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SS&E/백그라운드 포니

Chapter 11. 이름 없는 자들Unsung

by Mergo 2020. 10. 24.

 

 

 

조화력 6233년 4월 5일

 

사람들은 어둠 강림의 시대를 불길한 전조와 짙은 어둠이 지배하는 시대라고 부르오. 사로스인*1과 심경근위대Night guards*2를 위시한 밤의 피를 물려받은 자들은 하염없이 루나 공주님의 부재를 슬퍼하며 그분의 거처를 다만 올려다볼 뿐이고. 이들이 바라는 것은 공주께서 다시 세상 속으로 나오사, 지난 십 년간 홀로 칩거하시며 명상 끝에 얻으신 깨달음을 밤에 속한 자들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 하나뿐이오. 형제 자매들은 신실한 추종자이기는 하나, 이제 기쁨이 무엇이었는지 정녕 잊은 것이 아닌가 두렵소.

 

요사이 밤바람이 차오. 우리 가족들은 대부분 그런 밤바람을 두고 우중충하다고 하지만, 내게는 그보다 짜릿한 감각은 또 없을 것 같구려. 내가 혼혈인 것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기대가 크오. 우리는 어쩌면 위대한 발견과 계몽의 시대의 고점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소. 내 뼈와 뿔로 느껴지는 바는 그렇소. 불화의 시대Discordant Era가 종식된 이래 과학과 세속주의가 세상의 흐름을 이끌어 왔소. 턱수염 스타스월의 노력으로 크나큰 성취를 이루어낸 것은 사실이나, 그 또한 마법의 시대로 흐름을 전환하지는 못했소. 그의 노력은 우리 삶을 더욱 단순화시키는 데 그쳤다는 것이오.

 

사람의 삶은 그렇게 단순해서는 아니되오. 발로 디딘 땅과 코로 들이마시는 공기, 우리 몸 속을 순환하는 피, 그 이상의 것들을 인지하고 우리의 부박한 존재를 구성하는 기본원소 너머 시원始原의 진실을 수탐搜探해야 하오. 셀레스티아 공주의 광휘만으로 드러낼 수 없는 진실을, 베일에 가려진 창조의 역사 속에 숨은 진실을 말이오. 우리의 위대한 밤의 여신, 루나 공주께서 이제 진실을 찾아 떠나는 여정의 첫 발걸음을 떼시려는 것이 아닌지, 다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소.

 

위니페그 대학 고대신비학 석좌교수인 나를 캔틀롯으로 소환하셨음은, 비밀리에 나를 접견하시겠다는 의사 표명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소. 공주께서 불초한 몸을 직접 불러들이셨다면 단순한 의견 개진 이상의 일을 해드려야 한다는 말일 게요. 게다가 캔틀롯 상층 심경深更지구에 거처를 정해주시겠다고 하는구려. 공주님께서 대체 무엇을 바라시는 것인지 짐작도 되지 않소. 십 년에 걸친 칩거와 고독의 시간을 내가 해결할 수 있을까 두렵소.

 

상황이 얼마나 중한지 나로서는 짐작만 할 뿐이오. 공주께서 나를 급작스레 불러 오랫동안 곁에 두고 계실 생각을 하실 정도로 중대한 발견을 하신 것이겠지. 물론 공주님의 뜻에 기꺼이 따르려 하오. 캔틀롯에 단신부임하는 것도 아니고, 소중한 반려와 함께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시지 않았소.

 

세상이 변할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내기 어렵구려. 내 인생의 한자락에서 새로운 시대의 새벽이 밝아온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생각이오.

 

세인世人들은 지금을 어둠 강림의 시대라고 부르오. 마음의 죄를 씻어주는 영광된 어둠의 시대라면야, 그 표현이 올바를 것이오. 한 유니콘으로 지금 이 시대를 목도할 수 있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오. 그 어느 때보다도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있소.

 

앨러배스터 코멧후프

 


 

조화력 6233년 4월 7일

 

일지에 기록을 남긴 첫날부터 애매모호한 말장난을 친 점 미안하오. 서로 다른 분야로 마법학 학위를 다섯 개 땄으면 간결하게 글 쓰는 법 정도는 알 거라고 생각할 터이고, 나 스스로도 그 정도는 된다고 생각하지만 다름아닌 루나 공주님 스스로 나를 호출하시지 않으셨소. 누구에게나 있는 일이 아니니, 공부를 얼마나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게요. 아직 나도 연륜이 부족한 나이라, 쉽게 흥분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소. 어느 정도 해명이 되었으리라 생각하오.

 

일지는 내 사촌인 크레센트 샤인Crescent Shine이 준 것이오. 이걸 주고 가면서 한 마디 언질을 같이 남겼소. 왕실 심경근위대의 장長이 말을 전하고 갔으니, 그와 혈연이 있든 없든 누구라도 허투루 듣지는 못 할 것이오. 그가 가로되, 루나 공주께서 십 년에 가까운 침묵을 깨고 마침내 옥음을 내리셨으니, 가장 먼저 학자이자 연구자로서 내 도움이 필요함을 알리라고 하셨다고 했소.

 

아무 말도 나오지 않더군. 일말의 과장 없이 진실로. 크레센트 샤인은 그런 나를 따라하며 놀려댔고 말이오. 그 친구와 오랫동안 교류하다 보니 어느샌가 내가 평생 서원으로 세운 학자의 길을 가지고 악의 없는 장난을 치고 있었소. 내가 그를 자랑스러워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또한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소. 이제 그가 평생을 바쳐 모셔온 밤의 여신께서 나를 불러 그분께 봉사할 것을 명하셨으니 더더욱 그랬을 것이오. 심경근위대와 함께 그가 이룩해낸 업적에 먹칠을 해서는 안 될 텐데 걱정이구려. 이 또한 루나 공주님께 마땅히 돌아가야 할 광명과 경의를 위한 일이니.

 

크레센트는 십 년 만에 처음으로 왕가의 알리콘이 아니면서 루나 공주님의 옥음을 받들지 않았소. 용안을 직접 뵈었을 테니, 달의 여신께서 어때 보이셨는지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오. 만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고독과 우울에 침잠해 계시는지, 오직 불멸하시는 공주께만 허락된 활기와 기쁨으로 옥체를 새로이 하고 계시는지. 고대 신비학과 음악이론에 심취한 유니콘 학자를 직접 불러들여 곁에 두고 하시려는 일이 대체 무엇인지 말이오.

 

크레센트는 내가 묻는 말에 거의 대답하지 않았소. 당연한 일이오. 그의 충성심은 신성해 보이기까지 했으니, 공주님의 상태가 어떠한지 말을 아끼는 것 또한 자연스러웠소. 다만, 내가 예전에 연구 문제로 뼈빠지게 모았던 자료 다수를 루나 공주님께서도 깊이 공부하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소. 공주님께서 내 부박하기 짝이 없는 연구논문을 읽어보셨다니, 놀랍기도 하고 들뜨기도 하더구려. 떠나기 전에 덧붙이기로, 내가 하게 될 연구를 빠짐없이 기록으로 남겨둘 것을 당부하셨다고 했소. 새로운 연구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오.

 

공주님의 전언을 사양할 방법이 어디 있었겠소. 지금 써 내려가는 글줄이 공주님과 함께 연구하게 된 지금 심경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을 게요. 이 이상 기쁠 수가 없소. 나는 평생에 걸쳐 역사를 공부했지만, 나는 그 모든 것이 지나 버린 뒤에야 관찰자, 방관자로서 역사적 사실을 읽을 뿐 거기 참여하지 못했소. 불멸하시는 루나 공주님께서 이제 나를 불러들여 연구를 시작하시니, 이로써 나는 역사 속 기록으로나마 루나 공주님과 함께 불멸할 영광을 얻게 되었소.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려 한다는 말을 이렇게 길게 썼소. 아직 새로이 보게 될 것이 더 많은데 말이오. 아마도 나는 지금 이 영광스러운 순간을 받들기 위해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거요. 그 순간이 도래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소.

 

이전에도 자잘하게 몇 편 기록을 남기기는 했으나, 아무것도 아닌 것을 길게 써놓은 것에 불과하오. 시대를 초월할 중요한 발견을 기록으로 남길 기회를 이제 잡았소. 그대에게 바칠 작품으로 이만한 것은 앞으로도 영영 없을 것이오. 나는 그대를 통해 삶을 얻으니, 내가 잡은 기회보다 그대가 더욱 소중한 것은 당연하지 않소.

 

그러므로 나 앨러배스터 코멧후프는 그대 페눔브라Penumbra, 내 평생의 사랑, 나를 지켜보는 별, 내 저녁의 숨결에게 이 일지를 바치는 바요. 내 곁에서 묵묵히 세월을 함께하며 책상물림이었던 내게 세상은 겉치레와 공부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오늘의 기쁨 또한 없었을 것이오.

 

사랑하는 페니Penny, 그대에게 내 연구기록을 바치니 그대 또한 내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지금 이 시대가 조국에 어떤 유산으로 기록될 것인지, 새롭고 광명된 계몽의 시대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대 또한 알 거라 믿소. 다가올 시대는 우리를 더욱 풍요롭게 할 것이나 감히 재정의하지는 못할 거요. 불멸하시는 알리콘의 의지보다도 영원하고 확고한 것은 우리 사랑 하나뿐이기 때문이오.

 

계속 읽어 주시오, 페니. 이 모든 것이 그대와, 다시 그대를 위해서였음을 알아 주시오. 이로써 그대 마음의 양식이 되고 그대 영혼의 노래가 되기를.

 

앨러배스터 코멧후프 씀

 


 

조화력 6233년 4월 12일

 

싸구려 항공편으로 위니페그에서 캔틀롯까지 가는 데 여섯 시간이 걸렸소. 페눔브라 그대가 곁에 없으니 일각이 여삼추더구려.

 

나는 세 시간 전에 캔틀롯 외벽에 닿을 수 있었소. 글줄을 계속 적어 내려가자니 피로하기는 하나, 너무나 들떠 쉬이 잠이 오지 않는구려. 캔틀롯은 실로 이퀘스트리아의 수도로 더할나위없이 훌륭한 곳이었소. 이 땅의 가장 영민하고 창의적인 자들이 모두 여기 모여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오. 거리마다 음악이 넘쳐 흐르고 각종 미술품과 시, 찬란한 빛깔이 가득하더구려. 햇빛이 쨍쨍한데도 횃불이 밝혀져 있었소. 나는 이 모든 것을 직접 보았으므로 아오.

 

걱정은 하지 마오. 의관이 상한 일은 없소. 새 거처를 찾아가는 동안 동전지갑을 잃어버린 것 외에는 모두 무사하다오. 행인들에게 길을 물어 가며 찾아갔는데, 오히려 더 길을 잃어 그렇게 됐소. 완전히 길을 잃기 전에 크레센트 샤인이 날 찾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오. 설마 낮 동안 요 주변을 날아다니고 있을 줄은 몰랐지만 말이오. 캔틀롯 상가의 불은 절대 꺼지지 않는다더니, 왕실 심경근위대에게도 비슷하게 적용되는 게 아닌가 싶구려. 그러고 보니 그대는 일전에 녀석이 정예병을 이끌고 야간 순찰 비행을 다니는 모습을 보고 그 위엄이 장대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지요. 검은 갑주가 햇빛을 받아 번들거리는 모습은 그보다 더해서, 일종의 중압감까지 느껴진다오. 검은 투구 아래로 반짝이는 노란 눈동자를 보더니 근처를 지나던 행인들도 슬금슬금 몸을 사리더구려. 우리는 다만 서로 씩 웃을 따름이었소. 간단한 포옹으로 인사를 나눈 뒤, 크레센트가 심경 지구로 안내해 주었소. 공주님을 알현할 일자와 시간은 도착한 뒤에 전달받았고.

 

새 거처가 얼마나 넓은지, 직접 보면 놀랄 거요. 위니페그에 있는 아파트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오. 창문에는 햇빛을 막아 줄 두터운 덧문이 달려 있는데, 내가 없을 때는 마음대로 열고 닫아도 좋소. 주방은 왕궁의 그것과 동일한 양식이라오. 벌써부터 새 이웃들을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고 싶어지는구려. 옆집 사람들 모두 친절하고 좋은 분들이라오. 대부분 사로스인이기도 하고. 내 동족들과 그대가 더 많은 교류를 가질 기회가 오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르오. 믿거나 말거나이긴 하지만, 대체로 야행성이 아니시더군. 캔틀롯에도 새 벗님들을 많이 사귈 수 있을 것 같아 기쁘오.

 

더 쓸 것이 남아 있기만 하다면야 더 쓸 수 있지만, 이제 쓸 것이 남아있지 않소. 심경 지구의 대로와 골목마다 아로새겨진 화려한 장식은 거의 보지도 못했는데, 여로旅路가 너무 길어 피로하오. 위니페그의 아파트에 우리 물건을 전부 내버리고 오더라도 그대가 어서 여기 와 주었으면 좋겠소. 물론 그렇게 해 달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지만 말이오. 반려를 기다리는 한 주가 이렇게 기오. 공주께서 보내신 소환장을 다시 읽어보고 있소. 드림 밸리에 기원을 둔 원시 교향곡을 주제로 쓴 연구논문에 참고한 자료를 챙겨오라고 하셨지. 내 학자로서의 삶 한 자락을 다시 끌어들여 파헤쳐야 할 비밀이 무엇인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소. 무엇을 연구하게 될지 한 마디 내비치신 문장도 없으니 말이오. 당분간 무엇에 관한 연구 기록인지는 일지 맨 앞에 적어두기 어려울 것 같군 그려. 머리가 흐려지는 것인지 신이 나는 것인지도 모르겠소. 이제 그만 육신의 피로를 인정하고 내 평생 안 하던 짓을 해야 할 것 같구려. 해가 진 동안 잠을 자려고 하오.

 

그대가 보고 싶소. 위대한 발견의 시대 한복판을 살아가더라도 나 홀로 외로이 그 길을 걷는다면 기쁠 수가 없을 것이오.

 

앨러배스터 코멧후프

 


 

조화력 6233년 4월 22일

 

확정됐소. 내일 루나 공주님을 직접 알현하게 될 것이오. 그대를 기다리느라 정신이 팔려 루나 공주님을 알현할 날짜를 기다리는 것조차 잊고 있었소. 오해는 마시오, 페눔브라. 그대 생각이 내 머리를 어지럽히는 것이 아니오. 오히려 편안하게 해주지. 그대가 머지않아 이리로 와, 나와 함께 새로운 집에서 지낼 것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 자신이 영원불멸의 알리콘이 된 양 무한한 활력을 얻고 있소.

 

루나 공주님을 보좌해 수행할 연구 준비를 해야 하니, 왕실 기록보관소를 낱낱이 뒤져 봐야 할 것 같소. 심지어 대낮에 시립도서관에 가 볼 생각조차 들 정도라오. 아마 그대 생각보다도 더 열심히 캔틀롯식 생활에 적응해 나가고 있소. 그대와 나의 집이 심경 지구에 있다고 하나, 캔틀롯에서도 그대에게 내 야행성 생활에 맞추어 달라고 할 생각은 없다오. 내 반려로서 지금껏 햇빛 대신 달빛에 젖어 살아오지 않았소. 이제 새로운 삶을 맞이하는 마당이니, 그대에게 더 고통을 안겨주고 싶지 않구려. 무슨 멜로드라마도 아니고 쓸데없이 그런 소린 하지 말라고 하는 게 벌써 눈에 선하군. 어쩔 수 없었소. 캔틀롯 사람들은 대체로 활기차고 발랄하다오. 그들처럼... 그대도 본래 햇빛을 보고 살아야 할 사람이지 않소. 이제 그대가 바라는 대로 살 수 있게 삶의 방식을 바꿀 때가 된 거요. 이제 더 희생할 필요 없소. 나를 위해 그대가 참아 온 모든 것들이 늘 고맙구려.

 

낮 동안 도서관에 가는 길은 생각보다 고되지 않았소. 위니페그에서도 두르고 다녔던 달비단Moonsilk 망토는 여기서도 유용했소. 왕실 기록보관소 곳곳은 생각보다 어둑어둑한 곳이 꽤 많았다오. 캔틀롯의 공공시설과 각종 기간시설들은 우리 사로스인들도 쓸 수 있게 배려를 많이 해 둔 것 같았소. 루나 공주께서 셀레스티아 공주님과 함께 캔틀롯 왕궁에 기거해 오신 지도 어언 사천여 년이 흘렀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오. 캔틀롯 도처를 다니다 보니, 여러모로 위니페그가 캔틀롯 곳곳에 싹을 틔운 듯 했소.

 

그렇다고 사람들이 나를 소 닭 보듯 대했다는 것은 아니오. 내가 지난 거리와 들른 건물마다, 날 구경하느라 걸음을 멈춘 사람들이 부지기수였소. 몇몇은 말을 걸어오기도 했다오. 그래도 싫지는 않았소. 오히려 그 사람들의 호기심이 대단히 기꺼웠다고 하는 편이 맞을 거요. 페가수스가 아닌 사로스인은 그리 흔하지 않으니 말이오. 햇빛에 뿔이 드러나면 화상을 입으니, 뿔 또한 가리고 다녔기에 더욱 그랬을 터요. 일전에 크레센트 샤인 휘하 근위병인 척 꾸미고 다닌 적이 한두 번 있었는데, 맨티코어의 아가리에 가짜 날개가 찢겨나가는 걸로 마무리되었소.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니, 그대 얼굴이 안 좋겠군. 배움에 기뻐하고 사람 사귐에 즐거워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활력이 넘치는 도시에 온 것만으로 치솟는 기쁨을 이렇게밖에 전할 수 없어 안타까울 따름이오.

 

도서관에서 몇 시간을 내리 보냈소. 루나 공주님을 직접 배알하고 서연書筵함에 필요한 지식은 이미 내 머릿속에 전부 들어 있었지만, 그럭저럭 집중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공부할 수 있었다오. 캔틀롯 도서관은 대단한 곳이었소, 페니. 몇 년 동안이나 다다르지 못했던 평정의 극한에 아주 자연스럽게 다다를 정도였소. 공주님을 위해 사용해야 할 지식을 얻을 수만 있다면 언제나 두 눈과 귀를 활짝 열어두고 있을 것이오.

 

위니페그 시립대학 식물학 연구과제에 매달려 있던 그대의 심경이 이랬을런지 생각이 드는구려. 그 해에 처음으로 만나지 않았소. 그러고 보니, 그대를 위해 준비해 둔 게 있소. 지금 당장 루나 공주님을 직접 알현하고 옥음을 모시는 영광의 순간과, 그대에게 선물을 전해 주는 순간 중 어느 것이 더 기대되냐고 누가 물으면, 내 곁에서 잠드는 사람 쪽에 더 마음이 갈 것 같구려. 공주님의 날개가 날카롭다는 얘기가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오?

 

농담이오, 페눔브라. 경망스러운 언동을 용서해주기 바라오. 그대가 오기를 깊이 기다리고 있소. 내일 내가 누릴 영광의 순간을 그대와 함께 나누고 싶구려.

 

앨러배스터 코멧후프

 


 

조화력 6233년 4월 23일

 

사랑하는 페눔브라, 드디어 그 순간이 왔소. 루나 공주님을 배알하고 오는 길인데... 이거 무어라 적어야 할지도 모르겠구려.

 

알현은 물론 한밤중에 이루어졌소. 공주께서 달을 띄우시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크레센트 샤인이 근위병 둘을 데리고 아파트 발코니에 나타났소. 위병대가 나를 안내한 곳은 루나 공주님의 침소로 드는 문간이었소. 정말 놀랐다오. 알현실에서 배알하기로 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 말이오.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고, 그 누구도 내게 아무런 언질이 없었소. 그러니 어제 적은 유쾌한 농담을 다시 끌어다 써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오.

 

나는 다리를 달달달 떨면서 침소 문간 앞에 서 있었소. 밤새워 서연이 있을까 싶어, 달비단 망토를 미리 챙겨 나왔소. 햇빛을 맞을 수는 없으니 말이오. 웬걸, 망토를 둘러쓰고 나오니 식은땀만 외려 더 나더구려.

 

그러고 서 있었는데 침소 문이 열렸소. 공주께서도, 회랑을 따라 도열해 선 위병대에게서도 아무런 말이 없었지만 일단 문턱을 넘어 안으로 들었다오. 공주께서는 창가 옆에 앉아 계셨는데, 그 아래로 캔틀롯 금경金鏡 지구와 그 너머가 달빛에 젖어 반짝이고 있었소. 공주님을 직접 배알하니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내 안의 무언가가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소. 그 어떤 달변가를 데리고 와도 그 모습을 온전히 표현하지는 못할 거요.

 

그대도 일전에 셀레스티아 공주님을 배알하지 않았소. 그 때 '다시 태어나는 느낌' 이었다고 내게 말해주었었지. 루나 공주님을 배알했을 때 든 느낌은 그것과는 많이 달랐소. 오히려 내 일부가 죽어가는 기분이 들었다고 해야겠구려. 일부러 과장하거나 음습하게 쓴 표현이 아니오. 공주님 앞에 서니 나 자신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존재처럼 느껴졌는데, 또 한편으로는 그래서 특별한 존재가 된 기분도 들었소. 불멸하시는 루나 공주님 앞에 서니, 단순히 용안을 뵙고 있는 것만으로 혼이 빨려들어가는 느낌도 들더구려. 내가 얼마나 작은지, 그러면서도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새삼 깨닫는 시간이었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 공주께서 하문하실 것을 기다리고 있었지. 공주께서는 아무 말씀도 없으셨소. 그렇게 침소에 침묵만이 가득했고, 이렇게 깔린 어색한 침묵이 몇 분으로 이어졌소. 몇 분이 한 시간... 두 시간까지 확대되고 나니 내가 뭐라도 잘못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절로 들더구려. 공주께서 아무 말씀도 없으신 게 나 때문이 아닌가 싶었던 게요. 그러면서도 뭐라 입을 열 용기는 내지 못했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침묵을 지키시는 데는 무엇인가 신성불가침한 이유가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오.

 

공주님 앞에 가만히 서서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사지가 점점 더 마비되어 갔소. 그쯤되니 내가 얼마나 오래 서 있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더군. 그 동안 공주께서는 가만히 자리에 앉아 마치 스스로 우주의 한 부분이 되신 것처럼 밤하늘만 바라보고 계셨소. 이대로 가다가는 졸도하겠다 싶어, 문간까지 물러나 자리에 앉았소. 공주께서는 다시 아무 말씀도 없으셨소.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는 가운데, 가져간 자료를 꺼내 뒤적거리며 원시 교향곡에 관한 내용을 머릿속에 다시 새겼소. 혹시나 내 학식을 시험하시면 어떻게 하나 싶어서였는데, 그런 것 또한 없었다오.

 

그래 결국 공주님의 침소를 두리번거리는 것밖에 할 게 없더구려. 우리나라 음악사를 함께해 온 모든 악기들이 벽면마다 걸려 있었소. 마치 나 또한 그 중 하나가 된 듯했소이다. 개중에는 나조차 처음 보는 악기들도 몇 점 있었소. 페니 그대도 알겠지만, 그쪽 방면에선 내 지식이 결코 얕지 않은데 말이오. 이제는 멸종된 나무로 깎은 목관악기가 여러 점, 생명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재료로 만든 북도 몇 개 있었소. 각 시대를 풍미한 현악기들 위에 쌓인 먼지를 보고 있으니, 수백 년은 되었으리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소. 문득 내가 깊이를 짐작할 수 없이 깊은 우물 아래 가라앉은 조약돌 하나밖에 안 되는 존재처럼 느껴지더군.

 

그쯤에서 시선이 침소 한가운데 쪽으로 옮아갔소. 받침대 위에 무엇인가 신비감이 절로 느껴지는 물건 하나가 올려져 있었는데, 우선 그 울림통으로 말하면 겉은 매끈하고 색은 흑단처럼 검어서 새까만 빛이 반짝이며 흘러나오는 듯했소. 거기 매인 현 하나하나는 달빛처럼 창백했고 말이오. 침소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악기의 존재를 감지하지 못한 것은 아마 루나 공주님을 직접 배알하는 광명에 내 정신이 온통 쏠려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하오.

 

그 때 문득 머리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무언가가 있었소. 다름아닌 그 나이트브링어Nightbringer*3를 내 두 눈으로 직접 목도하고 있었던 게요. 전승에서 묘사하는 나이트브링어의 최후는 그게 뭐가 됐든 전부 거짓이었소. 페눔브라, 이 두 눈으로 똑똑히, 그 성물聖物을 영접했단 말이오. 삼백 년 전, 용들과 전쟁을 치를 때 파괴되었다고 했지만 아니었소. 단순히 세상에 남아 있기만 한 게 아니오. 마력을 온전히 간직한 채로 어느 한 곳 상한 자리 없이 멀쩡하게 남아 있었소. 게다가 루나 공주께서 보관하고 계셨던 게요.

 

나이트브링어 때문에 나를 캔틀롯으로 불러들이신 것 같소? 역사의 퇴적지에서 나이트브링어를 찾아내셔서? 두 분 공주께서 공동으로 여태껏 그 성물을 관리하고 계셨을 수도 있지 않겠소? 그렇다면, 진실을 굳이 숨겨두실 이유가 뭐가 있겠소?

 

루나 공주께서는 밤 내내 아무 말씀도 없으셨소. 어떻게 보면, 그럴 필요가 없으셨을지도 모르겠구려. 내 눈앞에 나이트브링어를 보여 주신 것만으로 내 상식을 뒤흔들어 놓으시기는 충분했을 테니 말이오. 그것만으로 많은 게 바뀌었소. 그것이 현존하므로, 창조의 노래Chorus of Creation를 우리의 두 귀로 언젠가 들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오.

 

그 때 나는 감히 입을 열어 이게 어떤 뜻인지 여쭤보려 했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소. 조각상이 생명을 얻듯, 공주께서 고개를 돌려 침소 문을 뿔로 겨누시자 몇 시간 내내 닫혀 있던 문이 곧장 열렸기 때문이오. 크레센트 샤인과 근위 둘이 들어와 아무 말 없이 나를 집까지 데려다 주었소.

 

심경 지구에 도착하자마자 서류 한 통을 받았소. 적혀 있기로, 내일 다시 공주님을 배알할 것이라고 했소. 그렇소, 그대가 오기 바로 전날이오. 내일은 어떻게 될 것 같소? 그 침묵이 무슨 의미라 생각하시오? 이게 대체 무슨 영문인가 싶지만, 그러면서도 벅찬 기쁨을 느끼고 있소. 창조의 도구를 이 두 눈으로 목도했으니 당연한 일이오, 페눔브라. 위대한 어머니께서 몸소 산하를 거니실 적에 세상의 모든 빛이 태어났고, 그 때 형태 없는 곡 한 편이자 순수한 마력의 응집체가 변하여 나이트브링어가 되었다고 하지 않소.

 

내게 해답이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긴 하되, 적어도 무엇을 해야 할지는 또렷하게 보이는구려. 한 번만 더 흐릿하게나마 성유물을 이 눈에 담을 수 있다면, 내 역할은 무슨 일이 있어도 완수하려 하오.

 

영원히 그대만을 사랑할 그대의 반려,

 

앨러배스터 코멧후프

 


 

조화력 6233년 4월 24일

 

다시 루나 공주님의 침소에 불려갔다 돌아와 적소. 이번에도 알아서 내 발로 걸어 들어가야 했다오. 지난 알현과 마찬가지로 루나 공주께서는 창가에 앉으신 채 창 밖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계셨소. 그것은 나이트브링어를 더 가까이에서 뜯어볼 시간을 주시는 것이었지. 앞에 가만히 서서 바라보기도 하고, 근처를 빙빙 돌며 훑어보기도 하고 한 자리에 오래 서서 깊이 뜯어보기도 했소. 신물에 발굽을 대보고 싶다는 충동이 올라왔지만, 차마 감히 그 검은 표면 가까이 다가설 용기가 나지 않더구려.

 

내가 침소에 들어 한 시간 남짓을 아무 말 없이 나이트브링어를 뜯어보고 있던 와중 마침내 공주께서 입을 여시어 옥음을 내려주셨소. 밤의 공주와 한 방에 들어 그분의 옥음을 영접하는 것은 흡사 폭풍에 실린 신의 은혜를 맞는 듯했소이다. 세포 하나하나가 불타는 듯하면서도 얼어붙는 듯한 기분이 들었소.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공주께서 말씀하실 때마다 일어나는 충격파에 실린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온 몸과 온 혼을 기울여 받드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소. 속삭이듯 말씀하시면서도 우레와 같은 공명을 일으키실 수 있으신 분은 오직 루나 공주님 한 분뿐일 게요. 공주께서 한 마디, 한 마디를 하실 때마다 공주님의 권위와 그 지당하심은 물론, 그분과 삼라만상이 세세하고 광명된 영겁의 실로 연결되어 있음을 감히 의심할 수 없었소.

 

공주의 말씀에는 나이트브링어에 관한 내용이 하나도 없었소. 신비학 연구에 관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소. 원시 교향곡 또한 말씀하시지 않으셨소. 공주께서는 사로스인이면서 유니콘으로 살아온 세월이 고단하지 않았느냐고 물으셨소. 그랬으므로, 나는 공주의 말씀에 답을 올렸소.

 

날개 없는 사로스인으로 사로스인 사회에서 살아온 것이 어떤 의미인지 말씀드렸소. 사로스 유니콘이 탄생할 확률은 1/5000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씀도 올렸다오. 새하얀 솜털과 잎새처럼 뾰족한 귀끝, 세로로 갈라진 동공은 또래 어린애들이 놀려먹기 좋은 소재였으며, 그 덕에 어릴 적에 많이도 괴롭힘을 당하고 놀림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소. 어느 날 내가 기억을 잃고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내가 뭘 하던 사람인지 대충 알아먹을 수 있을 정도 수준으로, 내가 잘 적응해온 것들과 배워 온 것들을 간략하게만 말씀 올렸소이다. 내게 공주께서 하문하셔야 할 지식이 있을 리 없지 않겠소? 페가수스와, 극소수인 그 외의 사로스인 모두에 대하여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실 분이 그 분이 아니오. 모든 사로스인은 밤의 여신과 그분의 의지에 복종하기로 오래도록 맹세해 온 사람들이니.

 

대답을 다 듣고 난 뒤, 루나 공주께서는 웃지도 찡그리지도 않으셨소. 자리에서 일어나시어 나이트브링어 옆으로 가만히 다가서실 뿐이었지. 부박한 설명이었지만, 명료한 설명이기도 했소. 나를 처음으로 불러들이신 후부터, 그때까지 이어진 끝없는 침묵은 모두 나를 시험하신 것이었소. 나이트브링어를 굳이 공주님 안전에 가져다 놓으신 것은 내 반응을 지켜보시기 위함이었던 게요. 아무 말씀도 감히 먼저 올리지 않았던 것이 결과적으로 좋게 풀린 것이오. 목전에 놓인 신물이라는 장엄함에 손쉽게 놀아나는 자가 아니라고 판단하신 게요. 밤의 여신께서 보여주신 행동을 내 나름대로 풀어 적자면, 학자라는 직함에 걸맞게 사고하고 행동했으며 충동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자제력을 보였다고 나를 인정해주신 것이오. 함부로 침묵을 깨지 않고, 필멸자의 발굽으로 감히 성물을 건드리려고 하지 않은 것을 말이오.

 

공주께서 말씀하시는 한 마디, 한 마디를 마음에 새기며 들었소. 나 또한 그러한 침묵에 익숙해지는 게 최선이겠다 싶어지더군. 명하시기 전에는 행하지 아니하고, 하문하시지 않으면 함부로 입을 열지 않기로 말이오. 공주께서 마지막으로 말씀하신 말을 들었을 때는 그야말로 혼절하는 줄 알았소. 공주께서는 교향곡을 쓰고 계셨다오. 그렇소, 페니. 하늘을 적시는 달빛의 주인이신 루나 공주께서 십 년의 침묵을 깨고 다시 세상 속으로 나아가실 때, 그분의 불요불굴 견인불발하는 기상을 담은 곡을 옆에 두고 싶으셨던 게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으니... 곡을 완성하는 데 나 또한 참여해 주기를 바라셨소.

 

공주님 안전에서 졸도해 쓰러질 정도로 경우 없는 자가 아니어서 다행이오. 가능한 모든 예의를 갖추어, 내 모든 것을 바쳐 임하겠노라고 말씀드렸소. 그 곡이 어떤 것인지, 몇 번까지 쓰실 생각인지 공주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으셨소. 내가 한낱 역사학과 음악이론을 공부하는 학자 한 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별로 신경 쓰시지 않는 듯했소이다. 그러한 과업은 셀레스티아 공주님 산하의 왕립 오케스트라 지휘자를 불러다가 맡기셔도 되지 않았겠소? 메어차르트를 비롯한 훌륭한 작곡가들을 전국 각지에서 불러모아 착수하더라도 말이 새어나갈 걱정은 없었을 텐데 말이오. 그 대신 오직 나 하나만을 불러다가 공주님의 과업에 함께해 주시길 바라고 계시니, 캔틀롯 역사상 이 정도의 행운을 누린 자가 있기는 했을지도 잘 모르겠소. 페니, 이제 영원토록 루나 공주님의 광명을 우리 필멸자들이 누릴 수 있도록 음악 속에 이를 남기는 전무후무한 예술의 과업이 막 시작하려 하고 있소. 나는 거기 참여할 영광을 얻었소.

 

내가 그 말씀에 얼마나 들떴는지 루나 공주께서도 충분히 짐작하고 계셨던 모양이오. 나는 전보다 일찍 퇴궁했소. 얼마나 일찍인지는 모르겠으나, 지난 알현보다는 일찍 귀가한 것이 맞소. 다음 배알 일정에 관하여 "그대의 반려 페눔브라와 완전히 정착한 뒤에 보자꾸나." 라는 한 마디 말씀만 남기셨는데, 공주께서 그대의 이름을 알고 계셨소. 내게 영광을 허락하고 계시다는 것만큼이나 명료하게 말이오. 평생 꿈꿔왔던 것들이 이제 현실로 다가오고 있음을, 이제 진실로 믿소. 오랫동안 작곡 작업에 참여할 것을 명확히 아는 명료성으로 내일 그대가 올 것을 알고, 오늘 있던 일들을 하나하나 적어 내려가고자 하는 들끓는 열망으로 그대를 기다리고 있소. 얼굴을 맞대고 그대를 내 품에 안아, 울며 웃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느낄 시간을 간절히 기다리며, 이만 줄이오.

 

만열滿悅과 열광을 담아,

 

앨러배스터 코멧후프

 


 

조화력 6233년 4월 25일

 

깜짝 선물을 준비했다고 전 일지에 써두었었지. 그대의 얼굴과 반짝이는 금빛 솜털, 진주처럼 반들거리는 푸른 두 눈을 보는 순간, 그런 건 모두 머릿속에서 지워져 버렸소. 그대가 다녀간 자리마다 자스민 잔향殘香이 남아 어른거리는데, 우리의 새 보금자리에서는 더욱 그랬소. 그대가 남긴 자스민 향기가 집안 곳곳에 스며서, 그제야 이 집이 진실로 우리의 집이 맞구나 싶었다오.

 

그대를 이끌고 발코니로 나가려 하니 그대가 얼마나 귀엽게 어리둥절해하던지, 아직도 잊히지 않는구려. 그대는 내 말대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소. 영원히 나아갈 것만 같은 한 걸음, 한 걸음씩마다 그대의 웃음이 감돌았소. 발코니를 쭉 가로지를 때까지 그러고 있었는지, 그대를 난간까지 데려갔을 때까지 그랬는지 잘 모르겠소. 밤 사이 크레센트 샤인처럼 날개가 자랄 일은 없을 듯하구려.

 

비로소 그대에게 눈을 떠도 좋다고 했을 때 그대의 얼굴은, 그 순간까지 잠깐씩 나고들던 꿈 속의 그것과 똑 닮아 있었소. 기쁨에 헉, 하고 숨을 들이마시기만 할 줄 알았지, 거기서 울음까지 터뜨려 버릴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오. 뺨 위로 흐르는 눈물을 내 뺨으로 문질러 닦은 것은 용서해주기 바라오. 그대의 젖은 뺨에 내 뺨을 마주치는 걸 좋아하니.

 

설마 도심지를 가로질러 가야 나오는 대학의 온실 대신 그대만의 온실을 갖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오. 위니페그가 캔틀롯 곳곳에 싹을 틔우고 있다고 전에 이야기했었는데, 그것은 우리 집에도 해당되는 말이었소. 우리 집은 심경 지구에서 유일하게, 발코니 위로 한낮의 태양빛이 쏟아져 내리는 집이기 때문이오. 이 집을 고른 것은 그 때문이었소. 그러니 내가 얼마나 집을 비우더라도, 언제든 원하는 대로 식물을 가꾸며 식물학 연구에 매진할 수 있을 거요. 나는 화훼에 대해서는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그대를 미소짓게 하는 법은 알고 있소. 어젯밤 그대를 맞이하며 '깜짝 선물'을 보여 주었을 때, 그대는 가장 환한 웃음을 지었다오. 그대가 내 인생의 곳곳을 기쁨으로 채워 주었듯 내 선물이 그대의 삶을 행복으로 채워 주길 바랄 뿐이외다.

 

다시 그대와 함께 살아갈 수 있음은 감히 측량할 수 없는 행복이오. 그대의 체취와 눈빛, 웃음소리를 가까이 할 수 있지 않소. 이런 얘기는 벌써 수도 없이 썼었는데, 한 줄을 쓸 때마다 머리가 더 산란해지는 기분이었소. 이제 그대를 곁에 두고 있으니 캔틀롯에 내가 뭘 하러 왔는지도 거의 잊어버릴 지경이오. 그대가 첫 배알이 어떠했는지 묻지 않아서, 나이트브링어를 내 두 눈으로 보았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소. 그대가 이 일지를 찬찬히 읽어보도록 내버려 둘 수도 있겠지만, 그럴 거라면 굳이 같이 있을 필요가 없지 않겠소. 내가 적은 것들은 루나 공주님의 유산을 가능한 많이 남겨두기 위함이지만, 우리가 함께할 시간을 남겨두기 위함이기도 하오. 달의 여신께 봉사할 수 있는 영광을 입더라도,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다면 그 광명 또한 아무것도 아닌 게 될 것이니.

 

아직 풀어야 할 짐이 많이 있었지. 이왕이면 밤중에 정리하는 것이 내 사랑하는 반려와 함께 있을 시간을 늘려 줄 것이니 지금 하자고 얘기해 보려 가야겠구려. 몇 달이든 몇 년이든, 언제고 그대가 내 일지를 읽어보게 될 날이 오면 내가 성공한 것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을 게요. 성공한 거라고, 그대가 말해주리라 믿소.

 

자스민 향기. 이 얼마나 황홀한 향기인지.

 

앨러배스터 코멧후프

 


 

조화력 6233년 4월 30일

 

오늘부터 그대와 떨어져 살아야 한다니 가슴이 얼마나 무거운지 모르오. 아파트를 정리하고, 이웃 사람들과 안면을 트며 거의 한 주가 지나갔으니 이제 루나 공주님께 돌아가 그분께서 허락하신 영광된 과업의 한 자리에 끼어야 온당할 것이오. 그나마 내가 없는 동안 페눔브라 그대가 아주 혼자는 아닐 것이라는 것이 다행이구려. 온실에 식물을 채워야 할 것이고, 캔틀롯에는 그대가 가 보지 못한 잘 가꿔진 정원과 중정中庭, 상업지구와 카페가 아주 많으니 말이오. 어디 그뿐이겠소, 몸이 떨어져 있더라도 내 그대를 생각함은 영겁을 괸들 못 다할 사랑과 함께 있다오. 그대를 생각하는 마음이 내가 없는 동안에도 즐겁게 지낼 수 있도록 해두는 것으로 전해지기를 바라오. 십중팔구는 시장 구경일 거라고 생각하고 싶은 욕망의 소리가 가슴팍 깊은 곳에서 올라오지만 말이외다. 

 

심경근위대의 몸에 업혀 루나 공주님의 처소로 가는 길은 한순간이었소. 비행 속도가 아무리 빠르든 공주님의 처소에 발을 들이는 것에 비하면 한 점 티끌에 불과할 터이나, 이들과 함께한 비행은 영 익숙해지지 않는구려. 공주님의 처소에 도착한 것은 대낮이었소. 다다르고 나서 보니, 공주께서는 그때껏 뵈었던 것보다도 활기차셨다오. 지난 두 번의 알현 때 내비치셨던 고요함과 엄숙한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소. 공주께서 스프링이 튀듯 가벼운 걸음으로 총총거리며 다니시는 모습은, 흡사 몸만 큰 아이처럼 보였소. 듣기로 왕립도서관의 장서 중 음악이론에 관한 것들만 골라 그 중 절반을 처소에 가져다 놓으셨다고 하더구려. 공주님 앞에 무릎 꿇으러 가는 길에도 책 무더기를 몇 개나 넘어가야 했다오.

 

공주께서 내리신 옥음은 더러는 짧고, 무뚝뚝하기도 했소. 나는 그 때 비로소 공주께서 내리신 시험을 무사히 통과했음을, 이제 그때껏 내보이셨던 겉치레가 공주님의 머릿속에 떠오른 악상을 구체화하고 오선지에 옮겨 적기 위한 연구와 시행착오의 시간에 자리를 넘겨줄 것임을 알았소.

 

일을 시작하기는 할 것이지만, 작곡 과정을 어떻게 가져가실 것인지 전혀 짐작이 되지 않았소. 악상을 가진 사람은 루나 공주님이시지 내가 아니니 말이오. 그래 작곡 보조 역할을 맡기실 모양이다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았소. 몇 분이 몇 시간으로 이행하는 동안 공주께서 적어 내려주신 글은 글이라기보다는 혼돈과 광란이 뒤섞인 무언가에 더 가까웠다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명확했소. 참을성을 기르는 것 말이오. 루나 공주님의 머릿속에 떠오른 악상은 마음대로 뒤엉키고 꼬인 실뭉치와 같았으므로, 공주께서 이를 질박하고 거칠게나마 풀어내신 것을 정밀하게 다듬고 손질해 장대한 태피스트리를 짜낼 사람이 필요하셨던 게요. 나 같은 사람이 말이오.

 

어둠 강림의 시대가 열리기 이전에도 그러했지만, 공주님께서 칩거를 시작하신 지난 구 년 동안 공주님을 온갖 모욕적인 언사로 깎아내리는 말들을 페니 그대도 여러 차례 들어 보았을 게요. 생각하는 것만으로 독신瀆神의 죄를 범하는 듯한 기분이 드는 말들을 여기 적으려니 몸이 떨리는구려. 루나 공주님을 일컬어 "먹통이Shadow Brained"라고 하지 않소. 심지어 "월광공주月狂公主(The Looney Princess)"라고까지 하더군. 위니페그에서는 세인들이 루나 공주님의 정신과 마음 모두 우리 별 사람의 것은 아니라면서 "우주 미세먼지의 수호자Keeper of Cosmic Dust", "달의 여자Mare in the Moon"라며 저희끼리 수군대며 낄낄거렸소. 공주님을 이따위 멸칭으로 불러대는 것 자체가 내게는 엄청난 모욕이오. 사로스 혈통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일차원적 이야기가 아니오. 국민 대다수가 공주님이 어떤 분인지는커녕 광인을 연기하는 겉모습과 십 년에 걸친 칩거 뒤에 숨은 체계적 설계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지.

 

한 장소에 같이 있는 것으로 모자라 가까이에서 용안을 모시다 보면, 루나 공주님은 단순히 밤의 여신으로만 정의되는 존재가 아니시라는 것을 알게 되오. 그분은 거울과도 같소. 어둠에 속했으면서 빛이 되기를 바라는 고독한 자들을 비추는 거울이시오. 만물의 이치로 따져보자면 결국 모든 사람은 공주님처럼 고독한 존재요. 영겁의 밤에 드리운 짙은 어둠에서 이치를 끌어내 자아내는 일이야말로 미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오. 수천 번의 수천 년을 거듭한 세월에 걸쳐 루나 공주께서는 세상을 위해 기꺼이 그 고단한 일을 해 오셨지. 그리고 이제 가장 깊은 우주 속 심연에서 한 곡의 노래를 찾아내는 최후의 임무가 경각에 달했소.

 

지금 작업하는 곡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별로 알고 싶은 마음도 없소. 공주님의 신성한 계획에 드리운 어둠을 구마해 내쫓는 정도에 그친다 해도 기꺼이 모든 것을 바칠 것이오. 공주께서는 어둠 속에서 독야청청 빛나는 밤의 여신이시니. 이를테면, '달의 여자'에게 무릎 꿇어 복종하는 자들은 그 복종의 의미를 따져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오. 루나 공주님이야말로 그 의미요, 목적이니 말이외다. 여신께서 지상을 거니시며 이 세상을 사랑하시니, 우리를 이끄시어 새로운 미의 시대로 인도하실 것이오.

 

미의 시대가 열리기까지는 아직 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소. 오후 반나절 내내 작업에 매달렸는데 이제 겨우 음표 몇 개밖에 찍지 못했으니 말이오. 공주께서 달을 띄우시고 계시오. 나는 왕궁 귀빈실에서 잠시 쉬고 있소. 오늘 작업한 것들을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인데, 그대밖에 머리에 떠오르지 않으니 지난한 일이오.

 

앨러배스터 코멧후프

 


 

조화력 6233년 5월 1일

 

사랑하는 페니, 우리가 해냈소.

 

아주 짧은 곡이기는 하나, 조화로우면서도 또 뒤엉키고 부딪치는 소리라오. 이 곡의 도입부는 현악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라져 가는 소리로 연주하는 것이어서 처음에는 공주님께서 적어주신 악보대로 그냥 시험삼아 연주해 보시는 줄 알았지 뭐요.

 

얼마 지나지 않아 곡이 완성되었소. 아름다움이 극에 달하면 사람이 절로 홀린다는 말이 이해가 되더구려. 공주님 침소에 있던 여러 악기 중 하프 하나를 연주해도 좋다는 허가를 얻은 바, 곡의 절반을 하프로 퉁긴 것만으로 그 아름다움에 도취되었소. 매일 밤 달빛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비추이시듯, 노래로 세상을 다시 아름답게 가꾸실 수 있음을 보여 주신 것이오. 그 어느 때보다도 공주님을 찬미하고 싶었소.

 

절반쯤을 퉁기고 나자 공주께서 연주해 보기로 하셨소. 그 전에, 침소 곳곳에 흑수정 여러 개를 둘러 놓으시더군. 디스코드와 맞섰던 고대의 전쟁에서 선조들이 방어물을 구축하실 때 사용하셨던 그 조화석Harmonic Rock의 파편, 음석이었소. 공주께서 쓰시기로 한 악기는 다른 무엇도 아닌 나이트브링어였소. 설마 내 평생에 저 성유물을 직접 보는 것도 모자라 그 소리를 들을 행운이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오. 현이 한 번 퉁겨질 때마다 귓속에 땅덩이가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듯 먹먹했소. 그것은 생명 그 자체의 소리였소.

 

바로 그 찰나에 곡이 끝났소. 나는 그 때 평생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경지를 보고 왔소. 굳이 옮긴다면, 황홀경 그 자체였다고 할 것이오. 하프트롯Halftrot 박사가 물질변환 마법을 연구하다가 위니페그 대학 이과대 건물을 홀랑 태워먹은 사건을 아직 기억할 거요. 그것도 충분히 충격적이고 엄청난 사건이었지만, 여기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오.

 

장벽이 사방에서 나를 둘러싸고 조여 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소. 그와 동시에 침소 곳곳에서 아주 작은 불꽃이 반짝거리며 일어나 터져나왔소. 음석에 불이 붙은 듯 섬광이 명멸하는 가운데, 이러다 죽는 건 아니겠지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소. 그도 그럴 것이, 사로스인은 광민감성이 높아 그 정도 빛을 맞으면 몸이 타 버리는 게 당연하기 때문이오. 당장이라도 몸을 움직여 달비단 망토를 집어 뒤집어쓰고 싶었는데, 몸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소. 내 평생 그런 불안감으로 얼어 버린 건 처음이오. 어느 순간, 불현듯 따뜻한 어둠이 다시 나를 감쌌소.

 

시야에서 빛이 사라진 후에야 공주님 안전이었음이 머리에 떠올랐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공주께서 이미 내 곁에 자리하여 나를 다독이고 계시지 뭐요. 아이를 안은 어머니처럼 나를 감싸주시고 계셨소. 그 신성한 존재만으로 나를 침식한 불경한 마력이 구마되어 물러가는 것이 느껴졌다오. 당장 그 끔찍한 느낌이 사라진 데만 정신이 팔려, 공주께서 직접 몸을 낮추어 나를 감싸주신 것이 도저히 받아들여지지가 않더구려. 목소리가 나오기는 하는 건지조차 몰랐지만, 감사의 말씀을 올렸소.

 

공주님께서 그만두라고 하셔서 말을 멈추었소. 공주께서 말씀하셨소. 어떤 식으로든 마력이 깃든 것임을 짐작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말이오. 덧붙여, 앞으로 옮겨 나가야 할 곡들 모두 그러하리라고 말씀하셨소. 어떻게 곡에 마력이 깃들 수 있는지 여쭙자, 당초부터 용처가 있는 곡이므로 그렇다고 하시더구려. 공주께서는 곡을 악보로 남겨두는 것은 세상의 안녕을 위해서라고 말씀하셨소. 앞으로도 이런 식의 부작용이 있을 터이나, 각 곡들이 이 땅의 산 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꼭 아셔야겠다고 말이오.

 

그제서야 굳이 나를 소환하신 이유가 슬슬 이해가 되더구려. 나는 전에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소. 캔틀롯에 산재한 극장에서 전문 음악인을 아무나 뽑아 데려오셨다면 첫 번째 곡이 촉발한 부작용을 전부 받아내기는 어려웠을 터요. 이 작업을 따라올 만한 사람도 많지는 않았을 것이고 말이오. 내 역할은 곡에 얽힌 비밀을 풀어내기 위한 보조역 그 이상이었소. 거칠게 표현하면, 실험 대상이기도 했다는 것이오.

 

그러하므로, 이제 그대도 공주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짐작이 갈 게요. 앞으로도 이런 일이 계속 있을 것이니, 정 견디지 못하겠다면 이제 그만두어도 된다고 말씀하셨소. 그 권능만큼이나 고귀하신 성정性情이 아니오. 공주님께도 그렇게 말씀드렸소. 덧붙여, 곡을 완성할 때까지 내 모든 것을 바쳐 공주님을 모시는 서원을 이미 세우고 왔음을 고했소. 공주님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전신전령全身全靈을 다할 것이라 말이오.

 

뜻이 그러하다니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공주님의 용안에, 처음으로 미소가 떠올랐소. 나는 그제야 이 작업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전달받을 수 있었소. 공주께서는 당신이 옮기고 계신 곡을 '궁창의 야상곡'이라 부르고 있으며, 그 첫 번째 곡은 '그림자 전주곡'으로 하기로 했다고 말씀하셨소.

 

모든 곡을 다 옮기고 나면 어떻게 되는지는 잘 모르겠소. 다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하오. 이제야 표지에 적을 이름이 생겼소.

 

앨러배스터 코멧후프

 


 

조화력 6233년 5월 1일

 

'궁창의 야상곡', 그 두 번째 곡을 옮겨냈소. '그림자 전주곡'에 비하면 훨씬 활기찬 곡이오. 박자가 대단히 빠른 곡이어서, 합주 시에 타악기를 많이 써야 할 것 같다고 말씀드리니 공주님께서도 동의하셨소. 일을 좀 많이 서두르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이는 공주님께서 바라시는 바요. 가능한 빨리 모든 곡을 악보에 옮겨 적는 작업이 끝나기를 바라시는 듯하오. 이리 급히 일을 추진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적지 않으리다. 그렇더라도 진척 속도가 갈수록 빨라지는 데는 합당한 이유가 있소. 한 사람의 열의란 주변에까지 영향을 주는 것이어서, 보조라도 맞추려면 내 모든 힘을 쏟아부어야 한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라오.

 

이번 곡은 격정 그 자체를 그대로 곡에 옮겨놓은 듯했소. 이번에는 내가 이름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루나 공주께서 곧장 '일몰 볼레로'로 칭해 버리시지 뭐요. 그렇더라도 내가 그 이상 가는 이름을 지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오. 태양이 저물어 서쪽 하늘 너머로 넘어가려 할 때, 아직 못 한 게 수두룩하다며 절로 급해지는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지 않소.

 

루나 공주께서 나이트브링어를 가지고 일몰 볼레로를 연주하자 가슴이 갈수록 빨리 뛰지 뭐요. 내가 얼마나 내향적이고, 운동을 별로 안 좋아하는지는 페니 그대도 잘 알고 있을 터인데, 나이트브링어가 연주하는 볼레로를 들으니 공중제비를 넘으며 사방을 마구 뛰어다니고 싶은 충동이 느껴졌소. 나름대로 지체 있는 학자로서의 내가 아니라, 그냥 어른인 나로서도 품기 민망한 욕구였다오. 온 몸이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가득 차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실실 나지 뭐요. '일몰 볼레로'가 '궁창의 야상곡'이 그 장대한 내용을 완성할 때 우리 모두가 누릴 기쁨을 미리 예고하는 곡인지 아닌지 잘은 모르겠으나, 한 가지 확신이 드는 게 있소. 일을 시작한 이래 이보다도 더 흥분되는 적은 없었소이다.

 

앨러배스터 코멧후프

 


 

조화력 6233년 5월 4일

 

열두 시간 가까이 잠을 자지 못했소. 왜 그랬느냐고? '일몰 볼레로'의 리듬이 아직도 내 신명을 타고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오. 한 자리에 오래 앉아 있는 것조차 어려울 지경이외다. 다음 곡을 작업하기 전 낮에 좀 자두어야 하기는 하는데, 어떡해야 잘 수 있을지 그대는 알겠소?

 

불가능할 것이오. 뜬눈으로 지새야 하겠지. 적어도 지금은 그럴 게요. 위대한 발견과 마법의 시간에 어찌 잠을 잘 수 있겠소. 그래도 정신을 집중해야 하니까, 뭐라도 하기는 해야 할 것이오.

 

몸에서 마법을 지워내기에 시간만큼 더 좋은 약이 있겠소? 페눔브라 그대도 세상에는 알아야 할 게 많음은 잘 알고 있을 게요. 나와 함께한 세월이 결코 짧지 않으니 말이오. 천지창조에 관한 이야기라면 그대도 듣다가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많이 들었을 터요. 그렇더라도 이 일지가 '궁창의 야상곡'에 대한 공식 기록이 될 수도 있으니 각 곡의 권능에 관하여 자세하게 적어두어야 할 것 같소. 그래야 최종 원고를 완성할 때 그럴듯한 설명을 적을 수 있을 테니 말이오.

 

세상은 노래 한 곡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세인들이 말하오. 평소에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나이트브링어로 야상곡을 연주하는 것을 들어 보니 이건 진실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소. 전승에 의하면 위대한 어머니께서는 우주를 떠돌아다니던 혼돈의 구름에서 비롯되셨다고 하오. 자신이 비롯된 혼돈의 구름이 우주의 평온을 해치는 옥의 티라 생각하시고, 본디 비롯되기를 종잡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졌다면 마력선을 다시 자아내어 명확한 원리와 질서를 비추게 해야 하리라 결심하셨소. 그리하여 위대한 어머니께서는 본인 스스로를 혼돈의 구름에 새기셨으니, 이는 위대한 어머니께서 부르신 한 곡의 노래로 기인함이오. 위대한 어머니의 신성한 목소리에 담긴 힘이 우주에 조화라는 개념을 만든 게요.

 

그도 그러할 것이, 음악이야말로 조화의 극치에 닿아 있지 않소? 소음이란 고정된 공간 속에 단순히 울려 퍼지기만 하는 파열음의 집합에 불과한 것이오.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질서를 갖추어 소리를 일으킬 때에만 비로소 화음으로 비롯되는 것이고, 그러함으로 천둥의 폭음도 낭랑한 종소리로 변할 수 있소. 그리하여 우리는 음악으로 빚어지고 음악에서 힘을 얻는 것이오. 산 자들의 목에서 나오는 노래는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모든 것을 향한 찬가이며, 이를 통해 생명의 탄생을 그려낼 수 있고 기록할 수 있소. 여신의 가슴에서 나오는 노래는 세상의 근본 이치에 편입되는 것이오. 대지가 단단하다지만, 그것은 대지를 이루는 화음이 단단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 것이외다.

 

위대한 어머니께서는 한 가락 노래로 혼돈에서 세상을 빚어내셨지만, 그것만으로 이퀘스트리아가 영원불멸, 백고불마百古不磨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오. 노래는 노래될 때에만 그 힘을 갖는 것인데, 어느 순간 그 노래가 끊겨 버리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되겠소?

 

그리하여 위대한 어머니께서는 궁창Firmaments을 창조하셨소. 이퀘스트리아와 그 위에 살아가는 생명 위를 덮어, 우주에 도사린 혼돈과 냉기를 막아내기 위한 방패로서 말이오. 그러나 궁창은 그 자체만으로는 기능할 수 없었소. 영원토록 위대한 어머니의 성가가 끊이지 않게 할 불사의 관리인, 혼돈의 감시자가 필요했소.

 

그리하여 위대한 어머니께서는 가장 위대한 희생을 치루셨느니, 스스로의 성가를 두 갈래로 쪼개 버리셨다오. 그와 동시에 위대한 어머니께서도 두 개의 존재로 분열되셨소. 그리하여 셀레스티아 공주님과 루나 공주님이 탄생하신 것이오. 셀레스티아 공주께서는 대지의 궁창을 맡아보시며 사계절로 대표되는 생명의 순환과 태양의 운행을 주관하게 되셨소. 루나 공주님께서 맡으신 것은 창공의 궁창과, 외계의 원소들로부터 이퀘스트리아를 수호하는 임무였고 말이오.

 

그 때 세상이 하늘과 땅으로 나뉘었고, 위대한 어머니와 그 분의 두 딸께서 부르시는 성가에 화음을 더하기 위해 우리 산 자들이 탄생하였소. 위대한 어머니께서는 이퀘스트리아의 존속에 필요한 모든 일을 마치신 뒤 우리를 떠나 별들로 돌아가셨지만, 두 개의 궁창은 두 명의 수호자의 감시 아래 위대한 어머니께서 남기신 조화의 노래를 방어하며 온전히 기능하고 있소. 

 

위대한 어머니께서 우리를 떠나고 난 뒤, 셀레스티아 공주님과 루나 공주님께서는 등을 맞대고 서서 이퀘스트리아 전역을 굽어보시니, 두 분을 창조하시고 두 분의 권능이 된 전능한 노래 덕분이었소. 하늘의 성가를 지키는 봉인이 흐트러진 일 또한 거의 없었소. 그렇더라도 조화의 노래는 언제라도 더 작은 부분들로 분열될 수 있다오. 일단 분열되고 난 노래를 다시 하나로 합치는 일은 위대한 어머니께서 다시 돌아오시어 세상에 더 많은 음악을 내려주시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이외다.

 

혼돈에서 태어난 괴물들이 무리를 이루어 이퀘스트리아의 대지를 유린했을 때, 두 알리콘 자매께서는 노래의 약간을 떼어내 "타이탄의 발라드"를 자아내셨소. 그리하여 새로이 탄생한 성가에서 타르타로스가 비롯되었으니, 감히 이퀘스트리아를 침범하려 한 사나운 흉물들을 영원히 가두는 감옥이 되었다오. 디스코드가 차원 사이를 헤집고 나타나 두 궁창을 산산이 찢어놓으려 했을 때도, 두 분 자매께서 다시 위대한 어머니의 유산 약간을 떼어 "조화의 원소"를 창조하셨소. 물질화된 노래는 펜던트의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구슬 하나마다 디스코드를 석화시키기 위한 주요 원소의 힘이 담겨 있었다오.

 

위대한 어머니께서 남기신 노래가 점차 미약하고 희미한 갈래로 나뉘어 갔으니, 창조의 원리에도 마땅히 그 영향이 갈 수밖에 없었소. 그런 일은 미리 막을 수도 있었는데 말이오. 영원의 노래는 이미 수도 없이 갈라지고 쪼개져 왔소. 심지어 생명의 근원에 관한 부분에까지 말이오. 이제 온 이퀘스트리아가 위대한 어머니께서 세상을 빚어내기 이전의 혼돈으로 무너지고 붕괴되어 환원될 수도 있는 위기에 내몰렸소.

 

그리하여 두 분 군왕의 자매들께서는 남은 노래를 악기의 형상으로 바꾸어 보존하기로 결심하신 것이오. 공주님들께서 빛과 어둠을 갈라놓는 푸른 서슬이요 창조의 권능을 영원토록 보존하기 위한 그릇을 만드셨으니, 훗날 이 그릇을 나이트브링어라 부르게 되오. 단순히 꿈꾸는 것만으로 가슴 속에 열망이 피어나는 신물을 직접 목도했으니 이 얼마나 큰 영광인지.

 

간단히 말해두자면, 나이트브링어는 현악기로 평범한 크기라오. 리라를 닮았는데 그보다는 조금 더 크고, 왕실의 물건인 만큼 고상하고 우아한 세공이 되어 있을 뿐 나머지는 같소. 다만 다른 악기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이 신성하고 무결한 차이가 있을 따름이오. 현이 한 번 울릴 때마다 온 몸이 사방으로 늘어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듯한 느낌이 드는 점도 있군. 나이트브링어와 한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낭떠러지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드오. 위대한 어머니께서 남겨두신 최초의 노래에 비하면 많이 약해졌지만, 그 권능과 존재감은 여전히 나 같은 미물을 압도할 정도요.

 

그 나이트브링어를 '궁창의 야상곡'을 현실로 끌어들이는 데 쓰시다니, 앞으로 어찌될까 두렵기도 하지만 어떻게 될지 궁금하기도 하오. 루나 공주께서 곡에 관하여 다시 설명하실 일은 없을 것 같구려. 그러하신다면 셀레스티아 공주께서도 이번 일에 동참하실 테니 말이오. 지금 나이트브링어는 루나 공주님의 머릿속에 있는 것을 구체화하는 수단으로만 쓰이고 있소. 가만히 생각해 보니, 가슴 속에서 희열이 들끓는구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이제 새로운 노래가 탄생할 수 있을 것 같소? 창공의 궁창에 매인 감시자에게서도 노래가 비롯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시오? 지난 구 년 반 동안 루나 공주님의 권능이 더욱 강력해지기라도 한 것일런지?

 

시간이 말해줄 것이오. 필멸의 굴레에 매인 몸이니, 평생이 다하기 전에 그 답을 얻지 못할까 두렵소. 그러므로 나 그대에게 모두 털어놓는 바요. 언제고 모든 사실이 공표되고 나서 우리 부부 또한 세인들에게 사실을 말해 줄 수 있도록 말이오. 언제고 이퀘스트리아에 야상곡이 울려 퍼지는 날, 우리가 나누었던 말들이 현실로 다가오는 것을 만인이 보게 될 것이며 우리는 어둠에서 비롯되었으나 그 또한 천상의 성가에 한 목소리를 보태 궁창에 새로운 힘과 조화를 불어넣을 수 있음을 보여 주게 될 것이외다.

 

앨러배스터 코멧후프

 


 

조화력 6233년 5월 6일

 

루나 공주께서는 새로운 곡을 '파도의 행진'이라 부르기로 하셨소. 내가 지금껏 즐겨 듣던 모든 곡들과, 옮겨 쓰던 곡을 통틀어 이보다 이상한 곡은 없었다오. 직접 듣거나 악보를 보게 되면 '일몰 볼레로'와 여러모로 비슷한 느낌을 받게 되는데, 그도 그럴 것이 볼레로를 느린 박자로 바꾸어 거꾸로 연주한 것이기 때문이오. 이 기괴한 곡을 직접 들어보면 '그림자 전주곡'처럼 불쾌하고 불편한 기분이 들 것 같지만 그렇지 않소. 내가 느낀 것은 경이와 경탄이었다오. 장대히 펼쳐진 신비의 밤하늘로 향하는 '궁창의 야상곡'이란 길을 따라 여행을 떠나는 것 같은 기분이었소.

 

나는 계속 루나 공주님의 용안을 올려다보고 있었소. 연구를 진척해 가다 보니 곡의 진행뿐만 아니라 공주님의 연주도 관찰해야겠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오. 공주님은 일말의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으셨소. 언젠가 보여주셨던 미소는 흔적도 없었소. 공주께서 이 신성하고 음악적인 의무를 다하기 위해 연기하고 계실 저 차가운 무표정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신경을 많이 쓰고 계실지, 문득 궁금해지더구려. 셀레스티아 공주님으로부터의 전언은 없었소. 어쩌면 그분조차도 이 일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을지도 모를 일이오. 그렇다면 야상곡을 만들어 내는 데 나이트브링어가 사용되고 있는 것 또한 모르시고 계시겠지.

 

쓸데없는 생각을 너무 깊이 하는 것 같아 순간 나 자신에게 환멸을 느꼈소. 두 분 공주께서 두 궁창을 단단히 결속하여 세상을 지키는 신성한 임무를 맡아 함께 살아오신 지 상상도 못 할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말이오. 이 모든 것이 실은 루나 공주께서 새로운 '성가'를 만들어 내는 한 과정이 아닐까 넘겨짚기에는 아직 너무 이른 감이 있소. 셀레스티아 공주께서도 스스로 몇 가지 곡을 지어 왕립 오케스트라로 하여금 연주하게 하신 바 있으니, 간단히 여흥을 즐길 뿐인데 셀레스티아께서 루나 공주님께 굳이 전언을 하시지는 않았지 않소이까?

 

그렇더라도 루나 공주님의 침소에서 나이트브링어를 퉁기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몸 구석구석이 불타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사실이오. 흡사 내면에서부터 불이 번져나와 온 몸을 태우는 것 같소. 진실로 감탄스럽고 마법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소이다. 거기 내가 일조할 수 있음이 얼마나 기쁜지 모르오. 공주님의 용안에도 내가 느끼는 바와 같은 바가 섞여 있기를 바랄 뿐이외다. 공주님께서 거느리신 엄숙한 기품이야 영영 바뀌지 않을 것이지만, 이 곡이 공주님께 어떤 의미인지는 눈에 쉬이 들어오기 때문이오.

 

아, 이번 연구는 여기까지인 모양이오. 귀가를 명하셨소. 페니 그대를 다시 보러 갈 수 있다니 좋구려. 일단 집에 있는 동안에는 음악 생각은 일절 하지 않으려 하오. 그대 두 다리에 안겨 자스민 향기를 맡으며 그대의 목소리, 그대의 품에 침잠하고만 싶구려.

사내의 상사병을 달래는 통에 그대의 온실을 가꿀 시간을 좀 손해 볼지도 모르겠구려. 그런 일은 없을 것이오. 그대가 나를 위해 참아 주었듯 나 또한 그대를 위해 참을 것이니.

 

앨러배스터 코멧후프

 


 

조화력 6233년 5월 8일

 

캔틀롯에서 새 인생을 시작한 이래 오늘만큼 기쁜 날이 없었소. 하루 종일 그대와 함께 지낼 수 있다니 말이오. 한 주 내내 연구에 매달려 가락을 오선지에 옮겨 적은 끝에, 마침내 그대 곁에 있게 되었으니 이 기쁨은 그대가 상상하기 어려울 거요. 다녀온 곳들과 했던 것들 모두, 그대가 기뻐하는 것이기만 한 것이라면 내게는 아무래도 상관 없는 것들이었소. 마지막으로 캔틀롯 곳곳의 공원을 돌아다녀 보기로 했을 때는 그보다 기쁠 수가 없었다오.

 

멸종 위기에 내몰린 식물 종들이 두 분 공주님의 보호 아래 캔틀롯에서 번성하는 모습을 직접 보았으니, 당연히 기뻤을 게요. 공원을 돌아다닐 거라면 낮 동안에 돌아보자고 얘기한 것이 그것 때문이오. 달비단 망토를 온몸에 둘러쓰고 다니는 것이 불편하기는 하지만, 햇빛에 반짝이는 수목 한가운데서 어린 아이처럼 환히 웃는 그대의 모습을 보는 대가라고 치면 전혀 어렵지 않았소. 루나 공주님께서 어떤 카레를 즐기시는지 그대가 물었을 때는 절로 웃음이 나왔었지. 바로 딴 재료로 공주께 대접할 카레를 만들어 주겠다니. 안타까운 일이지만, 나와 밤의 공주 사이의 교집합은 야상곡 하나뿐이라오.

 

번화가에서 식사를 하자고 해 주어 기뻤소. 나를 그림자 속에 숨겨야 할 무엇인가로 여기지 않아 주었으면 했으니. 어스 포니로서 사로스인과 결혼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 캔틀롯 시민들에게 당당히 우리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주어서 고맙소.

 

위니페그 대학에서 처음 만난 이래의 몇 년이 떠오르는군. 대학 전체에서 유니콘은 나 하나뿐이었소. 낮에는 미라라도 된 양 발을 질질 끌며 복도를 돌아다니곤 했었지. 밤이 되면 달빛을 받아 송곳니가 길게 자라나지는 않을지, 그 송곳니로 자기들을 덮쳐 피를 빨지는 않을지 무섭다는 이유로 다들 나를 피해다녔소.

 

그대도 그 꼴을 다 보았을 거요. 무엇인지는 몰라도 내 어딘가가 그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오. 처음에는 그대가 내 기벽과 괴짜스러움을 재미있어하는 게 아닌가 싶었소. 그렇더라도 사로스인 특유의 식사를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사람은 그대가 내 인생에서 처음이었다오. 어떻게 그대 목전에서 고기를 씹는 사람 앞에서 점심을 먹은 건지, 아직도 짐작이 가지 않소. 그때부터 그 어떤 걱정과 번뇌도 할 필요가 없어졌지만 말이오.

 

따뜻한 미소와 낭랑한 웃음소리, 아무도 보지 않을 때면 내 두 귀를 갖고 놀던 그대 모습에 반했소. 나 또한 그대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졌고, 백과사전 속 귀중한 정보에 버금가는 것들을 많이 알아냈다오. 그대는 식물학에 매료되어 있었소. 자연이 스스로 성장하고 스스로 살아가는 이치를 가르쳐 주었지. 삼라만상의 기저에 마법이 깔려 있음을 나 또한 그대에게 알려 주고 싶었소. 그리하여 우리가 나눈 말들은 한없이 현실적인 것들과 한없이 비현실적인 것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어 서로 어우러지는 이중창이 되었고, 별세계의 합창을 이루었으니. 그렇게 우리는 위니페그 대학의 왕자와 공주가 되었고, 만인이 우리를 우러러보며 진실한 사랑이 무엇인지 이야기했소. 위대한 어머니의 첫 번째 노래가 그랬던 것처럼,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이오.

 

그렇게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자 나도 내 분야에서 나름대로 권위자라는 소리를 듣는 수준이 되었소. 그 때도 그대는 내 곁에 있었지. 나는 밤에 속한 자였고, 그대는 기꺼이 나와 함께 어둠에 녹아들었소. 그대의 삶에서 낮을 버리고, 달빛에 젖어 눈을 뜨는 것이 습관이 되었소. 역사상 그 어떤 식물학자도 그런 희생을 한 바 없는데 말이오. 나는 늘 미안했고, 그 미안함을 조금이라도 더 벌충하고자 했지만 그대는 아무 말 없이 내게 입맞추기만 했소. 그대를 품에 단단히 끌어안는 것밖에 할 수 없었던 내 머리 위로는 늘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이 있었소.

 

내 소중한 사람, 나는 그대를 사랑하오. 온 세상의 보물을 모아다 그대에게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면, 이미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이 지척에 있음을 문득 떠올리게 되오. 캔틀롯에서 보낸 나날들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오. 이제야 그대가 나를 위해 희생한 것들을 돌려줄 기회를 얻지 않았소. 다른 이유로 캔틀롯에 이사 왔다면 얼마나 좋았을런지. 일 때문에 이사를 왔으니, 그대의 사랑스럽고 따스한 목소리를 떠나 마력으로 일렁이는 소리 속에 나 자신을 던져야 하는 현실이 너무나 어렵소.

 

언젠가는 본격적으로 가정을 꾸리게 되겠지. 아이를 갖게 된다면, 그 아이들이 창조의 궁창 사이 우리의 사랑을 새겨 넣을 노래가 될 것이오. 우리가 누구이며, 이 짧고 허망한 인생에서 어떻게 만나 함께 아름다운 삶을 일구었는지 말이오. 이보다 더 귀한 노래가 없을 것이며, 이름 없는 노래로 잊히지도 않을 것이라 믿소.

 

그 날이 오기 전까지는 우리의 일에만 집중합시다. 우리가 만난 그 날부터 사라졌던 두려움처럼, 우리 뒤에 남은 일들도 사라져 없어질 날을 기다리고 있소.

 

앨러배스터 코멧후프

 


 

조화력 6233년 5월 10일

 

별다른 이유는 없지만 일기를 적고 있소. 앞으로 또 한두 주 동안 루나 공주님의 처소에서 연구를 하게 될 것이오.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소. 그렇더라도 연구를 시작하기 전, 내가 본 것들을 여기 옮겨 적어 머리 속에서 지워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오.

 

캔틀롯에 도착한 이래 사로스인 인구가 급격히 늘어난 것 같은 기분이오. 페눔브라, 그대와 함께 대낮에 외출을 나갔을 때 느꼈다오. 달비단과 그림자 갑주로 온몸을 감싼 밤의 페가수스들이 길가에 여럿 서 있었소. 심경 지구에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말이오. 시선이 닿는 곳마다 피막 날개와 세로 동공을 한 형제, 자매들이 있었소. 더 이상한 것은, 내가 캔틀롯에 처음 당도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곳의 골목길을 낯설어하는 것 같았다는 거요. 저희들끼리 동아리를 이루어 상경한 사람들일까 싶은 생각이 들었소. 루나 공주께서 칩거를 깨고 밖으로 나오려 하시니, 머지않아 어둠 강림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리라는 말들이 돌았을지도 모르겠구려. 그렇지 않고서야 밤의 공주께서 기거하시는 도시에 이처럼 많은 밤의 종자들이 모여들 일이 없지 않소?

 

크레센트 샤인에게 물어 보았더니, 아무 답이 없었소. 확답이 될 만한 것도 없었다오. 머리가 꽉 차 있는 것 같더구려. 질질 끄는 걸음에선 어딘지 초조함이 묻어나고, 두 눈은 전보다도 두 배는 창백해져 있었소. 사로스인이 이렇게 되는 데는 이유가 있지. 아주 잘 아는 바요. 햇빛을 너무 많이 쬐면 그렇게 되오. 심경근위대 지휘관을 그리 과로하게 할 이유가 없지 않소? 지난 몇 주 동안 잠을 자기는 했는지도 모르겠구려.

 

아무 의미 없는 일에까지 행간을 읽겠다고 덤비는 것일지도. 사실, 꽤나 불편한 기분이라오. 그대와 다시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것 이상으로 불편하구려. 루나 공주님께서 거처하시는 궁전 회랑을 따라 걷는 동안에도 그림자가 나를 주시하기라도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소. 귀를 쫑긋거렸더니, 금속끼리 부딪치며 덜그럭대는 듯한 소리의 잔향이 들렸던 것 같기도 하오.

 

크레센트 샤인만 잠을 못 자는 건 아닐 게요. 나 또한 루나 공주님을 보조해야 하는 입장이니 말이오. 다음 야상곡이 기분 좋은 물건이면 좋겠구려.

 

앨러베스터 코멧후프

 


 

조화력 6233년 5월 11일

 

내 인생 다시 없을 공포를 느끼고 오는 길이오.

 

네 번째 연주곡, 차라리 루나 공주께서 툭 던지신 것과 같이 '비곡Elegy'이라 불러야 할 곡을 옮겨 쓸 때부터 조짐이 있었소. 공주께서 뜬금없이 야상곡은 총 10곡이 있다고 말씀하시길래 깜짝 놀랐지 뭐요. 처음부터 열 곡으로 계획하셨는지 무례를 무릅쓰고 여쭤 보았으나, 공주께서는 간단히 무시하셨소. 네 번째 연주곡의 제목을 말씀하시는 공주님의 용안은 그 말씀처럼 공허하고, 생기가 없었소. 네 번째 연주곡은 '어둠 소나타'로 부르기로 하셨다오.

 

다 옮겨 쓰기도 전에 그 제목을 말씀하시다니, 어찌된 조화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소. 곡을 다 옮겨 쓰고 나자 공주께서는 아무 거리낌 없이 나이트브링어로 '어둠 소나타'를 연주하셨다오. 그 때 이미 한 번 죽었거나, 적어도 내가 죽었구나 싶었던 것 같소.

 

페니 그대도 잘 알겠지만 사로스인들은 어둠과 밀접한 자들이오. 밤의 피를 이은 페가수스가 그 명백한 증거이지요. 사로스인은 반향정위 능력을 타고나는데, 이 능력으로 우리는 가장 어두운 밤조차 꿰뚫어볼 수 있소. 수천 년 전 루나 공주께서 사로스인들을 거둬들이시고 이 능력을 훈련시키시어 당신의 친위대로 삼기 전까지, 사로스인들은 이 능력으로 밤의 어둠에 숨어 식량을 구했다오.

 

나이트브링어로 어둠 소나타를 연주하자마자 칠흑보다도 더 검은 어둠이 몰려왔소. 내 어떤 감각으로도 그 어둠만은 뚫을 수 없었다오. 침소의 벽과 바닥 전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우주의 공허가 메운 것 같았소. 정말로, 그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았소. 소리마저도 들을 수 없었으니, 말 그대로 내가 죽었구나 싶어졌던 게요.

 

나는 자리에 쓰러져 공주님을 목놓아 부르며 버둥거렸소. 공주께서는 이전처럼, 자신의 아이를 안아 어르듯 나를 안아주셨소. 공포에 질린 나 자신과, 그런 나를 관조하는 다른 내가 있었는데, 나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빛이 돌아올 때까지, 아니 공주께서 빛이 돌아올 거라고 말씀해 주실 때까지 공주께 매달려 있었다오.

 

나는 그러했지만, 공주께서는 명경지수처럼 차분하셨소. 아득한 저편에 계시다고 해야 할까. 공주님의 목소리도 한 백만 마일 바깥에서 들리는 듯 흐릿했지만, 공주께서 말씀하시는 것들은 다 알아들을 수 있었소. 헌데, 괴이하고 이상한 말씀들을 하시더구려. 공주께서는 세상 사이의 세상에 관하여, 어둠 소나타가 일으킬 수 있는 어둠보다도 짙은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에 관하여 횡설수설하셨소. 나를 일깨우려고 하신 말씀이었을 것 같소? 그렇다고 하면,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는 것 같소이까? 아무래도 내게 말씀하신 것들은 공주님 혼자만의 것이었던 모양이오. 공주님 주변에 쇠사슬이 수도 없이 뻗쳐 있다느니 하는 괴이한 말씀을 하셨으니 말이외다. 뭔지는 몰라도 깜박 잠이 드시어 잠꼬대로 어떤 형태 없는 괴물을 보셨던 모양이오. 그러지 않으면 정신을 잃을 것 같으셨을지도 모를 일 아니겠소.

 

어둠 속에 침잠하기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나는 나 자신이 아니라 루나 공주께 공포를 느꼈소. 세인들이 입을 열 때마다 '달의 여자'를 운운하며 쏟아내던 온갖 비하와 모욕이 머릿속에 떠올랐는데, 그런 끔찍한 영역에까지 눈을 돌려 기억을 뒤적이는 나 자신이 너무나 가증했소이다. 공주님과 침소 벽면이 다시 눈에 보이기 시작할 무렵, 나는 셀레스티아 공주께서도 이 작업을 알고 계시냐고 여쭈었소. 루나 공주께서는 내가 애초부터 거기 없었던 것인 양 자리에서 일어나 저만치 가 버리셨소. 그리고는 나이트브링어를 받침 위에 돌려놓으시고 물러갈 것을 명하셨다오. 덧붙이시길, 앞으로 여섯 곡이 더 남았으니 나도 이만 돌아가 쉬도록 하라고 하셨소.

 

지금은 내  숙소로 주어진 방에 돌아와 앉아 있소. 지난밤에 밝혔던 초의 두 배 정도 되는 초를 구해다가 불을 붙여놓고 있다오. 창백한 솜털이 그을려 가고 있지만, 한데 모여 피어나는 촉광의 불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런 건 안중에도 없소. 빛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오. 항상 그랬었는데. 사람이란 관통될 수 없는 어둠 아래 내걸려 잔불만 일렁이는 도가니 근처를 굴러다니는 돌멩이에 지나지 않는 것 같구려. 내가 맞을 수 없는 햇빛 아래에 선 그대 모습을 생각하오. 그대의 두 눈을 들여다보는 모습을 생각해도, 어둠이 따라붙고 있소. 비록 한없이 연약하고 언제 꺼져 버릴지 모르는 세상일지라도, 이 세상은 우리가 살아갈 곳이오. 내 인생 처음으로 사라진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소. 믿을 수 없이 차가운 것이구려.

 

야상곡이 대체 다 뭐인 것 같소? 무슨 조화로 한없는 두려움과 즐거움이 한 데 뒤섞여 있을 수 있단 말이오? 나와 같은 한낱 미물이 뇌리에서 사라지질 않는 저 새로운 노래의 탄생을 과연 감당할 수 있기나 한 거요?

 

견뎌야 하오. 공주님 곁에 서 있어야 하고, 그대 옆에 서 있어야 하니.

 

앨러배스터 코멧후프

 


 

조화력 6233년 5월 12일

 

'별들의 왈츠'는 들으면 소름이 끼치지만 적어도 나름대로 시적인 아름다움이 있기는 하오. 나 역시 그 정도는 들을 만 하고, '어둠 소나타'보다는 진이 덜 빠지는 느낌이 있소.

 

루나 공주님과 함께 다섯 번째 비곡을 옮겨 적고 난 다음, 공주께서는 곧장 달을 띄우러 자리를 비우셨소. 나를 내보내시거나 하지는 않았다오. 그래 그렇게 공주님 침소에 홀로 남고 나니, 이 기회를 최대한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어둠의 여신께서 거처하시는 침소를 기웃거리고 돌아다니다니 이 얼마나 추악한 짓이냐고 경악할지도 모르겠구려. 지금 돌이켜보면, 나도 마찬가지로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지 못하겠소. 그렇더라도 그대 또한 나처럼 '어둠 소나타'가 끌고 온 부작용에 한 번 시달리고 나면, 이 세상 것이 아닌 게 너무도 분명한 수많은 곡이 탄생하는 현장에 있고 나면, 그대 나름대로 답을 얻고자 하는 거부할 수 없는 충동에 이끌리게 될 거요.

 

그간 공주님과 함께 비곡을 옮겨 적는 내내 본 바로는, 공주님의 침전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나 다름없었소. 이것이 핵심이었다오. 아마 그대도 그런 곳에 불멸하시는 알리콘께서 기거하신다는 걸 직접 보게 되면 정말 깜짝 놀랄 게요. 지금까지는 야상곡을 옮겨 적는 것에 감히 한 점 의심을 품어 본 적이 없었고, 자연히 이상한 점들도 무시하기 마련이었소. 허나 일단 마지막 실낱같은 빛줄기조차 박탈당했다가 다시 돌려받고 나니, 만물을 좀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되더구려. 이보다 정직하고 직설적으로 말할 수는 없을 거요. 루나 공주님의 침전은 그야말로 광인의 방이었소.

 

우선 온갖 문헌들이 그 어떤 계통도 없이 마구잡이로 널브러져 있다오. 활짝 열린 고서 몇 권의 창백한 페이지 위로 촉광이 넘실거렸고, 풀어헤친 두루마리와 두껍게 쌓인 양피지 뭉치가 한쪽 구석에 처박혀 먼지를 맞았소. 책의 절반 정도는 아무 내용이 없이 드문드문 몇 페이지만 쓰여 있다가 다시 비어 있었다오. 등골이 싸해지더구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여기 쌓인 문헌 대부분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희귀한 책들이 죄다 텅 빈 공책이나 다름없었다는 거요. 이거 뭔가 이상하다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았소. 여기 있는 문헌은 제본 양식부터 다른 책들과 비교된다오. 여기서는 우리나라 전역의 온갖 제본 양식을 다 볼 수 있소. 심지어 팀벅투*4나 드림 밸리 특유의 환경이 고스란히 나타나는 문헌도 있소이다. 제본 양식부터 분야까지 이처럼 다양한 문헌이 한 방에 모여들 이유가 무엇이겠소, 공주께서 가져오기를 명하셨으니 그런 거지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공주님 책상 위에 쌓여 있던 서한을 하나하나 들여다보았다오. 크레센트 샤인 휘하 심경근위대로 하여 이퀘스트리아에서도 가장 산간벽지에 있는 도서관을 골라 문헌을 수탐해 오라는 명령서가 몇 장 있었소. 그러고 보니, 희귀본 중에서도 희귀본일 책에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더구려.

 

직전까지도 이걸 눈치채지 못했다니 소름이 돋았소. 비곡을 받아 적는 일에 심취하여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이게 다 무슨 일인지 관조할 여유가 없었던 거요. 루나 공주께서 야상곡을 쓰시는 일이 과연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영감 때문일 것 같소? 아니면, 야상곡을 실체화하도록 부추기는 어떤 무언가가 뒤에 도사리고 있을 수도 있지 않소이까?

 

생각할 시간이 길지 않았소. 루나 공주께서 이제 막 달을 띄우고 돌아오셨소. 조금도 피로해 보이지 않으시니, 그만두실 것 같지는 않구려. 내게 따라오라고 몸짓하시더니, 곧장 여섯 번째 비곡 작업에 착수했소. 두 눈에 불길이 일렁이는 듯했소. 처음으로 그 눈빛에서 감정을 보았소. 이상하게도, 그것은 분노에 가까워 보였다오.

 

시간이 나면 좀 더 쓰리다.

 

앨러배스터 코멧후프

 


 

조화력 6233년 5월 15일

 

공주님과 함께 여섯 번째 비곡을 옮겨 쓴 지 벌써 사흘이 지났소. '어둠 소나타'나 '별들의 왈츠'와 달리, 이번에는 곡의 이름을 말씀해주지 않으셨소. 그렇지만 이전의 다섯 곡들보다도 더 중요한 곡 같은 기분이 드오. 곡을 완성한 이후 회랑에서 종종 듣게 되기 때문이오. 근위대원들이 흥얼대며 지나가기도 하고. 처음에는 화가 났소. 저치들이 신성한 작업을 엿들었다 싶었으니 말이오. 듣자하니 그런 건 아니었던 모양이외다. 바로 전날 옮겨 쓴 악보의 사본들이 곳곳에 굴러다니고 있으니.

 

이제는 하루의 시작과 끝에서도 그 곡을 듣게 되오. 여섯 번째 곡은 이름이 없는 것이지 형태가 없는 것은 아니었소. 이제 모든 심경근위대 병력이 여섯 번째 비곡을 꿰고 있소. 공주님 관할 구역 전용 사운드트랙이라도 되는 양 말이오. 개인적으로는 질릴 대로 질려서 그만 듣고 싶소이다만,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낼 강단은 없소. 솔직히 말하면, 이 곡을 흥얼대는 것 자체가 죄이기라도 한 듯 불안불안하다오. 루나 공주께서 어떤 목적으로 이걸 퍼뜨리신 건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벌써 공주님 관할 구역에는 중독성 있는 어떤 국가처럼 퍼져 있소. 국가, 어떤 국가냐고 묻는다면 뚜렷한 실마리는 없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홀에 죽치고 앉아 병력이 움직이는 소리를 들으며 공주께서 나를 불러들이시기를 기다리는 것 하나뿐이니.

 

뭔가 잘못된 기분이오. 내 일이 며칠 동안을 붙잡아 놓아야 할 일은 아니었을 텐데. 확정되기 전에 보내주시지 않는 이유를 도저히 모르겠단 말이오. 그대의 자스민 향기를 맡고 싶소. 그대의 목소리를 듣고 싶소. 어둠에 속하지 않은 노래를 좀 듣고 싶소. 너무나 추워 미쳐버릴 지경이오. 촛불을 좀 켜고 자면 나아질런지.

 

앨러배스터 코멧후프

 


 

조화력 6233년 5월 18일

 

오늘은 대단히 놀라운 광경을 목도했소. 마침내 루나 공주께서 호출하셨는데, 가 보니 공주님 홀로 계신 것이 아니더구려. 공주님 안전에 네 명이 더 있었소. 그것도 하나같이 평범한 사람들은 아니었다오.

 

둘은 바로 알아볼 수 있었소. 블루 밸리 대학의 플랫Flat 교수와 메어리스 라벨Marerice Ravel*5이었다오. 다른 둘은 내가 알지 못하는 이들이라 소개를 받았는데, 글쎄 메어차르트Marezart와 스트라토폴리스의 후프스톤 박사가 아니겠소. 내 앞에 이퀘스트리아 음악사를 새로 쓴 살아 있는 전설 넷이 모여 여느 평범한 금요일 오후 일과를 보내기라도 하듯 편안히 앉아 루나 공주님과 차를 마시고 있었다는 거요. 이들을 한 자리에서 본 것도 놀랄 일이기는 했지만, 내가 알기로 이 넷은 서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소. 그렇다고 왕궁에서 가까이 살고 있는 것 또한 아니었는데, 어떻게 이 넷이 한 자리에 모여 차를 마시고 있을 수 있단 말이오.

 

보아하니 내가 불려온 것은 루나 공주님과 이 넷 사이에 오간 대화가 거의 끝날 즈음이었던 것 같았소. 어떻게 한 자리에들 모여 계시냐고 묻자, 별 이상한 걸 다 묻는다는 듯 쳐다보더군. 더 얘기할 만한 것도 없는지 이 넷의 대화가 지리멸렬해질 무렵 대화가 끝났소. 이 즈음에서 루나 공주님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오. 내가 말실수라도 한 것인가 싶더군. 그랬는지 어쨌는지는 몰라도, 공주께서 발굽을 뻗어 매끈한 검은 악기를 톡 하고 건드려 보이셨소. 이제 보니 나이트브링어가 공주님 바로 곁에 있더구려. 그와 함께 나이트브링어의 현이 울림을 멈췄고, 현이 잠잠해지자 넷의 모습도 함께 순식간에 사라졌소.

 

생전 이런 마법은 처음 보았소. 공주께 저들이 어디로 갔는지 여쭙자, 공주께서는 평소대로 툭툭 던지듯이 '소집의 노래Song of Gathering'를 완성했음을 알려 주셨다오. 이게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소. 나이트브링어로 그 고대의 곡을 연주하셨음이 분명했소이다. 그리폰과 전쟁을 치를 때, 두 분 공주께서 전선에 나온 지휘관들을 전략회의실로 소집하는 용도로 활용하셨다는 옛날 이야기를 들은 바 있소. 두 분 공주께서 갖고 계신 곡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축에 속한다오. 그것을 음악가 네 명을 불러오는 데 쓰셨다니, 이상하다 싶기는 했지만 비곡을 옮기는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저들의 자문을 구할 필요가 있기는 있었으리라 생각이 들더이다. 야상곡이 예비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우리나라 최고의 음악가들을 불러모아 뜯어보아야 할 수준까지 다다른 것은 명백해 보였소.

 

지난 연구에서 느꼈던 바와 같은 '나 정도면 충분하겠다' 같은 생각도 더는 들지 않더군. 공주님께 내가 어떻게 소용이 있는지 어디 말해보라는 듯한, 그런 느낌이 있었을 뿐이오. 공주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침소 저편으로 총총히 가 버리는 뒷모습에는, 그런 한가한 얘기를 하고 있을 기분이 아님이 여실히 드러났소. 내가 공주님을 모시고 해야 할 일은 실로 중한 것이므로, 루나 공주께서는 현 상태를 굳이 전환할 이유가 없으실 것이오.

 

사랑하는 페니, 나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오? 잠시 한숨 돌리고 오겠다고 말씀드리고 숙소로 돌아와 적소. 공주께서 '밤의 만장' 이라는 곡을 옮겨 적으라고 하셨는데, 벌써부터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 나를 할퀴어대는 듯한 느낌이 드오. 아무리 길어도 십 분 후에는 공주님께 돌아가 곡을 계속 옮겨 적어야 할 것인데, 정말 가기 싫은 마음도 없잖아 있소. 일이 끝나고 나면 내가 나 자신이 아니게 될 것 같아 두렵다오. 간단명료하게 쓰기는 어렵지만, 며칠 전부터 귀가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계속 들고 있소이다. 방이 추워서 펜 드는 데도 기력을 어마어마하게 쏟았소.

 

공주께서 내 존재를 필요로 하시오. 가봐야겠소. 그분을 위해 다해야 할 의무가 있으니. 하늘이시여, 부디 도와주소서.

 

앨러배스터 코멧후프

 


 

조화력 6233년 5월 25일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겠구려. 결국 침소 밖 근위병에게 오늘 날짜를 물어야 했소. 마지막 일기와 근위병이 알려 준 날짜가 일 주일 차이가 나니, 모르긴 몰라도 한 주가 그대로 지나간 모양이구려. 기억이 흐릿하오. 춥고 배가 고프오. 부대시설이라면 근처에 있으니, 거길 쓸 수 있을 게요. 분명히 쓴 적은 있을 것이오. 그나저나, 여기 참 보기 참담하구려. 나 또한 그럴 것이오. 공주님을 언제 뵈었는지도 모르겠소.

 

아무리 잘 쳐 봐도 기억이 거의 남아 있질 않다고밖에 할 수 없겠구려. '밤의 만장'을 다 옮겨 적은 것은 기억하오. 연주도 해 보았소. 그랬으면 안 되었는데. 어딘가에 침잠하며 빠져 죽는 듯한 기분이었는데, 근육 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소. 온몸이 굳어서 공주님 침소에 주저앉아 버렸다오. 공주께서 나이트브링어로 다시 한 번 연주하시겠구나 싶은 생각을 하면서 말이외다.

 

공주께서는 고대의 악기를 건드리지도 않으셨소. 요 며칠 동안 처음으로, 내심 굉장히 기뻤소. 허나 공주님의 두 눈에는 전날 성역의 부박한 경계를 침범함을 주저하던 그 분의 모습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오. 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가 알던 그 공주님이 아닌 것 같았소. 공주님 자체가 하나의 공허로, 생명 없는 거대한 무언가를 위해 준비된 살아 있는 통로가 되어 오직 검은 먼지만을 품은 존재로 화해 버린 것처럼 말이오. 공주님을 올려다보면서, 휘몰아치며 소용돌이치는 악몽의 사건의 지평선Event Horizon*6 아래로 물레방아를 밟는 듯한 기분이 들었소.

 

공주께서 무어라 말씀하셨지만, 이미 그 즈음에는 그분의 말씀을 들을 기력조차 없었다오. 다만 잠이 그리웠을 뿐. 이틀 전에 누가 나를 업어다가 숙소에 데려다 놓았다고 하오. 공주께서 직접 하셨을까 싶구려. 아마 공주님일 것이오. 공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제 좀 기억이 나는군. 잊힌 과거의 심연 속에 잠겨, 소리낼 수 없는 자들의 혼과 몸뚱이를 말씀하셨소. 누군가의 굄*7을 받던, 잊힌 자를 말씀하셨소. 그래, 아는 말이오. 굄을 받다. 굄을 받던 이를 말씀하셨소. 굄을 받던 이를. 굄을 받던 이를. 굄을 받던......

 

대체 뭐에 홀렸던 건지 모르겠구려. 잠깐 정신을 놓기라도 한 것일런지. 이번에 옮겨 쓴 곡이 뭐였더라? 어스름에 관한 것이었는데 말이오. 그렇지, 진혼곡이오. '어스름 진혼곡' 이오. 사냥감을 포착한 포식자라도 된 양 내 머릿속을 계속 맴돌고 있소. 대체 왜 벗어날 수 없이 깊고 깊은 심해와 얕고 깊은 바다를 계속 생각하게 되는지 모르겠구려. 공주께서는 그분의 굄을 받던 이를 말씀하셨소. 듣기로는 공주께서 그를 세상 사이의 세상에, 시간과 공간과 노래의 잊힌 지류에 내던져 버리셨다고 하오. 그의 사랑은 그의 분노였고 동시의 그의 악의였소. 언제고 그자가 세상을 부수게 되더라도, 그 목표는 세상의 파괴가 아니라 공주께 돌아가는 것이라오.

 

사랑하는 페니, 나도 이게 다 무슨 소리인지 설명할 수 있었으면 좋겠소. 펜을 종이에 갖다대는 순간 곧장 줄줄 쓰이는 글줄이라 어쩔 수 없소. 이는 나 또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오. 그녀와 그녀의 세상과 우리 모두의 발굽 아래서 굶주린 듯 휘몰아치는 냉혹한 회오리바람의 부박한 잔해, 그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말이외다. 저들이 그녀의 노래를 부를 때 그들 스스로는 무無가 될 것이며, 버려진 자들 위에 그녀의 날숨이 다시 한 번 쏟아질 것이오. 상고上古의 노래가 태어나지 못한 자들을 태어나게 할지니, 그들은 한 순간도 그녀의 백성인 바 없을 것이나 동시에 미래영겁 그녀의 백성이 될 것이오. 저들은 더 이상 굄을 받던 이에게 복종하지 않으리니, 영원한 죽음의 땅이 그녀의 것이 되어 이미 태어난 삼라만상을 유산케 하기 때문이오. 기억되지 않은 곡이 궁창을 하나로 모으고 있으나, 그와 동시에 둘을 갈라놓고 있소이다.

 

그만해야겠소. 이제 그만 써야겠소.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누워 있는 것 하나밖에 없구려. 밖을 보니 사람들이 행진하고 있구려. 저게 무엇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소. 무엇인가 끔찍한 일이 일어나려 하오. 그대가 보고 싶소. 그대 품에 안기고 싶소. 머릿속을 맴도는 곡도 이제 그만 듣고 싶소.

 

앨러배스터 코멧후프

 


 

조화력 6233년 5월 28일

 

이제 다시 펜을 들어도 될 것 같소. 내 옆에 누운 그대가 보이는구려. 대체 언제 집에 온 것이오? 어제? 조금씩이나마 기억이 나는군. 크레센트 샤인이 아파트에 나를 던져두고 갔었소. 말 그대로 던져두고 갔지요. 그대가 소리치는 목소리에 깼던 기억이 나오. 크레센트에게 크게 화를 내고 있었지. 왜 얼굴 반쪽이 이리 뜨겁지 싶었소. 화창한 오후에 나를 데리고 날아오면서 내 망토가 잘 덮여 있는지 확인할 겨를이 없었던 모양이오. 신경 썼을 것 같지도 않지만. 관심 없다는 듯한 흥 소리와 함께 크레센트도 제 갈 길을 갔소.

 

그대는... 발코니에 떨어진 나를 천천히 당겨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간호해 주었소. 햇빛에 덴 이마 위로 찬물에 적신 수건이 맞닿는 것이 느껴졌소. 그 때야 그대임을 직감하고, 그대의 다리를 잡아 내 쪽으로 끌어당겼지. 자스민 향기가 달콤했소. 얼마나 오랫동안 그러고 있었는지, 내가 그대를 안은 것인지 그대가 나를 안은 것인지도 모를 시간이 지났소. 나는 기뻤지만, 그대는 놀랐소. 그대를 놀래킬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오. 그대를 겁주고 싶지 않소. 그 때는 뭐라 해야 할지도 잘 알지 못했소. 뭐라 말해야 했겠소?

 

아홉 번째 비곡을 작업했소. 루나 공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오. 누군가의 굄을 받던 자의 울음 사이로, '고적Desolation'이란 말씀이 들렸소. '고적의 노래'였는지, '고적의 애가'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구려. 기억나는 거라고는 열흘 전에 침소로 소집했었던 넷을 데리고 공주께서 구체화한 곡의 음표를 하나하나 새겨 넣는 작업뿐이오. 심지어 아홉 번째 비곡을 연주할 때는 공주님과 나 둘이 함께 했소. 공주께서 나이트브링어를 썼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소.

 

뭔가 잘못됐소. 여기는 궁전이 아닌데.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이오? 내가 대체 어디로 온 것이오? 내 집에서조차 한기를 느끼다니. 그대가 직접 자기 전에 난로에 불을 피우지 않았소. 그것이 벌써 두 시간 전이오. 불을 피워도 소용이 없다는 걸 설명해야 할 터인데, 설명할 수 있는 설명이 없소. 어딘가로 끌려 들어가고 있지만, 그곳이 어딘지 나는 모르겠구려.

 

사랑하는 페니, 그대는 온종일 내 곁에 있어 주었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그대는 내 피부이기라도 한 듯 내게 꼭 달라붙어 있었다오. 나에게 화를 내지 않을 수 있는 게 어떻게 가능한지, 나는 짐작도 못 하겠소. 왜 이리 오래 집을 떠나 있었는지, 내게는 이를 설명할 이유가 없소. 핑계야 만들 수 있겠지만, 핑계로는 내 행동이 정당화되지 않소.

 

그대와 결혼한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다행한 일인지 알아주기를 바라오. 미안하오, 페니. 무엇인지는 몰라도 감당할 수 없이 커다란 어둠이 그대의 반려에게서 시간과 기력, 제정신을 앗아가고 있소. 이제껏 그대는 희생만 하며 살아왔는데, 더 희생할 것을 강요해야 하다니 슬프오. 좋은 기회일 것이라고, 즐거운 시간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렇지 않았소. 앞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 무엇일지는 나도 모르겠소. 루나 공주님과 내가 열 번째 비곡을 완성하고 나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도 알지 못하오. 야상곡은 그 어떤 것보다도 크구려. 고래가 새우를 빨아들이듯 나를 잡아먹지만은 않기를 바라야겠소.

 

이번 일기를 읽기 불편하더라도 이해해 주시오, 페니. 곳곳에 남은 흔적은 그냥 눈물 자국이다 생각해주면 좋겠소. 그대는 괜찮을 거요.

 

앨러배스터 코멧후프

 


 

조화력 6233년 5월 30일

 

또 그대를 놀라게 했소.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그대를 보고 싶었을 뿐인데. 세상이 어느 순간부터 너무나 춥고 혼란스러운 곳으로 변해 버렸소. 귓가에서는 계속 음악이 앵앵대고 말이오. 그대의 눈에 비친 햇빛을 보고 싶어 발코니의 온실에 들어섰소. 그래, 사방이 그냥 햇빛이더구려. 그대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 다음에야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새삼 깨달았소. 유아 퇴행, 무통각증, 상식 결여가 한꺼번에 찾아오기라도 한 것 같소이다.

 

그대가 달려와 나를 방 안으로 다시 밀어 넣었소. 햇빛을 쪼이면 몸에 영영 흉터가 남을 수 있으니 말이오. 그대를 화나게 하고 싶지는 않소. 특히 내 알 수 없는 행동으로 그대가 화를 낼 때면 더욱 그렇소.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른다오. 루나 공주님이 왜 그러시는지 나는 모르지만 나는 내 표정을 감추는 재주가 없소.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어둠뿐이고, 내가 시선을 돌릴 때마다 따라와 시야 구석에 엉겨붙는다오. 왜 굳이 햇빛과 달빛을 나눠놓아야 했을지 모르겠소. 이 세상은 결함투성이오. 이퀘스트리아를 짙은 어둠 속으로 밀어 넣을 수만 있다면 모든 일이 다 잘 될 것이오. 세상이 한층 단순해질 것이오. 마침 그대는 나 때문에 어둠에 속한 생활을 해 본 적 있지 않소. 평범한 자들도 우리처럼 살 수 있음을 그대가 보여주고 있소. 그대는 완벽히 괜찮을 게요. 내가 그대 곁에 있지 않소. 루나 공주님의 광명을 광배처럼 두르고, 그분의 노래와 그분의 굄을 받던 이로부터 몸을 피해 어둠 속에서, 어둠의 가족을 꾸릴 수 있을 테요......

 

글 쓰기가 어렵소. 그대가 소리치는 소리가 들리는군. 그대는 나를 사랑하지만 내가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은 미워하오. 왜 이렇게 되었는지 함구하는 나를 미워함은 알고 있소. 나도 그런 내가 미우니. 자초지종을 말하려 입을 벌릴 때마다 눈물이 줄줄 흐른다오. 그대가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이 세상에는 있소. 그대 눈앞에서 햇빛에 타 죽고 싶지는 않구려. 영겁의 어둠 속에 침잠하는 완벽한 세상에서는 그대가 그 안에 빠지지 않도록 내가 잡아줄 수 있소. 내 일생 동안 내심 이런 고민을 했었던가? 태어난 이래 난생 처음으로 내 심장박동을 느낀 것 같은 기분이오. 그대가 뼈와 가죽으로 만든 북 소리에 맞춰 춤을 추길 바라는지는, 잘 모르겠군. 소중한 무엇인가를 잃게 될 것 같소. 소중한 무엇인가를, 이미 잃은 것 같소.

 

내가 보고 있지 않겠지 싶을 때의 그대는 슬픈 표정을 짓소. 나는 보았으므로 안다오. 그대가 한없이 끔찍하지만 또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어하는 것 같구려. 그대가 말하더라도, 그 소식을 듣는 자는 아마 내가 아닐 거요. 그대의 반려에게 달린 두 귀가 더는 반려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면 분명 놀라겠지. 우리는 우리가 비롯되었던 그림자로 돌아가는 거요. 루나 공주님의 곡은 내게서 색을 빼앗아갔지만, 그대는 아니오. 그대는 전보다도 더 따뜻하고 찬란한 사람이 되었소. 왜 이전처럼 그대를 만지고 느낄 수 없는 것인지 모르겠구려. 내 사랑이 저기에 있는데, 내 목숨은 창턱에 맺힌 물방울처럼 사라져가고 있구려.

 

해가 지고 있소. 루나 공주께서 나를 부르지 않으셨소. 잠시 걸으려 하오. 그대도 이해하겠지. 그래 주기를 바라오. 어디라도 가야겠소. 그대 나를 사랑하고 아끼는 바와 같이, 그녀도 그녀의 굄을 받는 이를 아끼고 사랑했지만 그 이는 가야만 했소. 어스름 진혼곡. 고적과 저 칙칙한 음표들. 끝없이 울리는 밴시의 합창과도 같이 나를 집어삼키는 차가운 웅덩이.

 

어디라도 가야겠소, 사랑하는 페눔브라. 그러지 않으면 죽을 것 같소.

 

앨러배스터 코멧후프

 


 

조화력 6233년 5월 31일

 

몸 곳곳에 멍이 들었소. 어디 하나 안 아픈 곳이 없구려. 어쩌다 다쳤는지 자초지종을 말했지만 그대는 믿지 않았소. 내가 이야기를 지어냈으리라 생각했었지. 지금 와서 다시 얘기한다 해도 그보다 더 명확히 설명할 자신은 없소. 힘들어서, 그럴 힘이 없소. 뭐 어쨌든 여기에만은 사실을 적겠소. 시간이 지나면 그대도 이해하리다. 내가 적어둔 글을 읽을 힘이 남아 있다면 말이오.

 

늦은 아침에 크레센트 샤인을 만났소. 별로 보고 싶어하진 않더군. 워낙 바빴으니 말이오. 심경근위대 중 안 바쁜 자가 하나 없었지. 하지만 그 때문에 그 녀석을 보아야 했소.

 

지난 주에는 루나 공주님이 관할하시는 구역에서 쉬다 오지 않았소. 내 맹세컨데 행진하는 소리를 들었소. 그 때는 그 소리가 무슨 소리인가 따져 볼 힘도 없었고 정신도 오락가락했지만, 오늘만큼은 분명했소. 나도 도저히 믿기지가 않소이다. 요사이 캔틀롯으로 사로스인들이 수도 없이 모여들고 있는데, 넷 중 셋이 심경근위대에 입대했소. 지난 주에 들었던 그 소리는 심경근위대의 급격한 팽창과 연관이 있었던 게요. 이는 전례가 없는 일이고, 공포스럽기까지 하오.

 

게다가 저들이 발 맞춰 행진하는 행진곡이 무엇인지 들어 봤더니 아뿔싸,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오. 바로 며칠 전에 루나 공주님과 내가 비밀리에 옮겨 썼던 여섯 번째 비곡이었소. 여섯 번째 비곡을 녹음해서 루나 공주님 관할 구역마다 큰 소리로 틀어놓고 있었단 말이오. 근위병 하나하나가 비곡에 맞춰 행진하는데, 피막 날개가 한 점 흐트러짐도 없이 정렬되어 있었소. 크레센트 샤인이 심경근위대 지휘관으로서 대단한 지휘력과 리더십을 가지고 있음은 인정하지만, 그조차도 저렇게 많은 사람을 한번에 저렇게 운용할 수는 없단 말이오. 그 누구도, 한낱 신병들을 이처럼 빨리 군인으로 바꿔놓을 능력은 없소.

 

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제야 알게 된 게요. 여섯 번째 비곡이 저 사람들을 조종하고 있었소. 어둠의 심연 속에서 뽑혀나온 무언가가 저들을 조종하고, 힘을 불어넣고 있었소. 이 모든 일은, 루나 공주를 도와 세상 속으로 비곡을 가져온 내 잘못이오. 저 사로스인 동포들의 귀로 끝없이 여섯 번째 비곡이 쾅쾅 울려퍼질 때마다 저들의 가슴 속으로 보이지 않는 비밀이 속삭여지고 있었소. 헌데 저들의 귀에 합창 소리가 들릴 것일지, 그녀의 사그라들지 않는 목소리가 들릴 것인지는 모르겠구려. 내 허파 속으로 파고들었던 그 한기가 저들의 허파 속에서 똑같이 꿈틀대고 있을지도, 나는 모르겠소.

 

크레센트 샤인에게 이건 뭐가 잘못됐다고 설명하려 했소. 내 말을 듣기를 거부하더군. 녀석은 변했소. 루나 공주가 그랬던 것처럼, 인간성이 결여된 끝에 공허한 껍질만이 남게 된 거요. 내 평생을 사촌 녀석과 어울려 다녔건만. 이제 내 눈 앞에 있었던 것은 무덤 앞 반짝이는 대리석 묘비에 불과했소. 어떻게든 설득해보려 했다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여 주려고 했지만, 내게 어디 그럴 힘이 있었겠소? 내가 알 수 있었던 것도 그것까지였다오.

 

나는 쉽게 당황하지만, 그 녀석은 쉽게 짜증을 내는 편이라오. 그리하여 어떻게든 다시 주의를 돌리려고 와락 붙잡아 봤더니, 이쪽을 꽉 붙들고는 땅바닥에 그대로 내동댕이쳐 버리더이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부관들이 달려와 떼어낼 때까지 나를 마구 짓밟아댔소. 뭐라뭐라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소. 날더러 '배신자'라느니 '비겁자' 같은 말들을 쏟아내더니, 그대 페눔브라를 향해 입에 담지 못할 말들을 마구 지껄였소. 어쩌다 이렇게 심하게 다쳐서 들어왔냐고 그대가 물었을 때 내가 대충 얼버무린 것도 다 이것 때문이오.

 

그대는 내 침묵을 오해하고 내게 등을 돌려 떠나갔소. 그 모습은 고적의 애가보다도 차가워 보였소. 화가 나는 게 정상이니 내 무슨 말을 더 하오리까. 그대에게 뭐라 할 일도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없을 것이오. 그냥 빨리 비곡 작업을 마치고만 싶소. 왠지는 모르겠지만, 야상곡 작업이 마무리되면 모든 일이... 다 괜찮아질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 이 한기도, 귓가에 앵앵대는 음악도, 이 미친 소리도 모두 그칠 것이라고 말이오. 그 때가 되면 이 모든 것을 설명해 줄 수 있겠지. 그러지 못할 거라면 굳이 이렇게 글줄을 남길 이유가 없지 않겠소?

 

이 일지 말인데, 처음에 쓰려고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중요한 기록이 될 것 같구려. 크레센트 샤인이나 그에게 들러붙은 무언가가 이 일지를 발견한다면 가장 먼저 이 일지부터 없애 버린 뒤 우리 가족도 노릴 것이 뻔하니, 잘 간수해야겠소. 사랑하는 페니.

 

앨러배스터 코멧후프

 


 

조화력 6233년 6월 1일

 

페눔브라, 사랑하오. 내 목숨보다도 그대를 사랑하오.

 

흔들림 없는 확신과 광명을 담아 쓰오. 입에 담더라도 그대가 전과 같은 얼굴로 돌아봐 줄 것인가 두려워서 그러지 못했소. 오늘은 침대에 누워 있자니 그대가 가만히 다가와 나를 안더구려. 그리고는 한 시간 가까이 울었소. 그대의 눈물을 닦아 주려고 했지만, 그대 얼굴에 발굽을 대지 못하게 쳐내서 그러지 못했소. 그냥 안고 있고만 싶다고 그대는 말했지. 아, 내 생이 이처럼 단순하고 아름다운 것이기만 했다면. 그대의 말을 가만히 따르지 그대가 얼굴을 내 뺨에 비비며, 잠긴 목소리로 요 며칠 동안 잘못한 게 많다고 말했소. 그냥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몰랐다고 말이오. 나도 알고 있었소. 그 무엇보다도, 나 그대를 사랑함은 변하지 않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오. 지금껏 나를 기다려 주었으니, 나 또한 영원토록 그대를 기다릴 것이오.

 

내가 함부로 자초지종을 입에 담지 못함을 안다고 그대는 말했소. 그대의 반려가 처음으로 이게 어찌된 일인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설명해 주지 않으니, 두려웠을 것임을 나는 아오. 어떤 노래는 가사보다도 그 소리로 말하고 싶은 바를 전한다는 말밖에 그대를 위로할 말이 없었소. 이것으로 기분이 나아졌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소. 나는 그대에게 입맞추고 그대를 가까이 끌어당겨 안았소. 내 귀여운 자스민.

 

그제서야 그대가 나를 찾아온 용건을 말해주었소. 심경근위대가 영장을 두고 갔다고 말이오. 크레센트 샤인이야 너무 바빠서든, 내게 화가 나서든 오지 않았소. 뭐가 어쨌든 루나 공주께 말씀드려야 할 일이오.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이든, 영장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 시간을 삭감해 버렸소.

 

그대는 가지 말라고 말했소. 나도 가고 싶지 않았다오. 하지만 명령에 불복한다면, 심경근위대가 나를 끌고 데려가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소. 그대는 두려워했지만 나는 두렵지 않은 척했소. 나는 그대에게 입맞추고, 내게 말하려던 게 무엇인지 물었소. 뭐가 됐든 그대를 요사이 힘들게 하는 것이 있음은 알고 있었소. 함부로 꺼내놓기에도 어려운 무언가가 말이오. 그러자 그대는 더 쩔쩔매더구려. 뺨에 홍조를 띄우며 말이오. 내게 비밀로 하고 있는 게 있구나 싶었지만, 그대가 보이는 이상한 행동을 하나하나 생각해 내기에는 몸이 너무 추웠소.

 

그대는 나를 웃으며 전송했소. 그대는 내게 뺨을 비비며 돌아올 즈음에는 이게 다 무슨 일이었는지 알아 왔으면 좋겠다고 했소. 내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밤을 마주하는 데 그 정도면 더없이 훌륭한 조건이었지. 마지막 비곡을 옮기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나는 모르지만, 더는 두렵지 않소. 내게는 돌아갈 사람이 있으니까 말이오. 이 알아먹을 수도 없는 미친 짓거리도 이제 끝이오. 나는 그렇게 그대와 약속했소. 사랑하는 페니. 다 잘 될 거요. 사랑하오. 약속하오.

 

앨러배스터 코멧후프

 


 

조화력 6233년 6월 3일

 

왕궁 바깥에서 사람들이 행진하고 군사 훈련을 받고 있소. 설마 루나 공주님 구역에서 이런 일이 있을지 누가 알았겠소이까. 그 반면에 왕궁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오. 근위병들조차 보이지 않았소. 어디를 둘러봐도 근위병은커녕 시종 한 사람조차 없었소. 그 안에는 나와 공주님, 수도 없이 널린 악기뿐이었소. 말 그대로요. 창조에 관한 이야기는 온데간데없이, 그 자리에 숨소리와 현 퉁기는 소리만 웅성댈 뿐이었소. 우리는 나이트브링어를 건드리지 않았소. 신물은 오랜 세월 끝에 새로이 탄생한 노래를 목도하는 과거로부터의 심판관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요.

 

루나 공주도 마찬가지로 어디 다른 세상에 가 있는 것 같았소. 결국 나 혼자 일하는 듯한 기분이었다오. 공주님은 내 주변을 부유하는 알리콘의 허깨비에 불과했으니까. 공주가 입을 열어 말할 때면 크고 높은 칠흑의 장막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는 기분이 들었소. 무엇인가를 말하였는데, 듣자하니 이 곡의 제목이 확실해 보였소. 마지막 야상곡, 그 유일무이한 마무리 말이오.

 

'새벽의 강림Dawn's Advent', 이 공주가 말한 이름이었소. 나는 그 이름에 안도했소. 음표 하나조차 제대로 적지 못했는데 벌써 눈물이 줄줄 흘렀다오. 막막한 어둠이 다가오는 듯한 기분이었지만, 왜인지 더는 몸이 떨리지 않았소. 내게는 금지된 아침의 찬란한 빛과, 그 빛을 가득 담은 그대의 눈을 생각했소. 사랑하는 페눔브라, 이제 돌아갈 수 있소. 남은 비곡은 한 개. 이제 비로소 귀로에 올랐소.

 

앨러배스터 코멧후프

 


 

조화력 6233년 6월 4일

 

이제 마무리된 것 같지만, 루나 공주의 안색을 살피니 그쪽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오. 공주는 석상이라도 된 듯 침전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는데, 그 모습은 가장 검은 돌을 골라 깎아낸 섬뜩한 가고일 조각과도 같았소. 맡기신 바를 이루었노라고 말했소. 마지막 비곡까지 모두 옮겼다고 말이오. 이제 이 일이 마무리되었소. '궁창의 야상곡' 작업이 끝났소.

 

그럼에도, 공주는 내 말을 조금도 신용하지 못하는 듯했소.

 

이제 뭘 더 하라는 것인지? 공주가 내 뒤쪽으로 시선을 옮겼소. 두 눈이 나이트브링어를 향해 있었다오.

 

하느님 맙소사. 연주해 보라는 게요. 고대의 악기를 빌어 창조의 노래, 그 마지막 곡을 연주해 보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었소. 루나 공주를 빤히 쳐다보았으나, 공주는 눈썹 한 번 까딱하지 않았소. 몸이 좋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 신왕神王이 결국 저편의 독기에 굴복했을지 모르지 않소.

 

아니면 두려웠던 것일지도 모르지요. 우리 너머에 도사리고 있는 피안으로 넘어가자니, 뭔가 불길하다 생각이 들 수도 있지 않겠소? 그럴 거면 왜 여기까지 밀어붙인 거란 말이오? 대체 뭘 위해서 이 짓을 했느냐는 거요.

 

궁전 회랑에는 아무도 없었소.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음악에 맞추어 행진하는 소리만 들려올 뿐. 비탄과 부패의 바다처럼 솟구치는 쇠사슬의 덜그럭대는 소리가 들려왔소. 공주는 그이를 그리워하고 있었소. 나를 그리워하지 마시오. 뭐라도 하지 않는다면 나 또한 루나 공주처럼 여기 얼어붙어 굳어 버릴지도 모르니, 그 어떤 안식도 허용되지 않고 사랑하는 이를 다시 볼 일도 없을 곳에 나 또한 그대로 갇힐지 모르는 것이오.

 

이렇게 글을 남기고 있는 것은, 내가 일을 저질렀기 때문이라오. 나는 내 발로 나이트브링어의 검은 울림통을 가만히 만져 보았소. 나이트브링어를 쓸어 보며 루나 공주를 돌아보자, 공주도 이쪽을 쳐다보았소.

 

아, 그제야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알았다오. 공주는 들어 보기를 바라고 있었소. 항상 청중이었지. 이 곡은 루나 공주를 위한 곡이었던 게요. 왜 지금까지 나를 불러들여 작업한 것인지 이제 이해가 되오. '소집의 노래'로 음악인 네 명을 불러들였다가 다시 내보내 버린 것도 명확히 정리되었소. 공주는 그 넷조차 믿지 못한 거요. 하지만 나 하나만큼은 신뢰하고 있었소.

 

내 입장을 명확히 이해하고 나니, 더 질문할 기력조차 없더군. 빨리 끝내 버리고 싶소. 보고 싶소. 귓가에 앵앵대는 소리를 끝내고 싶소. 그리되려면, 비곡을 연주할 수밖에 없겠지.

 

페니, 어쩌면 다른 누군가가 이 기록을 보고 있다면 부디 미물에 불과한 사로스인 하나가 감히 신물 나이트브링어를 침범한 것을 용서해주길 바라오. 나 또한 해야만 하는 일이었으니. 이제 음석을 설치해야겠소. 비곡을 연주해야 하니까. 처음이자 마지막인 야상곡의 연주회를 열어야 하니까.

 

앨러배스터 코멧후프

 


 

?????

 

춥다. 너무나 춥다. 재갈 물린 입으로 중얼대는 소리와 비명 소리가 뒤섞여 들려온다. 수도 없이 사방에서 솟구치는 쇠사슬은 흡사 덜그럭대는 토굴과도 같다. 정신을 차려 보니 물에 빠져 있었다. 루나 공주는 보이지 않았다. 궁전 회랑의 바닥에 널브러져 눈을 떴다. 몸 주변에 물웅덩이가 고여 있다. 감각이 없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지금도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제는 내 숙사에 있다. 어떻게 된 일이지? 불이 피워져 있다. 아마 내가 피웠으리라. 크고 맹렬한 불이 몸을 말려주고 있다. 내 몸인지 뭔지조차 모르겠다. 구석에 뭔가 시커먼 게 널브러져 있다. 나이트브링어가 왜? 왜 아직 내 수중에 있지? 모르겠다. 숨 쉬기가 버겁다. 춥다.

 

코멧후프

 


 

?????

 

여전히 춥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한 가닥 가락이 들린다. 한도 끝도 없다. 알겠다. '그림자 전주곡'이다. 내가 직접 연주한 적 있지 않았던가. 비곡도 참 많이 연주해 보았다. 전주곡, 볼레로, 행진 그리고...

 

마지막으로 연주한 게 '밤의 만장'이었던 것 같은데, 그걸 연주하고 나자 모든 게 어둠에 잠겼다. 루나 공주도 사라졌다. 세상이 사라졌다. 내가 사라진 것인가.

 

나는 여기에 있는데. 추위와 꺼져가는 불, 귓가에 어른대는 음악소리, 나이트브링어와 함께 여기 있지 않은가. 다른 사람들은 전부 어디로 갔는가?

 

어디선가 천둥 소리가 들린다. 벽이 흔들린다. 밖에 뭐가 있는가? 가서 봐야겠지만, 두렵다. 춥다. 몸이 얼어붙는다. 페니, 날 용서하시오. 페니,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있소. 춥소, 페니. 너무 춥소.

 

앨러배스터

 


 

?????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시신을 보았다. 왕궁의 바닥재와 벽마다 피가 고이고 튀어 있다. 루나 공주는 보이지 않는다. 그 목소리를 쩌렁쩌렁하게 울려대는, 차라리 비명에 가까운 소리는 들린다. 하나같이 두려움과 분노에 가득 차 있다. 전쟁이 터진 모양이다. 왕궁에 남아 있는 생존자는 없는 것 같다. 누가 나를 찾아냈는지는 모르나, 내 가방을 열어 보시오. 나이트브링어가 내 수중에 있소. 가져가시오. 다만 악에서 신물을 구하시오.

 

앨러배스터 코멧후프 박사 씀

 


 

?????

 

내 사촌이 살인을 했다. 그 자식이 다른 근위병을 참살하는 모습을 내 두 눈으로 봤다. 크레센트 샤인 저 새끼 뭐하는 짓이야? 심지어 혼자가 아니다. 심경근위대를 이끌고 날아가고 있다. 지붕마다 불을 놓고, 사람을 죽이고 다닌다. 아니, 그 이상이다. 사로스인이 아닌 자는 모조리 척살하고 있다. 학살이다. 달아나야겠다.

 


 

?????

다니는 곳마다 불타고 있다. 밝지만 여전히 춥다. 날숨이 엉겨 입김이 된다. 숨이 가쁘다. 벌써 두 번이나 토악질했다. 나는 단 한 번도 전장에 서 있어 본 적이 없다. 전장의 냄새는, 털이 타는 냄새와 토사물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캔틀롯이 불타고 있다. 길바닥마다 죽어가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아직 살아 있는 자들은 몸을 쥐어짜 통곡한다. 한 목소리로 한 사람을 저주하고 욕하고 있다. 루나 공주다. 루나 공주가 이 대학살을 지시했다는 것이다. 이퀘스트리아를 배신했다. 왜? 바로 몇 시간 전만 해도 같이 있었는데. 야상곡 잘 듣다가 갑자기 왜? 대체 무슨 일인가. 왜 자신의 왕국이기도 한 나라의 수도를 부수는 거지?

 

춥다. 지옥의 업화와 같은 불빛에 기대어 글을 남긴다. 밤이 오고 있지만, 편안하지는 않다. 내 얼굴을 들이밀기는 두려우나,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셀레스티아 공주께 나이트브링어를 가져간다면, 이 모든 일을 되돌릴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내가 사로스인인 것을 드러내고 나서도 사람들이 나를 살려 둘까가 문제된다. 내 동포들이 밤의 이름으로 사방에 피를 뿌리고 다니고 있으니. 모두가 홀려 버린 것만 같다. 루나의 광기가 저들을 이끌고 있다.

 

코멧후프

 


 

?????

 

왕실근위대의 병사들과 접선했다. 저들은 사로스인이 아니다. 내 얼굴을 보고 흠칫 놀라긴 했지만, 나를 해치려는 것이 아니라고 그들은 말했다. 나이트브링어를 넘겼다. 우리는 시립도서관 잔해에 숨었다. 바로 몇 주 전만 해도 여기 와서 차분히 공부하고 있었는데. 이제 모든 것이 장작이 되어 불에 타오르고 있다. 등 뒤에 시트로 대충 수습한 시신이 쌓여 있다. 근위대 지휘관이 탈출 루트를 설명하고 있다. 페눔브라, 그대가 괜찮은지 알아야겠소. 반드시

 

날 이상한 눈초리로 보고 있다. 저 얼굴은.

 

뭔가, 잘못됐다.

 

앨러배스터

 


 

?????

 

나는 앨러배스터 코멧후프 박사. 올해로 서른일곱 번의 겨울을 났습니다. 위니페그 대학에서 신비학과 음악이론을 연구해 박사 학위를 받았지요. 내 반려의 이름은 페눔브라 코멧후프. 우리는 심경 지구에 주소를 두고 있습니다. 누구든, 도와 주십시오. 그녀를 구해 주십시오. 엎드려 빕니다.

 

앨러배스터 코멧후프 박사 드림

 


 

?????

 

근위대원들에게 옆장 내용을 계속 보여주고 있다. 분명히 글씨를 써서 보여 주었는데, 한 글자도 읽지 못하는 듯하다. 애초에 아무런 글자도 없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누구인지 계속 말해주고 있는데, 얼마 안 가 이전처럼 멍청한 표정으로 되돌아간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왜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게지? 훈련 마쳐서 근위대가 된 이들이 아닌가. 이거

 

기습을 받았다.

 

앨러배스터

 


 

?????

 

캔틀롯 한쪽에서 다시 시가전이 벌어지고 있다. 여기는 안전하다. 추워서 죽을 것 같다. 은신처엔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여럿 모여 있다. 십 분 즈음이 지날 때마다 이쪽을 보더니 화들짝 놀란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지금까지 내 이름을 최소 다섯 번은 얘기한 것 같다. 장난질을 치는 건 아니겠지. 전장 한가운데 아닌가. 고약한 장난질을 칠 시간이 없단 말이다. 루나가 캔틀롯 전역에 마법이라도 건 것인가? 사로스인의 존재가 금방 잊히도록 하는 축복이라도 내린 것인가? 이 일지를 계속 보여주고는 있지만, 내가 쓴 글자는 단 하나도 읽지를 못한다. 아주 크고 굵은 글씨를 써놓아도 말이다. 이건 단순한 내전이 아니다. 내 수중에 나이트브링어가 있고, 내 머릿속에 야상곡이 처박혀 있으니까. 셀레스티아 공주님 맙소사, 이게 다 저 때문에 일어난 일이란 말입니까? 제가 이 참상을 빚어낸단 말입니까? 제가 그런 것이나이까?

 


 

?????

 

피가 난다. 몸도 아프다. 그렇더라도 써야 한다.

 

몇몇이 방금 내게 화풀이를 한 참이다. 세로 동공과 창백한 솜털을 보더니, 루나 휘하의 살인범들과 짝패가 틀림없다고 외치며 달려든 것이다. 나는 그대로 조약돌 가득한 길가에 내던져져 구타당했다. 달비단 망토가 찢겨 넝마가 되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온갖 멸칭을 들어 왔지만, 그보다도 지독한 욕설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그 멸칭이란 것도 나를 놀려먹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번에는 순수하고 지독한 증오에서 비롯된 말들이었다. 저들은 '나이트메어 문'과 함께 나도 죽여 버리겠다고 말했다. 아, 이제는 그렇게 불리는 모양이지? 캔틀롯을 태우는 불길과 연기를 보고 나니, 왜 그런 이름인지는 대충 이해가 되었다.

 

구타는 머지않아 멈추었지만, 내 생각대로만 일이 풀린 것은 아니었다. 근위대원들이 그랬던 바와 같이, 나를 처음 보는 사람 보듯 쳐다본 것이다. 엄청난 한기가 사지를 타고 흘렀다. 일어나려 하자, 저쪽도 내 쪽을 돌아보았다. 그렇게 나는 처음 맞았던 매를 온전히 다시 맞게 되었다. 구타는 이전처럼 잔혹하고 격렬했다. 눈 위로 피가 흘러 앞이 보이지 않을 때쯤 되자 그치들이 다시 나를 잊어버렸다.

 

그 때 몸을 일으켜 달아났다. 나이트브링어를 챙겨 도주했다. 크레센트 샤인의 패거리들이나 저 무뢰한들이나 위험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나는 전쟁의 화마가 쓸고 가며 무너뜨린 도시의 구역들을 비틀거리며 돌아다녔다. 아름다웠던 도시가 이제 안에서부터 썩어 터지고 있었다. 부패의 과정은 신속히 진행되었다.

 

이대로 죽을까 두려워 반쯤 무너진 진료소를 찾아 들어가 숨었다. 다친 자리를 치료할 만한 물건도 많이 있으니 다행이었다. 사지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멈추지 못했다. 글을 쓰고 있자니 더 아파 오는 것 같지만, 이 끔찍한 기억을 반드시 종이에 새겨 넣고 말리라.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이 참사가 나 하나 때문에 일어난 게 아닌가 싶어 두렵다. 내가 야상곡을 연주하지 않았는가. 그때까지 겪었던 모든 부작용은 차라리 경고였는데. 어둠의 여신을 신앙하고 숭상하는 과정이라며 내 두 발로 나이트브링어를 잡아 새로 빚어진 저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곡을 연주해 버렸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어야 했는데. 가슴이 아니라 머리의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아, 내 사랑하는 페니. 이 미쳐 돌아가는 전란 속 그대는 어디에 있소? 나이트메어 문이 뿌리고 다니는 피바람 한가운데 어디로 숨은 거요? 반드시 그대를 찾고야 말 것이오. 아, 너무 춥소. 캔틀롯이 무너지고 있소. 그렇더라도 그대를 찾고 말 거요. 그대가 안전한지 알아야겠소.

 

앨러배스터 코멧후프

 


 

조화력 6233년 6월 6일

 

근처를 지나던 검시관에게서 오늘이 며칠인지 들을 수 있었소. 야상곡을 연주한 날부터 이틀이 지났는데, 그 이틀 만에 캔틀롯 절반이 불타 없어졌소. 길가를 샅샅이 뒤져 시신을 수습하고 나무 수레에 싣는 모습이 보이오. 캔틀롯 입구 동향에 커다란 매장지가 생겼소. 여기서까지 공포의 불길에서 피어오르는 악취가 풍기는구려. 하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전염병 창궐은 막아야 할 일이외다. 불화의 시대 이후 최악의 사태임이 명백하오.

 

그대를 찾고야 말겠소. 부서진 진료소에서 담요 뭉치를 찾았소. 달비단이 아니다 보니 벌써 솜털이 그을리는 게 느껴지오. 그게 무슨 상관이겠소. 그대를 찾고야 말겠소, 페눔브라. 나 그대 곁에 있어야겠소.

 

반역파는 사로스인이오. 따라서 심경 지구만큼은 그 자들이 건드릴 이유가 전혀 없으리라 보는 편이 합당하오. 아직 거기에 있기만을 바라오. 건물 출입구를 비롯해 외부로 통하는 창 전부를 단단히 걸어잠그고 집 안에만 있다면 안전할 거요. 그대는 위니페그에 있을 때부터 생필품을 가득 쟁여놓는 습관이 있었으니. 지금 당장은 그대의 습관을 믿을 수밖에 없구려.

 

멀리서 폭음이 들리오. 몇 시간쯤 전에 충성파 군세가 반역파를 도시에서 몰아냈소. 캔틀롯을 탈환하려는 게 아닌가 두렵구려. 서둘러야겠소. 움직이자니 몸이 아프기는 하나, 그대를 찾는 게 더 중요하오.

 

앨러배스터

 


 

조화력 6233년 6월 6일

 

하느님 맙소사. 심경 지구에 누군가 불을 질렀소. 캔틀롯 시민들이 민병대를 조직해 무고한 사로스인에게까지 복수의 칼날을 휘두르고 있소. 내 생각보다 사태가 심각하구려. 들어가 보아야겠소. 어딘가 들어갈 방법이 있을 거요. 부디 무사하기만 하시오. 내가 가고 있소.

 

앨러배스터

 


 

조화력 6233년 6월 6일

 

앨러배스터요. 그대의 앨러배스터. 그대의 반려요. 위니페그 대학 캠퍼스 한가운데의 정자 아래서 결혼식을 치렀소. 그대는 가장 좋아하는 라벤더로 치장했소. 그대의 몸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자스민 향기가 나오. 내 사랑, 부디 이 글줄이 보인다고 말해주오. 나를 기억한다고 말해 주시오.

 

앨러배스터

 


 

조화력 6233년 6월 6일

 

나 그대를 아오.

 

나 그대를 알고 그대 나 사랑함을 아오.

 

이 두 눈을 보시오.

 

이 두 귀를 만져 보시오.

 

내 귀를 갖고 놀기를 좋아하지 않았소.

 

사랑하는 페눔브라, 나요.

 

그대의 반려요.

 

이 글을 읽어주시오.

 

나를 안다고 말해주시오.

 

제발.

 

앨러배스터

 


 

조화력 6233년 6월 7일

 

우리 집에 들어와서 글을 쓰오. 그대 바로 옆방이라오. 하지만 그대는 모르오. 누가 있는 것조차 모르지요. 이제 거리의 대학살이 좀 진정되었나 살피러 침실을 나설 터이고, 나를 보게 될 거요. 놀라 숨이 막히겠지. 부디 이빨을 드러내어 그대의 목을 물어뜯고 그 피를 마시지 말아 달라고, 그대는 엎드려 울며 빌 것이오. 그리고 달의 여자에게 돌아가라고, 죽음과 파괴의 군세에 합류하라고 말할 것이오. 이쯤에서 그대의 신경이 임계에 달할 것이니, 비틀거리다가 쿵 하고 쓰러질 게요. 현기증이 도진 것처럼 말이오. 그리하면 그대의 안녕을 위해 내가 자리를 피할 것이고, 잠시 뒤 그대는 이게 무슨 일인가 골치를 썩이며 침실로 돌아갈 게요. 그리고 몇 분이 지나면 다시 나오겠지요. 그리고 나를 다시 보게 될 거요. 그렇게 악몽은 끊임없이 반복되오.

 

나 그대를 아오. 그대는 내가 사랑에 빠진 사람이고, 나와 사랑에 빠진 사람이오. 그대는 여기에 있소. 그대의 자스민 향기는 여전하오. 그대의 아름다운 얼굴도 보이오. 그렇지만, 그대는 여기 없는 사람이오.

 

그대는 여기 없소, 사랑하는 페니. 빌어먹을 야상곡이 그대를 어디로 데려가 버린 게요? 이제는 그것 때문에 이렇게 되었음을 아오. 이 모든 것이 다 그 곡 때문이오. 야상곡이 우리를 정반대 방향으로 찢어버렸소. 이제는 감히 내 반려를 안으려 하지도 못하게 되었소. 그리했다간 그대를 겁탈하려는 약탈자로밖에 보이지 않을 터이니.

 

돌멩이만 널브러진 길바닥보다도, 학살이 시작된 왕궁 회랑의 바닥보다도 여기가 더 춥구려. 나는 벽에 기대어 주저앉아 있고, 옆에 나이트브링어가 있소. 발코니 바깥을 내다보니, 그대의 소중한 온실이 박살이 나 있소. 우리의 인생처럼 말이오. 심경 지구의 건물이란 건물마다 불타고 있구려. 이퀘스트리아는 분열되었소. 두 자매가 서로에 맞서 전쟁을 치르고 있다오. 우리는 대체 뭐가 되어 버린 게요? 우리의 앞날이 어찌 되려고 이러는 것이오?

 

더 쓰고 싶지만 그대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구려. 내 반려와 똑같은 모습을 한 유령이 걸어나와 나를 보고 비명을 지르고 있소. 이번에는 결과가 좀 바뀔지도 모르겠소이다마는, 그럴 일은 없을 것 같구려.

 

앨러배스터

 


 

조화력 6233년 6월 9일

 

셀레스티아 공주님이 이끄는 근위대가 루나군을 온전히 몰아낸 모양이다. 길거리에 널린 공보물을 보니, 나이트메어 문의 군세, 즉 루나 제국이 이퀘스트리아 북방까지 밀려났다고 적혀 있다. 그 말은 위니페그까지 달의 여자의 아귀에 넘어갔다는 말이겠지. 이제 더는 돌아갈 고향이 없게 되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나는 캔틀롯을 나가려 했다. 12번가 너머로는 넘어갈 수 없었다. 나는 가능한 멀리 달아났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가 안에서 얼어붙기라도 하는 듯, 어마어마한 한기가 밀어닥쳤다. 다시 한 번 더 캔틀롯 반대편으로 움직여 보았다. 서쪽 낭떠러지 인근에 도착하자마자 끔찍한 한기의 벽에 가로막혀 더 넘어갈 수 없었다.

 

대충 어떤 원리인지는 짐작이 갔다.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거리는 대략 반경 2마일 정도로, 그 너머로 가려고 하면 엄청난 한파가 밀려들어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 원점이 어디란 말인가? 캔틀롯의 무너진 거리를 샅샅이 헤집고 돌아다닌 결과, 한기로 구축된 내 유폐지, 그 원점에 왕궁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더욱 특정하자면, 루나 공주가 쓰던 침전이 그 정중앙이었다. 이해가 된다. 그곳에서 나이트브링어로 야상곡을 연주하지 않았는가. 뭔가 연관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제부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소, 페니. 지난 12시간 동안 유령처럼 집 근처를 빙빙 맴돌기만 했다오. 아무래도 계속해서 날 보고 놀라다가는 심장마비가 오지 않을까 싶어, 그대와 같은 공간에 있기는 포기했소. 적어도 열 번을 그대와 다시 '만났지만', 그 때마다 그대는 나를 생면부지의 사람처럼 대했단 말이오. 연기일 수가 없음은 잘 알고 있소. 그대의 두 눈에 더는 햇빛이 고여 있지 않소. 그대의 그 어떤 부분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오. 그대에게 나는 그림자... 사랑의 맹세 이후 계속해서 그대를 사랑해 오는 그림자일 뿐이였소. 적어도 나 하나만큼은 그 날의 맹세를 기억하니 괜찮소.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릴 방법을 찾아야겠소. 루나와 내가 이 세상에 끔찍한 어둠을 불러들였소. 나이트브링어가 있다면 이미 잃어버린 것도 회복할 수 있을지 모르오. 어쩌면 공주의 영혼을 잠식한 '나이트메어 문'이라는 것도 구축할 수 있으리오.

 

그래. 그래. 이제 알겠다. 이거라면 가능하다. 내 반려를 포함해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를 잊어버린다면, 그건 번지수를 잘못 찾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알리콘을 만나야 한다. 셀레스티아 공주를 독대해야 한다. 위대한 어머니의 목소리가 현실을 뒤흔들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던 천지창조의 순간부터 살아온 분이 아닌가. 바로 그 마법의 파편이 내 수중에 있다. 내게 나이트브링어가 있다. 셀레스티아 공주께 나이트브링어를 넘겨드린다면,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으로 이 악몽이 종언을 고할 것이고, 사랑하는 페니와 나는 다시 만나게 되리라.

 

듣기로 셀레스티아 공주께서 환궁하시어 도시의 피해 상황을 점검하고 루나 제국을 향한 반격을 준비하신다고 한다. 낭비할 시간이 없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오, 페눔브라.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가리다. 그리하여 희망으로 부활한 새로운 새벽을 함께 맞이합시다.

 

앨러배스터

 


 

조화력 6233년 6월 10일

 

왕궁 입구가 코앞에 있다. 여긴 좀 덜 춥군. 기운도 좀 나는 듯하다. 모 아니면 도. 내게 내린 저주는 내 존재감을 숨기는 권능도 있는 모양이다. 조심해서 들어가기만 한다면 순찰을 도는 경비병을 무사히 피할 수 있을 것이고, 들키더라도 얼마 안 가 잊힐 터이다. 이대로 셀레스티아 공주님의 지휘본부로 숨어 들어가는 일은 일종의 징검다리를 건너가는 것과 비슷하다. 조심해야 할 것은 내 만용이다. 싸움을 즐기지도 않을 뿐더러, 이번에는 발각되었다간 얻어맞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근위병 중 날개가 달렸든 말든, 사로스인이라면 학을 떼는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이것까지 실패한다면 나이트브링어를 보여 주고 환심을 사든지 주의를 돌려놓으면 그만일 것이다. 셀레스티아 공주님, 제게 힘을 주소서. 우리나라를 구원할 열쇠를 제가 가져가나이다. 아직 늦지 않았기만을 바랄 뿐...

 

앨러배스터 코멧후프

 


 

조화력 6233년 6월 12일

 

폭발 후유증이 아직 남아서 쉬고 있다. 이명이 끊이지 않는다. 귀가 먹지 않아 다행이다.

 

안타깝게도 셀레스티아 공주님을 뵙는 데는 실패했다. 왕궁까지 접근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지휘소가 위치한 건물에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나 버렸다. 루나 공주는 자기가 나이트메어 문으로 변모할 것임과, 자매가 자신을 저지하려 할 것임을 예측한 모양이다. 그리하여 캔틀롯 주둔 근위대가 폭발물이 사로스인의 작품이 아닌가 조사하고 있다. 루나 제국의 첩보망은 아주 깊은 곳까지 뻗어 있었던 모양이다. 나이트메어 문은 캔틀롯의 무고한 시민들의 피로 만족하지 않고, 이제 자기 자신의 자매까지 죽이려 하고 있다.

 

그래, 죽이려 '하고' 있다. 루나의 작전이 얼마나 비열하고 악랄했든지, 실패한 시점에서 아무 소용이 없다. 셀레스티아 공주께서는 무탈하시다. 폭발은 옥체를 조금도 상하게 하지 못했다. 그러나 충성파 지휘관들로 가면 문제가 달라진다. 캔틀롯 방어의 핵심이었던 지휘관 다수가 폭발에 휩쓸려 죽었다. 역사는 오늘을 더욱 어둡고, 어두운 날들로 기억하리라.

 

아파트로 돌아왔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발코니 아래 어둠에 매달려 있소. 죽음의 악취로 온몸을 휘감고, 그대의 아득하고 공허한 시선을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오. 적어도 다섯 번은 그대와 눈이 마주친 것 같지만, 그대는 이제 내 존재 자체를 감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아무 반응이 없었소. 이제 나를 기억하는지 아닌지는 아무래도 좋은 문제가 되어 버렸소. 그대가 그런 우울과 권태에 젖은 모습은 처음 보았다오.

 

내 사랑하는 사람이여, 그대 분명 외로울 것이오. 그대의 반려는 이 세상에 없소. 아예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생각까지 들고 있소. 내가 쓴 글줄은 그 누구도 읽지 못하게 되오. 길바닥에서 내 이름을 크게 소리쳐 부르거나 물건을 걷어차고, 생존자들의 적개심이라도 끌어 보려 잔해에 불을 질러 보아도, 그 누구도 나를 감지하지 못하오. 내가 물리력을 행사한 모든 것들은 무시되거나, 귀신의 장난 같은 것으로 치부되오. 이제 거부할 여지조차 없군. 나는 내 존재를 입증할 권능마저 빼앗긴 것이오. 사람들은 내 존재를 짧게는 몇 분, 길면 몇 시간 정도는 기억하지만, 기억의 시간이 끝나면 나는 다시 아무것도 아닌 자외다.

 

페눔브라 그대에게도 여러 차례 설명해 보려고 했었소. 그대의 놀란 마음을 달래고, 그대 곁에 앉아 두 눈을 바라보며 내 인생과, 우리의 인생이 포개졌을 때의 이야기를 몇 차례나 반복했소. 그 이야기를 그대가 얼마나 믿는지 정도는 나도 알고 있었다오. 사로스인이 그 자리에서 지어낸 거짓말 치고는 상당한 완성도가 있는 이야기. 딱 그 정도의 공허한 믿음이었소. 우리가 함께 나누었던 정보와 지식을 다시 공유할 수는 있었지만, 두 번 다시 사랑의 불꽃을 튀길 수는 없을 것이오. 우리가 만났던 사실조차 없어져 버렸으니, 그대가 누렸던 기쁨도 없어진 것이 아닌가 두렵소. 나 자신이 누구인지 그대에게 계속 말할 때마다 그대의 반응은 갈수록 시들해져 갔으니, 나를 기억하는 그대는 그 순간에도 죽어 사라져 가는 것만 같았다오.

 

우리가 마지막으로 함께했었을 때, 그대의 솜털에는 생기가 맴돌았고 뺨에는 홍조가 떠올라 있었소. 나 그대에게 여러 밀어를 속삭이고 싶어했듯 그대 역시 내게 무엇인가 털어놓고자 하는 바가 있었소이다. 이제 두 번 다시 그게 무엇이었는지 묻지도 못할 것이 두렵구려. 내가 무엇으로 전락했는지는 나도 잘 모르오. 신경 쓰지도 않소. 여기 서서 어둠 속에 숨어 그대를 바라보고만 있소. 그대도 어둠과 하나되는구려. 아직 나를 기억하는 그대가 살아서 영원토록 그리워할 그대의 반려를 찾아, 위니페그의 밤에 사랑을 속삭이던 그 사람을 찾아 한없는 칠흑 위를 표류하고 있을지 없을지 나는 모르겠소.

 

왜 아파트를 버리지 않소? 심경 지구의 공허한 그림자를 떠나 다른 생존자들에게 합류해야 하지 않소? 그대에게 남은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소. 왜 여기 머무는지 모르겠구려. 내가 돕고 싶소. 도우려고 해 보았소. 그대는 어디로 갈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오. 몸이 아프오? 비곡이 그대까지 침범한 것이오? 우리가 함께했기에, 한데 이어져 있기에 내가 그대까지 나를 집어삼킨 추위와 공포 속으로 끌어당기기라도 한 것이오?

 

그대가 이러고 있는 모습을 더는 눈 뜨고 못 보겠소. 그렇더라도 어떻게 해야 할지 나는 모르오. 셀레스티아 공주님을 알현해 보려던 시도도 수포로 돌아갔소. 전몰자를 기리는 추모 의식이 끝난 뒤, 공주께서는 즉시 캔틀롯을 떠나 블루 밸리 너머의 전장으로 떠나셨소. 내전이 번지고 있소. 이퀘스트리아가 불타고, 나는 내 평생의 사랑을 잃었소. 페눔브라 그대가 자신을 잃지 않을 수만 있다면 내 그 어떤 것이라도 포기할 수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나는 아직도 알지 못하오.

 

위대한 어머니시여, 저는 어찌해야 하오리까.

 

앨러배스터 코멧후프

 


 

조화력 6233년 6월 18일

 

뭔가 이상하다.

 

이런 신세가 되어 버리고 나자, 나이트브링어가 외려 편안하게 느껴진다. 현 한 줄씩을 가만히 퉁겨 보면, 내 안에서 무엇인가 깨어나는 것만 같다. 그러고 보니 위대한 어머니께서 자아내신 노래를 나이트브링어로 연주해 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 머무르시던 구역에 있었던 대규모 폭발은 따져보면 아귀가 맞지 않는다. 우선, 사로스식 폭탄이라고들 말하지만 그 폭탄은 조금도 사로스식 폭탄의 특질과 맞지 않는다. 둘째. 루나가 폭발물을 설치했다는 시간도 사실과 다르다. 폭탄이 설치된 시각이라고 수군대는 시간에, 루나는 나와 야상곡을 옮겨 쓰고 있었다.

 

왜 갑자기 이런 것들이 뇌리에 막 떠오르는지는 잘 모르겠다. 글쎄, 나이트브링어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것일지도. 한기에 찌든 추방자 신세가 되었지만 나이트브링어를 갖고 다니는 것만으로 힘이 난다. 뭔가 하나를 못 보고 넘어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뭔지 몰라도 반드시 찾아내야 할 무언가를 말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야상곡 전체를 연주한 적이 없다. 적어도 내 머릿속에는 '밤의 만장' 이후의 기억이 없다. '어스름 진혼곡', '고적의 애가', '새벽의 강림', 이 셋을 내가 연주했었던가? 아니면 루나 공주가 나를 대신해 나머지 세 곡을 마저 연주한 것인가? 그렇다고 치면 나이트브링어는 내가 아니라 루나에게 가 있어야 할 텐데?

 

페눔브라 그대에게서 과학도의 올바른 자세를 배운 적이 있어 다행이오. 참된 과학도라면 같은 실험을 여러 번 반복하여 결과를 도출해 내야 한다는 것 말이오. 지금 당장 내가 할 일 또한 그와 다르지 않소. '어스름 진혼곡'을 연주하고도 다른 어딘가로 날려가지 않는다면, 내 가설의 옳고 그름을 바로 판별할 수 있을 거요. 그렇더라도 지금 당장은 힘드오. 온몸이 부서질 듯 아프니. 이 모든 것이 시작된 곳으로 돌아가야겠소. 왕궁에 다시 숨어들어 루나 공주의 관할이었던 구역으로 가야 하오. 폭탄이든 뭐든 터지고 난 다음에도 아직 서 있기만 하다면 말이오.

 

뒤에 그대를 남겨두고 가야 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오. 어느 하나 쉬운 일이 없구려. 여기 주저앉아 그대가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는 것도 사람이 할 짓이 못 되니 말이오. 페니, 그대의 아픔은 분명 실존하는 것이나, 그것으로는 어떤 답도 얻을 수 없소. 그대의 몸은 갈수록 약해지고 있다오. 날이 갈수록 걸음걸이도 느려지고 있지 않소. 왜 그대에게 이런 일이 생긴 것인지 나는 모르오. 모든 일을 마치면 바로 돌아와 그대를 간호하기로 셀레스티아 공주께 맹세하리다. 그리하여 나는 구조대원으로 위장하여 그대에게 접근한 것이오. 사로스인 특유의 모습을 숨기는 데 공을 많이 들여야 하기는 했소만, 그래도 어찌어찌 그대를 부축하여 햇빛을 쬐게 하고, 밥을 먹이고 근처 진료소로 데려갈 수 있었소.

 

그럼에도 차도는 보이지 않았소. 지난 이틀 동안 그대 곁을 계속 맴돌며 보살폈지만, 유령은 산 사람을 치유할 수 없기에 결국 유령인 모양이오.

 

그리하여 특단의 대책을 쓸 수밖에 없었으니, 셀레스티아 공주님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고 루나는 걷잡을 수 없는 파괴의 화신으로 변했다면 해결책을 내 두 발굽으로 찾아낼 수밖에 없었소. 내가 연주하지 않았던 3개의 곡으로 야상곡의 잔학한 힘을 끌어낼 수 있다면, 나의 존재를 지워 버리고 그대를 폐인으로 만든 저주 또한 지워낼 수 있을지 모르는 일 아니오.

 

한 번도 기록을 쉬지 않았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에게는 백지나 다름없다지만, 영원히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온 나라가 다 알아야 한다. 루나 공주를 나이트메어 문으로 변모케 한 죄를 묻겠다는 치들이 있겠지만, 마음대로 하라지. 내 사랑 페니가 건강을 회복할 수만 있다면 내게 무슨 일이 생겨도 개의치 않겠다. 페니, 그대를 꼭 낫게 하고야 말겠소. 세상을 원래대로 돌려놓고야 말겠소. 약속하오.

 

앨러배스터 코멧후프

 


 

조화력 6233년 6월 21일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고된 여정이기는 했지만, 다시 왕궁에 숨어드는 데 성공했다. 셀레스티아 공주님께 접근하려 할 때 썼던 수법을 그대로 실행했고, 내 생각대로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다시 코앞에서 폭발만 일어나지 않으면 좋을 터이다. 설마 운명이란 놈이 그렇게 악랄한 놈은 아니겠지.

 

그대로 루나 공주가 거처하던 구역으로 숨어 들어갔다. 바로 십 분 전에 루나 공주의 침전에 도착했다. 모든 것이 그 때 그대로라, 좀 많이 놀랐다. 마지막으로 여기서 연주했을 때 봤던 것처럼 난장판이다. 방바닥과 테이블마다 펼쳐진 책도 그대로다. 책상 곳곳에 펼쳐지고 내걸린 두루마리와 노트도 모두 제자리에 있었다. 11일 전, 나도 모르는 새 온몸을 적신 물이 고여 물웅덩이를 만들었던 자리에 남은 얼룩도 그대로였다.

 

바뀐 게 없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내가 여기까지 기어 들어온 이유가 중요한 것이다. 역시 원점이라 그런가 다른 지점에 비하면 훨씬 따뜻한 편이다. 새 음석을 바닥에 원형으로 늘어놓았다. 비곡 연주를 마칠 준비가 되었다. 발굽으로 나이트브링어를 잡고, 남은 비곡을 연주할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 '어스름 진혼곡'의 가락이 벌써 머릿속에서 용솟음치고 있다. 일 주일에 걸친 고난 끝에, 모든 것이 시작된 자리에 다시 섰다.

 

내 수고가 부디 헛수고로 역사에 남지 않기를.

 

앨러배스터 코멧후프

 


 

?????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無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연주하거라. 연주하여 무가 되거라. 

 


 

?????

 

두 시간 전에 깨어났다. 이마가 피에 젖어 있다. 머리가 두 쪽으로 쪼개질 듯 아프다. 발굽으로 뿔을 만져 봤더니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이 느껴져 절로 비명이 나왔다. 내 뿔의 마력선에 불이 붙어 뿔 끝에 불이라도 붙은 듯했다. 일기장을 보았더니 2페이지 족하게 미친 듯 휘갈겨 쓴 글자가 박혀 있었다. 죄다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뿐이었다. 뿔이 거의 타 버렸다는 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겠다. 대체 뭐 때문에 이걸 갈겨 써놓은 거지? 대체 얼마나 빨리 써갈겼던 거람? 또 무언가에 홀렸던 건가?

 

얼마간 가만히 쉬고 나자 그럭저럭 염동력을 쓸 수 있을 정도로는 회복되었다. 회복이 되기는 했는데, 뭘 더 써야 할지 모르겠다. '어스름 진혼곡'을 연주했었지. 내 기억은 거기까지다. 그 뒤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기억나는 거라곤 어느 순간부터 불현듯 머리가 깨지게 아팠다는 거 하나......

 

잠깐 글 쓰는 것도 그만둬야겠다.

 

코멧후프

 


 

?????

 

이거 대단하군. 루나 공주가 이퀘스트리아 전역에서 긁어모은 고서는 분명 텅 비어 있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 분명히 글자가 쓰여 있다. 전에 못 봤던 이유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 세상의 것은 분명 아닌 듯한 신비로운 빛이 글자를 이루어 어른거린다. 공용어 이전에 쓰이던 고어로 쓰여 있기는 하다만, 어릴 적에 고어 문법을 배운 적 있기라도 한 듯 술술 읽힌다. 궁창 사이의 어둠과 거기 매인 자들, 그리고 노래에 관하여 적혀 있다. 그 노래를 부르는 자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다. 아름다운 만큼이나 잔혹한 이라고 한다. 그녀는 잊힌 자들을 지키는 자이다. 영영 돌아오지 못할 그이를 위하여 곡하는 자이다. 게다가, 내 일지의 지난 2페이지를 보니 내가 끝없이 반복해 적었던 글도 고서의 글자와 같이 신비로운 빛으로 반짝이고 있다.

 

잠깐. 그러면......?

 

펜이나 놀릴 시간은 없다. 읽어야 한다.

 

코멧후프

 


 

?????

 

머리를 또 다쳤다. 전에 썼던 일지를 다시 읽어보았다. 셀레스티아 공주님을 뵈러 왕궁에 잠입했을 때 폭발한 폭탄에 관하여 적어놓은 부분을 읽었다. 그 때 무언가가 일어났다. 내가 썼던 글자, 어쩌면 내가 썼다고 생각한 그 글자를 바라본 순간, 그 너머로 무엇인가 보이기 시작했다. 내 시야가 얼음과 쇠사슬, 벼락의 굴뚝 너머를 바라보는 것이기라도 한 양 말이다.

 

순식간에 밀려들어온 기억을 감당할 준비는 전혀 하지 못했다. 나는 그대로 쓰러졌다. 진실이 마력선을 따라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동안에도 방 안에 흐릿한 빛이 일렁거렸다. 폭발 따위는 없었다. 폭탄도 없었다. 나는 셀레스티아 공주님을 만났다. 확실하다. 내가 직접 겪은 일이므로, 나는 안다. 근위병 사이로 숨어들어, 태양의 공주를 방위하는 방어선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나는 나이트브링어를 높이 들고 셀레스티아 공주님과 최고 지휘관들 앞에 섰다. 그리고 진상을 밝혔다. 야상곡에 대해서도 말했다. 셀레스티아 공주께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물으셨을 때, 나는 직접 보여 드려야겠다는 충동에 휩쓸렸다. 결국 그 이유가 무엇이었든, 루나가 아닌 셀레스티아 공주의 면전에서 나는 다시 야상곡을 연주하고야 만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왕궁을 휘감은 대폭발이었다. 사로스인의 폭탄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셀레스티아 공주 본인이 폭발했다고 보는 편이 알맞을 것이다. 해가 뜬 것처럼 명확한, 궁극의 진실을 여기 적어둔다. 밤의 만장까지 이행하기도 전에, 셀레스티아 공주님의 정수가 야상곡에 반응하여 격렬한 임계 반응을 일으키더니, 공주님 시야의 모든 것을 공격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사방으로 태양의 힘을 방출한 것이다. 비명을 지를 수도 없었던 그 무시무시한 파괴 앞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제 생각해 보니, 사로스인이 설치한 폭탄이라는 것은 내가 그렇게 믿기로 한 것뿐이었고, 나는 그걸 그대로 일지에 적은 것이었다...... 아니, 내가 쓴 것을 믿기로 한 것일지도 모를 일.

 

나 혼자만 그 자리에 있던 게 아닌 점은 명백하다. 그럼에도 셀레스티아 공주님을 비롯해 그 주변에 있다가 불타 죽은 참모들, 캔틀롯 내외의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폭탄 테러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 하나만의 기억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기억을 조작해 버리는 모양이다. 역사는 그렇게 다시 쓰일 것이다. 야상곡이 형태를 갖춘 그것처럼. 지금 생각해 보아도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기는 하다. 왜 나 혼자에게만 진상이 명확히 드러나 보이는 것일까? 이제야 보이는 빛의 글자들과 연관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어스름 진혼곡'의 영향인가?

 

진실을 알아낼 방법은 단 하나. 여기 있는 문헌을 죄다 읽어보는 것이다. 특히, '궁창의 야상곡'을 처음으로 연주했을 때 적은 일지를 찾아봐야겠다. 그 때도 뭔가 바뀐 게 있을지 모르는 일 아닌가?

 

앨러배스터 코멧후프

 


 

?????

 

숨쉴 때마다 구역질이 난다. 펜 들 힘도 없다. 생각하기도 귀찮다. 기다리자. 몸을 추스려야 한다. 글은 나중에 쓰겠다. 지금은 아니다. 나중에 쓰겠다.

 

위대한 어머니시여, 저를 긍휼히 여기소서,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막 일어났다. 차라리 잠든 것이었기 바란다. 악몽이 현실이 아니길 바란다. 그렇더라도 악몽은 현실이었다. 내 머릿속에 불로 찍은 낙인처럼 박혀 있다. 지울 방법은 없다. 적어도 내게 진실을 잊을 방법은 없다. 나의 귀는 노래하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것이요, 두 눈은 저주받은 자들을 위한 것이며, 네 다리는 영원토록 잊히고 말 운명에 예속된 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야상곡을 연주하고 난 뒤 물웅덩이에서 일어났다고 쓴 일지를 읽었다. 그것만으로 온전한 진실이기를 기도했건만, 드러난 진상은 내가 통과해 온 어둠을 한데 모아 겹친 것보다도 잔혹하고 어두운 것이었다.

 

다른 어딘가에 다녀왔다. 헤아릴 수 없이 춥고 끔찍한 곳이었다.

 

나는 거기 혼자 있었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영혼을 가둔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지만, 수도 없는 시체가 널려 있었고 하나같이 녹슨 쇠사슬에 매여 있었는데, 그 끝은 무한히 뻗어 보이지 않았다. 한없이 쳐대는 천둥과 벼락 사이로 얼음처럼 차가운 바다가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저희끼리 엉겨들었고, 그 위로 단단한 강철로 된 발판이 여럿 있었다. 지옥과도 같은 기계에 수도 없이 많은 이들이 매여 있었는데, 소름끼치는 노래를 하는 것만으로 바빠 지금껏 자기들이 겪은 고통의 시간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녀가 거기에 있었다. 항상 그곳에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그이가 여기에 왔다가 다시 떠나고 나서도 그녀는 그곳에 있었다. 궁창 사이의 연옥에서 자신의 끝없는 노래를 흐느껴 부르며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노래였다. 궁창의 야상곡, 그것은 그녀의 노래였다. 단 한 순간도 그녀의 노래가 아닌 적이 없었다. 그것은 그녀를 위해, 그녀를 보호하고 가두기 위해,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였다. 그러니 루나 공주와 내가 버려진 노래를 심연에서 건져 올린 일련의 과정은 단순히 옮겨 쓰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것을 발견한 것이다.

 

루나 공주라... 생각해 보니 루나 공주와 셀레스티아 공주, 이 둘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이한 알리콘이라 여기고 있었다. 이제 그 충심도 의미와 목적을 잃어 공허해져 있으니, 내 한없는 절망의 핵심이었다.

 

진실은, 세상에 알리콘이 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셋이 있었다. 위대한 어머니께서 스스로를 쪼개신 결과, 태어난 것은 셋이 아닌 넷이었다.

 

그것이 세 번째 알리콘, 둘째 딸, 맏이도 막내도 아닌 아이. 셀레스티아 공주가 대지를 수호하고 루나 공주가 창공을 수호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는 이름 없는 자들Unsung을 수호한다. 그녀는 두 궁창과 궁창 사이를 통치하는 여황일지니. 그녀는 우주를 찢어발기는 것으로 우주를 하나로 묶는다. 루나 공주가 의도한 바인지는 모르겠으나 십 년 동안의 칩거, 어둠 강림의 시대 동안 지나치게 깊이 명상한 끝에 세상 사이의 공간을 보게 된 것이다. 어떻게 그곳까지 스며 들어가서 금단의 지식을 얻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따지고 보면 위대한 어머니의 한 편린이기도 하니, 그 정도의 권능은 있었을지도 모를 일. 그렇게 잊힌 자매와 선이 닿기는 했을 터이나, 저편에 뭐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 때문에 루나 공주가 이 꼴이 된 것이다.

 

나는 그 한가운데에서 둘 사이를 이어주는 역할이었다. 나이트브링어를 열쇠 삼아 세상이 잊은 비탄만이 가득한 세상의 문을 열어 버린 것이다. 루나 공주야 워낙 막강한 마력을 지니고 있으니, 이름 없는 자들의 땅에서 밀려오는 기운에 완전히 굴복할 일이 없었을 터다. 아마 그것 때문에 루나 공주의 인격이 반으로 쪼개진 게 아니었을까. 한때 내 신앙과 숭배의 대상이었던 어둠의 여신은 이제 세상에 없다. 나를 캔틀롯으로 불러들이기 전부터 파괴의 씨앗이 그 안에 심어져 있었을 것이고, '궁창의 야상곡'은 다만 루나 공주를 선 너머로 살짝 밀어주기만 한 계기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루나는 나이트메어 문이 되었고, 이제 이 땅에 파멸의 복음을 전하려 한다. 무슨 의도인지는 잘 모르겠다. 세상을 완전히 쓸어 버리고, 이름 없는 자들의 땅과 같은 모습으로 색칠해 버리려는 것일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세상을 끝없는 밤으로 뒤덮어 버리고 이퀘스트리아를 검은 캔버스 삼아 버려진 노래가 영원히 흐르게 하려는 생각일 수도 있겠지.

 

확실한 것은, 루나 공주가 이제 잊히고 버려진 무언가와 재접선을 시도한 것은 모두 선의였다는 것이다. 셀레스티아 공주께서 진실의 한 편린을 목도하시자마자, 즉 이름 없는 노래를 들으시자마자 내보인 사나운 폭발도 설명이 된다. 나이트브링어가 두 궁창 사이에 봉인된 공간을 해방하려 하니, 그 연주를 제거하여 봉인을 수호하기 위한 본능적 방어였다.

 

폭발 이후 셀레스티아 공주님은 뒤처리를 시작했다. 내가 현실 세계에 만들어낸 균열을 메워야 했기에, 현실을 다른 형태로 가공하여 빈 자리를 채워 넣은 것이다. 루나 공주 앞에서 그랬다가는 지금 여기서 이 글을 적고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루나 역시 집단무의식에서 이름 없는 자들의 존재를 몰아내야 하는 존재였으니. 이제는 너무 늦었다. 이미 벌어진 피해는 돌이킬 수 없다. 루나 공주는 이제 궁창 사이의 땅으로 무고한 이들을 밀어 넣는 비탄의 존재가 되어 버렸다. 뇌제雷帝, 나이트메어 문이 되어 버렸다.

 

더욱 깊은 심연 아래 또 어떤 끔찍한 진실이 꿈틀대고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기는 하나, 더 나아간들 헛수고만 하는 게 아닐까 두렵다. 불멸의 알리콘이 아닐지 몰라도 나이트브링어가 있다.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금단의 지식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라도 바람에 날리는 재처럼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보이지도 않고 형태도 없는 살아 있는 통로나 다름없다. '어스름 진혼곡'이 눈을 틔워 주고서야 알았다. 내 존재 자체가 궁창 사이의 균열이다. 내가 현실 세계와 이름 없는 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한, 나는 결국 몸 없는 유령으로 영원토록 이름 없이 궁창 사이를 떠돌게 될 운명이다.

 

내게 선택권이 남아 있기는 한가? '밤의 만장'을 다시 연주할 수도 있겠지. 그렇다고 뭐가 바뀌나? 그녀의 영역에 다시 발을 딛게 될 뿐이다. 천둥과 혼돈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발판에 묶인 다른 사람들처럼 그 여자의 꼭두각시가 될 뿐이다. 거기 있던 입 묶인 자들은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가? 옛날에도 나처럼 끔찍한 저주를 짊어진 자들이 있었는가? 그래서 루나 공주의 연구에 동원된 고서가 그토록 많았던 것인가? 나도 결국 망각과 마주보는 세상에 내걸린 녹슨 사슬처럼 끝도 없이 이어진 저주받은 자들의 대열에 낀 한 명에 불과했다는 것인가?

 

하늘에 계신 위대한 어머니 맙소사. 이제 머리도 굴러가지 않는다. 숨 쉬기조차 어렵다. 어디로 좀 가야겠다. 여기만 아니라면 그 어느 곳이라도 상관없다. 저 책더미가 어떻든, 색 없는 색으로 빛나는 글자가 어떻든 달아나고 싶다. 얼음처럼 차가운 이빨로 나를 좀먹어 들어가는 죽느니만 못한 운명이 눈 앞에 어른거린다.

 

가야 한다. 어디라도 가야 한다. 어디든......

 

앨러배스터 코멧후프

 


 

?????

 

하느님 맙소사. 사방에 깔렸다. 명확히 보인다. 처음에는 흐릿하게 보이더니, 나이트브링어로 '어스름 진혼곡'을 연주하자마자 길바닥을 비롯해 사방 천지에 아주 또렷하게 형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시체다. 말이다. 대학살이 있던 무렵 무너져 내린 잔해와 함께 사방에 튀긴 핏자국과 이름이다. 진혼곡을 다시 연주하기 전에는 보이지 않더니, 이제는 보인다. 어딜 보든 없는 곳이 없다. 이걸 적는 와중에도 내 머리 바로 위에 목 매단 사람의 형상이 어른거리고 있다. 내 일지에 쓰인 글자, 루나가 들여다보던 책더미 속 글자와 똑같은 빛으로 반짝이고 있다. 부패 정도가 심각해 보인다. 뼈가 드러나 보일 정도니까. 차가운 입김 같은 안개를 흩뿌리고 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안 보이는 모양이다. 얼마나 오래 여기 매달려 있었을까? 그녀가 저 사람을 찾아내어 자기가 거처하는 심연으로 끌고 들어가 사슬에 매어 영원토록 자신을 숭배하게 겁박할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나를 찾아내는 건 언제쯤일까? 내가 쓰러져 죽은 다음인가, 아니면 더는 그녀를 피해 달아나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진 다음인가?

 

나이트브링어가 있고, 지식이 있다. 나는 실존하고, 어떻게든 답을 찾을 것이다. '고적의 애가'와 '새벽의 강림'은 연주해 볼 만 할 것이다. 야상곡 전체를 연속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해 낸다면 뭐가 달라질 수도 있으리. 어쩌면 아직......

 

가만. 오늘이 며칠이지?

 

코멧후프

 


 

조화력 6233년 6월 26일

 

닷새가 지났구려. 하늘에 계신 위대한 어머니 맙소사. 닷새가 지나 버렸단 말이오. 어쩌자고 이렇게나 오래 정신 못 차리고 죽치고 앉아 있었단 말이오?

 

사랑하는 페니, 지금 가오.

 

앨러배스터

 


 

조화력 6233년 6월 26일

 

페눔브라, 집에 없더구려. 아파트가 텅 비어 있었소.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어디로 갔단 말이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알고 있으나, 잠깐의 부주의가 이런 결과를 낳을 줄은 꿈에도 몰랐소.

 

그대의 건강이 죽 좋지 않았소. 걱정되오. 어디로 갔소. 그대를 찾아야겠소. 그대를...

 

페가수스 병사 하나가 인근을 날아가고 있었소. 불러세워 물었더니 여기 살던 사람 말이냐며, 이틀 전쯤에 시가지 쪽 야전 병원으로 이송되었다고 알려주었소. 셀레스티아 공주님 감사합니다. 지금 가오. 기다려 주시오. 내가 늘 그대를 기다리는 것처럼, 나를 기다려 주시오.

 

앨러배스터

 


 

조화력 6233년 6월 26일

 

아니, 이럴 수는 없소. 세상이 이럴 수는 없소.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단 말이오. 마법이 이리 쉽게 깨질 리가 없소. 이미 정해진 운명 위에 또 다른 현실을 끼워 맞출 수 있든지 없든지는 이제 더 내 알 바 아니오. 아닐 거요. 지금껏 머리 싸매고 공부하고 연구하던 게 다 무엇을 위해서였단 말이오...

 

나는 절규했소. 이름 없는 자들의 땅에서보다도 큰 소리로 절규했소. 그 누구도 내 울음을 듣지 못했소. 그대도, 듣지 못하였소.

 

루나 공주, 이 빌어먹을 년. 위대한 어머니께서 벼락을 내리쳐 날 쳐죽이든 말든 상관 않소. 나이트메어 문, 갈아마셔도 시원치 않을 년 같으니. 불타 죽을 때까지 타르타로스 가장 깊은 나락에 처박혀 버려라.

 

이럴 리가 없소. 이럴 리가. 이럴 수가 없소. 이럴......

 


 

조화력 6233년 6월 27일

 

스물네 시간 동안이나 그대의 발굽을 잡고 있는데, 움직이지 않는구려. 이곳은 간호사가 자주 들락거리오. 지날 때면 이쪽을 흘끗 보더니, 그대의 빛나는 얼굴 위로 멱목冪目*8을 잡아당겨 덮어 버리오. 이제 그냥 그러려니 하오. 굳이 다른 사람들 구경거리 만들어 줄 필요는 없잖소. 그저 간호사가 갈 때까지 가만히 있다가, 다시 천을 잡아당겨 그대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오. 사랑하오. 이대로 계속 그대 얼굴을 보고 싶소. 이대로 그대 발굽을 잡고 있고 싶소. 도저히......

 

두 달이라고, 간호사가 그러더이다. 임신 2개월이라고 말이오. 내 사랑하는 페눔브라, 왜 말하지 않았소? 내가 그토록 눈이 멀어 있었던 거요? 캔틀롯으로 새 연구를 하러 간다는 희열에 눈이 멀어 아무것도 보지 못했던 거요? 2개월이면 우리가 위니페그를 떠나 이사 오기도 전 아니오. 그 때 알기만 했더라면, 공주의 소환이고 자시고, 응하지 않았을 거요. 절대......

 

이제야 알았소. 차라리 깨닫지 못했다면 좋았을 것을. 그대가 무기력했던 것도, 한때 햇빛이 깃들어 있던 두 눈에 권태와 피로만이 가득했던 것도 다 그것 때문이었소. 그대의 세상에서 나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버렸는데. 아아, 우리 집은 일순간 모르는 집으로 바뀌었을 거요. 뱃속에서 자라던 아이도, 이름 없는 자의 씨요 공허한 목숨이었을 것이오. 그것이 그대를 그렇게 만들었구려. 그대의 안에서부터 산산이 찢어놓고 말았구려. 자는 동안에도, 가만히 생각하는 동안에도, 흐느껴 우는 동안에도 그 사실에 몸이 얼어붙고 말았을 거요. 그대와 내가 함께 살아갈 수 있게 해주었던 것들이, 한순간에 뜯겨져 나간 거요. 왜 세상의 이치라는 노래가 그대를 치료하지 못한 게요? 왜 그대가 죽게 했어야 했던 게요? 내가 그대의 생에서 사라지더라도 그대는 계속 살아갈 수 있었고, 어머니가 될 수 있었고, 행복할 수 있었을 텐데.

 

이제 알겠소. 이름 없는 자들에 관한 사실을 알고 있으니, 나는 루나 공주만큼이나 현실 세계에 위협이 되는 존재가 되었소. 루나야 무시무시한 폭군인 나이트메어 문으로 변모했다지만, 그 이전에는 그래도 통제가 어느 정도 가능한 악이었지. 나의 모든 언행은 세상이 잊어야 하오. 세상에 남긴 자취도, 돌길 위의 낙엽처럼 신속히 쓸려 사라져야 하오. 그 어떤 방식으로든 나는 존재해선 아니되오.

 

그년이 우리 아이를 앗아갔소. 우리 아이에 이어, 그대까지 빼앗아갔소.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나, 이해가 되는 것도 아니오. 글도 더 쓰기 힘들구려. 그대의 발굽을 잡은 채 이 모든 게 그냥 부서진 노래의 한 편린이기를, 너무나 감쪽같은 모습이지만 결국 한여름밤의 꿈에 지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밖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소. 어딘가 그대가 나처럼 형태도 갈 곳도 잃고 외로워하고 있을 걸 아오. 이제야 서로를 마주볼 수 있게 되었건만, 부서진 노래가 우리를 갈라놓는구려.

 

다시 짜맞출 수 있소. 다시 짜맞추어, 우리 함께했던 시간을 되돌리고야 말겠소. 일지에 글자를 새겨 넣으며 가만히 보고 있는데, 아직도 빛의 글자로 바뀌지 않는구려. 진혼곡을 다시 연주해야 할 때가 된 듯하오. '고적의 애가'는 내가 알 수 없는 영역이오. 다른 건 대체로 다 기억하는데, 유독 이것만큼은 머릿속에 없구려. 루나 공주의 기억도 흐릿해져서 그런 모양이오. 나이트메어 문의 권능이 내 머릿속에서 그 곡의 기억만 빼돌렸을 수도 있겠구려. 상관없소. 계속 찾아 나가면 그만이니. 나이트브링어가 있고, 야상곡이 내 머릿속에 있소. 고적의 애가 따위야 다시 쓰면 되오. 계속해서 연주하고 또 연주하다 보면 '새벽의 강림'에 다다를 수 있을 테요.

 

그 날이 오면 페니, 내 사랑,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거요. 이 세상은 내 눈앞에 누워 자신이 그대라고 주장하는 한 구 시신처럼 거짓과 허위로 짜맞춘 허깨비요. 기다려 주시오, 내 사랑. 그대는 항상 나를 기다려 주었잖소. 두 다리를 쭉 펴서 나를 끌어안는 그대가 어디엔가 있을 것이오. 사슬에 옥죄여 나를 기다리지는 않을 것 아니오. 그대는 분명 아직 이 차가운 감옥 어딘가에 있소. 우리는 혼자가 아니오. 언제고 다시 만날 게요. 언제라도 말이오. 그 날이 오면......

 

그대를 사랑하는 앨러배스터

 


 

"여기, 이 지점부터..." 트와일라잇이 기거하는 도서관의 어느 책상 위, 펼쳐진 고서 위로 고개를 숙이며 가리켜 보였다. "기록이 일관성을 급격히 상실하기 시작하죠. 코멧후프 박사 본인도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고 있어요. 자기 말의 꼬리를 잡아 가며 계속 이야기하지만, 결국 원래의 지점으로 돌아오고 있죠. 사람이 미쳐가는 과정의 표본이라고 해도 될 정도에요. 아무 말이나 주절거리는 기록이기는 하지만, 곳곳에서 낯익은 말들이 포착되기도 해요. 이를테면 '이름 없는 자들'이나 '그이' 처럼. 그렇더라도 대부분은 말 그대로 종잡을 수 없는 헛소리죠. 박사 본인이 그려놓은 도표가 있긴 한데, 그것도 의미를 알 수 없답니다. 비곡이라는 것의 악보를 옮겨 적은 부분은 전혀 없지만, 그 기묘한 부작용에 관해 코멧후프 박사가 적어놓은 걸 보다 보면 그래서 이 인간이 원하는 게 대체 뭔가 싶어진단 말이죠. 뭐 애초에 아무도 못 읽을 거라고 전제하고 써놓은 글이긴 하지만."

 

"글쎄요, 이런 말씀 드리긴 좀 그렇습니다마는......" 트와일라잇이 갈피를 못 잡겠다는 듯 잔뜩 찌푸린 얼굴로 대답했다. "이게 전부 사실인지도 전 모르겠거든요. 일반적으로 학교에서 가르치는 바에 따르면, 어둠 강림의 시대 막바지에 셀레스티아 공주님이 이끄는 내각 회의실에서 대폭발이 일어남과 동시에 내전이 발발했다고 하잖아요. 그쪽 얘기는 지금 국사를 완전히 새로 쓰는 거나 마찬가지란 얘기죠!" 도서관 밖은 나른한 오후였고, 나긋한 햇살이 창 안으로 밀려들어와 눈살을 찌푸린 트와일라잇의 이마를 가만히 비추었다. "게다가, 그쪽이 가져오신 책도 말씀하신 거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자료에요. 옛날 위니페그의 농사법을 적어놓은 책이니까. 뭐 '앨러배스터 코멧후프 박사'란 사람의 글이 뭐 마법 같은 것처럼 그 위로 두둥실 떠오르기라도 한다, 그런 말씀이신가요?"

 

"네. 제 생각에는 코멧후프 박사 사후 사람들이 캔틀롯 길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이 일지를 찾아낸 것 같아요. 열어 봤자 코멧후프 박사가 쓴 글은 보이지 않았을 테니, 그냥 텅 빈 공책이다 싶었을 테죠. 곧장 국립도서관에 넘겨 다른 자료를 만드는 데 써 버렸을 거에요. 그렇게 수십 년이 지나고 나서는 위니페그 연감 기록이 되었겠죠."

 

"그건 그렇다고 쳐요. 코멧후프 박사의 글이 그쪽에게만 보이는 이유가 설명이 안 되잖아요!" 트와일라잇이 말했다. "코멧후프 박사가 보이지 않던 글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 그 저주인가 뭔가 하는 것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그게 그쪽과 어떤 관계가 있다는 거죠?"

 

"이상한 얘기인 건 저도 알아요. 다만, 그렇더라도 코멧후프 박사의 기록은 제게 너무나 명확한 현실이에요. 그뿐이겠어요. 지금 제 신세가 어떤지, 제가 했던 그 어떤 생각보다도 정확하게... 아니지, 신경 쓴 것보다도 정확하게 짚어 주고 있는걸요."

 

"신세라뇨?"

 

나는 한숨지었다. 너무 많은 걸 말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은 아니다. 내가 원한 것은 이 이야기를 관심 있게 들어 줄 수 있는 역사 애호가지 토론 상대가 아니었다. "뭐 그건 상관없어요. 내전이 시작된 때, 캔틀롯의 심경 지구에 살았다는 '페눔브라 코멧후프'란 사람에 관해 알고 계신 게 있나요?"

 

"그거야 언제라도 기꺼이 말씀드릴 수 있지요, 하트스트링스 씨. 어떤 게으름뱅이 보조사서가 가져와 달라고 한 자료는 못 찾고 꼬리나 질질 끌고 다니지 않는다면 말이에요!"

 

스파이크가 뒤뚱거리며 방에 들어섰다. 양반은 못 될 모양이다. 그는 헉헉거리며 먼지가 켜켜이 쌓인 낡은 두루마리 하나를 건넸다. "자, 찾아왔어. 처음 보는 사람이랑 갑자기 역사 공부를 하겠다니 이해가 안 되네. 한 시간만 있으면 슈가큐브코너에서 저녁 약속한 시간이라고?"

 

"쉿! 두루마리나 이리 내, 스파이크! 얘기가 막 재밌어지려고 한단 말야..."

 

"그래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스파이크가 이쪽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하고 말했다. "오. 안녕. 후드 멋진데."

 

"감사." 나는 트와일라잇에게 시선을 돌렸다. "뭐라도 있나요?"

 

스파이크가 발을 질질 끌며 나갔다. 트와일라잇이 양피지 두루마리를 펼쳐 인명 하나하나를 읽어 내려갔다. "네. '페눔브라'라는 어스 포니에 관한 기록이 있기는 하군요."

 

"그래요?"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 외엔?"

 

"뭐, 이게 전부네요." 트와일라잇이 어깨를 으쓱하며 이쪽을 쳐다보았다. "성은 남아 있지 않아요. 결혼했는지 아닌지도 지금은 알 수 없죠. 기록을 보니 나이트메어 문이 캔틀롯 침공을 개시했을 당시 심경 지구에서도 손꼽히는 고급 주택가의 비싼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었다는군요."

 

"사인死因은 나와 있나요?"

 

"잠깐만요. 옛말은 좀 서툴러서." 트와일라잇이 말하며 두루마리에 적힌 글자를 읽었다. "임신 초기 영양실조로 인한 용혈성 빈혈이라......" 트와일라잇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마주보았다. 깊이 빠져들었던 생각의 흔적은 인정할 건 인정하자는 분위기 속에 신속히 삭감되었다. "크흠. 그래도 말이에요, 무려 천 년 전 일이라고요. 신뢰할 수 없는 출처의 정보가 역사를 뒤틀어 놓는 데는 충분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독신 어스 포니 여성이 친척도 가족도 남편도 없이 캔틀롯에서도 비싼 아파트에 혼자 살며 사로스인 이웃들과 부대꼈던 것도 의심해 봐야 하지 않나요? 게다가, 페눔브라의 사인은 당시 캔틀롯 의료 수준으로 충분히 예방 가능한 임신 합병증이잖아요?"

 

"내전 발발 직후의 일이잖아요. 온 캔틀롯이 불길에 휩싸여 있었지요. 식료품이든 의약품이든 귀했을 거에요."

 

"그래요, 그래요." 나는 투덜대면서 도서관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가 잘못된 것일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선 결국 설득할 수 없었군요. 뭐, 내가 뭐라고 말하든 어떤 근거를 가져다 들이밀든 얼마 지나지 않아 죄다 잊어버릴 테니 상관 없으려나."

 

트와일라잇이 나를 째려보며 말했다. "잠깐. 그거 무슨 뜻으로 한 말이에요?"

 

"나도 몰라요, 트와일라잇. 내가 뭘 더 생각할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으니까." 나는 옷소매 속으로 발굽을 집어넣고, 아파 오는 머리를 문질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코멧후프 박사의 뒤를 내가 그대로 따라가는 듯한 느낌이 자꾸 든단 말이죠. 어쨌든 그 사람이 셀레스티아 공주께 야상곡의 존재를 고하러 왕성에 들어섰을 때 어마어마한 마력 폭발에 휩쓸렸던 건 확실해요. 다만 그 사실은 빠르게 잊혔고, 그 대신 사로스인 첩자가 폭발물을 들여와 폭파했다는 식으로 다들 받아들였죠."

 

"음...?" 트와일라잇이 마른침을 삼키며 내 앞으로 다가섰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하나 여쭤 볼 게 있어요." 나는 고개를 돌려 트와일라잇을 마주보았다. "하계 태양절 축제 이후 셀레스티아 공주께서 포니빌을 방문하신 게 몇 차례나 되지요?"

 

"으음... 뭐, 한번 세 볼까요." 트와일라잇이 생각에 잠겨 턱을 긁적였다. "나이트메어 문이 구마되었을 때 한 번, 슈가큐브코너에서 티 파티를 하실 때 한 번, 낙엽 달리기 축제 때 한 번."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외쳤다. "아! 포니빌 방문 일정이 한 차례 잡혔던 게 있긴 있네요. 패러스프라이트 창궐 때문에 몇 달 뒤로 미뤄졌지만." 트와일라잇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물었다. "이건 왜 물으시죠? 포니빌에 일 년 넘게 체재하셨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설마 여기 계신 동안 한 번도 셀레스티아 공주님을 뵌 적이 없었나요?"

 

"바로 그거에요. 트와일라잇." 나는 침을 삼키며 도서관 구석, 먼지 쌓인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그런 기억이... 없어요."





 

교향곡을 완성하는 것으로 저주가 풀릴 것이라고, 지금까지 믿어왔는데.

 

이제 그 무엇도 확실치 않다...

 

 

 


 

백그라운드 포니 후반전이 시작됐습니다. 완역될 때까지도 장기 프로젝트로 전환한 챕터 1~4의 재번역이 안 끝났다면, 일단 그것부터 마무리한 뒤 원문 펼쳐놓고 나머지 챕터를 검수할 예정입니다. 이 작업까지 끝나면 백그라운드 포니 번역 작업은 공식적으로 마무리됩니다. 그 이후에도 미처 발견하지 못한 오자나 오타 등이 포착되면 자잘하게 고치기는 하겠습니다마는 재번역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저도 인생 살아야죠.

 

완역 후 최종검수 때 여기 달린 각주들도 싹 교정, 첨삭할 예정입니다. 지금은 나오는 대로 막 써갈기고 있지만 그 때가 되면 좀 더 정제된 문장으로 핵심적인 부분을 짚고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네요'. 확신은 못 합니다. 그 때 되면 진지한 각주로 바꿀 테니 지금 쓰는 각주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겠죠.

 

9장을 궁창穹蒼으로 옮겨서 다행입니다. 설마 했는데 정말 창세기를 갖다 썼을 줄은 몰랐죠. 그 챕터만 미리 훑어보고 번역하다 보니 다음 장과도 안 맞는 부분들이 간혹 보입니다. 이런 곳들도 최종 검수하면서 수정할 예정이에요. 완역이 된다면야.

 

나이트메어 문 내전의 전개과정을 묘사한 부분인데, 꽤 마음에 듭니다. 저는 코믹스 같은 건 안 보니까 원작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네요. 코믹스로 나오긴 했나? 팬픽션 중에서는 나이트메어 문 내전 발발 직전까지의 내용을 당대 사람의 입장으로 꽤 잘 풀어낸 작품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이래서 SS&E를 못 끊죠.

 

앨러배스터 코멧후프를 묘사한 팬아트는 더피부루에서 달랑 3장밖에 찾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 중 그나마 나은 한 장만 올려둘 거에요. 사실 다 또이또이합니다. 한 사람이 다 그린 듯...

 

 

#919364 - fanfic, fanfic:background pony, oc, oc:alabaster comethoof, oc only, safe, sarosian, simple background, solo, transpar

Syntax quick reference: *bold* _italic_ [spoiler]hide text[/spoiler] @code@ +underline+ -strike- ^sup^ ~sub~ … [==stuff you don't want textile to parse==] Links: "On-site link":/some-link, "External link":http://some-link Images: >>1 — link to image, >

derpibooru.org

 

요건 나이트브링어를 묘사한 팬아트입니다.

 

 

Nightbringer by LimreiArt on DeviantArt

 

www.deviantart.com

 

미주

 

*1 Sarosian. 일명 Bat Pony. SS&E는 본인이 쓴 모든 이야기에서 bat pony보다 Sarosian을 더 즐겨 사용합니다. EoP, Background Pony, Saros, Austraeoh 등에서 등장하며 작중 비중이 그나마 큰 작품은 Austraeoh 시리즈입니다.

 

*2 Night Guards. 이쪽은 근위대원으로 복무하는 사로스인에 가깝습니다. Royal Guards를 왕실근위대로 번역하기 때문에 이것만 나이트 가드라고 옮기면 일관성이 없어 깊은 밤을 뜻하는 한자어 深更을 이용해 심경근위대로 번역했습니다.

 

*3 원래는 항아비곡을 옮긴 과정과 비슷한 번역어 도출 과정을 거쳤었습니다. 그렇기는 했는데 항아비곡이란 것은 신화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기는 합니다마는, 비록 멸실된 것이나마 사람의 기록에 남아 있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나이트브링어는 이퀘스트리아 창세신화 속 신물이지요. 현실의 신화 속 신명이나 도구는 대체로 이름에 뜻을 담고 있다지만 옮기면서 뜻 그대로 옮기지는 않잖아요? 북구 신화를 예로 들어 봅시다. 윗턱이 하늘 끝에 닿고 아랫턱이 땅 끝에 닿는다는 펜리르는 '늪에 사는 자'란 뜻이지만 '늪부살이'라고 옮기지 않고, 그 펜리르의 아가리를 찢어 그 사이로 칼을 찔러넣어 죽였다는 비다르의 이름은 '넓히는 자'지만 '벌려넓힘이' 라고 번역하진 않았죠. 토르의 묠니르를 '파괴자'로 옮기지 않고 슬레이프니르를 '미끌걸이'라고 옮기지 않습니다. Lunar Elegy는 루나가 처음에 쓴 '궁창의 야상곡'이란 제목이 전해지지 않았거나 왜곡되어 전해지는 과정에서 사람이 만들어낸 조어 같은 거라 항아비곡이라 옮기더라도 별반 문제가 되지 않지만 나이트브링어는 실존하는 것이더라도 그 실존이 극비에 붙여져 있어 일반 대중 사이에서는 엄연히 신화 속 신물로 받아들이는 모양이라, 음차했습니다.

 

*4 Timbucktoo. 아프리카 말리 공화국 중부에 위치한 도시 팀북투Timbuktu의 변형.

 

*5 Chapter 08의 마리스 라벨Mareece Ravel과는 다른 인물. 메어리스 라벨이 마리스 라벨의 선조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6 사건, 사상의 지평선. 일반 상대성이론에서 '경계 내부에서 일어난 사건이 경계 외부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경계면'을 의미합니다. 대표적 예시로 블랙홀의 바깥 경계를 들 수 있는데, 이 경계면 위에서는 물질이나 빛이 빨려 들어갈 수 있으나 그 안쪽에서는 블랙홀의 중력이 탈출하려는 빛의 속도를 초과하므로 외부로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여기서 굳이 threshold 같은 표현을 쓰지 않은 것은 블랙홀의 사건의 지평선에 빗대기 위함으로 보입니다.

 

*7 괴다. 고유어로, '특별히 귀여워하고 사랑하다'의 예스러운 표현. 현대 국어에서 이 의미로는 대체로 쓰이지 않습니다. 대중매체에서 그나마 쓰인 용례를 찾자면 대장금 사운드트랙인 <하망연> 정도. 좋은 곡이니 들어 보십시오.

 

*8 멱목. 시신의 얼굴을 덮는 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