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에게.
사람이 자기 주변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방법이 무엇일까? 지역 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아 하면 될까? 한 사람 한 사람을 살뜰히 챙기면 될까? 아니면 다만 어둠 속에 숨어 멀찍이서 현을 퉁기는 것으로 족할까?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면 어떨까?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자기가 아는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만은 같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은 그 사람이 이룬 것이 무엇인지, 선을 이루었는지 악을 이루었는지 알 길이 없고 처음부터 그 사람에게 고마워해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한다면, 어떠할까.
진실을 재발견하는 나날의 연속이야. 지금까지 포니빌은 나를 가둔 감옥과 같았고 궁창 사이의 세상은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아주 오래 전에 배웠던 무엇인가를 흔들어 깨우고 내게 다시 가르쳐 주었어.
세상을 살 만한 곳으로 가꿔 나가는 것은 그 핵심이 되는 부분을 더하거나 빼는 걸로만 이루어지지 않아. 창조와 파괴는 우리에게 주어진 요소들이 변화하는 한 과정일 뿐이거든. 우리 스스로가 세상을 녹이고 주조하는 용광로라는 사실은 너무 당연해서 금방 잊어버리기 마련이지. 사실 문제를 해결하거나 최소한 이해라도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그 곁에 다가서는 거야.
갑자기 폭풍우가 친다. 집에 도착하면 흠뻑 젖을 것 같다. 최대한 빠른 속도로 다리를 움직인다. 꺅! 물웅덩이에 미끄러질 뻔했다! 조심해야겠다. 갈기에 진흙범벅을 하고 집에 가면 엄마가 혼낼 거다. 하필이면 이럴 때 밖에 나와 있어서......
번개가 번쩍하고 내리꽂힌다. 절로 비명이 나온다. 비에 젖은 캔틀롯 거리를 더 빠른 걸음으로 내달린다. 우리 아파트가 보인다. 공주님 맙소사. 다 젖었네!
아파트 계단 통로에서 잠시 멈춘다. 어둠이 나를 감싼다. 벽에 부딪치며 멈춘다. 몸이 움찔한다. 추워 죽겠는 것도 모르고 여기까지 뛰어왔다. 오목하게 파인 벽감에 기대어 몸을 떤다. 머리 위에서 비가 쏟아진다. 길가마다 심어 놓은 가로수와 잘 가꿔진 화원 위로 드리운 칙칙한 하늘에서 비가 하염없이 쏟아져 내린다.
"하아아아아..." 한숨이 나온다. 뿔을 밝혀 들고 온 아이스크림 콘 쪽을 돌아보자, 아이스크림은 오래 전에 다 씻겨 내려가고 없다. "에이 씨!" 발굽을 쾅쾅 굴러대며 투덜댄다. "전 재산 2비트 주고 산 건데! 다 없어졌네!"
염동력으로 붙잡은 아이스크림 콘만 하염없이 이리저리 돌려 본다. 우렁찬 천둥 소리가 들리지만, 무서운 것도 다 잊었다. 고개를 숙여 축축한 콘 가장자리를 살짝 베어문다. 흠뻑 젖어 질척거리는 게, 빗물을 한껏 빨아들인 모양이다. 그걸 다 감안하더라도 아직 단맛이 나긴 한다. 이제 엄마가 호되게 한 소리 하실 테니, 이거라도 빨고 있으면 마음의 준비가 될까 싶어 쭙쭙 빨아댄다. 무거운 한숨과 함께 계단을 타고 오른다. 우리 집은 2층이다.
무슨 소리가 들린다. 빗소리도, 발굽 소리도, 천둥 소리도 아니다. 걸음을 멈춘다. 이상한 소리가 다름아닌 바로 아래서 들린다. 가슴이 내려앉은 건지 천둥소리가 난 건지 모르겠다. 천천히 쪼그리고 앉아 계단 난간 사이를 들여다본다. 암만 들어 봐도 괴로운 울음과 흐느낌 소리인데, 대체 누가 저리 서럽게 우나 궁금하다.
빗줄기와 번개에 가리운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앉은 누군가가 보였다. 대충 내 또래 정도 되어 보였는데, 나보다 훨씬 작았다. 큐티마크도 없었다. 축축하게 젖은 빨간색과 보라색 갈기가 흘러내려 얼굴을 가리는 한편 울음소리를 죽이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무섭지 않았다. 콘을 그대로 집어삼키고, 캑캑대며 말했다. "에이 씨... 마분지 씹어먹는 게 낫겠네!"
내딴에는 재밌다고 한 것이었는데, 울던 아이는 조금도 웃지 않았다. 우는 것만 해도 감당하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애초에 내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안녕?" 조용히 계단을 내려가 우는 아이 옆으로 다가서 방긋 웃는다. "너도 비 맞았니? 페가수스 아저씨들이 게을러서 그래! 아! 그럼 클라우드데일은 맨날 비가 오겠네? 히히히. 어떻게 생각해?"
아무 말도 없다. 달달 떨며 두 뒷다리 무릎을 끌어안으며 더욱 몸을 웅크린다. 구석 깊숙한 곳까지 파고든다. 나보다도 심하게 젖었다. 대체 얼마나 비를 맞았길래 이렇게 됐을까?
"저기, 괜찮아?" 마주보고 앉아 말한다. "갈기가 다 젖어서 그러는 거야? 으음, 괜찮아. 갈기 되게 예쁘다. 내 거 볼래?" 방긋방긋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잿빛 대기 위로 청록색 줄이 그어진다. "온실에나 가야 할 색깔 아니니. 히히힝. 온실이래, 되게 재밌는 말 아냐? 안에 들어가서 보기 전까지는 녹색도 아니잖아?*1"
그때까지도 아무 말이 없다. 적어도 내 존재를 인지하긴 한 모양이다. 두 앞다리를 조금씩 내리더니 고개를 살짝 든다. 한 쌍 눈동자가 보인다. 보라색이네. 근데 얼굴 한쪽이 왜 새파랗지? 아니, 잠깐... 이거 어떻게 된 거야?
"얼굴은 왜 그래?" 묻는다. 입술을 깨문다. 얼굴이 벌개진다. "어, 그게... 다쳤어?"
침을 꿀꺽 삼키는데, 밖에서 번쩍 하고 내리친 번개에 비친 얼굴 위로 시퍼렇게 부어오른 멍자국이 언뜻 비친다. "그..." 입을 연다. 고드름 부러지듯 맑은 목소리다. "비, 비 오길래 피할 곳 찾다가 부딪쳤어." 란다.
짐짓 화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어디 부딪쳤다고? 유니콘이면서 어스 포니처럼 어리버리하게 다닌다니 말이 돼?"
"그게... 내가 좀 그래서." 대답하는 말이 시원하지가 않다.
아무리 생각해도 바보 같은 짓이지만, 상관없을 것 같다. 주말이고 심심하던 차다. 저쪽도 친구 하나쯤 있는 게 나을 것 같고. "나는 라이라야." 엄마가 늘 얘기하는 것처럼 제대로 자기소개를 하자. "라이라 하트스트링스. 넌 누구니?"
이쪽을 본다. 떨리던 몸이 순간 멈춘다. "으음..." 입술을 깨물다, 불쑥 대답한다. "문댄서. 문댄서라고 해."
몇 줄기 무거운 숨을 토해내며 중심을 잡았다. 곧 한파가 불어닥칠 것이므로 마음의 준비를 마친다. 한기가 휘몰아쳐 몸을 때릴 것은 아므로 정신이 흩어지지는 않았다. 다만 머리로 아는 것이 살을 찢는 듯한 냉기의 시퍼런 서슬을 누그러뜨리지는 못했다. 어스름 진혼곡의 연주를 마치자마자 고개를 들고 품에 안은 나이트브링어를 더 단단히 잡는다. 녹슨 강철 바닥에 내려앉는 순간마다, 바닥이 아니라 죽음 그 자체에 발굽을 맞대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날카로운 한기가 찌르르 등골을 타고 올라가 머리에 이르면 눈을 연다. 각오가 들어찬 눈빛은 형형할 것이다.
크고 작은 용오름이 사방을 휩쓸고 다니고 그 위로는 벼락이 하염없이 내리치는 곳, 이름 없는 자들의 땅이었다. 얼마나 깊은 곳인지 구분할 수도 없는 곳 한복판에 매달린 철판이 하염없이 빙빙 돌아갈 때마다 저만치 보이는 녹슨 쇠사슬이 출렁거렸다. 한 줄기 날숨을 뱉어내자 즉시 입김으로 엉겨 한랭한 지옥의 한복판을 비추었고, 철판에 뚫린 구멍마다 재갈 물고 사슬에 매인 자들이 거미처럼 기어나와 이쪽을 향하여 하염없이 비척대며 다가올 때마다 사슬이 잘그라거렸다.
저들이 두려운 것은 아니다. 나는 저들을 만나려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니었다. 앨러배스터도 이제 없다. 나이트브링어를 단단히 틀어쥐고, 발굽으로 검은 현을 퉁겨냈다. 폭풍처럼 불어닥치는 바람 속으로 한 줄기 높은 음이 솟자, 몸 주위에 금빛 구체 형태로 보호막이 형성되었다. 이름 없는 자들이 저희끼리 엉키며 달려들어 투명한 보호막 위로 속절없이 저마다 발굽을 내질렀다. 흘끗 눈길을 주다가, 천둥의 옷을 입고 폭풍의 눈처럼 빙빙 도는 하늘을 향하여 소리쳤다.
"숨어 있지만 말고 나오시죠!" 고통에 절여진 신음과 금속끼리 부딪쳐 울리는 소리 위로, 고함치듯 뱉어낸 소리가 메아리졌다. "당신도 신격이 있잖습니까! 이쪽은 한낱 필멸자일 뿐이지만, 당신을 여기 옭아맨 성가의 한 파편을 들고 있죠! 나오십시오! 제 앞으로 나와 제 연주를 들으세요!"
천둥 소리와 바람끼리 휘감기는 소리만 들려왔다. 돌개바람이 발판 위로 몰아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이트브링어의 권능으로 구축한 방어막이 부르르 떨렸고, 바람에 쓸린 이름 없는 자 몇 명이 발판 아래 나락으로 추락했다. 이쪽은 아무런 영향 없이 제자리에 잘만 서 있었다.
"당신 얼굴 보기 전까지는 안 나갈 겁니다!" 당당히 소리치는 와중, 살을 에는 바람 위로 물기가 섞여들었다. 이를 악물고, 잃어버렸다 되찾은 아이를 안듯 나이트브링어의 울림통을 단단히 휘감았다. 나이트브링어 그 자체와, 그 안에 담긴 고대의 마력이 없었다면 잊힌 혼돈의 뼈다귀에 더 붙어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건... 쓰으으읍—" 단전에 힘을 주고 분노로 부르르 떨리는 듯한 고함을 토해냈다. "—이건 부탁 나부랭이가 아니라고! 이리 나와! 당장!"
고함과 동시에 하늘이 열렸다. 어마어마한 충격파와 함께 주위를 휩싸던 물기가 싸그리 날려 사라졌다. 깊고 깊은 대양의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폭탄이 터진다면 그렇지 않을까. 사방에서 들려오는 신음이 두 배, 네 배로 커졌다. 재갈 문 자들이 발판 위에 엎드려 부복하고, 달달달 떨리는 저희 사지만 쳐다보며 신음했다. 룬 문자에 가려 앞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았다.
그 여자의 거처이자 비행 요새인 구체가 하늘 높이 떠 있었다. 수없이 겹쳐진 구체들이 하나로 집약된 악의의 집합체인 것처럼 이쪽을 향해 회전했다. 둥근 석관과도 같은 구체가 머리 위로 점점 더 크기를 더해가며 다가와서, 그 위로 아로새겨진 룬 문양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구체 안에서 맥동하는 자주색 에너지가 꿈틀거리며 출렁거렸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오래된 옥좌에서 조금도 정제되지 않은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주색 기운이 강처럼 흘러나와 철판 위로 뒤엉킨 물안개 사이로 달렸다.
아래로 바싹 엎드린 자들이 저마다 신음하며 그 여자의 울음을 따라했다. 불쾌한 합창 너머로 이를 갈며 소리쳤다. "아뇨! 당신 노래 부를 생각 없습니다!" 천둥 소리가 연이어 두 번 울려퍼졌다. 이 땅에서 나는 게 아니라, 저 여자가 내는 소리임을 나는 알았다. "무無로 화化할 생각 따위 없으니까!"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첫 번째 공격이 날아들었다. 한 줄기 벼락이 스파크를 튀기며 날아와 철판 위로 내리꽂혔다. 불벼락을 맞은 자들이 단발마의 비명을 내질렀다. 번개가 이쪽 가까이 다가오기는 했으나, 나이트브링어로 쳐둔 방어막에 가로막혀 종소리의 잔향처럼 퍼지며 튕겨나갔다.
이를 뿌득 갈며 자세를 단단히 했다. "연주에 참여하시죠!" 현 몇 가닥을 퉁겨 몸 주위를 둘러싼 방어막을 더욱 단단히 다져 그 여자의 공격을 대비했다. "아홉 번째 비곡을 완성해 왔습니다! 고적의 이중주를 다 외워왔단 말입니다! 당신도 알고 있을 터!" 구체가 더 빠른 속도로 회전했다. 두 갈래 번개가 이쪽으로 날아들었다.
몸을 둘러싼 금빛 보호막이 명멸하며 내게 날아든 두 줄기 벼락을 튕겨냈다. 벼락에 맞은 철판이 열에 녹아 흘러내렸다. "그러니 연주에 참여하시란 말입니다!" 그 여자가 화를 내든 말든, 이쪽도 소리 높여 외쳤다. 둥근 요새가 방향을 틀어 다른 쪽으로 떠가기 시작했을 때, 나는 다급하다 못해 구걸하기 시작했고 그 통에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대체 몇 번을 더 말씀드려야 이해하시겠습니까?! 이름 없는 자들의 땅이 어떻든 신경 쓰지 않습니다! 감추고 있는 비밀이 뭐든 알 게 뭐냔 말입니다! 제9곡 연주만 같이 해 주시면 제10곡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제발 날 옭아매고 있는 저주를 어떻게 좀 해 주시죠. 그럼 두 번 다시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제발 도와 주소서! 새벽의 강림을 꼭 알아야겠나이다!"
구체 안에서 회전하는 수많은 구체들의 모습이 흐릿해져 분간되지 않았다. 보이는 거라곤 철판에서 솟아나는 연기와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줄기뿐이었다. 세 번째 알리콘 여신은 사라지고 없었다.
"알아내야 해..." 훌쩍이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외로운 기분이었다. "집, 집에 가고 말겠어."
이제 그 여자의 흔적까지 전부 사라지고 없었다. 심지어 천둥 소리까지 잦아들어 있었다. 이름 없는 자들이 몸을 일으키며 신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았다. 한숨지으며 나이트브링어를 단단히 잡고, 뿔을 밝혀 야상곡이 아닌 다른 노래를 연주했다. 페눔브라의 메아리가 찬란한 소리로 지옥 그 자체와도 같은 땅을 밝혔다. 그와 동시에 어떤 거대한 발굽이 있어 칠판을 문질러 지우는 것처럼 모든 것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저들의 신음과 축축한 습기, 번개, 쇠사슬 소리, 뼛속까지 시린 추위 모두가 희미해졌다. 나는 다시 부드러운 호박색으로 물든 지하실로 돌아와 그 한가운데 놓아둔 스툴 위에 앉아 있었다. 흙벽 위로 등잔불이 아른거렸다.
나이트브링어는 내 품에 잘 안겨 있었다. 나이트브링어를 가까이 안으며 축축히 젖은 발굽을 내려다보았다. 사지 그 어느 곳도 떨려 오지 않았지만, 별반 다를 것은 없었다. 나는 신음하며 눈을 감았다.
"벌써 열 번째야, 앨." 오두막 한가운데 쪼그리고 앉아 벽난로에 장작 한 덩이를 던져 넣으며 입을 열었다. "여덟 개의 비곡을 연주해 이름 없는 자들의 땅에 들어갔다 나온 게 이번 주만 해도 벌써 열 번째야. 그런데도 그 여자는 코빼기조차 비치질 않네." 장작을 하나 더 던져 넣으며 한숨지었다. 그것은 차라리 불길에 던져진 장작에 불이 붙어 탁탁 타오를 필연을 슬퍼하는 것 같았으리라. 무기력하게 주저앉으며 축축히 젖은 네 다리를 기름처럼 잔잔한 불길 앞으로 쭉 뻗어 내밀고 몸을 덥혔다. "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 그러니까, 봐봐. 누나한테 나이트브링어가 있잖니? 그 여자를 만들어낸 바로 그 노래의 한 파편이란 말야. 근데 왜 알아보질 못할까? 정신 똑바로 박힌 여신이면 아래로 내려와 직접 만나 줄 것이고, 누나도 이 신세 깔끔하게 딱 끝낼 수 있잖아?"
등 뒤에서 세상 그 어떤 소리와도 바꿀 수 없는 낭랑한 소리가 들려왔다. 조그마한 오렌지색 털복숭이가 가르릉거렸다. 침대 옆에 놓아둔 밥그릇에 막 건사료를 부어 준 참이었고, 앨은 참을성 있게 하나하나 입안에 넣고 씹어먹고 있었다. 고양이가 고개를 들어 차분해 보이는 호박색 눈동자로 이쪽을 바라보더니, 밥그릇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냥 나 혼자 중얼거리는 것밖에 안 되는 걸 알기라도 하는 것인지, 털뭉치는 귀만 몇 번 쫑긋거리고 말 뿐이었다. 똑똑한 녀석이다.
"어쩌면 이거 아닐까. 앨러배스터가 자기 코앞에서 나한테 나이트브링어를 넘겨주는 꼴을 그대로 냅두고 만 게 분해서 이러는 걸 수도 있잖아." 창문 너머로 서늘한 10월의 저녁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나는 한숨지었다. "아니면 지금까지도 위대한 어머니께 악감정을 품고 있을 수도 있지. 마침 누나가 한 조각이나마 그 분의 목소리를 담은 물건을 들고 나타났으니, 어디 빛 한 조각 비춰 주겠어......" 쓴웃음을 지었다. "...그게 정상이 아닌 빛이라 해도 말이지. 하여튼 진짜 덜떨어진 동네라니까. 휴대등이라도 들고 가야 하나." 앨을 보고 얼빠진 미소를 지었다.
고양이는 입가를 씰룩거리며 이쪽을 가만히 마주보고만 있었다.
몸을 움찔했다. "그래, 뭐, 멍청한 소리긴 했다." 나는 신음하며 몸을 일으켜 빗물에 젖은 발굽을 끌고 오두막 한쪽으로 향했다. "아무리 그래도 연속으로 10번 간 거란 말야? 이쪽을 아주 쌩까는 건 아닌 거 같거든. 매번 커다란 공 모양 왕좌를 끌고 와서는 누나를 겁줘서 쫓아 보내려고 한단 말이지. 대관절 그건 대체 뭐 하는 물건이래니? 천지창조의 새벽 때부터 알리콘에게 허락된 순간이동 수단이라도 되는 걸까? 그렇게 보면 좀 앞뒤가 맞지? 적어도 위대한 어머니가 이 땅에 계시면서 창조하신 존재일 거란 말야? 그러면 셀레스티아 공주님보다 더 오래된 존재일 수가 없다는 거지, 아무리 적어도......"
뿔을 밝혀 선반에서 수건 한 장을 끌어내려 갈기에 대고 열심히 문질러 물기를 닦아냈다. 이번 주 내내 했던 동작 그대로, 수건을 어깨와 등골로 끌어내려 몸을 닦았다. 몸 닦기를 멈췄다. 수건을 툭 떨어뜨리고 산발인 채 앨을 보고 말했다.
"혹시... 그게 이름 없는 자들을 가둬둔 감옥의 한 부분이라면 어때?" 마른침을 삼키며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다면... 저주가 누날 이 꼴로 만들어 놓은 거랑 똑같은 짓을 그 여자에게 하고 있을 수도 있어. 자기 자신의 노래를 빼고는 그 어떤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신세일지도 몰라."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루나 공주님 맙소사. 평생 그 여자 가까이 다가갈 수나 있을까?"
앨은 침대 위로 훌쩍 뛰어올라 한가운데 몸을 말고 엎드리고, 자기 몸을 핥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숨을 들이마셨다. 덜 닦은 부분을 마저 말리고, 옆에 있던 빨래 바구니로 수건을 툭 던져 넣었다. "글쎄, 뭐." 불빛 비치는 벽난로가로 가만히 걸어가며 혼자 중얼거렸다. "연구를 더 해 봐야 할지도 모르겠어. 트와일라잇네서 책은 충분히 빌려다 놓은 거 같다만. 하..." 앨의 밥그릇 옆에 높이 쌓아놓은 연구자료를 올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이대로 가다간 다이아몬드 독 도적떼가 하룻밤 사이 자기 서고 털어간 거 아니냐 싶을지도 모르겠는데. 최대한 빨리 갖다 줘야겠어. 그건 그렇다 치고..."
고개를 돌려 오두막에 찬란한 금빛 광휘를 흩뿌리는 광원을 쳐다보았다. 테이블 위에 놓아둔 나이트브링어는 시공간을 초월한 그 존재 자체만으로 한낱 필멸자인 내게 더할나위없는 축복이 되어주었다. 성유물을 나안으로 똑바로 쳐다보는 게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이러면 안 되는데 싶은 생각도 조금 들었다.
"나이트브링어로 가면 문제가 심각해진단 말이지." 혼자 중얼거리다 피식 웃었다. "그 여자가 어느 날 못 이기고 나와 제9곡을 연주해 준다면 어떻게 될 것 같니, 앨. 비로소 짊어진 저주를 완전히 벗어던지게 되면 어떻게 될까?" 몸을 돌려 고양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이트브링어를 돌려드리면 셀레스티아 공주님이랑 루나 공주님이 기뻐하실까?"
앨이 이쪽을 돌아보더니, 졸린 눈을 꿈벅였다. 귀를 몇 번 쫑긋거리고는 고개를 흔들고 고양잇과 특유의 그로테스크한 하품을 내질렀다.
"흠..." 고개를 푹 숙이고 침대로 향했다. "흥미로운데..."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더미 하나에 올라가 있던 브러시와 빗을 띄우며 웅얼거렸다. "저주가 그 여자에게 영향을 줄 가능성은 거의 없어. 아주 오래 전, 루나 공주님께서 우연히 궁창의 야상곡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 그분께 자기 존재를 투사해 나이트메어 문으로 바꿔놓은 게 그 여자니까."
앨 옆에 수북하게 쌓여 있던 이불 더미 위에 올라앉아 엉킨 갈기를 빗질했다. 책장을 열고 캔틀롯 특유의 음악 양식에 관하여 규명한 연구자료를 눈으로 훑었다.
"또, 그 여자도 사랑한 사람이 있었다고 했어. 앨러배스터가 알아낸 바에 의하면, 그 여자는 그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었어. 그 사람이 사라진 걸 명확히 기억하고 있으니, 저주가 기억을 지우고 있는 건 아닐 거야." 뿔을 밝혀 다음 자료집을 가져왔다. 얼굴이 찌푸려졌다. 다음 자료집을 끌어당겼다. 답을 찾는 시선이 책장 위를 싸돌아다녔다. "따라서, 이름 없는 자들의 땅에 들어설 때마다 나를 잊어버리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지. 그러면 누날 그냥 완전히 무시해 버리고 있다는 건데. 왜 그럴까? 그게 자기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재갈 물고 사슬 매인 노예로 편입되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그냥 없애 버리고 싶어하는 건가?"
부드럽고 폭신하며 따뜻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앨이 가까이 엉겨 두 앞발을 쭉 내밀고, 내 근처에 떠다니는 물건들을 건드려 보려고 하는 중이었다.
주변에 떠오른 온갖 자료집과 서적, 연구문헌, 브러시, 빗을 비롯해 온갖 잡동사니들 쪽으로 시선이 옮아갔다. 변명하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나와 앨 옆에 펼쳐두고 있던 책 딱 한 권만 남기고 전부 제자리로 돌려보냈다.
"고마워. 그래, 그래. 누나가 또 무리하려고 그랬네." 한숨을 푹 내쉬며 책장을 슥 훑어보다가, 다시 시선을 돌려 나이트브링어의 금빛 광휘를 쳐다보았다. "하룻밤 새 갑자기 강해진 기분이 드네. 그게 정확히 뭔진 몰라도 앨러배스터가 천 년을 버틸 수 있었던 것도 그것 때문이지 않을까. 장수하는 게 정확히 뭔지는 모르지만, 강해진 것 같은 기분은 누나도 잘 알거든."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성가의 한 파편이 누나 품에 없었다면 이름 없는 자들의 땅에서 그 여자를 상대로 일 초도 못 견뎠을 건 자명하니까." 자리에 앉아 앨에게 뺨을 비볐다. "그렇더라도." 나직하게 말했다. "새벽의 강림을 접할 수만 있다면, 세상 그 어떤 힘이라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어. 빌어먹을 야상곡을 완성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난롯가에서 딱딱 타오르는 장작 소리를 제외하고 오두막 안은 문득 고요했다. 따스하고 따끈하며 편안하고 자유로운 기분이 들었다.
"신의 힘이 누나 발굽에 있는데......" 씹어 뱉듯 말했다. "알리콘 하나와도 얘기가 안 되다니." 한숨지으며 이불에 얼굴을 파묻었다. "으으으으으...... 언제쯤 돼야 말을 섞어 줄라나..."
앨이 야옹 울고 가르릉거리며 내 품에 파고들었다.
나는 부박하게나마 지그시 웃으며 앨을 안았다. "그래, 그래. 누나한텐 앨만 있으면 되지? 우리 털복숭이!" 나직한 웃음이 쿡쿡 하고 나왔다. 애정 어린 앨의 울음소리에 마음이 좀 누그러졌다. "혹시나 재연할 날이 오기만 한다면야, 다른 누구도 아니고 우리 앨이 첫 번째일 거야." 방 멀찍이 떠오르는 흐릿한 아지랑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창 밖으로 석양이 지고 있었고, 조용히 다가온 저녁의 침묵에 젖어 나는 깊이 잠들었다.
"다시 말해 주겠니?" 엄마가 문댄서의 얼굴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본다. 왜 저러시는지 모르겠다. 우리 둘 다 이렇게 멀쩡한데.
"으음..." 새 친구는 아무 말도 없이 바닥에 발굽만 문지르고 있다. 울 엄마 아빠 시선을 자꾸 피한다. 쑥스러울 게 뭐 있다고 저러는 걸까. 젖은 걸로 치면 나랑 별로 차이도 없다. 아파트 밖으로 몰아치는 비바람이 갈수록 거세진다. 저거 때문에 무서워서 그럴까? 모르겠다. 발밑에 고인 물웅덩이 밖으로 한 발자국 나가서 문댄서 앞에 선다.
"여기 오다가 뭐에 부딪쳤댔어요!" 당당하게 말한다. "좀 덜렁대는 것 같지만 괜찮을 거에요? 갈기 너무 예쁘지 않아요? 좀 엉키고 젖긴 했지만 일단 마르기만 하면 대단할 거에요! 조금 전에 엄마랑 같이 미용실에 가는 게 너무 좋다고도 했는걸요! 언제 저도 따라가도 돼요? 한 블록 거린데!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도 않아요! 이웃사촌인데 지금까지 그것도 몰랐지 뭐에요?"
"그렇니?" 아빠가 대답한다. 아빠가 엄마에게 눈짓한다.
엄마가 우리 쪽으로 다가선다. 내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려 미신다. 뒤로 물러서자 엄마가 가만히 무릎을 굽히고 내 새 친구와 인사한다. "문댄서, 라고 했지...?"
문댄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울 엄마 아빠 앞에선 왜 저렇게 쑥스러워하는 걸까? 조금 전만 해도 미친 듯이 수다 떨었는데. 바나나 스플릿*2이랑 짓궂은 장난치기를 좋아하고, 날씨 좋은 날에 모래사장 가는 거랑...
"잠시 얼굴 좀 봐도 되겠니." 엄마가 부드럽게 말한다. 화가 나신 것 같진 않다. 다행이다. 그나저나 문댄서 얼굴이 뭐가 어때서 저러시지? "무서워할 것 없단다. 다치게 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약속하마."
문댄서가 숨을 깊이 들이마신다. 비 맞고 들어온 지는 좀 됐는데 아직도 얼굴이 젖어 있다. 문댄서가 고개를 든다. 부풀어오른 눈두덩을 엄마에게 보인다.
"세상에, 멍이 아주 심하게 들었구나." 엄마는 놀란 눈치다. 문댄서의 얼굴 위로 가만히 발굽을 올리신다. 새 친구의 눈가에 든 멍이 엄마 발굽보다도 커 보인다. "으으으음... 셀레스티아 공주님 맙소사..." 엄마가 고개를 돌려 아빠에게 눈짓한다.
아빠가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하신다. 코트와 우산을 챙기시고 문 쪽으로 가신다. 엄마 귓가에 대고 뭐라고 속삭이신다. 엄마도 고개를 끄덕이시고 아빠 귓가에 조용히 말씀하신다. 의도한 건 아닌데, 내게도 들렸다. "혼자서는 가지 말아요. 더스크Dusk랑 같이 가세요. 집에 있을 거에요. 오늘 아침에 샤이닝 아머와 근처 공원에서 놀아 주는 걸 봤어요."
"그래요. 더스크라면 이전에도 나이트롯Nightrot을 상대한 적 있었지요. 걱정하지 말아요. 이번에는 근위대를 대동하고 갈 테니." 아빠가 조용히 대답하셨다. 그리고는 나와 문댄서를 보고 잠깐 빙긋 웃어 보이신다. 왠지 모르지만 불안하다. 아빠가 문을 열고 나가 우산을 펼쳐 쓰시고, 비바람 속으로 멀어져 가신다. 창문 쪽으로 가 아빠 어디 가시나 보려고 했는데, 엄마가 벌써 우리 앞에 와 계셨다. 엄마도 어딘지 이상한 미소를 짓고 있다.
"문댄서가 우리 집에 와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구나. 밖은 비바람이 거세니, 오늘은 우리 집에서 자고 가는 게 좋겠어."
"저, 그게... 음..." 문댄서의 밝은 보라색 눈동자가 반짝 빛나더니, 이내 수그러들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꿈지럭거리며 뒷걸음질쳤다. 천장이 무너지기라도 하나. "그... 아빠가 별로 안 좋아하실 것..."
"쉬이이잇..." 엄마가 나직하게 말을 건다. 내가 지금보다도 작은, 아주 작은 아기였을 때 엄마가 하시던 그대로다. "네가 말 전해 달라는 게 아닌 이상, 너희 아빠한텐 비밀이란다." 엄마는 문댄서에게 딱 맞춰 말하고 있다.
문댄서의 대답도 마찬가지였다. "저기... 어... 엄마한텐 말씀드려도 괜찮아요."
엄마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어머니 말이지?"
"네...에." 문댄서가 끄덕인다. 갑자기 몸을 떤다. 이번에는 두 눈이 밝게 빛나고 있다. "혹시... 엄마도 여기 있으면 안 될까요?"
엄마가 부드럽게 웃는다. "그럼, 되고말고. 편할 대로 지내다 가도 상관없단다......"
"우후!" 좋아서 방방 뛴다. "친구랑 같이 잔다! 꼭 한 번 해 보고 싶었는데! 아! 맞다! 내 방 보여 줄게! 아빠가 예쁜 악기 많이 사다 주셨어! 언젠가 유명 밴드가 되고 말 거야!"
"얘, 라이라." 엄마가 나직하게 나무란다. "문댄서는 좀 쉬어야 한단다. 진정 좀 하렴."
"아... 저, 그게..." 문댄서가 입술을 깨물며 머뭇거리다 말한다. "괜찮아요. 라이라 좋아요. 재미있어요."
"엄마도 아셨죠?" 벙글벙글 웃으며 방방 뛴다. "나보고 좋대요! 이제 내 절친이에요. 이제 재밌는 거라면 다 같이 할 거에요!"
엄마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 뒤,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하신다. "그러렴. 방에 데리고 가도 좋아. 너무 시끄럽게는 굴지 말고. 곧 잘 시간이니까."
"알았어영! 시끄럽게 안 할게요!" 발굽으로 문댄서를 잡아당겨 내 방으로 데려간다. "빨리! 빨리! 난방절에 받은 선물 보여주고 싶단 말야!"
문댄서가 웃는다. 웃음소리가 듣기 좋다. 얘도 분명 음악을 잘 하게 될 것이다. 어디까지 함께 갈 수 있을까? 동시에 큐티마크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다. 우리가 다 크고 나면 내 밴드에 가입할 수도 있지 않을까?
"봐봐! 이것도! 저것도!" 방을 방방 뛰어다니며 실로폰과 플루트, 드럼 세트를 보여 준다. "예쁘지? 뭘 제일 잘 하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 아. 엄마 아빠가 짜증내게 하는 건 진짜 잘 해. 히히히."
"너희 부모님도... 소리지르고 그래?" 문댄서가 어물어물 묻는다.
"아냐! 너무 시끄럽다 싶을 때만 그래. 그래도 봐봐, 이거 사주신 건 울 엄마, 아빠잖아? 내가 좀 시끄럽게 굴어도 된다는 뜻에서 사다 주셨다고 할 수 있겠지! 히히히."
"아... 하하하..." 문댄서가 얼굴을 붉히며 웃는다. "내가 그 생각을 못 했네..."
"넌 트럼펫을 잘 불 것 같아!"
"아. 트럼펫 소리 하난 끝내주게 내지." 문댄서가 짓궂은 미소를 띄운다. "멕시칸터식 콩 튀김 배부르게 먹고 나면 잘 나와!"
"으!" 문댄서에게서 떨어져 커다란 봉제인형 뒤로 숨는다. "문댄서! 그건 숙녀답지 못해!"
문댄서가 깔깔 웃는다. 고개를 빙빙 돌리며 이쪽으로 폴짝폴짝 다가온다. "각오나 해라*3, 요술쟁이 음악가야!"
"안 돼!" 겁에 질린 척 연기하고, 침실을 빙빙 돈다. "내 훌륭하고 특별한 재능을 빼앗으러 사악한 유니콘 마녀가 왔어요! 도와 줘요! 누구 없어요!"
"하하하하!" 문댄서가 웃어대며 잠시 내 뒤를 쫓는다.
나 혼자 웃는 소리밖에 안 들리는 걸 새삼 깨달을 때까지 혼자 뛰고 있었다. 헐떡이는 숨을 달래며 걸음을 멈추고 돌아본다. 문댄서가 나와 엄마, 아빠가 함께 찍은 사진이 가득 걸린 벽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다. 빙긋이 웃으며 다가선다. "문댄서? 왜 그래?"
웃음기가 사라졌다. 아니, 여전히 웃고 있기는 한데 조금 전과는 다르다. 훌쩍이는데, 우는 것 같지는 않다. "너희... 너희 집 말인데..."
"우리 집이 왜?"
문댄서가 마른침을 삼키고 말한다. "되게 따뜻하다."
멍하니 쳐다본다. 창 밖에서 천둥소리가 메아리진다. 빗물에 젖은 창문 위로 벼락의 섬광이 굴절되어 퍼진다. 몸이 떨린다. "그야... 그야 당연하지!" 불안하게 미소짓는다. "그러지 말란 법도 없잖아?"
문댄서가 떨리는 눈으로 방 안 어둠을 가만히 응시한다. 갑자기 멈췄던 것처럼 급작스럽게 몸을 돌려 나를 쫓아온다. "각오나 해라! 으라아아아아!"
"엑! 아하하하! 야 불공평해! 사기 쳤어! 사기꾼아!"
"아니거든!"
"맞거든!"
"아니거든!"
"맞거든!"
"아니거든!"
눈꺼풀이 활짝 열렸다. 급한 숨을 들이마시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오두막 안은 문득 외로워 보였다. 지펴 뒀던 벽난로는 오래 전에 꺼져 있었다. 앨은 내 옆에 웅크려 몸을 말고 잘 자고 있었다. 부드러운 오렌지색 몸에 숨이 드나들 때마다 부풀었다가 되돌아왔다. 창 밖 세상은 아직 어두침침했지만, 숲이 빽빽한 지평선 너머 아득한 곳에서부터 아주 희미하게나마 새벽이 오고 있었다.
한파가 들이닥쳐 정신을 뒤흔들어 놓았을 즈음에야 나는 내 저주를 짊어진 신세를 자각했다. 두 앞다리를 붙여 비볐다. 이가 딱딱 부딪쳤다. 온기가 천박한 농담이 된 지 벌써 이만큼이나 지났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앞에 펼쳐져 있던 책을 내려다보며 세상이 잊은 지 오래인 캔틀롯 고악古樂을 혼자 흥얼거려 오두막에 고인 희미한 공기 속으로 던질 뿐이었다.
"아오 진짜... 저주만 콱 벗어 봐라. 역사상 가장 긴 낮잠을 자고 말 테니." 조심스레 앨 위를 넘어 침대 아래로 기어 내려왔다. "내가 싫어도 다른 누가 기억할 거거든. 염병할."
조용히 투덜거리며 칙칙한 잿빛 후드를 구렁이 담 넘듯 뒤집어썼다. 옷을 입으니 좀 견딜 만했다. 리라를 집어 가방에 집어넣고, 어깨 위로 가방을 둘러멨다. 집을 나서려다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 몸을 돌려 홀로 찬란히 빛나는 나이트브링어 쪽으로 향했다.
"위대한 어머니의 노래 한 조각이 내 발굽에 들어와 있으니, 마땅히 그 책임도 져야겠지."
앨은 나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에 아무 대답도 없었다. 내 새로운 일과가 흘러가든지 말든지 새근새근 잠만 잘 잘 뿐이었다. 최고급 벨벳으로 짠 전용 파우치에 나이트브링어를 집어넣었다. 래리티에게 부탁해서 만든 것으로, 거기 들어간 금화만 해도 동전지갑 하나를 꽉 채울 만한 양이었다. 바닥에 깔아놓은 둥그런 카펫을 한쪽에 말아 치우자, 일 주일 전에 마법으로 잘라내 만든 바닥 문이 나타났다. 뿔을 밝혀 잠금장치를 풀고 바닥 문을 잡아당겨 열었다. 파우치로 감싼 나이트브링어를 그 아래에 조심히 모셔놓고, 다시 문을 닫은 뒤 그 위로 카펫을 펼쳐 깔았다.
드디어 나갈 준비가 끝났다. 현관으로 향하며 목을 누르는 리라의 무게중심을 조정했다. 나는 앨을 가리키며 말했다. "누나 몰래 뭐 훔쳐먹을 생각 하지 마. 이 개구쟁이 녀석아."
털복숭이 네발짐승이 하품을 쩍 하더니 벌러덩 누워 천장을 보고 가르릉거렸다. 문을 닫자 삐걱이는 소리가 뒤에 남았다. 나는 머릿속을 꽉 채운 생각을 싣고 밝아 오는 새벽을 향해 걸어갔다.
생각으로 지끈거리는 머리 위로 어느덧 밝아온 아침이 쏟아졌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어느덧 완연한 가을이 되었음이 골수에 사무쳤다. 다가온 10월은 늦여름이 남기고 간 잔열을 뒤쫓아 소탕하려는 듯했다. 풀잎 위로 구르는 이슬이 발굽에 스칠 때마다 섬칫한 냉기가 느껴졌다. 솔직히 적어두자면, 기분 전환이나 하자고 나온 것이 아니었다.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는 기운을 좀 분출할 필요가 있어서였는데, 초가을 아침의 차가움과 으스스치는 몸에 이끌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짓까지 해 버렸다.
이런 얘길 하면 내가 짊어진 저주에 불면증도 딸려오는 게 아니냐고 되물을 사람도 있기야 있을 것이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는 아주 잘 잤다. 이것이 명백한 사실이다. 아홉 번째 비곡이 어떻게 짜여진 것인지 알아냈으니, 콧대 좀 빳빳하게 쳐들고 다닐 만한 자격이 있다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해방을 향한 내 머나먼 여정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진전을 이뤄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솔직하게 적어두자면, 절대로 아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아홉 번째 비곡이 이중주인 이상, 궁창의 야상곡 그 마지막 곡으로 나를 인도해 줄 수 있는 존재는 세상에 단 하나뿐일 수밖에 없다.
이런 결론에 다다른 경위를 적어 볼까. 트와일라잇 스파클은 새벽의 강림에 대하여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앨러배스터의 일지에도 이 곡의 본질이 어떤 것인지 적어놓은 부분이 없다. 포니빌 시립도서관 장서를 전부 뒤지고 나서도 새벽의 강림이란 말 한 마디가 끝끝내 나오지 않았다. 결국 시험삼아 동네 사람들 몇몇과 함께 고적의 이중주를 연주해 보았다. 애플잭과 핑키 파이도 그 중 하나였는데, 각각 바이올린과 아코디언을 썼다. 그 모든 시도가 전부 무용한 것으로 드러난 끝에,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슬슬 감이 잡혀 갔다.
궁창의 야상곡은 알리콘 공주 하나를 현실 세계에서 분리해 봉인하기 위한 것이다. 자기 영역인 이름 없는 자들의 땅에 끌려 들어온 자가 자기 권세에서 벗어나 산 자들의 세상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자기는 갇혀 있고 필멸자는 벗어나는 상황을 곱게 받아들일 리가 없지 않겠나?
그 여자의 주위를 둘러싸고 회전하고 회전하기를 반복하는 구체의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가질 않았다. 처음으로 이름 없는 자들의 영역에 들어섰을 때, 즉 앨러배스터가 나를 구했을 때는 높은 하늘 위로 구체를 끌고 다가왔었다. 그리고는 자기 땅에 속박된 다른 가엾은 영혼과 마찬가지로 어마어마한 공격을 퍼부었다. 두 번째는 보호막 마법을 숙달한 뒤 제7곡 밤의 만장을 연주해 들어섰을 때다. 그 때는 직접 강림해 나를 만나러 왔다. 그 여자가 보기에 나는 특이점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두 번째로 이름 없는 자들의 땅에 들어온 자였을 테니까. 지금 생각하면, 나를 처음 봤을 때는 일종의 위험 요인으로 간주했을 수도 있다. 그 때문에 직접 대면하여 자기의 노래를 부르고, 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제 나이트브링어를 받들고 이름 없는 자들의 땅에 드나드는 나는 전보다도 강한 힘과, 그 여자조차도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는 절대방어로 무장한 상태다. 이제 그 여자는 나와 거리를 두고 있다. 의식적으로 나와 가까이 접촉하는 일은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두려운 것일까? 그 여자의 비밀을 꿰뚫고 있는 주제에 산 자들의 땅에 발 붙이고 살아가고 있는 것 때문에 심사가 뒤틀린 걸까? 한낱 필멸자에 불과한 유니콘 하나가 쥐고 있는 게 대체 무엇이기에 살지도 죽지도 않은, 시간 속에 표류하는 알리콘 여신조차 경계를 늦추지 못하는 것일까? 나이트브링어의 존재인가? 아니면 다른 요소가 또 있는 건가?
이래서 잠을 잘 수가 없는 거다. 처음부터 무기력한 존재였음을 자각하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지금까지 아득바득 해 온 것들에도 불구하고 처음보다도 훨씬 무력한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을 알고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이 이상 가는 최악의 사태도 또 없을 거란 생각이 든다. 가끔 나와서 연주하는 게 유일한 휴식처였다. 음악을 다시 내 삶 속으로 편입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의식적으로 계속 그렇게 생각해 오고 있다. 기나긴 내 인생에서 듣고 연주한 곡 중에서도 가장 큰 기쁨과 편안함을 선사하는 단 한 곡의 곡만 연주하는 나날이 반복되었다.
페눔브라의 메아리. 나는 길게 뻗은 흙길 옆으로 펼쳐진 목초지 끄트머리에 주저앉아 그 곡 하나만을 하염없이 연주했다. 포니빌 서쪽 외곽에서 가까운 자리였다. 아침 해가 지평선 너머로 이제 막 얼굴을 드러내는 참이었다. 나무 위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저마다 짹짹대는 소리가 울려퍼지다, 현에서 솟아난 부드러운 곡조에 녹아들며 사라져갔다.
아주 잠깐이라도, 저기 보이는 동네의 평범한 사람처럼 살아가는 게 어떤 기분일까 생각했다. 아주 행복한 기분일 것이다. 평범한 사람은 유령으로 회귀하지 않아도 되고, 그러므로 언제 자기 존재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살 필요가 없다. 세상에 자기 이름을 큰 소리로 불러 줄 사람들이 있음을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 유명해지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친구 다섯, 아니 넷, 딱 둘만이라도 좋다. 누군가 말하고, 속삭이고, 웃고, 노래하고, 심지어 욕하는 것에서라도 내 이름이 불리길 바랄 뿐이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눈을 감고, 운명이 예비해 두었던 나 자신과의 협주에 참여하듯 심장 박동에 맞춰 한결 느려진 속도로 현을 뜯었다.
가장 중요한 곡을, 나 혼자서는 절대로 연주할 수 없는 것이야말로 야상곡이 품은 각종 아이러니와 역설 중에서도 그 극치라 할 만했다. 연주가 어렵기 때문은 아니다. 문제는, 그 여자를 설득해 연주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 깊고 깊은 심연 속에 한없이 오랜 세월을 갇혀 지냈던 여신의 마음을 움직일 방법이 뭐가 있을까. 나는 누구인가. 나는 여신이 아니다. 나는......
"어머나, 세상에! 리라로군요! 정말 멋진 연주에요. 혹시... 캔틀롯 분이신가요?"
가만히 눈을 열어 떴다. 쏟아지는 새벽빛에 젖어 몇 곳 흐릿하게 보이는 형체가 서서히 눈에 들어왔다. 솜털은 루비와 같고, 갈기는 후크시아를 빼닮았으며 에메랄드처럼 빛나는 신록의 숲을 눈동자로 삼은 듯했다. 아침 이슬에 젖은 세상을 비추고도 남을 듯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제발, 제발... 캔틀롯 분 맞으시죠?"
"어... 그런 셈이죠." 당혹감에 말을 더듬었다. 헛기침을 해 목을 쓸고, 나무 밑에 앉아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치어릴리 선생님, 되시죠."
"아하! 제가 딱 알아뵀죠!" 치어릴리가 폴짝 뛰었다. 채점한 시험지로 빼곡히 들어찼을 가방이 거의 떨어질 뻔했다. "결국 와 주셨군요! 저쪽에서 전달하기로는, 너무 편찮으셔서 이번 주 중으로는 못 오신다고 했었거든요! 아이들이 실망할 걸 어떻게 달래야 하나 얼마나 가슴 졸였다고요!"
"저... 어..." 환하다고는 못 할 미소를 띄우며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흔들어 갈기에 묻은 아침 이슬을 털어냈다. "저기, 뭔가 좀 이상해서 여쭤 보는 건데요."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혹시나 싶은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서 물었다. "말씀하시는 게, 제가 오길 기다리고 계셨던 것 같은데요?"
치어릴리가 마음이 앞서 너무 일찍부터 좋아했다고 생각하는 것쯤은 대답을 듣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캐... 캔틀롯 분 아니신가요?" 치어릴리는 입술을 씹다시피 하고 있었다. 화색이 돌던 얼굴에서 기운이 쪽 빠져나가는 모습을 목전에서 보는데 마음이 좋았을 리 없다. 지역 공립학교 교사인 치어릴리와는 몇 차례 대화를 나눠 보았는데, 세상 누가 와도 치어릴리만큼 흥이 많고 친절한 사람은 없으리라 장담할 만한 사람이었다. "아이쿠. 너무 결론부터 말씀드린 건 아니었나 모르겠네요. 왕립 영재 유니콘 학교와 계속 접촉하고 있었어요. 음악학부 블루 노이즈 교수님께서 포니빌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음악 교육 프로그램에 협조해 주시기로 했죠."
"블루 노이즈 교수님이라고요? 되게 오랜만에 듣네요!"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는 분이에요. 졸업반 때 그분께...어..." 제정신으로 돌아왔을 때는 오랜만에 아는 이름 나왔다고 제멋대로 벅차오른 가슴이 쓸데없는 말을 뱉어낸 지 오래였다. "그게, 그러니까..."
"그렇다면 교수님께서 보내 주신다던 분이 그쪽이 맞으시군요?" 치어릴리가 싱글벙글 웃으며 바싹 붙었다. "담당 학생들 중에서도 가장 똑똑한 학생을 골라 음악사 강사로 보내주신다고 하셨어요. 최근에 받은 연락에는 건강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어 트로팅엄으로 요양을 하러 간다고 했지만요. 그럼 이번 주도 기초 기하학 얘기를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였어요."
"아. 그렇죠, 뭐, 수학은 수학일 뿐이니까." 위장이 꼬이는 듯한 기분에 마른침을 삼켰다. 이런 불쾌한 기분이 드는 일은 그리 잦지 않다. 잦지는 않지만, 영 골치아픈 상황인 것은 분명하다. "그게, 제가 음악 쪽에 소양이 약간 있는 건 맞긴 한데, 뭔가 아주 심각한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네?" 치어릴리가 순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애들 가르치는 사람이 어찌 이리 순진해 빠질 수 있는지, 솔직히 감탄스러웠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순진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벌써 마음이 그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는데, 치어릴리가 입을 열어 쐐기를 박았다. "그... 블루 노이즈 교수님 학생 분 아니신가요? 캔틀롯에서 오신 분 맞지 않나요?"
"네, 뭐, 캔틀롯 출신인 건 맞는데, 그게......" 이게 뭐 하는 짓이지? 하고 몸이 움찔했다. 그 말을 끝끝내 긍정해서는 안 됐다. 내 동향 사람으로 지금쯤 어딘가에 누운 머저리 하나가 허파까지 토해 낼 기세로 기침하고 있을 텐데, 그 녀석 자리까지 내가 꿀꺽하려는 꼴 아닌가. 유령이나 다름없이 살아가는 신세라 해서, 다른 사람의 신원을 도용해 쓸 자격이 생기는 게 아니지만, 그렇다 쳐도......
그거 말고 달리 할 일이 뭐가 있었을까? 혼자 가만히 주저앉아 있을까? 풀 죽어서 왜 진도가 안 나가나 도움도 안 될 생각이나 굴리고 있으면 됐을까? 동네 꼬마 한 무리를 앉혀 두고 역사 선생 노릇을 한다 해도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는 건 명백한 사실이긴 하다. 학교 끝나고 집에 갈 때쯤 되면 내가 얘기해 준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말겠지. 인생에 훨씬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기억에서 싹 잊히지도 않을 과목을 가르치고, 공부할 기회를 치어릴리와 학교 꼬마들에게서 빼앗아 버리는 것과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달랑 하루도 가지 못할 것들을 가르쳐 놓고, 그걸로 꼬마들 지성의 지평이 넓어지거나 대오각성하기를 기대하는 건 둘째치고라도 애들이 좋아하기는 하겠느냐는 말이다.
다른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한다면 그 기회가 얼마나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것이라 해도 결국 내 저주에 짐을 하나 더 얹는 것밖에 되지 않는 것을, 나는 그 때 문득 깨달았다. 치어릴리의 소망을 들어주는 게 옳을 것이다. 저주를 짊어진 삶이 통과해야 할 절망이 얼마나 더 놓여 있는지는 아무 상관없었다. 세상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뭉개져 무너지는 꼴을 감상하려고 포니빌에 있는 게 아니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아주 짧은 순간이나마 빌어먹을 희망을 전할 기회가 있기만 하다면야, 기꺼이 받아들이리.
다분히 충동적인 결정이긴 했지만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어느새 치어릴리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아, 이거 안 속으시네. 이제 장난은 그만둘게요. 블루 노이즈 교수님께서 꼬마들한테 한두 가지 가르쳐 주시겠다고 약조하신 마당에, 재채기 좀 나온다고 그 원대한 계획에 초를 칠 수는 없죠?"
"정말... 정말이시죠?"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는지 치어릴리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뺨으로 활짝 웃었다. "이제 안 아프신 거 맞죠?"
10월 초순의 상쾌한 공기를 흠뻑 들이마시고, 빙긋 웃으며 숨을 내쉬었다. "포니빌 참 좋은 동네네요. 아침에 잠깐 시간 내서 산보 조금 한 걸로 몸도 마음도 깨끗해진다니 놀랐어요. 무슨 뜻인지 아시죠?"
"하하하! 그럼요!" 치어릴리의 옆구리에 날개가 솟아나 내 주변을 빙빙 돌며 기뻐하더라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할까요! 이번 주 내내 간단한 음악이론을 가르치면서 살짝 맛보기만 시켜 줬거든요! 선생님께서 고전, 중세 시대의 왕실 발라드 이야기 이야기만 곁들여 주시면 정말 완벽할 거에요!"
"아, 네..." 발굽으로 갈기를 가볍게 쓸어내리고, 치어릴리를 따라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길가를 걸어갔다. "뭐... 한두 가지 정도는 알긴 합니다만... 하하..."
"결국 양어머니인 밀키 화이트 사모님을 모셔와 일이 이러저러하게 됐다고 말씀드리고 나서야 장난을 그만두더군요." 이른 아침의 햇살을 맞으며 학교 운동장으로 들어서는 길에, 치어릴리가 말했다. 밖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발굽 소리가 귓가에 부딪쳤다. "셋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눈 게 스쿠틀루가 마음 잡는 데 도움이 되긴 한 모양이에요. 그때부터 조금이나마 어른들 말도 잘 듣고, 다른 학생들과도 가까이 지내기 시작했거든요. 벌써 서로 없으면 못 사는 친구가 둘이나 생겼죠!"
"세상에나..." 나는 도저히 그렇게는 못 하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씩 웃어 보였다. "스트레스가 엄청났겠는데요. 그래서, 반 아이들에게는 스쿠틀루가 선생님 동생이라고 얘기해 두셨던 것도 진심인가요?"
"네." 치어릴리가 지그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지금 잠시 동안만큼은 그렇게 하려고요. 스쿠틀루가 연극 배역을 맡게 되어 연기 지도를 하게 됐는데, 그 때 얘기해 뒀어요. 우리 '자매 관계'를 두고 '거짓의 거짓'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네요. 하하. 스쿠틀루도 나이를 좀 더 먹으면 무대에 서는 게 자기 적성인 걸 알게 되겠죠. 포니빌로 이사 오기 전까지 그 아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이해하지도 못할 급우들의 비웃음 없이 자기 적성에 맞는 길을 찾아가게 해 줘서 다행이에요."
"휴! 교사가 생업이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가 몰라요." 긴장된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학교 선생님들이 일상적으로 그런 일에 시달리는 줄은 상상도 못 했지 뭐에요. 그건 그렇고, 대단한 묘수였어요. 혹시 정신의학 쪽으로 진출해 볼 생각은 없으세요?"
"오 호 호 호, 농담도 참." 치어릴리가 발굽을 내저으며 킥킥 웃었다. "비행기 너무 태우시는 거 아니에요? 그것도 그렇지만, 전 그런 것보다는 텃밭 가꾸는 게 더 좋아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의외란 생각이 안 드네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어느새 학교 건물 근처까지 와 있었다. "으앗, 안녕하세요..." 무엇인가 커다랗고 새빨간 형체가 나타나서 몸이 얼어붙었다.
낯익은 사내가 짐수레에 여자애와 남자애 여럿씩을 싣고 건물 쪽으로 다가왔다. 빅 맥이었다. 치어릴리와 눈이 마주치자 빅 맥이 가볍게 무릎을 굽혀 인사하고 아이들을 잔디밭 위로 내려주었다. 꼬마들이 치어릴리 쪽으로 우르르 달려와 둥그렇게 모여서서 저마다 재잘거렸다.
"선생님 안녕하세여!"
"빅 맥 아저씨가 학교까지 태워다 주셨어요!"
"저도 크면 아저씨처럼 키 크고 힘센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래? 우리 오빠가 빅 맥 아저씨보다 더 큰데!"
"야!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어. 울 빅 맥 오빠야가 울 동네에서 키도 제일 크고 힘도 제일루 세!"
"아니거든, 애플블룸!"
"맞거든!"
"아니거든!"
"맞거든!"
"여러분! 여러분!" 치어릴리가 무릎을 굽히고 앉아 애플블룸과 문제의 사내아이를 떼어놓았다. 남자애는 혀를 낼름 해 보이고 물러났다. "그래요. 빅 매킨토시는 힘도 세고 믿음직한 어른이죠. 빅 매킨토시가 여러분 나이 때 친구들이랑 다투고 싸우기만 했을 것 같진 않지요? 지금처럼 크고 힘센 어른이 되기 위해 열심히 운동하고, 노력했을 거에요! 그러니 빅 매킨토시 아저씨를 본받아 친구들과 다투지 않는 어린이가 되어야겠지요? 어릴 때부터 서로 얼굴 찌푸리는 데 시간을 낭비한다면,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빅 매킨토시처럼 될 수 없을 거에요."
"선생님 말씀이 맞아요. 미안, 애플블룸."
"히힝. 괜찮아, 괜찮아. 스프링 게이즈. 난 화 안 났어! 오빠야, 오빠도 화 안 났지?"
"그려." 사내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꼬마들이 까르르 웃다가,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몇몇이 헉, 하고 숨을 깊이 들이마시더니, 무슨 폭주 기관차처럼 이쪽으로 달려와 나를 둘러쌌다. 난방절 트리가 딱 이런 기분일까.
"우와! 우와! 진짜 음악가다!"
"큐티마크 좀 봐봐!"
"캔틀롯에서 오셨어요?"
"옛날 노래나 그런 거 가르쳐 주시러 오셨어요?"
"공주님 계시는 곳에선 다들 그렇게 옷을 입고 다니나요?"
"이거..." 입술을 씹으며 머뭇거리다 말했다. "벌써 유명인이 된 기분인데요... 아하하..."
"여러분, 이 분은 하트스트링스 선생님이에요." 치어릴리가 우리 주위로 몰려든 꼬마들에게 말했다. 운동장에 몰려든 학생들 절반이 벌써 눈을 반짝이며 기대감에 부푼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귀여움의 호수가 있다면 이렇겠구나 싶을 정도였다. 그 시선을 굳이 피하지는 않기로 했다. "여러분 생각이 정확해요! 하트스트링스 선생님은 우리나라의 음악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시러 오셨어요. 그럼 다같이 인사할까요?"
"안녕하세요. 하트스트링스 선생님." 꼬마들이 한 목소리로 말하는 소리는 말 그대로 짜릿했다.
"어..." 영 불편한 마음을 억누르며 발굽을 흔들어 대답했다. 저주가 뻗어온 차가운 덩굴손이, 문득 아주 먼 저편의 일로 느껴졌다. "만나서 반가워, 어린이 여러분."
치어릴리가 빅 맥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이들 데려다 줘서 고마워, 매킨토시. 오는 길에 우체국에 급히 들를 일이 있어서 말이야. 그거 덕분에 일이 이렇게 잘 풀릴 줄은 몰랐지 뭐야. 혹시 장작도 갖고 왔어?"
"그려."
"진짜 고마워!" 치어릴리가 환히 웃었다. 뺨이 다시 붉게 물들어 있어서, 어디 아픈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좀 있으면 겨울인데, 정말 덕분에 살았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하나."
"그런가요. 포니빌에 온 지... 그... 얼마 안 되긴 했습니다마는..." 빅 맥을 보고 픽 웃으며 말했다. "애플 가문이 온 포니빌을 떠받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막 드는데요."
"그ㄹ...렇진 않어." 빅 맥이 이를 내보이며 씩 웃었다.
치어릴리가 킥킥 웃었다. "고생 많았어 매킨토시. 살펴 가. 오늘도 농장 일 하려면 일찍 들어가 봐야지. 자, 그럼 여러분도 들어갈까요? 수업 시간까지 겨우 10분 남았네요! 어서 들어가서 하트스트링스 선생님과 함께..." 치어릴리가 운동장 건너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얼굴에 감돌던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아. 공주님 맙소사. 또야." 치어릴리가 눈을 굴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 사람이 왜 이러나 싶어 눈만 꿈벅이고 있던 찰나, 꼬마 하나가 소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둘이 거칠게 웃어대는 소리가 뒤따랐다. 몸을 돌려 그네 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낯익은 잿빛 페가수스 꼬마를 양옆에서 둘러싸고 킬킬대는 유니콘 꼬마 둘이 보였다. 두 패거리가 꼬마를 가운데 두고 서로 공을 주고받으며 비웃어댔고, 날개 달린 꼬마는 그 가운데서 위아래로 뛰었다 내려오기를 반복하며 닿지 않는 공 앞에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만들 좀 해! 빨리 줘!" 럼블이 소리쳤다. 호텔 건물을 폭파시켜 무너뜨리던 날, 나는 모닝 듀와 럼블 앞에 서서 둘을 지켜냈다. 꼬마는 그 때에 비해 별로 자란 것 같지 않았다. 럼블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헉헉대며 두 양아치들에게서 자기 공을 받아내야 한다는 일념 하에 별 도움도 되지 않는 작은 날개를 퍼덕여댔다. "하나도 재미없어, 이런 거!"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네 상상 속에서만 말이야!" 똥똥한 꼬마가 비웃으며 대답했다. 어두운 청록색 솜털과 아무렇게나 삐져나온 듯한 거친 오렌지색 갈기, 굵직한 갈색 눈썹 하나하나가 철저한 불협화음을 이루었다. 녀석이 머리로 공을 쳐 럼블의 머리 위로 넘겼다. 반대쪽에 있던 호리호리한 꼬마가 공을 받았다. "캬하하하. 스네일스, 넌 어때?"
"똑같지, 스닙스! 하하하하!" 황갈색 솜털과 라임빛이 도는 녹색 갈기를 한 멀대같이 키만 큰 꼬마가 사지를 놀려 공을 실컷 희롱하다 도로 스닙스 쪽으로 넘겨주며 대답했다. "전에 이 새끼보고 펭귄이랑 다를 바 뭐냐고 씹었던 때보다 몇 배는 더 재밌는데? 이 새끼 그 때 펭귄은 냄새난다면서 질질 짰잖아!"
"그랬지. 럼블 너도 그 때 생각나냐?" 스닙스가 킬킬대며 뿔로 공을 받아 빙빙 돌리며 말했다. "닌 언제가 맘에 드냐? 그 때가 낫냐, 지금이 낫냐? 하하하하하!"
"알 게 뭐야!" 럼블이 발을 쿵쿵 구르며 소리쳤다. "내놓기나 하라고!"
"야, 등신같이 이딴 공에 목숨 거는 이유가 뭐냐 대체?" 스닙스가 코웃음쳤다.
"내 공 아니라고! 빨리 줘!" 럼블이 발을 동동 굴렀다. 비단결처럼 매끈한 흰 솜털을 한 여자애 하나가 그 현장에서 조금 떨어진 모래밭 쪽으로 조심조심 다가섰다.
"어... 괜찮아." 스위티벨이 빨개진 얼굴과 축축한 눈으로 말했다. "그렇게까지 해 가면서 받을 건 없어......"
"이게 말이 안 되잖아!" 럼블이 소리쳤다. "남의 건데 돌려줘야지!"
"오 호 호 호! 이게 그 구세준가 뭔가 하는 그거냐?" 스닙스가 빈정대는 투로 깔깔 웃어대더니, 앞다리로 공을 열심히 튀겨대며 말했다. "뭐 결혼 예물로 이 등신같은 걸 주고받기라도 할 셈인가 봐? 어? 하하하..."
"으으으으으......" 럼블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뒷걸음질쳤다. 그러다 뒤를 돌아보았는데, 스위티벨도 마찬가지로 화끈거리는 얼굴을 가리고 몸을 숨겼다. "어어어어어어... 어......"
"킥킥킥킥......" 스네일스가 눈을 굴리며 덜떨어진 웃음을 흘렸다. "둘이 아주 마시멜로같이 착 달라붙어 다니는 게 아주 일품이구만!"
"아니거든!" 럼블과 스위티벨이 동시에 소리쳤다.
"쳇! 됐다. 공에 목숨 걸고 달려드니 돌려줘야겠구만. 가져가라!" 스닙스는 그 말과 함께 명백한 악의를 실어 뒷발로 공을 걷어찼다. "받으라고!"
공은 럼블의 이마 한가운데로 날아가 작렬했다. "악!"
"하하하하하하!" 스닙스와 스네일스가 가까이 붙어 미친 듯 웃어제꼈다. 웃어대는 얼굴 위로 치어릴리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둘은 시선을 교환하더니 표정이 싹 굳어 중얼거렸다. "아, 망할."
"스닙스. 스네일스." 치어릴리가 유리도 능히 자를 수 있을 정도로 시퍼런 서슬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눈빛으로 두 꼬마를 쏘아보았다. "럼블 괴롭히는 건 그만두라고 말했을 텐데?! 럼블이 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러는 거지?"
"쌤! 그, 그냥 좀 장난 좀 친 거에요!" 스닙스가 대답했다. 그러고는 옆에 선 스네일스를 툭 쳤다.
"악! 어어어어어어..." 스네일스가 입을 헤벌렸다. 침이 고여 흘러내리기 직전, 스네일스가 제정신을 수습하고 말했다. "맞아요! 그냥 공놀이 좀 한 건데요!"
스닙스가 럼블을 째려보았다. 악의로 똘똘 뭉친 눈빛이 럼블을 지졌다. "맞아, 틀려?"
럼블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발굽으로 땅만 탁탁 파댔고, 스위티벨이 옆에 서서 가만히 몇 마디를 말해주었다.
"선생님 바보 취급할래?" 치어릴리가 한층 사나워진 표정으로 소리쳤다. "친구들 좀 그만 괴롭히라고 이번 주만 해도 벌써 두 번째야! 지난달에 선생님이 분명 경고했을 텐데? 선생님이 다시 너희 부모님 모셔와야 너희가 정신 차릴까?"
"모셔온다뇨?" 스네일스는 담임교사와 학부모 간 면담이라는 개념이 아주 새롭고 신선했는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스닙스는 정반대였다. 오히려 냉정해진 듯했다. 악동이라기보다 양아치에 가까운 분위기가 순간 사라졌다. 스닙스가 목을 닦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저희가 잘못했어요. 제발 엄마 아빠한텐 말씀드리지 말아 주세요."
"어어어... 네!" 스네일스는 스닙스를 금방 베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 안 그럴게요!"
"안 그러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래도 오늘은 캔틀롯에서부터 귀한 시간 내셔서 강사 선생님 모셨으니, 행실 똑바로 하도록 해. 조례 시간까지 여기 벤치에 꼼짝 말고 앉아 있어. 오늘 아침 동안 운동장 사용은 금지야."
"우......"
"그런 소리 내지 마. 오늘은 칠판 지울 일 없는 게 다행인 줄 알라고. 너희 계속 이런 식으로 하면 정말 날 잡아서 예의범절이 몸에 익을 때까지 교육할 테니 명심해." 치어릴리가 몸을 돌려 이쪽으로 다가와 학교 건물로 향하는 길에, 내 귓가에 대고 나직하게 말했다. "전 교사직이 좋아요." 치어릴리가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미소와 함께 눈을 찡긋했다. "그래도, 가끔은 엄하게 굴 줄도 알아야 하죠."
"허, 그렇네요..." 고개를 끄덕여 대답하고, 뚱해선 벤치에 올라앉은 둘을 슬쩍 흘겨보고 나서 치어릴리 뒤를 바싹 따라붙었다. "그러게요. 무르게 대하면 큰일나겠어요."
"명장 주콜트*4 장군이 옛 트로팅엄으로 진격해 온 루나 제국군 십만을 상대로 무기 한 번 쓰지 않고 손쉽게 격퇴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 때문이죠. "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빙긋이 웃어 보였다. "음, 여러분은 류트Lute도 무기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죠?"
온 교실에 감탄으로 반짝이는 눈망울이 가득했다.
"질문 있나요?" 리라를 끼고 스툴에 올라앉으며 말했다.
여자애 하나가 앞다리를 번쩍 들었다.
"네. 거기 안경 쓴 친구."
"징짜 깜짝 놀라떠여! 똘라Solar 왕국의 대장군이 정말루 노래 하나만 가지고 적군 전체를 놀래켜 쫓아보낸 거에여?"*5
배를 잡고 웃다간 쓰러질 게 뻔했으므로, 최선을 다해 견뎠다. 저 귀여운 얼굴만 아니었어도 그랬을 텐데. "흠흠. 그래요. 우리 친구 이름이..." 치어릴리 쪽으로 눈길을 던졌다.
교탁 앞에 앉아 있던 치어릴리가 눈을 찡긋하더니 입술만 움직여 이름을 불러주었다.
"트위스트 양이죠!" 꼬마를 향해 지그시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우리 친구도 알겠지만, 주콜트 장군은 대단한 지략가였어요. 당대 최고의 전략가였죠. 당시 루나 제국군 지휘관은 주콜트 장군과 몇 차례 교전 경험이 있었어요. 장군과 휘하 부대는 트로팅엄 방어를 명령받아 거기 주둔하고 있었는데, 루나 제국군이 트로팅엄을 포위한 거에요. 그 때 트로팅엄에서도 악명 높은 협곡을 이용한 전략을 입안한 거죠. 글쎄, 어떻게 보면 위대한 군사전략가로 칭송받던 자신의 명성을 이용한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눈을 찡긋하며 덧붙였다. "제 생각에는 음악의 힘이었던 것 같네요."
"저요! 저요!" 스위티벨이 발굽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래요, 라벤더빛 갈기 한 친구."
스위티벨이 얼굴을 붉히며 발굽을 맞대고 꼬물거리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트로팅엄을 포위한 루나 제국군에게 연주해 준 곡이 뭔지 알 수 있을까요?"
"오호. 이걸 물어 볼 줄은 몰랐는데요. 주콜트 장군은 당시 캔틀롯 도영倒影*6 지구에 살고 있던 사로스인 사이에서 유행하던 노래를 골랐어요."
"사로스인이요?" 스위티벨이 얼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치어릴리가 대신 대답했다. "사로스인은 야행성 포니 중 하나에요. 대부분은 페가수스인데, 박쥐 날개와 반향정위 능력이 특징이에요. 반향정위란, 깜깜한 밤에 날아다닐 때 아주 사소한 소리까지 듣고 자기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고요. 천 년 전, 나이트메어 문이 내전을 일으키기 전에는 루나 공주님을 직접 경호하는 근위병으로 활약했어요."
"하나 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귀가 참 귀엽게 생겼어요."
학생들이 킥킥 웃었다. 그때까지도 꽁하니 있던 사내놈들 둘 빼고.
"혹시 연주해 주실 수 있나요?" 실버스푼이 물었다. "어... 괜찮으다면요."
"물론이죠. 안 될 것 없답니다." 지그시 웃으며 리라를 내 앞에 띄웠다. "좀 거칠 수도 있는데, 그건 양해해 주세요?"
학생들이 다들 귀를 쫑긋 세웠다. 눈을 감고, 기억을 더듬어 곡을 떠올렸다. 가능한 차분하고 정돈된 느낌으로 첫 음을 퉁겼다. 옛 사로스인의 음악은 평범한 사람들 귀로 듣기에는 너무 빠르고 날카로운 경우가 많다. 어쨌든, 앨러배스터 아저씨나 그 동족들이 좋아하는 방식대로 쓰인 곡 아닌가. 가능한 한 그런 요소들은 제외하고 보다 차분한 해석을 덧붙여 변주했다. 대학 과제로 붙잡고 있던 시절의 머나먼 기억을 지금 되살려 연주하는 일의 간단함과 편안함이 감탄스러울 뿐이었다.
매일 일과로 진혼곡을 연주한 끝에 일어난 현상인지, 아니면 매일같이 나이트브링어를 다루며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진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지난 몇 주 전에 비해 연주 기술이 어마어마하게 향상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명백한 진실이다. 위대한 어머니의 성가, 그 한 조각을 물리적 실체로 집약시킨 악기를 모시는 광명과, 그렇게 끌어올린 연주 솜씨로 아이들 앞에서 연주할 수 있다니. 이 시점에서 평범한 아마추어 연주가는 아닌 셈이다. 나는 그 때, 이거야말로 내가 태어난 이유가 아닌가 싶은... 어떻게 보면 아주 당연한 일상을 영위하는 듯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연주가 끝났을 즈음 아이들 절반은 정신을 놓아 버린 듯 멍한 표정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책상을 두드려 박수를 칠 기세였다. 착한 학생들이라 그런지, 치어릴리가 박수를 쳐 주자고 말하기 전까지는 자제하고 있었지만.
"정말 멋진 연주였죠? 좋은 곡을 멋진 연주로 전해주신 하트스트링스 선생님께 힘찬 박수를 보내 드립시다!"
아이들이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리라를 품에 안고 차분하게 미소지었다. 그 때 내게 쏟아진 찬사와 칭찬이 짧으면 몇 분, 길면 몇 시간 내로 전부 사라져 없던 일이 되어 버릴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내 존재가 인지되고, 인정받는 느낌이 무엇이었는지, 그 조각이나마 느낄 수 있었으니까. 언젠가 평범하게 다른 사람의 기억 속에 남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만 한다면, 여기 꼬마들을 가르쳤던 것과 같이 음악을 가르치고야 말겠다는 서원이 마음 속에 세워졌다.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기만 하면, 아이들이 지었던 미소가 다시 얼굴 위로 나타날 테니까, 언젠가......
그때쯤, 크게 감명을 받기라도 한 듯 럼블이 흥분해서 말했다. "정말 예쁜 곡이에요! 멋졌어요!"
"하!" 스닙스가 툴툴대는 투로 들으라는 듯 말했다. "역시 호모새끼라 그런가 이런 거 좋아하는구만."*7
"하하하하!" 스네일스가 책상을 두들기며 낄낄댔다. "효모새끼래!"*8
"잘 됐네. 스위티벨한테 저걸로 청혼하지 그러냐, 카사노바 새끼야! 하하!"
럼블이 입술을 씹었다. 얼굴은 붉어졌고 귀는 늘어졌다. 두 줄 뒤에 앉아 있던 스위티벨이 빨개진 뺨을 허겁지겁 감췄다.
"스닙스! 스네일스!" 치어릴리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 딱딱거리며 일어섰다.
"예, 예?! 스네일스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효모 빵 좋아해요! 내 말 맞지, 스네일스?"
"같잖은 소리 집어치워! 하트스트링스 선생님께도 그렇고, 럼블에게도 그렇고,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야!" 치어릴리가 말했다. "스닙스, 당장 사과해! 지금 당장!"
"흐아아암..." 스닙스가 두 앞다리를 교차시켜 팔짱을 끼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런말해서증말죄송하게됐습니다." 스닙스가 말했다. 치어릴리가 스닙스를 노려보았다. "그게 어딜 봐서 사과라는 건지 선생님은 잘 모르겠구나."
"뭐요? 미안하다고 했음 됐잖아요!"
"아, 그러니..." 치어릴리가 교실 뒤편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저기로 의자 들고 가 앉으렴. 당장."
"우... 구석은 싫다고요!"
"선생님이 얘기하는 거 안 들리니! 더 이상 경고는 없을 테니 알아서 하렴!"
"으어어..." 스닙스가 스툴을 들고 치어릴리가 가리킨 구석을 향해 비척대며 걸어갔다.
"스네일스, 넌 저기 반대편으로 가렴. 발굽 끌지 말고."
"앗싸!" 스네일스는 스닙스 정반대 방향으로 폴짝폴짝 뛰듯이 걸어갔다. "먼지 너무 좋아!"
학생 몇몇이 벌 받는 신세가 된 스닙스와 스네일스를 보고 킥킥댔다. 치어릴리가 교탁 자리로 돌아와 앉고, 지끈거리는 머리를 문질렀다. 이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힘없이 웃고 말했다. "저희 애들이 소란을 피웠네요. 죄송합니다. 그럼 계속하실까요."
"아, 아! 그렇게 마음 쓰실 건 아니고요." 뒤로 돌아 구석을 바라보고 앉은 두 꼬마 깡패의 궁둥이를 흘깃 쳐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음악회에 가더라도 중간에 쉬는 시간 정도는 있잖아요?"
학생 몇몇이 웃음지었다.
"자, 그럼..." 헛기침하고 리라를 높이 들어올리며 말했다. "때는 폭풍의 시대Age of Tempests, 사악한 바다뱀이 어마어마한 무리를 지어 바다를 어지럽히던 시절이었어요. 턱수염 스타스월이 이것들을 조용히 시키려고 한 곡 노래를 지었어요. 같이 알아볼까요?"
"네! 네에!"
"얘기해 주세요!"
"녜! 바다뱀 얘기도 때단할 것 같아여!"
"하하하..." 리라 현을 가볍게 한 번 퉁기며 다음 곡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그나저나, 혹시 학교 밖 숲에 조그마한 쥐나 토끼 같은 친구들도 사나요? 잘못하면 이쪽으로 엄청나게 몰려들 수도 있는데..."
"하트스트링스 선생님. 정말 대단한 강의였어요." 오후 포니빌 공립학교 운동장. 치어릴리가 운을 띄웠다.
"제가 보기에도 그렇더군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꼬마들에게 내가 풀어 준 이야기 보따리를 얘기하는 게 분명했다. 지금까지도 지극히 평범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게 내게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지, 치어릴리는 모를 것이다. 그때까지 몇 시간이나 있었던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치어릴리는 학교 수업이 시작하고 하교할 때까지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저주가 몰아온 한기가 아직 어른거리고 있어서, 적어도 열 명은 되는 꼬마들이 저 사람은 누군가, 하고 이상히 여기는 표정으로 집에 돌아갔다. 그래도 담임교사만큼은 아직 나를 잊지 않은 채였고, 나는 그 사실이 미치도록 감사했다. 내 평생 감히 바랄 수도 없을 정도로 완벽한 하루였다. "오랫동안 기억에 남기만 해 주면 그걸로 족하지만."
"에이, 겨우 그거에요?" 치어릴리가 쿡쿡 올라오는 웃음을 누르며 말했다. "누가 와서 들어도 절대 못 잊을걸요. 블루 노이즈 교수님도 자랑스러워하실 거에요."
"아하하... 그런가요." 말을 더듬다 마른침을 삼켰다. "그나저나, 교사라니 슬슬 질투가 나는데요. 글쎄... 적어도 부러운 건 맞는 것 같네요."
"네, 네." 치어릴리가 살며시 눈을 돌리며 말했다. 우리의 시선이 운동장 저편으로 옮아갔다. 치어릴리가 다시 빙긋 미소지었다. 학부모 몇몇이 학교까지 와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애플블룸에게 다가가는 빅 맥에게 발굽을 흔들어 인사했다. 선더레인이 하늘에서 내려와 꼬마 동생 럼블을 등에 태우고 돌아갔다. 밀키 화이트가 스쿠틀루를 데리고 길을 따라 돌아갔다. 그 옆에는 스위티벨이 같이 있었는데, 래리티가 작업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모양이었다. "예의바르다고는 못 할 아이들이 저지른 일은 정말 죄송해요."
"뭐, 다들 그런 시절이 있었잖아요." 무감정하게 얘기하다가, 치어릴리에게 윙크하고 덧붙였다. "적어도 대부분은."
"설마 선생님도 어렸을 때 문제아였고 뭐 그랬다, 이런 말씀 하시려는 건 아니죠!"
"하하. 그런 건 아니고요." 후드 재킷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뭐, 사춘기 되자마자 입이 걸걸해진 친구가 있기는 하지만."
"흐으음...... 즐거운 시절이셨나 보군요."
"가끔씩 삐그덕거리기는 했지만, 좋은 시절이었죠." 끄덕이며 말했다. "한 사람은, 그 사람을 이루는 각 부분의 총체이죠. 좋은 부분도, 나쁜 부분도 결국은 나인 것이고."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나는 그 때 앨러배스터와 그 여자, 그리고 그 날까지 내가 이룬 모든 이해와 성취에 다다르게 해 준 모든 것들을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두렵고, 한편으로는 소중한 기억들이다. "펼쳐진 앞길을 다듬으려면 과거에 있었던 충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죠. 이제 그러는 법을 배우는 단계긴 하지만." 남은 장애물은 단 하나, 이중주를 연주하는 것. 나는 거기 수반될 고난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나? "각자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시간이 있는 법이니까... 그게 너무 오래 걸린다거나 어설프다는 이유로 남들을 가혹하게 몰아붙이는 건 도저히 못 하겠어요."
"그런가요. 올바른 길을 찾아갈 수 있게 도와 주는 과정에선 때로 엄격해질 필요도 있답니다." 치어릴리가 대답했다. 치어릴리가 방향을 틀어 걷기 시작했다. "그럼 여기서 실례해도 괜찮을까요? 얘기를 좀 해 봐야 할 사람이 있어서."
"어... 그렇게 하시죠." 나는 멍하게 대답했다. 치어릴리가 말한 그 사람은 키가 크고 울퉁불퉁한 인상의 사내였다. 유니콘이었는데, 전체적으로 창백한 솜털과 잔뜩 헝클어진 갈색 갈기, 입가 주변에 삐죽삐죽하게 자란 수염이 눈에 띄었다. 단단해 보이는 인상이었고, 큐티마크로 휴대용 드릴이 그려져 있었으며 앞다리에는 땀과 먼지로 얼룩이 져 있어서, 오늘 하루도 고단히 일하다 온 사내임을 대놓고 나타내고 있었다. 근처 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인부거나, 보도블럭을 까는 사람이겠거니 싶었다. "뭐 신체 노동하는 사람이겠지." 피식 웃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가까이 가서 말을 걸어 볼까 생각하던 찰나, 목전에 조그마한 그림자가 어른거려 그쪽으로 정신이 팔렸다.
"하아아...... 쓸데없는 놈." 스닙스가 툴툴대며 잔디가 풍성히 자란 학교 운동장 바닥만 내려다보는 채로 이쪽을 향해 뒤뚱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래, 집은 너 혼자 가라 스네일스. 어디 한번 혼자서 재밌게 놀든지 말든지 해 보라고. 내가 신경이나 쓸 줄 아냐." 앞을 안 보고 걸은 끝에 결국 나와 부딪친 스닙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욱! 으으......" 스닙스가 뿔을 문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아. 미안하게 됐슴다."
"이야!" 활짝 웃으며 말을 걸었다. "예의범절이 아주 없는 친구는 아니었네!"
"어......" 스닙스가 멍한 얼굴로 물었다. "저 아시나요?"
"아. 그......" 몸을 움찔해 가방에 넣은 리라의 무게를 분산시키며 말했다. "그... 넌 날 모르겠구나."
"아. 스네일스네 어머니는 아니시죠?"
"아냐."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맹세하는데, 스네일스네 어머니는 절대로 아니란다."
"그게, 저한테는 한 마디 말도 없이 지 혼자 집에 가 버렸거든요. 쳇. 똥멍청이 같으니. 나 없으면 앞뒤 분간도 못하는 놈인데."
"흥미로운데." 불쑥 말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헛기침하고 스닙스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뭐 하나만 물어 봐도 되겠니?"
스닙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뭐 그러시든지요. 모르는 사람이라고 겁부터 집어먹지는 않으니까."
"좋구만." 빙긋 웃고 운을 띄웠다. "다른 애들한테..."
"다른 애들한테 뭐요?"
재 볼 것 없이 질렀다. "다른 애들한테 그렇게 구는 이유가 뭐니?"
"그렇게 군다니 무슨 소리죠?"
"대충 짐작은 가잖아? 스네일스는 똥멍청이라고 불렀고, 럼블에게는 호모라고 한 데다가 스위티벨 공까지 뺏었지."
"하하하하!" 스닙스가 땅바닥을 탁 차면서 지저분한 오렌지색 갈기를 흔들었다. "야, 그걸 또 봤어요?! 이야, 별 쓸모도 없는 등신같은 물건인데 그거 돌려달라고 아주 울대요?"
"그렇게 구는 게... 좋은 거니?"
"에이 왜 이래요." 스닙스가 눈을 굴렸다. 그 얼굴에서 뭔가 위화감이 느껴지는 지점이 있었다. "걔들이 쪼다 병신인 게 지들 잘못이지 내 잘못은 아니잖아요? 그런 취급 당하기 싫으면 오히려 이쪽에서 좀 배워야 하는 거죠! 하하!"
"어허..." 내 눈길은 스닙스를 똑바로 겨누고 있었다.
스닙스가 이상한 표정으로 물었다. "뭘 봐요?"
"너 그거..." 고개를 한쪽으로 갸웃해 보이며 물었다. "눈은 어쩌다 그렇게 된 거니?"
"어어......" 그때껏 자신이 불량아임을 만천하에 자랑하던 표정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유니콘에게는 본능이나 다름없는 동작으로 고개를 돌렸다. 뿔 그림자로 왼눈 근처에 든 시퍼런 멍을 가릴 수 있겠다 생각한 것인가. 완벽하게 틀렸다. "그... 아까 아침에 어디 좀 부딪쳐서."
스닙스를 똑바로 노려보다가, 불쑥 말했다. "거짓말 마."
"흠..." 스닙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발굽으로 애꿎은 잔디를 뚝뚝 따며 대답했다. "별거 아니에요."
"정말?" 한쪽 발굽을 가만히 뻗으며 나직하게 물었다. "많이 아플 것 같은데......"
"난 괜찮아요, 됐어요?" 스닙스가 갑자기 날을 세우며 내 발굽을 쳐냈다. 스닙스가 말을 씹어 뱉을 때마다 이빨이 드러났다. "스네일스 그 병신같은 게 대가리까지 텅 비어선 이쪽으로 달려든 거에요! 이게 끝이고!"
그 때, 운동장 저편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닙스? 이리 와라, 아들."
스닙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눈가가 달달 떨렸고, 몸이 팽팽하게 긴장했다. "어... 가, 가야겠네요." 스닙스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는 곧장 자리를 떴는데, 마지막에 "귀찮게 해 드려서 죄송해요." 라는 인사도 빼먹지 않았다.
"괜찮아." 멀어져 가는 스닙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더듬거리는 말이나마 대답했다. 운동장은 문득 아무도 없이 조용했다. 스닙스 머리 꼭대기로 쏟아지는 키 큰 그림자와 꼬마 사이에 그 누구도 없었다. 스닙스는 힘없이 비척거리며 걸었다. 잠시 쳐다보다가, 조금 전 치어릴리와 몇 마디 나누던 그 키 큰 유니콘 남자가 스닙스의 아버지임을 짐작했다.
부자간에 어떤 말들이 오갔는지는 너무 멀어서 듣지 못했지만, 그렇게 유쾌한 대화는 아니었을 거라는 것 정도는 확신한다. 적어도 스닙스가 극도로 긴장해 있던 것은 사실이다. 스닙스가 깊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아비가 땅을 거세게 밟아 쾅 소리를 울리자 꼬마가 깜짝 놀라 덜덜 떨며 고개를 들었다. 반백발이나 다름없어 보이던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자, 잔뜩 찌푸린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무시무시한 표정이기는 했으나, 번득이는 눈빛 한켠에 감당할 수 없는 피로감이 묻어나는 듯했다. 갑자기 남자가 뿔을 밝혔다. 어디다 염동력을 투사한 건지 처음엔 몰랐는데, 고개를 숙여 스닙스 쪽을 쳐다보자 대충 알 만했다. 스닙스가 앞다리를 들고 뒷다리로만 일어선 것이다.
다만 그게... 스닙스 스스로 일어선 게 아니었다. 두 앞다리가 덜덜 떨며 허공에 헛발질했다. 뒷다리 쪽으로 체중이 집중되면서 디디고 선 두 뒷다리가 비틀거렸다. 십 초 가량이나 그러고 서 있는 모습은 어마어마한 충격이었다. 스닙스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콧김을 뿜어내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더 이상 충격 같지도 않았지만. 찰나의 순간이지만, 꼬마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린 듯했다. 한 번 꿈틀함과 동시에 스닙스가 다시 사족보행 상태로 돌아가 가쁜 숨을 토해댔다. 남자의 빛나던 뿔이 꺼져 있었다. 아비가 쿵쿵대는 걸음으로 길을 따라 걸으며, 따라오라는 듯 무뚝뚝하게 몸짓했다. 스닙스가 흐느적거리는 걸음으로 뒤를 따랐다.
별로 마음에 드는 풍경은 아니었다. 크게 소리 한번 지를까 하던 중에, 치어릴리가 빙글빙글 웃으며 나타났다.
"어머! 안녕하세요. 누구 찾아오셨나요?"
"저거..." 치어릴리 뒤쪽으로 멀어져 가는 두 인영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거 봤어요?"
"흠?" 치어릴리는 무슨 말이냐는 듯 이쪽을 쳐다보고 말했다. "어떤 거 말씀이시죠?"
"저거요. 방금 전에 그거. 스닙스랑 저 아저씨 하는 거..."
치어릴리가 뒤를 흘끗 돌아보았는데, 그 때는 이미 두 명의 모습이 멀어져 흐릿해져 있었다. "흠?" 치어릴리가 이쪽을 쳐다보고 말했다. "혹시 에지Edge 가문 사람이세요?"
"저 아저씨 성이 에지에요? 치어릴리, 그게..." 나는 말하다 멈췄다. 그대로 치어릴리를 쳐다보았다.
치어릴리가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었다. "실례지만, 저희 만난 적 있었나요?"
숨을 들이마셨다. 아득한 곳까지 뻗어가다가, 한쪽으로 꺾는 길목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 저... 실례가 안 된다면..."
느리고 조용히 걸어 시내로 향했다. 앞에서 걸어가는 두 사람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 물 흐르듯 발굽을 움직였다. 발소리에 이어 숨소리까지 눌러 죽이며 뒤따른 것은 스닙스와 그 아비였다. 익숙한 풍광과 소리를 지나쳐 갔다. 플러터샤이와 수다를 떠는 래리티의 가벼운 목소리와 스파이크가 불을 뿜을 때 인후에 묻은 잔불 냄새가 뒤섞여 어른거렸다. 슈가큐브코너 매장 밖으로 새어나오는 음악 소리와, 봉봉이 구워낸 각종 군것질거리에서 풍기는 달큼한 냄새가 섞여들었다.
시내에서 마주칠 수 있는 모든 감각과 자극을 뒤로하고, 앞서 가는 부자만 쳐다보며 걸음을 옮겼다. 아무도 모르는 행려병자의 장례 절차가 으레 그러하듯이 저 둘의 걸음에는 그 어떤 활기도 없었다. 사람이 걷는 건지 달팽이가 기는 건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는데, 이따금씩 아비가 뭐라고 중얼거리며 툴툴대는 것 외엔 그 어떤 말도 없었다. 스닙스는 다른 데로 새거나 할 생각이 전혀 없는 듯, 녹아 가는 빙하처럼 아비의 뒤를 따라 고개를 푹 숙이고 숨소리조차 없이 졸졸 가는 것이었다. 학교에서는 아무 거리낌없이 대들고 방방 뛰어다니는 양아치에게 이런 모습이 있었다니. 모르긴 몰라도 저 녀석은 감히 웃어 보이지도 못할 터이다.
둘은 시내 한복판으로 들어섰다. 시내에서 달랑 2블록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2층짜리 콘도미니엄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집집마다 앞에 조성된 정원과 잔디밭이 잘 관리되어 형형색색으로 빛나고 있었는데, 딱 한 곳만은 그렇지 않았다. 아비가 문제의 잔디밭이 위치한 집 앞으로 터벅터벅 다가가더니, 열쇠고리를 꺼내 하나하나 맞춰 보며 문을 열었다. 사내는 퉁명스레 흥, 소리를 내뱉으며 안으로 들어서더니 뒤돌아 스닙스를 쏘아보았다. 그러자마자 곧장 튀어나간 다리에 비틀거리는 모습은 차라리 척수반사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인데, 조금이라도 빨리 집에 들어가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 같았다. 멀찍이서 보니 집 안에 여자 둘이 있었는데, 스닙스가 집으로 달려 들어가는 모습을 무표정하게 쳐다만 보고 있었다. 스닙스가 현관으로 들어서서 매트에 급히 발을 닦고 쾅 소리와 함께 문을 닫아, 집 안이 더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나는 길가 끄트머리에 서 있던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문제의 가정을 좀 더 관찰하기 전에 우선 지나가는 행인이 없는지부터 확인했다. 뭐라도 걸리라는 심정으로 몇 분 가량 자리에 주저앉아 기다렸다. 섬뜩할 정도로 조용했다. 슬슬 해가 지기 시작했다. 피곤한 한숨과 함께 집을 겨누고 있던 시선을 거두고 몸을 돌려 포니빌 북쪽 어귀에 위치한 집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와장창 소리와 함께 누가 고성을 내질렀다.
몸을 홱 돌려 문제의 집을 쳐다보았다. 창가를 흘끔흘끔 쳐다보고 있자니, 창가에 십 초 정도 불이 켜져 있다가 꺼졌다. 다시 침묵이었다.
심장이 쿵쿵 뛰며 가슴팍을 두들겼다. 마른침을 삼키고 주춤주춤 방향을 틀어 오두막으로 향했다.
어두워. 목말라. 왜 이쯤되면 항상 더운 걸까. 여긴 드림 밸리도 아닌데. 캔틀롯은 산 위에 지은 도시 아닌가. 좀 봐 주세요 공주님. 태양의 운행을 관장하신다니 그 정도는 해 주실 수 있잖아요. 아. 목말라아.
이불을 걷어차 치운다. 하품하며 눈을 비빈다. 조용히 내려온다. 문댄서가 자니까 조용히 걷자. 벌써 2주 정도가 지났다. 문댄서가 굳이 방 한가운데에서 자는 것도 익숙해졌다. 어쩜 저렇게 잘 잘 수 있는 거지. 나는 밤마다 자려면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다 잠드는데, 문댄서는 한번 누우면 바로 잠들어 버린다. 낮 동안 에너지를 다 써 버려서 그러는 걸까. 문댄서는 숨바꼭질을 잘한다. 내가 어디 숨더라도 바로 찾아낸다. 언제는 마법으로 3피트 정도 떠다니는 것도 본 적 있다. 말은 안 하지만 부러워 죽겠다.
아 몰라. 물. 물 물 물 무우우우우우우울.
방문을 열고 희미하게 밝혀진 복도를 따라 걷는다. 하품이 계속 나온다. 왜 이불 밖만 나오면 졸려 죽을 지경이 되는지 모르겠다. 잠이란 참 이상하다. 문댄서랑 같이 산 다음부터 끝내주는 꿈도 못 꾸고 있다. 그래서 혼자 잘 자는 걸까. 내 꿈을 전부 가져가 버린 거야. 하긴, 그건 힘들겠지. 히히히. 가끔 보면 양의 탈을 쓴 늑대 같은 구석이 있단 말이지......어어어어어...?
이게 다 무슨 일이래?
거실에 어른들이 엄청나게 모여 있다. 엄마 아빠도 있다. 문댄서네 엄마도 있다. 아줌만 소파에서 자기로 했었는데? 저렇게 어른들이 가득 앉아 버리면 아줌마가 주무실 수 없을 텐데 왜 저럴까. 근데 다른 분들은 누구시지? 가만, 두 분은 낯이 익다. 더스크 아저씨랑 스텔라Stellar 아줌마였던가. 길 건너편에 사셨지 아마. 아들이랑 딸이 하나씩 있다고 했다. 딸내미는 어디 나가자고 해도 절대 안 나가는 책벌레라고 들었다. 아들은 파란 갈기를 하고 있는데, 어째 문댄서는 이 오빨 볼 때마다 얼굴을 붉힌다.
무슨 얘기들 하시는 거지?
"......문댄서가 어디 다치진 않을까, 그런 걱정 없이 잘 수 있는 것만으로 감사하죠.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조금이라도 일찍 뭐라도 해 봤어야 했는데."
"새틴Satine 씨는 잘못 없어요. 지금까지 잘 견뎠어요."
"근위대에 사실을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진술하신 게 더 중요하죠. 나이트롯을 감옥에 집어넣을 사유는 그것만으로 차고 넘칠 겁니다."
"너무... 너무 무서워요. 조만간 면회라도 가 봐야 하나 싶고."
"새틴, 고개 들어요. 그런 작자한테 마음 쓸 필요 없어요. 지금까지 거짓말로 살살 구슬려 가면서 등골 빼먹기밖에 더 했나요."
"자조自助하지 않는 자는 그 누구도 돕지 않으려 한다는 말도 있죠."
"이렇게 되어 버릴 줄은 몰랐죠. 만났을 땐 그렇게 사람 좋고 느긋한 사람이 없었는데. 대체 어떻게 된 거죠. 그런 사람인 줄 처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런 생각만 하면...... 문댄서까지 붙들고 어디까지 떨어졌나 새삼 다시 깨닫게 돼요. 공주님 맙소사, 제가 대체 무슨 짓을?"
"진정해요. 우리를 내치지 않은 것만으로 충분하니까. 새틴 당신도, 문댄서도 이제 안전해요."
"괜히 집 공간이나 차지하고 들어앉아서... 하는 거라곤..."
"겨우 며칠 있었던 걸로 그렇게 자책할 것 없어요. 저희가 계속 곁에 있을 테니 염려 마세요. 법원에서 사건의 전말을 낱낱이 밝히고 나면, 재산 반환 소송도 도와 드릴 거에요."
"그래도... 나이트롯이—"
"원래 당신 집이었어요, 새틴. 당신과 문댄서가 살 집 말이에요. 당신이 벌어서 산 집이지 그 작자가 산 집이 아니라고요. 두 번 다시 그런 생각 마세......"
졸려서 흐릿한 눈을 비비며 어기적어기적 거실로 들어선다. "잘 못 들었어요. 혹시 문댄서 생일 같은 거에요? 새 집으로 가는 거에요?"
어른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린다. 엄마가 엄하디엄한 목소리로 말한다. "라이라 너! 이 시간에 안 자고 뭐 하는 거니, 라이라 하트스트링스?"
"어어... 자다가, 목, 말라서..." 쭈뼛거리며 어른들을 올려다본다. "제가 들으면 안 돼요?" 고개를 돌려 문댄서네 어머니를 본다. "새틴 아주머니? 왜 울고 계세요?"
엄마가 아주머니를 가만히 안으며 숨을 깊이 들이마신다. 차분한 미소로 말씀하신다. "어른들끼리 잠깐 몇 마디 나누고 있었단다. 별 거 아니야." 엄마가 아빠를 쳐다본다. "여보, 잠깐..."
아빠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으로 다가오신다. "자, 공주님은 이쪽으로 오세요. 늦은 시간에 안 자고 돌아다니면 안 돼."
"그래도... 나 목말라서—"
"물이라면 아빠가 가져다 줄게." 아빠가 부엌에서 컵 하나를 띄워 물을 따라 가져오셨다. 아빠가 컵을 건네신다. 한 모금 마신다. 아빠가 내 앞에 몸을 낮추고 앉아 어깨 위로 발굽을 올리신다. "문댄서랑, 아주머니가 잠깐 신세 지고 계신 건 알지?"
"네에......" 끄덕인다. 영 불편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카펫만 쳐다본다.
"그래. 우리 가족이 도와 드려야 한단다. 엄마랑 아빠는 새틴 아주머니를 도와 드리고, 우리 라이라는 문댄서를 돕는 거야. 알겠니? 이해했는지 모르겠구나."
"문댄서는 인형이 아녜요, 아빠." 입을 뿌루퉁 내밀며 대답한다. "어떻게 도우라는지도 모르겠다구요."
"친한 친구로 지내면 된단다."
"벌써 친한 친군데요!"
아빠가 빙긋 웃는다. "그렇다니 정말 다행이구나. 문댄서는 네가 필요해. 네가 문댄서랑 같이 노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지 우리도 다 안단다. 계속 좋은 친구로 지내렴. 새틴 아주머니도 너랑 문댄서가 찰싹 붙어다니는 걸 보시고 얼마나 다행스러워하시는지 몰라."
"진짜여?"
"그렇대두. 물은 다 마셨나, 우리 공주님?"
"네에."
아빠가 지그시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신다. "그럼 이제 잘 수 있겠지?"
씩 웃는다. "응 아빠..."
아빠가 고개를 숙여 이마에 살짝 입맞추고 말씀하신다. "역시 우리 딸. 그럼 내일 학교 가야 하니 이만 잘까."
짐짓 찌푸려 보인다. "개구리 공부한다고 했는데."
"글쎄, 그래야 사마귀 날 일이 없지 않을까?"
"이히히..."
방 앞까지 아빠가 같이 와 주셨다. 마지막으로 머리를 다독여 주신다. "그럼 잘 자고, 아침에 보자."
"안녕히 주무셰요."
"잘 자라, 라이라."
방에 들어가 문을 닫는다. 침대로 향한다. 당황스럽다. 걸음을 멈춘다.
뭐가 이상하다.
문댄서 침대가 비어 있다. 방 한쪽 구석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다.
무슨 소리지 싶어 목을 쭉 빼고 찾아본다. 벽장에서 나는 소리다. 천천히 걸어가 벽장 문을 연다. 문댄서가 내 봉제인형을 껴안고 앉아 있다.
"문댄서?" 눈을 가늘게 뜬다. "울어?"
문댄서는 아무 말도 없다. 평소엔 이렇지 않은데. 비가 어마어마하게 내릴 때 아파트 입구쯤에서 처음 만난 그 때 이후로 문댄서는 단 한 번도 운 적이 없다.
"문댄서 왜 그래?" 가만히 앉아 시선을 가까이 가져간다. "우리 친구잖아. 근데 왜 울어."
문댄서가 훌쩍인다. 품에 안은 인형 너머로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웅얼웅얼 말한다. "가기 싫어..."
"응?" 무슨 소리지. "가긴 어딜 가?"
문댄서가 달달 떨더니 침을 꿀꺽 삼키고 더듬거리며 말한다. "우리 나가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잖아. 엄마랑 나보고 나가 살라고 하는 거 아냐? 나 가기 싫어!"
피식 웃는다. "야, 가긴 누가 간다고 그래! 있고 싶은 만큼 있어도 돼!"
문댄서가 훌쩍이며 젖은 눈으로 이쪽을 본다. "정말?"
"그래." 고개를 끄덕인다. "방금 들었거든." 목소리를 낮추고 조용히 속삭인다. "엄마랑 아빠가 그러는데 더 있어도 상관없대. 저기 길 건너편에 사는 더스크 아저씨랑 스텔라 아주머니도 그러시더라. 아무 데도 안 가도 돼."
문댄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나직한 한숨과 함께 거친 숨이 서서히 진정되었다.
앉은 자리에서 좀 꾸물거리다가, 방바닥을 쳐다보고 물었다. "어... 혹시 악몽 꿨어?"
문댄서가 고개를 젓는다. 눈물이 아직도 흐른다. "아니." 그게 대답이었다.
이럴 땐 뭐라고 해야 하나.
"그래도..." 계속 훌쩍이면서 이쪽을 본다. "나랑... 계속 같이 있으면 불편하지 않겠어?"
아무 말도 안 하다가, 씩 웃는다. "아빠가 그러는데, 너랑 친하게 지냈음 좋겠대."
"아저씨가... 그러셨어?"
"어. 되게 이상한 얘기 아냐? 벌써 친하게 지내고 있는데 친하게 지냈음 좋겠대."
문댄서가 작은 소리로 웃는다. 억지로 웃어 보이는 것 같다. "그러게..."
문댄서를 본다.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큐티마크가 생긴 기분이 이럴까 싶은 기분이다. 가만히 다가가 꼭 안는다. 여자애 둘이 벽장에 나란히 들어가 이러고 있는 게 좀 바보같긴 하지만, 혼자 내버려두고 싶지 않다.
"걱정 마." 뺨을 비비며 말한다. "나랑 같이 있으니까 악몽 같은 건 무서워하지 마."
문댄서가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몸을 기대 온다. 다리가 차갑게 식어 있다. 안됐다는 생각도 들지만, 나랑 같이 있어 줘서 행복하다.
"만난 게 너라 다행이야, 라이라." 문댄서가 말한다.
"음... 나도 너 만나서 좋아."
서로 킥킥댄다. 어느샌가 울음도 멈춰 있다. 우리는 누가 먼저 잠들었다 할 것도 없이 자리에 누워 잠들었다. 누가 먼저 잠들었을까.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무릎 뒤에 몸을 말고 엎드린 앨을 가만히 토닥였다. 고양이 몸이 한기로 출렁이는 망망대해 한가운데서 유일한 열원이라 할 것이었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창 밖을 내다보았다. 아침 해가 다시 떠올랐다. 잠시도 눈을 붙이지 못한 채, 불면의 어느 10월 밤이 다시 지나갔다.
심호흡하며 오두막에 채워 놓은 물건들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포니빌 시립도서관에서 조금씩 빼돌리다시피 가져온 장서가 어느새 산을 이루어 쌓여 있었다. 이름 없는 여신과 이중주를 연주하고야 말겠다는 기약 없는 목표 하나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려면 수십 권씩 쌓아놓은 두꺼운 책을 한 글자 한 글자씩 숙고해 가며 읽어야 했다. 고개를 돌려 나이트브링어에서 솟아나는 금빛 광채를 바라보았다. 창조의 권능, 그 작은 조각 하나가 미물 한가운데 독야청청 서 있었다.
해방을 향한 길은 여러 방향으로 나뉘며 뻗어 있는데, 갈 수 있는 길이 저희들끼리 뒤얽히고 뒤집히며 무시무시한 한기와 절망으로 벽을 세워 끝도 없는 미궁을 이룬다. 내가 풀어야 할 진정 큰 문제는 무엇인가. 나를 미궁으로 끌고 들어간 문제인가? 아니면 유령이나 마찬가지인 신세가 아닌 이상 처음부터 지각하지도, 인지하지도 못할 문제인가.
깊이 한숨지으며 무릎 위에 올라앉은 앨을 침대 한가운데에 내려주고 자리에서 일어나 후드를 뒤집어썼다.
"여러분, 오늘은 정말 특별한 손님을 모셨어요!" 하품을 쩍쩍 하는 학생들 앞으로 치어릴리가 방긋방긋 미소지으며 나아갔다. "캔틀롯에서 강사 선생님이 오시기로 되어 있었지요, 바로 오늘 오셨답니다! 여러분도 우리나라 음악의 역사를 공부하고 싶어했지요? 그럼 오늘의 선생님이시자 블루 노이즈 교수님의 수제자인 라이라 하트스트링스 선생님께 환영의 박수를 쳐 드릴까요!"
꼬마들이 일제히 환호하며 발굽으로 책상을 탁탁 쳐 박수를 보냈다. 교단으로 나아가 스툴에 앉았다. "네, 안녕하세요. 여러분들처럼 열심인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때가 겨우 어제밖에 안 된 거 같네요. 믿으실까 모르겠지만...하하. 이런 자리를 가질 때마다 갈수록 새로워지고 특별해져서 되게 기분이 좋아요."
"그건 뭔가요?" 가져온 악기의 금빛 울림통에 시선을 고정한 다이아몬드 티아라가 물었다.
"이거 말인가요." 리라를 높이 띄워 학생들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이건 리라라고 해요. 우리나라에서 역사가 가장 깊은 악기 중 하나지요. 대학의 박사님들께서도 성금聖琴 나이트브링어가 리라나 하프의 형상을 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계세요." 치어릴리에게 슬쩍 눈짓하며 빙긋이 웃었다.
치어릴리가 눈을 찡긋하며 거들었다. "보름 전에 천지창조 이야기를 배웠지요. 다들 기억하나요?"
꼬마들이 저마다 웅성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 곡의 노래가 세상을 빚었지요." 전날 꼬마들에게 들려 주었던 내용을 살짝 비틀어 말하며 숨을 가다듬었다. "세상의 근본이 노래기 때문에, 우리가 부르는 노래는 각자 자신을 음악에 실어 표현함과 동시에 창조의 숨결에 다가가는 행위가 되죠. 심장이 콩닥콩닥, 일정한 박자에 맞춰 뛴다는 사실을 아는 걸로는 부족해요. 부족하고말고요." 빙긋 웃었다. "시간이라는 개념보다도 앞서 존재한 노래들이 있지요. 그 노래는 세월을 정의하고, 우리 자신을 정의하는 노래에요. 사람이 상상하고 만들어낼 수 있는 창조의 공간을 가만히 돌아다니다 보면, 우리도 몰랐던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답니다. 장대한 역사의 길목을 따라 발전해 온 우리나라의 문화도 그렇게 자라난 것이고, 앞으로도 그렇게 앞으로 나아갈 거에요. 오늘 여러분과 이야기할 내용이기도 하죠. 여러분 모두 살아가면서 각자 놀라운 결실을 맺게 될 텐데, 오늘은 함께 거기 조금씩 다가가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무엇 하나 그렇지 않은 게 없지만, 이 또한 먼 옛날에서 시작되는데......"
"하..." 스닙스가 한쪽 발굽으로 턱을 괴고 쳐다보며 툴툴댔다. "음악으로 역사 공부를 시키네. 벽에 칠해놓은 페인트 마르는 거 보는 게 더 재밌겠다."
"하하하하!" 스네일스와 더불어 몇몇 꼬마들이 웃어댔다.
치어릴리가 찌푸린다. 벌써 자리에서 일어나 스닙스에게 한 소리 할 기세다.
"그래요? 그럼 우리 친구 스닙스가 좋아하는 음악이 뭔지 얘기해 보도록 할까요?" 잽싸게 끼어든다. "그러면 적어도 지루하진 않겠죠?"
어마어마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라도 한 양, 당황하며 대답한다. "어... 이름을 어떻게 알아요?"
치어릴리도 이쪽을 보고 있다. "이름 아셨어요?"
대답 없이 피식 웃기만 하고 말한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말해 봐요. 좋아하는 음악이 어떤 건지. 별 상관도 없는 거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확실히 관련이 있다는 걸 보여 드리죠."
"어어......" 스닙스가 살짝 움찔하더니, 책상 끄트머리를 발굽으로 탁탁 치며 말했다. "저야 뭐... 포니 펑크 좋아하는 거 같은데......"
꼬마 몇몇이 환호했다. 스쿠틀루가 씩 웃었다. 다이아몬드 티아라와 실버스푼은 눈을 굴린다. 스위티벨은 아무 반응 없이 눈만 깜박이고 있다.
"흐으으음... 포니 펑크... 펑크라......" 머리를 팽팽 돌리면서 입안을 핥다가 말했다. "그렇지. 비슷한 게 있어요!" 사지를 뚝뚝 꺾으며 염동력을 발휘하는 '근육'에 해당하는 쪽을 풀어 준 뒤, 뿔을 밝혀 리라를 감싸쥐었다. 멜로디가 있기는 하지만 없는 것 같기도 한, 묵직하게 쇄도하는 소리가 솟구쳤다. 몇몇이 입을 떡 벌리고 쳐다보는데, 스닙스의 표정이 특히 볼 만했다.
광기에 이어 일종의 공격성까지 느껴지는 속주를 마치고 스툴에 풀썩 주저앉으며 짐짓 숨을 고르는 척했다.
"휴! 아무래도 연습 부족인가 보네요."
"저거..." 스쿠틀루가 말을 더듬었다. "설마 하프로 저런 소리를 낼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리라거든!" 애플블룸이 잽싸게 끼어들어 정정했다.
"거기서 거기지."
"어... 음..." 치어릴리가 조심스레 다가오며 말했다. "그리폰 국가를 연주하는 것도 여러 번 들어 봤지만... 음... 신기하기로는 이게 제일이네요......"
"아시네요!" 치어릴리를 쳐다보며 씩 웃고 말했다. "방금 연주한 거 그리폰 국가가 맞아요. 뭐 이퀘스트리아 올림픽 때 들을 만한 연주는 아니지만요. 하하......" 고개를 돌려 학생들을 쳐다보았다. "요즘 그리폰 왕국에서 유행하는 대항문화운동의 한 갈래인 건 여러분도 알고 있겠지요. 신정일치 과두정에서 민주주의 연합국으로 권력구조가 재편되면서, 젊은 층도 이에 맞춰 자기 개성을 표현할 방향을 찾기 시작했어요. 묵직한 타악기 소리와 빠른 박자를 기반으로 고전 음악 상당수를 극한까지 몰아붙여서 거칠지만 가슴이 절로 뛰는 형태로 변주하던 것이 오늘날의 펑크 장르에요. 따지고 보면 그리폰의 발명품이라고 해야겠네요. 대항문화운동은 지난 30여 년 동안 대중성을 확대해 나갔고, 그 영향력이 우리 나라로까지 퍼져나와 여기에서도 몇몇 유명 아티스트가 등장하게 되었지요......" 지그시 웃어 보였다. "그것이 포니 펑크에요. 원조 펑크와도 별 차이는 없지만." 스닙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필리 탤런트Filly Talent 정도는 들어 봤겠네요?"
남자애들 몇몇이 킥킥 웃으며 자기들끼리 고개를 끄덕였다. 스닙스도 여전히 입을 다물지 못하는 채긴 했지만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하하하. 네, 네. 많이 들어 봤죠."
치어릴리가 학생들을 보다가, 이쪽을 보더니 다시 학생들을 쳐다보았다.
씩 웃으며 등을 뒤로 뻗었다. "자, 그럼 몇백 년 전으로 돌아가 봅시다. 루나 제국과 천상왕국Celestial Monarchy 사이에 어마어마한 내전이 벌어지는 동안 문화계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보이고 있었어요. '포니 펑크' 같은 장르를 개척한 건 아니지만, 당시만 해도 전대미문의 대사건에 휘말려 역사의 소용돌이 속을 살아가고 있었던 작곡가들은 그 시대를 반영한 곡을 여럿 써 나갔어요. 이 곡을 공부하고 배우면 기분이 어떨까요? 시간여행을 하는 것과 똑같을 거에요. 지금부터 수백 년 후를 상상해 봅시다. 사람들이 '포니 펑크'를 연구한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 세대와 직접 교감하진 못하더라도 어땠었구나, 하는 것 정도는 알 수 있겠죠? 음악은 우리 삶을 아주 많이 반영한답니다.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가 누구였으며, 우리가 누구일 것인지가 투영되는 거에요. 노래를 공부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공부하는 것과 같죠. 재미있을 수밖에 없겠지요?"
이쯤에서 학생 몇몇이 책상 가까이 붙어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지적 흥분에 휩싸인 학생들이 뭐라고 중얼거렸다. 몇몇은 기대가 되는지 몸을 뒤척였다. 강의 내내 스닙스는 내게 시선을 집중했다.
이쯤에서 완전히 내 학생이나 다름없었다.
"음, 여러분은 처음이고 하니..." 발굽을 살짝 핥고 리라로 몇 마디를 퉁기며 입을 열었다. "아주, 아주 오래 전에 살았던 볼트롯Voltrot이란 분에 대해서부터 시작합시다......"
운동장 한쪽 끄트머리, 치어릴리와 몇 걸음 떨어진 어느 지점에 가만히 서 있었다. 꼬마들이 10월의 청명한 햇살을 맞으며 코스를 따라 둥글게 줄지어 달렸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리라를 퉁겼다.
"트위스트, 조금 천천히!" 소풍 테이블에 앉은 치어릴리가 시험지를 뒤적이다 소리쳤다. "지난달에도 무리하다 발목 삐었지? 정글짐은 조심해서 타겠다고 약속했으면서 청개구리처럼 굴다 그렇게 됐잖니!"
혀짤배기 소리가 뭐라고 대답했다. 꼬마들이 쿡쿡 웃어댔다.
치어릴리가 빙긋 웃더니 빨간 펜으로 시험지를 슥슥 그어 채점했다.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 치어릴리가 말했다. "오늘 와 주신 것만 해도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는데, 정말 더 놀라게 되네요. 평범한 음악사 강의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렇게 가르칠 수도 있었네요. 자주 좀 와 주세요."
"네, 뭐..." 현을 퉁기며 느릿하게 대답했다. "오늘 강의 미리 준비해 오신 거 아니냐고 생각하고 계실 거 같은데." 눈을 찡긋하며 덧붙였다. "블루 노이즈 교수님께서 평소 가르치시는 방식 그대로 강의하지 않을까 싶으셨죠?"
"하하! 그랬죠!" 치어릴리가 팔짱을 끼며 미소지었다. "우리 나라 교육제도가 선생님처럼 아이들 사고력, 표현력을 기르는 쪽에 중점을 두는 방향으로 갔으면 좋겠네요." 그러고는 배시시 웃으며 다음 시험지에 점수를 매겼다. "주변 사람들이 늘 하는 말로는, 치어릴리 넌 어쩜 나이가 들어서도 동심이 그대로 남아 있냐고 하더군요. 현실을 발견하고, 또 공부해 가면서 꽃피는 어린이들과 어울릴 수 있는 게 제 재능이 아닐까요. 지식을 나눌 수 있듯이 행복도 나눌 수 있는 거죠."
"흠... 그렇군요. 알 것 같아요." 현을 몇 번 더 퉁겨 음을 일으키며 치어릴리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여쭤 볼 게 생각났어요. 전에 여기 아이들......"
"네?"
"뭐 하나만 여쭤 보고 싶은데..." 우리 앞으로 뒤뚱거리며 달려오는 꼬마 모습에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말했다. "오, 스닙스구나. 뭐 필요한 거라도?"
"어어... 하트스트링스 쌤이네요."
눈을 깜박이며 빙긋이 웃었다. "내 이름 기억하니?"
"기억하고말고요!" 치어릴리가 말하며 감동했다는 듯 스닙스에게 눈을 찡긋했다. "기본적인 예의범절 정도는 안답니다. 흠흠. 어떻게 생각하니?"
"어... 글쵸. 쌤 말씀이 맞아요."
운동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쪽 구석에서 스쿠틀루와 럼블, 페더웨이트Featherweight와 어울려 포 스퀘어Four Square*1 게임을 즐기는 스네일스가 보였다. 스닙스가 최소 2시간 이상 내 존재를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더 하고 싶은 말들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일'의 한 단계를 훌륭히 마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 도련님께서 무언가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 보군요?" 그 날 강의 내내 하염없이 늘어놓았던 '캔틀롯식 화법'으로 말을 꺼냈다. 언제 들어도 참 가식 쩐다.
"리란가 뭔가 가지고 포니 펑크 연주하신 거 진짜 끝내줬거등요!" 스닙스가 즐거이 방방 뛰며 말했다. "설마 학교에서 그런 걸 들을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죠! 심지어 포니빌에서!"
"그렇구나, 그런데......" 치어릴리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눈을 찡긋하며 끼어들었다. "학교에선 다시 듣기 힘들지 않을까. 집에서라면 언제든지 들을 수 있겠지만, 앞으로는 고전 음악이나 잘해 봐야 이지리스닝 정도밖에 듣기 힘들 거야. 교육청에서 정규교육과정에 요즘 그리폰들 음악을 집어넣는 걸 그닥 반길 것 같진 않거든."
"그..." 스닙스가 입술을 씹으며 괜히 잔디를 툭툭 찼다. "집에서도 못 들어서요......"
조심스레 스닙스를 뜯어보았다. 눈가에 든 멍자국은 거의 사라져 있었는데, 삐죽삐죽한 오렌지색 갈기 왼쪽에 커다란 혹이 불쑥 솟아 있었다. 심장에 대못을 채운 듯한 기분을 애써 지우며 물었다. "스닙스네 가족들은 음악을 안 좋아하나 보네?"
"으음... 잘 모르겠어요."
"그래?" 나는 대답했다.
"아뇨 뭐..." 스닙스는 생기 없는 무표정으로 운동장 저편의 숲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설마 '아뇨 뭐...' 하려고 여기까지 왔을 리는 없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말했다. "뭐라도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왔을 것 같은데?"
"어어......" 스닙스가 꾸물거리다 고개를 들었다. "네, 네... 글쵸..."
귀를 쫑긋하며 물었다. "그럼 말해 볼까?"
스닙스가 눈을 깜박하더니 씩 웃었다. "하트스트링스 쌤이라면, 더 좋은 곡도 알고 계실 것 같아서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과 기쁨이 교차했다. 나직하게 숨을 내쉬며 스닙스를 보고 빙긋 웃은 뒤,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쌤도 되게 좋아하는 곡이 하나 있어. 시간 날 때마다 연주하는 곡인데, 한번 들어 볼래?"
"어. 그러죠."
"포니 펑크는 아냐, 괜찮겠니."
"하하하." 스닙스가 피식 웃더니 똥똥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괜찮아요! 들려 주세요."
"그렇다면야. 그럼 시작할까..." 말을 마치고, 곡 전부를 들려주었다. 날 세운 변박 따위는 전혀 없이 부드럽고 차분하며, 기분 좋은 곡조가 울려퍼졌다. 곡조에 서글픔이 묻어나기는 했지만 힘차게 현을 뜯을 때마다 솟구치는 울림이 섞이자 이루 말할 수 없는 환희가 느껴졌다. 연주를 마치자 옆에서 듣고 있던 치어릴리까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옆에서 탁자를 콩콩 두드리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브라보! 브라보!" 치어릴리가 겨우 지그시 웃어 보이며 말했다. "굉장한 곡이네요. 제목을 알 수 있을까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대답했다. "페눔브라의 메아리. 저 스스로에게 가까운 만큼이나 소중히 여기는 곡이기도 하죠. 우울해질 때도 있고, 이걸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나 막막한 순간들도 있지만 그럴 때마다 연주하는 곡인데, 연주를 마치고 나면 마음이 되게 편안해지고 안정되더라고요."
"확실히..." 자기를 내려다보는 두 명 어른들 위에서부터 흘러내린 곡조가 언덕빼기 아래로 멀리 사라져 가기라도 하듯, 눈을 깜박이며 스닙스가 중얼거렸다. "...마음이 편해지긴 하네요."
리라를 가볍게 안아들고 차분한 눈길로 스닙스를 쳐다보다가 물었다. "좀 더 마음 편히 살고 싶다, 뭐 그런 생각이라도?"
콧김을 내뿜으며 이맛살을 찌푸린 스닙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툴툴대는 투로 대답했다. "아뇨. 그냥..." 꼬마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몸을 돌렸다. "할 짓 되게 없다, 싶어서 그랬죠..."
"심심할 때도 썩 괜찮거든." 나는 답했다. 스닙스가 떠나다 말고 걸음을 멈췄다. 나는 말했다. "슬플 때도,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도, 피곤할 때도 좋아. 내 기분이 어떻든 그건 중요하지 않거든. 음악만 있으면 좋아지니까. 음악은 사람을 이루는 한 부분이라고 아침에도 얘기했었지. 그 어느 누구라도 행복하게 살 자격이 있는 법이야. 우리 인생에서 아무리 중요하고 영향력이 큰 사람이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 누구도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없어."
스닙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톡 치면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한 얼굴로 소년이 말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세요?"
고개를 끄덕였다. "장담할 수 있지."
스닙스는 당장이라도 뭔가 말하려는 낌새였는데, 결국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자리를 떠나지도 지키지도 못한 채 그저 그 중간의 어느 지점에서 방황하고 있을 뿐이었다. 치어릴리가 즐거워하는 목소리로 짧은 침묵을 깨뜨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정말 예의바르고 바른 생활을 했구나." 치어릴리가 덧붙였다. "오늘은 럼블이나 다른 아이들 귀찮게 하지 좀 말라고 선생님이 뭐라 할 필요도 없었어. 단 한 번도 말이지! 훌륭하구나."
"어어어..." 스닙스가 멋쩍게 웃으며 짧고 굵은 꼬리를 흔들었다. "네."
"앞으로도 이렇게만 하렴. 부모님께서도 기뻐하실 거야."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희미해지기는 했지만, 스닙스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그렇겠죠. 하트스트링스 쌤도 연주 고마웠어요."
"뭘 이 정도로."
스닙스가 총총 자리를 떴다. 오싹한 한기가 잠시 떠올랐다 흐려졌다. 두 번 다시 스닙스의 저런 면을 볼 날이 없을 것이란 생각에 몸이 떨렸다.
"저도 괜히 입에 발린 말 한 건 아니에요." 치어릴리가 말했다.
"에이, 뭘 그런 생각을 하고 그러세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스닙스는 이리로 전학 온 다음부터 내내 사고뭉치에 골칫덩어리였어요." 치어릴리가 말했다. "호기심 왕성에 명랑하고, 또 추진력도 있는 성격인 건 맞지만, 대부분 민폐를 끼치거나 골치 아픈 문제를 만드는 쪽으로 흘러가더군요. 마음만 먹으면 그 누구의 마음에도 들 수 있는 녀석이지만 다른 또래를 괴롭히길 좋아해서 아무래도 힘들죠. 틈만 나면 여자애들을 울리거나, 그 이상으로 못된 짓을 할 게 뻔하니까 스닙스랑 스네일스는 항상 제 감시하에 둬야 해요."
"흠, 썩은 귤 같은 녀석들인가 본데요." 나는 답했다.
"그렇다 보니 좀 피곤하죠." 치어릴리가 고개를 끄덕해 보였다. "그래도 제가 지켜보는 한 저 두 녀석들이 함부로 못된 짓은 못 할 거에요. 스닙스 녀석이 럼블 좀 그만 괴롭히면 좋을 텐데. 스네일스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냥 아주 재미있는 놀이 정도로만 생각하지요."
"스닙스도 똑같이 생각하지 않을까 싶으신 거지요?" 치어릴리를 마주보며 말했다. "생각조차 하기 싫은 어떤 것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기 위한 수단 정도로?"
"그건 무슨 말씀이시죠?"
"그......" 심호흡하며 저만치 멀어져 가는 똥똥한 유니콘 꼬마로 시선을 옮기고 말했다. "저 친구 얼굴에... 못 볼 수가 없는 걸 설마 저 혼자만 봤을 리는 없을 것 같은데요."
치어릴리가 끄덕였다. "저 둘이라면 꽤나 거칠게 노는 편이라서요."
"아, 뭐 그렇겠죠." 치어릴리를 마주보았다. "남자애들이 다 그렇죠 뭐.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라면?"
치어릴리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얼굴의 웃음기가 많이 지워져 있었다. "스닙스가 가끔 얼굴에 멍 들어서 나타나는 데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는 거군요?"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 안 드세요?" 나는 물었다. "제가 선생님보다 학생들과 가까이 지내 본 것은 아니죠. 저 꼬마 친구가 도저히 유순한 성격은 아니라는 것도 동의해요. 급우를 괴롭히니까요. 음악 얘기를 할 때도 자기 감정은 최소한으로 내보이려고 하는데, 막상 찔러 보면 생각보다 많이 빼거든요." 치어릴리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나직하게 말했다. "집안 분위기가 그리 평화로운 편이 아니라면 어때요? 급우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는 데도 충분한 이유가 될 것 같은데."
"저도 그런 쪽으로 생각해 본 적이 있기야 하죠." 치어릴리가 차분히 대답했다. "제 나이만큼 교직에 몸담으신 선생님들은 보통 그런 추정 하나 때문에 발을 잘못 들인 경험이 한두 번씩은 있으신데 아시나요. 백이면 백 완전히 틀린 억측이었지만요."
"아. 그런가요. 으음..." 얼굴을 붉히며 괜히 몸을 꿈지럭거렸다. "그렇겠네요. 그런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긴 어렵겠어요."
"제가 맡아 기르는 아이들 하나하나 전부 소중한 아이들이에요." 치어릴리가 말했다. "물론 한 번에 이 많은 애들을 돌보는 게 절대 쉬운 일은 아니죠. 그러다 보면 행간을 읽는다면서 별것도 아닌 것에 매몰되는 일도 비일비재해요." 그렇게 마무리를 짓는가 싶더니, 조심스레 침을 삼키며 덧붙였다. "때로는, 그 반대인 경우도 있고......"
"혹시 스닙스네 부모님 아세요?"
"아버님을 몇 번 만나뵌 적이 있죠."
"오, 그래요?" 귀를 쫑긋하며 치어릴리를 마주보고 물었다. "어떤 분이죠?"
"성함은 스트레이트 에지Straight Edge라 하시죠." 치어릴리가 말했다. "포니빌 인근 건설 현장에서 근무하세요. 제가 보기엔 모범시민 그 자체시던데요."
"인격적으로도 모범시민일까요?"
치어릴리는 아무 말 없이 우물거리기만 했다. 나는 조용히 치어릴리만 보고 있었다.
한숨을 푹 내쉬더니, 피곤해 보이는 웃음으로 대답한 말은 이랬다. "이래서 제가 정신의학이 아니라 교육학 전공을 고른 거에요. 심리검사지를 들이밀고 있는 사람 큐티마크가 활짝 펴서 방긋방긋 웃고 있는 꽃이라니, 끔찍하게 안 어울리는 것도 있지만. 아하하하......"
"그래도 이 사람은 어떤 사람 같다, 정도로 평가는 가능하실 것 같은데요. 그 사람은 어떻던가요?"
"한평생 일용직으로 건설 현장을 떠돈 분이시죠." 치어릴리가 대답했다. "그러니 성격이 거칠고 질박해지는 건 어쩔 수 없겠죠. 사람 대하는 것보단 작업용 기계 다루는 게 더 익숙한, 그런 분이에요."
"스닙스가 학교에서 애들 괴롭히고 다니는 걸 그분도 듣기는 들으셨을 텐데, 반응이 어땠나요?" 전날 치어릴리와 그 남자가 잠시 '회동'을 갖는 모습을 떠올리며 물었다. "그 얘기를 하시긴 하셨을 것 같거든요."
"다른 아버님들과 비슷하게... 차분하고 착 가라앉은 반응을 보이시던데요." 치어릴리가 말했다.
"스닙스네 어머님은 어떤가요?" 나는 계속 물었다. "학부모 간담회나 비슷한 자리에 나오신 적 있나요?"
치어릴리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스닙스네 가족이 포니빌로 이사 오고 나서부터 어머님은 단 한 번도 뵐 기회가 없었어요."
"좀 이상하지 않으세요?"
"하하...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도 좀 이상하다 싶긴 하네요." 치어릴리가 대답했다. "이 문제에 관심이 아주 많으신 것 같은데요. 혹시 그쪽만 알고 계신 뭔가가 있는 건가요? 그게 사실, 저도 스닙스네 부모님과 좀 더 깊이 대화를 해 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요."
"솔직한 말씀으로..." 리라를 가방에 집어넣고 치어릴리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이런 기회가 한번 떨어져 주지 않으려나 내심 기다리던 차였다. 전체 계획에서 그 날 하루가 차지하는 비중을 그대로 얻어낼 수 있을지 없을지가 목전에 놓여 있었다. "선생님께서 이런 반응을 보이시는 게 좀 의외네요. 블루 노이즈 교수님께서 강사 자격으로 다녀오라고 하시길래, 가까운 친구네 친척집에서 묵어야겠다 하고 온 거거든요. 포니빌 시내 인근 콘도미니엄이죠."
"아. 그쪽 거리라면 저도 잘 알죠."
"그게, 제 평생 그렇게 잠을 설쳐 본 적 있었나 싶을 정도였어요."
"네?"
"그게..."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말했다. "시끄러운 소리를 들었어요. 마치..." 전날 스닙스네 집 인근에서 들었던 소음을 다시 떠올리며 눈을 굴리고 말했다. "벽이 막고 있어서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누가 소리지르는 소리 같더군요. 저도 전엔 아파트에 살았다 보니, 그런 소리만 들리면 저기 저 집 뭐 문제 있는가 보다, 싶거든요. 오늘 아침에 집 나와서 학교로 오는데, 옆집에서 꼬마가 하나 나오더군요." 말을 멈추고 치어릴리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치어릴리가 천천히 끄덕였다. "스닙스랑 몇 마디 꼭 나눠 봐야겠다 싶으셨을 수밖에 없었겠군요. 하루 종일 마음이 무거우셨을 텐데."
"그 친구 집안 분위기가 절대 평화로워 보이진 않았거든요." 이번만은 셀레스티아 공주님께 맹세코, 엄연한 사실을 말했다. "그래도...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음, 엄밀히 따져 보면 그게 사실이라도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 딱히 있을 것 같지는 않거든요."
가슴이 내려앉았다. "정말 그런 것 같으세요?"
"그런 것 같다, 가 아니에요. 그렇다, 의 영역이죠......" 치어릴리가 아직 반쯤 남은 시험지 파일을 툭 덮었다. "확실한 증거가 있지 않은 이상, 무조건 최악의 상황부터 가정하고 보는 건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으니까요."
누가 보더라도 눈에 띌 정도로 움찔하며 대답했다. "그렇겠군요. 하마터면 선생님 직업까지 잃게 만들 뻔했네요......"
"아하, 그것도 그렇죠. 뭐 절 음해하려고 하신다, 같은 생각은 안 하지만요. 그나저나......" 치어릴리가 짓궂은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우리 애들 개인 물품을 한 마디 말도 없이 내다 버리는 것도 그닥 바람직한 교육자상은 아니겠죠?"
치어릴리의 말에 멍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어... 네?"
"그게..." 치어릴리가 장난치듯 놀란 숨소리를 내며 말했다. "스닙스가 우산을 두고 갔거든요! 우리 어린 친구가 집에 가져가야 하는 걸 깜빡한 모양이에요. 아무래도 가만 내버려뒀다간 전부 좀이 슬어서 못 쓰게 될 것 같으니, 교육자로서 마땅히 직접 가져다 주는 게 마땅할 것 같은데요?"
"잠깐만요, 아침에 우산 들고 나오진 않았는데요?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지 않았어요? 그..." 나는 말을 멈추었다. "가만..." 고개를 돌려 치어릴리를 흘끗 보고 물었다. "지금 제가 생각하는 거 말씀하신 거 맞죠?"
치어릴리는 순진한 미소로 답했다. "혹시 오후에 바로 캔틀롯 올라가시는 거 아니시죠?"
치어릴리를 바라보며 싱긋 웃고 대답했다. "제가 그다지 서두르는 타입은 아니라서."
스트레이트 에지 일가가 사는 집 문 앞, 치어릴리가 초인종을 울렸다. 두 집 떨어진 집에서 개 하나가 짖어댔다. 붉어져 가는 햇살에 젖은 새들이 지저귀며 날개를 퍼덕였다.
"이런 일은 전에도 두세 번 정도 해 본 적 있죠." 치어릴리가 나직히 말하며 가방에 넣어 온 우산의 좌우 균형을 맞추었다. "전에 필리델피아에서 근무했거든요."
"필리델피아에도 집안 분위기 안 좋은 집이 꽤 있었나 보네요?" 이쪽도 조용히 물었다.
치어릴리는 아무 말 없이 이쪽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 하하. 그랬죠. '형제애의 도시' 아니겠어요." 픽 웃으며 덧붙였다. "나도 참, 바보같이."
"쉿. 누가 와요."
고개를 끄덕이고 치어릴리 뒤편으로 물러났다.
출입문 너머에서 문고리를 더듬어 찾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자 키가 크고 허여멀건한 솜털과 갈색 갈기, 그보다도 진한 색을 자랑하는 꺼끌꺼끌한 수염을 한 사내가 나타났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차갑고 무감정한 시선이 날아와 꽂혔다.
"안녕하세요, 스트레이트 에지 선생님!" 치어릴리가 짐짓 쾌활하게 말했다. "귀찮게 해 드려서 죄송해요. 아드님께서 학교에 우산을 두고 가서, 가져다 드리러 왔어요!"
"흥... 별 대수롭지도 않은 일로..." 스트레이트 에지가 중얼거리며 심드렁한 눈길을 던졌다. "저쪽은 누구요?"
추운 것도 아닌데 절로 몸이 달달 떨렸다.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다행히 치어릴리가 대신 입을 열어주었다. "아, 이쪽은 하트스트링스 선생님이세요. 음악사 특강 때문에 캔틀롯에서 어렵게 모셨지요. 스닙스가 오늘 강의를 아주 재미있게 들었는데, 아주 좋은 질문도 몇 가지 했답니다. 아하하, 옆길로 샜네요. 우산 여기 있어요." 치어릴리가 사내에게 우산을 내밀었다. "교실 한쪽에 박혀서 먼지 뒤집어쓰면 안 되니까요."
"흠......" 사내가 뿔을 밝혀 우산을 냅다 채가더니, 눈앞에 띄워놓고 여기저기 뜯어보다 말했다. "우리 집 물건은 아닌 것 같소만." 남자의 목소리는 무감정하고 억양도 없어서, 흡사 강철끼리 부딪쳐서 나는 공명음 같았다. "다른 집 애들 물건 아뇨?"
"아. 그게 말이죠... 오늘 아침에 아드님이 가져온 걸 봤거든요." 치어릴리가 아무리 들어도 어색하기 짝이 없는 소리로 웃으며 얼버무렸다. "요새 채점할 게 하도 많아서, 제가 착각했을 수도 있기는 하지만요! 아하하......"
"흠.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사내가 말했다.
"그럴 수도 있죠! 마침 집에 가는 길에 선생님 댁이 있길래 겸사겸사 갖다 드리면 좋겠다 싶어서 가져왔어요."
"글쎄, 치어릴리 선생이 마음 써 준 건 고맙게 됐소만." 사내가 우산을 건넸다. "우리 집 우산은 아뇨."
"어쩜, 집 되게 좋네요!" 치어릴리가 말했다. "주변에서 그렇다고들 안 하던가요?"
스트레이트 에지가 심드렁한 눈길로 이웃의 화사한 정원 한가운데 방치되다시피 한 자기 집 정원을 쳐다보더니 물었다. "그렇소?"
"그럼요. 동네에서도 조용한 곳이잖아요. 외곽 쪽보다는 차라리 이쪽에서 사는 게 더 낫겠는걸요. 대단한 이야기도 여럿 갖고 계실 것 같고." 치어릴리는 평소보다 더 친근한 태도로 접근하고 있었다. 치어릴리가 사내에게 싱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과는 한데 앉아 학부모 면담을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
"굳이...?" 사내의 눈빛이 칼끝처럼 일어섰다. "스닙스가 또 그 짓거리를 했소?"
입술을 씹으며 치어릴리 쪽을 쳐다보았다.
치어릴리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요즘 스닙스 행실이 정말 훌륭하답니다! 괜찮으시면,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 자세히 말씀드릴 수도 있죠!"
남자가 치어릴리와 나를 번갈아 보다가 치어릴리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흠..." 콧김을 훅 뿜고는 사내가 말했다. "좋소. 안 될 것 없지." 그 목소리엔 일말의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화가 난 것 같지도 않았고, 기분이 좋은 것 같지도 않았다. 남자는 연기 한가운데를 걸어가기라도 하듯 콧김을 뿜어냈다. 스트레이트 에지가 몸을 돌려 집안으로 들어섰다. 그게 안으로 들어오라는 제스처인 것은, 남자가 그 굵직한 목소리로 외치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어텀Autumn! 스닙스! 윈드송Windsong! 손님이다!"
치어릴리가 앞장서 들어갔고, 나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그 뒤를 따랐다. 뿔을 밝혀 현관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서자 집에서 풍기는 냄새가 인후로 밀려들었다. 시큼하고 불쾌한 냄새였다. 그 집에서 악취가 나야만 한다는, 나 혼자만의 의심에서 비롯된 강박 때문이었는지 정말로 끔찍한 냄새가 나는 것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모르는 사람의 집에 드나들 때면 몸과 영혼이 단절되는 듯한 기분이 든다.
거실로 들어가는 길은 지극히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가정에서도 으레 볼 법한 것들이었다. 즐거워 보이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 벽마다 줄을 서서 늘어서 있었다. 부엌을 슬쩍 보자 어린애가 형형색색으로 휘갈겨댄 그림 조각들이 냉장고 위를 가득 메운 것이 보였다. 찬장마다 고급스럽고 예쁜 접시와 은식기가 들어 있었다. 거기서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면 우리 고모랑 할머니께서 사시던 집안 풍경이 그대로 겹쳐 보일 것 같았다. 지극히 평화로운 평범한 가정집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스닙스네가 대체 어떻길 기대했던 것인가. 의심 때문에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했던 건가 싶기도 했다.
순간 치어릴리가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할까 덜컥 겁이 났다. 슬쩍 보니 치어릴리는 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치어릴리가 빙긋 웃으며 소파에 가 앉았다. 어느새 톡 튀어나온 여자 하나가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붉은 갈기를 길게 기른 노란 유니콘이었는데, 그 앞에 덮은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자리에 앉아 있는 품을 보아하니, 해 뜬 동안에는 대부분 거기 앉아 지내는 모양이었다. 여자가 지그시 웃으며 이쪽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치어릴리와 몇 마디를 나누었다. 그 웃음은 도자기 그릇처럼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위태로움이 있었고, 눈도 어딘지 공허해 보였다. 불안하다 싶은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실에는 조그마한 여자애 하나도 같이 있었다. 스닙스보다 서너 살 정도 어려 보였다. 처음 보는 사람은 그 둘이 남매라고 하면 못 믿을 터이다. 꼬마는 나와 치어릴리가 거실로 들어서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새하얀 도화지에 크레용을 들고 그림을 그리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온갖 원색이 부드러운 선으로 그어져 얽히며 집 여러 채와 성 여러 곳, 용을 비롯해 환상적이라고 할 만한 어느 풍경을 옮겨놓은 그림으로 수렴하고 있었다.
"스닙스?!" 스트레이트 에지가 조금 더 큰 소리로 말했다. "아들, 뭐 하냐?!"
"아. 스닙스는 안 부르셔도 괜찮아요." 치어릴리가 말했다. "요새 아주 올바른 행동을 보여주고 있어서 칭찬해 줬거든요. 학기 초랑 비교해서 성적도 오르고 있고요. 생물 시간에 간단한 퀴즈 시험을 봤는데, 반에서 2등을 했답니다. 리바이어던Leviathan과 바다뱀에 관심이 아주 많아요. 혹시 스닙스 큐티마크가 실은 고생물 화석 발굴을 말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라니까요! 하하."
소파에 앉은 여성이 지그시 웃으며 말했다. "정말 좋은 소식이네요." 그리고 덧붙였다. "저도 가끔 아들이 큐티마크 찾은 걸 깜빡한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답니다."
"가끔 보면 그냥 신경 써야 한다는 것 자체를 잊어버리는 것 같다니까." 스트레이트 에지가 끼어들었다.
"으으음..." 어텀이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책을 만지작거리더니 소파 앞다리받침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여러모로 어르고 달랜 결과이긴 하지만, 요새 공부에 좀 더 신경 쓰고 있는 건 확실해요. 저도 요새 몸이 안 좋고 해서 아들도 마음 잡기 힘들었을 테죠..."
"아, 저도 그 얘기 들었어요." 치어릴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어텀을 쳐다보았다. 몸을 앞으로 기울인 치어릴리가 여자의 앞다리를 가만히 잡으며 말했다. "어머님, 뿔은 좀 어떠세요?"
"요즘은 그리 아프진 않아요." 스닙스의 모친이 차분히 웃으며 대답했다. "치료가 잘 듣는지 발작 빈도도 갈수록 떨어지고 있고요.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치료가 정말 잘 되어 가고 있다고 하더군요."
"거 뭐 문진이라도 하나, 자네." 부엌에서 스트레이트 에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동자를 굴려 부엌 쪽을 슬쩍슬쩍 눈짓해 보니 웬 통 여러 개가 쌓여 있었다. 고개를 돌려 자세히 보자, 카운터 뒤에 똑바로 서서 무감정한 눈초리로 이쪽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스트레이트 에지의 모습이 보였다. 통은 그새 어디론지 사라지고 없었다. "치어릴리 선생이 우리 아들내미가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나 얘기하고 싶다고 부러 시간 쪼개서 왔는데 그럼 쓰나."
"으음... 그도 그렇군요." 어텀이 침을 꿀꺽 삼키며 졸린 눈으로 말했다. "못난 아들이 폐를 끼치고 있다면 사과드릴게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치어릴리가 명랑하게 대답했다. "실은, 요사이 스닙스 행실이 놀라울 정도로 좋아졌답니다! 공부만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올바른 행동거지가 점점 몸에 배어 가고 있지요! 지난번에는 스미스 선생님께서 손녀딸인 애플블룸에게 점심 도시락을 가져다 주시러 오셨었는데, 나오시자마자 발을 헛디뎌 넘어지신 적 있었어요. 글쎄 그 많은 남자애들 중 스닙스 하나만 가까이 가서 부축해 일으켜 드리지 뭐에요. 다른 아이들 행실이 얼마나 좋든지, 그 행동 하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어머나..." 어텀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어쩜 착하기도 하지."
"하..." 스트레이트 에지가 거실 한복판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지어낸 말씀 같은데."
"절대 아니에요." 치어릴리가 고개를 저었다. "또래 남자애들에 비하면 철이 아주 빨리 든 편이에요. 여태까지 어른들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뿐이죠. 다른 얘기도 있는데, 들으실까요?"
스트레이트 에지는 심드렁하게 한숨만 푹 내쉬었고, 그 아내인 어텀은 치어릴리에게 바싹 다가앉으며 "들려 주세요." 라 대답했다.
치어릴리가 말을 이어 가는 동안 나는 그 옆에 서서 최대한 자연스러운 표정을 연기했다. 층계 위를 흘끗 올려다보자 키가 작도 똥똥한 꼬마 하나가 얄팍한 침실 문 너머에서 이쪽을 내려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고개를 들어 2층을 보자 꼬마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상하다 싶은 생각을 안고 '윈드송'일 여자아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치어릴리의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꼬마는 그림을 그리던 도화지를 더욱 단단히 움켜쥐어 끝내 구기다시피 하게 되었다. 심지어 어깨 근육까지 심하게 긴장되어 굳어지고 있었는데, 그 내내 스트레이트 에지가 꼬마 가까이에 서 있었던 게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애써 마음을 달랬다. 결론을 내리는 것은 내가 아니었다. 내가 하루 종일 얘기해도 안 될 일을 치어릴리가 아주 간단히 해주고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치어릴리는 능수능란한 솜씨로 스닙스의 최근 행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와중에도 어느 정도 과장까지 섞어 가며 말했다. 그 와중에도 스닙스의 부모에게서 대답을 얻어낼 만한 지점을 정확히 찔렀는데, 이 대화는 '학부모 면담'이란 명분으로 시작해서 비공식적 조사라고나 해 둬야 할 구조물을 층층이 쌓아올리고 있었다.
더 가관이었던 것은 이 '면담'이 계속될수록 하나같이 굳었던 표정을 풀고 아주 편안한 얼굴을 한 점이다. 이들의 대화는 어느샌가 스트레이트 에지가 현장에서 하는 작업에 관한 것과 어텀 부인의 취미생활, 윈드송의 또래 친구로 옮아갔고, 아주 일상적인 주제에까지 치달았다. 심지어 나조차 한결 마음이 놓일 정도였다. 가끔씩 2층을 흘끗흘끗 쳐다볼 때마다 스닙스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가슴이 쿵쿵 뛴 것만 빼면.
"음." 치어릴리와 스트레이트 에지의 집에서 나왔다.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중천에 떠 있던 해가 벌써 저물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마당으로 나와 근처 길목 한 켠으로 빠져나왔다. "일이 아주 잘 풀린 것 같군요. 어때요?"
"스닙스네 어머님 건강이 그렇게 안 좋으실 줄은 몰랐어요." 착 가라앉은 소리로 대답했다. 같이 걷는 동안 나는 내 발끝만 쳐다보고 있었다.
"저도 오늘 다시 뵙고 나서야 생각났어요. 스닙스네 가족이 포니빌로 이사 온 것도 레드하트 선생님을 비롯한 동료 의료진 몇 분께서 마력선 치료 경력이 있었던 게 컸다고 들었고요." 치어릴리가 고개를 돌려 빙긋 웃으며 말했다. "급성 마력장단절증후군Acute Magical Disconnect 가족력은 없으시죠? 신경계에 심각한 교란을 일으킨다고 하더군요."
"저도... 얘기는 들어 봤어요." 나는 말했다. "아픈 것도 끔찍하게 아픈데, 치료에만 몇 년이 걸린다던데요."
"엄마가 아파서 아무것도 못 하고 와병만 하고 있는 것보다 더 정신 산란한 일이 또 있을까요." 치어릴리가 말을 멈추고 몸을 돌려 내 어깨에 발굽을 얹고 말했다. "스닙스를 걱정해 주시고, 저에게 말씀해 주신 점은 정말 감사해요. 오늘 직접 가서 확인해 본 바로는, 엄마가 아프다는 사실 앞에 괴로워하는 한 아이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요. 정제되지 않은 수단과 방법으로 자기 안에 쌓인 화를 표출하는 거야 그 또래 사내아이들에게는 흔한 일이지요. 그래도 소득이 없지는 않았네요." 치어릴리가 똑바로 서서 빙긋 웃고 말했다. "어머님 건강이 한층 나아진 걸 확인했고, 이번 '면담'으로 다음번에 스닙스가 또 급우들을 괴롭힐 때 뭐라고 해 줘야 할지 파악할 수 있었어요."
"네 뭐, 그런 것 같기도..."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자기 부모님이랑 말씀 나누는 중인데 끝끝내 안 나타나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았어요? 한 번을 안 내려왔는데?"
"하하하. 전혀 뜻밖의 상황에서 부끄러움을 타는 일도 드문 일은 아니랍니다. 스닙스가 전혀 그렇게 안 생기긴 했지만, 외모로 모든 걸 파악하지 마세요. 스닙스도 실은 정 많은 성격이라, 그에 걸맞는 행실을 보여 줄 날이 올 테니까요."
"그런가요..." 고개를 끄덕이며 픽 웃었다. "그랬으면 좋겠군요."
"네, 뭐. 그럼 저도 슬슬 집에 가서 채점 마저 해야겠어요." 치어릴리가 말했다. "오늘 수업도 너무 잘 해 주셔서 뭐라고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블루 노이즈 교수님께 이렇게까지 많은 걸 부탁드린 게 아니었는데." 치어릴리가 눈을 빛내며 방긋 웃었다. "혹시 올해 중으로 다시 한 번 시간 내 주실 수 있을까요? 조만간 캔틀롯 정원으로 현장학습을 나갈 예정인데, 가이드Chaperone 역할을 부탁드리고 싶네요."
"아하하하..." 애써 시선을 피하며 억지 웃음을 웃었다. "글쎄..." 침을 삼키며 겨우 웃고 말했다. "진지하게 고려해 볼게요. 오늘 일은 평생 못 잊을 것 같군요."
"우리 아이들만 또 하나 배우는 하루가 된 게 아닐지도 모를 일이네요." 치어릴리가 눈을 찡긋하며 가방에 넣은 우산을 질질 끌고 걸음을 옮겼다. "그럼, 즐거운 저녁 되시길."
"네. 그렇게 할게요." 몸을 돌려 총총히 걸음을 옮겼다. "선생님도요."
"어어... 하트스트링스 선생님?"
고개를 돌려 치어릴리를 마주보았다. "네?"
치어릴리는 헷갈린다는 눈치로 얼굴을 살짝 붉히고 물었다. "어디로 가시나요? 친구분 친척 댁에서 묵고 계시다고 들었는데, 그 집은 바로 옆집이잖아요."
"아. 그게..."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산책하는 게 취미라서요. 한 바퀴 느긋하게 돌기엔 포니빌만한 데가 없네요."
"하하하... 그렇긴 하죠?" 치어릴리가 발굽을 흔들어 인사하고 떠났다. "그럼 안녕히!"
"네. 어. 안녕히 가세요." 힘없이 발굽을 흔들었다. 치어릴리가 나를 등지고 걸어가는 것이 다행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치어릴리가 저 멀리까지 걸어가 붉은 석양 저편에서 바싹 다가온 저녁 속에 섞이는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나는 한숨지으며 에지 일가의 집 앞, 정돈되지 않은 잔디밭을 향해 분노 어린 시선을 내던졌다.
뭐가 됐든 분석하고 보는 내 성질머리를 탓할 일이었다. 가엾고 구차한 운명의 굴레를 뒤집어쓰고 세상이 잊은 노래를 찾아 떠난 순례자요 넝마주이이자 생각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는 유니콘 찌꺼기를 탓할 일이었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자로 끊임없이 격하되면서부터 비로소 보이게 된 경계 사이의 것들을 아예 접할 일이 없었다면, 지난 한 해 동안 내가 해낸 것들을 똑같이 이뤄낼 수 있었을까. 나는 선생이 아니고, 심리상담사도 아니다. 치어릴리는 이 두 방면에선 나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사람이다. 스닙스가 어떻게 지내는지 내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것도 아니면서, 무슨 자격으로 그렇게 넘겨짚었던 것인가.
남자애들은 결국 남자애들인 것이고, 저주받은 자는 끝내 저주받은 자일 뿐이다.
어깨를 으쓱하고 마을 북쪽 어귀에서 나를 기다리는 오두막으로 향하려 몸을 돌리는 찰나... 무슨 소리가 들렸다. 지난번에 들은 소리만큼 뭉개지지 않아서, 나름대로 또렷하게 들렸다.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뭐가 부서지는 소리도 섞여 있었다.
내심 다 놓아 버리고 무슨 소리가 들리든 신경 끈 채 계속 갈 수도 있었다. 그래도 확인은 해 봐야 한다는 일말의 망설임이, 그 여자가 내게 뻗친 이름 없는 자들의 기운에서 솟구치는 한기와 떨림이 방향을 틀어 그 집으로 걸음을 돌려놓았다. 고개를 돌려 스트레이트 에지의 집을 노려보았다. 직전에 들었던 것보다 더 큰 소리와 함께, 집 창문이 뒤흔들렸다.
주변 길목을 두리번거려 살폈다. 치어릴리는 벌써 저만치 멀어져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반대쪽 방향에서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지만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하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에 이쪽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단숨에 스트레이트 에지의 집 쪽으로 달려가 게이트 너머로 숨어든 뒤, 건물에 바로 귀를 갖다 대다시피 하며 접근했다.심호흡하고 귀를 기울이자, 내 심장 뛰는 소리 위로 집안에서 오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트레이트 에지가 이를 갈다시피 하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내지르는 소리가 아주 명료하게 들렸다.
"애비 아가리로 애새끼가 싸지르고 다닌 똥을 치우는 게 말이 되냐, 이 새끼야! 하긴 그 동안 엄청 풀어 줬지. 내가 말할 때는 이쪽만 보라고 했잖아!"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다니까요! 제가 뭘 어쨌다고—?"
"동네 돌아다니면서 저 등신같은 새끼들 물건 훔치고 다녔다며, 이 새끼야! 병신같이 짧은 다리로라도 세상 밟고 돌아다니고 싶으면 남의 물건 함부로 건들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네?! 아빠, 그런 적—"
"누가 말대꾸하라고 가르쳤어! 그년이 와서는 댁네 아들놈이 학교에 우산 두고 갔다고 그러더라! 우산 같은 건 사 준 기억이 없는데! 애미애비가 안 사다 주니까, 남의 걸 슬쩍해서라도 하나 장만해야겠다 싶었냐, 엉?"
"우산이요?! 하! 애초에 우산이야 아무도 신경 안 쓰는 거—?"
벽력 같은 퍽 소리와 함께 스닙스의 말이 끊겼다. 쿵 하고 쓰러지는 소리에 등골이 얼어붙는 듯했다. 잔향이 채 가시지도 않은 사이로 깜짝 놀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집에서 좀도둑 새끼가 나오다니 말이 돼!" 스트레이트 에지가 투덜대는 소리가 이어졌다. "별 쓰레기 같은 동네로 기어들어온 것만 해도 충분히 인생 좆됐다 싶었더니, 더한 게 있었구만!"
"스트레이트! 여보, 이러시면 안 돼요! 스닙스는 우산 얘기가 있었던 것도 몰랐잖아요—?"
"네년도 마찬가지야! 뭐가 자랑이라고 그렇게 떠들고 자빠졌어?! 다른 새끼들은 당신이 아프든 말든 알 필요가 없다고 누차 얘기했잖아! 특히 저 치어릴리라는 여자 귀에만큼은 안 들어가게 하라고! 아프단 얘기 동네방네 떠들고 다녀 봤자, 저 새끼들 구걸하는구나, 할 새끼들밖에 없는 거 모르겠어!"
"예의상 한 거죠, 예의상! 그거랑 우리 아들이랑 대체 무슨 상관이라고—!"
"애초에 이 새끼가 그따위로 굴고 다니지만 않았어도 선생이 내 집 문간에 대가리 들이미는 일은 없었을 거 아냐! 그년도 마찬가지야. 이 새끼가 훔치고 다닌 쓰레길 원래 주인한테 돌려 줄 필요가 전혀 없거든!"
"나... 으으으... 우산 훔치고... 다닌 적 없—"
"그 아가리 닥치고 방으로 꺼지기나 해, 이 새끼야. 기어오르는 거 참아 주다가 혈압 올라 뒈지게 생겼으니까."
"진짜, 제가 훔친 거—아악!"
"귓구멍에 좆 박았냐, 이 새끼야? 올라가서 숙제나 하라고. 아오, 빌어처먹을. 고마운 줄 모르고 도둑질이나 하고 다니면서 기어오를 줄만 아는 애새끼 때문에 등골 빠지게 일하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린지 씨부려 봐, 이 새끼야. 이참에 메인해튼으로 다시 갈까? 오늘 밤에라도 이삿짐 싸서 갈 수도 있어. 니 엄마가 거기서 며칠이나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제 애미가 어찌되든 좆도 신경 안 쓰는 품이, 커서도 지밖에 모르는 쓰레기 될 게 뻔히 보인다!"
"아뇨... 그, 그러지 말아요.."
"뭐?"
"어... 아, 아뇨."
"사라져. 내 평화롭고 조용했어야 할 저녁 시간대를 네놈이 또... 개박살을 내 놨으니까!"
이 일련의 사건 내내 누가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렸다. 갈수록 그 크기와 세기가 거세져 갔는데, 스트레이트 에지는 그것마저 참아넘기지 못했다.
"씨부랄. 윈드송 넌 아가리 닥치고 그림이나 그려! 어쩜 쓸모없는 건 제 오라비를 저리 똑 닮았는지. 대가리 빈 건 벌써 능가한 것 같구만."
"스트레이트 에지—"
"어텀 당신도 입 닫고 있어. 돈이 얼마나 줄줄 새나 당신 그 옘병할 발작 치료비 대기도 벅차니까. 그러니까 아가리 닫으라고."
그리고 죽음 같은 침묵이 이어졌다. 스닙스가 걷지도 못하고 발굽을 질질 끌며 침실로 올라가는 절뚝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이쯤에서 나는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다. 몸이 어찌나 덜덜 떨리던지 주체할 수가 없었다. 마른침을 삼키며 몸을 돌려 길가를 슬쩍 살핀 뒤, 치어릴리가 향한 방향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대략 2분 정도 걸려 치어릴리를 따라잡았다. "치어릴리!" 급히 다리를 멈추며 숨을 헐떡였다. "빨리요! 다시 가 봐야 해요!"
"예?" 치어릴리가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제 생각이 맞았다고요!" 나는 소리쳤다. "우리가 집 나서자마자 바로 어마어마한 소리가 났어요. 셀레스티아 공주님께 맹세코 가까이 가서 들어 보니까, 세상에 스트레이트 에지가 자기 가족들 상대로 온갖 폭언을 쏟아내고 있었다니까요! 잘 모르지만 아마 스닙스도 크게—"
"무슨 말씀이신지... 음..." 치어릴리가 흘끗흘끗 곁눈짓하며 말했다. "대체 무슨 말씀이시죠? 스닙스네 아버님을 아세요?"
"그..." 나는 잠깐 멍청한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땀에 젖은 몸이 오한에 떨었다. "네. 네, 스닙스의 아버지죠. 우리... 그러니까 방금 스트레이트 에지와 그 아내를 만나고 온 길 아닌가요."
"흠... 스트레이트 에지 씨랑... 어텀 부부 말씀이신가 본데..." 치어릴리가 지평선을 슥 쳐다보았다. 현기증이 나는 양 눈을 감고 비틀거리더니, 말했다. "포니빌로 처음 이사 오셨을 때 만나뵀던 적이 있죠." 치어릴리가 부박한 미소를 지었다. "그분들께 뭐 문제라도 있는가요? 제가 그 분들 아들 담임교사라서요. 저기, 서쪽으로 가다 보면 학교 있잖아요?"
치어릴리를 쳐다보다가, 발굽을 얼굴에 갖다대며 신음했다. "나도 거기 있었어요. 네, 그쪽이랑 내내 같이 있었죠. 그게 문제에요. 빌어먹을. 나 하나만 까먹으면 충분한데, 왜 자꾸 다른 일들까지 세트로 끼워서 잊어버리고 다니는 거야 대체?"
"네?" 치어릴리가 이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는데요. 누가 그쪽을 잊어버리기라도 했나요? 지인 분 찾아서 포니빌까지 오셨단 말씀이신가요?"
입술을 씹었다. 몸을 떨며 스트레이트 에지의 집을 돌아보았다. 서쪽 지평선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며 집 위로 어스름이 켜켜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오래되어 다 뭉개진 비석처럼 외벽의 형상이 서서히 흐려졌다.
"저기요?" 치어릴리가 물었다.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치어릴리와... 줄지어 늘어선 콘도미니엄을 등지고 떠났다.
이제 숨이 가쁘지도 않았다. 나는 평화롭고 차분하게, 담담히 서 있었다. 허파로 밀려 들어오는 숨결은 차분했고 밀어내는 날숨은 평온했다. 나이트브링어를 단단히 끌어안고 고개를 들어 이름 없는 자들의 땅 특유의 용오름과 쇠사슬 너머를 올려다보았다.
신음하는 희생양들이 가득 들어찬 강철판 위로 높이, 그 여자의 구체가 떠올랐다. 스스로 빙빙 돌아가는 구체 주위로 번개가 들끓었다.
나를 에워싼 모든 것들이 뒤엉키고 휘몰아치며 정제된 혼돈으로 몰아쳤다. 나는 녹슨 철판 위에 가만히 서 있었다. 딱히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하염없이 어스름 진혼곡만 반복해서 연주할 뿐이었다. 내 시선은 평생 가도 내 청을 들어 줄 기미가 없는 알리콘 여신의 비행 왕좌에 고정되어 있었다.
혹시 이러고 있다 보면 저쪽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다. 나는 거의 한 시간 가량이나 그 자리에 앉아 기다렸다. 궁창 사이의 땅을 자주 들락거리긴 했지만, 그 정도로 오래 있었던 적은 없다. 아무 일도 없었다. 내 근처로 오지도 않았다. 구체는 단 1인치도 내 쪽으로 다가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한없는 세월 끝에 이름 없는 자들의 땅으로 비집고 들어온 유일무이한 필멸자이기는 했으나, 내가 쌓아 온 지식과 얻은 권능, 개발한 능력 그 어느 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자리에 앉아 소멸로 몸을 적시는 것뿐이었다. 이름 없는 자들의 땅에 사로잡힌 신세이기라도 했다면 거기 그러고 앉아 있는 게 뭐라도 의미가 되기는 할 것이었다. 폭풍이 하늘을 집어삼키고 궁창 사이에서 천둥이 끝없이 메아리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 한가운데 서 있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어떤 상상 속 장소를 묘사한 그림을 감상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무서울 것도 없었으므로, 거기서 느껴지는 위압감 같은 것도 없어진 것이다.
낙담하여 한숨을 토해내고 고개를 푹 숙였다. 천천히 페눔브라의 메아리를 연주해 이름 없는 자들의 땅을 떠났다. 애초부터 거기에 내가 발을 담근 적도 없었던 것처럼.
오두막 한가운데 놓아둔 침대 위에 책을 벌여놓고 그 한가운데 앉았다. 똑같은 페이지를 몇 번씩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문장 하나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창 밖은 밤이었다. 앨은 한쪽 구석에서 털공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난롯가에서 장작 타는 소리가 번졌다. 호박색 불빛이 근처 엔드 테이블 위에 모셔놓은 나이트브링어의 울림통을 적시며 반짝였다.
얼마 뒤 나는 신음하며 발굽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이름 없는 자들의 땅에서 한 시간을 보냈다. 캔틀롯 음악사를 다룬 고서를 들여다보는 데는 그 두 배의 시간을 들였다. 그 어떤 수를 써도 머릿속에서 스트레이트 에지가 질러댄 소리를 지울 수는 없었다. 어텀이 웅얼거리던 목소리가 기억 한켠을 차지하고 맴돌았다. 가슴이 뛸 때마다 스닙스가 쓰러지며 일으킨 쿵 소리, 그리고 윈드송이 훌쩍거리던 울음소리가 자꾸 떠올랐다.
그래서 그 날도 잠을 설쳤다. 이틀 연속으로 치어릴리네 반에 출강하게 만들었던 원인인 충동적 열광이 시들어가고 있었다. 그 기저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몇 달 동안이나 잊고 있었던 광인이었다. 머릿속에 번뜩하고 떠오른 것은 영감이 아니라 광기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말했다. "있어야 할 때, 있어야 할 자리에 있기는 했지만 아무 소용 없잖아? 누나가 거기 끼어든다 쳐도 바뀌는 게 있기는 할까? 모닝 듀 때도 그랬고, 트와일라잇과 문댄서 때도 그랬어. 젠장할. 스쿠틀루 죽을 뻔한 거 살려 준 것도 굳이 이유를 찾으면 걔가 날 살려 줘서 그런 건데." 쓴웃음이 떠올랐다. "이 저주라는 건 내가 얼마나 쓸모없는 사람인지 알고 써먹는 게 아닌가 싶다니까."
앨이 털공을 굴리다가 잠시 멈춰 숨을 고르더니, 꼬리를 휙 휘두르며 순진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았다.
"그래, 그런 생각은 그만둬야지." 나는 말했다. "이 동네 가정집이란 가정집을 다 뒤져 본 것도 아니니까. 이 동네에 매일매일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거 하나는 확실하지만. 그래도......" 나는 움찔했다. "지금은 누나 몸부터 건사하는 게 맞을 거야. 사람들 일에 정식으로 개입할 수만 있으면, 치어릴리한테 도와 달라고 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럼..."
가슴 속에서 무언가 꿈틀댔다. 다리 뻗으면 닿을 거리에 모닥불이 타고 있는데도 문득 방이 더 춥게 느껴졌다.
입술을 깨물었다. "빌어먹을 야상곡을... 완성하는 게 훨씬 쉬운 일이니까. 그..." 삼킨 울음에 장이 뒤틀렸다. 나는 떨며 마룻바닥에 엎드린 오렌지색 털뭉치를 향해 말했다. "앨, 이름 없는 자들의 땅에 있는 것보다 포니빌에 있는 게 더 무서운 게 말이 되니? 그렇게 익숙해진 걸까?" 침을 삼켰다. "그렇게 냉랭해진 걸까? 그 여자처럼?"
앨은 움직이지도, 가르릉거리지도 않았다.
콧김을 뿜었다. 나이트브링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낱 미물일 뿐이라, 순간 눈이 멀어 버린 듯했다. "신의 힘이 이 발굽에 있는데......" 나는 중얼거리며 얼굴을 구겼다. "스닙스네 집에서... 어린애마냥 도망쳐 버렸어."
나는 한숨지었다. 오두막 벽이 휘어지며 나를 향해 조여오는 듯했다. 침대 밖으로 거꾸러지기는 싫어서, 억지로 눈을 감고 잠들었다.
"그러더니 이러는 거야, '안 될 것 없지요. 가방 이리 주세요, 들어다 드릴게요' 하고!"
마시던 물을 거의 뿜을 뻔했다. 우리는 공원 한켠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급히 물잔을 내려놓고 문댄서를 마주보았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네. 문댄서 너 그거 진짜 사실이야?"
"당연하지!" 문댄서가 실실 웃으며 대답했다. 빨간색과 분홍색이 섞인 앞머리가 바람에 날렸고, 아래로 드러난 흰 솜털이 햇빛에 젖어 반짝였다. "그 샤이닝 아머가 바로 이 몸을 위해 옷가방을 네 개나 들어다 줬단 말이지, 아무렴! 숙소가 우리나라 대사관 4번째 칸이었는데, 거기까지 날라다 주더라. 도착하고 나니까 땀에 흠뻑 젖어 있던 거 있지!"
의심스러운 양 슬며시 흘겨보며 말했다. "그 '땀에 흠뻑 젖었다'는 건 어느 정도를 얘기하는 거야?"
"아하아아아아, 얘..." 과제로 빽빽하게 들어찬 공책을 들어 부채질하더니, 문댄서가 말했다. "사실 땀도 얼마 안 났지롱!"
"떽! 문댄서!"
"아하하하하!"
"그 샤이닝 아머가... 트와일라잇네 오빠인 건 알고 하는 소리지?" 나는 반쯤 악을 쓰듯 말했다. 실은, 이쪽도 자꾸 웃음이 나와서 죽을 맛이었지만. "공주님 맙소사. 네가 드래곤랜드Dragonlands로 연수 다녀오는 걸 보디가드 비슷한 위치로 따라가기로 한 걸로는 성에 안 찬 거야?! 너도 그렇고 다른 애들도 그렇고, 샤이닝 아머한테 목숨 빚진 거나 다름없다고!"
"에헤이, 라이라도 참. 일을 그렇게 크고 복잡하게 만들면 진짜 그런 거 같잖아." 문댄서가 선이 가는 발굽을 절레절레 내저으며 과제 노트로 부채질했다. "되게 재밌었다니까. 그리고 그렇게 위험한 동네도 아냐. 그냥 트로팅엄에서 토요일 밤을 보내는 거랑 별 차이도 없었어. 교육 시스템이 어쩌니 하는, 그 양반들 옹색한 변명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이다만." 문댄서가 눈을 굴리더니 이쪽으로 바싹 다가앉으며 실실 웃었다. "그나저나 트와일라잇네 잘생긴 오빠, 우리 트와일라잇 표현을 빌리자면 세상에서 엉덩이가 가장 예쁜 남정네Best Flank Forever가 얼마나 자기 남성성을 과시하던지. 이제 막 근위대 임관한 사람이 자기가 뭐라도 그럴듯한 마법을 써 주기만 하면 여자들이 껌뻑 죽어 넘어갈 것처럼 하더라고. 하 참. 그래 내가 그 마개를 뽑고 김을 좀 빼 줬지. 그렇고말고!"
"야, 문댄서..." 휘둥그레 뜬 눈으로 문댄서를 노려보며, 더듬거려 말했다. "너 혹시...?" 마른침을 삼키고 물었다. "설마 호텔 방으로 끌어들인 건 아니지, 이 지지배야?"
"으으으음...... 그건 아니지." 문댄서가 픽 웃으며 자기 잔을 들어 홀짝이다 말했다. "난 그럴 생각 없었지만 그쪽은 그럴 생각 만땅이었을걸."
"으어. 못된 지지배. 트와일라잇이 알면 너 죽여버릴지도 몰라."
"셀레스티아 공주님 곁에 바싹 붙어 따라나니는 짓 청산하기 전에는 알 수도 없을걸."
"야, 트와일라잇이 공주님 심부름꾼 같은 게 아니잖아! 고급 마법사 과정 밟으러 들어간 거라니까?"
"고급 뭐시기 과정 밟고 있는 건 좋다 이거야. 너 걔 만나러 왕궁까지 가 본 적 있어? 으엑. 먼지 냄새, 낡아빠진 책 냄새, 근위대 땀냄새밖에 안 나더라! 우리 샤이닝 아머처럼 잘빠진 남정네들 얘기는 그만할까. 트와일라잇 걔도 공주님 내제자로 들어간 이후로 뭐 달라진 거 하나 없다구! 햇볕 쬐기 싫어하는 책상물림 백면서생 그대로라니까!"
"글쎄, 아무리 그래도 트와일라잇이 열심히 하는 거라면 우리도 조금씩은 도와 주는 게 맞지 않나." 나는 말했다. "예전엔 걔가 우릴 도와 줬잖아. 걔 부모님도 그러셨고."
"그래, 그래." 문댄서가 물잔을 내려놓으며 권태감이 묻어나는 시선을 이리로 향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 그 유명한 깽깽이 치는 일은 요즘 좀 어떠신가?"
부러 의기양양한 웃음을 짓는다. "음악 공부야 잘 되어 가고 있지. 선생님 되는 일은 잘 돼 가?"
"글쎄다. 그럭저럭."
"그럭저럭?"
"어."
"드래곤랜드도 다녀왔고 하니 이제 듣도 보도 못한 신기한 과목들 공부하느라 머리 깨질 줄 알았는데."
"아하, 고급 유니콘 사회학 같은 거?"
"어, 그거. 부전공 아냐?"
"그랬나. 모르겠네. 때려치우고 다른 거 할까 봐."
"진짜? 뭐 할 건데?"
"내 엉덩이에 101번 입맞추면 알려주지."
"너 진짜......"
"진심 개판이라니까." 문댄서가 툴툴댔다. "수업 들어오는 애들 다 하나같이 제 잘난 맛에 사는 돌대가리들이야. 이해할랑가 모르겠는데, 캔틀롯에서도 유독 더 거지같은 쓰레기 근성 모아다가 섞으면 딱 그짝일걸."
"뭐 사람 무시하고 깔보고 그래?"
"글쎄, 저번 주까진 안 그러더니 요즘들어 그러더라고!" 문댄서가 눈썹을 한 번 치키며 씩 웃더니 말했다. "그게, 어제부로 걔들 꼬리털 싹 밀어 버리게 됐거든."
"어어..." 이건 무슨 소린가 싶어 묻는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강의실 뒤편에 보면 반짝반짝하게 만들어 놓은 고급진 방석 깔고 앉는 애들 있거든. 걔들 방석에다가 초강력 접착제로 아름다운 장식을 더해 금상첨화를 만들어 준 사람이 있었지롱." 문댄서가 물 한 모금을 홀짝거리더니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 사람이 바로 나에요."
숨도 못 쉬고 문댄서를 쳐다보며 물었다. "너... 그거 다 사실이야?!"
"사실이지 그럼!"
"야 문댄서!" 나도 모르게 큰 소리가 나왔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뭔 소린가 싶었는지 이쪽으로 고래를 돌렸다. "아니... 대체 왜 그래?! 뭐야 이게, 유치원생도 아니고! 너 열아홉이야, 망할 열아홉이라고! 그 나이 먹고서도 그런 덜떨어진 짓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대체 뭐야?!"
"으으으음...... 그러면 저 안하무인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우쭐거리기나 할 줄 아는 돌대가리들이 어디 나가 돌아다닐 때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꼬리털이 싹 없어졌느냐고 질문공세를 받을 테니까 그랬겠지?!" 문댄서가 조신한 척 할 생각 없다는 듯 웃어댔다. "핑계도 걸작이지. 다이아몬드 독 패거리들이 밤새 몰래 기숙사로 숨어 들어와 그 새끼들 꼬리 싹 밀어다가 로스페가수스 얼룩말 암시장에 내다 판 것 같다고 얘길 지어내서 말 맞췄거든!"
"나 참, 야! 그럼... 그런 꼴을 당했는데 그걸 사실대로 어떻게 얘기하냐!" 발굽으로 이마를 짚고 눈물이 찔끔 나올 때까지 웃어대다 말했다. "문댄서 넌 대체 언제쯤 철들래?!"
"하하하하... 으으으음... '철이 든다'라..." 문댄서가 하도 웃어 새빨개진 얼굴로 말했다. "평소 자던 거의 반이나 잘 수 있으면 좋겠다..."
"농담은! 히힛. 잠 못 자는 사람답지 않게 팔팔하고 멀쩡해 보이는구만 뭘!"
"하하하... 하... 아냐, 진짜..." 계속 웃기는 했는데, 갈수록 그 소리가 공허해지다가 끝내 노역의 일환인 것처럼 늘어졌다. "요샌 캔틀롯에서도 더욱 드높은 곳에 계시다 보니 그렇게 되더라고."
나는 얼마 웃지 못했다. 숨을 고르며 문댄서를 빤히 쳐다보고 물었다. "너... 호텔 들어가 있어?"
"정신병원은 절대 아니긴 하지. 지금 생각해 보면 호텔이든 정신병원이든 어딜 들어가도 똑같을 것 같다만."
"놀랐네. 그럼... 어... 집에는 왜 안 들어가고? 기숙사 생활도 청산했으니 집에 들어갈 것 같았는데."
"하하하... 그게... 하..." 문댄서의 얼굴에 피로하고 지친 미소가 떠오르며 웃음소리를 베어냈다. "그 새끼 들어와 있어서."
문댄서를 빤히 쳐다보는 내 얼굴이 서서히 구겨져 갔다. "그 새끼라니...? 설마...?"
문댄서는 차분히 물 한 모금을 들이켰다.
이마가 절로 찌푸려졌다. 나는 선 자리에서 꾸물대다 말했다. "근데... 내가 듣기론..." 고개를 흔들어 떨쳐 버리고 가늘어진 눈으로 문댄서를 쳐다보았다. "볼티메어로 이사했다고 하지 않았어? 거기서 사업한댔는데."
"핑계야 찾아보면 많지." 문댄서가 투덜대듯 말했다. 문댄서가 방금 말한 상황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숨 넘어갈 듯 깔깔대던 애가 순식간에 이렇게 축 처진 것, 이 둘 중 뭐가 더 심각한 상황인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세상천지에 널린 게 핑곗거리야. 핑계가 괜히 핑계인 게 아냐. 엄마는 그 잘난 핑곗거리 중 하날 집어다가 세상 어디 처박혀 있던 그 새낄 끌어내는 데 써먹은 거지."
"그렇다 쳐도..." 앞다리가 달달 떨려 왔다. 마른침을 삼키고 물었다. "대체 왜?"
"흥... 이유가 달리 있겠어?" 문댄서가 숨을 들이마시며 대답했다. 잔뜩 찌푸린 얼굴에 입이 댓발 나와 있었다. "제 분수도 모르면서 남자 못 먹어 환장한 늙어빠진 창년 같은 여자라 그렇지.*9"
"야, 문댄서!" 큰 소리를 지르며 일어난 뒤, 주변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흘끗흘끗 곁눈질했다. 문댄서에게 가까이 붙어서 최대한 조용히 말했다. "너 제정신이야? 너희 엄마한테!"
"엄마도 병신이야." 문댄서가 툴툴댔다. "병신들 상대하는 데는 넌덜머리가 나다 못해 아주 학을 뗄 지경이야. 그러니 내가 엄마한테 뭔 장난질을 치든 그게 약발이 듣겠냐고. 엄마 인생 자체가 장난질이나 다름없는데. 나도 너무 지쳤어." 문댄서가 남은 물을 전부 목구멍 너머로 넘겨 버리더니 물잔으로 테이블을 쾅 때리면서 말했다. "그래서 결심했지. 슬슬 내 집 구할 수 있겠다 싶으면 바로 집 구해서 나가 버리려고. 기숙사도 싫고, 호텔도 싫지만 그런 똥무더기 같은 데는 더더욱 싫어."
"문댄서, 그래도... 그게 평생 가지는 않을 거야!" 가능한 확신하듯 내지른다고 내지른 말이, 어린애 낑낑대는 소리처럼 흘러나왔다. "그냥, 그냥 일시적인 거나 뭐 그 비슷한 거겠지! 그 나잇대 여자들이 흔히들 그러는 거 알잖아! 일 주일 내로 도로 쫓아내 버리시겠지—"
"쫓아내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될 것 같아?" 문댄서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고양이 혓바닥으로 사포를 긁듯 건조하고 메마른 웃음이었다. "몇 달도 안 되어 도로 불러들일걸. 아니면 제 발로 볼티메어에 기어들어가든가. 도대체가 그 대가리는 옛날에 들었던 노래, 옛날에 췄던 춤밖에 든 게 없는 주제에 그걸 또 까먹지는 않는다는 게 말이 되냐." 노트 위로 굴러 떨어진 낙엽 몇 조각을 대충 쓱쓱 흔들어 치워 버리고, 발굽으로 쿵 내려찍으며 눈을 부라렸다. "제일 좆같았던 거 알려줄까? 도대체 몇 번이나 저 쓰레기만도 못한 새낄 집에 불러들일 참이냐고, 아주 한심하기 짝이 없다고 주말 내내 소리를 질러댔는데 그년이 이런 말을 하더라. '피도 눈물도 없는 것', '딸년이 돼서 어째 저러나', 내가 빡돌아서 진짜......"
"문댄서—"
"딸년이 어째 저러냐고?! 그 씹새끼가 나한테 뭔 짓 했는지 알아? 응? 자다가 이불에 지도 그린 죄로 하룻밤 내내 발코니로 내보내 벌 세웠어. 너무 힘들어서 잠깐 앉기라도 하면 바로 머리를 후려치고 그랬다고 내가 얘기했던가? 심지어 발코니 창문 앞에 앉아가지고 감시하더라! 그 씹할새끼가. 할 짓이 그렇게도 없었나, 개새끼가......"
"나... 그게..."
"그렇지, 난 별 말도 안 했는데 지 혼자 날더러 말대꾸했다고 개지랄하던 날은 알아? 냄비에다 물을 팔팔 끓여서 들이대더니, 위아래도 모르는 건방진 애새끼는 벌을 받아야 한다면서 어느 쪽 발굽부터 담글 거냐고 물어보더라?! 우리 엄마라는 사람은 자기 딸년보다, 자기 딸년한테 그딴 개지랄을 아무렇지도 않게 벌인 씹새끼가 더 소중한 거야. 그런 쓰레기 새끼랑 나를 두고 저울질하는 게 그런 사람인데 말을 알아먹겠냐고. 벌써 그쪽으로 다 정해놓고 있는데?!"
"알았어, 문댄서."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며 몸을 배배 꼬다 말했다. "확실히 알겠어. 네가 맞아."
"어머나! 미안해라!" 문댄서는 싸구려 멜로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비탄의 한숨과 함께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우리 라이라가 듣기엔 너무 과격하고 잔인했나 보네?! 베프가 대가리에서 스팀 좀 빼겠다는데 그거 하날 못 참아?"
"그런... 그런 말은 안 했잖아!" 찔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되려 큰소리를 쳤다. "나한텐 언제든 털어놔도 괜찮은 거 알면서..."
"그러셔. 그럼 왜 도둑질하다 들킨 체인질링마냥 그러고 있는데?!"
입술을 씹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한 의사전달인 모양이었다. 문댄서가 씩씩대며 소지품을 가방에 쓸어 넣었다. "아이구, 미안해서 어째? 이제야 알았네. 소중한 점심시간을 내가 다 조져놓고 있었나 봐. 하, 심지어 이번이 처음도 아닌 모양이야."
"문댄서, 이러지 마..."
"왜? 내가 잘못했어. 나 때문에 오늘 하루 기분 잡쳤잖아. 미안하게 됐네. 지금 이 좆같은 기분을 네가 어떻게 좀 나아지게 할 수도 없을 게 뻔하니까 혹시라도 그런 생각 하고 있으면 걍 때려쳐.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었겠지만."
"야!" 얼굴을 구기고 말했다. "무슨 말을 그딴 식으로—"
"하!" 문댄서가 가방을 챙기며 시퍼렇게 독기 오른 웃음과 함께 경박한 웃음으로 대답했다. "비극이네, 비극이야! 내 베프라는 년도 살면서 그런 불평등을 경험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 이제 다른 친구 하나는 공주님 품에서 애지중지 자라면서 꿀 빨 일만 남았네!" 그러더니 눈을 휘둥그레 뜨며 발굽으로 머리를 탁 쥐어박으며 말했다. "아이고, 참! 벌써 빨고 있지! 아이구 세상에, 나 같은 하층민 인간짐짝 하나 때문에 댁들 앞에 놓인 탄탄대로 못 밟게 되면 안 되잖아! 벌레만도 못한 인생 나 혼자만 감당해야지 남들한테 똥물 튀기면 안 되지!"
"문댄서, 이러지 마, 제발." 나는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제발 그만해. 네 곁엔 항상 내가 있었잖아."
"내 곁에 계셨다고?" 문댄서가 표정을 확 구겼다. "네가? 네가 내 옆에 서 계셨다고?" 구겨진 얼굴이 더욱 찌푸려졌다. "그래서 내 인생에 얼마라도 발 담갔다, 뭐 그딴 얘기 하고 싶어지셨어? 네 입으로 나온 말, 네 몸으로 한 행동 중 진심이었던 게 하나라도 있기나 해? 라이라 네가 뭘 아는데? 무슨 지랄 같은 인생을 살아왔는지 얘기해 봐. 네 평생 하나라도 빼앗겨 본 적 있어? 난 왜 태어나서 이러고 살아야 하나 싶은 적 있냐고. '타고난 솜씨'랑 '캔틀롯 음악사 전공' 중 뭐 하나라도 널 엿멕여 본 적 있냐고!"
"어... 어..."
"문제의 본질을 말해줄까? 넌 단 한 번도 내 곁에 있어 준 적 없어. 너는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개도 웃을 소리는 집어치우라고. 아저씨랑 아줌마는 나랑 엄말 보호해 줬으니 그렇다 쳐. 넌 뭐했는데? 설마 같이 자고, 근처 도넛 가게나 시립공원 같은 데 몇 번 데리고 나간 별 같잖은 거 가지고 좆같은 내 인생에 어느 정도 도움은 됐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어려운 사람들 볼 때마다 그딴 싸구려 동정 몇 푼 던져주는 걸로 양심의 가책을 덜 수 있다니 인생 한번 존나게 살기 쉬웠겠어. 그러니까, 제발 너만의 동화 속 세계에 날 끌어들이지 말라고. 그거야말로 말이 안 되는 거 아냐?"
문댄서의 눈길을 피하며 입술을 씹었다. 시야가 뿌옇게 젖으며 인후가 먹먹해져 갔다. 뭐라도 말을 꺼내 봤자, 말 대신 울음만 나오리란 것은 명료했다.
문댄서도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었는지,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 "그래. 걍 울어 버려." 그리고 덧붙였다. "똑똑하든 병신이든, 뭐 할 거면 끝까지 다 해야지 중간에 관두면 죽도 밥도 안 돼." 문댄서가 입을 닫고 발을 쿵쿵 구르며 멀어져 갔다. "하더라도 꼭 안 하느니만 못하게 하는 건 지긋지긋해. 친구인 줄 알았던 년 하나가 딱 그짝이었지."
문댄서가 사라진 자리, 공원은 문득 고요했다. 멀찍한 곳에서 공부하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이 불편한 듯 자세를 고쳐잡았다. 문댄서의 발걸음 소리가 채 멀어지지도 않았을 때, 나는 발굽에 얼굴을 파묻고 조용히 울었다.
앨러배스터의 연주가 들렸다. 궁창의 야상곡에서도 극도로 정제되어 있는 가락만을 골라 뛰어난 안목과 솜씨로 재해석하여 뽑아낸 나긋한 선율이 들려왔다. 이름 없는 자들의 땅, 그 깊고 깊은 나락에서 몇 번이고 나를 꺼내 산 사람의 땅으로 데려와 준 바로 그 곡이 첫 번째 음과 함께 일어섰다가 마지막 음에 실려 잦아들었다. 그럼에도 별반 위로는 되지 않았다. 앨러배스터가 이 노래를 들려주고 싶어했던 사람은 내가 아니니까.
그렇다고는 해도 몇 번이고 '페눔브라의 메아리'를 되풀이해 연주하지 말아야 할 합당한 이유는 되지 않는다. 나는 연주 끝에 어떤 평화의 단편이나마 찾아들 거라는 희망을 품고 계속해서,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반복 연주했다. 아무래도 이런 신세다 보니, 희망에라도 매달려 있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시청 청사 옥상 끄트머리에 올라섰던 광인이 끝내 죽지 않은 것도 희망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번 다시 그 순간을 떠올리지 못할 나의 벗에게 나는 한 번의 포옹을 청한 것이다*10.
찰나의 순간이긴 했지만 나는 희망에 떠밀려 마을 한쪽 공원 가장자리에 앉아 오후의 햇살로 머리를 적시고, 나 또한 저들과 다르지 않다는 듯 다가와 포옹하는 10월의 서늘하고 상쾌한 바람에 안겼다. 더 이상 내쉬어야 할 숨이 남아 있지 않을 때, 비로소 내 몸에도 먼지가 쌓이기는 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죽어서까지 영영 타인들이 받는 대우를 받지 못할 것인가. 나는 잠시 생각했다.
두다다, 하는 발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낯익은 꼬마 넷이 보였다. 스쿠틀루가 새빨간 수레를 끌었고, 그 위에는 애플블룸이 귀엽기 짝이 없는 망토를 둘러멘 채 앉아 소형 망원경으로 이곳저곳을 살펴보며 입술을 핥고 있었다. 꼬마는 이따금씩 럼블과 스위티벨이 저 둘을 기다려 줄 때마다 근처 언덕마루를 힘차게 가리켜 보였다. 넷은 나를 흘끗 보더니 잽싸게 이쪽으로 달려왔다. 그리고는 내 엉덩이 쪽을 흘끗 살피더니 오만상을 썼다. 다같이 얼굴을 붉힌 꼬마들은 얼굴을 숨기며 급히 달아났다.
쟤들은 뭐 하는 거지, 싶어 눈썹을 치기던 찰나 앉아 있던 벤치 옆에서 누가 쉰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마음이 편해지는 곡이네요."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본 순간 심장이 멎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색하나마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신기한 일도 다 있네. 딱 네 또래 남자애가 전에 똑같은 말을 한 적 있거든."
"네?" 스닙스가 나를 흘끗 보며 물었다. "다른 동네에서도 연주하셨었나 봐요? 유랑 악단이나 뭐 그런 건가요?"
"으으음......"
"전에 한 번 포니빌에 유랑 마법사인가 하는 사람이 왔었거든요." 스닙스가 귀를 축 늘어뜨렸다. "그다지 즐거운 결말은 아니었지만."
"낯선 사람하고는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부모님이 말씀하시진 않니?" 나는 물으면서도 그 물음이 한심해서 소름이 돋았다.
"흥!" 스닙스가 턱을 치켜들고 도도한 자세로 내 앞을 몇 걸음 걸으며 자신감을 과시했다. "제 몸은 제가 알아서 지킬 수 있어요. 봐봐요, 어딜 봐서 제가 어린애에요? 큐티마크도 있다고요!"
문제의 그 큐티마크나 한번 구경해 볼까 하고 눈길을 돌리는데, 걸음걸이가 비틀거리는 게 심상치 않았다. 본인은 숨기려고 무진 애를 쓰는 모양이었지만, 숨길 수 있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날 저녁에 집 반대쪽으로 팽개쳐져 나동그라지던 소리가 머릿속에서 되살아났다. "그래, 확실히 키는 작아도 남자답긴 하네." 성인다운 느긋한 미소를 애써 유지하며 말했다. "그나저나, 언제부터 남성미 넘치는 거친 남자들이 달달한 음악소리가 들린다고 언덕을 넘어다니기 시작한 걸까 모르겠네?"
"언덕 넘어온 거 아니에요! 그냥..." 스닙스가 입술을 씹으며 움찔하더니, 흙길로 고개를 푹 늘어뜨리며 말했다. "그냥 좀... 시간이나 죽이고 있던 거죠."
스닙스를 보다가 새파란 잔디밭을, 다시 높고 푸른 하늘을 보며 말했다. "오늘 참 날씨 좋네." 스닙스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렇게 좋은 날 보통은 친구들이랑 어울려 다니지 않니? 멀대같이 커서 흐느적거리는 친구 있지 않았어?"
"흠? 아, 스네일스 얘기죠?" 스닙스가 짧고 똥똥한 어깨를 으쓱하더니 대답했다. "벌레를 쫓아다닌다나 어쩐다나 하는 모양이에요.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러니. 이렇게 날씨 좋은 날 혼자 있기는 좀 섭섭할 텐데." 나는 '페눔브라의 메아리' 몇 마디를 더 퉁기고 말했다. "어울리러 가 보는 건 어때?"
"으음..." 스닙스가 흙길을 탁탁 차더니 한숨지었다. "누나도 한번쯤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은 날이 있지 않았어요?" 그제야 좀 진심 섞인 웃음이 나왔다. "보고 있었구나?"
"뭐, 그게 곡이 워낙 좋으니까......" 스닙스가 나를 올려다보는 눈에 핏발이 가득 서 있었다. 이 동네에서 불면증에 시달리는 게 나 하나만 있는 건 아닌 듯했다. "연주하라고 누가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또 강요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았어요. 그냥 누나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 아닌가요? 그게 아니면 굳이 여기까지 나와 있을 이유가 없잖아요?"
나는 심호흡하며 어깨를 으쓱하고 대답했다. "침묵이랑은 별로 안 친해서 말야."
스닙스가 킥, 웃더니 길 양옆에 깔린 잔디밭으로 시선을 돌렸다. "진짜 끝내주는 적성일 것 같은데."
"뭐가? 연주 얘기?"
"네..." 스닙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새파란 잎사귀를 가볍게 톡 튕기자 진딧물 몇 마리가 떨어져 나갔다. "제 궁둥짝 좀 보세요. 등신같은 가위 한 짝밖에 없잖아요. 이게 대체 무슨 뜻인지 짐작도 안 가고요. 또래 애들이야 큐티마크 찾겠다고 혈안이 돼 있지만 정작 큐티마크가 있는 저는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지도 못해요. 진짜 등신같지 않아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가족들한테도 그런 얘기 못 하는 거니?"
스닙스가 콧김을 훅 뿜더니 얼굴을 확 찌푸렸다. "제가 뭔 소릴 하든 타고난 적성이 등신같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그리고는 내게 시선을 돌렸는데, 구겨진 표정이 어디 갔나 싶을 정도로 부드러운 얼굴이 되어 있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방금 그거 듣고 나니까 언제 기분이 안 좋았었나 싶을 정도로 괜찮아졌어요. 그건 누나가 타고난 거고 내가 타고난 게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되게 마음이 놓여요. 가위로는 연주 같은 연주를 못 하는 게 아쉬울 뿐이죠. 하하..."
매끄러운 울림통을 가볍게 쓸며 리라를 내려다보았다. "우리가 음악을 두고 뭐라고 얘기하든, 음악은 항상 그 이상의 것이지. 우리가 사는 세상의 근본이 된 게 음악이니까 말이야. 사람의 재능이나, 감상이 음악에 엮여 들어가기 한참 전부터 성립된 질서고." 나는 킥킥 웃고 스닙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니 거기 이끌리는 걸 두고 뭐라고 할 필요는 없지."
"귀찮게 하는 게 아니라고 하는 거죠?" 스닙스가 짧고 굵은 꼬리를 불안불안하게 흔들며 물었다. "그게... 그렇잖아요... 그냥 근처 돌아다니던 꼬마가 와서... 그... 아, 이걸 뭐라 그래야 돼......"
"아하하하... 진정해." 나는 답했다. 허파가 차분하고 잔잔하게 날숨을 밀어냈다. 나는 내가 하는 말을 들었다. "노래는 말이지, 그냥 연주하려고만 만든 게 아냐. 듣는 사람도 필요한 거거든." 스닙스를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나는 웃었다. "마침 관객이 필요하던 참인데."
"허..." 스닙스가 자리잡고 앉았다. 다친 곳이 쑤시는지 잠깐 멈칫하긴 했지만, 웃음을 잃진 않았다. "그럼... 방금 그 곡 한 번만 다시 들려 주실래요? 그게, 저, 실례가 아니라면..."
고개를 가로젓고 말했다. "실례라니." 나는 다시 페눔브라의 메아리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스닙스가 가만히 눈을 감으며 나긋한 선율에 귀를 맡겼다. "세상엔 좋은 게 정말 많아." 잔잔한 곡조 아래, 나는 숨죽여 말했다. "행복해지고 싶다는 생각은 잘못된 게 아냐."
나는 적당한 나무 근처에 우거진 수풀 뒤에 쪼그리고 앉아 잔잔한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기를 반복했다. 근처 울타리 바로 너머에 스트레이트 에지 일가의 콘도미니엄이 이지러지는 석양에 젖어 가고 있었다. 앨러배스터의 유작을 가능한 많이 들려준 뒤, 나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스닙스의 뒤를 밟았다. 꼬마는 집으로 돌아가기 싫은 듯 동네 이곳저곳을 느릿한 걸음으로 돌아다니다가 집에 돌아갔다.
사흘 내내 잠을 거의 못 잤더니 몸은 피로했고 눈은 건조했다. 몸이 살짝 떨리는 것뿐인데도 온몸이 뒤흔들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대체 뭘 하는 짓이었을까. 저주받은 몸이라고 해서 스토커 같은 짓을 해도 되는 권리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내 유일한 위안은 내가 뒤쫓고 있는 사람이 스닙스가 아니라는 명료한 진실 하나뿐이었다.
드디어 목표물이 시야에 포착되었다. 스트레이트 에지, 희끗희끗한 솜털을 한 사내가 집으로 어기적어기적 돌아가고 있었다. 걸음이 약간 휘청거리는 품이 흡사 주정뱅이가 갈지자 걸음을 하는 것과 똑 닮았는데,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었다. 몇 분 뒤 사내가 현관문 앞에 섰다. 잔뜩 화가 난 숨소리로 씩씩거리며 어깨를 들썩이는 모습은 집이 아니라 그 어떤 상상조차 무력화시킬 법한 야간 작업을 마주하고 있는 듯했다. 뿔을 밝혀 열쇠고리를 들어 문을 연 남자가 어둑어둑한 콘도미니엄 안으로 들어섰다. 주인을 맞은 현관문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닫혔다.
나는 심호흡하며 주위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해가 완전히 져 있었고, 햇빛이 사라진 자리에 별들이 하나둘씩 얼굴을 내밀었다. 한 겹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여러 겹으로 겹쳐지고 포개졌다. 이제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누구 볼 사람도 없었다.
발소리를 죽여 스트레이트 에지네 집 마당으로 숨어 들어갔다. 울타리문을 열고 구렁이 담 넘듯 안으로 들어섰다. 창가 쪽에선 절대 안 보이는 곳에 몸을 숨기고 집 가까이 귀를 들이밀었다. 심장이 벌렁벌렁 뛰고 온몸의 솜털이 쭈뼛 일어섰다. 한 명의 망령으로 포니빌을 배회한 지 벌써 1년도 넘었는데, 그간 이런 짓을 벌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때때로 트와일라잇네 도서관 신세를 진 것은 사실이지만 엄연한 내 소꿉친구고, 학문 연구와 도야의 장에 감히 내 발걸음을 옮겨놓은 것도 야상곡을 언급한 자료를 찾으러 들어가기 위함이거나 소집의 노래를 연주할 자리가 필요해서였다.
그럼 이건 어떤가? 무단침입 중에서도 최고 악질인 행위다. 래리티의 물건을 강탈하고 레인보우 대쉬의 구름을 훔치고 애플잭의 호의를 철저하게 단물만 빨아먹고 내치는 짓만은 하지 못하게 했던 양심이 가슴에 대고 죄악감의 칼날을 그어댔다. 한 20분 정도 거기 숨어 있었을까, 이제 더는 못 해먹겠다 싶어 몸을 빼려던 찰나 그 소리를 듣고 말았다.
윈드송이 엉엉 우는 소리가 첫번째였다. 스트레이트 에지가 감히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쌍욕을 고래고래 질러댔다. 윈드송이 우는 소리 위로 스닙스의 목소리가 겹쳐졌고, 스트레이트 에지는 목이 터져라 몇 마디를 더 날렸다. 잠시 뒤, 어텀이 울먹이는 소리가 난장판에 발을 들였으나 스트레이트 에지가 다양한 욕설을 내질러 어텀의 목소리는 밀려나고 말았다. 병 여러 개가 깨지고 날아다니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집 떨어진 곳에서 기르던 개가 왈왈대기 시작했다.
나는 심호흡했다. 입가 양쪽이 위로 올라갔다. 필요한 건 다 얻었다는 생각에 나는 웃었다. 나는 신속하게 스트레이트 에지의 집을 등지고, 번개처럼 뛰어 자리를 벗어났다.
포니빌 경찰서 1층 로비. 푸른 제복을 입은 사내 하나가 근무화를 닦아 윤을 내며 전등 빛 비치는 대기실 속으로 말을 꺼내 던졌다. "그래서 그랬죠. '저기 선생님, 이웃 분 스타킹이 확률의 법칙조차 무시할 수 있는 권능을 가진 게 아닌 이상 양말에서 발굽이 돋아나서 빨래 바구니 밖으로 걸어나와 길 건너편 선생님 사무실 서랍 속으로 들어갔다, 는 선생님 설명은 말이 안 되는데요.'"
"하하하하!" 데스크 뒤에 느긋하게 앉아 신문을 넘겨보고 있던 경찰관 하나가 껄껄 웃더니 말했다. "공주님 맙소사. 그러고서 잡아넣었구만?"
"당연하죠. 곱게 늙어야지 이 변태 늙은이가 몇 달 동안이나 동네 여자들 스타킹 훔치고 돌아다녔다니까요."
"다 늙어서 젊은 여자들 스타킹 수집하는 취미라니..." 신문을 보던 사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한숨지었다. "이해가 안 되네."
그 때, 경찰서 문이 벌컥 열렸다. 잡담을 나누던 경찰 둘이 벌떡 일어서서 고개를 돌렸다. "어어... 무슨 일이신가요?"
문을 열어제낀 것은 나였다. 나는 숨을 헐떡이다 침을 삼키고 말했다. "네! 일이 있죠! 제 일은 아니고! 다른 집 일이지만! 버톤가Burton Street 어디쯤에 당장 가 보셔야겠는데요!"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저, 저도 그랬으면 좋겠네요!" 달달 떨리는 앞발굽을 들어 짐짓 얌전한 체 내 갈기의 파란 부분을 갖고 만지작거리며 소리쳤다. "어디서 누가 비명 지르고, 소리 꽥꽥 지르는 걸 들었어요. 강도가 들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콘도미니엄 쪽 길가를 걷는데 막 그런 소리가 난 거에요! 너무, 너무 무서워서 뛰어왔거든요. 어서 가 보세요!"
둘이 시선을 교환하더니, 고개를 끄덕하고는 잽싸게 움직여 장비를 챙긴 뒤 나를 데리고 경찰서 밖으로 나왔다. "걱정하지 마세요. 바로 갈 테니. 어느 쪽인지 안내만 부탁드립니다."
경찰관들을 보며 슬슬 올라오는 자랑스러운 웃음을 억지로 눌러 내린 뒤, 헛기침하고 다급하게 달리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여기! 여기에요!" 몇 분쯤 지난 뒤, 나는 스트레이트 에지 일가가 거주하는 콘도미니엄 앞마당을 달달 떨리는 발굽으로 가리키며 확언했다. "여기 길 따라 걸어가고 있는데 고함소리가 막 나더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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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경찰관 하나가 모자를 고쳐 쓰며 울타리 쪽으로 다가섰다. "문이 열려 있는데......"
"아... 그러네요... 어..." 움찔하다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강도가 든 게 틀림없어요!"
"저희가 들어가 보죠. 뒤로 물러나 계세요." 경찰 하나가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그와 동시에 벽에 가로막혀 기세가 꺾인 고함 소리가 창문을 뒤흔들며 튀어나왔다. 끔찍한 기분과, 이제 됐다는 만족감이 동시에 찾아왔다. "저기요?!" 앞으로 나간 경찰이 현관문을 두드리고 말했다. "경찰입니다. 안에 무슨 일이시죠?"
또 한 차례 고성이 울렸다. 스트레이트 에지가 씩씩대며 소리를 질러댔다. 윈드송이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스닙스인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 이 모든 상황이 한 편 시문으로 무너지고, 또 응집될 테니까.
"경찰입니다! 대답하십쇼!" 경찰관이 현관문에 귀를 들이대며 얼굴을 찌푸렸다. 사내가 고개를 돌려 같이 온 동료에게 한 번 끄덕해 보였다.
내 옆에 있던 경찰관이 어깨를 다독이고 말했다. "여기 계세요." 그리고는 진압봉을 꺼내들고 입에 단단히 물어 든 다음 빠른 걸음으로 현관 앞 동료에게 합류했다.
"셋에 들어간다." 현관 앞에 있던 경찰이 몸을 돌리고 뒷다리를 한껏 몸통 쪽으로 당겼다. "하나.. 둘... 셋!" 그와 동시에 뻗어나간 뒷다리가 현관문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두들겼다. 경첩이 뽑혀나가 나뒹굴었다. 다른 경찰이 진압봉을 꺼내들며 외쳤다. "동작 그만! 경찰이다!" 진압봉을 단단히 잡은 경찰이 먼저 달려 들어간 경찰관을 따라 들어갔다.
나는 밖에 혼자 쪼그리고 앉아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었다. 일 분쯤 지났을까, 콘도미니엄은 아무 일 없이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후드 재킷의 칙칙한 잿빛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안절부절못하는 숨결 몇 번을 배어냈다. 그렇게 시간은 더 흘렀고 귓가에 들리는 거라곤 귀뚜라미 울음뿐이었다.
이쯤되니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스트레이트 에지 이 새끼가 드디어 돌아서 제 아내와 자식들에게 못할 짓을 한 건가? 설마 경찰 두 명으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자식이었던 건 아닐까?
"아, 공주님, 맙소사." 날카로운 한기가 몸을 찌르고 들어왔다.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내가 한 짓 때문에 스닙스와 그 동생에게 심각한 정신적 충격이 간 건 아닐까? 스트레이트 에지야 그런 꼴을 당해도 싼 자식이긴 했지만, 경찰 두 명이 달려들어 제 아버지를 마룻바닥에 메다꽂는 꼴을 그 어린것들이 꼭 눈앞에서 봤어야 할까? 나 때문에 어텀이 또 발작을 일으킨 건 아닐까?
걱정은 절망감으로 전환되었고, 절망은 아주 쉽게 행동을 촉발했다. 나는 머뭇거리며 길을 따라 올라가 열린 문 너머 집안으로 들어갔다. "어... 선생님들?" 아무 소리도 없었다. 흐릿한 현관 너머로 평범한 가정이나 다를 바 없는 각종 사진과 가구가 보였다. "저기... 괜찮으시죠? 네, 그게 사실 강도 사건이 아니긴 한데요." 마른침을 삼키며 집안 깊숙히 들어섰다. 숨결이 차가운 입김으로 엉겼다. "그래도 보시긴 해야 할 것 같아서. 상황이 더 안 좋아지기 전에 막아야......"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경찰 둘과 스트레이트 에지가 각자 레모네이드 한 잔씩을 들고 거실 한복판에 아주 편안한 자세로 서 있었다. 울먹이는 윈드송을 안은 어텀이 소파에 앉아 있었고, 스닙스는 층계 밑바닥에 앉아 카펫을 멍하니 쳐다보는 중이었다.
"그렇죠. 원더볼트 애들이 올해는 상태가 너어어어어무 안 좋은 건 감안해야겠지만." 경찰 하나가 잔을 빙빙 돌리며 씩 웃었다. "플릿풋Fleetfoot이랑 머큐리Mercury가 봄에 그리폰 동네로 공연 다녀온 다음부터 그렇게 됐지요."
"빌어먹을 그리폰 자식들이 페가수스 사정을 어디 봐 주겠어요." 스트레이트 에지가 툴툴대는 투로 대답했다. 희끗희끗한 얼굴 위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플릿풋도 머큐리도 그렇게 뻐기는 성격들은 아니란 말입니다. 포니 호텔이나 돌아다니면서 저 망할 그리폰 놈들 나라에서 나와 진짜배기 공연을 할 수 있을 날만 기다렸겠죠. 하여튼, 캔틀롯 윗대가리들이 선수 교환 프로그램 같은 건 대체 왜 추진했는지도 모르겠다니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참 나... 윗대가리들이 데려온 뾰족부리 돌대가리들 보세요, 편대 비행 같은 것도 못 하잖아요! 그래도 천만다행이죠. 올해 이후 청년비행대회에서 저 돌대가리들 볼 일 없을 거 아닙니까!" 경찰관 하나가 음료를 한 모금 입에 머금고 고개를 돌렸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사내는 거의 음료를 뿜어내기 직전까지 몰렸다가 겨우 삼키고 말했다. "콜록! 콜록!...컥! 크흠, 흠. 무슨 일이신가요?"
"그게... 저..." 나는 아무것도 못 하고 꾸물대며 서 있었다.
"흐으음......" 스트레이트 에지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보아하니, 지나가다가 문 부서진 걸 보았나 보군요."
"그거라면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다른 경찰이 발굽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게, 저희 잘못이라서요."
"그러게 말입니다. 이 짓만 15년짼데, 이런 일은 처음이거든요!" 옆에 선 경찰이 말했다. "아무튼 죄송하게 됐습니다. 손해는 서에서 전액 보상해 드리겠습니다."
"뭘 그런 걸로. 내가 못 고치는 건 세상에 없다니까요. 경찰이 어디든 다리 뻗으면 닿는 데 있으니 오히려 안심되고 좋네요."
"맞아요..." 어텀은 그때까지도 울음을 그치지 못하던 윈드송을 달래며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근처에 경찰이 있으면 좋죠..."
"내 말이 그 말이라니까, 여보." 스트레이트 에지가 은연중에 으르릉거리며 말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경찰 나으리들에게 인상을 팍 써 보이며 사방 벽을 가리켰다. "그래서, 문 부수고 돌입해 보니까 아무것도 없었다, 그 얘기에요 지금?! 누가 꽥꽥 고함 질러대는 거 다 듣고 왔는데!"
"아마 여기 저 친구가 저희가 돌파할 때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지른 것 같군요." 경찰 하나가 소심하게 대답했다. "그나저나 서장님이 이거 아시면 또 발칵 뒤집어질 텐데 어떡해야 하나 모르겠네요. 이걸 그냥 넘어갈 리가 없는데."
"얼마나 쪼아대려나 상상도 안 된다 지금." 다른 하나가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까 그 때도 지금처럼 당직 서고 있지 않았냐? 서에서 대기 타고 있다가 시끄러운 소리 들리길래 진압봉 챙겨 들고 튀어나갔었잖아. 나이트메어 문이 강림하질 않나, 작은곰자리가 와서 깽판을 놓질 않나, 패러스프라이트가 다 조져놓질 않나. 누굴 갖다 앉혀 놔도 이 동네만 오면 다들 무능하단 소리 들을걸."
"아이고 참, 이걸 말씀 안 드렸네요?" 스트레이트 에지가 쪼개며 말했다. "덕분에 잠이 확 달아났지 뭡니까.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한 몇 시간 정도 잡일 남은 거 뒤처리할 정도는 되겠군요. 고마운 일입니다."
"아냐... 이건 아냐..." 멍한 표정이 분노로 뒤틀리고 악문 이빨 사이로 으르렁대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아니라고!" 발을 굴렀다. "다 잘못됐어! 이 빌어먹을 집구석 어디가 정상이라는 거야!"
"내가 잘못 들었겠죠?" 스트레이트 에지가 시퍼렇게 날 선 눈길로 이쪽을 노려보았다. 얼마나 섬뜩했는지 거의 엉덩방아를 찧으면 넘어질 뻔했다.
"이웃 분, 진정하시고..." 경찰 하나가 안경을 벗으며 단호한 태도로 다가섰다. 표정 하나는 아주 진지했다. "야밤에 많이 놀라셨을 거란 건 저희도 이해하지만, 생각하시는 그런 게 아니라 저희 쪽 실수로 일어난 단순 사고......"
"단순 사고는 무슨!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런 소리나 하는 거 아니에요! 그냥 잊어버렸잖아! 당신들 전부!" 숨이 가빠 왔다. 어텀과 윈드송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 말이 맞다 칩시다. 그럼 저쪽에 있는 사람들은 뭔데?! 단순 사고라며 왜 아직도 우는 건지 얘기나 해 보라고요."
스트레이트 에지가 한숨지으며 병신 상대하는 거 아니라는 표정으로 경찰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시간이 많이 늦었군요. 이만 복귀하시는 게......" 그러더니 이쪽을 향해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선생님, 이만 나가시죠—"
"스닙스!" 꼬마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스닙스는 자기 이름이 튀어나오자 많이 놀랐는지 크게 움찔했다. "쟤, 쟤한테 물어 보세요. 이 빌어먹을 집구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물어 보면 알 거 아니에요!"
"네, 네.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마는—"
"스닙스, 너 다리는 왜 그렇게 됐어?!" 가장 가까이 있던 경찰관이 어깨를 덥석 잡았다. 그 발굽을 뿌리친 뒤, 저만치 떨어진 곳에 있던 꼬마에게 반쯤 사정하다시피 말했다. "얼굴에 멍은 왜 든 거고?"
"그게......" 스닙스가 뒷무릎을 꼭 끌어안으며 카펫을 북북 긁어대다가 대답했다. "스네일스랑... 싸, 싸워서..." *11
"아이고..." 스트레이트 에지가 한심스러워하는 얼굴로 말했다. "이 철없는 자식아..."
"스네일스는 또 뭡니까?" 경찰 하나가 얼굴을 찌푸리고 물었다.
"아... 그..." 어텀이 몸을 파르르 떨더니 말했다. "애 친구에요. 학교 친구죠."
얼굴이 절로 구겨졌다. "거짓말이에요! 둘 다! 저 작자가 무서워서! 나중에 무슨 꼴 당할지 모르니까! 눈이 달렸으면 좀 보라고!" 경찰관 하나가 나를 현관 쪽으로 밀어내려 용을 썼고, 나는 그 힘을 억지로 견뎌내며 스닙스에게 소리쳤다. "조금 전 공원에서 리라 뜯을 땐 그 멍자국 없었잖아, 이 자식아! 그게 언제, 어떻게 생겼는데?! 어?!"
"아니에요..." 스닙스가 마른침을 삼키며 제 아비 눈치를 살피더니 우물거리며 말했다. "저 사람 진짜 본 적 없어요... 정말..."
땀에 젖은 얼굴을 타고 생기가 쪽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같이 서로 좀 가 주셔야겠습니다." 나를 밀어내던 사내가 내 앞다리 하나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집어치워!" 이를 악물고 마력을 끌어모아 방출했다. 녹색 섬광과 함께 뿔을 원점으로 보호막이 전개되며 몸을 감쌌다. 설마 이 정도로 무력을 행사하진 않겠지 싶었던지, 나를 끌고 가려던 경찰관이 당황하며 발굽을 놓았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집 밖으로 몸을 빼내 차가운 밤 속으로 침잠하는 포니빌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주체되지 못한 화가 눈가를 타고 흘러 파르르 떨렸고, 미친 듯이 뛰어대는 심장 박동이 귓가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러니까, 이렇다는 거지." 다음 날, 시립도서관의 어느 한 자리에 트와일라잇 스파클과 애플잭이 앉아 있는 가운데 그 위를 가만히 떠다니던 레인보우 대쉬가 의심을 숨기지 않은 눈초리로 이쪽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무도 모르는 저주 같은 걸 받아 그 누구도 그쪽에 대해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 동네에서 일 년을 넘게 살았으면서도 그 누구도 그쪽을 모른다. 별 개 같은 상황을 다 보겠네. 우리한테 와서 부탁한다는 게 그 등신같은 저주를 걷어내는 걸 도와 달라는 게 아니라, 제 자식들을 두들겨 패는 웬 미친 새낄 족치는 걸 도와달라는 거고. 맞아?"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선 자세를 고쳐 잡았다. 고개를 힘주어 끄덕이고 말했다. "네."
레인보우 대쉬가 방향을 틀어 두 친구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 해도 되지?"
애플잭이 대답했다. "못 할 말 아니다 싶으면 해도 되겠지."
레인보우 대쉬가 이쪽을 돌아보며 조롱하듯 말했다. "말이 되는 소릴 해라!"*12
한숨지으며 눈을 굴렸다. 잠만 못 잔 게 아니라, 기력도 없고 제정신도 반쯤 가출한 상태였다. 평범한 표정을 유지하는 건 고사하고 저들 앞에 똑바로 서 있는 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노력이 필요했다.
"관심 구걸하는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앞뒤도 안 맞고, 수준도 떨어지고 설득력도 없는 소리를 지껄이면 쓰냐!" 레인보우 대쉬가 내 주위를 빙빙 돌며 비난의 의도가 생생하게 담긴 눈총을 쏘아댔다. 자긴 안 믿겠다는 소리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소리가 듣기 편할 리 없었다. "너 옆에 핑키 파이를 갖다 앉혀 놓고 헛소리 늘어놓게 시켜도 어디 대학 교수 강의 듣는 것 같을걸? 아하, 조화의 원소 얘기를 어디서 주워들었겠지! 그럼 셀레스티아 공주님 수제자인 트와일라잇 스파클 얘기도 들었을 테고, 훌륭하디 훌륭한 친구들과 함께 나이트메어 문을 물리친 경위도 대충은 들었을 거란 말야?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냥 우리한테 빌붙어서 명성의 부스러기라도 주워 먹으려는 생각이잖아. 그러니까, 그, 없는 거 같으면서 있는 그런 유명세 말이지! 세상 반대쪽에 있다는 '밤의 창고'를 털러 가자거나 하는 같잖은 소리나 그 비슷한 똥찌꺼기 같은 헛소릴 지껄이지 않은 것만으로 천만다행이야 아주. 또, 스트레이트 에지가 가정 폭력범이느니 하는 개소리도 마찬가지야. 기분 나쁘다고! 다른 사람 일에 같잖게 참견질하고 돌아다닌 게 대체 몇 년째야?! 거기다 사람을 아동 학대범으로 모는 역겨운 소리까지 해?! 하! 다른 덴 몰라도 포니빌은 점잖은 동네야, 이 어린 것아. 애초에 내가 이 동네 꼭대기에서 내려다보고 있는데, 그런 일이 있었으면 내가 알아도 먼저 알았겠지!"
고개를 돌려 냉랭한 표정으로 받아쳤다. "알아도 먼저 알았다면 그쪽이 '재미없는 애들'이라 치부하는 바로 그 포니빌 친구들 때문에 아직까지도 '끝내주게 멋진' 원더볼트 입단시험도 안 보고 이 동네에 죽치고 앉아 있는 이유도 잘 알겠군요. 그 친구들이 인생 한복판에 난 커다란 틈새를 채워 주니까, 평생 나 혼자 외롭게 살다 혼자 죽지 않을까 싶은 무서움을 지워 주니까 아닌가요."
루비빛 눈동자를 휘둥그레 뜬 채 뚝 떨어진 레인보우 대쉬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이구... 방, 방금 뭐라고 했—?" 어린애처럼 달달 떨며 반쯤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
애플잭이 인상을 팍 쓰며 말했다. "거 여보쇼—"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그쪽 얘기? 그쪽이랑 주변 사람들을 위해 마련해 둔 물리적, 정신적 기틀은 당신 아버지께서 물려주신 유산이죠. 그나저나 제 후드 좀 그만 쳐다봐 주시면 안 될까요? 뭐 사실 어디서 많이 봤다 싶기는 할 텐데, 애플잭 씨도 대충 그 이유 정도는 짐작하시겠죠. 과수원 돌보러 돌아다니실 때 입으셨던 바로 그 옷이거든요. 어느 겨울에 당신을 안고 흘러간 유행가를 흥얼거려 불러 주시던 때 아버님 솜털 색이 떠오른다는 이유로 특히 아끼던 옷이라고 했죠."
"어어어..." 애플잭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모자를 벗어 가슴에 안고 말했다. "아이구, 맙소사..."
"그럼 당신 얘기도 해볼까요..." 트와일라잇 쪽으로 몸을 틀고 빙긋 웃으며 입을 열자 트와일라잇이 눈에 보일 정도로 몸을 움찔했다. "세상이 그쪽 존재를 영영 잊어버리지 않을까 두려워하지요. 포니빌로 파견되어 온 후 우정의 불꽃을 목도하고 여기 평생 뿌리내려 살겠다고 결심을 굳혔고, 행복해서 울음이 나온다는 게 어떤 것인지 비로소 깨달았고요. 이전까지는 캔틀롯 왕성 장서관에서 혼자 훌쩍이는 것 외에는 울어 본 적이 없었고. 그러면서도 셀레스티아 공주님께는 본인이 어떤 근심과 슬픔을 안고 사는지 철저히 함구했지요. 이 문제에 대해서 그쪽이 전에 저한테 해 주신 말씀이 있었어요. '어쨌든, 턱수염 스타스월도 유사 이래 최고의 성취를 이룬 마법사였지만 죽고 나서 남긴 거라고는 마법 두루마리밖에 없었다' 였죠. 위대한 성취는 고독의 끝에서 나온다는 게 그쪽의 신념이었다고 해도 될 거에요. 포니빌로 와 친구들을 사귀고 난 뒤에는 내심 우리나라 역사책에 이름 한 줄 실리지 않고 영영 잊혀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었죠. 오지 않은 미래 때문에 괴로워하던 시절보단 지금이 훨씬 더 행복하니까."
트와일라잇이 나를 빤히 쳐다보며 덜덜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 "그... 어, 어떻게...?"
"지금은 제가 이걸 다 알고 있는 이유를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빙긋 웃어 보였다. "중요한 건 제가 이러고 있는 이유지요. 저도 그쪽처럼 사람들을 돕고 싶어서 이러는 거에요. 지금 우리는 행동할 기회를 쥐고 있지만, 여기 앉아 시간이나 뭉개고 있다가는 스닙스네 가족이 더 큰 피해를 보게 될 테지요." 몸을 꼿꼿이 세우고 셋을 바라보며 말했다. "서로 친구가 되겠다는 도박을 하지 않았다면 여러분 모두 양태는 완전히 다르겠지만 완전한 고립과 고독에 휩싸여 살았을 것은 명백하죠. 그 도박의 결과로 여러분은 이퀘스트리아 그 어디에도 없이 강대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죠. 지금 다시 그 도박을 해 볼 생각은 없으신가요?"
레인보우 대쉬는 몸을 떨었고, 트와일라잇 스파클은 훌쩍거렸다. 애플잭이 가슴에 안았던 모자를 금발 갈기 위에 얹고 조용히 그 둘을 쳐다보았다. 둘이 애플잭의 시선에 응답했다.
"별로 이상한 낌새는 없는데." 저녁 어스름을 머리에 맞으며 레인보우 대쉬가 불쑥 말했다.
"쉿!" 우리는 콘도미니엄 외부, 보행자 도로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애플잭이 목 쉰 소리로 조용히 시켰다. 집 안에 아직 불이 밝혀져 있었고, 그 위로 그림자 몇 점이 느릿느릿 지나다녔다. "하트스트링스 선생 얘기 들었제. 좀 걸릴 수 있다 캤다! 보아하니 요 스트레이트 에지라는 사내놈은 대가리에 피 쏠릴 때마다 확 내질러 버리는 족속 같구마."
"뭐가 어떻다 쳐도 등신같은 짓거리인 건 똑같아." 레인보우 대쉬가 얼굴을 구기며 툴툴댔다. "멋진 일도 아니라는 건 말할 필요가 없겠지. 사실상 동네 사람 염탐질이나 하고 앉아 있는 거 아냐! 그 사람 집 옆에 숨어서!"
"겁먹었으면 집에 가세요." 짜증 섞인 투로 대답했다.
"라이라 씨." 트와일라잇이 속삭였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좀 어려워요. 일단 그쪽 말대로 도박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주체는 저희니까요."
"알았어요..." 한숨지으며 피로에 찌든 얼굴을 발굽으로 문질렀다. "미안해요. 그게... 저 집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고 동원한 수단이 몇 가지인지 알면 아마 기절초풍하실걸요."
"치어릴리나 경찰 양반들한테 얘기했는데도 별반 도움이 안 됐단 얘기제?"
"소용없었죠. 저주를 받은 몸이라고 말씀드렸지요?"
"받아들이기 좀 어렵긴 하죠."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말했다. "스쿠틀루 수색, 머리 위로 건물 잔해가 쓰러졌는데도 럼블과 모닝 듀가 무사히 살아 돌아온 일, 거기에 패러스프라이트 창궐까지. 진심으로 이 모든 사건 하나하나마다 그쪽이 개입했다고 얘기하는 거에요?"
"네." 말을 마치고 몸을 움찔하며 답했다. "다만... 패러스프라이트 창궐 건에 대해서 설명하려면 아주,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할 거에요. 그걸 하나하나 다 설명하고 있다간 시간이 촉박할 거라..."
"스쿠틀루는... 내가... 이 내가 구했어..." 레인보우 대쉬가 마른침을 삼키며 순진한 표정으로 애플잭과 트와일라잇을 쳐다보았다. 두 날개가 축 처져 있었다. "맞지?" 그 말은 차라리 울먹임이라고 해도 좋을 터였다.
"고것들 참, 난 이게 더 신기하다 마." 애플잭이 모자를 벗어 부채질하며 말했다. "윈드휘슬러랑 캐러멜 중매 서 준 게 그쪽이라 그랬었제, 아주 상세히 얘기해 줘야 할 끼다!"
"하..." 일그러진 웃음을 지으며 미친 듯 웃어댔다. "하 하 하 하 하 하!"
레인보우 대쉬가 얼굴을 구겼다. "뭐가 그리 빌어먹게 재밌어?"
"으아아아아아..." 나는 혼자 중얼거려 말했다. "암만해도 진짜 좀 자기는 해야 할 모양이다..."
"그나저나 트와일라잇." 애플잭이 내 어린 시절 소꿉친구를 돌아보고 물었다. "느가 걸어 준 마법만 있으면 다른 사람덜이 우리 못 찾는 거, 확실하나?"
"벌써 몇 번째 똑같은 질문인지 모르겠지만, 확실해."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대답했다.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 몸소 현현하셔서 요 근처를 밝게 비춰 주시지 않는 한, 우리가 숨은 그림자는 비구름보다도 짙고 빽빽하게 우릴 숨겨 줄 거야. 우리가 여기 이러고 앉아 있는 건 다들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걸."
"그라모 다행이고." 애플잭이 부르르 몸을 떨고 말했다. "나가 여기 쪼그리고 앉았다는 걸 아무도 모른다 생각하이 기분이 참 끔찍도 허다."
"내 말이 그 말이야." 레인보우 대쉬가 말했다.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불안한 기색을 전혀 숨기지 않고 이쪽으로 몸을 돌려 나를 보았다. "하트스트링스 씨?"
"죽겠네..." 피로에 찌든 핏발 선 눈으로 문제의 집을 주시하며 대답했다. "트와일라잇, 왜 그래요?"
"그쪽이 저희한테 해 주신 얘기가 전부 사실이라고 하면—"
"전부 사실이에요."
"네. 사실이겠죠." 트와일라잇이 헛기침했다. "그 누구라도 그런 저주를 짊어지고 살기란 턱없이 어려운 일일 거에요. 죽었으되 죽지 않은 알리콘의 추격도 피해야 하고, 마법의 힘을 간직하고 있지만 역사가 잊은 악곡도 연구해야 할 텐데, 스닙스네 가족이 어떻게 살고 있나 아주 사소한 하나까지 넘겨짚는 게 가능하긴 한가요?"
"들었으니까 아는 거에요..."
애플잭이 끼어들었다. "듣기만 했나?"
한숨을 토하고 대답했다. "직접 보고 들었어요. 직접 듣고 봤고요. 아이 진짜. 보세요! 스트레이트 에지라는 자는 구제불능이에요. 그리고 제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든, 목전에 닥친 참상을 그냥 넘길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모른 척 하는 건... 잘못된 거니까! 세상에 어떻게..." 기억이 머릿속으로 비집고 들어와서 얼굴을 찌푸렸다. 눈물의 베일로 가리운 학교 내 정원의 그 축축한 상이 다시 눈에 맺힌 듯싶었다. 어둠 깔린 층계참 저편으로 뻗은 캔틀롯의 어느 길가 위로 한없이 쏟아지던 폭우의 모습과 소름끼칠 정도로 닮아 있었다. 나는 신음하며 두 발굽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셋은 불안해하는 눈치였다. 지금까지 쌓아올린 실오라기 같은 신뢰마저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트와일라잇..."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문댄서... 문댄서 씨 기억하시죠? 그러니까... 문댄서 씨가 어릴 때 무슨 일을 겪었는지."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놀란 숨을 토해냈다. 보라색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문댄서를... 아세요?"
심장이 쿵쿵 뛰어댔다. 아이구 젠장, 셀레스티아 공주님 맙소사. 또 잊어버렸네. 항상 여기서 실수를 한단 말이지.
"음... 크흠." 억지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전에... 그쪽이 말해 준 적 있었어요. 그, 지금 말고 예전에 몇 번 찾아갔었던 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게 맞군요..." 트와일라잇 스파클은 이 사실이 아주 짜증스러웠지만, 받아들이기는 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숨짓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제가 그쪽한테 문댄서 얘기를 얼마나 했었죠?"
침을 삼키고 대답했다. "들을 만큼은 들었죠." 트와일라잇의 어깨에 조용히 발굽을 올리고 말했다. "그쪽 부모님... 더스크 선생님이랑 스텔라 선생님께서 문댄서와 그 어머니인 새틴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 얼마나 많이 도와 주셨는지 기억하세요?"
트와일라잇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잊겠어요? 그 땐 몇 살 되지도 않았었지만, 좀 더 크고 나서부터 친하게 지냈죠." 트와일라잇이 빙긋 웃더니 애플잭과 레인보우 대쉬를 흘끗 살피고 말했다. "포니빌에 정착하기 전에는 문댄서가 유일한 친구였어요." 날카로운 고통이 온몸을 엄습한 듯한 소리로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바뀌었죠..."
"아직 애정이 남아 있나요?"
트와일라잇의 시선이 번개처럼 꽂혔다. 나를 보는 눈이 몇 번 깜박이고 나자 눈꺼풀 아래가 축축해져 있었다. "당연하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에요. 방식은 다를지 모르지만..."
빙긋 웃어 보이고 말했다. "문댄서 씨랑 당신이 아예 만난 적이 없었다면 문댄서 씨 인생이 어떻게 됐을까요? 새틴 선생님이 더스크 선생님과 스텔라 선생님과 친분이 없었다면 어때요? 즉..." 나는 말하며 몸짓했다. "더스크 선생님과 스텔라 선생님이 아주 사소한 것 하나, 아주 사소하지만 일이 크게 잘못되어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하나를 그냥 무시하고 지나쳤다면..." 나는 다른 둘을 곁눈질해 살피고 나서야 말을 마쳤다. "...문댄서 씨는 계속 불행한 삶을 살지 않았을까요."
트와일라잇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생각만... 생각만 해도..."
"트와일라잇." 나는 말했다. "이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아무 상관 없는 이방인, 아무것도 모르는 옆집 사람, 얼굴만 겨우 아는 사람 같은 건 없어요. 다들 이유가 있어서 태어난 것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우리 모두 창조의 개념을 실체화시킨 성가의 한 가락을 본따 지어낸 노래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니까. 즉슨, 드러내야 마땅한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 같으면 다가가서 발굽을 내미는 것이 우리의 의무, 의무라기보다는 차라리 본성이라 해야 할 것이란 말이지요. 포니 문명의 그 누구도 짊어져 보지 않은 끔찍한 저주를 이고 산다고 해서 서로의 구원이 되어 주고, 악을 물리쳐 몰아내려 하며, 화합과 조화의 숨결을 불어 혼란과 혼돈의 잿더미를 날려 치우고자 하는 사람의 본성이 흐려지는 것은 아니에요. 스닙스와 그 어머니, 여동생을 도와 주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쪽 부모님께서 문댄서 씨를 보살펴 주신 것과 같은 것이죠. 훌륭한 행동의 표본이기도 하고요. 끝없이 계속되는 아름다운 선율같이..."
트와일라잇 스파클은 아무 말 없이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아주 천천히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별 미친 소릴 다 듣네." 레인보우 대쉬가 툴툴대며 말했다.
"야 임마!" 애플잭이 외쳤다.
"뭐 왜! 살다살다 민트색 돌덩어리가 굴러다니는 꼴을 다 본다 야!" 레인보우 대쉬가 거친 동작과 함께 조용히 말했다. "별 같잖은 쓰레기 같은 말을 누덕누덕 기워 말을 만든 주제에 결국 아무 말도 안 한 거나 다름없잖아?!"
"니는 무슨 백일장 대회 심사위원으로 온 것 같나!"
"아오 진짜. 목 빠지게 기다리기만 하는 것도 짜증나 죽겠다고. 당장 아동 학대범이라는 그 새끼 대가리를 박살내든가, 집에 가자! 공주님 맙소사, 왜 이런 일이......"
"쉬잇!" 트와일라잇이 콘도미니엄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한쪽 발굽을 들며 레인보우를 제지했다. "방금 들었어?"
"뭘요? 무슨 일인데요?" 잔뜩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말했다.
"당장은 방해하지 말고 좀 더 듣게 냅두라." 애플잭이 대신 대답하며 내 어깨에 가만히 발굽을 얹었다.
레인보우 대쉬조차 몸을 기울이고 목을 쭉 뺀 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눈동자가 눈가를 따라 한 바퀴 빙 돌았다. 누군가의 날카로운 울음과 함께 묵직한 파열음이 들려왔다. 레인보우의 날개 깃털이 쭈뼛 섰다. "이런 썅!"
"돼지새끼들이 몸싸움 벌이는 소리가 딱 저짝인데." 애플잭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차라리 그거면 좋겠네요." 차갑게 대답하고 셋을 향해 눈을 부라리고 물었다. "아직도 헛소리 하는 것 같아요?"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마른침을 삼켰다. 바로 몇 발짝 떨어진 콘도미니엄에서 몇 차례 고함소리가 앵앵 메아리지며 들려왔다. 트와일라잇이 몸을 움찔거리며 물었다. "저거 정말... 스닙스네 아버지 맞아요?"
"저게 어딜 봐서 사람새끼냐!" 레인보우 대쉬가 쉰 목소리로 소리쳤다. "암만 봐도 꼭지 돌아간 용이지 사람은 아냐 저거!"
"제 자식들을 짚단 취급하며 내던지는 자식이라고." 애플잭이 분기탱천한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어린애들 가지고 장난치는 건 참아 줄래야 도저히 참아 줄 수가 없는 거다." 그러더니 모자를 눌러 써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매를 그림자로 덮고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암만해도 경찰 불러야 쓰겄제?"
"하트스트링스 씨가 얘기했었잖아!" 트와일라잇이 곧바로 대답했다. "아무 소용 없었댔어!"
"제가 전에 시도했던 걸 그대로 반복해 봤자 아무 소용 없을 거에요."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고함에 온 창문이 달달 떨리는 모습을 보면서도 애써 냉정을 유지하는 척하며 말을 이었다. "지금 필요한 건 여러분 셋이 동시에 증인이 되어 주시는 것..." 순간 차가운 한기가 몸을 강타했다. 입가에서 하얀 입김이 피어났다. 눈 주위가 경련했다. "아, 안 돼..."
"왜 그래요?"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제발!" 부리나케 트와일라잇의 면전으로 몸을 날려 갈기를 마구 잡아당기다시피 하며 물었다. "누군지 기억하겠어요?!"
"라, 라이라 하트스트링스!" 트와일라잇이 소리쳤다.
"와, 와 그러는데." 애플잭이 놀라 물었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내 이름 말해 봐요!"
"어어... 라이라!"
레인보우 대쉬를 향해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그쪽도!"
"병신!"
"레인보우—"
"어, 라이라라고 임마!" 레인보우가 고개를 미친 듯 휘저으며 말했다. "나 참 진짜! 그게 뭐 그렇게 대수라고—?!"
"공주님 감사합니다!" 나는 신음했다. 그리고 얼굴을 확 찌푸리며 말했다. "시간이 많지 않아요! 기회는 지금뿐이에요!"
"왜요?"
"대답할 시간 없어요!" 트와일라잇을 다시 홱 잡아당기며 말했다. "당장 저기로 순간이동시켜 줘요!"
"네, 네?!" 전염병 환자에게 잡히기라도 한 양, 트와일라잇이 몸을 홱 빼내고 물었다. "미치시기라도 했어요?"
"미치기 직전이죠!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저주가 이 모든 걸 없던 일로 만들게 할 순 없다고요!"
"다들 정신 좀 차리자구. 문화인답게 현관으로 걸어가서 문을 똑똑 두드리는 건 어때—"
집에서 다시 비명 소리가 튀어나왔다.
"까야겠다. 없던 걸로 해." 레인보우 대쉬가 말했다. "트와이?"
"알았어, 알았다구. 별로 좋은 생각 같지는 않은데..." 트와일라잇이 정신을 집중함과 동시에 뿔이 하얗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빨리 해요!" 충혈된 눈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너무 늦기—"
라벤더빛 섬광이 밝게 한 번 번쩍함과 동시에 저녁 어스름이 순식간에 녹아 사라졌고, 우리 넷을 둘러싼 풍경이 스트레이트 에지 일가의 집 부엌으로 바뀌었다. 유리병과 도자기 그릇, 금속 식기가 사방에 널려 있었다. 지독한 술냄새가 진동했고, 지난번에 들어왔을 때는 없었던 카펫 얼룩이 눈에 들어왔다.
"—전에!" 목전의 참상에 얼어붙은 몸 밖으로 웅얼대는 목소리가 밀려나와 말을 마쳤다. 애플잭과 레인보우 대쉬, 트와일라잇 스파클도 하나같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스트레이트 에지가 뿔을 밝혀 스닙스를 허공에 매달아놓고 있었다. 꼬마의 목 주위로 밝은 색 염동력이 엉겨 있었고, 그 위로 눈에서 하염없이 흘러내린 눈물이 뒹굴었다. 어텀은 소파에 늘어진 채 힘 빠진 앞다리를 아들을 향해 뻗고 있었다. 멀찍한 한쪽 구석에는 윈드송이 숨어 있었는데, 말할 수 없는 공포가 눈에 가득 차 있었다.
"—너 이 새꺄, 네가 그렇게 잘 알면 아가리를 놀려 봤어야 하는 거 아니냐?" 스트레이트 에지가 고함쳤다. "네 엄마 치료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건 나야, 이 자식아. 넌 버르장머리 없이 기어오르고 끼어들기나 할 줄 알지! 네가 치료비 댄다고 뺑이를 치고 다니기를 해 봤어! 입이 달렸으면 엄마 치료하는 데... 뭐라도... 한 게... 있는지 말해 봐...?" 스트레이트 에지의 눈가가 꿈틀하더니, 네 명의 무단 침입자를 향해 고정되었다. 그러더니 크게 딸꾹질하고는 비틀거리며 소리를 질러댔다. "이 씹할 것들은 또 언제 기어 들어왔—?"
애플잭이 주황색 번개처럼 스트레이트 에지를 향해 달려들었다. "당장 그 더러운 마법 풀어, 이 더러운 자식아!" 그 한 마디와 함께 애플잭이 사내를 들이받았다.
"억!" 남자는 그대로 거꾸러져 엔드 테이블을 부수며 쓰러졌다.
"스트레이트!" 어텀이 비명을 질렀다.
윈드송이 통곡했다.
스닙스가 비틀거리며 바닥으로 추락하는 찰나, 레인보우 대쉬가 재빨리 날아가 받아냈다. "이제 괜찮아 꼬마. 잡았어!"
"이건 또 무슨 개 같은 상황—?" 한 쌍 발굽이 스트레이트 에지의 가슴팍을 강타해서,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어욱!"
"그 누구도... 그 어떤 자식도 제 혈육을 저따위로 대하면 안 되는 거다!" 애플잭이 소리쳤다.
"내 남편한테 뭐 하는 짓이야?!" 어텀이 울부짖었다.
"거 아줌마!" 레인보우 대쉬가 품에 안겨 덜덜덜 떠는 스닙스를 붙잡고 딱딱거리며 대답했다. "쟤가 저 새끼 아가리를 때려부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아쇼!"
"됐어, 다들 진정 좀 해!" 트와일라잇이 소리쳤다. 나는 평생 트와일라잇이 이렇게 공포에 질려 몸을 떨어대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감히 내 집에 기어들어와?!" 스트레이트 에지가 꿈틀대며 애플잭을 뿌리치려 버둥거렸다. "네가 뭔데 남의 일에 끼어들어?! 어디 철창 신세 한번 져 봐라, 골 빈 년들!"
"개가 웃을 소릴 해라 임마!" 애플잭은 거의 얼굴에 침을 뱉을 기세였다. "경찰 부를 테면 불러, 이 벌레 같은 자식아. 어떻게 빠져나가나 구경이나 하게!"
"그이한테서 떨어져!"
윈드송의 울음이 커졌다.
"아오 진짜! 누구 저 꼬마 입 좀 다물게... 해, 해..." 공중에 뜬 레인보우 대쉬의 몸이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레인보우?" 트와일라잇이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왜 그래?"
"아니... 갑자기 어지럽네..." 레인보우 대쉬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품에 안고 있던 스닙스를 거의 놓칠 지경이었다.
레인보우 대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적어도 돌려 보려고는 했다. 차가운 입김이 시야를 가려서 나는 레인보우를 보지 못했다. 헉 소리와 함께 이를 악물고 스닙스를 최대한 정중하게 홱 낚아채고 외쳤다. "기억이 지워지고 있어요!"
"뭣?!" 애플잭이 고개를 들었다. "뭐가 어떻게 되고 있다고—으앗 젠장!"
"으라아아앗!" 스트레이트 에지가 애플잭을 거세게 밀어 떨쳐냈다. "뒈져서 지옥에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네 년들은 내가 잡아 죽이고 말 테다!"
떠밀린 애플잭이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치다 자기 그릇 진열장을 향해 쓰러졌다. 깨진 조각이 사방에 널렸다. 등잔이 마구 흔들려 그림자가 제멋대로 늘어났다 줄어들며 소용돌이쳤다.
"애플잭!" 트와일라잇이 비명을 질렀다.
재빨리 달려가 윈드송을 잡아채 등에 업고 몸을 돌렸다. "트와일라잇! 나가야 해요!"
"아니... 어떻게..." 스트레이트 에지가 난롯가에서 강철 불쏘시개를 집어들고 쓰러진 애플잭을 향해 미친 듯 달려드는 꼴을 본 트와일라잇이 역장을 펼치며 대답했다. "그럼 진짜 큰일나요!"
"이 불쌍한 애들이 평생을 이 지옥에서 살게 만들 셈이에요?!" 나는 그렇게 소리쳤다.
"너 뭐야!" 스트레이트 에지가 흉기를 들고 애플잭에게 달려드는 모습을 본 레인보우 대쉬가 급히 몸을 날렸다. "뭐가 더 중요하냐고요?!" 눈 깜짝할 사이 레인보우가 스트레이트 에지를 덮쳐 쓰러뜨렸다. 벽에 걸린 액자가 충격파에 뒤흔들렸다.
"이런 썅, 트와일라잇!" 목소리를 더욱 높여 소리쳤다. "애들 데리고 나가야 한다고요! 지금 아니면 기회가 또 없을지도—" 그와 동시에 끔찍한 한기가 집 안을 가득 채우고 지나갔다. "공주님 제발, 조금만 더—"
"으으으으!" 트와일라잇이 뿔에 마력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스트레이트 에지가 뭐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이며 레인보우에게 발굽을 휘두르는 것과 동시에, 우리 둘은 마력선을 타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나는 스닙스와 윈드송의 떨리는 몸에 매달렸다. 이 초 정도 지났을까, 우리는 동네 어떤 건물 한쪽 벽에 비틀거리며 기대섰다. "윽!"
"으악!" 달빛에 젖은 풀잎 위로 트와일라잇의 몸이 뒹굴었다. 트와일라잇이 거세게 기침하며 더듬더듬 말했다. "최... 최대한 멀리... 오긴 했는데..." 몸을 움찔하더니 땅을 짚고 일어서며 말을 이었다. "애플잭이랑 레인보우 대쉬는..."
"우리 둘보다는 단단한 사람들이니 괜찮을 테죠." 품에 안은 꼬마 둘을 끌어당기며 숨을 골랐다. 나는 말을 더듬었다. "중요한 건, 이제 애들이 안전할 거라는 거고."
"애들이라니...?" 녹초가 된 트와일라잇이 힘겹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 애플잭... 레인보우 대쉬..."
"그 둘이면 충분히 몸을 빼내 피하고도 남..." 끔찍한 두통이라도 앓는 양 머리를 문질러대는 트와일라잇의 모습에 당황해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잠깐..."
그 때, 우리 넷 앞에 밝은 빛이 터져나왔다. 몸을 움찔하며 눈을 가늘게 떠 확인해 보니, 시청 건물의 쌍여닫이문이 활짝 열려 안에 고여 있던 빛이 흘러나온 것이었다.
"세상에 맙소사!" 끔찍한 일에 시달리다 도망쳐 온 한 쌍 꼬마들과, 녹초가 된 두 유니콘이 바닥에 널브러진 모습이 심히 충격적이었는지 포니빌 시장은 급하고 날카로운 숨을 들이마셨다. 나이 지긋한 사람 몇몇이 시장님 뒤를 따라 나왔는데, 눈을 굴리면서 이 기괴하기 짝이 없는 꼬락서니의 근원을 탐색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폭탄이라도 터진 줄 알았는데!"
"죄송합니다, 시장님." 나는 말했다. "트와일라잇이 순간이동으로 데려다 주느라 그랬어요. 그게, 버톤 가에서 무시무시한 일이......"
"시, 시장님!" 트와일라잇이 크게 놀라 몸을 일으키고 물었다. "늦은 시간까지 어쩐 일이세요?"
"악몽야 축제가 머지않아서, 축제 준비 문제로 시의회가 소집되어 논의를 진행하던 중이었습니다만. 그럼 여러분이 늦은 시간에 길 한복판에서 대체 뭘 하고 있었는지 여쭤 봐도 되겠지요? 하늘에서 뚝 떨어지시기라도 한 것 같은데."
"어... 그게... 저도 잘..." 트와일라잇이 이쪽을 보더니 내 품에 안겨 있던, 이곳저곳에 멍이 든 채 몸을 떨어대는 꼬마를 보고 표정을 급격히 구겼다. "스닙스?! 공주님 맙소사! 이게...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트와일라잇, 당신도..." 마른침을 삼켰다. 한쪽 발굽을 뻗으며 말했다. "진정하고, 천천히 생각해 봐요. 뭐 하나쯤은 아직 기억하고 있을 텐데..."
"하?" 트와일라잇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시장님과 함께 쪼그리고 앉아 윈드송과 스닙스를 살폈다. "기억하다니 뭘요? 이게 무슨 상황인지조차 모르겠는데! 얘들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당신?"
"야! 트와일라잇!" 레인보우 대쉬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흠칫 놀란 숨이 비어져 나왔다. 몸을 돌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다.
우리 머리 위에서 날개를 파닥거리는 레인보우 대쉬가 허비할 시간이 없다는 투로 소리쳤다. "여기 있었구만! 좀 도와 줘야겠어!"
"무슨 일인데?"
"스트레이트 에지네 문제야!" 레인보우 대쉬가 외쳤다.
트와일라잇이 맹한 표정을 지었다. 시장님도 계시고, 시의회 의원들도 마침 자리에 있었다. 주저앉은 윈드송과 스닙스는 그 이름만으로 공포에 질려 몸을 떨어대고 있었다. 내심 다 됐다 싶어 안도하던 차에......
"들어도 못 믿을걸!" 레인보우 대쉬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 아저씨네 집에 강도가 들었어! 애들을 납치해 간 것 같아!"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아, 제기랄..."
시장님이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스트레이트 에지 씨네 아이들이, 납치를 당해요?!"
"어......"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한쪽 눈썹을 치키더니 꼬마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얘들 얘기하는 거야?"
레인보우 대쉬가 자기 눈을 못 믿겠다는 듯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보았다. 새빨간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건 또 무슨 일이야 대체?!" 레인보우 대쉬가 땅으로 내려섬과 동시에 달빛을 받으며 두 사람의 형체가 멀찍이서 나타났다.
"트와일라잇! 니 여기 있었나! 레인보우헌티 야그 들었제?!" 애플잭도 숨이 턱까지 차오르기는 마찬가지였다. 모자 아래로 늘어진 금발 갈기를 쓸어 넘긴 애플잭이 큰 소리로 말했다. "미치도 곱게 미치야지 이게 도당최 무슨 일이고! 정신 퍼뜩 차려 보니 레인보우랑 내랑 스트레이트 에지네 방구석에 가 있드라! 근디 보이까네 애덜이 어딜 갔나 안 보이는 기라!"
"뭐 무슨 마법을 썼거나 했을 겁니다." 스트레이트 에지가 말했다. "여러분이 나이트메어 문에 맞서 이겼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에는 신물이 나서 포니빌로 이사를 온 건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당장 경찰이 됐든 어디가 됐든 신고를 해야..." 한가운데에 있던 꼬마 유니콘 둘을 본 사내의 눈이 차갑게 식으며 가늘어졌다. "잠깐. 이건 또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꼴이랍니까?!"
"저... 저도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어요!"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대답했다. 차가운 별빛에 몸을 떨며 자리에 모인 사람들 하나하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애플잭? 레인보우 대쉬? 그러니까, 눈 떠 보니 어느 순간 스트레이트 에지 선생님네에 가 있었다는 거지?"
"내도 잘은 모르겠다마는 도서관 일 도와 주꼬 집에 가다 그리된 거 같다." 애플잭이 말했다. "어쩌다 아저씨네 집에 기어 들어갔는지 도당최 기억이 안 난다..." 애플잭이 턱을 긁었다. "아이구야... 뭐 살벌한 걸로 뚜들겨 맞기라도 했나 사지 곳곳 안 아픈 데가 없네. 뭐가 됐든 그걸로 내랑 레인보우 대쉬를 후드려 패고 나서 밖에 나와 잘 돌아다니고 있는 기 틀림없다!"
"어쩌면 아이들이 뭐라도 기억해 낼지 모르겠군요." 시장님이 말했다.
"딸? 아들?" 스트레이트 에지가 꼬마들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이게 다 어떻게 된 건지 말해 보겠니?"
윈드송은 아무 말 없이 울기만 했다. 스닙스는 멍한 얼굴로 목을 문지르고만 있었다.
"말해 보련?" 스트레이트 에지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저도..." 스닙스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몸을 같이 떨었다. "잘... 모르겠어요..."
"아오 진짜!" 그때까지 관망하고 있다가 발을 쿵쿵 구르며 풀밭으로 걸어 들어갔다. 다들 놀란 눈치였다. "스닙스, 그냥 말해 버려! 사실이 어떤지 전부 다 얘기하라고! 무서워할 것 없어!"
스트레이트 에지가 짜증 섞인 눈으로 노려보며 물었다. "이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은 또 누굽니까?!"
"그게......" 트와일라잇이 흠칫 놀랐다.
나는 다시 소리쳤다. "스닙스, 저 작자가 뭐라 하든 무서워할 것 없다니까! 지금 여기 있는 사람 전부 너도, 네 동생도, 엄마도 보호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야! 아버지란 작자가 어떻게 자식들을 학대하고 가족들을 못살게 굴었나 전부 말해!"
"뭣...?!" 스트레이트 에지가 얼굴을 파르르 떨며 뒷걸음질쳤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레인보우 대쉬가 별 헛소리를 다 듣는다는 눈치로 트와일라잇을 보며 말했다. "트와이?! 암만 봐도 정상은 아닌데, 혹시 아는 사람이야?"
"어어... 저기요?" 트와일라잇이 조심스레 다가와 말했다. "그... 잘 모르는 분께 이런 말씀 드리기도 뭐하지만, 일단 좀 진정하시고......"
"집어치워!" 몸 밖으로 숨이 광폭하게 밀려나왔다. 다가오는 트와일라잇을 쳐내고 스닙스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사정하듯 말했다. "스닙스, 제발 말해. 그 누구든 행복해질 자격이 없는 사람은 없어. 지금 여기, 바로 너도 그렇고! 있는 그대로 말해!"
"저..." 스닙스가 울먹거리며 주춤거려 내게서 멀어졌다. "이, 이 사람 뭐에요. 집에 갈래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는 울며 사정했다. "스닙스. 스닙스..."
"무, 무서워요. 가까이 오지 말아요." 스닙스가 훌쩍이며 여동생을 꼭 끌어안고 몸을 잔뜩 움츠렸다. 멀쩡한 사람 같아 보이는 표정이 아니기는 했다. "저리 가세요. 집에 갈래요..."
나는 그 때 거의 무너지다시피 했다. 시장님 뒤에 도열해 섰던 시의원들이 서로 소리죽여 몇 마디씩을 주고받았다. 애플잭과 레인보우 대쉬의 그림자가 머리 위로 드리웠다.
"거 머리 좀 식히고 얘기허자. 요 근처 사람은 아닌 거 같긴 헌데, 저 꼬맹이들 납치해서 도망가던 놈이 누군지 그짝은 좀 알 거 같으이......"
"그것도..." 레인보우 대쉬가 의심을 숨기지 않은 눈을 가늘게 뜨며 낮게 덧붙였다. "...그쪽이 유괴범이 아닐 때 얘기지만."
고개를 돌려 스트레이트 에지를 바라보았다. 그냥 달빛이 반짝인 것이었을지도 모르고, 내 머릿속 망상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나, 내 맹세코 그자가 아가리를 벌려 번들거리는 이빨을 훤히 드러낸 채 빙글빙글 쪼개는 꼴을 확실히 보았다. "으아아아아!" 그 다음 순간 시야를 가득 메운 것은 작열하는 에메랄드 빛 섬광이었다. 빛이 어둠 속으로 불려간 뒤, 시야를 채운 것은 자리에 있던 사람 태반이 바닥에 쓰러져 뒹구는 모습이었다. 거기에는 레인보우 대쉬와 애플잭도 끼어 있었다.
굳이 저들을 부축해서 일으키지는 않았다. 마력 방출이 마무리되자마자 나는 마을 북쪽을 향하여 전속력으로 달렸다. 짊어진 저주의 냉기가 돌팔매처럼 날아들었고, 그 아래서 내뱉는 숨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온몸에서 밀려나온 땀에 젖은 후드가 무거웠다.
문득 세상은 다시 머리 위까지 자라나 늘어선 나무들과 그 사이로 흘러 들어온 달빛의 만화경으로 반짝였다. 10월의 바람은 차가웠다. 시내에서 어느 정도 떨어지고 난 뒤 뜀박질을 멈추고 근처 공원으로 들어가 벤치에 몸을 기댔다. 익숙한 자리였다. 조용한 유니콘 하나가 외로운 소년을 위하여, 가장 따뜻하고 부드러운 곡을 퉁겨 주던 그 자리였다.
스닙스가 누려야 할 평화와 행복은 이 세상에 없었고, 그랬으므로 세상에 버림받은 내게는 그런 것이 더더욱 허락될 리 없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온 분노가 목구멍 너머에서 부글부글 끓다가, 입 밖으로 폭발하며 터져나갔다. 세상은 다시 에메랄드 빛 섬광으로 가득 찼다. 이름 없는 자들의 땅 곳곳에 퍼지는 그 여자의 걷잡을 수 없는 분노처럼 울어대는 천둥 같은 울림과, 신물 나이트브링어의 무게와도 비슷한 중량을 거느린 마력의 덩어리가 사방으로 폭발했다. 나무 조각으로 찢어지고 으깨진 벤치 파편이 공원 너머의 풀 덮인 언덕에까지 날려가 흩어졌다.
아무 이유 없는 파괴 행위 그 자체보다도, 아침이 되어 밖에 나온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저주가 꾸며낸 그럴듯한 다른 이유만이 보일 것이라는 사실이 더 괴로웠다. 나는 억지로 눈물을 눌러 참으며 오두막으로 내달렸다.
만장이 진혼곡으로 이행되었다. 나이트브링어의 현에서 솟구치는 음들은 내 갈리는 이빨에서 나는 것이라도 한 양 거칠고 날카로웠다.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다가오는 회오리바람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사방에서 낙뢰가 내리꽂혔다. 이름 없는 자들의 땅에 영원토록 울려대는 천둥 소리로도 내가 소리치는 말을 밟아 죽이기에는 부족했다.
"당장 거기서 내려오라고요!" 나는 다그쳤다. "그 잘난 왕좌에서 내려와 고적의 이중주 연주에 협조하란 말입니다!"
수많은 구체가 포개지고 겹쳐져 만들어진 단 하나의 구체는 그저 자리에 가만히 떠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 고도를 낮출 생각이 없었다.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왕림에 철판 바닥에 바싹 엎드려 신음하는 자들의 몸뚱이 위로 벼락이 동반한 섬광이 스쳐 지나갔다. 차가운 물이 한바탕 발판을 쓸고 지나갔지만, 그 무엇도 바뀌지 않았다.
"이게 부탁하는 걸로 보입니까! 이건 통보라고!" 혹한의 돌풍 속으로 소리 높여 외쳤다. "지금 당장 이리로 내려와서, 야상곡을 완성할 수 있게 협조하는 게 좋을걸! 이것만 완성하면 당신하고는 아주 작은 연관까지 끊고 살 수 있어. 이 빌어처먹을 지옥의 구덩이, 당신 집에 두 번 다시 들어올 일도 없을 테지! 당신도 내가 여기 드나드는 거 마음에 안 들어하는 거 아니까, 끝내자고! 당장 그 썩다 만 궁둥짝 들고 이리 내려와! 두 번 다시 이 지랄 안 해도 되게!"
구체 주위에서 환형으로 번개가 끓어올라 한 가닥 서슬 퍼런 낙뢰로 합쳐져 나를 향해 날아왔다. 내 품에는 나이트브링어가 있었고, 그 권능을 빌어 그 여자가 무슨 짓을 하든 아무 일 없이 흘려 버릴 수 있는 방어막을 만들 수도 있었다. 육중한 낙뢰가 나 대신 녹슨 철판 바닥을 내리쳤다. 젖은 철판이 순식간에 말라 버렸고, 이름 없는 자들이 충격에 나뒹굴었다.
"집어치우라니까!" 증발한 물기가 수증기로 피어올라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나는 나이트브링어 너머로 소리쳤다. "당신 노래 부를 일 없다고! 그쪽이 내 노래를 부르란 말이야, 젠장할!"
다시 한 가닥 섬광과 함께 육중한 마력이 이쪽으로 날아들었다. 그 여자의 공격을 이쪽의 마력으로 받아냈지만, 몸이 조금씩 뒤로 밀리면서 발굽이 철판에 슨 녹과 얼룩을 긁어댔다. 천둥이 잠시 잦아들고 난 뒤, 나는 고개를 들고 이를 악물었다. 눈물 한 줄기가 뺨을 타고 흘렀다.
"이 역겨운 자식아..."
구체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방향을 틀어 되돌아갔다.
"이 역겨운 자식아!" 궁창 사이의 혼돈 속에서 나는 비명을 질렀다. "네 빌어처먹을 노래만큼이나 구역질 나는 년! 혼자 고상한 척 세상 만사에 관심 끊고 사니까 중립의 화신이라도 된 것 같은가 본데, 그건 네 본성이 남한테 공감할 줄 모르는 냉혈한이라 그런 거야, 날개는 작살나고 목소리만 큰 빌어먹을 년아! 하기사 그러니 이 불쌍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나 다스리고 앉았지! 가슴도 비고, 대가리도 빈 걸어다니는 시체들한테서 여왕 대접 받아서 좋냐! 제정신으로 대체 누가 너 같은 걸 사랑해 주겠냐?! 위대한 어머니도 학을 떼실 거다! 그렇지, 그분도 너 꼴 보기 싫다고 궁창 사이 똥통에다가 처넣어 버리신 거 같은데 아니냐? 권능도 있고 힘도 있는 여신이라는 작자가 자기 사는 데 정리하기도 싫다고 손 놓으면 그게 여신 자격이 있냐고! 네 인생은 대체 어디가 그리 특별하고 그리 불쌍해서 골 난 어린애마냥 방구석에 처박혀서 발작질이나 하고 있냐?!"
구체는 이제 소리쳐도 들리지 않을 거리까지 멀어져서, 폭풍 너머로 그 모습을 감추었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 씹어댔다. "야, 이 이기적인 년아! 아직 들리지?! 이기적인 줄만 알았는데 찌질하기까지 하냐! 과거를 바꿔놓는 데 대가리를 쓰지 말고 미래를 발전시키는 데 좀 써 봐라! 안 그래도 다른 둘은 잘만 하고 있더라! 넌 뭐가 안 되냐?!" 발판 끄트머리에 서서 나이트브링어를 붙잡고 소리쳤다. "나도 현실에서 좀 살고 싶다! 세상을 바꿀 수 있으니까! 내 곁의 사람들을 돕고 싶으니까! 아, 근데 너는 그렇게 되는 것 자체가 안 되겠구나?! 좋은 거 알려주랴?! 네년이 스스로를 얼마나 잘났다고 생각하든지, 넌 아무것도 아냐 임마! 나이트브링어를 가진 건 이쪽이라고, 이 더러운 악마야! 평생을 숨어 다녀 봐라! 이쪽도 평생 널 쫓아다니면서 소리 꽥꽥 질러댈 수 있으니까! 혹시 내가 죽어 귀신이 됐으면 좋겠냐? 그럼 세상 끝날 때까지 너 쫓아다니면서 쪼아댈 거라고! 듣고 있지, 이 빌어먹을 것아! 이제 네년이 편히 쉴 수 있는 곳 따윈 세상에 없어! 너 쉬는 꼴은 내가 못 보니까! 창조의 노래가 너 같은 걸 만드는 데 낭비되다니 진짜 포니의 수치다! 이제 안식 따위 기대하지 마! 내가 그렇게 안 놔둘 테니!"
돌아오는 것은 미쳐 날뛰는 소음과 한기뿐이었다. 나는 몸을 떨며 아래에서 휘몰아치는 심연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바닥에 잔열이 남아 있었다.
남아 있던 열이 입술로 옮겨가 한 줄기 비명이 되어 날아갔다. 홧김에 발굽을 홱 휘두르고, 욕지거리를 하며 나이트브링어로 페눔브라의 메아리를 연주했다.
마을 북쪽 어귀로 향하는 흙길과 오두막 사이 어느 지점에서 나는 혼자 서 있었다. 집까지는 채 몇 걸음도 떨어져 있지 않았으나, 그리로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이름 없는 자들의 땅에서 묻어나온 한기조차도 감히 내 몸을 떨게 만들지 못했다.
등잔불을 켜놓고 나온 방 창문으로 불빛이 어른거렸다. 안쪽 어딘가에서 앨은 자고 있거나 반쯤 빈 밥그릇을 뒤적이고 있을 것이다. 내가 언제쯤 돌아올런가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으리.
나는 그자를 볼 수 없다. 그 때와 마찬가지로, 멀지 않은 날에도 그러할 것이다.
나는 심호흡하며 지평선 너머로 조금씩 솟아나는 아침 햇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때껏 내가 해 보기라도 했던 수많은 시도들이 머릿속에 떠올라서 나는 잠시 비틀거렸다. 그러한 나날 동안 내가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는 것 따위는 알 바 아니었다.
무거운 걸음을 질질 끌어 옮겼다. 나는 다시 방향을 틀어 포니빌로 향하는 흙길을 아무 말 없이 마주했다.
"흠?" 암브로시아가 안전모를 살짝 들어 흰 이마에 맺힌 진땀을 닦아낸 뒤 다시 끈을 단단히 조였다. 오후의 햇살이 쏟아졌다. "스트레이트 에지? 알지. 지금까지 같이 일하면서 본 바로는, 그만한 일꾼도 없어. 아무래도 자기 발굽 더럽혀 가면서 우리 쪽 일 하려는 유니콘이 그다지 많은 편은 아니니까. 아, 그렇지. 가끔씩 우리 장비도 맛탱이 가고 그러는데, 그 양반 뿔은 그러질 않으니 굉장히 쓸만하거든. 그러니 큐티마크로 드릴이 나타나도 그닥 이상한 일은 아니란 말씀이야. 됐나?"
"그게... 그 분 작업 솜씨나 작업 방식을 여쭈려던 건 아니고요." 마을 한쪽 귀퉁이 주택 공사 현장. 새 집은 아직 공사 중이었고, 나는 그 앞에서 암브로시아를 대면하고 서 있었다. 나는 말을 뭉갰다. 양쪽에서 드릴과 망치 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움찔하면서도 다리를 꼿꼿하게 펴고 말했다. "하루치 작업 마치고 나면 주로 어딜 가시나 궁금해서요."
"아이고 참, 괜찮은 거야?" 암브로시아가 녹색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쪽 눈 좀 보라고. 핏발이 엄청나게 섰어."
"전 괜찮아서." 나는 퉁명스레 대답했다. "왜 이렇게 됐느냐면..." 마른침을 삼키며 한쪽 발굽으로 갈기를 쓸어 펴며 말했다. "그 분... 옆집 살거든요. 밤만 되면 소리를 질러대는데, 잠을 잘 수가 있어야죠."
"소리를 질러? 스트레이트 에지가?" 암브로시아가 얼굴을 구겼다. "그러니까, 그 양반이 집에 가선 그닥 좋은 가장은 아니다, 뭐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거군?"
"혹시 놀라셨어요?"
"글쎄... 음..." 암브로시아가 어깨를 으쓱하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와이프가 바가지 긁어대는 통에 못 살겠다는 얘기야 한도 끝도 없이 늘어놓긴 하거든. 근데 그건 결혼한 남자들은 으레 하는 말이잖아. 우리 일이 다른 사람들 하는 것보다 빡센 건 사실이니까, 자기 짝꿍 뒷담화 늘어놓는 게 별로 문제 있다거나 하는 식으로 받아들이지는 않거든. 나야 뭐 그런 짓은 꿈도 안 꾸지만. 그 왜, 우리 남친님도 가끔씩 몰래 들어와서 얘기 슬쩍 훔쳐 듣거나 한단 말야. 그러고는 실실 웃으면서..."
"아뇨, 그런 건 됐고..." 나는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토하고, 나직하게 말했다. "그냥... 그 사람이 집에 가기 전에 으레 들르는 곳 같은 데가 있으면 그거나 얘기해 주세요. 저녁 때가 다 됐는데도 집에 안 들어오고 그러더라고요."
"그..." 암브로시아가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해 지고 나서 노가다꾼들이 모여드는 데라고는 한 군데밖에 없거든..."
나는 그 날 밤 선술집 코퍼 크라운Copper Crown을 찾았다. 전에는 단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었다. 술집 내부 공기를 마셔 보니, 왜 안 들어갔는지 대충 알 만했다. 뿌연 안개 같은 게 술집 곳곳에 가득 떠다니고 있었다. 어둑어둑한 실내 조명이 비추는 술집 안은 큼직한 잔으로 몇 번씩 퍼마신 술에 머리가 마비되어 딱히 지성인다워 보이지는 않는 어휘를 구사하며 기침을 토해내는 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레코드 플레이어에서 30년 전에나 유행한 포크송이 흐르는 가운데, 이따금씩 딱딱거리는 소리가 섞였다. 오래 전에 맛이 간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차라리 사포질을 할 때 나는 소리에 더 가깝게 들렸다. 하나같이 술에 절어 번들거리는 눈을 한 취객들이라, 그런 것은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 듯했다. 안쪽 자리로 갈수록 그런 경향이 강했다.
다른 취객들보다도 유독 더 시끄러운 소리로 떠들어대는 자들이 둘 있었다. 하나는 분홍 솜털을 한 유니콘 여자였는데, 그 갈기 색이 솜털 색보다도 더 진한 분홍색이었다. 다른 하나는... 내 불면을 초래한 여정의 목표물이었다.
"그렇다니까..." 스트레이트 에지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실실 웃으며 술을 홀짝이더니 수염이 삐죽삐죽한 턱을 긁으며 말했다. "에퀸 스테이트 빌딩Equine State Building*13을 지어 올릴 때 나도 거기 있었지. 작업자들 중에서도 초 일류들과 함께 좁아터진 비계와 발판을 누비며 이 뿔로 건물 기둥에 리벳을 박았어. 어스 포니들이야 내 앞에선 찍 소리도 못 하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다녔지. 그 불쌍한 종자들이 어떤 것들인지 자기도 알잖아. 마법도 못 쓰는 것들이라, 진흙 정도밖에는 쓸모가 없지."
"하하하하... 그렇겠네!" 유니콘 여자가 속눈썹을 건드리며 나긋하게 맞장구쳤다. "머리가 비었으면 똑똑한 자기 말이라도 잘 들어야지."
"존나게 맞는 말이야."
"자기, 그렇게 높은 데서 내려다보면 무슨 느낌이야?" 여자가 홍조를 띄우며 눈을 가늘게 떴다. "숨이 턱턱 막히겠지?"
"으흠......" 스트레이트 에지가 술을 목구멍으로 넘기고 번드르르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숨이 막힌다. 마침 나도 자기 숨 좀 막히게 할 만한 재주가 좀 있거든. 둘 다 뿔을 써야 하지."
"이히히히..." 여자가 갈기를 헝클어뜨리며 바 카운터에 기대어 말했다. "그럼 지금 해 볼래?"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싸늘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긴 구역질 나서 안 돼." 스트레이트 에지가 대답했다.
"어디가? 여기가 그렇다는 거야, 아니면 이 촌동네가 그렇다는 거야?"
"둘 다 똑같아. 그러니까 진짜로 분위기 좋은 데 가서 마저 얘기하는 건 어때, 자기?" 스트레이트 에지가 말했다. "분위기 잡아야 진짜 숨이 턱턱 막히게 해 줄 수 있는데."
나는 스트레이트 에지 바로 옆 자리에 가 앉으며 말했다. "소파에선 하면 안 될걸요. 듣자하니, 어텀 씨가 거기서 하루 온종일을 보낸다는데."
스트레이트 에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여자가 고개를 한쪽으로 길게 빼더니 한쪽 눈썹을 치키며 물었다. "잠깐, 뭐라고?"
"10월이 속하는 계절Autumn 얘기하는 거 아니에요." 나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대답했다. 피로에 지친 눈은 바 테이블에만 가 있었다. "사람 이름이죠. 여기 이 아저씨의 아내 되시는 분 말이에요."
여자가 얼굴을 찡그렸다. 이건 또 어디서 굴러먹다 온 뼈다귀 같은 놈인가 싶은 눈으로 나를 보던 여자가 스트레이트 에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건 또 무슨... 얘 뭐야?"
"참 나... 자기도 참..." 스트레이트 에지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설마, 어쩌다 여기 기어 들어온 덜떨어진 계집애 하나가 아무렇게나 내뱉는 말을 믿는 건 아니지?"
"안 믿지." 여자가 대답하더니, 표정을 확 일그러뜨리고 말했다. "그쪽이 날 '덜떨어진 계집애'로 보기 전에 집어치우고 나가는 게 나을 것 같을 뿐이야."
"어... 어어..."
"좀 비키지." 여자가 퉁명스레 말하며 의자에서 내려왔다. "그래도 그거 하난 맞아. 여긴 진짜 구역질나. 더 추잡해지기 전에 빨리 발 빼는 게 신상에 이롭겠어." 그녀는 갈기를 톡 쳐 넘기면서 느린 걸음으로 술집을 나갔다.
스트레이트 에지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자는 악의를 숨기지 않고 바 테이블을 벅벅 긁어대며 이쪽으로 고개를 돌려 도끼눈을 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남 훼방 놓고 다니면서 재미 좀 봤나 봐? 내가 당장 네년 뿔을 꺾어다가 눈깔에 처박지 말아야 할 그럴듯한 이유를 대는 게 신상에 좋을걸..."
"스트레이트 에지, 당신이 당신 자식들한테 자행하는 몹쓸 짓에 대해서 다 알고 있으니까." 목소리를 깔고 대답했다.
남자는 멍한 표정이었다. 뒷다리로 무엇인가 흘러 몸을 적시자, 남자가 놀라 펄쩍 뛰었다. 술잔을 기울인 채 그대로 무릎에 갖다대는 바람에 술이 흘렀다는 사실을 파악한 남자는 짜증을 감추지 않았다. 그자는 술잔을 바 카운터에 쿵 하고 내리찍으며 발굽으로 얼굴을 문질러대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그제야 깨닫고 물었다. "네가... 내 이름을 어떻게 아는데?"
"내가 방금 한 말 들었을 텐데?" 나는 고개를 돌려 무감정한 표정으로 사내를 쏘아보며 말했다. "그쪽이 스닙스랑 윈드송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왔다고."
그는 그대로 굳어 버린 듯 아무 말도 없었다. 두 눈에 양심의 흔적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말을 멈출 것도 아니었다. "스닙스가 질식하기 직전까지 목을 매달았지? 당신이 마음에 안 들어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증오, 두려움까지 전부, 그 앨 쓰레기통 삼아 처리한 것도 알고 있어. 툭하면 윈드송이 멍청하다느니 폭언을 일삼으며 제대로 먹지도 못하게 했고. 당신이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랑하기를 그만둔 불쌍한 여자의 좋은 남편인 양 행세하면서 당신의 추악한 면면들과 잔혹성, 악행을 숨겨 오고 있잖아. 애초에 사랑하기는 했는지도 의문이지만."
스트레이트 에지가 이쪽을 노려보고는 있었지만, 함부로 몸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레코드 판이 튀는 소리가 들렸다. 판 긁는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쩌렁쩌렁하게 울리기 시작하자, 바텐더가 재빠르게 판을 빼더니 이쪽으로 다가왔다.
"에지, 한 잔 더 줄까?"
스트레이트 에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잡았다. 바텐더가 술을 채워주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가볍게 몸짓해 돌려보내자, 바텐더는 조용히 업무로 복귀했다.
스트레이트 에지가 냉랭한 태도로 술을 들이키더니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지랄이지?"
지친 눈이 그자를 쏘아보았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 나는 24시간 동안 잠도 자지 못하고 돌아다녀야 했다. 지친 몸에 아직 이름 없는 자들의 땅에서 묻어온 녹슨 철의 냄새가 남아 있었다. 부디 저 자식도 이 냄새를 맡을 수 있기를 나는 바랐다.
"양심이 있으면,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나는 말했다. "지금 하는 짓거리, 전부 다 당장 그만둬. 결국 그쪽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짓이야. 지금까지 당신이 어떤 비애를 안고, 어떤 고통을 숨기고 살아왔는지 나는 몰라. 그래도 가장은 집안의 기둥이야. 당신의 능력과 힘, 일말의 도덕성까지 포기하는 순간 당신 가족들까지 끝장나는 거라고. 당신이 지키고 보호하기는커녕 쓰레기장에 처넣은 사람이 셋이나 돼. 애초에 포니빌로 이사해 들어온 것도 당신 아내, 어텀 때문 아니었어? 허구한 날 당신이 위협하고, 스트레스 해소 대상으로 썼던 스닙스도 마찬가지야. 스닙스에겐 등대가 되어 줄 아버지가 필요해. 당신이 짜증내고 화풀이하는 게 전부 스닙스한테 가서, 학교 애들한테까지 퍼지고 있어. 지금 멈추지 않으면 그 애는 괴물이 되고 말 거라고. 윈드송은 어때? 아직 어리고 순진하고, 무한한 잠재력을 갖고 있지. 아직 큐티마크를 얻진 못했지만 그 앤 딱 예술가 체질이야. 그런데 당신이 그 애의 가장 중요한 순간을, 가장 귀중한 시간을 박살내고 있어."
나는 자리에서 돌아앉아 스트레이트 에지를 마주했다.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술잔 바닥에 당신 걱정거리 숨기는 걸로 문제가 해결될까? 집에 들어가면 또 소리지르고 가정 불화나 일으키겠지. 당신이 이 동네 싫어하는 건 나도 알아. 당신이 뭣 때문에 가슴에 증오를 품고 사는지는 몰라도, 한 발짝만 뒤로 물러나서 찬찬히 살펴봐. 이 동네에서 당신을 증오하는 사람이 누가 있나. 이 동네 살만한 동네야. 다른 사람 돕는 일이라면 뭐라도 하는 사람들, 사랑, 희망 같은 게 가득하다고. 대체 왜..."
몸 속에서 무엇인가 들끓어 숨이 막혔다. 나는 이를 악물고 조용히 말했다.
"뭐가 그리 힘들어서, 뭐가 그리 어려워서 다른 사람이 도와 주겠다고 내민 발굽을 붙잡고 갱생할 생각을 안 하는 건데? 그걸 받아들이면, 지금까지 잘못된 길을 걸어온 걸 인정하게 될까 봐 그러는 거야? 당신 가족, 당신 자신을 위해서 새로 시작하는 건데, 너무 늦었다는 얘기도 아니잖아?"
스트레이트 에지가 이쪽을 쳐다보았다. 콧김을 훅 뿜은 사내가 술을 한 모금 들이켜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텁텁한 공기 속으로 나직한 대답을 내밀었다. "나도, 사랑을 믿었던 시절이 있어." 그는 술잔 끄트머리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느릿하게 잔을 흔들었다. 두 눈이 색 바랜 대리석 한 쌍처럼 보였다. "사람이 바뀔 수 있다고 믿었던 적도 있지. 희망을 믿어 본 적도 있지만, 전부 다 말만 번지르르한 쓰레기일 뿐이었어. 나도 젊었을 땐 그쪽처럼 밝고 명랑한 사람이었다고. 그 지랄 같은 걸 믿었으니 결혼 같은 짓을 했지. 어텀과 결혼한 게 그것 때문이야. 양가 가족이 모여 웃으며 식을 치렀어. 서로 축하하고, 케이크에, 풍선에... 그렇게 우리는 신혼여행을 떠났어. 참... 좋은 시절이었지. 근데 다녀오고 나서 보니, 내가 모르던 게 하나 있었던 거야."
호기심이 들어 물었다. "뭘 몰랐는데? 대체 뭐가 문제였길래?"
스트레이트 에지는 한 모금을 더 마시더니, 한숨을 푹 쉬고는 이를 갈며 죽일 듯한 기세로 술잔을 내 얼굴로 내던졌다.
술잔이 뿔에 부딪쳤다. 죽은 사람에게 똑같은 짓을 한다면 아마 벌떡 일어났을 것이다. 나는 죽은 자가 아니므로 맥주 거품과 술잔 파편들을 뒤집어쓴 채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머리가 마룻바닥에 부딪치며 생긴 충격에 귀가 울렸다. 시야 구석에 흐릿하게 피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스트레이트 에지의 발굽이 내 옆에 내리꽂혔다. 발굽을 따라 올라가자 이를 바득바득 갈던 스트레이트 에지의 얼굴이 내 몸에 침을 뱉었다.
"계집년들이란 죄다 기생충 같은 년이라는 걸 그 때 알았지!" 스트레이트 에지가 고함치는 소리에 근처 손님들이 깜짝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급성 마력장단절증후군은 유전병이었어! 연애 시작하기도 전부터 자기가 그 병이 있는 걸 그 더러운 창년도 잘 알고 있었지! 결혼하고 딱 1년... 이 씨부랄 1년이 지나자마자 기침을 하더구만! 이 씨팔! 네년이 소리 높여 찬미한 그 '사랑'이란 것 때문에 나는 이 썅년이 뒈질 때까지 치료비에 엮여 살 수밖에 없게 됐다 이거야! 내가 애새끼들 싫어하는 거?! 빌어처먹을 버르장머리 없는 애새끼들 갈아 마시고 싶어하는 건 사실이야! 그 썅년이 싸지른 귀태鬼胎 같은 것들 증오하는 게 당연하지! 아무리 귀엽게 생겨 처먹었어도, 아무리 똑바로 살라고 가르칠 때마다 그 멍청한 대가리로 징징대도 족쇄의 본질은 변하지 않아. 족쇄일 뿐이라고! 변화 얘기를 하고 싶나?! 희망 얘기를 운운할 셈인가?! 그 같잖은 얘기들 때문에 내 인생이 이따위로 돌아가고 있는데, 적어도 이 쓰레기같은 건 치워 주고 나서 뭘 좀 바꿔 보자고 아가리를 터는 게 맞는 거 아니냐고, 이 년아!"
"에지, 그쯤 해 둬!" 바텐더가 으르렁대는 목소리로 경고했다. 스트레이트 에지가 거칠고 흥분한 목소리로 일장연설을 늘어놓는 그 30초 동안 바텐더가 무슨 짓을 했는지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쇠몽둥이를 연상케 하는 무언가를 꽉 쥔 발굽을 쥐고 이리저리 꺾어 보이며 바텐더가 말했다. "자네 부인이 어떤 종류의 인간쓰레기든지 난 좆도 신경 안 써. 내 손님들 쫓아내지나 마. 내 가게에선 안 돼."
그때까지도 고통이 몸을 타고 흐르고 있어서, 이마가 파르르 떨렸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스트레이트 에지를 올려다보았다.
스트레이트 에지가 콧김을 훅 뿜어내더니 목 관절을 좌우로 꺾어 뚜둑 소리를 냈다. 술집 안에 있던 사람들이 숨죽여 지켜보는 가운데, 그자는 옆 의자에 놓아둔 가방을 들어 차분히 들쳐메었다. 그리고, 나를 가리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년이 무슨 생각으로 이딴 짓거리를 벌이는 건진 모르겠는데, 메인해튼 사회복지과에 득시글거리는 쓸데없이 동정심만 많은 년이면 그냥 조용히 꺼지는 게 좋을 거다. 다만 그년이 널 보낸 거라면... 자기 발굽 더럽히지 않고 겁쟁이마냥 날 엿먹이겠다는 생각에서 이딴 일을 벌인 거면..." 스트레이트 에지가 출입문으로 향하다 뒤를 흘끗 돌아보고 말했다. "네년들 대가리를 뽑아내서 네년이 뒤집어쓴 재킷인지, 넝마 조각인지에 둘둘 말아 내버리고 말 테다." 스트레이트 에지가 손님 둘을 지나쳐 걸어가더니 문을 거세게 걷어차 열었다. 경첩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 밖에서 스며든 별빛이 술집 안 퀴퀴한 공기를 잠시 갈라놓다가, 문이 닫힘과 동시에 다시 사라졌다.
나는 몸을 일으켜 발굽으로 뺨을 천천히 쓸었다. 뜨뜻한 피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발굽에 피얼룩이 남았다.
"저 병신 새끼, 돈도 안 내고 그냥 갔네." 바텐더가 뒤에서 툴툴댔다. 그러더니 한숨지으며 중얼거렸다. "안 좋은 과거는 전부 메어애미에 내려두고 온 줄 알았더니..." 바텐더가 몸을 기울어 나를 내려다보고 물었다. "거 이보쇼. 아주 흠씬 두들겨 맞았구만. 어디 약이라도 발라 드릴까?"
내 시선은 문으로 갔다가, 그 너머에 드리운 차가운 10월의 밤의 장막으로 향해 있었다.
"이봐요?"
나는 숨을 깊이, 아주 깊이 들이마셨다.
"아가씨, 괜찮은 거요?"
스트레이트 에지가 포니빌 중앙 거리로 향했다. 달빛을 받은 몸에서 드리운 그림자가 흙과 풀잎 위에서 힘없이 흐느적거렸다. 잔뜩 취한 그는 좌우로 비틀거리며 혼자서 궁시렁거리며 툴툴댔다. 눈꺼풀이 한 번 닫혔다 열릴 때마다 다시 밀어 올리기 어려워지는 듯했다.
그자가 향한 곳은 상업지구였는데, 하나같이 전부 닫혀 있었다. 상점이란 상점마다 그날의 영업을 종료한 지 오래였고, 조명도 전부 꺼져 있었다. 텅 빈 상점가를 찬바람이 한 번 쓸고 가자 흙먼지와 잎사귀가 흔들리며 바스락거렸다.
"으아으음... 땅 파먹는 새끼들이란 이래서 안 된다니까......"
훌륭한 일장연설을 마친 사내가 가방을 뒤적거려 철제 술병을 꺼내들었다. 뿔을 밝혀 뚜껑을 연 얼굴에 희미한 웃음기가 감돌았다. 그는 술병을 입에 대고 술을 쭉 들이켰다.
"으허어어... 쥑이네... 겔겔... '암브로시아'*14라. 하... 이름에 걸맞게 맛있는 년일라나. 키키키키..."
그자는 술병을 가만히 흔들어 돌리다가 다시 입가로 가져갔다. 목구멍 너머로 넘어간 술은 한 모금도 없었다.
"허?" 상당히 당황한 눈치였다. 그 다음 순간에는 쥐고 있던 술병조차 어느새 없어져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본 눈에 미끄러져 떨어진 술병이 흙바닥에 처박혀 안에 담아둔 술을 사방에 뿌리는 꼴이 보였을 것이다. "아 나, 재수가 없으려니까..."
스트레이트 에지가 몸을 굽혀 술병을 주웠다.
그 다음 순간, 술병은 다시 그의 발굽을 떠났다.
그자는 이마를 잔뜩 찌푸렸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또 뭔데?!" 그렇게 말하는 입가에서 차가운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술병이 길을 따라 굴러가 근처 어둑어둑한 골목길로 사라졌다. 그는 살짝 몸을 떨다가, 오만상을 썼다. 술에 잔뜩 전 머리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딱히 바람이 분 것도 아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스트레이트 에지는 얼굴을 잔뜩 구기며 술병을 따라 골목길로 향했다.
좁은 골목길을 가득 메운 어둠이 사내의 몸을 삼켰다. 걸음이 삐끗해 쓰레기통 한두 개에 머리를 처넣었다가 빼낸 뒤, 작은 소리로 각종 욕설을 주워섬기며 걸어가는 사내의 발굽 밑으로 쥐새끼 하나가 찍찍대며 달려갔다. 그는 쌓아 놓은 땔감 더미 너머로 걸음을 옮기며 건물 사이로 난 거대한 틈새를 시선으로 핥았다. 그 끝에 도착한 곳은 희미한 달빛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여기 있구만. 제기랄... 길바닥에서 좆같은 건 다 묻혀 왔겠구만." 사내가 술병 쪽으로 다가가 몸을 굽혔다.
그 순간, 넓적하고 두툼한 각목 하나가 날아들어 그자의 뒷다리 발목 부분을 무자비하게 강타했다.
"아아아아악!" 그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거꾸러져 쓰러졌다. 스트레이트 에지의 주둥이가 콘크리트 바닥을 긁고 지나갔다. 그는 몸을 일으키려 사지를 마구 버둥거렸다.
녹색 마력에 휘감긴 각목이 바람을 가르고 날아들어 그자의 오른쪽 앞다리 관절 부분에 작렬하며 어마어마한 파열음을 일으켰다.
"아악!" 사내가 내지른 비명은 2층 높이 벽돌 담장에 가로막혀 주위로 퍼지지 못했다. 그는 굳은 몸으로 오른쪽 앞다리를 부여잡고 바닥을 구르며 씨근거렸다. "쓰으으으으으... 아아악... 학..."
그 한 번의 타격으로 각목은 중심부까지 쭉 갈라지고 말았고, 모서리 부분은 벌써 깨져 나가고 있었다. 각목이 어떻게 되든, 뿔을 밝혀 각목을 바닥에 질질 끌어 가져오며 어둠 속에서 걸어나와 그자의 상판 앞에 서는 데는 아무 문제 없었다. 눈가가 꿈틀거렸다. 뿔에서 튀기는 불빛으로 어둠이 꿈틀댔다.
그는 새끼를 낳는 짐승처럼 울부짖기만 했다. 나는 다만 그 순간이 인과응보, 천벌의 순간이기를 바랐다. 사내가 내 쪽을 노려보았는데, 번들거리는 눈알에 한 줄기 공포가 스쳐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당신 뭔데 나한테 이 지랄 하는 거야?!"
그 으르렁대는 목소리란. 녹슨 구속구로 저 주둥이를 단단히 봉하면 얼마나 잘 어울릴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게는 그것이 없었으므로, 몽둥이로 아가리를 한 대 후려쳐 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지축이 흔들리는 것 같은 굉음과 함께 사내의 몸이 뒤로 거꾸러졌다. 입 밖으로 흘러나온 피가 달빛에 번들거렸다. 이름 없는 자들의 땅에서 맡았던 녹 냄새 같기도 한 비린내가 번졌다. 벽돌 담으로 둘러싸인 그 곳에선 그자가 아무리 씩씩대고 우는 소리를 내도 아무도 듣지 못했다. 나는 그자의 머리맡에 서서 짖고 싶은 대로 짖도록 내버려 두었다.
"내가 누구냐고?"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알 게 뭐야. 말해 줘도 기억 못 할 텐데. 설마 기억하더라도 별 상관은 없지만. 내가 어쩌든 네놈이 한평생을 화풀이 대상, 무시와 조롱의 대상으로밖에 보지 않았던 세 사람을 계속 상처입힐 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윽... 너... 너... 돈 때문에 이러는 거야?!" 스트레이트 에지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더듬더듬 말했다. 짙고 깊은 밤의 장막 아래로 그자의 이마가 찌푸려지는 것이 보였다. 엄청난 고통과 움직이지 않는 몸을 안고서도, 이 작자는 오직 화를 내기 위해 사는 것만 같았다. "저 씨발 가방 챙겨서 꺼져, 이 미친 싸이코 새끼야!"
"돈 때문이 아니야, 이 자식아!" 나는 소리치며 부러진 방망이의 뾰족한 부분을 들어 방망이로 맞은 관절 부위에 바짝 들이댔다. 그자는 움찔하더니 아무 말도 못 하고 꾸물대기만 했다. "아무 일 없이 편안한 나날, 그 나날에서 느끼는 행복 때문이지! 네 자식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막 대하면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뿔로 괴롭힐 힘이 있는 한 너희 가족은 그런 게 있다는 것조차 모를 거야!"
"이 지랄이... 그 쓰레기 새끼들 때문이라고?!" 스트레이트 에지는 공포와 불신감이 뒤섞인 눈깔을 뒤집고 징징 울며 말했다. "그것들 때문이라면 그냥 데려가십쇼! 말씀만 하시면 뭐라도 다 하겠습니다요! 그, 그러니 제 몸은 더 건드리지 마십쇼!"
"헛소리 마." 나는 비웃었다. "아니, 넌 평생 가도 그 습관 못 고쳐." 온 몸이 떨려 왔다. 어디선가 나이트브링어가 웅웅 울어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꼭지가 돌아 버린 내게 성물의 울음을 해석할 이성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한테 아직 그럴 힘이 있을 때 내가 직접 고쳐 줄까 하거든......"
"뭐..." 사내의 얼굴이 갈피를 못 잡고 구겨졌다. "뭐, 뭐라굽쇼?!"
"내가 처음에 얘기했잖아?!" 나는 콧김을 뿜으며 대답했다. 뿔이 에메랄드 빛으로 하얗게 작열하고 있었다. 다 부서진 각목이 염동력을 타고 공중에 떠서, 관짝 정도 넓이밖에 안 되는 골목 위로 섬뜩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아무도 뭐가 달라졌는지 모를 거라고! 너 자신조차! 나는 포니빌을 떠도는 망령일 뿐이거든. 역사는 내 존재를 알지 못할 테고, 그 누구도 내가 여기 살았다는 걸 모를 거야. 네놈은 어떨까?! 네놈이 뒈지고 나면 누가 널 생각해 줄까?!"
"아뇨, 이러지 마십쇼..."
"누가 네놈을 그리워하기는 할까?!" 이 말은 차라리 비명에 가까웠다.
사내는 아직 멀쩡한 앞다리 하나를 들어 덜덜 떨며 얼굴을 가렸다.
나는 방망이를 높이, 더 높이 들어올렸다. 속에서 불길이 들끓었다.
이 새끼 뿔만 없애면 돼. 이것만 부러뜨리면 된다고. 그럼 두 번 다시 자기 자식들 괴롭히진 못하겠지.
에메랄드 빛 그림자 아래로 달달 떠는 그자의 모습이 보였다. 쓰레기와 식은땀, 오줌의 비린내가 났다.
뿔만 없애 버리면 돼... 그럼 다 끝나...
이를 악물었다. 눈앞이 온통 뿌옇게 보였다. 그자의 앞에서 이글거리는 마력 폭풍이 꿈틀거렸다. 수백만에 이르는 자들이 그 여자의 노래를 하염없이, 영원히 주워섬기고 있었다. 그것은 우울했지만 어느 한편으론 정의롭고 당연해 보였다...
뿔을 부숴. 없애 버려. 없애 버리라고...
벽장은 동물 모양 봉제인형으로 가득했다. 문댄서가 그 한가운데 쪼그리고 앉아 울고 있었다. 내가 스닙스를 끌어안았을 때, 꼬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복 베일처럼 쏟아지는 비 너머 층계참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문댄서는 온 몸이 상처투성이였다. 트와일라잇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사실을 말하라고 스닙스에게 빌고 또 빌었지만, 꼬마는 거부했다. 문댄서가 떠난 학교 공원은 외롭고, 막막한 곳이었다. 그 고통과 괴로움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스트레이트 에지도 마찬가지였다. 피가 뿜어져 나오는 아가리로 마지막 일격을 기다리는 이 자식도, 고통과 괴로움을 이해할 수 없는 자였다. 이 자리에 그것들을 이해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나는 이해할 수 있다.
무거워져 가는 숨에 속에서 들끓던 불길이 녹아들어 사그라졌다. 하얗게 달아오른 뿔이 식었다. 치켜든 몽둥이가 툭 떨어지며 바닥에 구르는 소리가 골목 안에서 튕겨지며 메아리졌다. 나는 자리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두 앞다리가 입을 막았으나, 치솟는 울음을 억누르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밀려나온 울음이 메스처럼 나를 난도질했고, 그 자리로 눈물이 흘러내려 그 순간의 두려움을 씻어내렸다. 나는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나는 골목 벽에 기대 경련하는 남자를 쳐다보며 몸을 웅크렸다. 숨이 가빠 왔다. 내 의지로 입힌 타박상과 자상이 그의 몸에 새겨져 있었다. 짙은 안개가 사내의 몸을 덮어서 상처는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자리에 쓰러져 울었다. 몸이 떨려 왔다. 어디서 낑낑대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저기..." 내 가쁜 숨소리에 울음기가 뒤섞여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다, 다리 괜찮으신 거 맞죠?"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몸만 덜덜 떨 뿐이었다. 섬뜩한 한기가 건물 사이 골목에 내려앉았다. 스트레이트 에지가 욱신대는 사지 사이로 선혈을 뱉어낼 때마다 흰 입김이 뒤섞여 나왔다.
마른침을 삼키고, 한쪽 발굽을 가만히 뻗으며 물었다. "아저씨... 아저씨, 괜찮으..."
"건드리지 마!" 스트레이트 에지가 고함치며 발굽을 쳐냈다. 희번덕거리는 흰자위가 달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아아아악! 저리 떨어져!"
움찔하며 몸을 빼낸 뒤, 인후에 엉기는 응어리를 삼켜 내려보내며 말했다. "선...생님을..." 얼굴이 부서지는 듯했다. "해...치려는 게 아...니에요..."
"허어어억... 공주님! 공주님 맙소사, 여긴 뭐야?! 뭐, 뭐가 어떻게 된 건데?"
"진정하세요. 선생님 털끝 하나 건드릴 생각 없으니까..." 나는 억지로 웃어 보려고 했지만, 울음만 더 밀려나왔다. "도와 줄 사람을 찾아볼게요. 그러니까..."
"으으으윽... 씨팔, 빨리 하라고! 니미럴 재수가 옴 붙으려니까!"
"병원으로 모셔다 드릴게요. 그러니까..." 나는 고개를 흔들며 뿔을 밝혀 에메랄드 빛 염동력을 끌어내 사내의 몸을 감쌌다. "가만히 계세요. 에지 씨. 다 괜찮을 거에요."
"네가... 네가 날 어떻게 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조심스럽게 사내의 몸을 들어올렸는데도 어마어마한 고통이 닥치는지, 스트레이트 에지는 말을 채 마치지 못했다.
밤하늘에 고인 별빛을 맞으며 나는 그를 들고 느린 걸음으로 걸었다. 끔찍할 정도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가는 길에 스트레이트 에지는 최소 네 번 이상 내 존재를 다시 잊었고, 잊을 때마다 보이던 심리적 공황 상태가 회를 거듭할수록 심각해졌다. 얻어터진 몸뚱이가 마침내 극심한 고통과 패닉을 더 견디지 못하게 된 후에야 그는 의식을 놓고 뻗어 버렸다. 나는 그제야 내 몸 밖으로 밀려나오는 가쁜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스트레이트 에지가 쏟아냈던 온갖 말보다도 내 숨소리가 혐오스러웠다.
다음 날 오후, 나는 포니빌 시립병원 외부 벤치에 앉아 있었다. 머리는 봉두난발이었고, 후드에서는 땀과 눈물 냄새가 풍겼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내 꼴을 보고 잠시 멈췄다 걸어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참으로 보기 드문 구경거리였을 것이다. 정확히는 알지 못하고 다만 짐작할 뿐이다. 거기 앉은 내내 두 앞다리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으니까.
잠은 자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 감히 정신줄을 놓고 잠들 수는 없었다. 죄의식을 안은 심장이 느릿하게 뛰며 기나긴 하루 내내 나를 고문했다. 가슴 속에 뒤엉켜 새빨갛게 달아오른 가책의 매듭은 저주가 불러온 한기로도 식힐 수 없었다.
정신이 견디지 못하고 파괴의 임계점에 도달하려는 그 순간, 병원 정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솜털에 말라붙어 굳은 눈물자국을 문질러 닦아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스트레이트 에지가 다리를 절며 걸어나왔다. 오른쪽 앞다리 쪽에 목발을 짚고 있었고, 뒷다리에는 붕대를 칭칭 감아 놓은 상태였다. 어찌어찌 체중을 감당할 만은 한 듯싶었다. 얻어맞은 얼굴 반쪽도 붕대를 감아 놓았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그는 당장 몸이 아픈 것보다도 꼭지가 돌아 버리는 게 먼저인 듯했다. 사내는 혼잣말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막막하다는 눈길로 화창한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어색한 걸음걸이로 발을 질질 끌며 걷기 시작했다.
그자는 멀쩡했다. 함께 기뻐하고 싶은 마음과 어딘가로 숨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일어난 건 생전 처음이었다. 나는 벤치에서 뛰어내렸다. 굳은 다리가 뻐근했다. 나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저기... 어... 에지 선생님..."
"아 나 진짜..." 그는 평소보다도 더 오랜 시간에 걸쳐 고개를 돌리고 눈을 부라리며 대답했다. "나한테 뭔 볼일이쇼?"
"그게... 저..." 후드 소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괜찮으신 거죠? 그러니까, 의사 선생님들이 앞으로 후유증이 남을 거라거나......"
"아악, 썅!" 그는 질렸다는 듯 구역질하는 시늉을 하며 몸을 기울였다. "저리 꺼져, 거지 같은 년아! 뭐 이딴 병신 같은 동네가 다 있어!"
"선생님, 말씀이라도 해 주시면..."
"의사가 뭐라 그러든, 난 안 좋아. 안 괜찮다고!" 사내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씨팔놈의 의사란 새끼들은 사람 돈이나 쪽쪽 빨아처먹을 생각밖에 없지. 애초에, 네 년 같은 기생충 새끼들이 무슨 상관인데?"
"그게..."
"닥치고 꺼져, 이 년아!" 스트레이트 에지가 툴툴댔다. "씨부랄 세상에 병신 새끼들만 가득해서 어딜 갈 때마다 별 꼴같잖은 잡것들을 안 볼래야 안 볼 수가 없어! 아아아아악!" 남자가 느린 걸음을 옮기며 우르릉댔다. 날숨이 한 번 나올 때마다 각종 욕지거리가 폭풍우처럼 쏟아져 나왔다. "코퍼 크라운 가서 술 석 잔은 넘게 처먹었던 것 같은데. 거기도 쓰레기 같기는 매한가지지..."
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웅크리고 앉았다. 오후가 저물었을 때쯤, 나는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터덜터덜 북쪽으로 향했다.
오두막 문이 힘없이 열렸다. 앨이 곧장 달려나와 야옹거리며 내 앞다리에 매달려 애교를 부렸다.
나는 지친 눈길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밥그릇이 비어 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고양이 사료 봉투를 들어다가 밥그릇에 얼마를 부어 주었다. 끌어다 쓸 수 있는 마력의 한계가 가까워서, 뭐가 됐든 대충 하고 치우고 싶었다. 사료 포대가 마룻바닥에 떨어져 뒹굴었다. 나도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는 침대에 앉아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앨이 꼬리를 흔들었다. 이쪽을 보다가, 밥그릇에 부어 준 먹이를 보더니 콧수염을 꿈틀했다. 고양이의 따뜻한 발바닥이 땀에 젖은 몸을 타고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앨이 내 입가에 얼굴을 들이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몇 차례 눈만 깜박이고 있다가, 앨을 보고 힘없이 한쪽 발굽을 들어주었다.
고양이가 발굽에 달라붙어 몸을 비벼대며 가르릉거렸다.
침을 삼키고 조용히 두 다리를 뻗어 고양이를 끌어안았다. 따스한 온기가 품에 안겼다. 나는 그대로 울었다. 두 눈을 꼭 감은 채, 말이 눈물에 잠기기 전에 입을 열어 토해냈다.
"대체 왜 안 되는 거에요, 앨러배스터?" 나는 울먹였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처절하게, 멍청하게 일이 잘못되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하는 건데요? 해야 할 일인데 왜 못 하는 건데요? 일 년 동안이나 유령처럼 살았지만, 이제... 이제 도저히 받아들이질 못하겠어요. 나도... 나도 많은 걸 할 수 있는데. 세상을 바꿔놓을 수 있는데. 누가 변화를 만들어냈는지 사람들이 알 필요는 없죠. 그 누, 누구도 내가 세상을 좀 더 살 만하게 바꾸느라 무슨 짓을 하는지 알 필요는 없는 건데......"
앨이 몸을 웅크리고 엎드려, 내 떨리는 몸에 맞게 그 자그마한 털뭉치 같은 몸을 움직여 자세를 잡았다. 고양이가 오렌지색 얼굴을 내밀고 야옹, 하고 울었다.
울음이 입 밖으로 밀려나왔다. 나는 몸을 떨며 말했다. "그래도 전 알아요." 앨을 가까이 안고 얼굴을 비벼주었다. 눈물이 계속 흘러나왔다. "저는, 알아요." 울음이 한결 가라앉았다. 가르릉거리는 고양이의 옆구리에 얼굴을 대고, 나는 조용히 말했다. "공주님, 부디 긍휼히 여기소서. 그래도 앨러배스터 당신이 소천해서 다행이에요. 제가 그렇게 되는 꼴은 안 봐도 됐으니..." 나는 고개를 들어 헐떡이며 나이트브링어를 숨겨 둔 자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그 여자처럼 되는 꼴은 안 보셔도 되니 다행이죠..."
앨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내게 달라붙었다. 더 흐르지 않는 눈물이 스스로 말랐다. 한 시간쯤 지난 뒤, 앨이 식사를 마쳤다. 그리고 저녁이 왔고, 나는 불을 끄고 차가운 침대 속으로 파고들어 몸을 웅크렸다. 나는 까무룩 잠들었다.
화창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리라를 퉁겨보았다. 10월의 산들바람을 맞으며 음계 하나하나를 일으켜 보았다. 그것은 내가 지난 밤에 꾸었을지 모르는 고독한 꿈을 무의식에서 건져내기 위한 절박한 시도였다. 치어릴리의 활기찬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힐 때까지도 나는 그 무엇 하나 건져내지 못했다.
"블루 노이즈 교수님께서 훌륭한 제자를 정말 보내주신 것도 기쁘지만, 심한 독감을 앓으신다고 들었는데 쾌차하셔서 더 기쁘네요!" 떠오르는 해보다도 밝은 미소로 치어릴리가 말했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학교 운동장에서 학생들이 저희끼리 뛰어놀거나 어떤 놀이를 즐기며 수업 시작 전 자유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와 주신 걸 알면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할지 상상도 못 하실 거에요. 우리나라의 음악 이야기를 해 주실 선생님을 모시기로 했다는 걸 얘기해 준 다음부터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그냥 여쭤 보는 건데..." 나는 피로에 절어 중얼거리듯 말했다. "어제까진 주로 어떤 공부를 했나요?"
"아, 기본적인 수학이랑 기하, 또..." 치어릴리가 말을 멈췄다. 에메랄드 빛 눈이 몇 차례 깜박였다. "이상하다..." 그녀는 턱을 문지르더니 눈을 가늘게 하고 말했다. "지난 주에 도형 공부를 시켰었나? 왠지는 몰라도 기억이 흐릿한데..."
나는 심호흡하고 말했다. "음..." 피로에 찌든 미소를 지으며 리라로 곡 하나를 퉁겨 보았다. "뭘 가르치셨든, 아이들이 행복해했을 건 분명하네요. 아이들에게 행복이란 중요한 문제고요."
"글쎄, 행복한 것도 중요한 문제긴 하네요. 그래도 배움, 에헤헤헤, 이걸 잊으면 안 되겠죠!"
"글쎄... 우리도 살면서 많은 걸 잊을 수 있으니까요." 나는 말했다. 헛기침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아이들이 보는 선생님은 단순한, 지식의 전달자 그 이상일 거라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아이들이 마음껏 즐거워할 수 있게 해 주시니까요. 기쁨과 즐거움이란 흐려질 수도 사라질 수도 없는 것이죠. 마음에 녹아들어 하나가 되는 것이니까요."
치어릴리가 루비빛 뺨에 홍조를 띄우더니 씩 웃었다. 그게 가능하다면 말이지만. "하트스트링스 선생님 생각이 마음에 드네요. 아니... 히히... '느끼는' 방식이라고 해야 할까요?" 치어릴리가 걱정스럽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나저나, 건강이 다 회복되신 건 맞으시죠?"
"네. 전 괜찮아요."
"아직 몸이 좀 안 좋으시다면, 블루 노이즈 교수님께서도 특강 일자를 좀 뒤로 미뤄 주실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예컨대, 저희가 캔틀롯으로 현장학습 다녀온 이후라거나..."
"괜찮다니까요." 나는 심기를 건드리지 말라는 뜻을 언뜻 내비치며 말했다. 헛기침하고, 가능한 나긋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 평생... 제 평생 동안 지금만큼 기운이 난 적도 없었으니까."
치어릴리는 그 말을 듣더니 순진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음, 그러시다면 좋아요. 그렇다면 이런저런 것들..." 그녀가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눈에 활기가 가득 찼다. "빅 맥! 왔구나!"
"그으으으려."
"오, 겨울에 쓸 땔감도 더 가져왔나 보네!" 치어릴리가 내 옆에 있던 소풍 테이블에서 쏜살같이 달려가며 말했다. "자 자, 나도 좀 도와 줄게!" 그녀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보고 눈을 찡긋해 보였다. "하트스트링스 쌤, 잠깐만 실례할게요. 오래 걸리진 않을 거에요."
"그냥... 어... 너무 멀리만 가지 마세요." 나는 말했다.
"하하하!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흠흠..." 치어릴리가 학교 건물 옆, 땔감 상자 근처에 서 있던 덩치가 크고 솜털이 붉은 사내 쪽으로 다가갔다. "자, 그럼 조심해서 옮기자! 너야 덩치도 크고 힘도 세지만, 그렇다고 가시가 널 피해가는 건 아니거든!" 빅 맥이 피식 웃더니 기꺼이 치어릴리의 도움을 받아들였다.
나는 멀리서 보고만 있었다. 그때까지도 리라를 퉁기고 있기는 했지만, 내가 뭘 연주하고 있는지는 나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며칠 동안 못 자다가 몰아 잤더니, 아침 내내 흐릿한 꿈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그 때, 어디선가 익숙한 거친 목소리가 들려와서 잠이 번쩍 깼다.
"야 스네일스, 내가 몇 번이나 더 말해야 알아먹을래?" 스닙스가 툴툴거리며 소풍 테이블 쪽으로 걸어왔다. "지금은 뭘 하고 놀 기분이 아니라니까!"
"에에에에에에이, 왜 이래애애애애!" 스네일스가 잔뜩 부루퉁한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노는 거 싫어하는 것도 아니면서!"
"피곤해서 그래." 스닙스가 투덜댔다. "그리고 말이다, 퀴즈 성적 올리려면 공부 더 해야 한다고!"
스네일스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일그러졌다. "어어어... 언제부터 그렇게 퀴즈에 관심이 생긴 거야?"
"알아서 뭐하게?!" 스닙스가 쏘아붙였다. "이제 시간 낭비 하는 것도 지쳤을 수 있고!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인생 살기 싫어졌을 수도 있잖아!"
스네일스가 이상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스닙스, 넌 쓸데없는 사람이 아냐." 꼬마가 말했다. "나한텐 네가 최고야."
스닙스가 눈을 감자 왼쪽 눈꺼풀에 든 희미한 피멍이 언뜻 비쳤다. 꼬마가 한숨짓더니 툴툴대며 말했다. "노는 거야 나중에라도 놀 수 있잖냐, 내 말 맞지? 지금은 일단... 어디 가서 나비나 잡고 있어. 아니면 나 없을 때 혼자 노는 거 아무거나 하나 하고 있든가."
"나비?" 스네일스가 몸을 꼿꼿이 펴고 멍하게 눈을 깜박이다가, 갑자기 헉 소리를 내더니 펄쩍 뛰며 외쳤다. "꽃 못 건드리게 해야 해!" 그리고는 누런 잔상을 남기며 운동장 곳곳을 쏘다니기 시작했다.
"죽겠구만..." 스닙스가 뒤뚱뒤뚱 걷다가 나와 부딪쳤다. "어, 음악 소리!" 스닙스가 고개를 들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니면 내 리라일 수도 있겠다. "아, 어... 치어릴리 쌤이 노래를 부르던 그 음악 선생님이신가 보네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몸이 안 좋으시다던가 해서 못 오시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요?"
숨을 들이마시고 나서, 지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좀 나아졌거든."
"아." 스닙스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발 밑에 깔린 풀잎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다행이네요."
"꼬마들로 가득한 교실에서 가르쳐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나는 다시 아무 곡이나 되는 대로 퉁기며 말했다. "내 인생의 기쁨이란 음악을 나누는 거거든. 세상 그 누구라도... 행복해질 자격이 있는 것 같으니까."
"하. 그러신가요." 스닙스가 나직하게 말하며 양쪽 발을 번갈아 움직여 땅을 밟았다. "그러시다면, 장소를 잘못 고르셨어요."
"그래?"
"그렇죠. 학교야 뭐... 지루하기 짝이 없잖아요." 스닙스가 말했다. "뭐 공연 무대라거나, 동네 경연, 비슷한 거라면 또 모를까..."
"학교가 마음에 안 드니?" 나는 물었다.
"그..." 스닙스가 이마를 찌푸리더니 대답했다. "아뇨,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그러니까, 학교가 재미없는 건 맞거든요. 그래도 다른 애들 볼 수도 있고, 웃긴 얘기도 할 수도 있으니까." 꼬마가 킥킥대며 말했다. "평소에는 답도 없는 머저리긴 하지만, 스네일스 녀석이랑 놀러 다니는 것도 좋고."
"좀 마음이 편해지지 않아?" 나는 말했다.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하지만 항상 부드럽고 나긋한, 그런 노래 같지 않니?"
스닙스가 입술을 씹었다. 훌쩍이는 소리와 함께 꼬마가 고개를 돌려 다른 쪽으로 시선을 향하고 말했다. "마음이 편해진다, 좋죠."
리라를 내려다보다가, 스닙스를 보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음악 들어 본 게 언제니?"
"그게..." 스닙스는 내 쪽으로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작은 어깨가 흔들렸다. "옛날엔 엄마가 노래를 불러주셨어요. 지금은... 지금은 그만두셨지만."
"그만두셨어?"
"네 뭐..." 스닙스가 한숨지었다. "사리에 안 맞으니까."
"사리에 맞지 않는다?"
꼬마는 아무 말도 없었다.
"적어도 기억하고 있기는 하지?" 나는 물었다. "머릿속으로 노래를 부르다 보면 좀 마음이 진정되지 않니?"
스닙스가 이쪽으로 시선을 돌려 나를 마주보았다. 두 눈이 축축했다.
"잘 들으렴..." 부드럽게 웃으며 몸을 가까이하고 말했다. "어디든지 행복한 사람이 남아 있기만 하다면 노래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일은 영영 없을 거야. 우리 하나하나 모두, 행복하게 살 자격이 있으니까."
스닙스의 표정이 천천히 환하게 피어났다. 꼬마가 꼬리를 흔들며 말했다. "정말 오늘 연주 들려 주시는 거 맞죠?"
"그럼."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무리 적어도... 그 정도는 해 줘야 하지 않겠니."
"하하..." 스닙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려 학교 건물을 바라보았다. 치어릴리가 빅 맥과 함께 땔감을 옮기고 있었다. "끝내주겠는데요."
"야, 임마! 이리 와!"
스닙스가 흠칫 놀랐다. 꼬마가 이를 악물고 있는 것이 여기서도 보였다. 아이는 몸을 떨며 고개를 돌리더니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지금 갈게요!"
스닙스가 죽을 힘을 다해 달려 운동장을 건너고, 풀 덮인 작은 둔덕을 올라 흙길 위에 선 누군가의 그림자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숨이 멈추며 연주가 멎었다.
"아 나,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새끼. 귀에 좆 박았냐?" 스트레이트 에지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는 길가 한쪽에 목발을 짚고 서 있었다. "이리 와서 부축해야 할 거 아냐, 이 등신아!"
스닙스는 자리에 얼어붙어 움직이지 못했다. 스닙스가 왜 저러는지 이해를 못 하고 있던 차에, 싸늘한 한기가 스쳐 지나가기라도 한 듯 꼬마의 몸이 덜덜 떨렸다. "어어어어어... 어? 아버지? 아버지가 왜...?"
"뭘 뭉개고 앉았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분명 뭔가 하고 있었는데... 제가 뭘 어쩌고 있었죠?"
"애비가 불러서 온 거 아냐! 알아먹어?"
"어으음..." 스닙스가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했다. "네, 아버지."
"네, 아버지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집어치워, 이 새끼야." 스트레이트 에지가 툴툴대며 붕대를 칭칭 감은 목을 까딱했다. "아가리 닥치고 따라오기나 해. 집에 가야 하니까."
스닙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구겨진 표정이었다. "어어... 지, 집이요?"
"그래 임마. 네가 들은 게 맞어. 집에 간다."
"근데... 근데..." 스닙스가 고개를 돌려 등 뒤로 펼쳐진 운동장과, 밝은 붉은색으로 칠한 학교 건물을 돌아보았다. "오늘 수업 있는 날인데요. 진짜 집에 가야 돼요?"
스트레이트 에지가 시뻘겋게 달아오른 석탄처럼 이글거리는 눈으로 스닙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남들 보는 앞에서 징징대면 애비가 뭐라고 대답해 줘야 되겠냐?!" 에지가 뿔을 밝히더니 거칠고 사납게 스닙스의 앞다리를 낚아채 자기 코앞으로 끌고 와서 소리쳤다. "어젯밤에 집에 오다가 어떤 씹새끼한테 두들겨 맞았다! 의사 새끼들한테 돈도 다 뜯겨서 빈털터리 신세인데, 현장 감독 그 새끼가 보더니 다리 다 낫기 전까진 일 못 시키겠다고 하더라! 그러니 네가 집에 처박혀서 존경하는 아버지 수발을 들어 줘야 한다는 말이다, 이 자식아!"
"그래도... 그래도..."
"자꾸 징징대면서 기어오를래?! 네놈이 싸지른 똥 치워 준 것도 모자라서 뼈빠지게 일해 먹여 살려 놨더니 뭐가 어째? 넌 채무자야, 이 새끼야. 학교는 신경 꺼. 니네 애미가 적당한 책 몇 권 갖고 있을 테니까 그걸로 공부하면 될 거 아냐. 하루 종일 집구석에 처박혀서 책이나 들여다보며 시간 낭비하고 앉은 걸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데 그 정도는 있겠지."
"알았어요..." 스닙스가 고개를 푹 떨어뜨리며 웅얼거렸다.
"말을 해야 알아들으니..." 스트레이트 에지가 절뚝거리며 마을 쪽으로 향했다. 오른쪽 앞다리에 짚은 목발이 어긋날 때마다 몸이 움찔거렸다. "쓸데없이 여기서 시간 버리지 말자고. 알아듣겠냐?! 이것만 해도 충분히 짜증나는데, 네놈이 뭘 좀 이해할 거란 생각도 안 들고..."
나는 그 둘이 시내로 향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고개를 돌려 반대쪽을 보자 치어릴리가 내 존재를 완벽히 잊은 채 빅 맥과 더불어 장작 정리를 마쳐 가고 있었다. 뭐라도 말할 수 있었을 터이다. 스트레이트 에지가 스닙스를 데리고 갔다고 다 얘기할 수도 있었다. 그것 말고도, 그 이상으로 담대하고 극적인 짓을 얼마든지 저지를 수 있었다.
나는 그것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가기로 했다. 차분히 숨을 들이마시고, 리라를 눈 앞에 띄운 채 크고 끊김 없는 소리로 부드러움의 극치라 할 만한 곡을 퉁겨 10월의 바람에 실어 보냈다.
스트레이트 에지와 스닙스는 벌써 흙길을 상당히 많이 내려간 상태였다. 이제 스닙스의 큐티마크 모양도 흐릿해지고 희미해졌다. 스트레이트 에지가 끊임없이 뱉어대는 욕설들도 잘 들리지 않게 되었다.
나는 꾸준하고 참을성 있게 남은 곡을 계속 연주해 나갔다. 솟아난 음이 솟구치고 거꾸러지며 포개져갔다. 나는 건조한 눈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저주가 몰고 온 한기로 허파가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불 밝힌 작은 초에나 빗대야 할 그 아름다움이, 스닙스의 몸을 멈춰세웠다. 꼬마는 길을 걷다 말고 멈춰, 멀리서 들려오는 '페눔브라의 메아리', 그 선율에 귀를 기울였다. 꿈틀거리기도 하고 떨리기도 하던 몸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스닙스는 자리에 가만히 멈춰 섰다.
스트레이트 에지도 당연히 눈치챘다. 자박자박 걷는 스닙스의 발걸음 소리가 멎어서였을 수도 있고, 끊임없이 뱉어내는 욕지거리가 꼬마의 몸에 부딪쳐 되돌아오지 않고 그대로 멀어져 가서 알아챘을 수도 있었다. 고개를 돌려 본 자리에 아무도 없자, 스트레이트 에지가 얼굴을 구기며 뒤돌아보았다.
"야 이 새끼야. 애비 말 뭘로 들었어?! 애비가 집에 간다고 했으면 그걸로 끝이지 뭘 뭉개고 있어!"
스닙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가을 바람이 앨러배스터 최후의 걸작을 싣고 불어왔다. 등 뒤로 반 친구들이 깔깔대며 뛰어노는 소리도 들렸을 것이다. 나는 떨리는 가슴을 안고 지켜보기만 했다.
일이 벌어졌다. "안 가요." 스닙스가 그렇게 말했다.
스트레이트 에지가 몸을 돌렸다. 악의라고밖에 할 수 없는 감정밖에 실리지 않은 눈이 꼬마를 노려보았다. "방금... 뭐라고... 씨부렸냐... 이 새끼야...?"
첫 번째가 두 번째로 이어졌다. "안 간다고요."
스트레이트 에지가 길바닥에 목발을 내팽개치더니 스닙스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낮은 소리로 위협했다. 내가 내쉰 숨이 경악의 숨소리로 전환되었다. "누가 함부로 애비 꼭지 돌게 하라고 가르쳤냐, 이 새끼야..."
"으으... 가르친 게 있기나 해요!" 스닙스가 갑자기 대들었다. 다시 몸이 덜덜 떨리는 것이 보이기는 했으나, 그것은 두려움이 아닌 정당한 분노로 떨리는 것이었다. "맨날 소리지르고 욕하고, 집어던지기나 하고! 그러면서 엄마 얘기 꺼내서 사람 쓰레기로 만들었잖아!"
"당장 그 아가리 닥치지 못해!" 스트레이트 에지가 발굽을 치켜들었다. "너 이 새끼, 어디서 애비보고 그따위로—"
"사실이잖아!" 스닙스가 소리쳤다. 방울방울 맺힌 눈물이 뺨을 타고 떨어졌다. 꼬마가 악을 쓰며 외쳤다. "당신이 나, 엄마, 윈드송 누구 하나 좋아해 본 적 없다는 건 나도 안다고! 별다른 이유도 없으면서 사람 쓰레기 취급하는 말종이란 것도! 그딴 집에는 안 갈 거야! 두 번 다시 안 가! 사람은... 사람은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고!" 스닙스가 울며 소리쳤다. 운동장에 있던 꼬마들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결국 폭발하고 만 스닙스의 목소리가 메아리지며 운동장까지 밀려왔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누구라도... 해,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어! 내가 대들었다고 당신이 얼마나 화를 내든지 이제 내 알 바 아냐. 그래도 당신이 내가 누려야 할 행복을 더 앗아가게 두지는 않을 거야!"
"이 썅놈 새끼, 한 번만 더 그 아가리 놀렸다간..."
"저리 꺼져!" 스닙스가 소리쳤다. 꼬마는 젖은 눈을 꼭 감은 채 같은 말을 큰 소리로 반복했다. "당신은 내 아버지가 아냐! 당신은 내 아버지가 아냐! 당신은 내 아버지가..."
"이 새끼가 보자보자 하니까!" 스트레이트 에지가 발굽을 휘둘러 스닙스의 뿔을 후려쳤다. 그리고는 뿔을 밝혀 스닙스의 목을 조르며 높이 들어올렸다. "너 이 새끼, 오늘 잘 걸렸다! 그 멍청한 년이 네놈을 싸질러 놨을 때 죽여 없앴어야 했는데!"
사내아이들은 숨조차 쉬지 못했고, 여자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스쿠틀루가 용감히 뭐라고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만 페눔브라의 메아리만 연주할 뿐이었다.
끔찍한 소리를 들은 치어릴리가 운동장 쪽으로 다가왔다. "세상에,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그 꼴을 본 치어릴리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공주님 맙소사! 스닙스! 에지 선생님, 이게 대체 무슨..."
"당신네가 상관할 바 아냐!" 스트레이트 에지가 소리쳤다. "남의 가정사에 참견하지 마!" 그리고는 스닙스를 더 높이 들어 버렸다.
"스닙스... 숨을 못 쉬잖아!" 치어릴리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다급하게 학교 건물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소리쳤다. "빅 맥! 빨리! 정말로 죽여 버릴 심산이야!"
"그래는 안 뒤야." 빅 맥이 이를 뿌득 갈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는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달려가 순식간에 운동장을 건넜다. 흙먼지가 매캐하게 일어났다. 빅 맥은 조금도 사정을 봐주지 않고 스트레이트 에지를 들이받아 그대로 흙바닥에 처박았다. 에지가 꽥 하고 비명을 질렀다.
"카아아아악!" 스트레이트 에지가 경멸하며 소리쳤다. "뭐야, 씨팔! 떨어져, 어딜 흙이나 파먹는 새끼가!" 빅 맥은 대답 대신 발굽으로 스트레이트 에지의 아가리를 세차게 한 번 짓밟아 주었다. "카아아악, 아아아아아악!"
"우~후!" 애플블룸이 펄쩍펄쩍 뛰며 앞다리를 휘둘렀다. "오빠야, 아주 작살을 내 놨네!" 스쿠틀루가 합세해서 환호성을 울렸다. 덜덜 떨던 스위티벨을 럼블이 부둥켜안으며 눈을 가려주었다. 럼블은 웃고 있었다.
"으윽... 어딜 소똥밭에 굴러다니는 새끼가 누굴 건드려!" 스트레이트 에지가 침을 질질 흘려대며 각종 욕설을 내뱉었다. 형형하게 번쩍거리는 눈이 살기로 번득였다. 기세는 그러했으나, 빅 맥이 자기를 땅바닥에 눌러 제압하는 와중 저항다운 저항은 해 보지도 못하고 몸만 꿈틀거리며 신음만 흘릴 뿐이었다. "니미 씨팔, 동네도 뭔 씨부랄 이딴 동네가 다 있어! 언제고 네놈들 다 심장을 뽑아내 죽여 버리겠어! 그러니 당장 일으켜...우웁!" 빅 맥이 스트레이트 에지의 뒤통수에 대고 가만히 체중을 싣자 에지의 아가리 속으로 흙이 밀려 들어갔다.
그러는 와중 치어릴리가 스닙스 곁으로 달려가 꼬마의 경련하는 몸을 살폈다. 자리에 앉은 치어릴리가 스닙스를 안아올렸다. "스닙스! 스닙스, 세상에, 어쩜, 어쩜 이런 일이! 숨 쉴 수 있겠니?"
스닙스가 몇 차례 캑캑대더니 급한 숨을 몇 번 들이마셨다. 치어릴리의 품에 안긴 몸이 둥글게 웅크려졌다. 꼬마가 힘겹게 몇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스닙스가 쥐어짜내는 소리로 덧붙였다. "저, 저 사람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해 주세요. 저, 저 사람 너무 무서워요. 지금까지 내내... 계속 저렇게..."
"아, 스닙스..." 치어릴리가 몸을 굽히고 흡사 자신의 아들을 대하듯 얼굴에 뺨을 비비며 말했다. "당연하지! 선생님이 약속할게. 두 번 다시 저 사람이 널 건드리지 못하게 할게!" 치어릴리는 울먹이며 더듬더듬 말했다. "조금만 더 일찍 알았어도. 공주님, 부디 불쌍히 여기소서!"
"엄마랑... 윈드송도..." 스닙스가 몸을 떨며 치어릴리의 품에 바싹 안겨들었다. 아이는 흐느끼고 있었다. "엄마도... 윈드송도..."
"그 누구도 두 번 다시 못 건드리게 하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치어릴리가 입을 떡 벌리고 보고 있던 학생들을 슥 훑어보더니, 눈물을 문질러 닦고 그 중 하나를 지목해 말했다. "스네일스. 이리 오렴."
호리호리한 꼬마가 몸을 떨며 다가섰다. 크게 뜨인 눈이 흐느끼는 스닙스에 고정되어 있었다. "네, 네, 네. 서, 선생님."
"스닙스는 괜찮아. 시내로 나가서 경찰 아저씨들 좀 모셔와 주렴. 해 줄 수 있겠니? 스닙스를 위해서라도."
"어어어... 네, 네!"
"좋아. 걱정할 것 없어. 빅 맥 정도면 저런 작자는 충분히 제압할 수 있거든. 어서 가렴, 스네일스! 뛰어!"
스네일스가 시내로 달려갔다. 그 뒤로 스트레이트 에지가 울부짖는 소리가 메아리졌다.
치어릴리가 스닙스를 안고 빙긋이 웃으며 속삭였다. "괜찮아. 다 괜찮아. 이제 괜찮으니까, 걱정할 것 없어..."
"아, 안 무서워요..." 스닙스가 두 발굽으로 젖은 눈을 가리며 딸꾹질했다. "이제 안 무서워요. 이제 무섭지 않아요..."
"그래... 다 괜찮아, 스닙스." 치어릴리가 울먹이며 말했다. "울어도 괜찮아. 다 풀어 버리렴... 괜찮으니까..."
'페눔브라의 메아리'가 잦아들었다. 더는 연주할 수 없었으므로 나는 더 연주하지 못했다. 스닙스를 안은 치어릴리처럼, 리라를 가슴에 안았다. 눈물로 일그러져 가는 얼굴을 아침 하늘로 향하고, 몇 마디 무거운 울음을 토해냈다. 나는 다만 눈을 꼭 감은 채 하늘을 보며 울었다. 나는 웃으면서 곡했다. 내가 누구에게 고마워하고 있는지 기억할 기력마저 쇠진할 때까지, 입 밖으로 두 마디 짧은 말이 반복해서 흘러나왔다.
기억하든지 말든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도착한 경찰이 빅 맥을 도와 발광하는 유니콘을 체포했다. 아이들이 치어릴리 곁으로 다가가 스닙스의 안정을 도왔다. 처음부터 거기 없었을지 모르는 유령은 어느샌가 학교를 떠나 사라졌다. 오직 음악만이 남아 있었을 뿐.
"스트레이트 에지 관련해서 새 소식이 몇 가지 있는데." 며칠 뒤, 슈가큐브코너의 한 테이블.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운을 뗐다.
"제 자식들을 두들겨 패고 다녔다는 그 쓰레기 같은 자식 말이야?" 레인보우 대쉬가 탄산음료를 목구멍으로 넘긴 뒤 얼굴을 구겼다. "목 매달아서 죽여 버렸대?"
"레인보우 대쉬, 현실적인 얘길 좀 해!"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얼굴을 찌푸렸다. "목을 매달다니, 내전 시대도 아니고!" 트와일라잇이 차분히 신문을 접어 놓고 레인보우 대쉬와 애플잭을 바라보며 말했다. "보석 불허래. 법정 출두해서 재판을 받을 때까지 구치소에서 계속 썩어야 할 거야. 마침 과거 행적을 파고든 기사도 있는데, 예전에 메인해튼에서 보험 사기로 공개 수배되었었다는 모양이야. 몇 년 동안이나 경찰청이 이 작자 찾느라 골머리를 앓았대. 포니빌을 찾아볼 생각은 안 했나 봐."
"그러니까, 애들을 샌드백마냥 두들겨 팬 새끼를 처벌하는 데도 공무원들 특유의 기나긴 행정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거잖아." 레인보우 대쉬가 투덜댔다. "염병할. 그게 정의냐?!"
"야, 절차가 어쩌고 하면서 툴툴대는 데는 별반 실익이 없을 것 같다." 애플잭이 말했다. "중요한 건 그 새끼가 현행범으로 잡혀 들어갔다는 기다. 아마 감방에서 뒈지기 전까지는 세상 밖으로 못 나올 끼고."
"그래, 그건 그런데 짜증이 난다 이거지." 레인보우 대쉬가 앞다리를 포개 팔짱을 끼며 이마를 찌푸렸다. "제 혈육을 두들겨 패는 새끼가 동네 이웃이랍시고 멀쩡히 살아 돌아다니는데 아무도 눈치 못 깠다는 게 좀 그렇지 않냐?! 그러니까, 이런 쓰레기 같은 일이 요즘 시대에도 생기는 게 말이 되냐고. 셀레스티아 공주님은 이런 건 해결 안 하시고 대체 어디서 뭐 하시는 거래?"
트와일라잇이 숨을 들이마시며 테이블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리다 대답했다. "셀레스티아 공주님도 세상의 모든 악을 근절하실 수 없으니, 우리 각자가 더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게 낫지 않을까?"
"그건 그런데..." 레인보우 대쉬가 테이블에 턱을 괴고 엎어지며 한숨지었다. "이런 일들이 까발려질 때마다 느끼는 건데, 우리가 우리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거든? 그러니까, 우리가 조화의 원소잖냐?"
"멀 그래 시무룩해갖고 그르나." 애플잭이 씩 웃으며 말했다. "너가 동네에서 젤루 용감하고 착한 놈인 건 하늘이 알구 땅이 안다. 뭐가 됐든 안 좋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싶으모, 잽싸게 가서 싹 조져놓구 영웅 노릇 함 되제!" 애플잭이 고개를 돌려 트와일라잇에게 눈을 찡긋했다. "딱히 야만 그래야 하는 것도 아이다. 여기 있는 아들이랑, 다른 사람 전부 다 그래야 할 끼다."
"완벽한 세상을 만드는 완벽한 방법 같은 건 없지."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말했다. "조화로운 삶을 만들어 나가는 건... 친구 사귀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리고는 배시시 웃었다. "항상 순탄할 수도 없고, 도중에 이런저런 일로 부딪칠 수도 있고."
"스트레이트 에지 그놈이 본색을 드러내는 걸 코앞에서 봤으니, 적어도 우리 동네 사람들은 조금이나마 정신 차렸을 기다." 애플잭이 레인보우 대쉬를 보며 말했다. "혹시나 뭐 방범대 같은 거 꾸릴 생각이모, 지금이 딱 적기제."
"하. 그러네. 맞는 말이야." 레인보우 대쉬가 날개를 파닥이며 천장까지 날아올랐다. "내가 뭐 이런 거 제안하는 그런 성격은 아닌데, 다른 애들이랑 정기적으로 도서관에 모여서 회의 비슷한 거라도 하면 어때? 우리 동네 캠페인이라거나... 글쎄다, 이걸 뭐라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마는... 스트레이트 에지 사건이 어떻게 된 일인지 집집마다 전파할 수 있는 모종의 방법 같은 걸 생각해 내면 좋을 것 같은데. 니들 생각은 어떄?"
"정말 멋진 생각이야. 나는 찬성!"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레인보우 네가 직접 주도해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해."
"마, 말할 것도 읍제!" 애플잭이 거들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모자를 쓰며 말했다. "그럼 우짤래, 우리 대장?"
"그럼 일단 의상실 들러서 래리티부터 집어가자구!" 레인보우가 출입구를 가리켰다. 셋이 밖으로 향했다. "니들도 알잖아, 걔 어디 밖에 나다닐 때면 이것저것 다 준비해야 한다면서 시간 무지하게 잡아먹는 거!"
"하여튼, 갼 못 꾸며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는갑다. 아마 당장 세상이 쫑나부러도 갼 속눈썹이나 붙이고 있을 끼다!"
"그나마 다행이네. 내일 당장 세상이 망하진 않을 테니, 전부 다 박살나는 와중에 래리티가 속눈썹 붙이는 걸 안 봐도 되다니." 트와일라잇이 말했다.
셋이 깔깔대며 가게를 나갔다. 몇 명 꼬맹이들이 슈가큐브코너로 달려 들어왔다. 딱 학교 다닐 나이 또래 아이들이었다. 치어릴리가 얼굴을 내밀고 아이들을 불렀다.
"식사비는 지금 다 쓰면 안 된단다! 과일이나 주스 정도만 사도록 하고! 오랜 기차 여행길에 너희가 멀미라도 하면 큰일이잖니!"
"네에에에, 선생니이임." 꼬마들이 합창하듯 대답했다. 젊은 교사는 쿡쿡 웃으며 문간에 서서 기다리며 빅 매킨토시와 더불어 다른 보호자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오오! 스트로베리 슈프림이다! 스트로베리 슈프림이야!" 스네일스가 펄쩍펄쩍 뛰었다. 다른 꼬마 몇몇이 카운터 너머로 동전 몇 닢을 건네주자 케이크 부인이 주스 팩 몇 개와 자른 사과 조각을 넘겨주었다. "돈 모아서 스트로베리 슈프림 사자!"
"뭐?!" 스닙스가 미친 사람 보는 듯한 눈길로 스네일스를 딱 쏘아보면서 대답했다. "야, 그래 봤자 주스 팩 하나잖아. 큰 건 나도 아는데, 어떻게 나눠 먹으려고?"
"으어어어어어어어, 그럼 빨대 두 개 꽂자!"
"스네일스!" 스닙스가 놀랐다는 투로 말했다. "너 천재냐?"
"헤헤헤헤."
"가만... 어...이구 젠장." 스닙스가 짤뚱한 엉덩이에 짊어진 가방을 뒤적이다가 말했다. "1비트 모자라. 아무래도 작은 걸 사야겠는데. 스트로베리 슈프림은 못 먹겠다 야."
"에에에에에이..." 스네일스가 고개를 푹 숙이며 귀를 늘어뜨렸다.
그 때, 금화 세 닢이 꼬마들 사이로 툭 내려앉았다. "받아. 보태서 스트로베리 슈프림 두 개 사렴."
두 꼬마는 갑자기 떨어진 거금에 놀란 눈치였다. 돌아간 시선이 내 시선과 마주했다. "아니 잠깐. 누나, 진심이에요?!"
나는 리라를 놓아둔 의자에 앉아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누난 늘 진심이거든." 나는 말을 마치고 피식 웃었다. "뭐, 가끔은 좀 과하기도 하다만." 그리고 계산대를 가리켜 보였다. "괜찮아, 사다 먹으렴."
"고마아아압습니다!" 스네일스가 외쳤다.
"야 스네일스, 이거 챙겨!" 스닙스가 동전을 건네주며 말했다. "스트로베리 슈프림 두 개 사. 빨대도 좋을 만큼 챙겨 오고!"
"당연 당연하지!" 호리호리한 사내아이가 입에 동전을 물고 빙긋이 웃고 계시던 케이크 부인을 향해 달려갔다.
"어디 재밌는 데라도 가니?" 나는 물었다.
스닙스가 고개를 돌려 나를 마주했다. "네? 아..." 그리고 잔뜩 신이 난 채 꼬리를 흔들며 웃어 보였다. "선생님이랑 캔틀롯 공원으로 현장학습 가는 날이에요! 동상이랑, 각종 깃발이랑, 어마어마한 미로도 있다던데요!"
"그렇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재미 없겠는데."
"풉, 아하하하하하!" 스닙스가 폭소를 터뜨렸다. "하하... 뭐, 그렇죠..." 꼬마가 한결 차분해진 톤으로 대답하며 슈가큐브코너의 한쪽 벽면을 흘끗 쳐다보았다. "현장학습은 이번이 처음이라서." 스닙스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 저... 아버지였으면 쓸데없이 시간 낭비한다고 뭐라고 했을걸요."
"글쎄, 그것도 그다지... 좋은 아버지나 이해심 깊은 아버지라고 할 수는 없겠는데."
"뭐 그렇죠. 아버지야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스닙스가 툴툴대는 투로 대답했다. 얼마 안 가 즐거운 미소가 다시 찾아왔다. "그래도 이제 그 작자 때문에 불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지금은 뭐 어디라도 처박혀 있을 테고, 우리 가족은 그 덕에 행복하니까."
"이런... 실례했구나." 나직하게 대답했다. "이런 말 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아뇨!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냥......" 스닙스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나를 올려다보고 말했다. "그냥 그... 짐을 벗어던진 기분이라고 하나? 좀 가벼워진 느낌 있잖아요. 전에는 전혀 모르고 살았거든요. 하하하... 하루하루 그냥 날아다니는 기분이라, 사실 옆구리에 페가수스 날개가 달려 있는 건 아닐까 싶다니까요!"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그럼, 행복하다는 거구나?"
"제 인생에서 최고로 행복해요." 스닙스가 대답했다. "엄마도 동생도 그래요. 지금은 스네일스네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는데, 다들 인자하시고 유쾌하신 분들이에요. 게다가 어머니 치료 도와 주시겠다는 분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치료가 어지간히 되고 나면 훨씬 몸 상태가 나아질 거라고 했어요. 그리고 또......"
"근데..."
스닙스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눈을 깜박였다.
픽 웃고 말했다. "지금 느끼는 행복 있지? 네 힘으로 다른 사람에게 그런 행복을 줄 수도 있을 거야. 너희 아버지는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스닙스가 뭐라고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꼬마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아요." 침을 삼킨 아이가 덧붙였다. "한동안은, 좀 뭐라고 해야 하나, 무서웠는데......"
"괜찮아." 몸을 낮춰 스닙스와 눈 높이를 맞추고 빙긋 웃었다. "아직 너희에겐 되고 싶은 사람처럼 될 시간이 많이 남아 있거든. 저렇게는 되지 말아야겠다 싶은 사람처럼 되진 않을 거야."
스닙스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치어릴리의 큐티마크에 새겨진 웃음처럼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그 때, 스네일스가 주스 팩 두 개를 띄워 들고 잽싸게 달려들었다.
"스트로오오오오오베리 슈프리이이이이임!" 스네일스는 기쁨에 겨워 있었다.
슈가큐브코너 출구 쪽에서 치어릴리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좋아요, 여러분! 갈 시간이에요! 기차가 우릴 기다려 주진 않을 거에요!"
"스닙스, 가야 돼!"
"알아! 잠깐만 있어!" 키 작은 유니콘이 몸을 돌렸다. "누나, 좋은 얘기 고마워요. 그..." 스닙스는 당혹해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누가 있던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누나?"
"스닙스, 누구랑 얘기해?"
스닙스가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는 이를 딱딱 부딪치며 앞다리를 비비더니 말했다. "젠장. 누가 여기 냉동고라도 열어 놨다가 갔나?"
"으어어어, 스닙스! 진짜 가야 돼! 쌤 표정 안 좋아지기 시작했어! 쌤 표정 안 좋아지면 안 좋은 일이 생긴다구!"
"어, 어! 캔틀롯 가자, 캔틀롯!"
스네일스가 다른 친구들 뒤를 따라 부리나케 슈가큐브코너를 빠져나왔다. 주스 팩을 머리에 얹은 스닙스가 후미에서 따랐다. 즐겁고 행복한 분위기 속에, 스닙스가 한 곡 노래를 흥얼거렸다. 차분하고, 마음이 편해지는 곡이었다.
기숙사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왠지는 몰라도, 틀림없이 걔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걸어가 문을 열었다. 설마 문댄서가 그토록 비참하고 고독한 꼴로, 추위에 떨며 거기 서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문댄서!" 나도 모르게 소리가 나왔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여자 기숙사 복도에 서서 움찔대는 문댄서를 보자 나도 모르게 발굽이 가슴에 올라갔다. "어... 어..." 침을 삼키고 애써 웃음지으며 말했다. "안 들어오고 뭐 해?"
"어..." 문댄서는 선 자리에서 꾸물대며 말했다. "룸메... 애들은...?"
"나갔어. 도영 지구 언저리에서 뭔 파티가 있다나 봐."
"흠..." 문댄서가 힘없이 가방을 질질 끌며 느린 걸음으로 들어왔다. "같이 나가지 그랬어."
"영 내 취향이 아니라서."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천천히 문을 닫았다. "애초에 그... 어... 박쥐 양반들 보면 뭔가 쎄하단 말야."
"거짓말." 문댄서가 툴툴대며 어두워진 방 안을 휘휘 둘러보았다. "그냥 트와일라잇이랑 동류라서 그런 거야. 그냥 진도 못 따라잡을까 걱정인 거잖아." 문댄서는 방 안에 널브러진 각종 잡동사니를 보더니 구역질 난다는 투로 말했다. "루나 공주님 맙소사. 이 게을러 터진 년들 청소도 안 하고 살아?"
"문댄서..."
"아니면, 우리 민트그린 유니콘이 지난번 만남 이후 숙녀다움을 포기하기라도 한 건가?"
"문댄서. 돌아온 이유는 대강 알고 있어." 문댄서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어깨 쪽으로 발굽을 들어올리긴 했지만, 얹을지 말지는 심각한 고민이 필요했다. 나는 입술을 씹으며 머뭇거리다 대신 말했다. "그게, 어...... 어머님 뵈러 갔다가 들었어."
문댄서가 침을 삼키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알아."
나는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어머님 뵙고 오는 길이야?"
"어." 문댄서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봤어."
방은 문득 아무 말 없이 조용했다. 잿빛 그림자를 뚫고 발굽을 질질 끌며 걸어가 문댄서 앞에 섰다. 보라색과 붉은색이 섞인 갈기가 뻗쳐 있었고, 보라색 눈동자는 색이 바래 있었다. 그녀는 내 친구였지만, 아직은 친구가 아니었다. 가능한 차분한 어조로 나는 말했다.
"문댄서, 그... 너도 알겠지만 난 뭔 말 하려면 똑바로 얘기하질 못하고 끝없이 빙빙 돌려 말하는 것밖에 못 해. 나에 관해서라면 네가 가장 잘 알겠지. 항상 그랬고. 네가 겪어야 했던 끔찍한 것들을 나는 겪어 본 적 없어. 내가 어떻게 이해하겠어? 거기다......"
"이해해서 어디다 쓰게?" 문댄서가 툭 말했다. "라이라, 이건 아주 간단한 문제야." 문댄서가 고개를 들어 공허한 눈빛으로 나를 마주보았다. "그 새끼 뒈졌어. 죽음의 문턱을 넘고 관짝에 기어들어가 꺽꺽대며 뒈져 버렸다고. 아 젠장. 라이라 너 시 쓴댔나..."
"음악 한다니까."
"아무렴 어때. 네가 표현하고 싶은 대로 표현해 봐." 문댄서가 숨을 들이마시며 창가로 다가가 창문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커튼을 굳이 걷으려 하지도 않았다. "뒈졌어. 뒈져 자빠졌고... 이제..."
"이제라니?"
"엄마랑 얘기 끝냈어. 트와일라잇네 부모님께도 문안 드렸고. 그런데도... 그런데도 그 누구도... 너만큼 날 도와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더라..." 문댄서가 앞발굽을 맞대고 비비다, 마침내 한 마디 울음을 내뱉었다. "날 도와 준 건 항상 너였는데..."
"내가..." 솔직히, 나는 그만큼의 당혹감과 놀라움을 느껴 본 일이 없다. 나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문댄서, 진심이야?"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널 도와 준 적이 있었나? 난 그냥..."
"내 곁에 있어 줬지, 라이라. 넌 항상 내가 널 필요로 할 때마다 내 곁에 서 있었어. 내가 널 필요로 하지 않을 때, 아니, 차라리 그런 척 하고 있을 때도 내 곁에 있었어. 그런데도 나는 널 쓰레기 취급이나 했다고."
"야... 문댄서..." 고개를 저으며 카펫을 보고 말했다. "네가 언제 날 쓰레기 취급..."
"내가 널 쓰레기 취급했어!" 문댄서가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냥 내가 너무 화가 난다고... 널 짓밟고 부숴 놓으려고 했어. 그리고..." 이제 문댄서는 내 눈에도 빤히 보이게 몸을 떨고 있었다. "이런 날이 올 거란 걸 알았지만, 그게 너무 무서웠어. 이제라도 고백해야겠어... 너한테..."
나는 걱정 섞인 눈으로 문댄서를 쳐다보았다. "고백하다니, 뭘 말이야?"
문댄서가 고개를 돌리자, 눈물로 반짝이는 두 눈이 드러났다. "너무... 기분이 안 좋아." 문댄서가 숨을 들이마시며 얼굴을 구겼다. "그 새끼 뒈졌는데! 그 새끼가 뒈져 버렸는데! 기분이 안 좋다고, 라이라. 도대체 왜... 그런 건지 모르겠어!"
"어... 으음... 아무래도 아버지라서 그런 게 아닐까..."
"그 새낀 쓰레기야!" 문댄서가 더 비참한 몰골로 비명을 질렀다. "애새끼 괴롭히면서 즐거워하는 가학성애자에 가정폭력범, 더럽고 구역질나는 찌질이 새끼일 뿐인데, 그런 새끼가 뒤졌으면 기분이 좋아야 하는 거 아냐? 그런데도... 기분이 좋아지질 않아! 너는 절대 이해 못 할 일이라고 네가 방금 그랬지?! 나는 그 개새끼의 따, 딸년인데도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어! 이게 너는 마, 말이 되는 일이라 생각해?"
"문댄서, 그게 네 책임이라곤 생각 안 해!" 나는 소리쳤다. "그 자와의 혈연을 그냥 같은 천을 잘라내고 나온 조각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하지만 뭐?!" 문댄서가 흐느꼈다. 문댄서는 덜덜 떨며 발굽으로 얼굴을 닦았다. "라이라, 그 새낀... 그 새낀 내 인생의 모든 해악을 만들어 놓은 새끼야! 살면서 무슨 일을 겪든 그 새끼한테 당한 것들이랑 비교하게 된다고!" 문댄서가 딸꾹질하며 몸을 웅크렸다. "기분이 안 좋은 이유를 말해줄까... 난 아직까지도 남자랑 진지하게 사귀어 본 적 없어. 썸조차 타 본 일 없지. 왜냐면... 무서워서 그랬어, 라이라. 언젠가 나도 자식 낳고 살고 싶어하는 건 너도 알잖아. 그런데도 왜 그랬을까..." 문댄서가 눈을 감고 부르르 떨었다. "나, 나 같은 년이 자식 낳아 봤자 똑같이 되풀이할 게 뻔하지 않아?"
"문댄서..." 나는 애써 웃으며 문댄서 가까이 다가갔다. 아직 앞다리를 문댄서에게 갖다대지는 못했다. "네 자식들이라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똑똑하고 건강한, 최고의 행운아들일 테지."
"너무, 너무 무서웠어 라이라..." 문댄서가 나를 부둥켜안고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내가 겪은 일을 똑같이 하고 싶지 않아. 그 새끼랑 똑같은 엄마는 되기 싫어... 제발..."
"괜찮아, 넌 그 사람처럼 되진 않을 거야." 문댄서를 꼭 안으며 말했다. "내가 그렇게 안 놔둬. 듣고 있어? 내가 그렇게 안 놔둔다고..."
문댄서는 마침내 내 품에 완전히 무너져 내려 흐느끼면서 웃었다. "고마워. 그냥... 그냥 네가 내 옆에 있어 주기만 하면 돼... 그거면 충분해... 그냥 내 옆에 있어 주기만 하면..."
"괜찮아, 괜찮아..." 나는 문댄서를 품에 안고 뺨을 비비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항상 네 옆에 있을 테니까." 나는 웃었다. "영원히."
어스름 진혼곡의 연주가 끝난 뒤, 나는 혼자 서 있었다. 이름 없는 자들의 땅 한가운데 선, 단 한 명의 산 자였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내 양쪽으로 묶이고 구속된 자들이 여럿 늘어서 있었는데, 거의 움직이지도 않았다. 천둥소리도 그리 크지 않았다.
구체가 머리 위로 떠왔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주변에 맥동하는 폭풍을 이끌고 있어서 참 기괴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당신이 여기 있었다는 걸 압니다." 나는 차분히 말하며 나이트브링어를 단단히 잡았다. "당신이 얼마나 여기 있었는지, 나는 알 수 없고 앞으로도 알 수 없겠지요." 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내린 저주에 발목을 잡혀 대지를 떠도는 유령으로 내가 얼마나 살아가고 있는지, 세상 사람들이 알 길 없는 것처럼 말이지요."
구체는 그 자리에 떠 있기만 했다. 노랫소리도, 낙뢰도 없었다. 그 무엇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용감히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면 전 참 운이 좋았어요. 그렇기에 그 저주가 강력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아는 채로 아침에 눈을 뜨니까요. 그래도..."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운이 좋으면서도 맹목적이고, 어리석기까지 했다는 점도 인정해야겠습니다. 이제 와서 인생을 되돌아보니, 차라리 이 모든 일을 겪어서 다행이라고 생각... 아니, 다행임을 알게 되었거든요. 이전보다도 현명하고, 강인한 사람이 되었죠." 나는 눈을 감았다. 스트레이트 에지의 겁에 질린 얼굴이 눈꺼풀 속 어둠에서 떠올랐다. "...그런데도 완벽한 사람은 될 수 없더군요."
이름 없는 자 몇몇이 꿈틀대자 저들을 구속한 사슬이 덜그럭거리며 흔들렸다. 차가운 물안개가 발판을 쓸고 지나가, 저 아래의 혼돈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저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제 주변 사람들 곁에 있어 줄 수 있는 착한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그리고..."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왕좌를 올려다보는 눈에서 눈물이 툭 흘러나왔다. 나는 떨며 말했다. "세상의 다른 사람들을 축복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보다 조화롭고 정의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이정표를 남길 수만 있기를, 그 어떤 흔적이라도 남길 수만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많은 일을 겪으면서, 많은 것들을 배우고 익혔습니다. 그렇지만..." 울음이 솟구쳐 딸국질이 나왔다. 나는 울며 말했다.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차라리 천운이라 해야 할 행운이 따라 주거나, 우연이 겹치고 겹치지 않은 이상 저는 무용했습니다."
나는 나이트브링어를 더 단단히 잡고, 구체를 바라보며 무릎을 꿇었다. 눈물로 눈가가 젖었다.
"이제 당신께 다시 기적을 청하고자 한다면, 제가 그토록 이기적이고 불경한 것이 되나이까?" 나는 침을 삼키고 애써 숨을 정돈했다. 부디... 부디 말씀해 주소서. 노래해 주소서. 비오니... 엎드려 비오니... 왕림하시어 고적의 이중주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물에서 벗어나는 새와 같이 저를 풀어주소서. 그리되면, 저 또한 그대를 해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나이다." 다시 침을 삼키고 더듬거려 말했다. "죽어야 할 자이든 죽지 않아야 할 자이든, 이런 곳에서 살도록 강제됨은 차라리 유폐라 해야 합니다. 제가 그대처럼 되는 것을 바라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것이..." 나는 울면서 힘없는 웃음을 지었다. "그것이, 제가 그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나이다."
구체는 다만 차갑게 하늘에 떠 있을 뿐이었다. 멀리서 불규칙하게 섬광이 번쩍거려 저 너머 두 궁창의 경계를 드러냈다.
"다만 비나이다." 나는 울며 말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여기 서 있는 것뿐입니다. 성은을 베풀어 주소서. 이 주박에서 다만 자유롭게 하소서." 네 다리에 힘이 빠졌다. 나이트브링어를 거의 놓칠 뻔한 나는 말했다. "제게 직접 말씀하시지 않으심은 어찌된 일이나이까? 영겁의 세월 동안 이러한 일을 반복해야만 하는 것입니까? 제 존재를 꼭 무시하셔야 하나이까? 대체 무엇 때문에 야상곡을 완성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바로 그 때, 멀리서 내리꽂히던 낙뢰가 두 배, 세 배로 늘어났다. 쇠사슬이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낙뢰와 쇠사슬 소리가 나를 둘러싸고 무시무시한 불협화음을 일으키며 미친 듯 휘몰아쳤다. 이름 없는 자들이 곳곳에서 눈을 뜨고 일어나 한 목소리로 소리 높여 똑같은 말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세서世壻*15께서 깨어나신다! 세서께서 깨어나신다! 세서께서 깨어나신다!"
이름 없는 자들이 한 몸처럼 나를 둘러싸고 몸부림치며 포효했다. 휘둥그레 뜨인 눈이 이름 없는 자들의 모습을 비췄다.
"부마도위駙馬都尉*16! 부마도위! 부마도위! 부마도위!"
이름 없는 자들은 공포와 고통, 그리고 기쁨에 동시에 겨워 몸부림치며 나를 보고 미친 듯 짖어댔다. 그 기세에 눌린 나는 자리에 주저앉아 다급하게 '페눔브라의 메아리'를 연주했다. 쇠사슬 소리와 한 목소리로 연호하는 소리에 완전히 압도당하기 직전에 이름 없는 자들의 땅이 흐릿해지며 저 멀리로 사라져 갔다. 그리고 나는 다시 등잔을 밝힌 지하실 바닥에 앉아 있었다. 바닥을 굴러다니는 먼지와, 내 헐떡이는 숨소리만 곁에 있었다.
나는 일어나 앉아 떨리는 발굽으로 갈기를 쓸어넘겨 정돈했다. 눈물이 말랐고, 목소리가 제 상태를 되찾았다. "세서... 그, 그 여자가 사랑한 자가 깨어났다?" 이마가 찌푸려졌다. "그래서...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거지...?"
지하실은 아무 일 없이 고요했다. 세상이 돌아가기를 멈추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나는 아무 소득 없이 지옥에서 발을 빼야 했다.
나는 한숨지으며 나이트브링어를 가방에 집어넣고 등잔을 껐다. 그리고 계단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뭔가... 이상하단 말이지. 이번에는 발판이나 나한테 낙뢰를 떨어뜨리지 않았단 말야. 마음이 좀 풀린 건가?" 나는 한숨지었다. "앨러배스터 당신은 도대체 그런 데서 하루가 아니라 천 년을 버틴 거에요? 진짜 미치지 않고는 못 배겼겠네..."
마당으로 나오는 문을 열었다. 햇빛 대신, 얼굴에 파이가 날아들었다.
"으아 젠장!" 나는 뒤로 나동그라졌다. 체리와 커스터드, 휘핑크림이 뒤섞인 덩어리가 뿔, 눈, 입가에 범벅이 되어 묻어 있었다. 나는 움찔하며 두 발굽으로 얼굴에 묻은 파이를 닦아냈다. "셀레스티아 공주님 맙소사." 나는 성질을 내며 소리쳤다. "핑키 파이! 한 번만 더 아무 데나 파이 같은 걸 던졌다가는..." 시야가 회복된 뒤, 나는 자리에 굳어 버렸다.
오두막 뒤 잔디밭 위로 파이가 네 개 더 떠다니고 있었다. 멀찍이 파이 몇 개가 더 날아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날개 달린 돼지들이 편대 비행을 하고 돌아다녔다. 끔찍하게도, 곳곳마다 구체 형태의 무언가가 떠다니고 있었는데, 나무를 비롯해서 거꾸로 뒤집힌 집 같은 것에 들러붙어 있었다. 이 정신 나간 듯한 풍경 위로 분홍색 솜사탕 모양 구름이 떠다녔고, 그 아래로 구역질나는 갈색 무언가가 비가 되어 포니빌에 쏟아졌다. 한 시간 전만 해도 멀쩡했던 포니빌은 이제 조각조각 나 미궁의 형태로 바뀌어 있었다.
현실이라기엔 너무나 초현실적이고, 기괴한데다 미쳐 있었으므로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임은 분명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야말로...
"세상이 망했나 보다..."
위아래 할 것 없이 전부 개판이 되어 있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지하실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다보았다. 머릿속에 그 기괴한 말들이 다시 울려 퍼져서, 나는 얼굴을 노리고 날아드는 파이들을 쳐내며 급히 오두막을 향해 급히 달려갔다.
일 년 내내 내가 모르던 것들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작금 사태에 대비하기엔 역부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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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1 "I could blend in at a greenhouse. Heeheehe! That's such a funny word, 'greenhouse!' It's not even green until you walk inside."
*2 Banana Split. 바나나를 길게 가르고, 그 위에 크림 아이스크림 등을 얹은 것.
*3 En Guarde. 펜싱 용어로 '준비'. 프랑스어로는 '방어 자세를 취하라'는 뜻. 이는 전투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린애들이 앙 가르드라고 하는 것도 좀 묘해서, 임의로 '각오나 하라'라고, 어린이 만화영화에 흔히 나오는 말로 대체하였다. 캔틀롯이 귀족 위주 도시인 점을 감안해 앙 가르드로 나중에 바꾸든지 말든지 할 예정이다.
*4 Chucolt.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대독 전선에서 활약한 소련군 육군 장성 게오르기 주코프Georgy Zhucov를 비튼 것으로 보인다. 주코프는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에서 나치 독일군을 상대해 이겼고, 이후 베를린으로 진격해 의사당 건물에 붉은 깃발을 내걸었다.
*5 s발음을 th발음으로 하고 있다.
*6 Shadow district. 사로스인들이 주로 산 구역으로 묘사되어, 해 질 무렵의 그림자를 뜻하는 말을 차용해 옮김.
*7 Fruitcake. 속어로 동성애자 남성을 의미함.
*8 스네일스는 스닙스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걍 효모라고 썼음.
*9 Cuz she's a withered old tart who doesn't know how to keep her tail down. 을 적당히 옮긴 것. 말총 늘어뜨린 거 옆으로 치우면 뭐가 보이겠습니까. 한 마디로 '다 늙어빠진 창녀가 아직도 발정난 걸 못 가라앉혀서 아무한테나 들이대고 다닌다'는 패드립입니다.
*10 Background Pony Chapter 01. 'Melodious'
*11 원문으로는 '달팽이랑 싸워서 그렇게 됐다'로도 읽힌다.
*12 Horsefeathers!, 허튼소리, 경멸조의 거부를 표현. 레인보우 대쉬는 페가수스라서 깃털 달린 말이기도 하죠. 그래서 言/馬 두 개 의미를 갖는 '말'을 갖다 썼습니다.
*13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비튼 것.
*14 암브로시아는 그리스 신화의 신들이 섭취하는 음식 또는 음료를 말한다.
*15 여왕의 남편을 이르는 국서國壻를 변형한 것. 이름 없는 자들의 땅을 다스리는 신격인 점을 감안하여 國을 世로 확장시켜 옮겼다.
*16 왕실에서 공주, 옹주의 남편을 이르는 말. 창세신인 '위대한 어머니'의 세 딸 중 하나인 제3의 알리콘의 연인이었으므로 공주의 남편을 일컫는 말을 사용했다. 흔히 '부마'로 줄여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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