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에게.
우리는 언제 자기가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자각할까? 주어진 시간 내내 밥벌이만 하다가 소중한 것을 눈앞에서 잃어버릴 때일까? 아니면 기껏 무언가를 손에 넣었더니 다른 사람이 홀랑 집어갈 때일까? 자기가 해 온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을 때 느낄 좌절감과 고통은 그때까지 해 왔던 일들과, 거기 갖는 자부심의 무게와 똑같을까?
어쩌면 그게 아니라 우리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인지 정의하는 본질적인 무언가는 결국 상실될 수밖에 없는 것일지도 모르지. 그렇게 살아가면서 원래 자신이었던 부분들을 조금씩 잃어 가면, 어느 순간 뒤로 물러나 자기 자신을 새로 정의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남아 있지 않을 거야. 그 날이 오면 자기 자신이 가장 중시하는 가치들이 자신을 구성하는 근간이었다면 어떠했을지, 다만 생각밖에 할 수 없겠지.
저주가 시작된 그 순간에 나는 내 모든 것을 상실했다고 생각해.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르겠어. 상실보다도 더 받아들이기 힘든 게 하나 있는데, 그게 상실의 진정한 본질이 아닐까 싶어지더라고.
모든 것은 죽기 마련이야. 이 문제에 있어서는 나도 동의해. 의심의 여지 없이 말이야. 하지만 지금까지도 그걸 의심의 여지 없이 받아들이게 한 건 아무것도 없었어. 저주를 짊어졌든지 그렇지 않든지, 그 어떤 것도 내 삶 속으로 걸어 들어오지 않았어. 오직 무언가의 한 부분이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보여주는 진실의 차갑고 냉랭한 빛 아래 무너져 떨어져 나가는 모습만을 지켜봐 왔을 뿐.
사실, 삶에서 가장 좋은 것들이란 몸이 살아 있는 동안 계속해서 무너져 내리는 것이기 마련이지. 영원히 사람들 사이에 남아 있을 간극을 간단한 노래 한 가락으로 메울 수 있을까? 아니면 우리 중 누구라도 복받은 사람이 죽음조차 자리에서 머뭇거릴 만한 새롭고 장래성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내 그 간극을 채울 수 있을까?
"마법을 배우고 싶으셔서 오셨다니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하트스트링스 씨."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말했다. 내 주변을 가만히 돌아 나가는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스쳤다. 그녀의 말과, 내 머리 위에 발생시킨 에너지장 모두에 정신을 집중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나는 내가 가능한 한 양쪽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 주문은 숙달하려면 아주 섬세한 정신 집중이 필요하죠. 독학으로 익힌다고 그리 쉽게 되는 게 아니에요."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 이제... 알겠네요..." 나는 겨우 말했다.
트와일라잇이 까르르 웃었다. 정신이 산란해질 법도 했지만, 오히려 가슴이 뛰었다. "너무 긴장하셨어요." 그녀가 말했다. "이건 염동력과는 다른 방향으로 접근해야 해요. 보호 마법은 본질적으로 몸이 버텨내기 어려운 것을 대신 받아내 주는 에너지장을 불러내는 거에요. 힘을 전부 쏟아부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긴장을 풀어야 해요."
"긴장을 풀어요?" 네 다리가 후들거렸다. 나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어떻게요?"
"글쎄, 일단 꽉 감은 눈을 뜨는 것부터 시작할까요."
나는 심호흡을 하고, 조심스럽게 두 눈꺼풀을 밀어올렸다. 흐릿하게 보이던 도서관 내부가 서서히 선명해졌고, 그 가운데에는 트와일라잇의 웃는 얼굴이 있었다.
"좋아요. 훨씬 낫죠?" 내 소꿉친구이기도 했던 사람이 내 앞으로 다가서며 나긋하게 물었다. "혼자 긴장해서 스트레스 받을 필요는 전혀 없어요. 필요한 마력장 채널은 전부 개방되었으니 숨을 찬찬히 들이마시면서 뿔의 긴장을 푸세요."
나는 침을 삼키며 달달 떨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스파클 양."
"아하하하... 트와일라잇이라고만 부르세요."
"그럴까요, 트와일라잇..." 나는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민트그린 색 빛이 이마 바로 앞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어서, 두 눈이 움찔했다. 긴장하지 말라고 했지만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 적성은 음악이었다. 마력을 다루는 일이 내 장기도 아니었지만, 트와일라잇의 집 한가운데인 것도 모자라 그녀 앞에서 하급 방어 마법을 실습하고 있다면 어떻겠는가.
좋든 싫든 저주가 내 삶의 전환점이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저주를 받기 전에라면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던 마법들을 능수능란하게 써야만 하는 신세가 되었으니까. 포니빌에 오기 전, 내가 뿔을 가지고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고 해야 집 안에 굴러다니는 조그마한 잡동사니들을 띄우거나 리라를 퉁기는 것 정도밖에 없었다. 포니빌에서 몇 달을 지내다 보니 통나무를 운반해 오두막을 집고, 밤에는 불을 밝혀야 하니 빛 마법을 자유자재로 쓰며, 땔감에 불을 피워 난로를 덥히는 경지에 다다랐다. 마법이 담긴 악곡들을 연주하다 보니, 내가 살던 세상은 천지가 개벽해서 하늘이 아래로 가고 땅이 위로 간 형상이 되고 만 것이다.
단순히 마법을 가르쳐 줄 사람을 구해야 했다는 말로 내 궁박을 표현하기에는 모자라다. 트와일라잇에게서 항아비곡의 정체를 탐문하는 것 이상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니 우스운 일이다. 글쎄, 내가 트와일라잇에게 이방인이든 아니든 괜히 쓸데없는 일로 귀찮게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은 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나는 나의 소꿉친구와 함께 신발 멀리 날리기 놀이를 하면서 놀지 않았던가. 트와일라잇은 이제 내가 캔틀롯 거리를 쏘다니며 같이 놀러 다니던 어린애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제 어른이 되었을 뿐더러, 포니빌 어디를 찾아봐도 그보다 뛰어난 마법사는 없었다. 그러니 불쑥불쑥 나타나 즉흥곡인지 무엇인지를 연주하며 이게 뭐냐고 묻는 걸 대답하는 것 외에도 새로운 재주를 익히고 싶어하는 이방인을 좀 돕는 것쯤이야 트와일라잇에게는 식은 죽 먹기였다는 것이다. 그때껏 트와일라잇의 적성 말고도, 얘가 얼마나 마음 따뜻하고 친절한 녀석이었는지 망각하고 너무 평가절하한 게 아닌가 싶어 기분이 별로 좋지는 않았다.
"잘 되고 있는지 어떤지 모르겠네요." 나는 진땀을 흘리며 웅얼거리듯 말했다. "좀 봐 주실래요?"
트와일라잇은 빙긋 웃으며 내 뿔 위를 가만히 가리켜 보이고 말했다. "직접 보실까요."
나는 침을 삼키며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에메랄드빛 에너지가 얇은 피막 같은 것을 이루며 흡사 마법 양탄자처럼 공중에 떠 있었다. 내 몸 위로 순수한 빛의 돔이 지어져 있는 듯했다. 심장이 쿵쿵 뛸 때마다 빛나는 표면 위로 마력이 힘차게 흐르며 약동했다.
"허어..." 나는 겨우 말했다. "뭐, 별로 귀엽진 않네요."
"좋아요, 정말 잘 유지하고 있어요!" 트와일라잇은 큰 소리로 말하더니 내 주변을 빙 돌며 투명한 빛의 돔을 살펴보았다. "그렇죠, 말씀드린 대로 긴장을 잘 풀고 계세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장난스러운 눈길로 말했다. "정말로 이번이 처음인 거 맞아요?"
나는 트와일라잇을 마주보며 씩 웃었다. 너무 집중한 탓에 다리가 아직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정말이라니까요, 트와일라잇. 한꺼번에 이 정도 배울 수 있을 줄 알았으면 진즉에 도서관에 올 걸 그랬어요."
사실, 나는 이번 주 동안 세 번 트와일라잇에게 강습을 받았다. 발단은 여덟 번째 비곡이었다. 나는 여덟 번째 비곡의 다음 열다섯 마디를 익혔다. 그러나 '밤의 만장' 때문에 의식을 잃거나 다른 장소로 순간이동하게 되면 여덟 번째 비곡을 연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루나 공주님이 지으신, 지금은 잊힌 연주곡을 완전히 연주하기 위해서는 각 항아비곡이 초래하는 온갖 이상한 부작용에 대항할 수 있도록 나 자신을 보호하는 마법들에 숙달하는 것이 방책, 방책이라고나 해둬야 할 그 무언가였다.
"좀 더 자주 오셨으면 좋겠네요."
나는 트와일라잇의 말을 듣고 적잖이 당황했다. 깜짝 놀라 시선을 홱 하고 돌리는 통에 집중이 흐트러질 뻔했다. "네...?"
"아, 이게 무슨 뜻이냐면..." 트와일라잇은 눈을 굴리더니 보다 정확한 표현으로 다시 일러주었다. "유니콘들이 도서관에 좀 더 자주 왔으면 좋겠다, 하고 전부터 생각했거든요. 마법 운용의 폭을 넓혀 드릴 수 있게요. 캔틀롯에서 왕립 영재 유니콘 학교에 다닐 때도 조교로 일하면서 학생들을 지도했지요. 각자가 타고난 능력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낸 사람들의 표정을 눈앞에서 지켜보는 것만큼 값진 일은 없었어요. 포니빌에 있는 동안에는 지금까지 과학 실험이나 역사서 탐구를 하느라 바쁘기도 했지만, 예전처럼 다른 사람에게 마법을 가르칠 기회 자체도 없었죠."
"아, 그렇다면야... 기꺼이... 좀 더 자주 와야겠네요." 나는 겨우 말했다. 뿔 끝에 날카로운 통증이 엄습하는 순간 무릎이 마구 후들거렸다. "아아악!"
"쉬이이잇... 진정하시고..." 트와일라잇이 한달음에 달려와 바짝 붙어서서 말했다. "들이마시고, 내쉬고. 마력장에서 마나 피드백이 일어나서 그런 거에요. 금방 괜찮아질 테니, 방어 마법에만 집중하세요. 그러면 계속 유지되니까요."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몇 차례 밀려드는 고통을 견디고, 마침내 안도감이 찾아들자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휴우...... 근육 쓰는 거랑 거의 다를 것 없네요?" 나는 다시 침을 삼키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보이지 않는 근육, 뭐 그런 거...?"
"많이 연습할수록 솜씨도 좋아질 거에요, 제가 장담하죠." 트와일라잇이 말했다. "어지간한 수련 마법사들보다 훨씬 잘하시는데요. 이런 말씀 드려도 되나 모르겠지만, 마력장 운용에 재능이 있으신 것 같아요."
나는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늘어선 서책의 바다를 쏘아보았다. 나는 내 오두막집의 지하실과, 그곳의 흙벽을 생각했다. 귓가에 여덟 번째 비가의 25번째 마디가 들려왔다. 나는 한기를 느꼈다. 나는 말하는 동안에는 떨지 않으려 추위에 저항했다. "글쎄요, 이제 와서 새로운 걸 익히기에는 너무 늦은 게 아닌가 싶기는 한데......"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자연적으로 얻은 것이든, 초자연적으로 얻은 능력이든 말이죠."
"오래 전에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 해 주신 이야기 중에 이런 게 있었어요. 현세visible world와 영계invisible world는 필연적으로 균형을 이룰 수밖에 없다는 건데요." 트와일라잇이 말했다. "마법의 영역은 물리력의 영역에 거울상처럼 대응해요. 이 둘은 같은 이미지를 비추는 관계지요. 우주의 빛은 각 영역을 균등히 비추고요. 뭐 사실 마법이라는 것은 등가교환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해요. 지금 우리 둘 다 여기 이렇게 육신의 형태를 빌어 여기 있는 것은, 우리 모두 마나와 에너지를 이용해 우리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요. 유니콘에게 있어 각자 타고난 마법의 재능을 찾았는지 못 찾았는지는 별로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이죠. 중요한 건 언제 찾아내느냐의 문제에요."
"그러고 보니 트와일라잇 씨는 언제 본인과 마법 세계와의 접점을 찾았나요?" 이미 답은 알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물었다. "그 때 큐티마크도 얻은 건가요?"
트와일라잇은 아득한 생각에 잠겨 차분하게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오래 전에 제 뿔에서 불꽃이 튀었지요. 그 때 제가 어디 적성이 있는지 알 수 있었어요. 하지만 그 때 마법 영역과 연결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다시 몇 년이 지나서 포니빌로 온 다음에 또 다른 불꽃을 찾아냈지요. 평생 동안 마법을 수련하고 연구해 왔지만, 저에게는 여기에서 지낸 삶이 그 전의 평생보다 더 소중해요. 하스트스링스 씨도 아시겠지만, 마법 세계와의 연결이라고 해 봐야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 맺을 수 있는 인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새로 인연을 맺고 지켜 나가는 일은 마법 세계와의 연결을 유지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지만, 그 이상으로 가치있는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나는 몇 번 심호흡했다. 나는 그때서야 조금씩 진정하고 있었다. 적어도 트와일라잇이 원하는 정도까지는 긴장을 낮춘 상태임은 분명했다. "트와일라잇 씨한테 어려운 일이 대체 뭐가 있을까 싶군요. 뭐든 다 간단하게 해치우는 거 아니에요?"
"아하하하... 뭐, 시도 정도는 해 보죠. 그래도 그쪽이나 다른 유니콘들이 저마다의 성취를 이루는 걸 보는 게 훨씬 좋아요. 그것 때문에 치어릴리와 함께 새로 프로젝트를 하나 계획하고 있죠."
"그래요? 어떤 건가요?"
트와일라잇이 입을 떼기도 전에, 낯익은 보라색 형체가 뒤뚱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어으으으... 여기, 물 한 바가지 떠 왔어." 스파이크가 비늘 돋은 두 팔로 나무 양동이의 무게를 겨우 견디며 툴툴댔다. "애초에 왜 우물까지 가서 물 떠 오는 헛짓거릴 해야 하는지 설명이나 좀 해 주지 그래?"
"스파이크? 십 분 전에 내가 분명 얘기해 주지 않았어?!" 트와일라잇이 얼굴을 찌푸리며 도서관 한쪽 벽에 기대선 사다리를 가리키고 말했다. "하트스트링스 씨랑 방어 마법 실습하는 데 필요하다고 말했잖아!"
"누구 씨라고?" 스파이크는 붙잡고 있던 양동이가 기뢰라도 되는 양 흘끗 보며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어이 거기, 잘생긴 친구." 나는 윙크를 덧붙이려고 애쓰며 말했다.
"오! 어, 안녕. 후드 멋있네!"
"으..." 트와일라잇이 보라색 눈을 굴렸다. 그녀는 뿔을 밝혀 멀리 있던 사다리를 끌어당겨 내 바로 옆으로 가져다 놓았다. "이게 무슨 일인지. 내가 너 주는 밥에 뭔가 문제가 있나 보다. 갈수록 귀가 먹어 가는 것 같단 말이야."
"고지방 다이아몬드 안 먹었어! 진짜!"
"그건 걱정 마, 스파이크. 사다리나 타고 올라가서 내 신호를 기다려."
꼬마는 슬슬 쑤셔 오는 한쪽 팔로 양동이를 꽉 붙들고 사다리를 올랐다. "영문을 모르겠네. 이게 대체 뭔 짓이래? 그냥 레인보우 대쉬가 누구 하나 골라잡아서 장난질 칠 때까지 따라다녀도 되지 않아?"
"스파이크, 이거 캔틀롯에 있을 때도 많이 했었잖아. 기억 안 나? 방어 마법 연습할 때 이렇게 익혔는데."
"그래, 뭐 그땐 적어도 공주님께서 이 쓸데없는 양동일 대신 띄워 주시기라도 했지."
"공주님이 직접 마법을 써 주시는 사치를 누리지 않고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아니야?"
"말은 쉽지, 이 뿔머리야."
"너 그거 무슨 뜻이야?"
"어... 아, 아무것도 아냐!" 스파이크가 물양동이를 가지고 내 머리 위로 다가섰다. "쏟을 준비 됐어!"
"음..." 나는 입술을 깨물고 진땀을 흘리며 트와일라잇을 쳐다보았다. "이것도 커리큘럼에 있는 건가요? 저는 마법 공부하러 왔지 젖은 갈기 콘테스트 입후보하러 온 건 아닌데."
"진정하고 마법에 집중하세요." 트와일라잇은 씩 웃으며 별 거 아니라는 듯 내 주변에 보라색 역장을 만들어 둘러쳤다. 염동력으로 빚어낸 커다란 원기둥형 욕조의 바닥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마법을 쓰는 그 모습이 굉장하게도 느껴졌지만...... 또 질투심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어려운 마법은 아니지만, 그래도...... 음...... 젖지 않게 보호해 줄 정도는 될 거에요."
"그럼 호, 혹시 에너지장을 유지 못 하면 어떻게 되는 거죠?"
트와일라잇은 잠시 빙긋 웃더니 대답했다. "그으으으다지 기분 좋은 일은 아닐걸요." 그리고는 헛기침을 하고 보조사서를 올려다보았다. "스파이크?"
"그래, 뭐. 시작한다." 스파이크는 양동이를 내 머리 쪽에 겨누고 그대로 들이부었다.
나는 절로 몸을 움츠리려 드는 무조건반사에 대항했다. 본능적으로 두 눈이 질끈 감겼다. 물이 얼굴에 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사실, 에메랄드 빛 반구체에 닿은 물은 경사를 따라 사방으로 흩어졌지만 그 아래에 있던 나를 향해서는 조금도 흐르지 않았다. 머리 위에 떠오른 마력장이 천장처럼 내 몸을 막아주었다. 방어 마법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내 뿔에서 방출된 마력이 나를 향해 똑바로 떨어지려던 물을 밀어냈다. 나는 놀란 숨을 토해냈다. 염동력으로 물을 밀어내는 것보다 배는 쉬웠다. 내가 관여한 일이라곤 마력장을 반구형으로 유지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 외 나머지는 마력장이 알아서 했다. 트와일라잇에게 가르침을 청하러 오기 전까지는 내가 어딜 가서 이런 기술을 배울 수나 있을까 꿈도 꾸지 않았는데. 이 마법으로 방어할 수 있는 다른 원소가 더 있는지, 방어 가능한 정도는 어느 정도나 되는지.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란 그런 것이었다.
"잘 하셨어요, 하트스트링스 씨!" 트와일라잇이 환희에 차 소리쳤다. 그녀는 투명한 우산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방울처럼 물이 마력장을 투과하지 못하고 굴러 떨어지는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라벤더색 불빛과 함께 염동력이 작동하며 소중한 장서로 흘러 들어가려던 물들을 주워모았다. "이렇게 빨리 배우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이 기세로만 하면 중급 방어 마법도 금방 배우겠는데요! 이 상태로 호수 밑에 걸어 들어가더라도 털끝 하나 안 젖고 유유히 걸어나올 수도 있겠어요!"
나는 숨을 내쉬며 싱긋 웃고는, 내 입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자리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보며 조용히 기쁨을 만끽했다. "에이, 설마요." 나는 침을 삼키며 반쯤은 충동적으로 물었다. "눈보라는 어때요? 꽝꽝 언 호수 밑으로 가라앉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이 웃기지도 않는 질문에 대답한 것은 물론 스파이크였다. "어...... 저기? 이제 8월 중순인데. 왜 벌써 눈보라를 걱정해?"
나는 움찔했다. 위트있게 받아 넘기려던 차에, 도서관 문을 두들기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트와일라잇이 어깨 너머로 소리쳤다. "개관했어요! 들어와요!"
정문이 가볍게 밀려 열림과 동시에 밝은 빛이 도서관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 안에 웬 흐릿한 형상이 하나 있어 유쾌한 목소리로 외쳤다. "자, 그럼 이제 문 꽉 닫고 걸어잠궈! 이제부터 아주 시끌벅적하게 난장판을 벌일 테니까 말이지!"
저 목소린...
온몸의 동맥이 심장 박동에 맞추어 미친 듯 펄떡였다. 두 눈은 덜덜 떨렸다. 세상이 흐리게 보였다. 그리고 내 보호막도......
감각이 없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뿔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몸에 느껴지는 건 오직 하나, 물뿐. 방어막을 펼치며 집중하고 있던 생각이 얼음 조각처럼 산산이 부서졌고, 나는 갈기부터 꼬리까지 흠뻑 젖고 말았다. 마력장이 깨지면서 돌아온 반작용과, 얼어붙을 듯 차가운 숨을 토해내는 폐부의 충격조차 내 머릿속에 밀려드는 놀라움에 비할 것은 못 되었다. 나는 트와일라잇이 전개한 염동력 필드 한가운데 주저앉아, 욕실 커튼처럼 흩날리는 잿빛 갈기만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이런! 하트스트링스 씨!" 트와일라잇이 소리쳤다. 내 사과하는 목소리에 부정할 수 없는 후안무치한 기쁨이 묻어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정말... 정말 죄송해요..."
"아이고!" 스파이크가 내 머리 위 어딘가에서 소리쳤다.
"오, 대단한데! 설마 마법 지도를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야, 트와일라잇!" 익숙한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바닐라향 향수 냄새가 났다. 떨리는 눈 앞에, 순간 캔틀롯의 밝은 거리가 스치고 지나갔다. "한참 전에나 그랬던 것 같은데 말이지!"
"뭐, 너처럼 선생은 아니더라도 가끔씩 다른 사람 마법 정도는 가르쳐 줄 수 있잖아."
"얘는. 너 하던 대로 그냥 있는 거 없는 거 다 가르쳐 주다가는 배우는 사람 머리 터져. 그냥 물만 엎은 게 천만다행이다 야. 머리 터졌으면 뇌수로 범벅됐을 거 아냐."
"야 그런 농담은..." 트와일라잇이 어색하게 쿡쿡 웃었다.
"히히히... 어, 그쪽도...... 미안하게 됐습니다." 그녀는 내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나는 갈기로 덮여 보이지 않는 시선 너머로 멍하니 발굽을 내밀었고 그녀는 따뜻한 발굽으로 내 발굽을 잡았다. 어느샌가 그녀는 희미하게 보이는 염동력을 가지고 내 갈기를 양쪽으로 갈라주고 있었다. 젖은 시야로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와 새하얀 얼굴에 떠오른 웃음이었다. 그 하나하나를 볼 때마다 가슴이 뛰었다. 하얀 솜털, 붉은 갈기 위로 그어진 보라색 선, 작은 별들을 주근깨처럼 두른 초승달 모양 큐티 마크. "그 트와일라잇 스파클을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말이죠. 전에는 부모님 옷을 거의 불에 던지다시피 할 뻔했다니까요. 어이 트와이, 기억나지? 셀레스티아 공주님 제자로 가기 바로 전 주였나 그랬을걸?"
"야, 야! 그만해! 잊어버리기도 힘들어 그거!"
그것은 내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그 무엇도 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저 얼굴......
"문댄서...?" 나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문댄서는 나를 갸웃거리며 살펴보더니, 씩 웃었다. 바로 그 웃음이었다.
"그... 그..." 문댄서를 안아주고 싶었다. 그 자리에 무너지듯 쓰러지고 싶었다. 졸도했다가 다시 깨어나서 이게 현실인가 확인하고 싶었다. 그 때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 소중한 순간보다도 한기는 더욱 준엄한 현실이었다. "그게... 어..."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5학년 때 캔틀롯 예비학교Preparatory School에서 뒷자리에 앉았었어." 그것은 사실이었다. 적어도 우리 중 하나에게는. "기억하기로는...... 교육학, 사회학 전공으로 갔지 아마."
* 예비학교 : 대학 진학 목적으로 진학하는 사립고. 한국은 모든 고등학교가 진학 목적이긴 합니다마는 미, 영은 다릅니다.
"허... 세상 진짜 좁네, 그지?" 문댄서가 씩 웃었다. 두 눈에는 여전히 장난기와 호기심이 가득했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어서, 저 웃음 속에 녹아들고 싶었다. "근데 누군지 못 알아보겠다야. 이름이..."
"라이라."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그 숨소리는 울음에 더 가까웠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젖은 입술을 굽혀 미소를 짓고 말했다. "그냥 라이라라고 불러, 문댄서."
"어, 라이라. 못 알아봐서 미안해." 문댄서가 보라색 눈동자를 굴렸다. "여기 트와일라잇 선생도 동의하겠지만, 학창 시절에 학교에 그리 많이 나간 적은 없어서 말이야. 교외 활동 점수라도 많이 벌어놔서 망정이지 그거 아니었음 무슨 짓을 했어도 10학년까지 못 올라갔을걸!"
"야, 진짜 옛날 생각 나네." 트와일라잇이 빙긋 웃으며 쏟아진 물을 주워담아 스파이크가 들고 있던 양동이 위에 둥글게 뭉쳐 띄웠다. "네가 교직에 진출한 것도 되게 웃기는 일 아니야?"
"야!" 문댄서가 몸을 홱 돌려 트와일라잇에게 달려들었다. "일루 와! 이눔 지지배."
"힉! 히히히히!" 문댄서는 트와일라잇을 붙잡아 넘어뜨릴 것처럼 굴었지만, 정작 한 것은 품에 꼭 껴안고 부둥대는 것이었다. 둘은 서로의 얼굴에 뺨을 부비다가 서로 온기 어린 시선을 교환했다. "다시 보니 되게 반갑다 야. 설마 그 문댄서가 말도 아니고 편지인데 평소 성격대로 빨리빨리 오다니 깜짝 놀랐어."
"그게 왜 그런 건지 알겠어? 음?" 문댄서가 혀를 낼름 내밀고 말했다. "루나 공주님 맙소사. 야 트와이, 나 선생이야! 서류가 하라는 대로 하는 게 얼마나 귀한 일인지 안다구! 종잇장에 써서 날린 거면 똑같이 대접해 줘야지!"
"그래, 뭐." 트와일라잇이 씩 웃으며 말했다. "역시 늘 새로워." 그녀는 순간 단호한 눈길을 던졌다. "그리고 루나 공주님 성함 함부로 부르지 마. 나이트메어 문은 진즉에 구마했으니까. 공주님을 좀 더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라구."
"하. 바로 몇 분 전만 해도 햇빛에 아주 자글자글 익고 있었는데 뭘." 문댄서가 장난스런 윙크를 날렸다. "이야 트와일라잇...... 넌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어서 좋다니까. 딱 그 시절 꼬마 역사가 같단 말이지."
"요즘은 그래도 좀 덜 딱딱하게 굴려고 얼마나 노력하는지 아냐."
"더 노오오오력하도록 해! 뭐 필요하면 이 몸이 좀 도와 드리고! 그나저나 이 동네에선 소꿉친구끼리 만났을 땐 어딜 가서 노냐?"
"하하하, 문댄서!" 트와일라잇은 계속해서 나를 어색한 눈길로 쳐다보면서 문댄서를 말렸다. "내가 그러자고 널 부른 게 아니잖아!"
"네, 네. 아무리 그래도 방금 온 사람한테 오자마자 일 얘기부터 하는 건 좀 아니지 않냐, 트와이!" 문댄서가 툴툴대며 가방을 벗어 백골이 가득 든 주머니를 던져놓듯 도서관 한복판에 툭 던지고 말했다. "아직도 발굽이 얼얼하다 이 말씀이야!"
"기차 타고 온 거 아니었냐."
"기차야 타고 왔지. 그러고 나서 포니바니아를 얼마나 빙빙 돌았는데!"
"포니빌이라니까!" 트와일라잇이 피식 웃었다. "일단 이 동네에서 일 주일 이상 머물 생각이라면 일단 좀 걸어서 캔틀롯식 생활 습관을 좀 버리는 것도 좋은 생각이야. 어차피 삼 주 이상 있을 건 아니잖아. 괜찮아. 여기 와서 벌써 일 년 반을 보냈는데도 아직 캔틀롯 습관을 다 못 버렸다구."
"야, 이왕 휴가 나왔으면 평소 안 하던 걸 열심히 해야지 평소 하던 걸 똑같이 하면 되겠냐." 문댄서는 벤치 쪽으로 걸어가 걸터앉았다. 그리고 눈썹을 까딱까딱 움직이며 말했다. "포니빌이 라스페가수스 같은 동네였으면 그런 문제는 없었지. 무슨 말인지 알아?"
"하하하...... 난 잘 모르겠다." 트와일라잇이 눈을 찡긋하며 대답했다. 그녀는 몸을 돌렸다. "스파이크? 문댄서 가방 좀 옮겨 놔 줄래?"
"그래, 그래. 추억담 나누실 게 많으시겠지." 스파이크는 투덜대며 물양동이를 내려놓고 아무렇게나 던져진 가방 쪽으로 걸어갔다. "하인 노릇은 그만해도 되겠다 싶었더니."
"네가 하인 노릇이란 걸 할 때마다 뒤뚱거리며 걷는 품새가 얼마나 귀여운지 아니, 녹색등뼈 꼬마."
"으! 문댄서, 그따위로 부르지 말라니까!"
"히히히히...... 자, 이리 와 스파이크. 어디 이모가 한번 안아 보자. 너 어릴 때 나 그렇게 불렀었잖아. 기억나니?"
"우웩! 아냐!"
트와일라잇이 까르르 웃었다. "아냐, 그렇게 불렀어 스파이크. 나도 들었는데 뭐..."
"아 몰라. 헛소리는 이쯤하자고. 빨리 껴안든 뭘 하든 끝내. 그래야 빨리 이 귀찮은 짓거릴 하든지 말든지 할 거 아냐."
"에에에에에에이, 스파이크......" 문댄서가 스파이크를 잠시 꼭 끌어안으며 얼굴에 뺨을 비볐다. "트와이가 아직 비늘 관리는 해줘?"
"그냥 뭐 그렇지. 그래도 캔틀롯에 있을 때보다는 씹을 보석이 많기는 해. 포니빌이 사실 다이아몬드 광산 위에 지어진 마을이 아닌가 싶을 정도니까."
"그럼 내가 가져온 산 사파이어는 필요없겠네."
"캔틀롯 산 사파이어를 갖고 왔다고?!" 스파이크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외쳤다. 스파이크는 들고 있던 문댄서의 짐을 어느 순간부터 선물 보따리처럼 소중히 감싸들고 있었다. "수정 섞인 사파이어지?! 진짜로 가져온 거 맞지?!"
라벤더빛 염동력이 가방을 가볍게 휘감고는 스파이크의 탐욕스러운 손길에서 떼어냈다. 트와일라잇이 헛기침을 하며 웃는 듯 찌푸린 듯 애매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게 안 해도 도망 안 가. 그나저나 뭐 잊은 거 없니?"
"어...... 뭘?"
트와일라잇이 근처 옷장을 열더니 흰 수건 한 장을 꺼내들었다. 스파이크에게 수건을 넘겨준 트와일라잇은 빙긋 웃으며 내 쪽을 가리켜 보였다.
스파이크가 입술을 깨물었다. "아, 그래." 그리고는 오만상을 쓰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먼저 온 손님이 있는 것도 '잊어버리고 계신' 양반 뒷처리를 왜 내가 해야 하는 거야?"
"문댄서 왔잖아. 나도 나름대로 이유는 있어."
"이-야아아아, 이 친구 이거!" 문댄서가 깔깔 웃으며 다시 트와일라잇의 얼굴에 뺨을 비볐다. "너도 좀 바뀌긴 바뀌었나 보다 얘."
"글쎄... 그냥 오랜만에 봐서 반가운 거지 뭘." 트와일라잇이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문댄서와 뺨을 부볐다. "한 만 년 만에 보는 것 같다."
"너 말 잘했다! 고라췌... 영겁의 밤을 정복하신 구마사제이시자 용살자이신 트와일라잇 스파클 선생은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
"용은 죽인 적 없어! 편지에 써서 보낸 그 용 말하는 거 같은데, 그 포니빌 근처에 둥지 틀었다던 그 양반, 그 양반은 적당히 말로 타일러서 보냈어. 내가 한 것도 아니라 내 친구 플러터샤이가 한 거고."
"허어, 친구라? 설마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네 친구들이란 분들에 대해서 아주 소상히 소명해야 할 거다, 트와이. 아주 오랜만에 먼 친척을 보러 갔더니 웬 이상한 전염병에 걸려 있는 꼬락서니나 감상하고 있는 기분이란 말이지."
"문댄서!"
"하하, 왜? 아주 멋진 볼거리 아니야? 또 내가 알기로는 머지않아 날개가 돋쳐 산도 옮길 거라는 얘기가 있어! 저 예쁜 라벤더색 솜털 밑에 날개를 숨겨놓고 자기가 알리콘이라는 건 세상 사람들한테 전부 비밀로 하고 있는 거 아닌가, 전부터 의심스럽기는 했지. 이게 사실이면 너에 관한 상당수 의문이 해소되거든. 아니야?"
"하여간, 문댄서 너는. 네 똘끼 스위치는 언제쯤 꺼지는 거냐?"
"학생들 시험지에 틀렸다고 줄 찍찍 그을 때 정도."
"하하하하, 아아아아 그러고 보니 요 근처 돌아본 소감을 안 물어 봤네."
"그 얘기라면 뭘 좀 먹으면서 하는 게 낫겠다. 다른 얘길 좀 해야겠어. 네 손님이 조용한 게 우리가 너무 겁을 준 것 같단 말이지. 히히히히...... 흠흠. 왕따 놓아서 미안해. 그... 라이라, 맞지?"
사실 나는 그 때 기분이 너무 좋아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냥 포니의 껍질만 남아 있는 듯한 느낌이라고 해두자. 몸이 얼마나 젖었는지 신경이 쓰이지도 않았다. 아예 그 자리에서 영원히 그 모습만 보더라도 족할 것 같았다. 스파이크가 수건을 가지고 와 물기를 닦아주는 사이에도 악몽의 저편에서 건너온 유령 하나가 수의를 입혀주는 정도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수건을 받아들고 열심히 얼굴을 문질러 닦았다. 양동이에서 쏟아진 물 말고도 다른 물기가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문댄서의 말을 듣고 몇 초도 지나지 않았을 때, 나는 몇 번인가 훌쩍였다. 표정 관리도 끝났고 물기도 다 닦은 다음에야 나는 고개를 들어 웃으며 문댄서를 볼 수 있었다.
"아냐. 그... 어... 신경 안 써도 돼." 나는 당장이라도 올라오려는 울음을 억누르며 입술을 씹었다. "오랜만에 봤는데 뭐 그 정도쯤이야."
"그러고 보니까 어울리기에 딱 좋은 데가 있다고 그러드라!" 문댄서가 트와일라잇을 휙 보며 씩 웃었다. "기차 옆자리에 앉은 부인이 슈가커트 쿼터던가 하는 아담하고 좋은 가게가 있다고 하던데."
"슈가큐브 코너야." 트와일라잇이 정정했다. "그래도 같이 간다면야 더할나위없이 좋겠지."
"지금 농담하는 거지?" 스파이크가 씩 웃으며 말했다. "나는 저 맛난 사파이어도 못 먹고 손가락이나 빨고 있는데 니네 둘은 동네에서 제일가는 컵케익 가게에서 배가 터지게 먹겠다 이건가?"
"우리도 좀 쉬자, 임마!" 문댄서가 피식 웃었다. "우리는 앞으로 삼 주 동안은 머리가 깨져라 일할 처지거든!"
트와일라잇이 덧붙였다. "문댄서가 가져온 건 언제가 됐든 먹고 싶을 때 꺼내 먹어도 돼. 어쨌든 이번에 같이 하기로 한 일이 끝날 때까지는 진짜 말 그대로 머리를 갈아넣어야 하는 신세니까. 자, 그럼 슈가큐브코너를 가든가 죽든가 하자구!"
문댄서가 끼어들었다. "모름지기 섹시한 여자들은 당분 섭취를 멈추지 않는다구, 자네!"
트와일라잇이 얼굴을 감싸쥐며 신음했다. "널 데리고 삼 주나 살아야 하다니 벌써 눈앞이 깜깜하다 이 지지배야."
"히히히히! 날 보고 싶어하기는 했나 보네!" 문댄서가 폴짝폴짝 뛰며 말했다. "자, 그럼 가는 거지?"
"일단 은행 먼저 들렀다 가야 해."
"웩. 그게 뭐야. 왜?"
"왜냐니!" 트와일라잇이 사나운 몸짓으로 말했다. "너 이 지지배가 아무리 빨라도 내일 아침에나 오겠거니 싶은 생각을 했어서 그렇다! 안 그래도 어제 애플잭한테 줄 선물 사느라 개털인데." 그녀는 안달복달하며 입술을 씹어댔다. "개털이야 개털, 말 그대로 개털!"
"하! 이거 듣자하니 내 주머니에서 돈이 또 나갈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또'라니 그건 뭔 소리야?"
"어릴 때 도넛 조 아저씨네 가게 드나들던 건 기억할 텐데..."
"야! 그땐 네가 내겠다고 한 거였고!"
"그거야 네가 목구멍에 거미줄 치고 책만 읽어대는 것 같아서 그랬지! 네 공부량만 놓고 보면 저 지지배가 목구멍으로 뭘 넘기는 시간이 따로 있다는 것 자체가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었다구!"
"어째 좀 많이 부풀려서 말하는 것 같은데..."
"그러셔? 그럼 너 오늘 밥은 몇 시에 먹었어?"
"어..."
"오늘은 안 먹었다 치고, 어제는?"
"어어어어어......"
"나 참 진짜 별꼴이야! 트와일라잇 넌 내가 앞으로 강제로라도 먹일 거야. 하하, 이럴 줄 진즉에 알았으면 돈을 보따리로 싸 올 걸 그랬네!"
"문댄서, 나 진짜 괜찮은데—"
"내가 내죠 뭐."
둘은 깜짝 놀라 나를 돌아보았다. "응?"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바짝바짝 말라 가는 마른침을 목구멍으로 넘기고 싱긋 웃었다. 힘 빠진 몸뚱이 안에서 탄력 잃은 근육이 덜덜 떨려왔다. "내가 내죠. 두 사람 몫 다." 나는 친절하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럼... 슈가큐브코너로 가실까요. 얘기나 좀... 뭐 이를테면..." 이가 딱딱 부딪치는 것을 억누르며, 나는 겨우 말했다. "그 이번에 같이 하시는 일이 뭔지나 좀 들어 본다거나 하는 것 말이에요. 그... 어... 흥미가 생겨서요. 얘기나 좀 들어보고 싶은데."
"하트스트링스 씨,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는데요." 트와일라잇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문댄서와 이방인을 번갈아 보고 말했다. "마법을 배우고 싶다고 하셨을 때도 되게 기분 좋았거든요. 설마 친구라는 지지배가 하루 일찍 들이닥칠 줄은 몰랐지만. 그런 제안을 받아들이기는 좀... 그... 실습도 영 좋지 않게 끝났는데... 좀 그래서..."
"치..." 문댄서가 트와일라잇의 옆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는 다 들리도록 속닥거렸다. "괜찮아 괜찮아! 쟤 하는 거 보아하니 뱃속에 시나몬 스틱 좀 더 집어넣어야 정신 차릴 모양이야!"
"좀 다물지?"
"깔깔깔깔!"
"아녜요, 괜찮다니까......" 나는 저 둘의 시선에 온몸이 잘려나가 무너질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둘에게 다가섰다. "그러고 싶어요. 한 끼 정도는 대접하고 싶어서 그래요. 마법을 잘 못 썼든 어쨌든 그거랑은 다른 문제잖아요?" 나는 활짝 웃었다. 둘의 모습이 잠시 흐릿해지다가, 다시 선명하게 보였다. "괜찮아요. 기분 좋은 날이니까." 나는 침을 삼켰다. 일주일 중, 한 달 중, 일 년 중, 심지어 평생 동안 가장 기분 좋은 날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짓은 할 수 없었다. 그 찰나의 순간은 방어 마법으로 만든 반구 모양 역장보다 수백만 배는 연약한 비눗방울과도 같았고, 나는 그걸 깨뜨릴 만한 짓은 할 수 없었다. "그럼 슬슬 나갈까요. 가서 그... 친구들이 흔히 하는 것처럼 밥도 먹고 얘기도 하고 하죠." 나는 마지막 말을 뱉으며 살짝 몸을 떨었다. 그 목소리는 가냘픈 소리로 우는 새끼 고양이의 그것과도 같았다. 그걸 눈치채진 않았을까, 나는 무서웠다.
둘은 눈치채지 못했다.
이십여 분이 지난 뒤, 우리는 함께 슈가큐브코너에 들어섰다. 구름 위를 거니는 듯한 기분이었다. 문댄서는 쉴새없이 재잘거렸고 트와일라잇은 끊임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로 말하자면 머리와 가슴이 같이 아파 왔다.
나는 그 때, 그 순간이 영영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이야, 이 동네 인테리어 좀 보게!" 문댄서가 슈가큐브코너 곳곳에 둘러진 밝은 파스텔 풍 형상들을 하나하나 쳐다보고 말했다. "사파이어 쇼어스가 당뇨병에 걸려서 제도 테이블에다가 먹은 거 다 쏟아놓은 것 같아."
"쉿!" 트와일라잇이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힐난했다. "케이크 씨랑 케이크 부인이 바로 저기 계신데! 다 들려 이것아!"
"케이크 씨랑 케이크 부인? 진짜? 뭐, 우체국장 이름이 '스탬프 리커Stamp Licker'인 거랑 뭐가 달라?"
트와일라잇이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어느샌가 자연스럽게 끼어들고 있었다. "어스 포니들이랑은 접점이 별로 없었지 아마. 안 그래, 문댄서?" 나는 씩 웃었다.
우리는 적당한 테이블을 하나 골라 앉았다. 문댄서가 한숨지었다. "안 그래도 필리델피아에서 저런 양반들은 질리도록 봤지. 말도 마, 그쪽 양반들 이름이 얼마나 촌스러운지 몰라. 일반 상식을 초월한 수준이니까... 하하하..."
"요 근처 어스 포니 분들 성함이 되게 단순무식하게 지은 것처럼 보여도 심성이나 사고방식은 캔틀롯 출신 못지않다 얘." 나는 당당히 말했다.
"잠깐, 하트스트링스 씨, 그건 좀 이상한데요." 트와일라잇이 말했다. "저는 그쪽을 오늘 처음 봤거든요. 그러니까, 포니빌 주민이시라는 말씀이시죠?"
"어..."
"그나저나 '하트스트링스'라니 이름 되게 좋다." 문댄서가 씩 웃으며 끼어들었다. "보자, 그럼 뭐 연주가나 음악 선생 같은 거 하는 건가?"
"글쎄. 남한테 편하게 뭘 가르쳐 볼 정도로 깊게 공부할 위인은 못 되거든 내가." 나는 대답했다. 그리고 마른침을 삼키고 트와일라잇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적성을 열심히 갈고 닦아서 동네에서라도 뭐 하면 누구다 하는 식으로 말이 나오는 게 정상이겠지만 그것도 아니라서요. 아마 그래서 그럴 거에요." 나는 둘 사이에 걸터앉았다. 한없이 자연스러운 느낌이었다. 이 기적 같은 순간이 돌이라도 부술 듯 세차게, 점점 더 속도를 더해가며 박동하는 심장 소리에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았다. 나는 유년의 향수에 젖었다. 가능한 오래, 가능한 많이 그 시절을 맛보고 싶었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제가 주인공은 아니니까요. 꽤 오랫동안 서로 못 보신 것 같은데. 마음 가는 대로 편하게 대화 나누시죠."
"이런, 꼬시면 안 돼!" 트와일라잇이 까르르 웃는 사이 문댄서가 입이 귓가에 걸리게 활짝 웃었다. "필리델피아나 내 학생들, 별 신기한 도시 촌놈들이 헛소리하는 걸 어떻게 받아넘기고 사는지 얘기 꺼내자마자 아마 입 쩍 벌리고 하품할 거다. 네 큐티마크도 같이 쓸려 들어갈걸?"
"히히히..."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숨을 고르고 말했다. "너네 반 애들이 못된 장난질을 치려던 걸 네 번 연속으로 망쳐놨다는 얘기나 해보자. 그거 진짜야?"
"학생들이 선생님한테 그런 짓을 해요?!" 나는 얼굴을 구겼다. "끔찍해라."
"뭐, 그 녀석들한테는 그럴지도!" 문댄서가 눈을 찡긋했다. "바로 며칠 전, 그러니까 기차 타기 전 일이지. 칠판을 투명 접착제로 아주 칠해 버렸더라고. 근데 난 수업 종 치기 전에 미리미리 움직인단 말야. 그래 내가 판서하려고 분필을 갖다대는 순간을 노리고 벌인 그 장대한 시도가 그대로 발각된 건 당연한 일이지. 그래 나도 내 접착제 가져다가 애들 걸상에 미리 칠해놨지롱."
트와일라잇은 눈을 크게 뜬 채 한쪽 발굽으로 얼굴을 가리고 킥킥대며 웃었다. "야, 대단한데!" 그녀는 소리죽여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흐음...... 평소보다 벌 공부를 많이 시킬 수 있었다고만 해둘까."
트와일라잇이 깔깔댔다. "넌 어떻게 그런 짓을 보고도 그냥 넘어가는지 모르겠다 얘! 나였으면 바로 혼쭐을 냈을걸!"
"그야 내가 보기엔 그건 개기는 표현이 아니거든." 문댄서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애들이 보다 창의적인 발상을 하도록 도와 주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 걔들은 항상 신선하고 정신나간 발상을 하지. 솔직히 말하면 대단할 정도야. 뭐 그래봐야 문댄서 말발굽 안이지만. 보다 보면 얘들은 날 놀려먹으려는 게 아니라 내가 자기들을 어떻게 놀려먹는지 보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닌가 싶다니까."
"그래도 선 넘은 거 아냐?"
"글쎄, 그건 걔들한테 물어봐. 전에는 남자애 셋이 바지 입고 등교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생겼었으니까."
"필리델피아 한복판에서? 왜?"
"그거야 그 녀석들 궁둥이 솜털이 죄다 뽑혀나갔으니 그렇지! 이유가 더 있어?! 문댄서의 분노는 한도 끝도 없다구!"
우리는 즐거이 깔깔대고 웃으며 명랑한 코러스를 자아냈고, 그것은 내 영영 잃어버린 유년기의 앙코르이기도 했다. 케이크 부인이 주문을 받으러 느긋하게 다가왔을 즈음에는 주문하기도 전에 조증으로 졸도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이런, 이런. 좋은 친구들이 오셨네!" 케이크 부인이 활짝 웃었다. "안녕하세요, 스파클 양! 친구분이 오셨나 봐요?"
"바로 맞췄어요!" 나는 나도 모르게 대답했다. 그러나 내가 그 뒤에 뭐라도 더 끌어다 붙이기도 전에...
"이쪽은 제 소꿉친구 문댄서에요." 트와일라잇이 말했다. "치어릴리 선생님께서 방과후 학교 프로그램을 운영하시려고 하는데, 커리큘럼 짜는 거 도와 주겠다고 여기까지 왔어요."
"그래요?"
"고렇습니다!" 문댄서가 앞다리를 뻗어 트와일라잇의 목 주변에, 그리고 트와일라잇의 목에만 감으며 말했다. "두 위대한 마법사가 다시 모였습지요! 어이 트와이. 셀레스티아 공주님이랑 루나 공주님 놀이 하면서 놀던 날 기억하지?"
트와일라잇이 눈을 피하며 말했다. "어떻게 잊겠냐. 언젠가 달이 해를 집어삼키고 말 거라고 네가 얼마나 헛소릴 했는데."
"하! 재밌지 않았어?"
"재미도 없었고 과학적 고증도 엉망이었어! 그것 때문에 일 주일 내내 널 붙잡고 일식은 그냥 두 천체의 거리와 태양광 투사 때문에 우리가 보기에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라고 내가 얼마나—"
"보셨죠. 얜 저 없으면 이렇게 앞뒤 꽉 틀어막힌 바보가 된다니까요." 문댄서가 말했다. "그래도 같이 스파이크를 놀려댄 끝에 여기, 라이라 갈기를 홀딱 적셔놓는 쾌거를 이루긴 했지만."
"아니, 다... 지난 일이니까." 나는 멀리 떨어진 외로운 위성이 된 듯한 기분으로 나직하게 말했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다시 씩 웃고 케이크 부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여기 두 친구분들 것까지 함께 주문하려고 하는데요."
"아하, 그러면 더블보다는 더 큰 걸 시키셔야겠네!" 케이크 부인은 그 자리에 앉아 두 앞다리로 노트패드를 붙들고, 이빨로는 연필을 물어 적었다. "음음—흠, 크흠. 그럼 어떤 맛으로 해 드릴까요?"
"초콜릿이요." 트와일라잇이 말했다.
"전 바닐라!" 문댄서는 어릴 때와 똑 닮은 소리로 재잘대며 말했다.
나는 양쪽을 번갈아 보며 숨을 들이마신 뒤, 케이크 부인을 쳐다보고 말했다. "반반이요."
"초콜릿, 바닐라... 반반... 맞죠! 그럼 편히 앉아서 기다리세요. 금방 가져다 드리죠. 다시 봐서 좋았어요, 트와일라잇!"
"저도 그래요, 케이크 부인. 사장님은 좀 어떠세요?"
"오늘 아침에야 침대 신세와 작별했지요. 이제 어지럼증은 가셨다고 하니 좋은 소식이죠. 머지않아 두통도 멈추지 않겠어요. 어쨌든, 금방 내갈게요!" 케이크 부인이 종종걸음으로 멀어졌다.
문댄서는 트와일라잇을 멀뚱히 쳐다보고 물었다. "남편분이 어디 편찮으신가?"
"아, 음. 몇 주 전쯤에 미끄러져서 넘어지셨거든. 핑키 파이가 애플잭 생일 파티에 쓸 과자를 만든다고 주방을 엄청나게 어지럽히는 통에 바닥에 케이크를 떨어뜨렸었어."
"핑키 뭐?"
"아 제기랄. 너랑 걔 둘이 마주치면 어떻게 될라나 감도 안 잡힌다!" 트와일라잇이 화들짝 놀라더니 덧붙였다. "세상에, 너희 둘을 동시에 한 자리에 몰아넣으면 특이점이 발생할지도 몰라!"
"어이, 그건 내 위업에 도전하는 거야!" 문댄서가 눈을 가늘게 뜨며 짓궂은 눈빛을 던졌다. "핑키 파이라고 했나? 그 친구는 땔감이 사탕 지팡이라도 되는 양 맛있게 구워 먹겠다고 계속해서 불가에 내던지다 아파트를 홀라당 태워먹을 뻔하지는 않았을 거 아냐."
"하느님 맙소사, 다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트와일라잇이 낄낄 웃으며 말했다. "두 블록 떨어진 우리 집에서도 폭음이 들렸으면 뭐 말 다했지!"
"이야, 그때 아부지가 날 죽이지 않아서 다행이라니까!" 문댄서가 말했다.
"그러게!" 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달랑 열살배기 애한테 집 수리 다 해 놓으라고 하셨었잖아. 히히히히! 근데 넌 벽에 구멍난 걸 폴 녹스Foal Knox로 통하는 비밀통로라고 헛소릴 했었지!"
* Foal Knox : 미국 켄터키구 루이빌 인근 군용지인 포트 녹스Fort Knox를 꼰 것. 미 연방금괴저장고의 소재지.
문댄서와 트와일라잇이 동시에 나를 벙쪄서 쳐다보았다. 그 둘의 미소가 서서히 나를 의심하는 듯 가늘어지는 시선에 녹아 사라져 갔다.
"넌 그걸 대체 무슨 수로 들었냐?"
나는 입술을 씹었다. 후드 재킷의 소매를 만지작거리다가, 마른침을 삼키고 나서 떨리는 발굽으로 어깨 너머를 가리키고 대답했다. "트와일라잇 씨가... 그... 꼬마 용을 조수로 쓰시잖아! 도서관 나오는 길에, 그... 녀석이... 얘길 하더라고. 아마 둘한테는 안 들렸을 텐데..."
"걔 벌써부터 소문에 맛들리고 다닌다며 어떻게 좀 해보겠다더니, 아직인가 봐." 문댄서가 트와일라잇을 보고 씩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직 새끼용인데 뭘 어쩌겠냐. 모든 걸 하룻밤만에 익힐 수는 없는 법이지."
"그래도 너 정도면 죄다 가르칠 수 있지 않아? 그것 때문에 그 녀석의 비늘 덮인 보라색 궁둥이를 억지로 떠밀어서 포니빌로 데리고 온 거고."
"캔틀롯에 남아 봤자 어울릴 만한 상대도 없잖아?"
"그건 너한테도 적용되는 말인 건 알고 있겠지. 그나저나 그렇게 환골탈태한 건 또 어떻게 된 영문이야?"
"응?"
"일 년 동안 새 친구를 다섯이나 사귀었잖아! 하루아침에 셀럽 된 거나 다름없다구! 이야, 이거 부러워 죽겠는데!"
"몇 달 동안 어떻게 된 영문인지 다 편지 써서 부쳤잖아! 애당초 그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래?"
"그래, 편지 하니까 생각났어. 셀레스티아 공주님께 그 편지를 빼곡하게 써서 부치는데도 네 발굽이 안 떨어지는 게 너무 신기하다."
"문댄서..."
"왜? 난 축하해 주고 있는 거야, 친구!" 문댄서가 씩 웃었다. "내 존안을 봐. 환희로 가득 차 있지 않아?"
"뭔가 다른 게 그득한 것 같기는 하다."
"됐어 임마." 문댄서는 혀를 낼름 내보이고 말했다. "내일 이 시간쯤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커리큘럼 아웃라인 짜느라 책에 코 박고 있을 거란 명료한 사실을 억지로 잊어버리는 건 이쯤하도록 할까."
"그래도 네가 도와 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그럼 걍 하지 마. 들어봤자 귀에서 피만 날 것 같으니."
"그렇지, 두 분이 계획하신다는 프로젝트라는 건 대체 뭐에요?" 나는 둘이 피고인을 심문하는 이단심문관의 시선처럼 쏟아내던 시선의 사선에서 벗어난 게 그저 기뻐서 물었다. "그게 궁금했던 참이라..."
"음, 마을 가장자리에 자그마한 학교가 하나 있거든요. 치어릴리 선생님이라고, 친절하고 헌신적인 분께서 운영하고 계시죠." 트와일라잇이 말했다. "아무래도 포니빌에는 어린이 인구가 적으니까요. 하지만 학생 수가 적다고 해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좀 쉬워지거나 하는 건 아니에요. 아이들 연령대도 다 다르고, 학습능력도 차이가 있는데 단일 교육과정으로 가르치고 있으니 아무래도 일이 어렵게 되지요."
"내가 장담하는데, 그거 절대로 쉬운 일 아니야." 문댄서가 눈을 굴리며 말했다. "오츠랜도Oatslando(플로리다주의 도시 올랜도Orlando의 변형)로 부임했더니 딱 저만한 학교가 있는 거야. 그것도 도시 경계선 근처에 있었어. 2년 근무했는데, 사람 피곤하게 하는 동네였지. 그쪽 애들은 선생 엿먹이는 데 악어를 끌고 오거나 솔방울을 쓰레기같이 모아 올 놈들이었으니까."
"흠흠." 트와일라잇이 대화의 논점을 되돌렸다. "나이트메어 문을 격퇴한 이래 전국에서 마법 탐구의 대부흥기가 열렸지요. 대도시 출신 유니콘들이 연구를 위해 외진 도시로 연구와 실험을 위해 이주했지요. 저도 그 중 하나고요. 그러다 보니 유니콘 어린이 수가 작년 대비 2배로 늘어났어요. 원래 이 근방에선 유니콘 보기가 힘들었는데 이제 그런 환경도 아니게 됐고 하니, 어린 유니콘들이 적성을 찾을 수 있게 하는 게 당연한 일이겠다 싶었던 거죠."
"내가 듣기로 그 치어릴리란 양반은 어스 포니라던데." 문댄서가 말했다. "어스 포니가 마법을 가르치다니, 듣기만 해도 끔찍한 일이지. 입으로 뿅뿅 소리 내기만 하느니 뿔 달린 양반들이 도와주겠다는 거 받아들이는 게 낫고."
"그래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유니콘 꼬마들을 가르치려고 해 보지 않았을까." 나는 말했다. 사실, 나는 이전에도 때때로 치어릴리를 만나본 적이 있었다. 바로 코앞에 있는 지역 교사가 얼마나 영리하고 다재다능한지 모른다고 해서 문댄서를 탓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치어릴리는 혈혈단신이고, 마법을 시연할 뿔이 없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니까. "그러면, 어느 쪽으로 가닥을 잡은 거야?"
문댄서가 씩 웃었다. "우리 나름대로의 강좌를 만들어 보자는 생각은 여기 트와이 머릿속에서 나온 거야. 단순히 유니콘뿐만이 아니라 어스 포니나 페가수스들에게도 유익한 강의를 만드는 게 목표고. 마법을 못 쓰는 사람으로 태어나는 데 특별한 이유는 없으니까. 일단, 저 꼬맹이들이 재미있게 들을 수 있어야겠지만!"
"뭐, 그렇지." 트와일라잇이 중얼거렸다. "수업 시간은 가능한 적게 하면서도 유익한 강의가 되어야 하고, 그와 동시에 어린이들이 혼란을 일으키지 않아야 하니—"
"결국은 재미있게 하기로 한 거지." 문댄서가 테이블 위로 몸을 기울이며 트와일라잇의 말꼬리를 잘랐다. "그래야 꼬마들 머릿속에 잘 박혀서, 뭐, 마법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은 녀석들이 그쪽 지식을 잘 흡수할 수 있을 테니 말이야. 이게 사람 이름인지 디저트인지 헷갈리는 사람들 한복판에서 살았든 말든, 살았던 동네가 크든 작든 마법 가르쳐 주겠다는 학교는 널리고 널렸거든."
"으으..." 트와일라잇이 눈을 굴리며 엷게 미소지었다.
나는 다시 헛기침을 해 둘의 시선을 이쪽으로 돌렸다. "음, 좋은 생각 같아요. 같이 하신다니 너무 좋네요. 아마 앞으로 며칠 동안은 도서관에 불 꺼질 날이 없겠어요."
"으음...... 그렇죠, 그게 사실이기는 해요." 트와일라잇 스파클은 미안한지 몸을 꿈지럭거리며 내 시선을 피했다. "한동안 방어 마법 공부는 보류해야 하지 않을까 미리 말씀드리는 편이 낫지 않나 싶은—"
"뭔 소리야, 트와이!" 문댄서가 테이블에 발굽을 턱 얹으며 상체를 뒤로 살짝 젖혔다. "라이라가 물 뒤집어쓰고도 안 젖기 공부를 계속할 용의만 있다면야 내가 잠깐 자리 하나 못 비켜 주겠냐? 사람은 많을수록 좋은 거야! 그게 내 인생 철학이고!"
"문댄서, 아무리 그래도 한 번에 너무 많은 일을 할 수는 없잖아." 트와일라잇은 말을 꺼내다가, 테이블 아래에서 무엇인가 반짝이는 것을 보더니 순간 그쪽에 정신이 팔려 말을 잊었다. 그녀의 시선은 문댄서의 뒷다리에 가 있었다. "이야, 문댄서! 그거 멋진데!"
"음? 뭐가? 내 인생 철학? 아리스트롯텔레스Aristrotle랑 헷갈린 거 같은데."
"무슨 소리래, 발찌 말야! 이거 혹시 순은이야?"
문댄서는 멍한 표정으로 발굽 주변에 둘러진 반짝이는 고리를 내려다보더니, 뺨을 붉히며 눈을 굴려 시선을 위로 돌렸다. "으으으으음—그래. 돈 꽤나 썼지. 어때, 좀 볼 만한가?"
"어디서 샀어?"
"누가 줬는지 물어 보는 게 더 나을걸."
트와일라잇은 다시 발찌를 흘끗 보더니, 대충 알겠다는 듯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문댄서 너어어어어..."
"히히히—뭐?"
"그이 이름이 뭐야? 혹시 스타플레어Starflare? 그, 같은 동에 산다는 천문학 선생?"
"흐으으으으음... 글쎄에에에에에다..."
"언제부터 둘이 같이 나다닌 거야?"
"이제 막 들락날락하기 시작할 정도는 됐지."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자기 침에 사레들려 켁켁댔다.
"히히히히..." 문댄서는 저러다 졸도하지 않을까 싶은 기세로 깔깔 웃으며 팔짱을 꼈다. 그리고는 몸을 기울여 얼굴을 붉힌 트와일라잇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말했다. "이런, 네가 공주님 꽁무니에 딱 붙어다녔다는 걸 왜 자꾸 깜빡하나 몰라..."
"나는... 잘 모르겠다. 문댄서..."
"이제사 뭘 좀 알겠나 보구나. 글쎄, 우리 반에 득시글거리는 양아치들 관리하는 데 드는 비용이 어디서 나는지도 혹시 감 잡았을라나. 요즘은 꽤 행복하게 지내는 편이야, 트와이. 은 발찌만 갖고는 캠퍼스 안 호숫가를 같이 걷는 로맨틱한 산책의 기분을 다 설명하긴 어렵잖아."
"그래도 축하한다 야. 네 편지 보면 굉장히 똑똑한 사람인 건 알겠는데 혹시 그만큼 잘생겼으면..."
"똑똑한 남자들이 으레 어떻다더라 하는 소리는 익히 들었을 텐데."
"아냐?" 트와일라잇이 물었다.
문댄서는 잠시 눈만 꿈벅거리고 있다가, 이내 신음했다. 그녀는 씩 웃으며 테이블 위로 몸을 기울였다. "보오오오자, 넌 어떤데? 영민하시나 연애 사업에는 별반 관심이 없으신 우리 공주님 수제자께서는 아직 자기 반쪽을 못 찾으신 건 아니겠지?"
트와일라잇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급히 앞머리를 쓸었다. "문댄서,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몇 번째 얘기하냐 지금."
"허어어어얼?" 문댄서의 눈동자가 부들부들 떨렸다. "친구 많이 사귀었다고 편지 써서 보내고 그랬잖아."
"그건 그런데—"
"난 네가 연애소설에 나올 법한 멋있는 남자 만났을 줄 알았단 말이지!" 문댄서가 윙크했다. "이왕이면 좀 끈적한 사람으로!"
"문댄서! 지금..." 트와일라잇은 이를 딱 하고 다물고는, 고개를 테이블 밑으로 푹 숙이며 기나긴 한숨을 토해냈다. "그게 지금 여기서 할 말이냐 이 지지배야!"
"아직도 데이트 한 번 나가 본 적이 없구만, 트와이! 이런 얘기를 하면 안 되는 때와 장소가 어딨냐!" 문댄서는 나를 보고 씩 웃으며 말했다. "잘 들었지, 하트스트링스. 남자 대신 마법이랑 연애하면 안 돼. 저러고 살다간 좀 푸짐하게 저녁 먹을까 해도 혼밥하게 된다."
나는 피식 웃었다. "뭐 사람 취향이야 사람 나름 아니겠어."
"세상에. 여기 제과점이 아니라 수녀원이었어?! 아직 여름이야, 이 친구들아! 온누리에 사랑이 가득하다구! 세상천지 온통 그 냄새란 말이야!"
"나한테 그런 삶은 아직 너무 일러." 트와일라잇이 말했다. "해야 할 연구는 산재해 있고, 번역할 책은 쌓여 있고, 공부할 마법도 널렸고..."
"그러니까 그걸 왜 굳이 혼자 하려 드냐고."
트와일라잇이 한숨지었다. 그녀는 제과점 안에 드리운 그늘을 행복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뭐 그래도, 꽤... 괜찮은 생각 같기는 하다." 트와일라잇이 침을 삼키고 말했다. "완벽한 사람은 바라지도 않으니, 점잖은 사람 정도면 좋겠어."
"세상 누가 네 기준에 맞추겠냐." 문댄서가 대답하자 트와일라잇이 다시 홍조를 띠었고, 문댄서는 그걸 보며 또 낄낄 웃었다. 그리고는 나를 보고 말했다. "넌 어때? 반들반들한 갑옷을 입고, 한쪽에는 물에 흠뻑 젖은 여자를 위한 뭔가를 차고 다니는 멋진 기사 양반 정도면 마음에 들어?"
무미건조한 것이기는 했지만, 웃음이 절로 터져나왔다. 나는 내 유년기에서 찾아온 두 그림자와 함께 앉아 있었다. 이들은 내 바로 앞에 있었지만, 그럼에도 너무나 먼 존재였다. 나는 불가능한 것들, 우리 사이의 간극에 다리를 놓아줄 수 있는 것들이지만 세월 속에 사라져 가도록 내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들을 하염없이 주워섬기고 싶었다. 불가능한 것들을 뒤에 남겨두어 생긴 빈자리에는 새로운 것들이 자라났는데, 몇몇은 아름다웠고 다른 몇몇은 한없이 두려운 것이었다. 나는 차라리 그것들이 나를 지탱해 주기를, 내 말을 들어 주기를, 내 흐느낌과 폭소와 단발마와 작은 웃음을 함께해 주기를 바랐다. 나의 바람은 절박했다. 나는 항아비곡과 나의 오두막, 나의 음악, 그리고 모닝 듀를 생각했다.
"글쎄, 그런 걸 생각하기엔 포니빌에서 보낸 시간이...... 좀 짧지." 나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나는 목을 닦고 좀 더 힘을 실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여기 정착해서 살게 되면 친구도 많이 만들고, 가족도 많이 만들고는 싶네." 나는 둘을 애정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마지막 한 명까지 내 옆에 두고 싶어."
"오......"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팔짱을 끼며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렇군요. 그럼 그대로 실천해 보는 건 어때요? 포니빌에 사랑스러운 가족이 늘어나면 좋죠."
저주의 굴레에 매인 채 일 년여를 살아오며 나는 인신공격처럼 느껴지는 말들을 일축해서 치워 버리는 기술을 익혔다. 내가 익힌 그대로, 트와일라잇이 꺼낸 말을 밟아 죽여야 한다는 충동이 들끓었다. 그러나 내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전혀 다른 것이어서, 두 꼬마 사이에서 스타스월의 역할을 맡았던 한 꼬마가 나 대신 혓바닥을 빌려 말하는 것이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요?"
"이 동네는 너무 목가적이니까, 춤추기 좋은 무드로 바꿔놓을 수도 있지 않겠어." 문댄서가 말했다. "혹시 뭐 악기 같은 걸 연주한다거나 작곡을 한다거나, 뭐 그런 거 있어?"
"아! 악기는 조금 만졌지!" 나는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딱히 천재 부류는 아니긴 한데, 그럭저럭 들을 만하게 친다고는 생각해."
"그렇지. 난 저렇게 적당한 수준으로 겸손 떠는 사람이 좋더라고." 문댄서가 반짝이는 이를 드러내며 빙긋 웃었다. "그럼 한 곡 뽑아 볼래?"
"아하하..." 글쎄, 내 안에서 무엇인가 들끓어 뿌듯하고 벅차다고나 해둘법한 느낌이었다. "설마 문댄서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지! 보자, 내가 사실..." 나는 뿔을 밝히며 가방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파우치를 열어 금색 리라를 꺼냈다. "최근에 좀 주물럭거리고 있는 곡이 하나 있거든. 트와일라잇 씨한테 한번 들려 드릴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둘이 이제 그, 해후의 기쁨을 나누는 마당이니 굳이......" 나는 말을 다 끝맺지 못했다. 안개 속을 헤매는 듯 시선이 사방으로 분산되었다. 입술 밖으로 차가운 입김이 번지며 흘러나왔다. "그... 내가... 음..."
"이야! 봐라 트와이!" 문댄서가 깔깔 웃으며 테이블을 가리켜 보였다. "디저트에 연주를 곁들이게 될 줄이야! 아까 말한 건 싹 다 취소! 슈퍼큐트 코트Supercute Court 여기,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죽여주잖아!"
"슈가큐브 코너라고." 트와일라잇은 갑자기 편두통이 도지기라도 한 듯 머리를 문지르며 정정했다. "하여간..." 그리고는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피곤한 기색으로 싱긋 웃었다. "음, 뭐. 안녕하세요. 케이크 부인께서 실내 연주자를 고용하셨나 봐요?"
"으음..." 나는 트와일라잇을, 기쁨과 즐거움이 죄다 빠져나가 그녀 옆자리에 앉은 희디흰 여자에게 빨려들어 이제 칙칙한 피로밖에 남지 않은 그녀의 두 눈을 쳐다보았다. 나는 이어 문댄서를 보았다. 처음 봤을 때 그대로 경쾌하고 열광적인 모습이었다. 문댄서는 내 어릴 적 기억 속 그 꼬마의 얼굴을 쏙 빼다박은 듯했다. 이제 그날의 사진 속에 내 자리는 남아있지 않다. "그게... 음... 저..."
트와일라잇과 문댄서는 빙긋 웃었다. 차라리 깊고 새까만 우물 속을 그렇게 쳐다보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눈을 깜박이는 그 찰나의 순간마다, 나는 엄청난 속도로 그들에게서 멀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한 번 더 눈을 깜박이면 저들의 모습이 심연 속으로 녹아들어 영영 사라질 것 같아 두려웠다.
그래서 나는 돌아섰다. "이제 그만 가 봐야겠어요. 그게... 여기 앉으려는 생각은 아니었는데. 빈자리인 줄 알았지 뭐에요."
"괜찮아요." 트와일라잇이 부드럽게 말했다. "뭐 예약석이나 그런 것도 아닌데—"
"글쎄, 그러고 보니 우리 뭐 해야 할 일 있지 않았냐." 문댄서가 끼어들었다. "그나저나 되게 좋은 악기 같은데, 한번 들어나 봅시다!"
"나중에... 나중에 꼭...어... 들려 드리죠..." 나는 몸을 떨며 리라를 가방에 집어넣고 코를 킁킁댔다. "어... 그럼 실, 실례하겠습니다." 급하게 나가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신경을 썼지만, 예절교육은 필요한 최소한만 받은 거 아니냐는 소리를 들을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나가는 길에 케이크 부인과 부딪칠 뻔했다. 부인은 선데 3개를 올려둔 쟁반을 등에 지고 있었다.
"자, 여기 있어요!" 케이크 부인은 쟁반을 탁자에 내려놓고, 이상하다는 듯 테이블과 쟁반을 번갈아 보았다. "어머나. 두 분밖에 안 계시네요. 어디서 이런 실수를 했지......?"
"저흰 괜찮은데요?! 선데는 까짓거 반 정도 더 먹어도 사는 덴 지장 없다고요! 트와이, 넌 어때?"
"어, 그래. 근데..."
"근데 뭐?"
"이상하네. 그... 어,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하나—나 빈털터리거든."
"허어—야, 주머니 사정 정도는 파악하고 다녀야지, 지지배야! 히히히...... 너 머리랑 목이 사실은 떨어져 있는 거 아니냐—"
"야! 그건 무슨 소리야?"
"히히히히—됐어. 그러니까, 케이크 부인이라고 하셨죠?"
"그래요." 중년에 다다른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문댄서가 빙긋 웃으며 테이블 위에 금화 몇 닢을 꺼내놓았다. "여기, 제 주머니에 있는 돈 전부에요. 저 사악한 구두쇠 트와일라잇 몫까지 낼 만한 금액이면 좋겠군요."
"으으으으..." 트와일라잇이 열을 냈다.
"오호, 너 열내니까 되게 귀엽다."
"대체 내가 너랑 뭐 하는지 모르겠다." 트와일라잇은 째려보는 듯 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대연회Grand Galloping Gala 때 뭘 할 생각인지나 말해 봐."
"그러지 뭐! 근데... 어... 내가 전에 편지에 쓰지 않았던가? 아냐? 그래 그럼. 일단 대연회가 앞으로 4주 뒤에 열리지. 근데 정작 초대장을 받은 건 거의 포니빌에 오자마자였으니까, 한 1년은 된 얘기가 되겠다. 우선 초대장을 받은 게 나 하나뿐인 건 아니야. 이게 좀 재밌는 얘기가 얽혀 있어. 봐봐, 처음에는 티켓을 2장만 받았거든. 애플잭이랑 같이 수확 작업을 하는 도중에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 초대장을 보내 주셔서..."
나는 한 시간이 흐른 뒤에 오두막, 내가 집이라고 기억하는 장소에 도착했다. 비틀거리는 지친 걸음이었다. 나는 벽마다 걸려 있는 수많은 악기가 드리우는 저마다의 외로운 그림자를 생각했다. 일기장과 오선지 위에 켜켜이 쌓여 가는 먼지를 생각했다. 그리고 난롯가에 흩어진 잿가루와, 그것들이 내게 어떤 노래를 불러 주었는지를 생각했다.
나는 짊어지고 있던 가방을 내동댕이치듯 마룻바닥에 던져놓고 두 걸음을 더 걸어 침대 위에 말 그대로 고꾸라졌다. 나는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두 눈을 단단히 감았다. 그대로 누워 영영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머리가 제멋대로 문댄서의 반짝이는 이와 트와일라잇의 홍조를 띤 얼굴의 형상을 제멋대로 빚어내지 않을까 무서워서 그 어떤 빛도 보고 싶지 않았다. 까르륵거리는 웃음소리와 장난스러운 어조가 여전히 귓가에 맴돌며 떨리는 숨결이 좁은 방의 나무 벽에 부딪쳐 메아리지는 사이를 파고들어 괴롭혔다.
지박령이란 본래 잃어버린 자리에 남은 과거의 공백을 잊기 위하여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놀래켜야만 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잃어버린 것들은 그저 최후의 순간 자기 자신마저 잃어버리는 찰나까지 잃어야 할 것들이 더욱 남아 있음을 상기시켜 주는 것에 지나지 않은가.
문댄서와 트와일라잇 스파클을 한 자리에서 보고, 그 둘의 웃음소리와 목소리가 뒤섞인 소리를 듣는 것......
나를 구성하는 근간 중 아직 부서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슈가큐브코너에서 다시 찾아온 저주는 차라리 내게는 구원이라고 할 만했다. 도서관에 잠시만이라도 더 머물렀다면, 그 둘의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더 듣고 있었다면 나는 실낱 하나도 남지 않고 사라졌을 테니까.
그런데도, 억지로 밀어 올리려는 울음은 어째서 끝내 울어지지가 않는 것일까?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몸을 뒤집었다. 메마른 두 눈이 오두막 천장에 드러난 통나무 대들보를 따라 움직였다. 나는 웃고 있었다. 나는 오래 전부터 미쳐가고 있었어야 마땅했다. 지금 내 입장에서 그런 자리를 그냥 실실거리며 웃기만 하다가 나올 놈이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나는 지금껏 수많은 심판과 역경을 견뎌냈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제 내 죽마고우 둘이 내 곁에, 그것이 오늘 하루에 불과할지라도 내 옆에 있었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나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운이 좋았다. 헤어나올 수 없는 외로움과 한없는 절망 한가운데 갇혀 나 스스로의 과거와도 영원히 결별한 채 몸부림치던 가운데, 나와 옛날 사이에 가교가 생겨 건널 수 없는 사이를 이어주고 내 삶에 등불을 비추어주지 않았는가. 내가 문댄서를 얼마나 가깝게 생각했는지, 그 활발한 성격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정상 범주는 아닌 사고방식과 걸죽한 입담에 맞서 되받아치는 일이 얼마나 즐거웠는지도 다 잊고 있었는데 말이다.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정서적으로나 지적인 측면에서 단단하게 받쳐주는 기반암 같은 친구였다면, 문댄서는 혈기 넘치는 살아있는 불꽃과도 같았다. 내가 살아야 하는 춥고 차가운 세상에서조차, 살아 있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 일인지 일깨워 주고도 남을 친구였다. 그리고 그 둘을 다시 한 번, 한 자리에 모여 만나게 되다니......
그제서야 눈물이 솟아 흘렀다. 눈물은 단순히 따뜻한 것을 넘어서서, 데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뜨거웠고 나는 그것이 기뻤다. 나는 베개를 끌어당겨 가슴에 안고, 불현듯 눈을 가리운 달디단 흐릿함에 안겨 조용히 노래를 흥얼거렸다.
이 얼마나 복받은 일인가.
감당할 수 없는 고난 한가운데서 내 잃어버린 과거, 나를 구성하는 부분을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 복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나는 내 잃어버린 한 조각이 나를 찾아와 내 안으로 녹아드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 둘이 나를 기억하든 그렇지 못하든 그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나는 트와일라잇과 문댄서를 사랑했다. 그 둘은 아무런 탈 없이 살아 있었다. 완전한 타인으로나마 내 벗들이 행복한 삶을 누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세상만사는 문제없이 돌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 세상에 없지만, 그 둘은 그 세상에 남아 있으니까.
루나 공주님께서 지은 악곡에 나이트메어 문의 저주를 푸는 비밀이 숨겨져 있으리라는 보장은 사실 없다. 그 둘이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나는 무엇을 위하여 살아 있는가? 달리 생각해서, 내가 걷고 있는 일종의 순례길이 사실 나를 위해 진즉부터 예비된 것이었다고 보면 또 어떤가? 천지가 개벽할 때부터 저 신성한 협주곡의 비밀을 밝혀낼 봉쇄수도원의 사제로 내가 지목되어 있었다고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이제까지 나는 신실하게 그 운명에 복종해 왔다. 나의 순명은 보상받았는가? 나는 캐러멜을 향해 내가 다할 수 있는 존중을 다했다. 스쿠틀루에게 예정된 죽음의 운명을 돌려놓기 위해 항아비곡 중 하나를 이용했다. 그러면 문댄서가 포니빌로 내려온 것은 나의 순명을 유지시키기 위한 일종의 대가로서 주어진 것인가?
개 풀 뜯어먹는 소리이고, 내 상관할 바도 아니었다. 그따위 것보다는 문댄서가 여기 삼 주 동안 머무를 것이라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삼 주를. 괴상망측하기는 해도, 오늘 있었던 일을 그대로 매일매일 반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도 이런 보상은 받아야 할 것 아닌가.
웃음소리가 입술 밖으로 흘러나왔다. 어린 시절 동아리를 지어 같이 어울려 다니던 때 웃던 소리처럼 들렸다. 나는 가슴에 안은 베개를 더 단단히 끌어안고서, 그 날 그 행복했던 기억을 부여잡았다.
행복했다.
"그러므로 나 셀레스티아가 공주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트와일라잇이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화려한 색을 자랑하는 담요가 천막처럼 세워진 한가운데로 그녀의 목소리가 손전등 빛을 받아 메아리졌다. 빛 받은 담요가 장밋빛으로 빛났다. "스스로 사유하여 포니 수준으로 사고 수준을 향상시키고, 스스로 욕망하는 법을 학습할 수 있는 기계를 개발, 제작하는 모든 행위를 엄히 금합니다. 이는 세상의 안녕을 위함입니다."
"참으로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나는 짤막한 다리로 과장된 비장함을 담아 절했다. "현자단 모든 마법사의 수장된 이로, 공주님의 현명한 말씀 받들겠나이다."
"로봇 한 대쯤은 있어도 되지 않으냐?" 문댄서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담요 텐트 바깥에 있던 문댄서가 안으로 머리를 밀어넣자 손전등 불빛에 보라색 눈동자가 비쳐 반들거렸다. 문댄서는 씩 웃으며 재잘거렸다. "티아라에 윤을 낼 시종이 하나쯤은 있어도 되지 않은가! 강철로 된 시종이라, 멋지지 않겠는가?"
"무우우운댄스어어어—" 트와일라잇이 툴툴거렸다.
"쉬이이이잇! 나 루나 공주님이잖아. 까먹었어?"
"크흠. 루나 공주! 지금은 낮이에요! 달을 띄울 때까지 편히 누워 쉬고 있어야 이치에 닿지 않겠어요?"
"어디 궁전에 언니 혼자만 사시오?" 문댄서가 얼굴을 찌푸리며 팔짱을 꼈다. 그 뒤로는 머나먼 곳에서 반짝이는 별들이 보내주는 별빛에 젖은 내 침실이 배경으로 깔려 있었다. 별빛은 마치 어떤 음표처럼 보였다. "어찌하여 스타스월은 항상 언니랑만 얘기하는 것이고?"
"그거야......" 트와일라잇은 당연한 사실을 이야기하며 얼굴을 구겼다. "스타스월 또한 다른 유니콘들처럼 유니콘일 뿐이고, 유니콘이라고 어스 포니나 페가수스와 달리 낮에 자고 밤에 깨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러시다면 나는 언니를 배신할 수밖에 없소!"
"쉬이이이이이! 너무 나갔어!"
"어찌하여 밤 동안 깨여 나를 섬기는 자 하나 없는가?"
"루나 공주도 본인 근위대를 두고 있지 않습니까! 그만하면 재미거리는 되지 않소?"
"웩! 박쥐 날개가 어디가 보기 좋습니까!" 문댄서가 눈을 반짝였다. "그러니 로봇 몇 대쯤은 있어도 되잖소!"
"로봇은 안 된다고 했습니다! 방금 얘기 못 들었소?"
"어...... 나 여기서는 '자고' 있다가 들어온 거잖아."
"으으—스스로 사고하는 기계는 허가할 수 없소!"
"무엇 때문에?"
"위험하기 때문이지요!"
"무엇이?"
"사람이란 모름지기 자신의 마법 능력과 힘만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하기 때—"
"시시하기 짝이 없는 소리군!" 문댄서가 눈을 굴리며 폴짝폴짝 뛰어, 이불 천막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래! 이참에 로봇 군단을 만들어 달과 땅을 잇는 다리를 놓아야겠소. 그리하면 백성들도 원하는 때 언제든 달로 가 나를 섬길 수 있을 터요. 달에는 낮도 밤도 없으니 말이오!"
"야 그건 아니지!" 트와일라잇은 문댄서가 사형 판결을 받기 딱 좋은 범죄를 저지르기라도 한 듯 소스라치게 놀라서 말했다. "그건 역사적으로 맞지 않아!"
"그래서?"
"그래서?!" 트와일라잇은 동물 인형이 가득 놓인 쪽으로 뛰어들더니 그 날 저녁에 캔틀롯 시립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을 끄집어내 펼쳤다. "봐봐, 여기. 신고전시대Neo-Classical Era 기록을 보면 콜틀러리안 지하드 사건 직후 곧장 로봇 개발을 법적으로 금지했다고 되어 있—"
"난 마나 레이저 무기로 무장한 로봇 군단이 좋단 말야!" 문댄서가 우리 주변을 행진하는 군인과도 같은 품으로 휙휙 돌아대며 말했다. "진격하라, 강철과 기계의 형제단이여! 루나 공주께서 달의 이름으로 그대들의 무기를 사용하도록 명하셨도다! 보이는 것은 모조리 폭파하라!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폭파 같은 건 없었다니까! 정신 차려, 문댄ㅅ—"
"루우우우우우나 공주님이잖아."
"그러니까 너 지금 공주님 역할이라니까!"
"로봇 군단을 이끌어 우리의 땅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공주의 의무! 나와 함께하시오! 저 사악한 스무즈Smooze 놈의 공격에 맞서야 하지 않겠소!"
"스무즈 같은 거 없었어!"
"예이 예이!"
"아니라니까! 방금 지어낸 거잖아!"
"히히히! 상관없잖아? 어차피 역할놀인데."
"놀이라 그래도 일단은 공주님 역할이잖아! 공주님들이 보이는 거라면 뭐든지 터뜨리거나 하진 않으셨다고!"
"스무즈처럼 혼을 빼앗아 잡아먹는 무서운 괴물이랑 싸운다면 안 그럴걸!"
"아니 글쎄 아니라고!" 트와일라잇이 문댄서를 째려보았다.
"맞는데?" 문댄서는 히죽거리며 트와일라잇을 마주보았다.
"아냐!" 트와일라잇이 으르렁거렸다.
"맞다니까!" 문댄서도 질세라 으르렁거렸다.
"아니라—"
"공주님들!" 나는 목 주변에 휘감아 턱수염처럼 보이게 만든 털뭉치가 제자리에 잘 붙어 있도록 누르며 둘 사이로 끼어들고, 두 앞다리를 하나씩 벌려 둘의 가슴팍에 얹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두 분은 위대한 대모Cosmic Matriarch께서 남기신 찬란한 유산이신데요! 대모께서 본인이 없을 때 이퀘스트리아를 이렇게 통치하라고 가르치셨습니까?"
"흐으으으으응..." 문댄서가 팔짱을 끼더니, 입을 삐죽거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
"싸우지 말라고 하셨지." 트와일라잇이 툴툴대며 말했다.
"그러니, 오늘을 대축일로 선포하도록 하시죠!" 나는 빙긋 웃었다. "현자단의 수장은 기념일을 지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습니다. 그 권한에 비추어, 오늘을 '의좋은 자매 기념일'이라 하겠습니다. 앞으로 오늘은 자매들이 서로를 향한 우애를 되돌아보고, 부족하다면 채우는 날이 될 것입니다."
문댄서와 트와일라잇은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너무 멍청한 생각이야." 문댄서가 말했다.
"잠깐, 6월은 가정의 달이 아니야. 9월인데." 트와일라잇이 말했다. "세상에 그거 모르는 사람이 있나."
"그럼 내년부터 그렇게 부르도록 하시지요!" 나는 피식 웃으며 말하고, 트와일라잇을 바라보고 말했다. "혹시 외람된 말씀일지 모르오나, 증기기관식 로봇 정도는 허가해 주시겠나이까? 단순노동만 가능한 정도로 회로를 단순화하여 설계한다면 그 주인을 배반할 정도의 지성을 갖출 수는 없을 것입니다."
"흐음..." 트와일라잇은 학자 같은 미소를 지으며 등을 기대고 앉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래요. 그 정도라면 납득할 수 있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진짜 왕족처럼 권위가 있었다.
나는 문댄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하시면 루나 공주님께옵서도 셀레스티아 공주께서 캔틀롯 왕궁을 완공할 때까지는 로봇 군단을 그리 투입하시고, 왕궁 건설이 끝나고 난 뒤에 스무즈를 처단하러 가심이 어떠신지요?"
문댄서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혹시 해자를 파는 데 레이저 무기를 쓸 수 있지 않을까?!"
"히히히히..." 트와일라잇은 본인이 더 신나서 말했다. "어디에 조준해야 하는지 내 그려 드리지!"
"아아아앗싸! 다 날려 버려!"
"크흠." 트와일라잇이 반짝이는 지시봉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턱수염 스타스월, 그대의 무한한 지성과 명경지수와 같은 마음에 비추어, 그대를 로봇위원회의 수장으로 임명하겠습니다."
"그래요, 스타스월." 문댄서가 눈을 찡긋했다. "그대의 턱수염이 빛을 발할 때요. '짐의 달빛이 그대의...'...어...수염 기타 등등 위에서 빛나기를."
나는 고개를 깊이 숙여 절하며 자부심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공주께서 내려주신 광명을 받들어, 죽는 날까지 섬기겠습니다."
"그래, 그런 건 됐고." 문댄서가 발굽을 싹싹 문지르며 말했다. "로봇 성 지으러 갑시다!"
"어디를 파야 하는지 표시해 주지요!" 트와일라잇이 방방 뛰었다.
"어, 횃불을 좀 두는 건 어떻겠소? 밤중에 왕궁을 밝히면 참으로 보기 좋을 텐데요."
"그러려거든 석탄을 캐야 합니다."
"석탄이라? 어떻게?"
"뿔을 쓰도록 하세요. 대모께서 그대가 달을 조각하는 데 요긴하게 쓸 것이라며 뿔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아, 그랬지요. '현명하고 사랑받는 셀레스티아 공주, 그대에게 감사를.'"
나는 둘이 '필요한 물건을 챙긴다'며 내 방 이곳저곳을 쏘다니는 모습을 구석 자리에 앉아서 쳐다보았다. 밖에서는 별들이 늘어서서 은하수를 이루며 박혀 있었는데, 마치 온 우주가 내 눈앞에서 반짝이는 듯했다. 나는 빙긋 웃으며, 이 꿈에서 영영 깨지 않기를 기도했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났다. 집구석에 더 박혀 있을 수도 없었다. 문댄서와 트와일라잇이 계획하는 게 무엇인지 더 알아야 했다. 그 둘을 다시 봐야만 했고, 그들의 목소리도 다시 들어야만 했다.
매일 아침 나는 깨끗하게 정돈된 정신으로 잠에서 깼다. 머릿속에 속삭여대던 비곡도 이제 들리지 않았는데, 들으려고 해도 들리지 않는 지경이었다. 세상이 이제 더는 춥게 느껴지지 않아서, 후드 재킷을 그냥 벗고 다니는 건 어떨까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 직전까지 간 일도 있었다. 굳이 그런 식으로 기쁨을 표현하기보다는, 다른 방식을 택하기로 했다. 래리티가 짜준 화려한 붉은 스웨터를 입고 마을로 향했다. 동네 사람들은 마을 골목 곳곳을 활기차게 쏘다니며 돌아다니는 잘 차려입은 이방인을 미소와 손인사로 반겨주었다. 나는 웃음으로 화답했다. 모닝 듀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도 나는 미소지었다.
나는 마침내 트와일라잇의 도서관 정문 앞에 섰다. 머릿속에 이미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트와일라잇에게 마법을 배우러 오기로 약속한 것처럼 굴 심산이었다. 트와일라잇은 사려깊은 사람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기억조차 의심하는 평소 성격 때문에라도 생전 처음 만나는 이방인인 나를 마찬가지로 친절하게 대해줄 것이었다. 사실, 내딴에는 비겁한 속임수를 쓰는 것 같은 죄책감도 들었지만 감수해야만 했다. 보고 싶으니까. 봐야만 했으니까. 설사 셀레스티아 공주님 본인께서 이 모든 걸 관조하고 있더라도 봐서 기분이 좋아지면 좋아졌지 나빠하지는 않을 거라고 나는 자신했다.
나는 도서관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좋든 싫든 그것은 내게는 들어오라는 허락과도 같았고, 나는 문을 열었다. "실례합니다?" 나는 웃으며 문 너머로 몸을 기울였다. "귀찮게 해 드려 죄송하지만, 혹시 트와일라잇 스파클 양 계신가요? 캔틀롯 마법위원회에서 통지 서류를 전달받으셨을—"
"문댄서, 내가 몇 번이나 얘기해야 이해하겠어?!" 트와일라잇 스파클은 드잡이질이라도 한 듯 봉두난발이 된 갈기로 딱딱거렸다. 그녀는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종잇장과 공책과 참고자료가 산처럼 쌓인 책상 너머에 앉아 있었다. "현장학습 4번은 과하다니까! 두 번이면 충분하다구!"
"핏!" 문댄서는 트와일라잇 앞에 놓여 있던 벤치에 비스듬히 기대어 누운 채 눈을 굴리며 대꾸했다. "안 그래도 현장학습 4번으로는 부족하다고 하려고 할 심산이었는데."
"장난치는 거겠지..."
"처음으로 마법을 보고 배우는 경험인데, 당연히 더 굉장해야 하는 거 아냐?" 문댄서는 부들거리는 트와일라잇을 보며 피곤한 미소를 짓고 말했다. "그 꼬맹이들이 현장학습을 가야 하는 이유가 그거야! 마법을 바라보는 시각을 틔워 주는 데는 위니페그의 루나 마법박물관 관람만한 게 없다니까!"
"문댄서! 나 진짜!" 트와일라잇이 두 발굽을 홱 움직이며 말했다. "우리 지금 강의계획 짜는 거야! 휴가 계획이 아니란 말이야! 그 정도로 현장학습 보낼 재원을 마련할 방법도 없고! 애초에 혼자 남아서 애들도 가르쳐야 하는 치어릴리가 저 멀리서 돌아다니는 현장학습 간 애들을 어떻게 관리하란 말야?"
"그건 일반적인 생각이야, 트와일라잇. 칫... 고정 관념을 좀 버려!" 문댄서가 몸을 일으켜 앉으며 순진한 미소를 지었다. "치어릴리가 떠안은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 포니빌 한 곳에만 박혀 있다는 거야. 너도 마찬가지, 도서관 밖은 관심 하나도 없었지? 마법이랑 무관한 것들 말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단일학급분교에 짱박혀 있어서는 마법에 관한 그 어떤 것도, 찌꺼기 같은 거라도 얻는 게 하나 없다, 이 말씀이지!" 문댄서가 일어나 도서관 안을 한 바퀴 돌며 말했다. "다리도 한번 쭉 펴 보고, 돌아다니면서 세상에 굉장한 게 참 많다는 걸 몸소 보고 느껴야 비로소 아, 이게 사람 사는 거구나! 싶을 거다 이거지. 진짜라니까! 이것만한 게 없어!"
"문댄서, 나만 이런 생각하는 게 아니라는 건 생각해 봤어?" 트와일라잇은 애원하기라도 하는 눈빛으로 문댄서를 쳐다보았다. 걱정 때문에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애들 현장학습을 그렇게 많이 보내겠다는데 어떤 학부모가 잠깐이라도 보내 볼까, 생각하겠냐. 그럴 사람이 어디 있겠—"
"히히히... 트와이, 그 좋은 머리를 좀 굴려!" 문댄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꼬마들을 뭐 전쟁터나 비슷한 쓰레기장으로 내모는 거 아니잖아! 이퀘스트리아에 마법을 활용한 물건이 이렇게나 많구나, 하고 직접 가까이서 좀 보게 저 갑갑한 학교 건물은 잠시 치워 버리고 여기저기 다녀볼 수 있게 해줘야 하지 않겠어?"
"너무 큰 생각이고, 실천하기도 너무 비싸. 문댄서." 트와일라잇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기차 타고 가는 시간, 도시와 도시를 건너다니는 시간. 전부 길바닥에 내버리는 시간이야. 그럴 시간에 다양한 마법을 다루는 새 교과서를 파고드는 게 백 배는 나아."
"으어어어어...... 그만 좀 해 둬라, 트와일라잇!" 문댄서가 얼굴을 발굽으로 감싸더니, 트와일라잇을 멍하니 쳐다보며 물었다. "그걸로 세상이 조금이라도 바뀔 것 같아?! 교육이랍시고 글자만 수두룩 빽빽한 책들을 저 어린애들 눈알에 인정사정없이 처박아대는 게 정상이니! 애들이 스스로 배우게 해야지, 재우면 그게 교육이 아니잖아!"
"이번 방과후학교 프로그램의 목적을 잊으면 안 돼! 그렇지 않아?" 트와일라잇이 소리쳤다. "유니콘이든 아니든 마법 교육에서 소외된 어린이들에게 꼭 필요한 지식을 가르쳐 주는 게 우리 목표라고!"
"하염없이 책만 읽힌다고 그게 해결되는 건 아냐, 트와이!" 문댄서가 트와일라잇의 눈앞에서 왔다갔다하며 말했다. "뭐, 좋아. 책 파고드는 걸로 네가 이 정도 성취를 이룬 건 사실이야. 그건 네가 저 미칠 듯한 정보량을 처리하고 감당할 수 있는 머리를 타고나서 그런 거고! 젠장할.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 널 수제자로 받아들이시고 가르치신 것도 그것 때문이고! 저 꼬마들은 어떻지? 하, 걔들 욕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내 말해두겠는데, 걔들 중에 그걸 받아들일 머리를 달고 있는 애들 거의 없어. 십중팔구 이게 뭔 소린가 감도 못 잡는다고!"
"다 애들 앞날 생각해서 이러는 거거든!" 트와일라잇이 얼굴을 구겼다. "요즘 같은 무한경쟁시대에 마법 지식이 얼마나 많이 필요한데! 지식 요구량이 거의 매년 10배씩은 늘어난다고! 나중에 저 애들이 자라서 사회에 내던져지고 나면 세태를 따라잡지 못하는 낙오자가 될지도 모른—"
"좋아, 과장과 날조로 해보자 이거지—"
"그리고—" 트와일라잇이 한 치 흔들림도 없이 단호한 태도로 문댄서를 가리키며 말했다. "프로그램이 막바지에 이르기 전까지는 어디 보낼 계획도 없어! 그 전까진 유명한 유적지나 그런 거 근처에서 노닥거릴 시간 없다구! 문댄서 네가 역사에 능한 것도, 애들한테 역사 가르치려는 것도 다 인정하고 고맙게 생각해. 그래도 좀 합리적으로 가자고. 이해해? 봐봐. 나도 현장학습 필요한 거 인정해. 한 번이면 괜찮아. 딱 한 번! 그 때 위니페그, 갈 수 있어! 지금 당장은 어제 짜놓은 교육과정 얼개를 계속 손보면서 매주 세 번씩 나갈 읽기 숙제 자료는 뭘로 할지, 집에서 풀어 올 문제 20개씩은 어떻게 낼지, 깜짝 퀴즈는 어떻게 낼 것이며 성적에 어떻게 반영할지—"
"어우!" 문댄서가 신음하며 갈기를 쓸어넘겼다. "트와일라잇, 애들은 기계가 아냐. 애들 수준에 맞춰서 생각해!" 그리고는 단호함이 느껴지는 웃음을 지으며 몸을 기울였다. "선생질 시작하고 5년 동안 참 많은 걸 배웠는데, 교과서에 나와 있는 지식을 그대로 애들 머릿속에 쑤셔넣으려고 용 써 봤자 네모 구멍에 동그란 블록 집어넣는 거에 불과하다는 게 가장 큰 깨달음이었어. 조금도 매력적이지 않은 교수법이라고."
"문댄서..." 트와일라잇이 한숨지었다.
문댄서가 목소리를 높였다. "애들은 자기가 감명받아야 따라와! 세상에서 마법이 얼마나 생동감 있고 현실적으로 사용되는지 직접 보여주는 게 칠판에 하염없이 판서질이나 하는 것보다 더 많은 걸 알려 준다니까! 그래서 이 프로그램을 애들이 평생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겨주는 방향으로 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 아니, 그 방향으로 가는 게 맞다는 거야! 억지로 끄집어다 앉혀 봐야 애들 공부 안 해. 하지만 의욕을 만들어 주면 당연히 공부하지! 인생은 살아가는 것 자체로 공부가 되어야지 그게 아니면 아무 가치 없지 않겠어?"
"문댄서,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합리적으로 가자니까! 그걸 못 해 주겠어?!" 트와일라잇이 산처럼 쌓인 노트 더미를 발굽으로 쿵 내리쳤다. "우리 일은 앞으로도 몇 세대 동안 그대로 적용할 수 있게 짜임새 있는 방과후학교 프로그램을 짜주는 거야! 네 급진적인 교육철학의 시험대가 아니라고! 실질적으로 실현 가능한—"
"급진적 교육철학?!" 문댄서가 어이없다는 듯 낄낄 웃었다. "오호, 역시 공주님이 직접 가르친 분은 뭐가 달라도 다른가 봐? 본인이 동의할 수 없는 것들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다니, 귀여운데 그래."
"문댄서..."
"트와일라잇. 나 선생질 해먹은 게 5년을 훌쩍 넘어." 문댄서가 보라색 눈으로 트와일라잇을 노려보았다. 평소 짓고 다니던 웃음은 조금도 얼굴에 남아있지 않았다. "네가 말하는 급진적인 사상이든 아니든, 내가 말하는 건 다 선생질 하면서 배우고 익힌 거야. 머릿속에 꽃밭 차렸냐고 할지 모르지만, 필리델피아 애들한테는 이만한 교수법이 없었어. 포니빌 애들한테도 잘 먹혀들 거야."
"여기가 필리델피아로 보여?" 트와일라잇이 쏘아붙였다. "그쪽에서 먹힌다고 여기서 먹힐 거란 보장은 없어, 문댄서. 솔직히 까고 말할게, 내가 보기에 넌 지금 이걸 장난삼아 하고 있는 것 같아."
"하하하하하하하하..." 문댄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그대로 푹 숙이고 피식 웃었다.
트와일라잇이 얼굴을 구겼다. "이번엔 또 뭐?"
"네가 진짜 이 동네에 오래 처박혀 있긴 했었나 보다." 문댄서는 갈기를 매만지며 트와일라잇을 째려보았다. "촌구석에 오래 처박혀 있더니 너도 이 동네 수준이 됐나 봐."
순간 트와일라잇의 이빨이 번쩍였다. 그녀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잠깐 있어 봐—"
그 때 나는 헛기침했다.
둘이 동시에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둘이 혼란스러워하며 나를 멍하니 쳐다보는 새 달아오른 분위기가 순식간에 식었다.
"어... 네?"
"뭐 용무라도 있으신지?"
나는 조심스레 문간으로 자리를 옮겼다. 래리티가 짜준 스웨터를 입고 오지 말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 채로 요리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 나는 얼마 안 되는 땀방울을 떨어뜨리며 웃어 보였다. "실례했네요. 트와일라잇 스파클이라는 분께서 제 연구과제를 도와주게 되어 있다고 해서 왔거든요. 방문하기엔 적절치 못한 시간이었나요?"
"으음... 네." 트와일라잇이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그런 것 같아요."
"됐고, 이리 들어와요!" 문댄서가 몸짓했다.
트와일라잇이 당황하며 문댄서를 쳐다보았다. "문댄서!" 트와일라잇이 속삭였다.
"뭐?!" 문댄서가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어...우리 지금 이 프로젝트 만지느라 바쁘잖아. 아니야?"
"나이트메어 문의 궁둥짝을 걷어차 쫓아낸 이래로 휴식 같은 건 세상에 없다고 믿게 되기라도 했어? 정신 차려 트와이. 벌써 정오를 훌쩍 넘겼어. 잠깐 쉬자고." 문댄서는 다시 내게 몸짓하며 말했다. "들어와요. 진짜로. 들어와서 자기소개라도—"
"야? 내 말 안 듣지? 벌써 여기 전세라도 놨어?"
"아니, 정확히 말하면..." 문댄서가 트와일라잇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 도서관은 시립 도서관이지. 내가 잘못 아는 게 아니면 너는... 글쎄다, 정확히는 몰라도 아마 사서로 발령받아 온 걸로 아는데? 그러면 뭘 좀 찾아보러 온 사람에게 마땅히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트와일라잇이 발굽을 세차게 휘둘렀다. 트와일라잇은 잔뜩 부루퉁해져선 책을 탁 덮으며 말했다. "그래. 네가 맞다." 트와일라잇은 단조롭고 까칠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도서관이니까. 용도에 맞게 쓰자고."
"그따위 말투 쓰지 마라, 트와일라잇." 문댄서가 이마를 찌푸리고 말했다. "참고 있는 쪽은 이쪽이니까."
"하긴 넌 전부터 한 시간 이상 뭘 진득하게 붙잡고 늘어져 본 적이 없었지." 트와일라잇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별 같잖은 꼴 다 보겠다는 듯 실실거렸다. "스파이크가 옆에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몰라. 내가 머리 싸매고 계획 짜는 동안 스파이크가 어지간한 도서관 사무는 대신 봐 주니까. 넌 그저 여기 붙어서—"
"그게 네 방식이냐? 스파이크한테 힘들고 더러운 일은 다 떠넘기는 거? 네가 공주님 제자로 들어간 이래 스파이크가 항상 너한테 치이고 산다고 생각하는 게 나뿐일 것 같아?"
"스파이크가 하기 싫다고 하는 일이면 안 시키지—"
"걔가 너한테 하기 싫다고 할 수는 있고? 지랄도 정도껏 해라, 트와일라잇. 걔가 처음 알 깨고 나온 날이 아직도 머리에 생생한데, 설마 걔가 네 종놈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 까고 말해서 난 네가 걜 아들처럼 생각하는 줄—"
"됐어, 스파이크 얘긴 그만 해!" 트와일라잇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딱딱거렸다.
"내가 스파이크 얘기 꺼낸 것처럼 얘기하네? 어?" 문댄서가 으르렁거리며 맞받아쳤다. "벌써 까먹으신 거 같은데, 스파이크 얘기는 내가 안 꺼냈어. 네가 시작했지."
"너랑 내가 같이 앉아서 학습계획을 어떻게 짤지 혹시나, 진짜 혹시나 같이 머리 싸매고 생각하는 동안 스파이크가 도서관 사무를 봐 줄 수 있을 거라는 뜻이었지. 애초에 내가 널 왜 불렀는데—"
"어, 저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쯤되니 온몸이 달달달 떨리고 있었다.
문댄서가 헛기침을 하고는 숙련된 솜씨로 표정을 싹 바꾸어 날 보고 웃으며 말했다. "정말 미안하게 됐습니다. 도서관이야 뭐 항상 공공에 열린 기관이죠. 사서 양반은 상하좌우 꽉꽉 막힌 벽창호긴 하지만. 그럼 가실까요. 장서목록 보시고 필요한 자료 집어 주시면 제가 찾아다 드리죠. 그러니까, 그 정도면 덜떨어진 인간들도 할 만한 일이니까요. 그렇죠?"
트와일라잇이 일어나면서 의자가 바닥을 긁었다. 그녀는 의자에서 뛰어내려와 그대로 도서관 밖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문댄서가 트와일라잇의 등 뒤를 멀뚱히 보며 물었다. "넌 또 어딜 바쁘게 가시는데?"
"네 말이 맞다." 트와일라잇이 툴툴댔다. "좀 쉬자."
"세상에 맙소사, 난 그냥—"
"잠시만 조용히 하고 날 좀 냅둬. 문댄서, 제발 좀 그렇게 해. 제발."
"야 트와이! 그러지 마아아아..." 문댄서는 트와일라잇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결국 트와일라잇을 쫓아가기로 마음먹은 듯 자기도 뛰쳐나갔다. "너 대체 왜 그래?! 마음 풀어—"
"아, 그렇잖아도 다 풀렸다마다. 문댄서, 진짜 솔직하게 얘기하는데 나 좀... 글쎄... 뭐라도 좀 읽어야겠다."
"읽다니? 뭘 읽어?"
"몰라! 그냥 책이나 볼 거야! 그게 내 특기잖아?"
"트와일라잇, 진정해. 너 일에 너무 과민반응하는 거라니까..."
"과민반응? 당장 치어릴리도 그렇고! 시장님한테도 중요한 일이야 이거! 글쎄 혹시 또 셀레스티아 공주님께도 중요한 일일지 모르—"
"셀레스티아가 왜 이걸 신경 쓰겠어?! 아니, 대체 무슨 근거로 누구한테도 중요하겠다고 하는 건데?!"
"내가 세상만사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건 다 이유가 있어, 문댄서."
"아 진짜? 뭔데! 듣기나 해보자!"
"유니콘 어린이를 잘 가르치지 못하면 그 애들이—"
친구들의 대화 속에 나는 소외되어 있었다. 조용히 도서관 문을 닫고 나갔기 때문이다. 나는 출입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심장이 마구 뛰었다.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화려한 스웨터로 포장되어 식은땀과 햇빛에 젖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고깃조각이 된 기분이었다. 문틀까지 전달되는 작은 진동에 숨을 쉬기도 버거워지고 있었다. 거기 조금만 더 오래 앉아 있었다가는 죽으리라는 것은 명료했다.
그래서 나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나마 일어나 자리를 떴다. 인후를 틀어막은 응어리의 무게가 너무나 무거웠다.
내 친구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누군가 끔찍한 저주 마법을 들이붓기라도 했단 말인가? 정신에 영향을 주는 마법을 시험해 봤다가 그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는 것일까?
아니.
포니빌 사람들 중 저주를 짊어진 자는 나 하나뿐이다. 적어도 내가 믿어 의심치 않는 사실은 이 하나뿐이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 때문이란 말인가? 끔찍한 상황이 시작된 것은 알았지만, 이 어긋남이 시작된 지점이 어디인지는 슬프게도 나는 알지 못했다. 말 그대로 실마리가 없었다. 어디서부터 수습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그 때 정신을 수습하기를 기도하며, 어쩌면 그래야 한다고 중얼거리며 길을 따라 걸었다. 그들이 남긴 말소리를 따라가니,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둘은 화해한 뒤였다. 저들 사이를 중재할 수 없는 신세가 된 이제, 우리 셋이 다시 한 자리에 모이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구원이란 그리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날 이후 나는 그 둘을 미행하다시피 했다. 도서관에서는 장서를 열람하는 척하면서 그 둘이 되는 대로 커리큘럼을 짜내는 소리를 엿들었다. 마을 번화가에서는 무성의하게 리라를 퉁기며 잔잔한 분위기를 깨뜨리는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중앙 광장 구석에서는 붉은 석양 속에 숨어 더욱 새빨갛게 달아오른 그 둘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악순환이었다. 이것밖에 더 나은 묘사가 없다. 문댄서가 뭔가 급진적으로 느껴질 법한 말을 하면 트와일라잇이 곧장 반박하고 나섰고, 문댄서는 이에 맞서 방어적으로 나오면서 시퍼렇게 날을 세운 말투로 빈정거리면서 트와일라잇의 좋은 성격을 들쑤셔 놓았다. 그러면 지친 트와일라잇이 다른 주제로 말을 돌리면서 문댄서가 더 화를 돋우는 것이었다.
솔직히 어린 시절에 저 둘이 싸운 적이 없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양상이 달랐다. 같이 자던 침실도, 어릴 적 뛰어놀던 길거리도, 캔틀롯 공원과 공원 의자도 저런 말다툼을 본 적이 없었다. 여기는 포니빌이었고 이제 저 둘은 성인이 되었다. 그들은 이제 화가 나면 잉잉 울거나 빽빽대는 대신, 무시무시한 폭풍을 일으켰다.
"연구과제를 내주고 열여덟 페이지 분량으로 보고서를 써서 내게 하자고?!" 문댄서는 건네받은 서류뭉치를 휙휙 넘겨보다가 자기 눈을 못 믿겠다는 듯 소리쳤다. 보라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너... 너..." 문댄서는 거의 구토하기 직전인 사람의 표정으로 트와일라잇을 쳐다보았다. "트와일라잇, 너 진지하게 하는 얘기야?"
"그래." 트와일라잇은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트와일라잇은 내가 리라를 퉁기고 있던 공원 벤치에서 달랑 20피트 떨어진 옆 벤치에 문댄서와 함께 앉아 있었다. 그녀는 학습계획을 적어놓은 노트를 뒤적거리며 말했다. "나 혼자 어젯밤에 학습계획 초안을 짰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진지하게 하는 소리야."
"저걸 하룻밤만에 다 썼다고?!" 문댄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산더미처럼 쌓인 종이뭉치를 뒤지며 말했다. "아니, 그러니까 어제 래리티랑 저녁 먹은 다음에 다 썼다 이거지?"
"어."
"집에 들어왔을 때 열 시였잖아! 너 잠은 자긴 한 거야?!"
"됐어." 트와일라잇은 문댄서를 반쯤 없는 사람 취급하며 노트만 계속 훑어보고 있었다. "그건 상관없잖아. 할 일 다 마쳤으면 그만이지."
"야, 같이 하기로 되어 있던 거 아니였어?!"
"아하, 그랬던가?" 트와일라잇이 보일 듯 말 듯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여전히 문댄서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지금 벌써 몇 시야. 오후 3시인데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만나고만 있잖아."
"그래서 요점이 뭔데?" 문댄서가 말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홱홱 젓고는 으르렁대며 말했다. "분명 이 과제는 우리 같이 하기로 되어 있었다고. 기억은 해? 너랑 내가, 팀으로 하기로 했다고.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너 골내는 걸 풀어 줄 수 있을지 이젠 짐작도 안 가!"
"내가 만들었지만 꽤 괜찮은 연구과제인 것 같아."
"야 트와일라잇..." 문댄서는 어이없다는 듯 무식한 두께를 자랑하는 종이뭉치를 휙휙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너 지금 여덟 살 짜리 애들한테 18페이지짜리 보고서 써 오라고 숙제 내주겠다고 하는 건 알고 있냐! 아오... 좀... 이것보단 쉬운 과제도 있지 않겠어."
"과제를 말하는 거라면, 상당히 압축적으로 잘 만들었다고 생각하는데. 비록..." 트와일라잇의 차가운 대꾸가 그만큼이나 시퍼런 서슬을 세운 채 서서히 흐려져 갔다.
문댄서가 트와일라잇을 노려보며 말했다. "비록 뭐? 혼자 날밤 까면서 한 것 치고는 잘 한 것 같다고? 야, 너 혼자 해 놓고 나 찔리게 하려는 주제에 그럴 생각은 없었다는 듯 순진한 척은 하지 마."
"그럼 내가 어떻게 했어야 했는데?"
"래리티랑 밥 먹고 나서 아, 일이 너무 하고 싶어 미칠 것 같다, 싶었으면 나한테 몇 마디만 했어도—"
"얘기 했거든, 문댄서!" 트와일라잇이 마침내 고개를 홱 돌려 문댄서를 쳐다보았다. 그리 호의적인 눈빛은 아니었다. "하루에만 다섯 번씩은 얘기했지 싶다! 잠깐 앉아서 연구과제 수준이 어느 정도면 적절한지 한번 얘기나 해보자고 내가 몇 번을 얘기했냐고."
"참나, 하루 다섯 번? 그래서 업무 진척도 공유가 이 모양인가?"
"차라리 얘기할 필요조차 없었으면 좋겠다!" 트와일라잇이 쏘아붙였다. "중요한 교육 프로그램 개발 문제 때문에 좀 도와달라고 친구라는 걸 데려다 앉혀 놨더니, 눈에 보이는 사람마다 저녁이나 먹자고 하고 다녀서 일은 일대로 집중 못 하고 앉아 있으니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트와일라잇,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거면 바로 정정해도 되는데, 래리틴 네 친구잖아! 네가 아주 목을 매면서 기다린 대연회에 입고 갈 드레스도 지어 줬고! 만나 보니 사람 되게 괜찮아 보이더만! 난 애초에 이왕 여기 오는 김에 래리티도 그렇고, 네가 새로 사귀었다는 친구들 얼굴이나 한번씩 봤으면 좋겠다 싶었단 말이야!"
"그래서 내가 따로 스케줄 잡아 놓은 거야!" 트와일라잇이 소리쳤다. "이번 주 금요일에 래리티랑 플러터샤이 만나서 저녁이나 하자고 내가 몇십 번을 얘기했냐! 나도 그 날만 목 빼고 기다리고 있다고 얘기했잖아! 근데 정작 해야 하는 일은 어떠냐고! 아직 목요일도 안 됐는데 네가 참을성 없이 막 들쑤시고 다니는 바람에 목표치는커녕 그 근처에도 못 가고 한참 뒤떨어져 있잖아! 네가 필리델피아로 돌아갈 때까지 이제 달랑 2주 반밖에 안 남았다고!"
"2주 반이라—킥—트와이, 너 너무 급하게 생각하는 거 아니냐?"
"너 지금 누구랑 얘기하고 있는지 까먹었나 본데." 트와일라잇이 얼굴을 잔뜩 구기고 말했다. "내가 꽁으로 셀레스티아 공주님 개인 스케줄을 2년 동안이나 관리한 게 아니라고!"
"하하하하......" 문댄서는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웃어댔다.
트와일라잇이 얼굴을 찌푸렸다. "이번엔 또 뭐가 그리 웃겨?"
"공주님 일정을 자기가 관리했었다고 그렇게나 자랑하고 싶어하시는 분이......" 문댄서가 표정을 홱 바꾸어 트와일라잇을 째려보고 말했다. "선생질로 밥 벌어먹고 다니는 누구씨 경력은 지나가던 개만도 못하다고 말씀하시는데 당연히 웃기지."
"으어어어어..." 트와일라잇이 발굽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문댄서..."
"솔직히, 맞잖아!" 문댄서가 공책 더미를 세차게 내리치고 말했다. "지금 이게 애들 목 매달고 죽으라고 보내는 거지 뭐야! 애들이 중학생, 고등학생 정도면 못 할 거 없지, 나도 이해해! 찾아보니까 치어릴리가 애들한테 내준 숙제 중에 가장 분량 많았던 게 뭐였는지 알아? 가족의 날에 관해 2페이지짜리 에세이를 써 오세요, 이거더라!"
"애초에 사고의 범주를 넓혀 주자는 게 목적이잖아! 제대로 된 마법을 배우려거든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게 맞다고!"
"애들을 가르치려는 건지, 아니면 애들이 지치다 못해 죽을 때까지 공부를 강요하려는 건지도 구분 못 해?!" 문댄서가 소리쳤다. "아무리 많아도 5페이지. 그 이상은 용납 못 해."
"5페이지?!"
"귓구멍이 막혔냐?"
"그런 게 어딜 봐서 연구과제야!"
"네가 이러는 것 때문에 아주 돌아버릴 지경이야!" 문댄서는 구역질이 난다는 듯 종이뭉치를 흔들며 소리쳤다. "애들한테 뭘 연구시키는 걸로 제대로 된 마법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개소리라고! 마법은 현실 세계 속 또다른 세계를 탐험하는 과정이고, 창의적인 것이어야—"
"틀렸어!"
"그래, 네가 왜 그러나 한번 보자." 문댄서는 신음하며 눈을 굴렸다. "그래, 네가 마법 전문가이기 때문이겠군."
"맞다 왜!" 트와일라잇이 얼굴을 구겼다. "신중하게 계획하고 실험하는 것, 그리고 연구하고 또 연구하는 게 마법을 배우는 자세야! 애들이 마법이란 마력장을 아무렇게나 가지고 노는 거라고 여기게 되면 어떻게 되겠어. 그런 애들한테 마나를 다루는 법을 가르쳐 줘 봤자 오만에 찌들 대로 찌들어 위험하기 짝이 없는 마법에 관심이나 두는 싹수 노란 애들밖에 더 되겠냐고!"
"쓸데없는 비약은 집어치워..."
"진지하게 하는 말이야, 문댄서!" 트와일라잇의 두 눈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어서, 아무리 봐도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마법을 가르치는 일인데 그걸 아무렇게나 대충 넘기려고 하면 안 돼! 특히 한창 어린 애들은 그런 쪽에 영향받기 쉬우니까!"
"하, 너 어릴 때나 돌이켜보시지. 별의별 실험을 다 하고 다니지 않았냐."
"실험 주제에 관해서 한도 끝도 없이 공부한 다음에나 그랬지! 15페이지짜리 에세이 쓰게 시키는 것도 너무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는데, 난 여덟 살 때 50페이지짜리 보고서도 썼다고! 내가 마법에 재능이 있다는 것도 모를 때 그냥 개판으로 써제낀 게 그 정도였어!"
"야, 트와이. 그 높은... 높은 콧댈...* 뭔 말인지 알지! 나 참, 한두 번 부모님 분재를 작살낸 것도 아닌 분 입에서 이런 소리 나오니 웃겨—"
* 원문은 come off your high (horse), 잘난 척 하지 말아라 정도 되는 뜻입니다. 저는 높은 콧대를 분질러 버리겠다는 식으로 했지만.
"그래서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인데?" 트와일라잇이 맞받아쳤다. "내가 그러는 동안 넌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더라, 문댄서? 내가 한 것의 반만큼이라도 마법 공부를 했으면 진작에—"
"진작에 뭐?" 문댄서가 한심하다는 듯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너처럼 앞뒤 꽉 막힌 벽창호에 책만 들입다 파고들기 좋아하는 자의식 과잉에 불면증에 시달리는 워커홀릭이 됐을 거라고? 포니빌이 앞으로 어떤 동네가 될진 모르겠지만, 여기 애들을 네 미니어처판으로 만들어 놓을 생각이라면 두 번 다신 안 올 거야. 그래도 선생질을 좀 하다 보니 교육과정에 자기 자신을 투영해서 반영하는 것만큼 등신같은 짓거리가 또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는 게 다행이지만."
"너... 어, 어떻게..." 트와일라잇은 충격으로 입을 헤벌리고 말했다. "어떻게 날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어...?" 트와일라잇은 멍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켜 멀어져 가는 문댄서의 뒤를 쳐다보았다. "넌 또 어딜 가는데?"
"발 닿는 대로 간다. 난 걸어다니면서 생각하는 게 편하거든." 문댄서가 툴툴대며 말했다. "혹시 내 나름대로 최종 과제를 어떻게 내줄까 생각해 낼지도 모르지. 그러지 말란 법도 없잖냐? 너도 혼자서 아주 반짝반짝하게 잘 해놨는데."
트와일라잇은 길고 힘없는 한숨을 토해냈다. "문댄서, 잠깐만. 내가 잘못했어. 진짜. 잠깐만... 같이 얘기 좀..."
하지만 문댄서는 이미 멀리 사라진 뒤였다. 트와일라잇은 신음하며 두 발굽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녀 뒤에 앉아 있던 나는 가락을 마저 이어 연주하려는 쓸데없는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 다음 날. 문댄서는 슈가큐브코너의 한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뿔이 부드럽게 빛나며 염동력을 발생시켰다. 문댄서는 종잇장에 섬세하고 화려한 필체로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문댄서는 생기 없는 지루한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문댄서는 한두 번쯤 하품한 뒤,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근처 자리에 앉은 손님들의 잡담 소리라도 들으려는 듯 귀를 쫑긋거렸다.
가게는 차분하고 나직한, 평화로운 대화 소리로 조용했다. 그 모든 평화는 척 보기에도 대단히 화가 난 듯한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문을 거칠게 벌컥 열고 들어와 문댄서가 앉아 있던 테이블로 쿵쿵거리며 다가가는 통에 순식간에 깨져 버렸다. 트와일라잇은 옛 친구의 앞에 노트패드 하나를 쾅 하고 내려놓으며 물었다.
"문댄서, 이게 대체 뭐 하자는 소리야?!" 트와일라잇은 서슬을 시퍼렇게 세우고 노트를 가리키며 윽박질렀다.
문댄서가 한숨지었다. 그리고는 대단하다고밖에 형용할 길이 없는 참을성으로 트와일라잇을 마주보며 싱긋 웃었다. 그것은 뒤이어 날아든 그녀의 대답만큼이나 날카로운 조롱조의 웃음이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아. 1인용 테이블이기는 하지. 그래도 이게 네가 바라던 거 아닌가."
"개소리 집어치워. 이거 얘기야!" 트와일라잇이 노트패드를 홱 가리켰다. "트로팅엄에서 조교를 셋이나 데려오자니. 너 장난해?"
"장난치는 거였으면..." 문댄서가 툴툴대며 대답했다. "리퍼런스를 더 달아서 미주도 빼곡하게 채우고, 그러고도 남으면 클립으로 더 써서 첨부해 놨겠지." 그리고는 눈을 꿈벅거리더니, 본인이 생각하기에는 만족스러웠는지 무기력하게 실실 웃어대는 것이었다.
트와일라잇이 더 화가 난 것은 물론이다. "문댄서. 치어릴리가 외부 인력을 고용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내가 얘기했잖아!"
"현장학습 가는 것보다 훨씬 저렴한데 왜 그러셔? 네가 얼마나 현장학습을 혐오하는지는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데."
"야, 더 해보겠다 이거야 지금?!" 트와일라잇 스파클은 쉬지 않고 몰아붙였다. "일단 수업 계획부터 다 짜 놔야 다음에 뭘 할 수 있나 생각해 보기라도 할 수 있다고 내가 몇 번이나 더 얘기해야 알아듣—" 트와일라잇은 문댄서가 쓰고 있던 편지에 순간 시선을 고정하고는, 말하다 말고 물었다. "이건 또 뭐야?"
"어, 별 거 아냐. 그냥—"
"내가 묻잖아 지금! 누구한테 쓰는 거야 이거?" 트와일라잇은 염동력으로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종잇장을 강제로 잡아뜯다시피 들어올렸다.
"야!" 문댄서는 어이가 없다는 듯 얼굴을 왕창 구기며 말했다. "야 이 도둑놈아! 너 대체 왜 이래?"
"보자..." 트와일라잇은 편짓장을 뜯어보며 말했다. "수신인은 위니페그 지역사회조직 책임자고......" 트와일라잇은 편지를 좀 더 읽어보다가, 충격에 입을 떡 벌리더니 읽던 부분을 그대로 소리내어 읽었다. "위니페그 교육위원회 위원장께 루나 마법박물관 대관을 신청하는 바이오니..." 트와일라잇은 천천히 문댄서를 향해 시선을 옮기며 이마를 잔뜩 찌푸렸다. "너... 결국에는 일을 저지르는구나."
"어어어어..." 문댄서가 눈을 피하며 말했다. "봐봐, 트와일라잇..."
트와일라잇은 불쾌한 눈치를 감추지 않았다. "얘기도 없이 나 몰래 대관을 하시겠다!"
"그냥 그쪽이랑 얘기나 해볼까 싶어서 한 거야..." 문댄서가 얼굴을 붉히며 가게 안을 쭉 훑어보고 말했다. "그 왜 있잖아. 그...... 음...... 내 제안을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까 싶어서—"
"이런 문제를 결정할 땐 같이 결정하기로 되어 있었을 텐데!" 트와일라잇은 목소리가 갈라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식당에서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은 트와일라잇의 눈치를 흘끔흘끔 보았다. "혼자서 결정하지 않겠다고 합의했을 텐데,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생각을 할 수가 있지!"
"좀 열린 마음으로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싶어서 그랬지!"
"그래서 나 몰래 하셨냐?!" 트와일라잇이 문댄서 앞에 편지를 내동댕이치며 말했다. "문댄서, 네가 어떻게 그래?"
무엇인가 문댄서의 눈 위로 스치고 지나갔다. 문댄서는 천천히 쓰던 편지를 구기더니 한쪽으로 집어던지면서 고양이처럼 앙칼진 소리로 말했다. "아니, 내가 어떻게 너 몰래 이런 일을 꾸미겠냐. 트와일라잇." 문댄서는 콧김을 뿜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너머에 서 있는 트와일라잇을 냉혹한 눈길로 노려보았다. 그 둘 사이는 대양이 들어서고도 남을 만큼 멀리 벌어져 있었다. "왜 그럴까? 이퀘스트리아 역사상 그 누구도 너처럼 커다랗고 꽉 들어찬 대가리를 갖고 태어난 놈이 없으니까! 그 대가리를 무슨 수로 피하겠어!"
"아 좀!" 트와일라잇이 눈을 부라렸다. "그런 얘긴 하지—"
"듣기 싫으면 귀 쳐 닫든가!" 문댄서가 으르렁대며 말했다. "그래도 이 얘기는 꼭 해야겠다!" 문댄서는 트와일라잇을 경멸하듯 가리키며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이 동네 와서부터 넌 그냥 골칫거리밖에 안 됐어! 눈엣가시마냥 도저히 못 참아 줄 인간이었다고! 하기야 네 그릇이라고 해 봐야 어깨 위에 떨어진 비듬이나 뭐 그런 것 정도밖에 안 되니 놀랄 일도 아니다만."
"아, 그러셔." 트와일라잇이 같잖다는 듯 낄낄댔다. "살다살다 관심종자한테 설교를 다 듣네."
"그래 뭐, 학교 다닐 때는 그럭저럭 신나게 살기라도 했지!" 문댄서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너처럼 항상 최고 성적만 받으면서 학교 다닌 건 아냐, 그건 인정해! 적어도 너처럼 하루 웬종일 쉬는 날도 없이 별 쓰레기같은 책에 내 머리를 옭아매고 다니지는 않았지만! 왜 그런 것 같아?"
"한번 얘기해 보시지."
"아하, 안 그래도 그러려던 참이다!" 문댄서가 이를 악물며 자기를 가리키고 말했다. "인생이 책 읽고 공부하는 게 다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았으니까 그랬어! 나이 좀 더 먹는다고 왜 재미없게 살아야 하는데! 내 큐티마크가 왜 생겼냐고. 애들 머리에 지식을 주입하는 게 교육이 아니라, 애들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게 교육이다, 깨달으니까 생긴 거 아냐!"
"그러셔서 필리델피아 중부에서도 별 거 아닌 학교에 갇혀 중급 경제학이랑 일반역사 강의나 하시면서 살고 계셔?"
"뭐 임마! 적어도 붙잡을 교편은 있잖아! 안 그래도 매년 조금씩 더 나은 데로 옮기고 있고!"
"더 잘할 수도 있는데 안 하니까 그렇잖아, 문댄서! 처음부터 진지하게 공부하고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지기만 했으면 됐잖아!"
"아이고, 값진 충고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그려!" 문댄서가 낄낄 웃고 말했다. "세상에 공주 마마께 모든 지식을 사사받으신 분께서 이런 하찮은 놈한테 이런 금쪽같은 말씀을 해 주시다니!"
트와일라잇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너 그거 무슨 뜻이야?"
이번에는 케이크 부인이 조용히 홀을 가로질러 와 서로를 째려보는 얼굴 사이에 서 주었다. "흠흠... 저..." 케이크 부인은 잠시 입술을 깨물며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트와일라잇에게 나직하게 속삭였다. "스파클 양? 저기... 어...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스파클 양이랑 친구분 사이의 대화는... 가능하시면 가게 바, 밖에서 좀 나누어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그 말에 트와일라잇은 어느 정도 진정한 듯 보였다. 그녀는 한숨지으며 케이크 부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해요, 사장님." 트와일라잇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장님 말씀이 맞아요. 여기서 이러면 안 되는—"
"아니! 잠깐만요!" 문댄서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새하얀 귀 끝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문댄서는 부들부들 떨리는 발굽으로 트와일라잇 스파클을 가리켜 보이고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트와일라잇은 제 교직 경력을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깎아내리길 정말 좋아하거든요! 그러니 하던 말은 마저 끝내도 괜찮을까요? 자, 어서 네가 날 얼마나 벌레 보듯 하는지, 얼마나 같잖게 생각하고 있는지 네 사랑하고 존경하는 동네 사람들 앞에서 전부 까발려 봐, 트와이!"
트와일라잇은 콧김을 뿜었다. 그녀는 문댄서를 향한 냉랭한 시선 뒤에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들을 숨겨놓으려 용을 쓰고 있었다. "내 잘못이다, 문댄서. 여기서 소란을 피우면 안 되는 거였는데. 도서관 가서 얘기하자. 가서—"
"가서 뭐 어쩌자고? 착한 척 하려 드는 네 꼴같잖은 가식을 또 감상시켜서 아 내가 잘못했나 싶은 죄책감이나 만들자고?"
"손님들, 이제 그만하세요." 케이크 부인이 조심조심 끼어들었다. "자리를 조금만 옮겨 주시면—"
문댄서는 트와일라잇을 꼬나보며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너 몰래 뭘 꾸민 게 뭐가 그렇게 억울해서 그러냐?! 네 그 쓰레기같은 과몰입에 재확인 절차만 없었으면 나 혼자서도 다 해치우고도 남았겠다. 다 네가 중간에서 가로막아서 이렇게 된 거 아니냐고!"
"문댄서, 너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게 하나도 없다?" 트와일라잇은 동정하는 듯 문댄서를 쳐다보며 물었다. "어린 시절에도 넌 항상 충동적이었고, 뭐 하나 진득하게 기다려 본 적도 없지. 그러고 나서는 뭐? 현명한 선택? 그래서, 너희 반 학생들 성취도검사 점수는 어떻게 좀 안녕하시냐, 문댄서? 굳이 대답할 필요는 없어. 내가 확인해 봤으니까."
"아, 그러셨어요—?"
"혹시 그게 네가 이루어낸 성과라고 자랑스러워하는 건 아니겠지? 혹시나 그렇다면 걔들은 불쌍해서 어쩌—"
그 때 문댄서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문댄서가 되받아친 소리가 너무나 사납고 거칠어서 알아들을 수도 없었고, 문댄서가 말 그대로 목제 테이블 위로 뛰어올라가는 소음 때문에 그나마도 가리웠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말 그대로 박치기를 한 채 서로를 보고 으르렁대는 형세가 되었다. 케이크 부인은 그 사이에서 어쩔 줄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가게 전체가 당황한 얼굴들과 휘둥그레진 눈, 덜덜 떠는 꼬마들의 모임이 되었다. 나는......
나는 이미 오 분 전쯤에 리라를 퉁기던 것을 그만둔 참이었다. 두 발굽은 테이블 모서리를 꽉 붙잡고 있었다. 글쎄, 그 때 금이 좀 갔을지도 모르겠다. 두 어깨도 파르르 떨렸다. 무릎도 달달 떨렸고. 나는 다만 그 자리, 그 배경으로 놓인 쓰레기 한 조각으로 남아 있으려고 용을 쓰고 있었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다. 나는 내 역할을 안다. 나는 내 자리가 어디인지도 안다. 그리고 그것은 멀리서 내 친구들을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 감각 없는 몸을 중심으로 온 세상이 빙빙 돌았다.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몸을 일으켜 둘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캔틀롯 근위대보다도 더 큰 용기를 쥐어짠 끝에, 나는 꼭지가 돌 대로 돈 둘 사이에 섰다.
"이봐요—정신들 좀 차려요!" 나는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내 목소리가 가게 벽에 부딪치며 메아리지는 소리가 가게 안에 드리운 침묵의 무게를 말해주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둘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두 분 다 서로 할 말이 많이 쌓이신 것 같은데. 그래도 감히 짐작컨대 두 분 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이따위로 싸움박질이나 벌일 정도로 두 분 관계가 별 거 아닌 건 아닐 거 아니에요?"
"저기요, 저희 일에 굳이 끼어들지 않으셔도—" 트와일라잇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댁은 댁 일이나 신경 쓰셔!" 문댄서는 역시 문댄서였다.
트와일라잇이 얼굴을 찌푸렸다. "야! 네가 꼭지 돌았다고 다른 사람한테 그따위로 막말해도 되—"
"아하, 여기 포니빌이다 이거지?!" 문댄서가 냉소하며 말했다. "제 편 들어주는 사람한테 함부로 말하지 말라—"
"난 누구 편도 아니야, 문댄서!" 나는 곧장 받아쳤다.
그녀는 벙찐 표정으로 나를 이리저리 뜯어보며 말했다. "그쪽이 내 이름을 어떻게 알—"
나는 고개를 돌려 트와일라잇을 쳐다보며 이마를 찌푸렸다. "그쪽도 마찬가지야. 트와일라잇 스파클. 여기서 14개월을 살았으면서 참을성이 얼마나 귀한 덕목인지, 적당한 절충안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직도 모르겠어?"
"나... 그건..." 트와일라잇의 화난 표정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바뀌어 가면서 더욱 구겨졌다. "그쪽이 내가 뭘 배우고 뭘 못 배웠는지 어떻게 알죠? 당신 누군데요."
"우리 똑똑씨가 이제 보니 뭐가 옳고 그른지도 판단할 자리에 계셨나 봐?" 문댄서가 픽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하, 내가 모르긴 몰라도 말이다 트와일라잇, 암만해도 네 똥 닦아주는 사람 같은데!"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는 알겠다 이것들아!" 나는 짜증스럽게 문댄서를 돌아보고 말했다. "누구는 몸만 어른이지 아직도 애고!" 그리고 트와일라잇도 마찬가지로 날 선 시선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다른 누구는 세상만사 더럽게 딱딱하게 굴고!" 마지막으로, 두 앞다리를 조심스레 셋 사이로 들어올렸다. "쉽잖아! 이게 어려워?"
"루나 공주님 맙소사. 이게 무슨 연극놀이나 하자는 것도 아니고..." 문댄서가 신음했다.
"어렵냐고?!" 내가 쏘아붙였다.
"내가 함부로 루나 공주님 성함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트와일라잇이 등 뒤에서 딱딱거렸다.
"내 엄마 노릇 하려고 드는 거 이제 좀 그만두면 안 되냐?!" 문댄서는 곧장 독기 품은 직전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너희 어머님이야 아직도 머리에 선하지! 그 양반 때문에 네가 이 지랄이 난 거 아냐!"
"니네 엄마도 남말할 처지 아니거든!"
"그건 내가 올곧은 학자로 크길 바라셔서 그런 거고!"
"그러셔? 우리 엄만 인생을 즐기라고 가르치셨는데!"
"이것들아... 좀..."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몸을 떨었다. 둘의 싸움은 내 눈앞에서 더 격하고 치열한 것으로 과열되어 가고 있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좀... 진정들 좀 해라. 우리... 아니, 너희 친하게 지냈잖아..."
"저기..." 케이크 부인이 내 쪽으로 가만히 몸을 기울여 속삭이듯 말했다. "그다지 상황이 나아진 것 같지는 않은데요..."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떨었다. 눈동자를 굴려 시야 가장자리를 살폈다. 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더러는 내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듯한 시선으로 언제든 서로를 갈기갈기 찢어 없애 버릴 양 싸워대고 있는 문제의 두 사람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얼음 장막이 내 가슴 속을 뒤덮기라도 한 듯, 지금까지 겪었던 그 어떤 저주가 불러온 한기보다도 냉혹한 추위가 나를 괴롭히고 있었음을 자각한 것도 그때였으니......
트와일라잇과 문댄서, 그리고 나는 어릴 적 둘도 없는 친구였다. 우리의 관계는 돈독해지기도 했다가 냉랭해지기도 했다가를 반복했지만, 우리 셋의 유대 관계는 여전히 강력했었다. 항상 진지한 트와일라잇의 성격은 문댄서의 자유분방한 성격과 대척점에 서 있었다. 그러나 그 정반대의 성격이 정면으로 충돌하지는 않았다. 셀레스티아 공주와 루나 공주를 따라하며 놀다가도 분위기가 영 이상해진다 싶으면 턱수염 스타스월이 마법처럼 나타나 적재적소에 그의 지혜를 발휘하여 두 군왕의 자매가 분별력 있게 행동하도록 다독여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여기는 포니빌이었고 내 두 친구들은 동심의 찬란한 빛을 받은 밝고 즐거웠던 유년기 아래로 드리운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 동심이라는 것도 내 삶, 이 세계, 이 우주 자체에서 영영 사라져 버린 내 침실에서의 나날들과 어둠을 밝히던 손전등 불빛과 함께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변해 있었다.
여기는 포니빌이었고 나는 여기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여기 존재하지 않......
아, 신이시여......
"자, 잠깐만..." 나는 애써 차분한 호흡을 유지하며 덜덜 떨리는 입술을 억누르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트와일라잇... 문댄서... 내 말 좀 들어 봐..."
그들은 듣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내가 뭐라고?
"조금도 성장한 게 없어!" 트와일라잇이 소리쳤다. "뭐든지 그저 자기 생각대로만 하고 싶은 그 바보같은 어린애에서 조금도 달라진 게 없다고! 어릴 땐 어떻게 네 미친 짓거리를 눈감아 줬는지 모르겠는데, 이제 그럴 필요 없겠네!"
"지 마음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꼴통 똑똑이에서 못 벗어난 건 마찬가지거든!" 문댄서가 받아쳤다. 슈가큐브코너 전체가 끝없는 지진에 흔들리는 듯했다. 자신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은 나 하나뿐이었다. "내가 진짜 툭 까놓고 얘기하겠는데, 난 네가 가엾어 죽겠어! 좀 즐기면서 살 수도 있는데 오래 전에 뒈져 나자빠진 늙은이들이 싸질러놓은 먼지 쌓인 고서에, 고대 마법에, 온갖 책에 인생을 저당잡혀 사는 게 사람 사는 거냐!"
"적어도 내 이력서를 채울 정도는 되지! 넌 그 동안 뭘 하셨길래 유세야?"
"네가 진즉에 했어야 할 일을 하고 있었지!" 문댄서가 소리쳤다. "밖으로 나가서! 친구 사귀었다!"
"야! 나는 친구 없는 줄 알아! 좀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마음 터놓고 지내는 법쯤은 나도 배웠어!"
"적어도 내가 너보다는 힘들게 친구 사귀기는 했네!" 문댄서는 순간 산통이 오기라도 한 듯 얼굴을 살짝 떨며 말했다. "세상의 정면으로 나갔다고! 위험 감수해 가면서! 그래 뭐 실수가 있었기는 해. 그것 때문에 조금씩 더 나은 사람이 됐고! 그럼 너는 어떻지?"
"어... 음..."
"넌 어떠냐고?!" 문댄서가 눈을 부라렸다. "그러고 보니 넌 공부를 환장하게 좋아했지! 그럼 어디 그걸로 얼마나 고상한 가치를 손쉽게 얻으셨는지 말씀이나 해보셔. 그러고 나서 조금이라도 더 똑똑해진 척 하라고!"
"이게 지금 뭐하자는 소린데?" 트와일라잇이 지지 않고 소리쳤다.
"못 알아먹는 척 하지 마. 세상 사람 전부가 천국의 원소로 이어진 마법의 인연으로 친구 사귀는 건 아니잖아!"
"조화의 원소거든."
"알 게 뭐야! 신이 됐든 뭐가 됐든 이미 정해져 있던 운명의 결과로 친구 사귄 주제에 다른 사람한테 친구가 어쩌니 하고 판사질하지 말라고!"
그리고 벽력 같은 소음이 퍼졌다. 트와일라잇이 두 발굽으로 테이블을 그대로 내리쳤고, 문댄서가 쓰던 편지가 그 통에 날려 바닥으로 떨어져 내려갔다. 트와일라잇이 콧김을 뿜으며 말했다. "다 때려치워! 꺼져!"
"내가 잘못 들었겠지?" 문댄서가 어이없다는 듯 픽 웃으며 대꾸했다.
"똑똑히 들었잖아! 다, 당장 내 눈 앞에서 꺼져!" 트와일라잇은 온몸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두 눈가에 물기가 번졌고, 목소리는 마구 갈라졌다. "내 친구들 근처에 네가 있다는 것 자체가 싫으니까 꺼지라고!"
"오 호 호우!" 문댄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분히 극적인 동작으로 갈기를 쓸어넘기며 테이블 주변을 서성거리면서 냉소하더니 말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나 같은 버러지가 감히 트와일라잇 선생의 성역인 포니빌의 신성한 대지를 디디고 있다니! 그래, 친구도 손쉽게 얻으신 분이라 그런지 동네 하나 접수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셨나 봅니다! 뭐 그러시다면야, 이 동네 꼬마들이 마법사 과정을 밟아야 하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겠습니다그려! 그 누가 감히 마법의 원소께서 이토록 대가리가 비어 있으리라 생각했겠습니까!"
"빨리... 빨리..." 트와일라잇은 숨을 헐떡이며 창백한 얼굴로 테이블 너머를 향해 공허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제, 제발 사라져..."
"정신 차려, 트와일라잇!" 문댄서가 으르렁대며 말했다. 두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너 수준이 이 모양이었냐! 큰 그림을 보라고!" 문댄서는 주변을 거칠게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일 년 넘게 책만 빡빡하게 들어찬 포니빌 시립도서관에 처박혀서 늘 똑같은 케케묵은 옛날 마법이나 공부하고 뻔하디뻔한 고전 마법이나 연습한 주제에 그딴 소리를 해?!" 문댄서는 순간 구역질을 억누르는 듯한 표정을 하더니 계속 쏘아붙였다. "넌 친구가 뭔지 쥐뿔만큼도 모르잖아! 셀레스티아 공주님이 네 등신같은 소리로 가득찬 쓰레기를 다 받아 주시는 건 그냥 널 애지중지해서 그러는 거라고! 지금까지 늘 그랬듯이! 불세출의 천재 마법사는 무슨, 지랄하지 말라 그래! 넌 그냥... 멍청하기 짝이 없는... 등신 같은... 애새끼야!"
밝은 라벤더 빛 불꽃이 슈가큐브코너 한가운데서 솟아올랐다. 사람들이 다들 깜짝 놀라 움찔했다. 트와일라잇은 문댄서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트와일라잇은 더욱 뜨거운 불똥을 눈에서 튀기며 문댄서를 향해 달려들었다.
문댄서도 마찬가지로 전방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만!" 나는 그 한가운데로 끼어들어 큰 소리로 고함쳤다. 양쪽으로 벌린 앞다리가 둘의 뒷목을 낚아챘다. "두 번 말 안 한다!" 나는 둘이 서로를 쏘아보는 날 선 눈빛을 노려보다가, 기세를 죽이며 한숨지었다. "둘 다, 이제... 그만해."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어쨌든 내 친구인 둘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싸우지 마."
트와일라잇의 거칠어진 숨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두 눈에 시퍼렇게 빛나던 눈빛도 사그라들었고, 그 자리를 뺨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 두 줄기 눈물이 채웠다.
나는 문댄서를 돌아보았다. 문댄서도 마찬가지로 두 눈에 가득했던 노기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 때 문댄서는 가슴에 총탄을 맞기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그 총탄이 관통했는지 내부에 파고들어 박혔는지는 알 수 없었다.
글쎄, 어쩌면 둘 다였을지도 모른다. 트와일라잇은 의자에 무너지듯이 주저앉아 바닥만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문댄서는 자리에서 주춤거리더니 갈기를 매만지다가 몸을 돌려 패배자처럼 슈가큐브코너 출입문을 향하여 걸어갔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심장 뛰는 소리조차 내가 선 자리와 나로부터 서서히 쪼그라들며 사라지는, 아득한 귀뚜라미 소리처럼 들려왔다.
서로를 향한 폭언과 싸움이 끝난 뒤, 오직 파국과 심적 고통만이 남을 뿐 그 누구도 승리할 수 없는 싸움을 벌였음을 양쪽 모두 깨닫고 난 다음에는 으레 이럴 것인가 싶었다. 나는 가게를 나가는 문댄서의 축 처지고 희미해진 발굽 소리를 무시하려 했다. 두 발굽으로 얼굴을 감싸고 조용히 흐느끼는 트와일라잇의 끅끅대는 울음도 듣지 않으려고 나는 무진 애를 썼다.
멍하니 있던 나를 흔들어 깨워 준 것은 케이크 부인이 소멸한 폭풍의 눈에서 조용히 걸음을 옮기는 소리 하나뿐이었다. 내가 얼마나 외로운 존재인지, 내가 얼마나 무기력한지... 나는 그 소리로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영 그럴 것이라는 것도.
다시, 몸이 떨렸다.
나는 몸서리치며 포니빌을 빠져나와 숲 사이로 난 흙길을 걸어 내 사랑스러운 오두막집에 들어섰다. 집에 돌아와 문을 닫은 뒤에도 나는 몸을 멈추지 못하고 끊임없이 사지를 놀리며 헐떡거렸다.
나는 방 안을 빙빙 돌았다. 미친 듯 뛰어대는 심장에 두 눈알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나는 이를 악문 채 난롯가 앞에 멈춰서서 장작을 쌓아둔 불가에 뿔을 겨누었다. 온 세상이 흔들리고 떨리며 굴러다니는 듯했다.
누구인가 비명을 내질렀다. 등에 지고 있던 가방이 벽으로 날아가 부딪쳤다. 속이 뒤틀렸고 숨이 막혔다. 악기들이 와르르 떨어져 내리며 계통 없는 소음을 내질렀다. 플루트는 두 동강나 부러졌고 바이올린은 가느다란 나무 쪼가리로 으깨져 흩어졌다. 나는 부서진 악기들 사이로 나다니며 그 조각들과 나를 이루던 부분들과 아직 더 부서지고 뜯겨나갈 부분이 남아 있던 모든 것들을, 외마디 단발마와 함께 사방으로 걷어차 날려보냈다.
들이마시는 숨에서 피와 땀과 가래톳의 냄새가 났다. 이미 썩어 문드러진 유년기에서 풍겨오는 악취를 짓눌러 죽일 달콤한 향기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버려진 시체에 남은 핏기 없는 상처에 대고 토악질했다. 그 아래에선 침대가 가만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뒷다리를 굽혀 가슴에 안은 채 웅크리고 누웠다. 아직 아름다운 형상을 유지하고 있던 다른 것들까지 부숴놓고 싶지는 않았다. 텁텁한 먼지와 악보가 서로 뒤엉켜선 내 친구들에게 다시 권해보지도 못할 한없이 차가운 비곡의 무의미한 음표를 온몸에 두르고 내 몸 위로 떨어져 내렸다.
열 번째로 두 눈을 꽉 감았다 뜰 때까지도 나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눈물은 또다시 내가 필요할 때 흐르기를 거부했다. 이제 내 몸을 녹여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항상 저주받은 자였고 나는 항상 그 사실에 입각해야만 했다. 루나 공주님이 벼려낸 비수가 다시 내 등을 깊숙히 찌르고 들어온 것이다.
포니빌처럼 낯선 동네의 언저리에서 가만히 지켜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내가 필요로 하지 않는데도, 그렇게 해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도 문댄서는 포니빌에 왔고 내 존재가 남겨놓은 과거의 유산이 이제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내가 소중히 생각했던 그 모든 것들이 앞으로 두 번 다시 밝게 빛날 일도 없을 것이며, 앞으로도 영영 죽은 채 남아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단 하나, 아주 사소한 요소 하나가 결핍되었기 때문이었다.
빠져나간 톱니 하나는 나였다.
나는 두 발굽으로 머리를 감쌌다. 더욱 견디기 어려운 한기가 들이닥쳤다. 이럴 때면 늘 그랬듯, 나는 차라리 모든 감각신경이 마비되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내 소원은 다시 이루어지지 않은 채 버려졌다.
그 누구도 하찮은 목숨이 아니다. 목숨 하나하나는 결국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웅대한 건축물의 주춧돌인 것이다. 따라서 한 사람의 죽음은 그 건물 자체의 붕괴를 가져온다. 이것은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아름다운 비극이고, 자고 깨는 동안 무너져 사라지는 사랑과 아름다움으로 빚어진 장대한 걸작이다. 그 붕괴와 파괴의 순간을 두 눈 똑바로 뜨고 감당해야만 하는 저주받은 자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나는 그 극소수 중 하나...... 아니, 그 극소수란 결국 단 한 명이다. 나는 오랫동안 희망 없이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은, 그리고 지금만큼은, 친구조차 없는 자가 되었다.
나는 몸을 떨며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그 둘의 웃음소리가 어땠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아니었다. 복받은 일이 아니었다.
"실습 때문에 오신 거라면 정말 잘 오신 거에요."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조용히 발을 끌며 내 옆에서 서성거리더니 덧붙였다. "방어 마법은 숙달하려면 아주 섬세한 정신 집중이 필요하거든요. 혼자서...... 쉽게 독학할 만한 마법은 아니죠."
집중하는 데 별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도서관 한복판에 선 채, 투명한 녹색 에너지 반구체를 머리 위로 손쉽게 띄워올렸다. 방어 마법을 사용하는 동안에도 나는 완전히 다른 문제, 즉 도서관을 찾아온 진짜 목적에 온 신경을 쓰고 있었다.
"스파클 씨는 많은 걸 독학으로 익히신 것 같은데요." 나는 선 자리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흐으으음......" 트와일라잇이 보일 듯 말 듯한 콧김을 내뿜었다. 그녀는 차갑게 얼어붙은, 진중한 무표정을 하고 있었다. 트와일라잇은 바닥만 쳐다보며 흐릿한 그림자의 소실점으로 다가갔다. "글쎄요, 아마...... 마법이 적성에 맞았던 게 아닐까요." 트와일라잇은 마른침을 삼키고 계속 말했다. "마법 영역과 일단 한번 접점을 만들었다고 해도, 거기에 애착을 갖지 않는다면 하나도 소용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트와일라잇은 멍하니 눈을 꿈벅이며 바닥을 발굽 끝으로 긁으며 말을 마쳤다. "애착을 갖기는 힘들지만, 가치있는 도전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는 입술을 씹었다.
어둑어둑한 도서관 저편에 서 있는 트와일라잇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느라 방어막에는 거의 신경조차 쓰지 못했다. 트와일라잇이 근처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오후의 햇빛 속에 떠다니며 춤추는 먼지의 한 부분처럼 보였다.
"글쎄요, 이런 말 해도 되나 싶기는 한데." 나는 웃어 보이려고 애쓰며 말했다. 그때는 트와일라잇보다도 내가 더 비감에 깊이 잠겨 있는 것처럼 보였으리라. "지금 제가 배우는 입장이기는 하지만, 그쪽도 최근에 마음고생 꽤나 하신 것 같은데요."
트와일라잇은 멍하니 눈만 깜박였다. 그리고 천천히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고생 한 번 안 하고 마법을 숙달할 수는 없는 법이죠."
"그래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근데, 마법이 세상 전부일까요?"
트와일라잇은 대답을 하려는지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한참을 머뭇거리고 쭈뼛거리다가 결국 말했다. "아까보단 쉬운 질문이군요. 마법이라. 한때는 그게 정말 세상 전부인 줄 알았어요." 트와일라잇은 몸 안에서 올라오는 나약한 소리를 짓눌러 죽이며 말했다. "혼자 쉴새없이 마법이론 학술서를 읽고 공부하고 연구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던 날들이 있었죠. 그 땐...... 세상 일이 그렇게 복잡하지 않았고 그저 행복하기만 했어요. 공감하실지는 잘 모르겠지만, 고독이라는 게 생각보다 그렇게 나쁜 건 아니었죠."
그쯤 되니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방어막이 그 자리에서 흩어져 사라졌다. 여덟 번째 비곡도 더는 무섭지 않았다. "아, 트와일라잇......" 나는 괴롭고 나직한 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 '이방인'이 트와일라잇을 향해 몇 걸음을 떼기도 전에......
누군가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트와일라잇은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들어오세요."
이윽고 문 너머에서 내방인이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트와일라잇만큼이나 크게 놀랐다. 슈가큐브코너에서 있었던 사고 이후 이틀이 지났는데, 문댄서가 아직 포니빌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문댄서는 트와일라잇이 뭐라 할 틈도 없이 말했다.
"못 가. 아직은. 그... 아직 할 말이 남았어..." 문댄서는 말을 멈추고 눈을 깜박이더니 나를 쳐다보았다. 문댄서의 입가에는 아주 약간의 웃음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완벽한 이방인의 표정을 하고 문댄서를 마주보았다. "아. 어...... 실례했습니다."
"아뇨... 저... 음..." 나는 움찔했다. 그 누구의 이목도 끌지 않는다는 것의 진가를 나는 알고 있었다. 그 때 그 순간은 마치 일어나기를 기다리고만 있던 어긋남처럼 느껴졌다. 나는 트와일라잇이 내 옆에 있어주려는 것보다 더 절박한 심정으로 트와일라잇의 옆에 있어야 했다. 그럼 그 때는 어땠을까? 문댄서가 그 자리에 있는데? "아무래도 실례는 제가 해야 할 것 같아서요."
트와일라잇이 고개를 돌려 나를 곁눈질하며 말했다. "하트스트링스 씨......?"
"아이고, 이거 진즉에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나는 공허한 미소를 지으며 가방을 들쳐메고 말했다. "연주 교습이 잡혀 있었거든요. 두 시간짜리요. 후브스 선생님네 딸내미요. 그... 이름이 뭐였죠? 디즈니Disney였나?"
"딩키요?"
"아, 맞아요. 그 녀석 되게 똑똑하죠. 이제 그... 어... 플루트 연주법을 가르쳐 주러 가야 해요. 스파클 씨, 시간 내주셔서 고마워요." 나는 그 때 막 자리에서 몸을 빼고 있었지만, 트와일라잇이나 문댄서의 시야각 밖에서는 이미 벗어난 뒤였다. 둘은 서로만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서로의 모습이 비친 두 사람의 눈에는 그 어떤 악의도 없었고, 오직 거대하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공허감만 드러나 있었다. 나는 그것이 다행스러우면서도 혼란스러웠다.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그것은 아주 좋든지 아주 나쁜 것, 혹은 둘 다일 수도 있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랬으므로, 나는 가능한 조용히 창문 하나를 슬쩍 염동력으로 열어두고 정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나는 밖으로 나와 커다란 나무둥치의 모습을 한 도서관 건물에 찰싹 달라붙었다. 지나다니던 동네 사람들의 눈에 비치지 않도록 완전히 몸을 가린 후에, 나는 건물 외벽을 따라 쪼그리고 기어가 내가 열어두고 나온 창문 밑에 자라나 있던 수풀 뒤에 몸을 숨겼다.
거기 숨어 있자니 둘이서 나누는 나직한 대화 소리가 아주 잘 들렸다. 나는 혼자서 몸을 떨며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난 그... 음... 문댄서 네가..."
"지금쯤이면 여길 떴을 줄 알았다고?"
"으음... 어..."
"안 그래도 그럴 참이야. 바로 다음 차편으로 필리델피아로 돌아갈 테니까. 그래도 내가 아까 얘기했던 거 같은데,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르기는 해야 했어. 어쨌든 그게 예의 아니겠냐..."
"아마 직접 얼굴 보고, 학습지도 계획 작성에서 발 빼겠다고 얘기하러 왔겠지."
"이열, 너 진짜 뭐든지 다 아나 보다. 아니야, 트와일라잇?"
"문댄서..."
"알아! 미안해! 난... 난 그냥..."
그리고 쥐죽은 듯 잠시 정적이 흘렀다.
마침내 문댄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안 미안해. 이게 더 맞는 표현이겠다. 하나도 안 미안해. 미안한 척 같은 것도 못 하겠어. 직접 대면해서 들은 말이 다 짐작하고 있었다는 투라니. 내가 가장 서글픈 게 뭔지 알겠어? 네 얘기 들을 때면 항상 그랬어. 그것밖에 느낀 게 없어. 내 가장 오래된 기억, 그러니까 내 어린 시절 기억을 더듬어 봐도 네가 항상 시도 때도 없이 잘난 척하면서 내가 뭐 잘못 말한 거 있으면 바로 고치려고 들고, 내가 무슨 짓, 무슨 말을 하든 그게 얼마나 잘못된 건가 따박따박 지적질이나 하는 그 강박 증세, 또—"
"어린애밖에 안 되던 네가 그걸 어떻게 참아 넘겼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지 않아? 왜 그걸 다 감수하고 참아 넘겼는지, 왜 계속 어울려 다녔는지, 왜 같이 놀고 같이 등교했었는지 하나도 모르겠는 거 아냐?"
"글쎄... 내가 쓸데없이 열내는 걸 막아 줘서 그런 거 아닐까."
"그러면 그것 때문에 온 거라고 봐도 될까?"
"하...... 어떻게? 내 얼굴에 대고 네가 쏟아낸 말들을 똑같이 주워섬기는 걸로 될까 그게? 아니면 즐거운 시간을 보내러 간 곳에서 날 다시 몰아세우는 걸로 그게 될까? 몸만 큰 어린애 받아 주는 건 더 못 하겠다고 하지 않았냐. 내가 나잇값 못한다 싶으면서 그게 되겠어? 게을러 터지고 멍청하고 세상만사 그저 속 편하게 살려고만 한다고 생각하는데—"
"네가 평소에 어떻게 보이는지 생각해 본 적은 있어, 문댄서? 네 입에서 떨어지는 말이 다른 사람한테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는 생각해 봤어?"
"트와일라잇 네가 그 상처를 자초한다는 건 알고 하는 소리냐?"
다시, 아무 말도 없었다. 얼마간 들리는 소리라고는 그 둘이 발굽으로 바닥을 긁어대는 소리뿐이었다. 잔향으로 추측컨대, 저 둘 사이의 간극이 우주의 폭처럼 넓어졌다고밖에는 할 수 없었다.
"포니빌에 온 건 실수였어, 트와이. 날 탓해야지 누굴 탓하겠냐. 인생이 뭐 그런 거지. 등신같은 짓을 벌인 다음에 뭐 하나 배우고, 다시 등신같은 짓을 벌이고 또 배우기를 반복하는 거 아니겠냐. 아마 이건 너랑 내가 공유하는 유일한 생각일 거다."
"문댄서, 그만—"
"그리고 날 어떻게 달래 보겠다는 그따위 생각은 집어치워! 그걸로 대체 뭘 어쩔 생각인데? 내 머릿속에 뭐 개념이라도 주입할 생각인가? 그런 짓거리 하는 것 자체가 우리 둘에게 얼마나 곤욕인지 알 거 아냐? 트와일라잇 너랑 같은 방에 있으면 무슨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아. 아주 조금이라도 금 가는 소리만 났다 하면 귀에서 피가 날 지경으로 설교를 들어야 해. 대체 무슨 소릴 해야 네가 눈이 뒤집혀서 날 조져놓지 않을까 생각만 하면 바로 토 쏠린다고."
"내가 그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다 통제해야 성에 차는 사람 같아? 야, 동네 사람들 반이 너처럼 막나가고 통제 불능이 아닌 이상—"
"그러면 트와일라잇 넌 나머지 반이랑 어울려 다니겠지!" 문댄서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대체 왜 나 같은 종자들은 못 견뎌하는 건데, 왜?"
말이 끝나고 내려앉은 침묵은 상처에 소금을 뿌린 것처럼 쓰라렸다.
문댄서는 울먹이다가, 마침내 떨리는 목소리로 토혈하듯 말했다. "솔직히 말할게, 트와일라잇. 너 때문에 내 뿔을 부러뜨려 버리고 싶었던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셀 수조차 없어. 하지만 그럴 배짱은 없었지...... 그저 가슴 속에 묻어두고 삭일 생각밖에 없었다고! 처음부터 미쳐 돌아갔단 말이야......"
문댄서는 백색소음의 광대한 공허 속으로 흑, 하고 훌쩍거렸다. 트와일라잇이 힘 빠진 어조로 말했다.
"항상... 우리 사이는 항상 이랬잖아. 그렇잖아?" 트와일라잇이 메어 오는 목구멍 너머로 침을 삼키어 목젖이 출렁거리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어릴 때부터 우린 항상 이랬었어. 그땐 어떻게 해결했었지? 초등학교 들어가서까지도 우리 사이 좋았었잖아. 어떻게 그랬었지?"
문댄서가 킥 웃는 소리가 들렸다. 화살 꽂힌 자리처럼, 축축한 웃음이었다. "글쎄다, 트와일라잇...... 어린애들이 싸워 봤자 훨씬 빨리 회복해서 그러지 않을까?" 문댄서가 마지막으로 훌쩍이고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못할 것 같아. 영영 그럴 수 없겠지. 그냥... 그러는 것 자체가 바보짓이잖아. 그게 바보짓이란 건 나도, 너도 알고 있잖아."
"하지만—"
"우린 서로를 인정할 수 없어. 절대로 그럴 수 없겠지. 무엇 때문에......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지도 이젠 알기 싫다."
트와일라잇이 기나긴 숨을 들이마셨다. 트와일라잇이 발을 질질 끌며 걷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문댄서에게서 멀리 떨어졌음을 나는 알았다. "그래, 결국 여기까지구나?"
"그래, 트와이. 거의 완전히 그렇지."
"난... 우리 다시... 그게..." 트와일라잇은 그때 그녀가 짓고 있을 표정이 그러했듯이, 말을 더듬었다. "그래도 편지할게. 편지라도 주고받으면...... 어떻게 사는지는 알고 지낼 거 아냐. 적어도 각자 어떻게 사는지 정도는 알고 지낼 수 있—"
"트와일라잇 너는 편지를 쓰고 싶을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그 편지를 읽고 싶으리란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잖아?"
문댄서가 돌아서서 도서관 출입문을 열 때까지 둘은 다시 아무 말도 없었다. 문댄서는 문지방 한가운데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문댄서는 도서관 밖과 안에 걸친 자리에서 말했다. 그 말은 왠지 비현실적으로 아름답게 느껴졌다. 나는 그 때 트와일라잇의 인생에서 영영 떠나간 것이 무엇인지 대강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트와일라잇. 여기서도 혼자는 아니잖냐. 널 참아줄 수 있는 친구들을 사귀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적어도 나보다는 심지가 굳고 강인한 사람들이니 그렇겠지. 너 정도면 친구도 그 정도는 되어야지. 진짜야. 걔들이랑은 사이좋게 지내라."
"너도 큰 실수 하지 말고 잘 지내."
문댄서가 순간 움찔했다. 당장 뭐라고 받아치려고 했던 것 같지만, 1절과 2절이 없는 노래에 후렴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내 그만두었다. 문댄서는 트와일라잇의 거처를 순식간에 빠져나와 마을을 가로질러 날쌔게 달려갔다. 문댄서의 등 뒤에서 도서관 문이 닫혔다. 트와일라잇이 뭐라고 떨리는 소리로 말한 것 같았다. 확실한 것은 아니다. 나 또한 급하게 문댄서를 따라 달려갔으니까.
이십 분쯤이 지난 뒤, 나는 중앙철도역 벤치에 앉아 있던 문댄서를 발견했다. 포개놓은 다리 옆에 가방 하나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문댄서는 기차를 기다리며 동쪽을 향해 쓸쓸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 기차가 오면 문댄서는 집을 떠나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말을 붙이기는 해야 했는데, 어떻게 말을 붙여야 할지는 확실치 않았다. 인생에 마지막 기회란 항상 있기 마련이고, 그것 중 어느 하나 그냥 내버려도 되는 것은 없다.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마음 가는 대로 해보기로 하고, 나는 문댄서의 옆자리로 다가서며 말을 걸었다. "필리델피아 가시나 봐요?"
문댄서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는 나를 쳐다보며 낯익었지만, 텅 빈 미소를 지었다. "네. 이웃지간에 인정이 가득한 동네죠. 이웃집 갔다가 옆집 가고 또 옆집 가고 하다 보면 동네를 다 돌아다니게 된다니까요." 문댄서는 무거운 한숨을 토해내며 발굽으로 얼굴을 감쌌다. "오늘따라 말이 잘 안 나오네요. 재미없었으면 미안해요."
"뭐 돈 내고 구경하러 온 것도 아닌데요."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문댄서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자리에 올라앉았다. "저는 그... 음... 메인해튼에 가 보려고요. 빅 애플Big Apple이란 게 먹을 수 있는 그건가 궁금했거든요."
* Big Apple : 뉴욕 시를 이르는 다른 명칭. 맨해튼Manhattan은 뉴욕 시 내부의 섬.
"저도 거기서 좀 있어 봤죠. 없는 거 없이 꽉 들어찬 동네긴 해요." 문댄서가 동쪽 지평선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도 그게 애플소스로 들어찬 동네는 아니지만."
나는 한쪽 발굽으로 갈기를 쓸며 문댄서와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당장이라도 문댄서가 타고 갈 기차가 나타나지는 않을까 싶어 나는 두려웠고, 심장이 그에 맞춰 마구 두근댔다. "부럽네요. 전 앞으로 몇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해서요. 필리델피아 가는 차는 거의 다 온 거 같은데."
"그런 거 같나요? 왜죠?"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거든요. 포니빌이 그렇게 골치아픈 동네인 줄은 몰랐는데."
"아...... 진작에 그럴 거라 생각했어야 했는데......" 문댄서는 몇 마디를 더 하려는 듯 보였지만, 아픈 기억이 떠오른 머리는 입술 밖으로 다음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나는 문댄서를, 그 흰 솜털과 라벤더색 눈동자와 새빨간 갈기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메어차르트Marezart의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트와일라잇은 가족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한 노부인에 관한 이야기가 적힌 두툼한 고서를 우리에게 읽어주는 동안 나는 문댄서의 갈기를 땋아주던 옛날이 생각났다.
"전 친구 만나러 왔거든요." 나는 말했다. 문댄서는 늘 그렇듯 문댄서였다. 나는 문댄서와 같이 있을 수 있는 최후의 순간이라도 본래의 나대로 행동하기로 마음먹고 말했다. "처음 기대한 것보다도 더 좋더라고요."
"하..." 문댄서가 시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쪽도 그래서 왔어요? 하긴, 사람들 생각이 다 거기서 거기죠. 성함이......"
"이름이라..." 나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나는 내가 말하려던 말을 뱉어내는 것처럼 힘겹게 웃으며 말했다. "라이라라고 불러요."
"저도 친구 만나러 왔거든요, 라이라 씨. 어린 시절 친구죠." 문댄서가 말했다. 시선은 여전히 동쪽 지평선을 향해 있었다. 문댄서는 계속 나지막하게 말했다. "트와일라잇 스파클이란 애에요. 동네에서는 유명인사지요. 아마 들어 보셨을지도 모르겠어요."
"듣는다는 것도 사실 저한테 얘기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 들을 수 있는 거라서."
"하하...... 걔랑 똑 닮은 말투네요..." 문댄서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런데도 그렇게 잘난 척 하는 느낌은 별로 없어요."
"잘난 척요?"
"으으...... 그런 뜻이 아니라..." 문댄서는 한쪽 발굽으로 얼굴을 감싸며 신음했다. "그 녀석이랑 뭘 좀 같이 하려고 왔었어요. 마지막으로 본 지도 아주, 아주 오래 전 일인데 말이죠. 글쎄, 세월이 무섭기는 무섭더라고요. 기억을 지워놓는다고 해야 하나..."
"어떤 기억을 말씀하시는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문댄서가 마른침을 삼켰다. "짜증났던 기억. 속 터졌던 기억. 서로 집에 놀러가서 하룻밤 자고 오기보다는 싸움박질이나 벌이던 게 더 편했던 지지배들이 쉴새없이 투닥거리면서 화만 냈던 기억, 뭐 그런 거죠."
나는 앉은 자리에서 꼬물거리며 가만히 물었다. "애들이 뭐 가끔씩 괜히 문제를 들쑤셔서 일을 크게 벌이는 건 일상다반사 아닌가요?"
"그건 맞아요. 하지만 그것도 세월이 지나면서 서서히 흐릿해지죠. 뭐 그게 일반적인 거긴 하지만. 트와일라잇과 제 관계는......" 문댄서는 잠시 말을 멈추고 입술을 깨물며 나를 보고 말했다. "그 녀석은 너무 빨리 철든 것 같단 말이죠. 그게 뭐 잘못된 건 아니긴 해요. 꼬마 주제에 벌써부터 공부벌레 똑똑이가 된 것뿐이니까. 저는......" 문댄서는 다시 시선을 돌려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참혹한 사실을 직면하는 것 같았다. 눈가가 젖어들었다. "그 녀석 말이 맞네요."
"흠?"
"트와일라잇 말이 맞아요..." 문댄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문댄서는 놀라울 정도의 참을성으로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저야 뭐 어른이 되어서도 아직 애나 다름없으니까. 그래도..." 문댄서는 코를 훌쩍이면서도 보다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으며 저물어 가는 오후의 햇살을 쳐다보고 표정을 구겼다. "저도 성장할 수밖에 없다는 건 그 녀석이 한 번도 알아준 적이 없거든요. 트와일라잇은 저랑 달리 세상 속으로 나가 본 적이 없죠. 저는 어릴 적부터 그랬고요. 걔가 공주님 슬하에서 무지막지하게 공부하면서 마법의 비밀을 탐구하는 동안 저는 이퀘스트리아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현실이 어떤지 가까이서 들여다보았어요. 결국 어려운 길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지만, 그 덕에 제가 바라던 대로의 인간상으로는 더 빨리 성장할 수 있었지요. 그러니까..." 문댄서는 희미하게 웃으며 발굽장난을 하고 있던 두 앞다리를 내려다보고 말했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어요. 몸만 큰 어린애라고 해도 전 그게 좋아요. 무거운 책임 같은 거 없이 즐기면서, 가끔은 멍청하게 사는 게 좋아요. 인생이란 게 그렇잖아요. 한 순간을 기억하려 잠시 멈추지 않으면 순식간에 희미해지죠. 그래서 그래요."
문댄서는 몸이 떨리는 걸 억누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는 나를 쳐다보았다.
"아마 그래서 선생이 되기로 생각한 게 아닐까 싶네요." 문댄서가 말했다. "어린애들이 바글바글한 편이 좋았거든요. 제 옆에 있는 꼬마들이 매일매일 어떤 사람으로 꽃을 피우고 있는지 보고 싶었어요. 지원동기가 그게 뭐냐 싶지 않아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조금도."
"그리고 트와일라잇은......" 문댄서가 철도역 저편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포니빌의 커다란 나무집을 쳐다보았다. 문댄서의 입가가 파르르 떨리며 두 눈에 물기가 맺혔다. "이렇게 좋은 동네에 살고, 굉장한 것들로 가득한 자리에 사는데, 트-트와일라잇 그 녀석은 알까요? 정말로, 진심으로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을까요?" 문댄서는 목소리가 갈라지기 시작할 즈음에 침을 삼키고 계속 말했다. "전 거기 동의 안 해요. 너무 어린 나이에 철이 들다 보니 잠시 몇 걸음 뒤로 물러나서...... 잠시 쉬는 게 무엇인지, 살아 있음이 무엇인지 되돌아보는 기쁨을, 그 즐거움을 얻으려 하질 않는다는 걸 아마 걔 스스로도 모를 거에요. 그게... 그 모든 게... 그렇게 피땀 흘려 얻어내야만 할 정도로 가치있는 게 아니라는 걸 스스로 깨닫기 전에는 책에 박은 머리를 뺄 일이 없을 거고, 올라앉은 높은 의자에서 내려올 일도 없겠죠......"
"혹시......" 나는 용기를 내 물었다. "......누가 그 즐거움을 알려 줄 수 있지 않을까요?"
문댄서는 눈을 꽉 감고 말했다. "저는 그러지 못했어요."
나는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았다.
묻지 않은 질문에 문댄서가 답했다. "그게......" 문댄서는 다시 훌쩍이며 괴로운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려고 했었어요. 얼마 안 되는 시간이기는 했지만, 두 번 다시 똑같은 짓 하고 싶진 않네요. 저도 나이 먹을 만큼은 먹었고 이제는 알아요. 트와일라잇이랑 같은 자리에 있다고 해도, 저야 뭐 오래 살아 봤자 결국에는 죽겠지만 걘 공주님이랑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잖아요. 자기의 필멸성을 자각하더라도 이미 때는 늦은 뒤일 테니, 본인에게나 주변 사람들에게나 비극이지요." 문댄서는 몸을 떨며 눈가를 문질러 닦았다. "가끔씩은, 아직 그럴 힘이 남아 있을 때, 그리고 아직 상실의 고통이 덜할 때 보내주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멀리서 경적 소리가 들려왔다. 지평선 쪽을 바라보고 난 뒤, 울고 싶은 사람은 문댄서가 아니라 내가 되었다. 문댄서가 타고 갈 기차가 지평선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문댄서는 이미 일어서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을 한 가락 만가에 담아 기억하고 싶었지만, 입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도, 무엇을 잃을 것이고 무엇을 지킬 것인지 정도는 아니까요." 문댄서가 가방을 들쳐메며 철갑을 두른 듯 당당한 미소를 지었다. "저를 기다리는 애들이 있고, 할 일도 남아 있잖아요." 문댄서가 짧게 킥킥댔다. "그렇지, 아직 남은 길 함께 걸어 줄 잘빠진 남자도 하나 있었군요." 문댄서가 잠시 고개를 쳐들었다. "아직 남아 있는 것들이 있어요. 더 중요한 사실은, 제게 남은 것들이 제가 바라마는 것들이라는 것이고요."
그 때 나는 온 힘을 다해 울음을 참고 있었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 정거장에 들어오는 열차의 모습에서 애써 시선을 돌려놓았다. 설마 이런 순간조차 이처럼 소란스럽고 불쾌한 소리에 뒤덮일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우리 사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증기와, 공회전하는 엔진의 소음 위로 내가 소리높여 외치는 말과 함께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입김은 다르지 않았다.
"앞으로 굉장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 거에요. 트와일라잇이란 분에게도 그렇고."
"과거는 과거에 묻어두는 법이죠. 저는 미래를 살기로 결정했는걸요. 항상 그랬지만. 이제야 제 선택을 한 번 더 곱씹어볼 필요가 없어졌네요."
"지금까지 해 온 모든 것들이 미래를 위한 것이길 바랍니다. 그..." 나는 그렇게 애원했다. 시선이 흐려졌다. 이름은 이미 알고 있다. 그 이름을 얼마나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저, 내 전부를 빌어, 마지막으로 그녀 자신의 입으로 듣기만을 바랐다.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문댄서는 그렇게 해주었다. 윙크를 얹은 미소와,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아서 말해주었다. "문댄서에요. 혹여나 언제고 필리델피아가 전부 홀라당 불타 없어졌다는 기사가 나거든, 문댄서 이 여자가 드디어 일을 저질렀구나 생각하시면 돼요."
세상에 깔리는 어스름이 포니빌에도 검은 장막을 드리웠다. 트와일라잇 스파클은 슈가큐브코너 한쪽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평소대로라면 자리 털고 일어났을 시간이었지만, 그런 것에는 별 관심도 없었던 모양이다. 이틀 전 바로 그 자리에서 다분히 극적인 사건이 있었지만, 동네 사람들은 트와일라잇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 가운데 딱 한 명이 트와일라잇이 앉은 자리로 다가섰다. 나는 평소처럼 가식을 떨어댈 마음의 준비를 하며 트와일라잇 앞에서 얼마간 어물거리다가, 조금 전에 영영 잃어버리고야 만 친구의 목소리를 문득 떠올렸다. 가식을 떨려 했다니, 말도 안 되는 헛짓거리를 하려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흠흠. 저... 스파클 씨 되시죠?"
트와일라잇은 신중하게 읽어 내려가고 있던 종이뭉치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흠?" 트와일라잇은 개꿈에서 깨기라도 한 것처럼 멍한 표정이었다. "아, 죄송해요.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전 하트스트링스라고 하는데, 혹시... 으음..." 나는 당혹스러운 척하며 말했다. "아이고 참. 지금은 퇴근하신 거죠? 그럼 도서관 관련 문의는 지금은 하면 안 되겠네요......"
"아뇨, 편하게 말씀하세요......" 트와일라잇은 최대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포니빌이나, 연구에 매진하는 분들을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기꺼이 도와 드릴 수 있으니까요.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에요. 마법을 공부하고 싶은데 혹시...... 개인지도를 해 주실 수 있으실까 여쭤보려고요."
"아. 그...... 하하..." 트와일라잇은 기나긴 한숨을 토해내며 시무룩한 시선으로 자기 앞에 있던 테이블 위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게...... 제가 누굴 가르칠 자격이 있는 건 아니라서요."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그건... 어... 그건 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동네 사람들은 입을 모아서 마법의 원소이자—"
"그러니까... 정말로 마법을 배우고 싶으신 거라면야 저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가, 가르쳐 드리기는 할 수 있지만..."
나는 천천히 침을 삼켰다. 깜박이는 눈꺼풀이 드리우는 어둠 너머로 열차가 천천히 멀어져 갔다. 나는 친구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제가 때를 잘못 맞춰 왔나요? 그게... 기분이 별로이신 것 같은데."
"예전보단 안 좋은 것 같긴 해요." 트와일라잇이 웅얼거렸다. "그래도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여기가 단초였다. 나는 빙긋 웃어 보이며 부드러운 태도로 말했다. 말했다기보다는 애원이었다. "저는 걱정된다는 말은 한 마디도 쓰지 않았는데요?"
트와일라잇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두 눈동자가 어린애 같은 요구로 반짝이다가, 어느샌가 다시 성인의 퀭한 눈으로 바뀌었다. 그렇기는 했어도, 무엇인가 부드럽고 진심어린 느낌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죽마고우와 작별한 참이라 그래요. 학교에서 운영할 학습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있으니 여기 와서 절 좀 도와 달라고 부탁했죠. 그런데... 지난 며칠 동안 저희가 한 거라고는 눈만 뜨면 싸워대고 다퉈대는 것의 연속이었어요. 전에는 한 번도......" 트와일라잇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고뇌로 가득한 시선을 뚝 떨구고 말했다. "그런 식으로 잘못된 접근을 한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걔뿐만이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그랬던 기억은 없거든요. 어려서 같이 어울려 다니던 시절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되어 버렸어요."
나는 천천히 트와일라잇을 마주보고 앉아 테이블에 두 앞다리를 포개놓고 말했다. "글쎄... 어쩌면 세월이 사람을 최악의 방향으로 바꿔놓는 것일지도 모르죠?"
트와일라잇은 마른침을 삼키고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런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요. 우리는 항상 본질적으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우리 그 자체라고 생각해요. 그저 자신을 표현하는 정도를 달리할 뿐이라고요. 이 친구, 아니면 제가 친구라고 생각했던 한 여자는 제 옆에 있으면서 항상 제 들러리에 불과했었을 거에요. 이제서야 그걸 깨달은 거죠." 트와일라잇은 침을 삼키고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늘어뜨렸다. "너무 바보 같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요......"
나는 안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결말이 안 좋은 관계란 늘 있잖아요. 너무 마음 쓰지 않으셨으면 좋겠—"
"맞아요. 별로 신경 안 써요."
"뭘 신경 안 쓴다고요?"
트와일라잇이 나를 올려다보고 말했다. "그렇게 마음 쓰이지 않는다고요." 트와일라잇은 마른침을 삼키며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 "그러니까...... 제 인생에서 그 녀석이 영영 가 버린 게 그렇게 아픈 건 아니라는 거에요. 뭔가를 별것도 아닌 이유로 잃어버리는 것도 마찬가지로, 별로 아프진 않아요. 그러니까......" 트와일라잇이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트와일라잇을 빤히 보며 물었다. "어떤 거죠, 스파클 씨?"
트와일라잇은 축 처진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인생 자체에서 무엇인가 뜯겨나가 사라진 것 같아서 그래요. 아주...... 아주 큰 공백, 구멍이 하나 있다고 할까요. 어느 순간 생긴 게 아니라 항상 그 자리에 있었지요. 그리고 문댄서, 그 친구와 저는 어찌어찌 그 언저리에서 같이 춤추고 놀면서, 우리 둘이 말 그대로 완전히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어떻게든 잊은 채로 평생 갈 친구라고 생각했던 거에요. 그리고 그 친구와의 기억은...... 하나같이 즐거운 것들이죠.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순식간에 전락해 버렸지만." 트와일라잇은 막혀 오는 숨을 내뱉으며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이해가 안 돼요. 평생 공부만 하면서 논리 연습도 엄청나게 했는데, 뭐가 잘못된 건지...... 하나도 이해가 안 돼요......"
저녁을 맞아 불을 밝히는 슈가큐브코너의 차가운 전등빛이 원을 그리며 테이블 위에 스쳤다. 나는 천천히, 빛의 가장자리를 따라 발굽으로 테이블을 더듬었다. 밖에는 이미 별이 떠 반짝이고 있었는데, 두 공주와 한 마법사가 다시 내려와 세상을 돌아보던 그 때 그 침실에서 내다보던 그 모습과 똑같았다.
"저한테도...... 친구 둘이 있었어요." 나는 말했다.
트와일라잇이 조용히 내게 시선을 돌렸다.
"어린 시절엔 다들 이보다 더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가까웠죠." 광택제를 발라 매끈한 테이블 위에 남아 있는 소용돌이 모양 무늬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니 기억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둘은 닮은 곳이 하나도 없었어요. 하나는 창의력이 뛰어났지만 좀 으스대는 면이 없잖아 있었고, 다른 하나는 명랑했지만 충동적이었죠. 글쎄 아마 둘을 동시에 어디다 집어넣고 좀 냅두잖아요? 둘 다 몸 성히 나오지는 못했을 거에요. 하하하......" 나는 침을 삼키고, 뒷목을 문지르며 계속 말했다. "그렇더라도 전 둘 다 똑같이 좋았거든요. 동네를 돌아다닐 때 그 둘이 재잘대는 목소리도 좋았고, 소꿉놀이나 그런 걸 하더라도 둘이 생각하는 게 완전 다르다 보니까 얘기가 굉장히 이상하면서도 극적으로 흘러갔었는데 그것도 좋았어요. 그 둘과 같이 보낸 모든 순간들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서, 가끔 꺼내 곱씹어 볼 때마다 어른이 되어 마주한 지뢰밭 속으로 걸어 들어갈 힘이 생기더라고요."
나는 등받이에 깊게 기대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식당의 먼지 쌓인 천장 대들보를 쳐다보며 후드 소매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나는 침을 삼켰다. "우리도 어른이 되었어요. 그리고 뿔뿔이 흩어졌죠. 서로 조금의 관련도 없는 분야로 진출하러 각자 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지요. 그리고, 장난감 티아라를 쓰거나 동요를 부르며 갈기를 땋을법한 나잇대에서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셋이 한 자리에 모일 기회가 생겼죠. 흐으으음... 진즉에 그럴 생각을 할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던 게 비극이었죠. 너무 긴 세월이 지났고, 그 동안 각자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데다 이제는 만사 진지해질 때도 되었으니, 옛날에 우리가 뭣 때문에 친하게 지냈던지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문제가 되어 버린 거에요. 그 둘이야 예전처럼 명랑하고 똑똑하며 재치 있고 능력도 있는데 예쁘기까지 한 옛날 모습 그대로였지요. 세상에 타고난 그대로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는 있었지만, 우리 사이는 그렇지 못했죠. 왜 그랬을지, 혹시 짐작이 가세요?"
"왜 그렇죠?" 트와일라잇은 입을 딱 벌리고 몸을 내게 기울이며 물었다. "왜 친구 사이는 그렇지 못한가요?"
"우정이란 노래와 마찬가지기 때문이에요." 나는 조용히 말했다. "멜로디와 후렴부는 서로 이질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덧없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소리 중에서도 으뜸으로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거에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진중하게 트와일라잇의 눈을 쳐다보고 말했다. "하지만 그 어떤 웅장한 악곡이라 해도 악장과 악장 사이를 이어주는 경과부bridge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죠. 이어주지 않으면 단절되어 버려요. 단절되면 화합할 수 없죠. 결국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의 문제라는 거죠. 아름다운 것이 계속해서 그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아름다운 것들이 계속 공존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트와일라잇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때 문댄서가 타고 갔던 그 기차보다도 빠르게 트와일라잇이 멀어져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다음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한쪽 발굽으로 트와일라잇의 발굽을 잡았다. "저 보세요."
트와일라잇은 기운 없이 내가 시키는 대로 했다.
"결국엔 모두 죽기 마련이에요." 나는 말했다. "뭐가 됐든 결국은 죽어요. 다들 속으로는 죽음을 최대한 늦추기를 바라고, 또 가능하면 가장 소중한 것들을 가져갈 수 있기를 그리고 다른 사람들 사이에 벌어진 틈새가 더욱 깊어지기 전에 다시 그 사이를 이을 수 있기를 바라지요. 스파클 씬 똑똑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잖아요." 나는 차분하게 웃었다. "얼마나 복받은 사람이에요. 잃어버린 하나 때문에 인생 전체가 무너지더라도, 그게 당신 주변에 산재한 기회와 기쁨을 단념할 명분이 되지는 않아요. 그러니 절망하지 말아요. 절망해 봤자 복이 화로 표변해 돌아설 뿐이니까."
나를 바라보는 트와일라잇의 얼굴은 너무나 나약하고 연약해 보였다. "포니빌로 이사 오고 나서부터 셀레스티아 공주님께 이번에는 우정에 대해서 이런저런 걸 배웠다고 적은 편지를 써 보내는 게 일이었는데." 트와일라잇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눈물방울 하나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설마 우정이 끝장나는 걸로 편지를 쓰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해서......" 트와일라잇은 뭐라고 더 말하고 싶은 듯했지만, 결국 말하지는 못했다. 트와일라잇은 갈라지고 찡그려진 얼굴을 테이블 위로 떨궜다. 눈물이 흘러내려 고였다.
나는 트와일라잇의 발굽을 두 발굽으로 붙잡고 꼭 쥐었다. "듣기만 하세요. 상실에서 배울 건 배우고, 느낄 건 느끼되 절대로 거기 매몰되선 안 돼요. 여기... 지금도... 포니빌에 친구들이 있잖아요. 그분들은 아직 곁에 있어요."
"걔들까지... 걔들까지 잃어버리면 안 돼요..." 트와일라잇이 훌쩍였다.
"그렇다면 오늘을 즐겨요.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내 눈은 트와일라잇과 달리 말라 있었지만, 그 사실이 화가 나지는 않았다. 나는 학생들과 더불어 장난치고, 아기 용은 살찌우는 한 선생이 으레 짓곤 했던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즐길 인생이 남아 있을 때, 함께할 수 있는 친구들과 같이 즐기면서 사세요. 그러면 두 번 다시는 상실을 말하는 편지를 쓸 일도 없을—" 나는 새하얗게 엉기며 흘러나오는 입김에 놀라 말을 멈췄다. 나는 트와일라잇을 향하던 몸을 급히 뒤로 빼며 입을 가렸다. 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창 밖을 내다보았다.
땅 위에 드리운 밤의 장막 위로, 달이 휘영청 빛나고 있었다.
나는 내 몸을 안았다. 이가 딱딱 부딪쳤다. "안 돼. 아직은 아냐. 지금은 안 돼..."
그 때 등 뒤에서 출입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만 돌려 뒤돌아보았다. 래리티가 슈가큐브코너에 들어서고 있었다. 하루 종일, 그 길이와 폭을 알 수 없는 옷감들과 씨름한 끝에 갈기는 산발이었다. 래리티는 가능한 한 품위를 유지하며 하품하고, 염동력을 끌어다가 지친 몸에 푸른 스카프를 둘렀다.
"하아, 힘들었다! 오늘은 어째 더 피곤하네! 아아아아, 케에에에이크 사모님! 아직 민트 수플레 하나 부탁드려도 되나요오......"
* Souffle. 계란 흰자와 우유, 밀가루를 섞어 거품을 내고 치즈나 과일을 넣어 구운 것.
나는 옥죄어 오는 한기에 전율했다. 나는 이를 악물며 고개를 홱홱 젓고, 트와일라잇이 있는 쪽을 향해 절박하게 말했다. "스파클 씨. 제 말 들으세요. 잊어버리지 마시—"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트와일라잇은 사라지고 없었다. "트, 트와일라잇?" 나는 말을 더듬었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살펴보다 보니, 무엇인가 내 뒤로 날쌔게 움직이는 그림자가 있었다. 나는 다시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트와일라잇은...... 자신의 친구를 향하여 슈가큐브코너의 좌석들을 지나쳐 다가가고 있었다. "음...... 안녕, 래리티."
"트와일라잇! 어쩜, 안 그래도 보고 싶었는데!" 래리티는 절로 나오는 웃음소리를 억누르며 케이크 카운터에 몸을 기대고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사파이어 쇼어스Sapphire Shores가 나한테 드레스 주문 넣었다고 그러면 못 믿겠지? 그러니까, 보통 그 사람 하면 독특한 패션으로 유명하잖아. 근데 요즘에 하고 다니는 거 보면 영 이상한 쪽에 입맛을 들인 거 같단 말이지. 또......" 래리티는 말하다 말고 창백해진 하얀 얼굴과 휘둥그레 뜬 새파란 눈으로 트와일라잇을 쳐다보고 물었다. "아니... 트와일라잇! 너 왜 이러니! 뭐 잘못됐어?"
트와일라잇은 웃으려고 애쓰며 래리티를 마주보고 말했다. 채 마르지도 않은 눈물로 뺨이 젖어 있었다. "그냥... 너도... 너도..."
"트와일라잇, 너..." 래리티가 트와일라잇의 어깨에 발굽을 얹고 말했다. "다 얘기해도 돼! 괜찮은 거 맞지?"
트와일라잇은 그 말에 무너졌고, 그대로 따랐다. 트와일라잇은 거의 그 자리에 쓰러지듯이 주저앉았다. "아니. 안 괜찮은 것 같아." 트와일라잇은 달달 떨리는 발굽으로 얼굴을 가리며 흐느껴 울었다. "지금, 지금 당장 누구라도 들어줬으면 좋겠어..."
트와일라잇이 완전히 쓰러지기 전에 래리티가 잡아 받쳤다. 둘은 슈가큐브코너 출입문 앞에서 한 덩어리가 되었다. 래리티는 품에 안겨 흐느끼는 트와일라잇을 가만히 안은 채 얼굴에 뺨을 비벼주며 부드럽게 웃었다. "쉬이이이...... 괜찮아, 괜찮아. 다 토해버려. 그럼 좀 말하기 편해지겠지......"
그 너머 저편에서는 등을 돌리고 돌아앉은 내가 떨리는 가슴팍에 두 앞다리를 꼭 모으고 앉아 있었다. 행복하기도 했지만, 구역질이 나기도 했다. 평생 동안 반추하며 살아온 무언가를 결국 놓아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묘사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결국 보내야 할 것이라면 조금 일찍, 나 스스로 뜯어내 보내주는 게 더 나은 경우도 있는 법이다. 그때 내가 짓고 있던 웃음은 말 그대로 진심이었다. 트와일라잇과의 아름다운 이별을 슈가큐브코너에 남겨두고 나온 나는 밤의 품에 안겨 걸어갔다.
"이런, 이런, 스타스월 경!" 트와일라잇이 간의의자 끄트머리에 앉은 채 말했다. 캔틀롯 시내의 수많은 아파트 옥상들이 저마다 햇빛을 가득 안고 한없이 늘어선 모습이 아득하게 보였다. "들어 본 것 중 가장 뛰어난 연주였습니다! 이걸 국가로 삼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으에, 드럼 좀만 더 쓰면 좋았을걸." 문댄서는 말이 끝나자마자 혀를 삐죽이 내밀고 야유했다.
"루나!" 트와일라잇이 놀라 말했다. "공주답지 못한 행실이에요!"
"이제 용 사냥 하러 가는 줄 알았다구!"
"체인질링 습격을 물리치는 장면이 있는데 왜 그래!"
"체인질링 그거 재미없잖아! 그러니까 가서 용들 궁둥이나 걷어차 주자구!"
"스타스월의 연주가 끝나기 전까지는 안—"
"사실 이거 있잖아." 나는 잠시 실로폰을 치다 말고 말했다.
"공주님, 이라고 부르기로 한 거 아니었어?" 문댄서는 공손히 절하는 시늉을 해 보이며 트와일라잇에게 눈을 돌렸다.
"라이라아아아! 너라도 역할에 몰입해야 할 거 아냐!"
나는 목을 가다듬고 양 발굽으로 실로폰채를 하나씩 휙휙 돌리며 말했다. "아니, 잠깐만. 방금 친 노랜 진짜로 내가 니들 주려고 만든 거야."
문댄서가 놀라서 말했다. "진짜? 마구잡이로 막 친 거 아니었어?"
트와일라잇은 의자에서 뛰어 내려오며 물었다. "노랠 썼다고? 우리 주려고? 진짜?"
나는 웃었다. "안 될 거 없잖아? 니들 옆에만 있으면 노래하는 거 같은 기분이 드는데."
"히히히! 들었어 트와이? 라이라가 노래 부르고 싶어하는 건 내 덕이야!"
"아니거든! 우리 보면 노래하고 싶다고 하는 거거든!"
"아 그래?"
"야!" 나는 둘 사이에 가 앉으며 빼액 소리쳤다. "이건 노래가 아니잖아! 니들 노래 들어 볼 생각이 있긴 한 거야?"
문댄서는 자기 발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진짜 우리 주려고 만든 거 맞아?"
나는 씩 웃었다. "어." 그리고 트와일라잇을 쳐다보았다. "네 말도 맞고. 너희 둘 보다 보면 재밌고 즐겁고 뭔가 꽉 찬 기분이 들어."
트와일라잇은 오히려 당혹감에 얼굴을 찌푸리고 말했다. "근데 넌 항상 턱수염 스타스월 역할이었잖아."
"그리고 우리 둘만 보면 딱딱거리는 게 일이고." 문댄서가 말했다. 그 말을 듣고 트와일라잇도 깔깔 웃더니, 똑같이 반복해 말했다.
"글쎄, 별로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닌데?"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턱수염 스타스월 역할만 하는 것도 좋은 것 같아."
둘이 동시에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서로를 쳐다보더니, 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역시 이상해!" 둘은 나를 가리킨 채 서로에게 기대어 배를 잡고 웃어댔다.
나도 깔깔대고 웃었다. 의식적으로 어울려 웃었고, 둘 사이에 끼어 웃었다. "자, 그럼 어쩔래? 한번 배워 보겠어?"
"당연하지!"
"첫 소절은 어떻게 돼?"
"음, 이렇게 시작해..." 나는 즐거우면서도 어색한 기분으로 실로폰 건반을 치기 시작했다. "좋은. 친구들. 같이. 노래해. 영원히—"
* 그냥 뜻만 맞춰서 번역한 부분. 이런 가사를 어떻게 운율 맞춰서 옮기란 말인가?
"좋은친구들같이노래해영원히이이이이이이이—" 둘은 전혀 조율되지 않은 새된 소리로, 나를 놀리려는 의도를 전혀 숨기지 않고 소리쳤다.
"야!" 나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건 노래가 아니라 소리지르는 거잖아!"
"히히히!"
"히히히!"
"하하하..." 나는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그래도 노래는 같이 불러야지."
"그랭."
"그래야지."
"흠흠. 시작한다?"
"쪼은. 친구들. 같이. 노래해. 영원히이이이이이......"
우리는 연습했고 우리는 노래했다. 어디에서는 맞았고 어디에서는 맞지 않았다. 황금빛 하늘은 붉은 하늘을 거쳐 보라색 하늘로 변해갔다. 몇 번이고 실수했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우리 셋이 하나였으니까.
우리는 함께였다.
나는 별빛을 받으며 내 보폭만큼이나 차분한 숲의 숨결에 젖어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오두막 테라스에 앉았다. 두 앞다리 사이에 리라를 꺼내놓았다. 나는 악기를 보지 않은 채 염동력을 끌어와 현을 희롱했다. 벌써 한참 전에 꼬마였던 시절 만든 곡을 떠올리려니, 희미한 녹색 빛을 받은 내 나이든 이마가 찌푸려졌다. 그 시절에는 온기가 무엇인지 맛볼 수 있었었다.
옛날에 만든 곡을 연주하고 있자니, 그 선율이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내 인생에 더욱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어둠 너머에 있을 내 미래를 향해 절박하게 치달으며 거기 다리를 놓아주려 했다.
나는 혼자서 연주했다. 문득 생각해 보니,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그래 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트와일라잇...
문댄서...
내가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우리 추억을 잊지 않을게. 우리 우정은 영원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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