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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E/포니 최후의 날

Chapter 01. 잿더미 속에서From the Ashes

by Mergo 2019. 7. 21.

※ 본 작품은 Fimfiction.net의 Shortskirtsandexplosions 선생이 쓴 것입니다.

 

※ 블로그에 옮겨놓은 글이 조악하여, 원문을 같이 두고 번역물을 다시 써서 옮깁니다. 故 이윤기 선생님처럼 <장미의 이름>같은 어려운 책 옮긴 것도 아닌데, 다시 옮기면서도 어이가 없습니다. 대략 7년 정도가 흘렀는데, 이제라도 바로잡음을 다행으로 여깁니다. 이러고 한 2년 있다가 또 고치진 않겠죠?

 

※ 본 번역은 fimfiction상에서 제공되는 메시지 기능을 통해 번역 허가를 받아 이루어진 것임을 밝힙니다.

 

 


 

 

  그녀가 가장 먼저 떠올린 기억은 레인보우 대쉬의 두려움이었다. 어린 망아지는 덜덜 떨며 레인보우 대쉬의 등에 바짝 달라붙었다. 아이는 그녀가 토해내는 거칠고 헐떡거리는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클라우드데일 시가지는 공포에 떨며 발작적으로 우왕좌왕하는 이들로 가득했고, 레인보우 대쉬는 그 위를 의연하게, 쏜살같이 날아갔다. 하늘 위에는 거대한 장막처럼, 한낮의 태양을 가리우며 이퀘스트리아를 향하여 정면으로 추락하는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하늘 위에 세워진 페가수스들의 도시는, 처음으로 그 그림자에 잡혀 먹힐 운명이기도 했다.

 

  레인보우 대쉬의 등에 업힌 작은 망아지는 그녀의 무지갯빛 갈기에 코를 박으며 귀가 멀 것 같은 불협화음과, 혼란에 휩싸여 소리쳤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 난리인데?" 레인보우 대쉬가 되받아 소리쳤다.

 

  "믿을 수가 없네. 하모니 말이 맞았어! 걔가 한 말이 전부 맞았다고!" 이상하게도, 레인보우 대쉬의 목소리는 다분히 관조적이었고 냉정했다. 그녀는 수백만 마일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을 말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누구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알 만한 녀석이 있을 것 같냐? 트와일라잇도 이건 모를걸?"

 

  "레, 레인보우, 괜히 겁주지 마." 여자아이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레인보우 대쉬를 더 단단히 부여잡는 아이의 두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누가 무슨 말을 했다고?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레인보우 대쉬는 공포에 질려 사방으로 도망치는 비 공장 노동자들 사이에서 곡예비행을 하며 첫 번째 질문은 무시하고 두 번째 질문만 대답했다. "널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고 있지!"

 

  "나, 날?" 아이가 놀라 되물었다. "그럼 언니는? 으앗!"

 

  레인보우가 무너지며 쏟아져 내리는 하늘대리석 기둥 아래로 쏜살같이 날아감과 동시에 아이가 놀라 비명을 질렀다. 아이는 숨이 턱턱 막혀오는 와중에도 뒤를 돌아보았다. 하늘의 모든 구름들이 한 줌 수증기로 변해 흩어져갔고, 페가수스들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대부분은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오는 그 상아빛 덩어리를 밀어내다가 그 무게에 짓눌려 떨어지는 자들이었고, 구름 위를 뛰어다니다가 구름이 사라지면서 순간 균형을 잃고 추락하는 자들도 있었다. 구름이 있었던 자리 아래로, 그 불운한 페가수스들이 떨어진 이퀘스트리아의 대초원이 마구 흔들렸는데 클라우드데일이 무너져 떨어진 자리는 옛이야기 속 커다란 뱀이 땅을 찢고 나오기라도 한 듯 불룩해져 있었다.

 

  비명 소리가 더욱 늘어났다. 아이의 눈앞에서 3층에 달하는 기반구름이 무너져 내리며 무지개 공장이 폭발했다. 아이의 떨리는 시선 위로 클라우드데일의 절반이 도시의 기능을 상실한 채 거대한 혜성으로 무너져 내리는 모습이 들어왔다. 산산이 부서진 무지개 조각들이 흘러내렸고, 날카로운 대리석 파편이 거기 섞여 떨어졌다. 아이가 채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레인보우 대쉬는 왼쪽으로 방향을 급격히 틀면서 등에 탄 꼬마에게 꽉 붙잡으라고 소리질렀다.

 

  아이는 그녀의 말대로 레인보우 대쉬의 등 쪽으로 장치된 보호구의 철제 손잡이를 두 발굽으로 단단히 붙잡았다. 그 순간 레인보우는 쇄도하듯 떨어져 내리는 잔해들과, 추락하며 비명을 지르는 자들과, 수증기로 변한 클라우드데일의 뜨거운 증기 사이를 헤집고 곡예비행을 시작했다. 한바탕 하늘 위를 춤추며 곡예비행을 마친 뒤, 레인보우 대쉬는 기화해가는 구름의 마지막 몇 줄기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갈색 아지랑이를 향하여 똑바로 날아올랐다. 사라져가는 구름 사이로 갈색 아지랑이는 그 모습을 바꾸어, 버려진 열기구들의 무리 사이로 철제 프레임을 두른 비행선이 되었다. 포니 40인 정도가 타기에 알맞은 크기였다.

 

  레인보우 대쉬는 마침 열려 있던 창문을 통해 그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비행선은 버려진 왕실 화물 운송용 비행선이었다. 레인보우는 안에 들어서자마자 업혀 있던 아이를 내려놓았다. 아이는 멍하니 레인보우의 뒤를 따라 곤돌라 내부를 걷기 시작했다. 눈을 몇 번이고 깜박이고 나서야, 아이는 레인보우가 자신을 어디로 데려왔는지 생각할 수 있었다. 아이의 눈앞에는 새카맣고 윤이 나는 금속으로 마감한, 어둡고 좁은 방들이 늘어서 있었다.

 

  "비전秘傳 저장소?" 아이는 혼란스러운 눈길로 레인보우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레인보우 대쉬, 밖에서 포니들이 죽어나가는 마당인데 여기서 이게 뭐 하는 거야?"

 

  "내 생각이 맞다면, 아니지, 굳이 그런 식으로 표현할 것도 없겠군. 이퀘스트리아 자체가 죽어나가는 상황이야. 하늘 위든 땅이든 안전한 곳은 아무데도 없어. 여기만 빼고."

 

  "왜 여기만 그런데?"

 

  "하모니가 그렇다고 하더군. 무엇보다, 지금까지 걔가 한 말 전부 맞았으니까." 레인보우 대쉬는 아이를 비전 저장소로 밀어 넣으며 대답했다.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죽어가는 세상이 내지르는 울음과 비명이 조개를 뒤집어 놓은 것 같은 비전 저장소 바깥에서 아우성치고 있었다. "이제 전부 다 알겠군. 그렇다고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지. 넌 여기 있어, 알았냐?"

 

  "여기 있으라니?" 아이는 믿을 수가 없다는 듯 소리쳤다. 아이는 비틀거리며 저장소 위를 걸어갔다. 시선은 바닥으로 가기도 했고 천장으로 가기도 했다. 두 개 있는 작은 창문 밖으로 비치는 햇빛은 갈수록 흩어지고, 흐려져만 갔다. "레인보우 대쉬! 친구들은 어떻게 하고? 내......" 그 순간, 금속질의 철컹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와 함께, 아이는 자신이 저장소 안에 갇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레인보우 대쉬!" 아이는 문으로 달려가 두껍고 새까만 문을, 작은 발굽으로 두들겼다. "꺼내 줘!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널 죽게 내버려뒀다가 나보고 뭔 꼴을 당하라고?" 레인보우 대쉬가 문 밖에서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한쪽 발굽을 뻗어 아이의 갈기를 헝클어뜨리며 쓰다듬고는, 용감하게 씩 웃으며 말했다. "질질 짜지 말고. 못해도 삼십 분 안에는 돌아올 거야. 하모니를 찾으러 갈 거거든. 그 녀석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 테니까 말야!" 그리고 그녀는 겨우 마른침을 삼켰다. 숨기려고 했지만 숨기지 못했다. "아니...... 알아야 해......"

 

  "레인보우 대쉬, 가지 마!" 아이는 작은 몸으로 문에 부딪치며 흐느꼈다. "제발 가지 마! 혼자 있기 싫어!"

 

  "다시 온다니까! 약속할게! 그러니 너도 나랑 약속 하나 하자! 우리가 널 데리러 올 때까진 절대 여기서 나오지 마!"

 

  "레인보우!"

 

  "약속해! 핑키 파이 맹세로!"

 

  "아, 알았어." 아이는 딸꾹질을 하며, 겨우 눈물을 참고 대답했다.

 

  "전부 잘 될 거라니까. 뭐하면 직접 보고!" 레인보우 대쉬는 그제야 아이의 갈기를 놓아주고, 자신이 들어왔던 비행선 창문 쪽으로 뒤돌아 걸어갔다. "야, 솔직히 말해서 나까지 없으면 세상이 얼마나 덜 쿨해지겠냐. 내가 그 꼴은 못 보지." 그리고 눈 찡긋, 꼬리 탁. 레인보우 대쉬는 그렇게 떠났다

 

 

  아이는 몸을 떨며 비전 저장소의 검은 그림자 속에 주저앉았다. 두 개의 마주보는 창문으로 점점 그 규모를 더해가는 멸망의 크레센도가 창백한 빛으로 들어와 반그림자를 만들었다. 저 멀리에서 기어오는 공포심과 함께 한 시간쯤을 보내고 나자, 이제는 자신의 심장 박동마저 천둥 소리처럼 느껴졌다. 목 안에 무엇인가 시큼한 응어리가 지는 것 같았다. 아이는 부들부들 떨리는 혀를 겨우 움직여 레인보우 대쉬와, 플러터샤이와, 애플잭의 이름을 비롯해 자신이 아는 모든 이름을 갸날프게 불러 보았다. 그리고 아무도, 무엇도 그 부름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는 크게, 조금은 진정된 목소리로 처음 듣다시피한 그 이름을 불러 보았다. 사실, 대답을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하, 하모니?"

 

  바로 그 순간, 세상의 천장까지 뒤흔드는 거대한 충격파가 퍼졌다. 비행선이 암초 해안으로 달려든 선박처럼 마구 흔들렸다. 마주보는 창문 바깥에서 창백한 빛이 새어 들어와 저장소 내부를 비추었다. 그제야 아이는 열기구 하나, 혹은 그보다 더 많은 수가 폭발하고야 말았음을 깨달았다. 비행선은 대지를 향하여 하강곡선을 그리며 투신 자살하고 있었다. 아이는 그 짧은 생애 동안 들었던 이름들을 한없이 주워섬기고 있다는 사실조차 거의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겁에 질려 있었다. 몇 바퀴 더 돌고 났을 때에는 아이의 몸이 저장소 곳곳에 부딪치며 튕기고 있었다. 아이는 창 밖으로 비치는 클라우드데일 전체가 무너져 떨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끝없는 업화에 메말라 버린 대지 위로 상아 벽돌이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때까지 남아있던 페가수스들은 급격히 솟구친 잿더미에 휩쓸려 즉사한 채 불타는 아가리를 쩍 벌린 채 혓바닥을 낼름거리는 불길의 심연 속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아이는 충격파의 진원지를 찾아 시선을 위로 돌렸다. 추락하는 비전 저장소 위로 거대한 유령 같은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태양 위로 커다랗고 둥근 반점이 번지고 있었다. 급격한 기압차로 피가 끓는 와중에도, 아이는 그 '유령'이란 다름아닌 달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차가운 몸뚱이가 완전히 태양을 가린 뒤, 아주 잠깐 동안 불의 고리 같은 모양이 나타났다. 이윽고 달은 폭발하며 단 한 번의 천둥 같은 소리로 이퀘스트리아 전역을 뒤흔들었다. 아이의 비명은 그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진홍색 눈은 크게 열려 있었고, 실룩거리고 있었다.

 

  재와 눈이 구름 위로 춤추며 흩날렸고, 지평선과 지평선 사이로 어둠과 잿빛을 실어 날랐다. 그 누구도 그 모습을 볼 수 있을 때의 이야기지만, 그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그녀 하나뿐이었다.

 

  여자는 한숨짓고는 영원한 잿빛이 드리운 바깥의 무채색 세상을 두 눈에 담았다. 떨리는 속눈썹 위로 일말의 물기가 맺혔는데, 여자가 얼굴을 찌푸림과 동시에 사라져 갔다. 그녀는 조종적 의자에 똑바로 앉아 호박색이 도는 갈색 고글을 거칠게 뒤집어썼다. 조종석은 비행선의 비좁은 선실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녀는 두 발굽을 뻗어 조종석 좌우로 늘어선 레버들을 잡아당겼다. 기기 패널을 슬쩍 보던 중, 그녀는 고도계 바늘이 떨어지는 점에 집중했다. 대시보드 내부 기어와 자동제어장치가 더러는 식식대고 더러는 털털대고 있었는데, 그녀에게 나름대로 무언가를 말하는 듯했다.

 

  그녀가 난기류 속을 헤치고 나오는 내내 온 선실은 흔들리고 덜렁거리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대시보드 앞의 둥그스름한 앞유리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구리 프레임에 끼운 반투명 유리창 너머로 재와 눈이 뒤섞여 휘몰아쳤다. 본래 이곳의 대기는 차분한 편이었는데, 근처에 있어야 했던 커다란 바위가 없어져 있었다. 기기 패널에 의존하는 건 그만두고, 본능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갈색 발굽을 들어 사슬에 매달아 둔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선실 최후방에 설치된 거대한 철제 보일러가 뜨겁게 끓어오르기 시작하며 쉭쉭대는 소리가 났다. 비행선의 둥그스름한 벽면을 따라 설치된 황동 파이프 속으로 증기가 흘러 들어가자 파이프 몇 개가 덜그렁거렸다. 배출된 증기가 기계장치를 작동시키며 비행선 외부 프로펠러에 동력을 넣었다. 여자의 발굽이 다른 체인 핸들을 잡아당겼고, 날카로운 소리가 안개 낀 하늘을 비춤과 동시에 비행선 측면 환기구가 순간적으로 열렸다.


  선실에 종소리가 시끄럽게 울려퍼졌다. 비행선이 고속 하강하고 있었다. 그녀는 경보음을 무시하고 그대로 고각도 강하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호박색 고글 아래로 비치는 이마에는 주름이 잡혔고, 두 눈은 가늘어진 채 안개 묻은 바람막이 창을 노려보고 있었다. 비행선이 뚫고 지나가는 길목마다 사방으로 재가 날렸다. 고도계가 미친 듯이 찰칵거리는 소리를 냈고, 대시보드의 금속 프레임 역시 진동하면서 덜그럭거리고 있었다. 조종석 하네스가 더 견디지 못하고 늘어진 순간, 그녀는 눈 대신 재가 휘몰아치는 폭풍 가운데의 작은 틈을 찾아냈다. 엄청나게 큰 검은 무언가가 눈앞의 잿빛 안개를 뚫고 밀려들고 있었다.


  여자는 잽싸게 목을 길게 빼고 체인 핸들을 물어 거칠게 잡아당기면서 두 발굽으로 레버 두 개를 동시에 힘을 실어 밀어올렸다. 막 추락을 멈추기 시작한 비행선 안 곳곳에 매달린 보급품 그물망과 케이지가 앞뒤로 흔들리면서 덜그렁거렸다. 그리고는, 안개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한 자루 커다란 검은 칼처럼 튀어나온 화강암 절벽을 향하여 천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가능한 천천히 하강하도록 비행선을 몰아 내려가다가, 조금씩 속도를 올리더니 마지막에는 아예 동력을 끊어 중력에 동체를 맡겨 버렸다. 어떻게 하든 바위와 비행선의 철골은 부딪힐 것이기 때문에 상관없었다. 


  여자는 신속하게 안전벨트를 죄다 풀어버리고는 비행선 좌현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그러고는 입가부터 뒷다리까지 감싸는, 갈색 가죽 방호복을 입고 빠른 걸음으로 근처 밸브 쪽으로 가더니 손잡이를 이빨로 물어 잡았다. 그녀는 단숨에 손잡이를 물어 돌렸고, 손잡이는 돌아갈 때마다 끽끽 소리를 내질렀다. 비행선 좌현으로 넓게 낸 바람막이 창을 가득 채우며 거대한 기계식 갈고리가 밖으로 뻗어나왔다. 갈고리가 돌투성이 절벽을 무는 순간, 그녀는 물고 있던 밸브를 놓고 바로 옆에 장치되어 있던 두 개의 구부러진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증기가 쉭쉭대며 빠져나갔고, 곧 강철 갈고리가 낭떠러지 가장자리를 단단히 붙잡는 모습을 보며 여자는 표정 없는 만족을 느꼈다. 레버를 잡아당기며 갈고리를 정확한 자리에 건 그녀는 바로 우현 쪽 장치로 걸어가 같은 작업을 반복해 비행선을 그 자리에 완전히 계류시켰다.


  그녀는 다시 좌현으로 돌아 보급품 보관함 쪽으로 걸어갔다. 손잡이 대신 은은하게 빛나는 룬 문자가 검은 돌조각 위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여자는 작업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작업대 위에는 가죽 팔찌가 하나 올려져 있었는데, 직물을 솜씨 좋게 덧대어 바느질하고 대여섯 개 정도의 뿔로 장식한 물건이었다. 여러 가지 색이 뒤섞인 팔찌를 오른쪽 발굽 위로 밀어 올리고, 그녀는 헛기침을 해 목을 닦고 한 마디 주문을 중얼거렸다. "H'jem."


  팔찌에 매달린 여러 개의 뿔 중 하나 위로 잠시 희미한 보라색 기운이 어른거렸다. 그와 동시에 보급품 보관함에 새겨져 있던 룬 문자의 빛이 서서히 바래 갔고, 곧 완전히 꺼졌다. 거대한 철제 캐비닛이 쨍 하는 금속질의 울림을 울리며 열렸다. 그녀는 보관함에 다가서며 방호복 하나를 더 집어 껴입었다. 칙칙한 갈색이나마 방호복을 다 갖춰 입고 난 다음에는 가방과 등잔이 각각 두 개씩 붙은 안장식 가방을 대충 끌어당겨 짊어졌다. 걸칠 물건을 다 걸친 다음에는 길지만 접을 수도 있게 만든 총열에 목제 개머리판을 붙여 만든 물건을 끌어냈다. 그 다음은 비어 있는 두 개의 철제 탄창에 희미한 빛을 흘리고 있는 룬스톤 탄환을 꽉꽉 채워 넣는 일이었다. 방호복 우측 후방에는 소총을 수납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그녀는 소총을 운반용 주머니에 집어넣고, 왼쪽 주머니에 탄창을 넣었다. 마지막은 고대 룬을 새긴 회색 금속 뚜껑으로 막아둔 작은 유리 단지였다. 여자가 입고 있는 것과 갖고 있는 것들과 마찬가지로, 이 또한 직접 만든 물건이었다. 단단하게 채비하고 나서, 그녀는 보급품 보관함을 닫은 뒤 몇 걸음 뒤로 물러나선 이번에는 다른 주문을 중얼거렸다. "W'nyhhm."


  캐비닛 문 한가운데에 새겨진 룬 문자가 다시 빛을 뿌리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마력 봉인이 복원되었다. 여자는 장비를 다시 한 번 확인한 뒤 보일러를 끄고, 실내를 따라 밝혀진 벽등을 모두 껐다. 그리고는 어두운 조명만 켜져 있을 하층 격납고로 통하는 바람 이는 동제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화학 실험 장비들과 정비도구를 가득히 쌓아놓은 테이블 여러 개를 지나쳐 걸어간 그녀는 비행선 하부, 커다란 조리개 형태를 한 문이 있는 쪽으로 태연자약하게 걸어갔다. "H'jem." 한 번 더 전의 주문을 외우자 둥근 문이 안쪽에서부터 넓어지듯이 열렸고, 열린 사이로 안개 같은 회색 빛이 그녀의 모습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녀는 조종사 모자로 발굽을 뻗어 천제 마스크를 끌어내려 코와 입을 가렸다.

 

  뼛속까지 스미는 냉기를 품은 바람 위로, 이미 죽어 버린 그 너머의 세상이 환영 인사 삼아 건넨 눈발과 재가 뒤섞여 여자를 갑작스레 덮쳤다. 여자는 비행선 하층으로 뛰어내려 검은 절벽 위로 내려앉았다. 그 와중에 황동으로 만든 편자가 매끈한 검은 절벽 위로 반쯤 미끄러졌다. 그녀는 겉으로는 나직한 욕지거리를 중얼거렸고, 속으로는 온갖 짜증을 내면서 자리에 매달려 천천히 흔들리는 비행선을 등지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스프레이 페인트로 대강 써갈겨 놓은 이름이 비행선 위로 반쯤 바랜 채 남아 있었다. 그 이름은 "하모니"였다.


  방향도 분간해야 했고, 바람도 거세게 불어오고 있어서 여자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발굽을 들어 마스크를 살짝 올려 낮은 소리로 주문을 외웠다. "H'jnor." 하모니 호 격납고로 통하는 입구가 고양이의 눈처럼 단단히 닫혔다. "W'nyhhm." 조리개 문을 둘러싸고 배치된 여섯 개의 룬이 빛을 발하면서 방어 주문을 발동시키자 입구 위로 보랏빛 안개가 떠올랐다.


  여자는 유리처럼 매끈하면서도 새까만, 산이 있는 방향을 향하여 걷기 시작했다. 따각대는 발굽 소리는 끝도 없이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는 바늘 떨어지는 소리에 불과했다. 단단하게 감싼 목 위로 두껍고 시커먼 회색 구름이 하늘에서 꿈틀대고 있었고, 그 난장판 너머에서 별빛이나, 그 비슷한 무엇인가가 흩뿌린 빛 조각이 있을런지 없을런지는 알 수 없었다. 하모니 호에서 멀어지는 여자의 걸음은 목표물에 보다 가까워지고 있었고 비명을 지르는 듯한 바람 소리는 비행선에서 멀어질수록 스스로의 비명에 끌려 들어가, 빠져 죽었다. 그러고 나자 남은 것은 아무 기척도 없이 발밑에 한없이 깊은 심연이 도사리고 있을 것만 같은 불안한 침묵뿐이었다. 그렇긴 해도, 오래 전에 여기를 다녀온 적 있어서 여자는 그다지 당황하지도 않았다.


  대략 이백 미터를 걷고 난 다음, 폐허의 첫 번째 흔적이 드러났다. 천천히 내린 눈송이들은 거대하고 흰 무언가에 완전히 흩어져 있었다. 셀 수 없이 오랜 세월 전에 무너지면서 벽력 같은 굉음을 내며 쓰러졌을, 뒤집힌 원기둥 형태의 탑이었다. 다 바스러지고 기울어진 첨탑 위로는 구리로 아로새긴 태양 형상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그나마도 관리할 자들이 사라진 이후 오랜 세월을 견디며 재와 녹을 뒤집어써 흐려지고 더러워져 있었다. 다른 몇 채의 건물에도 같은 형상이 조각되어 있었다. 더러는 무너져 있었고, 더러는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다. 멸망한 도시는 자신의 거대한 유골을 아무렇지도 않게, 냉담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여자에게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위대한 도시, 함부로 올라서는 안 되는 도시인 캔틀롯의 폐허가 여자를 반겼다. 그녀는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다. 여자는 계속 걸음을 옮겨 목표물을 찾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캔틀롯에 그림자를 드리운 태산 같은 첨탑은 거대한 쟁기처럼 재가 뒤섞인 구름 사이로 그 창끝을 들이민 채 솟아 있었다. 아주 잠깐 동안, 끝없이 이어지는 황혼이 메마른 잿빛 불빛으로 세상을 비추었지만 무너진 도시에 남아 있는 탑들은 폐허 안으로 한 점의 빛도 들여놓지 않으려는 듯했다. 폐허 위로 깊은 골이 파여 새카만 그림자를 드리운 모습과도 닮아 있었다. 말라서 끈적해진 잉크 같은 그림자가 바람 부는 길목들과 도성 정원, 대리석으로 장식한 계단식 회랑 곳곳에서 흐르고 있었다. 한때 이퀘스트리아의 수도였고, 왕실의 총본산이었던 도시는 이제 거대한 묘지에 지나지 않았다.


  여자는 느릿한 걸음으로 도시의 잔해를 돌아다니며 다니는 길마다 주저앉은 모퉁이와 그 근처에서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흘끔흘끔 곁눈질했다. 언제든 오른쪽 옆구리에 넣어둔 소총을 꺼내들어야 했으므로, 바짝 긴장한 코가 실룩거렸다. 문드러진 돌덩이 위로 부딪치는 철제 편자들이 금속질의 소리로 외로이 울었다. 천으로 감싼 입가로 드나드는 숨결은 차분하고 흐트러짐이 없었다. 숨에 고삐를 채워 다니는 기술은 이보다도 인적 없고 적막한 문명의 무덤을 드나들며 익힌 재주였다.

 

  호박색 고글 위로 버려진 상점가가 비쳤다. 달랑거리며 매달린 간판들과 색유리는 그 와중에도 멀쩡하게 남아 있었다. 그녀는 주인도 손님도 잃고 외로이 남은 행상 좌판가를 지나쳐 걸어갔다. 가득 쟁여두고 팔았을 과일은 오래 전에 썩어 없어졌고, 이제 부박한 껍질만 남아 바스락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양 옆으로 도열해 늘어선 깃발들은 하나같이 낡아빠지고 해져 있었다. 여자가 새하얀 얼룩처럼 조약돌을 박아 넣은 바람 이는 길거리로 걸음을 옮길 때 깃발들이 일어서서 가슴팍에 안고 있던 왕가의 문양을 내보이며 차가운 미궁의 심장 방향을 가리켰다. 왕궁이었다.

 

  첨탑이 부서진 틈으로 눈발이 흩날려 내려와 다시 여자를 반겼다. 부드러운 잿가루가 날려 여자의 목덜미와 옆구리 위로 내려앉았다. 여자는 그런 것에 신경 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죽음으로 빚은 그 고운 가루는 흡사 두 번째 가죽을 뒤집어씌운 듯 여자의 온몸에 달라붙었다. 그 날 이후 재가 날리지 않은 날이 없었으며 날리지 않은 때가 없었다. 이제 잿빛 장막으로 온 세상이 뒤덮인 지 오래여서, 날이 더는 밝을 리 없었으므로 날이라는 표현은 이제 유용성을 가질 수 없기는 하지만, 아무튼 그러했다.

 

  얼마간 더 걷고 나자, 왕궁 입구가 커다랗게 아가리를 벌린 채 그녀를 맞았다. 그럼으로서 그것은 캔틀롯에서도 가장 높은 땅 위에 세운 10층 높이의 건물 중 반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웅변하고 있었다. 왕실이 기거하던 자리, 여자는 거기 전에도 와 본 적 있었다. 여자는 길을 밀고 걸어가면서 좌우로 얼굴을 기울여 양쪽에 장치한 스위치를 건드렸다. 그와 동시에 스프링 작동식 부싯돌이 부딪치면서 불똥을 튀겼다. 몇 번 더 스위치를 건드리고 나서야 양쪽 가스등에 모두 불이 밝혀졌다. 가장 어두운 곳으로 걸어 들어가는 여자의 주위로 황금색 광륜이 퍼지며 길을 밝혔다.  여자는 전에도 한두 번쯤 바닥에 뚫린, 산맥 가장 깊은 곳으로 이어지는 구멍에 반쯤 빠질 뻔한 기억이 있었다.

 

  가스등 불빛을 따라 도착한 곳은 이퀘스트리아의 두 공주가 살았었던 생활 공간이었다. 체크무늬 타일 위로 자갈과 잔해가 떨어져 얼룩이 졌고, 왕실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쓰러진 근위대원들의 가죽이 널려 있었다. 여자는 망자를 밟지 않게 뛰어 넘어가며 걸음을 옮겼다. 여자가 밝힌 가스등이 좌우에서 빛을 뿌릴 때마다, 무너져 내린 수백 수만 권의 책의 그림자가 꼭두각시 인형처럼 흔들거렸다. 이윽고 그녀는 식당으로 향하는 우회로를 찾아낼 수 있었다. 한때 상다리가 부러져라 음식을 차려내던 테이블과 긴 접시들은 이제 사방으로 흩어진 은제 식기와, 산산이 부서진 접시 조각들과, 탄화한 과일과 채소의 파편뿐이었다.

 

  그 자리에는 그것만 널려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여자는 끝내 식당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은 몸뚱이를 보고 말았다. 사방으로 흩어져 바다를 이룬 덜그럭거리는 뼈다귀와, 다 그을린 뿔에 조금 붙어 있고 나머지는 바스라지고 있는 새하얀 가죽이 눈에 들어왔다. 이 시체는 몸이 살아 있을 때는 요새와도 같은 캔틀롯 성 가장 깊숙한 곳인 여기에서 저 시체들을 만났을 것이다. 그 날 실외에 있었던 자들은 오래 전에 잿가루로 변한 지 오래였는데, 이제는 평원에 부는 찬바람에 실려 하늘로 떠올랐다가 눈에 섞여 끝도 없이 펼쳐진 그들의 공동묘지로 돌아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여기 캔틀롯 왕궁 가장 깊은 곳에서는 그 정반대로 대부분의 시신이 투구나 갑주 밑에 잿더미가 되어 쓰레받기에 쌓인 쓰레기처럼 널브러지고 쌓여 있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여기 왔을 때는 근위대원들의 황동제 편자를 뜯어낼 생각으로 들렀을 때였다. 얼마 안 되는 양이나마 거두어 녹이면 하모니 호의 선창을 보강하는 데 쓸 리벳을 만들 수 있었다. 발을 헛디뎌 산 깊숙한 곳으로 실족사할 위험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이번에는 편자와 갑주를 벗겨내러 온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단 한 가지, 그 하나만이 목적이었다. 그녀는 계속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여자는 태피스트리로 장식한 나선계단을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자수로 수놓은 태피스트리는 형형색색의 포니들이, 별빛을 머금은 갈기와 비단결 같은 흰 몸을 한 알리콘이 굽어보는 가운데 황금의 도시에 들이닥친 잿빛 시련을 이겨내는 일대기가 가스등의 불빛을 받아 흔들렸다.

 

  나선계단에는 바람이 들이치고 있었는데, 순간 찬바람과 함께 잿가루와 눈싸라기가 들이닥쳤다. 서쪽 방향 발코니가 열려 있었다.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발코니로 다가가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대지를 내려다보았다. 잿빛으로 뒤덮인 땅덩이 곳곳으로 시커먼 흙이 드러나 있었는데, 굽이치는 차가운 안개 속에서 다만 영면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딱히 처음 보는 것도 아니었는데, 저 아래에서 본 적도 있었고 보다 높은 곳에서 본 적도 있었다. 적어도 그녀에게만큼은, 어딜 가든지, 심지어 구름 너머 저편의 땅도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여자는 오른편을 슬쩍 곁눈질하며 무너진 캔틀롯에 입성한 이후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았던 걸음을 멈추었다. 3층 높이는 되는 스테인드글라스가 머리 위에서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는 태양의 공주와 밤의 공주가 서로의 꼬리를 쫓아 빙빙 도는 듯한 모습이 묘사되어 있었다. 그 위아래로 포니 몇몇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이 녹색 모자이크화로 그려져 있었는데, 스테인드글라스는 아직도 그 광택을 잘 보존하고 있었다. 적어도 2개 시대는 더 전에 그렸을 그림일 터인데도 채색한 곳마다 명장의 솜씨가 바랜 곳이 없었다. 다만 그녀는 그렇다고 말할 수 없었다. 신경조차 쓰고 있지 않기도 했지만, 이퀘스트리아가 두 번 다시 예전처럼 색채라는 것이 의미를 가지는 곳이 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여자는 고개를 약간 숙이고, 호박색 고글을 쓴 눈으로 헐거워진 스테인드글라스의 한 조각을 바라보았다. 두 공주 자매의 아래에서 뛰노는 포니 중 하나를 묘사한 조각이었는데, 그 헐거움이 여자를 편안하게 해주었다. 그녀는 가죽 방호복으로 감싼 머리로 그 헐거운 유리 조각을 손쉽게 밀어내 떨어뜨렸다. 이제 그 자리는 포니 모양 구멍이 남았고, 여자는 그 사이로 꾸물대며 기어 들어갔다.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넘어 조심스러운 걸음을 옮기던 여자는 고개를 양쪽으로 기울여 가스등의 불빛을 더 크게 밝혔다. 그 자리에 드러난 것은 셀레스티아 공주가 기거하던 알현실의 드넓고 공허한 모습이었다. 왕좌로 이어진 길은 굽어져 있었지만, 여전히 화려한 보라색 휘장을 드리우고 있었다. 휘장 하나하나마다 태양을 형상화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왕좌 아래로 떨어진 황금 판은 이제 그 빛을 잃었고, 분수대는 오래 전에 말라 있었다. 그렇긴 했어도 알현실은 다분히 역설적으로 멀쩡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여자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한쪽 발굽을 들어 쓰고 있던 고글의 조리개를 조절했다. 노출값이 조정되자 알현실 내부의 어둠이 걷혀 보였다. 그녀는 주변을 등잔불로 비추어 보며 살피다가, 자신이 찾고 있던 것을 찾아냈다.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자 알현실 구석으로 이어진 핏빛 깃털들이 떨어져 있었다. 고글 쓴 시선이 조금 더 먼 곳으로 옮겨갔다. 셀레스티아 공주의 모습을 수놓은 커다란 태피스트리 아래에, 황금가지로 짜놓은 듯한 '둥지'가 있었다.

 

  여기였다. 여기 그게 숨어 있었다. 아직 그걸 잡을 기회가 남아 있을 때 어서 움직여야 했다. 너무 늦기 전에 꾀여내야만 했다. 여자가 하모니 호를 묶어두고 내려오기 훨씬 전부터, 기회의 창은 닫히기 시작한 지 오래였다. 대가를 치르게 되더라도, 설령 캔틀롯을 살아서 떠날 수 없게 되더라도 빨리 움직여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잃게 될 테니......

 

  그렇다 하더라도, 잃을 게 있기는 했었던가?

 

  여자는 쪼그리고 앉아 고개를 젖혀 앞쪽 가방의 오른쪽 주머니를 묶는 끈을 홱 잡아채며 당겼다. 한쪽으로 끈을 흔들어대자 나무 조각에 이어 붙여 만든 종이 원기둥 같은 것이 떨어졌다. 주머니를 다시 조이고 난 뒤, 여자는 알현실 입구 근처에 장난감 불꽃놀이 대포를 깔았다. 그리고는 뒤로 물러서며 발굽을 반시계 방향으로 슥슥 비벼댔다. 편자끼리 부딪치며 금속질의 소리가 났고, 이윽고 스파크가 튀어올랐다. 그 다음은 스파크가 불길이 될 때까지 편자를 비벼대는 작업이었다. 장난감 대포의 발포 장치 역할은 해야 했으니까. 여자는 신속하게 자세를 갖추고 알현실 반대쪽으로 달려가 옥좌 옆에 몸을 숨겼다. 알현실에서 뻗어나오는 대회랑에서 보면 보이지 않는 자리였다. 여자는 몸을 낮게 웅크리며 눈을 가늘게 뜬 채 고글 위에 장치한 회전식 조정장치를 움직였다. 곧 터질 일에 대비하려면 조리개를 가능한 닫아둘 필요가 있었다.

 

  장난감 대포가 터짐과 동시에 밝은 섬광이 탁 터져나왔다. 불길이 천장으로 솟아올랐다. 차가운 왕궁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금빛으로 타오르는 폭죽은 일종의 봉화와도 같았다. 죽음을 예언하는 유령의 비명처럼 섬뜩한 소음이 왕궁 곳곳의 방들과 그 사이를 잇는 회랑을 가득 채웠다. 캔틀롯의 무덤에 살아 있는 자가 하나라도 있다면, 그 어디에 있든지 한없는 적막을 이처럼 어지럽히는 끔찍한 소리를 못 들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여자는 온 캔틀롯에 단 둘, 그녀와 목표물만 존재한다는 자명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울음의 첫 마디는 찍찍대며 뛰어가는 쥐새끼의 소리와도 같았고, 곧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나방처럼 잦아들다가, 이내 비틀거리고 흩어지면서 사라져 갔다. 폭죽이 일으킨 불길은 이제 죽어가는 고양이들마냥 낮은 소리로 겨우 으르렁대고 있었다. 여자는 다시 심장이 거세게 뛰는 것을 느꼈다. 부러 알현실에 질러놓은 소음이 무시되다시피 하며 다시 침묵과 어둠이 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몇 번 심호흡을 한 여자는 사냥감의 기척이 있나 살피려 오른편을 슬쩍 흘겼다. 놈은 없었다. 이번엔 왼쪽. 여자는 조금 놀랐다. 짊어지고 있던 가스등 불빛이 잘못 볼래야 잘못 볼 수가 없는 그 물건의 형상을 비추어 여자의 망막 속으로 꽂아넣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코드 플레이어였다. 레코드 플레이어가 있는 자리에는 다른 레코드 플레이어가 널려 있었다. 

 

  여자는 한쪽 시선은 꺼져 가는 불빛에 고정한 채 재빨리 레코드 플레이어가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 방호복 안에 수납해 둔 소총의 무게가 느껴졌다. 알현실 좌측에는 물건 상자가 많이 쌓여 있었는데, 가장 위에는 레코드 플레이어 상자가 있었다. 그나마도 바늘과 크랭크가 떨어져 박살난 지 오래였다. 이유 모를 낯선 기쁨을 느끼며, 여자는 상자 옆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물건 더미를 마구 뒤지기 시작했다. 그 통에 빨간 깃털 몇 개가 떨어져 나뒹굴었다. 생각대로, 다 떨어진 흰 케이스에 담긴 검은 디스크였다. 그녀는 입맛을 다시며 레코드판을 돌려 레이블을 확인했다. 물얼룩이 진 레이블에 적힌 이름을 본 여자는 크게 놀랐다. 한도 끝도 없는 시간 동안 처음으로, 마지막 포니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웃음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웃음이 연상되는 표정인 것은 확실했다. 박박 깎아 버린 말총이 잠시 흔들렸다.

 

  커다란 포효가 알현실을 가득 채웠다. 바닥을 비롯한 알현실의 모든 석제 구조물들이 흔들렸다. 돌조각과 먼지 덩어리가 천장화가 그려진 천장에서부터 후두둑 떨어져 내려왔다. 여자는 헉 소리와 함께 다급하게 좌우로 고개를 젖혀 가스등을 껐다. 금색으로 빛나던 등불을 밟아 죽이고, 여자는 레코드 디스크를 소중히 물어 들고 재빨리 뛰어올라 왕좌 뒤로 몸을 숨겼다. 그 다음 우측 후방에 위치한 안전 주머니에 검은 디스크를 쑤셔 넣었다. 주머니를 조여 닫은 다음에는 오른쪽 어깨를 앞으로 힘껏 젖히면서 뒷다리를 뒤로 뻗었다.

 

  그 반동으로 소총을 수납한 공간이 열리며 소총이 스프링처럼 튀어나왔다. 여자는 고개를 들며 총기의 목제 개머리판을 꽉 물어 잡고는 한 번 크게 흔들었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황동 총열이 펼쳐지며 약실을 드러냈다. 여자는 룬스톤 탄환을 물려놓은 탄창 하나를 꺼내 조용히 주문을 중얼거렸다. 오른쪽 발굽에 끼운 팔찌에 매달린 뿔이 한 번 깜빡임과 동시에 룬스톤이 조금 더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여자는 신속하게 탄창을 총에 끼워 넣고 총몸과 수직으로 장치된 한 쌍의 레버를 잡아당겼다.  알현실의 검은 그림자를 겨눈 채, 여자는 황금 옥좌 옆에 앉아 기다리기 시작했다. 고글 쓴 시선은 총구가 가리키는 방향에 박힌 채 다 꺼져 가는 불꽃만 질척거리는 알현실 입구를 겨냥하고 있었다.

 

  기괴한 포효 소리가 다시 한 번 왕궁 회랑에서 폭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 통에 왕좌 옆에 쪼그리고 앉은 여자의 몸까지 흔들릴 지경이었다. 천장에서 더 많은 먼지와 물감 조각들이 뜯어져 흩날렸고, 그와 동시에 알현실 실내 온도가 미친 듯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사냥감을 기다리며 가만히 앉아 있는 여자의 갈색 솜털과 두꺼운 가죽 방호복 사이 틈새에 땀이 흘러내려 방울졌다.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여자는 가만히 두려움을 흔들어 떨쳐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하여 다가오고 있을 업화를 찾아, 가만히 공허한 알현실 곳곳을 조용히 훑어보고만 있었다. 밝은 황색으로 빛나는 빛덩이가 나타난 순간, 엄청난 열기가 훅 끼쳐왔다. 시간이 흘러 쌓일수록 실내 기온도 미친 듯이 뛰어오르고 있었지만, 그 빛덩이가 어디서 나타났는지는 그녀 자신도 확언할 수 없었다.

 

  서로의 꼬리를 쫓아 빙빙 도는 두 공주의 형상이 창이 아닌 석조 바닥에서 구르고 있었다. 그제야 여자는 사실을 명료히 이해할 수 있었다. 여자는 목을 쭉 빼고 놀란 눈으로 돌아섰다. 찬란한 황금색과 진홍색 빛이 십자가 형태를 이루고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바깥에서 끓어오르며 넘쳐 들어오고 있었다. 이퀘스트리아 전역을 묘사한 모자이크화가 귀기 스민 밝은 빛을 받아 빛났다. 한 쌍 빛나는 눈동자가 자기 앞에 놓인 목숨을 찾아 번득이며 온 바닥을 훑고 지나갔다. 그 시선이 이내 여자를 포착했다. 그것은 커다랗고 날카로운 소리를 질러 다시 한 번 온 왕궁을 피 맺힌 포효로 가득 채우고는 곧장 창문에서 도약해 불타는 쟁기와도 같이 여자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것이 지나간 자리마다 널려 있던 스테인드글라스 조각들이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다. 놈은 왕좌 뒤에 숨은 포니를 노리고 있었다.

 

  여자는 숨을 멈추며 전방을 향해 크게 한 바퀴 굴렀다. 셀레스티아 공주의 오래된 옥좌를 한 쌍의 금빛 발톱이 움켜쥐자마자 그 위에 불이 붙었다. 그것이 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한 줄기 금빛 섬광만 남아 있었다. 이제 실내온도는 말 그대로 찜통과도 같았고, 죽은 근위대원들이 남긴 잿가루는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승화하고 말았다. 여자는 멀찍한 벽을 향하여 미끄러져 가며 순수한 열기로 인해 가죽 방호복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꼴을 보고 쯧, 하고 혀를 찼다. 그 다음 황동 소총을 꺼내 상자 위에 얹고 정조준했다. 거대한 불새는 높은 곳에 떠서 여자를 내려다보다가, 금색 부리를 크게 벌리며 날카로운 포효를 내지르며 불가침지역을 범한 자를 향하여 호령했다.

 

  "H'rhnum!" 여자는 복면을 한 채 소리쳤다. 뿔 팔찌가 한 번 깜빡, 하고 빛을 뿌리자 소총 탄창에 장전된 첫 번째 룬스톤 탄환이 자욱한 연기를 남기고 격발되었다. 격발된 탄환은 짧은 챙 하는 소리와 함께 황동 총열을 따라 속도를 높이다가, 총구를 벗어난 다음에는 알현실을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가르며 날아가 새의 모습을 한 지옥의 불꽃의 심장을 향해 쇄도했다. 커다란 불꽃이 튀고 붉은 깃털이 바닥에 흩어졌다. 불새는 비명을 지르며 불길 이는 날개를 퍼덕여 더 높은 고도를 향했다. 천정화는 이제 물감이 녹아 엉겨붙는 지경이었다. 여자는 망설일 틈 없이 소총의 장전손잡이를 잡아당겨 재장전했다. 총열에서 연기를 내뿜는 탄피가 튀어나왔고, 그와 동시에 다음 탄이 장전되었다. "H'rhnum!" 다시 격발음이 들려왔다. 이번에는 불새의 목덜미를 향해 탄두가 날아들었다. 불새는 피격 직전에 몸을 틀어 탄환을 피하고는, 한 줄기 길고 격렬한 포효와 함께 여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여자는 재빨리 한쪽으로 몸을 날려 불사조를 피했다. 그와 동시에 불사조가 조금 전까지 여자가 있던 자리 바로 뒤의 벽을 들이받았다. 보급품 상자가 불길에 먹혀 들어가면서 스파크와 잔불이 여자의 몸 위로 떨어져 내렸다. 네 발로 겨우 일어서고 나서야 여자는 마스크에 불이 붙은 사실을 깨달았다. 여자는 온갖 저주를 퍼부으며 고개를 미친 듯이 좌우로 흔들어 불 붙은 마스크를 떨쳐냈다. 여자는 검댕 묻은 얼굴과 악문 이빨로 다시 한 번 총을 장전하고, 몸을 돌려 가슴 방호복으로 불타는 발톱을 받아냈다.

 

  그 다음 순간 둔탁한 충격이 덮쳐왔다. 방호복을 더 껴입은 게 천운이었다. 갈색 솜털이 살짝 그을리기는 했어도, 흉부 방호판 또한 겉이 검게 조금 탔지만 아직 멀쩡했다. 불사조에게 들이받힌 충격으로 알현실 벽을 몇 번씩이나 치면서 튕겨나간 여자는 거친 숨을 내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기 자신의 그림자마저도 이젠 다음 공격 기회를 노리는 불사조처럼 느껴졌다. 여자는 날 선 숨을 내쉬면서 소총을 수납 공간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불새를 피해 전속력으로 뛰어,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해내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밀어 버린 꼬리지만 열기가 전해져 왔다.

 

  여자는 최고 속도로 구불구불하게 얽힌 왕궁의 회랑을 따라 질주했다. 이제 가스등에 의지할 필요조차 없었다. 바로 등 뒤에서 지옥의 불길 같은 찬란한 불꽃이 그녀를 추격하면서 경로상의 모든 잡동사니를 불태우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무거운 짐짝은 재빠르게 벗어 집어던지고, 바람이 불어 들어오는 층계를 따라 달려갔다. 그리고는 반질반질하게 코팅이 된 난간을 타고 신속하게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리고는 앞에 깔려 있던 헐렁한 양탄자 위로 훌쩍 뛰어 만화의 한 장면처럼 매끌매끌하고 경사진 바닥을 미끄럼을 타듯 내려갔다. 잠시나마 자신을 찢어 죽일 기세로 쫓아오는 불사조가 공격해 오면 피할 기력을 회복할 시간도 얻을 수 있었다.

 

  평평한 바닥에 발을 디디고 나서, 여자는 왕궁 중심부의 탁 트인 정원으로 통하는 기나긴 통로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통로 끄트머리에서 회색 불빛이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여자가 지나쳐 간 태피스트리와 초상화들은 이내 불이 붙어 타오르기 시작했다. 통로 끄트머리에서 출입구는 대리석 발코니로 변하며 주둥이를 크게 열었다. 그 가장자리에는 아름다운 보라색 휘장이 내걸려 있었다. 미친 짓이기는 했지만, 그녀는 그대로 뛰어올라 왕가의 문양을 새긴 휘장 끄트머리를 이빨로 낚아챘다. 위치에너지가 최고에 달한 순간, 여자는 그대로 휘장을 놓아 전방을 향하여 높고 멀리 몸을 던졌다. 그와 동시에 불사조가 왕궁을 박차고 튀어나왔다. 불사조는 날카로운 괴성을 지르며 밝게 빛나는 부리로 여자의 발굽을 낚아챌 기세였다. 그녀는 불사조의 공격을 어찌어찌 흘려보낸 뒤, 다 말라 버린 송수교 위에 내려앉았다. 그리고는 진흙탕만 남은 송수교의 빗면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갔다. 왕궁 출입문 너머, 눈발이 내려앉은 어둠만이 가득한 캔틀롯 시가지로 향하는 길이었다.

 

  2층 건물 차양으로 뛰어내린 순간, 여자의 몸뚱이를 감당하지 못한 차양이 찢어지면서 여자와 함께 추락했다. 아래쪽에 널려 있던 목제 좌판이 산산조각났고, 여자는 차양에 몸이 말려 있었다. 말린 몸을 풀고 다시 달릴 준비를 마친 뒤 돌아보니 조금은 거리를 벌린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급하게 뛰어내리는 통에 좌측 후방 가방 주머니가 열려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다급하게 사방을 둘러보다가, 조금 전에 챙겨 나온 레코드 디스크가 무사히 떨어져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는 재빨리 달려가 네 발로 미끄러지면서 레코드 디스크를 이빨로 낚아챘다. 그 순간 새된 괴성이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그녀의 고글 위로 두 개의 금빛 혜성 같은 무언가가 그녀를 향해 쇄도하는 모습이 비쳤다. 여자는 급히 불사조의 발톱을 피해 달아났고, 여자가 서 있던 자리를 불사조의 발톱이 긁고 지나갔다.

 

  여자는 물고 있던 레코드 디스크를 가방에 던져 넣고, 눈 덮인 캔틀롯 시가지를 질주했다. 추격해 들어오는 불사조의 몸에서 발하는 빛줄기가 무덤의 밑바닥에서 타오르는 횃불처럼, 새까만 비석과도 같은 캔틀롯의 어둠을 밝혔다. 1분쯤 지났을 무렵에, 불사조는 두 다리로 달리기를 그만두고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불사조는 하나의 광원처럼 주변에 광기 어린 빛무리를 자아내고 있었는데, 멀찍이서 달아나고 있는 포니의 몸을 비추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 노기에 찬 포효까지 내지르고 있었으니 그 꼴은 흡사 희미한 원령과도 같았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휘청거리며 날아오는 불사조의 몸에서 빠져 흩날리는 붉은 깃털이 시야에 들어왔다. 계획대로 되어 가고 있어서, 그녀는 급히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하층 구획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건물 지붕으로 뛰어올라 바스러질 대로 바스러진 지붕 판자를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리고 다시 몸을 날렸다. 그녀는 그대로 거리 너머 버려진 호텔의 발코니 창문 하나를 산산이 조각내면서 그 안으로 처박혔다. 2층 정도 높이를 떨어진 결과였다.

 

  여자의 몸은 침대 매트리스까지 날아가 부딪쳤다. 그 통에 유리 파편과 나무 조각, 빠진 매트리스 속이 튀어나와 사방에 날렸다. 여자의 몸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대로 더 날아가 벽에 등과 어깨를 박으면서 멈추었다. 그 다음 순간, 쇳소리가 퍼졌다. 여자가 소총을 꺼내 본인이 뚫고 들어온 발코니 창문을 겨냥한 것이다. 그 시선은 천천히 흩날려 떨어지는 잿가루 사이로 불사조의 광원이 있는지 살피고 있었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발굽이 소총 방아쇠를 더 단단히 틀어쥐었다. 룬 탄환 대부분이 시끄럽게 울어대고 있었다. 여자는 잠시 자신의 사지로 시선을 옮겼다. 그제야, 본인이 떨고 있는 게 아니라 건물 자체가 흔들리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잠시 몸을 움찔하다가, 짜증이 난다는 듯 표정을 구겼다. 얼마간이 더 지나고 났는데도, 부서진 발코니 창문 너머로 불사조의 자취는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바로 옆에 있던 소파가 칙칙대며 연기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이유는 자명했다.

 

  그녀는 그 찰나의 순간 몸을 일으켜 가장 가까운 문으로 뛰쳐나갔다. 그을린 조각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불사조의 불타는 부리가 온 호텔 건물을 달군 버터 나이프가 버터를 녹이듯이 태우고 있었다. 마지막 포니는 이를 악물고는 벽에 등을 기대고 불사조를 겨냥했다. "H'rhnum!" 그 다음 순간, 불사조가 그녀를 향하여 쇄도하기 시작했고 방아쇠는 채 당겨지기 전이었다. 탄환은 아슬아슬하게 불사조를 맞히지 못하고 지나가 마룻바닥에 박혔다. 그리고 둘은 그대로 아래층, 시체만 즐비한 호텔 로비로 굴러 떨어졌다.

 

  탄화한 가죽 조각들과 더불어 수많은 유골들이 여자 위로 비처럼 쏟아져 내려서 그녀는 깔리다시피 쓰러졌다. 불사조는 마구 버둥거리며 차가운 타일 바닥 위로 불꽃을 낙화처럼 뿌려대며 죽은 깃털들을 흩날렸다. 여자는 용수철이 튕기듯 몸을 일으켜 의자와 소파 뒤로 절룩이며 몸을 숨겼다. 그리고는 다음 탄창을 꺼내들었다. 여자의 발굽에 잡힌 탄창에서 보라색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그녀는 탄창을 소총 탄창 삽입구에 때려넣고는 잎새도 없이 말라 비틀어져 죽은 나무들만 무성한 정원으로 온 힘을 다해 달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가 벗어난 호텔 로비가 엄청난 충격파를 일으키며 폭발했다. 불사조가 미친 듯 몸부림을 쳐댄 결과였다. 열기를 가득 실은 충격파가 그녀를 떠밀어 넘어뜨렸다.

 

  마지막 포니는 정원의 잿빛 모래와 죽은 풀 위를 기어가다가, 한쪽으로 몸을 눕히고 룬 탄환으로 가득 채운 탄창을 소총에 끼워 넣고 한 번 더 쳐 주었다. 그녀는 낮게 포복한 채 다 뭉개져서 한 쌍 대리석 기둥만 남은 호텔 로비를 겨누었다. "H'rhnum! H'rhnum!" 고글은 온통 땀과 검댕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지만 조준점은 정확히 목표를 겨누고 있었다. 룬을 새긴 고정못을 박은 룬 탄환이 대리석 기둥 하나당 하나씩 정확히 박혀 들어갔다. 탄환은 짙은 보라색 기운을 뿌리고 있었는데, 호텔 잔해가 한 번 들썩이고는 대폭발을 일으키며 터져 나오는 동안에도 그 빛을 잃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불사조가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깃털 대부분이 사라진 모습을 드러냈다. 새빨간 깃털들은 그것들이 품고 있던 불꽃 같은 광휘를 상실한 채, 잔뜩 빠져 떨어져 있었다. 이제 불사조는 주름진 거죽과 갈라진 살점만 남은 채 서 있었다. 서 있었다기보다는, 삼 미터쯤 되는 키를 비틀거리면서 견디고 있었다. 불사조의 눈빛이 아주 잠깐 흐릿해지나 싶더니, 곧 주둥이를 흔들며 다시 한 번 온 날개부터 꼬리까지 불꽃을 피워냈다. 그리고는 먹이를 포착하고 군침을 흘리는 파충류와 같이 바로 두 개 기둥 너머에 서 있던 여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여자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타는 듯 뜨거워지는 정원을 향하여 큰 소리로 소리쳤다. "Y'hnyrr!" 팔찌가 깜박, 하고 빛을 뿌렸다. 거기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기둥에 박힌 두 발의 룬 탄환 위로 감돌던 보랏빛 기운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마법 안전장치가 해제되자마자 탄두에 충전된 인화성 화합물이 급속도로 반응하면서 폭발을 일으켰다. 두 개의 폭발이 온 캔틀롯을 뒤흔들었고, 그 통에 튕겨나온 잔해와 폭발력이 그대로 불사조를 직격했다. 그와 동시에 여자는 검고 굵직한 가시덤불 뒤로 몸을 날려 엄폐물로 삼았다. 폭음과 그 메아리가 서서히 사라지다가 완전히 흩어지고 난 뒤에야 여자는 자기가 숨어 있던 가시덤불에도 불이 붙은 것을 눈치챘다. 정원에 심어져 있던 다른 죽은 나무들도 마찬가지였다.

 

  정원 한가운데 도열한 불타는 나무들 한가운데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것은 불사조의 몸뚱이였다. 두 발톱은 경련하고 있었고, 두 날개는 걸레짝이 된 채 몸뚱이의 무게를 감당하려고 악을 쓰고 있었다. 그 깃털은 이제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불사조의 눈에 감돌던 섬광은 흩어져 사라진 지 오래였고, 그 대신 창백하고 불투명한 색 바랜 붉은색 눈동자만 남아 있었다. 불사조는 완전히 기운을 잃은 채 왕실에 봉사해 온 장엄한 시절을 그리는 듯 간신히 울었다. 이제 휘청거리고 절룩이는 사지는 마지막 통제력을 상실하며 쓰러졌고, 그 통에 불사조의 부리가 죽음만이 남은 정원 흙바닥에 박혔다. 여자는 소총을 등으로 넘겨 메고 조심스레 불사조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불타는 나무에 매달린 불꽃 이파리가 몇 줄기 연기를 남기고 시들어 사라져 갈 때마다 불사조의 숨이 급해져 갔다. 

 

  여자는 짐작이 간다는 눈길로 불사조를 바라보았다. 고글 너머로 불사조의 무기력한 시선이 죽어가는 쌍둥이처럼 흐트러지며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여자는 예전에 불사조의 생태에 관하여 깊게 공부한 적 있었다. 마력조차 고갈되어 버린 죽음의 땅에서 불사조의 생애주기는 일반적인 상황에 비해 한없이 짧아져 있었다. 이제 일은 거의 다 끝났고, 마지막 작업만이 남아 있었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불사조는 여자를 똑바로 쏘아보며 다 꺼져가는 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불사조의 비틀린 몸뚱이 안쪽에서부터 빛이 퍼져나왔고, 이내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으로 변해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여자는 즉시 죽은 나무 뒤로 몸을 날려 숨고, 소총을 불사조의 머리를 향해 겨누고 불사조가 마지막 저항을 포기할 때까지 기다렸다. 불사조가 힘없이 늘어지며 두 눈을 감았고, 최후의 숨결이 밖으로 퍼져나옴과 동시에 불사조의 몸은 정원 한가운데의 새카맣고 얼마 안 되는 잿더미로 변했다. 눈발 날리는 캔틀롯의 무덤에, 먹먹한 침묵이 조용히 찾아왔다.

 

  여자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았다. 말라 버린 분수대에 소총을 기대어 세워놓고, 두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짊어진 가방으로 발을 뻗었다. 하모니 호 캐비닛에서 꺼내 왔던 유리 단지가 끌려나왔다. 그녀는 룬 문양을 새긴 뚜껑을 조심스레 비틀어 열고, 단지를 아래로 숙여 정원 바닥에 흩어진 검은 잿더미를 조금도 남김없이 쓸어넣었다. 이걸로 끝났다. 지금까지 벌였던 모든 일들은 지금 이 한순간만을 위한 것이었다. 여자는 잿가루를 쓸어넣는 내내 진땀을 흘렸지만, 그래도 일은 빠르게 끝냈다. 그러고는 뚜껑을 거칠게 단지 입구에 때려넣고 쾅 쳐서 막았다. 그리고는 뚜껑에 입가를 붙이다시피 가까이 대고 조용하고 빠르게 속삭였다. "W'nyhhm."

 

  룬 문양이 빛을 뿌리더니, 단지 위로 보랏빛 아우라가 일렁거렸다. 마력 봉인이 작동한 것이다. 잠시 뒤 유리 단지 안에 넣어둔 재가 섬광을 일으켰고, 다시 크게 빛을 터뜨렸다. 그 기세만으로 단지가 거의 반쯤 밖으로 튕겨져 나갈 지경이었다. 그녀는 길고 깊은 한숨을 토해내며 단지 안을 들여다보았다. 담아 두었던 새까만 재는 온데간데없고, 진홍색과 황금색으로 빛나는 불꽃과도 같은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불길은 유리에 맹렬히 부딪치고 퍼져 나가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이제 불사조는 꼼짝없이 제압당해 감금된 것이다.

 

  "잘 지내보자고."

 

  마지막 포니는 한숨을 쉬면서 세 다리로는 땅을 딛고, 다른 한 발로는 빛나는 단지를 가볍게 툭툭 던지고 받다가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흐느적거리는 걸음이나마 당당하게, 라이플을 들쳐메고 캔틀롯의 적막한 거리로 걸음을 내딛었다.


  혼자서.

 

 


잡설.

 

처음에는 오역 몇 군데만 손봐야지 했다가, 문장 자체가 마음에 안 들거나, 대충 제껴서 뭉뚱그린 부분들이 하도 많아서 그냥 처음부터 다시 했습니다. 이미 번역해놓은 부분은 도저히 참고 자료로도 못 써먹겠더라고요. 괜한 짓을 또 벌이는 것 같습니다.

 

이거 재번역 시작한 게 꽤 됐는데 이제야 올리네요. 작가 양반이 대놓고 필로미나를 언급하는 부분이나, 중2력 돋는 도발 멘트를 삭제한 차이도 있었어요. 다시 읽어도 재미는 있습니다. 제가 몹시 피로할 뿐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