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틀롯 왕궁 알현실에서 찾아 온 레코드판의 반들반들한 표면 위에 묻어 있던 먼지를 갈색 발굽이 조심스레 털어냈다. 하모니 호 선실 내부 조명은 레코드판으로도 빛을 뿌렸고, 매끄러운 면이 들어온 빛을 튕겨내는 사이 판 한가운데에 붙은 둥그렇고 흰 라벨지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그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옥타비아, 공주 교향곡 I ~ IV 악장’ 한없이 부박하고 얇은 레코드판은 조심스레 누군가의 발굽에 붙들려 레코드 플레이어 위로 내려앉았다. 태엽이 풀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레코드판의 번들거리는 표면이 물 흐르듯 돌아가기 시작했고, 바늘이 천천히 자리를 잡으며 그 위로 내려갔다. 한 쌍 녹슨 스피커는 잠깐 거친 잡음을 뱉어냈고, 곧 낮은 첼로음이 사이사이마다 존재감을 드러내며 전체를 주도하는 아름다운 선율을 흔들리는 비행선 선실 안, 퀴퀴한 공기 속으로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격벽 위로 차분하고 부드러운 음색이 입맞추는 가운데, 마지막 포니는 외로운 선실 우현쯤에 매달려 천천히 흔들리던 그물침대 위로 몸을 던지다시피 누웠다. 그녀는 한쪽으로는 음악 소리에 귀기울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비행선 후방에 배치된 보일러가 식식대는 소리를 면밀히 살폈다. 여자는 기나긴 한숨을 내뱉으며 시선을 돌려 선실의 둥그스름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진홍색 눈동자가 강철 기둥들과 격벽 위에 박힌 철제 리벳 사이로 하염없이 돌아다녔고, 그 위로 오래된 것이나마 첼로음이 출렁거리며 다가와 어울려 왈츠를 추듯 섞여들었다. 선실에 드리우던 우울한 분위기가 평화로운 음악소리에 굴복하고 사라져가기 시작할 즈음, 여자도 두 눈을 감고 차분히 흔들리는 자신에게 허락된 아주 작은 공간에 몸을 맏기고 잠들었다. 그녀는 대大자로 뻗어 편안히 잠들었고, 박박 밀어 한 오라기 말총도 남지 않은 꼬리가 그물침대 사이로 삐져나와 늘어졌다. 시간은 그렇게 조용한 음악소리 사이로 흐려지고 번져 가며 섞여 들어갔다.
비행선 밖으로 하염없이 펼쳐진 잿빛 황무지는 빽빽한 안개와 잿더미가 뒤섞이며 휘몰아치는 회오리바람처럼 한없이 울부짖었고 빙빙 돌았다. 하모니 호는 그 위 어느 지점에 담담히 멈추어 서서 망각과 눈보라만 남아 있는 바다에 떠 있는 한 개 외로운 누런 판때기처럼 다만 견디고 있었다. 별들은 영멸의 경계선 그 어디쯤에 떠서 어물거리고 있었고, 그 밑으로 깔려 있는 대지는 파헤쳐진 거대한 속살을 드러낸 채 어림잡아도 수천 킬로미터는 되어 보이는 아가리를 쩍 벌리고 시커먼 속을 내보이고 있었다.
이퀘스트리아, 그 아무것도 남지 않은 세상에 단 한 명 목숨만이 남아 있었다.
일지 번호 # 2,345
나는 음악이 좋다. 몇 번을 반복해서 중언부언했더라도 그리 신경 쓸 문제는 아닐 것이다. 애초에 이 글을 읽을 사람이 나 혼자뿐이라는 것부터 관심 밖의 일이니, 더욱 그러하리라. 나는 음악이 좋다. 음악을 구성하는 음색이 좋다. 음악을 이루는 박자가 좋다. 출렁거리며 음악을 이끌고 나가는 음이 좋다. 곡을 시작하는 첫 음이 좋다. 곡을 끝내는 마지막 음이 좋다. 내가 듣고 있는 음악이란 현을 가지고 내는 것이고, 마땅히 현으로 음을 내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음악 뒤에 연주자들이 있었음을 감사히 여긴다. 그들 각자의 혼과 희망과 꿈, 그리고 그 자신의 두려움과 슬픔마저도 음악에 담아 청자들과 나누기 위해, 그들 모두 엄숙한 자세로 녹음에 참여했을 것이다. 각자의 재능과 능력을 타고난 이들이 각자의 기술을 갈고 닦고 연마하며 배운 것들과 갖게 된 애정을 음악을 통해 나도 나누어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거룩한 일인가. 비록 그것이 죽은 자들과 말을 섞으려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지라도 그 신성성이 퇴색하지는 않으리.
죽은 자들이나마 말상대가 있다는 점은 좋은 일이다. 말상대가 없는 것보다는 나은 일이니. 내가 음악을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 더는 잃을 게 없는 세상에서나마 어떤 감정을, ......슬픔을 다시 떠올리게 해 주기 때문이다.
어느 날 밤, 마지막 포니는 눈 덮인 언덕 위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여자의 등 뒤로 잿가루가 한바탕 흩날리는 가운데, 그 너머로 불탄 떡갈나무 세 개의 몸뚱이에 몸을 묶은 하모니 호가 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전방으로는 말 그대로 구겨지다시피 하며 조금씩 불거져 나온 땅덩이가 사방에 주름살처럼 접혀 있었다. 그녀가 언덕 위로 오르는 발걸음마다 땅덩이는 바스락거리며 으스러졌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습한 공기를 뚫고 언덕을 올랐고, 숨이 한 번 내쉬어질 때마다 입김이 짙게 끼었다. 언덕마루에 다다른 여자는 몸 곳곳에 피혁제 방호복을 껴입고 있었다. 그녀는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호박색 고글 위로 무너진 건물 몇 채와 집터만 겨우 남은 어스 포니 마을의 폐허가 비쳤다. 무너진 마을 한가운데에는 시계탑이 하나 서 있었는데, 시계판의 12시 방향에서부터 철을 좀먹으며 내려온 녹이 둥근 시계판 위로 엎질러진 것처럼 슬어 있었다. 시침과 분침은 언제 떨어져 나왔는지 짐작할 수조차 없었는데, 지금은 창백한 잿가루로 뒤덮인 땅 위로 떨어져 꽃혀 두 개의 첨탑처럼 서 있어서 이 세상의 괴사한 썩은 살에 꽃힌 두 개의 칼날처럼 보였다. 페가수스는 그 모습을 잠시 흘겨보기만 하고는 경사면을 따라 달려 두 날개를 글라이더처럼 펼쳐 신속하고 조용하게 아래로 내려왔다. 차가운 갈색 깃털이 반들거렸다. 다시 땅에 네 다리를 디딘 여자는 곧장 다른 무너진 마을을 향하여 고독한 걸음을 다시 재촉하는 것이었다.
그 여자의 이름은 옥타비아. 이퀘스트리아 역사상 가장 뛰어난 첼리스트였다. 살아서는 공작과 공작부인, 왕과 비, 심지어는 셀레스티아 공주님 본인도 캔틀롯 연주회장에 모셔 놓고 그 앞에서 자신이 작곡한 악곡들을 연주했다. 옥타비아의 곡들은 취입되어 한없이 찍혀나와 팔려나갔다. 옥타비아의 음재 덕분에 나는 어디를 가더라도 옥타비아의 곡이 담긴 디스크를 찾을 수 있다. 무너진 클라우드데일의 폐허는 물론 지반이 무너져 내린 메인해튼의 흔적에 가더라도 말이다. 내게는 다행한 일이다.
나는 지금까지 찾아낸 옥타비아의 음반들을 전부 보관하고 있다. 음반을 꺼내 들을 때면 현 하나하나를 섬세히 다루며 음 하나하나를 한 개의 층처럼 다루며 쌓아 만들어낸 소리가 귓가에 어른거리는데, 왜인지는 모르나 연주회장 관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들의 숨소리도 거기 섞여 있는 듯 느껴진다. 관객들이 환호하고 갈채를 보낼 때 나도 그 한가운데 있는 것처럼. 그 때 나는 그들과 같이 있다. 수천 명의 산 사람들 한가운데 섞여서 연주회장에 있다.
그리고 그런 느낌이 들기만 하면 레코드 플레이어는 작동을 멈춘다.
여자는 무너진 건물 내부에 수북히 쌓인 잔해를 뚫고 지나가 온갖 식기와 찻잔받침, 각종 접시들이 쌓인 자리를 파헤쳤다. 여자는 발굽 덮개 안에 내장된 소형 삽을 꺼내 그 부박한 파편들의 무더기 사이로 곧장 찔러넣어 간단히 몇 번 파냈다. 꼬마 둘이 웃는 얼굴이 그려진 수프 통조림 하나가 나왔다. 그녀는 그 웃는 얼굴은 무시한 채 통조림을 거꾸로 뒤집어 놓고 삽으로 세차게 몇 번 후려쳤다. 콩 세 알이 굴러 떨어졌다. 여자는 콧김을 뿜으며 삽을 덮개 속으로 돌려놓고, 강철 톱날을 꺼내들었다. 여자는 떨어진 콩을 소중히 집어들어 안장 가방에 달린 가죽 주머니 속에 조심히 집어넣었다.
여자는 주머니를 단단히 조여 닫으며 느긋한 발걸음으로 다 무너진 집을 나와 한때 소도시의 번화가였던 눈 덮인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마지막 포니의 발굽덮개가 눈을 밟고 지나간 자리마다 오메가Ω 모양 자국이 남았다. 그녀는 반쯤 으스러진 도서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냥을 나갈 때마다 옥타비아의 음악을 듣는다. 내가 어디로 향하든지, 그리고 내가 무엇을 주워오든지, 이퀘스트리아의 가장 어두운 무덤 속으로 뛰어들 때마다 옥타비아의 음악은 나와 함께했다. 평소 쓰는 은신처의 창백한 석벽에 가 부딪치는 첼로의 울음과 한숨 소리란. 그러다 보면 가끔씩은 나 자신이 더는 악령을 구마할 구마사제마저 사라진 이 신성한 땅을 헤집고 돌아다니는 한 마리 망령이란 생각마저 사라지곤 한다. 세상이 나를 저버렸으니, 나 또한 음악과 함께 세상을 저버리는 게 마땅하지.
물론 이게 정말로 도움이 되는 일이긴 한데...... 세상은 내가 어떻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상기할 때마다 도로 물거품이 되어 버리는 게 문제다. 이걸 신경 쓰기라도 하는, 신경 쓰는 척이라도 하는 유일한 존재가 나 하나뿐이니까. 뭐 사실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별로 상관도 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리고 다시 어느 날 밤, 페가수스는 하모니 호 선실 좌현에 앉아 있었다. 한쪽 발굽에 팔찌처럼 만든 황동 장치가 끼워져 있었는데, 거기에는 방금 잉크를 찍은 펜이 들려 있었다. 여자는 작업대 위로 몸을 구부리고 앉아 칙칙한 캔버스 장정이 된 일지의 빈칸을 채우고 있었다. 오래 전 클라우드데일 시립도서관의 폐허에서 주워 온 물건이었다.
일지를 쓰던 여자는 갈기를 밀어 버린 목과 두 앞다리를 쭉 펴며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는 길다란 한숨을 내쉬고는 지루하다는 눈빛으로 비행선 전면유리 너머를 내다보았다. 밖에서 한없는 잿빛 풍경으로만 넘실거리고 있던 세상도 무감정하게 여자를 마주보았다. 그녀는 다시 한숨을 내뱉으며 일지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옥타비아와 음악 이야기만 주구장창 쓴 것쯤은 자각하고 있다. 사실, 음악만이 내게 남은 유일한 가치있는 것이니 어쩔 수 없다. 게다가 오늘은 아무 일도 없었다. 언젠가 ‘아무 일도 없었음’을 주제로 일지를 쓰게 된다면 그 전날 일지를 펼쳐놓고 내일은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고 일종의 예언을 적어놓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아직 써야 할 것들이 남아 있다. 당초에 일지를 쓰기 시작한 것도 무엇인가 거룩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내 일상에 일지를 쓰는 새로운 일과가 추가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나는 내가 적어놓은 것들이 언젠가 다른 포니들에게 읽힐 날이 올 것이라는 순진해 빠진 희망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그것은 말 그대로의 개소리일 뿐이다. 나 역시 포니지만 내가 예전에 적어놓은 일지를 다시 읽어보질 못하고 있으니까.
그렇기는 해도 나는 아직 나 자신이며 내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뭐라도...... 생산할 필요가 있다. 그게 이 세상에서 내 존재만으로 해낼 수 있는 최소한이자 최대한일 것이다. 아니면 그냥 그렇다고 나 자신에게 말하려 하는 것뿐이거나.
그러므로 늘 그랬듯, 일을 또 해야지.
여자는 탄화한 나무들이 빽빽하게 박힌 자리를 빠른 걸음으로 지나갔다. 여기 서 있었던 나무들을 한순간에 숯덩이로 만들어 버린 것이 몰고 온 거대한 충격파에 휩쓸린 나무들은 하나같이 한쪽 방향으로 뒤틀려 있었다. 한때 숲이었던 땅 위로는 이제 짙고 푸른 안개만이 지표면에서 겨우 몇 센티미터 떨어진 채 차갑게 눌러앉아 있었고, 고글을 쓴 여자는 한 쌍 랜턴을 비추며 길을 밝혀 그 사이를 지났다. 목탄의 숲이 드리운 잿빛 정경에 비치는 흐릿한 금빛 촉광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던 여자는 모래 섞인 검은 흙 한가운데 깊숙이 막혀 있던 창백한 돌덩이 하나를 찾아냈다. 그 주위로는 나무 한 그루도 서 있지 않았는데, 그 모습은 돌덩이가 맹독을 품고 있기라도 한 듯했다. 포니 여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돌덩이를 향해 달려가 쪼그리고 앉아 가방에서 곡괭이 하나를 꺼내 들었다. 여자가 곡괭이를 휘두르기 시작하자 탁한 돌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고, 그 사이로 차가운 흰 속살이 드러났다.
이번 주에는 월석 몇 개를 찾을 수 있었다. 정확히 표현하면, 일곱 개다. 월석을 파고 들어가 에메랄드 세 덩이, 사파이어 두 덩이, 토파즈 하나, 루비 하나를 찾았다. 이 정도면 몇 번 정도는 화염석 없이도 신호를 쏘아보낼 수 있을 것이다. 당장 갖고 있는 화염석이라면 마력이 거의 소진되어 쓸 수 없다. 물론 믿을 만한 공급책은 많이 알고는 있지만, 최근에 큰손 하나...... 길리엄이 판에서 빠져 버렸으니 살 돈이 문제된다. 아, 뭐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 자식이 나처럼 일 잘하는 하청업체를 잃었다고 하는 게 맞겠지만...... 하청업체를 자르려다가 본인 목이 잘려 나갔으니 말이다.
넝마가 된 천막이 질풍을 맞아 미친 듯이 펄럭거렸다. 비참한 바깥 세상을 나돌아다니던 마지막 포니는 걸레짝이 된 천막 속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한쪽 발굽을 들어 고글 렌즈를 조정했다. 곳곳이 무너진 피신처 내부가 흐릿하게나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시신 몇 구가 둥그렇게 모여 천막 안 유일한 등잔을 둘러싼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등잔은 오래 전에 그 불빛을 잃었고, 오랫동안 그 안에 고여 있던 공기는 환기되지 않은 공기 특유의 퀴퀴함과 시체 썩은 냄새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육편 몇 조각과 털뭉치 몇 개가 개와 이름모를 포유류, 파충류의 해골 옆에 흩어진 채 내지르지 못한 단발마 속에 얼어 있었다. 무엇이 저들을 끝장냈더라도, 그리 오래 지난 일은 아닐 것이었다.
천막 내부 멀찍이 떨어진 곳에 버려진 채 녹슨 연장들은 굶주린 채 천막 안으로 기어 들어왔을 이것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도 제정신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입증하고 있었다. 포니는 콧김을 내뿜으며 텐트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 죽은 자의 것이었으므로 이제는 주인이 없는 물건들을 쓸어담기 시작했다.
다이아몬드 독들이 다시 내 손을 빌어 일을 처리하려 하지 않는 이상 어떤 일이 되더라도 내게 일을 시키고 일당으로 은을 쥐여줄 자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길리엄의 ‘개소리’ 호가 내뱉는 개소리에 뇌를 저당잡히지 않은 개자식들이 아직 사업을 할 의지가 있기만을 빌어야겠지. 그렇더라도 피해는 이미 발생했다는 게 문제다. 개새끼 하나를 걷어찬다면 그 무리 전체를 적으로 돌리게 되니까. 길리엄의 손에서 살아남으려고 발악할 때에야 나는 알 수 있었다. 역사는 승자의 손으로 쓰여진다고 하지 않았나. 최근 내가 목숨을 건진 것을 승리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여전히 나는 이 세계 유일한 포니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는 살아남아 자손을 남기는 데 성공한 자들의 편이니, 그렇게 보면 나는 두 배로 엿을 먹는 셈이다.
사냥을 끝내고 돌아온 마지막 포니는 사방에서 주워 모은 물건들을 작업대 위로 쏟아붓듯이 내던졌다. 요란한 소리가 뒤따랐다. 여자는 비행선 좌현 쪽으로 물러나 작업대 위로 쌓인 각종 연장들과 골동품을 쳐다보며 가방을 여미어 닫았다. 챙겨 온 물건 대부분은 쓰레기 그 이상, 그 이하도 되지 못하는 것들처럼 보였다. 여자는 고글을 올려 벗으며 진홍색 눈동자로 물건들을 째려보듯 쳐다보았다.
여자는 한쪽 발굽을 뻗어 재로 얼룩진 연장 더미를 뒤적거려 양피지 두루마리를 찾아 꺼냈다. 여자는 천막에서 가장 먼저 챙긴 물건이 이것이었던 것조차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두루마리를 신기한 듯 붙잡고 있었다. 몇 초쯤이 지난 뒤, 여자는 두루마리를 말아두고 있던 실을 잡아당겨 풀고 펼쳤다. 자기 손에 박힌 발톱만큼도 지도 그리는 솜씨가 없었던 자가 조악하게라도 끄적여 놓은 지도가 드러났다.
여자는 생각에 잠겨 턱을 문질렀다. 이걸 어떻게 할지 잠시 고민하던 끝에, 여자는 저편으로 건너가 우현 쪽 레코드 플레이어 아래에 놓아둔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는 안에 들어 있던 양피지 두루마리를 죄다 끄집어냈다. 그녀가 방금 집어 온 양피지 조각에 비하면 훨씬 보존 상태가 양호했다.
그리고는 머뭇거릴 이유도 없다는 듯 작업대로 되돌아온 여자는 그 위에 굴러다니는 물건들을 쓸어 던져 버리고 작업대 앞에 앉아 천막에서 집어 온 지도에 표기된 새로운 정보들을 기존 지도 위에 그려 넣기 시작했다.
여자가 잡은 스케치용 펜 아래에서 지형이 서서히 그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지난 몇 년 동안 극도로 신경을 써 가면서 기록해 온 지도는 이제 당연히 양피지의 갈색 표면 위로 대륙의 모습을 갖추어 그려져 있었다. 동쪽에서부터 흘러가는 거대한 물줄기는 남쪽에서 거대한 호수를 이루었다가, 서쪽 바다로 흘러 들어갔다. 대륙 지도에는 수많은 산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동쪽의 산맥들은 기세가 날카롭고 들쭉날쭉했으며 북쪽의 산들은 머리에 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서쪽 산맥지대는 절로 주눅이 들 정도로 키 큰 산들이 서 있는 곳이었다.
거대한 산맥들을 벽으로 삼고 남향의 호수를 앞마당으로 삼은 자리에는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었다. 서쪽 산맥지대 인근에는 이퀘스트리아에 있었던 수목 대부분이 집중되었던 울창하고 빽빽한 숲이 형성되어 산맥을 포옹하듯이 펼쳐져 있었고, 그 골짜기 한가운데에서 북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거대한 황금 탑을 연상케 하는 무언가의 옆자리에 무지막지한 구덩이 하나가 패여 있었다. 서쪽 산맥지대에서 가장 높은 산들을 지나 동쪽으로 향하면 가파른 협곡들과 날카로운 고원들이 있었는데, 그 모습의 묘사는 포니의 조악한 솜씨 탓에 상당히 뭉개져 있었다.
동쪽 해안지대에서 북쪽 산맥지대의 눈 덮인 산을 지나 서쪽의 날카로운 산들로 지도 위 시선을 옮겨놓다 보면 몇 군데 검은색으로 동그라미를 그리고 이름표를 붙여놓은 지점들이 보였다. 한때 생명으로 가득했던 자리의 이름들은 이제 그 어둠만이 남아 이름표에 새겨져 있었다. 남서로는 메인해튼, 극북에는 스탈리온그라드, 북동에는 휘니펙, 동쪽 해안지역에는 토론트롯과 드림밸리, 남쪽 해안선 한가운데에는 발티메어였다. 동쪽 산악지대에는 캔틀롯이 있었고,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자리에는 포니의 해골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한때 융성했던 도시 옆으로 몇 군데 자리가 비어 있었고, 그 구역은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았다.
마지막 포니가 쥔 펜은 그 자리만은 그리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고 넘어갔다. 그 대신, 여자의 발굽은 북서쪽으로 향해 ‘그리폰 마운트’라고 표시된 지점에서 약간 동쪽에 있는 곳으로 옮아갔다. 죽은 자들의 천막에서 집어온 양피지 지도를 면밀히 따려보고 난 뒤에야, 여자는 조심스레 동그라미 하나를 더 그리고 이름표에 그 도시의 이름이었던 것을 적어 넣었다. 그 자리에는 필리델피아라고 적혀 있었다.
한때 도시가 있었던 자리에는 그 석묘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대도시로 번영하던 곳들은 이제 그 자체로 거대한 봉분을 형성하고 있다. 세상 모든 것이 무덤으로 변해 버린 죽음의 세계에서 살아남고자 한다면 망자에 대한 예의 따위는 집어치우는 편이 현명하다.
무덤 속으로 기어 들어가서 필요한 물건을 코앞에 뒀는데도 곧장 낚아채지 않는다면 아무리 못해도 굶어 죽을 것은 각오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오래 전에 깨달았다. 이제 이 세상에 남아 있는 목숨들은 고통 속에서 태어난 것들이므로, 고통의 씨앗을 뿌리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 나는 그런 부류가 아니다. 그런 부류로 떨어지는 것만은 용납할 수 없다. 게다가, 아무리 비틀리고 썩어 문드러졌다 하더라도 내가 나고 자란 세상이니까. 나는 오래 전부터 이 사실을 체득하고 있었다. 잠든 사이 내 꿈을 가리우며 일어나기를 재촉하는 고독이 칭얼댈 때마다 나는 이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무덤을 도굴할 자격이 있는 것은 오직 나뿐이어야 한다. 살아남은 괴물들을 격퇴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첫 번째로 무덤에 손을 대는 죄를 지을 의무가 있다. 다른 짐승들이 나보다 먼저 세상의 무덤을 훼손하고 부수게 된다면, 그것은 더욱 큰 죄일 것이므로.
하모니 호 조종석에 앉아 있던 포니는 이퀘스트리아 전도를 그려놓은 양피지 지도를 매섭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완전히 무너지고 으깨진 곳들 몇십 군데는 저마다 색칠이 되어 있었고 무어라 갈겨쓴 메모들이 가득했다. 대평야 서쪽 어딘가, 새로 그려놓은 지점까지 살펴보고 난 여자는 지도를 둘둘 말아 지도 가방에 집어넣고 거칠게 닫은 뒤, 호박색 고글을 내려 썼다. 한 쌍 레버를 힘차게 전진시키자 비행선에 동력이 들어오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눈 앞 창 너머로 넘실거리는 안개가 갈라지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안개가 갈라진 사이로 서서히, 무너진 마천루의 잔해로 가득한 지평선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여자는 조심스레 필리델피아의 고층 건물 방향으로 방향타를 틀었다. 황동색 비행선이 버려진 대도시의 장대한 건물들 사이로 깊게 내려앉으며 나아갔다. 하모니 호는 서로를 향해 무너지다가 그 사이에서 부딪쳐 아슬아슬하게 철근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아치처럼 서 있던 두 탑 사이를 스치듯 지나가며 내려갔다. 뒤집어진 역마차와 돌무더기로 가득한 대광장에 비행선을 내려놓은 포니는 그대로 비행선을 묶어놓고 라이플을 총집에 집어넣으며 필리델피아 북쪽 폐허를 향하여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나는 사냥한다. 나는 수색한다. 나는 내게 필요한 물건들을 찾아 이퀘스트리아의 뱃속을 헤집고 다닌다. 물건을 찾아다니거나 낚시를 하거나 좀도둑질을 하지 않을 때가 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이런 황무지에서 가만히 있겠다는 말은 쓸모없는 존재가 되겠다는 말과 똑같은 말이고, 나는 혼자 있는 것보다도 쓸모없는 존재가 되는 게 더 싫다. 그래서 가정집에 쳐들어가고, 신전의 문을 박차고 들어가며 은행을 털고 죽은 자들이 무덤 속으로 갖고 들어간 부장품 항아리를 때려부순다. 병원이 쟁여두고 있던 약품을 찾아내 물건을 빼돌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 무엇도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며, 그 무엇도 낭비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도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잊지 말아야 한다. 나 개인의 자존심보다도, 내가 갖고 살아가던 양심보다도, 힘이 빠진 사지를 이끌고 돌아와 잠에 빠지며 나 자신을 사랑하고 증오하게 하는 사실을 깨닫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내 목숨이다. 내 목숨이 길지 짧을지는 모르나, 내게 내 목숨은 사실상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이퀘스트리아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는 목숨이다.
한 쌍 등잔에서 퍼지는 빛이 황동을 녹여 만든 포니 조각상 위에서 일렁거렸다. 철로 된 얼굴에는 눈가리개를 쓰고 있었고, 두 발굽으로 다 녹슬어가는 금속 천칭을 들고 있었다. 가죽옷을 껴입은 여자는 버려진 법정을 느린 걸음으로 돌아다녔다. 고글 쓴 두 눈은 앞뒤를 빠르게 살피고 있었다. 주심판사석 뒤에 문이 하나 나 있었다. 그녀가 법정 맞은편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법정에 비치된 의자들이 드리운 그림자가 더러는 흔들리고 더러는 뒤섞이며 부서진 문틀 너머를 가리키다가, 마침내 온갖 쓰레기와 먼지들로 가득 차 퀴퀴한 냄새가 나는 사무실 내부로까지 뻗쳤다.
눈이 한 번 천천히 흩어지며 그녀를 맞았다. 다 부서진 창문 너머로 필리델피아의 고층 건물 몇 개 층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창문이 부서져 있기는 했지만, 여자는 그닥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그대로 곧장 뒤엎어진 원목 선반 아래 쌓인 책더미 쪽으로 곧장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강철로 덮은 발굽이 페이지 몇 장을 넘기더니 고글을 올렸다. 여자의 나안이 책장에 쓰인 글자 몇 개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괜찮아 보이는 책 몇 권을 집어 가방에 고이 집어넣었다.
서적. 책은 갖고 돌아오기 가장 어려운 물건이다. 사실, 내 힘이 닿는 대로 텍스트를 수집하고 보존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 중 하나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렇더라도, 이퀘스트리아의 쓰레기장에서 쓸만한 물건을 찾아 돌아다니는 넝마주이는 나 하나뿐인 것이 아니다. 물론 개나 고블린, 원숭이 같은 부류에게 포니 문명의 텍스트라고 해 봐야 말 그대로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렇지만 내가 가방의 상당 부분을 할애해서 가져온다 쳐도 하모니 호가 감당할 수 있는 무게는 정해져 있다. 그러므로, 나는 텍스트가 쓰여진 종잇장이 내게 줄 수 있는 정보보다는 그 온기에 더 관심이 있다. 슬프게도, 텍스트 대부분은 보일러로 들어가는 게 더 효익이 크다.
그렇지만 특별한 물건, 적어도 내가 이퀘스트리아 정신을 후세에 남기는 데 중요한 자료라는 느낌이 드는 서책을 발견하면, 그건 보관한다. 이걸 골라내는 일은 고단하다. 우리의 역사와 우리의 문화, 포니 문명이 이루어낸 그 모든 것들이 이제 나 혼자만의 판단에 따라 심판되다니. 설마 이런 짐까지 내 어깨에 지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므로, 이런 짐이 내 어깨에 지워져 있다는 사실은 꿈에서도 모르도록 노력하겠다.
마지막 포니는 높다란 고층건물 옥상 난간 위에 앉아 있었다. 죽음이 덮친 필리델피아의 난개발된 도심을 따라 몰아치던 찬바람에 여자의 갈색 깃털이 흔들렸다. 오래 전부터 그 자리에 박혀 세월을 견뎌온 녹슨 철근들이 유지보수를 받지 못해 삼십 층 고층건물 속에서 녹슬고 부박해진 채 잿빛 대기 속으로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는 양 옆에 책더미를 하나씩 쌓아둔 채 앉아 있었다.
갈기를 박박 밀어 깎은 민머리 위로 고글을 올려둔 채, 여자는 책 몇 권 중 하나를 골라 표지를 가만히 뜯어보았다. 그리고는 책을 펼쳐 몇 장을 빠르게 넘겨보았다. 사막과 제빵과 식사예절을 다룬 페이지가 지나갔다. 여자는 진저리가 난다는 듯 한숨을 뱉으며 발굽을 세차게 휘둘러 책을 던져 버렸다. 내던져진 책은 페이지를 팔락거리며 돌무더기로 가득한 길거리로 떨어졌다.
그녀는 피곤하다는 듯 다른 책을 집어들고, 대충 훑어보다가 내던졌다. 그리고 다음 두 권에 대해서도 똑같은 공정을 반복했다. 그러던 중 그녀는 옛 필리델피아식 농경기법의 변천사를 수기로 정리한 연보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관개기법에 관한 내용을 적은 페이지를 꼼꼼히 뜯어보며 생각에 잠겨 이마를 찌푸렸다. 몇 분쯤이 지난 뒤, 여자는 책을 탁 소리를 내며 덮은 후 가져가 보존할 책으로 골라놓은 오른쪽 책더미 위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그녀는 곧장 다음 책을 집어들고, 무감정하게 자료 배제 공정을 계속했다.
내가 겪어보지 못한 것들에 관해서는 책이 그 답을 알려주었다. 불씨를 보존하는 방법이나 건강한 식생활을 유지하는 방법, 비행선 구조건전성 유지관리법, 파이프를 이용한 증기 여과법 등, 지식을 직접 말해줄 수 있는 자 하나 없이 삶을 지속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하여 책은 내 눈으로 보고 배울 창구를 제공했다.
스승 없는 세상에서 책은 훌륭한 강사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아리스트롯텔레스(Aristrotle,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카뮬(Camule,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니이트체(Neightszche,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데칸터(Descanter,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를 비롯한 이들의 저작들을 나는 그 자리에서 먹어치우듯 읽어 나갔고, 상당 부분 체화시켰다. 그리하여 옛날에 죽은 자들이 쓰던 논문 같은 방식으로 글을 쓰는 작문법을 익혔다.
어렸을 때만 해도 책을 읽는다거나 뭘 배운다거나 하는 건 내 평생에 없을 일처럼 굴었는데, 누구 하나 내가 모르는 단어 뜻을 설명해줄 사람도 없는 절멸 이후 세상에 내던져진 다음에야 읽고 배우기에 목을 매다니 웃기는 일이다. 결국 아주 쉬운 책부터 시작해 어려운 책으로 넘어가는 식으로 어휘를 배우기는 했지만, 그러다 보니 사전적 정의들 사이 간극 어디에선가 내 이해가 형성되었다.
살아온 삶 대부분은 나 혼자서 배워서 감당해내야 할 것들이었다. 절멸 이전에도 여러모로 내 삶은 이 모양이었다. 이퀘스트리아가 그렇게 끔찍한 결말을 맞이할 걸 감안한다면, 내가 가장 운이 좋은 녀석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H’jem.” 여자가 툭 던졌다. 룬스톤이 희미하게 빛나며 하모니 호 우현 서재의 문 봉인을 풀었다. 선실 문이 열리자 두꺼운 종이로 장정된 두터운 책들이 늘어선 모습이 드러났다.
그녀는 몸을 흔들며 몸 곳곳에 묻어 있던 잿가루와 눈을 털어내면서 가방으로 고개를 돌려 입으로 새로 집어온 책 몇 권을 꺼내 서가에 꽂았다. 그리고는 숨을 가볍게 내쉬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나 늘어선 책들을 외로이 쳐다보았다. 고글 쓴 눈이 유독 두꺼운 두 권 책에 시선을 던졌다. 최우상단 천반에서는 가장 두꺼운 책이었다. 책등에는 각각 금박과 은박으로 된 문양이 장식되어 있었는데, 하나는 태양이었고 다른 하나는 달이었다.
가장 특별한 두 권의 책. 내 존재 전부를 바쳐서라도 책장 하나 상하지 않게 지켜야 할 물건이다. 이퀘스트리아를 다스리던 두 공주님이 남긴 신성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즉슨, 셀레스티아 공주님 본인이 적어 내려간 일기와, 루나 공주님이 쓰신 일기라는 것이다. 나는 이것들을 캔틀롯에 두 번째로 들렀을 때 찾았다. 당장 세상에 드리운 어둠을 받아들이고도 남을 시간이 지났을 때, 나는 나 자신조차 상상도 못 했던 일을 저질렀다. 나는 왕궁을 털었다.
나는 내가 저지른 죄가 실은 내가 살아오며 해 온 것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업적이 아닐까 생각한 적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공주님이 남긴 유물을 보관한다고 할 때 마지막 포니의 비행선 비밀서재만큼이나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루나 공주님의 일지 대부분은 비어 있다. 달 속의 여자로서 구금되었다가 돌아오고 나서부터 쓰기 시작한 것이고, 불행히도 그것이 절멸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셀레스티아 공주님의 일지는 다르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시적인 글귀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옥타비아의 다른 작품이 수록된 음반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전등빛 비치는 공기 속으로 퍼지는 가운데, 포니는 다리를 꼰 채 흔들리는 해먹 위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마지막 포니의 붉은 눈동자가 던지는 시선이 별빛에 젖은 화려한 필체로 쓰여진 글자 위로 물 흐르듯 흘러갔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던 여자의 목 안에 응어리가 졌고,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자 집중되고 단단한 맥박이 갈색 솜털 아래에서 꿈틀거렸다.
셀레스티아 공주님의 글에는 기쁨이 있다. 희망이 있다. 신실한 신민들과 이들의 일상, 자신의 제자와 이들의 우정이 있다. 일지 대부분은 당신의 자매에 관한 내용이다. 천 년 동안의 구금 동안 당신의 삶에 얼마나 큰 구멍이 났는지, 그리고 천 년간 잃어버렸던 자매가 돌아왔을 때 느꼈던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 어떠했는지 적혀 있다. 셀레스티아 공주님이 남긴 문장 하나하나마다 낙관과, 다음 날 해를 띄워올릴 때 세상이 다시 기쁨으로 차오를 것이라는 기대가 남아 있다. 처음 공주님의 일지를 읽었을 때, 나는 셀레스티아 공주님이라면 포니 문명 전체와 당신과 당신의 자매까지 죽음으로 몰아넣을 절멸을 예측하고 있었으리라는 기대에 차 있었다.
마지막 몇 줄까지 빼놓지 않고 샅샅이 읽고 나니 세상 그 누가 느꼈을 슬픔도 태양의 여신이 느꼈을 슬픔과 비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만 깨달을 수 있었다.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 불멸자라는 것만 알고 있었지, 그때까지 살아온 기나긴 세월 동안 두 날개로 품어 지켜 온 자들과 그들의 우정과 협력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다가, 지나는 세월에 하나둘씩 스러져 죽어간 것은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 수많은 죽음은 셀레스티아 공주님 본인이 살아온 세월에 비하면 눈 한번 깜빡이는 순간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공주님이 남긴 글을 모두 읽었다. 기쁨이 묻어나는 글보다 슬픔에 젖은 글을 천 배는 더 많이 읽었을 것이다. 내가 약간 다른 방식으로 공주님과 교감할 수 있었던 역사상 단 하나의 포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기 때문이다. 물론 차이, 단 하나의 차이는 있다. 나는 공주님이 남긴 글을 가슴 깊이 담으며 읽었지만, 내가 겪은 상실을 글로서 풀어낸다 해도 이를 읽어 줄 자가 아무도 없으리라는 것이다.
짙은 구름이 뒤덮은 세상 위로 치솟아 구름을 뚫고 나온 잿가루 날리는 눈 덮인 꼭대기 위에 선 마지막 포니는 하모니 호 바깥에 단단히 매달려 있었다. 고지대의 바람에 날려가지 않도록 날개 각도를 조절해 가던 여자는 용접기를 악물어 잡고 있던 이 사이로 습 소리를 내뱉었다. 그녀는 익숙한 솜씨로 비행선 우현 방향의 황동 거죽을 잡아주는 가로 지지대를 타고 올라갔다. 그녀는 며칠 전부터 신경을 박박 긁어대며 덜그럭거리던 지점을 찾아냈다. 한쪽 발굽을 뻗어 고글에 달린 한 쌍 노즐을 조정하자 렌즈가 어두워졌다. 그 다음 용접기를 들어 외피를 지지고, 그 자리에 들고 온 새 리벳 못을 박아넣었다. 뼛속까지 시린 잿빛 하늘 위로 스파크가 튀겼고, 튀어오른 빛덩이는 자리에서 흔들리던 하모니 호 아래로 휘날리면서 떨어져 갔다. 용접 작업을 끝낸 여자는 용접기를 다시 단단히 물고 날개를 펼치며 펄럭거렸다.
그녀는 신속하게 비행선 가장 높은 곳까지 뛰어오른 뒤, 비행선 기낭 한가운데에 내둔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룬스톤을 박은 철판 두 장이 헐거워져 덜그럭거리고 있었다. 여자는 품을 뒤져 리벳 몇 개를 더 꺼내 제자리에 용접했다. 문제의 지점을 비행선 내외에서 단단히 용접했으니, 당분간 신경 긁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포니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잠시 그녀의 고독한 집, 그 ‘지붕’이라 할 만한 곳에 앉아 있었다.
거기서 더 뭉개고 있을 이유는 없었지만, 왜인지 모르게 비행선 내부로 통하는 조리개식 문을 열고 선실로 들어가려는 걸음을 늦추고 싶어졌다. 여자는 고글을 올려 쓰고 그 너머에 있던 새빨간 눈동자로 하늘 위로 엉겨 있는 죽음의 땅의 공기 위로 반짝이며 얼룩지는 창백한 빛을 노려보았다. 여자의 코에서 숨결이 빠져나왔다. 눈앞에 펼쳐진 한없이 두려운 심연을, 앞으로도 영원히 자신을 에워싸고 있을 그 심연을 향한 외로운 시선을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이제 태양은 없다. 달도 마찬가지로 없다. 미래 영겁의 세월 동안 그 자리에 있을 황혼과 재만이 있을 뿐이다. 낮이 없으니 밤 또한 존재할 수 없다. 아직 세상의 하늘에는 빛이 남아 있지만, 그 또한 스스로 꺼질 수 없어 남아 있을 뿐이다. 저 꼴을 보다 보면 이제는 영원히 사라져 버린 공주들께서 이퀘스트리아를 유지하기 위해 빚어낸 천체들 노릇을 하겠답시고 저 멀리에 있는 별들이 건성건성 빛을 보내오는 것만 같다.
결국 그 결과는 희미하고 끝없이 어른거릴 뿐인 흐릿한 빛무리일 뿐이다. 죽음을 앞둔 노인의 눈으로 하늘을 본다면 딱 이 모양으로 보일 것이다. 언제든지, 어느 순간이라도 모든 것이 어둠에 잠길 수 있다. 그게 지금 당장이 아닐 뿐이다.
가끔 하모니의 창문 밖에서 춤춰대는 창백한 회색 빛을 벗삼아 잠에 들거나 자려고 누울 때, 나는 차라리 어둠이 내려앉기를 바랐다. 모든 것이 끝나주기를 바랐다. 그때마다, 나는 나 자신에게 개소리는 그만두라고 말했다. 끝나주기를 바라는 것은 포기하는 것이며, 포기는 내가 가질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사치품이 아닌 것이다. 어둠이 오기는 할 것이다. 어느 식으로든, 언제든 말이다. 그 때가 올 때까지, 언제 어디서부터 어둠이 내려앉을 것인지 아는 척을 하지도 못하리라.
여자는 발굽덮개 가장자리에 수납된 망치를 꺼내 구부러진 부분을 곧게 폈다. 새빨간 눈으로 들여다보며 금속 덩어리를 들어올리고, 사방에서 살펴보며 더 고칠 점은 없는지 살폈다. 작업대를 등지고 돌아선 여자는 몸을 구부리고 앉아 발굽덮개를 좌측 전방 발굽에 차 보며 크기를 맞췄다.
여자는 발굽덮개를 살펴보던 것을 멈추고 무감각하게 비행선 전방 조종석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하모니 호 외부에 드리운 구름은 하나같이 재와 뒤섞여 짙은 잿빛이었고, 끝이 없이 늘어서 있었다. 여자는 한숨지으며 발굽덮개 크기를 마저 맞추고 일어서서 체중을 감당할 수 있는지 시험하기 시작했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측정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절멸의 날이 왔을 때 나는 아직 어린애였다는 것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부터 지고 뜰 해와 달은 없어졌다. 시간만이 중요할 뿐 나머지는 죄다 상상 속 존재일 뿐이다. 황혼만이 드리운 땅에서 시대란 개념 또한 잊혔다.
어느 순간 나는 황무지에 낙뢰를 이끌고 들이닥치는 폭풍이 일정 간격을 두고 발생하는 점을 눈치챘다. 이 간격을 이용해서 시간을 측정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 어느 날 버려진 위니피그들의 연구소에 갔다가 거의 기적적으로 말끔하게 보존된 모래시계 몇 개를 찾아내어 폭풍 발생 주기를 측정해 보았다.
폭풍은 평균적으로 대략 일백 시간 하고도 이십사 시간 주기로 들이닥친다는 계산이 나왔다. 평균적으로 이퀘스트리아의 1일은 24시간이니, 폭풍주기는 대략 닷새 정도가 된다. 닷새 정도면 폭풍주기를 새로운 ‘1주’로 사용해도 거의 무방할 것이다. 이퀘스트리아의 1년이 365일이니까, 1년이면 평균적으로 75번 정도 폭풍이 들이닥친다고 할 수 있겠다.
내가 이 실험을 시작하고 나서부터 센 것만 쳐도 1358번의 폭풍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아무리 적게 쳐 줘도 폭삭 망한 이 땅에서 18년을 넘게 살았다는 것이다. 이제 나는 명백하게 어린애 꼬마가 아니다. 그렇기는 하되, 내가 얼마나 ‘어린애’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삐죽하게 튀어나온 키 큰 바윗덩어리에 하모니 호를 묶어놓은 페가수스는 아래로 내려와 눈 덮인 평원의 널따란 삼림 속을 걸어갔다. 삼림이기는 했으되, 여자의 등 뒤로 빽빽하게 늘어선 커다란 잿빛 물체는 아무리 봐도 나무의 형상은 아니었다. 그것은 버섯이었다. 육 미터는 족히 될 길다란 균사체가 그 거대한 몸뚱이에 찬바람을 맞아 흔들리기도 하고, 눕기도 했다.
마지막 포니는 대충 무릎 정도까지 자란 버섯을 찾아낸 다음에야 걸음을 멈췄다. 곳곳에 뿌리가 튀어나온 회색 대지 위로 가방을 벗어 던져놓은 여자는 가방에서 긴 칼을 꺼내 거대한 버섯의 목줄기 어느 지점에 세차게 꽂아 쑤셔넣고는 사나운 기세로 버섯의 몸뚱이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버섯이 미끄러지듯 쓰러진 뒤, 그녀는 날카롭게 갈아놓은 톱날을 꺼내 쓰러진 버섯기둥의 텅 빈 몸뚱이를 향해 다가갔다. 둥그스름한 원통 모양의 버섯기둥 속으로 가스등을 밀어넣어 그 안을 환한 황금색 빛으로 밝힌 뒤, 톱날을 입에 물고 고무질의 균사체를 세차게 뜯어내기 시작했다. 뜯어낸 포자는 가죽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주머니를 단단히 매어 닫은 뒤, 여자는 다른 버섯 쪽으로 다가가 똑같은 공정을 반복했다. 여자가 포자를 뜯어내는 동안 가루눈이 가랑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해가 뜨지 않는다는 것은 빛도 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빛이 없다면 식물 또한 자라지 않는다. 식물이 자라지 않으니, 목숨을 부지하는 데 필요한 영양소를 얻을 수만 있다면 어떤 악식이라도 감지덕지해야 한다. 대절멸이 있기 전부터 살아 있던 것들 대부분은 절멸과 함께 ‘죽어가는’ 것들의 봉분으로 변해 버렸지만 균사체들은 사정이 달랐다. 말 그대로 개체수가 폭증한 것이다. 눈과 재를 실어나르는 차가운 바람은 포자를 운반하는 훌륭한 수단이 되었고, 그러다 보니 본래 타르타로스에서도 가장 깊은 동굴에나 자라는 초대형 버섯들이 여기까지 기어나와 사방으로 퍼진 것이다. 이제는 동굴에 사는 짐승들이 뜯어먹을 일도 없고, 번식을 방해할 숲도 없어졌으니 당연한 일이다.
어린 시절에 내가 나이를 먹어 답도 없는 황량한 땅 위를 비행선 하나에 의지해 돌아다니며 곰팡이나 버섯 같은 것에 의지해 연명하는 신세가 될 줄 알았으면 진즉에 접시물에 코 박고 죽었을 것이다. 여러모로 이미 그러고 있기는 하지만, 목숨을 부지하려면 에너지가 필요하고, 그 에너지를 얻기 위해 하는 행위라는 게 아이러니지만.
하지만 에너지만 얻는다고 능사는 아니다. 옛날 저 땅이 생명이 약동하는 녹색 대지였던 시절에는 포니들이 콩류나 감자, 당근 말고도 다양한 작물들을 심어 길렀기 때문에 건강한 식생활을 할 수 있었다. 여기 망각의 왕국에선 전통적인 포니식 농경법은 전혀 의미가 없다. 머지않아 일반적인 포니의 도덕관념에서도 일탈한 행위를 하게 되지 않을까......
버섯 조각으로 가득 채운 가방을 짊어지고 하모니 호로 돌아가던 여자는 순간 자리에 얼어붙었다. 바로 앞에서 무엇인가 재를 사방으로 튀기면서 몸을 돌린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포니는 자리에 바짝 엎드려 버섯 줄기들로 가득한 땅 위를 기면서도 바스라져 가는 흙무더기 위를 주시했다. 여자는 한쪽 발굽을 들어 고글에 장착한 렌즈를 조정했다. 초점이 맞지 않아 흐릿하게 보이기는 했지만, 바로 몇 미터 전방에 산발을 한 성체 퓨마 한 마리가 있었다. 퓨마는 으르렁거리며 죽은 흡혈박쥐의 몸뚱이 속으로 이빨을 박아넣고는 진미를 즐기는 양 뜯어먹고 있었다. 그것은 단단한 날개는 뜯어내고 그 아래 부드러운 살점을 탐하느라 바빠 등 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살아남은 포니 하나가 소리죽여 상황을 주시하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포니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한쪽 옆구리를 튕겼다. 황동 라이플이 총집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왔고, 여자는 신속하게 집총했다. 그 뒤 조용하고 은밀하게 반들거리는 총열을 늘리고 레버를 잡아당긴 뒤, 희미하게 빛나는 룬스톤 탄환을 장전한 차가운 탄알집을 라이플에 끼워 넣었다. 여자의 날숨이 라이플에 가 닿는 순간 탄알집 맨 위에 장전된 룬스톤이 밝은 보라색으로 빛났다. 목제 개머리판을 어깨에 단단히 견착한 여자는 총구를 흙무더기 너머로 겨누었다. 가늠쇠 위로 한창 식사에 몰두하고 있던 짐승의 형상이 올려졌다.
일말의 망설임도 그 무엇도 없이, 황무지 생활에 닳고 닳은 여자는 룬스톤 탄환에서 흘러나오는 빛무리 속으로 나지막한 한 마디 주문을 던졌다. “H’rhnum.” 전방 오른쪽 다리에 찬 뿔 팔찌가 한 번 빛을 뿜었다. 퀴퀴한 풍경 위로 천둥 같은 소리가 울렸고, 마나 탄환은 탄도를 형성하며 날아가 퓨마의 몸뚱이에 직격했다. 퓨마는 눈무더기 위로 쓰러져 엎어졌고, 더는 움직이지 못했다.
고기를 먹었다. 짐승을 사냥해서 그 살점을 취했다. 포니들이 타고나는 치아 구조상 곡식이나 식물이 아닌 것들은 먹기 어렵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발톱이 아니라 발굽을 갖고 태어났을 때부터 천부적으로 얻은 생득적 지식이었다. 포니 역사상 존재했던 그 어떤 국가의 법전에도 육식을 허하는 내용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추악한 야만인이요 범법자로 낙인찍히게 될 거라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나는 내가 추악한 야만인이요 범법자로 낙인찍힐 일 또한 없다는 것 또한 안다. 공주님들조차 전부 돌아가시거나 이 땅을 떠난 마당이니 당연하다. 생존이란 계속해서 그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이라면 반드시 그를 행하라는 정언명령과도 같다.
옛날에는 내가 아는 전부가 곧 현실이라고 대충 넘겨짚었어도 별 상관은 없었을 것이다. 자원은 풍족하고, 문명은 일반적인 동물들보다도 안락한 생활수준을 보장했으니까. 이제 그 문명의 얼마 남지도 않은 흔적을 지키려고 발버둥치는 신세가 되고 나니, 필요하다면 무슨 짓이라도 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본디 높이 올라갈수록 떨어지는 높이도 높아지기 마련이다.
이것이 수많은 모순 중에서도 내가 감당해야 할 유일한 모순이다. 죽었던 다른 포니들이 전부 되살아나 내가 단백질을 보충한답시고 허겁지겁 고기를 뜯어먹는 꼬락서니를 보게 된다면, 내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을 논리정연하게 설명한다면 나를 이해해 줄지 나도 가끔은 잘 모르겠다. 내가 저질러놓은 다른 행위들에 비하면 육식은 빙산의 일각이요 조족지혈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되고서도 나를 용서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여자는 마지막으로 남은 몇 센티미터 정도 되는 부분을 소형 용접기로 쓸어 태워냈다. 강철 문에 장식되어 있던 마지막 은 한 조각까지 잘라낸 그녀는 용접기를 끄고 전신의 체중을 실어 파괴된 스탈리온그라드의 시가지 한가운데 위치한 넓고 커다란 대리석 건물의 출입구 문을 밀어냈다. 진땀을 떨어뜨리며 신음까지 흘리고 난 끝에, 여자는 마침내 출입구 문을 밀어낼 수 있었다. 그 유약하기 짝이 없는 근육으로 문을 열려거든 그 경첩을 뜯어내는 수밖에 없었다.
사방으로 금속질의 마찰음이 울렸다. 한 무더기 재가 문에 치이며 솟구치더니, 문 열린 건물 내부로 파고들며 흩날렸다. 설마 먼지가 이렇게까지 많이 날릴 줄은 예상치 못했던 그녀는 기침을 하며 코 위로 가죽 마스크를 끌어올려 썼다. 건물 내부에서 축사 냄새와도 같은 무시무시한 악취가 훅 끼쳐왔으므로, 타이밍이 잘 맞아떨어진 셈이었다. 안장에 매달아 짋어진 가스등을 켜자 등불이 퍼지듯 피어올랐고, 그 불빛에 기대어 여자는 부서진 건물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그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그저 우울하고 안타까운 모습뿐이었다.
여자는 천천히 시신의 수를 세었다. 열... 열다섯... 스물다섯... 아무리 적게 잡아도 서른다섯 구가 널려 있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시체의 산을 이루며 쌓여 있었는데, 몇 구는 어린아이의 시신이었다. 이들의 시신은 셀레스티아 공주의 형상을 본따 만든 동제 제단 주위로 둥글게 모여 있었다. 이 건물은 스탈리온그라드의 태양 신전이었던 것이다. 재앙이 들이닥친 바로 그 순간, 인근 거주구역에 모여 살던 이들이 여기로 모여들어 절박한 기도를 올렸을 것이다. 시신은 생각보다 상태가 양호했는데, 걸치고 있던 옷가지나 신발까지도 보존 상태가 좋았다. 하지만 여자가 스탈리온그라드까지 온 것은 신발 밑창에 붙은 금속이 탐나서가 아니었다. 유니콘을 찾아서 온 것이다.
그녀는 깊은 한숨을 토해내며 가장 가까이에 있던 시신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회수 및 재활용이 가능할 듯한 스무 개의 두개골 중 첫 번째였다. 전방 좌측 발굽에 신은 발굽 덮개에서 작지만 날은 시퍼렇게 살아 있는 톱을 끄집어낸 여자는 해골의 정수리 정도 부분쯤에서 온 정성을 다해 톱질을 시작했다.
한 시간 남짓한 시간이 지난 뒤, 여자는 태양 신전을 빠져나와 하모니를 계류해 둔 스탈리온그라드 중앙 시가지 구역으로 향했다. 그녀의 목에는 가방 하나가 걸려 있었는데, 넘치기 직전까지 잘라다가 집어넣은 뿔들이 들어 있었다. 여자는 가벼운 걸음으로 비행선에 오른 뒤, 곧장 최상층 작업대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무두질한 퓨마 가죽으로 만든 끈 하나를 꺼냈다. 여자는 목에 걸고 있던 가방을 벗어 작업대 위로 쏟아놓은 뒤, 조심스럽게 끈으로 유니콘 뿔들을 꿰어 새 팔찌를 만들기 시작했다.
해와 달이 사라진 날, 포니들도 사라졌다. 나를 제외한 다른 포니들은 이제 없다. 동족들을 재와 먼지로 바꾸어 산산이 흩어 버린 사건이 있고서도 나는 지금, 얼마가 지났는지 알 수 없는 지금까지도 목숨이 붙어 있다. 그게 무엇이었든지, 그 때문에 셀레스티아 공주님과 루나 공주님도 돌아가셨다는 건 확실하다. 그러니 두 분 공주님과 우주의 원소들을 엮고 있던 마력 또한 손상되었을 것이고, 그 때문에 나는 한때 마법으로 충만했던 이퀘스트리아의 말라붙은 마력 샘과 그 죽은 시체 위를 떠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이렇게 써놓기는 했는데, 사실 마력은 일반적인 질량이나 에너지와 유사한 성격을 갖는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갑자기 나타날 수도 없고, 마찬가지로 갑자기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질 수도 없다. 따라서 마력은 어딘가로 이동했을 것이며, 이퀘스트리아에 살았던 다른 포니들이 전부 죽었으니 이 세상에 남은 마력은 전부 단 하나, 절멸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존재인 나를 중심으로 집중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주 사소한 것들이기는 하지만 내가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벌써 오래 전 일이다. 주워 온 책에서 배운 마법이었다. 쓸 수는 있긴 한데, 그 마법을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는 건 또 아니다. 내가 얼마나 정신을 집중하는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지각우주 내에 모여 있는 마력을 총동원해서 쓰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내가 페가수스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마법을 다루는 일에 있어 페가수스의 몸은 어스 포니와 다르지 않아서, 마법을 쓸 수 없다.
유니콘은 좀 다르다. 유니콘들은 일종의 생체 마력 배터리와 같은 체질을 타고난다. 그러므로 모든 종류의 마법을 익히고 통달할 수 있으며, 셀레스티아 공주님을 비롯한 다른 공주님의 신성을 빌지 않더라도 온갖 초자연적인 힘을 만들어낼 수 있어 이퀘스트리아 건국 반대파들이 유용하게 써먹었다. 이 능력의 원천은 그 뿔에 있는데, 이 뿔의 구성 물질이 유니콘의 능력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 소유자가 죽고 나서도 이 둥그스름한 뿔은 여전히 마력에 관한 그 권능을 유지하고 있었다. 대절멸 당시 죽은 유니콘들의 생명 정수 중에서도 마법적인 것들이 그 뿔에 깃든 게 아닌가 싶다.
내가 페가수스이긴 하지만, 유니콘의 뿔로 만든 팔찌를 이용하면 내가 마지막 포니인 한, 물질계와 비물질계의 통로처럼 작용하는 점을 활용해 마법의 규칙을 우회할 수 있다. 뿔 여러 개를 한곳에 모아두는 것으로 여기에 마력을 집중시켜 주문을 쓰는 것이다. 이걸로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다니면서 온갖 유용한 술수들을 쓸 수 있었다. 내가 마력을 극한까지 활용해서 공중부양을 하거나 물질을 변환시키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황무지를 뒤지고 다니는 도중이나 뭔가 보관하거나 가끔 내 앞을 가로막는 것들을 죽여 없애는 데는 무한한 유용성을 제공한다. 이 팔찌가 절박하게 필요한 물건이기는 하지만, 여기에만 의존하는 것은 또 아니다.
하모니 하층 창고 구역으로 내려온 그녀는 거품 이는 액체로 가득한 유리 용기와 증기를 내뿜으며 발광하는 액체를 담은 채 빛나는 유리병으로 송곳 하나 꽂을 틈 없이 들어찬 연금 작업대 위로 몸을 기울이고 섰다. 두 눈 위로 화학 실험실에서 쓰는 보안경을 쓴 마지막 포니는 이제 막 흰 룬스톤 조각 위에 비전 마법을 작동시키는 문양을 새겨넣은 참이었다. 순서대로 늘어놓은 월석 조각 맨 뒷줄에 방금 새긴 월석이 추가되었다. 여자는 실험용 집게를 가지고 월석 조각들을 순서대로 집어 김을 뿜고 있던 비커 안에 담갔다가 다음 비커에 담그는 공정을 시작했다. 신비로운 안개가 피어올라 선실 안을 가득 채우자 그녀는 마지막 비커에서 월석 조각을 꺼내 여러 가지 약초를 배합해 그 가루를 뿌린 물통에 담가 씻어냈다. 마지막 포니는 두꺼운 고서를 들여다보며 한없이 낮은 목소리로 몇 마디 주문을 중얼거렸다. 차고 있던 풀 팔찌에서 불빛이 반짝이며 오른쪽 발굽을 감쌌고, 곧 월석 조각도 마찬가지로 반짝이기 시작했다.
몇 분 뒤, 여자는 냉각수에 담가놓은 월석을 꺼냈다. 빛나는 돌조각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며 뜯어보던 여자는 한쪽 눈썹을 치키며 문자가 새겨지고 그에 맞는 마법을 부여받은 돌조각을 정사각형 모양 작은 판에 끼워 넣었다. 그러고는 방금 만든 탄들이 장전되어 있던 탄알집 맨 위에 이 룬 탄환을 끼워 넣었다. 그리고는 이 탄알집을 들어 황동제 소총의 탄알집 삽입구에 끼워 넣었다. 무기를 장전한 여자는 보안경을 벗은 뒤 하모니의 조리개식 출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뒤 수동으로 출입구를 개방했다. 늘 맞이했던 차가운 바람과 똑같은 찬바람이 불어닥쳤다. 여자는 광이 나는 소총을 들어 하늘 너머 눈 덮인 산꼭대기 쪽을 겨냥했다.
여자의 입술이 냉기를 머금고 굽어졌다. “M’wynhrm!” 그녀가 찬 팔찌에서 다시 섬광이 번쩍였다. 방금 제조한 룬스톤 탄환이 붉은 섬광을 내뿜었고, 밝은 진홍색 마나 탄환이 총열을 따라 방출되어 두꺼운 구름을 뚫고 날아갔다. 0.5초쯤 지난 뒤, 축축한 하늘 위로 적어도 0.5제곱킬로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며 시뻘건 불길이 사방으로 퍼졌다. 그 순간만큼은 하늘 위에서 죽치고 앉아 있던 황혼보다도 그 섬광이 더욱 밝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더욱 많은 재와 검댕이 날아와 밝아졌던 자리를 도로 메웠다. 여자는 2층 구조로 설계한 하모니의 곤돌라 안에서 비행선이 흔들리는 대로 함께 흔들리며 가만히 서 있었다. 입술 사이로 한 줄기 휘파람이 새어나왔고, 여자는 부박한 애정을 가득 담아 소총을 몇 번 쓰다듬어 준 뒤 연금 테이블로 돌아갔다.
룬스톤. 오랫동안 잊힌 마법 기술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라 할 수 있는 분야라 할 수 있다. 광물 조각과 몇 마디 마법부여 주문만 있으면 작동한다니 말이다. 마법학의 역사는 천공연금학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는데도 늘 손쉽게 배울 수 없는 분야만 붙들고 늘어지기만 했다.
역사적으로 룬스톤은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더는 사용되지 않았는데, 그 시점에서는 룬스톤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쩔쩔맸었다.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제2시대가 끝나고 난 뒤 나이트메어 문이 추종자들을 결집하고 루나 제국군을 창설하고는 자신의 자매이기도 한 셀레스티아 공주를 향하여 반역의 칼을 들이밀었던 내전의 시대 이후 룬스톤은 더 쓰이지 못했다. 전장으로 행군하던 군마들은 하나같이 룬스톤을 격발하기 위한 격발장치를 부착한 투사형 병기와 룬스톤 탄알집을 차고 있었다. 신비학을 철저히 인명살상용으로만 써먹으려고 혈안이 되어 미쳐 돌아갔던, 아주 오래된 시절의 이야기다. 내전이 끝난 뒤 캔틀롯 학파를 중심으로 발전한 마법학파는 이들에 비하면 사상부터 온건한 축에 들었으니, 제자를 거두어 가르치는 내용도 마땅히 달랐더랬다. 내전이 마무리되고 나서 천 년 동안 찾아온 평화의 시대이자 내가 태어난 시대이기도 한 제3시대는 그런 시대였다.
제3시대가 끝난 뒤 포니 문명은 루나 공주님이 나이트메어 문에서 해방된 이후의 시대인 제4시대를 맞이했어야 했다. 두 공주님께서 본래 그러하기로 정해진 바와 같이, 나란히 서서 해와 달의 운행을 조율하고 감독하는 시대가 되었어야 했다. 제4시대는 일 년을 채 채우지 못하고 끝장나 버렸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재앙 이전에 한 번 겨울 정리 행사가 있었던 것만 흐릿하게 기억나니까. 제4시대의 시작점부터 기록되기 시작한 모든 기록들을 포함해 제4시대가 이루어낸 모든 가치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불에 타 사라지고 말았다.
캔틀롯 왕궁을 뒤지러 갔다가 낡아빠진 책을 밟고 넘어졌더니, 그 고서에 오래 전부터 금기로 여겨지던 룬 마법에 관한 온갖 내용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나는 그 책을 얻은 위 고어 중의 고어인 월어를 공부해 어느 정도 깨우친 후, 발길 닿는 곳마다 널려 있던 월석들을 주워다가 룬 마법을 직접 실습해 보면서 고서에 적혀 있던 내용들을 모두 내 것으로 만들었다.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누군가 미리 예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떤 미친놈이 다시 거대한 전쟁의 물결을 불러일으켜 모든 포니들을 몰살하려 들 시대가 올 것이니, 그 때 만인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만 쓸 것을 당부하는 예언 같은 것 말이다. 나는 긁어모은 서적 중에서도 경전이나 예언서는 전부 뒤져 보았으나 하늘에 걸린 채 내려올 줄 모르는 저 황혼이나, 루나 공주님의 장대한 귀환 이후 얼마 이어지지도 못하고 이 모양으로 쪼그라들어 잿빛으로 물들어 버린 세상이나, 이 모든 것을 초래한 재앙에 관하여 아주 모호한 단서나 언급이라도 적어놓은 경우는 단 한 건도 없었다.
뭐 사실 죽어 버린 세상을 나 스스로 납득하는 데 굳이 예언 같은 걸 갖다 붙일 필요조차 없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몸뚱이든 지식이든 내가 나에게 허락한 것들을 가지고 당장 뭐라도 시작하면 그만이다.
나는 포니 최후의 생존자요 포니란 종족의 끝이니, 내가 곧 제4시대일 것이다.
옥타비아의 음악을 틀어놓은 채, 마지막 포니는 작업대에 앉아 형형색색의 보석들을 닦으며 광을 내고 있었다. 보석은 총 일곱 개였는데, 얼마나 투명한지 멀리 떨어진 보일러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을 받아 반들거리면서 그 투명성을 숨김없이 과시하고 있었다. 보석들은 불빛을 받아 저마다 다른 색을 튕겨냈다. 붉은색, 오렌지색, 황색, 녹색, 청색, 남색, 자색이었다. 그녀가 광을 내놓은 보석들은 그것들을 바라보는 여자의 시선을 그대로 여자에게 돌려주었는데, 보석 위로 비친 여자는 자신이 잘라 버린 갈기를 모아 천을 짠 헝겊을 가지고 정성스레 보석을 문지르고 있었다.
보석 하나하나에서 광채가 날 때까지 문질러 닦은 뒤, 여자는 시선을 돌려 작업대 구석 바로 위에 설치해 놓은 선반에 안전하게 놓아둔 납 상자 쪽으로 향했다. 헝겊을 자리에 놓아둔 뒤 발굽을 뻗어 납 상자를 끌어당겨 가져왔다. 그녀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상자를 조심스레 열었다. 그러자 상자에서 쏟아져 나온 찬란한 붉은 빛이 온 선실 안을 비추었다. 새빨간 화염석이 상자 안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화염석이 밝은 빛을 뿜어내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원래대로라면 이보다도 더 밝은 빛이 나와야 했다. 여자는 나이를 먹어가며 이를 배웠고, 이를 알았으므로 이마를 찌푸렸다.
여자는 한숨지으며 잠시 딴생각을 하던 것들도 정리한 뒤 납 상자를 닫았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뛰쳐나와 작업대를 끼고 재빠르게 돌더니 조종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녀는 조종석에 기어오르며 고글을 내려 쓰고, 자동항법장치의 작동을 해제했다. 덜그럭거리는 증기기관식 대시보드를 눈으로 쓱 훑어본 여자는 본능적으로 현재 위치가 어디쯤이라 판단하고는 레버 몇 개를 잡아당기고 체인 핸들들을 잡아당겼다. 하모니는 날카로운 예각을 그리며 하강하기 시작했고, 선두가 가리키는 방향에는 잿빛 안개 너머로 아른거리는 널찍한 언덕마루가 있었다.
언덕마루 한가운데에는 포니제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구조물이라고 해도 강철을 이용해 주조한 바리케이드들에 불과했다. 그리고 바리케이드가 둘러쌓은 지점 한가운데에 금속으로 만든 굵직한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신호 발생기였다.
무엇 때문인가? 나는 일지를 쓸 때마다 항상 이렇게 자문한다. 전에 쓴 일지로 돌아가 다시 읽어보지 않는 것과 그 이유는 비슷하다. 답은 없는데 물음만 있기 때문이다. 나는 왜 아직 살아 있는가에 대한 질문도 그 사정은 비슷하다.
재앙이 덮쳤을 때 나를 제외한 모든 포니들이 죽었다. 왜 나만 살아남았는가? 왜 이 세상에 살았던 아름다운 포니들은 전부 죽어 없어지고, 추악하고 야비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 소굴에서 기어나와 이 세상에 영겁의 세월 동안 자신들의 악을 전파할 권리를 얻었는가? 나는 왜 무너져 버린 세상에서 하루하루 연명하는 데 이리 고생을 하는가? 왜 이 땅 위에 살았던 자들은 세계사라는 이름의 거대한 역사로 편입되어 모호해질 자신들의 하루하루를 고군분투하며 살았어야 했는가?
나는 어째서 목숨을 죽여 그 가죽과 살점을 취하는가? 나는 어째서 버섯을 토막내어 가져다 스튜를 끓이고, 고기를 먹겠다고 산 동물을 죽이는가? 나는 왜 저 성스러운 불사조를 사냥해 추악한 배신자 놈들, 디리지블 독들에게 팔아치웠는가? 나는 왜 필리델피아의 마천루를 헤집고 다니며 스탈리온그라드의 공동묘지에서 내 것이 아닌 것을 취하는가? 나는 왜 본디 내가 갖고 놀 것이 아닌 마력을 구속하고 이용하려 하며, 저 무자비한 심연 속으로 걸어 들어갈 때마다 살상 무기를 휴대하는가? 나 스스로 독해와 작문을 공부하고, 옥타비아의 음악을 즐기며, 주조기술을 가르쳐 주거나 증기기관을 설치하거나 나 자신의 날개로 나는 법을 알려 줄 포니 하나 없는 가운데에서 나 혼자 비행선을 건조하고, 증기기관을 설치하고, 나의 날개로 날게 된 것은 또 어떤가?
내 존재의 유지를 위하여 계속 존재하고자 하는 노력을 투입하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예전에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패’라고 부를 만한 순간과 마주하게 되는 때가 있었다. 지난 이십 년 동안 나를 에워싸고 있던 흐릿하고 어두운 거울을 보고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을 성공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이와 동일선상에 있는 논의를 전에도 쓴 적 있는데, 셀레스티아 공주님과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을 듯하다. 공주님의 본질은 불멸성이며, 불멸성이 가져온 고독함을 슬퍼할 만한 핑계거리는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셀레스티아 공주님은 그럴 때에도 긍정적인 면을 찾아보려고 하셨으며 이러한 자세는 공주님이 남긴 일지를 구성하는 근간이 되어 있다. 이 세상 유일무이한 태양의 책임자인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도 그래도 그 상황에서 괜찮은 면을 찾아내실 수 있는데, 겨우 이퀘스트리아의 마지막 포니밖에 안 되는 내가 그럴 수 없어서는 안 된다. 나 역시 셀레스티아 공주님처럼 안고 살아갈 희망을 찾아내야 하리라.
누가 알겠나? 나에게도 긍정적인 면이 많이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다만 빛이 있을수록 그림자는 더욱 어두워진다.
하모니는 시뻘겋게 녹슨 강철 바리케이드에 매어둔 굵직한 쇠사슬로 계류되어 있었다. 육중한 철제 기계장치를 자리로 밀고 가던 여자의 박박 민 머리 위로 비행선이 조용히 흔들렸다. 여자는 바리케이드 하나운데 미리 설치해 둔 강철 지지대 위로 기계장치를 단단히 고정시켰다. 그녀는 신성한 노동의 시간을 잠시도 낭비하지 않고 가방을 열어 일곱 개의 보석을 꺼냈다. 여자가 강철 격자를 덮고 있던 두꺼운 천을 잡아당겨 치우자 그 아래 있던 일곱 개의 커다란 탐조등 같은 조명들이 잿빛 공기를 맞았다. 그녀는 하나하나 탐조등 렌즈를 열고는 그 안에 보석을 하나씩, 적색에서 녹색, 녹색에서 자색 순으로 집어넣었다. 여자는 격자 아래쪽을 열고 그 안에 있던 황동 칸에 빛을 내고 있던 붉은 화염석을 집어넣은 뒤 쾅 소리를 내며 단단히 장치를 닫았다. 장치 외부에는 룬스톤을 탑재할 공간이 있었다. 그녀는 희미한 빛무리를 거느린 월석 하나를 꺼내 그 안에 집어넣었다.
여자는 격자 장치 주위를 돌며 빛줄기가 정확히 하늘을 겨냥하도록 회전시켰다. 밸브와 장치 조정판을 쓰기 쉽도록 장치를 몇 번 조심스레 기울이고 나자 그녀가 가장 선호하는 각도가 완성되었다. 여자는 빛나는 룬 문자가 새겨진 장치를 향하여 고개를 숙이고, 팔찌를 낀 발을 들어올려 주문을 외울 준비를 했다. 여자는 땅 위로 조용히 떨어지는 눈발이 늘 해 오던 과업을 방해할지도 모른다는 깊은 고민에 빠져 잠시 머뭇거렸다. 여자는 고개를 흔들어 떨쳐 버리고, 시력 보호를 위해 고글을 내려 쓴 뒤 힘있게 한 마디 주문을 외웠다. “Y’hnyrr.”
룬스톤의 빛이 서서히 흐려지더니, 귀기 서린 불꽃이 격자 장치 안에서부터 뿜어져 나왔다. 페가수스는 녹슨 금속 레버에 발굽을 가져가 힘차게 잡아당겼다. 불빛이 깜박이더니, 더욱 흔들리다가 사라졌다. 여자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한없이 레버를 잡아당기고, 다시 잡아당기고, 또 잡아당겼다. 한 번 잡아당길 때마다 욕설은 그 강도를 더해갔다. 그녀가 레버를 또다시 잡아당기자 화염석이 다시 불꽃을 뿜어내며 장치 안에 설치한 프리즘을 향하여 빛줄기를 쏘아냈다. 일곱 개의 보석이 빛을 튀기며 반들거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외마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일곱 빛깔 무지개가 하늘 위로 치솟으며 끈적한 잿빛 하늘을 갈랐다. 무지개는 그 찬연한 빛으로 구름을 불태우고, 이퀘스트리아 하늘을 뒤덮은 황혼을 꿰뚫었다. 이것은 신호였다. 만인을 위한 신호이고, 그녀 자신을 위한 신호였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인공적으로 뽑아낸 단단한 빛줄기를 올려다보았다. 전에 신호기를 돌렸을 때보다 흐려져 있었다. 화염석의 빛이 흐려졌으므로, 보다 강력한 마력이 부여된 물건으로 바꾸어야 했다. 그렇기는 해도, 조금 덜 밝든지 그냥 밝든지와 무관하게 이 무지개는 기나긴 여정을 감수할 가치가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 들인 연료와, 이 모든 것을 조달하는 데 들인 은편과, 홀로 회의에 잠긴 채 견딘 외로운 밤들을 감수할 가치가 충분했다. 단순히 보기만 하는 것만으로도 그러했다.
마지막 포니는 깊은 한숨을 토해내며 자신이 빚어낸 무지개의 장엄하고도 빛나는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내 두 눈을 감고 차가운 황무지의 바람을 맞으며 그 시렵도록 아름다운 모습을 음미했다.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꿈을 꾼 적 있다. 문필가들이 꿈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두고 문장을 쌓아올려 철학의 구조물을 세운 책을 읽은 적 있었다. 거기 따르면, 꿈이란 그저 흑과 백의 이분법에 불과했다. 아마 다른 생에서라면 맞는 말일지도 모를 일이다. 나와는 관련 없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내 삶 자체가 흑백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는 꿈을 꿀 때마다 과거로 돌아간다. 그 시절은 단순히 색과 빛만 더 있었던 때는 아니었다. 따뜻한 세상에 놀라운 것들과 재미있는 것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이제는 영영 다시 볼 수 없다.
무지개가 있었던 시절, 그러니까 이 세상의 마법이 내가 벗겨먹는 대상으로 추락하기 전, 굉장히 일반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번영을 계속하던 세상에는 다음 날도 오늘과 같으리라는 일종의 약속이 있었고, 그 약속은 항상 사실이었다. 무지개는 희망의 상징이었고, 누구에게나 즐겁고 행복한 내일이 오리라는 즐거운 기대였다. 무지개가 희망의 상징이 아니라면 포니들이 무지개로 꿈을 꾸는 일은 없지 않았겠나?
재와 황혼만이 남아 있는 이 세상에 무지개는 존재하지 않는다. 희망 따위도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나이를 먹으면서 이 신호기를 만들어낼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무지개를 내가 만들어낼 생각을 한 것이다. 어쩌면 무지개가 가야 할 자리는 오직 꿈 속 세계 한 곳뿐이라는 내 생각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 흉내를 낼 수 있다면, 꿈의 정수를 병에 담아 이 세상으로 가져올 수만 있다면 이퀘스트리아에 아직 살아 있는 모든 자들을 위하여 빛나는 상징을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말이다. 그리고 만일 나 말고도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포니가 하나라도 더 있다면, 매일 내가 꾸는 꿈과 같은 꿈을 꾸고 있을 포니가 살아남아 있다면 잿빛만이 휘몰아치는 이 악몽 같은 세상에 그 정반대인 그림자를 띄우고 말겠다는 내 가엾은 쪽잠에도 의의를 둘 수 있을 것이다. 다리 네 개 달린 고깃덩이 하나의 목숨을 더 부지해 보겠다고 발악하는 것보다도 더 소중한 가치를 얻게 될 것이다. 마지막 포니가 아니게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이것이 내 매일의 일과를 반복하는 이유이다. 이것이 내가 단순히 존재하는 것 이상으로 존재하기 위해 하는 과업이다. 내 존재는 이 신호를 띄우기 위한 것, 죽음만이 가득한 저 하늘 위로 찬란한 빛을 쏘아 올리기 위한 것, 이퀘스트리아의 다른 생존자를 손짓해 불러 나를 찾아오라고 말하기 위한 것이다. 세상의 무덤 너머에서라도, 제1시대와 제2시대, 제3시대에 있어 왔던 수없는 기적들이 죽음을 물리쳐 온 것처럼 그러한 기적이 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만일,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누군가, 누구라도 나를 찾아와 합류한다면 그것만으로 우리는 제4시대를 완성할 수 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우리는...
몇 시간이 지난 뒤, 하늘 위로 외로이 뻗어 있던 무지개가 서서히 흐릿해지다가 깜박이더니, 한 줄기 창백한 빛줄기로 탈색되었다. 마지막 포니는 강철 바리케이드를 쌓아올린 원 바로 옆에 서 있던 6미터쯤 되는 탑 꼭대기에 갖다 놓은 의자 위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신호기는 바리케이드 한가운데에서 빛을 계속 뿜어내고 있었다. 머리 위로 떠 있던 하모니의 황동색 선체가 사라져 가는 무지개의 반그림자를 받아 반들거렸다. 잔잔한 대기 사이로 눈이 흩날리며 만물을 섬뜩한 침묵 속으로 끌어들였다.
페가수스는 탑 꼭대기 가장자리에 계속 앉아 있었다. 두 발굽이 탑 모서리마다 둘러쳐진 난간을 툭툭 쳤다. 여자의 갈색 몸은 숨이 천천히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부풀었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그녀의 머리는 가슴 쪽을 향하여 굽어 있었고, 고글 안으로 숨결이 끊임없이 들어차 물방울이 서려 있었다. 옆에 놔둔 황동 소총의 총열에도 이슬이 맺혀 있었다. 총에 물려둔 탄알집에서는 끊임없이 불빛이 반짝였다.
기나긴 침묵이 이어지던 끝에, 공기 중에 무엇인가 울려대는 소리가 가득 찼다. 아주 잠깐 동안 다시 조용하더니, 다시 새된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는 거의 엉덩방아를 찧다시피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깜짝 놀라 일어난 여자는 고글에 서린 김과 물기를 닦아내고 난간에 바짝 붙어 잿빛 고원 저편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이 소리는 이 돌투성이 언덕에 미리 설치해 둔 녹슨 말뚝에 매어둔 줄이 튕기며 진동하는 소리였다. 오래 전, 여자는 신호기를 설치한 자리에 바리케이드부터 시작해 나선 모양으로 짜인 복잡한 거미줄과도 같이 사방에 신호줄들을 박아놓았었다. 이 줄에는 그녀가 직접 만든 방울을 매달아 놓았고, 각 방울은 3미터 간격으로 배치되어 누군가 사족보행을 하는 자이기만 하면 누가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여자에게 바로 인지시켜 줄 수 있도록 설치되었다. 최초로 울린 신호줄 소리 뒤로 똑같은 소리 여러 개가 뒤따랐다. 그리하여 여자는 현재 위치로 전파되는 이 불안한 불협화음 한가운데 갇혔다.
맥박이 미친 듯이 내달렸다. 그녀는 떨리는 발굽으로 고글을 이마 위로 올리고 가방에서 소형 망원경을 꺼내 그 너머의 모습을 신중하게 지켜보았다. 망원경 너머로 안개 낀 돌투성의 고원의 지평선이 비쳤다. 그 위로 무언가의 형상이 서서히 커져 갈 때마다 여자의 심장 박동도 덩달아 빨라졌다. 그리고 마침내 수많은 그림자가 비쳤다. 여자는 분명히 보았다.
그곳에는 어떤 형상들이 있었다. 그 형상을 말하자면 형형색색의 갈기도 발굽도 없고 그 대신 가죽질의 피부와 날카로운 발톱이 달렸다. 그 형상들이 적어도 열 개가 모여 여자를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한 줄기 거대한 환호가 울리며 백골처럼 창백하고 추레한 모습을 한 괴물들이 다가올 살육의 기쁨에 취해 여자가 올라가 있던 탑을 향하여 미친 듯 질주하는 마당이었다.
여자는 욕설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소총을 낚아채다시피하며 탑을 박차고 뛰어올라 하모니를 묶어놓은 사슬을 붙잡고 민첩하게 타고 내려왔다. 거의 구르다시피 내려온 여자는 비행선을 묶어놓은 사슬들을 세차게 잡아당겨 비행선을 풀었다. 그 다음 격자형 장치 쪽으로 급히 달려가 보석 일곱 개와 힘을 거의 잃은 화염석을 챙겼다. 그녀가 딛고 선 고원의 땅덩이가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피에 미쳐 날뛰는 약탈자들의 사나운 발들이 녹슨 강철 바리케이드를 붙잡고 흔들어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재빨리 그 무거운 강철 격자장치를 등 위에 짊어진 뒤 소총을 입으로 옮겨 악물었다. 그리고는 날개를 펴고 눈 섞인 공기와 무자비한 중력을 박차고 오르며 사납게 펄럭였다. 그녀는 어찌어찌 하늘 위로 기계장치와 자신의 몸을 띄워올릴 수 있었다. 페가수스가 그대로 더 높이 날아오르는 순간, 포효하며 군침을 흘리는 짐승 몇 마리가 첫 번째 바리케이드를 뛰어넘어 여자를 향하여 달려들었다.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송곳니만 가득한 아가리가 바로 몇 센티미터 차이로 여자가 있었던 자리를 물어뜯었고, 여자는 다급하게 고단한 몸을 하늘 위로 띄워올렸다. 여자와 비행선까지는 이제 몇 미터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하모니의 곤돌라 하층 출입구에 겨우 올라왔을 때, 여자는 그 자리에서 퍼지다시피 엎어졌다.
여자는 거기 앉아 소총을 장전하고 조심스레 그 짐승들을 겨누었다. 그것들은 울부짖기도 하고, 여자를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음흉하게 보기도 하고, 침을 뱉기도 했다. 잿빛 황혼을 받아 번들거리는 그것들의 두 눈은 흰자 없이 새까맸다. 놈들은 돌만 가득한 고원에 서서 솜씨 좋은 사냥감이 하늘 위 먼 곳까지 날아가는 걸 하릴없이 지켜보다가, 가죽질의 거대한 몸뚱이를 돌려 우레 같은 소리로 울어대더니, 이퀘스트리아의 쓰레기장 너머를 향해 안개 속으로 사라져 갔다. 여자는 비행선 출입구에 기대어 한참을 헐떡이다가, 눈을 감았다. 실망감이 역력한 얼굴에 절로 떠오르는 분노를 여자는 애써 억누르고 있었다.
트롤. 제기랄, 끔찍하게도 혐오하는 족속이다. 놈들은 포니라는 종족이 대지 위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이 피도 눈물도 없는 짐승새끼들은 예전 같으면 다리 밑이나 축축한 동굴 천장에 들러붙어 있다가 지나가던 희생자를 끌고 다시 슬금슬금 숨어 들어가 잡아먹었는데, 이제 더는 숨을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황무지에서 살아온 세월 동안 나는 셀 수도 없을 만큼 트롤 놈들과 맞닥뜨렸다. 이것들은 몇 마일 밖에서도 냄새를 맡고 쫓아왔다. 그러므로, 나는 밖으로 노출되는 부위 중 냄새가 가장 진한 곳인 갈기와 꼬리를 박박 밀었다. 놈들은 나무 타는 불빛에 민감하다. 그래서 내가 쓰는 모든 등불은 가스등이다. 트롤은 치타와도 같은 속도로 빠르게 달릴 수 있다. 이퀘스트리아 평야지대로 나갈 일이 있으면 절대 보호복을 더 껴입지 않는 이유가 이거다. 몸이 가벼워야 최대한 빨리 날아서 달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트롤이 죽도록 싫다. 차라리 대절멸이 땅 속 깊은 곳까지 미쳐서 이 새끼들을 싸그리 잡아 죽였어야 했다고 생각할 지경이다. 그 이유, 그 이유는 가장 최근에 밝혔던 세 번의 신호를 보고 나를 찾아온 게 그 새끼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순진하게도 신호를 보고 찾아오는 자들이 포니 생존자뿐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세 번의 신호를 보고 나를 찾아온 자들은 항상 트롤이었고 나는 그때마다 한없이 절망했었다.
하긴 뭘 더 기대하겠는가. 세상에 남은 것들이라고는 개새끼에 고블린, 울버린에 하피 같은 새끼들뿐이고, 이것들 하나하나가 나의 죽음을 바라고 있다. 마주치는 것들마다 지상에 내려꽂힌 재앙을 두고 포니 문명의 탓으로 돌린다. 대절멸 때문에 그 문명 전부가 으깨지고 부서져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게 포니들인 건 그것들의 관심사항이 아니다. 대부분은 나를 이국적인 맛이 나는 고급 식재료로 보거나, 잘 쳐 줘 봐야 미래에 건설될 박물관의 박제 표본 후보 정도로 여긴다. 그나마 내게 우호적이라고 볼 수 있는 것들은 내 능력 때문에 나를 필요로 하는 무자비한 용병단이나, 더러운 피로 얼룩진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은 은 조각 하나마저도 아까워 미치는 물주들밖에 없다.
무지개를 끌어내릴 때면 나는 내 신념에 대하여 깊은 의문을 갖는다. 내가 만들어낸 무지개가 죽어 사라지고 나면 다시 내 기괴한 실체를 마주하게 된다. 내가 보고 듣는 것으로 희망을 가질 수 없고 오직 나 스스로 희망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정말 희망이 발붙일 자리가 있기는 한가? 그것은 자신을 스스로 만든 무한회귀의 감옥이며, 그 이름은 ‘광증’이다. 군침을 질질 흘리며 어슬렁거리는 트롤들을 예로 들어 보자. 나를 갈갈이 찢어발기고 싶어 환장한 저 어둠의 자식들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다. 미래영겁 저 하늘에 주저앉아 있을 황혼과 그 아래 버려진 황무지의 잔학함과 야만성을 마음 깊이 받아들일 수 있는 괴물만이 이 세상에서 살아갈 희망을 찾을 수 있다. 그러한 희망은 보다 오래 갈 것이며, 보다 마음 깊이 남는다. 구름 낀 하늘 위로 쏘아올린 가짜 무지개와는 정반대인 것이다. 그것은 추악한 욕망으로 가득 차 발톱으로 대지를 긁어대고 적의 피를 흠뻑 뒤집어쓰는 괴물의 희망이다. 나 자신이 살아온 시대를 포함해서 모든 문명이 사라진 지금의 현실이란 그러하다.
나는 평화와 관용과 우정 같은 관념의 품에서 자라며 기쁘게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또 오염되었다. 한때는 이런 가치들이 정상적으로 작동했지만, 살아남기 위해 다른 목숨을 죽여야 하는 지금 같은 시대에선 자연히 무시되는 게 현실이다. 언젠가, 알 수 없는 어느 날의 일지에서 나는 내가 누구이며 무엇인지에 대한 당연하고 절박한 현실을 받아들일지도 모르겠다. 모두들 죽어 없어진 세상에서 우정이나 희망을 말할 수는 없으리라는 것을 말이다.
‘모두들’이라니, 내 정신이 어떻게 된 모양이다. 지금까지 이천 번도 더 일기를 적으면서 이런 등신같은 표현을 쓰고 있었다. 앞으로는 이런 덜떨어진 표현을 써서는 안 되겠다. 지금부터는 좀 그렇기는 해도 ‘전부’라고 쓰는 편이 좋겠다. 거대한 묘지가 된 이퀘스트리아에 남은 거라고는 오직 시체일 뿐이며 시체는 인격체가 아니다. 저 끝없는 심연 위로 무지개를 띄우는 짓거리를 할 수 있는 동안이지만, 나는 그 무덤지기다.
끝.
20191223(Mon) 재번역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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