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E/백그라운드 포니

Chapter 01. 선율Melodious[개정]

Mergo 2019. 7. 22. 23:56

https://www.deviantart.com/ramiras/art/Background-Pony-778162063

 

 

일기에게.

 

음악의 기원은 언제일까? 음악의 뿌리는 의문이었을까, 아니면 확신이었을까? 음악의 탄생과 함께 누가 웃는 사람이 있었을까? 아니면 우는 사람이 있었을까. 음악을 만들어낸 사람 혼자만 그 탄생을 목도했을까? 그 앞에 청중이 있었을까?

 

왕립 영재 유니콘 학교에 입학할 즈음에는 이제 음악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비롯되었는지 배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지. 학교는 음악사상 기교면 기교, 감성이면 감성, 멜로디면 멜로디 모두 하나 빠지지 않았던 시대의 걸작들 전부 소실되어 사라져 버렸다고 가르쳤어. 이퀘스트리아 문명이 존속해 온 지 어언 일만 여 년이 지났지만 보존된 악보와 녹음된 연주, 현재까지도 연주되는 곡들은 아무리 오래된 것이라고 해야 겨우 천오백 년 전의 곡들이지.

 

영영 잊혀 버린 음악은 어떻게 되었을까. 끝없는 시간의 공허 속으로 사라져 간 명곡이 대체 얼마나 있었을 것이며, 시대가 낳은 위대한 음악가와 천재들이 지어낸 걸작 중에서 폐기된 것들은 또 얼마나 있었을 것인가. 제국의 연주회장에서 이제 그 소리가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면 곡은 그 가치를 영영 상실하는 걸까.

 

내가 전공을 선택한 것은 몇 년 전. 혹시나 그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음악사를 전공하기로 했지. 의문에 대한 답은 찾을 수 없었고, 그 대신 작곡이란 사람의 이성으로 계량될 수 없는 사람의 마음 속 물음을 끄집어내 던지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만 알게 되었어. 그러므로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는 모든 행위는 그 답을 찾아가는 구도의 길일 거야. 음표 하나씩의 소리를 일으켜 리듬과 화음을 구성하는 것으로 사람은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만나게 되는 거지.

 

먼 옛날에 살았던 사람들도 현재를 사는 우리가 탐구하는 것과 같은 것을 탐구했으면 좋겠어. 과거의 음악은 이제 남아 있지 않더라도,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표현하는 수단으로서의 음악은 옛날과 지금이 같다는 뜻이 되니까. 우리가 일궈낸 문명은 들리지 않는 귓가로 떨어지는 화려한 앙코르일지는 몰라도, 감정 없는 심금을 울릴 수는 없어. 우리의 선조들이 가졌던 것과 동일한 호기심과 야망을 가슴에 품고 음악을 느끼는 한, 우리의 심장과 하나된 그 소중한 뜻은 절대 잊히지 않을 테지.

 

오늘도 나는 음악을 연주하지. 나도 찾고 있으니까. 머릿속에 울리는 마법의 음악을 현실 세계로 이끌고 나와 구체화하는 것으로 내게 지워진 저주를 풀 수 있을지도 모르거든.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다면 천지개벽의 순간부터 전해 오며 끊임없이 박동하는 리듬에 나도 한몫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지. 내가 그 일부로서 그 누구라도 춤을 추지 않고는 못 배길 곡을 써 나가면, 그 곡으로 다른 사람에게 다가갈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거야.

 

그러면, 잊히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고.

 


 

평소처럼 포니빌 중심가 한쪽 구석에 서서 리라를 들고 최근에 구체화한 곡을 퉁기고 있었다. 일단 항아비곡 제7곡이라는 가제로 부르고 있다. 이번 주 내내 정신없이 살을 붙이던 바로 그 곡이다. 일지를 읽는 자가 있다면 이미 알고 있을 터다. 바로 지난 일지에 적어 두었으니까. 폭풍우에 쓰러진 나무가 내 당근밭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 바로 그 날 밤, 머릿속에 울려대어 내 잠을 깨웠던 바로 그 곡이다. 머릿속에 곡이 흐르는 것은 어쩌면 일종의 징조가 아닐까, 이것들을 악보에 옮겨 적어 구체화하면 이 끝없는 여정에도 끝내 끝이 보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늘 하고 있다. 이번 곡이 어떻게 작용할지는 짐작도 안 가지만, 트와일라잇 앞에서 간단히 연주해 보는 것으로 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트와일라잇 스파클은 항상 필요한 답을 내어준다. 타고났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혹시 작곡을 하는 데 그 머리를 쓴다면 어떻게 될까. 셀레스티아 공주께서 당신의 제자를 더 아끼고 사랑하게 되시지 않을까.

 

빌어먹을. 일기를 쓰는 건 좋은데 항상 다른 길로 빠진다. 각설. 포니빌 중심가 한쪽 구석에 서 있던 차였다. 리라를 퉁기고 있었는데, 별 일은 아니고 당시 돈이 좀 쪼들리기 시작해서 그런 것이다. 그리하여 내 앞에는 그릇이 하나 놓여 있었으니, 자랑스러운 포니빌 시민들께서 눈부신 성정을 드러내시는 데 그리 긴 시간이 들지 않았다. 두 시간도 되지 않아 25비트에 가까운 돈이 모였다. 전에는 이것보다도 더 벌었는데 말이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빙긋 웃으며 기꺼이 동전을 던져준 덕이다. 이쪽은 아무 말 없이 리라만 붙잡고 퉁기고 있었고. 다른 건 몰라도 몰입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 핵심이었다. 내가 지나는 사람들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관찰하는 만큼이나, 저 사람들도 이쪽에 관심을 두고 쳐다보고 있는 걸 전에는 전혀 몰랐었다.

 

평소처럼 캐럿 탑이 가장 먼저 지갑을 열었다. 이전에도 이 사람에 대해 쓴 바 있었다. 항상 다른 사람들보다 이른 시간에 일어나서 마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잡다한 일들을 미리 해두는 사람이다. 그 날도 그릇에 일 비트를 던져주며 빙긋 웃어주었다. 텃밭 가꾸는 법을 가르쳐 주던 어느 날 석양 아래서, 흙과 풀잎으로 얼룩진 똑같은 미소를 본 기억이 난다. 생전 처음 만나는 사람인 양 인사하더니,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뭐, 캐럿 탑에게는 늘 내가 처음 보는 사람이니까.

 

다음으로 지나쳐 간 행인은 시장님이다. 그날따라 갈기에 감도는 잿빛 톤이 진했다. 최근에 염색약을 바꿨을까. 시장님은 대단한 분이다. 포니빌이 다른 동네 같았으면 이런 선출직 공무원들은 나 같은 떠돌이 딴따라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을 터다. 시장님은 그런 치들보다 훨씬 교양 있는 사람이다. 미소를 지어주고 내 솜씨를 칭찬한 다음 일 비트를 그릇에 넣어주고 가던 길을 마저 가시니까. 시장님이 따님과 다시 말을 섞을 자신이 있으실지 잘 모르겠다. 최근 따님과 심각하게 다투고 나서 감정의 골이 엄청나게 깊어진 것 때문에 고민이 많은 분이다. 그 때 얼마나 서러웠는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만, 내가 낚아다가 솔직히 털어놓도록 유도했을 때는 가감없이 전부 털어놓으셨다. 차 한 잔씩을 앞에 두고 나누는 진솔한 대화라. 시장님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평생 가슴에 새기고 살리라.

 

하늘 높이 떴던 해가 슬슬 그 고도를 낮춰 내려오는 동안 몇몇 행인이 더 지나쳐 갔다. 나는 하염없이 항아비곡 제7곡을 연습했다. 지나는 사람들이 음악을 듣고 즐거워하는 것이나, 몇몇이 동전을 던져주는 것은 굳이 표현하자면 덤 같은 것이다. 오랜 연습으로 숙달된 솜씨로 현 하나하나를 염동력으로 잡고 퉁기며 연주하고 또 연주하기를 반복했다. 왜 같은 곡만 계속 하냐고 툴툴대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사람이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저거 좀 이상한 것 같다, 싶은 시선은 내가 뒤집어쓴 스웨터 재킷에 집중되었다. 시내로 나올 때마다 늘 갖춰입고 나오는 옷이다. 자고 깰 때마다 음습한 한기와 함께 그 상판을 들이미는 비곡의 가락처럼 이제 슬슬 익숙해진 것 같더라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비곡이나 계속 연습하는 게 내 할 일이었다. 전에 옮겨 쓴 다른 곡들과 마찬가지로 이번 곡 또한 그 진정한 의미를 알아내려면 이번에토 트와일라잇 스파클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었다. 의미는 그렇다 치더라도, 비곡을 느끼는 것만큼은 나도 할 수 있는 일인 만큼 남에게 미뤄둘 일이 아니다.

 

다음으로 지나친 행인은 래리티였다. 고상하게 말아 올린 갈기와 반짝이는 눈동자에 정신이 팔려 정신이 절로 흩어지는 것을 간신히 다잡았다. 래리티는 잡화점 앞에 멈춰 서서 연주를 듣다가 말했다. "어쩜, 이렇게 아름다울 데가!" 조금의 가감 없이 옮겨 적자면 이런 말이었다. 그리고는 그 누구보다도 많은 돈인 3비트를 그릇에 넣어주었다. 이럴 때면 기분이 좀 그렇기는 했지만, 어떻게 보면 좋은 씀씀이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넉넉한 마음씨를 내비치는 하나의 방법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 반응 없이 내 할 일만 했다. 특히 언제나처럼 래리티가 가까이 와 연민하는 시선으로 말할 때는 더욱 그래야 했다. "맙소사. 자기 추위를 타도 너무 타는 거 아니에요? 혹시 어디 안 좋은가요?"

 

맞는 말이다. 이빨이 딱딱 부딪치고 있었으니까. 물론 연기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일단 한기가 밀려오고 나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내가 짊어진 저주는 무시무시한 추위를 일으킨다. 걸치고 다니는 후드 재킷은 말 그대로 이 추위를 견뎌내기 위한 최후 방어선과 다름없는 것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옷을 껴입고 다니는 이유를 궁금해하지만, 그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나에게는 없다. 떨리는 몸이 질러대는 비명을 옷을 껴입는 것으로 틀어막는다면, 래리티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옷을 둘둘 말고 다니는 이유를 물을 터다.

 

"아. 전 괜찮아요." 늘 하던 대답이니 기억하고 있다. 연주 중에는 누가 말을 시켜도 대답하지 않는 것이 철칙이지만, 절대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못 해서 그런 게 아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체온이 좀 낮은 편이라서." 거짓말이다. 솔직한 말로 사실인지 거짓인지의 잣대를 들이댄다면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전부 거짓말에 불과하다. 사실을 말하든 거짓을 말하든 어차피 종착지는 같다.

 

"세상에. 그쪽처럼 훌륭한 연주자가 저체온증으로 객사하게 둘 수는 없지요." 래리티가 대답했다. 그러더니 전혀 상상도 못 했던 행동을 보였다. 가방을 열어 노란 목도리를 꺼내 건네준 것이다. "받으세요. 편하실 대로 쓰셔도 돼요." 래리티가 뿔을 밝혀 금빛 목도리를 내 쪽으로 건네주었다. 그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빛을 두른 그녀의 뿔처럼 빛나고 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음은 명백했다. 그렇다고 냉큼 그 선물을 받아 챙기기도 쉽지 않았던 게 솔직한 심정이다.

 

"아. 감사합니다." 이쪽도 빙긋 웃으며 퉁기던 현을 잠시 멈추고 목도리를 받아 목에 둘렀다. 거기서 정중히 사양했다면 일이 더 복잡하게 굴러갔을 것이다. "이러시지 않으셔도 괜찮았는걸요."

 

"아니에요. 이런 거라면 작업실에서 백 개는 금방 뜰 수 있으니까요. 게다가 노랑색은 저랑 잘 안 맞거든요. 마침 그쪽 눈이랑 아주 잘 어울리는군요." 래리티가 미소지었다. 아름다운 얼굴 중에서도 심안에 평생 어른거리는 그런 얼굴이 있는데, 래리티도 당연히 그 중 하나였다. "언제 한번 들르세요. 스웨터 재킷 하나 만들어 드릴게요. 지금 입고 계신 것도 좋은 물건이지만, 슬슬 낡아 가는 것 같아서."

 

이쪽도 소리내어 웃고 입가를 구부린다. "고맙습니다. 생각해 볼게요."

 

"꼭 와요!" 래리티는 내가 연주하던 곡을 콧노래로 흥얼거리며 총총히 자리를 떠났다. 래리티의 뒷모습이 길 건너편 잡화점 출입구 너머로 사라져 갔다.

 

래리티가 건네준 목도리가 도톰하기는 했지만, 그보다도 그녀의 진심 어린 따듯한 마음이 나를 더 편안하게 해주었다. 나는 계속 연주해 나갔다. 해가 서서히 고도를 낮추어 갔다. 태양이 서쪽 지평선 너머로 기울어 가며 찬란한 붉은 석양을 띄워, 지나는 이들의 솜털 위로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장을 보고 나온 래리티가 가방에 물건을 가득 넣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대략 열 번 정도 항아비곡 제7곡을 완주하고 난 다음일 것이다.

 

솔직하게 말해보자. 래리티가 가다 말고 또 그릇에 3비트를 넣어 주었을 때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어쩜, 이렇게 아름다울 데가!" 그렇게 말하더니 가까이 다가서며 물었다. "그나저나 맙소사. 자기 추위를 타도 너무 타는 거 아니에요? 혹시 어디 안 좋은가요?"

 

이번에는 웃어 보이기가 좀 더 버거웠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현을 계속 퉁기며 차분하게 대답하기는 했다. "아, 전 괜찮아요." 나도 모르게 눈을 찡긋하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렇지 않아도 어떤 친절한 분께서 좀 전에 이 목도리를 주고 가셨거든요."

 

"흠흠, 안목이 대단한 분이셨나 봐요!" 래리티가 경의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쪽 눈과 아주 잘 어울려요. 언제 한번 들르세요. 스웨터 재킷 하나 만들어 드릴게요. 지금 입고 계신 것도 좋은 물건이긴 한데, 슬슬..."

 

"좀 낡아 보이긴 하죠?"

 

"어쩜 그리 제 생각을 잘 아실까!" 래리티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연주 솜씨만 뛰어나신 게 아니라, 사람 마음을 읽는 재주도 있으신가 봐요?"

 

"뭐 비슷하긴 하네요." 하고 대답했다. "언제 시간 내서 의상실에 한번 들러 볼게요."

 

"꼭 와요." 래리티는 콧노래를 흥흥 부르며 가 버렸다. 이제 그녀는 다시 아무것도 모르는 선량한 이방인이었다.

 

그 날치 연습은 그쯤 해두자는 생각이 들었다. 동전이 가득 찬 그릇과 리라를 챙겨 가방에 집어넣었다. 목이 좀 말라 슈가큐브코너로 직행했다. 케이크 부인이 가게를 보고 있었다. 테이블 하나를 골라잡아 앉았다. 본인이 두른 앞치마만큼이나 환한 미소로 케이크 부인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포니빌은 처음 오세요?"

 

"보자......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군요." 하고 빙긋 웃었다. "허브티는 얼마나 하나요? 좋은 걸로."

 

"1비트에요."

 

"그럼 허브티 한 잔에 데이지 샌드위치까지 해서 3비트면 될까요?"

 

"되고말고요!" 케이크 부인이 발랄하게 대답했다. 저 목소리가 얼마나 듣기 좋은지 케이크 부인도 아셔야 할 텐데. 이 분 목소리 하나만 가지고도 졸업논문 하나는 뚝딱 나올 것이다. 슈가큐브코너의 주방은 매장 뒤편에 설치되어 있다. 케이크 부인이 주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나는 느긋하게 가방에서 동전이 담긴 그릇을 꺼냈다.

 

바로 그 때, 두 테이블 떨어진 곳에서 누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흘끗 보니 후브스 부인과 그 딸인 딩키가 앉아 있었다. 울고 있던 것은 꼬마 유니콘이었는데, 그 울음이 서럽기도 서럽지만 아예 자기를 놓아 버리고 우는 듯했다. 내가 알기로 더피 후브스의 딸이 사람들 앞에서 저렇게 확 울어제끼거나 하는 성격은 전혀 아니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딩키는 두 앞다리로 얼굴을 감싸고 엉엉 울고 있었고, 그 어머니는 옆에 앉아 가만히 속삭이며 아이를 달래고 있었다. 내가 앉은 자리에선 더피가 뭐라고 하는지 알 길이 없었지만, 적어도 그 얼굴에 떠오른 진심어린 미소는 볼 수 있었다. 어느 한 지점에서부터 마음이 통한 것인지, 딩키가 울음을 그쳤다. 꼬마는 눈물을 문질러 닦고 어머니와 꼭 닮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딱 그 시점에 핑키 파이가 나타났다. 늘상 그랬던 것처럼 폴짝폴짝, 난리를 치며 슈가큐브코너 한복판에 들어서더니 가게에 있던 꼬마 몇몇을 데리고 온갖 정신나간 말장난과 몸짓 놀이를 하며 놀아 주었다. 핑키의 온갖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본 꼬마들이 저마다 깔깔대며 박수를 쳤다. 더피가 핑키 쪽을 가리키며 딩키의 등을 두드렸다. 핑키를 비롯한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 오라는 뜻이었다. 어린 유니콘의 얼굴 한편에 남아 있던 슬픔이 어린애 특유의 활기로 뒤바뀌었다. 딩키가 핑키 쪽으로 후다닥 달려가는 모습에 더피의 한쪽 눈이 계속 가 있었다. 한편으로 입술 밖으로 새어나가는 한숨은 어찌 감추지 못했는데, 그 얼굴은 한편으로 우울해 보이기도 했다. 젊은 엄마는 테이블에 얼굴을 기대고 푹 엎어지고 말았다.

 

나로 말하자면 더피 쪽을 보느라 정신이 팔려서 근처까지 다가온 케이크 부인의 모습을 거의 놓칠 뻔했다. 케이크 부인 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자리에 가만히 서서 슈가큐브코너 내부를 멍하니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따끈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한 잔의 차와 데이지 샌드위치를 올려둔 트레이를 들고 있었는데, 그걸로 뭘 어떡해야 할지는 이미 잊어버린 듯했다.

 

"이상하다..." 말 한 마디, 한 마디마다 케이크 부인이 멍하게 눈을 깜박이는 게 보였다. "이걸 뭐 어떻게 해야 하기는 했는데..." 그리고는 방향을 틀어 주방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걸 뭐 어떻게 하려는 거였더라? 벌써 노망이 드나......"

 

헛기침을 해 신호를 보냈다.

 

케이크 부인이 이쪽을 보더니, 금방 정중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포니빌은 처음이신가 봐요?"

 

"보자..." 빙긋 웃어 보이고 말했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군요. 그나저나 뭐 문제라도 있으신 것 같아요. 괜찮으세요?"

 

"아, 그럼요!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기억이 나질 않아서..." 케이크 부인이 트레이에 올라간 게 음식이 아니라 개미떼이기라도 한 양 얼굴을 찌푸렸다. "아이고. 내일 시장님 주최로 식사 자리가 있다고 해서 거기 올릴 케이크도 구워야 하는데 큰일이에요."

 

부러 목을 쭉 빼고 트레이 위를 들여다보는 척하고 묻는다. "허브티랑 데이지 샌드위치네요?"

 

"음, 네. 그거죠."

 

"흐으으음......" 테이블 위에 금화 몇 닢을 올려둔다. "다 해서 3비트 정도면 될까요?"

 

"어머! 어... 드시려고요?"

 

빙긋 웃고 대답했다. "괜찮은 메뉴 같은데요. 한번 먹어보려고요."

 

"그러시다면야! 하마터면 버릴 뻔했지 뭐에요!" 케이크 부인이 내 자리에 찻잔과 샌드위치 접시를 올려주었다. 이쪽은 3비트를 케이크 부인에게 건넸다. 케이크 부인은 동전을 받아넣고 가볍게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슈가큐브코너에서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혹시 더 필요하신 거 있으시면 불러만 주세요."

 

"그러죠." 케이크 부인이 자리를 옮긴 뒤, 찻잔을 들어 한 모금 천천히 마셨다. 따뜻한 게 들어오니 추위가 조금 가시는 느낌이었다. 좀 쉬면서 비곡 연주에 뭐 빠진 것이 있나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했다. 항아비곡 제7곡의 마지막 부분에서 뭔가 하나 누락된 게 있기는 한 모양이어서 그게 뭘까 생각할 시간으로 배분한 것인데, 그 시간으로 후브스 부인 쪽만 쳐다보고 앉아 있었다.

 

더피는 슬픈 사람이다. 동네 사람들 중 이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포니빌 배달원을 그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 버리는 대부분의 치들은 그런 의미에서 죄인이라 할 것이다. 나 또한 그 죄인의 무리에 끼어 있었으나, 그것은 더피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탐색하는 과정에서 생긴 의문 때문이다. 왜 더피가 저렇게 괴로워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엉엉 우는 딩키를 달래는 더피의 모습에서 그 실마리를 보았던 것 같다.

 

찻잔을 비우고 나서 그닥 고상하지는 않은 모습으로 데이지 샌드위치를 아귀아귀 먹어치운 뒤, 가방을 챙겨 더피가 앉은 테이블 쪽으로 다가갔다. 말문을 여는 일은 늘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는데, 쓸데없이 가식 떠는 것은 별반 도움이 되지 않음을 나는 오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후브스 선생님. 표정이 별로 안 좋으신데 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

 

더피가 테이블에 엎어진 채 고개를 들었다. 두 눈이 서로 다른 방향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디쯤에 서야 나를 볼 수 있을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으음... 저기 죄송한데, 저희 구면이던가요?"

 

빙긋 웃고 말했다. "우리 동네에서 가장 열심인 배달원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요."

 

"아.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인지 알겠네요." 더피가 불편한 웃음을 짓더니 한쪽 발굽으로 갈기를 쓸어넘기며 물었다. "혹시 그... 어... 댁 창문이나 뭐 그런 데를 들이받거나 해서 그러시는 건 아니죠?"

 

"히히히... 아뇨, 그런 일 없었어요."

 

"휴. 다행이네요. 기억력이 좋은 편은 아니라서."

 

"그거라면 다른 사람들도 별로 다를 바 없이 비슷비슷하답니다. 정말로요." 더피 옆에 가 앉으며 다른 꼬마들과 핑키 파이와 어울려 까르르 웃고 있는 딩키를 가리키고 물었다. "딩키는 또래 아이들에 비하면 대단한 수재랍니다. 세 번 연속으로 전교 1등을 하다니 말이에요. 알고 계셨죠?"

 

"아, 알죠!" 더피가 소리쳤다. 얼굴은 나를 보고 있었는데, 시선은 내 양 옆을 겨누고 있었다. "그쪽은 어떻게 알았죠?"

 

이래서 말문을 트기가 쉽지 않다는 거다. 잽싸게 머리를 굴려 대답했다. "저는 캔틀롯 음악 교사에요. 치어릴리 선생님께서 교육과정을 확대하려고 하신다고 해서, 그 보조 명목으로 발령받아 왔죠. 어린이들 대상으로 합주 수업을 해 볼까 계획하고 계신다고 해서요. 이 이야기도 들으셨죠?"

 

"그럼요! 들었죠." 더피가 대답했다.

 

조금 전에 썼던 말을 정정해야겠다. 내가 말하는 것 중에는 진실도 섞여 있다. 그나마도 내가 저들을 계속 관찰해 오기 때문이다. 지난 한 달 동안 치어릴리가 학교 합주부를 만들어 보려고 동분서주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더피 후브스에게는 그다지 즐거운 대화 주제가 아닌 모양이었다.

 

"우리 머핀이 그 얘길 듣고 얼마나 신나하던지 몰라요." 더피가 말했다. "아침에 눈만 뜨면 학교 데려다 줄 때까지 계속 그 얘기뿐이랍니다." 더피가 한숨지으며 무기력한 시선으로 슈가큐브코너 너머, 핑키 파이의 미쳐 날뛰는 쇼에 정신이 팔려 있는 딩키를 바라보았다. "작곡에 소질이 있지요. 실은, 바로 지난 주에 딩키를 데리고 악기점에 갔었답니다. 한번 시험삼아 불어 보라고 플루트를 하나 내어주더군요. 세상에, 제 평생 그렇게 훌륭한 연주는 처음 들어 봤답니다. 연습 같은 것도 한 번 해 본 적이 없는데 말이에요. 그 애 아버지처럼... 타고난 재주가 있는 거죠." 더피는 유독 마지막 한 문장을 말하기 어려워했다. 얼굴 위로 슬픔이 내비쳐져 안색이 더욱 창백해 보였다.

 

"좀 전에 보니 울고 있던데..." 나는 말했다. 몇몇 곡에는 악장과 악장을 이어주는 경과부가 없는 경우가 있다. 가끔은 입게 될 큰 상처를 감수하고라도 후렴부로 직행하는 편이 낫다. "합주부에 못 들어가게 되어 그런 것 아닌가요."

 

더피는 움찔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이제 와서 말을 그만두거나 할 심산이 아닌 것도 명백했다. 사람들은 다들 하고 싶은 말을 가슴에 담고 산다. 이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슬며시 물으면, 사람들은 곧장 속에 담긴 말을 전부 털어낸다. 설마 그게 내 존재가치인가. 생각해 보면 세상에 그런 바가 허락된 것도 나 혼자뿐이 아닐까.

 

"저도 합주부 넣어 주고 싶죠." 더피 후브스가 불쑥 말했다. "엄마가 못나서 하고 싶다는 걸 못 해 주는 것뿐."

 

"호?"

 

"이 이야기는 가능하면 잘 안 하려고 하는데... 딩키한테는 더더욱 할 수 없는 이야기죠. 요즘 생활이 너무 고달파요." 더피가 고개를 푹 숙이고 테이블만 쳐다보며 발굽을 느릿느릿하게 휘저었다. 그것은 사시 눈을 교정하기 위한 절박한 시도처럼 보였다. "입에 풀칠하는 것만 해도 버거울 지경이에요. 배달원 수입으로는 싱글맘 생활에 필요한 지출을 다 가리기도 어렵답니다. 애 아빠가 갑자기 사라지지만 않고 직장만 다니고 있었다면야 생활에 여유가 좀 더 있었겠죠. 밥 먹고 사는 것 외에도 다른 데 쓸 돈이 있었을 거에요. 생활도 버거운데 합주부라니......?" 더피가 한숨을 푹 내쉬며 젖어 오는 두 눈을 문질러 닦았다. "딩키는 착하고 좋은 딸이에요. 엄마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감내할 수 있지요. 그런 아이가 플루트만 불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하는데. 그런 소질이 있는데, 정말 제 딸이 그런 소질을 타고났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데......"

 

"음악적 재능은 다른 소질 가운데서도 제일이지요." 차분히 웃으며 대답했다. "자랑스러워하셔야죠. 딩키가 존재 자체로 어머님 마음을 울리듯이, 그 솜씨라면 다른 사람들 마음도 충분히 울릴 수 있을 거에요."

 

"필요한 걸 해 주지 못하면 그 누구의 마음도 울릴 수 없을 테죠." 더피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리 머핀이 예의가 바르기는 또 얼마나 바른지, 나이가 많건 적건 항상 공손하게 대한답니다. 학교에서도 항상 열심히 공부하고요. 집에 와서도 열심이랍니다. 얼마나 착한... 착한 딸인지..." 더피가 훌쩍이며 눈가에 맺힌 눈물방울을 문질러 닦았다. 눈물은 잿빛 뺨에 스치지도 못하고 지워졌다. "그 딸이 음악을 하고 싶다고 하는데, 부모로서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요. 딸만큼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죠. 아이가 하고 싶어하는 걸 하는 데 필요한 플루트도 사주지 못하는 부모여서, 지금 사는 곳보다 더 사람 사는 것 같은 집 구하는 건 엄두도 나지 않고요. 세상에 무슨 사랑이 이래요?"

 

몸을 기울여 더피의 발굽을 가만히 잡았다. "따님도 평생 어머님이 자기를 어떻게 사랑해 주셨는지 기억하고 감사해할 거에요. 세상에는 돈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면서 자기 자식에게 일말의 존중은커녕 관심도 보이지 않는 부모들도 있답니다. 어머님은 그런 부류가 아니시잖아요. 플루트가 아니어도 어머님께서 딩키가 원하는 걸 해주실 수 있는 방법이 분명히 있을 거에요. 딩키에게 정말 필요한 건 이미 해주시고 계시니까요. 설령 제가 지금 당장 드린 말씀 전부를 잊어버리시더라도, 제 말에 눈물지으신 그 마음만은 잊지 않으실 거고요. 진심이란 영원한 것이니까."

 

더피가 다시 훌쩍였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더피의 두 눈이 나를 똑바른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더피는 지금 일기를 적는 이 순간까지 마음 한켠이 따뜻해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선생님처럼 친절하고 사려 깊은 분이 하신 말씀을 어떻게 잊겠어요?"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항상 그랬듯 따님 곁에 계셔 주세요. 언젠가, 어떻게든 딩키도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게 될 거에요. 약속드리죠."

 

더피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딩키가 까르르 웃으며 폴짝폴짝 달려와 더피 주위를 빙빙 돌며 핑키 파이가 주워섬긴 실없는 농담을 한없이 늘어놓았다. 더피는 차마 딸을 안아주지 못하고 있다가, 달려들듯이 꼬마 유니콘을 꼭 끌어안았다. 딩키가 깔깔 웃으며 더피의 품으로 파고들었고, 더피가 딸의 뺨에 얼굴을 비볐다.

 

이때쯤에서 한기가 갑작스레 느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덜덜 떨면서 스웨터 재킷 소매를 잡아당겼다. 입술 밖으로 하얗게 응어리진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기억에서 사라질 때면 늘 이랬었다.

 

더피의 한쪽 눈이 이쪽으로 향했다. 더피가 깜짝 놀라 움찔했다. "어머,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시죠?"

 

헛기침을 해 목을 닦고, 떨리는 몸을 애써 억누르며 대답했다. "실례했군요."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저 오신 분이 계신 것도 모르고."

 

"무슨 말씀을!" 더피의 목소리와 딩키의 웃음소리는 잘 어울렸다. 확실한 것은, 더피가 행복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슈가큐브코너잖아요. 누구나 앉고 싶은 자리에 앉을 수 있죠. 그렇지 우리 머핀?"

 

딩키는 웃기만 했다. 핑키 파이가 애들 다루는 솜씨는 언제 봐도 질투가 난다. 이쪽은 아직도 동요와 자장가를 다 깨우치지 못했는데.

 

"아뇨, 슬슬 가 봐야 해서." 라 대답했다. 사실이었다. 어느덧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는데, 트와일라잇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 머지않아 밤이 될 것이고, 밤이 되면 그 누구도 만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럼 두 분 모두 즐거운 저녁 되시길."

 

"하하...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더피가 말했다. "지금도 충분히 즐거운 시간이랍니다."

 

슈가큐브코너를 나와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기거하는 도서관을 향하여 느린 걸음을 옮겼다. 밤이 한 걸음 더 다가서자 하늘에 걸린 박모薄暮가 짙고 푸른 이불처럼 머리 위에 내걸렸다. 길가에 나다니는 사람들이 저마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왜 사람들이 해만 지면 그리들 급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것인지 나로서는 이해할 방법이 없다. 유독 포니빌 사람들은 그 정도가 남달랐다. 느긋하게 저 너머로 기우는 저녁의 상쾌하고 서늘한 숨결을 달래어 밤의 품 속으로 밀어 넣어 주는 취미는 나만 갖고 있는 건가 싶었다. 어렸을 적 어머니께서 가르쳐 주신 피아노 곡의 선율을 따라 나직한 콧노래를 부르며 걸음을 옮겼다. 더피, 딩키 가족에 비하면 우리 가족은 훨씬 유복한 편이었다.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어느 순간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잃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평생 한 번 해본 적 없다. 지금쯤 가족들은 무얼 하고 있을런가 궁금하기는 했다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생각해 보면 그 때 흥얼거린 피아노 가락이 과거의 따뜻한 기억들을 불러들인 것은 아닐런가. 지금 이 순간은 그 때보다 덜 추운 것인가.

 

포니빌 길가를 따라 늘어선 가로등이 환하게 빛을 발할 때쯤 트와일라잇의 도서관에 도착했다. 문이 열려 있었는데, 보조사서가 뭘 안으로 들여놓고 있는 듯싶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내 생각대로였다. 캔틀롯에서 송달된 고서 꾸러미가 여러 개 놓여 있었고, 스파이크는 그 꾸러미를 집어 다른 쪽으로 옮겨놓는 중이었다. 이쪽을 보더니 유쾌하게 팔을 흔들어 인사했다.

 

"안녕!" 스파이크가 꾸러미를 방 반대쪽으로 옮겨놓으며 소리쳤다. "후드 멋있네!"

 

"감사." 나는 답했다. "스파클 양 계시니?"

 

"걔는 왜? 혹시 약속이라도 했어?"

 

"스파아아아이크!"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라벤더빛 유니콘이 홀 밖으로 나와 현관으로 다가섰다. "이퀘스트리아 영웅서사와 그 영웅들 전집 든 소포 풀었어? 여덟 권짜리 다 들어 있는 거..."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깜짝 놀라며 말을 멈추더니, 트와일라잇이 말했다. "어머. 죄송해요. 누가 와 계신 줄 전혀 몰랐지 뭐에요!" 눈을 크게 한 번 꿈벅이더니 싱긋 웃는다. 뺨 위로 작은 보조개가 패인다. "뭐 필요하신 거라도?"

 

혹시 전에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얼마나 말도 안 되게 귀여운 녀석인지 적었던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네."

 

"좋아요. 그게... 음... 저도 최선을 다하기는 하겠지만, 폐관 시간이 얼마 안 남은 건 염두에 두셔야 해요. 중요한 편지도 써야 하고..."

 

"셀레스티아 공주께 드리는 편지 말이군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압니다."

 

"안녕!" 스파이크가 다시 지나쳐 간다. "후드 멋있네!"

 

"그래, 네가 그렇다면야." 고개를 돌려 씩 웃으며 트와일라잇을 마주보았다. "걱정하지 말아요. 일단 제 얘기 들어 보시면 그... 어... 완전히 혹하실 테니까. 제가 필요한 건 딱 한 가지기도 하고."

 

"호오?"

 

"공주님께 드릴 편지가 늦어지거나 할 일은 없을 거에요. 약속하죠."

 

"늦어지다뇨?"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살짝 긴장한 듯한 웃음을 웃었다. "느, 늦어져도 그게 뭐 무서울 일이겠어요?"

 

"하하하... 좋아요." 근처 나무 의자로 다가가 쿵 하고 주저앉으며 가방을 뒤적였다. 고개를 들어 트와일라잇을 바라보며 나직히 말했다. "스파클. 혹시 아주 마음에 드는 선율이 머릿속에서 일렁이는데, 이게 어디서 들었는지도 모르겠고 무슨 음악인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한번 흥얼거려나 보자 싶은 생각이 든 적 있었나요."

 

트와일라잇 스파클은 별 이상한 사람 다 본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불편한 심기가 내비쳐진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기사 내가 만난 사람들은 다들 한번씩은 저런 표정을 지어 보였었다. 그걸 다 주절거리자면 책이 한 권 나오고도 남을 것이다. 생각해 보니 벌써 쓰고 있군.

 

피식 웃으면서 가방에서 리라를 잡아당겨 꺼내 내 앞에 놓는다. 트와일라잇을 그윽하게 쳐다보며 말한다. "내 이름은 라이라 하트스트링스. 당신은 나를 기억하지 못할 거에요. 지금 이 대화가 있었던 것조차 기억하지 못하겠죠. 제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말하든, 지금까지 제가 만난 그 어떤 사람도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렸죠. 편지를 쓰면 전부 지워져 백지만 남고, 제 존재를 증거하는 그 어떤 기록이나 물증을 남겨놓아도 마침내 전부 사라져 없어져 버려요. 사람들의 기억에서 내 존재를 지워 버리는 이 저주가 나를 포니빌에 옭아매고 있어요. 그렇더라도 내가 사랑하는 한 가지조차 막지는 못했죠. 작곡을 막을 수는 없었어요. 내가 자아낸 가락이 그쪽의 마음 속에 스며들 수만 있다면야 아직 희망이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내 존재를 증명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세상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내 사랑을 증명할 수는 있을 거에요. 그러니 내 이야기를, 내 노래를 들어 주세요. 그것이 바로 저이니까."

 

"이게..."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미친 듯 눈을 깜박인다. 이마를 문지르더니 고개를 홱홱 젓고는 무슨 말을 하냐는 표정으로 묻는다. "이게 다 무슨 말이에요? 이해가 안 되는데요. 이거 무슨 장..."

 

"쉿." 빙긋 웃으며 앞에 놓아둔 리라를 띄운다. "일단 들어 봐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해서, 현 한 줄 한 줄을 하나하나 퉁겨 나갔다. 한나절을 동네 길거리에 서서 리라만 퉁기고 있었지만, 그것은 리허설에 불과했다. 트와일라잇의 나무집 한가운데서, 그녀의 면전에서 항아비곡 제7곡을 가능한 장엄하고 감미롭게 연주했다. 끝맺음이 어떻게 되는지 잘 모르기는 했으나, 자신감 있게 현을 데리고 놀며 연주를 마무리했다. 곡이 끝나고 나서 눈을 열어 떴다.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눈앞에 앉아 있었다. 그 좋은 머리 속에서 아직도 웅웅대고 있을 멜로디의 기억에 얼굴이 빛났다.

 

"이건..."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입을 열었다. "이거... 분명..."

 

"말씀해 주시죠." 트와일라잇을 찌르듯 쳐다보며 단호하게 물었다. "분명히 어디서 들어 보셨죠?"

 

"네... 네!" 트와일라잇이 외쳤다.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 느낌이 들긴 한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가슴이 뛰었다. 떨리는 마음을 다잡기가 힘들었다.

 

마침내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항아, 항아휘집이에요! 맞아요! 신고전시대 전기의 악곡이에요." 헝클어져 있던 머릿속 지식의 보고에서 마침내 건져 올린 정보에 트와일라잇이 활짝 웃었다. "나이트메어 문이 재림하기 전에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 한 번 들려 주셨지요. 루나 공주님께서 사악한 기운에 타락하시기 이전에 어떤 분이셨는지...... 기억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수단이라면서."

 

"그러면 이것도 묻고 싶군요." 단호히 물었다. "어떻게 마무리되는지, 기억해요?"

 

"방금 연주한 그 곡 말씀이시죠?"

 

"네."

 

"이거... 제대로 마무리된 거 아니었나요?"

 

"마무리는 되긴 했죠. 전에 한 번, 정확한 곡을 들으셨다니까 묻는 거에요. 마무리 부분이 어떻게 되죠?"

 

"이게... 이게 다 무슨 소린지 도저히 모르겠는데요!" 트와일라잇이 이쪽을 흘겨보았다. 보라색 앞머리 아래 가려진 이마가 찌푸려져 있었다. "그래요. 전에 이 곡을 들어 본 건 사실이에요.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 항아휘집에 남은 것을 개인적으로 가져오셔서 들려 주셨으니까! 그쪽은 무슨 수로 이 곡의 존재를 알아낸 건데요?"

 

"나도 들어 봤으니까요." 나직히 대답했다. "자고 깰 때, 눈을 감고 뜰 때마다 머릿속에 울리거든요. 내 머릿속 벽에 마구 부딪쳐 튀어다니며 내 무의식과 연결된 마력선을 자극하죠. ...흡사 제 뿔이 이 세상 것이 아닌 것들을 잡아내어 오직 나 하나에게만 속삭이는 양 말이에요.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대체... 대체 어떻게요? 왜요?"

 

"그쪽에게는 들리지 않는 이유와 똑같은 이유 아닐까요. 전 그렇게 보는데."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말했다. "그 누구도 저와 나눈 대화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죠. 다른 사람들에게는 제 존재만큼이나 이 곡 또한 순식간에 잊히는 것이니까."

 

"네?"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자리에 푹 주저앉으며 물었다. "하트스트링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시죠. 순식간에 잊히다니 무슨 뜻이죠?"

 

빙긋 웃음이 나왔다. 마침 스파이크가 근처를 지나가길래, 휘파람을 불어 멈춰세웠다. "안녕. 녹색 가시 친구."

 

"안녕!" 스파이크가 마지막 꾸러미를 들고 서서 대답했다. "후드 멋있네."

 

"그 얘기 했잖니, 스파이크!"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얼굴을 구겼다. "벌써 몇 번째 똑같은 소리 하고 있는지 알아?"

 

"몇 번째라니?" 스파이크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트와일라잇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미안한 얘기지만, 이쪽은 소포 뜯느라 다른 데 있다 왔다구. 난 저분 처음 보는데!"

 

트와일라잇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뭐라고 하려던 것을 막아서듯 말했다. "스파이크. 부탁 하나만 하자. 자키 구달*1 저, 제브라하라 동물학, 이란 책을 대출하고 싶거든. 트와일라잇이랑 얘기할 게 있어서 그런데 책 좀 찾아다 줄 수 있을까?"

 

"물론이지! 제브라하라 동물학. 금방 갖다 줄게!" 어린 보조사서가 자료실로 달려갔다.

 

"어..." 트와일라잇이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왜 갑자기 구달 선생 책을 찾으시는 거죠?"

 

"그 책 자체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 나는 답했다. "다만, 여기서 가장 먼 서가에 꽂혀 있는 책이라는 건 알고 있죠."

 

"그걸 어떻게 아시죠? 제 알기로 도서관에 오신 건 이번이 처음인데요. 적어도 제가 수석사서 자격으로 여기 체류하기 시작한 후부터는 그런데."

 

"흠...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도서관에 올 일이야 있었죠. 그것도 아주 많이."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그것도 전부 그쪽이 포니빌 시립도서관 수석사서로 오고 난 다음이고요."

 

"전 그쪽을 뵌 적이..."

 

"다른 것도 더 말씀드릴까요. 저랑 스파클 양이 포니빌에 온 시기 자체도 별로 차이가 없어요." 이 다음은 말하기 힘들었다. 여기까지 평정을 가장하고 있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었지만, 갈수록 나아지고 있는 듯하다. "저도 그쪽처럼 캔틀롯 출신이에요. 우리 가족은 스타스월 거리, 순백Alabaster지구 상층에 살았지요."

 

"스타스월 거리요?!" 이 이야기를 꺼내자 트와일라잇이 눈을 빛내며 귀를 쫑긋했다. "거기라면 제가 살던 곳에서 거리 두 개 정도밖에 안 떨어진 곳인데요!"

 

"484 네뷸라 가였지요." 트와일라잇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그쪽 아파트 바로 아래층에 문댄서가 살았고요."

 

지금까지 수백 번은 들었던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더니 트와일라잇이 말했다. "이상하기도 해라. 그쪽도 문댄서를 알아요?"

 

"그래요. 소꿉친구였으니까."

 

"둘이 그런 사이였군요? 문댄서 요것이 나한텐 왜 말 안 했지?"

 

"그렇지 않아요." 나는 말했다. "둘이 아니라, 우리 셋이에요. 그쪽, 문댄서, 나. 이렇게 셋. 우리 셋은 마법 유치원 입학까지 같이 했었지요. 다른 거야 뭐 기억하시겠... 아니지, 기억하겠죠."

 

트와일라잇이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떡 벌리고 이쪽을 쏘아보았다. "그랬으면..." 마른침을 삼키고 고개를 저으며 덧붙이기를, "그, 그랬으면 제가 다 기억했겠죠! 문댄서랑 제가—"

 

"몇 년 동안이나 하계 마법 캠프도 같이 다니고 그랬지요. 그쪽이 겨우 일곱 살이 되던 해 여름에 순간이동 마법을 써 보겠다며 실제로 썼다가 근위대 감시초소 꼭대기로 날려간 건 기억하시겠죠. 그 날 오후 반나절을 그쪽 도로 데려다 앉혀야 한다며 어디 지나가는 페가수스 분 없나 찾아다니면서 보냈어요. 얼마나 놀랐는지, 엉엉 울기까지 하더군요. 문댄서랑 같이 근처 도넛 카페까지 데려다가 겨우 진정시킨 기억이 나네요. 바로 그 때 왕립 영재 유니콘 학교 입학승인을 받은 걸 얘기했고요. 우리가 질투에 눈이 멀어 절교를 해 버리진 않을까 무서워서 꽁꽁 숨겼지요 아마. 우리가 어디 그럴 사람이었겠어요. 그쪽이랑 같이 어울려 다니던 하루하루, 매 순간이 얼마나 소중했는데. 시간이 지나 문댄서와 저도 입학승인을 받았지요. 그쪽이 교정 견학시켜 준다며 데리고 다녔고요. 덕분에 다른 신입생들과는 달리 1학년 생활이 고단하지는 않았어요. 문댄서랑 제가 얼마나 고마워했는지 몰라요."

 

트와일라잇은 가만히 내 말을 듣고만 있었다. 말이 끝나고 나서야 멀찍한 한쪽 구석을 쳐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전부... 있었던 사실이기는 해요. 말씀하신 순간들 중에 그쪽이 포함된 순간은 없어요. 문댄서와 저 둘뿐이죠. 하트스트링스, 당신이 전혀 기억에 없는데요." 트와일라잇이 이쪽을 쳐다보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이게 한심한 장난질이 아니란 걸 어떻게 입증하실 테죠? 레인보우 대쉬가 이렇게 하라고 시키던가요?"

 

"아하. 레인보우 대쉬가 핑키 파이와 작당하고 잉크란 잉크를 전부 투명 잉크로 바꿔 놓았을 때처럼 말이죠?"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면 레인보우 대쉬가 골탕먹이려고 숨겨 둔 케첩 양동이를 잘못 건드려서 갈기가 온통 케첩 범벅이 된 통에 욕실로 급히 달려 들어갔더니 물통에 물은 없고 웬 냉동 튀김만 가득 들어 있었던 때를 말씀하시는 건가?" 빙글빙글 웃으며 심호흡하고 말했다. "그렇지. 그쪽 뿔이 뚝 떨어진 것처럼 당신을 낚은 적도 있었군요. 건강 걱정으로 머리가 꽉 찬 심기증 환자처럼 도서관에 콕 박혀서 지금까지 보고된 모든 유니콘 특유의 질병을 찾아다니느라 종일 밤을 새웠었죠, 아마? 그 일 때문에 전에 슈가큐브코너에서 거하게 점심 대접을 해야 했다고 하던데......"

 

"어떻게... 어떻게 이걸 다 알고 있는 거죠?"

 

"그야 그쪽이 말해 줬으니 알지요."

 

"전에도 얘기를 했었다, 는 건가요?"

 

"수십 번도 넘죠."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수도 없이 주워섬긴 말을 다시 끌어와 다시 줄줄 읊으려니 고역도 이런 고역이 없었다. 까칠해지려는 마음을 애써 다잡아, 친절하고 말 잘하는 사람의 가면을 유지했다. "트와일라잇. 그쪽이 아주 영리한 유니콘인 건 자명한 사실이에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봐 왔으니, 어릴 때부터 잘 알고 있죠. 사람들하고 잘 지내는 걸 보니 얼마나 마음이 놓이는지 몰라요. 이전에 반복했던 수많은 대화와 마찬가지로, 당신이 결국 지금 이 대화도 잊어버리고 말 거라는 것도 사실이죠."

 

"아니... 맨정신으로 누가 그걸 쉽게 믿겠—"

 

한쪽에서 꼬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으으음... 트와일라잇?"

 

트와일라잇이 고개를 돌렸다.

 

스파이크가 자리에 서서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손에 책 한 권을 쥔 채 조금 전 들어간 자료실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나한테 뭐 시킨 거 같은데, 그게 저... 음..." 스파이크가 손에 쥔 두툼한 책을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제브라하라 동물학? 어우, 이거 너무 구식이야. 얼룩말들 인종차별하는 책이라고. 장서로 보관해두는 이유가 뭐야 대체?"

 

"그거야, 조금 전에 여기 라이라 하트스트링스 씨가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신 책이잖아."

 

"라이라 누구?"

 

"안녕!" 빙긋 웃으며 발굽을 흔들었다.

 

"오!" 스파이크가 눈을 깜짝하더니 말했다. "안녕! 후드 멋있네!"

 

"너 지금 라이라 씨 기억 안 난다는 뜻으로 하는 소리니?" 짜증과 혼란이 뒤엉켜 트와일라잇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여기서 나랑 한참 동안이나 말씀 나누시고 계시잖아! 넌 그 앞을 무려 세 번이나 왔다갔다했다구!"

 

"아이쿠! 미안하게 됐어! 몰랐지 뭐야! 그나저나 슬슬 폐관 시간 아니야? 낯선 손님 들이기에는 좀 늦은 시간 같은데?"

 

"스파이크—"

 

"그냥 간단한 담소나 나누고 있었어." 안심하라는 제스처를 내보이며 말했다. "그렇게 신경 안 써도 돼."

 

"에휴... 뭐 됐다." 스파이크는 신음하며 두툼한 책을 말 그대로 질질 끌면서 멀어져 갔다. "나는 보조사서지 문지기 같은 게 아니라구."

 

스파이크가 자료실로 사라진 뒤,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던 트와일라잇을 돌아보고 말했다. "봤죠? 제가 안 보이는 곳으로 갔다 오니 저렇게 됐어요. 일정 거리 이상으로 거리를 두게 되면 제 존재를 금방 잊게 되지요."

 

"그럼... 어... 다른, 다른 조건 같은 건 없나요?"

 

가까이 있던 창 밖을 내다보았다. 석양이 남긴 붉은 립스틱 자국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밤이 이끌고 온 어둠이 세상에 내려앉고 있었고, 머지않아 창백한 달이 떠오를 것이었다.

 

"시간." 콧김을 뿜으며 툭 던지듯 말했다. "보통은 몇 분 내로 잊어요. 가끔씩은 한 시간 정도. 아주 드물게 그보다 오래 가는 경우도 있기는 있지만, 뭐 어차피 내 존재까지 잊어버릴 테니까 생략하자고요. 이것 때문에 한 번 만나러 올 때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을 계속 되풀이해야 해요. 그쪽한테 꼭 물어 봐야 하는 걸 보자마자 툭 물어 보면 서로 곤란할 테니까."

 

"정말 죄송하긴 한데, 설명을 좀 해 주셔야겠는데요!" 트와일라잇의 외침은 얼굴이 씰룩일 정도로 찌푸린 표정만큼이나 날카롭고 거칠었다. "이런 건 난생 처음 본단 말이에요! 설령 이게 사실이라 쳐도, 그 누가 그런 삶을 감당할 수 있겠어요?"

 

"뭐 그럭저럭 견디고 사는 거죠. 고단하긴 한데, 그럭저럭 나 혼자서도 견딜 만 합디다."

 

"이건 내가 납득할 만한 설명이 아니에요.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입증할 증거를 더 보여 주셔야—"

 

"그러면 공주님 슬하 수제자로 들어가서 왕궁에서 보낸 첫 주 이야기를 할까요..." 그렇게 운을 띄웠다. "공주께서 그쪽을 데리고 가신 곳에 역사상 거대한 족적을 남겼다고 평가받는 유니콘 위인들의 초상화가 가득 걸려 있었다고 하더군요. 턱수염 스타스월의 초상을 바로 알아보고 왠지 모를 자부심도 느꼈었고. 공주께서 그쪽을 한쪽으로 데리고 가 무엇인가 한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저 초상화의 주인들은 전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었어요. 그 모두가 공주께서 오랜 세월에 걸쳐 길러내고 또 길러내신 수제자들이라는 것이죠. 이제 그들의 후배로 당신이 문하에 들었다는 거에요."

 

트와일라잇의 시선은 계속 나를 향해 있었는데, 부드러워 보이기도 하고 연약해 보이기도 했다. 그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나긋하게 계속 말했다.

 

"바로 그 때 죽음이란 게 어떤 것인지, 진실로 이해했다고 했지요. 활기와 생명으로 가득 찬 어린 나이에 말이에요. 셀레스티아 공주님의 직계 제자로 간택된 그 형언할 수 없는 천운을 타고난 자기 자신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모든 것의 끝을 의미하는 개념만큼은 알지 못하고 있던 자신을 그 때 직시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 때 저 초상들을 올려다보며 머릿속으로 역사를 되짚어 나갔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 또한 그 나름대로의 역사가 있을 것이며 나는 거기서 한 페이지에 불과한 것이구나, 잘 해 봐야 저기 초상화로밖에 남지 못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더군요. 결국 울음을 터뜨렸는데 왜 눈물이 나는지는 끝내 당신도 모르셨다고 했고요. 셀레스티아 공주께서 밤새 곁에 계시며 울음을 멈출 때까지 옆을 지켜주셨지요. 심지어 그쪽을 달래시느라 해를 띄우시는 것도 조금 뒤로 미뤘다고 들었어요. 15년 전 어느 날 아침이 그날따라 유독 어두컴컴했던 이유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 이만하면 입증이 됐겠죠."

 

말을 마치고 빙긋 웃으며 한쪽 발굽으로 트와일라잇의 발굽을 잡았다. 순간 트와일라잇의 몸이 떨렸다. 어느 날 현제賢帝께서 그리하셨듯, 떨리는 몸을 달래 주려 애쓰며 말했다.

 

"이것도 트와일라잇, 당신이 해 준 얘기에요. 바로 몇 주 전에 아주 진솔한 대화를 나누다 들은 이야기지요. 끝없이 공부하는 이유, 밤을 새워 책에 매달리는 이유, 단 한 순간도 책에 담긴 내용을 머릿속으로 정리하지 않은 채 허무하게 날아가는 시간이 없게 하려는 이유, 가능한 모든 지식을 당신의 머릿속에 집어넣으려는 이유. 지금 이 순간의 역사에도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우리 스스로 받아들여 세상을 더 이롭게 할 수 있는 정보가 우리 안에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우리 이전의 수도 없는 선조들이 살다가 간 것이라고. 자기 자신의 지성을 단련하지 않음은, 우리보다 먼저 이 땅에 살았던 선조들의 유산을 잊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그쪽 말씀에 따르면 셀레스티아 공주님은 그쪽에겐 스승 이상의 존재라고 하더군요. 우리나라의 심장 자체라고 해도 될 거에요. 그쪽도 마찬가지로 조화의 원소를 한데 묶는 존재로서 우리나라를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하고 싶어하죠. 공주님께도 최선이라 할 수 있는 대안을 내고 싶어하고요. 이렇게 보면, 당신은 공주님이 보여 주신 초상화 속 한 인물에 안주할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죠."

 

조금 전보다 축축하게 젖은 눈동자 위로 비친 내 모습이 빙긋 웃고 있었다.

 

"그쪽 친구들이 수도 없이 그 흔한 남자친구 하나 안 만들고 혼자서 뭐 하는 거냐고 물었을 테지요. 나름대로 좋은 뜻으로 캐물은 그 소리를, 당신은 그런 시시한 얘기는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척 한 귀로 도로 흘려 버렸어요.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바꿔 놓아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그런 것까지 품고 갈 여력이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강박이라기보다는 그쪽의 유별난 점이라고 해둬야 할까요? 평생에 걸쳐 배우고 익힌 지식을 집대성한 일종의 종합 연감 같은 것을 쓸 계획이 있다고도 했었군요. 역사상 최고의 고전으로 세대에 세대를 이어 전할 그런 책을 목표로 말이죠. 전에 듣기로는 그 제목을 '조화의 길'이라 정했다고 했었지요.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그 책을 생각한다고 하셨었죠. 언젠가 세상을 뜨고 아주 오랜 세월이 흘러서도 셀레스티아 공주께서 매일 아침 해를 띄운 다음 당신이 세상에 남긴 족적을 생각하시면서 그 책을 들춰보시는 생각도 같이 말이에요. 트와일라잇 당신이 죽을 만큼 두려워하는 것은 단 하나, 잊히는 것이라는 것이죠. 다른 사람들도 다들 마찬가지긴 하지만."

 

말을 마쳤을 즈음, 트와일라잇은 나를 매섭게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내 이야기를 깊이 듣고 있었다. 몸을 한 번 파르르 떤 트와일라잇의 뺨 위로 한 방울 눈물이 굴러 떨어졌다. 그녀는 발굽으로 얼굴을 문질러 닦고, 몸을 떨며 그보다도 더욱 떨리는 목소리로 나직히 말했다.

 

"대체... 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이번에도 내 말을 들어 줄 것임을 나는 알았다. 순간 심장조차 멈춘 것 같았지만, 이미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창 밖을 내다보았다. 달은 아직 뜨지 않았다. 한숨을 푹 쉬며 대답했다. "지금으로서는 작년 하지 태양절 축제 때문에 포니빌에 왔다가 이런 꼴이 되었다고밖에 할 말이 없네요."

 

"작년이요?" 트와일라잇이 울먹이며 말했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이트메어 문이 재림한 바로 그 날 밤?"

 

"네."

 

"그 때 지금 이 지경이 된 무언가가... 당신을..."

 

"저주지요." 나는 말했다. "적어도 내 입장에선 저주가 확실해요. 하... 뭐 달리 표현할 말도 없는 것 같긴 하지만."

 

"하지만... 이게 어떻게 가능하다는 거죠? 그 저주라는 것과 루나 공주님, 그러니까 나이트메어 문이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건가요?"

 

"여기까지 오는 데만 해도 시간을 너무 썼군요." 목소리를 내리깔고 말했다. "지금 여기서 자초지종을 다 털어놓기에는 시간이 없어요. 당장 얘기를 시작한다 해도 중간에 저를 도로 잊어버릴 게 뻔하고."

 

"그럼 적으시면 되잖아요!" 트와일라잇이 소리쳤다. 축축히 젖은 눈이 펜과 종이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어디다 적어 두시면 같이 읽으면서—"

 

"적어 봤자 소용 없어요. 누가 와서 보더라도 백지로밖에 안 보이거든요. 저만 빼고."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사실이에요. 벌써 포니빌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여러 곳, 여러 장소를 골라 글을 적어두고 돌아다녀 봤거든요. 어떤 식으로든 제 존재를 언급하는 글은 그 누구도 읽을 수 없어요."

 

"그것도 좀 멀리 떨어지거나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그렇게 되는 건가요?!"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말했다. 거칠어진 숨을 헐떡이다가, 갑자기 반색하고 말했다. "그래요! 셀레스티아 공주님께 편지를 쓰죠! 지금 당장! 녹염은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에라도 거의 동시에 소식을 전할 수 있으니까요! 셀레스티아 공주님이라면 이 저주를 치유하실 수 있을 게 틀림없어요! 스파아아아아아이크—!"

 

발굽을 들어 트와일라잇의 말을 잘랐다. "그것도 벌써 해 봤어요."

 

"해 봤다고요?!"

 

"그래요. 몇 달에 걸쳐 총 세 번 시도해 봤지요. 공주님께 편지를 보내 봤자 녹색 연기 아래 남는 거라곤 시커먼 재밖에 없을 거에요. 그쪽이 편지를 쓸 때 참고하는 기억이 단기기억이지 장기기억이 아니듯, 편지에 적은 글줄도 결국 순간이동 과정에서 죄다 타 버리게 되거든요."

 

"그럼... 그럼..." 트와일라잇이 생각을 쥐어 짜내느라 말을 더듬었다. 이 정도까지 저주의 성질을 '이해'하고 나면, 으레 트와일라잇은 혼신의 힘을 다해서 나를 도와주려 했다. 나는 그런 그녀가 참 존경스러웠다. 그와 동시에, 내 일로 이렇게 마음 고생을 하는 걸 보는 것도 차마 할 짓은 못 되었다. 내 유일한 위안은 이 부산도 얼마 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 하나뿐이었지만, 이는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였다. "아! 사진!" 트와일라잇이 한쪽에 서 있던 캐비닛을 열어 카메라를 꺼내왔다. "그쪽 사진을 찍으면—"

 

"제 사진이라면 벌써 한 장 갖고 계시지 않나요." 자리에서 일어나 창턱 쪽으로 다가가 캔틀롯 거리를 배경으로 둘이 찍은 사진이 끼워져 있는 널찍한 액자를 가리켜 보였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제 모습이 찍혔어야 마땅한 사진이라고 해둬야겠군요. 이게... 뭐. 직접 한번 보시죠."

 

트와일라잇이 자신의 모습과 문댄서가 같이 찍힌 사진을 쳐다보았다. 둘은 서로 가까이 붙어 사진을 찍었을 사람을 향해 환히 웃고 있었다. 그녀는 생전 처음으로 그 사진을 보는 듯 눈을 가늘게 하고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이상한데요... 사진기사 분이 뭔가 착각을 하셔도 단단히 하신 것 같은데. 왼쪽에 여백이 너무 많이 남아 있어요."

 

"한 명이 들어가면 딱 알맞은 공간이죠?"

 

트와일라잇이 입술을 씹었다. 액자를 제자리로 돌려놓고, 마른침을 삼킨 뒤 이쪽을 쳐다보며 그녀는 말했다. "그러면... 포니빌을 떠나 캔틀롯으로 가세요. 셀레스티아 공주님을 알현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시면..." 내 표정을 본 트와일라잇은 말을 다 마치지 못하고 뒤끝을 흐렸다.

 

천천히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했다. "그 누구의 기억에도 남을 수 없게 만든 이 저주가, 저를 포니빌 땅에 완전히 옭아매고 있거든요." 리라와 가방을 놓아둔 자리로 돌아왔다. "나이트메어 문과 제가 마주친 곳이 다름아닌 여기 포니빌이고, 그 때부터 저주가 시작되어서 그럴 것이라는 게 지금 제 추측이에요. 포니빌 밖으로 나가려고만 하면 끔찍한 추위를 느끼게 되죠. 흡사 우주의 절대영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생각만 해도 몸이 떨려서 스웨터 재킷의 후드 줄을 홱 잡아당기며 이를 딱딱 부딪쳤다. "제가 괜히 이걸 뒤집어쓰고 목도리까지 두르는 게 아니랍니다. 가끔씩 엄습하는 추위가 도저히 못 견딜 수준으로 지독해지는 경우가 있거든요."

 

"아..." 트와일라잇이 몸을 떨며 도서관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무기력하게 우는 아이 같은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분명히 당신을 도울 방법이 있을 거에요. 내가 아직 당신을 기억하는 동안 할 수 있는 일이..."

 

"그러시다면 딱 한 가지만 부탁드리죠." 염동력으로 리라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마음을 다잡았다. "기억에는 없으시겠지만 전에도 해 주셨던 일이에요. 아주 큰 도움이 되었죠. 이번에도 해내실 수 있을 거에요."

 

"그럼요. 당연하죠!" 트와일라잇이 눈을 빛내며 일어섰다. "뭐든지 말씀해 보세요!"

 

"이 곡을 마무리해야 해요. 도와 주세요."

 

"아까 연주하신 그 곡이요?" 트와일라잇이 마른침을 삼켰다. "하트스트링스 씨. 가능한 많은 지식을 익히려고 노력하는 건 맞지만, 제가 음악에는 재주가 없어서요."

 

"음악은 지식의 영역이 아니랍니다." 빙긋 웃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음악은 마음의 영역에 있죠. 트와일라잇, 당신은 이 곡을 알고 있어요. 전에 분명히 들었지요. 전문지식을 가지고 분석해 달라는 게 아니에요. 마무리 부분이 어떤 느낌이었는지, 그것만 말씀해 주시면 돼요."

 

"그..." 입술을 깨물며 가까이 다가선 트와일라잇이 내 옆자리에 앉아 말했다. "다시 한 번 들려 주세요."

 

고개를 끄덕이고, 차분하게 다시 한 번 연주했다. 이번에는 박자를 조금 더 빠르게 가져갔다. 벌써 밤이 깊어 가는 와중이라 시간 압박을 심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얼마 되지 않아 곡이 끝났다. 항아비곡 제7곡의 본래 곡명이, 너무나 갑작스레 뚝 떨어졌다.

 

"밤의 만장." 트와일라잇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하. 이게 제목인가요?"

 

"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알고 있어요." 트와일라잇이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셀레스티아 공주님 말씀으로는, 루나 공주님께서 타락하시기 대략 십 년 전쯤에 작곡하신 곡이라고 하더군요. 당신 스스로의 시기와 질투가 마음 속 어둠에 불을 질러 나이트메어 문으로 전락하기 전까지는... 견디기 힘들었던 세월을 예술로 승화시키면서 버티셨다고 해요."

 

"그럼, 맨 마지막 소절이 어떻게 되는지도 기억하세요?"

 

"그게..." 트와일라잇 스파클은 안절부절못하는 눈치였다.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라이라 씨. 저는 악보 쓰는 법은 하나도 몰라요. 게다가 그쪽이 누군지 아는 상태로 뭔가 적으면 곧장 사라져 버리는 거 아니었나요?"

 

"그러면 콧노래로라도 흥얼거려 주세요." 나는 말했다. "전에도 그렇게 했었지요. 장담해요." 눈을 찡긋했다. "기억은 제가 하면 되고."

 

"그냥... 그냥 흥얼거리라고요?"

 

"네에."

 

"그래요 그럼. 으음... 시작할까요."

 

천사의 그것처럼 나긋한 목소리에 실려 형태 없는 소리가 속을 비워낸 나무를 울림통 삼아 울리며 실내를 적셨다. 나는 집중해서 들었다. 트와일라잇의 마음에 실려나온 선율에 맞춰 심장이 뛰었다. 내 생각보다도 빨리 곡이 마무리되었다. 씩 웃고 있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분명 눈물 몇 방울을 짜냈을 것이다.

 

"아, 이렇게 끝나는군요. 하하... 음침하기도 하지."

 

"하지만 사실인걸요. 분명 이렇게 끝났어요." 트와일라잇이 답했다. "바로 어제 들은 것처럼 생생하게 기억나네요. 이 만장이라는 곡은 이렇게, 툭 끊어지듯 끝난답니다. 공주님께 마무리가 왜 이러냐고 여쭤 보았는데,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 소리내어 웃으시며 대답하시기를, 루나는 한 번도 마무리를 고상하게 가져가 본 적이 없었단다, 라고 하셨지요. 공주님께서 그렇게 웃으시는 건 처음 봤지 뭐에요. 하하..." 트와일라잇이 얼빠진 표정으로 씩 웃었다. "어떻게 이걸 지금까지 잊고 살았는지......"

 

"뭐 처음에는 항상 그렇죠. 우습고." 트와일라잇이 읊어 준 마지막 몇 마디를 리라의 언어로 바꾸어 염동력으로 현을 계속해서 퉁겨 보며 대답했다. 으스스한 화음이 도서관에 번지며 메아리졌다. 만장이 어떻게 끝나는지 확실해졌다. 다음에는 또 다른 곡을 들고 갈 것이다. 이 단순성이 나는 괴로웠다. "이거면 되겠군요."

 

"전체를 다시 연주해 보시는 게 아닌가요?"

 

"아뇨." 나는 급히 답했다. "안 돼요. 여기서는 안 된답니다." 조용히 가방에 리라를 밀어넣고 말했다. "...위험한 짓이거든요."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밤의 만장. 뭔지는 몰라도 권능이 서린 곡인가 보군요. 그렇죠?"

 

"대체로 그런 편이었죠. 제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멜로디를 모아 하나로 다시 엮어내고, 리라로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하지 않는 이상은 괜찮아요. 선율 하나하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장대한 조각퍼즐의 한 편린에 불과하지요. 저는 매일 이 퍼즐을 풀어내려고 용을 쓴답니다. 이걸 저 혼자 달라붙어서 하고 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요. 다른 비곡을 옮겨 적는 데도 트와일라잇, 당신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까요. 고맙습니다." 빙긋 웃고 덧붙었다. "정말이지, 한 번도 실망시키질 않는군요."

 

"제가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게 아쉬울 뿐이죠."

 

"그러면..." 싸놓은 가방에서 한 걸음 물러서서 트와일라잇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내 눈길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그게, 한 가지만 해주셨으면 좋겠다는 말은 사실 거짓말이었어요. 솔직한 말씀으로, 하나 더 부탁드리고 싶은 게..."

 

"오?"

 

"그게 말이죠..." 차마 눈을 마주치기 어려웠다. 지금 와서 생각해도 내 입으로 그런 부탁을 했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 몇 달이 지나간 지금에도 나는 가끔 스스로에게 더 강인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다그친다. 그 날 밤 나는 트와일라잇에게서 정말 필요로 하던 선물을 받았다. 이 모든 것을 이해하기 위한 외로운 여정에 진실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선물을. 사실 다른 걸 해 달라고 부탁할 만한 게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내 생각보다도 나약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하긴 그러니 이 같잖은 글줄을 죽죽 써 내려가는 것이겠지. "진짜 이상한 얘기인 건 알아요. 싫으시면 싫다고 하셔도 돼요. 전 괜찮으니까. 그걸로 뭐라 탓할 수도 없고..."

 

"라이라..." 트와일라잇이 가까이 다가섰다. "뭐길래 그러죠? 뭐가 필요하시길래 그런 말씀을?"

 

생각해 보면 나는 피식피식 할 일 없이 잘 웃는 재주가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좋게 써먹을 수 있는 표정이다. 나를 스쳐가는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며 나는 웃는다. 이 세상은 충분히 그런 대우를 받을 수 있다. 트와일라잇의 시선을 받으며 도서관에 그러고 서 있는 동안 내 얼굴에 떠오른 웃음도 마찬가지로 더할나위없이 훌륭한 미소였다. 다만 눈만은 웃고 있지 않았다. 흐릿하게 보이는 트와일라잇을 눈에 담으며, 겨우 고개를 들어 말했다.

 

"그냥 한 번 안아 주실 수 있나요."

 

저주가 시작된 날부터 트와일라잇과 말을 섞은 것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오십 번. 똑같은 대화가 반복된 것은 대략 스무 번에 육박한다. 나는 안아 달라는 부탁을 그 때 외에는 한 적이 없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날따라 평소보다 추워서 그랬을 수도 있고, 더피네 딸내미가 계속 생각나서 그랬을 수도 있다. 밤의 만장이 그렇게 홱 끊어지듯 끝나 버려서, 루나 공주님이 처음부터 그걸 의도하시고 그렇게 마무리지으셨을 것이 확실한 그 허무감에 그랬을 수도 있다.

 

생각은 더 생각되어지지 못하고 끊어졌다. 트와일라잇이 다가와 나를 안은 순간 모든 사고가 정지했고, 숨 쉬는 것까지 멈춰 버렸다. 다시 그렇게 따뜻한 곳에 발을 들일 수 있다는 감각은 그런 것이었다. 나는 소꿉친구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어 눈을 감으며 그녀의 등을 두 발굽으로 부여잡았다. 잊히는 것을 죄라고 규정한다면 평생 성자의 반열에 오르는 것은 꿈도 못 꿀 것이나, 나는 그 때 내가 진실로 찾아 헤매던 것이 무엇인지조차 잊은 채 방황하고 있었음을 새삼 깨달았다. 음악이란 고아한 것이나, 사람의 심장으로 덥혀지고 사람의 혈관을 따라 흐르며 약동하는 진정한 리듬의 복제품에 지나지 않는다.

 

아, 결국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이 연약할 수밖에 없는 사람의 운명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먼지와 눈물의 냉혹한 간극 위로 건설된 웃음과 현의 소리로 또 극복될 수도 있음은 얼마나 찬란한 운명인가. 그때 나는 더 많은 것을 털어놓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으나, 말로는 전달될 수 없는 것들이 있음을 알고 그만두었다. 말이란 잊히고 말 운명이나, 우리 둘 사이의 우정은 영원할 것이다. 우리가 친구였다는 진실이 그 포옹으로 전달된 것이 가장 행복했다. 영원히 저 품 안에 안겨 있을 수만 있다면 내 이름까지 모든 의미를 잃고 사라지더라도 상관없었다.

 

"고마워요. 트와일라잇." 서로의 품에서 떨어지는 순간, 한기가 다시 내 몸을 감쌌다. 내 울음은 찰나에 그쳤다. 순간 아무것도 없이 공허했던 표정에 다시 웃음을 띄웠다. "얼마나 절실했던 건지 아마 상상도 못 하실 걸요."

 

"이 정도로 되겠어요." 트와일라잇이 서글픈 듯 말했다. 잠시 허공을 쳐다보다가, 환한 표정으로 외쳤다. "그렇죠! 기억 마법을 쓰면 돼요!" 트와일라잇이 출입문 끄트머리에 세워 둔 높은 책장 쪽으로 달려갔다. "기억 마법에 최대한 마력을 집중시키면 이 저주인지 뭔지가 라이라 씨의 존재를 지워 버리는 걸 막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 동안 공주님과 제가 해결책을 찾아볼게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소용없어요. 저번에 했을 때도 소용없었고, 그 전에 했었을 때에도 실패했어요." 트와일라잇이 내 주변으로 뛰어다니며 벽벽마다 세워 놓은 책장을 뒤져 온갖 책을 꺼내들었다. "그러니까,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게 최선—"

 

"아뇨, 그럴 리가 없죠! 이건 다름아닌 턱수염 스타스월이 개발한 마법이니까요!"

 

"아. 집중증강마법 얘기군요?" 창 밖을 내다보며 무심하게 물었다. 창백한 달빛이 어른거렸다. 억장이 무너졌다.

 

"그래요! 어떻게 아셨어요? 일단 공식만 찾고 나면 마력 가루를 촉매 삼아 집중증강마법을 쓸 수 있을 거에요. 그러면 충분히—" 트와일라잇의 걸음과 함께, 목소리가 멈췄다.

 

한기가 몸을 쓸고 지나갔다. 날숨이 입김으로 엉겼다. 차마 방향을 틀 수가 없었다. 내 존재가 사라지는 순간의 사람을, 나는 보고 싶지 않았다. 보고 싶지 않아도 늘 보게 되었고, 보게 되었으므로 방향을 틀었다.

 

트와일라잇 스파클은 뿔을 환히 밝힌 채 도서관 출입구 로비 한가운데 멍하니 서 있었다. 주변에 몇 권의 책이 띄워져 있었다. 귀찮게 하는 나방 떼를 보기라도 하는 양 시선이 일그러졌다.

 

"내가... 대체 뭘...?" 트와일라잇이 눈을 꿈벅거리더니 얼굴을 찌푸리고, 뽑은 책을 정확히 뽑은 자리에 가져다 꽂았다. "딴짓하고 있을 시간 없는데! 이퀘스트리아 영웅서사와 그 영웅들 전집 풀어놔야 하는데." 트와일라잇은 책정리를 마치고 몸을 돌렸다. 시선이 마주쳐, 꺄악 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꺅! 아이쿠... 어... 아, 안녕하세요! 갑자기 어디서 나타나신 거죠, 그쪽은...?"

 

"실례했네요." 나는 말했다. 이 때 이미 가방을 짊어지고 있었다. "놀래킬 생각은 없었는데. 그... 개인적으로 연구하는 게 있어서, 이제 마무리하고 돌아가려고요."

 

"그렇군요. 어, 실례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트와일라잇이 순박한 미소를 지었다. "폐관까지 앞으로—" 시계를 흘끗 본 트와일라잇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시계판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일곱 시가 넘었어? 어, 오늘은 이제 닫을게요! 공주님 맙소사, 십오 분 전에 닫았어야 했다니?"

 

"그래요. 그럼 저도 가야지요." 무릎을 굽혀 인사하고 출입구로 향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좋은 저녁 되시길."

 

"하하하... 그쪽도요." 속을 비워낸 나무집을 등지고 돌아가는 길, 트와일라잇이 스파이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파아아아이크? 너 어디 또 들어가 숨었어? 소포가 제 발로 상자에서 걸어 나오는 게 아니잖니! 저녁은 일 다 마치고 먹을 테니 그렇게 알아!"

 


 

지금부터 대충 몇 시간 전쯤 마을에 다녀왔다. 포니빌 번화가 한쪽 구석까지 맑았다. 공공장소에서 '밤의 만장' 전부를 연주하는 게 멍청한 짓인 정도는 아는 분별력은 있으니, 여러 조각으로 쪼개 그 일부만 골라 연주했다. 나중에 나 혼자서 곡 전체를 연주하는 날이 오면, 그 일부라도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는 편이 이롭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곁을 지나쳤고, 족히 많은 사람들이 앞에 놓아둔 깡통에 동전을 넣어 성의를 표시했다. 후브스 박사와 그래니 스미스, 캐럿 탑을 비롯한 즐거운 얼굴들이 지나쳐 갔다. 한 사람이 자리에 나타날 때까지는 곡에 온전히 집중하기로 했다. 그 사람이 나타나 가까이 다가섰을 때, 나는 동전이 담긴 깡통을 왼쪽 뒷다리로 슬슬 밀어 등 뒤 수풀로 숨겼다.

 

"어쩜, 이렇게 아름다울 데가!" 래리티가 말했다. 사파이어와도 같은 두 눈동자가 정오의 태양을 받아 찬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는 가방을 짊어지고 다가서서 말했다. "맙소사, 자기 추위를 타도 너무 타는 거 아니에요? 혹시 어디 안 좋은가요?"

 

"저... 음... 전 괜찮아요." 빙긋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그 와중에도 제때 현을 퉁겨 곡의 흐름을 유지했다. "어디 아프거나 그런 건 아니고요. 다른 사람들보다 추위를 좀 많이 타는 것 뿐이에요. 그래서 이 후드에 목도리를 두르고 나왔지요."

 

"좋은 물건이군요!" 래리티가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며 말했다. "그쪽처럼 훌륭한 연주자가 저체온증으로 객사하는 모습은 죽어도 보고 싶지 않군요. 목도리도 잘 골랐네요 자기. 눈 색이랑 정말 잘 어울려요."

 

"목도리 주신 분도 그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나는 말했다.

 

"음, 제 생각이긴 하지만 그쪽은 충분히 받을 자격이 있어요. 연주를 들으며 돌아다니는 마을은 평소보다도 더 아름답거든요. 몇 비트라도 제 성의를 좀 표시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하하하..." 헛기침을 해 목을 닦았다. 선율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아뇨, 괜찮아요.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죠. 그... 사실 별로 생각도 안 해 봤는걸요." 부끄러움에 허파가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

 

"말도 안 돼요." 래리티가 발굽을 내젓고 말했다. "자기 이런 말 못 들어 봤어요? 베푸는 마음이야말로 마음의 창이랍니다. 몸이 살아서 서로 만나고 볼 수 있는 것도 지극한 행운이지요." 래리티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뭐, 그래도 그쪽이 그렇다고 하시니 별 수 없군요. 결국 그쪽을 뒤에 남겨두고 갈 수밖에 없겠어요. 다시 만날 날이 오겠지요?"

 

그제야 좀 숨을 쉴 만했다. 래리티를 마주보며 싱긋 웃었다. "네. 분명 그럴 날이 오겠죠."

 

"좋군요. 그럼 또 만나죠, 마담 마에스트로!*2 호호호호..." 래리티는 가 버렸다.

 


 

그로부터 한 시간이 지난 뒤, 나는 슈가큐브코너 내부 테이블을 하나 골라잡아 차 한 잔을 시켜놓고 앉아 있었다. 찻잔을 붙잡고 있기만 했고,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그저 뜨거운 음료에서 솟아나는 부박한 수증기만 가만히 쳐다보며 몇 달 만에 처음으로 누군가의 품에 안겼던 따뜻한 기억을 심드렁하게 되새기며, 그 기억이 그렇게 차갑게 느껴지기도 하는구나 싶은 생각에 젖어 있었다.

 

동전으로 가득 찬 깡통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포니빌 번화가 한가운데서 나흘 내내 리라를 퉁겨 돈을 번 끝에, 실험에 필요한 재료를 사는 데 필요한 돈을 전부 모을 수 있었다. '밤의 만장'이야 완벽히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만장을 완벽하게 연주해 낼 수는 없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마법의 재료를 구비해 둘 필요가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전에도 비곡을 연주하다가 쓰러진 적이 있었다. 마지막 음표 하나까지 리라로 퉁기고 나자마자 이 세상 그 어떤 목도리나 스웨터를 싸그리 긁어와도 도저히 가릴 수 없는 끔찍한 한기가 닥쳐왔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이 연구를 그만둔다면, 내가 떨어져 처박힌 저주의 구덩이 밖으로 기어나갈 마지막 기회까지 상실하게 될 것이다. 연구에 필요한 돈을 벌어 왔음에도 괜히 죄를 지은 듯 찜찜했던 그 기분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이전에 내 특수한 '처지'를 이용해 득을 좀 본 적 있었다. 아무리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한다지만 차마 떳떳하다고는 못 할 방법으로 다양하게도 챙겼으니까. 트와일라잇의 품에 안겼던 그 날부터, 내가... 나 자신을 찾아내고 난 뒤에도 나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고민되기 시작한 것이다.

 

"어머나. 리라로군요. 혹시 음악 하시는 분인가요?"

 

"흠?" 고개를 들었다. 솔직히 말하겠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서 한 번 더 보았다. "아, 네. 네. 뭐 비슷한 거죠."

 

트와일라잇 스파클은 가게 한가운데 서서 나를 보고 빙긋 웃어 보였다. "음악 하시는 분들은 늘 존경스러워요. 제 유니콘 친구들 중에서도 상당수가 음악 공부를 하는 쪽으로 진로를 잡았지요. 저는 좀 다른 분야에 있었지만 말이에요. 언제 시간이 나면 음악이론을 공부해 보고 싶네요. 얼마나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학문인가요."

 

느긋한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설마 그 두 가지가 양립할 수 있는 학문이 세상에 있다니 놀라운 일 아닌가요?"

 

"아! 음... 죄송해요. 제가 감히 뭐라고 끼어들 주제가 아니었는데." 트와일라잇이 얼빠진 미소를 지으며 눈을 굴렸다. "흠흠. 저는 트와일라잇 스파클이라고 해요. 마을 동쪽 시립도서관의 책임자지요."

 

"그렇다면 셀레스티아 공주님의 직계 제자이자 나이트메어 문의 사악한 정수를 구마하신 마법의 원소이시기도 하겠군요."

 

"아." 트와일라잇이 귀를 늘어뜨리며 순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것까지도 소문이 도나 봐요?"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렇게 차갑지는 않았던 것 같다. "사람 위에 사람 없다지만 적어도 누군가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업적을 쌓기 마련이죠. 저는 여기서 현이나 퉁기고 있지만, 그쪽은 우리나라를 지킨 것처럼." 찻잔을 들어 건배 자세를 취하고 씩 웃었다. "그래도 어디선가 다시 만날 일이 있겠지요?"

 

트와일라잇이 멍하니 이쪽을 쳐다보다가 까르르 웃었다. "아하하... 그래요. 각자의 자리에서 말이죠?"

 

"제 생각도 그래요."

 

"음, 언제 시간 되시면 도서관에 한 번 와 보시겠어요. 음악이론을 다룬 장서가 많거든요. 보여드릴 수 있으면 좋겠네요. 고대 리라를 다룬 책만 적어도 열두 권은 있답니다. 분명 아주 좋아하실 거에요."

 

"하하하..." 이미 했던 말을 또 꺼낼 용기가 나에게는 없다. 두 번씩이나 그럴 수는 없다. "보러 갈 일이 생기면 가도록 하죠. 언젠가 그 제안 기꺼이 받을 날이 언젠가 오겠지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트와일라잇이 나긋한 미소로 말했다. "누구나 자신의 적성을 타고나기 마련이죠. 자기 재능을 나누는 것으로... 서로를 더 잘 알게 되지 않을까요. 각자가 잘 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면 세상에 혼자 남은 듯 외로워할 이유도 없지 않겠어요? 저는 그게 조화를 이루는 열쇠라고 생각해요."

 

트와일라잇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는 동안, 나도 모르게 동전을 가득 담은 깡통에 시선이 갔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섰다. "전에 어떤 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베푸는 마음은 마음의 창이다. 몸이 살아서 서로 만나고 볼 수 있는 것도 지극한 행운이 아닌가. 라고."

 

"흠... 누구 말씀인지 몰라도 좋은 말씀이네요."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말이죠."

 

"그럼 좋은 시간 되세요. 저는 친구들 만나러 가야 해서요. 안녕히."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발굽을 흔들어 인사하고 떠났다. 테이블 쪽으로 돌아앉는데, 어디선가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끔찍하게도 귀에 익은 비곡의 한 부분이 어디선가 흐르고 있었다. 트와일라잇이 '밤의 만장', 그 마지막 몇 마디를 흥얼거리며 방글방글 웃고 있었다. 이게 무슨 곡인지 알고나 저러는 걸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었으니까.

 

즐거운 마음으로 물건을 챙겨 집어넣었다. 처음은 동전 깡통이었다. 오늘 뭘 해야 할지 정확히 알았으니, 내 실험은 좀 더 미뤄져도 괜찮을 것이다. 공허의 늪으로 한 주를 더 가져다 때려붓더라도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 날 저녁. 가늘고 긴 상자 하나가 염동력을 타고 시내 서쪽에 위치한 동네 레지던스 건물 정문으로 날아들었다. 상자는 초인종이 있을 법한 위치를 더듬으며 버튼을 찾고 있었다. 멀찍이서 염동력으로 조종하느라 죽을 맛이긴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버튼을 찾을 수 있었다. 일정 간격으로 초인종이 울리다가, 곧 잠잠해졌다. 앞마당 나무 아래, 상자를 가만히 내려놓았다.

 

얼마 뒤 문이 열렸다. 더피 후브스가 비틀거리며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다음 아침에 마을 곳곳으로 배달해야 할 수도 없는 소포에 편지를 분류하느라 흐릿하고 초췌한 사시눈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오기 전에 가게에 들러 산 물건인데, 설마 못 보고 지나치는 건 아닌가 불안했다.

 

더피의 노란 눈동자가 아래쪽을 살피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자에 시선이 닿았다. 이마가 찌푸려지는 게 보였다. 더피는 상자를 바로 줍지 않고 쪼그리고 앉아 쿡쿡 찔러보았는데, 상자가 눈을 번쩍 뜨고 깨어나 달려들지나 않을까 경계하는 모습 같기도 했다. 상자를 숙련자의 솜씨로 휙휙 돌려 보며 발신인이 있을 법한 자리나 딱지 같은 걸 찾아보더니, 아무것도 없는 걸 보고 그 끄트머리를 잡아 홱 열었다. 턱이 빠질 듯 입이 떡 벌어졌다.

 

나는 아무 말도 없이 입술을 깨물며 지켜보고만 있었다.

 

더피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잿빛 발굽에 들려 가느다란 금빛 플루트가 상자에서 빠져나왔다. 더피가 떨리는 날숨을 토해냈다. 따로 놀던 두 눈이 동시에 플루트를 쳐다보았다. 어느새 눈물이 고여 있었다. 더피는 울음을 참으며 애써 미소짓고는, 급히 다리를 움직였다.

 

"딩키! 우리 머핀!" 더피가 집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이게 뭘까! 엄마가 뭘 가져왔게!" 현관문이 느긋하게 삐걱이며 닫혔다. 문틀 사이로 꼬마의 환희에 찬 소리가 삐져나왔다.

 

하루에 두 번씩이나 트와일라잇 스파클의 품에서나 맛볼 온기를 느낄 수 있다니 복된 일이다. 그 때 나는 나를 안아 줄 다른 사람이 필요치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나는 혼자였고 다음 실험을 준비하는 데 들어갈 돈까지 날려 버리기는 했지만, 충분히 감내할 수 있었다.

 

혹시... 그냥 어디까지나 혹시나 하는 소리지만. 인생에서 가장 달콤한 순간은 역사에 남는 게 아니지 않을까.

 

빙긋이 웃으며 스웨터 재킷에 달린 두건을 머리 위로 덮어쓰고, 몸을 돌려 석양의 붉은 입맞춤 아래로 걸어 들어갔다. 포니빌은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 아름다울 것이다.

 

 

 

 

혹시 세인의 머릿속에 어디서 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름다운 선율인 것만은 분명한, 그런 곡조가 있지 않을까.

 

그 선율은 나이겠지.

 

 

 

 

 


미주

 

 

*1 Jockey Goodal. 제인 구달의 변형

 

*2 Madame Maestro. Madame는 여성형인데 Maestro는 남성명사입니다. 이상해 보이기는 하지만 BBC나 뉴욕타임즈에서도 이런 표현을 쓰는 게 보이니 이게 맞겠죠. 불란서 말은 잘 모르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갑시다.

 

 

 

챕터의 한 장면을 다루는 팬아트를 소개해 드리는 뜻깊은 시간입니다. 시작하기는 훨씬 나중 챕터에서부터 시작했는데, 개정하는 김에 좀 끼워 넣어도 되겠지요.

 

 

Background Pony by Underpable on DeviantArt

 

www.deviantart.com

 

래리티 선생에게서 목도리를 선물받은 라이라 옹의 모습입니다. 자세한 정황은 위에 나와 있으니 다들 아시죠?

 

 

 

In the Advent of Night by Doctor-Derpy on DeviantArt

 

www.deviantart.com

 

8년 전 떡밥인데, 백그라운드 포니 만화판을 시도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챕터 1만 겨우 해놨던가, 챕터 1도 다 못 했던가 할 텐데, 그 만화의 한 장면을 채색한 모습입니다. 느와르 깐지가 나는군요. 저 눈 좀 보십시오. 눈도 깜짝 안 하고 순식간에 누구 하나 담가 버릴 눈입니다. 어딜 봐서 저게 외로운 표정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