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공지인 듯 공지 아닌 공지인 글들

살아는 있습니다.

by Mergo 2024. 10. 3.

그간 기체후일향만강하셨습니까.

 

대충 때가 되었다 싶으면 필명이나 닉네임을 갈아 가며 꼬리를 잘라대던 것이 저의 습성이나, 현실의 이름으로 살면서는 이름을 바꾸면서 살 수가 없어 차선책으로 꼬투리를 잡히지 않거나, 잡히더라도 잘라내고 달아날 수 있도록 살아야 함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제 오만한 성정은 스스로 잘 알고 있으므로, 누군가 제 꼬투리를 잡아 갈구고 족치는 상황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했습니다. 결국, 제 의사와는 무관하게 열심히 살아야만 했습니다. 제기랄. 그리하여 슬슬 인터넷 세상의 이름을 잊어버렸을 즈음, 문득 MLP : FiM 팬픽숀을 번역하던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왜 그 시절이 떠오른 것일까요. 그걸 해서 제가 큰 돈을 손에 쥔 것도 아니고, 대단한 명예를 얻은 것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고것은 제 대학 시절을 함께한 콘텐츠가 이제 생애주기를 다해 관짝에 들어가 하관을 앞두고 있었던 때, 부장품이라도 하나 넣어 그 시절과, 그 시절을 보낸 저와, 그 시절이 어땠는지는 알아도 그 시절을 경험할 수는 없었던 분들과, 오래 전에 인터넷 세상에 던져 놓은 약속을 아직도 믿고 계셨을(분은 없었으리라 믿지만) 분들께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어야겠다고 생각하고 2년 동안 제 거의 대부분의 여가 시간을 투입해 여러 차례 문장을 고쳐 가며 옮기던 때와 지금의 삶이 비슷하지 않나 싶어서였습니다.

 

잠수 탔던 애가 갑자기 톡 튀어나와 이상한 말을 주워섬기고 있으니, '얘 또 뭐래?' 싶으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정확하고 간결하게 재단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녁 시간의 여유를 새벽으로 이연시켜서 공부하는 삶을 즐기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이 자식이 뭐라고 하는 거지?' 하고 우주적 공포를 느끼실 수도 있겠습니다. 직장인이 저녁에 안 놀고 일찍 자서 새벽에 공부를 한다니! 그다지 보편적이지는 않은 말입니다. 어느 면에서는, 이 자식 또 거짓말하네? 싶으실 수도 있겠군요. 안타깝게도 사실입니다.

 

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또 정신 나간 짓을 하는 것일까요? 저도 잘 모릅니다. BgP를 번역하면서 제게 어떤 영달이 주어진 적이 없었는데, 이 또한 같습니다. 차이라면 BgP는 부장품을 만드는 과정이라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 뻣뻣한 느낌이었고, 제 새벽 공부는 그냥 재미로 하는 거라 흐느적거린다는 것 정도가 있겠군요.

 

아무튼, 지금은 그렇습니다. 언젠가 과거의 죄를 속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 Past Sins로 돌아오겠습니다. 기약은 없습니다.

 

그 날이 있기야 한다면, 그 날까지 건승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