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E/백그라운드 포니

Chapter 03. 기반Foundations[개정]

Mergo 2019. 8. 4. 22:16

일기에게.

 

무엇이 사람을 만들까. 그 사람의 꿈인가. 아니면 그 사람의 사상이나 이루고자 하는 바인가. 아니면, 죽기 전에 이것만은 이루고 죽고 싶다는 희망인가.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들인가, 그 두려움과 염려 그 자체인가.

 

가족들과 같이 살 때, 그러니까 캔틀롯에서 살 때는 내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명확했었다. 앞으로 뭘 해서 먹고 살고 싶다는 명확한 목표가 있었고, 이런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는 이상형도 확립되어 있었다. 심지어 꼬마를 낳으면 어떤 아이였으면 좋겠다, 싶은 것까지 생각해 두었었다. 그 때 '무엇이 사람을 만드는가' 물었다면 아마 '그 사람이 가진 능력의 총합이 그 사람이다.' 라고 했을 터이다.

 

돌아갈 집이 있는 동안에는 그 모든 것이 명백해 보였다. 포니빌에 와서부터 끝없는 밤에 드리운 혹한의 장막 너머로 내던져진 다음에 보니, 불의 심판을 통과한 것처럼 내 평생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살던 것들이 전부 불타 없어져 있었다.

 

그 누가 평소에 돌아갈 고향을 잃어버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살겠는가. 집을 잃는다는 것은 순수하게 그 사람이 가진 역량만 회중에 남음을 뜻한다. 그 역량으로는 먹을 것과 잘 곳을 구할 수 없고 자기를 맞아 줄 사람 또한 찾을 수 없다. 작곡과 철학을 공부해 온 수 년간의 시간은 길거리에 널린 쓰레기통을 뒤지며 먹을 만한 찌꺼기를 찾고, 버려진 건물의 구석에 들어가 잠을 청하는 나날을 대비하는 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들에 끝내 굴복할 수도 있었던 날들의 이야기다.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굴복하는 것 외의 방책이 없었을 것이다.

 

문득 생각해 보니, 그렇게 됨을 예비하는 사람들도 없지만 행복을 예비하는 사람들 또한 없다. 돌아갈 집이 사람을 만든다면, 나보다도 단단하고 넉넉한 집을 지으리. 나는 저들을 위하여 노래를 부르지만, 그들은 평생 그 노래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내가 부른 노래가 저들의 가슴 속과 목소리 안에 벽돌 하나씩을 쌓아올려 집을 지어감을 믿기 때문에, 이는 아마 비극은 아닐 것이다. 저들 모두 나에게 자신의 기반을 기꺼이 내어 준 이들이 아니던가.

 


 

그 사람의 소리를 들은 순간 몸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그 사람 말고는 올 사람이 없었다. 우리 집과 농장 사이의 흙길을 나다니는 사람은 그 사람 말고는 없었다. 여름날 소나기가 으레 그렇듯 포효하듯 쏟아지는 빗소리 아래로 오두막 현관 나뭇바닥에 발굽을 질질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자리에 앉아 펜과 악보를 펼쳐두고, 옮겨 적은 '밤의 만장' 악보를 다듬고 있었다. 벽돌을 쌓아 만든 벽난로에 일렁이던 불꽃이 어느 새 희미하게 쇠해 있었다. 작업에 집중하다 보니 어디서 찬바람이 슬슬 분다 싶던 것도 모르고 있었다. 판자 지붕 위로 비가 쏟아져 내리는 소리가 웅웅대는 가운데, 밖에서 오도가도 못 하고 있던 그 사람의 소리가 들려왔다. 걱정되기도 했지만 흥미롭기도 했다. 후드 재킷의 소매를 정돈하고 일어서서 현관으로 걸어가 출입문을 홱 열었다.

 

애플잭이 깜짝 놀라 펄쩍 뛰더니 몸을 돌려 이쪽을 쳐다보았다. 애플잭이 소스라치게 놀라는 건 물론이고... 비에 젖은 쥐 꼴로 있는 건 본 적이 없었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흠뻑 젖어서는 현관문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금발 갈기가 주근깨 박힌 얼굴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고, 그 얼굴은 상황의 난처함에 붉어져 있었다.

 

"안녕하세요." 뿔을 밝혀 문을 계속 열어두며 차분히 웃었다. "산보를 하기엔 날씨가 별로죠?"

 

"아. 실례했구먼." 애플잭이 몸을 꿈지럭대며 말했다. 그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쏟아져 내리는 비의 장막에 가리워 있었다. 오두막 앞으로 뻗은 흙길은 어느새 시커먼 탁류로 바뀌어 있었고, 저편에 펼쳐진 숲 위에 어른거리는 칙칙한 잿빛 안개 너머에서 오후의 빛나던 햇살이 흩어지고 있었다. "음... 젠장할. 조지기도 단단히 조진 것 같구만." 애플잭이 순박한 미소를 지었다. 애플잭 아래에는 웬 바구니가 하나 있었는데, 젖은 수건으로 단단히 감싸둔 걸 보니 적어도 내용물 하나는 안 적시고 가져가야겠다 싶어 자기 몸으로 비를 막으며 갖고 온 모양이었다. "옘병할 비 피해서 잠깐 숨이나 돌리려고 했소. 하여간 저 페가수스란 것들은 한 번도 제대로 얘기를 안 해 준다니까."

 

어깨를 으쓱했다. "저도 놀랐지 뭐에요. 평상시 같으면 나가서 이리저리 돌아다녔을 텐데. 그래도 오늘은 뭣 좀 하느라 집에 콕 박혀 있었어요." 빙긋이 웃으며 덧붙였다. "집에 박혀 있었다고 하니 말인데, 그쪽도 이리 들어오셔야겠는데요."

 

"아니, 아니. 그럴 것 없소!" 애플잭이 고개를 저으며 비 내리는 저편을 가리켰다. "머잖아 그칠 게... 음... 언젠가 그치겠지. 그쪽이 굳이 그럴 필요 없다 이거요. 어차피 곧 갈 생각이기도 했고. 그쪽한테 궁상 떠는 걸 내보이려 그런 것도 아니니—"

 

"비에 빠져 죽을 지경인데 그리로 나가게 냅두면 제가 뭐가 되나요?" 뒤로 몇 걸음 물러나 들어오라고 몸짓했다. "들어오시죠. 마침 벽난로도 피워 놨어요. 몸이나 좀 녹이세요."

 

"어..." 애플잭이 입술을 씹었다. 이쪽을 보다가, 쏟아지는 비를 보다가, 가져온 바구니를 쳐다보더니 다시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참말로 그래도 괜찮겠소?"

 

어차피 들어올 거 뭘 그러냐는 듯 씩 웃었다. "생각 바뀌기 전에 얼른 들어오세요."

 

"뭐, 그렇다면야..." 애플잭이 몸을 파르르 떨더니 바구니를 가지고 조심스레 오두막 안에 들어섰다. "휴, 그러고 보니 이런 데가 있었던가 싶소. 평소 이쪽 길로 자주 나다니는데 언제 생겼담. 참 이상한 일 아니오. 원래 다 쓰러져 가는 헛간 하나 있지 않았소?"

 

"뭐 그랬을 수도 있죠." 미소지으며 문을 닫았다. 이제 차갑고 축축한 바깥 공기와는 안녕이었다. "새로 이사 와서 말이에요."

 

"그렇소. 만나서 반갑고, 앞으로도 잘 좀 부탁하리다." 애플잭이 말했다. 들통 하나를 애플잭 앞으로 밀어주었다. 대충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는 듯, 바닥에 모자를 벗어 내려두더니 금속 물통 위로 갈기와 꼬리를 빨래 짜듯이 짜냈다. "그렇더라도 말이지. 밤새 집이 버섯마냥 툭 하고 솟아나기라도 한 것 같구먼."

 

"으음... 뭐 그렇진 않은데요." 벽난로 쪽으로 다가가 한쪽에 놓아둔 철제 받침 위에 놓여 있던 통나무 세 토막을 띄우며 말했다. "뭐 모르셨더라도 어쩔 수 없죠." 그대로 불가에 땔감을 던져 넣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불꽃이 살아나며 맑은 불빛이 오두막 안을 가득 적셨다. 이번에는 그 온기를 쪼일 사람이 더 있었다. "제가... 존재감이 명확한 타입은 아니거든요. 집이 주인을 닮은 거죠."

 

"그러고 보이 요 근처랑 전에 헛간 있던 데랑 해서 사과나무 적잖이 심어 놓았던데." 애플잭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잠시 말을 쉬더니, 눈을 굴리고 빙글빙글 웃었다. "하하.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가장 먼저 눈에 띄더이다."

 

"그럴 수 있죠."

 

"접붙이기를 했던데, 혹시 직접 심었나?"

 

"음..." 침대를 지나쳐 가 잘 마른 수건을 가득 채워 둔 나무 캐비닛을 열었다. "네. 누구 도움을 좀 받긴 했지만."

 

"저 길 따라 내려가면 비슷한 거 수백 개는 박아놓은 과수원 있지 않나. 그 집 딸내미다."

 

"여러모로 이웃사촌이군요." 빙긋 웃어 보였다.

 

"허. 그러고 보니 맞는 말이네. 앞으로는 터놓고 지내자고. 이거 내가 실례가 많았구먼." 애플잭이 고개를 들어 오두막 벽을 쳐다보더니, 말꼬리를 길게 늘여 말했다. "호... 저건 또 다 뭣고?"

 

"흠?" 애플잭 쪽으로 돌아왔다. 애플잭의 시선이 닿는 곳을 쳐다보니, 벽에 줄 세워 걸어 둔 악기가 빽빽했다. 플루트, 기타, 하프, 차임Chime, 바이올린, 첼로, 클라리넷 등 익숙한 악기들이 조그마한 오두막 벽에 촘촘히 박아둔 고정기에 걸려 빼곡히 내걸려 있었다. "아. 그... 음악 하거든요." 벽면 가득한 악기는 말 그대로 악기의 숲이라 할 만했는데, 그 말 한 마디로 모든 게 설명되기라도 한다는 양 흥얼거리며 대답한 말이 그것이다. "동네 안에 집을 구해서 살아도 될 것 같지만,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있어요. 하루 종일 깽깽대면서 온갖 소음공해를 일으킬 거라, 며칠 못 가서 쫓겨날 게 뻔하거든요."

 

"그 뭐여, 작곡 하는 사람인가?"

 

"작곡이라기보다는 옮겨 쓰는 게 맞죠."

 

"글쎄..." 애플잭이 갈기 짜기를 멈추더니 입술을 씹었다. "내는 잘 모르겠구만."

 

"저도 그런데요 뭐." 피식 웃으며 수건을 건넸다. "받아 적는 게 대체 무슨 음악인가 알고 나면 그제야 알겠지요. 그럼 그 곡이 또 뭐냐는 의문이 생기겠지만." 애플잭이 수건을 받았다. 벽난로로 돌아가 부지깽이로 장작을 뒤적여 불꽃을 키웠다. "소개도 안 하고 있었군요. 라이라라고 해요. 라이라 하트스트링스."

 

"애플잭이여." 그녀는 나를 처음 본 사람처럼 말했다.

 

애플잭에게는 항상 '첫 번째' 만남이었을 것이지만, 몇 번이고 반복되는 최초의 만남을 나 또한 즐기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초면인 사람과 이야기할 때면 으레 목소리가 더 낭랑해지는 게 일반적인데, 애플잭 특유의 억양과 섞였을 때는 바이올린 소리를 듣는 듯하다. 만날 때마다 계속 듣는 소리지만, 빨리 다시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목소리다. 사람마다 목소리에 실린 악기가 다르니, 어떻게 보면 합주곡 같은 인생을 사는 셈이다.

 

"어지간하면 다른 사람헌티 폐 끼치는 짓은 안 할 텐데 말여." 애플잭이 계속 말했다. "이대로 갔어도 사지 멀쩡하게 집에 들어갔을 터인데. 젖은 거야 뭐 나중에 재채기나 몇 번 하면 그만이고."

 

"시내까지 다녀오신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이놈 때문이제." 애플잭이 수건을 목에 걸고 바구니를 감싼 젖은 수건을 하나하나 벗겨 냈다. "제발 멀쩡해라, 젖으면 안 되는데... 휴!"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그마한 알리콘 인형을 꺼내 호박색 불빛에 젖은 난로가에 내려놓았다. 장난감은 잘 말라 있었는데, 어찌 보면 집 안에서 가장 물기 없는 물건 같기도 했다. 애플잭이 자기 아이를 어르는 양 인형에 뺨을 비볐다. "잘못됐음 그냥 벼랑 하나 골라가 칵 뛰어 버리려고 그랬다."

 

"어, 애플잭 씨 취미는 어디 가서 얘기 안 할게요." 멍청한 표정으로 눈을 찡긋했다.

 

"엥?" 깜짝 놀라 이쪽을 보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이 무슨! 그런 거 아이다!" 애플잭이 헛기침을 하고 인형을 바구니 속으로 돌려놓았다. "애플블룸이라고, 내 동생 물건이여. 엄니랑 아부지 돌아가시기 전에 주신 유품이라 그랴. 거기선 좀 편안하실라나." 애플잭이 주저앉아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는 온기에 젖어 말했다. "애플블룸이 포니 마마Pony Pox를 앓고 있거등. 우리 집안 사람들은 다들 그 나이쯤에 한 번씩은 앓기 마련이다만. 내는 그거 걸렸을 때 꽃상여 탈 뻔했다 보니 갸는 좀 별 일 없이 넘어갔으면 좋겠다 싶었지. 그래 시내까지 가서 터진 데 꿰매고 해서 세탁까지 끝내 놨더니 마침 돌아오는 길에... 뭐 이리 된 거제." 애플잭이 벽 쪽으로 몸짓했다. 밖에서 쏟아지는 빗줄기가 저마다 어디 가서 부딪치는 소리의 잔향이 쩌렁쩌렁하게 들려왔다. "심장이 벌렁벌렁하니 이러다 죽겠다 싶대. 우리 꼬마 인형이 작살나는 건 죽어도 용납 못 하거등. 이제 나가 그쪽 집 현관을 도둑질한 이유를 알긋제."

 

"도둑질한 것도 없으시면서 그런 말씀을." 차분하게 말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완벽하게 이해했어요. 헌데, 제 생각에는 그건 아닌 것 같거든요. 오히려 인형보다 그쪽 몸을 더 챙기시는 게 맞지 않을까 싶거든요..." 침대 쪽으로 다가가 마침 놀려두고 있던 양모 이불을 끄집어냈다. "한 집에 둘씩이나 아파서 누워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어허이 참, 하트스트링스 선생. 뭘 그런 걸—"

 

"쉿." 애플잭의 어깨 위에 이불을 둘러 주고, 불가 가까운 곳으로 자리를 밀어주었다. "이 정도는 누리셔도 돼요. 좀 쉬시죠. 이렇게 젖어서 여기까지 올라오셨잖아요. 이 정도는 해드려야죠."

 

애플잭이 달달 떨리는 숨을 가슴 깊이 들이마시더니, 한결 편안한 자세로 불가에 앉아 몸을 말렸다. "흐으으으으음... 이러고 있는 것도 참말로 좋구마."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동감해요."

 

"이러고 있으니 우리 집 벽난로가 또 생각나네." 애플잭이 이불을 가까이 끌어당겨 덮으며 말했다. 녹안이 딱딱 타는 모닥불을 겨누었다. "울 아부지 작품이라. 언제 아부지가 그러시드라고. 아부지의 아부지, 아부지의 아부지의 아부지, 그리고 그 이전의 선조님들을 거슬러 올라가 애플 일가가 우리 나라 어디에 딱 정착해 살기 시작한 시점부터 구전으로 전해 내려온 설계를 따라서 만든 거라꼬. 상상이 가나? 그 긴 세월을 이어 온 수많은 세대가 전부 똑같은 벽난로를 쓰고 있다니 말이제."

 

"그건..." 애플잭 곁에 앉아 그녀의 얼굴을 차분히 쳐다보며 말했다. "...훌륭한 기반을 갖고 있으니, 그 어떤 일을 겪더라도 무사할 것이라는 뜻이죠."

 


 

때는 열두 달 전. 나는 울음에 절어 있었다. 마을 외곽의 버려진 헛간, 어두컴컴한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두 발굽으로 얼굴을 감싼 채 누워 온 몸으로 울어댔다. 나를 좀먹어 오는 울음의 아픔보다, 측량할 수 없이 막막한 한기가 뼛속까지 파고 들어오는 감각이 더 견디기 어려웠다. 포니빌 거리에서부터 잊을 만 하면 몸이 얼어붙는 듯 기묘한 감각이 느껴졌고, 그 혹한은 내게 신벌과 같았다. 폐건물 구석에 엉긴 먼지와 지푸라기 찌꺼기 사이에 드러누워 보내던 동안만큼은 그 추위가 반가웠다. 떨리는 몸이 눈가에 고인 눈물을 밀어 떨어뜨려 주었고, 내가 하고자 했던 것들은 여럿 있었으나 그 중 어느 것도 이루어진 게 없음을 자각하게 해주었다.

 

울음에 내몰린 숨은 으레 딸꾹질로 몸을 드나들었는데, 그 끄트머리에 산촌의 냄새가 묻어 있었다. 역사에 남지 못하고 잊힌 찌꺼기의 냄새와도 같았다. 쓸데없는 물건들만 잔뜩 들어찬 가방은 폐건물에 들어서던 순간부터 한쪽 구석에 집어던져 처박아 두었고, 곳곳에 구멍 뚫린 천장에서 햇빛이 바늘에 꿰인 실처럼 파고 들어왔으나 사방에 널린 목가적 쓰레기와 리라가 구분되지 않았다.

 

한 번 울음마다 한 번의 전율이 따라붙었다. 갈라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분명히 내 것이었으나 낯선 타인의 소리처럼 들렸다. 나는 그 때 아, 나도 나를 잊을 수만 있다면, 하고 바랐다. 아직까지도 머릿속을 떠돌며 나를 괴롭히는 마을 곳곳을 쏘다니며 끔찍한 파괴를 일삼는 광인의 기억과 나를 투명인간 보듯 쳐다보던 트와일라잇 스파클의 얼굴, 시청 건물 지붕 위로 기어올라 그 끄트머리에 서서 내려다보던 그 아래의 모습을 잊을 수만 있다면, 이런 삶이라도 한결 감당해내기 편안할 것이니...

 

발굽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꼈다. 어린애가 된 느낌이었다. 동쪽으로 달려 포니빌을 탈출하려 한 적 있었다. 그대로 캔틀롯까지, 우리 집까지 갈 수 있었다면 계속 갔을 것이다. 포니빌 경계에서 반 마일도 가기 전에 사지의 감각이 없어질 정도로 끔찍한 한기가 느껴졌다. 급히 시내로 돌아가 몸을 추스르고 서쪽으로 향했다. 비슷한 거리를 움직이고 나자 마찬가지로 엄혹한 눈보라 한가운데 내던진 듯한 추위가 막아섰다. 나는 하릴없이, 감옥이 되어 버린 마을 시내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남들에게 도움을 청함은 어불성설이었다. 좀더 솔직하게 말해보자. 애초에 저 사람들을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즐겁고 명랑해 보였다. 그들에겐 마땅히 그래야 할 명징한 이유와 근거가 있었고, 그랬으므로 저들을 미워한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나 스스로를 혐오했다고 함이 정확할 것이다. 어쩌다 도중에 마주쳐 저들의 행복해 보이는 표정을 보게 될 때면 나를 둘러싼 한기와 허기, 그리고 두려움이 새삼 다시 느껴졌다. 둘러싼 것들이 귓가에 속삭여대는 대로 나는 따랐다. 숨었다.

 

포니빌 서쪽 외곽으로 달렸다. 그쯤에서는 한기도 그리 거세지 않았고 그럭저럭 견딜 만했으며, 오히려 계속 정신을 차리고 있을 만했다. 흙길 한쪽에 버려져 있던 헛간을 찾아 들어가 드러누웠다. 생각을 정리하고 싶기는 했으나, 실은 이보다도 급선무인 일이 하나 더 있었다. 가능성을 따져보자면 훨씬 더 불가능에 가까운 일, 즉슨 제정신부터 차리는 일이 우선이었다. 흙과 짚 찌꺼기로 범벅이 된 발굽 위로 떨어져 내리는 눈물 방울처럼 수백 개의 조각으로 찢겨나가 사방으로 흩어진 이성은 회복할 수 없었다.

 

설령 산산조각난 제정신을 전부 주워모아 원래 상태로 되돌릴 수 있다 해도 기꺼이 그리 했을지는 확실치 않다. 이를테면 정해진 운명이 있어 사람의 인생이 거기 예속된다는 주장은 별로 달갑지 않다. 그것은 돌아갈 집을 잃는 것과 같다. 불릴 이름이 없어지는 것은 어떤가. 세상의 모든 부를 긁어모아 대저택을 매입해 들어가 사는 일은 있을 수 있다. 수백만의 집과 수백만 에이커*1의 영지를 거느리고 수백만의 농노를 거느려 사는 영주의 삶도 있을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존경받는 자들만 묻히는 묘지의 한 자리를 배정받아 거기 누울 수도 있을 것이다. 이름 없는 사람의 삶이란 살아서든 죽어서든 돌아갈 집이 없는 삶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 울었고, 그런 생각이 들어서 좌절하며 몸을 떨고 쓰러져 울었다. 그 때 그녀를 처음 만났다.

 

"나랏님 맙소사, 이게 무슨 소리여?" 폐헛간의 다 부서져 가는 벽 사이로 느릿한 목소리가 메아리졌다. 문간에서부터 들려오는 발굽의 사중주에 귀가 쫑긋거렸다. 바깥 찬란한 세상에서부터 나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내 분명히 뭔 소리를 들었다. 어... 보소? 거기 누구 있소? 게 누구요?"

 

헉 소리와 함께 튕겨나오듯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때까지 그럴 기운이 남아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인기척이 난 쪽으로 몸을 돌려 바라보자, 다른 것보다도 주근깨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새어 들어온 가느다란 빛살이 한 쌍 녹안을 비추었다. 저주가 시작된 이래 가장 따뜻한 미소를 짓더니, 그녀가 말했다.

 

"아이구. 안녕하쇼!" 그러고는 두 앞발굽을 머리 위로 들어 보이며 이쪽을 해칠 의사가 없음을 표했다. 갈색 모자와 아주 길게 길러 묶은 금발 갈기, 양옆에 내려놓은 사과 바구니 두 개가 보였다. "진정하쇼. 그쪽을 겁주거나 뭐 해하려고 그러는 게 아뇨." 그녀의 풍채는 근면한 어스 포니 농군의 전형이라 할 만했는데, 얼굴에는 두려움을 모르는 패기가 어려 있었고 네 다리는 튼튼해 보였다. 그 철옹성 같은 사람이 부드럽고 친근한, 연민 섞인 눈길로 이쪽을 쳐다보니, 대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어이구 맙소사. 아주 엉망이 됐구먼. 저기 길바닥 지나가다가 어디서 과부 우는 것만치 서럽게 엉엉 우는 소리가 들려서 와 봤수. 괜찮소?"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말을 한다 쳐도 내가 짊어진 저주의 아주 작은 한 부분이라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가. 삶이란 세상을 조각할 망치와 끌 같은 것인데, 조각할 세상이 진흙과 모래에 지나지 않는다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일어서지 말고 그냥 죽은 척 하고 누워 있었어야 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세상에 없는 존재가 된 것처럼 이번에도 없는 듯 넘어갈 수 있었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녀는 그냥 가 버리는 대신 이쪽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요놈이 적어도 수십 년은 방치된 폐건물인 건 알고 들어왔소? 어디 외지 출신인가 본데?"

 

평생 들어 본 그 어떤 화성보다도 부드럽고, 눈에서 마지막 물기까지 쥐어짜 낼 만큼 귀한 덕성이 스며든 그 말은, 이루 말할 것 없이 듣기 좋았다. 가끔 훌쩍이는 와중에도 그녀가 아니라 양 옆에 놓인 바구니 가득 쌓인 새빨간 과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입 안에 물기가 하나도 없는 것을 그제야 새삼 깨달았다. 폐헛간 전체를 울리고도 남을 묵직한 꾸르륵 소리가 퍼졌다.

 

그쪽도 그 소리를 들었다. 제정신 붙들고 있는 사람이 같이 들어서 다행이었다. "하하하... 출출하구만?" 그녀는 씩 웃으며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자기소개부터 해 보까? 애플잭이여. 정신 차리고 받으라구." 애플잭이 고개를 기울여 새빨간 과일 한 알을 코 위에 올려놓더니 이쪽으로 가볍게 던져주었다. "오렌지니까 조심하라구. 하하하하하. 흠흠. 집안 농담이여."

 

온 혓바닥이 귓가에 대고 소리를 질러대서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앞뒤 잴 것 없이 다급하게 사과를 씹어삼켰다. 목이 메이던 것도 연한 과육을 목구멍 너머로 넘기고 나니 한결 견딜 만했다. 심까지 씹어대고 나니 배가 좀 덜 고파진 건지 어쩐지는 몰라도 눈물이 마른 것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애플잭이 휘파람을 휙 불더니 말했다. "잘 먹는구마! 그래도 좀 진정혀. 하하... 내다 팔 물건이라 미리 씻어둔 게 얼마나 다행인가 몰러?" 애플잭이 다가와 앉았다. "보자, 이쪽 이름은 말했고. 그짝 이름은 무엇인고?"

 

애플잭의 시선과, 질문을 같이 피하며 몸을 떨었다. 요즘 생각해 봐도 그 때 그렇게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른 건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던 듯하다. 나는 가명을 쓰는 부류도 아니고, 그럴듯한 가명을 지어 가지고 다닌다 쳐도 리라만큼 나 자신을 극명히 드러내는 것 또한 없었다. 적어도 그 때는 추위나 굶주림보다도 무엇인가 나를 갉아먹고 있다는 생각이 더 급했다. 애플잭은 내 눈 앞에 있는 현실의 존재였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솟구치는 고독의 수평선을 깨뜨려 부술 수만 있다면 그 어떤 것이라도 할 의사가 있었고, 무슨 말이라도 할 생각이 있었다.

 

"라이라." 나는 우는 소리로 대답했다. "라이라 하트스트링스."

 

"라이라." 애플잭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모자 챙을 잡아 뒤로 기울이자 차분한 미소 띄운 얼굴이 드러났다. 애플잭이 발굽을 내밀었다. "라이라 씨. 참말 괜찮은 이름이네."

 

시야가 순식간에 다시 흐릿해졌다. 심장 뛰는 것이 느껴졌다. 애플잭을 안고 싶었고 애플잭이 나를 안기 바랐다. 사람의 온기를 다시 느끼고 싶었고, 다시 마음놓고 지내고 싶었다. 다시 행복하고 싶었다. 무엇 하나 남지 않으리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이것들 중 그 어떤 것도 남지 않을 것임을 나는 알았다. 그쯤에서 대화를 끊었어야 했다. 가방을 챙겨 폐건물 밖으로 달아나 어디 적당한 숲으로 숨었어야 했다. 숲에 들어가 지성이 좀 떨어지는 동물들일지망정 나를 보고 웃어주고 먹을 것을 나눠주며 나 또한 보살핌을 받을 자격과 가치가 충분하다는 것을 되새겨 주는 것들과 함께 지냈어야 했다. 내가 현실을 거부한 끝에 흙탕을 뒤집어쓰고 눈물로 범벅이 되어 질척이는 머저리 따위가 아니라는 듯 가만히 나를 달래주던 애플잭의 목소리처럼 그것들이 내 떨리는 몸을 진정시켜 주었을 것이다.

 

"이 동네는 내 발굽 보듯이 훤하거등." 애플잭이 계속 말했다. "헌데 그짝은 내 평생 요 근처에서 본 적이 없단 말요, 라이라 씨. 뭐 가족 보러 왔거나 그런 일로 오셨는가? 누구 데리러 올 사람은 있나? 지저분한 폐헛간에서 요렇게 시간 낭비하고 있을 것 없다 이거지, 그렇지 않소?" 애플잭이 눈을 꿈벅이다가 이쪽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어... 하트스트링스 씨?"

 

처음에는 왜 저리 궁금한 게 많나 싶었다. 눈에 보이는 애플잭의 모습이 좌우로 비틀거리는가 싶더니 새까만 어둠 속에 잠겼다. 멀어져 가는 의식의 끝에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기력 잃은 여자처럼 온몸에 힘이 빠졌다. 아마 오랫동안 굶주렸던 것이 원인이었던 것 같다. 아직 뭐라도 씹어 삼킬 기력이 남아 있는 동안에는 몸에 기력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법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폐헛간 바닥에 고꾸라졌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무렵에는 어두컴컴한 폐건물 안보다 수천 배는 밝은 세상이었다. 발 밑으로 보이는 흙바닥이 왠지 물 흐르듯 움직이고 있었고, 지평선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아이구, 정신이 좀 드나!" 애플잭이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태껏 내 몸뚱이를 들쳐업고 달렸구나 싶어 몸이 떨렸다. 흙길은 탐스럽게 익어 가는 사과가 끝도 없이 매달린 사과나무로 가득한 과수원 한가운데의 한 농가주택으로 이어져 있었다. 붉은 지붕을 올린 집 쪽으로 애플잭이 나를 업고 달려 들어갔다. 포니빌 언덕마루 너머의 세상은 문득 전보다도 더 차가워져 있었다. 떨리는 몸에 애플잭의 체온과 숨결이 닿아 춥지 않았다. "가만 있으래이. 여기 있는 게 나을 끼다. 괜찮을 겨."

 

"여긴..." 애써 호흡을 가다듬고 애플잭의 등을 꼭 붙잡았다. 두려움에 절어 포니빌 곳곳을 미친 듯 뛰어다니느라 혹사한 사지에서 격통이 느껴졌다. 왜 그제서야 알았을까. "혹시 여기 사시나요?"

 

"잘 봤네! 사과 하면 우리나라에서 여기, 스윗 애플 에이커산 사과만한 게 또 없다!" 나무 울타리와 사과 수레를 지나쳤다. 멀리서 가축들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고, 조그맣게 쌓아올린 밀짚 뭉치가 곳곳에 놓여 있었다. "여기저기 데리고 다님서 구경이나 시켜주고 싶기는 헌데 그건 좀 뒤로 미뤄야겠다. 열병인지 뭔지, 어디가 아파도 단단히 아픈 거 같거든, 라이라 씨. 일단 몸부터 좀 덥혀야겄다."

 

놀라 숨이 막혔다. "엇... 제 이름 기억하시는 거에요?"

 

"암만 당연한 거 아이가! 우리 집안 사람들이 다들 땅 파먹고 산다 캐도 진짜로 흙이나 퍼먹는 족속들은 아니거등!"

 

삼라만상이 모두 그 끝이 있더라도 눈물만큼은 그 끝이 없을 것 같았던 때가 몇 번 있었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비록 산산이 부서진 그릇 조각 같은 것이나마 미소를 띄우며 애플잭의 등에 엉겨붙었다. 신벌의 불길이 며칠 동안이나 머리 위로 드리워져 있던 악몽의 장막 끝에서부터 타오르고 있기라도 한 듯, 문득 세상은 더할나위없이 찬란했다.

 

그런 복된 풍경을 그냥 넘기기는 아쉬웠다. 눈을 뜨자 어느새 이 복자福者의 집 안, 가족사진과 각종 골동품을 비롯해 직접 깎아 만든 장식으로 가득 찬 거실 한가운데였다. 애플잭이 나를 소파에 내려놓았다. 바로 앞에 벽난로가 있었는데, 내 공허한 마음처럼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장작 없는 벽난로의 모습에 몸이 떨렸다. 애플잭도 그걸 보았는지 스탠드에서 잘 마른 장작 몇 개를 집어 왔다.

 

"인쟈 불 피 주께. 편하게 쉬고 있으라. 스미스 할머니헌티 수프 좀 끓여 달라고 말해 두께."

 

"스미스... 할머니요...?" 웅얼거려 대답했다. 그 때 집 멀찍한 곳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와 귀가 쫑긋했다. 애플잭과 나 둘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 집에는 삶이 있었다. 얼룩 하나 없이 깨끗한 소파에 떡지고 헝클어진 갈기와 먼지로 범벅이 된 솜털을 맞대고 엎어져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야 이름이 라이라 하트스트링스랍니더, 할매!" 애플잭이 저 너머로 우렁차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온 몸에 기력이 없어서 대화에 끼어들지는 못했다. "글쎄 동네 한쪽 구석에 엎어져 있드라고예! 사람 대접 받아 본 적도 오래 된 거 같은데 불쌍해서 우짭니꺼!"

 

"저..." 오한이 번져 몸을 꾸물대며 입술을 씹었다. "정말 감사드려요, 애-애플잭 씨. 그래도 처음 봤을 때 어땠는지까지는... 말씀하실 거 없..." 따끈한 온기가 퍼져나와 몸에 퍼졌다.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불 피운 벽난로 밖으로 장작 타는 구수한 소리가 흘렀다. 그대로 소파에 온 몸이 녹아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아아아아아아아아아... 공주님 맙소사. 끝내주네요." 취객의 웃음 같은 미소를 띄우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애플잭은 전보다도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떻게 골골대든 우리 집안 벽난로 앞에 앉아서 찜질 한번 해 주믄 바로 싹 나아 버리그든." 눈을 찡긋하더니 덧붙여 말했다. "아, 망할. 포니 마마 처음 걸렸을 때 생각났네. 이불 꽁꽁 싸매고 요 앞에 엎어져가 몇 날 며칠을 뻗어 있었제."

 

"실은, 병이 난 건 아니에요." 가능한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그저..."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애플잭의 선의를 스펀지가 물 빨아들이듯 양심 없이 집어삼키고 싶지는 않았지만, 죽지 못해 살았던 며칠을 견디고 난 끝에 찾아온 평화와 안식을 쉽게 놓기도 어려웠다. 내가 짊어진 문제를 누군가에게 다 털어놓고 싶으면서도, 나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짐을 타자의 어깨에 내려놓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갈 곳을 잃었을 뿐이죠." 나는 불쑥 말했다. 헝클어진 갈기를 발굽으로 쓸어내리며, 안에서 솟으려는 울음을 밟아 죽였다. "갈 곳이 없어져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글쎄, 나야 그쪽 상황은 잘 모른다마는. 일단 돌아갈 집부터 만드는 게 먼저가 아닐까 싶다."

 

"집이요?"

 

"집이 사람을 만들거든. 적어도 내 생각엔 그렇다." 벽돌을 쌓아 만든 벽난로에 난로철망을 내려둔 애플잭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옛날 얘기, 나 어릴 적 야그라. 우리 농장 내버리고 큰 도시로 도망가 버린 적 있다. 거기선 우리 가족들이랑은 결이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을 줄 알았거등. 하. 며칠 내내 눈알 빠져라 울기만 했다. 그래 결국 집으로 돌아오고 나니까 전부 다 괜찮아지드라꼬." 애플잭이 가만히 한쪽 발굽으로 내 갈기를 쓸었다. 폐헛간에서부터 들러붙어 온 잎사귀와 밀짚 줄기가 뽑혀나왔다. "사람이 살다 보믄 뭐 자아를 찾는다거나 하는 핑계로 집을 떠나거등. 집이 자기 전부인 거 알면서도 그렇게 된다. 막상 집 떠나면 어떻게 되는지 아나? 얻는 건 없고 잃는 것만 많제."

 

"집에서 도망쳐 나온 것도 아니에요." 나직한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어디선가 보이지 않는 질풍이 쌩 몰아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캔틀롯의 모습처럼 벽난로가 몇 마일씩 멀어져 갔다. "집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어떤 거라도 포기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럴 수가 없네요."

 

"그라모 그 이유가 있을 거 아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솜털 아래로 닭살이 돋아왔다. 두 앞다리를 모아 가슴에 붙이고, 어느새 다가온 차가운 어둠에 맞서 견뎠다. 애플잭은 내내 나를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이제 쇠약해진 손이 거실 한가운데 쓰러져 죽기만 하면 완벽했다. 내 평생 내가 이런 꼴이 되리라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행려병자에 부랑자, 인생의 목적도 이룬 것도 하나 없는 유니콘이라니. 캔틀롯 빈민가의 골목으로 모여드는 하층민들을 수도 없이 봐 오는 동안 내가 느낀 감정은 연민과 호기심 둘뿐이었다. 이제 그들과 같은 악취를 온 몸에 두르고 그들의 자리로 떨어진 것이다. 적어도 그 사람들은 나보다도 나누어 가질 희망이 더 많이 남아 있다. 어찌어찌 집으로 돌아간다 쳐도, 내게 속했던 권리를 계속 주장할 수 있을까. 부모님께서 도와 주실 방법이 있기는 할까.

 

엄마. 아빠.

 

"이유가 없어요." 떨리는 입술로 대답했다. "돌아가 봤자 저를 기다리는 것도 하나 없고요." 소파 더 깊숙한 곳으로 몸을 파묻었다. 그것이 소파가 아니라 차라리 관짝이기를 나는 바랐다.

 

"흐으으음... 머 됐다. 적어도 지금은 여기 있으면 되니까." 애플잭이 말했다. 그녀는 곧장 벽장 쪽으로 걸음을 돌리며 빙긋이 웃어 보였다. 아낌없이 주는 마음조차 그 웃음 앞에서 빛이 바라는 듯싶었다. 애플잭이 옷걸이에 걸린 재킷을 뒤적거렸다. "그짝헌티 딱 좋은 물건이 있그든. 오한 드는 데는 이만한 놈이 또 없드라고." 옷걸이가 잘 빠지지 않아 힘을 주어 빼낸 옷을 입에 물고 나타났다. 칙칙한 잿빛이었다. 그녀는 내 옆에 옷을 툭 내려두고 말했다. "함 입어 보드라고. 몇 년 전, 좀 어린 시절에 가을쯤이면 이놈을 입고 농장일을 했었다. 뭐 당연하지만서도 요즘은 거의 안 입제. 가죽이 한 겹 더 돋기라도 한 양 별로 추운 것도 모르겠그등."

 

시선이 애플잭을 향했다가, 애플잭이 내민 선물로 향했다. 눈을 몇 차례 굴려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니, 소매가 긴 스웨터 재킷이었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뿔을 밝혀 옷을 냅다 낚아채 머리 위로 내팽개치듯 뒤집어썼다. 두 앞다리를 소매에 끼워 넣고, 떨리는 몸을 옷으로 잘 감싸 덮는 일은 순식간이었다. 옷에 화톳불의 열기를 빨아들이는 기능이라도 있는 듯, 오래지 않아 몸 위로 일어난 소름이 다시 살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돌이켜보면, 옷을 건네준 것 하나만으로 몸이 데워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애플잭 입장에서야 보기 딱하니 약간의 적선을 하려던 것일지 몰라도, 받는 입장에서는 그 품에 안기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스쳐 지나는 이방인 이상의 존재와 함께 있는 느낌이 이런 것이었구나 싶어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정중하고도 사려 깊은 이 여자를, 나는 기꺼이 '벗'이라 칭하고 싶었다.

 

"고, 고마워요. 진심이에요." 소파 등받이에 기대 몸을 웅크리고, 벽난로에서 쏟아지는 불빛을 한껏 쪼이며 말했다. "전부 다. 꼭 보답하고 싶어요."

 

"나그 집이 너그 집이나 마찬가진데 멀 그런 걸 가지고." 애플잭이 심드렁하게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거 긴장 풀고 푹 쉬라. 그라모 좀 나아질 끼다. 너그 거처를 찾아 주는 건 좀 있다 하도록 하자. 알아들었나?"

 

아주 작은 웃음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그래요. 알아들었어요." 빙긋이 웃으며 잿빛 소매를 앞발굽 가까이 내려 덮었다. 어릴 때는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그렇게 부러웠었다. 엄마 아빠가 집에 없을 때 지켜 줄 오빠든 언니든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으니까. 언니가 있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세상에 이런 벽난로가 있는 곳이 또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하모. 그만한 게 또 없다." 애플잭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울 아부지 작품이거등. 언제 어디서든 사람은 뿌리를 단디 해야 한다는 기 지론이셨다. 자기 뿌리만 잘 간수하고 있으모 시간이 얼마나 걸리더라도 결국은 다 털고 일어설 수 있다고 하셨제." 애플잭이 잠시 불꽃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 얼굴에 떠오른 것은 내가 본 그 어떤 유약한 슬픔이라도 견뎌낼 수 있을 법한 결연한 표정이기는 했으나, 순간 폭삭 늙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부지가 하시던 말씀이 얼마나 무거운 건지 이제 좀 알겄다. 울 아부지가 내 뿌리셨응게."

 

구름을 이룬 사람의 온기에 취한 듯 머리가 어질어질했으나, 적어도 애플잭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정도의 판단력은 남아 있었다. "아버님께서도 자랑스러워하고 계시겠죠." 나는 말했다.

 

"글씨다. 나야 머 아부지 더 뿌듯하게 해 드리는 것밖에 해 드릴 게 읍네." 애플잭이 빙긋 웃으며 녹색 눈을 반짝였다. 그러더니 나를 지나쳐 가며 말했다. "할매가 수프 잘 끓이고 계시나 보러 가야겄다. 금방 오께."

 

"네, 그러세요." 앉은 자세를 바꾸며 대답했다. 장작에서 튄 불똥이 난로철망에 엉기며 흩어졌다. 불꽃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자 순식간에 나락으로 처박힌 내 신세에 대한 생각이 녹아 없어졌다. 재킷에 달린 두건을 잡아당겨 뿔 위까지 내려 덮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절망으로 점철된 어둠의 시간 동안 내 지친 사지를 옭아맸던 내 마음 속 그림자를 놓아 버리는 듯한 감각이었다.

 

한 곳에 가만히 앉아 며칠 동안 겪었던 일들을 반추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때문에 뭔지는 몰라도 불가해하고 두려운 무언가가 의식의 수면 위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생각의 좌표를 향하여 겨우겨우 나아가는 항로 위를 흔드는 비참의 파도를 따라 흔들거리며 둥둥 떠 나를 쫓아왔다. 더 깊은 생각에 골몰할수록 한 가지 사실만은 명확해졌고, 그 명료성이 가리키는 결론에 귀가 파르르 떨렸다. 끝없는 밤 앞에 겁을 먹고 얼어붙은 마음과 밤이 이끌고 온 냉혹한 한기에 굳어 버린 몸으로 어두운 골목에서 뒤채이며 깨어난 그 순간 내 머릿속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태어난 이래 한 번도 악기를 타고 세상에 연주되지 못한 한 가락 곡. 나는 그 곡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고 있었다.

 

생각에 한참 골몰해 있던 와중이라, 시야 구석에서 웬 노란 무언가가 아장아장 걸어나오다... 깜짝 놀란 것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쳐다보자 휘둥그레 뜬 호박색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꼬마 하나가 있었다. 떨리는 몸을 따라 새빨간 갈기 위에 묶은 붉은 리본이 흔들렸다. 추위에 떠는 것이 나 하나뿐만은 아니었다는 것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꼬마는 나를 무서워하고 있었을 뿐이다.

 

"어머. 안녕." 가능한 부드럽고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빙긋이 웃으며 살짝 몸을 기울였다. "애플잭 씨 동생이구나."

 

아이가 접시만큼 커진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뒷걸음질쳤다. "어어어어..." 잔물결 이는 연못 위로 흩어지는 달빛처럼 창백한 빛이 아이의 눈동자를 따라 흩어져갔고, 턱이 떨어지듯 열렸다. "어어어어... AJ?!"

 

"쉬잇, 괜찮아!" 씩 웃고 말했다. "아무래도 언니가 손님 데려왔다고 말한다는 걸 깜빡한 모양..."

 

"애플블룸, 니 왜 그러나?" 낯익은 오렌지색 형상이 방 안으로 느긋하게 걸어 들어오다가, 깜짝 놀라 얼어붙었다. 애플잭이 갑자기 큰 소리로 소리치는 바람에 이쪽도 가슴이 내려앉을 지경이었다. "애플블룸! 당장 이리 온나! 빨랑!"

 

꼬마는 거칠어진 숨으로 제 언니를 향해 달려갔다. 나는 당혹한 채 애플블룸이 애플잭 뒤로 숨는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애플잭은 동생 털끝도 못 건드리게 하겠다는 듯 버티고 서서 소파에 앉은 나를 노려보았다. 조금 전의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은 이제 없었고, 금강석처럼 단단하게 굳은 채 잔뜩 찌푸려진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는 사람만 있었다. "니 대체 뭐 하는 자슥이고?! 니 먼데 우리 집 와서 이라고 앉았나?!"

 

"예, 예?!" 이쪽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심장이 가슴을 뚫고 튀어나와 후드 자켓을 찢어 놓지 않을까 무서울 정도로 가슴이 벌렁거렸다. "잠깐만... 잠깐만요... 그게... 그쪽이..."

 

"가만, 걸치고 있는 거 내 거 아니가?" 애플잭이 딱딱거리며 물었다. 에메랄드 빛 눈동자가 가늘어지며 차갑게 이쪽을 쏘아보았다. 애플블룸이 울먹거리며 몸을 잔뜩 웅크리고 얼굴을 가린 채 우는 소리가 들렸다. 뜬금없는 소란에 놀라기라도 한 듯 녹색 솜털을 한 노부인이 다른 방에서 나와 두 자매의 뒤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시방 나그 집 재산을 도적질하고 있었다 이거제?!" 애플잭이 이를 뿌득뿌득 갈다시피 하며 소리쳤다. "니 벙어리가!"

 

"애플잭, 그게..."

 

"얼씨구... 나그 이름도 아나?" 애플잭이 고개를 한쪽으로 꺾었다. 머리 끝까지 치솟은 화가 당혹감에 잠시 씻겨나간 듯 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당혹감은 사라지고 분노가 다시 고개를 치켜들었다. "언 놈이 이러라고 시키드나? 시방 이게 재미진 장난거리로 보이는가베! 그렇잖아도 몇 달 전에 대가리 훼까닥 돈 새끼들이 우리 헛간 창고 조사놨는데! 그 정도 지랄 나면 됐지 멀 또 염병할 게 남았다고 이 지랄이고! 머 좋다 쳐, 나그 질문은 언제쯤 대답할 셈이가?!"

 

"이거 뭐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다고요! 저 라이라에요, 기억하시죠?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말을 멈췄다. 거실에 고였던 온기가 빠르게 흩어져 사라져 갔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내 멍청함을 새삼 깨달았다. 입 밖으로 울음 섞인 숨이 빠져나갔다. "공주님 맙소사. 또 시작이군."

 

"머가 또 시작이란 말이고?! 옘병할, 누가 그거 물어 봤나! 왜 나그 집에 함부로 기어들어왔는가 묻지 않나!"

 

"보세요... 음..."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로 힘없이 몸을 일으켜 세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게 말이죠... 그..." 마른침을 삼키는 한편으로 발굽을 내저으며 조금씩 뒷걸음쳤다. "이걸 다 어, 어떻게 설명드려야 하나도 감이 안 잡히긴 하는데..."

 

"해 봐라!" 애플잭의 싸늘한 분노가 잔뜩 찌푸려진 표정을 타고 코앞까지 닥쳐왔다. 잔뜩 긴장되어 팽팽해진 몸 위로 벽난로에서 흘러나온 불빛이 비쳤다. 불빛에 씻겨나간 얼굴 위로 주근깨가 번득였다. "똑바로 분나. 경찰 부르기 전에."

 

"아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얘기 잘 하고 있었잖아요! 마을 외곽에 틀어박혀 있던 걸 여기까지 데려오신 것도 본인이고..."

 

"니를 집까지 데려왔다꼬?! 내는 니를 오늘 난생 처음 보는 기다!"

 

"그렇게 나올 줄 알고는 있었는데, 역시나였군요. 그래도 다 사실이에요!" 어떻게 해서든 엉덩이만은 맞기 싫어 용을 쓰는 어린애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얘기도 했잖아요! 벽난로에 불 피운 것도 그쪽이고요! 이거 준 장본인도 그쪽이고."

 

"거 그럴듯허네. 니는 내가 빙신으로 보이나?"

 

"그게 아니라니까요! 루나 공주님 맙소사. 이걸 어떻게..." 걸음을 멈췄다. 몸의 떨림이 몇 배로 거세졌다. 뼛속까지 얼어붙어 그 자체로 얼음이 되어 가는 듯했다. 거실 벽 위로 줄을 맞춰 수도 없이 걸린 초상화 사이로 시선이 흔들렸다. 그 중 내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내 눈 앞의 셋에게 나 또한 영원한 이방인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터였다. 낯익은 공포가 솟기라도 한 양 얼굴을 구기다가 입을 열었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가, 가 봐야겠어요!"

 

"들어오는 기는 니 마음대로지만 나갈 때는 아니다!"

 

몸을 홱 돌려 집 반대편을 향해 미친 듯 뛰었다. "미안해요!"

 

"애플잭!" 화들짝 놀란 늙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점마 달아나려 드는구마!"

 

"튈 테면 어디 튀어 보라 카이소! 매키?!"

 

모퉁이를 돌아 현관을 향하여 쇄도하자 일가가 뒤에서 아우성치는 소리가 멀어지며 작아져갔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뭔가 큼직하고 새빨간 것에 정면으로 들이받고 말았다. "으으읍!"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나동그라져 골골대며 몸을 웅크렸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나는 숨이 막혔다. "으악!"

 

키 큰 사내가 내 위로 높디높은 탑처럼 서 있었는데, 저 붉은 솜털 아래로 단단하고 굵직한 근육이 꿈틀거렸다. 지금 이 상황만 아니었더라면 참 눈요기하기에 그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모습이었을 터인데. 안타깝게도 그 때는 이쪽을 흘끗거리며 적의를 내비치는 미노타우르스만큼이나 무서운 존재였다.

 

"빅 매킨토시야!" 늙은 여자 목소리가 먼저 이쪽에 닿았고, 등 뒤 거실에서 달려나오는 애플잭의 발굽 소리가 뒤를 따랐다. "도망 못 가게 잘 잡고 있으래이!"

 

이를 뿌득 갈고 급히 좌우를 살폈다. 한 번 훌쩍 뛰기만 하면 바로 닿을 거리에 욕실이 있었다. 붉은 거한이 이쪽을 향하여 달려드는 순간 몸을 날렸다. 나는 아슬아슬하게 몸을 빼내 욕실로 달려들었다. 문턱을 넘는 순간 뿔을 밝혀 문고리를 붙잡았고, 몸이 다 들어가자마자 급히 쾅 소리와 함께 문을 닫았다. 일가가 순식간에 욕실 앞으로 달려 들어오는 기세에 온 집이 우르릉거리며 흔들릴 지경이었다. 문을 걸어잠그러 몸을 일으켜 달리다가 욕실 문 앞 매트에 발이 미끄러져 거의 넘어질 뻔했다. 문을 잠근 뒤 욕실 문을 체중을 실어 눌렀다.

 

문을 거세게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두 번째. 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죽기 아니면 까무러칠 각오로 문에 달라붙었다. 굶주린 몸과 희미해진 마력만이 애플잭 가족의 지극히 당연한 반응에서 나를 지켜 주는 부박한 방어벽이었다. "공주님. 도와 주세요 공주님." 나는 이쯤에서 울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서 받았으나 그 누군가는 준 기억이 없다고 한, 차라리 귀신이 내주었다고 해야 할 잿빛 후드의 소매 위로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세 번째로 문을 강타했을 때는 거의 뒤로 날려갈 뻔했다. 미끄러운 타일을 딛고 서서 문을 막는 일은 굉장한 고역이었다.

 

"당장 문 열어라!" 애플잭이 소리쳤다. "느가 작금으 상황을 다 설명해 주기만 하모, 마 털끝 하나 안 다치고 집에 갈 수 있다 안카나!" 문 너머로 다른 사람들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 니 이거 주거침입죄로 감방 가고도 남을 일인 거 아나?"

 

"됐고! 가만히 좀 냅둬요 제발!" 과호흡의 문턱까지 떠밀려서 흐느끼며 소리쳤다. 나는 나무문을 쳐다보며 웅얼거리듯 말했다. "경찰 불러 봤자 아무 소용 없어요! 정말 아무 소용 없다고요! 누구를 부르든, 그 어떤 권리든 행사할 수 없을 테니까. 루나 공주님 맙소사..." 나는 흐느끼다 못해 딸꾹질이 섞인 숨을 토해냈다. 문에 기대섰던 몸이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왔다.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흔들어댔다. 머릿속에서 앵앵대는 곡조가 더 크게 들려왔다. 당장이라도 내 머리를 부수고 나와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으로 온 욕실을 칠해놓으려는 것만 같았다. "누가 날 좀 어떻게 해 줘요. 당신은 거의 그럴 수도 있었고. 이게 그렇게 어려운 부탁이에요?"

 

문 너머에서는 아무 말도 없었다. 훌쩍이며 자리에 주저앉아 두 뒷다리를 앞다리로 끌어안은 채 조용히 기다렸다. 1분... 2분... 3분. 잿빛 소매를 들어 눈가를 문질러 닦고 고개를 들었다.

 

"저, 저기요?"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을 그대로 드러내며 말했다. 다시 말했다. 아무 답도 없었다. "애, 애플잭 씨? 애플블룸?" 마른침을 삼켰다. "매, 매키?"

 

아무 말도 없었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참을 문고리만 쳐다보고 있다가, 겨우 힘을 짜내 뿔을 밝혀 잠긴 문을 열었다. 조심스레 문을 밀어 열고 고개만 빼꼼히 꺼내 집 안 복도를 살폈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헐떡이는 숨을 진정시키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조심스레 복도를 따라 걸었다.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디뎠을 때 마룻바닥이 끽끽대고 울었다. 몸을 움찔하며 살금살금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거실 근처까지 갔더니, 낭패도 그런 낭패가 없었다. 나는 귀퉁이에 조용히 서서 들었다.

 

애플잭이 나를 등진 방향으로 벽난로 앞에 서 있었다. "아이고...... 한여름에 이 무슨 땔감 낭비고. 이게 다 낭비다 낭비." 애플잭이 모자를 벗더니 금발 갈기 한가운데를 긁적이며 딱딱 소리와 함께 타오르는 불꽃을 가만히 쳐다보며 말했다. "대체 언놈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가? 애플블룸 너가 그랬나?"

 

"내 아니다, 언니!" 노란 꼬마가 애플잭을 스쳐 지나며 말했다. "내보고는 언니 오빠 허락 없스면 땔감 넣지 말라고 캤잖아. 귀에 딱지 앉도록 한 얘기 하고 또 하는 게 뉜데?"

 

"지금까지 너가 언니 오빠 말대로 그럭저럭 말 잘 듣는갑다 하고 넘어간 수도 많기야 허지. 근데 과연 그게 사실일까 싶었던 적도 거의 비슷비슷허거등......"

 

"언니! 그건 무슨 뜻인데?!"

 

"애고 되다...... 너그끼리 투닥거릴 필요 없다!" 나이든 여자가 흔들의자에 주름지고 늙은 육신을 맡긴 채 벽난로에서 쏟아지는 열기를 받으며 빙긋이 웃었다. "그렇잖아도 저 의사 선상이 말하기를, 노인네 관절 쑤시는 데는 따땃하게 지져 주는 게 제일이라 카대. 홀 홀 홀. 그렇지... 애플블룸아, 가서 할미 담요 좀 갖다 주겠느냐. 할미가 알기로 애플블룸은 참 말도 잘 듣고 착한 애거든."

 

"금방 갖다 드릴게요."

 

"그라모 내도 오빠랑 같이 잡일이나 좀 하러 갈랍니다." 애플잭이 뒷문으로 나가며 말했다. "아이고, 공주님 맙소사!" 애플잭이 피식 웃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붉어져 가는 석양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하루가 대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겠네. 할매요, 내도 이제 다 늙었나 봅니다."

 

"아아아아이구,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느냐. 고얀 것 같으니." 스미스 할머니가 내뱉듯 말했다.

 

"이히히히......" 애플블룸이 작은 몸으로 용케 할머니의 담요를 끌어 가져왔다. 그 뒤에 있던 애플잭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나는 입술을 씹으며 이 모든 것들에서 뒷걸음쳐 물러섰다. 나는 복도 한가운데 오직 나의 몸서리치는 한기와 더불어 서 있었다. 벽에 걸린 둥그스름한 거울에 내 모습이 비쳐 보였다. 봉두난발을 하고 온몸에 흙먼지를 뒤집어쓴 여자 하나가 서글픈 눈으로 나를 마주보았다. 한쪽 발굽을 들어 목 뒤에서 달랑거리는 두건을 만지작거렸다. 내 삶이 되어 버린 현실에서 내가 형성할 수 있는 교우관계는 기껏해야 그 정도라는 것을 그 때 깨달았던 것 같다.

 

공허한 위장이 다시 뒤틀리는 소리를 토해냈다. 나가려고 현관 쪽을 돌아보았더니,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현관문이 내게서 멀리, 더 멀리 떨어져 가는 것만 같았다. 아득히 멀어진 문만큼이나 죄책감 또한 흐릿해졌다. 나는 애플잭 일가의 부엌에 뛰쳐들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찬장부터 홱 열어젖혔다. 그 안에 있던 빵 두 덩이를 후드 재킷의 앞주머니에 곧장 쑤셔넣었다. 부엌에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포니빌 시내로 가지고 나가 팔면 짭짤한 부수입을 제공할 것이 확실한 고급 장신구도 꽤 많았는데, 그런 것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래. 이것이 내 첫 번째 절도 기록이다. 사소한 것일지도 모르나, 나는 이것이 내 인생 첫 번째이자 마지막 도둑질이 되기를 공주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나는 그대로 농가를 빠져나와 내 리라가 있는 곳으로 급히 달려갔다. 이제 내게 '집'이라고 할 만한 것이 그 리라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기라도 한 것처럼.

 


 

날이 밝았다. 애플잭이 전의 그 굽어진 길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모습은 금방 눈에 띄었다. 농가에서 있었던 '그 경험' 이 있던 날부터 달랑 하루밖에 지나지 않은 터라, 나는 잠시 눈을 붙이지도 못했다. 훔친 빵으로 배를 채우긴 했으나 한기가 끝없이 몰려들어 잠을 설쳤다. 죄의식과 고립감 때문에 이전처럼 헛간 구석에 처박혀 숨어 있지도 못했다. 나는 헛간 가장자리에 서서 흙길을 따라 애플잭이 다가오는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애플잭의 눈에 띈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애플잭은 길 한가운데 서서 이쪽을 보고 씩 웃어주었다. 나는 경악하는 동시에 안도했다.

 

"이야, 존 아침!" 애플잭의 미소는 짜릿했다. 그 모습은 차라리 일출에 빗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 "새벽부터 나와가 돌아다니는 사람은 또 첨이네!" 애플잭은 양쪽 옆구리에 하나씩 사과 바구니를 짊어진 채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렇제, 뭐 좀 안 드실랑가? 원래는 사과 하나에 일 비트씩인디, 지금은 기분이 조니께 두 개에 일 비트씩 주꾸마."

 

내 평생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을 사랑하는 자매의 아득하게 흐려진 저 그림자가 그 주근깨 위에서 일렁였다. 그 얼굴에 머물러 있던 시선 위로 애플잭의 얼굴이 아니라, 어느 목조주택의 부엌, 문이 활짝 열린 채 도둑맞은 속을 그대로 내보이는 보관함의 형상이 서서히 떠올랐다. 애플잭을 향한 시선을 겨우 떼어 돌려놓았다. 싼값에 넘기겠다는 저 달디단 사과 알맹이들도 나는 볼 수 없었다.

 

"음... 호의는 감사하지만 괜찮아요. 그... 저... 누굴 좀 기다리는 참이라."

 

"그려? 나도 아는 사람이가 싶으네. 내도 동네에 친구 몇 놈 있그등."

 

헛간 문틀에 어색하기 짝이 없는 자세로 기대며 입술을 씹었다. "아뇨... 아마 모르실 거에요." 한숨을 푹 내쉬며 한쪽 발굽으로 갈기를 쓸어넘겼다. 애플잭 앞에서 나는 기댈 곳 없는 방랑자에 불과했으므로, 더더욱 그렇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다만... 머지않아 알게 되실 수도 있겠지요." 웃으려고 했지만 웃어지지가 않았다. 차라리 페가수스처럼 날개를 자라게 해 날아가는 게 더 쉬웠을 것이다.

 

"니 괜찮나? 나가 참견할 바는 아니지만서도, 기부니가 많이 안 좋아 뵈는데." 애플잭이 모자를 고쳐 쓰며 연민이 묻어나는 시선을 던졌다. 벽난로 앞에 앉은 것처럼 따뜻한 눈이었다. "날씨 기똥차지 않나. 땅에 뿔 박고 돌아다닐 듯이 고개 푹 숙이고 다니는 거 안 좋다. 기분 전환도 할 겸 해가 고개 반짝 들고 하늘 좀 봐라."

 

나 혼자서는 도저히 들어올릴 수 없었던 양 입꼬리가 서서히 위로 굽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유는 잘 몰라도 떨리는 몸이 잦아들었고 숨쉬기가 한층 편안해졌다. "그게... 음..."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입을 열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주절거려 가며 화제를 바꾸어야 할까 속으로 생각했다. "요 헛간 생각하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그랴? 뭐가 궁금한데?"

 

"이거 어느 분 건물인가요?" 불면의 이틀 밤을 지새는 동안 머물렀던 헛간은 나무를 조잡하게 짜맞추어 지은 건물이었다. 그 안 어딘가엔 산산이 부서진 관짝 바깥으로 흘러나온 저주받은 부장품처럼 내 리라와 가방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주인이 있는 건물은 아닌 것 같은데요."

 

애플잭이 킥킥 웃더니 내 옆에 와 서며 말했다. "그기 아니제. 언 놈이 갖고 싶어하기라도 하냐고 해야제." 그러더니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문틀을 퍽 하고 걷어찼다. 문이었던 판자가 힘없이 떨어져서 애플잭과 나 사이로 쓰러져 흙바닥에 나뒹굴었다. "보자, 나가 알기로는 나그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있었던 걸로 안다. 울 엄니랑 아부지가 딱히 얘기해 주신 바는 없다마는. 그나마 가능성 높은 게 필시 리치네 집안이 소매업으로 업종 변경하기 전에 쓰던 건물이라는 설이긴 헌데, 그렇다 쳐도 엄청나게 오래 전 얘기거든. 그러니께는, 요 땅덩이도 그렇고 저놈도 그렇고 갖는 놈이 임자라는 게지. 정신 박힌 놈이 갖겠다고 나서지는 않을 것 같다만." 헛간과 흙길 사이를 갈라놓으며 빽빽하게 도열해 선 나무 쪽을 돌아본 애플잭이 입을 열었다. "저거 나무도 문제제. 다 베어낸다 쳐도 땅이 너무 단단해가 뭐 심어 먹을라모 수백 명 데려다가 까뒤집거나, 거하게 마법 한번 써서 족쳐 놔야 할 끼다. 요약을 해 볼꺼나. 아주 오래 전 동네가 어땠는가 기억하는 사람 없제. 이것도 마찬가지 신세다 이거다."

 

헛간을 올려다보다가, 문틀을 가만히 쓸며 말했다. "사라져 가는 기억이라. 그거라면 저도 몇 가지 아는 바가 있습니다마는." 나는 남 말 하듯 말했다.

 

"어랍쇼. 신기한 일도 다 이꾸마."

 

무슨 소리인가 싶어 눈길을 돌렸다. "그래요?"

 

"아니, 그거 말고." 애플잭이 턱을 문지르며 내 목 아래 상반신을 감싸고 있던 옷을 흘끗 보고 말했다. "내도 너그 옷이랑 똑같이 생긴 옷이 하나 있다."

 

마른침을 삼키며 소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에이, 설마요...?"

 

"흠... 아하... 하기사 그거 꿰입고 다닌 것도 벌써 몇 년 됐다."

 

한쪽 눈썹을 치켰다. "일하러 나가기는 너무 춥다 싶을 때 작업복 비슷하게 입고 다니셨던 건가요?"

 

애플잭이 회상에 잠겨 눈가를 살짝 떨며 말했다. "머,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헛기침을 해 목을 닦은 뒤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서 있는 헛간을 올려다보았다. "저기... 동네에서 혹시... 어... 돈 좀 벌 만한 일이 없을까요?"

 

"돈?"

 

"네, 돈이요." 고개를 끄덕이고 애플잭을 마주보았다. "혹시 동네에서..." 입술을 씹었다. 나 스스로 입을 열어 꺼낸 말인데도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을 다시 되새기며 말을 마쳤다. "...아르바이트 구하는 거 없을까요?"

 

"일자리 알아보고 있으모 저기 동네 중심가 내려가 보모 게시판에 구인구직란 있응게 그거 보면 돼." 애플잭이 말했다. "뭐 아르바이트는 거의 없을 끼다. 대부분 정직원 뽑는 거라서."

 

침을 삼키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겠네요. 확실히..."

 

"머 그래도 음악 하는 사람이면 해 볼 만한 게 천지빛깔일 거 같은데." 애플잭이 낭랑하게 말했다.

 

나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음악이요?"

 

"그럼, 당연한 거 아이가!" 애플잭이 씩 웃으며 내 큐티마크를 가리켜 보였다. "머 설마 우표 붙이기 같은 걸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제?"

 

"적성 살리라는 거군요." 나는 무감각하게 말했다. 머릿속에 덮여 있던 뿌연 얼음 장막이 하나 걷힌 느낌이었다. "그래요..." 리라를 넣어 둔 가방을 숨긴 짚더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흠, 그러고 보니..." 애플잭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큐티마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쪽 적성은 오렌지 판매가 틀림없군요."

 

애플잭이 코웃음을 쳤다. 그러더니 모자가 떨어질 지경으로 큰 소리로 껄껄 웃어댔다. 나도 웃음으로 화답했다. 왠지 따뜻해진 기분이 들었다.

 


헛간으로 향하는 길이 크게 구부러지는 지점 언저리를 거닐던 애플잭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헛간 쪽을 바라보았다. 아침마다 시내로 나가며 지나다니는 길에 늘 있었던 그 헛간은 그 날도 평소와 다름없었다. 다른 점이라면, 그 옆에 녹색 텐트 하나가 쳐져 있었다는 점이다.

 

"뭐여 시방...?" 애플잭이 이상하다는 눈치로 텐트를 흘겨보았다. 길 양 옆으로 꼿꼿하게 늘어선 나무에서 늘어진 가지를 따라 나긋한 멜로디가 흘렀다. "서커스 순회 공연이라도 하는갑지?"

 

"서커스까진 아니고, 연주자 하나가 지나다 들른 거죠."

 

애플잭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허?" 애플잭이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동전 네 개가 애플잭 쪽으로 날아가서 모자 챙 위에 사뿐히 떨어졌다.

 

나는 헛간의 출입문 문턱에서 느긋하게 리라를 퉁기며 다 무너진 문틀에 기댔다. "사과가 참 좋아 보이네요. 두 개만 주시겠어요?"

 

애플잭이 옆구리에 짊어진 사과 바구니를 흘끗 보더니 모자를 기울여 동전을 세고 말했다. "글씨, 두 개 값은 아니다. 네 개 값이지."

 

시내로 내려가 연주하는 것도 차츰 익숙해지던 참이었지만, 씩 웃어 보이는 것도 그만큼 연습이 붙은 상태였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좋아요. 네 개 주시죠. 마침 용돈이 좀 남았는데 맛있는 거 좀 먹는 것도 좋겠지요."

 

"그래 보이나?" 애플잭이 지고 있던 사과 중에서도 가장 괜찮아 보이는 것으로 네 알을 골라 봉투에 담으며 말했다. "휴가라도 온 모양인가베."

 

"거의 비슷하죠. 여긴 지낼수록 마음에 드는군요. 그런 의미에서 조금만 더 오래 있을까 생각 중인데." 리라를 퉁기며 몸짓하고 말했다. "이런 말 해도 될진 모르겠지만 아주 건강해 보이시네요. 농장 쪽에서 일하시나 봐요?"

 

"하하, 머 사실이 정확히 그렇긴 허지." 애플잭이 픽 웃더니 한쪽 발굽으로 사과 봉투를 들었다. "여 근처 돌아다니는 데 재미가 붙었다면야 언제고 내캉 우리 가족들이랑 얼굴 트고 지내게 될 끼다. 여그서 과수원 한 것도 참 오래됐그등."

 

"여기 오래 계셨다고요?" 뿔을 밝혀 애플잭의 발굽에서 사과 봉투를 조심스레 들어올려 헛간 옆 텐트 한쪽에 잘 놓아두고 말했다. "그러면 말씀 좀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

 

"해 봐라."

 

"요 헛간 말인데요, 버려진 것 같은데 맞나요?"

 

"글씨, 으음...... 사실상 그렇다고 봐야제."

 

"그럼 땅도 같이 버려진 거라고 봐도 될까요?"

 

"나가 알기론 그렇다."

 

대충 짐작이 간다는 듯한 웃음을 짓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건물은 굳이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군요?"

 

"니 무슨 생각 허나?" 애플잭이 이쪽을 흘끔흘끔 보며 말했다. "머 다 때려부수고 그럴 생각이가?"

 

"글쎄, 그럴지도 모르죠." 리라를 퉁기며 뒷다리로 헛간을 툭 차고 말했다. "혹시 그쪽 방면으로 경험이 좀 있으신지?"

 

"하하! 거 미안하게 됐다. 번지수 잘못 찾았다카이."

 

"네?"

 

"내도 나가 아는 기면 다 알려 주고 싶기는 헌데, 내는 헛간을 짓는 걸 잘 하는 기지 그걸 때려부수는 거는 잘 모르그등." 애플잭이 모자로 몇 번 부채질을 하더니 아침 햇살을 뒤집어쓴 금발 갈기 위에 모자를 얹었다. "아버지 살아 계실 때 참 이것저것 많이 지으셨는데 내는 그거 몇 번 본 수준밖에 안 뒤야." 애플잭이 콧김을 훅 뿜더니 말했다. "특히 통나무집 짓는 건 참 기가 막혔제. 마음만 먹으면 주무시면서도 지으셨을 기라."

 

한쪽 눈썹을 치켰다. "통나무집이요?"

 

"하모, 아주 순식간에 지으셨응게! 오죽허면 동네 사람들이 집을 짓는 게 아니라 심는 것 같다고 했겠나. 다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애플잭이 흙길을 따라 돌아가며 말했다. "야그는 이쯤해야겄다. 장에 나가 봐야 하그등. 보자, 저거 다 때려 부수고 싶으모 시내 나가서 괜찮은 놈 구해 보는 게 나을 기야."

 

"어떤 분 같으면 될까요?"

 


 

애플잭이 평소처럼 집을 나와 걷다 길이 크게 구부러지는 지점에 다다랐을 무렵, 무시무시한 굉음에 그녀는 그만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나무 조각들이 사방으로 흩어졌고, 그 뒤로 형형색색의 색깔들이 뒤엉킨 잔상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휙휙 지나다녔다.

 

"레인보우 대쉬?" 애플잭이 아침 햇살을 맞으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애플잭이 비틀거리며 길 한쪽으로 비켜섰다. 낯익은 파란 페가수스가 오래된 헛간을 포탄처럼 뚫고 날아다니며 아무렇지도 않게 판자 한 장, 한 장 단위로 무참히 해체하는 모습은 분명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야야, 니 뭐꼬!" 나무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기며 애플잭의 머리 위로 흩날려 떨어졌다. "니 눈은 장식이가! 내 돌아뿌것네! 아주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전쟁 벌이고 앉았나?"

 

"자요." 염동력에 뜬 헬멧 하나가 애플잭 앞에 불쑥 나타났다. "쓰시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나는 생필품을 쟁여둔 텐트 옆에 서 있다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가끔 보면 정신 나간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긴 하는데, 뭐 그래도 좋은 구경거리니까."

 

"그릉가... 그짝이 그렇다믄 그런 거겠지." 애플잭이 모자를 벗고 영 어색한 동작으로 헬멧을 뒤집어썼다. "이 미친 짓거리 당장 그만두게 할 수 없나?"

 

"뭘 그리 심각하세요? 간단한 일인데. 지금은 여기 헛간이 서 있긴 하지만, 머지않아 사라질 거에요. 그뿐이지요. 안 그래요, 그, 레인보우 대쉬, 씨였나요? 제 말 맞죠?"

 

"느어어어어어!" 문제의 페가수스가 보안경을 뒤집어쓰고 헛간 한가운데에 커다란 구멍을 뚫으며 뛰쳐나왔다. 레인보우 대쉬가 입으로 지지대를 물어 홱 잡아당기면서 자세를 바꿔 천장에서 떨어지는 잔해를 차낼 준비를 했다. "하이야아아아!"

 

"여보세요?!" 입가에 두 앞발굽을 모으고 소리쳤다. "레인보우 대쉬 씨, 정신줄 챙겨요!"

 

"어, 어?!" 레인보우 대쉬가 이쪽을 내려다보았다. 얼굴에 가득 찼던 파괴의 희열이 서서히 사라져갔다.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머리를 깜박이는 눈꺼풀이 대변했다. "잠깐. 뭐야? 너 누구야?"

 

"라이라요."

 

"라이라 누구?"

 

"라이라 하트스트링스."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뿔을 밝혔다. 내 헬멧에 뚫린 구멍 밖으로 뿔이 반짝였다. "아직 기억하시죠? 요 헛간만 잘 부숴 주시면 50비트 드려요."

 

"잠깐만." 레인보우 대쉬가 붉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애플잭과 나 앞으로 날아왔다. "저거 다 때려부수고 돈도 받아 가라, 그 얘기 하는 거지?"

 

"바로 그거죠."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개꿀이네!" 레인보우 대쉬가 공중에서 몸을 웅크리더니 홱 펼치며 헛간 잔해를 향하여 포탄처럼 날아갔다. "이거나 처먹어라! 으아아아아아!"

 

다시 굉음이 울렸다. 사방으로 잔해가 날아다녀서 애플잭과 나는 몸을 숙였다.

 

"그려, 새로 이사 온 양반인가 보네!" 애플잭이 끙 소리와 함께 입을 열고는 사과 바구니에 날린 톱밥 찌꺼기를 살살 쓸었다. "꼭두새벽부터 저 레인보우 대쉬를 데려다가 막일을 시키다니, 돈 깨나 깨졌겠어!"

 

"아, 친구분이세요?"

 

"입술과 이빨의 관계라 할 수 있지. 시시때때로 치통이 엄습하는 것 같은 기분을 선사하거던." 애플잭이 겨우 씩 웃었다. 목소리에 유쾌한 기분이 묻어났다. "사과 과수원 한쪽에 비 좀 뿌려 달랬더니 반대쪽에다 비 쏟아놓고 갈 때가 그렇제!"

 

"야!" 머리 위로 형형색색의 잔상이 휙 돌더니 헛간으로 날아들었다. 다시 굉음이 울렸다. "다 들었어 이년아!"

 

"아하. 과수원을 하시나 봐요?" 사방에 찌꺼기가 날리는 와중에 입을 열기란 참으로 고된 일이었다.

 

"크흠. 그려. 스윗 애플 에이커란 곳이제."

 

"되게 잘 나갈 것 같은 이름인데요."

 

"글씨. 그럴 수도 있제. 와 묻는데? 혹시 청과 장사에 관심 있나? 접는 게 나을 끼야. 그짝은 포화상태거던."

 

"그건 아니고요." 레인보우 대쉬가 열심히 헛간을 때려부수는 모습을 흘끗 보며 말했다. 해가 하늘 높은 곳으로 떠올라 길 양옆에 흩어진 흙 얼룩에 드는 햇빛이 많아질수록 헛간의 모습 또한 점점 해체되며 녹아 사라져 갔다. "농사 짓는 분을 한 번쯤 만나뵐 수 없을까 싶었거든요. 몇 가지 여쭤 볼 게 있어서 말이에요."

 

"그랴? 머가 궁금한데?"

 

"그게, 보시다시피... 음..." 나는 선 자리에서 몸을 좀 움찔하고 나긋하게 웃었다. "포니빌 들어온 게... 일종의 휴가 비슷한 느낌으로 온 거거든요. 그런데 와서 살아 보니까 처음 계획보다 훨씬 오래 지내게 될 것 같아서요. 뭐, 그러지 말란 법도 없잖아요? 그... 살기 좋은 곳이라서."

 

"그랴. 전적으로 동의혀." 애플잭이 빙긋 웃었다.

 

"혹시 지인 분들 중에 주택 공사 잘 하시는 분 계신가요?"

 

"뭔 집 지을 낀데?"

 

"아..." 숨을 들이마셨다. 부서져 가는 헛간을 둘러싸고 자라난 오크나무를 슥 둘러보고 조용히 말했다. "통나무집을 지을까 해요."

 

애플잭이 환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이야, 인연인갑네! 하하하, 설마 그걸 찾을 줄은 몰랐다!"

 

침을 삼키며 물었다. "그 말씀은..."

 

"나가 그쪽으로는 한두 가지 주워들은 게 있제!" 애플잭이 씩 웃었다. "울 아부지가 통나무집 하나는 참 끝내주게 지으셨거던. 주무시면서두 지으실 수 있었을 끼야. 내한테도 몇 가지 가르쳐 주셨제. 지금은 소천하셨지만."

 

"상심이 크시겠어요."

 

"마 괘안타."

 

"그럼..." 후드 재킷의 소매를 매만지고 고개를 돌려 애플잭을 마주보았다. "실례가 아니라면 몇 가지 여쭤 보고 싶은데요. 뭐가 필요할까요?"

 

"도끼가 있어야제. 단단하고 잘 드는 놈으로."

 

좀 당황스러웠다. 설마 그걸 생각하지 못했다니, 내가 멍청했다. "네?"

 

"하하하..." 애플잭이 능청스럽게 나를 보며 말했다. "주머니 두둑하믄 목재를 다 사다 써도 상관은 없는데..." 그리고는 숲을 가리켰다. "암만해도 집 짓고 살라믄 할 일이 아주 많을 끼야. 일을 시작한다믄 그것부터 하는 게 맞제."

 

"그렇네요." 마른침을 삼키며 빙긋 웃었다. "맞는 말씀 같군요. 그럼..." 목을 긁으며 애플잭을 쳐다보았다. "괜찮은 도끼랑... 다른 공구까지 구해야 할 텐데, 괜찮은 걸 구할 만한 곳이 있을까요?"

 

"마, 그런 거야 일도 아니제!" 애플잭이 근처 나무에 기대며 씩 웃었다. "다만 어디 좀 받아써야 할 끼다. 설마 우리 머리 위에서 레인보우 대쉬 저것이 캔틀롯 내전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동안 집중이 될 것 같진 않은데 괜찮겠나? 마 레인보우, 나그 말이 맞나, 틀리나?!"

 

"히야아아! 허? 뭐?" 레인보우 대쉬가 돌진을 멈추고 우리 머리 위로 날아왔다. 숨이 거칠었고 진땀을 뚝뚝 흘렸다. "애플잭? 너 헬멧 뒤집어쓰고 뭐 하고 앉았냐?" 그리고는 사시눈을 하더니 자기 얼굴에 덮인 보안경을 탁탁 두드렸다. "뭐야 이건?"

 

"니 설마 저거 때려부수다 머리 다친 거 아이가?" 애플잭이 깔깔 웃느라 막히는 숨으로 말했다. "마 일 마치고 하트스트링스한테 돈 받아 가기 전까지는 머리 안 다치는 기 좋을 텐데!"

 

"뭔 일?!" 레인보우 대쉬가 얼굴을 찌푸렸다. "하트스트링스는 또 누구야?!"

 

"이야, 안녕하세요!" 빙긋 웃으며 앞다리를 흔들어 인사했다. "요 헛간 부숴 주면 백 비트 주기로 한 사람이에요!"

 

"가만. 마음껏 때려부수고 돈도 받아 가라고? 개꿀이네! 으아아아아아아아!"

 


 

집을 나와 길이 굽어지는 어귀를 걷던 애플잭이 표정을 확 구겼다. 금빛으로 물든 잎사귀가 하나둘씩 떨어졌다. 규칙적으로 쾅쾅대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애플잭이 걸음을 돌렸다. "어어... 보소. 좀 도와 드릴까?"

 

"하아아... 아뇨!" 라고 소리쳤다. 거의 성질을 부리듯 말이 나왔는데, 그것까지 사과하기에는 몸이 너무 피곤했다. 염동력으로 내 앞 3피트 전방에 도끼를 띄워두고 땀을 문질러 닦았다. 굵직한 오크나무의 옆구리를 도끼로 파대고 있던 참이었다. 머리 위로 뾰족하게 튀어나온 뿔에 어린 빛이 깜박였다. 염동력을 극한까지 밀어붙여 사용한 대가로 마력장을 타고 따끔거리는 고통이 전해져 왔다. "제가 할게요! 염병할 나무 녀석을 좀 설득해서 말을 듣게 하면 그만이니까! 으아아아!"

 

공중에 띄운 도끼를 다시 한 번 휘둘렀다. 뜯겨나온 나무 조각과 껍질 부스러기가 길 옆 흙더미에 날리며 자국을 남겼다. 나무는 내가 몇 번이나 도끼질을 하든 그것은 자기의 존재에 그 어떤 영향조차 미치지 못한다는 듯 고고하게, 쓰러질 기색 하나 없이 서 있었다.

 

"흠흠. 암만해도 다른 사람 일에 함부로 끼드는 취미는 없지만서도..." 애플잭이 빙긋 웃더니 안전 거리 내에서 어색하기 짝이 없는 벌목 현장을 한 바퀴 휙 돌았다. "...간단하게 시범을 좀 보여 주고 싶은데 어떠나."

 

"헉... 뭐..." 도끼질. "...철인 경기라도..." 다시 도끼질. "...나가시지..." 다시, 도끼질. "...그래요?! 으악!" 나는 엉덩방아를 찧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도끼가 내 옆 흙더미에 날아와 뒹굴었다.

 

"내캉 레인보우 사이에 그런 게 있다고 사람들이 야그 안 하드나? 나가 하늘에 맹세코 야그하는데, 고것은 동네에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이 나타나믄 혹시 자기 모르나 하고 주변에 얼쩡거리고도 남을 놈이여." 애플잭이 이쪽으로 다가오더니 도끼자루를 만지며 물었다. "하여간. 아무튼, 해도 되나?"

 

심호흡을 몇 번 뱉어내고, 이마를 흐르는 땀을 문질러 닦은 뒤 발굽을 까딱이며 말했다. "그래요 그럼, 한번 해 보세요..."

 

"좋아. 몸 좀 푸까." 애플잭이 빙긋 웃더니 입으로 도끼자루를 물어 들어올렸다. 그러고는 나무 쪽으로 다가가 도끼를 기대 세워 놓고 이쪽을 돌아보았다. "잘 봐라. 그짝은 나무 패는 동작부터 잘못되었어. 요놈같은 나무를 비서 쓰러뜨려야겠다 생각했으모 어느 쪽으로 무게가 쏠리게 해야 하나 판단을 해야 한데이. 그래야 너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쓰러질 끼 아이가." 애플잭이 나무 주위를 한 바퀴 돌더니, 도끼가 아니라 조각도로 파내기라도 한 듯 얼마 패이지도 않은 자리를 한 대 퍽 치고 말했다. "여기가 가장 낫겠다고 생각한 기제. 그라모 이제 어딜 후드려 팰지 골랐으니께는 도끼질을 해야제. 너그가 했던 것만치로."

 

애플잭이 입에 도끼자루를 물었다. 나무둥치를 향해 도끼날을 인정사정없이 휘둘러대는 애플잭의 네 발굽은 땅을 단단히 디디고 있었고, 전신의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도끼날이 향하는 방향은 명백히 수평이 아니라 아래쪽을 겨냥하고 있었는데, 정확히 45도 각도로 뿌리 쪽을 파냈다. 사선으로 들어간 도끼날이 나무줄기 속을 파고들자 애플잭이 도끼날 방향을 바꾸어 수평으로 휘둘렀다. 그러자 굵은 줄기 위로 선명하게 홈이 패였다.

 

"이야..." 감탄만 나오는 솜씨라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떡 벌렸다. "건치도 보통 건치가 아니신가 보네요."

 

애플잭이 도끼질을 마치고 흙바닥에 도끼를 툭 내려놓으며 말했다. "흠... 머 그렇제. 나그 생각도 그렇다." 그녀는 한 방울 땀도 흘리지 않았다. 애플잭이 홈을 파낸 반대 방향으로 가서 나무를 가까이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평생을 나무 상대하면서 살았다카이. 저그 사과 과수원 살그등. 스윗 애플 에이커 야그는 들어 봤제."

 

"들어 봤던 것 같군요." 빙긋 웃고 대답했다. "그나저나, 도와 주셔서 감사—"

 

"아이다. 이걸로 쫑나는 게 아이거든." 애플잭이 나무둥치를 가리켰다. "인쟈는 방금 파낸 자리 반대쪽으로 가서 요로코롬 수평으로 몇 번 더 도끼질을 해 줘야 해. 가로축으로 해가 좀 쪼아 주모 요 파낸 자리 방향으로 해가 쓰러질 끼야. 이해핸나?"

 

"이해했어요." 나무로 다가가 도끼를 넘겨받고 전방에 띄워 올렸다. "그나저나 신기하군요. 혹시 하루의 첫 일과를 나무 베는 유니콘 도와 주시는 걸로 시작하시기라도 하나요?"

 

"이게 머가 이상한 일이라고 그러나?" 도끼가 닿지 않을 만한 거리까지 물러서 있던 애플잭이 피식 웃었다. "느가 일단 우리 동네 와 있다는 게 중요한 기다. 보아하니 남 등쳐먹지 않고 증직하게 먹고 살라카는 거 같은데, 그런 사람이 뿔 다 태워먹을맨치로 도끼질 같지도 않은 거 하고 있는데 그양 지나가면 이웃된 도리가 아니제!"

 

"호..." 마력을 집중해 애플잭이 나무뿌리 근처에 파낸 홈과 수평이 되도록 도끼를 찍었다. "누구라도 당신 곁에 있기만 하면 이웃 대접을 해 주신다는 말씀이군요."

 

"그랴. 머..." 애플잭이 모자에 앉은 먼지를 털며 내가 도끼질하는 걸 보더니 말했다. "나가 알기로는 그게 제일인 것 같드라고. 황금률이라고 카제, 만나는 사람마다 살갑게 대함서 윤 내고 잘 닦아야 금마냥 반짝반짝하는 거 아이겠나."

 

그 말을 곱씹느라 잠시 도끼질을 멈추었다. 숨을 들이마시자 청량한 가을 공기가 몸에 스몄다. 다시 기운이 샘솟는 듯 웃음이 났다. "그거 굉장한 철칙이네요." 도끼질을 이어갔다. 두터운 나무줄기가 기우뚱하더니, 애플잭이 이야기한 방향으로 천천히 기울어 갔다. "분명 대단한 철인鐵人이실 테지요."

 

"허. 이런 말 허긴 싫지마는, 내는 그 말을 그닥 좋게 받아들이진 않그든."

 

"달리 생각해 주시면 좋겠는데요."

 

"마 이상하고마..."

 

"흠?"

 

"아, 암것도 아이다..." 애플잭이 턱을 긁적였다. "분명 요 근처에 다 부서져 가는 헛간 하나가 있었던 거 같그등."

 

"불필요한 것들은 흔히 그렇게 되기 마련이죠." 마지막으로 몇 번 도끼질을 가하며 말했다. "어느샌가 사라져 버려요." 나무가 뚝 부러지며 우리 반대 방향으로 쓰러졌다. "자... 넘어갑니다잉!" 활짝 웃으며 물러섰다.

 

"흠흠, 그랄 땐 나무timber갑니다잉 이라 카는 기다."

 

"아, 그래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입을 연 찰나,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지축이 울렸다. 나무가 지면에 충돌하면서 흩어진 잎들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눈을 깜박이다 옅은 홍조를 띄우며 말했다. "...나무 갔네요."

 

"쓰으읍, 하하하하하하."

 

깔깔 웃는 애플잭을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암만해도 이놈 속을 긁어내고 들어가서 사는 건 힘들 것 같죠?"

 


"홈을 더 깊게 파그래이, 그... 뭐시냐..."

 

"하트스트링스요." 나는 잘라서 쌓아놓은 통나무 옆면을 작은 도끼로 다듬고 있었다. 들어서 있던 나무를 정리하고 나온 공터 주위에 남은 나무들은 하나같이 잎을 전부 덜어낸 앙상한 모습으로 뿌리박고 서 있었다. 직사각형으로 깎아 다듬은 통나무 기둥들이 길가 한쪽에 서서 집의 형상을 잡아갔고, 그 위를 날카로운 한기가 스쳐 지나갔다. "슬슬 몸에 익네요. 오늘같이 좋은 날에 귀찮게 해 드리고 싶진 않았는데."

 

"마 그런 말 마래이!" 애플잭이 웃으며 발굽을 내저었다. 11월의 찬바람은 유난히 지독했으므로, 그녀는 무늬 없이 단색으로 짠 갈색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있었다. "나가 집에 왜 느긋하게 가는지 아나. 너그맨치 쩔쩔매고 있는 아가 혹시 있으까 싶어가 그런 기야."

 

"뭐, 그래도 다행이에요. 진짜, 진심으로 이거 다 빨리 마치고 싶었으니까." 세워올린 기둥에 정확히 맞물리도록 홈을 파느라 온 정신을 집중하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진땀이 흘렀다. "저 혼자서는 도저히 빨리 할래야 할 수가 없었거든요. 마법 쓸 줄 안다고 해도 경험이 없으면 아무 소용 없는 것 아니겠어요."

 

"그려. 너그들 유니콘들이란 대체로 마—" 애플잭이 입을 열다가 당혹스러워하며 얼굴을 붉혔다. "어음. 딱히 악의가 있는 건 아니다."

 

하던 일을 계속하며 씩 웃고 말했다. "전 상관없어요."

 

"그냥 그런 기다. 유니콘 아들이란 그 자랑시러운 뿔을 가지고 온갖 굉장한 일을 뚝딱 해치워 가모 그걸 대단한 자랑거리로 여기거등. 나그 친구 중에도 유니콘이 둘 있다 보이 마법에 너무 의존하고 그라모 머리가 깨지듯이 아플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너거는 그래도 적당히 조절해 가면서 할 줄 아네. 하루빨리 그 두 지지배들헌티 너그 하는 걸 보여 줘야 할 텐데 말이다."

 

"애플잭 씨도 참..." 작은 도끼로 거친 부분을 정리해 가며 빙긋 웃고 말했다. "괜찮아요 괜찮아. 별로 걱정하실 일은 아니에요."

 

"마 너거가 그렇다면 그런 거겄제. 옮길 준비 되았나?"

 

"위치 좀 잡아 주실래요?"

 

"하모!"

 

심호흡하고 온몸의 근육을 긴장시켰다. 뿔에서 한 가닥 마력이 분출했다. 통나무가 느릿하게 떠올라 내가 잡아놓은 집터 위로 떠갔다. 애플잭의 지시에 맞춰 이미 세워놓은 기둥에 새로 가져온 나무의 홈을 맞추고 천천히 내려 끼웠다.

 

"그렇제... 마 다 됐다! 어얼쑤! 봤제? 너거가 하던 것보다두 매끈하게 들어맞았을 끼다. 내 장담하께!"

 

"그런 줄은 진작 알아봤죠." 숨을 크게 내쉬며 옷깃을 정리하고 목 뒤로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진심을 담아 웃어 보였다. "고마워요. 애플잭 씨 없었으면 절대 못 했을 거에요."

 

"하." 애플잭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목에 맨 스카프를 매만졌다. "나가 한 거라곤 딱 한 가지 알려 준 것밖에 없는데 너그는 나가 다 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구마. 나그야 뭐 도움이 됐다면 그걸로 족하겠다만. 저기 기둥 사이에 회반죽 칠하는 거나 잊지 말그래이. 어떻게 하는지 보고 싶으모 지금 보여 줄 수도 있고. 울 아바이가 통나무집 하나는 기가 막히게 지으셨그등."

 

"정말인가요?" 차가운 가을 공기를 허파 깊이 빨아들이고 애플잭을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포니빌 건설에도 상당한 공이 있으실 것 같은데요?"

 


 

"그기 궁금하다니 참 재밌는 아가씨네." 애플잭의 입 밖으로 말과 함께 뿌연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나는 그녀와 함께 나무 비계 위에 서 있었다. 완성된 벽면의 대들보 이음새에 회반죽을 칠하는 작업이 다 마무리된 참이었다. "동네 사람들이야 잘 모르는 야그지마는, 울 아부지 살아 생전에 동네가 세 배로 커졌거등. 시의회 양반들이 안건을 의결하면, 그걸 실행하는 건 울 아부지셨다. 그 중에는 동네 북쪽 주택 지구 확장 계획도 들어 있었제."

 

"정말요?" 회반죽을 덧칠하며 실실 웃었다. 눈송이가 하늘거리며 떨어져 내려, 임시로 천장 대신 씌워놓은 파란 방수포 위에 흰 반점을 흩뿌렸다. "즉, 사과 농사 하나만 지으셨던 건 아니군요?"

 

"마! 과수원 하는 양반이 평생 사과 하나만 파는 게 머 잘못이고!" 애플잭이 얼굴을 찌푸렸고 나는 어린애처럼 낄낄댔다. 애플잭도 피식 웃더니 본격적으로 겨울이 시작된 숲 저편으로 시선을 던지고 말했다. "아부지는 자기 앞가림 정도는 스스로 해야 칸다고 생각하셨제. 다만 다른 사람들헌티는 훨씬 관대하셨다. 아부지는 항상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다녔고, 불행한 사람들이 당신처럼 자기 인생에서 빛나는 순간을 쟁취할 기회를 갖게 하려고 무진 애를 쓰셨다카이. 글쎄, 아부지가 시장 하셨으모 분명 대단했을 텐데..." 애플잭이 무거운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아부지랑 어무니가 그렇게 되지만 않으셨다모 말이제."

 

"유감이에요." 나직하게 말했다.

 

"마 괘안타." 애플잭이 나를 보고 씩 웃었다. "우리 가족 부양하는 데 필요한 것들, 내 소중한 사람들 지키는 데 필요한 것들은 아부지 살아 생전에 다 가르쳐 주셨으니께, 그닥 후회가 남지는 않아."

 

"애플잭 씨는 행운아로군요." 나도 모르게 말이 떨어졌다. 한기가 몸을 쓸고 지나가서 내 작업은 아주 잠시 지체되었다. "자기가 어디에 있어야 할지, 누가 당신 곁에 있는지 아시니..."

 

"울 아부지가 늘 하시던 말씀이 있데이. 언제 어디서든 사람은 뿌리를 단디 해야 한다. 자기 뿌리만 단디 간수하모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려도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다꼬." 언젠가 들었던 말을 들려주며 애플잭이 나를 마주보았다. "내는 이렇게 생각한다. 인생이란 여럿이서 울력을 나가는 기랑 비슷한 기야. 고된 일을 어떻게 해야 잘 해낼 수 있을 거 같나. 즐기는 수밖에 없데이. 지금 나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고, 지금 나가 해야 할 일은 니를 돕는 기다."

 

조용히 숨을 내쉬며 후드 재킷의 소매를 매만졌다. 기억 저편의 어느 벽난로에서 온기가 뿜어져 나와 몸을 적셨다. "애플잭 씨 같은 사람이 백 명만 되었어도."

 

"하..." 애플잭의 뺨에 가벼운 홍조가 스쳤다. "옘병. 내는 올바른 일이라꼬 배운 대로 하는 기다. 나그보다 나은 사람은 수두룩 빽빽하데이."

 

"그래요?" 비계 밖으로 몸을 살짝 내밀고 회반죽을 덧칠하며 물었다. "예를 들면?"

 


 

"그라모 한 사람으 예를 좀 들어 볼까." 애플잭이 벽돌을 건네며 말했다. "스미스 할매는 그기 본인이라고 주장하시거등. 빅 맥은 동네 당나귀들 중 하나 작품이라 생각헌다. 그건 의견일 뿐이제. 석 달 전부터 토요일 아침만 되모 우리 집 뒷문에 선물 바구니를 하나씩 두고 가는 양반이 있는데, 우리 가족 중 그 양반 털끝 하나 본 사람이 읍다."

 

"그래요?" 반쯤 완성된 벽면 너머로 미리 피워둔 모닥불의 열기가 느껴졌다. 열을 받아 따끈따끈해진 회반죽 통 쪽으로 가 벽돌에 펴 바른 뒤 집 북쪽으로 빼꼼히, 조금씩 쌓여 가는 굴뚝 위에 얹었다. "그 바구니에 뭐가 들어 있었나요?"

 

"이게 또 신기한 기라. 빵 두 덩이다. 심지어 동네 빵집에서 갓 구운 걸 갖다 놓기라도 한 양 따끈따끈하거등!"

 

"허..."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애플잭의 지시에 맞춰 벽돌을 한 장 한 장씩 계속 쌓아올렸다. "누가 들으면 그쪽이 베이킹엔 완전 문외한인 줄 알겠는데요."

 

"하! 말도 안 되는 소리라. 그러나저러나, 대체 저 동네 사람들 중 누가 우리 집 뒤에 빵을 갖다 두는지, 갖다두는 건 좋은데 왜 그걸 아무도 모르게 하는지 짐작도 안 가긴 허는데 그기 뭐 중요하긋나! 빵이야 멀쩡하게 맛있꼬, 덕분에 평소 하던 대로 나가 직접 빵 굽는 짓은 안 해도 되니까네. 농장 일 할 시간이 는다, 이 말이다."

 

"선물을 받은 것 같다, 는 느낌은 조금도 없는 평이군요."

 

"가장 좋은 선물은 상대가 바라는 걸 주는 기 아이다. 필요한 걸 주는 기제." 애플잭이 겨울 바람 속으로 입김을 훅 불어내고 서서히 꼴을 갖춰 가는 굴뚝 쪽으로 발굽을 까딱거렸다. "봐라. 세상 어느 놈이 지정신으로 난방절 전날에 통나무집 마무리하모 시간 날릴라 카겠나?"

 

"그거야 뭐 제 잘못이죠." 조용히 답했다. "한참 전에 끝냈어야 할 일인데."

 

"머 적어도 일 하는 태도 하나는 좋네." 애플잭이 씩 웃으며 눈을 찡긋했다. "작업 태도가 좋다는 건 무슨 의미냐, 일에 갈려나감서도 계속 뭘 배우려고 한다는 것이제."

 

"그렇다면 이쪽은 감사를 표하는 게 사리에 맞겠지요." 이마에 묻은 회반죽을 문질러 닦아내며 빙긋이 웃었다. 내 말투는 편안했다. "덕분에 난로 공사까지 다 마쳤네요. 완전히 겨울 되기 전에 끝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음, 머 그 정도면 한파가 들이닥쳐도 쓸만할 끼다." 애플잭이 못을 건네주며 말했다. 그녀는 녹색 조끼에 갈색 모자 차림으로 비계 위에 서 있었고, 그 뒤로는 흰 눈과 서리의 설국이었다. "그나저나 거 굴뚝 한번 옴팡지게 잘 쌓았네그랴. 지금 당장은 지붕 공사부터 후딱 끝마치는 게 최선이겠다만."

 

"고마워요, 애플잭 씨." 통나무집 위에 마지막 나무널 몇 장을 얹고 못을 박아 고정시키는 작업이 쉬운 게 아니어서 내 대답은 낑낑대는 소리와 함께 나왔다. "그래도 제가 그쪽 시간을 너무 뺏은 것 같은데요. 파종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거 이 시간에 일어나 돌아다니는 사람 더 있는 것처럼 얘기하네그랴." 애플잭의 녹색 눈이 굴렀다. "한 번엔 한 가지 일만 하는 기다." 애플잭이 가지만 앙상히 남은 나무 위로 포니빌 번화가의 모습 위로 잠시 시선을 던지더니 말했다. "내일 아침쯤에 겨울 정리를 하기는 하겠다만, 앞으로도 몇 주 정도는 계속 추울 끼다. 그때꺼정 너그 집 공사가 안 끝나모 아주 곤란할걸."

 

"동네에서도 인망이 두터우신 분일 것 같은데, 맞나요?" 웃으며 나무널을 제자리에 맞추고 망치질해 고정시켰다. "매년 봄마다 다른 분들 농장에 눈 쌓인 것 치우는 거 도와 주시거나 할 것 같네요."

 

"보자... 너그가 말하는 돕는다는 기 이래라저래라 큰 소리로 떠들어대는 기면 맞는 말이다." 애플잭이 피식 웃었다. 그 웃음에 나름대로의 자부심이 스쳐 지나갔다. "시간 맞춰 할 거 다 끝낼 수만 있으모 확성기 따위 내다 버리고 나가 직접 쟁기 끌고 뛰어다닐 용의도 충만하지마는."

 

"시간 맞춰 끝낼 수만 있다면, 이란 뜻은?"

 

애플잭이 한숨지었다. "너그랑 나만치로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할 거 하고 돌아댕기는 부지런쟁이들이 많지 않다는 기 문제다. 그러니까네 우리 동네 겨울 마무리가 제 때 끝나 본 적이 읍다."

 

"흐으으으음......" 마지막 못을 박은 뒤 애플잭을 돌아보고 말했다. "글쎄요, 팀 짜고 업무분장 철저히 하는 방법도 있을 텐데."

 

"나그야 어떤 신념 같은 걸 동네 사람들이랑 공유하고 싶제. 다만 나가 잘 할 수 있는 거라곤 땅덩이 위 치우는 기랑 파종하는 긋밖에 읍서. 시간 제때 맞춘다고는 장담 몬 하지마는, 빠뜨린 데 없이 깔끔하게 한다고는 장담할 수 있다."

 

"그쪽을 표현하려면 유능하다는 말로는 모자라겠는데요." 웃으며 말했다. 스쳐 지나가는 한기에 목 주변 옷깃을 잘 여몄다. "유능하고, 그 어떤 사람이든 도움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거들기까지 하는 사람이군요. 애플잭 씨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그쪽이라면 제때 일을 마치는 건 사실상 논외 아닐까요? 겨울이 땅을 비워 줘야 해서 겨울 마무리를 하는 거라고 생각하진 않으시잖아요? 겨울이 비워 준 땅에 사람이 살아야 하니까 겨울 마무리를 하는 것이죠."

 

"호...... 거 괜찮은 시각이네." 애플잭이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다만." 숨을 들이쉬고, 그녀가 말했다. "그렇다 해도 나가 시간 맞춰 일 끝내는 걸 포기하진 않을 끼다."

 

"그렇겠지요. 올해는 저도 좀 도울 수 있겠네요." 망치를 내려놓고 몸을 돌려 애플잭을 마주보았다. "그러니까... 난생 처음 보는 사람도 울력에 끼워 주실 용의가 있다면, 말이죠."

 

"허 참..." 애플잭이 픽 웃더니 말했다.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랑 튼튼한 사지만 달려 있으모 그게 뭔 상관이가."

 

"아버님께서 하신 말씀인가요?"

 

"이건 내 끄다. 머, 아부지랑 완전 무관허게 나가 만들어낸 말이라꼬 하모 거짓말이겠다만." 애플잭이 눈을 찡긋했다. "그런 의미에서, 너그도 뭐 조끼나 그런 거 하나 맞춰 줘야 할 낀데."

 

"그건 상황 봐서 정하죠..." 갈기를 쓸어넘기고, 혹한의 바람 너머로 빙긋 웃으며 말했다. "혹시 누리끼리한 갈색 같은 건 아니죠?"

 


 

"나무 말뚝은 왜 박는 건가요?" 흙 위로 새싹들이 일렬로 도열해 머리를 내민 모습을 내려다보나 고개를 들며 물었다. "원예용품점 사장님 설명이 영 별로라서."

 

돋아난 싹들은 사과나무 씨에서 돋은 것들이다. 애플잭이 새싹의 행렬을 따라 걸으며 말했다. "버팀목이다. 이걸 박아 줘야 나무가 똑바르고 올곧게 자란데이. 꽂은 지 얼마 안 되는 모종들은 제대로 줄기를 뻗을 힘이 없는 게 부지기수라. 즉 새끼 나무에다 버팀목을 대 줘야 이것들이 대가리 푹 숙이거나 하는 사태가 예방된다, 이 얘기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한 무리 새떼가 오두막집이 자리한 햇빛 비치는 공터 주변에 늘어선 나무 위를 스치듯 날아다니며 짹짹 울었다. "하긴 사과나무에 관한 문제라면 발굽 들여다보듯 환히 아시겠네요."

 

"이것들이 자기네들 습성을 절반맨치래도 알았음 소원이 없겠다. 지들이 알아서 뿌리 내리고, 알아서 자라면 일이 얼마나 편해지겠나."

 

"그럼 인생 무슨 재미로 살아요?"

 

"안 그래도 나가 우리 오라비 빅 맥헌티 귀에 딱지 앉도록 맨날 주워섬기는 말이 그 말이다." 막 잔디를 입힌 마당을 잠시 애플잭과 걸었다. "언젠가 봄에 뜬금없이 배를 심어 보는 기 어떻겠냐고 그러드라. 그 해 여름이 아직도 가끔 꿈자리 사납게 만들제." 애플잭이 살짝 몸을 떨더니 말했다. "그 날 이후로 과수원 운영은 울 오라비가 아니라 나가 전담하는 걸로 합의를 봤제. 허허."

 

"광고 모델로는 오빠 분이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으엑." 애플잭이 눈을 굴렸다. "그래 머 동네 여자들한테 다 물어보고 다녀도 누구 하나 반대할 사람 없을 끼다. 아주 성심성의껏 동의하긋제. 무슨 수를 써도 자꾸 들러붙는 통에 아주 골머리가 썩어 문드러질 지경이다."

 

"그러고 보니 여름 하니까 말인데." 오두막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출입문 쪽에 원목으로 데크를 하나 짤까 하는데, 어떻게 하는 편이 좋을까요?"

 

"머, 지붕이랑 해가 현관 놓을 생각이가?"

 

"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사 오기 전 살았던 동네에 비하면 풍광이 아주 좋거든요. 가끔 오후에 나와서 유유자적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음, 혹시 비라도 오면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난롯가에 앉은 애플잭이 고개를 들었다. 그 몸을 양모 이불이 빈틈없이 덮고 있었다. 그녀가 이쪽을 곁눈질하며 물었다. "그나저나 궁금헌 게 있는데." 목소리가 나직하고 조용해서, 집 밖에 휘몰아치고 있던 태풍이 몰고 온 바람소리에 거의 묻힐 지경이었다. "거 음악 허는 양반이 동네 구석탱이에서 헐 만한 게 뭐가 있나? 예술한다는 양반들은 죄다 동네 번화가에 살그등. 그짝처럼 사람 좋은 양반이 사람 하나 없이 외로운 곳에 살고 있다는 게 먼가 부조리허다고 생각되는데."

 

"아뇨, 그건 아니고..." 차분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애플잭 옆에 앉아 딱딱 타는 불길에서 전해오는 온기를 쬐었다. "그쪽 생각만큼 외롭게 살지는 않아요."

 

"드나드는 객이 많나?"

 

"음... 뭐 때때로 그렇죠." 씩 웃어 보였다. "자주는 아니라도 때때로 들르는 친구가 하나 있으니까요."

 

"그르냐? 갸 이름이 어떻게 되나? 아는 사람일 것 같은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표정이 무엇인가 차고 칙칙한 것으로 녹아들었다. "아뇨. 그쪽은 모르실걸요."

 

"머 그람 됐다. 아주 혼자 지내는 건 아닌가 보이 다행이네. 집이 좀 작긴 해도 아늑하니 좋구만." 애플잭이 빙긋 웃으며 벽난로에 타는 불꽃의 붉은 기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무 일도 없이 편안하겠어."

 

"네. 딱 그러네요."

 

"혹시 그짝이 왜 사는지 물어 봐도 되겠나?"

 

"삶의 이유 말인가요." 벽을 빽빽히 채우며 내걸린 악기를 올려다보며 되풀이해 말했다. "뭐... 살려고 살지요. 아름다운 것을 보면 그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가락을 지어내고, 상실을 뒤따르는 슬픔을 음표로 기록해 남기며 행복하게 살려고, 살고 있어요. 인생에서 마주치는 어둠은 흔히 새삼 깨달을 시간조차 없이 흔해빠진, 온기와 기쁨 뒤로 늘어진 그림자거든요." 칙칙한 잿빛 후드의 소매를 매만지고 빙긋 웃었다. "안타깝게도 그렇게 바쁜 사람은 아니라서요. 주로 듣는 쪽이기도 하죠. 보통 제가 들은 소리를 별로 안 좋아하는 경우는 잘 없어요. 그 하나하나가 귀하고 소중한 보물 같은 것들인데, 그걸 싫어하는 건 이상하잖아요. 실은 제가 그렇게 복 받은 사람인 것도 한참이 지나서야 알았지요. 그래도 복 받은 걸 모르고 살아가던 세월이 아깝지는 않아요. 집 짓는 거랑 비슷하다고 할까요. 기초 공사부터 시작해 직접 벽을 세우고 지붕을 올리셨으니 잘 알고 계시겠죠. 집은 일단 다 지어지고 나면 단순히 건설에 투입된 노동량의 총합으로 그치지 않아요. 집 짓는 걸 도와 주었던 소중한 벗들의 사랑과 도움까지도 포괄하는 것이죠. 그러니 집이란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놓아 준 기반의 포석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며, 한 사람 이상의 존재가 되는 것일 테죠. " 눈을 감고 차분히 숨을 내쉬었다. "이 집에 들어와 사는 것은, 여기서 새로 사귄 벗들과 함께 사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영원히 흐려지지 않을 기억처럼... 영원한 자리가 되는 것이죠. 그런데 어떻게 외롭다는 생각을 하겠어요."

 

나름대로 진심을 담아 한 말이었기에 뭔가 대답이 돌아오리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아무 말도 없이 조용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시간이 흘러가는 사이 난롯가의 불꽃은 점점 더 희끄무레해져 가는 듯싶었다. 그 어떤 창도 열어놓지 않은 오두막 안에 혹한의 바람이 감돌았다. 눈을 다시 열어 뜨자 입술 바깥으로 뿌연 입김이 떠가고 있었다. 이를 딱딱 부딪치며 눈길을 돌렸다.

 

"애플잭...?"

 

그녀는 순간 찾아온 현기증에 어질거리며 이마를 문지르고 있었다. 어지럼증을 수습한 애플잭의 녹색 눈이 번쩍 뜨였다. "시방 이기 다 뭐꼬...?" 당혹감이 공황으로 확대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애플잭이 낯선 주위를 휘휘 둘러보다가, 구속복을 입혀놓은 듯 빈틈없이 둘러 놓은 양모 이불의 감촉을 느끼고 입을 열었다. "여긴... 또 머 하는 곳이가...?"

 

"애플잭...?"

 

"으어어!" 애플잭이 화들짝 놀라 펄쩍 뛰었고, 그 통에 애플블룸의 인형을 넣은 바구니를 밟을 뻔했다. "이, 이게 다 무슨 일이고? 나가 시방 여기서 멀 하고 있는 것이여? 갈기는 또 왜 이리 젖었...?!" 잊힌 지 오래인 어느 헛간에서 언젠가 자신이 끌어내 집으로 데려갔던 누군가처럼 애플잭이 몸을 떨었다. "어우, 썩을... 빗길에 자빠졌나 보구먼, 맞소?"

 

"일단..." 몸을 일으켜 두 발굽을 들어 보이고 말했다. "잠깐 진정하시는 게—"

 

"아이구야, 민폐 끼쳐서 미안하게 됐소. 이거이 말요..." 애플잭이 입술을 씹더니 젖은 앞머리를 한쪽으로 쓸어넘겼다. 그 와중에도 몸을 계속 떨고 있었다. 이렇게나 유약하고 겁에 질린 모습은 처음이었다. 나는 그 때 그녀를 안아주고 싶었다. 온 세상이 무너지는 것을 자기 어깨로 견뎌내고 감당해내는 무게를 짊어져 마땅한 사람은 세상에 오직 나 하나뿐이니까. 차라리 오두막이 순식간에 고운 가루로 분해되어 무너져 내리더라도 애플잭을 이만큼이나 겁먹게 하기는 힘들 것이다. "시상에 나가 먼 정신머리로 태풍 한가운데 기어들어간 거람?" 차마 남에게 보이지 못할 행동을 하려던 차에 내 눈에 뜨이기라도 한 양 갈라지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가 훼까닥했었나? 설마 나가 그렇게 돌아 버렸을라꼬..."

 

"애플잭 씨... 잠깐 진정 좀 하시고..." 애플잭에게 다가가 두 어깨에 발굽을 얹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게 했다. "당신은 분명 강한 사람이죠. 타인을 의심하지 않는 것 또한 강함의 한 단면일 테고요. 그러니 지금은 절 믿으세요. 다 괜찮으니까. 그쪽이 집에 가던 길에 폭풍우가 불어닥친 거고, 저는 그냥 그쪽을 제 집에 들인 것뿐이에요." 나는 진심을 다해 웃었다. 그리고 내가 입 밖에 꺼낸 말이 난롯가를 박차고 일어난 동안 상실되었던 체온의 대신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니... 그쪽 집처럼 편히 계셔도 돼요."

 

떨리던 몸이 조금씩 잦아드는 모습은 내 오한이 가실 때와 비슷했고... 그 오한의 대부분은 애플잭과의 관계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그녀가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거 참 좋은 말이다야."

 

"훨씬 낫군요." 이쪽도 웃으며 답하고, 애플잭을 난롯가로 데려가 앉혀 불빛을 계속 쬐게 했다. "아, 그러고 보니까 전 음악 하거든요." 애플잭의 어깨에 담요 한 장을 둘러 주며 말했다. 밖에는 폭풍우가 계속 치고 있었다. "그쪽은 어떄요? 오렌지 장사를 하시나요?"

 

애플잭이 멍하니 이쪽을 쳐다보더니 머뭇거리듯 중간에 휴지休止가 몇 군데 낀 너털웃음을 웃다가, 언젠가 내게 도끼질을 가르쳐 주던 그 때처럼 호쾌한 소리로 웃었다. 애플잭이 웃음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크흠... 그러고 보이 이름을 안 물어봤구마. 나가 누구 덕을 봤는지도 모르면 말이 안 되제."

 

"라이라."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라이라 하트스트링스에요."

 

"라이라." 애플잭이 내 이름을 되뇌이며 벽에 수도 없이 걸어놓은 악기를 어린애처럼 쳐다보더니 말했다. "그랴, 좋은 이름이네..."

 

"흠... 다들 그렇다고 하더군요."

 


 

우리의 대화는 두 시간 반 동안 지속되었다. 그 동안 애플잭이 나를 잊는 일은 없었고, 내게 그보다 다행스러운 일은 또 없었다. 애플잭이 들려 준 이야기 대부분은 내가 직전 몇 달에 걸쳐 들었던 것들로, 만날 때마다 나에 관한 기억은 모두 잊지만 내가 모르는 것을 물어 보면 조곤조곤 자세히 알려 주던 그 사람이 해 준 이야기였다. 이미 들어 새로울 것도 없는 이야기를 애플잭이 풀어 놓는 동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듣기만 했다. 몇 번이고 계속해서 듣고 싶은 곡이라면 그것이 명곡인 것이다. 그 어떤 레코드 플레이어로도 애플잭의 이야기만큼 듣기 좋은 재생은 불가능했다. 나는 애플잭이라는 명곡을 몇 번이고 다시 만날 수 있는 더없는 행운을 누리는 사람이다. 그녀와의 만남은 매번 앙코르를 외치고 싶은 것이었다.

 

폭풍우가 그치고 난 뒤, 나는 마지못해 애플잭이 짐 싸는 것을 도와주었다. 애플잭이 모자를 쓰고 있을 때 나는 애플블룸의 장난감을 넣은 바구니를 갈무리하는 식이었다. 바구니를 건네준 뒤 우리는 각자 가야 할 길로 갔다. 그것은 겨우 찾은 큰언니가 다시 기나긴 여행을 떠나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오두막 현관에 서서 애플잭이 진흙탕이 된 길을 헤치고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크게 구부러지는 지점 직전에서 애플잭이 걸음을 멈추었다. 내 예상대로였다. 나는 애플잭의 뒷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뭔지는 몰라도 애플잭의 의식 속 망각의 평원 너머 어딘가에 무엇인가 남아 있는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애플잭은 자기 기억보다도 바구니가 무겁게 느껴졌는지 입에 물고 가던 바구니를 위아래로 움직여 보았다. 애플잭이 잽싸게 바구니를 감싼 담요를 풀어헤쳤다. 그 어떤 화가를 데려와도 그 얼굴에 떠오른 경악을 온전히 담아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바구니에는 애플블룸의 인형뿐만 아니라, 금방 구운 것이 확실한 두 덩이 빵이 같이 들어 있었으니까.

 

애플잭이 입을 오므렸다. 몇 마디 소리 없는 감탄사를 중얼거린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늘어선 나무와 진흙탕, 안개 위로 떠오른 무지개, 낯선 통나무집 하나가 보였을 테지만 나는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실내로 돌아와 벽난로 앞에 쌓인 이불 밑으로 들어가 밤의 만장의 마지막 몇 가지 파편에 살을 붙이고 있었다. 작업은 얼마 끝나지 않아 완료되었다. 남은 것은 일종의 보호 수단으로 쓰기 위한 준비물 몇 가지를 조달하는 일이었다. 지난 연주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주 명확히 기억하고 있다. 등골을 타고 무서울 정도로 차가운 한기가 기어 올라와서, 불가에 더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몸을 감싼 후드 재킷이, 흡사 자매의 품에 안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감각은 나무에 불을 붙이는 것 이상으로 내 몸을 덥혀주었다. 언젠가 또 다른 밤에는 울음 대신 웃음을 머금고 잠들 수 있으리. 난롯가 밖으로 튀어나온 잿가루는 중요치 않다. 어쨌든 뿌리를 잘 내리지 않았는가.





집으로 가는 길이 얼마나 멀고 길지 알 수 없지만, 몸이 살아 있는 동안 이웃을 잃지는 않으리.

 

 

 

 

미주

 

*1 에이커. 약 4,050평방미터. 1평방미터는 1평(3.3제곱미터)이 아닌 1제곱미터를 의미. 즉 각 변의 길이가 63미터 정도 되는 정사각형의 넓이를 의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