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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c./[Rated Ponystar] 떨어진 별과 남은 자들

05. I Have A Problem : Rainbow Dash Part II

by Mergo 2019. 10. 5.

레인보우 대쉬 여기 잠들다

 

사랑받는 딸, 충의로운 벗, 참된 영웅으로

 

부디 편안히 잠드소서

 

내 묘비에 적힌 내용이란 것들은 이랬다. 죄다 거짓말이었지.

 

대체 어떻게 되먹은 딸이 그딴 식으로 목숨을 잃고 온 가족을 상상도 못할 고통으로 내몰겠어? 그래 그 충의로운 벗이라는 게 자길 도우려는 친구들한테 술에 떡이 되서는 그따위 망발을 지껄이나? 대체 몇 번이나 저들을 울렸을까? 내 병증이 심각해지거나 끝내 자살하지는 않을까 발을 몇 번이나 동동 굴렀을까? 걱정할 만도 했는데. 거기에, 영웅이라고라? 지랄. 내가 누굴 구조하거나, 포니빌을 지키거나, 적어도 곡예비행을 하다가 죽은 건 아니잖아. 그냥 찐따새끼마냥 뒈진거지.

 

관짝에 뻗은 내 시체를 짓밟아 버리고 싶었다. 그리고는 그 위에 매달아 버리고 싶었지. 근데 그게 뭐? 귀신이나 그 비슷한 무언가로 전락했다는 아주 작은 사실 하나가 사람을 돌아버리게 하더라. 죽었으면 죽은 대로 천국이나 엘리시움(그리스 신화, 선량한 사람들을 위한 사후세계)이나, 서머랜드같이 뭔가 사후세계 같은 데로 가는 게 맞잖아.

 

이제 장례식은 막바지로 흐르고 있었다. 내 소중한 친구들이 장례식장에서부터 무덤까지 관을 들어주었고, 나는 그 뒤를 따랐다. 길가에 늘어선 사람들이 고개를 숙여 마지막 인사를 하는 모습은 꽤 장관이긴 했는데, 그것 때문에 기분이 조금이라도 나아진 구석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기분이 더 좋아지겠냐 이거지. 나는 죽었다. 그것도 젊은 나이에. 원더볼트 입단도 할 수 없었고, 결혼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내가 저지른 등신 같은 지랄 덕에 앞으로 영원히 자살자로 기억되겠지. 구천을 떠돌고 있기도 했지? 그래, 그야말로 지랄맞았어.

 

트와일라잇도 이런 느낌이 들었을까 생각하다가...... 걔 생각은 그만두기로 하고 억지로 생각을 돌렸어. 그 날 생각이 나니까. 어쨌든 나도 죽어 나자빠진 마당에 그렇게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러 내 관 가까이로 다가오는 모습을 전부 지켜보았어. 래리티는 울고 있었고, 본인 딴에는 속삭인다는 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좀 떨어져 있던 나에게도 들릴 지경이더라고. 래리티는 내가 좋은 친구였다며, 부디 트와일라잇에게 우린 괜찮다고 전해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애플잭은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다가, 모자를 벗어 가슴에 가만히 대보이며 인사하고는 자리를 떠났지. 핑키 파이 녀석은 살짝 찌푸린 듯 보였던 내 입가를 만지작거려 웃는 얼굴로 바꾸고 있었는데, 주변 사람들이 죄다 당황하더라고. 그 녀석은 울고 있었어. 그런 주제에 나보고는 웃는 게 낫다고 하더라고. 인정하긴 싫지만 맞는 말 같더라. 플러터샤이는 내 머리맡에 꽃을 올려두고 이마에 입을 맞추고 떠났어. 스핏파이어는 무감정하게 경례를 붙였는데, 뺨 위로 눈물방울 하나가 굴러 떨어지고 있었지. 한번 상상들 해봐. 내가 그 딱딱한 목석 스핏파이어를 울렸다니까. 다른 때만 같았으면 배를 잡고 웃었을 텐데.

 

스쿠틀루도 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장례식장에서 울고불고 한 것 때문에 걔 부모님께서 못 오게 한 모양이야. 그 울보 꼬맹이한테 미안했다고 적어놓은 유언장이나, 하다못해 그거 비슷한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걔가 날 얼마나 선망하는지는 나도 알고 있었어. 근데 지금 난 죽었고, 술에 취해 못할 말을 한 걸 후회하고 있지. 내가 걔한테 그런 소리를 내뱉고, 날 가만 냅두라고 소리나 빽빽 질러댔는데도 걔는 날 믿었는데.

 

그리고 난 이제 죽고 없지.

 

부모님도 마지막으로 딸 얼굴을 보러 오셨더군. 두 분이 날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말씀하시고는, 내 관 뚜껑을 덮으셨어. 그렇게 내 몸은 나무 상자 안에 영영 남겨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지. 그리고, 하관한 자리 위로 흙이 한 삽씩 떨어져 내렸어. 매장이 끝난 뒤, 남겨진 사람들은 모두 자리를 떠났어.

 

나만 빼고.

 

나는 거기 혼자 서서 내 무덤을 쳐다보고 있었어. 두 눈을 문질러 닦으며 눈물을 씻어내던 참에, 내 묘비에 적힌 글귀가 눈에 들어오더군. 그건 정말 무서웠어.

 

주정뱅이

 

내가 헛것을 보는 건 아닌가 싶어서 눈을 꿈벅거리면서 다시 봤는데, 그렇게 쓰여 있던 게 맞더군. 천천히 몸을 돌려 달아나려던 차에, 바로 옆에 있던 묘비에 적힌 글이 눈에 들어왔어. 몸이 싹 굳더라고.

 

주정뱅이

 

사방에 묘비가 깔려 있더군. 묘비 하나하나마다 다 똑같은 글이 적혀 있었어. 주정뱅이. 그 말을 보기 싫어 두 눈을 질끈 감고 묘지에서 도망쳐 나왔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시커먼 아가리를 쩍 벌린 채 망자를 기다리고 있던 무덤 구덩이에 굴러 떨어지기 직전이었어. 날개를 펼쳐 달아나려고 했는데, 그럴 수가 없더군. 딱 들러붙어서 펴지지가 않았어. 결국 새까만 심연으로 떨어지면서 꺄아아아악 하고 비명을 질렀지. 떨어지는 데는 한도 끝도 없었어. 내 비명소리는 나를 감싸던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그러다가... 딱 멈추더군. 날개를 펼치지도 않았고, 누가 나를 붙잡은 것 같지도 않았어. 그냥 그 한없는 공허만이 들어찬 구덩이 한가운데에 딱 멈춰 버렸다고 보면 정확할 거야. 죽어 땅에 묻힌 나를 기다리는 운명은 결국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엄청 무서워지더라고. 영원히 어둠 속에 갇혀 있어야 하나, 싶었으니까.

 

그 좌절감에 젖기 직전, 무슨 소리가 들려왔어. 처음에는 조용조용하게 들려왔는데, 듣고 보니 누가 어둠 속에서 막 노발대발 소리를 질러대는 소리였지.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어.

 

"날 원더볼트에 임관하지 말라고 스핏파이어한테 말했다던데, 무슨 소리야?!"

 

누가 질러대던 소린지 바로 알겠더군. 자기 자신의 목소리는 본인이 모르기 더 어려운 것이지. 문제는 그 다음 목소리였어. 이미 죽어 나자빠진 지 오래지만, 거의 심장마비가 올 것 같았지. 몇 달 동안이나 듣지 못했던 그 목소리, 딱 한 번만 그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버릴 수 있는 그 목소리였으니까.

 

"레인보우. 평생 동안 원더볼트 임관을 보류시키라고 한 게 아니야. 네가 준비될 때까지 몇 달만 더 시간을 달라고 한 것뿐이야."

 

"트와일라잇......" 기쁨과 서러움이 뒤섞인 눈물이 얼굴을 타고 뚝뚝 떨어지더군.

 

"너 지금 장난하냐?! 사관학교 최고기록을 갱신한 게 누군데! 시험마다 1등으로 통과한 게 누군데! 준비는 무슨 준비를 해!"

 

"아냐. 레인보우 대쉬. 아직 준비가 안 됐어. 네 비행 솜씨가 훌륭한 것도, 네가 후보생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것도 사실이야. 넌 아직 네 감정을 적절하게 통제하지 못해! 네가 몇 번이나 싸움질을 벌였는지 스핏파이어가 다 말해줬어. 네가 이론 파트는 전부 무시하고 있다는 것도."

 

헉, 하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순간 우는 것도 멈추더군. 이 대화가 어떤 것인지 알았으니까. 잊으려고 매일 기를 쓰던 바로 그 대화였으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트와일라잇의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어. "기초군사전술훈련 때도 항상 돌격만 한다고 하던데, 전술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항상 시뮬레이션만 했다 하면 사상자 비율이 엄청 높게 잡힌다고도 하더라. 팀을 생각하기보다는 혼자 알아서 하겠다는 듯 구는 일이 너무 많다고 말이야. 원더볼트는 곡예비행단이긴 해도 엄연한 군사조직이야. 네가 명령을 따르는 법을 익히고, 행동하기 전에 먼저 생각하는 법을 배우기 전까지는 원더볼트 임관을......"

 

"아 그래, 그렇게 나오시겠다? 지금까지 원더볼트 한번 들어가 보겠다고 몇 년 동안 뺑이치는 동안 날 좀 도와 주나 싶더니 이제 와선 등에 칼을 꽂으시겠다 이거지?! 넌 친구도 아냐!"

 

더는 견딜 수가 없어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지. 그건 나를 향한 것이기도 했어. 결국 이렇게 되고 말 것을, 후회하게 될 말은 하지 말라고 말이야. 내가 쏘아붙인 말 한 마디, 그 한 마디 말을 제발 하지 말아 달라고.

 

"널 배신한 게 아니야! 위험한 작전 중에 네 전우들이나 네가 죽고 다치지 않게 해 주려고 하는 거야. 이퀘스트리아가 당장은 평화로워 보여도 얼마나 불안정한지 알잖아. 팀으로 움직일 때는 너도 그 팀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걸 알려 주고 싶어서 그래."

 

"말은 청산유수지. 개 풀 뜯어먹는 소리 하지 마셔! 왕관이 너무 꽉 끼어서 그런가 '충의'를 담당하는 부위로 가는 혈류가 막히기라도 한 거 같은데 그래?!"

 

"대쉬, 그게 아닌 거 알잖아. 그러니까 이제 고집은 그만 피워! 딱 일곱 달만 스핏파이어랑 같이 일대일 교육을 받으라는 거야. 분대 지휘관으로서 옳은 판단을 하는 법을 익히라는 거야. 아주 조금만 성과를 내면 돼. 그러면 스핏파이어도 분명......"

 

일곱 달인데. 딱 일곱 달만 미루면 됐는데. 뭘 믿고 그리 고집을 피웠는지. 내가 어리석었어. 그 다음에 이어질 말이 무엇인지는 알았지만, 듣고 싶지가 않았어. 귀를 꽉 막았는데도, 목소리는 계속 들리더군. "그만! 그만! 이제 그만해! 듣고 싶지 않아! 안 들을 거야!"

 

"됐다, 그만 들을란다! 날개 달린 지 일 년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도 빌빌대면서 제대로 날아다니지도 못하는 애 말은 안 들어! 원더볼트 임관 자격은 충분한데, 내 친구라는 작자는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나머지 아주 그냥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구만!"

 

"그만! 그만해! 말하지 마!" 그때껏 질러 본 것보다도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어. "제발!"

 

"아, 혹시 부족한가? 엿이나 처먹어, 트와일라잇 스파클! 네가 친구인지 적인지도 이젠 분간이 안 간다! 너 좆같다고!"

 

더는 견딜 수가 없었어. 나한테 무슨 욕을 해도 성에 차지가 않을 정도로. 대신 비명을 지르고, 절규할 수밖에 없었지. 스스로를 때리고, 저주하면서 말이야. 그게...... 이게 트와일라잇과의 마지막 대화였거든. 내 친구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 트와일라잇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너 좆같다는 말이었어. 이제 사과할 기회는 영영 오지 않겠지. 이걸 되돌릴 수 있는 기회도 영영 오지 않을 거야. 내가 멍청했어. 내가...... 구제불능...... 머저리였어.

 

트와일라잇의 부고를 들은 날부터, 하루하루 그 기억이 떠올랐지. 잊으려고 얼마나 용을 쓰든, 얼마나 술을 들이키든, 잊히지가 않았어.

 

얼마나 울었지도 잘 모르겠어. 하긴, 이미 죽은 마당에 시간이 무슨 상관이야? 더는 울어지지가 않을 때까지 울다가 눈을 다시 떠 보니......

 

... 장례식장으로 다시 돌아와 있더군.

 

참 이상하지, 그걸 보고 반쯤 정신을 놓은 몸이 다시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천천히 둘러볼 깜냥이 되다니. 장례가 여전히 치러지고는 있었는데, 빈소에는 아무도 없었어. 그냥, 관짝에 누운 나밖에 없었지. 관으로 천천히 다가가 봤는데, 가까워질수록 왠지 더 긴장이 되는 거야. 관 안에는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 시신밖에 없었는데 말이야. 그 순간, 내 시체가 눈을 번쩍 뜨고는 날 쳐다보더라고.

 

깜짝 놀라 뒤로 나자빠지면서 비명을 질렀어. 관짝에서 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관 밖으로 나와 서는데, 마치 아직도 살아 있는 것만 같더군. 녀석, 그것, 아 씨, 아무렴 어때. 그게 날 쳐다보고 씩 웃으면서 묻더라. "놀랐냐?"

 

"이... 이... 너 뭔데?" 내가 반문했어. 이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이해할 기력조차 없더라. 내 장례식을 지켜보고, 시커먼 구덩이 속으로 떨어지다가 내 인생 최악의 실수를 다시 돌이켜봤는데, 이제는 말 그대로 나 자신과 대화를 하고 있잖아. "이건 내가 미친 건가? 죽은 건가? 둘 다인가?"

 

"죽지도 않고, 미치지도 않았어. 그렇다기보다는, 그렇지. 죽어가고 있다는 게 맞겠다." 관에서 나온 내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답했어.

 

"잠깐...... 그럼 넌 뭐야?"

 

"나?" 녀석은 자신을 가리켜 보이더니 말했어. "글쎄, 네 무의식이라고 해둘까. 네 죄의식이기도 하고, 생에의 의지이기도 하지. 갖다 붙이자면 한도 끝도 없어. 그렇지만, 나는 결국 너야."

 

"그럼...... 내가 안 죽었다는 건? 죽어가고 있다는 건 뭐야?" 이게 임사체험인가 뭔가 하는 그건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조금은 희망적으로 물었어.

 

"말 그대로지. 하지만 결정은 네가 해." 녀석은 나를 가리키며 대답했어. 죄인을 앞에 둔 판사처럼, 약간은 비난하는 듯한 시선으로 말이야. 이번만큼은 존심이고 뭐고 없었지. "네가 뭘 어떻게 했는지 잘 모르는 모양이야? 넌 추돌사고를 낸 적 없어. 대신 급성 알코올 중독사 직전까지 술을 퍼마셨지."

 

"내가...... 죽기 직전까지 술을 퍼먹었다고?" 그거 무섭더라. 뭐라도 하다가, 아니면 차라리 사고사이기를 바랄 지경이 되더라. 그것보다 더 추한 죽음을 맞다니 말이야. "그, 그래서 내가 관짝에 안 들어가고 여기서 얼쩡거리는 건 대체 뭐야?!"

 

나, 어쩌면 저 녀석이, 한숨지었어.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가기는 했는데, 네 친구들이 너만은 살려 보려고 기를 쓰고 간호하고 있거든. 네가 꼴통 중의 꼴통이라 이걸로는 못 죽겠다고 버티고 있는 것도 한몫하고."

 

이러면 안 되는데, 웃음이 나더라.

 

"어쨌든." 녀석이 말했어. "인정할 마음의 준비는 됐지?"

 

"뭘 인정해?" 무슨 말을 하는지 알면서도, 일단 묻기부터 했어. 녀석이 날 쳐다보는 시선도, 대충 짐작은 간다는 느낌이었지. 으르렁거리면서 고개를 홱 돌리고 대답했어. "그래! 나... 나, 나, 나 알코올 중독자다! 됐냐? 만족해?! 내가 얼마나 찐따에 병신새끼였는지 인정하는 꼬라지를 보니 속이 좀 편하냐?! 내 상상 속 장례식이라 해도 내 주변 사람들을 울리는 꼬락서니를 보니 즐거워?!" 벌떡 일어나서 녀석의 얼굴 앞에 내 상판을 들이대고 소리쳤어. 얼굴에 침이 튀는데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더군. "트와일라잇이 죽기 전에 내가 마지막으로 씨부린 말이 너 좆같다는 소리인 걸 다시 상기하게 되서 좋냐?!"

 

울음이 나서, 고개를 돌렸어. "그래, 내가 병신이었어! 그래도 술에 기대던 건 어쩔 수 없었어, 알아?! 그러면...... 조금은 받아들이기 쉬워져서......"

 

"그럴 가치는 있었고?" 녀석이 물었어.

 

"...아니... 그래도...... 그런 죄책감을 갖고 어떻게 살아?" 그렇게 되물었어. "트와일라잇은 죽고 나는 살아 있는 하루하루마다, 눈앞에 어른거리고 귓가에 들려오는 건 다 그 날 내가 등신같이 성질 부리던 것뿐이었어. 세상을 구하거나, 같이 책을 읽거나, 같이 날아다니던 즐거운 기억들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고. 그저... 그저 트와일라잇이 맞는 말을 한다는 이유로 그따위 망발을 지껄인 내 밑바닥밖에 보이지 않아. 그러니까, 이 꼴을 좀 봐! 걔 말이 맞잖아!"

 

내 자매와도 같았던 그 친구, 수많은 일들을 함께 겪으며 서로 의지했던 나의 친구에게 마지막에는 침을 뱉고 말았다는 생각에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어. "그냥... 미안하다고 하고 싶어... 그거면 돼..."

 

놀랍게도, 내 판박이는 나에게 걸어와 뺨에 얼굴을 가만히 비벼주더군. 기분 참 이상하다는 생각도, 다 꺼지라는 생각도 안 들었어. 누군가가 내 옆에 있어 주기를...... 정말로 바랐던 것 같아. 그게 나 자신이더라도 말이야.

 

"난 끝이야......" 절로 입 밖으로 말이 나가더군.

 

"...... 다 놓아 버리고 싶어?" 내 판박이가 물었어. 고개를 들어 녀석을 쳐다보자 녀석은 관짝을 가리켜 보였지. "바로 저기에...... 네 고통을 끝내 줄 기회가 있어. 그런 죄책감을 갖고 살아갈 자신이 정말로 없다면, 남은 평생을 그 고통을 안고 살아갈 자신이 없다면...... 저 안으로 들어가. 그러면 편안해질 거야."

 

관을 쳐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천천히 다가갔어. 다 끝낼 수 있는 길이 여기 있었으니까. 다 잊을 수 있는 길이, 술을 더 먹지 않아도 되는 길이, 더는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는 길이 말이지......

 

갑자기 등이 싸해져서 천천히 몸을 돌려 물었어. "지금이...... 선택의 순간이지, 맞지? 죽을 것인지, 살 것인지 선택하는 거 맞지?"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어. "도저히 다른 길을 찾지 못하겠다 싶다면, 그리고 마음의 준비도 됐다면 그 관 안으로 들어가 눕도록 해. 그러면 내가 관 뚜껑을 닫고 장사를 지내 주지. 그러면 너도 안식을 얻을 거야. 트와일라잇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고."

 

"트와일라잇......" 관에 가까이 다가가며 중얼거렸어. 녀석을 다시 볼 수 있어. 녀석에게 사과할 수 있어. 관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추자 관 안이 눈에 들어왔어. 안에 놓인 베개도 그렇고, 정말 편안해 보이더군. 안에 들어가 눕기만 하면, 이 서러움과 고통은 영영 잊고 즐겁고 편안한 기나긴 잠에 빠질 수 있다 이거지. "이걸로 끝낼 수 있다면......"

 

그 다음 순간, 거기서 나가는 문이 눈에 들어왔어. 그 밖에는 현실이 있었지. 고통과 역경이 기다리는 바로 그 현실이. 트와일라잇이 죽고 없는 그 현실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현실이 있었어. 내 친구들, 내 가족, 스쿠틀루, 스핏파이어. 내가 밀어낸 사람들이 내가 다시 일어나기를 기다리며 기도하는 현실이 말이야. 하지만 나는 그들과 함께할 자격이 없었어. 나 같은 주정뱅이 병신일랑 기억에서 싹 씻어 버리고 새로 출발하는 게 나을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지.

 

그렇더라도, 그 사람들은 그럴 수 없었을 거야. 내가 본 장례식을 다시 생각하면, 그 사람들은 내가 죽고 나서 한없는 울음과 고통에 다시 시달려야 할 테니 말이야. 내가 여기서 포기하고 모든 걸 끝내면 분명 그렇게 되고 말겠지. 그 사람들이 두 번째 비극을 감당할 수 있을까? 트와일라잇을 잃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여기서 내가 죽어 버리면 나는 대체 뭐가 되는 거지?

 

여기서 포기한다면, 충의의 원소라는 건 대체 무슨 개 뼈다귀 같은 소리가 되겠지?

 

나는 눈을 감고...... 관짝을 걷어차 버렸어. 그리고는 관짝이었던 조각들을 밟고 몸을 돌려 문으로 향해 당당하게 걷기 시작했지. 아직은 안 죽어. 아직은 아니야. 이렇게는 안 죽어. 트와일라잇을 다시 보고 싶고, 다시 만나 내 망발을 사과하고 싶은 건 사실이야. 하지만 내가 죽고 나서 사람들이 어떻게 될지 암시하는 꼬락서니를 보고 있자니, 아직은 내가 죽어서는 안 되겠더라고. 죽음은 내 궁둥이에 입이나 맞추라지.

 

내가 내 판박이를 지나쳐 갈 때, 녀석은 자랑스러운 듯 웃고 있었어. "진심이야? 돌아가면 평생 그 고통을 껴안고 살아가야 하는데."

 

나는 걸음을 멈추고 되물었어. "내 친구들. 아직 날 기다리고 있지?"

 

"바로 네 곁에 모여 있지. 네가 깨어나기를 기다리면서." 녀석이 대답했어.

 

푹 한숨을 쉬고 대답했어. "그러면 나 혼자 그 고통을 떠안진 않아도 되겠군."

 

그리고 아무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나갔어. 따뜻한 빛이 나를 감싸는 게 느껴졌고......

 


 

 

...처음으로 들린 소리는 심전도계가 삑삑대는 소리였어. 무언가에 흠씬 얻어터진 내 창자를 주워다가 불 위에 올려놓기라도 한 듯한 고통이 느껴졌는데, 어느 정도는 안심이 되더라. 어쨌든 살아 있으니까. 아직 살아 있으니까.

 

"보세요! 정신이 들어요!"

 

천천히 눈을 열어 뜨자, 내 곁에 늘어선 사람들이 보였어. 날 기다리던 사람들이. 내 친구들, 부모님, 스쿠틀루와 그 패거리들이. 하나같이 눈물이 그렁그렁해 가지고는, 나까지 즙을 짜게 하더라고. 이번만큼은 자존심이고 뭐고 인정하겠다고 마음을 다잡고, 힘없는 소리나마 입을 열어 말했어. "고민거리가...... 있어...... 좀 도와 주라."

 


 

충의로운 야심가는 구원을 향한 기로에 올라섰다.

 

오랜 시간과, 수많은 시험과, 한없는 울음이 뒤따랐다.

 

다시 일어선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꿈을 향해 날아올랐고

 

평생 숙원으로 삼던 그 자랑스러운 제복을 마침내 몸에 걸쳤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술에는 입을 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