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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E/백그라운드 포니

Chapter 09. 궁창穹蒼The Firmaments

by Mergo 2020. 9. 14.

일러두기

이번 챕터는 초반부터 역주가 길어졌고, 역주에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관계로 각주를 미주로 옮깁니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미주로 달 것 같아요.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부분은 폰트를 백색 처리하고 삭선을 그어 표시합니다.




일기에게.

공포의 근원은 어디인가? 매일 밤 두려움에 몸부림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이고? 자기가 죽었는지 아니면 그냥 잠들어 있던 것뿐인지 굳이 확인하려고 가쁜 숨을 내쉬며 두 눈을 부릅뜨는 건 대체 무엇 때문이지?

어둠에게 이러한 권능을 내려준 자는 누구인가? 어둠 속으로 난 문간에 설 때마다 불안해지는 이유는, 먼지 퀴퀴한 구석에 불가해한 형상을 내려보내 끊임없이 속삭이게 한 자는 누구이고? 뒷목에 난 솜털과 갈기가 소름과 함께 쭈뼛 일어서게 만든 자 대체 누구인가?

세상은 얼마나 안전하고 따뜻하며 평온한 곳인가, 우리 모두 그렇게 들으며 자랐었지. 그래서 아주 약간이라도 거기 반하는 일이 생기는 순간,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던 우리의 세상은 한순간 퇴색해 버리고 우리 모두 찜찜한 기분을 느끼게 되는 게 아닐까. 앞날에 대한 극심한 두려움, 그것은 우리 인후 뒤에 주저앉아 있는 담즙처럼 쓰디쓴 것이고. 우리 모두 각자가 사랑하는 사람에 집착하여 함께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지만, 정작 자기들의 걱정거리는 찰나의 것이기를 바란다. 그래서 집 한구석 침대에 틀어박혀 눈물 흘리며 사람이 마주할 수 있는 최악의 공포를 마주한 양 덜덜 떠는 것이겠지.

나는 두 하늘 사이의 세상을 보고 왔다.*1 그걸 보기 전에는 진정한 공포가 무엇인지 함부로 논하면 안 될 것이다.


나는 라이라 하트스트링스. 이틀 전, 나는 형언할 수 없이 긴 세월 끝에 저주받은 교향곡을 연주한 첫 번째 필멸자가 되었다. 이틀이 지난 지금에도 혹한의 어둠에서 몸을 다 빼내지 못했다. 나는 내가 목격한 사실에 대한 기억과 함께 오롯이 혼자 남아 있다. 몸이 살아 있지만, 남길 기록이 너무나 많다.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한 편의 곡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도서관 곳곳으로 곡조가 쏟아져 스며들었다. 한없는 비감에 젖어 끊임없이 앵앵대는 구절이 반복되었다. 마지막 음표 하나까지 연주를 마치고 나서도 현마다 잔향이 엉겨붙어 징징 울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울먹이는 얼굴로 내 앞에 서 있었다. 헤벌어진 입에서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아무 억양 없는 한 마디 말이 흘러나왔다.

"어스름 진혼곡Twilight's Requiem*2, 이네."

 

그렇게, 여덟 번째 비곡의 이름을 알았다.

"어스름 진혼곡, 이라고?" 나는 되물었다. 가방에 리라를 도로 집어넣은 뒤, 오후 햇살에 젖은 트와일라잇을 마주보며 앉았다. "재미있는 이름이군." 나는 무감각하게 말했다. 이것이 트와일라잇에게 질문하는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필요한 걸 전부 들려주면, 트와일라잇은 곡명을 알려주는 방식 말이다. "혹시 다른 거랑 헷갈린 거 아니지?"

"다... 당연하지." 트와일라잇이 나직하게 말했다. 두 귀가 접혀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는 시들어 빠진 보라색 꽃다발처럼 대충 주저앉았다. 옛날 생각이 나는지, 시선이 도서관 한켠의 그림자 위를 훑고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곡 하나만큼은 절대 못 잊을 테니까.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 역사를 가르쳐 주실 때 처음으로 얘기해 주신 거거든. 엄청나게 흥미롭더라고. 아무래도 어리다 보니, 캔틀롯 음악사에서 중요한 곡에 그런 이름이 붙은 걸 좀 과하게 의식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음악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면, 어떤 의미에서 중요하다는 거지?" 나는 캐물었다. "말해 봐, 트와일라잇. 무슨 말을 듣더라도 지금 나한테는 엄청나게 유용한 정보니까."

"유용하다니?" 트와일라잇의 입술이 떨렸다. 그녀는 슬픈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말했다. "이게 어떻게 유용하다는 거야, 라이라? 네가 말한 게 전부 사실이라면, 이런 건—"

"어서. 시간이 많지 않아." 나는 일어서서 트와일라잇에게 다가갔다. "이 진혼곡이라는 게... 루나 공주님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 거지?"

"여름쯤이었는데, 용족 여왕과의 회담 문제로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 잠깐 자리를 비우신 동안 찾아본 적이 있긴 해." 트와일라잇이 말했다. "녹음한 음반을 들어 봤더니, 세상에 그만큼 슬픈 곡이 다시 있을까 싶은 생각이 다 들더라고. 그 뒤로 잠시 왕립도서관에 근무하시는 왕실 기록관님들께 여쭤 보고 다녔어. 그리 많은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어둠 강림의 시대Shadow's Advent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 정도가 다야."

"어둠 강림의 시대라?" 나는 생각에 잠겨 되풀이했다. 공부 좀 했다는 유니콘이면 누구든 어둠 강림의 시대를 안다. 내전 직전의 폭풍전야를 다분히 시적으로 돌려 말한 것이다. 당시 루나 공주님은 나이트메어 문에 완전히 잠식당하기 직전까지 몰렸고, 칩거를 거듭했다. 공주 하나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완전히 세상과 연을 끊고 은둔했으니, 온 이퀘스트리아가 악영향을 받은 것은 당연했다. 루나 공주가 신성 모독적인 고통을 빚어내고 있다는 뜬소문이 돌았다. 셀레스티아 공주조차 이를 염려할 정도였다. 루나 공주가 칩거를 그만두고 세상에 나왔을 때, 그분은 이미 이전의 루나 공주가 아니었다. 나이트메어 문에 완전히 잠식당한 공주는 곧장 내전을 일으켰고, 수많은 산하가 황폐화되었다. 그 말을 듣고 처음 든 생각도 웃기는 것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시간이었을 텐데, 어떻게 진혼곡을 지을 정신이 남아 있었을까? "기록관들께서 혹시 어둠 강림의 시대 동안 어스름 진혼곡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 말씀해 주셨어?" 나는 물었다.

트와일라잇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도. 루나 공주님께서 달에 유폐당하기 전까지 많은 곡을 남기신 게 확실하기는 한데, 이 진혼곡만큼은 작곡자가 누구인지 남아 있지 않거든."

"그렇더라도 왕립도서관이나 항아기록관에 진혼곡 관련 정보가 보관되어 있던 건 맞지?"

트와일라잇은 움찔하더니 살짝 전율했다.

"트와일라잇." 나는 한숨지었다. "중요한 문제야—"

"난 모, 몰라. 알았지?!" 트와일라잇이 갈라지는 소리로 외쳤다. "라이라 널 도와 주고 싶은 건 사실이야. 진심으로 도와 주고 싶어. 그래도... 모르는 건 모르는 거야. 캔틀롯 대월식*3 동안 항아기록관에 보관된 정보 대부분이 멸실되면서 어둠 강림의 시대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는 사료도 같이 사라졌거든. 천 년에 걸쳐 평범한 사람들이 보관해 온 고서 몇 권에 남은 기록 파편 몇 조각으로 겨우 짐작이나 하는 정도지. 그 사료를 찾아낼 가능성을 말하자면, 잘 쳐 봐야 거의 없다 정도겠네. 다만..." 생각에 잠긴 트와일라잇의 눈이 반짝, 하고 빛났다.

 

"다만?" 나는 흥미가 돋아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트와일라잇은 주저하다가 말했다. "포니빌 도서관에 희귀한 고서들이 꽤 남아 있었어. 고전 중에서도 고전이라 할 만큼 오래된 것들이지. 나조차도 절반 정도나 겨우 더듬거리며 읽는 수준이지만. 거의 월어 아니면 고대어로 된 것들이거든. 일단 좀 읽어 보니 대부분은 내전 이전에 유니콘 천문학자들이 기록한 연감 기록물이었어. 천 년 전, 전쟁터가 된 위니페그에서 탈출한 피난민들이 포니빌까지 흘러 들어오면서 가져온 것 같아."

"그것들 지금 어딨어?"

"그보다도 더 오래된 책들이랑 같이 지하실에 보관해 놨지. 마력을 충전한 마나 크리스털로 항상 보호 마법을 걸어두고 있고. 언제 캔틀롯 교수님들이 오셔서 잠시 볼 수 있겠냐고 할지 모르니까."

"글쎄다, 그 양반들보다는 내가 읽는 게 차라리 나을 텐데."

"라이라, 정말..." 트와일라잇이 선 채 내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루나 공주님이 남긴 유산이나, 악곡... 또... 그런 것들과는 아무 연관도 없는 기록인데." 그녀는 몸을 떨며 발굽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읽더라도 소용이 있을까? 이... 마지막 비곡에 대해서만 알면 되는 거 아니었어?"

"비곡을 실제로 연주하는 게, 고단하기 짝이 없거든." 나는 말했다. 나는 벌써 도서관 지하실로 들어가는 나무문을 흘끗흘끗 곁눈질하고 있었다. "비곡에 관련된 것이라면 그 어떤 정보더라도 상관없어. 모호하다면 모호한 대로 도움이 되니까 얼마든지 납득할 수 있어."

"꼭 완전한 형태로 연주할 필요가 있어?" 트와일라잇이 소리쳤다. "위험한 곡을 위험하게 연주해서... 안 좋은 일을 굳이 겪으려는 거야!"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더니, 약간의 희망을 갖고 웃으며 말했다. "좋아! 그럼 내가 옆에 있겠어. 내 방어 마법은 평범한 유니콘이 전개하는 것보다 세 배 정도 단단하거든. 진혼곡이 어떤 마법적 후폭풍을 만들더라도 내가 옆에 있으면 막아낼 수 있을 거야."

"그건 불가능해, 트와일라잇. 비곡을 연주하는 건 나 혼자여야만 하고, 오롯이 나 혼자만의 책무여야만 하니까. 내가 그러라고 했다 쳐도 그때까지 기억이 남아 있지는 않을 거고."

"그... 그건..." 트와일라잇이 몸을 떨었다. 이런 반응도 수백 번은 보았었다. 고장난 레코드판이 끊임없이 똑같은 소리를 반복 재생하는 모습이 절로 떠올랐다. 반복되는 말들은 갈수록 힘을 잃었다. 옛 친구의 입에서 비틀거리는 듯 연약한 목소리가 나왔다. "그건 너무하잖아." 나는 그 말에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짊어진 저주의 본성이 나를 잡아먹게 둘 순 없어. 트와일라잇." 나는 말했다. "주어진 실마리는 단 하나. 그 실마리가 가리키는 방향도 하나뿐이지. 나이트메어 문이 내게 저주를 내렸을 때부터, 이 머릿속에 이 비곡이란 것이 계속 떠돌아다니도록 운명지어졌다는 거야. 뭐가 어떻게 되든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연주하는 것 하나뿐이고. 그 끝에 파멸이 기다린다면야 별 수 없지. 파괴란 변화의 본질이기도 하니까. 그렇게 생각 안 해?"

"그렇게 생각 안 해!" 트와일라잇이 외쳤다.

트와일라잇이 이렇게 반응할 줄은 생각 못 했다고 해야 할지, 설마 이렇게 격한 반응을 보일 줄은 생각 못 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것도 상당히 의외였다. "절대 동의 못 해!" 그러더니 자기 발굽을 뻗어 내 발굽을 단단히 잡았다. 마찬가지로, 놀라운 일이었다. "외로운 길을 갈 필요는 없잖아, 끝내 이방인으로 살아갈 필요는 없잖아!"

"그래도 말이지..." 트와일라잇을 쳐다보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우리의 일상적 만남이 이렇게 극적으로 흘러가는 건 영 익숙하지 않았다. 이번엔 또 얼마나 다르길래? "나는 외로울 수밖에 없어, 트와일라잇. 비곡의 비밀을 전부 밝혀내기 전까지는 감당해야 할 운명이야."

"지금은, 내가 알잖아!" 트와일라잇의 보랏빛 눈 위로 잔물결이 일었다. 물 위를 걷겠다고 난리치다가 빠져 죽는 기분이 들었다. "많이 말해 줬잖아, 이제 나도 알아.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희생을 치르면서도 항상 우리 옆에 있었다는 걸, 우리가 소꿉친구였다는 걸!"

"트와일라잇..." 나는 친구의 발굽을 맞잡았다. 그것은 나무줄기에 발굽을 대는 것처럼 직설적인 표현이었다. "우리 사이의 옛일을 얘기한 건 네 신뢰를 얻기 위해서였어. 낯선 유니콘 하나가 걸어 들어와서 아무 설명도 없이 대뜸 이 비곡을 특정해야 하니 도와 달라고 하면 네 기분이 어떻겠니?"

트와일라잇은 다른 상황을 가정할 수 있을 만한 감정 상태가 아니었다. 명백한 사실로 구성된 순간이 그녀 앞에 꽃피어 있었지만, 다음 번 눈 깜박할 사이에 전부 무너져 사라질 수도 있었으니까. "어떻게 그걸 날 보러 오는 유일한 이유라고 규정할 수 있어? 가엾은 것! 기억 속 친구를 빼면 기댈 수 있는 친구 하나 없는 인생을 견디는 게 얼마나 고단할까!"

"됐어..." 나는 한숨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슬쩍 발굽을 잡아당겨 트와일라잇의 손아귀에서 조금씩 빼냈다. "견딜 만 해. 견디다 보면 어떻게 또 견뎌지더라—"

"우정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해, 라이라!" 트와일라잇이 울상이 되어 외쳤다. "지금도 봐, 우리 다시 친구가 됐잖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정은 지켜낼 가치가 있는 거야! 공주님께 빨리 와 달라고 연락해야겠어!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 도와 주시겠다고 하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마법사들을 비롯해서—"

"아무 소용 없었어, 트와일라잇!" 나는 불쑥 말했다. 내 생각보다도 큰 목소리였다. 트와일라잇의 순진무구한 눈동자에 비치는 얼굴 구긴 한 여자의 모습에 힘이 빠졌다. "미안해 트와일라잇. 그게... 그것도 다 해 봤거든. 넌 항상 최선의 결과를 얻고 싶어했지."

트와일라잇의 뺨을 타고 눈물 한 방울이 굴러 떨어졌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최선의 결과를 원하는 게 아니야. 이제 친구를 잃는 건 그만두고 싶어." 눈을 깜박인 그녀의 얼굴은 창백해져 있었다. 트와일라잇은 내 발굽을 놓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려 도서관 한편에 놓인 테이블 위, 익숙한 사진을 넣은 액자를 쳐다보았다. 두 소녀가 방긋 웃으며 찍은 사진이었다. 한 명이 더 들어갈 자리가 남아 있었다.

그 때 나는 깨달았다.

셀레스티아 공주님 맙소사. 이거였구나. 달라진 점이 여기 있었구나.

"너였어..." 트와일라잇이 훌쩍이며 내 발굽을 더 단단히 잡았다. "너였어. 없어진 건 너였어."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눈물이 흐르는 얼굴이 나타났다. "내 인생 대부분의 기억 속에서 뭔가가 없어져 있었어. 나는 음악 하나 없이 유년기를 보냈고, 사랑받지 못한 채 외로운 마음으로 포니빌로 왔지. 그리고 이제... 무, 문댄서도 영영 내 곁을 떠났어." 트와일라잇은 코를 훌쩍이며 막혀 오는 숨으로 계속 말했다. "이제 모, 모든 게 설명이 돼, 라이라. 널 빼앗긴 채... 살고 있었던 거야."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거의 절규하듯 말했다. "널 빼앗겼다구, 라이라. 이제야 어딘가 비어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이유를 알았어. 이제 너는 다시 날 떠나가겠지? 왜?! 왜 이렇게 되어야 하는 건데?! 그... 그 저주가 왜! 왜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 정말..."

"트와일라잇." 나는 차분하게 말하는 척하느라 말을 더듬었다. 트와일라잇의 눈물을 보았지만, 왠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웃어 보이려고 했지만, 그나마도 구기다 만 얼굴처럼 되었을 뿐이었다. 그때까지 하루 반나절을 웃어 보이지도 않고 보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여기 죄책감을 가질 여유조차 없었다. "괜찮아, 진정해. 괜찮다니까. 난... 괜찮아—"

"아냐! 그게 어떻게 괜찮은 게 돼!" 트와일라잇은 거의 울부짖으며 내 발굽을 더 단단히 붙들었다.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언제고 날아가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그 뒤에는 오직 그녀의 눈물만이 남아 있을 것임을 트와일라잇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제야 소중한 걸 다시 찾았는데... 그것도 얼마 안 가 사라져 버릴 거라고, 전부 없어질 거라고 네가 그랬잖아. 그게 어떻게 다 괜찮은 게 될 수가 있어?!"

"내가... 내가..."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없었으므로,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였다. 진혼곡을 더 생각할 정신도 없었다. 비곡에 더없이 어울리는 소재가 있었지만, 나는 그런 비곡을 쓸 기력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차선을 택했다. 트와일라잇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 용기를 내기 전 거의 1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끊임없이 반복된 대화 속에서 나를 단단히 휘어잡고 있던 방책이었다. 이번에는 말할 것이다. 다 말하고, 그대로 안은 채 따뜻한 포옹 속에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작아질 수 있는지 직접 느껴보게 할 것이다.

내가 짊어진 저주를 역병처럼 사방에 퍼뜨리고 다니는 상상은 매일 나를 찾아왔다. 세상 모두에게 버려지는 저주는 전염성이 없었고, 나는 이를 불평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 내가 그나마 할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라고나 해야 할 것은 내가 만들어낸 유령들이 내 주위를 거닐 때 간단히 툭 건드리는 것으로 저들에게 소중한 것을 넘겨주는 것이었다.

나는 사과했다. "미안해, 트와일라잇." 사과했지만...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뱉은 말은 단어를 짜맞췄을 뿐인 무가치한 쓰레기였다. 그래서 나는 독백과 함께 연주되는 음악을 사랑했다. "미안... 내가 미안해..."

"가... 가, 가지 마..." 트와일라잇은 나를 붙잡고 흐느꼈다. 내 품에 안긴 몸이 떨려 왔다. 울음소리와 목소리가 뒤섞인 소리는 어린애가 흐느끼며 딸꾹질하는 소리로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가지 마, 라이라." 트와일라잇은 내 어깨를 부여잡고 울었다. 후드 재킷에 눈물자국이 얼룩졌다. "문댄서를 잃고 너까지 잃으라고? 잃어버린 친구와 잊어버린 기억은... 왜 다시 내게 돌아올 수 없는지 그 이유조차 같이 갖고 사라진단 말야..."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럴 만한 이유는 있었다. 냉기의 장벽이 밀물처럼 우리를 향해 밀려오고 있었다. 저주가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그게 고맙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나는 진눈깨비처럼 차가운 한기를 받아들이며 눈을 감았다. 소꿉친구의 울음과 냉기가 뒤섞였다. 나는 트와일라잇이 내 품 안에서 죽기라도 한 듯 그녀를 가볍게 안았다. 그곳은 도서관이었다.

품에 안긴 트와일라잇의 몸이 가볍게 꿈틀하는 것이 느껴졌다. 몸의 떨림과, 흐느낌이 함께 잦아들었다. 한없이 소중한 것들도 같이 사라진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으으으으..." 트와일라잇이 신음했다. 그녀는 내 품 안에서 이마에 발굽을 갖다대며 흔들렸다. 두 눈이 어질어질하게 열려 뜨였다. "휴... 뭐... 뭐, 뭔 일이에요 이게?"

"그게..." 쉬고 쌕쌕대는 목소리가 나왔다. 헛기침한 뒤, 트와일라잇을 가볍게 잡아주며 그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넘어졌어요. 제가... 받았고요."

"정말요?" 트와일라잇은 놀란 눈치였다. 그녀는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왠지 모르게 축축해진 뺨을 만져보았다. "이건 무슨...?"

"기억 안 나세요?" 나는 공허한 미소를 지었다. "책장 꼭대기에 있던 백과사전이 떨어져 그쪽 머리에 부딪쳤어요. 쾅, 하고 엄청나게 큰 소리가 났었지요."

"세상에." 그녀는 피식 웃으며 눈을 돌리고는 뺨을 문질러 닦았다. "그쪽이라면 절 애 취급하진 않겠지만요. 레인보우는 얘기가 좀 다를 거에요. 조금 부딪친 걸 가지고 눈물이나 질질 짠다고 끝까지 놀려댈걸요. 하..." 트와일라잇은 입술을 씹으며 나를 쳐다보고 말했다. "이건 비밀이에요...그쪽 성함이?"

나는 입을 열었다. 말을 멈추고, 그대로 억눌러 삼킨 뒤 다시 말했다. "그... 책을 좀 찾고 있거든요. 방금 와서."

"음, 그거라면 용족 보조사서 스파이크가 도와 드릴 수 있을 거에요!" 트와일라잇은 그렇게 말하고 바람처럼 걸어갔다. "공주님께 보낼 편지를 마저 써야 해서요! 대연회도 벌써 사흘 전에 끝났는데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게으름 피우다가 무슨 벼락을 맞을지."

"공주님께서도 좋아하실 거에요."

"히힛. 뭐, 공주님도 그쪽도 실망시키지 않게 노력해야겠는데요!" 이때쯤 트와일라잇은 거의 말이 닿지 않는 곳까지 가 있었다. "바보같이 넘어지는 거 잡아 줘서 고마워요!"

"아뇨..." 나는 그림자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별 말씀을..."



"내가 진짜 이건 얘기해야겠다." 스파이크가 한쪽 손에 등잔을 든 채 나를 데리고 포니빌 도서관의 어두컴컴하고 먼지 퀘퀘한,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지하실 계단을 내려가며 말했다. "이 기분 나쁜 데를 굳이 들어오고 싶다고 한 사람은 그쪽이 처음일 거야." 거대한 나무의 굵직한 뿌리가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지하실은 원통형이었는데, 그 밑바닥에는 마력을 품어 빛나는 마나 크리스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에 젖은 먼지 낀 책장이 여럿 놓여 있었다. "이 쓰레기 더미를 굳이 보겠다고 하는 사람도 거의 없긴 하지만. 아... 내가 저것들을 쓰레기라고 했다는 건 절대 트와일라잇에게 말하지 마. 왠진 몰라도 저 썩어가는 종이뭉치를 천금보다도 더 귀하게 생각하니까 말이야."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게 되면 금방 잊어버리기 마련이더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적어도 다섯 번은 여기 내려와 봤다고 스파이크에게 얘기해 주는 것은 실익이 없었다. 지금까지 이 맨땅에 헤딩 식 조사를 벌이면서도 나는 분명히 유용한 정보가 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 "길 알려 줘서 고마워, 스파이크. 이제 다시 올라가 봐도 돼."

"진심?" 스파이크가 지하실 흙벽에 튀어나온 녹슨 갈고리에 랜턴을 걸며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 그쪽 두고 올라가는 건 내 직업정신에 반하는 일이야."

"그렇다면야." 나는 나직하게 말하고 책장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건 시대순으로 정렬해 둔 건가?"

"그럼. 전고전前古典Pre-Classical시대부터 천년기 중반 사이 물건들이야."

"어둠 강림의 시대 동안 쓰인 책도 있을까?"

"그럼, 물론이지!" 스파이크가 다 부서져 가는 목제 스툴을 들더니, 세 번째 책장 앞으로 밀어 넣고 그 위로 훌쩍 뛰어올라 네 번째 선반에 엉겨 있던 거미줄을 불어서 떼어 냈다. "자, 이거야. 트와일라잇이 붙여 놓은 분류표를 보면 이 여섯 권 책이 어둠 강림의 시대에 쓰인 책이야. 그쪽도 알겠지만 그 여자가 만든 분류표라면 의심할 여지가 없지. 오래 전에 사멸한 언어로 된 천문연감 같은데, 딱 봐도 재미없는 내용이지. 진짜 이거 찾는 거 맞아?"

"응."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나는 다가가 스파이크가 딛고 섰던 스툴을 건네받았다. "도와줘서 고마워. 여기서부턴 내가 알아서 할게."

"뭐, 정 그렇게 하겠다면야." 스파이크가 어꺠를 으쓱하고 층계로 향하며 말했다. "그래도 뭔가 도움이 필요하다 싶으면 등잔 걸어둔 데 옆에 보면 줄이 하나 있으니까 그거 잡아당기면 돼. 도서관 1층 종에 연결된 거니까. 한 번 딱 당기기만 하면 금방 내려와서 도와 줄게!"

"잘 기억해 둘게."

"그래야지." 스파이크가 잠시 멈추고 씩 웃으며 나를 가리켰다. "아, 그리고—"

"그래, 그래." 나는 무감정하게 잿빛 소매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괜찮은 옷이긴 하지."

"허. 그래 그럼. 행운을 빌어."

스파이크가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문이 끼익 소리와 함께 열렸다가, 잠시 열린 채 머뭇거리더니 작은 쿵 소리와 함께 닫혔다.

스파이크가 나가자마자 나는 주저앉았다. 등은 책장에 기대고 머리는 의자에 얹었다. 나는 두 앞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고 몇 번 심호흡했다. 한없이 차갑고 우중충한 생각이 밀려들어 나는 몸서리쳤다.

품에 안긴 트와일라잇의 몸에 힘이 빠지던 순간이 떨쳐지지가 않았다. 폭풍우처럼 눈물을 쏟아내던 사람이, 눈 깜짝할 사이에 명경지수처럼 차분한 상태로 돌아왔으니까. 우리의 만남이 극적인 형태로 흘러가도록 내버려 둔 탓에 그렇게 된 것이었고 나는 그것이 몹시 두려웠다. 문댄서가 트와일라잇과 절교한 것만이 원인은 아닐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내가 공유한 지식과 사실 때문에 충격과 스트레스를 받았을 그녀를 좀 더 열심히 위로하고 다독였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무거운 한숨이 도서관 지하실 흙벽에 부딪치며 메아리졌다. 지하실이 외롭고 어둡게 느껴져서,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들었다. 땅굴 속에 나 홀로 어둠에 감싸여 있어서 나는 안도했다.

나 어떻게 된 건가? 대체 뭐가 되어 버린 거지? 한두 달 전만 해도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는데. 뭐가 변한 거지? 너무 늦어 버릴 때까지 트와일라잇이 무서워하고 있는 걸 왜 느끼지 못한 거지?

트와일라잇이 나를 잊어버려서 다행스럽고 기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저주가 개입해 타이어에 구멍을 뚫듯 팽창한 감정을 무너뜨려 그 재에서 다시 태어난 껍데기로 되돌려놓고 트와일라잇의 입을 막아준 것을 나는 깊이 감사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늘상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저주와 함께한 열다섯 달의 시간이 나를 끈질기고 섬세하며, 용감히 역경에 맞설 줄 아는 사람이자 당당히 슬픔을 이겨낼 줄 아는 유니콘으로 키워낸 것은 사실이다. 다른 건 몰라도 전보다 강인한 사람이 된 것은 확실하다. 다만 지나치게 강인한 사람이 된 것은 아닐까 두렵다. 저주에 얽힌 비밀을 찾아 나가는 동안 다른 사람의 감정을 무감각하게 받아들이게 되더라도, 그런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 과연 자랑스러워해야 할 일일까.

내가 견뎌야만 했던 것과 포기해야 했던 것들, 나는 그 모든 것을 탓하고 싶었다. 연주만 했다 하면, 끝이 없이 이어진 혹한의 길을 건너가는 내내 사람 골치나 썩일 줄 아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부작용이나 일으키고 있으니 비곡 또한 내 비난의 화살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얼마나 집요하게 이 문제를 붙들고 늘어지더라도 그럴듯한 핑계를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좋은 쪽, 또는 나쁜 쪽으로 강인한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 걸 납득시켜야 할 사람이 있기는 한가? 유유자적 살아가는 사람들로 가득한 포니빌에 내가 무슨 짓인가를 한다 하더라도 그 짓에 대한 가치 판단을 할 수 있는 건 오직 나 하나뿐인데.

나는 도서관 지하실에 앉아 그 어느 때보다도 더한 외로움을 느꼈다. 또다른 날이 다가왔다가 지나가고 있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긴 끝에, 내게 남은 것은 뭐라도 연관이 있을지 모르는 악곡의 이름 하나뿐이었다. 나는 앞다리를 가슴에 붙여 끌어안으며 몸을 떨었다. 들여다본 내 소중한 벗의 두 눈 안에는 내가 지금껏 흘렸던 그 어느 눈물보다도 깊은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망각 속으로 빨려들어갈 것이기는 매한가지였지만, 트와일라잇의 눈물에는 최소한의 온기를 누릴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우는 데 쓸 힘이 없었다. 그래, 변하긴 변한 모양이다. 어떤 형태로 변했는지는 모르지만, 굳이 그걸 알아볼 생각은 없었다. 풀어야 할 고대의 수수께끼가 이미 있었고, 해결한 다음에 자부심을 가질 만한 문제도 그것 하나뿐이었다. 유용한 조사를 위해 늘 마음에 두고 있는 생각이다.

그랬으므로, 일어서서 뿔에 흐릿한 광원 마법을 걸어 어둠 강림의 시대에서 온 여섯 권의 책을 밝혔다. 그 순간, 그때까지 익혀 온 조사 기술들은 더할나위없이 쓸모없는 쓰레기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스파이크가 어린애다운 과장법을 써서 표현하기는 했지만, 정작 그 본질은 전혀 과장되어 있지 않았다. 사방에 거미줄이 얽힌 책 여섯 권은 첫눈에 보기에도 쓸만한 정보는 하나도 없을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보니 내가 그때까지 공부한 월어가 아직 충분치 않다는 것이었다. 내가 공부한 월어 원문은 사소한 편지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다시 살펴보자 구문이 미친 듯이 꼬여 있어서 머리가 핑핑 돌 지경이었다. 네 번째로 봤을 때는 뒤에서부터 거꾸로 읽어 나갔다. 속에서는 구역질이 나고, 눈에는 고대인이 덩실덩실 춤추는 환각이 보였다.

거의 한 시간 가량을 이른바 '연구조사'에 투입하고 나니, 그새 그만두고 싶어졌다. 머리가 아프다 못해 반으로 쪼개져 버릴 것만 같았다. 거기 처박혀서 그러고 앉아 있다 보니, 차라리 비곡에 손을 대는 게 휴식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굳이 도서관 지하실까지 기어 내려가 시간 낭비를 하는 한심한 이유에 나는 한숨지었다. 피할 수 없는 일을 늦추기만 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트와일라잇의 순진하고 착한 품성이 이미 마지막 퍼즐 조각을 내게 넘겨주었지만, 사실 나는 별로 그게 필요하진 않았다. 여덟 번째 비곡은 이미 내 머릿속에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었으니까. 또, 굳이 곡의 이름을 알아야 할 필요도 없었다. 돌이켜보면, 도서관에 기어이 찾아온 것부터 내 두려움의 산물이었다는 것이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진즉에 했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 어둠을 마주한 채, 내 앞에서 한없이 어른거리는 검은 지평선과 나 자신을 향하여 어둠을 노래해야 했다.

집에 가자고 마음을 굳히고 일어서다가, 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여섯 권의 고서 중 한 권이 유독 눈길을 끌었다. 마나 크리스털에서 나오는 빛이, 장정에 부딪쳐 반짝거렸다. 나는 그때까지 루나 공주님이 남긴 비곡의 수수께끼를 푸는 실마리가 될 수도 있을 언급을 찾고 있었다. 문자가 아니라 상징으로 눈 앞에 드러나기 전까지, 나는 목전에 두고도 아무것도 찾지 못했던 것이다.

여섯 권 중에서도 가장 얇은 책의 책등 위에 새겨진 문양이 여러 번 빛을 받아 번득였다. 다름아닌 '달 속 암말'의 상징이, 갈색 장정 위 검은 선으로 새겨져 있었다. 나는 염동력으로 조심스레 그 책을 들어올려 눈 앞으로 가져왔다. 이리저리 돌려 보면서도 내심 처음 봤을 때처럼 쥐뿔 아무것도 없겠지 생각했다. 고대 월어로 적힌 말들은 천 년 전 사람이 아니고서야 알아먹을 수 없을 정도로 횡설수설, 지리멸렬했다. 고대 위니페그에서 탈출한 유니콘의 혈통에서 태어났으면 좋았을 것이다. 설령 그 가문에서 태어났더라도 루나 공주님께 충성하던 반역자 가문들이 전후에 꼼꼼하고 섬세하게 반역 증거를 인멸했을 테니 별로 달라질 것은 없었을 테지만. 나이트메어 문을 도와 이퀘스트리아 내전에 반역파로 참전했다는 기록은 가문의 이름에 먹칠이나 할 뿐이다. 과거의 가장 깊은 상처는 본래 후세 사람들이 볼 수 없게 숨겨야 하는 법이니.

그렇다면 염동력으로 잡아 들고 있는 이 책은 대체 무엇인가? 내가 연주해야 할 진혼곡의 의미를 알고 있었을 옛 시대의 기록 파편인가? 나는 책장을 넘겨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갈변한 종이에 적힌 글줄 역시 도저히 알아먹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페이지 대부분이 듬성듬성 비어 있었다. 왜 이것들을 아무도 찾지 않는 지하실 깊은 곳에 처박아 뒀는지 대충 이해되었다. 무의미한 기록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내려면 적어도 그 기록만큼은 오래 살아야 할 것이고, 그만큼 오래 살아남으려면 불멸의 존재인 알리콘이어야 할 것이며, 오직 알리콘만이 이 기록을 가지고 뭐라도 해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 주제를 잘 알고 있었다. 평생 여신이 남긴 음악의 잔향을 쫓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인 내가 가만히 앉아서 그것을 따라가기는 불가능했다. 슬퍼하는 트와일라잇을 심드렁하게 쳐다보고 있던 나 스스로를 징벌하기에 너무 늦은 것일지도 몰랐다. 아직 내게 부마付魔한 비겁을 구마驅魔할 시간은 남아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고서를 내 등 위에 얹고 벽에 걸어둔 등잔을 든 뒤 도서관 1층으로 향하는 층계를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나는 골목을 따라 포니빌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저녁 해가 내려앉으며 가을의 찬란한 대지 위에 늘어선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마다 진하고 밝은 붉은 빛을 내려주고 있었다. 건물의 그림자가 구부러지며 땅 속으로 스며들었다. 붉은 석양의 빛살이 뻗어와 북쪽으로 향하는 내 발밑에 깔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비춰주는 것 같기도 했고, 어두운 운명을 향하여 나아가는 길을 물들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므로 나는 서두르지 않았다. 쪽배에 기대어 꿀 위를 노 저어 가듯, 발걸음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벌써 이만큼 다가온 가을의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사방을 둘러싼 풍경과, 저마다 어울려 노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포니빌은 작은 마을이다. 전체 인구 수를 더해 봐야 1,500명을 겨우 넘을까 말까할 것이다. 이 사람들과 어울린 것도 어느덧 열일곱 달째. 거의 절반에 달하는 사람 이름을 외웠다. 미치지 않으려고 가진 취미였으니, 그리 기념비적인 업적도 아닐 것이다.

평생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석양이 내려앉는 시내를 걸으며, 지난 일 년 반 동안 왜 그리도 열심히 비곡의 뒷배경을 파고들었나 생각했다. 저주받은 곳이 여기가 아니라 메인해튼 한가운데였다면 지금과 상황이 많이 달랐을까? 필리델피아는? 발티모어는? 주변에 수백 명이 살든 수천 명이 살든, 별반 차이는 없는 것이다.

나는 단독자다. 내 인생의 시작과 끝 모두 나로 인한 것이며, 내 숨결과 목소리와 노래 모두 내게서 비롯된 것이다. 이걸 가지고 평생 동안 입씨름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나마도 나 혼자 주절거리는 것으로밖에 할 수 없겠지. 언젠가 이 일기를, 종잇장 위를 지나간 외로운 펜의 흔적을 따라 읽어 내려가게 될 사람 역시 다르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석양은 찬란한 불길처럼 타올랐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다 스러진 흔적밖에 보이지 않았다. 세상 모든 사람이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의 지복한 비밀을 감춘 그릇이지만, 하루하루 지난한 날들이 흘러갈 때마다 나와 그들 사이를 갈라놓은 냉기의 장막이 더욱 높아지고 단단해지고 있으니 내가 거기 끼어들 자리는 없을 것이다. 목을 좀 길게 빼니 말소리가 다 뭉개져서 희미하게 들려왔다. 스쿠틀루는 밀키 화이트와 치열한 입씨름을 벌이고, 더피 후브즈는 길을 가다 한 사내에게 부딪쳐 고개를 꾸벅거리며 연신 사과한다. 래리티는 패션업계에서 유행하는 스타일이 개악되었다며 플러터샤이를 붙들고 신음하며 징징댄다. 그리고 저 멀리에서 암브로시아가 누군가와 즐겁게 이야기하는 소리가......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떨리는 몸에서 나는 소리로 귀가 먹먹했다. 나는 다시 들이닥친 한기의 장막을 뚫고 거리의 사람들이자 이방인들에게서, 포니빌의 찬란한 일상에서 멀어져 갔다. 오두막으로 가는 길은 어둠과 수목 사이로 난 한 줄기 실낱과도 같았다. 인생의 모든 형태와 어둠과 질감이 내게는 독이었고, 그 독을 마신 나는 중요한 순간에 발굽을 내밀 수 없는 자가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내가 어떤 인간이 되었는지 뻔히 알면서도 거기에 어떤 욕지기나 구역질도 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데도, 몸에 딱 맞는 드레스를 맞춰 입은 것처럼 자연스럽고 편안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트와일라잇의 슬픔을 달래주지 못한 죄책감이 흐려질 때쯤, 그녀가 나를 따라올 수 없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내 품에 안겨 울 때, 그 몸이 내게 녹아드는 듯한 느낌은 행복한 기억이었다. 트와일라잇이 내가 있는 나락으로 따라올 수 없어서, 내가 깨달은 인생의 어둠을 공유할 수 없어서 나는 안도했다.

몇 달 전, 시내의 고층 건물 옥상 난간에서 한 젊은 여자가 자살 소동을 벌인 적 있었다. 한 용감한 청년이 나서서 그녀를 설득했다. 여자는 언제고 떨어질 수 있음에도 그의 말을 들었고 옥상 난간에서 내려왔다. 나는 일련의 사건을 트와일라잇이 모르기를 바랐지만, 나 스스로는 그 내막을 알고 있었다.

뭐가 됐든 이 사건의 진상은 광기의 장막 너머에 있는 것이며, 나는 이 사건을 바탕으로 품만 들지 도움은 안 되는 곡을 쓰기로 생각했다. 이제 더는 웃지 못하리라. 깔깔댈 수도 없으리. 나는 오두막으로 돌아가 두꺼운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저물어가는 날을 뒤로하고 나는 문을 닫았다.



나는 침대에 앉아 고서를 펼쳐 들여다보았다. 무의미한 말들이 무리를 이뤄 눈앞에서 꿈지럭거렸다. 다 흐려지고 몇 군데는 틀리기까지 한 천문도를 펼쳐보는 기분이었다. 남은 마지막 몇 시간은 가만히 명상하면서 보냈어야 했는데. 어떻게 보면 명상하고 있었다고 해도 될 것 같다. 계통도 분별도 없이 마구잡이로 써놓은 듯한 아수라장 한가운데를 들여다보는 것은 내가 하려는 일의 본질과도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어둠 강림의 시대에서 온 고서 속 숨겨진 페이지가 있어 비곡 연주로 촉발될지 모르는 부작용을 미리 알려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언제나 그렇듯, 그다지 좋은 생각은 아니었다. 그렇기는 했지만, 나는 고서 속 월어를 하나하나 꾸역꾸역 읽어 나갔다. 결국 언젠가 책을 덮고 어둠에 잠겨 비곡을 퉁기러 가게 될 것이 두렵기는 했지만.

나는 마지막 햇빛이 언제쯤 사그라들지 생각했다. 창 밖으로 비치는 햇살이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오후가 내 뒤를 따라다니나 싶은, 그런 게 있었다. 평소보다 유난히 조용하게 느껴졌다. 오두막을 둘러싼 숲마저 잠든 것 같았다. 언제고 한 마디 크레센도와 함께 온 숲이 떨쳐 일어나 감당할 수 없는 공포를 내게 들이밀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석양이 마지막으로 던진 붉은 햇살이 셋에서 둘로, 둘에서 하나로 줄어 갔다. 어둠이 내려앉는 순간, 나는 보이지 않는 강철이 나를 둘러싼 듯한 차가움을 느꼈다. 운명은 멀리서 가만히 속삭이는 편을 좋아하지, 이렇게 자신을 대놓고 드러내는 일은 드물다. 나는 책을 탁 하고 덮은 뒤 침대에서 일어나 준비물을 챙겼다. 리라와 악보, 음석, 등잔이었다. 나는 조용히 오두막을 돌며 물건을 챙겼고, 물건은 별다른 저항 없이 내 품에 안겼다.

그러는 동안에도 트와일라잇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떨쳐낼래도 떨쳐지지가 않았다. 이것이 마지막 비곡이라면, 오늘로 내 모든 고생이 결실을 맺어 저주가 풀린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했다. 내가 필요한 정보를 빼낸다는 명분으로 망각의 떡 벌린 아가리 위에서 트와일라잇을 꼭두각시 인형처럼 가지고 논 순간들을 모두 기억하게 된다면 트와일라잇은 나를 용서할까. 나는 그대로 살아가는데 트와일라잇은 수십 수백 번을 죽게 만든, 죄 없는 죄를 과연 용서해 줄까. 내가 한 모든 짓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다시 편입되었지만 저주받은 시간 동안 행한 죄를 심판받아야 하는 저주를 짊어지게 될 나를, 계속 친구로 생각해 줄까.

인생이 얼마나 꼬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핑계는 핑계일 뿐이다. 그 때 나는 알았고, 지금도 잘 알고 있다. 나는 총탄처럼 오두막을 뛰쳐나왔다. 판잣집이나 다름없는 오두막의 문이 홱 제껴져 열렸다. 나는 문을 밀어 닫은 뒤 지하실로 향했다. 지하실 입구에 마중 나온 황혼의 누런빛이 묻은 어둠이 회오리치며 나를 반겼다. 나는 머리 위로 등잔을 들어 걸고, 철제 받침대 옆에 놓아둔 스툴에 앉았다. 어스름 진혼곡을 옮겨 적은 악보를 꺼내고 그 위에 리라를 띄웠다. 그 다음으로 마력이 충전된 음석을 제자리에 올려두는 일이었다. 음석 거치대는 의자를 중심으로 네 방향에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전에는 마련해두지 않았던 안전장치를 준비했다. 며칠 전 구해다가 지하실 한쪽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밧줄을 꺼냈다. 밧줄 끝에는 긴 쇠말뚝이 달려 있었다. 나는 쇠말뚝을 지하실 바닥에 꽂고, 몇 차례 잡아당겨 단단히 박혀 있는지 확인했다. 뿔을 밝혀 반대쪽 끝을 왼쪽 뒷발굽 바로 위에 동여맸다. 밤의 만장을 연주하고 난 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그때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흠뻑 젖은 채 알몸으로 숲 한가운데로 순간이동해서 덜덜 떨고 있지 않았던가. 별로 도움은 안 될 것 같기는 했지만, 임시변통으로라도 뭐가 됐든... 아니면 누가 됐든 이상한 곳으로 순간이동시키는 것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 옮겨쓴 악보를 좍 펼쳐놓고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일련의 과정을 마치기까지 한참은 걸린 줄 알았는데, 집에서 뛰어나와 여덟 번째 비곡의 벼랑 앞에 서기까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다. 등골이 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세월과 함께 잊히고, 마땅히 잊혀야 했던 비곡을 가지고 실존 세계 깊숙히 파고들기 위해 내가 일상적으로 해 온 일들은, 세상에 오직 나 혼자에게만 주어진 일이었고 오롯이 나 홀로밖에 하지 않는 일이었다. 온 세상이 공허했다. 그때부터 내가 갖고 놀아야 하는 곡은 위대한 여신을 악마로 만들어 역사상 유례없는 혈전을 일으키고, 온 세상 사람들을 전쟁의 업화로 밀어넣게 한 사악하고 예측불허인 곡이었다. 내 자유의 대가가 얼마나 무거운지 미리 알았다면, 과연 나는 비곡의 첫 마디라도 퉁겨 보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현을 퉁기고... 연주를 이어나갔다. 그림자 전주곡을 연주하기 시작하자 지하실에 잔향이 가득 차 메아리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예전보다도 강인하고 명석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림자 전주곡이 유발하는 피해망상적 편집증을 아무렇지 않게 털어 버리며, 고대의 음악에서 마력을 뽑아내 연주 집중도를 끌어올렸다. 일몰 볼레로로 넘어갔을 때는 이미 보호 마법을 반쯤 작동시키고 있었다. 일몰 볼레로가 선사하는 활력과 열광으로 온 몸이 들끓어 올랐다. 마력선을 통해 정제한 마력을 집중시키자 뿔에서 녹색 돔 모양의 보호막이 형성되어 머리 위를 덮었다. 파도의 행진이 시작되자 몸과 마음이 일거에 차분해졌다. 나는 파도의 행진 특유의 무감각한 느낌과 함께 침잠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음석이 발하는 어두운 에메랄드 빛 섬광이 보호막에 부딪쳤다.

그리고 모든 빛이 사라졌다. 나는 심호흡하며 어둠 소나타의 검은 장막을 헤치고 나아갔다. 지하실은 추웠지만 견딜 만했다. 보호막이 부드러운 번데기, 이불 더미처럼 작동하며 죽음의 바다를 건네주었다. 별들의 왈츠가 힘차게 연주되는 동안 시야가 서서히 회복되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살아 있음이 체감되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고 몸이 달아올랐다. 극지대를 흐르는 강 한가운데 던져진 살아 있는 횃불처럼, 내게 다가오는 한기를 녹여 없애는 기분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연주했을 때는 나약하기 짝이 없었는데, 그 때는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강해진 것이 느껴졌다. 우선 자랑스러웠다. 이대로 가면 비곡의 마지막 장까지 집중된 화력과 맑은 정신으로 밀어붙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내 연주를 방해하는 장애물 따위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연주는 어느덧 달의 비가로 넘어가 있었다. 뿔이 덜덜 떨렸고 보호막이 요동쳤다. 전장을 향하여 돌격하는 기분이 들었다. 불현듯 나이트메어 문의 눈매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때 나는 나이트메어 문의 그림자에서 다만 덜덜 떨며 아무것도 못 하고 서 있었다. 그 때 라이라 하트스트링스와 나이트메어 문, 필멸자와 불멸자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 둘은 혼자가 아니었다. 이 둘이 혼자가 아니었다? 셀레스티아 공주님 맙소사. 벌써 옛날 일을 떠올리고 앉았다니? 그나저나 근처에 떠다니는 이 구름은 대체 뭐야?


시선을 돌려 쳐다보자 눈가가 절로 떨렸다. 구름 따위는 없었다. 지하실 벽도 더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 자리에 있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다만...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흙은 전부 사라졌고, 녹아 가는 얼음이 으깨지며 만들어 내는 거친 질감만이 남아 있었다. 근처에서 커다란 금속질의 울림이 들렸다. 녹슨 사슬이 수도 없이 매달려 영원의 구덩이 속에서 절그럭거리는 소리 같았다. 귀가 막 아파 올 때쯤, 그보다도 크고 어두운 소리가 포효처럼 터져나와 다른 소리를 전부 밟아 죽였다. 머리 위에 걸어놓았던 등잔이 그 여파로 꺼지고 나서야 내가 밤의 만장으로 넘어왔음을 알았다. 게다가 나는 잘 살아 있었다. 빌어먹게도, 염병스럽게도 팔팔하게 잘 있었단 말이다. 나는 과거의 상처를 들여다보았다. 보호막은 나와 눈 앞의 공포 사이에서 나풀거리는 헝겊 조각에 지나지 않았다. 나이트메어 문의 얼굴이 낮게 깔리는 비명과 함께 녹아 사라졌고, 썩어 들어간 살점과도 같이 나이트메어 문의 기억이 내 영혼에서 떨어져 나갔다. 악마 공주의 투구가 있던 자리에는 한 쌍의 생기 없는 눈만 남아 있었다. 그녀의 눈이었다.

나는 허파를 쥐어짜는 듯한 날숨과 함께 진상을 눈치챘다. 저것, 보다 정확히는 저 자식이 지난번에 나를 엿먹인 놈이라는 것을 말이다. 네 개의 음석이 하나하나 폭발했다. 에메랄드 빛 보호막이 파열되었다. 지하실 벽이 얼음물과 잿가루로 뒤섞여 터져나왔다. 덜그럭거리는 사슬의 외로운 선율에 맞춰 몸이 흔들렸다. 밤의 만장은 그 음울한 마지막 마디의 연주와 함께 무너지듯 끝났다. 눈이 뒤집히는 느낌이 들었다. 어떤 힘이었든지 간에, 내 보호막을 유지하기 위한 안간힘을 짜내 의식이 날아가기 직전에 보호막에 불어넣었다. 나는 발굽을 위로 뻗어 리라를 붙잡았다. 빛나는 악기가 가슴에 안겼다. 나는 아무 생각도, 두려움도 없는 무방비한 어린애가 되어 의자 뒤로 넘어졌다.




몸이 물에 빠지며 사방으로 물을 튀겼다. 죽을 만큼 춥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들이마신 숨에 액체가 입 속으로 침투했다. 숨이 막혀 캑캑댔다. 혹한의 자궁 속을 떠다니는 사이 턱이 스스로 밀려 닫혔다. 너무나 추워서 감히 눈을 뜰 엄두도 나지 않았는데, 눈을 감고 있으면서도 눈이 멀쩡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입안에 고인 액체가 구역질나는 얼음으로 바뀌어 갔다. 나는 물결이 느껴지는 쪽으로 머리를 홱 잡아뺐다. 빛나는 녹색 안개로 시야가 가득 찼다. 얼얼한 눈 위로 저 멀리 리라가 떠내려가는 모습이 아주 명확하고 보였다. 염동력으로 붙잡기는 했지만, 리라는 그러거나 말거나 격랑이 몰아치는 강 위를 유유자적 떠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신음했다. 리라를 따라 헤엄쳐가는 동안 심장 박동에 맞춰 이빨이 딱딱 부딪쳐댔다. 허파를 한계까지 몰아붙인 끝에, 감각이 없는 두 발굽을 쭉 뻗어 리라를 홱 잡아챘다.

그러자 전혀 생각도 못 한 일이 일어났다. 위로 떨어진 것이다. 비명을 지르는 입 밖으로 얼어붙어 가루처럼 된 담즙이 떨어져 내렸다. 영겁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 날아가는 동안 내가 느낀 것은 우뢰와 같은 소음뿐이었다. 엄청난 높이에서 떨어져 내려가며 아무 곳도 아닌 곳으로 날아가는 사이, 눈가루와 진눈깨비가 몸에 마구 부딪쳤다. 리라를 품에 단단히 안은 채 눈만 돌려 사방을 돌아보았다. 시커먼 밑바닥에서 무엇인가 마구 돌아가고 있었다. 리라가 발하는 에메랄드 빛 광휘가 쇠말뚝을 비추었다. 밧줄에 매달린 채로 함께 날아온 것이다. 어떻게 수습해 보기도 전에 추락이 끝났다. 또 다른 호수였다.

얇게 언 얼음이 박살났다. 그 아래로 뼛속까지 얼어붙을 듯 차가운 물 깊은 곳에 나는 처박혔다. 차가운 것으로 모자라 내 갈기까지 모근에서 뽑아 버릴 정도로 격렬한 물살을 자랑하는 어딘가로 다시 내던져진 것이다. 나는 이 기분 나쁜 액체를 더 먹게 될까 무서워서 입을 꽉 닫았다. 몸을 돌려 물살을 차며 나아가는 동안, 나를 지나쳐 가는 것들과... 내가 지나쳐 가는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들은 시커먼 형상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하나로 이어진 채 시체처럼 시커멓고 거대했다. 아주 먼 옛날에 단조한 듯한 강철로 주조한, 무지막지하게 크고 끝이 보이지 않는 쇠사슬이 여럿, 내 주변에서 늘어지고 떠다니고 휘어지고 있었다. 세어 보니 열 갈래였는데, 이것들은 영원토록 그 자리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을 것 같았다. 다시 시야가 흐릿해졌다 싶자, 어느샌가 나는 다시 어느 곳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 비행은 옆구리를 채인 채 그 방향으로 날아가는 것과 다름없었다. 벌린 입 속으로 눈송이가 쇄도하며 그 안과 혓바닥에 부딪쳤다. 오래 전에 타고 남은 재 같은 맛이 났다. 다시 벼락이 내리꽂히며 귀가 멍멍해졌다. 떨리는 눈으로 그쪽을 쳐다보니 끝없이 폭발을 거듭하는 핵 주위로 번개가 엄청나게 치고 있었다. 천둥벼락이 울릴 때마다 섬광이 번쩍번쩍했다. 나와 영겁 사이에는 서로 열십자로 교차하는 검은 쇠사슬의 형상이 수천 개 드리워져, 번갯불이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갈라진 계란 껍질 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악몽 같은 광경이었지만 나는 거기 매료되었고, 물에 빠질 마음의 준비를 미처 하지 못했다.

다시 떨어진 호수는 이전 것들에 비하면 훨씬 잔잔한 곳이었다. 물 깊숙한 곳까지 떨어졌다가, 뒷다리로 물을 차고 올라와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헤엄치면서도 나는 도저히 살아남지 못할 것이란 예감에 리라를 더 단단히 붙잡았다. 후드 재킷은 이미 소매까지 한껏 젖어서 쇳덩이를 매달아 놓은 것 같았고, 갈기도 물에 쓸려서 얼굴 위로 늘어지고 있었다. 고개를 마구 저어서 눈을 덮은 갈기를 한쪽으로 치웠다. 우레 소리가 들려왔다. 몸이 움찔했다. 귀가 터질 것 같았다. 벼락이 몇 번 더 떨어졌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형용이 안 될 만큼 거대한 무언가의 일부이든 전부이든, 나는 그 때 그것을 처음 보았다. 그것은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하늘과 땅의 구분이 없었다. 북극점과 남극점도, 별도 없는 곳이었다. 주기를 예측할 수 없는 번개가 내리꽂힐 때마다 튀기는 섬광의 무질서한 명멸을 빼면 그 어떤 빛도 찾을 수 없었다. 현실 세계가 여기 검은 형상들과, 심연 속 칠흑의 강철로 단조된 녹슨 구조물의 집합으로 변해 있었다. 하나같이 길이가 어느 정도나 될지 짐작도 되지 않는 쇠사슬로 엮여 있었다. 물의 단단한 장막이 섬뜩한 형상의 발판으로 변했다. 나는 몸이 굳은 채 바라만 보고 있었다. 한없이 넓지만 또 얕은 바다가, 발판이 되어 솟아오른 자리의 구멍을 춤추듯 쓸어 덮었다. 쏟아지는 비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하늘에서 서로 엉기는 듯한 모습이었다. 떠다니는 강은 시작도 끝도 없었는데, 백골처럼 창백한 눈가루가 미친 듯 휘몰아치는 한가운데서 휩쓸려 꿈틀대는 은사銀絲처럼 솟구쳤다가 거꾸러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오른쪽에서 꿈틀대는 강 너머로 무엇인가 검은 형상이 어른거렸다. 돌아보니 발판이었다. 포니빌 광장의 절반 정도 되는 크기였다. 나와 발판 사이에는 두 줄기 격류가 흐르고 있었다. 나는 될 대로 되란 식으로 리라의 금빛 몸통을 물어 잡고, 열심히 발을 저어 물의 감옥을 떨치고 나갔다. 나는 정직하게 격류를 향하여 나아갔다. 섬뜩하기 짝이 없는 물살이 나를 마구 밀치며 내 앞뒤로 시퍼런 서슬을 드러내고 있던 사슬로 몰아붙여 갔다. 언제가 됐든 조금만 방심하면 온 몸이 사슬에 갈려나가 채썰릴 것이었다. 돌파구를 찾아 뚫고 나가는 순간, 시야 구석에서 녹슨 쇠사슬이 삐그덕대며 덮쳐왔다.

 

나는 몸을 돌리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두 번째 강에 떨어졌다. 나는 단단한 돌 같은 곳에 똑바로 떨어졌다. 눈발 날리는 공기 속으로 머리를 빼자 번개가 일으킨 섬광이 번쩍, 하고 스치고 지나갔다. 마지막 강은 정반대 방향을 향하여 밀려들고 있었다. 쇄도하는 물살에 휩쓸린 몸은 팽이였고, 물살은 채찍이었다. 천둥 소리를 비롯한 온갖 소음이 급류 속에서 쪼개졌다. 겨우 몸을 빼내기는 했지만, 어디로 떨어질지 생각하고 빠져나온 것은 아니었다.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머리가 어딘가에 부딪치고, 뒤이은 격렬한 두통이 엄습해 왔을 때에야 내가 어디로 떨어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아아악!"

나는 흠뻑 젖은 몸으로 바들바들 떨며 비명을 질렀다. 발판에 도착해 있었다. 울고 있었지만 내 울음은 들리지 않았다. 사방에서 내리치는 천둥이 귀를 꽉 채우는 것도 모자라서 머리 깊은 곳을 마구 할퀴어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몸을 일으켜 세우고 앉으려 했지만, 발굽이 녹슨 채 웅웅 울리는 금속을 똑바로 디디지 못하고 계속 미끄러졌다. 알에서 깨어나 피투성이로 짹짹대는 새처럼 두 눈이 활짝 뜨였다.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벼락의 줄기가 춤추며 나를 비추고 있었다. 나는 무서워서 일어나지 못했다. 일어났다간 다시 위로든 아래로든, 한없이 차가운 망각 속으로 떨어질 것 같았다.

나는 떨리는 몸을 더욱 낮추었다. 흐르던 눈물이 뺨 위에서 얼어붙었다. 두 발굽을 뻗어 가만히 얼굴을 만져보았다. 머리가 제자리에 잘 붙어 있었다. 온 몸의 감각이 없어지고 있었다. 시선이 닿는 곳은 어디든지 눈과 얼음과 물기둥으로만 채워져 있었다.

"전능하신 셀레스티아 공주님 맙소사..." 어린애 같은 목소리가 징징댔다. "여긴 어디야?"

대답은 벼락 소리뿐이었다. 무한히 뻗어나간 어둠은 어떻게 생각하면 객마차의 객실처럼 작은 공간인 것 같기도 했다. 천둥의 낮게 깔리는 포효만 끊임없이 메아리졌다. 이대로 가다간 내 머리가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여기..." 목소리가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해져 갔다. 알아먹을 수 있는 것이 여기에 없었듯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여기가 한기의 근원인 걸까?"

더는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비명을 지르는 것뿐이었다. 다음 비명을 내지르기도 전에 나를 에워싼 어둠이 그 세를 마구 불리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내가 쓸 수 있었던 광원光源은 벼락 하나뿐이었다. 내 발굽은 텅 비어 있었다. 좋지 않았다. 몸을 돌려 돌아보자 리라가 빛나고 있었다. 에메랄드 빛을 뿌리는 리라가 얼음 바닥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고, 그 끝은 검은 발판 너머 나락이었다.

"으아아아—안 돼!"

리라를 향하여 달려갔다. 나는 휘청이다가 넘어졌다. 왼쪽 뒷다리에 매달아 놓은 쇠말뚝이 질질 끌려오고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몸을 날렸다. 나는 리라 바로 뒤에 떨어졌다.

리라는 끄트머리에 걸쳐 있었다. 나는 몸을 날렸다. 두 앞다리가 간신히 리라를 붙잡았다. 붙잡고 나서도 상황이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다. 발판에 걸친 것이 내가 되었기 때문이다. 교차에 교차를 거듭하며 거대한 격자의 형상을 이룬 녹슨 쇠사슬과, 그 아래로 펼쳐진 바닥 없는 나락이 보였다. 게다가, 쇠사슬에 아무것도 없는 것 또한 아니었다. 거기에... 무엇인가가 엮여서 마구잡이로 흩어져 있었다. 끝없이 덜그럭거리는 소음은 저것들이 내는 것이었는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머리 위에서 천둥이 울부짖을 때마다, 저 한가운데에서 묵직한 소음이 대답하듯 웅웅대고 있었다.

그 꼴을 보고 나니 천둥 소리가 단순히 기분 나쁜 것 정도가 아니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천둥이 무겁고 흉흉하기 짝이 없는 폭음을 내지를 때마다 저 깊은 곳에서 생각조차 못 할 정도로 높고 알아듣기 어려운 메아리가 올라왔기 때문이다. 마음이 조금 진정되자 이 거슬리기 짝이 없는 소리의 집합이 마치 비석과 비석, 무덤과 무덤을 마구 긁어대는 듯 불쾌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최초의 죽음이 있기 전부터 세상에 있었던 음악을 듣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벼락이 번쩍이며 두 굉음 사이로 명멸할 때마다, 저 아래 쇠사슬에 매달린 수많은 형상들이 엄청난 소리로 역겹기 짝이 없는 합창을 내질렀다.

"세상에..." 나는 말을 더듬었다. 떨리는 눈이 가늘어졌다. "저거... 저거 전부 사람이야?"


목에 얼다 만 얼음이 달라붙었다. 고개를 돌리자, 수직으로 일어선 강줄기가 투명한 잿빛 연기처럼 발판을 휩쓸고 있었다. 앞으로 10초만 더 있으면 나를 덮칠 것이 분명했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겨우 자세를 수습해 네 다리로 일어섰다. 나는 발판 끄트머리에 서 있었다. 얼음 조각들로 장식한 물기둥이 나를 향하여 기어오고 있었다. 도망칠 자리는 없었다. 나는 공포에 질려 몸만 떨고 있었다. 엄마, 아빠, 포니빌을 생각했다. 그리고...

어스름을 생각했다.


"어스름 진혼곡..."

여기 떨어진 것도 이유가 있었다. 내 저주도 뭔가 이유가 있어서 내린 게 아닌가. 악몽의 한가운데 떨어진 나에게는 해답도, 희망도, 빛도 없었다. 다만 퉁겨야 할 곡 하나뿐이었다.

나는 다가오는 물기둥을 보며 내게 남은 방책들을 생각했다. 나는 정말 이렇게 하고 싶다는 충동과 함께, 방책 하나하나를 전부 걷어차 치워 버렸다. 고개를 앞으로 숙이고, 정신을 집중해 보호 마법을 끌어냈다.

"으으으!"

보호막이 부서지면 끝장이었다. 이를 악물고 온 힘을 끌어내 보호막에 투입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차디찬 물과 눈발이 뒤섞여 사방에서 휘몰아쳤다. 보호막 곳곳의 빈틈을 몇 방울 물방울과 얼음 조각이 비집고 들어와 솜털에 얼룩을 남겼나. 나는 머릿속으로 이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시간을 세어 나가고 있었다. 부박한 보호막이 그 품에 안고 있던 마지막 공기를 몇 번 가쁜 숨이 전부 들이마셨다. 아파 오는 눈이 다가오는 강의 밑바닥을 찾아 헤맸다. 물기둥이 전진하는 속도를 가지고 계산해 보니, 앞으로 3미터 정도만 더 견뎌내면 흘려보낼 수 있었다. 허파가 요동쳤고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저 반대쪽의 차가운 공기가 보호막 속으로 흘러 들어올 때까지만 견디면 끝나는 일이었다.

번개가 번쩍이며 눈부신 빛기둥을 만들고 지나갔다. 축축하고 묵직한 굉음에 온 세상이 흔들리는 듯했다. 보호막은 순식간에 부서졌다. 물기둥이 나를 집어삼켰다. 얼음 조각들이 살 곳곳을 할퀴어댔다. 나는 리라를 꼭 붙든 채 비명을 질렀다. 소리는 없고, 기포만 올라왔다. 나는 강의 이동 경로와 정반대 방향으로 몸을 던져 광기의 광장으로 빠져나왔다.

"으아아아!" 나는 그야말로 난리를 치며 뛰쳐나왔다. 몸이 빙빙 돌았다. 날카로운 쇠사슬이 조밀한 포위망을 구성하며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녹이 슬어 있었고, 곳곳에 형상들이 보였다. 발굽들도 여럿 있었다.

나는 다시 흐릿한 세상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이제 죽었구나 싶은 순간, 근처를 지나가던 다른 물기둥에 빨려들어가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이 또한 강은 강이라는 것인지 물결이 상당히 거셌다. 나는 그대로 무엇인가 단단하고 새까만 것 쪽으로 휩쓸렸다. 혹시나 다른 발판이 아닐까 싶어, 그쪽을 향해 계속 헤엄쳐 갔다. 나는 거의 내던져지다시피 하며 구조물 쪽으로 튕겨져 날아갔다.

정작 내가 날아간 방향에는 발판 대신 시커먼 기둥 모양의 물체만 있었다. 번개가 내리치며 흩어진 섬광이, 녹슨 표면 곳곳에 뚫린 구멍을 비추었다. 나는 차라리 저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이 맞겠다고 생각했다.

"윽!"

나는 처박히다시피 착지했다. 리라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입구의 날카로운 가장자리에 겨우 매달려 있었고, 리라는 굵직한 기둥 안쪽 어딘가로 굴러 들어갔다. 현을 붙잡고 있던 염동력이 끊겨서, 에메랄드 빛 마력으로 빛나던 모습은 이제 더 보이지 않았다. 어둠의 끝자락에 매달려 망각에 한쪽 발을 담그고 있는 형국이었다. 혹시나 디딜 만한 곳이 있을까 뒷발로 계속 있을 만한 자리를 치고 쓸다 보니, 발판으로 쓸법한 곳에 발이 닿았다. 디딤판에 체중을 싣고 욱신거리는 몸을 기둥 속 공허로 밀어넣었다. 뒷다리에 매달려 있던 쇠말뚝까지 끌어올리는 데 약간의 시간이 더 소모되었다. 안에 들어서자 막막하기 그지없는 어둠에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천둥 소리가 구멍 안에서는 더 크게 들렸다. 이 안을 더듬는 동안 리라를 먼저 찾아낼지, 귀가 먼저 먹을지 분간이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악기가 필요했다. 느껴야 했고, 보아야 했다.

어찌어찌 리라를 찾아 발굽으로 쥐었는데, 그와 함께 금속질의 촉감이 느껴졌다. 그와 함께 처음 느껴 보는 기괴한 느낌에 압도되었으니, 리라를 찾은 게 아주 기쁜 일은 아니었던 셈이다.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기둥 안쪽에서 끝없이 메아리지는 천둥 소리보다도 끔찍한 것이 그 안에 있었다. 먹먹해 오는 귀가 사방에서 들려오는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감지하고 쫑긋 섰다.

나는 잠시 자리에 앉아 가쁜 숨을 달래며 축축하게 젖은 후드 재킷으로나마 리라를 꼭 붙들고 있었다. 덜그럭대는 소리가 커지더니, 천둥 소리에 맞춰 울어대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심장 박동이 급격히 빨라졌다. 마력선에 마력을 집중해서 리라에 불어넣었다. 구역질나는 창백한 녹색 빛이나마 기둥 속 좁고 답답한 공간을 비추자 그래도 뭐가 좀 보이기는 했다. 벽인 줄 알았던 곳마다 사람 얼굴이 빼곡하게 붙어 있는 것도 보게 되었지만.

"으어!"

비명이 절로 나왔다. 나는 셀 수 없이 많은 몸뚱이로 쌓아올린 기둥 한가운데에 있는 것이었다. 사람의 몸... 적어도 한때는 살아 있었던 사람의 몸으로 구축된 것은 확실했다. 저마다 달랐을 솜털 색이 썩어 문드러진 듯 창백한 색으로 변해 번들거리고 있었고, 눈과 입이 달려 있어야 할 곳에는 금속 구속구와 함께 기둥 밖에서도 이들의 사지를 속박하고 있을 쇠사슬에 슬어 있던 새까만 녹의 파편 같은 것이 잔뜩 묻어 있었다.

나는 몸을 웅크리고 얼굴을 리라로 가렸다. 사방에 쌓인 시신의 아주 작은 디테일 하나마저 눈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밖에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들은 시체가 아니었다. 말로 규정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경련하고 요동치며, 저마다 매인 사슬을 흔들어 화음과는 정반대에 있는 소음을 만들어냈다. 그러더니 다음 천둥과 그 다음 천둥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때 알았다. 내게는 온기가 있고, 빛나는 리라가 있었다. 이것들은 나에게 반응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금속끼리 부딪치며 난 소리인 줄 알았었다. 그러나 녹슨 철은 흐느낄 수 없고 비명을 지를 수 없다. 그것들이 일제히 신음하며 불협화음의 회오리를 일으켰다. 나는 그 부패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있었다. 얼어붙은 사지가 동시에 되살아나 나를 향해 더듬거리며 다가왔다. 무엇인가 그것들의 다리를 쳐내며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끔찍하게도, 그 목소리의 주인은 나였다.

"아아아악! 아악! 으아아아악!" 나는 사방에서 뻗어오는 사지를 쳐내고, 짓밟고, 걷어찼다. 그것들이 내지르는 신음이 더욱 커졌다. 그것들은 나와 내 리라를 노리는 듯 사슬이 허락하는 선에서 내게 마구 달려들었다. 입을 열지 못하게 주둥이에 채워진 구속구가 삐그덕대며 그 밖으로 새어나오는 작은 흐느낌 소리와 울부짖는 소리를 앞세우고 눈먼 자들이 달려들었다. 나는 처음에 들어온 구멍을 향하여 뛰쳐나가려 했지만, 내게 반응하는 몸뚱이가 그 수를 더욱 불렸고 끝내 내 앞까지 가로막았다.

무엇인가 달려드는 소리에 그것들이 내지르는 소리가 지워졌다. 기둥 전체가 흔들렸다. 다른 물기둥이 시체 기둥을 치고 지나간 것이 틀림없었다. 곳곳에 뚫린 구멍으로 차가운 물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수위가 그것들의 발굽과 발목을 거쳐 무릎까지 올라왔다. 그것들이 잡아끄는 통에 내가 먼저 빠져 죽게 생긴 판이었다. 나는 내 주위로 몰려든 그것들을 붙잡고 기어 올라가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수직 거리로 백 피트 정도만 올라가면 될 것 같았다. 게다가 그 끄트머리에 뚫린 구멍 너머로, 머리 위에서 뻗은 번개의 섬광이 비치고 있었다.

이쯤에서 수위는 내 목까지 올라와 있었다. 숨쉬기가 어려워져 몰아쉬어야 하는 수준이었다. 나는 내게 뻗어오는 사지를 걷어차고 쳐내고 짓밟았다. 그것은 헤엄을 치기 위한 것이기도 했고, 그것들을 떼어내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나는 위를 향하여 올라갔다. 가쁜 숨이 씩씩대다가, 이내 헐떡이는 지친 숨으로 바뀌었다. 그것들의 대가리가 하나씩 물에 잠길 때마다 신음 소리도 하나씩 사라져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불운한 자들 모두가 물 깊이 잠겼다.

나는 그와 동시에 구멍 속으로 기어올랐다. 몸을 일단 빼내기는 했는데, 아무리 용을 써도 그 이상 올라올 수가 없었다. 고개를 숙여 아래를 보았다. 수면이 엄청난 속도로 차오르며 수면 속 형상들이 이지러져 보였다. 수십 구의 시신이 뭉쳐 버둥거리는 모습은 마치 항아리로 떨어져 단체로 빠져 죽어가는 뱀 떼를 보는 듯했다. 그 구물텅거리는 살덩이들 사이에, 내가 매달고 온 쇠말뚝이 단단히 잡혀 있었다.

"아악, 안 돼! 으으!" 나는 기합을 내지르며 온 힘을 짜내어 밧줄을 잡아당겼다. 한 번 잡아당길 때마다 뒷다리에 매어둔 매듭이 조여지며 살을 파고 들어왔다. 어깨 위까지 물이 차올랐다. 한쪽 발굽을 내려 매듭을 툭툭 쳐 풀어 보려고 했는데, 오히려 시체들이 일제히 발굽을 뻗어서 피부를 긁어대며 매달리는 것이었다. "으으으으으으... 이거 놔! 저리, 저리 꺼져! 이거 놓으라고! 이런—ㅆ!" 그때부터는 더 말하지 못했다. 숨을 쉴 수가 없었으니까. 비명과 얼음과 공기방울 외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구속구가 채워진 얼굴들이 사방에서 그 흉측한 몰골을 들이밀며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뒷다리를 덜덜 떨면서도 발길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것들을 동여맨 쇠사슬이 바다뱀처럼 꾸물거렸고, 목까지 차오른 수면이 내 목소리를 뭉개놓았다. 시체들의 사지와 신음으로 가득한 죽음의 공간 어디에선가 녹색 불빛이 솟아올랐다. 내 리라를 감싼 것보다도, 태양보다도 밝은 빛이었다. 품에 안긴 트와일라잇이 울음을 멈췄을 때, 나는 바로 말을 걸 자신이 없었다. 나는 한 곳에 집중한 염동력을 방출했다. 뿔에서 빠져나간 마력이 탄도를 따라 날아갔다. 시체 몇 구가 치어 날려갔다. 응축된 마력이 목표 지점을 타격했다. 밧줄을 끊어놓은 것이다.

그제야 나는 자유의 몸이 되어 위를 향해 올라갔다. 올라갔다기보다는, 쇄도했다거나 솟구쳤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물살을 타고 올라 구멍 밖으로 날아오르는 순간, 나는 숨을 가득 들이마시고 환성을 올렸다.

구멍 밖으로 분출되듯 튀어나오자 하늘 위로 번개가 쳤다. 내가 나온 곳은 기둥 꼭대기에 있던 또 다른 발판이었다. 하마터면 무덤 대신 쓸 뻔했던 구멍 속에서 얼음물이 간헐천처럼 쏘아져 올라왔다. 등 바로 뒤에서 뿜어져 올라오는 물줄기에 놀란 나는 앞으로 넘어져 엉엉 우는 아이처럼 바닥을 기었다.

나는 리라를 꼭 껴안은 채 몸을 웅크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달달 떨렸다. 천둥이 다시 한 번 우르릉 울자, 그에 대답하기라도 하듯 그것들이 입을 모아 신음했다. 더욱 끔찍했던 것은, 신음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는 점이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자 그렁그렁하게 맺혀 있던 눈물이 순식간에 싹 사라졌다. 내가 밟고 있던 바로 그 발판에 쇠고랑에 입을 매인 시체들이 수도 없이 드러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내가 웅크린 자세 그대로. 녹슨 철과 사후경직을 일으켜 굳어 버린 시체들의 무덤 한가운데서, 나는 차가운 하늘을 올려다보며 울먹거렸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공주님 저 좀 살려 주세요..."

나는 눈을 감았다 뜨면 이 모든 것이 꿈이어서 숲 속 내 오두막, 내가 누울 관짝에서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천천히 떴다. 그런 일은 없었고,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얼음과 번개만이 가득한 지옥의 경계에 있었다.

더는 견딜 수 없는 절망의 구덩이 어느 한쪽 구석에서도 아직 합리적으로 생각할 정신은 남아 있었다.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들과 일 년 넘게 살아가면서 견딜 수 있는 힘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었다. 사람들의 나에 대한 기억은 햇살 쨍쨍한 보도블록에 떨어진 빗방울 몇 개처럼 오래도 가는 것이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세상에 내 발자취를 남겨 두려는 절박한 시도에서 태어난 정신이었다.

항아비곡...

나이트메어 문이 지었다는 곡...


곡 같은 게 아니야...

그것은, 장막...

그것은, 봉인...

방어선... 여기가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틀어막기 위한 방어선이었어...

그런데, 여긴 대체 뭐야?

여긴 대체 뭐하는 데야?

이것들은 대체 뭐야...?

심장도 번개도 멈춘 듯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사방에 널린 시체들이 끊임없이 신음하며 꿈틀거렸고, 몸을 묶은 녹슨 사슬을 계속 잡아당겼다. 고개를 들자,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번개가 한곳에 집중되고 있었다. 어디에 모여드는 것인가. 보고 싶은 마음이 불현듯 싹 사라졌다. 모든 생명보다도 오래된 공포가, 천지개벽 이전부터 존재해 온 공포가 내 머릿속을 사정없이 긁어대고 있었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덜덜 떨리는 울음이 스며나왔다.

나는 어느샌가 자리에서 일어서 달리고 있었다. 그 끔찍한 모습을 피해 몸을 돌려 발판 반대쪽으로 뛰었다. 입으로 리라를 물고, 구속구에 매인 채 신음하는 그것들을 뛰어넘으며 달렸다. 이것이 무엇인지 정의해 줄 누군가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존재한 이 끔찍한 느낌을 피해 내 한평생을, 탄생 이전의 전생을, 천지개벽 이전의 다른 시간대에서조차 달아나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오래지 않아 발판 끄트머리에 닿았다. 왜 뛰어내리지 않았는가, 그것은 아직도 뭐라 딱 잘라 말하기 힘들다. 그 덕에 몸이 살아서 일기를 적고 있으니 괜찮지 않을까. 운명이 내 발길을 돌려놓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무슨 빌어먹을 조화인지는 모르지만, 새까맣게 변한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고 포위망을 좁혀 들어오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네 다리로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고.

궁지에 몰린 것이 사람을 용감하게 해 주는 것은 아니다. 내가 그 상황을 견딘 것은 용감한 것과 하등 상관이 없다. 턱수염 스타스월처럼 강력한 살아 있는 전설이라 할지라도, 리라의 뾰족한 쪽으로 두 눈을 파내 버리겠다는 듯 꿈틀대며 수도 없이 일어나 자기에게 다가오는 꼴을 보면 벙찌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을 테다. 그것은 결 자체가 다른 공포였고, 두 번째 죽음이었다. 나는 나이트메어 문을 직접 대면하고도 살아남았지만, 그것은 비곡 너머의 나락에 잠식되고 부마된 루나 공주님보다도 끔찍한 운명을 짊어지게 된 나를 맞이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나락이 이제 나를 먹어치우려 하고 있었다.

나이트메어 문이 나타났을 때, 내가 가진 유일한 방책은 음악뿐이었다. 개벽과 함께 존재한 것도 음악이었고, 그녀에게 힘을 준 것도 또한 음악이었다. 천둥 소리가 잦아들자 번개가 이를 신호로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입이 생기더니 길고 가는 목으로 이어졌고, 칼날처럼 날씬한 몸통이 생겨나 무시무시하게 길쭉한 다리를 뻗었다. 형상이 내게 다가왔다.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망정이지,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었다면 그 자리에서 곧장 뛰어내렸을 것이다. 머릿속에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어스름 진혼곡."

번개가 사그라들자 그 너머에 뭉쳐 있던 어둠이 뒤섞이며 썩어 문드러진 살점의 형태로 합쳐졌다. 그 형상에 붙을 살이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이었지만, 동시에 끔찍하게 두려운 모습이었다. 저 여자야말로 모든 비명의 시작과 끝이요, 잠들고 죽는 순간에 입가를 떠나는 최후의 숨결이었다.

"어스름 진혼곡."

나를 이곳으로 인도한 것은 한 편의 곡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곡이 나를 돌려보낼 수 있지 않을까, 그것밖에는 내가 기댈 것이 없었다. 나는 리라를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그 여자를 똑바로 노려보며, 나는 리라로 첫 열 마디를 연주했다. 진혼곡은 사방에서 울어대는 신음 소리에 가로막혀 잘 들리지 않았다.

구속구에 매인 자들이 바다가 갈라지듯 양 옆으로 천천히 비켜섰다. 그 위로 그 여자가 걸음을 옮겼다. 그것은 미래영겁 끝나지 않을 숭배이자, 공포에 기반한 것이었다. 알리콘의 모습을 갖춘 여자는 내게서 네 걸음 떨어진 자리에 서서 두 날개를 활짝 펼쳤다. 거센 찬바람이 몰아쳤다. 백골처럼 창백한 사지 위로 진실과 거짓 사이에 걸친 바닥 없는 나락 같은 눈빛이 번득였다.

그 때 나는 진혼곡의 가운데 지점을 연주하고 있었다. 이마와 뿔에 맺힌 액체가 강처럼 줄줄 흘러내렸다. 그것이 땀인지 피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 여자가 내게 가까워 오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뱃속에 불이 붙는 듯했다. 이러다가 내 몸이 터져나가 명료한 고통의 우주를 만들어내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모든 것은 눈 앞의 여자에게 달려 있었다.

여자가 입을 벌리자 창백하고 칙칙한 치아가 드러났다. 온 천둥이 그 입을 빌려 말하려는 듯싶었다. 형언할 수 없는 자홍색의 밝은 눈동자가 번쩍거렸다. 장례식의 종 수백만 개가 동시에 울리는 듯한 목소리로 여자가 말했다.

"연주하거라."

나는 부지런히 진혼곡을 연주해 나갔다. 남은 것은 20마디. 숨이 막혀 왔다.

"내 곡이다. 계속 연주하거라."

앞으로 10마디. 여자가 너무나 가까워서 창백한 몸 위로 불타는 룬 문자가 똑똑히 보였다. 알아볼 수 없는 이름 수천 개가 룬으로 쓰여져 있었고, 군살 없이 날씬한 그녀의 사지가 그 아래로 솟아오른 벨벳 산맥처럼 움직였다. 여자의 숨결 속에, 종말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無가 되거라."

신과 같은 그녀의 목소리가 귓속에서 웅웅 울렸다. 나는 뒷걸음질치다 쓰러져 발판 아래로 한없이 추락했다. 눈보라 사이로 떨어지는 혜성처럼 떨어진 끝에...



...포니빌 시내 어느 잔디밭에 뻗었다. 어슴푸레하게 밤하늘이 밝아지는 가운데, 세상이 이토록 따뜻한 곳이었는지 새삼 느꼈다. 나는 빠져 죽어가는 물고기처럼 숨을 몰아쉬며 몸을 떨었다. 내 옆에는 갈색 건물이 한 채 있었고 하늘에는 별과 귀뚜라미 울음이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뒷발로 마구 발길질하며 이를 딱딱딱 부딪쳤다. 양 옆에 늘어선 벽면과 건물 지붕에 부딪쳐 돌아오는 울음소리가 유독 비참하게 느껴졌다. 저 세상의 한기에 흠뻑 젖어 허우적대는 동안, 저 울음이 내 울음인 것을 알았다.

한없는 고통에 젖어 알아들을 수 없는 울음이 내 인후咽喉를 조여 왔다. 나는 리라마저 떨어뜨리고 아파 오는 뿔을 부여잡은 채 뒹굴었다. 온몸이 얼어붙어 아무 감각도 없었지만, 살을 베는 듯한 한기의 파도가 온몸을 도려내는 듯 아팠다. 귓속에서 이계의 천둥소리가 웅웅대며 정기적으로 밀어닥치는 고통과 보조를 맞췄다. 가쁜 숨이 과호흡으로 이어졌는데, 내 갈기와 후드 재킷이 빨아들인 악몽의 바다는 그 밖으로 빠져나올 줄 몰랐다. 나는 울기 위해 울었다. 내 울음은 울음이라기보다 차라리 폐활량을 시험하는 과정이었다고 할 것이었다. 깨진 유리 조각을 다리삼아 움직이는 벌레들이 한 줄기 강을 이루어 등골을 타고 오르는 듯한 느낌이, 천천히 기어 올라왔다.

한쪽 건물의 출입문이 휙 열리고 나서도, 나는 거기서 빛이 쏟아지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느릿느릿한 걸음 소리가 빛을 가리워, 가느다란 그림자를 드리웠다. 나는 경련하는 몸으로 꽥꽥 소리지르며 마구 발길질하고 있었다. 문을 연 사람은 짜증내며 소리치지도, 투덜대지도 않았다. 헉 하고 놀라는 소리를 내더니 내게 쏜살같이 달려온 것이다.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셀레스티아 맙소사!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괜찮아요?!"

나는 이를 악문 채 거친 숨을 내뱉으며 떨리는 몸을 웅크렸다. 뱃속에 불이 붙은 기분이었다. 차라리 터져 버리고 싶었다. 속에 있는 것을 전부 게워내고 싶었다. 그 누구라도 더는 가까이 다가오지 않고, 멀찍이 서서 욕설을 한 바가지 내뱉을 만한 추태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저 이방인을 나는 구하고 싶었다. 나는 계속해서 목도한 어둠을 향하여 울면서 욕했다. 몇 번 구역질이 섞였다.

그 사람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천천히 다가와 어깨를 흔들며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왜 이러고 계신 거죠? 다른 사람이 이렇게 한 거에요?!"

나는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등골에서 뱃속으로 옮겨간 느낌이 이제 목구멍까지 올라와 전부 태우고 있었으니까. 이 세상은 붕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앞으로도 그 짓을 영원히 반복할 것이었다. 나와 그 사람은 그 한가운데 낀 불행한 중생일 것이다. 나는 그녀의 발굽을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나는 잘 들리지 않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다, 앞뒤 잴 것 없이 마구 소리쳤다.

"아홉 번째가 또 있어! 세상이 어떻게 돼 처먹었길래 이 지랄이야?!사람을 그렇게 괴롭혀 놓고도 아직 부족해?!"

"이게... 무슨..." 그녀는 말을 더듬으며 한 쌍 푸른 눈을 휘둥그레 떴다. "무, 무슨 소리에요 이게! 아홉 번째가 뭐라고요—?!"

"아아아아악!" 나는 아픈 뿔을 두 발로 부여잡고 이를 악물며 다시 땅바닥에 쓰러져 발작했다. 그 느낌이 이번에는 내 머리를 노리고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왜, 대체 왜?! 왜 아홉 번째가 또 있는데?! 이 지랄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데?! 이거 썅 끝나긴 하는 거야?!"

고통스러운 목소리가 풀잎 사이로 스며들어 사라져 갔다. 이쯤 되면 한기가 몰려들 만도 한데, 오히려 등 뒤에서부터 부드러운 온기가 전해져 왔다. 미친 듯 소리를 질러대는데도 내 옆을 떠나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내 등과 어깨를 다독이면서, 경련하는 귓가에 조용히 뭐라고 속삭여주고 있었다. 그것만으로 내 몸을 지배하던 그 느낌을 잊기에 충분했다. 머리가 엄청나게 아프기는 했지만, 천천히 마음이 진정되어 갔다. 우는 소리가 착 가라앉은 숨소리로 바뀌었다. 감각 없는 사지가 욱신거리는 느낌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쉬이이잇... 진정해요. 다 괜찮아요. 얼마나 추울까.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는지는 모르지만 이제 괜찮아요. 진정하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쓰러진 채 힘없이 축 늘어져서 그녀의 지시를 듣고만 있었다. 그녀의 발굽이 어깨를 가만히 잡아당겼다. 나는 너무 지쳐서 반발할 기력조차 없었다. 그녀가 나를 부축해 일으켰다. 나는 그녀에게 몸을 의탁해 걸었다. 그녀가 나를 인도한 곳은 그녀의 집 안이었다.

"마음 편히 가지세요. 한 번에 하나씩 하자고요. 다 괜찮아질 거에요. 일단 젖은 건 말리고, 몸부터 녹여야겠군요. 누구라도 그렇게 있어서는 안 돼요."

나는 겨우 눈만 열어두고 있었다. 나무로 바닥을 깐 마루와 흰 리놀륨, 발 밑에 깔린 보들보들한 양탄자가 흐릿하게 보였다. 머릿속에서 멈추지 않고 어른거리는 그 곳에서의 기억과, 이 따뜻한 곳에서 느껴지는 모든 감각이 뒤섞여 흐릿한 잡음이 되었다. 섬광과 함께 내리꽂히는 번개와, 그 빛을 받아 번들거리는 구속구 찬 창백한 얼굴들이 사방에 보이던 그 모습. 이해 가능한 영역을 넘나들며 밀려들고 빠져나가는 물살에 삼켜진 끽끽대는 쇠사슬과, 그 위에서 포효하던 천둥.

그 모든 형상들이 불 붙어 타들어가는 사진, 불에 타 부서지는 악몽처럼 천천히 사라져 갔다. 그와 동시에 떨리는 몸 위로 포근하고 따끈한 온기가 내려앉았다. 나를 데려온 곳은 널찍한 부엌이었는데, 오븐 몇 개가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그녀는 나를 열기가 집중되는 지점에 앉혀놓았다. 옆으로 쓰러지려던 찰나, 그녀가 쿠션을 들고 달려와 내 밑에 깔아주었다.

"자... 여기 앉아요." 그녀가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나를 부축해 앉히는 그녀의 입가에, 나긋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제과점을 운영하거든요. 자고 일어나서도 영업은 해야 하니까 매일 밤마다 사탕을 미리 만들어둬야 해요. 마침 오븐에 불 피운 지 몇 시간쯤 지났으니까, 몸 녹이기에는 딱 좋을 거에요. 인생이란 참 재밌다니까요? 호호호." 그녀는 헛기침하며 내게서 멀어져 갔다. "그럼 가만히 계세요. 금방 다녀올게요."

멀리서 그녀의 목소리와 웃음소리, 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에는 별로 눈길을 주지 않았다. 나는 무표정하게 불 속만 들여다보았다. 사지는 움직이기는커녕 한 번 꿈틀할 수도 없었다. 저 오븐 속에서 녹아 뒤섞일 수 있는 것들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저기에 몸을 담가 뼈만 남기고 녹아 없어지고 싶었다. 그 알리콘이 나를 찾아내고야 마는 미래와, 다시 그 알리콘과 마주하게 되는 미래만큼은 피할 수 있으니까. 그 알리콘이 내 영혼에 낙인을 찍은 게 아닌 이상, 머릿속에 아홉 번째 비곡이 떠오를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인가? 끔찍한 추위로 가득한 지옥에까지 다녀온 지금, 앞으로 어떤 것들을 더 마주하게 될까? 인간은 얼마나 공포를 감당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분신하고 싶었다. 몸을 태워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분해되고 싶었다. 여기가 아닌 곳이라면, 포니빌에 묶여 있는 것만 아니라면, 이 끔찍한 기억을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것만 아니라면, 내게 허락된 이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 이보다 더한 운명으로 나를 끌고 들어가는 것만 아니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나는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입을 벌리고 싶지만 죔쇠에 조여 벌릴 수 없는, 끝없는 고통에 지친 자들이 수도 없이 들어찬 그곳. 나는 그곳의 주민은 아니었다. 그렇기는 했지만, 어쩌다 발을 들이고 빠져나온 다음부터 나는 내게 허락된 세상이 그곳밖에 없으리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만장이 나를 어딘가로 끌고 들어간 적은 없었다. 진혼곡은 내 생각과 달리 아무런 부작용이 없었다. 아홉 번째 비곡을 완성해 이보다도 끔찍한 운명 속으로 짓쳐들어간다면, 내 얼굴 앞에 들이밀어진 공포가 아니라 진실이 내 앞에 드러날까?

그 누구도 내가 보고 온 것과 아는 것을 알아서는 안 된다. 마을에 나다니는 것도 그만두어야 했다. 존재 자체를 그만두어야 했다. 저 순진한 사람들 사이로 나돌아다니는 것만으로 저들을 죽음보다 끔찍한 공간의 문턱까지 끌어들일 수 있었다. 항아비곡은 혼돈의 도가니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세상을 이 세상에서 격리하기 위한 봉인이었고, 나는 그 장벽에 뚫린 하나의 문틀이었다. 나는 태양의 세상과 비명의 세상이 만나는 교차점이었고, 얼어붙은 여러 막 중 하나였다. 나는 끔찍한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 아홉 번째 비곡만이 머릿속에서 한참 꽃피고 있었다. 더는 감당할 수 없었다. 자살만이 유일한 선택이었다.

나를 데려온 사람이 등에 담요와 이불을 가득 짊어지고 돌아왔다. 이 친절한 어스 포니 여성은 부엌에 돌아와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내 이곳저곳을 곁눈질하며 살폈는데, 특히 젖어서 늘어진 갈기에 시선이 오래 머물러 있었다. 내게 이불을 둘러주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좋아요. 이제 좀 괜찮아 보이는군요." 그녀가 나긋하게 말하며 내 뒤로 다가와 담요 몇 장을 어깨 위에 둘러주었다. 몸을 녹이는 데는 턱없이 부족했는데, 그녀 역시 할 게 아직 남아 있는 듯했다. 그녀는 부엌을 나갔다가 잠시 뒤 발자국 소리와 함께 돌아왔다. 발굽을 끼우기 위한 죔쇠가 달려 있는 큼지막한 머리빗을 들고, 그녀는 물었다. "이름이 없는 건 아니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븐 속 불길에 내 앞날이 녹아 들어가는 모습만을 쳐다보고 있었을 뿐이다. 나긋한 목소리도, 그녀의 갈기를 따라 흐르는 바닐라의 달달한 향기도 나는 감각할 수 없었다.

"으으으음... 뭐, 괜찮아요."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체온이 목 뒤로 느껴졌다. 그녀가 등 뒤로 다가서서 한쪽 발굽으로는 내 어깨를 잡고, 다른 한쪽으로는 빗을 써서 젖은 갈기를 정리해 주었다. "굳이 말할 필요는 없지요. 가만히 앉아서 쉬시기만 하세요. 초면인 분에게 너무 많이 묻는 것도 실례일 테니까요."

나는 콧김을 뿜었다. 눈을 감고 힘없이 고개를 푹 숙이자, 그녀가 갈기를 빗어 주었다. 엉킨 갈기를 부드럽게 풀어 정돈하는 솜씨가 굉장했다. 나는 그녀의 손길 아래 몸을 늘어뜨렸다. 지옥에 다녀온 사람의 마음마저 달래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나는 적잖이 놀랐다.

그녀가 나지막하게 호호 웃는 소리가 들렸다. 오븐에서 밀려나오는 열기만큼이나 따뜻한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정말 멋진 갈기네요. 제 갈기도 직모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까칠한데다가 잘 펴지지도 않는 곱슬머리라, 정리하기도 힘들거든요. 그쪽 갈기는 비단결 같으니, 어디서 오셨든 남정네들이 줄을 섰겠는데요."

좀 웃으라고 한 얘기인 것은 확실했지만, 나는 어딘가에 짱박혀 엉엉 울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달달 떨리던 몸은 이미 한참 전에 진정됐지만, 나는 평생 옛날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녀가 조심스레 갈기를 빗어 내려가는 동안 나는 하염없이 발굽을 꿈지럭거렸다. 정돈된 갈기가 반들반들하게 빛났다. 갈기를 정리하는 데 몇 분씩이나 걸린 것도 아니었지만, 그 사이 나는 머릿속에 울려퍼지던 아홉 번째 비곡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됐어요. 기분은 좀 나아졌나요?" 그녀가 빗질을 멈추고 두 발굽을 내 어깨에 얹었다. 발굽이 말라 가는 어깨를 가볍게 잡았다. 처음에는 이 사람이 왜 이러지, 싶었지만 이어진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니 모든 상황이 명료하게 이해되었다. "그럼, 말해 보세요. 함부로 집에 들어왔다고 화내는 일은 없을 거에요. 각자의 아픈 과거는 서로 비밀로 해두기로 하면 인생이 그리 못 견딜 만한 것은 아닐 테니까요. 자, 그럼 저희 집엔 왜 들어오신 거죠?"


나는 가만히 있었다. 그녀가 나를 집에 들인 이래 처음으로,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입은 조금 벌려두었다. 나는 우는 소리로 말했다. "그게..." 나는 침을 삼키고, 울먹이며 말했다. "밖에서... 쓰러졌거든요. 보셨죠? 그래서... 선생님이 절 데려오셨고요. 꼭 쉬다 가라고 하셔서..."

그녀는 순진한 표정으로 빙긋 웃었다. 반짝이는 두 눈에 생기가 가득했다. "아, 내가 그랬었나요?"

나는 숨을 씁 하고 들이마셨다. 목구멍에 무엇인가 걸리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겨우 말했다. "절 데려오신 걸... 잊어버리셨군요." 나는 몸을 떨며, 지친 눈길로 그녀의 천사 같은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절 데려오신 걸 잊어버리셨으면서... 그런데도... 그래도 절 신경 써 주시는 건 왜 그런 거죠?"

그녀는 이를 드러내며 빙긋 웃었다.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요?" 그리고는 내 뿔 위로 앞머리를 쓸어내렸다. "곤란한 사정이 있으신 것 같은데,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입이 달달 떨렸다. 뿌연 안개 같은 장막이 눈 앞에 드리워서, 그녀의 모습이 가리웠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숙였다. 그게 나를 지탱할 최선의 수단이었다. 내가 보고 온 끔찍한 것들을, 울부짖고 소리지르며 전부 토해낸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들이 바로 그 때, 그 순간을 위해 예비된 것만 같았다.

"그쪽이 누군지도 모르고..." 나는 말을 더듬었다. "성함도 몰라요." 나는 훌쩍이며 울음에 젖은 소리로 말했다. "그렇지만, 당신이 좋아요." 몸이 절로 그녀 쪽으로 쓰러졌다. 그녀는 나를 받아주었다. 나는 그 품에 안겨 울었다. "너무 좋아서, 그쪽 친구가 되고 싶어요. 다른 모든 사람의 친구가 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나는 눈물과 함께 솟구치는 흐느낌을 이를 악물어 참아냈다. 이제, 춥지 않았다. 몸이 더워지고 있었다. 내가 원하던 방식으로 몸이 녹은 것은 아니지만, 그 또한 말할 것 없이 황홀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의 친구도 될 수 없어요. 친구가 될 수도 없고 친구를 얻을 수도 없어요. 무슨 말인지 모르시는 건 알아요. 이해하실 필요는—"

"쉬이이이..." 그녀가 나를 끌어안고, 부드러운 손길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축 늘어진 귓가에 그녀가 속삭였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당신만은 이게 무슨 일인지 알잖아요." 그녀의 솜털이 비단결처럼 느껴졌다. 보지 않고도 그녀가 웃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쪽의 기분이 어떤지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괜찮아요."

나는 그 말에 완전히 무너졌다. 내 기분이 어떤지, 나는 명백히 보여주었다. 눈물과 울음소리로, 온전히 보여주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안은 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울음에 떨리는 몸을 보듬고, 갈기를 쓰다듬으며 등을 두드려 주는 그녀에게, 나는 지옥에서 보낸 15개월의 서러움과 두려움을 전부 쏟아내었다. 그녀는 내가 상상만 해 오던 따뜻한 사람의 이상형이었다. 나를 지탱해 줄 수 있고, 알아들을 수 없는 울음을 전부 들어 줄 수 있는 따뜻한 사람. 나는 더 단단해지고 그만큼 더 부스러져 가던 껍질 속에 고여 가던 모든 어둠을 쏟아냈다. 이 순수한 사람에게 나는 그저 역병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녀의 주방에 숨어들어 우울한 숨소리로 공기를 더럽히는 낯선 부랑자로 다시 전락하게 되는 것도 시간 문제였다. 미치광이란 세상 모든 악의의 무게에 짓눌려 쓰러지면서도 그것을 승리라 칭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을 나는 그 때 다시 생각했고, 그러자 내 앞에 기다리고 있는 악몽의 존재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때 사랑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했다.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한 사람의 품에서 죽고, 영혼에 얼룩진 고통과 비통, 온갖 고난을 씻어낸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 내가 지금까지 트와일라잇에게 해 왔던 것은 그런 것이었음을 나는 그때서야 알았다. 그와 함께 죄책감도 떨어져 나갔다. 눈물에 젖은 얼굴에,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다음 날 아침, 나는 그녀의 부엌에서 눈을 떴다. 한 쌍 쿠션 위에 누워 있었고 이불 두 채가 몸을 덮고 있었다. 오븐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더는 못 견딜 정도로 뜨거워져 있었다. 그 뜨거움으로, 다시 어떻게 연명해 나갈 정도로는 제정신이 돌아온 것을 체감했다.

새벽의 희미한 여명이 밝아 오고 있었다. 그녀는 부엌 멀찍한 곳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마치 나를 지키기 위한 자리 같았다. 사탕을 만드는 작업 도중에 잠든 것 같았다. 단잠의 기쁨으로 얼굴이 풀리며 입이 헤벌어져 있었다. 크림 같은 얼굴이 새로운 하루의 금빛 햇살을 받아 빛났다.

찌뿌둥한 사지를 풀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어깨에 덮은 담요를 털어냈다. 후드 재킷은 오래 전에 말라 있었다. 친절한 사람 덕택에 갈기도 비단결처럼 곱게 정돈되어 있었다. 나는 조용히 부엌을 건너가 그녀 앞에 섰다. 뭔가 말하려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나는 우울한 한숨을 토해냈다. 이 사람을 깨워서 좋을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를 들이고 나서 몇 시간이 지난 뒤였다. 모닝 듀처럼 잠시 기절했다 깨어나는 것과는 아주 큰 차이가 있었다. 잠이란 산 사람의 세상에서 잠시 떠났다 돌아오는 것이니까. 실실대며 자기를 쳐다보는 나를 보면 놀라기밖에 더 할까.

그렇지만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하고 싶었다. 내게 준 위로의 아주 조그만 파편으로나마 그녀에게 축복을 전하고 싶었다. 할 수 없을 짓을 하려고 할 정도로 바보스럽지는 않았다. 그랬지만, 저주가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나는 아무런 후회가 없었다. 나는 다만 그녀를 바라보며 발굽을 뻗어, 푸른색과 분홍색이 섞인 그녀의 갈기를 천천히 쓸어 볼 뿐이었다.

잠결에 뒤척이는 그녀의 얼굴이 반대쪽으로 향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잠꼬대가 들렸다. 나는 의자에 앉아 잠든 그녀를 가만히 남겨두고, 늘어선 오븐을 지나 부엌 밖으로, 집 밖으로 나가 빛나는 세상 속으로 향했다.



리라를 주웠다. 한기와 추위로 뒤덮인 저 너머 세상에서 돌아와 떨어진 그 자리에 가만히 떨어져 있었다. 진흙과 풀잎이 끄트머리에 묻어 있었다. 염동력으로 들어올려 한 번에 한 곳씩 정성들여 닦아냈다. 번잡한 일을 마무리한 뒤 등에 리라를 짊어졌다. 한 줄기 한숨이 입가를 떠났다. 그와 동시에 낯선 기분이 들었다. 나는 몸을 돌려 골목 끝자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제빵사의 집을 등지고, 포니빌 한가운데로 향했다.

탁 트인 곳으로 나오고 나니 얼굴을 찡그리고 봐야 할 지경이었다. 아침 해가 쨍쨍하게 비추고 있었다. 햇살로 타오르는 세상이 눈에 들어왔다. 북소리가 나는 곳이 보였다. 제코라가 시내까지 나와 나무그늘 아래에 앉아 있었다. 함께 가져온 낯익은 북들을 신나게 두드리고 있는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더피 후브즈와 그 딸인 딩키가 제코라 옆에 앉아 있었다. 꼬마 유니콘은 염동력으로 플루트를 들고 있었는데, 제코라가 신호를 보내자 굉장히 숙련된 솜씨로 박자에 맞춰 곡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제코라가 빙긋 웃었고 더피는 옆에서 둘이 음악을 만들어 내는 가운데 박수를 치며 거들었다. 그 앞에는 젊은이들 여럿이 구경하고 있었는데, 아침부터 좋은 구경거리가 생겨 모두 웃고 있었다. 청중 가운데는 캐러멜과 윈드휘슬러도 있었다. 운송 사업으로 고단한 한 주에 쉼표를 찍으며 그 둘은 같이 앉아 있었다. 둘은 서로에게 몸을 기대고 있었는데, 때때로 얼굴을 비비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곡조는 끊어질 듯하면서 끊임없이 이어졌다.

한쪽을 흘끗 보자, 아침부터 기운이 솟아 팔팔한 스쿠틀루가 밀키 화이트와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찌푸리고 구겨진 얼굴이 아닌 웃는 얼굴로, 이따금씩 소리내어 웃으며 대화를 잇고 있었다. 그런 잡담이 아무리 길어지더라도, 사랑의 오작교 앞에서는 아주 사소한 게 되어 버렸지만. 청중들에게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갓 구운 빵을 가득 채운 바구니를 들고 힘차게 걸어가는 애플잭이 보였다. 애플블룸이 폴짝폴짝 뛰며 언니를 쫓아갔다. 둘은 플루트와 북소리가 어우러진 메아리를 뒤로하며 무슨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지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둘의 걸음이 향한 곳에는 래리티와 플러터샤이가 있었는데, 플러터샤이로 말할 것 같으면 래리티가 자랑스럽게 보여 준 새로운 드레스를 보고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조금 더 떨어진 곳에는 트와일라잇이 후브즈 박사와 마주앉아 즐거운 대화를 잇고 있었다.

시야 구석에서 갑자기 웬 꼬마 둘이 깔깔대며 뛰쳐나와 달려갔다. 고개를 돌리자 스위티벨과 럼블이 마을 광장에서 평생 안 끝날 것 같은 술래잡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럼블이 스위티벨을 붙잡으면서 놀이는 끝이 났고, 둘은 그대로 뒤집어진 나뭇잎 위에 넘어져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모닝 듀와 암브로시아는 서로를 쳐다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내가 잠시 그 둘만의 세계에 발을 들여놨다가 빠져나가자, 둘이 동시에 나를 쳐다보더니...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돌려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한기와 추위뿐인 심연에 발을 들여놨다가 빠져나온 지 열두 시간도 되지 않은 한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가 있던 자리에는 이제 진심으로... 마주보고 씩 웃어 줄 수 있는 뻔뻔함을 갖춘 광인이 있었다.



언제부터 포니빌의 어둠만을 보려고 했던 걸까? 따뜻한 온기와 보기 좋은 것들을 빨아들이고, 나만 짊어진 문제가 있다며 먼지와 쓰레기를 뱉어낸 건 대체 언제부터지? 나는 그보다는 나은 사람이고, 스스로도 그 점을 명확히 알고 있다. 그런 삶을 살았다. 여러 가지 의미로 그런 삶을 공유하기도 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내가 포니빌에 있는 것도 목적이 있다. 저주를 받기 전 포니빌에 온 이유. 그 이유는 가장 차가운 나락에 떨어진 지금 이 순간에도 유효하다. 내가 아주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나는 아주 유령과 마찬가지인 게 아니다. 내가 남겨온 발자취는 달빛에 젖은 돌개바람이 휙 하고 지워 버리는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의 삶을 만져주지 않았는가. 오직 나만이 알 수 있는 흔적을 남겨 오지 않았는가.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알 수 없고, 나는 그런 은혜를 입을 일이 없는 건 좀 아쉽지만.

만인을 위해 아무런 대가 없이 자기의 삶을 초개처럼 내버린 사람들이 지탱해 온 시간은 어느 정도일 것인가. 이퀘스트리아에서 가장 질박한 소도시 한가운데서, 세상에 좋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볼 수 있는 것은 얼마나 은혜로운가. 내가 만들어낸 선善이 얼마나 많은지 볼 수 있으니 기쁘지 않은가. 날 수 없는 아이가 살아서 숨쉬고 있을 수 있는 이유를 나는 안다. 농부 청년이 사랑을 쟁취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 원동력이 무엇인지 나는 안다. 새로운 동아리를 만나 낯선 온기를 나누는 것보다 혼자 되기를 택한 사람이 세운 서원이 무엇인지 나는 안다. 세상 그 누가 장대한 생명의 역사에서 저 찬란한 모습을 보고도 혼자 그늘에 숨어 의심할 바 없이 자신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을 그저 자신만의 기쁨과 행복으로 남겨두기만 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저주받은 몸이지만,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 아닌가? 인생의 시련을 겪고 나면 어떤 사람이 되어서 나오는지도 모르는 채 우리 모두 거기에 투신하지 않는가. 나를 속박한 녹슨 구속구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나설 필요가 없는데도 자기가 감옥에 갇혔는지도 모르는 채 살아온 수많은 이들을 구해냈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위안이 될 것이다. 이것은 축복이다. 그래, 잊힐 수 있는 축복이다. 이 축복과 함께하는 한, 나와 다른 모든 사람을 위해 살아갈 수 있으리.

저 세상으로 난 문틀이 아닌 다른 것으로 나를 정의할 권리가 내게는 있다. 고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될 수는 있겠다만, 그게 뭐 그리 별거인가? 나를 부수고 들어오는 자가 있다면 그자가 내게 준 고통만큼이나 큰 기쁨으로 맞설 것이다. 나는 댐이 되어 내게 오는 모든 기쁨과 고통을 그대로 돌려줄 것이다. 이것이 내가 맞선 운명의 적막 한가운데서 내가 얻어낼 수 있는 승리의 방법이다.

지옥에 다녀온 몸이지만, 천국에 다녀온 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나는 눈물로 내 안의 두려움을 같이 흘려냈다. 그렇게 한 번 무너진 다음, 숭고한 진실이 내 안에 깃들었다. 삶의 따뜻함이 그보다도 크고 차갑고 끔찍한 것들에게 포위될 수 있다. 그 불쾌한 것들의 군세가 아무리 강대하더라도, 생명은 이미 영겁의 세월 전부터 그 모든 것에게서 승리했다고 나는 말할 수 있다.

내 이름은 라이라 하트스트링스. 나는 살아 있다. 언제고 이 저주에 종언을 고하고 말 것이지만, 설령 그러지 못하더라도 나는 기억할 것이다. 내 인생은 따뜻했고, 따뜻하며 따뜻할 것이라고. 나를 무너뜨리려는 것들이 영원토록 밀려들 것이지만, 나는 그때마다 버티고, 또 버텨냈노라고.



"정말요?"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귀여운 얼굴에 기쁨이 가득했다. "정말이죠?"

"그럼요." 나는 트와일라잇의 도서관에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말했다. "근대 캔틀롯식 문헌관리기법 강의라니, 얼마나 멋져요! 겸사겸사 스피치 연습도 될 테니 서로 이득이죠!"


"정말... 정말 좋네요! 그러니까... 어..." 그녀는 라벤더빛 솜털 위로 장밋빛 홍조를 띄우며 갈기를 긁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캔틀롯식 강의기법 실습을 도와 달라고 하면 주저하거든요. 그러고 보니 성함도 아직 못 들었는데, 혹시..."

"하트스트링스라고 부르세요."

"저야 감사한 일이기는 한데, 이게 어떤 건지 알고 오신 건지는 모르겠어요." 트와일라잇이 말했다. "가끔씩 너 완전 재미없다, 는 얘기를 들으니까요." 그녀는 킥킥 웃더니 한숨짓고 말했다. "시간을 좀 더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게 있지 않겠어요."

"스파클..." 나는 그녀를 똑바로 보고 말했다. "역시 똑똑한 지성인다워요. 포니빌에 있는 동안은 제 시간이 그쪽 시간이라고 생각하세요." 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줄 때 받아 먹어야지 나중 가서 딴소리하면 안 되잖아요."

"그렇다면 좋아요!" 트와일라잇은 방방 뛰고 싶은 충동을 꾹 억눌러 보려는 듯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히히히히—아이쿠! 으음... 어머나. 옆길로 새도 너무 샜네요, 그렇죠? 하하... 자, 그럼 뭘로 공부해 볼까요? 책 가져오시지 않으셨어요?"

"네? 아... 네. 가져왔죠." 나는 어둠 강림의 시대에서 온 고서를 들어올렸다. 날숨과 함께 고서가 우리 사이로 날아왔다. "포니빌에 더 오래 있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 이제 이거 반납하려고요." 나는 침을 삼켰다. 머릿속에는 아홉 번째 비곡이 흐르고 있었지만, 그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우리의 대화에 정신을 집중했다. "스파클 씨네 꼬마 용 사서한테 고맙다고 말씀 좀 전해 주세요. 그 친구 덕에 이 자료도 빌려 볼 수 있었거든요."

"하는 김에 혼도 좀 내야겠네요. 대출이력이 안 남아 있던데." 트와일라잇이 얼굴을 찌푸렸다. "대출했으면 대출했다고 기록을 남겨 놔야 하는데 없더라고요. 아무래도 잔소리가 좀 부족했던 모양인데..."

"에이, 살살 해두세요." 나는 빙긋 웃었다. 염동력으로 붙잡은 책을 한 번 더 흘끗 쳐다보았다. "그렇다 해도, 이걸 그쪽처럼 귀하게 다루려고 할... 것 같지는..." 목소리가 잦아들며 눈이 가늘게 뜨였다.

"하트스트링스 씨?" 트와일라잇의 목소리가 울렸다. 웅얼대는 듯한 숨소리에 당황과 염려가 뒤섞여 있었다. "괜찮으세요?"

차라리 설명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법했다. 나는 책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다 흐려져서 보이지도 않는, 무가치한 고대 월어의 파편밖에 적혀 있지 않던 자리에, 전혀 다르고 분명하게 읽히는 무언가가 새겨져 있었다. 또렷하고 굵직한 글자로 쓰인 글이, 이 세상 것 같지 않은 푸른색으로 반짝였다.

오래된 책의 갈색 장정 위로 새겨진 글자는 너무나 분명하게 읽혔다. "궁창의 야상곡Nocturne of the Firmaments : 앨러배스터 코멧후프 박사Dr.Alabaster Comethoof의 연구 기록" 이라고 쓰여 있었다. 나도 모르게 입이 떡 벌어졌다. 나는 무감각하게 책을 펼쳐 페이지를 휙휙 넘겼다. 책장 하나하나마다 차가운 파란색으로 쓰인 글줄과 도표, 악보, 그리고 다시 빽빽하게 들어찬 글줄이 적혀 있었다. 나는 어느 한 지점에서 멈추어 맨 앞의 기록을 읽었다. "......버려진 자들 위에 군림하여 궁창 사이의 세상을 자유로이 풀어줄 자로다. 고대의 곡이 태어나지 못한 자를 태어나게 하고, 그녀의 백성들을 미래영겁......"


"허..."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그래, 이게 다르군."

"뭐가요?"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내 어깨에 가까이 기대서서 고서를 쳐다보고 물었다. "어디 훼손된 데 없는 거죠?"

나는 놀라서 물었다. "저기... 이 글자 모르시겠어요?"

"뭐 당연하죠." 트와일라잇이 싱긋 웃으며 끄덕였다. "고대 월어 문자거든요. 아는 사람은 극소수지요. 저도 아주 숙달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알아볼 정도는 된답니다. 헤헤..."

나는 그녀를 쳐다보다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뭐가 달라졌길래 이렇게 된 것인가. 트와일라잇이 보기에는 전과 마찬가지인 사어로 된 고서일 뿐인데, 왜 나는 이 문자를 또렷하게 알아볼 수 있는 거지?


그 이유를 생각해 내자, 낯선 사람의 부엌에서 받은 포옹처럼 따뜻한 느낌이 가슴에 찼다.

"진혼곡..."

"하트스트링스 씨, 그건 무슨 뜻이죠?"

"별 거 아니에요." 나는 책을 탁 덮었다. 신비로운 푸른 글자가 함께 사라졌다. 나는 소꿉친구를 향해 차분히 웃으며 말했다. "그... 조금 늦게 반납하면 혹시 폐가 될런지... 싶은데 혹시..."





무의미한 것은 없다.

일생을 건 탐구를 포기하지 말자. 모든 길은 그 앞에 길이 이어져 있는 한 끝내 어디로라도 닿기 마련.




즐거운 팬-아트 소개 시간.

SS&E 아저씨가 친절하게도 데비앙 계정을 파서 빽그라운드 포오니 팬아트를 수집해 두신 덕에 제 수고가 많이 줄었읍니다. 이번 장에서는 라이라가 뭔가 이상하고 그로테스크하며 끔찍한 곳으로 공간이동한 장면이 나왔지요. 이 영역을 묘사하는 팬아트가 생각보다 꽤 되던데, 그림 제목에 스포일러성 정보를 달아놓은지라 그래도 괜찮은 것들로 퉁치겠습니다.

 

Sing my Song ... by Assarak on DeviantArt

 

www.deviantart.com

 

 

!Spoiler! The Firmaments =Background Pony fanart= by WillhemTier on DeviantArt

 

www.deviantart.com


여담이지만, 빽그라운드 포오니가 대단하긴 대단한지 팬픽의 팬픽이 있습니다. End of Ponies 같은 경우에도 팬픽의 팬픽으로 Red Wings가 있었지요. The Crimson Sunrise라고 19~20장, 엔딩 시퀀스를 바꿔놓은 3차 창작이 있어요. 제가 19장까지 옮기는 걸 못 기다리시겠다면 미리 20장까지 다 읽으시고 그걸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권장하지 않습니다마는, 그냥 그런 게 있구나 정도로 알아두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하 미주


*1 I have seen the land between the firmaments. Firmament는 기본적으로 창공, 창천으로 번역되며 신화, 종교적 맥락에서 궁창穹蒼으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크리스트교에서는 천주가 천지를 창조한 기간 중 둘째 날 지구를 덮고 있던 깊은 물(primal sea, abyss, tehom)을 나누는 경계가 됩니다(창1 : 6-8). 여기서는 사람의 이해를 넘어서는 신화적 공간으로서의 성격을 반영하기 위해 궁창으로 옮깁니다. 성서의 번역어 Firmament는 히브리어 shamayim과 raqia를 동시에 의미하는데, shamayim은 '하늘'과 '아주 높음'을 뜻하는 sham과 '물'을 뜻하는 mayim을 합친 것입니다. raqia는 금속을 두드려 접시를 만들듯 두들겨서 얇게 편다는 의미의 raqqə에서 온 말이지요.

창세기에서는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을 나누고, 궁창을 하늘이라 부릅니다. 궁창 위의 물은 수증기에서 발생하는 비와 눈, 우박 같은 것이며 궁창 아래의 물은 바다, 강, 지하수 등을 말합니다. 노아 홍수를 묘사한 구절들을 살펴보면, 하늘 창문으로 물이 쏟아진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신학에서 하늘은 여러 계층으로 나뉘어 있는데, 하늘 창문을 말하는 구절은 둘째 하늘에 비, 눈, 우박 등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다는 믿음에 근거한다고 할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살펴보면, between the firmaments는 두 세계 사이의 세상이라는 표현이나 두 하늘 사이의 세상이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어원을 감안하여 이 세상의 하늘 밖에 존재하는 세상이라고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참고한 영문 위키피디아의 삽화를 참고하시면 이해가 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각주에 흠결이 있는 것은 너그러이 봐 주십시오. 무교라서 잘 모릅니다. 정식 출판물 각주 다는 것도 아니고 한낱 인터넷 팬픽션 각주 다는데 신학 탐구를 하는 건 과하지 않습니까. SS&E가 모티브를 따왔을지는 모르지만 신학적 내용을 주입해서 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장미의 이름> 급이 아니면 그런 짓 해 봤자 욕만 먹기 좋지요.

 

Firmament - Wikipedia

The sun, planets and angels and the firmament. Woodcut dated 1475. In biblical cosmology, the firmament is the vast solid dome created by God on the second day to divide the primal sea (called tehom) into upper and lower portions so that the dry land could

en.wikipedia.org


*2 일반적으로 Twilight은 황혼으로 옮깁니다. 다만 지금까지 나온 항아비곡 씨리즈를 잘 살펴보면, 시간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는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Prelude to Shadows → #2 Sunset Bolero → #4 Darkness Sonata → #7 Threnody of Night → #8 Twilight's Requiem으로 연결되지요.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면(#1) 황혼이 내려앉고(#2), 그 끝자락에서 밀려오는(#3 March of Tides) 어둠(#4)이 다가서면 별과 달(#5 Waltz of Stars, #6 Moon's Elegy)이 뜨는 것입니다. 그 결과 깊은 밤(#7)이 되는 것이죠. 이런 의미에서 보면 새벽이 밝아오는 즈음의 어스름을 묘사하는 것이 적합합니다. 다음 문장은 앞으로의 내용을 스포일러하는 내용이니 굳이 보시고 싶으신 분만 드래그하셔서 보십시오. 비곡은 8장부터 새벽을 향해 전개됩니다. 또한 어둠이 걷히기 시작하면(#8) 한없는 적막 속에 깨어질 것이고(#9), 그 자리에서 새벽이 옵니다(#10).



*3 Great Canterlot Eclipse. 예전에는 모택동의 문화대혁명을 직유하는 의미에서 문화대침체라고 옮겼으나, 그 실질을 따져보면 내전 중 나이트메어 문에 관한 기록을 없애서 자세한 진실을 백성들이 알지 못하게 하는 정부 주도 기록말살에 가깝습니다. 대월식이라는 표현은 그림자가 달을 가려 없애는 것처럼 관련된 모든 사실을 추적해 없애고 공백(어둠)만 남긴 점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죠. 언젠가 완역하면 싹 개정하겠습니다.


여담. 제목을 처음에는 창공蒼空이라고 옮기려 했습니다. 금방 알아듣기도 쉽고, 어감이 굉장히 좋거든요. 창천蒼天은 그... 창천이사 황천당립蒼天而死 黃天當立이 나올 것 같지 않습니까. 황건적이라는 거에요. 막판까지 제목을 기존에 옮겨놓은 창공 그대로 갈까, 궁창으로 바꿀까 고민 꽤나 했습니다. Industry 옮기면서 달의 비가를 항아비곡으로 고쳤었는데, 그때처럼 신화적 이미지를 유지하는 방향이 적절할 것 같아 궁창으로 갔습니다. 궁창, 궁창. 어감이 썩 좋은 말은 아니네요.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그대로 가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