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에게.
헌신적이다 못해 그 헌신이 스스로를 부정할 정도로 사람이 이타적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언제나 가슴에 품은 하나의 이상을 위하여 인생의 모든 것을 초개처럼 내던질 수 있는 고결한 생물일까? 저주를 짊어졌든지, 그렇지 않든지 말이야. 사람에게 허락된 지상에서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조금은 우리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걸까. 인생에서 마주치는 아픔을 더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각자의 인생을 좀 더 즐겨도 되는 것일까.
나는 항상 이런 식으로 일을 복잡하게 생각하는 버릇이 있어. 부정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지. 만화경처럼 수도 없는 관점에서 들여다보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나들며 머리를 굴리다 보면 문제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경우도 종종 있게 돼. 그러다 보니 분석적 사고가 문제에 접근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목적의 자리를 꿰차는 일도 없을 수가 없지.
분석적 사고의 힘을 빌어 나를 상처주고 두렵게 하는 것으로 모자라 기댈 곳 없는 끔찍한 적막과 고독을 눈앞에 들이미는 것들에게서 거리를 두려는 것은 과연 가능한 것일까. 번지르르한 말의 함정 따위보다도 이 낫지도 못할 병에 훨씬 잘 듣는 처방이 없는 것도 아닌데.
내가 기댈 유일한 언덕은 음악 하나뿐이라 생각해. 말로써 견뎌낼 수 없으면 음악에 기대어 견뎠으니까. 분석적 사고로 재단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일이야 나한테는 천지빛깔이니, 그 이상으로 음악에 기댈 수밖에 없을런가.
음악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니까.
얼어붙은 회랑 위로 울부짖는 자들이 줄지어 걸어간다. 수레국화의 푸른빛을 띤 눈동자가 떨리지 않는가. 오늘도 봉사의 나날이다. 하루도 봉사가 끊인 날이 없었다. 눈물을 마시는 이 없고*1 시문詩文과 서찰書札은 읽는 이 없으니. 종이 울린다. 여기는 서릿발에 뒤덮인 도시. 그녀의 전쟁이 아닐진대, 어찌 그녀의 그림자에 꽃을 심는가. 눈 앞에 펼쳐진 것이라 해도 가시밭길이구나. 이름 없는 가사들이 떠다니는 가운데 빈 곳에서 비명이 들려온다. 어디선가 그대 울음이 들리오. 기필코 그대를 찾고야 말겠소. 사랑하오. 나 그대를 사모하오. 그녀 또한 그이라 부르는 이 있으니, 사모하는 이를 괴고, 다시 사모한다.
고개 돌리는 곳마다 전투의 참상이 온몸을 찔러댄다. 차갑게 얼어붙은 돌조각이 강처럼 흐르는 가운데, 그 아래로 기어간다. 그 누구도, 설령 그녀조차도 감히 들을 수 없는 곳에서 곡을 써야 한다. 피부 위로 스치는 흑철이 쓰라리다. 현으로 길을 열기는 글렀다. 발굽이 피투성이다. 벌써 몇 시간 전부터 뿔이 작동하지 않는다. 마력 장막을 뚫고 지나갈 때마다 그 여자의 눈이 보인다. 그년이 나를 쫓고 있다. 나 그대부터 찾아야겠소. 그년이 그대를 찾아내기 전에 내가 찾아야 하오. 내가 시간을 벌 수 있을지 모르오. 그 여자가 사모하는 이를 찾아낼 수도 있을 터요. 세상의 파괴자와 이를 두고 협상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오. 혹시 그 사내가 고적의 비가에 관해 알고 있는 게 있을지도 모를 터. 부디 그 때만큼은 뿔이 제대로 작동하기를. 내가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는 것이 그년에겐 발굽 안 대고 코 푸는 일밖에 안 되는 것은 아닐까 두렵다.
사방에 얼음만 가득하다. 털이 빠진다. 지나간 곳마다 잿빛 자국이 남는다. 연못 수면에 비친 다 늙어빠진 사내가 이쪽을 마주본다. 저것이 내 미래인가. 햇빛이야 평소에도 혐오하던 것이지만, 이제는 그것 때문에 다치고 머리까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아, 이제 눈을 감으면 그대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소. 그리 되기만 한다면 한달음에 그대 곁으로 달려가 그대 항상 내 귀를 갖고 놀던 대로 그대의 귀에 입맞출 수 있을 터인데. 이 모든 것이 끝난 뒤 그대가 들어 주길 바라는 곡이 있소. 그대를 찾는 날 내 머릿속에 떠오를 곡 말이오. 그리하여 우리 부부는 이 야상곡이라는 것을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으로 바꿔놓을 수 있을 거요. 아름다웠던 우리의 생활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테요. 그 여자는 할 수 없겠지만 우리는 할 수 있소이다. 나 그대를 사랑하니, 그년이 제 서방을 내버렸듯 그대를 내치는 일은 절대 없을 게요.
가시밭길이 빽빽해진다. 이 현으로는 뚫고 갈 수 없겠다. 근위병들이 이쪽을 보더니 비명을 지른다. 뭐 '일광 차단' 어쩌고 하는 이야기다. 찬란하고 광영된 세상은 끝장났다. 남은 거라곤 한없는 흑암과, 넘실거리는 불꽃에서 떨어져 나온 불똥 몇 조각뿐. 골육상잔의 끝에 별들은 떨어질 터이다. 저들은 각자의 정당한 분노로 별들을 부수고야 말리라. 그 공허에서 그년이 비집고 나와 밤하늘을 쇠사슬로 뒤덮고 말 것인가? 두고 보지만은 않으리. 밤이 내려앉기 전에 새벽을 일으키고야 말겠다. 웃긴 것은 그 해답이 노래라는 것이다. 현으로는 길을 열 수 없다. 발굽이 피투성이다. 나 그대를 사랑하오. 부디 조금만 더 기다려 주기를. 그년의 꼬드김은 듣지 마시오. 그년은 제 서방을 사모하지만, 제 서방을 내쫓고 말았거든. 그년은 제 서방을 사모하지만, 제 서방을 내쫓고 말았거든. 그년은 제 서방을 사모하지만, 제 서방을 내쫓고 말았거든. 그년은 제 서방을 사모하지만......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읽기를 그만두었다. 오두막 창 너머로 나른한 오후의 햇살이 비치는 가운데, 나는 침대 한가운데에 쪼그리고 앉아 땅이 꺼져라 한숨지었다. 눈을 질끈 감고 그 위로 발굽을 가져가 문질렀다. 시퍼런 글자를 읽어 내려가는 일은 말 그대로 고역이었다.
내가 코멧후프의 일지를 읽어 내려간 시간은 아무리 잘 쳐 줘도 한 시간을 채우지 못했다. 코멧후프 박사가 아무렇게나 주절거려 적어 놓은 글을 더욱 읽어 갈수록 요 새파랗게 반짝이는 글자를 읽기만 지난해져 갔다. 앞으로 무려 4페이지에 걸쳐 괴발새발, 한없이 끄적여 놓은 "그년은 제 서방을 사모하지만, 제 서방을 내쫓고 말았거든."을 정독해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은 명료한 사실이었다. 여기에도 몇 가지 사소한 특이점이 있기는 했는데, 철자 위치를 바꿔 놓거나 글자 순서를 뒤섞어 놓은 곳도 있었고 아예 뒤집어 써 둔 자리도 있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패턴이지만, 그래도 패턴인 것은 확실했기에 정신을 집중해 살펴볼 가치가 있었다. 코멧후프의 기록 중 무려 3/4에 이르는 부분이 이런 말같잖은 주절거림으로 들어차 있었으니, 시퍼런 문자를 계속 읽어 나가기가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이 웃기지도 않는 텍스트를 가만히 정독해 가는 것은 이제 일종의 의무처럼 느껴졌다. 이게 아니면 살펴볼 것도 없었으니까.
광기로 치닫고야 만 코멧후프의 탐구 과정에서 건져낸 진실이 어떤 것이라 해도, 나는 그게 알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이 작자가 썼던 얘기 또 써 가며 하염없이 반복해 가는 글줄을 얼마나 진지하게 탐구하든지, 찾다 못해 눈이 돌아간 그 진실이라는 것은 한 글자도 찾아내지 못할 것이었다. 그의 기록에서 '패러스프라이트'를 언급하는 구절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영 찜찜한 자홍색으로 반짝이던 글자 하나하나를 찾아내 읽었다. 색이 흐려져 갈 즈음에는 진혼곡을 연주하고 다시 들여다보았다. 그 여자나 궁창의 야상곡에 대해 언급한 모든 구절, 이름 없는 자들의 영역, 나이트메어 문이 왕위 찬탈을 노리고 내전을 일으킨 뒤 셀레스티아 공주님이 계셨던 회의실에서 일어난 정체불명의 폭발. 이 네 가지 중 어느 하나만 언급하더라도 이 색이 입혀짐을 확인했다.
코멧후프에게 의지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 생각하고 싶다. 사실이 어떻든 이 양반이 적어놓은 기록은 내게 이름 없는 자들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니까. 코멧후프의 연구기록에 기대어 궁창의 야상곡에 대해 알아내지 않았는가. 앞으로 남은 비곡이 둘이라는 것도... 뭐, 적어도 내가 직접 알아내는 것보다는 많이 알아내긴 했다. 나이트브링어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코멧후프는 죽는 날까지 나이트브링어를 가지고 다녔을 것이다. 문제는, 코멧후프 또한 저주를 짊어진 자였기 때문에 사후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는 거다.
코멧후프의 기록을 여러 번, 부지런히 숙독하더라도 거기서 나이트브링어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낼 것 같지는 않다. 암호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이 미쳐 돌아가는 텍스트를 분석, 해석하는 일은 할 수 없다. 나는 평범한 일개 사람일 뿐이다. 혹시 코멧후프가 자기 진의를 숨길 작정으로 지리멸렬한 헛소리를 늘어놓은 거라면 어떨까. 반려가 내 눈앞에서 처절한 죽음을 맞이한 걸 봤으면서도 아직 살아서 어딘가에 있으리라고 생각할 만큼 망상증이 도진 것이라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나이트브링어를 어떻게 했는지, 어디에 숨겼는지 무슨 수를 써서든 숨겼을 터이다. 시간을 초월한 악기가 천 년 전 그 날부터 수백 세대에 이르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캔틀롯 깊숙한 곳 어딘가에 잘 숨겨져 있다고 생각해 보면 이것도 운인가 싶다. 코멧후프 박사가 나이트브링어를 가지고 들어갔을 곳이 자기 무덤 말고는 또 없을 것이고, 무덤이라 해도 얼핏 봐서는 무덤인 줄 모르는 곳 아니겠는가?
참담한 심정이 들 수밖에 없다. 궁창의 야상곡을 완벽하게 연주해 내고, 그럼으로써 숨겨진 진실을 드러내는 것은 나이트브링어가 없으면 불가능했다. 바로 열 페이지 전에 이름 없는 자들의 영역을 지켜야 한다느니 같은 소리를 주워섬기며 나 자신을 속이려 든 글줄이 자홍색으로 빛나고 있으니, 일기를 계속 적어 나가기도 어렵다. 밤의 만장을 처음으로 연주했던 그 날 밤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패러스프라이트 창궐 당시 셀레스티아 공주께서 포니빌을 방문하셨을 때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 돌아 버릴 지경이다.
패러스프라이트. 이것들이 정말로 허깨비에 불과한 것인가. 진실로 환각에 불과한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참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한 기분이 든다. 실은 다람쥐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짐승이라거나, 블루 밸리 같은 곳은 세상에 없다거나, 사실 공기 중 산소를 포집해서 혈관 속으로 밀어넣는 기관이 허파가 아니라거나 같은 소리를 혼자 중얼거리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더라도 이제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이름 없는 자들의 세상이 존재하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버려진 알리콘 여신이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듯 세상 그 어느 것이라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되지 않았나. 코멧후프 박사 정도나 할 법한, 공포스러울 정도로 멍청하고 덜떨어진 짓을 하게 된다. 한밤중에 일어나 어스름 진혼곡을 연주하고, 종잇장에 아무 말이나 끄적여 이것도 자홍색으로 빛나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 일기를 적어 내려가는 와중에도 한 단락을 마칠 때마다 거의 버릇이 되어 버린 양 편집증적으로 들여다보느라 한 번 쓰고 한 번 읽는 짓을 하고 있다.
패러스프라이트는 어떤 짐승인가. 이것들은 사람 신경을 긁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는 조그마한 버러지인데, 어떻게 봐도 곤충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곤충이란 모름지기 머리, 가슴, 배 3개 부분으로 구분되어야 할 것인데, 패러스프라이트는 대가리만 있고 이 대가리에서 가슴과 배의 기능까지 모두 수행한다. 이것들은 둥글둥글한 대가리에 조그마한 날개가 붙어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이것들을 어떻게 분류학의 범주로 끌어들여야 할지, 참 암담한 버러지라 아니할 수 없다.
어쨌든지 저쨌든지, 이것들에 대한 기억이라면 또렷하게 남아 있다. 아니지. 이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나는 이것들을 실제로 본 적은 한 번도 없는 주제에, 그 존재를 늘 경계하며 살아왔다. 패러스프라이트를 처음 본 것은 포니빌 패러스프라이트 창궐 때가 처음이었다. 그렇기는 하더라도 꼬마 시절부터 대학에 다니던 시절에 이르기까지, 패러스프라이트가 위험한 짐승이라고 생각한 것은 변함없이 사실이다. 그렇지 않다면 평생 패러스프라이트를 경계했다고는 하지만, 실은 그렇다고 나 혼자만 그렇게 생각한 것일 수도 있을 터이다. 내 기억이 거짓과 뒤엉켜 있고, 이 때문에 내 지난날을 떠올리는 데 심각한 오류가 일어났거나 현실을 인지하는 데 문제가 있었을 수 있음을 생각하면 오싹하다.
확실한 것은, 어느 한 점에서는 나 혼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동네 사람들도 하나같이 패러스프라이트의 존재를 확신하기 때문이다. 요 근방에선 속담이나 관용어 비슷한 것으로 '패러스프라이트에게 먹이를 주지 마라' 같은 말을 자주 쓴다. 아주 오래된 말이거나... 이제 더는 쓰이지 않는 말이겠지. 다른 지방의 기록 중 이런 비슷한 문구를 쓴 것이 있기는 할까. 당장 입 밖에 내어놓고서도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는 건 아닐까. 여기 매여 산 것이 겨우 일 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훨씬 더 오래 살았던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숨겨진 과거의 진실과 패러스프라이트가 또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가.
그런 생각들을 주워섬기던 머리가 아파 왔다. 이걸 갖고 펜 놀리는 것도 슬슬 버거워진다. 근래 있었던 일 때문에 산란해진 정신이 코멧후프가 중언부언해 가며 하염없이 동어반복을 반복하는 글줄을 들여다보는 내 정신까지 족쳐놓고 있는 모양이다.
부득부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두막집 출입문 바로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실은, 그 소리가 반가워서 가슴이 두근거렸고 싱긋 웃음이 나오기까지 했다. 이전에도 이 소리를 들은 바 있었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신속하게 움직였다. 으깬 어육을 두둑하게 담아 둔 갈색 가방을 열어 몇 조각 집고 나무그릇에 담았다. 사냥감을 쫓는 코요테와 같이 슬며시 문 쪽으로 다가섰다. 입술을 핥으며 문고리를 가만히 돌리고, 뿔을 밝혀 문을 천천히 밀어 열었다.
나른한 오후의 햇살이 문틀 너머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 한가운데 조그마한 형체가 가만히 앉아 호박색 눈동자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털을 살짝 곤두세우고 꼬리를 말아내리나 싶더니, 얼마 안 가 진정했다. 오렌지색 털은 9월의 서늘한 산들바람을 맞아 유독 더 몸에 달라붙은 듯 보였다.
"어머, 어서 와, 앨Al." 나긋하게 웃으며 반겼다. 앨러배스터 코멧후프 박사의 이름에서 따온 이름이다. "오늘은 일찍 왔구나. 밤에 심심했나 보구나? 응?"
고양이는 조각상처럼 가만히 앉아 이쪽을 마주보고 있었다. 귀만 쫑긋거릴 따름이었다. 밖에 놔둔 고양이 밥그릇은 거의 비어 있었다. 이 녀석이 배불리 먹은 것은 아니었다. 이걸 노리고 그 날 아침에는 부러 조금만 채워 놓았던 것이다.
"누나한테 물고기가 좀 더 있거든." 나는 말했다.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문틀 앞으로 고양이 밥그릇을 가만히 밀어 주었다. "그... 어... 네 거랑 마찬가지로 살코기 많이 넣었어." 나는 굳이 강조했다.
'앨'은 내가 내민 밥그릇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이 녀석은 잠시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제 앞에 있는 밥그릇으로 고개를 돌리고 앉아 이빨에 끼인 고기 찌꺼기를 빼내 우물거렸다.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오른쪽 발굽으로 턱을 받쳤다. "저기 시내만 내려가도 처음 보는 사람이라며 얼굴 들이밀고 얘기나 하자는 사람이 득실득실한데, 고양이 주제에 '야옹' 한 마디도 안 하는구나. 뭔가 잘못됐다 생각 안 하니?"
앨 얘기를 일지에 적어두지 않은 것도 사실 이유가 있다. 지난 몇 주 동안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던가. 아주 간략하게라도 적어 보자. 여덟 번째 비곡을 구체화하고 연습하느라 바빴고, 이름 없는 자들의 영역에 발을 들였다가 목숨 건져 돌아왔다. 코멧후프가 남긴 일지도 정신없이 읽어댔다. 그러니 적어도 그 정도는 되어야 거기 신경을 쓸 여력이 생기는 것이다. 셔플 선생과 함께한 한 주가 또 나를 바꿔 놓았을 수도 있겠다 싶다. 그리하여 가만히 앉아 이걸 일지에 쓸 것인지 버릴 것인지 숙고해 보는 버릇이 들어 버린 것이다. 이런 신세다 보니 내게 허락된 것도 얼마 되지 않는 것이고, 글로 남길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자연히 더욱 희소해질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한 이치다.
앨이 오두막 근처에 나타난 것은 7월경이다. 시기를 좀 더 특정하자면, 포니빌 하지 태양절 축제 직후라 하겠다. 이 녀석이 어디서 톡 튀어나온 건지, 누가 기르던 녀석인지 나는 알 길이 없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서 밖에 나가 보니 귀엽게 생긴 오렌지색 털뭉치가 출입문 밖을 어정거리며 쥐나 도마뱀 따위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었다는 것만 확언할 수 있다. 처음에는 별반 생각이 없었다. 이 녀석은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지만, 그 또한 산 것이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내 존재를 인지하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별 생각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마음이 동하지 않은 것은 또 아니었다.
그리하여 조그마한 그릇에 물을 담아두기 시작했다. 물을 채워두고 동네에 다녀오면, 분명히 증발하기에는 모자란 시간이었음에도 물그릇이 비어 있었다. 어느 날 똑같이 물을 담아두고 몰래 집에 숨어 동태를 지켜본 적이 있다. 새벽에 가까운 이른 시간이었는데, 이 녀석이 근처에 줄지어 깔린 울타리를 하나하나 타고 넘어오더니 급하게 물을 들이키는 것이다. 이런 것이 며칠 동안이나 반복되어서, 물만 덜렁 주기보다는 먹을 것도 좀 나눠 주는 착한 사람 노릇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워하는 것 같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밥그릇에 넣어둔 생선 토막을 적은 양이나마 으적으적 잘도 씹어먹기 시작했다.
이런 모습이 일상의 풍경이 되었다. 이 녀석이 나나, 우리 집의 존재를 명확히 기억한다는 확증은 되어 주지 못했다. 고양이 머릿속에 있는 거라곤 숲 가장자리쯤에 먹고 마실 게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녀석은 단순히 배를 채우러 우리 집에 왔다. 그뿐이었다. 어쨌든 이 녀석이 정기적으로 우리 집에 오는 덕을 보는 게 적어도 한 명 있다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었다.
"아직 요 근처에서 애플잭을 못 봤나 보구나?" 나는 고양이에 대고 말했다. 열심히 오물거리는 고양이를 마주보고 앉아 후드 소매를 가다듬었다. "여기 근방 사과나무들이 한 조인데, 몇 개나 되는 조를 매일 돌아가면서 쉬지도 않고 사과를 따거든. 납품 시간 맞추려다 보니 사람이 되게 급하고 살벌해지기는 하는 것 같다만, 또 동물은 되게 좋아하거든. 혹시나 중간에 마주치면 오히려 좋아할걸." 나는 피식 웃었다. "그렇지, 아주 멋들어진 새 집을 만들어 주려고 할 수도 있겠네. 그럼 길고양이 신세는 청산하고 스윗 애플 에이커 고양이로 살 수 있는데. 혹시 그럴 생각 있어?"
앨은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저 밥그릇에 얼굴을 들이박고 생선 조각을 먹어대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 뿐이었다. 햇빛에 젖은 오렌지색 꼬리는 흡사 혜성의 궤적 같았다.
"너희 집은 어디니. 저기 숲 언저리쯤이니?" 고양이 등 뒤로 우거진 무성한 숲을 가만히 쳐다보며 혼자 주절거렸다. "오며 가며 패러스프라이트를 봤을 것 같지는 않은데, 맞지? 아주 조그맣고 귀엽게 생겨서는 뽈뽈거리며 잘 돌아다니는 것들인데, 너희 같은 고양이들 눈에 띄면 순식간에 작살나서 토막날 것 같거든. 네 생각은 어떠니?"
아무 소리도 없었다. 그저 벌들이 윙윙대고 늦여름 매미가 맴맴대는 소리만 문간에 가득 찼다.
한숨지으며 갈기를 쓸어넘겼다. "이제 뭘 어떡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패러스프라이트가 대체 무슨 상관인지 결국 밝혀내더라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 나이트브링어가 없으니, 야상곡을 온전히 연주할 수도 없고." 몸이 으스스 떨렸다. 두 앞다리를 가슴 가까이 붙였다. 이가 딱딱거렸다. "에휴...... 아무래도... 지금까지처럼 머리 터지게 연구하고 조사해 봤자 천 년 전 '앨'처럼 결국 미쳐 버리는 거 아닐까 싶네."
어디서 달그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만 난 게 아니었다. 뭔가 뜨뜻한 것이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눈을 꿈벅이며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자, 앨이 만족스러운 듯 가르릉거리고 있었다. 오두막 쪽으로 한층 더 다가서서 출입문 안으로 들어선 채였다. 문 밖 밥그릇은 비어 있었다. 고양이는 내 큐티마크를 슬쩍 스치듯 지나가 조금 전 부어 두었던 새 밥 쪽으로 어슬렁거리며 다가갔다.
피식 웃다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조심스레 발굽을 뻗었다. 앨의 등에 발굽이 닿자마자 털을 곤두세우기는 했으나, 달아나지는 않았다. 고양이의 오렌지색 털은 부드러웠다. 천천히 등을 쓸어주었다. 꼬리가 발굽을 휘감나 싶더니, 계속 등을 쓰다듬어 주자 또아리를 풀고 돌아갔다.
"흠..." 폭 한숨이 나왔다. 처음으로 앨을 만진 기쁨으로 뺨에 희미한 홍조가 떠올랐다. "그래도 어디 기댈 데가 있으니, 그렇게 빨리 정신 놓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지?"
고양이는 내가 뭐라거나 말거나 계속 근육 조직을 떨어 그르릉거리는 소리만 낼 뿐이었다. 앨은 밥그릇에 머리를 박고 먹었다. 이제 나를 피해 달아나지 않았다. 아주 사소한 것이었지만, 그 사소한 하나로 다시 너끈히 한 주를 견딜 만했다.
낯설고 새로운 기운이 사지에 가득 찼다. 턱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것이 느껴졌다. "집에 박혀 있는 건 이쯤하고, 슬슬 일 좀 해 볼까?"
"그러니까, 볼링은 때려치우자고 하는 건 아니야!"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도서관 문을 열었다. 레인보우 대쉬가 큰 소리로 떠들었다. 넉넉하게 속을 비워낸 나무집 안으로 둘이 걸어 들어갔다. "이번 주 모임도 나갈 거긴 한데, 저번같은 실수는 다시 없게 하자 이거지! 우리 다 그냥 시간이나 때우자고 볼링 치러 다니는 게 아니잖아?"
"이게 다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거든!"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짊어진 가방을 풀어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나보다 점수 잘 매기는 사람 없잖아!"
"점수표 절반이 텅 비었거든, 트와일라잇!" 레인보우 대쉬가 이마를 찌푸렸다. 그러고는 천장에 닿을 듯 말 듯한 높이까지 날아올라 심통이 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이기는 게 아냐. 내가 이겨서 애플잭 면상이 죽을상이 되는 거 구경하는 것만한 게 세상에 또 없다고. 어떻게 점수표 절반을 그냥 홱 날릴 수가 있어?"
"알아, 알아! 나 평소에 안 그러는 거 알잖아!" 트와일라잇이 한숨짓더니, 전전긍긍, 불안해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때 머리가 좀 복잡했었나 봐. 공주님께 드릴 글 생각하느라 그랬었던 거 같은데... 어... 알잖아. 나 의외로 주의 산만한 거." 그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서가 곳곳을 돌아보았다. "뭐라고 해야 하나, 세상 자체가 날 곯려먹으려고 하는 것 같..." 트와일라잇이 내가 앉아 있던 스툴에 부딪혔다. "아..." 트와일라잇이 눈을 꿈벅거리더니 말했다. "어, 안녕하세요."
"그쪽도요." 싱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책상에 펼쳐둔 각종 연감의 페이지를 넘기며, 눈을 흘끗거려 트와일라잇을 살피고 말했다. "그쪽이 수석사서시군요?"
"어... 아. 네. 흠흠. 맞아요. 그쪽은...?"
"라이라. 라이라 하트스트링스."
"안녕하세요, 하트스트링스 씨. 어. 도서관 문은 닫아두고 나간 것 같은데 어떻게...?"
"꼬마 보조사서가 열어 주더군요." 나는 말했다. "연구하고 있는 게 있는데, 도움을 좀 받았죠. 책을 하나만 찾아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순식간에 찾아서 가져다 주더라고요. 꼬마가 아주 대단해요." 다른 자료실로 책을 옮기고 있던 꼬마 용 쪽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잘생긴 친구, 내 말 맞지?"
"안녕! 후드 멋진데!"
마주보고 씩 웃어 준 다음, 트와일라잇을 보며 실실 웃었다. "자기 일도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몰라요. 저는 거의 없는 사람 치더군요."
"쟤가 그럴 애가 아닌데." 레인보우 대쉬가 중얼거렸다.
트와일라잇이 눈을 흘겼다. "레인보우..."
"뭐 됐다. 나도 할 일 있으니까 가야겠구만." 레인보우 대쉬가 하품을 쩍 하더니 문 쪽으로 날아갔다. "너도 이쪽 분 도와 드려. 이번 주 볼링 모임에선 그런 실수 없을 거라고만 약속해 두라구. 평소처럼 야무지게. 알지?"
"그건 걱정 마, 레인보우." 트와일라잇이 명랑하게 눈을 찡긋했다. "내가 두 눈 부릅뜨고 보고 있을 테니까, 평소처럼 애플잭 놀릴 준비나 해 두라구." 트와일라잇이 말하다 흠칫하더니, 얼굴을 붉혔다. "잠깐... 이게 그런 뜻이 아니라..."
"알았당. 나중에 봐!" 레인보우가 도서관을 떠났다.
"그쪽이 수석사서 되시나요?" 나는 말했다.
"어..." 트와일라잇이 말꼬리를 길게 늘이다, 정중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네. 제가 수석사서랍니다. 도와 드릴까요? 마침 시간도 넉넉하니, 편하게 말씀하세요."
"음, 뭐. 아무래도 시립도서관 수석사서시니까, 생물학 쪽에도 식견이 깊으실 것 같아서요."
"글쎄요, 조금 공부한 건 있지요. 주전공은 마법과 우주론이지만..."
"그러시다면..." 스툴을 돌려 트와일라잇을 마주보고 말했다. "패러스프라이트라고 아세요?"
트와일라잇 스파클은 벙찐 표정이었다. 설마 그런 주제가 갑자기 툭 튀어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게 확실했다. "네, 뭐. 패러스프라이트 하니, 별로 안 좋은 기억이..."
"그러셨어요?"
"네." 영 꺼림칙한 기억이었는지, 트와일라잇은 이리저리 몸을 꼬았다. 그 시선도 양 옆에 늘어선 서가 사이로 흔들렸다.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 포니빌 방문하시기로 되어 있던 주에, 패러스프라이트가 창궐해서 포니빌 절반을 말 그대로 먹어치워 버렸지요. 그게 벌써 몇 달 전이네요."
"그래요?" 테이블에 몸을 기대며 물었다. "세상에. 낭패도 그런 낭패가 없네요."
"말도 마세요." 트와일라잇이 이쪽을 쳐다보며 물었다. "포니빌 분은 아니신 것 같은데, 맞나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다고 해둘까요."
"뭐, 그 덕에 마을 사람들이 다들 부지런하고 협동의식이 충만한 분들이시란 걸 직접 보게 된 건 소득이긴 했어요." 트와일라잇이 말했다. "동네 분들이 총동원되어 복구 작업에 나서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까지도 몇 군데는 패러스프라이트에게 먹힌 채 남아 있었을걸요."
"그것들이 떼로 나타나면 그렇게 골치가 아픈가 보네요?"
트와일라잇이 몸을 떨었다. "생각만 해도 피곤해 죽을 지경이죠."
"왜요?"
트와일라잇이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그것들 쫓아낸다고 무진 애를 썼는데도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 몇 배씩 계속 불어나요. 심지어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 몸소 오시기로 되어 있던 주에 그 난리를 친 거죠. 그나마 다행인 건 방문 직전에 다른 곳에 급한 일이 생겨서 방문이 취소되었다는 거에요. 안 그랬으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이 악화일로를 걸었을 테고요."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 패러스프라이트 창궐 얘기를 들으신 건 아닐까요?"
"글쎄요... 음..." 트와일라잇이 불안한지 움찔거리다 말했다. "아뇨. 포니빌 패러스프라이트 창궐 사태가 공주님 귀에 들어간 것 같지는 않은데..."
한쪽 눈썹을 치키며 물었다. "태양의 인도자이시며 온 이퀘스트리아를 보우하시는 알리콘 공주께서, 지척 거리인 포니빌이 초토화되는 걸 눈치 못 채실 것 같지는 않은데요."
"공주님께서도 패러스프라이트 문제는 전에 겪어 보셨으니까요!" 트와일라잇이 말했다. "예전에 필리델피아에서 똑같은 일이 일어난 적 있었지요.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별반 얘기 없이 캔틀롯으로 돌아오셨던 걸 봐서는 별 일 없었던 게 확실하고요. 비슷하게 생각하신 게 아닐까요." 트와일라잇이 헛기침했다. "어... 저기... 공주님 지시로 나오신 감사관 같은 건 아니시죠?"
"아하하하..." 나는 웃고 말했다. "진정하세요. 공주님 지시를 받는다거나 하는 입장은 아니니까."
"그럼 왜 오신 거죠?" 트와일라잇이 한쪽 눈썹을 치켰다. "패러스프라이트에 뭐 연구할 만한 게 뭐가 있긴 한가요?"
"괜찮으면 잠시 시간 좀 내주실래요. 이놈들에 대해서 가만히 생각해 보자고요." 나는 몸짓했다. "그것들이 마을 절반을 먹어치웠다고 했지요. 맞죠?"
"맞아요."
"그것들이 마을 절반을 부술 수 있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글쎄요..."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이쪽으로 다가와 내 옆 스툴에 앉았다. "아무래도 먹성이 어마어마한 점 하나겠지요. 그러다 보니 패러스프라이트는 일반적으로 먹을 수 있는 것과..." 마른침을 삼키더니, 희미한 홍조를 띄우고 말했다. "...못 먹는 것을 구분하지 않아요. 눈에 보이면 일단 집어삼키지요. 아무래도 마법 때문에 비틀려 버린 것도 있지만."
"네...?"
트와일라잇이 발굽을 비벼댔다. 시선은 내가 아닌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충동 유발 마법을 쓰면 그것들의 식욕을 좀 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해 봤지만, 오히려 먹성만 더 키워 버렸거든요."
"뭐 건초나 귀리, 사과, 꽃 같은 거 말씀이시죠?"
트와일라잇이 입술을 씹었다. "목재, 철근, 옷감, 종이, 잉크 같은 거죠."
"잉크요?!"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트와일라잇 스파클 선생. 생물학에서 말하는 유기생명체가 아니라 어디 전설에 나오는 마귀 얘기를 하는 거 아닌가요?"
"저도 봤고, 다른 사람들도 두 눈 똑똑히 뜨고 본 내용이에요!"
"그렇다면야 부정하진 않겠어요. 잠깐 생각해 보자고요." 발굽을 내저어 강조하며 말했다. "그게 말이 되나요?"
"어......"
"그 조그마한 벌레가 제 몸뚱이의 몇 배나 되는 것들을 집어삼킬 수 있는 것부터 이상하죠? 일단 뭘 먹었으면 그게 어디로 가기는 가야 할 테고요. 없어지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잖아요.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지는 않는다는 점에서는 우리 둘 다 견해가 일치할 것 같은데."
"네, 사실이죠." 트와일라잇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그것들의 증식 메커니즘이 설명이 될 것 같네요. 이것들은 먹어치운 양에 비례해서 증식하거든요. 뭐가 됐든 일단 충분히 먹어치웠다 싶으면 유기질을 만들어 토해내는데, 이 유기질이 발달해서 새로운 패러스프라이트 개체로 성장하지요."
"즉, 먹어치운 것들을 가지고 자기의 유전적 복제본을 만들어 낸다는 거군요?"
"일단 제 생각은 그래요."
트와일라잇을 쳐다보고 물었다. "조그마한 벌레들 뱃속에 들어찬 장기라고 해야 오밀조밀, 작은 것들밖에 없을 텐데 그것들로 도저히 과학적 설명이 불가능한 현상을 일으킨다니, 따져보면 이건 전대미문의 대발견이죠."
"그..." 트와일라잇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말씀하시는 의도를 잘 모르겠..."
"생물 뱃속에 도저히 소화가 불가능한 물질이 가득 들어찼는데, 그걸로 마을 하나를 초토화시킬 정도로 무리를 불렸다는 거잖아요. 무시무시한 속도로 증식했다는 건데, 그 정도로 신진대사가 활발한 경우가 과연 가능하느냐는 거죠." 나는 말했다. "세상 그런 소화계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도 말이 안 되는 것 아닌가요? 그런 기능이 가능한 소화계가 있다 쳐도, 한낱 조그마한 벌레에 불과한 패러스프라이트의 뱃속에 그게 어떻게 들어차 있고, 작동하는 것인지 의문이 남지 않나요."
"그게, 한 가지 경우가 있기는..."
트와일라잇을 가리켰다. "'마법' 얘긴 하지 마세요."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나직하게 웃더니 말했다. "글쎄요, 마법으로 설명할 필요까지도 없을 것 같지 않은가요? 윈디고에 큰곰자리, 팀버울프도 있지요. 저런 게 어떻게 가능한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동물들은 세상에 많답니다. 그것들을 이해하려면 아마 형이상학적 논의가 훨씬 더 진전되어야 할 테지요. 어쨌든 이퀘스트리아는 혼돈의 영역에 존재했던 땅이니까요. 아주 오래된 전승과 고문古文의 내용이 전부 진실일 때 얘기긴 하지만. 그것들이 오직 에너지로 구성된 동물이라면, 이 땅이 아니라 우주의 생물이고 그저 어찌어찌 뿌리를 내린 것이라면 그다지 이상할 일도 아니지요."
"즉, 패러스프라이트 또한 본질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것들이라는 거군요?" 나는 말했다. "훌륭한 과학도라면 그런 허황된 결론을 가지고 다리 쭉 뻗고 잘 수는 없을 텐데."
"음, 사실은 말이죠." 트와일라잇이 말했다. "그것들을 가까이서 들여다보고 연구할 기회가 한 번도 없었어요." 마른침을 삼키더니 덧붙였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지만요. 그 때 제 머릿속에 있는 거라곤 한시라도 빨리 이 버러지들을 몰아내서 더 이상 마을에 피해를 못 입히게 해야 한다는 것 하나밖에 없었거든요."
"그래서, 잘 됐나요?"
"마을이야 멀쩡하게 잘 남아 있잖아요?" 트와일라잇이 킥킥 웃었다. "저희가 마지막으로 본 바로는, 에버프리 숲 깊은 곳으로 들어가더군요."
"에버프리 숲으로요?"
"네."
"눈에 보이는 건 죄다 주워먹고 보는 식성에, 눈 감았다 뜨면 몇 배로 불어나 있는 번식 속도 그대로 숲에 들어갔다고요?"
"그... 그렇죠 아마..."
몸을 기울였다. "그럼 우리가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그것들이 숲을 갉아먹고 있을 텐데, 예방책 마련해 둔 건?"
트와일라잇은 놀란 눈치였다. 두 눈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바닥만 훑어댔다. "어......"
"말씀하신 걸 종합해 보자고요." 나는 말했다. "이것들은 사실상 억제가 불가능해요. 에버프리 숲만 먹어치우는 게 아니라, 우리 나라, 이 별 자체를 전부 갉아먹지 말란 법도 없다는 거죠. 즉슨, 우리가 땅이라고 발 딛고 사는 게 실은 땅이 아니라 수도 없는 패러스프라이트가 모이고 모여 응집된 군체일 수도 있다 치더라도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거에요."
"그...럼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되나요. 짐작이 전혀 안 가는군요." 트와일라잇이 오들오들 떨며 말했다. "그 날 이후 패러스프라이트 하면 아예 학을 떼서, 그것들 정리하러 간다고 해도 껴 본 적이 없거든요."
"한 번도 안 가셨다고요?"
트와일라잇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도 안 갔어요."
"증식 속도가 느린 것도 아니고, 피해를 안 주는 것도 아닌데..." 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 이것들 문제를 해결하러 가셨다가 별 문제 없었다며 돌아오셨다는 거잖아요. 이상하지 않아요?"
"즉, 패러스프라이트의 행태에 일관성이 없다는 말씀이시죠?"
"아뇨, 그렇지 않아요." 나는 말했다. "애초에 패러스프라이트란 버러지의 존재 자체부터 말이 안 된다는 거에요. 과학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그야말로 총체적 비일관성과 비현실성을 집대성한 것들이니까."
"그렇더라도..." 트와일라잇이 켕기는 듯한 미소로 말했다.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어요. 저도 그렇고 제 친구들도 그렇고, 코앞에서 그것들을 직접 보고 마을 밖으로 내쫓았으니까요! 그것들 때문에 동네가 반쯤 부서져서 원상복구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스파클 씨 기억이 잘못됐다고 하려는 게 아니에요." 나는 말했다. "그 기억이 입각한 존재 자체가 잘못됐다는 거죠."
"제 말씀 못 믿으시겠다면 동물학 서가를 찾아보셔도 좋아요." 트와일라잇이 말했다. "패러스프라이트가 어떤 것들인지 써둔 자료가 분명 있을 테니까요."
"그렇지 않아도 좀 뒤져 봤죠."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이쪽 좀 보라고 몸짓하고, 책상 위에 널린 연구문헌을 가리켜 보였다. "꼬박 하루 동안이퀘스트리아 곤충강 백과Equestrian Insect Families 전집만 들여다보았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저 방대한 텍스트 중 패러스프라이트에 대해 서술해 놓은 부분은 단 한 곳도 없더군요. 그래서 자료 조사의 범위를 넓혔답니다. 미확인동물학, 천상생물 우주생물학, 원소학에 소환학까지 파고들었죠."
"뭐 좀 나오던가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뇨. 그 어떤 학문의 범주에서도 패러스프라이트에 관한 자료는 못 봤어요." 트와일라잇에게 시선을 돌렸다. "방금 얘기한 분야는 낯설어하실 것 같은데, 어때요?"
"장서 대부분은 적어도 한 번씩은 훑어보기라도 하기는 했는데......"
"그 중 패러스프라이트 얘기가 나오기라도 한 책이 있었나요?"
"음..."
"잘 생각해 보세요." 나는 말했다. "평생 읽어 온 책 중에 패러스프라이트를 언급하기라도 한 게 있었나요."
기억을 짜내는 트와일라잇의 이마가 찌푸려졌지만, 아무 말도 없었다.
트와일라잇을 보고 물었다. "그럼 그것들의 모습을 묘사한 삽화나 그림 같은 건?"
아무 말도 없이 입술만 깨무는 것이었다.
"그런 게 있다고 얘기라도 들어 본 적은?"
트와일라잇이 이쪽을 마주보더니 마른침을 삼키고 말했다. "어떤 종에 관하여 기록한 문헌이 없다 해도 그 실존을 부정할 근거로는 불충분해요."
"눈에 보이는 거라면 일단 입에 넣고 보고, 뭐가 됐든 집어삼키기만 하면 곧장 제 복사본을 토해 내며 번식하는 꼴을 보고도 기록을 안 남긴다면 그것도 이상하지 않나요?" 나는 말했다. "패러스프라이트는 평범한 벌레가 아니에요. 우리나라의 근간부터 무너뜨릴 수 있는 위험 요소지요."
"글쎄요..." 트와일라잇이 어깨를 으쓱했다. "현재 시점에서 도출할 수 있는 답이라고 해야... 패러스프라이트가 최근에야 발견... 되었을 수 있다는 것 정도밖에..."
나는 아무 말 없이 빙긋 웃어 보일 뿐이었다.
트와일라잇은 현기증이 나기라도 하는 듯 눈을 꿈벅이더니 이쪽을 향했다. "그렇다 쳐도... 어떻게?"
싱긋 웃고 펼쳐 둔 연구문헌을 탁 덮었다. "전대미문의 황충蝗蟲 떼를 향해... 전대미문의 질문이 던져졌군요."
오두막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밤이 깊어 있었다. 도서관에서 책 몇 권을 빌려 가져오기는 했지만, 나 혼자서는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오기 전 오후 시간을 전부 트와일라잇 스파클과 보냈다. 우리는 고량진미를 찾아 헤매는 육식동물처럼 과학학회 학회지를 파고들었다. 망각의 운명에서 뻗어나온 줄이 한 줄기 한기로 변해 온몸을 휩쓸고 나서야 도서관을 나섰다.
문을 열고 들어서며 뿔을 밝혀 등잔을 켜다가, 걸음을 멈췄다. 낯익은 주황색 무언가가 침대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밤하늘에 총총히 돋아난 별빛이 나를 올려다보는 호박색 눈동자 위로 반짝였다. 한없이 순박하고 선량한 짐승의 전형이었다.
고양이를 향한 눈을 몇 차례 깜박였다. 오두막 한쪽 벽 위로 시선이 옮아갔다. 잠시 나갔다 오는 동안 환기나 시킬 겸해 열어둔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고양이에게 눈길을 돌렸다.
"어머나, 앨. 아주 너희 집처럼 자리잡고 앉아 있구나."
고양이는 나를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등 뒤로 열린 문을 가만히 닫으며 고양이를 조심스레 쳐다보았다. 문이 다 닫히고 나서도 고양이는 나를 피해 달아나려는 듯한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
"흠... 뭐, 용기가 가상하긴 하네. 그건 인정하지." 등에 짊어진 가방과 도서관 장서를 담은 책가방이 풀어져 내려가는 감각이 느껴졌다. "그래도 여기 살 생각이라면 잘못 생각한 거야. 몇 시간 간격으로 계속 생면부지의 낯선 사람으로 돌아가는 사람이랑 평생을 같이할 자신은 없을 거라 생각하는데."
고양이는 하품하더니 어깨를 몇 번 날름거려 핥았다.
침대 옆에 리라를 내려두고 잠시 어물거리다, 고양이 밥 봉투를 놓아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밥 봉투 아래 나무그릇을 놓아두고 봉투를 몇 번 툭툭 흔들자 살점들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물고기 토막이 몇 개 떨어졌다. 어느샌가 옆에 다가선 앨이 가만히 다가와 밥그릇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흠..."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좋은 게 있긴 있네. 평생 독수공방할 줄 알았더니 이렇게 잘생긴 남정네를 방에 들이는 날도 다 오는구나."
밥그릇을 내려놓자 앨이 그대로 얼굴을 그릇에 박고 주둥이를 먹이에 파묻다시피 하며 아귀아귀 먹어댔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띄워 들고 침대 쪽으로 가만히 걸어갔다. 앨이 몸을 말고 누워 있던 침대 한가운데 자리가 아직 따뜻했다. 낯선 행복이었다. 숨을 깊이 내쉬며 침대에 앉아 나도 모르게 찾아온 손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멍청한 짓인 걸 알면서도 반나절 내내 무용지물인 주제를 놓고 공부했던 것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 트와일라잇 스파클이란 친구를 찾아갔어. 뜬금없이 머리가 터져라 공부시켰네." 앨이 쩝쩝 먹어대는 동안 나는 말했다. "둘이 머리를 싸매고 책을 뒤져댔는데, 패러스프라이트를 언급이라도 한 게 딱 한 곳 있더라." 두 발굽으로 책을 쥐고 휘휘 넘기며 말을 이었다. "이퀘스트리아 생물학회 학회지에 있더라고. 그나마도 세 달 전에 나온 문헌이야." 앨을 흘끗 돌아보며 한쪽 눈썹을 치켰다. "패러스프라이트가 어떤 생물인지 그나마 자세하게 써둔 유일한 기록물이지. 패러스프라이트가 포니빌 절반을 집어삼키고 나서 몇 달쯤 있다가 어떤 연구자 양반이 써서 제출한 거야."
앨이 내 쪽으로 꼬리를 흔들며 물고기를 쩝쩝 씹었다.
"뭐, 패러스프라이트가 정말로 발견된 지 얼마 안 된 새로운 곤충의 한 종이라면야, 동네 절반을 작살낸 다음에야 학계에 보고된 게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그런데도 말이지,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관리하는 도서관 전체 문헌을 통틀어 봐도 패러스프라이트를 언급이라도 하는 책이 딱 한 권밖에 없는 건 납득이 안 돼. 지금으로서는 패러스프라이트에 관한 기록을 남긴 사람들이 나나 셀레스티아 공주님, 다른 동네 사람들이 겪은 바와 마찬가지로, 역사를 왜곡해서 새로 쓰려는 그 여자의 마각魔脚에 걸려들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봐. 내가 '그 여자'라고 하긴 했는데, 혹시 이해하니? 두 개의 궁창 사이의 땅, 이름 없는 자들의 영역이라는 지옥에 떨어진 불쌍한 영혼들을 수호하는 알리콘 비슷한 존재야. 이 여자가 미쳤나... 하는 건 아니지?"
앨은 밥그릇에 떨어진 생선 토막을 핥더니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고양이의 귀가 쫑긋했다.
한숨이 푹 나왔다. "그래... 패러스프라이트가 제 몸무게의 백만 배는 되는 것들을 거뜬히 먹어치우고 순식간에 세를 불린다는 말이나 세 번째 알리콘이 있다는 말이나, 똑같이 미친 소리긴 하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등잔 불빛으로 환히 밝아진 오두막 저편의 책선반 위에 고이 모셔져 있던 고서 한 권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코멧후프 박사라는 양반이 혼자 헛소리 떠들어 놓은 거나, 내가 방금 쏟아놓은 소리나 가히 우열을 가릴 수가 없기는 한데... 그래도 있지, 이름 없는 자들의 영역이 있는 건 사실이야! 그 여자도 거기 있고! 내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왔으니, 확신할 수 있어..." 한 줄기 한기가 사지를 쓸고 지나가 몸이 부르르 떨렸다. 후드 소매를 고쳐 입었다. "이젠 내가 트와일라잇처럼 얘기하고 있네..."
앨이 몸을 쭉 펴더니 고개를 흔들고 어슬렁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고양이는 침대 옆 마룻바닥에 멈추더니 느긋하게 몸을 말고 엎드렸다.
"훗..." 고양이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렇게나 떠들어대는 내 헛소리를 다 받아주는 생명체라니, 딱 내 스타일이야." 나는 한숨지으며 발굽을 뻗어 고양이의 등을 쓰다듬었다. 앨은 거부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아이구, 이 불쌍한 남정네야." 나는 중얼거렸다. "밖에서 살아도 누나가 밥은 계속 챙겨 줄 텐데. 그게 중요한 거 아니야?"
고양이는 두 앞발을 가지런히 모으더니 베개 삼아 그 위에 머리를 가만히 얹고 눈을 스르르 감더니 이내 잠들었다.
나는 정좌하고 심호흡했다. "나 혼자 미친 게 아닌 걸 확인해야 그래도 속이 좀 풀리겠네. 일단 동네 한 바퀴 돌면서 패러스프라이트라고 아냐고 물어보고 다녀야겠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정신나간 꼴을 직접 보고야 만 사람들이 나보다 더 미쳐 있는 꼴을 보면 좀 나아지겠지." 나는 피식 웃으며 앨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혹시 모르지. 그걸로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감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 여자 입장에서는 내가 영영 모르길 바랐겠지만, 어쩌나, 그 금단의 지식이 내 머릿속에 있으니 머지않아 사건의 행간까지 읽을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네?"
"패러스프라이트라? 으. 더러운 버러지들이죠. 즐겨 가던 카페가 있는데, 거기 테라스를 죄 갉아먹어 놨더군요. 책 읽기로는 동네에서 그만한 곳이 또 없는데, 복구까지 장장 일 주일이 걸렸답니다. 흠? 글쎄요, 딱히. 마을이 죄다 부서질 뻔 하기는 했지만, 빨리 복구된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동네가 워낙 단합력이 좋다 보니, 남들이 보면 이상하다 싶을 정도 속도로 일을 해내거든요. 992년에 어마어마한 폭풍이 있었는데 혹시 아시나요? 뭐 그것까지 대 보지 않더라도 당장 작년에 있었던 일만 생각해도 패러스프라이트가 저질러 놓은 건 별 것 아니지요. 그게 벌써 일 년이나 지났다니. 여하튼 우리 동네는 이상한 일이 수도 없이 생기는 곳이니까요. 벌레 떼가 나타나 눈에 띄는 건 죄다 집어삼키던 때부터 한 달만 시계를 뒤로 돌려보면 눈 뒤집힌 작은곰자리가 나타나 난동을 부렸답니다. 기껏 뒷정리 해 놨더니 버러지 놈들이 또 어질러 놓은 거죠."
"작은곰자리가 쳐들어왔을 때라, 네 뭐, 여기 있었죠. 주택가 아파트 두 채를 말 그대로 때려부수더군요. 그걸로 끝났지만요. 그놈이 더 부수지 않고 순순히 돌아갔으니 얼마나 다행이에요. 흠? 곰탱이가 순순히 돌아간 이유가 알고 싶다고요? 아, 그 때 여기 안 사셨나 보네요?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답니다.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어디선가 나타나더니 그 녀석을 어떻게 잘 달래서 에버프리 숲으로 되돌려보냈지요. 잘 안 되는 경우엔 드잡이질을 해서라도 쫓아 보낼 생각이었던 것 같네요. 네? 아, 그거요. 패러스프라이트 때도 본인이 어떻게 해 보려다가 오히려 상황을 꼬아 놓았지요. 오히려 떼거리만 늘린 격이었으니까!"
"어우, 누구라도 안 놀라곤 못 배겼을걸! 요 근방에서 트와일라잇 스파클처럼 똑똑하고 많이 배우고 영리하고 능력 좋은 사람이 또 없단 말요. 돌덩이를 모자로 바꿔놓기도 하고, 어디서 문을 만들어 내는가 하면 새끼용한테 콧수염을 달아 주기까지 했거든! 우리 트와이만큼 솜씨 좋은 재주꾼도 또 없소이다. 비슷한 어중이떠중이야 세상에 더 있을 수도 있겠다마는, 셀레스티아 공주님 본인의 내제자는 하나뿐이거든! 혼자 힘으로 작은곰자리 그 커다란 몸뚱이를 번쩍 들어 그대로 마을 밖으로 띄워 보내는 걸 봤을 땐 너나할 것 없이 입을 떡 벌리고서 구경밖에 할 게 없었소이다. 그러니 그 훌륭한 재주를 가지고 패러스프라이트인지 뭔지 하는 버러지들이 아가리를 떡 벌리고 눈에 띄는 건 죄다 뱃속에 처넣으러 다니는 걸 못 하게 하려고 하는데 오히려 역효과만 나는 걸 보고 우리가 얼마나 당황했을지 그쪽도 대충 짐작이 될 거요. 그쯤 되니 이것들이 아주 걸신이 들렸는지 우리 일가 헛간을 아주 작살을 내 놓았더이다! 그렇기는 해도 빌어먹을 버러지 놈들이 동네를 작살내 놨다고 해서 트와일라잇을 욕할 수는 없을 게요. 왜 그런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가기는 하다만, 뭐 트와이도 못 하는 게 있는 거겠지. 그쪽이 이해 못 하는 건 그게 아니겠지, 안 그렇소? 흠? 그것들을 동네 밖으로 치워 버리고 난 다음에 버러지들 찾아본 적이 있느냐고? 아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잖수. 그런 일은 시장님한테 물어 보드라고. 요 근처 순찰 다니는 건 그분이 계속 적어두고 계시니까."
"시내 복구 작업을 마치고 나서 얼마 안 있다가 대쉬 양을 불러 에버프리 숲 근처를 몇 번 돌아봐 달라고 했었지요. 대쉬 양처럼 눈썰미도 좋고 민첩한 페가수스라면 패러스프라이트를 찾아내지 못할 리도 없을 것이고, 마땅히 그것들의 소굴을 캐낼 수도 있으리라 싶었거든요. 사흘 내내 에버프리 숲을 샅샅이 뒤지고 돌아다녔지만 찾아낸 건 아무것도 없었답니다. 레인보우 대쉬 정도 되는 페가수스가 찾아내지 못했다면 사실상 없는 것과 다름없지요. 그 일은 그쯤에서 마무리지었고, 두 번 다시 패러스프라이트 수색 작업을 재개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보이지 않으면 잊힌다'는 옛말의 한 사례로 들기는 좀 그렇기는 하지만, 그때만 해도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던 터라 패러스프라이트 흔적 추적 같은 일에 시간과 노력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죠. 사실, 패러스프라이트 추적 사업은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던 것도 아니랍니다. 시의회가 패러스프라이트 추적을 안건으로 올리고 심의했는데, 위원회 심사 결과 굳이 예산을 투입할 필요가 없다고 하더군요. 그때부터 패러스프라이트는 논의의 주제조차 될 수 없었어요. 실은 저도... 그쪽이 패러스프라이트 이야기를 꺼내고 나서야 그런 것들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저조차 잊고 있었던 거죠."
"이상한 일이지요, 정말. 그 날개 달린 짐승들은 생각만 해도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답니다. 그것들이 제 의상실을 어떻게 해 놨을지 대강 짐작이 가실 테니, 제가 그것들 이름만 들어도 못 견디는 것도 이해가 되실 거에요. 끔찍하기 짝이 없는 일이죠. 처음 봤을 때는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웠는지 몰라요. 소중히 간직하고 싶은 것들은 왜 다들 그 뒤에 잔혹하고 기괴한 본성을 숨기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그것들과는 상종을 않는답니다. 에버프리의 것은 에버프리에게 돌려주어야 하고, 그것들이 어떻게 살든 우리가 거기 개입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지요. 네? 글쎄요, 그렇지 않아요. 그것들이 정말로 에버프리 숲에 살던 것들인지 아닌지는 잘 몰라요. 마을 어귀에 호스슈Horseshoe 호텔이라고 있는데, 바로 근처에 에버프리 숲이 있답니다. 나중에 피해를 산정해 보니 호텔 건물이 가장 심각한 손상을 입었더라고요. 그래서 에버프리 출신 벌레인가 하는 거죠."
"저희는 호스슈 호텔을 말 그대로 토대부터 다시 쌓아 올렸어요. 굳이 '저희'라는 표현을 쓴 건, 재건 작업을 자청해서 들어가기도 했고, 스파이크가 현장 감독을 맡은 것도 있어서고요. 그... 것들을 더 위험한 것으로 변모시켰으니, 죄의식이 없을 수가 없지요. 면전에 대고 직언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제가 동네 사람들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빚을 지고 있다는 데는 다들 동의할 거에요. 그건 그렇고, 건축 작업도 꽤 흥미로운 경험이었어요. 사람들 관리하는 데 뭐 타고난 게 있나 싶은 생각도 들더군요. 한 층 한 층, 벽면 하나하나, 벽돌 한 곳 한 곳까지 확인하며 정확하고 똑바르게 재건했지요. 월말에는 호텔이 완벽히 복원되었고요! 마을 전체를 복원하는 것보다도 오랜 시간을 투입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어느 곳보다도 심각한 피해를 입었으니까 어쩔 수 없었어요. 네? 음, 아뇨. 다른 건물은 거의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굳이 호텔 건물만 악에 받쳐서 뜯어먹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처음 건물을 세울 때 쓴 자재 중에 그것들 입맛을 돋우는 뭔가가 있었을지도 모르겠군요. 패러스프라이트의 허기는 무한하니까요. 그것들이 기갈들어 달려드는 판에 벌어지는 일대 혼란이란, 세상 어디를 찾아봐도 최대 맛보기 정도밖에 못 느낄걸요. 호스슈 호텔이 에버프리 숲에서 가장 가까운 건물인 것도 사실이고요. 그것들이 포니빌로 날아들면서 가장 먼저 마주쳤을 테니, 그 정도 피해가 나는 것도 그럴듯한 설명이 되죠. 패러스프라이트가 왜 그런 생태를 갖는지 말씀드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사실 저도 아는 게 없거든요. 글쎄, 가장 가까이서 패러스프라이트를 관찰했던 사람이라면 알고 있을 것 같기도 하네요."
"응? 아냐! 그건 내가 아녀! 처음 봤을 때부터 학을 뗐다니까! 내 할 일 머릿속으로 정리하면서 구름에 엎어져 한참 잘 자고 있는데, 그것들이 어느 순간 '네 몸뚱이에 붙어 쉬어 갈 수 있는 우리 동족들이 얼마나 되나 세어 보지 않으련?' 하고 떼거리로 나타난 거야! 나야 뭐 '좋은 생각이 아냐 이것들아. 어딜 만져.' 하고 있었고. 그랬더니 어느 순간 사방이 죄다 벌레 떼더라고. 그것들 한가운데를 뚫고 날아가는데, 무슨 애들 볼풀 밑을 지나가는 기분이더구만. 으어어어... 암만 생각해도 쿨하다곤 절대 못 해. 플러터샤이는 이 빌어먹을 똥덩어리들이 뭐가 좋다고 그러는지 몰라. 어? 제대로 들었구만. 우리 중에 옘병할 버러지들을 가장 예뻐한 건 플러터샤이였어. 아주 결혼까지 할 기세였지. 대체 이 빌어먹을 것들이 뭐가 좋다고 그러는 거람?! 그러니 그쪽 가서 물어 보라구! 패러스프라이트를 처음 찾아낸 게 그 녀석이거든!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걔 정도면 한두 가지는 알고 있는 게 있겠지!"
에버프리 숲 인근 오두막집. 문을 두드렸다. 몇 시간 내내 동네 사람들을 대상으로 탐문을 벌이고 다닌 결과, 여기에 뭐라도 있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매끈한 표면을 반짝이며 가느다란 개울이 졸졸 흘렀고, 서늘한 9월의 바람이 근처를 거니는 나비와 벌, 각종 새들과 어울려 불었다. 동네 훈련사가 '집'이라 부르는 곳이 이토록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곳이라니, 샘이 났다. 집에 박혀서 자유 시간을 보낼 때 텃밭을 일구던 때처럼 마음이 잔잔해졌다.
하... 요새는 '자유 시간'이란 것도 가져 본 적이 없구만...
문을 두드리고 나서 일 분이 족히 지났는데도, 플러터샤이는 나타나기는커녕 대답하지도 않았다. 전보다는 큰 소리로 문을 두드렸다. 플러터샤이는 분명 집에 있었다. 오두막으로 향하는 기나긴 길을 따라 걷던 중, 근처에서 꽃에 물 주는 소리를 들었으니까. 아니면... 나를 보자마자 도망쳤을 수도 있었다.
나는 한숨지으며 세 번째로 문을 두드렸다. 드디어 안쪽에서 겁에 질린 새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뭐, 뭣 때문에 오셨죠?"
나는 차분히 웃으며 대답했다. "플러터샤이 씨 되시죠. 저는 라이라 하트스트링스라고 해요. 조사할 게 좀 있어서 지역 주민 분들이랑 인터뷰를 하고 있거든요. 잠시만 시간을 내 주실 수 있을까요."
"음... 어, 어떤 인터뷰를 하시나요?"
"그, 패러스프라이트 연구를 하고 있거든요. 듣기로는 몇 달 전 이것들이 창궐했을 때 가장 먼저 패러스프라이트를 목격하신 분이라고—"
"힉! 아, 아녜요! 전 아무것도 몰라요! 뭣 때문에 제가 패러스프라이트를 잘 안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일이 이상하게 꼬여 갔다. "어... 몇몇 분들이 그러시더라고요... 그... 패러스프라이트가 떼를 이루어 마을을 습격하기 전에 최초로 그것들을 발견한 게 그쪽이—"
"무...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제가 패러스프라이트를 불린 게 아니에요! 작을지 몰라도 그보다 끔찍한 것들은 본 적이 없어요!"
"플러터샤이, 그쪽 잘잘못을 따지려는 게 아니에요!"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 "곤충 연구를 하려고 하는 것뿐이고, 다른 분들 말씀으로 그쪽이 패러스프라이트와 접촉이 가장 잦았다 해서—"
"안 될 것 같아요! 미안해요!"
"간단히 몇 가지만 여쭤—"
"미안해요! 전 못 해요!"
그때부터 오두막은 침묵에 잠겼다. 나는 콧김을 뿜으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생각에 잠겨 턱을 긁적이다가, 한 줄기 한기가 몸을 감쌌다. 몸을 돌려 오두막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두막 문을 두드렸다.
새된 목소리가 응답했다. "네, 네?"
"플러터샤이 씨 되시죠? 저는 라이라라고 해요. 그쪽 친구분이신 트와일라잇 스파클 씨 추천으로 찾아왔는데요. 포니빌에선 동물을 제일 잘 아신다고 들었어요."
"네...?"
"제가 알고 싶은 게 아무래도 플러터샤이 씨 정도로 전문지식이 없으면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거라서, 몇 가지 간단하게 여쭤 보고 싶은 게 있거든요."
"동물이랑 관련된 것 때문에 찾아오신... 건가요?"
"네. 정확히 짚으셨네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래도 이왕이면 직접 얼굴 뵙고 말씀드리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은데요."
"죄... 죄송해요. 제가 너무 바빠서요. 돌봐 주고 식사 챙겨 줘야 할 아이들이 많거든요. 많이 급하신가요?"
"음, 제가 연구해야 할 동물에 대해서 한두 가지라도 알 법한 사람이 플러터샤이 씨 한 분밖에 없어서 말이죠."
"어떤 동물인가요?"
"아..." 길바닥을 한 번 차며 오두막 근처 잔디밭을 살폈다. "아뇨, 뭐 평범한 것들이에요. 다람쥐나 청설모. 큰어치나..." 마른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패러스프라이트..."
"패러스프라이트요?!"
"아뇨, 대부분은 다람쥐 얘기에요! 잠시만 시간을—?"
"무리에요! 죄송합니다!" 새된 목소리가 대답했다. "저는 못 도와 드려요! 다른 사람 찾아보세요!"
한숨지으며 몸을 돌려 걸어갔다.
오두막 문을 두드렸다.
새된 목소리가 응답했다. "어떻게 오셨나요?"
"캔틀롯 동물위원회 지부장 하트스트링스입니다." 딱딱하고 권위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셀레스티아 공주님 지시로 포니빌 훈련사와 면담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안위를 위한 일이니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플러터샤이 씨, 즉시 문을 열고 나오십시오."
"저... 저, 그게... 저..."
"플러터샤이 씨?! 즉시 문을 열고 나오기 바랍니다. 국가 안위가 걸린 일이란 말입니다."
"캔틀롯... 지부장... 셀레스티아 공주님... 안, 안위..." 마지막 말이 신음처럼 길게 이어지더니, 너머에서 무엇인가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황스러웠다. "플러터샤이 씨?" 눈을 꿈벅이고 다시 말했다. "플러터샤이 씨? 당신..." 입술을 깨물었다. "쓰, 쓰러졌습니까?"
아무 답도 없었다.
나는 신음했다. 문을 잡고 머리를 몇 번 부딪쳤다. 한숨지으며 몸을 돌려 오솔길을 따라 걸어갔다. 어깨가 처졌다.
오두막 문을 두드렸다.
"으... 어... 네, 네...?" 지친 듯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플러터샤이 씨, 괜찮으세요?" 문에 기대어 물었다. "어디 안 좋으신 것 같은데."
"어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잠을 애매하게 길게 잔 것 같은데, 자야겠다 싶은 기억이 없거든요... 심지어 방바닥에 쓰러져 잠든 거라..." 잠시 불편한 침묵이 감돌다가, 겁에 질린 목소리가 나왔다. "어, 누구시죠?"
"저는 라이라 하트스트링스라고 해요. 마을 도서관에 들렀다가 바로 오는 길인데, 여쭤 볼 게 있어서요..."
"뭔가요...?"
입술을 씹으며 몸을 꼬았다. 에버프리 숲 저편, 포니빌 중심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더욱 나아간 끝에 있는 마을 어귀의 한 오두막. 그 안에서 꼬리를 늘어뜨리고 나를 기다리는 누군가가 생각났다. 웃음이 천천히 번졌다. 헛기침하고, 오두막 문을 똑바로 마주본 채 말했다.
"그게, 최근에 이사를 왔거든요. 그... 이사 온 집 바깥에 고양이가 하나 돌아다녀서 말이죠."
"고양이요...?"
"네. 아주 작은 고양이죠. 귀엽기도 비할 데 없고. 그렇기는 한데... 음... 누가 기르는 고양이 같지는 않거든요. 게다가 계속 저희 집 주변을 빙빙 도는 걸 보고 있자니 마음이 영 좋지가 않네요. 그래서 밥이라도 챙겨 주고 있어요. 처음에는 물만 줬는데, 시간이 좀 지나니까 말린 물고기를 사다가 주고 있고. 이제는 저희 집 주변이 편안하게 느껴지는지 아예 자기가 살 곳이라고 선포하기라도 하듯 자기 발로 걸어 들어오더라고요. 저도 조그만 고양이 하나 데리고 사니까 좋기는 한데, 챙겨줘야 할 것 다 잘 챙겨주고 있나 궁금해지더군요. 그래서 도서관에 가 봤더니 트와일라잇 스파클이라는 사서분이 포니빌 어귀에 플러터샤이라는 본인 친구분이 사시는데, 그쪽이 동물 훈련이나 돌봄에 있어서는 최고 전문가라고 알려 주셨지요. 고양이를 들인 다음 뭘 더 해 줘야 하나 궁금하면 그쪽을 찾아가면 된다고 하셔서요. 혹시 도와 주실 수 있을까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오두막 문에 걸어둔 빗장을 끌르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가녀린 페가수스가 나를 내다보며 물었다.
"그 아이 이름이 뭔가요?"
웃음이 나왔다.
"어머나..." 나는 플러터샤이를 데리고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플러터샤이가 무릎을 꿇고 앉아 앨을 얼렀다. "앨, 이리 오렴. 정말 귀엽게도 생겼구나." 오렌지색 줄무늬 고양이를 어르는 솜씨를 보아하니, 보통이 아니었다. 플러터샤이가 앨을 가슴께로 안아올려 머리를 가만히 쓸어주었다. "어머! 골골이 소리도 잘 내는구나. 솜털도 노르스름한 게 예뻐. 살아 있는 오렌지 셔벗 같네! 헤헤."
"대체..." 플러터샤이가 고양이를 너무나도 쉽게 안아 올려서, 입을 떡 벌리고 물었다. "대체 무슨 조화를 부리셨길래 얘가 아무렇지 않게 품에 안기죠?"
"제가 안기라고 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붙임성이 좋은 고양이일 뿐이죠." 플러터샤이가 앨을 앞다리로 안아들며 말했다. "아직 안아 올리려고 하신 적이 없나 봐요?"
"그게... 음..." 뒷목을 긁적이고 말했다. "고양이들은 개인 공간, 뭐 그런 거에 민감해서 침범하지 않는 걸 좋아한다고 들었거든요. 강아지들이랑 정반대 습성이라고요. 맞나요?"
"개체마다 차이가 있는 법이죠." 플러터샤이가 말했다. "사람도 똑같죠. 서로 알아 갈 시간이 필요하지요. 여기 꼬마 고양이는 붙임성이 좋은 아이인 것이고요." 플러터샤이가 고개를 숙여 앨과 코를 비볐다. "헤헤. 사람을 아주 좋아하네요. 집을 정말 마음에 들어하나 봐요."
"허. 뭐, 공을 많이 들였죠."
"으음..." 플러터샤이가 침대 밑에 깔아둔 깔개를 가리켰다. "좀 지나치게 편안해하는 것 같기도..."
"네?" 플러터샤이가 가리킨 쪽을 봤더니, 분명히 집을 나설 때까지는 없었던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었다. 어쩐지 집안에 이상한 냄새가 나더라니, 그제야 그 이유를 알아낸 것이다. "하아, 루나 공주님 맙소사..." 나는 툴툴대며 쓰레받기를 집어 깔개 위에 또아리를 틀고 있던 사악한 존재를 들어냈다. "바보 취급 당한 기분인데요."
"그렇지 않아요. 고양이를 아주 잘 돌봐 주신 것 같은데요." 플러터샤이가 앨의 털을 천천히 쓸더니, 가까이서 들여다보며 말했다. "털 상태를 보니 건강해 보여요. 길고양이들은 대체로 영양을 충분히 섭취하지 못하다 보니 털 상태도 좋지 않죠. 이 아이 같은 경우, 꽤 오랫동안 먹이를 받아 온 것 같네요."
"아. 길고양이가 맞나요?" 뒷정리를 마치고 들어오며 물었다. "그... 뭐라고 할까... 얘가 완벽하게 길고양이 태생이 맞나요?"
"아.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플러터샤이가 말했다. "야생 고양이치고는 지나치게 살가워요. 게다가, 벌써 주인이 있는걸요."
눈을 꿈벅이며 되물었다. "주인이 있나요? 어, 어떻게 아셨죠?"
플러터샤이는 아무 말 없이 부드럽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얼굴이 붉어졌다. "아하하. 아무래도... 사소한 것도 자세히 관찰하는 습관 덕분에 동물 전문가가 되신 모양이네요."
"전에 여기 사시던 분이 기르던 고양이일 가능성도 있죠." 플러터샤이가 앨을 내려놓고 등을 쓸어주며 말했다. "전에 사시던 분들이 어떤 분이셨는지 아는 거 있으세요?"
"글쎄요오오오오......"
"그렇지 않다면 다른 집 고양이인데 집을 나왔을 수도 있죠. 실은 포니빌에도 그런 고양이가 몇 된답니다. 전에 그런 아이들을 데려다가 입양을 보낸 적 있었는데, 아직도 보고 싶네요."
"서서히 희미해지겠지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이 녀석 건강 관리를 하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글쎄요. 아무래도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건..." 플러터샤이가 이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주인이 있었거나 없었거나, 이 아이가 언제 예방접종을 맞았는지, 맞기는 했는지가 문제니까요."
"아, 젠장." 발굽이 절로 얼굴로 향했다.
"잘못되지는 않을 거에요." 플러터샤이가 말했다. 우리는 포니빌 동물병원 내부, 멸균실 한쪽 구석에 앉아 긴장으로 잔뜩 몸이 쪼그라든 앨의 몸에 주사 몇 대가 꽂히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걱정하실 것 없어요. 오랫동안 건강하게 살라고 맞는 거니까요."
"네 뭐..."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멀리서 이쪽을 쳐다보는 앨의 밝은 호박색 눈동자만 눈에 들어왔다. "누, 누가 걱정한다고 그러세요? 걱정 안 해요..." 마른침을 삼키고 덧붙였다. "다 잘 되겠죠 뭐..."
플러터샤이가 나직하게 쿡쿡 웃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쪽처럼 길고양이를 따뜻하게 대해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말년에 쫓겨나 집 없이 떠도는 반려동물들이 아직도 많다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에요."
"그냥 저 녀석 잘 챙기려는 것뿐이에요. 미친 소리 같나요?"
"그렇지 않아요. 하트스트링스." 플러터샤이가 옷소매를 가볍게 토닥이며 말했다. "그렇게 걱정하실 필욘 없는데."
"그런 건 아니고..." 고개를 흔들고 플러터샤이를 마주보았다. 보통 대화할 때는 내가 저 입장이었는데, 입장의 전환이 이처럼 신속할 수 있다니 많이 놀랐다. 애플잭이랑 과수원 이야기를 하거나 트와일라잇과 책 얘기를 나눌 때, 아니면 레인보우 대쉬와는... 뭘 얘기해야 하나, 폭발이나 뭐 그런 걸 얘기할 때 똑같이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 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나는 이 한 마디를 위해 그 날 오후 내내 이러고 돌아다녔던 것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망각의 한기가 뻗어나와 오가는 대화를 끊어놓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여쭤 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그... 일반적으로 동물이라고 하는 것들, 말인데."
"어머. 제가 가장 좋아하는 주제네요." 플러터샤이가 말했다.
"하하..." 피식 웃고 말했다. "전혀 몰랐군요." 헛기침을 하고 말을 꺼내려는 순간...
플러터샤이가 하염없이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번영에 있어 그 근본이라 할 만한 것이 바로 사람과 동물 사이의 유대거든요." 앨에게 마지막 주사가 접종되는 모습을 지켜보며 플러터샤이가 말했다. "적어도 제 생각은 그래요. 사람은 세상을 돌보기 위한 종복으로 태어났다고 생각하거든요. 페가수스들이 으레 하는 일 이상의 논의인 것이죠. 사람이 나름대로의 존중과 정성을 담아 동물을 돌보지 않는다면 온 세상이 갈기갈기 찢길지도 몰라요. 사람은 이 땅과 소통하는 존재이지, 자기 입맛대로 자연을 바꿔놓으라고 태어난 게 아니거든요. 제 마음대로 세상을 주무르고 싶어하는 것은 다이아몬드 독이나 미노타우르스 같은 것들인데, 그네들의 고향 땅이 어떻게 되었나 생각해 보면 답은 분명하죠. 숲은커녕 야생 동물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땅이 되어 버렸거든요."
"네, 헌데—"
"제 생각에 천지창조는 처음부터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의 모든 소중한 것들을 지켜내는 수호자가 되라는 뜻을 담고 있었던 것 같아요." 플러터샤이가 차분하고 따뜻한 미소로 말했다. "사람은 스스로 친절함에 이끌리고, 주변에 친절을 전파하기 마련이죠. 일반적인 의사소통 이상의 것이라고 할 만해요."
"흥미로운 말씀이긴 한데요, 꼭 좀 여쭤 보고 싶은 게 있—"
"사람의 말로 세상을 표현하려는 것 자체가 우리를 옭아매는 것 아닐까요?"
나는 입을 헤벌린 채 플러터샤이를 쳐다보았다. 숨을 정돈하고 대답했다. "제 존재는 말보다는, 느낌으로 정의되는 것 같네요.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언어에 사로잡히게 되니, 오히려 더 길을 잘못 드는 듯한 기분이 들거든요. 가끔은... 논리적인 것이든 아니든, 주변에 늘어놓은 정보량에 압도되어 언제고 미쳐 버리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드네요." 침을 삼키며 갈기를 가만히 쓸었다. "그런데도... 별 쓸데없는 걸 세세히 따져 보겠다고 덤비고 있죠. 말이라는 게 실은 아무것도 아닌데, 그걸 가지고 떠들어대는 데 쓰고 있으니 계속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기도..."
그 때 수의사가 앨을 데리고 다가와 내 품에 안겨주었다. "다 됐어요." 의사는 플러터샤이와 나를 보며 빙긋이 웃었다. "건강하기도 아주 건강하고, 착하기도 되게 착하더군요. 주사를 놓는데 한 번 움찔하지도 않았으니까요."
"그럼... 음..." 앨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의사를 올려다보고 물었다. "집에 가서 몸이 안 좋다거나 하는 건 없을까요?"
"흠... 좀 어지러워할 수는 있지만, 저희가 회복식으로 처방해 드리는 것만 잘 챙겨 먹이시면 길어도 이틀 안에는 건강하게 다닐 수 있을 거에요."
"알겠습니다. 감사드려요." 고개를 숙여 앨의 수염 난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주삿바늘을 그렇게 맞아댔는데도 멀쩡하구나. 혹시 너 고양이가 아니라 고슴도치 아니니?"
앨이 야옹, 하고 울며 발굽에 얼굴을 비볐다.
깜짝 놀라 입술을 달달 떨며 물었다. "세상에... 이제야 야옹, 소리를 내 주네요!"
플러터샤이가 끼어들었다. "하트스트링스 씨, 이 아이 말을 이해하시겠어요?"
"음..." 말을 더듬었다. 조그마한 고양이를 쳐다보는 것으로 어깨에 얹혀 있던 짐이 벗겨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대체 왜 아무것도 아닌 것에 그리 불안해하고 발을 동동 굴렀는지 모를 일이었다. 고양이가 골골대며 편안한 자세를 찾아 둥지를 틀듯 품에 안겼다. 내 평생 이토록 따스하고 부드러우며 사랑스러운 느낌은 처음이었다. "슬슬 이해가 되려는 것 같기도 하네요."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한 미소와 갈라지는 목소리로, 나는 불쑥 말했다.
"아무 모래나 넣어 주면 되나요?" 하고 물었다.
저물어가는 해가 호박색으로 하늘과 내 오두막을 물들였다. 플러터샤이와 나는 내 집 앞을 거닐고 있었다. "바깥 생활을 오래 했다니까, 집 근처 모래를 떠다가 넣어주셔도 될 거에요. 떨어진 낙엽이나 솔잎 같은 걸 주워다가 가장자리에 올려 두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그러면 좀 더 빨리 적응할 수 있을 거에요. 얼마나 오래 숲 생활을 했는지 모르니까요."
"그렇군요..." 앨이 내 가방에서 머리를 빼꼼히 내밀고 어질어질한 눈치로 눈을 꿈벅이고 있었다. 의사 선생 말대로였다. 고개를 돌려 고양이를 보고 빙긋 웃어주었다. "그럼, 그, 몇 주쯤 지난 다음에 가게 가서 사다 쓰면 되죠?"
"정기적으로 갈아 주시기만 하면 고양이도 좋아할 거에요." 플러터샤이가 나긋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고양이는 여럿 봤지만, 이 아이처럼 귀여운 고양이는 처음이에요. 정말 잘 되셨네요."
"하하... 그러게요." 나는 말했다. "운이 좋았죠 뭐. 그나저나, 얜 몇 살 정도 됐을까요?"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라면, 대략 16개월에서 24개월 정도 되었을 거에요."
"애가 좀 작은 거 같은데 다들 그런가요?"
"아무래도 하트스트링스 씨가 거두기 전까지는 밥다운 밥을 못 먹고 지냈을 것 같으니까, 이상한 일은 아니죠."
"말씀대로 하루에 두 번씩 밥 줄게요."
"한 달 정도 있으면 얼마나 건강하고 귀여운 아이가 되어 있을지, 생각만 해도 기쁘네요." 플러터샤이가 말했다. "튼튼해진 모습을 어서 보고 싶네요!"
"하하..." 나는 숲을 바라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깜짝 놀라실걸요."
"저... 음..." 플러터샤이가 갑자기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처음 오셨을 때 자꾸 피하려고만 해서 죄송해요. 친구들한테 여쭤 보셔도 비슷할 텐데, 제가 그... 낯을 심하게 가리는 편이어서."
"그래요? 왜 그렇지?" 눈동자를 굴려 플러터샤이를 쳐다보며 물었다. "재미있게 이야기할 만한 것들도 많이 아시는데 왜 그럴까요. 소통에 관해서는 양쪽 모두 서로 동의할 수 있는 견해를 공유한다고 보는데."
"그건 아닐걸요." 플러터샤이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랬다면 처음 오셨을 때 바로 문 열어드리고 응대했을 테니까요."
"저기..." 옆으로 다가가 가만히 어깨에 발굽을 얹었다. "말보다는 느낌으로 표현하는 게 더욱 강력할 수 있다는 그쪽 견해에 십분 동의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일반적으로 사회가 요구하는 예의범절이란 걸 발판 삼아 상대를 조금 더 이해하고 알아 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드네요. 그러니까... 오늘 여러모로 많이 애써 주시고, 덕택에 저랑 앨이 좀 더 윤택하게 살 수 있게 해 주신... 여기 계신 어떤 분처럼 말이죠." 나직하게 쿡쿡 웃고 덧붙였다. "잘 생각해 보자고요. 새로 친구 좀 사귄다고 해 될 건 없잖아요?"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못 되는 것뿐이에요." 플러터샤이가 어깨를 늘어뜨리며 말했다. "당당하지도, 용감하지도, 대담하지도 못해서..."
"그쪽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거죠." 나는 말했다. "그쪽처럼 온화하고 친절하면서 사려 깊은 사람도 없어요. 이런 사람들이 인생을 좀 살 만하게 해주는 것이지요. 그쪽이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은 부류였다면 굳이 그쪽을 찾아가 만날 필요가 있었을까요." 빙긋 웃으며 덧붙였다. "오늘 도와 주신 것만 해도 그쪽이 자평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당당하고 멋있었어요. 다른 사람들에게 좀 더 가까이 가기 위한 징검돌 같은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 하트스트링스 씨 말씀이 맞을지도요." 플러터샤이가 얼굴을 붉히며 빙긋 웃더니, 마음이 놓인 듯 날개의 긴장을 풀었다. "더할나위없이 똑똑하고 사려깊은 분 같아요. 그게..."
"그게?"
"글쎄요, 뭐라 할까... 잘 모르겠지만, 저한테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신 것 같았는데, 말씀하실 틈을 안 드린 것 같아서..."
멍한 얼굴로 플러터샤이를 마주보았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플러터샤이가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글쎄... 저 혼자만의 생각이었을지도."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숙여 지그시 웃으며 앨의 얼굴에 뺨을 비볐다. "귀염둥이들만 보면 하던 것도 다 잊어버리는 게 저 하나만은 아닌 모양이에요."
앨이 지친 듯 늘어진 야옹 소리를 내더니 가르릉 소리를 내려는지 목을 떨었다. 낡아빠진 모터보트의 시동을 거는 듯한 소리가 나왔다. 우리는 쿡쿡 웃었다. 한기가 저만치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다.
"음, 이제 좀 쉬어야겠네요. 공부할 게 남아 있어서."
"포니빌엔 연구하러 오신 건가요?" 플러터샤이가 물었다.
"그렇죠 아마..." 나는 내 입에 담긴 말에 가로막혀 말을 더듬었다. "뭐... 비슷한 거죠. 그렇다고나 합시다."
"흐음..." 플러터샤이가 눈을 찡긋했다. "아무래도 눈 좀 붙이셔야겠는데요."
"그쪽 말이야 뭐... 늘 맞는 말이었으니까." 멀어져가는 플러터샤이를 배웅하며 발굽을 흔들었다. "잘 가요. 오늘... 고마웠어요..."
"고맙긴요." 플러터샤이가 대답했다. 그 순간 매서운 한기가 몰아쳐 몸을 감쌌다. 플러터샤이는 잠시 몸을 떨다가 날숨을 뱉어냈다. 입김이 뿌옇게 엉겼다. 낯선 풍경을 보는 듯,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어깨를 으쓱하고는 저 반대쪽으로 한참을 가야 나오는 자기 집으로 통하는 귀로에 올랐다.
떠나는 플러터샤이를 하염없이 지켜보고 서 있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신속하게 오두막으로 들어와 가방을 내려놓고, 나른하게 늘어진 앨을 침대 한가운데에 올려주었다.
"뭐, 그리 나쁜 경험은 아니었지?" 나는 출입구 쪽으로 돌아가 등잔에 불을 밝히고 물건을 정리했다. "일단 해 줘야 할 건 다 해 준 것 같고. 앞으로 네 밥은 어떡할지, 청소는 어떻게 해 줄지 멋진 계획도 다 세워 놨어. 네가 그... 어... 앨 2세를 만들 수 없다는 영 좋지 못한 사실도 들었고. 그래도 상관없잖아? 이제 우리 둘이서 멋진 하루하루를 보내면 되는 거야. 안타까운 것은 이제부터 누나는 코멧후프 박사가 남긴 똥더미에 코를 처박고 알아 봤자 기분만 나빠지는 것들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지."
걸음을 옮기다 잠시 멈추어 서서 침대 한쪽 구석을 쳐다보았다. 베개 옆에 책더미가 하나 쌓여 있었는데, 저것들이 왜 저기 가 있는지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허. 이상도 하단 말야." 흐느적거리며 걸어가 동물학 학회지 몇 권을 집어들었다. "넌 어디서 왔니? 도서관이던가? 기억이 안 나네."
앨이 야옹 하고 울었다.
가만히 고양이를 마주보았다.
고양이는 가르릉거리며 나를 마주보았다. 내 생각과는 달리 아직 졸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가 자는 동안 얘가 함부로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선반에 얹어둔 것들을 떨어뜨리거나 하는 불상사를 예방한다는 이유로 앨을 침대 기둥에 묶어놓으면 그것도 동물 학대로 걸리는 것일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뭐가 어떻든, 앨은 아무렇지 않게 어디다 대고 몸을 비벼댔다. 고양이는 순진한 표정으로 가르릉거리며 내 가방에 얼굴을 문지르고 있었는데, 고양이 수염에 가방 속 금빛 리라가 쓸리웠다.
나는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발굽에 든 책뭉치로 시선을 돌렸다. 그 때 앨이 다가와 침대에 책을 올려두던 다리에 얼굴을 비벼댔다. 흐느적거리며 걸어가 리라를 집어들었다. 멍하니 리라를 바라보고 있자니, 그 위로 권태에 찌든 듯한 내 얼굴이 떠올랐다.
"그..." 문득 입 밖으로 나직한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오늘... 뭔가 할 게 있기는 있었는데..."
앨이 혼자 가르릉거리다가 야옹거리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몸을 돌려 코멧후프 박사의 일지를 흘끗 보았다. 그쪽으로 다가가 뿔을 밝혀 책을 띄워 펼쳤다. 페이지를 휘휘 넘겼다. 한 글자 한 글자 모두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가만... 이거 이렇지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이 나왔다. 오두막에 감도는 한기가 기세를 더했다. 앨도 이 한기를 느끼는지 어쩐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 스스로 깨우쳐야 하는 것을 고양이에게 묻는 미친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어디... 어디 갔어...?"
싸늘한 한기가 몸에 부딪쳤다. 쇠사슬 부딪치는 소리가 생각났다. 전신의 근육이 긴장했다. 다른 방법이 없다면, 이를 해결할 방안은 단 하나뿐이었다. 뿔을 밝혀 리라를 높이 들었다. 고양이가 듣든지 말든지 그 때는 별반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당장 어스름 진혼곡을 연주해야 했다. 아직 내 머릿속에 진혼곡이 온전히 남아 있을 때 연주를 마쳐야 한다는 절박한 충동이 온몸을 휘어잡았다.
연주는 시작할 때와 같이 순식간에 끝났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연주를 마치고 난 뒤 느껴지는 거라고는 머리가 쪼개질 듯 과중하게 몰린 생각에 피가 머리로 쏠리는 기분뿐이었다.
순간 몸이 비틀거려 리라를 거의 떨어뜨릴 뻔했다. 어디서 불어온 바람에 코멧후프의 일지 페이지가 넘어갔다. 단어 몇 개가 창백한 청색에서 들끓는 자홍으로 색을 달리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제야 나도 모르게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던 무언가를 새삼 망각의 낭떠러지에서 건져 올렸다.
나는 아파 오는 머리를 붙들고 그대로 무릎 꿇고 앉았다. 기억이 돌아오며 서로 공명했고, 뿔이 이를 받아 같이 빛났다. 파닥거리는 날개와 둥글둥글한 몸뚱이, 형형색색의 원색으로 뒤엉켜 온 마을을 집어삼키던 황충의 무리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패러스프라이트." 절로 씁 소리가 나왔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패러스프라이트. 패러스프라이트. 패러스프라이트. 플러터샤이한테 물어 봤어야 했는데. 왜 안 물어 봤지? 왜 깜빡했을까? 왜...?"
자리에 얼어붙다시피 한 기분이었다. 떨리는 발굽으로 코멧후프의 연구일지를 집어들고, 한쪽 페이지 구석에서 흐느적거리며 자홍색으로 반짝이는 글자를 쏘아보았다. 나는 입이 찢어져라 씩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호호 호. 안 되지, 안 돼. 안 되고말고. 어찌어찌 날 꾀여내기는 한 모양이네, 어디서 굴러먹던 알리콘 뼈다귄지는 몰라도." 나는 코웃음쳤다. "아깝게 됐어. 나를 어떻게 엿먹이기는 했는데, 나도 그리 바보는 아니란 말씀이야. 그리 쉽게 굴복할 줄 알고. 야상곡이 머리에 들어 있는 한 그렇게는 안 될 거야. 나도 이름 없는 자들처럼 되어 버리기는 했지만, 호락호락하진 않다니까. 코멧후프 아저씨한테 통할지는 몰라도, 나한테는 안 통해."
나는 앨을 돌아보며 히죽히죽 웃었다.
"누나가 그 여자가 바라는 만큼 멍청한 사람으로 보이니?"
앨이 고개를 갸웃하며 야옹, 하고 울었다.
"그런 것 같진 않지." 탁 소리와 함께 책을 덮고, 몸을 일으켜 오두막을 한 바퀴 돌며 말했다. "날 밝자마자 바로 시작해야겠다. 제발 잘 됐으면 좋겠네."
오두막 문을 거세게 두들겼다.
안에서 새된 목소리가 대답했다. "무슨 일로 오셨—?"
"저기, 그냥 요 주변 산책 나왔는데..." 나는 말했다. "길가에 웬 털복숭이 동물 하나가 죽어 있었거든요. 혹시 그쪽이 키우시는 게 아닌가 싶어서."
"공주님 맙소사!" 가녀린 한 쌍 발굽이 신속하게 빗장을 끄르는 소리가 들렸다. "공주님 맙소사, 이를 어쩜 좋아..." 오두막 문이 홱 열림과 동시에 플러터샤이가 숨을 헐떡이며 헐레벌떡 뛰쳐나왔다. "엔젤이니? 퍼즈? 엘리자뱃저?! 이게 대체—?"
"아이구, 이런. 잘못 봤네요." 씩 웃으며 눈을 굴렸다. "안경을 쓰고 나왔어야 했는데 이게 어딜 갔나 몰라요. 시력이 갈수록 떨어지니 곤란하게 됐어요!" 길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밝은 색깔 무언가를 툭툭 차며 말했다. "그냥 물이끼였네요. 아하하하... 어어어어이구...... 흠흠. 이거, 실례했습니다."
"아... 어..." 플러터샤이가 침을 삼키며 영 불안한 눈치로 몸을 떨었다. "그... 저... 괜찮아요. 그럼—"
눈을 똑바로 쏘아보며 말했다. "패러스프라이트 얘기 좀 들읍시다."
비틀거리는 마네킹처럼 뒷걸음질치더니 플러터샤이가 말했다. "제가 잘못 들었나요?"
"형형색색의 그 버러지 녀석들 연구하러 여기까지 왔어요. 듣자하니, 그쪽이 패러스프라이트를 다룬 적 있다고 하던데."
"그게... 어..." 플러터샤이는 완전히 기가 죽어 계속 뒷걸음질쳤다. "어어..."
"포니빌에서 동물 하면 그쪽이라던데, 맞죠?"
"그, 그거라면 수의사 선생님이랑 말씀 나누셔도 될 것 같은데요." 플러터샤이가 더듬더듬 말했다.
"의사 선생은 패러스프라이트를 상대해 본 적이 없어요. 안 그래도 물어 보고 오는 길이고." 플러터샤이에게 바싹 다가서며 말했다. "다만 그쪽만은 패러스프라이트와 교감 비슷한 걸 나눈 적이 있죠. 전 이것들이 대체 어떤 놈들인가 알고 싶어 죽을 지경이고..."
"그게, 별로 권장할 만한 건 아닌 것 같은데요." 플러터샤이가 대뜸 말하더니 한 마디 새된 소리와 함께 몸을 돌려 오두막으로 달려 들어갔다. "죄송하지만, 다른 사람 찾아보세요—"
"플러터샤이 당신 말고는 그 누구도 도움 안 된다고요!" 등 뒤에서 소리쳤다. "사람의 말로 소통할 수 없는 동물이라도, 느낌으로 서로 이야기하고 보살피고, 소통할 수 있는 걸 아는 사람이 당신 말고 누가 있다고..."
플러터샤이는 막 문간에 들어서다가 우뚝 멈춰 섰다. 상기된 얼굴로 입술을 씹으며 이쪽을 돌아보았다.
나긋하게 웃으며 천천히 다가갔다. "누가 그러더군요. 사람은 본디 세상을 보살피기 위한 종복인 것이고, 이는 천지창조의 순간부터 세상을 잘 지키도록 예정된 것이라고. 그쪽은 어떻죠? 세상을 보살피는 쪽인가요, 아니면 그 의무를 피해 도망치는 쪽?"
플러터샤이가 움찔하더니,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이쪽을 보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들어오세요. 앉아서 이야기 나누실까요?"
"트와일라잇 스파클은 자기 때문에 패러스프라이트 피해가 커졌다며 내내 자책하고 있죠." 플러터샤이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오두막 현관 근처에 있던 테이블에 앉아 따뜻한 차 한 잔씩을 앞에 두고 있었다. "지나친 부채의식이에요. 패러스프라이트를 포니빌에 들여온 게 트와일라잇은 아니니까요. 에버프리 숲으로 몰아넣으려고 했을 때 패러스프라이트 몇몇을 몰래 숨겨두고 있던 사람도 아니었죠."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테이블에 둘러앉자마자 리라를 꺼내 조용한 곡 하나를 골라 내내 퉁겼다. 음악을 깔아두니 좀 마음이 진정되는지, 플러터샤이의 어조는 내내 담담했다. 그 때 하염없이 퉁기던 곡이 어스름 진혼곡을 변주한 것이라는 것은 꿈에도 모를 터였다. 이는 이야기하는 동안 내 기억을 온전히 보존하기 위한 예방조치였다.
"첫눈에 보기엔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럽던지, 그대로 홀리다시피 했죠." 플러터샤이가 피로로 풍화된 듯한 미소를 지었다. "제 평생 그런 것들은 난생 처음이었거든요. 설마 그렇게 예쁜 것들이 그 정도로 위험한 것들이었다니, 도무지 믿기 어려웠어요. 흡사 동화에서 톡 튀어나온 것처럼 매력적이었답니다......"
"처음 보셨을 땐 한 마리만 있었다고 했죠?" 나는 물었다. "처음에는 분명 한 마리밖에 없었지만, 서서히 수를 불리며 온 포니빌을 뒤덮을 정도로 무리가 커졌다고요. 맞죠?"
플러터샤이가 끄덕였다. "그것들에게 먹이를 주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 보지도 않고 밥을 줬으니, 경솔했어요. 친구들에게 보여 주려고 시내로 나가던 길에 두 마리가 더 불어나 세 마리가 되었지요. 그때부터 아주 빠른 속도는 아니더라도 수가 불어나기 시작한 거죠."
"아무래도 그것들을 직접 보셨고..." 나는 말하며 테이블에 바싹 다가섰다. 그 와중에도 연주는 멈추지 않았다. "직접 느껴도 보셨고, 두 발굽으로 직접 잡아도 보셨는데..."
"그렇...죠?"
"뭔가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다 싶은 생각은 없었나요?" 나는 물었다. "그것들이 먹이를 먹고 수를 불리는 과정이 너무 비현실적이다 싶은 느낌 있잖아요?"
"저..." 플러터샤이가 이쪽을 곁눈질하며 말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으신 건지 잘 모르겠어요. 제가 다뤄 온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비현실적이란 느낌은 없었거든요."
"동물을 보살피는 데 타고난 재능이 있으시다 들었는데."
"그렇기는 해요. 하지만 패러스프라이트에게는 통하지 않았어요. 저를 아예 없는 것 취급했으니까."
"그게 좀 이상하다 싶은 생각은 없으셨어요?" 나는 짚어 물었다. "이 근처에선 그쪽만한 훈련사도 없다고 하던데요. 친구분이라는 트와일라잇 스파클 씨 말로는, 에버프리 숲에 자생하는 맨티코어가 잔뜩 흥분해 날뛰는 걸 달래신 적도 있고, 악랄한 코카트리스나 적룡까지 맞쏘아보는 걸로 기를 죽이셨다고 하더군요. 심지어 그게 죄다 일 년 동안 일어난 일이라고."
"으음..." 플러터샤이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희미한 미소를 띄우며 발굽을 문지르더니 말했다. "네. 그런 일이 있기는 했죠......"
"그런데도 이 벌레들은 통제가 안 됐었다는 거잖아요?"
플러터샤이가 몸을 떨며 말했다. "완벽한 사람은 없기 마련이잖아요. 못 하는 게 있기 마련인데, 그게 급소인 경우가 잦죠."
"아뇨, 플러터샤이 씨가 뭐 잘못이 있다거나 결점이 있다거나 하면서 들춰내려던 건 아닌데." 나는 말했다. "제가 무슨 말 하는지 아시겠어요? 그쪽이 패러스프라이트를 조금도 통제할 수 없었다는 것, 그 자체로 뭔가 잘못됐다는 거에요. 그쪽이 동물을 다룰 때 명령이나 단순한 행동원리만 이용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 마음가짐과, 감수성에 감복해서 따르게 되는 거죠. 그게 왜 패러스프라이트에게는 먹히지 않았을까요?"
"전..." 플러터샤이가 달달 떨었다. "...잘 모르겠..."
"패러스프라이트는," 플러터샤이를 쳐다보며 말했다. "본질적으로 모순된 존재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원리와 충돌하는 것일 수 있지요. 그래서 어떤 법칙이나 원리 같은 것으로는 말을 듣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고."
"음..."
"생각해 보자고요." 나는 말했다. "눈에 보이는 거라면 뭐든지 집어삼키는 식탐, 어마어마한 증식 속도,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을 정도의 피해를 입히는 점. 어느 하나 말이 되는 게 있나요? 이 중 어느 하나라도 그쪽이 아는 바에 합치되는 게 있었나요?"
플러터샤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각성의 온천 위를 헤엄치기라도 하는 듯, 몸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저도 그게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그... 아무리 봐도 말이 안 되는 것 투성이었거든요. 트와일라잇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몇 달 내내 패러스프라이트 창궐의 뒷수습을 하며 보냈는데, 트와일라잇은 아직 저희가 갚아야 할 빚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트와일라잇이 쓴 마법은 패러스프라이트의 식욕을 감퇴시켰어야 했으니 그 책임이 있는 것이고, 저는 패러스프라이트를 마을로 들여온 것도 모자라 몇 마리를 숨겨놓은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요."
"패러스프라이트 처리는 그냥 마을 밖으로 내몰아 버린 게 끝이었지요?" 나는 캐물었다. "그 난리를 피워 놓았는데, 설마 그것들이 제 발로 걸어 나갔을 리는 없고."
"아뇨... 자기 발로 나가기는 했어요..."
"그래요?"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 오시기로 한 시간 직전에, 패러스프라이트를 꾀여 마을 밖으로 유인해 치우는 데 성공했죠." 플러터샤이가 말했다.
"그랬나요?" 놀라웠다. "뭘 썼나요? 횃불 같은 거?"
"아니징, 바봉!" 핑키 파이가 옆에서 툭 튀어나와 재잘거렸다. "음악 들려줬엉!"
너무 놀라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다. 리라를 가슴 가까이 끌어안고 숨을 고르며 핑키 파이를 쳐다보았다. "이건 또 무슨?!"
"고것들이 발가락이 있었잖아? 신명나는 음악 좀 들려 주면 아마 탭댄스도 능수능란하게 췄을걸?" 핑키 파이가 깔깔깔 웃으며 말했다. 갑자기 웃음을 뚝 멈추더니, 얼굴을 구겼다. "가만 있어 보자, 우리도 발가락 있었으면 탭댄스 출 수 있낭?"
"플러터샤이 씨 오두막인데 그쪽이 여기 왜?!"
핑키 파이가 더 놀란 눈치였다. "플러터샤이네 집이었엉?" 주변을 휘휘 둘러보더니 하는 말. "엉. 글쿠낭. 어쩐지 새 모이랑 담비 꼬리 냄새가 난다 했징!"
"잇몸이는 부엌에 있어. 난로 바로 옆에서 자고 있을 거야." 플러터샤이가 나긋하게 웃으며 말했다. "머핀을 좀 구웠거든. 따뜻한 게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야."
"오키 도키 로키!" 핑키 파이가 정신 사납게 까불거리며 부엌 쪽으로 향했다. "덕분에 페인트볼 시합 잘 보고 왔엉! 잇몸이 봐 줘서 고마웡!"
"응원하는 팀이 이겼니?"
"아닝. 캔틀롯 이글 아이스한테 또 깨졌엉. 하여간 유니콘들이란 그놈의 뿔을 콱..."
"잠깐, 잠깐만!" 핑키 파이를 불러세웠다. "방금 뭐라고 했었지..."
"웽? 플러터샤이네 집에서 담비 꼬리 냄새난다고 했던 거? 히히히히. 족제비 냄새가 고약하다는 걸 돌려 말한 거지로—"
"그거 말고. 패러스프라이트한테 음악을 들려줬다며." 나는 말했다. "대체 뭘 들려 줬길래 그것들을 끌고 마을 밖으로 나갔단 거야?"
"저런...쯧쯧!" 핑키 파이가 이쪽으로 새파란 눈동자를 굴리더니 꺄르륵 웃었다. "패러스프라이트는 음악 듣길 좋아하징! 내 보기엔 정도가 좀 과한 것 같앙! 일인 밴드 하나만 투입해도 형형색색으로 반짝이는 그 해충... 햅충... 햇츙? 들이 다들 정신 팔려서 그 뒤만 졸졸 따라다니게 하는 덴 충분하거등." 핑키가 눈을 모으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정면을 보며 말했다. "암만 봐도 제정신은 아냥! 좀 쪼글쪼글하고 비뚤긴 했지만 그것도 사실 살아 있는 음표 같은 게 아닐까 싶엉. 뭔 말 하는지 대충 알겠징?"
"으어어..."
"뭐 어쨌든 고마웡! 아. 머핀 한두 개만 가져가도 될까?"
"필요한 만큼 가져가도 돼."
"감솨!" 핑키가 부엌으로 달려갔다. "어이! 잇몸이! 식기세척기에서 당장 나와! 못된 악어! 주걱 씹으려면 네 주걱 씹엉!"
"으..." 갈기를 쓸며 리라를 흘끗 보고, 플러터샤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잠시 좀 걸으실까요?"
"이...건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아요." 플러터샤이가 쭈뼛거리며 곁으로 다가섰다. "대체 뭘 찾으시려고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뭘' 찾는 문제가 아니에요." 한기가 몰려들었다. "'누굴' 찾느냐의 문제에 더 가깝죠." 우리 둘은 플러터샤이의 집 바로 근처로 뻗은 에버프리 숲 속으로 걸어 들어와 있었다. 안으로 파고든 지 대략 10분 정도 지난 뒤였다. 아직 해가 떠 있어서, 빼곡하게 우거진 초목에서 드리운 어둠이 머리 위로 뻗어나온 에메랄드 빛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빛살에 희미하게나마 녹아내렸다. "패러스프라이트를 이끌고 들어온 게 대략 여기쯤이죠?"
"으으음..." 플러터샤이는 겁을 잔뜩 집어먹고 새된 소리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제 솔직한 심정으로는, 언제 어디서 다시 패러스프라이트가 나타날지 모르니 무서워 죽을 것 같아요. 그것들이 다시 나타나면 가장 먼저 무너질 곳은 저희 집일 테니."
이가 딱딱 부딪쳐 왔지만 억지로라마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껏 나타난 적 없잖아요. 이상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포니빌을 거의 다 먹어치우는 데 겨우 이틀이 걸렸어요. 이제 몇 달이나 지났는데 숲도, 그쪽 집도, 마을도 전부 멀쩡하잖아요? 이유가 뭘까요?"
"전... 잘 모르겠네요." 플러터샤이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계속 패러스프라이트의 이상한 점을 조목조목 듣다 보니, 패러스프라이트라는 개념 자체가 더 낯설고 혼란스러워지기만 하네요. 전에는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 없었지만, 하트스트링스 씨가 짚고 넘어간 것 중 틀린 말이 하나 없네요. 패러스프라이트 연구로 뭘 찾아내시려는 건가요?"
"사실, 저도 잘 몰라요." 나는 말했다. "그렇더라도, 해답이 바로 코앞에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은 드네요."
"어째서인가요?"
"패러스프라이트란 놈을 꼭 직접 보고 싶거든요."
"네, 네?!" 플러터샤이가 흠칫하더니 덜덜 떨었다. "대체... 대체 왜요? 직접 보셔 봤자 위험하기만 할 텐데!"
"대신 진실을 알게 되겠죠." 나직히 중얼거리며 에버프리 숲의 칙칙하고 어두운 내부를 가만히 응시했다. "전 그저 이해하고 싶을 뿐이에요. 이 발굽으로 진실을 찾아 거머쥘 때까지는 꼼짝없이 그 어떤 답도 가질 수 없는 게 무서워 죽을 지경이죠."
"그럼... 에버프리 숲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시겠다는 뜻인데..."
"그건 감수해야죠." 나는 말했다. "무섭지 않아요. 그쪽도 무서워할 필요 없고."
"몸을 심하게 떨고 계신데, 그건 왜 그런 거죠?" 플러터샤이가 물었다. "어... 실례가 아니라면..."
"무서워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나는 달달 떨며 말했다. "추워서 그런 거지."
"춥다뇨? 아직 더위가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괜찮아요 괜찮아." 추위에 경련하는 사지를 달래며 말했다. 숲으로 들어갈 것은 전혀 상정하지 않은 채 온 터라, 망토를 비롯해 겹겹이 껴입고 들어왔어야 할 옷이 죄다 고스란히 집에 남아 있었다. 여기까지 진행시켜 놓은 것을 초개처럼 버리고 돌아갔다 올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저라고 좋아서 들어온 건 아니에요.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간다면 그 어떤 것도 알 수 없는 게 싫을 뿐."
"참 대단하신 분이세요. 정말."
"그쪽도 매한가지죠." 지그시 웃으며 화답했다.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이 정도 알려 주신 것만 해도 감지덕지죠. 그... 오두막 밖으로 끌어내려고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한 건 사과드리고 싶어요."
"제 얼굴 한 번 보려고 그런 짓까지 해야 하다니, 오히려 제가 죄송하죠." 플러터샤이의 발굽이 땅을 툭툭 칠 때마다 부드러운 흙이 패여 들어갔다. "평범한 페가수스처럼 사교적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대부분은 제 잘못이긴 하지만요. 이제 친구도 여럿 사귀었으니, 제가 무섭다고 일단 거리부터 두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진심도 헤아릴 줄 알아야 하는데......"
"플러터샤이 당신, 참 좋은 사람이네요." 빽빽하게 늘어선 밀림 속으로 파고들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자신을 너무 가혹하게 몰아붙이지는 마세요. 온유하고 오래 참는 그 마음이 동물과 가까이 지낼 수 있는 힘이 되었을 테니까요. 주변 친구들이 그쪽을 좋아하고, 또 존중해 주는 것도 그것 때문일 거에요." 눈 앞에 공터가 하나 나타났다. 몸이 떨려왔지만 애써 웃음지으며 걸음을 멈췄다. "아하. 여기가 좋겠네."
"어..." 플러터샤이가 목을 쭉 빼고 물었다. "뭘 하시려고요?"
잡풀과 조그마한 관목만 우거진 공터 한가운데에, 나무 그루터기가 하나 외로이 서 있었다. 플러터샤이에게 고개를 돌리고 나무둥치를 가리켜 보였다. "잘 보세요. 좋은 무대는 딱 보기만 해도 티가 나거든요." 그루터기를 널찍한 의자 삼아 깔고 앉았다. 옆에 플러터샤이가 따라붙었다. "좋구만. 자, 그럼 패러스프라이트를 이끌고 포니빌을 나왔을 때 연주했다는 음악이 어땠는지 빨리빨리 설명해 주실래요?"
"어..." 플러터샤이가 주변에 늘어선 나무들을 쳐다보며 움찔했다. "핑키 파이가 연주했어요. 아주 신나는 곡이었지요. 박자도 빨랐고... 계속 똑같은 멜로디만 연주했어요. 그런데 그게... 어... 혼자서 악기 여러 개를 썼거든요. 리라 하나로는 따라하기가 좀 힘들 것 같은데..."
"그건 상관없어요." 리라를 눈앞에 띄워 올리며 대답했다. "마침 거기 비견될 만큼 아주 신명나는 곡 하나를 알고 있거든요."
"그래요?"
"자, 긴장 풀어요." 염동력으로 현을 죽 퉁겨 보며 말했다. "어디 자리잡고 앉으시죠. 이왕 따라왔으니 그쪽도 즐겨야 수지가 맞지 않겠어요."
"네..."
가만히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당장 몸을 치받는 한기 너머에 흐르는 한 줄기 곡조를 생각했다. 잠시 뒤, 나는 시원시원하게 일몰 볼레로를 뜯고 있었다. 마력이 담긴 곡조가 그루터기에서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메아리졌다. 숲 한가운데 문득 비어 있던 공터가 이제 흥겨운 연주의 장으로 돌변했다. 온 숲이 흥겨운 소리로 가득 찼다.
"하하하하..." 플러터샤이가 나긋한 소리로 말했다. "재미있는 곡이네요. 잘은 모르겠지만, 왠지 가슴 한켠이 벅차올라요..."
"쉿." 일몰 볼레로의 빠른 박자에 정신을 집중하면서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칭찬은 감사하지만..." 나는 나직하게 말했다. "지금은 집중해야 해요."
"어머. 죄송해요."
"뭐 괜찮습니다." 그렇게 말해둔 뒤 입술을 씹으며 일몰 볼레로 연주에만 골몰했다. 두 번째, 세 번째 연주가 끝나고 네 번째로 치달았다. 매 연주마다 일부러 조금씩 변주를 섞어 두었다. 있어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곡조를 살짝살짝 바꿔 가면 내 '사냥감'을 보다 쉽게 낚아 올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연주가 계속될수록 떨리던 몸이 진정되어 갔으나, 그 자리에 걱정이 새로 들어섰다. 뭐가 일이 되고 있기는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패러스프라이트가 나타나 들이대는 듯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릿속에 오직 음악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연주에 심취해 있는 동안 그 여자가 내 기억을 건드려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를 잊게 만드는 건 아닐까 두려웠다. 볼레로를 진혼곡으로 바꿔 연주하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이 나를 감쌌다. 벌레를 꼬여내는 것보다, 그 기억을 온존하는 게 더 필요할 듯싶었다. 그 때, 플러터샤이가 끼어들었다.
"저기! 하트스트링스 씨!"
"그냥 한 번만 더 퉁겨 보게 잠시만 내버려 두실래요—"
"안 그래도 돼요! 보세요!"
눈을 떴다. 추위만 몰아치는 흐릿한 숲의 이미지 위로, 번개를 담은 공마냥 코앞에 떠다니는 아주 조그마한 보라색 점 하나가 떠올라 있었다. 눈을 몇 번 깜박이자 파스텔톤의 둥글둥글한 형상의 모습이 선명해졌다. 잠자리 날개 같은 날개를 대가리에 매달고 좌우로 흔들거리며 딱정벌레 등딱지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방긋방긋 웃어대는 벌레 한 마리가 나무 사이로 새어 들어온 햇빛을 쪼이고 있었다.
"오호. 너구나." 나는 말했다. 플러터샤이에게 눈짓하자, 그쪽도 눈짓했다. "이놈이군요. 맞죠?"
"설마 지금까지 패러스프라이트를 한 번도 직접 본 적이 없다는 거에요?" 플러터샤이가 소곤소곤 말했다.
뭔가 대답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대답할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름 없는 자들의 땅과 코멧후프 박사의 일지를 비롯해, 차마 현실의 일부라고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끔찍히 미쳐 돌아가는, 그런 상상도 못 할 것들이 머릿속에 문득 떠올랐다. 동네가 패러스프라이트의 습격을 받았다는 때인 몇 달 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가 가만히 기억을 되짚었다. 그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스름 진혼곡의 힘으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걸 명확히 알게 된 것인지... 아니면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하게 된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글...쎄요. 확실하진 않은데..."
그러든지 말든지, 패러스프라이트가 아주 작은 소리로 짹짹댔다. 정말 말도 못 하게 귀엽기는 했다. 그와 동시에, 거의 리라를 떨어뜨릴 뻔할 정도로 본능적인 경계심이 마구 샘솟았다. 어딘지 모르게 이 버러지가 짹짹대는 소리가, 궁창 사이의 영역에 갇혀 아가리에 족쇄를 매단 이름 없는 자들의 울부짖는 소리와 별로 다를 것 없어 보였던 것이다.
"겉보기에는 아주 붙임성이 좋은 것처럼 굴죠." 플러터샤이가 나직하게 말했다. "가까이 다가가면 갈기에 자기 둥지를 틀려고 할 정도로 엉겨붙지요." 그리고는 이쪽을 보고 말했다. "그래서... 어... 이제 한 마리가 나타나기는 했는데, 이걸로 뭘 하실 생각인가요?"
"뭘 할 수 있나 볼까요." 눈 앞을 떠다니는 보랏빛 구체에 시선을 고정하고 말했다. "이거, 잠시만 들어 주세요." 리라를 내밀었다.
플러터샤이가 조심스레 리라를 받았다.
지고 있던 가방을 풀어 내려놓았다. 그 와중에도 패러스프라이트를 향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패러스프라이트는 내내 나를 빤히 쳐다보며 뭐가 그리 좋은지 끝도 없이 헤실거리고만 있었다.
"좋아요..." 숨을 후 내쉬며 떨리는 몸을 애써 가다듬었다. "당신 도움이 필요하겠는데요. 이쪽으로..."
플러터샤이가 안절부절못하는 눈치로 끄덕였다. 그루터기 위에 리라를 살며시 내려놓은 플러터샤이가, 얼굴 앞에 가방을 띄워놓고 패러스프라이트를 향해 다가가는 내 뒤를 쫓았다. 공터를 건너 벌레를 향해 다가가는 짧은 시간이 10년처럼 느껴졌다. 이제 숨 내쉬면 닿을 거리까지 다가갔을 때 플러터샤이를 조용히 불러 말했다. "저 녀석한테 얘기 좀 전해 주실래요." 가방에 달린 주머니를 열어 보여 주었다. "잘 달래서 여기 집어넣어 데려갈 거에요."
"그래요." 플러터샤이가 끄덕이며 말한 뒤, 나긋한 미소와 함께 가만히 발굽을 뻗었다.
패러스프라이트가 날아와 플러터샤이의 발굽 위를 빙빙 돌더니 거기 대가리를 비볐다. 다시 뭐라고 짹짹거리더니 내민 발굽을 타고 통통 튀며 다가가 플러터샤이의 얼굴에 제 면상을 비벼댔다.
"아하하하......" 플러터샤이가 뺨을 붉히며 말했다. "가까이서 보면 이렇게 귀여운 것들인 걸 새삼 또 깨닫게 되네요..."
헛기침하고 말했다. "벌써부터 속아넘어가면 안 돼요." 얼굴 앞에 열어둔 가방을 가리켜 우리의 원래 의도를 상기시켰다.
"흠흠... 그랬죠." 플러터샤이가 패러스프라이트에게 얼굴을 비벼주며 말했다. "해치려는 게 아니란다. 너희가 어떤 아이들인지 좀 더 잘 알고 싶은 것뿐이야. 그러니 하트스트링스 씨를 겁내거나 하지 말아 주렴. 너희가 숲 깊은 곳에 꽁꽁 숨어 버리면 너랑 친해지고 싶은 사람도 친해질 수 없잖니. 그러니 널 데려가도 될까?"
패러스프라이트가 짹짹거리더니 혀를 내밀어 입가를 핥았다. 가만, 버러지 주제에 혓바닥도 있다고? 보면 볼수록 정상은 아니군.
"그럼... 가 보자꾸나." 플러터샤이가 조그마한 구슬처럼 생긴 벌레를 내 가방에 가만히 넣어주며 나긋하게 말했다. "맞지? 널 해치려는 게 아니란다."
그대로 가방을 닫고 조임끈을 단단히 조여 동여맸다. 그대로 가방을 움켜쥐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덜떨어져 보일 게 분명할 웃음이 얼굴에 번졌다. "코멧후프 선생, 당신이 어디로 떨어졌는진 모르지만 똑똑한 후임 들어온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라고..."
"네?"
급히 헛기침하며 가방을 짊어지고 섰다. "아, 신경 쓰지 마세요. 생각대로 되서 기분이 좋아 그런 거니까."
"이제 패러스프라이트도 잡으셨는데, 이 녀석을 어떻게 연구하실 생각이시죠?" 플러터샤이가 물었다. "생체 분석 마법 같은 거라도 쓰실 건가요?"
"아뇨." 나는 말했다. "집으로 가져가서, 지하실에 안전하게 가둬 두고 연구할 생각인데요."
"뭘 어쩌시겠다고요?!" 플러터샤이가 깜짝 놀라 말했다. "그 말은... 패러스프라이트를 포니빌에 다시 들인다는 뜻이잖아요!"
"어... 그렇죠. 그렇게 되죠..."
"그거... 엄청나게 위험한 일인 건 아시죠!" 플러터샤이가 외쳤다. "마을로 도로 데리고 들어가면 일단 눈에 띄는 먹을 만한 것들은 전부 집어삼키기 시작할 테고, 지난번과 똑같이 난리가 날 거라는 건 그쪽도 잘 알고 계실 텐데요!"
"한 번만 믿어 줘요, 플러터샤이." 나는 말했다. "저도 마법은 좀 쓰는 편이라, 몇 달 전 일이 되풀이되는 것쯤은... 충분히 막을 수 있어요."
"그래도..."
"이 녀석을 다치게 하는 일 또한 없을 거에요. 패러스프라이트가 대체 어떤 족속인지 규명하려면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투입해야 할 텐데, 그걸 에버프리 숲 한복판에서 하는 건 불가능해요." 말을 마치고 몸을 돌리자......
...플러터샤이가 날개를 활짝 펼치고 앞을 막아섰다. "저도... 이러고 싶지는 않아요." 얼굴을 찌푸려 보이려는 헛된 시도와 함께 입술을 씹던 플러터샤이가 말했다. "그래도... 그것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해요."
"흠?" 당혹스러웠다.
"숲 밖으로 패러스프라이트를 데리고 나가는 건 용납할 수 없어요. 처음부터 저것들을 제가 들이지만 않았어도 포니빌이 패러스프라이트 떼에 뒤덮여 엉망진창이 되는 일은 없었겠죠. 그 때부터 내내 죄책감에 시달려 왔어요. 이제 그 책임을 져야 해요. 그러니... 저..." 플러터샤이가 이를 악물더니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그가방당장벗어서내려놓으세요그러지않겠다면제가직접할수밖에없어요." 그러더니 풀이 죽어서는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저... 이렇게라도 할 수밖에 없는 걸 이해해 주세요."
나는 아무 말 없이 플러터샤이를 쳐다보다가, 나직하게 한숨을 뱉으며 빙긋 웃었다. "세상 그 누구라도 당신 행동을 이해 못 할 사람은 없을 거에요.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것뿐이니."
"그럼..." 플러터샤이가 침을 삼켰다. "제가 해 달라는 대로 하실 건가요?"
"그쪽 제안대로, 여기서 훑어보기나 하는 걸로 하죠." 나는 말했다. "원하는 만큼 연구하지는 못하겠지만, 계속 연주해 주면 저 녀석도 함부로 멀리 달아나지는 않을 것 같으니까... 그 동안 어떻게 시간은 벌겠지요." 몸을 돌려 나무둥치를 가리켰다. "말 나온 김에, 저기 제 리라나 좀 가져다 주실래요? 저게 있어야 연주를 하든지 말든지 할 테니..."
"아..." 플러터샤이가 긴장을 풀고 날개를 접었다. 그루터기를 쓱 보고 이쪽을 보더니 말했다. "그러죠." 플러터샤이가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는 종종걸음으로 리라를 놓아둔 쪽으로 다가갔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조금씩 멀어져 가는 플러터샤이의 뒤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10피트, 20피트, 30피트......
플러터샤이가 리라를 집어들었다. 이쪽으로 몸을 돌리려는 순간 몸이 움찔하더니 굳어졌다. 숨결이 입김 되어 시야를 가리웠다. 뿌연 장막이 걷힌 너머에는 덜덜 떨면서 사방을 돌아보는 플러터샤이가 있었다.
"응...?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던 거람...?"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세상 당당히 몸을 곧추세우고 다가서며 말했다. "이야, 안녕하세요!"
"힉!" 이쪽을 돌아본 플러터샤이가 흠칫 놀라 튀어올랐다. 그 통에 리라를 떨어뜨릴 뻔했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누구시죠?!"
"아이구, 이거 죄송하게 됐네요." 숨이 막혀 왔다. "놀래켜 드려야겠다 싶은 생각은 없었는데 실례했군요. 제코라 선생 댁에 볼일이 있어 가던 참인데, 글쎄 리라를 어디서 떨어뜨렸지 뭐에요." 플러터샤이의 발굽을 흘끗 보고, 벙긋벙긋 웃으며 말했다. "오호! 그쪽이 찾으셨나 보네요!"
"어어..." 좀 진정된 듯, 떨리던 몸을 가라앉힌 플러터샤이가 발굽에 쥐어진 금빛 리라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네요..."
"아이구, 이걸 어떻게 보답해야 하나! 참 친절하시기도 하지!" 쪼르르 달려가 뿔을 밝혀 리라를 집었다. "세상에, 뿔도 뗐다 달았다 하는 거였으면 분명 어디 가서 잃어버렸을 게 뻔하다니까요." 패러스프라이트를 넣어 둔 주머니의 반대쪽 주머니에 리라를 집어넣었다. "그나저나, 오늘 날씨도 참 좋은데 에버프리 숲까진 무슨 일로 걸음하셨는지 모르겠군요. 산보라도 나오셨나요?"
"그..." 플러터샤이가 뺨을 붉히며 낯설기 짝이 없을 에버프리 숲의 정경을 가만히 쳐다보고 말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보통은... 숲 속까지 들어오진 않으니까..."
"저런, 그건 아깝군요. 야생 동물이랑 잘 지내실 것 같은데."
"아, 실은..."
"보자, 제코라 선생 댁은 좀 나중에 가도 될 일이고." 떨리는 몸을 애써 숨기며 씩 웃어 보였다. "숲 바깥까지 데려다 드리죠. 아무래도 포니빌 사람은 아니다 보니까 좀 더 뒤적여 보고 싶거든요. 뭐, 혼자 가시겠다면야 어쩔 수—"
"아뇨!" 플러터샤이가 당황한 눈치로 소리쳤다. 좀 움찔하더니, 보다 차분한 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저, 괜찮으시면, 같이 가 주세요."
쿡쿡 웃으며 플러터샤이의 오두막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괜찮다니요, 제가 고맙죠 뭘..."
뿔을 밝혀 내 오두막집 한쪽 구석에 설치해 둔 높은 선반 위에 올려두었던 유리병 하나를 집어 내렸다. 안에 넣어 둔 패러스프라이트가 둥그스름하고 투명한, 밀폐 공간 너머로 보이는 세상을 향하여 벙싯벙싯 웃어 보였다.
나는 한숨지으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집 한가운데에 앉아 있던 앨이 유리병에 가둬 둔 패러스프라이트를 빤히 쳐다보며 영 심기가 불편한 듯 꼬리를 꿈틀거렸다.
"조그만 벌레 한 마리 잡겠다고 병 깨뜨릴 생각은 마라잉.", 하고 말했다. 가방을 끌러 내려놓은 뒤 잡다한 물건을 방 구석으로 몰아넣으며 중얼거렸다. "너네같은 고양잇과 눈에 맛있는 간식으로 보일 건 누나도 아는데, 저게 거꾸로 널 잡아먹는 꼴은 별로 보고 싶지 않구나. 그랬다간 자기혐오에 빠지고 말 거야."
앨이 조그맣게 야옹 하고 울더니 책꽂이 아래 칸 쪽으로 다가가 병을 빤히 쳐다보았다.
앨을 방 한가운데로 살살 밀어냈다. "하기사, 그렇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자기혐오적인 사람이긴 하지." 고양이 옆에 쪼그리고 앉아 등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그러고 있으면 내가 선량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 되는 듯한 기분이 든다. "플러터샤이는 최선을 다해서 날 도와 준 죄밖에 없는데, 그 은혜를 거짓말로 갚다니 말이 되니 이게?" 나는 한숨지었다. "나도 해야 할 게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지만, 목적이 아무리 장대해 봤자 모든 수단을 정당화해 주는 건 아니잖니?"
앨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저 가만히 앉아 있다가, 침대 쪽으로 어기적어기적 걸어가며 내 엉덩이를 스치고 지나간 것뿐이었다. 앨의 털이 스칠 때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나는 자리에 그대로 앉아 병에 가둔 패러스프라이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언젠가 이 저주를 끝내 벗어던지는 날이 오면, 트와일라잇이나 애플잭, 모닝 듀... 같은 사람들에게 내 잘못을 사과할 날이 오기는 올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좀 편해지거든."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젠 플러터샤이에게도 사과해야 하겠네." 나는 몸을 떨며 후드 소매를 매만졌다. "당장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까, 그저... 계속 날 기억해 줄 친구만 있으면 좋겠다 싶거든. 내가 자기들을 그렇게 이용한 걸 알면서도 그 사람들이 내 친구가 되어 줄까?"
침대에서 희미한 야옹 소리가 들렸다. 이불 속으로 들어간 앨이 공처럼 몸을 말고 누워서 하품을 하고 있었다.
고양이를 보고 씩 웃으며 말했다. "네 기억 속에도 남지 못한 채 밥 주는 그림자로만 남아 있는 신세지만, 그 신세를 청산하고 나면 너만은 내 친구가 되어 줄까? 하기사, 귀신이랑 한 집에 살던 세월이 외롭지 않을 리 없다만."
앨은 아무 말도 없었다. 잠든 몸 사이에서 들숨과 날숨이 교차할 때마다 오렌지색 몸통이 부풀었다 가라앉기만 반복했다.
나는 불쑥 말했다. "유령 생활도 너무 오래 했어. 원래대로 돌아가려면 이렇게나 끔찍한 일들을 해야 하는구나. 당장 그 생각만 해도 미쳐 버릴 지경이야." 다시 유리병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아... 코멧후프였으면 어떻게 했을까."
"그년은 제 서방을 사랑하오. 머나먼 그대를 찾아 헤매는 나는 한 줄기 곡일지어니. 불꽃과 사이렌 소리. 이제 달이 사라졌으니 그것들이 온 우주를 대적할진저. 삼라만상이 곧 이름 없는 것들이요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일지어다. 진실은 오직 위대한 어머니의 태중에 있으니. 잡아당겨 드러내자니 끈이 끊어져 있도다. 세상은 한 곡의 노래로 시작하여 한 곡의 장송곡으로 끝날지어다. 산산이 부서진 곡의 파편이로다. 고적은 궁창을 가르고, 이제 노래를 갈라놓는다. 삶의 종착지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것. 그 여자에 대적해야 하리라. 세상의 아름다움과 사랑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 내 모든 것을 포기한 끝에 내 숨결까지도 내놓아야 할지라도 나 그대를 찾고야 말 것이오. 이제 어둠의 심연 속으로 들어가 숨으리. 나이트브링어가 있는 한 나는 쓰러지지 않소. 쓰러지지 않는 한 그대와 내가 다시 세상 속으로 돌아갈 길이 있을 것이오. 그 여자의 노래를 산 자들의 귀로 듣게 하겠소. 그대 내 귀를 갖고 노는 것을 즐겨했었지. 그대 나를 기다려 주기만 할 요량이면 내 반드시 그대를 찾아낼 것이오. 그년은 제 서방을 사랑했지만 끝내 노래를 빌어 그를 밀어내고 말았소. 나는 그 여자가 아니오. 비록 그년의 마각에 사로잡힌 몸이나마 거기 굴복하지는 않을 거요. 몸이 살아서 다시 노래하니, 노래할 수 있음은 곧 존재함이요, 존재함이란 기뻐함이며 기쁨은 다시 울음에 이르니. 황홀하기 이를 데 없는 발라드가 어느 순간 비통한 만가로 전환될 수 있음이며 그 또한 언제든 아름다운 연가로 돌아설 수 있소. 우주는 스스로 돌고 도는 것이므로, 혼돈이 지배했던 곳에서 다시 꽃이 필 수 있으니. 그년은 제 서방을 사랑했으나 그는 떠나야 했소. 떠난 자는 이미 포기하고 죽어가고 있으나, 나는 돌아갈 길을 찾아 헤매고 있소. 나 돌아갈 길을 찾아낼 때 그 또한 내가 찾은 길을 따라 돌아갈 것이니. 내 노래를 알고 무가 될지어다. 서방 되는 이여, 내 꼭 찾아가리다. 찾아내고야 말 것이오. 무슨 일이 있어도......"
몇 번 눈을 깜박였다. 발굽을 뻗어 눈을 문질렀다. 침대에 앉은 나는 신음했다.
"이제 그만할까." 옆자리에 따끈따끈한 털뭉치 하나가 둥글게 몸을 말고 엎드려 있었다. 벽난로 안에서 가만히 타오르는 화톳불에 기대 앨을 흘끗 쳐다보았다. 천 년 묵은 일기장을 가리키며 물었다. "넌 좀 알아듣겠니?"
앨은 아무 말도 없었다. 몇 번 몸을 꿈틀대다가 기지개를 켜더니, 다시 내게 기대어 몸을 말고 웅크렸다.
책장 높은 곳에 올려둔 유리병 안을 돌아다니는 패러스프라이트를 쳐다보았다. "암만 봐도 코멧후프 아저씨가 '유령이 된다'는 걸 너무 직설적으로 실행한 게 아닌가 싶단 말이지. 그런다고 그 여자한테 무슨 일이 생겼을 것 같진 않고. 일단 이름 없는 자들의 영역에 사로잡힌 이상 신이든 아니든 살아서 거길 빠져나올 수는 없을 거야. 이름 없는 자가 된 이상 밖으로 나올 생각은 꿈에도 꿀 수 없게 되거든."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니, 평생 되찾을 수 없을 사랑을 슬퍼하며 울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는 거야. 남자친구가 없었던 게 어쩌면 그나마 잘 된 일일지도 모르겠네......"
난롯가에서 타오르는 잔불이 딱딱대는 소리가 문득 고요히 내려앉은 적막을 뚫었다.
"에휴, 내가 또 뭐래니." 말을 씹어 뱉었다. 고개를 돌려 내 침대에서 하염없이 뒹굴거리는 털뭉치를 보고 빙긋 웃었다. "아하, 앨이 누나 남자친구야?" 몸을 숙여 뺨을 비볐다. 처음에는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수염으로 내 입가를 건드리며 귀찮다는 듯 야옹 울었다. 깔깔 웃으며 얼굴을 더 가까이 가져갔다. 그러는 와중에도 내 시선은 패러스프라이트를 향해 있었다. "고적은 궁창을 가르고 이제 노래를 갈라놓는다, 라......" 코멧후프가 주절거려 놓은 소리를 입으로 주워섬겼다.
무엇인가 머리에 떠올라서 절로 표정이 굳어졌다.
"노래라..." 중얼거리며 패러스프라이트를 올려다보았다. 볼레로에 맞춰 리듬을 타던 녀석의 보랏빛 몸뚱이가 떠올랐다. "저놈도 음악소리를 듣고 나타났단 말이지. 동네를 아작내던 패러스프라이트도 음악 소리를 따라 에버프리 숲으로 들어갔다고 했어. 심지어 그 핑키 파이가 보기에도 흡사 살아 있는 음표 같다고까지 했지..."
나는 처음으로 패러스프라이트를 향한 시선을 떼어 불빛에 젖은 방 안을 휘 둘러보았다. 그 때 내 입으로 뱉은 말이 앨을 향한 것이었는지...... 혼자 중얼거리던 것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코멧후프가 셀레스티아 공주님을 찾아가 야상곡을 연주했었지. 그 반작용으로 공주님께서 어마어마한 마력 폭발을 일으키셨지만 없던 일Unsung이 되어 버렸단 말이야. 사로스 첩자가 숨어들어 왕궁 어느 한 구역에 폭탄을 심어 놨다는 식으로 완전히 덮어씌워졌어. 이름 없는 자들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걸 감추기 위해서였다고 치면, 사실을 왜곡한 게 누가 되느냐가 문제구만. 그 여자 짓일까, 아니면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 하신 걸까. " 침을 삼키며 패러스프라이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알리콘은 본디 위대한 어머니 그 자체였던 성가에서 갈라져 나온 존재. 위대한 어머니는 최초의 알리콘. 창조의 노래로 그 형상을 갖추고, 다시 노래를 네 갈래로 쪼개어 자기 자신 외에도 셀레스티아, 루나, 그 여자, 총 셋을 더 만들어 냈다고 하니. 이 넷의 권능은 위대한 어머니의 첫 번째 노래에서 비롯되는 바...... 천지창조가 마무리될 때쯤에는 첫 번째 노래도 이미 여기저기 뜯겨나가 넝마가 되었을 터."
앨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스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내가 보고 있는 게 패러스프라이트가 맞나?" 나는 혼자 물었다. "아니면, 노래의 한 파편을 보고 있는 건가. 노래라고 치면...... 그 노래의 주인은 누구지?"
"음, 아무래도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 유구한 세월을 살아오신 건 사실이니까요." 다음 날. 나는 트와일라잇 스파클을 찾았다. 우리는 나무 테이블 위에 책 한 권을 띄워놓고 각자 자리로 향했다. "그 중 대부분은 캔틀롯에 기거하셨지요. 캔틀롯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셨으니, 몇 곡 정도 지어 남기신 게 새삼 놀랄 일은 아닐 테죠."
"그 중에 찾아야 할 게 하나 있는데..." 우리가 골라잡은 테이블은 도서관 정중앙에 있었다. 나는 말하며 트와일라잇 옆자리 스툴을 당겨 앉았다. "공주님께서 몇 곡이나 쓰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으으으음...... 그리 많진 않죠."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천장을 올려다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오히려 적은 편이라고 하는 게 맞겠죠. 대강... 오천 곡 정도?"
몸을 떨며 한숨을 토해냈다. "뭐, 할 일도 없었으니 잘 됐군요."
"아하하. 공주님께서 쓰신 곡에 이 정도로 관심을 보인 사람은 하트스트링스 씨가 처음이시라, 저도 궁금하네요. 혹시 사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지금 쓰시는 곡에 접목하신다거나, 깊이 연구해 보실 생각이신가요?"
"그냥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라고만 해두죠......"
트와일라잇이 잽싸게 가까이 다가서며 빙글빙글 웃었다. "저도 도와 드릴게요!" 그러더니 눈을 찡긋했다. "그런 일이라면 질리지도 않고 끝까지 해낼 수 있으니까."
"허. 그건 몰랐네......"
"네?"
"흠흠." 트와일라잇을 보고 말했다. "안 그러셔도 돼요. 제가 뭐라고 오천 곡씩이나 되는 걸 뒤적이는 일에 그쪽 시간을 내달라고 그래요."
"흠, 그럼 대략적으로라도 어떤 걸 찾고 있다 정도만 알려 주세요. 그 정도만 돼도 수고를 많이 줄일 수 있을 테니까요."
숨을 깊이 내쉬며 나직하게 말했다. "벌레..."
트와일라잇이 눈썹을 치켰다. "벌레요?"
"멍청하게 헤실헤실 웃고 다니는 귀여운 벌레인데, 식욕이 장난 아닌 것들이죠." 나는 말했다. "눈은 초롱초롱하고, 잠자리 날개가 달렸는데......"
"호오." 트와일라잇이 그런 게 다 있냐는 시선을 던졌다. "그럼, 일반적인 교향곡을 찾으시나요? 아니면 자장가?"
"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공주님께서 자장가를 쓰셨을 리는 없을 텐데."
"아뇨. 많이 쓰셨어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이 절로 나왔다. "네?"
"이 책만 해도 한 부분을 온전히 할애해서 공주님께서 쓰신 자장가를 실어놓고 있죠." 테이블에 놓아둔 두꺼운 책을 들어 몇 페이지를 휙휙 넘겨 보이던 트와일라잇이 말했다. "옛날에는 집집마다 아이들에게 불러 주는 자장가가 있었죠. 대부분은 공주님께서 지은 자장가에 뿌리를 두고 있어요. 요즘 불리는 자장가도 상당수가 그 파생형이고요. '조용 조용, 자장 자장Hush Now, Quiet Now'만 해도 한 번쯤은 들어 보잖아요?"
"되게... 오랜만에 듣네요."
"아 그렇지. 이건 비밀인데..." 트와일라잇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씩 웃으며 조용히 말했다. "스파이크한텐 얘기하지 마세요. 실은 저도 몇 번 불러 준 적이......"
"야! 그만해!" 얘기가 나오자마자 멀찍이서 누가 소리쳤다. "부끄러워 죽겠다 정말!"
"히히히... 에이, 뭘 그래, 스파이크! 하트스트링스 씨가 아무한테나 얘기하고 다닐 사람 같니?"
"안녕! 후드 멋지—"
"어어, 감사." 트와일라잇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럼 공주님의 자장가 중에 제가 말한 귀엽고 둥글둥글한 벌레 얘기가 나오는 게 혹시 있을까요?"
"뭐, 그건 지금부터 찾아봐야겠죠?"
두 시간이 지난 뒤에도 우리는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 지은 자장가를 실어놓은 부분을 붙잡고 씨름하고 있었다. 트와일라잇 스파클은 악보를 휘휘 넘겨 가며 본인 입으로 말한 '질리지도 않고 끝까지 물고 늘어질 수 있다'는 말을 행동으로 훌륭히 증명해 냈다. 나로 말하자면, 가면 갈수록 잠깐 눈 붙이고 싶다는 생각이 커져만 갔다. 대놓고 하품을 해대면서 겨우 잠들지 않고 버티는 게 고작이었는데, 그나마도 언제 다시 저주가 몰려와 겨우 만들어 둔 트와일라잇과의 연결을 도로 끊어내지 않을까 싶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자료실 구석에 내려앉은 그림자가 슬슬 눈꺼풀 안으로 조심스레 침투하기 시작할 때쯤, 옆에서 트와일라잇이 어깨를 쿡쿡 찔렀다.
"하트스트링스 씨. 이것 좀 보실래요. 뭘 좀 찾은 거 같은데."
"뭘... 찾으셨다고요...?"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밀어 올리며 말했다.
"이거에요." 트와일라잇이 보라색 발굽을 들어 책 끄트머리의 먼지 범벅이 된 페이지 위에 적힌 짧은 곡 하나를 가리켰다.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 지으신 것들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곡 중 하나라고 하는군요."
"어디 봅시다..." 몸을 일으켜 악보 맨 위를 쓱 훑어보았다. "예쁜 스프라이트Sprites가 줄을 지어 나아가네, 라. 허어, 그냥 귀여운 수준이 아니었나."
"읽어 보시겠어요?"
"원하신다면야..."
예쁜 스프라이트가 줄을 지어 나아가네
스타 블리스Star Bliss에게
잘 자라, 우리 블리스
해 진 곳에 아침 안개 피어날 적에
우리 아가 눈 뜨고 어울려 놀 때
예쁜 스프라이트 줄을 지어 나아가네
두 눈에 숲의 빛 가득 담고
우리 아가 걱정거리 먹어 없애리
푹 자라, 우리 블리스
날개 단 요정님들 햇빛 받아 춤출 적에
온 누리 걱정 없이 깊이 잠드네
우리 아가 근심 걱정, 잠 깨우는 유령과
우리 아가 싫어하는 것들 모두 갖고
아침이 오기 전에 모두 먹어 없애리
사랑하는 우리 아가
예쁜 스프라이트가 벙싯벙싯 웃을 적에
우리 아가 잊지 말렴
언젠가 뒷동산에 달 걸려 올 때
숲 속의 요정님들 우리 잘 때 자지 않아
우리 잠든 사이 청소를 나오신다고 말해 주렴
"자, 어떤가요?"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말했다. "찾으시던 게 맞나요?"
"글쎄..."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좀... 되게 반복적인데요."
트와일라잇이 쿡쿡 웃었다. "메어차르트 자장가는 아니니까요. 반복적이긴 하지만 공주님께서 실수하신 건 아닐 거에요. 특정한 청자를 설정하고 쓴 곡 아니겠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나는 말했다. 노래를 선물받은 사람의 이름에 눈이 갔다. "그나저나, 스타 블리스는 누구죠?"
"아..." 트와일라잇이 보다 차분하고 진중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 내제자를 받기 시작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슬하에 드신 분이니 저에게는 대선배가 되시죠.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어둠 강림의 시대 수준이 아니라 디스코드가 전란을 일으키기도 전 시대를 사셨던 분이신데 그 때만 해도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는 영재를 제자로 받아들이는 수준을 넘어서, 아예 본인 호적에 올려 입양하셨답니다. 턱수염 스타스월도 공주님 보시기에는 어린 아들 정도였죠. 공주님의 보살핌도 여염의 어머니들과 다르지 않아서, 애정과 헌신을 담아 돌보셨지요. 내제자 하나하나마다 따로 자장가를 써서 부르셨을 정도니까요."
"그래서 많을 수밖에 없었군요."
"그렇죠."
"그럴진대, 만장은 또 얼마나 많이 있을지..."
트와일라잇은 그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헛기침을 해 목을 닦았다. "한 가지 여쭤 볼 게 있어요." 자장가를 가리키고 물었다. "혹시 이거 읽고 뭐 생각나시는 거 없나요."
"글쎄요..." 트와일라잇이 악보를 쳐다보며 말했다. "생각해 보니..." 그녀는 놀란 눈치였다. "허. 잠깐, 그럴 리가..."
"뭐든 말씀해 보시죠."
트와일라잇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억측일 가능성이 높아요. 그나저나..." 트와일라잇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그것들이 처음 발견된 게 일 년도 안 된 일이고, 걱정거리를 먹어 없앤다는데 동네 절반을 먹어치웠으니 닮은 구석이 전혀 없죠. 에휴, 혹시 그 때 포니빌에 계셨던가요?"
몸이 떨렸다. "있었던 것 같긴 한데 기억에는 없네요."
"네?"
"혹시..." 트와일라잇을 향해 정중한 미소와 함께 물었다. "글쎄...... 혹시 한 일 주일 정도 빌려 가도 폐가 되지는 않겠죠?"
빌려온 책을 침대 위 한쪽에 던져두었던 코멧후프 박사의 일지 위로 올려두었다.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창 너머로 저무는 태양이 사방을 붉게 물들여, 내 골방도 붉게 젖었다. 앨은 분위기가 이상하다 싶었는지 조용한 걸음으로 빙빙 돌았다. 내 쪽을 보고 몇 차례 야옹 울었는데, 못 들은 체했다.
자리에 가만히 주저앉아 두 권의 책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 입가로 발굽을 가져갔다. 높이 올려둔 패러스프라이트와 셀레스티아 공주님의 자장가가 실린 자리를 표시한 책갈피 사이로 시선이 계속 오갔다. 나는 한동안 말없이 이 둘을 가만히 번갈아 보고만 있었다. 앨이 문득 야옹, 하고 울어 침묵을 깨뜨렸다.
그제야 입을 열었다. "어스름 진혼곡은 일종의 완충장치... 현실에 존재하는 것과 이름 없는 자들의 영역에 걸쳐 있는 것을 구분 가능하게 해 주는 곡." 나는 계속 말했다. "코멧후프가 궁창의 야상곡을 기억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어. 이쪽은 그 덕에 패러스프라이트를 잊지 않고 있지." 마른침을 삼키며 유리병에 가둔 패러스프라이트를 쏘아보았다. "나이트브링어가 없을지 몰라도, 위대한 어머니가 남겼다는 곡의 단편만큼은 내 머릿속에 있는데, 아직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 길은 없는 게 문제구만. 잊지만 않는다면야 뭔가 방책이 있을 수도 있는 일......"
앨이 다가와 엉겼다. 부어준 밥을 이미 다 먹어치워서 밥그릇은 비어 있었다. 그러니 이 녀석이 달리 더 바라는 것이 있을 리가 없었는데, 몸을 비벼대는 한편 목으로는 가르릉거리며 뭔가 요구하고 있었다.
앨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머리를 몇 번 쓰다듬고 귀를 긁어주었다.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휴. 페눔브라가 아저씨 귀 갖고 놀기를 좋아했다던데..." 나는 한숨지었다. "자기가 사랑하던 사람을 포기할 수 없어서, 두 번 다시 그 사람의 사랑을 받을 수 없어서 미쳐 버린 게 아니었을까......"
목에 무엇인가 응어리졌다. 앨을 보고 있자니 눈물이 차올라서 견딜 수 없었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며 몸을 떨었다. 낮은 목소리가 나왔다.
"이러고 앉아 있을 수는 없어. 계속 나아가야 해. 반드시..."
집을 나왔다. 가방에 필요한 물건들을 쓸어 넣어 짊어졌다. 리라의 무게와, 패러스프라이트가 명랑하게 까불고 노느라 녀석을 가둬놓은 유리병이 꿈틀대는 느낌이 그대로 전해졌다.
문 밖으로 나서기 전에 현관께에서 잠시 어물거렸다. 어스름이 깔리우는 가운데 발굽이 움찔거렸다. 한 줄기 들숨과 함께 몸을 돌려 문을 밀었다. 현관문이 삐걱대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이제 앨은 집 밖으로 나갈 수도 있었고, 아주 나를 떠나 사라질 수도 있었다. 나도 알고 있었다.
조용하고 무거운 걸음으로 집을 돌아 지하실 쪽으로 향했다.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가는 대신, 잠시 걸음을 멈춰 어두워져 가는 숲 속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비치는 별빛이 어둑한 형상에 가리워 더욱 흐릿해졌다. 밤의 만장을 처음 연주한 그 날 밤, 나는 한밤중에 웬 숲 한가운데로 날려간 채 깨어났다. 흠뻑 젖어 추웠고, 추워서 몸이 떨렸으며 머리는 공포에 지배되어 있었다. 그때를 적어놓은 일기를 다시 읽어보면, 내 머릿속에 있어야 할 기억보다 내가 기억하는 내용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을 알 수 있다. 그 여자가 뿜어낸 목소리가 내 존재감을 흩어놓은 것이다. 내가 궁창 사이의 세상, 이름 없는 자들의 영역에 발을 들였을 때 아마 나 같은 필멸자의 눈에 보여선 안 될 끔찍한 진실을 보았기 때문에 내 기억을 지워놓은 것이겠지.
셀레스티아 공주께서 지으신 노랫말로 가리운 진실이 대체 얼마나 무시무시하기에 그리 해서라도 숨겨야 했을 것인가. 내가 이를 알게 되면 코멧후프가 그리된 것처럼 나 또한 미쳐 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코멧후프가 끝끝내 얻지 못한 자유를 내게 안겨주고 집을 향한 귀로를 열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오두막을 뒤돌아보았다. 딱 보기 좋을 정도로 노르스름한 앨의 털과, 내 옆에 붙어 자며 전해주던 온기와 애정을 자장가 삼아 잠들던 나날들을 마지막으로 다시 생각했다.
더 기다리고 자시고 할 이유가 없었다. 지하실 계단을 타고 내려가 등잔에 불을 밝히고 좁은 방 안에 들어서서, 철제 받침대 옆으로 스툴을 끌어당겨 앉았다. 리라를 받침대에 올려두고 새 악보를 꺼내 밑에 깔았다. 내가 찾아낸 야상곡 전부 머릿속에 들어 있기는 했으되, 무엇을 골라 연주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셀레스티아 공주님이 지었다는 '예쁜 스프라이트가 줄을 지어 나아가네'가 흔들리는 등잔 빛을 받았다. 이제 머릿속으로 구상해두고 있던 것을 실천에 옮겨, 온 세상 불합리의 집약체인 패러스프라이트의 아가리에 쑤셔 넣어야 할 때였다.
유리병을 집어들었다. 안을 들여다보자 패러스프라이트가 빙글거리며 이쪽을 맞쏘아보았다. 그저 행복하고 즐거이 날개를 파닥거리고 있는 품이, 흡사 어느 면에서는 꼬마와 닮아 있었다. 세상이 행복하고 즐거운 곳으로만 보이는 그 나잇대에 영영 주저앉아 버린, 그런 꼬마. 하긴 자장가가 살아 움직이는데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이다.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짓을 나는 저질렀다. 주둥이를 막아 둔 마개를 비틀어 뽑아 패러스프라이트를 꺼내 준 것이다. 조그마한 버러지가 지체없이 밖으로 나와 짹짹대며 지하실을 한 바퀴 돌아보더니, 매달아 둔 등잔 주위로 빙글 돌고 내 앞으로 날아와 즐거운 표정으로 헤실거렸다.
나는 세상 모든 이치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듯한 버러지를 쏘아보며 가방을 뒤져 발굽에 잡히는 대로 사과 몇 덩이를 집어 내밀었다. 동네 시장에서 사 온 것들이었다. 발굽을 가볍게 휘둘러 지하실 중앙에 새빨갛고 광이 반들반들한 과실을 굴려 한데 모아두고, 녀석이 어떻게 하나 가만히 지켜보았다.
오래 기다릴 것도 없었다. 패러스프라이트는 굶주린 몸을 이끌고 흡사 회오리바람을 일으킬 듯한 속도로 새빨간 과실을 향하여 급강하했다.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어이가 없어질 정도로 아가리를 쩍 벌리더니, 절로 구역질이 날 정도로 불쾌하기 짝이 없는 소리와 함께 사과를 아귀아귀, 꾸역꾸역 처먹어대는 것이다. 버러지가 주둥이를 벌리고 지나간 자리에는 심도 꼭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 조금 전에 비하면 분명히 살이 토실토실하게 오른 패러스프라이트가 잠자리 날개를 흔들어 지하실 한가운데로 날아올랐다.
나는 그저 조용히, 버러지가 어떻게 나오는가 지켜보고만 있었다.
둥둥 떠다니던 놈이 순간 휘청하더니, 어디 집중할 대가리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어디 정신을 집중하기라도 하듯 눈을 내리깔았다. 보라색 공과 같은 몸뚱이가 출렁거리다가, 기침을 캑캑 토해내며 사지를 마구 움직였다. 버러지가 아가리를 벌리고 작은 공 모양의 토사물을 뱉어냈다. 일반적인 구토물이라면 게워내자마자 땅에 떨어져야 마땅할 텐데, 놈이 쏟아낸 토사물은 액체도 아닌 것이 어느 한 지점에 엉겨붙은 모양새인데다 쏟아지지도 않고 공중에 떠 있었다. 눈 깜박할 새에 한 쌍 날개가 튀어나오며 토사물의 갈색 껍질을 찢어발겼다. 두 번째 패러스프라이트는 밝은 녹색이었다. 녀석은 제 부모 겸 형제인 첫 번째 패러스프라이트 곁을 즐거운 표정으로 맴돌았다.
다시 느릿느릿 발굽을 뻗어 가방에 집어넣었다. 사과 두 개를 더 꺼내 던졌다. 벌레 둘이 과육을 향하여 날아드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리 큰 것은 아니었지만, 사과 한 덩이를 통째로 집어삼키는 기행을 보여 주더니, 다시 공중으로 날아올라 좀 전처럼 휘청댔다. 패러스프라이트 두 마리가 동시에 신선하기 짝이 없는 토사물 두 덩이를 토해내며 푸르르 소리를 내뱉었다. 좁은 지하실에 소리가 메아리졌다. 토사물에 비해 밝고 화사하기까지 한 상판을 자랑하는 패러스프라이트 두 마리가 껍질을 찢고 나오며 두 마리가 네 마리로 늘어났다.
버러지들에게 먹일 사과는 아직 더 있었다. 나는 휙휙 집어던지듯이 사과를 꺼내 굴려주었다. 놈들 쪽으로 굴러간 사과는 몇 초 지나지 않아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고, 벌레들은 처먹은 만큼 두 배, 세 배로 그 머리 수를 불리웠다. 얼마쯤 지나고 나니 굳이 먹이를 줄 필요조차 없어졌다. 어느 정도 수가 불어나고 나니, 자식이 부모를 잡아먹으면서 수를 더욱 불려 가기 시작한 것이다. 패러스프라이트가 지하실을 가득 채우고 날갯짓하는 윙윙 소리가 귓가에 울리기 시작할 때쯤, 리라를 집어 뿔을 밝히고 어스름 진혼곡의 첫 마디를 퉁겼다.
스스로 세를 불리는 버러지의 무리에 어스름 진혼곡이 섞인 모습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이것들은 저희도 모르는 사이 날개 움직이는 간격과 소리를 정돈해 타악기와 같이 박자를 맞추기 시작했는데, 소음이 조금 전에 비해 잦아들었을지는 몰라도 어디선가 불 리 없는 바람이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벌레 떼가 내 주변을 맴돌며 때때로 짹짹거리는데, 좁아터진 지하실에 갇힌 주제에 한여름의 휴가를 즐기는 듯 방긋방긋 웃는 꼴이 참으로 볼 만했다. 어스름 진혼곡이 계속해서 다음 마디, 다음 마디로 나아갈 때마다 패러스프라이트 무리가 멜로디에 맞춰 비행 경로를 바꾸고 저마다 춤추며 어떤 패턴 같은 것을 드러냈다. 세상이 버린 비곡을 들으니 온몸에 짜릿한 자극이라도 오는지, 하나같이 눈을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 때는 그것들이 내 청중이구나 싶었다. 이제 이것들이 잊어버린 것을 다시 가르쳐 주어야 할 때, 본질적으로 자연법칙에 반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해 주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어스름 진혼곡의 잔향으로 현이 아직 떨리고 있는 동안, 셀레스티아 공주님의 '예쁜 스프라이트가 줄을 지어 나아가네' 악보를 신속히 살폈다. 느릿느릿한 박자에, 가슴 벅찰 정도로 단순한 멜로디. 연주해야 할 나까지 끌어당겨 재우고 싶어하는 듯한 인상이었다.
어스름 진혼곡의 권능이 슬슬 나타날 때가 되자, 나를 둘러싸고 빙빙 돌던 패러스프라이트 떼가 일거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내 평생 본 것보다도 더 눈을 휘둥그레 뜬 버러지들이 그저 제자리에 떠 있기만 한 것이다. 하나같이 거북이 기어가는 것처럼 느릿느릿한 속도로 날개를 치는데, 어느 하나 어긋난 놈 없는 것이 전부 어디 홀리기라도 한 듯했다. 나는 그 때, 여태껏 해 온 연구가 드디어 어디로든 길을 열어 주고 있음을 알았다. 그것이 비록 더 끔찍하고 무서운 곳일지라도.
노랫말까지 따라 부를 필요도 없었다. 자장가의 가락 하나만으로 패러스프라이트의 혼을 빼놓기 충분했다. 음 하나하나가 대기에 스며들며 어스름 진혼곡의 권능에 섞여들었다. 버러지 놈들도 다들 깨달은 모양인지, 개체가 아닌 하나의 군체로 바뀌어 있었다. 자장가를 퉁기는 동안 패러스프라이트 군체가 각자의 비행 간격을 일정하게 조정하며 흡사 하나의 그물로 펼쳐지듯 나를 둘러싸고 펼쳐졌다.
연주가 재개되었다.
"네놈들은 허깨비에 불과해." 치솟는 소리 속으로 말을 던졌다. "실존한다고 믿고 싶겠지만, 그건 네놈들 생각이고."
버러지들은 일거에 시무룩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저것들이 나누어 가진 영혼 같은 게 있었다면, 그 또한 함께 쪼그라들고 있었을 것이다. 파닥거리던 날개가 서서히 그 속도를 줄였는데, 출처 모를 바람은 오히려 그 힘을 더해 불어닥쳤다. 갈기가 마구 날려 연주하던 곡의 악보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네놈들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미친 소리야." 나는 말했다. "기억을 되짚어 보지 그래. 그 웃기지도 않는 네놈들 일대기를 되돌아보라고. 너희는 애초부터 진실을 숨기기 위해 창조된 불합리의 집합체일 뿐이야."
패러스프라이트 한 마리 한 마리가 모두 금빛 섬광을 뿜어대기 시작했다. 숨이 가빠 왔다. 멀리서 울부짖으며 밀고 들어오는 파도가 해안에 와 부딪치고, 그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 오는 듯 으스스한 소리로 지하실이 가득 찼다. 벌레들이 눈에서 밝은 자홍색 섬광을 뿜어냈다. 그리고는 일종의 섬광등처럼 나를 둘러싸고 패턴을 이루어 명멸했다. 새빨간 빛이 지평선을 이루었다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했고, 그 때마다 눈 앞에 떠다니는 패러스프라이트 하나하나가 녹아 없어졌다. 서서히 투명해져 가는 외피 아래로, 파스텔톤 색에 가리웠던 것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갖가지 음표와 말, 세상이 잊은 목소리가 그 안에서 밝은 보라색으로 빛나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정도를 더해 가는 기괴한 형상 앞에, 나는 목을 쥐어짜 외쳤다. 눈가가 젖어 왔다.
"노래하라!" 나는 소리쳤다. "그 여자의 노래를 노래하라! 노래하여 무가 되어라!"
패러스프라이트가 답했다. 저들은 말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 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의자에서 굴러 떨어졌다. 수도 없이 휘몰아치는 음표를 피해 몸을 웅크린 순간, 그 난장판에서도 특히 가장 큰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흡사 천지창조의 순간이라 해도 믿을 만큼 장엄하고 신성했다. 귀가 터져 피가 흐를 것만 같은 기분이 들 즈음, 무시무시한 소음도 잦아들며 낮게 깔리는 소리로 축소되었다. 눈을 떠 패러스프라이트가 사라진 자리를 살피자, 그것들이 남긴 정수가 바로 앞 벽에 들러붙어 있었다. 아니, 벽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순환하는 별들로 짜낸 우주공간을 휘몰아치는 우주가스와 은하계, 각종 성운으로 장식한 모습을 그대로 비춰 주는, 투명한 유리창과도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는데, 벌써 어딘가를 떠가고 있었다. 우주공간의 절대영도와 진공에 사로잡혀 몸을 떨며 우주 한가운데를 떠가는 와중이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살아 있을 수 없는 환경이었다. 하긴, 그 동안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지.
입을 벌려 뭐라도 말하려 했으나,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하긴 소리라는 개념이 생기기 전이었으니 소리가 나올 턱이 있겠는가. 어깨 너머를 돌아보자 대충 그 이유를 알 듯했다. 빛나는 성좌와도 같이 장엄하고 아름다운, 커다란 포니의 형상이 별빛 총총한 우주의 평야를 달리고 있었다. 혼돈의 독기에서 일어서 두 날개를 활짝 편, 그분이 입을 열었다. 위대한 어머니께서 노래를 빚어내 거기 생명을 하사하였고, 비로소 산 것이 된 노래가 삼라만상을 이루며 변화하였다.
지하실에 갑작스레 생겨난 유리 창문 위로 한 줄기 섬광이 터져나왔다. 급히 눈을 가리고 등을 돌려 빛살을 피했다. 이제 나는 궁창을 따라 날아다니고 있었다. 보이는 거라고는 오직 큰 물과 바다, 그 위로 치는 번개뿐이었다. 창조의 풍요로운 뱃속에서 이퀘스트리아가 이제 그 싹을 틔웠고, 그와 동시에 나는 자라며 죽어갔다.
그 때 나는 삼라만상, 세상 그 자체였다. 내가 셀레스티아 공주님이자 루나 공주님이었다. 내가 곧 해이자 달이었다. 밤의 끄트머리로 사라지는 세 번째 알리콘 또한 나였다. 나는 불멸자이자 필멸자였다. 어린 아이에게 자장가를 불러 주시던 셀레스티아 공주님이었고, 그 노래를 듣던 스타 블리스 또한 나였다. 내가 곧 노래였고, 노래가 나를 데리고 창조의 모세혈관을 따라 내려갔다. 구불구불하게 얽히고 갈라진 갈림길을 만나면 위대한 어머니의 노래는 더욱 잘게 쪼개질지언정 그 아름다움은 간직한 채 갈라져 나갔다. 세상을 부수겠다며 디스코드가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졌다. 눈 깜짝할 새 재건된 캔틀롯은 재건과 동시에 나이트메어 문이 나타나 그 위로 울부짖어 다시 불타 사라지고 말았다. 어둠의 시대가 눈을 가렸으나, 다시 사람의 곁으로 돌아온 조화의 원소가 뿜어낸 빛에 굴복하여 사라졌다. 이퀘스트리아의 어느 깊은 골짜기에 들어앉은 작은 마을. 더없이 평화로운 정경. 이제 지하실은 그곳을 향하여 운석처럼 쇄도하고 있었고, 나는 다만 벽에 죽자사자 매달린 불운한 원주민이었다.
그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목소리였다. 내 입은 열리지 않았는데. 눈을 번쩍 뜨고 본 모습에 나는 숨이 막혔다. 호텔 로비였다. 셀레스티아 공주님의 방문을 기념하는 현수막이 곳곳에 내걸려 있었다. 뭐라도 보겠다고 목을 쭉 빼고 안달복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디서 소란이 일었다. 중무장한 페가수스 근위대 뒤로, 칙칙한 잿빛 후드를 입은 채 미쳐 날뛰는 광인의 모습이 보였다. 근위대 몇 명이 붙어 광인을 밀어내고 있었다.
"부디, 들어 주소서!" 라이라가 악을 썼다. "들어 주셔야 하나이다! 이제 공주께서 저를 내치시면 두 번 다시 말씀드릴 수 없으리이다! 엎드려 비느니, 제발 들어 주소서!"
"멈추지 못할까!" 근위 하나가 소리쳤다.
"이쪽이다! 공주님께 접근하지 못하게 해!" 다른 근위가 외쳤다.
"놔요! 놓으라고요!" 라이라가 울며 사지를 마구 휘둘렀다. "들으셔야 한다고요! 공주님께서 들어 주시지 않으면 평생 저주를 짊어지고 살아야 한단 말이에요!"
단단히 무장한 근위의 무리가 광인을 질질 끌다시피 하며 출입문 쪽으로 나아갔다. 그 때, 저편에서 나긋하고 장엄한 목소리가 이들을 멈춰세웠다.
"기다리거라." 누군가 발굽을 들어올렸다. 금빛 신발이 신겨져 있었다. 셀레스티아 공주가 연회 테이블에서 몸을 일으켜 입을 떡 벌린 채 쳐다보는 내빈들을 지나쳐 걸어갔다. "끌어내 내치지 말아라. 편히 말하게 두거라..."
"공주님, 이는—"
"짐은 만인을 보살필 책임이 있다." 태양의 알리콘이 말했다. "짐의 권능으로 백성의 고통을 덜해 줄 수 있기만 하다면, 어찌 모른 척 할 수 있겠느냐. 그 또한 짐의 책임이니라."
근위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사내들은 신속히 복종했다. 근위가 몸을 붙든 다리를 거두자 라이라가 앞으로 풀썩 쓰러졌다. 그리고는 기쁨에 차 울며 아기처럼 셀레스티아 공주를 향해 기어갔다. "망극하나이다.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불초한 몸에 미친 고난을 어찌 말로 다하겠나이까..."
"쉿......" 셀레스티아가 다가갔다. 공주가 두 날개를 펼쳐 한없이 작은 유니콘의 몸뚱이를 포옹하듯 감싸주었다. 공주의 말은 흡사 자장가처럼 들렸다. "진정하거라. 다 괜찮다. 숨부터 고르자꾸나. 네 어려움을 고하는 일은 그 뒤에 해도 늦지 않다."
라이라가 울먹이며 공주를 올려다보았다. 말을 더듬는 라이라의 얼굴 위로 눈물이 강처럼 흘렀다. "고하는 것으로 어찌 충분하다 하겠나이까. 직접 보여 드리는 것이 나으리이다. 지금 이 악곡을 들으셔야 하나이다. 그러지 아니하면 공주께서 이 대화가 끝나기도 전에 저를 잊으실지도 모르니, 그리되면 너무 늦을 것이 두렵습니다......"
"그대...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셀레스티아가 말했다. "내 그대를 어찌 잊는다는 게—?"
"공주 전하, 엎드려 비나이다." 라이라가 몸을 일으켜 뿔을 밝혀 리라를 띄우고, 발굽으로 잡아 올렸다. "다만 들어 주소서. 세 곡 비곡에 지나지 않으나, 공주님의 기억을 되살리는 데는 충분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저를 구제할 방책도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르나이다."
연회장에 모인 내빈 몇몇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한가운데 나타난 미친 유니콘이 영 마음에 걸리는지, 저희들끼리 소리 죽여 쑥덕거렸다. 어느새 근위대가 라이라를 둘러싸고 서 있었는데, 아주 약간의 적의라도 보이면 즉시 제압할 태세를 갖춘 채였다.
셀레스티아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그리하거라. 네 그리 바란다면야 그리해도 좋다. 내게 어떤 방책이 있으리라 생각이 든다면야, 얼마든지 연주하거라."
"망극하나이다. 감히 약속드리건대, 이게 어찌된 일인지 이제 분명해질 것입니다!" 라이라가 몸을 꼿꼿이 세우고 일어서서 현을 퉁기기 시작했다.
지하실 벽에 나타난 유리벽에 비친 모습을 나는 숨죽인 채, 가까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현에서 나온 것은 음악 소리가 아니라 쇠사슬이 덜그럭대는 소리였다.
"뭣?"
그 순간, 쇠사슬이 채찍처럼 뻗어나와 나를 휘감았다.
"뭣?!"
나는 그대로 몸을 묶여 잡혀갔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나는 자리에 잘 서 있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모습이 요동치다가 순간 멈추더니 빙빙 돌며 멀리 사라져 갔다. 셀레스티아 공주가 라이라를 품에 안는 모습과, 라이라가 뒤로 기어가는 모습, 근위대가 라이라를 붙드는 모습이 이어졌다.
"아냐..."
라이라는 그대로 근위에 끌려나가 로비 밖으로 내던져졌고, 호텔의 정경 또한 같이 멀어져 갔다.
"망할!" 나는 이를 악물며 과거의 내가 근위병에게 끌려가는 동안 쇠사슬을 잡아떼려 무진 애를 썼다. "안 돼, 제기랄! 거의 다 됐는데! 이제 비곡을 연주하려던 참이었는데! 조금만 더 있었어도—" 나는 이를 갈며 나를 옭아맨 쇠사슬을 잡아당겼다. "이건 대체 또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지하실 벽 위로 지나간 나날들이 셀 수 없이 흑백으로 명멸하며 지나갔다. 이미지가 흐려지고 뭉개져서 더 알아볼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더니, 어느 순간 급정지했다. 이제 라이라는 포니빌 한가운데 서 있었고, 나는 과거의 나에게서 뻗어나온 쇠사슬에 몸을 묶여 매달려 있었다. 때는 한밤중이었고, 달에 나타나 있던 여자의 형상이 사라지고 있었다. 심경의 갑옷을 두르고 음침한 미소를 띄운 달의 여자가, 라이라 앞에 강림했다.
"나이트메어 문..." 라이라가 자리에 쓰러져 덜덜 떨었고, 나는 다만 지켜보며 목이 메였다. "...저주를 짊어진 날."
머리에 두른 투구 아래로 나이트메어 문의 두 눈이 반짝였다. 악신이 숨을 뱉는 순간 쇠사슬이 나를 홱 잡아챘다. 묶인 몸이 뒤쪽 벽을 향해 내동댕이쳐졌는데, 시간의 흐름이 그보다 빠르게 전진하여 그 반대 방향으로 나를 잡아당겼다. 셀레스티아 공주님이 폭발을 일으키며 끔찍할 정도로 밝은 빛을 뿜어내서, 호텔의 모습이 희미해져 갔다.
"안 돼. 돌려놔! 돌려놓으라고! 어디로 또 끌고 가려고?!"
혜성 꼬리와도 같이 포니빌에서 보낸 1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 끝에 도착한 곳은, 어느 날 일몰을 배경삼아 라이라가 홀로 낯익은 지하실을 향해 총총거리며 내려가는 장면이었다. 라이라가 악기 아래 세워둔 받침대에 악보를 올려두었다. 비곡의 제목이 머리에 스쳐 지나갔다.
"밤의 만장." 사슬에 묶인 몸이 마구 떨려댔다. 나는 그제야 내가 어디로, 언제의 나로 날려온 것인지 새삼 깨달았다. "공주님 맙소사..."
라이라가 연주를 마침과 동시에 물에 빠졌다. 사방으로 벼락과 천둥이 내리쳐댔다. 젖은 건 현재의 나도 마찬가지였다. 추위라는 개념 자체보다도 엄혹한 냉기가 밀어닥치는 이름 없는 자들의 땅에서 라이라와 나, 과거와 현재의 내가 만나 세상의 밑바닥에서 빙글빙글 도는 녹슨 강철 발판에 나뒹굴었다. 나는 발판으로 날려온 뒤에도 몇 바퀴를 더 굴렀고, 그 통에 쇠사슬이 온몸에 칭칭 감겼다. 지하실에 문득 생겨난 유리 같은 바닥이 아니라, 뼛속까지 얼려 버릴 듯 차가운 강철의 느낌만 느껴졌다. 눈을 뜨자 과거의 라이라는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 과거의 내 자리로 옮아온 것이다. 사방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입마개가 씌워져 다만 신음할 뿐인 사람의 형상뿐이었다. 머리 위로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우자, 이름 없는 자들이 동시에 납작 엎드려 경배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궁창 사이의 무너진 세상 위로 군림하는 어둠을 향해 고개를 들자 그 여자가 보였다. 그 여자뿐만이 아니라, 그 여자가 거처하는 곳, 태어나지 않은 자들의 종복이자 지배자로 군림하는 곳 자체가 함께 보였다. 강철로 주조한 거대한 구체 위로 고대의 룬 문자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고, 그 아래에 발판이 여러 개 펼쳐져 있었다. 구체는 다공성 강철을 수없이 겹쳐 만든 것이었는데, 잠시도 멈추지 않고 계속 돌아가며 벼락을 내리치고, 거기 속박된 자들에게 먹이를 주는 고대의 장치에 동력을 공급했다. 순간 가슴 속에서부터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솟구쳐, 시간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온몸을 감쌌다. 이름 없는 자들의 땅이 이제 더 추운지 어쩐지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속이 들끓었다.
"당신!" 목소리를 높였다. 몸을 일으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나를 옭아맨 쇠사슬을 풀어헤치려 발악하며 외쳤다. "제발 나가 뒈져! 목 매달고 뒈져 버려! 조금만 더 가면 됐다고! 조금만 더 했으면 진실을 알 수 있었는데, 당신이 방해했지? 그렇지?!" 쇠사슬은 풀리기는커녕 내 몸을 타고 올라 똬리를 틀고, 목까지 칭칭 감쌌다. 나는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풉......" 그 여자의 구체를 올려다보며 천둥 따위 개나 물어 가라는 심정으로 고래고래 소리쳤다. "다른 사람 인생 조져놓는 걸로 당신이 얻는 게 뭔데?! 위대한 어머니가 당신한테 뭐 못할 짓이라도 했어?! 있었다 쳐, 그렇다고 그게 당신 남편 포함해서 다른 사람들까지 당신 땅에 옭아맬 이유가 된다고 생각해?! 애초에 그 양반 사랑하긴 했어?! 말해! 말하라고!"
무수한 구체가 켜켜이 쌓인 구체가 아득히 높은 곳에 떠 있었다. 사방에서 온갖 소음이 뒤엉키는 난장판 위로, 한 줄기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입 묶인 자들이 울부짖듯 신음하며 따라 불렀다.
"노래하지 마!" 나는 소리쳤다. "말을 해! 그 잘난 아가리로 얘기해 보라고—"
구체에서 한 가닥 번개가 내리쳤다. 과거의 내가 비명을 질렀다. 나도 같이 지를 뻔하였다. 나를 쓸어 없애 버릴 듯 무자비하게 내리찍는 번개 하나하나를 그저 떨리는 눈으로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차가운 공기에 연기와 죽음의 냄새가 배었다. 이름 없는 자들의 울음이 더욱 커졌다. 신입을 환영하면서도 그 운명을 슬퍼하는 듯하였다. 코앞에 닥쳐온 끔찍한 운명과, 더는 피할 수 없게 나를 옭아맨 사슬의 느낌에 나는 숨이 막혔다. 아, 정말로 나를 자기 마각에 떨어뜨릴 셈이구나. 장장 일 년 동안 나를 뒤쫓아 온 유령의 무리로 영원히 남을 수밖에 없겠구나. 트와일라잇과 부모님 생각이 났다. 앨도......
사슬 매인 자들 중 하나가 탄환처럼 달려나왔다. 나를 향해 똑바로 달려오더니, 발굽을 휘둘러 한 줄기 찬란한 섬광을 일으켰다. 몸을 묶은 사슬이 산산조각나 사방에 떨어져서, 나를 풀어 준 자의 얼굴을 볼 겨를이 없었다. 과거의 라이라가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달려온 자가 급히 라이라의 발굽을 잡았다. 번개가 내리치는 경로를 피해 우리 셋은 혜성의 꼬리처럼 달렸다. 비명을 지르며 꿈틀대는 이름 없는 자들을 헤치고 나와, 화가 나 번개를 내리치는 그 여자와 빙빙 도는 구체를 피해 달아났다. 내가 주절대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말다운 말이 입 밖으로 나온 순간, 과거의 내가 똑같이 말했다.
"다... 당신 누구에요?!" 라이라는 새된 소리로 끽끽댔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숨이 막혔다. "여기 대체 어떻게 되먹은 데에요? 못 견디겠어, 너무 무서—"
그 사람은 아무 말도 없었다. 발판에 그 사람을 묶어두고 있어야 할 쇠사슬 따위도 없었고, 그 자리에는 궁창의 눈물로 흠뻑 젖은 큼직한 망토만 걸쳐져 있었다. 그 사람은 이름 없는 자였지만 동시에 그 반대이기도 했다. 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발판 끄트머리로 다가가 두 발굽으로 라이라를 일으켜 세웠다. 들춰진 망토 아래에 숨겨져 있는 것을 나는 보았다. 흑철로 빚어낸 울림통에, 새까만 현이 여러 줄 매어져 있었다.
"나이트브링어?" 과거의 나는 알아볼 수 없었지만, 나는 이제 안다. "공주님 맙소사. 그럼 이 사람이...?"
앨러배스터는 말없이 라이라를 발판 밑으로 내던졌다. 그와 동시에 입을 열고 한 곡 노래를 불렀다. 나는 라이라와 함께 추락했다. 이름 없는 자들의 땅에 도사린 천둥번개와 엄혹한 한기, 광기가 녹아 사라져 갔다. 라이라가 떨어진 곳은 별이 총총한 밤하늘 아래 어느 숲이었다. 라이라가 떨어지자마자 나 또한 앞으로 홱 내팽겨쳐지듯 날려갔다. 이제 쇠사슬도, 과거의 나 자신도, 그 어떤 것도 나를 옭아맬 수 없었으나 비명만은 나를 끈질기게 따라왔다. 미쳐 돌아가는 시간의 틈새에서 몸을 빼냄과 동시에 지하실 벽이 깜박였다. 나는 아파 오는 머리로 하염없이 한 사람의 이름만을 되내일 뿐이었다.
"앨러배스터... 앨러배스터. 왜 말하지 않았나요...?"
유리가 깨어졌다. 지하실 흙벽이 밀려들었다. 사지를 움직여 위로 기어 올라갔다. 겨우 헤치고 나와 별빛 총총한 지상으로 머리를 내밀었을 때, 귀에 들리는 거라곤 울음소리와 귀뚜라미 우는 소리뿐이었다.
"앨러배스터... 앨러배스터. 제발..."
뜨뜻한 혓바닥이 얼굴에 스쳤다.
깜짝 놀라 눈이 번쩍 뜨였다.
앨의 호박색 눈동자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고양이가 가까이 다가서며 얼굴에 제 뺨을 비비더니, 다시 혀를 내밀어 핥았다. 나는 지하실 입구 쪽에 엎어져 있었고, 숲 가장자리에 밤이 어른거렸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오두막집이 조용히 자리했고, 그 출입문은 열려 있었다.
나는 궁창 사이의 물에 흠뻑 젖은 채 식은땀을 흘리며 캑캑댔다. 그 여자가 곱게 돌려보내 준 건가? 코멧후프가 날 살려 준 건가? 고개를 돌려 지하실로 통하는 계단 쪽을 바라보았다. 등잔이 차분히 흔들리고 있을 뿐, 패러스프라이트는 온데간데 없었다. 애초에 여기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앨러배스터. 당신이 날 구한 건가요." 마른침을 삼키며 몸을 떨었다. "두 번이나?" 야옹 소리가 들렸다. 훌쩍이며 고양이를 품에 안았다. "행운은 세 번까지라는데..." 나는 떨며 말했다.
앨이 야옹 울고 품 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울며 고양이에게 얼굴을 비볐다. 밝은 오렌지색 털이 눈물에 젖었다. "날 계속 잊어버리더라도 상관없어. 자동으로 밥 채워지는 밥그릇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어. 내가 널 사랑하는 것만 알아줘." 나는 울며 앨의 귀를 긁어주었다. "사랑해. 그것만 알아줘. 지금 널 사랑하는 것만 알아줘..."
앨이 몸을 빼고 싶어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랬다면 앨은 잘 참은 것이다. 우는 내 품에 안긴 앨은 세상 모든 온기와 행복, 기쁨의 집약체였다. 내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들이었다. 이 어찌 축복이라 아니할 것인가.
잠이 오지 않았다. 위험하기 짝이 없던 연주를 마치고 돌아와 앉은 자리에서 나는 잠들지 못했다.
나는 고양이를 옆에 끼고 침대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앨의 등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창 밖을 내다보고 있자니, 나긋하고 따뜻한 빛깔과 함께 새벽이 밝아 왔다. 조용히 숨을 토해냈다. 창 너머로 떠오르기 시작한 새벽 안개를 따라 시선이 솟았다.
"혼자서는 그 어떤 수를 써서도 해결책을 찾지 못한다는 걸 앨러배스터도 알았던 게 분명해." 나는 중얼거렸다. "정신이 갈수록 혼미해지기는 했지만, 자기가 처한 상황이 어떤 것인지는 인지할 수 있었을 거야. 셀레스티아 공주님도, 루나 공주님도 알현할 수 없고 야상곡 또한 온전히 알지 못하니 저주를 푸는 건 불가능했지. 비곡 두 개만 더 알아내면 저주를 풀 수 있었겠지만 끝내 알아낼 수 없었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거야. 죽거나......" 침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이름 없는 자가 되거나."
옆에 엎어져 있던 앨이 배를 보이고 누워 배를 쓰다듬으라고 들이밀었다.
피식 웃으며 앨의 배를 쓰다듬었다. "결국은." 나는 말했다. "미치지 않고서야 갈 수 없는 길을 가기로 결정했겠지. 코멧후프는 죽고 싶지도 않았고 이름 없는 자가 되고 싶지도 않았어. 그리하여 아무도 모르게 이름 없는 자들의 땅으로 숨어들었어. 무슨 수를 썼는진 모르겠지만, 천 년 내내 그 여자의 수족 사이에 몸을 숨기고 바싹 엎드려 있었지. 대체 뭣 때문일까?"
테이블에 놓아둔 코멧후프의 일지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 옆으로야상곡을 옮겨 적은 악보가 두툼하게 쌓여 있었고, 리라가 같이 놓여 있었다.
"그렇겠지..." 웅얼거리듯 말했다. "...루나 공주님의 귀환도 예정된 일이었으니까. 천 년째 되는 해, 해가 가장 긴 날 별들이 그분의 해방을 도우리라... 그렇게 돌아오신 것까진 좋았는데, 나이트메어 문을 탄생시킨 이름 없는 자들의 정수와 함께 돌아오신 게 문제였지." 차가운 숨결이 뿜어져 나왔다. "그래서 누나처럼 저주받은 사람이 또 생긴 거란다. 코멧후프 정도 되는 사람도 비곡의 비밀을 전부 밝혀내지 못했는데, 설마 다른 사람이 밝혀낼 수 있을까."
창 밖에서 넘어오는 빛살이 밝기를 더했다. 저 너머에서 더욱 밝게 빛나는 빛살이, 그만큼 따뜻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어둠 강림의 시대, 앨러배스터가 자기 역량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페눔브라의 죽음을 앨러배스터가 좀 더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만 있었다면, 남은 두 곡의 비곡을 마저 밝혀내고 구원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면 똑같은 수수께끼 속으로 떨어진 사람을 기다리며 수백 년씩 기약 없는 기다림을 견딜 필요도, 나 같은 사람한테 기댈 필요도 없었을 텐데. 가만, 앨러배스터의 기다림이 자기를 위한 게 아니었다면......?"
앨을 쓰다듬던 발굽을 멈췄다. 조그마한 털뭉치로 시선을 돌렸다. 가슴이 미친 듯 두근댔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집중시켜 돌파해야 하는 일인데, 내가 그러지 않는다면...?" 나는 중얼거렸다. "저주를 벗어던지는 데 내 모든 것을 걸고 달려들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나도 앨러배스터처럼 되는 건가? 그 여자는 제 남편을 잃었고, 앨러배스터는 페눔브라를 잃었어. 그럼 나는 뭘 잃게 되는 거지?" 마른침을 삼키며 나는 다시 자문했다. "뭘 잃게 된다는 거지?"
앨이 등을 스치던 발굽이 없어지자 불만스러운지 작은 소리로 가르릉거리며 툴툴댔다.
인후에 구멍이 뚫린 듯 허전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은 갈수록 더 위험해지기만 하는데."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렇게 살아 봤자 내가 뭘 할 수 있나. 유령, 유령이랑 다를 바 없잖아."
오두막 나무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안쪽에서 플러터샤이가 새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네? 누구세요?"
"플러터샤이 씨 댁인가요? 포니빌 전담 훈련사로 일하신다는데."
"어음... 네. 마을 분들께서 그러기로 하셨을 거에요..."
"구조한 녀석이 있거든요. 혹시 돌봐 주실 수 있을까요..."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플러터샤이가 질러둔 빗장을 끌르고 문을 열어 얼굴을 빼꼼히 내밀었다.
나는 플러터샤이를 마주보고 섰다. 짊어진 가방에서 꿈틀대는 느낌이 느껴졌다. 플러터샤이의 눈에 정오의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귀여운 고양이 하나가 가방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야옹, 하고 우는 모습이 비쳤을 것이다.
"정말 귀여운 녀석이네요." 플러터샤이가 현관가를 돌아다니는 고양이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말했다. "얼마 정도 돌보셨다고 했죠?"
"지난 주 동안은 제가 돌봤어요." 나는 방 구석에 서서 냉랭한 거리를 유지하며 말했다. "집에 들인 건 일 주일이지만, 그 전 두세 달 정도는 길고양이로 돌아다니던 걸 보고 밥이랑 물 챙겨 줬죠. 마을 어귀에 숲 있잖아요. 그 언저리 쪽으로 돌아다니던데... 보자마자 반했다고 해야 하나. 이해하시죠?"
"그럴 만 하네요." 플러터샤이가 빙긋 웃으며 몸을 낮추어 고양이에게 뺨을 비볐다. 앨의 눈에 민트색 유령이 보이는지, 보이지 않는지는 모르겠지만 고양이는 시시때때로 이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람을 정말 잘 따라요. 길고양이 출신이라고 하면 아무도 안 믿을 정도에요. 보통 길고양이들은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아마..." 플러터샤이가 작은 소리로 쿡쿡 웃고 말했다. "그쪽 덕분일지도 모르겠어요."
어깨를 으쓱하고 대답했다. "저도 나름대로 노력 많이 했어요. 어떤 분이 물심양면으로 많이 도와 주시기도 했고. 화장실 쓰는 법 가르치는 것도 배웠고요. 얘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도 알고, 예방주사도 놓았죠."
"그렇게 정이 들었는데..." 플러터샤이가 나를 마주보고 물었다. "...정말 기를 생각이 없는 거에요?"
"이쪽이 기르고 싶다고 해서 기를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서......" 지하실 너머로 보았던 과거의 내가 이야기하는 것을 듣듯 내 말이 귓가에 울려댔다. "지금은... 그... 복잡한 일이 여러 가지로 엉키고 꼬여 있다 보니까..." 한기가 느껴져서 기침하고 말했다. "아무래도... 아무래도 당장은 반려묘, 다른 반려동물도 마찬가지로 들이기 어려울 것 같거든요. 그... 저..." 나는 입술을 씹으며 오두막 한쪽 구석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불쑥 말했다. "이 녀석이 편안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기만 하다면, 그걸로 족해요."
"네, 최선을 다해서 살기 좋은 집을 찾아볼게요." 플러터샤이가 말했다. "약속드려요."
"고마워요..." 나는 억지로 웃었다. "친구분들이 그러시더군요. 어떻게 하는진 몰라도 동물들과 깊이 교감하실 줄 아신다고..."
"사람과 동물 사이에 맺어진 유대감은, 본질적으로는 하나와 또 다른 하나가 어울리고 관계를 구축하는 것과 같은 것이죠." 플러터샤이가 말했다. "말로는 옮겨놓기 어려운데......"
"...느낌으로는 알 수 있죠." 나는 나직하게 말했다. "천지창조의 날부터 모든 사람에게 허락된 권능이 바로 느낌 아닌가요."
플러터샤이는 놀란 듯한 눈치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머나. 맞아요. 되게 시적인 비유인데요."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은 지어 주셨나요?"
"네?"
플러터샤이가 빙긋 웃으며 오렌지색 털뭉치를 가리켰다. "찾으셨다는 고양이요. 어떻게든 부르시긴 했을 것 같은데요?"
어깨를 으쓱하고 대답했다. "뭐 이름이 중요한가요. 그냥... 돌아다니던 거 주운 것뿐인데. 갈 곳 없이 방황하고 다니길래, 어디라도 집다운 데 넣어주긴 해야겠다 싶었던 거죠." 나는 침을 눌러 삼켰다. "저 녀석... 잠이 많아요. 너무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면 별로 안 좋아해요. 그리고... 귀, 귀를 긁어주면 좋아하고..." 더는 말할 수 없었다. 한 방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트스트링스?" 플러터샤이가 이쪽을 쳐다보고 물었다.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그냥..." 나는 훌쩍이며 뺨을 문질러 닦고, 숨을 고른 뒤 말했다. "그냥... 그..." 플러터샤이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마음을 애써 가다듬었다. "사람이 과거를 잊어버리는 거...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이 슬픈 일들을 기억에서 지워 없애는 편이 더 나아서 그런 게 아닐까, 싶으신 적 있나요. 그런 일 없었던 듯 모른 척하고 지나갈 수만 있다면, 더 고급하고 강인하고 장대한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플러터샤이는 눈을 꿈벅이며 나를 마주보다가, 날개를 꿈틀대더니 이렇게만 말했다. "잘 모르겠군요. 그나저나, 말씀하시는 게 꼭 철학자 같은데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실 수 있는 거죠?"
"하...하하. 그거야 뭐..." 나는 피식 웃었다. 앨을 쳐다보는 두 눈은 말라 있었다. "느끼는 것보다도, 몸이 숨쉬는 게 더 쉬운 것과 비슷한 이치죠." 나는 툭 말했다.
플러터샤이가 다가와 어깨에 발굽을 가만히 얹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 아이들처럼 돌볼 테니까요. 좋은 사람 찾아서 보내 줄게요. 약속해요. 걱정하지 말아요."
대답하고 싶었다. 앨에게 작별인사를 남기고 싶었지만, 내 생각은 그저 생각만으로 남겨야 하는 세상에 떨어진 이상 그럴 수 없었다. 그 때 입을 열어 말했다면 사실을 있는 그대로 꺼내놓기 더 쉬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때문에 내가 돌아 버렸더라도 삶이 보다 편안해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말하고 싶었지만 말하지 못했던 사실, 그리고 끝내 잊어버리려 했던 사실. 나는 앨이 걱정스러웠다.
그 날 오후, 나는 오두막에 혼자 앉아 그때껏 완성해 온 야상곡을 옮겨 적은 악보를 한데 모아 정리하고 있었다. 가능한 절제해서 표현하자면, 집이 텅 비어 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곁을 지켜주던 반려의 빈자리가, 패러스프라이트의 빈자리와 새삼 닮은 듯했다. 세상이 문득 더 외로운 곳이 되어 버리기는 했으되, 동시에 보다 참된 곳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다시 저주를 짊어진 자로 돌아가, 천지창조와 함께 주어져 현재까지 내려오는 과업에 매달려 있었다.
작업하는 내내 오두막은 고요했다. 여태껏 조용한 가운데 연구하고 작업했는데, 일주일 만에 회귀한 일상이 너무나 낯설었다. 잠깐 바람이나 쏘이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 없는 자들의 땅으로 향하기 전에 뭐라도 남겨둔 것이 있지 않을까 싶어 코멧후프의 일지를 같이 챙겼다. 시퍼런 글자나마 햇빛을 맞으며 읽으면 그나마 좀 더 읽을 만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하여 코멧후프 박사의 일지를 가방에 집어넣고, 리라를 같이 챙긴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려 오두막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심하게 문을 열고 난 뒤, 나는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주황색 무언가가 쏜살같이 집 안으로 달려 들어온 것이다.
몸을 돌려 그것이 향한 쪽을 바라보았다.
앨이 침대 주변을 빙빙 돌더니 훌쩍 뛰어 그 위로 올라와 아주 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자리에 앉아 지금 당장 가르릉거리며 그루밍을 하지 않으면 미래도, 과거도 없다는 기세로 제 몸을 핥아댔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려 현관문 쪽을 쳐다보았다. 잠시 뒤 침대로 천천히 다가갔다. 가방을 벗어 앨 옆에 가만히 내려두었다.
문틀 너머에서 햇빛이 쏟아져 내려, 고양이의 호박색 눈동자를 비추었다. 앨이 반대 방향으로 몸을 틀어 반대쪽 다리를 핥았다. 제 발톱을 살짝 물어뜯은 고양이가 이불 깊숙이 들어앉았다.
내 오두막은 플러터샤이 오두막과 정반대 방향으로, 포니빌 양쪽 끄트머리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충 재어 봐도 직선거리로 1마일 가량 정도 될 텐데, 그 사이에 건물과 강, 각종 잡목립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그 거리를 4시간도 안 되어 돌아왔다니...
실험삼아 한쪽 발굽을 들이밀었다.
앨이 주둥이를 들어 내 발굽 냄새를 킁킁, 딱 한 번 맡더니 늘 그랬듯 거기 제 얼굴을 비벼댔다. 고양이가 작은 소리로 야옹, 하고 울더니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워 뒹굴었다.
한없이 무거운 웃음이 떠올랐다.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이제 숨길 필요는 없었다. 고양이 가까이 몸을 기울이고 귀를 긁어주며 내 얼굴을 고양이 뺨에 비벼주었다. 앨은 미동도 없이 내 애정표현을 받아주었다.
"동물은 저주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네."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 여자의 노래로도 고양이의 직감 같은 건 어떻게 가리지 못하는 것일지도. 아니면 너희 고양이들이란 다들 간을 배 밖으로 꺼내두고 다녀서 이름 없는 자들의 비밀에 다가서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는 거니."
그 날 저녁, 우리 둘은 코멧후프 박사의 일기를 침대 한가운데 놓아두고 같이 앉았다. 벽난로에 피워둔 따뜻한 화톳불이 딱딱 타올랐다. 어느 한 곳 따뜻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후드를 껴입을 필요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이런 일은 아주 드물다. 옆에 앉은 앨의 부드러운 털이 내 허벅지를 간지럽히는 느낌이 편안했다.
"뭐 아무렴 어때." 나는 고양이를 보고 빙긋 웃었다. "누나처럼 정신 나간 채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는 궤변꾼 곁에도 너처럼 귀여운 친구가 공부를 도와주겠다고 와 주다니 얼마나 예뻐." 고양이에게 얼굴을 비비고, 실실 흐르는 웃음을 애써 주워담았다. "너도 누나한테 자장가 불러주러 왔니? 트와일라잇은 스파이크한테 불러 준다는데."
앨이 헛소리 하지 말라는 듯 야옹, 하고 울었다.
"나 참. 기대도 안 했다 요놈아." 나는 말했다. 앨을 반려묘로 들이고 나는 몹시 행복했다. 따뜻한 숨이 쏟아져 나와 푸르딩딩한 글자 위로 엉겼다. "패러스프라이트 녀석들이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 여기 호텔을 찾으셨던 그 날의 진실 중 정확히 뭘 숨기고 있는지는 평생 모를 수도 있겠지만서도, 적어도 코멧후프가 어디 있는지는 알아냈어. 나이트브링어도 그 양반이 잘 보관하고 있고. 잘된 일이지? 그러니까... 복덩이가 굴러 들어왔는데 사소한 거 가지고 흠 잡으면 안 되잖아?"
견뎌야 할 삶이 거칠고 험할지라도, 아주 작은 축복이나마 받을 수 있는 것을 거부해서는 안 될 일이다.
저는 고양이에 취미가 없습니다. 고양이들이 절 별로 안 좋아해요. 대학 다닐 때는 캠퍼스 고양이들이 공격했고, 친구 따라 고양이 카페에 놀러 갔더니 그날따라 기분이 언짢으셨던 고양이 한 분이 보자마자 오른손을 할퀴어 놔서 피를 봤습니다. 한 몇 분 동안 피 닦으러 화장실 계속 드나들었죠. 흉터가 남지는 않았습니다. 저쪽에서 먼저 싫어해도 될 이유를 제공했으니, 이쪽도 고양이를 안 좋아해도 될 거란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호의적인 반응이 나와 봤자 무관심이죠. 취미가 없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랜만에 돌아왔습니다. BGP팬아트를 소개하는 그리 뜻깊지 않은 시간입니다. 오늘의 주제는 라이라와 그 고양이, 앨입니다.
The Background Pony and her cat by PianoPonky on DeviantArt
www.deviantart.com
뭔가 그로테스크하니 끝내주는 그림입니다. 퀭한 게 아주 마음에 드네요. 농담입니다.
Little Friend by EmeraldGalaxy on DeviantArt
www.deviantart.com
이건 뭔가 목가적인 분위기가 있죠. 평범하게 보면 아, 라이라가 고양이를 기르네 싶지만 BGP 팬아트인 걸 알고 보면 아이러니하기 짝이 없는 그림 되겠습니다.
근데 이게 끝이에요.
SS&E의 초기작 EoP와 BGP는 '주인공과 플러터샤이가 뭔가 찾으러 에버프리 숲으로 들어가는' 동일한 구도를 공유합니다. 두 주인공이 구원을 찾아 플러터샤이를 만나는 것도 비슷하죠. 다만 EoP의 주인공 하모니는 '의도치 않게, 정말 어쩌다가' 일에 휘말린 한편, 라이라는 능동적으로 에버프리에 입성하는 점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Ch.04에서 라이라가 이름 없는 자들의 땅에 들어가고도 무사히 살아 돌아온 이유가 설명되는 챕터였습니다. 앨러배스터 코멧후프가 이름 없는 자들의 땅에 숨어든 이유야 뭐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쫀득쫀득하니 재미있는 후반부였다고 생각합니다.
Ch.14는 라이라 최후의 휴식기가 될 것입니다. Ch.15는 주제가 무겁고, 16부터 19는 엔딩 시퀀스, 20은 엔딩이라 사실상 라이라가 마음 편히 있을 수 있는 게 Ch.14밖에 없어요. SS&E의 버릇이라면 버릇인데, 마지막으로 몰아치기 전에 휴식처로 삼을 파트를 하나는 만들어 줍니다. EoP 아웃라인에도 그나마 숨 돌릴 만한 구간을 만들어 두고, 더 걷잡을 수 없이 상황을 진행시켜 그대로 엔딩까지 밀고 나갑니다. 굳이 따지자면 Ch.15가 그런 역할을 하긴 해야 하는데, 주제가 원체 무거운데다 아주 남의 일도 아닌, 그런 상황이라 가장 마음 편히 있을 수 있는 곳이 Ch.14입니다.
미주
*1 원문은 Tears and poetry and Letters unreceived. 시문과 서한을 받아들임은 읽는 것일 터이나, 눈물을 받아들이는 것을 어떻게 옮겨야 할까 생각하다가 이영도 선생의 작품 <눈물을 마시는 새>를 차용하여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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