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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E/백그라운드 포니

Chapter 10. 근홍자적近紅者赤Green Is the New Pink*1

by Mergo 2020. 9. 26.

일러두기

 

SS&E의 초창기 장편소설에서 핑키 파이가 등장하는 경우, 영화나 음악, 소설, 전자오락 등 다양한 방면의 오마주나 인용 빈도가 급격히 증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The End of Ponies의 4막 Dredgemane은 통째로 핑키 파이와 관련된 부분인데, 그 첫번째인 Chapter 31 'Heart of Pinkness' 부터 조지프 콘래드의 소설 'Heart of Darkness', 어둠의 심연을 패러디하고 있습니다. 퍼펙트 스톰, 파이널 판타지, 제5도살장, 콜드 인 줄라이, 지옥의 묵시록, 브이 포 벤데타 등이 챕터명으로 언급되고 있지요. 그리고 그 전통은 Background Pony까지 이어져 내려옵니다. 유독 이 챕터만 각주가 빽빽하게 적힌 것은 그것 때문입니다. 작가가 영 번역하기 껄끄러운 성적 농담을 날린 경우 의미를 살리면서 스무스하게 넘어가기 위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인용하기도 했습니다. 각주 없이 대충대충 훑어보셔도 괜찮겠습니다마는, SS&E의 악랄한 글솜씨를 같이 체험하실 겸 미주도 같이 읽어 보시는 걸 권장드립니다.

 

 

 

 

일기에게.

 

세상 모든 것이 사실 고쳐 써야 하는 건 아닐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람이란 본래 불완전한 존재니까 나 같은 '수호천사'를 필요로 하는 것 같단 말야? 저주 때문이든 아니든, 어떤 이유가 있으니까 포니빌에 있는 거라는 것쯤은 알고 있긴 한데, 그 이유라는 것의 모든 일면을 내가 정해야 하는 건 아닐 것 같거든. 내가 살아내야 하는 이 기묘한 운명의 시선에서 보면 나는 폰Pawn일까, 운명의 주인일까?

 

내가 마주한 숙명이 어떤 이유로 주어진 것이거나 운명이 예비한 것이라고 하면, 세상도 결국 완벽한 곳이 되는 거잖아. 그렇다면 그 완벽한 세상에 존재하는, 고쳐 써야 할 것들은 대체 뭐지? 옥의 티인 것들은 세상에서 퇴장해 다른 것들을 돌봐야 하는 걸까?

 

내 인생에 짜여진 구조와 배분된 계통을 찾아 헤매이며 여러 가지 것들을 보고 듣고, 해 가면서도 가능한 합리적으로 움직이려고 용을 썼지. 꽤나 고상한 탐구를 했던 것 같지만...... 신성성까지 갖춘 탐구가 존재할까?

 

이렇게 해야 한다면서 사람이나 세상 일을 한 가지 방법으로만 옭아매는 짓은 바람직하지 않지. 알고는 있지만 일관되게 실천하지는 못해. 한 번 삐끗하면 항상 끝이 영 좋지 않더라고. 다행스러운 것은 그런 실수를 몇 번이나 저지르고도 사지와 머리가 잘 붙어 있다는 거야. 내 제정신도 잘 붙어 있다면 좋을 텐데.

 

가장 아름답고 평화로우며 완벽한 것들일지라도 가끔은 취객처럼 비틀거리며 나타나지. 밖에서 보기에는 그냥 우스운 꼴에 지나지 않지만, 세상이란 폭풍우 치는 바다 위를 떠가며 암초에 몇 번이고 들이받는 범선처럼 흔들리는 곳이야. 누구라도 한 번쯤은 넘어지지 않으려고 바둥거리다 바닥을 쿵쿵 치게 되지. 혼돈과 불확정성이 추는 춤은 그 중에서도 가장 복잡하지. 일단 한번 그 매혹적이고 독특한 스텝에 맛을 들이니 다른 장단은 답답해서 못 어울리겠다니까.

 

왜 굳이 그랬느냐고? 그게, 한쪽 발굽으로 박수를 치는데 거기서 나는 소리 같거든. 엄마 아빠가 눈앞에서 어린애로 돌아가 버린 걸 봤을 때 지을법한 표정 같기도 하고. 아니면... 그...

 

아무래도 당장 딱 요약해서 쓰는 건 안 될 것 같지?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부터 되짚어 보자고.

 


 

저주가 시작되고 닷새쯤 지났을 때 나는 온갖 분비물로 뒤덮여 악취를 뿜어내고 있었다. 적어도 그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사람들이 불쾌해하는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아서였는지, 내가 얼마나 밑바닥까지 떨어졌는지 알고 싶지 않아서였는지는 몰라도 사람 사이에 섞이는 일은 가능하면 피하고 싶었다. 사람들은 내 눈앞에서 내 존재를 망각했고, 그 때마다 저주가 불러온 한기가 몰려왔다. 내 안의 무언가가 죽어 쓰러졌다. 포니빌 시청 청사 인근에서 친절한 사내 하나가 말을 걸어 준 이후 계속해서 구원을 찾고 있던 바로 그 마음이었다.

 

나는 용기를 짜내 낯선 유폐 생활을 시작했다. 내 소유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금빛 리라 하나와, 잡동사니만 잔뜩 들어찬 낡아빠진 가방 하나뿐이었다. 돈을 좀 가져온 것이 있기는 했지만,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거나 호텔에 방을 잡는 헛짓거리를 하는 사이 대부분이 증발하듯 사라졌다. 나는 순식간에 잊혔고, 나를 잊은 종업원들은 당신이 뭔데 여기 있느냐며 나를 쫓아냈다.

 

그리하여 나는 정처 없이 포니빌 골목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나는 피로와 굶주림에 미쳐가고 있었다. 사내가 했던 말을 계속 머릿속으로 되뇌이고, 마음 속에 희망의 근거지를 마련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래봐야 나는 광인의 악몽에서 피어나는 연기를 따라 들어가고 있는 것에 불과했으니, 그 연기조차도 공허한 위장을 채울 수 없었다. 결국 나는 포니빌 북동쪽에 있는 한 공원 가운데에 있던 쓰레기통을 뒤지는 신세가 되었다. 쓰레기통 곳곳을 더듬는 일은 부끄럽기 짝이 없어서, 나는 입술을 씹으며 내가 왜 이런 추한 짓을 하는 신세가 됐나 생각했다. 결론이 어쨌든 나는 쓰레기를 뒤져야 했다. 차갑고 비정한 세상에서 다시 하루를 살아내려면 위장에 뭐라도 밀어 넣어야 했으니까.

 

그렇게 하루를 살아내면... 뭐가 있나? 왜 하루를 또 견뎌야 했을까? 음식도, 거처도, 친구도, 미래도 구할 수 없는 마을의 섬뜩한 공허에서의 하루를 다시 감당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나는 생각하지 못했다. 잠도 자지 못했고, 웃을 수도 없었다. 나는—

 

"없넹!" 그녀가 분홍 발굽으로 쓰레기통을 헤집으며 말했다. "못 찾겠엉!"

 

"으음..." 나는 생각에 잠겨 중얼거렸다. 내가 중얼거린 목소리가 아니었다. 내 목소리치고는 너무... 귀가 따갑다고 해야 하나. 나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한 쌍 반짝이는 파란 눈동자에 비친 내 퀭한 얼굴이 나를 마주보았다. "왜 바보같이 쓰레기통에 집어넣어서 못 찾고 그랭?"

 

눈가가 씰룩거렸다. 나는 푸석한 갈기를 쓸어 넘겼다. 얼굴 한쪽이 씰룩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게... 어... 음..." 나는 침을 삼켰다. 시선이 쓰레기통으로 향했다가 내 발굽으로, 온통 핑크색인 낯선 사람으로 옮아갔다. 그녀는 근처에 분명 없었던 통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히히히히!" 그녀가 콧소리를 섞어 웃었다. "목소리 잃어버린 사람 같네."

 

"목소릴... 잃어...?"

 

"어떻게 자기 목소리를 쓰레기통에 내다 버릴 수가 있엉?" 그녀는 심호흡하더니 꼬불꼬불하게 부풀어오른 갈기와 머리를 쓰레기통 깊이 집어넣었다. 목소리가 메아리졌다. "목소리는 목에 있는 거라 목소리인 거야. 듣기만 좋다면야 노래 부를 땐 나도 빼버리지만. 아, 귀까지 먹은 거야? 귀 먹은 사람들이 요 근처에 몇몇 있거등. 말하자면, 귀가 아니라 말귀겠지만!*2" 그녀가 고개를 쑥 빼들었다. 바나나 껍질과 흙 묻은 휴지조각이 머리 꼭대기에 얹혀, 흡사 왕관처럼 되어 있었다. "그래서 대답 안 하는 거겠지이? 밭이랑에서 까마귀 쫓느라 소리 질러대서 그렇게 된 거양?"

 

"누가... 날더러 말 못 한다고 그래?"

 

"엄머나 놀래라."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며 뭔가 생각하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머리에 올라간 쓰레기가 천천히 미끄러져 공원 길가에 떨어졌다. 그녀가 턱을 긁적이다가 말했다. "하긴 제정신인 사람이 까마귀가 자기 작물 다 파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일은 없겠징? 오호!" 그녀가 벙긋 웃었다. "허수아비 찾는구나! 그렇고말고! 근데..." 그녀가 쓰레기통을 쓱 쳐다보고 물었다. "허수아비는 대체 어떻게 내다 버린 거야?"

 

"어..."

 

"잘게 쪼개서 버렸을라나? 그러면 허수아들*3이 되겠넹?"

 

"가봐야겠다..." 나는 움찔하며 뒷걸음질쳤다.

 

"잠깐!" 그녀가 발굽을 쭉 뻗어 나를 붙들었다. "히히! 부끄러워하기는! 혹시 모르니 물건 따로 떼다가 보관해 놓는 거야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잖앙?" 그녀가 근처 나무로 쏜살같이 달려가더니 안쪽에 발굽을 집어넣었다. "자, 나만 해도!" 그리고는 내게 달려왔다. "짜잔, 공 숨겨놨지롱."

 

힘 빠진 발굽이 나도 모르게 고무공을 붙들었다. "뭐... 뭐야 이거—?"

 

"동네 곳곳에 공 숨겨두고 다니다 보니까 사람들이 날 괴짜로 보더라고. 레인보우 대쉬를 처음 만났을 때쯤에는 지금보단 덜 뻔뻔했지. 그래서 걍 입안에 다 집어넣고 다녔지롱. 왠진 모르겠는데 날 보자마자 깔깔깔깔 웃더라고."

 

"어음..."

 

"대쉬 얼굴이 얼마나 꿈틀꿈틀거리던지, 아마 그쪽이 봤으면 야 저거..."

 

"아... 나 당신 알아."

 

"그랭?"

 

몸이 떨렸다. 트와일라잇에게 깜짝 파티를 열어주던 기억이 머릿속에서 번쩍였다.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 생각이 나를 죽였다. 눈 앞에 새파란 눈동자 한 쌍이 나타났다. 뭐가 저리 좋은지 내내 방실방실 웃고 있던 그녀의 얼굴은, 과거의 깊고 깊은 해구 속으로 나를 끌고 들어가는 차가운 빙하 덩어리처럼 보였다. "아냐, 신경 쓰지 마. 이제 진짜 가 봐야겠으니까, 이 쓰레기통은 그쪽이 마저 뒤져도—"

 

"나랑 쓰레기통이랑 하라고? 웩!" 핑키 파이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게 어딜 봐서 파티야?"

 

나는 핑키 파이를 멍하게 쳐다보았다.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생각도 잘 되지 않았다. 갑자기, 묻고 싶어졌다. "파티? 혹시... 혹시 기억하고 있어?"

 

"파티하는 방법이야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 큐티마크가 생긴 날에 나는 스스로와 한 가지 약속을 했어. '지금 이 순간부터, 아침마다 두 가지 일을 한다. 첫째, 화장실에 간다. 둘째, 파티한다.' 결국에는 몇 년 내내 카펫 세탁을 안 하는 날이 없었지만. 그러니, 내가 어떤 직업을 골랐겠어!"

 

"아니, 그거 말고. 날 기억하냐고." 나는 물었다. "전에 봤던 적 있지? 하계 태양절 축제 전이라거나?"

 

핑키 파이가 까르르 웃더니 눈을 굴리며 말했다. "우우우우, 이런. 그럴 리 없잖아! 축제라구, 축제! 축제 전후로 눈에 보이는 사람이란 사람은 전부 다 나랑 말을 했었단 말이지! 대충 짐작하겠지만 밑준비를 많이 했거등. 그러니 그쪽 이름을 내가 까먹었어도 그럴 수 있겠다 생각하고 넘어가자궁."

 

"그래도—"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잠깐만! 생각 좀 해보자!" 핑키 파이가 얼굴을 찌푸린 채 다분히 과장된 말투로 중얼거렸다. "으으으으으으으으음—민티Minty? 샛지Sudsy일라나? 갈기 보니까 그럴 것 같은데. 아냐? 흐으으음.... 가토Gato*4? 아, 그럴 리 없지. 암만 봐도 메어드리드*5는 근처에도 안 가 본 것 같으니까."

 

"크흠." 나는 헛기침하고 툭 던졌다. "라이라."

 

"하트스트링스?" 핑키가 말했다.

 

숨이 멎는 듯했다. 나는 떨리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맞아."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정확해. 어떻게...?"

 

"글쎄, 그쪽 이름이 치즈스트링스Cheesestrings였으면 그렇게 며칠 굶은 것 같은 얼굴을 하진 않았을 테니까?" 핑키가 나를 꼭 껴안고 말했다. "가자구, 라이라! 빵 구우러 가자!"

 

"빵을 구워?"

 

"그럼!" 핑키가 나를 시내 쪽으로 밀며 말했다. "배 채우려면 채울 걸 구워야지? 그렇지?"

 

"혹시... 빵집 직원?"

 

"아, 몰랐엉?" 핑키 파이가 야단을 떨었다. "다른 데 가서 알아봐아아아아아아아아아! 히히. 흠흠. 넝담. 진짜. 이쪽이양! 맛난 것들이 우릴 기다린다구!"

 


 

"같이 자란 친구가 있었징. 나이로는 걔가 동생이었어." 핑키가 말했다. "뭐라 그럴까, 언니를 좀 존경하는? 뭐 그런 거 있잖아. 처음으로 바위 농장 일을 시작할 때도 함께였어. 만사가 다 괜찮았지. 대부분은 좋게 풀리게 우리가 만든 거지만. 난방절Hearth's Warming에는 토론트롯*6까지... 돈 벌어 보겠다고 진저브레드를 팔러 가기도 했었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걜 예뻐하고 믿었고. 나중에는 사막 한가운데에 캔틀롯 가는 경비병들이 잠깐 머물렀다 갈 수 있는 조그만 도시를 하나 세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더라고. 그 친구 이름이 메어 그린Mare Green인데, 걔가 세운 도시가 라스 페가수스야. 대단한 친구지. 비전도 있고 배짱도 두둑하잖아. 그런데도 자기 이름 박은 판때기나 표지판, 조각상 같은 건 하나도 안 세웠다니까! 누가 눈에 컵케익이라도 박아 놨나 봐. 누가 그런 주문을 했는진 아무도 모른다지. 그 얘길 듣고 나서도 별로 화가 나진 않았어. 메어가 어떤 녀석인데. 고집불통에다 그 큰 목소리로 바보 같은 소리나 하는 녀석이란 말야. 그래 그 녀석이 설탕 범벅이 되어 나타났어도 별 얘기 안 했어. 그냥 나 혼자 '이게 우리가 선택한 길인걸.' 했을 뿐이지. 누가 그런 주문을 했는지 물어보진 않았어. 그야 그거랑 빵 굽는 건 아무 상관도 없는걸!"

 

"으음..." 나는 앞치마를 두른 채 두 앞발굽을 컵케익 반죽에 푹 박고 꿈지럭거리고 있었다. 슈가큐브코너 주방 한가운데였다. 따끈한 오븐에 둘러쌓여 기분이 좋았지만, 핑키가 혼자 떠들어대던 소리가 별 말 같지도 않은 결론으로 끝나서 짜증도 났다. "왜 그걸 나한테?"

 

"생각해 보니까 잘 모르겠당. 갑자기 바나나 다이키리Daiquiri*7 땡기네."

 

"바나나 뭐?"

 

근처 오븐 중 하나가 발랄한 띵! 소리를 뱉었다.

 

"오오우! 처음 넣은 빵이 다 구워진 모양이야!" 핑키 파이가 목을 뻗어 어스 포니용 벙어리장갑을 발굽에 끼우고, 따끈한 컵케이크가 가득 담긴 쟁반을 잡아당겨 꺼냈다. "으으으음.... 냄새 좋지? 아침에 맡는 엔젤 케이크*8 냄새는 정말 각별하다니까."

 

"해가 중천에 떴는데."

 

"또또또또 또 그런다!" 핑키 파이가 웃음기 어린 얼굴로 말했다. "빵 굽는 건 말이야, 즐겁고 행복한 일이 되어야 한다구! 이런 맛난이들을 만들 땐 모름지기 주고 싶은 사람을 생각하는 게 제일이징! 예를 들어 볼까. 설탕 장식 올린 디저트를 만들 때는 친구들 얼굴을 생각하지. 그럼 더 맛있게 구워져! 어떻게 보면 걔들 입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내 입으로 들어가는 게 훨씬 많겠지만 말이야." 핑키가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빵 조각을 내밀었다. "자. 한 입 해. 잘 구워졌나 맛보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지. 시식을 해 봐야 손님들한테 천국행 직행열차 티켓을 줄지 말지 알 수 있으니까!"

 

"그... 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따끈하고 맛있어 보이는 빵조각을 나는 멍하니 쳐다보았다. 입에 침이 고였고, 시야가 뿌옇게 물들었다. "한... 입만 해?" 그 순간, 입에 갑자기 따뜻하고 맛있는 감각이 가득 찼다. 나는 신음했다. "읍읍읍읍!"

 

"히히히. 바보!" 핑키 파이가 내 입에 빵을 우겨넣으며 벙글벙글 웃었다. "이건 네 거야!"

 

"읍읍!" 나는 빵 한 입을 베어물고 삼켰다. 남은 빵조각은 달달 떨리는 발굽으로 붙잡았다. "내, 내 거?"

 

"너 먹으라고 구운 거양! 나도 좀 먹궁!" 핑키가 활짝 웃었다. "왜냐, 이제 너도 내 친구니까!"

 

내 안에서 무언가가 꺼졌다... 아니, 켜졌다고 해야 하나. 지금에 와서도 그게 무엇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공허한 위장을 섬광처럼 가득 채우는 달달한 맛에, 오감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핑키 파이의 발굽까지 깨물어 먹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우오오오! 세상에 네상에! 히히히! 직접 만들어 먹으니까 어때, 민트색 친구? 히히히!"

 

"어..." 빵을 게걸스레 삼키고 나서 가쁜 숨을 고르며, 나는 말했다. "으음... 응..." 간만에 뱃속을 음식다운 음식으로 가득 채운 행복감에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지금까지 먹어 본 것 중 제일이야..."

 

"이제 시작인데 벌써 그런 말을? 아직 한참을 더 먹어치워야 할 텐뎅!" 핑키가 프로스팅 디스펜서와 각종 과자를 내 쪽으로 밀어냈다. "넌 설탕 장식을 해. 난 이것들을 트리플 X 버전으로 만들 생각이니까."

 

나는 다시 물었다. "뭐라고?"

 

핑키는 흥흥 웃더니 형형색색의 사탕 장식으로 가득 찬 그릇을 흔들어 보였다. "스프링클 엑스트라, 엑스트라, 엑스트라 라지 버전이지!"

 

"어..." 나는 공허한 웃음소리와 함께 바지런히 내게 떠밀려 온, 셀프도 이런 셀프가 또 없는 내 한 끼 식사에 필요한 작업을 시작했다. "그래, 그렇겠지."

 

"빵끗 웃으면서 해, 녹색 친구! 히히히. 중요한 건 웃는 거거등."

 


 

"으어어어어..." 나는 슈가큐브코너 한쪽 구석 깊숙한 곳에 놓인 긴 의자 하나를 골라잡아 앉아 있었다.

 

"배 아파아?" 핑키 파이가 물었다.

 

나는 취객처럼 웃으며 대답했다. "꽉꽉 들어찼지 뭘." 목구멍에서 설탕 냄새 나는 트림이 올라왔다. 급히 입을  가렸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테이블 너머에 앉은 핑키를 쳐다보고 말했다. "설마 내 평생 컵케익 여섯 개를 한 번에 다 먹어치울 줄은 꿈에도 몰랐어."

 

"하 하. 얌전하기도 하지."

 

"세상에..." 나는 이마를 찌푸리며 거세게 캐물었다. "도대체 한 번에 컵케익 열네 개를 삼켜 버리다니, 그건 또 뭐가 어떻게 된 일이야? 그게 가능해?"

 

"울 할무니도 늘 그랬어. 넷이 먹을 걸 혼자 다 먹어치우니 네 뱃속엔 히드라가 하나 들어앉은 모양이라고."

 

"그거 그럴듯하네."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되게 재미있으신 분이셨나 봐."

 

"그랬지. 안타깝게도 이 세상에 더는 안 계시지만."

 

"저런..." 나는 미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괜한 걸 물었네, 핑키 파이. 천수가 다 되어 돌아가신 거야?"

 

"아니. 벽이 쓰러졌어."

 

"아." 나는 놀라서 몸을 꿈틀대면서 시선을 돌렸다. "으음... 어..."

 

"아 맞다!" 핑키 파이가 자리에서 폴짝 뛰어 일어나더니 나를 보고 실실 웃으며 말했다. "남자애들 놀려먹으러 갈래?"

 

나는 놀라 되물었다. "나 잘못 들은 거 아니지?"

 


 

"그래 결국 날개만 가지고 그 자식을 흠씬 두들겨 패 놓았다 이거지!" 선더레인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선더레인 옆에 같이 있던 클라우드체이서와 플리터가 깔깔 웃으며 환호했다. 해가 기울며 저녁노을로 저물어가는 가운데 찬란한 석양이 스며나와 동아리를 흠뻑 적셨다.

 

"와, 대단했겠는데!" 플리터가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맞을 짓 했네." 클라우드체이서가 요염한*9 윙크와 함께 말했다.

 

"그래, 뭐." 선더레인이 근육질의 가슴을 긁적이다가 씩 웃었다. "그러게 왜 우리 비행팀 일에 부리를 들이대서는 일을 만드는지. 세간에는 그리폰이 그냥 개체 수가 적은 걸로 되어 있는 모양인데, 내 생각은 좀 달라. 그냥 종 보존에 필요한 유전자풀도 유지 못 하고 있는 거야. 하기야 뭐 그것들이 어쩌겠어? 뇌가 그것만큼이나 진화가 덜 된 족속인데—"

 

"찾았다!"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선더레인에게 달려갔다. 몸이 떨렸다. 추위가 절반, 이 짓을 꼭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절반이었다. "선더레인, 좀 도와 줘요!"

 

"그쪽은 누구...?" 플리터가 까칠한 시선을 던졌다.

 

"어허!" 선더레인이 나와 자기 친구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너도 들었잖아! 혼구멍을 내 줘야 할 녀석이 또 있는 것 같군!" 그는 헛기침을 하더니 날개 근육을 과시하는 듯한 자세로 서서 말했다. "그래, 무슨 일이길래 그러시죠?"

 

"서쪽에서 체인질링 1개 분대가 날아오고 있다나 봐요!"

 

"체인질링?!" 선더레인이 얼굴을 찌푸렸고, 클라우드체이서와 플리터는 놀라서 저희들끼리 뭐라고 쑥덕였다. "그리폰 자식들만큼이나 못된 자식들이긴 하지!" 선더레인이 눈을 깜박였다. "거의—"

 

"이쪽으로, 빨리!" 나는 발굽으로 한쪽 방향을 가리키고 그쪽으로 종종걸음쳤다. "예리하고 날카롭고 눈썰미 매서운 페가수스가 봐야지 다른 사람 갖고는 턱도 없어요!"

 

"그렇고말고! 체인질링 자식들이 포니빌을 공격하게 둘 수는 없...는데..." 선더레인이 등 뒤를 흘끗 돌아보았다. "그나저나 체인질링 놈들이 여기까진 또 무슨 일로 기어 들어오는 거지?" 클라우드체이서와 플리터가 어깨를 으쓱해 대답했다.

 

"빨리빨리! 시간 없어요!"

 

"좋았어!" 선더레인이 내 뒤를 따랐다. 나는 그대로, 척 봐도 수상하기 짝이 없는 마을 공터로 그를 데려갔다. "어디 있다는 거죠? 아무것도 안 보이는—"

 

"지평선을 봐요, 어서!" 나는 서쪽을 가리켰다. "몇 마리나 오고 있는지 알아야 해요!"

 

"그건 그런데..." 선더레인이 움찔하며 눈을 찡그렸다. "해가 저쪽으로 넘어가는데요! 이거 뭐가 보여야..."

 

"그러면 여기서 보세요." 콘크리트 위 검은 반점을 가리켰다. "그렇더라도 하늘에서 눈 떼시면 안 돼요!"

 

"어......" 클라우드체이서가 침을 삼켰다. 두 눈이 내가 가리킨 지점에 못박혀 있었다. "선더레인?" 플리터가 솟아나는 웃음을 삼켰다.

 

"조용히 좀 해줘!" 선더레인이 툴툴댔다. "어느 방향인지 찾아내려면 집중해야 한단 말야." 그는 하늘을 쳐다보며 접착액이 질척하게 붙은 반점 위로 걸어 들어갔다. 철퍽 소리와 함께 걸음이 멈췄다. "흐으으음..." 그는 새빨갛게 물든 서쪽 하늘을 살펴보다 말했다. "새 떼밖에 보이지 않는군요. 확실한 정보가 맞는가요—?"

 

나는 입술을 깨물며 발굽을 들어올려 신호를 보냈다. 근처 수풀에서 핑키 파이가 불쑥 튀어나와 선더레인의 귓가에 대고 소리를 질러댔다.

 

"튀어! 루나 제국 이단심문관이다!*10"

 

"갸아아아악!" 선더레인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놀란 닭처럼 날개가 마구 퍼덕거렸다. 그가 겨우 정신을 수습했을 때는 접착액이 네 발굽에 전부 달라붙어 고무줄처럼 질척거리고 있었는데, 사내는 그 장력을 견디지 못하고 땅에 그대로 처박히고 말았다. "아아이쿠!" 바닥에 찰싹 달라붙은 채 선더레인이 신음했다. "으어어어어어..."

 

클라우드체이서와 플리터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깔깔 웃으며 비명까지 질러댔다. 핑키 파이도 코웃음을 치며 뒤로 발랑 나자빠지더니 사지를 마구 바둥거리며 박장대소했다. 나로 말하자면, 가만히 앉아 한쪽 발굽을 입가에 대고 헉 하고 놀라고 있었다. 얼마 뒤, 끔찍했던 며칠 동안의 기억과 공포가 전부 흐려지고 사라지고 난 후에는 나도 그 자리에 엎어져 숨을 몰아쉬어 가면서 낄낄거렸다.

 

당연한 일이지만, 선더레인은 그닥 그 상황을 기꺼워하지 않았다. "으으으으! 핑키 파이!" 그는 투명한 접착액에 포박당한 몸을 빼내려 바둥거리며 큰 소리로 소리쳤다. "잡히기만 하면 가만히 안 둔다!"

 

"해 볼 테면 해 보셔, 모호크!*11" 핑키 파이가 벙글거리며 눈물을 닦아냈다. "히히힝! 너희 셋이 뭘 하고 있었는지 몰라도 제대로 말아먹은 것 같넹! 어쨌거나 저쨌거나 넌 오늘 밤은 여기 계속 붙어 있어야 하겠는걸!"

 

"다물어! 일루 와!" 선더레인이 이를 희번득거리며 달려들었다.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그는 다시 접착액의 늪으로 끌려 들어갔고, 날개에서 빠진 깃털이 흩날렸다.

 

"뜨아!" 나는 핑키 파이의 품 속으로... 넘어졌다.

 

"이제 그만 다이아몬드 독 궁둥이처럼 똑 떨어져 볼까, 민트사탕?" 핑키 파이가 나를 홱 낚아챘다. 우리는 마을 어귀까지 함께 달렸다. 등 뒤에서 선더레인이 퍼부어대는 욕설과, 얼굴을 붉히며 깔깔 웃는 자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하하하하하!" 나무가 빽빽하게 도열해 선 길바닥 위로 나무뿌리가 몇 개씩 불쑥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나는 거기로 넘어져 버릴 듯이 웃어댔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지 뭐양!" 내 옆에는 핑키 파이가 있어, 저물어가는 하루의 끝을 함께 걷고 있었다. 그녀는 즐거운 듯 폴짝거리며 뛰어다녔다. "선더레인이 대쉬를 살살 약올릴 생각이었는지, '가까이 오는 사내놈들한테 머릿기름 쩐내 자랑하려고 머리 안 감고 다니는 거지?' 하니까 대쉬도 한 마디 안 지고 '그러는 네놈 이름은 치미창가를 배 터지게 처먹어댄 다음 날 화장실에 일어나는 비극을 형상화한 거 아니냐?' 고 하더라니까!*12"

 

"히히히히!"

 

"거기에 덧붙이기를, '그래서 기상팀 애들이 수요일 점심때부터 저녁때까지 그 지랄을 한 거 아니야? 이야, 난 진짜로 천둥번개가 치는 줄 알았지!' 라고 하더라고. 히히. 당연하지만 선더레인도 꼭지가 돌았어. 근데 거기에 대고 무슨 말을 또 해? 대쉬가 펀치라인에는 별로 소질이 없을 수도 있지만, 하고 싶은 말을 상대 명치에 꽂아 버리는 데는 도가 텄거든. 다른 애들보다도 대쉬를 오래 알고 지내다 보니, 걜 웃길 때면 늘 즐겁더라고. 이를테면 염통 쫄깃해지는 짜릿한 게임이라고 해야 하나? 하나 예를 들어 보자. 무지개 공장이 피로 꽉 차 있는 이유가 뭐게?*13"

 

"헤헤헤—크흠. 모르겠는데. 무지개 공장이 피로 꽉 차 있을 이유가 있나?"

 

"눈송이 공장을 봐서 그래.*14"

 

"쓰으으-읍하하하하하!"

 

"히히히히—그래, 페가수스 농담이지. 별로 안 좋아했는데 갈수록 빠져들더라고. 그래도 모름지기 농담이란 핫소스 끼얹은 듯 매콤해야지. 사해 바다뱀이 클라우드데일로 놀러 갔는데, 어떻게 됐는지 알아?"

 

"히히히... 으음... 글쎄. 어떻게 됐는데?"

 

"죽었어!"*15

 

"크흡— 하하하하!" 나는 거꾸러지다시피 하며 웃어댔다. 높아진 혈당수치와 엔돌핀 농도, 부족한 수면으로도 연명이 가능하긴 한 모양이었다. 핑키 파이는 이 셋을 하나로 이어 붙이는 재주가 있었다. 추위에 몸이 얼어붙으면서도, 핑키 파이만 있다면 어디라도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단한데, 핑키 파이. 몸에 증기기관이라도 있는 거야?"

 

"다른 건 몰라도 선더레인은 그런 거 없이 늘 열이 받아 있지롱!"

 

"히히히..."

 

"생각해 봐. 페가수스 애들이 의무적으로 '가스 방출 훈련'을 수료해야 한다고 치면, 선더레인이 그 수석에 서서 당당히 깃발 흔들고 풍선 날리면서 자랑하고 있을 것 같지 않아? 히히히! 알지? '수료'인데 말야."

 

"하하하..."

 

"그러고 보니까 플러터샤이는 그 훈련도 통과 못 할 것 같단 말이지..." 핑키 파이가 생각에 잠겨 턱을 긁적였다. "이 세상 밖에 또다른 세상이 있다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갑자기 막 드넹. 보이는 거 들리는 거 다 있는데 그게 죄다 방구 냄새인 거."

 

"휴...우..." 나는 웃느라 아파 오는 뺨으로 씩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음, 슬슬 어두워지는 것 같지?"

 

"웩! 난 어두운 거 싫어! 어둠은 엄마한테 편지 한 장 안 보내는 불효자란 말야!" 그녀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짓더니 내 가방끈을 와락 붙잡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어둠도 놀려먹는 거 어때?"

 

"어떻게? — 으아앗!" 핑키 파이는 나를 질질 끌고 몇 시간 전, 우리가 만났던 공원으로 달려갔다.

 


 

다음 폭죽이 공기를 가르고 날아가 별이 총총한 밤하늘로 솟구쳤고, 밝고 찬란한 형형색색의 불꽃으로 폭발했다.

 

나는 바닥에 앉아 즐겁게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핑키 파이는 기쁨에 겨워 폴짝폴짝 뛰면서 허공에 대고 발굽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야! 관념적 권태와 증오의 거대한 확장인 어둠이라도 이건 못 이기지!" 핑키가 야생마처럼 나를 보고 씩 웃자, 드러난 이빨 위로 빨강과 노랑, 파랑이 뒤섞인 불빛들이 반짝거렸다. "트와일라잇이 니체Neightzsche*16가 어쨌다느니 주워섬기는 건 내 알 바 아냐. 그 늙은이는 되는대로 얘기한 것밖에 없거든. 이 몸이 몸소 그 아저씨의 헛소리를 하나 고쳐 주자면, '네가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심연도 너를 보고 까르르 웃어 줄 것이다' 정도."

 

나는 빙긋 웃으며 다음 폭죽을 건네주었다.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속이 깊어 보이네."

 

"으음! 딥 디쉬 파이 좋지!*17 호박 파이 완전 좋아! 지금이 가을이었으면 좋았을 건데. 사탕도 왕창 집어넣어서 만들 수 있으니까! 어떻게 생각해?"

 

"너 이상해."

 

"진짜 이 상하는 게 뭔지 보여줘?" 핑키 파이가 방화광적 미소를 지으며 폭죽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펑 터진다!"

 

폭죽은 북향으로 약간 틀어져서 솟구쳐올라 찬란한 금빛과 노랑색을 꽃피우며 그 목숨을 다했다. "하하하..." 나는 잔디밭에 기대고 앉아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불빛과 불꽃을 쪼였다.

 

그 때 세상은 다시 따뜻하고 살 만한 곳이었다. 그 날부터 이어져 온 두려움이 전부 녹아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팔짱을 끼며 잔디밭에 대고 앉은 엉덩이를 더욱 밀어 앉으며 피부로 느껴지는 풀잎의 질감에 환희했다. 절망에 그토록 쉽게 굴복하고, 며칠 내내 기꺼이 그 늪으로 침잠했던 것이 한심했다. 좀 더 알아봤어야 했는데. 조금만 더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면 이 모든 상황을 훨씬 더 매끄럽게 넘길 수 있을 터였다. 이 저주라는 것도 그냥 일시적인 것일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 자기가 그러지 않으면 뭐 어쩔 텐가? 세상에 영원한 것은 오직 죽음 하나뿐이다. 나는 죽지 않았다는 것을, 핑키 파이가 알려준 것이다.

 

"재밌네." 나는 말했다.

 

핑키 파이가 낄낄 웃었다. "뭐가 재밌는뎅? 좀 더 자세하게 말해 봐. 민트 친구."

 

"히히..." 나는 몸을 돌려 폭죽 불빛에 젖은 핑키 파이를 보고 씩 웃으며 말했다. "아무도 날 기억 못 하는 줄 알았거든. 나이트메어 문을 눈앞에서 보고 난 다음부터 하루하루가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웠는지 몰라. 희망 없는 세상에 그토록 쉽게 사람이 내던져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거야. 그래도 오늘은 아니야. 오늘은 인생 최고의 날이야. 모든 걸 잃어버린 게 아니라고, 네가 보여줬잖아."

 

"징짜?" 핑키 파이가 다음 폭죽에 불을 붙이며 방긋 웃었다. "내 덕이양?"

 

"으음... 응. 제정신 차리게 해 줘서 고마워." 나는 다리를 끌어안으며, 눈을 천천히 감았다. 만족스러웠다. "벌써 엄마랑 아빠가 눈에 선하네. 지금쯤 엄청나게 걱정하고 계시겠지. 날만 밝으면 캔틀롯행 첫 기차 타려고......"

 

"뭐, 오늘 하루 좋았다니 다행이양!" 도화선이 타오르는 날카로운 소리 위로 핑키 파이의 목소리가 솟구쳤다. "나도 같이 놀았으면 좋았을 텐데!"

 

"히히히." 나는 웃었다. "벌써 그랬잖아? 더 이상 행복할 수 없을 것 같아. 안 웃으려고 해도 웃음이 계속 나오네."

 

"잘됐네! 난 사람들 웃는 게 좋앙! 특히 초면인 사람 웃기는 게 최고양!"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어딘가 어긋나고 있었다. 나는 눈꺼풀을 떨며 눈을 떴다. 불길한 느낌에 이마가 찌푸려졌다.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빛은 무시하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말했다. "잠깐... 그... 그... '초면인 사람'이란 뜻은 정확히 무슨 뜻으로 한 거야?"

 

"보아하니 잠깐 놀러 나온 자취생 같은뎅!"

 

입이 벌어졌다. 눈이 몇 번 깜박이고 나서, 혀 짧은 소리로 말했다. "라이라." 나는 침을 삼키고 다시 말했다. "내 이름은 라이라야."

 

"하트스트링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글쎄, 그쪽 이름이 치즈스트링스였으면 그렇게 며칠 굶은 것 같은 얼굴을 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

 

"아냐... 밥 먹었잖아... 같이 먹었잖아." 침이 목구멍 너머로 떨어졌다. 머리 위에서 폭죽이 터지는 그 순간에도, 몸을 덮치는 한기는 그 기세를 두 배, 세 배로 높이며 몰아쳤다. "같이 컵케익 구웠잖아. 기억 안 나?"

 

"으으으음... 컵케익이라." 핑키 파이가 군침을 삼키고 말했다. "들어가아아아아아아자마자 스프링클 엑스트라, 엑스트라, 엑스트라 라지 버전으로 구워 먹어야겠당." 불현듯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저기, 메어 그린 얘기 들은 적 있엉?"

 

"잠깐... 너..." 나는 고개를 저으며 일어섰다. 거칠어져 가는 숨이 쌕쌕거렸다. "네 입으로 얘기해 놓고 기억 안 난다고?"

 

"기억이 안 나긴 누가? 메어 그린? 라스 페가수스에서 생긴 일은 라스 페가수스의 일이양.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든 내 죽마고우는 못 잊징! 내 눈 말고 컵케익 갖다 박을 데가 또 어딨다궁?"

 

"아냐! 우리 둘 얘기야! 너랑 나! 같이 컵케익 구운 거 기억 안 나? 선더레인 엿먹인 거 기억 안 나냐고?! 숲길 걷던 것도 기억 안 나? 같이... 같이 공원 온 것도?"

 

"에이! 혼자서 불꽃놀이하면 그게 무슨 재미야, 같이 봐야 재밌지!" 핑키 파이가 다음 폭죽에 불을 붙이며 싱글벙글 웃었다. "같이 와 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궁. 안 그랬으면 나 혼자 궁상맞게 앉아서 밤하늘에 폭죽 쏘는 바보짓 한다는 기분이 들었을 건데 말야!" 핑키가 머리 위에서 터지는 무지갯빛 섬광에 환호했다. "호오오오오오오우...... 얼마나 이뻐!"

 

"나... 너... 이거..." 나는 속에서 천불이 난 기분으로 나무뿌리 사이에 낀 갈기를 밀어 뺐다. 임계점에 다다른 폭탄처럼 몸이 떨려 왔다. 나는 겨우 말했다. "가야겠다..."

 

"읭?" 핑키 파이가 깜짝 놀라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러어언... 방금 와 놓구선!"

 

"아냐..."

 

"그래도 예쁜 불꽃놀이 보면서 같이 놀자—?"

 

"아니!" 나는 소리쳤다.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울음을, 나는 겨우 억눌러 참았다. "가 봐야 해서 안 돼. 미안!"

 

"에이, 애처럼 그러지 말자구, 민티!"

 

"라이라라니까!" 나는 말 그대로 울먹이며 소리쳤다.

 

"하트스트링스?" 핑키가 말했다. 나는 그제야 핑키가 내 큐티마크를 보고 때려맞춘 것임을 깨달았다. 그녀는 평생 동안 짓고 있을 듯한 미소로 말했다. "그쪽 이름이 치즈스트링스였으면 그렇게 며칠 굶은 것 같은 얼굴을 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잠깐! 어디 가?"

 

나는 도망쳤다. 죽을 힘을 짜내서 달렸다. 그 어떤 것도 보거나 느끼지 못한 채, 그저 숲 속으로 달아날 뿐이었다. 세상은 결국 어둠과 한기로 쌓아올린 거대한 미궁이었고, 나는 그 한가운데 던져진 것이었다. 눈을 깜박일 때마다 나이트메어 문의 사악한 눈빛이 어른거렸다. 나를 쳐다보는, 빛나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엄마와 아빠의 얼굴이 사라져 갔다. 나는 울면서 가지 말라고 소리쳤다.

 

내 생각이 얼마나 안일했는지 나 스스로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 날 포니빌 주민들은 내게 친구가 되어 줄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그들은 편협한 광대에 불과했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뭐라도 때려부수고 싶었다. 진흙탕을 구르다가 그대로 죽어 버리고 싶었다.

 

내가 그 어느 충동에도 따르지 않은 것은 순전한 우연이었다. 숲 속으로 아무렇게나 달겨드는 걸음에 나는 몹시 피곤했다. 어느새 모르는 곳까지 들이친 걸음의 끝에서 나는 쓰러져 눈물만 흘렸다. 아침이 밝고 보니 버려진 헛간이었다. 근처 농가의 딸이 근처를 지나가다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면, 그 고독감에 사로잡히고 말았을 터다. 그 우연이... 내 인생을 바꿔놓았다.

 


 

핑키 파이와의 첫만남이 있은 후 몇 주가 지났다. 그 동안 낡은 짐가방 외에도 당당히 내 것이라고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늘었다. 어느 날 오후,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시가지에 나가 리라를 퉁겼다. 유익한 시간이었다. 저주를 받은 몸이지만, 충분한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돈이 많이 벌렸으므로, 비록 부박한 것들이지만 영양가 있는 음식과 위생적인 생활, 그럴듯한 거처를 마련할 수 있었다. 포니빌 북쪽 어귀에 있던 폐헛간 근처에 천막을 치고, 거기 신세를 지고 있었던 것이다. 좀 더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당장 급한 것부터 처리하는 게 먼저였다.

 

매일 아침만 되면 뇌리에서 하염없이 떠다니는 음악 소리가 대체 무슨 의미인지 깨달은 것도 그쯤이었다. 그 곡은 루나 공주, 나이트메어 문이 부마付魔한 바로 그 분께서 지으신 대단히 오래된 악곡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역사에서 거의 잊힌 연주곡인 "그림자 전주곡"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음표 하나하나를 다 옮겨 적은 뒤,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하게 연주하자마자 생각도 못 했던 부작용이 나타났다. 내 주변의 모든 광원이 엄청나게 증폭되면서, 피해망상과 엄청난 불안감이 느껴진 것이다. 그 때 느껴지던 느낌을 전부 적어 기록해두고 싶었지만, 그 현상을 견디는 것만 해도 힘들어서 그러지 못했다. 그림자 전주곡을 완주하자마자, 다음 악곡이 머리에 떠올랐다. 당황스러운 만큼이나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그 때, 포니빌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이 저주에 뭔가 다른 의미가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포니빌에 발이 묶인 지 한 달쯤 지난 무렵, 나는 내 상황에 서서히 적응해 나가고 있었다. 무서워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냉정을 유지해야 했다. 그때만 해도, 언젠가 가족을 다시 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었다. 내가 알 수 있었던 건, 이 연주곡이 무언가를 해방하는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한 번에 하나씩 해치우자." 나는 중얼거렸다. 그닥 재미있는 어구는 아니었지만, 유용한 문장이라는 것은 변함없었다. 나는 후드 재킷의 옷깃을 다듬으며 침낭에서 몸을 일으켰다.가방을 짊어진 뒤 몸을 돌려 텐트 지퍼를 열었다.

 

새끼 악어가 내 얼굴로 날아들었다.

 

"므으읍읍읍읍!" 나는 그대로 텐트 밖 흙탕에 넘어져 빌어먹을 파충류와 씨름했다. 흙바닥에서 몇 번 구르고 나자, 내 쪽으로 호다닥 달려오는 발굽 소리가 들렸다.

 

"안 돼! 그만! 못된 잇몸이! 떨어져! 떨어지라니까! 으아아아아!" 한 쌍 앞다리가 악어의 비늘 가죽을 붙드는 것이 느껴졌다. 대단히 불쾌한 뽕 하는 소리와 함께 새끼 악어가 머리에서 떨어져 나갔다.

 

"퉤엣!" 나는 주저앉은 채 침을 뱉었다. 한숨지으며 눈을 덮은 갈기를 밀어 치우고, 눈 앞의 선명한 인영人影을 향해 소리쳤다. "아 나 진짜, 핑키! 어지간하면 목줄 좀 채우라니까?!"

 

"야, 얘 잘못이 아냐! 행글라이더 타는 법을 가르칠 수 있을까 싶어 그랬징! 근데 막상 바람 타라고 던져주고 나서야 글라이더를 깜빡한 게 생각났지 뭐양... 아, 행거도 까먹었구!"

 

"교수대라도 찾고 있었나 봐?*18" 나는 물었다.

 

"읭? 교수대라니?"

 

나는 한숨짓고 말했다. "됐어. 목줄 정도는 찰 수 있을 거 같으니 목줄이나 채워."

 

"바보같긴! 악어가 어떻게 목줄 매고 행글라이더를 타?" 핑키가 빙글빙글 웃으며 큰 눈깔을 부릅뜬 악어를 들어 자기 뺨에 문질렀다. "히히히! 뭐 어쨌든 좋은 아침이양! 아침부터 얼굴에 악어 붙인 건 미안행!"

 

나는 한숨과 함께 천천히 몸을 일으켜 몸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이런 일이 벌써 열 번째라는 사실에 화를 내야 할지, 아홉 번을 겪었으면서도 아무 대비를 안 한 내 멍청함에 화를 내야 할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이 저주라는 것은 핑키 파이처럼 제정신을 놓고 다니는 사람들의 가지가지 미친 짓을 여러 번 감당해야 하는 의미에서 최악이었다.

 

"됐어. 앞으론 조심해." 나는 툴툴대며 덧붙였다. "네 생각보다 동네 근처엔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니니까, 아무데나 악어를 던져댔다가는 잇몸이만 안 좋은 꼴 당하는 걸로 안 끝날 수도 있어."

 

"그래, 뭐, 잇몸이 이빨이 잘 자라고 나면 사람들을 잇몸이한테 대신 던져보지 뭐." 핑키가 잠시 멈칫하더니 깜짝 놀라 나를 보며 말했다. "잠깐! 어떻게오또케 내 이름을 아는 거양? 전에 본 적 없는 얼굴인뎅."

 

나는 한숨지으며 설명을 끌어댔다. "그건 말이지—"

 

핑키 파이는 자기에게 뭔가를 설명하려는 것만큼 더한 뻘짓은 없다는 것을 몸소 증명해 보였다. "왠지 그쪽이라면 알 것 같기도 하넹! 그나저나 그쪽 비주얼이 증말로 민트 셔벗 땡기게 하는뎅!"

 

"네, 네. 그러시겠지요—"

 

"으으으으으음. 셔벗."

 

"난 가 봐야 해." 나는 신음하며 텐트 지퍼를 밖에서 잠가 닫았다. 가방을 단단히 고쳐 멘 뒤 나는 말했다. "곡 하나 쓰고 있어서, 포니빌 도서관에 좀 가 봐야 하니—"

 

"근데 왜 텐트에서 살앙?"

 

"텐트가 내 안에서 살면 내 입에다가 지퍼를 달아야 할 테니까."

 

그 정도만 해 둬도 깔깔 웃어댈 터였다. 이 농담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잽싸게 몸을 빼내 달아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날 아침만은 달랐다. 흙밭을 뒹굴며 깔깔대던 핑키가 갑자기 정색하더니 이렇게 말한 것이다.

 

"야! 도서관 간댔징! 생각났엉! 트와일라잇 주려고 머핀 굽고 있거등! 발굽 좀 보태줭!"

 

몸이 떨렸다. 핑키 파이를 처음 만난 날 함께 빵을 굽던 기억을 잊으려고 매일매일 용을 쓰고 있었으니까. '같이 있었던' 날부터 몇 주가 지난 뒤였고, 나는 그 때보다 단단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핑키 파이의 존재는 아직 그렇게 되려면 멀었다는 사실을 내게 되새겨줄 뿐이었다.

 

"미안. 좀 바빠서..."

 

"블루베리 머핀인뎅? 뭐, 그럼 어쩔 수 없징—"

 

"라이라." 나는 말하자마자 바로 후회했다.

 

"어디보자. 그럼 뒤에는 하트스트링스가 붙겠넹? 이름이—"

 

"치즈 안 좋아해!" 나는 얼굴을 구기며 대답했다. "내가 가장 혐오하는—"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당혹해했다. "이건 또 뭐 하는 짓이야?"

 

핑키 파이가 한쪽 발굽으로 물구나무를 선 채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쪽 큐티마크를 거꾸로 뒤집어서 보면 전자오락에 나오는 유령 캐릭터랑 비슷하게 생기지 않았냐고 누가 얘기한 적 없엉*19?"

 

"안 닮았거든!" 나는 소리쳤다. 그러다가, 혹시나 싶어 내 엉덩이를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아무튼..." 조그마한 악어를 꽁무니에 매단 채 핑키 파이가 통통 튀며 쫓아와서 말했다. "빵 굽기 싫으면 안 구워도 됑! 하기 싫은데 억지로 굽는 것만큼 안 좋은 게 또 없그등! 그렇고말고! 토리 헤이모스 선생*20 말 좀 들으라고 케이크 부인이 얼마나 닦달하던지!"

 

"으으으음..." 핑키가 되는 대로 신명나게 주절거리는 소리가 양쪽 귓속에서 앵앵거리며 정신 사납게 했다.

 

"다음번에 잇몸이 던질 땐 날개 자랐는지 먼저 확인하고 날릴겡! 날개가 아니더라도 물갈퀴 정도까지는 확인하겠지만!"

 

"핑키. 잠깐." 나는 그녀에게 발굽을 뻗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알았으므로, 나는 살짝 움츠렸다. 그 날 하루를 어떻게 쓸지 계획한 것들이, 그 찰나의 시간 동안 서서히 녹아 사라지고 있었다. 그 날 쌓아올릴 수 있는 성과가 어느 정도였든, 그 짓 하나로 죄다 도로아미타불이 될 지경이었다. 솔직하게 쓰자면, 갑자기 핑키 파이라는 인간이 궁금해져서 마음을 바꾼 것이다. 왜 핑키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는지는 지금에 와서도 잘 모르겠다. 글쎄, 빙글빙글 웃는 뺨을 잡아 늘리는 것 같은 감각일지도 모르겠고, 안 좋은 일만 줄지어 일어나는 와중에도 두 눈에 끊임없이 반짝이는 눈빛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무엇 때문인지는 차치하고라도, 머릿속에 떠다니는 멜로디는 내가 별로 얻을 것이 없었다. 핑키 파이와 함께하면, 얻을 것이 있었다. 발굽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서서, 몸에서는 풍선과 케이크 버터 냄새를 풍기며 나를 보고 빙글빙글 웃는 이 사람은, 내 발굽으로 잡을 수 있었다. 인생이 어느 순간부터 온갖 사고로 쇠창살을 삼고, 모든 결과를 우연으로 요약해 버리는 알 수 없는 감옥이 되어 버린 차였다. 거기 갇힌 내 앞에, 무기 수감의 마지막 비감 한 조각까지 끌어들여 웃음으로 승화시켜 버릴 수 있는 사람이 통통 튀는 걸음으로 나타난 것이다. "생각을 바꿨어." 나는 억지로 밀어내듯 말했다. "그 뭐시냐... 으으으음... 같이 빵 굽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진심?!" 딱 2초 정도만에 핑키가 표정을 싹 바꾸며 활짝 웃었다. "진짜?"

 

"응..." 나는 침을 삼키고 말했다. "안 할 것도 없잖아? 마음 또 바뀌기 전에 가자구."

 

"서두를 게 뭐 있엉?! 아직 아침 산보도 안 했는뎅!"

 

"아침... 산보...?"

 

"에이, 왜 이래!" 핑키가 깔깔깔 웃으며 자기를 따라오라는 듯 발굽을 까딱거렸다. "아침 햇살 맞으면서 걷는 게 얼마나 기분이 좋다구? 같이 뛰자, 스파이라Spyra!*21"

 

"라이라라고."

 

"상관없잖앙. 후딱후딱 움직여, 녹색 까칠이!"

 


 

"그렇게 꼽주고 나서 레몬 케이크 굽고 있는데, 그 인간이 또 저기 포니빌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연인의 거리Nuzzler's Lane라는 곳이 있다면서 들이대는 거 있징!" 핑키 파이는 나를 번화한 포니빌 시내로 끌고 가면서도 쉴새없이 떠들어대다가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아니, 진짜! 어떻게 사람이 뻥을 그렇게 칠 수가 있대?!"

 

"그러니까 뻔뻔스럽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네." 나는 말했다. "네가 구운 빵을 싫어하는 건 또 뭐가 어때서 그래? 그거 하나만 가지고 사람 판단하는 건 잘못된 거야. 믿거나 말거나지만, 남자들은 음식만 먹고 싶어하는 게 아니라구."

 

"아무렴 어땡." 핑키가 씩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래리티가 소개해 준다는 남자들은 싹 다 거를 거양. '오, 자기. 자기랑 포키 피어스Pokey Pierce라면 틀림없이 굉장한 한 쌍이 될 거야!' 풉! 그러시겠징! 그 인간이랑 둘이서 한 배 타고 가느니 차라리 빙산 들이받아서 빠져 죽는 게 나을 거양!"

 

나는 픽 웃고 말했다. "뭐 적어도 그 정도는 받아들일 만큼 자존감이 있다니 다행이네. 연애나 하러 가라고 충동질하는 매체가 한두 가지가 아니긴 하다만, 우리도 전부 바보는 아니니까 거기 안 낚이는 사람들도 있는 거겠지." 그 때, 눈 앞에 튤립 한 송이가 들이밀어졌다.

 

"좋은 아침이에요, 천사님." 이라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잘생긴 얼굴의 잘생긴 미소에서 흘러나왔다. 얼굴 위로 연한 청색 눈동자가 반짝였고, 그 꼭대기에는 사파이어처럼 반짝이는 갈기가 있었다.

 

"어어어어..." 당혹스러웠다. 그가 내민 튤립을 받아 챙기기는 했지만, 그 이상은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선 채 몸만 비비 꼬고 있었다. "어어... 어으으음..."

 

사내는 빙긋 웃더니 고개숙여 인사하고 조경용 수레를 향하여 걸어갔다.

 

" 남자가 뭐래?" 핑키가 무표정하게 물었다.

 

"그... 그..." 나는 그에게서 튤립으로 시선을 떼어놓고, 헛기침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사이, 슬쩍 꽃을 흘려 버리는 와중에도 두 뺨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글쎄, 모르겠는걸." 우리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 사이 목소리가 떨리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진정되었다. 나는 물었다. "핑키. 하나만 묻자..."

 

"으응?"

 

"생판 모르는 사람인데 그런 건 신경 안 써?"

 

"네가 맨티코어가 아닌 이상 신경 안 쓰지롱!"

 

"그거... 되게 위험한 생각 아냐?"

 

"누가 생각하면서 산다고 그래?" 핑키는 통통 튀는 발걸음으로 포니빌 시내를 향하여 들어가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빵 구워서 다른 사람 먹일 수 있으면 된 거징!" 그녀가 고개를 돌려 턱수염을 기른 사내에게 발굽을 흔들어 인사하며 말했다. "안뇽 에이스! 염증 생긴 건 좀 괜찮아?"

 

나는 계속 말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 어떤 악의를 가지고 접근할지도 모르는 일이고—"

 

"괜찮아 괜찮아. 아직 쓸 수 있는 관절이 세 개나 남아 있잖앙!" 핑키 파이가 남자를 향해 까르르 웃으며 소리쳤다. "그러니까 포기하지 말라궁!" 멀리서 사내가 껄껄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핑키?" 나는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내 말 듣고 있기는 한—?"

 

"치어릴리 안뇨옹! 애들은 어때? 양파처럼 쑥쑥 크고 있엉?"

 

"하하하!" 지나가던 여자가 이쪽을 보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언제나처럼 활기차답니다!"

 

"잘됐넹! 유치원 등록 시작하면 알려 주라! 낮잠 시간을 좀 쓸 수 있을 것 같으니까!" 핑키 파이가 나를 보고 실실 웃으며 말했다. "치어릴리 참 좋은 사람이야. 네 생각은 어때?"

 

"너 지금 세 명이랑 한 번에 얘기한 거야?" 나는 물었다.

 

"우웁스!" 핑키가 미안해하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미안, 가이라.*22"

 

"라이라야. 미안할 건 또 뭔데?"

 

"나랑 같이 있으면서 안 웃고 있으니까 그렇지. 알잖아?" 핑키는 다시 군중을 향해 발굽을 흔들며 누군가를 불렀다. "세티스토츠Sethistoats*23 안녕! 위니페그 흥행사興行師라는 그 여자가 답장 보내 줬엉?"

 

지나가던 노란 솜털을 한 사내가 이쪽을 보더니 얼굴을 붉혔다. "누구? 뭐가 뭐라고?" 그는 사과 가판대에 그대로 부딪쳤다. "아야! 아오!"

 

"히히히." 핑키가 내게 윙크하며 조심조심 말했다. "저 친구 주의가 좀 산만해."

 

"저 친구만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나는 핑키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세상만사를 그렇게 까불거리는 걸로 받아들이기에 인생은 너무 짧고 중요한 것 같지 않아? 정말 안 좋은 일을 당한 사람이 네 옆에 있는다고 방긋 웃고 싶어할 것 같진 않잖아? 그럼 어떻게 할 거야? 그런 상황이 있을 거란 생각을 해 보긴 했어?"

 

"우우. 설교하는 거양?" 핑키 파이가 낄낄 웃더니 말했다. "케이크 사장님이 맨날 나한테 그러거든. 적어도 내 생각엔 그래. 진지할 때랑 아닐 때랑 구분하긴 어렵지만 말야. 아. 케이크 사장님 목 본 적 있엉? 기린 목뼈를 대신 붙인 거 같다니까."

 

"나이도 어지간히 먹었고, 포니빌에서도 맡은 역할이 있을 텐데 조금만 더 진지해질 수도 있지 않나—"

 

"푸딩햇 의장이 가운데골Central Valley로 순례를 떠나기 전만 해도 온 이퀘스트리아 곳곳에 기린이 많이 살았거등. 전염병이 도는 건 슬픈 일이야. 그렇지? 뭐 그래도 요즘은 걔들 카지노도 운영하면서 잘 살고 있고 하니까—"

 

"핑키. 집중 좀 하면 누가 너 잡아먹기라도 한대니?"

 

"왜 그렇게 심각해?" 핑키가 흥흥 코웃음을 치더니 나를 보고 씩 웃었다. "나도 심각하게 얘기하는데, 릴라Leela 너도 로봇 나비같은 소리를 하기 시작했단 말야." 그러더니 금빛 튤립을 건네주었다. "자. 떨어뜨렸더라."

 

"저..." 핑키가 조금 전 그 사내의 정중한 몸짓을 기묘하게 따라하며 꽃을 건넸고, 나는 주저했다. 걸음을 더 옮기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얼어붙은 나는 뺨에 다시 불이 붙는 듯한 느낌에 말을 더듬었다. "어떻게... 어디서 찾았...?"

 

"너무 퍼져 있지 마아!" 핑키 파이가 슈가큐브코너 입구로 들어서며 큰 소리로 외쳤다. "라이라 너보고 경주하라고 그러는 건 아니지만*24, 머핀은 구워야 할 거 아냥! 자 후딱!" 핑키가 날개 달린 누군가에게 부딪쳤다. "우우우웁스! 히히! 미안요! 머핀이 급해용!"

 

"쳇..." 황동색 페가수스가 우리를 지나쳐 가며 툴툴댔다. "어스 포니들 극성은 참, 엔트로파 공주님도 질색할 지경이라니까."*25

 

튤립을 귀 뒤에 꽂고 슈가큐브코너에 들어섰다. 나는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뒤를 돌아보자, 그 페가수스도 나처럼 가다 말고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황동색 눈동자가 새까만 갈기 아래서 나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잠시 동안 서로를 그렇게 쳐다보다가, 어깨를 으쓱하고 갈라져 각자 갈 길을 갔다.

 

"허어..." 나는 후드 재킷을 고쳐 입고 몰려드는 한기를 견뎌내며 슈가큐브코너로 들어섰다. "이상한 일도 다 있지."

 


 

"푸 푸 플래터*26가 무슨 뜻인지 그제야 알았지 뭐양!" 슈가큐브코너 주방 한가운데서, 핑키 파이가 머핀 반죽을 담은 그릇을 내려다보며 깔깔 웃었다. "휴우! 아, 그러고 보니까 연회 끝나고 나서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 하계 태양절 축제를 메인해튼에서 하는 걸로 바꿔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다지 뭐야! 아. 공주님께서 양치 잘 하고 계시려나 모르겠네."

 

나는 길게 한숨지으며 블루베리를 준비했다. "그래, 하루하루 새롭게 배우는 게 좋은 거지." 나는 억지로 침을 삼키며 욕지기를 눌러 죽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잘 닦아."

 

"세상이 그런 흑백논리로만 된 게 아니라궁."

 

"그건 또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이야?"

 

"몰랑. 페트롯 몰리네이Petrot Molyneigh*27가 한 말이겠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한다 싶으면 꼭 더 말이 안 되게 만들더라 넌."

 

"그 자세 때문에 네가 항상 진지를 치사량까지 복용한 사람이 되는 거야!"

 

"진지를 치사량까지 뭐가 어쨌다고?"

 

"봐봐. 스탤리온 앤 올리Stallion and Ollie 알지? 루이스 앤 메어틴Lewis and Maretin은? 애벗 앤 콜트스텔로Abbot and Coltstello는?*28" 핑키는 반죽을 섞으며 눈을 찡긋했다. "하나는 바보인데 다른 하나는 옆에서 엄근진한 표정을 짓고 있단 말야! 그러면 어떻게 돼. 우리가 머핀 뿌리는 것처럼 사람들이 다 와 하고 박장대소를 한단 말이징! 이 말은 무엇이냐! 우리가 그 후배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 머지않아 하프궁둥이와 당중독자Harpflank and Sweets*29로 유명해질 거야!"

 

"그거 누가 벌써 쓰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말했다.

 

"히히히! 괘안아! 다른 사람들 웃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쪽을 웃기는 것도 중요하니까. 그쪽이... 누구더라..." 핑키 파이의 말은 명료하게 딱 떨어지지 못한 채 늘어졌고, 그 위로 갈피를 잡지 못한 입이 헤벌어져 있었다.

 

나는 핑키를 쳐다보며 몸을 일으켜 섰다. "왜? 무슨 일인데?"

 

"으음... 그겡..." 핑키가 입술을 깨물며 얼굴을 붉혔다. "재수가 없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그게 그런 일이 터졌을 때 좀 더 스무스하게 받아넘긴다는 뜻은 아니거등......"

 

"너 내 이름 까먹었지. 그렇지?" 나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들이밀며 물었다. "...잊어버린 거잖아? 그것도 방금?"

 

"그... 아하하하... 머핀 구우러... 왔는데... 그쪽이... 그..."

 

"그만!" 나는 소리쳤다. 블루베리 몇십 개가 타일 바닥에 떨어져 뒹굴었다. 나는 몸을 더욱 기울여 핑키 파이의 어깨를 붙들고 물었다. "도망갈 생각 마! 잘 생각해 봐. 핑키 파이."

 

"그...쪽 이름 생각해 내려고 하는 참—"

 

"됐어! 그럴 필요 없어!" 나는 소리쳤다. 침을 한 번 삼키고, 한결 풀어진 소리로 다시 물었다. "그냥 설명을 좀 해줬으면 좋겠어."

 

"설명이라니 뭘?"

 

나는 입술을 깨물며 나직하게 말했다. "지금 어떤 기분이지? 저주가 당신한테 무슨 짓을 했지?"

 

"저주라니...?"

 

"일면식은커녕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어느 순간 내 앞에 딱 서 있는데, 이상하단 생각이 안 들었어?" 잠들지 못하고 며칠 밤을 뒤채이며 고민하던 문제의 답을 핑키 파이의 두 눈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기라도 한 양 그 눈들을 똑바로 쳐다보며 나는 물었다. "내 얼굴도 목소리도 당신은 처음 보고 듣는 것이겠지. 어딘지 익숙하단 생각이 들진 않아? 전에 나랑 얘기해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아니면 그냥 아무것도 모르겠어?"

 

"그게... 그게..."

 

"말해..." 비탄으로 점철된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나는 더 단호한 얼굴로 핑키를 쳐다보고 말했다. "나한테는 중요한 문제야.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야겠어. 왜 일이 항상 이따위로 돌아가는지 알아야..."

 

"그..." 핑키 파이는 자신의 가련한 영혼 깊은 곳을 탐색하는 명상가처럼 가늘게 뜬 눈을 다급하게 굴리며 천장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게 말이지..."

 

"어떤데?"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핑키 파이가 눈을 깜박이더니, 벙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피스타치오를 좀 더 때려붓고 싶은 기분이양!"

 

두 귀가 축 늘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피스타치오를 때려넣고 싶은 기분?" 나는 중얼거렸다.

 

"옙퍼로니!" 핑키는 통통 튀는 걸음으로 유유히 빠져나가 높은 선반에서 견과류 통을 집어 내렸다. "블루베리는 필요 없어! 하! 레시피에 과일을 집어넣다니! 과일은 겁쟁이들만 쓴다구! 질박한 농업도시인 포니빌에 과일이라니 믿을 수 없어! 반죽에 견과류를 때려부어야 한다는 뜻이지!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핑키 파이!" 나는 반쯤 몰아붙이듯 말하며 핑키가 나가지 못하게 길을 막았다. "나 누군지 알겠어?"

 

"예쁜 사람!" 핑키가 윙크하며 말했다. "갈기 보니까 민트초코 생각나!" 그러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총총 걸어가 이빨로 견과류 통의 뚜껑을 잡고 말했다. "으음음음—어기 부루붸리 옴 앝따 어. 에픈 팅구!"

 

"심각한 얘기하는 거라니까!" 나는 핑키의 입에 물린 통을 잡아 뽑았다. "암만 봐도 정상은 아닌 일이 일어났다니까...... 으으으으." 핑키의 입에서 흘러나온 군침이 발굽에 묻어 주욱 늘어나는 꼴에 나는 얼굴을 구겼다. 축축해진 통을 한쪽에 가만히 놓아두고, 핑키를 쏘아보며 물었다. "여기에만 한 시간 반을 있었는데, 내가 처음부터 없던 사람처럼 되어 버렸다고. 저기 윗동네 내 텐트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가 줄줄 다 읊어주면 뭐라 그럴래?"

 

"텐트에서 만났다궁?"

 

"그래! 내 얼굴에 대고 잇몸이를 던졌지!"

 

"흠, 잇몸이한테 행글라이더를 가르치려고 했을 수는 있겠넹." 핑키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까 우리 동네에 글라이더 구할 만한 데가 있을까? 아니면... 행거라도?"

 

"핑키!"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반쯤 악을 썼다. "너, 나, 잇몸이 셋 사이 얘기 나부랭이가 아니라니까!"

 

"흥! 칫! 둘이 있으면 무리고 셋이 있으면 단체라궁!"

 

"주방에 같이 있는 사람 이름조차 모르는데 신경이 안 쓰인단 말이야?!"

 

"그릉가? 이름이 뭐가 중요하다고?"

 

"중요해! 나는 라이라 하트스트링스야."

 

"그랭?" 핑키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그쪽 이름이—"

 

"네 입에서 한 번만 더 치즈라는 말이 나왔다간 내 맹세코 가만 안 둘—"

 

"쓱 보니까 머핀 굽는 법 한두 가지 정도는 충분히 익힐 수 있을 거 같은뎅!" 핑키가 까르르 웃었다. "그거면 충분하잖아?"

 

"아냐!" 나는 소리쳤다. "하나도 안 충분해! 사람은 각자가 누구고, 각자 무슨 일을 하는지로 정의되니까!"

 

"그걸 뭐라고 불렁? 빅 라이라 이론?*30"

 

"내 말 가지고 말장난 치지 마!" 핑키가 아무 생각 없이 주방을 한 바퀴 돌며 재료를 주워담는 동안, 나는 그 뒤를 따르며 계속 말했다. "세상 사람 전부가 어느 날 갑자기 네 이름을 잊어버리면 기분이 어떨 것 같냐고?!"

 

"댄스 클럽 들어갈 때 좀 많이 힘들긴 했징."

 

"그러니까!" 나는 팔짱을 끼며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말했다. "기분 이상하지 않겠어? 나를 구성하는 조각 중 가장 큰 조각이 없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겠냐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내가 가진 모든 걸 죄다 뒤어뜯어 갔는가 궁금하지 않겠어?"

 

"라이라는 바보네. 캔틀롯 궁정도 아니잖앙! 세상 사람 모두가 옷 입고 다니는 건 아니라궁.*31"

 

"아 나..." 나는 발굽을 얼굴에 가져갔다. "핑키 너..."

 

"그나저나 후드 멋진데." 핑키가 조리대로 돌아가 반죽을 치대며 말했다. "세상에, 역시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니까?"

 

"넌 아무것도 모르겠지!" 나는 말했다. "너는 날 몰라!"

 

"똑똑하고 공부도 잘했고, 음악에 재능이 있는데 마침 그쪽에 흥미가 있었네."

 

나는 놀라서 말을 멈췄다. "어..."

 

핑키 파이가 깔깔 웃었다. "에이 왜 이래. 설마 큐티마크가 대충 아무렇게나 생기는 건 줄 알았던 거양? 신을 상대로 주사위 놀이를 하겠다궁? 아인스탈리온Einstallion 아자씨가 그런 얘기 하지 않았었나?*32"

 

"큐티마크만 보면 그 사람이 어떤지 다 꿰뚫어 볼 수 있다 이거야?" 나는 억양 없는 목소리로 물으며 엉덩이를 가리켜 보였다. "큐티마크 딱 보고 아 저 사람 음악하는 사람이다, 하는 걸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글쎄." 핑키가 내 엉덩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암만 봐도 금색 하프가 인류학*33 큐티마크일 리 없잖아?"

 

"으으... 핑키 너..."

 

"밖에 나가서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물어보고 다녀 봐. 사람들 별로 그쪽 잘 모른다?"

 

"그래. 그건 좀 재밌었다." 나는 크게 몸짓하며 말했다. "그러니까 네 이름을 큰 소리로 한번 말해 봐. 그걸 듣고도 아무 감흥이 없는지, 한번 말해 보라구!"

 

"응? 이름 다 불렁?"

 

"당연하지."

 

"흐으으음..." 핑키 파이가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며, 이름 한 글자 한 글자를 혀로 굴려 말했다. "핑카미나 다이앤 파이." 그녀는 말을 멈췄다.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했다. "아 진짜. 재미없는 이름이라니까."

 

나는 삐딱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으음..."

 

"왱? 문제 있엉?"

 

"아니, 아냐. 그냥..." 나는 얘기하려다, 말을 멈추고, 한숨으로 끝냈다. "됐다." 나는 그대로 조리대에 기대 주저앉았다. "내가 왜 그걸 물어봤는지 나도 모르겠다."

 

"기운 내라궁 친구! 왜 그렇게 그쪽에 신경 쓰고 있는진 하나도 이해 안 돼지만! 이름에 뭐가 있다구 그랭? 울 엄빠가 그러는데 내 이름을 '서프라이즈*34'로 지으려고 했다고 그러드랑. 그게 차라리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엉. 그런 의미에서 사소하나마 계속 날 위한 서프라이즈 파티를 한 거양! 근데 막상 생각해 보니까, 날 축하하는 건 이미 매번 하고 있더라궁. 히히히히. 그래서, 평생 동안 날 부르는 호칭이 뭐 그리 중요한 거양?"

 

"적어도 푸 푸 플래터는 중요한 이름이라고 생각하지?"

 

"글쎄, 이름보다는 냄새가 더 끝내주더랑. 됐고 나 좀 도와 주랑! 보탤 발굽이 있는데 그냥 두기엔 아깝지?"

 


 

"피스타치오야?" 카운터 너머에서 플러터샤이가 나긋하게 웃으며 이쪽을 쳐다보았다. "이거 되게 맛있다. 집에 좀 가져가서 다람쥐들 맛이나 좀 보여 주고 싶네. 혹시 그래도 폐가 되진 않을까?"

 

"떽! 헤이스팅스 다리 너머로 반출되는 모든 물건에는 위니 왈라스세가 붙어서 절대 공짜가 될 수 없엉!" 핑키 파이가 소리쳤다. "최대한 많이 가져가도록 해! 온 숲에 블루베리와 피스타치오의 복음을 고루 전파하도록! 다람쥐 녀석이 교회 안 다닌다고 쫓아내거든 그냥 냅두고 다른 동네나 가져다 줘!"

 

"도대체가..." 나는 계산대 옆에 주저앉아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다. "너 말하면서도 네 입에서 떨어지는 소리 안 듣고 말하지?"

 

"으. 안 그래도 마이크 써서 얘기해 본 적은 있지. 침 열라 튀기더랑." 슈가큐브코너에 모여든 사람들이 즐거이 식사하는 가운데로 걸어 플러터샤이가 출구로 향했다. 핑키가 그녀의 뒤에 대고 발굽을 흔들었다. "노래는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야 노래인 거양. 그래서 아 이렇게 해야겠다, 같은 생각은 안 행."

 

"아무 생각 없이 지르는 건 그것뿐만이 아닌 거 같은데."

 

"플러터샤이는 달라. 방금 나간 그 페가수스 친구 봤징?" 이제 노란 얼룩처럼 흐릿하게 보이는 그녀의 뒷모습을 핑키 파이가 가리키며 말했다. "플러터샤이는 합창단 하나 꾸려도 전혀 손색이 없거등. 플러터샤이나 나나 목소리는 똑같다고 다들 그러는데 말야.*35 나는 잘 모르겠단 말이징. 네가 들어 볼랭? 흠흠. 도 레 미 파"

 

나는 눈을 부라리며 핑키의 입에 내 발굽을 쑤셔넣어 다물게 했다. "들을 만큼 들었어, 핑키 파이. 네가 친절하고 재미있고 명랑한 사람이란 건 알겠지만, 도저히 답이 없다는 생각도 같이 든단 말이지."

 

"아아비업떠?" 핑키가 웅얼거렸다. 발굽을 치우자 핑키가 고개를 흔들고, 입술을 풀더니 말했다. "그쪽이 어떤 사람인지는 몰라도, 굉장히 즐거운 기분인걸."

 

"즐거운 기분이 드는 것과 즐거워지는 건 엄연히 다르다고."

 

"엑." 핑키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언제부터?"

 

"위대한 어머니Cosmic Matriarch*36께서 이 세상 사방에 신성한 숨결을 불어넣어 질서를 이룩하신 그 순간부터지. 그게 무슨 상관인데?" 나는 두 다리를 쭉 펼치고 일어섰다. "사람은 평온에 다다를 수 없어. 진정한 평온에 다다를 수 없다고. 우주의 질서에 따라 자기가 있을 곳을 명료히 깨닫지 않는 이상!*37"

 

"다이어네틱스Dianeightics*38 요법 책 읽어 봤냐고 물어보는 거양?"

 

"핑키 파이. 어제가 어땠고 내일이 어떨지 생각이나 해 보긴 한 거야?!" 이쯤되니 핑키 파이가 걱정스러울 지경이었다. "언제까지 오늘만 보고 살 건데? 당장 코앞에 있는 걸로 인생을 나는 게*39 언제까지 먹힐 것 같은데? 좀 의미 있고, 오래 가는 건 하나도 이룩한 게 없어?"

 

"흐으으응... 글쎄, 과거에 머물러 있는 건 가능할 것 같아. 그 '날다'가 무슨 뜻으로 쓰였는지 찾을 수만 있다면 말이지." 핑키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리고는 생각에 잠겨 턱을 가볍게 쓸었다. 그러는 와중에 두어 명이 더 다가와 계산대에서 머핀을 더 가져갔다. "있지, 나 어릴 때는 웃을 거리가 그렇게 많지 않았어. 뭐, 추락한 신의 날개에서 떨어져 나왔다나 어쨌다나 하는 큼직한 뼈다귀 하나랑, 좁고 험한 협곡밖에 없는 작은 정착지에서 태어났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 웃음은 죄악이고*40, 한 사람의 가치가 일출부터 일몰까지 그 사람이 갱도를 얼마나 파고 들어갔냐로 결정되는 그런 동네였어."

 

"핑키..." 나는 한숨지으며 지그시 그녀의 어깨에 발굽을 올려놓았다. "모... 몰랐어. 정말 그런 곳이 있어?"

 

"풉!" 핑키는 계산대를 쿵쿵 두드려대며 쿡쿡 웃어댔다. "하하하하! 장난이징! 바위 농장 출신이야 그냥."

 

"핑키 파이!"

 

"하 하 하 하!"

 

"됐어." 나는 가방을 집어 등에 얹었다. "나 간다."

 

"우우우우... 그렇게 딱 잘라 말하지 망! 좀 웃으라고 한 건뎅!"

 

"이대로 가다간 내가 먼저 무덤 파고 들어갈 판이야."

 

"아이구! 내가 또 깜빡하고 있었넹!" 핑키 파이가 내 옆으로 다가섰다. "그러면 그렇지! 머핀 굽는 거 도와줬으니까 품삯은 줘야징! 사장님 내외가 가게에 현금은 잘 안 두셔서 돈으로 주기는 무리일 것 같궁, 간단한 기념품 같은 건 어땡?" 핑키가 계산대 밑으로 고개를 숙이더니 보라색 하마 인형을 집어 보여주며 말했다. "플러시Plushie 어땡?"

 

"핑키 파이. 다른 건 몰라도 플러시는 진짜 받기 싫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지. 플러시는 어린애들이나 좋아하니까. 오호오오!" 핑키가 계산대 뒤를 마구 뒤지더니 말했다. "넌 똑똑해 보이니까! 여기, 책 선물!" 두꺼운 장정이 된 두툼한 책 하나가 날아와 발굽 위로 툭 떨어졌다.

 

나는 겨우겨우 받아들고, 책장을 펼쳤다. 몇 페이지 넘기고 나서, 나는 핑키를 심드렁하게 보며 말했다. "죄다 백진데."

 

"그랭? 일기 쓰면 되겠당! 글 쓸 줄 알잖아. 그칭?"

 

"왜 굳이 일기를 또 쓰라는 건?!" 나는 말을 멈췄다. 텅 빈 페이지를 몇 장 다시 넘기며 나는 생각했다. "흐으으음..."

 

"난 일기는 안 쓰거등. 쓰려고 하면 영겁의 세월이 걸리지 뭐양. 게다가, 일기로 뭘 써야 하는지도 모르겠단 말이지?" 핑키 파이가 헛기침을 하더니 굉장히 으스대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일기에게. 수사학적 성찰은 좋아하니? 수사적 문장은 어떠니? 나는 잔뜩 뽐낸 수사적 문장 쓰기를 굉장히 좋아했지만, 어느 순간 무언가 머리에 팍 떠오르더니 아, 주절주절 늘어놓기보다 명확하게 평서문으로 쓰는 게 낫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 뭐야!"

 

"어, 핑키 파이?" 플러터샤이가 말했다. 그녀가 계산대로 다가서며 말했다. "혹시나 싶어서 왔는데." 플러터샤이의 어조는 조용조용했다. "저기...으음... 머핀 두 개만 더 가져가도 될까? 요즘 엔젤이 굉장히 착한 아이로 있어서, 칭찬을 해주고 상을 주면 앞으로도 계속 그럴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 플러터샤이가 말을 멈추고 나를 가만히 쳐다보며 말했다. "어머, 안녕하세요. 핑키 친구 분 되시나요?"

 

"달랑 5분 전에 봐 놓고 기억이 안 난다고요?"

 

"어음. 네. 죄송해요. 제가 그, 그랬나요?"

 

나는 빈 책을 탁 소리를 내며 덮고 핑키 파이에게 몸짓하며 말했다. "하! 이것 보라구! 봤지?"

 

"누구? 플러터샤이?"

 

"날 잊어버렸잖아!"

 

"히히히! 플러터샤이야 뭐 날개가 탈착식이었으면 진작에 잃어버리고도 남았을 텐데 뭘! 어어... 기분 나쁘라고 한 말 아니야."

 

"난 괜찮아."

 

"저번 주에 잇몸이한테 짜 준 슬리퍼 있잖앙. 잇몸이가 이제 멋진 스텝을 밟기 시작하더라."

 

"어머 정말?" 플러터샤이가 활짝 웃자 빠진 깃털 몇 개가 떨어졌다. "언제 꼭 잇몸이 발레 리사이틀 보러 갈게."

 

"그랭! 수컷 악어가 자기의 여성성을 탐구하는 세상이라니 이 얼마나 살기 좋은 세상이야."

 

"핑키!"

 

"안뇽!" 핑키가 나를 쳐다보았다. "거기 안뇽! 이야, 책 멋있게 생겼당!"

 

"아 셀레스티아 맙소사..." 속에서는 들불이 타오르는데, 몸이 느끼는 것은 한기였다. "또 까먹었냐?"

 

"어어..." 핑키 파이가 눈을 깜박이다가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하트스트링스지? 이름이 치즈스트링스였으면"

 

"그래, 그래. 잘들 있으라고."

 

"나도 치즈 좋아해." 플러터샤이가 말했다.

 

"아무도 안 물어 봤거" 걸음을 너무 서둘러서, 계산대를 넘어가려다 다리가 걸려 넘어졌다. "윽!"

 

"보아하니 잇몸이만 발레 배우고 싶은 건 아닌 모양이야."

 

둘이 까르륵 깔깔대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할 말도 없어서 더 화가 났다.

 


 

텐트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었다. 나는 욕설을 중얼거리며 지퍼를 찾아 더듬거렸다. 지퍼를 찾아 홱 내린 뒤, 나는 새까만 후드에 싼 감자 자루처럼 몸을 던져 누웠다. 나는 한숨지으며 침낭 위에 엎어져 있었다. 어두워져 가는 어느 여름날은 그 잔열로 따끈따끈했다. 가슴팍에 무언가가 단단히 끼어 있었는데, 그게 뭔지는 직접 보고 나서야 알았다.

 

빈 일기장이었다.

 

"제기랄. 하루 공쳤잖아. 셀레스티아 맙소사." 나는 빈 책을 텐트 구석진 자리에 홱 던지고 돌아누웠다. 흘러내린 갈기가 공기를 보는 눈 위로 쏟아졌다. 머릿속에 새로 생겨난 이 알 수 없는 곡의 정체를 밝히는 일로 하루를 썼어야 했는데. 저주를 풀기 위한 연구와 좀 더 튼튼하고 안전한 집을 짓기 위한 조사, 생계비 충당으로 하루를 알차게 썼어야 했는데, 하루 온종일을 헛짓거리나 하고 돌아다닌 것이다. "문댄서, 저거 네 제자는 아니겠지, 설마?"

 

세상은 문득 춥고 적막한 곳이었다. 언제나처럼.

 

나는 살짝 몸을 떨며 머리 위로 후드를 눌러썼다. 두 앞다리를 가슴에 꼭 붙였다. 나고드는 숨결에서 희미한 김이 피어올랐다. 머릿속에서 그 날 있었던 일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다른 상황이었다면, 내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이었다면, 핑키가 항상 원해 왔던 것들을 그 파편으로라도 실현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몇 번은 슬그머니 웃음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기는 했다. 나는 냉정한 마음으로 웃음을 떨쳐냈다. 그래서 웃고 싶은 나와 웃고 싶지 않은 나는 교착 상태였다. 이것조차 저주에 그 원인을 돌려야 하는 것이었을까?

 

나는 대체 뭐가 되어가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운명이 예비한 나의 마지막 모습은 무엇이었을까. 항상 춥고 기쁨 없이, 까불지도 웃지도 못한 채 살지는 않지 않았는가. 저주가 저주로 이행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고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아니지. 아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일 리 없다. 아직 취합해야 할 정보가 더 남아 있었다. 답을 찾아야 했다. 핑키 파이를 이해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다른 것들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종잡을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 하는 것보다 지난한 일은 없다. 게다가, 평생 오늘만 살 기세로 살아가는 사람의 머릿속은 어떨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기도 했다.

 

그랬으므로, 나는 신음하면서 돌아누워 내가 평생 안 할 것 같았던 짓을 하기 시작했다. 빈 일기장을 들어올려 첫 번째 페이지를 열었다. 악보에 음표를 새겨 넣을 때만 쓰던 펜을 염동력으로 잡아, 간단한 메모로 하루를 정리했다. 메모에서 윤곽이 드러났고, 윤곽에서 서사가 생겨났다. 서사가 한데 모여 일지가 되었다. 포니빌에 갇혀 사는 동안 계속해서 그려나가게 될 지도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치 못했다.

 


 

열두 달이 지난 뒤, 벽난로에 불을 피운 안락한 오두막집 한가운데에 앉은 나는 그 '지도'를 그려 나가는 데 아주 열심이었다. 나는 조용히 중얼거리며 깃펜을 붙잡고 페이지 밑바닥에 마지막 글줄을 써넣었다.

 

"혹시, 세인世人의 머릿속에는 있지만 어디서 들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그런 아름다운 음악이 있지 않을까. 있다면, 그것은 나이겠지." *41

 

나는 펜을 멈추고 깃펜을 잉크병에 집어넣은 뒤 완성된 일기를 바라보았다.

 

"흐응. 나 혼자 볼 글이라서 다행이네. 이건 안 지워질 거 아냐."

 

나는 숨을 들이마시며 빙긋 웃었다. 인생이 팍팍하기는 했지만 견딜 만했다. 저주를 받고 바들바들 떨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그 날 이후, 나는 비곡 여러 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살 집을 지었다. 식자재를 충당하기 위해 텃밭도 가꿨다. 아무래도 이런 신세다 보니 트와일라잇에게 최대한 효율적으로 협조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상용어구도 개발해 두었다.

 

바로 전날, 나는 트와일라잇을 통해 일곱 번째 비곡의 제목을 알아낼 수 있었다. 왼편을 돌아보자 밤의 만장을 기록한 두툼한 악보 더미가 그 제목을 기록한 안전 라벨에 싸여 있었다.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일 년 내내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드디어 내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좋은 데 오기라도 한 듯 기분이 풀어졌다.

 

그 때 내 안에서 잔불처럼, 갑자기 반짝 하고 피어난 기분은 일종의 향수가 아니었을까. 그것이 무엇이었든 그 힘으로 일기를 적어 내려간 것은 사실이다.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일기장 가장 앞 페이지를 펼쳐보았다. 첫 번째 페이지에 적힌 글줄을 보고 나는 얼어붙었다.

 

일 년 전 내가 대충 갈겨쓴 글씨로 적어놓은 메모가 있었다. 글씨는 그야말로 괴발새발의 극치였고, 열두 달 전의 내가 얼마나 차가운 인간이었는지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쭉쭉 적어 내려간 글줄 사이사이로 '돈 더 벌어올 것'이나 '헛간 건물 때려부술 것', '도서관 보존서고에 접근할 것', '악기 구입' 같은 보배 같은 메모가 적혀 있었다. 그러나 정작 내 주의를 끈 비망록은 따로 있었으니, 그야말로 분노에 찬 선으로 세 번이나 삭선을 그어 지워 버린 한 줄 메모, '핑키 파이식 사고 배우기'가 그것이었다.

 

꼭 하라고 강조하는 듯한 그 한 줄에 나는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웩. 진심?" 떨리는 숨결이 새하얀 입김이 되어 빠져나갔다. 나는 벽난로에 타오르는 불 속을 들여다보았다. "이거 대신 시간 여행의 원리를 규명한다거나, 모조 무지개 만드는 법 개발하는 게 더 나을 거 같은데?"*42

 

새삼스레 나의 고독을 깨닫는 때가 여러 번 있었다. 그런 때가 언제 찾아들 것인지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그런 때가 되면 수다스러운 깨달음은 내 얼어붙은 날숨조차 가로막을 수 없는 절대적 침묵을 동반했다. 벽난로에 피운 불길이 오두막 안에 드리운 어둠에 녹아 사라지는 듯했다. 창 밖으로 보이는 밤하늘의 별 하나하나가 사라져 갈 즈음, 벽에 걸어놓은 악기의 형상이 흐릿해지며 사라져 갔다.

 

밤의 만장이 간직한 비밀을 파헤치든지 말든지, 마음의 평화와 건전한 정신 상태로 이행해 온 시간이 긴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절대로 쉬운 길은 아니었다. 일 년 내내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 일이 여러 차례 있었으니까.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그걸 견뎌냈으니 좀 자랑스러워해도 된다는 것이다.

 

내 마음이 차분해진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핑키 파이가 보여 준 자연 그대로인 날것 그대로의 즐거움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항상 붕붕 뛰어다니는 그 녀석이라도 자기랑 똑같은 사람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한없는 고독에 침잠할 때 핑키를 거기서 꺼내 올 만한 사람이 있기는 할까?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어떤 방식으로 기쁨과 절망 사이의 장벽을 넘게 될 것인지 감히 예상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긴 있을까?

 

'핑키처럼 생각하기'는 이제 나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어느 단계가 아니라, 저주를 짊어진 자가 걷는 길에 아무것도 모르고 끼어든 까불이를 알아 가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 녀석이 아니었다면 시시때때로 일지를 꺼내 끄적일 일도 없었을 것 아닌가?

 

"이게 다 악어 자식 때문이야." 나는 중얼거렸다.

 

후회는 이제 그만두어도 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내 머리는 이미 계획을 하나하나 다 짜두고 있었다. 어쨌든 비곡의 비밀을 찾아내는 데 또 한 번 큰 걸음을 떼지 않았는가. 걸핏하면 날 까먹는 친구들이기는 하지만, 그 친구들이 더 큰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게 도와주는 걸 미루거나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나는 일지를 휙휙 넘겨 가장 최근에 쓴 페이지로 넘어갔다. 펜을 들어 메모 몇 개를 적었다. 씩 웃었다. 한 몇 주는 붙잡고 있어야 글다운 글이 나오겠지만,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미 동네 사람들과 연줄은 만들어 두었으니까. 그 연줄들이 날 기억 못 해서 문제지만. 내가 해야 할 것은 올바른 질문을 그 질문을 받아야 할 사람에게 던지는 것 하나뿐. 그러면 핑키 파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디까지나 가정이다만, 핑키가 자기 모습을 찾게 도와 줄 수 있을지도...

 


 

그 날부터 한 달이 지난 뒤 슈가큐브코너 앞. 핑키 파이가 스쿠틀루를 품에 안고 꼬마의 두 앞다리를 개선장군의 그것처럼 힘차게 들어올리고 있었다. 핑키는 가볍게 춤추며 벙긋벙긋 웃었다.

 

"우 후! 이게 누구양!" 핑키가 꼬마에게 윙크했다. "초장거리 마력충전식 페가수스 발사기가 몸과 영혼을 분리시킨 거 치고는 너무 늦은 거 아니양? 그지, 스쿳질라?"*43

 

스쿠틀루가 얼굴을 붉혔다. 꼬마는 핑키 파이의 품에서 벗어나 몇 발짝 떨어지더니 얼굴이 벌개져서 괜히 발굽으로 땅을 쿡쿡 찍었다. "난 괜찮다니까 핑키. 진심. 아니 뭐 죽을 뻔 한 거 넘긴 것밖에 없는데 무슨 개선장군이라도 된 것처럼 축하한다고 그러고 등을 두드리고 간단 말이야. 아니 뭐 후브즈 박사가 만든 뭐시깽이 때문에 죽다 살아난 건 맞고, 죽다 살아난 게 다행인 건 맞긴 해. 죽을 걸 살았으니까. 암만 그래도 두 번 다시 그런 짓 하고 싶진 않아. 밀키 화이트도 동의할 거고."

 

"밀키 화이트라고 그러니까 아주 길고 씨원한 사르사파릴라*44 한 병을 통째로 삼킬 수 있을 것 같지 않니!"

 

"그런 거 뱃속에 집어넣을 수 있을 것 같긴 해."*45

 

"응?"

 

"아. 어... 들려?"  스쿠틀루가 귀에 발굽을 갖다대고 말했다. "스위티벨이 노래 부르는 것 같아. 슬슬 가서 끼어야겠는걸. 우리 하고 다니는 거 있잖아. 저기서. 여기 있을 때가 아냐."

 

"오키 도키 로키!" 핑키 파이는 벌써 저만치 간 꼬마를 향해 순진한 몸짓으로 발굽을 흔들어 배웅했다. "큐티마크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재능을 폭발시켜 보도록 해!" 핑키는 몸을 돌려 나를 웃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언제 한번 동쪽으로 순례를 떠나는 얼룩말 순례객들한테 큐티마크 크루세이더 얘기를 했었거등?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 핑키는 킬킬 웃다가 갑자기 멈추더니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아. 음. 안뇽! 내 이름은 핑키 파이! 누구양? 왠지 모르게 치즈 얘기는 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막 스멀스멀 드는걸?"

 

"뭐, 아직 희망은 있는 모양이네."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읭?"

 

"핑키 파이..." 나는 핑키에게서 몇 피트 떨어진 나무에 등을 기대고 서서 리라를 퉁겼다. 핑키의 친한 친구들과 나눈 몇 번의 대화와, 핑키의 고향과 가족에 대해 쌓아올린 지식을 시적으로 조합해 가면서 심금을 울리는 말을 쌓아올린 불면의 밤은 모두 그 순간을 위해 예비된 것이었다. "머릿속에 굉장히 멋진 멜로디가 왔다갔다 하는데, 어디서 들었는지도 모르겠고 그게 뭔지도 모르겠다면 일단 흥얼댈 생각이겠지?"

 

"으엑. 살다살다 저런 말은 처음 들어 보네."

 

"어어어어어어... 허..." 나는 물꼬를 틀 방법을 끊임없이 생각하며 혀를 굴려댔다. "흠흠. 시작한다." 나는 빙긋 미소를 띄우며 핑키를 쳐다보고 말했다. "사람은 무엇으로 완성되나? 꿈인가? 생각인가? 목표인가?"

 

"저런! 쯧쯧." 핑키 파이가 바보같은 미소를 지으며 사방으로 눈알을 굴려대며 말했다. "이거 몰카인강? 이게 대체 뭐징?"

 

나는 기나긴 한숨을 토해냈다. 현을 더욱 강하게 퉁기고, 보다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고독이란 무엇인가? 완전한 고독은 무엇인가?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기는 했는가?"

 

"우우! 나 이거 좋아해! '노래 맞추기' 맞징? 다음 가사 내가 맞춰볼게." 핑키 파이는 눈알이 불거져 나올 정도로 숨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꽥꽥대는 소리로 노래하기 시작했다. "사라아아아아아앙이 식은 거에요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오오오오오오우 사랑을 잊어버린 거에요오오오오오오오오오우!" *46

 

나는 얼굴을 구겼다. 저 천진난만한 녀석과 대화다운 대화를 시도했다가 실패한 게 벌써 일 년 전이었다. 그게 왜 실패했는지 새록새록 떠올랐다. 발정기 고양이 같은 끽끽대는 소리에 주변 사람들이 이쪽을 흘끗흘끗 쳐다보기 시작했다. 시장님도 발굽을 뻗어 귀를 막아 버렸고, 베리 펀치는 얼마나 그 소리가 듣기 싫었던지 근처 관목에 머리를 처박아 버렸다.

 

"—거에요오오우! 사랑은! 이제! 없지만! 나 그대 떠날 수 없네-에에에에에-우후우우우아아아아아아아다 두! 다 두! 다 두후"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래... 다른 데 가서 해야 되겠다..."

 


 

아주 오랜,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나는 공원 가로등에 모여든 벌레들이 웅웅거리는 한가운데로 쏟아지는 빛을 맞으며 리라를 쥐어짜 몇 개 듣기 싫은 곡조를 뽑아내고 있었다. '저주를 짊어지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를 물어야 할 남은 기운이 불협화음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단조로운 곡을 토해내듯 쥐어짜던 나는 몹시 피곤했다. 두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오오! 오오! 나 이거 알앙!" 핑키 파이가 벙긋벙긋 웃으며 달려왔다. "스티비 네이 콘서트 티켓 샀엉? 양심도 없나 봐 걘! 내 생각엔 그 여자 분명 뭘 강요당하고 있는 거라니까!"

 

"아냐! 그런 거" 나는 속을 끓이면서도 애써 진정하고 리라를 퉁기며 나직하게 말했다. "영웅은 다만 역사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영웅인 것인가? 신화적인 삶을 살다 간 위대한 이들이 역사에 남은 것은"

 

"오오! 브로니 스타크 얘기지!" 핑키 파이가 폴짝폴짝 뛰고 말했다. "나 완전 팬이잖오!"*47

 

"염병. 그딴 거... 으으으으... 얘기하는 게 아니라고!" 나는 소리쳤다.

 

"오오오오오오오오오......" 핑키 파이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메어블 인수당해서 화났구낭?"*48

 

"나 말 좀 하자!"

 

"뭔 말 하는뎅?"

 

"자기소개!"

 

핑키 파이는 벙찐 표정을 짓더니 별이 송송한 하늘을 슥 둘러보고는 나를 쳐다보고 물었다. "그게 자기소개라고?"

 

"아주 중요한 말을 하기 전에 일단 유려하게 설명을 좀"

 

"인사는 악수 한 번으로 충분하잖아?" 핑키가 앞다리를 쭉 뻗고 말했다. "나는 핑키! 대충 부르려거든 '파이'라고 해도 돼." 그리고는 눈을 찡긋하고 말했다. "'다이앤'은... 음... 뭐, 정말 심심하다 싶을 때나 그렇게 불러."

 

"됐어. 거기까지." 나는 벤치에서 일어나 염동력으로 리라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리라 타임이다."

 

"뭔 타임?"

 

"내 노래나 들어." 나는 짧게 툴툴거린 뒤 심호흡하며 리라를 퉁겼다. 잔잔한 멜로디가 퍼졌다. 연주곡은 묘하게 홀리는 듯한 구석이 있었는데, 귀뚜라미조차 늦은 밤 이는 산들바람에 실러오는 나긋한 자장가 소리에 빠져 입을 다물었다. 핑키 파이도 까불거리는 짓을 멈추었다. 그녀의 시선은 나와, 내가 퉁기는 리라에 줄곧 머물러 있었고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음표 하나하나를 차분하게 이어 갈 뿐이었다. 곡이 흘러갈수록 핑키 파이의 입도 조금씩 더 벌어져 갔는데, 머리 위로 휘영청 떠오른 달이 흘리는 달빛에 젖어 이빨이 반짝거릴 정도였다.

 

곡이 마무리된 뒤, 나는 핑키를 차분하고 조용한 눈길로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거..." 핑키는 어느 면에서는 섬뜩하게까지 느껴지는 숨소리로 말했다. "그거..."

 

"이거? 평범한 민요야."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보통 꼬마들이 잠자리에 들 때 머리맡에서 불러주던 노래라더군. 포니빌 출신들은 별로 들어 본 일이 없지만 말이야. 이퀘스트리아 전역에 퍼진 노래가 아니거든. 대충 눈치챘겠지만 나도 어느 정도 조사는 해뒀어. 대체로 포니빌 기준으로 하면 북동쪽으로 가야 있는 동네 토착 민요라고 하던데, 그쪽이면 주로 채석장이나 바위 농장을 하거든. 포니빌 사람 중 이 노래 아는 사람 본 적 없지?"

 

"이거..." 핑키의 목소리가 떨렸다. 푸른 두 눈이 우리 사이의 흙길만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고, 더듬는 말투로 말했다. "엄마가. 엄마가... 불러 주시던 노래야." 핑키는 떨리는 발굽으로 뽀글뽀글한 갈기를 매만졌다. "다른 것도 많이 불러 주셨고."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러지 않으셨지?" 나는 한 걸음 다가가며 조심스레 물었다. "이제 다 컸다면서 말이야. 그랬지?"

 

천천히, 슬픈 듯 핑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핑키 곁에 가 쪼그리고 앉았다. "그래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며 나는 계속 말했다. "그래서 집을 나와야겠다, 더 나은 곳을 찾아야겠다 싶은 생각이 든 거야?"

 

핑키는 입을 꾹 다문 채 다시 고개를 저었다.

 

"핑키..." 발굽을 그녀의 어깨에 얹었다. "집에서 나온 게 네 선택이기는 했어?"

 

"아니... 난..."

 

"쉬잇..." 나는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웃는 걸로 감춰두거나 해야 할 일이 아니야."

 

"감추는 거 아냐!" 핑키가 떽 소리쳤다. "이건"

 

"핑키 파이, 세상 일도 다 때와 장소가 있어. 다른 사람 때문에 웃음을... 자기 해방의 통로로만 여기게 되면 안 돼..." 나는 핑키와 눈높이를 맞추고 내 온 힘을 다해 그녀의 마음에 발굽을 뻗었다. "잘 들어. 넌 대단한 사람이야. 아름다운 사람이고. 다재다능하기까지 해. 그것들을 엉뚱하고 시시한 것들에 쏟아부어 억누르는 게 과연 올바른 일일까? 네가 마음만 먹는다면야 산도 옮겨놓을 수 있을걸. 사방에 풍선 불어 날리고 장식끈 뿌리고 다니는 시간에, 네 집을 짓고 스스로 거기 살 수도 있어. 케이크 사장님 내외 집 다락방에 처박혀 지내지 않아도 된다구.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너 자신을 위해서 살 자격도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다른 사람들이... 날 필요로 할 텐데..."

 

"그럼 네가 필요한 건 어쩔 테야?" 나는 물었다. "널 완전하게 하고, 네 미래를 보장해주는 것들은 어쩔 생각이지?"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럴 생각만 있다면야 남자친구도 순식간에 찾을 수 있을걸."

 

"...싶지 않아..." 떠올리는 것만으로 너무나 아파서, 표정으로 축약할 수 없는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라도 하는지, 핑키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반복하기 싫어."

 

"뭘 반복한다는 거지? 가족들이 너한테 한 거?" 나는 천천히 핑키의 뺨을 어루만졌다. 두 푸른 눈이 축축하게 젖어 갔다. "핑키. 잘 들어. 네 잘못이 아니야." *49

 

핑키가 이를 악물었다. 숨소리에 울음기가 묻어났다.

 

"네 잘못이 아니야. 가족들이 너한테 한 짓도, 널 쫓아낸 것도..."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 사람들의 잘못이겠지. 그래도 가족들이 도와 줄 수 없는 지점은, 너 스스로 키워 나가야 해. 너 스스로와 친구들에게 당당히 네 가족이라 소개할 수 있는 가족을 꾸리는 것처럼 말이지. 그럼... 네가 정말 원하는 게 뭐야?"

 

"나..." 핑키는 헐떡였다. 눈가에서 흐르는 물방울이 수를 불려 갔다. "그... 나..."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 뭔데?"

 

"우에에엣취!" 핑키가 내 얼굴에 재채기를 날렸다.

 

"갸아아악!" 나는 엉덩방아를 찧으며 쓰러졌다. "애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50

 

"퓨!" 핑키가 코를 문질러 닦으며 평소처럼 순진한 미소를 지었다. "꽃가루 알레르기 너무 싫어! 그쪽은 어땡!"

 

"으으으으! 우욱! 퉤!" 나도 얼굴을 깨끗하게 문질러 닦고 핑키를 마주보며 말했다. "꽃가루... 알레르기 있었어?"

 

"신경 긁는 거 다 뽑아냈네, 그지? 히히히히! 아! 가족 얘기 하고 있었지 참." 핑키가 내 주변을 통통 뛰어다니며 말했다. "잇몸이가 열 번 연속으로 카펫을 개판으로 만들어 놨다고 날 쫓아내지 뭐양!"

 

"...........................잇몸이라고."

 

"우왕. 앞에 말 안 한 거 사실 일부러 말 안 하고 그냥 생략해 버린 거징?"

 

"그러니까 악어 새끼가 카펫을 망쳐 놔서 널 쫓아냈다?"

 

"뭐 적어도 표면상의 이유는 그럴걸. 트와일라잇이 저번에 나한테 문법 가르쳐 준다고 그랬는데, 유의어사전에 불이 붙지 뭐양. 왜 그랬는진 아직 잘 모르겠엉. 스파이크가 창 밖으로 지나가던 래리티를 보긴 했는데. 혹시 그건가? 내 삶의 빛, 내 샅의 불이여? 뭐, 난 수학은 그럭저럭 잘 하긴 하지만. 히히히."*51

 

"그러니까 이거 전부포니빌에 사는 것까지 전부... 죄다..." 나는 이를 악물고 펄쩍 뛰며 절규했다. "아냐! 이걸론 아무것도 설명이 안 된다고!"

 

"안 된다닝?" 핑키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물었다.

 

"안 되잖아! 납득이 안 돼!" 나는 쏘아붙이듯 말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항상, 항상 행복할 수 있느냐고! 어제도 내일도 신경 안 쓰고 오늘만 사는 것도 설명이 안 되고! 항상 내가 누군지 잊어버리는 주제에 왜 내가 저주받기 전이랑 똑같이 대하는 거냐고! 그걸로 설명이 안 되잖아!"

 

"워 워!" 핑키 파이가 얼굴을 찌푸리며 두 앞다리를 강하게 내저었다. "워 워 워 워 ! 진정하라구!"

 

나는 분노에 겨워 부들부들 떨며 핑키를 째려보았다.

 

핑키도 나를 쳐다보았다. 나를 죽 훑어보더니, 땀에 젖어 웃으며 말했다. "우리 뭔 얘기하고 있었드라?"

 

"너 진짜..."

 

"초콜릿 퍼지*52 얘기나 할래? 한밤중에 가로등 아래서 초코 퍼지 얘기하는 게 꿈이었거덩. 초코 퍼지는 뭔가 몸에 죄 짓는 그런 죄악감 넘치는 맛있음이 있단 말이 잠까안! 어디 가는 거야?"

 

"집! 내가 아주 끝장을 보고 만다." 나는 툴툴거리며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돌아갔다. "이번은 이렇게 끝났지만 다음에는 절대 이렇게 안 끝내!"

 

"왜 이래애애애앵! 같이 얘기 좀 하자아아!" 핑키가 노래하듯 소리쳤다. "노래 하나 달랑 들려주고 캐릭터가 극적으로 변화하고 장족의 발전을 이루게 도와 주는 생면부지의 낯선 사람 같은 장치가 아니잖아아아아! 이리 와아아아아!" 핑키는 자리에 주저앉아 중얼거렸다. "흐으으음. 가끔씩 저런 사람들 있징. 같이 살지도, 없이 살지도 못하는우우우우! 쩐당! 나방이양!"

 


 

"필리델피아행 열차 출발합니다! 타실 분들 빨리 타세요! 필리델피아 열차요! 빨리요!"

 

떨리는 숨을 가득 들이마셨다. 몇 주가 지난 뒤, 나는 포니빌 기차역 벤치에 기대어 앉아 열차가 지평선 너머로 경적 소리를 울리며 사라져 가는 음울한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인후에 남은 씁쓸한 뒷맛이 몹시 괴로웠다. 문댄서가 포니빌을 떠나기 전, 나와 나눈 마지막 몇 마디가 내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소중한 기억으로 남겨 잊지 않으려는 마음 곳곳이 아파 왔다. 그것이 나와 문댄서가 마지막으로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나는 눈꺼풀을 짓눌러 감고, 두 발굽으로 얼굴을 감쌌다. 문댄서의 표정과 그 보라색 눈동자, 악동과도 같은 미소가 내내 눈앞에 떠올랐다. 아직 문댄서의 목소리가 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귀가 쫑긋거렸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기는 했지만... 문댄서의 목소리는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휴우! 왜 기차는 죄다 증기기관으로 작동하는 거람?"

 

몸을 움찔하며 젖은 눈을 떠 돌아보았다. "음...?"

 

"왜 그런지 알겠엉?" 핑키 파이가 씩 웃고 있었다. 등 위에 빈 쟁반을 올려두고 있었다. "기차는 열라 크고 자의식 과잉인 족속들이라, 저 굴뚝으로 김을 좀 빼 줘야 해서 그래." *53 그녀는 쿡쿡 웃음을 참으면서 지평선 너머를 가리켰다. "기차 넝담. 지역민들이나 알아들을 농담이지만."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소리내어 웃었다. 마음이 아프면서도 즐거운 기분이었다. 울음을 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나는 웃음으로 도피했다. "괜찮아. 이해했어. 적어도 그렇다고 생각해." 나는 떨리는 숨을 내뱉으며 지평선 너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발굽을 질질 끌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핑키 파이는 나를 버려두고 가지 않았다. 내가 지은 뒤틀린 웃음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케이크 싸장님이 역장님한테 시나몬 대니시 패스츄리를 왕창 배달해 드리라고 하셔서 갔다 오는 길이지롱. 날개 아파 죽겠엉!"

 

"잠깐..." 나는 침을 삼키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넌 날개가 없잖아, 핑키 파이."

 

"나도 알지롱! 자기들이 똑 떨어져 나가서 허니팟 여관에 걸어 들어가 체크인했지 뭐양! 우리 동네 유일, 베개에 깃털 안 채워넣는 호텔이지롱! 히히히! 알아들엉?"

 

알아들었다. 끔찍한 농담이기는 하지만 알아는 들었다. 웃으려고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눈에 눈물이 고여 갔다. 내 과거가 흩어져 사라지는 모습과, 트와일라잇의 미래에 문댄서는 없을 것이라는 것을 이제 똑똑히 알면서도, 나는 부박하기 짝이 없는 행복을 느꼈다. 멍청하고, 나약하고, 등신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괜찮았다.

 

"당신 참 재밌어, 핑키." 나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지평선을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듣기에도 목소리에 울음기가 스며 있었다. 이제 문댄서가 탄 기차는 멀어져 보이지 않았고, 보이지 않는 기차가 상처를 헤집었다. 떨리는 몸을 바싹 웅크렸다. 입 밖으로 날카로운 숨소리가 빠져나갔다. 나는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었다. 어느 한 근육 조직만 움직여도 온몸이 산산이 부서져 깨질 것이었다. 그 누구도 보고 싶지 않았고,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도 알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핑키가 나까지 본인 계산에 넣었다는 것인데...... 사실 아예 생각이 없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나, 나는 그렇게 느꼈다. 핑키가 내 뒤의 벤치에 앉으며 쟁반을 옆에 내려두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잘 모르고 하는 말일 수 있는데..." 핑키는 유독 굉장히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은 친구가 좀 있어야 하는 것 같아."

 

"음......" 뺨을 타고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나는 급히 숨을 붙잡았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피식 웃었다. 고마워서, 목소리에 쇳소리가 섞였다. "마, 맞아. 그, 그런 거 같아..." 울음이 다시 숨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핑키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당장 떠들어대는 데만 쏟을 정신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혹시 직장인이 평생 못 보는 영화가 뭔지 알앙?"*54

 

"아니." 나는 코를 훌쩍이며 한쪽 발굽으로 갈기를 쓸어넘겼다. "무슨 영환데?"

 

"부귀영화!"

 

"스으으읍하하하하하하!" 몸 밖으로 밀려나오는 숨이 날카롭게 가슴을 쿡쿡 찔러 아팠지만, 입가에는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 "그건 좀 심했다."

 

"동감이양. 길을 건너려고 한 철학자가 하나 있었는데 혹시 알앙?"

 

"으음, 아니. 왜 할 일 없이 길을 건너려고만 했대?"

 

"자기가 왜 길을 건너려는지 탐구하기 위해서지!"

 

"히히히히... 아 졸라 끔찍하다."

 

"끔찍하긴 해, 그징?"

 

"아무렴..." 나는 핑키에게 몸을 기댔다. 그녀의 실존과, 온기에 기분이 좋았다. "다, 다른 건 없어?"

 

"당근 있지! 올라갈 땐 하얀데 내려올 땐 노랗고 하얀 게 뭘까?" *55

 

"몰라. 뭐야?"

 

"나도 몰라. 근데 놓치면 냄새 꽤나 날걸!"

 

"히히히히!"

 

"하 하 하 하. 아직 농담은 어어어엄청 많이 있다궁. 우우! 그렇지! 이거 진짜 꿀잼이양. 그러니까 록 캠프에서 있던 일인데..."

 


 

"그렇게 돼서 옥타비아를 비롯해 다른 연주자들까지 내가 노래부르고 춤추는 데 장단 맞추도록 만든 거지롱!" 핑키 파이가 자랑스럽게 외쳤다. 시간이 더 흐른 어느 날 오후, 포니빌 중앙광장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그날 대연회장 플로어는 그냥 내 독주 무대였대니까! 엿차! 어기엿차! 으쌰! 히히! 플러터샤이가 왕궁 정원에 사는 동물들을 죄다 연회장 안으로 몰아넣고 개판을 만든 게 안타까울 따름이양. 보자, 그러고 보니까 광견병 주사 아픈가? 대연회 끝나고 온 날부터 트와일라잇이 자꾸 일장연설을 늘어놓고 있어서 말이징..."

 

"나의 벗 핑키, 그대가 그걸 정녕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면야..." 제코라가 움찔하더니 몇 걸음 떨어지며 말했다. "당장 레드하트 선생과 얘기를 해보는 게 좋을 듯하네."

 

"왱? 레드하트도 주사 맞아야 되낭? 베리 펀치 얘기도 해줘야겠다. 걘 허구한 날 한 대 맞는다는 얘기밖에 안 하니까.*56 아, 그러고 보니 생각났어. 제코라한테 물어 볼 게 있었거등. 얼룩말이 사막지대에서 사는 건 알겠는데, 왜 말할 때 라임 맞춰서 말하는 거양? 그러면 더 목마르지 않아?"

 

핑키의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핑키가 눈을 깜박이더니 말했다. "어라라. 어깨가 나한테 말을 하넹." 그리고는 몸을 돌려 휘둥그레 뜬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오! 음, 안뇽!" 그녀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우으으음...... '치즈 얘길 했다간 아주 아주 아주 안 좋은 일이 생길 거야' 라는데, 맞앙?"

 

"그렇지. 딱 내가 찾던 사람이네." 나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핑키가 한쪽 눈썹을 치켰다. "내가?"

 

"핑키가?" 제코라가 말했다. 나는 제코라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녀는 다급히 불쑥 내뱉었다. "일들 보시게!" 그녀는 발굽을 휙휙 흔들어 인사하더니, 잽싸게 빠져나갔다.

 

"흠흠." 나는 핑키에게 돌아섰다. "중요한 일이야.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을뿐더러 케이크 설탕장식까지 신경 써야 하는 일이지."

 

"오! 글쎄... 음..." 핑키는 지금껏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어 본 일이 거의 없음을 깨닫고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다른 건 몰라도 하나는 확실히 할 수 있을 것 같은뎅!"

 

"둘 다 할 수 있을 거야. 장담하지." 나는 핑키를 끌고 슈가큐브코너 방향으로 향했다. "자, 어서 가자구!"

 

"그래—앵! 근데 근데 근데 근데..." 핑키는 영 켕기는 듯한 기색으로 나를 따라오며 말했다. "무슨 상황인뎅? 뭘 하는 건뎅? 근데 누구?"

 

"만나서 반가워! 이 정도면 충분하지?"

 

"어어... 오키 도키 로키!" 핑키는 그대로 함박웃음을 지으며 내 서두르는 걸음을 따라 급히 달렸다. "잠깐! 나 데리구 가!"

 


 

"지금부터 우리가 구울 마블 케이크*57의 향기와 식감, 거기 입힐 프로스팅의 맛에 따라 내 안에 갇힌 작은 새가 풀려나거나 말거나 할 거야. 어떻게 생각해?"

 

"어어... 어, 그렇겠지! 근데... 음..." 품에 재료를 왕창 들고 있던 핑키 파이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나는 반대쪽에서 필요한 재료를 찾아 핑키의 품에 던져 올리고 있었다. "으어! 근데... 그거..."

 

"뭐야. 마레 안젤루Marea Angelou*58도 안 읽어 봤어?"

 

"아! 그분! 칫! 누군 안 읽어 본 줄" 핑키가 불안불안하게 기대서더니 말했다. "잠깐. 방금 지어낸 이름 아냐?"

 

"지어낸 거면 등 두드리면서 칭찬이라도 해주려고?"

 

"그러고 싶긴 한데 재료를 너무 많이 들고 있어서 못 하겠네."

 

"뭐, 그럼 어쩔 수 없지!" 나는 조리대 위에 커다란 팬 하나를 쿵 내려놓았다. "이제부터 우리는 정말 굉장한 케이크를 하나 구울 거거든!" 나는 미친년처럼 핑키를 보고 씩 웃었다. 세상은 문득 생기발랄했고, 나는 미친 듯 돌아가는 자전거 바퀴의 중심축이었다. "넌 어떡할래? 본심을 숨기지 마! 난방절 모쏠처럼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얘기해! 이 슬픈 세상조차 스프링클과 젤리 맛에 정신 팔려 죽음이 중지될 정도로 스프링클이랑 젤리를 있는 대로 다 때려붓자구!"

 

"음, 저기, 재밌겠는데! 음... 재밌을 거 같긴 한데."

 

"생각하지 마. 그냥 즐겨. 휴! 셀레스티아 맙소사. 인생은 좋은 거지, 수지 맞는 장사잖아. 안 그래?"

 

"나는 생각 같은 거 안 한다고 생각하는뎅!" 핑키가 품에 안은 식자재 무게로 헉헉대며 나를 쳐다보고 말했다. "그냥 빵 굽는 거잖아. 까먹진 않았지?"

 

"빵 굽는 건 곧 사는 거고, 사는 것은 울기 위함이고, 우는 것은 다시 웃기 위함이며 웃는 것은 다시 춤추기 위한 것이니 결국은 다시 빵을 굽기 위함이지. 내가 감히 말하는데, 이런 미친 문장은 사람 머리 박살내려고 있는 것이고."

 

"아하. 그르네! 난 안 그럴겡!"

 

"그래야지! 그럼 그 빌어먹을 베이킹 소다 좀 이쪽으로 주겠어?"

 

"당근! 근데... 하나만 물어보자..." 핑키가 나를 곁눈질하며 물었다. "왜 그렇게 기분이 좋은 거양?"

 

"하하!" 나는 깔깔 웃으며 이퀘스트리아 역사상 가장 커다란 케이크로 기록될 빵을 굽는 작업에 착수했다. 불타는 지옥을 오븐으로 쓸 기세였다. "뭐 누구라도 물어 볼 법 하다만!" 나는 핑키에게 윙크해 보이며 말했다. "바닷물 차올랐다 빠지는 거랑 똑같아. 간조와 만조 같은 거라고."

 

"내 머리로는 이해가 잘 안 되는뎅."

 

"누구라도 항상 활기차게 살 수는 없단 거야." 나는 말했다. "몇몇은 약간의 잡음이 있기도 하지. 특수한 상황이란 게 있으니까. 사람 영혼의 전형이 되는 게 무슨 뜻인지, 그걸 통해서야 알게 돼. 더없이 행복한 꿈의 골격 구조도 말이야. 지금까지는 내가 널 이해하려고 했지. 근데 막상 보니까, 너처럼 살 수는 없겠더라고. 나는 결국 나로서 살 수밖에 없는 거니까. 다행스러운 일이지. 이제 그게 명확히 보이거든. 그래서 그래. 하나 물어보자. 혹시 앨러배스터 코멧후프란 사람 들어 봤어?"

 

"누구?"

 

"좋아, 거기까지." 나는 흰 통을 쿵 하고 내려놓았다. "밀가루 때려부어! 하하하. 흠흠. 오늘은 아주 기분이 좋아. 최근에 책을 엄청나게 읽어댔거든. 그냥 읽은 것만 있는 게 아냐. 괜찮은 것도 많이 건졌어."

 

"오 그랭? 어떤 걸...?"

 

"달랑 열 개밖에 없다는 거."

 

"뭐가?"

 

"비곡이." 나는 핑키가 세팅해 준 제빵도구를 마구 뒤적거리며 따뜻한 숨을 내뿜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내게는 귀향이나 마찬가지야. 집으로 가는, 아름다운 길."

 

"무슨 말인지 모르겠엉. 집에 가는 길이 필요한 거면 직접 내면서 가도 되잖앙?"

 

"어느 정도 격을 맞춰 줘야 가능한 것들도 있거든." 나는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어 보였다. "춤 한 곡 땡길래?"

 


 

"후아! 후아! 그으렇지... 조심!" 핑키 파이가 움찔하며 소리쳤다. 나는 염동력으로 거대한 케이크를 띄워 포니빌 시내로 가져가고 있었고, 핑키는 내 앞에서 좌우로 춤추며 선도하고 있었다.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케이크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조심조심! 이런! 이런, 떨어뜨릴 줄 알았는데!"

 

"아니, 네 시간 동안이나 바닐라와 민트를 결합한 인생작품을 같이 만들어 놓고서 그런 말을...?" 나는 천천히 걸으며 피식 웃었다. 선두에 선 핑키와 후미에 선 나 사이로 떠가는 케이크는 영 불안정해 보였다. "세상에, 이렇게나 오래 기억해 주다니 놀랐어!"

 

"이걸 떨어뜨려서 도로아미타불 만들어 버리면 평생 기억에 남을걸!" 핑키가 좌우로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케이크의 흔들림을 잡아내는 데 아주 열심이었다. "이거 굽느라 사장님한테 삼십 비트나 치렀단 말양! 떨어뜨리면 안 돼!"

 

"도로아미타불을 만들긴 뭘? 재밌으니 된 거 아냐?" 나는 지평선을 가리켰다. "계속 가자구!"

 

"왁!" 핑키가 위험 요소를 포착한 듯 전방으로 몸을 휙 날렸다. 아무것도 없었다.

 

"하하하하!" 케이크를 띄워둔 염동력은 무사히 잘 작동하고 있었다. "너 좀 과하게 예민해."

 

"네가 너무 안일한 거거든!" 핑키가 얼굴을 홱 찌푸리며 말했다. "대체 뭐야 그게?! 케이크는 중대 사안이야! 거짓말 같징?"

 

"그런 거 아냐. 얼마 안 갈 거라 그렇게 신주단지 모시듯 안 해도 되는 것뿐이지. 얼마 안 간다고 그랬지만, 벌써 도착했어!"

 

"읭?" 핑키 파이는 우리가 도착한 아파트 건물 출입문을 흘끗흘끗 쳐다보다 말했다. "케이크 배달하기로 한 데가 여기양?"

 

"엉. 뭐 문제라도?"

 

"음, 아니, 그런 건 아닌뎅. 달달한 거는 이미 충분히 구할 수 있지 않느냐 이거징. 슈가큐브코너처럼 아담하면서도 트렌디하고, 친절한 제과점이 경쟁업체니까..."

 

"뭐, 그럼 수교하러 간다고 생각하라고. 자, 받아." 나는 케이크를 핑키의 등 위에 얹었다.

 

"우웁!" 케이크가 얼마나 무거웠는지, 등에 진 케이크 균형을 맞추는 것만 해도 핑키의 다리가 와들와들 떨렸다. 핑키는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그러니까 날더러 이걸 갖다 주라는 거양?"

 

"그거지." 나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선물이라고만 해두라고. 누가 보냈는지 물으면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고 해."

 

"익명씨가 되겠다궁?" 핑키 파이가 땀을 줄줄 흘리며 말했다. "윌리엄 플랭스피어*59 희곡에 나오는 것처럼 하라는 거양?"

 

"하하하... 아냐, 그 정도까진 아니고. 자, 내가 초인종 누를게." 초인종을 치고 나자, 한 가지 깜빡한 것이 떠올랐다. "앗! 아 젠장. 까먹고 있었네!"

 

"뭘? 뭘?" 핑키도 덩달아 당황했다. 허리가 케이크 무게에 짓눌려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후드 재킷 주머니에서 자그마한 벨벳 주머니를 꺼내, 케이크 쟁반 끄트머리에 금사를 걸어 매달았다. "좋아. 이제 됐어."

 

"역시 선물은 내 돈 주고 사긴 애매한데 갖고 싶은 게 최고라니까."

 

"조용." 문간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소리를 죽여 말했다. "오! 왔다왔다! 행복하고 귀여운 사람을 연기하라구!"

 

"잠깐! 그거—으으으할 순 있는데!"

 

"당연하지." 나는 빽빽하게 자라 도열한 수풀 뒤로 뛰어가 몸을 숨겼다. 한낮 햇살 사이로, 아파트 문이 열리며 크림색 몸을 한 어스 포니가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핑키 파이?"

 

"오... 안뇽 봉봉!" 핑키가 쌕쌕대며 말했다. "오후의 깜짝 케이크 선물 노래를 불러주고 싶지만, 그게... 으으으으으... 보이지..."

 

"세상에, 이게 뭐람!" 봉봉이 다가가 어깨를 끼워 핑키가 짊어진 무게를 나눠 들었다. "자, 여기 내려놓고 얘기해."

 

"안에 두자..."

 

"응?"

 

"집 안에 두자고."

 

"이 큰 걸 날 주려고 가져왔다고?" 봉봉은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듯 웃으며 말했다. "세상에... 집 한쪽 구석에 갖다 놔야겠다 이건. 오븐 근처에 잘못 놨다간 다 녹아 버리겠어."

 

"나한테 고마워할 건 없엉! 갖다 주라고 한 사람이 있으니까!"

 

"그래? 누가 이...걸 다 보내주셨대?"

 

"음..." 핑키가 봉봉과 함께 케이크를 집안에 갖다두고 말했다. "휴. 익명씨가 보냈어."

 

봉봉이 한쪽 눈썹을 치키며 말했다. "익명씨라니?"

 

"그래. 소름 돋지 않아? 이건 뭐 눈팅족들 한 무더기를 갖다 놓은 것도 아니고."

 

"세상에... 그 익명씨란 사람이 내가 뭘 했길래 큼직한 케이크를 다 갖다주라고 한 걸까?"

 

"모르징. 근데 주머니를 하나 달아주더라고."

 

"주머니?" 봉봉이 방향을 틀어 케이크 쟁반에 매달아 두었던 벨벳 주머니를 찾았다. "어머나! 이런 이런... 재밌는 사람이네!"

 

"그 주머니 뭔지 알아?"

 

"그렇다고 봐야겠지. 스탈리온그라드*60 전통이거든. 거기서는 선물을 줄 때 이런 조그마한 벨벳 주머니에 담아 주는 게 일반적이었어."

 

"이야. 봉봉 네가 스탈리온그라드 출신인 줄은 몰랐는데."

 

"음, 뭐 그랬겠지." 봉봉이 발굽을 뻗어 벨벳 주머니를 들고 금사를 풀었다. "별로 얘기하고 다닌 것도 아니고, 포니빌로 이사 와선 이쪽 억양으로 바꾸느라 한 몇 년... 걸렸으니까..." 그녀의 입가를 떠난  숨결에 실려 목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핑키 파이가 봉봉이 든 주머니를 뜯어보며 말했다. "왜 그랭. 뭐 이상한 거라도 들어있엉?"

 

"그런 건 아니고. 이건..." 봉봉이 한쪽 발굽으로 입을 가렸다. 주머니에는 반짝이는 구슬 몇 개가 들어 있었다. "스트릿 마블이야. 어릴 때 우리 또래 친구들은 다들 이걸 갖고 놀았지. 스탈리온그라드의 벽마다 맺히는 결정을 갈아 만든 건데... 또..." 봉봉이 훌쩍이는 소리와 함께 울음을 삼켰다. "아, 공주님 맙소사! 냄새가 나..."

 

"무슨 냄새?"

 

봉봉의 얼굴이 괴로움과 즐거움이 뒤섞인 울음으로 굳어졌다. "고향, 고향 냄새." 그녀는 훌쩍이며 입술을 깨물면서도, 찬란한 미소를 지었다. "아, 핑키... 우리 가족이 함께 부르던 고향 노래를 들은 게 대체 언제인지..."

 

"그래? 스탈리온그라드에 대해서 그리 좋은 얘기는 못 들어봤거든. 행복한 삶하고는 거리가 있다던데."

 

"행복은 있지..." 봉봉의 뺨을 타고 눈물방울이 굴러 떨어졌다. "아무것도 없이도 행복할 수 있어. 도저히 행복할 수 없을 것만 같은 황무지에서도, 비틀어 짜면 행복한 게 나오기 마련이고. 행복하다는 건 그 자체로 가슴에 온기를 품고 사는 거야. 그렇게 흘려보낸... 시간을 전부 뒤로 한 나 같은 사람도..." 봉봉은 웃음으로 울고 있었다. 핑키 파이도 축축해진 눈으로 밝게 웃고 있었다. "부탁해. 누가... 그 온갖 수고를 감당해 가면서까지 나한테 이걸 보내줬는지... 알아야겠어."

 

"어어..." 핑키 파이가 꾸물대며 말했다. "나도 알려주고 싶은데, 그게"

 

"아냐. 괜찮아." 봉봉이 목 메인 소리로 대답하며 빙긋이 웃었다. "이해해. 멋진 선물이었어. 정말 멋진 선물. 알았던 것 같아. 내게 정말 뭐가 필요한지 정확히 알았던 것 같아..." 봉봉이 파르르 떨더니 핑키를 와락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래도 누굴 좀 안기는 해야 할 것 같아!"

 

"으에엑!" 갑자기 안긴 핑키 파이가 소리쳤다. 그러면서도 깔깔깔 웃으며 봉봉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히히히. 익명씨가 봉봉을 행복하게 해 줘서 봉봉이 행복하다니 나도 넘나 행복한 거 있지!"

 

"세상이 포기될 수 없듯이, 우리 각자도 포기될 수 없는 사람인 거야." 봉봉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혀가 살짝 꼬이면서 순간 이국의 억양이 묻어나왔다. 그녀는 헛기침을 해 목을 닦고, 등을 뒤로 하며 핑키에게 말했다. "이 사실만은 잊지 말아 줘. 나도 기억할 테니." 그녀는 미소지으며 젖은 뺨을 문질러 닦았다. "이 케이크도 정말 마음에 들 것 같아. 그러니 네가 아무 관련 없다고는 하지 말아 줘. 핑키, 고마워. 진실로."

 

"저기... 음..." 핑키 파이는 뒤돌아 나오며 봉봉에게 발굽을 흔들었다. "당연하지! 그럼... 맛있게 하고 열심히 먹, 어그게 말이지..."

 

"하하... 무슨 말인지 알겠어." 봉봉이 빙긋 미소지었다. 그녀는 얼굴에 벨벳 주머니를 살짝 문질러 보더니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핑키 네 생각보다, 사람들은 널 많이 이해하고 있어. 고마워하기도 하고."

 

문이 천천히 닫혔고, 핑키 파이는 무표정으로 다만 서 있었다. "흠..." 그녀는 몸을 돌려 길가로 나오며 중얼거렸다. "사람은 타인을 이해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거 되게 괜찮은 질문이네."

 

리라에서 흘러나온 몇 마디 멜로디가 들렸는지, 핑키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오, 아직 있었어?"

 

"아직 날 기억하고 있는 주제에, 겨우 그게 놀랍단 말이야?" 나는 눈을 찡긋하며 대답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엉!" 핑키가 내 쪽으로 다가와 봉봉의 집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왜 굳이 악명으로*61 보낸 거야?"

 

"익명이 맞겠지."

 

"그래도 알아들었네. 진지하게 하는 얘긴데?"

 

"핑키 네가? 진지하게 얘기한다구?"

 

"어이! 아무리 그래도 날 놀리는지 아닌지 정도는 구별할 수 있다니까!"

 

"하하하..." 나는 몇 마디를 더 퉁기며 차분한 미소를 지었다. "스스로를 폄하할 필요는 없어, 핑키. 학자의 이성과 철학자의 언변, 천사의 마음까지 가졌으면서 왜 그래."

 

"기차 화통 삶아먹은 목소리 주면 그거 전부 다 내다 버릴 용의 만빵임."

 

"뭐 그러든가." 나는 잠시 리라 연주를 멈추고 아파트 쪽을 가리켰다. "봉봉은 따뜻한 마음 그 자체를 갖고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자기 것을 베푼 사람이야. 친절의 대가가 있을 것 같지 않았는데도 말이지. 이방인에 대해서 잘은 몰랐지만, 봉봉이 해 준 것이 이방인에겐 전부나 다름없었지. 자기가 친절을 베풀고 있다는 자각조차 없이 친절을 베풀 수 있다니, 많이 놀랐어.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그건 그냥 맛보기 수준이었더라고."

 

"오호?"

 

"그럼 말해보자. 포니빌 그 어느 누구를 친절 그 자체인 사람이라 부를 수 있을까? 즐거운 마음과 넉넉한 마음씨를 모두 갖추되, 결코 겉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같이 있는 사람까지 즐겁게 해 주는 것으로 은연중에 그 모든 미덕을 내비치는 사람이 과연 누구라 생각해?"

 

"음..." 핑키 파이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순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냥 몸으로 때우면 안 될까?"

 

"하하하. 너야. 핑키 파이." 나는 말했다. "행복이란 개념의 화신이 아닐까 싶더라고. 그냥 존재하는 것만으로 행복하니까. 행복의 정령이 지상에 강림하는 날이 온다면, 그 그릇은 네가 될 것 같아. 발걸음부터, 온갖 말도 안 되는 말장난에 주의산만, 집중력장애까지 딱딱 들어맞지. 하하. 네 너다움이 너를... 음..."

 

"오오오오오.... 어. 지금 나 칭찬하는 거양?"

 

"그렇게 이해해주면 좋겠네."

 

"오! 쩐당. 음... 그럼 얼굴 빨갛게 해도 되나?"

 

나는 윙크했다. "편하실 대로."

 

핑키가 얼굴을 살짝 붉히고는 귀여운 웃음을 지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히히히. 흠흠. 다른 사람이 웃는 게 정말 좋아. 저기 봉봉처럼 말야. 봉봉에게는 기분 좋은 날이 될 것 같지? 나는 기분 좋은 한 주가 될 거양! 내 솜씨가 더 좋으면 좋을 텐데."

 

"내가 얼마나 기분 좋을지 넌 짐작도 못 할걸."

 

"뭐 때문에?"

 

"자기 솜씨를 더 갈고 닦겠다는 의사표현이 들어가서." 나는 말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알았으니, 이제 그걸 발전시키려고 하잖아. 너랑 난 그런 점에서 비슷하다고 봐. 제삼자가 보기에 완벽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계속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하니까. 이제야 인정하지만, 솔직히 네가 참 많이도 부러웠어."

 

"그럴 게 있던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현을 부드럽게 퉁기며 말했다. "세상 곳곳에 도사린 악의와 위험 따위 신경도 안 쓴다는 듯 그 순간에만 온 힘을 쏟아 살아가는 모습이 부러웠고, 우는 게 정상일 것 같은 상황에서도 방긋 웃으며 즐겁게 살아가는 모습이 부러웠어. 피곤할 법한데도 피곤한 줄 모르고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으니, 다들 널 만나던 날을 생각하면... 처음부터 넌 남에게 주려고만 했다는 걸 새삼 깨닫는 거지. 웃음이 나올 수밖에. 핑키 파이, 그게 네 모습일 거야. 지워지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웃음. 잠시 얼굴에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표정으로 그치는 게 아냐. 웃음이란 과거나 현재에 속박되지도, 없어지지도 않는 것이지. 내가 해내야 하는 일도 그것과 비슷해...... 그게 그냥 생각에 그치는 것으로 끝날 날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언제고 내가 짊어진 일과 대적해야 하는 날이 온다면 나도 행복하게, 웃으면서 받아들이려고."

 

핑키 파이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입가가 아주 살짝 굽어지며 희미한 미소를 띄웠다. "그쪽을 보고 있지만, 그쪽이 한 말을 전부 이해한 것 같진 않아. 그냥 씩 웃어주고만 싶은데, 그거면 충분할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하지. 열다섯 달을 매달려서 인생 최대 미스터리를 붙잡고 있다 보니 속에 응어리가 져도 크게 진 것 같단 말이야. 이제 좀 쉬면서 웃고 싶어."

 

"히히히. 음악하는  사람들도 그쪽 정도가 되면 구렁이 담 넘어가듯 얘기할 수 있나 봐?" 핑키는 유쾌하게 말하며 나를 뒤에 남겨두고 통통 튀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앞으로도 그런 사유를 할 수 있길 바라, 마담 민트. 언젠가 꽃을 던져주는 날이 오겠지."

 

핑키 파이는 그대로 핑크색 공처럼 포니빌 시가지를 향해 통통 튀어갔다. 나는 그 뒤를 빙긋 웃으며 쳐다보았고, 입에서는 하염없이 길고 축축한 숨을 내보냈다.

 

"그러지 못할 거야."

 


 

"느으으으읍!"

 

"흐으으으읍!"

 

"쓰으읍—하!" 애플잭이 그루터기를 향해 앞발굽을 홱 제꼈다.

 

"우아아아!" 레인보우 대쉬의 몸이 포니빌 공원의 잔디밭에 쓰러졌다. 청명한 오후의 한자락에, 새파란 바퀴벌레처럼 다리를 오므리고 쓰러진 레인보우의 신음이 울렸다. "염병! 또야!"

 

"발씨름은 잠깐 쉬다 하지?" 애플잭이 한숨지으며 몸을 뒤로 젖혔다. "발꿈치가 계속 근질근질하거든."

 

"어허, 어림없는 소리!" 레인보우 대쉬가 벌떡 일어나 그루터기 너머 애플잭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그렇게 쉽게 넘어갈 거 같냐!"

 

"그만 좀 하자, RD!" 애플잭이 신음했다. "그 염병할 대연횐지 뭔지 다 끝났다! 티켓 갖고 투닥거리던 거 굳이 계속할 필요가 없다고! 이제 그 짓거리는 인생의 흑역사에 잘 묻어두는 게 맞지 않겠냐?!"

 

"입 다물어! 끝장을 본다 내가." 레인보우가 실실 웃으며 그루터기 위에 다시 한 번 앞다리를 쿵 하고 올려놓았다. "1337판*62 669선승!"

 

"하아..." 애플잭이 레인보우 대쉬의 앞발굽을 잡았다. "좋을 대로 해라."

 

둘이 맞붙기 직전에 핑키 파이가 갑자기 나타났다. "안뇽! 너희 뭐행? 뻘짓하고 있엉?"

 

레인보우 대쉬가 툴툴대며 대답했다. "이 선머슴 녀석의 기고만장한 주근깨투성이 면상을 땅에 박아 버리려던 차—"

 

"어림도 없지 이것아." 애플잭이 핑키에게 피식 웃어 보였다. "그래 무슨 일이야, 친구?"

 

"생각을 좀 하고 있거든. 캐러셀 부티크 남쪽에 괜찮은 땅이 하나 있어서. 집 짓는 법 좀 가르쳐 줄 수 있엉?"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긴 하네. 근데 지금은 RD 녀석에게 참교육을 베풀고 있으니까 조금만 나중에—" 애플잭의 녹색 눈동자가 크게 열렸다. 그녀는 모자 챙을 정돈하면서 핑키 파이를 쳐다보고 물었다. "함 다시 말해 볼래?"

 

"집을 짓고 싶다고?" 레인보우 대쉬가 어색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옙퍼로니!"

 

"왜 갑자기?"

 

"그게..." 핑키 파이가 숨을 아주, 아주 깊이 들이마셨다. 그녀는 기관총처럼 줄줄 말을 쏟아냈다. "그게 말이지 나는 주변 사람들을 빵끗 웃게 해 주는 낙으로 하루하루 보람차게 보내는 와중 어느 날 엄빠가 잔뜩 화가 나서는 날더러 이제 애도 아니고 성인인데 철 좀 들라면서 한참 잇몸이 몸 닦아주고 있는 와중에 날 그대로 집에서 쫓아내 버린 관계로 포니빌까지 흘러들어와 사는 중이고 엄빠 말대로라면 내가 정신 안 차리면 아무것도 하는 거 없이 엎어져서 하루하루 시간이나 죽이면서 헛소리나 하는 룸펜 신세가 되어야 할 텐데 그러지 않으니 참 이상한 일 아니닝!"

 

애플잭이 물고 있던 건초 줄기가 툭 떨어졌다. 레인보우 대쉬도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벼운 산들바람이 갈기를 스치고 지나간 다음에야, 저 셋은 뭔가 잘못됐다 싶은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어... 뭐지...?" 애플잭이 고개를 갸웃했다.

 

"음악소리 끊긴 거 같은데." 레인보우 대쉬가 말했다.

 

셋이 동시에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무 옆에 떨어뜨린 리라를 더듬어 찾아 집어들었다. "크흠. 음... 실례. 아하하... 하시던 거 계속 하세요." 나는 다시 배경음 역할을 시작했다. 가볍게 뜯고 퉁기는 현에서 부드러운 곡조가 흘렀다.

 

애플잭은 레인보우 대쉬의 발굽을 붙잡은 채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어디까지 했더라......" 애플잭이 핑키 파이를 보며 불안불안한 웃음을 지었다. "장족의 발전인 것 같기는 해. 네 판단이 합리적인지 어떤지 내가 판단할 수는 없다만, 집 짓는 데 나도 끼워 주면 고맙겠어. 네가 정말 원하는 거기만 하다면야."

 

"정말 원하는 거라, 피스타치오랑 블루베리가 땡기는데." 핑키 파이가 일출을 바라보며 입술을 핥았다. "흐음."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헛기침을 하고 덧붙였다. "통나무집도. 내 집도 갖고 싶어. 이제 나도 혼자 살 때가 된 것 같아서."

 

"오호, 그렇다 이거지! 설계는 언제부터 하려고?"

 

"AJ 네가 발굽 좀 빌려 주겠다면야 언제든 하지!"

 

"나야 뭐 언제든 환영이지! 잠깐만 있어 봐!" 애플잭이 잠시 힘을 주더니, 그루터기에 힘차게 발굽을 내리찍었다.

 

"우와아앗!" 레인보우 대쉬가 풀밭에 나뒹굴었다.

 

"좋아, 준비됐어!" 애플잭이 끙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이-햐! 공구 가지러 가자구!"

 

"오키 도키 로키!" 핑키 파이가 폴짝폴짝 뛰며 앞장서자 애플잭이 빙긋 웃으며 뒤를 따랐다.

 

"야! 불공평하잖아!" 레인보우 대쉬가 툴툴대며 떠나는 둘에게 급히 달려갔다. "내가 널 그냥 보내줄 줄 아냐, AJ! 1339판 670선승으로 다시 붙어!"

 

"아오 질려. 그만 좀 해라, 안 질리나?!"

 

"그만은 지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해!"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리라를 길게 퉁겼다. 핑키 파이가 통통 뛰어가는 모습에, 나는 즐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참 일상적으로 비일상적이란 말야."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뻗은 발굽이 리라를 지나 가방 속으로 들어가 갈색 표지의 고서를 꺼내들었다. 나무둥치에 편안히 기대앉고 책을 펼치자 포근한 그늘 속에 마력으로 빛나는 글자가 반짝거렸다. "그럼 코멧후프 선생, 어디 그쪽이 무슨 헛소리를 적어 놨는지 한번 봅시다......"





 

그러고 보니 피스타치오랑 블루베리가 막 땡기는데.

 

알러지는 엿이나 먹으라지.

 

 


 

 

이번 챕터는 팬아트가 없습니다.

 

대화가 많은데 챕터 9보다 힘듭니다. 핑키 파이는 이래서 까다로워요. 하지만 배트맨 씨리즈에는 리들러라는 더한 빌런이 나오죠. 리들러 수수께끼 원문이랑 번역문을 비교해 보십시오. 리들러는 아예 창작을 해야 합니다. 그런 거 필요없이 세상이 불타기만 하면 되는 조커가 역시 제일입니다. 당신은 나쁜 사람이에요 SS&E. 내게 번역하기 거지같은 말장난을 가득 떠넘겼잖아요.

 

 

각주

 

*1 ~ is the new black. 이라는 스노우클론이 있습니다. 이른바 관용어구의 변형, 복제, 변주를 말하는 것이죠. 이를테면 홍철 없는 홍철팀 같은 느낌인데, 하스-스톤이라는 유사 게임을 해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희귀 카드라고 하지만 전혀 희귀하지 않은 카드만 팩에서 막 나오잖아요? 홍철 없는 홍철팀, 발에 채이다 못해 갈아서 없애야 하는 '희귀' 카드, 붕어 없는 붕어빵, 뭐 이런 식으로 쭉쭉 변주되어 재생산되면 눈덩이 굴리듯 수가 막 늘어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Snowclone입니다.

 

~is the new black, 이라는 말은 인종차별을 목적으로 한 말이 아니라, 요즘엔 이게 먹어준다 라는 뜻입니다. 옛날 패션업계에서 블랙을 최고로 치다가 유행이 변하고 바뀌고 돌면서 계속 먹어주는 색이 달라지니까, '야, 요즘은 레드가 먹어줘' 라고 말할 때 Red is the new black이라고 쓰는 것이죠. 근데 왜 피부가 black인 사람들은 사람 취급을 안 한 걸까요. 그 거지같은 역사 때문에 피해망상에 찌든 폭도들이 약탈쑈를 벌이고 있잖아요. 뭐가 어쨌든, 미드 Orange is the new black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감방에 들어간 뉴요커가 오렌지색 죄수복만 입고 살아야 하는 상황을 비꼬는 것이죠. 최신 유행의 변화를 의미하는 ~is the new black이란 표현에 죄수복을 의미하는 Orange가 붙으면 어떻게 될까요. 유행에 민감한 뉴요커의 성향을 대입해 생각해 보면, 감방에서의 생존이 자기 최고 관심사가 되었다는 의미가 되지 않습니까? 이걸 또 변주해서 Green is the new black이라는 캠페인도 하고 있습니다. 친환경 캠페인이죠.

 

이를 바탕으로 Green is the new pink를 해석해 봅시다. Green은 라이라입니다. Pink는 핑키 파이지요. 대충 라이라도 핑키 파이와 동류가 되었다는 식으로 해석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같이 어울려 다니면 자연히 물들게 된다는 사자성어, 여러분도 이미 알고 계실 것 같습니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죠. 이 앞에 4글자가 더 붙습니다. 붉은 안료를 가까이 하는 자는 붉어지고, 먹을 가까이 하는 자는 검게 된다는 성어인 근주자적近朱者赤 근묵자흑近墨者黑이 기원이거든요. 라이라를 뜻하는 녹색을 붙여 근주녹갈, 이라고 옮길까 했지만 그건 너무 나갔죠. 빨강 + 초록 = 갈색 아니겠습니까. 원래 제목과도 차이가 엄청나게 나니, 녹색을 포기하더라도 라이라의 핑키化를 뜻하는 근주자적으로 옮기는 편이 더 나았다는 것입니다. 朱는 붉은색을 나타내는 의미보다는 안료인 주사를 나타내는 의미가 더 강하고, 분홍색과 통하는 느낌이 없어서 朱 대신 紅을 사용했습니다.

 

*2 원문은 "Hey, you didn't lose an ear, did you? I hear some ponies like to carry ears around. Ears of corn, that is." ear는 귀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곡식의 이삭, 옥수수 알갱이 같은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핑키는 여기서 귀와 옥수수 알을 가지고 말장난을 하고 있습니다. 빌어먹을...

 

*3 "Turned him into scareflies?" 를 옮긴 것. 허수아비를 뜻하는 Scarecrow를 Scare + crow로 쪼개서 까마귀 쫓는 구조물로 의미를 축소시키고, 허수아비를 여러 조각으로 나눠서 버렸으니 까마귀 대신 파리 쫓는 구조물이 되었다는 의미에서 Scarefly로 만든 것. 염병할 말장난...

 

*4 Gato. 어원은 라틴어 Cattus. 갈리사어, 포르투갈어, 스페인어 남성명사로 고양이나 돈을 의미. 같은 로망스어군인 이탈리아어에서는 Gatto라고 씁니다. 형용사로는 녹안이나 벽안을 뜻한다고 사전이 그러는데, 라이라는 금안이니 해당사항 없을 듯.

 

*5 Maredrid.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Madrid의 변형.

 

*6 Trontrot. 캐나다 온타리오 주의 주도 토론토Tronto의 변형.

 

*7 다이키리. 럼주에 과일주스나 설탕을 섞은 칵테일. 어니스트 헤밍웨이 작가가 즐겨 마신 칵테일 중 하나.

 

*8 Angel Cake. 달걀 흰자로 만드는 스펀지케이크.

 

*9 원문 Sultry wink. 대체 왜 남 때려 준 얘기에 관능적인 윙크를 날리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렇습니다.

 

*10 원문 Lunar Inquisition.

 

*11 선더레인은 모호크 헤어스타일을 한 것으로 묘사됨.

 

*12 Thunderlane은 Thunder + Lane인데, 대충 해석해 보면 번개가 치면서 땅에 꽂히는 번개기둥 같은 느낌이죠. 치미창가는 토르티아에 재료를 집어넣고 튀겨낸 음식입니다. 보통 밥이나 치즈, 콩 같은 걸 때려넣죠. 지방을 풍부하게 함유한 치즈를 또 튀겨서 배 터지도록 먹으면 화장실 가기가 두려워질 것입니다. 제 지인은 '새끼 필로미나를 낳는 고통' 이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왜 Thunderlane 드립을 치는지 아시겠죠.

 

*13 다들 알고 계실 Rainbow Factory 드립.

 

*14 특정 상황에서 특정 부위에 피가 몰린다는 표현입니다. SS&E 이 인간은 EoP에서도 번역하기 빡세라고 이런 드립 날리더니 여기서도......

 

*15 Dead sea serpent를 가지고 한 말장난. 사해 출신 바다뱀, 즉 [Dead sea] [Serpent]도 되지만 [Dead] [Sea serpent]가 되어 죽은 바다뱀도 되는 것. 빌어먹을 말장난. 내 잠수가 내 번역보다 가취있기를.

 

*16 Neightzsche. 프로이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를 비튼 것. SS&E는 유독 니체 철학에 집착하는 면이 있습니다. 이 양반 글에서 철학자 이름이 나온다고 치면 니체는 반드시 들어가다시피합니다. 그리고 니체에게 영향을 받은 자로 가장 유명한 작자가 아돌프 히틀러입니다. 정확히는 니체 여동생이 뻘짓해서 그런 거긴 하지만.

 

*17 사람 속이 깊어 보인다(deep)고 운을 띄웠더니 deep dish pie로 받은 것.

 

*18 Hang glider를 이용한 말장난. 행글라이더에서 글라이더를 빼먹었는데 행거Hanger도 깜빡했다고 하자 교수형 집행인Hanger도 깜빡한 거냐면서 혹시 교수대 찾냐고 디스 때리는 것.

 

*19 Pac man의 귀신 캐릭터들.

 

*20 Tori Haymos. 실존 인물인 토리 헤이든Torey Hayden을 비튼 것. 특수교육교사 겸 교육심리학자로, 아동교육심리학의 고전으로 불리는 '한 아이'를 비롯해 논픽션과 소설을 여럿 집필한 저술가이기도 함.

 

*21 Spyra. 셀레스티아 공주의 밀명을 받아 트와일라잇 스파클을 밀착 감시하던 왕실 정보원 라이라 하트스트링스가 변절 요원Rogue Agent인 골든 하베스트Golden Harvest를 추적하는 명령을 받았다... 로 시작하는 모험물.

 

*22 Guyra. 라이라의 성반전 버전(Rule63)

 

*23 이퀘스트리아 데일리의 Sethisto.

 

*24 팬픽션 Running of Lyra

 

*25 Entropa. SS&E의 처녀작 겸 장편소설(현재 연중) The End of Ponies의 설정 겸 등장인물. EoP 세계관의 창세신화(겸 EoP 세계관 내의 역사적 사실)에 따르면, 부부 신 콘수스Consus와 에포나Epona 사이에서 태어난 다섯 자매 중 장녀로 시간을 비롯한 세상의 이치를 관장하며 시간의 여신으로 불림. 자세한 설정은 EoP를 읽어보시면 됩니다. 근데 백그라운드 포니보다 더 길어요.

 

*26 Pu pu platter. 중국 음식이나 하와이 음식으로 구성한 요리. 육류나 해산물로 구성한 전채요리를 사용하며, 미국 중식당에서 제공되는 푸 푸 플래터는 계란말이, 돼지갈비, 닭날개, 치킨텐더, 훈툰 등을 담은 것. Pu pu는 하와이어로 전채요리를 의미.

 

*27 게임 개발자 피터 몰리뉴Peter Molyneux의 이름을 비튼 것.

 

*28 각각 코미디 영화 스탠 앤 올리Stan and Ollie, 코미디 그룹 마틴 앤 루이스Martin and Lewis, 애벗 앤 코스텔로Abbott and Costello를 비튼 것.

 

*29 Harpflank and Sweets. 라이라와 스위티 드롭스를 주인공으로 한 팬픽션 시리즈.

 

*30 빅뱅이론

 

*31 라이라가 쓴 말은 strip. 내가 가진 걸 전부 뜯어갔다는 의미에 가깝게 사용되었으나 핑키는 스트립쑈의 그 스트립으로 또 말장난을 친 것. 이쯤되면 라이라가 '당신은 못된 사람이에요.' 하고 칼 들어도 됩니다.

 

*32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을 부정하며 했던 말. 예측가능한 세계를 가정한 고전역학의 시대를 살았음을 보여주는 발언. 아인슈타인은 관찰 대상이 관찰자의 결정에 의해 존재하는 세계인 양자역학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훗날 스티븐 호킹 박사는 '신은 주사위를 던지며, 가끔 인간을 엿먹이기 위해 안 보이는 곳으로 주사위를 던지기도 한다.'고 말했지요. 과학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과도기에서 구 패러다임을 옹호한 사람들이 인류 역사상 최고의 천재들이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지만 매력적입니다.

 

*33 라이라를 다룬 팬픽션 중 가장 유명한 Anthropology. 가끔 녹색창 가서 기웃거려 보니까 번역이 있더라고요. Ad hoc 선생께서 번역 및 검수하셨습니다.

 

*34 MLP FIM 팬덤이 한창 흥하던 시절 Ask Surprise 라는 Ask 텀블러가 운영된 적 있습니다. 근데 이 캐릭터가... 탈색, 염색한 페가수스 핑키에요.

www.equestriadaily.com/2012/02/tumblr-spotlight-ask-surprise.html

 

Tumblr Spotlight: Ask Surprise

My Little Pony: Friendship is Magic News, Brony and bronies, my little pony merchandise, pony art, pony music, pony media

www.equestriadaily.com

*35 플러터샤이와 핑키 파이의 성우는 Andrea Libman으로 같습니다. 성우 개그.

 

*36 Cosmic Matriarch은 절대적 여군주로 옮겼던 표현입니다. 지금 와서 보니 너무 구려요. 위대한 어머니로 번역어를 바꿉니다.

 

*37 이 부분은 스토아학파의 우주론을 연상시킵니다. 철인哲人 황제로 불리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전쟁터에서 남긴 <명상록>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전략) 우주 만물은 줄곧 신의 섭리에 따라 움직이다. 우연히 발생하는 일도 자연의 원리에 따라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며, 모든 것은 신의 섭리에 의해 다스려지며 모두 이 섭리와 관련이 있다. 만물은 그 섭리에서 흘러나오고 우주 전체의 이익도 신의 섭리에 의한 것이다. 당신도 이 우주의 일부분이다. 그밖에 모든 것도 자연의 일부분이다. (후략)

 

아우렐리우스는 '신들이 하는 일들은 섭리로 가득 차 있다. 운명이 하는 일들도 자연과, 또는 섭리가 지배하는 복잡한 인과관계와 무관하지 않다. 만물은 섭리에서 흘러나온다. 그 밖에도 필연과, 너도 그 일부인 전(全) 우주에 유익한 것이 있다. 자연 전체가 가져다주는 것과 자연 전체를 보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자연의 모든 부분에서도 선하다.' 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SS&E 세계관에 흔히 등장하는 우주론과 다른 부분이 상당하지만(일례로 스토아학파는 신의 섭리를 정말 신의 섭리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스토아학파의 섭리에는 그 인격적 주재자인 창조주나 인격신이 상정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순리대로 따라야 한다는 등장인물의 언행은 '우주적 원리에 순응하는' 차원에서 결이 비슷한 것이죠. EoP의 만신전萬神殿은 우주법칙을 주재하는 인격신을 전제하고 있으며, 작중 인물들은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벗어나지 않습니다.

 

*38 Dianeightics. 올바른 표기는 Dianetics. 해로운 심상을 제거하기 위한 심리요법.

 

*39 실을 길게 늘인다는 뜻의 순우리말. 원문은 Eke. 핑키는 이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해 옛날에 살면서 찾아보겠다는 뜻으로 던진 것.

 

*40 핑키 파이의 부모는 하나같이 엄격하고 무뚝뚝한 이미지를 가지며, 영국의 청교도들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엄격, 근엄, 진지, 불통인 수도사 캐릭터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등장하는 호르헤 수사입니다. 작중에서 웃음이 죄악인지 아닌지, 이단심문관인 윌리엄 수사와 신학논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호르헤 수사는 엄격하고 교조주의적이다 못해 광신적인 인물상으로 그려지는데, '웃음을 죄악시'하는 점에서도 일치합니다. 굳이 종교적으로 가지 않더라도 보수적인 사회에서는 웃음 등 감정표현을 배척하는 경향이 있기도 하지만, 여기에 종교적 믿음이 부가되는 순간 이 경향은 더 강하게 표출됩니다. 문제는 이것조차 SS&E가 독자들을 낚기 위해 준비한 빌드업이었다는 것입니다.

 

*41 Background Pony Chapter 1 'Melodious', 마지막 문장.

 

*42 The End of Ponies의 내용. 주인공은 달 추락으로 엉망이 된 이퀘스트리아에 살아남은 최후의 포니로, 다른 포니 생존자를 찾기 위해 정기적으로 모조 무지개 발생장치를 이용해 무지개를 쏘아 올립니다. 시간 여행은 달 추락의 원인을 찾아내기 위해 과거와 멸망 이후 현재를 비교대조하고, 멸망의 원인을 찾아내 황폐화된 이퀘스트리아를 회복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재밌어 보이죠? 번역한 입장에서 말씀드리면 Background Pony보다 더 빡세고 어렵고 무자비합니다. 재밌긴 해요.

 

*43 Background Pony Chapter 6 'Heroes and Bards'

 

*44 Sarsaparilla. 주로 약용식물로 이용되는 사르사파릴라를 음료로 가공한 것. 대표적 가공품으로 루트비어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망개떡을 감싸는 잎사귀가 국내 서식하는 사르사파릴라의 일종인 청미래나무(망개나무)의 잎입니다.

 

*45 성적 농담

 

*46 Righteous Brothers, 'You've lost that lovin feelin', 1965

 

*47 Brony Stark. 두말할 것 없이 토니 스타크 변주.

 

*48 마블 엔터테인먼트는 2009년 12월 31일 디즈니에 인수됨

 

*49 It's not your fault. Good Will Hunting(1997)과 구도가 상당히 유사합니다. 대단히 멋진 영화니 꼭 보십시오.

 

*50 원문 Sweet Luna on a Bicycle. Jesus Christ on a bicycle이란 속어가 있어요. 예수님 이름을 그냥 한 번 불러보는 게 아니라 진짜 깜짝 놀랐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 지수스 크라이스트를 넣은 거라고 합니다. 그 부분이 여기서는 루나 공주가 된 거고요. 근데 이걸 한국어로 적당하게 옮길 만한 게 별로 없더라고요. 마음 같아선 으악 시발 깜짝이야 를 쓰고 싶긴 했는데.

 

*51 스파이크가 래리티를 보고 불끈했다... 뭐 그런 뜻입니다. 불 붙었대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 중 한 구절을 가져와 대충 땜질했습니다.

 

*52 Fudge. 설탕, 버터, 우유 등을 이용해 만드는 연한 사탕.

 

*53 움베르토 에코의 <푸코의 진자>에 등장하는 세 주인공 중 하나인 야코포 벨보의 말버릇인 '마개 뽑고 김 좀 빼시지'가 생각나는 대목. 엄밀한 의미로 따지고 들어가면 다른 의미이기는 합니다.

 

*54 Did you ever hear the one about the horse who walked into a bar? Bar가 술집인 바가 있고 장벽이나 빗장, 문살 등을 뜻하는 Bar가 있습니다. 일명 빠루라고 하는 크로우바도 포함되죠. 핑키 파이는 여기서 Bar에 들이받는 상황을 만들어 거기 들이댄 사람이 '아우취!' 를 외친다는 아재-개그를 시전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답이 안 나오길래 다른 아재-개그로 바꿔서 넣었어요.

 

*55 The End of Ponies, Act IV 'Dredgemane', Chapter 33 'For the Moon is Hollow and I have touched the Pie' 최후반부에서, 핑키 파이가 Mayor Mare 머리에 계란을 떨어뜨리는 장난질을 치면서 한 말. 이 때는 회색을 덧붙여 Mayor Mare의 갈기 색을 반영하였음.

 

*56 간호사도 아닌 사람이 직접 주사를 놓는 경우라면 당뇨로 인한 인슐린 투여, 마약 투약이 대표적이죠. 입만 열면 술 타령하는 베리 펀치의 이미지를 생각해 보면, 당뇨 쪽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습니다. 당뇨 있는 사람이 저렇게 술 퍼먹어도 되나 싶지만. 마약으로 가면 문제가 심각해지니까 그냥 인슐린으로 갑시다.

 

*57 Marble Cake. 서로 다른 색의 반죽을 교차시켜 자연상태의 대리석무늬와 비슷한 모양이 되도록 만드는 케이크.

 

*58 Marea Angelou. 미국의 시인, 작가, 배우였던 마야 안젤루Maya Angelou를 비튼 것. 생몰연도 1928~2014. 대표작으로 <새장에 갇힌 새가 왜 노래하는지 나는 아네>가 있음.

 

*59 William Flankspear. 잉글랜드의 시인, 극작가인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변형.

 

*60 Stalliongrad. 러시아의 도시 스탈린그라드의 변형.

 

*61 원문 Animaniacs. 1993년 방영된 미국의 만화영화. Anonymous 대신 또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

 

*62 1337 = LEET = L + EE + T = 엘 이 트 = 엘리트. 서양 MMORPG에서 엘리트급 몹들을 이렇게 부른답니다. RD는 AJ 발굽씨름 대결을 보스몹 레이드 뛰는 느낌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옮기기도 애매하고 밑에 1339도 있어서 그냥 이렇게 했습니다.

 

 

백그라운드 포니의 Volume I이 끝났습니다. 끝났으니 뒷표지를 올려야겠죠. 다음 포스팅부터는 Vol.II의 표지를 사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