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소리

PRPG 시나리오를 짜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Mergo 2021. 7. 10. 09:59

원래는 코어룰만 뽑아내서 하려고 했는데 사실 Roleplaying is Magic S4E가 씨잘데기 없는 것들 싹 도려내고 남은 코어룰이더라고요. 그냥 몇 페이지 안 되니까 느긋하게 티스토리 게시물로 써도 될 것 같습니다. 카테고리 하나 파면 될 것 같군요.

 

그런 의미에서 PRPG 씨나리오를 쓰기 위한 구성요소를 짜내 봅시다. 롤플레잉 게임의 묘미는 세계관 탐색에 있는 것이고, GM이 주절주절 설명하기보다는 그냥 보여주고 플레이어들이 알아서 해석하게 하는 게 더 재미있다고 생각하므로, 세계관 자체는 짜임새 있고 튼튼하게 짜되 보여주는 것은 드문드문, 대충 갈피만 잡을 수준이면 족하다... 는 게 평소 지론입죠. 그런 세계관을 의식의 흐름대로 쓰는 것은 아주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짜깁기하면 짧은 시간으로 그럭저럭 봐 줄 만한 스토리를 뽑아낼 수 있습니다.

 

세계관 탐색이란 무엇인지부터 정의합시다. 플레이어가 세계관을 탐색하는 방법으로 크게 두 가지를 짚을 수 있습니다. 첫째, 플레이어가 직접 그 세계를 돌아다니며 보고 듣는 능동적 탐험과 둘째, GM이 제시하는 NPC나 서적, 사료 등을 이용해 정보를 캐내는 간접적 탐험이 있겠지요. 능동적 탐험은 GM이 보여주고 싶은 것을 잘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보통 이걸 시각화해서 볼 수 있는 비디오 게임 같은 쪽에서 많이 써먹는 방법이죠. 씨꺼먼-영혼이 그런 쪽에서 굉장한 연출을 보여 줬습니다. 간접적 탐험은 비디오 게임에서는 주로 어떤 퀘스트나 설정상의 인물, 사건, 단체 등의 배경이나 뒷이야기를 설명하는 수단으로 쓰이죠. 뭐 어디 동굴에 들어갔더니 웬 시체가 있길래 평소처럼 루팅을 해 보니 일기장이 나와서 열어 보자 이 사람(이었던 것)이 왜 이 동굴로 들어왔고 여기에 뭐가 있다는 카더라가 있더라... 정도의 정보가 있더라 수준으로. TRPG는 기본적으로 시각화가 플레이어와 GM의 머릿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GM의 말발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플레이어들도 GM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로 배경지식을 갖춰야 하고요. 예컨대 어떤 성당을 묘사한다고 칩시다. GM이 "...고대 유니코니아 고딕 양식..."이라고 설명했을 때, 고딕 양식이 뭔지 설명할 수는 없더라도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이 뭐뭐 정도는 있다고 알고 있는 편이 피차 편하죠. 똑똑한 GM이라면 "첨탑이 어디에 몇 개씩 총 얼마가 서 있고 흰 대리석으로 치장되었으며 곳곳에 프린쎄스 플래티나의 유니코니아 건국 여정을 묘사한 조각이 새겨져 있는데 블라블라..." 하면서 친절한 배려를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아무래도 이쪽이 좀 나을 거에요. 배경지식을 평준화하기는 힘드니까.

 

따라서 시나리오를 쓸 때는 '대충 여기서 뭔 일이 일어나는' 공간적 배경과 더불어 '여기서 뭔 일이 일어날지' 예고하는 NPC, 플레이어가 원하기만 한다면 더 많은 정보를 캐낼 수 있는 요소를 적절히 배치해야 할 것입니다. 플레이어 각자의 배경이야 뭐 서로가 까기 전까지는 모르는 거니까 가능하면 배경 설정은 공유 안 하는 게 좋겠어요. 그래야 GM이 플레이어 사이에 갈등을 조장하는 등 게임을 더 쫀득하게 만들어 주죠.

 

예시 : 플레이어들은 동방을 다스린다는 마법사 여왕 A를 찾기 위해 구성된 순례단의 일원이다. ㄱ은 동방과 마법학 교류를 위해 프린쎄스 플래티나가 추천한 마법대학 교수(캐릭터 배경설정이 이러할 경우)이며, ㄴ은 순례단 보호를 위해 함께 파견되는 기사, ㄷ은 동방으로 가는 길에 현지인들과 교섭하거나 외국 도시에서 협조를 구하기 위한 외교관, ㄹ은 플래티나의 밀명을 받아 순례단의 감시를 담당하는 궁정 요원이다(외부적으로는 프린쎄스 플래티나가 맡긴 노잣돈을 관리하는 회계사 겸 경로 안내자로 발표). 이들은 순례단 숙소에서 처음 만났으며, B항구를 출항해 사흘 정도 항해한 뒤 C항에 도착하였다.

C항은 중동 이민족(당나귀 정도?)과의 교류가 왕성하여 이국적인 물건을 많이 접할 수 있다. 그러나 도시 규모에 비해 유니코니아가 파견한 경비 병력이 부족해 치안에 문제가 있다. 플레이어들은 여기서 동방으로 가는 길에 있다는 각종 시련과 이상한 동물들에 대해 접하게 되고, 이에 대비해 각자 무기와 의약품 등 상비물품을 준비한다.

= 플레이어들이 항구에 도착해 각자 짐을 갖고 배에서 내렸습니다. 귀가 요상하게 길고 사지가 가는 이민족들이 머리에 천을 둘둘 두르고 다니는데, 비슷하게 생긴 양반들이 하역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저 멀찍한 곳에서 이민족 하나가 먼저 내린 상인의 호주머니에 발굽을 슬쩍 집어넣었다가 잽싸게 달아납니다. 상인이 소매치기 잡으라고 소리를 치고 나서야 저 멀찍이서 미친 듯이 달려온 경비병 하나가 헥헥거리면서 뿔을 밝혀 소매치기범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네요. 부두는 엄청나게 큰데 경비 병력은 여섯 정도밖에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뭔가 높아 보이는 사람들이 넷씩이나 몰려다니니까 경비병 하나가 다가옵니다. (후략) (출전 : <바우돌리노>)

 

뭐 요런 식으로 상황을 만들 수 있겠죠. 저 넷이 인생역전을 목적으로 모인 거렁뱅이 넷이라도 상황은 짜낼 수 있습니다. 밀항을 의심하거나 할 수 있으니까요. 반반이라도 가능합니다. 암만 봐도 같이 어울릴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 패거리를 짜서 다니는데 눈에 안 뜨일 리가 없었다, 식으로 짜맞출 수 있습니다.

 

그럼 간접적으로 세계관을 탐색할 때 GM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GM이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건 좋지 않습니다. 이런 걸 두고 설정놀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에코 교수 소설처럼 캐릭터들이 지식배틀을 벌이는 건 이 캐릭터들이 세계관에서 태어나고 자란 게 아닌 이상 불가능해요. 플레이어들이 자기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두되, 적당하다 싶은 때에 여러 가지 요소를 이용해 슬쩍슬쩍 떡밥을 흘려서 꼬여내야 합니다. 위 예시대로라면 경비병이 '동방으로 가신다고요?' 하면서 떡밥을 좀 흘릴 수도 있습니다. 무장을 단디 하게 하려면 '도적들이 판을 치고 있어서 외벽 막는 것만 해도 벅차다' 나 '들짐승이 무시무시하다' 정도로 얘기해 두고, 좀 루즈하다 싶은 지점에 정말로 그 도적떼나 들짐승과 싸움을 붙여 주는 식으로요. 떡밥은 나중에 회수해야 합니다.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회수를 해야 해요. 짐승이 나온다면 정말 그 짐승을 보여 줘야 하는 것입니다. 간접적으로 수집한 정보가 현실로 나타나 아익후 이게 사실이었구나, 할 수 있도록 체험시키는 게 덕목이 아닐까요. 이것은 세계관을 치밀하게 짜 두는 게 전제되어야 합니다. 주먹구구식으로 막 갖다 붙이면 근본이 없어지거든요. 그리고 그 치밀한 세계관의 구축은 현실 자료를 찾아보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죠. 동방으로 가는 길에 만날 요괴를 디자인하고 싶으면 <산해경> 같은 걸 열어보면 되고, 중간에 마주치는 중간보스 조직을 만들고 싶다면 십자군과 하사신을 조금씩 섞고 포니스러움을 첨가해 주면 될 일입니다. 사회, 문화적 요소까지 디자인하고 싶은 경우 아예 그쪽 논문을 찾아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겁니다. 중세 배경으로 하고 싶으면 <중세> 씨리즈를 빌려다가 필요한 정보만 뽑아낼 수도 있을 거고요.

 

이 모든 요소가 준비되었다면 '재미있는' 스토리를 짜야 합니다. 사실 이게 가장 큰 암덩어리에요. 재미있는 스토리를 짜는 법은 저도 잘 모르니까 여기서는 생략하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