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5. 재회Reunion
마지막 포니의 소총이 등불을 받아 반들거렸다. 피트는 여자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 쭈그리고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그와 형제들의 눈앞에서 술집 전체가 박살이 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흥분한 객들이라 해도 꼭지가 지나치게 돌아갔거나 술에 떡이 되어서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는 자들이었으므로, 그들은 조금의 거칠 것도 없이 그녀와 그녀가 쳐든 총기를 향하여 태연자약하게 다가가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순간, 술집 문이 활짝 열리며 새하얀 눈발과... 깃털이 흩날렸다. 금빛 부리와 반짝이는 고글, 날카로운 발톱이 빛을 튕겨내며 술집 안을 더욱 밝혔다. 그리고 새가 우는 듯한 목소리가 뒤를 따랐다. “우와와와와, 호, 호, 호! 이거 대체 뭐 하자는 상황인가? 우리 급수통에 뭔가 심각한 싸움이라도 난 거야? 흐흠? 흠? 피트, 이거 뭐야?”
피트는 진땀을 흘리면서도 총알같이 달려가면서도 포니에게 곁눈질하며 웅얼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여기 올 때마다 등신같은 일이 생긴다고?” 그리고는 큼큼 헛기침을 해 목을 닦고는 바 카운터를 뛰어넘어 달려가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애써 꾸며낸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이야아아아아아- 이거 골든 갱 아니십니까! 제 가장 사랑하는 고객님들께서-켁!” 그리폰 무리 중 하나가 날개를 펼쳐 피트의 목을 붙잡아서, 그는 쌕쌕대는 목소리로 계속했다. “에-헤-헤-헤-왜 이러십니까요, 저희 모두 행복한 한 가족 아닙니까. 아, 안 그런가요?”
“그야 말할 필요도 없이-당연한 거 아니냐, 피트! 우리가 그런 사이가 아니었다면 진즉에 가게 다 뒤집어엎었지! 너도 우리가 그러는 거 별로 바라진 않을 거 아냐? 그러니까, 어쨌든 네 가게잖냐!”
“저-저도 그렇습니다요... 에헤헤... 어, 제 동생들도 마찬가집니다. 저-적어도 똑똑한 애들은 그렇지요.”
“그렇지. 아까도 얘기했지만, 여긴 너네 가게잖아. 하하! 자, 다들 진정하라고! 말로들 해!” 피트의 체모 빠진 곳 근처 털을 헝클어뜨리던 대장 그리폰이 무리를 향해 씩 웃어 보이고는, 커다란 날개를 들어 손짓한 뒤 네 다리로 연기 자욱한 실내로 느긋하게 걸어 들어왔다. “황무지를 뒤지고 다니는 일이란 길고 피곤한 일이야! 다들 진정제 한 알씩 까먹고 술이나 들이키자고! 골든 갱은 제3시대 시절마냥 거나하게 잔치를 벌일 생각이니까 말이야! 주인장은 술 안 떨어지게 계속 날라오기만 해!”
바로 이쯤, 포니는 소총을 내리고 총집에 도로 집어넣은 뒤 느릿하게 바 카운터에 기대어 늘어졌다. 두 눈에 이글대던 분노의 불길은 이미 사그라들어 있었다. 그녀는 쓸쓸히 숨을 들이마시며 온몸에 화상을 입고 몸이 오그라진 오우거가 일어나려고 버둥대는 꼴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자의 친구들이 잔뜩 그을린 쓰레기 더미에서 그자를 들어올려 그 경련하는 몸뚱이를 빈말로나마 화장실이라고 해 주기도 부끄러운 곳으로 데려갔다. 오우거들은 그 두꺼운 떡대 너머로 페가수스를 돌아보며 얼굴을 잔뜩 구겨 보이더니, 온갖 외설적인 욕설을 섞어 미친 듯이 궁시렁거리며 사라졌다. 다른 객들도 그녀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골든 갱이 갑작스레 들이닥친 상황에서 하던 일을 계속할 수도 없었으므로 영 내키지 않는다는 듯 각자의 테이블로 돌아갔다.
포니의 입술 사이로 기나긴 숨결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바 카운터 위에 놓여 있던, 피트가 가져다가 쫙 펼쳐놓은 가죽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갈색 가죽 위로 그려진 세상의 쓰레기장 위로 비비원숭이가 잔뜩 흥분해선 이쯤에서 녹염이 포착되었다며 연신 짚어댔던 그 지점 한가운데엔 여전히 휘갈겨 그려 놓은 표식이 남아 있었다.
백금 같은 날개가 불쑥 튀어나와 지도를 가리웠다. 그 위를 올려다보자, 기골이 장대하고 키가 큰 그리폰 하나가 그 부리로 빙긋 웃어 보이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그리폰은 함께 들어온 다른 여섯과 마찬가지로 갈색 가죽으로 지은 항공 재킷을 입고 있었는데, 그 위로는 쓰러진 적들과, 그녀 자신과 그 동족들이 추격하여 얻어낸 전리품의 모습을 그려놓았다. 그 누구도 이들의 기술과 숙달된 잔혹성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이퀘스트리아 황무지 최고의 현상금 사냥꾼이자 황혼 앞에 선 단독자들이었다. 그것이 골든 갱이었고, 지금 포니 앞에 당당히 서서 미소짓고 있는 덩치 큰 그리폰은 그 골든 갱에서도 스스로 리더를 자칭한 자였다.
“이런-이런-이런.” 껄껄 웃는 그리폰이 쓴 한 쌍 은제 고글이 불빛을 튕겨내며 반들거렸다. “너 사실 마지막 포니가 아닌 거 아니야? 왜 항상 내가 다니는 곳마다 네가 다른 새끼들에게 목이 달아날 상황을 만들어 놓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네?”
포니는 기나긴 한숨을 토해내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그쯤되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고 봐도 되는 것 아닌가요, 길다.”
“오오오오 호 호 호-거하게 푸닥거리 한 판 한 건 똑같으니 상관없을까?” 그리폰은 바닥에 넘어뜨린 취객이 계속 꿈틀거리는 가운데서도 근처에서 곯아떨어진 다른 손님의 잔을 집어다가 크게 한 모금 들이켰다. 목으로 술을 넘긴 길다는 숨을 탁 내쉬면서 부리를 문질러 닦더니, 포니 옆자리로 가 바 카운터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트롤이나 하피와 드잡이질을 하고, 네 고객들 요구사항 맞춰 준다고 폭풍을 수도 없이 뚫고 다니는 성격인 건 알고 있었지. 그렇더라도 너보다 세 배는 큰 오우거를 술 취한 양아치 녀석들로 득시글거리는 술집 한가운데서 걷어차 날리다니? 별로 현명한 행동은 아니었다, 하모니.”
“제 이름은 그게-” 포니는 늘 그렇듯이 짜증을 내려다가, 상대가 상대인 걸 다시 한 번 자각하고는 축 처져서 웅얼거렸다. “하긴 아무려면 어때요.”
“왜 그리 축 늘어져 있어?” 길다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은제 고글을 정수리로 밀어올리고 물었다. 한 쌍 호박색 눈이 빙긋이 눈웃음을 지으며 마지막 포니를 보고 윙크를 해 보였다. “살아 있는 것 하나면 충분하지 않니?”
“그것과는 좀 다른 문제라서요.”
“음, 그게 가장 중요한 문제잖니. 그렇지 않아?” 길다가 갑작스레 포니를 향해 거의 껴안다시피 몸을 홱 기울였다. “적어도 네게는 그래. 그러고 보니 내가 죽게 되면 골든 갱은 스토우가 대신 이끌게 될 거야. 빡치네. 네가 거기 침이라도 발라 두면 누가 감히 그 자리를 넘볼 수 있을까? 아유, 미안하다. 구식 표현이지. 쓰지 말아야 하는데 계속 쓰게 된다니까. 그래도, 음, 넌 다 생각이 있잖니.”
“제가... 생각이 있다뇨...?”
“하하하-” 길다가 갈색 포니의 뺨을 살짝 꼬집었는데, 당하는 포니 입장에서는 그 발톱에 피부가 뚫리기 직전이었다. “너 영문도 모르고 얼떨떨해하는 게 되게 귀여운 거 아니? 너뿐만 아니라 포니 전체를 볼 때마다 그런 느낌이 들었지. 특히 넌 상황이랑 안 어울릴 때 그렇지. 꼭지가 돌았을 땐 더욱 그래.” 그녀는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이퀘스트리아가 불타지 않았더라도 너희 포니들은 서로 꼭지를 돌리려고 치고받다 멸종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야!”
“저 그냥 일거리나 좀 받아갈까 하고 온 건데요, 길다.”
“그럼 그 일거리를 받으러 온 곳을 한번 보려무나. 진지하게, 이대로 가다간 저것들이 네 가죽을 홀라당 벗겨서 산 위에 걸어놓고 전시해 버릴 게다! 이제 슬슬 화를 참는 법, 이길 수 있는 싸움인지 재 보고 시작하는 법 정도는 배울 때도 됐잖니! 뭐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길다는 심드렁하게 천장을 훑어보며 조용히 말했다. 포니를 향하여 기댄 몸이 더욱 바싹 들이밀어졌다. “이 길다가 네 뒤를 봐 주는 게 얼마나 다행스럽고 중요한 일인지 다시 말해줘야겠다. 여기는 온갖 양아치에 쓰레기 같은 놈들로 꽉 차 득시글거리는 쓰레기장이나 다름없어서, 너처럼 착하고 순진한 포니를 죽여 없애고 싶어하는 것들이 수도 없단다. 내가 항상 너를 지켜 줄 수는 없지 않니. 그렇더라도 골든 갱이 계속 너를 보호하기는 하겠지만...” 길다의 목소리가 조용히 깔렸다. 그 와중에도 사자 꼬리를 페가수스의 등 쪽으로 돌려 꽉 묶고, 목 주변을 단단히 조이고 있었다. “...그것도 네가 영리하게 처신할 때의 이야기다.”
포니의 새빨간 두 눈동자는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사자 꼬리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바 카운터와 길다의 꼬리, 길다의 발톱, 길다의 냉엄한 떡대에 갇힌 그녀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피로감을 느꼈다. 여자는 무기력하게 가방을 열고, 불사조를 팔아넘긴 대가로 길리엄이 준비해 준 은편 중에서 쓰고 남은 은편 전부를 넣어둔 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고는 그리폰 ‘친구’를 한 번 올려다보고았다. 돌아온 시선은 빙산보다도 차가웠다. 페가수스는 아무 말 없이 은편 주머니를 길다의 다른 쪽 발톱 위에 올려두고, 고개를 돌려 머릿속에서 은편의 이미지를 지워 버렸다.
골든 갱의 수괴는 바로 기분이 좋아져서 씩 웃으며 말했다. “똑똑하기도 하지.” 그리고는 한 줄기 날카로운 휘파람을 불었다. 거의 길다만한 그리폰 하나가 옆으로 다가왔다. “어이, 스토우Stowe. 이름값 좀 하자. 당장 탈론 함교로 가서 저장고에 이거 짱박아stow 두고 와. 물론 그렇게 하겠지?”
스토우는 차가운 잿빛 깃털을 두른 그리폰이었는데, 항상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듯한 관상이었다. 왼눈 위로 커다란 흉터 하나가 나 있었고, 입고 있는 재킷에는 몇몇 정체를 알 수 없는 종족의 손가락뼈가 장식되어 있었다. 은주머니를 넘겨받은 스토우는 길다 옆에 앉아 있던 포니를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며 윽박질렀다. “빈 궁둥이, 우리한테는 작은 거라도 다 바쳐야 할 거다! 그러지 않으면 네년을 죽이고 창자를 꺼내 아무도 모를 곳에다가 흩뿌려 놓을 테니-”
“스토우! 썩 꺼지든가 개소리 집어치우고 꺼져!” 길다가 부두목의 배때지를 세차게 걷어차며 소리쳤다. “어디다 대고 함부로 짖어대! 웃자란 앵무새 새끼가!”
“대체 왜 대장 시간을 저딴 데 낭비하는지 모르겠네요.” 스토우가 침을 탁 뱉으며 포니를 마지막으로 한 번 노려보더니, 발을 쿵쿵 구르며 돌아섰다. “그 썅년이 그렇게 좋으시면 그냥 결혼하시지 그래요, 대장.”
“그래, 우리 웨딩 케익은 네년의 닭똥집을 꺼내서 만들어 주마, 이 주둥이만 산 년아! 썩 꺼져!” 길다가 얼굴을 팍 구기더니, 이내 낄낄대면서 포니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파하하, ‘빈 궁둥이’라니. 저 사이코패스 년이 지껄이는 욕설은 늘 새롭다니까. 아, 나는 절대 저런 말 안 써! 예전에 포니들이랑 어울려 다니면서 재미 좀 봤으니까! 그래도 이건 짚고 넘어가자, 하모니. 내가 발굽 달린 바보들을 욕하지 않았다는 건 설령 세상 물정 모르는 룸펜이라도 욕하지 않았다는 뜻이야. 그런 걸 견제와 균형이라고 하는 거 아니겠어?”
“그렇죠...” 포니는 한숨지으며 텅 빈 엉덩이 위로 가방을 밀어 덮었다. 철부지 시절의 습관 같은 것이었다. “길다가 말하는 거라면야.”
“어이, 여기!” 길다가 한쪽 발을 들어 카운터 쪽으로 흔들며 외쳤다. “럼앤코코넛 둘! 빨리!”
포니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 술 안 하는데요.”
“멍청한 소리 하지 말고!” 길다가 혀를 낼름 내보였다. “나랑 있을 땐 마셔야 해!”
“절 살려두시느라 고생이 많으시니까...” 포니는 슬며시 조소하며 말했다. “하모니도 제정신 차리기 전까지는 못 몰게 하실 거 아니에요.”
“좋아, 좋아. 내가 졌어. 참나, 말로는 못 당한다니까.” 길다가 낄낄 웃더니 그녀의 ‘친구’를 바라보며 빙긋 웃어 보였다. 발톱 달린 발가락이 바 카운터를 규칙적으로 톡톡 두드렸다. “너희 일이지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다만. 혹시 멸망에서 살아남았으니 이제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니?”
“그런 것 같아요...”
“좋아, 좋은데 좀 더 직설적으로 대답하도록 하렴! 그러니까, 그 생각이 바뀐 건 아니겠지?” 길다가 픽 웃더니 포니를 가리키며 말했다. “포니들을 볼 때마다 정말 얘들은 왜 이러고 살지 싶었던 지점이 몇 곳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이상했던 건 자기네들 스스로 자기 인생에서 할 일을 하나로 한정시켜 놓고 사는 것이었어. 솔직히, 너희 사회는 이해가 안 되더구나. 지금까지 그 사회가 존속해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거야. 그건 그냥 등신같은 카스트제나 다를 바 없잖아? 그렇지, 너희가 뭔가 깨달으면 궁둥짝에 뿅 하고 튀어나오는 그 문신 비슷한 거 이름을 뭐라고 하더라?”
“어어어어......” 포니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큐티 마크요.”
“하-하하하하하 하 하 하 하!” 길다는 주먹으로 바 카운터를 두들기며 대소했다. 웃는 얼굴 위 호박색 눈에서 한두 방울 눈물이 배어나올 지경으로 웃었다. “하 하 하 하-휴, 휴우우우-아니 잠깐, 농담 아니지?”
“제가 뭐하러 그러겠어요.”
“그러니까 너희 포니들이 문명 전체를, 사회 계층들을 얽어놓은 걸 ‘큐티 마크’라 부른다 이거구나? 풉-나도 살면서 온갖 잡스러운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이것만한 건 또 없을 거다. 염병, 이러니 너희 나라가 펑 하고 터졌지.”
그리폰 앞에 두 잔 술이 놓였다. 길다는 즐거이 한 잔을 쭉 들이키고는 한 번 뒤집어서 탁탁 털고, 기나긴 트림을 한 뒤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 해도 포니 전부가 강단 없고 허약하지는 않았어. 너희 중에서도 가장 괜찮은 녀석이랑 할 일 없이 날아다니던 때야말로 내 인생 최고의 나날이었으니까.” 그 골든 갱의 수괴가 연약해 보이는 숨을 내쉬더니, 머리 위로 올려둔 고글을 다시 당겨 쓰고 말했다. “페가수스로 태어난 걸 감사히 여기거라. 나는 항상 날개 달린 포니들이 마음에 들었으니까. 유니콘들이 드레스에 바느질이나 하고 저 흙구덩이에 박힌 포니들은 쟁기나 끌고 앉아 있을 때 페가수스들은 너희 이퀘스트리아에 한두 가지나마 멋진 구경을 시켜 줬으니 당연하지. 페가수스가 날아다닌 자리는 그대로 하늘길로 남아서, 황혼과 안개로 범벅이 된 지금에도 멀쩡히 남아 있단다. 폭풍이 잦아들고 나서 아직 잿가루가 휘몰아치고 있을 때 하늘을 잘 들여다보면 페가수스들이 날아다닌 자리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게 보일 거다. 흐으음-그 빌어먹을 날개달린 말들이었다면 지금처럼 거꾸로 된 세상에서도 괜찮은 안식처를 꾸릴 수 있었을 텐데.” 길다는 두 번째 잔을 들어 홀짝거리다가, 숨을 내쉰 뒤 포니를 슬쩍 곁눈질하며 물었다. “그 덕에 지금까지 네가 저승사자와 잘 투닥거리고 있는 거 아닐까. 어떻게 생각해, 꼬마?”
“농담이시죠.” 포니는 웅얼거리며 대답한 뒤, 그리폰을 보고 최대한 예쁘장하게 웃었다. “전부 길다가 지켜 줘서 그런 거죠.”
“그렇지, 절대 잊지 않도록 해!” 골든 갱의 수괴는 발톱으로 포니를 가리켜 보이더니, 두 번째 잔도 마저 비우고는 트림했다. 잔은 놓지 않았다. 길다는 만취 직전까지 가 있었고, 그녀의 은제 고글은 술집의 뿌연 불빛 속에서 순간 김이 서렸다. “넌 너무 어렸어, 꼬마. 시발 너무 어렸다고. 옘병할 카드는 이미 던져졌으니 뭐 어쩌겠어. 나는 너 대신 살아남았다면 훨씬 더 잘 생존할 수 있었던 페가수스 한둘은 알아. 보호도 필요없고, 뭐든지 적절하게... 나, 나 없이도 알아서 잘 할 수 있었던 애들.” 침을 겨우 넘기는 길다는 심란해 보였다. “아니다, 하나다. 딱 하나밖에 기억 안 나네, 이제 보니...”
포니는 고개를 푹 숙이고 나직이 한숨을 쉬며 이마를 찌푸렸다. “저도 그 사람 기억해요.”
그 둘은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었고, 얼마가 더 지나고 나서야 그녀는 그 둘이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었다는 것을 지각했다. 차게 식은 두 몸뚱이 사이로 흘러 들어온 흐릿한 증기는 술집 밖에 어른거리는 황혼이 두르고 있는 안개와도 같았다. 포니는 헛기침을 하며 축축히 젖은 눈 위로 고글을 뒤집어쓰고, 술집 밖으로 나서며 말했다.
“어, 전부 다 고마워요. 피트도 충분히 귀찮게 했고요. 이제 슬슬 가야겠어요.” 그리고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잠시 뒤, 포니가 내심 이제 풀려났다 싶었을 때 길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지, 하모니. 우릴 등지고 떠나기 전에 하나 묻자...”
포니는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등 뒤를 돌아보았다.
길다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 채 씩 웃으며 말했다. “요전에 스토우랑 애들이 나랑 같이 다니다가 네 친구랑 만난 적이 있다고 얘기했지?”
“친구요? 저 친구 없는 거 알고 계신 거 맞죠?”
“헤헤. 이름이 브루스인가 하는 골초 얼룩 다람쥐였어. 입에 마시멜로를 발라 놓은 양 아첨 하나는 끝내주더군. 그... 어... 그 녀석이랑 작은 사업을 했거든. 그 녀석이 얘기하던가?”
포니는 그리폰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대답했다. “그런 얘기는 들어 본 적 없어요.”
“그래, 뭐, 그 다람쥐 녀석도 꽤나 싸돌아다니는 녀석이거든. 물론 너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되겠지만. 그래 스토우 놈의 흉악한 상판을 보더니 겁부터 집어먹고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줄줄 늘어놓더라고.”
“무슨 헛소리였는데요?”
길다는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녹염에 관한 얘기였어. 황무지 곳곳에 녹색 빛기둥이 나타난다는 거였지. 일단 딱 들으니까 그거 참 큰 돈 되겠구나 싶었지. 너한테도 돈을 좀 나눠줄 수 있을 정도로 벌이가 짭짤하겠다고 계산이 됐다 이거야! 하하!” 길다는 다시 술 한 모금을 삼켰다. 이마 위 깃털 하나가 곤두섰다. “돌아다니다가 그런 건 본 적 없지? 네가 돌아다니는 곳 근처에서 자주 보인다는 것 같던데!”
페가수스는 길다를 쳐다보았다. 뒤집어쓴 고글 덕에 바 카운터 위에 덩그러니 두고 나온 가죽 지도 쪽으로 자꾸만 시선이 가는 포니의 시선은 골든 갱 수괴에게 감지되지 않았다. “저... 일단 뭐라도 알게 되면 바로 알려 드릴게요.” 그리고는 빙긋 웃고는 발굽을 흔들어 작별 인사를 건넸다. “제 보호자께 적어도 그 정도는 해 드려야 마땅하죠.”
길다가 발톱을 흔들어 인사했다. “염병, 직설화법 쓰라니까. 안전운전해라. 오우거들이랑은 싸우지 말고, 알아듣지?”
“네...” 포니는 다시 고개를 들려 걸음을 옮겨놓았다. 그리고 숨죽여 중얼거렸다. “오우거라...”
포니는 레버를 잡아당겼다. 두 번째, 세 번째로 잡아당기고 나서야 깊은 진동음과 함께 신호가 하늘 위로 솟았다. 새로 산 화염석이 일곱 개의 보석을 향하여 찬란한 빛을 뿜어냈고, 그 빛을 받은 보석들은 다시 무지개와 같은 형상을 이루어 황혼 속으로 날아들었다. 전보다 열 배는 더 밝았다.
M.O.D.D.로 출발한 지 30여 시간이 지났다. 포니는 평소대로 무지개 신호를 밝히러 고원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기계를 돌리느라 고단해진 몸으로 가쁜 숨을 고르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 표정은 서서히 찌푸려지며 사그라들고 있었다. 무지개는 돈을 들인 만큼 찬란하게 반짝이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왜인지 전보다도 더 흐릿해 보였다.
머리 위에 떠 있는 하모니를 묶어둔 쇠사슬이 저희끼리 비벼지며 끽끽대는 소리를 냈거나 말거나 했을 것이다. 다음 폭풍을 기다리는 지금 이 순간 몰아치는 눈보라가 한층 더 거세게 불어오고 있든지 말든지 했을 것이다. 피멍 든 뺨에서 다시 피맛이 떠오르든지 말든지 했을 것이다. 무엇인가 그녀의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그녀는 십 분 가까이 무지개를 올려다보고 나서야 자신의 시선이 단 하나의 색에 박혀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녹색이었다.
그녀는 좌절감에 빠져 한 줄기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M.O.D.D.에서 겪었던 온갖 일들이 초점 없이 멍한 마음 속으로 스며들며 그녀를 자극했다. 그녀가 돌투성이 땅을 세차게 걷어찼고, 그 통에 흩날린 흙조각이 심드렁하게 날려 녹슨 강철 바리케이드 한두 개에 가 부딪쳐 흩날리며 그녀의 갈 곳 없는 화를 조롱했다. 버려진 고원 위로 내려앉은 끝없는 침묵은 누구 하나 봐 주지도 않을 무지개를 지키는 헛수고를 반복하는 밤이 돌아올 것임을 그녀에게 말해주었고, 그녀의 생각은 끝내 저 무지개는 결국 자신을 빚어내고 띄워 준 그녀 자신만을 위해 춤추는 것이 아닌가에 가 닿았다.
포니가 지금까지 은편과 화염석과 무지개 신호를 얻어내기 위하여 거쳐 온 온갖 고생과 수고가 전부 창백한 불안감으로 수렴되었고, 그 자리에는 단 하나의 색깔만이 남았다. 그것은 그녀가 순간적으로 시선을 틀어 눈 앞에서 치워 버린 색이었고, 자기 자신의 나약한 이면에서 내심 두려워하는 색이었으며 그렇기에 혐오하는 색이었다.
“그럴 가치는 없어.” 마지막 포니는 스스로를 타이르듯 말했다. 지난 세월 동안 이런 짓은 한 번도 하지 않았었다. “굳이 거기로 돌아가야 할 만큼 녹염이 가치있는 건 아니야.” 여자는 소총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그것은 어린아이를 보듬어 안는 것과도 비슷했다. 그녀는 붉은 두 눈을 부라리며 고글을 끌어당겨 쓰고, 감시탑으로 무기력하게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찾아오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그녀는 그곳에서 몇 시간을 버티고 앉아 있을 것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페가수스는 하모니 상층 선실에 매달아 놓은 해먹에 가만히 엎드려 누운 채로 옥타비아의 곡을 듣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가스등의 금빛 등불에 젖은 셀레스티아 공주의 일지가 활짝 펼쳐진 채 놓여 금빛으로 쓰여진 옛 여신의 힘찬 필치를 드러냈다. 마지막 포니는 아주 오래 전부터 셀레스티아 공주가 써 내려간 비단결 같은 문장들을 읽고 다시 읽기를 거의 의무적으로 반복해 왔었다. 여신이 남긴 성스러운 글을 머릿속에 남기고, 그리하여 비행선 창문 밖에서 휘도는 잿빛 안개를 몰아내기 위해서였다.
습관적으로 공주의 일기를 읽어 나가던 중, 난기류가 일어나 하모니 동체를 들이받았다. 비행선은 아무렇지 않은 듯 아주 잠깐만 덜컹거렸고, 다만 그 때문에 옥타비아의 음반이 덜컥 움직이며 판이 긁혀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중간 부분을 건너뛰었을 뿐이었다.
그렇더라도 이 정도면 몇 번이나 공주의 일기를 반복해 읽어 왔던 여자의 집중을 깨기에는 충분했고, 그녀는 눈을 몇 번 깜박인 뒤 왠지 눈에 띈 한 문단에 시선을 고정했다. 날짜를 보니 제3시대 중반쯤에 쓰인 일기였는데, 여기에는 허니테일 가문 마지막 후손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었다. 허니테일 가문은 대대로 위대한 조상들을 배출해 온 유니콘 귀족 가문이었는데, 루나 제국군 충성파로 가담한 전력이 있었으나 나이트메어 문 유폐 이후 셀레스티아 공주가 직접 사면한 전적이 있었다.
그 이후 이퀘스트리아의 주류는 왕당파 군인들로 루나 제국군의 손에 허망하게 쓰러져 간 전몰자와 참전 군인들의 후손들로 구성되었고, 선조들이 흘린 피를 잔혹한 복수로 되갚아 주고자 하는 여론이 형성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허니테일 가문은 이퀘스트리아의 그 누구도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왕실 사유지에 몸을 의탁하여 수백 년의 세월을 견뎠다. 허니테일은 셀레스티아 공주의 비호 아래 살아갈 수 있는 것으로 만족했지만, 이들의 두려움과 망설임은 근친혼에 의한 혈우병을 일으켜 결국 스스로 멸문하여 이제 여왕이 일지에 남긴 몇 마디 힐난으로밖에 남지 않았고, 그나마도 세상이 멸망하고 나서 살아남은 단 하나의 페가수스가 찾아 읽고 나서야 다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포니의 붉은 눈동자가 익숙한 하모니 선실의 천장을 훑고 지나가는 동안 밖에서는 살육마와 괴물들을 피해 폐허를 뒤지고 다니며 그녀를 뜯어먹고 등쳐먹고 사기를 치려 드는 날다람쥐와 원숭이, 가슴팍에 보이지 않는 비수를 바싹 들이대던 그리폰과 몇 마디 대화를 하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나날과도 같이 되돌아오는 눈보라가 몰아쳐 창문 위로 몇 개 얼룩을 남겼다. 그녀의 존재는 저 회오리바람 속을 떠도는 잿가루와 마찬가지였으며, 다른 것이라곤 증기기관식 비행선의 이름을 빌어 가명을 만들고 신성모독적 기술인 룬스톤으로 이빨을 세워 무장한 것뿐이었다.
그녀는 마지막 포니였고, 이것이 삶을 살아내는 일이라면 그녀의 솜씨는 대단히 조악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을 것이었다. 그녀가 간략하게나마 기억하기로는 기회가 자신을 잡아먹기 전에 기회를 잡으라는 말은, 작은 것에 안주하지 말고 가장 큰 것을 챙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었고, 두 날개가 그녀 자신의 후안무치함을 눈치채기 전에 땅을 박차고 날아올라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녀는 재앙 이전에도 셀레스티아 공주의 보호를 원하지 않았으므로, 재앙이 지나간 지금에도 길다에게 보호를 요구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젊은 암말은 공주의 일지를 탁 하고 닫았다. 그리고는 그물침대에서 튀어나오며 레코드 플레이어의 전원을 내리고, 작업대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집어 챙긴 뒤 자연스럽게 조종석으로 몸을 날렸다. 지도 두루마리를 펼친 그녀는 입으로 컴퍼스를 집어 현재 위치와 이퀘스트리아 황무지 한가운데의 거리를 재어 보았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좌표 ‘105, 32, 10’까지의 거리였다.
그녀는 조용히 마음을 다잡은 뒤 두루마리 지도를 대충 접어 치우고, 입에 문 컴퍼스는 뱉어낸 뒤 텁텁한 실내 공기를 씹으며 중얼거렸다. “그 누구도 영원히 살 수는 없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공주님?” 여자는 고글을 덥석 집어 쓰고는 레버 몇 개를 힘차게 잡아당겨 하모니 우현의 모터만 작동시켜 남쪽을 향하여 선회했다.
하모니는 수십 시간이 지난 다음 목적지에 도착했다. 비행선 계류 작업을 마친 뒤 내려다본 세상은 을씨년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이퀘스트리아에서 가장 깊은 골짜기가 된 자리로 희디흰 모래 폭풍처럼 눈보라가 광폭하게 몰아쳤다. 그을린 대지 위로 튀어나온 새까만 유리기둥들은 검은 칼날이 꽂혀 있는 것 같기도 했는데, 그 자체만으로도 함부로 땅 위에 내려서기 어려워 보였다.
그녀는 용감히 비행선에서 뛰어내리며 날개를 펄럭였고, 마지막 날갯짓과 함께 그 신성한 땅에 발을 디뎠다. 여자는 내려앉자마자 육신의 껍데기를 벗고 나온 혼령이 여기 죽음 같은 묘지에 다시 스며들기라도 하는 것처럼 몸서리쳤다. 이빨이 딱딱 부딪치는 와중에도 그녀는 울부짖는 바람을 뚫고 나아갔다. 그녀는 북쪽 지평선 방향을 살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지만, 시계가 크게 제한되어 5미터 이내만 겨우 살필 수 있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유일한 사실은, 북쪽으로 향해 언덕 하나만 넘어가면 피트가 불러 준 좌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뿐이었다. 경사진 땅 너머에서 뭔지는 몰라도 안 좋은 일이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고, 그에 더해 오랫동안 잊어버렸던 기억의 한없이 두려운 그림자가 서서히 기억 표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포니는 마른침을 삼키며 자세를 바로하며 당당히 섰다. 가죽 방호복과 가방, 소총, 룬스톤 탄알집, 룬 봉인을 걸어놓은 유리병 두 쌍의 무게가 몸에 전해졌다. 짊어지고 나온 보호장비의 무게만으로도 몇 걸음 걷기조차 버거울 정도였다. 안장 가방에는 등불이 매달려 있기는 했지만, 아직 등불을 켜지는 않았다. 아직은 불을 켤 때가 아니었다. 길을 찾아가는 데 굳이 불을 켤 필요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하모니를 묶어놓은 언덕 위에서 천천히 걸어 내려오기 시작하자, 황망히 불어온 바람이 그녀 앞에 눈을 뿌려댔다. 그 너머로 보이는 것은 한 쌍 말라붙은 강이 지붕 곳곳이 날아간 지 오래인 형형색색의 주택들과 무너진 건물들을 휘감고 돌아가는 풍경이었다. 말라붙은 떡갈나무 몇 그루가 서서히 시야 안으로 들어왔고, 드디어 잿빛 평원에서 죽은 듯 잠들어 있던 마을의 정경이 천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눈 덮인 길가 옆에는 기묘한 각도로 구부러진 표지판 하나가 외로이 서서, 페가수스의 목적지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을 증거했다. 그 위를 뒤덮고 있던 고운 잿가루가 뭉쳐 떨어져 나간 자리에 몇 개 쓸쓸한 글자가 적혀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어스 포니들의 성지 포니빌입니다. 현재 인구 1,056명”
2020.01.04. 재번역 완료.
원래는 2월에 올려도 되지만 새해 기념으로 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