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에게.
저주를 받았다는 건 무슨 뜻일까? 그게 진정으로 뜻하는 바는 과연 뭘까? 무언가를 빼앗겼다는 것? 아직 뺏기지 않고 쥐고 있는 것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 나는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운명에 떨어지고 만 것일까, 아니면 앞으로 들이닥칠 잔혹하고 어두운 운명을 그저 누워서 기다리고 있는 것에 불과한 걸까?
스스로를 동정하기란 참으로 쉬운 일이었어. 매일 각각의 하루마다 곱씹고 되새김질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무언가, 라고나 해두자. 얼마간은 이게 내 머리를 돌게 만들지는 않을까, 언젠가 그 끝에 다다랐을 때 애처롭고 처절한 발악에 기대게 되지는 않을지, 그래서 내 주위에 남아 있지도 않은 친구들의 유령 같은 그림자를 찢어놓게 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더구나.
그러던 차에 저 놀랍고 멋진 사람들을 만나게 된 거야. 나 또한 한때 그랬던 것처럼, 언제든 빛날 수 있는 기회를 안고 태어난 사람들이었지. 사실, 그 사람들과 내가 다른 거라고는 한 가지밖에 없어. 위대한 성과를 만들어낼 기회를 박탈당했는지, 그렇지 않은지의 차이일 뿐이지. 그런데 말이야, 그 사람들은 또 자신의 한계를 극복할 기회를 얻었으면서도 그걸 살리지 못해서 그냥 흘려보내는 경우가 많더라고. 인생이란 승리자든 패배자든 각자 어느 정도는 만족할 만한 점수를 따내게 되는 복잡다단한 게임이나 다름없는 모양이야. 하긴, 그래야 공평하지 않겠어?
그렇긴 해도, 내 앞날이 어떻게 될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비가에 담긴 마법의 힘을 깨워내 나를 가둔 이 보이지 않는 감옥의 검은 철창을 깨고 나오기 전까지는 망각, 모호성, 공허만이 넘실대는 미래밖에 보이지 않을 거야.
그러면, 내 주변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 사실 포니란 종족은 태곳적부터 저주를 짊어진 채 살아오고 있는 거나 다름없지. 기억상실과 한없는 냉기의 저주는 물론 아니야. 우리 자신의 꿈과 열정을 표현할 수 있는 멋진 수단들을 써먹을 수 없게 만드는 무지의 저주라고나 해두자.
적어도 나만큼은, 그 누구도 그런 저주를 받고 있지 않기를 바랐어. 이 저주만 끊어내고 나면, 또 다른 저주를 끊어내는 작업을 시작하려 해. 내가 그렇게 바라긴 했지만, 저 친절한 사람들 가운데 자신이 원하던 만큼만이라도, 자신이 해 왔던 만큼이라도 찬란하게 빛날 수 있었던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는 게 내 결론이야. 그 사람들을 도울 방법은 무엇일까? 내 재능을 죽여 없애던 저 사악한 짐승의 숨통을 끊어놓을 수 있는 은탄은 무엇일까?
그러니 난 아냐. 난 저주받지 않았어. 다른 사람보다 복이 조금 박한 것뿐이고, 조금 덜 다듬어지고, 조금 덜 빛나는 것뿐이지.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내 인생에 있어서도 이미 격살당한 그것에도 다시 힘을 불어넣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어. 빛을 잃어버리긴 했지만, 다시 빛나게 만들어 보겠어. 내가 얼마나 할 수 있는지, 얼마나 할 수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내 주변 사람들이 그런 행운을 얻게 되리라는 꿈과 희망을 포기할 수는 없지.
문을 열고 가게에 들어서자 매달려 있던 종이 달랑거리며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화려하게 장식된 의상실 안으로 부드러운 음색이 흘러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훨씬 나긋하면서 보다 강단 있는 목소리가 종소리를 누르며 들려왔다.
"캐러셀 부티크에 어서 오세요. 가장 화사하고 세련된, 세상 단 하나뿐인 옷만을 취급합니다."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지금껏 들었던 인사 중에서는 가장 쌈박한데.
"잠시 실례할까요......" 가능한 정중하고 공손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문제의 만장을 완주한 지 벌써 한 주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흐트러졌던 신경도 거의 수습되어 있었고, 다시 누굴 만나러 나가는 것도 좋았다. 고급하게 장식된 의상실 안으로 낡은 가방과 수수하기 짝이 없는 후드 재킷을 입고 들어서니, 깨끗한 직물의 냄새와 눈이 절로 즐거워지는 커튼이 반겨주었다. "래리티란 분께서 여기서 일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왔는데요. 혹시 잠깐 말씀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나는 오래 전, 한때 친밀하게 지냈던 자들과 '인사'를 나눌 때는 이렇게 하도록 하자는, 간단한 규칙 하나를 정해두고 있었다. 일을 간단하게 하려거든 처음 만나는 척 인사하는 게 가장 편했다. 누구라도 대뜸 이름으로 불렀다가 괜히 경계심만 키우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이 나름의 '법칙'이 과연 맞는 걸까 고민한 적은 규칙을 정한 이후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머, 제가 래리티랍니다. 세상에 딱 하나밖에 없는 그 래리티요." 래리티는 무례한 시종을 훈계하는 공주처럼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그 나긋함 안에는 그런 오만함을 조롱하는 듯한 푸른 서슬이 있었다. "어머, 내가 뭐래니.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여자는 웃음을 누르려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새로 멋진 드레스를 하나 만들고 있었는데, 한창 작업이 잘 되어 가던 차라 말이 멋대로 나왔네요. 한창 배고플 때 식료품점에 가면 자기도 모르게 말이 나오는 것처럼요. 또 괜한 말을 한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흠...흠...흠..."
창 밖의 세상에선 그야말로 멋진 하루가 흘러가고 있었는데, 그 찬란한 빛이 예쁘게 장식한 창틀 너머로 흘러와 의상실 벽 깊은 곳까지 스며드는 듯싶었다. 문제의 흰 유니콘은 한 점 만들다 만 옷을 한창 만지작거리면서 매끈한 광택을 흘리는 멋진 무도복으로 완성지어 가고 있었다. 래리티의 어조는 한창 다듬고 있던 무도복이 풍기는 기품과 굉장히 어울렸다. 흡사 범죄자라도 된 기분이 들 지경이었다.
"아뇨, 사과하실 것도 없으신데요." 나는 걸음을 옮겨 래리티의 등 뒤에 가서 섰다. 그리고 목을 쭉 빼 래리티가 만들던 옷을 어떤 구경거리라도 되는 듯 어깨 너머를 들여다보았다. 지금껏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절로 매료될 수밖에 없는 것들이 그곳에 있었다. 캐러셀 부티크는 일종의 마법이 걸린 곳이 아닌가,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력을 가진 것들이 태어나는 곳에 내가 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선생님의 뛰어난 손재주와 능력이 온 마을에 소문이 자자하더라고요." 몸이 떨리는 가운데 평범한 어조를 유지하기란 힘든 일이었고, 목소리가 절로 커졌다. "그래서, 과욋돈을 좀 벌어 보실 생각은 없으신가 해서요."
"어떤 일을 하면 되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래리티가 돌아보지도 않고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푸른 무도복의 하늘거리는 치맛자락 위로 푸른 리본을 하나 더 감고 있던 참이었다. 일과 사람이 하나가 되어 있었고, 나는 그 위대한 여정의 궤도를 빙빙 도는 위성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새롭고 놀라운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고 무시해 버리는 건 부끄러운 일이긴 하지만, 그만큼이나 주문이 많이 밀려 있는 것도 사실이랍니다. 마을에 떠도는 제 소문을 들으셨다면 요즘 제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것도 같이 들으셨지 않을까 싶네요. 방문 예약 일정을 먼저 잡는 게 좋겠어요. 저기 책상에 주문제작 의뢰서와 주의사항을 적어놓은 문서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아...... 옷을 주문하려는 건 아닌데요." 우물쭈물하는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래리티는 순간 리본을 너무 세게 잡아당겼다. 리본은 거의 뜯겨나오듯 풀려나왔다. 여전히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지만, 많이 당황한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오, 그래요?" 래리티의 목소리는 살짝 갈라져 있었다. 찰나의 침묵이 흐르는 동안 어색함이 감돌았다. "드레스 주문이 아니라면, 어떤 용무로 찾아오셨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가능한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의 특별한 재능은 보석 세공이라고 들었거든요." 나는 사파이어를 박아놓은 듯한 래리티의 큐티마크를 따라 시선을 움직이며 가방을 뒤적거렸다. “아주 귀한 보석을 찾아내는 일과 그 보석을 세공해 마법을 거는 일이라면 선생님이 제일이라고 하더군요.”
"어, 그 사람들이 그러던가요?" 래리티는 드레스 끝자락을 마감하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만들던 드레스 너머 허공을 쳐다보기라도 하는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흠, 확실히 거짓말이 아니긴 하죠. 그러면, 말씀하시고 싶은 바가......"
"제 이름은 라이라 하트스트링스에요. 마법을 걸어 주셨으면 하는 게 있어서요." 라고 대답했다. 내게 내린 저주와는 무관한, 냉기가 감도는 분위기에 몸을 떨면서 겨우 웃고 말했다. "가능하면 다른 장인들에게는 맡기고 싶지 않아서 말이죠. 선생님이 가장 훌륭한 장인인 걸 아는 이상, 그보다 못한 사람들 손에 맡길 이유가 없잖아요?"
"흠......" 래리티가 천천히 몸을 돌려 나를 쳐다보며, 아무렇지 않게 씩 웃어 보였다. "저 사람들이 제가 최고라고 하던가요? 글쎄요, 제 환심을 사시려는 것 같은데......"
"그래도 이렇게 바쁘실 줄은 상상도 못 했지 뭐에요." 나는 당혹감에 몸을 움찔하며 말했다. 나는 여기에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는 것은 오래 전에 깨달았다. 그렇더라도 내가 여기에서 무슨 말, 무슨 짓을 하든지 포니빌에 온 이래 가장 불편한 상황이 지속되었을 것임은 자명했다. "이거 정말 멋진데요. 아무래도 사소한 일로 귀찮게 해드리는 건 실례가 될 것 같은데."
"어머, 무슨 말씀을. 편하게 말씀하세요!" 래리티는 내가 계단 꼭대기 난간 위에 불안불안하게 올라앉은 어린애라도 되는 것처럼 바로 달려들며 말했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래리티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기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다가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듯했다. "제 자랑을 하려는 건 아니지만, 마법 부여 정도라면 자면서도 할 수 있죠. 말하고 보니 벌써 제 자랑이 되어 버렸군요. 어쨌든 그러면서도 제 정신 집중에 도움이 될 테니, 결국은 제 작업을 어느 정도 도와주시는 것으로도 볼 수 있지요! 그럼-흠흠..." 래리티는 당당히 웃어 보였다. 그 시선에서조차 어떤 광책 이는 듯싶었다. 래리티의 심미안이 어디서 나오는지 대략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하트스트링스 씨, 마법을 부여할 보석을 몇 개나 되나요?"
나는 지고 있던 가방을 돌아보았다. 얼마 전 제코라에게서 사들인 음석 네 개는 이미 받은 마력을 모두 잃어버린 채였다. 내 머릿속에 박힌 새로운 곡을 연주할 가능성이 약간이라도 있다 쳐도(연주할 용기는 어떻게 짜낸다 치고), 이 돌덩이 네 개를 마력으로 완벽하게 충전하기 전까지는 아주 조금도 진도를 뺄 수 없었다. 음석 충전 작업이 빨라질수록 내가 지하실로 다시 기어 들어갈 날도 앞당겨질 것이고, 자연히 애상곡 연주도 근시일이 될 것이며 내 영혼 또한 불가해하고 차갑고 어둠만이 가득한 시커먼 심연으로 더욱 빨리 내던져질 것이었다.
"딱 하나에요." 나는 말했다. 가방에서 검은 크리스털 하나를 꺼내 래리티의 눈 앞에 띄워 주었다. "새로 쓰는 곡이 있는데, 옆에 마력 전지가 있으면... 그... 좀 더..."
"영감을 보다 쉽게 얻을 수 있다는 것이군요?" 래리티는 내가 건넨 음석이 태초부터 그녀 자신의 것이었던 듯 자연스럽게 채가면서 말했다. 그리고는 염동력을 가지고 다양한 각도로 돌려 가며 이리저리 뜯어보는 것이었다. "더 말씀하실 것도 없으세요. 저도 그 기분 아주 잘 안답니다. 유니콘은 주변 환경에 아주 쉽게 영향을 받아요. 비물질 세계에 흐르는 수많은 마력 흐름과 이어질 수 있는 지복을 받지 못한 분들을 보면 많이 안타깝죠. 호이티 토이티 선생님은 들어 보셨죠? 그분은 말 그대로 어스 포니 문화계에 숨어 있던 다이아몬드 같으신 분이죠. 일설에 의하면 선생님께서 처음으로 크게 유행시키신 패션 라인을 작업하신 곳이 라스페가수스 외곽의 나무 오두막이었다는데, 하! 말이 안 되지 않아요?"
"어......"
"흐으음... 어머, 이런 이런. 왜 여기서도 가장 실력 있는 마법부여사를 찾아오셔야 했는지 알겠군요." 래리티는 재미있다는 듯 나를 보고 눈을 찡긋해 보이며 말했다. "이 가엾은 녀석이 얼마나 혹사당했는지도요! 거의 못쓰게 되기 직전인데요? 대체 이 녀석으로 뭘 하시는 거죠? 설마 윈디고 소환 의식에 쓰시기라도 한 건가요?"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머릿속으로 기억들이 생생하게 일어나 서릿발과 어둠으로 치장한 몸뚱이를 이끌고 나를 덮쳐왔다. "글쎄,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작곡가와는 이미지 차이가 좀 있다고만 해두죠." 나는 무심결에 웅얼거리듯 말했다. 말의 높낮이를 일정하게 유지하려면 머릿속으로 들려오는 음악 소리를 억눌러야 했다. 두 귀가 부르르 떨렸다. "실전된 것들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성가를 복원하다 보면 가끔씩은 문헌으로 남아 있는 것보다도 더 깊숙한 곳까지 파고 들어가야 할 때가 있지요. 보통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제 능력이 부족한 경우죠. 그러다 보니 그... 음... 마력이 많이 필요하더군요. 음... 이해하시죠?" 나는 거의 드러내놓고 몸을 움찔했다. 머릿속으로는 당장 부티크를 박차고 나간 뒤 다음 날 이 짓을 반복할 계획을 짜고 있었다.
다 망한 일이 그대로 끝장나지 않은 것은 순전히 래리티 덕분이었다.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예술가라는 것은 확실히 알겠어요. 저는 그런 분들을 아주 존경하지요." 래리티는 빛을 잃은 음석 너머로 빙긋이 웃어 보이고 말했다. "저도 고전주의 양식에 깊이 흥미가 있거든요. 타임머신을 만들어 턱수염 스타스월 선생님이 살던 시대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지..." 래리티가 이마에 발굽을 대더니 눈을 반짝이며 의상실 천장을 올려다보고 말했다. "아아, 멋져라. 세월이 흐르며 더러는 좀먹어 없어지고 더러는 쇠퇴해 사라진 양식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그 시대의 그림 한 장만 현실 시대로 가져올 수만 있다면 현대 이퀘스트리아에도 진실된 아름다움과 참된 멋이 다시 살아날 수 있을 테지요. 하지만, 그럴 수가 없어요..." 래리티는 다시 검은 보석에 눈을 맞추더니 그 시커먼 표면 아래로 비치는 자신의 형상을 가만히 달래듯이 고운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창조하고 고무하고 빛내지 않을 거라면 우리가 존재할 이유는 없지 않겠어요?"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어색하게 웃었다. "제가 어떻게 선생님에 비하겠어요. 전 단순한 역사가일 뿐인데."
"말도 안 되지요! 그렇게 비하하지 말아요!" 래리티가 빙긋이 웃었다. "그 누구도 과거의 부록으로 태어나지 않아요. 오히려 함께 만들어 가야 할 미래를 갖고 태어나지요. 우리 자신만의 특별한 미래를 말이에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래리티를 향한 시선을 거두었다. 의상실 벽은 반짝이는 보석이 곳곳에 붙어서 반짝이고 있었고, 곳곳에 거울이 서 있었다. 나는 그것들이 만들어낸 빛나는 만화경에 비친 래리티의 흰 몸과 자색 갈기를 쳐다보았다. 내 몸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저는 미래에 큰 가중치를 두고 살지는 않아요." 나는 작은 소리로 대답하며 다시 래리티를 쳐다보았다. "지금 당장의 삶에 집중하는 것이 죄는 아니잖아요?"
"성자와 죄인도 많은 면에서 비슷하기 마련이지요, 그러니 그리 마음 쓸 일은 아니지 않겠어요? 그렇죠?" 래리티는 경망스레 말을 끝내더니,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그럼, 라이라 씨. 그... 한때 찬란하게 빛났던 보석을 다시 살려내는 일에 관한 얘기를 해 보자면..."
"아, 음..." 나는 그 자리에서 자세를 바꾸었다. "이런 말씀 드려도 못 믿으실 건 아는데, 그게 그래뵈도-"
"산양이 조각한 음석이군요. 저도 어느 정도 안목은 있답니다. 그건 그렇고, 이거 정말 좋은 구경 했네요. 산양들이란 미학적인 데 관심은 전혀 없지만, 일단 자기들 이름을 내걸고 만드는 물건이라면 품질 관리는 정말 철저하거든요. 이걸 산양이 아니라 이퀘스트리아 쪽에서 만들었다면 재충전 과정에서 어느 정도 손실이 있었을 거에요."
"사례비는 어느 정도 드려야 적당할까요?"
"흠..." 래리티는 근처 창가로 걸어가며 뿔을 밝혀 커튼을 걷어 의상실로 쏟아져 들어오는 정오의 찬란한 일광을 방 깊숙한 곳까지 들여보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제 돌이켜보니 마법부여를 하지 않은 지도 대단히 오래 되었군요. 예전에 쓰던 요율이 어느 정도였더라..." 래리티는 잠시 말이 없었고, 그걸 지켜보는 나는 래리티가 나를 등쳐먹을 생각으로 옛 기억을 반추하는 척이 아닌가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래리티는 평온한 시선으로 나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세 닢으로 하지요. 괜찮은 값이죠, 그렇지 않은가요?"
그런 말을 듣고 나니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래리티를 똑바로 쳐다보지는 못했다. 나는 더듬거리다가 대답했다. "음... 그렇네요. 정말... 그... 친절하시네요."
"흐으음...... 그렇다고 하신다면야, 그런 것이겠죠." 래리티는 그날 아침부터 웃기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웃음을 그치지 못한 것처럼 말끝을 살짝 떨며 대답했다. 그리고는 벽장을 열고 철제 스탠드 하나를 띄워 가져왔는데, 염동력에서 반짝이는 불빛보다도 더욱 생기 도는 분위기였다. 래리티는 스탠드에 쌓인 먼지를 훅 불다가 기침을 하더니, 스탠드 다리 세 개를 펼쳐 창문 앞에 가져다 놓았다. "이 녀석이 녹슬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가보를 망가뜨리면 가족들에게 큰 잘못을 하게 되는 거니까요."
"혹시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저..." 나는 삼각대 모양 스탠드와 함께 서 있던 래리티에게 다가섰다. "이건 무슨 물건인가요?"
래리티가 경쾌하게 웃고 말했다. "정말로 역사서만 읽고 다른 건 아무것도 안 하셨나 봐요, 그렇죠? 다양한 마법을 접해보지 못한 분들을 보면 늘 안타까워요." 래리티는 헛기침을 해 목을 닦고는 유리 렌즈를 띄워 금속 장치 상단에 조심스레 고정시키면서 말했다. "이건 천공 증폭기라는 물건이에요. 이 세상에는 마력을 받은 다양한 물건들이 있지만, 그 어떤 것이라도 안전하게 원래 그대로 반짝이는 상태로 충전시켜 되돌려 놓을 수 있는 원소가 하나 있지요."
나는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햇빛이군요?"
"그래요." 래리티는 스탠드 최상단에 장치되어 있던 원형 금속 죔쇠 사이로 증폭된 햇빛이 지나가도록 렌즈를 조금씩 기울여 각도를 조절하면서 나긋하게 대답했다.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는 낮의 아름다움과 온기만을 전해 주시는 게 아니에요. 그분 자신의 정수, 말인즉 위대한 어머니께서 직접 내려주신 신성성 그 자체를 허락해서 쏘이게 해 주시는 것이죠. 따라서 태양에너지를 올바르게 집중시킬 수만 있다면 공기 중에서 마력을 직접 끌어오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는 거에요." 래리티는 조심스럽게, 정말로 조심스럽게 힘을 잃은 음석을 스탠드 위로 가져가 반들반들한 죔쇠 안에 넣고, 죔쇠를 단단히 조였다. "이이이제... 됐어요! 그럼 결론은 이렇게 되죠. 자기 자신의 빛을 누구에게나 나누어 주시는 공주님만큼이나 친절한 사람이 또 어디 있겠어요?"
나는 증폭기 쪽으로 다가가 조용히, 어린아이가 쳐다보는 것과 같은 선망의 눈길로 음석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았다. 우리 눈앞에서 집중된 태양광이 음석에 빨려 들어가자 검은 크리스털 안쪽에서부터 빛이 피어나며 빛의 자리를 차지하고 눌러앉아 있던 탁기를 바스라뜨리며 밀어내는 모습이 시현되고 있었다. 음석의 빛은 처음에는 흐릿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매끄러운 표면 아래서부터 익숙한 에메랄드 빛 광무로 반짝이기 시작했다.
"이거... 정말 멋진걸요." 나는 말했다. "알리콘의 광명을 병에 담아둔 것 같아요!"
"아뇨, 아직 끝난 게 아니에요." 래리티가 딱 잘라 말했다. 그리고는 나를 가만히 한쪽으로 밀어 물러서게 한 뒤, 음석을 올려둔 삼각대가 의식의 제단이기라도 한 듯 경건해 보이는 걸음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흠흠, 제 역할이 여기부터라서요." 래리티는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 때 나는 래리티가 내 동전을 가져갈 때가 가까웠음을 직감했다. 래리티는 뿔 위로 마력을 집중시켰다. 두 번째로 빛이 피어나며 부티크 내부를 밝혔고, 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래리티가 광채를 폭포처럼 흘리우는 음석을 잡고 있었다.
래리티가 음석에 마력 봉인 마법을 걸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트와일라잇이 관리하는 도서관에서 월마법에 관한 온갖 서적을 섭렵하며 일 년을 보낸 게 헛된 것은 아니어서 나 또한 다양하고 멋진 마법들을 다룰 수 있게 되었지만, 래리티의 천재성은 놀라운 것이었다.
"정말... 정말 대단해요." 나는 음석과 래리티를 번갈아 보다가 씩 웃었다. "이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다니."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음... 저한테는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래리티는 집중을 풀지 않은 채 나직하게 말했다. "괜히 제 자랑이나 하려고 드리는 말씀이 아니에요. 우리는 모두 각자 어울리는 자리가 있는 법이에요. 제가 들이는 시간의 반밖에 쓰지 않으면서 마력은 세 배나 더 많이 충전할 수 있는 분들도 봤지요. 저는 그분들의 뒤를 무작정 따라가지 않은 것뿐이에요. 누가 뭐래도 각자가 타고난 재능이란 것은 단순한 돈벌이 수단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이니까요."
"그건 그렇다고 해두고, 고마워요." 나는 잠시 웃다가 뿔을 밝혀 가방에서 금화 세 닢을 꺼냈다. "여기 금화도요." 래리티는 내가 건넨 금화를 뿔을 밝혀 받아갔다. 정산이 끝난 뒤 나는 말했다. "덕분에 오늘 하루 즐겁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제 지불 능력 밖에 있는 일이라."
"오?"
"제가 감히 넘겨짚자면, 오늘은 정말 기분이 좋아 보이셔서 말이에요. 사람들이 항상 청명한 하루 같은 기분이면 좋겠는데."
"달리 그러지 않을 이유도 없잖아요?" 래리티는 마력 봉인 마법을 거는 와중에도 나를 곁눈질로 보며 말했다. 그러더니 입술을 둥글게 말아 올리며 날 때부터 그 웃음을 띄우고 세상에 나온 듯한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제가 한 마디 할 수도 있겠군요. 제가 오늘 기분이 좋은 건 최근에 굉장히 멋진 일이 있어서 그런 것이죠. 속물 같아 보이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각자의 행복에 속물 같은 잣대를 들이댈 필요는 없지요. 어떤 일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혹시..." 래리티의 나긋한 목소리는 잠시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실버 심즈Silver Seams 선생님을 아세요?"
나는 의상실 곳곳에 배치된 화려한 장식들만 하릴없이 쳐다보았다. 나는 답하지 못했고 내 대답은 궁박했다. "들어 보았다고 하기는 어렵죠. 그런데... 그... 이름이 그렇게 대단한 것인가요?"
래리티는 다분히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 "물론이죠, 이름은 전부나 다름없답니다!" 나는 순간적으로 래리티가 마력부여 작업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스탠드를 걷어차 버리지 않을까 생각했다. 래리티는 나를 다시 흘깃 쳐다보았는데, 그 시선은 다이아몬드처럼 냉랭해 보였다. "이름은 그 주인을 정의해요. 각자가 가는 길도, 그 주인에 대한 악평도 모두 그 안에 담기는 법이고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래리티는 아직 말을 마치지 않았다. "그리고 실버 심즈 선생님의 명성은 현재 진행행이에요! 메인해튼 패션계에서도 가장 명망 높은 디자이너시니까요! 지난 10년 동안 필리델피아와 트로팅엄에서 매년 개최된 패션 박람회 가운 분야 최정상을 지킨 분이지요! 게다가 캔틀롯 하스워밍이브 야외극에 쓰는 화려한 의상들도 그분의 작품이고, 원더볼트 최신 단복도 선생님께서 디자인한 거에요!"
"이야, 어마어마한 이력인데요."
"대단한 이력 수준이 아니에요. 이퀘스트리아 문화계에서 실버 심즈라는 이름이 갖는 파급력은 그야말로 신화적이에요. 세상에, 그분과 직접 면담할 수 있다니 도저히 못 기다리겠어요."
"그럴 만도 하군요." 나는 고개를 주억이며 대답하다가, 말의 의미를 깨닫고 전율했다. 반들반들하다 못해 반짝거리기까지 할 정도로 깨끗하게 정리된 의상실과, 곳곳에 전시해 놓은 화려한 드레스, 래리티가 만들던 옷은 그 의미였다. "잠깐만요, 그거 실버 심즈 선생님이 여기 오신다는 거죠?"
"이히-히히히-바로 그거에요!" 래리티는 그 자리에서 몸을 비비 꼬았다. 래리티에게 갑자기 페가수스의 날개가 달려서 천장 밑을 몇 바퀴나 빙빙 돌더라도 그리 이상하지는 않을 듯싶었다. "업무차 트로팅엄에 들르신다고 하는데, 도중에 포니빌에 잠시 들르실 거라고 해요. 좋은 사업 파트너이신 호이티 토이티 선생이 실버 심즈 선생님과 몇 마디 나눌 기회를 잡았다면서, 잠시 저희 의상실에 들러 보자고 개인적으로 제안해 보시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실버 심즈가! 패션계의 고고한 여왕이! 바로 여기 오신다는 거죠!" 래리티는 거의 실신 직전이었다. 음석 깊은 곳에서부터 마력에 의한 빛이 맥동하며 퍼져 나온 덕에 래리티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아, 그래도 제 인생이 워낙 부박하다 보니... 이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까... 그... 둥실둥실하네요. 핑키 파이라면 분명 이렇게 표현했을 테지요. 이해 못 할 소리를 늘어놓아서 죄송하네요."
"잘 된 일이니 이렇게 흥분하시는 것도 당연하죠." 나는 웃으며 말했다. 래리티가 마력 부여를 마친 음석을 내 앞에 띄워주었고, 나는 기꺼이 음석을 받았다. "심미안이 대단하시니까요. 심즈 선생님도 래리티 씨 작품들을 보시면 분명 즐거워하실 테지요."
"네?!" 깜짝 놀란 래리티의 목소리는 쇳소리가 났고 당혹감이 역력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러더니 의상실에 걸어놓은 옷들을 발굽으로 가리켜 보이며 물었다. "저기 걸어놓은 보잘것없고 시시한 것들 말씀이세요?"
나는 진열창 앞에 도열해 있던 반짝이는 드레스들을 흘끗 보았다. "제가 보기에는 굉장히 멋지고 예쁜 것들인데-"
"그건 딱 그 수준밖에 안 되는 것들이에요!" 래리티는 비틀거리며 나를 지나쳐 갔다. 그리고는 주위에 늘어서 있던 말 없는 마네킹들에게 연설하듯 말했다. "실버 심즈 같은 분들께 깊은 인상을 남기고자 한다면 마땅히 더 아름답고, 더 멋진 것들을 만들어야 해요! 그야말로 밤하늘의 별처럼 찬란해야 하죠! 창의력을 담당하는 부분 자체로도 부족하니 마땅히 그 이상의 초자연적인 힘이 필요한 거에요!" 그 모습은 입장료가 전혀 아깝지 않을 굉장한 원맨쇼와도 같았고, 나는 초대 손님이나 다름없었다. "앞으로 일주일도 안 남았어요! 선생님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으려면 마땅히 부티크를 아름답게 만들어야 하는데, 그럴 시간조차 얼마 없고요! 선생님께 신선한 충격과 흥미를 안겨드릴 만한 드레스를 만들어야 해요. 여기부터 블루 밸리까지 그 누구에게라도 가슴 깊이 새겨져 있는 그분의 명성만큼이나 강렬하고 정확하게 그분의 머릿속에 제 이름을 남겨야 하니까!"
"부담감이 엄청나신가 봐요." 나는 말했다. 음석을 가방에 집어넣고 지퍼를 당겨 닫은 뒤 래리티를 보고 빙긋 웃었다. "아름다움의 극한에 다다른 작품을 빚어내실 수 있으리라 믿어요."
"단순히 시간만 가지고 되는 일은 아니에요. 영감은 위대한 것이지만, 그만큼 제멋대로거든요. 지금까지도 주문받은 옷들을 겨우 하나씩 만들어 내면서 이 세속의 홍진에서 어떤 영감이 떠오르지는 않을까 하는 희망만 붙들고 있거든요. 불행하게도 저희 고객들이 넣은 주문을 가지고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는...데, 그게... 아무리 높게 쳐도 서민적인 게 최선이거든요. 셀레스티아 공주께서 플레어(나팔 모양) 디자인을 넣은 옷은 주문하지 말라고 선포하신다면야 좀 상황이 나아지긴 하겠지만..."
"저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영역이네요." 나는 낙심하여 말했다. "제가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흐음. 벌써 충분히 도와 주셨는걸요.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그걸 다 받아 주셨으니까." 래리티는 귀족 같은 웃음소리를 내더니, 나를 돌아보고 말했다. "그러니..." 래리티는 생각에 잠겨 턱을 문질렀다. "제가 그쪽에게도 도움을 드려야 공평하지 않을까요."
나는 당황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며칠 전에 연주한 만장의 영향 때문에 아직도 정신을 다 수습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더라도, 나는 존재를 잊히는 저주를 받은 몸이라는 것을 설명하기에는 그 이유가 너무나 궁박했다. "마력부여를 해 주신 것만으로 충분해요."
"반짝이는 돌멩이 하나 정도는 잊어버려요. 그... 따뜻하게 입고 다니시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이게 직업이다 보니 눈에 띄는 게 좀 있어서..."
아하, 그럼 그렇지.
"보시기에 어떤가요?" 나는 대충 짐작은 간다는 눈길로 래리티를 쳐다보고 말했다. "대강은 알겠지만요. '낡아' 보이지요?"
"그래요, 대략 그렇다고 할 수 있겠군요." 래리티는 빙긋 웃으며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내 두 앞다리 쪽에 거의 닿을 듯 말 듯하게 발굽을 가져가더니 말했다. "음... 잠시 살펴봐도 될까요..."
"그럼요..."
래리티는 내 주위를 빙빙 돌면서 새까만 후드 재킷의 옷소매와 후드를 이리저리 만지작거리고 들여다보았다. "음... 일단 소맷동이 다 낡아서 올이 다 드러났군요. 게다가... 세상에, 이 기운 곳들은 또 뭐죠? 보기 좋지 않은 건 그냥 넘어가더라도 바느질한 곳이 터져서 너덜너덜하잖아요! 이 녀석이 제 역할을 계속할 수 있도록 손을 보셨다는 것 정도는 알겠지만, 이렇게 하면 옷이 오히려 망가져요. 이렇게 손을 봐서 입고 다니는 분이 계실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저한테 옷은 그 정도면 충분해서요. 그렇기도 하고, 감기에 걸리거나, 어..., 정말로 몸이 추워질 때는 다른 방법이 또 있으니까."
"그것은 몸의 일을 돌보는 것일 뿐이죠. 안 꾸미고 다니실 거에요?"
"제가 잘못 들었나요?"
"솜털 색부터 굉장히 귀하고 예쁜 색이잖아요. 갈기도 잘 관리하고 계시고. 세련미를 타고난 유니콘이라고 해도 될 정도에요. 그런데도 이런 누더기 같은 옷을 두르고 다니면 아깝잖아요?" 래리티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전문가적 권위가 묻어나는 동작으로 고개를 위로 치켜세웠다. "그런 이유에서! 보온 능력을 유지, 강화한 새 옷을 만들어 드릴 수 있도록 제게 전적으로 협조해 주셔야겠어요."
"저기, 래리티 씨."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로, 괜찮다니까요..."
"따분하고 흔한 게 나쁜 건 아니지만, 그것들을 보다 좋게 바꿀 수단이 있는데도 안 쓰는 건 어리석은 일이에요. 지금까지보다 기분이 괜찮아질 테니 맡겨 줘요." 창문 너머에서 실려오는 찬란한 햇빛을 받은 래리티의 치아가 반짝거렸다. "옷 값도 필요 없어요! 그래도 영 그렇다 싶으시면, 제 머리 속 디자이너 세포들 몸이나 풀게 해 준다 생각하세요. 거기다 더 좋은 옷까지 받아 입으실 수 있다고요! 실버 심즈 선생님 방문을 기념하는 데 하트스트링스 씨처럼 우아한 사람을 멋지게 꾸미는 것만큼 좋은 게 또 있겠어요?"
“저기...” 나는 검은 옷소매 끝자락이 더러는 성스럽고 더러는 냉혹한, 고독의 신성한 기억들의 총체라도 되는 양 움켜잡은 채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말했다. “래리티 씨의 선의와 친절성은 정말 감사드리지만...” 나는 잠시 몸서리쳤다. 지금 필요한 건 챙긴 지 오래였다. 포니빌의 아름다운 자들과, 다행스럽게도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의 인생에 개입하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래리티는 당장 해야 할 일만으로도 바쁜 사람이었고, 나는 래리티의 좋은 기분에 이끌려 나온 불필요한 부산물을 기꺼이 먹어치울 수 있는 자는 못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사실을 말해주기로 했다. “설령 당신과 호이티 토이티, 실버 심즈 선생님까지 달라붙어 새 옷을 만들어 주신다고 해도... 이걸 버릴 수는 없어서요. 그러니까... 일종의 애착 같은 게 있다고 해두죠. 제게 옷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할 때 어떤 좋으신 분이 주신 선물이거든요.”
“흐으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래리티가 의외로 내 말을 쉽게 받아들여서 조금 놀랐다. 사실, 내심 약간은 아쉬웠다. “제가 억지로 새 옷을 지어드리고 떠맡길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그건 그렇고...” 래리티는 내가 의상실에 처음 들어섰을 때 붙잡고 있던 드레스 쪽으로 되돌아가며 눈을 찡긋해 보였다. “저도 가장 좋은 선물의 힘을 무시할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니까요. 감성도 감각과 비슷하거든요. 감성 없이는 지금 존재하는 자신을 구성하는 근간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리라 생각해요.”
나는 의상실에 지는 그림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침을 삼켰다. “제가 아침마다 하는 생각이네요.”
“그렇더라도 제 호의는 계속 유효해요. 언제든 편하실 때 들르셔서 말씀만 하세요.” 래리티는 만들던 드레스의 치마 부분에 리본을 더 달면서 말했다. 작업에 집중하기 시작하면서 목소리가 서서히 늘어졌다. “실버 심즈 선생님께 깊은 인상을 주는 것도 좋지만, 제 손님들은 아주 잠깐이라도 잊으면 안 되니까요. 그러면 저 자신이 너무나 싫어질 거에요.”
그 순간만큼은 래리티가 내 쪽을 볼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나는 무진 애를 쓰며 얼굴에 띄운 미소를 유지했다. “그거라면 저도 믿어 의심치 않아요, 래리티 씨. 그럼...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나는 몸을 돌렸다. 의상실의 타일 바닥에 발굽이 부딪치는 소리가 사방으로 퍼지면서 울려댔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출입구로 향했다.
드레스숍 안에 낭랑한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실례합니다.” 나는 가방을 짊어지고 부티크 정문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래리티 선생님 계신가요-?”
“어머 깜짝아!” 래리티가 깜짝 놀라 헉 하고 말했다. 래리티의 네 다리가 급히 움직이며 부티크 한가운데 놓아둔 마네킹에 입혀둔 드레스 위로 검은 천을 씌웠다. 그녀는 내가 의상실에 들어선 순간부터 그 순간까지 짧은 시간 동안 10마일은 달린 듯 가쁜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래리티는 검은 천에 덮인 드레스에 달라붙어 있었는데, 그 주변 사방으로 바늘꽂이들과 줄자, 재봉용 바늘과 온갖 화사한 천조각들이 흩어지고 널브러져서 말 그대로 전쟁통이었다. 내가 캐러셀 부티크에 다녀간 지 일 주일이 거의 다 되어가는 날이었다. 내가 다녀간 뒤 래리티가 보냈을 하루하루가 겉보기에도 느껴지는 피로감과 늘어진 눈가, 사방으로 뻗친 갈기에 그대로 매달려 있었다. 래리티가 쓰고 있던 작업용 안경 위로 벙찐 내 얼굴이 비쳤다. 래리티가 얼이 빠져 말했다. “저기... 저 문 잠그지 않았어요?”
“죄... 죄송해요!” 나도 마찬가지로 당황했다. 내가 짊어진 저주의 본질상 언제고 이런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단순히 보이지 않는 것뿐만이 아니라, 아예 형태 자체가 없어진 건 아닌가 싶을 때가 간혹 있었으니까. “휴업 중이셨어요? 그게... 그런 표시나 알림 같은 게 없어서...”
“세에에에상에, 정신을 어디 두고 다니는 거람?!” 래리티가 반쯤은 투정을 부리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눈을 굴렸다. “점심 먹고 들어오면서 출입구 문 잠그는 걸 잊었나 봐요! 아으... 요사이 좀, 아주 많이 바쁘다 보니. 흠흠.” 래리티는 당당한 자세로 서서 뻗친 자색 갈기를 쓸어 넘기며 정중한 미소를 짓고 말했다. “정말 죄송해요. 그...”
“하트스트링스라고 부르세요.”
“정말 죄송해요, 하트스트링스 씨. 부티크는 모종의 이유로 며칠 동안 쉬어요. 이틀 전에야 주문받은 드레스를 다 만들었거든요. 다음 주까지는 주문을 받지 않아요. 요즘 아주 급한 일이... 생겨서.”
“급한 일이요?” 나는 눈을 깜박이다가 씩 웃으며 말했다. “아하, 실버 심즈 선생께 보여 드릴 드레스 말씀이신가 보군요?”
래리티는 이보다도 새파랗게 질리는 게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 “그쪽이... 그걸... 그분도...” 래리티의 왼쪽 아래 눈꺼풀이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때 래리티가 뒷걸음질치다가 쓰러져 버리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어떻게 그쪽이 실버 심즈 선생님께서 오시는 걸 알고 있죠?”
나는 순간 멈칫했다.
오, 이런.
“혹시... 혹시 제 친구들이 말하던가요?” 래리티는 눈을 깜박이며 묻더니, 날이 시퍼렇게 일어선 칼과 같은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핑키 파이. 하여간 그 지지배는 쓸모없는 말이나 퍼뜨리고 다니는 데나 도가 텄지...”
“어.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에요! 저는... 그...” 나는 그럴듯한 변명거리를 찾아 몸을 비틀었다. 지금도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내가 뱉은 말이 진실이건 아니건, 누군가의 입을 통해 밖으로 퍼져나갈 거라는 생각을, 진지하게 해 본 적 없다. 거기서 왜 굳이 변명거리를 찾으려 했을까? 어쩌면 나는 내가 만나는 포니빌 사람들이 내 생각만큼이나 훌륭한 사람들로 남아 있기를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그, 라스페가수스에서 왔거든요. 패션쇼에도 다녀왔고-”
“라스페가수스요?” 래리티의 얼굴에 떠오른 살벌한 표정은 내 입에서 떨어진 ‘패션’이라는 말과 함께 눈 녹듯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찰나의 순간에 미소까지 지어 보일 정도였다. “그러시다면 호이티 토이티 선생님의 작품도 보셨겠네요!”
“그럼요! 호이티 토이티! 그리고... 어... 듣기로는 호이티 토이티 선생이 실버 심즈 선생님께 잠시 여기 들렀다 가시는 건 어떠냐고 했다는데...”
“라스페가수스에서 포니빌까지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오셨다는 건...” 래리티는 순간 엄청나게 심각한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숨도 제대로 못 쉬며 소리쳤다. “실버 심즈 선생님이 벌써 도착하셨을지 모른다는 말이잖아요! 지금 이러고 있는 사이에도 벌써 시내 호텔에 체크인하고 계실 수도 있다는 건데!” 래리티는 검은 천을 씌워둔 드레스 주위를 빙빙 돌면서 얼굴을 구겼다. “셀레스티아 맙소사, 아직 완성 근처에도 못 갔는데! 시간을 얼마나 낭비한 거람! 아이, 이걸 어쩌면 좋아?”
“저기요! 괜찮아요! 일단... 어... 일단 진정해요!” 나는 두 발굽을 흔들어 몸짓하며 미소지었다. “실버 심즈 선생님은 어때요, 부유하고 풍족한 분 아닌가요. 맞죠?”
“오, 그렇고말고요!”
“그렇다면 다른 부유층 분들과 마찬가지로 편안하게 쉬고 계실 가능성이 더 높죠.” 나는 빙긋 웃으며 어느 정도는 강조의 의미로 검은 천을 가볍게 건드리고 말했다. “이 멋진 드레스를 완성할 시간은 충분히 남아-”
“안 돼요!” 래리티가 재빠르고 조용하지만 강하게, 검은 천에 맞닿은 내 발굽을 떼어냈다. “보시면 안 돼요!” 래리티가 경고하듯 말했다. “절대!”
“어... 보려던 건 아닌데요, 래리티 선생. 선생님이 보여 주실 의향이 있는 게 아니라면야-”
“말할 것도 없잖아요!” 래리티는 죽어가는 반려동물을 안아 올리듯 커다란 마네킹을 꼭 안으며 반쯤 위협하는 듯한 소리로 말했다. “이퀘스트리아의 그 누가 와도 이건 지금은 못 보여 줘요!”
“아, 뭐 그렇다면야.” 나는 침을 삼키며 갈기를 쓸어넘겼다. 그리고 불안한 듯한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어... 이유를 여쭤 봐도 될까요?”
“이유요?!” 래리티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되물었다. “왜냐고요?! 그건요, 어떤 예술이든지 완성되기 전에는 말할 수 없이 비루하고 보기 좋지 않기 때문이에요. 완성되어 빛날 준비가 되기도 전에 한창 토대를 쌓아 올리고 있는 그 추한 모습을 누구에게라도 보인다는 것은 저 스스로가 제 작품을 폄하하고 욕하는 것과 다름없거든요! 자기 자신을 존중할 줄 아는 디자이너라면 절대로 작품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밖에 내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죠!”
“아. 네, 이해가 되네요.” 그쯤에서 대화를 끝냈어야 했는데, 래리티가 워낙 긴장해 있었는데다가 차림도 부스스해서 영 뒷맛이 좋지 않았다. 나는 왜 평생 어울려 다니지도 못할 사람들과 친구가 되려고 하는 걸까? “그래도... 저는 실버 심즈 선생님은 아니에요. 그렇죠?”
“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거죠?”
나는 어둑어둑한 캐러셀 부티크 안을 쓱 둘러보았다. 지난주에 왔을 때 밝혀져 있던 전등 절반은 꺼져 있었고, 래리티가 한창 붙잡고 씨름하고 있던 드레스 위에만 스포트라이트가 비추어져 있었다.
“이 드레스를 작업하가 위해 칩거에 칩거를 거듭하는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는데요...”
“당연한 일이죠! 실버 심즈 선생님께서 오시는데 온 힘을 쏟아부어서 선생님께 보여 드릴 작품을 만들어야 마땅하니까요! 무엇보다도, 이건 일생일대의 기회니까!”
“그러면 그 동안 작업 중인 드레스가 어떠한지, 본인 외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어 보신 적은 있으세요?”
래리티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저 눈만 깜박이며 듣고 있었다.
나는 래리티의 표정을 살폈다. “친구분들 생각도 들어보신 적 없어요?”
래리티는 피가 날 지경으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나는 어렴풋이 웃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완성되기 전에 남의 의견 몇 마디 듣는다고 큰일나는 건 아니라는 거에요.” 나는 씩 웃으며 몸을 돌려 내 큐티 마크를 보여주며 말했다. “악보를 쓰다 보면, 작곡 과정에서 내 시각으로만 보기보다는 남의 의견 몇 마디 듣는 편이 최종 결과물에 있어서는 더 낫다, 싶을 때가 종종 있거든요.”
“으음... 그렇군요.” 래리티는 조금 편안해진 눈치였다. 래리티의 주름진 갈기가 어느 순간 부드럽게 풀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요. 아주... 합리적인 의견이군요.”
“자, 그러면...” 나는 다시 몸을 돌려 래리티를 마주보며 말했다. “밖에 나가 햇볕도 좀 쪼이고, 친한 친구분들도 몇 분 불러서 냉철한 비평 몇 마디를 청한다고 해서 나쁠 건 없겠죠?”
“음. 아뇨. 아뇨, 그렇게는 할 수 없어요.”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안 된다니요?”
“애들-어-제 친구들은 좋은 사람인 건 맞지만, 그러다 보니 제 기분이 혹시나 상할까 싶어 잘된 것만 과장해서 말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래리티는 부티크를 잠시 거닐다가 말했다. “저는 냉철한 평가가 필요할 때에도 친구들의 그런 평가를 더 좋아했어요.” 래리티는 입을 앙다문 채 두 푸른 눈에서 불꽃을 튀기더니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에요.” 래리티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활짝 웃는 얼굴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트스트링스 씨였죠. 맞나요?”
“어... 맞는데요?”
“하트스트링스 씨가 보시기엔 어떠한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이렇게 묻는 래리티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차라리 그 때 똑같은 말로 되물었다면 어땠을까. “어... 아하하...” 나는 초조함이 묻어나는 동작으로 자세를 바꾸고, 내 전방 좌측 발굽을 절레절레 저었다. 나의 ‘낡아빠진’ 후드 재킷 소매 위의 기운 자국을 잘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래리티 씨, 진지하게, 제가 패션을 논할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처음 뵙는 낯선 분이신 걸로 자격은 충분해요.” 래리티는 온몸에서 희망을 띄워내며 빙긋이 웃었는데, 그러니 래리티의 부탁을 거절하기는 갈수록 더 어려워졌다. “게다가 날카롭게 짚을 건 다 짚으면서 조리있게 말씀도 잘 하시지요. 그러니, 제 부탁을 들어 주시겠어요?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하지만, 지금은 기댈 곳이 없어요!”
“드레스가 완성되기 전에 보는 건 말 그대로 범죄 행위라고 하셨잖아요!”
“다행스럽게도 귀측에서 그렇지 않다고 저를 납득시키셨으니 괜찮아요!”
“어... 그러네요...”
“그러고 보니 내방하신 목적을 안 여쭈어 봤네요. 어떻게 오셨나요?”
“음...” 나는 가방을 열어 두 번째 검은 수정을 꺼냈다. “마력 부여를 좀 해야 해서-”
“아하! 마력 부여라면 자면서도 할 수 있어요! 그러면 이렇게 하죠. 평가를 해주시면 저도 마력 부여를 하는 걸로. 어때요?” 래리티는 내가 쥐고 있던 음석을 두 발굽으로 낚아채더니, 그대로 나를 드레스 쪽으로 밀고 가며 말했다. “부탁해요. 제가 지금까지 만든 드레스가 어떤지 보시고 한 말씀만 해 주세요. 그래 주시면 정말 감사할 것 같아요!” 그렇게만 말하고, 래리티는 뿔을 겨누어 미완성 드레스를 덮고 있던 검은 천을 가볍게 벗겨냈다.
바로 그 순간, 나는 꺼져 있던 부티크 내부 조명이 일거에 잠에서 깨어나 밝게 빛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몇 초 정도가 지난 뒤에야, 새하얀 비단 드레스 특유의 희디흰 옷감이 우리 옆에 나 있던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받아 몇 배로 밝게 빛난 것뿐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드레스의 위쪽 옷깃에는 상아색 구슬들이 일렬로 매달려 있었다. 드레스 중간쯤을 휘돌아 나가는 장식띠 위에도 반짝이는 구슬들이 붙어 있었다. 스커트 부분의 옷단은 척 보기에도 미완성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자리에 장식된 몇 겹 레이스가 원단의 무게감을 적절히 강조하고 있어 그 또한 놀라운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어렸을 때에도 패션에 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드레스 카탈로그보다 역사책을 가까이하던 것은 트와일라잇과 마찬가지였다. 우리 삼총사에서 소공녀 역할은 문댄서의 것이었고, 멋진 드레스가 코앞에 떡하니 나타났을 때 정신을 잃고 달려들 만한 녀석 역시 문댄서 하나뿐이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그 드레스를 보았을 때는 절로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래리티가 만들어낸 드레스는 왕실에서 입더라도 잘 어울릴 것 같았다. 혹시 그 날 오후 내내 당장 내 눈앞에 있는 드레스보다도 아름다운 것을 보지 못해서 그 날 밤은 좀 우울하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진짜배기 비평가라면 그 드레스를 가지고 기나긴 글이라도 쓸 수 있을 것이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름다워요.”
“끝이에요?” 래리티가 내 바로 옆에서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물었다. 나는 깜짝 놀라 펄쩍 뛸 뻔했다. “그냥 ‘아름답다’?”
“그게... 음...”
“겨우 십 초밖에 안 보셨으니 그렇죠! 제발 부탁해요!” 래리티가 몸을 한껏 낮추었는데, 그 귀족적인 패셔니스타가 필요하다면 애걸복걸이라도 하겠다고 매달리는 것처럼 보였다. “천천히 뜯어보세요! 차분하게 살펴보시고요! 가까이에서도 들여다보시고, 감상평을 들려 주세요!”
그래요 그럼...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신사적인 댄스 파트너가 된 듯 드레스를 향해 다가갔다. 나는 그것을 가만히 뜯어보았다. 그리고는 스커트에 시선을 쏟았다. 드레스 주위를 몇 바퀴 돌며 둘러보았다. 나는 사냥감을 쫓는 사자처럼 드레스 주위를 맴돌았다. 나는 아주 사소한 곳과 세세한 것까지 뜯어보고 나서야 다시 말했다.
“여전히 아름답군요.”
나는 그때, 래리티가 폭발하지 않을까 순간 겁이 났다.
그래서 나는 급히 말을 가져다 붙였다. “아, 그러고 보니 이제 알았는데...” 나는 드레스 중간 부분에 붙어 있던 반짝이는 구슬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거... 전부 진주인가요?”
“그래요. 맞아요. 완전 자연진주지요. 블루 밸리 유역에서 난 것들이랍니다!” 래리티가 활짝 웃으며 답했다. 무슨 말이 떨어질까, 심장이 콩닥콩닥 뛸 때마다 래리티의 두 눈가도 달달 떨렸다. “재료는 아끼지 않아요! 혹시 몰라서 남겨뒀던 건데-아하하-다행이지요. 아름답지 않나요?”
“옷깃에도 사용하셨고요.” 나는 옷깃을 가리켜 보였다.
“그리고... 여기-여기-여기-” 래리티가 잽싸게 내 옆에 와 서더니 여러 겹으로 마무리한 스커트 부분을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그리고 여기에 아직 더 붙여야 해요! 마지막 세 층은 진주로 강조할 생각이거든요! 그러면 총 다섯 층에 진주가 붙게 되는 거죠!”
“이야... 그거 대담한데요...” 나는 발굽에 턱을 괴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냥 보면 사치스럽지만... 자부심과 미의식... 특히 자연미를 강조하는 것이군요.”
“그렇죠! 그렇죠! 히히-흠흠.” 래리티는 애써 진정하고는 톤을 낮춘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누가 떠오르진 않으세요?”
나는 벙쪘다. 그리고는 래리티를 봤다가, 드레스로 시선을 옮겼다. “음... 그렇다고 하면 파란 보석을 좀 더 써도 괜찮지 않았을-”
“흐으음?” 래리티는 깜짝 놀라 드레스를 이리저리 뜯어보더니, 눈을 굴렸다. “아하, 이런!” 래리티는 표표히 웃고는 말했다. “그렇게 나르시스트는 아니에요! 음, 적어도 이번 일에서만큼은 아니죠. 흠흠. 잘 생각해 보세요...”
“음...” 나는 갈기로 가리운 머리를 긁적이고 물었다. “실버 심즈 선생님께서 입으실 옷인가요? 그게...... 선생님 솜털은 잘 몰라서요. 혹시 맞나요?”
래리티는 내가 백주대낮에 빤히 보이는 곳에서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인 양 얼이 빠진 얼굴로 나를 보더니 말했다. “그러니까... 잘 모르시겠다는 건가요? 제 작품이 누구를 뜻하는지 모르시겠어요?”
나는 어디엔가 있을 실마리를 찾아 정신없이 드레스를 쳐다보았다. 드레스는 희고, 반짝였으며 진주 광택이 반들거렸고 어딘가 장엄한 면이 있었다. 여기서 뭘 더 말해야 하나?
“앞으로 이틀만 있으면 8월 10일이 아닌가요?” 래리티가 마침내 힌트를 던져주었다.
나는 래리티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리고 래리티가 준 힌트를 가지고 두뇌를 쥐어짜냈다. “8월 10일... 8월 10일...”
래리티는 내 근처를 서성거리다가, 당당히 말했다. “실버 심즈 선생님께서 오시기로 한 날짜이기도 하지만, 8월 10일은 유니코니아의 플래티넘 공주님 탄신일이기도 해요!”
“아...” 나는 그런가 보다 하는 눈치로 눈을 깜박였다. “아하!” 그제야 드레스가 누구를 형상화한 것인지 감이 잡혔다. “이퀘스트리아 건국의 어머니 중 한 분!”
“그리고......” 래리티가 빙그레 웃으며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유니콘 왕조 최초로 다섯 유니콘 부족을 통합하신 분이기도 하지요!”
나는 래리티를 마주보았다. 아무 말도 없이 찰나의 시간이 흘렀다. 래리티가 한숨짓는 소리가 내 가슴에 포탄처럼 날아와 꽂혔다.
“이런, 이런. 선조들을 잘 기억해야죠!” 래리티는 드레스 쪽으로 한껏 뽐내듯이 걸어가 수많은 줄을 이루어 늘어선 진주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플래티넘 공주께서 다섯 부족을 통합하고 난 뒤 각 부족의 수장들에게 내어주신 선물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시겠죠?”
“음...” 나는 다 들리는 소리로 웅얼거리다가, 문득 정답이 떠올라 씩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지요! 드림 밸리의 사라진 호수, 사파이어 호에 서식하던 진주조개에서 얻은 진주가 아닌가요!”
래리티는 정답을 맞춘 어린이를 대견해하는 스승처럼 미소지으며 말했다. “공주께서는 부족장들에게 당신의 위대함과 관대함을 상징하는 진주들을 내어주시면서, 유니콘이 맞이할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선포하셨지요. 그리고 이들은 후세를 위해 해와 달이 무사히 운행하도록 자신들의 모든 마력을 쏟아부어 운행 경로를 만드셨어요.” 래리티는 앞으로 진주를 더 달아야 할 치마 레이어를 가리키고 말했다. “다섯 층 치마는 다섯 부족을 의미하죠. 아름다움과 은총과 약속의 총체이기도 해요.” 래리티는 당당히 서서 말했다. “실버 심즈 선생님은 메인해튼 엘리트 그룹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분이시죠. 그리고 그 메인해튼은 옛 유니코니아의 고도, 네이암스테르담Neigh Amsterdam이고요!”
“그리고 선생께서 여기 들르시는 것 또한 플래티넘 공주 탄신일 즈음이군요. 그나저나, 플래티넘 공주께서 언제쯤 즉위하셨었죠?” 나는 흥미롭다는 듯 웃으며 래리티를 흘끗 보았다. “이천 년쯤 전인가요? 루나 공주님이 나이트메어 문으로 추락하기 대략 천 년 전쯤 즉위하셨다고 알고 있는데.”
“잘 모르시나요?”
“정말로 잘 모르겠네요. 그게...” 나는 침을 삼켰다. “저도 제정신을 어디다 빼놓고 다니는 게 아닌가 싶고요. 실버 심즈 선생님까지 그러시진 않을 테고요?” 나는 래리티에게 윙크했다. “상대가 누구인지 잘 파악하고 계시는 것 같아요. 그야말로... 음... 눈이 부실 지경이에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래리티는 반쯤 아이처럼 웃다가, 곧바로 자신을 억눌러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흠흠, 그렇지만 아직 제가 지금까지 만들어 놓은 것에 관해서 여쭤 볼 것이 더 남았어요. 이제 이 드레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 아셨으니, 제가 말하고 싶은 걸 너무 드러내놓고 주장하는 것 같지 않은지 말씀해 주실래요?”
“이 드레스를 만드시느라 얼마나 많은 번민을 겪고 얼마나 큰 노력을 해 오셨는지 명확하게 느껴져요. 실버 심즈 선생님께서도 일단 보시면 정곡을 찔린 것처럼 강렬한 충격을 받으실 것이고, 시간도 얼마 없는데 생각을 이렇게 정리해서 표현할 수 있으신 걸 보시면 정말 엄청 감명받으실걸요.”
“그래요, 아마 그렇게 표현하시는 게 맞을 거에요. 제가 받은 시간은 겨우 일 주일이었으니까.” 래리티는 침을 삼키며 다시 차분해진 눈길로 드레스를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아직 이 드레스는 미완성이에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붙일 진주가 많이 남았거든요. 드레스 앞쪽을 너무 꾸몄나 싶은 생각도 들긴 해요, 지금은. 마지막 레이어에 진주를 붙이다가 다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정확히 계산하시지 않았을까요...”
“흐음. 그렇겠죠. 그래도 일단 드레스를 입어 볼 사람이 없으면 장식을 얼마나 붙여야 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어요. 일단 사람이 입어 봐야 옷감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니까 판단이 서니...” 래리티는 말을 하면서 방책을 생각하느라 말끝을 흐렸다.
“직접 입어보신 적은 없나 봐요?” 나는 물었다. “본인 작품이잖아요.”
“세에에상에! 어불성설이에요! 본인이 본인 작업물을 입고 있는데 어떻게 작업을 계속하겠-” 래리티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는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 무슨 생각이신지...?” 뺨에 불이 붙은 듯 뜨거워졌다. “어,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아니 진짜로. 제가 그걸 할 수 있을 리 없잖아요.”
삼십 분 뒤, 나는 그 짓을 하고 있었다.
음석은 창문 앞에 놓인 철제 스탠드 꼭대기에 잘 놓인 채 마력을 다시 그 몸에 채워 넣으며 느릿하게 반짝였고, 래리티는 마력 봉인 마법을 음석에 덧붙이고 있었다. 나는 스테이지 위에 가만히 서서, 래리티가 내 주변을 빙빙 돌아다니면서 내 사지를 밀거나 당겨서 장식이 덜 끝난 자리마다 진주를 마저 붙이는 작업을 하는 것을 보았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잘 모르시겠죠, 그... 하트스트링스 씨였죠, 맞나요?”
“네.”
“음, 다행이에요. 그래도 죄송하네요. 다른 분 성함을 잘못 기억하는 건 끔찍하게 싫어해서.”
“전 그닥 신경 안 써요.” 나는 애써 평안한 숨결을 유지했다. “정말로요.”
“전 지금 아주아주 기뻐요!” 래리티는 초조하게 웃더니 작업을 계속했다. 래리티의 두 눈은 등 뒤를 부지런히 살피고 있었다. “혹시라도 제가 잠그는 걸 잊어버린 저 문으로 하트스트링스 씨가 들어오시지 않았더라면 완전히 시간에 못 맞출 뻔했으니까요!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꼭 수호천사 같네요!”
“천... 사요?” 나는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나는 아침 이슬을 생각했다. 몸 주위로 퍼져나가는 따뜻하고 기분 좋은 느낌이, 이 어색하기 짝이 없는 상황을 견딜 만하게 해주었다. 나는 언젠가 다시 이 화려한 드레스를 다시 입는 것을 상상했다. 절로 웃음이 지어졌지만, 한숨도 뒤따라 나왔다. “선량한 사람이란 다른 선량한 사람이 선량하듯이 선량한 사람일 뿐이죠.”
“흐음...” 래리티는 바늘과 실을 띄워 올리며 빙긋 웃더니, 치마 부분의 솔기를 따라 진주를 하나씩 매달아 가며 말했다. “하트스트링스 씨께서 하시는 말씀 중 몇 가지는 굉장히 통렬하군요. 제가 옷 짓는 일과 마력부여를 잘 한다는 것 외에 또 무슨 말씀을 듣고 오셨는지 여쭤 보고 싶은데요.”
“아. 음. 글쎄요... 요 근처에서 인구에 회자되는 것 정도...가 전부죠.”
“그런가요?” 래리티는 내 주변을 돌면서 진주 붙이기에 열을 올렸다. “그러면 제가 인구에 뭐라고 회자되는지 여쭤 봐도 될까요?”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는 게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되는 순간들이 가끔 있다. 나는 차라리 그 때 그 부드럽고 값비싼 드레스를 입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뭐, 래리티 씨가 옷을 정말 잘 만든다는 얘기, 일을 시작하면 한눈팔지 않는다는 얘기 정도죠.”
“오.” 래리티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바느질은 조금 전에 비해 열의가 떨어져 있었다. “그게 전부던가요? 왜 전혀 놀랍지가 않은지...”
“그, 그래도 제가 원래 요 근처 살지는 않으니까요!” 나는 어떻게든 말이 되게 하려고 애썼다.
“라스페가수스에서 오셨다고 했었죠?”
거기서 뭐라고 말해야 했을까? 셀레스티아 맙소사, 나는 거짓말에 능하지 못하다. “근처에서 며칠만 더 묵었다면 래리티 씨에 대해서 몇 마디는 더 들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렇다고 해도, 저는 길거리를 나돌아다니는 소문에는 그렇게 큰 관심은 없으니까.” 그것만은, 적어도 그것만은 진실이었다. 나는 편안한 숨을 내쉬며 래리티가 보다 편하게 작업할 수 있도록 자세를 바꾸었다. “게다가 유명세를 얻는 일은 제 적성이랑은 완전히 딴판이거든요.”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특히나 요즘은 더하죠.”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래리티는 보다 낭랑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절로 그쪽으로 주의가 기울었다. “하트스트링스 씬 예쁜데다가 몸가짐도 우아하시고 영리하기까지 하신데요. 감히 말씀드리자면 말이죠. 어딜 가시더라도 동네 남정네들이 줄을 서서 쫓아다니고, 어린 꼬마들까지 질투할 것 같은데!”
나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 “이거, 친구분들 특유의 화법이 래리티 씨에게도 옮아간 모양인데요.”
“무슨 말씀을! 진실된 칭찬은 그 어느 선물만큼이나 값진 것이랍니다! 그렇게 폄하하실 필요까지야?”
“죄송...” 나는 몸을 비비적거렸다. “해요.”
“그런 건 그만두세요. 겸손도 적당해야지 과하면 뒷말이 나오기 마련이에요. 그렇더라도 제 친구인 플러터샤이에 비하면 전혀 과한 건 아니긴 합니다마는.”
“플러터샤이란 분께도 칭찬을 많이 하시나 봐요.”
래리티가 빙긋 웃었다. “칭찬받을 만하니까 칭찬을 하는 거죠.”
“제가 해드린 거라곤 드레스 입어드린 것밖에 없는데요.”
“아니죠, 그 이상이에요.”
“어떤 게 그렇죠?”
“그 왜,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죠. 이를테면 부티크에 들어오시면서 저를 이름으로 불러주신 거라거나.”
나는 래리티를 빤히 보며 물었다. “그게... 정말로 고마워하실 만한 일인가요?”
“오, 말하자면 끝도 없지요!” 래리티는 잠시 바느질을 멈추고는 고아한 푸른 눈을 돌리고 말했다. “누가 저희 부티크 바로 앞을 지나가면서도 저를 알아보지 못하시거나, 제가 온 힘을 쏟아부어 지은 드레스를 보고도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시는 분 한 분마다 새빨갛게 익어서 광택도 반짝반짝한 사과 한 알씩을 주기로 했다고 해 볼까요. 그 길로 스위트 애플 에이커는 문 닫아야 할 거에요! 흥!” 래리티는 방긋 웃었다. “그래서 하트스트링스 씨처럼 일면식도 없으신 분이 절 보러 와 주시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어... 물론 처음 들어오셨을 때 첫인상은 좀 많이 별로였겠지만요. 아하하...”
나는 의상실 구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모든 상황에서 내 이름을 처음으로 불러주는 사람이 다름아닌 나 자신 하나뿐이었던 일 년을 보낸 입장에서 그런 발상이 마음에 찰 리가 없었다. 일 년 동안 적어 온 일기장이 그 느낌을 온전히 담아낼 것 같지도 않았다. 내 맹세하건데, 한때 내가 ‘라이라’라고 불렸다는 사실조차 잊을 때가 있다. 뭐라고 설명할 수도 없는 저주가 빚어낸 쓰레기인 나 자신의 두려움과 후회에 숨이 막혀 깨어난 아침은 항상 우울하기 짝이 없는 잿빛 하늘이었다.
“누가 알아봐 준다는 게 좋은 일이기는 하죠.” 나는 새삼 깨달은 사실을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것도 무언가 꿈꿀 수 있다는 희망이 있을 때까지의 일이지만요. 저는 제 이름이 정말 좋아요. 깃발처럼 휘날리든지 말든지 신경을 안 쓸 뿐이죠.”
“혹시 스포트라이트 싫어해요?”
“스포트 뭐요?”
“스포트라이트요.” 래리티는 반짝이는 시침핀 몇 개를 눈앞에 띄워둔 채 웃어 보였다. “누가 스포트라이트를 원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어느 순간이 되면 결국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될 운명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언제라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편이고요.”
“유명해지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존재 이유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은가요?”
“저는...” 나는 잠시 입술을 깨물다 말했다. “언젠가는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죠. 요즘에는 좀 다르지만...” 나는 한기를 느꼈지만, 래리티의 미완성 드레스를 입고 있는 동안만큼은 떨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이 세상에서 제게 허락된 시간이 다했을 때, 다 버리고 완전한 저 자신 하나로만 남아 세상을 등지고 싶을 뿐이죠.”
“세상에 맙소사.” 래리티는 거의 웅얼거리다시피 말했다. “대단히 비장한 각오군요. 그렇지 않아요?”
“저는 그게 삶을 긍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나는 래리티를 안심시키려고 웃으며 말했다. “적어도, 모든 것을 행복하게 끝낼 수 있는 방법 같거든요. 유명세가 그 틈새를 메워 주지는 못하잖아요?”
“글쎄요, 철학 강의는 제 특기가 아닌지라.” 래리티가 진주 한 알을 꿰매어 매달고는 잠시 일손을 멈추고 말했다. 반쯤 완성된 드레스의 새하얀 원단 위에 래리티의 눈길이 머물러 있었다. “그렇더라도 한 사람의 본질이 그 사람에 대한 악평으로 정의되지는 않는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악평은 오히려 그 사람을 발전시키지요.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속 좁은 생각은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어쩔 수 없지요.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의 문제니까.”
래리티의 말은 내 주의를 끌었다. 인정하겠다. 나는 래리티를 진지한 눈길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요?”
“그래요...” 래리티는 뒷다리로 버티고 서서 차분하게 웃으며 말했다. “유명해진다는 것은 포니 사회에서도 넉넉한 삶과 명성과 부를 얻게 된다는 의미를 갖지요.” 래리티는 발굽으로 갈기를 우아하게 빗어 넘기면서 우리 옆에서 마력을 넘겨받고 있던 음석을 살짝 곁눈질해 보았다. “포니라는 종은 예컨대 사회적 동물이기도 하지만, 그 하나하나는 모두 찬란하게 빛나기 위해 태어난 보석과도 같아요. 낯선 사람이 부티크로 들어와 제 이름을 불러 줄 때면 내심 다시 태어난 기분이 들어요. 그때까지 제가 해 온 것들이, 그러니까 이 세상이라는 캔버스 위에 그려놓은 것들이 다른 사람의 이목을 끌고 그 사람들과 저의 마음을 하나로 이어 주었다는 뜻이니까요.” 나를 마주보는 래리티의 얼굴은 내 마음 속 눈 안에 그녀가 그려놓으려는 그림만큼이나 밝게 빛나고 있었다. “하트스트링스 씨, 우리는 결국 한 명의 예술가로 귀결될 수밖에 없어요. 우리 하나하나는 꺾이지 않는 정신으로 붓을 삼아 세상에 각자의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거든요. 저는 그저 다른 사람에게 영감을 줄 수 있도록 보다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려고 하는 것뿐이지요. 돋보이는 사람이란 본디 그래야 하는 것 아닐까요?”
래리티가 말하는 동안 여덟 번째 비곡悲曲이 다시 머릿속에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래리티의 말을 파묻어 버리기는커녕 그녀가 말하는 한 마디 한 마디를 강조하듯이 들려와서, 래리티는 혹시 천지가 개벽할 때부터 항아비곡姮娥悲曲의 성가대로 정해져 있던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때, 아주 찰나 동안이었지만 저주가 나를 잡아먹기 이전에 내게 작곡이란 무엇이었는가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내게 작곡이란 모든 존재의 아름다운 면모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 위한 것이었었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나는 래리티가 삶 그 자체보다 커다란 가치가 되고 싶어한다고 판단할 자격이 없었다. 가슴이 따뜻한 사람에게는 가장 높은 자리가 주어져야 하는 법이다. 래리티가 이 세상에 주고 싶어하는 선물은 무엇이었을까. 그 때 래리티가 내게 주었던 가장 소중한 선물처럼, 내가 그러기를 바라기보다도 한참 전부터 그래 왔었던 지혜가 아니었을진저.
“저도 래리티 씨처럼 멋진 사람이 되고 싶네요.” 나는 환하게 웃으면서도, 착 가라앉은 어조로 말했다. “빛나기 위해 태어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단지 반짝거리는 것밖에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래리티가 내 말을 온전히 이해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래리티가 지어 보인 새침한 윙크는 내가 그때까지도 잡아내지 못한 사실이 있음을 명료하게 알려주었다. “명성에 관한 오해들 중에서도 가장 큰 게 그거에요. 명성이란 경쟁을 통해 쟁취되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마라톤에 가깝다는 게 제 생각이죠.” 래리티는 내 곁으로 다가와 드레스의 치마 부분 마무리 작업을 재개했다. “머지않아 하트스트링스 씨도 온 힘을 다해서 달리게 될 날이 올 거에요.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빛나는 당신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볼 다른 사람들이 벌써 부러워지는걸요.”
래리티가 해 준 말은 내 마음을 족히 채우고도 남아 그 먹먹함만큼이나 커다란 경외심을 안겨주었다. 그 때문에 정신이 산란해져 여덟 번째 비곡 작업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다. 보다 솔직하게 말해보자. 시간 감각을 잃고 있었고, 드레스를 직접 입어본 날부터 세 번째 음석을 충선하러 부티크로 갈 날 사이의 날들을 세어보지도 않았었다.
내 머릿속에 있는 것이라곤 이전에 래리티가 내 기분을 좋게 해주었던 것처럼, 조금이나마 그 비슷한 방식으로 래리티의 기분을 띄워 줄 생각뿐이었다. 나는 힘차게 문을 열고 들어갔고, 문에 매달린 종이 달랑거리며 낭랑한 소리로 나의 입장을 알리웠다. 나는 곧장 온갖 원단들이 반짝이며 널려 있을 의상실 안으로 재잘거리며 떠들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래리티 선생님 계세요? 저는 라이라 하트스트링스인데, 선생님 말씀 듣고 왔어요. 지금 딱히 바쁘신 거 아니면 혹시 보석 마력부여를 좀 부탁드릴 수 있을까 하고 왔-”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키가 크고 갈색 솜털과 잿빛 갈기를 한 여자가 새까맣고 두꺼운 뿔테안경 너머로 나를 그대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여자는 검은 블라우스와 거기 잘 어울리는 헐렁한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바지를 입으면서도 나팔 모양으로 넓어져가는 꼬리를 충분히 집어넣고 빼낼 수 있을 만큼 넉넉한 옷이었다. 그 딱딱하기 그지없는 복식은 가느다랗고 깐깐해 보이는 인상을 조금도 희석시키지 못했다.
“어...” 나는 당황했다.
“흐으음...” 이것이 그 여자가 처음으로 꺼낸 목소리였다. 그 여자는 나를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 여자가 다시 입을 열어 말하고 나서도, 나는 저 여자가 나를 향해 말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멀리서 들려오는 발굽 소리를 듣고 나서야 짐작할 수 있었다. “보아하니, 그대의 단골인가 보군요?”
“오! 어... 아하하...” 래리티는 진땀을 흘리며 기진맥진한 채 나와 이 이등변삼각형 모양의 여자 사이로 끼어들어 말했다. “이제 한낮이니까요! 손님들이 맞는 옷이 있나 보시러 오실 만한 시간이지요!”
“제가 와 있는 동안에는 영업을 잠시 쉬신다고 하지 않았는지...”
“아! 그랬나요! 하하! 이상하네요, 분명히 그렇다고 말씀드렸는데, 그렇죠?!” 래리티는 몸을 돌려 그 여자를 마주보더니, 아무 표정도 없이 서 있던 여자의 발굽에 입을 맞추기라도 하듯 한껏 몸을 낮추었다. “아하하... 아무리 천재라도 깜빡 잊어버릴 수 있는 법이니까요! 말들이야 항상 제 자리를 찾아가지만, 발이 그 뒤를 따라가는 일은 잘 없지요!” 래리티는 이번에는 나를 보고 말했다. “어...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어... 이게 그러니까...” 래리티는 고개를 흔들더니 다시 말했다.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도와 드리죠. 그런데 지금은 선약이 있어서요. 그래도 일단 필요하신 게 뭔지 간단하게라도 적어두고 가시면 내일 아침까지는 바로 마련해 드릴게요. 소중한 고객님들께서 필요하다고 하신다면야 항상 신속 정확한 서비스를 제공해 왔으니까요! 아하하하...”
“음...” 나는 래리티 등 뒤에 서 있는 키 큰 여자를 쓸쓸히 올려다보았다. 그 형상은 흡사 거대한 무언가의 그림자가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리...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에요.” 나는 급히 웅얼거리며 가방을 짊어진 채 그대로 몸서리치며 뒷걸음질쳐 가게를 나가기 시작했다. “정말요. 다음에 다시 오죠.”
“어머,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뭐가 필요한지 말씀만 하시면 내일까지는 준비해 드릴 수 있어요!” 래리티는 순간 당혹감을 떨쳐낸 두 눈으로 간절히 부탁하는 듯한 눈빛을 보였다. “지금 선약이 있어서 영업하지 않는 건 사실이지만, 뭔가 필요해서 찾아오신 분을 아무것도 해드리지 못하고 되돌려보낼 수는 없어요...”
“새 겨울옷이 필요하신 게 틀림없군요.” 그 여자가 말했다. 내 후드 재킷을 겨누고 있던 그 여자의 권태감 어린 시선이 느껴졌다. “그게 아니면 대규모 수선일지도.” 그 여자는 의욕 없는 눈길로 래리티를 보고 말했다. “토이티 선생이 말하기를, 그대가 인근 주민들에게 지어 준 옷을 작년에 호이티 선생에게 그대가 지어 준 캔틀롯 라인으로 제가 오인했다고 하더군요.”
래리티는 마른침을 삼키며 나를 곁눈질했다. “어, 네. 캔틀롯에서 유행하는 스타일을... 어... 좀 차용해 보려고 했지요. 하지만 이 근방이라 해도... 어...” 래리티는 발굽을 물어뜯다가, 겨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게, 아무래도 농업 도시다 보니까요. 심즈 선생님. 어스 포니들이 어떤지 아시잖아요. 아무래도 기성복을 많이 선호하는 기질이 있으니...”
“그대의 작업실...” 실버 심즈가 부티크를 가볍게 돌아보고 말했다. “대략 오 년 정도 되어 보이는데?”
“음. 네. 부전공으로 경영학을 골랐고, 마침 어머니께서도 작은 사업을 하고 계셔서-”
“5년 정도면 지역 패션계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지, 그대 생각은?”
“어. 그렇지요. 제 생각엔-”
“뭐, 나도 어떤 짜릿한 걸 기대하고 온 거니까.” 나는 그 때 처음으로 실버 심즈의 입가에 웃음 비슷한 게 어리는 것을 보았는데, 그나마도 그냥 입가를 양옆으로 잡아당기는 것이어서 검은 돌 위에 가느다란 선 하나를 그어놓은 형상이었다. “그러니 래리티 양, 기회를 드리죠. 날 짜릿하게 해봐요.”
래리티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가 있었고, 나는 그 세상과는 격리된 존재였다. “오! 물론이지요! 지금 당장 보여 드리고 싶어 죽을 지경인 옷이 하나 있거든요!” 그 순간 부티크 안에 한기가 감돌았다. 내가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의 안중에도 없는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나는 그 때 이미 알고 있었다. 젊은 유니콘은 실버 심즈의 옆에 가까이 다가가 섰다. 그리고는 플래티넘 공주의 업적들을 하나하나 극적인 어조로 읊더니, 끈 하나를 강하게 잡아당겨 부티크 한가운데에 쳐두었던 장막을 거두었다. 장막이 사라진 자리에는 완성된 드레스가 그 고상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래리티는 마력이 어려 푸른색으로 빛나는 진주의 행렬 하나하나를 조명하며 보여 주었고, 그러면서도 실버 심즈의 귓가에 이퀘스트리아 건국 이전 유니코니아 연합왕국의 성립에 대한 이야기를 끝도 없이 온갖 미사여구를 덧붙여서 늘어놓고 있었다. “그리하여 플래티넘 공주께서 모든 유니콘에게 남겨두신 선물과 같이, 저 또한 선생님께 이 드레스를 보여드릴 수 있어 영광이에요! 플래티넘 공주님의 고아한 정신이 여기 남아 반짝이는 것 같지 않은가요?”
“으음. 그렇군요. 정말 아름다워요. 그대가 이 드레스를 짓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공부했는지 절실히 느껴질 정도니까.”
“어머, 당연한 일이죠! 사실, 이 드레스를 짓는 내내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영감이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졌어요. 지난 닷새는 흡사 영감의 날개를 달고 날아간 것 같다니까요-!”
“그렇기는 하되, 그대만 괜찮다면 모델이 그대의 캔틀롯 라인업을 입은 모습을 보고 싶은데.”
“제... 캐, 캔틀롯 라인업을요?”
“그래요, 그대가 호이티 토이티 선생의 의상실에 납품했던 바로 그 라인업 말이에요. 상류층 의복 하면 호이티 토이티 선생이지요, 듣기로는 그러하더군.”
“아... 아! 어... 그, 그럼요!” 래리티가 마른침을 삼키고는 실버 심즈가 드레스를 계속 뜯어보는 가운데 옆걸음질쳤다. 나는 멀찍이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 이 근처에 아직... 어... 연령대가 괜찮은 친구들이 좀 있을 거에요. 잠시만 기다리시면 제가 바로 준비해서 데리고-”
“쇼케이스를 진행할 모델들도 없다는 것인지? 그대의 고객들도 그대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드레스를 구경하고 싶어할 터인데.”
“아, 일상적으로 나가는 옷은 대체로 그런 라인은 아니에요. 하하하- 옷은 많이 나가긴 했는데 캔틀롯 거리에서야 그런 옷은 그야말로 흔하디 흔한 것이라-”
“그래요, 그래요. 호이티 토이티 선생의 가게에서 그리 인기가 좋다는 것은, 무언가 특별한 게 있다는 것인즉. 자, 그 라인업은 어디에 있는지? 그대, 제가 포니빌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아요.”
“어... 이,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심즈 선생님! 감히 약속드리건대, 아하하... 실망하실 일 없으실 거에요오!”
둘이 시야에서 사라져 가는 동안, 나는 늘 그래 왔듯 그림자 속에 서서 가만히 잊혀 있었다. 플래티넘 공주의 광명을 묘사한 진줏빛 드레스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밝게 빛나고 있었는데, 나는 그 모습만큼이나 외로워 보이는 모습이 또 있을까 생각했다. 내가 래리티에게 해주려던 말은 그게 무엇이었든 아무렇지 않게 부티크 안으로 빠져나가 실버 심즈의 존재 속으로 빨려 들어가 익사했다. 나는 천천히 걸어 의상실을 나왔다. 종소리는 칙칙하고 비정한 소음처럼 들렸다. 나는 나가면서 창문에 내걸린 표지판을 돌려 ‘폐점’으로 바꿔놓고 떠났다.
그 다음 날 아침,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느린 걸음으로 부티크에 들어섰다. 캐러셀 부티크의 문은 이른 아침부터 열려 있었고 천장에 달린 전등에는 불이 밝혀져 있었다. 의상실 한가운데에서 어떤 형상 두 개가 반짝이고 있었다. 하나는 진주로 장식한 드레스였는데, 바로 전에 봤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채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머지 하나는 래리티의 새하얀 몸이었는데, 햇빛을 받아 튕겨내며 반짝이는 품이 귀한 다이아몬드를 보는 듯했다.
그러나 뿔을 밝혀 한 장 스카프를 들어올려 바느질하는 래리티의 무감각하고 아무 감정 없는 표정이 그 찬연한 모습을 바래게 했다. 다시, 두 눈 아래가 풀리워 늘어져 있었다. 나는 대체 무엇 때문에 래리티가 잠조차 잊고 저러고 앉아 있는지 묻기가 두려웠다.
나는 용감하게도 헛기침을 하고 물었다. "래리티 씨 맞으시죠?"
그 이름을 입에 담자마자 순식간에 래리티의 두 눈에서 눈빛이 형형하게 되살아났다. 몸 깊은 곳에 놓인 횃불에 불이 붙어 타오르기 시작하기라도 한 듯했다.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는 래리티의 표정은 일견 밝았으나 그 안은 공허해서, 마치 손대지 않은 화폭을 보는 듯하였다. "어머! 어서 오세요." 래리티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구부정한 모습을 지우려는지 두 다리를 쭉 펴고 기지개를 켰다. "캐러셀 부티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세상 단 하나뿐인 화사하고 세련된 옷이 가득한 곳이죠."
나는 내 웃음이 부디 래리티에게도 옮아갈 수 있는 것이기를 바라면서 진심을 담아 웃어 보였다. 그런 성질의 웃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는 개의치 않고 말했다. "이 동네 사람은 아닌데-" 나는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라이라 하트스트링스라고 하는데, 포니빌에 온 김에 혹시 뭘 좀 부탁드릴 수 있을까 싶어서 왔어요."
"흠. 그렇군요. 도와 드릴 수만 있으면 저로서도 기쁜 일이지요." 래리티는 이렇게 대답했는데, 문장에 담겨 나온 일종의 열성 같은 것을 표현하기에 그 목소리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불러지지 못하고 삼켜지는 노래만큼이나 비극적인 게 또 있을까. "우선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려야겠네요. 다른 고객께서 주문하신 스카프를 완성해야 하는 참인데, 가장 먼저 해 드리겠다고 약속을 해 버려서요."
나는 문가를 곁눈질한 뒤, 래리티에게 시선을 돌렸다. "밖에 내걸린 표지판보다도 일찍 여셨더군요. 아침 산보를 나와 돌아다니던 와중에도 눈에 띄일 정도였으니까요."
"음, 어젯밤에 잠을 그렇게 많이 자지는 못했거든요. 어차피 두 시간밖에 안 남은 거 이렇게라도 나와서 일하는 게 낫지요."
"고생이 많으시네요, 래리티 씨." 나는 침을 삼키고 천천히 뒷걸음치며 말했다. "그러시다면야 다음에 다시 올-"
"아뇨! 그건 안 돼요! 인정할 수 없어요!" 래리티는 순간 몰아붙이듯 말했다. 그리고는 자기 말에 놀라 두 눈을 꿈벅거리더니, 한숨을 내쉬며 한쪽 발굽으로 이마를 짚고 말했다. "아, 죄송해요. 너무 저만 생각하고 말았네요."
"더 심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봤는데요 뭐." 나는 가만히 웃어 보이고 대답했다.
"저는 지금껏 그 누구도 그냥 돌려보낸 적이 없어요. 하트스트링스 씨가 그 첫 번째가 되기를 원치 않아요." 래리티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아무것도 없는 창문 밖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하트스트링스心琴." 래리티가 미소지었다. "좋은 이름이군요, 명성을 얻기에 부족함이 없어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사실, 래리티가 전날의 대화를 기억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멍청한 기대 때문에 놀랐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다. 나는 그저 한없이 침잠하는 듯한 느낌, 설명하려 할 때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실버 심즈의 검고 무감정한 시선밖에 떠오르지 않는 그 느낌에 잡혀 먹히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서서히 혼미해져 가는 정신을 흔들어 깨우려는 다급하고 절박한 행위를 시도할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래리티 눈앞에서 내가 무슨 짓을 벌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사고는 아닐 것이었다.
"어제 누가 오셨다는 얘기가 들리던데요." 나는 불쑥 말했다. "다름아닌 그 실버 심즈라고 하던데." 나는 뱃속을 걷어차는 듯한 느낌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생각하면서 이어 말했다. "제가 온 것도 그것 때문이에요." 나는 쾌활하게 웃어 보이려고 했다. "실버 심즈 선생이 캐러셀 부티크에 들렀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아주 고급한 곳이라는 설명이 되니까!"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는 칭찬은 전혀 먹히지 않았다. 좀 더 잘 알아보고 나서 그랬어야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때는 래리티가 기운을 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저 래리티 본인도 힘을 내야 한다는 절박감만이라도 공유하기를 바랐다. "흠, 사람들은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데요." 래리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어째서... 음...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실버 심즈 정도 되는 사람이 몸소 찾아와 같이 시간을 보내 준다면 그 어떤 디자이너라도 기뻐할 텐데."
"그걸 같이 시간을 보낸다고 표현할 수 있다면 그렇겠죠." 래리티는 웅얼거리며 대답했고, 바느질하던 스카프를 그 자리에 그대로 띄워놓는 것조차 힘겨워하며 갑자기 축 처져서는 말했다. "하아...... 이게 뭐 하는 거람?" 래리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건 정말 대단했죠. 정말로요. 실버 심즈 선생님은 대단한 분이세요. 화술도 굉장해서, 말에서 빛이 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으니까요. 그 칙칙하기 짝이 없는 스탈리온그라드의 길거리에 어떻게 선생님의 발자취를 남겼는지 들으니 절로 매료되더군요. 그렇게 두 시간을 보냈어요. 선생님 정도 연배에 그 정도의 위엄을 갖추신 분은 별로 없어요. 정말 대단하지요." 래리티는 바느질로 스카프의 형상을 쌓아 올리며 한 줄기 콧김을 뿜었다. "그 정도는 되어야 진실로 명성을 얻었다고 하는 거죠."
한때 그 자리에서 반짝이던 무언가의 그림자라도 된 듯, 나는 래리티의 등 뒤에 서서 꾸물거리고 있었다. 나는 애써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래리티 씨에 대해서 뭐라도 말씀하신 것은 있지요? 실버 심즈 선생이 여기저기 많이도 돌아다닌다고 하던데요. 포니빌 쪽 패션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이셨을 것 같은데."
"아쉽게도 그 정도의 여유는 없었지요." 래리티가 바로 대답했다. "에이전트와 회의가 있어서, 바로 가셔야 했거든요. 아마 지금은 침대에 누워 아침을 먹으며 오후발 트로팅엄행 기차를 기다리고 있겠지요. 그 다음에는 다음 시즌 패션쇼를 준비하실 거고요. 흠. 유능한 엘리트 특유의 신속성과 활동성은 정말 대단했어요. 뭐, 저에게는 아주 먼 세상 이야기일 뿐이지만."
나는 래리티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되는데요."
"이해하고 자시고 할 게 있나요?" 래리티는 냉랭하게 대꾸했다. 나와 더 말을 섞을 용의가 있기는 한 것인지조차 의심스러웠다. 래리티는 공중에 띄운 바늘들을 움직여 다시 바느질을 시작했는데, 바늘끼리 부딪치며 냉랭한 금속질의 소리로 울어댔고 그 한가운데 낀 뜨개질거리는 그 형태를 갖추기는커녕 오히려 잃어 가는 듯했다. "또다시 실패의 비감을 예비하는 짓거리 말이죠? 한 인간의 삶이 눈 깜짝할 사이에 결정되기라도 하는 양 찰나에 지나지 않는 순간이나, 단 한 번의 눈길이나 딱 한 번의 기회에 목숨 걸고 달려드는 꼬락서니를 보시죠. 제 자신의 모습이지만 욕을 안 할 수가 없어요. 이런 일을 한두 번 겪어 본 것도 아니면서 이 비슷한 일만 생기면 비굴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거기 기대려 드는 짓만큼 멍청한 짓이 또 있겠냐고요!"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답했다. "실패에서 배운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거기서 얻는 건 사실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 대신 그 다음의 실수를 보다 참을성 있게 인정할 수 있게 해주지요."
"그 실수를 범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거에요!" 래리티가 시퍼런 서슬을 세우고 말했다. 그러고는 짜고 있던 스카프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는 눈에 익은 드레스를 분노의 불길이 들끓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처음부터 멍청한 실수를 하지 않기 때문에 천재인 거에요. 실수를 한다는 것 자체가 천재가 아니란 뜻이라고요!"
침묵이 내려앉는 의상실 안에 노기로 들끓는 허파 속으로 공기가 드나드는 소리만 가득했다. 래리티는 천천히 감정을 추스렸다. 그 뒤 래리티가 내뱉은 말에는 여전히 분기가 가득했지만, 조금 전보다는 정돈되어 있었다.
"하트스트링스 씨가 정확히 어떤 분인지는 모르지만, 아마 음악 쪽 분야에 종사하시는 분이겠지요. 그것도 두각을 드러내는 쪽일 것 같은데, 맞지요?"
나는 침을 삼키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느 쪽이냐고 물으신다면, 래리티 씨가 말씀하신 쪽에 조금 더 가깝다고 해야겠죠. 하지만 재능이란 건 원래 상대적인 거니까-"
"아뇨, 그건 현실이에요." 래리티가 답했다. 나를 쏘아보는 래리티의 눈 위로 불길이 타올랐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그 이름을 쓸 이유가 없지 않나요?"
"어... 하트스트링스는 제가 태어나면서부터 받은 이름인데요."
"그래요?" 래리티가 쏘아붙이듯 물었다.
나는 래리티를 보고 눈을 꿈벅였다. "네, 그래요. 뭔가 잘못 아신 것 같은데."
"그렇다면 하트스트링스라는 이름이 본인을 잘 정의하는 것 같나요? 하트스트링스라는 이름을 입에 올리는 사람들이 당신이 누구이고 어떤 존재인지 바로 인지하는 것 같나요? 단순히 본인의 이름을 잠깐 생각하는 것만으로 대중에게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 이 아름다운 세상에 당신이 무엇을 만들어 주는지 명확히 정의되는 데서 오는 자신감으로 조금은 들뜨고 기쁜 생각이 드는가요?"
나는 긴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글쎄요... 그렇다고는..."
"당신의 이름을 듣고 당신의 큐티마크를 보았을 때, 저도 모르게 당신같은 사람이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당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말이에요." 래리티가 말했다. 그녀의 얼굴은 미소를 띄우기에는 지나치게 굳어 있었고, 그렇다고 완전히 굳은 것도 아닌 표정을 짓고 있었다. 래리티는 계속 말했다. "우리가 존재하는 데는 무엇인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개인적인 믿음 때문이지요. 우리는 빛나기 위해 태어났어요. 몇몇은 다른 이들보다 더 밝은 빛을 내지만, 그건 지금 할 이야기는 아니니 넘어가죠. 성공하기 위해서는, 명성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고 우리 사회에 족적을 남기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충족되어야 해요. 첫째로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과 재능이 필요해요. 둘째로는 비전을 공유하는 타자를 만나야 하죠. 그래야 각자의 세상에서 자신이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지 소통할 수 있으니까." 래리티는 한숨짓더니 다시 한 번 예의 그 드레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소통할 통로를 어떻게 열어두고 있어야 하는지 아는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어요. 현재에 안주하고 멈추어 있을 뿐 창의력을 발휘하려 하지를 않죠. 끔찍한 말로 들리겠지만, 저는 차라리 그러기를 바라요. 그렇지 않다면, 전부 제..." 래리티의 숨이 순간 거칠어졌다. 그녀는 발굽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웅얼거리듯 말했다. "그런 것이라면, 신이시여, 그 동안 얼마나 추락한......?"
나는 래리티와 같은 곳을 바라보는 척했다. 그래야 거기 놓인 아름다운 걸작품을 찬미할 만한 말을 꺼낼 수 있었으니까. "그래도, 어. 들어오자마자 저 드레스가 자꾸 눈길을 끌던데요. 혹시 실버 심즈 선생이 여기 들렀을 때도 보여 드렸나요?"
잠시 동안, 래리티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계속 말했다. "우아함의 극단이라고 해도 되겠어요. 그 말 하나만으로 표현하기엔 부족하지만." 나는 계속 말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러기를 주저하고 있었지만. 그 순간은 너무나 부박했다. 약간의 내적 갈등을 거친 뒤, 어쨌든 나는 말하고자 한 바를 입 밖에 냈다. "진주 모티브를 채택하셨네요. 이거 흥미로운걸요. 그렇다면 실버 심즈 선생이 다녀간 건 플래티넘 공주 탄신일 전후로군요."
래리티는 홱 하고 내게 창백하게 얼어붙은 듯한 시선을 돌렸다. 잠시 뒤 래리티의 표정은 웃는 듯 우는 듯한 얼굴로 무너져 내렸다. 래리티가 훌쩍이는 소리에 나는 일순간 비참해졌다. 그러나 래리티는 곧장 활짝 웃는 표정을 지으며 나직하게 대답했다. "역시 그 이름에 걸맞는 분이셨군요. 유니코니아의 유산 모티브가 말 그대로 폭삭 망해 버린 그 날 당신도 여기 있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궁금해지는데요."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잘 모르겠군요."
"생각해 보면, 실버 심즈 선생은 '실버'란 이름을 일종의 상표처럼 거느리고 다니지만 정작 본인의 옷은 항상 검은색이죠."
"네?"
래리티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제 친구 중 하나가 여기라고 말해주던가요? 아니면 포니빌 지역 유지분들이었나요?"
"저, 저는 그냥 사업상 온 거에요! 정말로." 이건 진실이었다. 적어도 대부분은. "래리티 씨가 생각하는 것만큼 래리티 씨가 마을에서 별볼일 없는 사람은 아닐 거에요."
"한 가지 정정해야겠군요. 저는 도구일 뿐이에요."
"잠깐만, 뭐라고요?"
"누구나 아는 이름." 래리티가 말하며 지어 보인 웃음이 두 눈에서 쏟아져 떨어지는 실망감을 어느 정도 누그러뜨렸다. "일종의 보통명사라고나 해두죠. 저는 옷단을 수선하거나 터진 곳을 고치거나 닳은 소매 정도나 고쳐주는 동네 재봉사일 뿐이에요. 동네 사람들이 제 이름을 부르는 빈도나, 이퀘스트리아 사람들이 실버 심즈라는 이름을 부르는 빈도는 별반 차이 없을걸요? 그런데, 사람들이 그걸 곱씹어 볼까요? 보물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그 대가를 받는 것은 보물이 아주 깊은 곳에 숨겨져 있을 때지요. 과연 그 사람들이 그 보물을 찾아 좀 더 멀리 내다보고자 하는 비전, 타고난 갈망을 갖고 있을까요? 동네 사람들이 저를 부르는 이름은 제가 갖고 태어난 이름이 아니라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겠군요. 제가 항상 래리티로 불리는 게 아니라는 것이죠."
나는 당혹스러웠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었어요?"
"아니에요." 래리티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제가 원래 받은 이름은 '사파이어 사이트Sapphire Sight'에요. 저희 가문은 아주 오래 전부터 보석 세공이나 마력부여를 업으로 해 왔지요. 생물적으로 타고날 수밖에 없는 유전형질에 기초한 가문의 전통에 아무 말 없이 따를 거라 생각했다면야 어울리는 이름이지요. 제가 큐티마크를 얻은 것도 천연 보석이 가득한 광맥을 찾는 도중이었어요. 제가 타고난 적성이 그것이라고 해도, 그것 하나에 제 인생을 구애받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요. 제 뿔은 희귀한 보석을 찾아내는 데 더 유용하기는 하지만, 저는 제 꿈과 그 꿈이 가져다 줄 삶에 더 관심이 있었어요. 바로 그것 때문에 저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래리티'로 개명한 것이죠."
"왜죠?" 나는 물었다. "왜 '래리티'를 고른 거죠?"
래리티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대답했다. "제가 살고 싶은 인생의 모습을 그려낸 이름을 갖고 싶었으니까요." 래리티는 드레스를 서글픈 듯 쳐다보았다. "시간과 노력을 발판삼아 그 이상을 성취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지요. 저는 특별해지고 싶었어요. 명성을 얻고 싶었지요. 세상 모두가 내 이름 석 자를 아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세상 사람들이 단순히 그 이름만이 아니라 그 안에 숨겨진 보다 깊은 뜻을 알아 주기를 원했지요. 다이아몬드 여러 개로 만든 장신구처럼요. 보석이란 단순히 채광되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에요. 보석이란 세상에 그 반짝이는 자태를 보여 주고 그 빛으로 세상을 채우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드러나야만 하지요. 세상에는 단순히 존재를 드러내는 것만으로 만인의 흠모를 받는 복을 타고난 것들이 있기 마련이니까. 저는 오래 전에 사파이어 사이트란 이름을 버리고 래리티가 되기를 골랐지요. 훌륭해지기 위해서 또 무엇을 해야 했을까요? 다른 선택은 없었을까요? 아니면 저희 가문의 전철을 그대로 따라가서 가문의 그림자 속에 가려진 한 개 옥의 티로 남아 있었어야 했을까요? 그랬다면 제가 아무리 성취해 봤자 가문의 전통이란 가파른 벽 위의 모래알 하나, 아니면 상상도 하지 못할 어떤 산업 안의 톱니바퀴 하나 정도에 불과했겠지요."
"산업이요?" 나는 한쪽 눈썹을 치키며 되물었다.
"슬프게도 결국 세상 만물은 산업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니까요." 래리티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그리고 충분한 반복성만 보장된다면 사람은 자신이 행위하는 것을 넘어서서 행위 자체를 자신과 일치시키게 되지요. 이 절박한 기계화의 요구 앞에 삶이란 결국 무엇이죠? 저는 어제 실버 심즈 선생님의 눈을 들여다보고, 목소리를 듣고, 그 후광을 직접 쪼일 기회를 얻었어요. 그것도 오후 내내. 면담이 끝나고 나서 실버 심즈 선생님의 말씀 하나하나를 복기해 보고 나니, 거기서 느낀 기쁨은 기계장치가 준 카타르시스에 불과했다는 걸 깨달았어요. 왜 그런지 아시겠어요? 실버 심즈 선생님도 결국 산업의 한 부분, 예술에서 태어난 공정의 하나에 불과하지만 선생님은 그 점은 모르시고 계셨거든요. 한때 선생님은 메인해튼 패션계에서도 무모할 정도로 실험적인 디자이너였지요. 그러나 이제 보니 자신의 발굽으로 디자인을 그려내기는 하지만, 선생님은 그 결과물에서 소외되어 있더군요. 산업에 있어 중요한 것은 과정이 아닌 이윤 창출이고, 이윤이란 화폐로 집약되어 계산되는 것이지 어떤 마법 같은 것으로 구체화되는 게 아니긴 하지요. 그러니 내심 선생님이 가엾다는 생각을 할 뻔했지요...... 하나만 아니었다면..."
"그래요?" 나는 흥미가 돋아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물었다. "그게 뭐죠?"
래리티가 침을 삼켰다. 마침내 입을 연 순간의 래리티는, 자기가 자신에게 선사하는 몸서리를 억누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퀘스트리아 패션업계에 목소리를 낼 권리를 갖고 있다는 점이죠. 요즘 세상은 산업화되지 않은 게 없고, 그런 세상에서 단순히 인정받는 수준을 뛰어넘어 떠받들어지고, 숭배받는 일은 아주 자연스러워요. 사람들이 생각하고 도전하기를 두려워하니까, 새롭고... 특별한 것... 그리고 귀한 것을 찾아내기를 두려워하니까." 래리티는 길고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저 드레스에 들인 진주만 가지고도 시장에서 충분히 먹히는 드레스를 아마 수십 벌은 만들 수 있었을 것이고, 그 몇 장만으로 업계에서 괜찮은 입지를 얻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굳이 이런 세상에서 인정받아 보겠다고 진주 한 알 한 알을 아껴 가면서 드레스 한 장을 만든 과정 전체가 시간 낭비 아니었는가 싶더군요. 설령 그게 아무런 특색도 개성도 없는 산업구조의 하나로 편입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죠."
나는 래리티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지만, 몸 속 깊은 곳에서부터 누군가가 적었던 글줄이 말이 되어 밖으로 나오려고 하고 있었다. 누군가라고 해도, 내가 적은 글이었지만. 나는 내가 적었던 일기를, 지금 당장 적어 내려가고 있는 이것들과 같으면 같았지 별로 다르지는 않은 글들을 생각했다. 누가 됐든 내가 쓴 글을 찾아내어 읽게 될 복된 자가 있으리라고 생각해 일기를 쓴다 쳐도, 그는 결국 나일 것이었으므로 결국 나는 나를 위하여 글을 쓰는 것이었다. 전날 있었던 비극을 적어 넣은 페이지를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쉽게 펄럭여 넘겨 결국 먼지 묻은 종이 뭉치 사이로 던져 넣는 것이었을지, 아니면 심오하고 깊은 내적 사유로 판단하는 비평가의 그것이었을지 나는 모른다. 단순한 노래 한 가락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은 저만치 다른 곳에 갈 수 있고, 마찬가지로 그 전과 전혀 다른 가락을 들려주면 저만치 있던 마음은 돌풍에 휩쓸린 양 또 다른 방향으로 꺾일 수 있다. 그러면 험난한 세상의 폭풍을 건널 범선을 만드는 사람의 마음은 어떠하겠는가?
"어쩌면..." 나는 말했다. "어쩌면... 아직 적당한 때가 아직 오지 않았을지도 모르지요." 나는 고개를 들어 래리티를 쳐다보았다. "물론 기약 없는 기다림일지도 모르지요. 기약이 없다고 해서 기회가 오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되지는 않아요. 혹시 모르겠네요, 그 날이 오거든 래리티 씨도 실버 심즈 선생처럼 큰 유명세를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물론 그것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지만. 실버 심즈 선생이 범한 실수를 되풀이하지는 않으리라 믿어요."
"흠... 실수라고요?" 래리티가 씩 웃었다. "심즈 선생님은 제가 성취하고 싶었던 모든 것을 이미 성취하신 분이에요. 실수한 사람이 오히려 그것으로 성취를 이루었다? 그게 정말이라면야 저도 그런 짓을 못 할 게 없으니 한번 해 봐야겠군요." 래리티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물론 지금까지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저 스스로도 그러고 싶지 않고."
나는 대답했다. "인생이란 게 원래 완벽주의자들에게는 퍽퍽한 거 아닐까요."
"세상이 아무리 잔혹하다 해도 인생 탓을 하지는 않아요." 래리티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바보짓이라면 또 몰라도." 그리고는 나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쪽처럼 사려깊고 품위 있는 분 앞에서는 특히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네요. 그러니 부디 제 비감 때문에 늘어놓은 무가치한 말들을 용서하세요. 그럼 이제 어떻게 오셨는지 여쭤 봐도 될까요."
나는 내 몸뚱이 밑바닥까지 심장이 뚝 떨어져 내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 아... 어..." 짊어진 가방이 비석을 가득 넣어 들고 온 것처럼 한없이 무겁게 느껴졌다. "저기 있잖아요? 아주 즐거운 대화도 나누었고 하니 이제 그만 슬슬 가 봐도 될 것 같은데-"
"혹시나 제가 짜증을 낸 것 때문인가요. 그러지 마시고." 래리티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제 친구들조차 절 보고 호들갑쟁이라고 하는걸요. 가끔이긴 하지만 맞는 말이에요. 그럼 저희 부티크를 찾아 주신 이유를 말씀해 주세요. 열과 성을 다해 모시죠."
나는 새총을 쏘다 새를 맞춰 죽인 어린애처럼 불편하게 꼼지락거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염동력으로 가방을 만지작거리다가 래리티의 시선을 피하며, 겨우 더듬거리는 말로 대답했다. "내방한 이유... 내, 내방한 이유라고 해도... 음... 듣기로 마력 부여에 능하시다고 해서요." 나는 나머지 두 덩이 음석을 한 번에 처리했어야 했다. 내 안에서 무언가 움직여서, 나는 한 개의 음석만을 건넸다. "좀 급하게 재충전해야 해서 말이죠. 그게... 음... 이 동네에서는 그쪽이 제일이라더군요.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하지 않던가요."
래리티는 차분한 숨과 함께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대답했다. "같은 값이면 더 나은 걸 사고 싶어하는 게 당연한 일이지요."
나는 몸을 움찔했다. "그렇기는 한데, 아무래도 스카프 일로 바쁘신 것 같기도 하고 그것 말고도 지을 드레스도 한참 남아 있고 하실 테니..."
"하트스트링스 씨."
"여력이 없으시다고 해도 충분히 이해가..."
"하트스트링스 씨." 래리티는 염동력으로 음석을 거의 뺏어가듯이 가져가며 말했다. 그리고는 꼿꼿하게 서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한 미소를 짓더니 창가에 놓아둔 마력부여용 장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보석에 마력을 불어넣는 일이라고 해도, 제가 생계를 꾸리는 수많은 방법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아요. 포니빌에 처음 왔을 때부터 했었지요. 먹고 살려고. 그렇다고 해서 제가 그 일에 자부심이 없다거나 무성의하게 한다거나 하지는 않아요. 그러니 제게 맡겨 주세요."
나는 래리티가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 가기라도 하는 듯 한쪽 발굽을 뻗었다. 내가 진정으로 슬펐던 것은, 래리티에게는 더 이상 이 자리에서 떨어져 있을 곳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음석이 내 것인 것처럼 여기는 래리티의 집이었다. 저주를 받지 않았더라도, 래리티는 차라리 수인과도 같았다. 혹시 래리티도 저주의 희생자는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니, 저주받지 않은 자란 대체 어떤 자인가? 나는 그때까지도 이런 철학적 사유에는 그다지 힘을 쏟지 않았었다. 일련의 동작을 따라 작업을 시작하는 래리티의 모습은, '사파이어 라이트'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보는 듯했다. 래리티는 창문 앞에 렌즈를 설치하고, 증기력을 통해 작동하는 피스톤과 같이 햇빛을 잡아 집중시켰다. 그리고, 나는 래리티에게 금화 세 닢을 건네주었고 래리티는 내게 한 번 빙긋 웃어주었다. 나는 그 때 우리 중 누가 더 지쳐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 곁을 떠나기만 하면 래리티는 내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잊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 자신이 떠안은 문제들만은 잊지 못하리라. 그녀의 걱정거리들은 산소처럼 현실적인 것이었고, 삶을 유지하기 위해 거기 의탁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것이었다. 내가 래리티를 설득할 능력이 있다고 쳐도, 내게 래리티의 삶에 개입할 권리가 있는가? 내게 명성이란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지만, 이는 내가 감당해야 할 저주 때문에 그런 것이다.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은데, 결국 잡지 못하는 기회를 눈앞에 둔 자의 절망은 어느 정도일 것인가.
래리티는 결국 숟가락으로 산을 옮기려고 하는 것인가? 사람들은 정말 래리티를 기계의 한 부분으로만 여기고, 그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는 것인가? 한 사람에 대하여 편향 없고 적절한 조사를 할 수 있는 자가 과연 있을 것인가, 나는 생각했다. 그러던 중, 나라면 충분히 할 수 있으리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래리티 씨요? 네, 알지요. 상점가 근처에 회전목마Carousel 하나 차려두고 운영하는 분 아닌가요? 잠깐, 아니에요? 그게 진짜 회전목마가 아니라 옷가게였다고요? 이런. 그럼 그쪽에 굴러다니는 텐트는 다 뭐였죠?"
"흐으으음... 래리티... 래리티라... 아! 기억나요! 그 하얀 분 맞지요? 갈기는 푸르스름하고요. 지난번 하계 태양절 축제 때 시청에서 댄스 파티 주최하는 거 봤어요. 콜사인이 뭐였죠? 'DJ P0N3'이었던가?"
"그 재봉사 말씀하시는 거지요? 드레스나 뭐 그런 것들을 같이 취급했던 것 같은데요. 그, 갈기에 줄 그어진 것 같은 유니콘 말씀하시는 거 아닌가요? 뭐 아무렴 어떻습니까. 둘 중 하나는 나무 속에 살지요. 슬슬 가봐도 될까요? 점심 약속에 늦어서."
"클라우드데일로 청소년비행경진대회 구경 갔다가 죽을 뻔했다던 유니콘이 있었던 것 같다고 어렴풋하게 기억은 나네요. 그러고 보니 우리 동네 기상팀에 레인보우 대쉬라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그 날 뭘 했는지 들어 보셨어요?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 지켜보시는 가운데 오색찬란한 소닉 레인붐을 일으켰지요! 슈웅! 콰앙! 이야! 게다가 원더볼트 단원 셋도 구해냈지요! 그쪽은 뭐 없어요? 인생에서 가장 끝내줬던 순간?"
"아, 그 혹시 뱀파이어 같은 말투를 쓰면서 일 주일에 두 번은 알로에 로터스 자매네 스파 들르는 그 사람인가요?"
"캐러셀 부티크야 늘 들르는 가게지요! 잠깐, 그 사람이 가게 주인이라고요? 세상에 맙소사, 그냥 수습생 정도인가 보다 생각했지요. 그러니까, 누가 물려준 것도 아닌데 그 젊은 나이에 그 정도 가게 사장을 하고 있다고요? 여기서 뭔가 이상하다 싶은 거 못 느끼시겠어요?"
"조화의 원소라는 소문이 있는 하얀 유니콘이 있다고 하더이다. 그도 그럴 것이, 조화의 원소라는 것이 옛적에 신물로 섬겨지던 물건 아니겠소. 그것들이 우리 시대 사람들의 어떤 영혼 같은 것에 반응해서 합쳐졌으니 당연하지. 내 알기로 그 중 하나가 충의Loyalty이고, 그 원소에 대응되는 자가 그 흰 유니콘이라오. 아니면 뭐 미의 원소나 그런 것이겠지. 흠...... 헌데, 이걸 왜 묻는 게요?"
"저리 가요 아가씨. 샌드위치 먹어야 하니까."
"생각해 보니, 전에 포니빌에서도 패션쇼가 한 번 있었지요. 한 1년쯤 됐을걸요. 번쩍번쩍하게 꾸민 평론가인지 뭔지가 여럿 와서 구경했죠. 몰랐나 봐요? 결국 천하의 바보천치들을 놀려먹는 행사 정도밖에 안 되었지만. 뭐 그야 그렇게 되는 게 당연하죠! 드레스라고 해 봐야 하나같이 싸구려 걸레조각 정도밖에는 안 되어 보였으니! 살다살다 콧대 높은 양반이 그렇게 꼭지가 돈 건 처음 봤다니까요. 하... 잠깐, 뭐라고요? 왜 이런 얘길 하냐고요? 그거야 그 멍청한 장난질, 수작질이 전부 '래리티'의 머리에서 나온 것 때문이지 또 뭐겠어요? 그러니까, 이것 때문에 래리티가 누구냐고 묻고 나니는 것 같은데 아니냐 이거에요. 이제 슬슬 그 여자도 응보를 맞을 때가 되긴 했지요."
"어... 그러니까 이런 거에요. 뭐하러 마을 한쪽 구석까지 밀려난 가게, 그것도 좁고 어두침침한데다 값은 바가지를 씌우는 가게에서 쇼핑을 하겠냐는 거. 저는 그래서 리치스 스레드에서 쇼핑을 하죠. 그거야, 인기 많은 애들은 다 거기에서 옷을 사니까요. 캐러셀 부티크야 뭐 목에 뻣뻣하게 힘이나 주고 다니는 속물이 알아서 하겠죠!"
"감히 그런 말을!"
나는 슈가큐브코너 한쪽에서 파스텔 톤 갈기를 꼬불꼬불하게 볶은 여학생 둘에게 말을 묻고 있다가 말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 둘도 나와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나와는 달리 한없이 지루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우리 셋의 시선이 한번에 몰리자 마지막 말의 주인은 곧장 몸을 움츠렸다. "어... 너희들 심기를 불편하게 하려고 한 건 아닌데... 그래도..." 플러터샤이가 숨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얼굴을 크게 찌푸리면서 조금 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힘이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래리티를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래리티는 훌륭한 디자이너고, 손님들에게 바가지 씌우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아! 래리티는 내 친구기도 하고, 겨우 그따위 대접이나 받을 사람이 아니야!"
"예예... 그러시겠지요......" 학생 하나가 마스카라를 칠한 눈을 굴리며 말했다. "그쪽 말이 사실이라고 칩시다. 그럼 내가 지금까지도 그 이름을 몰랐다는 건 말이 안 되는데?"
"그렇지..." 다른 하나도 끼어들어 플러터샤이에게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래리티란 사람이 그렇게 능력있는 사람이면 트로팅엄이나 뭐 그런 데 판에 끼어 놀지 뭐하러 시골 촌구석 동네에서 놀아?"
"그냥 그쪽이 자기 친구니까 싸고 도는 거 아니냐는 거야." 첫 번째 학생이 다시 한 번 조롱하며 말했다. "아하, 알겠다. 자기한테 좋은 말 하고 다닐 때마다 옷값 조금씩 깎아줘서 그러는 거지?"
"뭐... 뭐..." 플러터샤이의 푸른 눈이 흔들렸다. "아냐! 래리티는..." 플러터샤이가 침을 삼켰다. "걘..."
"하. 내 이럴 줄 알았지." 여학생 둘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스텔 톤 꼬리가 같이 흔들렸다. "꼰대들은 지들끼리 씨부리라고 해. 여기 스무디도 맛대가리 상실했고."
"그러니까, 이런 거지...... 세상에나! 나도 그 말 하려고 했었는데!"
"그건 아니지! 각자 주관이 있어야 할 거 아냐!"
둘은 향수 냄새를 남기고 떠났다. 나는 둘이 떠난 자리를 삐딱하게 쳐다보고 서 있다가, 헛기침을 한 뒤 천천히 플러터샤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니까... 래리티란 분은 능력 있는 분이고 이런 대접을 받으면 안 된다고 하셨지요?"
"어......" 플러터샤이는 그때까지도 둘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부드러운 분홍 갈기 뒤로 시선을 숨기더니 몸을 돌려 사람이 반쯤 찬 식당 구석 자리로 돌아가는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말한 건 잊어버리시고요.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그쪽이 하시려던 말에 흥미가 생겨서, 더 들어 보고 싶은데요?"
플러터샤이는 아무 말도 없이, 굴러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느릿한 걸음으로 되돌아갈 뿐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후드 재킷의 소매를 매만지고 말했다. "아, 뭐 그러세요. 캐러셀 부티크의 오만방자한 속물에 대해서 들어야 할 건 다 들은 것 같으니까."
"으으..." 플러터샤이가 이를 악물며 생긴 근육의 긴장이 희미하나마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는 그대로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나를 돌아보았다. "당장 그 말 취소해!" 그녀는 눈을 한 번 꿈벅이더니, 얼굴을 붉혔다. "어... 실례했습니다. 그게......"
나는 씩 웃어 보이고 말했다. "이제 그쪽 의견을 들려 줄 의향이 드셨나요?"
"저..." 플러터샤이는 몸을 덜덜 떨더니 눈 위로 흘러내린 앞머리를 몇 번 쓸어 넘겼다. "설마 제가 이런 말을 해야 하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래리티는 평판이 좋은 친구니까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죠." 그녀는 나를 쳐다보며 자신의 목소리처럼 부드럽고 잔잔하지만 훨씬 진지한 웃음을 띄웠다. "래리티를 이해하려면 우선 래리티가 누구인지부터 알아야 해요. 래리티는 친절하고 고상하고 사려 깊고 나긋나긋한 친구에요."
"궁금한 게 하나 있어서요......" 나는 후식류를 진열해 놓은 유리 카운터에 기대서며 플러터샤이를 바라보았다. "래리티 씨가 거기 만족하는지 아닌지 혹시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어... 거기가 뭐죠?"
"우선 래리티 씨에 대해 알고 나서야 래리티 씨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 말이에요. 래리티 씨는 아티스트죠, 그렇지요?"
"네. 두말할 필요도 없죠..."
"친분이 있어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
"아, 아니에요!" 플러터샤이가 두 날개를 늘어뜨리며 외쳤다. "래리티가 만든 것만 봐도 바로 아실걸요! 마을 유지나 가까운 친구, 외교관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에 어울리는 수백 가지 드레스를 만들었는데요!"
"그렇다면..." 나는 두 '친구'가 나간 문간을 곁눈질하며 물었다. "제가 지금까지 물어보고 다닌 사람들이 래리티 씨에 대해서 조금도 모르는 것은 어떻게 된 거죠?"
플러터샤이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부끄러운 듯 시선을 돌렸다.
나는 흥미있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제가 현을 잘못 건드린 모양이군요? 저는 음악 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그런 것엔 학을 떼지요."
"어째서... 래리티에게 관심을 보이는 거죠?" 플러터샤이가 침을 삼켰다. "제 친구 래리티를 왜?"
나는 목을 긁적이다 한기를 느끼고 몸을 움츠렸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플러터샤이 본인이 내게 이름을 밝히게 할 의도로 물은 것이었다.
"어... 프, 플러터샤이에요."
"어머님 성함은요?"
"어. 말씀은 드릴 수 있지만 그게 중요한가요?"
"글쎄, 괜찮으시면 한번 어울려 주시죠."
"제 어머니 성함은 윈드플리커Windflicker에요. 스트라토폴리스Stratopolis 출신이시죠."
"조모님 존함은 어떤가요. 말씀해 주시겠어요?"
"플러터스카이Fluttersky라는 이름을 쓰셨죠. 제 이름도...... 어느 정도 할머니 성함을 딴 것이고요."
"조모님께서도 어머니를 모셨을 것이고, 그분께서도 성함이 있으셨겠지요. 그분의 존함은 기억하나요?"
"어......" 플러터샤이는 잠시 기억을 더듬더니 대답했다. "실버클라우드Silvercloud...... 였던 것 같은데요. 아아 세상에, 바로 기억해내지 못하다니 죄를 지은 것 같은..."
"그러면..." 나는 살짝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분의 어머니의 존함은 어떤가요. 혹시 알고 계신가요?"
플러터샤이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이단심문관이나 할 법한 질문 세례에 그녀는 몸만 꿈지럭대며 얼굴을 붉혔다.
"혹시 몰라 말씀드리지만, 저에게 같은 질문을 하신다면 저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할 거에요. 모르니까." 나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마른침을 삼켰다. "조모님께서 어머니로 모셨던 분의 성함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니 플러터샤이 씨는 저보다는 나은 사람인 것이죠. 이게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문답을... 음... 주고받은 이유......가 뭔지 여쭤 봐도 될까요?"
"래리티 씬 현재 여기에 있죠. 그쪽이나 제 조상, 선조들과 달리 래리티 씬 살아 있어요. 다른 사람들 사는 곳에서 기껏해야 담벼락 몇 개 넘은 것 정도 떨어진 자리에서, 사람 속에 섞여 산다고요. 래리티 씨 스스로도 대단히 노력하시는 분으로 알고 있는데 왜 래리티란 이름을 아는 사람이 이렇게 적은 걸까요?" 나는 후드 재킷의 옷깃을 정돈하고, 벽을 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래리티란 이름을 썼던 사람이 있었다는 게 잊히는 건 과연 몇 세대 정도면 충분할까요?"
"솔직히, 그렇게까지 자세하게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어요."
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저도 마찬가지에요. 얼마 전에서야 이런 생각이 들었지요. 오래 전, 저는 당연하다 생각했던 것들을 잃어버렸어요. 이제는 아무것도 못 하고 아쉬워만 할 뿐이고. 래리티 씬 자기 인생을 바쳐서 그 일을 해 왔을 테지만, 정작 그 결과가 어떻냐는 것이죠."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실 정도면 래리티를 정말 아끼시나 봐요." 플러터샤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그렇게 사려 깊은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나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 식의 시선을 던졌다. "제가 잘못 들은 거면 정정해 주세요. 래리티 씨 친구분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그건......" 플러터샤이는 겨우 말을 끄집어내어 입 밖으로 밀쳐냈다. "전에 래리티 곁에 있어 주었어야 했던 때가 있었는데 그러지 못해서에요. 저만 그런 것도 아니었죠. 래리티가 의지하던 사람들 모두 곁에 있어 주지 못했어요."
"그게 가능할 것 같지는 않은데요."
"사실이에요." 플러터샤이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그랜드 갤로핑 갈라 있지요. 래리티와 저, 다른 다섯 친구들까지 모두 왕실 행사에 초대받았어요. 행사가 행사인 만큼 예복이 필요했고, 래리티가 무료로 드레스를 만들어 주었어요. 그 때나 지금이나 그 정도로 착한 사람은 보지 못했지요. 드레스를 짓느라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투입했는데도 저희 중 누구 하나...... 고맙다 말하는 사람이 없었고요."
"정말요?"
"으으으음...... 정말로요." 플러터샤이는 죄인처럼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어요. 저희 모두 각자 생각해 둔 디자인이 있었지요. 자기 솜씨에 자부심이 있는 디자이너라면 그 누구를 데려왔더라도 그 자리에서 기각시키고 자기 안으로 진행했을 거에요. 래리티는 그러지 않았어요. 자기 솜씨와 감각을 드러내고자 하는 생각보다도, 저희를 기쁘게 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했던 거에요. 자기의 마땅한 권리를 포기하면서까지. 결국 저희가 원하는 형태대로 드레스를 지었지만, 단적으로 말해 끔찍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 나오더군요. 그 꼴을 보고도 각자의 욕심에 눈이 멀어 그런 줄도 몰랐지만. 결국에는... 어으으음......" 플러터샤이의 여린 몸에 전율이 일었다. 욕지기가 일기라도 한 듯했다. "행사에는 패션쇼도 끼어 있었지요. 그 끔찍한 형상들이 호이티 토이티를 포함한 캔틀롯 사람들 앞에 그대로 전시된 거에요. 래리티가 항상 꿈꿔왔던 순간이었는데, 세상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기회였는데, 그걸 저희가 박살내 버린 거죠."
"세상에..." 나는 입술을 깨물며 하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끔찍하네요."
"그게 사실이죠. 래리티는 완전히 무너졌어요. 그래도 저희 나름대로 래리티 자신을 위한 드레스 재봉만큼은 도우려고 했어요. 그리하여 래리티가 연회에서 입으려고 만들고 있던 드레스는 완성할 수 있었죠. 그 드레스로 호이티 토이티 선생의 시선을 잡아끌고 나서야 개인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두 번째 기회를 얻을 수 있었고요. 그제서야 래리티 본연의 디자인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줄 수 있었죠.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 래리티의 작품들을 캔틀롯 소재 본인 부티크에서 판매하게 해 달라고 하더군요."
"허..." 나는 빙긋이 웃었다. "뭐, 그러면 됐죠. 끝이 좋으면 된 거 아닌가요. 그 정도면 퉁친 것 같은데."
"그거면 된 거 아니냐고요?" 플러터샤이는 슬프고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 "아, 차라리 그렇기만 하다면 좋겠네요. 아직 모르시겠어요? 이미 막대한 피해가 일어났다고요. 호이티 토이티 선생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해서, 그게 패션업계에서 래리티의 커리어에 어떤 실질적인 무언가로 작용하기는 하나요?" 플ㄹ러터샤이는 부끄러운 듯 두 눈을 감으며 침을 겨우 밀어 삼켰다. "뭐 그렇죠. 호이티 토이티 씨 앞에서만 보여 준 두 번째 패션쇼로 래리티가 돈을 많이 벌어들인 건 사실이에요. 그렇다고 그것으로 이미 망친 첫 번째 쇼와, 그 때문에 상실된 앞으로 열게 될 패션쇼 기회를 만회할 수는 없어요. 래리티가 캔틀롯을 통해 드레스 수백 장씩을 판매하고 있는 건 맞지만 바로 이곳, 래리티가 사는 곳에서는 래리티의 평판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죠. 여기에서 주목받을 기회...... 이제 없어요. 영원히 사라졌죠."
나는 생각에 잠겨 슈가큐브코너를 가만히 돌아보았다. 생각으로 답은 나오지 않았고 나는 물어야 했다. "그럴 기회를 잃었다면, 왜 여기 머물러 있는 건가요?
"저도 모르겠어요. 다만 여전히 제 친구로 남아 줘서, 곁에 남아 줘서 기쁠 뿐이죠." 플러터샤이가 쓴웃음을 지었다. "특히 그 때 절교하지 않아 줘서...... 어, 그건 저 하나만의 잘못이에요."
"그게... 어떻게 된 일인데요?"
"그 때와 비슷한 일이 다시 벌어진 거죠." 플러터샤이가 다시 내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포토 피니시라고, 유명 사진작가께서 포니빌에 들르신 적이 있어요. 래리티가 자기의 디자인을 세상에 선보일 기회였고, 그러기 위해서는 모델이 필요했어요. 래리티는 저를 지목했죠. 너무나 기쁜 일이었지만, 그 때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긴 거에요. 포토 피니시 선생이 제 쪽에 더 흥미를 보인 거죠. 래리티가 선보인 의상의 아름다움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어요. 결국 저에게 쏠린 이목은 애초부터 래리티가 누려야 했던 것이었죠. 저도 영 떨떠름하기는 했지만, 유명세도 얼마 안 가 사그라들더군요. 그렇지만 한때 모델로 유명세를 얻은 것 자체는 사실이에요."
"그러면 그 동안 래리티 씨는 아주 약간의 관심조차 받지 못했다는 것..."
플러터샤이가 겨우 뱉어놓는 말들은 부들거리며 떨리고 있었다. "그 착한 애가 바라는 거라고는 세상에 자기 이름을 알리는 것 하나뿐이에요. 아름다운 옷을 만들어내고 그걸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것이죠. 저희 때문에 사라진 두 번의 기회가 온전히 래리티에게 돌아갔다면 유명세는 이미 따놓은 당상이었을 텐데 말이에요. 글쎄, 셀레스티아 공주님의 수제자와 래리티가 친분을 가진 것까지 센다면 세 번이라고도 할 수 있겠군요."
"트와일라잇 스파클..."
"역사에 길이 남아 전할 이름이죠." 플러터샤이가 거들었다. "저도 트와일라잇을 알아요. 저와 마찬가지로 유명세 같은 것은 신경 쓰지 않는 타입이죠. 하지만 래리티에게는 그게 전부에요. 그리고 래리티는 지금까지 자기가 가진 모든 걸 내놓았어요. 항상 그래 왔죠.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플러터샤이의 어깨에 가볍게 발굽을 얹었다. "부럽네요. 여러 가지로."
"저를요?" 플러터샤이가 이상하다는 듯 눈을 꿈벅이며 대답했다. "왜죠?"
나는 웃었다. "래리티 씨 같은 좋은 분이랑 친구니까요."
"그건 짐작했지요. 제가 짐작할 수 없는 것은 한 가지에요." 플러터샤이는 답이 없는 질문에 대한 답을 애걸하는 듯, 부드러운 눈길로 나를 찌르며 물었다. "세상에 그렇게 좋은 사람이, 어째서 그렇게 박복한 걸까요."
나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는 래리티 본인에게 물어 볼 의사가 충분히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 다음 날, 나는 캐러셀 부티크의 출입문 종이 울리는 소리 아래 내 말을 놓아두었다. "저는 라이라 하트스트링스라고 하는데, 혹시......" 나는 옷감 조각들이 내 앞으로 비단 유성처럼 날아드는 모습에 벙쪄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저기...... 무슨 일 있어요?"
"아, 이만한 일이 또 어디 있겠어요?!" 래리티가 툴툴대며 대답했다. 그 모습은 폭발 직전인 보라색 활화산, 또는 몇 시간 동안 여러 번 폭발한 화산과도 같았다. 재봉에 필요한 물건들이 사방으로 뒤엉켜 널려 바다를 이룬 부티크 바닥을 신경질적으로 뒤지며 쏘아대는 래리티의 목소리에 그 충혈된 눈만큼이나 뜨거운 불길이 일렁이고 있었다. "벌써 지난주에 해결했어야 할 일을 지금까지 미루다가 이제 와서야 드레스를 짓는데 레이스가 없는 상황이 말이 돼요? 고객들과의 약속만큼이나 중요한 건 없는데 개인적인 일을 먼저 하겠답시고 미루다가 이 지경이 됐는데? 분명 사흘 전에 노란 레이스를 좀 사다 놨는데 이게 발굽이 달렸는지 어디로 사라져서 보이지도 않고!"
"어..." 래리티가 내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뭘 찾는 동안, 나는 얼음 덩어리처럼 그 자리에 서서 마른침만 삼키고 있었다. "저기...... 혹시 뭘 좀 부탁드려도..."
"뭐를요?! 이 상황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지경이에요! 어떻게든 해결을 봐야 하는 입장이기도 하고, 기분 전환으로 다른 걸 좀 할 처지도 아니에요." 래리티는 잠시 말을 멈추고 무릎까지 쌓인 옷감 더미 사이에 서서 한숨을 푹 내쉬더니 나를 보고 힘겹게 말했다. "어린애 수작질 같은 꼴 보여서 정말 죄송해요. 하필이면 이럴 때 오셨네요. 일이 몇 가지 남아 있어서, 주문을 받고 싶어도 언제쯤에나 만들어 드릴 수 있을지 가늠이 안 되거든요."
"아. 이, 이해했어요!" 나는 싸늘한 한기를 느끼면서도 래리티를 안심시키고 싶어 웃으며 말했다. "동네에서 소문이 자자하시길래 저도 한번 만나뵙고 싶..."
"오? 동네 사람들이 자기네 얘깃거리에 저도 끼워 줄 줄은 몰랐는데요?" 래리티는 쓴웃음을 지으며 헝클어진 옷감 더미를 뒤적거렸다. "실버 심즈가 얼마나 천재적인 사람입네 하며 아주 열정적으로 거기 하나에만 파고드는 줄 알았지 뭐에요!"
"실버 심즈요?" 나는 대답할 말들 사이에서 위태로이 간을 보고 있다가, 모른 척 하는 편이 낫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말했다. "그 사람이 왔었어요? 포니빌에?"
래리티가 그런 걸 얼마나 싫어하는지 잊고 있었다. "하! 그랬었죠, 지금은 가고 없지만! 사람은 가고 없는데도 그 이름 부르는 소리는 도저히 입을 다물지 않더군요! 뭐 적어도 그 여자가 빈손으로 트로팅엄행 기차를 탄 게 아니란 사실을 가리지는 못했지만!"
"어..." 나는 난처했다. 래리티는 분노에 겨운 채 대화의 방향타를 틀어쥐고 휘두르고 있었다. 나는 거기 잡힌 방향타에 불과했고. "빈손이 아니라니요?"
"왜 그러시죠? 못 들으셨어요?" 래리티가 내 쪽으로 몸을 돌리고는 다음에 말할 문장을 강조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타일 바닥을 거세게 구르고 말했다. "그 여자, 동부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기 전에 리치스 스레드에서 가을 신상을 싹 긁어갔어요. 덧붙여 거기 주인장에게 아주 좋은 조건으로 의뢰까지 넣었다더군요!" 그렇게 말하는 래리티의 두 눈은 새파랗게 달아올라 지상으로 쇄도하는 한 쌍 운석처럼 살기등등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듣고 싶어하지 않는 소식을 하나 덧붙일까요? 그 여자, 여기 캐러셀 부티크에도 들렀었어요. 여기 와서는 뭘 해줬을까요? 하품이나 찍찍 하다가 두 시간 내내 책으로도 못 낼 같잖은 인생 얘기만 죽 늘어놓다 갔어요. 제가 만든 것들에는 눈길조차 안 줬어요. 애초에 드레스에는 관심 있는 척이라도 하는 여자 아니었나요? 그러고는 리치스 스레드에서 짐가방 절반을 채워서 트로팅엄으로 돌아간다? 하! 세상에 선한 것과 예의범절이라는 것들은 턱수염 스타스월이 묻힐 때 순장당하기라도 한 건가요?"
"저기... 음..." 나는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그거... 이상한데요." 나는 헛기침을 하고 겨우 래리티를 슬쩍 보며 말했다. "리치스 스레드에는 가 본 적 없는데. 혹시 그쪽 패션업체, 실력있는 쪽인가요?"
"패션업체요? 칫..." 래리티가 혀를 차더니 다시 말했다. "패션업체라고요?" 래리티는 내 쪽으로 조금 다가오더니 서슬 퍼렇게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리치스 스레드를 굴리는 작자가 어떤 작자인지 몇 말씀 드리죠. 필시 리치도 그렇고, 그쪽 집안 전체가 돈을 만진 건 순전히 사과 장사 하나, 그것도 본인들이 키우고 수확한 것도 아닌 사과를 팔았기 때문이에요. 그자는 갈기에 헤어젤을 떡칠한 장사치에 불과하죠. 뭐 좋은 걸 쓰긴 하지만, 그뿐이에요! 그 작자가 패션을 알고 이해하는 정도는 따지고 보면 미노타우르스가 향수를 이해하는 수준 정도밖에 되지 않죠! 머지않아 사과 수확용 드레스나 사냥꾼용 드레스, 아니면...... 뭘 생각하든 그 이상으로 기괴한 것들을 다루는 분점도 여럿 낼 거에요 아마!"
래리티는 이를 갈며 그 눈앞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목을 매달기라도 하는 듯한 눈빛을 뿜었다.
"그리고... 실버... 심즈... 으으으으..." 래리티는 두 눈을 단단히 감더니, 숨을 세차게 내뱉으며 말했다. "그 여자가 리치스 스레드의 여성복 라인을 싸그리 긁어가다 못해 쪽쪽 빨아먹는 건 뭐 의심할 것도 없죠. 일단 그쪽 물건을 떼어다가 트로팅엄까지 운반하고 나서 전부 뜯어본 다음에 대충 다시 짜깁기하고 나면 진부하고 천박하지만, 세간에는 멋스러운 가을 신상이랍시고 팔아먹으며 거만 떨 수 있는 거에요! 왜냐, 세상에 드레스란 이래야 한다는 의식 자체가 없어졌으니까! 우리 눈앞에 드레스랍시고 가져다 들이대는 것들은 결국 지난날의 쓰레기를 칠해놓은 구역질 나는 색으로 장식한, 걸레 되기 직전의 행주 같은 넝마에 불과하니까!"
장광설이 절정에 달할 즈음, 래리티는 거의 구역질을 바닥에 쏟아놓기 직전까지 가 있었다. 그녀는 낯익은 흰 드레스를 전시해 놓은 전시대 가장자리 아래쪽에 주저앉으며 숨을 골랐다.
"하아...... 정말 화나는 일이에요." 래리티는 단아한 인상을 주는 발굽을 휘저어 머리를 식히며 웅얼거렸다. "그것들은 전부 하나의 공정에 불과해요. 거기서 거기인 케케묵은 공산품을 찍어내는 공정 말이죠. 보다 나은 결과를 내고... 보다 나은 존재가 되고자 하는 본성이 있는데도. 사람들이 우리 같은 사람들이 아무 표현도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면, 우리가 표현하는 건 대체 무슨 소용이죠?" 래리티는 침을 삼키며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갈기가 얼굴 한가운데와 양쪽 가로 작은 강처럼 흘러내렸다. "아주 약간의 변화만이라도 일으키는 게 제 평생 소원이었죠. 제 가게와 제 물건으로, 제가 떠올린 이미지를 전국 사람들과 공유하기를 바랐어요. 그러던 중 실버 심즈처럼, 제가 바라마지 않을 정도로 이름을 떨치는 사람과 다시 만나게 되었지요. 대체 무슨 수를 쓴 걸까요? 그리고 전 대체 왜 그렇게 되길 바랐던 걸까요?" 래리티는 눈을 감더니 두 발굽으로 얼굴을 문질러 닦았다. "으으으으으으음...... 솔직히, 제가 이러는 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해요. 그런 취향도...... 그렇고. 정말 진절머리가 나요..."
나는 래리티의 말이 끝난 뒤 찾아온 침묵 속에 가만히 서 있었다. 래리티도 나도 그 침묵이 깨지는 것을 감당하지 못할 어떤 이유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다만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나는 그 때,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뭐라도 말해야 함을 스스로 알았다. 오직 내가 한 말만이 예외 없이 잊힐 테니까. 나는 그 반작용이 어느 정도일까, 측량할 수 없는 것을 측량하려 하며 머리를 굴렸다.
"래리티 씨, 중요한 건 본인의 취향이 확고하다는 것 아닐까요." 나는 말하며 가만히 다가가 진줏빛 광택을 뽐내는 드레스 자락을 가볍게 훑었다. 그리고 차분히 웃어 보이고 말했다. "아무리 그런 세상이라도 누군가는 알아 줄 거에요."
"흠...... 좋은 꿈이군요." 래리티는 중얼거리며 몸을 더욱 늘어뜨렸다. 그리고 내가 바라보며 웃었던 바로 그 드레스를 쳐다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깨는 게 무서운 저 같은 사람은 얼마나 오래 그 꿈을 꾸어야 하죠?" 래리티는 나를 마주보았다. "제가 꾸었던 꿈이 드디어 그 과실을 맺을 때가 언제쯤일까요? 다 늙어서? 더는 새로운 걸 떠올릴 수 없는 나이가 되어서 성공하다니, 무시무시한 천재성이겠군요. 그렇더라도 실버 심즈나 호이티 토이티 같은 사람들 그림자 속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갔지만. 그런 광명을 누리기에는 지나치게 예민한 상태일 테니."
"그... 때가 언제쯤이라고 딱 잘라 말씀드리기는 어려운데..."
"저도 마찬가지에요." 래리티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지었을 그 드레스를 내가 언젠가 마주친 회색 갈기를 한 누군가를 바라보는 듯 경멸하는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보기는 하지만, 그건 미래를 꿈꾸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죠. 젊은 날을 많이 남겨두고 있기는 해요. 이제 그걸 어떻게 써야 최선의 결과가 나올지 생각하고 결정할 때가 됐죠. 마법 걸린 어린애가 남기고 간 하늘거리는 흔적을 쫓은 것도 너무 오래됐죠. 호이티 토이티나 필시 리치 같은 사람들은 각자 자신에게 맞는 산업에 자리를 잡았고요." 래리티는 결심한 듯했다. "이제 저도 그럴 때가 됐어요."
"그래도 래리티......" 나는 래리티를 마주보았다. "이 드레스를 봐요! 아름답지 않아요?"
"그렇죠. 그러니, 누군가의 기억 속에는 영원히 간직되지 않을까요." 래리티가 콧김을 뿜었다. "합당한 가격에 말이죠. 어쨌든 그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니까." 래리티가 고개를 돌려 나를 향했다. 한때 고운 소리로 지저귀던 새처럼 재잘거리던 누군가는, 이제 아무 표정 없는 흔적으로만 남아 서 있었다. "어쩌면 글쎄, 그쪽에게 팔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제가 감정적인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언할 수 있어요. 저는 서비스에 있어서만큼은 완벽주의자랍니다."
"그게... 저..." 나는 래리티와 드레스와 내 가방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무엇 때문이지 목이 메었다. 나는 벽을 보고 나직하게 말했다. "사실, 뭘 좀 사거나 주문을 하고 싶어서 온 게 아니라......"
"오?"
"음... 사실 어떻게 된 일이나면..." 나는 드레스를 쳐다보았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벅차오르며, 내 오두막집 뒤편의 모닥불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모방하기를 갈구했다. 이 세상에 과연 잿더미 속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이 있기는 한 것인지, 나는 알아야 했다. '패배감'이라는 말은, 단지 단어를 구성하는 자음과 모음의 조합에 불과한 것이다. "말씀을 좀... 말씀을 좀 전해 달라고 하셔서요."
"말을 전하라고 했다고요?"
"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 자리에서 급한 대로 짜낸 것을 그대로 옮기고 있다고 자각하니 몸이 떨렸다. "슈가큐브코너에서 어떤 페가수스 분을 만났지요. 나비 여러 마리가 큐티마크로 그려진 친절한 여자 분이셨어요."
"플러터샤이가?" 래리티의 표정 일부가 저절로 환해졌다. 래리티는 눈을 꿈벅이며 말했다. "직접 얼굴 보고 얘기하지도 못할 만큼 중대한 문제가 있을 리가 없는데요?"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댁에서 키우는 고슴도치에게 스웨터를 하나 떠 줘야겠다고 하시던데요...... 그게... 그 녀석이 아프다나 봐요."
"고슴도치라......?" 래리티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는 생각에 잠겨 턱을 긁적였다. "이상하군요. 플러터샤이는 고슴도치를 키우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
"어... 오늘 아침에 찾았다고 하시던데요. 밤 사이 강물에 떠내려온 게 틀림없다면서, 폐렴 같은 게 걸리지 않았나 싶다고 했고요. 스웨터나 담요가 없으면......"
"짐작이 가는군요." 래리티가 한숨을 내쉬며 발굽을 휘휘 젓더니, 피곤해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고슴도치를 걱정하다가 본인이 먼저 병이 나진 않을까 모르겠어요. 사실, 저는 고슴도치보다는 플러터샤이가 더 걱정스러우니까... 뭐 시일이야 더 벌면 되고요. 말씀 전해주셔서 고마워요. 성함이......"
"하트스트링스에요. 그리고... 어... 괜찮아요." 나는 침을 삼키며 초조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작업실이 이런데 스웨터를 뜰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괜찮아요?"
"휴!" 래리티가 머리를 가볍게 튕기며 부티크 한쪽으로 걸어갔다. "그건 모른 척 해주세요. 그렇지 않아도 비단에 레이스를 가지고 드레스를 짓느라 머리가 아팠으니까요. 잠깐 쉬고 나면 못 찾던 옷감도 보이겠죠. 가만히 들어 주셔서 그래도 한결 나아졌어요." 래리티는 완전히 시야에서 벗어난 곳까지 걸어 들어갔고, 출입문 근처 깊숙한 벽장 속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럼...... 뜨개질거리를 어디다 뒀는지도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설마! 실버 심즈 하나 덕에 정신이 쏙 빠진 모양이야!"
래리티가 궁시렁대는 동안, 나는 입술을 씹으며 진주 드레스 쪽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래리티가 곧장 이리 다가오지 않음에 깊이 감사하며 슬며시 가방을 열었다.
그 날 오후, 나는 래리티가 틀림없이 붉으락푸르락해서는 잔뜩 화가 난 표정을 지으리라고 생각했었다. 그 대신, 형언할 수도 없이 막대한 충격을 받은 표정뿐이었다. 그 때 나는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었음을 알았다.
그리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래리티의 표정을 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 때만큼은 온 몸의 감각을 곤두세우고 뭘 좀 하느라 바빴기 때문이었다. 나는 포니빌 시내 중심가에 있었고, 래리티가 그 근처를 지나갔다. 찬란한 붉은 석양에서 쏟아지는 빛에 젖어 몇 마리 귀뚜라미가 노래하는 가운데 밤의 문턱에 앉아 가만히 현을 퉁기고 있는 내 모습은 절로 눈이 가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내 주변에는 광배와도 같이 수십 명이 모여들어 혼이 쏙 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리라를 퉁기어, 지난날의 화려한 곡조를 붙잡아 현실로 끌어왔고, 내가 가져온 무언가의 아름다움에 얹어 장식했다.
현이 울리는 소리 가운데로 운집한 군중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그들의 소리를 굳이 묻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래리티가 불러모은 관중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좋은 곡이야. 혹시 전에 들어 본 적 있어?"
"내가 알기로는 '플래티넘 공주와 연합의 송가'인데. 전에 들었던 것보다도 섬세한 연주야."
"포니빌에서 이런 걸 들어 본 게 대체 얼마만인가 몰라?"
"쉬이잇, 조용! 안 들리잖아!"
"아 집중 안 돼. 저 드레스에 정신이 자꾸 팔리네. 어디서 저런 고급한 예복을 구했을까?"
"저거 진퉁 진주인가? 끝내주는데!"
"오, 잘 어울리는걸! 마침 바로 며칠 전이 플래티넘 공주 탄신일이기도 하니..."
"전에 네가 저런 건 캔틀롯에서나 볼 수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름답지. 저건 그냥 아름다운 거야."
"저 드레스는 뭐지? 맞춤옷이라도 한 걸까?"
"얘가 뭔 소리래. 저런 건 왕족들이나 입을 수 있는 거라고."
"저 사람 누구지?"
"몰라! 그냥 여기 오더니 바로 연주를 시작했거든."
"저 드레스는 어디서 구했는가 꼭 좀 물어봐야겠어! 세상에, 오늘 정말 좋은 구경 했어..."
내 시야 구석에 서 있던 래리티가 좌우를 두리번거렸고 보라색 갈기가 그에 맞추어 흔들렸다. 대중들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칭찬 한 마디, 한 마디마다 래리티의 입이 조금씩 벌어졌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래리티가 열심히 생각하는 사이 부드러운 노란색 형체가 가만히 걸어와 그녀 곁에 섰다.
"어머! 세상에. 래리티, 저거 혹시...?"
"응, 저거야. 바로 몇 시간 전에 없어진 그 드레스가 맞아! 신고하려고 경찰서에 가던 길이었는데, 이건 대체..." 래리티는 침을 삼켰다. "놀래라..."
"저 유니콘이 범인이라고 생각해?"
"쉿! 플러터샤이, 잠깐 들어 볼래?"
"어? 아. 좋은 곡이네. '플래티넘 공주와 연합의 송가'였던가..."
"아니 아니 아니, 저 사람들 말 말이야!" 래리티가 말했다. "들려?"
전에 봤던 학생 둘도 군중 사이에 끼어 있었는데, 둘 모두 내 연주의 배경처럼 펼쳐지는 속삭임의 바다에 귀를 쫑긋거리고 있었다.
"저건 틀림없이 블루 밸리 연안에 밀려든 바다 거품으로 만든 것일 거야!"
"시포니가 만든 거 아닐까?"
"너 바보니? 그거 미신이야!"
"아무리 그래도 저게 현실에서 가능한 수준은 아니잖아."
"연주와 정말 잘 어울려. 허스워밍이브가 일찍 온 것 같아."
"헤헤헤..."
"저 사람, 돈 받고 하는 건가?"
"디자이너가 기획한 걸지도 모르지......?"
나는 귓가에 들리는 말 하나하나를 숨쉬듯 빨아들였다. 마지막 몇 마디의 연주까지 마치고 나는 두 눈을 감은 채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서 있었다. 마지막 과정까지 마치고 난 뒤, 나는 다시 눈을 열어 뜨고 래리티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사람들의 환호 소리가 부박하게 깔리는 어스름을 부수며 울려퍼졌고, 나는 그 내내 래리티만 보고 있었다. 나는 굳이 입꼬리만 올려서 웃지 않고 이를 드러내며 씩 웃은 뒤, 정중하게 무릎을 굽혀 절했다. 그리고 가방 옆에 리라를 가만히 내려놓았다.
"브라보! 브라보!"
"멋진 연주였습니다!"
"'연합의 송가'를 이토록 훌륭하게 소화한 연주가 대체 얼마만인지, 지금까지 들은 것 중에 제일이었소!"
"혹시 캔틀롯에서 오셨어요? 귀족가 출신 아니세요?"
"이것부터 대답해 주세요. 그 드레스는 어디서 구했어요?"
대중은 열광과 환호로 대기를 채우며 즐거이 웃었다. 나도 약간을 보탰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제가 차려입은 옷이 고급스러워 보이는 것은, 이 옷 하나를 만드는 데 굉장한 정성과 수고가 들어갔기 때문이죠." 나는 군중 한가운데를 빤히 쳐다보며 발굽을 들어 가리켰다. "오호...... 여기 그 주인공이 와 계시군요! 캐러셀 부티크 오너 래리티 선생을 모시겠습니다! 이 드레스를 지으신 분이 바로 이분이지요. 의심의 여지가 없죠?"
군중은 래리티를 사이에 두고 둘로 갈라져 돌아보면서 입을 떡 벌렸다. 내 간단한 몸짓을 따라 거기 서 있던 사람들이 녹아 없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길이 열렸다. 래리티는 급작스레 쏟아지는 선망의 눈길의 비에 정신이 혼미해졌는지, 거의 엉덩방아를 찧듯 뒷걸음쳤다. 플러터샤이는 얼굴에 새빨간 홍조를 띄우더니, 멋스럽게 차려입은 채 래리티를 둘러싸고 모인 군중 사이로 가볍게 걸어 들어가 사라졌다.
"래리티 선생이라! 진즉 알았어야 했건만!"
"그대 같은 사람은 모름지기 타협 같은 건 하지 않지요!"
"요즘 세상에도 옷 한 벌에 혼을 싣는 사람이 있다니 기쁩니다."
"포니빌에 그대 같은 사람이 더 많았으면, 아니지. 이 나라에 그대 같은 이가 더 많았더라면!"
"말씀 좀 해 주세요! 혹시 아직 진주가 좀 남아 있나요?"
"트로팅엄 가든 파티에는 저런 드레스가 더 격에 맞는데!"
"아! 나이트메어 나이트 축제도 있겠네요! 플래티넘 공주님처럼 입어보고 싶었는데! 분명 아직도 이것처럼 멋진 옷을 몇 벌은 더 만들 수 있겠지요!"
"'연합의 송가'를 곁들인 쇼케이스를 볼 수 있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꼭 시대를 거슬러 가 그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더군요."
"그래요. 좋은 곡에 아름다운 드레스까지. 더할 나위 없었지요!"
"말씀 좀 여쭐게요. 혹시 주문 받으세요?"
"래리티 선생, 이쪽 연주자와는 협업 관계이신지?"
래리티는 입술을 씹으며 천천히 돌아 주위를 둘러싼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래리티는 눈에 띄게 비틀거리고 있었지만, 그 두 눈에는 부정할 수 없는 총기가 감돌고 있었다. "저... 어... 아하하... 이게... 음..." 그녀는 사람들의 얼굴 하나하나와 갈기 하나하나를 건너, 내 얼굴과 내 갈기에 시선을 부딪쳐오며 말했다. "저도... 여러분들과 비슷한 마음이거든요. 많이 놀라서..." 래리티는 마른침을 삼키고 말했다. "우리 모두 동시에 똑같은 생각을 했나 보군요, 재미있는데요?"
사람들이 킬킬 웃었다. 플러터샤이는 자랑스러운 듯 웃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살아 있었다.
"세상에나! 그 작자가 드레스를 훔쳤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요!" 나는 말했다. 한 시간이 지난 뒤, 우리 둘은 캐러셀 부티크 안으로 나란히 들어섰다. 창틀 밖 세상은 천천히 흐릿해지며 자주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슬슬 '정리하고 뜰 때'가 될 때까지 얼마 남지 않았지만, 나는 이미 해야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제 바보스러운 짓을 용서하세요." 나는 천의무봉 그 자체라 할 만한 드레스에 주름이 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천천히 드레스를 벗었다. "방학만 되면 정신이 어떻게 된다니까요. 평소 같았으면 이런 드레스를 싼값에 팔겠다고 하면 한 번쯤은 더 생각해 보는데 말이죠. 캔틀롯에서부터 먼 길을 왔는데, 깜빡하고 제정신을 안 챙겨 온 것 같다니까요. 하하하!"
"아하, 그 느낌이라면 저도 잘 알죠. 하트스트링스... 씨였죠?"
"네엡."
"저도 애플루사로 처음 여행을 갔을 땐 근처 가게에 가득 쌓아놓고 있던 선인장즙 사탕에 정신이 팔렸었죠. 요즘도 가끔 친구들과 그 때 얘길 해요."
"히히히, 그래요!" 나는 우아한 동작으로 옷을 마저 벗은 뒤 래리티에게 건네주었다. "그거 굉장한데요."
래리티는 조심스레 드레스를 받아 반투명한 염력으로 공중에 띄웠다. 그녀는 차분하고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표정으로 나긋하게 물었다. "그 남자가 어떻게 생겼다고 했죠? 시청 뒤쪽 골목에서 드레스를 팔았다는 자가?"
"으으으음..." 나는 기억을 더듬는 척 끙끙거리며 의상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짜리몽땅했죠. 페가수스였던 것 같아요. 한쪽 날개 깃털이 빠져 있었고요. 털 색은 노란색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칙칙했고."
"뭐 그래요, 누구나 실수는 하는 법이니." 래리티는 경박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마네킹에 드레스를 단정하게 입히고는 나를 쳐다보지 않고 말했다. "그자가 옷값으로 얼마를 뜯어갔다고요?"
"아. 말씀드려도 못 믿으실걸요. 삼백 비트요! 미친 거 아니에요?" 나는 눈을 굴리며 다분히 극적인 몸짓을 해 보였다. "루나 공주님 맙소사. 엄마랑 아빠가 아시면 큰일 날 텐데! 흠흠. 그게 다 같잖은 도둑놈의 수작질이었다니 죄송해요. 그자가 말하기를 마을 동쪽으로 가다 보면 나오는 '레이디 래리티'가 운영하는 의상실에서 산 드레스라고 하더군요. 딱 한 마디만 빼면 전부 사실이었죠. 산 게 아니라 훔쳐 나온 것 하나만 거짓말이었고."
"쓸데없는 데 깔끔 떠는 도둑이네요." 래리티가 말했다. "뭐 그래도 드레스를 상하게 하진 않았으니까." 그녀는 마침내 내 쪽을 보고 말했다. "사기당한 돈을 찾고 싶지 않을 리는 없겠지요?"
"어..." 나는 발굽을 내저으며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삼백 비트면 큰돈이니까요. 그건 그렇고, 제가 캔틀롯 음악학교 학생이라고 생각한 이유가 대체 뭐죠?"
"그거야 하트스트링스 씨가 굉장한 실력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죠."
"에이, 그냥 취미삼아 치는 거에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벙긋거리며 웃어 보였다. "그래도 우리 모두에게 결과가 좋았으니 괜찮지 않아요?"
"아무래도 지금보다 실력이 더 좋아지실 것 같더군요."
"뭐, 행인들 모아놓는 솜씨는 그렇죠!" 나는 취객 같은 웃음을 지으며 출입문 쪽을 가리켰다. "솔직히, 그냥 좋은 드레스 하나 산 김에 자랑하고 싶어서 그랬지만......"
"그랬나요...?"
"그래도 설마 제가 리라 퉁기는 거 듣겠다고 거의 삼십 명 가까이가 모여들 줄은 몰랐죠! 솔직히, 저 드레스 역할이 컸지 싶어요. 살면서 그만큼이나 관심을 받아 본 적이 없거든요!"
"그래요?"
"그래요. 내심 사기 치는 것 같단 생각도 들더군요. 솔직히, 전부 래리티 씨와 저 드레스 덕분이죠."
"흠, 흠, 흠..." 래리티는 가늘고 나직하게 쿡쿡 웃더니, 내 쪽으로 다가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두 발굽으로 내 어깨를 잡고 말했다. "하트스트링스 씨, 괜찮으시면 잠시 앉으실까요."
나는 래리티를 보며 눈만 깜박였다. 대답할 말을 찾는 말은 반쯤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조금 전에 연주할 때, 난생 처음으로 코드 하나를 빼먹기라도 한 것처럼 심장이 제멋대로 뛰었다. 내심 불안했지만 나는 래리티가 하자는 대로 했다. 그 때 나는 어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래리티가 말문을 열기 시작하자마자, 전혀 그런 상황이 아니라는 점이 명백했다. "도둑이라고 해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는 사람이라면 제 드레스를 훔쳐 팔더라도 최소 이천 비트 정도는 불렀을 거에요."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조금 전처럼 능글맞은 웃음을 짓고 말했다. "글쎄요, 음, 아마 좀... 어... 급하지 않았을까요. 그렇죠? 범죄자들이 흔히 그러잖아요. 당장 돈이 궁하다 싶으면 장물이 아니라 다른 뭐라도 그렇게 팔게 되는 게 세상 이치고."
"그렇다면 밤중에 식품점 창문을 깨고 들어가 먹을 걸 집어들고 달아나는 게 훨씬 더 쉽겠지요." 래리티는 창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애초에 포니빌은 농경도시지요. 제 친구 애플잭도 일 년 내내 가족 가수원에서 과일 따느라 바쁘고요."
"아뇨... 그래도..." 나는 입술을 씹었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상황을 통제하기 어려워지고 있었다. 내 머리는 그 상황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그 작자가 그리 똑똑한 부류는 아니었을..."
"자기가 훔쳐 나온 물건에 자연 진주가 수도 없이 매달려 있는데, 그것조차 무시하고 값을 불렀다면 그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아주 높겠지요. 여기에서 드레스를 훔쳐 나갈 정도로 숙련된 도둑이라면, 그 남자... 어쩌면 여자는 진즉에 메인해튼 암시장에 드레스를 가져가 자기 일 년 치 수입에 맞먹는 값을 받고 팔아치웠을걸요."
나는 뭐라도 말하려 했지만, 입안이 버쩍 말라 그러지 못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른 지 몇 시간이 지난 다음이었지만, 그토록 무서운 죄책감을 느낀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래리티는 계속 차분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그 덕에 미친 듯 뛰던 맥박도 차분하게 돌아갔다. "머리도 좋고 영리하기까지 하시더군요. 뭘 좀 찾다가 여기 돌아왔더니, 찾던 게 뭐였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어요. 머릿속에 있는 건 제 드레스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는 것 하나뿐이었죠. 그리고 지금 이때까지 드레스가 사라진 진짜 이유와 어디로 갔는지, 누가 가져갔는지...... 전혀 알 수 없었고요."
나는 래리티와 나 사이의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날 밤에 몰아닥칠 첫 번째 한기가 몰려왔다. 나는 발굽으로 타일을 문질러댔다. "그쪽이 어떤 조치를 취하시더라도 받아들이죠. 그렇더라도 잠시만 뒤로 미루어 주세요. 잠깐 멈추고 번화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돌이켜봐요."
래리티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이 눈이 아닌 전신으로 느껴졌다. "번화가에서 있던 일이라니요?"
나는 래리티를 다시 마주보았다. 눈빛이 형형했는지, 그냥 내 희망사항일 뿐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래리티 씨 당신과 똑같이 여기 사는 사람들이! 당신의 드레스를 보고 감탄했다고요! 만듦새도 좋고! 의미도 있다고! 장인정신이 그 빛을 발했다고요!"
"정정해야겠군요." 래리티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람들이 감탄한 건 하트스트링스 씨의 연주에요. 제가 지은 드레스의 색으로 물들어 있었을 뿐."
"그래도... 결국 똑같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래리티는 차분히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같은 게 아니에요."
"그냥... 사람들이 당신을 알아줄 통로가 필요했던 거 아니에요?" 나는 말했다. 자신의 절박함을 목도하고 있자니 내 숨도 마찬가지로 쓰레기처럼 너덜거리기 시작했다. "래리티 씨가 만든 드레스는 훌륭하다고요! 그저 사람들의 주목이랑... 그..."
"쉬이이잇..." 래리티는 차분히 두 발굽으로 내 어깨를 감싸고 내 영혼에 직접 말을 걸고 들여다보듯이 말을 이었다. "저는 하트스트링스 씨, 당신을 몰라요. 어떻게 제 얘기를 들었는지, 어떤 근거로 제가 어떤 고집이 있다고 판단했는지, 전혀 알 수 없어요. 지금 제가 알고 있는 건 당신이 완전한 이방인이라는 것 하나뿐이죠. 당신이 누구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우리 모두 한 가지 비슷한 점이 있는 것 같군요. 제가 저 드레스의 의미라고 생각했던 것은 이제 더는 남아있지 않고, 어떻게 해야 제 능력을 더 밝고 넓은 길로 인도할 것인가에 대한 교훈만이 남아 있다는 점을 파악하고 있다는 것 하나 말이에요."
"그래도..." 나는 울먹이지 않으려고 용을 썼다. 래리티 앞에 앉아 있으니 어린애가 된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드레스만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내 눈물로 진주를 띄워 올리기라도 할 것처럼. "그래도 당신은 기억될 자격이 있어요. 유능한 노력가잖아요. 당신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자격이..."
"그것은 자격의 문제가 아니지요." 래리티는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내 시선을 자신에게 돌려놓았다. "오히려 얻는 문제에 더 가깝죠. 혹시 제가 조화의 원소 중 하나를 대위하는 존재라고 누가 말해주던가요?" 래리티는 자세를 되돌리며 어떤 현인처럼 말했다. "운명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저는 관용의 원소에 대응하는 존재가 되었어요. 루나 공주님에 부마된 나이트메어 문을 축출하는 구마의식의 한 부분을 맡았지요. 그 날부터 저는 트와일라잇 스파클, 오백 년 만에 셀레스티아 공주께서 직접 수제자로 들였다는 유니콘과 가까이 지내는 복이자 특권 같은 것을 누리게 되었어요. 제가 이런 연줄을 끌어다가 캔틀롯 패션업계에서 한 위치를 차지하는 등 이익을 챙기려거든 얼마든지, 지금보다도 훨씬 쉽게 얻어낼 수도 있었겠다 싶지 않으세요?"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목이 메어 왔다.
"흐으음..." 래리티는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비겁하고 소인배 같은 짓에 마음이 흔들린 적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그 때보다는 괜찮은 사람이 되었나 보다 생각하는 게 더 낫더군요." 래리티는 나를 부드럽지만 꿰뚫어 보는 듯한 눈으로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저는 이 세상에 바라는 게 정말 많아요. 유명세는 그 중 하나일 뿐이죠. 제 친구들도 다들 동의할 거에요. 하지만 제 친구들을 비롯해서 그 누구도 모르는 것 하나는 제가 궁극적인 목표라고 거짓말을 하는 그 어떤 것보다도, 레이디이자 예술가로서 하루하루 더 발전해 나가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게 더 중요하다는 거에요. 제가 지금 이 일을 하고 있지 않았다면 제가 이룩한 것이라봐야 공허하고 무가치한 승리에 취한 여왕 같은 것 정도밖에는 안 됐을걸요. 그 어떤 세속의 주인이라도 왕관을 쓸 자격은 없다는 것이죠. 하하하... 그 왕관이 얼마나 반짝이는지는 제쳐두더라도요."
나는 떨리는 숨을 들이마시며 창 밖을 내다보았다. 밤이 어둠을 몰고 다가오고 있었다. "저도 그런 욕망이 있기는 있어요. 하지만... 이제 더는 그렇게 그 목표를 향해 갈 수는 없으리라는 걸 아주 오래 전에 알게 되었죠." 나는 훌쩍이면서도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제가 빛날 수 없는 곳에서 빛날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만 있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만 있어요."
"우리 모두 빛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태어나죠. 하지만 서로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도록 할 수는 없어요. 그 대신 오래되고 심심한 음악에 맞추어 춤추고 있을 뿐이죠. 자기 스스로 꽃피울 수도 없는 채 말이에요. 자신이 견딜 수 없는 무언가를 한다고 해도, 그건 절대로 호응을 이끌어 낼 수 없는 것이고요."
나는 드레스를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입술 사이로 울음 대신 킥 하는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나는 겨우 짜내듯이 말했다. "인생에는 두 번 다시 얻을 수 없는 것들도 있지요."
"그래서 저는 보다 새롭고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기 위해 산다고 생각해요." 래리티가 웃었다. "당신도 그래야 하고요." 래리티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저는 선물을 거절당하는 게 싫어요. 특히나 진심을 담아 정성스레 만든 거면 더하죠." 래리티는 뿔을 밝혀 검은 천을 집어다가 진주를 두른 드레스를 입혀둔 마네킹 위로 가져갔다. "오늘 있었던 일...... 오늘 하시려고 했던 일은 다분히 무례하고 경솔한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저를 생각해서 하신 것이기도 했지요. 제가 절도범이라면서 뛰어들지 않은 건 그것 때문이에요." 그녀는 천을 드레스 위에 덮었다. 방이 조금은 더 어두워졌고, 그 통에 래리티의 밝은 몸통도 순간 윤을 낸 상아처럼 흐려 보였다. "저는 당신의 재능이 정말 부러워요. 드레스는 한두 번 입을 때나 아름답지 음악... 아름다운 음악은 영원히 아름다우니까요. 가끔은 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요. 좀 더... 오랫동안 남아 있는 것을 추구할 수 있다면..."
나는 침을 넘기며 고개를 돌렸다. 래리티가 내 왼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자국을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내 머릿속에는 나를 둘러싸고 웃으며 음악을 듣는 사람들의 형상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리고 다시, 오두막에 피워둔 모닥불의 죽어가는 재들이 나타났다. "부러워하지 마세요. 남을 부러워하면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새로 시작하기만 할 뿐이니..."
"흠..." 래리티는 나를 보고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기억해 두죠."
나는 얼굴을 문질러 닦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래리티 씨라면......"
우리는 밤이 깊을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문을 가지고도, 유명 인사들을 가지고도 말했다. 래리티는 직접 만나 본 유명한 음악가들의 이름 몇 개를 말해주었다. 옥타비아를 가까이에서 본 일이 한 번도 없는 것이 너무나 저주스러웠다. 별들이 슬슬 제 형상을 다 갖추어 가고, 혜림한 이지러진 달의 자리를 넘보기 시작할 즈음에 나는 이만 가 보겠노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게 하세요. 그럼 저도 이제 일을 시작해야겠군요." 래리티가 말했다. 신경이 잔뜩 곤두선 채 어지럽혔던 의상실 바닥을 깨끗이 정리한 래리티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만드는 이 드레스, 완성이 될까 싶어요."
나는 래리티가 반쯤 만들던 드레스 쪽으로 다가서는 모습을 지켜봤다. 의상실 출입문 문간에 걸쳐선 채, 나는 하얗게 일어나는 입김을 뿜어냈다. "언젠가 완성될 날이 올까요? 다 만들었다 싶으실 때가 언제쯤일까요?"
"그것은 제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지요." 래리티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의상실 구석에 쌓여 먼지에 덮여 가는 옷감처럼 별다를 게 없었다. 글쎄, 그 누구에게도 한 말이 아닐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흐으으음...... 그럼 뭘 더 더해야 하나?" 래리티는 드레스를 바라보며 나긋하게 중얼거렸다. "레이스도 달았고. 에메랄드 장식도 붙였고." 그리고 한 줄기 한숨 소리가 창백한 달빛의 입맞춤으로 물들어 의상실을 채웠다. "리본을 더 달아야겠네..."
문 위에 내걸린 출입종이 울리는 소리가 먹먹하게 들려왔다.
그 날부터 삼 주가 지난 뒤였다. 나는 어쩌다가 오랫동안 버려진 채 서 있던 신전을 찾아낸 탐험가라도 된 듯 뿌듯해졌다. 그러나 나를 맞으러 아침 햇살을 건너와 귀에 닿는 목소리를 들었을 때, 내 가슴은 뛰는 대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침잠했다.
"캐러셀 부티크에 어서 오세요. 가장 화사하고 세련된 세상 하나뿐인 옷만을 취급합니다."
"안녕하세요. 그게..." 나는 망설이며 입술을 깨물다가 숨을 토하며 말했다. "요 근처로 놀러 와서요. 뭐 특히 찾는 게 있는 건 아니긴 한데......" 나는 가방을 뒤적이며 뻣뻣한 걸음걸이로 의상실 한가운데까지 들어갔다. 그리고 보푸라기를 잡아 뜯어내듯이, 빛을 잃은 마지막 음석을 꺼내 그 칙칙한 모습을 내보였다. 여덟 번째 비곡이 머리를 뒤집어 놓으며 날뛰는 판이어서 당장이라도 울고 싶었지만, 너무나 피곤해서 그러지도 못했다. "보석에 마력을 충전해야 해서, 혹시나 하고 와 봤어요. 그, 보시다시피...... 음...... 상태가 말이 아니라."
"어디, 잠깐 살펴봐도 될까요." 래리티는 모델 같은 걸음걸이로 한창 짓고 있던 재킷을 놓아둔 쪽에서 다가와 내가 건넨 음석을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반짝이는 눈망울로 그걸 들여다보더니 나긋하게 말했다. "흐음...... 그렇군요. 꽤나 오래 사용하신 것 같아요. 오래된 보석에 마력을 충전하러 오시는 분들은 거의 없기는 하지만, 보석 하나 다루지 못하게 되면 그날로 은퇴하겠다는 것도 제 생각이라. 아하하..."
"저... 음... 그래도 다른 할 일이 있으실 것 같은데."
"어머, 그럴 리가요! 이번 주는 한가해요." 래리티가 눈을 굴리며 말했다. "칙칙한 양모 원단 몇 장 만지작거리고 나서 캔틀롯에서 유행한다는 패션보다 더 괜찮은 디자인을 뽑아낼 수 있나 궁리하는 것 빼고는 할 게 없거든요. 흠흠. 정말로요." 래리티는 우아하고 친절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다 보니 이런 일은 그야말로 하이라이트라고 할 만하죠. 자, 그럼 잠깐 앉아 계시겠어요?"
"그거야 얼마나 걸리냐에 따라 다르겠죠. 제가 언제쯤 앉으러 갈 것 같으세요?"
"글쎄, 그렇다시다면야 저도 선생님이 앉으러 가시면 이 친구 갈기를 좀 잘라가야겠네요. 아하하하...... 으으으으으, 대체 핑키 걘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거람." 래리티는 헛기침을 하고 창가에 가져다 놓은 금속 장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농담은 이쯤하고, 비용은 3비트에요.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고요."
"고맙습니다..."
"그렇기는 한데, 시간을 좀 더 써주셨으면 좋겠네요." 래리티는 음석을 죔쇠에 고정하고 햇빛을 집중시키는 지점을 조정하며 고개를 들어 말했다. 동화에 나오는 어린아이 같은 소리로 래리티가 말하자 속눈썹이 따라 흔들렸다. "굉장히 편안한 복장이기는 한데, 너무 낡았어요! 동의하시기만 하면...... 따뜻한 만큼이나 남들 눈에 보기도 좋은 스웨터를 한 벌 떠 드리고 싶은데."
"아뇨, 괜찮아요. 제안은 감사하지만, 그게..." 나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래리티가 만들고 있던 재킷을 보자 목구멍 안에 어른거리던 냉담함이 순간 몸을 떠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주머니 위를 수놓은 복잡한 꽃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화려한 색으로 갈마드는 여러 장 원단들도 보였다. 그것은, 잃을 게 없는 사람은 남에게 주지 못할 것 또한 없다는 의미나 상징처럼 보였다. 남들의 주목을 받을 운명의 때가 아닐지도 모르는 일이기는 했지만, 래리티의 선의에서 발을 빼고 물러날 생각이 그 때 지워졌다. 그리고 그것을 재청해 마땅하다는 생각이 그 자리를 채웠다. "아니에요. 부탁드리죠."
"흠?" 래리티가 삼 비트짜리 사소한 일을 하다가 왠지 놀라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다시 말씀해 주시겠어요?"
나는 작은 미소를 띄우며 래리티를 마주보았다. "네. 새로 입을 옷을 하나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왕이면 따뜻하고...... 멋있는 걸로."
래리티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뜨자 거기에는 반짝이다 못해 찬란하기까지 한 눈동자가 있었다. "그럼요. 물론이죠! 해드려야죠!" 래리티는 초신성 폭발에 실려 오기라도 한 듯한 숨소리와 함께 어린애처럼 내게 달려왔다. "어쩜, 이렇게 밝고 빛나는 청록색 솜털에 맞는 옷을 짓는 게 대체 얼마만인지 몰라요! 으으으음, 뭐가 좋을까. 금색 실로 장식한 새 스웨터 재킷은 어때요? 아니면 예쁜 노란색 스카프는? 아 참! 이걸 빼먹을 뻔했네! 빨간색 스웨터에 노란 줄을 넣으면 눈동자 색과도 어울리고 좋겠죠! 허스워밍데이 같지 않겠어요? 히히히히..." 래리티는 순간 자기 발굽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나도 참! 뭐라는 거람. 어... 생각해 두신 게 있으실 테니, 그쪽으로 하도록 하죠."
"아뇨..." 나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래리티 씨만큼 멋진 걸 떠올릴 자신은 없어요. 래리티 씨가 원하시는 대로 해주세요."
놀라 헉 하고 숨을 들이마시는 래리티의 모습은 태양 자체만큼이나 빛나 보였다. "정말요? 정말, 정말로 그래도 되나요?"
나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전율을 일으켜 보시죠."
"그렇게 해서, 다분히 멜로드라마 같은 방식이기는 했지만 그 철면피 개들이 저를 당나귀에 빗댄다고 몰아간 것이죠. 솔직히, 제가 보기에도 훌륭한 솜씨였어요. 엄청나게 무서워하고 있다는 걸 직접 보여주는 행동이 별 효과가 없었다고 하면, 제가 징징대는 소리 하나 때문에 그것들의 야만적인 생각이 꺾인 것이겠죠. 그것들이 저를 보석 탐지용 노예로 삼으려던 생각 자체를 그만두게 되었을 때 제 친구들이 저를 구하러 나타났지요.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이, 그 악한들의 손아귀에서 저 스스로를 구원한 지 오래였는데 말이죠. 흠흠, 그건 그렇고 소매 부분은 어떠세요? 너무 조이진 않아요?"
"아뇨. 괜찮은데요." 나는 의자에 앉아 대답했다. 래리티가 내 주변을 빙빙 돌고 있었다. 뜨개질 도구들이 가장 최근에 완성된 옷 근처에 띄워 올려져, 내 앞다리를 감싸고 올라가며 화사한 스웨터의 소매 부분을 뜨고 있었다. "딱 좋아요. 정확히 재셨네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래리티는 내 앞쪽 다리를 올렸다가 내려 보면서 어느 지점에서 옷소매가 접히고 당겨지는지 뜯어보았다. "작업 시작한 후부터 계속 몸을 떠시는데, 별로 안 따뜻하신 거죠? 그러시면 디자인 같은 건 그만두고 처음부터 다시......"
"괜찮아요." 래리티의 얼굴이 시야 구석진 곳으로 움직였다. "다 괜찮을 거에요. 이거 벌써부터 마음에 드는군요."
"으음...... 뭐, 그러시다면야!" 래리티는 작은 소리로 대답하면서 한쪽 소매의 끝자락을 조였다. "제 마음대로 하라고 일임하시는 손님을 맞은 게 대체 얼마만인지 몰라요! 오래 걸리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티 하나 없이 멋진 옷을 만들다 보면 간혹 왈츠를 추어야 하는데 탱고를 추게 되는 경우가 있거든요."
"얼마가 걸려도 상관없어요." 나는 말했다. "그 다이아몬드 독들 얘기를 더 해 주시겠어요?"
"오! 그럼요. 비밀 하나 알려 드릴까요?"
"그럼요. 비밀 얘기 싫어하는 사람도 있어요?"
"히히히... 친구들에게는 저 야만스러운 족속들의 무례한 요구를 숙녀답게 거부했다고만 말했었지요. 사실, 그건 반쪽짜리 정답이에요. 저희 집안 내력상 다이아몬드 독들과 자주 부딪칠 수밖에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노하우가 많이 쌓여 있거든요. 즉슨...이걸 뭐라고 표현할까, 그 단순하기 짝이 없는 녀석들에게 어떤 수를 써야 할지 환히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거죠."
나는 깔깔 웃고 말했다. "에이, 설마요."
"어머, 전부 사실이에요?" 래리티는 옷깃을 몇 번 만지작거리더니 리넨 천을 덧대어 보며 말했다. "사실, 그 노하우라는 것도 제 조상 한 분께서 그 두더지 같은 녀석들 영역에 잘못 들어가셨던 것 때문이지만요! 루비 조이라는 성명을 쓰셨는데, 대단히 귀족적인 분이셨지요. 그분께서는 차분한데다 영민하신 분이기도 해서, 그것들의 혼을 쏙 빼놓은 것도 모자라 다이아몬드가 어마어마하게 매장된 광맥을 캐서 시카콜트Chicacolt에 있던 조상님들 댁으로 실어 나르게 만드셨지요. 흠-흠-흠...... 바로 그때부터 저희 가문과 보석 사이의 인연이 시작된 거고요. 히히히......"
나는 웃으며 래리티의 이야기를 듣고, 옷을 입어 보며 행복한 오후를 보냈다. 앞날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나를 옭아맨 저주는 오히려 래리티의 따뜻한 마음을 더 사무치게 느끼게 해주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나를 키운 계기가 된 고마운 일들은 모두 내가 알 수 없었을 때, 어디에서 비치는지 모를 스포트라이트처럼 갑작스레 찾아왔었다.
각자의 삶에서 진정으로 빛날 기회가 몇 번이나 있을지 어찌 알 수 있으랴.
그렇더라도 서로를 도울 수 있기만 하다면 절대 멈추어서는 안 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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