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M으로 TRPG를 한다면 어떤 스토리를 짜는 게 좋을까요? 수도원에서 일어나는 살인사건? 종족 내/종족 간 갈등이 심화되며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활동하는 스파이? 전설 속 왕과 그가 지배하는 왕국을 찾아 동방으로 떠나는 여행자는 어떨까요? 어느 어촌 마을에 갔는데 뭔가 해마를 닮은 포니들이 돌아다니거나 하는 건 또 어떨까요. 페가수스들이 날씨를 조절해서 유니콘과 어스 포니가 활동하기 어려운 환경을 조성해 천 년 동안 대치 상태로 살아가다가, 유니콘이 개발한 마법으로 페가수스가 설정한 한계선 너머로 유니콘과 어스 포니가 진출해 전쟁을 벌이는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뭐 고렇습니다. 제가 여기서 든 예시는 죄다 다른 사람이 쓴 것들이죠. <장미의 이름>, <프라하의 묘지>, <바우돌리노>, <인스머스의 그림자>, <눈물을 마시는 새>입니다. 출전이 어디인지는 차치하고라도 잘 다루고 완급 조절이 절묘하다면야 재미있는 세션이 될 만한 것들이죠.
TRPG의 매력이라면 소재 선택에 큰 제약이 없고, 스토리 전개도 수습만 된다면야 감당 가능한 범위까지 확대할 수 있는 점을 뽑을 수 있겠습니다. 무엇보다 주인공 일인칭 시점이라 GM이 짜낸 세계관을 탐험하는 즐거움을 제공하죠. FiM이 교훈적인 내용을 주로 한 컨텐츠이기는 합니다마는, 그렇다고 해서 그 가르침이 포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그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잘만' 다룬다면 처절함과 비장미로 장식된 이른바 'epic'한 세션을 진행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비극적인 것은 이를 잘 다룰 수 있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는 않다는 점이죠. MLP : FiM TRPG 세션이 진행된다면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스토리를 짜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위에서 든 예시를 쓰자면, 전설 속 왕국을 찾아 동방으로 향하며 겪는 모험 이야기 정도가 적절하겠네요. 가면서 보고 듣는 거야 뭐 <중세>나 <바우돌리노> 속에 녹아 있는 당대 사람들의 믿음에 기반해 적당히 만들어 내면 될 것이고요. 이 정도만 해 둬도 기존 FiM 세계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습니다. 현재 시점이 아니라 유니코니아 건국 전후 20년? 그 정도만 해 둬도 충분하겠죠. 반면 유니콘, 어스 포니 연합과 페가수스가 내전을 벌이게 된 상황을 묘사하는 경우에는 플레이어 캐릭터들이 대충 납득할 수 있는 설명 정도는 제공해야 합니다. GM이 직접 설명하는 게 아니라, 플레이어들이 세션을 진행하면서 알아 갈 수 있게 말입죠. 어지간하면 하기 힘든 일이지만 제가 신경 쓸 일은 아니죠. 제가 마스터를 할 게 아니니까요. 하게 된다면 저는 트롤링만 줄창 할 겁니다. 식품점에 패러스프라이트 풀어놓거나 뭐 그런 짓을 할 거에요.
대충 요약해서 결론을 냅시다. 처음부터 독자적인 세계관 가져가려고 하지 말고 흥미로운 소재를 다룬 작품을 참고해서 거기에 포니 스킨을 씌운 뒤 세션을 진행해 보고, 짬이 어느 정도 쌓인 시점에서 더 어려운 세계관을 적용하며 마스터링 능력을 기른 뒤 그때까지 십이지장 쪽에서 푹 숙성된 독자 세계관을 바탕으로 세션을 진행하는 편이 좋을 테지만 TRPG를 하고 놀 국내 팬덤은 거의 없으니까 이번에도 고라니가 꽥꽥 짖으며 가로되, "영영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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