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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소리

번역 이야기와 추억팔이

by Mergo 2022. 3. 8.

MLP : FiM 팬덤 초기... 그러니까 2012년 중반쯤부터 2013년 후반 정도까지만 해도 커뮤니티가 상당히 복작복작했습니다. 이 팬덤이 상당히 신기한 게, 내부에서 팬 창작 컨텐츠 소비를 중심으로 하는 사람들도 많은 반면에 어떤 생산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상당했다는 것이죠. 외국의 컨텐츠를 수입, 소개하는 사람들도 있고 아예 자체생산해서 갖고 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번역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도 그 수가 많지는 않았어요. 그나마도 만화나 텀블러 Ask, 팬메이드 뮤직 가사 쪽 비중이 높았고, 장편을 옮기는 사람은 극소수였습니다. 저는 불운하게도 그 극소수 중 하나였어요.

 

장편을 옮기면서 가장 힘든 것은, 괜찮은 문장으로 옮기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당시 팬덤을 구축하고 있던 것은 갓 고등학생을 벗어난 대학 초년생들이나 중, 고등학생 위주였는데, 이는 영문을 읽고, 이해하고, 한국어로 옮기는 프로세스가 잘 구축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이 번역을 하고 있었다는 의미로도 읽힙니다. 그게 사실이기도 하고요. 저는 그 중에서도 유독 심한 축에 속합니다. 영어도 잘 못했지만 문장력이 특히나 거지같았지요. 실제로 제 초기 번역작인 EoP의 챕터 1과 BgP를 비교해서 읽어보면 이걸 같은 사람이 썼나 싶어지는 지점들이 있습니다. 문제의 그 챕터 1은 제가 날려 놓았으니 굳이 안 찾아보셔도 됩니다. 그나마 BgP Ch.1~4를 옮기기 시작하는 시점에서부터 문장이 한결 사람이 쓴 것처럼 변하지요. 문제는 영어 실력이 별로였던 건 똑같았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개판을 쳐놓다가 말고 군대에 갑니다. 상병 5호봉쯤인가부터 마음 수양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필사를 시작했어요. 당시 필사한 게 <남한산성>과 <칼의 노래>입니다. 상당히 도움이 많이 되었어요.

 

그렇게 좀 향상시킨 문장력을 어디다 써먹었느냐...... 자소서 쓰는 데 썼습니다. 그러다가 2019년 하반기부터 다시 이 판에 돌아와 번역을 재개하면서 지금까지 잘 써먹고 있죠. 그래도 옛날보단 영어능력이 좀 나아진 편이라 그래도 '옮겼다'고 부를 만한 결과물을 뽑아낼 수 있었습니다. BgP Ch.1~4를 재번역한 것도, 나중에 원문을 슬쩍 보니 제가 개판으로 옮긴 게 너무 티가 나서 갈아엎으려고 벼르던 걸 실천한 것이죠. 다른 말로는 흑역사 청산이라고도 합니다.

 

문장이 잘 안 쓰인다는 것 말고도 어려움은 더 있습니다. 아무리 번역을 해도 어느 지점에 다다르기 전까지는 도저히 끝이 안 보인다는 점도 문제가 되죠. BgP 번역 재개하면서 완역될 거라고 저 자신도 생각 안 했습니다. 하다가 현타 와서 그만둘 게 분명하고, 많이 하면 Ch.10정도겠지 싶었어요. 그 지점들은 번역을 하면서 중간중간마다 보이기도 하는데, BgP 같은 경우에는 주로 스토리의 주요 떡밥이 살포되는 지점과 많이 겹쳤습니다. 그래서 Ch.5~8은 정말 힘들었어요. Ch.9를 시작으로 계속해서 굵직한 떡밥을 뿌려줬기 때문에 후반부 번역이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Ch.11은 Part I, II로 나누어 번역을 했는데, Part II 번역이 딱 이틀만에 끝났어요. 떡밥은 좋은 연료입니다.

 

일단 3월은 쉬겠다고 말을 해두기는 했는데...... 제가 옮겨야 할 글이 아직 남아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Pink Eyes는 일단 하기는 할 생각이긴 하지만 그 다음이 있을지는 저도 확신하지 못합니다. 그 때 가 보면 대충 알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