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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E/백그라운드 포니

Chapter 04. 고독의 교향곡Symphony of Solitude[개정]

by Mergo 2019. 8. 4.

일기에게,

 

혼자가 됨은 어떤 뜻일까? 그러니까, 완전한 고독 말이야. 진정한 고독이 무엇인지 나는 과연 이해하고 있을까? 덜덜 떨며 잠들었다가, 눈물에 젖어 깨어나는 것만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으로 한숨짓던 시절은 이제 지나간 지 오래야. 지금 내 모습이 그 때보다는 나이도 좀 더 먹고, 더 의연하고 강인한, 똑똑한 사람의 모습이 아닐까. 한 사람이 수많은 자질을 광배光背처럼 거느린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고독을 극복할 수는 없어.

 

나는...... 예나 지금이나, 고독한 사람이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그렇더라도, 그 사실에 집착하고 싶지는 않아. 집착하는 데 그럴듯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잖아? 그러고 보면, 뭐 이유가 있어서 하는 게 세상에 있기나 할까?

 

이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어야만 해. 어떤 이유가 있기는 있다고 믿으니까, 내가 갇힌 감옥의 두터운 벽에 끊임없이 달려들어 부딪쳐가는 것이고, 계속 걸어가는 거지. 내가 계속 앞에 놓인 길을 따라가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어. 내가 기억될 수 있도록. 저 멋진 사람들의 삶에 내 확실한 족적을 남길 수 있도록. 내가 알았던 사람들을 향해 똑바로 걸어가 다가가면, 저들이 한눈에 나를 알아볼 수 있도록. 그리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앞으로도 계속 만날 수 있도록.

 

이것들을 끄적이는 동안에도, 이런 걸 희망사항이랍시고 적는 자는 세상에 나 하나뿐이라는 사실이 머릿속에 떠올라서... 앞으로도 그 꿈을 살아내는 일 없이 평생 꿈만 꾸게 될 고독에서 벗어나지 못하지 않을까 생각했어.

 


 

"그리고 얼마쯤 있다가......" 핑키 파이가 슈가큐브코너 한복판에 놓인 테이블에 초콜릿 컵케이크를 가득 채운 상자를 느긋하게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희열로 가득한 푸른 눈동자가 두 친구를 향해 번득였다. 그녀는 계속 말했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페가수스들 말을 빌면, 이번 주말 포니빌 날씨가 굉장히 좋을 거라고 하더군요. 그러니 파이 양, 혹시 토요일 오후에 선약이 있으신지?' 라고 했엉."

 

트와일라잇 스파클과 래리티가 무표정한 얼굴로 핑키 파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서, 어떻게 했니?" 래리티가 힘주어 물었어.

 

"'토요일에는 늘 선약이 있어영. 사르사 음료 열 병을 들이키고 기도를 올리죠!' 라고 했엉! 히히히힝!" 핑키 파이가 깔깔 웃더니 헥헥거리며 두 앞다리를 가슴으로 끌어당겨 팔짱을 끼고,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러니까 막 웃더니 이러는 거양. '요맘때쯤 되면 메어스트롬 호숫가가 참 볼 만하답니다.' 풉!" 핑키 파이가 눈을 굴리며 말했다. "그게 사르사파릴라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지 원!"

 

"핑키......" 트와일라잇이 숨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래리티는 두 푸른 눈을 반짝이면서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물었다. "그거, 그 남자가 데이트 신청한 거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

 

"어라." 핑키 파이는 놀란 눈치였다. 그러고는 알 수 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면서 되물었다. "진짜? 왜 그랬대?"

 

"내 생각엔, 핑키 너한테 반한 모양이다." 트와일라잇이 웃으며 찻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가며 말했다. "적어도 그 사람이 하려던 말이 뭔지 눈치채기는 했지?"

 

"음......" 핑키 파이가 턱을 긁적이며 푸른 눈동자로 천장만 막 훑다가 대답했다. "그랬는지 안 그랬는지도 기억이 안 나넹. 그러고 나선 잽싸게 튀어서 말이징."

 

"어머?" 래리티가 고개를 파묻으며 물었다. "뭐 때문에?"

 

"나도 몰랑. 그게, 그 남자 얼굴에 레몬 커스터드 파이를 던져 버리고 난 다음이긴 했지롱."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입에 머금고 있던 차를 뿜었다. 그러고는 켁켁대며 테이블 가장자리에 몸을 기댔다.

 

래리티는 졸도 직전이었다. "너...... 그러니까...... 그 남자한테...... 뭘 했다고?"

 

"피, 핑키?" 트와일라잇이 충격에 질려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뭐에 씌였길래 그 가엾은 사람 얼굴에 파이를 던질 생각을 한 거야?"

 

"그 사람은 그냥 서로 말이나 터 보려고 했던 건데!" 래리티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이었니?"

 

"그냥 걔 부탁을 들어 준 것뿐이야!" 핑키 파이가 자기변론을 하듯 외쳤다.

 

"그런 게 어떻게 부탁이 될 수가 있니?!"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소리쳤다. "너랑 데이트를 하고 싶었을 뿐이란 말이야!"

 

"흐음......" 핑키가 입술을 깨물더니,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아마 그 때 대시가 해 줬던 얘기를 떠올렸던 것 같아. '사내놈들이란 딱 하나 보고 여자를 만나지. 파이 생각밖에 없거든.' 했었거덩.*1 가엾게도, 얼마나 소심한지 말을 제대로 하질 못하더라궁. 그래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야겠다 생각했지!"

 

트와일라잇과 래리티는 십 초 가까이 벙쪄서 핑키 파이만 빤히 쳐다보다가 깔깔대며 웃기 시작했다. 저마다 웃는 소리가 산산이 부서져서 끊임없는 웃음소리로 뒤바뀌었다. 순수한 즐거움에서 비롯된 웃음의 카덴스Cadence가 슈가큐브코너를 가득 메우며 메아리졌다.

 

핑키 파이도 웃음소리를 보탰다. 웃는 얼굴에 분명히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히히히힝... 으음... 아, 아직도 잘 모르겠엉! 암만해도 파이 대신 케이크를 던졌어야 할 것 같징?"

 

"하하하하...... 오, 핑키 파이......" 트와일라잇 스파클은 숨쉬기조차 버거울 정도로 웃어대며 말했다.

 

래리티가 몸을 기울여 빙긋 웃는 얼굴로 핑키 파이의 얼굴에 뺨을 비벼주고 말했다. "자긴 앞으로도 그대로 있어 줘. 언젠가는 기꺼이 어, 얼굴에 파, 파이를 맞아 줄 멋진 남...... 멋진 남자—후후후후—하하하하하!"

 

"히히히......"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보라색 염동력을 뽑아내 컵케이크 상자를 들어올렸다. "자, 그럼 갈까. 나머지 셋이 우리 마음대로 오늘 소풍 파토낸 줄 알기 전에 공원까지 가야지."

 

"슈트루델 던지는 건 어땡?" 핑키 파이가 즐거워하며 두 친구의 뒤를 따라 방방 뛰며 슈가큐브코너의 문을 나서며 말했다. "파이보다는 좀 덜 더럽혀지니까 말이징! 껍질이 좀 단단하긴 하지만. 아! 그래! 글레이즈를 안 발랐을 수도 있었는데! 그랬으면 던질 때 좀 더 공기역학적으로 던질 수 있었을 텐데!"*2

 

나머지 둘이 명랑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셋이 내가 앉아 있던 테이블을 가볍게 스치며 지나갔고, 그 뒤로 높은 음조의 합창 같은 소리가 일어서서 귓가에 울렸다. 앉은 자리에서 고개를 돌려 그쪽을 돌아보았다. 갑작스레 퀴퀴한 먼지 냄새가 들숨에 섞여 코 속을 적셨다. 가슴팍에 오래된 역사책 두 권을 안고 있었던 것을 그제야 알았다. 한숨지으며 품에 안고 있던 도서관 장서 두 권을 놓아주고, 내 앞 테이블에 내려 펼쳐 열었다. 슈가큐브코너는 문득 전보다 퇴색한 것처럼 보였다. 온기도 좀 줄어든 듯했다. 귓가를 타고 흘러가던 트와일라잇의 낭랑한 목소리가 마지막 흔적을 남기고 희미해졌을 때, 등줄기를 타고 한 줄기 한기가 춤추며 내려갔다.

 

나는 몸을 떨면서도 새까만 소매를 발굽 위까지 잡아당겨 덮고, 잊히고 찾는 사람 없는 데서 마찬가지 신세인 텍스트의 바다 속으로 자맥질했다.

 


 

저주가 시작된 날부터 거의 열세 달이 지났다. 세월은 내게 평정심을 가르쳤다. 최근의 나날들은 보다 차분하고, 목표의식과 각오로 충만해 있다. 그것으로 숨통이 좀 트였냐면, 그렇지 않다.

 

머릿속 벽에 부딪치며 크게 메아리지는 음악소리가 문득 들려오지 않는 밤들도 있었다. 그 빈자리에 꿈이 들어차지만 않았어도 지극히 복된 밤을 보낼 수 있었을 터이다. 세상 가장 고통스러운 감옥이 다름아닌 꿈이 아닌가. 솟아날 구멍 하나조차 남겨두지 않고, 대상에게 모든 효력을 집중하는 저주가 세상에 있을 리 없으니.

 

꿈 속에서 나는 아무도 없이 텅 빈 포니빌을 혼자 걸어 건너는 내 모습을 본다. 그 누구도 내 곁에 있지 않다. 세상에 오직 내 모습과 내 소리만이 있는 것이다. 땅에 부딪치는 모든 발걸음이 내 걸음이고, 적힌 글자 중 무엇 하나 내가 적지 않은 것이 없다. 모든 숨소리와 모든 노랫소리와 모든 울음소리가, 오직 내 목에서만 솟아나는 것이다.

 

악몽이나 비슷한 종류의 꿈처럼 보이기는 하나, 결국 견뎌야 하는 매일을 억지로 버티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 꿈 속에 떨어지는 것이 나았던 날들이 있었다. 꿈 속에서 나는 삶의 온기와 행복으로 가득한 사람들의 얼굴보다는 훨씬 나은, 적막이라는 감옥으로 이감되었다.

 

트와일라잇 스파클의 웃음이 눈에 뒤채이고 그 목소리가 귓가에 퍼질 때마다, 나는 그녀와의 옛 관계를 떠올린다. 트와일라잇과 나, 문댄서가 아직 어렸을 때 우리는 캔틀롯 상층 공원으로 몰려가 국사 속 굵직한 사건들을 따라하며 놀았었다. 문댄서는 루나 공주님 역할을 좋아했고, 트와일라잇은 늘 셀레스티아 공주님 역할을 골랐었다. 내 역할은 턱수염 스타스월로 고정되었다. 우리가 어울릴 때마다 그 불퉁한 사내 역할을 맡아 하는 걸 가지고 둘이 장난을 치기도 했다. 그것이 무익하지는 않았다. 셀레스티아 공주님 역할만큼 트와일라잇이 좋아하는 게 또 없었으니까. 그 때 트와일라잇이 웃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세상이 한결 더 밝고 살 만한 곳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고, 절대 그 웃음에 어깃장을 놓고 싶지 않아졌었다.

 

몇 년 후, 트와일라잇이 셀레스티아 공주님 문하로 편입되었고 그렇게 문댄서와 내 곁을 떠나갔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은 두 번 다시 채울 수 없는 무엇인가를 내 인생에서 영영 상실하고 만 순간이었다. 그 때 우리는 모두 어린 유니콘이었고, 다른 또래들과 마찬가지로 역사와 마법을 비롯해 캔틀롯 양식의 예술을 배우는 데 열심이었었다. 문댄서는 교사의 꿈을 이루고 싶다며 필리델피아 대학으로 진학하며 그리로 이사를 갔다. 나는 왕립 유니콘 영재학교에서 음악과 작곡을 공부했다. 우리는 모두 살아 있는 지식의 보고가 되기 위해 정진했고, 그 정진의 힘으로 각자가 선택한 길 너머에 있을 미래를 향하여 나아갔다. 공부와 경력관리가 우리 삶의 중심을 차지했고, 그렇게 우리 사이도 조금씩 멀어져 갔다.

 

우리는 단 한 번도 그 사실에 연연해 본 적이 없었다. 우리 사이는 영원할 것이고, 그 내용은 정순할 것이었으니까. 간혹 트와일라잇과 문댄서, 나 셋이 만나 각자의 진로와 성취에 관하여 대화한 날들도 있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골똘히 곱씹어 보기도 했다. 먼 옛날 우리가 어땠는지, 그 기억을 간직하고 있어야 지금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 있는지를 납득할 수 있었을 테니까. 우리 사이는 우리 셋이 무엇으로 묶여 있는지만 기억한다면 영원토록 이어질 수 있는 우정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그 기억을 온전히 갖고 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 문댄서와 트와일라잇은 그걸 잃어버렸지만, 잃어버린 것이 있다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그 둘이 굳이 그걸 알 필요가 있을까? 내가 그 둘을 기억하는 한, 그 둘이 각각 루나 공주님과 셀레스티아 공주님 역할을 하면서 웃고 떠들던 시절을 기억하는 한 잃어버린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진실로, 이렇게 믿는다.

 

그렇다면 매일 트와일라잇과 마주칠 때마다 잘려나간 사지가 내게 말을 걸어오는 듯한 감각과, 내 마음에서 뜯겨나간 한 조각이 원래 자리로 되돌려 달라고 비명을 질러대지만 그 자리에는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따뜻한 무언가의 퇴색한 유령만이 남아 있는 감각이 느껴지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나는 트와일라잇이 포니빌로 온 이래 그토록 많은 친구를 사귀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감당할 수 없는 행복감과 환희를 느꼈다. 트와일라잇을 걱정하던 날들도 있었다. 문댄서와 내가 각자의 진로를 개척하며 각자 큰 서원을 세우고 나아간 것도 사실이지만,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자기 진로를 일종의 극단적 강박관념에 입각해 바라보고 있던 것도 사실이었다. 셋이 한번 보자고 날짜를 잡아도 한두 번 잡은 게 아니지만, 문댄서와 나만 덜렁 와 있는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우리는 트와일라잇을 걱정했다. 트와일라잇이 그리웠고, 이 녀석이 쟁취하려던 미래가 근심스러웠다. 어릴 때부터 트와일라잇은 셀레스티아 공주님에게 찰싹 달라붙어 지냈는데, 불멸하는 알리콘 공주와 그렇게 가까운 관계를 맺은 결과를 트와일라잇이 과연 대비하고 있는가, 문댄서와 나는 확신하지 못했다.

 

그래서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포니빌로 이사를 간다는 말에 나는 몹시 행복했다. 그 녀석과 친교를 다질 만한 사람이 많이 있을 테니까. 자기의 정신을 단련해 왔던 힘과 같은 활력을 느낄 기회를, 영원의 고독이 그 근본에서부터 산산이 짓밟아 으깨 버릴 운명에서 구해낸 사람들이 다름아닌 그들이 아닌가.

 

그렇더라도, 트와일라잇과 그 친구들을 볼 때마다 상황이 조금만 달랐다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나는 하계 태양절 축제 기간 동안 트와일라잇을 만나러 포니빌에 왔다. 트와일라잇에게 꽃핀 기회가 내게도 자기를 허락했다면, 어땠을까. 트와일라잇의 친구들이 내 친구들이 되고, 같은 모임에 나가고 같은 소풍을 떠나 함께 겪은 이야기를 추억하며 한바탕 웃고,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 웃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인생은 지나간 하루하루의 궤적이 모여 그려지는 것이지만, 그 맛은 하루하루의 꿈이 모여 내는 것을 깨달을 정도로는 연륜이 쌓였다. 때로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합창 사이에 끼지 못하고 그저 듣고만 있어야 할 때도 있다. 오래 전 일이지만, 여전히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무대 위에서 활짝 웃으며 빛날 수 있도록 주연 자리를 내주고 나는 한쪽 구석의 턱수염 스타스월로 남아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객석에서 앙코르 소리가 쏟아지는, 훌륭한 연극에서. 나를 위한 나 혼자만의 박수소리를 들으며 여기 얼마나 더 주저앉아 있어야 할런지, 나는 알지 못한다.

 


 

며칠 전, 나는 통나무집 문을 비틀거리며 열고 들어가 섰다. 여느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하루였다. 직접 만든 악기들이 벽면마다 빽빽하게 내걸려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들려줄 일은 없는 것들이었다. 벽난로가 아가리를 벌리고 나 혼자만의 생각과 어둠만이 곁을 지키는 밤을 비출 땔감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 생활이란 것은 한없이 지루한 것이다. 나 혼자만을 위한 난롯가로 향하며, 얼마 안 되는 여유 시간을 어떻게 쓸지 구상해둔 것을 다시 떠올렸다. 트와일라잇네 도서관에서 빌려온 수많은 고서 중 하나를 골라잡아 읽어볼 생각이었다. 나이트메어 문 뒤에 숨겨진 갖가지 비밀로 인도해 줄 실마리가, 아주 작은 정보의 편린의 형태로나마 그 안에 있을 수 있었으므로 샅샅이 뒤질 필요가 있었다. 마지막엔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거나, 뭘 해볼 수도 없을 만큼 작은 사실 하나만 겨우 건질 것이며 남은 시간은 밖으로 나가 햇빛을 쬐며 집 주변에 늘어선 아름다운 산하를 들여다보면서 주저앉아 보내게 될 것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달빛이 왈츠를 추며 다가올 때 그 언저리에서부터 일어서는 소름이 내 뼛속까지 침범하게 되면, 집으로 들어가 침대 위 담요를 뒤집어쓰고 벽난로만 하염없이 들여다보며 입을 헤벌린 채, 나를 기다리는 밤의 심연 속으로 들어갈 나를 위한 한 쌍의 귀와, 흐르는 눈물을 달래줄 미소와 흐느끼는 울음을 가라앉힐 웃음소리가 있는 세상을 생각하려 용을 쓰게 될 것이다.

 

애초에 이걸 대체 왜 적은 거지? 대충 열 번 적을 때 한 번 꼴로 나는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 그 이전의 모든 질문과 마찬가지로, 무의미한 허깨비에 불과한 물음이다. 지금은 아무 곳이나 발 닿는 대로 돌아다니다가 캐러셀 부티크에서 대략 이십 야드쯤 떨어진 벤치 하나에 올라앉아 있다. 날씨 좋다. 구름 몇 점 없이 하늘이 청명하다. 마흔아홉 번 내 몸을 타고 기어올랐던 다람쥐가 쉰 번째로 다시 몸을 타고 올라오고 있다. 네 번 연속으로 먹이를 줬다는 뜻인가, 잘 모르겠다. 그 동안 하늘을 떠가는 캔디 메인과 세 번 마주쳤다. 나를 볼 때마다 발굽을 흔들며 똑같은 인사를 건넸다. 후브즈 부인이 어제와 그 어제, 그 전날들에도 건넸던 것과 똑같은 미소를 건네며 딩키를 데리고 벤치를 지나쳐 갔다. 이십 분쯤 지나, 잠깐의 변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뒷발굽으로 흙길 바닥을 긁어 내 이름을 적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 행인들 중 몇이나 내 세 글자 이름을 알아보고 멈춰설지 세 보기로 했다. 다시 이십 분이 지난 뒤, 카운트는 0에 머물러 있었다. 한 시간, 네 시간, 닷새, 그리고 천 년이 지난대도 그 수가 늘어날 리는 없을 것이었다.

 

이 일지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라면, 그 다른 사람은 누가 될 것인가? 내가 먹을 것과 잠잘 곳과 쉴 곳을 구하는 법을 일러줘야 할 피후견인이 누구란 말인가? 그 사람이 이걸 읽기는 할까? 애초에 읽을 수는 있을까? 이 짓도 결국 아가리를 벌린 굴뚝 너머로 흘러가는 연기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때로는 세상의 모든 무의미를 내 안에 집약하려고 발악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때가 있다. 그렇더라도 흙바닥에 이름 없는 곡을 적어놓거나, 다람쥐를 살찌워 펑 터뜨릴 때까지 밥을 먹이는 것보다는 유의미하지 않을까.

 

예전에는 취미로 곡을 쓰기도 했다. 배운 걸 써먹을 생각이 없다면 애초에 배울 필요가 없으니까. 그 때문에 부모님 신경도 여러 번 긁었다. 밤만 되면 위층 내 방에 처박혀서는 다음 세기의 명곡을 써 보겠다면서 딱딱하고 재미없는 곡을 리라나 하프로 계속 퉁겨댔으니.

 

요즘에는 내 음악을 하고 있지 못하다. 자고 깰 때마다 무슨 저주받은 조음기라도 된 양 머릿속에서 한 줄기 곡조가 떠돌아다니며 뿔 속에서 징징 울어대고 있으니까. 그걸 내 밖으로 끄집어내려고 온 힘을 끌어다가 갖가지 발악을 했었지만, 나온 것은 끝내 한 줄기 비명뿐이었다. 지나간 밤들은 차갑고 추웠고 냉혹했다. 어찌어찌 그 곡조를 어느 정도 구체화시켜 옮겨 적어놓고 난 뒤에도 안도감 따위 느낄 새도 없이 곧장 다음 곡조가 유령의 속삭임처럼 내 귓속에서 앵앵댔다. 나이트메어 문이 불러온 끝없는 밤의 그림자 속에서 버둥거리는 한, 내 곡은 두 번 다시 퉁길 수 없으리.

 

그러므로 아직 나에게 남아 있다, 고 말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것은 내 말이 될 수밖에 없다. 잠깐 추억을 떠올리거나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는 것처럼 아직 내게 인지할 수 있는 행복이 남아 있기만 하다면, 이 일기는 아카펠라로 부르는 환희의 송가*3일 것이다. 지금 적어 내려가는 글을 읽을 수 있을 사람 또한 나 하나뿐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게 최선일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아름다움과 심금을 울리는 것들로 일지를 계속해서 채워 나가면, 이 일기 전체가 나만의 교향곡이 될 터이다. 저주에 한 대 먹일 수 있을 때까지 찾아내야 할 가락이 많을 것이나, 오직 나만이 쓸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곡 하나를 쓰기 위한 채를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은, 비곡이 무엇인지 명백하게 밝힐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진짜 이것들 빌려 가려는 거 맞지?" 서가에는 먼지가 켜켜이 내려앉은 두꺼운 고서가 빽빽하게 꽂혀 있었고, 완만한 각도로 이동식 사다리가 걸쳐져 있었다. 스파이크는 그 위에 서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퀘스트리아 공용어로 된 것들이 아니거든. 트와일라잇 스파클 선생 얘기에 비춰보면 상당수가 월어月語로 된 책인 거 같은데. 아마추어 수준으로라도 익힌 것 같지는 않고. 근데, 이름이 뭐더라......?"

 

"하트스트링스." 나는 나직하게 대답했다. 스파이크가 있는 서가 쪽으로 다가가 사다리 아래쪽에 서서 말했다. "그렇게 신경 안 써 줘도 괜찮아. 뭐가 됐든 빼곡하게 들어차 있기는 하겠지. 그냥... 옛말 공부에 시간을 들이고 싶어하는구나 하고 넘어가면 돼."

 

"오, 그거 괜찮은데." 스파이크가 어깨를 으쓱하며 서가에서 커다란 책 두 권을 잡아당겨 빼냈다. 책에 붙어 나온 거미가 종종걸음으로 달아났다. 스파이크는 움찔하더니 책에 엉긴 부박한 거미줄을 털어내고 말했다. "솔직히 좀 멋있어. 도서관에 책 빌리러 오는 사람들 대부분은 요리책이나 모험 소설 같은 시시한 것들이나 찾으러 오거든. 트와일라잇도 나랑 똑같은 소리 할걸. 모처럼 이런 책을 찾으시는 분이 오셨는데, 마침 자리를 또 비워 버렸네. 뭐 그래도... 하하..." 스파이크가 고사리손으로 책을 들고 내려왔다. 작고 통통한 몸이 빙글빙글 웃었다. "차라리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자기 또래 유니콘이 이런 케케묵은 책을 찾으러 왔다면서 잔뜩 흥분해서는 고대사가 어떻느니 하고 신나게 늘어놓았을 테니까."

 

부박하기 짝이 없는 것이나마, 웃음이 나왔다. "얘기만 들으면 되게 안 좋은 일인 거 같은데."

 

"그런가. 관점이야 사람마다 다른 법이지. 그래도 말이지, 날씨가 저렇게 좋은데 굳이 공부하러 도서관까지 오는 사람들을 보면 기분이 영 싱숭생숭하거든. 심지어 몇몇은 절대 안 나갈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심호흡하며 가볍게 뿔을 밝혀 스파이크가 들고 내려온 책을 받고 대답했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 정말로." 후드 재킷의 옷깃을 다듬는 와중 몸이 살짝 떨렸다. 나는 말했다. "그래도 좋은 날씨에 공부하러 틀어박히는 것도 세상이 잊은 보물을 다시 찾아내는 과정의 일환이라면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지."

 

"흠... 그건 또 재미있을 것 같단 말이지." 스파이크가 반듯하게 도열한 조그맣고 날카로운 이빨을 내보이며 씩 웃더니 말했다. "뭔가 끝내주게 재미있고 멋있는 연구라도 하는 모양이야."

 

"멋지다는 말이면 족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있다는 표현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음, 난 잘 모르겠어." 스파이크가 녹색 비늘을 긁적이더니, 내가 염동력으로 잡아 들고 있던 책을 흘겨보며 말했다. "항아휘집姮娥彙輯*4에 있는 책만 만지면 소름이 끼친단 말이야."

 

"너만 그런 건 아냐."

 

"그러니까! 전에 트와일라잇이 항아휘집이 뭔지 설명해 준 적 있거든. 루나 공주님께서 천 년 동안의 유폐 끝에 다시 돌아오시기 아주 오래 전부터, 나이트메어 문이 남긴 것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말들이 많았던 모양이야. 트와일라잇 말로는 전국의 도서관에서 월어로 된 자료를 싹 내버렸다고 하더라고. 세상에 그게 다 뭐람?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 '백성들이 루나가 쓴 글을 잘못 읽었다가 나이트메어 문의 잔해에 부마될지도 모르겠다' 생각하시기라도 한 것 같다니까."

 

"그 일련의 사건을 '캔틀롯 대월식Great Canterlot Eclipse'이라고 하지." 나는 책을 들고 책상 쪽으로 걸어가 하루 종일 붙들고 늘어질 채비를 하며, 머릿속으로는 트와일라잇이 해주었던 설명을 되뇌이는 채 입을 열었다. "현대에 들어서도 연구되는 사건이야. 나이트메어 문의 폭정이 끝나고 난 뒤, 그 후폭풍으로 온갖 문헌자료가 엄청나게 검열됐거든. 뭐 몇백 년쯤 지나고 나서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도 이거 잘못됐다 싶으셨는지 검열 명령을 해제하시긴 했다만. 덕분에 근대에 들어 대규모 문예부흥이 촉발되었지. 이 때부터 캔틀롯이 학문과 예술의 도시로 발전해 나가기 시작했고, 여기 힘입어 수도가 될 수 있었어. 그렇더라도 대월식이 우리나라 문화에 미친 악영향이 취소될 수 없고, 지금은 멸실된 항아기록관Lunar Archive의 자료가 회복될 수는 없지만." 

 

스파이크가 휘파람을 불더니 말했다. "오호. 트와일라잇이 설명해 준 거랑은 다른데."

 

나는 순간 호기심을 느끼고 물었다. "네가 들은 설명은 어떤데?"

 

"루나 공주님의 서고에 있던 책은 어지간히 용감한 사람이 아닌 이상 다들 겁을 먹고 쳐다보지도 못했다는 식으로 넘어갔어."

 

"뭐, 그것도 맞는 말이기는 하지." 나는 선문답하듯 대답하고 덧붙였다. "나이트메어 문이란 이름 하나가 세상을 얼마나 어지럽히고, 얼마나 많은 걸 앗아갔는지 생각하면 당연해."

 

"그래, 그럼..." 스파이크가 눈을 찡긋하더니 내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도저히 나 혼자서는 못 해 먹겠다 싶으면 휘파람을 불어서 날 찾아. 그 트와일라잇이 인정한 연구 조수라구. 그러니까 뭘 좀 도와 줬으면 좋겠다 생각이 들면 그냥 바로 불러도 돼. 하트스트링스."

 

"진짜?" 고서 한 권을 골라 펼치자 먼지가 사방에 자욱하게 퍼졌다. 발굽을 흔들어 먼지구름을 흩어놓은 뒤, 눈을 가늘게 뜨고 빽빽하게 늘어선 낯선 문자들을 들여다보았다. 내 물음은 우스꽝스러웠고 아무 억양이 없었다. "그러면 위대한 어머니Cosmic Matriarch에 대한 것 좀 알려 줄 수 있겠어?"

 

"어......" 스파이크의 에메랄드 빛 눈꺼풀이 멍하니 깜박였다. "위대한 뭐, 뭐라고?"

 


 

"대체로 단순한 옛날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는 하죠."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언젠가 했던 말이다. "다만, 그 이야기는 평범한 전설 따위가 아닌 걸 알게 되었어요."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전율했다. 저주를 짊어진 뒤 겨우 두 달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나는 마을 외곽의 폐헛간 근처에 녹색 천막을 하나 치고 기거하고 있었다. 트와일라잇의 입에서 그 한 마디를 얻어내기 위해 알로에와 로터스의 스파 대기실에 앉아 발을 동동 구르며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참을성 없는 손님을 가장해야 했다. 돌이켜보면 그 때 내 모습은 칙칙하고 시커먼 스웨터를 껴입은 주제에 몸을 덜덜 떨고 있었을 터인데, 그쯤되면 시시한 마사지나 페디큐어를 받는 게 아니라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닌지 싶었을 것이다. 그 궁상을 보고서도 그냥 넘어가 줬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어떻게요?"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용을 쓰며 나직하게 물었다. 세상 모든 곳이 차가운 관짝과 같았다. 두꺼운 머리통 속을 부서진 레코드 판처럼 빙빙 돌아다니는 비참하기 짝이 없는 곡조에 내 마음도 같이 흔들렸다. "그저그런 옛 전승 따위가 아니라는 건 어떻게 아셨나요?"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 말씀해 주신 적 있으니까요... 아니, 그녀라고 해야 하나......" 트와일라잇이 까르르 웃고 덧붙였다. "어쩌면 그들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뭐라고 부르든지 위대한 어머니의 실재는 의심할 바 없는 명확한 사실이라고 생각해요. 공주님 말씀의 행간을 귀동냥이라도 할 수 있을 정도로 공주님 슬하에 오래 있었으니까 말이에요."

 

"행간이라?" 의자에 몸을 가만히 붙여놓으려 용을 쓰면서 마른침을 삼켰다. 감당할 수 없는 추위가 몰아쳤지만, 나는 용감히 맞섰다. 진심으로 이 이야기에 관심이 있었던 만큼, 겉으로도 그렇다는 표시를 해야 했으니까. "즉슨, 공주께서 한 번도 위대한 어머니에 관하여 터놓고 말씀해 주신 적은 없다는 거군요?"

 

트와일라잇은 순간 심기가 불편해졌는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내가 신경을 잘못 건드린 건 아닐지, 얘기해 주고 싶은 생각까지 싹 사라지게 한 건 아닌지 싶어 전전긍긍했다. 다행히도 트와일라잇은 축 처진 말투로나마 이야기를 계속해 주었다. "공주님의 개인적 문제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그냥 해보는 말이 아니에요.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는 아주 길고 긴 세월을 살아오신 분이니까, 그런 일을 쉽게 딱딱 짚어낼 수는 없다는 거죠." 

 

"그렇더라도 공주님과 어떤 관계가 있기는 한 것 같다는 거군요?"

 

"맞아요. 루나 공주님 역시 마찬가지에요. 아시겠지만......" 트와일라잇은 빙긋 웃으며 '우리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발굽으로 갈기를 쓸어 넘기고 말을 이었다. "태양과 달의 운행을 관장하시는 두 분 공주님들께서 불멸하시는 건 아주 당연한 사실이죠. 이 사실에 반론할 수 없다고 해서, 다른 당연한 명제를 당연하게 무시하고 간과해도 되는 것은 아니고요. 즉, 그 어떤 마법사라 해도 자기 스스로 마법 공부를 해 나갈 수준이 되기 전에는 반드시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죠."

 

나는 침을 삼키고 말을 받았다. "스스로 비롯되는 것은 없고, 만물에는 반드시 그 시작이 있기 마련."

 

트와일라잇은 깜짝 놀랐다는 듯 나를 돌아보고 말했다. "네... 맞아요! 하하. 어떻게 아셨어요? 하트스트링스 씨도 마법사신가요?"

 

나는 입술을 씹으며 눈을 피했다. 전에도 트와일라잇과 똑같은 대화를 네 번이나 했었기 때문에, 이 대화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책에 나온 거 주워들은 거죠." 이것은 사실이기도 했고 거짓이기도 했다. 내가 아는 거라고는 근대 문헌에 언급된 것 중에서도 아주 극소수의 개념과 용어, 인명 정도에 불과했으니까. "그 누구도 우리나라의 두 공주님들이 언제, 어떻게 나타나신 것인지 그 기원을 알지 못한다, 정도로 이해하고 있어요."

 

"그것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지요." 트와일라잇이 고개를 끄덕였다. 향초Aroma Candle에서 퍼지는 은은한 촉광이 그녀의 라벤더빛 몸을 적셨고, 신실한 말들을 꺼내놓는 내 소꿉친구에게 나긋하고 여린 기운을 덧칠했다. "평범한 사람은 대체로... 얼마더라? 육십 년에서 칠십 년? 최대 구십 년? 정도까지 살 수 있죠. 턱수염 스타스월은 예외, 아주 큰 예외지만요. 지상의 시간이 다하기 전에 한 세기 동안 세상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정말 운이 좋은 경우겠죠.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알리콘의 수명을 짐작할 수 있겠어요? 태초부터 존재하셨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어쩌면 세상의 이치가 정립되고 해와 달이 스스로 태어나는 모습까지 보셨을지도 모를 일이죠."

 

몸을 타고 한기가 다시 밀려들었다. 나는 우리 너머 아득한 곳에서 반짝이는 낯선 별들이라도 되는 양 촛불을 바라보며 추위를 견뎠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되네요. 상상조차 어려울 정도로 다른 세상 일이라 그런가." 다시 트와일라잇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나는 그때, 내가 건네는 말처럼 내 두 눈도 진심을 담고 있기를 바랐다.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선 어떠셨을까요? 혹시 들으셨어요?"

 

"저도 알았으면 좋겠네요. 어떠셨는지 저도 알아서, 친구들을 비롯해서 이 문제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얘기해 주고 싶은 마음이에요. 다만 그분의 제자인 저 역시도 알 수 없는 것들이 셀 수 없고, 위대한 어머니에 관한 얘기는 공주님께도 굉장히 민감한 주제였던 것 같아서 감히 여쭤 볼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 같네요."

 

"공주님께서 그냥 알려 주실 생각이 없으신 모양이다, 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트와일라잇은 곤란한 질문이었는지 꿈지럭대며 대답했다. "음...... 없어요. 이 문제는 그런 문제와는 다른 문제라고 생각해요...... 적어도 제 생각에는."

 

"오호?"

 

트와일라잇이 내 쪽을 쳐다보았다. 순간 그 두 눈은 한없이 여리고 연약해 보였다. "그쪽이 오래, 아주 오랫동안 살아온 나머지 어머니가 어떤 분이셨는지조차 희미해졌을 때 누가 어머니에 대해서 얘기해 달라고 하면 어떤 기분이겠어요."

 

급한 숨이 인후로 파고들었다. 대기실에 드리운 그림자가 밤이 몰고 온 철의 장막처럼 짙어졌다.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트와일라잇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는 매일같이 그 문제를 당면해야 하실 거에요. 저도 그것 때문에 함부로 말을 꺼내지 않았던 거고요."

 

나는 고개를 떨구며 사과했다. "미안해요......"

 

"미안할 것까지야..." 트와일라잇이 빙긋 웃으며 몸을 기울였다. "그럴 것 없어요. 호기심조차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만 잘 새겨둔다면, 의문을 갖는 건 오히려 바람직한 일이니까. 그러고 보니, 공주님께서는 위대한 어머니에 관해서는 말씀을 많이 아끼셨지만, 제가 그분의 제자로 들어간 이래 딱 한 번, 뭔가 연관이 있을 듯한 말씀을 해 주신 적이 있었어요."

 

나는 고개를 들어 트와일라잇을 마주보고 물었다. "뭐라고 하시던가요?"

 

트와일라잇이 나긋하고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공주님 슬하로 막 들어갔을 때 일이에요. 세상이 어떻게 빚어졌는지 여쭈어 본 적 있었죠. 공주님의 답변은 모호하고 흐릿한 것이었지만, 딱 한 곳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자세하게 말씀하시더군요." 트와일라잇은 웃음소리를 눌러 죽이고, 헛기침을 해 목을 닦은 뒤 스승의 말을 그대로 옮겨주었다. "세상 만물이 비롯됨은 숨결이 비롯되어 흐르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 스스로 비롯된 것이 없단다. 하지만... 노래만큼은 그러지 않았느니."

 


 

무슨 노래를 말하는 것인가? 아침과 밤을 가리지 않고 내 머릿속에 처박혀 되는 대로 흘러다니는 이 곡조를 뜻함인가? 그 어떤 이도 감지할 수 없는 영역의 것들이 나 하나에게만은 감지되는데, 이 축복인지 저주인지 종잡을 수 없는 기능을 수여라도 한 것인가? 왜 나한테? 왜 나 하나한테만? 나이트메어 문에게 그게 무슨 소용이 있다고?

 

이것이 내가 골머리를 썩이던 문제였다. 이 하나를 가지고 뇌를 쥐어짜다시피 하고 있었다. 매일같이 트와일라잇의 도서관과 공원 벤치, 오두막의 벽난로, 촛불 밝힌 책상, 차가운 달빛과 아침 햇살의 부드러운 입맞춤 아래를 돌아다니며 온갖 문헌과 두꺼운 고서, 두루마리를 뒤져댔고, 답을 찾아 떠난 그날의 여정은 이 하잘것없는 목숨으로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지나간 시대 뒤로 켜켜이 쌓인 먼지에 지친 눈이 시위를 벌이고 나서야 멈추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갔고, 그 동안 나는 역사의 잊힌 답들의 표면만 간신히 한 번 스치고 지나가는 정도밖에 이루지 못했다. 그나마도 세월이 흐르며 모호해진 끝에 왜곡되고 비틀렸음에도 사실인 것처럼 나를 속이고 있는 게 아닐 경우에나 성립할 것이다. 상세하게 서술된 것들은 여러 갈래 언어로 갈라져 숨어 버렸는데, 그 말들도 대부분은 사어死語였다. 코덱스와 그 번역본, 각종 연감들과 월어의 첩첩산중으로 도망해 흩어진 다양한 전승까지 뒤져 보았으나, 그 끝에 남은 거라고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 훨씬 많으며 앞으로도 영영 그러하리라는 결론뿐이었다.

 

나이트메어 문의 시작은 음악가였지만, 그 끝은 폭군이었는가? 실제로 그러했더라도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일 년 내내 매달린 연구로 어느 정도 역사를 통찰하는 시야가 틔였고, 여기 비추어 보니 우리나라에 있었던 각종 문화권이 역사적으로 일관된 경향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즉, 음악적 소질을 갖추고 있던 자들이 한순간에 정의의 적으로 반역했다는 것이다. 미노타우로스의 경우, 연인에게 배신당한 뒤 자기가 섬기던 나라 전체를 미궁 속에 빠뜨린 저주를 건 왕실 작사가에 대한 전승이 전해 내려온다. 다이아몬드 독은 일반적으로 문맹 취급을 받지만, 동족 살해에 맛을 들인 한 부족이 동족들을 '회오리의 비명'으로 유인해 살육한 과정을 기록한 두루마리 몇 권을 남겼다. 이는 용에게서도 나타나는 현상인데, 고대의 한 여왕이 마법 공명 다이아몬드를 이용해 자신의 형제, 자매들을 돌로 만들어 버렸다는 구전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내가 발견한 이 경향성은, 당장 내가 갇힌 고통의 벽과 관련이 있는 것만 찾아다녔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저주받은 유니콘이라는 내 신세 때문에 찾아낸 것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다양한 문화권과 문명에서 공통적으로 유사한 전승이 수도 없이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단순히 불쾌한 우연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루나 공주께서 음악에 조예가 깊으셨던 것은 새삼 다시 말할 것도 없는 사실이다. 이는 셀레스티아 공주님도 마찬가지다. 두 분은 포니 문명을 이끄는 한 쌍 자매요 알리콘 지도자이고, 그러므로 두 분의 백성들을 구성하는 근간이 되는 문화예술에 깊은 관심을 가지셔야만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아니함은 곧 가증한 죄였을 터이다. 두 분께서는 그러셨으되, 옛 사람들이 밤보다 낮을 더 기뻐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셀레스티아 공주님을 향한 경애는 춤과 노래의 몸을 빌어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루나 공주님께 바쳐져야 했을 존경과 사랑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말았다. 이 간극을 좁히기 위해 루나 공주께서 본인 당신만의 음악을 수탐하셨을 것이라 쉬이 상상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이것과 위대한 어머니가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어느 정도는, 아니, 반드시 맥락을 공유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트와일라잇 스파클은 공주님 문하에서 공부한 당사자이고, 셀레스티아 공주께서 "만물의 근원은 노래였다"고 말씀하셨다고 말했다면, 그 당사자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 천지창조와 함께 세상에 나타난 두 알리콘 자매만이,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유일한 존재들이니까. 음악만큼이나 머리에 명료하게 남는 기억이 세상에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래, 그 노래라는 것은 실존한다. 달 뒤편에 숨은 망령처럼 메아리지며 울려대는 곡조가 휘몰아치는 차가운 병 안에 갇힌 외로운 몸이나, 그 노래라는 것을 찾아내기만 한다면 나 자신도 찾을 수 있으리. 어쩌면, 가정에 불과한 것이지만, 오직 알리콘 자매의 뇌리에만 남아 있을 천지창조의 음악을 다시 세상 속으로 이끌고 들어갈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리하여, 노래와 함께 나 또한 세상에 다시 실존할 수 있을지도.

 


 

바로 어제 아침, 슬슬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너무 오랫동안 '밤의 만장' 연주를 미뤄두고 있었다. 이제 겁도 나지 않아서, 더 미룰 핑곗거리도 없었다. 답을 찾고 싶다는 절박한 심정이 이제 목전에 어른거리는 혹한의 여정을 향한 두려움을 넘어선 것이다. 어제는 그런 의미에서 딱 좋은 날이었다. 준비물을 사는 데 필요한 돈도 충분히 있었고, 시간 역시 넉넉했다. 곧 기력이 쪽 빨려나가게 될 것을 알아서 그리 기꺼운 기분은 아니었다.

 

우선 에버프리 숲으로 가야 했으므로 옷을 단단히 챙겨 입어야 했다. 목적지까지 가려면 후드 한 장 덜렁 뒤집어쓰고 가는 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우선 양털 양말부터 신었다. 발굽 위에 양말을 씌우고, 윗부분을 최대한 윗쪽까지 잡아당겨 덮었다. 한 달 가까이 두르지 않았던 진갈색 망토를 집어 온몸에 둘렀다. 따뜻한 미소를 띄우며 목도리를 건네주던 한 우아한 유니콘과 그 때의 행복이 머릿속에 새록새록 떠오르는 익숙한 노란 목도리를 목에 감았다. 마지막으로 뿔을 꺼낼 수 있도록 직접 짜면서 구멍을 하나 만들어 놓은 검은 비니를 집어 뒤집어썼다. 동전지갑을 집고, 뿔을 밝혀 후드 재킷과 망토에 달린 두건을 같이 집어 머리 위로 눌러쓰며 오두막을 나섰다.

 

에버프리 숲 경계까지는 걸어서 삼십 분이 걸렸는데, 숲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겹겹이 껴입은 두터운 옷들이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가는 길 내내 견딜 수 없는 열기가 옷 안에 가득 들어차서, 흘러나온 진땀이 옷과 몸 사이에 엉겨붙었다. 망토나 양말만이라도 벗고 가면 한층 편하지 않을까 싶은 내면의 유혹이 있기도 했으나, 머지않아 세상 모든 이불을 끌어와 덮고 싶다는 생각이 들 것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넘어가지 않았다. 이 여정의 결과로 내가 성취할 것이 그곳을 다녀왔다는 사실 하나뿐일지, 알아낸 곡을 연주하는 데 필요한 준비물일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잡생각은 많을수록 좋았다. 애플잭이나 래리티의 동생에게 내 큐티마크가 무슨 뜻인지 한 백만 번쯤 되풀이해 설명했던 때와 모닝 듀에게서 꽃 한 송이를 받았을 때, 만화책에나 나올 정도로 진땀을 줄줄 흘려대던 기억으로 연결되기는 하지만, 숲 근처까지 갈 힘을 주기 때문이다.

 

모닝 듀.

 

나는 한숨을 폭 내쉬고, 오랜만에 피식 웃었다. 웃기는 일이었으니까. 우정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나를 옭아맨 저주를 풀어 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글줄로 그렇게나 썼는데, 이 2어절만은 항상 즐거운 기분으로 만들어 주었다. 어려운 여정이 아주 약간은 견딜 만해졌다. 나는 한결 괜찮아진 기분으로 빽빽한 숲 속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간만에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며 몸과 마음이 완전히 이완되었을 때만 가능한 일을 했다.

 

작곡을.

 


 

짊어진 저주와 연관이 있는 항아비곡은 일곱 편. 내가 지금까지 찾아낸 게 일곱 편뿐이라, 일곱 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비곡은 그 어떤 경고나 사전 통보 없이 스며들어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내가 잠들 때 일어나서 깨어날 때 달려들었다. 천지를 창조한 것이 한 곡 노래였던 바와 같이, 나를 끝장낸 것 또한 한 곡이었으므로, 창조와 파괴 사이의 간극을 조심스레 건너야 하는 어려운 일이 되었다.

 

항아비곡 제 1장, '그림자 전주곡Prelude to Shadows'의 제목은 트와일라잇의 도움으로 찾아낸 것이다. 왕명으로 편찬된 국사전서國史全書 제12권에서 단 한 번 언급되었는데, 항아기록관 자료가 대체로 그렇지만 루나 공주님께서 작곡에 취미를 갖고 계셨다는 주요 증거 중 하나다. 온 세상에서 나에 대한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던 날, 눈을 떴을 때부터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나는 '그림자 전주곡'이 대체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무진 애를 썼다. 이는 머릿속에 떠오른 다른 비곡들도 마찬가지다. 이걸 다 받아 적은 다음 직접 연주해 보았을 때를 말하는 것이다. 이 곡에는 뭔지 몰라도 신비하고 마법적인 무언가가 있었음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리라로 퉁겨 보는 과정에서 그 어떤 마법의 영향을 받은 바 없기 때문이다. '그림자 전주곡'을 연주한 것만으로 정신 상태가 극도로 피폐해졌다. 전전긍긍, 신경과민에 피해망상에다 심약해지기까지 했었다. 벽 너머의 무언가가 다가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헐거운 형체들과 빛줄기가 말을 걸어왔다. 전주곡 연주를 마치자마자, 바로 다음 곡이 머릿속에 떠올라서 엄청나게 당황했다.

 

항아비곡 제2장 역시 트와일라잇의 도움을 받아 곡명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일몰 볼레로Sunset Bolero'. 그림자 전주곡과 일몰 볼레로를 계속 연주하고 연습하던 어느 순간, 이 둘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음악소리가 전혀 무의미한 게 아님을 그 때 깨달았다. 두 곡은 연결되어 있었고, 앞으로 얼마가 더 있을지 알 수 없는 대곡을 이제 막 펼쳐보기 시작한 단계에 불과했던 것이다.

 

처음으로 일몰 볼레로 연주를 마쳤을 때, 그림자 전주곡과 달리 정신이 피폐해지거나 하는 느낌은 없어서 안도했다. 그 대신, 내 계산에 없던 일이 일어났다. 엄청난 열광이 솟아나 내 안을 가득 채운 것이다. 심장이 빨리 뛰다 못해 심계항진에 가까운 상태로 서른여섯 시간을 보냈다. 이대로라면 마라톤도 충분히 뛰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일몰 볼레로는 타악기가 굉장히 많이 쓰인 곡이었는데, 그것 때문인지 아니면 나이트메어 문이나 알 어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엮여 있어서인지는 알 수 없어서 미칠 뻔했다. 한 불경한 알리콘의 정수에서 비롯된 음악을 연주할 뿐인 필멸자에 불과했고 이제 겨우 곡 두 개만 퉁겼을 뿐이었지만, 당시 루나 공주님께서 알고 계시던 것보다는 많이 알고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까지 들었다.

 

항아비곡 제3장은 구체화하는 데 좀 오래 걸린 편인데, 처음에는 그냥 일몰 볼레로가 다시 들리네? 하는 수준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길고 추운 밤 한복판에서 몇 시간 동안 가만히 생각해본 끝에, 세 번째 비곡은 일몰 볼레로의 속도를 늦추고 우울한 불협화음을 더해 변주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내려고 트와일라잇의 도서관 장서 중 접근 가능한 월어 문헌을 닥치는 대로 뒤졌었다. 답을 구하는 데는 두 달이 걸렸다. 그간 주요 어휘를 상당히 외운 덕에 루나 공주님께서 이전에 쓰셨던 곡 중 하나를 변주하여 변주곡을 만드셨다는 기록을 해독할 수 있었다. 이것이 '파도의 행진March of Tides'을 규명한 과정이다.

 

연주를 마치자마자 '파도의 행진'의 부작용이 밀려왔다. 머리가 어지러워졌고 시간의 흐름이 극도로 느려진 듯한 느낌이었다. '일몰 볼레로'의 부작용은 '파도의 행진'의 부작용을 상쇄하기 위해 예비된 것임을 그 때 깨달았다. 이 때는 '파도의 행진'이 가져올 악영향을 전혀 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마터면 작곡을 마치지 못할 뻔했다. 볼레로와 파도의 행진이 연결되어 있음은, 단순히 모든 곡이 하나로 이어진다는 것만을 뜻하지 않았다. 완벽히 순서를 맞추어 들려온다는 것 자체가, 이 모든 일 뒤에 무엇인가 알 수 없는 배후가 있음을 암시했다. 다른 누군가가 개입되어 있다는 생각에까지 닿고 나니, 이 마곡魔曲을 더욱 연구해야 할 이유가 더욱 뚜렷해졌다.

 

항아비곡 제4장에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었다. 도저히 이름을 찾아 붙여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 연주를 마친 뒤 말 그대로 공황 발작을 일으키다시피 했으니까. 즉슨, 현을 퉁기는 동안 한 반쯤은 눈이 멀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보다 정확히 당시를 묘사하기는 어렵다. 한 중간쯤 왔을까 싶은 시점에 어느 순간 세상의 모든 빛과 색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새 오두막집 한가운데서 몸을 떨며 어둠을 부여잡고 쓰러졌을 때가 또렷이 떠오른다. 누가 좀 도와 달라고 비명을 질러댔을 수도 있겠다마는, 그 누구도 듣지 못했으리라. 새벽이 밝아올 때쯤 다시 눈이 보였다. 뜨는 해 앞에서 나는 환희했다.

 

그 뒤로 여섯 주 동안 비곡의 비밀을 파헤치는 작업을 그만두었다. 누가 내 탓을 할 수 있으랴? 내가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 마곡을 상대하고 있는데 어쩌겠는가. 저주가 시작된 날 이래 지금까지 해 온 그 어떤 연주로도 내가 짊어진 저주를 벗을 수는 없었음은 명백했다. 다만, 한낱 미물인 나라도 여신의 음악을 연주할 수 있을 정도는 되는 것은 확실히 느꼈다. 하루가 지날수록 네 번째 비곡이 머릿속에서 천천히 흐려져가며 울어대서, 아픈 아이를 간호하는 어머니라도 되는 양 다시 리라를 끼고 앉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고른 날은 보름달이 뜨는 밤이었다. 현을 퉁길 때마다 솟구치는 소리와 함께 겁에 질려 예민해진 오감五感 위로 창백한 달빛이 쏟아져 그나마 마음이 편했다. 첫 번째 비곡에서 두 번째 비곡으로, 다시 세 번째 비곡으로 이행했다. 네 번째 비곡을 퉁기던 와중 다시 시야를 상실했다. 나는 용감히, 차라리 맹목적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현을 뜯어댔다. 그렇게 네 번째 비곡이 완성되었고, 시야도 되돌아왔다. 이상할 정도로 차분하고 관조적인 평온이 느껴졌다. 나는 그 힘으로 밤이 몰고 온 어둠 앞에 당당히 서서 그 차갑기를 말할 수 없는 눈총을 받아낼 수 있었다. 날이 밝자마자 트와일라잇네 도서관으로 향해 자료를 뒤졌다. 당시 어떤 마을에 심각한 눈병이 창궐했는데, 루나 공주님께서 찾아가시어 눈병을 고쳐 주셨다는 옛 전승이 담긴 기록을 발견했다. 심지어 그 치료는 다름아닌 음악의 힘을 빌어서 한 것이었는데, 그 이름은 '어둠 소나타Darkness Sonata'라 전한다.

 

어둠 소나타를 옮겨내면서 온갖 기괴한 상황을 마주했기에, 이제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기 충천하여 다섯 번째 비곡에 덤벼든 것이 그 때문이다. 여세를 몰아 다섯 번째도 빨리 끝내 버리자는 잔꾀는 별로 소용이 없었다. 다섯 번째는 상상도 못 한 방식으로 나를 편안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걸 '행복'이라 칭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것은 차라리 '안심'에 가깝기 때문이다. 트와일라잇 스파클에 따르면, 다섯 번째의 이름은 '별들의 왈츠Waltz of Stars'였다.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그 카덴스는 '일몰 볼레로'의 고양감 넘치는 박자를 닮아 있으면서도 '파도의 행진'과 비슷한 불협화음이 섞여 있었지만 그 둘보다도 훨씬 초월한 듯한 느낌이 있었다.

 

'별들의 왈츠' 연주는 그야말로 중립의 극치와 같았다. 재미있고 가벼운 첫 부분에서부터 절로 매료되었는데, 그 감각이 며칠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 다음 느낀 것은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끔찍한 적막감이었다.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곳으로 떠나가 버린 자매의 이름을 부르는 듯, 현에서 솟구친 소리가 메아리지는 공허와 '별들의 왈츠'만 머릿속에 계속 떠올랐다. 왜 하필 자매였을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이 곡이 생각날 때면 고개를 들어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바라본다. 그럴 때면 모든 답을 찾아낸 것은 아니지만, 내가 모든 답을 갖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리하여 여섯 번째 비곡으로 넘어온다. 트와일라잇 스파클은 금방 이 곡을 알아들었다. 다름아닌 루나 제국의 국가였다고 말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나이트메어 문이 궐기하기 몇 년 전부터 자신의 세력을 끌어모을 목적으로 만든 곡이라고 했다. 루나 공주께서 조화의 원소의 권능에 의하여 달로 유폐되기 전, 나이트메어 문은 수많은 유니콘들을 끌어들여 자기 계획에 동참시켰다. 그리하여 나이트메어 문의 기치 아래 수많은 군대가 모여들었으니, 어둠의 알리콘은 이 불운한 이들의 목숨으로 자매의 권능을 찬탈하고 그 앞을 막아서는 자들의 목숨을 거두고자 했다.

 

내 선조들께 이루 말할 수 없는 해악이었을 곡을, 이제 다시 내게 속삭이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은 감당하기 힘들었다. 이퀘스트리아의 두 신왕神王 사이의 전쟁에서 유니콘은 거의 멸족의 위기에 내몰렸다. 그러므로 내가 찾아내야 하는 비곡이란 하나같이 끔찍하면서도 알 수 없는 미지의 것이었는데, 그러는 와중에도 나름대로의 미학은 갖추고 있었다. 사람이 세상에 만들어낸 그 어떤 간교하고 사악한 것들이라도 처음에는 순수한 예술이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눈에 보이는 고서라면 무엇이든 집어다가 그 안을 들여다보는 짓을 시작했으니, 여섯 번째 비곡과 관련된 기록은 근대에 거의 대부분이 멸실되어 있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제정신으로 루나 제국의 망령이 현대에 다시 기어나와 살아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자가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그처럼 스스로 아름다울 수 있는 악곡이 과거의 죄악에서 번져나온 그림자를 이유로 지워져야 하는 것은 비극이기도 하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칙칙하기 짝이 없는 멜로디 사이를 헤매다 문득, 제목을 몰라도 곡의 구성을 구체화하여 옮겨놓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음을 새삼 깨달았다. 내가 가진 모든 두려움은 물론 시간의 권능조차 감히 물리치지 못한 뭐라 말로 옮겨놓을 수 없는 생각이 저주가 시작된 날부터 나를 지배해 왔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몰라도, 연구 과정에서 건져낸 모든 말들이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을 나만큼은 알아야 했다. 루나 공주님의 병든 마음이 어느 순간 뒤틀리고 사악한 형상으로 변이되기 직전까지 공주께서 곡 하나하나에 얼마나 마음을 쏟으셨을지, 나는 다만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여섯 번째 연주곡은 '달의 비가Moon's Elegy'로 부르기로 했다. 현을 퉁겨보는 순간 머리에 퍼뜩 떠오른 생각이었다. 연주를 마친 순간 저주가 몰고 온 한기가 두 배... 세 배로 거세졌다. 내가 누릴 수 있었던 세상의 모든 온기가 박탈되어 사라진 것만 같았다. 사지에 감각이 없어지는 것을 시작으로 추위와 기갈이 덮치더니 그 끝에서는 정신적으로 누군가에 예속되고 싶은 욕망이 일어났다. 미친 전쟁광들이 왜 이 곡을 앞세워 더욱 미쳐 날뛰었는지 단박에 이해되었다. 광신도들을 한데 모아놓고 '달의 비가'를 들려 준다면 어찌될 것인가. 나이트메어 문과 같은 뇌제라면 비가의 반작용을 이용해 살육광들을 마음대로 부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솔직하게 적어 두자면, 달의 비가가 일으킨 무시무시한 한기는 1번부터 5번까지에 이르는 비곡을 다시 연주하고 나서야 사그라들었다.

 

그렇기는 한데, 나는 아직까지도 일곱 번째 비곡을 작업하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다.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밤의 만장Threnody of Night'이라 부른 것이 마음에 걸려서다. 만장이란 다름아닌 망자를 추모하기 위한 곡을 부르는 말이다. 내가 짊어진 저주의 비밀을 파헤친 끝에서 뭐라도 건질 게 있기는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그 결과가 죽음이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렇더라도 내게 선택의 여지는 없다. 비곡에서 발을 뺄 수 없음은 이미 자명한 사실이니. 한 곡 한 곡을 발견할 때마다 나 또한 그것들이 어떤 것인지 깨닫게 된다. 비곡은 중간의 곡을 빼먹거나 건너뜀이 없어서, 곡이 어떻게 끝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루나 공주님의 족적을 쫓아 도움을 구할 수도 없다. 셀레스티아 공주께 탄원을 올려 그분의 지혜를 얻는 것도 불가능하다. 트와일라잇의 안목과 스파이크의 문헌 탐색 능력 둘만이 내가 누릴 수 있는 도움의 전부였고 그나마도 아주 찰나인 것이었으므로 이 여정에서 나는 마침내 혼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끝없는 밤 한가운데로 내던져진 어린애가 헤매이고 홀로 된 탐험가가 시커먼 밀림 한가운데를 더듬어 통과하려 하는 것처럼 한없이 차갑고 위험한 길을 나는 혼자서 가야 한다.

 


 

어제 정오 무렵 에버프리 숲에 갔다. 그냥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나의 궁박이 얼마나 궁박한지는 상관없었다. 전력질주는 무의미하게 체력을 낭비할 뿐이었으므로, 수목이 번성하다 못해 빽빽하게 들어찬 숲 한가운데서 진이 빠지는 사태만은 예방하기 위해 체력을 가능한 효율적으로 써 가며 걸었다.

 

가는 길은 아주 추웠다. 정말, 말로 다할 수 없이 추웠다. 치아끼리 딱딱 부딪쳐댔고 온몸에 소름이 돋아 솜털이 날카롭게 일어섰다. 망토에 스카프, 비니, 스웨터 재킷까지 껴입은 몸이 이미 얼어 언제라도 수백만 조각으로 산산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나이트메어 문이 천 년의 봉인에서 풀려나 지상에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 첫 번째 발걸음이 닿은 곳은 여기 포니빌 광장이었고 나 또한 그 자리에 있었다. 그 때부터 나는 저주를 짊어지게 되었다. 글쎄, 생각해 보면 거기 있던 사람들 중에서도 내 체온이 가장 높았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마을 어귀쯤에서는 가벼운 오한이 일어났고, 집에 도착해서는 온몸이 얼었으며 포니빌 광장에서 한참 떨어진 곳, 이를테면 스윗 애플 에이커쯤에 들어서면 전신의 감각이 마비된다.

 

에버프리 숲에 들어서면 그냥 죽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편하다. 그때부터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 한파가 밀려오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온갖 털옷에 다른 옷가지로 온몸을 감싸고 덜덜 떨어대는 열병 환자처럼 보일 터다. 잠깐 몸이 좀 안 좋다는 말로 내 상태를 대충 무마하는 데 유용하게 잘 써먹고 있다. 그렇기는 한데, 추위가 보통이 아니니 정말로 필요할 때가 아니면 이렇게까지 멀리 나오는 일은 극히 드물다. 이번에도 '밤의 만장'을 연주하는 데 필요한 물건이 있어서 나선 것이다. 그랬으니, 계속 가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계속 숲을 헤치고 걷다 보면, 목적지가 눈에 들어올 테니.

 

목전에 늘어진 거친 길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가야 할 길이 더욱 먼 곳까지 늘어지며 아득하게 보인다. 졸도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으므로, 고개를 똑바로 쳐들고 잎사귀 사이로 배어 들어온 부박한 햇빛을 그대로 눈에 담으며 정신을 유지했다. 페가수스를 비롯한 자연의 관리자들이 순리대로 자연을 돌보고 있는데도 그곳만큼은 전대미문의 변이를 일으켜 스스로 자라고 성장하는 끔찍한 환경이라며, 제정신이 박혔다면 응당 에버프리 숲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에버프리에 서식한다는 각종 괴물들은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내 몸을 깨뜨리려 쇄도하는 극한의 냉기에 비하면 형체도 확실치 않을 뿐만 아니라 대단히 무해한 것들에 불과했지만. 어제 내가 뚫고 간 한기는 이를테면 극지방 만년설 아래 고인 이름 없는 지하 호수에 뛰어드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다. 차라리 극지방의 흙을 주사기 가득 채워다가 내 정맥에 그대로 쑤셔넣었으면 그래도 좀 따뜻했을지 모르겠다. 달의 저주가 불러온 기괴한 악영향을 가지고 논다, 고 표현은 하겠지만 실제로 가지고 노는 것은 절대 아니다. 아주 약간이라도 그걸 가지고 논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상황 자체를 분석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정신을 계속 분산시켜야 했다. 밤의 만장을 생각했다. 머릿속에 불로 찍은 낙인처럼 단단히 박힌 음계를 생각했다. 오래 전 각 비곡을 연주했을 때 어떤 소리가 났는지 기억을 뒤적일 때마다 귀가 쫑긋거렸다. 나는 포니빌 길거리에 나가 비곡을 연습했고, 그 때마다 사람들은 고맙게도 동전 몇 닢씩을 던져주었다. 비곡의 원전을 그대로 연주한 것은 아니었고, 상당한 변주를 가한 것들이었다. 원곡 그대로 음 하나씩을 퉁겨대는 것은 연습이라고 할 수 없었다. 완벽히 연주해 냈다가 비곡이 품은 마법이 다시 효과를 내기 시작하기라도 하면 뒷감당이 되지 않으니까. 오롯하게 나 혼자서만 감내하고 있는 미지의 굴레를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씌워 버리는 일은 바라지 않았다. 저주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도 애초에 다른 사람들과 다시 어울려 살고 싶었기 때문이니까. 내 인생 대부분을 시련과 한기, 시행착오로 보내더라도 추구할 가치가 있는, 고상한 뜻이 아닌가.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기쁨에 숨이 막혔다. 드디어 목적지인 나무집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문간에 다가서서 떨리는 발굽으로 가볍게 몇 번 두드리는 나를 이국적인 형상으로 깎은 온갖 가면이 맞아주었다. 이번에는 더 힘이 들었다. 얼마나 더 견딜 수 있을지 나도 알 수 없었으니까.

 

다행히도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문을 두드리자마자 그녀의 목소리가 나를 맞았다. "오시게. 모르는 이이든 아는 이이든 이리 들어와 앉으시게. 어느 병이라도 그에 맞는 탕약을 내어줄 터이니." 

 

나는 숨을 깊게, 한참을 들이마시고 내쉰 뒤 문을 열었다. 동네 사람 같은 웃음을 지어 보이느라 온몸의 근육을 전부 쥐어짜는 듯 기력이 빠졌다. "안녕하세요, 제코라." 나는 거의 비틀거리듯 하며 집 안에 들어섰다. 관절을 힘껏 조여 무너지지 않게 굳히고 가능한 단단한 자세로 서서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횃불에서 비치는 녹광綠光이 그 위로 번들거렸다. "바쁘신데 죄송해요."

 

"죄송하다니 당치 않구려, 친절하신 객." 제코라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녀는 거품 이는 커다란 가마솥 옆에 서 있었는데, 한 줄로 도열시켜 세워 놓은 온갖 약초들을 곁눈질로 훑어보며 새로 개발하고 있던 탕약에 집어넣고 있었다. "그대 내 집에 있음은 그대 내 객이란 뜻이네."

 

"아, 네, 네......" 한기가 몰려들어 몸이 움찔했다. 제코라의 고향이라는 머나먼 사막 어딘가에서부터 흘러들어왔을 양식으로 조각된 장식들이, 이제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면 차갑게 얼어붙은 얼음 조각에 지나지 않을 것만 같아 나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 듣기로 마을 근처에 계시다는 은자隱者시라고 하시던데요... 시내로 잘 나오지 않으신다고 들어서..." 솔직하게 말해보자. 이번이 벌써 다섯 번째, 아니, 여섯 번째던가 되는 대화의 되풀이었지만 처음이나 지금이나 말이 잘 풀리지 않는 건 매한가지였다. "아......저는 메인해튼 대학 소속으로 화학 연구를 하고 있어요. 이 연구를 끝내야 하는데, 시약 네 종류가 부족하네요. 드, 듣기로는 파시는 것들 중에 음석Sound stone도 있다고 하던데, 정말인가요?" 나는 이를 악물었다. 제코라는 아직 대답하지 않았지만, 뭐라고 할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조금이라도 더 빨리 대답해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보통 포니와 달리 얼룩말들은 대답이 나오기까지의 시간이 제멋대로였다. 

 

"흠, 신비의 도구 음석이라. 마침 산양제 중에서도 질 좋은 것들이 있다네." 제코라는 본인 눈 앞의 가마솥 안 내용물만 하염없이 휘저으며, 그 위로 피어오르는 흐릿한 수증기에 대고 대답했다. "한 덩이에 다섯 비트 정도면 적당할 것이네. 값을 높여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닐세. 음석 구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라서." 그녀는 검은 상자를 올려둔 선반 쪽으로 느긋하게 걸어갔다. 그러면서 슬쩍 고개를 돌려 오늘 처음으로 내 쪽을 쳐다보았다. 벽안이 휘둥그레졌다. "무슨 일이 있어 그대 그렇게 껴입고 온 겐가? 온 땅에 눈보라가 몰아치기라도 하는 것인가?"

 

자, 시작이로군......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용기를 쥐어짜 망토와 후드 재킷에 달린 두건 둘을 전부 벗어 버렸다. 입술은 웃고 있는데 그 아래선 이빨이 딱딱딱딱 부딪치는 모습을 제코라가 보았는지 어쨌는지는 평생 알 길이 없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이 정도로 제코라의 신경이 다른 데로 흩어지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아하하... 놀라실 거 없어요. 제코라 선생님. 포니빌에 그런 이상기후가 들이닥친 게 아니니까요. 그냥 제 모, 몸 상태가 좀 그래서."

 

"몸 상태가 좀 그러하다니, 몸이 어떠하기에 그러는가?" 제코라가 검은 상자에서 검은 수정 네 개를 집어다가 꼬리 위에 소중히 얹었다. 반쯤은 걱정하는 듯, 반은 흥미로운 듯 오묘한 표정을 한 제코라가 다가와 물었다. "포니들은 대개 많이 걸쳐 봤자 모자 정도나 쓰고 다니는 것 같네만, 그대는 뭘 둘둘 말고 다니고 있지 않나!"

 

"아, 유전병이에요. 선생님 탕약으로도 고치기 어렵죠." 몇 번 다녀가다 보니 여러 구실을 가져다 붙였지만, 이 핑계만큼 빨리 귀가할 수 있는 핑곗거리가 또 없었다. 제코라에게 반감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같이 어울리고 싶은 사람이다. 제코라가 시내에 나오는 날이 언젠지 미리 알 수만 있으면 미리 앞질러 가서 두근두근하며 기다렸으면 기다렸지, 싫은 사람은 아닌 것이다. 제코라의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사지가 영영 마비되어 못쓰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일 뿐. "그것도 그렇지만, 선생님 댁까지 찾아온 것도 음석을 구할 수 있다니까 온 거고요."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벌써 뿔을 밝혀 동전지갑을 꺼내고 있었다. 몇 주 동안이나 길바닥에서 리라를 퉁겨 모은 돈이 이 매매로 싹 사라지는 살 떨리는 순간이었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하나에 다섯 비트라고 하셨죠? 그러면 여기 20비트......"

 

"아닐세, 객이여. 불초한 솜씨나마 도움이 될 만한 게 있을 걸세!" 제코라는 굉장히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다가, 순식간에 밝아졌다. "아하! 용 탕약을 좀 드셔 보시는 건 어떤가!" 

 

어머나 젠장.

 

전에는 이런 말 한 마디도 없었잖아.

 

"어어어어..." 나는 돈을 건네주다 말고, 끔찍한 밀림의 한가운데에 홀로 낙오된 여행자처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요, 용 탕약이라뇨? 제코라 선생님, 진짜, 전 음석만 있으면—"

 

제코라는 내 말은 들은 척도 안 하고 벌써 근처 진열대에서 병 하나를 집어들더니, 나무그릇에 새빨간 액체를 가득 따라주었다. "포니 여러분과 함께 살며 여러 미덕을 배웠네만, 그 중에서도 객을 환대하라는 것이 제일이었네. 음석이야 벌써 금전이 오고갔으니 이미 그대의 것이네만, 그대처럼 오한에 떨어 쇠약해진 이를 그냥 내보내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닐 터이지!"

 

"제코라 선생님, 진짜......" 나는 발굽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대체 왜? 이렇게 좋은 사람들 한가운데서 왜 나 혼자 저주를 짊어지고 있어야 하는가? 그냥 음석만 낚아채서 달아날 수도 있다. 아예 나중에 숨어들어 훔쳐내고 이십 비트는 내가 필요한 곳에 잘 쓸 수도 있을 터이다. 그런다고 문제가 생길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내가 강도짓을 하든, 성인군자처럼 굴든 제코라는 어차피 나를 기억하지 못할 텐데. 왜? 왜 굳이 이러고 앉아 있는 거지? 이런 짓은 벌써 수도 없이 해보지 않았나? 어차피 악몽 같은 삶, 내 곁에는 아무도 없는데. 급하게 필요한 물건을 조금이라도 빨리 주머니에 챙겨 넣어야 하는 일인데, 한 번쯤은 발굽을 더럽혀도 되는 거 아닌가? "이러실 필요가..."

 

"말로는 '괜찮다'고 하지만, 그대 목소리는 정반대라네." 제코라는 웃는 얼굴로 정곡을 찌르며, 탕약을 따른 그릇을 들이밀었다. "일단 들게. 오한이 그칠 걸세."

 

세상에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이 단 하나라도 있었다면 이렇게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가만히 다가가 제코라가 내민 탕약 그릇을 감사히 받아들었다. 마셔 봤자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라는 냉혹하고 쓰디쓴 진실보다는 쓰지 않았다. 제코라가 천연두, 나병, 페가수스 특유의 관절 질환까지 탕약으로 다스릴 수 있는 명의라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이제 이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아무것도 모르는 양 순진하고 고마워하는 빛을 얼굴 가득 띄우고 활짝 웃어 보이는 것뿐이었고 그것은 내가 제코라에게 해 주어야 할 의무이기도 했다.

 

"감사합니다. 제코라 선생님. 이렇게까지 챙겨 주시지 않아도 됐는데..."

 

"그대가 왔던 곳으로 되돌아갈 때까지 버틸 정도는 될 걸세." 제코라가 말했다. "용 탕약을 좀 마셨으니, 이제 그대의 이름을 물어도 폐가 되지는 않겠지?"

 

"라이라." 나는 말했다. "라이라 하트스트링스." 이번엔 얼마나 지난 다음에 어떤 대답이 나올까, 머릿속으로 메트로놈을 돌리며 생각했다.

 

"아, 하트스트링스. 진실로 좋은 이름이구려. 만인이 삼라만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본따 태어났다면 그것만한 홍복洪福이 또 없겠지."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웃음이 나왔으므로, 내가 웃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탕약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었지만, 그 말 한 마디만으로 잠시나마 나를 조여 오는 추위를 견딜 만했다. "고맙습니다. 말씀에 압운押韻이 살아 있는데, 괜찮은 악기가 없는 게 좀 아쉽네요."

 

"말에 압운을 싣는 것은 주술적 의례에 불과하다네." 제코라가 옆 진열대로 다가가 잠시 놓아두었던 음석을 다시 집어들며 말했다. "감히 악사의 영역을 범하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

 

"안 될 것도 없지 않나요?" 나는 물었다. 근처 선반에 목조 조각상이 여럿 진열된 것이 눈에 띄었다. 의례용 북으로 보이는 악기를 둘러싸고 노는 얼룩말들을 묘사한 그림도 한 점 있었다. 순간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음악만큼이나 사람을 잘 드러내는 방법도 없으니까요." 나는 사막을 그린 그림을 씁쓸히 쳐다보며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얼룩말이든, 포니든."

 

나는 잠시 멈추었다가, 20비트를 건네주었다. 제코라가 음석 네 덩이를 건네주었다. 음석을 가방에 넣었다. 오늘은 내가 여길 찾아오기 시작한 이후로 처음, 제코라에게서 다른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 '새로울' 말을 해주는 것이 도리에 맞을 것이다.

 

"약초학이나 탕약 끓이는 법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이라도 제코라 선생님과 같이 작업해 보고 싶어할 작곡가들이 한둘이 아닐 거에요. 트와일라잇 스파클도 그렇고, 그 친구들도 선생님 칭찬이 대단하더군요. 그러지 않았다면 음석 구하겠다고 여기까지 오진 않았을 거에요."

 

제코라가 대답했다. "얼룩말이 뱉어내는 말의 압운을 가지고 곡조를 쓸 시간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럴 시간에 다른 일을 하는 편이 더 나을 걸세."

 

"그래도... 선생님..." 나는 방의 사방을 에워싼 벽면을 돌아보았다. 다시 한기가 몰려들었다. 이번에는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제코라를 향한 것이었다. 그곳에서 이방인은 나였고, 나는 그곳에 조금도 동화되지 않았다. 고향을 떠나온 제코라는 포니빌 인근에 정착해 집을 지었고, 그녀의 작은 둥지는 척 보기에도 아름다웠지만 그만큼 낯설고 이상한 곳이기도 했다. "여기 계셔 봤자 혼자... 혼자일 수밖에 없잖아요." 다시 몸을 타고 기어오르는 오한에 떨리는 목이 겨우 목소리를 짜냈다. "그것도, 선생님 스스로 선택하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저 같으면..."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그냥 문 열고 나가면 그걸로 만사형통인데. 음석도 샀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지만 나는 말했다. "시내에 친하게 지낼 만한 사람이 저렇게 많은데, 혼자서 지내지는 않을 것 같아요."

 

제코라는 내가 애원하다시피 꺼낸 말에는 관심도 없는 듯했다. 초소로 돌아가는 병사처럼, 휘젓던 가마솥 쪽으로 걸음을 돌려놓을 뿐이었다. "오직 홀로 오롯이 있을 때에만 최선의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네. 주술사의 일은 공부를 마치지 않고서는 도저히 시작할 수도 없는 것이니."

 

제코라를 향하는 내 눈길은 필경 쓸쓸해 보였을 것이다. "우리 모두 각자 자기에게 소중하고 중요한 것들을 하면서 시간을 쓰기 마련......" 다시 한 차례 한기가 들이닥쳤다. 안와 속에서 안구가 그대로 얼어 버리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어떻게 제코라를 계속 쳐다보고 있을 정도는 되었다. "사운드트랙도 없이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길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 말을 듣자 제코라가 재미있다는 듯 이쪽을 돌아보았다.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설마 그대가 '우리'라는 말을 쓸 줄은 생각치 못했네. 재미있지 않은가. 주술사가 여기 나 하나밖에 더 없지 않나? 하하하하......" 제코라의 입 밖으로 던져진 웃음은, 분명 따라 웃어주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쓰디쓴 약이요, 도저히 익숙해지지가 않는 저 탕약을 세계 각지에서 긁어모아 철벅이며 뒤섞는 것보다도 속이 메슥거리는 소리였다.

 

"주술사... 음악가... 여신..."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 사방의 벽들은 온몸에 얼음을 두르고 더욱 가까워져 있었다. 나는 눈더미에 발이 빠지기라도 한 듯 비틀거리며 나무집 바깥쪽으로 뒷걸음쳤다. "각자의 성취를 나누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만이 아는 것으로 족하면, 우리가 대체 뭐가 되겠습니까?"

 

거품 끓는 가마솥 안 수면 위로 제코라의 얼굴이 비쳤다. 순간 다른 것이 번득이며 지나간 듯했다. 가늘게 뜬 그녀의 벽안에는, 솥에서 피어나는 수증기로만 보였을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눈앞의 벽을 쳐다보았다.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누군가와 이야기를 했던 것처럼 목이 풀려 있었을 터지만, 이상한 일인 만큼이나 그녀에게는 그 또한 아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제코라는 늘 혼자였으니.

 


 

나는 해가 지기 전에 오두막집에 돌아왔다. 도착하자마자 '밤의 만장'을 연주할 준비에 착수한 것은 아니다. 내게는 혹한의 땅이나 다름없었던 에버프리 숲에 다녀오는 동안 피로가 어마어마하게 쌓였으므로 몸을 쉴 필요가 있었다. 나는 그대로 오두막 한가운데에 드러누워 이불과 담요를 산처럼 쌓아 덮었다. 뼛속까지 스민 한기를 녹여 없애는 동안 머릿속으로 만장을 다시 짚어보았다. 이것은 그 이상을 준비하는 시간이기도 했는데, 하루 종일 명상하면서 준비해도 부족한 비곡의 후폭풍에 대비해 마음의 준비를 하는 시간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내 인생을 제삼자가 본다면 앞일도 뻔히 정해져 있고, 상황도 크게 바뀌는 것 없이 일정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건 실체적 진실에서 한참을 벗어난 생각이다. 문자 그대로, 미지의 세계 속에 나 자신을 내던져야 하니까. 심지어 내가 그 비밀을 파헤쳐야 하는 비곡을 남긴 바로 그 알리콘 공주조차 이걸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는 판이다. 한 줌이나마 진실을 알 만한 자라 해도 나이트메어 문 단 한 명뿐, 저주를 짊어진 자에게나 그렇지 않은 자에게나 그녀의 소멸은 동등하게 행복한 일이었다.

 

무의미한 것에서 의미를 끌어내는 것은 필멸자의 사명이다. 여신들께서 수천 년 동안 우리와 함께 달려오신 세월 동안 이 명제는 단 한 번도 감히 부정된 적 없다. 내가 짊어진 임무가 홀로 감당하기에 너무나 무거워질 때, 나는 내가 내 기억과 함께 외로울 수는 있을 것이지만 내 고난과 함께 외로울 수는 없을 것임을 되새겼다. 나는 거기서 위안을 찾지 않았다. 그 이해로 나는 현실을 감당할 힘을 얻었다.

 

한 시간 삼십 분쯤 그렇게 누워 쉬다가, 슬슬 준비가 됐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라를 집고, 횃불을 챙겼다. 악보와 연구노트, 기름 등잔을 들었다. 마지막으로 검은 수정의 형태를 한 음석 네 개를 준비했다. 아주 오래 전에, 산양이나 유니콘을 비롯한 사람들이 특정 가청주파수를 흡수하는 용도로 활용한 도구다. 트와일라잇네 도서관에서 몇 시간씩 자료를 뒤적이면서 알게 된 것으로, 이퀘스트리아 문명 초기 선조들은 음석을 이용해 신비한 마력이 담긴 가청주파수에 접속했다고 한다. 자료는 음석의 기원은 디스코드가 처음으로 이퀘스트리아에 맞서 봉기를 일으키기 전부터 있었다는 진동석이라는 가설을 제시하고 있다. 진동석은 혼돈 에너지에 그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다고, 예전에는 그렇게 알려져 있었다는 모양이다. 음석을 몇 차례 써 보며 나름대로 사용법을 깨치고 나니, 항아비곡이 유발하는 부작용을 음석에 결속시켜 특정 지점에 집중시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비곡 연주는 이전보다 한참은 더 견딜 만한 것이 되었다. 만장 다음에 뭐가 들이닥치더라도 내가 그걸 제대로 감당할 방책, 방책이라고나 해둬야 할 것만큼 그 날 밤에 절실한 것이 또 없기는 했지만.

 

그런 아이러니와 함께 날은 저물어 밤이 되었다. 나는 오두막집을 나와 숲 근처에 대충 지어둔 조그마한 판잣집으로 이어진 어둠 속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등잔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빛이 앞을 밝혀주었다. 판잣집 문에 걸린 빗장을 끄르고 문을 열자 땅 속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경사 위로 튀어나온 나무 계단이 시야에 들어왔다. 염동력을 단련하는 겸해서 몇 달 동안이나 판 토굴이었다. 판잣집에 들어서서 문을 닫고, 대충 15피트 정도 지하로 내려가자 가로 20걸음, 세로 30걸음 정도 되는 직사각형 모양 공간이 나타났다. 항아비곡 연주 실험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을 때는 주변 마을 주민들에게도 부작용이 미치지 않을 거란 확신이 없었다. 그렇다면 안전하게 나 혼자서 항아비곡을 연주할 수 있는 일종의 지하 벙커를 파자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그리하여 이미 저주를 짊어진 나 하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비곡을 들을 일이 없을 거라 장담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땅 속 작은 공동空洞 천장에 박아둔 금속 갈고리에 등잔을 걸었다. 희미한 호박색 불빛이 토굴 사방에 덧댄 판자 벽 위로 흔들렸다. 바닥은 한 걸음을 딛을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고른 조약돌을 가득 깔아두었는데, 방 정중앙의 한 자리만은 예외였다. 그 자리는 나무 판자로 바닥을 댔고, 그 위에는 금속 받침대가 놓여 있었다. 나는 받침대 위에 리라를 올려두었다. 뿔을 밝혀 한쪽에 박아두었던 목조 스툴을 집어다가 리라 앞에 놓았다. 다음은 마찬가지로 판자 바닥을 깔아둔 네 귀퉁이마다 음석을 하나씩 올려두었다. 나와 리라를 둘러싸고 음석이 하나씩 놓여 있는 형국이었다. 나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며 뿔 속 마력선에 정신을 집중하고, 네 개의 검은 수정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음석에서 칙칙한 에메랄드 색 불빛이 흘러나와 천장에서 떨어지는 호박색 불빛과 뒤엉켰다. 난방절 아침을 보는 듯했다. 불빛이 뒤섞이며 엉키는 한가운데에 앉아 차분히 숨을 고르고, 다시 뿔을 밝혀 받침대 중간 정도 높이쯤에 음표가 빼곡히 들어찬 노트를 띄웠다.

 

몇 분 동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미지의 경계 위를 넘어설 듯 말 듯, 조용히 앉아 있었다. 나는 산 자들의 세상을 떠도는 망령의 운명을 타고나기라도 한 양, 하관을 마친 관 내부처럼 막막한 침묵을 지켰다. 실험을 시작하는 것이 나는 항상 어려웠다. 그 끝에 무엇을 마주치게 될지, 마지막 소리가 솟구쳤다가 사라지고 난 뒤의 빈자리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지, 짊어진 저주를 벗어던질 수 있을지 없을지, 저주가 그 무게를 더할지 어떨지, 의문의 무게는 그 무엇보다도 무거웠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제코라가 생각났다. 고향은 이미 머나먼 곳으로 아득한데, 숲 속 집에 앉아 홀로 주술 연구를 하고 있을 그 여자가 떠올랐다. 무엇이 그 여자를 깊고 깊은 고독으로 내몰았으며, 눈앞의 연구에 매진하게 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약으로 만인을 구제하고자 하는 순수한 이타심인가? 어떤 목표가 있기는 한가? 지금껏 그녀 홀로 해 온 모든 것에서...... 뭐라도 얻은 게 있기는 한가?

 

다시 하루를 바쁘게 살아내야 한다는 단순한 이유 하나만으로 매일 반복되는 일과를 쉬지 않고 계속하는 제코라의 용기와 열의가 나는 몹시 부러웠다. 저주를 떨쳐내는 날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제코라만큼의 열의를 갖고 있기는 할까? 동네 사람들이 내게서 발견하길 바랐던 그 모든 미덕을 다시 만인 앞에 내보일 수 있을까?

 

생각을 너무 많이 했다 싶을 때까지도 무엇 하나 제대로 생각된 것이 없었다. 그래도 그 덕에 내가 어제 해야만 했던 유일한 일을, 해야 할 연주를 할 수 있었다. 나는 스툴에 차분히 앉아 숨을 골랐다. 뿔을 밝혀 염동력을 끌어내 현 몇 줄을 가볍게 퉁겼다. 시련의 시작이었다.

 

'그림자 전주곡' 연주가 시작되었다. 그와 동시에 피해망상과 편집증의 전율이 밀려왔다. 머리 위에서 흔들리는 등잔의 호박색 그림자는 어느새 생명과 형상을 갖춘 불협화음 그 자체가 되어 있었다. 나는 사방에 놓아둔 네 개의 음석에서 흘러나오는 녹색 불빛에 집중하며 연주를 이어나갔다. 잠시 후 전주곡의 을씨년스러운 선율이 잦아들었다. 전주곡은 그리 긴 곡이 아니었다. 나는 이미 다음 곡인 '일몰 볼레로'를 연주할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머릿속에 보이지 않는 타악기가 가득 들어차 저마다 쿵쿵 소리를 울려대는 듯, 지하실 전체가 볼레로의 빠른 박자에 맞춰 진동했다. 음석에서 빠져나오는 녹색 빛무리가 더욱 밝아졌다 싶었더니, 미리 놓아둔 음석이 아니라 내 뿔에서 나오는 빛이었다. 에메랄드 빛 섬광이 점차 흔들리고 깜박이기 시작했다. 이제 '파도의 행진'으로 이어갈 때가 되었다. 특유의 먹먹함이 몸을 타고 기어올랐다. 나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가볍고 용감히 다음 곡을 향하여 전진했다.

 

'어둠 소나타' 연주가 시작되자마자 전신의 피가 얼어붙는 듯한 추위가 엄습했다. 등잔 불이 점차 희미해지는 것인지, 내가 그렇게 본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목구멍에서 넘실대는 울음을 억지로 밟아 죽이면서 내게 다가오는 지하의 어둠을 다만 가만히 응시할 뿐이었다. 적어도 이만 번 차고 기울었을 달의 무게가 나를 짓누르는 듯했다. 나는 자포자기한 채 내 머릿속 밤하늘 한가운데 뜬 창백한 구체를 향하여 자맥질했다. 보이지 않는 다리들이 나를 들어 스스로 홀리는 케던스의 흐름 위로 옮겨놓았다. 이제 더 두렵지 않았다. 다음 곡은 '별들의 왈츠'였으니. 시야가 회복되었고, 멀쩡해진 눈으로 다시 보니 등잔 불은 당연하다는 듯 그 자리에 그대로 잘 밝혀져 있었다. 나는 곧 부닥칠 철의 장막을 생각하며 빛을 품 가득 안았다. 나를 맞이한 벽은 흡사 시커먼 얼음과도 같았다. '달의 애가'의 차가운 입맞춤이 스치고 지나간 순간 나는 의자에서 거의 굴러 떨어질 뻔하였다. 애가는 언제라도 내 영혼을 유리잔처럼 손쉽게 깨뜨려 없앨 수 있다고 위협하는 듯하였다. 나는 다만 참고 견디며 내가 가진 모든 무기를 동원해 애가의 파르스름하며 흰 곡조를 따라 질주했다. 파훼법을 아는 것은 여기까지였고, 이제부터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다음 곡은 '밤의 만장'이었다. 그것은 차라리 지금까지 해 온 모든 음악의 종착역이자 그 스스로의 죽음과 같았다. 당시 내가 만장에 접근한 방식은 수도승에 가까웠는데, 무엇을 더 더하거나 뺌이 없이 순수한 형태를 유지하며 함부로 솟구치거나 꺼짐이 없이, 그저 그러한 대로 흘러가도록 연주했다. 그 누구도 죽음 앞에서 자신을 내세울 수 없듯, 나 또한 만장 앞에서 장난질을 칠 수 없었다. 만장은 그 자체로 어마어마하게 엄숙했는데, 그 하나만으로 두 고막이 비명을 질러대는 듯했다. 현을 한 번 퉁기는 사이사이마다 숨소리가 끼어들어 허깨비나 마찬가지인 마침표를 찍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의식적으로 사방을 둘러싼 벽을 쳐다보지 않았다면 아마 토굴이 어느 순간 바닥 없는 나락으로 변했구나 싶었을 것이다. 연주의 반향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현을 한 번 퉁길 때마다 같이 솟아나는 잔향을 전부 거두어들여 죽음과도 같은 침묵을 자아내는 것도 음석의 권능인가? 아니면, 소리 자체가 죽어 버리고 있는 것인가?

 

당황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당황할 수가 없었다. 여기까지 와서 실수하는 것은 용납 불가능했다. 지금까지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잘 연주해 놓고, 중간에 뚝 끊어 버리면 무슨 일이 생길지 누가 안단 말인가. 완벽하긴 했을까. 완벽했어야 하리라. 이보다도 음악답게 연주할 수 있었을까. 포니빌 길가에 서서 여러 차례 만장을 변주해 왔지만, 단 한 번도 이처럼 아름답게 들린 적이 없었다. 기억에 사무치는 아름다움, 아픈 아이에게 어둠의 검은 베일 너머에는 어머니의 입맞춤보다도 편안한 무언가가 있으니 어둠을 받아들이라고 기꺼이 말할 수 있을 아름다움이 만장에 있었다.

 

셀레스티아 공주님 맙소사. 대체 무슨 생각을 했단 말인가. 만장이 내게 말하고자 한 바는 대체 무엇이었는가. 다시 들으려 했지만, 무엇인가 귀를 막아서 듣지 못했다. 한없이 이어진 쇠사슬이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시커먼 창자처럼 빙빙 돌며 회오리바람처럼 세상의 시커먼 중심을 향하여 휘몰아치는 소리만 들려왔다. 어릴 적, 예술을 가르치던 선생들은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색이 있다는 거짓말을 했었다. 이제 그 보이지 않는 색들이 만장의 목구멍 너머에서 쏟아져 나와 칠흑보다도 어두운 어둠으로, 여신께서 공기와 빛, 슬픔을 빚으시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세상을 기어다니며 끽끽거렸다는 무언가의 시커먼 피처럼 나를 엄습했다.

 

무서웠다기보다는, 그냥 한없이 추웠다. '달의 애가'에서부터 그랬다. 나는 차라리 존재를 잊어버리는 것으로밖에 인지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무언가의 아가리 속으로 밀려 떨어지는 날개 뜯긴 버러지에 불과했다. 내 정신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연주를 멈추려고 했지만 이미 리라는 내 통제 없이도 스스로 소리를 일으키고 있었다. 옆에 망치가 있었으면 아마 곧장 뿔이 가루가 될 때까지 휘둘러댔을 터이지만, 발굽 또한 내 것이 아닌 것은 마찬가지였다. 고개를 숙여 두 앞다리를 내려다보았으나 눈에 보이는 것은 내 눈물뿐이었다.

 

이제는 공기조차 견디기 어려웠다. 보지 않아도 보였고, 내 몸 자체가 이제 내 몸이 아니었다. 등잔에서 흘러나와야 했던 빛은 꺼진 지 오래였다. 흑석영은 이미 박살이 나 흩어졌다. 토굴 안에 잿빛 안개만 자욱했다. 아이가 생애 처음으로 꾼 악몽과도 같았다. 살려달라고 벽에 대고 빌었고 벽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벽 위로 수천 곳의 모습이 흘렀다. 내가 울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듯 벽들도 그만큼 슬펐던 모양이다. 벽에서 흘러나온 눈물은 세월의 빛으로 반들거렸고, 차가운 소나기처럼 나를 휩쓸었다. 눈물이 깨지며 세상 모습이 수만, 수억 개씩 명멸했다. 불 붙어 미래영겁 불타게 된 해변의 모래처럼 새까만 별들이 수도 없이 죽어나가고 있었다.

 

나는 앉은 채 쓰러졌고, 나를 따라 토굴이 함께 쓰러졌다. 그렇게 우리는 어둠보다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쇠사슬을 지나 자맥질했다. 리라의 현은 지평선과 지평선 사이를 잇는 날개뼈처럼 늘어나 물에 잠겼고, 끝없는 달빛의 창백한 빛에 젖어 반짝거렸다. 그리고 모든 것이 어둠에 잠겼다. 내가 처음 들은 내 목소리는, 울음이었다.

 

내 모든 희망과 두려움의 반그림자 속에 홀로 서서, 나는 그 목소리를 부둥켜안았다. 그리고......

 

들었다...

 


 

"라이라?"

 

제브라하라 북방에는 가젤이 사는데, 이들은 오래 전부터 자르면 흰 즙을 분비하는 갈대를 베어다가 그 빈 줄기를 가지고 결혼식에 쓸 플루트를 만들어 사용해 왔다. 다만 언젠가부터 이주를 시작한 영양의 소개로 일부다처제적 의식이 도입되며 갈대로 만든 플루트 대신 말라붙은 강의 진흙을 파내 구운 오카리나를 사용하는 것으로 문화가 바뀌었다. 이렇게 바뀐 전통은 지난 오십 년 동안 가젤 사회에서 기본적인 기악 연주법으로 자리잡았다.

 

"라이라?!"

 

북방민족인 가젤은 제브라하라 남방 평야지대에 정착해 살던 얼룩말 부족과 접촉한 뒤, 얼룩말의 악기인 타악기를 도입하여 전통 민요 연주의 한 축으로 편입시켰다. 이것이 불화의 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산양 부족들이 북방 산악지대로 이주한 이후 기록상 최초로 제브라하라에서 작곡이 이루어진 케이스이다.

 

"라이라 하트스트링스!"

 

엄마 목소리네...

 

온갖 교과서와 공책이 어지러이 널브러진 침대 한가운데서 눈을 뜬다.

 

창 밖으로 무지갯빛으로 반짝이는 캔틀롯의 평화로운 정경이 보인다.

 

왠지 다른 것보다도 엄마 갈기가 더 밝아 보이는걸.

 

아, 엄마 표정 완전 구겨졌네.

 

"으어어어......" 나는 눈을 깜박이며 일어나 앉았다. 공기가 차갑기는 하나, 갑자기 오한이 스치고 지나간 이유는 아니다. "내가 뭐 깜빡하고 있나......?"

 

"두 시간 있으면 차 떠난다 이것아!"

 

"이런 망할." 청록색 가방 안에 공부하던 자료를 급하게 쑤셔넣는다. "태양절 축제! 트와일라잇 지지배한테 이제 죽었다!"

 

"죽이다니? 몇 달 만에 보는 건데 잘도 그러겠다 얘!" 엄마가 피식 웃는다. 엄마 목소리의 조성은 내 실력으론 절대 모방할 수 없다. 별로 그러고 싶지도 않지만. "근데 딸. 꼭 그걸 다 챙겨가야겠니? 트와일라잇이랑은 태양절 축제 일로 만나는 거니까. 갔다 와서도 공부할 시간은 충분히 있을 텐데."

 

"0.2점만 더 따면 학과 1등이거든요!" 다른 공부거리들을 가방에 밀어넣고 닫았다. "그런데 어떻게 1초라도 낭비하겠어요?"

 

"트와일라잇이랑 있을 때도 책 들여다보느라 걔한테 신경 안 쓰고 그러지는 말아라."

 

"에이 엄만. 딸이 그 정도 일반상식도 없을까봐." 엄마에게 눈을 찡긋해 보인다. 잽싸게 엄마 곁에 붙어서서 뺨을 비비고 계단을 내려간다. "포니턴 가서 엽서 보낼게요."

 

"포니빌이야." 엄마가 불러세운다. "아, 그리고......"

 

달려 내려가다가, 엄마 목소리를 듣고 바로 멈췄다. 나는 층계 가운데에 멈춰서서 신음하며 돌아보았다. "설마...... 저 또 뭐 깜빡한 거 있어요?"

 

"뭐긴 뭐겠니?" 중년 끝자락에 접어든 부인 특유의 나긋한 느낌으로 엄마의 뿔이 빛을 발했다. 그와 동시에 시야 가장자리로 무서우리만치 익숙한 형상이 날아 들어왔다. "공부하면서 쓸 게 아니라도, 축제 동안 한두 곡 정도는 퉁겨 볼 만 할 거야."

 

뺨이 달아올랐다. 나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고마워요 엄마." 나도 뿔을 밝혀 리라를 건네받고 그대로 가방에 밀어 넣었다. "정말이지, 뿔이 탈착식이었으면 진즉에 어디서 잃어버렸을 거라니까요."

 

"그러니까 뿔 잘 간수하고 다니렴. 우리 똑똑이 앞날이 그 뿔에 달려 있으니까." 엄마가 말했다. 마지막으로, 엄마가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대로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창문이 활짝 열려 있다.

 

캔틀롯 공기는 싱그러우면서도 깊은 맛이 있고, 멋진 소리로 가득하다.

 

아빠가 방 한가운데 서서 창문을 죄다 열어놓고 요즘 그리고 있는 그림을 휘적이고 계신다.

 

"염병." 하고 툴툴대시더니, "내 눈 앞에 있는 색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못 만들 게야." 하고 투덜대신다.

 

"딱 좋아 보이는데요 뭐." 노래하듯이 끼어든다. 잽싸게 달려가 뺨을 쓱쓱 비빈다. "포토 피니시도 아빠가 그려준 초상화 보면 좋아할걸요."

 

"이건 초상화가 아니라 칸탈루프*5 정물화란다."

 

"어... 음... 넹. 뭐... 그 아줌마가 좀 닮긴 했잖아요." 나는 낄낄 웃다가, 현관으로 잽싸게 내달렸다. 밝은 햇살이 나를 감싼다. "갔다 올게용! 좀 있다 봐요!"

 

"포니빌에 너무 오래 붙어 있지는 마라." 아빠가 조용히 말한다. "시골 동네야. 듣자하니 거기 냄새는 죽을 때까지 안 빠진다더라."

 

"아빠두...... 달랑 며칠 있다 올 건데요 뭘! 히힝. 나 갔다 왔는지도 모르실 거면서!"

 

아빠가 그림을 들고 멀어져 간다.

 

모든 게 흐릿해진다.

 


 

열차 내부는 혼잡하기 짝이 없다.

 

도저히 집중이 안 되는 환경이다.

 

바로 두 자리 너머에서 애 하나가 울어대고 있다.

 

포니레츠키*6의 작품을 다시 생각한다.

 

노트에 음표 몇 개를 끼적거려 적는다.

 

악보의 빈자리는 이제 35마디. 옥타비아가 최근에 발표한 '턱수염 마법사를 위한 아다지오'에 비빌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다음 역은 포니빌, 포니빌입니다! 다음 역은 포니빌, 포니빌입니다!"

 

셀레스티아 맙소사, 소음공해 천국이다.

 

기차가 급커브를 꺾는다.

 

뺨이 창문을 짓누르는 감촉이 생생하다.

 

그런 주제에 창 밖 풍경은 정겹기 짝이 없었다.

 

사과 과수원이라도 되는지 사과나무가 빽빽히 서 있고, 풍차에 낡아빠진 지붕을 얹은 건물이 몇 채 보인다. 종탑이 보이나 싶더니, 도로 사과나무만 가득하다.

 

"그러네..." 나는 혼자 중얼거리며 피식 웃었다. "땅 파먹는 동네 그 자체구만."

 

다시 텅 빈 악보를 내려다본다. 창 밖보다는 훨씬 낫다.

 

조용히 멜로디를 흥얼거려 본다.

 

옥타비아, 부러워 미치겠다 정말......

 


 

"트와일라잇?! 워후!"

 

앞에 사람들이 지나다니고는 있지만 미친 여자처럼 실실 쪼개면서 펄쩍펄쩍 뛴다.

 

"야! 트와일라잇! 나 왔다!"

 

트와일라잇은 농사꾼들에 둘러싸여 소풍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그 앞에 놓인 접시에는 반쯤 베어먹은 파이 하나가 놓여 있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이쪽으로 고개를 돌릴 때 트와일라잇의 보라색 눈동자가 그랬듯, 눈에 채이다시피 들어찬 사과처럼 반들거린다.

 

"아. 라이라. 왔니." 트와일라잇이 억지로 씩 웃어 보인다. 뭔가 고민이 있는 모양이다. 적어도 저 양반들이 트와일라잇에게 대접한답시고 내놓은 먹을거리가 위장을 압박하는 것보다는 심오한 문제일 것이다. "문댄서 편지에 네가 올 거라고 적혀 있더니, 진짜로 와 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글쎄 뭐 적어도 한 명은 그런 것 같다 야." 사방에 펼쳐진 사과 과수원 곳곳을 돌아다니며 일하는 농사꾼들이 등에 흐르는 땀을 문질러 씻어내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했다. "휴! 너도 냄새난다 싶지? 왜 올해 일출식을 이런 산간벽지에서 하기로 하셨나 모르겠다니까?"

 

"그렇게 나쁜 동네는 아냐. 좀 강박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친절하기는 하지만. 뭐, 그게 보탬이 되는 건 아니긴 하다."

 

"히히히히...... 너 오늘 밤은 그냥 엎어져서 푹 잠이나 자야겠는데." 나는 눈을 찡긋해 보이며 트와일라잇의 배를 가리켰다. "위세척이라도 받든가."

 

"그건 불가능해, 라이라." 트와일라잇이 신음했다.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 수제자 자격으로 축제 준비를 감독하라고 하셨단 말이야. 여기가 첫번째인데, 이대로 가다간 공연 담당자들이랑 얘기해 보기는커녕 스탠드업 코미디라도 할 수 있을까 모르겠어."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전부 다 저마다 다른 곳을 보고 있다.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꿀 같은 기회를 함부로 날려 버린 적이 없었다.

 

"씁......" 트와일라잇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단순한 사람들이니 어그로 끄는 데 굳이 공 들일 필요 없겠지?"

 

"어. 제발." 트와일라잇이 발굽을 뻗어 내 두 발굽을 감싸잡는다. "뭐라도 좀 해 줘!" 부탁이 아니라 애원 수준이군. "나 좀 꺼내 주라!"

 

"걱정 붙들어 매셔." 가방에서 리라를 꺼낸다. "요놈을 가져왔지."

 

곧장 현을 주르륵 일자로 긁으며 퉁기고, 큰 목소리로 외친다.

 

"오마나 세상에 네상에! 저기 위니 넬슨*7 아냐?!"

 

안타깝게도 농부 가족은 저게 무슨 헛소리래, 하는 듯 멍청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한 박자 쉬고, 헛기침을 한 뒤 소리친다. "으악, 과수원에 불 났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농사꾼들이 한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저 건너로 달려간다.

 

눈 깜짝할 사이에 트와일라잇과 나, 둘만 남았다.

 

"지금이다. 튀어!" 트와일라잇이 외마디 비명과 함께 잽싸게 튀어나간다.

 

나는 그 뒤를 깔깔 웃으며 따른다.

 


 

"트와일라잇! 왔구나!" 스파이크가 길바닥 한가운데서 서성거리며 기다리다가 놀란 소리로 말했다. 그러더니 이상하다는 눈길로 쓱쓱 훑어보았다. "하느님 맙소사. 사과 음식을 얼마나 먹여댄 거야?"

 

"으으으으......" 트와일라잇은 당장이라도 위장에 들어찬 음식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은지 억지로 침을 눌러 삼켰다. 나란히 스파이크 쪽으로 걸으며, 트와일라잇은 속이 메슥거린다는 얼굴로 씩 웃으며 말했다. "때맞춰 와준 게 천만다행이지 뭐야."

 

"스파이크한테도 고마워하라구." 나도 피식 웃었다. "아마 거기 있을 거라고 얘기해준 게 걔거든. 설마 그래도 파이를 뱃속에 막 구겨넣고 있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제발..." 트와일라잇이 우울한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파이 얘기는 꺼내지도 마. 나도 할 거 없어서 그러고 붙들려 있던 게 아니니까."

 

소꿉친구가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나 더 가까이서 관찰하고 싶어져서 한 바퀴 돌아 반대쪽으로 가 말했다. "뭐 걱정거리라도 있어? 지난번에 봤을 때는 공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문이라며 한도 끝도 없이 얘기를 쭉 뽑아내더니. 그건 그렇고, 내일 해 띄우시기 전까진 행차 안 하시는 거 맞지? 지금쯤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발 동동 구르고 있어야 하지 않나 싶어서 말이지. 아, 노인네 같은 표현인가. 히히히......"

 

"라이라. 너 음악사 공부 계속 하고 있지. 그렇지?"

 

"안 하고 있다면 그건 그거대로 뭐가 잘못돼도 한참을 잘못된 거지."

 

"혹시 '조화의 원소'와 관련된 곡이 있었다는 언급 같은 게 나온 적 없어?" 트와일라잇이 헛기침을 해 목을 닦고 계속 말했다. "대충 천 년쯤 전이라던데?"

 

"하아...... 또 이 얘기." 스파이크가 눈을 굴리며 구부러진 길 너머로 보이는 시내 번화가 쪽으로 총총히 걸어갔다. "다음에 만나봐야 할 사람이 '대싱 레인보우'인가 뭔가 하는 사람이었지. 미리 가서 얘기 좀 해둘게."

 

나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스파이크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쟤는 또 왜 저런대니?"

 

"과민반응이다 이거지 뭐."

 

"과민반응? 무슨 과민반응?"

 

트와일라잇이 대답 대신 한숨을 쉰다. 트와일라잇은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영영 알 수 없을 지식을 머릿속 곳간 가득히 쌓아놓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트와일라잇을 앞으로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경외할 뿐. 문댄서만 여기 있었어도 얠 좀 웃길 수 있었을지 모르는데.

 

트와일라잇이 전혀 진심으로 안 느껴지는 미소를 띄우며 다가선다. "아냐, 신경 쓰지 마. 그냥... 올해나 작년이나 똑같잖아. 일상적으로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살 수 있다니 얼마나 복 받은 거야. 깊이 감사해하면서 축하나 하자구."

 

"거 참, 얘기 좀 해 줘 봐." 피식 웃으며 말한다. "듣자하니 오늘 밤은 동네 한가운데 시립도서관에서 묵을 거라던데."

 

"맞아. 축제 준비 기간 동안 숙소로 쓰기로 되어 있어."

 

"웬 민트그린 유니콘이 문 두들기고 들어와서 음악 얘기만 줄창 늘어놓으면 심기가 많이 불편할까?"

 

"흐음...... 간만에 봤으니 어디 앉아서 얘기나 좀 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 당장은 할 일이 너무 많아서." 트와일라잇의 얼굴에 무엇인가 아득한 것이 스쳐 지나간다. 내 곁에 다가서서 뺨을 비비지만, 나는 이미 웃고 있지 않다. "그래도 다시 목소리 들으니까 되게 좋다 얘. 되게 좋은 곡을 듣는 거 같은 느낌? 요즘은 세상만사가 다 이상하게 흘러가서 말이지. 공주님께 여쭤 보고 싶어도 워낙 멀리 계시니 즉답을 받기도 어렵고."

 

"뭐 때문에 그래?"

 

"그런 게 있어. 아주 중요한 건데, 도저히 알 수가 없거든." 트와일라잇이 물러서서 발굽으로 머리를 문지르다가 한숨짓는다. 꼭 세상 전체의 운명이 자기에게 달려 있기라도 한 듯하다. "설명할 시간이 없네."

 

마른침이 넘어간다. 걱정스레 묻는다. "친구한테도 그럴 시간이 없는 건 아니겠지?"

 

트와일라잇은 아무 말도 없었다.

 

트와일라잇은 아무 말 없이 혼자 길을 따라갔다. 트와일라잇이 그림자로 변해 버린 것만 같던 순간, 고개를 돌려 이쪽을 보더니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일단 일부터 마치고 보자. 그럼 시간이 있는지 없는지 판단이 서겠지."

 

"그래, 그럼 나중에 도서관 들를게!" 트와일라잇의 뒤에 대고 소리친다. "군것질거리랑 놀거리 좀 챙겨가?"

 

"됐어! 음식은 사양이야!" 트와일라잇이 외친다. 그러더니 까칠하게 덧붙인다. "놀거리도 필요 없어! 오늘은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야!"

 

"알았어! 그렇게 알고 있으라구!"

 


 

"무슨 말인고 하니, 아주 깜짝 놀래켜 주기만 하면 된다는 거죠!" 실실 웃으며 말한다. "따라서, 폭풍우와도 같은 파티를 열어 주었으면 해요."

 

슈가큐브코너 안, 단 음식을 가득 진열해 둔 카운터 너머에 선 분홍 포니가 환희에 차 숨을 한껏 들이마신다. "오오오오오오옹 알았엉 알았엉 알았엉!" 새파란 눈동자가 끝을 모르는 열광으로 번득인다. "그렇구말구 처음 딱 보는 순간부터 아 저 사람은 아무래도 거하게 환영 파티를 열어 줘야 사람 구실을 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거덩! 저녁때쯤에 도서관에 있을 거라는 거 확실한 정보 맞징?!"

 

"히히히. 그럼요! 시청 청사에서 일출 행사가 시작될 때까지 밤새 거기 있을 거에요."

 

"조우았써! 화톳불 피우고 노는 건 호불호가 갈리거덩. 모기가 워낙 꼬여야징. 우엣췽! 이히히히히! 정말 완벽하게 멋졍! 실내 파티에, 음식도 마침 여기 우리 싸장님덜 정성이 가득 담긴 과자가 쫙 깔려 있으니 그거 싸들고 가면 되겠궁! 오오오오! 핫쏘스도 챙겨야징! 핫쏘스 두고 가면 안 뒤양! 사르사파릴라랑 얼마나 잘 어울린다궁! 그징?"

 

"그래요, 그래. 소스는 누구나 좋아하죠." 가방을 뒤적이며 묻는다. "그럼 파티 비용은 어느 정도죠?"

 

"히히힝. 공짜!" 여자가 활짝 웃는다. "집에서 해주는 거다 생각하라궁. '집에서 해주는 거다' 라고 했지만 정확히는 '나무집에서 해주는 거다'가 맞징. 도서관이 그렇게 생겼으니까. 누군지 몰라도 나무 속 비워서 도서관 지을 생각 한 사람은 뭔진 몰라도 틀림없이 흰개미를 마음대로 부리는 재주가 있었을 게 분명한데 그 이유가 뭐냐면—"

 

"지금 장난쳐요?" 눈썹을 치킨다. "캔틀롯 사람이라고 얘기했을 텐데요. 그럴 마음만 생기면 하루 세 끼 전부 출장뷔페로 때우고도 돈이 남아 댄스 파티까지 열면 웨이터가 팁까지 받아먹는다고."

 

"히히히—유니콘인데 바보넹? 웨이터가 왜 먹엉! 갖다 줘야징!"

 

"그런가요?" 피식 웃고 가방을 도로 닫아 여민다. "하기사 제가 뭐라고 좋은 제안을 거절하겠어요. 파인 씨도 동의하시죠?"

 

"파인뎅."

 

"아무렴 어때요. 그냥 시간 맞춰 오시기만 해 주세요."

 

"우우우우우우후우!" 펄쩍펄쩍 뛰는 걸로도 모자라 허공에 대고 발길질까지 하고 있다. "파티 때리러 간다아, 신명나게 파티 때리러 간다아!"

 

"으음...... 킥킥킥킥......" 덩달아 나도 사악한 미소를 짓는다. "그 점에서는 이견이 없을 것 같군."

 


 

스파이크가 조그마한 방에서 걸어나왔다. 머리에 전등갓을 쓰고 있었다.

 

아주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 도서관 한가운데서부터 무시무시하게 시끄럽고 미쳐 날뛰는 파티가 트와일라잇을 맞았다.

 

붉으락푸르락, 잔뜩 찌푸린 얼굴에 도끼눈을 치켜뜬 얼굴이 나를 겨눈다.

 

"이. 망할. 지지배."

 

"깔깔깔깔......" 자리에 주저앉아 팔짱을 턱 낀다. 눈을 찡긋한다. "나도 사랑해. 그러게 믿을 사람을 믿었어야지."

 

"왜 다들 눈치를 못 채?!" 트와일라잇이 툴툴댄다. "날이 밝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이러고들 있냐고?!"

 

"바로 하지 태양절 축제일이 되지, 트와이!" 잽싸게 달려가 부둥켜안으며 말한다. "에헤이 참, 왜 그러는 거야아! 빵끗 웃어! 그렇지. 똑똑이의 노래Smarty Pants Song 퉁겨 줄까?"

 

트와일라잇의 등 솜털이 마구 곤두선다. "아니. 그러지 마!" 그러고는 우리 주변에 늘어선 사람들이 혹시 들었을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말한다. "그건 평생 입에도 담지 않겠다고 약속했을 텐데!"

 

"히히히히...... 어릴 땐 좋다고 헤헤거리며 들었잖아."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야. 이 개판에 어울려 흥청망청 놀 시간 같은 거 없다니까. 비유적으로나 말 그대로나 똑같이! 상황이 얼마나 위중한데!"

 

"그래? 히히..." 어느새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고, 근처 테이블에 있던 소다 한 병을 집으며 묻는다. "뭐가 그리 위중한데?"

 

고개를 푹 숙이더니 끙끙 앓으며 대답한다. "조금만 더 있으면 새벽이 밝을 거고, 그러면 그 해로부터 천 년이 지난 뒤 가장 해가 긴 날이 되지. 역사조차도 기억하지 못할 만큼 오래 전부터 예정된 일이 일어나고 말 거야."

 

"허어."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트림을 누르고 입가를 닦은 뒤 음료수 병을 내려두고 묻는다. "거 참 기괴한 얘기네. 그래...... 천 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래?"

 

"라이라 너. 달 속의 여자가 대체 어디 있을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어?"

 

"추방당한 공주 이야기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은 듣고 자라잖아. 그게 뭐 어때서—"

 

"그 공주의 이름은 루나야."

 

"알 게 뭐람. 뭐가 어쨌든 다 옛날 이야기야. 세상이 잊은 데는 잊을 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라는 생각은 안 들어?" 빙긋 웃어 보인다. 트와일라잇의 눈에 비친 내가 이를 빛내며 웃고 있다. "아무것도 아닌 걸 가지고 그렇게 골치 썩이지 마, 트와일라잇. 문댄서도 똑같이 얘기했을걸? 그러니까 그런 썩은 떡밥 때문에 당장 즐길 것도 못 즐기고, 그러면 안 돼."

 

트와일라잇이 입술을 깨문다. 트와일라잇이 대답하기도 전에 발걸음 소리가 어마어마하게 울리기 시작한다.

 

다들 도서관을 나가, 마을 반대편에 있다는 시청을 향하여 질주하는 사람들의 무리에 섞이고 있다.

 

"셀레스티아 맙소사..." 트와일라잇이 중얼거린다.

 

씩 웃으며 뿔로 쿡쿡 찌른다. "뭘 기다리고 있어? 빨랑 가서 너네 스승님 만나뵈야지. 아냐?"

 

"그래야지... 얼마나 뵙고 싶었는데..."

 

마음이 좀 편안해진 모양이었다. 표정은 웃고 있지 않았지만, 혈색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트와일라잇이 힘차게 걷기 시작했고, 나는 그 뒤에 잽싸게 달라붙었다.

 

가다가 멈췄지만.

 

두고 온 게 있었다.

 

"망할...... 늘 이렇다니까." 곧장 도서관 구석으로 달려 들어간다. "빨리 찾아가야지."

 

온갖 색종이가 쌓여 산을 이룬 자리를 마구 파헤치며 뒤적이는 통에 꼬리 달기 놀이용 그림 하나가 섞여 날려간다.

 

그리하여 언제나 그랬듯 금빛으로 반짝반짝하는 이 녀석을 다시 찾아내고야 만 것이다.

 

"아예 이참에 꼬리에다 매달아 갖고 다녀야겠다." 리라를 가방에 집어넣고, 도서관 밖으로 뛰어나갔다.

 


 

"좋아...... 염병할 시청이 대체 어디 짱박혀 있다는 거지?"

 

그렇게 신음한다.

 

길거리도 어느새 텅 비어 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도서관 밖으로 뛰쳐나간 그 많은 인간들은 자취를 감춰 버렸고, 나는 완전히 혼자 남은 신세가 되었다.

 

그 등신 같은 파티나 꾸미고 돌아다니지 말고 근처 지리나 파악하면서 다녔어야 했는데. 애초에 트와일라잇도 별로 즐긴 것 같지 않고.

 

"아! 바보짓했네!" 눈을 굴리며 별이 총총히 뜬 하늘을 보고 씩 웃는다. "사람이 모이면 소음이 나는 법!"

 

바로 시끌시끌한 곳을 찾아간다.

 

마을 한복판에서부터 온갖 소음과 웃음소리, 말소리와 환호하는 소리가 뒤섞여 건너온다.

 

느긋하게 그 진원지를 향하여 걷는다.

 

어디선가, 무엇인지 모를 낯설고 모호한 마력이 느껴진다.

 

그걸로 노래 하나 써 보라면 정말 쓸 수도 있을 듯했다.

 

벌써 후렴부가 대충 나와서, 흥얼거리며 걷는다. 머리 위에서 무엇인가 스쳐 지나가는 듯하다.

 

고개를 들자 달이 보였다. 문제는, 그게 평소 보던 달이 아니라는 것이다.

 

뭔가 다르다.

 

"가만, 이상한데..." 콧노래를 멈춘다. 낯익은 형상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달의 반점이 없어졌잖아. 여자의 형상이 어디 갔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달 주위를 둘러싸기라도 하는 양 네 개의 빛덩이가 달을 가운데 두고 반짝였다.

 

얼마나 놀라운 광경이었던지, 이빨이 딱딱 부딪치고 있는 것조차 몰랐다.

 

"잠깐... 뭐, 뭐야 이거?" 한 줄기 한기와 함께 다리에 닭살이 돋았다. 몸을 떨며 마구 문지른다. "이거 왜 이래? 한여름인데. 대체......"

 

목소리가 멈춘다.

 

안 돼.

 

목소리를 빼앗기기라도 한 듯하다.

 

말은 하고 있지만,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세상에 없는 음악이 들린다.

 

한밤중에 아이를 안고 자장가를 부르는 어머니의 몸짓처럼 가만히, 고개를 당겨 들어올린다.

 

그렇게 별들을 바라본다.

 

별이 흩어진다.

 

한가운데 응어리진 어둠은 날개를 달고 있다.

 

내게 다가오고 있다.

 

자리에 주저앉는다. 형상이 땅에 내려앉음과 동시에 내 주변 모든 것이 뒤흔들린다.

 

다시 소리가 들리기는 하였으나, 세상 모든 것 위에서 내리치는 소리처럼 벽력 같은 소리뿐이었다.

 

잉크처럼 검은 솜털.

 

새까만 날개.

 

투구와 철제 신발.

 

병든 여신의 살점 밖으로 드러난 뼈대처럼 창백하고 새하얀 은으로 치장한 자.

 

창백한 푸른 눈동자는 초승달의 날카로운 부분처럼 뾰족한데, 차라리 그 모습은 무기물에 더 가깝다.

 

죽음보다도 차가운 숨결이 뿜어져 나와 내 몸에 들러붙어 생기를 좀먹어 간다.

 

비명을 지르려 하는데, 질러지지가 않는다.

 

나는 다만 떨어진 리라와 땅 위를 뒹구는 가방 옆에 굴러다니는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 여자를 바라보는 것은, 흡사 깊고 깊은 심연에 삼겨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창백한 푸른 기운이 나를 집어삼킨다.

 

나는 첫 번째 희생자요,

 

그녀는 나의 종말이리라.

 

그녀는 아무 말도 없었다. 칠흑처럼 컴컴한 입가 깊숙한 곳에서부터 울리는 듯한 한 곡 노래만이 있었을 뿐.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었고, 그녀가 내게 줄 선물 또한 아무것도 아니었기에 그 노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노래하고 있었다.

 

그 선물을 받았다.

 

짐 또한 그대가 맞이할 세상 모든 온기를 베어 죽일 사신이요, 시간의 울음조차 희미해질 때까지 굳건히 버티고 설 절멸의 대행자를 맞이했노라.

 

짐은 이를 맞이하였고, 곧 그것이 되었도다.

 

짐은 아침의 여명을 꺼뜨리는 자요, 불경한 빛으로 세상을 더럽히는 자들에 맞설 강고한 수호자일지니.

 

그리하여 짐은 영원히 불멸할 것이요, 끝나지 않는 어제의 신실한 현인이니라.

 

위대한 어머니께서 궁창에 그분의 광명을 다시 전하시는 날까지, 짐은 지복의 망각을 수호할지니.

 

그대 또한 어머니의 귀한 딸이듯 짐은 노래하지 않는 자들을 노래할 것이고, 세상 너머의 세상에 잠든 그분의 광명을 지킬 것이다.

 

어머니의 의지는 짐의 의지.

 

그대 축복받았음을 마땅히 알라.

 

짐은 마땅히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으리니.

 


 

"으으으으으—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

 

몸부림친다.

 

눈이 부시다.

 

뜨겁다.

 

한 쌍 앞다리가 해를 밀어 치워 버리기라도 할 양 버둥거리고 있다.

 

낯선 얼굴 둘이 보인다.

 

이쪽을 내려다보는 두 얼굴은 걱정스러워하는 듯 하면서도 겁을 집어먹은 표정이다.

 

사람들이 발굽을 뻗어 나를 붙들고 자갈 깔린 길목으로 향한다.

 

"진정하세요! 레드하트 간호사님께 데려다 줄게요. 다 괜찮을 거에요!"

 

"어디..." 힘없는 목소리다. 작을 뿐더러 기운도 없다. "으으으...... 여기가 어딘지 고하라."

 

"네?"

 

"공주님 맙소사. 정신이 혼미한 모양이군."

 

몸이 움찔한다. 목을 쥐어짜 우는 소리로 묻는다. "짐... 저... 저 어디로 간다고요...?"

 

"괜찮아요. 마음 편히 가지세요."

 

"아... 시끄러워..." 몸이 떨렸다. 무엇인가 머릿속에 파고들어 내 뿔을 붙잡고 수백만 항성의 무게로 짓눌러 두개골 속으로 처넣는 듯한 기분이었다. "귀... 아파." 나는 흐느껴 울며 말했다. "누가 좀... 멈춰 줘요..."

 

"대체 무슨 소리지?"

 

"모르겠군. 자기가 무슨 말 하는지도 모르고 있어. 빨리 데려가자고..."

 

"너무 시끄러워... 누가 좀 막아 줘요... 아무것도 안 들려..." 나는 흐느꼈다. 사람들이 나를 부축해 움직였다. 쇠사슬과 얼음만이 가득해야 할 곳에 땅이 있었다. 그 위로 눈물이 굴러 떨어졌다. 눈이 부셔도 너무 부셨다. 거기에 그 끔찍한 소음이란. "누군지 몰라도 연주 좀 멈추라고 해요...... 당장 멈추라고 해 줘요. 그 누구도 들어서는 안 되는 곡이에요. 그분이 돌아오실 때까지 그 누구도 들으면 안 되는... 으으으......"

 

시야가 뭉개진다.

 

이제 종소리와 사람들의 말소리뿐.

 

"빨리요. 암만 봐도 뭐 발작이나 그런 것 같아요!"

 

"세상에, 이게 다 어떻게 된 거에요?! 어디 뭐 빠졌다가 건지기라도 했어요? 흠뻑 젖었네!"

 

"그나저나 본 적 있는 사람인가요? 나이트메어 문이 나타났을 때 다들 실내로 대피한 줄 알고 있었는데."

 

"아아아... 어, 어머니..." 눈이 까뒤집혀 흰자가 드러난다. 어머니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혼자다. "어, 어머니! 들리지 않으십니까! 지... 어머니, 이렇게 빌어도 안 되나이까!"

 

소리친다.

 

차라리 비명이다.

 

쩌렁쩌렁한 음악소리. 어머니께 닿을 수도 있겠지.

 

아니. 듣지 못하실 것이다.

 

짐이 그리되도록 두지 않으리.

 

"어머니!"

 


 

"하느님 맙소사.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까지!" 눈처럼 새하얀 솜털을 한 여자가 나를 굽어보며 묻는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그게... 음..."

 

"그게, 저희가...... 어떻게 된 거냐면..."

 

"그건 뭐죠?! 좋아요, 그럼 이 불쌍한 사람을 어디서 찾았는지는 기억하겠죠?"

 

"그게... 음..."

 

"기억 안 나요. 클라우드키커 넌 기억해?"

 

"시내였지, 아마."

 

"아마, 라고요? 레인드롭스 씨?!"

 

"으음... 아닌가, 병원 바깥이던가? 저희한테 너무 그러지 마세요, 선생님. 저희도 선생님만큼이나 머리가 어질어질하다고요."

 

"보나마나 축제 때문이겠군요! 내 공주님 이름에 대고 맹세하는데, 술이 떡이 될 때까지 사이다 퍼마시는 건 자중하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에요." 레드하트라는 여자가 몇 가지 의료기구를 가지고 여기저기를 들여다보다가 쿡쿡 눌러보고 물었다. "자, 혹시 아픈지 얘기해 볼까요?"

 

"그... 저..." 세상이 빙빙 돈다. "머리가 아파요. 음악이..."

 

"두통이 있다고요? 그럼 뿔은 좀 어떠세요. 성함이..."

 

"하트스트링스에요. 라이라 하트스트링스. 실례지만 음악 좀 꺼 주시면 안 될까요?"

 

"뇌진탕이 있는 것 같군요. 위버?! 저쪽에서 물이랑—"

 

"아뇨, 그런 건 됐고 음악이나 꺼 주세요. 그거면 되니까..."

 

"머리가 아프시다고 하셨으니까 고쳐 드려야죠. 자, 마음을 가라앉혀 보세요... 그 다음..."

 

순간 한기가 스친다.

 

떨리는 몸을 웅크린다.

 

눈에 초점이 돌아온다. 입김이 맺힌다.

 

입김과 전등불뿐.

 

"이건... 대체 무슨...?"

 

"으음... 이거... 죄송..."

 

병원 침대에 누워 옆을 돌아본다.

 

간호사가 옆자리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다. 벽에 기대어 있다가 일어서면서 머리를 흔들더니, 이쪽을 삐딱한 시선으로 본다. "환자분이... 증상이... 증상이..." 몸을 움찔하더니, 말을 바꾼다. "헤이포크라테스Haypocrates*8 맙소사. 내가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지...?"

 

"그게..." 마른침을 삼킨다. "제가 뇌진탕을 일으킨 것 같다고 하셨잖아요. 방금 전에—"

 

"이런 실례가. 제가 도와 드릴 거라도?"

 

"으음..."

 

"어디 아프세요? 아시겠지만 진료를 받으시려면 먼저 접수부터 하셔야—"

 

"저기 페가수스 두 분이 절 데려오셨잖아요..." 진료실 한쪽에 서 있던 페가수스 둘을 가리키며 말한다. "길가인지 어딘지...에 엎어져 있는 걸 저 두 분이... 데려..." 둘을 쳐다보던 시선이 떨어져 나간다.

 

저 둘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멍청한 표정만 지을 뿐이다. "레드하트 선생님,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희는 저 분이랑 일면식도 없어요. 생판 처음 보는데."

 

숨을 급히 들이마신다. 표정이 구겨진다. "그... 뭐... 네, 네?!"

 

"지금 누구 하나 바보 만드는 장난이라도 치는 건가요." 레드하트가 딱딱거리면서 우리 셋을 째려본다. "눈곱만큼도 웃기지가 않는데 말이죠."

 

"마... 말씀드렸잖아요..." 이마를 문지르며 말한다. 반쯤 우는 소리다. "이름이 라이라, 라이라 하트스트링스라고 했잖아요. 두고 간 리라 찾으러 갔었죠." 침을 삼킨다. 몸이 떨린다. 끔찍하게 춥다. 음악소리가 들려온다. 암초에 부딪쳐 부서지는 파도처럼 끊임없이 달려든다. 몸이 산산이 뜯겨나가는 듯하다. "리라 찾아서 집고, 그대로 달 아래를 걷고 있었는데......" 한쪽 발굽이 입가를 가린다. "셀레스티아 맙소사. 나이트메어 문이 거기 나타났죠. 바로 코앞에 나타났는데, 도저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눈이 마주쳤는데, 그러고 나서 바로 쓰러졌고요. 한참을 그대로 쓰러져 있었는데..." 마른침을 삼킨다. 전신이 떨린다. 진료실 벽이 녹아 하나로 뭉치고, 소음과 눈물로 흐릿해진 형상으로 바뀐다. "저 어디 있었어요? 누가 좀 말해 주세요. 제발..."

 

마무리가 없는 음악처럼, 내 말에 그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뿐이었다.

 

무서운 마음을 부여잡고 진찰실 저편을 바라본다.

 

다시 초점이 돌아온다.

 

세 사람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하나같이 멍청한 표정이다.

 

"죄송한데, 저... 누구시라고...?"

 


 

빛 속으로 비틀거리며 걸어 들어간다.

 

어지럽다.

 

몸이 비틀거린다.

 

시선이 떨어지지가 않는다.

 

눈을 돌려놓을 수가 없다.

 

사람들이 춤추고 있다.

 

축제를 즐기고 있다.

 

사방에서 날아오른 폭죽이 총격처럼 터진다.

 

마을 곳곳에 태양 문양을 새긴 깃발이 내걸려 있다.

 

나는 그곳에서 소음에 파묻혀 어안이 벙벙한 채 태어난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

 

"제발... 누가 좀 도와 줘요." 웅얼거린다. 걸어 나온 병원 쪽을 가리킨다. "저기 있는 사람들 제정신이 아니에요." 몸이 움찔한다. 계속 말한다. "저 사람들 전부 다 어디 이상해요. 머리가 어떻게 됐거나 한 거 같은데. 뭔가... 어떤 전염병 같은 게 도는 걸지도 몰라요. 아니면... 아니면..."

 

자리에 멈춰선다.

 

뭔가 잘못됐다.

 

뭐가 잘못돼도 단단히, 아주 단단히 잘못됐다.

 

"저기요?" 뭉개진 발음으로 말한다. 머릿속에 가득 들어찼던 아픔이 아무 생각 없이 축제에 들떠 즐거워하는 상판들에 놀라 먹먹한 혼란으로 뒤바뀌었다. "저기... 저기요?"

 

사람들이 이쪽을 본다. 부르기에 본 것뿐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군중 속으로 다시 섞여 들어간다. 온 동네가 어느새 우유 젓는 통이 되고 사람들은 그 안에서 돌아가는 우유가 되기라도 한 듯, 조금 전에 본 사람이 다시 보이고, 또 보이고,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한 번도 빠짐없이 순진하고 티 없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저는 라이라 하트스트링스에요. 좀 들어 주세요. 병원에 뭔가 일이 났다고요. 제 보기엔—저기요?!"

 

조금 전의 얼굴들이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졌다. 여러 번을 보았지만, 저들은 처음 봤을 때처럼 멍청한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똑같은 파티에서 똑같은 사람들에게 수도 없이 자기소개를 하는 기분이었다. 트와일라잇과 마찬가지로 나는 이딴 장난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봐요들 좀, 중요한 얘기라고요! 누구라도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으라고! 아주 심각한 얘기를 하는데—왜 아무도 안 듣고 앉았는데?!"

 

"네?" 근처에서 깔깔대고 웃던 사람 하나가 나를 지나쳐 갔다. 끔찍하게도, 조금 전에 나를 병원으로 데려갔던 그 페가수스 중 하나였다. "그쪽은 누구......?"

 

나는 그 여자를 씹어먹을 기세로 소리쳤다. "라이라라고!" 여자의 가슴팍에 발굽을 세차게 들이댔다. "그쪽은 뭔데 병원 밖으로 기어나와서 이러고 앉아 있어?"

 

바로 그 때, 창백한 형상이 뒷편에서 쓱 스쳐 지나갔다. "다들 오늘은 즐기자구요!" 레드하트였다. 하지 태양절 축제의 소음 위로 레드하트의 활기찬 목소리가 울렸다. "다들 기억하세요. 안전이 먼저랍니다! 진료소는 늘 열려 있어요!"

 

뭐라 말도 못 한 채, 레드하트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심장 박동까지 느껴졌다. 끔찍하게 추웠다. 아드레날린은 아무 효능이 없었다.

 


 

"저기요! 야!"

 

빽 소리친다.

 

발굽을 미친 듯 휘저어 보인다.

 

인파를 헤치고 나아가다가, 슈가큐브코너 바깥에 내어놓은 컵케익 테이블에 걸려 넘어졌다.

 

거친 숨이 뿜어진다.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시식용 컵케익을 나눠주던 분홍 갈기 여자의 어깨를 홱 잡아챈다.

 

"다시 봐서 얼마나 반가운가 몰라요. 파인 씨."

 

"히힝! 정확히는 핑키 파이에용! 그래도 가끔씩은 '핑키 파인'이라 불려도 별로 신경 안 쓰지용!"

 

"하하. 이런 실례." 불안불안하게 씩 웃고 여자의 앞다리를 비틀듯 잡는다. "저기. 저 좀 도와 주세요. 어제 하지 말란 거 씹고 깜짝 파티 열었다고 트와일라잇이 그 답례를 해주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소나무Pine 냄새가 아주 각별하기는 하니까용, 그졍? 난방절 아침에 눈 떠서 선물 열어 보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니까영! 그 왜, 언제는 은박지로 깔끔하게 포장된 상자를 까 보니까 웬 새끼 악어 하나가 뿅 하고 튀어나오더라고영! 툭! 하고! 그러더니 제 머리를 바로 물어 버렸지용! 히히히힝—다행히도 그 땐 걔 입 속에 이빨이 없어서 살았지만! 그리하여 그 친구 이름을 '잇몸이'라 지은 것—"

 

"됐고—제 말 좀 들어요!" 바로 쏘아붙인다. 컵케익 얻어먹으러 다가오는 자들을 미리 쳐낸다. 그래야 이 소소한 '회의'를 방해하려는 자들이 없을 테니까. "트와일라잇 어디 갔어요? 가서 사과해야지 안 그러면 계속 이 웃기지도 않는 짓을 계속 할 것 같아요. 설마 축제를 걔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거란 건 알았는데 이건—호 호 호 호오오..." 광년이처럼 낄낄대고 웃다가, 입술을 비틀고 외쳤다. "설마 진짜 떡을 갖고 그림의 떡으로 바꾸는 장난질까지 가능할 줄은 몰랐죠*9!"

 

"으으으으으으으음... 떡이라."

 

"그래서, 걔 어디 갔어요?"

 

"넹? 어디에 누가 있어요?"

 

"트와일라잇 스파클!"

 

"왜영?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영?"

 

"네. 그러니까, 아뇨. 진짜 그렇다는 건 아니고. 직접 보고 어제 하지 말라던 거 무시하고 깜짝 파티 해준 거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오! 어제 파티에 있었나 봐영?!" 핑키가 헤벌쭉 웃는다. "그럴 만도 하죠. 지이이이이인짜 재밌었으니까! 내가 했지만 진짜 끝내주는 파티였다니까용!"

 

고개를 갸웃거리다 말한다.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고 앉았어?! 누가 하긴 누가 해, 내가 했구만!"

 

"흐으으응...... 누구신데영?"

 

"라이라!" 소리친다. "라이라 하트스트링스! 트와일라잇 스파클 친구라면서 거하게 파티 한 번 때려달라던 돈 많은 유니콘 기억 안 나쇼? 집에서 해주는 것 같이 해주겠다며?"

 

"히히히... 이름 되게 예쁘네용." 핑키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한 표정으로 빙글거릴 뿐이다. "그래도 미안하게 됐으용. 그쪽은 그야말로 금시초문이라."

 

하릴없이 그녀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불현듯 핑키의 새파란 눈동자가 한없이 차가워 보였다. 그 냉기가 핏줄을 타고 흘러, 온몸의 피가 얼어붙었다.

 

"혹시나 그랬다면 그쪽한테도 진짜 지인짜로 끝내주는 환영 파티를 열어줬겠죵. 이 동네는 녹색 톤 솜털을 한 사람들이 별로 없거든요. 사실 그런 색이 그리 흔한 것도 아니고... 또... 저기요, 어딜 또 가요?"

 

떠난다.

 

걜 뒤에 남겨두고.

 

이 마을을 떠난다.

 

소음과 빛, 광기를 여기 버려두고 떠나려 한다...

 


 

"으으으으으..." 네 다리를 가슴팍 가까이 말아 붙인 채 흙길 한복판에 쓰러진다. "으아아아아... 셀레스티아 공주님, 살려 주세요......"

 

춥다.

 

추위라는 개념을 아득히 초월한 듯한 한기다.

 

더는 나아갈 수 없다.

 

내 걸음이 닿은 곳은 마을 어귀. 하늘 위로 태양이 쨍쨍하게 떠 있다. 그럼에도 네 다리가 얼음 덩어리인 것처럼 느껴진다.

 

"으으윽... 악!"

 

비명이 절로 나온다.

 

몸 구석구석에서 얼음 바늘이 뽑혀져 나오는 듯한 고통이 엄습한다.

 

움직일 수가 없다.

 

이 방향으로는 차마 도저히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갈 자신이 없다.

 

그래서 땅을 기었다.

 

다리를 저는 꼬마처럼 긴다.

 

땅을 기어 시가지 쪽으로 몇 걸음 되돌아간다.

 

핏줄 가득히 차오른 한기가 서서히 녹아 사라진다.

 

견딜 만은 하지만, 전신이 고통에 절여진 듯하다.

 

소음과 음악소리, 눈물이 뒤섞인다......

 

"누가 좀... 누구라도 제발..."

 

울먹이던 소리가 흐느낌으로 바뀐다. 몸을 일으켜 울부짖으며 달린다.

 

"도와 줘요!"

 


 

"저 사람 왜 저래?"

 

"사이다 과음한 거 아냐?"

 

"하하... 술이 사람을 개로 만든다더니 정말로 개가 됐네."

 

"제발!" 나는 번화가에서 가장 먼저 마주친 사람에게 매달려 애걸복걸했다. 그녀의 두 눈에 비친 내 모습은, 봉두난발에 거친 숨을 마구 헥헥대는 행려병자와 같았다. 당장 저 눈동자 속에 뛰어들어 내 형상을 잡아끌어 나오고 싶었지만, 그 모습은 이미 저만치 멀어져가고 있었다. "저 좀 도와 주세요! 저는 라이라 하트스트링스고요! 가족이 캔틀롯에 있어요! 집에 가고 싶어요! 누구라도 좋으니 날 기억하는 사람 어디 없어요!"

 

"거기! 진정 좀 하세요. 도움이 필요하다면 사람을... 찾아봐... 드리..." 말을 꺼낸 여자가 갑자기 휘청하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와 나 사이에 차가운 안개만 어른거리고 있었다. 여자가 중얼거렸다. "으으... 휴. 햇빛도 정도껏 내리쬐야지." 그리고는 이쪽을 보며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실례했군요. 뭐 도와 드릴 일이라도?"

 

"이 인간들이 진짜 왜 이래?!" 여자를 거칠게 밀쳐낸다. 어느새 주위에 모여든 구경꾼들에게 소리친다. "당신네들 귓구멍 막혔어?! 당신들 다 제정신 아니야! 내 맹세코!"

 

"저 사람들이 제정신 아니라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혹시나 하는 기대와 함께 몸을 돌렸다. 기대는 수포로 돌아갔다. "레드하트 간호사..."

 

레드하트는 병원 앞에 서 있었다. 그녀가 이쪽을 뜯어보며 물었다. "죄송한데, 저희 구면이던가요? 다른 분께서 보내셨다거나?"

 

레드하트를 피해 뒷걸음질치다가, 무언가에 걸려 넘어졌다. 내 발에 뒤채인 것은 보라색 비늘 뭉치 같은 것이었다. "윽!" 탁 쳐서 떼어낸 순간, 그 정체를 새삼 깨달았다. 환희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스파이크!" 두 앞다리로 보라색 꼬맹이를 번쩍 들어올려 미친 듯 실실대며 얼굴을 마주했다. "셀레스티아 공주께 영광을. 이제야 찾았구나! 스파이크, 트와일라잇 얘 어딨는지 좀 알려 줘! 뭔진 몰라도 아주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있어. 트와일라잇이라면 어떻게 할 수 있을지도 몰라! 마법이나 뭐 그런 데 걔가 보통 능한 게 아니잖니! 그래, 트와일라잇은 어디 있어?"

 

"으어어... 어..." 스파이크는 한 손에 쥔 태양 색깔 막대사탕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꼭 쥐며 더듬거려 말했다. "트와일라잇 스파클이라면 새 친구들이랑 같이 도서관에 있지. 근데 무슨 일로 걜 찾는 거야?"

 

"왜긴 왜야?! 걔만큼 이 미친 상황을 똑바로 이해할 수 있는 애가 세상에 또 어딨어! 못 본 지... 보자... 그래, 대충 몇십 시간은 됐다구!" 마른침을 삼키고 덧붙인다. "나 어디로 사라졌냐고 물어보지도 않았어? 지금껏 뭘 하며 돌아다니고 있냐고 툴툴대지도 않았고?"

 

스파이크의 녹색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꼬마는 입술을 깨물며 겨우겨우 목소리를 짜내 말했다. "어... 저기요? 트와일라잇이라면 어제까지만 해도 친구라고는 딱 한 명밖에 없었고, 그나마도 캔틀롯에서 공부하느라 여긴 없을 텐데."

 

떨리는 숨이 한 마디 이름을 토해냈다. "문댄서잖아." 나는 고양이 새끼처럼 징징대며 말했다. "그럼... 그럼 내 얘기는 왜 없어? 라이라 얘기는 왜 안 해?"

 

"그게, 지금까지 말 그대로 평생을 트와일라잇이랑 같이 지낸 입장에서 말하자면..." 스파이크가 어쩔 줄 몰라하는 억지웃음을 띄웠다. 내 시선을 절대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비늘 덮인 몸이 두려움으로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트와일라잇은... 저... 라이라, 라는 친구에 대해 한 마디도 한 적이 없는데."

 

나는 멍하니 스파이크만 쳐다보고 있었다. 끙 하는 소리와 함께 스파이크가 바닥에 떨어졌다. 주위를 둘러본다. 레드하트 간호사는 지금 이 행위가 아예 세상에 없기라도 한 듯 다른 사람과 대화하고 있다. 처음 붙잡은 여자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그 누구도 나를 보고 있지 않다.

 

심장이 폭주기관차처럼 뛰어댔다. 머리로 피가 엄청나게 몰려서, 머릿속에 계속 울려대는 음악소리도 거기 빠져 죽지 않을까 싶다. 그럴 일은 없었다.

 

"글쎄, 어쩌면 그냥 네가..." 고개를 돌린다. 나는 안중에도 없이 스파이크가 뒤뚱대며 걸어가고 있다. 벌써 몇 야드는 족히 가서, 몇몇 꼬마들 사이에 섞여 입을 헤벌리고 박수를 치며 마술쇼를 보고 있다. "...정신이 나간 걸지도."

 

숨이 가빠 왔다. 눈을 감을 때마다 어둠 너머의 피안이 보였다. 모든 노래가 죽음을 맞이하는 곳. 나 또한 그리로 향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중력이 나를 무자비하게 잡아끄는 것만 같아, 미친 듯 죽어라 뛰는 것으로 그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도서관 출입구 나무문. 말 그대로 온 몸뚱이를 거기 내던진다.

 

미친 듯이 두들긴다.

 

더러는 긁어대기도 한다.

 

숨이 정돈되지가 않는다. 무엇인가에 쫓기는 듯한 기분이 드는데, 그 무엇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마침내 문 위쪽이 열린다. 딱 봐도 고집불통 같은 인상에 오렌지색 솜털, 알알이 박힌 하얀 주근깨가 인상적인 여자가 나를 쏘아본다.

 

"음... 뭐 문제라도 있으신가? 여기가 도서관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계시겠지?"

 

"트와일라잇 어딨어?!" 달려든다. 여자가 급히 뒤로 물러선다. 머리 위에 얹힌 모자가 떨어질 듯 위태로이 흔들리다가 제자리에 앉는다. "어디 갔어?! 걔랑 할 말 있어! 급해!"

 

"어...... 저기, 거울은 보고 다니는 거 맞나? 10파운드*10짜리 가방에 10부셸*11어치를 집어넣은 양 너절하기가 말로 다 못 해. 암만해도 사이다는 당분간이라도 끊는 편이 맞겠구마. 허 참. 사이다 파는 년이 사이다 끊으라고 하다니 이 무슨 경우람."

 

"애플잭?" 나무집 깊숙한 곳에서 한 마디 목소리가 웅얼거리듯 들려왔다.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누구길래 그래?"

 

"뭐라 그래야 하나, 정신줄 놓은 유니콘이여 트와일라잇. 축제라고 한도 끝도 없이 퍼마신 모양이다."

 

새파란 페가수스가 현관 앞으로 날아왔다. "하! 축제라 그래도 별로 마실 만한 것도 없었잖아!"

 

"아. 너희 둘 잠깐만 조용히 해 줄래?"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소리내어 웃으며 다가온다. "뭐라해도 이제 여기가 내 새 집이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

 

"진심이가? 암만해도 제정신 아닌 거 같은데."

 

"마법의 원소라구? 기억하지? 하하하.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어." 트와일라잇이 농사꾼 여자를 한쪽으로 가볍게 밀며 나를 보고 싱긋 웃는다. "자 그럼, 어떤 문제로 오셨죠?"

 

"트와일라잇!" 닫혀 있는 아래쪽 문 너머로 트와일라잇을 끌어내기라도 할 것처럼 발굽을 감싸쥔다. 두 눈에서 무엇인가 반짝인다. 다름아닌 내 눈가에 맺힌 기쁨의 눈물이 비친 모습이다. "셀레스티아 공주님 감사합니다! 너 찾아다니느라 온 마을을 쏘다녔다구! 무사했구나! 뭔지 몰라도 미친 일이 일어나고 있어! 천 번째 되는 해가 됐다나 어쨌다나 하는 얘기 했었잖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설명은 잘 못 하겠는데, 이 작자들이 내가 애초에 없는 사람인 것처럼 굴어대고 있단 말야! 바로 여기 있는데! 전부 날 무시하고 있다고! 그치들만 그런 게 아냐. 스파이크까지 그러더라고! 처음에는 뭐 간단한 장난질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까 전혀 다른 거야! 제발 나 좀 도와 줘! 네 힘으로 안 되면 공주님께 말씀이라도 드려 줘!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어... 일종의 퇴행성 뇌기능장애 뭐 그런 거인 것 같아. 월간 캔틀롯 건강잡지에서 언제 한 번 봤거든. 일단 다른... 다른 사람들 전부 다 검사해 보고 나면, 혹시 또 모르잖아, 원인이 뭔지 알아내면 다들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축제일에 감염이 퍼졌다고 누가 너보고 뭐라 그러겠어, 너 혼자 머리 싸매고 축제 일정 짰으니까 그 사람들은 할 말 없잖아. 나도 마찬가지로 기꺼이 도와... 줄... 게..." 연주를 거칠게 끊어내는 듯, 목소리에서 온기가 빠져나갔다. 목에 응어리진 무언가를 겨우 목 너머로 넘기며, 이쪽을 마주보고 선 공허한 표정을 바라본다. 제발 답을 주기를. "트와일라잇...?"

 

"들어 보니... 뭔가 심각한 일이 있기는 있었던 것 같네요." 트와일라잇이 대답했다. 아무런 파문 없이 잔잔한 호수처럼 차분한 목소리였다. 나는 문간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고 서 있었다. 이제 내가 뭘 하고 있는지 객관적으로 보질 못하겠다. "그래도 일단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셔야죠. 진정하시고, 천천히 말씀해 보세요. 제가 할 수 있는 한 힘껏 도울 테니. 일단 성함부터..."

 

억하심정을 녹여 풀기에는 너무나 차가운 답변이다. 내 목소리만 갈라지고 부서져 있다. "라, 라이라..." 무엇인가 죽어 쓰러져 있는데, 나는 이를 매장해 줄 수 없다. "나... 라이라잖아. 알잖아. 네 친구 라이라. 트와일라잇, 대체 왜...?" 뒷걸음질쳐 도서관에서 달아난다. 나는 나무에서 잘려나간 나뭇가지나 다름없었다. 이미 뜯겨나간 가지는 다시 붙을 수 없다. 말을 하려 입을 열면 미친 듯이 뛰어대는 심장이 재촉한 숨결이 목구멍을 갈아내는 듯한 고통만 있을 뿐. 문간에 선 트와일라잇 위로, 캔틀롯 길가에 쪼그려 앉은 트와일라잇이 겹쳐 보인다. 걸으면서 책을 읽어 보려고 하다가, 포기하고 우리 집에서 두 블록 떨어진 길바닥에 주저앉은 것이다.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간다. 다른 구역으로 이사를 온 후 내 나이 또래 유니콘은 처음 만났다. 트와일라잇이 울먹거리는 건 못 본 척, 가만히 책을 주워모아 건네준다. 시시한 얘기를 나눈다. 얘는 마법을 좋아하고 나는 음악을 좋아한다. 며칠 뒤, 우리 둘은 '역할'놀이를 좋아한다는 다른 유니콘 또래를 만났다. 그리하여 우리는 역사에 남지 않은 장대한 모험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우리 집......

 

엄마.

 

아빠.

 

무엇인가 죽어 나자빠진 것. 그것이 나이기를, 나는 바랐다.

 

"저기, 얘기를 해 주셔야... 잠깐만요!" 트와일라잇이 문을 열고 나온다. 나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내 말 들어! 나 좀 보라고!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까! 제발 아무나!"

 

벽촌의 길거리를 들쑤시고 다니는 광인이 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근처에 가기조차 싫다.

 

내 머릿속에 박혀 빠져나갈 생각을 안 하는 음악 소리처럼, 내 뒤를 따라다닌다.

 

머릿속에서 뜯어내고 싶다.

 

이 미친년도 뜯어내 버리고 싶다.

 

이년을 잡아 갈기갈기 찢어발겨 버리고 싶다.

 

"제발! 제발 좀! 날 좀 봐요!"

 

사람들이 저마다 모여앉아 웃는다.

 

사람들이 저마다 모여들어 춤춘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머릿속 음악 소리가 그 크기를 더해간다.

 

주먹질로도, 불꽃으로도 지울 수 없다.

 

"라이라, 난 라이라에요! 제발, 제발! 내 말 좀 들어요! 나 여기 있다고!"

 

나를 스치고 지나는 시선들이 있었고, 스치고 지나가 다시 없었다.

 

그나마 나를 계속 지켜봐준 것은 햇빛 하나뿐이었는데, 머지않아 땅거미가 내려앉아 어둠에 삼켜져 사라졌다.

 

"나 여기 있어요!"

 


 

나는 내 비명에 놀라 깨어났다. 근처에 늘어선 나무들이 내 목소리를 튕겨냈다. 밤하늘에 박힌 별 아래로 비탄에 잠긴 소리가 메아리졌다. 나는 흠뻑 젖은 채 땅에 떨어진 낙엽과 풀 위를 뒹굴었다. 주변은 온통 깜깜한 어둠이었고, 의지할 만한 광원은 달 하나뿐이었다. 달이 보이기 전까지 비명을 질러댔다. 세상에 잊힌 보이지 않는 짐승들이 밤만 되면 수도 없이 모여들어 끽끽 비명을 지른다는데, 나도 그 중 하나였다.

 

잠시 멈춰 숨을 골랐다. 내가 있던 자리가 아니라 다른 곳으로 날려온 것을 그제야 알았다. 내가 파놓은 토굴이 아니었다. 등잔 불빛도, 사방에 놓아뒀던 음석도 전부 사라지고 없었다. 그곳은 숲 한가운데였다. 밝게 빛나는 나무줄기 사이에 나 혼자 있었다. 그리고 '밤의 만장'은......

 

다른 곡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아아아아악! 안 돼!" 머리를 붙잡고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주둥이를 축축한 흙에 처박고 마구 쑤셔댔다. 주변이 온통 축축했는데, 내 땀은 분명히 아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뭐 어디 아무도 모르는 바다에 처박혔다가 그리로 날려간 것인가. 새로운 곡... 이 염병할 곡조는. "썩어 죽을. 이건 아냐." 나는 울었다. "아직 더 남았다니. 여덟 번째가 또 있다니!"

 

나는 내 발굽에 걸려 넘어졌다. 큼직하게 고인 물웅덩이로 미끄러져 엎어졌다. 온 몸이 비명을 질러댔다. 몸이 다시 얼어붙고 있었다. 에버프리 숲에 들어갈 때보다 열 배는 끔찍한 추위가 엄습했다. 설상가상으로, 아무런 옷도 입고 있지 않았다.

 

무기력한 망령의 덩굴손처럼 사지가 오그라들었다. 나는 미친 듯 발버둥쳤다. 어찌어찌 빠른 걸음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때는 내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초자 알지 못했다.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땅에 뿌리박은 뼈다귀처럼 한없이 늘어선 나무들과 그 위로 떠올라 빛나는 창백한 달뿐이었다. 하나같이 척박한 무기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가던 길에 흙길로 들어선 것은 천운이었다. 그때부터 방향을 잡아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길을 찾아 무작정 달리던 흔적 위로 솜털에서 굴러 떨어진 물기가 뚝뚝 흘러 땅을 적시고 있었다. 대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어디로 날려갔다 왔단 말인가?

 

오두막에 다다라서는 급히 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불을 피우려 사지를 놀리기까지 어언 삼 분 가량의 시간이 들었다. 불을 붙이고 나서부터는 정도가 없었다. 불 속으로 쪼개지도 않은 장작 열 덩이를 던져 넣고 그 앞에 콕 박혀서, 이불이란 이불은 다 뒤집어쓰고 누웠다.

 

그날 밤은 난로 앞에서 부들부들 떨며 보냈다. 잠을 자기는커녕 제대로 몸을 쉬일 수도 없었다. 몸이 얼마나 떨리던지 이대로 가다가 척추뼈가 탈골해서 피부를 뚫고 나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저 빨리 아침이 밝기를 기도했다. 시커먼 어둠은 질렸다. 오직 나 혼자만 앓는 병을 치료할 방법이 있지 않을까 싶어 이름 없는 곡들을 옮겨 적고, 부작용을 견디며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하는 짓은 이제 지쳤다.

 

창 밖으로 아침의 잿빛 안개가 솟아올랐다. 그제야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때까지도 축축하게 젖은 꼴이었다. 내가 묻히고 돌아온 액체는 색, 냄새, 심지어 맛까지 없었다. 결국 내가 빠졌던 액체는 틀림없이 순수한 물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문제는 대체 왜 내가 젖어 돌아왔냐는 것이다.

 

연주 도중 대체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무엇 때문에 숲 한가운데로 툭 떨어진 거지? 설마 이게 만장의 권능인가? 내가 해 온 일들이 전부 이 하나를 위해서였나? 이게 루나 공주님이 지은 곡의 비밀을 풀어낸 대가란 말인가?

 

정오가 되기 전까지 나는 감히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겨우 집을 나와 판잣집 아래 토굴로 들어섰다. 거기서 혹시 내가 어디로 날려갔는지,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발자국도, 긁힌 자국도 없었다. 한밤중에 나를 숲 깊은 곳까지 누가 끌고 간 흔적이라 할 만한 것은 전무했다. 리라는 자리에 잘 놓여 있었고 음석은 마력을 모두 소진한 채 바닥에 굴렀다. 그리고, 내 후드 재킷도 거기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옷은 마지막 비곡을 연주하던 바로 그 자리에 젖은 흔적 하나 없이 그저 늘어져 있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만장이 마지막 비곡이었다. 이제는 전혀 다른 것이, 끔찍하기도 끔찍하지만 빌어처먹게도 아주 다른 곡이 머릿속에 맴돌고 있다. 그림자 전주곡을 처음 맞이했을 때보다도 두려웠다. 달의 애가보다도 잔학하게 뼛속까지 얼려 버리는 듯한 감각이었다. 그 때 이미 맨 앞의 10마디 정도는 언제든지 옮겨 적을 수 있을 정도로 기억에 박혀 있었으나, 도저히 그럴 수 없어서 적지 않았다.

 


 

"아무도 모르는 음악의 정체를 밝혀내려고 한다면서, 이번 곡을 옮겨 적지 않는 이유가 있을까?"

 

"이 쓰레기 같은 짓을 해서 따라오는 게 엎어져 기절하는 거라거나, 온몸의 피가 싹 얼어붙는 것 같은 추위, 끔찍한 두통밖에 없어서 그렇지!" 도서관 책상 위로 먼지가 켜켜이 쌓인 책을 여러 권 쾅 하고 내려놓고 가방을 뒤져 노트패드를 잡아당겨 꺼내며 툴툴거려 대답했다. "빌어처먹을 열세 달 동안이나 이 짓거릴 했는데 이게 그 시간을 꼬라박을 가치가 있기나 한가 슬슬 의심이 든단 말야! 진도를 빼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고! 내가... 아아아아아아악!" 분을 못 이겨 소리를 빽 지르며 꺼낸 노트패드를 벽에 힘껏 내던지고 근처 책장을 있는 힘껏 후려쳤다. "이게 다 허공에 삽질하는 것 같단 말이지! 애초에 왜 이런 짓을 해야 할까?! 대체 왜 이 개 같은..." 풀풀 화를 내다가, 나만 부들거리는 게 아님을 깨닫고 말을 멈췄다.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스파이크가 어쩔 줄 몰라 하며 꼬리만 만지작거리며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보조사서 스파이크는 다만, 있는 성질 없는 성질 다 내 가며 펄펄 뛰는 미친 유니콘을 무시하고 갈 길 가는 것이 죄악이기라도 한 양 내 불똥 튀는 시선을 아무 말 없이 마주보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공주께서 생명 그 자체의 의미를 깨우쳐 주시고자 새로 들인 제자에게 하사하신 알. 스파이크가 껍질을 깨고 나온 핏덩이에 불과했을 때 트와일라잇 스파클은 가장 먼저 나를 불러 스파이크를 보여주었다. 그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 태양절 축제 때, 내 앞다리에 매달려 잔뜩 놀라 덜덜 떨던 그 꼬마가 그 위에 겹쳐졌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위협할 수 있을 정도로 실존하는 생명은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화가 누그러졌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최선을 다해 웃어 보였다.

 

"미안. 네가... 나한테 이런 소리 들을 이유는 없었는데. 날 도와 주는 사람이라곤 너밖에 없거든. 신경도 잔뜩 곤두선데다 머리도 아프다 보니... 그게..."

 

몸이 떨렸다. 눈꺼풀이 스스로 내려와 감겼다. 망막에 비친 어둠은 다시, 어둠의 노래가 자라나는 못자리로 한없이 익숙했다. 생각해 보면 비곡을 옮겨 적는 나날이 나를 보다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지 않았는가. 이전의 내 모습에서 못된 부분을 조금씩 갉아 없애 준 것이 비곡이었는데. 시간을 돌릴 수 있다 해도 과거로 기꺼이 돌아갈 것인지, 지금은 확실치 않다. 나는 이제 오만하기 짝이 없던 어린애가 아니다. 망각의 감옥 속에서 나는 진실로 내가 되고자 하는 바를 찾았고, 그 사람이 되기 위한 여정을 거치고 있다. 그 모습이야말로 진실로 자부심을 가져도 되는 모습이고, 타인에게 기억될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 사람은 어둠의 가장자리에서 몸을 떨며 잿불만 깜빡이는 잿더미 앞에 주저앉아 있다. 일 년이 넘어가는 시행착오의 반복 끝에 이미 내가 잃어버린 것, 아마 영영 잃어버렸을 것들을 보상하고도 남을 성취가 있기는 할 것인가. 나도 모르게 입술 밖으로 새어 나가는 저 말들처럼......

 

"나는 혼자거든." 그렇게 말했다. 어쩔 수 없었다. 어쩌고 싶지도 않았다. "혼자야, 혼자. 고단해 죽겠다... 연구하겠다고 매달려 있는 것도 갈수록 못 해 먹겠고. 세상 그 누가 와서 돕겠다고 난리를 치든, 결국 나 혼자 해야 할 일이거든. 오직 나에게만 주어진 일이라서, 다른 누구한테 기댈 수도 없고. 내가 다니는 곳마다 날 도와주겠다고 발굽을 내미는 사람이 나타나더라도 마찬가지야. 그... 다른 사람들은 다들 따뜻한 곳에 사는데 나 혼자만 추운 곳에 사는 기분이 어떤지 네가 알지는 모르겠다만. 그 추위가 가끔 무슨 짓을 벌여. 미안해. 너한테 이런 말을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어리고, 사랑받고, 돌아갈 집이 있는 녀석에게 해 줄 말은 아니었는데."

 

한숨을 폭 내쉬고, 열어 펼친 페이지에 고개를 처박았다. 다시 들여다보아야 할 금지된 고어의 성유물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 때 스파이크가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했다. 많이 놀랐다. "그게... 저, 알지도 못하면서 건방진 소리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냐."

 

무슨 말을 하느냐는 눈길만 던지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스파이크 나름대로 이해해 보려고 노력은 한 것 같았지만, 세상에 나만큼이나 그걸 잘 이해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 "사랑받는 것도, 돌아갈 집이 있는 것도 알고는 있어. 그게 내가 어떤 녀석인지 규정하는 건 아니거든." 스파이크가 배시시 웃었다. 말을 쥐어짜내기라도 하는 듯, 꼬리 끄트머리를 꽉 붙잡고 억지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나는 용족이지. 자색 새끼용. 그 셀레스티아 공주께서도 자색 용은 내가 처음이라고 하셨어. 그... 트와일라잇 스파클이랑 다른 사람들이 날 돌봐 줘서 정말 다행이다 싶은 것도 맞고, 다들 날 신경 써 주는 것도 알아. 근데... 나 자신에게 충실한 게 어떤 건지는 도저히 납득을 못 시키겠더라고. 나나, 다른 용족들에 대한 정보의 총량이 딱 정해져 있다고 치더라도 도저히 그걸 다 머릿속에 집어넣을 자신도 없긴 해. 그렇더라도 내가 누구인지 찾아가는 건 절대 멈추지 않아. 지금이 아니라 좀 더 나이를 먹게 된 다음에, 내가 가진 걸 전부 내버리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 트와일라잇도 기꺼이 돕겠다고 나설 건 뻔하지만, 암만 봐도 안 될 것 같단 말야. 그쪽도 그렇지?" 스파이크가 숨죽여 훌쩍였다. 그 다음 내비친 그 커다란 웃음은 내가 지어낼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용감해 보였다. "그래도 말야, 가끔은 혼자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봐. 자기 자신을 자기 눈이 아니라 남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면 진실된 나를 만날 수 없거든."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다리를 뻗어 스파이크의 보라색 어깨에 가만히 얹었다. "언젠가 네가 누군지 알게 될 날이 분명 오기는 오겠구나. 그 날 네가 찾아낸 네가... 지금 내 눈앞에 선 녀석만큼 진실되고 착한 녀석이라면 별로 이상하지도 않을 것 같네."

 

우리 사이에 다리가 놓인 듯했다. 꼬마의 눈가에 맺혀지던 눈물이 바로 말라 버려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트와일라잇이 늘상 하는 말이 하나 있거든. '너 자신에 솔직하라'고. 아무나 주워섬기는 같잖은 말장난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생각해 보면 나름대로 언젠가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에게 구원받을 날이 오리라는 말을 해 주려고 했던 게 아닐까 싶네. 혼자서 역경에 맞서는 게 절대 안 무서울 리는 없지만, 그래도... 음... 안 그랬으면 인생이 영 재미없지 않았을까?"

 

스파이크는 말 끝에는 씩 웃는 게 예의라 생각했는지 혼자 킬킬 웃었다. 처음에는 당혹스러웠지만, 열세 달 더 나이를 먹은 나는 저 꼬마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게." 조용히 대답하며 스파이크의 등을 쓸어 주고, 빙긋 웃어 보였다. "그래. 엄청나게 재미없었겠지."

 

"그래... 음..." 스파이크가 헛기침을 하고 까칠하기 짝이 없는 유니콘 앞에 놓인 먼지투성이 고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고대 월어라. 허. 번역 자료 필요해? 요 어디쯤에 고어 사전 있을 거야."

 

스파이크가 다른 데로 가 버리면 무슨 일이 생길지 나는 알았다. "아냐. 그러니까... 괜찮으면 조금만 더 어울려 줬으면 좋겠는데." 나직하게 말하고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후드 재킷의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저 아득한 혹한과 신성의 땅을 눈으로 더듬었다. "스스로 고독을 택하는 사람도 있지. 반면......"

 


 

나무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오시게. 모르는 이이든 아는 이이든 이리 들어와 앉으시게. 어느 병이라도 그에 맞는 탕약을 내어줄 터이니."

 

목재 특유의 묵직한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제코라의 집 안에 들어섰다. 들어가자마자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던 두건 두 장을 전부 내려 벗고, 살을 에는 한기를 견디며 물었다. "제코라 선생님 되시나요?"

 

"그래, 그렇네." 제코라가 고향에서 배달되어 온 두루마리 몇 개를 펼쳐 깊이 들여다보며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포니빌 집집마다 내 이름이 도는 것 같더군. 그대 또한 내 탕약 이야기를 익히 들었을 터."

 

"음, 사실 그런 이야기는 제가 잘 몰라서요. 어떤 분께서 제코라 선생님께 뭘 좀 가져다 드리라고 하셔서 갖고 왔지요."

 

"호오?"

 

"네. 마을 한복판에 가만히 놓여 있던 물건인데, 요 주변 사람들 중에서 이걸 갖고 계시다는 분은 한 분도 없었거든요. 그러면 모호크 갈기를 하신 분이시라면 혹시 알 수도 있겠다 싶다는 결론이 났죠. 설명이 됐으면 좋겠네요."

 

"이보다 명료한 설명이 또 어디 있겠는가." 제코라가 두루마리를 말아 한쪽에 놓았다. 나무집 깊숙한 곳에서부터 제코라의 의심 어린 시선이 느껴졌다. "그래. 그대가 뭘 가져왔는지 봐도 되겠는가?"

 

"그게..." 무심한 척, 가져온 물건에 덮어두었던 캔버스 천을 벗겨냈다. 한 쌍 북이 제코라 앞에 드러났다. "혹시 아시는 물건인가요?" 나는 아무 표정 없이 가만히 기다렸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제코라의 솜털 위로 새겨진 줄무늬가 순간 창백하게 바랬다. 제코라가 입을 떡 벌리고 느린 걸음으로, 내가 가져온 물건을 향해 다가왔다. 그녀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중얼거렸다. 고향 땅에서 쓰는 말, 그 한 편린일 것이다. 제코라가 침을 삼키고 말했다. "일건향현고日乾響絃敲. 제브라하라의 물건이네. 조상들께 맹세코, 아주 어렸을 때 이래 단 한 번도 이런 물건을 보지 못했네."

 

그럴 줄 알았다는 눈길을 던진다. "역시 제 생각이 맞았군요. 척 보면 얼룩말 물건인 걸 바로 알아볼 수 있나 봐요?"

 

"솔직한 감상을 묻는다면, 그래. 맞는 말일세." 제코라는 말을 더듬으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우리 동족에게 일건향현고가 갖는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지. 감히 거기 대고 농을 할 수는 없네." 제코라의 얼굴 위로 무엇인가 녹아들었다. 푸른 눈동자 위로 수십 개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며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그려냈다. 제코라는 북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가와, 가볍게 지나치며 내 가까운 곳에 섰다. "어렸을 적 내 형제자매들이 북을 쳐 주곤 했지. 그 때 생각을 하니 마음이나마 다시 거칠 것 없는 젊음을 되찾은 듯한 기분이 드는군."

 

"네. 향수란 으레 그런 법이죠."

 

"그렇기는 하되, 향현고가 여기 있다니 진실로 이해가 안 되는군." 제코라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물며 고향에서도 귀한 물건일진대, 그런 것이 형편 좋게도 평범한 포니의 눈에 들었다니 말이네?"

 

제코라의 작업실 깊숙한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목조 조각 하나가 추운 이 땅에서는 도저히 그 온기를 쪼일 수 없는 따뜻한 석양처럼 어른거렸다. 내 오두막 벽면마다 걸어놓은 악기들과 마찬가지로, 향현고는 내가 만든 것이었다. 내 악기들은 전통 방식대로 만든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으나, 향현고만은 전통을 고수하여 만들었다. 고독한 삶이란 고독의 이유를 탐색하는 게 태반이니까. 반쯤 얼어 죽기 직전까지 내몰리며 얼룩말 은자를 찾아가 그 앞에 선 순간, 나는 잊힌 옛 곡들보다도 귀중한 이유를 찾아냈다.

 

"글쎄요, 세상에는 더 이상한 일들도 있기 마련이라." 부러 경박한 투로 말했다. "전후사정이 어떻게 됐든지, 동네 사람들 중에서 감히 자기가 갖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없었어요. 암만 봐도 제코라 선생 말고는 제대로 쓸 수 있을 것 같지 않으니까."

 

제코라는 어느새 생각에 잠겨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뭐 문제라도 있으세요?" 묻는 척 말을 걸었다. "아, 그렇지. 동네 사람들 말로는 주술사시라고 하던데요. 혹시 주술사가 되면 음악을 연주한다거나 하는 건 전부 금기가 되는 건가요?"

 

제코라는 유년기에 보았던 경이로운 악기가 다시 눈앞에 나타난 것이 믿기지 않는 듯 차마 거기서 눈을 떼어놓지 못하고 있었다. "공부에 매진한다는 핑계로 즐겨야 할 때 즐기지 않은 것을 통렬히 반성하고 있네. 내가 이해할 수도 있을 세상의 미지를 찾아 이역만리 타향까지 온 게 아니었던가 말일세."

 

"그러고 보니 지식을 탐구하는 사람은 정작 자신 또한 그 탐구의 대상이 되어야 함을 잊는 일이 잦다고 하더군요."

 

제코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슬픈 듯 고개만 푹 숙이고 있을 뿐.

 

정작 나는 웃고 있었다. "그리운 곡조를 연주하실 수 없다면야..." 근처 스툴로 휘적휘적 걸어가 주저앉듯이 앉았다. 한 쌍 북 앞에 발굽을 하나씩 올려놓는 순간, 기적처럼 오한이 잦아들었다. "그럼 다른 사람이 쳐주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요? 적어도 들으실 수는 있을 테니."

 

제코라는 내가 내 몸에 불을 당기기라도 한 듯 입을 벌리고 물었다. "그대의 말이 사실인가? 그대가 제브라하라의 타악기를 다룰 수 있다는 말 아닌가?"

 

"흐음... 글쎄요. 선생님께서 워낙 말씀에 압운을 많이 실으시니 흥이 나시는 건지 아닌지 알 수가 있어야죠." 눈을 찡긋해 보이며 다른 쪽 스툴을 가리켰다. "일단 앉으시죠. 아무리 훌륭한 곡이라도 혼자 들어선 의미가 없어요. 주술사라도 가끔은 벗과 시간을 보내도 되는 거 아니겠어요?"

 

향현고 연주를 처음 들은 어린아이의 눈빛이 다시 어른거리는 눈가 아래 물기가 고여 갔다. 제코라가 빙긋 웃으며 내 건너편에 앉았다. 오래 전에 조사해 두었던 제례곡祭禮曲을 두드리기 시작하자 제코라의 얼굴에 기쁨과 환희가 스쳐갔다. 북 치는 법이라면 나 혼자서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 가며 조금씩 연습해 두었었다. 낯선 혹한의 땅에서 방황하는 두 사람이 이제 각자에게 결핍되었던 아름다움을 찾아 한 자리에 모였다. 어쩌면 여기서 더 나아가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나, 진도라는 것은 다만 그 보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고 있었다.

 

언제고 내가 짊어진 저주를 벗어 버리기는 할 것이다. "밤의 만장"을 비롯한 곡을 앞으로 더 주워담아 완성해야 할 일일지도 모른다. 새로 머릿속에 떠오를 곡들을 계속해서 주워담아 완성해야 할 일일지도 모른다. 그 다음 비곡이 다시 머릿속에 떠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한 곡일지, 열 곡일지, 수천 곡일지 나는 알 수 없다. 앞으로 더 가야 할 길이 얼마나 남았든지 이제 괜찮다. 내 이름을 모르는 친구들이기는 하나 저편에서 나를 기다리는 벗들이 있고, 그 벗들이 내비치는 따스함과 진심을 통해 나는 내 모습을 본다. 저들의 시선이 내게 닿아 있다고 생각하면, 내 영혼을 지탱해 주는 이들을 이제 놓치지 않는 날을 기다리게 된다. 그것이야말로 우주에 감도는 냉기와도 같은 한기를 뚫고 전진할 수 있게 해 주는 원동력이니.



 

 

이런 삶이나마 적어도 한 명 벗은 가질 수 있으리.

 

나 자신에게 솔직하기만 하다면야, 타자에게 솔직하는 것이 무엇 어려우랴.

 

 

 

 

 

미주

 

*1 All stallions ever want from a mare is some pie. 잠자리로 끌어들일 생각밖에 없다는 고수위 농담. SS&E가 이런 소리 할 때마다 역자 입장에선 참 난감합니다.

 

*2 슈트루델, 글레이즈: Strudel, Glaze. 슈트루델은 과일을 잘라 밀가루 반죽에 싸서 오븐에 구운 오스트리아 전통 과자이며, 글레이즈는 오븐에서 구워내기 위해 음식 위에 바르는 소스나 설탕을 뜻합니다.

 

*3 Ode to Joy. 베토벤 교향곡 9번 라단조 '합창' 중 4악장 '환희의 송가'. 프리드리히 실러가 지은 동명의 시를 가사로 사용하였음.

 

*4 Lunar Collection. Lunar Elegy를 항아비곡으로 옮겼으므로 이와 맞추기 위해 Lunar를 항아로 옮기고, Collection은 휘집彙集으로 옮겼습니다. 휘집은 '종류에 따라 모으다'는 뜻이며, 조선 후기 야담집으로 동야휘집이 있습니다. 여유당전서의 전서全書도 꽤 매력적이었습니다마는, 이 전서는 '어느 한 사람의 저작을 전부 모아 한 질로 만든 책' 또는 '한 분야의 저작물이나 사실의 전부를 망라하여 체계적으로 엮은 책'이란 뜻이므로 의미상 적합하지 않습니다. Lunar Collection은 내전 직후 기록말살에서 살아남은 자료를 모아놓은 것이므로 휘집이란 표현이 적합할 것입니다.

 

*5 칸탈루프. 녹색 껍질과 오렌지색 과육이 특징인 멜론의 한 종류.

 

*6 Ponyrecki. 폴란드의 음악가 헨릭 고레츠키Henryk Go'recki의 변형.

 

*7 Whinny Nelson. 컨트리 싱어송라이터 윌리 넬슨Willie Nelson의 변형.

 

*8 Haypocrates. 고대 그리스의 의사 히포크라테스의 변형. 의사 윤리를 선언한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남김. 현재 의사들이 선서하는 내용은 1948년 제네바 선언으로 개정된 것이다.

 

*9 Takes the cake. 여러 의미에서 '압권'을 뜻함. 여기에서는 설마 이런 짓까지 가능할 줄 몰랐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므로 대충 그에 맞춰서 변주했읍니다.

 

*10 Pound. 1파운드는 약 454그램.

 

*11 Bushel. 곡물, 과실 등의 무게를 나타내는 단위. 영국식으로 62파운드(28.123kg), 미국식으로 60파운드(27.216kg)를 나타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