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2. 광인의 꿈Lunatic's Dream[개정]
일기에게.
사람이 자고 깰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매일 밤 달이 뜨고 나면 사람의 의식은 줄지어 가는 양떼처럼 저 깊은 어둠 속으로 불려가고, 잠든 사이의 길고 고결한 침묵 속 심장 박동은 무엇으로 주관되는 것인지 사람은 끝내 알 길이 없지. 자고 깰 때 사람은 잠들기 전의 자신으로 온전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일까. 아니면 지난밤 침대에 몸을 누이던 존재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그저 비슷한 존재에 불과한 것일까. 그러한 것이라면 사람은 자고 깰 때마다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닿았던 생각의 희미한 청사진으로 끊임없이 재구축되는 자동인형이요, 웃기지도 않는 정자미인情子微人*1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사람이 세운 뜻과 염원과 희망이 잠드는 순간 사라진다는 것이니.
그렇다면 사람이 꾸는 꿈은 뭐라고 해야 좋을까. 무의식이 드러내는 후회일까. 생물적 죽음의 공포로 달궈진 용광로 속으로 떨어지는 애착의 한 조각일까. 사람의 의지와 욕망은 결국 벽돌 벽에 날아가 부딪쳐 으깨지는 달걀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는 칙칙한 상실의 미래를 알기 때문에 사람은 기어이 꿈을 꾸는 것일까.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었지. 땅 위로 내려앉는 밤은 흡사 죽음의 여왕과도 같아. 불꽃 뒤에 숨어 아무도 보지 못하는 삶의 목적을 쫓아 그 짧고 무용한 목숨을 초개처럼 내던지는 나방의 오그라든 다리와, 마지막으로 한 번 파닥인 잿빛 날개와도 같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낡아빠진 속삭임이 사람의 꿈이라고 말이야. 눈 감았다 뜰 때마다 자기를 잊어버리는 세상 위에 아득하게 어른거리는 장대한 어둠이 떠다니는 꼴을 정신 멀쩡한 사람이 보면 어떻게 생각하겠어. 꿈은 결국 비명으로 수놓은 교향곡의 머나먼 전주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밖에 안 들겠지.
지금 생각해 봐도 미친 소리긴 하네.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문득 기적이라고나 해둬야 할 생각이 나더라고. 꿈은 노래와 비슷하다는 거야. 사람들은 연주곡의 제목이 뭐였는지 금방금방 잊어버리지. 제목을 잊어버리는데 그 곡을 쓴 사람의 이름은 어련하겠어. 그 또한 순식간에 잊혀 버려. 자고 깰 때의 측량할 수 없는 간극에서도 사람이 잊지 않는 것이 있으니, 어미가 갓 태어난 제 자식을 핥듯 우리 귓가에 속삭이는 뭐라 말할 수 없는 목소리가 그것이지. 찬란한 금빛 새벽을 맞이하여 눈을 뜰 때 이 목소리는 우리의 몸을 깨워 움직이는 것 이상으로 작동하는데, 심장이 덩실덩실 춤을 추는 음악소리이기도 하면서 죽어 묻힌 사람이 다시 깨어나 무덤을 열고 나오듯 침상에서 일어나 기어나오게 하는 기적이기도 해.
사는 일이란 도저히 제정신으로 못 해먹을 일인데, 어느 때는 막막하다가 어느 때는 또 암울한 게 시도 때도 없이 출렁이며 뒤바뀌니 제정신으로 어떻게 있겠어. 죽음보다도 더 어두컴컴할 수 없이 차갑고 검은 밤의 공허 안에 무엇인가 있어 고깃덩이에 불과할 사람의 심장에 한 명 정원사가 지력 빨린 땅에 씨앗을 심듯 한 편의 노래를 넣어주기에 버틸 수 있는 거지. 사람의 꿈에서 싹 틔워 자라는 노래는 차라리 교향곡이라고 불러야 할 것인데, 때로는 지휘자 없이도 스스로 굴러가는 오케스트라와도 같아. 사람은 오케스트라와 같아서, 각자의 탐구와 성장이 마침내 생生으로 이행될 때까지 허무에 맞서 꽃을 피우고, 평생 들어보지 못한 음악가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과 같이 끝내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바꿔놓지. 그리고 불현듯 그 음악가는 다름아닌 자기 자신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돼.
나로 말하자면 꿈꾸는 걸 아주 좋아한단다. 꿈에 홀려 사람이 미쳐 버리기도 하는 것일까. 감히 말하자면, 나는 차라리 꿈 덕분에 살아 있어.
하지 태양절 축제 전날이었다. 지평선에 걸린 붉은 석양 아래로 깃털처럼 흩날리는 잔불과 같이 곳곳에 눈부신 화톳불이 피어났고, 그 주변에 사람들이 저마다 무리지어 몰려들어 원을 그리며 앉았다. 연례 행사를 치르러 몰려든 사람들이 저마다 웃고 떠들며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소리 위로 음악소리가 솟아나, 그날 밤도 서로 어울려 놀며 하룻밤을 지새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올해는 볼티메어에서 태양을 띄우기로 되어 있었으나, 그것이 매일같이 이 땅에 빛을 가져다 주시는 위대한 알리콘 공주에게 경의를 바치며 아침 해를 맞이하러 모이는 모임을 취소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 와중에도 혼자 축 늘어져 있던 사람이 하나 있었다. 사람들이 빽빽하게 모여든 자리에서 한참 떨어진 화톳불 옆에 자리잡고 앉은 어스 포니였다. 오렌지색 솜털과 흙빛 갈기 위로 시무룩해 보이는 어둠이 가물거렸는데, 지친 표정으로 불꽃만 하염없이 들여다보는 사내의 우울한 표정과 한 짝을 이루었다. 축 늘어진 어깨 위로 음악소리가 밀려들 때마다 귀가 아주 조금 일어섰다가 가라앉았다. 낮이 서서히 저물어 여름 축제로 시끌시끌한 마을 위로 보라색 하늘이 드러났다. 그는 눈을 감으며 차가운 한숨을 토해냈다.
화톳불이 딱딱 소리를 내며 타는 가운데, 그 너머에서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캐러멜Caramel! 어이, 친구! 무슨 일이라도 있어?!"
캐러멜이라 불린 사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이름처럼 향기롭지만, 부박하기 짝이 없는 억지 웃음을 지은 사내가 말했다. "아, 선더레인Thunderlane... 블로섬포스Blossomforth. 무슨 일이야?"
페가수스 커플이 캐러멜이 앉아 있던 화톳불로 다가가 말했다. "그건 우리가 묻고 싶은 말이라구!" 선더레인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애들 다 시청 건물 옆에 있는데 여기서 뭐 해."
"시장님 대자녀가 원더볼트인 건 알지. 그 사람이 클라우드데일에 있다가 들렀다는 말이 있어!" 블로섬포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불빛을 받은 주근깨가 선명히 드러났다. "월출쯤에 불꽃놀이 하잖아. 그 전에 곡예비행 몇 가지 보여주지 싶어!"
"흠... 그거 재미있겠는데." 캐러멜이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 웃음은 지은 것이라기보다, 차라리 무너지는 걸 겨우 떠받치는 웃음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난 힘들고, 너희끼리 봐. 너네 페가수스 애들이 대단하긴 대단하다만, 나 같은 짐짝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냐."
"말도 안 되는!" 블로섬포스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캐러멜 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우린 너랑 어울려 노는 게 가장 좋은데."
"맞는 말이야. 그나저나..." 선더레인이 눈썹을 치키며 말했다. "윈드휘슬러Wind Whistler도 거기 있는데—"
"쉿!" 블로섬포스가 새하얀 날개 한쪽을 펼쳐 선더레인의 가슴팍을 탁 쳤다. "선더! 전에 내가 뭐라고 했어...?"
"아이구! 미안! 내가 그러려던 게 아니고—!"
캐러멜이 헛기침했다. 사내는 둘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너희 둘이 이번 하지의 연인이었지, 아마?"
페가수스 둘이 캐러멜을 마주보더니, 얼굴을 붉혔다. 갈 곳을 잃은 발굽이 괜히 땅을 툭툭 차서, 새빨갛게 물든 얼굴만큼이나 붉은 땅의 속살을 드러냈다.
"어, 그런데..."
"글쎄, 뭐 2년 연속으로 하지의 연인이 된 게 큰일은 아니잖아?"
"그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들 하고..."
"마음과 마음의 날*2에서부터 다들 올해도 우리가 될 것 같다고들 얘기가 나오기는 했다만..."
"저... 아하하하... 그렇게 신경 쓸 필요도 없지?"
캐러멜이 진실한 웃음을 지어 보이고 말했다. "축하한다. 다른 사람들도 다들 마찬가지일 거야. 올해 축제도 즐겁고 멋진 기억으로 남았으면 좋겠네. 나는... 잠깐 여기 앉아서 좀 쉬고 싶어. 작년만 해도 별의별 일이 다 있었고 하니, 가만히 앉아서 생각 정리할 짬도 없다 보니까... 대충 알겠지?"
"혼자 앉아서 생각하겠다는 뜻은 아니겠지?" 블로섬포스가 캐러멜을 연민하듯 바라보며 물었다. "오늘 밤은 특별한 밤이야. 친구가 없는 것도 아니잖아. 윈디도—어... 음..." 그녀는 미안한 듯 입을 꾹 다물고 선더레인을 돌아보았다.
선더레인이 빙긋 미소지으며 블로섬포스의 뺨에 얼굴을 비비더니, 마지막으로 캐러멜을 보고 물었다. "내가 뭐라 한들 생각을 바꿀 일은 없겠지?"
"잘들 가라고, 하지의 연인들아." 캐러멜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절정으로 치닫는 밤을 나지막하게 노래하는 음악 소리가 사내의 귀를 스치웠다. 캐러멜은 눈을 감았다. "함께 새벽을 맞으라고. 나는 신경 쓰지 마."
페가수스 커플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딱딱 소리와 함께 타는 화톳불의 불꽃 너머로 발굽 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져갔다. 벗들이 자리를 완전히 떠난 뒤 캐러멜이 다시 한숨지었다. 그는 눈을 뜨고 화톳불 앞 흙바닥에 원 두 개를 그려놓았다. 그것은 평생 벗어나지 못할 영겁의 고독을 그려낸 듯했다.
그때쯤 음악소리가 멈췄다. "꿈꾸는 거랑 별로 차이 없죠?"
캐러멜은 놀라 눈만 꿈벅거렸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시선이 내게 닿았다. "어... 뭐가 말입니까?" 그가 물었다.
"사는 거." 나는 답했다. 그 때 나는 캐러멜 몇 미터 뒤, 목제 우편함에 기대서 있었다. 뿔을 밝혀 리라를 띄워두고 두 앞다리로 칙칙한 후드 재킷의 두건을 머리 위로 덮어썼다. "해가 뜨고 지면 사람은 자고 깨지요. 인생이 그렇게 흐른답니다. 아주 새까만 장막으로 계속 막을 바꿔 가며 공연하는 연극 같지요." 빙긋 웃으며 리라의 현을 퉁기기 시작했다. 이로써 연주가 대화를 이끌었으니, 내 말은 다만 배경음에 불과했다. "이제 보니 더는 연극 무대에 설 이유를 찾지 못하는 배우 같은 표정을 하고 있군요. 왜 그런지 물어도 될까요?"
"저기, 걱정해 주신 건 감사합니다마는. 이쪽은 그냥 생각 정리나 좀 하면서 쉬려던 참이거든요. 그렇더라도..." 그가 말했다. "저, 음. 연주를 멈추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듣기 좋군요."
"흐음...... 뭐 그러시다면야." 싱긋 웃고, 계속 현을 퉁겼다. 낭랑한 소리가 솟았다. "음악이란 그런 것이죠."
말은 없고 선율만 흐르는데, 캐러멜은 조금도 편안해 보이지 않았다. 장작이 타며 딱딱거리는 것만큼 산만한 소리로 몸을 뒤척이던 사내는 결심했는지 입을 열었다. "제 친구들은 절대로 이해 못 할 겁니다."
"흠?" 현을 퉁기며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죠?"
"제 친구들 말입니다. 조금 전까지 있었던 페가수스 둘."
"그쪽만 두고 즐거운 걸음으로 터덜터덜 가 버린 사람들 말이군요? 뭐 누가 그 둘을 탓할 수 있겠어요. 축제의 밤 아닌가요?"
"네, 뭐..."
"그러면, 친구 분들과 어울려 축제를 즐기지 못할 이유가 있기는 있나 봐요?"
"아.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캐러멜이 대답했다.
"그렇군요. 그럼 전 하던 연주나 마저 하죠." 나는 절로 떠오르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캐러멜이 입을 꾹 다물었다. 콧김을 훅 뿜더니, 결국 말했다. "평소대로라면 저도 축제에 끼어 잘 놀았을 겁니다. 올해는 그게, 쉽지 않네요." 생면부지의 이방인인 나에게 그는 속에 있던 말을 꺼내놓았다. 지쳐 보이는 얼굴은 사실 누구에게라도 털어놓고 싶다는 절박한 필요의 표출이었거나, 애초부터 돌아갈 것 없이 사실대로 털어놓게 하려고 내가 작정했던 것 같다. "하지 태양절 축제라고 하면,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 버렸다는 것과..." 그는 떨리는 한숨을 토해내며 푸른 눈동자로 눈앞에서 일렁이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그 내내 좋은 일은 하나도 없었다는 것밖에 생각이 안 나는군요."
"그렇군요." 사내의 목소리와 비슷한 우울한 멜로디로 밤하늘을 수놓으며 말했다. "그러니 꿈꾸는 건 고사하고 잠조차 제대로 못 주무시는 것이겠죠."
사내가 희미한 미소를 짓더니 이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요 근처 분이 아니신가 보네요?"
"그쪽 친구분들한테 뭐 이상한 소문 퍼뜨리려는 생각은 아니니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 그런 뜻은 아니고요." 캐러멜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으나, 진실한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냥 저... 하지 태양절 축제니까요. 다들 집으로 돌아가 행복한 시간을 보내야 하지 않나 싶어서." 그는 침을 삼키고 덧붙였다.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집이 좀 멀어서요." 차가운 숨에 말이 실려 나왔다. 아무렇지 않은 듯 의연하고 즐거워 보이는 표정으로 리라를 퉁겼다. 굳은 표정이 순식간에 따뜻한 웃음으로 바뀌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곁이라, 하하하. 단 한 순간도 빠짐없이 제 곁에 있답니다. 자, 그럼 그쪽은 어때요?"
"저는..." 시퍼런 단도 하나가 뱃속을 파고들기라도 하는 듯 굳어진 얼굴로 캐러멜이 말했다. "좀 복잡하군요."
"하지의 연인으로 뽑힌 사람이랑 마주치는 게 그리 표정이 굳을 정도로 복잡하고 골치 아픈 일은 아닐 텐데요. 오히려 별 일 아니지 않아요?"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리라로 퉁기는 곡조에 맞추어 가볍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다가 말했다. "그거야 아주 오래된 전통이기는 하죠. 셀레스티아 공주께서 처음으로 이퀘스트리아에 태양을 띄우셨을 때 어스 포니, 유니콘, 페가수스 각각 1쌍씩 3쌍의 연인을 보셨다지요. 영광과 명예, 사랑이 넘칠 문명의 기반을 닦을 빛을 선사함과 동시에 이들을 하지의 연인으로 축복하셨다는 게 요지죠.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상 만인이 이를 소중히 여겨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고요. 그쪽도 동감하실 것 같은데."
"흐음... 그럴까요..." 캐러멜이 웅얼거렸다. "무섭다고나 해둬야 할 문제라서."
"다들 그렇지 않나요?"
"그게 구실이 되진 않잖습니까!" 사내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소리쳤다. 그 분노는 내가 아닌 다른 곳을 겨누고 있었다. "요즘들어 사는 게 유독 퍽퍽해졌습니다. 제 앞가림 정도라면 어떻게 하긴 하겠습니다마는. 윈디가..." 캐러멜의 잔뜩 구겨진 얼굴이 문득 우거지상으로 풀어졌다. 사내는 한숨을 내쉬며 화톳불 앞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곡조를 흥얼거리며 몇 마디를 더 퉁기고 사내 쪽으로 슬쩍 눈길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그쪽 친구분들께서 윈드휘슬러라는 분 말씀을 하시더군요."
"휴...... 아주, 아주 많이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캐러멜이 말했다. 시선이 불길 속으로 녹아들었다. "사는 게 하룻밤 꿈이나 다름없다고 하셨었죠. 윈디 곁에 있을 때는 더할나위없이 행복하니, 깨고 싶지 않은 꿈이라고 해둬야겠군요. 착하고 명랑한데 정직하면서 영리하기까지 하답니다. 윈디의 웃음소리를 들으면 이 몸이 원래 성냥개비로 쌓아올린 것이기라도 한 듯 무너지고, 그 목소리를 들으면 무너진 몸이 다시 합쳐져 일어나는 기분이 들지요."
"하하하..." 소리내어 웃으며 퉁기던 현을 잠시 놓았다. "이거, 올해는 윌리엄 플랭스피어William Flankspeare가 앉은 자리를 골라 온 것 같군요."
캐러멜이 피식 웃으며 눈동자만 돌려 이쪽을 보고 말했다. "윈드휘슬러도 저더러 꼭 시인처럼 말한다고 한 적 있죠. 글쎄, 정확히는 윈디 곁에만 있으면 절로 고급한 말, 듣기 좋은 말을 하게 되는 것이지만. 그러니 꼭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합니다."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을 막상 꺼내놓고 나면 십중팔구는 다른 말이 되어 있죠." 그렇게 대답하고 다시 리라의 현을 퉁겼다. 숨결 사이마다 화음이 들어찼다. "그래 윈드휘슬러란 분이랑 같이 안 계신 이유가 뭐죠? 다 큰 남자 입에서 듣기 좋고 고급한 말이 나오다니, 백 비트가 전혀 안 아까운 구경거리 아닌가요."
"아무 생각 없이 불쑥, 하지의 연인이 되어 주지 않겠느냐고 물었지요. 그건..."
"그게 어때서요?"
"그건, 옳지 않습니다." 캐러멜이 비참하게 말했다.
"어째서죠?"
캐러멜이 마른침을 삼켰다. 땅이 꺼질 듯 깊은 한숨을 토해낸 끝에, 마침내 입을 열었다. "도저히 감당 못 할 흉년이 들었거든요. 한 해 농사가 완전히 망해 버렸습니다. 심어놓은 샐러리는 지금도 하나씩 죽어가고 있고, 그나마 길러놓은 것들도 올해 추수 때까지 입에 풀칠도 못 할 정도밖에 안 됩니다. 결국 가축을 내다 팔아 먹고 사는데, 그나마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죠. 할 수 있는 만큼 보태 본다고 동네에서 투잡을 뛰고 있긴 합니다마는, 이미 너무 늦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심지어 위니페그에 사시는 멀고 먼 친척들에게까지 선을 대 보고 있죠. 난방절 전까지 농장이고 뭐고 싸그리 내다 팔아치우고 포니빌을 뜨는 게 어떨지 다들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판입니다. 뭐 저는 포니빌에 계속 남아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남아 봐야 뭐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진 않아요. 아무리 일이 잘 풀려 봐야 조그만 아파트 하나 얻어서 투잡, 쓰리잡 뛰면서 퇴근하고 출근하는 시간 사이마다 쪽잠 자 가면서 겨우겨우 살겠지요."
"이보다도 더 운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싶네요."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렇더라도 이야기는 계속 들어 봐야겠군요. 한 가지 여쭤 보죠. 지금 윈드휘슬러라는 분과 같이 시간을 보내지 않는 것과 방금 말씀하신 사정이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가요."
"일 년을 족히 만나면서 서로에게 이끌려 온 사이랍니다." 캐러멜이 말했다. "제가 살아내야 하는 상황이 어떤 것인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윈디는 거의 알지 못하지요. 제 인생은 갈수록 미쳐 돌아가고, 다시 미쳐 돌아가는데..." 그는 눈을 쥐어짜듯 감고 몸을 떨었다. "윈디는 행복하고 활기찬 인생을 살고 있죠. 저 같은 실패자가 짊어진 인생의 무게를 같이 짊어질 필요도 없고요. 그 친구가 살아가야 할 푸른 하늘에, 제가 먹구름이 될 수 없어요. 윈디를... 사랑하니까, 진심으로 사랑하니까, 놓아 줘야 해요..."
현에서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소리가 솟았다. 사내를 쏘아보는 시선 사이로 소리가 흔들리며 사라져가는 잔향이 번졌다. "아, 그래요?"
"하지의 연인이 되어 달라는 부탁은 제가 해서는 안 될 부탁이었어요." 그는 씹어 뱉듯이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제게 하지 태양절 축제란 새로운 한 해를 상징하는 행사랍니다. 제 앞날... 그리고 걔 앞날을 위해서라도 이제 할 일을 해야죠." 캐러멜의 서글픈 시선이 불꽃으로 향했다. 저 불 속에 인생 모든 행복이 장작으로 타고 있기라도 한 듯한 얼굴이었다. "이제... 포기하려고요. 마음 접으려고요. 그 편이 서로에게 최선이니까."
"흠..." 고개를 끄덕였다. "꿈에서 쫓겨나기 전에 차라리 본인이 직접 꿈을 죽이는 게 능사긴 하죠."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루고 싶은 것을 이루고, 닿고 싶은 곳에 닿았으면 그 꿈을 굳이 더 꿀 필요는 없을 거에요. 안 그런가요?"
캐러멜이 눈을 꿈벅이다가, 헝클어진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네?"
깔깔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쪽도 이해가 안 되나 보네요?" 이번에는 발랄한 리듬을 자랑하는 곡을 퉁기며 물었다. "그렇지. 혹시 광인의 이야기, 들어 보신 적 있나요?"
"어음..." 캐러멜은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한 듯 머리를 긁적이다가,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이번엔 뭐죠? 음유시인 놀이라도 하시려는 건가요?"
"전에는 더 이상한 노릇도 해 보았답니다. 그래서, 들어 보실래요?"
"뭘요. 이야기 말입니까?" 캐러멜이 마른침을 삼키며 다시 불꽃 속으로 시선을 돌렸다. "글쎄요. 긴가요?"
서쪽 지평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늘과 땅의 경계선에 아직 석양의 붉은 기운이 묻어 반짝이고 있었다. 아직 달이 뜰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세상 온갖 소중한 것들이 그리 오래 존재할 수 없듯, 이것도 짧은 이야기에요. 사람의 말 대신 리라의 소리로 듣고 싶으시다면야, 기꺼이 그렇게 해 드릴 수도 있지요. 어느 쪽이든 별로 차이는 없으니까요."
"어, 전 상관없습니다. 어디 갈 것도 아니니까요." 캐러멜이 한숨지으며 멀찍이 떨어진 다른 화톳불로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떠들썩하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캐러멜과는 정반대로,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즐거운 표정이었다. "좋은 이야기에 잠시 눈을 돌려도 좋겠지요. 요새 인생 팍팍하기가 재미없는 소설 저리 가라 할 정도니."
빙긋이 미소가 떠올랐다. 좋은 관객은 아무것도 모르는 관객이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의 끝까지 관객에게 결말을 노출하지 않는 것이다.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리라를 머리 위로 띄워 올리고 현을 뜯기 시작했다. 타오르는 화톳불 위로 장대한 곡조가 솟았다.
"광인의 이야기는 어느 한 마을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딱 포니빌이랑 똑같은 동네였죠. 게다가 편리하게도 딱 오늘처럼 하지 태양절 축제일이 배경이랍니다..."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축제일을 기뻐하며 즐거이 놀고 있었지요. 그 해의 하지 전야는 그 어느 해보다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둡고 깜깜했는데, 그 때문에 공주님께서 어둠을 깨고 일으켜 세우신 새벽이 유독 찬란하고 가슴 벅차게 느껴졌을 테지요. 다들 길가로 몰려나와 잔뜩 들떠서 춤추고 노래하며 놀이판을 벌이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여기 끼지 않은 딱 한 사람이 있었어요. 그 여자는 외지인이었는데, 그 사람만큼은 새벽을 기뻐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거든요.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도저히 미치지 않고는 못 배길 상황이었죠."
"처음에는 별 거 아닌 것 같았어요. 두 번째로 마주친 사람이 처음 마주쳤을 때랑 똑같은 표정을 지었거든요. 그러더니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반기는 양 똑같이 발굽을 흔들어서 인사하는 거에요. 틀림없이 전에 만났던 사람들도 여럿 섞여 있는데, 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죠. 처음 그 여자를 만났을 때랑 똑같이, 낯선 이방인을 대하듯 대하기 시작했어요."
"'영문을 모르겠네. 전에 만나서 몇 마디 나눴잖아요?', 하고 묻고 다녔지요. '뇌진탕인지 뭔지로 병원에 뻗어 있다 일어났을 때 옆에 붙어 있던 간호사 아니에요? 그쪽은 오전에 시청 건물 뒤 으슥한 곳에 쓰러져 있던 저를 병원으로 데려다 주신 분들 아닌가요?' 라고도 했어요."
"사람들은 하나같이 무슨 소리 하냐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저마다 축제를 즐기러 가 버리고 말았죠. 온 동네가 하지 태양절 축제로 단발마와 같은 흥분에 휩싸여 있었어요. 그 뒤에 혼자 남은 여자는 당장 자기가 아무 이유도 없이 이런 곤란한 상황에 처하지는 않았으리라는 결론을 내렸지요. 저주를 받은 게 확실하다고 말이에요."
"결론부터 말하면 저주받은 건 맞아요. 갑자기 그렇게 되었으니, 저주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지요? 여자는 눈에 보이는 사람마다 붙잡고 늘어지며 자길 기억하냐고 물어보고 다녔어요. 얼마나 절박했는지, 숨이 가빠지는 걸로 모자라 열까지 오를 지경이었죠. 물어보고 다닐 때마다 동네 사람들은 더더욱 그 여자를 쉽게 잊어버릴 뿐이었어요. 그 사람이 뱉어놓은 말과 비명과 울음 모두 망각의 심연으로 내던져져 가라앉아 버리기라도 한 것 같았죠. 그녀의 존재를 외면하는 듯하기도 하고, 아예 무시해 버리는 것 같기도 하고, 심지어는 존재 자체를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기라도 하는 것 같기도 했어요. 한 사람의 가치와 성격 전부가 죽어 무덤에 묻히기도 전에 먼지만도 못한 취급을 받기 시작한 것이니, 아주 끔찍한 일이지요."
"'당신들 대체 왜 이러는 건데?!" 견디다 못한 여자는 끝내 절규하기 시작했어요. '사람 하나 병신 만드는 장난질이라도 하는 거야?! 누구라도! 제발 아무나! 나 좀 봐!', 하고요."
"차라리 애원이라고나 해야 할 비명도 결국 허사였죠. 지나가던 행인이야 깜짝깜짝 놀라거나 했겠지만, 아주 조금 뒤면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조차 잊어버렸거든요. 잔혹해도 너무 잔혹한 악몽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그냥 질이 아주 안 좋은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슬슬 들었죠. 결국 자포자기한 채 부조리극의 한 장면이라고나 해둬야 할 짓을 벌이기 시작했어요. 그리하여 발에 걸리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걷어차고 때려부쉈어요. 공주님의 모습으로 깎은 조각상은 넘어뜨리고, 기념품 팔러 온 장사꾼들 노점은 작살을 내 놨죠."
"이 정도로 미쳐 날뛰었는데도 다른 사람들은 관심조차 없는 것 같았지요. 그리하여 이 여자는 최후의 양심까지 저버린 짓을 벌였어요. 하지 태양의 횃불을 가져다가 바로 앞 화단에 휙 던져, 건물 안 홀 앞에 꾸며 놓은 정원에 불을 질렀죠. 온 동네 사람들이 다들 검댕으로 범벅이 된 채 저마다 양동이를 들고 불을 끄러 달려들었으니, 축제도 그걸로 끝난 셈이 되었어요. 여자는 본인이 질러놓은 불길 앞에 가만히 서서 자기가 바로 방화범이라고 당당하게 뽐내듯 외쳤지요.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경찰 둘이 달려들어 여자를 붙잡아다 마을 외곽의 구치소에 집어던져 버렸어요."
"여자에게는 더할나위없이 행복한 순간이었죠. 반항은커녕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경찰들을 맞이했고, 감옥으로 끌려가는 와중에도 기회만 되면 경찰관을 껴안아댔어요. 반항은커녕 아주 협조적인 태도로 독방에 들어갔지요. 마치 그 자리야말로 이 여자가 있을 자리라는 듯 말이에요. 취조하려고 감방에서 꺼내 경찰서로 이송하는 도중, 경찰들이 덜컥 멈춰서더니 수면 마법에서 깨어나기라도 하듯 부스스한 얼굴로 여자를 멍하니 쳐다봤을 때 얼마나 실망했겠어요. 뭔가 실수가 있었다며 몇 번이고 사과하더니, 여자를 덜컥 풀어 줘 버렸죠. 그렇게 그녀는 다시 멍하니 거리로 나오게 되었어요. 무엇이 확실한 실존이고 무엇이 허무한 환상인지 생각하려 하는데 생각되지 않는 채로, 말이죠."
"풀려난 여자는 자기가 불을 질렀던 건물의 홀로 돌아갔어요. 거의 졸도할 뻔했지요. 불길이 집어삼켰던 것들이 전부 원래대로 되돌아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동네 사람들도 다시 축제를 벌이고 있었거든요. 심지어 자기들 면전에 방화범이 툭 나타났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듯 순진한 표정을 짓고 있었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에요. 여자는 그 때, 자기가 성인군자가 될 수도 있고 지독한 악한이 될 수도 있음을 새삼 깨달았지만, 도덕의 나침반을 어디로 두는지는 사실 아무것도 아닌 문제였어요. 아무것도 아닌 실오라기 정도에 불과했지만, 자기는 여전히 자기로서 중요한 존재였거든요."
"여자는 이것 때문에 미친 게 아니었어요. 오히려 마지막 남은 한 조각 이성에 실낱같은 선을 대주었지요. 그녀는 마을을 가로질러 시립도서관으로 향했어요. 걷는 여자의 발걸음은 무거운 가슴만큼이나 잘 들리지 않았어요. 시립도서관에는 유년기를 같이 보낸 소꿉친구가 있으니까, 그 사람이라면 분명 자기를 알아봐 줄 거라고 생각했던 거에요. 사실, 이 여자가 하지 태양절 축제에 맞추어 이 동네로 온 것도 바로 그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였죠. 그 친구라면 틀림없이 자기 몸에 엉겨붙은 저주의 먹구름을 떼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죠. 출입문을 두드리자 문이 열리고 친구의 명랑한 얼굴이 나왔어요. 여자는 너무 기뻐 숨이 막힐 지경이었지만, 그 기쁨도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지요. 온 동네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처음 보는 사람을 보는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요."
"친구와의 우정마저 잃어버렸으니, 장례식도 없이 그냥 매장된 자의 죽음이 아마 그런 느낌이었을 테죠. 이 우주도 영겁의 세월을 거쳐 무너져 내리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게 무의미한 건 아니잖아요. 우주가 무너지는 걸 몸이 살아서 직면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영원한 냉담의 어둠으로 둘러싸인 외로운 섬에 갇히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사람은 혼자 사는 동물이 아니지요. 타고나기를 그렇게 타고났으니까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끌어당기죠. 사람이 서로 어울림은 물방울이 합쳐지는 것과 같답니다. 타자의 곁에서 그 온기를 쪼이는 게 어떤 것인지, 타자와 함께하는 것이 무엇인지, 행복이 무엇인지 영원히 이해할 수 없어 한겨울 밤보다도 차갑고 냉혹한 한기만 그 품에 가득 안고 사람의 목숨을 탐하는, 우주의 저 어두컴컴한 빈 자리를 우리는 공허라고 부르지요. 사람의 곁에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공허가 우리를 노리는 것은, 그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을 사람은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광인이 품었던 희망은 그 날 전부 박살났어요. 차라리 죽는 게 더 낫다 싶을 정도로요. 여자를 가둔 악몽은 죽음에 죽음을 잇대어가며 쌓아올린 어둠의 감옥이었지요.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 눈길을 돌릴 때, 심지어 같은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수도 없이 죽어야 했거든요. 순식간에 잊히는 것만 해도 끔찍하기 짝이 없는 일인데, 바로 코앞에 서 있는데도 존재를 부정당하는 것처럼 계속 무시당하는 건 어떻겠어요? 광인은 산송장처럼 길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앞으로 평생 동안 깨어나기는 계속 깨어나지만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악몽에 갇혀 살아야 하는 운명임을 깨달았어요. 자기가 가진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악몽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것 또한 영원히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도, 말이죠."
"그럼 끝없는 꿈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요. 광인에게 이건 삶과 죽음의 문제가 아니었어요. 지옥 같은 고통을 반주 삼아 열린 가면무도회나 다름없는 그 악몽을 깨뜨려야 했지요. 그러면 그 비탄과 외로움도 멈출 테니까요. 잠에서 깨어나기 직전 뱉어낸 날숨 너머에 칠흑 같은 어둠만이 도사리고 있다 해도, 그 어둠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에게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죠."
"그 날 하루가 저물어가며 동시에 축제도 끝마칠 때가 되었어요. 중앙 광장에 내걸렸던 축제 장식들도 다 정리되어 자취를 감췄지요. 시간이 흘러 어느덧 늦은 저녁때가 되어, 사람들도 다들 잠자리에 들 채비를 하고 있었어요. 광인도 잘 준비를 해야 했고요."
"어스 포니 둘이 해체한 설비를 챙기고 있던 중에, 한 사람이 문득 고개를 들자 시청 4층 난간 위에 광인이 서 있는 모습이 나타났어요. 사파이어 빛 눈동자가 충격과 공포에 물들고, 숨이 막혀 헉 소리밖에 할 수 없었지요. 사실, 광인은 하루 종일 그러고 서 있었어요. 그제서야 자기를 찾아 준 사람이 나타난 거죠. 너무 늦은 게 문제였지만. 어쨌거나 저쨌거나, 사내는 광인을 향해 발굽을 크게 흔들어 보이며 같이 온 사람에게 소리쳤어요."
"셀레스티아 공주님 맙소사. 빨리 가서 페가수스 아무나 좀 데려와. 누구라도 좋으니까 잘 나는 친구로!" 동료가 다급하게 달려 멀어져 가는 동안, 그는 시청 건물 가까이로 다가가 고개를 들어 광인을 올려다보고 말했어요. '선생님. 선생님이 무슨 일을 당하셨는지 감히 넘겨짚어 말씀드리지는 않겠지만, 이걸로 만사가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다른 방법이 있을 거에요!'"
"광인은 이미 오래 전에 마음을 굳혀놓고 있었죠. 눈물 자국뿐만 아니라 헝클어진 갈기, 흙투성이가 된 솜털이 아마 그 증거였을 거에요. 광인은 사내에게 꽥꽥 소리쳤어요. '닥쳐! 닥치라고!' 차라리 비명이라고 해야 하겠군요. '하나마나한 얘기는 집어치워! 그걸로 뭐가 바뀌는데! 그쪽도 날 잊어버릴 거 아냐! 살아 있으나 뒈져 나자빠지나 거기서 거기야. 진즉에 뛰어내려 피떡이 됐어야 했다고!'"
"'안 돼요! 그러지 마세요. 무의미하게 죽어도 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고, 사내가 발굽을 들어올리며 외쳤지요. '잊지 않을 거라 약속할게요! 일단 내려오셔서 저희랑 얘기를 좀 하시죠!'"
"'시간이 지나면 약속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텐데 뭘 약속한다고!' 여자는 흐느껴 울다 딸꾹질까지 하고 있었어요. 그러면서도 진정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고요. 광인은 끄트머리까지 다가서서 언제든 몸을 내던질 듯 위협해 보였지요. 떨어지는 꿈을 꾸면, 바닥에 닿기 전에 깨곤 하잖아요. 이번에도 그럴 것임을 입증해 보이겠다는 듯한 기세였어요. '이 개만도 못한 동네! 감옥, 차라리 감옥이지!'"
"'잠깐만요...' 하고 운을 뗀 어스 포니 청년이 두 앞발굽을 들어올리고, 조용하면서도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어요. 광인과 마찬가지로 몸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말이죠. '세상이 그쪽 느낌대로 잔혹하고 끔찍하더라도 이걸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요! 이런다고 달라지는 것도 하나 없고요! 그러니 절 믿고 거기서 내려오세요. 아직 살아낼 수 있는 시간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드디어 광인도 참다참다 못해 폭발했어요. '왜?!" 여자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씹어 뱉듯 소리쳤죠. '뛰어내리지 못할 건 또 뭔데?! 떨어지기만 하면 다 끝내고 편해질 수 있는데 내가 왜?!'"
"그 자리에서 광인을 올려다보던 사내는 분명 같은 사람이었지만, 어딘지 달라 보였어요. 다른 사람으로 느꼈을 수도 있고, 마을 사람들이 여자를 처음으로 인지했다가 다시 잊어버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광인 또한 그 남자를 처음으로 자기 인지 영역에 끌어들였을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이번만큼은 순식간에 잊히지 않았지요. 연옥의 동굴 저편에서 울려오는 메아리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저주받기 이전의 여자가 그러했듯이 존재 자체로 기억되고 있었기 때문이죠. 사내의 늘어뜨린 귀였는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입술이었는지, 어쩌면 사파이어 빛 눈동자 위로 엉겨 가는 물기가 사내의 말 뜻을 광인에게 전했을 수도 있겠군요. 뭐였는지는 별로 상관없으니 넘어갈까요. 광인 스스로도 제정신과 함께 사라졌다 착각하고 있던 본인의 한 일면이 다시 떠올랐어요. 부드러운 가락이 귀를 간질여 잠에서 깨어난 어린 아이가 천지창조의 순간부터 존재해 온 한 마디 노래와 함께 황금빛 새벽을 맞이하듯, 사내의 한 마디가 그 편린을 이끌고 올라왔지요."
당신은 소중하고 각별한 사람이니까. 당신이 떠나 버린 세상은 이전보다도 더 칙칙하고 살기 어려운 곳이 될 테니까.
"광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내를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어요. 남자는 완벽한 타인이었죠. 전에 아는 사이도 아니었고, 그나마도 몇 분만 지나면 도로 잊어버릴 게 뻔했지요. 그렇더라도 사내의 말이 광인의 마음 가장 깊은 곳,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곳을 어루만져 준 것은 사실이었어요. 아직 그 마음이 남아 있었음을 여자는 그제야 깨달았죠. 얼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광인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었어요. 어쩌면 다시 태어난 거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남자는 당장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기꺼이 한 것뿐이었는데 말이죠. 언제 세상을 떠날지 알 수 없었으므로 그 사내 또한 소중한 사람이었어요. 한 점 그림자가 광인의 마음을 포위하고 늘어선 벽을 태워 구멍을 낸 것은 그것 때문이었죠."
"광인은 그제야 자기가 빠진 절망과 고통의 구렁텅이에 사로잡혀 얼마나 이기적인 짓을 벌였는지 깨달았어요. 몇 번이고 죽음에 죽음을 잇대어 가며 죽음을 반복하는 사람이 여자 하나만은 아니었거든요. 마을 사람들도 광인과 함께 계속 죽고 있었지요. 저 사람들이라 해도 결국 과거의 껍질 속에 드리운 기억상실의 그림자요, 매달려야 할 십자가에 자신의 모든 생각을 못박을 권리를 받드는 부박한 허깨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광인이 그 사람들의 꿈을 깨뜨릴 자격을 갖는 건 아니었어요."
"저주를 짊어진 광인이 사방을 들쑤시며 동네 사람들 인생에 뻔뻔스레 참견을 하고 다녀 여자가 짊어진 망각의 역병이 창궐하고, 그리하여 온 동네가 죽음을 향하여 전진하고 사람들은 어둠의 심연을 향하여 너나할 것 없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어요.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광인과 마주칠 때마다 더러는 빙긋 웃고, 더러는 큰 소리로 웃으며 반겨 주었지요. 저들 모두를 위한 무덤을 파 주기에는 수가 너무 많았죠. 그래서 광인의 머릿속에서 전율하며 울려퍼지는 곡 한 편 같은 노래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어요. 머릿속에 스스로 울리는 곡은 심장이 한 번 뛸 때마다 더 크고 힘차게 울려 퍼졌는데, 그 때 광인의 심장을 뛰게 한 건 사내였지요. 사실, 사내가 건넨 말은 더없이 귀중한 말이기는 했지만 광인이 거기서 뛰어내려 추락하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도 더 빨리 심연 속으로 빨려들어갈 말이기도 했어요. 다른 사람들의 얼굴은 기쁨과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허락된 시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될 것이고, 여자도 그 신세가 되지 않았다면 능히 그럴 수 있었을 테죠. 광인이 조금만 더 용기를 낸다면, 악몽으로 변한 삶이나마 살아내고자 한다면, 그리고 저주 뒤에 숨은 비밀을 찾아내고 말겠다는 의지를 갖는다면 여자 또한 그렇게 살 수 있을 거에요. 차라리 좀 더 미치기만 한다면, 으로 표현하는 게 더 알맞겠군요."
"세상 그 어느 새벽도 그만큼이나 찬란히 머릿속을 맑게 개어주진 못했을 거에요. 문제는 그게 끝나기도 전에 한 줄기 오한이 몸을 타고 지나갔다는 거죠.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로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 이제 영영 사라졌다는 뜻이었죠. 그 남자의 표정도 벌써 풀어져서, 아기 침대에 누운 영아처럼 흐리멍텅한 얼굴을 하고 있었죠. 사내의 꿈은 그렇게 끝났고, 눈에 맺힌 눈물도 사라졌어요. 광인의 눈동자에 비친 자기 얼굴을 멍청하게 쳐다보고 있었을 뿐. 여자는 저주가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빙긋 웃더니, 고층 난간에서 내려와 사라졌어요."
다시 저문 하루를 슬퍼하는 듯한 현의 소리가 잦아들었다. 얼핏 들으면 애수에 젖은 듯하지만, 그 위에는 그 때 내가 살며시 짓고 있던 미소처럼 행복한 마음이 묻어 있었다. 밤이 깊어 가며 짙은 자주색 장막을 드리워 이야기의 종막을 알렸다. 나는 캐러멜에게서 조금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광인이 짊어진 저주가 그 남자와의 만남으로 사그라든 것은 아니었어요. 엄밀히 따져보면 차라리 초입 정도였죠. 앞으로 살아내야 할 혹한의 시간들을 감당해낼 수 있는 진실하고 깊은 온기가 가슴 깊은 곳에서 피어난 것도 사실이죠. 여자의 광증은 스스로 다시 하루를 견뎌낼 원동력이 되었고요. 광인의 꿈과 같은 인생을 살아내고, 청중이 연주의 끝에서 그 연주의 의미를 알아주기만을 바라는 희망 하나만으로 잊혀야 할 연주자가 되어 곡을 퉁기고 노래를 부르는 데 필요한 용기와 끈기의 원천이죠. 기억이란 살아냈던 어느 한 순간의 모든 향미를 거세해 버리고 난 뒤 남은 부박한 한 점 껍데기에 지나지 않아요. 끔찍한 꿈에서 사람을 흔들어 깨워 주는 음악이나 죽음과 상실로 점철된 역사가 남긴 유산을 관통하는 끝없는 노래와 같이, 사람의 심금 위에 매인 현을 퉁겨 울리는 것은 음악이지요. 광인은 사내에게서 그것을 배웠어요. 아주 별 거 아닌 한 마디로, 광인이 짊어진 저주가 흉악하고 잔혹하더라도 여자에게는 아직 그 순간을 즐기며 살아내야 하는 의무와 그럴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음을 상기시켜 준 거에요. 삶이란 한바탕 꿈에 불과하지만 사람이 어떻게든 해낼 수 있는 것이기도 하죠. 인생 곳곳에 어두운 골목이 수도 없이 뻗어 있기는 하지만, 거기에서도 그 나름대로의 의미를 찾아내 그것을 한 곡 노래로 바꾸어 낸다면 인생 다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에요."
그렇게 연주는 끝났고, 캐러멜은 순간 찾아온 적막에 놀랐는지 어쨌는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사내는 우리 옆에서 딱딱 타는 화톳불은 안중에도 없이 이쪽을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화톳불보다도 밝고 화사하게 빛나는 존재가 바로 자기 앞에 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좋은 이야기군요." 캐러멜이 나직히 말했다. "비극이지만, 또... 음..."
"행복을 모르는 자는 슬픔을 논할 수 없죠." 낭랑하게 말했다. 다시 입을 벌려 꺼낸 말은, 지어 보인 웃음만큼이나 부박한 것이었다. "우리 모두 행복하고 건강한 인생을 즐기며 바로 이 자리에 살아 있죠. 이 모든 것도 언젠가 기억처럼 아득히 흐려져 갈 것이고, 그 날이 오면 그 빈 자리를 노래로 채울 생각이에요. 세상의 모든 사랑과 상실은 저마다의 자리가 있는 법인데, 사람은 이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괴로워하며 어쩔 수 없이 납득하는 경우도 있어요. 저는 차라리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려고 해요. 잃음으로써 그 빈자리에 적막과 고요가 찾아들 것과, 몸이 살아서 감사히 받든 세상의 온기가 있음을 알게 되죠. 세상을 살아내는 것은 스스로의 두려움으로 지은 폐쇄 병동에 사람의 후회가 당직 근무를 도는 정신병원에 입원해 누운 것과 같아요. 다가올 앞날을 대비한다면서 감시초소를 더 높고 더 많이 쌓아올릴 걱정은 그만두고, 당장 눈 앞의 화톳불을 쪼이는 게 탈출구죠. 제가 하나 장담하는데, 혼자 된 사람이 사랑의 온기를 털끝만큼이라도 아는 건 불가능합니다. 하하하."
캐러멜이 마른침을 삼켰다. 벽안이 젖어 왔다. "윈드휘슬러가 저를 사랑해 주니, 저도 윈드휘슬러를 사랑하고 싶습니다. 아무것도 줄 수 있는 게 없는데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쪽을 주시면 돼요." 이야기를 들려 주며 퉁겼던 음악을 다시 소리로 옮기며 말했다. "당신을 그 사람의 것으로 해주세요. 그리고 그분 곁에서 계속 살아가세요. 서로에게 기억 이상의 것이 되어 주시고, 함께 일출을 맞이하세요. 다시 견뎌야 할 내일이 얼마나 팍팍하든지 결국 또 견뎌지기는 견뎌질 것이고, 그쪽이 소중한 사람을 포기해 버리면 세상은 더 견디기 어려워질 테니까."
캐러멜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내의 눈가에 무엇인가 반짝이는 것이 맺혔다. 자고 깨는 사이마다 눈가에 맺혔던 밝고 창백한 구슬. 일 년 내내 꿔 오던 꿈마다 나를 찾아온 그 물건이었다. 캐러멜의 얼굴을 바라보자 순간 한기가 몰려와 몸이 떨렸다. "광인은 짊어진 저주를 풀어낼 방법을 찾았나요."
침을 삼켰다. "아뇨. 평생 못 찾겠지요." 나는 말했다. "그렇더라도 세상 그 누구도 느낄 수 없는 재미를 볼 기회를 잡았다는 건 광인 스스로도 인정했어요. 자기를 잊어버린 것들에 대한 노래를 부르는 재미라고 해둘까요. 다만..."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화톳불로 시선을 돌렸다. "...그 때 자기 인생을 바꿔 준 그 사람을 찾아내 단 하루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평생 쌓아 온 통찰력과 지식 전부를 포기해서라도..." 천천히 고개를 돌려 사내의 사파이어 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입김이 뿜어져 나와 세상의 양극단으로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다. "정말 고맙다고 말해 줄 것 같네요. 앞으로도 계속 자기는 꿈을 꾸며 살아갈 거라고, 죽는 날까지 기억하겠노라고."
화톳불에서 튕겨져 나온 불똥이 날리다가 꺼져 흩어졌다. 캐러멜의 두 눈에 잠시 스치고 지나간 눈빛처럼, 불똥의 죽음은 순식간이었다. 사내가 눈을 깜박이고 나자 어느덧 밤이 깊어 있었고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싹한 한기가 그의 몸을 타고 기어올랐을 것이다.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점점 더 짙은 어둠이 주위를 에워싸 갔다. 그리하여 캐러멜은 시각은 없는 셈 치고 청각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잠자는 아이를 살며시 깨워 침대에서 내려주는 새벽 햇살과도 같이, 듣기 좋은 곡 하나가 그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캐러멜이 고개를 돌려 몇 미터 앞 화톳불을 쳐다보자, 어느새 페가수스 여럿이 모여 즐거이 웃으며 캐러멜에게 축하를 던지는 환영이 어른거렸다. 사내는 말 그대로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라 귀신 들린 사람처럼 미친 듯 달려갔다.
파란 하늘처럼 푸른 날개와 금발 갈기를 한 여자가 친구들과 함께 화톳불 앞에 모여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종소리처럼 낭랑한 웃음소리였다. 캐러멜이 여자의 낭랑한 목소리가 닿는 곳까지 달려왔을 때 그는 이미 제대로 서 있기조차 어려워할 만큼 지쳐 있었다. 그는 여자의 뒤로 다가가 용기를 내 헛기침하고 말을 걸었다. "윈디?"
윈드휘슬러가 돌아보았다. 캐러멜의 눈에도 그녀의 날개가 흔들리고 갈색 눈동자에 빛이 어리는 모습이 보였을 것이다. "캐러멜! 저..."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른침을 넘기더니, 겨우 말했다. "올해 축제는 안 오는 줄 알고 있었는데..."
"내가 그랬었지. 그게..." 캐러멜이 입을 떼 대답했는데, 끝맺지 못하고 끝이 축 늘어졌다. 그는 뭘 어쩌면 좋을지 모르는 듯한 눈치였다. 당장 윈드휘슬러에게 온 이유조차 설명하지 못해 불 속에 답이 있기라도 한 양 화톳불만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캐러멜이 귀를 쫑긋했다. 어디선가 끝없이 이어지는 멜로디가 들려와서, 사내의 입을 움직여 말을 이어갔다. "음악을 들었어. 뭐라 말하기도 어려울 만큼 듣기 좋고 예쁜 곡이었는데." 그는 빙긋 웃으며 시선을 움직여 윈드휘슬러를 바라보았다. "안 되겠더라. 옆에 네가 없으니 좋은지 어떤지도 잘 모르겠더라고."
윈드휘슬러의 날개 끝 깃털이 파르르 떨리더니, 금빛 꼬리가 두 번이나 빙빙 꼬였다. 그녀는 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자기..." 윈드휘슬러는 둑 터진 듯 끝없이 흐르는 눈물로 범벅이 되어 겨우 웃고 있었다. 곁에 있던 친구들도 윈드휘슬러와 캐러멜을 위해 조용히 자리를 비워주었다. 무도회장에서 자리를 비워주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나도 보고 싶었어."
"윈디, 그게... 음..." 캐러멜이 입술을 씹었다. 윈드휘슬러의 눈길이 갑자기 부담스러워지기라도 한 양 몸을 파르르 떨더니 말했다. "혹시 그 뭐냐... 어, 혹시 따로 할 거 없으면..."
"그래." 윈드휘슬러가 하늘에 뜬 달처럼 반짝이는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하지의 연인이 되어 줬으면 좋겠어."
캐러멜은 놀란 눈치였다. 화톳불 너머에는 선더레인과 블로섬포스가 앉아서 빙긋 웃으며 눈을 찡긋해 보이고 있었다. 그는 김 빠졌다는 듯 피식 웃으며 윈드휘슬러 옆자리에 앉았다. "내가 그 얘기 꺼낼 거라는 건 어떻게 알았대?"
"으으으음..." 윈드휘슬러가 옆으로 몸을 기울여 캐러멜의 얼굴에 뺨을 비비더니, 낭랑하게 속삭였다. "틀린 말도 아니잖아."
캐러멜이 숨을 길게 내뿜더니, 뺨을 비볐다. 어린애 같은 목소리로 그는 말했다. "절대 아니지." 사내가 훌쩍였다.
윈드휘슬러가 괜찮냐는 듯한 눈길로 물었다. "캐러멜? 너... 괜찮은 거 맞지?"
화톳불의 불빛을 받아 사내의 젖은 눈이 번들거렸다. 사내의 슬픔은 윈드휘슬러를 향한 웃음에 자리를 비켜준 지 오래였다. "그냥 살아 있는 게 새삼 행복해져서 그래. 너랑 있어서. 네 곁에만 있으면 영원히 깨지 않을 즐거운 꿈을 꾸는 것 같거든. 이걸로 설명이 될까 싶네."
그녀는 마주보고 웃으며 말했다. "글쎄, 벌써 설명하지 않았어?"
둘이 서로에게 기대어 축일의 온기에 휘감긴 채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꺼져 가는 화톳불 너머 어둠에 숨어 가만히 서 있었다. 캐러멜과 나 사이에 휘영청 떠오른 달을 등지고 리라를 퉁기며 돌아갔다.
지금 일지를 적는 동안에도 언제쯤에 연주를 그만뒀는지 확실치 않다. 레퍼토리가 다 떨어졌다 싶은 생각이 들었을 때 문득 고개를 숙여 아래를 쳐다보니 리라가 가슴에 안겨 있었다. 서글프면서도 즐거운 마음이 들어 한숨을 내쉬었다. 악기는 연주의 시작일 뿐이다. 작곡이 그 결실을 맺으려거든 청자가 필요한 법이고, 그럼으로써 곡은 끝나지 않는다.
우렁찬 천둥 소리 같은 굉음에 잠시 누리고 있던 평온한 마음이 싹 가셔 버렸다. 캐러멜과 윈드휘슬러, 기타 마을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 밤의 자주색 장막 위로 펼쳐지는 화려한 불꽃놀이를 보고 환호했다. 마을 곳곳에 화톳불과 형형색색의 폭죽 불꽃이 가득 찼고, 길가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람들이 들어차 춤을 추었다. 하지의 연인들은 기쁨에 젖어 다음 새벽을 같이 기다리자고 약속했다. 공주께서 태양을 띄워 새벽이 오면 하지의 연인들은 말 그대로 세상을 가득 채우는 빛에 두 사람의 마음에 싹튼 기쁨을 비춰 보게 될 것이다.
다들 축제에 취해 있어서 한 명이 슬쩍 빠져나가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 사람은 화톳불로도 볼 수 없고, 폭죽의 섬광에도 그림자를 만들지 않는다.
마을 중앙 광장 바깥으로 걸어 나오던 중 잠시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찰나의 순간이나마, 내 발자국이 한 걸음씩 옮겨놓는 박자에 맞추어 달빛에 녹아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아니면 그저 보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꿈결 같은 모습에, 나는 오직 광인만이 할 수 있을 대답을 건넸다.
나는 웃었다.
내가 세상에 어떤 흔적을 남길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기껏해야 무덤 한 곳밖에 없을 것 같다.
재번역 후기
당시만 해도 SS&E의 솜씨가 그리 훌륭하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직 EoP 물이 덜 빠져서 거지같은 문장이 계속 나오죠. 과거의 제가 왜 번역기를 돌렸는지 대충 짐작이 가는군요. 구성 면에서도 빽그라운드 포니 이전 작품인 EoP를 추종합니다. EoP도 각 막에 대응하는 메인 캐릭터가 있고, 멸망 직전 각 캐릭터의 서사를 따라가다가 막바지에 감정선을 터뜨리는 식으로 전개되죠. 필요한 장치도 세팅하고, 적절하게 활용해 가면서 캐릭터의 감정선에 공감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제공하면서 말입니다. 안 그래도 한 막이 최소 5.5만부터 시작하니까 이런 거 배치할 여유는 충분합니다.
BP 챕터2는 그런 면에서 좀 다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BP의 한 개 챕터가 EoP의 1개 막에 대응합니다. 장편을 단편으로 줄여야 해요. 김훈 선생이 하신 말씀처럼 단편은 작가의 밑천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BP의 경우 챕터2가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죠. 감정선 2개가 부딪칩니다. 캐러멜의 감정선이 있고 광인, 즉 라이라의 감정선이 있습니다. 근데 분량은 7천이에요. EoP 1막에서 생존자의 감정선 세팅하고 터뜨리는 데 대충 5.5만 정도 투입한 거에 비하면 14% 가량밖에 안 되죠. 여기에 감정선 두 개를 넣으니까 글이 붕 뜹니다. 챕터1만 해도 1.1만이고 제시되는 감정선이 2개 있으나 그리 중점을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라이라의 일상 생활 루틴을 보여주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죠.
그리고 1인칭 주인공 시점인데 왜 갑자기 전지적 작가시점이 끼어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거 엄연한 일기인데.
SS&E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는지 한 챕터를 이끌어 가는 주동인물에게 힘을 더 실어주려는 게 이후 챕터에서 자주 보입니다. 메인 스토리와 크게 관련 없는 챕터는 라이라와 엮인 캐릭터들 위주로 흘러가지만, 일인칭 주인공 시점 특성상 스토리가 크게 진전되는 부분에서는 라이라에게 무게중심이 가는 챕터도 많지요. 챕터11은 과거의 시점에서 사건의 진상을 일부 보여주는 장이기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지만. 쓰다 보니 또 쓸데없이 길어졌습니다. 글을 아껴 써야 할 것인데, 언제쯤에나 그리 될런지.
미주
*1 Homunculus. 중세 유럽의 의학이론에서는 사람의 잉태와 탄생에 관하여 정자 속 작은 사람이 여성의 태를 빌어 성장하고 태어나는 것이라고 여겼다. 이 정자 속 작은 사람을 정자미인, 즉 호문쿨루스라 한다. 연금술사들은 이 정자미인을 여성의 몸을 빌리지 않고 인위적으로 성장시키고자 했는데, 말의 자궁을 빌려 성장시킬 수 있다는 말도 있고 말똥에 섞어 60일을 묵히면 된다는 말도 있었다.
*2 Hearts and Hooves Day. 본 역본은 명확한 번역방향이 나온 2020 연말에 재번역한 것이며, 이미 Grand galloping gala를 대연회로 번역한 이후에 번역한 것이다. 여기서 이것만 음차 번역을 해 버리면 앞뒤가 안 맞으므로 hooves를 날리고 의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