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pendices
라이라 하트스트링스는 포니빌 공원의 바람 부는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혼자였다.
여름의 뜨거운 태양이 하늘 위에 걸려 있었다. 나무마다 붙어 있는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라이라의 발걸음 소리를 지워주었다.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자, 언덕마루였다. 망아지 몇몇이 완만하게 경사진 풀밭 위를 뛰놀고 있었다. 몇몇 꼬마들은 빈 종이 상자 안에 들어가 썰매 삼아 타고 놀고 있었다. 그다지 매끄럽지는 않은 경사면을 타고 내려가서는, 까르르 웃다가 다시 언덕 꼭대기까지 열심히 끌고 올라가서는 다시 타고 내려가고, 다시 끌고 올라가고 있었다. 오후 내내, 그 아이들은 이 매혹적인 반복을 즐기며 놀 것이었다. 슬슬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거나, 종이 상자가 뜯어지고 나면 그 놀이 또한 끝날 것이었지만, 그들의 놀이는 그 두 가지 상황과는 분리되어 있는 듯 보였다. 타고 내려와 웃고, 웃으면서 더 빨리, 더 열심히 올라가 다시 내려오면서.
라이라는 잠시 언덕마루까지 올라왔다가 썰매를 타고 내려가는 아이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빈 벤치를 찾아 잠시 몸을 쉬었다. 숨을 고르고, 나른한 몸을 등받이에 기대면서.
머리 위로 무엇인가 날갯짓하며 지나갔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밝고 푸른 하늘 위로 까마귀 한 마리가 점처럼 찍혀 날아가고 있었다. 까마귀는 멀리까지 늘어서 있어 지평선에 묻은 검은 얼룩처럼 보이는 숲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아무리 오랫동안 쳐다보고 있어도, 시야에서 없어지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다.
“너 잠 못 잤지?”
라이라가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봉봉이 빙긋 웃으며 라이라를 쳐다보고 있었다. 네 다리를 곱게 접은 채 앉아 있었고, 앞에는 책 한 권이 펼쳐져 있었다.
“어떻게 알았어?” 라이라가 마주 웃으며 대답했다.
봉봉이 눈을 찡긋해 보이고 나긋하게 대답했다. “베스트 프렌드라며, 기억 안 나?” 그녀는 어느 사진에선가 본 갈기 모양을 하고 있었다. “얘기 좀 해 볼래?”
라이라가 한숨지었다. “얘기할 것도 없는 거야.”
“그것 때문에 잠 못 자는 거잖아. 아니야?”
라이라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무기력하게 사지를 늘어뜨렸다. 라이라는 등받이에 널린 빨래처럼 늘어졌다. 그 동작이 워낙 느릿느릿해서, 깃털이 떨어지는 걸 보는 듯했다. “악몽을 꿨어.”
“이상한 일이네.” 봉봉이 책장을 넘기며 느긋하게 말했다.
“요즘들어 그 내용을 점점 잊어가고 있다는 게 이상한 일이지.” 라이라가 말했다. 그녀는 책을 읽고 있는 봉봉을 쳐다보고 계속 말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게 나이를 먹는다는 말이기는 하지만. 현실은 우리가 인지 가능한 것보다도 무서운 것이어서 그게 무서운 거라는 생각을 못 하게 해.”
“얘기할 생각은?”
라이라가 피식 웃었다. 아이들이 웃는 소리가 화음처럼 어우러졌다. 그녀는 다시 상자를 타고 언덕을 따라 내려가는 꼬마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바다 위, 증기선에 타고 있었는데 말이야.”
“처음부터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봉봉이 말했다.
라이라가 마른침을 삼켰다.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들이 드리웠다. 고개를 들어 보자 까마귀 몇 마리가 더 지평선을 향하여 날고 있었다. “전쟁이...... 났어. 아주 큰 전쟁이.” 라이라가 말했다. “이퀘스트리아와 그리폰......을 위시한 다른 비 포니 종족의 연합군이 부딪친 거야.” 라이라가 천천히 머리를 흔들었다. “자세한 이유는 기억이 안 나. 굉장히 복잡한 일이었다는 건 기억해...... 오고 간 말도 그렇게 차분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광기에 절어 있었다고 할까.”
“증기선에 타고 있다고 하지 않았어?”
“우리는 피난을 떠났어...... 전황도 좋지 않았지. 이퀘스트리아의 절반이 불타 버렸거든. 나머지 반은 그렇지 않았고.” 라이라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녀는 썰매를 막 끌고 올라온 아이들이 다시 썰매를 타고 내려가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멍한 석양이 드리웠다. “공주님들께서 그리폰이 개발한 병기를 발견하셨어. 뭐라고 할까......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 병기였어. 연금술 혼합제제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고대 마법이라고도 할 수 있고, 순수한 죽음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 꿈 속에서 그걸 뭐라고 이름 붙여서 부르지는 않았거든. 그 대신, 우리는 그걸 ‘종말’이라고 불렀어.”
“네가 한 말이 맞네.” 봉봉이 말했다. “네 무의식도 그렇게 창의적이진 않은 모양이야.”
라이라는 대답 대신 웃기만 했다. “뭐 그건 됐고, 우리는 이퀘스트리아 대륙을 버리고 증기선에 올랐어. 본토에 ‘종말’을 이용한 공격이 올 것임을 알아냈거든. 그 때, 무장 페가수스 편대 여러 개가 머리 위로 지나갔어. 포니와 그리폰 사이의 대규모 전투가 우리의 항로 위에서 벌어지고 있었거든.”
“네가 평소에 그렇게 되길 바라고 있어서 꿈에 나온 것 같은데.”
“이런, 들켰나 본데?” 라이라가 하늘 위로 날아가는 한 무리의 까마귀 떼를 쳐다보며 말했다. “어쨌든, 우리는 페가수스 형제들이 그리폰과 교전을 벌이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어. 처음에는 엄청 무서웠던 기억이 나. 그래도 그 전투에서 우리는 그리폰들을 말 그대로 분쇄해 버리는 대승을 거두었어. 그래서...... 증기선에 타고 있던 다른 포니들이랑 다같이 환호했지. 몇몇은 웃고, 몇몇은 울고, 다른 몇몇은 춤을 추고. 그도 그럴 게, 두 눈으로 똑똑히 봤잖아? 포니들을 찢어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저 젠장할 그리폰들을 분명히 봤지 않았냐 이 말이야. 응분의 대가를 치른 셈이지! 그 짧은 순간이나마, 우리의 삶, 우리의 고향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고통과 우리가 흘려야만 했던 피 대신에, 희망이 가슴 속에 자리잡았어.”
느릿느릿한 봉봉의 대답은 이제 오히려 오싹하게만 느껴졌다. “그 다음은?”
라이라가 이를 악물었다. “‘종말’이 찾아왔지.” 멀리서 아이들이 웃고 있었다. 바람에 뒤채이는 나무 사이로, 낭랑한 종소리처럼 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목표 지점에 도달한 순간이 기억나. 그건 우리 머리 위로 떨어지지 않았어. 그래서 오히려 더 끔찍했고.”
“호오?”
“그건 수백 마일은 더 떨어진 바다 위에 떨어졌어. 그걸 어떻게 아냐면, 온 수평선이 물로 가득 차는 걸 봤기 때문이야.” 라이라의 귀가 축 처졌고, 눈동자가 떨렸다. “말 그대로 끔찍한...... 정말 끔찍한 폭우처럼 물이 쏟아졌어. 거역할 수 없는 죽음의 장막이 하늘 높은 곳까지 치솟아 올라...... 모든 마법 병기의 결정체로 대기권으로 진입한 거야. 그리고...... 나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 비명 소리도, 흐느끼는 소리도, 아무것도 없었어. 배에 타고 있던 포니 중 그 누구도 숨쉬기조차 벅차지 않은 이는 없었으니까. 그래도 우리는 그것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어. 빙하가 깨져서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엄청난 해일이 우리를 덮치고 있었거든. 말 그대로 수직으로 치솟아 오른 해일이 말이야. 그 순간에는 슬프지도, 화가 나지도 않더라. 오히려 속으로 씁쓸하게 ‘적들이 해냈구나. 적들이 정말로 해냈구나. 이게 종말이구나. 그 어떤 것도 그 이름에 걸맞지 못하겠지. 이게 그 종말의 순간이구나.’ 하고 중얼거리고만 있더라고.”
봉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렇게......” 라이라는 저녁의 차가운 그림자를 드리운 봉봉을 바라보며 말을 끝냈다. “잠에서 깼어.”
“그 상황에서 차분하다니 참 독종이다 너.”
“흐음......” 라이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이나마 미소를 띄웠다. “그럴 만하니까 그랬겠지.”
봉봉이 책장을 넘겼다. 활자가 사방에 박혀 있었다. “그래서, 결론은?”
“얼마 전부터 말해야겠다고 생각한 거지만 말야.” 라이라가 말했다. “그러질 못했어. 끔찍할 뿐이니.”
봉봉이 작게 후훗 하고 웃었다. 사진에서 봤던 모양을 한 갈기가 그녀의 눈가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정말?”
“그래......” 라이라가 뒷목을 문지르며 낄낄 웃었다. “내가 개똥철학자 노릇을 할 때 얼마나 네가 성질을 부렸는지도 너도 알잖아.”
“그렇지. 그래서?”
아무 말도 없었다. 잎새들도 잠시 바스락거리지 않았다. 아득한 지평선에 걸린 태양은 차갑고 희미해져 가는 햇빛을 뿌리고 있었다.
“정신이란 참 대단해.” 라이라가 말했다. “기억을 되짚어 가서...... 오래 전에 버려둔 생각을 다시 꺼내오기도 하고.” 라이라가 숨을 들이마셨다. “그런 종류의 힘은 스스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뇌세포를 자극해 활동시켜야 하는 것일 텐데, 그런 건 어느 기록에 남아 있는 것과도 달라.” 그녀는 침을 삼켰다. “그 과정을 다룬 과학 논문을 읽어 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항상 그런 느낌이 들어. 꿈에서 경험한 일은 현실에서는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하는. 한 순간 중에서도 찰나의 순간일지도 모르겠고. 그러니까...... 꿈 속에서는 몇 달 정도나 걸린 일 같은데, 사실은 그게 점심 시간에 오 분 정도 잠깐 눈 붙인 사이에 꾼 꿈에 불과했다는 것처럼.”
“너 그 능력자 맞는 것 같은데.”
“가끔 있는 일도 아냐. 꽤 자주 일어나.”
“흠...”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든단 말이야.” 라이라가 공원에 깔리는 그림자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포니의 몸은 죽더라도 그 뇌는 완전히 죽은 게 아니지 않을까, 꿈 속으로 도피하는 게 아닐까. 뇌세포 사이에 신호가 전달되는 그 찰나의 시간 동안 우리는 몇 번이고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게 아닐까.”
“사후세계 얘기야?”
“그게 끔찍하단 말이지.” 라이라가 말했다. 그녀는 웃어 보이려 했지만, 숨이 막혀서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우리가 매달리는 희망, 그리고 우리를 병들게 하는 근심...... 하루하루를 그저 검은 벽으로 둘러쌓인 미로를 통과하듯 달아나듯 살게 하는 슬픔과 두려움.” 그녀가 눈을 깜박였다. “귀신이 되는 가능성을 집어치운다면, 우리의 이 나약한 정신으로 저승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어쩌면 우주의 기운이 우리를 좀 쉬게 해 주는 것일 수도 있지. 우리만의 작은, 개인실의 천국.”
“아냐......” 라이라가 깔깔 웃었다. 얼음 위를 미끄러져 가는 꼬마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천국이 있다고 생각 안 해.”
“왜?”
“삶이 끝나지 않는 곳에 천국은 없어. 그리고, 그것 말고도......” 라이라가 뺨을 비볐다. 지금까지 흘린 눈물 중 처음으로 닦은 눈물이었다. “천국은 애초에 없는 편이 나아. 불꽃이 그곳을 더 차갑게 태워 버릴 테니.”
“나쁜 놈이었던 것처럼 얘기한다 너.”
“이 내가?” 라이라는 이제 온 하늘을 뒤덮고 날아가는 까마귀 떼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사이 아주 작은 틈으로 겨우 햇빛이 깜박이며 견디고 있었다. “나는 준법시민이었다구. 춤에 빠져서 그것만 하긴 했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았지. 바뀌어 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어...... 바뀐다는 건 고려해 봐야 할 것들이 엄청나게 많아진다는 뜻이니까. 그냥......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대충 묻어가면서 사는 게 더 쉽지. 적어도 내가 나쁜 놈이었다면, 적어도 그게 뭔가 역할을 하긴 했을걸. 악이란 항상 변화를 수반하니까...... 그리고 그것이 열정의 근간이 되지. 그 대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어때? 걸어갈 수 있는 길 중에서도 가장 느릿한 길을 따라가는 거야. 그러면 이제 그 길이 그렇게 매력적인 이유도 납득이 되지. 하는 일이라고는 중력을 따라 미끄러지는 것밖에 없는 주제에, 주변의 것들을 음미하며 살아간다는 환상에 빠지게 되거든.”
“뭔가 잃어버린 거라도 있어?”
“없어.” 라이라가 말했다. “어쩌면, 전부.” 다시 눈물이 흘렀다.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던 느낌과 같았다. 별 느낌도 없기는 했지만. 활자는 이제 빈 벤치 위까지 뒤덮고 있었고, 라이라는 심해에 버려진 쓰레기처럼 떠다니고 있었다. “태양. 그리고 더운 여름날 발에 닿던 젖은 땅의 감촉. 너를 가볍게 안아 주던 친구의 숨결 냄새. 오래된 사진에 찍힌 그림자 위를 채우던 작은 점들. 오렌지 주스.” 그녀는 아이들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며 내지르는 비명 소리를 들었다. 이제는 다 세지도 못할 어마어마한 까마귀 떼가 날아다녔다. 처음도, 끝도 없이 중언부언, 횡설수설하는 활자들 같았다. “너는 존재의 법칙에 도달했어...... 피하기만 하는 존재의 법칙에. 온 세상과, 친구와 적을 한 데 모아 너와 함께 차가운 내리막길에 실어 내려보내고 말았어. 너는 그저 미적지근하게 허송세월하고...... 텅 빈 채 살아왔어. 그렇게 살아 봤자 결국 잠들어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지. 머지않아, 네 현실과 네 꿈은 서로 다르지 않게 될 거야. 어쨌든, 전부 기억일 뿐이니. 그리고 우리의 영혼이란 것도 결국은...... 애초부터 어쩔 수 없는 부록으로 설계된 것일 뿐...... 그렇게 되지조차 못하지만.”
“이제 난 무엇을 하고 싶어?”
라이라가 흐느꼈다. “난......”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눈물이 계속 흘러 말을 잇기 어려웠다. “다시 석양을 보고 싶어.” 라이라는 울며 말했다. “다시 그 온기를 느끼고 싶어. 다시...... 다시 포니들과 함께하고 있다고 상상하고 싶어...... 아주 많은 포니들과......” 그녀는 다시 얼굴을 문질러 닦았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자신의 발굽에 남아 있는 희미한 빛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제 태양은 아주 깊이 뚫린, 작디작은 구멍 너머에 켜진 작은 촛불처럼 보였다. “......서로 미워하지도, 서로 싸우지도 않고 그저 행복하게......”
“......그리워하거나, 후회하거나, 두려워하지도 않고......”
“......희망하지도 않고......”
라이라가 다시 눈을 떴다. 그것뿐이었다. 짙고 거대한 어둠에 휩싸여 빛이 멀어져가고 있었다. 영겁의 세월이 흐를 때마다 그 빛은 더욱 작아져 갔고, 그녀의 정신 일부는 세계조차 존재하지 않는 어딘가로 빨려들어가고 말았다. 그랬으므로, 영원히 멀어져 가는 그 모습이 얼마나 빠른 것인지는 거기에 남은 그녀의 일부만이 느낄 수 있었다.
그곳에는 질문이 없었다. 질문이 없어서 답도 없었다.
차라리 불타는 것이 더 편안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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