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Ponyvile

Chapter 01.

Mergo 2022. 5. 8. 00:16

핑키 파이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눈물로 젖어 얼룩지고 축축한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였다. 핑키는 조심스럽게 침대에 누웠던 몸을 일으켰다. 혹시라도 그녀가 범한 끔찍한 죄악을 명명백백히 증거하는...... 선혈로 젖은 침대가 나타나지는 않을까 두려워서였다. 침대는 눈물에 젖어 있는 부분만 제외하면, 물기 하나 없이 잘 말라 있었다.

 

핑키는 천천히 발굽을 얼굴에 갖다댔다. 뺨을 타고 흐르던 눈물방울이 발굽에 닿아 으깨졌다. 갈기가 흘러내려 눈 앞을 가리우는 순간 핑키는 으스스쳤다. 두 눈으로 보았던 그 무참한 현장과, 그 충격이 아직 남아 있었다.

 

"대체... 대체 왜..." 잠들어 있는 동안 꾸었던 무시무시한 악몽의 이미지가 생생하게 뇌리에 떠올랐다. 소름끼치는 비명소리가 두 귀에 앵앵거리고, 솜털은 피로 흠뻑 젖었으며, 살아 있는 몸뚱이를 베어 그 안의 것을 드러내는 섬뜩한 감각이 사지를 타고 전해지던 그 악몽...... 현실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핑키 파이는 머릿속에 떠오른 것들을 밖으로 쏟아내 흩어 버리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거세게 도리질쳤다.

 

"왜 이따위 꿈을 꾸고 있어야 하는데!?" 핑키의 두 발굽이 자신의 머리를 강타했다. 끊임없이 기억 속에서 솟아나는 악몽 속 참상들을 떠올리기 싫어서였다. 목불인견의 꿈을 꾸기 시작한 지도 어언 2주가 지났다. 그 동안 매일 밤마다 악몽이 찾아왔고, 하루가 다르게 그 잔혹성을 더해 갔다.

 

첫 번째 악몽은 악몽이라고 하기에도 뭐했었다. 웬 괴물 하나가 핑키를 공격했는데, 정작 별로 힘도 안 들였는데도 알아서 나가떨어지는 녀석이었으므로 평소와 그닥 다를 것도 없이 잠에서 깼다. 그 다음 악몽에서는 핑키를 공격하는 괴물들만 바뀌었는데, 어느 날 밤에는 핑키의 영혼을 빼앗아 지옥으로 보내려는 죽음의 대행자가 습격했고, 또 어느 날 밤에는 보기만 해도 몸의 떨림이 멈추질 않는 빼빼 마른 사람slender pony과 맞닥뜨리기도 했다. 그 다음 날은 허기와 갈증으로 허덕이는 몸뚱이에 역병이 또아리를 틀어, 산 채로 살점이 썩어 들어가면서도 죽지 못하고 살아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악몽을 꾸었다.

 

그나마 이런 꿈들은 차라리 나았다. 적어도 이것들은 현실에선 일어날 일 없는 것이니까. 친구들과 어울려 멋진 파티를 즐기고 나면 꿈에서 보고 느낀 것들은 머릿속에서 전부 사라졌다. 혹시 잘못된 식습관 때문에 이상한 꿈을 꾸는가 싶어 식사 종류를 바꾸기도 했는데, 하루 정도는 효과가 있었고 딱 하루만 효과가 있었다. 그 다음 날 꿈에서 핑키는 시퍼렇게 날이 선 이빨과 발톱으로 무장한 괴물이 되었다. 핑키는 그 괴물이 되어 스스로를 공격하고 자신의 살점을 뜯어 삼켰다. 꿈에서 깨고 난 뒤에도 입 안에 그 구역질 나는 맛이 남아 어른거렸다.

 

다음으로 찾아온 꿈에서, 핑키는 포니빌 곳곳을 휩쓸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혼란과 공포를 일으켰다. 집은 부수고, 작물은 짓밟았다. 물건은 깨뜨렸고 인명은 살상했다. 그 다음 날 밤 꿈에는 핑키 자신의 소중한 친구들까지 공격했다. 괴물이 된 핑키는 광증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공격성으로 친구들을 찢어발기고 토막냈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천천히 죽어가게 두는 대신, 적어도 신속한 죽음을 제공한 것이었으므로 차라리 나았다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밤 꿈에서는 핑키 자신이 그런 짓을 했기 때문이었다. 꿈 속에서 핑키는 다른 밤에서처럼 악마가 되었지만, 지난번과는 달랐다. 핑키는 철저하게 핑키 자신으로서 똑같은 만행을 자행했다. 송곳니도, 발톱도, 광증도 없었지만 핑키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 어젯밤 꿈에, 핑키는 가장 소중한 친구인 레인보우 대쉬를 납치, 감금했다. 그리고 날붙이를 꺼내......*1

 

핑키는 더 견디지 못하고 화장실로 달려가 위장에 들어 있는 것을 전부 게워냈다. 변기와 마주하기 직전, 꿈 속에서 보고 행했던 만행의 이미지가 눈 앞에 번쩍, 스쳐갔다. 핑키는 자괴감을 느꼈다. 대체 어떻게 돼먹은 년이길래 무의식 속에서라도 그런 잔혹무도한 짓을 할 생각을 떠올릴 수가 있단 말인가!? 그것도 사랑하는 친구에게! 저 하늘의 태양이나 달달한 먹거리, 파티, 심지어 자기 자신의 목숨보다도 소중한 친구에게 말이다! 그 중에서도 레인보우 대쉬라면 더하다! 지금까지 본 사람 중에서도 가장 멋있고 대단할뿐더러 놀기까지 좋아하는 친구니까! 레인보우 대쉬가 파티에 참석만 한다면야, 성대한 파티를 열어 온갖 간식거리와 구경거리, 농담거리까지 준비해 가고도 남는 게 바로 핑키 파이였다.

 

거울에 비친 핑키 파이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입가를 문질러 닦았다. 갈기가 직모로 펴져 있었고 핏발 선 두 눈은 퀭하기 짝이 없었으며 솜털은 그 색을 잃고 칙칙해진 꼴이 척 봐도 정상은 아니었는데, 거기에 화룡점정으로 거친 숨을 몰아쉬기까지 하니 그 모습은 정상이 아니라는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초췌했다.

 

핑키가 찬물을 퍼올려 얼굴을 문질렀다. 정말로, 진심으로, 더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레인보우 대쉬를 보고 싶었다. 레인보우 대쉬가 멀쩡히 잘 있는지 알아야 했다. 하지만...... 꿈에서 본 그 모습이 조금이라도 잊혀지고 난 뒤에야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슈가큐브코너에 출근해서 일하기도 해야 했다. 컵케익은 냄새만 맡아도 토해 버릴 것 같은데.

 


 

핑키는 건물 그림자에 숨은 채 포니빌 곳곳을 돌아다녔다. 상쾌한 공기와 따뜻한 햇살도 그녀의 마음을 달래주진 못했다. 다른 사람의 얼굴을 차마 쳐다보고 다닐 수도 없었다. 저들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꿈 속에서 보았던 참혹한 모습이 다시 머릿속에 떠오를지 몰라 무서웠기 때문이다. 행선지도 정해놓지 않은 채 핑키는 그저 걷고 또 걸었다. 슈가큐브코만 아니면, 그녀 자신의 방만 아니면, 그 꿈이 연상되는 곳만 아니라면 어디든 상관없었다.

 

핑키는 정처 없는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한 때부터 대체 얼마나 지났을까 싶어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천만다행히도, 그녀에게 오늘따라 왜 그러냐며 말을 걸어오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 꿈이 핑키를 괴롭히기 시작한 이래 그녀는 파티를 더욱 자주 열었는데, 파티의 빈도를 늘리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핑키가 겉으로만 밝고 활기차게 군다는 것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음은 핑키도 알고 있었다. 전에, 트와일라잇이 무슨 일이라도 있냐며, 자기가 도울 수 있는 게 있으면 할 수 있는 만큼 도와 주겠다고 한 적도 있었다.

 

잠깐! 트와일라잇이 있었지!

 

트와일라잇은 대단한 마법사다. 이 지긋지긋한 악몽을 떨쳐낼 방법을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트와일라잇은 분명 그 중 하나일 것이다! 트와일라잇의 목전에서 트와일라잇과 다른 친구들에게 못할 짓을 하는 꿈을 꾼다고 이실직고하려니 몸이 움찔했지만...... 굳이 꿈의 내용을 말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꿈을 안 꾸게 하는 데 꿈의 내용을 꼭 알아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은가.

 

핑키는 걸음을 재촉하며 도서관을 향해 냅다 달렸다.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몸이 알아서 그녀를 도서관으로 데려다 주는 것인 듯싶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기는 했지만. 도서관 앞에 도착한 핑키는 살짝 정신 나간 사람처럼 문을 두들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첩이 삐걱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어라. 핑키 파이구나." 트와일라잇은 살짝 놀란 듯했지만, 친구가 찾아온 반가움이 더 커 보였다. "혹시 또 파티 초대하러 온..." 핑키의 몰골은 도저히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이었고, 트와일라잇도 그 모습에 말을 멈추었다. "......핑키, 괜찮아? 별로 안 좋아 보이는데."

 

"그래... 아주 안 좋아 트와일라잇... 들어가서 얘기해도 돼?" 핑키는 평소와 달리 절차라는 것을 신경 쓰며 말했다.

 

"당연하지. 얼른 들어와." 트와일라잇이 즉답하며 핑키를 안으로 맞아들였다.

 

"고마워..." 핑키가 조용히 도서관 안으로 발을 들이며 말했다. 그녀는 도서관 중앙의 테이블로 향해 그 주변에 놓여 있던 붉은 벨벳 방석 위에 주저앉았다. 테이블에 머리를 박은 핑키는 눈을 감고 조용히 한숨지으며 트와일라잇이 좋아하는 음료가 뭐였는지 생각하면서 마음을 애써 가라앉혔다.

 

"뭐 마실 거라도 갖다 줄까? 핫초코는 어때?" 트와일라잇이 물었다.

 

"단 건 사양할게...... 커피로 갖다 주면 좋을 것 같은데... 크림이든 설탕이든 넣지 말고..." 핑키가 나직히 신음하듯 말했다.

 

"단 걸 마다한다고?" 트와일라잇은 당혹했다. "맙소사... 진짜 심각한 일인가 보네!" 트와일라잇이 잽싸게 핑키가 부탁한 커피를 준비하며 말했다. 커피잔이 염동력을 타고 핑키 앞으로 떠가더니 자리에 내려앉았다. 핑키는 사지를 부들부들 떨면서 잔을 들어 마시기 시작했다. 쓴맛에 얼굴이 절로 구겨졌다.

 

"핑키. 무슨 일이야. 얘기해 봐." 트와일라잇이 축 처진 핑키 옆에 앉으며 말했다. 갈기는 직모로 변해 있고, 솜털은 칙칙해졌으며 두 눈은 퀭하게 처진 채 핏발이 서 있는데다...... 핑키 파이 특유의 활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므로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은 확실했다.

 

"트와일라잇... 진짜 너무 끔찍해!" 핑키가 발굽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말했다. "평생 이런 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어!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다니, 끔찍해도 너무 끔찍해! 잠도 못 자, 쉴 수도 없어. 파티하면 나아질까 싶었는데 아무 효과도 없었고! 빨리 끝내고 싶어서, 빨리 쉬고 싶어서 온갖 일을 다 해 봤는데 나아지기는커녕 더 심각해지기만 해!" 핑키의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 핑키가 이 정도로 겁에 질리다니, 트와일라잇은 이보다도 놀랄 수가 없었다.

 

"핑키... 말해 봐. 그 '끔찍하다'는 게 대체 뭔지." 트와일라잇은 다 잘 풀릴 거라고 핑키를 달래려 했다. 핑키가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악몽을 꿔, 트와일라잇." 핑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끔찍하고, 소름끼치고, 잔인하기 짝이 없는 악몽을 꾼다고. 파티를 자주 하면 잊어버릴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아니었어. 그래서 식습관도 바꿔 봤고, 자기 전에 명상도 했어. 샤워하면서 입에 레몬 물고 물구나무 선 채 자려고 했는데 그것도 안 되더라고. 다 소용없었어...... 어젯밤 악몽은 지금까지 꾼 것들보다도 더 지독했고."

 

"악몽을 꾼다고?" 트와일라잇이 발굽으로 뺨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잠깐만." 트와일라잇이 몸을 일으켜 책장으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장서를 죄다 끄집어내 하나씩 쓱쓱 훑으며 쓸만한 책이 있나 살피기 시작했다. "아니고... 얘도 아니고. 아니고, 아니고, 뭐야 이건. 이것도 소용없고..." 10분쯤 흐른 뒤, 트와일라잇이 책 한 권을 끄집어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찾았다!" 트와일라잇이 테이블로 돌아와 책을 펼치더니 책장을 휙휙 넘기기 시작했다.

 

"악몽." 어떤 한 페이지에서 책장 넘기기를 멈춘 트와일라잇이 말했다. "강한 부정적 감정을 일으키는 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흔하게 관찰되는 현상. 약물의 투여나 식습관 등 외부 요인에 의해 지속적으로 악몽을 꾸거나, 꿈을 꿀 때마다 그 내용이 심화될 수 있다.... 이건 아까도 한 말이고." 트와일라잇이 더 읽어 내려갔다. "신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근시일 내에 겪은 외부 스트레스나, 정신적으로 큰 영향을 준 특정 사건에 의해 촉발될 수 있다. 피상담자가 어떤 종류의 악몽을 꾸는지 분류하고, 그에 따른 치료 방법은 후술한다." 책을 읽는 트와일라잇의 목소리는 고요했다.

 

"그러니까, 그거 더 안 꿔도 되게 해 줄 수 있다는 거지?" 막연한 희망이 핑키의 가슴 속에서 솟아났다.

 

"치료 방법이라고 기술하기는 했으나, 이를 통해 평생 동안 악몽을 꾸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잠을 자면서 악몽을 아주 배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지속적으로 악몽을 꾸는 경우에는 해법이 될 수 있다." 트와일라잇이 계속 읽었다. "여기 보니까 네 기억에 접촉해서 무슨 꿈을 꾸는 건지 볼 수 있게 해 주는 마법이 실려 있어. 네가 어떤 꿈을 꾸는지 알 수 있으면, 정확히 어떤 마법을 써야 하는지도 특정할 수 있겠지."

 

핑키 파이의 내부에서 솟아난 희망이, 호수 아래로 가라앉는 돌덩이처럼 무너졌다.

 

"안 돼! 아냐, 그건 진짜, 정말 안 돼 트와일라잇!" 핑키가 미친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 꿈은 절대 보면 안 돼! 절대, 절대 안 돼!" 핑키가 발굽으로 얼굴을 감쌌다. "끔찍하고 무서운 꿈이야. 그... 그 누구도 내가 꾼 꿈의 내용을 알아선 안 돼." 핑키가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두 눈에 그렁그렁하게 고인 눈물이 언제라도 굴러 떨어질 수 있을 것처럼 출렁거렸다.

 

트와일라잇의 발굽이 가만히 핑키의 어깨 위에 얹혔다. 핑키가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트와일라잇이 걱정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꿈을 꾸는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지만, 네가 그것 때문에 힘겨워하는 건 알 수 있어. 그것 때문에 네가 네가 아니게 된다면, 도저히 묵과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네가 나를 찾아온 건 도움을 얻기 위해서고, 나는 너를 도와 줄 거야. 그러니까 내가 네 꿈을 볼 수 있게 허락해 줘. 그래야 널 도울 수 있어." 트와일라잇은 그렇게 설득했다. 핑키는 고개를 푹 숙이고 눈에 붙은 들불처럼 뜨거운 눈물을 애써 참고 있었다. 트와일라잇이 자신을 도와 주고 싶어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럴 능력도 있음을 알고 있었으므로, 핑키는 애써 울음을 삼켰다.

 

"트와일라잇..." 핑키가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울음을 짓누르며 힘겹게 말했다.

 

"응? 왜 그래?" 트와일라잇도 비슷하게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약속해 줘...... 내 꿈에서 무엇을 보든지... 나를 지금까지와 다른 존재로 보지 않겠다고." 핑키가 훌쩍거리며 말했다.

 

"내가 무엇을 보든지, 너는 항상 내 소중하고 사랑하는 친구로 남아 있을 거야. 맹세할게." 트와일라잇이 말했다. 핑키의 눈에 그녀의 미소가 비쳤다. 편안하고, 안심이 되는 얼굴이었다.

 

"피, 핑키 파이 맹세로?" 핑키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트와일라잇은 조금 마음이 놓이는 듯 빙긋 웃었다.

 

"진짜진짜진짜 진짜 약속.*2" 트와일라잇이 핑키 파이 맹세에 수반되는 일련의 동작을 질서정연하게 수행했고, 마무리로 얼굴에 페이스트리를 꽂아 넣는 시늉을 했다. 핑키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천천히 눈을 감으며 고개를 살짝 들었다.

 

"조... 좋아. 트와일라잇, 널 믿어." 핑키 파이는 조용히 말하며 트와일라잇이 이제부터 무슨 짓을 하든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했다.

 

트와일라잇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책에서 본 마법을 그대로 따라했다. 뿔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트와일라잇이 핑키의 이마를 덮은 갈기를 뒤로 쓸어넘겨 귀 뒤로 넘기고, 뿔 끝을 핑키의 이마에 살짝 갖다댔다.

 

 

 

 

"나 좀 가만히 내버려 두고 꺼져" 비쩍 마른 사람The Slender Pony은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 다가오고 있었다. 그자가 가까워질수록 속삭이듯 들려오던 잡음이 귀를 찢어놓을 듯 커져갔다. 몸 한쪽에서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고, 반대쪽으로 피가 터져나와 사방에 뿌려졌다. 흩날린 피가 시야를 가려서 세상은 온통 핏빛이었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쓰러지며 현실의 옷자락을 부여잡으려 용을 썼다. 이 고통과 소음이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이 되기 전에.

 

 

 

 

몸에 구멍이 나 있었다. 안에서 들끓는 구더기들이 구물텅대며 몸을 타고 기어오르는 감각이 느껴졌다. 구더기들은 그녀를 산 채로 갉아먹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고통이 몸 곳곳을 할퀴어대고 있었지만, 죽음은 아직 저 멀리에 있었다. 쓰러져 있는 그녀의 몸을 버러지들이 뜯어먹었고, 피부 아래로 자맥질하는 구더기의 물컹한 몸뚱이와 그 꾸물대는 감각은 고스란히 쓰러진 자에게 전달되었다.

 

 

 

 

이빨 사이에 낀 뼈다귀가 뿌드득 소리와 함께 분쇄되었다. 뺨을 타고 피가 흘렀다. 물컹하고 끈적한 살점이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날카로운 이빨이 한 어스 포니의 모가지를 찢어발겼다. 몸에 붙어 있을 수 없게 된 머리통이 툭 떨어져 굴러다녔다. 머리를 떼내고 남은 살덩이는 씹기 딱 좋은 먹거리였다.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맛이지만, 그녀는 그 맛을 갈구했다. 그 맛이야말로 그녀가 찾아 헤매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맛을 더더욱 탐닉해야 했다! 그녀의 이빨이 떨어진 머리통을 물더니 힘을 가해 두개골을 깨뜨렸다. 안에 고여 있던 것들이 깨진 뼈 사이로 흘러내려 그녀의 입 안으로 떨어졌다. 더 먹어치워야 했다. 이 정도로 배가 찰 리 없으니까.

 

 

 

 

잠시 비명이 잦아들었지만, 어디까지나 잠시일 뿐이었다. 다시 비명이 일었다.

 

"뭐 때문이야? 대체 뭐 때문에 이러는 거냐고?" 레인보우 대쉬가 고통과 공포에 질린 소리로 외쳤다. 레인보우 대쉬는 테이블에 결박되어 있었고, 두 날개와 네 발굽은 썰려나간 지 오래였다.

 

"레인보우 대쉬...... 누구나 언젠가는 죽기 마련이잖앙." 핑키 파이가 수술용 칼을 들어올리며 대답했다. "지인짜 뻔한 얘기 아니양? 한번 생각해 봐. 내 인생에 의미가 있었는지, 죽는 순간에도 나름대로 대의명분을 갖고 있었는지, 내가 죽고 나서도 세상이 나를 기억할지 말양. 하나하나 다 중요한 의문 아니겠엉." 그녀가 레인보우 대쉬를 향해 다가갔다. 근섬유 하나하나마다 질척한 살의로 충만해 있음이 느껴졌다.

 

"네 말이 맞다 치자..." 레인보우 대쉬가 끝없는 고통과 울음에 헐떡이며 말했다. "지금 네가 날 죽이면... 죽는 순간에 대의명분을 품을 수 없는 거 아니야." 레인보우가 흐느꼈다. "대체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핑키가 발굽을 들어 레인보우 대쉬의 얼굴을 가만히 두드려 주었다. 핑키는 레인보우에게 바싹 달라붙어 있었는데, 전에는 조금도 느껴보지 못했던 낯선 감각이 느껴졌다. 핑키의 입가에서 뜨거운 숨이 뿜어져 나왔고, 핑키의 몸은 그녀 자신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움직였다. "아아... 레인보우 대쉬...... 지금 이 순간까지 이해하지 못했다면, 앞으로도 이해할 수 없을 텐데. 되어야 할 일이 되어지는 것뿐인데 말이양." 핑키가 레인보우 대쉬에게서 떨어졌다.

 

레인보우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짓지 않았어도 되었을 것이다. 핑키가 수술칼을 레인보우 대쉬의 엉덩이 깊숙히 꽂고는 곧장 사지 말단 쪽으로 그어 버렸기 때문이다. 레인보우의 얼굴에 스쳐 지나가는 고통과 비명소리... 핑키 파이의 섬세하고도 즐거운 절단 수술의 개시였다. 어쨌든 핑키에게는 재료가 필요했으니까.

 

 

 

트와일라잇이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핑키가 꿈에서 본 끔찍하고 잔인한 것들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 본능적으로 머리를 홱 잡아당겼다. 트와일라잇이 책꽂이에 부딪치자 장서가 죄다 쏟아져 내렸다. 트와일라잇은 공포로 반쯤 혼이 빠진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주문의 작동은 겨우 몇 초만에 이루어졌고, 그 짧은 시간은 꿈에서 본 모든 것들이 밀려들기에 충분했다.

 

핑키의 꿈은 무시무시했고... 너무나도 현실감 있었다. 꿈에서 보고 듣고 행한 모든 것이 생생히 느껴질 정도였다. 일반적으로 꿈은 그렇게 생생한 감각을 전달하지 않는다. 핑키를 습격한 괴물과, 온 몸 구석구석을 파먹어 들어오는 버러지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살덩이의 질척한 감촉, 그리고 그 무참한 잔혹행위...... 구역질이 났다.

 

"트와일라잇?" 겁에 질려 잔뜩 위축된 채, 거의 들리지도 않게 된 목소리가 뒤따랐다.

 

트와일라잇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 핑키 파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떨고 있었다. 두려움과 공포로 떨며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꿈을 꾼 장본인은 핑키 파이였고... 그 꿈에 고통받은 당사자이기도 했다. 도움을 구하러 여기까지 온 것 또한 그 때문이었다.

 

"핑키..." 트와일라잇이 겨우 입을 열고 말했다. 밖으로 쏟아지려는 감정과 위장 내용물을 겨우 달래서 내려보내고 나온 말은 이러했다. "이럴 줄은... 몰랐어..." 트와일라잇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켜 핑키 파이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지금은 의연해져야 했다.

 

"트와일라잇..." 핑키가 흐느끼며 말했다. "미안해... 네가 봐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그녀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울음이 밀려나오는 사이마다 헐떡이는 숨을 들이마셨다. 트와일라잇이 핑키의 곁으로 다가가 두 다리를 뻗어 그녀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품에 안긴 핑키는 트와일라잇의 어깨에 기대어 서럽게 울었다. 트와일라잇은 소중한 친구를 꼭 안은 채,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핑키를 구하고야 말리라 다짐했다. 핑키가 꾼 꿈의 내용은 돌이켜보기만 해도 위장이 뒤틀리는 느낌이었지만, 친구를 구하는 것이 그보다도 훨씬 중요했다.

 

"괜찮아, 괜찮아..." 핑키의 울음이 차츰 잦아들어 갈 때쯤 트와일라잇이 말했다. "꿈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을지 이제 알겠어...... 잘 들어, 꿈 속의 너는 네가 아냐. 그러니까, 지금은 왜 그런 꿈을 꾸게 되었는지 밝혀내야 해." 트와일라잇의 그 말은, 조금 전 핑키와 나눈 약속이 훌륭히 지켜지고 있음을 그 자체로 입증하고 있었다. 트와일라잇의 품에 안긴 핑키는 꿈 속의 핑키와는 다른 존재였다. 핑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울음을 멈추고 트와일라잇의 품에서 나왔다. 트와일라잇이 책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다시 몇 페이지를 휙휙 넘겼다.

 

"일단 식습관 때문에 생긴 건 확실히 아니었지. 그러면 최근 있었던 사건 때문인지, 아니면 잠재의식 속 깊은 곳에 숨은 다른 게 원인인지......부터 판단해야겠네. 꿈은 언제부터 꾸기 시작한 거야?"

 

"그게..." 핑키가 젖은 얼굴을 문질러 닦으며 말했다. "대연회 끝나고 며칠 있다가부터 꿨는데...... 지난 보름 동안에는 매일 꿨어. 식사 메뉴를 바꾼 날 밤에는 안 꿨는데, 그 다음 날부터 바로 시작하더라고..." 핑키가 문제의 악몽이 얼마나 자주 찾아왔는지 세며 말했다.

 

"흐음...... 하긴 대연회 정도면 아주 큰 사건이긴 하지. 도넛 가게에서는 괜찮아 보였는데......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어? 포니빌로 돌아가기 전에 몇 가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면서 마차 타러 가기 전까지는 혼자 다녔잖아." 트와일라잇이 말했다.

 

"......으음... 너희랑 논 다음에는 언니, 그러니까 옥타비아 보러 갔어. 대연회장에서 첼로 켜던 그 사람 말야. 그 정도 뒷배는 있으니까 대연회장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그 난장판을 벌일 수 있었던 거지. 덕분에 잘 놀았다고 감사 인사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아서." 핑키는 그 날 밤을 회상하며 말했다. "근데 내가 난리를 쳤다고 살짝 짜증을 내더라. 그래도 결국 풀어지긴 했고, 고향 떠나서 각자 밥벌이 하면서 어떻게 사는지 신나게 수다도 떨었어. 그러다 보니까 갈 시간이 거의 다 됐더라고. 그래서 앞으로 연락 좀 하고 살자고 약속하고 헤어졌지."

 

트와일라잇은 그 말을 곰곰히 곱씹었다. "그럼, 언니랑 만난 것 때문에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 물음은 정말 궁금하다는 어조였다.

 

"혹시라도 그런 거라면 진짜 이해 안 가는데." 핑키가 발굽에 턱을 괴고 말했다. "진짜 재밌게 놀았거든...... 언니가 안 좋은 소리 한 것도 없었고."

 

"그럼 편지는 받았어?"

 

"하나 받긴 했어. 필리델피아 공연을 하러 간다는 내용이랑, 아무래도 전국 곳곳을 더 돌아다녀야 할 것 같으니 답장하고 싶으면 굳이 주소 쓰지 말고 자기 악단 앞으로 보내면 된다, 정도밖에 없었지만. 배달부가 알아서 갖다 줄 거라나." 핑키가 생각에 잠겨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 편지에도, 독설 같은 건 한 마디도 없었는데......"

 

"그럼 보름 전에는 어땠어? 가끔씩 예전만큼 명랑하진 않다 싶은 시점들이 있긴 했는데, 그 때도 그렇게 나쁘진 않았거든." 트와일라잇의 뇌리에 지난 며칠 동안 핑키 파이가 옛날만큼 정신 사납게 굴진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 이유는 이제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글쎄...... 그 때도 딱히 뭐 없었거든. 악몽 꾸니까 전보다 파티 더 많이 해야겠다 하고 파티에 미쳐 살긴 했는데, 이렇다할 사건 같은 건 없었어..." 핑키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구나." 트와일라잇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려 페이지 하나하나를 쓱쓱 읽어 내려가다가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는 일련의 행위를 반복하며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최선의 방책을 찾았다.

 

"여기 있다...... 아까 것과는 다른 마법이야. 첫 번째 것은 단순히 들여다보는 마법이었지. 이번에는 이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발본색원하기 위한 마법이야. 왜 그런 악몽을 꾸게 되었는지, 가장 큰 이유부터 가장 사소한 이유까지 파헤치는 마법이지." 트와일라잇이 자신감 있게 말했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 마. 금방 괜찮아질 거야." 그녀가 빙긋이 웃어 보였다.

 

"고마워..." 핑키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좋아. 처음에는 좀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고 나와 있긴 하지만, 곧 익숙해질 거야. 준비됐지?" 트와일라잇이 물었다. 핑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해 볼까." 트와일라잇이 심호흡하며 다시 정신을 집중하자, 뿔이 밝게 달아올랐다. 트와일라잇이 고개를 숙여 핑키의 이마를 향하여 뿔을 겨누고, 다시 가볍게 톡 건드렸다.

 

핑키의 의식이 순식간에 흐려져갔다. 빽빽한 안개 가운데에 내던져진 듯한 느낌이었다. 아주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듯한 감각과 함께, 주변에 있던 모든 것들이 흩어져 사라졌다. 세상이 빙빙 돌았고, 등 뒤에서 광풍이 몰아치며 그녀를 떠미는 것 같았다. 여러모로 굉장한 감각의 한가운데에 있다 보니, 뱃속에서 창자가 굴러다니는 느낌까지도 들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이걸 견뎌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든 순간, 빙빙 돌던 세상은 요동치기 시작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그 움직임을 멈추었고 휘몰아치던 바람도 잦아들었다.

 

핑키가 가쁜 숨을 들이마셨다. 숨은 기침이 되어 터져나왔다. 발굽 아래 바닥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핑키가 고개를 들어 가볍게 도리질치고 천천히 눈을 열어 떴다. 그곳은 도서관이었고 여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트와일라잇은 온데간데없었다. 트와일라잇은 무엇 때문에 그녀를 혼자 남겨둔 것인가?

 

"트와일라잇?" 핑키가 부르는 소리에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공허한 메아리만 되돌아올 뿐이었다. 이상했다. 도서관이 기괴할 정도로 조용했던 것이다. 평소 트와일라잇이 자리를 비웠을 때보다도 조용했다. 테이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가방 하나와 쪽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핑키는 조심스레 쪽지에 적힌 문장을 읽었다.

 

 

어둠을 건너야만 빛을 볼 수 있다.

 

 

핑키는 당혹해하며 쪽지를 내려다보았다. 트와일라잇이 쓴 쪽지일까. 트와일라잇이 쓴 거라면...... 무슨 의도로 쓴 거지? 가방은 가져가라고 놔둔 건가? 트와일라잇이라면 다 생각이 있을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핑키를 내버리고 사라질 사람은 아니니......

 

가방에 뭐라도 들었나 싶었던 핑키가 가방을 열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가방 안에는 물건 두 개가 들어 있었다. 첫번째는 누구라도 척 보면 알 만한 물건인 랜턴이었다. 안에는 기름이 차 있었고 심지도 넉넉하게 남아 있었다. 랜턴 한쪽에 둥그스름한 꼭지가 붙어 있었는데, 보아하니 이것을 돌리면 랜턴에 불이 붙는 모양이었다. 앞으로 써야 할 수도 있으니, 기름을 낭비하는 일은 피해야 했다. 핑키는 랜턴을 가만히 가방에 집어넣었다.

 

"이건 뭐지?" 핑키가 중얼거리며 직사각형 모양의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다이얼과 안테나가 달려 있었는데, 낯익은 물건은 절대 아니었다. 구멍이 여러 개 난 원이 그려져 있는 것 같기도 했는데, 보다 보니 소형 축음기의 일종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조그마한 물건에서 음악이 나온다니 그게 가능할까?*3

 

그러거나 말거나 핑키의 발굽에 쥐여진 그것은 스스로 작동을 시작해서, 조용한 잡음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핑키가 그것을 툭 떨어뜨렸다. 핑키는 DJ가 벌 날아다니는 소리를 가지고 놀면 이런 소리가 나지 않을까 싶은 소리를 토해내는 물건을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잠시 뒤 잡음이 멈추었다.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뭔가 중요한 것임은 틀림없다는 본능적인 느낌이 들었다. 핑키가 물건을 들어 가방에 집어넣었다.

 

"트와일라잇이 이걸 두고 갔다는 건...... 내게 필요한 물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 그렇다면야." 핑키는 중얼거리며 조심스럽게 가방을 들어 옆구리에 짊어졌다.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나니, 지금 당장은 쓸만한 게 없는 것 같았다. 핑키는 밖으로 나가기로 결심했다. 트와일라잇과 얘기를 하고 난 뒤로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으므로, 지금 상태라면 레인보우 대쉬를 보러 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뭐야?" 도서관 문을 나와 몇 걸음도 채 가지 못한 핑키가 멈춰섰다. 짙은 안개가 포니빌 전체에 깔려 있었다. 얼마나 짙은지 도서관 바로 근처에 있는 건물도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말 그대로 눈 앞에 있는 것만 겨우 보이는 지경이었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핑키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의 몸이 떨렸다. 기온이 엄청나게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뭐야 이게? 포니빌이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당황한 핑키가 중얼거렸다. "레인보우 대쉬 짓인가? 걔가 이런 짓 할 리는 없는데?" 지금 당장은 레인보우 대쉬를 찾아가서 얘기를 해 봐야 했다. 핑키는 레인보우 대쉬의 집이 있는 방향을 잡아 달리기 시작했다. 전속력으로 달리던 핑키는 당장 멈춰야 한다는 생각에 급히 속도를 줄였다. 속도가 바로 줄지 않아서 핑키는 조금 더 미끄러진 뒤에야 멈출 수 있었다. 그녀의 코앞에 있어야 할 땅은 더 이상 없었다. 돌멩이 몇 개가 핑키의 발에 채여 아래로 떨어졌다.

 

포니빌에 있을 리가 없는 거대한 낭떠러지가 그녀를 막아서고 있었다. 레인보우 대쉬의 집으로 향하는 길...... 보다 정확히는 포니빌 밖으로 나가는 모든 길이 절벽에 절단되어 있었다. 오직 하늘길만이 포니빌 밖으로 그녀를 빼내 줄 수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핑키가 바닥 없는 무저갱의 바닥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각주

 

*1. 이쪽 분야에서는 전설로 추앙받는 cupcakes를 오마주한 것.

 

*2. Cross my heart, hope to fly, stick a cupcake in my eye. 'Cross my heart and hope to die, stick a needle in my eye.'를 아동 정서에 맞게 die를 fly로, needle을 cupcake으로 바꾼 것. '내 말 진짜 거짓말 아니고 사실, 진실임' 같은 느낌이다.

 

*3. 사일런트 힐 시리즈에서 적의 존재와 거리를 경고해 주는 수단인 라디오를 말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