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는 필요없다. 내 일은 너를 피안으로 인도하는 것 하나뿐이다.
.무슨 그런 말씀을. 자, 동전 가져가세요.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원래 이래야 하는 거잖아요?.
.여자의 우아해 보이는 얼굴에서 시선을 떼어 떨어뜨리자, 발굽에 쥐여진 동전이 눈에 들어왔다. 반짝반짝하게 잘 닦인 동전이었다.
.나는 차가운 한숨과 함께 동전을 받아 로브 아래 주머니에 집어넣고, 노를 저어 배를 밀어냈다.
. 망자는 카론에게 대가를 주고, 저승의 뱃사공은 죽은 자를 사자의 강 저편으로 인도한다고 하니까요.
.여자는 횡설수설하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두 벽안은 고요한 수면 위를 차분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조금은 지나칠 정도로, 차분하게.
.죽은 자들이 강을 건너 도착한 곳은 저승의 샘, 거기 발을 들인 자 영겁의 파동과 하나될지니. 흠...... 대충 짐작하시겠지만 트와일라잇 여왕이 연구 끝에 알아낸 것들을 좀 알려 줬어요. 지식을 나누는 데 조금의 주저함도 없는 분이라, 우리처럼 미천한 필멸자들에게도 기꺼이 지식을 나누시죠. 심지어 우리를 스스럼없이 친구라 칭하실 정도로 친절하시고 유쾌하신 면모도 있답니다.
.나는 차분히 숨을 내쉬며 노를 저었다.
.네 말은 여왕이 자애롭고 선량한 지도자라는 뜻이군.
.그뿐이겠어요. 임종을 지켜주시기도 하신답니다. 제가 죽을 때도 곁에 계셨지요. 허락된 마지막 시간이 끝나는 순간, 병상 옆에 애플잭과 그 일가족을 데리고 함께 자리해 주셨으니까요. 아, 차라리 그 반대였다면. 차라리 내가 그 사람들의 임종을 지키는 입장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슬프게도, 그럴 수는 없었어요. 트와일라잇 여왕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아요. 사람의 생애는 대체로 비슷하니, 그 모습을 몇백 번이고 반복한 여왕께서 얼마나 강인한 심성을 갖게 되셨겠어요. 그렇더라도 그 무게를 감당하기란 쉽지 않겠지요. 저처럼 죽어 없어진 사람들은, 여왕께서 밀려드는 폭풍을 홀로 감당하실 때 그 곁에 가 서 있을 수 없을 것이고요.
.결국, 이렇게 되었군.
.평정을 잃었어.
.여자는 백설처럼 흰 입가를 발굽으로 가리고, 무한한 어둠 속으로 희미한 흐느낌 소리를 떨어뜨렸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노 젓는 속도를 늦추고 있었으나, 여자는 지각하지 못했다.
.지금껏 강을 건네다 주면서 배를 더 빨리 몰았으면 몰았지, 일부러 늦추게 될 일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했는데.
.여자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울음이 멈출 즈음에, 어둠 속으로 빛나는 숨결이 뿜어져 나왔다.
.전 여왕을 위해 곡할 수는 없어요. 적어도 우리보다는 본인의 최후를 준비할 시간이 길 테니까. 애플잭도 마찬가지에요. 뭐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저 같은 사람도 순식간에 납득이 가는 걸 보니 남겨진 사람들도 마찬가지긴 하겠군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게냐?.
.농담도 잘하셔라. 제가 주절거리는 게 그쪽한테 그렇게 중요할 것 같진 않은데요.
.나에게 소용이 없을 수는 있겠지. 그렇다고 네게 소용없는 것이 되지는 않을 것 같다만.
.여자는 코앞에 달랑거리는 등잔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아무 말 없이 생각하다가 불쑥 말했다.
.한평생을 들여 쫓아다닌 꿈이 두 가지가 있었지만, 이 둘은 정반대 것들이었어요. 엄청나게 유명해지고 싶었지요. 그런 주제에 내 곁의 사람들에게 무엇이든 베푸는 사람이 되고 싶어했어요. 친구들이 보기에도 저라는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그 이중성 하나로 명확히 설명되었죠. 일이 년씩 지나다 보니 어느새 수십 년이 지나갔고, 저도 어느새 그 생각을 충분히 인정하고 존중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균형이 깨져 버리고 말았어요. 그 때부터 저는 그 전까지의 제가 아니게 된 것이죠.
.어떻게 달라졌다는 것이냐?.
.나이를, 먹은 게죠. 저승 세계의 뱃사공님은 아마 이게 무슨 소린가 싶으실 거에요. 나이를 먹으면 사람이 바뀐답니다. 그 바뀜에 당사자의 감정은 전혀 중요하지 않죠. 나이를 먹다 보니 재산을 모으고 명성을 쌓는 게, 길게 보면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게 점점 또렷하게 보이더군요. 사람들 하는 말로, '죽어서 싸들고 갈래?' 라는 거죠. 죽어 보니 이만한 금언이 또 없구나 싶네요. 하지만 죽기 몇 년 전에는 그 말을 떠올리기만 하는 걸로 그냥 미쳐 버릴 것 같았어요. 그래도 지상에서의 시간이 남아 있는 동안, 나름대로 괜찮은 해결책을 찾아내기는 했다 싶기는 하군요.
.그 방책이라는 것이......?.
.제가 해 줄 수 있는 최선이란 친구들 곁을 지키는 거였지요. 애플잭네 집으로 이사해 들어갔어요. 막상 들어가 보고 보니 생각만큼 고단한 삶은 아니었지요. 저야 뭐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 농장 일도 제법 잘 거들었습니다. 늙은 몸으로 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했지요. 스미스 할머니와 함께했던 날들 덕을 많이 보았답니다. 트와일라잇 여왕께서도 캔틀롯 왕궁을 떠나 자주 거기 들르셨지요. 차와 다과를 내놓고 둘러앉아 옛 친구들끼리 오래된 추억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깔깔 웃던 것이 몇 번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군요. 제가 갖고 있던 마지막 재산도 전부 처분해서 애플잭네 아이들과 손자, 손녀들 교육에 쓰도록 했지요. 펌킨, 파운드네 애들을 위해 쓴 것은 물론이지요. 남은 돈은 옛 친구들의 무덤 주변에 정원을 가꾸는 데 썼습니다. 열사병으로 쓰러져 죽지만 않았다면 지금 이 순간에도 제 사랑하는 친구들과 옛이야기를 하고 있었겠군요.
.나는 여자의 말이 끝날 때까지 그녀를 조용히 보고 있었다.
.그러할진대, 왜 울고 싶어하는 것이냐?.
.여자의 몸이 떨렸다. 그녀는 배 끄트머리를 잡아 몸을 지탱하고 계속 말했다.
.마음의 준비는 이미 끝났다 생각하고 있었지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난 각오로, 놓아야 할 것들을 놓고 살고 있다... 싶었던 겝니다. 이제 돌아보니, 얼마나 이기적으로 살았는지밖에 보이지 않는군요.
.어떻게 살았단 말이냐?.
.저승에 오고 나면 어떤 기분이 들까, 밖에 생각하지 않았던 게지요. 내가 해 줄 수 있었던 최선의 것들이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버린다는 것은 미처 생각치 못했습니다. 벗들과 그 가족들이 생물적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해 주려고 무진 애를 쓰며 살아왔는데, 저들마저 저승에 오고 나면 그게 다 무엇이란 말입니까? 저들마저 저승에 오고 나면 제가 쌓아주고 온 부의 탑이 얼마나 더 견딜 수 있을까요? 영원한 잠에 빠져든 사람에게 제가 남긴 말들과 지혜와 유산이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네 벗들 모두 너를 아끼고 사랑할 것이다. 저들 모두 그 마음을 거느리고 편안히 망각의 품에 안겼다.
.농담도 잘하시지. 그냥 해 보시는 말씀이 아닌가요.
.나는 보았으므로 안다. 저승에 도착한 순간부터 망각의 품에 안기는 순간까지, 네 벗들은 너를 비롯해 자기들의 벗을 아끼고 사랑했다.
.여자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그 말씀은...... 벌써 실어다 주셨단 말씀이신가요?.
.고개를 끄덕였다.
.플러터샤이... 핑키 파이... 또... 다른 사람은...?.
.네 친구들 모두 너를 걱정했다. 저들의 삶에 네가 남긴 족적은 흔적이라기보다 차라리 축복이라 하는 편이 옳으리. 선물을 얼마나 주었는지, 유산을 얼마나 남겼는지는 중요치 않다. 저들이 너를 어떻게 알고 있고, 저들에게 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마땅히 알라. 네 벗들을 비롯해 네가 평생 사랑한 사람들은 네가 각자에게 베풀었던 것을 깊이 감사해했고, 그 마음 그대로 어두운 심연으로 들어서서 평화로이 잠들었느니.
.여자는 눈을 깜박였다. 눈꺼풀이 밀어낸 은색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내가 강변에 다다랐을 때부터 얼굴 곳곳에 남아 있던 세월의 빗줄기는, 이제 말 그대로 흐릿해지고 사라져가고 있었다.
.내 앞에 선 사람은 젊을 적 그대로인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 안에 차오른 온기로 여자는 풍랑 일던 마음을 잠재웠다. 그녀가 말을 꺼내자 잔물결이 일었다.
.마지막 순간에 절 생각했을지, 그러지 않았을지. 지금껏 짊어지고 살았지요. 이제 보니 최후의 순간이 아니라, 영원이었군요.
.가장 좋은 선물은...... 설마 자기도 줄 줄 몰랐던 것이거나, 받을 줄 몰랐던 것들이지.
.흐으으으으음...... .
.여자는 빙긋 웃었다.
.낡은 동전보다는 수천 배 정도 낫네요. 그렇죠?.
.그렇게 말하며 여자는 빙긋 웃어 보였다.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여자의 말에 녹아들었는지 아닌지, 나는 잘 모른다.
.우리는 그렇게 섬에 닿았다. 먼저 내려가 배에서 내리는 여자의 발굽을 잡아주었다.
.애플잭을 보시게 되거든, 친절하게 대해 주세요. 이 얘기도 해 주시고요.
.그녀는 바닥 없는 웅덩이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며 한 번, 등 뒤를 돌아보았다. 찬란한 보라색 갈기가 탐스럽게 흔들렸다.
.애플잭도, 트와일라잇도, 우리보다 먼저 떠나 버린 사랑하는 친구들도. 제가 많이 보고 싶어했다고. 또...... 제 마지막이 이러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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