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ude : Resurrection
흐릿한 촉광 사이로 유니콘 한 명이 고개를 푹 숙이고 눈은 꼭 감은 채 앉아 있었다. 사내가 앉아 있는 곳은 잔물결 하나 없이 고요한 연못 가장자리였고, 수면 위로 사내의 거울상이 흔들렸다. 연못은 에버프리 숲 최심부, 검게 물든 나무들이 뒤틀리고 구부러진 가지를 뻗어 사방을 가리운 곳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었다. 주위를 둘러싼 나뭇가지들은 말 없는 초병과도 같았다.
이퀘스트리아가 겨울의 옷을 벗고 봄의 제전으로 나아가기는 했지만, 에버프리 숲만은 아직 겨울의 찌꺼기가 남아 곳곳에 들러붙어 있었다. 흙 위에 아직 눈이 덮여 있었고, 공기 또한 한기가 스며 있었다. 사내의 허파 밖으로 뿜어져 나온 숨결이 입김으로 엉겨 공중으로 떠오르다가, 얼마 뒤 다시 흩어져 밤의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사내는 한참 동안이나 연못 가장자리에 아무 말 없이 혼자 앉아 있었고, 옆에 켜 놓은 양초 몇 개만이 그의 곁을 지켰다. 작고 허약한 불꽃에서 피어난 불빛이 사내의 솜털과 갈기를 적셨다. 그는 솜털과 갈기를 전부 검은색으로 염색한 지 오래였고, 이는 큐티마크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그의 엉덩이 또한 완전한 검은색이었다는 이야기다.
숲 속에 퍼지는 조용한 소리만이 들리는 소리의 전부였다.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 바람에 물이 찰랑이는 소리, 벌레가 우는 소리와 날갯짓하는 소리가 고작이었다. 세상 모든 것에서 초탈한 듯한 침묵이야말로 사내가 그 날 밤에 맡은 과업을 준비하기에 더없이 필요한 것이었다. 사내가 심호흡을 들이마시는 순간, 나뭇가지 사이로 발굽 소리가 부딪쳐 메아리졌다.
"넥서스Nexus 님, 저희는 준비를 마쳤습니다."
넥서스라 불린 검은 유니콘이 숨을 들이마셨다. 등 뒤에서 나타난 자를 향해 돌아간 얼굴의 눈꺼풀이 열리며 청록색 눈동자가 나타났다. "그래. 나도 거의 끝났다."
완연한 침묵을 깨뜨리고 나타난 자가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숲의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발걸음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 사내는 뿔을 밝혔다. 마력이 자유롭게 순환하기 시작함과 동시에 염동력이 발현하며 사내가 옆에 벌여두고 있던 물건들을 허공으로 들어올렸다. 사내가 밤하늘, 특히 달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우리의 여왕이시여, 지금이야말로 폐하의 종복들이 기울여 온 노력이 열매를 맺는 날이나이다. 부디 저희를 인도하소서."
넥서스의 입에서 조용하고 느릿하게 흘러나온 말에는 흔들림 없는 충성과 헌신의 의지가 충만했고, 그 어조에는 셀 수 없이 교리를 설파해 온 흔적이 드러나 있었다. 넥서스가 혼자 우물거린 그 목소리는 뛰어난 지성을 가진 이와 강건한 육신을 가진 자들을 홀려 그들의 대의로 끌어들인 훌륭한 무기였다. 사내는 고개를 깊이 숙여 절하며 한쪽 발굽을 가슴에 가져다 댔다.
"제 미력한 몸뚱이나마 폐하의 성심과 권능을 담는 그릇으로 쓰시어 응보를 이루소서."
공중에 떠오른 물건들이 넥서스 근처로 모이더니, 원을 그리며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검푸른 색으로 물들이고 흰 별빛을 수놓아 밤하늘의 모습을 모사한 망토 한 벌이 바람에 나풀거렸다. 잿빛이 도는 자주색 강철로 주조한 갑주가 뒤를 따랐다. 갑주는 전투화와 목 보호대, 흉갑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는 청록색으로 물들인 초승달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폐하의 갈기를 받드나이다." 넥서스가 망토를 등 뒤로 둘렀다. "폐하의 갈기는 끝 모를 밤하늘이며, 폐하의 강대함과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옵니다. 이제 신이 폐하의 갑주를 받드나이다." 사내가 갑주를 몸에 걸치며 말했다. "폐하의 옥안과 광명에 바치옵니다. 바라옵건대, 신이 섬기는 이는 오직 폐하 한 분이올지니 오늘 제가 폐하를 대신하도록 윤허하소서."
갑주의 마지막 한 조각이 넥서스 쪽으로 떠왔다. 흉갑과 같은 금속으로 만든 투구였다. 사내는 조심스레 투구를 돌려 투구에 난 뿔 구멍에 자기 뿔을 집어넣으며 머리에 얹었다. 투구는 딱 맞았다. "오늘 밤 폐하의 권능이 신과 함께하도록 허하시고, 그리하여 폐하 스스로의 육신으로 차가운 밤 공기를 호흡하소서. 폐하의 용안으로 세상을 직접 내려다보소서. 이제 폐하께서 예전처럼 나약한 자의 몸뚱이를 빌어 강림하셔야 할 일은 없으리이다. 오늘 밤, 폐하는 조화의 원소로 해할 수 없는 폐하만의 옥체를 가지시게 될 것이나이다."
넥서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수면에 비친 자신의 거울상을 내려다보았다. 사내가 신앙하는 주인의 모습과 더할나위없이 똑 닮은 모습이었다. 다른 신도들과 마찬가지로, 그 또한 돌아온 주인의 권능과 지혜를 직접 목도하고자 하는 의지로 충만해 있었다. 이제 넥서스와 부하들의 기나긴 노고의 끝에 그들의 여왕은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의식에 참여하는 자들 중 그런 의복을 착용할 수 있는 자는 그 의식의 집전자인 넥서스 단 하나뿐이었다. 그것이야말로 그 누구도 감히 빼앗아갈 수 없을, 넥서스의 영광스러운 직책이었다.
"나이트메어 문이시여, 오늘 폐하를 따르는 자들이 폐하께 새로운 생명을 빚어내 드리겠나이다. 해와 달의 폭정은 이제 그 응보를 맞으리이다."
마음을 다잡은 넥서스가 몸을 돌려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발자국을 따라 조금 걷자 근처 공터가 나타났다. 공터에는 몇 명의 유니콘과 페가수스, 어스 포니들이 모여 있었는데, 의식 준비를 확인하느라 곳곳을 바쁘게 오고가는 모습이었다.
공터에 쌓여 있던 눈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지만, 아직 몇 군데 반점처럼 눈이 쌓인 자리가 남아 있었다. 땅바닥에는 나무 그릇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는데, 기름에 적신 무언가의 가루가 가득 들어 있었다. 페인트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고, 두건을 눌러쓴 페가수스들이 하늘 곳곳을 오가며 구름을 모아 공터 위 하늘을 덮고 있었다.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넥서스의 눈에 띄인 자들은 의식 준비의 지휘자인 세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교단의 검은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지휘자는 페가수스 둘에 어스 포니 하나로, 넥서스와 같은 갑주를 걸치고 있었지만 전투화와 밤하늘 망토, 투구만은 오직 넥서스만 착용했다. 이 제의祭衣를 입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하나뿐이었다.
"나이트 윈드Night Wind, 진척 상황은 어떤가?" 넥서스가 셋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구름을 이용한 위장은 거의 마무리되었고, 앞으로 몇 분만 있으면 담당자들 모두 원위치 가능합니다." 짙은 보라색을 한 페가수스가 청록색 눈으로 넥서스를 빤히 쳐다보며 대답했다. 청록색 눈동자는 교단의 일원임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는데, 교단이 신봉하는 존재의 눈동자 색이 청록색이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이유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계몽된 자들이기도 했으므로 주어지는 축복이었다.
"좋아." 넥서스가 대답하며 어스 포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스톤월Stonewall. 물건은 잘 가지고 있나?"
"캔틀롯에서 출발한 이후 단 한 순간도 제 곁에서 떼어놓은 적이 없습니다." 어스 포니가 대답하며 자기 등에 올려놓은 그릇을 가리켜 보였다.
"그레이 게일Gray Gale. 귀빈께서는 정신을 차리셨나?"
"아, 그럼요. 방금 깨어난 참입니다." 잿빛 패가수스가 대답했다. "스톤월이 무서운가 보던데요!"
"달아나려고 했다가는 스톤월이 당장 네년 뿔을 부러뜨려 버릴 거라고 네가 얘기했으니 그렇겠지." 나이트 윈드가 틱틱댔다.
그레이 게일은 아무렴 어떠냐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왜. 덕분에 뭔 짓을 하려고는 안 하잖아."
"하고 싶어도 못 해. 모가지에 마법을 못 쓰게 막는 구속구를 채워 놨으니."
"다들 잘해주었다." 넥서스는 둘이 더 투닥거리기 전에 적당히 끊으며 말했다. "그럼 이제 할 일을 다해야겠지. 스톤월, 마법진 중앙으로 성물을 운반하라. 그레이 게일과 나이트 윈드는 횃불을 들고 하늘로 향하라."
셋은 끄덕이고는 각자의 자리로 신속하게 흩어졌고, 넥서스는 공터 한쪽 구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밧줄로 네 발굽을 꽁꽁 묶이고, 머리에는 자루를 뒤집어쓴 여자가 땅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넥서스는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로 나무 그릇 사이를 지나 구속당한 여자를 향해 다가갔다. 보라색 솜털이 진흙탕에 젖어 더러워져 있었고, 어두운 자주색 갈기는 엉망이 되어 있었다. 넥서스가 보기에 여자의 꼬락서니는 매우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적당히 거리가 가까워진 뒤, 넥서스가 뿔을 밝혀 여자의 머리에 씌워 둔 자루를 벗기고 그 너머에 있던 충격과 공포에 찌든 눈을 마주보았다.
"저희의 누추한 자리에 기꺼이 함께 해 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스파클 양."
"당신 누구에요? 무슨 짓을 하려는 거죠?"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겁에 질린 채 새된 소리로 말했다. 목청을 가다듬어야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밧줄로 동여맨 네 다리를 움직여 보려고 용을 쓰며 마력을 끌어내 탈출을 기도했으나, 그녀는 신체적으로만 구속된 것이 아니었다. 목에 채워진 철제 구속구가 마력의 흐름을 막고 있었다.
넥서스가 조용히 웃으며 뿔을 밝혀 트와일라잇 스파클을 들어올렸다. "역시 탐구심이 왕성하시군요. 하긴, 그 셀레스티아 공주의 제자 중에서도 백미라고 하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그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공터 중앙으로 걷기 시작했다. 공중에 뜬 트와일라잇은 그의 뒤를 따라 떠갈 수밖에 없었다. 넥서스의 앞에 선 어스 포니 스톤월이 철제 제단 같은 것을 설치하고, 등에 지고 있던 나무 그릇을 위에 올려두고 있었다.
"저희가 그대를 위해 준비한 자리는, 사실 아주 별 것 아닌 것이기도 하답니다, 트와일라잇 스파클 양. 저희는...... 글쎄요. 이퀘스트리아의 진정한 여왕을 섬기는 충실한 종이라고나 해두면 되겠군요. 나이트메어 문 여왕 폐하 말입니다."
"당신 미쳤어!?" 트와일라잇은 넥서스의 염동력에 떠가면서도 몸부림쳤다. 결박을 풀고 달아나려는 시도는 결코 멈춘 적이 없었다. "나이트메어 문은 없어졌어. 세상에 없는 자를 무슨 수로 섬기겠다는 거야?"
"스파클 양께서 생각하시는 것처럼 복잡하고 철학적인 방법은 아니랍니다. 그래도 벌써부터 괜히 김을 빼 놓으면 실례가 되겠지요. 스파클 양의 헌신은...... 저희 모두에게 있어 아주 기쁜 일이 될 것이라는 것 정도만 아시면 됩니다." 말을 마친 넥서스는 트와일라잇의 머리에 다시 자루를 뒤집어씌우고, 자루 주둥이를 단단히 여몄다. 그리고는 트와일라잇이 뭐라고 소리치는지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고 음소거 마법을 걸어두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트와일라잇은 계속 허공에서 발버둥치게 내버려 둔 넥서스가 금속 제단 쪽으로 걸어갔다. 키가 크고 폭이 좁은 철제 탁자 위에 올려진 나무 그릇 내부로 사내의 시선이 향했다. 사내의 눈이 기대감으로 번득였다. 내용물은 부적을 조각내어 말아 둔 것 같은 것들이었다. 종이 자체는 검은색이었고, 가장 큰 조각에는 청록색 초승달 문양이 큼직하게 박혀 있었다.
넥서스가 그릇 옆에 놓여 있던 단도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뿔을 밝혀 들어올렸다. 칼날은 티끌 한 점 없이 깨끗했고, 잘 갈려서 서슬 퍼런 속살을 내보이고 있었다. 한 번도 쓴 적 없는 칼이었지만, 넥서스는 다른 칼을 쓰려고 했었다. 사내는 그때까지도 뭐라고 소리치며 몸을 비틀고 있던 트와일라잇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는 트와일라잇 쪽으로 다가간 뒤, 그녀의 고도를 조금 낮추었다. 그리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복부를 강타했다.
남자의 발길질은 즉시 효과가 나타났다. 트와일라잇은 버둥거리던 몸을 축 늘어뜨린 채 숨을 캑캑대며 괴로워했고, 넥서스는 단도를 들고 바싹 달라붙었다. 검날이 트와일라잇의 다리를 살짝 베고 지나가며 눈에 거의 보이지도 않을 상처를 남겼다. 베었다고 해 봤자, 종이에 살짝 베인 것만도 못했지만 트와일라잇은 계속 비명을 질렀다. 아파서였기도 했고, 생명의 위협을 느껴서였기도 했다.
트와일라잇이 뭐라고 생각하거나 말거나, 넥서스는 트와일라잇에게 더 이상의 위해를 끼칠 생각이 없었다. 사내가 관심이 있는 것은 그 자신이 방금 트와일라잇의 다리에 남긴 상처였다. 베인 자리가 벌어지면서 피가 조금씩 배어 나오자 넥서스가 단도를 가까이 가져갔다. 칼에 몇 방울 피를 먹인 사내가 나이트메어 문의 잔해를 담은 나무 제기에 피를 떨어뜨렸다.
"조화의 원소, 그 중 마법의 원소를 받드는 자의 생혈에 담긴 생명을 취하소서. 몇 방울 적의 피에서 취한 힘만으로도 적의 피를 모조리 방혈하시고 남음이 있으리이다." 넥서스가 기도문을 읊듯이 중얼거렸다. 그는 트와일라잇을 다시 띄워 공터 구석진 곳으로 데려가더니, 조금의 예의와 배려도 없이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치고는 금속 제단을 향해 돌아갔다. 그와 동시에 스톤월과 나이트 윈드, 그레이 게일을 비롯해 다른 망토 두른 자들이 넥서스를 향해 돌아섰다. 그들 모두의 시선이 사내를 향해 몰렸다. 남자가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하자 그 앞에 모여선 자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형제, 자매들이여. 우리는 거의 2년 가까이 어둠 속에서 수많은 고역을 치뤘다. 저 잘난 폭정왕 둘과 근위대의 등 뒤에서 산적한 사명을 이루어낸 그대들의 안위는 가히 백척간두와 같았다. 지금 이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 그대들이 얼마나 많은 사재를 털고, 그대들의 얼마나 긴 시간을 투입했는가. 그 인고의 세월 끝에 드디어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의식은 모두 준비되었다. 우리 악몽의 자식들Children of Nightmare이여, 오늘 밤 우리의 여왕께서 오직 당신만의 생명과 피, 그리고 형상을 갖추시고 다시 태어나는 모습을 목도하게 될지니!"
사교도들이 환호를 울리며 발굽을 쿵쿵 내리쳐 박수를 쳤다. 넥서스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는 잠시 부하들이 기뻐하도록 내버려 두다가 말을 이었다. "천 년 전, 우리의 여왕과 루나 공주는 한몸이었고, 한 존재였다. 조화의 원소는 우리의 여왕을 파괴할 권능이 없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저 나약하기 짝이 없는 루나의 몸뚱이에서 우리의 여왕을 축출하는 게 고작이었지. 여기 이 부적 안에 그 분의 정수가 봉인되어 있다. 잔혹하기 그지없는 결말이었지만, 이름만 그럴듯한 조화의 원소로는 우리의 여왕을 세상에서 지울 수 없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음이라."
"오늘 밤, 우리의 주인이 비로소 당신의 육신을 가지고 강림하신다. 오늘 밤이야말로, 순해 빠진 루나 공주에게 속박되어 계신 우리의 주인을 진정으로 해방시켜 드리는 순간이 되리라. 그리고 마침내, 이퀘스트리아를 수복하는 위대한 여정의 시작이 될 것이다!"
넥서스가 뒷다리로 땅을 딛고 벌떡 일어섰다. 사교도들의 환호성 위로 사내의 함성이 울렸다. "형제 자매들이여, 그대들의 힘을 내게 빌려다오! 우리의 승리가 머지 않았음이라! 오늘 밤, 나이트메어 문은 새로 태어나실 것이다!"
사교도들이 환호하며 스펠 넥서스Spell Nexus가 흩뿌린 고양감에 경도되어 준비를 마무리하러 돌아갔다. 유니콘들은 공터 주위에 원 모양으로 도열해 서서, 숲 바닥에 페인트로 그려 둔 마법진에 마력을 집중했다. 마법진이 발동하며 희고 푸른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한편, 스톤월은 의식에 참여하는 얼마 안 되는 어스 포니들과 함께 원 주변을 따라 걷고 있었다. 입에는 횃불을 물고, 기름에 적신 가루를 채운 그릇마다 불을 붙이는 것이었다. 불이 붙은 그릇은 섬뜩한 푸른 불꽃으로 빛났다.
이와 비슷한 모습이 마법진 위 상공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페가수스 사교도들은 제기를 더 많이 휴대하고 있었는데, 저들이 제기를 들고 있으면 그레이 게일과 나이트 윈드가 그 사이로 날아다니며 불을 붙였다. 갑주를 두른 페가수스 둘은 숙달된 동작으로 모든 제기에 빠짐없이 불을 붙이고, 마법진 한쪽 구석에 있던 스톤월과 합류했다. 셋은 마법진이 전개되는 모습을 가만히 감상하고 있었다.
넥서스 또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모든 제기에 불이 붙자 사방으로 마력이 풀려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마력이 충분히 해방될 때까지 기다리다가, 본인이 갖고 있던 제기 중 하나에 불을 붙이며 마법의 시동을 걸었다. 넥서스는 조심스레 불 붙은 제기를 높이 들어올려, 혹시나 불이 꺼질까 천천히 마법진 중앙으로 옮겼다. 그 뒤,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나이트메어 문의 잔해와 피 묻은 단도를 집어넣은 제기에도 불을 붙였다.
불이 순식간에 종잇장에 옮겨 붙었고, 넥서스는 재빨리 마법진을 둘러싸고 돌고 있던 휘하 유니콘들에게 합류했다. 넥서스가 합류하자 그들은 일제히 점토를 주물러 그릇을 빚는 것처럼 사방에 방출된 마력에 개입해 변형시키고, 어떤 형태를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풀려난 마력을 성형하고 그대로 단조하여 나이트메어 문의 잔해가 담긴 제기 속으로 집어넣는 것이었다.
혹시 의식이 실패하진 않았을까, 불안한 몇 초가 지난 뒤 넥서스가 그토록 고대하던 형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단도를 적신 피가 주문의 힘을 받아 불 위로 떠오른 것이다. 단검에서 떨어져 나온 핏방울이 하나의 구체를 이루며 모여들었고, 칼은 공터 근처에 있던 나무로 날려가 그대로 날 전체가 나무둥치에 박혀 버렸다.
칼은 사라지고 피만 남은 현재, 마법진 가운데에 놓아둔 제기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나이트메어 문을 봉인한 부적이 불타며 솟구친 연기가 핏방울을 둘러싸고 모여들었다. 제기에서 솟구친 불길과 연기, 마력이 마법진을 따라 흘러 들어갔다. 그 모든 것들이 마법진 중앙에서 회오리를 이루며 돌아갔다.
그것들이 모여 만든 검은 구체가 핏방울을 감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씩 그 크기를 키워 갔다. 불과 연기를 비롯한 다른 모든 것들을 빨아들이며 커지는 구체는 조금도 그 성장을 멈추지 않았다.
"보라...... 우리의 기대가 이루어지고 있다." 넥서스가 말했다. "폐하께서 비로소 그 형상을 갖추시고 계신다. 우리의 여왕이 곧—"
콰릉!
한 줄기 낙뢰가 하늘에서 떨어지며 마법진 중앙을 타격했다. 사교도 다수가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강철 제단과 핏방울을 감싼 검은 구체, 나이트메어 문의 잔해, 붉은 불꽃을 담은 나무 제기, 모두 번개에 맞아 재가 되었다. 그와 동시에 사교의 무리들이 정성스럽게 모아 둔 구름들도 전부 흩어져 사라졌다. 구름 하나 없이 맑게 갠 밤하늘에서 근위대 1개 부대 전체가 쏟아져 내렸다.
"멈추어라! 너희는 전원 체포다!" 근위 몇 명이 소리침과 동시에 금빛 갑주를 두른 페가수스 근위대 수십 명이 공터 곳곳에 착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교들은 누구 하나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근위대를 향해 돌격해 들어왔다. 공터이자 제사장이었던 곳은, 이제 전장이 되었다.
난투가 시작된 뒤에도 넥서스는 대경실색하여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마법진 한가운데와 거기 놓여 있었던 나이트메어 문의 잔해 모두가 번개에 바싹 구워져 흔적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교가 온갖 정성을 들여 수립하고 진행해 온 모든 계획이, 단 한 번의 낙뢰로 전부 물거품이 된 것이다. 마른 하늘에 이 정도의 번개를 내리칠 수 있는 자라면 단 하나뿐이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하늘에 난 구멍을 통해 아래로 내려오는 누군가의 형상이 보였다. 넥서스의 눈이 번쩍였다. 그 여자는 단 한 번 뿔을 반짝이는 것만으로 따뜻한 코코아 한 잔에서 피어나는 김을 쓸어 치우듯이 하늘의 모든 구름을 정리할 수 있는 여자였다.
"셀레스티아." 넥서스가 이를 갈며 청록색 눈동자를 태양의 공주에게 겨누었다. 셀레스티아 공주는 전장 한복판에 가볍게 내려앉더니, 자기를 노리고 달려드는 사교도들을 파리 쫓듯이 가볍게 뿔만 반짝이는 것으로 치워 버렸다. 넥서스는 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장 셀레스티아에게 덤벼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신성한 의식을 방해한 자에게 그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었다. 다행히도, 넥서스는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한 자였다.
"오늘 네가 승리했다고 착각하지 마라, 셀레스티아. 응보의 때를 잠시 늦췄을 뿐이다." 넥서스가 혀를 차며 말했다. 그리고는 근처 사교도들을 불러모아 근처로 모으고 뿔을 밝혔다. 그레이 게일, 나이트 윈드, 스톤월과 얼마 안 되는 사교도들이 근처로 모이자 넥서스가 뿔을 밝혔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사교의 무리는 어떻게 되었느냐?" 셀레스티아가 물었다. 구조된 트와일라잇은 즉시 자택으로 옮겨져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쉬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겪은 일이 워낙 충격적이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곯아떨어진 것이다. 셀레스티아는 황금떡갈나무 도서관Golden Oaks Library을 작전본부로 전환하고, 트와일라잇의 방 근처에 경비를 배치하여 보호하는 한편 근위대가 가져온 보고를 접수했다.
"상당한 무리를 체포하여 구금하였으나, 잔당 일부가 마법을 이용해 달아난 것으로 판단됩니다." 근위가 고개를 깊이 숙여 절하며 대답했다. "투명화 마법을 쓴 것으로 보여 놈들의 발자국을 추적해 숲 깊은 곳까지 들어갔사오나, 흔적이 끊겨 더 쫓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급히 몸만 숨겨 달아나다가, 도중에 실수했음을 깨닫고 흔적까지 지우는 마법으로 전환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현재 내제자의 행방이 묘연하다고 최초 신고한 얼룩말의 협조를 얻어 숲 전역을 수색하고 있습니다."
"그래, 제코라 말이구나. 오늘 큰 공을 세웠으니 마땅히 상을 받아야 할 것이다. 논공행상하여 처리하라. 루나와 더불어 저녁이라도 대접해야겠으니, 언제든 편한 날에 왕궁에 들르라고 이르거라."
"그리하겠습니다." 근위가 발굽을 들어 경례하며 말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공주 전하께옵서는 적들이 무엇을 노리고 작금의 흉계를 꾸몄는지 짐작이 가시나이까?"
"나도 모르겠구나." 셀레스티아가 덧붙였다. "적들이 무엇을 꾸미고 있었는지는 오늘 체포한 적의 잔당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트와일라잇은 납치 이후 계속해서 머리에 두꺼운 자루를 쓰고 있었으니 알 수 없었을 터이다. 사교도들이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유추할 만한 단서조차 알지 못하니 말이다."
"그 의식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는 아시나이까?"
셀레스티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 또한 처음 보는 종류의 의식이었단다. 고문헌에 기록된 것이라면 내 식견이 아직 거기에 닿지 못했다는 것이라고 하겠지만, 새로 개발해 낸 의식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겠지. 정확히 어떤 목적으로 개발된 의식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목적이 있다면 의식을 개발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너희는 의식 현장이 훼손되지 않도록 잘 보존하라.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근위가 다시 경례했다. "말씀을 받드나이다. 최대한 많은 증거를 보존하여 왕성으로 가져갈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그리하라. 의식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매우 불경스러운 것임은 확실하다. 감히 공주의 내제자를 건드리다니, 좌시할 수 없다." 셀레스티아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근위대장은 들으라. 너희는 지체 없이 오늘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라."
"분부를 받드나이다. 공주 전하."
의식 현장에 파견된 유니콘 근위대는 공터에 떨어진 것 하나 남김없이 쓸어담을 기세로 수색을 개시했다. 남아 있던 증거물들이 수집되었다. 나무 제기 안에 담겨 있던 것들은 전부 회수되었고, 다 타지 않은 가루는 한데 모았다. 근위대는 현장에 남아 있는 것들 중 에버프리 숲 공터에서 자연히 찾을 만한 것들을 제외한 모든 것을 수거했다. 마법진이 공터를 둘러싼 수목 경계선 외부로 뻗어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한 근위대는 그 이상으로 수색 범위를 확장하지는 않았다.
유니콘 근위대가 수집한 증거물들은 미리 준비해 둔 수레 한 대에 적재되었고, 적재 작업이 끝난 뒤에는 페가수스 근위대가 수레를 호송하기로 되어 있었다. 페가수스 근위대는 신속히 비상하여 캔틀롯을 향해 날아갔다. 지상에 남아 있던 유니콘 근위대는 인솔 장교의 지시에 따라 도열해 서서 지시를 하달받았다.
"고생 많았다. 우리는 지금부터 탈출한 사교도를 수색 중인 수색조에 합류해 에버프리 숲을 수색한다. 사교도 중 유니콘은 특히 주의하라. 놈들 중 하나가 괴이한 사술을 사용해 포위망을 뚫고 달아났다.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중대장님, 놈들이 다시 나타날 것을 대비해 의식 현장을 경계해야 하지 않습니까?" 근위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근위대에 갓 입대한 신병이었다.
"그럴 필요는 없다. 놈들은 우리 생각보다도 더 치밀한 자들이다." 중대장이 대답했다. "얼룩말 제코라가 트와일라잇 스파클을 납치하는 현장을 목격하고 알리지 않았다면 포니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우리는 끝내 몰랐을 것이다. 즉, 이것들은 셀레스티아 공주님을 비롯해 근위대나 경찰 기관의 방해를 받지 않도록 미리 계획을 짜고 움직였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근위대 1개 대대가 자기들 꽁무니에 바싹 따라붙은 상황에서 굳이 현장에 다시 나타나는 바보짓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 하나 덧붙여야겠군." 중대장이 계속 말했다. "여기는 캔틀롯 시립공원이 아니다. 에버프리 숲은 위험한 곳이지. 여기 서식하는 괴물들 중에는 내 두 배는 되는 사람도 갑옷째 집어삼키고 남을 것들도 있다. 꼭 필요한 게 아니라면, 가능한 빨리 에버프리를 빠져나가는 게 최선이다."
"다만 의식 현장을 경계하겠다는 말에는 틀린 점이 없다. 뜻대로 해도 좋다. 히드라만 안 만나게 주의하도록." 중대장이 말을 마쳤다. 사내가 중대원들을 향해 발굽을 까딱하고, 숲 외부로 향하며 수색을 개시했다.
현장을 경계해야 하지 않냐고 물었던 근위 하나만 공터에 남아 중대원들이 나무 사이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사내는 잠시 그 자리에 머뭇거리고 있다가, 중대장이 부르는 소리에 부리나케 뛰어 중대원들과 합류했다. 사람들이 떠난 에버프리 숲의 공터는 예전처럼 고요한 침묵을 받아들였다.
그 때, 눅눅한 안개처럼 자리에 맴돌고 있던 마력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차가운 밤 공기 속에서 반짝이던 마력이 공터 한쪽에 내려앉았다. 숲 쪽으로 몇 피트쯤 떨어진 곳의 수풀 속 진흙 한가운데에, 검은 구체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셀레스티아가 번개를 쏘아보낼 때 마법진 바깥으로 떨어져 나간 바로 그 구체였다.
조그마한 검은 구체가 차가운 대지 위 어느 홈 위에 가만히 얹힌 채, 자석이 강철을 끌어들이듯 주변의 마력을 빨아들였다. 구체는 마력을 빨아들일수록 점점 더 그 크기를 더해 갔다.
구체가 처음 크기에서 두 배 정도로 커졌을 때쯤 구체가 꿈틀거렸다. 구체 표면에 난 구멍에서 아주 작은 핏방울 몇 개가 솟아났다. 조금 전 넥서스가 사용한 단도에서 채취했던 그 피가 맞았지만, 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검고 끈적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내포하고 있던 생명을 빨리고 난 뒤, 쓰레기처럼 버려진 피였다.
구체가 꿈틀거릴 때마다 사혈死血이 더욱 배어나와 땅에 흘렀고, 흙 위로 시커먼 얼룩이 생겨났다. 생기를 빨린 피가 더 남아 있지 않을 때쯤, 구체의 꿈틀거림이 변화했다. 조금 전보다 그 기세는 많이 줄어들었지만,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가슴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처럼 변해 있었다. 그것은 심장 박동이었다. 그 와중에도 구체는 계속해서 커져 갔고, 공터에 남아 있던 마력을 계속 빨아들였다. 셀레스티아 공주가 중단시킨 의식은, 그렇게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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