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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E/.마지막 사람을 건넬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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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rgo 2020. 11. 3.

.그녀는 의외로 동전을 갖고 있었다.

 

.영겁의 세월 끝에서도 아직 무로 돌아가지 않은 세상의 원리가 있다니, 놀랄 일이다.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다만 그녀를 향해 노를 저어 갔을 뿐.

 

.여자는 놀란 듯한 표정으로 나를 기다렸다. 아직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 쓰러지는 것을 막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두 날개가 활짝 펼쳐져 있었다.

 

.그대가 카론Charon인가요?.

 

.그녀의 숨결은 오래 전에 해져 뜯어져 버린 밤의 베일을 향해 몰아치는 회오리바람과도 같았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버티고 서 있었다.

 

.소생을 아시나이까?.

 

.다른 지성체와 대화해 본 것이 벌써 셀 수도 없이 오래된 일인 것처럼, 여자는 살짝 비틀거렸다.

 

.그대가 해야 할 일은 알고 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구 떨리고 불안정했지만, 용기로 가득 차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그녀가 라벤더빛 발굽을 뻗어 동전을 건넸다.

 

.나는 동전을 흘끗 보기만 하고, 동전 대신 그녀의 다리를 잡아 끌어당겼다.

 

.여자는 아주 잠시 머뭇거리더니, 아무 망설임 없이 내 도움을 받아 배에 올랐다.

 

.나는 노를 저어 부서져 가는 강변을 떠났다. 이것이 내 마지막 운행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조금 전만 해도 우리가 서 있었던 그 강변이, 시커먼 장막 뒤에 가려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사라지는 모습은 한없이 두려웠다.

 

.내가 건네야 할 마지막 사람이 확실했다. 배에 탄 그녀 뒤에 있던 모든 존재가 무너지고 사라져갔다.

 

.세상 모든 진리를 다 보았다 싶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더니, 몸을 떨며 덧붙였다.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모습도.

 

.무너져 가는 세계를 뒤로하고, 나는 가만히 노를 저으며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여러 왕국이 세워졌지만,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지요. 수백, 수천, 수백만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묻었습니다. 심경의 횃대 너머 영겁의 잔불을 향하여 떠나는 용들의 장례를 보았습니다. 코키토스*1에 사는 바다뱀의 무덤도 제가 만들었고요.

 

.뱃머리에 매단 등잔이 느릿느릿 달랑거리며 깜박이는 불빛을 토해냈다. 셀 수 없는 여정을 끝마친 뒤에도 바래지 않던 빛이 서서히 사그라들고 있었다.

 

.이퀘스트리아가 으깨져 먼지가 되는 모습도 모았습니다. 땅에 세웠던 모든 기념비와 무덤이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해 버렸지요. 해와 달과 별마저도 사라져 방향조차 잡을 수 없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황무지를 떠돌며 묘지기 노릇을 했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대기를 쥐어짜 마지막 노래를 부르고, 얼어붙은 우주에 그나마 남아 있던 빛을 긁어모아 마지막 불꽃을 피웠어요.

 

.그녀가 마침내 나를 쳐다보았다. 젖은 두 눈을 보는 순간, 가슴 속에서 무엇인가 울컥하는 마음이 솟구쳤다.

 

.그 이상으로 현실적인 순간은 없었다. 그녀 또한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그녀의 다음 말이 그렇게 조각조각, 부서져서 나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태껏 그대가 강변을 지키고 있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설마 이 긴 세월이 지났는데도, 수도 없는 자들이 이제 아무도 남지 않았는데도. 지금껏 저를 기다린 이유가 무엇인가요.

 

.모든 실존이 그대와 운명을 같이하는 것처럼, 소생 또한 마쳐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다릅니다. 그 누구도 내게 당신의 역할을 이어받겠다고 나서지 않았어요. 당신은 어땠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것만으로 되어질 말은 다 되어진 것이니.

 

.그녀는 우리 둘 모두의 말을 포괄해서 말하고 있었다.

 

.그래, 그럴 수밖에 없을 테지?.

 

.저는 지상에 살았던 그 누구보다도 많은 지식을 갖고 살았습니다. 사후 세계에 관해서도 알고 있지요. 저처럼 영원불멸한다는 알리콘조차 품어 영면케 하는 심연이 있는 것도 알고 있답니다. 제가 출생한 때, 그러니까 고전 시대부터 알고 있었지요. 너무나 오래된 일이라, 그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기만 해도 마음이 괴롭습니다. 헌데, 제가 아는 것과는 많이 다르군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소생은 잘 모르겠습니다.

 

.카론은 남자라고 알고 있는데요.

 

.그녀는 나를 똑바로 쏘아보며 말했다.

 

.적어도 카론은 남자일 수밖에 없거든요. 헌데 그대는 다르잖아요? 목소리부터 다르지요. 고문에 적힌 예언과는 정반대에요. 수백 세기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기는 했지만, 제 기억력은 아주 사소한 것 하나조차 잘 잊지 않아요.

 

.그러하시다면, 수많은 것들 중 하나 정도는 잊어버리실 수도 있겠군요.

 

.그렇지 않아요. 따라서 현재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제가 오래 전에 세운 가설, 즉 저승의 뱃사공 역할은 자원자를 통해 승계된다는 가정이 성립하는 경우겠죠. 언제 나타날지 모를 후임자를 태우기 전까지, 끝없는 세월 동안 검은 물 위로 죽은 자들을 건네 줄 수 있을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만 자신의 역할을 한다면, 카론이 남자가 아닌 게 설명되지요.

 

.그렇게 우리 둘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녀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공허를 칼처럼 베어냈다.

 

.두건을 벗으세요.

 

.제 맨얼굴을 보시어 무엇을 얻으시려 하나이까?.

 

.지난 영겁의 세월 동안 나를 괴롭혀 온 두려움을 덜어내려 합니다. 그러니 그대의 여왕으로 명하겠습니다. 카론, 그대의 두건을 벗으세요. 그대의 얼굴을 보고자 합니다. 누가 제 백성들과 제 가족, 제 벗들을 영원한 안식으로 인도하였는지 보고 싶습니다.

 

.거부할 명분은 없었다. 모든 것이 공허로 돌아가는 마당에, 세상에 남은 사람이라곤 우리 둘뿐이었으니.

 

.그랬으므로, 나는 명을 받들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처음으로, 두건에 이어 망토, 온몸에 뒤집어쓴 로브까지 벗어 내려놓았다.

 

.옷을 벗어 내려놓음과 동시에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눈물에 무언가의 색이 비쳤다.

 

.눈물에 어른거리는 색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였구나.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왠지 네가 하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다들 너인 줄은 알고 있었어?.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알 필요 없으니까. 마지막 가는 길에 그 어떤 번민도, 두려움도 없이 가는 게 중요하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잖냐. 걔들이 싸울 필요도 없었고.

 

.그것도 네가 싸워서 그런 거잖아. 네가 우리 대신 싸워주어서.

 

.그녀는 웃으면서 우느라 어깨를 들썩거리고 있었다.

 

.강 위를 떠가는 배가 힘차게 흔들렸다. 이제 강마저 말라 가고 있었다.

 

.그래도 끝까지 남아 있었을 필요는 없었잖아. 친구들을 기다려 준 건 너무 고맙고 감사하지만. 나까지 기다려 줄 필요는 없었어.

 

.아니, 그럴 필요가 있었지.

 

.나는 피식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억겁의 세월 동안 굶주려 온 그것이었다.

 

.트와일라잇. 내 일은 마지막 한 사람까지 강을 건네주기 전에는 끝나지 않아.

 

.그녀가 나를 쳐다보았다. 그 눈빛이 내 영혼을 쓰다듬는 깃털과 같아서, 다시 하늘을 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누가 너처럼 진실하고 의리있었을까!.

 

.그녀의 말이 눈물과 함께 잦아들었다.

 

.배가 섬에 닿았다. 모든 것이 뒤흔들리기 시작했지만 우리는 놀라지 않았다. 우리 모두, 이 순간을 준비해 오고 있었으니.

 

.트와일라잇이 내 어깨를 잡았다.

 

.오직 어둠만이 가득한 세월을... 그 끝없는 밤을 내가 어떻게 견뎠는지... 상상도 못 할 거야. 모든 물질이 부스러진 후에야 나도 안식에 들 수 있었어. 그 동안... 친구 중 하나라도... 딱 한 명이라도... 내 가슴 속에 응어리진 슬픔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남아 있기를 기도했는데.......

 

.트와일라잇이 숨을 고르며 나를 바라보았다. 두 눈에서 생명이 흐르듯 눈물이 흘렀다.

 

.우리 둘의 숨결이 하나로 엉기며, 최후의 불빛을 일으켜 한 줄기 섬광이 번득였다.

 

.내 사랑하는 친구. 너희 한 명 한 명이 내겐 하염없이 고맙고, 사랑하는 친구들이었어. 다름아닌 네가 저승을 지키고 있어서 다행이야. 죽어가는 지옥의 흑염 속에서도 홀로 버틴 촛불이 되어 줘서 고마워. 네게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아서, 또 네가 내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다시 깨달아서, 다시 홀로 고문 같은 세월을 견디게 되더라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을 것 같아. 내 인생 최고의 선물이었어. 고마워.

 

.나는 웃었다.

 

.나는 가만히 다가가 흐느끼는 트와일라잇을 품에 안고, 두 날개 사이의 등을 가만히 두드려 주며 두 눈을 마주보고 말했다.

 

.내 친구들이 평화로이 안식에 든 것을 아는 것만으로 족해.

 

.그녀는 다만 흐느낄 뿐이었다.

 

.음악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때껏 잊고 있었다. 그녀의 노래는 그 어떤 것보다도 아름다웠다.

 

.우리는 오래 부둥켜안고 있지 않았다. 영겁의 심연이 그 순간의 슬픔마저도 빨아들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떨어졌다. 트와일라잇은 아직도 강 건너편 망자의 세상을 지켜봐야 할 의무가 남아 있는 듯 심연을 향하여 뒷걸음질로 걸었다. 

 

.기다리고 있을게.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섬이 트와일라잇의 등 뒤로 쪼그라들어 일어서며 검은 광배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심연의 잔잔한 수면이 트와일라잇의 사지를 조용히 받아들였다.

 

.무슨 수를 써서든, 기다리고 있을게. 바닥 없는 잠이 다한 끝에 다시 생명의 불씨가 피어오를 때까지, 기다릴게.

 

....여왕이시여, 이제 눈 감으소서.

 

.트와일라잇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흔적도 없었다.

 

 

 

미주

 

*1 코키토스, Cocytus. 그리스 신화의 비통의 강인 아케론의 한 지류. 그 뜻은 '탄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