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에게.
사람이 일평생 원하는 게 뭘까? 그러니까, 정말로 원하는 게 뭘까? 각자 꿈꿔왔던 것을 성취하기만 한다면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일까? 인생의 종막을 내리는 순간에도 자기가 이뤄낸 것들이나 받아온 메달, 트로피가 예전처럼 소중할까? 일평생 세상에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공헌한 시간들을, 죽음의 차가운 품에 안기는 순간까지도 조용하고 부드러운 세레나데처럼 추억할까?
각자 무엇을 해 왔는지, 어떤 서원을 세웠는지, 그리고 어떤 역경과 고난을 넘어섰든지 인생에는 결국 끝이 찾아오기 마련이며 그 마지막 순간은 끝내 공유될 수 없는 각자의 것이지. 만인은 죽음 앞에서 고독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고독함을 결국 부정하고 말아. 매혹적인 역설이지. 수많은 요소들이 각자의 지류를 타고 흐르다가 마지막에는 하나의 본류로 합류하는 모습을 관찰하기에 역사 공부는 참 좋은 방법이야.
아직도 내 앞에는 외로운 여정만이 남아 있어. 늘 그랬지. 단 하루도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비곡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날이 없었고, 미친 듯 그 비밀을 풀어헤치는 나날들이 반복되었어. 내 탐구 생활이 불러올 알 수 없는 미래를 얻기 위한 것이었지. 반복되는 작업이었지만 나는 늘 열과 성을 다해 비곡에 덤벼들었어. 늘 동경했던 소설 속 여주인공의 정열처럼 말이야.
슬슬 이 여정의 최대 고비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해. 한없이 외로운 여정이라 한참을 망설인 것이긴 하지만, 지금은 여덟 번째 비곡에 도전할 준비가 되었어. 전에는 별로 그런 거 신경도 안 썼는데 말이야. 늘 이렇게 바닥 없는 적막감에 빠진 건 아니었다구.
요새들어 이러더라고. 그를 만나고 나서부터......
목조 식탁 한가운데에 황금색 튤립이 화관처럼 짜여 놓였고 그 한가운데 장밋빛 초가 하나 놓여 희미한 촉광을 밝혔다. 나는 촛불에 반짝이는 노란 꽃잎을 바라보았다. 원래대로라면 촛불 앞에 놓인 이제 겨우 반절밖에 메우지 못한 악보 하나만 쳐다보고 있었어야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나는 몇 주에 걸친 시간 끝에 여덟 번째 비곡을 완전히 구체화시켜두고 있었다. 이제 악보에 옮기는 일만 남아 있었고, 그러는 것쯤이야 전에도 그랬듯이 아주 쉬운 일이었지만 망설임과 두려움, 그리고 한없이 깊은 나락으로 추락한 내 마음까지 겹쳐 아직 다 옮겨적지 못했다.
래리티가 슈가큐브코너에 들어섰을 때, 나는 누가 들어왔는지 별반 관심이 없었다. 혼이 쑥 빠져 방황하는 가운데 래리티의 발걸음 소리는 희미한 타악기 소리처럼 들릴 뿐이었다. 얼마 뒤 아득히 들려오던 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한숨짓는 래리티의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나, 별일도 다 있네요! 아무래도 저만 좀 쉬어야겠다 싶었던 건 아닌 모양이에요. 흠흠. 잠시 실례할게요. 혹시 앉아도 될까요?"
내 앞에 놓인 튤립은 스무 송이였다.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꽃 스무 송이. 그리고 아직까지도 코끝에 스칠 때마다 가슴이 뛰는 흙냄새와 그 목소리와 그 웃음만을 보기 위해 아무 일도 없이 마을로 내려오는 데 쓴 20일의 아침. 그날의 기억들은 잘 간직하고 있었다. 이제는 그 추억들이 희미해지고 사라질 때까지 얼마나 걸릴 것인지만 생각할 뿐이다. 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은 이토록 연약하고 부박한 것인지. 코끝에 스치던 그의 차분하고 따뜻한 숨결이 아직도 사무치는데......
"정말 미안해요. 혹시 집중하는 데 방해되나요? 그러시면 다른 자리를 찾아보죠......"
"흠?" 나는 고개를 들어 래리티를 보았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커피 한 잔을 옆에 띄워둔 채 서 있었다. 래리티의 반짝이는 두 눈이 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 반대편의 주인 없는 의자를 간청했다. 나는 악보로 시선을 돌라고, 다시 근처 테이블을 쭉 돌아보았다. 슈가큐브코너의 좌석들은 전부 빽빽하게 들어앉아 저마다 떠들어대거나, 식사를 하거나, 조용히 대화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아... 음..." 나는 내가 짓는 웃음의 절반만이라도 내 눈이 웃고 있기는 한가 스스로 의심하면서도 래리티에게 빙긋 웃어 보였다. "괜찮아요. 이리 와 앉으세요. 래리티 씨."
래리티는 내 입 밖으로 자기 이름이 떨어지자마자 방긋 웃었다. "아, 설마 이런 환대를 받을 줄은!" 래리티는 웃으며 내 건너편 의자에 조심스레 앉았다.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난 래리티는 목에 두른 스카프를 정돈하고 말했다. "저번 주말 내내 캔틀롯에서 보냈거든요. 대연회에 참석하느라요. 저 같은 건 두 번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회지도층 인사들로 꽉 들어차 있었지요. 그런 데 있다가 이제 겨우 포니빌로 돌아와서 만난 낯선 사람이 저를 이름으로 불러주실 줄은 몰랐어요!" 래리티는 키득거리며 웃고는 빙그레 미소지었다. "역시 사는 동네만한 곳이 또 없다니까요. 알아봐 주셔서 고마워요. 성함이......?"
"하트스트링스에요." 나는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라이라 하트스트링스."
"이런, 이런...... 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래리티는 숙녀답지 못한 웃음을 애써 억누르며 말했다. "그나저나 행색이 말이 아니네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지가 쭉 펴졌다. 다시, 다리와 발굽 곳곳에 감아둔 붕대가 당겨지는 느낌과 왼쪽 귀 아래쪽 피부가 팽팽하게 긴장하는 느낌이 전해졌다.
"아. 걱정해 주실 것까진 없어요." 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래리티 씨가 캔틀롯 다녀오시는 동안 이쪽 동네도...... 꽤 이런저런 일이 있었거든요." 나는 거짓말을 주워섬기면서도 굳이 윤색하려는 수고를 들이지 않았다.
"그러시다면야." 래리티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염동력으로 들고 있던 커피잔을 가볍게 휘휘 흔들었다. 래리티가 워낙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는 것은 내게는 종종 아주 당연한 사실처럼 느껴졌다. "그러면 더 묻진 않을게요."
"고마워요." 나는 목소리를 낮추고 대답했다. 나는 악보 위로 펜을 띄워 올려, 음표 두 개를 더 그려 넣었다. 깃펜이 양피지를 긁어대는 느낌은 아주 견디기 어려웠다. 차라리 비석에 몇 줄 글자를 새겨 넣는 일이 더 나았을 뻔 했다. 분위기가 더 냉랭해지지 않을까 문득 걱정되어 말을 꺼냈다. "그... 어... 캔틀롯에 계시다 오셨다고 했지요?" 래리티는 내 목소리에 활기가 전혀 없다는 것은 눈치채지 못했다. 사실, 내가 그쪽에 관심 없던 만큼이나 그쪽도 별로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제 생각엔 뭔가 대단히 흥미진진한 얘깃거리 몇 가지 정도는 나온 것 같은데."
"흥미진진이라뇨? '마법 같다' 거나 '믿기지 않는다', '환상 그 자체였다' 정도는 되야죠!" 래리티는 한 마디 한 마디를 할 때마다 커피잔을 휘휘 흔들었다. 그리고는 다분히 극적으로 과장된 몸짓으로 몸을 뒤로 젖히면서, 밝은 숨소리와 함께 말을 턱 끊었다. "아, 거기 모인 명사들에 그 화려함이란! 어찌나 웅장하고 장엄하던지! 제가 그때껏 꿈꿔왔던 모든 것이 거기 다 있었지요!" 래리티는 기나긴 한숨을 내쉬더니 기억에 취해 흐트러진 웃음을 가다듬어 만족감에 젖은 미소로 녹여내며 몸을 앞으로 기울이면서 다시 커피 한 모금을 홀짝이며 말했다. "아, 그게 다 끝나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 래리티의 얼굴을 마주보고 물었다. "그래요?"
"음음!" 래리티는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더니 입안에 머금고 있던 커피를 목으로 넘기고 말했다. "그렇고말고요! 대연회가 대단히 즐거운 행사기는 했지만, 설마 제 인생에서 그렇게나 졸부스러운 사치를 부리는 작자들이나, 기본적인 예의범절조차 없이 천박하기 짝이 없는 자들은 물론이고 자기네들이 무슨 부유하고 교양 있는 사람들의 대표자라도 되는 양 허파에 바람만 가득 들어차선 같잖은 허세나 부려대는 치들이 한자리에 다 모인 꼴을 보게 될 줄은 전혀 몰랐거든요! 멀리서 보면 황색언론 같은 쓰레기들과는 격이 다른 행사처럼 보이지만, 막상 직접 가까이서 보니—하—이빨만 가지고 명주실로 코듀로이 직물을 짜는 기분이었어요!"
"흐음......" 나는 슬며시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굉장히 화려한 수사법인데요, 이거."
"어떤 사실을 형용할 수 있는 방법은 세상에 너무나도 많지만, 정작 그 결과물을 보면 절대다수는 쓰레기나 다름없답니다. 비극이죠." 래리티는 몸을 뒤로 기울이며 염동력으로 틀어쥐고 있던 커피잔을 다시 흔들었다. "초등학생처럼 투덜거려서 죄송해요. 캔틀롯에서 끔찍한 주말을 보내고 났더니 정신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진 것 같네요. 친구들과 같이 가서 그나마 다행이기는 하지만, 저는 그냥 좀 더 일찍 집에 오기로 했거든요. 그러다 보니 같이 얘기할 만한 친구도 없었고요. 어떤 느낌인지 아시겠죠."
"아, 일찍 오셨어요?"
"네에에...... 주문받은 드레스가 한도 끝도 없이 밀려 있거든요. 게다가 제 인생 최대의 기회가 될지 모른다며 드레스 하나만 붙잡고 있느라 그나마도 연기받은 것들이에요. 바보같은 생각이었지만." 래리티는 눈을 굴리며 가벼운 소리로 웃었다. 그리고 두 발굽으로 커피잔을 붙잡고 말했다. "뭐, 그래도 좋은 거 하나는 알았으니 다행이죠. 역시 전 일할 때가 가장 편해요. 혹시 그쪽이 어떠실지는 모르지만......"
나는 래리티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숙이고 악보를 들여다보았다. 얼음 바늘로 귓불을 찔리기라도 한 듯 두 귀가 움찔했다. 아파 오는 날숨 위로 얼음의 파도를 일으키며 여덟 번째 비곡이 쏟아져 내렸다. 나는 뒤통수의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전 얘기하는 것도 좋아해요." 나는 불쑥 말했다.
"음......" 래리티는 안도의 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다행이에요."
"하나 여쭤 볼 게 있는데, 혹시 이 사람이다 싶은 사람 만나보신 적 있으세요?" 나는 우리 사이에 놓인 금빛 튤립으로 짠 화관을 멍하니 쳐다보며 아무 생각 없이 물었다. "이상형인 남자라거나?"
래리티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안에 머금은 커피를 마저 마셨다. 그리고는 나를 쳐다보고, 이리저리 뜯어보더니,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물었다. "전에... 전에 저희가 만난 적 있었던가요?"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조용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어색한 순간을 얼버무리려거든 사실을 은폐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나는 되새겼다.
"저희... 음... 저번 주에 만났었죠. 래리티 씨가 친구분들과 같이 캔틀롯 가시기 전에요." 나는 말했다. 나는 차분히 래리티를 바라보며 말했다. "주문한 대로 단순하면서도 멋진 드레스였어요. 크림색을 바탕으로 하고, 금색 꽃무늬를 넣은 드레스요. 기억나시죠?"
"제가 그랬던가요?" 래리티는 당황스러워하며 표정을 구겼다. 래리티는 턱을 밀어 천장을 올려다보며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갈기를 쓸어내렸다. "확실히 제가 만들 만한 디자인이기는 한데. 왜 기억이 안 날까.....?" 래리티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의 지뢰밭을 건너가듯 뭐라뭐라 중얼거리더니, 침을 삼키며 멋쩍은 미소를 짓고 말했다. "공주님 맙소사, 요새 정말로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기는 했나 봐요. 그러지 않고는 이럴 수 없잖아요? 정말 죄송해요. 혹시 드레스가 마음에 안 들거나 하신 건 아니시죠?"
나는 바닥으로 시선을 떨구며 말했다. "제 평생 그만큼 예쁘고 눈부신 드레스는 못 봤어요. 잘 입었어요."
"아, 정말 다행이에요! 언젠가는 저도 제 옷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네요." 래리티가 경박하게 웃더니 말했다. "아, 제가 옷 하나하나에 들이는 수고에 걸맞는 대우를 받기만 한다면야 얼마나 좋을까요. 대연회에 입고 가려고 회심의 역작을 만들었더니, 막상 가 보니까 애플소스에 케이크 프로스팅으로 범벅이 되었지 뭐에요."
나는 못 들을 말을 들은 사람처럼 래리티를 흘끗 보고 말했다. "세상에... 무슨 끔찍한 일이 다 있대요..."
"으음... 그 인간이 끔찍하긴 했죠." 래리티는 칼끝처럼 시퍼런 서슬을 세운 눈빛으로 가게 벽을 흘겨보며 말했다.
"네?"
"아... 음... 그래요, 이게......" 래리티가 눈을 굴리며 말했다. "대연회 내내 친구들 옆에 붙어 있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거든요. 자기가 물고 태어난 금수저만큼이나 머리에 든 게 없는 귀족 머저리들 사이에 끼고 말았죠." 래리티는 차분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트스트링스 씨는 제가 한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진실한 사랑이란 어쩌다가 마주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운명에 실려오는 것들은 자기가 간다고 미리 말해주지 않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구름을 찍어내는 페가수스라도 된 양 어떤 형태로 찾아올지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고 생각하죠. 바보 같게도."
"왜 그런 말씀을 하시죠?" 나는 차분히 되물었다. "되게 로맨틱하긴 한데 뜬금없었어요."
"아, 제 인생에서 로맨틱한 거 빼면 거의 남는 것도 없답니다! 인생이란 짧은 것이니, 몇 가지 이제 와서 재평가한다 해도 너무 늦은 것은 아니기도 하겠군요."
"예를 들면 어떤 게 있을까요?"
"돌이켜보면 참 바보같았던 것들이나 쑥스러운 것들이죠. 변덕스러운 어린애들이나 좋아할 법한 것이기도 하고요. 하나하나 뜯어보면 괜찮은 것들이기는 하지만, 끌어안고 살 만한 것은 아니죠. 그 작자의 무례한 언동은 제 유치한 백일몽이 받아들이기에는 말 그대로 천재지변이나 다름없었거든요. 그 때 스포트라이트가 저를 비추고 있지 않았어야 할 텐데."
"대연회에서 뭐가 일어났든지, 그건 그냥 잠시 걸음을 늦추는 것 정도에 불과하다고 보는데요." 나는 펜을 끼적여 음표 세 개를 더 그려 넣으며 말했다. 나는 아직 메워지지 않은 악곡의 심연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웅얼대며 말했다. "아직 꿈을 이룰 수는 있다고 생각해요."
"흐으으음... 아무래도 저만 낭만을 찾아다니는 건 아니었던 것 같군요." 래리티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몸을 기울이고 말했다. "저는 그 중에서도 열성적인 부류는 아니었을 것 같다는 건 확실하네요. 그럼 저도 한 가지 묻죠. 이런 질문을 해도 될진 모르겠지만. 혹시 불가능한 사랑의 상사병을 떨치고 일어난 적 있으세요?"
나는 여생을 조금 더 떼어 끝없는 밤에게 넘겨주다가 멈칫했다. 나는 금빛 튤립의 화관을 가반히 쳐다보았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래리티를 마주보았다.
나는 웃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천사님." 그는 말했다. 그리고 웃었다. 그는 금빛이 도는 무언가를...... 그의 솜털처럼 부드러운 질감이 느껴지는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나는 그의 표정 위에 쑥스러움 한 스푼을 얹은 표정을 지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나는 뿔을 밝혀 그가 내민 발굽에 들려 있는 무언가를 받았다. 튤립이었다. 새벽의 숨결을 받아 반짝이는 여린 꽃잎에서 향기가 퍼졌다. 슈가큐브코너에서 래리티를 만나 이야기한 그 날부터 3주 전, 포니빌 북쪽 출입구에서 있던 일이다. 나는 늘 그렇듯 가방을 들쳐메고 리라를 챙겨 포니빌로 나온 참이었다. 마을은 언제나처럼 활기차게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무리로 막 북적거리기 시작한 참이었다. 그리고 그 풍경의 한가운데에는, 그 누구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고 오직 나만 쳐다보며 빙긋 웃고 있는 한 사내가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어머나, 고마워요." 나는 화답했다. 그 특별한 순간을 제례에 바치는 춤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지만 않았더라면 아마 그쯤에서 내 두 뺨은 불붙은 듯 붉게 불들어 있었을 것이다. 전부 잊어버리고 만 순진한 미소와 그 숨결과 내게 건네진 꽃 한 송이에 가슴이 마구 두근거리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지만. "뭐, 꼬시려는 생각만 아니시라면야." 나는 말했다. 그가 어떻게 반응할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건 내 알 바 아니었다. 다시 듣고 싶었다. 처음과 같이, 이제와 같이 영원히 그 말을 듣고 싶었다.
"그 반대랍니다." 그는 말했다. 사내는 고개를 깊이 숙여 절했다. 둥근 목선을 따라 푸르른 갈기가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포니빌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한여름 밤의 꿈처럼 홀연히 사라져 내가 마을에 들어서기 전부터 다듬고 있던 장미 덤불을 마저 손질하러 느긋하게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지나쳐 가다가 나는 잠시 멈추었다. 나는 염동력으로 들고 가던 튤립을 들여다보았다. 튤립이라고 해도 그저 한 식물의 몸뚱이에서 가장 반짝이는 부위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것들 수천 송이를 땅에서 뽑아내 화관을 짓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세상에 꽃들이야 한없이 피어 있지 않던가. 사람의 가슴을 채워 주고, 또 고독과 공포로 메마른 사막 같은 세상을 견디며 사람이 자랄 수 있게 해주는 것은 희미하기 짝이 없는 감정이다. 내게는 아직 풀어야 할 비곡들이 남아 있었다. 냉기만이 가득한 세상에 홀로 떨어져 죽음과도 같은 악곡을 따라 두려움 가득한 여정을 시작한 자 앞에 건네진 튤립 한 송이는 아직 포기될 수 없는 온기가 세상에 남아 있음을 말해주었다.
새 아침이 밝았고 나는 위로를 얻었다.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튤립을 들어올려 귀 뒤에 줄기를 꽂아 고정시켰다. 나는 뒤돌아보며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나는 마지못해 목적지로 향하는 걸음을 옮겼다. 그것으로 제의는 끝났다. 나는 다음 일출까지 얼마나 남았는지를 세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모닝 듀Morning Dew였다. 그는 어스 포니였고 정원사였으며 예술가였다. 그는 온 마을을 쏘다니며 캔버스 화폭 위에 그림을 그렸고, 흙을 파내고 그 자리에 화려한 꽃들을 심었다. 그의 붓은 악곡의 멜로디가 확장되듯 색을 다루었다. 노랑의 찬란한 그림자와 고혹적인 빨강의 빛깔, 파랑의 평온한 화사함이 그의 세심한 배치 위에 피어났다.
내가 아는 한 그는 포니빌에서 유일하게 꽃을 그리는 사람이었다. 번화가의 유명 꽃집을 운영하는 데이지Daisy나 로즈럭Roseluck 같은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꽃을 파는 사람이지 그리는 사람은 아니다. 모닝 듀가 그러하듯이 꽃을 기록하는 사람은 아닌 것이다.
그는 새벽이 처음 밤을 깨고 다가설 때 잠에서 깼다. 떠오르는 해가 그와 대지를 비추일 때 둘은 평등하게 반짝였다. 금빛 햇살이 지평선을 물들이며 하늘에 홍조를 물들이기도 전에 그는 밤새 싹을 틔운 잡초들을 골라내 뽑아냈다.
포니빌은 아름다운 마을이나, 그 누구의 수고도 없이 아름다울 수는 없는 마을이다. 마을이 완벽해 보이는 것은 그가 일을 완벽히 해냈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그 또한 완벽한 것이다. 완벽히 집중하여 완벽히 차분해진 마음으로 완벽한 균형을 일구어 내는 것이다. 그는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흙탕과 진탕을 다니며 일했지만, 일을 마치고 나올 때는 발레 무용수와 같았다. 흙먼지나 각종 침전물조차 감히 그의 용모를 더럽히지 못하였으니, 세상 사람 그 누구도 그 자신처럼 고아해지기는커녕 발끝조차 따라갈 수조차 없다는 당연한 사실과 그 사실 앞에 세인은 질투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진리에 다다라 삶 자체가 행복해지기라도 한 듯 존재 자체에서 빛이 나기 때문이었다.
나는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 영리한 어스 포니와 마주쳤으니, 그는 그 때마다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근면과 성실의 수호성인과도 같이, 붙잡고 있던 일을 놓아 버리고 다가왔다. 조경이 다다를 수 있는 극치의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다가도 그만두었다. 세상을 보다 완벽하게 만드는 그의 작업은 나를 보기 위해, 나를 보고 웃기 위해, 내게 꽃 한 송이를 주기 위해...... 그리고 그 이상의 것을 주기 위해 언제든지 포기되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천사님."
나는 그가 건네는 꽃을 받아들면서도 쓰러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세상이 빙빙 도는 것이 아니었다. 모닝 듀가 나를 바라보는 눈길에 나도 모르게 아찔해진 것뿐이었다. "뭐, 꼬시려는 생각만 아니시라면야." 나는 답했다. 나는 그 때 내 대답이 말이라기보다는 노래이기를 바랐다.
"그 반대랍니다." 모닝 듀가 화답했다. 그는 몸을 숙여 인사한 뒤 우체국 앞, 이끼가 빽빽하게 끼고 진흙탕으로 범벅이 된 자리에 색을 꽃피워 미려하게 바꾸고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모닝 듀가 이끌고 온 바람은 노동과 땀으로 젖어 있었지만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꽃을 건네받은 그 순간 어딘가 깊은 곳에서 일어선 향긋한 기운이 내 오감을 따라 들어서는 통에 코앞에 띄워놓고 있던 튤립도 겨우 간수하는 형편이었다. 나는 단순한 것들만이 내 가슴을 뛰게 만들 수 있는 것처럼 스스로 가식을 떨었고, 그 단순한 것들도 아무렇지 않게 무시해 버릴 수 있는 것인 양 허세를 피웠다.
헛된 시도였다. 나는 새로 받은 꽃을 귓가에 꽂은 채, 다리에 움직일 힘이 남아 있는 동안 억지로 사지를 놀려 자리를 벗어났다.
사실 모닝 듀가 반기며 말을 거는 상대가 나 하나뿐이지는 않았다. 그는 가까운 사람과 낯선 사람을 가리지 않고 두루 말을 섞었다. 한창 섬세한 솜씨로 조경을 다듬다가도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지나는 사람들에게 미소를 보내고 말을 걸었다.
모닝 듀는 자기가 마주하고 반기고 말을 거는 사람 그 누구도 '천사'라는 말을 붙이지 않았다. 오직 나만 그렇게 부르는 것이었다. 나는 보았으므로 안다. 이퀘스트리아 패션 잡지의 표지를 장식할 만한 화려한 옷차림을 한 여자들에게는 '사모님', 잘 해 봐야 '규양閨養'이라고 불렀다. 래리티나 플러터샤이처럼 미인이 지나갈 때도 최대한 정중한 태도로 '아가씨'라고만 부르는 것이었다.
이 다분히 시적인 수사를 사용하는 것은 나를 대할 때뿐이었고, 그럴 때마다 그의 푸른 눈은 반짝이는 눈빛으로 가득했는데 이 모습을 보는 순간 몸에 묻은 흙먼지 자국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 나를 쳐다보는 그 표정만 환히 빛났다. 그 눈빛이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그는 항상 나를 보면 조경용 수레에서 금빛 튤립을 꺼내 건네주며 천금보다도 값진 네 마디 말을 건넸다.
"좋은 아침이에요, 천사님."
이 때는 소리내어 웃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만 했다. 칙칙한 아침의 일이었다. 그와 나 모두 흠뻑 젖어 있었다. 페가수스들이 그날 오후로 예정된 야유회 때문에 하늘을 깨끗하게 닦아놓아야 한다며 새벽부터 소나기를 퍼부었기 때문이다. 포니빌 거리에 고여 흐르는 빗물은 가히 홍수와도 같았다. 식당을 비롯한 각종 점포들 절반은 문을 열지도 않았다. 아침 해라고 해야 잿빛 구름 사이로 굴절되며 이지러지는 빛 덩어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때 스스로도 뭘 하는 건지 모른 채 진흙탕이 된 길을 따라 걸으며 후드 재킷의 소매를 적시고 있었다. 그 어떤 세상의 고난을 들이밀더라도 모닝 듀는 아무리 잘 쳐 줘 봐야 잊히고 말 역사의 한 찌꺼기를 반복하는 일을 멈추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그가 건넨 네 마디 말을 듣고 알았다.
"이 녀석을 펼쳐 보더라도 노란 우산으로 변하거나 하지는 않겠죠?" 나는 빗물에 젖은 채 씩 웃으며 말했다.
"그렇기만 하다면야 이 일도 한층 할만한 일이 될 텐데요." 그는 금방이라도 소리내어 웃을 듯한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그 때 우리는 삶이라는 별 웃기지도 않는 물웅덩이에서 헤엄치는 둘이었으므로, 한숨짓거나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는 진흙범벅인 일터로 돌아갔다. 나는 우산 없는 산책을 계속했다. 우리 둘 다 제정신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날 오후가 되자 구름은 전부 걷혀 쾌청했으나 내게 들러붙은 재채기는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상관없었다. 격렬한 재채기 사이마다 귓가에 꽂은 튤립이 느껴졌다. 웃음도 떨어지지 않았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무엇 때문에 늘 같은 반응을 보이는 거지?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똑같은 말과 몸짓으로 말을 걸고, 늘 같은 꽃병에서 한 송이 금빛 꽃을 뽑아 하루 한 번, 빙긋 웃고 건네주는 이유가 대체 뭘까? 서로 꼬리를 물고 빙빙 도는 것 같잖아?
물론 모닝 듀가 단순히 여자를 꼬시려 든다고만 생각할 수도 있다. 다만...... 그걸 단순한 작업질로만 받아들이는 건 내가 싫다. 무엇보다 이러한 가정은 지금껏 한 번도 바뀌지 않은 그의 일정한 반응이 실은 아무 뜻도, 감정도, 그 어떤 동기도 없다는 결론밖에 내지 못한다. 스파이크가 내 후드를 보고 멋지다고 말하는 것이나 래리티가 새 재킷을 지어 주겠다고 하는 것, 레인보우 대쉬 본인이 내 오두막에 머리를 들이받아 놓고는 왜 여기 집이 생겨 있냐고 나에게 따지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다는 결론 말이다.
포니빌에 발이 묶인 채 세월을 보내다 보니 이 동네 사람들이 슬슬 지인, 친구, 심지어는 가족으로까지 느껴지곤 한다. 그러므로 나는 잠시 뒤로 몇 걸음 물러나 내 '이웃들'을 재평가해야 했고, 그때마다 저들은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친구의 개념과는 동떨어진 공허한 모조품에 지나지 않음을 새삼 깨달았다. 내가 저들과 나눈 모든 대화는 저들에게 최초의 대화였다. 내가 저들과 만나며 내비친 모든 인상들은 저들에게 첫인상이었다. 누구와 어떤 주제에 대하여 논의했던 것들을 다시 의논하려 할 때는 미리 짜둔 단계에 따라 전에 나누었던 대화를 줄줄 늘어놓고 시작해야 했으니, 다른 사람과 다시 이야기를 하는 작업은 무감정한 기계의 제어판에 달린 버튼들을 때려대는 듯 섬세한 공정이었다.
모닝 듀에게만큼은 그런 짓을 할 필요가 없었다. 대답을 끌어내기 위한 수고 자체가 필요하지 않았다. 현실에 내가 존재하는 모습 그대로 그의 푸른 눈동자가 던지는 시선 위를 슬며시 지나가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그는 바쁘게 꽃을 심고 다듬느라 정신없이 움직이다가도 곧장 그 다정하고 진심 어린, 저 달달하기 그지없는 무언가가 향하는 방향을 내게 돌렸다. 그것이 결국 무용한 것이 되리라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렸다.
그래서, 그 사람이 나만 보면 그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뭘까? 뜨는 해처럼 잘생기고 장엄한 그 사람의 하루에 내가 그 정도 비중을 갖는 것은 대체 무슨 조화인가? 아무리 콧대 높고 모가지 빳빳한 여자라도 바로 굴복할 만한 미소를 띠고 고상하게 절하며 꽃 한 송이와 함께 인사를 건네는 건 대체 무엇 때문인가?
모닝 듀는 무엇 때문에 나를 천사라 부르는가?
나는 하염없이 이 생각만 했다. 곰곰히 곱씹어보기도 했고, 때로는 강박적으로 매달려 가면서까지 생각했다. 여덟 번째 비곡을 완성하는 일은 나도 모르는 사이 뒷켠으로 밀려나 있었다. 다른 것들도 매한가지였고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학자처럼 비곡의 비밀을 파고들면서도 오선지를 채우고 각종 연구를 거듭하던 세월이 무색하게, 나는 다시 사춘기 여학생으로 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글쎄, 제가 보기에는 그게 그렇게 잘못된 것 같지는 않거든요."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나는 도서관 한가운데 서서 뿔을 밝혀 보호막을 형성하고 있었다. 나는 차분한 마음으로 정신을 집중했다. 뿔이 욱신거리는 느낌은 어느샌가 사라져 있었다. 이것도 이제 더는 어렵지 않았다. 공을 훨씬 많이 들여야 하는 일은 따로 있었으니, 불쑥 찾아온 민트그린 색 솜털을 한 이방인에게 마법을 가르쳐 달라고 설득하는 일이 그것이었다.
"잘못된 것 같지는 않다는 건 무슨 뜻인가요?" 나는 정수리 위에서 서서히 모습을 갖춰 가는 녹색 반구를 흘끗흘끗 쳐다보며 신음하듯 말했다. "이 정도로 나이가 찼으면 철딱서니없는 것들이 하는 연애놀이보단 나아야죠."
"철딱서니없는 것들이 하는 뭐라고요?"
나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트와일라잇을 쳐다보며 말했다. "말 그대로죠 뭐. 이만한 표현도 달리 없잖아요?"
트와일라잇은 쿡쿡 웃으며 내 옆에서 어정거리더니 말했다. "다른 사람에게 끌리는 기분이 드는 거야 자연스러운 일이죠. 그 정도가 어떻든간에 말이에요." 트와일라잇은 그러면서도 내가 방어 마법을 어느 정도나 숙달했는지 신중히 재 보고 있었다. "글쎄, 사춘기에 연애감정을 느끼지 못하면 심각한 우울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심리학 연구논문을 몇 편 읽어보기도 했고요......"
"스파클 씨가 통찰력이 대단하시다고 들어서 온 건데 말이죠." 나는 말했다. 나는 에메랄드 빛 반구 정도로 만든 방어막을 투명한 파라솔처럼 확장시키며 잠깐 이를 악물었다. "책 밖에서 얻은 걸로, 좋은 팁 좀 얻을 수 없을까요?"
"그거라면 번지 수를 잘못 찾으셨어요." 트와일라잇은 반쯤 웃으며 대답했다. "제 연애 경험이라고 해 봐야 그... 음, 글쎄... 스트릿 하키 경험이랑 비슷하거든요. 하하하." 트와일라잇은 살짝 뺨을 붉혔다. 보라색 눈동자가 어쩔 줄 몰라하며 화제를 돌릴 방법을 찾느라 마룻바닥을 열심히 훑고 있었다. "사실, 지금 그런 걸 생각할 상태도 아니어서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공주님께서 대연회 때 읽으실 연설문을 쓰고 있었거든요. 2주 후에 열리는 그거요."
"아. 죄송해요." 머리 위에 펼쳐진 커다란 반구가 서서히 흐려져가며 떨리기 시작했다. "제가 때를 잘못 맞춰 왔네요—"
"아뇨, 아뇨! 괜찮아요!" 트와일라잇은 내 죄책감을 달래 주려는 듯 웃으며 발굽을 내저었다. "가끔 다른 분들께 마법을 가르쳐 드리는 것도 좋거든요. 무엇보다도......" 트와일라잇이 눈을 굴렸다.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도 편지에 가끔씩은 좀 쉬라고 적어서 보내시니까요. 다시 뵙게 되면 여기서 시간을 보내며 제가 얼마나 많이 배웠는지 보여 드리고 말겠어요."
"직접 보여드릴 게 정말 많을 거라 생각해요."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친구분들도 그 중 하나일 테고요."
"하하하......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트와일라잇은 헛기침을 한 뒤, 막 다시 보호막을 만들기 시작한 내 주위를 맴돌다가 말했다. "그 사람이 그냥 꽃만 주고 말던가요?"
"네?"
"그쪽이 말하는 그 사람 말이에요." 트와일라잇이 윙크하며 말했다. "매일 아침마다 튤립을 한 송이씩 준다고 했었죠. 저야 뭐 연애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거기 뭔가 있기는 한 것 같네요. 그렇지 않아요? 히히히...... 남자들이 뭔가 똑같은 행동만 계속하는 건 어떤 신호이기도 하니까요."
"신호라니 어떤 신호요?"
"그 사람이 금붕어처럼 금방금방 잊어버리기는 하더라도 늘 한결같은 태도로 똑같은 행동을 하는 걸 보아하니 그 사람에겐 이게 아주 중요한 일과인 것 같다는 게 요지인데—잠깐, 이건......" 트와일라잇의 표정이 순식간에 찌푸려졌다. "그 낭설은 틀린 걸로 밝혀진 것 같은데... 아닌가요?"
"저... 음..." 나는 초조하게 웃었다. "별로 신경 안 쓰는 주의라서."
"뭘요, 금붕어요?"
"아뇨, 그게... 으음..." 나는 한숨지었다. "별로 중요한 얘기는 아니니까요."
"뭐 어쨌든, 우리 정도 나이에 남자에게 끌리는 건 문제될 것 하나 없어요." 트와일라잇이 차분하게 웃으며 말했다. "특히 그쪽처럼 서로 관심있는 경우라면야 더더욱 바람직하죠."
"그... 진짜 그렇게 보여요?" 나는 말을 더듬었다.
트와일라잇이 장광설을 늘어놓듯 말했다. "솔직한 감상으로는 세상 여자들 중 누구 하나 안 부러워하는 사람이 없을걸요. 고전시대 초기 체인질링 대군단이 우리나라를 침공하고 나서 지금까지도 유전자 풀이 다 복구되지 않았잖아요? 여자 다섯 명당 남자 한 명이 태어나는 게 현실이고요.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을 찾아다니고 있는데 마침 거기 딱 맞는 사람이 코앞에 있다면야 바로 사귀기 시작해야 마땅하죠. 안 그러면 그건 거의 범죄라고요. 으음... 당연히 비유적 표현이에요."
"그래도..."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까지 나눈 그 대화들도 결국 전에 있었던 수천 번의 대화처럼 망각의 늪 속으로 증발할 것이고, 나는 다시 나 자신만의 생각과 어둠에 휩싸여 혼자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때까지 지나간 매 순간들은 내게 공포나 다름없었다. "제가 그런 사람을 찾아다닐 처지가 아니라면 어쩌죠?"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머리 위에 떠오른 에메랄드 빛 방패가 살짝 흔들렸다. "그럴 형편이 안 된다면?"
"쉬이이잇...... 집중하시고......" 트와일라잇이 앞으로 다가서며 가만히 내 어깨에 발굽을 얹었다.
나는 한숨지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나는 내 소꿉친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 정신적 지주인 그녀는 나를 마주보며 싱긋 웃었다. "아무 조건 없는 행복을 안겨줄 사람을 만날 처지가 아니라고 스스로 납득해 버린다, 비극이죠."
트와일라잇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다행이었다. 아예 끝까지 파고들어 볼걸, 하는 강렬한 후회가 남기는 했지만. 다행히 나는 그런 생각이 들기 전에 입을 열었다. "종이로 된 달에 지나지 않는다면 어쩌죠? 제가 잡아야 하는지 어쩐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글쎄요, 제가 그쪽 입장이고 뭘 좀... 음... 뭐라도 해 볼 생각이 든다면......" 트와일라잇은 주저앉아 턱을 톡톡 두드리며 뭐라 웅얼거리다가 말했다. "과학적 접근을 하지 않을까요."
나는 얼굴을 구겼다. "과학적 접근이요?"
"심도있게 관찰해 보겠다는 거죠."
관찰이라면 나도 한참을 해 봤다고 말하고 싶었다. 여기 온 이래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오직 지켜보는 것뿐이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백일몽에 잠긴 몽상가...... 어쩌면 눈을 반짝이는 어린아이로 돌아갔을지 모르는 트와일라잇을 앞에 두고 그런 소리를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었겠는가?
애초에 이 똑똑이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벌렁벌렁 요동치는 심장 박동과 끓어오르는 열기를 트와일라잇에게 온전히 전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매일 아침마다 나는 그가 나를 무시하기를 바랐다. 아침이 밝으면 나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더불어 말할 수 없는 낙담을 동시에 맛봐야 했다. 역사 속 내 존재라야 있는지도 모를 것일지 모르겠지만, 그에게 나는 공기처럼 눈 앞에 실존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를 허파 속으로 들이마시고, 영원 불멸할 한 마디와 함께 밖으로 뿜어냈다.
"좋은 아침이에요, 천사님."
"실화야?" 애플잭이 쓰고 다니는 모자 아래 늘어진 그늘 아래로 한쪽 눈썹이 치켜져 올라갔다. "그러니까, '천사'라고 부른다고?"
"으음... 네."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대답했다. 나는 오두막집 앞 텃밭에 씨를 뿌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꽃을 하나 줘요."
"뭐, 장미 같은 건가?"
"튤립이요."
"튤립을 줘?"
"어음... 그, 그런데요?" 나는 바쁘게 씨를 뿌리며 말했다. 애플잭이 발을 뻗어 쟁기질한 밭 여기저기를 가리켜 보이며 씨 뿌릴 장소를 가르쳐 주었다. 나는 목례로 감사 인사를 하고, 계속 말했다. "그게... 안 좋은 건가요?"
"그게, 좀 신기한 일이긴 하거든." 애플잭이 모자 챙 아래로 흘러내린 금발 갈기를 쓸어 넘기고, 사과 바구니를 가득 실은 마차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보통 남정네들은 작업 멘트를 치면서 장미를 주는 걸 선호하니까."
"그쪽이 보기엔 그건가 봐요?" 나는 얼굴을 찌푸리고 대답했다. "그냥 작업 멘트다?"
"내 생각을 들어보고 싶다고 했잖아?" 애플잭이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아가씰 꼬시는 거라고. 연애를 책으로 배우면 그렇게 되지."
"연애를 책으로 배운 건 그쪽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요."
"내 연애 경험을 물어보고 싶은 모양인데, 세상에는 차라리 안 듣는 게 더 나은 것들도 있다구."
"안 될 이유도 없지 않아요?"
애플잭은 신음하더니 모자를 고쳐 썼다. "그게 말이지......" 과거를 반추하던 여자가 콧김을 뿜어냈다. "처음으로 나한테 남정네가 엉기던 때 말인데, 그게...... 으옴웅웅아글......"
나는 애플잭의 말을 끊고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잠깐만요, 뭐라고요?"
"으으... 그게..." 애플잭은 다시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발음을 뭉개어 웅얼대기 시작했다.
"애플잭 씨. 초면이긴 하지만 그래도 제가 음악 하는 사람이라서요. 가사 없는 노래를 쓸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놈 궁둥짝을 걷어찼다구!"
나는 되물었다. "말 그대로 걷어차 날려 버렸다는 거에요?"
"그놈이 먼저 건드린 걸 어떡하냐!" 애플잭은 결코 고의가 아니었다는 듯 앞다리를 휘휘 저으며 소리쳤다. "안 그래도 파종기라 농장에 씨 뿌리고 앉았는데 글쎄 그 와중에 들어와서 뻔뻔스레 사람 귓가에 대고 종알거리는데 어떡해 그럼! 그래도 걘 나한테 걸린 거라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해. 빅 매킨토시 눈에 띄였으면 일주일 동안 앉지도 눕지도 못하는 건 고사하고 아예 궁둥짝이 떨어져 나갔을걸!"
"히히히히히......"
애플잭이 순식간에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이게 어딜 봐서 웃긴 얘기야? 여자의 사생활을 눈곱만치도 존중하질 않는 천하의 밥버러지 같은 놈이었는데!"
"자, 그래서 그 얘기가 제 상황이랑 어떻게 연관이 있는데요?" 나는 쪼그려앉아 씨앗을 하나하나 심다가 씩 웃으며 애플잭을 쳐다보고 말했다. "제가 관심 있는 남자는 신사 그 자체인데 말이에요. 그 사람이 잘못한 거라면 절 꼬셔 놓고 아무렇지 않게,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일하러 돌아가는 것 정도밖에 없는데."
"흐음......" 애플잭은 한숨지으며 모자를 벗어 무신경하게 먼지를 툭툭 털어내면서 말했다. "그쪽 말이 맞는 것 같긴 하네. 세상 남정네들 전부가 가운데 다리를 잘라내 마땅한 놈들은 아니니까......"
"이제 말이 좀 통하네요."
"그렇더라도 믿을 만한 족속들인 건 또 아니거든." 애플잭이 툴툴대며 덧붙였다.
"어휴..... 애플잭..."
애플잭은 폭 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싱긋 웃으며 내 쪽으로 다가와 말했다. "자, 봐봐. 하트스트링스." 애플잭은 내 옆에 쪼그리고 앉아 씨앗 몇 개를 집어들고는 내가 잘 볼 수 있게 심어 보였다. "그쪽이 이상한 생각 하게 하려고 하는 말이 아냐. 사람마다 입맛 다르고 생각 다른 법이지. 그쪽도 뭐 이걸 모를 것 같지는 않고. 그럼 내 생각은 어떨까?" 애플잭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글쎄 나도 언젠가는 쟁기 끄는 건 그만두고 애기 침대나 천천히 흔들면서 지내는 날이 오기는 오겠지. 아직 그 때가 되지 않은 것뿐이야. 솔직히 말하면 우리 집 과수원 관리하는 것만 해도 바빠 죽겠거든. 뭐 다른 생각이 들 겨를도 없을 지경이니까. 대연회에 가져가서 팔 사과를 골라내야 하니까 사과 따는 것만 해도 미칠 지경이지. 12일 남았어 이제."
"미안해요." 나는 말했다. "안 그래도 바쁘신데 제가 방해를—"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래!" 애플잭이 새된 목소리로 말했다. 얼굴은 웃고 있었다. "초면이라도 발굽 좀 보태주고 얘기도 들어주고 하니까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나한테 기대는 거 아니겠냐." 애플잭은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그래도 말이지, 특별한 사람을 찾는 쪽으로 일이 넘어가면 그건 또 내가 말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 단적으로 말하면...... 하... 내가 보기에도 준비가 다 됐다 싶어지기 전까진 그쪽에는 관심 끄기로 했으니 말이야."
"그래도 혹시 누가 그쪽한테 흠뻑 빠진 걸 알게 되면......" 나는 움찔했다. "누가 그쪽한테 완전히 빠진 거 같다 생각이 들면 좀 들뜨기는 하시지 않겠어요?"
"글쎄..."
"그 생각을 만족시킬 수도 있다면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알아 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을까요?"
"그럴지도." 애플잭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남자 쪽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지. 남정네들 하는 생각이 대체로 다 거기서 거기라는 게 비극이긴 하지만...... 그게 사과 따는 거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오두막집 앞으로 뻗은 흙길을 내려다보면서 몸을 계속 움직였다. "그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어떻게 알죠?"
"하트스트링스 선생이 동네 사람들한테 애플잭이란 여자가 어떤 사람입니까, 하고 물으면, 상대도 인정사정없다시피 정직한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겠지?" 애플잭은 내심 자랑스러운 듯 웃으며 말했다. "그쪽한테 관심 있는 것 같은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으면 돌직구를 던져야지."
"무슨 뜻이에요?"
"그 남자한테 가서 얼굴 보고 딱 물어 봐, 원하는 게 뭔지!"
안 그래도 전에 그럴 생각으로 마을로 내려간 일이 있었다. 그 날 모닝 듀는 나를 맞아주지 않았다. 그 때 내가 느낀 것이 좌절이었는지 안도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게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오랫동안 붙들고 늘어질 필요는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 북쪽 변두리를 지나던 행인들과 내가 그의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잡화점 모퉁이를 지나치다가, 인근 철거 현장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오렌지색 형광조끼를 입은 공사 인부들이 저마다 망치와 끌을 들고 버려진 호텔 건물을 어지러이 해체하고 있었다. 아침 해가 시끌시끌한 공사현장 앞을 지나던 한 무리 청년들을 비추었다. 동아리 한가운데에 낯익은 목소리와 모습을 갖춘 이가 둘 있었으니, 이들은 친구들이 빤히 보는 앞에서 서로 뺨을 비벼대고 있었다.
"야, 그럼 함 보자!" 선더레인이 큰 소리로 말했다. 블로섬포스와 다른 두 페가수스가 선더레인 양옆으로 목을 길게 빼고 쳐다보고 있었다. "너희들 커플링이 어떻게 생겼나 구경이나 좀 해보자!"
캐러멜이 윈드휘슬러를 쳐다보았다. 윈드휘슬러가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캐러멜의 갈기에 얼굴을 묻어 그 위로 떠오른 미소를 감추며 왼쪽 발굽을 들어 보였다. 튕겨나온 햇빛이 만화경처럼 퍼져나와 모여든 친구들의 얼굴을 비추었다.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팔찌가 윈드휘슬러의 발굽을 장식하고 있었다.
"어쩜어쩜어쩜!" 블로섬포스는 놀란 눈치였다. "끝내준다 얘!"
"그러게." 플리터Flitter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본 것 중에서 이것만한 건 또 없다 야."
"캐러멜, 이거 대단한데." 모닝 듀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선더레인이 팔찌를 흘끗거렸다. "어디서 이걸 살 돈이 났나, 친구?"
"야 선더!" 블로섬포스가 날개로 선더레인을 퍽 쳤다.
"난 진지하다구!"
"하하하..." 캐러멜은 나머지 한쪽을 찬 발굽을 문질렀다. 두 귀가 늘어져 있었다. "그... 음... 직접 땅 팠지 뭐."
"직접?" 모닝 듀가 물었다.
"다이아몬드 독 다섯을 쓰긴 했지만."
"정말 다섯이야, 친구?" 선더레인이 히죽대며 물었다.
캐러멜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그래. 셋일지도 모르겠군."
윈드휘슬러는 헛기침을 하더니 활짝 웃는 얼굴로 팔찌를 가까이서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래도 우리 동네 사람들 중에서는 가장 로맨틱한 것 같은데."
클라우드체이서가 까르르 웃었다. "그래서, 이것 때문에 결혼하기로 한 건 아닐 거 아냐?"
윈드휘슬러와 캐러멜은 서로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잠시 시선을 나눈 둘은 뺨을 비볐고, 윈드휘슬러가 입을 열었다. "몇 달 정도 계획을 하긴 했지."
"저번 태양절 축제 때 하지의 연인으로 맺어지고 나서부터 말이지."
"그리고 우리 창업하려고." 윈드휘슬러가 말했다. "운송 쪽."
"그래?" 모닝 듀가 눈을 반짝였다.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인데그래!"
"어디 보자, 어디서 깨를 볶는 냄새가 진동을 하나?"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동아리는 호텔 건물을 헐어내는 시끄러운 현장에서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을 향하여 동시에 시선을 홱 돌렸다. 공사 인부 하나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안전모를 벗고 고개를 홱 흔들어 흰 눈 같은 긴 갈기를 늘어뜨렸다. 형광 조끼에 갈색 공구 벨트를 차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 중에서도 유독 예뻐 보였다. 여자의 녹색 눈동자가 윈드휘슬러의 발굽에 끼워진 반짝이는 팔찌를 비추었다.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 비틀린 미소로 히죽거렸다. "오, 이게 뭐야. 캐러멜이랑 윈디가 결혼을 했다고? 언제 하나 했네!"
"별로 놀랄 일은 아니잖아. 안 그래, 암브로시아Ambrosia?" 윈드휘슬러가 홍조를 띄우며 말했다.
"야." 암브로시아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나도 일 다니면서 볼 건 다 봤어 얘. 캐러멜한테 찰싹 붙어다니느라 반 년 동안 날개 한 번 펴는 걸 못 봤는데 어련하겠어?"
"동네에서 가장 보기 좋은 한 쌍이었지!" 이렇게 말하는 플리터의 날개 끄트머리는 이름값을 하듯 살랑거리고 있었다.
"너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겠지?" 클라우드체이서가 암브로시아를 놀리듯 말했다.
"어이. 일 년 내내 남자친구 없이 살았다고—"
"오오오오, 눈치 깠네!"
"그만들 해. 이 얼마나 경사로운 날이야." 모닝 듀가 투닥대는 자매를 꾸짖듯 말했다. "형제 싸움은 집에 가서 해도 늦지 않아. 그건 그렇고, 이거......" 순간 모닝 듀가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나는 멀찍이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푸른 눈이 반쯤 질끈 감기는 순간, 그는 겨우 절뚝거리며 균형을 잡았다.
"아이고 이런." 암브로시아가 목을 길게 뺐다. 순간 염려와 걱정으로 얼굴이 창백해지나 싶더니, 순식간에 비틀린 능글맞은 웃음을 빚어냈다. "또 시작이네."
"어이, 모닝." 선더레인이 날개 한쪽을 펼쳐 모닝 듀를 살짝 쿡 찌르고 말했다. "정신 차려, 이 친구야."
모닝 듀는 정신을 차렸다. 그는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가 다시 총기를 되찾고 말했다. "흠흠. 아하하...... 미안하구만. 좋은 소식을 들었더니 기분이 좋아져서 말이야."
"그렇긴 하지." 암브로시아가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그녀는 그새 또 뺨을 비비기 시작한 연인을 대충 쳐다보았다. "이 얼마나 잘 된 일이야. 그래서 식은 언제쯤 올리려고?"
"식은 대충 한 달 반쯤 있다가." 캐러멜이 말했다. "그냥 수수하게 올릴 거야. 식장은 시청 대회의실 대관해서 마련할 생각이고."
"동네 사람 전부 초대할 거야!"
"하하하... 그렇지..." 캐러멜이 숨을 들이마셨다. "솔직히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니까. 몇 달 전만 해도 포니빌 뜨고 아주 새출발할 생각이었는데 말이지."
"운명이 사랑의 편을 더 자주 들어 주다니 재미있지 않나." 모닝 듀가 덧붙였다.
"어우...... 그건 과장이 심하지 않아?" 암브로시아가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끝이 약간 갈라져 있었다.
"앰버Amber, 그래도 그게 사실이잖아?" 모닝 듀가 몸짓하며 말했다. "너도 봤잖아! 얘들보다 행복해 보이는 한 쌍 본 적 있어?"
"뭐 엄밀히 따지자면, 봤지!" 암브로시아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히죽거렸다. "나도 그렇고 남동생 둘도 그렇고, 아빠가 의무방어전 치르다가 생긴 게 아니거든."
"아이고, 공주님 맙소사." 선더레인은 시선을 피했고 블로섬포스는 낄낄대고 웃었다. 선더레인의 곁에 조그마한 남자애가 같이 서 있는 것이 그제서야 눈에 들어왔다. 꼬마는 어른들이 저희끼리 뭐라 말하며 깔깔 웃어대는 모습을 저건 또 무슨 말인가, 싶은 듯 순진한 표정으로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럼 축하 파티를 해야 하니 슈가큐브코너로 가 보실까." 윈드휘슬러가 말했다. "당연히 너희들 다 와도 돼."
"식은 어떻게 준비할 건지, 창업계획은 어떻게 된 건지 의논도 할 거고!" 캐러멜이 말했다. 사파이어 빛 눈동자가 기대감에 반짝이고 있었다.
"난 좀 있다 갈게." 모닝 듀가 말했다. "할 일이 아직 남아서 자리를 비울 수가 없군 그래."
"나도 마찬가지." 암브로시아가 덧붙였다. "그것 말고도 하루 종일 톱밥 뒤집어쓰고 땀내나는 아저씨들 사이에서 쏘다녀야 하는 것도 있지. 슈가큐브코너에 그대로 들어갔다간 냄새가 진동을 할걸."
"하, 듣고 보니 맞는 말이네." 블로섬포스가 말했다. 그녀는 다른 동아리를 쳐다보았다. "뭐 그럼, 우린 슬슬 갈까?"
윈드휘슬러가 꺄르륵 웃었다. "그럼 가자!" 윈드휘슬러와 캐러멜이 꼭 붙은 채 앞장섰다. 클라우드체이서와 플리터가 뒤따랐다. 선더레인과 블로섬포스가 후미에 붙었다. 따라가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사람이 하나 뒤에 남았다.
아주 작은 페가수스 남자아이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선더레인의 남동생이라는 것이 새삼스레 머릿속에 떠올랐다. 저 녀석 이름이 뭐였더라? 트레머Tremor? 퀘이크Quake? 부머Boomer였나? 꼬마는 한참을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녀석이 지금껏 그 누구도 쳐다보지 않았던 한 방향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나는 숙련된 관찰자의 섬세하고도 정확한 접근법으로 녀석의 시선을 따라 포니빌 정경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꼬마가 쳐다보고 있던 자리는 잔디밭으로, 꼬마 셋이 소풍을 나와 놀고 있는 곳이었다. 딱 꼬마 또래 정도 되어 보였는데, 하나같이 명랑하고 순수해 보였다. 포니빌 시내에서 저 세 명이 어울리는 모습을 보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 나는 곧장 스쿠틀루를 알아보았다. 다른 둘도 전에 본 적이 있었다. 머릿속으로 정보를 취합하는 데 잠깐 걸리기는 했으나, 나머지 둘이 각각 애플잭과 래리티의 동생이리라는 결론이 나왔다.
수도사Crusader를 자칭하는 셋은 한 장 종이 위에 온갖 잡다한 것을 마구 휘갈겨 써 내려가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것이 실험적 적성 탐구를 위한 온갖 뻔뻔한 행위를 목록화하는 작업이라는 데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스쿠틀루가 뭐라고 말하면 애플잭의 동생이 깔깔 웃었고, 래리티네 동생 쪽의 반응은 약간 달라서 스쿠틀루를 놀리는 노래를 지어 그 자리에서 부르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주황색 페가수스 꼬마도 꺄르륵 웃으며 그런 노래 부르지 말라고 항의하는 식이었다.
선더레인의 동생은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꼬마가 한 줄기 한숨을 토해냈다. 저 또래 애들이 갖고 있을 정서치고는 어둡고 외로운 느낌이 물씬 들었다. 아이의 자그마한 날개가 힘없이 늘어졌다. 나는 멀리서 노는 여자애 셋과 저 사내아이 사이에 벌어진 간극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나는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때 내가 그 모습을 재미있어했는지, 불쌍히 여겼는지는 모르겠다. 둘 다일지도.
"럼블? 우리 말 안 들었어?!" 멀리서 선더레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들려왔다. "슈가큐브코너 간다니까!"
"잠깐... 그냥 잠깐—" 럼블이 작은 목소리를 쥐어짜 대답했다.
"빨리 와, 꼬맹이! 내가 직접 가서 널 잡아다가 질질 끌고 갈까? 너 잘 보고 있으라고 아버지가 그랬다구!"
럼블은 그대로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꼬마는 마지막으로 날개를 한 번 들썩이고 단호하지만 느린 걸음으로 바라보기만 하던 자리에서 점점 더 멀리 떨어져 갔고, 마을을 가로질러 슈가큐브코너로 향하는 형과 그 친구들의 무리에 끼어들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다가 모닝 듀의 목소리에 퍼뜩 깨어났다. "정말 잘 되었지 뭐야. 솔직히 캐러멜 저 친구가 얼마나 걱정스러웠는지 몰라." 그는 암브로시아에게 고개를 돌리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윈드휘슬러도 그렇고, 일이 정말 이상할 정도로 잘 풀려서 얼마나 다행인지."
"더 이상한 일도 있었는데 뭐." 암브로시아가 끄덕였다. 그리고 머리에 쓰고 있던 안전모를 한번 찰싹 때렸다. "근데 넌 내가 툴툴대는 건 안중에도 없나 봐." 그녀는 사내를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모닝 넌 별로 부러운가 봐?"
"흠? 이번엔 또 무슨 얘길 하려고 이러시나?" 모닝 듀가 실실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작업 복장에서 풍기는 투박한 모양새와는 정반대인 소리로 쿡쿡 웃었다. "솔직히 너 정도면 사귀어 볼 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거든. 꽃 따는 것부터 시작해서 전부 마음에 든단 말야." 암브로시아가 윙크하며 말했다. "캐러멜이랑 윈디 얘기할 때 말 곱게 쓰는 것도 그렇고." 그녀는 이를 살짝 악물었다. "청첩장 받았더니 신랑도 너고 신부도 너인 거 아닌가 몰라."
"하하..." 모닝은 발굽으로 땅을 탁탁 치고 말했다. "글쎄, 내가 결혼을 하긴 할지조차 의심스럽다만."
"괜찮은 사람이다 싶어서 보면 꼭 일이랑 결혼하지 못해서 안달이라니까? 왜 그런 거야?"
"그게 아니야, 앰버." 모닝 듀가 한숨지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마을을 가볍게 쓱 훑어보았다. 찰나였지만, 한없이 진지한 표정이었다. "아직 내 짝을 못 찾아서 그런 것 같은데..."
그의 시선이 내가 있던 자리를 지났지만, 나는 그 자리에 없었다. 나는 그가 툭 던진 말을 듣자마자 탈옥수처럼 건물 뒤로 숨어들어 시선 밖으로 몸을 빼냈다. 힘 빠진 헐떡이는 숨이 기도를 타고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숨은 막혀 왔고, 가슴은 고도 한계점에 다다른 비행선처럼 무거웠다. 나는 후드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후드 재킷으로 내 전신을 숨길 방법이 있기만 했다면야, 진즉에 그랬을 것이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저 사람 말은 왜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이리 짓궂은 것인지. 저 사람 눈동자가 조금 움직일 때마다 가슴이 뛰고, 황홀해지고, 더러는 두려우면서도 매혹되는 건 왜인가?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은 아닌데. 자존감 충만한 어른에다 음악가 겸 예술가에, 학자 노릇까지 하고 있는 내가 왜?
속으로는 그렇게 중얼대고 있었지만 나는 웃고 있었다. 사지가 파르르 떨렸다. 나이트메어 문이 남긴 저주의 가닥들이 온몸 곳곳으로 밀려들고 있었음에도 나는 미소지었다. 나는 잔뜩 흥분한 채 미친놈처럼 포니빌 중심가를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한 사람의 이름과 그 사람의 목소리로 불이 붙은 몸에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것들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을 내 얼굴과도 같은 장밋빛 망상이었다.
사람이란 각자의 인생에서 무언가를 찾아 떠돌기 마련이다. 나로 말하자면 비곡의 정체를 파헤치는 입장인데, 어쩌면 나 혼자서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태어난 이래, 저주가 나를 포니빌에 옭아매기 한참 전부터 찾아다니던 무언가를 비곡의 비밀을 찾아 헤매는 와중에 나도 모르는 사이 찾고 있었던 모양이다. 모닝 듀 같은 사내도 같은 것... 아니면 같은 사람을 찾고... 있었을지 모른다고 가정, 어디까지나 가정한다면......
안 돼. 그런 생각 하는 것 자체가 지금 상황에서 얼마나 배 부르고 멍청한 소리인데. 당장 해결해야 할 일이 버젓이 있잖아. 벗어던져야 할 저주에 매여 있는 주제에 그게 할 생각이야. 그거 하나만 보라고. 그거 하나만 보고 가야 한단 말야. 이... 그... 주제 파악도 못 하고 헤헤거리는 등신같은 짓거리, 당장 멈춰야 해. 앞만 보고 달려도 어떻게 될까 말까인데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나는 기진맥진한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현기증을 느꼈다. '앞만 보고 간다'는 관념이 내포하는 희망에 고무되어 앞만 보고 달려온 지난날들이 얼마나 피로한 것인지, 그 관념이 얼마나 부조리한 것인지 나는 깨달았다. 모닝 듀의 목소리로 흥분한 심장이 미친 듯 뛰어댄 후부터 세상 만물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다른 데 신경을 좀 분산시킬 필요가 있었다. 나보다도 한 수백만 배는 쉽게 흥분하는 사람과 말을 섞으며 제정신을 수습해야 했다.
"거기 있는 모두가 제 드레스를 보게 되겠죠. 틀림없이 그 섬세함과 우아함에 다들 감탄할 거에요. 온 캔틀롯 인구에 회자될 대사건이 될 거에요!" 래리티는 벌써 특유의 극적인 화법으로 김칫국을 반 통쯤 비우고 있었다. 래리티는 반쯤 수선된 망토를 무릎 위에 얹은 채 스툴에 앉아 나를 마주보고 있었다. 캐러셀 부티크의 화려한 실내장식 사이사이로 래리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저희 여섯 전부 다 대연회 최고 미인이 되겠죠! 모든 시대를 살아온 불멸자이신 셀레스티아 공주님이시라도 그날 밤을 영원히 기억하실 거에요! 우리가 자리를 빛낼 바로 그 대연회의 밤을!"
나는 두 발굽으로 턱을 받치고 래리티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래리티의 머릿속에서 어떤 상상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그대로 말해주는 낭랑한 목소리에 기분이 좋아졌다. 두 귀가 쫑긋거렸다. 망토를 수선하고 싶다며 캐러셀 부티크에 들어온 것부터... 이걸 위해서였다. 래리티의 꿈이더라도 꿈 속에 꿈을 집어넣어 흩어놓는 것이 얼마나 절박했는지 모른다. 내 꿈에 속수무책으로 묶여 있다가 들으니, 이만한 기분 전환이 없었다.
"핑키 파이가 입을 드레스는 그 특유의 명랑함과 순수한 열광을 담아서 만들었지요! 근처에만 가도 바로 동화될 거에요! 애플잭에게는 가만히 있어도 품위가 절로 살아나도록 신경 써서 맞춰 줬어요. 사과 파는 데 도움이 될 거에요! 레인보우 대쉬에게는 원더볼트조차 홀릴 만한 디자인으로 만들어 주었지요. 트와일라잇에게 줄 드레스는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 보시기에도 자부심을 느끼실 수 있을 거에요! 그러면 이제 하나 남았는데, 제가 보기에도 정말 잘 만든 드레스라 일단 한번 얘기만 시작해도 한도 끝도 없을 거에요. 플러터샤이의 드레스 말이죠!"
입술 사이로 뜨뜻한 숨이 빠져나갔다. 래리티는 친구들과 대연회에 입고 갈 드레스 이야기를 끊임없이 늘어놓았고 나는 듣고만 있었다. 래리티를 향하던 시선이 잠시 떨어져, 다른 곳으로 향했다. 시청 대회의실 한가운데에 선 윈드휘슬러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결혼 서약을 마친 지 한 시간쯤 지난 다음이었다. 윈드휘슬러는 새틴으로 지은 백옥 같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캐러멜은 그 아름다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주위를 둘러싼 하객들이 환호하며 지켜보는 가운데 새신랑과 새신부가 어울려 춤추고 뺨을 문질렀고, 하객들도 저마다 나긋한 움직임으로 춤추기 시작했다. 나는 연회장의 그림자 속에 혼자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한숨으로 보낸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내 옆으로 다가서는 잔잔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너무 놀라 허파 속 공기를 뿜어냈다. 모닝 듀가 내 옆에 와 있었다. 피로연장의 은은한 조명을 받은 몸에 부드러운 호박색 불빛이 어른거렸고, 찬란하다고나 해야 할 솜털이 빛을 받아 비단결 같은 광택으로 반짝거렸다. 그는 빙긋 웃으며 내게 한쪽 발굽을 들어 건넸다. 정말 나랑 춤추려는 거 맞겠지? 그도 그럴 것이, 나는 그에게 완전한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영영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거절해야 했지만, 무엇인가 거부할 수 없는 힘이 내 발굽을 끌어당겨 그의 발굽을 잡아 승낙의 뜻을 내비쳤다. 함께, 나란히 춤추며 귀를 맞대고, 다시 한 번 나를 '천사님'이라 부르는 소리를 이번에는 더 가까운 거리에서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쿵쿵 뛰는 내 심장에 더 가까운 곳에서...
"...그리고 밤이 별빛에 젖어 음악을 따라 흐르며 되살아날 즈음에, 드디어... 그를 만나게 될 거에요!" 래리티의 목소리가 내 백일몽을 흩어놓았다.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꿈에서 반짝 깨어났다. 놀라서 눈만 꿈벅거리는 사이마다 어떤 사내의 따스한 미소가 명멸했다. "그라니 무슨 말이에요?! 아... 그게..."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멋쩍게 웃었다. "누구요?"
래리티는 별 소리를 다 한다는 듯 눈을 가늘게 했다. 우리 둘 모두 어떤 꿈에서 동시에 깨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않을까요?"
"으음... 중요하진 않죠." 나는 헛기침을 하고 괜히 부산스레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모닝 듀, 아니 아니, 그 사람을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한 계기가 있을까요? 으으으음... 그, 그러니까..." 나는 끓는 속을 끌어안고 홍조가 떠오르는 얼굴을 세차게 저은 뒤 심호흡하고 말했다. "그러니까... 저... 밤이 별빛에 젖어 음악을 따라 흐르며 되살아날 즈음... 까지 하셨죠?"
"으으으으으음...... 네." 창문 너머로 비치는 정오의 햇살이 다시 백일몽에 빠져들어 가는 래리티의 눈가를 비추며 더욱 밝게 명멸했다. 래리티의 새하얀 얼굴 위로 짙은 장밋빛 홍조가 꽃피듯 떠올랐다. "벌써 눈에 선해요. 저 왕궁의 우아한 연회장에 들어서면 이미 모여 있던 사람들은 이 멋진 드레스에 절로 정신이 팔려 생면부지의 이방인에 시선을 집중하겠지요. 포니빌 출신이라는 저 시골 처녀가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고귀하고 훌륭하신 분들마저 내심 질투해 마지않을 복식을 어디서 구했는지 다들 궁금해할 거에요. 바로 그 때 왕자님 눈에 제가 딱 뜨이는 거에요. 일종의 외경과 흥미가 뒤섞여 가슴에 불을 지르겠죠. 저 여인이 누구인지 못 알고는 못 배기겠죠. 뒤따르는 수행원들은 뿌리치고, 혼자서 연회장을 건너와 제 발굽을 들어 입맞추고 같이 춤추어 달라고 부탁할 거에요."
"저기..." 나는 눈살을 약간 찌푸리며 말했다. "대공이 그쪽을 봐주었으면 좋겠다는 건가요?"
"글쎄요, 나인內人들이나 할법한 망상을 하려던 생각은 아니었는데." 래리티가 경박한 말투로 대답했다.
살다 보면 치과 진료대에 방금 누운 환자처럼 웃어도 될 때가 있는 법이다.
래리티는 내가 웃자 눈동자를 굴렸다. "헙! 제 나이 먹고 하기에는 너무 이상한 생각이었나요?"
"크흠." 나는 킬킬대던 웃음을 겨우 밀어 넣고 말했다. "그게, 확실히 좀... 망상적이기는 해서..."
"저기요, 그게......"
"하트스트링스라고 부르세요."
"전 철이 들어버린 사람들이 정말 안됐다고 생각하거든요." 래리티가 말했다. "정말로." 래리티는 뿔을 밝혀 실을 꿴 바늘을 망토로 가져가 곳곳에 뚫린 작은 구멍들을 기웠다. "그 사람이 꾸는 꿈이야말로 그를 구성하는 근간이 되지요. 예술 하는 사람들은 더해서, 더러는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생각이 동일시되기도 하고요. 각자가 원하는 대로 그리고 색칠할 수 없는 캔버스에 가치가 없듯 인생도 그런 게 아닐까요?"
나는 웃었다. "래리티 씨야 뭐 한 모퉁이만 돌면 인생 최고의 하룻밤을 보내게 될 텐데요." 나는 말했다. "하루아침에 꿈이 현실로 표변한 사이에 원하던 것들을 채우는 데 부끄러울 건 별로 없죠."
"아니죠, 부끄러울 것 하나 없답니다." 래리티가 눈을 찡긋하고 말했다. "우리가 가진 한 줌 현실로 꿈을 희롱하며 데리고 놀 수 있는 만큼에는 그래도 되죠. 대연회에서 제가 정말 누굴 마주칠지 말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코흘리개 시절부터 꿈꿔왔던 대연회의 장관 하나만큼은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겠어요."
"혹시 그 꼬마가 왕자님과 결혼해서 같이 왕족의 반열에 오르는 것도 꿈꾸지 않았나요?" 나는 물었다.
래리티가 농담도 잘 한다는 듯 깔깔 웃었다. "어릴 때 공상에 너무 젖어 있었던 거 아니에요?"
나는 으쓱하며 말했다. "캔틀롯 심포니 오케스트라 일등석 자리를 탐냈던 건 생각나네요."
"자기를 속일 수는 있어도 저는 못 속인답니다." 래리티가 몸을 기울이며 솔직히 말해보라는 눈빛을 던졌다. "아직 본인이 몰라서 그렇지, 그쪽도 본인이 원하는 어떤 로맨스가 있어요."
"어떤... 로맨스가 있어요?"
"그 말대로에요. 맞아요. 지금 그쪽이 인지하고 있는 인생보다도 더 크고 달콤한 일종의 관념이나 판타지일 수도 있고, 어떤 열망일 수도 있겠죠."
그는 내게 웃어준다. 그는 내게 꽃을 준다. 나는 그에게 소중한 천사라고, 그는 항상 일깨운다. 내가 그대의 천사가 맞다면, 한참 전에 날개를 잃었을 거라고 말하고픈 충동이 인다. 그 어떤 천사라도 천국에 절대 비할 수 없는 대지에 처박혀 옴짝달싹 못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뭐라고 주절대기도 전에 그는 슬픈 표정으로 나를 본다. 나는 사과하고 가려 한다. 그의 곁에서 나는 강가에 주저앉은 속수무책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미 그는 안다. 신기한 사람이다. 나를 아껴 주는 사람이지만, 또 내 마음을 병들게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우리는 말의 꽃을 피우며 숲으로 갔다. 날씨, 햇살, 주위의 풍광과 번성하는 화초를 비롯해 내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나는 그저 주워섬겼다. 그의 푸른 두 눈동자는 그의 미소처럼 빛나는 아름다움으로 나를 어르며 더 깊은 이야기를 끄집어냈고 나는 하릴없이 나라는 인간의 밑바닥까지 전부 말했다. 말 그대로 전부 말했다. 나를 옭아맨 저주와 그 저주가 정기적으로 몰고 오는 한없는 한기에 관하여 말했고, 저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지내며 고무되기도 했지만 사람들 안에서도 나는 고독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해해 주었다. 솔직히 많이 놀랐다. 어떻게 이걸 이해할 수 있는가? 그냥 내 기분이나 풀어줄 겸 이해하는 척만 하고 있었던 걸까? 그렇지 않다. 그는 이해했고 그게 어떤 것인지 본인의 언어로 풀어 말했다. 그는 내 두 발굽을 잡고, 내 눈을 들여다보며 자신이 이해한 바를 말해주었다. 날개를 꺾인 천사는 다시 날 방법을 찾기 마련이라고. 내가 곡을 쓰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영영 잃어버린 날개로 다시 바람을 받으려는 것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는 기꺼이 그 바람이 되어 나를 더 찬란하고 따뜻한, 행복한 세상으로 데려다 줄 것이다. 이 사람의 눈을 들여다볼 때 그 눈동자는 창문이 되어 내 눈물을 마셔주고 싶어하는 그의 마음을 비춰 준다. 나는 그 때 이 이를 더는 의심할 수 없음을 안다. 여기 숲 한가운데서 저주가 불러온 칼바람이 끝내 내 목을 베어 쓰러지더라도, 그의 품에 안겨 죽을 수 있다면 미련은 없을 것이다.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이 남자라면 성실한 조경인만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우를 갖추어 나를 매장해 줄 것이다. 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유령들과 함께 갇힌 냉골 감방에서 몇 달 동안을 버둥거리며 살아온 나의 과거를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그리하여 나는 내 무덤에 다만 이것만을 놓아두라고 말한다. 나는 지금껏 그 누구에게도 취하지 않았던 자세로 내 이름을 말해 준다. 내 이름을 불러 준다. 내 숨결을 그릇으로 삼고 억누른 눈물을 용제로 삼아 그의 귓가에 쏟아낸다. 그는 한 방울 흘림 없이 받아내고, 포니빌에서 가장 아름답고 화사한 것들에게 세례를 주는 물을 길어오는 그 급수지에 온전히 풀어놓는다.
나도 모르는 사이 어스름이 깔렸다. 달이 어둑한 어스름을 깨치고 솟아올라 지금 이 아름다운 순간마저 흩어놓을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그와 함께 포니빌로 돌아가는 길과 그 끝자락에서 마침내 씁쓸한 작별을 나눌 때까지 몇 걸음이 남았을까. 내 오두막집은 지척에 있다. 냉기와 어둠만이 가득한 방에서 다시 독수공방하고 싶지 않다. 다시 그러고 싶지 않다. 그러느니 차라리 죽으리.
그리하여 나는 한 가지 부탁을 입에 담으니, 요즘 붙잡고 쓰는 곡이 하나 있는데 마침 내 집이 근처에 있으니 한번 보여주고 싶다고 말한다. 오히려 그쪽에서 상당한 흥미를 내비치니 이쪽이 당황스럽다. 솔직히 말하면 좀 무서운 일이다. 무서워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서서히 속도가 붙는 발걸음 뒤에 그는 멀어지지 않는다. 그를 집으로, 내 집으로 인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벽벽마다 걸어놓은 수많은 악기들을 보고 놀라워하는 그의 모습이 보인다. 일종의 경의가 어린 그의 미소는 또 다른 태양이 떠오른 듯 말간 호박색으로 빛난다. 난롯가에 다시 불을 붙이는 작업은 평소보다 빠르다. 추위에 떨던 때와는 확연히 다르다. 오히려 후드 재킷을 뒤집어쓴 몸에 땀이 나는 지경이다. 이 쓸데없는 녀석은 벗어 던져야겠다. 그러고 보니, 굳이 내가 벗지 않더라도 여기 기꺼이 날 도와 줄 사나이가 하나 있지 않은가. 땀이 뚝뚝 떨어진다.
그도 눈치챘다. 물론 눈치챌 수밖에 없다. 다 보고 있으니까. 포니빌 구석구석, 잘 보이지도 않는 곳마다 찾아다니며 꽃을 심고 기르는 비결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는 방을 건너와 내 앞에 선다. 발굽은 맞닿지 않는다. 우리는 찬란한 백척간두에 서 있으니, 그럼에도 그가 먼저 건드리지 않는 것은 내가 먼저 말을 꺼내기 전에 함부로 들이치면 안 되는 지점이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자리에 서서 몸을 떨고 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는 그의 얼굴까지 달랑 몇 인치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역사에 길이 남을 훌륭한 다리들은 하나같이 지었다 하면 무너뜨리는 건축가들의 발굽으로 지어졌으니, 그 사람들은 처음부터 첩첩산중 골짜기에 다리를 놓으려 했었기 때문이다.
두 얼굴 사이에 눈물의 강이 굽이쳐 만나 서러운 합주를 이룬다. 오두막집에 혼자 앉아 음산하기 짝이 없는 악곡들을 퉁겨댄 것이 몇 번째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해와 달과 별이 그 빛을 내게 비추지 않을 때 나를 비추는 불꽃은 내 무너져가는 앙가슴 밑에서 타오르는 고통뿐이었다. 내 울음 소리를 자장가 삼아 몸을 둥글게 말고 잠들던 밤들이 몇 번이었는가. 아침에 눈을 뜸은 결국 이를 잊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일기에도 나는 그러한 것들을 적지 않았다. 그래, 요점이 뭘까? 사람은 슬픈 존재이며, 각자 슬픈 존재라는 것이다. 내가 저 가여운 것들의 총체가 될 것이며, 저것들을 감당할 수 있는 자 또한 나 자신일 것이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용맹한 군인들과 시대의 영웅들은 말할 수 없는 비탄 속에서 죽어갔다. 적어도 그들에게는 세상에 그들과 전우들의 용기를 증거해 줄 노래가 여럿 바쳐졌고, 끝내 세상이 기억하고 있다. 내 목숨이 다하는 날, 비곡의 비밀을 찾아 헤매던 내 지난날은 온데간데없이 흐지부지해져 마침내 내가 쌓아올린 가락과 곡조는 이방인들의 숨결 사이에서 무정하게 울리는 진공이 될 것이다.
소매자락으로 눈물을 닦고 다시 보자 그 사람의 얼굴이 내 얼굴 가까운 곳으로 다가오고 있다. 내 머릿속에 울려대던 생각이 입 밖으로 마구 뛰쳐나가고 있었음을 나는 그 때 안다. 나는 좌절감에 비명을 지르고 싶어하지만, 그는 나직하게 속삭여 나를 말린다. 그가 내 얼굴에 뺨을 비빈다. 모닝 듀의 황금빛 솜털은 부드럽고 반들반들했다. 그는 자기 자신보다도 내가 백 배는 소중한 사람이라는 듯 나를 달랜다. 그는 한 마디 말이나 거창한 언사, 나를 달래려는 공허한 말 한 마디도 꺼내지 않는다.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은 내 이름뿐. 칙칙한 흙 속에 생명의 씨앗을 심는 손길처럼 내 이름만을 되내이는 그 모습에 나는 무너진다.
쓰러지던 나를 그가 잡는다. 그리고 나를 부여잡는다. 나는 이거면 충분하다고, 누가 나를 잡아 주고 안아 주면, 내 존재와 가치를 그것으로 인정받으면 나는 좋다고 말하려 한다. 울음이 입을 막아서 내가 말하는 소리는 정확히 알아들을 수가 없다. 결국 내 귀에 들리는 것만큼이나 그에게도 무의미한 소음에 불과하다. 그래도 그는 이미 알고 있다. 이해하고 있다. 몇 분이 몇 시간으로 옮아간 지금, 우리는 난롯가 앞에 나란히 누워 있다. 그는 자신의 온기와 나직한 목소리로 차가운 저주받은 밤을 쫓아내 몰아내려는 듯 나를 안고 있다. 나는 몇 달 동안의 고독과 괴로움을 말한다. 나는 그라면 내 말을 전부 이해할 것을 안다고 말한다. 그의 마음은 천지가 개벽할 때부터 우리 둘만을 위한 그릇이었다. 내가 얼마나 울먹이고 흐느끼든지, 그는 이미 전부 이해하고 있음을 나는 안다. 그의 웃음이 퇴색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평생토록 이 사람만을 위해 곡을 쓰고 싶다. 지금 여기서 그가 내게 주고 있는 것만큼 아름다운 곡으로 그의 귀를 채워주고 싶다.
나는 고개를 든다. 숨이 막힌다. 창 밖으로 해가 떠오르는 모습이 보인다. 냉혹한 달이 이끌고 온 악몽 같은 밤은, 정말로 나쁜 꿈처럼 산산이 조각나 흩어졌다. 심장이 미친 듯 뛰어대며 당장이라도 내 가슴을 뚫고 나올 듯 요동친다. 그는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그렇게 물으며 내 이름을 말해준다.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전능하신 셀레스티아여, 감사합니다. 이 사람이 내 이름을 부른다. 나를 잊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이 남자의 소중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 나는 아직 실존한다. 그의 품에 안기면서도 나는 몸을 떤다. 그는 내 이름을 알고 있다. 나를 옭아맨 저주는 이제 끝이다. 나는 그의 사람이고, 그는 나의 사람이다.
그제서야 눈물이 그치고, 나는 그를 안는다. 내가 웃음소리를 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도자기 인형이라도 되는 듯, 그는 나를 소중히 감싸안고 내 갈기를 쓸어 준다. 아침 햇살이 창 너머에서 쏟아져 들어온다. 이제 새로운 미래와 새로운 삶이 기다린다. 뭘 가장 먼저 기뻐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이 남자의 향기부터 기뻐하기로 정하고 나는 다시 깔깔 웃는다. 그래, 이게 현실이라면, 이 남자의 체취를 더 맡을 수 있다면 그러하리라.
그런 거다.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나는 의상실 너머 래리티를 쳐다보았다.
"원하는 로맨스라 해도 결국은," 나는 우물대며 말했다. "꿈일 뿐이죠." 그 누구도 막을 필요 없는 무의미한 홍수를 받아내는 댐처럼, 내 웃음은 조용했다. "세상에 직접 성취해야 할 게 얼마나 많은데요. 다행히도 그 중 상당수는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것들이죠."
"흐으으으응......" 래리티가 다 안다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비극이네요."
나는 눈을 꿈벅거리다가, 삐딱하게 물었다. "무슨 뜻이에요 그거?"
래리티는 내 말은 무시한 채 고개를 숙이고 바느질만 하다가 말했다. "뭐, 허황된 얘기는 집어치우더라도 저 나름대로 오랫동안 믿어 온 명제가 하나 있거든요."
"아 그래요? 그게 뭐죠?"
"세상은 아주 넓답니다. 그러다 보니 미래도 불확실하고, 질병도 많으며 끔찍한 괴물들도 많지요. 잘 숙고해 보시면 포니로 태어난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감이 올 거에요. 매일 우리를 굽어살피시는 훌륭한 알리콘의 보살핌을 받으니까요." 래리티는 진지한 눈길로 나를 쳐다보고 말했다. "우리를 보호해 줄 존재가 없는 다른 세상에서 다른 존재로 태어났다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소중한 것들이 얼마나 빨리 사라지겠어요?"
"이거... 진지한 얘기였네요." 나는 실실 웃으며 말했다.
"진지한 얘기죠, 그렇죠?" 래리티가 살짝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혹시 동네에서 제가 진지한 생각은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떠벌리는 사람이 있었던가요?"
"으음..."
래리티는 계속 말했다. "인생은 짧아요. 짧고도 고되죠. 그렇기는 하지만..." 그녀는 우아한 미소를 지었다. "경계 없는 아름다움과 품위를 내보일 힘은 우리 모두 갖고 있어요. 그래요. 갈고 닦은 인격으로 찬란히 빛나는 사람들도 있죠. 그리폰은 그 고아함이 비길 데가 없는 이들이죠. 용들도 마찬가지에요. 겉보기에는 야만스럽기 짝이 없어 보이지만 고전 시대의 귀족적 우아함이 있죠. 그럼 생각해 보세요. 우리 포니들보다도 아름답고 섬세하며 훌륭한 이들이 또 있을까요?"
"글쎄......"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뒷목을 쓸었다. "저도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긴 하지만, 아무래도 그런 생각 자체가 좀 불건전하지 않나......"
"아뇨." 래리티가 대놓고 부정했다. "별로 틀린 말도 아니잖아요. 포니란 척박하기 짝이 없는 세상 한가운데의 다이아몬드와 같은 존재랍니다. 역사는 우리가 저질렀던 실수와 잘못을 기억하고 있지만, 우리는 자연의 수호자로 역할을 다해 왔어요. 저 밖 풍경에 포니가 남긴 흔적이 잘못된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반대겠죠.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데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요. 평생 제가 믿어 온 신념이기도 하죠." 래리티는 따뜻한 날숨과 함께 빙긋 웃었다. "우리 모두 태어난 이유가 있어요.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에요. 사람을 사랑하려는 것보다 귀하고 가치있는 마음이 또 있을까요?"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래리티의 말에 가슴이 절로 뛰었다. "그거 멋진데요."
"저는 다음 주말에 있을 대연회 때나 완벽하게 멋졌으면 좋겠는데요." 래리티가 또 백일몽에 잠긴 듯 실실대며 말했다. "왕자님이든 빈털터리든 일단 잡으면...히히히히... 뭐 그런 게 중요하겠어요. 제가 그 사람 마음을 뺏고, 그 사람은 저를 제대로 숙녀답게 대우하고 애정을 담아 대한다면 제가 지금까지 꿈꿔왔던 게 이뤄지는 건데요." 래리티의 표정이 갑자기 차갑게 굳어졌다. "다만......"
나는 흥미가 일었다. "다만 뭐요?"
"으으으으으......" 래리티는 신음하더니 특유의 극적으로 과장된 동작으로 이마를 발굽으로 짚으며 살짝 비틀거렸다. "장엄 왈츠Cosmic Waltz를 출 줄 몰라요!"
"장엄... 왈츠요?"
"전기 고전시대부터 오케스트라 연주에 맞춰 대연회 때마다 추는 전통 춤이에요!" 래리티는 뿌루퉁한 얼굴로 망토 수선 작업을 재개했다. "대연회까지 갔는데 춤 한 번 같이 못 춰 보면 억울해 죽을지도 몰라요!"
"그게 걱정되는 거였어요?" 나는 벙쪄서 래리티를 쳐다보았다. "평민이 눈에 들어올 리 없으니 어떻게든 다른 수로 왕자님 마음 뺏어 보시려고 온갖 수를 생각하시더니, 고전 무도를 따라 추지 못하는 게 걱정거리였다고요?"
"흥!" 래리티가 콧대를 높이 세웠다. "제 생각대로 살고 싶다고만 했을 뿐인데요 뭐! 그런 자리에서 법도도 몰라 갈팡질팡하고 싶다고는 한 마디도 안 했네요!"
나는 멍하니 있다가, 쿡쿡대는 웃음을 시작으로 깔깔 웃기 시작했다. 래리티도 따라 웃기 시작해서, 미안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래리티처럼 영민한 사람이라고 해도 혼자 힘으로 도달하기는 어려운 결론이다. 외부 요인으로 정신을 좀 흩어놓으면 내 머리를 어지럽게 하는... 나 자신의 감정에 배당되는 정신을 분산시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건만. 정작 기대한 것과는 정반대 결과가 나오고 말아서, 잠깐 변덕으로 래리티를 찾아간 이래 분산되었던 내 감정들이 교향곡을 이루는 악기들처럼 조직화되었다.
래리티가 믿는 바를 나 또한 믿고 싶었다. 자기 생각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지 알면서도 우직하게 안고 가는, 그런 따뜻한 사람이 되기를 나는 바랐다. 달리 적당한 표현이 없어서 이렇게밖에 적을 수 없지만, 나는 안타깝게도 그런 부류의 인간은 못 되었다. 나는 항상 현실에 입각해 살아온 지지배였다. 나는 래리티의 생각에 동의하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애플잭의 주장에 진중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기도 한 여자였다.
이 외의 다른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애플잭은 영리하고 지성이 뛰어나며 근면한 사람 그 이상의 사람이었다. 애플잭 자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눈부시고 아름다운 여자이기도 했다. 포니빌에서 가장 정직한 사람이자 마을 발전의 중추로 열심히 일해 온 나날 동안 수십 명의 구혼자가 농장 문을 두드렸지만, 애플잭은 그 누구도 선택하지 않고 모두 돌려보냈다.
무례하기 짝이 없던 자들을 쫓아낸 얘기를 들은 걸로 생각해 보면, 지금 애플잭이 자기 반쪽을 찾아 편안히 지내려 하지 않는 것은, 가까운 말로는 표현할 수 없지만 래리티가 말했던 것처럼 영원 불멸할 어떤 진실에 도달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런 사람들을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고 퉁치는 것은 적합치 않다. 이들은 존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기에.
"좋은 아침이에요, 천사님."
나는 모닝 듀가 건넨 튤립을 받아들었다. 나는 빙긋 웃으며 염동력으로 꽃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코를 킁킁대자 모닝 듀 근처에 있을 때 겨우 느꼈던 향기의 파편이 느껴졌다. 자기가 자라서 이렇게 될 줄 모르고 그저 이상한 민트그린 케이지에 갇힌 줄로만 아는 꼬마가 문을 부수고 나오려고 발버둥치는 양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꿈틀댔다. 나는 잠시 꼬맹이를 달래 잠재우고, 뱉고 싶은 말을 꺼내기 전에 용기를 긁어모았다. 밝아 오는 새벽의 찬란한 햇살이 포니빌 북쪽 도로에 늘어선 나무 꼭대기에 튕겨져 나오며 명멸했다. 나는 아득히 들려오는 철거 공사 현장의 소음보다 더 큰 소리로 말했다.
"제가 왜요?"
잘생긴 얼굴에 번진 미소가 순간 당황한 듯 멍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하긴 세상 어느 누가 이보다도 더 뜬금없는 이단심문에 맞닥뜨렸을까 싶기는 했다.
"네?" 모닝 듀가 더듬거리며 반문했다. 허둥대는 모습이 꽤 귀여웠다. 염병
나는 헛기침하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지적인 모습을 연출하며 말했다. "제가 왜 천사죠? 흠?"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당장 제정신을 유지하려면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근처 건물로 달려가 벽에 내 돌대가리로 박치기를 먹이는 게 더 나았을 것 같기는 하지만. 대체 뭔 짓을 한 거람? 이 소중한 순간을 그따위로 날려 버리다니? 나는 라이라지 애플잭이 아닌데. 아무튼, 나는 계속 말했다. "왜 난생 처음 보는 여자한테 그런 작업 멘트를 날리는 건지 알고 싶은데요?"
"그게... 저..." 모닝 듀는 씩 웃더니 어쩔 줄 몰라하여 푸른 갈기를 쓸었다. 이 숫기 없어 보이는 행위를 하느라 흙가루가 갈기에 조금 묻었다. 아주 사소한 것들이 모이고 모여 이 남자를 멋진 남자로 만들었으니, 아주 사소한 흠결이 있더라도 큰 문제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음... 그게..." 그는 마침내 침을 꿀꺽 삼키고는 축 처진 어조로 말했다. "누구랑 닮아서요..."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누구요"?" 나는 그를 곁눈질하며 물었다. "다른 사람이겠죠?"
"아뇨, 다른 사람이 아니랍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랬으므로, 나는 그것이 진심이라고 생각했다. 전에는 이 남자에게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지만, 그러면서도 내게 보여 줬던 친절한 태도는 조금도 잃지 않은 채 꺼내는 한 마디 한 마디에 심장이 요동쳤다. "어떤 느낌이나, 기억이라고 할까요...... 하하..." 그는 달달하기 그지없는 미소와 웃음소리로 말했다. "제가 실례를 했군요. 그런... 표현을 쓰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뇨! 그러실 건 없고—!" 급하게 말하느라 혀를 깨물 뻔했다. 나는 침을 삼키며 목소리에 실렸던 다급함을 씻어내고, 대신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말했다. "미안해할 것 없어요. 그냥... 좀 궁금했거든요. 그나저나, 이거 굉장히 예쁜데요."
"그쪽 눈동자와 어울리죠." 이 말은 직설적인 만큼이나 날카롭기도 했다. 설마 이런 말이 나올 줄도 몰랐고, 모닝 듀가 그만큼 진지한 눈빛을 할 줄도 몰랐다. "황금빛은 정말 멋진 색이죠. 금빛을 따라할 수 있는 건 많지 않답니다."
나는 그 말에 거의 본능적으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염동력으로 잡고 있는 튤립을 쳐다보았다. 그 짧은 순간 나는 울기보다 웃기를 택했다. "하하하하... 이거...... 대단하네요. 음, 뭐. 좋아요." 나는 멍청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말했다. "한번 들어 보죠."
"미리 말씀드리지만......" 예의를 차리를 모닝 듀의 모습은 고통스러웠다. 우리 사이의 거리감이 그대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거리야 언제나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었다. 그는 말하면서도 발굽으로 땅을 긁었다. "글쎄, 꽤 긴 얘기인데요."
"다행히 제 귀도 기네요."
"하하. 크흠. 그럼 시작하기 전에, 포니빌은 처음이신 듯 하니 말씀드리죠. 저는 포니빌 조경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어릴 때부터 장래 희망으로 이걸 꿈꾼 건 아니었지요."
나는 이미 알면서도 굳이 그의 큐티마크를 슬쩍 쳐다보았다. 세 개의 갈색 묘목이 모인 형태인 것은 옛날에 기억해 뒀었다. "그런가요? 적성에는 이게 맞으신 것 같은데."
"아하, 그거라면 반박할 여지가 없지요." 그는 차분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부모님 모두 근위대 현역 군인이시다 보니 그렇게 되더군요."
"정말요?"
"네. 저는 항상 부모님을 따라 근위대에서 복무하고 싶어했지요. 캔틀롯 근위대로 임관하길 꿈꿨습니다." 모닝 듀가 말했다.
"이거... 꽤나 흥미로운 얘기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님께서 군인이셔서 그랬군요?"
"글쎄요..." 그는 부끄러운 듯 씩 웃으며 발굽을 꿈지럭거렸다. "그게 다는 아니었죠."
나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계속하시죠."
"어렸을 때 몸이 정말 아팠거든요." 그는 말했다. "어른이 된 지금에도 이따금씩 엄청난 현기증이 도진답니다. 그래도 그런 것들을 참아 가며 어른이 될 수 있었던 건 어떤 버팀목이 있었기 때문이었죠."
"오호?"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왠지 나를 정면으로 쳐다보길 어려워하는 듯했다. "그러니까... 음... 어떤 계시 같은 걸 봤다고 할까요. 상태가 가장 위중했던 어느 날 밤에, 웬 여성 분 하나가 제게 오시더니 몸에서 아픔을 걷어내 주시더군요. 현기증도 없이 말끔해진 몸으로 침대에서 내려와 서니, 새로 태어난 것 같았죠. 그분을 바라보며 감사 인사를 하려고 했지요. 천지창조의 순간만큼이나 찬란한 한 쌍 금빛 눈동자만 보이더군요. 그때부터 더는 심하게 아프지 않았고요. 정신을 차려 보니 병실 창문 밖으로 아침 해가 뜨고 있었지요. 당직 근무를 마치고 부모님께서 찾아오셨는데, 깜짝 놀라시더라고요. 밤새 큐티 마크도 생겨 있었던 거지요."
"오우......" 저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멋진 큐티마크 이야기였어요."
"누구라도 그렇지 않을까요?" 모닝 듀가 말했다. "제 부모님도 그렇고, 다른 만나는 사람들도 제가 조경에 적성이 있으니까 큐티마크가 나타난 거라고 생각하지요. 그분들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생각은 좀 다르지만요. 제 큐티마크가 나타난 건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이유라는 거죠. 온정과 진심을 가득 담은 그분의 금빛 눈동자를 마주하고 맞이한 아침에 저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 때 제가 느꼈던 안정감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다고 생각했죠. 제가 얻은 편안함은 결국 수호천사께서 주고 가신 거였으니까요."
"그럼 왜 근위대로 임관하지 않으셨죠?"
"하하... 근위대원이 되는 것도 제가 입대하고 싶다고만 해서 되는 게 아니라서." 그가 답했다.
나는 움찔했다. "미안해요. 짐작했어야 했는데."
"미안하실 것까지야." 그는 으쓱하며 말했다. "그래도 언젠가는 자격요건을 채우는 날이 오겠죠."
"그럼 그때까지는..." 나는 조경도구를 가득 실은 짐수레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내도 짐수레를 돌아보았다. "그때까지는, 제게 주어진 일을 해 나가야지요. 다가오는 적을 잡는 초병이 되어 사람들이 편안히 지내도록 할 수는 없지만, 다른 쪽으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줄 수는 있으니까요. 눈과 마음을 같이 편안하게 해주는 데 조경만한 분야가 또 없지 않은가요?"
"하하하..." 나는 시선을 돌리며 갈기를 쓸었다. "새로운 국방 분야인가요. 아무래도 새 사령부 하나 파야 하는 거 아닌가 몰라요."
"하하하하. 그도 그렇군요. 쓸데없이 하나마나한 소리나 주절거린 건 아닌가 모르겠네요."
"아! 아뇨! 아니에요." 나는 급히 말하고, 침을 삼켰다. "그건 됐다 치고, 왜 그쪽이—"
"그쪽 눈을 보면, 오래 전 그 날 아침 잠에서 깨던 때의 그 명료한 순간이 떠오르거든요." 그는 말했다. "또... 하하..."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저 자신을 발견한 순간의 그 가슴 벅찬 기억도 되살아나고요. 혼자가 아니었구나, 이제 두렵지 않다, 같은 생각도 들었었죠. 저는 세상 만인이 편안해졌으면 좋겠어요. 각자의 수호천사를 만나 구원받고, 또렷한 기억 속에 그 순간을 남기기를 바라는 것이죠."
나는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목에 응어리가 져서 목이 막혔다. 나는 우리 발굽 사이에 깔려 있는 부드러운 대지를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은 한없이 신성한 것이었지만, 내가 닿을 수 없는 곳에서 빙빙 도는 혹한의 대지는 멈추지 못했다. 몸을 타고 한 줄기 한기가 흘러 지나갔다. "그런 경이를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름다운 사실을 잊지 않으면, 우리도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둔탁한 쿵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모닝 듀가 땅에 쓰러져 있었다.
밖으로 나오려는 비명을 눌러 죽이는 데 태산 같은 품이 들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그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과호흡하고 있었다. 나는 축 처진 그의 몸을 휘둥그레 뜬 눈으로 덜덜 떨며 쳐다보았다.
그의 쓰러짐은 육중한 통나무가 쓰러져 눕는 것과도 같았다. 나는 달달 떨리는 발굽으로 그의 목을 짚어 맥박이 뛰는지 확인했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풀잎과 꽃들은 가만히 바람에 흔들리며 아무 일도 없었다.
맥을 짚는 발굽에 그의 부드러운 솜털의 감촉이 느껴졌다. 나는 무시했다. 심장이 멎은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건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단 한 줄기 근육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피부 아래에서 아직 생명이 꿈틀대고 있음을 말해주는 그 어떤 징후도 없었다. 나는 당황해서 아직 숨을 쉬고 있나 입가를 확인해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큰 소리가 들렸다. 내가 소리지르는 소리였다.
"누구 없어요!" 그를 살리려면 어떤 응급처치를 해야 하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원인을 모르는데 어떡해? 그냥 쓰러졌는데! "누구라도 의사 좀 불러주세요! 레드하트 선생 좀 불러와요! 이 사람 갑자기 쓰러졌다고요!"
"거기!" 누군가 딱딱대며 말했다. "호들갑 좀 떨지 마셔!"
나는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암브로시아가 차분한 걸음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반쯤 철거된 호텔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내가 놀랐거나 말거나 빙글거리며 말했다. "이건 처음 보시나 봐?"
"저, 저기요!" 나는 울먹였다. "누구 좀 불러 주세요. 이 사람 어디 잘못된 거 같아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히 얘기하더니, 갑자기—"
"잘못된 것처럼 보이는 거요." 그녀는 안전모를 벗으며 툴툴댔다. "하여간 이 모지리 자식은 생각이 있는 건지. 목걸이든 뭐든 놀라지 마시라고 적어서 붙이고 다니면 얼마나 좋아." 암브로시아가 내 옆으로 와 쪼그리고 앉았다. 그녀는 모닝 듀의 이마에 발굽을 갖다댔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지금까지 버티고 선 거 보고 용하다 싶었소."
"네... 네...?" 나는 말을 더듬었다. 나는 침착해 보이려는 척도 하지 않았다.
"탈력발작Cataplexy이라는 거요. 아주 일상이지."
"탄... 탈력... 발작이라뇨?"
"하하. 이 거지같은 말 발음 새는 게 나만 있는 건 아니었군요. 흠흠. 아무튼, 흔한 증상은 아니지." 암브로시아가 무심하게 말했다. "말하자면 기면증 환자죠. 단지 그 정도가 심각할 뿐이지. 일평생 달고 살았는데, 견디는 거 보면 참 사내는 사내다 싶다가도 가끔 보면 영 지지배 같단 말요."
"그게..." 나는 침을 삼켰다. "이분이 죽은 줄 알았죠."
"글쎄, 차라리 그러기를 바랄걸. 아무튼, 이 친구 그냥 잠든 거요. 일하다 말고 그냥 그대로 코 박고 잠들어 버리니, 자기가 심은 꽃 절반은 얘 입 속으로 들어갔을걸." 암브로시아가 피식 웃었다. "이제 정신 차리고 일어나게 해 줘야지. 마침 시간도 적당하니까. 자, 잘 보시라고." 암브로시아가 목을 가다듬고는 몸을 기울여 모닝 듀의 귓가에 말 그대로 소리를 빽 질렀다. "야! 해가 중천에 걸렸다! 당장 일어나, 이 굼벵아!"
"헉—으아아!" 모닝 듀의 푸른 눈이 다시 반짝 하고 뜨였다. 그는 어질어질한 두통을 견디고 있는지 눈을 몇 번 깜박이다가 이내 꽉 감아 버렸다. "으으으으... 으음..." 모닝 듀가 다시 눈을 떴다. 이번에는 실눈이었다. "어휴 맙소사. 또 쓰러졌나 봐?"
"그래." 암브로시아가 빙긋 웃으며 모닝 듀를 일으켜 세웠다. "걱정할 거 없어, 임마. 한 2분밖에 안 됐으니까. 3분인가."
"으..." 그는 신음하면서 이마를 문지르더니,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게 무슨 꼴인지. 이번 주만 해도 네 번째지 아마?"
"다섯 번째야." 그녀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자식들, 또 나한테 점심 사게 생겼군."
그는 눈동자를 돌려 이제 포기했다는 듯 암브로시아를 보며 웃었다. "진짜? 너희들 아직도 나 가지고 내기하고 그러는 거야? 호텔 건물 부수는 것처럼 뭔가 더 생산적인 활동을 할 수는 없어?"
"네가 나한테 이러시면 안 되지!" 암브로시아가 혀를 낼름 내밀어 보였다. "그럼 내가 매일같이 너 깨워주고 다니는데 그 정도 서비스는 받아야 하는 거 아냐?"
"하하... 그렇긴 하지..." 그는 한숨짓더니 고마워하는 눈치로 말했다. "앰버 너 없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몰라?"
"으으음..."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하늘에 떠가는 구름 사이를 슥슥 훑었다. "생각하기도 싫은데." 암브로시아는 다시 하얀 갈기 위에 안전모를 턱 하고 뒤집어쓰고 말했다. "아무래도 좋은 알람 시계는 되지만 훌륭한 말상대는 내가 못 되잖냐. 너 때문에 여기 눈 동그래진 아가씨가 엄청 놀랐으니까 네가 알아서 해."
"누구?"
"야 모닝, 너 그럼 못 쓴다!" 암브로시아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 이쪽이랑 얘기하고 있었다며?"
"그랬던가?" 모닝 듀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졸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아. 좋은 아침이에요, 천사님."
"그..."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나는 땅을 내려다보았다. 깜짝 놀란 사이 나도 모르게 떨어뜨린 튤립이 잔디 위에 누워 있었다. "네. 그... 좋은 아침이에요."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럼 이만 가 볼게요. 그... 사업상 협상할 게 있어서." 나는 거짓말했다.
"그렇게 하세요." 모닝 듀는 어질어질한 와중에도 늘 보여주던 인사를 했다. "좋은 시간 되시길."
"그래요, '천사님'." 암브로시아가 툭 던졌다. 모닝 듀를 한번 쭉 째려보더니, 시선을 거두고 그녀도 자리를 떴다.
나도 급히 자리를 떴다. 종종걸음으로 그 자리에서 멀어지는 가운데에도 땅에 떨어뜨렸던 금색 꽃을 챙기는 것은 잊지 않았다.
나는 오두막으로 돌아와 혼돈의 파도가 내 꼬리에 바싹 따라붙어 있기라도 한 양 문을 쾅 닫고 들어섰다. 가슴이 쉴새없이 콩닥거려서 나는 몹시 피곤했다. 나는 문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나는 뿔을 밝혀 가방에 고이 모셔두었던 튤립을 꺼냈다. 급하게 주워다 챙겨 넣었던 꽃이었다. 나는 꽃을 눈 앞 가까이 들고 금빛 꽃잎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들여다보았다. 더없이 아름다운 순간이 순식간에 공포에 물들고... 다시 소중한 시간으로 돌아가는 전환의 순간은 찰나였다.
모닝 듀를 연민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나는 그를 이미 연민하고 있었다. 기면증, 그것도 만성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거의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렇더라도, 그가 일상적으로 감수하며 살아가야 하는 시련의 가혹함을 침소봉대하지는 않았다. 근위대 임관을 꿈꾸는 그의 희망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었다. 그 콧대 높은 왕실 근위대가 근무 도중 고꾸라져 잠드는 사람을 일원으로 받아들일 리 없지 않은가?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눈앞에 성모가 강림한 기적과 그 때 느낀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자신의 꿈을 향해 정진하고 있었다. 사내의 삶은 꿈 같은 기적이 지어낸 금실로 수놓아진 유년기의 계시 하나로 집약되었다.
생각해 보면...... 그는 어느 날 아침, 내게는 수도 없이 반복된 일상이지더라도 그에게는 알 수 없는 세상의 일일 그 어느 순간에 가볍게 슥 본 것만으로 나를 감각적 수사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오직 자기를 옭아맨 저주만 알고 살아왔던 여자에게 그것은, 무한히 반복되는 순간의 편린이 마르지 않는 축복의 샘으로 바뀌는 기적과 같았다.
나는 꽃으로 얼굴을 쓸며 한숨지었다. 꽃잎은 만져보니 비단결 같았고, 그 감촉에 모닝 듀의 맥박을 짚어보며 허둥지둥하던 사이 천의무봉이란 말이 아깝지 않았던 사내의 솜털을 만졌던 사실이 새삼스레 머리에 떠올랐다. 그가 갑자기 쓰러졌던 때, 내 의식은 또렷했으며 흐트러지지도 않았다. 당황이야 하기는 했지만, 돌이켜보면 나의 행동은 철저히 합리적인 것이었다. 기뻤다.
됐다. 스스로를 속여 무엇 하겠나? 내가 그를 진정으로 알고 있는 정도와, 소중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 같은 느낌이 가져온 만족감으로는 내가 마주해야 했던 냉엄한 현실을 없는 것으로 할 수는 없었다. 문간에 주저앉아 전후좌우로 일어선 통나무 벽들보다도 더 가까이, 사내가 쓰러진 그 자리에서 현실은 차갑게 내 옆에 와 서 있었다.
나는 한숨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오두막 한쪽에 놓아둔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테이블 위에는 물을 가득 채운 크리스털 꽃병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이것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가져온 튤립을 꽃병에 꽂았다. 앞서 꽂혀 있던 다른 꽃봉오리 몇 개 사이에 새로 가져온 튤립이 고개를 내밀었다. 정확히 세자면, 열두 송이 꽃 사이에 한 송이가 더해진 것이다. 꽃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대략 보름쯤 전부터였는데, 내 빛나는 이성이 철부지스러운 변덕에 고개를 숙인 결과였다.
나는 멍하니 돌아서서 침대를 쳐다보았다. 지난밤에 쓰다가 던져 버린 악보 몇 장이 그대로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여덟 번째 비곡을 완성해 나가는 작업은 지지부진했고, 하루가 다르게 지리멸렬해지고 있었다. 적당한 변명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머리는 이미 비곡을 완벽히 구조화했고, 음석 네 개도 완전히 충전되어 있었다. 내 한 몸 지킬 수 있을 정도의 방어 마법도 배웠으며 심지어 꽤 숙달도 되어 있었다. 남은 것은 비곡을 오선지에 옮겨 적는 일 하나뿐이었다. 이 작업만 마치면 트와일라잇에게 악보를 보이고 악곡의 이름을 얻어낸 뒤 몇 가지 마무리 조사를 마치고 저주받은 비곡 속으로 다시 발을 담글 수 있었다.
집으로 가져와 이제 찬란한 정오의 햇살에 비치는 꽃송이의 수가 비곡을 옮겨 적은 악보의 장수를 압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두려움만이 들어차 있던 내 오두막에 저 찬란한 빛깔을 옮겨놓지 않는 것이 오히려 죄를 받는 일이 아닌지, 그 순간만큼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비곡의 비밀을 찾아가는 내 여정을 채색할 행복은 과연 무엇인가? 앞으로 몇 개의 비곡을 더 쫓아 들어가야 하는지 알 길조차 없는데? 열다섯 곡일 수도 있지만, 만오천 곡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루나 공주께서는 불멸하시고, 불멸하셨던 시간 동안 많은 악곡을 지으셨을 것이다. 언젠가 죽고 말 중생 하나가 멀찍이서나마 그 시대의 유산을 더듬거리려 하는데, 그에게 남은 시간이 과연 충분할까? 남은 평생을 염병할 비곡만 탐구하다가 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설사 내가 비곡의 비밀을 밝혀내 저주를 지워낸다 하더라도, 얼마나 늙고 지친 몸이 되어 있을 것인가? 래리티가 시적으로 말해준 것처럼, 나 또한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그 때 가서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이 남아 있기는 할까?
나는 일개 포니일 뿐이며, 몸에 깃든 저주 하나가 거두어지는 것 하나로 단순히 정의하기에는 너무나 찬연하고 덧없는 가치가 절실히 필요했다. 이 단순한 이야기는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어 무턱대고 믿을 만한 것은 아니었으나 없는 척 무시하기도 어려운 것이었다. 그 드높은 이야기 하나만을 위하여 어려운 길을 걸어온 지 얼마나 지났는가. 비곡의 탐구가 과연 나 혼자만을 위한 것이었나? 나 혼자만의 생각 때문에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욕망하는 것들이 내가 닿을 수 없는 피안에 언제까지고 주저앉아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 나를 정의하는 것인가?
생각이 정돈되지 않고 사방으로 꼬여 갈피를 잡기 어려울 때나, 아름답지만 그 안에 저주를 품고 있는 내 오두막집에 틀어박혀 붙들고 있는 작업에 회의감이 슬슬 피어오를 때면 으레 하는 일이 하나 있다.
포니빌 중심부에 꾸며진 넓은 공원 가장자리마다 놓인 벤치 하나를 골라 앉고, 염동력을 최대로 끌어모아 현을 퉁길 때마다 현이 진동하는 사이에서 소리가 일어났다가 더러는 잦아들면서 명멸했다. 소리가 음악의 꼴이라도 갖추고 있고 아정雅正하기만 하다면, 그이와 그의 두 눈, 차분한 목소리와 그보다도 편안했던 과거사로 정의되지 않는 내 마음의 편린을 흔들어 떨칠 수 있다면 그 곡이 무엇이더라도 좋았다.
내 얼굴은 굳어 있었다. 나는 눈을 짓눌러 감고, 내가 일으키는 소리에 도취해 보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지 못했다.
자기 과거사를 아무렇지 않게 털어놓은 건 무슨 의미지? 나 정도면 믿을 만하겠다는 확신을 준 계기가 있었던가? 정말 눈동자 색 하나 때문이었을까? 나는 치장하는 데 그다지 신경 쓰는 사람은 아니다. 글쎄, 평범한 여자들보다도 무신경한 편이기는 하다고 생각하지만. 캔틀롯 생활은 떨쳐낼래야 그럴 수 없는 어떤 몸가짐 같은 것을 몸에 새기기 마련이다. 꾸미는 행위를 쑥스러워하는 공부벌레인 그 트와일라잇 스파클조차도, 남들이 쉬이 얻을 수 없는 아름다움이 몸에 배어 있다. 예뻐 보이려고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이미 그 자체로 아름다워 보이는 사람들이 전국 도서관마다 사서로 하나씩 박혀 있다면야 공부하러 도서관에 가는 사내들이 엄청나게 늘어날 것은 자명하다. 그럼... 공부하고 남는 시간에는 뭘 할까... 흠... 레슬링 같은 걸 하려나?
이건 논외다. 자아도취도 정도껏 해야지 이러다가 내 연주 실력까지 들먹이게 생겼다. 다시, 나는 '수려한' 사람으로 보이려는 시도 자체를 한 적 없다. 수려하건 말건 그런 염병할 얘기에 관심을 둬 본 적도 없었다. 지금까지는......
내 눈, 내게 준 튤립과 같은 금빛 눈을 보고 그는 수호천사를 떠올렸다고 했다. 천사를 떠올려? 이전에 날 두고 그 누가 이렇듯 정중하고 친절한 표현을 써준 적이 있었던가?
아니. 작업 거는 것일 뿐이다. 그러하므로 그러한 것이다. 애초에 모닝 듀는 나를 모르니까.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 그 기억의 명멸 속에서 뉴런 세포들이 뇌조직 속으로 신경전달물질을 방출했을 것이고, 그 결과 머릿속에서 건져올린 작업 멘트를 조건반사처럼 입 밖으로 내뱉은 것일 뿐이다. 나는 그에게 한낱 관념일 뿐이고, 그 또한 내게는 일개 관념에 불과한 것이다. 부박하기 짝이 없는 애욕을 가지고 건전한 구조물을 쌓아올릴 수는 없다. 나에게나 그에게나 이 모든 것은 그저 같잖은 백일몽에 불과하다. 그러니 잊어야 한다. 전부 잊어야 한다.
나는 잊으려고 하면서도 잊지 않으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좌절했고 몹시 피로했다. 뿔을 밝혀 현을 퉁겨대면서도 나는 내가 소리를 짓고 있는지조차 자각하지 못했다. 그 때, 발랄한 목소리가 악기 소리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눈이 번쩍 열려 뜨였다. 소리와 어울리며 흥얼거리듯 들려오는 목소리가 끊길까, 나는 쉬지 않고 현을 퉁겼다. 어디서 들어 봤던 목소리였는데 생각나지는 않았다. 어느샌가 눈 앞으로 달려온 조그마한 꼬마 하나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큐티마크 없는 셋 중 놀라울 정도로 래리티와 똑 닮아 있었던 그 꼬마였다.
나는 그 꼬마를 빤히 쳐다보았다. 뿔 달린 머리가 방향을 틀어 자기를 응시하는 모습이, 더러는 몽롱하고 더러는 달달한 노랫소리를 깨뜨릴 정도로 무서웠던 모양이다. "힉!" 꼬마는 펄쩍 뛰더니 미안하다는 듯 거리를 약간 벌리고 말했다. "그... 죄송해요. 저 때문에 집중하던 게 깨지신 거죠? 언니한테도 항상 그것 때문에 많이 혼나는데."
나는 피식 웃으며 퉁기던 리라를 계속 퉁겼다. "괜찮아. 방해했다기보다는, 내 연주를 도와 줬다고 해야겠는데."
"정말요?" 꼬마의 말 끝이 갈라졌다. 기쁨으로 반짝이는 그 표정과 더없이 잘 어울렸다. 라벤더 색과 분홍색이 섞인 갈기 아래로 반짝이다 못해 정신줄을 놓칠 것만 같은 망토가 늘어져 있었고, 금실로 마감한 끄트머리가 반들거렸다. 이 꼬맹이가 망토를 지으며 온갖 보석을 가져다 붙이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노래가 너무 좋아서 저도 모르게 따라 부르게 되더라고요."
"노래를 잘하더구나. 타고났던데." 나는 말했다.
"저, 정말요?" 꼬마는 내 칭찬에 거의 폭발 직전이 되어 말했다. "정말 그런 거 같아요?"
나는 꼬마의 탄성을 못 들은 척하고, 큐티마크 없이 빈 엉덩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이 어린애가 얼마나 진심으로 내 말을 받아들이고 있는지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애초에 빈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럼!" 나는 씩 웃고 말했다. "처음부터 다시 연주하면 다시 한 번 노래를 불러주지 않을까 싶었는걸!"
"아... 음..." 꼬마는 어린애답게 쑥스러워하며 얼굴을 붉히고는 길가로 자라난 잔디밭을 하얀 발굽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그런 부탁은 못 드릴 것 같아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그럼 뭐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잖니?" 나는 이런 분산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게, 친구들이랑 만나기로 했는데 아직 안 와서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꼬마가 말했다. "평소대로라면 저희 언니, 그러니까 래리티 언니랑 점심을 먹고 있었겠지만..." 꼬마가 뿌루퉁하게 입을 삐죽 내밀었다. "부티크 사방을 폴짝폴짝 뛰어다니느라 바빠서 말이에요. 뭐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춤을 연습한다나."
"대연회란 참 이상하지." 나는 말했다. "다 큰 어른이라도 어린애로 돌려놓거든. 너희 언니분도 예외는 아니었나 보구나." 나는 웃으며 눈을 찡긋했다. "언니랑 대연회 얘기를 하다 보면 언니나 너나 비슷한 점이 많은 게 보일 거야."
"헐. 그건 싫어요. 래리티가 일장연설하는 건 듣기 싫거든요."
"왜?"
"으음, 스쿠틀루가 이런 말을 쓰더군요. '뱀파이어 같은 소리 또 시작이다!' 라고."
나는 피식 웃었다. "뭐, 흡혈귀나 래리티 씨나 얼굴이 새하얗기는 하다만."
"그건 무슨 뜻인가요?"
나는 헛기침하고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리라의 현을 주르륵 퉁겼다. "그럼, 어떤 노래 좋아하니?"
꼬마의 녹색 눈동자에 놀란 기색이 비쳤다. "어떤 노래든 다 연주할 줄 아세요?"
"음악 하는 사람이면 레퍼토리를 폭넓게 유지해야 하니까."
"'웃는 얼룩말과 반려견The Laughing Zebra and His Dog'*1이라고 아세요?"
"그럴지도. 가사 좀 알려 줄래?"
"노래로 불러드릴게요!" 꼬마의 목소리가 다시 갈라졌다. 처음 보거나 들었을 때 본능적으로 약간 섬칫한 것들이 있는데, 내 경우에는 그것 자체로 너무나 미려한 것들이 그렇다. 꼬마의 노랫소리에서 그 목소리는 단단하고 찬란했으며 조금의 어긋남도 없었다. 내 눈앞의 꼬마가 가사 하나하나의 음정과 박자를 정확히 지켜 가면서 노래하고 있었다. 그에 어울리는 솜씨로 연주해 주기란 지난한 일이어서, 드넓은 음역대를 자유자재로 드나들며 노래하는 솜씨에 감탄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타고난 솜씨였다. 노래는 짧았고 노랫말은 허튼소리에 유치한 것이었지만, 아이의 노래는 흡사 오페라의 한 대목처럼 들렸다. 노래가 끝나고 난 뒤 근처에 늘어선 나무에서 경탄과 환호를 내지르듯 잎사귀를 떨어뜨렸다. 나도 차분히 박수를 쳐 뒤따랐다.
"브라보! 브라보!" 나는 아이를 내려다보며 씩 웃었다. "타고났네, 타고났어! 슈가큐브코너 같은 곳에서 노래해 보면 어때?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서 구경료를 못 줘서 안달이 날 텐데!"
"으..." 꼬마는 움찔하더니 말했다. "듣기만 해도 끔찍한데요."
나는 피식 웃었다. 그래. 귀엽긴 하지만 나한테는 안 되지. 우리 둘 다 거기 있었던 걸로 아는데. "뛰어난 솜씨란 다른 사람들과 나눠야 한단다. 각자 가장 잘하는 일을 그냥 비밀로만 남겨둔다면 발전을 할 수 없지 않겠니?"
"적성은 스스로 찾는 게 의미있는 거라고 생각해서요."
"옳은 말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끊임없이 탐색하는 것이야말로 훌륭한 삶이지. 밖으로만 뻗지 말고 네 안의 것들도 꺼내볼 줄 알아야 해."
"안에 것들이라고 하니, 전에 한번 목구멍에 발굽을 밀어넣어서 마룻바닥에 다 쏟아낸 적 있었어요!"
"어...... 그렇구나..."
"애플블룸 말로는 제가 너무 긴장해서 그랬다고 하거든요. 그 전날에 벌레 하나를 통째로 삼켜 버려서, 도로 꺼내려고 한 거였는데—"
바로 그 때 익숙한 두 개의 목소리가 공원을 감싸안고 선 야트막한 언덕 위 풀잎을 타고 재잘거리며 넘어왔다. 꼬마는 몸을 홱 돌려 멀리서부터 씩 웃으며 다가오는 꼬마 친구들에게 발굽을 흔들었다.
"쟤들도 양반은 못 되네요. 가 봐야겠어요!" 꼬마는 나를 휙 돌아보고 말했다. 기쁨과, 미안해하는 마음이 뒤섞여 있었다. "덕분에 재밌는 얘기도 하고 노래도 실컷 불렀네요. 언니는 이름이 뭐에요?"
"하트스트링스야." 나는 답했다. "어린 친구Sweetie는 이름이 뭐니?"
"히히. 벨Belle*2이에요."
"벨?"
"스위티벨이에요." 꼬마는 약간 홍조를 띄우며 말했다.
"아하." 나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마지막으로 현을 퉁겼다. "그래, 그럴 것 같더라니."
스위티벨은 작은 몸으로 뒤뚱거리며 쏜살같이 달려갔다. "또 봐요, 하트스트링스 언니! 저 노래 잘한다고 하신 거 기억해 둘게요!"
나는 발굽을 흔들어 작별했다. 나는 웃고 있었다. 아이가 남긴 마지막 몇 마디가 귓가에 울렸다. 웃음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나는 발굽을 내리고, 힘없이 벤치에 늘어져 앉았다.
한 줄기 한숨이 내려앉았다. 내 입가를 떠난 한숨이 아니어서 조금 놀랐었다.
"예쁜 목소리야..." 내 바로 옆 벤치는 나무 그림자에 숨어 있었다. 남자애의 목소리가 그 위에서 웅얼거렸다.
나는 내가 앉은 자리에서 고개를 돌렸다. 시야 가장자리에 반들반들한 검은 갈기와 창백한 솜털을 한 페가수스 꼬마 하나가 들어왔다. 나는 차분히 웃으며 산들바람에 무심히 던지듯 말했다. "선더레인 동생이구나. 럼블 네가 여자애들 훔쳐보는 취미 있는 거 너희 형도 아니?"
아이가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가슴팍 속에서 심장이 벌렁거리는 모습이 바깥까지 드러날 정도였다. "후, 훔쳐보던 거 아니었어요! 진짜! 누구한테 제발 말하지 마세요!"
"진정 좀 해. 날씨도 좋은데." 나는 중얼거리며 현을 몇 번 퉁겼다. 럼블이 햇빛 속으로 나갔다. "날씨 좋아서 나온 사람을 내가 왜 뭐라고 그러겠어?"
"그렇죠. 그냥..." 럼블은 선 자리에서 꿈지럭거리고 있었다. 외로워 보이는 눈이 언덕빼기 위로 춤추며 돌아다녔다. 그 위로 어린 수행자 셋, 그리고 그 중에서도 어떤 하나가 영광스러운 여정을 찾아 사방으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럼블은 두 번째 한숨을 토해내고, 그 자리에 거꾸러지듯 주저앉아 말했다. "내가 이상한 놈일 뿐이죠."
나는 눈썹을 치켰다. 나는 럼블을 쳐다보고 물었다. "누가 그런 소리를 하니?"
누가 그런 소리를 했냐는 내 물음은 정확했다. "학교 애들이요." 럼블이 말했다. "스닙스, 스네일스가 그러더라고요. 전처럼 애들이랑 어울려 다니질 않으니 어떻게 된 게 틀림없다고."
"버릇없는 녀석들이구나." 나는 말했다. "세상에 이유 없는 일이 어디 있다고 그런 말을—"
"그 여자애한테 빠진 이후로 완전 재미없어졌다고 그러더라고요." 럼블이 덧붙였다. 꼬마는 무기력하게 길판에 뒹구는 흙먼지 몇 개를 툭툭 쳤다. "노잼이라고."
아하. 그게 그렇게 된 일이었구만. 유독 페가수스 애들이 조숙하단 말야, 왜 그러지?
나는 웃으며 럼블을 쳐다보았다. "이 누나가 보기엔 말이야, 그냥 질투나서 그런 것 같거든."
꼬마가 이상한 소리를 한다는 듯한 얼굴로 물었다. "절요?"
"그래."
"질투할 게 뭐 있다고요?"
"그야 그 스닙스랑 스네일스란 녀석들이 보기에도 네가 자라는 게 보이긴 할 테니까." 나는 리라를 퉁기며 말했다. "그 둘에 비하면야 네가 훨씬 더 성숙한 것 같은데, 걔들은 거기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개념 탑재가 안 된 거거든."
"제가 어딜 봐서 그 둘보다 잘났다고요?" 럼블이 얼굴을 구기며 물었다.
"말은 바로 들어야지. 네가 더 낫다고는 한 적 없어. 네가 더 성숙했다고만 했지."
"상관없잖아요. 제가 어딜 봐서 그런데요?" 럼블이 얼굴을 구기며 불만스러운 듯 흙더미를 내리쳤다. "자나 깨나 생각나는 여자애가 있어서 그렇다고요?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잖아요?"
"너는 이해가 되고?"
럼블이 입술을 씹었다.
나는 럼블이 혼자 생각을 정리하게 내버려두고, 잔뜩 겁먹은 아이를 달래어 나오게 하려는 듯한 차분한 곡을 퉁겼다.
어느샌가 럼블이 입을 열어 웅얼거리듯 말했다. "그 애는 예뻐요. 걔 노래를 들으면 행복해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 애가 어떤 사람인지 더 알고 싶어져요. 그 애는 날... 날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해요. 그 애한테까지 재미없는 별종 취급 받기는 싫어요."
"한참 전부터 마음이 있었던 모양이네."
"그게..." 꼬마는 피식 웃으려다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형은 늘 또래 여자들이랑 잘 어울려 다녔거든요. 플리터, 클라우드체이서, 블로섬포스 같은 누나들이랑 있는 거 보면 되게 기분 좋아 보였어요. 특히 블로섬포스 누나랑 있을 때는 더했죠."
"오. 젊은 친구가 관찰력이 여간 아니네."
"형처럼... 즐겁게 살려면 나도 좀 멋있어져야 하나 싶기도 하고..."
"흐으음..." 나는 실실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 너희 형처럼 여자애들이랑 친하게 지내며 놀러 다닌다고 해서 네가 그만큼 즐거울 수 있을까?"
"어... 그건 잘..."
"그래, 이제 좀 진실한 대답을 하는구나."
"당사자가 행복하지 않다면야 남에게 행복한 일이라도... 행복일 수 없죠." 럼블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여자애들도 저랑 있으면 별로 안 좋아할걸요."
절로 웃음이 나왔다. 나는 퉁기던 현을 잠시 멈추었다. "자존감 좀 챙겨, 어린 친구. 앞으로 한 몇 년만 있으면 너도 몰랐던 카사노바의 본성이 뛰쳐나와 세상 볕을 보게 될 것 같으니까."
"카사-뭐라고요?"
"어, 신경 쓰지 마. 블로섬포스랑 너네 형 둘만 있을 때 쪼르르 가서 물어 보든가." 나는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스위티벨이다."
"예?" 럼블이 벙쪄서 물었다.
"네가 좋아하는 애 말이야." 나는 윙크했다. "그게 걔 이름이라고."
"지, 진짜요?" 꼬마의 표정이 환해졌다. 작디작은 날개가 파닥거려 럼블의 작은 몸을 가볍게 띄웠다. "되게 예쁜... 이름이네요."
"내가 말해도 될라나 모르겠는데, 잘 어울리는 이름이더라."
"뭐 좀 더 알고 계신 거 없으세요?"
나는 낄낄 웃고 말했다. "세상에, 난 중매쟁이가 아니란다?"
"어......"
"그렇게 관심이 있다면야." 나는 자칭 수도사들이 뛰어다니는 방향을 가리켰다. "직접 가서 물어 봐도 되잖아."
럼블은 독감 예방주사를 맞으러 온 것처럼 순식간에 잔뜩 움츠러들어 말했다. "아, 안 돼요. 그건... 그건 못 해요..."
"스닙스, 스네일스가 그거 가지고 뭐라고 하기라도 하니?"
"아뇨, 그게 아니라..." 꼬마가 다시 한숨지으며 몸을 늘어뜨렸다. "제가 뭐라고요. 형하고는 정반대로 머리도 별로고 큐티마크도 없는데...... 걔가 보기에도 재미없을 거에요." 럼블의 피로한 시선은 발 밑 땅바닥에 박혀 있었다. "게다가, 같이 있어도 같이 있는 줄 모른다고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갈기를 쓸며 지나가는 산들바람이 유독 차갑게 느껴졌다. 나는 숨을 깊이 내쉬며 나직하게 말했다. "누나 말 들어도 돼. 나도 그런 느낌 아니까."
"대체..." 럼블이 팔짱 낀 다리 위로 서글픈 얼굴을 포개며 말했다. "여자애들이 뭐에 눈길을 주는지조차 모르겠어요. 뭘 원하는 걸까요?"
"천지개벽 때부터 내려온 유구한 질문이구만."
"으으음. 답이 없네요......"
나는 헛기침했다. "글쎄... 음... 잘 생각해 보면, 의외로 되게 간단하거든." 나는 말했다. "진심, 배려, 헌신의 대상이 되기를 바라지. 네 생각은 어떤지를 알고 싶어하고. 특히 네가 감정을 공유할 생각이 있다면 더욱 그렇고." 나는 찬연한 파란색으로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사파이어처럼 맑고 푸른 하늘이 어느 순간 한 사내의 눈동자로 비치어 마음에 불이 붙었다. "여자들은 솔직한 사람을 좋아하거든. 인생 목표가 무엇이든 상관없어. 그 일부, 가장 따뜻하되 가장 연약한 한 조각을 내버려서 둘만이 공유하는 한 조각으로 바꾸고 싶다는 것만 솔직하게 표현하면 그만이야. 너를 영원히 내 안에 간직해 갈 거라는 등등 낯간지러운 말로 흔히들 약속하는 것처럼 같이 있는 시간의 단 일각이라도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걸 보여 주면...... 흐흐흐." 나는 벌개진 얼굴로 갈기를 쓸어 넘겼다. "완전히 뿅 간다니까. 같이 있으면 행복하고 안심되는 그런 사람을 찾았다 싶어지니까 말이......" 말을 마치고 꼬마를 내려다보자, 나도 모르게 말끝이 축 늘어졌다.
럼블은 공허한 표정과 헷갈려하는 시선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꿈지럭거리다가 말했다. "음...... 혹시 알려나 모르겠는데." 나는 어딘지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꽃도 괜찮아. 여자들은 꽃도 좋아하거든. 좀 갖다 줘 보면 어때."
"꽃이요?" 럼블은 뜻밖이라는 듯 입을 떡 벌리며 물었다. "설마 그렇게 단순할 것 같진 않은데요?"
"얘는. 믿어 보라니까." 나는 눈을 찡긋하고 말했다. "효과 죽여."
"꽃이라......" 럼블이 마침내 그 작은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저 허약한 날개가 자기를 보이지 않지만 따뜻한 구름 속으로 밀어 넣기라도 하는 듯 뒤뚱대며 걷고 있었다. "꽃... 꽃... 꽃." 꼬마는 발굽을 휘휘 흔들며 말했다. "누나 고마워요!"
"별말씀을." 나는 피식 웃으며 마주 발굽을 흔들어 주었다. "늘 기억해. 가장 행복한 것은......" 아직 럼블은 내 말소리가 닿는 거리 안에 있었다. 별 상관은 없었다. 럼블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으니까. "...당연하게 누리는 것들이라는 걸." 나는 혼자 중얼거리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내 리라는 짊어져 온 저주의 차가운 밑바닥을 헤치고 떠가는 외로운 돛단배와 같았다. 나는 리라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리라는 당연히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었으므로 나는 그것에서 그 어떤 경외감도 느끼지 못했고, 리라 또한 내게 그 어떤 것도 약속하지 않았다.
그 때 내 가슴속에 자리잡은 의지는 칼과 같았다. 나는 벤치에서 내려왔다. 나는 햇빛 속에 혼자서, 단독자로 가슴을 펴고 섰다. 나는 북쪽을 향하여 당당한 걸음으로 걸어갔다.
"좋은 아침이에요, 천사님."
그와 동시에 튤립 한 송이가 건네졌다. 나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내의 발굽에서 금빛 튤립을 낚아채고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좋아하는 색이 뭐에요?"
모닝 듀는 고개를 갸웃했다. 금빛 몸이 호기심의 낭떠러지 위에서 흔들렸다. "음..."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금빛 빼고요."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재차 물었다. "두 번째로 좋아하는 색이 뭐에요?"
"어... 음..." 그는 숫기 없는 웃음을 짓더니 대답했다. "굳이 꼽자면, 은색이군요."
"은색이라! 좋아요!" 나는 발굽을 흔들며 사라졌다. "좋은 하루 되세요!"
그는 멍한 얼굴로 흐느적거리며 발굽을 흔들어 주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천사님."
"좋아하는 냄새가 뭐에요?"
"어어...... 네?" 모닝 듀가 당황하며 물었다.
"좋아하는 향 말이에요." 나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얼굴을 바싹 들이밀었다. "말해 봐요."
"아... 어... 하하하..." 그는 살짝 홍조를 띄우며, 푸른 갈기를 쓸고 말했다. "저야 뭐 옆에 끼고 사는 화초가 많으니까요. 하나만 고르기는 좀......"
"그래도 가장 괜찮다 싶은 거 하나는 있을 거 아니에요."
"그... 어...... 진한 자스민 향기는 늘 좋아하긴 한 것 같군요." 그는 말했다. "꽃도 정말 아름답고요."
"좋아요!" 나는 활짝 웃고 튤립을 챙겨 재빨리 달아났다. "감사요!"
"허어..."
"좋은 아침이에요, 천사님."
"좋아하는 곡 뭐에요?"
"다시 말씀해 주시겠어요?"
나는 안에서 올라오는 웃음을 밟아 죽이며 빙긋 웃기만 하고 말했다. "지금 당장 그 어떤 곡이라도 하나 골라잡아 들을 수 있다고 한다면, 어떤 곡을 고르고 싶어요?"
"혹시... 음악 하시는 분이신가요?" 그는 내 큐티마크를 곁눈질하더니 물었다.
나는 웃으며 얼굴을 들이밀어 시선을 차단했다. "어서요."
"어... 으음..." 그는 턱을 긁적이더니, 머리 위로 밝아 오는 아침 하늘을 쳐다보다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어릴 때는 메어리스 라벨Mareece Ravel*3의 장엄 교향곡을 즐겨 들었지요. 열병식에 자주 쓰이기도 하고요."
"좋네요! 마리스 라벨 정도면 자면서도 연주할 수 있으니까!"
"그래요? 그거 참...... 어... 대단하시긴 한데......" 그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어디 가셨지?"
나는 이미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한 멜로디를 옮겨 적으러 오두막집으로 달음박질치고 있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동네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이 어디죠?"
"예?"
길 건너편 반쯤 철거된 호텔 건물에 달라붙어 한창 작업에 열을 올리던 암브로시아와 기타 인부들이 이쪽을 신기한 구경 하듯 쳐다보았다. 조증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들뜬 여자 하나가 모닝 듀를 붙잡아 놓는 모습으로 보였을 테니 그럴 만했다.
"어느 날 휴가를 얻었다고 치고." 나는 말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누워서 날씨나 즐기며 뻗어 있을 수 있으면 어디로 가실 건가 물었어요."
"그... 음..." 모닝 듀는 더듬거렸다. 현기증에 순간 비틀거리다가, 자세를 고쳐잡고 겨우 꺼낸 답은 이것이었다. "평소 같으면 온실에서 보내겠지만, 그렇게 되면 마을 동쪽 호숫가에 가지 않을까 싶군요."
"호숫가요?"
"네. 호수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차분해지면서 머리가 맑아지거든요. 가끔 시간이 나면 물가에 앉아 쉬면서 삶을 되돌아보지요."
"그거 멋진데요. 그럼 안녕!" 나는 곧장 뛰어가 버렸다.
모닝 듀는 뭐라 발음할 수 없고 발음하더라도 무슨 말인지 모를 한 마디 말과 함께 멍하니 서 있었다. 그저 한쪽 발굽으로 몸짓하다가 어깨 너머를 돌아보곤, 그때껏 지켜보고 있던 암브로시아를 비롯한 다른 인부들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그들은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나는 오두막에 들어앉아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 멜로디를 오선지에 대충 끄적여 적었다. 다 옮겨 적은 악보를 목전에 두고 음표 하나하나를 조용히 흥얼거리며 꼼꼼하게 확인했다. 확인이 끝나자마자 벌떡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는 걸음을 재촉했다. 항아비곡을 옮겨 적다가 내버린 악보 몇 장이 발에 채였다. 나는 리라를 챙기지도 않고 나와 문간에 서 있었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내 작은 집을 돌아보았다. 집 한쪽 구석에 놓아둔 엔드 테이블 위에 황금색 꽃들이 가만히 놓여 있었다. 거의 열 송이가 다 되어 가는 튤립이 가지런히 모여 꽃병에 꽂혀 있는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순간 어떤 생각이 떠올라 표정이 굳어졌다.
"흐으음......"
나는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뿔을 밝혀 찬장과 서랍장을 도둑처럼 헤집었다. 은을 명주실처럼 만들어 짠 장식끈이었다. 눈앞에 장식끈을 띄워둔 채 고개를 돌려 다시 한 번 튤립 꽃병을 쳐다보았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뱉으며 꽃병에 꽂힌 꽃송이 하나씩을 가볍게 톡톡 건드렸다.
캐러셀 부티크 출입문 위에 매달린 종이 큰 소리로 울어댔다. 래리티는 의상실 안을 다급하게 뛰어다니느라 바빠서 채 눈치채지 못했다.
"아이 참, 장식끈을 죄다 어디에 치워 놓고 이러지? 얼마 정도는 무조건 챙겨 가야 하는데! 플러터샤이 드레스가 찢어지거나 하면 어쩌나, 제발 그럴 일이 없어야 할 텐데! 으! 맞아, 이것도 있었지! 트와일라잇 옷도 잘못될 수 있는데! 별 장식 하나는 분명히 박음질 풀려서 헐렁거릴 게 뻔한데!"
"어..." 내심 불안해서 살짝 몸을 떨면서도 나는 래리티의 영역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래리티 씨 되시죠? 혹시... 때를 잘못 맞춰 온 건 아닌가요?"
"때를 잘못 맞췄다니요? 아뇨, 그럴 리가 없죠! 말도 안 되죠!" 래리티는 곧장 경박한 웃음소리를 터뜨리며 루비 장식이 박힌 상자에 온갖 신기한 것들을 무지막지하게 쑤셔넣었다. "대연회까지 앞으로 이틀밖에 안 남아서 도저히 못 견디겠거든요! 이게 어떻게 안 좋은 타이밍이 될 수 있겠어요?!" 래리티는 말을 멈추고, 눈에 띄게 부스스해진 갈기를 쓸어 넘겼다. "비구름 근처에 금관 던져두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기는 했지만, 레인보우 대쉬가 그대로 따라 줘야 할 텐데요!" 래리티의 두 눈이 순간 시뻘겋게 달아오른 석탄처럼 이글거렸다. "연회 도중에 혹시라도 금관에 녹이 슨 게 보였다가는 창자를 뽑아다가 머리에 세 번 둘러서 묶어 버리고 말 거에요!"
"흠흠." 나는 래리티를 정면으로 마주보고 섰다. "그... 어...... 여유가 없으신 건 저도 알지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어려워요!" 래리티가 발굽사래치며 말했다. "말씀하시던 중에 끊어 버렸군요. 정말 죄송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 누가 오더라도 드레스를 짓는 건 물론이고 수선해 드리기도 어렵답니다. 수선하실 게 있으시다면 대기자 명단에 성함을 적어 주세요. 돌아오는 대로 손봐 드리죠!"
"그게......" 나는 입술을 씹으며 몸을 꿈지럭거렸다. "정말, 진짜로 급한 거라서—"
"똑같은 말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건 취미에 없습니다마는." 래리티는 뒤돌아 재봉 물품 사이사이를 오가며 말했다. "협상의 여지가 없다니까요! 혹시나 싶어 미리 말씀드리는데, 금화나 보석으로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에요. 토지 소유증서를 가져오시더라도 대답은 똑같을 거고—"
나는 래리티 앞 탁자에 리라를 쿵 내려놓았다. 금속성이 울렸다. "장엄 왈츠는 어때요." 나는 말했다. 래리티가 멈칫하더니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물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죠?"
"장엄 왈츠를 가르쳐 드리죠." 나는 래리티를 똑바로 마주보며 다시 말했다. "삼십 분이면 돼요." 나는 침을 삼키고 한 마디를 덧붙였다. "언제, 어디서든 그 자리에서 바로 춤이 나오게 해드릴 수 있는데."
래리티는 염동력으로 띄워두고 있던 옷감과 장식끈을 툭 떨어뜨렸다. "딜!" 래리티가 곧장 앞으로 달려와 치수를 적어둔 메모를 홱 낚아채며 말했다. "필요하신 거 말씀만 하세요!"
"이거 참......" 캐러맬은 목에 맨 보타이를 하염없이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포니빌 북쪽 언저리에 영 어색한 듯 서 있던 사내 곁에 선 다른 남자 옆으로 아침 해가 떠올랐다. 둘은 동쪽, 캔틀롯을 향하여 뻗은 길목을 따라 은마차를 끌고 갈 예정이었다. "목에 매는 게 아니라 목을 매는 것 같구만. 내가 무슨 정신으로 이 짓 해보자고 했는지."
윈드휘슬러가 어디선가 툭 튀어나와 캐러멜 앞에 둥둥 떠서 말했다. "네가 래리티 씨 말을 들었기 때문이지. 그 래리티 씬 트와일라잇 스파클과 친분이 깊은 분이고." 그녀는 애정 어린 미소를 지으며 캐러멜의 보타이를 고쳐 맸다. "트와일라잇 스파클은 캔틀롯에 연줄이 있는 사람 중에서도 가장 명망 높은 사람이지. 사업을 제대로 해 보려거든 우리가 얼마나 친절하고 신용 있는 사람인지 광고할 필요도 있어."
캐러멜이 한숨을 내쉬더니 눈을 굴렸다. 그는 피곤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난 그냥 배달부 복장으로 다닐 줄 알았지. 옷만 보면 대연회 초대받은 사람인 줄 알겠어."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잖냐." 어디선가 선더레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블로섬포스와 클라우드체이서, 플리터, 럼블을 대동한 선더레인이 한쪽에서 나타났다. "인생 대충 넘길 날개 찬스가 세상 사람 전부한테 있는 게 아니니까."
캐러멜이 한숨지었다. "이거 날개 패거리들 아니신가. 구경이라도 왔나?"
"오오오오오, 캐러멜!" 블로섬포스가 싱긋 웃었다. "왜 그리 심각해? 다들 친구 아니야. 다같이 배웅을 나가 줘야겠다 싶어 왔지!"
"배웅이라고 해도, 주말만 넘기면 다시 돌아올 거지만." 클라우드체이서가 덧붙였다. "어...... 윈디는 같이 안 가?"
"금방 따라오겠다고 하던데." 캐러멜이 약혼녀 쪽으로 몸짓하며 말했다.
"어. 동네 돌아다니면서 해둬야 할 게 몇 가지 있어서." 윈드휘슬러가 끄덕였다. "그것만 마치면 바로 캔틀롯 가서 합류할 거지만."
"그러고 보니 그걸 안 정했네." 캐러멜이 고개를 돌렸다. "어디서 만날래? 시내 쪽에 대단한 도넛 카페가 있다는 모양인데. 내일 아침 거기서 만날까?"
"으음...... 내일 정오쯤으로 하자." 윈드휘슬러가 말했다. "상점가에서 드레스를 한 벌 사야 해서 말이야."
"드레스라니?" 캐러멜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했다. "윈디, 우린 대연회 초대장 받은 게 없잖아! 그쯤 되면 연회도 끝났을 텐데!"
"난 대연회 간다는 얘긴 한 마디도 안 했는데?" 윈드휘슬러가 빙글빙글 웃으며 대답했다.
"음?"
윈드휘슬러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고도를 조금 낮춰 캐러멜의 귀에 뭐라고 속삭였다.
캐러멜은 가만히 듣고 있었다. 몇 번 눈을 꿈벅이더니, 맹렬한 기세로 얼굴을 붉혔다.
"오 호!" 선더레인이 한쪽에서 킬킬댔다. "구경거리는 씨가 마른 줄 알았더니, 이거 굉장한 구경거리*4가 하나 있었군!"
"조용하지 못하겠니!" 윈드휘슬러가 혀를 낼름 내보이더니 깔깔 웃으며 말했다. "선더레인 넌 음란마귀가 가득 들어찬 머릿속을 좀 덜어낼 필요가 있어!"
"난... 어... 깨끗이 씻고 기다리지 뭐." 캐러멜이 멍하니 말했다. 옆에 선 남자가 낄낄댔다. "웃지 마요 좀!"
질질 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방향으로 다들 고개를 돌렸다. 암브로시아가 달려 들어왔다. "휴! 아슬아슬했구만 또!" 암브로시아가 안전모를 내려 벗고 캐러멜을 쳐다보며 몸짓했다. "잘 갔다 와, 우리 꼬맹이!"
"달랑 그 한 마디 하자고 여기까지 뛰어온 거야?" 캐러멜이 아연실색해서 말했다.
"하하하. 당연하지! 넌 좀 존중받아 마땅한 녀석이니까 말이야." 암브로시아가 얼굴을 찌푸렸다. "설마 그 '레이디 래리티'란 양반이 이것도 옷이라며 청구서 들이밀진 않았겠지?"
"그게—"
캐러멜이 뭐라 말하려던 찰나, 윈드휘슬러가 캐러멜의 입을 틀어막으며 끼어들었다. "캔틀롯에서 만나면 거기서 데이트나 하려고."
"전에 그러지 않았나..."
"어." 블로섬포스가 고개를 주억이며 끼어들었다. "운송업...... 이라고 해야 하나, 그쪽으로 해 볼 거라는 모양이야."
선더레인이 헛기침했다. "1년쯤 지나면 뭔가 다른 거 하나도 어딘가 다른 곳에 실어다니고 있을지도 모르지."
"블로섬?"
"응, 윈디?"
"선더레인 좀 때려 줘."
"그러지 뭐." 말이 끝나자마자 커다란 찰싹 소리가 났다.
"아우!" 선더레인이 한쪽 엉덩이를 문지르며 애인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너 그냥 나 때려보고 싶었지."
옆에 섰던 페가수스 자매들이 깔깔 웃었다.
"아 그만 좀!"
클라우드체이서와 플리터도 까르르 웃었고, 암브로시아도 히죽거리며 동참했다. 늘 그렇듯 럼블은 혼자 다른 세상에 가 있었다.
그 때, 조그마한 보라색 새끼용 하나가 헐떡이는 숨으로 달려 들어왔다.
"거기 잠깐만, 일정 변경이야!" 스파이크가 단숨에 마차 위로 기어올랐다. 작은 몸에 두른 정장 소매를 진땀을 줄줄 흘리며 가다듬더니, 숨찬 소리로 말했다. "캐러셀 부티크에서 만나 가기로 했으니, 거기 잠깐 와 달라대!"
"뭣?" 캐러멜 옆에 선 사내가 툴툴대며 말했다. "달랑 몇 구획 건너와서 직접 타지도 못할 정도로 치장한 게요?"
"거 이봐요!" 스파이크가 순간 불을 뿜을 듯 호통치고는 말했다. "래리티가 그렇게 하라니, 일단 그리로 가시자구!"
"그래 뭐, 대충 무슨 일인지는 짐작이 가는군." 캐러멜이 눈을 굴리다가, 윈드휘슬러를 보고 빙긋 웃어 보였다. "그럼 내일 보자?"
"난 오늘 꿈에서 볼 건데."
"하하하... 못 당하겠다니까."
윈드휘슬러가 더욱 내려와 서로 얼굴을 가까이 대고 비볐다. 사내의 입가에 가볍게 입맞춘 여자가 하늘을 날아 사라졌다. 캐러멜이 스파이크에게 몸짓했다. 스파이크가 쥐고 있던 고삐를 흔들었다.
"대연회를 향하여!"
"캐러셀 부티크가 먼저였지?"
"어. 그러네. 헤헤. 그렇지."
은마차를 끌고 멀어져가는 사내 둘의 뒤에 남은 캐러멜의 동아리가 저마다 발굽을 흔들고 큰 소리로 잘 다녀오라고 소리쳤다.
암브로시아가 흔들던 발굽을 내리더니 히죽거리며 말했다. "별반 도움도 안 되는 춤판에 저러고 번쩍번쩍하게 빼입고 다녀야 하는 건 대체 뭔지 모르겠다니까."
"그게 말이지, 앰버. 가끔씩 사소한 사치를 누릴 권리 정도야 있지 않겠어."
암브로시아가 깜짝 놀라 옆을 돌아보고 말했다. "모닝! 거기 언제부터 있었어?"
"방금 와서 얘기에 끼지도 못했지 뭐야." 사내가 부드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그래도 별 문제는 없을 거야. 캐러멜이라면 알아 줄 테니까. 윈디도 그럴 거고." 모닝 듀가 몸을 돌려 동아리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시내에서 조촐하게나마 파티를 한다는 모양이야. 가는 사람?"
"아하..." 블로섬포스가 눈을 굴리며 말했다. "그거네. '진짜배기 대연회에 초대받지 못한 유구한 모욕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가엾고 딱한 시민 여러분을 위한 위로 파티'. 우리 시장님의 천재적인 작품이지. 쳇. 됐어, 난 사양이야."
"뭐 그건 그렇고, 우리 다 노는 법은 다 알잖아. 늘상 그렇게 놀아 왔고." 선더레인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러더니 옆에 있던 럼블을 내려다보고 물었다. "꼬마 동생, 형 말이 맞아 틀려?"
럼블은 조용히 혼잣말하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흐으으음...... 데이지? 민들레가 낫나? 역시 장미?"
"요! 정신 차려 맨!"
"어, 엇?" 럼블이 자리에서 펄쩍 뛰더니 형과 그 친구들의 무리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왜?"
"혼자서 뭘 주절주절 그렇게 늘어놓고 앉았어?"
"나도 몰라..."
"네가 몰라?"
꼬마는 마른침을 삼키더니, 특유의 새된 목소리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물었다. "우리 동네에서 가장 예쁜 꽃이 뭐 있어요?"
"그거야 뭐......" 암브로시아가 발굽짓했다. "모닝 듀가 그쪽으로는 도사지. 그건 왜 알고 싶은데?" 암브로시아가 눈썹을 치켰다 내리며 익살을 부렸다. "혹시 여자친구한테 뭐 선물이라도 할 생각이니?"
"네?" 럼블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무슨! 아니에요! 꽃 같은 걸 좋아할 리 없—"
블로섬포스가 깜짝 놀라 말했다. "어머머머머머! 진짜네 진짜!"
"아니라니까요!" 럼블이 꽥 소리쳤다. 그리고 그 스스로도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붉혔다. "저도 왜 꽃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
"세상에, 이 일을 어찌해야 좋을꼬?" 클라우드체이서가 장난스럽게 럼블의 매끈한 검은 갈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리 두 눈 앞에서 럼블이 당당한 로맨티스트가 되어 가고 있다니 하느님 맙소사!"
"적어도 저 집안 누구 하나는 이미 그런데 말이지." 블로섬포스가 무심하게 덧붙였다.
"하 하, 그래—야!" 선더레인이 블로섬포스를 째려보았다.
그녀는 낄낄 웃을 뿐이었다.
"몰라! 당신들 다 돌대가리들이야!" 울상이 된 럼블이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뛰쳐나갔다.
"에헤이! 럼블! 그러면 못써!" 플리터가 럼블의 뒤에 대고 소리쳤다. "젠장할, 그러게 애는 왜 건드려서 이 사달을 내고 그래."
"저 녀석은 내가 데리고 올게." 선더레인이 신음하듯 말했다. "너흰 다른 데 가 있어. 하여간, 어떻게 너흰 하루를 그냥 못 넘어가냐."
블로섬포스를 비롯한 다른 둘이 낄낄거리더니 이내 날개를 펴고 다른 방향으로 날아갔다. 모닝 듀는 동아리가 흩어지는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살며시 미소를 띄우며 암브로시아 쪽을 돌아보았다.
"다들 들뜬 것 같지. 이맘때쯤 되면 어김없이 이러기는 했지만."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포니빌같은 벽촌僻村까지 대연회 때문에 들뜰 이유가 뭐인 것 같아?"
"난 안 그렇거든." 암브로시아가 나직하게 툴툴댔다. "내 할 일도 바빠서 그딴 데는 신경을 쓸 수가 없단 말이지." 그녀는 몸을 돌려 모닝 듀의 조경용 수레 뒤쪽을 가리켜 보였다. 호텔 건물 골격 주위로 주황색 끈을 두르는 인부들이 보였다. "내일 날 밝으면 저것도 잡아 조져야지. 알아서 엎어져 줄 것 같지는 않잖아."
"그렇잖아도 시내 게시판에 경고 공문 붙었더라." 모닝 듀가 끄덕이며 말했다. "그 유난 떨 것까진 없지 않나 싶던데?"
"하. 왜, 내일 한참 일하고 있는데 동네 한가운데서 천둥 치는 소리 날 것 같아서 무서워?" 암브로시아가 안전모를 다시 뒤집어썼다. "순식간에 끝날 거야. 폭파할 때 안전거리 안쪽까지 기어 들어오지 않는 이상 위험할 것도 없어. 굳이 무슨 의미를 끄집어낸다면야, 이 재미없는 동네에 찰나의 유흥거리 정도는 되겠지. 대원군*5인지 뭔지 구경 못 해서 질질 짜던 애들도 깜짝 놀라서 잊어버릴걸."
"대연회야."
"알 게 뭐야."
"흠." 모닝 듀가 말했다. "전에도 말한 것 같은데, 한 번 더 말하지 뭐. 너 하는 일 때문인지 네 말은 뭔가 독특한 느낌 같은 걸 내 준단 말이지."
"어휴, 또 헛소리." 암브로시아가 재미없는 얘기 그만 하라는 듯 손사래치더니 멋쩍어하며 은발 갈기를 매만졌다. "요새 네 미의식이 갈수록 이상해지는 거 같단 말이지...... 너 그러다..." 암브로시아는 모닝 듀 뒤에 비치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고, 그 통에 입 밖으로 나오던 말이 질질 끌리다가 사라져갔다. 땀에 젖은 이마가 찌푸려졌다.
"음?" 모닝 듀가 암브로시아를 쳐다보았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사내의 얼굴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미소였다. "아, 이런." 그는 짐수레에 발굽을 넣어 거의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튤립을 꺼냈다. "좋은 아침이에요......" 얼굴에 어린 웃음기가 흐려졌다.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금빛 솜털은 늘 그랬던 대로 밝은 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떨리는 숨이 사내의 입가를 떠났다. "...천사님."
나는 심호흡하며 침착한 모습을 유지했다. 나는 그의 두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느 샌지 두 눈이 크게 뜨였는데, 푸른 눈동자 위에 그의 두 눈에 비치고 있을 형상이 그대로 비쳤다. 민트그린색 솜털을 한 여자 하나가 은빛 비단 가운을 걸치고 있는 모습. 크림색 실로 작은 꽃무늬 패턴을 수놓고, 거의 보이지 않는 금실로 마감해 소박하게 맞춘 옷이었다. 왼쪽에 가볍게 늘어뜨린 띠에 리라를 자연스럽게 걸어 두었다. 내 머리 위에는 햇빛을 받아 반짝이며 화룡점정을 이루는 장식이 하나 얹혔다. 내 뿔 주위로 널널한 공간을 두어 두를 수 있도록 짠 튤립 꽃관이었는데, 말할 것도 없이 지금껏 그가 내게 한 송이씩 주어 온 꽃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가 이미 잊어버리고 없는 과거의 유령이 보여 준 일관성에 나는 반했고, 그랬으므로 나 또한 그에게 있어 매력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려 했다.
"글쎄요." 나는 최대한 당당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심하게 웅얼거리기나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나는 이 평온한 순간을 평온한 숨결로 장식하고 싶었으니까. "뭐, 꼬시려는 생각만 아니시라면야..." 나는 초조한 웃음을 덧붙여 말했다.
늘 같았던 답을 들려줘요. 부디...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 자리에 얼어 버리기라도 한 듯했다. 굳어 있기는 했으되, 그는 여전히 모닝 듀였다. "그 반대랍니다." 그가 대답했다.
아, 다행이다...
침을 삼켰다. 심장이 노래했다. 래리티가 지어 준 멋진 가운이 뛰는 심장에 녹아 없어지진 않을까, 나는 생각했다. 헛기침하고 고개를 한쪽으로 갸웃해 보이며 말했다. "멋진 인사네요. 친절하시기도 하셔라." 나는 그의 발굽에 쥐인 튤립을 가리키며 말했다. 한결 안정된 숨을 뱉은 다음에야 나는 얼굴에 홍조를 띄우고 말했다. "그 전에... 하하하...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는데요?"
그는 튤립과 내 이마에 걸린 꽃관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마른침을 삼킨 사내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좋은 질문이네요. 그... 음... 하하..." 그는 목을 문지르며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공주님 맙소사, 이 남자 왜 이리 귀여운 거람? "그림을 그리다 보면 뭔가를 더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만, 망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요?"
"흠......" 나는 쑥스러운 척 고개를 내리깔고 말했다. "포니빌 사람들은 다들 이렇게 시적인가요?"
"음... 바보들이나 그런 화법을 쓰죠." 모닝 듀가 헛기침하고 말했다. "그... 아. 미안합니다. 그런 의도가—"
"아뇨, 미안해할 것 없어요." 나는 그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실은, 그쪽을 만나러 온 거거든요."
"저... 말인가요?" 그는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요. 시청 소속 조경사, 모닝 듀 씨 맞으시죠?"
"어, 네. 제가 모닝 듀이긴 합니다만, 무슨 일이시죠?"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다른 사람들이 절 두고 뭐라 하던가요?"
"화훼에 대해선 그쪽이 이 근처에선 제일이라고 하더군요." 나는 웃고 말했다. "그래서 언젠가 얘길 해보고 싶었죠."
"그, 그러신가요?"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나는 그때 암브로시아에 대해서는 요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시야 구석으로 그녀의 형상이 멀어져 갔다. 암브로시아의 시선이 모닝 듀를 향했다가 나에게 오고, 다시 모닝 듀에게 향했다. 조용히, 아주 조용히, 그녀는 뒷걸음질쳐 배경 속으로 사라져 갔다.
나는 전경 한가운데 당당히 서서, 어안이 벙벙한 채 선 어스 포니 사내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제 이름은 라이라 하트스트링스. 그다지 유명하지는 않지만, 캔틀롯 출신 음악가에요." 나는 슬쩍 몸을 꼬았다. 내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이 저주라는 것이 전부 없는 일로 만들어 주기는 했지만, 아주 약간의 진실조차 섞지 않은 거짓말을 할 때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 시내에서 공연을 몇 번 해 볼까 하는데, 아무래도 다른 분들이 하는 것만큼만 하는 걸로는 성이 안 차거든요. 평판이라는 게 따라다니니까요. 그래서 리라 연주 말고도 청중들께서 흠뻑 빠지실 수 있는 공연을 해야 하죠. 일단 그러려거든, 으음... 무대를 멋지게 꾸며야 해요. 네. 독주하는 동안 제 주변을 꽃 장식으로 꾸며 보는 건 어떨까... 생각하고 있거든요."
"그거..." 그는 나를 쳐다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멋진데요."
나는 씩 웃으며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뭐가요?"
"그러니까... 어..." 그는 불편한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되게 멋진 생각이라는 뜻이었어요." 그는 손수레에 튤립을 돌려놓았다. "그... 음... 아무튼 사람은 제대로 찾아오셨군요! 동네 분들이 절 추천해 주신 것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으니까요. 그... 어떤 분에게 제 얘길 들으셨는진 몰라도, 사람은 다들 잘하는 게 다르니까요. 음... 제가 소파 고치는 거나 펜대 굴리는 일은 잘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어... 이런..." 사내가 얼굴을 문질렀다.
나는 그 만남에 기대하는 바가 아주 많았다. 여기에라도 고백하자면, 그 사람을 허둥지둥하게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대화의 방향을 틀어놓을 생각으로, 그의 손수레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말했다. "포니빌에는 조경사가 그쪽 한 분만 계신가요?"
"음, 그렇지는 않아요." 그는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 마디씩을 꺼낼 때마다 조금씩 진정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어스 포니가 많은 도시거든요. 캔틀롯과 달리 예술 쪽에 재능이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요. 대신 농작물이나 화초 쪽에 능한 사람은 더 많지요."
"플로리스트*6라면 어때요?" 나는 수레에 기대어 데이지가 가득 꽂힌 화병에 고개를 대고 향기를 맡으며 빙긋 웃었다. 아침 바람에 화관 꽃잎이 살랑거리는 느낌이 느껴졌다. 나는 그를 빤히 쳐다보고 말했다. "여기처럼 예스러운 작은 마을에, 예쁜 꽃을 전문적으로 가꾸고 다루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흐으음......" 그는 갈기를 만지작거리며 얼굴을 붉혔다. "하하. 그렇군요. 말씀대로에요."
"그러시다면 제가 그쪽을 찾아온 이유를 짐작하시겠군요." 나는 그를 향해 멋을 낸 걸음으로 다가갔다. 잠시 고개를 숙여 목 아래를 살짝 쳐다보았다. 발굽에 래리티가 옷에 어울리는 신발을 신어야 한다며 만들어준 은빛으로 반짝거리는 슬리퍼가 신겨져 있었다. 나는 가능한 신발을 더럽히지 않으면서 얼굴에는 차분한 웃음을 띄우며 사내 앞에 다가섰다. "마을 유일의 화훼 전문가시니, 틀림없이 아주 뛰어난 분이시겠죠. 즉, 미학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그쪽이 믿을 만하다는 거지요. 그런 분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공연 준비를 믿고 맡길 수 있겠어요?"
"음, 뛰어나다는 말을 들으면 어떤 기분일까 잘 몰랐었는데—" 모닝 듀가 입을 열었다. 그는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파란 눈동자가 떨렸다. 코끝이 살짝 올라가는 것을 나는 보았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는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부탁이에요. 갑자기 쓰러지지만 말아 줘요...
"이거... 하하..." 사내의 표정이 활짝 웃는 얼굴로 바뀌었다. "굉장히 좋은데요. 잠깐... 혹시 자스민 향인가요?"
나는 침을 삼키며 가능한 나긋나긋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훌륭한 음악가란... 음... 어떻게든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죠." 아 이런. 너무 나가 버렸구만. "그... 캔틀롯에 있을 때부터 향수 뿌리는 습관이 들었거든요. 포니빌에서는 이상하게 보일 것 같지만." 나는 움찔했다. 입 다물자! 사회학자마냥 두 마을 비교연구나 하고 있을 시간 없다구!"
다행히도 모닝 듀는 많이 냉철한 사람은 아니었다. ...어쩌면 내 생각 이상으로 그런 사람일 수도 있겠지. 뭐라 말하기 힘들다. 그 사람이 한 마디를 할 때마다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으니까. "아, 아뇨. 저한테는... 대단히 매력적입니다." 그의 대답은 말 그대로 연인끼리 속삭이는 소리와 같았다. "저기..." 사내는 말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마음 속에서 다 때려치우고 그 입술에 내 입술이나 갖다 대라는 아우성이 들려왔다. 그는 헛기침하고 말했다. "저... 혹시 생각해 두신 꽃이 있으신지?"
"일단 찾아뵙기만 하면 그쪽에 다 맡길 수 있을 것 같았죠." 나는 말했다. "그쪽 시간을 너무 잡아먹는 게 아니기만 하다면야."
"아! 아뇨! 그..."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침 코스는 거의 다 돌았으니까요."
"아침 코스라뇨?"
"매일 아침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확인을 하죠. 꽃이 아직 피어 있는지 확인하고, 상점가 앞에 슬슬 뿌리를 박으려는 잡초를 걷어내는 작업 같은 거죠. 뭐 그런 것들이에요. 시장님께서는 우리 마을은 이렇기를 바란다고 확고한 방향을 잡아 두시고 계신데, 그걸 이뤄 드리려면 아주 많은 곳을 돌봐야 하죠."
"상상만 해도 벅찬데요..."
"건너편 건물 있는 자리는 야생화가 자랄 공간이겠지, 생각하고 있어요."
"저기 시끄러운 사람들 달라붙어 있는 건물 말씀하시는 거에요?" 나는 암브로시아와 다른 인부들이 달라붙어 있는 건물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거 완전 철거할 건물 아닌가요?"
"음. 네. 한 달밖에 안 걸렸네요."
"그건 그렇고..." 나는 그를 곁눈질하고 물었다. "야생화요? 진심?" 나는 웃음을 겨우 누르며 말했다. "굳이 걔들이 자리잡을 터가 필요할까요?"
모닝 듀는 빙긋 웃고 말했다. "바보 같은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공기만큼이나 흔해빠진 것이라도 색채만 풍부하다면 아무렇게나 내버릴 생각은 없답니다." 그는 반쯤 철거된 호텔을 흘끗 보았다. "실은, 저 낡은 건물도 더는 못 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은 것도 사실이에요. 오래된 건물이기는 하지만, 무너뜨리고 나면 시대의 유물을 영영 잃어버리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으니까요."
"유물로 보는 사람이 있으니, 정신 사나운 산업폐기물로 보는 사람도 물론 있겠지요?"
"그럼요. 그래도 단순한 이분법만 가지고 인생을 살고 싶지는 않네요."
"그래요?"
"음......" 그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 만물에 각자 타고난 아름다움이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게 유용하더군요. 특히 생겨났다 사라지는 것들이라면 더더욱 말이죠." 사내의 잘생기고 사려 깊어 보이는 얼굴이 차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세상 모든 게 항상 우리 기분을 좋게 해주지는 않지만, 막상 그것들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나서도 우리 머리 속에 기억되잖아요? 그런 거죠."
나는 그 말에 내가 대답할 말이 있기를 바랐다. 눈물로 그의 말을 가슴에 새기고 그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나는 그 한 순간만을 위해 엄청난 공을 들였다. 굳이 망쳐놓고 싶지도 않았고, 그이 또한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다.
"모닝 듀 씨는 굉장히 생각이 깊은 분이시군요." 나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생각이야 세상에 차고 넘치지요. 그 중에서 잘 키워 볼 만한 건 꽃 정도밖에 없지만." 그는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쪽 시간을 낭비하면 안 되겠군요. 캔틀롯 연주가시니 일정이 굉장히 촉박하실 테지요. 그쪽은 대연회에 안 가시나요?"
나는 소리내어 웃고 발굽을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아, 그거요. 그것보다 더 재미있는 곳이 얼마나 많은데요. 지금은 포니빌에만 있고 싶네요."
"음, 뭐 그러시다면." 그는 고개를 끄덕하고 말했다. "도움이 되어 드릴 수 있어 기쁩니다. 꽃 견본을 보시고 싶으시다면 적당한 곳을 한 곳 알고 있지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같이 가시겠습니까, 리라 씨?"
"그럼요! 잠깐—" 나는 자리에 얼어붙었다. 귀가 울렸다. 나는 그를 흘끗 쳐다보며 물었다. "방금... 뭐라고...?"
"실례했군요. 성함이 리라 씨 맞지 않나요? 제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요?"
"틀린 건 아니지만, 그게... 쿡쿡—하하하하!"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사내의 얼굴은 거의 붉으락푸르락해지며 홍조로 물들었다. 그는 혼자 줄을 못 맞춘 병사처럼 벙쪄 있었다. "죄송... 죄송합니다. 어디가 잘못됐나요?"
"아뇨. 그냥... 흠흠. 그냥, 발음이 좀—"
"발음을 잘못한 건가요?"
"어, 꼭 그런 건 아니에요. 그..." 가슴이 쿵쿵 뛰었다. 기분이 상했다고 해도 그 천 배 정도 좋은 기분이라는 것을 설명할 기력이 없었다. "그쪽이 제 이름을 그렇게 부르는 게 익숙치 않을 뿐이죠."
"정말인가요?"
"라이라라고 읽어요. 리라가 아니에요." 나는 올라오는 웃음을 힘껏 눌렀다. "그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쪽이 그러시니."
그는 쑥스러운 듯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라이어Liar라고 발음한 것과 거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음, 잘 생각해 보세요! 달리 생각하면 그 악기는 라이어Lyre*7라고도 읽는걸요."
"이거, 저는 못 당하겠는데요."
"네 뭐... 하하하하..." 나는 반쯤 주저앉다시피 하면서도 그를 향해 발굽을 내저으며 말했다. "실례했네요. 그게... 쿡쿡... 설마 제 이름을 그렇게 읽으실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기절할 것만 같았고, 날아갈 것만 같았다. 이보다 더 귀여울 수 있을까? 상상도 못 했던 의외의 면모 때문인지 그를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다. "세상에. 세상 참 재밌어요, 그렇죠?"
"잠깐... 잘 모르겠는데요." 그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제가 전에 하트스트링스 씨 성함을 전부 불러 본 적이 있었던가요?"
관자놀이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진정하자, 진정해. 살짝 오락가락하는 정도로 수습해야 웃어넘길 수 있단 말야. "아, 그렇군요. 미안해요. 그게... 어..." 이건 흰 거짓말이야. 악의는 없어. 어쩔 수 없는 거야. "이른 아침부터 이러고 돌아다니는 게 영 익숙하지 않아서요. 잠이 덜 깼나 봐요." 이 정도면 됐어.
"대단한 사람들이라도 한 번쯤은 그런 일을 겪죠." 그가 답했다.
가장 운이 좋은 사람들만 그럴지도요. 가장 잘생긴 사람만 그럴지도, 가장 푸른 눈을 가진 사람만 그럴지도...
"그럼 따라오시죠, 라이라 씨." 그는 정확히 발음했다. 나는 그가 그렇게 말해주기를 꿈꿨었다. 나는 구름 위를 걷는 듯,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우리는 북동 방향으로 계속 걸어 마을 외곽에 있는 그의 온실에 도착했다. 가는 길에 유리 온실 몇 채가 세워져 있었다. 나는 그 어느 하나라도 가까이 들여다보려는 수고를 들이지 않았다. 내가 따라간 길이라고 해야 그의 뒤를 그대로 쫓아간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매일같이 학수고대하던 멋진 일들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하기도 했다.
내 앞에서 걸어가는 저 사내가 내게 말을 걸고, 즐거움으로 반짝이는 두 눈으로 나를 보며 내 존재를 증명해 주고 있었다. 어색한 듯 몸을 떨거나,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더듬거리는 모습은 그의 발걸음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천지사방에 익숙한 식물들이 가득해서, 사내는 자신감을 되찾고 대담해졌다. 그의 한 모습이자 그의 세상에 우리는 와 있었다. 나는 이 나긋한 사내의 왕국 국경에 갓 발을 들여놓은 방랑자와 같은 기쁨을 느꼈다. 그는 하나하나 설명해 주며 나를 안내했다. 그의 입에서 떨어지는 정제된 언어 한 마디 한 마디가 귀를 간지럽혔다.
"캔틀롯 출신이시라고 하니,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일에 익숙하시겠구나 정도밖에 짐작이 안 되는군요. 라이라 씨 자리를 장식하는 걸 넘어서, 라이라 씨를 돋보이게 하려면 밝은 색 꽃을 쓰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갈기의 흰 브릿지가 매력적이니까요."
"어머, 고마워요."
"하하... 흠흠. 자, 실내 공연이라면 카네이션을 쓰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치형으로 화환을 짜고, 꽃송이 몇 개로 장식하면 잘 어울릴 거에요. 실내가 아니라 실외 공연을 하신다면 카네이션 대신 여기 백합을 쓰시는 걸 추천하죠." 그는 백합 몇 송이를 발굽으로 살살 쓸어 보였다. "다만 아시다시피 백합*8은 특유의 용처 때문에 곤란하지요. 설마 장례식에서 연주하실 것 같지는 않으니까요. 그러니 비슷한 이미지를 가지는 다른 꽃으로 넘어가면..." 그는 몇 걸음 더 가더니 거기 줄지어 피어 있는 꽃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데이지를 써 보시는 것도 괜찮답니다. 무대의 균형감을 살려 줄 거에요."
"정말 어느 상황에서 어느 용도로 쓰더라도 다 여기서 조달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나는 그의 뒤를 따라가며 말했다. 온실 안은 따뜻했다. 나는 유리 온실의 유리판 때문인 척했다. "대단하세요."
"포니빌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이죠." 모닝 듀가 말했다. 우리는 꽃이 줄지어 늘어선 사이를 거닐었다. 그는 혹시라도 굴러다니는 잎사귀나 나뭇가지가 내 몸이나 드레스를 긁지 않도록 신경 써 주었다. 몸에 배어 자연스럽게 나오는 그 모습에 나는 조용히 웃었다. "필리델피아나 메인해튼에 비하면 시간이 넉넉한 편이랍니다. 실례일지도 모르지만, 라이라 씨 고향과 비교해도 그렇지요."
"포니빌이나, 다른 곳 사람들은 대부분 캔틀롯 사람들이 늘 바쁘고 피곤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좀 다르답니다." 나는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나라 문화예술이나 과학기술의 중심지니까요. 매일 아침마다 교통체증에 시달려야 그 이기를 얻는 게 문제일 뿐이죠."
"하하. 캔틀롯이라면 조경사들을 엄청나게 고용해서 미화 작업을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말했다. "셀레스티아 공주님과 루나 공주님께서 거처하시는 곳이니 당연하겠죠. 왕궁을 관리하시는 분들은 조경의 정점에 계신 분들일 겁니다."
"아. 대단한 분들이죠." 나는 끄덕이며 말했다. "왕실의 시험을 통과하고, 자격을 인정받으신 분들인 건 틀림없어요. 그게 최고라는 증명이 될까요?"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그를 마주보았다. "왕궁 상원尙苑*9들께서 각자 업무를 보시는 건 거기에 본인이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얼마나 고귀한 임무인가 떠들어대는 말들은 많지만, 그런 얘기는 우리 선조들의 선조들까지 셀 수도 없는 세대 동안 재생산된 것일 뿐이에요. 즉 열정의 문제라는 거에요. 하지만 신성한 두 알리콘 공주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위하는 근위대조차도 피할 수 없는 것 또한 열정의 결핍이죠."
"어쩌면 그것 때문에 캔틀롯 사람들이 포니빌에 그렇게 많이 오는지도 모르겠군요." 모닝 듀가 대답했다. "전통에 포위된 채 살아가서 그렇겠지요. 그래서 포니빌에 무언가를 찾으러 오는 것이고요."
나는 빙긋 웃었다. "뭘 찾는 걸까요?" 열정이겠죠? '열정이에요' 라고 말해줘요.
"완결성이겠죠. 저만의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그 누구라도 평생을 바쳐 얻고자 하는 게 그것이니까요."
나는 숨을 내쉬며 꽃들을 향해 미소지었다. 좋아요. 어떻게 보면 그게 더 낫긴 하네요. "오늘 밤 대연회 때문에 전국 각지에서 캔틀롯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니 우습지 않나요. 대연회에 가는 것 하나로 그 사람들 인생이 정의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저는 그쪽을 잘 모르지만, 저는 평생을 캔틀롯에서 살았어요.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만큼 대연회가 대단하거나 그런 건 아니거든요.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걸 해야지, 단순히 유명한 거라고 해서 자기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처럼 구는 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훌륭한 연주자가 되는 것처럼 말인가요?" 그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히히히... 네, 그건 제 얘기가 맞죠." 나는 침을 삼키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쪽은 어때요?"
"어..." 그는 한숨지으며 데이지가 가득 꽂힌 꽃병 쪽으로 다가가 천천히 꽃 하나하나를 살폈다. "저는 지금 하는 일만으로 굉장히 행복해요. 포니빌도 저를 필요로 하고, 어느 골목이든 보기 좋게 꾸며놓을 수 있어서 저도 즐겁죠."
"평생 그것만 하고 살 건 아니잖아요?" 나는 침을 삼켜 목에 엉기는 응어리를 밀어내며 용기를 쥐어짜 그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내 일생을 바쳐 무엇을 하고 싶은지 저는 알고, 그래서 만족해요. 다른 사람들도 매한가지라고 생각하고요."
"그래도... 음... 자기가 정말 뭘 하고 싶은지 처음부터 알면 인생의 재미가 뚝 떨어져 버릴 텐데요. 그렇지 않나요?"
나는 그 말에 킥킥 웃었다. 그는 이상하다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 답변으로 나는 헛기침하고 말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재미있는 이유라고 생각해서 그런 거니까요."
사내의 표정이 순간 묵직한 무표정으로 바뀌더니, 다시 데이지 꽃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쪽에게는 이유, 겠지만 제게는 운명의 발굽이랍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언젠가 수레 옆에서 얼굴을 붉히고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던 사내의 모습이 기억났다. 그렇게까지 준비하고 연기했는데, 그때까지도 사내의 벽을 못 뚫었다는 게 말이 될까? 과도하게 열심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개인적으로는 카네이션을 쓰는 게 그림이 예쁘게 나올 것 같네요." 그가 말했다.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퍼지며 우리 주변의 유리판을 타고 흘렀다. "시 낭송부터 연주회까지,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공연이라면 카네이션만큼 무난한 장식도 없지요." 사내의 입술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굽어졌다. 그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지금 복장 같은 공연 의상을 입으신다면 금상첨화죠."
사내의 두 눈에 비친 내 얼굴은 웃고 있었고, 열린 입술 사이로 이가 드러나 반짝였다. "음, 혹시 은색 좋아하세요?"
"아하하..." 그는 얼굴을 붉히며 저쪽 너머에 걸려 있던 화초로 시선을 돌렸다. "그... 드레스에 더없이 어울리는 색이기는 하죠."
"아, 여쭤 볼 게 더 있는데..." 나는 사내 곁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숨소리는 가볍게 냈지만 실은 허파에 불이 붙은 것 같았다. 온실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카네이션이랑 백합, 데이지 말씀하셨는데,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할 때는 괜찮은 선택이라고 하셨거든요. 그러면..." 나는 잠시 입술을 씹으며 말을 멈췄다가, 곧 말했다. "대중이 아니라 한 명을 위한 거라면 뭐가 좋죠?"
"그러니까... 세레나데 같은 데 쓰실 것 말씀이신가요?" 그는 순진하게 되물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사내의 웃음이 어색하게 경련했다. "어...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잘못 권해드렸군요, 라이라 씨."
순간 가슴이 내려앉았다. "아닌데요?"
그의 시선이 내 머리 위에 걸려 있는 튤립 꽃관에 가 박혀 있는 것을 나는 그 때 알았다. 가슴이 차분하게 가라앉는가 싶더니, 사내의 목소리를 듣자 다시 날카롭게 뛰었다. "때로는 그 자체로 완벽하기 때문에 도울 수가 없는 경우도 있어요."
나는 힘없이 숨을 내쉬었다. 혹시 어깨에 발굽을 올리거나 하면 큰일 나는 거 아냐? 나는 내 것이 아닌 고동을 느꼈다. 시선을 내려 보니, 벌써 발굽을 어깨에 대고 있었다. 그 순간은 콘크리트가 부서져 나가는 것처럼 지나갔다. 나는 당황하는 대신에 차분하게 말했다. "요사이 느낀 게 있는데, 인생에는 완벽해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들이 있어요. 정확한 때를 맞추면 무엇이든 완벽해질 수 있죠." 그 때 내 웃음은 행복과 고통 양쪽에 겨워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을 함께할 사람이 있다면."
그의 두 눈에 아주 찰나의 동요가 비쳤다. 글쎄, 그가 당황했는지 기뻐했는지는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그는 내가 얹은 발굽을 치우려고 하지는 않았다. "하트스트링스 씬 대단한 분이군요." 그는 싱긋 웃었다. "그러고 보니 궁금하군요. 당신의 음악도 당신의 말처럼 아름다운가요?"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더러 대단한 사람이라니! 좋은 거지... 좋은 거 맞겠지? 적어도 멋지다는 말의 두 배, 찬란하다는 말의 절반 정도는 되는 말이니까! "글쎄요, 말이 아무리 대단해도 결국 말이니까요. 거기 집착하면 그냥 횡설수설하는 것밖에 되지 않지요." 나는 내 왼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리라가 금빛 장식띠에 잘 걸려 있었다. "그래도 궁금하시다면야, 간단하게 제 솜씨를 보여 드릴 수는 있죠."
온실 안에 커다란 소리가 메아리졌다. 돌바닥에 다리 두 쌍 달린 무언가가 쓰러지는 듯한 소리였다. 너무나 무서워서 혹시나 싶은 생각을 인정하지도,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저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을 뿐이었다. 그렇더라도, 해야 했다. 그쪽을 보니 모닝 듀가 요 몇 초 동안 아무 말도 못 한 이유가 너무나도 명료하게 설명되었다.
셀레스티아 공주님 맙소사, 이 가련한 사람! 또 쓰러졌어. 좋아. 진정하자. 저번처럼 신경과민 꼬마애처럼 당황하면 안 돼. 탈력... 탈력 발... 탈력 발ㅈ... 금방 정신 차릴 거야. 일단... 기다리자. 기다려 보자...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꼼지락대던 발굽의 움직임도 멈췄다. 가만히 그의 곁에 쪼그려 앉아 있기만 했다. 숨은 잘 쉬고 있었다. 이번만큼은 확실했다. 온실은 쥐 죽은 듯 조용했고, 그의 코와 입으로 부드러운 숨소리가 쌔근대는 소리가 명료하게 들려왔다. 두 앞다리는 보일 듯 말 듯 씰룩거리고 있었고, 그의 얼굴 위로 주름이 지어졌다 풀어지기를 반복했다. 언제 어디서 기억이 끊기며 그 자리에 쓰러져 마비된 채 꿈틀거릴지 모르는 사람의 삶이 어떨까, 짐작하려 했으나 짐작되어지지 않았다. 그를 동정하고 싶지 않았다. 위장 속에서 아가리를 크게 벌려 오는 공허감을 무시하려 했으나, 무시되어지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발굽을 뻗었다. 그의 푸른 갈기가 부박한 얼음으로 만든 것이기라도 한 양, 나는 닿을 듯 말 듯하게 그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내 목구멍 밖으로 울음이 나왔을 것이다. 내 존재를 잊어버리는 인간들 덕에 내 저주받은 몸이 골치를 썩이는 일은 정기 행사나 다름없었다. 모닝 듀를 질투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는 자기 몸조차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나를 집어삼킨 저주가 악랄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적어도 내게는 온전히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몸이 있었다.
또 다른 잔혹한 현실이 나를 덮친 것은 그때였다. 모닝 듀가 쓰러졌다는 사실이다. 그의 목소리가 없는 온실에서 나는 바보에 머저리가 되어 발가벗겨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얇디얇은 은빛 드레스 한 벌로는 나를 덮칠 한파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유리를 건너 온실 안으로 파고드는 햇빛조차 내가 입각해야 할 현실을 녹일 수는 없었다.
그가 다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별로 안도하지 못했다. 나는 한숨지으면서도 억지로 웃어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내를 쳐다보았다. "괜찮으세요?"
"으으으..." 그는 움찔하더니 앓는 소리를 내며 아파 오는 머리를 문질렀다. "네.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요."
"갑자기 쿵 하고 쓰러지셨어요." 나는 억양 없이 대답했다. 조약돌이 가득 깔린 온실 바닥 위를 방황하는 시선이, 거기서 나가는 가장 빠른 출구를 계산했다. "근처에 사람이 있어서 망정이죠... 안 그랬으면..."
"저 어디 부딪치지는 않았죠?"
"하하... 세상에 못 고칠 게 어디 있겠어요." 나는 언젠가의 건설 노동자처럼 비꼬는 말투로 대답했다. 나는 침을 삼키며 온실 출구를 흘끗 쳐다보고 말했다. "뭐, 괜찮으신 것 같으니까 이제 그만 가 봐야겠네요."
"그래요?" 모닝 듀가 몇 차례 눈을 깜박이더니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꽃을 고르는 건 그만두겠다는 말씀으로 이해해도 될까요, 라이라 씨?"
"마음 써 줘서 고마워요. 그래도—" 나는 얼었다. 심장을 뺀 모든 부분이 얼어붙었다. 미친 듯 심장이 뛰어댔다. 나는 딱 벌어지려는 입을 가까스로 붙든 채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절..."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그것만큼은 감출 방법이 없었다. "절 기억하세요?"
"뭐..."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잠깐 쓰러졌다 일어난 주제에 사람을 잊어버린다면 그만한 무례가 또 없죠. 그렇죠, 하트스트링스 씨?"
숨이 막혔다. 그의 모습이 순간 위로 솟으면서 커졌다. 나도 모르게 홱 잡아당기다시피 하며 그를 일으켜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의 두 앞다리를 잡고 있었다. 놓고 싶지 않았다. "하, 한 번만 더 말해 줘요..."
"뭐를요?"
나는 눈을 감고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다. "제 이름이요. 제 이름을... 불러 주세요."
그의 목소리가 더욱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듯싶었다. 내가 내 머리를 쏴 버리진 않았는지, 가까이에서 여기저기 살펴보고 있어서였기 때문이리라. "라이라. 라이라 하트스트링스..."
그 때 나는 무언가에 목이 메었다. 눈을 뜨니 그의 잘생긴 얼굴이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그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일 때까지 나는 눈을 깜박이지도 않고 그대로 그를 보고 있었다. 맑아진 시야에 비친 그의 모습은 내 꿈에서 나온 듯 선명했다. "저 어디로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나는 중얼거렸다.
모닝 듀가 한쪽 눈썹을 치키며 물었다. "네?"
나는 움찔했다. 나는 새된 목소리로 말했다. "어, 음, 그러니까..."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무엇을 사내의 눈에 감추고 싶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뺨이었을까, 축축해진 두 눈이었을까. "그... 잠깐 같이... 좀 걸을래요?"
모닝 듀는 꽃송이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발굽으로 꽃을 손질하면서, 대답을 망설였다. 잠시 동안의 침묵이 지난 뒤, 그는 내게 시선을 돌리고 활짝 웃으며 선선히 말했다. "그래요. 그...러고 싶어요. 라이라."
"좋아요." 나는 그 자리에서 튀어오르기라도 하는 양 숨을 크게 내쉬며 두 발굽으로 그의 발굽 하나를 꽉 쥐었다. "딱 좋은 곳이 있어요!"
"하하..." 내 곁에서 걷던 모닝 듀가 기분이 좋은지 고개를 흔들었다. "호숫가 걷기는 늘 기분이 좋아요."
"그래요?"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그의 곁에서 걸었다. 얼굴에 걸린 웃음이 내려가지 않았다. "다행이네요. 저도 정말 좋아하거든요."
"이 근처는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아요." 그는 우리 오른편으로 보이는 호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잔잔한 수면 위로 잔물결이 퍼졌다. 정오가 지나 서편으로 내려오는 태양이 짙은 석양을 띄우며 저물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일어나고 잦아들기를 반복하는 산들바람의 온기와 그림 같은 노을빛에 젖어 걸었다. 9월은 그렇게 우리 곁에 살아 있었다. 나는 추위에서 완전히 해방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안타까운 일이죠. 볼 것도 많고 생각할 것도 많은 곳인데 말이에요. 그렇기는 해도 조용히 있을 수 있으니 그건 그것대로 고마운 일이죠."
"모닝 듀 씨는 혼자가 더 편한가요?"
"이따금씩 그럴 때가 있지요." 그는 내게 시선을 돌렸다. "라이라 씨는 혼자 있는 편을 선호하나요?"
"글쎄요......" 나는 흥얼거리듯 말했다. "사람이랑 같이 있을 일이 없다고 할까요."
"공연 다니시느라 이동이 잦으셔서 그런가요?"
"아, 그건 아니에요." 나는 헛기침했다. "그런 건 아니고요. 요즘 사람 만날 일이 없어서 그런 것뿐이에요."
"무슨 이유라도 있나요?" 그가 물었다. "화술이 굉장히 능수능란하신데."
"그, 그렇게 보여요?"
"정말로요." 그는 빙긋 웃었다. "다만..."
"다만 뒤엔 뭐가 오죠?"
"철학적인 면도 어느 정도 있지요." 그가 말했다.
"그래요?" 래리티가 지어 준 옷을 더럽히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가는 길에 엎어져 있던 통나무를 피해 걸었다. 나는 비꼬는 듯 실실거리며 물었다. "설마 여자들은 진지한 얘기를 하면 안 된다거나 하는 말을 할 생각은 아니겠죠?"
"설마요!" 그는 씩 웃으며 말했다. "철학은 얼마나 큰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평가가 바뀌죠. 사내들은 순환논법에 아주 약해요. 여자를 말한다고 치면, 제 생각에는 삶에 초점을 맞출수록 고득점이 아닐까 싶네요."
"그 '삶'이라는 거 말인데, 밥 짓고 청소하고 애 낳는 그런 얘기 같은데, 맞죠?" 나는 윙크했다.
"전혀요." 군락을 이루어 자란 부들 앞에 멈춰선 사내가 나를 보고 말했다. "세상은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 차 있지요. 그 대부분은 여성의 이미지로 대표된단 얘기에요."
"하. 말은 쉽지요."
"맞아요. 말은 쉽죠."
나는 낄낄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사내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말했다. "좀 구식이지 싶은데요, 모닝 듀, 선생님. 이런 말 해도 되나 모르겠지만."
"구식으로서 우리는 진보한 가치를 직접 실천할 기회를 가진답니다." 그가 답했다. "그렇긴 해도 기사도에서 말하는 말 하나하나 전부가 현대 사회에서 가치를 갖는 건 아니지만요. 온실에서 그 말씀 해주신 덕분에 흐릿한 머리가 많이 깼죠." 그는 얼굴을 붉히며 내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고마워요. 라이라."
"반짝이는 갑옷 입은 여기사가 되는 것도 괜찮죠."
"맞는 말이에요." 그가 말했다. 질질 끌리는 내 걸음을 본 사내가 물었다. "피곤하신가요?"
나는 부끄러워 빙긋 웃었다. "네, 라고 하면 평화롭고 차분한 데 앉아서 계속 얘기할 수 있는 건가요?"
"신사는 불확실한 것을 함부로 말하지 않는답니다."
"음, 아깝게 됐네요. 그럼 그냥 여기 앉죠."
그 때, 그가 한쪽 발굽을 내밀었다. 왜 그럴까 궁금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한 마음에 나는 그가 내민 발굽을 잡았다. 모닝 듀는 그처럼 숙련된 사람이나 찾아낼 법한 평평한 잔디밭으로 나를 데리고 걸어갔다. 나는 앉기 전에 잔디를 정리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는 내 곁에 가만히 서서 기다리다가, 내가 정리를 마치고 앉은 다음에야 자리에 앉았다.
"항상 이런 평화를 즐기는 건 아니에요." 그가 말했다.
"그래요?"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건 본인 선택인가요?"
"솔직히 대답하면, 아니에요." 그는 대답하며 잔잔한 수표면을 바라보았다. "저는 군인 가문에서 자랐어요. 그리고 '군인 가문'이란 한 곳에서 오랫동안 지낼 일이 거의 없는 집안이지요. 제 또래 남자애들이야 이사가 잦은 환경에 쉽게 적응하지만, 저는... 건강이 그리 좋지 않은 것도 있어서..."
"방금 전처럼 갑자기 쓰러지거나 하는 게 그것 때문인가요?"
그는 우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크흠. 잘 지냈다고는 말하기 어렵군요."
"많이 불안했겠네요." 나는 말했다. "한 곳에 정착해 있지도 못하고, 아플 때 기댈 수 있는 사람조차 곁에 없었으니."
"기댈 수 있는 사람은 있었죠. 제 부모님." 그가 말했다. "두 분과 함께 일하는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였어요. 공주님들과 우리나라를 위해 헌신하시는 분들, 얼마나 존경스러워요. 단지..." 그는 잠시 어물거렸다. 푸른 눈동자에 호수 표면이 비쳐 어른거렸다. "존경하는 것 이상으로 저도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제 또래 남자들 다수가 각자 역할을 맡아 하고 있는데요. 언젠가 제가 너무 나이를 먹기 전에, 제게도 역할을 할 기회가 오길 바랄 뿐이죠."
나는 그를 바라보며 얼마간 시간을 흘려보낸 뒤 물었다. "그걸 증명하고 싶은 건가요?"
"흠..." 그는 나를 보고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증명이라기보다는, 얻고 싶은 거죠."
"뭘요?"
"확신." 그는 불쑥 말했다.
"확신요?"
모닝 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평생 동안 나름대로 기적적인 순간을 맞죠. 제 어린 시절에도 그런 순간... 아주 특별한 순간이 있었어요." 그는 침을 삼키고 몸짓하며 말했다. "저는 좀 달랐죠. 단순히 나는 누구인지,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 깨닫는 것에 그치지 않았거든요. 뿌연 안개를 찢고 떠오르는 새벽의 태양처럼, 병든 유년기를 벗어나는 탈태, 탈태라고나 해야 할 순간을 경험했으니까요. 제게 허락된 시간 동안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이해한 순간이었죠. 그렇지만... 저는... 할 수 없었어요."
"몸 때문에요?"
그는 나를 보았다.
나는 소리 없이 웃고 말했다. "때때로 몸을 못 가누는 사람은 아주 많아요. 아픈 마음이든 현기증이든, 사람은 누구나 현재의 자신을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 돌이켜 볼 자격이 있어요. 다들 그렇게 자신의 꿈에 다시 한 번 투신하는 것이고요."
"매달려 보고 싶은 희망이네요. 그래도 가끔은 두렵답니다..."
"뭐가 두려운데요?"
"너무 늦지 않았을지." 그는 몸을 떨었다. 사내의 시선은 그의 과거에서부터 따라온 어슴푸레하고 창백한 무언가를 바라보는 듯싶었다. "제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이 발굽에 거머쥐려면 시간을 되돌려 유년기로 돌아가는 방법밖에 없지 않을지, 그 혼란스러운 세상이 다만 한바탕 꿈이어야 할 게 아닌지... 두렵네요."
나는 천천히 끄덕였다. "네. 당신이 과거에 겪었던 고통을 말로 풀어내려면 책을 한 권 써도 모자랄 거라고, 저도 이해해요." 나는 밝게 웃었다. "아니면..."
"아니면...?" 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햇빛이 비쳐서 사내의 눈은 가늘게 뜨여 있었다.
나는 두 앞다리로 리라를 잡았다. 나는 그의 앞에 앉아 뿔을 밝혀 리라의 현을 붙들었다. "아니면... 잃어버림으로서 얻은 게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이해가... 잘 안 되는군요."
"쉿..." 나는 가만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힘 빼요, 모닝. 아무 생각 하지 말고 들으세요." 나는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앞으로 내가 옮겨쓴 관현악 악보가 넓게 펼쳐졌다. 나는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현을 퉁겨 과장할 부분은 과장하면서 풍부하고 힘있는 소리를 끌어내 경쾌하게 연주했다. 빠른 곡조를 따라가는 와중에도 나는 모닝 듀의 표정을 살폈다. 사내의 입이 점점 더 크게 헤벌어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상정된 연주 시간보다 빨리 연주를 끝냈다. 사내의 목소리가 허공에 입맞추듯 들려왔다.
"이거..." 그는 말을 더듬었다. "장엄 교향곡을 여러 번 들어 봤지만... 이만큼이나 기분 좋게 들은 건 또 처음이네요."
"에이, 왜 이래요." 나는 낄낄 웃었다. "비행기 너무 태우신다. 제가 연습하기라도... 한 것 같잖아요...?" 나는 말을 멈췄다.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럴 거라고만 생각했지, 설마 이 남자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니까. "부모님 생각이 나네요. 두 분 모두 이 곡에 맞춰 행진하셨으니까요. 학교가 끝나 집에 돌아가기 전엔 늘 담장 옆에 서서 두 분을 지켜봤지요." 사내가 나직하게 말했다. "두 분을 흉내내서 걸어 보려고도 했고, 당당한 자세를 따라해 보려고도 했고, 군인으로서의 품위를 모사해 보려고도 했었어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몸 상태가 안 좋아지기는 했지만, 두 분의 걸음에 맞춰 당당하게 걸어 보려고 애를 많이 썼었죠. 두 분은 그런 저를 항상 격려해 주셨어요. 열심히 하려는 모습을 항상 믿어 주셨죠. 어느 정도 자란 다음에는 캔틀롯 사관학교에 입학하려고 재수에 재수를 거듭했죠. 계속 떨어졌지만 포기하지 않았어요. 지금 이 순간에도 아직 희망이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려고 하고 있죠. 두 분께서 해내신 것을 저도 해내기 전까지는 만족할 수 없을 게 뻔하니까."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큰 빚을 지고 있죠... 두 분의 유산에."
"유산... 이라뇨?" 나는 사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때 비로소 깨달았다. 저 부드러운 태도 안에는 자기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필요가 꿈틀대고 있었다. 어찌 보면 유치하기까지 한 끈기와 집착을, 저 천사 같은 사내는 품고 있었다. 내 안에서 무엇인가 부서졌다. 부서진 조각이 허파를 짜내 부드러운 한 마디 물음을 짜냈다. "아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
그는 숨을 세차게 내쉬었다. 비밀을 밝히는 그의 두 눈은 말라 있었다. "S.S.허리케인함*10." 그는 냉정하게 말했다. "드림 밸리Dream Valley 동쪽에 있는 모래톱에 물자를 하선하는 과정을 감독하는 것이 임무였죠. 파견 함대 전체가 물자 보호에 투입되었어요. 어느 날 밤, 허리케인 호 증기 탱크가 폭발했죠."
그는 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굳이 끝맺을 필요도 없었다. 거기까지 들은 시점에서 이미 목이 메어 오고 있었다. 성인이라면 누구나 "S.S. 허리케인 사건"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으니까. "모... 몰랐어요. 미안해요, 모닝."
"미안할 것 없어요, 라이라." 그가 말했다. 사내는 오히려 그 이상 진실할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덕분에 행복했거든요. 정말이에요. 지금까지 들은 장엄 교향곡이라고 해야, 대부분은 오케스트라 악단의 연주를 녹취한 것이어서 고전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만 했거든요. 드라마틱한 팡파레로 끝맺는 것까지 전부 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허리케인함 희생자 추모식 때마다 장엄 교향곡을 연주하는데, 그 스타일이랑 조금도 다르지 않아요. 긍지도 기쁨도 느껴지지 않죠. 그냥 묵직하고, 계량할 수 없는 슬픔만 담고 있을 뿐이에요." 그는 침을 삼키고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당신의 연주는... 영웅의 축제와도 같았죠. 리라 하나로 그 격정을 표현했으니까... 음..."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기운이 나는 연주였어요, 하트스트링스. 돌아가신 분들이 세상에 계시던 시절이 절로 떠올랐죠. 연주 솜씨만큼이나 음악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연주자들이 더 많았으면 좋았을 텐데요."
나는 조금도 동의할 수 없었다. 나는 내 품에 안긴 리라가 끔찍한 살상무기라도 되는 양 쓸쓸한 눈길로 악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글쎄 가끔은... 과하게 느껴서 문제죠."
그는 이상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왜 그렇죠?"
나는 머릿속에 넘치는 생각에 걸려 넘어지듯 고개를 흔들었다. 생각을 입 밖으로 쏟아내기 전에 기다려야 했지만, 이미 방어선 상당수가 무너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 사람은 나를 한없이 솔직하게 대했으니까. 그에 맞는 존중을 표하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했을지는 뻔하지 않은가?
"너무 아름답고 완벽한 순간을 딱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마치 그 시간과 장소가 당신을 위해 마련되어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든 적 있나요?"
그는 갈기를 만지작거리다가 대답했다. "그런 적이... 있긴 있죠. 한두 번 정도지만. 왜 그러죠?"
나는 침을 삼키고 힘없이 대답했다. "전 매일 그렇거든요."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매일매일, 한 순간 한 순간마다 그런 느낌이 더더욱 강해져요. 게다가..." 나는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너무나 자주 있는 일이지만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요."
"그 순간을 당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르죠." 그는 말했다. "진실로 당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아서 그럴 수 있다는 거에요. 반복되는 순간마다 그런 느낌이 강해지는 건 그것 때문일 수도 있죠.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것은, 벼랑 끝까지 다가섰으면서도 거기서 뛰어내려 보지 않기 때문이고요. 진심이 아니었다는 거죠."
"모닝..." 나는 조용히 말했다. "세상 사람 모두가 그런 복을 받은 건 아니에요... 그리고... 또..."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당신처럼 훌륭하기도 어려운 일이죠. 저만 해도 이런 순간을 영원히 겪을 운명이에요. 찬란한 틀에 박혀 살아갈 테지만, 깨닫지 못하겠죠. 당신은 어떨까요?" 나는 그를 애정과 슬픔을 담아 바라보았다. "이거에요. 지금 이 순간은 당신의 시간이에요. 당신의 것이고 당신만의 것이죠."
나는 그에게서 떨어졌다. 그는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라이라, 무슨 말이에요. 그게 대체—?"
"쉿..." 나는 그에게 다가섰다. 나는 발굽으로 그의 부드러운 솜털을 살며시 쓸었다. 입술이 씰룩이는 것이 느껴졌다. 온 세상이 흔들렸고, 내가 깨어나야 할 악몽 속으로 그의 모습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한없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라도 내가 봐야만 할 세상이었다. "당신의 순간이라고요. 모르겠어요? 새벽에 떠오르며 당신에게 노래하는 태양처럼, 당신의 마음을 가장 편안하게 해주는 한 쌍의 금빛 눈동자처럼 느껴지지 않나요. 그러고 보니 우리가 처음 봤을 때, 날 보고 당신이 뭐라고 불렀었죠." 나는 침을 삼키고, 애원하듯 물었다. "기억하나요, 모닝 듀? 내가 당신에게... 당신이 날 보고 뭐라고 생각했는지?"
그의 입이 헤벌어졌다. 지금까지도 그를 괴롭혀 온 고통의 발톱으로 고랑이 져 있던 사내의 얼굴이 펴졌다. "천사...?" 그는 어린 시절 죽마고우를 다시 만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그의 수호자가 아니었다. 지금은 알 수 있다. 사내의 두 눈에 비친 허깨비는, 등신같은 화관을 머리에 쓰고 최초이자 최후의 데이트를 위해 빼입고 마실 나온 말라깽이 여자의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당장의 것을 원했고 순간적인 것을 원했으며 미신적인 것을 원했다. 나는 안기고 싶었고, 안겨서 등을 맡기고 싶었고, 죽음처럼 고요한 밤중에 발을 디딜 때 옆에서 온기를 전해 줄 사람을 원했다.
모닝 듀에게는 더 많은 것이 필요했다. 너무나 정직하고 무기력한 나머지 그것을 원할 수조차 없었던 사람. 그는 한 발만 더 가면 자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언제나 그랬다. 포니빌에 새벽이 밝을 때마다 그는 나를 보았고, 내 두 눈과 내 얼굴은 그저 자아 발견이라는 계몽의 순간의 경계선에서 그를 놀려먹는 것에 불과했다. 내면의 악마를 초월하려는 순간에 선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그렇게 희롱당해서는 안 되는데도. 모닝 듀는 그 어떤 꽃으로도 구마驅魔할 수 없고 축귀逐鬼할 수 없을 만큼의 망령을 짊어지고 있었다.
저주를 벗을 힘이 나에게는 있든지 말든지 할 것이었다. 그 순간 내겐 그를 자유롭게 할 힘은 없었다. 내가 한 말은 무위로 돌아갈 것이다. 내가 한 연주도 마찬가지로 그러할 것이다.
내게 그것을 받아들일 용기가 있었다면 좋았을 터였다. 내 머리가 작동하는 곳에서 내 심장은 작동하지 않았다. 아주 약간은, 불가능한 일을 해 보려는 생각이 있기는 있었다.
"모닝 듀." 나는 속삭였다. "당신의 수호천사는 당신이에요. 항상 그랬을 거에요." 나는 코를 훌쩍이고, 빙긋 웃었다. 그의 두 눈에 비치는 거울상을 별로 믿지는 않았지만, 나는 계속 말했다. "어린 몸으로 병마에 맞서 싸울 때,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고 말았을 때, 군인이 되겠다는 꿈 하나만 보고 도전하며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를 반복하다가 이제 여기 정착해 질박한 삶을 꾸리기로 했을 때. 그 모든 시간을 견딜 힘을 준 건 당신 자신이었어요." 나는 입술을 깨물고, 한 마디를 덧붙여 말을 마쳤다. "당신을 강하게 만든 모든 것들을 받아들여요. 포니빌에 정착한 당신을 만들어 준 건 그것들이었어요. 더는 찾아다닐 필요가 없어요..."
그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눈길이 부드러웠다. 사내가 말하려고 하기 전에 내가 먼저 파토낼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그대를 만나고 나서야 내가 나도 모르는 새 찾아다니고 있었던 걸 알았어요." 그는 숨소리 섞인 소리로 말했다. "그대 같은 사람이 내 앞에 앉아 음악과 지혜와 기쁨으로 내 빈자리를 채워 주고 있는데, 이 사람이라는 확신이 서는데, 어떻게 다시 내가 나를 지키는 생활로 돌아가겠어요?" 그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부탁이니, 믿어 줘요. 이제 더 찾지 않아요. 쉽게 말하기는 싫지만... 그래도 말하자면 찾았어요. 당신을..." 그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죠? 말해 주세요. 당신을... 그대를 더 알아야겠으니..."
말해주고 싶었다. 울고 싶었다. 당신이 찾는 사람이 바로 나라고, 오직 나뿐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사내가 그 품으로 지켜 주고, 안아 주고, 기쁘게 해 주고, 편안하게 해 주어야 할 사람은 나라고. 사내가 짊어진 고통을 날카롭게 벼려내던 것들에 맞서 홀로 방황하던 나날들과 혼자서 두려워하던 시간들은 오직 나를 만나기 위해 준비해 온 세월이었으므로, 나를 만남으로서 모든 비극이 끝나는 것이라고. 우리가 서로를 찾아낸 날에 나는 살 것이나 그는 죽을 것이라고. 나이트메어 문의 권능으로 내게 지워진 고통은 그를 만나면서 나를 깨우고, 행복이 되어 내가 기댈 곳이 되어 주었지만 이제 더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그러고 나면 나는 다시 홀로 남아 잿더미에서 꽃을 피우려는 부질없는 짓을 반복하는 쳇바퀴로 내몰릴 것이라고.
"더 말해 줄게요." 나는 불현듯 억양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어디로 향하는지 사내는 볼 수 없었다. 칠흑 같은 천정처럼 우리 머리 위에 도사리고 있는 냉혹한 어둠을 그는 알지 못했다. 그 모든 것은 오직 나만이 알고 있었고, 이것들을 여기까지 끌고 들어온 것은 나의 잘못이었으며 오롯이 나만의 죄였다. "다만 그 전에." 나는 간신히 말했다. 내 목소리는 눈에 띄게 갈라져 있었다. 나는 헛기침하고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그대에게 부탁이 있어요."
"그럼요." 그는 나직하게 말하며 미끼를 물었다. "뭐죠."
나는 그의 등 뒤로 펼쳐진 정경을 바라보았다. 호숫가에 나무 몇 그루가 서 있었다. 10피트(304.8cm) 정도 떨어진 나무가 있었고 20피트(609.6cm) 떨어진 것들도 있었다. 대충 35피트(1066.8cm) 정도 거리에 늘어선 나무들이 보였다. 그 아래로 찬란한 꽃잎 몇 개가 바람에 가만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럼 저기 가서..." 나는 힘없이 그쪽을 가리켰다. "...메리골드 한두 송이만 따다 줄래요?"
그는 어깨 너머로 나무들을 돌아보더니, 나를 보고 물었다. "메리골드요?"
나는 짧게 웃었다. 그 때 내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울상이 된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나는 고개를 돌렸다. "뭘... 좀 얘기하고 싶은데, 비유해서 설명하려고요." 나는 침을 삼켰다. "철학적이라면서요. 기억하죠?"
그는 눈을 깜박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좋아요. 금방 다녀올게요."
사내가 일어섰다. 떠나는 발걸음 뒤로 그의 그림자가 뒤따랐다. 발굽에 잔디가 밟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두 눈을 꽉 감고 발굽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울음이 나오려고 하기도 전에 나는 심호흡해서 울음을 몸 안에 가둬두었다. 몇 초가 지나고, 그 몇 초가 모여 몇 분이 되었다. 아득한 저편에서 들려오는 듯 흐릿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 메리골드라. 온실에 많이 있는데." 모닝 듀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내는 몸을 돌리더니 지평선을 멍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헌데... 이렇게 좋은 날에 왜 그걸 찾아다니고 있담...?"
이방인으로 돌아간 사내가 나를 돌아보았을지도, 아닐 수도 있다. 나는 이미 자리를 떠서 호숫가를 총총히 떠나고 있었다. 그 왜, 살인범이 사건 현장에 멍하니 남아 있는 경우는 없으니까.
다시 돌아온 오두막은 무덤 구덩이처럼 나를 맞아주었다. 나는 잠시 자리에 서 있었다. 드레스가 벗겨진 허물처럼 흐물거리며 늘어졌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모닝 듀의 체취가 흐려져갔고, 그와 함께한 반나절 또한 무너지는 꿈의 흐릿한 그림자로 사라져 갔다.
휘청이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네 다리가 기운 없이 질질 끌렸다. 옮겨 적다 내버린 비곡 악보 뭉치가 한곳에 처박혀 있었다. 팽개친 악보가 비곡에게서 나를 지켜 줄 보호막이라도 되는 양 내다 버린 종이 뭉치가 낙인처럼 뇌리에 박혀 나를 지져댔다.
언제쯤에야 인정할 수 있을까? 언제쯤에야 진정으로 내가 욕망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는 한숨지으며 머리에 쓰고 있던 금빛 튤립 화관을 띄웠다. 두 앞다리에 꽃봉오리가 닿았다. 한없이 유약하고 부드러웠지만 생기는 없었다. 줄기를 떼 버리지 않았다면 필요한 물과 양분을 빨아올려 천수를 다하고 시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가지 않은 길이었다. 나는 꽃이 마땅히 붙어 있어야 할 자리에서 이것들을 떼내, 귀중한 하루를 저 한없이 추하고 보잘것없는 싸구려 행동에 허비했던 것처럼 무의미한 원 속으로 밀어넣고 말았다.
더욱 화가 났던 이유는 확실치 않다. 예쁘게 꾸미고 나가면 모닝 듀의 관심을 끌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 때문인가, 앞으로도 계속 그런 짓을 할 뻔했던 것 때문인가.
몸이 움츠러들었다. 이를 악물고 참았다. 두 발굽이 금빛 꽃잎을 앞에 두고 비벼지고 있었다. 그 사이에 들어가면 꽃잎은 으스러져 한낱 섬유질로 추락할 것이다. 나는 꽃잎을 으깨지 않았다. 안 그래도 아름다운 것들을 수도 없이 망쳐놓고 들어온 참이 아니던가. 나는 작은 테이블에 화관을 올려두고, 슬리퍼를 벗은 뒤 비틀거리며 침대로 다가갔다. 드레스를 벗어놓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나는 침대에 쓰러졌다. 나약한 나를 한없는 추위와 시커먼 어둠이 포위하고 있었다. 나는 그 때의 꿈을 떠올렸다. 꿈이라기보다, 망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깊은 숲 속 따뜻한 자리에서 모닝 듀의 허깨비가 나를 품에 안아 보듬는 모습과, 나를 잊지 않고 저주받은 밤에 드리운 철의 장막 너머로 내 이름을 다시 불러주는 모습은 꿈이라기보다 망상이었다.
그것은 환시幻視이자, 몽상이었으며 불행한 죄수의 머릿속에서 돌아가는 행복 회로였고 앞으로도 영영 그럴 것이다. 그 허깨비를 현실로 끌고 들어와 내가 입각할 수 있는 실체적 진실로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는 같잖은 상상의 나래를 편 것은 잘못이었다. 나는 그보다는 더 현실적이어야 했다. 나를 옥죈 시련의 틈바구니 속으로 모닝 듀를 끌고 들어올 생각 대신, 그 사람을 더 존중해 줬어야 했다.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또한 영혼이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했던 짓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잊히고 말 것이기는 하지만, 하나같이 그 또한 현실이었으며 위험할 수 있는 것들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나는 문득 깨달았다. 포니빌에 갇힌 내가 해야 할 것은 음악의 여신의 뒤를 쫓는 것이지 그 자리를 찬탈하는 것이 아니었다. 천재일우의 기회를 잡으려면 그 사실에 입각해야 했다. 그 일을 감당해낼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내가 해야 하는 일을 끝마치기 위해서라도 나는 그 사실을 양지해야 했다.
나는 눈을 단단히 감고 몸을 웅크려 네 다리를 모두 가슴에 붙였다. 내가 해야 할 일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끝내 거기 귀의하는 것뿐이었다. 나는 혼자였다. 나는 혼자이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비곡의 비밀을 찾아내는 것만이 내 삶의 목적이고 다른 것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새로이 각오를 다지며 현실을 다시 받아들이기만 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망령이 그것 빼고 뭘 더 할 수 있겠는가?
"이게 마지막이여!" 오렌지색 작업복을 입은 사람이 소리쳤다. 포니빌 북쪽 경계 근처에 서 있던 버려진 호텔 건물은 이제 칙칙한 갈색 껍데기만 남아 있었다. 그는 건물 밖으로 걸어 나오며 말했다. "뇌관 연결 끝! 이제 터뜨리는 건가?"
"오늘 중에 안 터뜨리면 내가 성을 간다. 당연한 거지!" 암브로시아가 은색 장비에 설치된 타이머를 돌리며 툴툴댔다. 호텔 건물의 수많은 문들과 창문 속에서 전선이 빽빽하게 흘러나오고 있었고, 그 모든 선은 암브로시아가 쥐고 있는 기계장치로 연결되었다. "이제 좀 할 만한 일을 할 수 있겠구만! 집 짓고 헛간 올리는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어 돌아 버리겠다니까. 폭파 용역을 주려거든 돈이라도 충분히 쥐여 주고 해야 하는데 우리 시장은 그런 게 없으니 원."
"그런진 잘 모르겠다." 남자가 피식 웃으며 안전모를 고쳐 썼다. "네 주특기가 멀쩡한 벽 찢고 부수는 거 아니었냐."
"아닌데. 그건 니네 어머님이 화장실 가시면 하시는 거고."
"하, 하, 하."
"지랄은 그만 하자고. 요 근처는 잘 정리해 둔 거 맞겠지?"
"어. 촘촘하게 퍼져서 네 번을 쓸고 다녔지. 반경 30미터 안에는 사람 없어."
"좋아. 그럼 빨리 해치우자고." 암브로시아가 돌리던 타이머를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자, 다들 주목하쇼! 3분 있다 터질 거거든! 얘기 들은 대로 멀찍이 떨어져 계시라고들!" 그녀가 돌아본 곳에 행인들이 길을 가다 멈추고 안전거리 밖에 서서 구경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장엄한 폭발 장면에 흥분하여 환호하고 발굽을 흔드는 등 기대만발이었다. 암브로시아가 동료 작업자에게 눈짓하고 말했다. "시작하지?"
"콜." 그가 끄덕였다.
"그럼... 시작!" 암브로시아가 레버를 돌렸다. 타이머가 돌아가며 폭파 전까지 남은 시간을 실시간으로 갱신할 때마다 째깍거리는 소리가 은빛 장치 밖으로 흘러나왔다. 둘은 조금의 지체도 없이 달리기 시작해 호텔이 맞이할 불우한 운명을 환호하며 기다리는 구경꾼 패거리 사이에 도착했다. 암브로시아는 동료 작업자들과 흥분한 구경꾼들 사이에 멈춰 서서 숨을 골랐다. 폭파 현장을 둘러싸고 경고 표지가 설치되어 있었다. 주말 내내 포니빌 시내에 나붙었던 경고문과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내용이었다. "휴. 이 정도면 대연회에 비빌 수 있을라나?" 암브로시아가 농을 던졌다. 그녀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낄낄대고 웃었다.
그 즈음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 내가 마을에 도착한 것은 평소보다 늦은 아침이었다. 의도한 바였다. 어떤 사내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모닝 듀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구경꾼 사이에 낀 채, 벽돌을 가득 집어넣은 듯 내 등을 누르는 가방을 짊어지고 서 있었다. 폭발할 호텔 건물을 마지막으로 흘끗 보는 사이 입 밖으로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주는 기억을 매장하기에 아주 적합해 보였다. 그저 내가 포니빌의 유일무이한 장의사가 아니길 바랄 뿐.
"뭔가 두고 온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암브로시아가 말했다.
"농으로라도 그런 소린 마라 야." 작업자 하나가 툴툴대고 말했다. "지금 그런 소리 해 봐야 하나도 안 웃긴단 말이다."
그녀는 키득대며 웃었다. 임박한 폭발에 얼어붙어 있던 사람들은 긴장 풀린 기색을 내비쳤다. "아냐, 그런 게 아닌데. 엇! 생각났다. 모닝 듀 얘 안 보인다. 어떻게 된 거야?"
"왜? 네 작품에 마무리 작업이라도 해 주고 있었으면 좋겠어?" 작업자 하나가 말했다.
"2분 전!" 다른 작업자가 소리쳤다.
암브로시아가 대답했다. "아니, 그러면 오히려 다행이겠지. 걘 쓰잘데없이 감성적이거든. 건물 무너져 내리는 거 보면... 걔 가슴도 같이 무너질걸... 왠지 그럴 것 같다." 암브로시아의 얼굴이 순간 새파랗게 질렸다. 입은 떡 벌어졌다. 암브로시아에게 있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뭐여?" 작업자 하나가 암브로시아를 쳐다보았다. "앰버, 왜 그래?"
"저거..." 암브로시아가 숨이 멎을 듯 작은 소리로 말하며 발굽으로 한 지점을 가리켰다. "저 덜떨어진 새끼, 뭐하는 짓이야...?"
모든 사람이 시선을 돌렸다. 나는 목을 남들보다 한참 더 빼서 봐야 했다. 내 눈에 그 지점이 들어오는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조그맣고 창백한 페가수스 하나가 고고도에서 폭심지로 다가가고 있었다. 건물 바로 앞에 내려앉은 꼬마에게 경고 표지판과 경고문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고는 창턱 밑에 피어나고 있던 연녹색 꽃줄기와 꽃봉오리들을 헤치기 시작했다. 한 송이 한 송이, 가장 예쁘게 핀 화초와 야생화가 꺾여 모였다. 그것들은 모닝 듀가 거두지 않아 거기 남아 있던 것들이었고... 그것들을 모으지 않은 것은 어떤 유니콘 하나가 모닝 듀의 그 전날 하루를 통째로 없애 버렸기 때문이었다.
셀레스티아 맙소사, 안 돼...
"거기!" 누군가 소리쳤다. 소리의 주인과 다른 몇몇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당장 거기서 튀어나—"
"가만히 있어!" 암브로시아가 두 앞다리를 양쪽으로 펼쳐 사람들을 막았다. "죽고 싶지 않으면 들어가지 마쇼! 저기 곧 터진다고!" 그녀는 세 발짝 앞으로 다가가 두 발굽을 입가에 모아 대고 소리쳤다. "야! 이 미친 새끼야!*11 당장 궁둥짝 쳐 들고 이리 튀어나와! 좀 있으면 폭약 터진다고!"
설마 럼블이 그 말을 안 들었을 리는 없다. 사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흠칫 놀라 두 눈이 공포에 질려 크게 뜨였으니까. 꼬마는 다급하게 날개를 마구 퍼덕이며 그 자리를 벗어나려고 용을 썼지만, 그 다음 순간 그대로 땅에 처박혀 버렸다. 떨어진 몸이 경련했다. 다시 날개를 움직였지만 그 또한 허사였다. 이제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풍전등화에 몰린 아이의 두려움 가득한 그 모든 시도를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 때,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답이 나왔다.
"덩굴..." 누군가 중얼거렸다. "꼬마 뒷다리가 덩굴에 걸렸다!"
"살려 주세요!" 럼블의 목소리가 아득한 거리에서 들려왔다. "도와 주세요! 움직일, 수가 없어요!"
"1분 전!" 작업자가 더듬거리며 소리쳤다.
"거기 있으쇼!" 암브로시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몸짓해서 가만히 있으라고 신호했다. 그녀가 달려나가며 소리쳤다. "지금 간다, 꼬마! 거기 가만히—"
"내가 할게!" 럼블이 있는 쪽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심장이 벌렁댔는지 어쨌는지는 확실치 않다. 고개를 돌리자 모닝 듀가 내팽개친 수레가 모로 엎어진 채 굴러다니고 있었고, 그 앞에는 뛰쳐나간 두 발굽에 밀려나간 잔디가 보였다. 나는 두 앞다리로 입을 가렸다. 시선이 다시 호텔로 향했다.
모닝 듀는 시선이 그리로 옮아가기도 전에 럼블에게 도착해 있었다. 급히 속도를 줄이는 통에 몸이 쭉 미끄러졌다. 그는 럼블의 목을 한쪽 발굽으로 잡고, 몸을 기울여 꼬마의 뒷다리를 옭아매는 덩굴을 이빨로 물어뜯었다. 덩굴이 끊어지자 럼블의 몸이 비틀거리며 호텔 건물 쪽으로 엎어졌다. 수도 없이 많은 전선이 건물 안으로 긴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몸을 집어넣고 있는 그 건물이었다.
"30초밖에 안 남았어!"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이만 마음을 놓고 싶기는 했지만, 아직 운명의 차가운 손길이 미래를 확정지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러지 못했다.
"가! 어서!" 모닝 듀가 숨을 헐떡이며 소리쳤다. 현기증이 다시 도지는 것 같았다. 아냐. 지금은 안 돼. 제발. 럼블이 잽싸게 달음박질을 쳤고, 모닝 듀는 그 뒤를 따르는가 싶더니... 그것도 몇 초 지나지 못했다. 두어 마디 쌕쌕대는 숨소리만 남기고 사내의 몸이 그 자리에 쓰러진 것이다.
몸이 땅에 부딪치며 나는 소리는 럼블에게도 들렸다. 꼬마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 안 돼!" 소년이 끽끽대는 소리로 외쳤다. 럼블은 안전지대로 도망쳐 가는 대신 뒤돌아 모닝 듀의 갈기를 죽기살기로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아저씨, 일어나요! 30초도 안 남았다고요!"
"공주님 제발—모닝!" 암브로시아가 소리쳤다. 그녀는 호텔을 무너뜨릴 시한 폭탄의 타이머를 흘끗 보더니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 때 누군가가 그녀를 밀치고 달려갔다. 그 사람이 밀치고 지나간 속도가 어마어마해서, 암브로시아는 균형을 잃고 넘어져 쓰러진 채 무력하게 상황을 볼 수밖에 없었다.
밀치고 뛰어간 사람은 나였다. 나는 달리며 짊어지고 있던 가방을 벗어 내팽개치고, 가빠 오는 숨을 더욱 재촉하며 달려갔다. 흙과 풀이 발길에 채여 흩어졌다. 후드 재킷 가장자리에서부터 땀에 젖어 차가워졌다. 럼블과 모닝 듀 앞에서 급히 속도를 줄이자 네 발굽이 땅을 파며 미끄러졌다.
"누나, 도와 줘요!" 럼블은 눈물로 범벅이 된 채 엉엉 울며 매달렸다. "이 형 좀 옮겨 주세요—"
시간 없어.
"내 뒤로." 나는 말했다.
"그게 무슨—!"
"가까이 붙어!" 그 때 나는 벌써 이를 악물고 있었다. 언제라도 내 머리 위로 벼락을 내리칠 수 있는 호텔 건물을 나는 노려보고 있었다. 녹색 불빛이 반짝함과 동시에 우리 머리 10피트(3.048m) 위에 얇은 막이 펼쳐졌다. 그 너머로 폭발과, 붕괴할 건물이 있었다. "으으..." 방어막이 에메랄드 빛 마력을 머금고 견고화되며 작은 돔처럼 전개되었다.
트와일라잇에게 배운 보호막 마법을 완전히 전개한 순간 폭약이 폭발했다. 폭심지는 건물 중앙부였다. 시멘트 파편과 나무 조각으로 찢겨나간 호텔이 구름을 이루며 무너졌다. 건물 깊은 곳에서 몇 차례 폭발이 더 일어났다. 건물 토대의 스무 곳이 동시에 타격되며 건물의 육중한 몸뚱이가 쓰러졌다. 머리 위로 파편과 잔해가 바다처럼 쏟아져 내렸다.
럼블이 외마디 비명과 함께 모닝 듀에게 엉겨붙었다.
나는 이를 단단히 악문 채 최전선에 네 다리를 박고 버티고 있었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 쏟아지는 파편들은 보호막을 뚫지 못하고 튕겨나갔다. 충격파로 몸이 밀려났다. 밀려난 자리에 고랑이 생겼다. 수백만 개의 죔쇠가 조이는 듯한 두통이 엄습했다. 그렇기는 했어도 폭발의 여파가 우리에게 닿지는 못했다. 쓰레기 몇 조각이 반투명한 보호막 너머로 날려 들어온 것 빼면 아무렇지도 않았다.
멀찍이서 보고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파 오는 눈을 실눈으로나마 뜨고 있으려고 하니 고역이었다. 폭발과 함께 호텔 건물 대부분은 사라졌지만 건물 정면부는 폭발로는 자기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듯 남아 있었다. 벽면은 차라리 자기 손으로 운명을 다하겠다는 듯 기우뚱하기 시작했다. 두껍고 육중해 보였다. 2층 높이의 목재 판넬이 내 머리 위를 덮치고 있었다.
벽이 쓰러지던 그 때, 우리 셋이 서 있던 땅에는 말 그대로 크레이터가 생겨 있었다. 녹색 마력이 휘몰아치며 마구 요동치고 흔들렸다. 나는 필사적으로 보호막 주문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력으로 안 되면 내 목숨이라도 마력선에 집어넣겠다는 심정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고 전신의 근육들이 경련했다. 럼블이 울먹이는 소리와 모닝 듀의 희미한 숨소리가 들렸다.
시간의 흐릿한 안개 속 어딘가에서, 아파 보이는 소년이 병상 밖으로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 앞으로 해가 떠오르고 있었고, 창문 너머에서 한 쌍 금빛 눈동자가 소년을 마주보았다. 영원히 그를 포옹할 수 없기에 그저 한없이, 하염없이,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눈길이었다.
"으윽..." 속이 끓었다. 몸으로 보호막을 받치고 서자 온 세상이 밝은 에메랄드 빛으로 명멸했다. 뿔이 임계점에 도달하며 덜덜 떨렸다. 고통을 받아내며 보호막 속으로 염동력 한 줄기를 짜내 집어넣었다. "아아아아아아악!" 녹색 돔이 염동력을 받아 사선으로, 흡사 미사일처럼 무너지는 건물 벽면을 향하여 날아갔다. 보호막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는 바다가 갈라진 자리처럼 보였다. 반으로 갈라진 벽면은 우리를 덮치지 못했고, 그저 우리 양 옆으로 거대한 폭음과 함께 쓰러질 뿐이었다.
그 다음 순간 내 앞으로 무엇인가 떨어졌다. 몸이 휘청하며 작살난 흙바닥에 얼굴을 박았다. 나중에서야 안 일이지만, 그 모든 일은 단 5초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그 때 내가 지키려던 것은...
"으으음... 모... 모, 모닝..." 나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우고 모닝 듀에게 기어가듯 다가갔다.
럼블이 이미 미친 듯이 그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꼬마는 울음을 제대로 참지도 못했다. "안 움직여요! 설마... 설마..."
"괜찮아, 이 녀석아." 나는 침을 삼켰다. 나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 그의 상체를 들어 올려 무릎베개를 해주었다. "다 괜찮아." 나는 말했다. 내 목소리지만 어딘지 이상하게 들렸다. 나도 모르게 웃고 있어서였다. "전부 다 괜찮아." 나는 말했다.
"그래도... 그래도..." 럼블이 나를 쳐다보았다.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었다.
따뜻한 물방울 하나가 목을 타고 흘러서 정신을 차렸다. 나는 발굽을 들어 왼쪽 귓가를 만져보았다.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왼쪽 귀에 가느다랗고 깊은 상처가 나 있었다. 보호막 마법 덕분에 목숨은 건졌지만, 아직 완벽하게 숙달한 것은 아니었구나 싶었다. 몇 군데 베이고 긁힌 상처가 있었지만 큰 상처는 아니었다. 럼블과 모닝 듀도 마찬가지로 열 군데 정도 찰과상이 있었지만, 최악의 경우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암브로시아를 비롯한 몇몇이 숨이 멎을 듯한 기세로 달려왔다. 그들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내 상처에서 흐르는 피였다. "공주님 맙소사. 다들 괜찮죠?"
"정말 대단하더군요!"
"방금 한 거 봤어?"
"공주님 맙소사, 큰일 날 뻔 했네요!"
"그... 이 사람..."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새삼스레 내 숨이 얼마나 떨리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우린 괜찮아요. 그냥... 좀..."
"가만히 있어요!" 암브로시아가 몸짓했다. 이 여자가 저렇게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모습은 처음이었다. 녹색 눈이 쓰러진 모닝 듀를 쳐다보고 있었다. "레드하트 선생을 불러올 테니 기다려요! 혹시 모르니까 그냥 갈 생각은 말고!"
"죄송해요!" 럼블이 울며 말했다. 눈은 젖어 있었고 코는 훌쩍거렸으며 입은 울었다.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냥 날아다니다가... 날다가... 정말 몰랐어요! 이 형 괜찮은 거 맞죠!"
"안 괜찮은지 확실하지도 않은 걸 왜 벌써부터 걱정하고 그러냐." 암브로시아가 말했다. "너 날 수 있댔지."
"그래!" 나는 럼블을 홱 돌아보고 말했다. "지금 여기선 네가 가장 빠르지! 프론토 선생님 좀 모셔와 주렴!"
"네!" 럼블이 자세를 고치고 날개를 움직여 날아올랐다.
"그쪽... 그쪽은요...?" 암브로시아가 신경 쓰이는 눈치로 나를 쳐다보고 물었다.
"난 멀쩡해요. 레드하트 선생님 모셔오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이 사람 좀 보고 있을게요."
암브로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가지를 향하여 멀어져가는 그녀와 동료 작업자들의 모습이 흐려졌다.
남은 것은 나와, 내 두 앞다리에 안긴 모닝 듀뿐이었다. 호텔이 있던 자리에 처절한 전투가 있은 뒤의 전장 같은 침묵이 찾아들었다. 가쁜 숨이 서서히 잦아들며 차분한 숨결로 바뀌었다. 나는 사내의 따뜻한 몸을 받쳐 안고 곳곳에 남은 작은 자상과 멍자국을 찬찬히 찾아보았다. 그것들은 그의 솜털의 완전성을 모독하는 것이니까. 왼쪽 뺨에 희미하게 베인 자국이 남아 있었다. 나는 천천히 발굽을 들어 사내의 얼굴로 가져갔다.
비단결 같은 솜털이 발굽에 닿은 순간 내 안의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나는 그 순간의 현실성에 발목을 잡혔다. 가슴 속에서 심장이 벌렁대는 것이 느껴졌다. 사내의 차분한 심장 박동과 아주 잘 어울렸다. 나는 그 때 내가 평생 가질 수 있는 것과 가질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는데, 우리 둘 모두에게 그러한 것들은 어떠할 것인가. 항아비곡이 일종의 신탁처럼 내게 내려진 것이 아닐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처럼 달콤한 순간은 그렇다면 무엇인가.
나는 사내의 갈기를 한쪽으로 쓸어넘겼다. 정오의 햇살을 받아 빛나는 그의 금빛 얼굴은 잠든 소년의 그것과도 같았다. 그 어떤 아름다운 것이라도 홀로 고고히 이처럼 아름답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기적인 것이겠지. 알 게 뭔가. 더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몸을 기울였다. 두 이마가 맞닿기 직전까지 가까워졌다. 녹아내리는 행복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나는 뺨을 비비고, 그의 얼굴을 가만히 감쌌다. 네 다리의 힘이 풀려 부들거렸지만, 그가 있어서 견딜 만했다. 나는 더욱 몸을 기울였다. 사내의 숨결이 내 입가에 와 닿았다.
마음 속 둑이 터진 것도 그떄였다. 나는 숨죽여 울며 모닝 듀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눈물이 흘러 사내의 이마를 적시고 흘러내렸다. 그것은 우리 사이를 갈라놓은 한 줄기 강처럼 보였다. 그의 몸은 따뜻했고 연약했으나 살아 있었다. 나 또한 살아 있었기를 나는 바랐다. 천사들이 대지에 자주 왕림하지 않는 것은 이유가 있었다. 자기들이 직접 나서 지켜야 할 정도로 끔찍한 지복의 순간에야 천사들은 비로소 지상에 내려오는데, 내려올 만한 일은 안 생기고 별 것 아닌 일들만 생기니 그런 것이다. 내 부박한 영혼 한가운데서나마 영원히 살아 숨쉴 그 때의 기억을 생각하면, 그런 때에나 비로소 천사가 내려오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몸이 아직 살아 있는 한, 이 때의 기억을 놓치는 일은 영영 없으리.
암브로시아와 럼블을 비롯해 다른 사람들이 돌아왔다. 후미에는 레드하트가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없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와 정성스러운 간호, 부드러운 깨움에 힘입어 모닝 듀는 깨어났다. 몸에 반창고를 붙인 뒤, 그는 발굽을 들어 럼블과 암브로시아의 어깨를 차례대로 토닥여 주었다. 어질어질해 보이기는 했지만, 두 눈과 귀가 온기를 찾아 경련하는 모습에서는 어떤 상실감이 불현듯 느껴지기도 했다. 사내는 발굽으로 이마를 쓸었다. 이마가 흠뻑 젖어 있어서 사내는 당황한 눈치였다. 그의 앞다리에 묻어 나온 눈물이 말라 사라져 갔다. 찬란한 금빛 새벽을 바라보며 병상에서 일어난 어느 날의 소년처럼,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다음 날 나는 공원에 나가 벤치를 하나 골라잡고 앉아 있었다. 들고 나간 리라는 옆에 잘 놓아두기만 하고 연주하지는 않았다. 나는 힘든 숨을 들이마셨다. 늦여름의 따뜻한 그늘 속을 가만히 바라보는 동안 허파는 차분히 부풀었다 오므라들기를 반복했다. 전날 낭패를 본 덕에 몸 곳곳에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자랑스러운 감정 따위는 없었다. 사람을 살렸다고 의기양양하지도 않았다. 하늘로 돌아갈 날개가 없는 수호천사에게 업적을 자랑하는 일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일이다.
굽은 길 너머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오후의 적막을 깨는 조용한 벼락 같았다. 눈만 슬쩍 돌려 쳐다보니 럼블이 혼자서 길을 따라 걸어오고 있었다. 꼬마는 하염없이 한숨만 푹푹 내쉬며 걸었는데, 전에 들었던 것보다도 무거웠다. 축 처진 걸음이 멈춘 곳은 언덕마루에 선 한 나무의 그늘이었다. 꼬마는 그 밑에 풀썩 주저앉아 다리 사이의 칙칙한 흙만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감정하게 헛기침을 한 목에서 말이 나왔다. "페가수스가 구름이 아니라 땅을 보고 다니다니. 무슨 일이라도 있니?"
"엇?" 럼블이 내 쪽을 보더니 몸을 움찔했다. "아. 안녕하세요."
"안뇽."
"누나도... 한 소리 하실 건가요?" 꼬마가 툴툴대는 말투로 말했다. "다들 그랬거든요."
"무엇 때문에?"
럼블은 근처에 자란 풀잎을 가지고 비비 꼬면서 대답했다. "저 때문에 사람 하나 죽을 뻔했거든요. 어제 일이에요."
"그래?" 나는 가만히 웃었다. "사람 해치고 다닐 녀석은 아닌 것 같은데."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꼬마가 신음하고 말했다. "멍청한 짓을 했거든요. 지나가던 사람이 절 살리겠다고 목숨을 걸었죠. 건물 전체가 말 그대로 저희 위로 쓰러졌죠. 어떻게 둘 다 살아난 건지 모르겠어요."
"운수가 좋은 것도 사실 다 이유가 있는 걸지도 모르지." 나는 중얼거렸다. "실수에서 배우는 것보다도, 우리 자신에게서 배우는 게 더 많다는 걸 운명의 여신이 알려주는 한 방법일지도 모르잖니."
"그런 건 됐어요." 럼블이 툭 내뱉었다. "당분간 혼자 날아다닐 생각은 하지 말라고 형한테 단단히 혼났어요. 제 잘못이라 할 말도 없고요. 그냥..."
"그냥?"
"꽃을 찾아보고 있었어요. 하늘에서 보면 어디가 꽃이 더 많이 피는 곳인지는 알 수 있거든요. 그게 아니라도 더 편하기도 하고요."
"왜 하필?" 나는 기계적으로 물었다.
"그..." 럼블이 입술을 깨물었다. "모르겠어요. 정말.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어요."
"꽃 좋아하니?"
"아뇨." 럼블이 툴툴댔다. "절대."
"그럼 왜—?"
"그건 별로 상관 없잖아요, 예?" 럼블은 진저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홱홱 저었다. 가느다란 발굽이 얼굴을 덮었다. 꼬마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몰라요. 정말 몰라요." 그러고는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애들도 다들 알아요. 난 그냥 이상한 놈이에요."
나는 아무 말도 않고 럼블을 쳐다보았다. 멀찍한 언덕가에서 낭랑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귀를 쫑긋거렸다. 까르르 웃는 소리가 주위를 밝혔다. 그 중에서도 하나가 독보적으로 뛰어났다. 왼쪽을 돌아보자 길게 자란 잔디 위를 뛰어다니며 노는 작은 몸 세 개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다시 럼블에게 시선을 돌리며 심호흡했다. 가만히 뜯어보는 눈길이 절로 가늘어졌다. 주저앉은 벤치 위로 흐릿한 녹색 아지랑이가 반짝였다.
"히히히힛!" 애플블룸이 키득키득 웃었다. "아이고, 스쿳! 너 지금 농담하는 거지! 실화야?"
"아무렴." 스쿠틀루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끄덕였다. 스쿠틀루를 비롯한 셋은 특유의 새빨간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걔가 또 짜증나게 하면 이럴려구. '어디다 대고 큐티마크 없다고 놀려대냐. 어디 맞설 테면 맞서보자. 아예 변기통에 앉지도 못하게 궁둥짝이 쪼개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똑똑히 보여주겠다!*12'"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 얘기하는 거 같은데, 걔가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니야!" 잔디 덮인 언덕배기를 통통 튀며 돌아다니던 무리의 후미에 있던 스위티벨이 말했다. "스쿠틀루 너랑은 도저히 그런 쪽으로 엮이려는 애가 없다구—" 스위티벨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녹색 불빛이 번쩍하면서 꼬마의 망토를 풀어 버렸다. 스위티벨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마법으로 일으킨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망토만 보였다. "맙소사! 잠깐 기다려!"
"워! 잠깐, 뭐라고 했어? 스위티벨?" 스쿠틀루가 끙 소리와 함께 말했다.
"그러게 갈기에 단단히 동여맸어야지!" 애플블룸이 실실 웃으며 덧붙였다.
"참... 재밌다 그래...!" 스위티벨은 헐떡이며 날려가는 천 조각을 쫓아 달려갔다. "아무튼 들었지! 잠깐 기다려!" 망토는 공원 길가 한쪽의 나무 밑에 떨어졌다. 스위티벨은 발굽으로 망토를 주워들며 어딘가의 뿔난 패셔니스타가 으레 하는 것처럼 투덜댔다. "으으으으으! 이놈의 천조각! 이걸 한 대 쥐어박을 수만 있으면 얼마나—!" 꼬마는 말을 멈췄다. 혼자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럼블도 그렇기는 마찬가지였다. 깜짝 놀라 펄쩍 뛰더니, 사선死線에 내몰린 사람처럼 뒷걸음질치다가 나무에 부딪쳤다.
스위티벨은 무심하게 럼블을 쳐다보고 있었다. 럼블도 멍하니 스위티벨을 마주보았다. 얼마간 어색한 침묵이 지난 끝에, 스위티벨이 입술을 살짝 씹으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럼블은 몸을 떨며 자꾸 꿈지럭거렸다. 아주 조금 앞으로 다가선 럼블은 억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 안녕."
"으으으응..." 스위티벨이 늘어진 망토 위로 얼굴을 반만 내밀고 대답했다. "안녕..."
"저기..." 럼블이 이를 뿌득 갈았다. "되게 예쁘—어어... 어—목소리, 목소리 말이야. 노래 정말 잘하던데." 럼블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게, 들... 들리더라고. 노래 정말 잘했어. 좋겠다."
스위티벨이 시선을 떨궜다. 발굽이 땅을 탁탁 차기 시작했다.
"친구들이랑 놀러 나왔어?" 럼블이 뒷목의 반들거리는 갈기를 긁으며 말했다. "너희 셋이 그... 잘 지내니까... 어... 같이 놀거나... 그, 많이 하잖아. 어른들 입장에서는 신경 긁는다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래도 내가 보기엔 다 잘 하고 있는 것 같고. 그, 너희가 사람들 귀찮게 한다고 생각하는 쪽은 아니니까. 그... 으으으...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
스위티벨이 갑자기 몸을 떨었다. 경련까지 일으켰다.
럼블이 스위티벨을 쳐다보고 물었다. "괜... 괜찮—?"
스위티벨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더니, 무지막지한 양의 액체를 럼블 바로 앞에 마구 토해냈다.
"으앗! 깜짝아!" 럼블이 뒷걸음질쳤다.
"우읍... 욱..." 스위티벨이 그 자리에 주저앉아 뺨을 앞다리로 문질렀다. 잔뜩 찌푸린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 갔다. "엄마! 저... 욱... 미안, 진짜 미안! 나도 왜 갑자기 이러는지 모르겠어!" 스위티벨은 몇 차례 기침하고 헛기침하더니, 망토를 껴안다시피 붙잡고 말했다. "사람한테 토하고 다니는 그런 거 아냐!"
"야..." 럼블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했다. "이거..."
스위티벨이 움츠러들었다.
"참..." 럼블이 씩 웃으며 말했다. "...끝내준다!" 럼블이 날개를 팔락이며 다가섰다. "이렇게 토할 수 있는 사람은 처음 봐!"
별 미친...
스위티벨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정말? 비꼬는 거—우읍— 아니지?"
"그럼! 우리 형도 보면 끝내준다고 박수 칠걸!" 미친
"애플블룸이 그러는데, 항상 내가 파리라도 잡아먹으려는 양 입 벌리고 다녀서 그렇대*13."
"그래?" 럼블이 스위티벨에게 훌쩍 다가섰다. "그럼 더 큰 벌레 찾아보러 갈 생각 없어?"
"으음..." 스위티벨은 입술을 씹으며 다시 망토로 얼굴을 가렸다. "그, 그건 좀."
"아." 럼블이 금세 풀이 죽어 대답했다. "그래... 물론 그렇겠지..."
"그...렇긴 해도 애들이랑 같이 다람쥐 잡으러 갈 생각이긴 했거든!" 스위티벨이 말했다. 럼블도 큐티마크가 없어서 스위티벨은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같이 갈래?!" 활짝 웃는 스위티벨의 두 눈이 반짝였다. "우리 적성 진짜 끝내주는 걸지도 모르잖아!"
"그래, 물론!" 럼블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모르는 데 적성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럼 결정됐네. 뭘 머뭇거리고 있어?" 스위티벨이 까르르 웃으며 까딱까딱 몸짓했다. "가자—으앗!" 꼬마는 붙들고 있던 망토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히힛... 흠흠, 자. 기다려 봐." 럼블이 다가가 조심스레 스위티벨의 목에 망토를 매어주었다.
스위티벨은 얼굴을 붉힌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매듭짓기가 끝나자 스위티벨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별 거 아냐."
"언니한테 가서 네 것도 하나 해 달라고 해야겠다."
"어..." 럼블은 쑥스러운 듯 웃으며 대답했다. "너만큼이나 어울릴 것 같지는 않은데."
"뭔들 어때. 다람쥐나 잡으러 가자. 출발!"
"히히! 그래!"
둘은 언덕을 달려 내려가 애플블룸과 스쿠틀루에게 합류했다. 나는 일련의 과정을 쥐 죽은 듯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딱히 방해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 날 이후 처음으로 가슴 한켠이 따끈해지고 있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야, 아주 꿀이 뚝뚝 떨어지네."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암브로시아가 길을 따라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작업복은 입고 있지 않았다. 드러난 솜털과 눈처럼 새하얀 갈기가 굉장히 잘 어울렸다. 어떤 목적이 있어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감추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암브로시아가 다시 입을 열자 인부 특유의 걸죽한 말투가 튀어나왔다.
"동네 사람들도 참 너무하지. 꼬맹이가 사고 치기는 했어도 너무 나간 거 아닌가 몰라."
"동네 사람들이 전부 꾸짖을 정도라니." 나는 무감정하게 말했다. "어떤 사고를 쳤길래 그렇대요?"
암브로시아는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지 부르르 떨었다. "대부분의 원인은 내가 제공했지요. 그래서 저 녀석 형 되는 사람한테 너무 꾸짖지 말라고 얘기해 뒀습니다. 선더레인이 애들 혼내고 꾸짖는 건 잘한다고 소문이 자자하지만, 그 녀석 하는 거 보면 뇌는 두개골 안이 허전해서 넣어 둔 건가 싶을 정도로 안 쓰는 일도 비일비재하거든."
나는 피식 웃었다. "뭐라고 할까, 되게 관조적으로 말씀하시네요."
"글쎄,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지만." 암브로시아가 신음했다. 그녀는 잠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피곤한 듯 갈기를 쓸어넘겼다. "호텔 폭파를 하면 폭파를 한다고 좀 더 확실하게 얘기를 해놨어야 했는데 말요. 경고 표지판을 더 갖다 세워 둘 수도 있었겠지. 페가수스 애들 좀 더 써서 전파하고 다니라고 했을 수도 있을 것이고. 아예 타이머 달린 놈을 쓰지 말았어야 했을지도."
"도저히 그럴 상황이 아니더라도 일단 일이 터지고 나면 꼬투리 잡아 족치기는 쉬운 법이죠." 나는 말했다. "그렇게 자책할 일도 아닌 것 같은데요. 다들 안 다치고 나왔으면 된 거 아닌가요?"
"천운이었지.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었수." 암브로시아가 툴툴댔다. "요 몇 주 동안 영 정신이 딴 데 나가 돌아다니고 있었단 말요. 내가 자랑하는 직업정신하고는 한참 다르지."
"왜 그럴까 맞춰 볼까요?" 어깨를 으쓱하고 물었다. "대연회 때문에 그런 거 아니에요?"
"하!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수!" 암브로시아는 껄껄 웃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한숨지었다. "인생이 그렇게 단순해 빠지면 오죽 좋겠소."
"대연회 때문에 머리가 산란한 것도 아니면, 뭐 때문이죠?" 나는 씩 웃으며 물었다. 머리가 맑게 개였다. 급하게 묻는 내 입가에는 이미 웃음기가 싹 가셔 있었다. "누구에요?"
암브로시아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전에 봤던 매력 그 자체였던 한 사내의 새파란 눈동자에 비친 그 모습과 같았다. "이젠 상관없지. 어린애마냥 주절주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놨는데, 그래 놓고서 뭘 바라면 그건 도둑놈 심보요. 뭣보다... 하... 난 절대 점잖은 사람은 못 되거든. 그 녀석은 좀 더 예쁘고 순한 여자를 만나는 게 나아."
나는 조용히 암브로시아를 바라보았다. 나는 침을 넘기고 말했다. "저 사람한테 필요하겠다 싶은 것들은 대체로 이미 다 갖고 있더라고요. 있기나 할까 싶은 사람을 찾아다니다 보면 결국 혼자 남기 마련이고요."
"흠. 더한 꼴이 되는 경우도 많수." 암브로시아가 조용히 말했다.
"네." 나는 냉담하고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있죠. 그런 거."
암브로시아는 몸을 꿈지럭거리더니 어깨를 짓누르던 마지막 죄책감을 씻어내기라도 하듯 한숨지었다. 그러고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뭐, 지나간 일 가지고 청승 떨어 봤자 아무 소용 없지. 안 그래도 내일부터 바로 아파트 공사 들어가야 하거든. 애들 만나서 계획을 좀 짜 놔야겠구만. 그럼 좋은 하루 되시요. 세상 모든 걱정 짊어진 양 중얼거리면서 돌아다니는 불쌍한 년은 나 하나로 끝났으면 좋겠네. 하하하..."
떠나는 암브로시아 뒤로 나는 발굽을 흔들어 전송했다. "그게... 잘못은 아니잖아요..." 암브로시아는 너무 멀리 가 있어서 듣지 못했고,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서 그 뒤를 따라가 말해주지 못했다.
"아, 이거 궁금하네요." 래리티가 입을 열었다. 슈가큐브코너 한쪽 내가 앉은 자리 맞은편에 앉아 입을 떼는 그녀의 모습은 장밋빛 촉광에 젖어 있었다. "선 넘은 질문일 수 있는데요, 하트스트링스 씨는 불가능한 사랑의 열병을 앓아 본 적 있나요?"
나는 악보에서 눈을 떼고 래리티를 마주보았다. 나는 씩 웃고 말했다.
"불가능에 대한 사랑 때문에 얻은 상사병은 나을 수 없는 법이죠." 나는 덧붙였다. "대연회 이전의 당신과 지금의 당신이 다른 것처럼 말이에요. 대연회에 들떠 얼이 빠진 채 발이나 동동 구르던 어린애로 되돌아가고 싶지는 않으시잖아요?"
래리티는 멍한 눈길로 나를 쳐다보았다. 저물어가는 석양의 그림자가 그녀의 얼굴을 적셨다. "그렇죠." 래리티가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 다시 그 때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네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좋아요."
"그래도..." 나는 염동력으로 들고 있던 깃펜을 가리켰다. "기억은 남지요."
"그건 무슨 뜻이죠?"
"그게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알면서도,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달콤하죠." 나는 우리 사이에 놓여 빛나는 촛불 앞에 놓인 화관을 내려다보았다. "우리 머리 속 어느 한쪽 구석만큼이나 상상의 산물을 쌓아두기 좋은 곳은 없죠. 하지만 마음은 달라요. 언제고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되기 전에 미리 준비하고 있는 게 우리가 할 일이죠. 어떤 상상을 했든 진실한 사랑이 다가올 순간이 언제인지, 이전보다는 애정을 덜 갈급하면서도... 덜 고독한 사람이 되는 순간이 언제인지는 영영 예상할 수 없는 날이 되는 거고요."
래리티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지쳐 보이기는 했지만, 그때까지 봤던 그 어떤 표정보다도 진실해 보이는 미소가 얼굴에 스쳐 지나갔다. "끔찍하게, 정말 끔찍할 정도로 오랫동안 사람을 그리워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새삼 드네요."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보다도 더 오랫동안 그리워해야 할 사람들도 있겠죠."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금색 꽃잎을 가만히 쓸어 보다가 말했다. "그런 사람들도 있다는 거지, 우리 모두가 그런 건 아닐 거에요."
래리티는 아무 말 없이 커피를 마저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밖으로 나가는 대신 내 곁으로 다가와 어깨에 한쪽 발굽을 얹었다.
"그 갈급에 지배당하지 마세요. 당신이 세상을 버릴 수는 있어도 세상이 당신을 버릴 것 같지는 않으니."
"그럴게요, 래리티 씨." 나는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모든 사람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니까."
래리티는 그 말에 입술을 떨었다. 그녀는 자부심인지 우울감인지 모를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래리티는 한 줄기 날숨과 함께 슈가큐브코너의 문을 열고 나갔다. 석양의 마지막 한 조각이 그녀 위로 이지러졌다.
나는 혼자 앉아 비곡을 마주했다. 모닝 듀의 선물로 자아낸 화관을 쳐다보았다. 나는 아름다운 것들과, 미지를 향한 두려움 때문에 잊히는 아름다운 것들을 생각했다. 미지를 두려워할 그럴듯한 이유를 가진 것은 오직 나 하나뿐이었고 저주를 짊어진 자 또한 나 하나뿐이었다. 이것을 감당해내는 것은, 내 찬란한 의무이기도 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촛불을 불어 끄고, 발굽으로 화관을 홱 낚아챘다.
다시 찾아온 아침, 새로 짓는 아파트의 목재 골격 사이마다 전기톱과 드릴 소리가 가득 차 아수라장 그 자체인 소음공해를 만들어냈다. 암브로시아라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정신 단단히 챙기고 공사에 참여하고 있었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래야 할 그녀는 장비에 걸려 넘어져 판자 위로 엎어지고 말았다. 암브로시아는 끔찍한 두통을 앓기라도 하는 듯 씩씩거리며 머리를 문질렀다.
"아냐... 이게... 아냐!" 암브로시아가 떽떽대며 소리쳤다. "니들 설계도면은 똑바로 보고 작업하는 거 맞냐! 정신 안 차릴래! 토대가 자그마치 20도나 비뚤어졌잖아! 이따위로 하면 창문 달 때 욕 처먹는 건 나란 말야!"
"그건 좀 너무한데, 앰버!" 인부 하나가 공사 소음을 뚫고 소리쳤다. "너 하란 대로 하고 있는 거야!"
"내가 몇 번을 얘기해야 들어먹을래? 내가 대가리 아파서 미친 소리 하면 개소리 하지 말라고 딱 끊으라고 했잖아!"
"그렇게 머리 신경 쓸 거면 똑똑이답게 안전모나 똑바로 챙겨 써!"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 암브로시아가 머리를 문지르다가 한숨짓더니 투덜댔다. "아이 씨바, 백 번 맞는 말인데.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야. 자살시도라도 하는 거야 이거?" 암브로시아가 콘크리트 바닥 위를 비틀거리며 걸어가 나무 탁자를 흘겨보더니 소리쳤다. "이런 썅, 그걸 어디다 처박아 놨더라?" 그녀는 안전모를 찾아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툴툴댔다. "옘병. 여기 올려놨었는데. 누가 옮기기라도 했나?" 어느 지점에 시선이 닿자 암브로시아가 그 자리에 딱 얼어붙어 입을 떡 벌렸다.
안전모는 공구 상자 무더기 위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거꾸로 뒤집어 둔 안전모 한가운데에, 금빛 튤립으로 짠 화관 하나가 통째로 들어가 있었다.
암브로시아는 자리에 주저앉아 안전모 속 화관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뛰는 가슴과 함께 머리가 함께 흔들렸다. 그녀는 발굽을 뻗어 부드러운 꽃잎을 만진 암브로시아가 중얼거렸다. "왜... 이런 계집애 같은 물건이 여기..." 걸걸한 말투가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잦아든 자리에, 둥그런 미소가 찾아들었다. "그 녀석이...?" 그녀는 입술을 씹으며 공사 현장 너머 저편으로 시선을 옮겼다.
"휴우... 어이! 앰버!" 인부 하나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한 소음을 뚫고 울려퍼졌다. "공구함 근처까지 간 김에 줄자 하나 던져 주라!" 몇 초쯤이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갔다. 인부가 고개를 돌렸다. "앰버?"
암브로시아는 자리에 없었다. 튤립도 함께 사라졌다.
모닝 듀는 상점가 앞 부드러운 흙바닥에 민들레 한 줄을 막 다 심은 참이었다. 그는 일어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문질러 닦고, 자신의 작품을 가만히 감상했다. 사내는 몸을 돌려 수레에서 원예도구 하나를 집어들었다. 멀리서 오렌지색 작업복을 입은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나타난 것도 그때였다.
그는 깜짝 놀라 펄쩍 뛰었지만, 얼마 안 가 반창고 붙은 가슴에 발굽을 가져가며 별 일 아니었다는 듯 피식 웃었다. "앰버,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설마 매일 쓰러지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건 아니겠지?" 모닝 듀는 암브로시아를 지나쳐 가 묘종과 원예도구로 가득한 수레를 뒤적거렸다. "그래, 웬일이야? 이번 달에는 다른 쪽에서 작업하는 걸로 알았는데."
암브로시아가 모닝 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말을 꺼냈다. "그래 내가 그걸 쓴 게 보고 싶었어? 이제 됐나?"
"어......" 모닝 듀가 고개를 들어 지평선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암브로시아를 쳐다보았다. "응? 무슨 말인지..."
그녀는 들고 온 안전모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튤립을 엮어 만든 화관이 사내의 시선에 담기는 동안 암브로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오호. 이거..." 모닝 듀가 튤립을 뜯어보며 말했다. "꺾은 지 며칠은 된 것 같은데, 아직도 괜찮은걸!"
"우리 동네에서 이렇게 오래 가는 꽃을 키울 수 있는 건 너 하나밖에 없어." 암브로시아가 말했다.
"음, 그런가. 그래도..." 모닝 듀는 말을 그만두었다. 꿈지럭거리면서도, 암브로시아가 꺾었다고 보기에는 그녀 자신조차 영문을 모르는 듯한 기미를 눈치챈 것이다.
그녀 또한 모닝 듀의 표정에서 사실을 눈치챈 것은 마찬가지였다. "네가... 보낸 게 아니구나?"
그는 천천히, 한없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앰버. 미안...하지만 내가 보낸 게 아니야. 왜...? 그러니까, 왜 그렇게 생각한 거야?"
"쳇..."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안전모와, 그 안의 보물 같은 화관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등신같이 넘겨짚었네."
"그런 게 아니고! 그러니까... 그게... 네 생각만큼 시시하고 그런 건 아니거든—"
"그렇겠지, 모닝. 항상 그랬듯."
"앰버?" 그는 침을 삼키며 이게 무슨 일인가, 하는 눈길로 암브로시아를 쳐다보았다. "무슨... 얘길 하는지 모르겠는데..."
"거짓말 하지 마. 아닌 척 해 봤자 나는 못 속여. 나도 아닌 척 하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발굽으로 갈기를 쓸어넘기며 길 건너편의 무너진 호텔 잔해를 힘없이 쳐다보았다. 기나긴 한숨이 입술을 떠났다. "네 시선을 봤어."
"시, 시선이라니?"
"캐러멜과 윈디가 서로를 보는 눈길, 선더레인과 블로섬보스 사이에서 마주치는 그 시선이랑 똑같던데. 내가 보기엔... 아니... 확실히 알아..." 암브로시아는 가벼운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지 않은 채 모닝 듀를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네가 날 보는 시선이, 그 시선이었어."
모닝 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고개를 숙이고 헐거운 흙을 발굽으로 헤치고 있을 뿐이었다.
"네, 네!" 암브로시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주저앉았다. 안전모를 품에 꼭 껴안고 있었다. "나야 뭐 늘 너랑 이러고 드잡이질을 하고 놀았지. 아, 진짜 등신같다. 우리 둘 다 등신같은 걸 알면서 더욱 더 등신같은 짓을 평생 계속할 운명이지."
"앰버, 그건 그런 게 아냐—"
"대충 달래고 넘어가려고 하지 마!" 암브로시아가 얼굴을 찌푸렸다. 찌푸린 얼굴이 한없이 유약해 보이는 눈빛으로 녹아들었다.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너는 찾고, 나는 찾아 주길 기다리고 있는데 왜 시간은 갈수록 빠르게 흐르는지, 영영 혼자인 채 살다가 죽을 것 같은 기분이 어떤 건지 알기나 해?"
"우린... 우린 혼자가 아냐, 앰버—"
"혼자야, 모닝. 우린 혼자야..." 그녀는 젖은 눈으로 멈칫했다. 훌쩍이는 소리와 함께 암브로시아가 말했다. "어제 널 잃을 뻔했어. 널 영영 못 만나게 될 뻔했다고. 얼마나 무서웠는데. 두 번 다시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은 예감 때문에, 시작해 보자고 얘기해 볼 기회조차 영영 없어질 것 같은 기분 때문에, 얼마나 무서웠는데! 얼마나, 미안했는데..."
"아냐." 모닝 듀가 따뜻한 눈길로 말했다. "미안해할 것 없어.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으니..."
"모닝 듀, 이 멍청한 자식아!" 암브로시아는 웃으면서 곡하는 듯, 안쓰러우면서도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그것 때문에 사과하는 것 같냐? 너도 눈치 깠잖아!" 그녀는 발굽을 뻗어 그의 뺨을 쓸었다. "너 같은 남자가 스스로 못 깨우치고 어리버리하고 다니니까, 내가 직접 나서서 정신 차리게 해 줬어야 했는데 너무 늦게 해 줘서 미안하다는 얘기 아냐."
모닝 듀는 머뭇거리며 한쪽 발굽을 들어... 마침내 그녀의 발굽을 잡았다. 얼굴에 닿은 그녀의 발굽을 밀어내는 대신, 가만히 붙잡은 채 한숨지었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는 말했다. "머뭇거리던 건 이유가 있어. 내가 평생을 바쳐서라도 하고 싶은 게 있는 건 너도 알잖아." 사내의 목소리가 떨렸다. 평생 떨쳐낼 수 없을, 그 날의 소년이 겹쳐보였다. "이대로 가면, 내 평생을 바치더라도 절대 따라잡을 수 없는 것도 알고 있어. 너도, 나도."
"모닝."
"넌 나보다 강인하고 당당한 사람이야." 그는 씁쓸한 눈길로 말했다. "널... 지켜 줄 수 있는 남자가 못 돼. 늘 불안하게만 만들겠지..."
그녀는 한 줄기 눈물이 흐르는 얼굴로 빙긋 웃었다. 그녀는 사내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넌 네 생각보다도 나은 사람이야. 이 겁쟁이." 암브로시아는 벅차 오는 가슴을 안고 더욱 둥글고 큰 미소를 지었다. "넌 할 수 있어..."
사내도 무엇인가 깨달은 듯한 눈치였다. 그는 무거운 한숨을 내보냈다. 기억 속 어느 한 모습보다도 찬란한 무엇인가를 보고, 기억에서 해방된 것 같았다. 그는 안전모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두 발굽으로 안전모 속 튤립 화관을 들어올려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는 곧장 화관을 암브로시아의 머리에 씌워주었다.
그녀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화관이 제자리를 잡아 걸렸다. 암브로시아가 아이처럼 깔깔 웃었다. "음..." 그녀는 훌쩍이면서도, 영 익숙하지 않다는 듯 꾸물대며 말했다. "그... 내 눈 색이랑은 안 어울리는 것 같아."
"맞는 말이야." 모닝 듀가 천천히 끄덕였다. 그는 빙긋 웃고 덧붙였다. "그래도 네 웃는 얼굴이랑은 잘 어울려."
그녀는 꺅꺅거리며 웃는 와중에도 한쪽 발굽으로 눈물을 문질러 닦았다. "그래서... 이제 1일인가?"
모닝 듀가 차분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1일이지." 그는 말했다. 그는 고개를 숙여 뺨을 비볐다.
암브로시아도 사내의 뺨에 얼굴을 비비고, 그의 몸에 단단히 달라붙어 그의 어깻죽지에 얼굴을 묻었다. 그 또한 포옹으로 화답했다. 포니빌 시가지가 형형색색의 캔버스가 되었고, 그 한가운데서 따뜻하게 엉겨 있는 둘의 모습은 한 폭 그림이었다.
나는 근처 가게 앞에 서서 인생의 아름다움을 생각했다. 왼발굽이 한 일을 오른발굽이 모르게 하는 것이 최선인 일도 있는 법이다. 가방에 담긴 리라의 무게를 짊어지고, 나는 몸을 돌려 무심하고 차가운 곳으로 향했다. 여덟 번째 비곡이 머릿속에서 낙인처럼 솟구쳐 흐르고 있었다.
수호천사의 자격은... 누구를 지키는지가 아니라, 그를 위해 무엇을 포기하는가에 달려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떼어놓을 수 없었다.
오후 내내 한 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꽉 들어차 있었다. 간단하게 써두자면, 그것 때문에 오두막으로 돌아와 일기장 앞에 앉은 것이다. 비곡이 나를 부르고 있다. 창백하고 차가운 품이기는 하나, 그 품에 나를 안는 손길은 거부하지 않는 게 최선이겠지. 그 이름, 그 목적, 비곡 전체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까지 알아야겠다. 그 다음이야 뭐, 어떻게 될지는 잘 알고 있다. 이제 어디 얽매일 데도 없으니, 할 건 해야지?
여덟 번째 비곡을 연주하기 전까지는 일기를 쓰지 않을 생각이다. 검게 타오르는 거대한 봉화처럼 내 앞에 어른거리는 그 순간에 내 모든 힘을 쏟아붓기 전까지 다시 펜을 잡을 일도 없다. 얼어 죽었든지, 저주받은 비곡의 불가해한 나락 속으로 끌려 들어갔든지 한 게 아닌 이상 일기를 다시 쓰기는 할 것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내가 세상 떠날 때 굳이 나를 위해 울어 줄 사람이 한 명, 단 한 명은 있다. 그 사람에게 묻더라도 주저함 없이 그럴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여기까지 쓴다.
라이라 하트스트링스
나를 좀먹는 이 끔찍한 저주를 벗어날 방법은 있든지 말든지 할 것이다. 가끔씩 그따위 것들은 다 집어치우고, 누구라도 나를 사랑해 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빽그라운드 포오니 팬아트는 주로 후드 쓴 라이라만 덜렁 그려 놓은 게 많은데, 아주 간혹 스토리의 한 부분을 다룬 팬아트가 발견되곤 합니다. 지금은 팬덤이 터져 버려서 더 나오지도 않지만요. 요즘 나오는 팬픽션에 비하면 빽그라운드 포니는 흡사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같은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죠. 팬덤 초창기에 나온 것이기도 하고, 아주 잘 쓴 글이라고 칭송받기는 하는데 정작 읽어본 일러스트레이터는 많지 않거든요.
애니웨이.
일단 이 파트의 한 장면을 다룬 팬-아트가 바로 요것이죠. 빽그라운드 포오니 팬아트를 옛날에 잠깐 구경한 적 있는데, 이건 대체 무슨 장면인가 싶었습니다. 챕터 5, 6쯤 옮길 때는 아, 라이라가 뭔 사고를 쳐서 저렇구나 했는데 이제 보니 건물 아작난 거였습니다. 전혀 건물 뽀개지는 것 같은 느낌이 없어서 짐작도 못 했지 뭡니까.
Guardian Angel by DarkFlame75 on DeviantArt
www.deviantart.com
좀 뒤적이다 보니 Part II에서 라이라가 데이트할 때 입은 복장을 재현한 장잉도 있었습니다. 근데 이것도 사람마다 드레스 색깔 다른 경우가 있어서 '뭐지 내가 또 오역했나' 싶은 지점들이 꽤 있습니다. 코쟁이들도 오독하게 되는 걸까요?
Lyra and Morning Dew 1 by 1stAstraStudio on DeviantArt
www.deviantart.com
암브로시아는 요로코롬 생겼습니다.
미주
*1 The Laughing Vulcan and His Dog, 스타트렉 세계관의 동요
*2 라이라가 "And your name, sweetie?"라고 물어서, 스위티벨은 Sweetie는 말했으니 Belle만 알려준 것. 빌어먹을 말장난...
*3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1875~1937), 물의 유희, 볼레로 등을 남긴 프랑스 작곡가.
*4 "...still be some Grand Galloping to be had!" 말들이 한데 모여 gallop하면 발굽 소리Clop가 납니다. 그리고 Clop은 포니 팬덤에서 그렇고 그런 의미로 사용됩죠. 뒤에서 윈드휘슬러의 발언은 이 문맥으로 파악해야 합니다.
*5 Gala를 Gallstone(담석)으로 바꿔 'A인지 B인지 몰라도 ~' 화법을 쓰고 있습니다. Gala를 대연회로 옮겨 놔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대원군으로 옮겼습니다. 더 좋은 드립이 있다면 제보해 주십시오.
*6 Florist. 사전은 흔히 꽃집 주인이나 화훼재배업자 정도로 번역하나, 여기서는 최종 소비단계에서 고객의 니즈에 맞춰 화훼를 선택하고 적합한 형태로 가공(꽃다발, 꽃바구니, 화환 등)하며 행사 중 화훼 장식을 유지관리하는 전문 종사자를 의미합니다.
*7 Lyra(라이라) - Lyra(리라) - Liar [ˈlaɪə(r)]- Lyre[ˈlaɪə(r)]. Liar와 Lyre의 발음이 같음을 이용한 악랄한 말장난.
*8 미국, 영국에서는 장례식에 백합을 사용합니다. 다만 꽃을 크게 가리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1898년 5월에 어린이의 장례식에 흰 모란꽃과 백장미를 사용한 기록이 있고 1897년 1월 제중원의 간호사로 근무하던 제이콥슨이 사망했을 당시 백합을 사용해 장례를 지낸 기록이 있습니다.
*9 조선 시대 내시부 소속 종9품 관직. 궁궐의 정원을 관리하는 업무를 수행했음. 왕정사회인 MLP : FiM 세계관을 반영해 옮기다.
*10 선박 접두어 S.S.는 상선의 경우 증기선Steamship을 의미함. SS&E가 상선과 군함의 접두어를 구분하지 않고 쓴 것으로 추측됨.
*11 Shrimp. 흔히들 새우를 생각하지만 속어로는 거친 의미. 걸걸한 입담을 유지하는 선에서 최대한 순화.
*12 그대로 옮기면 '빈 궁둥이들 그만 놀리는 게 좋을 것이다. 계속 그러면 네놈을 한 대 후려 팰 것이고, 변소 갈 때마다 아파서 울게 될 것이다' 정도 의미. CMC 스타일, 특히 호전적인 스쿠틀루의 성향에 맞춰 북녘의 새빨간 유사국가 스타일로 옮김. 암만 해도 원문을 보면 농담 같지는 않아서... 진지하게 협박하는 게 더 웃긴 북녘 스타일을 따라갔음.
*13 Swallowing flies. 입을 헤벌리고 다닌다는 표현. 아래에서 럼블이 받는 것은 아뽀으-브룸이 한 말을 액면 그대로 판단해서 그런 것.
'SS&E > 백그라운드 포니'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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