반들반들한 표면 위에 다시 새하얀 얼음이 엉겨붙어 덩어리를 이루고 있었다. 하염없이 울부짖으며 질주하는 바람의 한 자락을 발굽 하나가 가만히 눌러 금속 밑창으로 된 발자국을 남겼다. 가벼운 금속질의 소리가 줄줄이 이어지며 그 위로 선명한 한 줄기 선을 그었다. 무지개처럼 굽은 선이었다. 다시 몇 번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리창에 달라붙어 있던 마지막 얼음조각 하나까지 모두 떨어져 나갔다. 갈색 솜털을 한 암말의 얼굴이 유리 위로 떠올랐다. 여자는 거울상을 보고 새삼스레, 자기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쓰고 있던 고글이 차갑게 반짝거렸다. 페가수스는 유리창에 떠오른 거울상 너머, 그 안쪽에 무엇이 남아 있는지 보려고 얼굴을 바싹 들이밀고 그 안을 꼼꼼하게 들여다보았다. 눈에 들어오는 거라고는 다 떨어진 원단 무더기의 흐릿한 형체뿐이었다. 마지막 포니의 입가를 떠난 날숨이 뿌옇게 엉겼다. 그녀는 물러서서 다 무너져 가는 캐러셀 부티크의 모습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첨탑처럼 솟아 있었던 부티크 건물은 어느샌가 무너져 있었고, 재앙의 여파로 일어난 폭발로 날아든 잔해들이 의상실 주변을 둘러싸고 반지의 형상을 만들며 굴러다니고 있었다. 한때 건물 3층 외벽을 장식하고 있었던 포니 모양 마호가니 조각 두 점은 기적처럼 아무 손상이 없었다. 다만 그 위치가 건물 터에 허벅지까지 쌓인 눈더미 안쪽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잿더미가 쌓여 가던 세월 내내 조각의 발굽에 맺혀 그 차갑고 뾰족한 주둥이를 들이밀던 고드름 몇 개가 뚝 하고 부러져 떨어졌다.
그녀는 숨을 들이마셨다. 한때 사치품을 다루던 상점이었던 곳을 뒤로하고, 포니빌 시내를 향해 재와 눈이 뒤섞여 바람을 타고 휘날리는 길을 걸어갔다. 오래 전에 무너진 천막들과 간이 건물들이 얼어붙은 진창 속에 늘어서 있었다. 그렇게 늘어서서 줄행랑을 놓고 달아난 군대가 남기고 간 군기처럼 부박하고 찢겨진 조각들을 영겁의 바람 속에 휘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페가수스는 빠른 걸음으로 걸으며 한쪽 발굽을 고글에 올렸다. 폐허 한가운데서 혹시나 녹색으로 빛나는 무언가가 포착되면 강조 표시하도록 렌즈를 조정하기 위해서였다. 멍청한 짓도 정도가 있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그녀는 전에 이 특수렌즈를 거의 쓴 적이 없었다. 왜 굳이 갖고 있는지, 자기 자신조차 알지 못했다. 황무지 이퀘스트리아에서 녹색이란 공적空賊 패거리나 사기꾼 놈팽이의 눈깔에서 비집고 나오는 탐욕이 띠는 색일 뿐이지 그 이상은 아니었다. 식물 비슷한 걸 구경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은 때때로 브루스가 찾아낸 것들을 구경시켜 줄 때 외에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자연 상태의 식물을 본 것도 재앙 직후 외에는 없었다. 그나마도 식물인 걸 인지하기 전에 그녀의 솜털 색으로 바뀌어 버렸지만.
녹염, 그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다른 원소의 불꽃들처럼 황무지 어딘가에서 피어오르고 있다는 것 자체는 알고 있었다. 불꽃을 얻어내는 일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불꽃을 얻어내는 과정에서 부담하는 위험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찾아내는 일부터 엄청난 난관이었기 때문이다. 황무지 곳곳에 아직 건질 것이 남아 있는 자리마다 불꽃이 있다고 해도 불꽃을 얻는 것이 편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상 모든 장사치들이 저마다 비행선을 이끌고 황혼 아래로 날아들어 쟁탈전을 벌였을 테니까.
피트가 녹염에 그렇게 목을 매는 이유는 뻔했다. 녹염의 아주 작은 한 조각만 있어도 저 추레한 원숭이 새끼들은 황무지 제일의 장사치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고블린, 오우거, 울버린. 피트의 손에 녹염이 들어가는 순간 저들 모두 피트를 선망과 질시의 눈으로 쳐다볼 것이다. 세상은 철저하게 무너져 내려, 그만한 가치만 있다면 목숨을 빼앗거나 뇌물을 먹이는 것쯤은 이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이 있기는 했으나, 녹염을 얻기만 하면 막대한 우위를 점하게 된다는 사실은 거기 끼지 못했다. 이번에는 딱히 죽이거나 잡아 가둘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퀘스트리아 역사를 되짚어 보면 녹염은 마력 정수의 일종이지,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캔틀롯에 홍염이 있었듯 녹염 또한 존재함은 명료했다. 녹염이 포착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리고 포니빌에 도착해 어디로든 눈길이 닿을 때마다 그녀의 머릿속 다락방에 숨은 망령들이 웅성거리며 흔들렸다.
그녀는 전보다도 더한 각오로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 유니콘 뿔 팔찌도 새로 만든 것으로 앞다리 하나당 하나씩 차고 온 참이었다. 포니빌 어딘가에 녹염이 존재하기만 한다면야, 유니콘의 뿔이 그녀를 이끌어 인도해 줄 것이다. 렌즈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더더욱 그럴 것이고, 렌즈가 밥값을 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녀는 지평선 너머든지, 팔찌에서든지 언제고 불빛이 비춰질 수 있다고, 언제고 목표물 근처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마음의 준비를 해두고 있었다.
그 때가 올 때까지는 다만 이 성지를 돌아다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 걸음씩 발굽을 내딛을 때마다 가슴팍에 비수를 조금씩 더 가까이 들이밀어 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주위에 늘어선 가정집이 그 수를 불리울 때마다 그녀는 몸서리쳤다. 새하얀 서릿발로 얼어붙은 과거의 그림자, 그 갈기 속으로, 포니빌 시내 깊숙한 곳으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휘몰아치던 바람이 잔잔한 숨결처럼 잦아들어, 피맺힌 절규의 귀곡성이 너무 늦어 버린 귀향의 비애 속으로 몇 가닥 눈가루를 흘려넣는 탄식으로 화했다.
포니빌 광장 터 언저리 즈음에서 마지막 포니는 걸음을 멈췄다. 이제는 높게 쌓인 눈더미 사이로 여기저기에 나무조각이 튀어나온 폐허에 불과했다. 수레와 카트, 노점이었던 것들의 탄화된 조각들과 파편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기라도 한 듯 사방에 널려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고글 너머의 세상을 바라보았다. 굽어진 금속 아치 같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천천히, 가까이 다가서고 보니 포니빌 시기市旗 깃대였다. 제4시대가 열리기 200년 전, 어스 포니들이 여기 정착해 마을을 세운 것을 기념하는 기념물이기도 했다.
끔찍하게 휘어진 깃대 아래에 콘크리트 판때기가 하나 붙어 있었다. 짚더미 하나만 가지고 정착해 살기 시작한 때 새겨진, 아주 오래된 글씨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파우스트메어와 그 딸들”을 표시하고 있었다. 포니빌을 세운 사람들의 이름 옆에 두 개의 발굽 도장이 찍혀 있었다. 하나는 나이든 여자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어린 아이의 것이었다. 혼자 남은 페가수스는 눈을 맞으며 가만히 다가가 자기도 모르게 발굽을 뻗어 발굽 도장에 가져다 댔다. 처음은 어린아이의 발자국이었다. 척 보기에도 너무 작았다. 그녀는 늙은 여자의 발자국 위에 자신의 발굽을 가져다 대었다. 이번에도 그녀의 발굽이 더 컸다.
마른침을 삼키며 세월과 잿더미에 묻혀 황량한 옛 고향을 가만히 돌아보던 여자의 몸이 떨렸다. 우체국이었던 건물은 두 동강으로 쪼개진 채, 다 무너진 동쪽 벽면으로 뼈대만 남은 캐비넷에서 흘러나와 바닥에 나뒹구는 종이 뭉치를 그대로 내보이고 있었다. 셀레스티아 공주를 실물 크기 그대로 묘사한 조각상으로 장식한 분수대는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뒤틀린 뒤였다. 조각은 분수대 한쪽 구석에 겨우 기댄 채 서 있었으나, 구멍이 숭숭 뚫린 두 날개 위로 부식된 자국과 허여멀건한 곰팡이가 뒤덮여 있었다.
공원을 둘러싼 벽돌 담장 위로 다 떨어진 전단지가 흔들렸다. 포스터에 인쇄된 포니 셋은 푸른 옷을 입고 고글을 쓴 채 대형을 짜 위풍당당한 표정으로 세차게 휘몰아치듯 날아가고 있었다. 이층침대와 따뜻한 아침 앞에 모여앉아 식전 기도를 하는 모습이, 중심가 구석에 아직 그녀의 머리 속 포니빌의 모습이 어렴풋하게나마 남아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쳐다보며 걸어가 이내 지나치는 찰나의 순간 눈을 깜빡였다. 눈꺼풀이 스치는 순간, 여관 지붕이 코끝을 조금만 더 들면 닿을 듯 청명한 푸른 하늘에 뜬 푸른 도시 클라우드데일의 형상과 그 뒤로 차분히 흔들리는 숲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갔다. 눈꺼풀이 다시 열린 순간 하늘은 다시 잿빛 광기로 물들어, 혹한만 남은 학살의 현장 위로 냉혹한 포효를 내질렀다.
어린애가 깔깔 웃는 듯 새된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헉 하는 숨을 들이마시며 오른쪽으로 급히 시선을 옮겼다. 텅 비어 버린 가게 입구에 간판 하나가 녹슨 사슬 하나에 매달린 채 걸려 있었다. 간판 위 접철이 찬바람을 맞아 끽끽 우는 소리가 멀리 떨어진 그녀의 귓가까지 닿았다.
그녀는 긴 한숨을 토해냈다. 완전무장한 몸뚱이 안에서 미친 듯 뛰어대는 심장이 마침내 뛰쳐나가 목구멍으로 쇄도하는 듯했다. 여자는 숨을 고르고 정신을 수습하려 무진 애를 썼다. 녹염을 찾으러 온 것뿐이고, 그 이상의 목적은 없었다. 이렇게... 오래 눌러앉아 있을 필요가 없었다.
태어난 고향의 버려진 길목들과 찢겨나간 거리, 산산조각난 공원 언저리를 걸어 내려갈 때마다 발걸음이 계속 느려져만 갔다. 눈 덮인 땅이 아니라 상아빛 타르로 들어찬 웅덩이 위를 걸어서 건너기라도 하는 양 한 걸음이 천 근 같았고 다리가 덜덜 떨렸다. 여자는 목을 길게 빼고 사방으로 시선을 던졌고......
시립 도서관이 보였다. 굽이치는 줄기를 높게 뻗은 나무의 속을 비우고 들어선 도서관은 가히 기적적으로 포니빌 그 어느 건물보다도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우습게도 도서관 주변에 들어섰던 건물들은 조금도 무사하지 못했다. 도서관 정문은 오래 전에 뜯겨나가 있었다. 창문 역시 깨진 지 오래였다. 나무 꼭대기에 소소하게 차려놓은 간이 천문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상대적으로나마 멀쩡하게 남아 있던 것은 아래쪽 발코니였는데, 아무렇게나 뒤틀리며 마구 솟구친 판자들이 저마다 대가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일어서서 그녀 기억보다도 높이까지 뻗어 있었다. 절멸 이후에도 나무가 계속 자라기라도 한 것 같았다. 비틀리고 불탄 나무의 시꺼먼 사지 위로 잎사귀 하나 보이지 않았다. 씁쓸하고 우울한 모습이었고, 멀리서 보니 그녀가 느끼는 헛헛함만큼이나 도서관 안도 텅 비어 있었다.
슈가큐브코너는 포니빌 주택가 북쪽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남은 모습은 찬란한 과거의 퇴색한 유령에 지나지 않았다. 건물 외벽에 칠한 형형색색의 페인트는 화염방사기에 그슬리기라도 한 양 죄다 벗겨져 있었다. 지표면이 말 그대로 새까맣게 불타 있어서, 이퀘스트리아 전역과 함께 슈가큐브코너를 집어삼킨 화마가 어떤 것이었는지 짐작이 되었다. 상층 유리창은 불길에 녹아 무너져 있었고, 그 너머로 썩어 문드러진 목화솜이 피어나듯 2층에서부터 날려온 가구의 파편들이 굴러다녔다. 한때 분홍색으로 가득했을 방이었다.
다음은 장난감 가게였다. 점포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여자는 그간 말 그대로 완전히 기억에서 떠나 있었던 가게의 존재에 전율했다. 온갖 알록달록한 색들이 교차하며 장식한 광대 모자의 형상 그대로 따와 지은 건물의 모습이 여자의 마음 속에서 수없이 명멸했다. 이제 그 신기하게 생긴 가게는 철근콘크리트가 여기저기 튀어나온 채 뒤얽힌 산업폐기물에 지나지 않았다. 여자는 가게 가까이 다가갔다. 주석 조각*1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널려 바다를 이루고 있었고, 전시장에 일렬로 정렬하여 지나는 아이들을 유혹하던 수제 장난감들은 그 잔해만 남아 있었다. 그녀는 가게 안에서 몇 시간이나 아무것도 사지 않고 어물거리던 늦겨울 저녁을 생각했다. 사방에 진열된 멋진 장난감들을 가까이서 보고 싶다는 마음을 애써 밟아 죽이며 다만 몸만 덥히던 시절을 생각했다.
*1 인체 무해하고 녹는점이 섭씨 231도로 낮은 편이어서 장난감 주조에 적합. 금속이기는 하나 외부 충격에 약해 최근에는 레진이나 플라스틱으로 대체.
여자는 몇 시간 동안 다 무너진 호텔 건물들의 로비와, 텅 빈 아파트의 황폐한 복도를 거쳐 온갖 해충과 독충들이 군락을 이룬 레스토랑의 잿빛 안개에 막혀 어둑어둑한 주방을 하릴없이 돌아다녔다. 끝장난 시대의 망자들을 묘사한 각종 그림과 사진과 초상화가 있었다. 죽은 자들의 얼굴이 점점 낯익은 것이 되어 간 어느 순간, 그녀는 욕지기를 느끼고 급히 뒤돌아 휘몰아치는 눈보라 사이로 달아났다.
여자는 한쪽에 엎어져 있던 수레를 붙잡고 숨을 골랐다. 수레바퀴가 바람을 받아 께름칙한 소리와 함께 끽끽 돌았다. 즐거운 여행이 될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설마 고향이 이 지경으로 부서져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무너진 제방에서 터져나오는 물처럼 공기가 사방에서 허파 속으로 밀려 들어오는 감각이 느껴졌다.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자 새삼스레 세상이 더욱 냉혹한 곳으로 느껴졌다. 귀향의 목적은 녹염을 찾기 위해서였고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나, 문명의 흔적을 더듬고 다닐 때면 으레 그랬던 것과는 전혀 다른 차림으로 온 것도 사실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쓸만한 물건 몇 가지는 벌써 챙겼을 터인데, 여기 와서는 돌무더기 하나 뒤져보지도 않은 것이다. 아파트 건물에 혹시 레코드판 한두 장쯤 있지 않을까 싶어 기웃거려 본 것은 사실이지만, 막상 바로 앞까지 가서는 돌아섰다. 여기는 포니빌이었고, 여자의 가방은 비어 있었다.
여자는 수레 위로 머리를 기울이고 겨우 숨을 골랐다. 포니빌에서 도망쳐 나왔음을 새삼 깨닫고 나니 다시 숨이 가빠 왔다. 그녀는 포니빌 북쪽 언저리에 있었고, 조금 전 둘러본 건물들은 이제 시야에서도 사라져 있었다. 아무리 못해도 다섯 구획을 도망한 것이다. 페가수스는 조심스레 사방을 흘끗거리고 더러는 돌아보기도 하는 등 경계 태세를 갖추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여자의 생각대로 조심스레 한 걸음을 더 내딛자 눈앞에 보이던 정경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빽빽하게 끼어 있던 안개가 혹한을 몰고 온 황무지의 바람에 쓸려 잠시 자리를 비키자, 그 아래로 적어도 백 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절벽이 드러났다. 뭐라 형용할 수 없이 아가리를 벌리고 누운 그 밑바닥에는 저희들끼리 부딪쳐서 박살나기라도 한 양, 터지다시피 한 건물의 잔해들이 가득 널려 있었다.
절멸이 이퀘스트리아를 휩쓸고 지나갈 때 페가수스들만 화를 당한 게 아니라는 것을, 어스 포니와 유니콘도 마찬가지였음을, 그녀는 늘 그랬듯 다시 머릿속에 되새겼다. 부서진 클라우드데일의 잔해들이 땅 위로 쏟아져 내리던 그 순간, 세상은 요람에서 관짝으로 돌변해 사람들을 집어삼켰다. 그 때 하모니 호는 세상이 찢어지고 갈라지며 남긴 대지의 상흔과 엎어지면 코 닿을 정도 거리였다. 포니빌 한가운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직접 목도하고 나니 절로 발굽이 달달 떨렸다. 떨어진 달이 포니빌을 어떻게 부숴 놓았는지는 아직 짐작할 수 없었다. 보지 못했으므로 알 수 없었다.
그것만으로 목적지를 설정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여자는 길을 잃었다. 이 위대한 땅으로 비행 좌표를 설정한 때부터 이미 방향을 잃은 채였다. 엎친 데 덮친 격인지, 그나마 양호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 자신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혹시 저질렀을지도 모르는 초보적 실수들 가운데서도, 오래 전에 생명의 흔적이 증발한 뒤 남은 악몽의 잔상에 제 발로 기어 들어온 것은 가히 최악이었다. 녹염을 포착하고 확보한 뒤 여길 뜨는 것만 해도 충분한 보상이 될 거라고, 여자는 혼자 중얼거렸다. 제정신을 유지한 채 포니빌을 걸어 나오기만 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여자는 마음을 단단히 다잡고 몸을 돌려 낭떠러지를 등지고 섰다. 그녀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몰골로 도망쳐 온 길을 빠르게 되짚어 올랐다. 포니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비행선을 묶어 두었으므로 하모니의 불빛은 닿지 않았다. 양 앞다리에 차고 있던 팔찌 두 개가 갑작스레 번쩍이며 반응했다. 여자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고 두 앞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뿔 팔찌가 아주 진한 보라색 박무薄霧를 뿜어내며, 평생 그 어느 때보다도 밝게 빛났다. 가져온 유니콘의 유골 전부가 일거에 반응할 정도로 강력한 마력을 방출하는 무언가가 포니빌에 있었다. 두 앞다리를 디딘 자리 주변에 쌓여 있던 눈이 원을 그리며 녹아내려 땅 속으로 빨려 들어갈 정도였다.
“이건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여자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럴 수가 없는데? 저렇게 까뒤집히면서 마력선Leyline이 망가졌을 텐데......”
그 때, 날개 달린 무언가의 그림자가 흰 눈더미 위를 쓸고 지나갔다. 여자는 날카롭게 혀를 차며 말을 끊고, 짊어지고 있던 가방을 앞으로 튕겼다. 그녀는 튕겨나온 소총을 잽싸게 낚아채 몇 번 찰칵이는 소리와 함께 사격 준비를 마치고 그림자가 지나간 자리를 쓱 째려보았다.
구멍이 난 듯 하염없이 눈을 뿌려대는 하늘 아래로 폐가에 지나지 않는 포니빌의 건물들이 남쪽을 향하여 도열해 있었다. 여자는 눈을 흘기며 한쪽 발굽을 들어 고글 렌즈를 조정했다. 남은 한쪽 발굽으로는 소총을 붙들었다. 강조 색상을 바꿔 가며 그것이 들어가 숨을 만한 자리와 그림자 사이를 낱낱이 훑는 동안 포니빌 폐허가 형형색색으로 물들었다. 놈의 기척이 포착되기는 했으나, 곧 희미해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여자는 짜증 섞인 소리로 툴툴대며 고글을 거칠게 벗어 올리고, 새빨간 눈동자로 기척이 나타났던 자리를 쳐다보았다.
포니빌 건물 중에서도 가장 높은 건물인 포니빌 시청 청사의 둥그스름한 모습이 그녀 앞에 들어왔다. 최상층 서쪽 부분 몇 군데가 무너져 내리고 있는 걸 빼고는 놀라울 정도로 온전했다. 유리창의 절반 정도는 깨져서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지만 외관문들은 아직 문틀 안에 정상적으로 붙어 있었다. 여자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고글을 다시 내려 쓰고 청사 내부를 훑어보았다. 렌즈를 바꿔 가며 살펴보던 중 무언가 홱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녀는 커다란 나무둥치를 사이에 두고 숨바꼭질을 하듯 그것을 찾아 시선을 돌렸다. 녹색 아우라가 희미해진 자리는 다시 아무것도 없이 칙칙한 정물만 남아 있었다. 그 또한 일시적 현상에 지나지 않았던 것처럼.
여자의 이마 위로 깊은 골이 생겨났다. 여자는 소총을 어깨 너머로 넘겨 걸고, 가빠 오는 숨을 부여잡은 채 용감히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청사를 향하여 느릿느릿하게 걸어가던 그녀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다 떨어져 나간 외부 철제 장식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반쯤 날아간 지붕과 페인트가 벗겨져 가는 건물의 장대한 형상으로 시선을 옮겼다. 시청 건물 내부에 녹염이 있다고 쳐도, 여기까지 근접했는데 조금의 낌새도 느낄 수 없었다. 여자는 쓰레기장으로 변한 도시 그 어디에도 더 발을 붙이고 싶지 않았고 달리 가야 할 곳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결심한 듯 혀를 차고 시청 출입구의 양여닫이문에 다가갔다. 여자는 왼쪽 앞발굽에 찬 신발에서 금색 칼날을 뽑아내고 경첩 사이 공간에 찔러 넣어 온 힘을 다해 잡아당겼다.
제법 힘을 들이고 나서야 여닫이문이 홱 하고 열리며 그 새까만 틈새를 드러냈다. 훅 불어온 재와 먼지가 장막처럼 여자의 고글 위로 쏟아져 내려 시야를 가렸다. 그녀는 한쪽 발굽을 들어 고글을 문질러 닦고 건물 안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여자는 후회했다. 떨리는 시선이 땅바닥에 가 붙었고 여자의 몸을 타고 먹먹한 아픔이 밀려왔다. 그녀는 몇 번 몸서리치며 숨을 고른 뒤, 용감히 고개를 들고 말 그대로 시체로 쌓은 산을 향하여 걸음을 내디뎠다. 살아 숨쉬던 포니빌 사람들은 이제 뼛조각과 말라비틀어진 껍데기, 더러는 말 그대로 가루가 되어 한 꺼풀 벗겨낸 공동묘지와도 같은 청사 홀에 무더기를 이루며 뒹굴고 있었다.
이런 꼴은 그간 거쳐간 수많은 폐허에서 여러 번 봐 왔던 것이었다. 스탈리온그라드Stalliongrad에서는 태양의 전당이었고, 볼티메어Baltimare에서는 대학이었으며 더러는 클라우드데일의 추락한 잔해이기도 했다. 수십, 수백 명이 동시에 넓은 건물 안으로 밀려 들어갔을 것이고, 그 안에서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대절멸이 몰고 올 충격파에 맞아 다함께 탄화하는 미래일 따름이었다. 죽은 자들에게는 참상이었을 터이나 마지막 포니에게는 골동품에 불과했으니, 시체를 샅샅이 훑어보며 쓸만한 물건을 찾다가 괜찮은 물건을 찾으면 무감정하게 주머니에 집어넣는 게 당연했다. 이것보다도 더 심한 꼴은 얼마든지 봐 왔지만 여자는 단 한 번도 지금 같은 비참한 기분을 느낀 적이 없었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자욱한 공기를 들이마실 때마다 코가 따끔해 왔지만 여자는 산처럼 쌓인 시체들 사이로 더 깊이 걸어 들어갔다. 옛날에나 맡을 수 있었던 냄새가 코 끝에 어른거렸고, 사람들이 즐거이 웃으며 말하는 소리가 기억의 흔적을 따라 피어났다. 따뜻한 오후의 바람을 맞으며 일하는 사람들과 골목마다 모여서 노는 꼬마들, 그리고 공원에서 서로 뺨을 비비는 연인들과 언덕 한쪽으로 소풍을 나온 가족이 떠올랐다. 머리로는 이러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으나, 여자는 멍하니 시체의 산을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죽은 몸 하나하나에 시선이 가 닿을 때마다 심장이 맥동했다. 머리빗이나 한 타래 사파이어, 챙 넓은 모자, 우편물 가방, 파티용 장식끈 같은 것들처럼 낯익은 사람이나 사물이 여기 있었음을 입증하는 흔적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 것들은 보이지 않았으나, 여자의 우울감은 그녀가 마음을 놓도록 해주지 않았다. 뭐라도 느낀 바가 있었다 해도, 그런 생각을 한 것 자체가 부끄러워 견딜 수 없다는 마음뿐이었을 것이다.
굴러다니는 유해 사이에는 유니콘 해골도 간간이 섞여 있었는데, 여자의 기억보다도 많은 유니콘이 포니빌에 살았던 모양이었다. 청사 안에 내려앉은 새까만 어둠 위로 차갑고 창백한 빛이 스며들어 유니콘 해골에 붙은 뿔을 비추었다. 마력 중계 기능이 거의 상실된 유니콘 뿔 팔찌가 두 개 있기는 했으나, 여자는 차마 그 뿔들을 잘라내지 못했다.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여자는 시청 중심부를 향하여 걸어 들어갔다. 특이한 유골이 한 쌍 굴러다니고 있었다. 중년쯤 되어 보이는 페가수스의 해골이 색 빠진 누런 건초 위에 뻗어 있었는데, 그 품에는 아무리 잘 쳐 줘도 막 유아기를 벗어난 듯 작은 유니콘의 말라붙은 가죽이 안겨 있었다. 절멸의 공포를 단편적으로나마 보여주는 이런 모습은 이퀘스트리아의 폐허를 뒤지고 다니기 시작한 첫날부터 봐 온 것이었다. 도굴꾼 노릇도 하루이틀 해 온 것이 아니었으나, 저런 모습을 볼 때마다 속이 쓰린 것은 처음과 지금이 같았다. 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포니빌에서 본 지금 이 모습이 여자가 평생 겪은 것보다도 더 격렬한 욕지기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녀는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입을 여는 순간 쓰디쓴 구토가 올라올지, 울음이 올라올지 그녀 스스로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시선을 끌어당겨 청사 안으로 길게 늘어진 어둠 속을 쳐다보았다. 윗층과 발코니는 여기서부터 적어도 10미터는 되는 곳까지 뻗어 있을 것이었다. 나이트메어 문이 바로 여기 나타나 영겁의 밤을 약속하던 그 때가 떠올랐다. 그 또한 두려운 일이었음은 자명했다. 여자는 그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 때 그녀의 작은 몸은 파멸의 징조와도 같았던 나이트메어 문의 불경한 웃음소리 앞에 전율했다.
그 때의 공포는 오래가지 않았다. 나이트메어 문은 강림한 그날 바로 조화의 원소에 격퇴되었다. 마지막 포니는 역사 마지막 장 역설 항목에 종말은 절대로 그 모습을 미리 드러내어 경고하지 않음을 적어 넣고 싶었다. 그 누구도 하늘에 오직 황혼만이 내걸릴 것이라고 예지하지 못했고, 이런 일이 있으리라 예견한 자 또한 없었다.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시청에는 지나간 기억들과 어둠만이 혼재해 있었고 녹염은 없었다.
확실을 기하기 위해 여자는 고글 설정을 돌려 가며 어두운 실내를 다시 한 번 훑었다. 그녀는 녹염의 흔적이라도 찾기 위해 가능한 모든 곳을 살폈다. 천장 대들보부터 시작해 청사 바닥, 그리고 그 사이 공간까지 눈에 보이는 모든 곳을 훑어본 다음에도 아무 것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뿔 팔찌까지 기능을 상실했다. 여자가 몸을 돌려 짜증 섞인 한숨을 뱉으려 할 때, 한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는 왼쪽으로 급히 뛰어 벽 언저리에 굴러다니는 시신 더미를 쳐다보았다. 잠시 잠잠하다가, 다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떠올랐다. 그녀는 조심스레 어두운 구석으로 숨어 들어갔다. 바스락대는 소리가 멈추기는 했으나, 분명히 무언가가 바로 근처에 있었다. 구멍이 많이 뚤린 것으로 보아 늙은 어스 포니의 유골로 보이는 해골이 마지막 포니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사방에 널린 잿가루와 각질 조각 사이에서 이 유골은 유독 눈에 띄었는데, 안경을 쓰고 낡아빠진 흰 칼라를 목에 두른 채 그 위로 닳은 녹색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숙여 이 특이한 시신을 가까이서 쳐다보려고 할 때였다.
해골이 훌쩍 뛰어 여자에게 덤벼들었다. 본디 턱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허연 거품을 물고 날카로운 이빨이 가득 들어찬 주둥이가 붙어 있었다. 창백한 짐승 한 마리가 으르렁거리며 해골 밑에서 튀어나와 아가리를 벌려 여자의 무방비한 몸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마지막 포니는 물리기 직전에 겨우 몸을 한쪽으로 틀어 공격을 피했다. 짐승의 이빨이 아슬아슬하게 여자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며 고글을 낚아챘다. 여자는 뒤로 미끄러지며 목을 홱 잡아빼 놈의 발톱에 걸린 고글을 몸에서 끊어냈다. 짐승은 텅 빈 대가리를 자랑하기라도 하듯 고글을 주둥이에 처넣어 박살을 내고 으적으적 씹더니, 여자를 향하여 소리를 질렀다.
상대는 트롤 한 마리였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뒤로 멘 소총에 발굽을 뻗었다. 그 순간, 딱딱하고 질긴 무언가의 육중한 무게가 뒤에서 덮쳐왔다. 발톱 돋친 사지 몇 개가 그녀의 몸을 향해 뻗으며 그 위를 더듬었다. 여자는 깜짝 놀라 뒷발로 발길질해 놈을 떨어뜨렸다. 날아간 몸뚱이가 시신 더미로 떨어져 잔해가 사방에 날렸다. 진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뒤로 틀자 시체 더미 사이마다 숨어 있던 그림자 세 개가 저마다 튀어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적은 트롤 여러 마리였다. 그녀는 고개를 홱 숙여 가장 먼저 이빨에 잡힌 다리뼈를 물고, 자기를 향하여 쇄도하는 트롤 세 마리에게 그 삭아 가는 유해를 힘껏 집어던졌다. 셋은 일거에 시체더미 속으로 고꾸라져 온몸에 그을음을 묻혔고, 그와 동시에 한 줄기 째지는 비명이 여자의 등 뒤를 덮쳤다. 그녀는 급히 공중제비를 넘으며 첫 번째 트롤의 육탄 공격을 피했다. 청사 한쪽 면으로 몸을 굴려 피한 여자는 소총을 꺼내 견착하고 겨냥했다. 아무리 적어도 마흔은 되어 보이는 트롤 무리들이 건물 곳곳에서 슥 하고 튀어나와 저마다 끽끽거리며 미끄러지듯 먹잇감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기습이었다. 놈들은 지금을 기다리고 있었다. 포니가 지상에서 사라진 시대, 이것들은 이퀘스트리아에서 가장 편안한 도시였던 포니빌을 자기들의 수중에 넣고, 죽음만이 기다리는 함정으로 개조했다. 이 땅은 이제 트롤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포니빌 시청은 놈들이 마련한 덫 중에서도 가장 큰 덫이 되었다.
“셀레스티아의 갈기 맙소사. 내가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웠군.” 여자는 이를 갈며 반짝이는 룬스톤을 향해 주문을 외우고 소총 약실에 탄을 채웠다. “H’rhnum!”
초탄이 날아가 가장 앞에서 전진하던 트롤 무리 한가운데 있던 놈의 가슴팍을 맞췄다. 창백한 몸뚱이가 철퍼덕 소리와 함께 쓰러졌고, 그와 동시에 트롤들이 속도를 높여 쇄도하듯 여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발톱이 바닥을 긁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놈들이 여자를 덮치려고 뛰어오른 순간 두 번째 탄이 장전되었다. 놈들의 새까만 눈깔이 창백한 가죽과도 같은 몸뚱이 위에서 명멸하는 별빛처럼 살의로 번들거렸다.
여자는 두 뒷다리로 땅을 차고 뛰어오르며 개머리판을 휘둘러 트롤 두 놈을 한 번에 거꾸러뜨렸다. 그 자리를 세 놈이 채워 아가리를 딱딱거리며 소총을 붙잡고 늘어졌다. 그녀는 놈들과 몸싸움을 벌이다가, 총구가 놈들의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역겨운 몸뚱이를 향하는 순간 주문을 외쳤다. “H’rhnum!” 소총이 격발됨과 동시에 놈들 중 하나의 아가리를 향해 탄이 날아가 꿰뚫었다. 뜨뜻하고 탁한 액체가 컴컴한 공기 위로 튀었다. 그녀는 포효하며 바닥을 쿵, 하고 차며 체중을 실어 총기를 휘둘러 아직 총에 붙어 있던 두 놈을 떼어냈다. 트롤들은 끽끽대는 소리와 함께 거꾸러져 쓰러졌다.
여자는 전방을 향하여 미친 듯 달려나갔다. 공황에 빠진 눈이 출구의 잿빛 직사각형 형상을 포착했다. 그녀는 건물을 빠져나가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시신을 뛰어넘는 순간, 천장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내려 여자의 몸을 관통했다.
마지막 포니가 비명을 질렀다. 지금까지 겪은 격통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고통에 몸이 경련했다. 황혼이 언뜻 비쳤다. 트롤 한 마리가 여자의 몸을 덮쳐 누르고 있었는데, 그 손에는 일 미터쯤 되어 보이는 철 막대가 들렸고 그 끄트머리가 그녀의 왼쪽 날개 바로 아래쪽 살점을 찌르고 있었다.
트롤은 포효하고 으르렁거리며 손에 쥔 철근을 마구 휘저어 여자를 고문했다. 그녀는 한 마디 단발마와 함께 몸을 날려 한쪽으로 뛰어오르며 올라탄 트롤을 내팽개쳐 다 떨어진 벨벳 현수막으로 내던졌다. 다시 뛰어 보려 했으나 살점 깊숙한 곳까지 파고든 자리가 비명을 질러댔고, 두 날개는 힘이 빠져 늘어졌으며 사지가 마구 후들거렸다. 그녀는 신음하며 한 걸음 한 걸음씩 천천히 출구를 향하여 움직였다. 숨결이 이상한 끽끽대는 소리에 섞여 입 밖으로 떨어졌다.
발톱과 바닥이 부딪치고 긁어대는 소리가 여자를 뒤쫓았다. 귀가 먹먹해질 지경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번들거리는 뾰족한 이빨을 드러낸 아가리가 네 개, 시선에 들어왔다. 매복하고, 창으로 옆구리를 찌른 것도 모자라 이제 그녀에게 달겨들고 있었다. 여자는 때릴 수 있으면 때리고, 발에 걸리면 걷어차면서 달려드는 트롤들을 떼어놓으려 안간힘을 썼다. 아픈 몸에 감각이 없어져 갔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네 번인지 다섯 번인지 넘기고 나서야 트롤 떼를 겨우 떼어낼 수 있었다. 그녀는 있는지 없는지 모를 사지를 놀려 겨우 몸을 일으키고 출구를 향하여 몸을 날렸다.
눈 흩날리는 폐허 위로 칙칙한 빛이 날리는 꼴은 우주 단위의 폭발이 일어난 모습과도 같았다. 고글을 뜯겼으므로 여자는 이제 사방에 널린 새하얀 눈과 그 위를 뒤덮은 허연 잿가루를 맨눈으로 보고 길을 찾아야 했다. 그녀는 당장 죽음의 함정이 된 시청 청사에서 거리를 벌릴 수만 있다면 상관없었기 때문에, 가는 길을 보지도 않고 가능한 빠른 걸음으로 절룩거리며 움직였다. 가쁜 숨이 더욱 거친 쌕쌕대는 숨소리로 바뀌었다. 다친 자리에서 올라오는 아픔에 여자는 눈바닥 위로 엎어졌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비명을 참았다.
그녀는 몸을 움찔하며 몸의 왼편을 살폈다. 왼쪽 날갯죽지 아래에 박힌 철재가 반들거리며 튀어나와 있었다. 살피는 눈이 부들부들 떨렸다. 살육에 굶주려 군침을 흘리며 포효하는 트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눈 덮인 땅 위로 쇄도하는 트롤의 발구름이 대지를 뒤흔드는 것이 느껴졌다.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눈과 눈물이 뒤섞여 흐르는 눈으로 여자는 이를 악물어 철근을 단단히 잡았다. 몇 차례 소리 죽인 기합을 내지른 후, 그녀는 살에 박힌 이물질을 잡아뜯듯이 잡아당겨 홱 뽑아냈다. 멍한 시선 위로 흰 눈 덮인 대지 위에 떨어진 핏자국이 비쳤다. 그 뒤로 두 쌍 발톱 뻗친 사지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여자는 치솟는 비명을 겨우 누르고 욱신거리며 아파 오는 옆구리 방향으로 몸을 굴림과 동시에 입에 문 철근을 뱉어 두 앞발굽으로 단단히 잡고, 코앞까지 들이닥친 첫 번째 트롤의 아래턱을 노리고 힘껏 찔렀다. 철근이 목구멍을 뚫고 들어가 두개골을 뚫고 정수리로 튀어나오는 통에 두 눈깔이 불거져 나왔다. 이 끔찍한 꼴이 눈을 스치고 지나기도 전에 트롤 두 놈이 저마다 으르렁거리고 짖어대며 여자의 사지를 노리고 달겨들었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겨우 몸을 놀려 한 놈을 걷어차 밀어낸 뒤, 오른쪽 날개를 펼쳐 넘어뜨렸다. 넘어진 트롤의 앞발 한쪽을 단단히 물어 잡은 여자는 그대로 몸을 회전시켜 다른 한 놈에게 내팽개쳐 날려보냈다. 두 놈을 한쪽으로 내던지고 난 뒤, 그녀는 네 다리를 재촉해 전속력으로 달려 눈더미 위로 올라갔다. 지나간 자리에 피가 스몄다.
여자는 두 날개를 펼치며 훌쩍 뛰었다. 바람을 받아 날아가며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비행이 끝난 뒤 여자는 땅에 그대로 처박혔다. 여자는 신음을 흘렸다. 왼쪽 날개가 불붙은 듯 아팠다. 상처에서 피가 솟구쳐 나오는 감각이 느껴졌다. 여자를 차가운 황무지의 한복판에 빨아들이려는 듯, 꽂아 놓으려는 듯 피가 흘렀다.
여자는 날 수 없었다. 숨을 헐떡이며 움찔거리면서도 그녀는 절룩이며 일어나 빽빽한 안개 저편을 쳐다보았다. 하모니의 둥글납작한 황동색 선체가 안개 속 유령처럼, 언덕마루 위를 떠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때 그 언덕은 그 누구도 감히 정복할 수 없는 높다란 봉우리처럼 느껴졌다. 여자는 반쯤 기다시피 절뚝이며 언덕을 향하여 걸음을 옮겼다. 숨소리는 어느덧 씨근덕거리고 있었고, 가죽 방호복은 어느샌가 잠수용 무게추와 같이 여자의 몸을 쥐어짜며 더 많은 피를 뽑아내 그 어떤 저능아 트롤이라도 능히 추적할 수 있을 법한 시뻘건 흔적을 뒤에 남겨두고 있었다. 트롤 무리의 굶주린 포효가 밴시의 비명처럼 메아리지며 황량한 골목길과 포니빌 공원을 가득 메웠다. 저마다 되는대로 지껄이는 소리가 모여 잔학한 아수라로 뒤엉킨 울음이 바로 뒤에서 들려왔다.
“젠장, 젠장, 젠장!” 여자는 울음을 겨우 억누르며 이를 악물고 비틀거리는 한 걸음씩을 간신히 내디뎠다. “오면 안 되는 거였는데! 왔으면 안 됐—” 여자의 말은 여자가 넘어지며 눈더미에 얼굴이 박히는 통에 마무리되지 못했다. 가죽질의 몸뚱이가 여자 등에 올라타서 짓누르고 있었다. 몸을 누르는 습격자의 무게중심이 움직이는 순간, 그녀는 재빨리 머리를 오른쪽으로 홱 젖혔다. 거의 동시에 트롤의 쩍 벌린 아가리가 겨우 몇 밀리미터 차이로 빗겨나가며 그녀의 얼굴 바로 옆 눈더미에 꽂히며 사방으로 잔해를 튀겼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트롤의 귀를 꽉 물어 잡았다. 연골이 으깨지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트롤의 몸뚱이가 뒤로 넘어갔다. 그녀는 한쪽으로 몸을 굴려 두 번째 공격을 피한 뒤, 가장 가까이 있던 놈의 몸뚱이를 힘껏 걷어차 다른 놈을 맞춰 밀어냈다. 그러는 동안에도 트롤 군단의 선봉대 둘이 합류해 그녀를 붙들고 늘어지고 있었다.
이제껏 한 번도 생각하는 데 뇌세포를 써 본 적 없기라도 한 것처럼 뇌가 쌩쌩 돌아갔다. 머리가 첫 번째로 처리한 정보는 현재 상황에 대한 것이었다. 철근에 찔린 뒤 시청 청사에서 급히 몸을 빼내 달아나던 도중 소총을 어디엔가 흘렸던 것이다. 두 번째는 그녀가 아주 방어 능력을 상실한 것은 아니라는 결론 도출이었다. 사지를 이용해 트롤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기 때문에 가방에 잘 들어 있는 두 번째 탄알집을 꺼낼 시간을 번 것이다. 그녀는 탄알집을 입에 문 뒤, 다친 몸으로 큰 기합성을 뽑아내며 머리 뒤로 온 힘을 다해 자주색으로 빛나는 그것을 던져 넘겼다. 여자가 째지는 목소리로 크게 소리쳤다. “M’wynhrm!”
탄알집은 그야말로 피와 살로 쌓은 성벽과 같은 트롤 무리의 군세를 향하여 똑바로 날아갔다. 외쳐진 주문이 탄알집 안에 장전된 룬 탄환을 일거에 반응시켰다. 룬이 깜박이다가 흐릿해졌고 곧 폭발했다. 충격파를 타고 흰 재가 사방으로 날렸고, 찢겨나간 사지와 육편이 그 뒤를 따랐다. 마지막 포니는 충격파로 휘청거리는 트롤의 손아귀를 힘껏 뿌리쳤다. 날지 못하는 두 날개를 펼쳐 폭발로 생겨난 뜨거운 공기를 받으며 숨이 멎을 듯 도움닫기를 하며 달렸다. 그녀는 날아오르지 못하고 포니빌 중앙 광장의 부서진 분수대에 그대로 부딪쳤다.
“아악!” 그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두 앞다리가 말 그대로 불타고 있었다. 팔찌가 마력으로 과충전되어 말 그대로 불이 붙은 것이었다. 여자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급히 팔찌를 벗어 던졌다. 다리에서 김이 솟았다. 겨우 몸을 가누며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로 몸을 일으키려던 중, 몇 놈이 포효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든 여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미 포위된 지 오래였다. 포니빌 곳곳에 매복하고 있던 트롤들이 한데 모여 견고한 벽을 이룬 채 분수대를 원점으로 해 원을 그리며 포위망을 짜고 있었다. 페가수스의 사방에서 살기등등한 짐승들이 느릿느릿하지만 확실하게 다가왔다.
왼쪽 날개는 그야말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설령 이 자리를 박차고 날아오를 방법이 있다 쳐도, 두 번 다시 이 날개로 날지는 못할 정도였다. 그것만으로 이퀘스트리아의 폐허를 비추는 황혼 속의 짧은 인생은 끝장난 거나 다름없었다. 그렇기는 했으되, 이곳은 그녀의 고향이었고 그녀가 태어난 땅이었다. 멸망한 외로운 왕국에서 유일하게 그녀의 마음 속에 남아 있는 곳이었다. 게다가, 지옥에서 기어나온 저 빌어먹을 놈들의 송곳니에 기꺼이 목숨을 내어줄 생각도 없었다.
그녀는 좁혀져 오는 적들의 포위망을 가만히 쳐다보며 표정을 구겼다. 그리고는 분수대 중앙 알리콘 조각상 위로 기어 올라갔다. 셀레스티아 공주 석상의 두 날개가 여자의 몸에서 솟구친 피로 피칠갑이 되었다. 그녀는 이로 석상의 뿔을 단단히 잡고 계속 잡아당겼다. 오래된 뿔이 뚝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에서 깨끗하게 뜯겨나왔다. 페가수스는 공주 석상을 붙잡고 날카로운 뿔을 번쩍 들어 보였다.
“그래, 지상 최후의 말고기가 그렇게 처먹어 보고 싶더냐? 어? 그게 그렇게 구미가 당겨?” 그녀는 소리를 지르며 피 섞인 침을 자기를 둘러싼 트롤들에게 퉤 뱉었다. 새빨간 눈이 노기로 불탔다. “한번 해 보든가!”
트롤들은 여자를 음침한 눈깔로 보며 식식대는 소리를 질러댔다. 구부러진 송곳니가 튀어나온 아가리가 위아래로 벌어졌다 오므려지길 반복했다. 새까만 눈들이 저마다 발톱으로 눈을 긁어대며 다가왔다. 트롤들이 분수대 가장자리로 기어올라와 여자를 향해 재빠른 몸놀림으로 달려들며 낄낄 웃어댔다.
“덤벼!” 여자는 포효하며 발굽에 든 뿔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 순간, 하늘에서 굵직한 나무둥치만한, 비늘 돋친 발 하나가 떨어져 내려 순식간에 트롤 네 마리를 밟아 으깼다. 뭉개진 살점과 이빨이 사방으로 튀기며 공원에 깔린 조약돌 위로 흩어져 떨어졌다. 우레와 같은 메아리가 사방으로 울렸다. 그녀는 숨이 막혔다. 뭐라 형용이 안 되는 발톱이 박힌 두 번째 발이 바람을 가르고 떨어져 트롤 몇 놈의 몸뚱이를 순식간에 곤죽으로 만들었다. 트롤들이 방향을 틀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여자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황혼이 보여야 할 하늘을 무엇인가 거대한 몸뚱이가 가로막고 있었다. 그녀는 전율했다. 땅 위에 엉겨붙은 안개 너머로 두터운 비늘로 가득 덮인 몸뚱이가 굽어지고, 긴 모가지가 땅 위를 훑는 모습이 보였다. 입은 무표정하게 다물고 있었고, 어둠 속에서도 단단해 보이는 벼슬이 반들거리며 빛났다. 에메랄드 빛 홍채 위로 갈라진 길고 가는 동공과 연기를 뿜어내는 한 쌍 콧구멍이 보였다.
“이런 썅......” 마지막 포니가 중얼거렸다. “용이잖아 저거.”
괴물이라는 말이 이보다 더 어울릴 수 없을 법해 보이는 용이 한 번 포효하자 지축이 울리며 포니빌 폐허의 건물들이 진동했다. 거대한 날개가 달린 용은 뒷다리로 일어서서 몸을 조금 돌리더니 굵고 긴 꼬리를 한 번 휘둘러 공원 터 전체를 쓸어 버렸다. 트롤들은 저마다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다가 꼬리에 맞아 나가떨어졌는데, 이것들은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용의 손아귀에 붙잡혀 그대로 박살나거나 땅 위로 내팽개쳐져 곤죽이 되었다. 트롤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더러는 달리고 더러는 기어 달아났으나, 근육이 가득 들어찬 용의 사지에 붙잡히거나 걷어채이는 운명을 피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겁에 질려 있었다. 옆구리가 뚫려 피가 나는 것보다도 당장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그녀는 분수대에서 뛰어내려 달아났다. 그녀 앞으로 트롤 여러 놈이 우왕좌왕하며 도망다니고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용에게 내려찍히고 걷어차여 피떡이 되어 사라졌다. 페가수스는 뱀이 기어가듯 구불구불한 경로로 달렸다. 빠르게 움직인다면 용의 사지를 피해 목숨을 건질 수도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충격과 공포와 과로로 마구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포니빌 한쪽 골목으로 몸을 빼냈다. 순간 쎄한 기분이 든 여자는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용이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안개 속을 들여다보며 두 날개를 펴더니, 엄청난 화염을 뿜어 광장을 뒤덮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까지 살아 있던 트롤들은 산 채로 불타 죽었을 것이다. 그 불꽃은 녹색이었다.
여자는 달아나며 그 모습을 목도했다. 그녀는 이를 악물며 욕설을 내뱉었다. “녹색 불꽃!” 여자가 혀를 찼다. “그래, 그랬어!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불꽃이 아니었던 건 몇몇 드래곤의 신체 기관에서만 방출되기 때문이었어! 등신같이!” 그녀는 자기 머리를 한 대 때릴 시간조차 없었다. 주변 공기가 타는 듯 뜨거워졌고, 거기 더해 광풍까지 밀려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날개를 펄럭이는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가까워오며 그녀를 뒤덮어 오고 있었다. “아... 제기랄...” 그녀는 겁에 질린 아이처럼 버걱거렸다.
그 때 어디선가 끽끽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앞을 흘끗 쳐다보니 트롤 무리가 전열을 갖추고 골목길을 막고 있었다. 여자가 급히 걸음을 멈추자 앞발에 뒤채인 가루눈이 날렸다. 놈들은 그녀를 음산한 눈으로 훑어보더니 곧장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날개 달린 그림자가 온 골목을 뒤덮었다. 두텁고 튼튼한 비늘로 뒤덮인 다리 네 개가 여자와 트롤 사이 공간에 떨어졌다. 건물 두 줄이 다리에 맞아 박살이 났다. 용은 화산과도 같은 주둥이를 숙여 불을 뿜었고, 엄청난 고열에 달아오른 잔해가 트롤 무리를 덮쳤다.
그녀는 감히 용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 대신 다 무너져 가는 아파트 건물 속으로 몸을 날렸다. 여자는 피에 젖어 숨을 헐떡이며 근처에 가구와 의자, 캐비넷이 널려 있는 쪽으로 절룩이며 걸어갔다. 바깥에 있던 용이 움직이며 발걸음 하나를 옮길 때마다 건물 전체가 흔들렸다. 용은 여자를 낚으려고 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여자가 있는 곳을 찾아 돌아다니고 있었고, 둘 사이의 거리는 달그락거리며 흔들리는 유리창 하나에 불과했다. 용은 똑똑한 놈이었고, 지금 당장 움직이지 않으면 용에게 잡히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여자는 째지는 비명과 함께 문을 박차고 나가 가시덤불과 눈으로 뒤덮인 정원을 가로질렀다. 그녀는 가시 돋친 줄기를 굳이 피하지 않고 눈앞에 보이는 작은 집의 부엌 뒷문을 향하여 질주했다. 지나간 자리마다 피가 흘렀다. 쫓아온 용의 발걸음이 정원을 찍어눌렀다. 현관 절반은 무너진 잔해로 막혀 있었으므로, 여자는 아무 생각 없이 층계를 따라 올라가 2층 긴 복도에 닿았다. 비늘 돋은 커다란 손이 여자를 잡으러 뻗쳐 들어왔다. 손톱부터 밀고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손바닥이 먼저 들어와 여자가 근처에 있는지 먼저 확인했다. 마지막 포니는 이런 섬세한 부분에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저 손을 피해 달아나 멀찍한 곳 벽 창문을 향하여 쏜살같이 달려갈 뿐이었다. 그곳이라면 몸을 날려 달아나기 적합했다.
시내 중심가 한가운데로 유리 파편이 쏟아져 내렸다. 그 한가운데로 여자가 몸을 굴려 충격을 줄이며 떨어졌고, 절룩이는 걸음이나마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 순간 등 뒤에서 건물이 말 그대로 박살나며 지축이 흔들렸다. 용은 별 것 아니라는 듯 건물을 간단히 때려부수고 느긋한 걸음으로 날 수 없는 페가수스를 따라왔다. 용이 한쪽 다리를 옮겨놓을 때마다 땅이 쿵쿵 울렸다. 절멸 이후 그렇게 지축이 울려댄 것은 오늘이 처음일 것이었다.
페가수스는 비틀거리는 와중에도 온 힘을 다해 용에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쳤다. 새빨간 눈동자가 사방으로 하모니를 찾아 움직였으나 그 그림자조차 찾지 못했다. 목전에 닥친 현실에 가슴이 먹먹해 왔다. 가슴 한구석이 내려앉았다. 달아날 길은 없었다. 용이 그녀를 쫓아오고 있었다. 죽은 목숨이었다. 애초에 이곳으로 좌표를 찍고 찾아온 행동 자체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멍청하고 충동적이었다. 이제 그 쓰디쓴 대가를 치를 때가 된 것이다. 그렇더라도 아직 몸 안에 흘릴 피가 남아 있는 동안만큼은 그 운명을 피해 달아날 생각이었다. 여자는 코앞에 보이는 소름끼칠 정도로 익숙한 3층건물로 달려 들어갔다.
“아아악!” 여자는 슈가큐브코너의 출입구에 온 힘을 다해 부딪치며 신음했다. 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용이 그녀 뒤로 다가오는 발걸음에 온 세상이 흔들리며 비명을 질러댔다. “아, 좀!” 여자는 소리치며 발굽을 휘둘렀다. 문이 홱 열림과 동시에 그녀는 실내로 굴러 들어가며 딱딱하게 굳은 빵조각이 널린 다 부서진 스탠드 위로 널브러졌다. 마지막 포니는 무릎으로 기어 안쪽 구석으로 기어 들어갔다. 사탕 입힌 간식거리 모양으로 짠 스탠드가 습기를 가득 먹은 채 양쪽에서 까딱거렸다. 여자는 기어가다 말고 중간에 멈춰 섰다. 서리와 진땀이 엉겨붙은 솜털 사이로 새빨간 눈동자가 빛났다.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우레처럼 쩌렁쩌렁하게 울리던 굉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적막만 남아 있었다. 용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가 버린 것이었을까...?
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무엇인가 찢겨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슈가큐브코너 지붕 절반이 말 그대로 뜯겨나간 자리로 차가운 잿빛 황혼이 들어와 실내를 비추었다. 여자는 깜짝 놀라 몸을 낮춰 쏟아져 내리는 재와 잔해를 피했다. 떨리는 눈길로 올려다보자 용의 강철 같은 손톱이 건물을 파고들어와 벽을 양쪽으로 갈라놓고 있었고, 그 사이로 서슬 퍼런 주둥이가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연기 사이에서 에메랄드 빛 홍채가 반짝였다. 용이 대가리를 낮추었다.
그녀는 치솟는 울음을 억누르며 마지막으로 날개를 힘껏 퍼덕여 날아 보려는 헛된 시도를 했다. 왼쪽 날개에서 깃털이 뽑혀 떨어졌고, 그 여파로 끔찍한 고통의 파도가 온몸을 타고 퍼졌다. 여자는 뒷다리로 몸을 일으켜 서 보려고 했으나, 힘없이 쓰러져 건물 구석에 몸을 말고 엎어졌다. 그녀는 몸을 떨며 몸을 더욱 웅크렸다. 그렇게 하면 저기서 웃고 있는 용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기라도 한 양.
죽을 준비를 한 적은 없었다. 어떻게 죽더라도 이렇게 끝날 수 없었다. 이렇게는 안 됐다. 포니 사회의 유산, 이퀘스트리아 최후의 생존자, 마지막으로 남은 천상의 신들과 그 가족들이 이룬 일대기와 업적의 증명이 이제 어디선가 튀어나온 용 한 마리의 아가리에 사라지고 말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이 그녀의 잘못이었다. 여자는 덜덜 떠는 몸으로 이보다 더 비참해 보일 수 없는 목소리를 쥐어짜 말을 더듬으며, 목숨을 구걸했다.
“제발. 제발 그러지 마!” 마지막 포니는 피와 땀에 젖은 채 흐느끼며 빌었다. “이번만 봐 줘! 내가 어떤 놈인지, 내가 왜 사는지 당신은 몰라! 뭐라도 할 테니 제발 살려 줘! 내 돈이든, 비행선이든, 룬스톤이든...... 이번만 살려 보내 주면 전부 당신 거야...... 제발!”
용은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쾅 소리와 함께 용의 왼손이 여자의 떨리는 몸을 쥐었고, 곧 슈가큐브코너의 타일 바닥에 단단히 눌러놓았다. 여자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용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렸으나, 용이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병을 뽕 하고 따 연 뒤 내용물을 그녀의 머리 위로 쏟아붓는 모습을 공포에 질려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고운 상아색 가루가 쏟아져 내리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여자의 온몸을 뒤덮었는데, 그 꼴이 화장터의 소각로 밑바닥에서 구른 것과 다르지 않았다.
여자는 두려움에 찬 눈으로 기침을 토하며 겨우 더듬거리며 말했다. “이게-이게 지금 뭐 하는 거야—?” 용이 여자를 입안에 던져 놓을 듯 아가리를 들이밀며 고개를 숙였다. “안 돼...”
용이 아가리를 벌리고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습한 가스를 뿜어내기 시작하자 실내온도가 급상승했다.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목구멍에서 솟구친 녹염이 용의 혓바닥을 타고 뿜어져 나와, 드넓은 아가리 사이를 채우며 쇄도해 여자를 감쌌다.
마지막 포니는 비명을 질렀다. 녹염에 몸이 타들어갔다. 용솟음치는 에메랄드 빛 불길 한가운데서 피부를 시작으로 온몸이 녹아 없어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죽음의 한순간과도 같았던 순간은 여자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결과로 귀결되었다. 왼쪽 날갯죽지 아래쪽에서 느껴지던 고통이 사그라든 것이다.
모든 고통이 씻은 듯 사라졌다. 중추에서 말단으로 고통이 사라지는 느낌이 퍼져갔다. 눈 깜짝할 사이 어디선가 거대한, 바람 부는 옥빛 터널이 생겨났다. 그것은 영원의 세계에 탄생하기 위해 지나야 할 출산 경로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어떤 구심력이 작용하며 그녀를 끌어당기는 듯한 느낌밖에 들지 않았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속도로 에메랄드 빛 잿더미 속으로 던져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온 세상이 저 너머에서 깜박이는 빛이 구축한 신기루의 숲과 거기서 오는 열광에 미쳐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알다가도 모르겠는 이 만화경과 같은 풍광은 처음 시작된 것과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끝나 버렸다. 페가수스의 몸뚱이가 유성처럼 대지로 날아가 박혔는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지육신 모두 멀쩡했다. 꽉 감은 눈꺼풀 너머로 그녀의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살아 있었다.
그 다음으로 느껴진 것은 다름아닌 온기였다. 부드럽고 편안한, 진짜 온기였다. 봄빛으로 싱그러운 풀잎들이 숲을 이룬 한가운데 떨어진 몸은 이슬을 받아 촉촉해져 있었고, 그 몸을 둘러싸고 온기가 퍼졌다. 어안이 벙벙한 채 뜨인 눈에 저마다 이슬을 머금은 녹초의 바다에서 튕겨져 나온 빛덩이가 어른거렸다. 그녀는 기진맥진한 채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검은색과 황금색이 배합된, 한없이 부드럽고 연약한 날개를 단 곤충 하나가 가만히 날아와 코 끝에 앉았다. 그것은 다시 날개를 가볍게 살랑살랑 움직여 저만치 보이는 금빛 아우라 속으로 날아갔다. 그 자그마한 생명에 그녀는 경탄했다. 머릿속 어둠이 사라진 자리에서 그것의 이름이 떠올랐다. “나비” 였다.
즐거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여자의 귀를 간지럽혔다. 이슬 맺힌 풀잎이 숲을 이루어 늘어선 자리 너머로 훌쩍훌쩍 뛰어다니는 형체가 시선에 들어왔다. 반들거리는 밝은 색 솜털과 은은한 갈기, 맑은 눈을 하고 입을 활짝 열어 까르르 웃으며 네 다리를 바람처럼 움직이며 꼬리를 홱홱 흔드는 형상들이 따뜻하고 포근한 산들바람 속에서 뛰놀고 있었다.
포니들이었다. 조그마한 몸집을 한 살아 있는 포니들이 열 명 남짓, 저마다 깡충깡충 뛰며 웃고 있었다. 큐티마크가 막 생길 즈음 나이로 보이는 꼬마들이 서로 술래잡기를 하며 즐겁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탁 트인 평원은 그네나 시소, 미끄럼틀, 정글짐이 가득한 운동장이기도 했다. 새빨간 지붕을 얹은 학교 건물이 멀찍이로 보였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쳐다보자—
눈이 멀 듯한 풍경이었다. 그녀는 발굽으로 눈을 급히 가리며 날카로운 숨을 들이마셨다. 긴 갈기가 바람에 날려 머리를 쓰는 낯선 느낌에 순간 어안이 벙벙했지만, 이내 무시했다. 대신 덜덜 떠는 몸으로 자리에 앉아 눈앞의 놀라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황혼과 안개, 날리는 재와 눈 모두가 사라진 자리로 드높은 하늘 위를 당당히 오르는 형체가 하나 있었으니, 태양이었다. 이퀘스트리아의 만인을 위하여 셀레스티아 공주가 전하는 생명의 선물, 태양이 그곳에 있었다.
찬란한 흰 산들이 뜨는 해를 받아 순수한 사파이어 빛 청색으로 반짝이는 호수 위로 일어선 땅, 이퀘스트리아였다. 잔잔한 수면 위로 일 미터쯤 되는 곳에 물안개가 가만히 내려앉았고, 거위 한 무리가 수면 위를 날았다. 새들의 거울상이 비치는 수표면 밖으로 물고기 한두 마리가 튀어오르며 장난쳤다. 하늘은 찬란한 금빛으로 빛나는 실안개로 치장했는데, 생명으로 약동하며 반짝이는 세상 속으로 숨결을 불어 넣으며 떠오르는 바닐라 색 빛깔로 한데 녹아 뒤섞이고 있었다.
페가수스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새된 종소리가 멀리서 들려와 가슴을 뒤흔들었다. 보는 것만으로 하염없이 기쁜 햇빛에서 시선을 돌리자, 연보랏빛 갈기를 한 여자가 벙글벙글 웃으며 학교 건물에서 나와 운동장에서 끼리끼리 모여 놀고 있던 아이들을 낭랑하게 불렀다. “얘들아! 공부 시간이란다! 자, 어서 들어오렴! 공부가 끝난 다음에도 놀 시간은 충분하단다!”
“치어릴리 선생님......” 그녀의 말은 날숨에 섞여 떨어졌다. 처음 듣는 목소리로 말이 나왔다. 아이들이 웃는 얼굴로 한 줄로 서서 즐거이 학교 건물을 향하여 달려갔다. “스네일스... 실버스푼... 스닙스... 트위스트...”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학생들을 쳐다보았다. 떨리는 입 밖으로 한 마디 이름이 빠져나왔다. “...애플블룸?”
두 눈에서 무언가 불꽃이 튀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고, 그 한 동작에 지금까지 부딪쳐왔던 악몽 같은 세월들을 털어냈다. 물 위로 떠가던 안개가 일출을 받아 수정처럼 투명하고 푸른 하늘 속으로 증발해 사라졌다. 에메랄드 빛 숲 너머로 줄지어 늘어선 자줏빛 산맥에 예쁜 무지개가 하나 걸려 온 몸으로 찬란한 아침을 비추었다. 그 모습을 잔잔한 호수가 조용히 비춰주었다.
눈에 비친 모든 것들이 눈물에 젖어 흐느낌에 섞이고, 몸 밖으로 딸꾹질과 함께 치솟아 올랐다. 여자는 얼굴을 가렸다. 날카로운 숨결이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는 사이마다, 울음이 몸 안에서 웃음으로 담금질되었다. 두 어깨로 짊어졌던 모든 무게가 한순간에 깨져 떨어졌다.
“아, 공주님...... 공주님 맙소사. 이거 정말이지.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잊어버리고 살았었다니...” 그녀는 몸을 떨며 훌쩍거렸다. 바람에 실려 흔들리는 갈기를 발굽으로 쓸던 여자의 시선은 줄곧 무지개에 박혀 있었다. 햇살과 산들바람이 그녀의 몸 위에서 다시 만났다. “진짜야. 이건 진짜야. 셀레스티아 공주님 감사합니다. 감사—”
그 때 온 세상이 깜박였다. 운동장이 찌부러졌고 학교 건물은 뒤틀린 한 줄기 빛줄기처럼 퍼졌다. 폭포처럼 서 있던 산맥은 호수 수면과 함께 떨어져 나갔다. 무지개마저 산산히 부서지며 밝은 녹색 불꽃으로 변해 눈앞의 풍경을 불태워 버렸다. 지평선부터 하늘까지 펼쳐져 있던 풍광들이 불에 타 녹아 없어지는 사진처럼 붕괴되어 갔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넓게 열린 두 눈은 공허했고 숨은 막혀 왔다. “아, 안 돼......”
세상은 그대로 폭발하듯 깨어져 에메랄드 빛 화염의 손가락이 되어 그녀를 다시 한 번 들쳐업고 목을 조르며 녹색 불꽃이 꿈틀대는 터널로 끌고 들어갔다.
“아아아아아아아악—!” 생겼던 갈기는 사라지고, 솜털 위에 피얼룩이 다시 번졌다. 왼쪽 날개 아래 근육에 다시 끔찍한 고통의 비수가 꽂혔다. 여자는 추운 슈가큐브코너의 잿더미 내려앉은 바닥에 있었다. “—안 돼!”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나뒹굴며 경련하고, 가쁜 숨을 토해냈다. 포니빌 폐허 곳곳에 세상의 잿빛 안개가 눈에 섞여 떠다녔다.
고통에 지친 몸이 얼음장 같은 타일 위에서 널브러져 눈물 흘리며 학교 운동장에서 마주쳤던 모든 온기를 도로 흘려보냈다. 한 순간이 영원과도 같게 느껴졌다. 그녀는 태아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 모로 누웠다. 보라색 비늘 덮인 다리 하나가 가만히 내려와 그녀를 가볍게 쓸어주더니, 날개 아래 다친 자리를 가만히 감쌌다. 묵직한 목소리가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녹색 연기가 뿜어져 나와 상처를 덮었다. 마법의 연기가 슈가큐브코너를 채웠다. 그녀의 옆구리에서 느껴지던 날카로운 고통이 어느 순간 씻은 듯 없어졌다.
그녀는 떨리는 몸으로 눈을 열어 뜨고 왼쪽 날개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상처가 천천히, 자기 스스로 봉합되고 있었다. 상처가 있던 자리에 마른 핏자국이 뒤덮인 갈색 솜털만 남았다. 이게 무슨 일인지 머리를 굴리며 그녀는 가쁜 숨을 정돈했다. 그 때, 머리 위에서 천둥벼락처럼 커다란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리며 아직 용이 그 자리를 떠난 게 아님을 상기시켰다.
“자네가 고향을 떠난 것도... 아주 오래 전 일이 되어 버렸군. 그렇지 않은가?”
여자는 숨이 막혔다. 상처가 나아 운신이 자유로워진 여자는 네 다리로 훌쩍 뛰어 물러서며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다. 우뚝 솟은 용의 키와 덩치에 놀란 여자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탈출로를 머리에 그리기도 전에 거대한 용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보라색 비늘이 희미한 황혼에 젖어 반들거렸고, 목에 건 금줄에 보라색 펜던트가 걸려 있었다. 빈 방에 묵직하고 낮은, 따뜻한 목소리가 퍼짐과 동시에 녹색 볏이 진동했다.
“아차, 고향이라니. 자네가 돌아갈 고향이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기는 했는지 먼저 물었어야 했는데.”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생각보다 정중한 용을 향해 어질어질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 뭣...?”
용은 단단해 보이는 머리를 갸웃해 보이며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투로 대답했다. “즉슨, 도피는 그만둘 때라는 것이네, 스쿠틀루.”
마지막 포니의 숨이 턱 막히고, 새빨간 눈이 크게 열려 뜨이며 촉촉이 젖어 들어갔다. 믿을 수 없다는 듯 헤벌어지는 입을 수습하지도 못한 채, 그녀는 용의 거대한 풍채를 쳐다보며 몸을 떨었다. “뭐... 방금, 방금 뭐라고......?”
용은 차분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새파랗게 날이 선 이빨이 왠지 낯설지 않고 친숙하게 느껴졌다. “다름아닌 자네 이름이지. 오랜 세월 동안 잊힌 것이기는 하네만, 이 이름을 통하여 우리의 관계는 진실한 벗이자 오랜 벗으로 돌아가게 된다네.”
여자의 시선이 바쁘게 움직였다. 안쓰럽기까지 한 한 줌 온기가 뺨을 타고 흘렀고, 두 날개에 힘이 빠져나갔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용을 똑바로 보고 겨우 말했다. ”스... 스파이크?“
보라색 용의 콧구멍에서 한 줄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용은 정중한 몸짓으로 한쪽 손을 가슴에 얹더니 가볍게 허리를 숙이고 말했다. “그렇네, 그 스파이크라네.”
여자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는 몸을 떨며 스파이크를 향해 겨우 몇 걸음을 옮겨놓았다. 닿을 수 없을 정도로 커 버린 스파이크를 여자가 올려다보았다. 여자의 한쪽 발굽이 스파이크의 손에 닿았다. 그의 손은 여자보다도 두 배는 커 보였다. 스파이크는 천천히 손가락을 접어 여자가 건넨 발굽을 가만히 감쌌다. 그 순간 여자는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여자는 눈물에 젖어 스파이크에게 달려가 그의 가슴에 안겼다. 외로운 몸이 울음을 감당하지 못해 아파 왔다. 그녀는 용의 따뜻한 비늘 위로 얼굴을 묻었다. 용은 무릎을 꿇고 앉아 꼬리로 그녀를 감싸주었다. 무너져 우는 여자의 떨리는 갈기를 스파이크의 다른 손이 가만히 쓸어주었다.
여자의 말들은 너무 늦은 울음에 뒤섞여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녀는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애써 웃어 보이며 스파이크에게 얼굴을 비볐다. 비늘이 젖어 반들거리며 보라색으로 반짝였다. “언젠가 만날 줄 알았어... 한 번도... 절대, 절대, 절대 잊은 적......” 여자는 다시 한 번 울음을 터뜨리며 주저앉았다.
늙은 용은 뺨에 돋은 녹색 비늘로 여자를 살짝 건드리며 나긋하게 말했다. “그대가 여기 와 있는 것이 가장 확실한 증거라네, 스쿠틀루. 이제 마음 놓게.”
과거의 기억을 매장한 뒤틀린 석관 한가운데서, 그들은 오래 전 죽은 벗들의 재로 세례를 받으며 얼마간 그렇게 서 있었다. 스파이크가 여자를 놓아주었다. 그녀는 한없는 기쁨에 젖어 울먹이며, 앞다리로 얼굴을 문질러 닦고 멍하게 물었다. “어, 어떻게 된 거지......? 어딜, 어딜 다녀온 거야? 날 어디로 보냈던 거지?”
순한 에메랄드빛 눈동자 위로 여자의 모습이 비쳤다. “과거에 다녀온 거라네.”
여자는 믿을 수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옛날?”
“그렇네.”
“무슨......” 스쿠틀루는 눈에 젖은 포니빌 폐허로 시선을 돌렸다. 찬란한 일출과 하늘에 걸린 무지개가 아직도 눈에 선했다. 여자의 젖은 눈은 그 허깨비라도 다시 보고 싶어했으나 허사였다. “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는데.”
“곧 알게 될 걸세.” 스파이크가 빙긋 웃으며 스쿠틀루를 쓰다듬었다. “진실로.” 그는 또아리를 틀었던 꼬리를 풀고 슈가큐브코너 밖으로 힘차게 걸어 나왔다. 아직도 숨을 다 고르지 못한 페가수스를 등에 업은 용은 날개를 펼치고 말했다. “같이 가세, 오랜 벗이여. 마음 편히 쉬게 해 줌세.”
2020.08.09. 재번역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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