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SS&E/백그라운드 포니

Chapter 14. 아홉 번째의 저주The Curse of the Ninth

by Mergo 2021. 1. 22.

일기에게.

 

내가 가는 길은 정말 나 혼자만 가는 길일까. 저주를 떨쳐낸 끝에 구원받는 이가 진실로 나 하나뿐인 것일까. 내가 걷는 길고 지난한 여정이 다만 그렇게 보일 뿐이라면, 이는 허깨비를 본 것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내 꿈과 희망은 지금까지 건너야 했던 고난과 파헤쳐야 했던 지식이 아니라, 도무지 만족할 줄 모르고 제 영향력을 행사하려 드는 그 여자의 마각에서 벗어날 필요를 느끼지 못해 견디고 익힐 필요가 없었던 다른 사람들의 힘으로 구축된 것이라는 것을 나는 이제 겪고 보며 깨달았어. 그 어느 때보다도 명징한 사실이지. 저들은 붙잡혀 있는 걸 끝내 알지 못하지만, 자기들에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을 탈출의 열쇠를 기꺼이 내게 넘겨주었어.

 

나는 동화 속 공주도 아니고,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곤경에 빠져 허우적대며 다만 누가 구해 주기를 기다리는 부류는 더더욱 아냐. 어쩌면 지난 일 년 동안 얻은 가장 큰 수확이 이것일지도 모르겠네. 혼자 가야 할 먼 길이지만, 나 혼자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곳까지 다가선 것은 나를 이끌어 주고 도와 준 다른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었어. 더, 더 멀리까지 능히 닿을 수도 있으리라고, 변화무쌍한 운명의 바람이 말해주더구나. 혹시 모르지. 더 이상 그 여자도 나를 어찌할 수 없는 곳까지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그런데 말이지, 요즘 이런 생각이 든단 말이야. 그 여자는 나를 막아서려던 게 아니라... 도와 주려던 게 아니었을까?

 


 

영 불편한 침묵이 어른거리는 아담한 어느 회합실. 탁자를 둘러싸고 네 명이 저마다 자기 자리에 앉아, 그 날의 화두로 던져진 주제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어안이 벙벙한 채 생각을 정돈하고 있었다. 촛불 여러 개를 엮어 매단 천장등 불빛이 위에서 깜박일 때마다 이들은 체인질링끼리 신호를 주고받기라도 하는 듯 냉랭한 시선을 교환했다. 아무도 안 하니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누군가 한숨짓더니, 테이블 쪽으로 붙어 앉았다.

 

"뭐, 좋은 질문인 것은 확실하군요." 입을 연 것은 옥타비아Octavia였다. 목에 맨 보타이를 매만지고, 타는 연기의 잿빛으로 물든 두 발굽을 오크나무 테이블 위에 가만히 얹었다. "음악이 진실로 신성한 권능을 가지고 있을까요?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마는, 저는 명명백백히 그리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모인 분들 한 분 한 분, 모두가 어떤 경험을 하셨는지 제가 알 수는 없는 일이지요. 다만 저는 음악을 통해 제 연주에 몰입한 청중과 제 모든 생각을 공유해 왔습니다. 어떤 매개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 주는 다리라고 해도 손색이 없겠군요."

 

"옥타비아 씨 말씀에 동의해요." 멜로디아 브레이드Melodia Braids가 말했다. 옥타비아의 대각선 앞에 앉아 있는 젊은 페가수스였다. 멜로디아는 영 조마조마한지 에메랄드 빛 머리채를 쓸어 넘기더니, 입술을 씹으며 꾸물거리다가 불쑥 말했다. "그... 음악 학교로 진학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하면 절로 몸서리가 쳐져요. 그, , 청중 앞에서 연주하고 있노라면 제 영혼을 아주 잘게 나누어서 앞에 모인 모든 사람들과 나누는 한편으로 하나하나 조심스레 재조립하는 느낌이 들거든요. 표현의 수단으로 음악보다 더 섬세한 건 아마 없을 거라 생각해요."

 

"그런가. 이쪽은 춤추는 걸 선호한다만." 멜로디아 맞은편에 앉은 사내가 대답했다.

 

멜로디아가 남자를 쳐다보고 물었다. "바드Bard 선생님 말씀은, 선생님께 음재音才가 첫째는 못 된다는 말씀이신가요?"

 

"아니지, 그건 아냐!" 바드 선생이 말했다. "뭐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준다' 같은 헛소리를 주워섬기는 사람은 못 된다는 얘기지. 다른 사람을 알아 가고, 사귄다는 말을 자네들은 그렇게 표현하는가? 저기 아무 동네나 가서 스퀘어 댄스장*1이나 찾아보시게." 그는 턱수염을 기른 어스 포니였다. 사내가 의자를 뒤로 밀어 등받이를 벽에 기댔다. 그러고 앉아서는 구부정하게 앉아 뒷다리로 기타를 집어 느긋한 가락을 퉁기기 시작했다. "자네들 보기에 어떨지 몰라도, 음악이란 사람이 자연을 더 편하게 느끼는 것이 되어야 해. 당장 사람이 돌보지 않는 땅이 얼마나 많은가. 위대한 엄마가 사람에게 필요한 공연장을 이미 다 만들어 뒀는데 사람들이란 다들 녹음실에 짱박혀 조정하고 녹음한 것들을 음반 가게로 몰려가 사서 듣잖나. 부끄러운 일이야."

 

옥타비아가 끄덕였다. "점핑 레이 바드Jumpin' Ray Bard 선생님도 저희랑 통하는 게 있긴 있군요."

 

"대자연 맙소사. 아가씨." 바드 선생이 비스듬히 기울여 앉은 의자를 바로하고 카우보이 모자 챙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냥 저기 녹색머리 아가씨처럼 '바드 선생'이라 부르라구. 그 호칭은 우리 옛 멤버 녀석들이 아닌 이상 함부로 쓰는 게 아녀. 그것도 'J.R.바드'처럼 품위있게 부를 때나 얘기지."

 

"무례를 범한 점, 고개 숙여 사과드리겠습니다. 바드 선생님." 옥타비아가 희미한 미소를 띄웠다. "선생님 나름대로의 방식이나마 위대한 어머니를 언급하신 점을 짚고 넘어가려 했는데 실례를 범했군요."

 

"그려?" 바드 선생가 다시 비스듬하게 의자를 기울여 앉았다. "그 양반이 뭐 어쨌다고?"

 

"전승에 따르면, 한 곡 노래를 불러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하지 않던가요?" 옥타비아가 나머지 셋을 돌아보았다. "여기서부터는 제 추측이지만, 천지창조와 함께 이 노래도 산산이 조각나 세상 곳곳에 흩어져 현실세계를 구성하는 여러 축이 되었을 거에요. 즉, 바드 선생님께서 방금 열정적으로 자연을 찬미하신 것은 전세계로 흩어진 위대한 어머니의 보편타당한 노래를 찬미하는 것에 닿아 있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 모두 한 곡의 노래를 구성하는 한 부분인 거지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미안하게 됐군. 아가씨가 '고개 숙여 사과하겠다'고 말한 다음부터 한 마디도 이해하지 못했어."

 

옥타비아가 치솟는 짜증을 억누르며 발굽을 얼굴에 갖다댔다. 멜로디아 브레이드는 빙긋 웃으며 테이블 쪽으로 바짝 당겨 앉았다. "저, 음악이 내포한 힘은 그 신성성을 막론하더라도 충분히 여러 가지 방향으로 설명이 가능할 것 같아요. 옥타비아 씨께는 음악이란 타자와의 연결을 주재하는 힘이고, 점핑 레이...아, 바드 선생님께는 자연과 하나되는 힘인 것이죠." 멜로디아가 수줍은 듯 날개를 가볍게 떨더니 홍조를 띄우고 덧붙였다. "저...어...한테는 저 자신과 소통하는 수단이에요. 스크래치 씨께는 틀림없이 순간순간의 감정을 표출하는 방법일 거에요! 제 말이 맞죠, 바이닐Vinyl Scratch?"

 

회합실에 아무 말도 없었다.

 

"어..." 멜로디아가 쭈뼛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스크래치 씨?"

 

푸른 갈기에 흰 몸을 한 유니콘 하나가 테이블 끄트머리에 엎어져 잠들어 있었는데, 침을 질질 흘리며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아대는 중이었다.

 

"거 이봐!" 바드 선생이 툴툴대며 말했다. "일어나라구! 후딱 눈 떠!" 사내가 한쪽 뒷다리를 뻗어 바이닐이 올라앉은 의자를 툭툭 찼다.

 

"커어어...억!" 바이닐 스크래치가 새빨간 눈을 동그랗게 뜨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분명히 확인했어! 물 내렸다구! 싹 내려갔다니까!" 깨어난 여자는 잠시 멍하니 있었다. "얼라라...?" 바이닐이 멍한 눈길로 회합실을 죽 훑더니 내뱉었다. "아. 그렇지 참. 이제 생각났네."

 

"우리 브레이드 양이 인생에서 음악이란 뭐냐고 여쭈셨거든요. 아직 기억하시겠죠." 옥타비아가 말했다. "신성하다거나, 그런 거 있잖아요."

 

"글쎄다, 잘 모르겠네." 바이닐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일이지 뭐." 그리고는 하품을 쩍 하며 테이블에 엎어졌다.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스피커가 끝내주는 소리를 뱉을 때까지 판 긁는 것밖에 없는데." 바이닐이 실실 웃었다. "그렇지. 언제 올랜도츠Orladoats에서 공연했을 때 생각나는구만. 그 땐 판이 아니라, 스탈리온그라드에서 왔다는 몸 좋은 형씨들을—"

 

멜로디아가 벌개진 얼굴을 애써 가리며 헛기침하고 말했다. "다, 다른 얘기는 나중에 하는 게 좋겠어요."

 

"저 아가씨 말이 옳아." 바드 선생이 바이닐을 경계하는 듯 슥 눈짓하더니 툭 던졌다. "평소처럼 주절거리자고 쓸데없이 비싼 호텔 시설 빌려 들어왔는데, 거기서 이상한 소리나 주워섬기는 게 별 도움이 될 것 같진 않군."

 

"쳇. 알았수, 앞뒤 꽉 막힌 양반들 같으니." 바이닐이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두 앞다리로 뒷통수를 받치더니 천장을 보고 늘어지게 하품했다. "그나저나, 뭔 얘기들 하고 있었더라?"

 

"그..." 멜로디아가 입을 열다가 그만두더니, 입술을 씹다가 말했다. "저, 되게 좋은 화두였는데."

 

"설마 자네들 기억력이 다들 금붕어 수준으로 감퇴한 건 아니겠지." 바드 선생이 느릿하게 말했다. "음악이 갖고 있는 어떤 마력 이야기를 하고자 모인 게 아닌가?"

 

"네, 그랬죠. 이상하지만, 그 얘기 할 때마다 자꾸 잊어버려요." 멜로디아가 불안해 보이는 눈으로 테이블을 응시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음악이 어떤 힘을 갖고 있는지 계속 생각해야 한다는 느낌이 들어요. 이 얘기가 더할나위없이 소중한 논의 같은 그런 느낌이거든요.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건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글쎄, 감히 한 말씀 드리자면 제 경우 지금까지 걸어온 음악 인생 평생이 음악의 힘과 불가분 관계랍니다." 옥타비아가 명료하게 말했다. "장소가 연주회장이든 아니든 상관없어요. 수많은 연주로 얻은 일종의 유산 같은 것보다도, 음악이 저를 곧추세운다고 하겠군요."

 

"하하하하!" 바이닐의 입가에 떠오른 희미한 미소 사이로 이빨이 반짝였다. "곧추세웠대.*2"

 

옥타비아가 표정을 확 찌푸리더니, 다시 펴고 말했다. "음악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고, 지금 여러분과 만나 이런 이야기 나누지도 못했겠지요. 그러고 보면 음악에 신비한 힘 같은 게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싶어지는 것이고요."

 

"아가씨 말씀을 듣자하니, 하고 싶은 말을 두고 아주 빙 둘러가고 있는 모양인데." 바드 선생이 말했다. "하나마나한 이야기는 그만두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 괜찮을 듯하이."

 

옥타비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테이블에 가까이 붙어 앉으며 몸을 기울였다. "여기 계신 분들, 다들 한 번쯤은 '아홉 번째의 저주'라는 이야기는 들어 보셨겠지요?"

 

"오호......" 멜로디아가 귀를 쫑긋했다. "그럼요! 들어 봤죠!"

 

"저주가 뭐 어쨌다고?" 바드 선생이 표정을 구겼다.

 

"뭐 메어테주마Maretezuma*3의 복수인가 뭔가 하는 얘긴가 보구만." 바이닐이 대충 뭉개는 발음으로 말했다. 셋이 아무 말 없이 째려보고만 있자, 바이닐이 어깨를 크게 으쓱하며 말했다. "나 참, 왜들 이래?! 다들 줄 비비고 튕겨서 돈 벌 줄만 알았지 멕시콜트Mexicolt 가서 압생트Absinthe 한 잔 먹어 본 적 없단 말야?"

 

"제가 말씀드린 건, 캔틀롯에서도 최고라 불리는 음악가들 사이에서 떠도는 전설 같은 거랍니다. 스크래치 씨." 옥타비아가 말했다. "어린애들이나 믿을 유치한 괴담이라는 점에는 동감하지만, 그런 이야기라도 수백 년 동안 온전히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니 그 성질이 예스러운 골동품과 비슷하다고 할 만하겠죠. 내용은 별 것 없어요. 아무리 훌륭하고 뛰어난 음악가라도 명곡 단 아홉 개만 낼 수 있다는 얘기에요. 음악 인생... 아니, 평생 딱 아홉 곡밖에 명곡을 내지 못한다는 게 맞겠군요. 열 번째 명곡을 만들어 내 운명에 저항하려 하는 자에게는 그만큼의 응보가 따르고, 심하면 죽거나 죽느니만 못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거든요."

 

"호... 그래, 나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바 있지." 바드 선생이 기타 퉁기는 것도 그만두고 말했다. "이른바 27클럽*4이라고 하는 것 아닌가?"

 

"아! 그거! 나도 알지!" 바이닐이 테이블을 쿵 하고 치더니 바드 선생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거, 그, 지미 헤이드릭스Jimmy Haytrix랑 콜트 커베인Colt Kurbain*5 같은 양반들 얘기하는 소리 아냐?"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 봐요." 멜로디아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도 아홉 번째의 저주란 이야기는 들어 봤지만요. 후프스톤 박사Doctor Hoofstone나 포니데레키Ponyderecki, 그린 사운드Green Sound 같은 분들이 희생되었다고들 하죠. 하나같이 젊고 장래가 촉망되는 작곡가들이었다고 해요. 수많은 곡을 썼지만, 각자 아홉 번째로 명곡을 써내고 나서부터는 비참할 정도로 추락해 더는 명곡을 써내지 못했다고 하죠. 죽거나 은퇴할 때까지 쭉 말이에요. 이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분은 물론... ... 니토벤Neightoven이시죠."

 

"아하! 그렇네! 니토벤이 있었지! 하하..." 바드 선생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왜 아홉 번째 명곡이 그리 유명한지 알겠구만. 마지막 명곡이라는 꼬리표가 붙었으니 그럴 만도 하겠어."

 

"그러고 보니, 시애들Seaddle에서 그 양반이 싸지른 거 좀 갖고 논 적 있지." 바이닐이 짓궂기 짝이 없는 미소로 말했다. "리버브 끝내주게 걸고 저음 짱짱한 스피커로 출력하니까 다들 좋아 죽으려 그러더만. 사방에 유리가 널렸었다니까. 당신네들도 꼭 봤어야 했는데. 힙스터 자식들이 오줌을 얼마나 지려놨나, 사방에서 물 튀기는 소리가 작살이었다니까."

 

옥타비아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니토벤 교향곡 9번*6을... 디제잉 같은 데 함부로 가져다 써도 되는 견본음악 취급하지 마시죠." 헛기침을 해 목을 닦은 옥타비아가 웅변했다. "아홉 번째의 저주. 한 사람이 이룩할 수 있는 음악적 업적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고, 언제 어디서 무너질지 알 수 없이 위태로운 것임을 그 자체로 증거하는 것이죠."

 

"가만, 그대는 여기 브레이드 아가씨처럼 곡을 짓는 사람은 아니잖나?" 바드 선생이 옥타비아를 가리켰다. "내 알기로 자네는 주로 캔틀롯 연주회장에서 다른 사람이 지은 곡을 연주한다고 하던데. 그 솜씨가 가히 천사의 솜씨에 비견된다지."

 

"네. 정확히 짚으셨습니다." 옥타비아가 끄덕이며 말했다. "저를 두고 뭐라고 치켜세우든, 저는 다만 첼로 연주에 있어서만큼은 최고가 되고 싶었던 한 첼리스트에 불과하지요. 그렇다고 제가 고전 악곡에 경의를 표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고전 음악은 제 모든 것이니까요. 이것은 고전 음악이 제 음악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 때문만이 아니지요. 저는 어릴 때부터 언젠가 큰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다는 꿈을 꾸었어요. 캔틀롯 음악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제 적성이 가장 요긴하게 쓰일 곳이 어딜까 고민했지요. 고민의 종착역은 트로팅엄 서부에서도 부촌은 못 되는 곳에 있던 조그마한 공연장이었어요. 저는 그곳에서 아홉 번째의 저주, 그 진짜 본질을 깨달았지요."

 

"으어어..." 바이닐이 선글라스를 이마 위로 젖히고 눌러 감은 눈꺼풀 위를 문질렀다. "이거 아까 얘기한다던 그 주제로 계속 얘기하는 거 맞지?"

 

"거 잠시라도 조용히 있으면 죽기라도 하나?" 바드 선생이 툴툴댔다.

 

"말씀해 주세요. 듣고 있어요." 멜로디아가 빙긋 웃는 채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옥타비아를 마주보고 말했다. "트로팅엄에서 어떤 일이 있었나요?"

 

"이 점은 상기하시고 들어 주세요." 옥타비아가 말했다. "초년병 시절의 이야기에요. 글자 그대로 배경 신세인 무명이었죠. 당시만 해도 저는 일반적인 교수법과 학문적 지식으로 음악을 대하고 있었어요. 벽창호나 다름없었죠. 저 스스로 음악을 느껴 보려고 하지도 않았고, 음악이 연주자와 청자의 영혼을 이어 주는 다리와도 같다는 걸 이해하지도 못했어요. 음악가가 된다는 게, 뭔가 막막하고 벅찬 느낌이었죠. 일종의 모험심 같은 것도 좀 있었지만......"

 


 

저는 트로팅엄에서도 앤빌 러스트 극장Anvil Rust Theatre이란 곳에서 연주를 했었어요. 흔히 '극장'이라고 하면 장대한 내부 공간이 있으리라 생각하지요. 연주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저렴한 가격에 좌석을 내어주고, 전도유망한 젊은 음악가들은 그곳에 잠시 머물다 자기 적성에 맞는 자리를 찾아 떠나는 일종의 중간시설 같은 곳이어야 한다는 기대가 형성된다는 것이죠. 극장이라고 써붙인 곳에 들어가자마자 그런 기대는 전부 산산이 조각나 먼지처럼 되어 버렸지만요. 좌석이라고 해도 겨우 백 명 정도나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지금 생각해 보면, 공연장 자체는 사람 냄새 나고 포근한 곳이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당시만 해도 저는 야심만 가득한 하릅강아지에 불과했지만요.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수백, 수천 명씩 모인 곳에서 연주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희망과 기대에 젖어 있었죠. 그런 기대야 언제고 충족되는 날이 오기는 올 것인데, 새파란 애송이였던 저는 당장 욕심에 눈이 멀어 그런 걸 전혀 보지 못했어요.

 

어쨌거나 저쨌거나 일단 들어선 거 계속 가자는 대로 졸졸 따라갔지요. 제가 배정받은 숙소는 앤빌 러스트 극장 내부 4층에 있었어요. 아주 작은 아파트 같은 느낌이었지요. 고백하건대, 저는 특별 대우를 받고 있었어요. 재학생들에게나 지급하는 품위유지비를 졸업 이후에도 꾸준히 부쳐 준 데다가, 제 직장 겸 숙소인 앤빌 러스트 극장에서도 최소 격일 간격으로 무대에 설 수 있게 해주었거든요. 그 때만 해도 제가 정말 행운아란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첫 주가 지나기도 전에 그런 생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어요.

 

트로팅엄 사람들은 대체로 점잖고 고풍스러운 느낌을 주니, 대체적인 성격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건 착각이에요. 직설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섬세하고 고급한 화법으로 무자비하다 싶을 정도로 냉혹한 혹평을 포장하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답니다. 잿빛 하늘을 자랑하는 트로팅엄 서부 빈민촌에서 2년을 살았지만, 그 골목만큼이나 트로팅엄 사람들 성격을 명료하게 보여 주는 게 없더군요.

 

앤빌 러스트 극장에서 처음으로 공연한 날은 메어차르트를 연주했어요. 조금도 주저 없이 온갖 야유를 쏟아내서, 무대에서 쫓겨나듯이 내려오고 말았지요. 처음에는 한 발짝도 움직일 생각 없었어요. 이제 막 몇 마디 연주하지도 않은 차에 내려갈 수는 없잖아요. 아직 제가 초보 티를 못 벗어서, 그걸 가지고 야유하고 비난하고 욕하는가 보다 하고 넘어가려고 했죠. 그런데도 눈물이 그치질 않아서 더는 연주를 못 이어 나가겠더라고요. 결국 그렇게 내려가야 했죠.

 

사람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 트로팅엄에서 새삼 깨달았다고나 해야겠군요. 제가 연주자로서 능력이 있든지 없든지, 일단 야유와 비난이 시작된 이상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런데 이게, 유명세의 문제도 아니더군요. 솜씨도 좋고 경력도 대단한 어떤 분이 여기서 공연을 하신 적 있는데, 그분이 무대에 서실 때도 청중들이 똑같은 반응을 보이는 거에요. 트로팅엄 빈민가에 있는 극장이니, 연주회장에서 지켜야 할 예의 같은 교양이 좀 부족한 분들이 많이 찾으신 건 사실이에요. 겨우 개막 공연밖에 안 했는데도 도저히 자리에 앉아 있는 걸 못 버티는 사람이 많았죠. 그분들을 견뎌내는 게 제 업무였어요. 그 사람들이 원하는 건 좀 익숙하고 자주 들어 본, 그런 음악이었고요. 그분들 입맛에 맞는 연주자만 찾으신 거죠, 사실. 저는 그쪽은 아니었죠.

 

앤빌 러스트에서 보낸 하루하루는 말 그대로 고역이었어요. 하루가 다르게 의욕이 없어졌죠. 그렇게 버티다 보니 며칠이 몇 달로 이행되어 있더군요. 그쯤되자 관객들도 저를 쓰레기 취급하는 건 그만두었어요. 이제 제 연주를 좀 즐기고 좋아해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사람들은 그때까지도 별 반응이 없었어요. 사실 객석과 무대 사이에 어떤 보이지 않는 벽 같은 게 있어서, 흐르는 선율로 청자와 연주자의 혼이 만나야 하는 것이 못 만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까지 들더군요.

 

그렇게 살다 보니 슬슬 제 솜씨와 포부까지 의심하게 되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이라도 열심히 연주했나? 매일 밤 무대에 세워 준다고 해서 자만에 빠졌던 건 아닌가? 겨우 이런 대접을 받자고 내 평생을 뼈빠지게 공부하고 노력하면서 산 건가? 젊은 혈기로 유치하기 짝이 없던 꿈에 정신 팔려 여기까지 왔나? 꿈만 크게 꿨지, 내가 닿을 수 있는 곳은 여기까지인 건 아닌가? 같은 의문이 들기 시작한 거죠.

 

트로팅엄의 겨울은 텁텁하고 추워요. 겨울 어느 날, 감히 제 연주를 비교하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대단한 실력자셨던 분이 은퇴 선언을 하셨어요. 유명하신 분이었죠. 이제 나보다 훨씬 훌륭한 연주자랑 비교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추한 생각에 기뻤던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그 분 표정 위로 형용할 수 없는 무기력과 슬픔이 느껴져서 마음이 좋지 않았어요. 극장 위에 연주자 숙소가 있는데, 한창 물건을 정리하고 계시던 그분과 어쩌다 마주쳤어요. 제 안의 시기와 질투가 눈 녹듯 사라지더군요. 그렇지 않았으면 그렇게 진솔한 대화는 못 했을 거에요.

 

그 분 말씀으로는, 앤빌 러스트에서 죽치고 있으면 답도 없이 어두운 앞날밖에 없을 거라고 하더군요. 음악 인생 여기서 이렇게 끝내고 싶지 않으면 당장 앤빌 러스트 극장을 떠나 가능한 멀리 달아나라고 말이에요. 그 이유를 여쭸더니, 갑자기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시면서 옛날 일을 말씀하시더군요. 끔찍하기 짝이 없었던 지난 20년 전, 바로 여기서 첫 연주회를 가졌었다고. 여기 사람들 귀를 사로잡아 보겠다는 생각에 목숨 걸고 동분서주하는 동안 음악계에서는 오히려 더 멀어져 갈 뿐이었다고, 말이에요.

 

그러면 첫 무대가 끝나자마자 다른 곳으로 떠나거나, 적어도 그만둘 수는 있지 않았느냐고 여쭈었어요. 그분 말씀으로는,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을 거기 붙잡아 묶어놓는 듯한 무언가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앤빌 러스트 극장에 어떤 비극적 참사가 있었고, 한을 풀지 못한 채 지박령으로 눌어붙은 원령이 있어 청중에게는 잔혹하기까지 한 혹평을 쏟아내게 만들고 연주자에겐 관객의 냉랭한 무관심을 정기적으로 받아 마시고 싶게 하는 일종의 충동을 일으킨다, 고 은연중에 암시하시면서 말이에요.

 

말씀을 듣고 보니, 아주 말이 안 되는 소리는 또 아니었어요. 저도 마찬가지로 냉담한 반응을 받고 싶다는, 있어선 안 될 생각을 품어 본 적이 있었으니까요. 마음 놓고 푹 잔 날이 거의 없을 지경이었고요. 이불 아래 감당할 수 없이 뜨거운 열기가 들끓기라도 하는 것처럼 식은땀에 결박되어 한밤중에 벌떡벌떡 일어나는 건 거의 일상이었어요. 가끔은 숙소 벽 사이로 매캐하고 역한 타는 냄새가 스며 들어오는 듯한 느낌도 들었죠.

 

대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진 모르겠지만, 혹시 저처럼 밤에 잠을 잘 못 주무시거나 하는 일이 없었는지 여쭈니, 낯빛이 창백해지시더군요. 그분은 모호하기도 하고 간결하기도 한 한 마디 대답만 내놓으셨어요. 어떤 날짜였죠. 그리고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개인 물건을 여행가방에 채워 넣으시더니 무시무시한 속도로 방을 박차고 나가 버리셨어요. 그 날 이후 그분이 어떻게 살고 계신지 접할 일은 없었어요.

 

정확하고 명료한 말로 그분이 알고 계셨던 걸 풀어놓지 못하고 다만 겁에 질려 머뭇거리시기만 했지만, 분명히 뭐가 있기는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저는 곧장 트로팅엄 시립도서관으로 향했어요. 그분이 더듬거리며 불러 준 어느 날짜에 트로팅엄에선 무슨 일이 있었는가, 사건 기록을 하나하나 뒤져 가며 조사했지요. 아주 섬뜩한 일이 있었더군요.

 

앤빌 러스트 극장에서 무시무시한 사고가 있었어요.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지만, 트로팅엄도 아주 유서 깊은 도시에요. 어둠 강림의 시대에서부터 시가지가 형성되고 있었으니까요. 때는 700년 전. 앤빌 러스트 극장과 근린시설이 개장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에요.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던 작곡가 그린 사운드가 은퇴 공연을 갖기로 했지요. 은퇴하기에 너무 이른 나이가 아니냐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젊은 작곡가였지만,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그린 사운드 본인도 10년에서 20년 정도 쉬면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했으니 어쩔 수 없었어요.

 

그린 사운드는 마침 새로 문을 연 앤빌 러스트 극장에서 은퇴 공연을 갖고, 신곡이자 음악 인생을 마치는 마지막 곡이 될 곡을 연주하기로 했어요. 뭔가 이상하다 싶은 생각이 드실 수도 있겠네요. 이것보다도 지독한 아이러니가 또 어디 있을까요. 이 곡은 그린 사운드의 열 번째 교향곡이었거든요. 앞서 발표한 아홉 곡은 전세계에 그린 사운드라는 이름을 널리 알렸을 뿐만 아니라 300년 족히 우울한 발라드와 처절한 비곡으로 점철되었던 음악계에 새롭고 신선한, 긍정적 모티프를 도입한 걸작이었죠.

 

그린 사운드의 은퇴공연은 대단히 질박하고 소소한, 작은 연주회가 될 예정이었어요. 더 크게 하고 싶어도, 공연장이 앤빌 러스트 극장이었으니까 많은 사람을 수용하지 못했겠죠. 그린 사운드는 그런 연주회를 갖고 싶어했지만, 오히려 그런 공연이라는 점 때문에 트로팅엄에서도 엘리트, 특권층에 속하는 사람이 아니면 표를 구할 수가 없었죠. 음악계에서 온갖 비난과 반발이 쏟아졌을 건 여러분들도 충분히 짐작하셨을 거에요. 문제는 자기네들의 질시와 증오를 통제하지 못하고...... 소시오패스나 다름없는 방식으로 해소하려는 자들 한두 명 때문에 일어났어요. 비극의 씨앗이었죠.

 

그린 사운드가 최후의 걸작이 될 열 번째 교향곡을 들고 연주회장에 나타난 날, 방화범 하나가 극장에 숨어들어 불을 놓았어요. 화마火魔가 삽시간에 건물 전체를 집어삼켰고, 극장에 있던 120명은 그대로 불길에 갇혀 죽어야 했죠. 죽은 이들 중에는 그린 사운드도 있었는데, 타다 못해 녹아내린 시신 일부는 죽어서도 바이올린을 놓지 않았다고 하는군요. 그린 사운드의 유족은 홀아비가 된 남편과, 유복자가 된 쌍둥이 둘이었어요. 트로팅엄 사람들은 그린 사운드의 죽음을 슬퍼하며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 주었고, 수백 년 동안이나 불이 난 날을 시 공휴일로 지정하고 그린 사운드와 희생자들을 추모했죠.

 

생각해 보면 연주자 대기실 같은 곳에서 그린 사운드란 이름을 꺼내는 것 자체가 금기와도 다름없었어요. 이제 그 이름은 끔찍한 사고 그 자체와 다름없이 어떤 미신이고, 근거 없는 공포의 상징처럼 되어 있었죠. 시립도서관을 뒤지며 조사를 마친 뒤, 동료 연주자들이나 세입자들에게 그린 사운드의 열 번째 교향곡을 혹시 아느냐고 물어보며 다녔어요. 대부분은 들어도 대답하지 않거나, 못 들은 척 하기도 했을뿐더러 역정을 내는 사람들도 몇몇 있었죠. 그린 사운드에 대해서 물어보고 다닌 사람들의 반응은 이렇게 다양했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했어요. 그린 사운드란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린 사운드란 이름만 나오면 가던 길 잘 가다가도 벽에 불이 붙어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오들오들 떨어대는 거에요.

 

그때쯤에야 비로소 깨달았죠. 머리 깊숙이 뿌리내린 편집증적 공포의 희생양에는 저도 포함되더군요. 한밤중에 식은땀에 흠뻑 젖어 벌떡벌떡 일어나는 것도 이유가 있었던 거에요. 그럼 가끔씩 방에 감도는 매캐한 연기 냄새의 환각에도 뭔가 실마리가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문득 들더군요. 이 연기 냄새가 의미하는 바가 뭘까 그때부터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먼저 떠난 그분은, 제게 알려주신 것보다도 더 진상에 다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말이죠. 그 결론이 어떻든, 하루가 다르게 사건의 진상에 다가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앤빌 러스트 극장을 찾는 사람들이 저를 비롯한 연주자들에게 들끓는 증오와 냉랭한 무관심을 쏟아붓는 이유가 있기는 있을 테니까요. 청중과 연주자가 함께 딛고 선 건물 토대도, 따져보면 비참하고 끔찍한 죽음을 맞아야 했던 원령 위에 세워진 거나 다름없었죠. 그 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 연주로 트로팅엄 사람들을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은, 음악을 연주하는 게 아니라 여길 좀 봐 달라는 구걸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맙소사, 어떻게 그런 오만방자한 생각을 할 수가 있담? 제가 조금이라도 분별력이 있었다면 사람들이 제 연주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를 제 연주의 미흡함에서 찾았을 거에요. 아니면 고전 음악 연주를 그만두거나. 이 말도 안 되는 곳이 제 연주 경력의 전부인 이상, 거기에 현실적 잣대를 들이밀 생각은 추호도 없었죠. 저는 좀 더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했고, 한 명의 연주자인 이상 코앞에 보이는 흠을 가만히 놔둘 수는 없었어요. 제 '목소리'를 저편에 분명하게 전달하려면, 그 결함을 반드시 타도해야 했죠.

 

트로팅엄 시립도서관 기록보관소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진 기록을 찾으며 하루를 꼬박 보냈어요. 찾으면서도 한동안은 뭘 찾아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죠. 기록의 퇴적지를 뒤지는 것으로 역사가 잊고 사람이 잊은 저주받은 교향곡을 공짜로 우려낼 수 있으면 세상이 이렇게 어려울 필요가 없잖아요? 차라리 선조들의 무덤을 파헤쳐 쓸만한 부장품을 도굴하는 게 뭔가 얻어낼 가능성이 훨씬 높죠. 저는 그걸 알면서도 계속 기록물을 뒤져 나갔어요. 제가 몸담은 연주회장에 뿌리내린 원혼을 하루빨리 구마해야 한다는 절박함도 있었지만, 그린 사운드의 유작이 그런 식으로 잊히는 것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수도 없는 기록과 문건을 뒤집어엎다시피 한 끝에, 드디어 제가 찾아 헤매던 물건이 나타났어요. 그때까지도 꺼지지 않은 잔불이 일렁이는 검댕에 범벅이 된 고서 안에 악보 한 장이 끼워져 있더군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누가 저 찾기 쉬우라고 일부러 이렇게 해 놓은 것 같다는 기분도 들었어요. 그때쯤 되니 어떤 승리의 기쁨 같은 걸로 가슴이 충만해져서, 이제 무섭다, 두렵다는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지요. 700년이 지나도록 그 누구도 기억하지 않았던 그린 사운드 최후의 걸작, 교향곡 10번이 제 발굽에 들어왔으니 당연하지요. 과거의 어둠과 그 근본을 제거해야 연주회장을 떠도는 원혼을 구마할 수 있을 테니 말이에요.

 

그때부터는 공휴일 중에서도 의미 깊은 날을 기다리는 나날의 연속이었어요. 그런 날에는 저녁 공연을 하지 않거든요. 별로 바라던 바는 아니었지만, 꼼짝없이 그 해의 난방절까지 기다려야 했죠. 트로팅엄 거리마다 몰려나온 사람들이 캐롤을 부르고 눈장난을 치는 동안, 저는 앤빌 러스트 극장 으슥한 곳에 몸을 숨기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안내원이 퇴근하고 관리인이 극장 문을 닫을 때까지 조용히 숨죽여 엎드렸죠. 사람들이 전부 빠져나가고 어둠만 내려앉았을 즈음, 무대로 올라가 일종의 비밀 공연 준비를 시작했어요.

 

갑자기 오싹하면서 신경이 엄청나게 곤두서더군요. 네 다리가 하나같이 덜덜덜덜 떨려서, 잡고 있던 첼로를 놓치지 않는 게 고작이었어요. 칠백 년 전 앤빌 러스트 극장에서 화마에 휩쓸려 비명과 울음 속에 죽어간 사람들이 아직도 좌석에 남아 저마다 사지를 뻗어 저까지 잊힌 시간 속 불구덩이 속으로 끌고 들어가려는 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그때까지 거기 남아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영혼을 뭐라고 부르든지, 저들을 다시 세상 속으로 데려가 주었어야 할 낭랑하고 부드러운 화음의 대단원을 듣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죽어서 가야 할 곳으로 가지 못한 채 구천을 떠돌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죠.

 

그 누구보다도 솜씨 좋은 연주자만이 저들의 원통함을 풀어 줄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저들에겐 오직 저만이 그런 연주자일 것이라는 것도 말이죠.

 

더 머뭇거릴 것도 없이 기억 속에 남은 그린 사운드의 10번 교향곡 악보를 따라 눈을 감고 연주를 시작했어요. 당시 유행했던 멜로디 구조에서 탈피한 선율이 치솟았다가 급강하하기를 반복했는데, 세상에 그렇게 아름다운 곡이 있을 수 있는 걸 그제야 알았어요. 더할나위없이 발랄하고 경쾌한 곡이었지만, 이제 그 곡을 마지막으로 물러나 초야에 묻혀 두 아이의 어머니로 여생을 보내고 싶어했던 한 음악가의 마지막 곡으로 귀를 흠뻑 적시기 직전의 순간에 목숨을 잃어야 했던 가여운 사람들이 너무 가엾어서 눈물이 절로 흐르더군요.

 

아마 그분들께선 열 번째 교향곡보다도, 저 혼자 소리 없이 흘리던 눈물을 더 좋아해 주셨던 게 아닐까 싶어요. 눈물 떨어지는 소리가 타악의 자리를 대신 채워 준 것처럼 말이죠. 제 솜씨가 좋았던 건지, 아니면 10번 교향곡을 들은 것 자체로 만족하신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뭐가 바뀌기는 한 것 같았어요. 연주를 마치고 나니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던 천금의 무게가 씻은 듯 사라졌거든요. 음악학교 입학 이후 마주했던 그 어느 때보다도 큰 행복감과 해방감이 느껴졌죠. 아직 몇 분이 돌아가지 않고 남아 박수를 치며 환호해 주시기라도 하는 것인지, 귀가 살짝살짝 간지럽더군요. 감고 있던 눈을 바로 뜨면 앞이 뿌옇게 흐려지잖아요. 제 맹세컨대, 창백한 사람의 형상이 관객석 전방 몇 줄을 꽉 채우고 앉아서 빙긋이 웃어 주시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어요. 다시 눈을 깜박이자 언제 그런 게 있었냐는 듯 사라졌어요. 이제 가셔야 할 곳으로 가셨구나, 다행이다, 싶으니 웃음이 떠오르더군요.

 

그분들은 귀천歸天하셨고, 저도 그걸 알고 있었어요. 앤빌 러스트 극장에 창궐하며 곳곳을 오염시키던 고통과 증오의 구름이 걷히고 나니, 침묵 속에 젊은 음악가의 미래와 기회를 내보이는 듯한 분위기가 떠오르더군요. 그제야 비로소 저 같은 햇병아리들이 자기 솜씨를 마음껏 펼쳐 보일 수 있는 곳이 된 것이죠. 이제 한을 품고 주저앉은 원령이 남아 있지도 않았지만, 그린 사운드의 열 번째 교향곡을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해 보았어요. 관객이 없었으니, 제 인사를 받아 준 건 관객석에 드리운 불 꺼진 극장의 어둠뿐이었죠.

 


 

"미친 사람이 늘어놓는 장광설 같다고 생각하셔도 무리는 아니죠." 옥타비아가 앉은 자리에서 계속 말했다. "유령이나 망령 얘길 늘어놓는 게 현실성 있는 이야기는 아니니까요. 그 날 겪은 신비한 경험의 정확한 성질이 무엇이었냐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앤빌 러스트가 변했고, 저도 변했다는 명제는 분명한 사실이거든요. 실제로 신년맞이 공연 무대에 올라 연주했을 때는 박수갈채를 받았어요. 제가 더 노력하고 연습해서 환호를 받은 건 절대 아니에요. 처음 공연했을 때와 기량 차이가 거의 없었으니까요. 그러니, 청중들께서 제 연주를 좀 더 열린 마음으로 들어 주셨다고 해석하는 편이 보다 옳은 결론일 거에요."

 

옥타비아는 말을 마치고 부끄러운 듯 테이블에 올려놓은 발굽을 빙빙 돌리며 나긋하게 웃었다. 동석한 셋은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저만 그런 것도 아니었어요." 옥타비아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평소처럼 욕이나 얻어먹을 각오로 올라갔다가, 사람들이 환호작약하는 걸 보고 깜짝 놀라서 내려왔거든요. 제 솜씨가 과연 세상에서도 통할지, 무서워하고 혼자 의심하던 것들을 씻어낸 계기이기도 했어요. 앞으로 얼마나 더 나아갈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봤거든요."

 

"황송하게도 제 솜씨를 높게 쳐 주신 분들께서 곳곳에 제 이야기를 하고 다니셨는지, 트로팅엄 전역에 제 얘기가 돌더군요. 앤빌 러스트 극장은 어느샌가 고전 음악을 필두로 한 고전 문화 부흥의 성지 같은 곳으로 유명해져서, 전국 방방곡곡에서 많은 분들이 찾아 주셨어요. 어느 날에는 팬시 팬츠 선생님이 직접 찾아오셨는데, 캔틀롯으로 돌아가신 뒤 사교계에 제 이야기를 많이 하셨던 모양이에요. 운이 따랐는지, 하지 태양절 축제 때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 트로팅엄에 오셨다가 앤빌 러스트에 잠시 들르셨어요. 공주님을 독대하고 연주한 자리에서 솜씨를 인정받은 걸 계기로 유명 연주자의 말석에나마 끼게 된 것이고요. 솜씨가 이름을 따라주지 못해서, 겨우 미끄러져 떨어지는 것만 면하는 신세지만요."

 

"이야..." 멜로디아 브레이드가 지그시 웃으며 날개를 살며시 파닥이고 말했다. "굉장하네요. 그린 사운드 최후의 교향곡을 연주한 것으로 아홉 번째의 저주를 극복할 수 있었다는 말씀이시죠?"

 

"별 것 아닌 이야기였지만 거기서 어떤 의미를 발견하셨다니 다행이네요." 옥타비아가 대답했다.

 

"암만 봐도 미신에 찌든 허튼소리 아닌가." 바드 선생이 툴툴대듯 말했다.

 

"선생님!" 멜로디아가 찡그리며 말했다. "반박하실 말이 있으신 것 같은데, 해 보시죠."

 

"반박을 한다 치지, 그걸 어디에 쓰겠나?" 턱수염 빽빽한 얼굴이 찌푸려졌다. "옥타비아 양이 해 준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경험담이고, 그 내용을 입증해 줄 제3자가 없네. 그러니 반박 가능한 주장이 아닌 것이고, 그걸 반박한다는 것 자체도 성립될 수 없어. 즉, 그 이야기를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도 마찬가지야."

 

"집어치우고 좀비랑 귀신 얘기나 더 해 주라. 재밌네." 바이닐 스크래치가 말했다. 선글라스를 치켜올린 바이닐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머지 셋을 쳐다보고 말했다. "좀비, 귀신 얘기 좋아하는 사람?"

 

"이야기의 진실성 여부를 의심해 봐야 한다는 회의론적 사고는 제 옛날 얘기를 아무것도 아닌 시시한 얘기로 격하시켜 버려요. 만물의 잣대로 회의주의를 채택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옥타비아가 말했다. "제 이야기의 요지는, 음악에 있어 연주 솜씨 자체보다도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 는 것이었어요. 들어 주시길 바랐던 것도 그거고요. 앤빌 러스트의 관객들과 제가 마음으로 교감하지 못하게 막고 있던 벽이 정말 있기는 있었답니다. 교향곡 10번을 연주한 날을 경계로 벽이 허물어진 것도 단순한 우연의 일치로 치부하기 어려운 것이고요. 어떤가요?"

 

"좀비랑 귀신 얘기 좋아하는데..."

 

"본디 사람 여럿 엮인 일에 또 여럿이 끼어 들어가기 시작하면 일이 어디로 튈지 아무도 짐작할 수 없기 마련." 바드 선생이 기타를 단단히 잡으며 말했다. 사내가 몸을 까딱까딱하며 뒷다리로 바닥을 톡톡 쳤다. "연예, 공연 산업의 일부로 음악을 끌어들이면 안 돼. 말인즉, 제기랄, 따지고 보면 나도 컨트리 음악으로 승승장구하던 놈이니 자네들 보기엔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 했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만 들겠구만. 그렇긴 해도 한참 동안이나 공연 안 다닌 게 나름대로 이유가 다 있다 이거지. 나는 아가씨처럼 많이들 좋아하는 음악을 하지 않아. 내가 그쪽에 발을 들인 게 아니라, 그쪽이 날 끌어당겼다고 하는 편이 맞을 테지. 자연 속으로 나가 가볍게 산보를 할 때마다 그런 느낌이 들거든. 대지가 직접 말을 걸어오는 것과 같아. 세상 나고 기록 났듯 음악도 마찬가지야. 그것들 전부 형제자매라는 게지.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겠는가."

 

"좀비, 귀신 얼마나 좋아..."

 

"쉿!" J.R.바드 선생이 바이닐을 홱 째려보더니 기타를 가볍게 퉁기며 말했다. "거 뾰족머리 흰색솜털 아가씨, 남 말할 때 함부로 끼어드는 거 좋지 않아! 옘병할, 무슨 얘기 하고 있었더라? 아하, 그랬지!"

 

바드 선생이 포크 음악을 연주하려는 듯 코드 몇 개를 퉁겨보았다.

 

연주 대신, 사내가 말했다. "왜 그리 일찍 음악 인생 접었냐고 물어보고 싶은 말이 많을 게야. 끄적인 음악 중 가장 괜찮은 것들만 추려서 연주하고, 녹음하는 데는 별반 문제가 없었어. 이쪽을 보고 뭐라 지껄이며 미친 듯 몰려오는 '광팬'이란 족속들을 보고 나니 이제 그만둬야겠다 생각이 들더구만. 자네들도 이해할 것 같은데? 누가 좋다고 그런 난장판에 발을 담그나. 그래 그대로 우리 직원들이랑 매니저들한테 '관둘란다' 한 마디 하고 기타 하나만 챙겨 아무도 모르는 곳을 찾아 훌쩍 떠났지. 생각해 보면 적어도 어디로 갈 건지 정해놓고 떠나는 게 정상인데. 기차역에 가니 뭐 반짝반짝하는 포스터가 하나 붙어 있더구만. 새로 개척할 땅에 정착할 지역민들을 모집하는 내용이었어. 정착지를 '애플루사'라 부르기로 벌써 합의 본 것 같더군. 내 살다 살다 그렇게 멍청한 작명은 처음 봤다니까. 헌데 그 애플루사란 동네가 사막 한가운데 있고 정착해 살 사람도 얼마 안 된다길래, 나도 모르게 '나도 갈랍니다' 하고 서명해 버렸지. 일이 이렇게 된 게야..."

 


 

 

정착할 동네라는 곳에 기차가 닿은 뒤에도 거기가 정착지인 줄 몰랐어. 암만 봐도 그냥 땅 파고 들어간 토굴로밖엔 안 보였거든. 가파르기 짝이 없는 협곡 한가운데 낀 샌드위치 신세나 다름없었지. 성격 나쁜 버팔로가 떼를 지어 근처를 돌아다니기까지 하니 금상첨화, 화룡점정이었어. 새로운 땅이라는 말에 눈이 뒤집어져 함께 흘러온...허어어...애플루사인이라고나 해 둘 무리의 모험심에는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더군. 동의하진 않았지만 반발하진 않았어. 그냥 그런갑다 하고 비슷한 동류인 체 하며 살아야겠다 싶었지. 그도 그럴 것이, 당장 해야 할 일만 해도 미쳐 돌아갔거든. 고된 노동이야말로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소통할 수 있게 해 준다고 생각하던 걸 생각하면, 잘 된 일이었지.

 

첫번째로 착수한 일은 남쪽을 향하여 철로를 까는 일이었어. 이루 말할 수 없이 고되고 힘든 일이라네. 그걸 가지고 안절부절 못하고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굴 필요는 없어. 일을 해야 하니까 일하고, 일을 하니까 일이 끝나는 것이지. 하늘에 뜬 해는 제가 더워지고 싶을 때마다 열을 뿜었고, 그럴 때마다 바람이 불어 더위를 식혀주는 나날이었어. 사막의 기후란 으레 그런 것이니, 정착민들이 할 수 있는 게 뭐 있었겠나. 천지창조 이후 근면성실하고 어진 어스 포니들이 그래 왔듯이 해야 하는 일을 최선을 다해 할 뿐이었어. 굳이 말할 것도 없겠지만, 나도 느끼고 있었지. 내가 뭘 느끼고 있었는지는 자네들이 알아서 생각해 보시고.

 

내 입장에선 이보다 완벽할 수가 없었지.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잘 흘러왔구나 싶으니 말여. 해가 지면 서쪽 지평선에 붉은색과 주황색이 뒤섞여 더없이 화려한 색조가 이글거리는데, 그걸 보고 있으면 위대한 엄마가 세상의 천장에 끝내주는 그림 한 폭을 또 그렸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들거든. 커다란 바위와 산처럼 치솟은 절벽 위로 진홍과 분홍이 뒤섞여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모습이 또 얼마나 각별한지 몰라. 지금 자네들 콧구멍으로 들어가 허파까지 깨끗하게 뚫어 주는 것과 같이 건조한 공기도 예술이야. 가끔 마음이 내키면 언덕빼기를 향해 큰 소리로 노래를 불러도 좋았지. 나도 몇 번 해 봤고. 저 커다란 산이 내 노래에 응답하듯 메아리를 돌려보내는데, 그 소리가 두 귀에 능히 닿는다네. 바위와 돌로 출렁거리는 대양을 사이에 끼고 서로를 부르는 연인 같은 느낌이라고나 해 두자고. 돌이켜 보면 자기숭배의 일환이나 다름없었던 전국 투어나 음반 사인회로 점철된 세월 속에 매몰된 나 자신이 점점 그 껍질을 깨고 나오는 나날이었어. 끔찍하기 짝이 없어 공주님도 눈을 돌리고 말 거지같은 이름이지만, 그 애플루사에서 새 사람으로 갱생한 게지. 허 참.

 

개척지를 그나마 사람 살 만한 곳으로 꾸미러 온 다른 개척자들은 어땠을 것 같나? 지금 자네들 차분하게 앉아 있는 거의 반이라도 됐으면 내가 말을 안 했지. 우리는 하루하루 철로를 깔고 사과나무 씨앗을 심는 일에 매달렸다네. 그래 사람들이 하나같이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다니는 품이, 다들 곱추라도 된 줄 알았지 뭔가. 그래 겁을 집어먹어도 배 터지게 먹었구나 싶어 왜들 그리 쪼그라들어 있냐고 묻자, 묻는 말에 대답은 안 하고 엉뚱한 소리를 하더군. 일 초라도 빨리 할당량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문 단단히 걸어잠그고 숨어야 한다고 말여. 사막의 눈을 피해야 한다나.

 

자네들 머리로 상상이 되나?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말이야! 아니, 대지와 하나 되는 삶을 살고 싶어서 도시를 버리고 사막 한가운데로 그 잘난 궁둥짝 쳐들고 들어온 거 아니냐 이거지! 하! 참. 당신들 병신 아니냐고 툭 까놓고 물어 봤어. 오히려 이쪽을 병신 보듯이 보더니 묻더구만. "방금 들었소?" 하고.

 

내가 뭐랬겠나. "듣긴 뭘 듣는단 말요? 바람 소리 말인가? 사막에 고인 침묵에도 소리가 나나 보오?" 그랬지.

 

그랬더니 내가 뭐 전염병 환자라도 되는 양 슬금슬금 뒷걸음질쳐서 떨어지더구만. 몇 달쯤 지나고 나서야 몇몇이랑 둘러앉아 터놓고 얘기를 좀 할 수 있었어. 하나같이 똑같은 옘병할 소리를 하더구만. 그때까지도 무슨 소리가 들린다는 게야. 이 양반들은 그걸 '흥얼거리는 소리'라고 돌려 말했어. 흥흥거리면서 콧노래 부르는 그 소리 맞아. 수십 명이 죄다 똑같은 소리를 듣는다는 게야. 협곡 근처를 둘러싼 흙과 모래가 노래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여. 그래 그게 그렇게도 무섭기는 했던 모양이야. 빌어먹을 겁쟁이 자식들이 짐 싸서 곧장 도시로 튀어 버렸거든. 이름부터 등신같이 지어놓은 개척지에 새로 자리잡고 살겠다고 작정하고 온 작자들인데도 그걸 못 견딘 게야.

 

그러니 무슨 생각이 들겠나. 옥타비아 양이 조금 전에 앤빌 러스트 극장에 들러붙은 원혼을 달래 저승으로 돌려보냈다고 얘기했었지. 그 때랑 똑같은 생각이 들더군. 이 양반들 꿈이랑 현실도 구분 못 하나 싶었지. 생각이 사람을 지배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괴담에나 나올 법한 상황이 코앞에 닥친다? 상상만 가지고 될 일이 아냐. 이거야말로 음악의 힘이라 할 수 있지. 뭐 지박령이든 원령이든, 이름이 어떻든간에 내 알기로 그런 것들은 세상에 없어. 음악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니, 무엇이든 믿게 만들 수도 있다는 거야. 삼라만상의 역사는 곧 음악의 역사이고, 음악사에 길이 남아 영원히 추앙받을 만한 음악가라면 오직 한 분뿐이신데 이제 그분은 오래 전에 사람의 곁을 떠나시고 말았지. 그분은 떠나셨어도 영광된 성가의 편린들은 우리 곁에 남겨두셨어. 이제 세상에 그 조각이라도 연주하고 노래할 자격이 있는 것은 오직 자연뿐이야.

 

각설하고, 저 언덕빼기에서 들려오는 '흥얼거림'이 대체 뭐길래 그랬을까? 공주님께 맹세코 개척지 곳곳을 돌아다니며 하늘과 땅 사이 귀를 기울이지 않은 곳이 없었어. 일출부터 일몰까지, 저 빌어먹을 선인장에까지 귀를 들이밀어 봤지만 아무 소리도 없었다 이거지. 그 비슷한 것이라도 있을까 했지만 없었어. 다만 개척지 인근에 가꾸기 시작한 사과 과수원이 개판 5분 전이 되어 가는 것만은 나도 볼 수 있었지.

 

그래. 잘 기억하고 있구만. 그때까지 골짜기 곳곳에 심어대던 사과나무들이 뒤틀려 죽어가기 시작했거든. 우리가 그 양반들 뛰어다니는 땅바닥에 작물을 심어 볼까 한다는 얘길 근처 버팔로 양반이 듣더니, 사막이란 당신네들 생각처럼 쉽게 가꿀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잔소리를 늘어놓은 적이 있었어. 아주 순화해서 표현하자면, 그대로 다 굶어 죽을 판이었어. 심어놓은 씨는 발아할 생각이 없었고, 겨우 심어놓은 묘목은 가지가 말라비틀어져 죽어 버렸지.

 

처음에는 대지가 사람에게 이리 가혹할 리 없다며 현실을 부정했어. 정신나간 도시 촌놈들이 공장 일 나가는 것마냥 작업화에 작업복 껴입고 나가 작물을 심으니 작물이 자랄 리가 없다 생각했지. 그린 후프Green Hoof선생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도 관개농업에는 한두 가지 주워들은 바가 있었거든.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네 어쩌네 하는 멍청한 미신을 주워섬기는 동안 이제 제정신도 같이 내보낸 게 틀림없는 머저리들이 내 동네 이웃이라니 내 심정이 어땠겠어.

 

농사는 이렇게 짓는 거라고 몸소 시범을 보여 줄랬더니, 이 빌어먹을 작자들은 신경도 안 쓰더군. 뭐 전염성 정신병 저주 같은 거라도 걸려서 미쳐 날뛰는 것마냥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구르고 비틀거리고 난리도 아니었어. 저치들 귀에만 들리는 초대형 콘서트 같은 거라도 열려서 거기 끌려가기라기라도 한 양 머릿속에 그것만 들어차 있었던 게지.

 

이게 다 대체 뭐란 말야. 저주라는 게 정말로 있어서 동네에 서리기라도 했단 걸까? 당장 짐 싸서 살던 도시로 꺼지라고 자연이 우리 등을 떠미는 거였을까?

 

난 그런 생각은 안 키워. 이 몸만큼은 그딴 거 키우지 않아. 나를 찾아서 개척지행 열차를 타고 들어왔는데, 내 이웃이라는 돌대가리들처럼 달달 떨고만 있으면 자아 회복이 아니라 오히려 더 등신이 될 테니까. 이제 천지사방에 오직 자연뿐이었고, 이제 우리 둘이 아주 진지한 대화를 나눠도 되겠다 싶은 생각도 들던 차였지.

 

그러고 보니 개척지로 옮겨온 이래 단 한 번도 노래하고 연주하는 시늉조차 해 본 적이 없더구만. 음악가로서의 나는 잠시 제쳐두고 정말 내 안에 있는 참 나를 찾는 데 골몰해서 대부분의 시간을 침묵으로 보냈거든. 이제 저 등신같은 '흥얼거림'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 다들 훼까닥했으니, 이쪽도 내 최선의 무기인 기타를 드는 게 사리에 맞지. 그리하여 어깨 위에 기타를 들쳐메고, 등 위에 귀리와 수통을 가득 쟁여넣은 가방을 짊어진 채 해가 질 때까지 그냥 앞만 보고 걸었어. 밤이 깊어질 즈음 해서 커다란 메사*7 하나를 골라잡아 타고 올라갔지. 내가 뭐 밑도 끝도 없는 마초라서 그런 건 절대 아냐. 온 동네가 그 흥얼거린다는 소리 때문에 귀에 딱지가 앉도록 그 얘기만 하고 앉아서 지친 것도 있었고, 진정으로 대자연을 마주보려면 마땅히 그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니겠어.

 

대충 꼭대기까지 기어올라가고 나니까 해가 뜨더라고. 열기가 슬금슬금 올라오는데, 도저히 견딜 재간이 없더구만. 당장 할 수 있는 거라곤 자리에 앉아서 주변 풍광이나 좀 보는 것밖에 없었어. 아. 당연히 기타도 쳤지. 문제는 내가 개척지로 흘러들어오면서 악보 한 장 안 챙겼다는 거야. 산업화된 음악에 질려 내 발로 걸어나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다시 그 판의 힘을 빌게 될 줄도 몰랐지. 연주할 준비가 안 되었다고 할 수 있겠구만. 뭐 누가 됐든 뭐가 됐든 듣고 있기는 하겠지 하면서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그냥 쳤어. 삼라만상이 다 내 청중일 수도 있고, 그 누구도 내 청중이 아닐 수도 있었다는 거야.

 

황량한 벌판에 불어오는 외로운 바람을 맞으며 사막에 널린 바윗덩어리 꼭대기에 앉아 기타 줄이나 퉁기고 있자니, 뭐라고 할까, 좀 우습더구만. 사실 다 상대적인 거 아니겠나. 옥타비아 양도 그리 생각하겠지? 아하 젠장, 어떻게 보면 애플루사의 그 머저리들이야말로 진실에 더 가까이 있는 게 아니었을까 싶더라고. 생각해 보니 나 또한 자기가 쌓아올린 모든 것을 내버리고 여기까지 흘러들어온 멍청이었으니까. 하. 아, 그러니까 이런 말이야. 제정신이 박힌 놈이면 동네에 이상한 역병이 돌아 다들 굶어죽게 생긴 판에 사막 한가운데 돌덩이 위에 올라앉아 혼자 기타나 치고 앉아 있지는 않을 거란 거지. 차라리 다 망가져 가는 사과 과수원이라도 돌보는 게 더 그럴듯하지 않아.

 

잠깐 있다 내려온 것도 아니었어. 한참을 주저앉아 뭉개고 있었지. 해 뜨고 나니 얼마나 뜨겁던가 얘기했지? 해가 떴으니 지는 것도 당연한 일인데, 몇 시간쯤 지나면 다시 떠올랐다가 또 저물었어. 그렇게 오랫동안 안 자고 깨어 있는 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로 느껴지더구만. 글쎄, 뭐 불면증이나 수면장애 같은 얘기를 꺼내면 뭐라 대답해야 하나 막막하기는 하지만. 동네 사람들이 말하는 그 흥얼거리는 소리가 뭔지 알아내기 전까진 두 눈 똑바로 뜨고 거기 앉아 당나귀들마냥 자세 굳히고 안 내려갈란다, 하고 각오를 하긴 했어.

 

그래도 말이지, 그게 휴양지에서 신선놀음하는 거랑은 천지차이였거든. 물 다 떨어지고, 귀리는 슬슬 맛탱이가 갈 때쯤이야. 땀냄새도 어떤 경지에 이르면 평생 목욕 한 번 안 해 본 돼지마냥 지독해질 수 있더구만. 이때부터 나도 슬슬 머리가 돌기 시작했지. 어떻게 보면 처음부터 미쳐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야. 미치지 않고서야 그 돌덩이를 타고 오를 생각을 누가 하겠나?

 

불현듯 제정신이 돌아오고 나니, 슬슬 내 생물적 죽음이 두려워지더구만. 당장 집어치우고 도로 내려가려던 찰나 무슨 소리가 들렸어. 그래, 그 흥얼거림이라는 걸 말이지......

 

흥얼거리는 소리라고 해야 할까? 아니, 거기에 적합한 말은 아마 없을 거야. 대지모신 같은 존재가 있어 내게 직접 말을 걸어오는 것이었을까? 염병. 나는 그런 걸 논의할 사람은 못 돼. 최악의 방식으로 자연에 대적하러 나선 기타 치는 또라이였지...... 헌데, 자연이 직접 내게 뭘 불어넣더군.

 

머릿속에 아주 멋진 곡이 막 떠오르는 거야. 무대 위를 등신같은 걸음으로 누비고 다니던 지난날에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끝내주는 악상이 댐 터진 것처럼 막 머릿속으로 밀려드는데, 야, 그거 기분 괜찮더라고. 이 돌대가리에 어마어마한 악상이 한데 모여 있었다니, 지금 생각해 봐도 믿기지가 않는구만. 말하자면 이거야. 이제 막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온 젊은이들끼리 모여 만든 밴드 하나가 통째로 내가 되어 있는 느낌. 자네들도 알잖아? 스스로 마땅할 줄 아는, 때묻지 않고 어디 얽매이지 않는 창의성으로 충만해 있었다는 거야. 바윗덩어리 위로 기어오르기 전에는 죽었다 깨어나도 떠올릴 수 없었던 굉장한 멜로디가 샘솟듯이 나오더라고.

 

그제야 무의식의 영역에 어느 정도 걸친 부분까지도 아주, 아주 약간은 이해가 가더군. 머릿속에 신선하고 참신한 멜로디가 가득 들어차 있기는 했는데, 내 힘으로 떠올려서 써낸 건 아니었다는 거야. 말인즉, 자연이 내게 그런 곡 또한 쓸 수 있는 걸 가르쳐 줬다는 것이지. 온 대지가 말을 걸어오고 있었어. 그걸 뭐라고 규정하든지, 애플루사 정착민들이 그 소리를 두려워하고 있었던 건 사실이야. 나는 달랐지.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리듬에 몸을 맡기고 박자를 맞추어 발굽을 두드려댈 수도 있었어. 대지는 항상 자기를 딛고 사는 사람들에게 같은 방식으로 말을 걸어오는 것이고, 나는 우연히 그걸 들은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단 말이지. 이퀘스트리아를 빚어낸 창조신은 떠나야 할 때를 알고 사람의 곁을 떠나셨지만, 세상에 준 것 전부를 도로 회수해 가신 것은 아니니까 말이야. 두 분 공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발 밑을 받쳐 주는 대지가 있으며 사람에게는 두 귀가 있지. 이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뭐가 됐든 특별한 것들이 태어나고, 또 태어나기를 반복해 가면서 우리 곁에 나타나는 것이고. 그런 게 아닌 이상 앙코르란 개념 자체가 필요할 이유가 없잖나. 자네들 보기엔 어떻지?

 

각설. 골짜기 끄트머리에 가만히 앉아서, 대지가 속삭인 말을 사람의 귀로 들을 수 있는 형태로 바꿨어. 기타를 한 번 슥 퉁기고 나서 연주를 시작했지. 소리가 끊임없이 솟아나는 가락의 굴뚝 같은 걸 옆구리에 끼고 있나 싶은 생각까지 들었어. 그 연주는 대지가 홀로 그때까지 감당해 온 모든 비밀의 총체를 끌어당겨 꺼내놓는 것과 같았어. 그 모든 것은 음악의 형태로 내 머릿속에 저장되었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돌덩이 아래로 기어 내려가 사막 벌판을 지나 개척지 어귀에 닿은 뒤 쓰러졌는데, 나중에 들으니 사흘 밤낮을 돌덩이 위에서 보냈다는 계산이 서더군. 

 

사흘 밤낮이라니까. 외따로 떨어진 바윗덩어리 꼭대기까지 기어 올라가서 세 번의 일몰과 세 번의 일출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는 거야. 그 내내 사막의 열기에 바싹 익어 가며 말라 비틀어지고 있었다는 거지. 우리 친절한 이웃들이 나를 병원으로 끌고 갔어. 내가 죽은 줄 알았다나 봐. 대단히 애석하게도 두 눈 번쩍 뜨고 일어나 버렸지만. 눈 뜨자마자 찾은 건 한 잔 물이 아니라 내 기타였어. 기타 들고 병상에서 일어나 앉으니까 주변에 우글우글하게 운집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입을 떡 벌리고 쳐다보더구만. 살다살다 그런 멍청한 이름은 처음 들어 봤다 싶은 동네로 짐 싸서 들어오고 난 뒤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기타 잡고 연주한 게 그 때야. 병원에서도 소소하게나마 콘서트가 가능하더구만.

 

혹시 대충이라도 결말 짐작한 친구 있나? 그 연주는 동네 사람들이 웃으며 춤출 수 있게 해주었어. 바람에 뒹구는 회전초에 나름대로의 불안과 걱정을 실어 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야. 바로 다음 날부터 우리는 과수원을 더 열심히 돌보기 시작했지.

 

바로 다음 달이 되었을 때는 애플루사에 정말 기근이 들었던가 우리 스스로도 의심스러워했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꽃을 피우기는커녕 말라 비틀어지기 바쁘던 사과나무에 꽃이 피기 시작하더니, 먹고 살기 충분할 정도로 소출을 내 주더군. 애플루사 정착 이후 첫 번째 수확이었어. 새삼 보기 좋더구만. 일체유심조라지만, 자네들도 그 모습을 꼭 한 번 봤어야 해. 다른 건 몰라도 애플루사라는 동네 전체가 마음을 바꿔먹은 건, 다른 사람들이 자연이 들려주는 소리에 지레 겁먹고 숨어 다닐 때 혼자 그 앞에 나선 단 한 사람 때문이라는 건 확실한 사실이라고 말이지.

 


 

 

"딱히 내 자랑 하려고 이런 얘기를 한 건 아니야." 바드 선생이 연주를 마무리하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고요한 시선이 다른 셋을 향했다. "우리 동네가 바뀐 건 다 나 하나 덕분이다, 라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지. 이 '기근'이란 것도 사실 여러 가지 골칫거리 중 하나 정도에 불과하거든. 나중에는 이보다 훨씬 더한 일도 여럿 겪었어. 이를테면, 꼭지가 돌아 대가리를 이리로 향하고 달려드는 버팔로 무리 같은 거. 그래도 뭐, 우정의 힘......인지 뭐시긴지 하는 걸로 어떻게 잘 넘기긴 했어. 여튼. 요점은......"

 

사내가 기타를 벽에 기대어 놓으며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테이블 위로 두 발굽을 펼쳐 놓았다.

 

"나 혼자서는 도저히 애플루사의 돌대가리들이랑 소통이 안 됐어. 그걸 극복해낸 건 노래의 힘이지. 내가 원하던 답이 실은 대지에서 나온 게 아닐 수도 있지만,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얻어낸 것은 분명해. 내가 그걸로 세상을 조금이나마 바꿔놓은 건 아니야. 세상에서 내가 배운 것이지. 안절부절못하고 낑낑대던 사람들 진정시키고 달랠 수 있었던 건 오롯이 그 덕분이야. 이 모든 것이 음악의 힘 덕분에 가능했다는 것이지. 어떤가? 신비학이네 마법이네 하는 같잖은 소리 하려는 게 아니야. 중요한 건 마음가짐이지. 그렇다고 옥타비아 양, 자네가 겪은 일을 별것도 아닌 걸로 깎아내리려는 건 아니...."

 

"선생님. 한 가지만 여쭈어 봐도 될까요." 옥타비아가 끼어들었다.

 

"말해 보시게."

 

옥타비아가 테이블에 바짝 다가앉으며 말했다. "저라고 선생님 작품 활동을 아주 모르는 건 아니에요. 사실, 예전에도 몇 번 선생님 곡을 샘플링한 적 있었고요."

 

"허, 재밌구만."

 

"선생님이 쓰시는 화음은 거칠지만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지요. 이 이야기는 계속 늘어놓을 수도 있지만, 질문의 요점이 아니니 지금은 넘어가도록 해요.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선생님께서 도저히 이름만큼은 긍정할 수 없는 개척지로 자아 탐색의 여행을 떠나기 이전까지 발표하신 앨범 수를 여쭤 봐도 될까요?"

 

"왜, 녹음이야 꽤 하긴 했다만... 어허......" 바드 선생이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거칠어진 발굽으로 턱수염을 매만졌다. "흠...... 7집이었나? 아니, 8집인가?"

 

"9집이에요!" 멜로디아 브레이드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했다. "이제 기억났어요!" 멜로디아가 계속 말했다. "점핑 레이 바드 선생님이 발표하신 음반은 총 9장. 전부 웨건 휠 레코드에서 발매했죠! 하하!" 딱딱 박수를 치는 멜로디아의 뺨에 홍조가 피었다. "신기하게 맞아떨어지지 않아요?"

 

옥타비아는 빙긋이 웃어 보일 뿐이었다.

 

바드 선생은 놀란 눈치였다. 얼굴이 좀 창백해진 듯했다. "대지모신 맙소사..." 사내는 모자를 벗고 거의 다 벗겨진 갈기 위로 발굽부채질을 했다. "굳이 그런 식으로 해석한다면야, 뒷맛이 썩 좋은 편은 아니긴 하구만. 옥타비아 양이 일종의 전도를 하려 든다고는 못 하겠다만, 그렇게 생각하는 데 뭐라도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

 

"제가 의도한 바 또한 그것 하나뿐인걸요." 옥타비아가 대답했다. "다르게 보기."

 

"흠. 그래, 뭐." 바드 선생이 정수리에 모자를 얹어 쓰고 옆을 휘 돌아보았다. "그럼 누구, 비슷한 경험 한 사람 더 없나?"

 

"나! 나!" 바이닐 스크래치가 두 발굽으로 테이블을 쿵 하고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조롱하는 듯 실실거리며 말했다. "전에...전에 한 번 그런 적이 있거든? 오키? 그러니까, 트롯 크루즈랑 니콜 키드메어*8 결혼식에서 축하 공연을 할 때 일이야. 잘 듣고 있나? 장장 세 시간 동안 안 쉬고 턴테이블을 열심히 긁어대고 있었거든? 듣고 있지? 그래 잠깐 자리를 비우고 화장실 가서 방광도 비우고... 뭣 좀 다른 것도 처리했지. 그게, 콧속이 원체 가려워야지. 아 뭐 어쨌든. 별 상관 없는 얘기다. 어쨌든 화장실 갔다가 돌아와 보니까, 글쎄 무슨 꼴이 나 있었는지 알아?"

 

셋은 긴장한 채 아무 말 없이 기다리고만 있었다.

 

바이닐 스크래치가 이를 빛내며 빙글빙글 웃었다. "글쎄 내 장비 전부 다 오바이트 범벅이 돼 있더라고!"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셋은 바이닐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이게... 말이지..." 바이닐이 진땀을 빼며 나머지 셋을 쳐다보고 말했다. "...그래, 쳐 돌아버릴 일이지. 안 그래? 아니, 트롯 크루즈랑 니콜 키드메어가 결혼하는 자리잖아. 그지? 암만해도 배 나온 채로 사진 찍기는 싫었을 테니 음식을 그렇게 많이 준비한 건 아니었어. 게워낼 정도로 먹을 수가 없었다구. 아니, 새들톨로지 신도*9니까 모르긴 몰라도 이미지나 그 비슷한 거 관리는 철저히 해야 했을 거 아냐. 그게 아닌 이상 신혼여행 잘 다녀오라고 제정신으로 말 못하지. 아, 새터데이 네이 라이브Saturday Neigh Live*10 때 긁었던 리믹스만 줄창 틀어대고 있었던 건 무시하자구."

 

옥타비아는 아무 말 없이 테이블만 내려다보고 있었고, 바드 선생은 대놓고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멜로디아 브레이드가 자세를 고쳐 앉고 입을 열었다. "그, 저기—"

 

"그럼 그 오바이트는 다 누가 싸질러 놓은 거지?!" 바이닐 스크래치가 말했다.

 

멜로디아가 움찔하더니, 마른침을 삼키고 말을 이어 나갔다. "저, 저도 비슷한 경험을 한 일이 있는 것 같아요. 그... 어... 아주 비슷한 이야기는 아니긴 하지만, 저... 그래도 연관은 있는 것 같아서..."

 

"괜찮으니, 말씀해 주세요." 옥타비아가 말했다.

 

바이닐이 콧방귀를 뀌더니 의자에 몸을 던지듯 주저앉아 두 앞다리를 겹쳐 꼬며 말했다. "쳇. 대단한 추리소설 매니아들 납셨구만. 하여간 이 빌어먹을......"

 

"농담꾼 아가씨는 진정하고." 바드 선생이 툴툴대며 말했다. 사내가 멜로디아에게 웃어 보였다. "그럼 자네, 계속해 보겠나."

 

"으으으음... 네." 멜로디아가 길게 늘어뜨린 녹색 갈기를 이리저리 꼬다가, 겨우 말을 꺼내놓을 힘을 짜내 말했다. "그, 어, 여러분께서 저를 아실지 모르실지 잘은 모르지만, 세간에는 그... 어... 나름대로 유명한 작곡가로 알려져 있나 봐요. 음, 작곡가라기보다는 작사가에 더 가까운 것 같지만요. 그나마도 오스카 헤이머스타인Oscar Haymerstein*11은커녕 그 발끝도 못 따라가는 신세지만." 멜로디아가 킥킥 웃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이름 있는 가수들에게 곡을 제공할 정도는 된답니다. 그게... 제 생업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지금까지 심사숙고해서 잘 해오고 있다 싶은데... 그......"

 

"흠?" 옥타비아가 한쪽으로 고개를 기댔다.

 

멜로디아 브레이드가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선율을 만들고 악기를 연주하는 일에 끼는 건 아니지만, 어떤 가수가 노래를 부른다고 하면, 연주에는 제가 없어도 가사에는 제가 있는 것이죠. 즉, 이 또한 나름대로 지분이 있는 게 아닐까요? 노래를 짓는 데 제가 하는 것이라곤 펜을 들어 가사를 써 내려가는 것밖에 없지만, 이 또한 음악을 빌어 제 자신을 표현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의 선율에 의지해야 하기는 하지만 말이에요."

 

"허허, 이런." 바드 선생이 등받이게 몸을 기대며 모자 챙을 슬며시 밀어올렸다. 그 아래로 빙긋이 웃는 얼굴이 드러났다. "나도 한창때는 다른 가수들 곡 리메이크 여러 번 했었어. 난 아직도 나 같은 놈한테 가사를 빌려 주신 작사가 양반들 다 은인이라고 생각해. 그러니 그게 잘못됐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말라구."

 

"그래요. 그 말이 맞아요." 옥타비아가 끄덕이며 말했다. "선율을 빚고 연주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이미 훌륭한 음악가잖아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말씀만으로도 감사하죠." 멜로디아가 끄덕거렸다. "그래서... ... 원혼 서린 극장이나... 기근 닥친 개척지 같은 문제에 휘말린 건 아니지만, 아홉 번째의 저주에 관한 경험은 확실히 있어요. 저... 여러분과 이야기를 하기 전에는 그런 일이 있었는지 한 번 생각해 본 일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제가 겪은 일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이기도 하죠. 글쎄, 중요하다는 말은 좀 어폐가 있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뭔가... 저를 바꿔놓은 건 사실이에요. 운인지 운명인지, 음악 인생에서 제가 작사한 곡이 아홉 번째로 차트를 석권하자마자 있었던 일인데요......"

 


 

저는 클라우드데일에서 태어나 자랐어요. 제 적성을 갈고 닦기엔 그리 좋은 환경이 아닌 건 아주 어릴 때부터 새삼 느끼고 있었죠. 페가수스의 진로라 해도, 대체로 기상 관리, 토네이도 관리, 근위대 임관을 벗어나지 못하잖아요. 뭐라고 할까... 아무래도 저는 전사의 피를 이은 건 아닌 것 같네요. 그냥 음악을 하고 싶을 뿐이었는데, 클라우드데일 인근은 음향에 관해서라면 정말 최악이에요. 어떤지 짐작도 못 하실걸요. 짐작해 보시려고 한다면, 말이죠.

 

어쨌든, 로스페가수스로 이사를 간 것도 그것 때문이었죠. 구름 위에 산 건 아니었고, 할리위니Hollywhinny*12 거리 어느 한 자리에 집을 구해 들어갔어요. 매력적이면서... 글쎄요, 하하하...... 잔혹한 곳이더군요. 대학에서 음악이론을 전공하다 졸업해 보니, 어느샌가 사방에 널리고 널린 작사가들 틈바구니에서 무한경쟁에 시달리는 신세가 되어 있었어요.

 

내가 과연 아티스트의 삶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 자문할 때마다, 그렇지 않다는 생각만 들더군요. 즉 이런 거죠. 밭을 얼마나 잘 가는지, 귀리 농사를 얼마나 잘 짓는지, 우표를 얼마나 잘 붙이는지 등등, 어느 한 사람이 단순노동을 얼마나 잘 소화하는지 계량화해서 비교하는 건 납득이 가죠. 순수한 창조성과 창의력으로 경쟁해야 하는 업계에서 그런 기준을 쓰기는 어렵잖아요? 적어도 저는 사람의 창의력은 그 어떤 잣대로도 비교할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해요. 어... 음악 하는 데 재능이 별반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에요. 이런 이야기 대부분은 대체로 단순한 운의 문제로 귀결되기 마련이죠. 옥타비아 씨를 예시로 들어 볼게요. 옥타비아 씨가 타고난 솜씨는 불세출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죠. 팬시 팬츠 선생이 옥타비아라는 연주자가 있다고 캔틀롯 상류사회에 소개하지 않았다면 아무 소용 없는 거 아니었을까요?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 트로팅엄에 들르신 김에 옥타비아 씨를 독대하고 연주를 청하신 것도 팬시 팬츠 선생 덕분이니까요. 그런 얘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 레퍼토리는 흔히 이렇죠.

 

얘기가 샜는데, 제가 하고 싶은 일로 밥벌이를 하는 게 절대 쉽지는 않을 거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시작한 일이었어요. 그걸 아는 것으로는 그때껏 살아온 인생처럼 별볼일없는 페가수스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도저히 어쩔 수가 없더군요. 진심이에요. 클라우드데일 출신이라고 소개할 때마다 '네가 그 영맹英猛한 페가수스들 피를 이었다는 건데 말이 되냐'면서 웃음거리로 삼더군요. 전혀 페가수스답지 않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에요. 태어날 때부터 몸이 건강한 편은 아니었던 게 첫번째고, 다른 하나는... ... 사람들 대하는 게 많이 서툴렀던 점이에요. 제 모습이 어땠을지 상상이 가시나요? 이제 막 대학을 마치고 사회로 나와,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도 가장 뜨거운 용광로와 같은 곳에 이름 좀 날려 보겠다고 고군분투하며 홀로 할리위니를 방황하는 페가수스의 모습이 어땠을지......

 

제 뜻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었어요. 사실, 업계에 본격적으로 투신한 것도 아니었죠. 돌아보면 그 때 절망과 좌절에 빠져 죽지 않은 건 기적이나 다름없어요. 그리 잘나가는 가수는 못 됐던 라벤더 레이크Lavender Lakes라는 사람이 작사가를 구한다기에 거기서 일을 시작하게 됐죠. 그다지 운이 좋은 편은 아니었네요. 그 사람이나 저나 무명인 건 똑같았고, 이 사람이 다급하구나, 절박하구나 하는 데서 의견이 맞았어요. 라벤더 레이크는 초췌하기 짝이 없는 몰골로 나이트클럽을 드나들며 메인 이벤트의 말석이라도 혹시 낄 만한 곳이 없나 찾아다니는 게 일이었는데, 그럴수록 주머니 사정만 나빠져 갔지요. 이 사람이 재능이 없는 건 아니었어요. 목소리는 정말 예뻤는데, 그 목소리로 부를 가사가 없었던 거죠.

 

그래서 라벤더 레이크가 제시한 조건에 합의하고, 가사를 써주기 시작했어요. 글쎄... 가엾다고 생각했던 것 같네요. 동정심 하나로 사업 파트너를 고른 사람 중에 잘 된 사람 없다고들 하잖아요? 적어도 그런 식으로 계약한 건 중에 제대로 된 게 날 수가 없을 것 같죠. 그 다음부터 일어난 일이 제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은 건 사실이지만, 얻어걸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에요.

 

라벤더 레이크가 애니하임Aneighheim*13 주택가 나이트클럽에 일을 구하러 갔을 때였어요. 유명한 사진작가가 마침 그 클럽에 가 있었지요. 다들 이름 정도는 들어 보셨을 거에요. 포토 피니쉬 선생이 거기 있었던 거죠. 뭐 어쨌든, 포토 피니쉬는 제가 써준 곡도 마음에 들어했지만, 라벤더 레이크가 노래하는 것도 마음에 들었었나 봐요. 라벤더 레이크가 무대에서 내려오자마자 바로 한쪽으로 데리고 가더니 기나긴 격려를 늘어놓았다고 하니까요. 저야 그 자리에 없었지만, 나중에 라벤더가 얘기해 주더군요. 아주 기운이 넘쳤지요. 포토 피니쉬가 알고 지내던 명망 높고 유명한 에이전트에게 선을 대주겠다고 한 모양이었어요. 할리위니 대로에서 그 에이전트와 만나기로 했는데, 저도 같이 가 주면 안 되겠느냐며 부탁하더라고요. 당시만 해도 만나 봤자 별로 바뀔 건 없겠다 싶었지만, 그러자고 했죠. 당장 주머니에 떨어지는 얼마 안 되는 수입으로 겨우겨우 먹고 사는 처지였으니까요. 대박이든 소박이든 뭔가 얻어걸린다는 것 자체가 너무 급작스러운 일이기도 했고, 그 전에 실현 가능성도 없다시피한 게 현실이었어요.

 

그 에이전트라는 사람은 정말 천재가 맞았어요. 어빈 콜트신Irvine Coltsein이란 사람이었죠.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라벤더 레이크의 장점을 꿰뚫어본 데다가, 제 가사에도 절로 듣는 사람을 매료시키는 부분이 있다고 바로 얘기해 주었지요. 뭐, 그냥 칭찬을 후하게 해 주신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적어도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 건 아니었어요...... 실버 스핀 음반Silver Spins Publishing과 음반 계약을 주선해 주셨거든요. 요구 조건은 한 사람당 하나씩 두 개였어요. 저는 새로 발매할 곡 세 개에 쓸 가사를 써 가야 했어요. 그것만으로 충분히 기분 좋은 조건이었죠. 라벤더 레이크에게는 무대 분장과 활동 예명을 바꾸라고 했어요. 조건을 받아들고 망설이고 있길래,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밀어 줬죠. 어빈 본인이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는 만큼, 그러는 편이 좋을 것 같았거든요. 그 조건을 받아들인 라벤더는 사파이어 쇼어스Sapphire Shores로 활동하고 있죠. 그리고...... 아하하... 제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여기 계신 여러분들께서도 잘 알고 계시겠죠. 그렇지요?

 

뭐, 말 그대로 어쩌다가 온 세상에 제 가사를 전해 줄 수 있는 단단한 기반을 딛고 서게 된 것도 감사한 일인데, 그 가사를 라벤ㄷ...... 아니, 사파이어 쇼어스의 환상적인 목소리로 불러 준다니 대단한 일이었지요. 어쨌든 그 세 곡에 붙일 가사를 써 갔는데, 그 중 두 곡이 바로 히트곡 반열에 올랐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어요. 사파이어 쇼어스도 마찬가지로, 하루아침에 무명 가수에서 셀럽으로 인생이 바뀌었죠. 저희 둘 다 어안이 벙벙했어요. 인기가 사람을 바꿔놓는 건 한 순간이라고들 하지만, 우리만큼은 절대 그러지 말자고 약속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 날 나눈 약속이 아직까지도 무사히 지켜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요즘도 평범한 친구들이 으레 그러듯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어요. 그쪽이 투어로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쪼개 만나주고 있죠. 솔직한 말씀으로, 만인의 주목을 받는 그 자리가 탐나는 건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 앞에 서는 일은 항상 피로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으니까, 저는 지금 이 상태야말로 완벽한 최선이라 생각해요.

 

이제 그쪽이나 소속사에서 가사를 더 써 달라고 연락을 받으면 써서 넘기는데... 결과물로 나오는 곡을 들을 때마다 어쩜 이렇게 좋은 곡이 나왔지? 싶은 생각이 들어요. 제 문재文才를 부러 깎아내리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분 모두 아시다시피 사파이어 쇼어스의 인기는 이제 일종의 사회 현상 같은 게 되어 버렸으니까, 제 입장에선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것이죠. 사실상 히트곡 두 개를 연이어 내면서 화려한 데뷔를 한 셈인데, 그러고 나서도 히트곡을 계속 써낼 수 있다니... 어쩜 이리 운이 따라 준 것인지 아직도 믿기지가 않네요.

 

사파이어 쇼어스에게만 가사를 준 건 아니었어요. 우리 소속사 가수들에게 갈 가사도 몇 곡 적었지요. 제 작품 중 가장 큰 인기를 끌었던 것들은 오직 사파이어 쇼어스에게 간 가사뿐이었지만요. 그렇게 몇 년이 훌쩍 지났어요. 그 동안 제 문재가 못 쓸 것은 아니었나 보다는 자신감이 생겼지요. 그때부터 작업실에 더 오래 머무르며 더 복잡하고 예술성을 살린 곡을 작업했어요. 언젠가는 화려한 오케스트라 합주를 동반한 곡을 써낼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우리 나라에서 열리는 시상식이란 시상식마다 사파이어 쇼어스가 상을 휩쓰는 내내, 저도 항상 그 뒤를 따르며 곁을 지켰어요. ......딱 한 번만 빼고.

 

가기 싫어서 안 간 게 아니라, 그 해에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팠어요. 사파이어 쇼어스의 아홉 번째 히트곡의 유행이 끝나 갈 때쯤이었죠. "흐린 기억 속의 그대Remember You Softly"라고, 조그마한 발라드였어요. 꽤 잘 어울리는 제목이라 생각했죠. 좀 음침한 느낌이긴 하지만, 이제 조만간 몸이 크게 아플 것인데, 평범하게 나을 만한 병은 아니겠구나... 하는 걸 몸이 벌써 느끼고 있었거든요. 제가 그닥 건강하게 태어난 건 아니었다고 했던 거 기억하시죠? 글쎄, 타고난 병이 드디어 나를 잡는구나... 싶은 느낌이었어요. 양쪽 폐에 심각한 감염이 생겨서, 일 년을 족히 병상에서 보냈죠.

 

엔터테인먼트 산업계 사람들 중에서도 제가 많이 아프다는 걸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어요. 대부분은 그리폰의 나라에서 있을 사파이어 쇼어스의 공연이 취소됐다는 소식 정도만 알았지요. 죽어가는 친구를 뒤에 두고 어떻게 가냐며 사파이어가 취소한 거에요.

 

그 말은 명확한 사실이에요. 말 그대로 죽어가고 있었죠. 전신 대부분이 마비되어 발굽 하나 까딱할 수도 없었죠.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가슴 속에 들어찬 침과 바늘이 속을 뒤집어 놓는 듯 아팠어요. 여기... 계신 여러분은 평생 그런 일 없으셨으면 좋겠어요. 차가운 병실에 혼자 누워 이대로 눈 감고 두 번 다시 못 깨어나면 좋겠다는 피로감에 찌들어 있었던 건 저 하나면 족하니까요.

 

제가 입원해 있다, 는 현실의 핵심은 이거였어요. 병세가 갈수록 악화되기만 한다는 것. 숨쉴 때마다 아픈데 온몸이 굳어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더 안 좋아질 수가 있느냐, 싶으실 거에요. 어, 그 이상도 있더라고요. 소설이나 그런 데서 흔히 써먹는 느낌이긴 한데, 그때부터는 몸의 문제가 아니었어요. 앓아누운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없어 계속 생각에 생각만 거듭하다 보면, 그 생각이라는 것도 깊은 밤의 어둠 속으로 나무 장대를 찔러넣듯 깊숙한 나락으로 빠지게 되죠. 그러면 사람은 현실 그 자체에 의문을 갖게 돼요. 사람은 왜 사는 걸까? 살아서 뭐 어쩌자고? 이른바 작사라는 짓으로 밥벌이를 하면서, 미친개처럼 날뛰는 10대 팬들 앞에서 노래하는 팝 가수에게 줄 가사를 짜내는 데 내 모든 것을 투입한 적 있었던가? 아, 다른 페가수스 동포들처럼 날씨나 관리했어야 했는데. 자연의 섭리에 따랐어야 했는데. 뭐가 됐든 광활한 우주 위 티끌만한 반점 위에라도 내 발자국을 좀 더 오래 남길 만한 일을 찾았어야 했는데......

 

...아. 어머. 그... 이야기가 완전히 다른 데로 샜죠? 아하하하...... 어... 죄송해요. 이 얘기는 사파이어랑도 터놓고 해 본 적이 없다 보니 저도 모르게. 사파이어가 이해해 줄 것 같지도 않아요. 적어도 저는 사파이어가 저를 아끼고 사랑해주는 것만큼이라도, 이 친구가 이걸 이해할 일이 없기를 바라죠. 충분히 행복하고 유명한 삶을 살고 있는데, 사람이 마주할 수 있는 어둠 중에서도 가장 깊은 어둠... 정도라고나 해둬야 할 짐의 무게를 굳이 더 짊어질 필요는 없으니까요.

 

말하자면 끝을 알 수 없이 뻗어나간 공허 한가운데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팽팽한 한 가닥 실에 매달려 더욱 깊은 곳으로 한없이 침잠해 들어가는 것과 같아요. 어둠의 심연에서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고, 망각의 밑바닥에서 숫자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죠. 그 한가운데서도 이성의 끈을 놓아 버리지는 않았어요. 아홉 번째 히트곡에서 첫 번째 히트곡까지, 제가 세상에 남기고 간 흔적을 생각하면서 이 아홉 곡이야말로 내가 삶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인 것이며, 나를 지탱해 줄 힘이 있는 것인가 생각하고 있었지요.

 

저 자신을 인식함과 동시에 과거를 되돌아본 끝에 남은 희미한 흔적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저 이전에도 끝내 지난 아홉 곡을 뛰어넘는 명곡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요절한 선배 음악가들처럼 나도 여기서 끝나는 것인가 두려워하던 것일지도 모르지요. 바닥 없는 심해로 침잠해 들어가던 저를 그 위로 끄집어 내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해 준 건 사파이어였어요. 눈물로 축축한 얼굴에 애써 미소를 띄우며 얼굴에 뺨을 비벼주던 사파이어 쇼어스가, 제정신을 차리게 해 준 것이죠.

 

한동안 아무 감각도 없이 멍하니 있었는데, 그 '무감각'하다는 것이 이처럼 따스하고 생동감 있는, 현실적 느낌이 될 수도 있더군요. 반들반들한 죽음의 황야 속으로 걸어 들어가, 두 눈으로 어둠의 심연을 직접 목도하고 그 앞에 기다리는 섬뜩하고 차가운 운명을 피해 되돌아온 거에요. 그것을 제 변화의 계기라고도 부를 수... 있겠지요. 죽음을 바로 앞에서 목도한 것 때문에 기운을 잃었던 건 아니에요. 정말 아니에요.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차분해졌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지금 여러분께 제 과거를 털어놓는 이 순간에까지 그 힘이 닿고 있답니다.

 

회복기의 첫 한 달이 지나갈 때쯤, 병실에 화환과 문병 선물이 엄청나게 쌓였어요. 절반은 사파이어가 보내준 거였고, 나머지 반은 소속사에서 보낸 거였지요. 두 달째가 되니 꽃 선물이 좀 줄어들더군요. 셋째 달과 넷째 달은 어물거리는 사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어요. 다섯 달이 되었을 때, 에이전트가 심혈을 기울여 쓴 편지를 한 통 받았어요. 다시 작사 활동을 해 줄 수 있겠는지, 받는 사람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전략적으로 잘 쓴 글이었어요. 하긴 그럴 만도 했어요. 제가 앓아누운 이래 순회 공연도 갈수록 뜸해지고, 사파이어 쇼어스의 레퍼토리도 식상해져 갔지요. 소속사가 쓰고 있던 작사가도 여럿 있었지만, 제가 이전에 써놓은 가사에 버금갈 만한 가사를 써낸 분도 없었다고 하더군요. 다들 다급한 처지였고, 결국 제게 역할을 해 달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면서도 혹시 이것 때문에 병이 재발하지는 않을지 어떨지...... 전전긍긍하고 있었지요. 재발 외에 뭘 더 상정하고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사파이어, 제 가여운 친구는 병문안을 올 때마다 공연 얘기는 아예 꺼낸 적도 없었어요. 제 생각을 많이 해 주는 친구죠. 하지만 표정에서 드러나는 것까지 감출 수는 없었나 봐요. 걱정스러운 걸 넘어서, 겁을 먹은 지경에 이르렀죠. 병원에 누워 지내는 동안 단 한 글자도 써 볼 생각을 하지 않은 제 자신이 공포스러울 정도로 밉더군요. 가사를 끌어내려 머릿속을 아무리 뒤져 봐도, 저 냉혹하고 시커먼 아가리가 저를 집어삼키려 할 때 보이던 어둠밖에 보이지 않더군요. 병상에 앉아서 가사를 쓰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어요. 밖으로 나가, 세상의 온기를 쪼여야 했죠.

 

그래서 병실을 나서 산책을 나갔어요. 할리위니 대로 곳곳을 돌아다녔지요. 다니면서... 쇼핑도 좀 많이 하고요. 히히. 네, 영감을 얻는 데는 별로 도움은 안 되지만 생각 정리에는 쓸만하답니다. 그 때부터... 뭔가 일어나더군요. 제가 그렇게 되길 바라지 않았으므로,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이라는 생각은 했어요. 그게...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건 아는데, 이것만큼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네요.

 

말... 온갖 낱말들이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걷던 길목에서 스며 나오기도 하고, 마르퀴스 극장에 내걸린 표지판에서 뚝뚝 떨어지기도 했어요. 심지어는 지나가는 역마차에서까지 튀어나오더라니까요. 놀라서 비명을 지른 적도 있어요. 물웅덩이에 발굽을 담그고 물장난을 하니 멜로디가 나온 적도 있어요. 해변 모래사장에 가 무릎을 가만히 쓸어보다가, 이게 어떤 노래로 향하는 일종의 지표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사방에서 쏟아지는 어휘는 일관성이 전혀 없었지만 그만큼 풍부했는데, 이것들을 어떻게 엮어 보려는 것 자체가 이미 정상인의 사고는 아니었던 것 같지만, 그래도 해 볼 만했죠.

 

그래서 제 앞에 어휘가 튀어나온 순서대로 적어 보자 결심했죠. 그래서 어딜 갈 때마다 항상 노트패드를 지참했어요. 처음에는 아무런 연관성이나 의미도 찾지 못했죠. 되는 대로 튀어나온 말들이라, 이것들로 가사를 쓰려면 힙스터도 못 되는 사람 정도로 수준을 떨어뜨려야 할 판이었으니까요. 눈에 보이는 말들이 이상하든 말든 꾸준히 적어 내려간 뒤, 혼자 있을 때 가만히 살펴보다 보니 어떤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게다가 이 말들 전부... 서로 연관된 것들이었죠. 믿어지세요?

 

죽음과 공허의 영역 깊숙한 곳까지 떨어졌다가 다시 산 사람의 땅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뭐가 들러붙어도 단단히 들러붙어서 왔다, 고 얘기하는 거나 마찬가지... 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이것도 어떻게 보면 타고난 것 비슷한 거라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단순히 무시하면서 살아왔을 뿐인, 도저히 제정신에는 못 볼 재능 같은 거죠. 사파이어 쇼어스에겐 제가 필요했으니, 제가 적어 내려간 단어의 집합을 내다 버리는 대신 그대로 안고 가기로 한 거에요. 저는 그것들을 한데 모아 노래로, 가사로 엮었어요. 다음 날, 작업이 끝나자마자 단정하게 한데 묶어 소속사로 곧장 보내 버렸고요. 미쳐도 보통 미친 게 아니었죠.

 

그 다음 날 아침부터 제 아파트에 누가 찾아왔더군요. 아, 해고 통보를 하려고 사람을 보냈구나 생각했죠. 찾아온 건 어빈 콜트신 본인이었어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제가 보낸 곡을 두고 '아름답다'느니, '예술의 극치', '심금을 울린다' 같은 표현을 쓰더군요. 이 사람이 날 놀리나 싶었죠. 벌써 스튜디오로 다 보내 뒀더군요. 사파이어 쇼어스가 녹음실에 들어갔다 나오고 난 뒤, 우리는 열 번째, 열한 번째에 이어 열두 번째, 열세 번째 곡까지 연속으로 차트를 석권했어요.

 

우리는 이참에 지금까지 낸 곡을 한데 모아 컴필레이션 앨범을 내기로 했어요. 가사 대부분을 제가 맞닥뜨린 어휘의 집합에서 찾아낸 것으로 채웠지요. 엔터테인먼트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라 불리는 '이 노래에 실려, 그대 나의 곁으로The Numbers That Bring You Back'가 그렇게 나왔어요. 어제 마지막으로 진단을 받으러 갔는데, 진료실에서 들은 것만 두 곡이었어요. 2년 만에 완치 판정을 받았죠. 사실, 죽었다 살아난 다음에도 건강 관리에는 별로 신경을 안 썼어요. 그 어느 때보다도 아이디어가 샘솟다 보니 도저히 거기 신경을 쓸 겨를이 안 났거든요.

 

사파이어도 좋아해 줬어요. 기분이 좀 나아져서 다행이죠. 저... 때문에 사파이어까지 우울해했다니 미안할 뿐이에요. 유명한 사람 대부분은 주변 사람에게 냉랭하게 구는 법을 연습하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태생적 안하무인을 선보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제 친구 라벤더는 그런 부류가 아니에요. 이름이 어떻고 갈기 모양이 어떻고 무대에서 무슨 옷을 입든지, 라벤더는 작사가를 찾아 발을 동동 구르던 그 날의 가수이고... 제 친구일 테니까.

 


 

"생각해 보면, 그래서 제가 죽다 살아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해요. 라벤더랑 아홉 곡을 히트시켰다는 걸 생각한 게 아니라, 내 친구 라벤더를 생각했던 덕이 아닐까." 멜로디아 브레이드가 배시시 웃었다. "저만큼 사파이어 쇼어스를 잘 아는 사람도 없을걸요. 얼마나 유명해지든 그 친구는 저 없이는 외로워서 못 살 거에요. 할리위니에서 주고받을 수 있는 계약 관계야 많을 테지만, 그만큼...진심인 관계는 또 없을 거라 생각해요. 다시 세상 속으로 돌아가 내 친구 곁으로, 내가 좋아하는 일 곁으로 가고 싶었던 것 때문에라도 그 때 죽으면 안 됐죠, 사실. 여기에는 다른 이유도 하나 있는데, 열 번째 히트곡을 내야 한다는 제 자신의 의지도 있었어요. 일단 열 번째 히트곡만 내면, 그 누구도 저를 막을 수 없게 되는 거니까요." 멜로디아가 쿡쿡 웃더니 뒷다리 무릎을 껴안으며 말했다. "설마 제가 그 정도 의지와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그 덕분에 살아서 여기 있는 거지만."

 

"말씀대로라면, 아홉 번째의 저주라는 개념이 그대를 변화시켰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어요." 옥타비아가 빙긋 웃었다. "그럴 수 있다고는 해도, 죽음을 이겨낸 건 전적으로 그대의 힘과 정신력이 이루어 낸 성과라고 할 테지요."

 

"간을 뻥튀기로 튀긴 게 아니면... 죽었다 살아나기 힘들지." 바드 선생이 빙긋 웃었다. "알아들었나? 자네가 작사가로 이름을 날리는 건 그 덕분이고, 내가 방구석 기타리스트에 불과한 것도 그 때문이네."

 

"흐으음..." 멜로디아가 얼굴을 붉혔다. "글쎄요... 언젠가 제가... 아니, 우리 모두 언젠가는 가야만 할 곳에 갈 때까지, 지상에서 남은 시간 동안 제가 하고 싶은 것들 하고 살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해요." 마른침을 삼킨 여자가 나머지 셋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모두 각자의 시간을 즐길 수 있었으니 지금 여기서 만날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으어, 지겨워 죽겠네......" 바이닐 스크래치가 이마로 테이블을 쿵 치며 권태에 찌든 눈으로 방 건너편을 멍하게 쳐다보았다. "저주받은 극장, 노래하는 골짜기에, 이젠 콜트라드의 '어둠의 건초Hay of Darkness*14' 를 그대로 주워섬기는 꼴이라니...... 잘난 당신네들 머리로 짜낼 수 있는 게 말같잖은 괴담에 가식 쩌는 하하호호밖에 없어?!"

 

옥타비아가 얼굴을 찌푸렸다. "글쎄요, 스크래치 씨. 그쪽이 늘어놓은 돈 많은 유명인들 결혼식 얘기와 더불어 어마어마한 구토물 얘기를 진지하게 듣고 점잖게 계셨던 분들을 그렇게 폄하하는 건 그리 바람직하지 못한 것 같은데요."

 

"야!" 바이닐이 말했다. "나도 당신네들처럼 재미없는 얘기나 늘어놓는 데 한 가닥 하지만, 당신네들 이 덜떨어진 작자들은 정작 아무것도 못 들은 주제에 뭐라도 들은 척 주절거리고나 있잖아! 아홉 번째의 저주라, 내 튼실하고 탱글한 엉덩이 맙소사! 뚱싯뚱싯 씐나는 우리 업계에서 있었던 쩔어주는 얘기 하나 들려줘?!"

 

"아니, 별로 듣고 싶지 않군." 바드 선생이 툭 던졌다.

 

"어허이! 그 수염 다 뽑아 버리기 전에 다물어!" 바이닐이 능글거리는 조소를 띄우며 뿔을 밝혀 선글라스가 빛나게 만들고, 야광봉처럼 한쪽 발굽에 들고 빙빙 돌리며 새빨간 눈초리로 나머지 셋을 휙 둘러보며 말했다. "지금부터 자의식 과잉에, 상위문화에 찌든 딴따라 나으리들 양말조차 깜짝 놀라 날아갈 법한*15 멋진 이야기를 들려줄 테니 잘 들으라고. 얘기 끝날 때쯤 되면 당신네들 전부 다 '내가 왜 양말을 신고 있었을까?' 싶어질걸? 아, 뭐 작년에 신물나게 써먹은 말장난이긴 하다만. 그건 그렇고, !"

 

"어..." 멜로디아가 입술을 깨물며 발굽을 들어올렸다. "저 양말 신고 있는데..."

 

"자!" 바이닐 스크래치가 일어서서 큰 목소리로 떠들며 선글라스를 휙휙 돌렸다. "메어애미Mareami*16 시내, 어느 디스코텍에 공연 하러 갔을 때 얘기야. 입장 시간 전에 미리 밤 새워 긁어댈 장비 쫙 깔아 놓고 있었는데, 우리 뚱뚱보 매니저가 뒤뚱뒤뚱 걸어오더니 말을 걸더군......"

 


 

"요. DJ-P0N3. 좆됐어. 음석 남은 게 하나도 없네."

 

그래 내가 그랬지. "뭐? 아잇, 씻팔. 음석 챙겼어야지 왜 안 챙겨서 일을 만들고 지랄이야? 앞으로 12분만 있으면 시작인데 어쩌려고 그래. 그 안으로 해결 못 하면 연필이 눈깔 속으로 사라지는 마술 보게 될 줄 알아."

 

그래 그 새끼가 그러대. "뭐, 공연 마치고 간 DJ가 쓰던 보험용 음석을 구하긴 했어.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지도 않고, 충전된 마력도 간당간당하긴 하다만 평소처럼 죽여주는 베이스 깔고 가는 데는 충분할 거야."

 

그리하여 이 몸이 말씀하셨지. "그래 그 등신같은 물건에서 아직 써먹을 만한 구석이 남아 있다고 진심으로 생각한다면야 이리 넘겨. 내가 확인해 주지."

 

그 자식이 음석이랍시고 얻어온 걸 넘겨주는데, 이야, 저질도 그런 저질이 또 없겠더구만. 아니 그러니까, 다이아몬드 독 뱃속에 있다가 나온 거 같았어. 처먹는 구멍 말고 다른 구멍으로. 그걸 갖다가 그대로 근처 테이블에 몇 번 때려박아 보니까 소리 비슷한 게 나긴 했어. 생각해 보니까 음석이 아니라 테이블이 내는 소리일 수도 있겠더라고. 그러니까, 음석은 거기 있는 것이기도 하고 없는 것이기도 하지. 이해하겠어, 옥타비아 씨? 됐으니까 다물고 있어.

 

그건 그렇다 치자고. 대삐리들이랑 지지배들이 슬슬 입장하면서 댄스 홀이 꽉꽉 들어차기 시작했어. 하나같이 눈꺼풀 축 늘어져 있는 꼬라지가 볼 만하더만. 디스코텍에서 꾸벅꾸벅 졸아대는 건 신성모독이야. 음악 살짝 깔아주면 바로 약발 돌지. 이 정도는 알아먹겠지? 자, 그러니까, 더 뭉개고 있을 시간이 없었어.

 

"뭘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자빠졌어!" 그랬지. 적어도 난 그렇게 말했다고 생각해. 잘은 모르겠다만. 그때부터 벌써 뿅 가 있었던 게지. 존만한 똥쓰레기를 턴테이블 마나공급장치에 쑤셔넣고, 레버를 힘차게 당겼는데 아무 일도 없더라고. 어떡해. 모처럼 오늘의 인기녀로 뽑혔는데 잔뜩 긴장해서 발굽 덜덜덜덜 떠는 지지배처럼 노즐을 막 후려쳤지. 우리 매니저는 대경실색을 했고. 하, 쪼다 새끼.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얼마나 크게 비명을 질러댔는지, 분명 그 새끼 똥구멍에 피 터졌을 거야. "그 똥덩어리 아직 부하상태면 어쩌려고 그래! 너 꼴리는 대로 불러도 상관없는데, 그 염병할 물건 과부하 걸지 마!"

 

거기다 대고 뭔 말을 해줘야겠어? 이 등신같은 놈한테 한 마디 해 줘야지. "이 등신아. 내가 뭔 짓 하는지는 나도 아주 잘 알고 계신다. 네놈이 램스탈리온Rammstallion이랑 나이트위니Nightwhinny*17 매쉬업이나 하면서 떡을 치고 있을 때 이 몸은 턴테이블을 완전 조져놓고 계셨다고."

 

분명 나한테 대고 꽥꽥 소리를 지르고 있었어야 할 사람이, 갑자기 천장으로 휙 날아가더라고. 페가수스였는지, 아니면 선글라스에 가려서 잘못 본 것일 수도 있겠어. 기억이 잘 안 나네. 메어애미 하면 습도 높기로 유명하잖아. 염병할 것. 맞아? 아냐? 까는 소리하네. 어디까지 했드라? 오케이, 알았어.

 

"자, 자. 다들 진정들 하세요!" 내가 미리 녹음해 둔 목소리는 절대 아니었어. 이 돼지새끼가 스피커 전원 올리는 것도 잊어먹고 있었거든. 거기다, 헌트롯 S.톰포니Huntrot S. Thompony*18 아저씨처럼 뭔가 낄낄대는 톤이었거든. "옘병할 디스코텍을 다 뒤집어엎을 정도로 끝장나게 놀 준비 다 되어 가거든요. 너무 들떠서 당장이라도 해바라기를 양푼으로 퍼먹을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아, 셀레스티아 공주님이라도 내다 버리고야 말 뭐 같은 씨는 무시합시다! 존만한 크리스탈 하나 때문에 큼직큼직한 기계가 안 돌아가다니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그러는 걸까요?! 블루 밸리로 놀러 간 동안 우리 존경스러운 카덴즈즈즈즈즈즈즈즈자 공주님의 가호에 힘입어 정기 쪽쪽 빨리고 오기라도 한 걸까요?! 대답 좀 하세요, 바가지 쓰고 사 온 용 가래침 같은 작자들아!"

 

그래 장비를 쓱 훑으니까 거기 비친 거울상이랑 순간 눈이 딱 마주쳤는데, 웬 '9' 하나만 달랑 떠 있더라고. 보자마자 야 이 씨ㅂ... 아이쿠, 여기서 쓰기는 좀 그런 표현이구만. 흠흠.

 

"야, 이거 뭘까!" 하고 큰 소리로 덧붙였지. "9래! 9를 거꾸로 뒤집으면 날씨 쌀쌀할 때 내 뿔 길이가 되지. 인치 단위로 말야. 그걸 다시 뒤집으면, 빌어처먹을. 또 9가 되는구만! 어이, 형씨들! 와서 이 똥덩어리 좀 봐 줘 봐! 혹시 중급 마법사 자격 있는 친구 있나? 전원 올려야 해. 어... 음석이 원체 등신이라 이쪽에서 시동 걸어야 한다고!"

 

그랬더니 꾸역꾸역 낑겨 들어온 작자들이 하나같이 깔깔대더구만. 처음에는 왜들 이러나 싶었는데, 방금 뱉은 말 다시 생각해 보니까 그럴 법도 했어. 그 콧대 높고 실험정신 투철한 디제이가 반쯤 맛탱이가 가서 거의 쓰레기 비슷하게 된 물건으로 시동 잘 걸어 놓고는 그런 소리 지껄이고 있었던 거야. 그대로 내 콧구멍에 처넣었지롱.

 

근데 여기서부터 일이 신기하게 돌아가더라고. 당신네들은 마법이랑은 거리가 있으니, 마력장이 뭔지 아마 잘은 모를 거야. 이 마력장이라는 건 그 범위가 있어서 두 개 이상의 마력장이 일정 거리 이하로 가까이 붙으면 그게 약하든 강하든 일단 엉겨붙으려는 성질이 있어. 그러니까 음석인지 똥덩어린지 안에도 우리 눈에는 안 보이지만 아무튼 구물텅거리는 그물 같은 게 들어 있는데, 이것들이 내 왼쪽 콧구멍에 들어간 순간부터 다시 작동을 시작한 거야. 대뇌 시냅스가 팽팽 돌아가면서 '와, 이 새끼 뿅 갔어!' 하더라고. 그 때 머리가 멍해지면서 정신 놔 버렸어.

 

그리고, 휴, 이보셔들. 혹시 캔틀롯 산맥 꼭대기에서 그 아래 크리스탈 숲 호수에 뛰어들어 본 적 있어? 이 얘기를 왜 하냐면, 그 때 내가 겪었던 게 딱 그거나 다름없거든. 아주 무지막지했어. 별만 총총한 한밤중에 남들 눈 피해 나와 공원 근처까지 나가서는, 행인만 보였다 하면 달려가 품에 제 새끼 떠넘기고 얼굴 들킬새라 순식간에 도망가는 치들 있잖아? 그것들마냥 별이 총총한 큼직한 외투를 둘둘 두르고 나온 절대로 우리 눈에 띄여서는 안 되는 미지의 것들을 봤지. 경찰모 쓴 혜성이 호각 불며 달려나와 감마선을 토해내며 그 옷자락을 벗겨내고 나니까, 딱 봐도 음악 좋아하게 생긴 뼈다귀가 드러났어.

 

하! 아냐. 그럴 리 없잖아. 농담 한 번 해 본 거야. 사방으로 천둥번개가 치고, 별 거지같은 것들이 득실거리는 가운데 반짝이는 파란 선이 가득 뻗은 시원한 곳에 떨어졌어. 환각제 빨면 딱 그짝이겠더라고. 시커먼 라텍스인지 뭔지, 아무튼 그 비슷한 걸로 온몸을 감싼 양반 하나가 있었는데, 암만 봐도 브루스 복스라이트네Bruce Boxleitneigh*19 같더라고.

 

"우왓!" 깜짝 놀라서 말했지. "브루스 복스라이트네랑 완전 판박이네!"

 

"99일의 밤을 감히 잡으려 하지 말라." 그 아저씨 눈빛이 흡사 다이아몬드마냥 단단해지더니, 이쪽으로 둥둥 떠와서 이렇게 속삭이더라. "이보게 바이닐, 소녀에게 입맞추고 싶으면 입맞추게."

 

"하?"

 

바로 그 때, 반짝이는 빨간 갑옷을 갖춰입은 사람 아홉 명이 갑자기 나타났어.

 

"보라!" 브루스가 딱딱거리더니 내 발굽을 잡아 들어올렸어. "빛나는 붉은 갑주를 껴입은 아홉 기사들이로다!"

 

"그래, 그렇네! 당장 목소리 녹음해서 보컬 샘플로 써야겠는데!"

 

"그러기에는 시간이 없다!" 아저씨가 큰 소리로 외치면서 등에 짊어지고 있던 거대한 신발을 잡아 끌어내려 갑옷 입은  사람들을 하나하나, 반들거리는 돌멩이처럼 때려부수더군. "어서! 문을 열라!"

 

"알았슈!" 이제 뭘 해야 했을까? 당연히, 입을 크게 벌리고 혓바닥을 길게 늘여 내미는 것밖에 할 만한 게 없었어. 그대로 땅에 혓바닥을 내리꽂고 문고리를 홱 잡아 열었더니 건너편에 울 엄마가 계시더라. 웬 망치도 하나 들고 있었고. "오. 그거 좀 빌립시다!" 하고 잽싸게 뺏어 들었지. 혓바닥을 꽂았는데 어떻게 말을 하고 있었는진 나도 모르겠어. 혓바닥 대신에 꼬리 움직여서 말하고 있었나 봐. "아, 이왕 만난 김에 하는 말인데, 펜치랑 뜨거운 하룻밤 보내려던 거 조져놓으셨던 건 다 잊었으니 신경 쓰덜 말아유!" 하고 문을 쾅 닫아 버렸어. 혓바닥도 뽑고 뒤돌아서서 얘기했지. "이제 어째?!"

 

"자네가 품은 두려움을 끼고 아홉 바퀴를 돌게!" 아재가 소리쳤어. 그 아저씨 반짝이는 이륜마차에서 온갖 삐그덕대는 소리, 때려부수는 소리, 뭐 갈리는 소리 같은 게 얼마나 나나, 얘기 듣기도 엄청 빡셌다구. 그 소리를 말로 옮기다가는 말이 아니라 무지갯빛 토깽이가 튀어나올 거야. "꾸물대지 마시게!"

 

"공주님 맙소사. 공주님도 성체 용 목젖만큼이나 화끈하시군요!" 그렇게 빼액 소리를 지르며 망치로 내 뿔을 두들겨 부수기 시작했어. 아홉 번째 치고 나니까 지루해지더라고. 그래서 발굽을 들어 내 대가리를 쪼개 버렸지. 웬 나비떼가 쏟아져 나오대. 적어도 내가 보기엔 나비 떼가 맞았어. 이쯤 되니 슬슬 내가 미쳤나 싶더라고. 나비가 빙빙 돌면서 수많은 9와 6의 형상을 만들었는데, 9는 6 주위를 돌고 6은 9 주위를 도는 꼴이었어. 이제 웃음밖에 안 나더라. 아니, 비명이던가. 비명 지르는 것도 좋지. "갸아아아아아아악! 공화당Republicanter*20 찍는 딸기가 핏줄 타고 흐른다!"

 

"됐어!" 빛덩이랑 바퀴 위에 올라앉은 브루스 아저씨가 각종 신발이랑 잡동사니를 막 내던지며 소리쳤어. "이제 콘서트 프로그램 속으로 뛰어들게!"

 

"간다 간다 뿅 간다!" 그러고 경계선 쪽으로 내달려 세로로 쭉 뻗은 로토스코프 효과 기둥 속으로 뛰어들었어. 내 웃음소리가 뒤따라 들어왔는데, 그 친구 입술을 핥아주고 싶더라고. 왜, 사람은 나이를 처먹을수록 입맛만 까다로워져서는 힙스터 새끼들처럼 더 새롭고 쩔어주는 사운드를 찾아 헤맨단 말이야. 그럼 재미없기 짝이 없는 음악계 깊숙한 나락에서도 약간은 예술적 쾌락을 누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거든. 입술을 핥아주면 어린 시절, 아침 식사 전에 몰래 빼먹는 포니 타르트가 얼마나 맛깔나는지 걔도 기억할 거 아냐. 문득 생각해 보니까 왜 머릿속에서 쿵쿵거리지 싶은 거야. 브루스 아저씨가 반짝이는 아홉 번째 음석을 걷어차 건네준 거였어. 정신 차려 보니 메어애미 디스코텍에 설치했을 턴테이블 위에 벌거벗은 채 엎어져 있더라고. 근데 생각해 보니까 난 옷을 입은 적이 없더라......

 


 

"그리하야..." 바이닐 스크래치가 테이블을 힘차게 쿵 치며 이야기의 마침표를 찍었다. "...거의 극복할 수 있었다 이거지!" 바이닐이 자랑스럽게 웃으며 몸을 뒤로 기울였다. 그러더니 표정을 구기며 덧붙였다. "아, 잠깐." 멍한 표정으로 바이닐이 말했다. "우리 뭔 얘기 하고 있었드라?"

 

"극적으로 과장된 뉘앙스는 없는 걸로 치면..." 옥타비아가 나머지 둘을 둘러보며 발굽을 맞비볐다. "우리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 것 같군요."

 

"정말요?" 멜로디아 브레이드가 바이닐을 향해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옥타비아 아가씨 말은, 자네, 우리 모두 아홉 번째의 저주와 직면했다는 것이지." 바드 선생이 말했다.

 

"직면하고, 극복했죠Surpassed. 어떤가요?" 옥타비아가 대답했다.

 

"헤... 헤헤..." 바이닐이 제 선글라스를 보며 빙글빙글 웃다가 탁 소리와 함께 머리 위로 올렸다. 거꾸로 뒤집혀 있었다. "그 '극복'에서 앞 네 글자Ass를 빼면 어때? 풉, 아하하하하하! 아..."

 

옥타비아가 한숨지었다. "적어도... 대부분은 그렇군요."

 

"그런데, 저흰 왜 이런 얘길 나누고 있는 걸까요? 이상하다는 생각 안 드세요?" 멜로디아가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게 뭐 중요하거나 한 것 같진 않잖아요?"

 

"자네, 나한테 묻는 건가?" 바드 선생이 으쓱하더니 옥타비아를 가리켰다. "저기 계신 아가씨께 묻지 그래."

 

"흐음?" 옥타비아가 표정을 구겼다. "저 말인가요?"

 

"자네가 이 덜떨어진 얘기를 시작한 장본인이잖아. 굳이 모여 아홉 번째의 저주 얘기를 하자고 한 데는 뭔가 이유가 있을 테지."

 

"제게 불리한 쪽으로 포석을 두시는 게 아닌가 싶은데요." 옥타비아가 자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는 오늘의 주제를 다시 한 번 강조한 것에 불과해요. 정말로요. 사실 개인적으로 큰 흥미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오늘 모임 주제로 그걸 내건 사람은 제가 아니에요."

 

"그럼..." 멜로디아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씹었다. "옥타비아 씨가 얘기를 시작한 게 아니면..."

 

"이거 왜 이래, 보타이 아가씨!" 삐딱하게 기울어진 선글라스 아래로 눈을 굴리며 바이닐 스크래치가 쏘아붙였다. "얼이 다 빠질 지경이야. 그러니 내 말을 듣는 게 맞지. 사람 혼 빼놓는 게 고상한 취미는 아니잖아. 애초에 이 얘기 시작한 저의가 있을 거 아냐? 슬슬 자서전에 쓸 떡밥거리가 말라 가는 모양이야, 마담므 캔틀롯?"

 

"논의를 시작한 건 저 분이 아니에요." 나는 말했다. "저지요."

 

테이블에 둘러앉은 넷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방 한쪽 구석에 놓아둔 스툴에 앉아 빙긋이 웃고 있었다. 몸에는 후드를 입고, 옆에는 가방을 얌전히 놓아둔 채였다. 후드 소매를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굳이 대화 방향을 설정해 드리지 않아도 될 정도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져서 정말 기뻤어요. 역시 우리 시대의 살아 있는 전설들은 뭐가 달라도 역시 다르군요."

 

"어......" 멜로디아가 불안한지 몸을 떨었다.

 

옥타비아는 아무 말도 없었고, 바드 선생은 모자 아래, 갈기가 벗겨져 나가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 뭐. 오케이. 좋아." 바이닐 스크래치가 선글라스를 이마 위로 올리며 이쪽을 쳐다보고 물었다. "후드 뒤집어쓴 말하는 라임 부른 사람 누구?"

 

쿡쿡 웃음이 나왔다. "저런. 제 말씀을 반대로 이해하셨군요. 정확히 해둘까요." 테이블 쪽으로 두 앞발을 활짝 펴 벌렸다. "제가, 여러분들을 초대한 거에요. 보아하니, 너무 누추하지는 않은 모양이군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는데요. 저희가 그쪽을 뵌 건 이번이 처음일 텐데..." 옥타비아가 이쪽을 쏘아보고 말했다.

 

"하트스트링스라고 부르세요." 그 옥타비아가 코앞에 있다니. 자꾸 벅차오르는 가슴을 애써 달래며 대답했다. "저는 라이라 하트스트링스에요. 여러분들 나누는 말씀, 전부 다 즐겁게 들은 참이지요."

 

"아! 그러셔!" 바이닐이 조금도 냉소를 감출 생각 없이 깔깔 웃어댔다. "그럼 나는 끝-내주는 뱀파이어 여왕이겠네!"

 

"가만히 좀 있어 봐." 바드 선생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나를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흘겨보았다. "자네가 우리 모임 내내 오간 말을 여기 앉아 다 들었다고 하는데, 그렇다 치더라도 지금까지 우리가 그대 모습을 보지도, 소리를 듣지도 못한 건 어떻게 설명할 텐가?"

 

"뭐, 제 얘기 듣자마자 바로 이해하실 거란 생각은 안 했으니까요. 바드 선생님." 나는 빙긋이 웃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선생님께서 이해하실 필요가 없다는 말은 아니지요. 선생님은 어스 포니의 전범이라 하실 분인데, 삼라만상의 본질이 정말 마법적인지 어떤지는 차치하고라도 그걸 이해하시려고 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자기소개와 상황설명을 주절주절 늘어놓고, 제가 뭐 하는 사람인지까지 말씀드리려면 여러모로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럴 여유가 없네요. 지금은 그게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만요. 중요한 건, 여러분 모두 제게 뭔가를 증명해 냈다는 것이지요." 빙긋이 웃으며 넷을 쳐다보고 말했다. "각자 나름대로의 의심은 잠시 젖혀두고, 저를 도와 전대미문의 곡을 완성해 낼 수 있는 힘을 갖추고 계신 것을 명징히 입증해 내셨다는 거죠."

 

"무, 무슨 곡이길래?" 이쪽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멜로디아가 움츠러들며 말했다.

 

"누구나 가슴 속에 있는 가사를 써내는 그쪽 솜씨를 빌어 신생할 곡이지요." 멜로디아에게 말했다. 옥타비아 쪽으로 몸을 돌렸다. "완벽한 연주를 해내겠다는 일념으로 이뤄낸, 연주의 극치로 연주해야 할 곡이고요." 빙긋이 웃으며 바드 선생을 돌아보았다. "두 궁창과 그 너머 세상 한가운데 놓인 대지를 누구보다 깊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끌어 내야 할 곡이며." 마지막으로 DJ P0N3을 쳐다보았다.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눈으로 보아야... 쿡쿡... 보이는 곡이죠."

 

"어......" 바이닐이 멍한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좋은 건가?"

 

"여러분이 알고 계시든 아니든, 여기 모인 네 분은 우리나라 음악계 최고로 꼽히는 분들이시죠. 이제 여러분 앞에 엎드려 부탁드리니, 부디 저와 함께 한 곡 노래를 옮겨 적는 일에 동참해 주세요. 별 것 아닌 곡이 아니에요. 시간과 시간 사이에서 잊힌 고삐 풀린 비곡이고, 마법으로 갈라놓은 두 공간의 사이 그 밤보다도 어두운 곳에 버려진 노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어난 나락 속으로 돌아가 다시 울려 퍼져야만 하는 곡이에요. 버려진 교향곡의 아홉 번째 비곡이므로 범인은 갈 수 없는 크고 높은 길이니, 아홉 번째를 극복해 낸 여러분만이 갈 수 있는 길이에요. 지금 여기와, 곡을 마무리할 최후의 야상곡 사이를 갈라놓은, 말로 옮길 수 없는 장벽이지만 동시에 모호해서 넘어갈 수 없는 벽이기도 하죠."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애매모호하지만 크고, 또 무서운 말씀을 하신 것 같은데..." 멜로디아가 입을 열었다.

 

옥타비아가 대신 말을 마쳐주었다. "그렇다고 해도, 저희는 그쪽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요. 설령 저희 쪽에서 동의할 의사가 있다고 해도,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생면부지의 유니콘과 함께 그런 일에 가담할 이유가 생기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요?"

 

"그래,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적어도 얘기는 해 줄 수 있지 않나?" 바드 선생이 거들었다.

 

"제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소개하는 건 하나마나한 일이에요." 나는 말했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 제 모든 걸 다 바쳐 진심으로 말한 것이 순식간에 잊히다 보니, 자기소개는 무의미해요. 그것 때문에 저는 이 곡을 완성해야 하죠."

 

"그러면, 그 교향곡이란 것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으니 하나 더 묻지. 그걸 어떻게 옮겨 적을 생각인가?"

 

"9악장은 완전히 조각나서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뒤섞인 조각 형태로밖에 알아내지 못했거든요. 처음부터 우리 같은 필멸자들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멀쩡하게 이해할 수 없도록 짜인 곡처럼 말이죠. 그리고, 제가 이것들을 상대하는 첫 번째 사람이 아니에요. 저 이전에도 9악장을 발견한 사람이 있었지만, 혼자서 이 곡을 해석해 내려고 하다가 어떤 거대한 벽을 만나고 끝내 미쳐 버렸어요. 뒤죽박죽이 되어 고통으로 얼룩진 기억 속에 역사의 진실을 영원토록 담고 지내야 하는 축복, 어쩌면 저주일 수도 있는 역량을 지닌  사람이었지만, 그 끝은 아무도 모르는 광인이었어요. 이제 9악장을 해석하는 일이 제게 넘어왔지만, 도저히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에요. 어쨌든 저도 일개 필멸자에 불과하니까, 혼자서 비곡의 존재를 알아낼 수는 있어도 그 실체를 잡아낼 수는 없는 것이죠. 로스페가수스, 캔틀롯, 올란도츠, 애플루사에서 여기까지 여러분을 모셔온 것도 그것 때문이에요. 제가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여러분이 있다면 해낼 수 있어요. 우리 다섯이 힘을 합치면 제9곡, '고적의 애가Desolation's Elegy'를 완성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그렇게만 된다면, 어디까지나 가정이긴 하지만, 저를 영원히 바꿔놓을 10악장을 찾아 다시 홀로 지난하고 외로운 운명의 여정을 떠날 수도 있을 거에요."

 

"좋아, 알아들었어!" 바이닐 스크래치가 미친 사람처럼 낄낄대며 발굽을 내저었다. "몰래카메라에서 하는 거랑 비슷한 짓거리구만. 그렇다 쳐도, 뭔 농담이 이렇게 저질이래?"

 

"아니......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에요." 옥타비아가 바드 선생을 보고 물었다. "바드 선생님. 제가 알기로 선생님은 은퇴 생활 중이세요. 그렇다면 애플루사에 계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됐어! 병먹금들 해!" 바이닐이 툴툴대며 말했다. "토 나오는 녹색 패러스프라이트나 다름없는 년한테 먹이 주지 마. 넌 이 섹시하지 못한 난장판이나 해명하라구!"

 

"해명이라,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는 여러분도 대충 짐작할 수 있지 않아요?" 나는 차분히 말했다. "여기 모인 경위도 그렇고, 여기로 온 길이 어떻게 되는지 기억하는 사람 있어요?"

 

"참 나, 당연하지! 왜, 그..." 바이닐은 말을 잇지 못하고 뒤를 흐렸다. 선글라스에 가린 시선이 천장 위로 방황했다.

 

옥타비아는 아무 말도 없이 입을 떡 벌렸다.

 

바드 선생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통에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사내는 마른침을 삼키며 머리 위에 매달린 등잔을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멜로디아 브레이드는 덜덜 떨며 몸을 감싸더니, 겁이 났는지 사방의 벽만 둘러보고 있었다.

 

"여기가 어딘지 말씀드리는 편이 이해가 쉬우시겠지요." 나는 차분히 말했다. "여러분은 포니빌에 와 계십니다. 즉슨, 제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에 앉아 계시다는 것이죠."

 

"포니...빌?" 옥타비아가 혀끝으로 음절 하나하나를 튕겨 보듯 말했다.

 

"공연 한 번 했던 곳이군..." 바드 선생이 툭 던졌다. 뒤집어진 의자 옆에서 얼마간 어물거리다, 그는 말했다. "가만... 포니빌 비슷한 냄새가 돌긴 하는데..."

 

"잠깐만요, 포니빌?" 멜로디아가 눈을 깜박이더니, 환하게 웃으며 날개를 파닥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겁에 질려 있던 눈이 생기로 가득 찼다. "포니빌에 사촌이 살아요!"

 

"거짓말 마." 바이닐이 툭 내뱉더니 이쪽을 쳐다보고는 선글라스 아래 새빨간 눈동자가 보일 때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계속 어깨를 으쓱해 보이던 바이닐이 물었다. "어떻게." 말을 마친 여자의 두 앞다리가 옆으로 뚝 떨어졌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데?"

 

"간단하죠." 나는 말했다. "노래의 한 파편. 그래요. 천지창조 이후 지상의 모든 생명을 빚어냈다는 위대한 어머니의 성가에서 떨어져 나온 한 파편의 권능을 빌었지요. 그 후로 더 많은 곡을 접했어요. 적지 않은 수가 제게 매인 사슬을 풀어 주었지만, 훨씬 많은 곡이 족쇄를 채우더군요. 도저히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던 와중, 여러분 모두를 여기로 소환할 수 있는 곡도 찾아낼 수 있었어요. 이제 저주를 푸는 여정에서 가장 큰 수수께끼를 여러분과 함께 풀 수 있다는 뜻이죠."

 

"그런가요. 어떠한 곡이기에 그런 권능을 갖는지 궁금해졌어요. 말씀해 주시겠어요?" 옥타비아는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눈치였다.

 

헛기침하고 말했다. "뭐, '소집의 노래'가 아닌 이상 그런 권능을 가진 곡은 없죠."

 

"파하하하!" 바이닐이 코웃음쳤다. "왜, 차라리 죽어 나자빠져서 저승에 왔다고 그러지!"

 

"소, 소집의 노래라고요?"

 

"농담도. 그런 걸 두고 흔히 속된 말로 배부른 망상이라고 한답니다." 옥타비아가 도도한 표정으로 말했다. "위대하고 신성한 곡을 연주하려면, 그에 걸맞는 신성한 힘이 있어야 하죠. 한낱 필멸자인 우리에겐 그런 힘이 없고요."

 

"위대하신 두 분 군왕의 자매들께서도 소집의 노래를 연주하실 권능은 없어!" 바드 선생이 의자를 삐딱하게 뒤로 기울이며 큰 소리로 말했다. "거의 천 년 동안이나 두 분들께서 소집의 노래를 연주하시기는커녕 언급하신 적도 없지. 애초에 소집의 노래를 연주하려면 마땅히 그에 걸맞는 성유물이 있어야 하는데, 그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지......"

 

나는 재빠르게 가방을 열어 그 안에 있던 물건을 꺼냈다. 꺼낸 물건을 조심스레 띄워 테이블 끄트머리까지 가져가 살며시 내려놓자, 그 반짝이는 표면 위로 분명히 금속질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잔향이 솟았다. 온 방에 상서로운 금빛 기운이 감돌았다. 내가 가져다놓은 물건 앞에, 다들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린 듯했다.

 

"공주님, 맙소사..." 옥타비아는 말을 더듬었고,

 

멜로디아는 본능적으로 날개를 펴고 날아올랐다. "세... 세상에 어떻게..."

 

"허...어떻게..." 바드 선생이 비스듬히 기울여 앉은 의자가 뒤로 넘어졌다. 사내는 마른침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나이트브링어가, 여기..."

 

"위대한 어머니의 성가, 영영 사라지고야 말았다는 그 마지막 파편." 옥타비아는 말 그대로 울먹거리고 있었다.

 

바이닐 스크래치도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다른 셋을 휘휘 둘러보더니, 나를 보고는 테이블로 시선을 돌렸다. 한쪽 발굽을 모서리에 올리더니 반대쪽 발굽으로 거세게 두 대를 내리쳤다. 바이닐은 표정을 잔뜩 움츠리면서 발굽을 휘휘 저으며 아파했다. "아, 젠장. 아퍼. 실화 맞네, 실화 맞어. 제기랄."

 

나는 단호한 표정으로 넷을 쳐다보았다. 모임장 안에 아주 작은 잔향이 메아리졌다. 실은, 이들이 여기로 소집된 후부터 계속 울리는 소리였다. 내 발굽 아래 놓인 나이트브링어의 가장 긴 현이 스스로 울리는 모습을 저 넷도 본 것이다.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성유물의 윤곽을 가만히 쓸어내리는 몸이 광휘를 받아 반짝였다.

 

"맞습니다. 창세신의 숨결이자, 위대한 어머니의 성가. 그 한 파편이 여기 있어요. 네, 뭐. 나이트브링어가 사라진 것도 사실이죠. 이제 아니에요. 나이트브링어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여러분을 여기로 모셔오는 데 그 권능을 빌렸지요. 이제 저는 여러분과 함께 나이트브링어를 가지고 아홉 번째 비곡, 고적의 애가에 살을 붙일 겁니다." 

 

넷은 코앞에 떨어진 나이트브링어의 위엄에 압도되어 그대로 주저앉아 있었다. 옥타비아는 온몸에 힘이 빠졌는지 나무 테이블에 몸을 기댔다. 테이블로 전해진 심장박동이 거기서도 느껴질 정도였다. 왼쪽에 있던 멜로디아는 날개를 접고 바닥에 내려앉은 뒤, 헛기침을 하며 순진한 표정으로 측량할 수 없는 호기심을 드러냈다.

 

"대체 어떻게..." 멜로디아가 훌쩍이며 물었다. "어떻게 나이트브링어를 찾아내셨죠? 수백 년... 아니, 영겁의 세월 동안 그 누구도 그 소재를 알 수 없었다고 들었는데..."

 

멜로디아에게 시선을 돌리고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누가 주더군요."

 

"누, 누가 그걸 막 준다고?!" 바드 선생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나이트브링어는 신성성 그 자체나 다름없어. 소재를 알 수 없어 역사마저 그 존재를 잊어버린 존재, 그리고 그 무엇도 비견할 수 없는 권능 그 자체가 실체화한 성유물이라고. 대체 누가 자네에게 나이트브링어를 넘긴단 말인가!"

 

"이제 같은 저주를 짊어진 자를 만났으니, 지금까지 그 곁을 지켜 준 횃불을 계승자에게 맡길 때가 되어 넘겨준 것에 가깝죠. 그래야 자기 뒤를 잇는 사람이 저주를 풀어낼 수 있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 테니." 나이트브링어를 꼭 안으며 그 묵직한 울림통에 대고 말하듯 대답했다. "여러분 넷과 마찬가지로, 그 사람 또한 시간과 공간, 그리고 궁창을 초월한 한 곡의 노래로 제게 다가왔어요. 그 사람이 쓴 곡, 말이에요. 이름 없는 자들의 영역에서 들려오는 다른 음악과 달리, 완성하느라 정말 힘들었어요. 대충 짐작 가시죠? 잘 들어 보세요...

 


 

어떻게 된 일인지 얘기하려면 1년 전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여러분을 모셔온 경위를 설명하는 데 처음부터 늘어놓을 필요는 없겠군요. 저는 1년 내내 모든 역사의 기록에서 지워져 버린 야상곡의 비밀을 풀어내는 데 매달렸어요. 이 교향곡이 잊혀야 했던 이유는 한 가지, 미지의 악령을 봉인하고 그 봉인의 존재조차 감추기 위해서였죠. 이 곡은 10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7악장을 완전히 다 익히기도 전에 진실을 목도할 기회가 있었어요. 여덟 번째 비곡의 권능을 빌어 진실을 포착하고 이해할 수 있었지요. 지금까지 살아온 궤적을 처음까지 되짚어 나가며 제8곡을 끊임없이 연주해 나간 끝에, 제 과거 자체가 완전히 새로 쓰여 버린 걸 알게 되었죠. 정확히 말하자면, 현실 자체가 조작된 것에 더 가까워요.

 

야상곡의 비밀을 밝혀내는 게 마음 편한 작업은 절대 아니었어요. 그 때나 지금이나 홀로 버려진 한 명의 단독자인 것은 같지만, 연구는 계속해야 했어요. 그래야 아홉 번째 비곡의 비밀에 접근해 제 최악의 공포와 대적할 수 있기 때문이죠. 지금 이것도 그 여러 가지 시도 중 한 줄기고요.

 

여덟 번째 비곡을 연주하며 알아낸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어요. 저 이전에도 야상곡의 비밀을 밝혀내려 했던 사람들이 더 있더군요. 저주받은 사람이 남겨놓은 기록을 우연히 찾아냈죠. 뇌리에 떠오르는 멜로디를 구체화하고, 옮겨 적고, 재연할수록 그 사람이 적어놓은 말이 점점 더 분명히 느껴졌어요. 그 사람이 억지로 운명과 마주했던 것처럼 저도 제가 겪은 일들을 명료하게 정리해 갔는데, 어쩌다가 이름 없는 자들의 땅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었죠. 여러분이 이 방을 나가시자마자 곧장 잊어버리시고 말 은밀하고 또 은밀한 비밀이 감춰진 곳인데, 정말 끔찍한 곳이었어요. 우리 같은 필멸자는 물론, 불멸자의 눈에도 띄어서는 안 될 뭔가가 숨겨져 있기는 한가 보다 싶더군요. 제가 이걸 기억할 수도 있고 심지어 입에 담을 수도 있는 건 제가 저주를 짊어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걸 기어코 찾아내려는 제 의지도 빠뜨릴 수 없어요.

 

어찌어찌 방황하는 영혼들과 고통에 찬 합창만 가득한 악몽의 땅에서 몸을 빼 돌아오기는 했어요. 오기 전에 그 땅을 지배하는 자를 보았지요. 아주 높은 곳에 세워둔 왕좌에 앉아 있었는데, 그자가 절 찾아내고 말았어요. 그 여자가 저까지 이름 없는 자들의 땅에 속박하려던 순간, 제가 얻은 그 기록을 남긴 사람이 나타나 구해 주었지요. 절 빼내고 나서 궁창 사이의 땅으로 내던져 피신시켰는데, 그와 함께 한 곡 노래를 부르더군요.

 

산 사람의 땅으로 안전하게 돌아오기는 했지만, 당장 목숨 건진 게 너무 기뻐서 제대로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저주를 짊어진 채 만인에게 버림받은 신세인 건 똑같았는데 말이죠. 가만히 앉아 곰곰히 생각해 보니, 저를 돌려보내면서 한 곡 노래를 불렀던 게 생각난 거에요. 아주 모르는 곡도 아니었어요. 오히려 아주 익숙한 곡이었죠. 천 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우리 둘 모두에게 역병처럼 감겨들어 저주를 지운 바로 그 곡들을, 조금씩 잘라다가 하나하나 끼워맞춘 곡이었거든요.

 

어떻게 짜맞춘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 벗이라고나 해야 할 이 사람도 야상곡을 좀 아는 사람이었어요. 저주받은 교향곡의 한 악장씩을 분해해서, 이름 없는 자들의 땅과 여기 사이를 잇고 소통을 가능케 하는 노래를 구성하는 데 필요한 부분만 찾아 짜깁기한 거죠. 그 사람도 모르는 악장에서 뽑아내야 할 파트도 물론 있었는데, 이 빈자리는 본인의 영혼을 잘라내어 메우고, 평생 그의 몸과 마음, 영혼을 비롯한 모든 걸 다 바쳐 사랑했던 한 사람과 함께한 기억으로 봉합했어요. 이 노래의 제목을 '페눔브라의 메아리Penumbra's Echo'로 지은 건 그것 때문이고요.

 

페눔브라의 메아리를 바로 뽑아낸 건 아니었어요. 벗이 천 년 전에 남기고 간 발자국을 따라 몇 날 며칠 밤을 꼬박 새워 일지를 읽고 연구해야 했죠. 필체 하나는 예술이지만 광인의 주절거림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글줄로 아무 말이나 주절거린 것들이, 우연히 제게 들어온 일지 안에 가득 들어차 있었어요.

 

아니면, 제가 일지를 얻은 게 우연이 아니었다고 하면 어떨까요? 천재라고밖에 할 수 없는 지성과 지상 그 어느 악기보다도 성스러운 악기 모두를 갖춘 자가 아니면 놓을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의 원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다리가 그 사람의 노래와 페눔브라의 메아리로 세워져 우리 사이에 놓여 있으니까 말이에요. 한낱 유니콘의 몸으로 이름 없는 자들의 땅에서 천 년의 세월을 견디고 살아남아 그리로 빨려든 저를 구해 준 그 사람이 보관하고 있던 악기가 바로 그거였죠.

 

제게는 일종의 의무가 생긴 셈이지요. 저 자신뿐만 아니라, 벗에게도 말이에요. 그 사람은 저를 위한 다리를 놓아줬어요. 이제 그 다리를 건너 중간 지점에서 만나 궁창 사이에서 아가리를 쩍 벌린 심연 위로 그 무엇보다 조용하고 소중한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 역할은 온전히 제 것이었어요. 그러려거든 우리 둘 모두에게 저주를 안겨준 바로 그 곡을 그 사람이 옮겨 적었던 것처럼 그 사람의 노래를 제가 옮겨 적어야 했어요. 여덟 번째 비곡을 동원해서 그 사람이 오직 저만을 위해 남겨둔 암호 패턴을 찾아낼 수 있었죠. 이제 페눔브라의 메아리를 해독하기 위한 열쇠를 발굴한 셈이었죠.

 

그 다음으로 찾아든 것은 극심한 긴장감이었어요. 이제 연주해야 할 곡은 두 번 다시 연주할 수 없는 곡인 것을 짐작하고 있었거든요. 제가 봐서는 안 되는 땅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쯤은 알고 있었어요. 천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제 벗은 지옥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곳에 틀어박혀 있었고요. 이제 그 가장자리만 겨우 몇 분 밟고 돌아오는 주제에 감히 거기 비길 생각을 할 순 없었겠죠?

 

이렇게 소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번뿐, 그 다음부턴 두 번 다시 대화할 수 없을 거라고 그 사람이 남겨둔 실마리에 적혀 있더군요. 집 뒷편에 파놓은 지하실로 내려갔어요. 평범한 사람이 들어서는 안 될 곡을 연주하기 위한 비밀 스튜디오라고 해둬도 좋겠군요. 지하실 바닥을 밟자마자 리라를 보면대에 올려두고 그 사람이 남긴 기록을 뜯어내기 시작했어요. 그 다음 두 시간 동안에는 땅굴 흙벽의 주요 지점마다 일지 페이지를 붙여 나갔지요. 모든 작업을 마치고 난 뒤 지하실은 시간조차 잊어버렸을 제 벗의 공간으로 편입되었어요. 조명을 끄고 리라 앞에 앉았어요.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난 거죠.

 

정성을 다해 여덟 번째 비곡을 연주했어요. 그리고 나선 지겹도록, 하염없이 되풀이했죠. 벗이 남겨둔 기록들이 저를 쳐다보는 듯한 기분이 들더군요. 물 깊숙히 가라앉은 강철판에서나 날 법한 녹슨 쇠 냄새가 나기 시작했어요. 진전이 있기는 하구나 싶었죠. 벗이 남긴 수기의 글자들이 푸른색으로 빛나며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죠. 빛이야 뭐 늘 나던 거긴 한데, 이번에는 어떤 패턴이 있더군요. 몇 페이지에 걸쳐 똑같은 소리 하고 또 하고, 끊임없이 주절거려 놓은 페이지들은 그 순간을 위해 예비해 둔 거였어요.

 

이제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이 페이지에서 저 페이지로, 써놓은 말들이 하나로 연결되기 시작했어요. 전에는 이게 서로 맞닿는지도 몰랐던 것들이었어요. 새파란 글자들이 하나로 뭉쳐 흐려지면서 끈의 형상으로 바뀌더니, 나선형으로 빙빙 도는 모양으로 변했어요. 종잇조각에 적혀 있던 글자들이 하나로 모여 구체처럼 나열되어 저를 감싸고 빙빙 돌다가, 몇 개 고리로 나뉘더니 불 꺼진 지하실까지 전부 둘러싸 버렸어요. 광기로 빚어낸 우주의 사운드 부스 한가운데 앉아 리라를 잡은 발굽을 고쳐 잡고, 구체의 새까만 가장자리에서부터 속삭이는 노래를, 페눔브라의 메아리를 연주했어요.

 

시간과 공간의 족쇄를 벗어나 달아난 광인이 마련해 둔 한가운데로 들어서는 것이었죠. 거기로 걸어 들어가는 행위는 아무리 좋게 쳐 줘도 광기 그 자체 속으로 향하는 것과 다름없었지만, 머뭇거릴 필요는 없었어요. 아홉 번째의 저주가 벗님의 정신을 흩어놓은 것은 사실이에요. 이제 벗님의 색 바랜 껍데기만 남아 있을지 몰라도, 아홉 번째의 저주를 극복하기만 한다면 그렇게 되는 것만은 피할 수 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죠.

 

빛 한 점 없는 어둠 한가운데 앉아 리라를 가볍게 퉁겨 보았어요. 당장 코앞에 있는 것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어둠이었지요. 숨이 드나들 때마다 엉긴 차가운 입김이 몸을 쓸어내리는 게 느껴졌는데, 그게 정말 여기 존재하는 것인지 어쩐지도 잘 몰랐어요. 벗님이 자아낸 음악이 조용히 흐르기만 하는 가운데, 문득 현을 퉁기기 시작해 끝까지 완주했어요. 연주가 끝난 뒤에도 환호는 들리지 않더군요. 제가 들은 건 쇠사슬 부딪치는 소리뿐이었죠.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어요. 어둠 너머에서 쇠사슬이 뱀처럼 기어 이쪽으로 달려들고 있었던 거죠. 눈을 크게 뜨고 쳐다봤지만 보이는 거라곤 어둠밖에 없었어요. 그 무엇도 넘을 수 없는 경계 저편에서 쇠사슬 소리가 더욱 가까이 다가와 목전까지 기어들었어요. 몸에 다시 차가운 숨결이 스쳤는데, 제 숨이 아니었어요. 누가 온 거죠.

 

마른침을 삼키며 페눔브라의 메아리를 다시 한 번 연주했어요. 이번에는 힘을 빼고 부드러운 곡조로 연주했죠. 입을 열기는 했는데, 목소리가 잘 나오지도 않더라고요. "그 여자가 당신에게서 무엇을 앗아갔는지, 알아요." 용기를 쥐어짜 말을 하기는 하지만, 훌쩍거리는 듯한 목소리만 나오더군요. "이름 없는 자들의 땅에 숨어 지내던 기나긴 세월 동안 몸에서 흩어져 사라진 것들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어요. 그러니 이제부터 예, 아니오 두 가지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만 드릴 거에요. '그렇다'고 하시고 싶으시면 고음을 퉁기세요. '아니'라고 하시려면 저음을 내 주시면 돼요." 심호흡하고, 어둠 속으로 나직한 첫 번째 질문을 던졌어요. "당신은, 앨러배스터 코멧후프죠?"

 

아무 말도 없이 조용한 가운데, 백골처럼 건조하고 숨막히는 적막이 내려앉았어요. 눈앞에서 입김이 갈라짐과 동시에 고적한 가운데 한 마디 음이 울렸어요.

 

고음이었어요.

 

전율이 일더군요. 똑바로 앉아 있기도 버거울 정도로. 그 사람의 노래, 그리고 그 사람과 페눔브라의 노래를 계속 이어 연주하던 발굽이 달달 떨릴 지경이었어요. "앨러배스터." 더듬거리며 질문을 마쳤어요. "지난번에 저를 구하신 것도 당신인가요?"

 

묻자마자 한 마디 고음이 울렸어요.

 

입술을 깨물다가, 겨우 물었어요. "거기서 빠져나오실 수 있겠어요? 산 자들의 땅으로 돌아와 저와 함께하실 수 있으실까요?"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저음이 울렸어요. 갈비뼈가 웅웅 울릴 정도로 낮고 묵직한 음이었죠.

 

눈가가 축축해지더군요. 몸을 움찔하기는 했는데,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었어요. 거기서는, 앨러배스터 코멧후프 앞에서는 그럴 수 없었죠. "새벽의 강림Dawn's Advent*21에 닿았나요? 궁창의 야상곡을 완주하신 적이 있었나요?"

 

다시 침묵. 죽어가는 동물의 마지막 울음처럼 비탄에 찬 저음이 길게 이어졌어요.

 

눈을 꼭 감고, 다음 질문을 던졌어요. 무의미한 질문이란 걸 알면서도 말이에요.

 

"혹시... 혹시 제9곡을 가르쳐 주실 수 있을까요? 고적의 애가를?"

 

이번에 들린 저음은 무뚝뚝하다 못해 분노까지 느껴질 정도로 날카로웠어요. 그 소릴 듣자마자 실언했구나 싶어 몸이 더 떨리더군요.

 

"죄... 죄송해요. 그게..." 입술을 씹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언제 이 대화가 끝날지, 언제 이 구체가 붕괴되어 앨러배스터와의 연결을 영원히 단절할지 모른다고. 그래서 그때만큼은 이기적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톡 까놓고 얘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혹시... 앨러배스터, 제게 주실 수 있는 게 있을까요?"

 

침묵만 흐를 거라 생각했는데, 앨러배스터는 곧장 백귀百鬼의 웃음처럼 날카롭고 찌르는 듯한 고음으로 대답했어요.

 

바로 그 때, 뭔지 몰라도 큼직하고 금속질인 무언가가 제 품 속으로 파고들었어요. 갑자기 차가운 게 밀고 들어오니까 깜짝 놀라서 비명이 나왔는데, 떨리는 두 다리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떨어진 다음에야 입을 다물었죠. 그 느낌과 함께 앨러배스터가 준 게 무엇인지 알고 나니, 온 몸의 세포가 충격으로 훌쩍훌쩍 뛰어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앨러배스터! 이건..." 말하다 혀를 깨물었죠. 저, 그리고 우리 주위를 둘러싼 개판이라고밖에 할 말 없는 분위기와 더불어 현실의 경계가 서서히 무너져 가는 가운데 제가 받은 충격과 혼란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죠. "제가 할 수 있는 게 있지 않겠어요? 제가 당신을 거기서 꺼내온다면, 다시 자유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 어떤 슬픔과 후회조차 느껴지지 않는 무감정한 저음이 대답했어요. 그 소리는 제 품에 안긴 나이트브링어에서 나는 거였지요. 앨러배스터가 나이트브링어에 뻗은 염동력을 거두는 게 느껴졌어요. 정말로 제게 나이트브링어를 맡긴 거에요.

 

막힌 숨이나마 쥐어짜내 어둠 속으로 계속 말을 던졌어요. "앨러배스터, 페눔브라는 당신을 사랑했어요. 최후의 순간까지도 당신을 사랑했어요. 당신이 이 말을 믿어 주기만을... 바랄 뿐이지만..."

 

우주 반대편에서 누가 빨아들인 어마어마한 숨결이 휩쓸고 지나가며 지나간 자리마다 뒤엉킨 우주의 냉기를 녹여 없애는 것처럼 구체 내부가 따뜻해지더니, 역사상 그 누구도 그런 고음을 들어 보지 못했으리라 자신할 수 있는 높고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고맙네."

 

그와 동시에 구체가 완전히 조각나 흩어졌고, 사방에 붙여둔 일지들도 같이 찢어져 종이조각이 되었어요. 눈을 뜨니 촛불만 어른거리는 지하실 바닥에 등을 대고 누운 채 네 다리로 아름다움 그 자체를 형상화한 듯한 악기를 꼭 껴안고 있더군요. 벗님이 세상에 남긴 유일한 유산인 일지는 완전히 불타 재가 되어 눈처럼 내려앉아 있었고요.

 


 

"지금은 제가 여러분을 모신 건 저 하나만을 위한 게 아님을 이해하실 수 있겠지요." 원목으로 꾸민 모임실 한가운데 테이블에 놓여 희미한 빛을 뿌리는 나이트브링어에 살짝 몸을 기댔다. 옥타비아와 멜로디아, 바드 선생, 바이닐은 조용히 내 이야기를 경청했다. "나이트브링어는 이제 아직도 끝맺지 못한 앨러배스터의 이야기를 끝맺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고, 그 사람이 남겨준 유산이기도 해요. 어쩌면, 궁창 사이의 땅, 이름 없는 자들의 영역에 도사린 저주받은 심연에 영원히 갇히고 만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마칠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겠군요. 그러니 제 앞에 놓인 두 가지 선물, 음악계 최고의 재능을 가진 사람들과 앨러배스터가 보관했고 이제 제가 그 역할을 이어받아 지키고 있는 나이트브링어의 효익을 누리고자 한다면 아홉 번째 비곡과 열 번째 비곡을 극복하는 부정할 수 없는 의무를 마땅히 이행해야 해요. 여러분의 도움이 있다면 10악장, 모든 비곡의 끝 근처까지라도 갈 길을 찾을 수 있을 거에요. 지금 이 의무를 다하여 보다 깊은 깨달음을 얻고 보다 나은 사람이 되어 나올 수 있을 터죠. 혹시나, 그냥 가정에 불과한 것이긴 하지만, 언젠가 다시 친구의 이름으로 여러분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 모든 이야기의 끝을 들려 드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방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혼이 빠진 청중의 전형이라 할 만했다. 커튼도, 더 낭비할 시간도 없는 게 일반적인 연주와의 차이라면 차이였다.

 

넷을 향해 빙긋이 웃으며, 조심스레 부탁했다. "존경하는 여러분, 절 도와 주시겠어요? 아홉 번째 비곡의 흩어진 조각을 한데 모아 완성하는 일에 함께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넷은 아무 말 없이 시선을 교환했다. 그러더니 동시에 벌떡 일어나 저마다 의자를 들고 원래 거기 있어야 한다는 듯 내게 다가왔다.

 

"필기구가 필요할 것 같아요." 멜로디아 브레이드가 말했다.

 

"아가씨가 적으면, 내가 검토해 보도록 하지." 바드 선생이 말했다.

 

"으음... 어..." 바이닐 스크래치는 겸연쩍어하며 뒷목을 긁적이더니 말했다. "내가 어디 쓸만할 것 같지는 않은데, 직접 연주하는 걸 들어 보고 한두 마디 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나이트브링어를 받들어 연주하는 사상 초유의 역할을 짊어질 사람도 있어야겠군요." 옥타비아가 말했다. 잔뜩 긴장한 채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피식 웃고, 나이트브링어를 테이블 너머로 밀어 넘겼다. 몇 년 동안이나 그저 꿈 속에서 만날 수밖에 없었던 전설 그 자체인 첼리스트에게, 나는 말했다. "타비Tavi, 그쪽이 해주겠어요. 하시고 싶은 대로 해보자고요."

 

이제 우리는 다섯의 개인이 아니었다. 우리는 한 사람의 뇌를 구성하는 다섯 개의 뇌처럼 움직였다. 한 가지 생각과 한 가지 목표로 단결된 다섯의 생각은 대체로 비슷했다. 소집의 노래, 그 권능은 실로 대단했다. 넷은 내가 뭘 하려는지 바로바로 이해했고, 내가 조합한 것을 평가해 주었다. 성격이 서로 다를 수는 있어도, 이들이 타고난 재능과 음악을 향한 열정은 모두 같았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소음 속에서 아름다운 가락을 찾아내는 모든 것, 음악을 향한 부정할 수 없는 사랑, 그 모두가 우리의 공통분모였다.

 

멜로디아 브레이드는 우리 작업의 핵심이었다. 내 머릿속을 떠돌던 제9곡의 파편화된 조각조각들을 모아 거기서 중요한 부분들을 골라냈다. 이미 옮겨 적은 멜로디를 다시 분해하고, 나 혼자서는 도저히 할 수 없을 수준으로 재조립해 거기서 이 가락이 나왔다고 상상도 못 할 만큼 새로운 멜로디를 만들어 냈다.

 

일단 샘플 하나가 완성되면 연주는 옥타비아의 몫이었다. 그렇게 우아하면서도 평정을 잃지 않고 연주할 수 있다니, 연주를 듣기는커녕 울지 않으려 용을 써야 할 판이었다. 두 분 여신께서 직접 만들어낸 악기를 품에 안고 연주하는 모습은 조금도 어색하지 않고 당연해 보였다. 나이트브링어에서 뻗어나온 광휘의 만화경으로 벽을 물들이며 단단한 현을 퉁기는 모습에선 그 어떤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옥타비아의 연주를 듣고 나면 바이닐이 툴툴대는 말투로 촌철살인이라 할 만한 촌평을 달았다. 연주를 쪼개어 듣는 능력이 탁월해서, 옥타비아의 연주에서 내가 불러 준 샘플이 괜찮게 섞인 부분과 서로 겉도는 부분을 귀신같이 찾아내 멜로디아에게 일러주었다. 이쪽에는 전혀 조예가 없는 디제이의 코멘트가, 궁창의 야상곡 중에서도 도저히 알아먹을 수가 없는 제9곡을 완성하고 있었다.

 

이렇게 검수가 끝난 부분은 점핑 레이 바드 선생에게 넘겨 하나로 합쳤다. 사내는 작업 내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곡조를 흥얼거렸다. 우리가 넘긴 악보를 보고 나직하게 콧노래를 불러 보며 제9곡의 윤곽 안에 감춰진 이미지나 의미 등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오랜 세월 끝에 하나로 합쳐지는 대륙과 같이, 바드 선생은 무한한 인내심과 헌신에 가까운 집중력으로 바이닐 스크래치가 표시해 둔 샘플을 집어 하나로 합쳐냈다.

 

이렇게 제9곡을 어둠의 나락에서 건져 올리고 나면, 이것들을 받아적는 것은 내 몫이었다. 곡이 완성된 뒤, 나는 옥타비아에게 최초로 제9곡을 연주할 영광을 돌렸다. 옥타비아가 아홉 번째 비곡을 연주하다 말고 나머지 넷에게 눈길을 던졌다. 그 뜻을 가장 먼저 파악한 것은 멜로디아였다. 혹시 나이트브링어 말고 다른 악기는 없는지, 멜로디아가 물었다.

 

내가 쓰던 리라도 같이 갖고 온 것이 다행이었다. 설마 내 평생에 옥타비아 옆에서 연주할 날이 오다니, 나는 그 순간이 올 때까지도 그것이 현실임을 자각하지 못했다. 나는 옥타비아의 옆에서 신호를 기다렸고, 나머지 셋은 이쪽을 바라보며 비곡 연주의 순간을 기다렸다. 우리가 일으킨 고아한 가락과 소리가 바다를 이루었는데, 곡조 하나가 쓸고 지나간 자리에 다른 멜로디가 포개지고, 다시 포개졌다. 제9곡의 연주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이 완벽하게 끝났다. 그 때 머리에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페눔브라의 메아리를 다시 연주할 수만 있다면, 앨러배스터에게 키스라도 해 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렇군요. 고적의 애가Desolation's Elegy가 아니었어요." 나는 지친 표정으로 나이트브링어의 금빛 아우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고적의 이중주Desolation's Duet네요."

 

"처음부터 두 사람이 연주할 것을 상정한 곡이에요." 멜로디아가 말했다. "온전히 연주하려면 연주자 두 명과 악기 두 점이 필요한 것이죠. 혼자서 연주하면 멜로디가 무너져 버려요."

 

바드 선생이 끄덕였다. "절반에 지나지 않는다지만, 혼자서 구체화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린 이유가 있었구만. 그렇지 않은가?" 사내가 물었다.

 

"얼마나 큰 도움이 되어 주셨는지 상상도 못 하실 거에요." 나는 넷에게 다가가 한 명씩 어깨를 토닥이며 조용히 말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그 어둠을 더해 가는 판이지만, 그래도 집으로 돌아갈 길이 더 선명하게 보이는 기분이에요."

 

"허, 냉정해진 음악가라." 바이닐이 헤롱헤롱한 미소를 띄웠다. "언제 한 번 꼭 해 봐야겠구만."

 

"하지만, 꼭 긍정적으로만 해석할 여지가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요?" 옥타비아가 나이트브링어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아쉬움에 발굽을 부르르 떨었다. 나를 바라보는 눈길에 슬픔이 배어 있었다. "친구 분들과 의사소통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차단된 거나 다름없어요. 그쪽이 말씀하신 모든 점을 고려해 보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고립된 처지에 계신데요."

 

"지금만큼은 함께 연주할 사람이 있었죠." 멜로디아가 우울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제9곡을 같이 연주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기는 있을까요?"

 

"저도 지금까지는 그럴 수 있을까 싶었죠." 나직하게 대답했다. 무릎을 꿇고 앉아 가방에 리라를 밀어넣었다. 물통을 꺼내 마개를 비틀어 뽑았다. "지금은..." 마른 목구멍으로 물이 넘어가면서 식도가 부르르 떨렸다. 방 한쪽 구석으로 시선을 돌리고 말했다. "부탁할 만한 사람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자네 연주를 현장에서 들을 수 없다니 아깝게 됐구만." 바드 선생이 차분한 미소로 말했다. "하늘을 쪼개고도 남을 전대미문의 공연이 될 텐데 말야."

 

"하하, 딱 그렇네요."

 

"나중에 그 때 이야기 해 주실 거죠?" 멜로디아가 나긋하고 희망찬 미소를 지었다. "이 '저주'라는 게 다 끝나고 나면, 언제 저희 보러 오시는 건 어때요?"

 

"흠, 그건 장담할 수 있죠..." 나는 넷을 바라보았고, 넷이 나를 바라보았다. 물통을 들어 입가로 옮기며 차분히 눈을 감았다. 흐르는 물로도 말을 막을 수 없다면, 아마 이렇게 덧붙였을 것이다. "어떻게 제가 여러분들 뵈러 안 갈 수 있겠어요."

 

물 한 모금을 삼켰다. 방 저편에서 나이트브링어의 마지막 현이 그 진동을 멈췄다. 귀가 절로 쫑긋했다. 물 마시기를 마치고 숨을 깊이 내쉬었다. 눈을 뜨자, 넷은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차분히 물통 마개를 꽂아 닫고, 가방을 어깨 위로 넘겼다. 빈 테이블 쪽으로 다가가 나이트브링어를 들어 벨벳 파우치에 집어넣은 뒤 가방에 넣었다. 나이트브링어에서 뿜어져 나오는 금빛 광휘를 숨기기 위함이었다. 염동력으로 머리 위에 밝혀져 있던 등잔을 끄고, 문을 열고 나갔다. 방이 어둠에 잠겼다.

 

나는 흥얼거리며 나무계단 몇 개를 걸어 내려갔다. 내게 주박으로 씌워진, 두려울 정도로 아름다운 곡이었다. 도서관 1층에 다다르자 스파이크가 이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나를 보고 고개를 좌우로 갸웃거리다가, 들고 있던 어마어마한 책더미를 거의 떨어뜨리다시피 내려놓았다. 나른한 오후의 햇살이 창 안으로 들어와 책을 적셨다.

 

"우왓! 어... 안녕! 어어..." 스파이크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가 층계로 옮아가더니, 다시 이쪽으로 돌아왔다. "혹시... 위층 스터디룸 쓰고 내려오는 거야?"

 

"어. 아차. 진짜 미안."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스파이크를 마주보았다. "예약하고 써야 하는 거지?"

 

"뭐 그렇지. 그래도... 그, 그렇게 미안해할 것까진 아니고. 사람도 별로 없고 한산하니까......"

 

"미안하게 됐어. 다음 번엔... 꼭 예약하고 쓰도록 할게."

 

"그래, 그거면 됐어. 그나저나......" 스파이크가 씩 웃으며 이쪽을 가리켰다. "후드 멋진데."

 

"그랭. 뭐 그건 됐고." 스파이크를 보고 씩 웃으며 말했다. "고양이 밥 뭐 줘야 하는지 나온 책은 혹시 없나?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가 하나 있는데, 얘가 암만해도 배가 아픈 모양이라서 말이지. 아무래도 먹여도 되는 걸 줘야 하지 않겠어."

 

"으음...... 아하. 딱 알맞은 게 있지. 좀만 기다려!" 스파이크가 자료실 반대쪽으로 총총거리며 멀어져 갔다. 너무 멀리 떨어지지 않도록 그 뒤를 느긋하게 따라 걸어갔다. "얼마 안 걸리니까 괜찮아! 당장 집에 가고 싶은 거 나도 이해하거든!"

 

"훗......" 나지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느 때보다도 더 집에 가고 싶어 미칠 지경이지."



 

인생은 잔혹하여 홀로 가는 먼 길로 삼을 수 없다. 곁에 아무도 없이 혼자라 해도, 합주하는 소리만큼은 들을 수 있기 마련.

 


아홉 번째의 저주, 라는 것은 좀 뜬금없는 설정이죠. SS&E 선생 말에 따르면, 그냥 넣고 싶어서 넣은 부분이 챕터14입니다. 다만, '왜 하필 아홉 번째인가?' 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이를 이해하려면 수비학數秘學을 조금 뒤져보면 됩니다.

 

수비학은 1부터 9까지의 숫자에 각각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데, 여기서 3은 Triad라 하며 다양한 곳에서 그 상징성을 드러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하나임을 말하는 삼위일체, 부처가 되는 길로 법신불과 보신불과 화신불 3가지를 제시한 삼신불, 힌두교 3주신으로 각각 세상의 창조와 유지와 파괴를 관장하는 브라흐마-비쉬누-쉬바, 과거-현재-미래, 나-너-우리 등등 한 총체를 3가지로 나누어 동시에 완전성과 통일성을 부여하려고 하죠. 그래서 이 3을 완전수라 부릅니다.

 

완전수 3이 3번 있으면 9가 되죠. 이를 Ennead라 하며, 완전수의 완전수로 완성된 수인 만큼 온갖 상서로운 의미는 다 갖다 붙입니다. 9는 최상의 완전으로 완성되는 수이지만, 그와 동시에 한계를 뜻하게 되기도 하는 것이죠. 완성은 곧 한계인 것입니다. 9를 넘어가면 새로운 차원이 나타나거나, 공허만 있게 되는 것이죠. 그러므로 9는 파괴의 임계점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10, Decad는 1부터 9까지의 모든 상징이 융합된 완전수 이상의 완전수인 것이고 새로운 차원을 시작하는 최초의 1인 것이며 신의 영역으로까지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BGP 세계관에서 아홉 번째의 저주를 이기지 못한 음악가들이 많았다고 언급되는 것은 굳이 갖다 붙이자면 그런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저 넷은 신의 영역에 도달한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람의 영역을 벗어난 것이지 신의 영역에 닿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신의 영역을 침범하고 있는 것은 라이라지요. 'Lunar Elegy'가 괜히 10곡인 건 아닐 것 같지 않습니까?

 

챕터13에 써놨지요. 챕터14가 최후의 휴식처라고. 어차피 잊힐 운명이기는 합니다마는, 당대의 전설로 불리는 뮤지션 네 명과 전설 그 자체인 악기를 가지고 합작하는 기분이 어땠을까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위에서 십이지장으로 내려가는 부분이 따뜻해지지 않습니까? 제 입장에서 말씀드리면, 나보코프와 김훈을 한데 앉혀놓고 글쓰기를 배우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가장 닮고 싶고 배우고 싶은 사람들이 다대일 과외를 해주는 거나 다름없다는 것이죠.

 

지금까지 옮겨놓은 본은 녹색창 게시도 상정하고 옮겨놓은 것입니다. 원문이 좀 스파이시해도 이쪽은 간을 좀 줄여서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죠. 챕터6이었던가? 올리다가 단어 필터링 먹은 적 있거든요. 이제 그런 거 신경 쓸 거 없이 캐릭터에 맞게 충실한 표현을 쓸 수 있습니다. <마션>을 읽어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마션>의 첫 문장은 '나는 좆됐다.' 입니다. 녹색창에 올리려거든 '망했다' 정도밖에 못 쓰죠. 필터링 걸릴 거에요, 아마. 염병은 안 걸리더라고요. Ch.08에서 같잖은 로맨틱 판타지 주고받는 부분에 흰 글씨로 염병, 이라고 적어서 넣어놨는데 안 걸리더군요. 덕분에 잘 써먹었죠. 그런 의미에서 바이닐 파트는 좀 더 과격하고 신랄하게 옮겼습니다. 약을 바가지로 한 것 같은 것도 있고.

 

 

 

팬아트나 몇 장 보고 치웁시다. 오늘의 주제는 나이트브링어입니다.

 

 

Nightbringer by LimreiArt on DeviantArt

 

www.deviantart.com

 

 

Background Pony Volume 2 by Ramiras on DeviantArt

 

www.deviantart.com

 

나이트브링어를 묘사한 그림이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다만 대체로 원문 묘사에 충실한 편입니다. 옥타비아는 첼리스트인데 리라를 어떻게 연주했나 모르겠군요. 다른 악기 아닌가요? 사실 Ministry of Image의 BGP 인쇄본 下권 표지는 스포일러였습니다. 암만 봐도 얘가 쓰는 리라가 아닌데 비범하게 생겼잖아요. 안타깝습니다. 사실 나이트브링어 얘기가 나온 이상 어떻게든 얘 품을 거쳐가는 게 맞긴 합니다마는, 그렇다고 저렇게 안고 있는 모습을 보여 줄 필요는 없었어요.

 

 

미주

 

*1 Square Dance. 남녀 4쌍이 한 조를 이루고 사각형으로 마주보고 서서 추는 미국 전통 춤.

 

*2 "...music has erected for me..." 의 'erect'를 이용해 성적 농담으로 바꿔놓은 것.

 

*3 Maretezuma는 몬테수마Montezuma를 비튼 것. 영어 관용구 Montezuma's revenge는 물갈이, 물갈이로 앓는 복통과 설사 등을 의미함.

 

*4 27세에 요절한 음악가들을 한데 묶어 칭하는 말.

 

*5 지미 헨드릭스와 커트 코베인을 변주한 것. 둘 모두 만 27세로 요절함.

 

*6 오마주 대상인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은 '합창'. '환희의 송가'가 유명하며, 루드비히 반 베토벤이 남긴 최후의 교향곡.

 

*7 꼭대기는 평평하고 등성이는 벼랑인 언덕. 미 남서부 지역에 흔한 지형. 콜로라도 서부에 위치한 그랜드 메사는 13,000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면적과 1500m의 높이로 유명하다. 전라남도는 12,247평방킬로미터이다.

 

*8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은 1990년 결혼해 2001년 이혼했다.

 

*9 톰 크루즈는 사이비 종교인 사이언톨로지 신도이다.

 

*10 Saturday Night Live, SNL을 비틀어 놓은 것.

 

*11 Oscar Hammerstein II을 비튼 것.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는 미국의 극작가이자 작사가로, 작곡가인 리처드 로저스와 함께 현대 뮤지컬의 기초를 닦았다.

 

*12 Hollywhinny. 할리우드를 비튼 것. 할리우드는 로스앤젤레스에 소재하고 있으며, 할리위니는 로스페가수스에 소재한 점에서 명백한 패러디.

 

*13 캘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에 속한 도시 애너하임Anaheim을 비튼 것. 1870년 세워진 도시로, 당시에는 로스앤젤레스 카운티에 속해 있었다. 디즈니랜드가 있다.

 

*14 영국의 소설가 조지프 콘라드. 폴란드 출신으로, 20대에 선원으로 일하며 영어를 배웠다. 폴란드 출신자로서 정체성은 확고히 유지했으나, 작품 활동은 오직 영어만 사용했다. 조지프 콘라드의 소설은 어렵고 복잡한 문장으로 점철되어 있어 번역본이 많지 않다. 언급된 Hay of Darkness는 대표작 어둠의 심연Heart of Darkness를 비튼 것이다. 어둠의 심연은 이후 베트남전을 배경으로 각색되어,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으로 개봉되었다.

 

*15 knock the socks off. 깜짝 놀래키다, 감동시키다 정도의 의미를 갖는 숙어. 여기서는 '당신네들 놀래켜 줄게' (당신네들 양말을 벗겨 버리겠어) - '내 얘기 듣고 나면 얼라리 난 양말도 안 신었는데 어디서 나왔지? 하게 될걸' - '전 양말 신었어요' 로 활용되면서 역자의 머리를 아프게 했다. 빌어먹을 말장난.

 

*16 마이애미Miami를 비튼 것.

 

*17 람슈타인Rammstein과 나이트위시Nightwish를 비튼 것. 람슈타인은 독일의 인더스트리얼 메탈 밴드이며, 나이트위시는 핀란드의 심포닉 메탈 밴드이다.

 

*18 헌터 톰슨Hunter S. Thompson을 비튼 것. '곤조 저널리즘'의 창시자로, 자유와 반전운동, 환각제, 폭력으로 대표되는 1960년대를 대표하는 시대의 이단아 저널리스트 겸 작가였다. 평생 술, 마약, 담배를 달고 살았으며 2005년 권총자살했다. 죽기 전 아내에게 '지긋지긋한 지구를 떠나는 것이 평생 소원'이라며 사후 유골을 대포에 넣어 격발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 부탁은 친구 조니 뎁이 사비를 들여 들어주었다.

 

*19 브루스 복스라이트너Bruce Boxleitner를 비튼 것. 브루스 복스라이트너는 미국 배우이다.

 

*20 도저히 괜찮은 말장난이 생각나지 않아 공화당이라고 그대로 썼다.

 

*21 원문은 Shadow's Advent로 표기되어 있다. 뒷 문장에서 궁창의 야상곡을 완주할 수 있었느냐고 묻기 때문에, 10곡인 새벽의 강림으로 고쳐 옮기는 것이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