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에게.
생의 마지막에 무엇이 가장 소중할까? 지나온 인생의 궤적이 전부 또렷하게 기억나려나? 다른 사람이 자신의 유산을 계승해 주기를 바랄 수도 있지 않을까? 이 두 가지가 사람을 보다 영속적인 존재로 만들어 주지 않을...... 적어도 그런 느낌은 들지 않겠어? 자신의 성취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느끼는 힘을 희생하더라도 우선 성취부터 이루고 보는 삶이 더 우수한 것일까?
음악이야말로 사람을 이루는 근간과 사람의 감정 모두를 담는 그릇이자 타임 캡슐이지. 사람의 실존을 증거하는 모든 말들은 그 짜임새가 얼마나 정교하게 잘 구성되어 있는지와 관계없이 어느 한 지점에서만큼은 반드시 앞뒤가 안 맞게 되거든. 뭐 그렇다 쳐도 사람마다 다른 것도 사실이니까.
그렇더라도, 무엇이 중한가에 관한 논의는 계속해 보아야 해. 세상에서의 허락된 시간이 우리 모두에게 각자의 흔적을 남길 여지를 허락하기만 한다면, 이왕 남길 거 더 크고 바람직한 발자취를 남겨야 하니까. 사람 하나하나는 빛나는 우연의 산물이며 동시에 찬란한 존재이니, 작은 돌과 태산, 대륙에 이르기까지 그 무엇도 만들어 낼 수 없는 소리를, 우리는 만들어 낼 수 있어. 그러니 각자의 음악은 단순히 청음의 대상으로 그치는 게 아니야. 마땅히 재청의 환호를 받아야지.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자아낸 음악에 부득이 발굽을 담가야 하는 상황이 되면, 내가 모든 책임을 진다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거야.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소리를 내기 때문에 아름다운 거니까. 이 소리라는 건 말이지, 누가 내라고 해서 내는 게 아니고 들으라고 해서 듣게 되는 게 아니거든. 꼭 들어야만 한다면야, 최대한의 경의와 존중을 먼저 표한 다음에 들어야 하는 것이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원작자 입장에서 가장 기분 좋은 일은 관객의 재청일 거야. 그것이야말로 천지창조 이래 모든 노래의 종착역이니.
반짝반짝하게 닦아 놓은 레인 앞에 의자가 여럿 놓여 있었다. 래리티가 급히 달려 들어옴과 동시에 볼링핀이 시원한 포효를 내지르며 쓰러졌다. 래리티는 자리에 멈추어 숨을 헐떡이면서 목에 두른 비단 스카프를 급히 풀어헤쳤다. "늦어서 미안!" 볼링장 한가운데 벌써 모여 있던 다섯 친구들에게 래리티가 피로에 찬 미소를 짓고 말했다. "오늘 안에 마무리해야 할 드레스가 엄청나게 쌓여서...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겠지......"
"됐어, 됐어. 도착했으니까 이제 서로 몇 점씩 내나 대결할 수 있잖아, 그럼 됐지!" 스코어보드 앞에 앉아 있던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레인 앞에 서 있던 것은 애플잭이었는데,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공을 굴리고 말했다. "이제 세 프레임 쳤거든. 네가 안 와서 일단 플러터샤이가 대신 쳤는데 괜찮겠어?"
"래리티, 그게......" 플러터샤이가 입을 꾹 다물며 새빨갛게 물든 얼굴을 두 앞발굽에 든 한 쌍 볼링화 뒤로 숨겼다. "한 번인지 두 번인지 거터*1에 공을 빠뜨린 것 같은데......"
"그렇게 겁먹을 거 없어 자기." 래리티가 발굽을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그러고는 트와일라잇에게 대단히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근데 자기, 난 여기 놀러 온 건 아닌데 어떡하지? 저 볼품없는 것들을 커다란 공을 던져 굴려서 맞추라니, 난 절대 못 하겠어! 그렇지 않아도 알로에 로터스네 스파에 가면 더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잖아. 게다가 시설 이용객들마다 돌려 신었을 이 끔찍한 신발을 발굽에 끼워야 하다니, 목에 칼이 들어오더라도 그런 자해는 할 수 없어."
플러터샤이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들고 있던 반들반들한 볼링화를 툭 떨어뜨렸다. "그러게! 더러워라!"
"더럽다니 무슨 소리야 플러터샤이! 무조건 소독, 살균해서 쓰게 돼 있단 말야. 절대 아무 문제 없다니까!" 트와일라잇이 헛기침하고 래리티 쪽을 쳐다보았다. "대연회도 벌써 지난 주에 끝났겠다 하루 저녁 정도 볼링 치는 게 뭐 어때서 그래 래리티! 좋아할 것 같았는데!"
"그 뭐 어떤 게 다름아닌 '대연회' 끝난 뒤 하고 싶은 것들 중 그나마 나은 것이기 때문이지." 래리티가 눈을 굴리며 말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이 괴상망측한 놀이를 정기적으로 모여 같이 하고 싶어하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다트를 던지거나 배드민턴을 치거나, 그 무엇을 하든지 내가 네 친구인 한 나에게는 아무 상관 없다는 거야." 래리티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그냥 앉아만 있을게. 다음 주쯤 되면 적어도 끓는 물에 발을 담가 볼 용의가 생길지도 모르지.*2" 래리티는 플러터샤이 옆에 있던 빨간 의자에 가 앉았다. "그냥 좀 기다려 줘. 그럼—악 악 아아아아아악!" 그녀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의자에서 튕겨져 나오듯 뛰어나와 미친 듯이 엉덩이를 비벼댔다. "껌 붙은 거지?! 더러워 죽겠어 정말!"
트와일라잇이 한숨지었다. 볼링핀이 무너지는 파열음이 들려왔다.
"아오, 젠장." 핀 하나가 쓰러지지 않고 서 있는 꼴을 본 애플잭이 귀를 축 늘어뜨렸다.
"오오오오오우! 이게 다 뭐람?" 레인보우 대쉬가 얄미운 웃음을 지으며 애플잭 주위를 빙빙 돌았다. "사과가 어디 이상한 데로 떨어지기라도 한 모양이야?"
"그랬엉?!" 핑키 파이의 얼굴이 그 사이로 갑작스레 디밀고 들어오더니, 애플잭을 보고 말했다. "혹시 초콜릿 호수에 빠졌낭?—으앗!"
애플잭이 핑키를 한쪽으로 밀어 치우고 레인보우 대쉬를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았다. "우리 동네 사람들 중 요 10년 동안 퍼펙트 게임*3을 달성한 인간이 하나도 없거든? 어디 얼마나 잘 하나 보자, 이 똥파리 같은 것이!"
"네 꿈 속에서나 말이야, 뾰로롱!" 레인보우 대쉬가 두 발굽에 침을 탁탁 뱉더니 슥슥 문지르고 가장 가까이 있던 공을 잡았다. "완벽하다면 또 나지, 눈 닦고 잘 보기나 하셔!"
"그 같잖은... 으음... 꼴값 좀... 그만 떨어!" 애플잭이 표정을 확 구겼다. "눈 닦기는 개뿔, 옥수수밭에 던져 놓고 눈만 갖고 알아서 살아 나오라면 그러지도 못할 것이!"
"넌 왜 항상 예로 드는 게 죄다 흙 파먹는 얘기에서 벗어나지를 않냐?" 레인보우 대쉬가 레인을 쏘아보며 각도를 잡고, 공을 단단히 쥐었다. "그럼 내 궁둥짝에 키스할 준비나 하셔!"
"떼돈 버는 일 아니면 그런 짓 안 한다, 이년아."
"이런 이런, 정말 볼거리가 풍성한걸?" 래리티가 마침내 그나마 괜찮은 자리를 잡아 앉고 말했다. "그래서, 지금 누가 1등이야?"
"으음..." 플러터샤이의 얼굴이 붉어졌다. "난 아냐."
"뭐 아직 시간 있으니까, 직접 보면서 확인해 보는 것도 좋겠지."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말했다. 레인보우 대쉬가 힘껏 던진 공이 엄청난 소리와 함께 레인 위를 구르는 순간, 트와일라잇은 면전에 볼링 가이드북을 띄우고 그 내용을 읽었다. "여기 보니까 천상력Celestial Era 957년에 필리 프레임스Filly Frames란 사람이 전국체전에서 15점 차이로 우승을 놓치고 돌아왔다고 적혀 있네."
"그거 흥미로운걸." 핑키가 근처 가게에서 주스 한 잔을 사와서 래리티에게 건넸다. 래리티가 우아한 미소로 핑키를 맞았다. "우리가 새 역사를 쓰겠다고 여기 모인 건 아니잖앙."
우뢰와 같은 소리로 핀이 쓰러지는 소리가 메아리졌다. 레인보우 대쉬가 환희하며 귀 따갑게 환호성을 내질렀다.
래리티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한숨지었다. "그래, 대체로 그런 것 같네."
"내가 누구인지 모두 알고 있지! 백날 누구인지 말해 봐야 뭐해." 레인보우 대쉬가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자기 자리로 돌아와 말했다. "내가 사는 어썸 스트리트, 네가 사는 어쩜 스트리트."*4
"빌어먹을. 똥 푸는 삽을 헛간에 그냥 처박아 두고 왔네." 애플잭이 신음하며 핑키가 건넨 주스 잔을 받아들고 트와일라잇을 바라보았다. "그래, 다음은 누구 차례고?"
"잠깐만..." 트와일라잇이 점수판을 슥 훑어보다가 맨 마지막 흰 상자에 "X"자 표시를 그렸다. "레인보우 대쉬가 3프레임 연속 스트라이크네.*5 현재 상황은 이 정도야."
"이 몸이야말로 레인의 지배자라는 것 또한 명확한 상황이지!"
트와일라잇이 눈을 굴리더니 점수표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제 4프레임 시작이야. 그런고로... 오호, 래리티! 딱 맞춰 일어났구나!"
"그럴 순 없어, 자기. 알잖아? 게다가 껌에 커피 얼룩까지... 아주 질색이야."
"그래 뭐. 어쩔 수 없지. 그럼......" 트와일라잇이 턱을 긁었다. "플러터샤이? 래리티 것까지 계속 던질 거야?"
"내가 그러고 싶어할 리 없잖아?" 플러터샤이가 반문했다. 두 날개를 축 늘어뜨리더니, 슬픈 표정으로 바닥을 내려다보며 하는 말로 쐐기를 박았다. "아. 알겠어. 너희가 한 번 던질 때 두 번은 던져야 그나마 너희랑 비슷한 점수가 나올 가능성이 생겨서 그러는 거구나......"
"아, 아냐!" 트와일라잇이 외쳤다. "그런 거 절대 아냐!"
"우우우! 우우우우!" 핑키 파이가 트와일라잇의 면전에서 폴짝폴짝 뛰며 말했다. "그럼 내가 래리티 대신 던질랭! 그럼 저기 링에 공 더 던질 수 있잖앙!"
"핑키..." 트와일라잇이 얼굴을 찌푸리며 볼링장 뒤편을 가리키고 말했다. "그 링이라는 게 우리 바로 뒤 상점가 얘기하는 거잖아! 지금 볼링 치는 거랑 하등 상관 없는 거라구! 이해해?! 저기 핀 쓰러뜨리는 거라니까?!"
"그랭, 그래도 공 두 번씩 더 던질 수 있으면 보라색 원숭이 따낼 정도로 점수가 쌓이지 않을까아!"
트와일라잇 스파클은 벙쪄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다시 점수표로 시선을 돌렸다. "안 되겠다. 다른 사람 끼워서 해야지."
"그러는 게 낫지 않나?" 애플잭이 하품을 참으며 자기 자리에 주저앉았다. 웃음기가 번지는 얼굴 위로 내려앉은 모자 챙을 밀어 올린 애플잭은 멀리서 들려오는 핀 쓰러지는 소리를 해변에 밀려오는 파도 소리를 듣는 양 편안한 표정으로 감상하고 있었다. "이왕 노는 거 사람 많이 끼고 하는 게 재미지니까."
"어......" 레인보우 대쉬가 멍하니 되물었다. "그럼 누굴 낄 건데?"
"내가내가내가! 내가 고를랭!"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핑키 파이가 앉은 자리에서 시선을 마구 돌려대며 주위를 샅샅이 훑었다. "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음......" 핑키의 두 눈이 가늘어지며 사냥감을 찾아 움직였다. "으으으으으으음......" 핑키가 나를 보더니 희색이 만연한 표정으로 외쳤다. "오!" 그리고는 이쪽으로 폴짝거리며 달려와 내가 앉아 있던 테이블을 반쯤 들이받다시피 하며 그 위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지인짜, 지잉짜 심심해 보이는 분이시넹! 핀 때려부수는 데 일손이 좀 부족하다고 그러는뎅, 같이 하실래영? 넹 넹 넹?"
나는 읽던 고서에서 고개를 들고 핑키를 마주보았다. 몸이 떨렸다. 이쪽이 마음의 준비를 얼마나 하든지, 핑키 파이식으로 들이미는 데는 깜짝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를 딱딱딱 부딪치면서 물었다. "핀을 때려부숴요? 그러니까...... 그쪽 게임에 끼라는 거군요?"
"정답! 정답!" 핑키가 미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뽀글뽀글한 갈기가 출렁대는 모습이 시뻘건 먹구름을 보는 듯했다. "지금이라면 1등상으로 보라색 원숭이도 드려용!"
"야 핑키!" 트와일라잇이 뒤편에서 신음했다.
"그게... 저..." 핑키에서, 그 뒤 동아리가 모여 앉은 자리로 시선을 돌렸다. 다섯 명이 동시에 이쪽을 보고 있었다. 하나같이 즐겁고 행복하며 친절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내가 속한 혹한의 세상에서 저 자리만큼이나 기꺼이 녹아들고 싶을 만큼 황홀한 곳은 또 없을 것이다. 나는 목전의 아름다운 것들을 하나하나 재어 본 다음, 단호하게 말했다. "미안해요. 그... 공부하러 나온 거라 게임에 낄 만한 시간은 없을 것 같네요."
"고옹부?" 핑키 파이의 얼굴이 기묘하게 비틀렸다. 핑키가 이렇게 불편한 표정을 짓는 것 자체가, 코앞의 상황이 도저히 말도 안 되는 것임을 방증하는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숙제를 할 거면 여기보단 용이 파놓은 둥지로 들어가서 하는 게 훨씬 나을걸영!"
"꺄아아아!" 플러터샤이가 앉은 자리에서 몸을 홱 낮추었다. "핑키, 제발. 내가 그 'ㅇ'자 단어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잖니!"
"에이, 깜놀한 괭이처럼 굴 거 없잖앙! 네 주변에서 엔젤만큼이나 'ㅇ'자 단어가 어울리는 게 또 없다고 레인보우 대쉬가 그러던걸. 엇, 잠깐. 그건 다른 'ㅇ'자인가......"
"그런 적 없거든!" 레인보우가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애플잭은 옆에서 빙글거리고 있었다.
핑키가 다시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몸도 이쪽으로 돌려세우고 물었다. "지인짜로 묵직한 공 굴려서 핀 뺑소니치는 끝내주고 놀라운 게임에 낄 생각이 없는 거죵?"
"핑키..." 래리티의 나긋한 목소리가 시끄러운 길목을 지나 건너왔다. "점잖은 분 그만 괴롭히고 이리 와."
"아뇨, 전 괜찮아요." 나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친구분들이랑 좋은 시간 보내세요. 저는 저대로 시간을 보내죠."
"오키 도키 로키!" 핑키가 몸을 돌려 통통 튀어가며 말했다. "시간은 보낸다고 보내지는 게 아니에영! 행운을 빌어용!"
나는 발굽을 흔들어 핑키를 배웅했다. 내 곁을 떠난 핑키는 다시 트와일라잇 곁에 감도는 온기 속으로 녹아 들어갔다. 트와일라잇 주변은 항상 따뜻했었다. 나는 한숨지으며 발굽을 떨어뜨렸다. 억지로 시선을 잡아떼 이쪽으로 돌려놓으며 후드 소매를 다듬고, 다시 코멧후프가 남긴 미친 소리에 집중하기로 했다. 생각대로 되진 않았다.
가끔씩 내가 저 여섯을 스토킹하기라도 하는 것 같은 점은 나도 안다. 헌데, 이게 과연 스토킹의 범주에 들어갈까? 마음만 먹으면 저들과 한 집에서 연속으로 30일을 보낼 수도 있지만, 저들은 내가 거기 쭉 있었다는 사실을 영영 알 길이 없다. 마음으로나마 저들과 같이하며 저들의 화사한 온기 언저리에서 어정거리는 것을 죄라고 규정할 수 있는가? 그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다. 나에게 해가 되는 것 또한 아니다.
나는 한숨지으며 코앞에 놓여 시퍼렇게 빛나는 글자를, 아직 더 건질 것이 남아 있기라도 한 양 다시 들여다보았다. 코멧후프가 남긴 일지를 읽기 시작한 바로 그 날, 내가 거기서 뽑아낼 수 있었던 정보는 기껏해야 코멧후프 본인이 전혀 그럴 의도가 아니었음에도 내게 기록을 넘겨주는 그림이 나왔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이틀 전, 나는 내가 뽑아낸 정보를 가지고 트와일라잇을 만나러 갔다. 실수였다고 생각한다. 나와 같은 저주를 짊어졌던 사로스 유니콘이 남긴 지워진 역사의 기록을 가지고 논의해 보려고 했지만, 혼란만 가중되었다. 트와일라잇이란 사람이 얼마나 많이 배운 사람이건 간에, 내가 저주받은 신세라는 것 외에는 납득시키기가 어려우니 그냥 트와일라잇의 도움은 간접적인 것에 그쳐야 한다는 것만 알았다. 가능하다면 트와일라잇에게 내가 소꿉친구였다는 점까지 이해시키는 짓은 최소화하려 한다. 소꿉친구로 돌아가 봤자, 꺼져 가는 촛불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니.
코멧후프의 기록으로 알 수 있었던 사실을 트와일라잇과 공유하려던 것은, 루나 공주님의 직속 작곡가가 역사에 남지 않은 경위를 파악할 만한 지식이나 자료출처를 구하려던 이유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를 집어삼키려는 이 저주를 코멧후프 또한 짊어지고 살았기 때문에, 그 또한 끔찍히도 고독한 삶을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코멧후프라는 사람에 관하여 다른 사람과 논의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 또한 맞이하게 될 두려운 미래가 아니라 평범한 역사 속 인물로 그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트와일라잇 같은 사람이 나를 바라보고, 그 따뜻한 눈길을 나 또한 보고 있으면 평범하게 시선을 교환하는 게 어떤 것인지 절로 떠오른다. 그리하여 나는 코멧후프의 뒤 전철을 밟는 그림자가 아니게 된다.
코멧후프에게 전부나 다름없었던 한 사람의 기억이 갑자기 머릿속에 떠올랐다. 코멧후프를 덮친 저주가 그의 생명을 산산이 찢어발겨 버릴 때, 그와 평생을 함께하기로 맹세한 반려 또한 마찬가지의 광기에 휩쓸리지 않았던가. 코멧후프는 모셔야 할 공주에 충성했고, 아내에게는 좋은 남편이었으며 몸담은 도시를 사랑하는 사내였다. 그 말로가 어떠했는가? 나 또한 그렇게 될 것인가? 내 머리로 이해하자니, 너무나 괴로운 생각이었다. 볼링 핀과 공이 부딪치는 굉음이 순간 어마어마한 천둥으로 변해 귓가를 때렸다. 가져온 물건들을 가방에 급히 쓸어담고, 희망과 기상천외한 매력으로 가득한 그 곳에서 급히 달려 달아났다.
코멧후프의 기록을 사흘 밤을 새워 가며 독파한 뒤에도 나는 간단히 눈을 붙이는 것조차 하지 않았다. 자기는커녕 포니빌을 싸돌아다니느라 실시간으로 손실되고 있는 수면 시간이 어느 정도인지는 마을 어귀에 선 종탑의 종소리만 듣고도 알 수 있었다. 오전 여섯 시였다. 지평선 너머로 빛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잠든 마을에 나 혼자만 깨어 있었다. 나는 그렇게 아침을 맞이하는 것을 좋아했다. 새벽과 아침 사이는 고요했고 행복했으며, 한편으로 오싹하기도 했다. 희미한 금빛 태양광 아래로 빽빽한 안개가 부박한 구름으로 합쳐져서 호수 위를 떠다녔고, 부들개지와 풀잎이 그 아래에서 흔들렸다.
보통 이런 아침을 맞이할 때는 어디 적당한 곳을 골라잡고 서서 리라를 붙들고 아무거나 몇 개 곡을 퉁기면서 일찍부터 하루를 시작하는 부지런한 사람들을 구경하곤 했다. 캐럿 탑이 수레를 끌고 나오고, 더피 후브즈는 배달 경로를 따라 돌며 우편물을 돌리는 가운데 모닝 듀와 암브로시아가 아침 산보를 도는 게 일반적인 풍경이었다. 전부 여느 날과 다름없는 가운데, 나 혼자 기진맥진해 있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면 아무것도 없는 자리 위로 피로 얼룩진 캔틀롯 거리, 뭐라 딱 잘라 말할 수 없지만 마력이 엉긴 듯 보라색 불꽃으로 타오르는 가운데 신기루로 보이지 않는 몸뚱이가 여럿 떠다니는 모습, 그리고 코멧후프의 머리 위에 나타났다는 목 매달린 시신의 환영이 일렁거렸다.
코멧후프 박사가 "어스름 진혼곡" 을 연주한 후 현실 밖의 세계를 보게 되었다는 것이 기록의 내용이다. 나 또한 진혼곡을 연주하지 않았는가. 시간이 꽤 흘러 그 영향도 많이 사그라들었을 것이지만, 차마 어느 한 곳을 오래 쳐다보고 있을 자신이 없다. 내 의문에 대한 대답과, 내 막연한 두려움을 확인해 줄 무언가가 내 앞에, 포니빌에 나타날 지 모르기 때문이다.
불변의 밤을 지새우며 읽어댄 것이 코멧후프의 기록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스름 진혼곡"을 연주한 뒤, 불안불안한 마음으로 내가 쓴 일지를 처음부터 읽었다. 내심 기대하던 것은 찾지 못했다. 그럼에도 내가 써내려간 기록은 불현듯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몇몇 글자는 섬뜩한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는데, 쓰였다기보다는 종이의 표면 위를 부유하는 듯싶었다. 이런 글자들을 볼 때마다 거의 곧바로 그 여자의 두 눈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코멧후프란 사람에 대하여 아무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이름 없는 자들의 영역에 나도 모르게 발을 디디고 돌아왔을 때, 그 여자의 한 단면이 여덟 번째 비곡의 멜로디를 붙잡고 나를 따라 들어온 듯했다.
그 여자의 노래로 코멧후프의 인생은 나락으로 처박혔고, 코멧후프 본인도 사실로 받아들였듯 그가 살아야 할 현실의 원리도 뒤바뀌어 버렸다. 그러면 내 실존은 거기에 얼마나 영향을 받았을까. 나라는 사람을 규정하는 근간이, 어느 정도나 그 여자에게 빼앗겼단 말인가. 이제 실존이란 개념이 의미가 있기는 한가. 아직 내가 더 믿을 수 있는 게 남아 있는가. 그 여자는 태어나지도 못한 앨러배스터와 페눔브라의 아이까지 빼앗아 갔다. 내 인생과 내 벗들까지 가져갔다. 이 세상을 꼭 가져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 잘난 야상곡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맞을 때까지 삼라만상을 난도질하고, 세상 만인을 자기의 불경스럽고 흉물스러운 노래를 한없이 따라 부르기만 하는 운명에 예속시켜야 할 이유가 있느냐는 것이다.
끝 없고 바닥 모르는 추위만 가득한 현실에 떨어진 것은 명백한 진실이다. 단 한 조각의 온기나 즐거움조차 남기지 않고 모조리 박탈당한 것이 사실이니까. 삼라만상의 장대한 역사 속에 그 어느 것으로도 흠결이 생기지 않는, 그야말로 신성불가침한 존재가 하나쯤은 있었을 수도 있었을 터이나, 세상은 그렇게 되도록 짜여 있지 않다. 그 여자는 존재해야만 했다. 모든 사상事象과 기적이 맞물리는 곳을 짓밟아 부숴야 하는 것이 그 여자였다. 자기네들을 옭아맨 고문에 심취한 끝에 스스로 평화로이 죽을 생각까지 잃어버린 뒤틀린 영혼이 병목까지 들어찬 지옥의 주인이 아니던가. 조화의 땅에 남은 것들까지 자기 땅으로 끌어들이지 않는 것도, 실은 나 같은 희생자를 찾아 돌아다니느라 바빠서일 것이다. 앨러배스터 코멧후프도 마찬가지였다. 그 여자의 노래 때문에 미쳐 버리지 않았는가. 불멸하시는 루나 공주님은 또 어떤가. 그 권능에도 불구하고 그 힘에 굴복하지 않았는가. 광인의 지식으로 머리가 꽉 차 버린 끝에 나이트메어 문으로 변모하셨을 것이다. 지식은 내버릴 수 없으니, 아마 필연일 것이다. 셀레스티아 공주님은...
그 여자의 힘에 무릎 꿇은 다른 자들에 비해 셀레스티아 공주님은 어떠하신가. 누구보다도 오랜 세월을 살아오시며 전능한 권능과 힘을 거느리고 계시지만 무엇보다도 그분의 정신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다. 조화의 영역은 이름 없는 자들의 존재를 끝내 몰라야 하므로, 이를 차단하는 과정에서 무엇인지는 몰라도 거대한 마법을 사용하셨을 것이다. 그 결과는 참혹하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폭발이었다. 그 결과로 현실세계는 이름 없는 자들에 대하여 그 어떤 것도 전해들은 바 없는 형태로 왜곡되었고, 셀레스티아 공주님 스스로도 이름 없는 자들에 관한 지식을 잃으셨다. 그것은 공주님 스스로와 다른 백성들이 감당할 수 있었다. 공주님께서 이리 되기를 선택하셨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멧후프는 진실을 보았다. '어스름 진혼곡'을 연주하고, 그 대가로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진실을 목도했다. 그렇다면 나 또한 진상을 알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셀레스티아 공주님을 알현한 일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쳐도 그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까?
지금까지의 생각을 정리하면, 알아야 한다. 알아야 하지만 알지 못한다. 물안개 자욱한 곳까지 나가 돌아다녔는데도 보지 못했다. 진혼곡을 퉁긴 다음 일지에 적어둔 장소를 따라 돌아다닌 것이 벌써 수 차례였다. 코앞에 어른거리며 빛나는 글자는 내가 쓴 것 같기는 했으나, 아무리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어도 무의식 속 진실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내 퇴색한 일기 뒤로 숨은 가혹한 진실을 목도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과학적 방법론을 들이밀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래봐야 코멧후프 박사가 했던 그대로를 따라하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코멧후프는 저주가 시작된 지점, 즉 루나 공주님의 침전으로 숨어들어 '어스름 진혼곡'을 연주했다. 확실하게 알기 위해서는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나이트메어 문이 강림하여 이름 없는 자들의 정수로 나를 물들인 바로 그 지점, 포니빌 중앙 광장으로 향해 그곳에서 어스름 진혼곡을 연주해야 했다.
나는 마을 중앙 광장으로 가지 않았다. 걸음이 그리로는 향하지 않았다. 나는 그 날 아침 마을을 휘적휘적 돌아다니다가 시립묘지에 들어섰다. 내가 보기에도 고약한 취미이긴 하다만, 때때로 시립묘지를 돌며 산책하는 경우가 있다. 밤과 낮의 경계선쯤에 선 어느 시간대에 묘지를 돌아다니는 것 정도는 평범한 일이었다. 삶은 피안의 죽음을 암시한다. 어느 시대, 어느 세대라도 통용되는 진실이다. 죽은 자들의 묘비만큼 그 사람의 삶이 얼마나 따뜻하고 행복했는지 시적으로 요약하는 것은 없다. 묘비에 한 줄 글도 적혀 있지 않은 묘지라니, 그보다도 공허한 게 또 있을까. 그런 동네가 있다면 그 동네 사람들은 전부 자기네들의 과거와 미래 모두 받아들이기 거부하는 자들일 것이다.
역사 속에는 다양한 것들이 있고, 그 중 대부분은 이름이다. 묘비만 박힌 고적한 추모공원에 죽은 자들의 이름이 반짝였다. 이름 아래로 새겨진 생몰연도는 그 자체로 묵직한 무게감이 있었지만, 이제 세상에 없는 자들을 기념하며 적어 넣은 첨언만큼이나 심금을 울리지는 못했다.
"잉크 스텝. 920 – 995. 사랑받는 아버지이자 남편으로 여기 잠들다."
"세레나데. 811 – 877. 화음 속에 잠들다."
"골든 하베스트 2세. 920 – 982. 그대의 꽃이 영원히 시들지 않기를."
"그레이셔스 실버. 922 – 988. 아내요, 어머니요, 간호사로 잠들다."
"그래나이트 셔플Granite Shuffle. 918 – "
나는 마지막 묘비 앞에 멈춰 섰다. 묘비는 창백한 흰색이었는데 가장자리는 검은색이었다. 새겨진 이름을 들여다보았다. 한 글자, 한 글자 똑바르게 박혀 있었는데 아직 죽은 날짜는 새겨져 있지 않았다. 파다 만 묘비를 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내가 죽고 나면 저 사람들이 시신마저 잊어버릴 것인가. 대충 들어다가 어디든지 값싼 땅에 그냥 매장해 버리는 것은 아닐까. 일을 하다가 중간에 자기네들이 왜 그러고 있는지 잊어버리고, 다시 시신을 보고 땅을 파다가 잊어버리기를 반복하여 끝내 내 시체를 화장터에 집어넣어 버리지 않을까. 시체를 태우고 남은 뼛가루마저 잊어버리려나?
몸을 떨며 갈기를 쓸어넘겼다. 옳지 못한 생각이다. 그런 건 패배주의자들이나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런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조화의 시대 끄트머리에서 캔틀롯 길거리를 떠돌다 광기에 절어 죽어 간 한 사내만이 내 세상 유일한 친구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내가 그래도 똑똑한 편이구나 하고 살았는데, 이제는 그럴 수도 없지 않은가. 스스로의 생각조차 확신할 수 없다면 내가 어디 기댈 만한 곳이 있을 리 없을 것이다. 이 얼마나 끔찍한 생각인지, 누구라도 정신이 나가지 않고는 못 배길 터이다.
묘지 산책도 그쯤이면 족했다. 설마 성묘하러 온 사람들이 저마다 발굽 소리를 울려대며 지나다닐 때까지 그러고 돌아다니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안개가 이끌고 온 이른 아침 포니빌, 나는 다시 그 한가운데 있었다. 이제 어딜 더 갈 수 있는가. 아직 가지 않은 곳이 남아 있는가.
"임자는 기억력이 좋으니 잊어버리는 법이 없지. 안 그렇소, 스미스 양?" 나이든 사내의 목소리가 옆에서 불쑥 들려왔다.
그 말이 나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생각하는 데 5초가 좋이*6 걸렸다. 어안이 벙벙해져서 고개를 돌려 소리의 출처를 향했다. "잘 못 들었는데요...?"
"갈기가 참으로 반짝반짝하는구려. 그레이스Grace헌티 비법 얘기 해 주셨소?"
그때까지도 나는 소리의 주인을 찾지 못하고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마침내 말을 거는 사람을 찾고 보니... 나이가 아주 많이 든 영감님이었다. 다 쪼그라든 다리 위로 관절이 앙상하게 튀어나와 있었고, 칙칙한 붉은 솜털에 덮인 노쇠한 몸이 달달 떨렸다. 목뼈가 한쪽으로 구부러져서 잿빛 갈기가 그 아래로 흘러내렸는데, 다 해진 깃발과 같았다. 노인은 근처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녹색 눈을 가늘게 뜨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대는 항상 갈기를 가지런히 다듬고 다니니 말이외다." 노인이 말했다. 그의 시선은 이쪽을 향해 있을지언정 내가 아닌 다른 곳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침과 낮 사이에서 어른거리다 사라져 가는 새벽 안개에 정신이 팔려 있는 듯싶었다. "새벽마다 초원에서 모아들이는 이슬이 아니오. 오늘 같은 새벽이 알맞겠어. 아뿔싸, 레드트롯Redtrot이 항상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으라고 했는데 말이오. 기습이라도 당하면 정신 팔고 있던 놈이 가장 먼저 죽기 마련이거든."
하릴없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선생님, 누가 누구를 기습한다고요."
"쉬이이잇!" 노인이 쪼그라든 앞다리를 들어 입가로 가져가더니 주위를 살폈다. "묻지 마시구려. 적들은 저 나무 속에 숨어서도 그대가 하는 얘기를 전부 훔쳐 듣는답니다. 오아시스에 숨기에는 몸뚱이가 너무 크지 싶으실 수도 있겠지만 적들은 거기에도 능히 몸을 숨기지요. 저번 주에 블루 오츠Blue Oats가 당하지 않았소. 그 자식은 늘 입이 방정이었소. 멍청한 자식 같으니. 레드트롯 말을 잘 들었으면 괜찮았을 터요. 레드트롯만큼 유능한 친구도 또 없거든."
"아 예..." 괜히 꿈틀대다 물었다. "혹시 근처에 계실까요?"
"누구 말이오?"
"레드트롯이란 분이요."
"허어?" 노인이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씬...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구려. 요즘들어 아침저녁으로 쌀쌀하구먼. 아직 월동 준비도 안 되었는데 말이오. 아직..."
그 때, 테라스로 통하는 문을 열고 희끄무레한 형체가 나타나 노인 곁으로 다가섰다. 노인보다 적어도 40살은 젊어 보이는 간호사였다. 흰 모자를 쓴 간호사가 빙긋 웃으며 노인에게 말했다. "셔플 선생님, 여기 계셨네요. 요즘들어 다리에 기력이 돌아오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그렇더라도 아침 식사 전에 걸으시려면 저희한테 언질은 주시고 나가셔야지요! 갑자기 나가시면 곤란해요."
"아침 식사라니? 으이? 이제 막 숙영지를 꾸리지 않았소! 가만...?" 노인이 고개를 돌려 눈을 가늘게 뜨고 간호사를 쳐다보았다. "가만... 그대는 누구요?"
"글래스 샤인, 간호사에요."
"간호사? 간호장교란 말이오? 나는 부상병이 아니오만! 당신 정말 누구요?"
간호사는 한숨을 폭 내쉬더니 애써 웃으며 말했다. "들어가실게요." 그녀는 가만히 노인을 데리고 건물 안쪽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비타민제 챙겨 드실 시간이에요."
"그레이스가... 그레이스가 부탁했소?" 노인이 오들오들 떨리는 발굽으로 이쪽을 가리켰다. "스미스 양에게 갈기 관리법을 물어보고 있었다오. 여자들이란 그걸 여자들만의 비밀로 남겨둬야만 속이 시원하겠소?"
"하하하... 여자들 갈기는 다들 저렇답니다. 이쪽으로..."
"여기가 어디요?"
"식당이지요. 친구분들도 기다리고 계세요."
"친구라? 하! 저치들 중 절반은 안면조차 트지 않은 자들이고, 나머지 절반은 안면 튼 걸 후회하는 자들이오!"
"어머, 안 그러시던데요! 어제 오후만 하더라도 브리즈 씨랑 골든 글랜스 선생님이랑 모여 앉으셔서 담소 나누시던 걸 제가 봤는걸요."
"내가 그랬었소? 그렇다면야 그 둘은 심성이 곧고 정직한 사람이겠거니..."
"그렇고말고요. 두 분도 선생님 보시면 좋아하실 거에요..."
그쯤에서 그 둘의 '대화'는 멀어져서 더 들리지 않았다. 노인의 허약한 몸 상태도 그랬지만, 이 대화 때문에 간호사가 노인을 데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데 아주 오랜 시간이 들었다. 이제까지 그냥 호텔로만 알고 있던 2층 건물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어쩐지 양로원 얘기가 거의 안 나오더라니, 이것 때문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곳과 비교해 봐도 포니빌이 유독 장년층 이하 인구 비율이 높아 보여서, 노인들은 다 어디로 갔나 항상 궁금했었다. 일 년 동안 모르기는 했으되, 이제라도 그 답을 찾았다. 이해가 되는 일이기는 했다. 블루 밸리만큼은 못해도 우리 나라에서 포니빌만큼 평온하고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곳이 또 없기 때문이다. 저 멀리 캔틀롯이나 메인해튼 출신 노년층이 보기에 내가 기거하는 오두막은 피서를 즐기기 적합한 여름 별장으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것도 언젠가 내가 오두막을 남에게 빌려줄 수 있는 기쁨을 누릴 때나 가능한 이야기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길바닥에 가만히 서서 시간을 버리고 있노라면, 쓸데없는 잡생각을 하느라 그랬다는 말밖에 적당한 핑계거리가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실은 좀 다른 문제였다. 가엾은 그래나이트 셔플 선생에게 온 신경이 몰려 있었다. 얼굴에 떠다니던 공허한 표정과, 글래스 샤인이라는 간호사의 부축을 받아 겨우 옮기는 후들대는 걸음으로 양로원 식당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생각했다. 코멧후프 박사도 자기를 옭아맨 저주에서 몸을 빼냈다면 어땠을까 싶었다. 그 사람도 저렇듯 고독하고 남들과 다를 바 없는 운명을 맞이했을까. 그랬다면, 그것이 저주이든 아니든, 과연 '휴식'이라 칭할 수 있을 것인가.
더 알고 싶다는 호기심은 가슴 깊이 눌러두고 마을 중앙 광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기거하는 도서관 앞까지 와 있었다. 개관 시간만 되면 짊어질 수 있을 만큼 많은 책을 집어 앉을 생각이었다. 그 날 공부해야 하는 분량만 세어 봐도 캔틀롯의 역사를 다룬 역사서 여덟 질에 달했다.
단 한 페이지도 숙독하지 못했다. 도서관에 떠도는 침묵에 젖어 쉬며 몇 분 동안 가만히 생각했다. 무엇인가 고독하고 차갑고 애달픈 것이 나를 갉아대고 있었다. 집은 책을 전부 스파이크에게 넘겨주고,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도서관을 나섰다.
포니빌 양로원에 들어섰다. 불러세우는 사람은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으레 그렇지만, 몇몇 장소는 그닥 익숙하지 않다. 양로원에 출입하려면 수도 없이 세워 놓은 출입통제 시설 너머에서 나를 노려보며 내 신상을 캐묻는 사람에게 꼬박꼬박 대답해 줘야 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양로원을 일종의 교도소나 정신병원 비슷한 곳으로 여기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거나, 나에게도 닥칠 운명이라는 데서 느낀 공포가 내게 그런 무지를 불어넣은 것이 아닐런지.
양로원 홀을 따라 걸어 들어가는 동안 간호사와 노인을 여럿 마주쳤다. 한결같이 빙긋 웃으며 환영해 주었다. 딱히 뭘 찾아서 들어온 것도 아니면서 이리저리 기웃거리다, 시설 북쪽의 한쪽 공간에 들어섰다. 왕립 영재 유니콘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한 번도 들은 적 없던 가락의 파편이 귀에 감겼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전 음악 중에서는 비교적 후기에 작곡된 것으로, 세상에 나온 지 50년 하고도 조금 더 된 악곡이었다. 안타깝게도 그 곡의 제목이 무엇인지는 기억하고 있지 못하나, 특유의 양식적 모티프를 보아하니 작곡자가 누구인지는 충분히 알 만했다. 작곡자의 이름은 가넷 헤이스트링스Garnet Haystrings로, 천상의 시대 중반에 발발한 대對 그리폰 전쟁 이후 최대 무력 충돌이었던 제브라하라 내전 당시 파병된 국군에 여러 편의 악곡을 제공한 유명 작곡가이다. 가락의 몇 조각을 듣는 것만으로 중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던, 침략군에 맞서 동맹국을 수호하기 위해 머나먼 이국의 땅으로 행군하는 용감무쌍한 국군의 모습을 그린 기록화가 머릿속에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러했으니 셔플 선생이 레코드 플레이어를 틀어 놓고 행진곡을 들으며 방에 가만히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모습은 생각보다도 놀라운 것이었다. '기습' 등 종잡을 수 없는 말만 늘어놓던 것이 이해되며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나는 문간 너머에 서 있었다. 고대 시대를 바라보는 외계인이라도 된 듯했다. 방은 좁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병원용 침대 주변의 벽에 온갖 형형색색의 장식이 붙어 있지 않았다면 영락없는 감옥이었다. 금빛 명판 여러 점과 유행 지난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찍힌 흑백사진 몇 장과 몇십 년 전의 신문에서 오려 낸 기사, 찬란하다는 말이 아깝지 않은 농가의 풍경을 옮겨둔 그림 몇 장이 대표적이다. 방 가운데에는 체스 테이블이 하나 마련되어 있었고, 그 옆에는 의자에 앉아 노인이 쌕쌕 자고 있었다. 영영 시작될 일 없을 대국을 예비한 흑과 백의 군세가 체스판 위에 가지런히 도열했다. 방으로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통했다. 이제 보니 방에 난 창 위로 늘어진 커튼이 바람에 날려 흔들리고 있었고, 그 사이로 밝은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흐으으음..." 혼자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쾌적한데."
"구에에에엣취!" 노인이 해수기침과 함께 잠에서 깼다.
"으아아앗!" 문틀에 거의 부딪치다시피 하며 펄쩍 뛰었다.
"콜록... 쿨럭!" 으으음..." 노인이 노쇠한 몸을 느릿느릿 앞으로 기울였다. 눈에 뭐가 끼인 듯 흐릿한 시선이 이쪽을 향하더니 맑아졌다. "흐으으으으음... 하여간 때 하나는 기막히게도 못 맞추는구만!"
"저기..." 경련하는 노인의 사지나, 한쪽으로 기울어진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으려고 용을 쓰며 말했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갈 길 갈게요—"
"왜 스탈리온그라드 놈들은 길거리 공연을 못 하게 하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지?!" 노인이 툴툴댔다. 그러더니 눈을 더 번쩍 뜨며 말했다. "자네, '떠나시오, 데이지' 라고 아나?"
무슨 말인가 싶어 멍하니 답했다. "네?"
"즉슨, 하프를 퉁길 줄 아는지 모르는지 묻는 게요!" 노인이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설마 가수라고 발뺌할 셈은 아니겠지! 가수들이란 그대 같은 갈기를 하고 다니지 않거든!"
"어어..." 뭐라 말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다가, 금빛 리라 형상을 한 내 큐티마크로 시선이 향했다. "아! 음... 하하. 뭐, 리라를 퉁길 줄은 알지요. 하프랑 그렇게 큰 차이는 없습니다마는—"
"블루 오츠 녀석, 이빨로 하프를 퉁길 줄 안다면서 얼마나 뻐겨대던지." 그래나이트 셔플이 횡설수설하며 말했다. "그래 어스 포니가 이빨 하프는 무슨 이빨 하프냐고 늘 딴죽을 걸었더랬지. 그런 건 유니콘들이나 하는 거라고 말이오. 당최 듣지를 않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리는 게요. 그러니 살아서 여기 없는 게지..." 노인은 자기 말에 발목을 잡혀 꾸벅거리며 창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니 살지 못한 게야... 그래서... 그래서..."
그리고 잠시 아무 말도 없다가, 내가 먼저 어색하게나마 말을 꺼냈다. "가넷 헤이스트링스를 좋아하시나 봐요." 레코드 플레이어를 가리켜 보였다. "캔틀롯 음악계에서는 전설이나 다름없지요. 원더볼트가 에어쇼를 할 때마다 이 사람 곡을 연주하거든요."
"젊은이들이 죽으러 가는 걸 두고 수다스러운 심경 고백밖에 할 줄 모르는 거만한 버러지에 지나지 않소." 노인이 화가 난 듯 툭툭 내뱉었다.
나도 모르게 이를 악물며 움찔했다. "어어어어어어... 그렇군요..." 다시 몸을 앞으로 하고 물었다. "어, 그러면 왜 그 사람 곡을 틀어놓고 계신 건가요?"
"박자 하나는 마음에 들거든." 노인이 대답했다.
"아." 그렇게만 말했다. 다시 우리 둘은 아무 말도 없었고, 침묵이 점령한 자리에 멜로디가 끼어들었다. "그렇군요—"
"아가씬 누구요? 비타민 먹을 시간이 됐소?"
"아. 그건 아니고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라이라 하트스트링스에요. 그냥 지나가던 길이었지요. 양로원이 여기 있는 줄 전혀 몰랐지 뭐에요—"
"그치들이 강가를 따라 왔다갔다하면서 얼마나 틀어댔는지 몰라." 노인이 중얼거렸다. "그 스피커로 말이오. 단 한 번도 빌어먹을 배 밖으로 기어나온 적이 없었지요. 암. 우리와는 정반대였소. 우리는 가까이서 보면 진흙이 이렇게 생겼구나, 하는 걸 몸으로 익혔지. 진흙이야말로 최고의 전우였다오. 그 레드트롯조차 코트에 묻은 진흙을 떨어낼 수가 없었으니."
"그런가요?" 나는 말했다. "혹시 그것 때문에... 어... 부대 지휘관이 뭐라고 하지는 않았나요?"
"부대 지휘관이라고?"
"레드트롯이란 분이요."
노인이 현기증이 난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이쪽을 보았다. "누구?"
"어... 레드트롯 선생님이요.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분이 그 분 아닌가요."
"아니, 그쪽이 누구냐고 물은 거요."
"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떨궜다. "라이라라고 해요. 라이라 하트스트링스요."
"음냐... 또 비타민 먹을 시간이오?"
"아니에요, 선생님." 조금 전에 보았던 친절한 간호사를 흉내내어 말했다. "그냥... 편하게 쉬고 계시면 돼요. 쉬시는데 방해해서 죄송해요." 머저리가 된 기분이었다. 그런 기분이 들 때면 퇴로를 찾아 몸을 빼는 것이 가장 속 편하다. 그리하여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괜찮소, 스미스 양. 그렇지 않아도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지 않소."
나가던 걸음이 멈췄다. 몸을 돌려 물었다. "네?"
노인이 의자에 몸을 기대 앉아 오들오들 떨리는 육신을 레코드 플레이어 옆에 두고 쉬게 했다. "농장 굴리는 일만 해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거 아니오. 스미스 양이야 늘 사과나무 가꾸기를 좋아하지 않소. 풍채 좋고 잘생긴 청년이랑 데이트하는 것보다도 사과나무 끼고 나다닐 걸 더 좋아할 사람이라고 그레이스가 그럽디다. 그거 다 알면서도 괜히 집적거리는 거라오."
"저..." 노인에게 몇 발짝 다가갔다. "방금 절 누구라고 부르셨죠?"
"허, 그새 오렌지 가문으로 호적을 옮기기라도 한 게요?" 노인은 껄껄 웃으려는 듯했지만, 쌕쌕대는 숨소리만 튀어나왔다. "단 하루라도 메인해튼에 발을 들여 먹고 자느니, 차라리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생마장당하는 게 나을 거라고 하지 않았소."
"네...?" 노인을 쳐다보던 시선을 떼어 내 몸을 훑어보았다. 민트그린 솜털과 억센 것은 아닌 용모, 색이 진하지 않은 갈기.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하... 아하하... 제가 스미스—" 나는 그만두었다. 헛기침을 해 목을 닦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어... 뭐 그렇기는 한데, 세상이 많이 변했답니다. 메인해튼도 그럭저럭 살 만은 한 동네더군요. 그... 제 손녀딸 애플잭도 아주 어릴 때 자기 발로 거길 다녀왔었는데요. 혹시 모르셨어요?"
"손녀딸이... 있다...?" 노인이 삐딱한 시선을 던졌다.
움찔하고 대답했다. "어음... 그러니까 이거에요. 언젠가 손자 손녀까지 보면, 도시가 살기 좋은지 어쩐지는 갸들 판단에 맡기겠다는 거죠. 젊은이들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비두는 게 맞는 거지요. 안 그런가요, 셔플 선생님?"
"애플 스미스 씨도 장난을 좋아하는 모양이군." 노인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냥 그래나이트라고만 부르시오. 스팅킹*7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그냥 성씨로만 부르는 게 내숭 떠는 거란 것쯤은 아오."
"그렇게 하죠, 그래나이트." 순간 머릿속이 번쩍하며 숨이 막혔다.
그제야 이 사람이 누구인지 명료하게 깨달았다. 공동묘지에서 '그래나이트 셔플'이라는 이름을 본 것만으로는 잘 몰랐다. 어쩐지 어디서 분명히 듣기는 들어 봤다 싶은 이름이더니, 이 노인이 바로 그 사람이었다. 시골 마을의 정경을 그려놓은 그림과 신문 스크랩을 몇 번 곁눈질하는 것만으로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선생님이... 선생님이 바로 그 그래나이트 셔플 선생이었군요! 필시 리치의 아버지, 리치스 할인매장의 주인인 그 스팅킹 리치와 동업을 하셨다던 그 분이시죠!"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커튼 너머, 형형색색으로 반짝이는 포니빌의 정경이 섬광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나이트 셔플, 스팅킹 리치, 그래니 스미스. 수십 년 전 포니빌을 개척해 정착지로 일구어낸 개척자 중 한 분이라니."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좁은 방에 드리운 그림자에 미소가 사라졌다. 저마다 알아듣기 어려운 말들을 주워섬기고, 해수기침에 절어 느릿한 걸음을 겨우 옮겨놓는 수십 명 노인들을 부박한 칸막이 벽으로 구획지은 방 안에 하나씩 집어넣은 곳에 지나지 않은 곳에 그 정도 되는 사람이 있다니. 나는 노인을 멍하니 바라보며 물었다. "선생님 같은 분이 대체 왜 여기에 계신 거죠."
입 밖으로 낸 말에 거의 곧바로 후회막심한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그래나이트 셔플은 내가 한 말을 알아들을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창 너머에서 들어오는 시원한 산들바람을 맞으며 다시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지 오래였다. 돌아가던 레코드 플레이어가 곡의 마무리를 토해냈다. 스피커 너머로 바늘이 딸각거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발굽을 뻗어 레코드 플레이어를 껐다. 내 시선은 줄곧 노인을 향해 있었다.
인생이란 결국 소중한 것들을 계속해서 잊어 가는 과정일 것이다. 나는 속으로 눈물지으며 몸을 돌려 노인의 방을 나섰다.
"실례합니다...?"
글래스 샤인이라는 간호사는 간호사실에 앉아 있었다. 이쪽으로 천천히 몸을 돌리더니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무슨 일이시죠?"
"저는 라이라라고 하는데요." 간호원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라이라 하트스트링스요. 제가... 그..." 잠시 꿈지럭거리다가 씩 웃으며 말했다. "옛날 포니빌이 어땠는지, 지역신문에 칼럼을 하나 내려고 어르신들 이야기를 들어보고 다니고 있어서요." 몸을 돌려 그래나이트 셔플 선생의 방 쪽을 가리켰다. "27호에 계신 선생님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
"아, 그럼요." 간호사가 고개를 까딱 끄덕였다. "그래나이트 셔플 선생님 방이고요. 여기 오신 지는 8년 되셨어요." 나도 모르게 그렇구나 하고 납득할 뻔했다. "8...년이요?" 침을 삼키고 물었다. "선생님 연세가 어떻게 되시죠?"
"아... 으으으으음..." 글래스 샤인이 천장을 쳐다보며 입술을 씹었다. "여든두 살 정도 되셨지요. 여든세 살이실 수도 있고요. 셔플 선생님 말씀을 듣기는 좀 어려우실 것 같네요."
"문제가 있나요?"
"그, 어르신들 중에서도 젊은 시절을 생생하게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시기는 하거든요. 죄송한 말씀이지만 셔플 선생님은 그런 쪽은 아니세요. 십 년 동안 정신적으로도 많이 노쇠해지셨고요. 요양보호사 분들은 물론이고 저희 간호사들도 셔플 선생님 용태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어요."
"그렇군요..." 숨을 푹 내쉬며 문이 다닥다닥하게 붙은 기나긴 회랑을 바라보았다. 소독약 냄새가 풍겼다. "그나저나 말이죠." 침을 삼키며 간호원을 마주보고 말했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성함인데요."
"그럼요!" 간호원이 홍조를 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고말고요. 여기 계신 분들도 셔플 선생님을 아주 잘 알고 계신답니다. 포니빌 곳곳마다 선생님의 입김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지요. 하트스트링스 씨 연배 정도 되는 사람들도 그렇고 제 또래들도 그렇고, 셔플 선생님을 잘 모르고 다니니 얼마나 창피한 일이에요."
"네. 동감이에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것 말고도, 선생님 성함을 본 곳이 한 곳 더 있거든요. 그... 어... 시립 추모공원에 다녀왔어요. 거기 얘기도 써야 해서..."
"그런가요...?"
"묘비 하나에 선생님 성함이 새겨져 있는 걸 봤어요. 그냥 동명이인이겠지 생각했는데, 사망연도 딱 하나만 적혀 있지 않더라고요."
"아. 그건 별로 이상할 일도 아니지요." 글래스 샤인이 대답했다. 지나가던 간호원에게 클립보드를 넘겨주면서 그녀는 계속 말했다. "막대한 부를 거머쥔 사람들은 미리 자기가 묻힐 장지를 마련해 놓기도 하거든요. 셔플 선생님께서도 10년 전에 미리 장지를 마련해 두기로 하고 계약서에 서명을 마치셨지요. 그 때만 해도 지금보다 정신이 맑으셨답니다. 그 때부터 선생님 친족분들이 장지 값을 내주시고 있지요. 요양원비도 그분들이 내시고 있답니다."
"그 친족이라는 분들은..." 간호원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서 뭘 하고 있죠?"
"으으음... 제가 알기로는 트로팅엄에 계세요. 정확히 기억하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마는..." 글래스 샤인이 턱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아들과 딸이 한 분씩, 대자녀가 최소 세 분 있죠."
"전부 부자고 말이죠?"
간호원이 피식 웃더니 물었다. "이것도 칼럼에 들어가는 내용인가요?"
"아, 이거요? 아뇨! 안 들어가죠. 그냥..." 이를 악물고 갈기를 쓸어 넘기며 27호를 돌아보았다. "그 분들, 여기 오시기는 하세요?"
글래스 샤인이 헛기침했다. "전에는 자주 오시더니 요즘은 덜하죠."
"덜한 건가요... 아니면 발길을 끊었나요?"
아무 말도 없었다.
마른침을 삼키고, 풀이 죽어 물었다. "그건 너무하지 않아요?"
간호원은 한없이 부박하지만, 그래도 진심인 것은 확실한 미소로 말했다. "저를 비롯해 모든 직원들이 바라는 거라고 해도, 그래나이트 셔플 선생님께서 여기 계신 동안 평화롭게 쉬시는 것, 하나뿐이죠."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고개를 떨구듯 끄덕였다. "그래도... 아직 면회객이 있기는 하겠지요? 누구라도 만나뵈러 오는 사람이 있기는 했죠?"
간호원은 시선을 떨어뜨리고,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27호실을 돌아보았다.
"아하, 그랬지. 영양이란 것들은 사납기가 비할 데 없소." 그래나이트 셔플이 말했다. "우리 몸뚱이 절반을 미노타우르스의 상반신으로 대체하고, 남은 하반신에도 상반신만큼 근력을 붙여서 다닌다 해도 사막을 제 집처럼 돌아다니며 유격전을 벌이는 이 족속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게요. 이 영양이라는 놈 하나를 잡아 죽이는 데만 반나절이 족히 걸렸답니다. 이런 것들이 일 개 중대 규모로 모여 우리 뒤를 쫓아다니면서 계속 칼침을 놓아댄다고 생각해 보시오. 어찌어찌 이것들을 협곡 쪽으로 끌어들이고 나서야 치고 빠지는 짓거리를 더 못 하게 만들 수 있었소. 그때부터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용기과 명예를 걸고 정정당당한 싸움을 할 수밖에 없었다오. 레드트롯이 저 뿔쟁이 네 놈을 맡아 싸웠지요. 나는 한 놈만 맡아서 죽어라 싸웠는데, 아니나다를까 지독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놈이었소. 레드트롯이 상대하고 있던 떨거지 네 놈을 열 묶음으로 가져와야 그나마 비슷할 게요. 아주 가까이 붙어서 드잡이질을 벌이는데, 글쎄 이 자식이 아침에 처먹은 걸 그대로 쏟아내면서 싸우는 통에 냄새가 아주 끔찍했소. 그것들은 땅 자체가 척박하다 못해 거의 썩어들어가는 곳에서 사는데, 거기서 나는 거라고 해야 똑같이 구역질나는 쓰레기일 것 아니겠소. 얼룩말 친구들이 가진 오아시스가 탐이 날 수밖에 없었을 게요. 그렇게 추악하고 답 안 나오는 족속들이 바로 영양이라오. 세상에 어느 누가 그런 것들을 낳아 기를 생각을 했단 말이오? 세상에, 알 수 있더라도 알고 싶지 않소. 블루 오츠가 자기는 알 것 같다고 얘기했지. 그 친구는 바보 천치요. 그 왜, 언제는 숙영지를 꾸리고 나서 코코넛을 따겠다고 근처 나무를 기어오르지 뭐요. 그래 '사막인데 코코넛이 어디 있겠냐, 등신 같은 놈.' 그랬지요. 똑 떨어지기 전에 그 녀석이 가로되—"
말이 멈췄다. 그래나이트 셔플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벽을 한 번, 두 번 슥슥 보더니 내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것이기라도 한 양 이쪽을 보았다.
"이게 어찌된 일이오? 내가 뭘 하고 있었소?"
"제브라하라 내전 당시 참전하셔서 겪었던 일들을 말씀해 주고 계셨지요." 나긋하게 웃으며 말했다. "레드트롯 소위라는 분과 같이 최전선에서 2년 동안 복무하셨는데, 그분이 선생님을 후방으로 전출시켰다고—"
"전출이라니?!" 그래나이트 선생이 툭 내뱉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 얘기를 해보자고 해서 갔더니 이미 결정이 다 되어 있더구먼!" 노인은 몸을 떨더니 몸을 일으키려는 양 부들거렸다. "전선에 서지 못하는 군인이 어떻게 군인일 수 있—"
체스 테이블 옆에 놓아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노인을 달래 의자에 계속 앉혀두며 말했다. "레드트롯이란 분도 선생님 건강이 별로 좋지 않은 걸 알아서 그랬던 걸 거에요. 의지가 있더라도 복무를 감당할 몸 상태가 아니면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없는 거잖아요?"
"음? 뭐요?" 노인이 놀라 물었다. "내가 뭐 병이라도 났소이까?" 그는 창가에 걸려 흔들리는 커튼 너머의 정경과, 벽에 붙은 몇 장의 사진을 바라보더니 물었다. "그레이스는 어디 있소? 다리가 좀 나아진 것 같구려. 이제 스탈리온그라드를 떠나도 될 것 같소. 작년만 해도 스미스 양이 편지 다섯 통을 보내주었소. 어서, 어서 답장을 써 부쳐야 하오."
발굽에 턱을 괴며 나긋하게 웃어 보였다. "스미스 양이란 분을 끔찍이도 아끼시나 봐요."
"흐으으음..." 노인이 뜬금없이 피식 웃었다. "스미스 양은 뭔가 자랑하고 싶을 때면 늘 그렇게 말하더군."
당황해서 입술을 씹었다. "어, 셔플 씨, 그런 게 아니라—"
"번쩍사과 잼을 만들며 구슬땀 흘리던 모습이 난방절 아침에 꾸미고 나타난 것보다 몇 배는 더 예뻐 보였소.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우아해 보일 수 있지 내내 궁금했지만 끝내 알지 못했지. 그 왜, 위시 스텝Wish Step도..." 노인은 조금 전처럼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말을 멈추었다.
눈썹 한쪽을 치켰다. "위시 스텝이 뭐라고 하던가요, 셔플 씨...?"
"머지않아 다시 들르겠다고 하더이다." 노인은 눈을 가늘게 뜨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 친구 말로는 트로팅엄에서 벌인 사업이 아주 잘 된다는 모양이오. 필시Filthy도 그렇고 우리 아들내미도 그렇고 다들 능력 하나는 괜찮거든. 그렇기는 하되 요즘 시장은 내 평생 못 보던 형태로 재편된 것 같소. 요즘 나오는 신문은 읽기도 버겁지. 특히나 최근들어 아침 온도가 뚝 떨어졌소." 노인은 몸을 떨더니 두 앞다리를 몸에 바싹 붙이고는 체스판을 멍하니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사막에서 밤을 보내던 때가 생각나는군...... 블루 오츠는 하룻밤도 거르지 않고 징징 울며 잠들었소. 그걸 가지고 레드트롯이 뭐라고 하지 않기만을 빌었지. 세상 물정 모르는 새파란 어린애였을 뿐이니 말이오. 한밤중에 엉엉 우는 걸 달래서 재운 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 그 녀석이 그걸 알았으면 어떻게 했을지 나도 잘... 잘..." 노인이 깜짝 놀라 눈을 깜박이며 작은 방의 천장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어디... 어디 다른 데 있다 온 것 같소. 시간이 얼마나 지났소이까. 여기서 떠나기 전에 얘기를 해 줘야 하는데 말이오. 스미스 양." 셔플 씨가 이쪽을 보았다. "얼마나 지났는지 혹시 그레이스 녀석에게 물어봐 줄 수 있겠소?"
나는 노인을 마주보았다. 그에게 해 줄 말이 나에게는 없었다. 창 밖을 내다보자 벌써 밤이 깊었다. 나는 하루종일 노인의 뒤를 따라다니며 이야기를 청해 그가 살아온 인생의 궤적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을 주워모았다. 몇 시간을 같이 보내고 나니, 이 노인은 쪼개진 기억을 맞추기보다 오히려 더욱 잘게 쪼개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내의 기억이 온전하지 않음을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나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허허..." 노인은 체스판을 내려다보며 눈빛을 반짝였다. "뭔가 구린내가 난단 말이오." 노인이 툴툴대듯 말했다. "그런 짐승들이 체스처럼 훌륭한 놀이를 할 줄 안다고 생각해 보시오. 이 놀이를 개발한 것은 얼룩말이지만, 영양 놈들이 이 또한 훔쳐 냈을 거요. 정말 그 뿔쟁이 축생들이 애새끼를 싸지르기는 할 수 있나 심히 의문이 드오. 그것들이 약탈한 마을에서 긁어모은 인분과 분뇨를 가지고 반죽해서 자기네들 새끼를 만드는 게 아닐까 싶구려."
"저기... 어..." 하릴없이 웃어 보였다. "영양도 정상적으로 가족을 꾸릴 정도는 된다고 생각해요. 삼십 년 전에 종전 선언까지 했으니,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노인은 듣고 있지 않았다. 그 대신 본인 이름과 비슷한 걸음걸이*8로 안락의자에서 일어나 오들거리는 다리로 체스판 앞으로 다가섰다. 노인은 내 맞은편 자리의 스툴에 앉아 한쪽 발굽을 뻗어 백의 폰Pawn*9을 전진시켰다.
노인을 보고, 체스판을 보고, 다시 노인을 보았다.
노인은 하루를 살아내느라 진이 빠진 다리를 조금씩 떨며 마호가니 체스판과 대리석 기물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대국을 청하는 것이든 아니든, 연장자를 존중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좋아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용기를 쥐어짜, 흑의 폰을 전진시켜 백의 폰과 마주보게 세웠다.*10 "체스 둬 본 것도 오랜만이네요. 그래도 선생님보다는 조금 더 두지 않았나 싶은—"
노인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다음 폰을 움직였다.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뭐, 그렇다면야." 이쪽도 폰을 전진시켜 상대 폰의 진로를 막았다.
노인은 신속하게 나이트*11를 전진 배치했고 이쪽도 나이트를 전진시켜 대응했다. 전선을 구축한 폰들이 전장에서 대면했고 비숍*12과 룩*13, 그 귀중한 퀸*14을 가지고 길을 닦았다. 오가던 대화는 기물을 이리저리 미는 소리와, 나무판에 기물이 부딪치는 소리로 대체되었다. 그 짓을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지 짐작되는 바는 없었으나, 쓰잘데없는 짓을 빨리 끝내 버릴 방법이 없을까 계속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 때 난데없이 노인의 비숍이 달려와 내 두 번째 폰을 쓰러뜨리고 이쪽의 킹을 위협했다.
판세를 다시 훑었다. 지금 킹을 움직이지 않으면 곧장 체크메이트가 될 판이었는데, 당장 위기를 피하더라도 앞으로 다섯 수 내로 내 중요 기물들이 노인의 나이트와 비숍에 떨어지는 형국이었다. 나름대로 체스 잘 둔다고 생각했는데. 왕립학교 기숙사에서 만난 다른 친구들도 체스로 완전히 제압했으니까. 내심 셔플 씨가 노망이 들었다고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 확실했다. 다른 건 몰라도 체스에서만큼은 절대 무시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거기서부터 10분 동안은 내 인생 최악의 체스 대국이었다. 처음부터 내가 질 수밖에 없었던 게임이었다. 기물을 지키는 것이 내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기라도 한 양 행마를 이어갈 뿐이었다. 그 작은 방이 그렇게 조용한 곳이었던가, 새삼 깨달았다. 그때쯤 되니 내가 뭐하러 양로원에 왔는지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내 평생 진땀이 날 정도로 어려운 대국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진땀에 젖은 후드는 흡사 세탁하고 물을 짜내지 않은 걸 그대로 입은 듯했다.
"그래, 아직도 그 친구를 빅 매킨토시라 부르시오?"
"어—" 흑의 군세는 백의 군세에 유린당해 남은 것이 거의 없었다. "다시 말씀해 주시겠어요?"
"자네 며느리가 손자를 낳지 않았소. 그 녀석 기골이 얼마나 장대하던지, 산파가 애 받을 때 쿵 하고 울리는 게 온 동네를 뒤흔들어 놓았었지." 그래나이트 셔플이 씩 웃으며 말했다. "옆에서 그걸 다 지켜봤을 테니 얼마나 놀랐겠소이까."
한쪽 눈썹을 치켰다. 노인의 기억은 그 부분만이 세상에 남아 있었지만, 그 날 하루 종일 노인이 주워섬겼던 그 어떤 말보다도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다 보니 훨씬 믿을 만한 말처럼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빙긋 웃었다. "뭐, 그 녀석이 '빅' 매킨토시라 불리는 것도 이유가 있답니다. 그래나이트 씨. 여러모로 이름 값 하는 녀석이지요. 좀 부족한 게 흠이긴 합니다마는."
"힘만 갖고 안 되는 일이 닥치면 어찌할런지, 참 걱정이오." 나이든 사내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흑의 군세를 짓밟으며 중얼거렸다. "그 말괄량이 녀석만큼만 되었어도 좋았을 것을. 그... 주근깨 있는 녀석 말이오."
대국이 완전한 패배로 끝나자 세상이 한결 따뜻하고 행복한 곳처럼 느껴졌다. 깔깔 웃고 말했다. "그러게요. 그래도 완벽한 사람은 없는 법이니까요. 애플잭 녀석도 빅 매킨토시가 없으면 힘 쓸 사람 없으니 곤란한 건 마찬가지지요."
"그런 게 가족 아니겠소." 그래나이트 셔플이 말했다. 그는 신속하게 기물을 재배치했고, 두 번째 대국을 시작하려는 걸 막기에 내 동작은 너무 느렸다. 노인이 기물을 전진시킬 때마다 나도 기물을 배치해 맞섰다. 그 동안 사내의 눈길에는 무엇인지 모를 지침이 엿보였다. "자네 곁에는 가족이 함께하지. 가족이란 돈이나 축재와는 다르다오. 삶이 고단의 극치에 이르더라도 함께 살아가는 것이 바로 가족이오." 이번에는 노인이 수세에 몰렸다. 나는 내 공세를 기뻐하지 않았다. 노인의 말은 나를 향해 있었지만, 그 시선은 내가 아닌 저편의 어둠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행마하지 않고 기다렸다. "나는... 스미스 양, 그대가 쌓아올린 가족이라는 기반이 늘 부러웠소."
입술을 씹으며 나도 모르게 물었다. "셔플 씨가 전에도 이런 말씀 하셨었나요?"
노인은 천천히 눈을 감고 떴다. "으음... 글쎄... 잘 모르겠구려." 그는 말을 삼키듯 끝내며 고개를 떨구었다. "다만 그레이스가... 그레이스 말로는..."
노인의 목소리가 잦아들다가, 낮게 깔리는 코골이로 바뀌었다. 노인은 스툴에 앉아 잠들었고,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뭔가 켕기고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밖에서 간호사가 오가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있을 만큼 있었던 모양이었다. 근처 의자에 걸려 있던 담요를 가져다가 쪼그라든 두 어깨 위에 걸쳐주고, 노인의 집을 떠났다.
그 날 밤은 잠들지 못했다. 고적의 애가라는 곡에 관하여 코멧후프가 끄적여 놓은 자잘한 조각들을 옮겨 적느라 코멧후프의 연구일지를 옆에 펼쳐두고 있었다. 사실, 단 한 쪽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 오두막 안에 고인 어둠과 함께 천장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둠 강림의 시대 막바지에 이르러 내전 발발과 함께 불탄 캔틀롯의 폐허와 이름 없는 자들의 땅에 대한 생각은 온데간데없이, 뭐라고 표현하기도 애매한 감각에 휩싸여 있었다. 사막과, 전화戰火가 할퀴고 간 여러 사막 고을의 모습이 눈 앞에 어른거렸다. 스탈리온그라드 외곽에 설치된 야전병원과, 구식 헤어스타일을 한 간호사에게 치료를 받는 부상병들의 모습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고풍스러워 보이는 판매대에 줄지어 선 번쩍사과 잼의 모습과, 돌이켜보면 후회스러운 세월 끝에 침전하다 퇴적된 과거의 응어리를 털어낼 수도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 살게 된 대부호들의 얼굴을 찍어놓은 사진처럼 흩어져 가는 체스 기물의 모습이 눈가를 스쳤다.
그 신기루의 어느 지점에서 마침내 나 혼자 웃을 만한 순간이 있기를 바랐다. 바랐다기보다는, 그렇기를 빌었다. 찰나이긴 하지만, 그런 순간이 있기는 있었다. 체스 게임을 하는 것으로 셔플 씨 이야기를 다 들을 수 있는가. 스미스 할머니와 그 일가족과 뭔가 접점이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내 알 바 아닌 건 알지만... 그렇더라도...
노인이 젊어서 벌였다는 사업 이야기도 돌이킬 수 있을까. 한 존재를 구성하는 근간이 되는 기억 대부분을 망실한 사람은 그 자신이었던 존재가 맞는 것인가. 과거를 잃어버린 끝에 사람은 어떤 존재가 되는가. 존경받아 마땅한 과거에 백지만이 남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존재의 종말만이 도사리는 심연에서 자신의 본질을 건져 올릴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내게는 풀어야 할 저주가 있다. 지금껏 짊어지고 살아온 저주가 있다. 그것이야말로 내 평생을 걸고 맞서야 하는 싸움이다.
그래나이트 셔플은 어떠한가. 노인의 삶이야말로 저주 그 자체거나, 아니면 저주가 휩쓸고 간 끝에 남은 찌꺼기가 아닌가. 노인과 노인의 작은 방과 먼지 쌓인 체스 기물이 계속 생각났다. 기록에 남은 그 어떤 사막보다도 척박한 곳에서 다시 새 아침을 맞으며 눈을 떴을 때 노인은 무슨 생각을 했을 것인가. 노인의 생각은 죄다 혼란과 두려움에 젖어 있는가. 한 순간 한 순간을 다른 순간을 살고 있으니, 그 사이의 전환은 항상 숨이 막힐 게 아닌가. 코멧후프가 그랬던 것처럼 노인 또한 흐트러져 가는 정신으로 자기가 살아야 할 삶의 목적을 설정했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그 전부 광기에 녹아 사라질 운명인가.
"스탈리온그라드 사람들은 루나 공주님, 셀레스티아 공주님을 섬기지 않더이다. 스미스 양." 어느 날 아침이었다. 그래나이트가 검은 체스 기물을 움직이며 말했다. "그 대신 '별의 여왕'이란 존재를 섬기지요. 한 성당에서 동시에 두 공주님을 섬기기 위해 스탈리온그라드 사람들이 머리를 굴려 만들어낸 개념이죠. 이유인즉,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 그 동네에는 태양을 띄우지 않았기 때문이라오. 그리하여 두 공주님이 사실 한 존재가 아닌가 생각하게 된 거요. 루나 공주께서 달의 여자가 되고 나서부터는, 하, 신앙에 좀 문제가 생겼을 테지요."
"셔플 씨." 체스판 위에서는 내 기물을 지키기 위한 눈물겨운 투쟁이 일어나고 있었고, 나는 그 위로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제 얘기 좀 들어 보실래요." 노인의 방에 들어가자마자 그는 아무 말 없이 대국을 시작했다. 나름대로 환영해 주는 것인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노인의 장단에 어울려 보기로 했다. 백이 먼저 두어야 했지만, 먼저 두어야 하는 쪽이 이쪽임을 전달할 수단이 없었다. 흑백을 가리는 것도 그 날 노인이 앉은 의자가 어느 쪽인지의 문제였으니. 설령 순서를 제대로 맞춰서 두었다 해도 노인이 나를 압살하고 승리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터이다. "루나 공주님께서 풀려나셔서 나이트메어 문의 주박을 벗고 신성을 되찾으셨다면 어때요?"
"떼끼! 두 분 자매의 이야기를 멋대로 지어내지 마시오, 스미스 양!" 그래나이트가 말했다. 꾸짖는 듯했지만 입가가 둥글게 굽어 있었다. "그런 건 영양들이나 하는 것이외다! 그런 무례를 장난삼아 저지르는 건 그레이스만으로 족하오."
킥킥 웃고 말했다. "스탈리온그라드 사람들이 얼마나 당황했을지 눈에 선하네요."
"오호! 항상 그랬소이다. 다른 간호사들까지 얼굴이 벌개지게 만들었으니 말이오. 언제는 그레이스가 레드트롯에게 스펀지 목욕*15을 해 줄 차례가 되었다오. 레드트롯은 그레이스만은 안 된다고 했지만. 아직까지도 전우회 사람들은 레드트롯이 기습 때 싸우다가 어깨 빠진 줄 알고 있지요. 그레이스 말로는 전혀 아니었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 순간 글래스 샤인이 27호 방문 밖으로 지나쳐 갔다. 나를 보더니 움찔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물었다. "실례합니다. 누구시죠...?"
헛기침을 하고, 다분히 의례적인 투로 대답했다. "라이라. 라이라 하트스트링스."
"대단히 죄송하지만, 면회 시간이 아니라서요. 셔플 선생님 친족이 아닌 이상 지금은 안 된답니다. 나중에 다시 오시겠—"
"아. 그거라면 괜찮아요." 문 너머를 가리켰다. "셔플 선생님 딸 되시는 분, 그러니까 위시 스텝 씨가 저 올 거라고 어젯밤에 미리 서류를 보내 두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서류라뇨?" 글래스 샤인이 생각에 잠겨 얼굴을 찌푸렸다. "어떤 서류요?"
"못 보셨군요?" 좀 더 멀찍한 곳을 가리켰다. "간호사실로 보냈다고 하시던데."
"그런가요? 가서 확인해 볼게요." 글래스 샤인이 돌아서서 멀어져 갔다. "여기서 기다리세요."
"네. 그러죠." 간호사가 5피트, 10피트, 15피트까지 멀어져 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한 차례 으스스하고 몸이 떨렸다. 후드 재킷을 매만지고 대국으로 돌아갔다. "음, 그러고 보니 스탈리온그라드 사람들은 평소에 뭘 하고 노나요?"
"으으으음..." 셔플 씨가 달달 떨리는 발굽으로 퀸을 집어 움직였다. "조약돌 같은 걸 만들더구려."
"그래요? 조약돌을 다 만들고 나면 뭘 하나요?"
"더 만들지요." 퀸이 떨어졌다. "염병할..."
"아... 음..." 빙긋이 웃으며 염동력으로 떨어진 퀸을 정중하게 잡아 올렸다. "어디에 둘까요?"
노인은 헛기침을 하더니, 고요하게 앉아 말했다. "C6에서 C2로."
노인의 퀸을 대신 옮기고, 죽은 폰을 치웠다. 내가 둘 차례가 되어 기물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저기, 오기 전에 마을 돌면서 얘기 좀 들어보고 왔는데요."
"그렇소이까, 스미스 양? 스탈리온그라드에 오고 나서부터 그랬소?"
내가 들은 바를 가만히 털어놓았다. "한창 활동할 때 그야말로 체스계의 전설로 군림하던 한 그랜드마스터 이야기를 들었지요. 네 번 연속으로 그랜드마스터 대상 대회에서 우승한 것도 모자라 블루블러드 대공 2세와도 대국을 펼쳤지요. 심지어 이겼어요. 평범한 어스 포니 비즈니스맨이 왕족을 상대로 겨뤄서 이기다니 상상이 가세요?"
"허어... 직접 보기 전에는 못 믿겠구려." 셔플 씨가 툴툴대듯 말했다. "그나저나 그 양반, 트로피는 좀 땄다고 하더이까?"
"흠..." 노인의 머리 위를 쳐다보았다. 열 개는 족히 될 기념패가 걸려 있었다. 아침 햇살을 받아 기념패 위로 아로새긴 금박 글자와 날짜가 반짝였다. "몇 개 정도는 된다네요." 노인을 마주보며 빙긋이 웃었다. "그 사람을 이길 만한 사람은 또 없을걸요."
"잡담은 그만두구려. 움직일 게요, 말 게요?"
픽 웃으며 나이트를 들어 노인의 퀸을 압박했다. "오늘따라 참을성이 부족하신데요."
"그게 어디 내 탓이오?! 스팅킹이 늦지 않소! 하기사 항상 늦었지! 그 자식 가족들이 먼저 자리잡고 살아서 번쩍사과 잼 팔아 남은 이윤을 더 가져가는 것밖에 안 되오. 볼티메어에서 태어난 게 어디 내 잘못이오? 전선에 다녀온 것만 아니었어도 내가 훨씬 빨리 동네에 눌러앉아 살기 시작했을 터요. 제기랄. 스미스 양보다도 먼저 정착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랬으면 우리가 이렇게 만날 일도 없었을 거 아니겠어요?" 노인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그럼 그레이스도 못 봤을 뻔했네?"
"그레이스는 자기가 가고 싶은 데로 다니는 사람이오. 뭘 어떻게 하라고 해도 듣는 사람이 아니지. 알잖소."
"그랬던가요?"
"흐으으음... 둘이 수다 떠는 모습을 심심찮게 본 터라 그렇겠거니 생각했소이다만." 노인이 폰 하나를 가리켰다. "B7에서 B5."
노인의 말대로 폰을 움직이자 내 나이트가 위기에 몰렸다. 노인의 퀸을 잡아야 할지, 나이트를 살려야 할지 생각하며 물었다. "저희가 같이 있는 거 보셨어요?"
"흐음? 누구 말이오?"
"그레이스랑 스미스 씨—어, 그러니까..."
"아무도 없었소!" 노인이 툭 내뱉었다. "반경 1마일 이내에 여자라곤 아무도 없었소. 스탈리온그라드에서 블루 오츠 놈이 좀 과하게 껄떡대고 돌아다닌다 싶더니 그렇게 됐소. 그 그레이스조차 그 녀석과는 거리를 뒀지. 나중에 자초지종을 듣고 나니, 다 설명이 되더구먼!"
"허허... 병사들이 여자를 꼬시는 방법에 뭐 문제라도 있었나 보죠?"
"블루 오츠 놈이라면 하자가 얼마나 있어도 이상하지 않지. 이건 비밀인데..."
"뭐가 비밀이죠?"
노인은 쌕쌕거리더니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그 자식은 '빅 오츠'라고도 불렸소. 하필이면 동원담당관의 심기를 거스른 적 있지. 클라우드데일 여자의 심기를 잘못 건드려서 영 좋지 않은 곳을 차이고 나더니, 페가수스들도 못 짜낼 구름 덩어리도 있다는 걸 세상 당당히 보여줬거든!" 노인이 다시 쌕쌕거렸다. 나름대로 껄껄 웃는 게 이렇구나, 나는 그 때 알았다.
나는 무표정으로 그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포기하고 깔깔대고 웃었다. 그 때 익숙한 얼굴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실례합니다." 글래스 샤인이 어깨에 발굽을 올렸다. "면회 시간이 아니라서요. 셔플 선생님 친족이 아니신 이상 지금은 면회가 안 되세요. 나중에 다시 오시겠어요?"
"아, 그거라면 괜찮아요. 선생님 따님께서 저 올 거라고 미리 서류를 보내 두셨다고 하더라고요. 간호사실에 가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래요? 언제쯤에요?"
"어젯밤에 송달됐다고 들었어요. 확인해 보실래요?"
"여기서 기다리세요." 글래스 샤인이 멀어져 갔다.
나는 실실 웃으며 대국을 재개했다.
"게 누구였소?" 그래나이트가 가쁜 숨으로 물었다.
"아무렴 어때요." 헛기침하고 말을 이었다. "그렇지. 사막 얘기나 좀 해주세요."
"지금처럼 해가 질 때는 말이오." 그래나이트의 눈가에 아득한 석양이 걸렸다. "온 땅이 석양을 받아 불 붙은 듯 붉게 물들지요. 사막 전선이라 해서 사방이 모래, 먼지, 죽음의 아수라로만 덮여 있는 것은 아니외다. 곳곳에 튀어나온 바위 위로 빛의 띠가 엉기지요. 처음에는 붉었다가 오렌지색으로 변하고, 다시 호박색으로 물들었다가 갈색으로 바뀝니다."
요양원 테라스 한쪽에 놓인 흔들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가져온 일기장을 옆에 띄워두고, 그래나이트가 말하는 모든 것을 느릿느릿하게 받아 적었다.
"수백 년 동안 오직 얼룩말에게만 그 존재를 허락한 색이 여럿 있었소." 노인이 말했다. "영양들이 기어들어와 전부 산산이 찢어발겨 놓았지요. 왜 그랬겠소? 땅 속 깊이 묻힌 다이아몬드나 돌덩이, 그런 잡것들을 취하기 위해서였다오." 노인이 이를 악물며 앞발걸이를 꾹 쥐었다. "징집영장을 받았을 땐 아, 전쟁에는 제발 발 담글 일 없었으면 좋겠다 싶었소. 저 아름다운 것들을 뭉개놓은 저 추악한 짐승들을 보고 나니 생각이 바뀌었지만..." 그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노인은 천천히, 이쪽으로 시선을 옮기더니 물었다. "스미스 양. 그대는 영영 되찾을 수 없이 잃어버린 것들이 있소?"
사막의 지평선 위로 저물어 가는 태양을 대충 그려 가던 선을 멈췄다. 노인을 마주보았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제 생각보다도 더 자주 잃게 되더군요."
그래나이트가 해수기침을 토해냈다. 노인이 등받이에 기대어 지친 눈으로 붉게 물들어 가는 포니빌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떠나시오, 데이지'."
귀가 절로 쫑긋했다. 눈을 돌렸다. "네?"
"그대의 갈기에 피어난 국화를 보시오. 여기까지 줄기를 뻗어 꽃을 피울 줄은 몰랐구려. 느린 걸음이지만 계속 발이 걸려 넘어지는구려. 그대는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 언제라도 병력 수송대에 실려 어딘가로 흘러갈 터인 것을 그대도 알지 않소. 그대 곁에 있으면 이 순간이 영영 계속될 것 같은 생각이 드오. 그대와 비단결 같은 갈기를 볼 때마다 눈을 감는데도, 절로 춤이 나오니 어찌해야 할지. 집 밖으로 흘러 휘돌아 나가는 강에서 수영하는 기분이오."
빙긋 웃으며 차분하게 날숨을 내쉬었다. "좋았던 시절이 있었나 보군요."
노인이 픽 웃었다. 사랑과 후회가 뒤섞인 듯한 소리였다. "아하... 아, 그대. 그대와는 아니었소. 스미스 양 남자친구가 날 잡아 죽였을 테니 말이오. 번쩍사과 잼보다도 나와 스팅킹을 더욱 경계하던 친구였지. 너무했다고 말할 생각은 없소. 사막 전선에서 모래와 죽음을 수도 없이 보고 돌아온 사람이니, 외로워 보이는 게 당연하지."
"그럼..."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누구였죠?"
"그..." 노인은 입술을 깨물며 테라스 바닥을 덮은 마룻장만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표정이 굳는가 싶더니, 한 줄기 산들바람이 사내의 잿빛 갈기를 쓸고 지나갔다. "위시 스텝을 겁주려던 게 아니었소. 너무 엄하게 구는 거 아니냐고 그레이스가 그러더군.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소. 주니어가 너무 멀리 가 버려서 그랬던 것 같구려. 위시 스텝이 그 자리를 차지하더라도 뭐라 할 말은 없소. 어쨌든 둘이 남매인 건 확실한 사실이니 말이오. 아들놈은 아스파라거스인지 뭔지 하는 헛짓거리에 돈을 때려붓고 있었소. 그렇게 하다간 집안이 통째로 거덜날 게 뻔했소이다. 트로팅엄에 벌였다는 사업이 뭔지도 관심 없었소. 내가 세운 이 마을이 커지고 있었으니 말이오. 포니빌에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필요했소. 필요했고말고..." 노인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발굽을 들었다. 의자에서 내려오려는가 보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노인 옆으로 달려가 사내의 부박한 체중을 지탱했다. 그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게 의탁했다. 그는 서지도 앉지도 않은 기묘한 자세로 비틀거리며 계속 말했다.
"스미스 양은 어찌 그리 자식 농사를 잘 지으셨소? 우리 자식놈들은 내 말을 들어먹지를 않는답니다. 애비를 두고 멀리 가지 말아 주기만을 바라는 것인데. 애비처럼 뜨내기 생활이나 하면서 허송세월하지 말라는 것인데. 볼티메어를 벗어나지만 않았다면, 캔틀롯에 발을 들이지만 않았다면 현장에서 징집되어 국군에 편입돼 전선으로 끌려갈 일도 없었을 터요. 내 부모님도 내가 그리되기를 원하지 않았소. 이제야 그 심정을 이해해서 주니어도, 위시 스텝도 뜨내기 생활이 어떤 건지... 겪지 않기를..." 그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보이지 않는 심연을 노려보았다. "영양과 드잡이질을 한 얘기는 하지 말라고 그레이스가 여러 번 말했소. 영양이 어떤 족속인지, 그 시커먼 뱃속에 뭘 숨기고 있는지 몰라서 그런 게요. 영혼이란 게 있는 족속이면 그렇게 쉽게 부서지지 않는답니다. 그야말로... 추 그 자체지요. 추악하다는 게죠. 그..." 사내의 입술이 떨렸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고 내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스미스 양?"
노인을 가까이서 쳐다보며 물었다. "네, 그래나이트?"
사내는 쌕쌕대다가 움찔하더니 말했다. "자식들이 제자리에 잘 있도록 하시오. 집을 두고 멀리 가게 하는 일 없게 하시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내의 발굽을 두드렸다. "그럴게요, 그래나이트. 그렇게 할게요."
노인은 입술을 깨물며 저물어 가는 석양을 씁쓸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나는 그 곁에 서 있었다. 얼마 뒤, 용기를 짜내 물었다. "셔플 선생님. 아직 색 구분은 가능하세요?"
"그..." 노인이 숨을 들이마셨다. "모르겠구려. 해가... 뜨는 것이오, 지는 것이오?"
나는 잠시 주저하다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그게 대순가요?"
노인은 이쪽을 마주보더니 웃음을 지어 보였다. 누구에게 더 위안이 된 말인지 재어 볼 수는 없으나, 그 순간만큼은 좀 따뜻했다.
"스팅킹에게 얘기 전해 주오." 복도를 따라 노인을 데리고 가 방까지 안내했을 때, 그래나이트가 문득 말했다. "다음 주 회의 때까지는 어렵다고 전해 주시오."
"한번 해 보죠." 노인을 천천히 데리고 들어가 의자에 앉혔다. 벽 한쪽에 흐릿한 등잔이 밝혀져 있었다. 주름진 붉은 살가죽 위로 오렌지색 불빛이 흘러내렸다. "그쪽도 이해할 거에요."
"그 녀석이라면 이해하고도 남을 게요." 그래나이트가 툴툴댔다. 늙고 지친 사내의 몸을 안락의자로 데려가 앉히는 내내 노인은 쉬지 않고 주절거렸다. "잘난 체 하려는 생각은 없소이다마는, 십 년 내내 사업하면서 어깨에 얹힌 무게를 견디고 있으니 그쪽도 뭐라 못 할 테지요."
"그럴 것 같네요." 눈을 찡긋했다.
"어떻게 그대가 그런 말을 하오?!" 노인은 희미하게 웃으며 딱딱거렸다. "스팅킹 그 자식보다 스미스 양이랑 같이 사업한 세월이 더 긴데 말이오! 그러지 말고, 미리 쟁여놓은 번쩍사과 잼을 쓱 가져다가 미리 싹 팔아 버리고 입 씻는 게 어떻소?"
"흠..." 노인을 앉히고 담요를 덮어주며 말했다. "스팅킹이 별로 안 좋아할걸요."
"그렇소? 그래서? 그렇게 당해도 싼 작자요!"
"그쪽도 보복 정도는 할 줄 알겠지요. 혹여나 발각되면 어떻게 할까요? 셔플 씨, 아니면 주니어나 위시 스텝에게 무슨 짓을 할지 알고요?"
"레드트롯을 불러다가 따끔하게 혼구멍을 낼 거요." 그래나이트가 날을 세워 말했다. "스팅킹 그 놈이 영양 놈들 반절만큼이라도 쌈박질을 잘 할 것 같진 않소!"
얼굴을 살짝 찌푸리다가, 이내 웃는 표정으로 바꾸었다. "선생님 말이 맞겠지요."
"당연하오. 내 말은 항상 옳거든. 적어도 내 말이 맞아야 할 때보다도 더 많이 맞는 말을 하는 건 사실이오." 노인이 한숨지으며 몸을 움찔거려 안락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었다. 그는 수도 없이 붙은 흑백사진을 쳐다보았다. 머릿속을 떠다니는 생각 중 저 사진으로 길어올릴 수 있는 것이 어느 정도나 될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레이스 말로는 내가 병사로서 실격이라더군. 생각을 너무 많이 한다나 어쨌다나. 레드트롯이 나를 전선 후방으로 밀어넣은 것도 아마 그것 때문일 거요. 내 몸은 행군에 적합한 것이 아니지만, 어쨌든 낙오하지 않고 잘 따라갔소. 왜냐, 해야 할 일이니까. 번쩍사과도 마찬가지요. 그것들이 알아서 판로를 열어 갖고 오지 않는단 말이오. 주니어는 그걸 이해 못 했지. 그 녀석은... 그 녀석은..."
나는 가만히 서서 사내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나이트가 몇 차례 기침을 토해내고 숨을 들이마셨다. 잠시 아무 말도 없던 노인이 조용히 말했다. "위시 스텝은 가만히 있으라고 했소. 그게 최선이라고 하더군. 나를 보는 것 같지만 결국 보지 않고 있었던 거요. 그 녀석 눈이 아니었거든. 그 녀석 눈이..."
노인의 말에 눈을 깜박였다. 이제 그래나이트의 내면에 있던 무언가가 밖으로 나오려는 것이었을까. 나는 몸을 기울여 사내의 발굽에 내 발굽을 얹었다. "셔플 선생님. 따님이 마지막으로 온 게 언제죠?"
"흐음?" 노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누가?"
"따님이요. 마지막으로 보신 게—?"
"하지 태양절 축제였다오!" 노인은 빙그레 웃더니 쌕쌕거렸다. 그 와중에도 입가에 지은 웃음을 지우지는 않았다. "당차기가 그지없더구려. 오라비처럼 주근깨도 많았고. 손주들 잘 기르시오, 스미스 양. 나중에 애플 일가 사과는 그 녀석들이 맡아야 하니."
"아뇨, 내 손—" 고개를 젓다가 한숨을 푹 내쉬고 말했다. "애플 스미스의 손주들 얘기가 아니에요. 선생님 딸, 위시 스텝 얘기하는 거에요. 그래나이트 선생님, 따님이 마지막으로 면회 온 게 언제죠?"
노인이 나를 마주보더니, 슬로우모션이라도 되는 듯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F2에서 E3."
당황스러웠다. "네?"
"쉿... 블루 오츠에겐 말하지 마시오." 노인이 지친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 놈 머리로는 이게 어떤 수인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거거든."
체스 테이블로 눈길을 줬다가, 다시 노인을 마주보았다. "그래나이트, 그러니까—" 나는 몸을 떨며 눈을 감았다. 잠시 뒤, 다시 그의 발굽을 잡으며 말했다. "블루 오츠에겐... 말하지 않을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하진 않소. 어차피 그레이스가 다 말할 테니." 그는 혼곤히 젖어 오는 밤의 어둠에 젖어 중얼거렸다. 사내의 머리가 안락의자 깊이 기댐과 동시에 저 등잔의 불빛도 노인에게 더욱 흐릿해지기만 하는 것인지 싶었다. "마음 좀 편히 가지라고 잔소리가 어찌나 심하던지. 그 스팅킹도 날더러 숫자 갖고 골치 좀 썩이지 말라고 한 마디 했었소. 아마 날 견제하려는 수작일 거요. 스미스 양도 그 작자가 어떤 자인지 잘 알지 않소. 그나마 날 두고 잔소리를 하지 않는 사람은 레드트롯 하나뿐인데, 그 양반은 잔소리 대신 노발대발하면서 소리를 지르는 부류니까 그런 게요. 내 자식들한테 그런 꼴을 보이고 싶진 않더군. 그게 애들 교육에 좋더라도 그러고 싶진 않소. 어차피 블루 오츠처럼 될 테니 말이오. 그러고 싶지 않소. 스미스 양은 그러고 싶소?"
대답하려고 입을 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영 기껍지는 않았지만 내가 거꾸로 물었다. "그래나이트 씨는 어쩌고 싶으세요?"
"나 말이오?" 그는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무거운 숨에 헐떡이는 어깨가 출렁거렸다.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등잔빛에 무엇인가 반짝였다. 어딘지 초탈한 듯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사내의 뺨 위로 눈물방울 하나가 굴러 떨어졌다. "집에, 집에 가고 싶구려."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두 발굽으로 노인의 앞다리를 가만히 잡았다. 나는 조용히 말했다. "저도 그래요, 그래나이트. 저도 그래요."
나는 오두막 테라스에 서서 별빛을 맞고 있었다. 옆구리에 리라를 끼고 되는 대로 현을 퉁겼다. 무슨 곡을 연주하는지도 나는 몰랐다. 신경 쓰지도 않았다. 어스름 진혼곡과 고적의 애가는 길바닥에 눌러앉은 유령이었고, 그 유령은 내가 다스릴 수 없었다. 나는 이를 새삼 깨달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은 명징했다. 그 이상을 담보할 확증을 나는 갖고 있는가. 과거는 어느 한편의 시각으로 쓰여지고, 미래는 내일이 그러하기를 혼자 바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의 사실을 여러 모양으로 빚어내 노래하는 것은 똑같은 후렴구에 대충 앞뒤 곡조를 붙여 중언부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몸이 죽어 세상을 떠나고 나도 남은 사람들이 나를 기억해 줄 일은 영영 없으리. 그렇더라도 별일은 아니지 않은가. 내 공허한 미래는 저들의 아득한 현재일 것이고, 내가 있든지 없든지 현실은 저들이 바라는 대로 되어 갈 것이다.
늘상 이래 오지 않았는가. 세상에 살았던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렇게 소중했다면 살다 간 모든 이들을 기리는 장대한 장서관을 세워 기억해야 이치에 닿는 것이 아닌가. 세상은 그런 감상적인 생각을 쉬이 받아주지 않는다. 몇몇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시간이 흐르고 난 뒤 남은 찌꺼기를 내버리는 데 거리낌이 없다. 다르게 생각하면, 세상 만물이 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기계 장치처럼 수백만의 수백만이 죽음을 향하여 전진하고 있을 따름이 된다.
그렇더라도, 사람이란 결국 금방 없어지고 말 티끌 같은 존재인 자신을 구성하는 근간이 된 사고의 틀과 더불어 각자에게 가장 소중한 장소, 각각의 인생에 영향을 주었던 사람들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존중하고자 기꺼이 자기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 동물이다. 먼저 왔다 간 사람들이 걸어간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을 단호히 거부할 수 있을 정도로 고귀하고 넉넉하며 훌륭한 인품을 가진 사람이 우리 중 얼마나 있을 것인가. 사람의 삶이란 철저히 개인적인 것으로서 각자의 기술을 갈고 닦아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인 것이다. 이미 시들어 잿더미가 되어 버린 사람들의 뒤를 아무리 따라 봐야 그 기회를 살릴 방책은 없을 것이고, 각자가 마땅히 누려 마땅한 것이나 그와 동시에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하기는 또 지난한 광명을 추구하는 영광된 탐구의 길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되지 않겠는가.
그 널뛰는 지점 사이 어느 한 지점에 균형이 있기는 있을 것이다. 이제 와서야 깨닫는 것이지만, 나는 평생 그런 균형점에 도달해 본 경험이 없다. 보다 솔직하게 말해보자. 나는 그 균형을 찾으려는 시도조차 해 본 적 없다. 언젠가 플러터샤이에게 할머니 성함을 말해주던 때가 기억난다. 그게 뭐 칭찬받아 마땅한 거라는 생각은 요만큼도 들지 않는다. 즉슨, 내가 아는 것은 할머니의 성함뿐이며 그분이 어떤 꿈과 희망을 안고 사셨는지, 그 질감을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지낸 적이 없다는 것이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공부해야 할 것들이 많기는 했지만, 시간을 아주 빡빡하게 아껴 써야 할 정도로 할 공부가 많지는 않았다. 많았든 적었든, 집안의 어른이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았으니 마땅히 시간을 빼 집에 다녀갈 수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와 아버지께서는 나를 애지중지하다 못해 내가 알아서 하라고만 하셨다. 실수였다.
나는 할머니께서 병상에 누워 하루하루 가까워지는 죽음의 심연 속으로 침잠하시는 동안 한 차례도 찾아가지 않았다. 할머니께서 또렷한 의식으로 곁에 있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유언을 남기시던 마지막 몇 시간 동안에도 나는 그 곁에 없었다. 그 날 밤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나는 나중에야 이를 들었다. 어둑한 집 복도를 떠돌아다니는 날씨 얘기, 정치 얘기처럼 지나가는 말로 할머니의 죽음을 들었다. 들은 바로는 할머니의 간과 췌장이 액화되다시피 했다고 했다. 할머니는 차가운 강변에 서서 어슬렁거리던 아이처럼 당신의 체액에 휩쓸려 익사하신 것이다. 할머니의 장례는 내가 학교에서 최종 리허설을 하던 도중 치러졌다. 할머니의 유골은 금빛 이름표를 붙인 불투명한 화강암 유골함에 봉인되어 캔틀롯 상층 영묘*16에 안치되었고, 나는 그 모든 과정에 조금도 관여하지 않고 내가 살아갈 궁리, 나의 미래만 보고 달렸다.
세월이 흘러 나는 성년이 되었고, 할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않은 데 티끌만큼의 후회나 회한 없이 심드렁하게 살아왔다. 포니빌에 오기 전, 포니빌을 배회하는 망령으로 떨어지기 전에는 그랬다. 무시당하고 잊히고, 그 누구의 사랑도 받을 수 없는 신세가 되기 전에는 그랬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이름을 불러 주리라는 그 부박한 확신이 세상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단순히 뼛속까지 얼어붙을 듯한 한빙지옥에 떨어지는 것이라면 항아비곡까지도 필요없었다. 이름 없이 살아가야 하는 것 자체가 우주 속 공허의 한기를 압도하니까.
그러하다면 단순히 잊히는 것뿐만이 아니라, 자기가 잊힌다는 사실조차 잊게 되는 것이라면 어떤가. 알지 못하니 차라리 복 받은 일인가? 수도 없이 철침을 박아둔 깡통 안을 하염없이 굴러다니며 출구를 찾는 조약돌처럼, 생각되어질 수 없는 생각과 슬픔, 추위만을 안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아니, 집으로 가는 길을 찾는다고 해야 하나...?
연주를 멈주고 리라를 품에 끌어안았다. 눈을 감았다. 그래나이트 셔플의 공허한 시선이 떠올랐다. 눈물이 흘렀다. 노인은 평생 돌아갈 집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앨러배스터 코멧후프도 그랬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내심 할머니도 돌아갈 집을 찾지 못했을 것 같다.
내게는 아직 항아비곡이 남아 있다. 이름 없는 자들의 노래가 있다. 지도가 있는 것이다. 가야 할 길이 얼마나 고되고 비참하든지, 아직 집으로 갈 길이 남아 있다. 그런데도 거기서 뭘 하고 있었던가. 왜 시간낭비를 하는 것인가.
나는 훌쩍이며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는 오두막으로 달려 들어갔다. 가방을 챙겼다. 음석 몇 덩이를 집었다. 악보 뭉치를 집어 일기장에 끼워 넣고, 그대로 가방에 쑤셔 넣어 포니빌 중앙 광장을 향하여 걸었다. 밤의 장막이 마을을 덮고 있었다.
혼곤한 잠에 빠진 마을은 흡사 꿈꾸는 죽음을 맞이한 듯했다. 허파를 쥐어짜내 한바탕 비명을 내지르더라도 저 사람들은 듣지 못할 것이고, 결국 내가 소리를 지른 사실을 잊을 일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든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게 되었다는 생각보다는 나으니까, 그래도 아직 중요한 사람이구나 싶은 생각을 하는 데 아주 유용한 생각이었다.
내게는 가장 따뜻한 곳인 포니빌 중앙 광장에 들어섰다. 그렇다고는 해도 한기가 몰아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후드를 뒤집어쓴 몸은 여전히 추위로 떨고 있었다. 음석을 원형으로 배열하고, 그 한가운데에 리라를 들고 섰다. 거의 14개월 전, 나이트메어 문이 봉인에서 풀려나 처음으로 발을 디딘 자리에 나는 서 있었다. 천 년 동안의 유폐 동안 쏟아진 슬픔을 루나 공주께서 견디셨는지 어쨌는지가 궁금했다. 나이트메어 문이 걸친 갑주가 천 년 동안 그 슬픔을 튕겨냈을지 어쨌을지 나는 알 수 없다.
이제 진실을 알게 되든지, 바뀐 것 없이 그대로일지 결정될 때가 됐다. 앞으로의 일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내가 변했는지 어쨌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코멧후프는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변해 버렸지만. 앨러배스터가 저주의 비밀을 끝내 풀어내는 데 실패했더라도 상관없었다. 당분간 내가 매달릴 테니까. 다만, 어느 불행한 영혼이 있어 다시 천 년이 지난 뒤 내 기록을 읽게 되면 그보다도 꼭 맞아떨어지는 일도 없을 터이다. 그 여자와 그 여자의 노래만 족쳐놓을 수 있다면 상관없다.
차갑고 머뭇거리는 숨결만이 나직하게 곁을 지켰다. 나는 잠시 멈추었다. 포니빌의 밤은 지극히 어둡고 고요했지만, 두려울 정도로 개방된 자리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먼저 살다 간 이들 중 내게 허락된 것과 같은 권능을 받고, 다만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고자 하는 진실한 희망에 기대어 실존의 베일을 꿰뚫고자 한 사람이 존재의 잊힌 역사 속 얼마나 살았을 것인가.
진실로 세상을 위한 일이기는 할까.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인식의 지평이 넓어지더라도, 내가 알고자 하는 바가 아닐 수 있는 것 아닌가. 나 홀로 저주받은 게 아니라면 어떨까? 주변 사람들 모두 나처럼 끔찍한 저주를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지만 나는 알 수 없는 것이라면? 일지를 적어 내려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내 곁에 저주를 짊어진 자가 있어 여기 좀 보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지만, 나는 평생 그 사람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면 또 어떠한가.
이제 더 미룰 핑계도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 다다랐고, 마음의 준비도 마쳤다. 가끔 눈물이 흘러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모르게 눈을 가리기는 했으나, 마음의 준비는 항상 해두고 살고 있다. 현을 퉁겨 어스름 진혼곡의 처음 몇 마디 소리를 일으켰다. 으스스한 곡조가 솟아 마을의 침묵을 잠재웠다. 관객은 하늘의 별뿐이었다. 그러든지 말든지, 나는 묘석처럼 버티고 서서 연주를 마쳤다. 여덟 번째 비곡이 잦아드는 동안 나는 가만히 앉아 계시를 기다렸다.
보이지 않았다.
몸이 떨려왔다. 황급히 일지를 꺼냈다. 이전에 변화가 있었던 페이지를 다시 펼쳐 읽었다. 그 때 자홍색으로 빛나던 글씨는 평소와 똑같이 밝게 어른거리고 있었다. 글자는 내가 써두었을 때와 똑같았고,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내가 기록한 그 날에 있었던 사건의 진상에 대하여 그것들은 입을 다물었다.
낮은 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코멧후프는 사건의 진상을 봤었는데, 왜 나는 진실을 알 수 없다는 것인가? 내가 코멧후프처럼 용감하지도, 절박하지도 않아서?
나는 서둘러 어스름 진혼곡을 다시 연주했다. 조악한 연주였지만, 정확한 연주이기도 했다. 음표 하나하나를 악보에 맞춰 정확히 연주하는 것으로 진혼곡 연주가 마무리되었다. 자홍색으로 빛나는 기록 앞에, 나는 단서 없이 내던져진 기억상실자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치솟는 짜증을 억누르며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진혼곡이 진실을 알려주지 않았으므로, 내 지성의 밑바닥까지 긁어 가며 그럴듯한 이유가 뭐가 있을지 생각했다.
나는 그때서야 깨달았다. 그곳은 내겐 포니빌에서 가장 따뜻한 자리였지만, 뼛속까지 얼어붙는 듯한 한기를 억누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나이트브링어가, 없구나."
이마를 짚으며 그대로 마을 중앙 광장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제기랄, 나이트브링어도 있어야 하다니..."
조각난 성가의 마지막 한 조각, 나이트브링어는 앨러배스터가 가지고 있었다. 그는 유일하게 왜곡된 현실에서 진실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었고, 고대의 악기를 소유한 유일무이한 필멸자이자 이름 없는 자였다.
내가 가진 거라 해도, 뭐가 있는가?
나는 한숨지으며 그대로 잔디밭에 턱을 괴고 엎드린 채 눈을 감았다. 잘해 봐야 이름 없는 묘비 하나 정도밖에 건질 게 없겠지만,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현듯, 가야 할 길은 내 생각보다 훨씬 길고 멀리 뻗어 있었다.
"B6에서 G6."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체스판 위 정사각형들의 배열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흑백무늬를 들여다보며, 나는 그 어떤 색도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 성립할 수 있는 삶이란 얼마나 각별한 것일까 생각했다.
"자네 귀가 먹으셨는가?!" 그래나이트 셔플이 쌕쌕대며 기침을 토해내더니, 체스판 끄트머리를 두드렸다. "이 룩을 G6으로 옮겨달란 말이오!"
"아... 어..." 문득 정신을 차리고 꿈지럭대며 대답했다. "죄송해요." 뿔을 밝혀 노인의 룩을 집고, 내 킹과 퀸을 정면으로 압박하는 자리에 얹었다. "딴생각을 했네요."
"군수공장에는 들어가지 마시오. 자네 발굽이 튼튼하기는 하지만서도, 잡쇠를 녹여 갑주를 만드는 데는 맞지 않소. 자네는 부드러운 흙을 밟고 사는 게 더 어울리기도 하고." 그래나이트 셔플이 움찔대듯 자세를 고쳐 앉았다. 노인의 주름진 피부 위로 오후의 햇살이 흘러 들어와, 길고 깊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본래 여자란 전선에서 가능한 멀리 있어야 하는 법이오. 전선 가까이에서 일하는 건 그레이스 하나만으로 족하단 것이오. 평생 안 봐도 될 피를 거기서 다 보고 있지 않소. 레드트롯이 쩌렁쩌렁하게 소리치며 지휘하는 건 잘 하지만, 그레이스에 비하면 오히려 겁쟁이에 불과하오."
"그렇군요."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라도 그렇겠지요."
"스미스 양, 괜찮은 게요? 아무래도 잠을 영 못 잔 모양이구려."
나는 한숨짓고 퀸을 움직여 노인의 룩을 제거했다. 퀸이 빠진 빈틈으로 노인의 비숍이 침투해 킹을 공격한다면 옴짝달싹못하고 체크메이트를 당할 판국이었다. 설마 목을 치라고 본인이 직접 목을 빼 늘어뜨려 줄 줄은 몰랐는지, 노인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벌린 채 체스판만 보고 있었다. 그 때야말로, 말할 기회였다.
"셔플 선생님?"
"흠? 왜 그러시오?"
"저는 스미스 씨가 아니에요."
노인은 놀란 눈치였다. "아니라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라이라 하트스트링스라고 해요. 체스나 두자고 선생님 뵈러 온 것도 아니고요."
"허! 그래, 그래 보이는구먼!" 노인은 떨리는 발굽으로 비숍을 집어 내 킹의 활로를 차단하는 자리로 뻗었다. "바보도 이렇게는 안 두겠더구려! 블루 오츠 녀석이랑 뒀을 때나 이랬는데 말요. 체스의 기본은 폰이라는 것도 모르는 덜떨어진 놈이었지." 발굽에서 비숍이 떨어졌다. "빌어먹을."
노인의 비숍을 주워들었다. 그래나이트가 겨냥한 좌표로 비숍을 움직이는 대신, 나는 체스판 위에 말을 띄웠다. 창문 너머에서 들어온 빛이 기물의 가장자리를 따라 튕겨져 나갔다. "셔플 선생님, 하나 여쭐게요. 모든 걸 되돌릴 수 있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기회가 온다면. 받아들이시겠어요?"
"흠?" 노인은 이상한 소리를 한다는 눈치로 말했다. "스미스 양,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우리 모두 있어야 할 자리에 와 있지 않소?"
"그래나이트 선생님. 저는 스미스 씨가 아니에요. 여긴 사과 과수원도, 제브라하라의 사막지대도, 또 스탈리온그라드 외곽 야전병원도 아니에요. 선생님 집, 포니빌이죠."
"포니빌? 집? 허, 그 빌어먹을 벽촌에 참 오래도 붙어 살았지. 그렇지 않소? 갈 기회만 있으면 당장이라도 가고 싶은데..."
"뭐 문제라도 있나요?"
노인은 얼어 있었다.
나는 캐물었다. "무엇 때문에 포니빌로 돌아가기 싫으신 거죠?"
"흠..." 노인은 두 발굽으로 체스판 양쪽을 붙잡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날씨도 안 좋고, 페가수스들 성격은 개차반이오. 어떻게 봐도 말이 안 되는 버러지인 패러스프라이트도 살지..."
"그런 데서는 살기 싫으신 거군요?"
노인은 윗입술을 씹었다.
차분히 웃으며 물었다. "그러면 그래나이트 선생님은 어디서 살고 싶으세요?"
"흠..." 노인이 몸을 움직였다. 주름진 피부가 양 옆으로 솟았다. "아주 잠시만이라도 댄스 플로어에 살고 싶구려. 아직 시간이 남아 있을 때,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 아주 잠시라도 거기에서 살고 싶소."
빙긋이 웃으며 가방을 열었다. "어쩐지, 선생님께서 거기 가고 싶으신 것 같더라고요."
"그랬소?"
"네." 리라를 꺼냈다. "그것 때문에 좀 전 시립도서관에 들러 음악사 서가를 좀 뒤졌지요."
"스탈리온그라드에 도서관도 있소? 그 동네 사람들은 읽으라는 책 외에는 못 읽는 줄 알았는데."
낄낄 웃고 말했다. "뭐, 잠시긴 하지만 흉내라도 내 보자고요." 이때부터 현을 퉁기기 시작했다. "아시는 곡인지 말씀 좀 해 주세요."
"뭐라? 연주를 하겠다? 음악 감상은 취미에 없—" 노인이 말을 멈췄다. 늙고 병든 허파에서 숨소리만 쌕쌕거렸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울리는 현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리 긴 곡은 아니었지만, 젖어 오는 눈가를 보아하니 조금이라도 제정신을 차리게 해 준 것 같았다.
나는 연주를 마치고 리라를 한쪽 옆으로 치우며 빙긋이 웃었다. "어때요? 마음에 드시나요?"
"'떠나시오, 데이지'." 노인이 더듬거려 말했다.
씩 웃으며 대답했다. "제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곡이더군요. 겨우 악보가 실린 책을 찾아냈는데, 얼마나 오래된 책인지 다 찢어지기 직전이었어요. 재미있지 않나요? 기억에서 거의 잊혀진 곡이, 갑자기 코앞에서 되살아나다니."
그는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고만 있었다.
웃음기가 싹 가셨다. 몸을 기울여 사내의 앞다리에 발굽을 얹었다. "셔플 선생님? 듣고 계세요?"
안 듣고 있던 게 분명했다. 노인이 입 밖으로 꺼낸 말은 나를 향한 것도, 애플 스미스를 향한 것도 아니었다. "그대 갈기는 비단결 같구려." 노인이 나직하게 말했다. "어떻게 관리하는지 물으니, 살아서 돌아오거든 그 때 직접 보여 주겠다고 하지 않았소. 그것 말고도 더 보여 줄 게 있었던 게요. 운도 억수로 좋은 놈 아니오? 야전병원 간호사 중 가장 예쁘장한 아가씨가 나를 고르다니 말이오. 내가 그리 잘생긴 용모도 아니고... 그렇게 행복해질 거란 생각도 한 번 해본 적 없는데... 아..." 사내가 젖어 가는 눈으로 방을 가만히 훑자, 그 위로 흑백의 유령이 엉겼다. "그대를 위해 빌어처먹을 전쟁터로 나갔소. 사방에 구르는 시체와 치솟는 불길... 그때부터는 눈에 들어오지 않더군. 블루 오츠는 내 품에서 숨을 거뒀소. 평소처럼 울음을 달래주는 것밖에 하지 못했지요. 전장을 뛰어다니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그대가 내 곁에 있었소. 그대는 내가 살아서 돌아오기만 한다면 기꺼이 평생을 함께해 줄 정도로 좋은gracious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오. 얼마나 고마운 일이오..." 노인의 눈가가 떨리더니 한 방울 눈물이 굴러 떨어졌다. 사내는 그 말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비수 같은 한 마디로 명확히 했다. "그레이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싶어 이마를 찌푸리던 중, 가슴이 철렁 주저앉았다. 공동묘지를 거닐며 묘비에 적힌 이름을 보지 않았던가. 주인을 기다리는 그래나이트 셔플의 가묘假墓를 보았고, 그 옆에 있었던 또 하나의 무덤을 보았다. 나와 마찬가지로, 노인 또한 자신을 기다리는 한 이름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 선생님..."
"그레이스..." 발굽으로 눈물을 문질러 닦는 늙고 병든 사내의 얼굴은 한없이 가련해 보였다. "그레이스, 날 두고 먼저 가면 어떡하오. 그대가 떠난 빈 자리에... 보이지 않는 우리 아이들은 또 어떡한단 말이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무릎을 꿇고 앉아 빌었다. "선생님, 진정하세요! 죄송해요! 좀 더 신경 썼어야—"
"놓으쇼!" 노인이 앞다리를 홱 휘둘러 나를 밀쳐냈다. 노인이 분명 군인이었음을 나는 몸으로 알았다. 나는 그대로 밀쳐져 뒤로 쓰러졌다. 한 사람의 부서진 인생에서 떨어져 나온 먼지가 사방으로 떨어졌다. "내버려 두시오! 나는 그레이스를 사랑했소, 스미스 양! 내 평생 그레이스를 잊는 날은 단 하루도 없을 게요! 그레이스는 나만 봤단 말이오! 이제 그 눈이... 아아, 그 눈이..." 노인은 비탄에 젖어 흐느껴 울며 발굽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제 뜨이지 않소. 더 뜨이지 않는단 말이오. 위시 스텝, 의사를 불러오거라. 돌아오며 스팅킹과 필시를 데려와라. 너희 엄마가 일어나지 않는구나. 절대... 저, 절대..."
노인의 울음은 두려울 정도로 조용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방인이었다면 그 울음은 사방에서 들리는 신음과 기침, 겨우 꺼내는 말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을 것이지만, 나는 그런 제3자도 아니었고 이는 모두 내 책임이었다. 나는 사지가 끊어지는 듯한 심정으로 노인의 방을 떠났다. 그래나이트가 평생 갖고 살아온 용기의 아주 작은 한 파편만 내게 있더라도, 내 인생을 기꺼이 살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나보고 뭔 파랑새 운운하는 거야!" 슈가큐브코너의 한쪽 구석 자리 테이블. 레인보우 대쉬가 큰 소리로 툴툴댔다. "아니, 멀쩡히 발굽 달린 것도 안 보이나? 내가 뭐 하고 싶어서 아침에 공동묘지에다 비구름 갖다 놨냐구! 묘지긴지 뭔지, 그 위니Whinny 할아범이 뭐 '대양의 색을 품은 알바트로스'인지 매인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개소리나 주절대는 걸 어떻게 견디나 몰라?!"
"하하하." 옆에 앉아 있던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웃었다. 둘 앞에 따끈한 김이 피어나는 차 두 잔이 있었고, 레인보우 대쉬 옆에는 래리티가 있었다. "쓸데없는 소리가 아냐, 레인보우 대쉬! 나이들수록 죽음만 가까워 오는데, 이왕이면 죽는 건 생각하지 말고 그런 거라도 생각하는 게 낫지 않아? 위니 아저씨가 굳이 새 얘기 하시는 건 조류 관찰하는 게 취미셔서 그렇고."
"취미가 아니라 집착이야 집착!" 레인보우 대쉬가 투덜댔다. "그 멍청한 머리에는 뇌 대신에 새새끼들 깃털이나 채워 다니는 게 분명해! 세상에, 어떻게 레인보우 대쉬를 몰라봐! 포니빌 기상관리팀 팀장에, 청년비행대회 우승자라고! 어떻게 거기다 새새끼를 들이밀어!"
"내가 눈 빤히 뜨고 쳐다보고 있는데, 안 될 리가." 래리티가 우아한 몸짓으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캔틀롯 패션 이야기나 해 볼까 해서 왔더니, 겸손할 줄 모르는 떠벌이 페가수스가 자존심 채우는 얘기나 한 분밖에 없는 장의사 선생님 취미생활 얘기밖에 없네."
"야 래리티, 네가 그 양반 못 봐서 그래!" 레인보우가 큰 소리로 말했다. "아마 너 보자마자 갈기는 공작새 꼬리 같다느니 헛소리나 하면서 5분 먼저 가려다 50년 먼저 갈 거기라도 한 양 네 몸에 맞는 관 사이즈 재기 시작할 거다!"
"으!" 래리티가 움찔하며 말했다. "농담이겠지! 시청이 어떻게 그런 노망난 영감한테 우리 가족 친지들 장례를 맡겨?"
"그거야 일솜씨 하나는 기가 막히니까!" 트와일라잇이 큰 소리로 말했다. "위니 아저씨가 선을 넘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행동하시는 것도 맞는 말일 수 있지만, 괴짜 소리 몇 마디 듣는 걸로 그렇게 성실하고 일 잘하는 사람 구할 수 있으면 괜찮은 거야. 애초에..." 트와일라잇이 차를 한 모금 하더니 덧붙였다. "업무 시간 대부분은 혼자 계시고, 그분도 혼자 있는 걸 더 좋아하시는 것 같더라. 누가 너 공동묘지 가서 묘지기 양반이랑 얘기하고 오라고 강요하는 건 아니잖아."
"그럴 것도 없지 않나? 책에서는 못 배우는 걸 배우러 가는 게 그렇게 무서울 일은 아닌 것 같은데?"
트와일라잇이 얼어붙었다. 멍한 표정으로 래리티와 레인보우 대쉬를 마주보았지만, 당황한 것은 그 둘도 마찬가지였다. 그 누구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으니까.
"나이들면 언제고 그 사람처럼 늙고 오락가락하게 될 텐데, 그렇게 되면 늙은이 취미라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작자들이 낄낄대면서 비웃어댈 게 뻔한데, 그건 안 무서운가 봐?"
트와일라잇이 놀라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다른 사람들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단 한 명,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트와일라잇을 노려보는 사람이 있었다. "죄송한데, 뭐라고...?"
"죄송하긴 뭐가 죄송해?" 나는 씩씩대며 셋이 둘러앉은 테이블로 향했다. "정말로 죄송하단 생각이 있기는 하셔?! 머리에 수백, 수천 권씩 읽어제낀 책 내용은 들었을지 몰라도 당장 코앞에 살아 있는 역사도 못 보는 주제에 말이 많네. 아, 나는 영원히 역사에 남았으면 좋겠다, 하시는 분이 다른 사람은 별것도 아닌 양 그렇게 뭉개는 게 참으로 보기 좋네요."
"야!" 레인보우 대쉬가 찌푸리며 그대로 자리에서 날아올랐다. "당신 뭔데 함부로 지껄여? 당신이 뭐라고 트와일라잇한테 그따위로—!"
"당신도 마찬가지!" 나는 맞쏘아보며 말했다. "대체 언제까지 노예마냥 빌빌거리고 다니면서 한도 끝도 없이 아 원더볼트 들어가고 싶다, 만 늘어놓을 건지 궁금해 죽겠네. 연기통 매달고 하늘에 글씨 쓰고 그림 그리는 연습에 인생이고 뭐고 다 갖다 들이박느라 친구, 가족 할 것 없이 다 내다 버린 끝에 다 늙어서 돌아보면 뭐가 있을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꿈이라는 걸 알기라도 하고 쫓아야 하는 게 정상 아냐?"
레인보우의 붉은 눈이 멍하니 꿈벅였다. "아... 어... 어......"
고개를 돌려 래리티를 향했다. "당신은, 패션이 인생의 전부인 줄 알지?!"
"당연한 거 아닌가요! 제가—!"
"당신이랑 더 가까워지지 못해 안달인 여동생도 안 보이고, 좀 더 같이 어울려 다니고 싶은 친구들도 안 보인다 이거구만. 당신 머릿속에 들어찬 거라곤 그 같잖은 상상력으로 쥐어짜낸 로맨틱한 저녁때밖에 없잖아? 하나같이 무릎으로 질질 기고 당신한테 매달리는 남정네들 말야. 유명해진다는 그 꼴같잖은 꿈 하나 때문에 당신 코앞에 와 있는 것들도 못 보는데 그게 그 정도로 가치있는 건가? 자기네들 희생이 물거품이 됐으니,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아는 사람이 되겠다고 자기들 인생 내다 버린 사람들도 참 안됐네. 그 작자들이 그 끝에 사람이 아니라 한낱 이름으로 전락했다는 걸 왜 모르지?!"
래리티는 풀이 죽어 얼굴을 찌푸렸고, 트와일라잇은 당신 누구냐는 눈길로 이쪽을 쏘아보았다. "저기, 이게 다 무슨 소리에요?! 대체 뭣 때문에—?"
"이 빌어먹을 작자들은 하나하나 다 떠먹여 줘야 알아처먹어?! 그냥 고개 들고 눈 앞을 보면 누구라도 세상이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감각의 대상인 걸 깨달을 텐데 대체 다들 왜 이래!"
이쯤에서 호흡이 가빠졌다. 나는 그대로 주저앉아 두 뒷다리를 모아 가슴에 붙였다.
"당신들 다 충분히 멋지게 살잖아." 나는 말했다. "당신들 전부 다. 즐거운 것들과 지켜야 할 것들이 당장 내일 오는 게 아니잖아. 오래 전에 사라진 것도 아니잖아. 우리 앞에, 바로 코앞에 있는데. 왜 다들 세상에 더 중요한 게 있는 것처럼, 그것만 있으면 등신같은 걸 찾아 도저히 끝나질 않는 병신같은 여정을 떠나는 작자들이 없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굴어. 왜 잠깐 멈춰서 당신네들이 가진 것, 당신네들 곁에 있는 사람들을 보질 않냐고. 나도 당신네들처럼 따뜻하게, 즐겁게 살고 싶어. 당신네들처럼 서로 웃고 떠들면서 살고 싶다고."
숨이 막혀 왔다. 떨리는 발굽으로 갈기를 쓸어넘겼다.
"나도 당신네들처럼 친구들이랑 어울릴 수만 있다면, 딱 하루만이라도 잊히지 않을 수만 있다면, 아무나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 하나 붙잡아서 하루 종일 어울려 다닐 거라고. 그것들이 전부 과거로 접어들어 더 이상 지금 이 순간에 남아 있지 않게 되면... 아무것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야. 알아들어? 세상엔..."
다시 고개를 들어 바라본 순간, 나는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레인보우 대쉬는 그때까지도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래리티는 몸을 달달 떨고 있었다. 트와일라잇 스파클은 멍하니 입을 헤벌린 채였다. 그 얼굴 위로 드러난 표정이야 제각각이었지만, 이게 무슨 일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음은 명백했다. 그 셋뿐만이 아니었다. 슈가큐브코너의 사람 전부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갑자기 나타난 미친년을, 저주를 짊어진 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 태양절 축제 이후 광인이 여러 사람들 앞에서 소리를 질러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일 년 전 그 때처럼, 그 때의 시선도 사라질 것임을 나는 알았다.
식당은 막막한 침묵만 가득했다. 가게 밖으로 도망치려 살며시 걸음을 옮겨놓는 작은 발굽 소리만 들렸다. 내 비겁한 심성은 항상 도움이 되지 않았다. 흐느끼던 그래나이트 셔플 선생의 목소리가 귓가에 앵앵댔다. 눈을 질끈 감고, 한쪽 발굽을 얼굴로 가져갔다. 휘몰아치는 한기가 몸 곳곳을 타격했다. 나는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
노인에게 있어 기쁨의 노래라고 할 만한 곡을 연주해 주고 싶었다. 젊었을 적의 그 기쁨을 다시 누리게 해 주고 싶었다. 기쁨이 있으면 그 반대편에 고통이 있을 것이며, 이들은 천칭과 같아 그 때는 있었으나 이제는 없는 것들의 공백과 허무를 계량할 뿐이라는 것을 나조차 잊고 있었다. 삶의 끝자락에 선 쇠약한 노인을 가지고 실험을 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자기는 사람들 기억 속에 영원히 남고 싶다던 저 친구가 보기에 나는, 실수를 아쉬워하고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아닐 것이고, 그리하여 같은 실수를 평생 반복하는 부류에 지나지 않을 터이다.
"미안하게 됐수." 나는 울먹였다.
"괜찮아요, 일어나세요." 트와일라잇의 목소리는 나를 위로하는 듯했다. 그것은 차라리 독이었다. "여기 앉으세요. 얘기나 좀 하죠. 왜 그러시는지—"
"그... 그..." 숨이 막혔다. 몸을 돌려 급히 달아났다. "미, 미안!" 나는 눈물을 쏟으며 슈가큐브코너의 문을 박차고 나와 도망쳤다.
나는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갈피를 잡지 못한다. 이번에는, 잡지 못한 갈피를 다시 찾아 잡아 보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 날 저녁, 나는 침대에 누워 창 밖으로 떠 오는 별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위대한 어머니가 우리와 같은 감정을 가지고 저 별자리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면 어떠할 것인지 생각했다. 창조주께서 당신이 빚어낸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 스스로 찾아가도록 운명지으신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신격을 갖고 불멸의 존재가 되어 맡은 일을 그만두고 본인의 취미생활에 몰두한다고 생각하니 그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셀레스티아 공주께서 트와일라잇 스파클을 가까이 하시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내제자를 들이기로 작심하고, 살아온 시간과 살아갈 시간에 비하면 티끌조차 되지 않을 짧은 시간 동안 길러내는 것은, 위대한 사랑의 실천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다.
나는 마을 사람들을 진실로, 진실로 사랑한다. 저들을 사랑하기로 했기에 나는 저들을 사랑한다. 조금 전 내쉰 숨결을 잊어버리듯 나를 잊어버리는 이들이지만, 사랑하고자 하고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만큼은 잊지 않는다. 그 욕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만 몸만 살아서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목적을 가지고 거기에 있음을 인정하고자 하는 욕구인 것이다.
나는 트와일라잇 스파클을 사랑한다. 레인보우 대쉬와 래리티도 그렇다. 그래나이트 셔플 선생도, 내 모든 경애를 바쳐 사랑한다. 할머니께는 해 드리지 못했으므로, 언젠가 부모님께서 소천하실 때가 오더라도 내가 그 곁을 지킬 수 없을 것이니 부모님께도 마찬가지로 해 드릴 수 없을 것이므로, 나는 그래나이트 셔플의 곁에 서 있고자 했다.
밤은 더디게 흘러갔다. 나는 몸을 말고 누워 눈을 질끈 감았다. 온 세상의 눈물을 내가 다 흘렸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순간, 머릿속에 새벽이 밝아 문득 떠오른 한 줌 생각에 온 몸이 해체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슈가큐브코너로 쳐들어가 주절댄 헛소리가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그래나이트 셔플 선생을 만날 일 없었으면, 친해져 보려는 짓을 하지 않았으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애초에 노인과 나 사이의 '관계'가 그럴듯한 과실을 맺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노인에게 나는 허깨비일 뿐이다. 스미스 할머니였다가, 어느 순간 블루 오츠로 전환되고, 다시 간호사로 뒤바뀔 뿐이다. 그에게 나는 변화무쌍하게 뒤섞이는 기억의 편린들 한가운데서 표류하며 그 가운데서 보이는 것들을 이야기할 대상, 그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없었다. 나는 앨러배스터 코멧후프 박사가 제정신을 차리기를 바랐고, 그래나이트 셔플 또한 제정신을 차리길 바랐다. 나는 앨러배스터와 교류할 수 없지만 그래나이트와는 교류할 수 있다. 이게 그렇게도 단순하고 이기적이고 가여운 일인가.
그래나이트에게 한 곡 연주를 들려주었고 사내는 거기서 빛을 보았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될 것인지, 미리 생각했어야 했다. 이유가 있어서 한 사람의 끝이 그토록 차갑고 비참한 것이 아니겠는가. 80년이란 세월은 떠나보내야 했던 것이 얻은 것 이상으로 쌓이기 충분한 시간이다. 자기 자신의 삶의 그림자에 사는 이들은 굳이 기억을 꺼내 볼 필요가 없다. 그저 한갓진 곳에 살며 젊은이들에게 존중받고 동년배들과 어울릴 수만 있다면 충분하다. 가만히 내버려 두었으면 될 텐데, 나는 그러지 않았다. '떠나시오, 데이지'를 연주했고, 그 끝에 찾아든 명료한 의식의 끝에 노인은 사별한 그레이스를 떠올렸다. 그 기억이 노인을 잠식한 것이다. 그 곡을 취해 이름 없는 자들과 똑같은 신세로 만들 권능이 내게 있었기를,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나마 전심전령으로 나는 바랐다.
한 줄기 한숨이 입 밖으로 새나왔다. 눈이 열려 떠졌다. 나는 일어나 앉았다. 눈가를 문질러 닦고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향했다.
아득한 별들이 사방으로 넓게 퍼져서 반짝이고 있었다. 저것들이 다 무엇인지 조사하고 연구하는 일이 위험할 뿐더러 연구자의 목숨까지 앗아가는 일이라고 생각해 봐도, 그렇다 해서 밤하늘에 뜬 별을 가만히 올려다보지 말라는 법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크게 휘둘러 밤하늘을 쓸어 내버리는 일이 아주 간단하고 쉬운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나, 그 끝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이 텅 빈 하늘일 것이다. 그런 하늘에 어떤 아름다움이 있을 것인가.
나는 그 때 위대한 어머니가 세상에 남기고 떠나, 영영 치유될 수 없는 흠결 하나를 새삼 깨달았다. 그 한 가지 실수에서 모든 죄악이 비롯되었으리라. 위대한 어머니가 이름 없는 자들의 영역을 빚어내어, 그 여자를 궁창 사이의 세상에 매장한 것은 어떤 식으로든 용기와 고결함으로 포장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단순한 비겁이었을 뿐이다. 위대한 어머니가 그 여자를 영원히 홀로 내버렸듯, 내가 그래나이트 셔플을 영영 홀로 되게 버려둔다면... 자기 할머니가 당신의 체액에 질식해 돌아가시는 와중 한 번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은 계집애처럼, 위대한 어머니처럼 비겁자가 될 뿐이리.
어느 순간 눈물이 멈추었다. 자야 했으므로 나는 잠들었다. 잠을 자야 노인네를 찾아가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닌가.
느릿한 걸음으로 셔플 선생의 방에 들어섰다. 노인은 의자에 앉아 있지 않았고, 침대에 반듯이 누워 있었다. 그는 깨어 있었는데, 그것으로 족했다. 숨소리가 요란했으나 실제로 허파에 들어가는 호흡량은 그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듯했다.
나도 살아오면서 끔찍한 것들을 여럿 보았었다. 사방에서 번개가 내리치고, 구속구로 입을 묶인 자들이 흐느껴 울며 쇠사슬 쩔렁이는 소리와 함께 끝없는 지옥의 한복판을 배회하는 곳에도 다녀왔다. 이제 돌아가라는 말을 들었으면서도 끝내 노인의 방으로 돌아와 홀로 눈물짓는 이의 앞에 가 앉는 데는, 이름 없는 자들의 영역에서보다도 더한 용기가 필요했다. 그래나이트 선생이 나를 기억할 확률이라 해도, 차라리 타르타로스에 눈송이가 흩날릴 가능성을 재는 것이 훨씬 현실적이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내가 살아온 길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기억의 주체는 나였다. 기억하는 쪽은 항상 나였다.
"면회객이 그닥 달갑지 않으신 건 알지만..." 나는 말했다. "그래도 잠깐 들러 보고 싶더군요. 가라고 하신다면야, 가겠지만... 왠진 몰라도 선생님 얼굴 한 번 더 보고 싶더라고요."
"한 번 더라니...?" 노인은 천장으로 향한 시선을 꾸물거렸다. 덮은 이불 속에서 사지가 조금씩 움직여, 주름진 발굽이 노인의 가슴팍 위로 향했다. "자네... 전에도 왔었다는 얘기군?"
나는 당황했다. 나를 애플잭의 조모, 애플 스미스로 여기지 않고 있으니까. 무슨 일이 있었던가. 내가 말을 걸고 있는 상대가 정말 그 그래나이트 셔플이 맞았을까. 아니, 당초에 나와 이야기하던 그래나이트 셔플이 전부 동일인물이라 할 수 있는가.
"흠?" 노인이 툴툴대는 투로 말했다. 짜증 가득한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 정정한 기력이 담겨 있어서, 나는 차라리 안심했다. "자네, 거기 있는가. 고양이가 자네 혓바닥을 뜯어 가기라도 한 겐가?"
나는 씩 웃으며 숨을 내쉬었다. 스툴에 앉아 두 발굽을 맞대고 비비며 노인이 누운 침대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잠시 뒤 대답했다. "네. 전에도 온 적이 있죠. 보다 정확하게 세 보자면, 이번 주만 해도 벌써 세 번은 찾아뵈었네요. 오늘까지 세면 네 번째고요."
"허?" 노인은 해수기침을 토해내고, 거칠어진 숨으로 쌕쌕거리다 날숨을 길게 뻗어 호흡을 가다듬었다. "집안 어른이라도 뵈러 왔나?"
"아뇨... 그런 건 아니고..." 나는 말했다. 노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천장에 가 박힌 시선이 떨어질 줄 몰랐다. 나는 느리게 말했다. "이번 주에 벗님을 한 분 사귀게 되었거든요. 저도 설마 그렇게 될 줄 몰랐지요. 체스 솜씨가 일품이랍니다. 저도 나름대로 어느 정도 폰이랑 비숍은 운용할 줄 안다 싶었는데, 그 분은 훨씬 잘 하시더라고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좋은 건 좋은 것대로, 나쁜 건 나쁜 것대로 많이 보고 들으셨지요. 심지가 굳은 분이에요. 젊으실 적에는 친구를 여럿 사귀셨다는데, 저... 세월이 지나면서 보내기도 많이 보내셨다고 하더군요. 음..."
나는 헛기침을 하며 후드 재킷의 소매를 매만졌다. 아무 말도 일도 없이 잠깐의 시간이 지나갔다. 나는 말을 이었다.
"결혼하셔서 자녀도 두셨는데, 하나같이 아버지를 닮아서 영리하고 돈 버는 재주가 있었다는군요. 늙고 병든 부모를 자주 찾아오는 것이 자식의 도리일진대, 그 도리도 다하지 못하는 자식들을 여전히 아끼고 사랑하시더라고요. 그저 자식들 잘 되기만을 바라시면서. 머나먼 이국의 땅이 순수악의 발굽에 짓밟히려 할 때 함께 전장으로 진격하던 동료 전우들에게도 마찬가지였어요. 이미 지나온 길은 한도 끝도 없이 늘어져 있는데, 집으로 향하는 귀로는 피안 너머로 한없이 뻗어 아무리 걸어도 닿지 않을 것만 같았다더군요.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 때 비로소 그 분이 제겐 벗님 그 이상의 존재인 걸 알았지요. 뭐라고 할까..."
나는 입술을 씹으며 대놓고 눈가를 닦았다. 노인은 내게 시선을 두지 않았다.
"제 인생의 골목길마다 그 분이 계셨다고 해야겠네요." 목소리가 떨렸다. "그 분은 전혀 모르시지만요. 당연히, 아니지. 그 분께서도 그걸 아셔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죠. 맑은 정신으로 살아가실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육신에 담긴 기억이 뒤섞여 뒤죽박죽이 되어 있기는 하지만, 아직 기억하고 계신 것을 이용하면 정신을 돌려 놓을 수 있겠다 싶었지요. 벗님의 기억 깊은 곳까지 들어갈 수만 있다면,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뭐라도 행복한 기억을 끄집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디에 계시든, 몸 상태가 어떻든 그 분이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실 수 있기만 바랐어요. 딱, 하나만이라도."
방 안에 드리운 어둠이 세를 불리는 듯한 느낌에 몸을 떨면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건 사실." 나는 말했다. "다 그분을 위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절 위해 한 짓이었죠. 이 미쳐 돌아가는 세상이 더 이상 저를 받아들여 주지 않는 날이 오면, 행복했던 기억과 선행의 기억을 가지고 한갓지며 영광된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해서 그랬던 거에요. 사실 지금도 궁금하기는 해요. 인생의 끝자락에서 제가 가진 거래 봐야... 아니, 우리가 가진 거래 봐야 자기 자신의 생각 외에는 자기 것이라고 할 만한 게 없을 테니까요. 그것들이 전부 온전한 기억도 아닐 것이고, 하나같이 즐겁고 행복한 기억인 것도 아닐 것이긴 하지만."
방을 떠다니는 작은 먼지의 촉감 하나하나가 느껴져서 발굽을 움찔했다. 우리 둘 다 시간이 목숨을 거둬가기만을 기다리는 화석에 불과했다. 노인은 기나긴 세월 동안 그 부패에 맞서 싸웠을 것이므로, 나 또한 저항을 멈추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존재가 특별하죠. 각각의 존재로 세상에는 소리가 있게 되는데, 그것도 보통 소리가 아니라 화려함의 극치에 이른 합주곡이랍니다. 혼자만의 소리라면 그 가락이 얼마나 웅장하고 아름답든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게 중요하죠. 솔직히, 제 평생 동안 누구한테서 앙코르 소리 들어 보는 날이 오기는 할까 저도 잘 몰라요. 하지만, 제 벗님에게만은 그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노인 쪽을 쳐다보았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나이트 셔플은 전과 똑같은 멍한 표정을 지은 채, 그저 천장만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인후에 응어리가 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초췌한 숨소리와 함께 스툴을 끌어당겨 비틀거리며 앉았다. 노인의 병상에 기대어 사내의 한쪽 발굽을 가만히 쥐었다.
"글쎄... 아무래도 다른 때 다시 찾아뵈어야 하려나 봐요. 그분이 저를 용서하실지 어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닐 거에요. 그저, 함께 있어 즐거웠다는 걸... 그 분은 평생 제 목소리를 기억하지 못하실 테지만, 그 분 덕에 저는 한결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는 걸, 알아 주시기만 했으면 좋겠어요."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노인의 침상과 사내를 향해 덮쳐오는 어둠을 피해 방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걸음이 문간에 닿았을 때, 무엇인가 나직한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노인이 질식하기라도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놀라서 그래나이트 선생 쪽을 쳐다보자, 한 마디 가락을 흥얼거리는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노인의 숨이 고르지 않아서, 그가 어떤 곡을 흥얼거리고 있는 것인지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얼마 뒤에야 그 곡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떠나시오, 데이지'." 나는 말했다.
노인은 침을 삼키더니 가만히 말했다.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구려. 왜... 그런지는 모르겠소만..."
눈을 질끈 감으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미안해요, 그래나이트. 그래서는 안 됐는데..."
"미안해할 것 없소. 그레이스." 노인이 중얼거렸다. "그 때 같이 췄던 춤만큼 즐겁고 황홀했던 일은 평생 없었거든. 그것만 생각하면 사막에서도 그리 더운 줄 몰랐다오. 레드트롯이 소리를 빽빽 질러대는 것도 어디서 개가 짖나, 하고 잘 들리지 않더군. 그렇지, 바로 어제 일이오..." 사내가 숨을 급히 들이마셨다.
눈을 떴다. 내가 본 것을 나도 믿기 어려웠다.
그래나이트 선생은 얼굴을 찌푸리지도, 웃지도 않았다. 그것은 차라리 처음으로 난방절을 맞이한 어린이의 그것과 같은 순수한 경이를 영접한 얼굴이었다. "어떤 빈 마을에 진입했소. 고을에 살육만 그득했다오. 우리는 수도 없이 영양을 참살했소. 모래가 피로 물들었소. 곁에서 같이 싸우던 병사 하나가 적병의 공격을 받고 숨졌소. 나는 죽은 놈을 보고 웃었다오. 위악을 떨거나 하려던 것은 아니었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으니까. 그 때 머릿속으로 '떠나시오, 데이지'를 다시 떠올렸소. 그리고 그대의 비단결 같은 갈기와, 우리 같이 추던 춤을 생각했소. 그 때 아주 작은 문이 눈가에 들어오더군. 그레이스, 그대 갈기와 똑같은 문고리가 달려 있었소. 레드트롯을 보고 그쪽을 가리켜 보였소. 우리는 즉시 그쪽으로 이동했소. 레드트롯이 문을 가만히 들어 열었소. 창을 꼬나잡고 제일 먼저 돌입했더니, 글쎄..."
사내는 발작이라도 일으킨 듯 쌕쌕댔다. 순간 너무나 당황해서 너스 콜을 울려야 하나 싶었다. 노인은 잠잠하게 진정된 목소리로, 반쯤 울먹이며 말했다.
"백 명은 족히 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소. 사방이 줄무늬 천지더구려. 부모와 자식이 뒤엉켜, 온 가족이 서로에게 매달려 있었소. 저들은 우리를 영양의 떨거지로 오해했소.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비명을 지르더구려. 문을 더 활짝 열었소. 그제야 서로를 식별할 수 있었다오. 그 마을 얼룩말들은 죄다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던 게요. 태어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사람들이 말이오..."
그래나이트 선생이 몸을 떨었다. 눈물이 굴러 떨어짐과 동시에 사내가 발굽을 들어 눈가를 닦았다. 이번에는 전혀 달랐다. 아, 그 다름의 찬란함이여. 노인은 웃고 있었다.
"우리는 그 사람들을 꺼내 주었소. 저들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달라고 하지 않았다오. 다만 우리를 껴안았을 뿐. 눈물로 범벅이 돼서는 우리를 껴안고 입맞추기까지 했소. 그레이스, 나는 그제야 알았소. 세상 그 무엇이든 각자의 가치가 있음을 말이오. 끔찍하기 짝이 없었던 전쟁도, 눈에 보이는 건 죄 부수고 불지르던 영양 놈들의 만행도, 내 품에 안겨 어머니를 부르며 죽어간 블루 오츠의 울음도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었소. 각자의 아름다움과 삶을 찾아 다시 세상 속으로 풀어놓는 권능이 말이오. 무의미한 것은 없소.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었소. 그레이스, 그대를 생각할 즈음이면 내 가슴속에 피어나는 사랑과 벅참에는 발끝도 미치지 않지만 말이오. 언젠가 그대와 함께 다시 춤추고 싶구려."
노인은 늘 그랬듯 조용히 울었다. 우는 것은 사내 하나만이 아니었다. 나는 문간에 겨우 몸을 기대어 눈물을 떨궜다. 멀리서 싱긋 웃는 노인의 얼굴이 아득해져만 갔다.
"다시 만날 날이 올 거에요."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심정으로 나직하게 말했다. "다시 만나 춤출 날이 분명 올 거에요."
"그래 마땅하지..." 노인의 얼굴에 자글자글 피어난 주름살은 그 하나하나가 따스하고 촉촉한 보조개처럼 보였다. 병실이 노인의 미소로 가득 찼다. "벌써 다시 만난 것 같구먼. 그이와 어울려 춤춘 것이 대체 얼마만인지..."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숨이 아닌 허파가 빠져나오는 듯 무거웠다. "셔플 선생님. 내일 또 찾아뵈도 괜찮을까요? 나머지 얘기는 그 때 더 듣는 걸로 하고요."
"그렇게 해..." 노인은 코를 훌쩍이며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 괜찮을 것 같구만." 그는 침을 삼키고, 처음으로 나와 눈을 마주쳤다. "자네가... 자네 벗님이라는 사람을 보고 시간 남거든 오라고."
나는 눈가를 문질러 닦고 작은 소리로 웃었다. 그를 보며 웃음짓고 말했다. "시간이야 많을 거에요. 약속하죠..."
노인은 천장 너머에 있을 천당을 바라보듯 시선을 돌렸다. 고개가 가만히 흔들리며 '떠나시오, 데이지'의 가락을 나지막이 흥얼거렸다. 해야 할 바를 다한 나는 창 너머에서 쏟아지는 따뜻한 햇살에 잠겼다.
이튿날 아침은 평소보다도 밝았는데, 평소 끼던 안개도 하나 없어 맑았다. 코멧후프의 일지를 들여다보며 내가 살아낸 시간들과 비교해 봤더니 어느새 날이 밝아 있었다. 페눔브라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았어도 앨러배스터가 똑같이 광기와 절망에 빠졌을 것인가, 나는 생각했다. 앨러배스터의 광기는 그가 바라던 바였을까. 궁창의 야상곡 대신 본인과 아내가 만들어 갈 빛나는 노래에 더 집중하기로 결정했다면, 앨러배스터는 이보다도 더 강력한 지침을 남기지 않았을까.
앨러배스터와 같은 결말을 맞이하지 않는 방법은 알고 있었다. 이름 없는 자들의 영역에 매료된 자는 그 또한 이름 없는 자가 될 뿐이다. 그 여자의 생명은 차라리 그 자체로 모든 소리를 없애기 위해 스스로 소리를 죽여 없앤 듯했다. 내게는 다행히도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 내 비탄과 슬픔이 모두 그 여자가 나를 옭아맨 저주 탓이라기에는 과도했다. 셔플 선생도 웃고 사는데, 나라고 그러지 말란 법이 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발걸음도 가볍게 그의 집으로 향했다. 캐럿 탑이 물건을 실은 수레를 끌고 지나쳐 갔다. 우편 가방에 온몸이 묶인 후브스 여사가 근처를 날아 지나갔다.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셔플 선생이 기거하는 방의 창문이었다. 밖에서 들여다보기에도, 그의 방 창가에 걸려 있던 커튼이 없어진 것이 확연히 드러났다.
더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곧장 양로원으로 뛰어들어가 그래나이트 셔플 선생이 살던 구역 입구로 몸을 날렸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자리에 남은 공허감에, 나는 끊임없이 몸을 떨었다. 빈 침대 위로 상자 몇 개가 놓여 있었다. 기념패와 사진 액자, 접어 넣은 체스판뿐이었다.
지나가던 발걸음 소리가 등 뒤에서 멈췄다. "저... 무슨 일로 오셨나요?"
홱 고개를 돌렸다. 간호사, 글래스 샤인이 쭈뼛거리고 서 있었다. 그녀의 부은 눈가에서, 나는 노인의 방 안에 도사리고 있는 것과 같은 공허감을 느꼈다. 방 번호를 확인했다. 마른침을 삼키고 간호사를 마주보고 물었다.
"어떻게 된 거에요?"
그녀는 방 안을 휘 둘러보더니, 나직한 한숨을 내쉬고는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제 저녁때쯤에 심장발작으로 작고하셨어요. 평소에도 심장이 안 좋으신 건 알고 있었고, 발작이 한두 번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주무시고 계실 때 발작이 왔어요. 임종을 지켜드리지 못하신 건 유감이에요. 셔플 선생님 가족 되시나요?"
"그..." 나는 하염없이 방만 둘러보고 있었다. 입술을 씹으며 갈기를 쓸어내렸다. 한 줄기 한기가 익숙한 포옹처럼 나를 덮쳤다. "텅 비어 버렸네요..."
글래스 샤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12호실은 항상 만실이었지요. 이제 셔플 가문에서도 요양원 건물 사용에 간섭하지 않을 테니, 12호실 어르신 중 한 분을 여기로 모시려고 해요. 너무 오래 기다리셨죠. 불쌍하게도. 실은 지금까지 이 구역은 셔플 가문 사람들만 쓰는 곳이었거든요."
"그... 그렇군요."
글래스 샤인이 연민하는 눈길로 물었다. "혹시 뭐라도 도와 드릴까요? 원장님 만나뵙고 가시는 건 어때요?"
"아뇨,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이제..." 나는 멈칫했다.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아. 한 가지만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흠? 뭐죠?"
"그... 어..." 나는 꾸물대며 물었다. "어르신은 어디로 모셨나요?"
이틀이 지난 뒤 나는 다시 노인의 이름 앞에 섰다. 그래나이트 셔플, 이라는 이름 아래 적힌 숫자는 드디어 완전한 생몰연도로 완성되어 있었다. 끌을 대고 마지막 숫자를 파낸 자리 , '918 – 1001' 위에 아직 대리석 조각이 묻어 있었다. 아무것도 없이 매끈하게 비어 있던 그 아래쪽에도 외로운 한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아버지, 군인, 그리고 사업가로 잠들다."
나는 기나긴 한숨을 토해냈다. 한때 나와 어울려 체스를 두던 노인은 이제 들뜬 흙이 채 가라앉지도 않은 구덩이 안에 묻혀 있었고, 나는 포니빌 공동묘지 한쪽의 그 구덩이 앞에 서 있었다. 고개를 돌려 옆자리 무덤 앞에 선 묘비를 읽었다. 그레이셔스 실버. 922 – 988. 아내요, 어머니요, 간호사로 잠들다.
"셔플 선생님 말씀이 맞네요." 나는 중얼거렸다. "춤이랑 별로 다를 게 없어요." 한 마디 덧붙였다. "어쨌든지 저쨌든지, 서로 꼭 붙어 계시지 않은가요."
한 줄기 바람이 일어 묘지를 가만히 쓸고 지나갔다. 햇빛에 젖은 갈기가 바람에 날렸고, 묘비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별다른 일만 없다면,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이름 없는 자들의 영역이 있음을 나는 안다. 나이트브링어 또한 어딘가에 있기는 있을 것이다. 나이트브링어를 찾아내는 일도 중요한 일인지 아닌지, 이제 상관없었다. 나는 살아 있으니까. 페눔브라와 앨러배스터가 잠든 자리를 찾아 온 세상을 뒤지고 싶은 충동은 있었다. 그 둘을 내 눈 앞에 잠든 그레이셔스와 그래나이트 부부처럼, 꼭 붙어서 안식을 취할 수 있게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엇!"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도중, 등 뒤에서 목소리가 끼어들어 산통을 깼다. "아이구 깜짝이야. 계신 줄 몰랐네요!" 사내가 실없이 웃었다.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근래에 탈상하셨나 보네요?"
몸을 돌리자 등에 짊어진 가방 양쪽에 삽 하나씩을 걸어두고, 솜털은 흙에 얼룩진 노인이 하나 서 있었다. 그는 꽃을 가득 실은 수레를 끌고 있었는데, 많이 놀랐는지 생기 없이 흐릿해져 가는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며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관리인, 위니 선생님 되시나요?" 나는 말했다.
"호오, 그렇답니다! 하하. 그게 제 이름이죠." 그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널찍한 모자를 한쪽으로 기울여 쓰고 빙긋 웃었다. "전에 어디서 마주친 적이 있었던가요?"
"그..." 나는 무덤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노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적은 없지요. 음..." 헛기침을 하고 물었다. "혹시 제가 잘못 들은 건 아니죠?"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여기... 장례 치른 사람이 없었던 듯 말씀하셨잖아요?" 나는 물었다.
"제가 알기로는 없었답니다." 노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거기 누운 불쌍한 노인네는 제가 하관했지요. 관짝에 쓴 걸 보아하니 페가수스는 아닌 모양이던데, 가볍기가 깃털 같더군요. 하하하." 그는 흙 묻은 발굽으로 입을 막으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이구, 이거 실례했습니다 그려! 암만해도 돌아가신 분 뵈러 오셨을 텐데, 노인네가 주책없이 새새끼들마냥 입을 놀렸군요—"
"아뇨. 괜찮아요, 위니 선생님. 괜찮아요." 나긋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혈연은 아니니까요. 그래도..." 입술을 깨물며 힘겹게 묘비를 돌아보았다. "알고 지냈던 분이에요. 장례식도... 없이 매장되셨다니 마음이 좋지 않네요."
"어이쿠, 노인네는 그런 고상한 말투에 익숙하지 않답니다. 여기도 나름대로 비싼 값 치러야 들어가 누울 수 있는 자리지요. 뭐 요직에 있던 양반이었던가 했나 봅니다?"
"요직에 있었다는 걸로는 부족하죠."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포니빌 개척을 주도한 사람이거든요. 전장에서는 용감한 군인이었고요. 또—"
"허허, 추도 연설을 할 거면 아가씨헌테 부탁했으면 되겠군요." 위니가 말했다. "음... 유족들이 장례식을 치르기나 했으면 말입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나름대로 추모하는 거죠."
"그러면 정식으로, 훌륭하게 한 번 해보실까요?"
"음...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흠흠." 노인은 다리와 허리를 펴고 꼿꼿이 서서 정중히 모자를 벗었다.
고개를 돌려 묘비를 똑바로 마주했다. 잠시 입을 다물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그래나이트 셔플은 헌신적이며 용감한 사나이였습니다. 고인은 당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찾아 세상을 돌아보셨습니다. 그 끝에 고인께서는 머나먼 이국의 땅에서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참상을 목도하고야 말았습니다. 당신은 조금도 거기 기죽지 않으셨고, 낯선 얼룩말들을 도와 그들과 그들의 고향을 지켜내셨습니다. 고인과 삶의 한 자락을 같이했던 소중한 벗들과 동료들은 삶의 끝자락까지 고인의 머릿속에 명징히 남아 있었습니다. 애플 스미스, 레드트롯, 스팅킹 리치와 같은 벗들과, 고인의 자녀인 위시 스텝, 그래나이트 주니어를 동등히 아끼고 사랑하셨습니다. 고인과 삶을 함께한 이들 중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큰 사랑을 받으신 당신의 반려 그레이셔스 실버는 고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셨으나, 고인은 숨을 거두실 때까지 지고지순하게 그레이스를 그리워하셨습니다. 끊임없이 기억이 뒤섞이고, 자아가 뒤바뀌는 와중에도 고인은 정원을 가꾸듯 반려의 기억을 간직하고 계셨—"
감당할 수 없는 한기가 몸을 흔들어서 나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숨결이 입김 되어 허공에서 엉겼다. 등 뒤에서 불현듯 휘파람 소리가 솟다가 깜짝 놀란 듯한 숨소리와 함께 끊어졌다.
"아이구 깜짝이야. 계신 줄 몰랐네요!" 무덤 관리인, 위니가 실없이 웃었다.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혹시 방해가 되었나요?"
노인을 마주보았다. 입술이 떨렸다. 눈을 감고, 힘겹게 침을 삼켰다. "그..." 무거운 한숨을 토해내며, 고달픈 눈으로 묘비를 쓸었다. "뭘 좀 생각하고 있었지요..."
"생각이라?" 사내가 머리를 긁적였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계셨나요?"
"돌이 내는 소리." 나는 중얼거렸다. 마지막으로 그래나이트의 이름을 쳐다보고, 위니에게 시선을 돌렸다. "여기 정말 좋네요." 나는 말했다. "앞으로도 이랬으면 좋겠어요."
위니가 조용히 미소짓자 눈이 가늘게 굽었다. "아하, 그거라면 안심하세요. 걱정하실 거 하나 없답니다."
"걱정해도 바뀌는 건 없긴 하죠." 나는 말했다. 가만히 묘지 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이, 천둥과 쇠사슬 울리는 소리만 가득한 세상의 그것처럼 칙칙한 잿빛으로 물든 듯했다. "가끔은, 세상 그 무엇에도 별 의미가 없을 때도 있고."
말을 마치고 자리를 떠났다.
볼링공과 핀이 격돌하며 무너지고 쓰러지는 파열음이 터졌다.
"하 하 하!" 레인보우 대쉬가 앞다리를 홱 치켜올렸다. "4연속 스트라이크다!" 그러고는 날개를 펼쳐 제자리에서 재주넘기를 하더니 실실 웃으며 자리로 날아가 애플잭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뭐?! 뭐?! 뭐?!"
애플잭이 레인보우 대쉬의 머리를 한쪽으로 치우고 레인을 노려보았다. "대가리가 비어서 그리 가볍나! 지금 쪼개 둬라. 지금부터 그 상판때기로 레인을 반들반들하게 닦아 줄 테니."
"그러면 바닥도 눈 번쩍 뜨고 이러겠지—" 레인보우 대쉬가 두 발굽으로 자기 얼굴을 감싸쥐고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레인보우 대쉬가 나한테 키스했어! 너무 좋아서 천장이 돼 버릴 것 같아!"
"이제부터 시작인데 뭐라노!" 애플잭이 툴툴댔다. "니는 병아리 얼마나 알 까고 나올지도 모르는데 계란 수부터 세 봄서 즐거워하는 빙신이가?! 내 금방 따라잡아 주꾸마."
"아, 지난 주에 못 했던 거 지금 한다고?"
"주둥아리 여물고 있으래이!" 애플잭이 몸을 홱 젖히고 숨을 씁 하고 들이마시면서 레인을 향해 공을 날렸다. "으라아아아아!"
"무리하지 마 자기." 래리티가 앉은 자리에서 말했다. 한쪽 발굽에 금속 자를 들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리라도 상하면 어쩌려고."
"너도 마찬가지거든!" 점수표를 들고 있던 트와일라잇이 툴툴댔다. 잔뜩 찌푸린 얼굴로 팔짱을 끼더니 래리티를 흘겨보며 말했다. "세상에 어떻게 이 주 연속으로 투구를 안 하겠다고 버틸 수가 있어?"
"안됐지만, 난 엄연한 아가씨니까 흔해빠진 불한당들처럼 과격한 놀이를 하고 싶지 않거든!" 래리티가 가녀린 발굽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일 아침 사파이어 쇼어스가 드레스 맞추러 온다고 했으니 무리하면 안 돼, 자기. 놀이에 끼었다가 혹시 어디 알 배기기라도 하면 평생 내가 저지른 바보짓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거든!"
"괜찮아, 래리티." 플러터샤이가 홍조 어린 미소로 말했다. "여기 와 준 것만으로 기뻐."
"어머나, 고마워라." 래리티가 눈을 감고 미소지으며 콧대 높아 보이는 숨소리를 뿜었다. "우리 모임의 본질이 뭔지 적어도 한 명은 잘 알고 있네."
"아오, 진짜." 트와일라잇이 들고 있던 점수판 위로 고개를 푹 숙였다. "이럴 거면 왜 계속 네 차례까지 예약해 두는지 모르겠다. 뭐 그러면..."
핑키 파이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럼 애플잭이 두 번 떤지는 걸로 하면 어땡? 그럼 대쉬 점수 따라잡을 수 있을지도 몰랑!"
"풉—하하하하하하!" 레인보우 대쉬가 쩌렁쩌렁한 소리로 웃어댔다.
"핑키, 바람 넣지 마라!" 애플잭이 소리쳤다. "내는 그딴 거 필요 없다카이!"
"그딴 거 필요 없으시다는 분이 왜 멀쩡한 핀은 다섯 개나 남기셨을까! 빈 수레가 요란하다더니 풀씨는 실어도 실은 게 아닌가 봐?"
"이 옘병할..."
"그만! 진정 좀 해, 진정!" 트와일라잇이 소리쳤다. "안 되겠다. 핑키 네가 두 번씩 던지는 걸로 하는 게 어때? 적어도 저번 주처럼 상점가로 볼링공을 던져대진 않는 거 같으니까."
"우우우! 더 나은 방법이 있지롱!" 핑키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잽싸게 달려와 내가 앉은 상가 테이블 앞에 다가섰다. "언니 안냥! 묵직한 공으로 시끌시끌하니 귀 아픈 게 끝내주는 대단한 놀이 할 생각 있엉?"
나는 그 때 정적에 침잠하고 있었다. 읽는 척이나 하고 있던 일지에서 고개를 들어 핑키를 올려다보고 물었다. "흠? 공이라뇨?"
"무지무지하게 재밌는 놀이!" 핑키가 이를 다 드러내고 환히 웃었다. "지금 끼면 보너스로 꼭지 돈 모자 쓴 아가씨도 구경 가능!"
"너 시방 뭐라고 지껄이는 겨?"
"애플잭, 조용히!" 핑키가 딱딱댔다. "우리의 평화로운 일상에 생면부지의 낯선 사람을 꼬셔서 끌어들이고 있잖아!"
"공주님 맙소사. 핑키 너..." 트와일라잇이 발굽을 얼굴에 갖다댔다. 래리티와 플러터샤이는 그 모습을 웃으며 지켜보고 있었다.
"고맙지만, 사양... 음..." 꾸물거리며 말을 이었다. "볼링은 못 끼겠네요. 뭣 좀..."
나는 말하다 그만두었다. 그래나이트의 묘비처럼 매끈하고 차갑게 닦인 테이블이 반들거렸다. 내가 정말 뭐 하러 여기까지 나온 것인지, 나는 자문했다. 그 이유가 꼭 있어야 하는지도.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자 따뜻하고 생기발랄한 핑키의 푸른 눈이 반짝였다. '지금 이 순간'이 그 위에서 춤추고 있었다. 그 너머로 몇몇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 아름다운 청년들이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지 않은가. 찰나였지만, 아주 오래 전에 잃어버린 벗들이 저쪽에서 오라고 몸짓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내가 그 부름에 답할 때였다.
"좋아요. 하죠." 빙긋 웃고 대답했다. "아무래도... 같이 놀면 재미있긴 하겠군요."
"저게 된다고?" 트와일라잇 스파클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듯 놀란 표정이었다.
"우후!" 핑키 파이가 통통 튀는 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짜잔, 이게 다 뭐게! 아이스크림 선데에 민트 추가용! 자자, 볼링 노다지판은 이쪽이에용!"
나는 그대로 했다. 여섯이 둘러앉은 자리로 다가서는 동안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생각해 보면, 이전에는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었다. 발굽만한 마을 곳곳마다 내려앉은 한기의 늪에서 허우적대며 일 년 넘는 세월을 보내는 동안 트와일라잇을 비롯해 다른 친구들이 같이 있을 때는 단 한 번도 끼어들어 본 일이 없었다. 일 년 동안 이런 일이 없었으므로, 나는 그 온기를 현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 순간만큼은 그런 건 조금도 문제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 순간의 온기, 아주 짧은 한순간이나마 저들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이었으니.
"만나서 반갑수. 잘해보자고." 애플잭이 주근깨 낀 얼굴로 씩 웃었다.
"동감. 그래도 내 점수는 발끝까지라도 못 따라오실걸!" 레인보우 대쉬가 콧대를 세우고 눈을 찡긋해 보였다.
"갈기 예뻐요." 플러터샤이가 나긋하게 말했다. "결도 정말 좋은데요."
"고, 고마워요." 나는 쭈뼛대며 대답했다.
"갈기는 좋지만, 입고 계신 옷은 좀 오래되어 보이네요." 래리티가 우아한 미소로 덧붙였다. "기회가 되면 그쪽 옷을 하나 만들어 드리고 싶은데."
"음... 글쎄요. 저도 설마 누구랑 어울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요." 마른침을 삼키며 웃어 보였다. "이거 말고도 집에 빨간 스웨터가 하나 있긴 한데..."
"아, 포니빌 사세요?" 트와일라잇이 놀란 눈치로 말했다. "좋은데요! 혹시 도서관은 와 보셨나요?"
"아..." 나는 빙긋이 웃으며 목을 긁적였다. "뭐 몇 번..."
"스파이크가 제대로 응대해 드렸나 모르겠네요. 요새 세월이 얼마나 수상한지, 평범한 사서 근무만 하려고 해도 도무지 그럴 시간이 안 난단 말이죠."
"그렇긴 하죠."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올해는 정상이 아니었어요. 그렇죠?"
"진짜 그래요!" 여섯이 동시에, 똑같이 대답했다. 여섯은 마주보며 깔깔 웃었다. 나도 끼어들어 같이 웃었다. 내 목소리는 사이에 섞이지 못하고 유독 튀었다. 별 문제는 아니었다.
"트와일라잇, 니 차례여!" 애플잭이 몸짓했다.
"아! 뭐... 음... 간다!" 트와일라잇이 공을 집으러 갔다. "누구 내 점수 대신 좀 써 줄 사람?"
"핑키?" 래리티가 물었다.
"우아우버베베아이빠!" 핑키가 입 안 가득 팝콘을 물고 대답했다. "비버에베아빕믐베 우무 머 어블 하함!"
"으으. 뭐 먹을 땐 대답하는 거 아냐, 자기!"
"어..." 마른침을 삼키고 점수판 쪽으로 다가가 자리에 앉았다. "괜찮으시면, 제가 하죠."
"정말요?" 플러터샤이가 물었다. "그래도 저희 손님이신데."
"괜찮아요." 숫자가 빼곡히 적힌 목록표를 훑어보며 테이블에 굴러다니던 연필을 염동력으로 들었다. "제가 해도 돼요."
"머, 그렇다면야." 애플잭이 모자 챙을 매만졌다. 트와일라잇이 레인으로 투구했다. "군것질하는 거 보면 패러스프라이트가 따로 없다니까. 쟈가 질릴 때까지 먹고 나면 아마 그쪽도 저 짭짤하니 먹을 만한 쪼가리 몇 개 좀 주워먹을 수 있을 겨."
"저, 저기. 그게..."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멀리서 들리는 하관의 장송곡처럼 귓가에 진혼곡이 맴돌고 있었다. "으..."
"괜찮으세요?" 플러터샤이가 물었다.
"음..." 나는 점수표를 들여다보았다. 한쪽 귀퉁이에 '패러스프라이트'라고 연필로 써넣었다. 단어가 완성되자 패러스프라이트, 란 말 전체가 묵직한 자홍색으로 반짝였다. "그럼요." 그렇다고는 얘기했지만, 이상하다는 느낌은 숨결에 그대로 묻어나왔다. "다 괜찮아요..." 글자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한기 같은 것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전부 다, 괜찮아요." 빙긋이 웃었다.
"그런가요. 만나서 반가워요. 성함을 혹시..."
"하트스트링스." 나는 답했다. 트와일라잇이 두 번째 투구를 던졌다. 남은 핀을 전부 쓰러뜨리며 스페어를 기록했다. "편하게 라이라라고 부르세요."
"라이라 씬 포니빌에 얼마나 계셨어요?" 플러터샤이가 물었다.
"아... 엄밀히 말하면 포니빌이 저희 집은 아니고요." 나는 말했다. '패러스프라이트'라는 글자를 다시 보았다. 코멧후프가 가졌던 나이트브링어가 나에게는 없다. 그것은 열쇠일 뿐이고, 열어야 할 문을 찾기 전까지 열쇠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래도 머지않아 집에 갈 수 있을 것 같기는 하네요."
트와일라잇이 숨을 몰아쉬며 돌아왔다. "휴! 그럼... 점수가 어떻게 되죠?"
트와일라잇의 칸에 대각선 하나를 그었다.
"보아하니, 슬슬 따라잡을 모양인데요."
내 평생 앙코르 요청을 받을 수 있을지 걱정하던 날들이 있었다.
최초의 황홀한 소리가 있어야 앙코르가 성립할 터이고, 그렇기에 반복될 수 있는 것이겠지.
라이라가 독설 쏟아내는 부분은 제 못된 심성을 빌어, 가능한 상대의 성질을 긁어놓는 데 초점을 두고 옮겼습니다. 억하심정이 터지는 부분이라, 공격성을 강조해야 할 것 같았어요.
미주
*1 거터Gutter, 볼링에서 공이 굴러가는 경로를 레인Lane이라 하는데 이 레인 양쪽에 파놓은 일종의 도랑. 공이 굴러가다가 여기 빠지면 핀은 구경도 못 하고 그냥 빠져나가게 됩니다.
*2 I'll be more than capable of dipping my hooves into the bowling water, if you pardon the pun. Bowling과 Boiling을 가지고 장난질을 치는 대목.
*3 볼링은 총 10프레임 또는 12프레임으로 구성되며, 모두 스트라이크로 처리하면 퍼펙트 게임이 됩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매우 어렵읍니다.
*4 대쉬는 “Somepony stop the bus! Cuz I gotta get off on ‘Awesome Street!’” 라고 말했읍니다. 이걸 그대로 한국어로 옮기자니 특유의 자뻑스러운 맛이 잘 안 사는 것 같아서... 아예 라임을 만들어서 번역해 보았어요. "내가 누구인지 모두 알고 있지! 백날 누구인지 말해 봐야 뭐해." 는 'ㅐㅏ ㅜㅜㅣㅣ'로 대충 만들었고, "내가 사는 어썸 스트리트, 네가 사는 어쩜 스트리트."는 귀찮아져서 그냥 그대로 복붙해 버렸읍니다. 아예 AJ랑 힙합대전 붙는 거였으면 "내 가사는 어썸" 이랑 "내가 사는 어썸 스트리트", "네 가사는 어쩜", "네가 사는 어쩜 스트리트" 으로 좀 그럴듯해 보였을 텐데 아쉽네요. 이 인간이 번역한다고 설치더니 드디어 미쳐서 가지가지 하는구나... 생각해 주십시오.
*5 원문에서는 "레인보우 대쉬가 1프레임에서 30점 기록 중이야." 입니다. 볼링 규칙상 스트라이크의 경우 다음 두 번의 점수를 더하게 되어 있습니다. 2번 투구로 어쨌든 다 쳐내긴 한 스페어의 경우 그 프레임의 점수인 10점에 다음 프레임의 초구 점수를 더하지요. 즉 스페어의 경우 최대로 뽑아낼 수 있는 점수는 20점(스페어 기본점수 10점 + 스트라이크 10점)입니다. 반면 스트라이크의 경우 다음 두 번의 투구로 뽑아낸 점수를 더하기 때문에 최대로 뽑아내는 점수는 30점(X-X-X)이죠. 현재 3프레임까지 쳤기 때문에 RD의 1프레임 점수가 확정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재 RD의 2프레임과 3프레임 점수는 확정되지 않은 것이죠. 계산에 따라 '1프레임에서 30점 기록 중이다' = '1프레임부터 3프레임까지 연속 스트라이크다' 가 성립하는 것이고요. 1프레임에서 30점이라고 써 봐야 이해하기 어려워서, 그냥 3연속 스트라이크라고 바꿔 썼습니다. 같은 말이니까요. 10프레임 모두 스트라이크를 쳤어도 스트라이크 점수계산식상의 문제로 2번을 더 투구해야 합니다. 실질적으로 10프레임에서 퍼펙트 게임을 따내려면 12번 연속 스트라이크를 쳐야 하는 것이죠.
*6 '족히'는 수량이나 정도 따위가 넉넉함을 나타내며, '좋이'는 거리, 수량, 시간 따위가 어느 한도에 미칠 만함을 나타냅니다. (feat. 국립국어원) 오타 아니에요.
*7 Stinking Rich. 그래니 스미스에게서 잼 독점유통권을 사들여 부를 쌓은 바로 그 양반.
*8 Shuffle은 발을 끌며 느릿하게 걷는 모양을 의미.
*9 Pawn. 장기의 卒, 兵과 같은 말. 첫 번째 행마에 한하여 전방으로 2칸 전진이 가능하며, 두 번째 행마부터는 전방으로 1칸 전진만 가능합니다. 폰의 공격범위는 전방 좌, 우측 대각선 2칸이지요. 이처럼 공격행마와 이동행마가 다른 유일한 기물입니다. 특수룰로 앙파상En Passant, 프로모션Promotion이 있습니다.
*10 체스판은 가로 8칸, 세로 8칸이며 양측의 기물이 양쪽 끝 2열에 배치됩니다. 노인과 라이라가 똑같이 폰을 2칸씩 옮겼음을 뜻합니다.
*11 Knight. 장기의 馬처럼 상하좌우 한 칸 이동한 뒤 그곳에서 한 칸 대각선으로 이동하는 것은 같으나, 다른 기물을 뛰어넘어 이동 및 공격이 가능한 말입니다. 이를 이용해 나이트가 반격을 받지 않으면서 상대의 주요 기물인 킹, 퀸이나 비숍을 공격할 수 있어 전략적 활용이 요구됩죠. 행마 특성상 폰과 함께 첫 번째 차례에 이동 가능한 유이한 기물이기도 합니다.
*12 Bishop. 대응하는 장기의 기물은 象. 대각선으로 거리 제한 없이 이동 및 공격 가능한 말입니다. 대각선으로만 행마 가능한 특성상 비숍은 체스판의 흑 또는 백 한 가지 색에만 서 있을 수 있습지요. 흑백 모두 흑색 칸만 이동 가능한 비숍과 백색 칸만 이동 가능한 비숍을 1개씩 갖고 시작합니다. 폰이 구축한 방진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는 등 다양한 운용이 가능합니다.
*13 Rook. 장기의 車. 전후좌우 4개 방향 중 하나로 거리 제한 없이 이동 및 공격 가능한 기물. 특수룰로 캐슬링Castling이 있습니다.
*14 Queen. 비숍과 룩의 행마법이 합쳐진 기물. 전후좌우 및 사방 대각선으로 거리 제한 없이 이동 및 공격 가능합니다. 폰이 반대쪽 끝에 도달하여 프로모션이 이루어질 때 일반적으로 고르는 기물이 퀸이어서 퀴닝Queening이라는 별칭을 갖기도 하죠. 이 경우 체크 상태가 아님에도 이동이 불가능한 스테일메이트를 유발할 수 있어 이긴 게임이 무승부로 끝날 수 있으므로 나이트 등 다른 기물로 바꾸는 경우도 있습니다. 스테일메이트가 무승부 처리되는 것은 '체스는 한 수 쉼의 개념이 없고', '킹 스스로 죽을 자리로 들어가는 것은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경기가 끝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유사한 개념으로 바둑의 장생長生이 있죠. 무한히 반복해서 두는 수를 방지하기 위해 둔 개념인 '패'에 해당하지 않으면서 무한히 반복해서 둘 수 있는 형태를 장생이라 하는데, 그 희귀성 때문에 바둑계에서는 장생을 길조로 여기며 축하하고 기념하며, 장생이 생긴 대국은 무승부 처리합니다.
*15 와병하는 사람의 몸을 스펀지를 적셔 닦아 주는 것.
*16 Mausoleum. 페르시아 제국의 총독이었던 마우솔로스를 기념하여 그리스 할리카르나소스에 건립된 건축물인 마우솔레움Mausoleum 또는 마우솔레이온Mausoleion에서 유래된 말. 흔히 영묘靈廟로 번역되는데, 무덤 묘가 아닌 사당 묘를 쓴다. 여기서는 서양의 봉안당 양식인 모설리움을 뜻한다. 모설리움은 관을 석재 캐비닛에 집어넣고 석판으로 막는 양식으로, 유서깊은 가문은 가문 전용 모설리움을 두고 선조들의 관을 안치한 뒤 가문 차원에서 관리하기도 한다. 굳이 'upper' Canterlot Mausoleum으로 적어놓은 것을 보면 라이라 가문의 전용 모설리움보다는 시립 모설리움일 가능성이 높으나, 전문 관리인이 상주하며 봉안당을 관리해야 함을 감안하면 일반 시민들은 쉽게 이용하기 어려울 것이다.
'SS&E > 백그라운드 포니' 카테고리의 다른 글
Chapter 14. 아홉 번째의 저주The Curse of the Ninth (1) | 2021.01.22 |
---|---|
Chapter 13. 몸이 숨쉬듯Easier Than Feeling (5) | 2020.12.29 |
Chapter 11. 이름 없는 자들Unsung (1) | 2020.10.24 |
Chapter 10. 근홍자적近紅者赤Green Is the New Pink*1 (1) | 2020.09.26 |
Chapter 09. 궁창穹蒼The Firmaments (1) | 2020.09.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