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에게.
소중히 간직하고 싶어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린 끝에는 무엇이 남을까. 스스로를 지탱해 오던 것들을 한순간에 전부 상실한 뒤 남는 사람의 본질은 무엇일까. 이해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도 한 가닥 희망을 찾을까, 그저 끝없는 슬픔에 무너지고 말까.
이 질문에 답변할 말을 생각해 보기에 충분할 정도로 살기는 했지만, 진실은 아직도 멀고 흐릿해서 잡을 수가 없어. 사람의 지혜와 사람의 가식 아래 그 어딘가 깊은 곳, 사람의 본질 안에 있을 무언가일 수도 있겠지. 설령 자기의 본질을 향하여 한없이 침잠한 끝에 다시 표면의 삶으로 돌아오더라도, 거기서 무엇을 보았는지 사람의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못 할 수도 있겠지. 다만 표현한다는 행위에 목을 매고 달려들 필요는 없다는 게 내 생각이야. 무엇이 나를 버렸고, 내 인생에서 무엇을 영영 상실했는지 생각하는 건 결국 살아갈 이유가 남지 않았다는 결론으로 빠지기 쉽거든.
모든 것을 상실한 끝에도 뭔가 남기는 남을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 그 끝이 무無일 거라 생각하고 싶지 않아. 나 자신의 고독한 뿌리를 타고 내려가 깊고 깊은 망각의 주춧돌을, 그 어둠을 보고 온 사람으로서 대답하겠어. 모든 것을 빼앗긴 뒤에도 일기를 적어 나가는 원동력이 무엇인지. 다가오는 파멸과, 아리아 공주의 염병할 노래에 맞서 싸우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게 내 운명이니까.
캐러멜과 윈드휘슬러가 칼로 케이크를 베어내자 대기하던 악대가 흥겨운 음악을 연주했다. 쏟아지며 명멸하는 카메라 플래시를 바라보며 둘은 빙긋이 웃었다. 그들의 앞날을 축복하는 덕담 앞에 둘은 얼굴을 붉혔다. 둘의 결혼식이 거행된 식장은 꽤 널찍했다. 새하얀 장식이 올려진 케이크를 자르고 서로의 앞다리를 제 앞다리 안으로 끌어들인 채, 둘은 마주보고 케이크를 들어 서로에게 먹여주었다. 회장에 모인 하객들이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윈드휘슬러가 케이크를 먹는 동작은 고아하고 점잖았는데, 캐러멜이 그 정도로 고상한 태도를 보인 것은 아니어서 노란 스펀지케이크 조각이 멀끔한 검은 턱시도 위로 군데군데 떨어져 있었다. 하객들이 껄껄 웃으며 휘파람을 보냈다. 윈드휘슬러가 낭랑한 소리로 웃었다. 캐러멜은 난감하다는 듯 웃으며 신부에게 자기 뺨을 비볐고, 신부는 값비싼 턱시도에 묻은 케이크 파편을 쓸어냈다. 둘은 앞으로도 영원히 남을 그 순간의 온기에 젖어 두 번째로 입을 맞추었다.
피로연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속되었고, 사진사들은 필름을 다 쓸 때마다 사진기에 새 필름을 끼워 넣었다. 웨딩 케익을 자르고, 하객들과 함께 몇 차례 건배한 뒤 연회장은 무도회장으로 용도가 변경되었다. 포니빌 시청 청사가 전부 결혼식장이었고 연회장이었다.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눈꽃처럼 하얀 식탁보를 씌우고, 마무리로 화려한 꽃장식을 얹은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었다. 애플잭이 빅 맥과 스미스 할머니, 애플프리터, 골든 딜리셔스를 데리고 캐러멜 일가 사람들과 한 자리에 앉았다. 두 가족은 전혀 거리낌없이 어울리며 웃고 떠들며 건배를 외치고 큰 소리로 환호했다. 한쪽 구석 테이블에는 래리티와 플러터샤이가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 둘 모두 신부 들러리에 걸맞게 수수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래리티는 본인이 직접 바느질해 만든 신부의 웨딩드레스를 열심히 쳐다보다가 잠시 눈을 돌려 음료를 마시던 차였다. 래리티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애써 웃어 보였고, 플러터샤이가 그런 친구를 가만히 안아 달랬다. 연회장 반대편에는 잘 빼입은 페가수스 무리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선더레인, 블로섬포스, 클라우드체이서와 플리터가 신혼 부부를 보고 환호하며 눈을 찡긋거렸다.
자기도 모르게 올라오는 어린애 같은 웃음을 애써 억누른 윈드휘슬러가 가만히 눈을 감고 캐러멜의 목에 얼굴을 기대서, 이들은 연회장 한가운데서 서로 뺨을 비비는 모양새가 되었다. 높은 창문에서 흘러 들어온 달빛이 부부가 한쪽 앞다리에 끼고 있던 팔찌를 타고 흘러내렸다. 시간이 채운 족쇄를 벗어던지기라도 한 듯, 악대가 연주하는 음악이 둘을 가만히 감싸주었다.
한쪽에서 잔뜩 들뜬 핑키 파이가 둘을 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현혹되기라도 한 듯, 새파란 두 눈을 반짝이며 사방팔방을 뛰어다니면서 말이다. 다행히도 그 짓을 하느라 기력이 다 빠져서, 우스꽝스러운 노래를 부를 힘은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핑키가 레인보우 대쉬에게 몸을 기댔다. 레인보우는 툴툴대며 당혹스러울 정도로 심플한 드레스 자락을 만지작거리면서 방 남쪽 벽에 붙은 시계만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그 뒤에는 아주 작고 귀여운 테이블이 여러 개 깔려 있었는데, 대체로 반쯤 먹다 남긴 케이크 접시가 널려 있었다. 그 테이블의 주인인 꼬마들이 끼리끼리 모여 놀았다. 애플블룸과 스쿠틀루, 스닙스가 딩키를 데리고 술래잡기를 하며 놀아 주고 있었는데, 테이블 상판 아래로 늘어진 흰 식탁보 밑으로 들락날락하며 까르르 웃어댔다. 조금 떨어진 곳에 더피 후브즈와 밀키 화이트, 치어릴리가 한데 모여 담소하고 있었는데, 한데 어울려 춤추는 신혼부부와 본인들 오른편에서 춤추는 다른 커플 사이에서 시선이 엇갈렸다.
조금 더 떨어진 곳에는 스위티벨과 럼블이 어색하기 짝이 없는 동작으로 연회장 한가운데에서 있었던 일련의 행위들을 모방하고 있었다. 스위티벨이 입은 꽃 드레스와 럼블이 입은 놀라울 정도로 보수적인 양식의 정장이 그 모습을 한층 더 볼 만한 것으로 바꿔주었다. 테이블 한두 개 거리 정도 떨어진 곳에서 여자 몇몇이 모여 웃으며 뭔가 달달한 내용일 것이 분명한 말들을 쑥덕였는데, 소심한 럼블은 그 소리에 더 위축되기만 할 뿐이었다. 그 상황에 깊이 심취한 스위티벨이 자기 목을 럼블의 어깨 위에 얹었다. 럼블이 용기를 내어 그 행위에 응답했다.
연회장 중앙을 바로 면하는 테이블에는 시장님과 후브스 박사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둘은 춤추는 신혼부부를 바라보면서도 근래 있었던 일들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시장님이 빙긋 웃으며 옆에 앉아 있던 젊고 붉은 갈기를 한 여자에게 몇 마디를 전하자, 그 여자도 씩 웃으며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떨어진 자리에는 결혼을 축하하고자 갈기를 화려하게 꾸민 제코라가 참석해 있었다. 봉봉과 캐럿 탑이 다음 축제를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 논의하는 내용에 푹 빠져 있는 듯했다. 맨 끄트머리에는 암브로시아와 모닝 듀가 자리했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춤추는 캐러멜과 윈드휘슬러를 차분하고 조용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둘은 서로에게 얼굴을 기대더니, 발굽을 잡고 입을 맞췄다.
마지막 현의 떨림까지 정돈되며 잦아들었다. 연회장 한쪽 모서리를 차지하고 있던 악대가 잠시 소리를 거둬들이자 마을 곳곳에서 찾아온 하객들이 일제히 환호를 올렸다. 시장님이 잠시 일어서서 몇 마디 말씀하시며 하객들에게 몸짓해 보이셨다. 몇몇이 자기 자리에서 일어서서 각기 짝을 지어 연회장 한가운데로 모여들었다. 연주가 재개됨과 동시에 무도가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부부의 친구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암브로시아와 모닝 듀가 어울려 춤을 추었고, 선더레인과 블로섬포스가 느긋한 걸음으로 춤추며 가볍게 포옹했다.
더피 후브스와 밀키 화이트와의 대화에 여념이 없던 치어릴리의 어깨를 누군가 가볍게 톡 건드렸다. 치어릴리가 고개를 돌리자 빅 맥이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굳이 말이 필요 없었던 제안에 치어릴리는 몸을 돌리고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고, 더피와 밀키 화이트가 그녀를 떠밀어 빅 맥에게 보내주었다. 치어릴리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웃으며 빅 매킨토시와 함께 회장 중앙으로 나아갔다. 치어릴리가 떠난 자리에 애플잭이 들어와 남은 둘과 즐겁게 킥킥 웃었다. 핑키 파이는 그 신나는 상황에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고 레인보우 대쉬를 끌고 들어갈 만한 자리가 있는지 눈을 희번득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핑키 파이가 레인보우 대쉬를 번쩍 들어 연회장 한복판에 집어넣고 호키포키 춤을 강요했다. 하객 절반 정도가 유쾌하게 웃었다. 레인보우 대쉬가 끙 하고 한숨짓더니 웃는 얼굴에 침 뱉기도 뭐했는지 꾹 참고 핑키가 하라는 대로 움직였다.
스파이크가 뒤쪽에 있던 다과 테이블에서 펀치 한 잔씩을 양손에 들고 뒤뚱거리며 나타났다. 꼬마가 핑키 파이를 보더니 레인보우 대쉬에게 시선을 돌리고, 시선을 정면으로 옮겨놓고 말했다. "윽.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이 동네는 남자 인구를 보다 적극적으로 유치하려는 노력을 경주할 필요가 있어. 세상에 여자 둘이 춤을 춰야 하다니, 이상한 상황 아니야?"
"아이구 야, 됐다."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뿔을 밝히자 라벤더빛 염동력이 스파이크의 한쪽 손에 쥐여져 있던 음료 잔을 감싸며 들어올렸다. 음료를 한 모금 목으로 넘긴 트와일라잇이 더없이 흡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결혼식 후의 여흥으로 즐거이 무르익어 가는 연회와 흥겨운 음악 소리에 젖은 트와일라잇이 나긋하고 행복해 보이는 웃음을 떠올리며 말했다. "굳이 흥 깨지 마. 요새 하루도 조용할 날 없었잖아."
"이게 조용한 날로 보여?" 스파이크가 얼굴을 구겼다. 작은 몸에 딱 맞는 턱시도와 실크햇이 부들부들 떨렸다. 꼬마가 손에 든 펀치 잔을 들어 한 모금 넘긴 뒤 한바탕 거하게 트림을 뿜어내더니 말했다. "내 평생 이만큼 붐비고 미쳐 돌아가는 결혼식은 못 봤다구!"
"그렇겠지, 네가 처음으로 참석한 결혼식이 이거니까!"
"아니거든!" 스파이크가 픽 웃으며 말했다. "복실이Mr.Fuzzhead랑 복순이Mrs.Fuzzhead 결혼시키는 거 봤는데?"
"플러터샤이네 동물들은 논외야."
"그래, 뭐..." 스파이크가 발가락을 꾸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지금같은 파티만 아니면 어디든 가도 좋겠어."
"얘는! 오늘은 아주, 아주 특별한 날이라구."
"당사자들에겐 그렇겠지..."
"당사자뿐만이 아니야 얘!" 트와일라잇이 싱긋 웃으며 몇몇 커플들에 둘러싸여 연회장 중앙을 거닐고 춤추는 부부를 쳐다보았다. "3주 전만 해도 세상이 정말 이렇게 끝장나는구나 싶었잖아. 설마 공주님들께서도 디스코드가 봉인을 깨고 튀어나올 줄은 상상도 못 하셨다니까. 희망이고 뭐고 전부 다 잃어버리고 끝없이 소용돌이치는 혼돈 속에서 영원히 고통받는 신세가 될 뻔했는데......"
"그 때 너랑 다섯이 조화의 원소를 차고 나타나서 세상을 구했다 뭐 그런 소리가 나오겠구먼......" 스파이크가 어깨를 으쓱했다. "전에도 몇 번이나 들었어. 다 안다구."
"그러셔?" 트와일라잇이 한쪽 눈썹을 치키고 스파이크를 흘겨보았다. "디스코드가 사람들을 제멋대로 세뇌하고 조종하던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나 생각해 봐. 그때까지 살아오고 지켜냈던 본인의 삶이 눈앞에서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꼴을 눈 뜨고 볼 수밖에 없었지. 솔직히 말해서, 저 둘이 결혼식 날짜를 앞으로 당겼더라도 별로 잘못된 거라는 생각은 안 들었을걸? 요새 죽을 만큼 힘들긴 했지만, 그 덕에 인생이 참 소중하구나 싶은 걸 배우지 않았어?"
"아하, 그러신가. 애플잭네 친척들한테는 그닥 와닿을 말 같진 않은데." 스파이크가 말했다. "애플잭이랑 스미스 할머니 얘길 얼핏 들었는데, 수작Share-crack을 어떻게 줘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더라고."
"소작Share-crop이겠지, 스파이크." 트와일라잇이 정정해 주었다. "스윗 애플 에이커는 넓고, 친척 둘이랑 나눠 경작할 땅은 충분히 있어. 애초에 그게 가족 좋은 거고 친척 좋은 거 아니겠니. 당장 나 어릴 때도 부모님께서 새틴 씨, 그러니까 문댄서네 어머님께 금전을 꽤 융통해 주셨었다고."
"문댄서는 친구였지 가족은 아니었잖아?"
"요점을 헷갈리는구나." 트와일라잇이 연회장 중앙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연, 학연, 혈연, 교우 관계를 초월해서 함께 어울려 사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니. 공주님께 몇 달, 다시 몇 달에 걸쳐 편지를 보내드린 주제에 이제서야 그걸 깨닫고 있다니."
"뭘 깨달아?"
"조화는 스스로 비롯되는 게 아니야. 평화도 어디서 갑자기 뚝 떨어지는 게 아니지. 조화를 빚어내기 위해선 평범한 사람들 각각의 용기가 필요하다는 거지!" 트와일라잇이 스쳐 지나가는 투로 픽 웃었는데, 두 눈에는 물기가 엉기고 있었다. "아주 간단한 일이지. 좀 더 일찍 깨달았으면 참 좋았겠지만, 그랬다면 지금보단 이 순간을 덜 소중히 여겼을지도 모르겠어. 나 혼자 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공부를 하는 걸로 나 자신이 구성되고, 발전해 나갈 거라고 착각하면서 대체 몇 년을 허비한 걸까!"
"글쎄, 책에 미쳐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책 한 권 쓸 정도 시간 정도는 되지 않을라나?"
"그래, 그럴지도..." 트와일라잇이 훌쩍이는 숨을 수습하고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여태껏 몰랐던 당연하고도 놀라운 사실을 매일 새삼스레 배우게 되네. 언젠가는 윈드휘슬러랑 캐러멜처럼 되고 싶어."
"그러니까, 언젠가는 연애 결혼을 하고 싶다는 거지?"
"하하... 그런 식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어." 트와일라잇이 흥미롭다는 투로 대답하더니, 보다 차분해진 어조로 말했다. "내 말은, 인생의 어딘가에서 내게 다가온 기회를 잡는 게 두렵다는 이유로 그걸 놓쳐 버리지 않기를, 그 기회를 잡기 위해 해야 할 것들을 명확히 알게 되기를 바란다는 거야. 그렇게 해야만 비로소 나 자신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일 테니까."
"난 잘 모르겠군." 스파이크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트와일라잇을 보며 말했다. "너 정도면 자기 인생, 충분히 자기를 위해서 쓰고 있는 거라 생각하거든."
"흐흥.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막상 자기 인생의 빈자리에 구멍이 뚫려 드러나기 전까지는 내가 내 인생을 살았는지, 어디서 남의 인생을 살았는지 그 누구도 확언할 수 없는 법이야."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발굽이 트와일라잇의 등에 닿았다. 말 그대로 자리에서 펄쩍 뛴 트와일라잇이 몸을 돌려 뒤쪽을 보려 하다 그대로 얼어붙었다.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가 물었다. "어어... 무슨 일이시죠? 뭐 필요하신 거라도......?"
떨리는 몸으로 트와일라잇을 마주했다. 반짝이는 예복과 정장 사이에 낀 잿빛 후드는 노숙자가 꿰어 입은 수의와도 같았다. 끝이 다 갈라지고 상한 갈기가 목을 타고 흘러내려 흐느적거렸다. 거친 숨으로 겨우 말을 꺼낼 때도 두 눈에 조마조마한 심정이 그대로 새어나왔고,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당신, 내가 아는 사람." 더듬거리며 말했다.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입술을 씹었다. 스파이크가 어쩔 줄 모르는 눈치로 우리 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발을 이리저리 툭툭 움직였다.
"저기요...?" 트와일라잇이 말했다.
"당신... 내가 아는 사람." 트와일라잇의 외면과 내면과 그 너머 숨겨진 것들을 찾아 시선을 움직이며 나는 말했다. 마른침을 삼키며 봉두난발이 된 갈기를 쓸어내렸다. "당신의 말투, 목소리의 높낮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없고, 무엇 하나 관심을 두지 않는 곳이 없는데, 그러면서도 순수해... 아이처럼." 형체와 질량을 결여한 눈보라가 밀어닥쳐 뼛속까지 한기가 스몄다. 이를 악물었다. 연회장이고 뭐고 사방이 전부 빙빙 도는 것만 같았고, 그 회전축은 눈 앞의 이 여자였다. "당신은 다른 그 무엇보다도 바라는 게 있어. 나도 그걸 원해. 이건 누구든지 원하는 것이지만, 모든 사람이 그게 무엇인지 말할 수는 없어. 누가... 그래... 누가 울고 있었던 것 같군." 나는 몸을 떨며 사방으로 이지러지는 별빛을 올려다보았다. "책이 많았어. 책도 많았고, 거기 쌓인 먼지도 많았어. 맞아... 그 순간에 당신과 내가 같이 있었던 것 같긴 한데, 언제였는지 생각해 보려고 하면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트와일라잇이 한두 발짝 뒤로 물러섰다. 혼란스러운 빛이 가득 떠오른 얼굴이 찌푸려져 있었다.
스파이크는 시장님이 계신 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건장한 경호원 둘이 시장님 양쪽 뒤에 버티고 서서 차렷자세로 몇 마디 말을 나누던 참이었다.
스파이크가 그쪽으로 한 걸음을 옮겨놓기도 전에 트와일라잇이 녀석의 어깨를 가만히 잡았다. 트와일라잇이 이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잠깐 숨 좀 고르실까요. 글쎄... 아무래도 길을 잃으신 것 같은데..."
트와일라잇을 향해 시선을 겨누었다. 가슴이 뛰었다. 입을 열어 말하는 순간에도 시야 구석에서 항성 하나가 빛과 열을 뿜어내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맞아. 그거야. 길을 잃었어."
"그럼 제가 어떻게 도와 드리는 게 좋을까요?"
그 때 지고 있던 가방의 묵직한 무게가 등골을 타고 전해졌다. 목구멍에 응어리가 지는 것과 거의 때가 일치했다. "그게... 그... 멜로디가 하나 있어." 더듬거려 말하면서도 과호흡하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써야 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 상황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 끄트머리에 선 것에 비견된다는 것 정도는 알았던 것 같다. 나는 차마 그 밑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 밑으로 몸을 던졌다. "조금은 알지만, 몇 마디가 빠졌어." 굳이 뒤돌아볼 것도 없이 가방을 열고 뭔가 잡히는 것을 꺼냈다. 백금으로 자아낸 듯한 현이 매인 자그마한 금빛 현악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유는 모르지만, 멜로디를 완성시켜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이마를 찌푸렸다. "멜로디 전체를 다 알아야겠어."
"야 트와일라잇..." 스파이크가 까치발을 하며 그녀의 어깨를 툭툭 밀었다. "이 여자 상대하는 거 슬슬 소름끼치려고 하는데..."
"쉿!" 트와일라잇은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스파이크를 꾸짖었다. 그리고, 담담히 말했다. "그, 저는 음악을 잘 몰라요. 아무래도 다른 분을 찾아보셔야겠는데... 시립병원 쪽으로 안내해 드릴까 하는데, 따라오실..."
"아냐!" 내 고함에 몇몇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스파이크가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심호흡하며 마음을 안정시키고, 바싹 다가서며 말했다. "이 멜로디만 완성시키면 그만이야. 그럼 전부 다 기억날 거야. 이유는 몰라. 그래도 알아야겠어. 이건 당신도 아는 곡조니까!"
"저는 음악가가 아니라니—"
"당신밖에 도와 줄 사람이 없어!"
트와일라잇이 입술을 씹었다. 결국 체념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까딱해 보였다. "어쩔 수 없군요. 그 멜로디를 한번 연주해 보세요. 그럼 제가 아는 곡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 테니."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자리에 주저앉아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현을 퉁겨 첫 번째 음을 일으키고 난 뒤 일필휘지로 연주를 이어가던 중에도 긴장으로 얼굴이 굳어 있었다. 염동력이 내가 알고 있는 음을 따라 현을 데리고 놀았고, 그 위로 솟아오른 음은 곳곳이 무너지고 부서져 있었으나 차분하면서도 장중한 곡조를 이루었다. 연주를 마치고 핏발 선 눈을 떠 트와일라잇을 차분히 쳐다보았다.
"이건... 낯이 익은데요." 트와일라잇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왕실 기록보관소에 남아 있던 곡... 인가 싶기도 하고..."
"나머지 부분을 알고 있어?!"
"글쎄요, 겨우 몇 번이나 들은 정도라서... 기억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흥얼거리기라도 해 봐!" 쉰 목소리로 외쳤다.
트와일라잇은 얼마간 벙쪄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까요. 음... 시작합시다." 특기할 정도로 깊고 긴 숨을 들이마신 뒤, 트와일라잇은 내 요구를 들어주었다. 콧노래일 뿐이지만 음 하나하나를 건드리며 지나가는 곡조는 근엄한 학자라도 화원을 따라 덩실덩실 춤을 추며 그 근원을 찾으러 다닐 듯했다. 물론 이 또한 파편화되고 군데군데 이가 나간 소리임은 분명했다. 그렇다고 진실된 마음에서 비롯된 그 소리의 아름다움이 부정되는 것은 아닐 터이다. 흥얼거리던 소리가 끝이 나고, 연회장에 가득한 연주 소리 속에서 불안한 눈치로 웃으며 트와일라잇이 말했다. "으음...... 도움이 되었을까 모르겠네요.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 들려 주셨던 후로는 한 번도 다시 듣질 못해서—"
힘차게 리라를 퉁겨서 그녀의 말을 막았다. 종전의 곡조가 반복되었다. 느리지만 힘찬 공명이 뒤를 따랐다. 깊고 깊은 협곡 속으로 날아 들어가는 듯 숨이 거칠어졌다. 내 염동력은 곡조가 스스로를 연주해 나가는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심연 깊은 곳에서 측량할 수 없이 밝은 빛이 솟구치는 느낌이 들었다. 이 곡이 어스름 진혼곡이라는 것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시청 청사 내부에 고인 공기에 불이라도 붙은 듯한 느낌에 네 다리가 균형을 못 잡고 비틀거렸다. 온 몸에 불이 붙은 것 같았다. 연회장 내부의 형상이 다시 제 모습을 갖추어 내 망막으로 파고들었다. 눈물이 흘러 아래로 흘렀다. 심호흡하며 몸을 돌린 찰나, 거기 모인 만인의 모습에 나는 당혹했다.
스쿠틀루가 밀키 화이트의 품에 안겼다. 럼블이 스위티벨과 춤을 추고, 핑키 파이가 죽을 만큼 지루해 죽겠다는 표정을 굳이 숨기지 않고 있던 레인보우 대쉬 주변을 빙빙 돌며 혼자 웃어댔다. 애플잭이 봉봉과 더피를 데리고 농담 따먹기를 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래리티와 플러터샤이가 제코라의 외국 예복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며 연신 감탄했다. 캐러멜과 윈드휘슬러가 입을 맞추었고, 암브로시아와 모닝 듀가 서로 뺨을 비비며 다른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밀어蜜語를 나누었다.
우레와 같은 환호가 귀를 때렸고, 나는 리라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두 앞발굽으로 입을 가린 채 나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더는 연회장에 있고 싶지 않았다. 전부 안개 속에 갇힌 듯 흐릿하고, 괴롭기만 할 뿐이었다. 첫 번째 울음이 격발된 총탄의 폭음처럼 밀려나왔고, 그 뒤를 따라 숲 전체가 쓰러지는 듯한 두 번째 울음이 입 밖으로 쏟아졌다. 달달 떨리는 발굽에 얼굴을 묻었다.
트와일라잇이 다리를 뻗어 나를 붙잡고 끌어안는 감각이 느껴졌다. "공주님 맙소사. 대체 무슨 일이죠?" 큰 목소리로 묻는 트와일라잇의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왔는데, 또 아득히 먼 곳에서 나오는 것 같기도 했다. 명백한 사실을 말하자면, 트와일라잇이 내게 건넨 그 낭랑한 목소리 때문에 울음이 더 크게 밀려나왔다는 것뿐이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왜 갑자기 우시는지 전혀 모르겠어요!"
울음에 목이 메이고 딸꾹질이 나왔다. 숨을 고르는 데 한참이 걸렸다. 눈을 깜박여 세상을 다시 보자 세상 모든 것들이 내가 아직 살아 있음을 분명히 증거하는 각종 상징들을 목에 걸고 그 흉물스러운 자태를 한껏 과시하고 있었다. 나는 트와일라잇의품에 안겨 이따금 꿈틀거리며 꺽꺽대는 소리로 겨우 말했다.
"그자가, 그자가 맞았어." 나는 흐느꼈다. "틀린 말이 아니었어. 명백한 사실이었다고. 전, 전부 다. 차라리......" 급히 들이마신 들숨이 허파를 찔렀다. 별들이 저마다의 차갑고 저주받은 간극 사이에서 무심히 반짝였다. "차라리, 돌이 되는 게 나았을 텐데......"
"예?!" 트와일라잇이 도저히 뭐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한기의 소용돌이보다도, 그 두 눈에 담긴 연민이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누가 옳았다는 거죠? 무슨 말씀인지..."
"저기요, 하나만 물읍시다." 트와일라잇의 어깨를 붙잡고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녀를 마주보며 물었다. "오늘이 며칠이죠?"
"네?"
"며칠이냐고요!" 결혼식 이후 하객들이 누릴 수 있는 각종 유희, 이를테면 흥겨운 음악이나 웃음소리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말해요 빨리!"
"그... 10월 29일인데요!" 트와일라잇이 입술을 떨며 대답했다. "모르셨어요?"
급한 숨을 들이마시는 입을 발굽으로 틀어막았다. "공주님, 맙소사." 나는 말을 더듬었다. "한 달이 거의 다 지났잖아. 내가 진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기, 레드하트 선생님 한 번 뵙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니..." 이를 악물며 고개를 흔들었다. 눈물이 흩어져 떨어진 자리에서 새로이 눈물이 솟아났다. 불 같은 한숨과 함께 나는 말했다. "아니, 아니, 전혀, 그렇지 않아...... 레드하트는 별 도움 안 돼. 당신도 별반 도움이 안 되고. 그 누구도 날 도울 수 없어. 두 분 공주님이 오셔도......" 입에서 헉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렇지 참! 무슨 수를 써서든 셀레스티아 공주님, 루나 공주님을 만나야겠어. 만나뵙고 말씀드려야 해. 두 분께서도 그 여자의 일부를, 세상이 버린 황혼의 공주 아리아의 일부를 공유하고 계시니......"
트와일라잇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스파이크를 향했다. 스파이크는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그럼 진혼곡이 두 분께도 작용할까?" 몸뚱이가 이미 과호흡 직전까지 치달아 있었지만, 나는 혼자 계속 중얼거렸다. "디스코드에겐 통했는데, 두 분께도 통할까가 문제로군. 일단 공주님들께선 궁창을 초월해 공명하는 정수를 공유하고 계시니까 통하긴 할 거야. 통해야 해......"
"디스코드요?" 트와일라잇이 말했다. 얼굴 근육이 살짝 긴장되어 있었다. "세상에나. 그 자식이 봉인을 깨고 뛰어나왔을 때 대체 어디 계셨던 거죠?" 그러더니 내 어깨에 한쪽 발굽을 얹었다. "아직 다 회복되지 않았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
"회복이 돼?!" 트와일라잇의 발굽을 단단히 붙들고 두 눈을 부릅뜬 채 얼굴을 들이밀었다. 놀라 눈물 맺힌 눈을 쏘아보며 말했다. "아무것도 회복되지 않았어. 전부 묻혔고! 전부 다 끝장났다고!" 울음이 솟구치며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남은 건 나 하나......" 급한 숨을 들이마시고 말했다. "잘 들어, 트와일라잇. 기억해야만 하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보다, 더, 더 끔찍한 건 없어."
"뭘 기억한다는 거죠?"
침을 삼키며 칼같이 대답했다. "모든 것을."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이건 무슨 의미—"
"넌 셀레스티아 공주님 역할을 했어." 숨을 들이키며 조용히 말했다. "루나 공주님 역할은 문댄서 거였지. 나는 스타스월이었고. 우리 셋은 서로 어울려 웃고, 노래하고, 출출하면 도넛 사다 먹으면서 유년기를 보냈어. 네게 큐티마크가 생겼을 때 문댄서는 분홍 가방을 선물했어. 나는 그리폰식 점성술 책을 사다 줬고. 얼마나 즐겁게 웃던지, 별빛 속에 쏟아지는 작은 종의 소리 같았다니까. 너처럼 똑똑하고, 재능도 있는데다......" 쓴웃음과 함께 말을 마쳤다. "......예의바르기까지 한 녀석과 친구라는 게 나도 너무 좋았고."
트와일라잇이 당혹감과 눈물이 뒤섞인 눈으로 나를 보았다. "확실히... 그리폰 점성술에 관한 책을 갖고 있긴 했는데. 어디서... 어디서 구했는지는 기억이 없......"
"그런 기억을 짊어지고 산다는 거야." 나는 말했다. 울음이 다시 올라와 얼굴이 일그러졌다. 여기저기 엉킨 갈기를 쓸며 말했다. "다른 예를 들면, 아리아 공주라거나." 침을 삼키고 울음에 젖은 목소리를 짜냈다. "그 사람이라거나." 나는 울며 눈을 감았다. "아마 속세의 모든 고통과 평화가 동시에 증발할 때까지 그 사람을 절대 잊진 못하겠지. 가야 할 길 곳곳에 구멍이 수도 없이 뚫려 있는데, 길을 가려거든 그 구멍 하나하나에 전부 빠졌다가 밑바닥에서부터 기어 올라와야 해. 그러면서 나였던 것들을 조금씩, 조금씩 잃게 되지. 예를 들어 볼까...... 태피스트리에서 실 하나씩을 계속 뽑아내는 거랑 비슷하다고 보면 돼. 결국 머지않아 선율로만 남게 될 운명인데, 그 때가 될 때까지도 그 노래에겐 나를 구원할 힘이 없을 터......"
"구원이요?" 트와일라잇이 말했다. "노래는 또 뭐죠? 제 생각에는—"
"진혼곡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 트와일라잇의 발굽을 가만히 쓸면서 말했다. 나는 울며 웃었다. "하지만, 너는 아니야."
"제가요? 제가 뭘 더 할 수 있죠?"
"잘 들어." 울음이 잦아들면서 숨결이 함께 제자리를 찾아 차분하게 흘렀다. "이 얘기를 들어야 할 사람이 있어. 내가 여기서 털어놓은 모든 사실들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더라도, 그 사람에게 전달해야 해. 내가 말한 것들이 전부 시들어 사라질지라도 내겐 이걸 말해야만 할 이유가 있어. 이게 내가 줄 수 있는 전부니까."
트와일라잇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보는 시선에 연민과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좋아요." 마른침을 삼키며, 그녀가 말했다. "말씀하시죠."
얼굴에 떠올랐던 미소가, 트와일라잇 뒤편의 밤하늘로 시선이 옮아가며 사라졌다. "그 사람을 처음 본 건 13일 전......"
한 줄기만 잿빛인 사내의 갈기가 오후 햇살을 튕겨냈다. 호박색 솜털이 가을이 되어 서서히 그 색을 바꿔 가는 잎새와 잘 어울렸다. 기차역을 빠져나오는 사내의 걸음이 개선식의 그것이기라도 한 양, 그를 둘러싸고 가을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사내는 혼자가 아니었다. 이제 막 어린애 티를 벗은 여자애 하나가 그를 따랐다. 아이는 어스 포니로, 피처럼 붉은 갈기와 꿰뚫어보는 듯 날카로운 눈빛으로 번득이는 벽안이 눈에 띄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포니빌에 오는 건 싫었는지, 아무 표정 없는 얼굴에 서슬 퍼런 도끼눈을 하고 있었다. 목에는 카메라를 하나 걸고 있었는데, 그 위의 머리는 등에 느슨하게 걸어 둔 가방을 흘긋흘긋 보거나 앞다리에 찬 시계를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내가 그 꼬마를 관찰한 것은 10초도 되지 않는다. 내 시선을 잡아끈 것은 오히려 그 옆의 사내였다. 초췌하기 짝이 없는 표정과 굳게 다문 입, 지칠 대로 지쳐 풀어진 사지 아래로 겨우 꿈틀거릴 뿐인 늘어진 힘줄. 벨벳으로 두껍게 짠 가방 속에 빈 화폭이 여러 개 들어 있었다. 적당한 풍경만 보이면 바로 자리 깔고 앉아서 그림을 그릴 것 같은 인상이었는데, 어딜 봐도 굳이 붓을 휘둘러 화폭에 옮기는 수고를 들일 만한 풍경은 없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둘은 외지인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당시에는 하루에 기차역을 오가는 사람만 수백 명이었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일종의 성지순례 같은 것이 전국적인 유행으로 번지던 차여서, 주말에 포니빌을 찾는 관광객이 세 배로 늘기도 했으니까. 그렇기는 한데, 유독 그 둘에게만 신경이 쓰였다. 둘이 느릿한 걸음으로 동네를 돌아다니다 호텔을 잡아 들어가는 모습을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자니 갈비뼈를 부수고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비명을 지르고도 싶고, 흐느끼고도 싶은데 또 깔깔대며 웃고 싶기도 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던 중, 등 뒤에서 어떤 여자가 재잘거리며 말했다. "하트스트링스? 뭐 문제라도 있나요?"
당혹감에 몸을 돌려 뒤를 쳐다보았다.
직전까지 아주 진지한 대화를 나누기라도 한 듯 꽤나 가까운 거리에 웬 여자 하나가 서 있었다. 다중초점렌즈를 사용한 안경 너머로 여자의 남색 눈이 가늘어졌다. 녹색 애스컷 타이가 가을바람을 받아 흔들렸다. "방금 그게 마지막 질문이었는지 확인해야겠더군요. 말씀하시다 갑자기 그만두셔서."
"제가..." 골치 아프게 됐다는 심정으로 여자를 곁눈질했다. 두 눈이 여자의 행색을 위아래로 훑었다. 잿빛 갈기와 세어 가는 솜털. 푸른 리본을 묶어 봉인한 두루마리 모양의 큐티마크. "제가... 선생님께... 뭘 묻고 있었다고요?"
여자가 눈썹을 치켰다. "그래요. 확실히 뭘 물어 보려고 한 것 같은데."
절로 입이 헤벌어졌다. 멍한 눈초리로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입가로 발굽을 가져가더니 헛기침을 해 목을 닦고,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셀레스티아 공주님에 관해서 물어 보고 싶은 게 있다고 하셨지요. 혹시... 공주님을 기리는 기념비 건립 사업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셀레스티아, 공주님..." 갈피를 잡지 못해 떨리는 몸으로 숨이 빠져나오며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없는 말의 파편을 꺼냈다.
"혹시 왕국 의회Royal Council에 탄원서를 제출하시려는 건지요? 공주님께서 바로 답변을 주실 수 있을 것 같진 않아요. 의회 쪽에서 공문을 보냈는데, 디스코드가 전국적으로 끼친 피해가 어느 정도나 되는지 공주님께서 직접 돌아보시느라 순방 일정이 꽉 차 있다고 하더군요."
"디스코드..." 마른침을 삼키며 근처를 죽 훑어보았다. 투박한 건물 위에 얹은 초가지붕이 금빛으로 반들거렸다. 어딘가로 향하는 사람들과, 서로 포옹하는 사람들, 즐거이 잡담하며 신나게 웃어대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 한가운데 커다란 나무의 속을 파내 건물로 바꾼 나무집이 하나, 컵케익 모양 굴뚝을 여러 개 세워놓은 화사한 식당이 하나 있었다. "아리아 공주..."
"아리아?" 여자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 정말 괜찮으신 거 맞으시죠?" 여자가 말했다. "혹시 어디 안 좋은 데라도 있나요? 여기서 몇 블록만 가면 훌륭한 병원이 하나—"
"공주님들..." 불현듯 찾아온 현기증에 몸이 비틀거렸다. "공주님들을 뵈려던 이유가 뭐였지."
여자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저도 그걸 좀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고대의 강대한 적인 디스코드가 돌아왔어도 끝내 조화를 꺾지는 못했음을 널리 전하고, 또 기리고자 특별한 연주를 준비하신 것 같은데요. 음악 하시는 분 맞죠?"
"그게..." 내 행색을 가만히 살폈다. 칙칙한 잿빛 후드로 몸을 감싸고, 등에는 가방을 하나 지고 있었다. 가방 안에는 금속인지 뭔가 묵직한 게 들어 있었다. 뿔에서 뻗어나온 마력장 안으로 현이 느껴졌다. "음악을... 연주해야 하기는 해요..." 입을 벌려 말하고 있기는 했지만, 거기에는 말하고자 하는 요지도,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하는 열망도, 말해져야 할 그 무엇도 들어 있지 않았다. 머뭇거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조금 전 스쳐 지나간 두 이방인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선명히 떠올랐다. 무기력해 보이던 사내와, 잿빛 선이 죽 그어진 갈기......
얼마간 침묵이 이어진 끝에, 여자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문을 열었다.
"뭐 그래요. 좀 나아지면 언제든 다시 찾아오셔도 좋아요. 그렇기는 해도, 오늘 하루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것 같지만." 여자가 넥타이 자락을 매만져 정돈하고 시내 한가운데 우뚝 선 원통형 건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환영회 준비가 거의 다 끝나 가고 있어서 말이지요."
"환영... 회라뇨...?"
"어머, 그야 물론 조화의 여섯 원소들이지요!" 여자가 활짝 웃었다. "캔틀롯 왕궁에 가 있었는데, 내일 밤에 돌아온다고 하지 뭔가요! 전국 각지에서 이 기막힌 개선식에 참석하려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모여들고 있답니다! 선생님도 여기 참석하실 생각으로 오신 줄 알았는데 의외군요!" 여자가 아파 오는 머리를 발굽으로 슥슥 문질렀다. "아... 그 말은 즉 각종 유관기관고 고관대작들을 모시고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얘기지만요. 그 다음엔 결혼식이고, 그러고 나면 악몽야 축제고요. 공주님 맙소사! 올해도 악몽야 축제라니! 이제 더 셀 머리도 없는데......"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시가지 쪽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은빛 투구를 쓰고 칠흑 같은 솜털을 두른 검은 알리콘의 형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환영 너머로 울음과 어둠으로 치장한 별들이 무심하게 반짝였다. 몸이 끔찍한 추위에 떨고 있음을 지각한 것은 그 때였다. 이가 딱딱 부딪치기 시작했다.
"그걸로 끝나면 말도 안 하지요. 올해도 난방절은 돌아올 테니까 그것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은 도저히 하고 싶지조차 않답니다! 가뜩이나 디스코드를 물리친 다음이니 평소보다도 시끌벅적하고 성대한 축제가 될 게 뻔하니까요!" 여자가 이쪽을 보고 말했다. "그러니 제가 이만 자리를 파하고 돌아가더라도—" 여자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저기요?"
나는 이미 저 멀리까지 달음박질치고 있었다. 공황에 빠진 숨이 불쑥불쑥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지나쳐 간 각종 가게들과 호텔들이 혹한의 공기 속으로 희미해지며 사라져 갔다. 눈을 깜박이는 짧은 순간마다 지친 행색의 사내와 붉은 갈기의 꼬마가 시야를 스쳐 지나갔다. 겨우 환영을 떨쳐낼 정도로 멀리 달린 뒤에야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떠다니는 정체 불명의 노래를 붙잡고 울며 고민할 수 있었다. 생각은 생각되어지지 않았고, 그렇다고 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마을 북쪽으로 가야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때는 내가 낼 수 있는 최고 속도로 북쪽을 향하여 달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발에 불 붙을 정도로 질주하다 언뜻언뜻 스쳐 지나간 사람들이 저마다 발굽을 흔들며 인사했다. 낯선 사람의 무리가 파스텔톤으로 번지며 그 경계를 잃고 또 뒤섞였고, 거리의 소리와 내가 느끼는 혼란이 가세했다. 추위가 그 정도를 더해 갔다. 나 자신의 광기와 발버둥, 빠져 죽을 것 같은 괴로움을 헤치고 계속 달렸다. 그저 뭐라도, 그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 눈에 띄기만 해 달라는 심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억의 현관 너머로 비치던 모습이 눈에 담겼다. 그 모습은 차라리 뇌에 박힌 가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뇌리에 깊숙히 남아 있었다. 숲이 우거진 흙길을 따라 올라가면 나오는 조그마한 통나무 오두막이었다. 집 안으로 들어섰다. 문은 별다른 저항 없이 열리며 나를 받아들였고, 그 안에 감추고 있던 수십 개 악기를 걸어놓은 벽면과 졸졸졸 따라와서 내 다리에 대고 제 꼬리를 문질러 대는 털뭉치 하나가 있는 기묘한 내부를 내보였다.
쾅 소리와 함께 문을 닫고 털덩어리를 지나쳐 걸었다. 나는 침대 모서리에 앉아 떨리는 다리로 리라를 가슴팍에 끌어안은 채 마력장을 더듬었다. 두려움이나 고통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관심 있는 것은 오직 그 곡에 남아 있는 힘뿐이었다. 좁은 집의 벽 위로 악보가 서서히 떠오르는 듯싶었다. 나는 불을 지피는 여행객처럼 현을 뜯었다. 얼마간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진혼곡을 다시 연주할 수 있었다. 한기가 갈라지며 그 사이로 사라졌던 기억들이 홍수로 밀려오는 탁류처럼 쏟아졌다.
몸이 움찔했다. 너무나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진실을 알아 버린 사람의 표정이 으레 그러하듯이, 내 얼굴도 엄청나게 구겨지고 찌푸려지며 피부가 당기는 느낌을 만들었다. 나는 침대에 그대로 쓰러지며 몸을 웅크리고, 울음을 밖으로 쏟아내지 않으려 입술을 짓이기듯 씹으며 용을 썼다. 여기는 포니빌이었고, 나는 이곳에서 일 년 정도를 보냈다. 디스코드가 봉인을 깨고 나타났고, 나는 그자와 수수께끼 대결을 벌였다. 나는 이겼지만 졌고 졌지만 이겼으며, 조화의 원소가 디스코드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내 기억은 나를 버리고 사라졌으며, 이를 되돌릴 방법은 오직 하나, 앨러배스터 코멧후프가 정신을 차리게 해 준 곡이자 아리아 공주가 만들어낸 환상의 베일을 찢어 가리운 진실을 드러내는 곡이며 혼돈의 군주가 세상을 부수는 것을 그만두게 한 곡을 연주하는 것이었다.
선율의 잔향마저 스러지고 난 뒤, 내 쉽게 감동하는 성질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가, 곳곳이 찢겨나가더니 물거품처럼 산산이 뜯겨나갔다. 떠오른 거품 하나하나가, 갈기 위에 잿빛 줄무늬 하나가 그어진 한 사내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 형상이 나를 향해 달려 들어와 내 안으로 스며들었고, 나는 출산하는 임산부처럼 신음했다. 아직 몸 속에 흘려보낼 눈물이 남아 있을 거란 생각은 못 했었다. 빌어먹을 한기가 내 전신의 신경을 전부 마비시키기라도 한 줄 알았었다. 나는 틀렸다. 진혼곡은 내게 기억을 돌려주었지만, 기억을 되찾고 나자 이보다도 더 벌거벗겨져 야생에 내버려진 듯한 기분이 들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 울음으로 밀려나온 발작이 멈췄다. 나는 아주 깊은 심연에서 급히 헤엄쳐 올라온 사람처럼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시선이 방 건너편으로 향했다. 오두막 내부는 고독하면서도 너무나 익숙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벽면에 수도 없는 악기가 걸려 있었는데, 기나긴 일 년 동안 해 온 연구와 탐구의 기념품이었다. 나는 그 때 어스름 진혼곡이 내 모든 기억을 되돌려 주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까 두려워서, 내 연구의 궤적을 자세히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더 빨라지고 있어." 중얼거려 말했다. 조그마한 무언가가 침대 위로 훌쩍 뛰어 올라왔다. 내 대화 상대가 누구였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앨이 야옹, 하고 울며 이쪽으로 오더니 수염 난 뺨을 내 얼굴에 대고 문질렀다. 리라를 잡고 있던 한쪽 발굽을 바들바들 떨며 들어올려 고양이를 가만히 다독이며 말했다. "내가 언제... 언제 나갔더라..." 밝은 빛이 어른거리는 창가를 내다보았다. "네 시간 전인가? 아니면 다섯 시간 전? 분명 내가 나갔을 때는 아침이었는데." 사지가 바르르 떨렸다. 몸을 떨며 리라를 끌어안았다. "시장님 뵈려고 시내 나갔던 것까진 기억나는데, 그러고 나서... 다 까먹었었지? 분명 시내 나가긴 했었어. 그 다음에... 그 다음에는......"
역에서 나와 거리를 걷던 사내와 어린 여자의 그 빌어먹을 형상이 다시 시선에 어른거려서 눈가가 움찔했다. 하나의 솜털은 칙칙했고 다른 하나는 밝았다. 그 위로 햇빛이 반들거리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이쪽에 시선 한 번 준 적이 없다. 적어도 내가 그들의 시선을 눈치챈 일은 없다. 내가 달아난 것은 그것 때문인가?
"시장님 말씀이..." 그 생각에 골몰하기 싫어서였는지 몰라도, 나는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앨이 내 옆자리 푹신한 곳에 올라앉더니 몸을 말아 작은 털공 모습으로 그루밍을 시작했다. 나는 중얼거리며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 요사이 바쁘시다고 했지. 모르긴 몰라도 비망록조차 전부 확인하지 못하셨을 수도 있겠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겠지만 시장님도 할일이 태산인 것 같았고. 이번처럼 포니빌에 사람들이 이렇게나 운집한 건 본 적이... 없는데..."
급한 숨이 허파를 찔렀다. 오두막이 한층 더 춥게 느껴졌다. 한기가 뿔에서부터 꼬리까지 관통해 지나갔다. 마력장 위로 녹색 불이 어른거렸다. 나는 당혹했다. 나도 모르게 품에 안은 리라로 진혼곡을 다시 연주했다.
"사태가 심각해졌어, 앨." 진혼곡의 잔향 속에서 흐느낌을 참는 소리가 북받쳤다. "뭐라도 기억하려면... 아주 작은 거라도 기억하려면..." 몸이 떨렸다. "진혼곡을 계속 연주해야 해."
앨이 피곤하다는 듯 이쪽을 보더니 낮은 소리로 가르릉거렸다.
앨을 깊이 안고 얼굴을 마주 비비며 눈물을 닦아냈다. "이제 진혼곡을 연주하기 전에는 시내도 마음대로 나갈 수 없어. 엉뚱한 장소에서 뜬금없이 리라를 꺼내들고 연주를 시작하면 분명 병신처럼 보이겠지만 상관없어. 핑계는 만들면 그만이니까. 그냥 웃어넘기면 그만이거든. 언제 어디서든 어스름 진혼곡을 연주할 수 있게 준비하고 다니거나, 셀레스티아 공주님의 가호를 비는 수밖에 없다는 거야......"
오두막에 죽음 같은 침묵이 감돌았다.
나는 다시 말했다. 어린애가 칭얼대는 듯한 소리가 나왔다. "셀레스티아 공주님, 제발 도와 주세요. 아리아의 자매시라면 그 정도는 해 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 감각이 없는 다리를 움직여 벽난로 앞에 섰다. "디스코드가 나를 멀리 순간이동시켜 버리기 전에 그랬지. 나를 아리아에게 보내려면 아리아와 다른 두 자매가 공유하는 노래를 '가로채야' 한다고. 디스코드 이 자식은 대체 무슨 말을 하려던 거야?" 땔감 몇 개를 들어올려 난로에 던졌다. 딱딱 소리와 함께 따뜻한 온기가 피어났다. "궁창의 야상곡이 아리아와 산 자들의 세상을 격리하고 있지만, 세 자매의 연결은 그 격리를 무시하고 존재한다는 의미인가?"
어슬렁거리는 걸음으로 고양이 사료 포대를 놓아둔 쪽으로 향했다. 뿔을 밝혀 앨의 밥그릇을 천천히 채웠다. 그와 동시에 고양이가 침대에서 뛰어내려 밥그릇 옆으로 가더니 밥그릇이 채워지기를 느긋하게 기다렸다.
"야상곡은 여러 갈래로 나뉜 위대한 어머니의 성가 파편 중에서도 보다 작고, 상대적으로 최근에 떼어낸 것." 일을 마치며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사료 포대를 제자리로 돌려놓고 허공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조화의 원소보다는 강력한 권능을 갖고 있고, 오래되기도 더 오래된 거란 말이지." 나는 이때부터 이마를 잔뜩 찌푸리고 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가니기 시작했다. "근데 또 셀레스티아 공주님을 비롯해서 삼라만상이 빚어진 시기보다는 또 후대란 말이야. 결론적으로 알리콘 자매들의 정수는 야상곡보다도 고대의 존재, 보다 원형에 가까운 노래란 얘긴데, 이 야상곡이 셀레스티아 공주님과 루나 공주님이 아리아의 존재를 알지 못하게 막고는 있지만 이 셋의 연결을 끊어놓지는 못한다는 거군. 셋이 공유하는 노래가 세 자매를 연결하고 있다면 그 연결을 이용해서 이름 없는 자들의 땅, 허공을 떠도는 아리아의 옥좌실 내부에 바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분명 있을 거고. 문제는 이 가설이 사실이라고 가정하더라도 전에 셀레스티아 공주님을 배알했을 때는 왜 그렇게 되지 않았느냐가 설명되지 않는다는 건데. 분명 한 번 배알하기는 했지만 패러스프라이트 사태가 터졌지. 아으 젠장... 대체 그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거람? 기억해 내고 싶은 걸 기억해 낼 수 있기만 하면 참 좋으련만......"
오두막 안이 더 어두워져서 나는 자리에 얼어붙었다. 창 밖을 내다보았다. 입 밖으로 숨이 빠져나갔다.
아무 것도 없었고 오직 별빛뿐이었다.
귀가 움찔했다. 몸을 돌려 벽난로를 쳐다보았다. 땔감은 다 타 버린 지 오래였고, 난로에는 재와 꺼져 가는 잔불만 일렁였다.
야옹 소리가 들렸다. 침대를 돌아보자 앨이 네 다리를 쭉 펴고 서서 이쪽을 이상한 눈치로 쳐다보고 있었다. 보고 싶지 않았지만, 마룻바닥에 놓아둔 앨의 밥그릇을 내려다보았다. 텅 비어 있었다.
숨이 가빠 왔다. 자리에 무릎을 꿇으며 쓰러지는 대신, 침대로 기어가다시피 다가가 앨을 가까이 안았다. 고양이는 내 다리에 안긴 것이 퍽이나 마음에 들었는지 편안히 몸을 기대고는, 내가 뺨을 비벼주며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려 애쓰는 와중에도 순진한 목소리로 가르릉거리는 소리를 냈다. 오두막 밖에 짙게 깔린 침묵에 귀가 멀 지경이었다. 잿빛 줄무늬가 그어진 한 사내의 기억이 다시 솟았다. 나는 떠오른 기억을 흩으려 용을 썼다.
"앨러배스터, 나 도저히 못 해먹겠어요. 정신이 나가는 걸 감당할 수가 없어요. 내가 가진 것 중 그나마 가장 도움이 되는 게 그거였는데, 그나마 견디고 살 수 있었던 게 그것 때문인데." 나는 훌쩍이며 축축해진 눈을 꽉 감았다. 나는 무너져 가는 어둠을 향해 중얼거렸다. "당신이 겪어야만 했던 일이 이렇게나 빨리 닥쳐올 줄 알았더라면, 어떻게든 준, 준비는 했을 텐데. 더 연구하고 더 궁리했을 텐데. 더 빨리 곡을 완성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아... 아..."
고양이의 뺨에 난 수염이 눈물에 젖은 얼굴을 간지럽혔다. 느긋한 가르릉 소리가 들렸다.
우는 것도 몸의 일이라, 지친 몸은 더 울지 못해 조금이나마 진정했다. 이름 없는 자들의 땅에도 다녀왔는데. 혼돈의 첨병 드라코네쿠스의 모진 고문도 견뎌냈는데. 내가 걸어온 길을 그토록 쉽게 내버리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 있었다. 앨러배스터는 천 년을 그렇게 견디면서도 끝내 꺾이지 않았는데, 2년도 채 채우지 못한 내가 저주에 굴복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 아닌가.
"시장님과 다시 얘기해 봐야겠어." 앨의 쫑긋거리는 귓가에 대고 말했다. "공주님들께서 다음 번에 포니빌에 행차하시는 게 언제인지 알아야 해. 또 무슨 일이 터지기는 하겠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세상이 두 쪽 난다면 도로 붙여놓겠어. 셋을 연결하는 노래가 산산이 조각나 무너진다면 처음부터 다시 짜맞추면 돼. 아리아를 직접 만나야 해. 지금 시점에서 유일한 희망은 위대한 어머니께서 남기신 성가의 다른 조각을 가진 공주님들의 협조를 구해 아리아와 대면하는 것 하나뿐이야."
앨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이불에 쓰러지듯 누웠다. 눈을 감고, 잠들 때까지 음과 음 사이마다 절박한 심정을 담아 가사를 붙여 진혼곡을 흥얼거렸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전부 다 기억하고 있을 거야. 내 이름이 뭔지, 내 친구가 누군지,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기억할 거야. 기억하고 있을 거야."
별빛이 희미해지고, 숲의 형상이 무너져 사라졌다. 어둠이 모든 시야를 뒤덮었다.
"기억할 거야... 기억할 거야... 기억..."
쓸쓸한 마음과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고스란히 드러낸 사람이 나를 마주보았다. 이맛살을 찌푸리자 그 사람도 얼굴을 찌푸렸다. 가벼운 한숨을 내쉬자 그 사람의 입가도 움직였다.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자 그 사람도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어떤 가사가 떠올랐다. 가사가 실린 곡조가 깊은 무의식 속에서 떠올랐다. 거의 본능적으로 가방을 열어 평범한 리라를 꺼냈다. 상대방은 나를 이상한 사람 보듯 쳐다보았다. 가슴이 하도 뛰어서 갈비뼈를 부수고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머릿속 깊은 곳을 방황하던 곡조가, 전문가 특유의 우아한 스타일에 맞춰 연주로 변환되었다.
어스름 진혼곡이 가을 바람을 타고 솟았다. 상대방은 당혹스럽다 못해 꺼림칙한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낸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의 밝은 호박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뿔이 마력을 받아 청록색으로 빛났고, 그와 비슷한 색깔을 한 갈기가 떨리는 목 뒤로 솟아올랐다. 나는 어떤 가게의 진열창 앞에 서 있었다. 나는 거친 숨을 애써 달래며 뒷걸음쳤다. 몸을 움찔거리며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아침이었다. 어쩌면 오후였을지도. 잘 모르겠다. 해는 거의 중천에 올랐고, 지평선의 양극단은 안개에 가리워 보이지 않았다. 주변의 소리와 지나는 형상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들과 웃음소리로 나는 포니빌을 다시 인지할 수 있었다. 내가 떨어진 무저갱에서 이만큼이나 밝고 활기찬 곳이라면 그곳밖에 없을 테니까. 그렇지만 여전히 사고는 사고되어지지 않았다.
내가 집을 떠나 시내로 내려온 것은 어디에 볼일이 있어서, 아니, 누군가에게 볼일이 있어서였다. 시청 건물의 둥글고 높은 형상이 일종의 목표처럼 머리에 떠올랐다. 쪽빛 눈동자와 잿빛 갈기, 녹색 넥타이가 생각났다.
"시장님..." 침을 꿀꺽 삼키며 중얼거려 말했다. 창턱 너머에 피어난 꽃들에 잠시 눈길이 향했다. 튤립을 보니 대양처럼 푸른 두 눈이 생각났다.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릴 때, 위장이 꼬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장미도 피어 있었다. 혼돈의 노란 원형무늬 위를 떠다니는 붉은 눈동자가 떠올랐다. 부르르 떨리는 몸에서 솟구친 한기가 등골을 타고 흘러 몸이 굳어 버렸다. 발굽으로 얼굴을 문지르고, 씀바귀를 씹은 것처럼 떠오른 기억들을 흩으며 숨을 골랐다. "셀레스티아 공주님, 루나 공주님..." 이를 뿌득 갈며 진열창을 등졌다. "공주님들이 포니빌에 왕림하시는 날짜를 알아내야 해. 배알하고 말씀을 드려야 해. 지금은 그때랑 달라. 야상곡의 비밀을 더 많이 알고 있으니까 이번에는 다를 거야. 두 분 공주님도 마찬가지일 터고..."
거친 숨 사이로 잿빛 줄무늬가 섞인 갈기를 한 사내가 기차역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는 사라지고 없었고, 나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계속 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나는 혹한에 얼어붙은 유령처럼 시내를 걸었다. 머리 위에 떠오른 태양은 밝게 빛났지만, 나는 어느 작은 곳 하나조차 얼지 않은 곳이 없었다. 후드 재킷의 소매를 잡아당겨 최대한 열을 보존했다. 내가 계속 이러고 살았단 말인가? 15개월이나 이 미친 짓거리를 하며 살면서도 제정신을 유지했다고?
좌우에서 소리가 들렸다. 한쪽에서는 선더레인이 한 무리 페가수스들과 어울려 잡담을 주절거리고 있었다. 반대쪽에선 여자애 셋과 남자애 하나가 빨간 수레를 타고 마을을 돌아다녔다. 머리 위로 집배원이 날았고, 귓가에서는 먼 옛날의 플루트 연주곡의 잔향이 울었다. 흩어진 생각들은 뒤에 남겨두고 떠나려 했지만, 트와일라잇 스파클과 문댄서가 어느 작은 식당에서 소리치며 다투던 소리만 떠오를 뿐이었다. 순간 심장이 멎었다. 스트레이트 에지의 몸뚱이를 겨냥한 몽둥이를 띄워 올리고 있던 내 모습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여자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악문 이 사이로 거친 숨소리가 삐져나갔다. 눈을 굳게 닫으며 걸음을 늦추고, 심호흡을 몇 번 한 뒤 비틀거리며 계속 걸었다. 나는 낮은 소리로 혼자 중얼거리며 잔디 위를 눈으로 훑었다. "내 이름은 라이라 하트스트링스. 캔틀롯 출생이며 왕립 영재 유니콘 학교에 진학해 역사학과 음악이론을 전공......"
얼룩말 하나가 안전모를 쓴 어스 포니 하나에게 발굽을 흔들며 인사하더니 서로 즐겁게 대화하며 나를 스쳐 지나갔다. 그들의 이름이 입술에 걸렸다. 마음에 돋은 칼이 그 이름을 베어냈다. 나는 계속 걸었다.
"내 이, 이름은 라이라 하트스트링스. 내 출신지는... 캐, 캔틀롯. 왕립... 왕립..."
머리 위로 한 무리 먹구름이 모여들었다. 햇빛에 눈이 부셔 찡그린 눈으로 올려다보자, 무지갯빛 갈기를 한 페가수스가 기상관리팀 1개 조를 이끌고 날아다니고 있었다. 왼쪽에서 밝은 새소리가 짹짹댔다. 시선을 돌리니 노란 페가수스가 한 무리의 새들을 모아 합창단을 만들고, 본인은 지휘를 하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대단한 행사가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이런 행동이 일상을 구성하는 한 부분인가? 내가... 그런지 아닌지 알기는 했던가? 저들과 함께 행사에 참여한 적이 있었던가? 내 친구, 내 가족, 내 연인은 대체 어디 있는가?
내게는 가야 할 곳과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시청 청사에 가야 했다. 시장님을 만나야 했다. 진혼곡 연주는 그때까지 미뤄도 무방할 것이다. 그 권능이 다하기 직전이 아닌 시점에 세상이 잊은 연주곡을 연주하는 것이 두려웠다. 그럼에도 세상에는 나 이상으로 고통받았던 한 유니콘 사내가 있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무엇인가? 내가 그를 만난 적이 있었던가? 그는... 그가 잃었던 것을, 잊어버린 것을... 그의 소중한 것을... 찾았던가... 찾아냈던가... 어쨌던가...
"내 이름은... 내 이름은 라이라 하트스트링스." 더듬어 말했다. "출신지는..." 쌕쌕대는 숨이 뿜어져 나갔다. 투명한 입김이 번졌다. "내, 출신지는..."
옆에서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돌렸다. 분홍색 어스 포니 하나가 고상해 보이는 여자 하나를 상대하며 그 사람이 심드렁한 어조로 최근 작업하고 있다는 결혼식 예복의 지음새를 자랑하는 소리에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고상해 보이는 사람 옆에는 상앗빛 비단과 프릴을 가득 담은 가방 몇 개가 떠 있었다. 둘은 보석으로 장식한 회전목마 모양으로 지은 화려한 건물로 향했다.
나는 자리에 얼어붙었다. 연주에 대한 욕망도 욕망이었지만,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공포는 그 이상이었다. 가방에서 리라를 꺼냈다. 연주법까지 잊어버렸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 순간만큼이나 두려운 적도 없었다. 차분히 숨을 고르며 마음을 진정시키고, 본능에 몸을 맡겼다. 곡조 하나가 하늘로 솟았다. 낯선 곡이 조금씩 낯익은 것으로, 친숙한 것으로 변해갔다.
연주를 마치자마자 현실의 무게가 내 머리를 강타하며 뿔에 묵직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얼굴을 파이 굽는 접시로 얻어맞은 듯 몸이 떨렸다. 눈꺼풀이 감겼다. 핑키 파이가 슈가큐브코너 주변을 뛰어다니는 모습과, 이빨 없는 악어가 그녀의 꼬불꼬불한 꼬리털을 꽉 물고 날려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구워 온 도넛을 코끝에 올리고 빙빙 돌리고 있었는데, 곡예사라도 되는 듯했다. 핑키 파이는 어린애였고, 광대였으며 기쁨이었다.
광소로 뒤틀린 얼굴은 눈을 다시 열어 떴을 때도 곧장 시야가 회복되지 않을 정도로 구겨져 있었다. 리라를 떨어뜨린 나는 배꼽을 잡고 그저 미친 듯 웃어댔다. 내 웃어대는 소리 너머로 핑키 파이가 웃고 노래하며 삶을 찬미했다. 핑키 파이의 춤 솜씨는 가히 환상적이라고 할 만했는데, 냉혹한 산업의 논리가 그 무도를 아무 거리낌없이 박살냈다.
래리티의 의상실 한쪽 구석에 수도 없는 그림자가 갑자기 나타났다. 나는 놀란 숨을 들이마셨다. 눈가가 경련했다. 래리티가 지금껏 지어낸 드레스는 가히 셀 수 없을 지경이었지만, 그 누구도 관심이 없었기에 시착의 영광을 입은 옷도 없었다. 업계의 주목을 받기를, 그리하여 명성을 얻고, 시도 때도 없이 변하는 패션업계의 집단지성에 보잘것없는 부분이나마 이바지하기를 바라던 래리티의 고군분투가 거기 있었다. 그녀가 지금껏 해 온 모든 것들은 업계의 무관심이라는 이름의 대양 위에 던진 작은 조약돌이 일으킨 파문에 불과했으며 래리티 또한 그걸 알았다. 그것이 오장육부를 찢어놓는 고통임은 자명했으나, 래리티는 뻔뻔스러워 보이기도 하는 가면 아래 자신의 적의와 고통을 감춘 채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일을 계속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삶은 깊은 감동을 선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그만큼의 슬픔을 일으킨다. 래리티는 자신을 위해 곡하지 않으므로, 내가 래리티를 위해 곡할 수밖에.
나는 광소를 터뜨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울음을 토해냈다. 길바닥 한가운데 쓰러져 앉아 떨리는 발굽으로 꼭 감은 눈을 가리고 우는 꼴이라니. 래리티는 계속되는 좌절과 역경에 굴하지 않고 싸우는 투사였고, 그런 투사는 그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레인보우 대쉬는 혼자 남겨지는 것을 죽기보다도 싫어한다. 트와일라잇 스파클은 역사에서 잊히고 싶지 않아 매일 연구에 매진한다. 한 번 시작된 사고는 다른 사고로 흘러들었고, 사고의 탁류가 점점 그 세를 불리워 끝내 홍수가 되어 내 눈물로 흘러 떨어졌다. 모닝 듀는 근위대의 꿈을 접어야만 했고, 캐러멜은 빈곤한 삶의 비애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스쿠틀루의 소중한 두 날개는 동시에 가장 쓸모없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중심에 불멸의 사랑에 바치는 비통한 애가를 지키고 앉은 엄숙한 참주와도 같이, 돌이 된 디스코드가 앉아 있다. 디스코드가 겁쟁이인지, 뛰어난 지략가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자는 왜 나를 떨어뜨려 놓았을까. 이렇게 슬프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될 줄 알고 있었다면, 차라리 나도 데려가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더 살아 봤자 할 수 있는 일도 없을 텐데. 내가 해야 하는 게 더 있단 말인가. 대체...
"뭐라도 먹는 편이 낫지 않겠나, 스칼렛Scarlet." 몇 걸음 뒤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뼛속까지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밥이 넘어가겠어요?" 여자의 목소리가 되받았다. "속이 뒤집어질 지경이라 뭐만 먹어도 바로 얹혀 버릴 텐데. 당신은 그닥 불편하지 않나 보군요. 저 천지분간도 못 하는 머저리들 보고서도 괜찮다는 건가요?"
"스칼렛 자네한테는 아주 낯익은 모습일 텐데...... 여기가 군의 고향 아닌가."
"정정해 드리죠. 여기는 내 고향이었던 곳이에요. 내가 태어난 곳이라는 이유 하나로 익숙하고 낯익을 거라고 생각하진 마세요. 으으... 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진짜..."
몸을 떨며 뒤돌아보았다. 나는 깜짝 놀라 근처 식당의 외부 테이블 앞에 세워놓은 목조 간판 뒤로 몸을 숨겼다. 날숨을 내쉬면 닿을 만한 거리에, 붉은 갈기를 한 여자와 나이들어 보이는 사내가 테이블에 앉아 낮은 목소리로 대화하고 있었다. 젊은 여자는 발굽에 카메라를 들고 만지작거리고 있었고, 사내는 포니빌의 모습을 묘사한 풍경화를 마무리짓는 참이었다.
"스탈리온그라드 복구 현장에 가 보고 싶다고 얘기할 수도 있지 않았나." 남자가 큰 소리로 말했다. "내가 알기로 스탈리온그라드에는 좋은 사진을 찍을 만한 곳이 아주 많은데 말이네. 그나저나 그 동네 사람들도 큰일이지. 디스코드가 스탈리온그라드 장벽을 통째로 치즈 덩어리로 바꿔 버렸으니 말일세."
"그렇긴 하죠. 그래도 스탈리온그라드에는 혼자 가도 되니까."
"혼자 가도 되니 늙은이랑은 가지 않겠단 말이군?"
"당신이랑 같이 다니는 게 훨씬 좋지 무슨 소리에요!" 여자가 소리쳤다.
"허허허...... 늙은이 따라 포니빌까지 왔으니, 거 맞는 말이로군 그래."
"가만... 그러고 보니 왜 포니빌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한 거죠?"
"이쪽 동네에 와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그랬네. 나한테나, 군에게나."
"흥. 노망이라도 났나 보군요." 여자가 의자를 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일단 왔으니, 가족이나 좀 보러 갈 수도 있겠어요."
"부디 살아 있는 가족이면 좋겠군..."
"여우 같은 늙은이. 내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았군요. 어떻게 해야 꼭지가 도는지도 잘 아시고..."
"스칼렛." 사내가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군과 함께하는 여행은 아주 즐겁네. 군이 마음의 평화를 찾기만 한다면야 더욱 즐거운 여행이 될 것 같네만."
"평화는 정체를 뜻하죠. 전 사진작가고요."
"인생이란 단순한 구실과 핑계로 쌓아올린 구조물이라네. 그리고 그 대부분은 쓰라린 것이기도 하지."
"으엑. 말 그만 하고 붓질이나 더 할 순 없어요?"
"군이 바라는 바대로는 어려울 것 같군."
"뭐 아무렴 어때요. 나 어디 있을지는 알죠?"
"알다마다. 잘 되길 바라네."
나는 이 때 최대한 주의를 끌지 않고 그 주변에서 벗어나려고 무진장 애를 쓰고 있었다. 거의 다 빠져나갔을 즈음에는 둘의 대화가 멀리서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처럼 들렸다. 큰길가로 뛰쳐나가려고 상황을 살피고 있었는데, 주방기구로 가득 채운 커다란 수레 하나가 달려오다 내 앞에서 홱 방향을 틀었다. 나는 길 한복판에 쿵 하고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그 와중 놓친 리라가 길바닥에 뒹굴었다. 놀란 현이 웅웅대며 우는 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졌다. 그 소리는 마치, 내가 짊어진 저주가 몰고 오는 오한이 사라졌다가 다시 되돌아오는 듯했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눈을 뜨자 좀 전의 젊은 여자가 나를 바싹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 눈동자는 짙은 쪽빛이었고, 솜털은 가지런했으며 붉은 갈기는 피가 흐르는 것처럼 선명했다.
나는 몰랐지만 뭐 경련 비슷한 것을 일으켰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쪽도 놀랄 이유가 없으니까. "아, 죄송해요!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여자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그러셔서." 내 봉두난발이 된 갈기와 쭈글쭈글해진 후드 재킷에 여자의 시선이 닿았다. "괜찮으세요? 말씀... 말씀하실 수 있으시죠?"
자리에서 일어나 뿔을 밝혀 길바닥에 나뒹구는 리라를 들어올렸다. 울림통을 가볍게 흔들어 거기 묻은 흙덩이와 풀잎 몇 조각을 털어냈다. 그 와중에도 나는 곤두선 신경을 수습하며 숨을 고르느라 훌쩍이고 있었다.
"라이라 하트스트링스라고 해요." 아무 생각 없이 튀어나온 말이다. 시야 가장자리에 맺힌 식당 외부 테이블 쪽을 흘끗 보자, 사내는 사라지고 없었다. 마음이 좀 편해졌다. "어, 그러니까, 괜찮아요. 그냥... 생각할 게 좀 많아서..."
"그러신 것 같네요." 여자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목에는 카메라가 하나 걸려 있고, 눈 아래로 맺힌 그림자가 수면 부족을 열렬히 웅변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아주 바쁜 사람일 터인데, 그러면서도 완벽한 타인, 그것도 머리가 어떻게 된 게 틀림없는 사람에게 괜찮냐고 물어 보러 올 시간을 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저는 스칼렛 브리즈라고 해요." 여자가 말했다. "여기 출신이죠."
헛기침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짐짓 놀란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신가요?"
"네. 뭐 여기 출신이라고 해서 추억이 많은 건 아니지만." 여자는 건조한 미소와 함께 묘하게 시원하면서도 섭섭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부분은 아무 일도 없이 무사한 나날이 계속되는 곳이거든요. 말하자면 방금 일 같은 건 잘 하다가 코드 잘못 짚은 것 같은 일이라는 거죠. 음,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드리죠."
"별로... 괜찮습니다." 나는 그 여자와 나 사이의 땅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대답했다. 머릿속도 대충 정리됐고, 여자 덕분에 놀란 가슴도 가라앉았으니 시장님 뵈러 가는 일을 잊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추억이란 조심해서 다뤄야 할 놈이죠. 항상 즐거운 기억만 있는 건 아니니까."
여자는 그 말에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여자가 이마를 찌푸렸다. "그쪽도... 그런 게 있나 보군요?"
쓴웃음을 짓다가 예의상 빙긋 웃고 말했다. "말씀드리긴 좀 그렇지만... 하긴 말씀드려도 상관없긴 하네요. 어쨌든, 도와 주셔서 고마워요. 혹시..." 기차역과, 처음 도착했을 때 여자가 지어 보이던 찌푸린 얼굴이 떠올랐다. "고향 생각나서 오신 건가요?"
"고향 생각요?" 여자가 눈썹 한쪽을 치켰다. "흐으으음... 아뇨. 철저하게 일 때문이에요."
"일이요?"
여자가 목에 건 카메라를 가리켰다. "필리델피아 인콰이어러Fillydelphia Enquirer*1 소속 기자에요. 디스코드가 격퇴된 마을의 '질박함의 미학'을 담은 사진을 찍어 오라고 하더군요. 나 원... 대도시 사람들이라는 게 다들 그렇더라고요. 지금까지 아무도 관심 없던 동네 얘긴데 왜들 갑자기 어디서 관심들이 그렇게 나서 관심을 주는지 몰라요. 온 나라가 디스코드를 물리친 기적에 눈이 돌아가서 다들 그것만 떠드는 판이죠. 매체 입장에서도 눈 뒤집고 들어가야 할 일이고."
"그럴... 줄은 몰랐네요." 멀리 보이는 시청에 시선을 고정하고 대답했다. "바깥 동네로 잘 나가질 않아서."
"그게 잘못된 건 아니니까요." 여자가 말했다. "자기 인생에 만족하기만 하면 되잖아요."
"그렇긴 해요..."
스칼렛이 다시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물었다. "그쪽 얘기는 그다지 하고 싶지 않다고 했던 말씀, 아직도 유효한가요. ......하트스트링스?"
여자를 마주보았다. 내면이 복잡할 수는 있어도, 요즘 세대이기는 할 것이다. 고통과 무기력감이 층을 지어 그녀의 얼굴 위에 떠올라 있었다. 수많은 감정들이 뒤엉킨 얼굴을 갖기에 여자는 지나치게 젊었다. 내가 이런 신세만 아니었다면, 래리티와 핑키 파이에게 그랬던 것처럼, 당장 벗이 되어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트와일라잇과 벗이 되고 싶어하는 만큼이나 나는 여자의 벗이 되고 싶었다.
"아, 뭐 지금은 괜찮아요. 고마워요." 빙긋 웃어 보였다. "가끔은 세상이 언제나처럼 잘 굴러가고 있는 걸 새삼 확인하는 게 최선의 방책인 경우도 있는 법이죠."
"흠, 그거 꽤 괜찮은 사고방식인 것 같은데요?" 스칼렛이 되받았다. "그러니까, 디스코드 자식도 도로 사라졌으니까요. 하하."
반사적으로 대답이 나오려던 순간, 시선이 시청 쪽을 겨냥했고 그와 동시에 나도 모르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해야 할 일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디스코드는 자기 옥좌에 앉아 조화의 원소에서 뿜어져 나온 섬광을 맞고 봉인되었다. 디스코드는 과연 누구 때문에 봉인되기를 선택했나. 그 누구가 누구인지, 나는 단 한 명밖에 떠올릴 수 없었다. 디스코드가 석화되며 봉인될 때 솟은 비명이 온전히 그의 입에서만 나온 것은 아니다.
"자, 그럼 가 봐야겠어요." 스칼렛이 말했다. "한 주 정도는 더 있을 거에요. 혹시나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고 싶은 게 있으시면 동네에서 유독 빨간 머리 찾으시면 될 거에요." 여자가 어린애처럼 킬킬대더니 말했다. "기억하세요. 제 이름은 스칼렛 브리즈에요."
"그러죠... 노력해 볼게요." 조용히 대답했다. 고개를 들어 동네에서도 유독 적막한 쪽으로 향하던 여자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디로 가나요?"
"묘지요." 여자는 냉랭하게 툭 던지듯 대답했다.
놀라 물었다. "시에서 묘지 사진을 찍어도 된다고 했다고요? 거기 사진은 왜요?"
스칼렛이 건조하게 웃더니, 부박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지었다. "아, 아니에요. 이건 일 때문이라고 할 수 없죠..."
여자가 멀어졌다.
힘 빠진 다리를 휘젓다시피 놀려 시청으로 향했다. 나는 조용히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었다. 가락이 편안한 이불처럼 나를 감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모습 또한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열 번째로 진혼곡을 연주했다. 나는 안락의자에 앉아 때로는 조심스레 발굽을 움직이고, 또 때로는 섬세한 염동력을 사용해서 리라를 퉁겼다. 흐린 기억 속에서 어떻게 진혼곡의 파편을 끄집어내 하나로 이어 아름다운 연주곡으로 짜맞추고 나면 어렴풋하게나마 진혼곡의 악보가 머릿속에 남기는 했지만, 오래 가지는 못했다. 첫 번째 연주를 마치자 이름 없는 자들의 땅에 다녀온 기억이 되살아났다. 두 번째 연주는 앨러배스터 코멧후프의 일지에 엉긴 싯누런 광기를 보았을 때를 돌려주었다. 진혼곡은 아름다웠지만, 기억을 되살리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던 만큼 반복해서 듣는 게 그리 기껍지는 않았다.
나는 왜 특정한 연주곡에 코가 꿰이는 신세가 되고 말았는가. 이전의 기억은 사라지고 없는데, 그 기억을 살려내려면 진혼곡을 연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궁창 사이의 땅으로 떠났을 때의 기억이나 패러스프라이트가 가려서 보이지 않았던 기억들은 진혼곡 연주로 살려낼 수 있었다. 상황이 바뀌었고, 안 좋아졌다. 덕분에 내 정신은 이리저리 뒤섞이는 실존의 광풍 속에서 야상곡에 뒤엉켜 견디는, 걸레짝이 된 깃발 신세가 되어 버렸다.
디스코드 때문인가? 혼돈의 군주에게 진혼곡을 연주해 준 것이 내게 부작용을 몰고 온 것일까? 앨러배스터와, 순식간에 그를 잠식한 광기를 다시 생각했다. 어쩌면 앨러배스터를 잠식한 광증이 나 또한 잡아먹을 준비를 하며 때를 기다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리아의 노래가 내게서 현실을 인지하는 능력을 뽑아냈는지도 모르겠다. 아리아의 저주가 내 영혼 곳곳에 퍼지며 나 자신에 대한 기억까지 망가뜨리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디스코드를 상대했던 것이 불가역적으로 진행되는 어떤 현상을 더욱 가속했을 수도 있겠다. 디스코드는 내가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을까. 디스코드는 내게 이런 일이 닥칠 줄 알고 미리 경고하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사실상의 치매나 다름없는 기억의 상실이야말로 자유를 향해 열린 길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저편에서 헛기침을 해 목을 씻는 소리가 들렸다. 어스름 진혼곡 연주를 잠시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헛기침은 책상에 앉아 있던 비서가 낸 것이었다. 억지 웃음을 지어 보이는 여자의 갈기가 조금 흩어져 있었다. 그 얼굴에 진득하게도 엉겨 있는 불쾌감과 짜증은 이쪽에서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고급스럽게 꾸며놓은 민원실 안에 들어와 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오크나무를 댄 양문형 출입문이 저쪽 벽에 서 있었고, 그 앞에는 온 나라에서도 알아주는 고위직 관료들과 발굽을 맞잡고 있는 잿빛 갈기의 여성을 찍은 사진이 붙어 있었다.
"그게..." 먼지 한 점 없이 깔끔한 실내 구석구석을 어색하게 둘러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시장님을 뵈려고 왔는데..."
비서가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끄덕였다. "그러시군요..." 여자가 커다란 타자기를 두들겼다.
멍한 말투로 물었다. "제가 얼마나 기다렸죠?"
타자 소리가 멈췄다. 비서가 이쪽으로 얼굴을 빼꼼히 내밀고는 더욱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눈가가 살짝 떨렸다. "같은 곡을 열 번 연주하실 동안이죠."
눈을 깜박이다가, 품에 안은 리라를 슬쩍 보고 얼굴을 붉히며 가방에 밀어 넣었다. "죄송합니다. 그게... 영 마음이 진정되질... 않아서요..."
"아 네..."
"신경 쓰이게 해 드렸네요. 흠흠. 죄송합니다."
문이 벌컥 열리고 캐러멜과 윈드휘슬러가 뒷걸음으로 나왔다. 시장을 향해 연신 고개를 숙이며 밝게 웃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시장님!" 캐러멜이 말했다. "저희가 얼마나 기쁠지 아마 상상도 못 하실 겁니다!"
"아뇨, 저도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하죠!" 시장이 나긋나긋하게 대답하며 둘을 따라 나왔다. "저도 몇십 년 전에 바로 거기서 비슷한 일을 치렀으니까요. 저희 남편도 얼마나 좋았는지, 거의 기절하다시피 했답니다. 다리를 먼저 이쪽으로 뻗은 게 다행이었지 뭐에요." 시장이 눈을 찡긋하며 기분 좋은 웃음을 머금었다. "위대한 어머니 품에서 편안하기를."
윈드휘슬러가 캐러멜을 가볍게 안더니 시장 쪽으로 방긋 웃었다. "저희가 이런 영광을 누리게 되다니, 이보다 더 기쁠 수가 없어요. 정말로."
"요사이 일도 굉장히 많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캐러멜이 말했다. "저희 식장 마련해 주시려고 바쁘신 와중에 무리하셨다고 말이죠. 그러신 줄 알았다면—"
"괜찮아요 괜찮아! 포니빌이 다 한 가족 아니겠어요!" 시장이 큰 소리로 말하며 젊은 부부의 어깨 한쪽씩에 발굽을 얹었다. "우리나라는 조화의 광명 속에 빛나는 곳이지, 혼돈의 군주가 드리운 장막에 갇힌 곳이 아니랍니다! 지금은 그저 기쁨과 환희를 만끽하면 됩니다. 제가 직접 여러분의 결혼을 축복해 드릴 수 있어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우리 앞에 놓인 새로운 시대, 지복의 시대를 살아가는 동안에도 몇 번 없는 중요한 의식 중 하나를 제게 맡기신 거니까요." 시장이 윙크했다. "여러분의 자녀들도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겠지요!"
캐러멜과 윈드휘슬러가 얼굴을 붉히며 쑥스러움이 묻어나는 시선을 마주쳤다. "아하하..." 둘이 상기된 얼굴로 괜히 바닥에 깔린 카펫을 툭툭 건드리며 시선을 피했다. "저, 시장님, 아직 그럴 생각은..."
"하하하... 농담입니다!"
캐러멜이 시선을 돌려 시장을 보고 말했다. "결론은, 시 동쪽 호숫가 펜션을 신혼여행 기간 동안 이용해도 좋다는 것인가요?"
윈드휘슬러가 씁 소리와 함께 캐러멜의 머리를 한 대 후려쳤다.
캐러멜이 움찔했다. "알았어! 가자 가!" 사내는 킬킬 웃는 아내와 함께 돌아가며 시장에게 발굽을 흔들어 인사했다. "결혼 계획이라서요!"
"그래요,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시장이 큰 소리로 말하며 방글거리는 얼굴로 발굽을 흔들었다. 부부가 떠난 뒤 시장이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커다랗게 퍼져 있던 미소가 은은하고 가볍게 변했다. "휴, 두 번은 못 할 짓이지." 시장이 비서 쪽으로 눈짓했다. "앰버윈드 씨. 다음 일정이 어떻게 되죠?"
비서가 심드렁하게 이쪽을 가리켰다. "시장님께 급히 드릴 말씀이 있다는 유니콘 음악가 한 분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성함은..."
"하트스트링스입니다." 일어서서 시장을 응시하며 말했다. "라이라 하트스트링스라고 합니다."
"하트스트링스라! 이름 정말 예쁘네요!" 시장이 이쪽으로 다가와 내 발굽을 잡고 몇 번 흔들었다. 시장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연주 소리가 들리더군요. 그쪽 연주인가요?"
"어어... 네." 움찔하며 말했다. "실례했습니다. 시장님 집무실에서 폐를 끼쳤습니다. 소란을 피울 의도는—"
"민폐라니요!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던데요." 시장이 눈을 찡긋하더니 비서를 보고 말했다. "앰버윈드 씨는 어땠죠?"
"시장님. 16시 정각에 필시 리치 씨와 면담이 잡혀 있습니다만."
"아이구..." 시장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더니 약간 땀이 난 얼굴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차라리 병균이랑 면담하는 게 낫지." 시장이 다시 활기찬 표정으로 따라 들어오라고 몸짓하고 집무실로 들어갔다. "어서 들어오세요. 물류창고를 더 지어야 하니 땅을 더 내놓으라는 작자만 아니라면 누구든 환영이니까!"
"어... 그러죠..." 비척거리며 집무실로 따라 들어갔다. 그 안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는데, 고전 양식으로 짠 책장 옆마다 어스 포니 위인들의 모습을 모사한 장식이 달려 있었다. 널찍한 책상은 가구가 아닌 예술품의 영역에 존재하는 물건이었다. 이제 저 책상 너머로 내 목소리를 넘겨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울 정도였다. 안락의자에 앉아 가방을 가슴에 안고, 몸을 떨며 테이블 위로 시선을 옮겼다. "되게... 좋은 곳이네요."
"전임자께서 넘겨주셨을 때 모습 그대로랍니다." 시장이 자리에 앉더니, 내가 덜덜 떠는 꼴을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보며 말했다. "아이고, 세상에나! 추우신가 보네! 담요 같은 거라도 드릴까요?"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흠?"
"그러니까, 호의에 감사드립니다마는, 그 저... 체질 같은 거라서요." 나는 말했다. "어, 옮거나 하는 건 당연히 아니에요. 저는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아하, 음, 그렇다면야." 시장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래서 재킷을 입고 다니는 거로군요. 그럼 얘기로 돌아갈까요. 하트스트링스 씨는 뮤지션인가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요 근처에서 연주도 하시나요?"
"그...렇게 봐도 무방할 듯 싶습니다."
"잘 되었군요!" 시장이 웃으며 안경을 고쳐 썼다. "언제 꼭 찾아서 들어 봐야겠어요!" 시장이 눈길을 잠시 돌리더니 쿡쿡 웃었다. "그러니까, 적어도 여기에서 연주를 청하진 않을 거에요. 방음이 전혀 안 되니까. 요전에 누가 말같지도 않은 소리만 잔뜩 적어놓은 걸 세금신고서랍시고 가져다 들이밀길래, 소리를 좀 질렀거든요. 그 때 알았지요. 하하하하..."
"아하하..." 어색한 웃음을 띄우며 시장의 널따란 책상을 슥 훑어보았다. 시장의 모습을 찍은 사진 몇 장이 있었는데, 시선을 움직일수록 시장의 더욱 젊은 시절을 볼 수 있었다. 유독 사진 한 장만은 낡고 해져서 상이 흐릿해져 있었는데, 검은 솜털을 한 어스 포니와 분홍 갈기 시절의 시장, 그리고 새빨간 갈기를 한 여자애 하나가 함께 찍혀 있었다. 웃고 있는 셋의 형상은 내 머릿속처럼 흐리고 먹먹해져 있었다. "그, 최근에 기억 상실 저주를 당한 것 같아서..."
"오?"
"그... 저주를 풀고 싶어서요." 나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무래도 평범한 수단, 평범한 사람의 도움만으로는 안 되더군요. 우리 중에서도 가장 위대하신 분들께 도움을 청하고 싶어서, 시장님을 찾아뵙게—"
"그렇지, 작곡도 하시나요?"
당혹해서 물었다. "다시 말씀해 주시겠어요?"
"연주만 하시는 게 아니라 작곡도 하시는지 물었어요." 시장이 빙긋이 웃으며 가볍게 내 쪽으로 발굽을 뻗었다. "저런 사람들은 대체 어디서 저런 멜로디를 쑥쑥 뽑아내는 걸까, 하고 늘 부러워했었지요. 유니콘이 특히 많았죠. 아무래도 유니콘이 예술 쪽에 능하니까요."
"네, 그... 어... 요즘은 다른 사람 곡을 커버하고 있어요." 말하는 몸이 살짝 움찔했다. "가능한 정확하게..."
"저도 어릴 적엔 훌륭한 연주자가 되기를 꿈꾼 적 있답니다." 시장이 말했다. "아이고, 세월이 무상하네요..." 시장이 등받이에 몸을 깊이 기대더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실제로 살아온 세월의 기억보다도, 오래 전에 해 보고 싶다 꿈꿨던 것들의 기억이 더 오래 가다니, 참 이상하죠. 젊은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아, 아닙니다." 고개를 가로젓고 조용히 말했다. "저도 이해합니다. 장담하죠." 침을 삼켰다. "어떤 일을 하고 싶어하는 것, 어떻게 되기를 희망하는 것. 이것들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 감정이므로, 그 이상의 의미를 갖지요. 확실..." 나는 잠시 멈칫하면서 창가를 바라보았다. 햇빛을 받아 허공을 떠다니는 먼지가 흔들렸다. "단 한 가지는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던 것이 실제로 벌어지고 말 때 제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니까."
시장이 한쪽으로 고개를 갸웃하고 말했다. "그게 무엇이죠?"
침을 꿀꺽 삼키며 가방을 바싹 끌어안았다. 안에 넣어둔 리라의 형상이 느껴졌다. "제가 음악을 사랑한다는 것이죠." 나는 말했다. "결국에는 그것만이 저를 정의하더군요. 다른 그 무엇을 갖다 붙이더라도 이 한 가지 절대적 명제의 연장선에 불과한 것이었죠." 시장을 슬쩍 보며 말했다. "시장님의 모든 행위에는 실천하는 사람의 모습만 있는 게 아니라, 꿈꾸는 사람의 모습도 있을 거에요."
시장이 차분하게 웃음지었다. "젊은이가 이렇게 속 깊은 말을 하기가 쉽지 않은데, 솔직히 감명받았어요. 하트스트링스 양이 앞으로 살아갈 날이 훨씬 더 오래 남은 젊은이라니 믿기지 않는군요."
"살아간 날이든 살아온 날이든, 결국 다 숫자일 뿐이죠." 나는 즉시 말했다. "꿈과 희망이야말로 사람의 영혼을 이루는 것이고요. 기억의 장막은 젖혀두고, 꿈과 희망만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에는... 기억만이 남으니까요."
시장은 잠시 아무 말도 없이 이쪽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시장이 내 말에 대답할 것인지, 사무실 밖으로 쫓아낼 것인지는 명확치 않았다. 시장이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흥미로운 견해로군요." 시장이 가볍게 웃더니 말했다. "예술가와 한데 앉아 철학을 논할 수 있다니 이보다 즐거운 일이 또 없겠지만..." 시장이 등받이에 몸을 기대더니 책상 너머의 나를 보고 몸짓했다. "...확실히, 저와 논의하시고 싶으신 일이 있어 여기까지 오신 것이겠지요?"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두 분 공주님을 뵙고 싶습니다."
시장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잠깐, 우리나라의 두 분 공주님 말인가요?"
나는 잠시 입을 닫았다. 짜증을 내기에 좋은 때는 아니었다. "네." 나는 단언했다. "셀레스티아 공주님과 루나 공주님 말씀입니다. 혹시... 근시일 내로 두 분 공주님께서 포니빌에 왕림하실 일정이 있나요?"
시장이 안경을 고쳐 쓰더니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건 연주 때문이겠지요?"
"아뇨, 아니 아니, 맞습니다. 그러니까..." 움찔하는 몸을 억누르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시장 앞에서 뜬금없이 리라를 꺼내들고 진혼곡을 연주한다니, 이상해도 너무 이상한 상황 아닌가.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차분히 말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두 분 중 한 분만 모셔도 좋으니, 여기에서 공주님을 뵙고 싶습니다." 나는 말했다. "조화가 다시 한 번 사악한 혼돈을 무찔렀으니, 그 기쁨을... 그... 저... 연주로 표현해 공주님께서 들으실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아주 낭만적인 생각이군요." 시장이 정중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만, 공주님들께서 포니빌에 방문하시는 시일을 알고 있더라도 공주님들을 알현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제 능력 바깥의 일이랍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지만 무시했다.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소리쳤다. "그런 건 상관없어요! 시장님께서... 그... 알현 일정을 잡아 주신다거나 할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으니까요! 두 분 공주님께서 다시 포니빌을 찾으시는 날이 언제인지만 알려 주시면 됩니다. 앞으로 행사도 많이 남아 있지 않은가요?"
"글쎄 뭐..."
"악몽야 축제도 있고!" 어색한 미소로 말했다. "낙엽 달리기 대회도 있죠. 난방절도 있고 많잖아요!" 다시 몸을 기대며 한결 편안해진 숨으로 말했다. "그... 음... 보이는 사람마다 다 물어 보고 다녔는데도 공주님들께서 언제 다시 오실지는 다들 감도 못 잡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시장님이시라면 다른 사람들보다는 공주님들께서 언제 오시는지 더 잘 아실 것 같았어요."
"대단히 유감입니다만, 앞으로 최소 네 달 동안은 공주님들께서 포니빌을 찾으실 일정이 없습니다. 하트스트링스 양."
억장이 무너졌다. 집무실이 한층 더 춥게 느껴졌다. 진혼곡을 연주하면 흐려진 기억 속에서 그나마 따뜻한 것들을 건져내어 시장의 입에서 떨어진 냉혹한 진실을 덮을 수 있을 것이라는 충동이 들끓었다. "네, 네 달이요...?"
"그래요." 시장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눈썹을 치킨 여자가 말했다. "혹시나 싶어 말씀드립니다만, 저는 매일 아침마다 공주님들 일정을 확인합니다."
"아..."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시선도 함께 떨어뜨려 책상을 향했다.
"정말 유감이에요. 그래도 앞으로 있을 축제에 공주님이 방문하신다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그쪽을 위한 시간을 마련해 보도록 노력하지요." 시장이 밝게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시청 청사에서 결혼식을 치를 수 있게 힘 좀 썼답니다. 트와일라잇 스파클을 비롯한 지역 유지들도 참석 의사를 밝혔지요. 트와일라잇 스파클이라면 바로 그 셀레스티아 공주님의 내제자 아닌가요! 이 정도면 위로가 되지 않나요!"
"숙... 숙고해 보겠습니다." 힘이 빠지긴 했어도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그나저나 이상한데요..." 시장이 가볍게 웃고 말했다. "바로 이틀 전에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 행차하셨는데, 그 때는 긴장을 많이 하셨었나 보지요?"
당혹감에 심장마저 잠시 뛰기를 멈추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시장을 마주보았다. 입이 절로 헤벌어졌다. "이틀... 이, 이틀 전에 오셨다고요?"
"어머, 그럼요. 초저녁 즈음에 행차하셨답니다. 다들 기뻐서 난리도 아니었지요. 디스코드 격파 이후 처음으로 포니빌에 왕림하신 거니까요."
"대체..." 의자에서 일어서며 이마를 찌푸렸다. "언제요? 무엇 때문에?!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 대체 왜?!"
내 격렬한 반응이 걱정스럽기까지 했던 모양인지, 시장이 그런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농담하시는 거죠? 혹시 그 때 다른 곳에 가 계셨나요?"
"아뇨! 계속 여기 있었죠!" 숨이 가빠졌고 식은땀이 흘렀다. 큰 소리로 말했다. "부탁드립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말씀해 주세요!"
시장의 쪽빛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주문을 해제하러 오셨지요..."
"무슨 주문요?"
"그야 우리 마을 북동쪽 지구에서 어마어마한 난리통을 일으킨 바로 그 주문이죠!" 시장이 살짝 얼굴을 붉혔다. "아주 악랄한 주문이었어요. 저조차도 한낱 깡패에 지나지 않게 만들어 버렸으니까요. 저도 그 때문에 시민들을 짚으로 만든 인형이라도 되는 양 하찮게 보며 공격했습니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는 듯 시장이 몸을 부르르 떨더니 애써 웃어 보였다. "디스코드가 다시 봉인을 깨고 나온 줄로만 알았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주문이 잘못 사용된 거였지 뭐에요. 아이고 참. 유니콘 특유의 기술은 존중해 마땅한 거지만, 그래도 가끔은 좀 자제해 가면서 쓰시면 좋겠다 싶네요! 하하하하..."
"이게...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나는 소리치듯 답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죠? 그..." 눈가가 경련했다. 시장을 보고 물었다. "그게 언제죠?"
"그야 화요일이지요." 시장이 답했다.
나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이 나왔다. 내 오두막과 벽난로, 자는 앨의 몸 위로 반짝이던 별빛을 생각했다. 그리고 기차역에서 나와 걸어가던 둘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 날이 다름아닌 목요일이었다는 사실은 나를 미치기 직전까지 몰고 갔다.
"나흘..." 몸을 떨며 발굽으로 얼굴을 쓸었다. "나흘이나 지났잖아. 위대한 두 분 공주님들 맙소사. 어떻게 그 긴 시간을 그냥 흘려보낼 수가 있지?" 침을 삼키며 자리에 풀썩 쓰러져 앉아 몸을 웅크렸다.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 오셨다니..." 나는 울먹였다. "공주님께서 오셨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자자, 그렇게 안 좋은 것만 생각하는 건 그만두죠!" 시장이 측은하다는 눈길을 보냈다. "결국은 다 잘 풀렸답니다! 문제의 주문은 공주님께서 순식간에 없애 주셨고, 그만큼이나 일상도 빨리 회복되었어요. 게다가 캔틀롯은 바로 지척 아닌가요. 지금 당장은 아무런 순방 일정이 없긴 하지만, 두 분 공주님께서 마음만 동하시면 바로 오실 수 있는 거리—"
그 때 여닫이문이 열렸다. 신경이 잔뜩 곤두서서 부들부들 떠는 비서가 나타났다. "흠흠, 시장님...?"
"앰버윈드 씨!" 시장이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 면담 중인 거 모르—"
"정말 죄송합니다." 비서가 웅얼거렸다. "고집이 엄청나서요. 제 장담컨대, 시장님께 자기가 온 걸 보고하지 않으면 시청 청사 전체를 죄다 뒤집어엎고도 남았을—" 비서가 여기까지 말한 순간, 새빨간 갈기에 목에는 카메라를 건 어스 포니 하나가 느긋하게 집무실로 걸어 들어왔다. 스칼렛 브리즈가 자리에 멈춰 칙칙한 쪽빛 눈동자에 불을 켜고 집무실을 휘휘 둘러보았다.
시장의 눈 위에도 그와 똑 닮은 색이 어려 있었다. 시장의 시선이 떨렸다. 시장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 아무 말도 못 하던 시장이 입을 열었다. "스칼렛, 얘..."
"시장님..." 스칼렛이 간단명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가운데에 끼어 당혹했다. 저주 때문이 아니라, 그 둘 사이의 관계가 집무실을 더 차갑게 만들었다. 테이블과 그 위의 낡은 사진으로 시선이 움직였고, 분홍 갈기를 한 젊은 시절의 시장 무릎에 앉은 붉은 갈기 여자애의 모습에 눈이 갔다. 심장이 쿵쿵 뛰어댔다.
"음..." 시장이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그러고는 웃는 것 같지 않는 얼굴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트스트링스 양, 용건은 이만하면—"
"네, 충분히 알아들었습니다." 나는 자연스럽게 대답하고, 몸을 일으켜 문가 쪽으로 조용히 걸어갔다.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장님. 결혼식 연회 건은 숙고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느릿하게 스칼렛을 지나쳐 걸었다. 얼굴을 흘끗 쳐다보니, 요 전날, 그러니까 나흘 전 포니빌에 막 도착했을 때 짓고 있던 그 매서운 표정이 다시 얼굴 위에 떠올라 있었다. 길거리에 자빠진 행인을 그냥 두고 지나치지 못하던 선량하고 착한 그 스칼렛은 이제 없었다. 스칼렛이 나를 지나쳐 가더니, 전장이 내려다보이는 낭떠러지로 올라가는 최고 지휘관처럼 시장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내가 대체 뭐에 씌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나가서 문을 닫고 둘만의 자리를 만들어 준 뒤 문에 기대섰다.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이 느껴졌다. 눈을 감자 잿빛 줄무늬가 있는 갈기를 한 사내의 모습이 감긴 눈꺼풀의 어둠 위로 떠올랐다. 우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그 때—
"으아아아아..." 비서가 중얼거렸다. 슬쩍 눈을 떠 쳐다보니 비서 책상 위로 입김이 떠가고 있었다. 여자가 앞다리를 맞잡고 비비더니 몸을 떨면서 타자기 앞에 앉았다. "아, 진짜 가을은 질색이라니까..." 여자는 나를 완벽히 무시했다. 나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당연했다.
나는 멍하니 닫힌 문과 밝진 않은 복도의 조명, 복도 옆에 붙은 비서 사무실, 그리고 비서를 순서대로 쳐다보았다. 비서는 이쪽에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두운 복도 쪽으로 살금살금 들어가 숨어들었다. 시청 기록보관소와 다른 사무실 한두 곳을 지나 비품 창고로 들어갔다. 뿔을 밝혀 공기를 가볍게 몇 번 두드려, 비품 창고가 시장 집무실과 맞닿아 있음을 확인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사이 잽싸게 숨어들어 문을 닫았다. 골판지와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비품실 한쪽 벽에 달라붙었다. 이제 나와 시장 집무실 사이에는 얇은 문 하나밖에 없었다. 잠긴 지 오래일 문인 것은 확실했으므로, 이게 갑자기 열리는 상황은 상정할 필요가 없었다. 깃털 떨어지듯 조용히 문에 귀를 들이밀고,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열띤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오겠다고 연락한 적은 없지요. 왜냐, 개인적인 일을 보러 온 게 아니니까. 철저하게 업무 목적으로 왔다는 거죠."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니?! 스칼렛, 육 년 만에 고향에 왔으면서 바로 어제 만난 듯 자연스럽게 내 사무실로 들어오더니 이젠 또 개인적인 일로 온 게 아니라고?!"
"지금은 필리델피아 인콰이어러에서 일해요. 디스코드가 격퇴당한 포니빌이란 곳에 가서 괜찮은 사진이나 몇 장 찍어 오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포니빌 랜드마크 몇 군데의 출입 허가를 받으러 왔어요. 바로 시장님 당신으로부터 말이죠. 제가 갔다 올 곳이 어디냐면..."
"시장님?!"
"흠흠. 시계탑이랑, 포니빌 도서관. 셀레스티아 공주님 조각상이랑, 마을 귀퉁이의 오래된 풍차..."
"셀레스티아 공주님 맙소사. 스칼렛, 넌 내 딸이야. 다른 사람들처럼 시장님, 시장님 하고 부를 필요 없잖아."
"그러지 않을 이유도 없잖아요? 엄마 일이니까."
"내 직업이 어떻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말씀에는 굉장히 의심이 가는데요."
"스칼렛, 돌아온 진짜 목적이 뭐니? 진심으로 말하렴! 어쩜 입에서 나오는 말 하나하나 다 냉소에 독설밖에..."
"말씀드렸잖아요. 일 때문에 왔다고."
"일 때문에 왔다면서 사적인 일로 온 것처럼 구는 건 뭐니? 왜 얼굴 보고 얘기하는 건데?! 네가 그 표정에, 그 목소리로 쏘아붙이는 거 들을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는 건 너도 알잖아! 그럴 때마다 엄마 가슴 찢어진다고..."
"체재하는 기간은 그리 길지 않을 겁니다, 시장님. 그런 의미에서 최대한 빨리 사진 찍고 뜰 수 있게 지금 면담도 가능한 빨리 끝내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결국 그래서 돌아온 거였어? 몇 년 만에 집에 온 게, 겨우 네 인생에서 엄마 털어내 버리려고 온 거였냐고."
"필리델피아가 내 집이죠. 이 동네는 저랑 아무 상관 없고."
"그럼 빨리 사라지지 그래?!"
"이쪽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서. 회사가 좀 다른 데로 보내 줬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죠. 그래도 말이죠 시장님, 한 사람의 가치를 증명하는 건 성실성과 전문가 의식이라고 제게 가르쳐 주신 게 당신이세요."
아무 말도 없었다.
스칼렛이 다시 말했다. "그럼, 제가 언급한 일련의 시설에 대한 출입허가를 받은 것으로 봐도 될까요?"
"행운을 빈다..."
"행운을 비는 걸 바란 게 아니에요. 시장님 당신의 허가를 득하러 온 거죠."
"알았으니까 썩 나가! 이쪽도 이런 말같잖은 소리 더 늘어놓고 싶지 않으니까!"
다시 아무 말도 없었다.
"좋아요. 그 점에 있어서는 의견이 일치하는군요." 스칼렛의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그럼, 재선도 잘 되기를 빌죠."
"스칼렛..." 시장이 더듬거렸다. "스칼렛, 얘, 잠깐만. 엄마가 잘못했다. 가지—"
문이 열렸다가 순식간에 닫혔다. 먹먹한 침묵 속에 벽 너머로 어떤 소리가 조그맣게 새어 나왔다. 나흘 전, 침대에 쓰러져 있던 누군가가 내던 소리와 아주 흡사했다.
세상은 문득 더욱 추운 곳이었고, 이빨이 딱딱 부딪쳤다. 진혼곡을 연주하라는 충동이 지친 마음을 비집고 나와 아가리를 벌렸다. 숨어 있는 동안에는 연주할 수 없었다. 나는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하며 시청을 빠져나갔다. 이 정도면 괜찮은 핑곗거리인 것 같았다.
시청을 나오고 몇 시간 동안 나는 주변을 빙빙 돌기만 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앞으로 단기간 내에 공주님들 중 한 분이라도 포니빌에 왕림하실 일이 없다는 것뿐만 아니라, 셀레스티아 공주님을 알현할 수 있는 천금같은 기회를 놓쳐 버렸다는 게 나를 미치게 했다. 저주가 더 심해진 게 이번 달, 이번 주만 아니었다면 야상곡에 대해 더 많이 알아낸 것들을 바탕으로 실험을 해 볼 수 있었을 터였다. 진혼곡이 위대한 알리콘의 기억을 일깨울 수 있는지도 알아낼 수 있을 터였다. 세 자매가 공유하는 노래를 바탕으로 아리아와 접선할 수도 있었을 터다. 이제 그런 기회가 또 언제 온단 말인가?
새로 밝혀진 사실은 끔찍했고, 끔찍한 만큼이나 내 머리도 이를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나는 에버프리 숲 가장자리를 따라 걷다가, 나무가 드리운 그림자가 머리 위를 스칠 때마다 움찔거렸다. 시내 공원 곳곳을 돌아다니면서는 시장님과 그 딸, 스칼렛 사이에 오갔던 대화를 되새김질했다. 해가 질 즈음에는 마을 외곽이었고, 늦가을 찬바람에 식은 몸은 미친 듯 뛰어대는 심장박동을 견디기도 버거워했다.
어머니는 딸을 하염없이 그리워했는데, 그 딸은 냉혹할 정도로 거리를 두려고 하다니. 그런 모녀 관계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인가. 그 둘은 저주를 받지도 않았고, 마법에 홀리지도 않았으며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완벽한 타인으로 인식할 만한 초자연적 권능의 개입이 있지도 않았다. 대체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딸이 어머니의 관심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싶어하는 것일까. 스칼렛의 얼굴에 어려 있던 한기와 시장이 소리죽여 흐느끼는 소리. 둘 다 감정이 있는 존재들이니, 상처를 받을 수도 있고 상대를 증오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디스코드가 세상을 거의 다 뒤집어 놓았던 때만큼 인생의 소중함과 유약함을 제대로 역설한 사례도 또 없었다.
세상 만사를 다 이해할 수도 없을뿐더러, 아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스스로를 타이르려 했다. 내가 그 누구의 곁에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 행복하고 따뜻한 삶을 살아가는 나 이외의 모든 사람들의 삶을 이렇다저렇다 비평할 권리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니까. 유령은 그저 곳곳에 출몰하는 것으로 족해야 한다. 내가 당장 생각해야 할 것이 있으면서도... 내가 정말 집중해야 할 일이 있으면서도... 모녀의 말다툼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런 이유였다.
붙잡고 있던 정신줄이 서서히 풀려 가고 있었다. 나는 헐떡이며 자리에 멈췄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다시 알아먹을 수 없이 뭉개지고 흐려졌기 때문이다. 나는 엉덩방아를 찧듯 주저앉아 리라를 꺼냈다. 몇 번 숨을 고르고, 가능한 차분하게 어스름 진혼곡을 연주했다. 떨리는 발굽에 들린 금빛 리라가 같이 바들거렸다. 진혼곡을 연주하는 동안 눈물 맺힌 눈을 열어 주변의 형상들을 둘러보았다. 일정한 모양으로 깎아 다듬은 화강암 판들이 사방에 늘어서 있었고 그 사이로 빛나는 석양의 끄트머리가 어른거렸다. 나는 포니빌 추모공원에 와 있었다.
10월 바람이 몰아치다가 푹 거꾸러졌고, 머리 위로 잎들이 바스락거렸다. 흙무더기처럼 외로이 버려진 내 흩어진 기억 위로 침묵이 내려앉아 사방은 기름처럼 고요했다. 리라를 띄워 올리고 비척거리며 걸었다. 이 비석에서 저 비석으로 옮겨다니며, 그 위에 아로새겨진 낯선 이름과 마주할 때마다 이 사람은 감정을 느끼는 것만큼이나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인지능력을 간직하고 최후를 맞이했을까 생각했다. 나와 앨러배스터만큼이나 희망 없고 차가운 세상에 살아가는 자들이 더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와 나는 아리아의 노래로도 침묵할 수 없는 존재였고, 나이트브링어의 신성한 존재에 매달린 부박한 멜로디로 화하기 전까지 세상을 끝없이 방랑해야 하는 유령이었다.
오두막 마룻바닥 밑 비밀 지하실에 모셔놓은 나이트브링어를 생각하느라 잠시 걸음을 늦추었다. 내가 죽고 나서 내 시체를 매장해 줄 사람이 없음에도 나는 나 자신을 위한 묘비를 마련해 둔 셈이었다. 물론 그 위에 내 이름이 적힐 일은 절대로 없을 터였다.
무엇인가 시선을 잡아끌어서 느려진 걸음을 멈추었다. 유독 눈에 뜨이는 묘비 하나가 있었다. 슬쩍 곁눈질해서 보다가, 가벼운 걸음으로 다가갔다. 묘비 앞에 서서 그 위에 적힌 글을 계속해서 읽었다. 진혼곡을 똑바로 연주하지 못했던 게 틀림없었다. 묘비 맨 위에 적힌 2어절이 사람 이름임을 눈치채는 데 한참이 걸렸으니까.
"대단히 편안한 저녁이군. 그렇지 않소?"
깜짝 놀라 리라를 끌어안았다. 등 뒤에서 누군가가 말하는 소리에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대도시에는 이런 곳이 흔치 않소이다." 사내가 계속 말했다. "안타까운 일이지. 건전한 삶을 살아온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편안히 쉴 권리가 있는데 말이오."
입을 다물고 눈을 감았다. 몸을 돌리지는 않았다. 몸을 돌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아, 이거 실례가 많았소이다. 찾아온 사람이 있을 터인데. 늙은이가 주제넘은 짓을 했소."
심장이 쿵쿵댔다. 저 수많은 묘비 중 하나 앞에 죽치고 앉아 있느니, 차라리 울고 비명을 지르는 것이 훨씬 나았다.
"그럼 이만 가 보겠소이다. 편안한 저녁 되시길 바라오."
남자의 멀어져 가는 발자국 소리와 낙엽 으스러지는 소리가 궁창 사이의 세상에서 울어대는 쇠사슬 부딪치는 소리처럼 귓가에서 웅웅댔다. 나는 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우는 대신 말했다. "잠깐만요." 그 힘없이 떨어진 말 한 마디에 온몸이 찌르듯이 아팠다.
남자가 걸음을 멈췄다. 잠시 아무 소리도 없다가, 그가 느긋하게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오?"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몸을 돌려 불길로 가득 찬 동굴을 들여다보는 꼬마처럼 사내를 보고 말했다. "무례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니... 미안해하시지, 마세요..."
사내가 이쪽을 쳐다보며 뿔을 밝혀 꽃다발을 자기 얼굴 앞에 띄워 올렸다. 바람이 불어 잿빛 줄무늬가 난 갈기를 툭 치고 지나갔다. 그의 지치고 피곤한 눈이 햇빛을 받아 찡그려졌다. "그 누구도 방해하거나 귀찮게 할 생각은 없었소이다. 그... 여기 사람은 아니라서 말이오. 이 늙은이에게도 절친한 벗이 있는 바, 그 친구의 춘부장께서 여기 잠들어 계시다기에 인사나 드릴까 하고 왔지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신가요?" 몸을 떨지 않으려 무진 애를 쓰며 말했다. "친구분 아버님께서 여기 계신다는 것이군요."
"그래요." 노인은 웃지도 찌푸리지도 않았다. 그 모습은 흡사 평생 써야 할 생이 몸에서 모두 뽑혀나간 듯했으나, 늙어 가는 육신 아래에 깊은 지혜의 샘이 솟아나는 것은 확실했다. "그 녀석이 인정할 것 같지는 않지만, 그 일가는 참 복받았구려." 사내가 수없이 늘어선 묘비를 둘러보며 말했다. "장지로는 참 아름다운 땅이오. 조용하고, 호젓한 것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도 감정이 있는 것은 느껴졌지만, 그 말이 너무나 차갑게 느껴졌다. "여기... 추모공원의 역사는 포니빌 자체와도 비슷하지요."
"그렇소이까?"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포니빌을 세운 주역들이 여기 잠들어 계시죠."
내 앞에 있던 묘비를 가리키며 사내가 물었다. "그대의 선친도 그 중 한 분이셨나 보오?"
나는 움찔하며 묘비를 슬쩍 돌아보았다. 묘비 맨 위에 적힌 2어절의 글자를 따라 시선이 움직였다. "네... 이 분도 중요한 역할을 맡으셨던 것 같습니다."
"생전에 어떤 일을 하셨소?"
침을 삼켰다. "아버지셨고, 군인이셨고, 사업가셨다고 하더군요."
"그렇소." 사내가 입술만 움직여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나는 그 모습에 숨이 막혔다. "더 캐묻지 않겠소이다."
"혹시... 그 친구분 아버님 묘지 찾는 거 도와 드릴까요?"
"늙은이가 먼저 지치지만 않는다면야 찾을 수 있겠지요." 스산한 바람을 타고 사내의 낮은 목소리가 퍼졌다. 사내의 시선이 근처 지평선 근처를 훑었다. 퇴색해 가는 눈동자에 빛이 일었다. "아하. 저기 있구려." 사내가 묘비 두 줄을 건너 커다란 직사각형 모양의 묘비로 다가갔다. 갓 핀 백합으로 만든 꽃다발 하나가 앞에 놓여 있었다. "아무래도 늙은이보다 먼저 찾아왔던 것 같소. 그 친구나 이쪽이나 피차 바쁘게 살다 보니, 같이 찾아뵈러 올 시간을 낼 수가 없었소이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오."
사내가 묘비 앞에 꽃다발을 내려놓는 순간 이쪽은 몸을 일으켰다. 당장 자리를 벗어나야 마땅했다. 어딘가에 리라를 파묻고 밤의 어둠 속으로 잠겨들어,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마저 잊도록, 저주가 나를 잠식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했다. 나는 그 반대로 사내 쪽으로 다가가 그 옆에 섰다. 그는 놀라울 정도로 키가 컸고, 솜털은 약간 노란 빛이 도는 게 석양에 젖은 산을 보는 듯했다. 남자 쪽을 돌아보지 않으려 무진 애를 쓰며 그저 하염없이 묘비만 쳐다보았다. 묘비에 무언가 적혀 있었다. 이름이었다. '솔티 브리즈Salty Breeze'
"스칼렛의 아버님인가..." 혼자 중얼거렸다.
사내가 깜짝 놀라 이쪽을 돌아보았다. "아니, 스칼렛을 만나 보았소?"
몸이 움찔했다. "으음..." 심호흡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에... 어쩌다 마주쳤었죠. 되게... 친절한 사람이던데요."
사내가 한쪽 눈썹을 치켰다. "그랬소?" 그는 건조한 웃음을 웃었다. 그 모습은 흡사 돌과 같았다. "그래, 그거 참 다행인 일이구려. 스칼렛 그 친구 머리에 일 얘기와 한숨밖에 들어 있는 게 아니었다니 기쁜 일이오."
"그... 무슨 말씀이신지."
"아하. 귀측이 관심을 가질 만한 일은 아니외다." 사내가 무감정하게 말했다. 두 눈은 묘지 너머 지평선을 들불처럼 밝히는 석양을 향하고 있었다. "스칼렛 양이 포니빌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소. 여기 사람들은 다들 '음습한 목적을 가지고' 쾌활한 척 한다고 하더구려. 이제 늙은 몸을 끌고 와서 직접 보아하니, '쾌활하다'는 말은 분명 사실인 것으로 보이오. 다만 늙은이의 솔직한 감상을 덧붙이자면, '음습한 목적이 있다'는 건 그냥 스칼렛 양의 냉소였다고 해야겠구려."
"저희는 그런 것 없이도 잘 지내고 있어요." 한 구절, 한 구절을 말할 때마다 침을 삼켜 가며 대답했다. 남자의 존재 하나만으로 시간이 하염없이 늘어지는 것 같았고, 이쪽은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단지 의식을 놓지 않으려고, 그저 견디려고 말했다.
"아무래도 세상 모든 조화의 중심지니까요."
"그래요, 그렇게들 말하더이다..." 사내는 내 목소리처럼 나른하고 힘 빠진 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그 점에 주목했다. 그리고, 사내를 돌아보았을 때 그 가늘어진 두 눈에도 관심이 갔다. 나는 말했다. "어쨌든 스칼렛 씨가 아버님 뵈러 조금 전에 다녀갔다는 거군요?"
"그렇소." 사내가 끄덕이며 말했다. "스칼렛이 아주 어릴 때 명을 달리했다고 하오. 듣자 하니, 끔찍한 사고가 있었다 하더군요. 스칼렛 본인의 말에 따르면 솔티 씨가 시장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다들 쉬쉬했다고 하더이다. 한 가족의 비극이 커다란 사건으로 바뀌어 세간의 이목을 끌게 되면 저질 삼류 드라마처럼 바뀌는 것도 순식간이기 때문이오. 아마 시를 위해서는 최선의 방책이었을 터이지만, 스칼렛은 그것을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소. 그것도 아주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말이외다. 스칼렛은 고향 땅을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밟았소. 이 늙은이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지만, 어쨌든 나이에 비해 아주 강인한 여성인 것은 사실이오."
사내를 마주보고,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물었다. "브리즈 양에게 관심이 많으시군요?"
사내의 입술이 조용히 굽어지더니, 피식 웃음을 내보냈다. "사실 좀 과한 면도 있다고 생각하오. 스칼렛이 얼마나 슬퍼하고 있는지는 이 늙은이도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내면의 한과 비통함은 감히 짐작할 수도 없소." 사내가 나를 쳐다보았다. "스칼렛이나 나나, 둘 다 예술의 영역에서 밥벌이를 하오. 스칼렛은 필리델피아 인콰이어러를 비롯한 기타 정기간행물에 실을 사진을 찍으러 다니는 사진기자지요. 이 늙은이는 환쟁이랍니다. 생각해 보면 내 기억은 언제나 풍경을 그리거나 사람의 얼굴을 모사하는 순간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오. 우리는 작년, 볼티메어에서 개최되었던 이퀘스트리아 미디어 컨벤션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그 때 내가 만난 스칼렛은 재능은 출중하지만 집중력은 좀 부족한 젊은이였소. 글쎄... 어떻게 생각하면 내가 스칼렛을 거두었다고 해도 되겠소이다. 어쩔 수가 없었소. 그 때나 지금이나, 나는 스칼렛을 집에 가는 길을 잃어버린 미아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오."
"고향에 돌아오기는 했잖아요?" 나는 물었다.
"글쎄... 별로 그런 것 같진 않소." 사내가 다시 비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아버지의 묘지를 찾은 것, 그건 좋은 일이라 생각하오만... 기분 좋은 해후라고 보기는 어렵소이다. 디스코드 격퇴 이후 포니빌에 출장을 다녀와야 하는 신세가 되자 스칼렛은 분을 못 이기고 펄펄 뛰었소. 필리델피아 인콰이어러와의 계약을 깨고 로스 페가수스로 이사하기 직전이었소이다."
"그럼 왜 마음을 바꾼 거죠?"
"내가 설득했소." 그가 말했다. "늙은이의 생각..." 입술을 씹던 사내가 고쳐 말했다. "차라리 늙은이의 감이라고 하는 게 옳겠군. 태어난 고향에 돌아가는 게 어느 식으로든 스칼렛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았소. 어쩌면 본인의 어머니와 다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생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 스칼렛이 자기 어머니와 거리를 두는 행위 자체가 어머니 가슴에 대못을 박는 행위라는 걸 자각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소만."
"그럼 스칼렛이 한을 품은 이유는 무엇인 것 같으세요?"
"그걸 미루어 짐작하기에 충분한 질문을 해 본 적이 없소." 사내가 덧붙였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려. 스칼렛처럼 젊은 사람들은 한을 품는 걸 더 강한 사람이 되기 위해 겪어야 할 고난쯤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요. 그런 감정들은 자기 자신을 잠식해 들어가는 것뿐이고, 종내 자기의 삶에 갇히게 만들 뿐이라는 걸 깨닫기엔 너무 젊은 나이기도 하오. 스칼렛은 근시일 내로 자기가 품고 사는 기억들이 자기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었는지, 나쁜 사람으로 만들었는지 판단을 하기는 해야 할 것이오. 다만 이대로 가면 즐거운 기억을 만들 기회는 영영 잃어버리지 않을까 걱정되는구려. 물론 이 또한 스칼렛이 제 어머니와 둔 거리 때문에 육친의 정까지 무너지지는 않는다는 전제가 깔린 것이지만."
바람에 흐트러진 갈기를 발굽으로 쓸어 다듬는데 오한이 들었다. 나는 말했다. "글쎄요, 선생님 같은 벗을 사귈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운인지 잘 모르는 것 외에는 딱히 결핍되거나 한 건 없는 것 같은데요." 쓴웃음을 지었다. "선생님이 자길 얼마나 생각하는지, 얼마나 자기 장래를 걱정하는지 알면..."
사내가 숨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천천히 끄덕였다. "기나긴 인생살이에서 뭐 얻은 게 있는지는 모르겠소만, 적어도 우리 모두가 각자의 존재 가치를 갖고 이 땅에 태어난 것은 확실하다는 것은 알게 되었소. 늙은이와 동행한 이래 스칼렛은 퍽 부드러워진 편이오. 예전에는 다른 사람들 골통이나 부수고 다닐 줄 알더니, 요즘은 그래도 자기 주변 사람들한테는 웃어 보이기도 하고 더러는 좋은 말도 해주기도 하지요." 그는 나를 보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쪽이 스칼렛과 마주쳤을 때 그 녀석이 보여 준 모습이 가장 좋은 증거겠구려."
"누구든지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해야겠다 마음만 먹으면 친절하게 굴 수 있지요."
"그래요, 뭐, 그래도 스칼렛 그 친구가 좀 긍정적인 사고를 할 수만 있게 된다면야 이 늙은이의 마음도 한결 가벼워질 터인데." 사내가 말했다. "타자의 행복을 위해 헌신했음을 실감한 것도 아주 오래된 일이오이다. 그대가... '유용한' 사람이 된 기분이 어떤지... 잘 알런지, 어떨런지는 잘 모르겠소만..."
사내를 마주보고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정말 잘 알지요."
사내가 나를 보더니 빙긋 웃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 하다가, 사내가 말을 꺼냈을 때는 정말 찢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저러나, 이 늙은이 장단에 오래 맞춰 줄 필요는 없었을 터인데 말이오. 늙은이가 주절대는 말 어울려 주어 고맙소."
"아뇨... 별 말씀을." 입술을 떨며 말했다. 사내가 잠시 시선을 돌린 사이 나도 몸을 돌려 재빨리 걷기 시작했다.
사내가 말했다. "아, 그렇군. 늙은이는 네뷸러스Nebulous라 합니다."
몸을 돌려 사내를 마주보았다. 지그시 웃으며 힘을 짜내 말했다. "멋진 이름이군요."
그가 이쪽으로 잠시 고개를 돌리더니, 한두 번 눈을 깜박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좋은 밤 되시구려." 사내는 비석 쪽으로 몸을 돌리고 고개를 숙였다.
나는 자리를 떠났다.
다음 날은 눈 깜박할 사이에 왔다. 잠은 자지 않았다. 그저 진혼곡을 계속해서 퉁기며 사내의 목소리와 사내의 이름을 기억 깊이 새기는 데 열중했다. 그것은 차라리 고문이었고, 가슴 깊이 새겨져 아물지도 않는 열상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두막 한쪽에 들어앉아 늦가을 아침 태양이 다시 솟을 때까지 진혼곡만 연주하며 내 목적의식이라는 관짝 속에 생각들을 집어넣어 보존하는 데 열중했다.
앨의 밥그릇에 밥을 부어 주자마자 문을 박차고 나가다시피 집을 나섰다. 후드를 걸쳐야 한다는 생각 따위는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나 자신의 절박만으로 어깨 위에 내려앉은 서릿발을 녹여 없애는 데는 충분했다. 나는 포니빌 곳곳을 쏘다니며 골목 하나, 구석 하나 빼놓지 않고 뒤져댔다. 모든 묘석은 크고 높은 이상을 모사한다. 사람이 진정 붙잡을 만 하고 향유할 만 하며 목숨을 걸 만한 것들은 말로 옮겨놓을 수 없는 것들이며 하늘에 떠도는 뜬구름과도 같아서, 나로서는 음악과 비탄과 환희, 그리고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이 정당한 분노를 담은 한 마디 외침을 무기삼아 쟁취할 수밖에 없다. 목숨을 부지한다는 것은 몸을 이루는 가장 작은 원소들로 분해되어 가는 과정이다. 디스코드가 다시 세상에 풀려난 날부터 한 주 동안 사라진 기억의 빈틈으로 방황하던 나는, 아직 나를 붙들어 매 주고 있는 게 존재하는지, 아직 나를 깊숙한 곳에 품어주고 있는 개념이 있기는 한지를 고뇌하며 쓸데없는 비탄에 빠져 허송세월했다. 삶에 남아 있던 형형색색의 빛깔들이 사라지고 난 뒤 내가 마주한 것은, 나 스스로는 이해한 척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들이 싹 벗겨지고 나서 남은 내 감정들이었다. 네뷸러스가 늙고 지친 몸에도 불구하고 놓을 수 없었던 마지막 실낱 또한 그것이었지만, 타인의 앞날을 축복하고 행운을 빌어 주기 위한 그의 길고 긴 노력은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네뷸러스는 내게 있었던 열의를 가진 사람이었지만, 존재 자체를 잊히는 재주는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스칼렛을 구원할 수 있었고, 구원이 뚝 떨어져 내린 허공으로 전락하지 않았다. 나는 거의 며칠 만에 처음으로 내가 포니빌에서 무엇을 하고자 서원을 세웠는지 다시 떠올렸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오전 내내 마을을 뒤지고 돌아다녔다. 진혼곡을 연주할 필요도 없었다.
수색은 성공적이었다. 스칼렛은 포니빌 교외의 오래된 풍차 밖에 있었다. 그 중에서도 돌을 둥글게 깎아 만든 입구 바닥 앞에 서서 녹슨 농기구를 가득 실은 채 버려진 나무 수레 밑에서 피어나는 야생화를 찍고 있었다. 홀로 작업에 열중하는 스칼렛의 모습은 더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그 얼굴에 찌푸려진 구석은 한 곳도 없었다. 거리가 좀 있기는 했는데, 시장님이나 네뷸러스의 얼굴에서나 보일 법한 무언가가 그 입가에 엉겨 있었다. 거울을 볼 때마다 수도 없이 마주했던 그것이 스칼렛에게서도 보였다.
장작 더미 뒤에 숨어 스칼렛을 살피는데 몸이 떨렸다. 귀신이 자기보다 다섯 살은 어린 사람의 한을 풀 수 있겠는가 싶어서였다. 나는 네뷸러스도 아니고, 시장 본인도 아니다. 아주 잘 쳐 봐야 아리아의 노래에서 쏟아져 내린 저주스러운 서리에 지금껏 체득한 지혜와 진실된 마음에서 나온 말을 갈갈이 찢겨, 더 말이라고 할 수도 없을 누더기를 메시지랍시고 들이미는 전달자에 불과할 터이다.
그 때 새삼스레 한 가지 깨달음이 머리를 스쳤고, 나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내가 전할 수 있는 것이 아주 말뿐인 것은 아니었다. 스칼렛이 들꽃에서 시선을 떼고 풍차 내부로 걸어 들어갈 때 떠오른 생각이었다. 스칼렛이 조용하고 느린 걸음으로 풍차 안에 들어서자 발걸음 소리가 메아리졌다. 한 쌍 여닫이문이 축 늘어지며 닫혔다.
나는 눈을 깜박이다 시내로 방향을 틀었다. 마지막으로 풍차를 한 번 돌아본 뒤 고개를 돌리고 도심을 향하여 전속력으로 달렸다.
"호박이라면 앞으로 사흘 안에 배달이 가능합니다!" 포니빌 동부 마을 시장가. 캐럿 탑이 당당하게 선언하듯 말했다. "물론, 수확량의 10%는 우리 마을을 위해 쾌척할 생각이고요." 캐럿 탑이 웃었다. "올해는 참 씨알이 굵어요. 애들도 그렇고, 가족들도 아주 좋아할 테지요!"
"오호, 대단한데요!" 시장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렇잖아도 호박등 깎을 자원봉사자들을 모집해 두었답니다. 게다가 애플잭 양이 저녁에 할 게임 몇 가지를 준비해 주기로 했지요!"
"아하. 애플잭이라면 믿을 만하죠!"
"일이 아주 잘 진행되는군요." 시장이 말했다. "올해 악몽야 축제는 분명 역대급일 겁니다."
캐럿 탑이 열렬히 동의하는 표정으로 시장에게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제코라 선생이 올해 이야기꾼 역할을 맡는다는데, 사실인가요?"
"흐으음... 네." 시장이 안경을 고쳐 쓰며 즐거이 웃었다. "제코라 선생이 들려 주는 나이트메어 문 이야기라니, 듣기만 해도 즐거운 이야기죠. 나이트메어 문 전설은 곳곳에 강한 인상을 줄 만한 지점들이 많은데, 마침 근처에 제브라하라의 주술사가 있다니 얼마나 멋진가요."
"진짜, 못 기다리겠네요!" 캐럿 탑이 발굽을 흔들어 인사하고 걸음을 옮겼다. "자, 그럼 해 지기 전에 농장 일 하러 가야겠군요. 혹시 더 필요하신 거 있으시면 언제든 오셔도 괜찮고요!"
"그럼요!" 시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고, 그러면 확성기도 있어야겠는데요! 하하하하..." 시장이 고개를 젓더니, 청명한 가을 공기를 흠뻑 들이마셨다.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 옳았어. 악몽야 축제가 올해의 클라이막스가 될 거야." 시장이 몸을 돌렸고, 바싹 다가선 나와 얼굴을 마주쳤다.
"시장님! 큰일이에요!" 부러 잔뜩 겁을 집어먹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빨리 와 보세요, 빨리요!"
"예?" 시장은 소스라치게 놀란 기색을 숨기지도 못하고 펄쩍 뛰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죠? 그쪽은 대체 누구고...?"
"시간 없어요!" 피해망상증 환자라도 된 양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지금 당장 이 대화도 엿듣고 있을지 몰라요. 그자라면 천막이나 좌판으로 둔갑하는 걸로 모자라 저기 장미 덤불로도 변할 수 있으니까!"
"예? 누가요?!"
침을 삼키고 잔뜩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누구냐뇨, 디스코드죠."
시장의 쪽빛 눈동자가 겁에 질려 흔들렸다. "디, 디스코드라고요? 그 말인즉... 그자가 다시 봉인을 깼다는 말인가요?!"
"쉬잇!"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기울여 시장의 귀에 대고 말했다. "트와일라잇 스파클과 그 친구들이 조화의 원소를 가지고 상황을 정리하러 모이기는 했지만, 정작 그 자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는 몰라요. 일단 다시 세상에 풀려난 이상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 왕림하셔도 그 자를 막으실 수는 없을 거고요. 저를 전혀 모르시겠지만, 그것도 당연한 일이죠. 캔틀롯 왕실이 트와일라잇 스파클에게 이 사실을 알리라는 밀명을 받아서 내려왔으니까. 혹시나 저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골치 아프니까 아무도 모르게 숨어 다녔지요. 디스코드가 돌아온 이상 다시 이 땅에 혼돈의 씨앗을 뿌리는 건 시간 문제, 아니 경각에 달린 문제라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닙니다."
"잠깐... 아, 아니 그래도 이게 가당키나 한가요?!" 시장은 이쯤에서 온몸을 달달달달 떨고 있었다. 식은땀에 젖은 얼굴로 조심스레 건물 지붕 위를 살펴보는 시장의 사지가 파르르 떨렸다. "분명히 봉인당했을 텐데요! 그것도 단 2주 전! 조화의 원소가..."
"...세상이 끝장나기 직전에 겨우 한데 모여 그 무지갯빛... 무언가로 디스코드를 때려잡았다고 말씀하시려던 거죠." 말이 매끄럽게 나오지 않아서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했다. "흠흠. 시장님께서 주목하셔야 할 건 눈에 보이는 현상이 아닙니다. 루나 공주님께 부마한 나이트메어 문을 쫓아냈을 때는 안정되고 정돈된 정신 상태를 유지했지만, 디스코드를 봉인할 때는 그러지 못했거든요. 그래도 일단 조화의 원소가 한 자리에 다시 모였으니, 언제든 디스코드를 봉인할 수 있다는 건 다행입니다만."
"그렇다면... 왜 제, 제가 나서야 하는 거죠?"
"포니빌 곳곳에 뻗은 골목 하나하나까지 자기 발굽 들여다보듯이 아는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리 그 트와일라잇이라 해도 그자의 은신처를 찾아낼 수 없기 때문이죠." 시장을 가리켰다. "그런 사람은 시장님뿐이고요! 그런즉, 현 시점부터 제가 시장님을 호위하여 조화의 원소 쪽으로 모셔 가야겠습니다."
"그래요, 좋습니다!" 시장이 떨리는 몸을 애써 달래며 내뱉듯 말했다. 시장이 창백하고 지친 얼굴로 말했다. "헌데, 저들은 어디 있지요? 트와일라잇 스파클은 어디에 있습니까?"
심호흡하고 몸을 돌린 뒤, 뛰며 말했다. "따라오세요.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시장님, 서두르세요!" 기울어 가는 해가 푸른 언덕 위를 비추었다. 내 청록 솜털도 초목과 함께 햇빛을 받아 반들거렸다. 나는 뒤를 보고 소리쳤다. 에메랄드 빛으로 반짝이는 언덕마루 위로 풍차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나무를 다듬어 만든 부품이 삐걱거렸고 투명한 풍차 날개가 느릿느릿 돌아갔다. "시간이 없습니다!"
"조금만 천천히 가면 안 되겠나요!" 등 뒤로 시장이 쌕쌕대는 숨과 비틀거리는 다리로 따라붙었다. 땀에 흠뻑 젖은 칼라가 늘어져 흘러내리기 시작한 참이었다. 시장은 비뚤어진 안경을 고쳐 쓰며 애써 달렸다. "저는 그쪽처럼 팔팔한 청년이 아니라고요! 디스코드를 물리치고 싶은 건 저나 여섯 친구들이나 같은 마음이겠지만, 막상 도착하기도 전에 기절하기라도 하면 늙은이가 여기까지 뛰어온 이유가 없어—"
"그거라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몸을 돌려 풍차 입구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도착했거든요."
시장이 주변을 휘휘 돌아보았다. 언덕빼기 위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 시장의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트와일라잇은 어디 있죠? 다른 다섯은 또 어디 있나요?"
"안쪽입니다. 어서 들어가세요! 저도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그래요!" 시장이 겁이 나 헐떡이는 숨을 달래며 말했다. 지친 다리를 질질 끌다시피 하며 문간으로 들어간 시장은 판자를 짜맞춰 바닥을 댄 내부에 들어섰다. "트와일라잇, 도착했어요! 그쪽이 보낸 사람이 디스코드 건 이야기는 다 해 줬습니다. 그래 어떻게 도와 드릴—?" 시장은 놀라 자리에 얼어붙었다.
스칼렛 또한 당혹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오후 햇살에 빛나는 거미줄을 카메라에 담던 중이었다. 스칼렛의 쪽빛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아이구, 여기서 또 무슨 일을 하고 계십니까?"
시장이 입을 헤벌리고 대답했다. "그쪽은...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아닌데."
"오호오오오, 그런 줄 아셨나요?"
시장은 눈을 깜박이더니 얼굴을 찌푸리며 몸을 홱 돌렸다. "이봐요,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커다란 쿵 소리와 함께 풍차 밖으로 통하는 길이 차단되었다. 나는 풍차 내부에 들어서자마자 출입문을 닫아걸고, 그대로 봉쇄한 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무슨?!" 시장이 더듬거리며 외쳤다.
스칼렛이 시장 옆으로 다가서며 이쪽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야! 이게 뭐 하는 짓거리야?! 너 미쳤—?"
분노와 경악이 번득이는 두 사람의 눈 위로 금빛 무언가의 형상이 떠올랐다. 내가 가방에서 꺼내든 리라의 모습이었다.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톱니바퀴의 축과 삐그덕거리는 부품들로 가득 차 좁고 답답한 풍차 한가운데로 스산한 멜로디를 흘려 넣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장막이 곧 눈을 가리울 것이었으므로 나는 눈을 가만히 감았다. 저 둘은 연주가 끝난 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조금도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어둠 소나타의 연주가 끝난 뒤, 나는 찾아온 어둠을 담담히 맞이했다. 다만, 저 둘은......
"셀레스티아 공주님 맙소사! 눈이... 눈이 안 보여!"
"스칼렛, 정신 차려! 어떻게 된 건진 몰라도 분명 뭔가 이유가 있어서—"
"아악! 내, 내 발굽조차 안 보여! 저 년이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디스코드가 수를 쓴 거야! 우리를 꼬여내서 사악한 마법을 걸려고 유니콘인 양 속여서 접근한 거였어!"
"거지같네 진짜! 아아아악! 그러게 처음부터 이 병신같은 동네엔 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왜 그랬지?!"
"잠시라도 좀 조용히 하면 안 되겠니?! 엄마 생각 좀 하자!"
"암만 생각해 봤자 뭐 합니까?! 당장 앞이 안 보이는데!"
"얘, 너 혼자만 그런 것도 아니잖—"
"얘 얘 하고 부르지 좀 마세요! 제가 무슨 코흘리개... 꼬맹이도..."
끔찍할 만큼 날카로운 한기가 둘을 덮쳤고, 모녀는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둘은 서로를 안은 듯한 모양새로 자리에 쓰러졌고, 코 끝에서 희미한 입김이 엉겨 흘렀다. 이 모든 현상을 적어 둘 수 있는 것은... 시야가 다시 트였기 때문이다. 둘이 정신을 못 차리고 버둥대는 동안 이쪽은 풍차의 원기둥형 벽을 따라 세운 나무 계단을 조심스레 타고 올라갔다. 나는 3층 어두운 곳에 숨어 조용히 모녀를 내려다보았다. 모르긴 몰라도, 이제 막 다시 눈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은 확실했다.
"으으으으으..." 스칼렛이 어질어질한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게 다 뭔 일이래? 기억이 나질 않으니 이거... 뭐야 이거?" 스칼렛이 고개를 들었다.
시장도 눈을 떴다. 품에 딸이 안기듯이 들어와 있는 모습이, 시장 본인도 당혹스러운 듯했다.
스칼렛이 움찔하더니 얼굴을 팍 구기며 시장의 품을 거칠게 빠져나왔다. "이게 지금 어떻게 된 상황이죠?! 시장님은 또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이건... 나도..." 시장이 마른침을 삼키더니 고개를 들었다. 풍차 부품들이 삐그덕거리며 굴러가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일이다."
"시장님 입에서 모른다는 말이 나온다니 이건 또 어떻게 된 일이죠?!" 스칼렛이 툴툴댔다. "시장님은 항상 무엇이든 알고 계시잖아요? 뭐 절 염탐한다던가, 그런 짓을 하고 계셨던 거 아닙니까?!"
"얘 좀 봐. 나도 잘 모르겠다니까. 엄마도 정신 차려 보니 여기—"
"시장님을 어떻게 믿습니까!" 스칼렛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문 쪽으로 달려들어 체중을 실은 그대로 문에 부딪쳤다. "보나마나 또 구역질나는 장난질이겠죠! 그것 말고는 설명이 안 되고!"
"똑같은 얘기를 몇 번이나 해야 알아듣겠어?!" 시장이 어깨를 으쓱이며 쏘아붙였다. 창백한 다리가 움찔했다. "여기는 대체 왜 왔는지, 어떤 놈이 여기다 가둬 놨는지 나도 모른다니까?"
"아오 진짜!" 스칼렛이 툴툴대며 문 걸쇠에 달라붙어 용을 썼다. 스칼렛이 용을 쓰든지 말든지, 문은 꼼짝도 않고 버티고 서 있을 뿐이었다. "이 시발?! 썅! 거지같은 문짝! 이게 뭔 지랄이야?!"
심호흡하며 고개를 기울여 외창 쪽을 바라보았다. 외창이라 해도 가늘고 길게 난 것이어서 평범한 창문은 아니었다. 트와일라잇은 자기가 나를 가르쳤다는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지만, 몇 달 동안이나 도서관을 들락거리면서 갈고 닦은 염동력만은 내가 열심히 배웠다는 증거가 되었다. 고철을 가득 실은 수레를 염동력으로 끌어당겨 풍차 출입문을 빈틈없이 틀어막을 수 있을 정도였다. 출입문을 밀어서 열려면 열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유니콘이 없다면 적어도 여섯은 데려와야 저 쓰레기 더미를 밀어낼 수 있을 것이었다. 내게 이 사실은 명백했다.
저 둘에게는 그러지 않았다.
"이 썅 빌어처먹을 풍차!" 씩씩대는 스칼렛 브리즈의 얼굴은 그 자신의 붉은 갈기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한참 전에 싹 다 때려부수고 밀어 버렸어야 할 거 아뇨!"
"내가 그럴 수 없다는 걸 너 자신도 잘 알 텐데!" 시장이 쏘아붙였다. 그녀는 거친 숨을 달래려 석벽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이 풍차는 랜드마크야! 물론 네가 이 사실을 이해해 주길 기대하는 게 바보 짓이기는 하다만—"
"그쪽 일을 하다 보면 엮일 수밖에 없는 쓰레기같은 것들을 애호하고 있다는 것밖에 모르겠는데요!" 스칼렛이 헐떡이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설마 내가 이딴 지랄같은 상황에 처할 줄은. 이봐요!" 스칼렛이 고개를 치켜들며 소리쳤다. 수도 없이 늘어선 기둥 사이로 목소리가 메아리졌다. "이봐요! 누구 없어요!"
"하아......" 시장이 발굽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신음했다. "스칼렛, 그만해라..."
"누가 좀 꺼내 줘요! 갇혔어요!"
"도심에서도 한참 떨어진 곳에다, 지나는 사람도 없는 곳에서 뭘 바라고!" 시장이 스칼렛보다도 크고 높은 소리로 꾸짖었다. "한참을 불러 봤자 누가 오기도 전에 네 목부터 나갈 게다!"
스칼렛이 눈을 부라렸다. "아니, 적어도 둘 중에 한 명은 좀 쓸모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 아니냐고요. 시장님!"
"도대체가!" 시장의 쪽빛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시장은 폭발하듯 소리쳤다. "말끝마다 시장, 시장 타령하는 것 좀 그만하지?! 시장이기 전에 나는 네 엄마야, 엄마! 네가 내 배에서 나온 새끼라고! 빌어먹을 일정 관리에 끝도 없는 서류 작업에 치이는 사람이기 이전에, 너를 낳은 사람이라는 걸 좀 더 우선해서 호칭을 써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안 들어?!"
"그러신 분이 하나뿐인 딸년을 그따위로 대합니까!"
시장이 도끼눈을 떴고,
스칼렛도 인상을 쓰며 그 시선을 되받아쳤다.
모녀 사이에 오간 고성 위로 침묵이 찾아왔다. 잠깐의 시간이 지난 뒤, 삐그덕대는 나무 부품 소리 아래 스칼렛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스칼렛이 한쪽에 놓아둔 카메라 쪽으로 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스칼렛이 뒷다리 무릎을 품에 안고 고개를 숙였다.
"거지같네요." 스칼렛이 말했다.
시장이 콧김을 훅 뿜더니 곳곳에 붙은 거미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쪽에게도, 그리 즐거운 경험은 아니구나."
"흥." 스칼렛이 쓴웃음을 지었다. "저랑 같이 지낸 세월도 그리 즐거운 경험은 아니셨겠죠. 한 번도."
시장이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아니."
"왜 또 그러실까, 또 고약한 농담을—"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건 네 태도 하나밖에 없어!" 시장이 고개를 홱 돌려 스칼렛을 쳐다보았다. 분기탱천한 시선에 충만했던 노기가 서서히 빠지며, 그 시선 또한 스칼렛의 얼굴에서 그 앞 바닥으로 떨어졌다. "집안에서 어쩌다 마주칠 때마다 네 악에 받친 얼굴을 마주하고, 싸늘한 목소리를 듣고, 그림자처럼 스쳐 지나가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이었는지 넌 모를 거다."
"뭐 어때서요?" 스칼렛이 침을 삼키며 잔뜩 구겨진 얼굴로 말했다. "그게 당신이 바라던 일 아닌가요?"
"난 네가 강하게 크기만을 바랐을 뿐이다."
"뭐, 당신처럼 말인가요?" 스칼렛이 조롱조로 대답했다. "시장님, 그건 강한 게 아니에요. 일로 도피하는 거지."
"내가 이 길에서 경력을 쌓으며 해 온 모든 일은," 시장이 자기를 가리켰다. "포니빌과 시민들을 보호하고, 너를 지키기 위해서였어."
"아하, 노력이 부족해서 아빠는 못 지켰나 보군요?" 스칼렛은 웅얼대는 목소리로 독기를 가득 담아 말했다. "이제 그만 인정하시죠. 아빠만 땅에 묻은 게 아니라, 당신의 일부도 같이 땅에 묻은 거라고."
시장의 얼굴이 슬픔과 고통에 찌푸려졌다. "네가 나를 보는 그 시선, 그것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하나 없지. 나는 그 시선과 마주칠 때마다 차라리 나도 죽었기를 바랐다."
스칼렛의 눈빛에 섞인 독기가 희미해졌다. 여자의 시선은 한결 순한 것으로 돌아갔고, 그녀는 시장의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씹었다.
시장이 한숨지으며 발굽으로 얼굴을 쓸었다. 인후에 엉긴 응어리를 삼켜 내려보낸 시장은 잠시 그 자리를 서성거렸다. 잠시가 몇 분으로 이어졌고, 그 몇 분은 다시 태양이 지평선을 향하여 내려서고 붉은 석양을 하늘에 띄우는 것이 풍차 외창으로도 명확히 보이고 풍차 내부에 어둠이 드리우기 충분한 시간으로 연장되었다.
마침내 시장이 입을 열었다. "내가 포니빌의 시장으로 봉직한 것도 30년이 다 되어 간다. 그 동안 포니빌은 나름대로의 번영을 구가했다. 나는 그간 놀라운 순간들을 목도했다. 나이트메어 문이 지상으로 풀려났고, 조화의 여섯 원소가 한데 모여 순수한 악의와 혼돈을 우정의 힘으로 물리쳤지..."
"누구나 다 하는 얘기군요." 스칼렛이 툴툴댔다.
어미가 딸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 오른쪽 앞다리로 왼쪽 앞다리를 감쌌다. 입을 여는 시장의 입술이 떨렸다. "그 때 저 여섯의 모습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어서, 광명스럽기까지 했다. 다만, 내가 정말로, 진실로 다시 보고 싶은 모습은 아니었어."
스칼렛이 콧방귀를 뀌었다. 딸은 어미를 쳐다보지도 않고 툴툴댔다. "내가 이 거지같은 동네 뜨기 전에 당신이 날더러 뭐라고 했지요? 룸펜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사진이나 찍으러 다니다간 어디 가서 굶어 죽기 십상이고, 그런 짓보다는 사업 쪽에 더 재능이 있으니 괜히 시간 낭비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스칼렛..."
"아빠가 살아 계셨어도 질색 팔색을 했을 거라고도 했고." 스칼렛이 거칠게 말했다.
"스칼렛, 스칼렛—"
딸이 딱딱거리며 대들었다. "그 때 생각했죠. 내가 앞으로 뭘 해서 밥 처먹고 살든지 말든지, 그쪽이 퍽이나 신경 써 줄 것 같진 않다고. 내 말 틀려요?!"
"스칼렛, 내가 잘못했다!" 시장은 차라리 울부짖는 듯한 소리와 함께 한 방울 눈물을 떨어뜨렸다.
스칼렛은 그런 반응을 전혀 예상치 못한 양 당혹스러워하며 멍한 얼굴로 한쪽 눈썹만 치킬 뿐이었다.
시장은 울먹이며 발굽으로 얼굴을 문질러 닦았다. 시장이 몸을 떨며 말했다. "다 내 잘못이다. 이제... 이제는 화해하고 싶구나. 네가 보기엔 같잖은 수작일 테지. 그야... 잘못한 사람은 나니까. 내가 저지른 끔찍하고 잔인한 실수 때문에...... 너무 많은 걸 잃었다. 그러고 나서 돌이켜보니...... 인생에 있어야 할 빛이 전부 사라지고 난 뒤 내 모습은, 그 뒤에 엉겨붙은 그림자 자국에 지나지 않았어. 내 삶의 빛을 되찾고 싶다. 내, 내 사랑하는 딸을......"
스칼렛은 아무 말 없이 시장을 흘겨보고만 있었다. 여자의 뜨거운 숨에 끝없는 적의가 묻어나고 있었으나, 스칼렛의 말투는 평온했다. "그쪽이 그렇게 나오면 제가 옳다구나 하고 받아 줄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난 거죠? 그쪽은......" 스칼렛이 침을 삼키더니 쏘아붙였다. "당신은, 단 한 번도 사과한 적이 없잖아요!"
시장이 한숨지으며 잿빛 갈기로 덮인 머리를 숙였다. "그래, 맞다..."
"다른 건 몰라도 그쪽 방면에서는 아주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 않았나요! 아주 앞뒤 꽉 막혀서는... 그쪽스럽다는 말로밖에 평가가—"
"나도 안다, 아주 잘!" 시장은 속 끓는 소리로 대답하면서도 스칼렛을 향해 눈물로 덮여 초점이 맞지 않는 시선을 던졌다. "흉물스럽기 짝이 없는 악의 무리를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본 뒤에야 그래선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스칼렛, 시대가 급변하고 있어. 흑마법과 백마법이 이 땅 위에서 격돌하고 있지. 수백 년 동안이나 없었던 일이 일어나고 있다. 설마 내 평생에 일어날까 싶었던 일들이 내 눈 앞에서 벌어졌다. 살아 있는 재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존재의 흑마법에 당하기도 했지. 일단 그 마법에 당하면 나라는 존재에 대한 모든 통제와 지각력을 상실하게 된다. 다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뒤, 전까지는 몰랐던 게 가슴을... 채웠다..." 시장이 몸을 움츠렸다. "...내가 얼마나 공허한 삶을 살았는지 느껴졌거든." 시장이 마른침을 삼키고 한층 진정된 숨으로 말했다. "나는 왜 공허한 삶을 살았을까, 나 스스로 내 인생을 공허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어. 나 자신에게서 소중한 것들을 빼앗아 없애 버린 게 나였다. 나는 그렇게 너까지 잃었지."
스칼렛이 입을 벌리고 시장을 쳐다보았다.
시장이 천천히 스칼렛에게 다가갔다. 스칼렛이 움찔할 것 같았는데, 그러지 않았다. 어머니는 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스칼렛. 네 아버지가 죽었을 때 나는 그런 끔찍한 고통을 겪게 되리라는 걸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겪고 싶지 않았고, 너 또한 그런 일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널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너를 그렇게 키운 건 그것 때문이었어. 하루를 오직 공부와 학과 수업에 투자하게 하고, 내 멋대로 네 진로를 강요한 것도 그래서였지. 너를... 강하게 키우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하면 다 잘 될 거라 생각했지." 시장이 몸을 떨었다. "잘못된 생각이었다. 작금에 와서 네가 나를 어미 취급하지 않는 것도 전부... 내 책임이다. 인과응보지. 내 멋대로 인생이란 길의 잡초를 뽑아 버리지 말았어야 했다. 그 잡초가 자라 행복을 꽃피우는 자리를 만드는 거였는데."
"강하게 크긴 했습니다." 스칼렛이 떨리는 목소리를 진정시키려 안간힘을 쓰며 말했다. "그건 내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지였으니까요. 당신이 내게 다른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았으니."
"그래. 그래, 맞다..."
"그건 그렇다 치죠. 시장님이 변했다는 걸 제가 어떻게 믿지요?" 스칼렛이 시장을 의혹의 눈초리로 살피며 물었다. "사실 애초에 여기서 마주칠 계획을 세워 둔 거 아닙니까?!"
"그건 나도 정말 모르겠다, 내 딸아. 그건 나도 알고 싶은데..." 시장이 말을 멈추었다. 차가운 생각에서 피어난 증기를 쫓는 듯 그녀의 시선이 천장을 향했다. 시장이 침을 삼키더니 말했다. "사람의 영혼을 이루는 것들이 있다더구나..."
나도 모르게 눈썹을 치켰다.
스칼렛은 당혹해하는 눈치였다. "예?"
시장이 딸을 마주보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범한 최악의 잘못은 네 마음을 현실주의자의 것으로 깎아 다듬으려고 했던 것이었어...... 너는 항상 이상주의자, 그것도 유쾌한 이상주의자였는데." 시장이 쓴웃음을 지으며 눈물을 떨어뜨렸다. "너희 아, 아빠를 똑 닮아서..."
스칼렛은 숨이 멎을 듯한 침묵 속에 시장을 마주보고 있었다.
"스칼렛, 이제 내가 어떻게 해야 좋겠니?" 시장이 힘을 끌어모아 말했다. "기억도, 명예도, 과거의 죄악도 다 벗겨내고 나면 그 자리에 남는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자기 딸인 스칼렛을 사랑하지만, 되찾을 수 없기에 그저 애틋해하기만 하는 그런 여자일 뿐이야." 시장은 떨리는 다리로 무릎을 꿇고 앉아 한쪽 발굽을 스칼렛의 어깨에 얹었다. "나는 네가 잊힌 기억 속 존재로 전락하길 바라지 않아. 내가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너만은 잃고 싶지 않아."
스칼렛이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어린애처럼 숨을 들이마시며, 한껏 찌푸려진 얼굴로 말했다. "확실히, 변했군요."
"아니..." 시장이 고개를 저었다. 눈물에 젖은 얼굴이 웃고 있었다.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뿐이지. 나쁜 엄마지만, 내 예쁜 딸 스칼렛도 옛날처럼 돌아와 주길 부탁하고 또 부탁할게. 마주쳤다 하면 과거의 어둠 속을 헤매며 다투던 관계는 그만두자. 우리 스스로를 구해 줄 수 있겠니."
스칼렛은 아무 말 없이 시장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 몸을 파르르 떨었다.
시장은 조마조마한 기색을 조금도 숨기지 못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스칼렛......?"
"진짜 짜증나... 진짜 최악이야..."
시장은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으로 울먹거리다 말했다. "그럴 수밖에. 내가... 자초한 일이지..."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스칼렛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떨리는 두 발굽으로 얼굴을 가린 스칼렛이 거의 들리지도 않는 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했으면서... 절대 안 바뀔 것처럼 그러더니, 이제 와서 허락해 주면 어쩌자는 거에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시장의 젖은 눈이 굽어졌다. "무슨 말이니. 허락이라니?"
스칼렛이 고개를 들었다. 희미해져 가는 석양을 받은 얼굴이 반짝였다. "다시 '엄마'라고 불러도 된다고 허락했잖아요."
시장이 빙긋이 웃으며 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이제부터라도 엄마 노릇 제대로 할게. 엄마 혼자서는 어려울 것 같으니, 좀 도와 줘야겠다. 그럴 수 있지, 딸? 엄마를 용서하고, 도와 줄 수 있을까? 그래야 엄마도 딸을 도울 수 있을 것 같아."
스칼렛이 시장의 발굽을 잡고 얼굴을 비비며 울먹거리는 소리로 말했다. "당연하죠 엄마." 눈물이 넘실거리는 얼굴로 애써 웃는 모습은 힘들어 보였다. "당연한 말을..."
"딸..." 시장이 다리를 뻗어 스칼렛을 일으켰다.
스칼렛은 시장의 다리에 몸을 맡기고 일어나서 어머니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울기만 했다. 돌아갈 집을 찾아서였다.
시장도 스칼렛을 놓기 싫은 듯싶었다. "다 잘 될 거야. 잘 되고 말고. 시간이라면... 차고 넘치는 게 시간이니까."
"엄마, 미안해요." 스칼렛이 흐느꼈다. "이제껏 엄마 가슴에 못 박았던 거... 박으려고 작정하고 있었던 것도..."
"괜찮아. 사과는 그만 하렴. 좀 안아보자..."
석양이 남기고 간 금빛 일광이 밤의 차가운 그림자 속으로 녹아드는 동안 모녀는 서로를 포옹했다. 흐르던 눈물이 마침내 말라 없어지고, 울음소리가 웃음소리로 바뀌었을 즈음, 어느샌가 열린 문이 느슨하게 늘어진 모습이 모녀의 시선에 포착되었다. 출입구를 봉쇄하고 있던 수레는 제가 가고 싶어 가기라도 한 양 자리를 비켜준 지 오래였다. 문이 이제야 열렸다며 툴툴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풍차를 뒤로하고 떠나는 모녀의 뒷모습은 즐거워 보였다. 나는 자정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 위로 보름달의 창백한 빛이 쏟아지는 모습은, 달을 마주보고 웃어 줄 수도 있을 만큼 아름다웠다.
"얘, 핑키 파이. 가만히 좀 서 있으면 안 되겠니!" 다음 날. 래리티가 큰 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기념 촬영 시간이지 파티 준비 시간이 아니라니까!"
"아, 그렇게 딱딱하게 할 건 아니에요." 스칼렛 브리즈가 조용히 말했다. 정오를 맞아 하늘마루에 오른 태양에서 쏟아지는 햇빛 속에 시청 청사가 우뚝 서 있었고, 그 아래로 한 무리 사람들이 모여 섰다. 맑고 청명한 하늘은 광각 렌즈를 장착하고 삼각대에 고정해 놓은 카메라 앞에 줄지어 선 포니빌 사람들의 모습을 담기에 그보다 더 적합할 수 없는 조명과도 같았다. 거의 주민의 절반 가량이 사진을 찍으러 모였다. 카메라 뒤에 선 스칼렛은 완벽한 한 컷을 찍기 위해 차분히 기다리고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웃는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죠. 필리델피아로 가져갈 사진에는 여러분이 행복해하는 모습만 담겼으면 좋겠네요."
"그쪽도 포함하는 건가요?" 트와일라잇 스파클의 목소리가 스파이크의 머리 위쪽에서부터 울려 퍼졌다. 그 옆으로 플러터샤이와 레인보우 대쉬가 서 있었다. 트와일라잇이 씩 웃더니 덧붙였다. "포니빌 출신이시라면서요. 이쪽으로 오셔야 하지 않을까요?"
몇몇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열광적으로 환호했다.
"흠... 그것도 괜찮긴 한데요." 스칼렛이 대답했다. "그건 전문기자로서의 프로 의식이 결여된..."
"언제부터 프로 의식이 그렇게 중요했다고?" 명랑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시장이 나타나 트와일라잇과 스파이크 옆에 가 서며 말했다. "제 생각에는 스칼렛도 우리 한가운데 끼어서 그 이름을 오래도록 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가족이니까요."
몇몇이 환호하며 스칼렛에게 이쪽으로 오라고 몸짓했다. 어스 포니들은 발굽으로 땅을 밟았고, 페가수스들이 환호를 울리며 휘파람을 불었다.
스칼렛이 홍조를 띄우더니, 앞다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알았어요, 알았어! 정 그렇다면야."
"그라아아아췌!" 애플잭이 스칼렛에게 몸짓하며 말했다. "자, 자. 얼릉 와서 여그 서더라고!"
"셔터 누르자마자 뛰어가더라도 자리를 못 잡을 텐데요. 이 카메라는 타이머가 없어서." 스칼렛이 난처하게 됐다는 얼굴로 말했다. "사진을 찍으려면 누군가는 사진에 찍히지 말아야 해요."
주민들은 곤란하게 됐다, 어떻게 하냐는 듯한 시선을 교환했다. 마침내 사람들이 저희끼리 머리를 맞대고 쑥덕이기 시작할 때였다.
"내가 찍어 드리죠."
사람들이 일제히 한쪽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내가 서 있었다. 픽 웃으며 머리에 쓰고 있던 후드를 내렸다.
"실례. 엿보고 있던 건 아니에요. 뭔가 단체 사진이라도 찍으러 나오신 모양이라."
"어......" 레인보우 대쉬가 한쪽 눈썹을 치켰다. "그러셔?"
"저 사람들은 뭐니?" 한쪽 끝에 서 있던 더피가 물었다.
딩키가 더피 쪽으로 얼굴을 기울였다. "사람들이 아니라 한 사람이에요 엄마..."
더피가 한쪽 눈을 감더니 활짝 웃었다. "그렇구나! 안녕하세요! 어디 가시나 봐요?"
심호흡하며 빙긋 웃음을 띄웠다. "그렇다고 할 수 있겠죠. 도와 드려요?"
"뭐, 그러시다면야..." 스칼렛이 카메라를 가리켰다. "이 버튼 보이죠? 제가 눌러 달라고 할 때 눌러 주시면 돼요. 아무래도 한 장만 찍고 끝날 건 아니라서, 잠깐이 아니라 몇 분 정도씩 걸릴 것 같은데." 스칼렛이 소심한 미소를 지었다. "그... 너무 과한 부탁이죠?"
"걱정도 참." 발굽을 내젓고 스칼렛 쪽으로 다가서며 어깨 쪽에 묻은 한기를 털어냈다. "도움이 된다면야 저도 좋죠."
"잘됐넹!" 핑키 파이가 소리쳤다. "빨리빨리 왕, 스카-스카Scar-Scar!
스칼렛이 끙 소리를 내더니 한쪽 자리를 골라 풀썩 주저앉았다. "제발, 제발 다른 사람들도 저걸 본받아서 날 스카*2라고 부르는 일은 없으면 좋겠네요."
"나쁠 것 없지 않아?" 시장이 웃으며 딸의 어깨에 발굽을 얹었다. "너 좋다는 표현인데."
"유치뽕짝이거든요..."
"흐음...... 어쨌든 그게 네 고향이란다." 시장이 눈을 찡긋했다. "아니면, 여기 사는 동안 계속 '시장님 딸내미'로 불리고 싶니?"
스칼렛이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러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받아들이고 살아야 할 게 있으면 받아들이고 살려고요."
"벌써부터 굉장한 인생이 될 것 같지 않니." 시장이 고개를 들고 끄덕이며 말했다. "준비됐어요!"
"자, 다들 들으셨죠?" 트와일라잇이 자세를 잡고 서자 수십에 달하는 그녀의 친구들과 이웃들이 똑같은 자세를 잡았다. "됐어요!"
스칼렛이 이쪽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함이라도..."
"에이..." 어깨를 으쓱하고, 카메라 셔터 위에 발굽을 얹었다. "내 이름이 중요한가요?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지요." 헛기침을 해 목을 닦고, 고개를 앞으로 숙인 뒤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며 결코 세련됐다고는 할 수 없는 무대에 모인 그리 많지도 않은 사람들을 한 자리에 모두 담았다. "그럼, 치즈!"
"치이이이이이즈!"
카메라 셔터가 희미한 찰칵 소리를 냈다.
사내의 호박색 발굽이 여러 개 화폭을 휙휙 넘겼다. 사내가 고개를 멀리 빼서 들여다보다가 다시 숙이기를 반복할 때마다, 그 눈은 그림으로 옮긴 포니빌 풍경과 실제 포니빌 풍경을 비교하며 바삐 움직였다. 그는 오후 햇살을 맞으며 언덕마루에 앉아 있었다. 붓질 한 번 어긋난 곳이 없고, 색의 결핍과 과잉도 없어서 제법 만족하는 눈치였다. 사내는 숨을 들이마시며 화폭을 한 줄로 정렬시키고, 그대로 한데 모아 벨벳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림 좋은데요." 내가 말했다.
네뷸러스는 깜짝 놀란 눈치였다. 나이든 사내가 몸을 돌려 나를 마주보았다. 10월 바람이 사내의 잿빛 무늬 새겨진 갈기와, 언덕마루 위 에메랄드 빛 풀잎들을 쓸어넘겼다. 서늘하고 기분 좋은 산들바람을 맞으며 네뷸러스가 웃는 얼굴로 끄덕였다. "그렇습니까. 뭐, 풍경 덕이지 솜씨가 좋아서겠소."
"아름다운 곳이기는 하죠."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이 차갑고 거세져서, 후드를 단단히 뒤집어썼다. 사내의 그림자 속에 작은 도자기 그릇 같은 것이 숨어 있는 듯싶었다. 그의 지친 몸을 너무 들여다보지 않으려 시선을 돌렸다. "여기가 어떻다고 불평불만을 하려는 건 아니지만, 동네가 예뻐서 붙어 있는 거였으면 차라리 좋았겠다 싶네요."
"이 늙은이는 멋진 마을에 좀 더 오래 있고 싶지만, 지금은 그런 호사를 누릴 수 없을 모양이외다." 사내가 말했다. "한 시간 내로 기차를 타야 하니까요."
숨을 들이마셨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럴 거란 예감은 들었다. 네뷸러스가 혼자 떠나게 두었어야 했다. 사진을 찍자마자 집으로 돌아갔어야 했다. 언덕마루에 선 네뷸러스의 모습은 문득 다 쇠퇴한 불꽃처럼 보였고, 나는 그런 그를 그냥 둘 수 없었으므로 언덕을 올랐다. 그래야만 했다. "포니빌 풍경이 선생님 마음에 다 차지 않아서는 아닐지요?"
남자가 픽 웃더니 말했다. "생면부지의 이방인에게도 이리 친절하고 따스하게 대하는 사람들만 가득한 마을이, 그럴 리가 있겠소."
나는 말없이 사내를 쳐다보고 서 있었다.
네뷸러스가 헛기침을 하고 벨벳 가방의 지퍼를 당겨 잠갔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햇빛이 미묘한 각도를 이루어, 거기 비친 사내의 힘줄이 반들반들하게 닦은 묘비의 표면처럼 칙칙하고 힘 빠진 그림자 비슷하게 보였다. "늙은이는 그저 포니빌에서 해야 할 일을 다 했을 뿐이랍니다. 마법이 잘못 걸린 인형이라거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동물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등 사건에 엮이기는 했지만, 꽤나 즐거운 여행이었소."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보았다. "작은 마을이지만 이름은 높더니, 이제 그 이유를 알겠소이다."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악명이 높은 게 아니었으면 좋겠군요."
"아하, 물론 좋은 쪽이지요." 남자가 심호흡했다. "앞으로 당분간은 혼자 다녀야 하는 게 안 됐다면 안 된 일이지만."
입술을 씹으며 고개를 숙여 언덕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금빛 지붕들을 바라보다 물었다. "혼자요?" 문득 지나는 바람에 묻듯이 말했다. "어떻게 된 건가요?"
"여기 도착했을 때는 같이 여행하는 친구가 하나 있었소이다. 여기 있겠다고 하더군요. 어머니가 여기 사시니까요. 일종의... 해후를 한 것이오."
"그, 친구가 한 분 줄었다니 유감입—"
"하하! 줄다니? 그렇지 않소이다." 네뷸러스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동행인이 줄었다지만, 그 친구가 더없이 훌륭한 방법으로 자기 자신을 재발견하며 떠난 것이므로 그건 슬퍼할 일이 아니외다." 사내가 이쪽을 보았다. "그 친구는 한평생 자기 어머니를 미워하며 살았소. 그런데 이제는 둘 사이의 관계를 좋은 쪽으로 재설정하기로 했다더이다. 그 친구가 그렇게 얘기하며 웃는데,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말로 다 옮길 수가 없소. 밤과 낮의 차이라고 해야 할지, 분명 같이 다니는 친구였습니다마는... 아주 딴사람이 되어 있었소. 짊어진 짐을 많이 덜어냈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오." 그는 시원하다는 투로 한숨지으며 덧붙였다. "그건 이 늙은이도 매한가지고요."
한층 차분해진 숨을 내쉬었다. 네뷸러스를 보고 빙긋 웃자 두 뺨이 따뜻해졌다. "포니빌 여행이 마음에 드셨던 모양이에요."
"그 친구에게 잘 된 일이니까요." 사내가 말했다. "몇 년 동안이나 홀로 전국을 떠돌다 이제 돌아갈 집과... 돌아갈 가족을 찾은 것 아니겠소. 그것 하나만으로도 네 발 뻗고 편히 잘 만 하오."
"다행이군요." 내 인생 가장 무거운 한숨을 겨우 내 안에 도로 넣어두고 조용히 말했다. "그러면... 그러면 선생님 집은 어딘가요?"
네뷸러스는 힘들어 보였다. 턱선을 따라 드리운 그림자가 깊어졌다. "글쎄...... 보자, 아주 다른 것이기는 합니다만. 이 길이 내 집이외다."
몸이 움찔했다. 겨우 사내를 보고 물었다. "방금 제가 들은 게...?"
"잘 들은 게 맞소. 그 친구를 가두고 있던 건 이 늙은이의 여로요." 사내가 벨벳 가방을 몇 번 흔들었다. "그 친구가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서는 여기 올 필요가 있었소. 나는 아직도 나를 찾는 여정을 마치지 못했고 말이오. 바로 여기 있는 그 친구의 어머니께서 해 주셨던 것을 이 늙은이가 해 줄 수 없는 것은 그것 때문이외다." 네뷸러스가 건조하게 웃었다. "질투하는 것 아니냐 싶으실 수도 있겠군. 실제로 질투가 나긴 하오. 나잇값도 참 못 한다 생각할 수도 있겠구려. 그 또한 맞는 말이오. 그쪽도 춘추가 쌓이다 보면, 사람이 좀 방어적이 된다 싶은 걸 새삼 느낄 때가 올 것이외다. 보자... 어떤 느낌이라고 할까..."
"삶에서 무언가 결핍되어 있군요." 나는 말했다. "어느 지점이 결핍된 것인지는 잘 모르시지만, 선생님께서는 그 결핍을 메우고 싶어하시는 것이고요." 고개를 숙여 내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저도 그게 어떤 것인지는 조금 알아요. 선생님께서 그러하셨듯, 저 역시 포니빌에서 지내며 많이 바뀌었으니까요.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이라면 어땠을까 싶지만, 이렇지는 않았을 거에요."
네뷸러스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발굽의 무게중심을 고쳐 잡았다. "나도 그대와 같은 집이 있었소." 사내가 허공을 바라보며 문득 입을 열었다.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입술이 떨렸다. "그래요? 마, 말씀해 주실래요?"
"굳이 말할 가치는 없는 이야기오." 사내가 답했다. "아주 오랜 세월을 캔틀롯에서 지냈소. 결혼도 했소. 헌데, 세월을 보내다 보니 내 인생이 도무지 더 나아지지가 않는 걸 문득 깨달았소. 아내가 있었다고 했지요? 돌이켜보면... 우리는 눈을 마주치고 대화한 적이 없었소. 아내는 정치가였고 역사가였소. 이 늙은이는 어땠을까요? 내 이상을 이루는 질료를 찾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고 싶었고, 그 수단으로 그림을 택했소. 그래... 어떤 순간이 계기가 되어 갈라선 게 일 년이 다 되어 가는군. 그 무렵부터 전국을 떠돌아다니고 있소. 더 늦기 전에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오. 늙은이의 꿈의 질료가 무엇인지 속시원히 알아내기 전까지는 쉴 수 없다는 게요." 사내가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눈길을 던졌다. "그대처럼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를 이야기... 같구려."
나는 웃고 있지 않았다. 치솟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만으로 한계였다. 흔들리는 풀잎을 내려다보며 몸을 떨다가, 문득 발굽으로 입가를 가리며 고개를 들었다. "아뇨... 잘 알죠..."
네뷸러스는 신기해하는 듯했다
"저도... 가족들 못 보고 지낸 지 한참, 아주 한참 됐어요." 나는 말했다. "정확히는, 부모님이지요." 석양이 들불처럼 타오르기 시작한 지평선으로 시선을 돌리고, 인후에 엉기는 응어리를 삼키려 애쓰며 말했다.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건 아니지만, 아니긴 하지만... 수십 년은 된 것 같은 기분이에요."
"얼굴도 안 보는 사이였소?" 사내가 물었다.
"하하... 아뇨. 그것보다는..." 헛기침을 해 목을 닦았다.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도 무진 애를 써야 했다. "운명, 차라리 운명이라고나 해야 할 것 때문이라고 해야겠어요. 지금 상황에서는 평생 다시 한 번 만날 수나 있을까 의심스러운 수준이죠."
사내는 안타까움과 연민이 뒤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유감이오."
"흠......"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네뷸러스 뒤로 펼쳐진 포니빌의 정경을 바라보았다. "유감이라. 아니에요. 기억만은 남아 있어요. 저와 함께 살아가는 기억으로 남아 있죠. 부모님께 배운 것들을 존중하고 따르는 데, 부모님께서 심어 주신 사고방식에, 부모님께서 만들어 주신 제 음악을 향한 사랑에 모두 남아 있어요. 제가 하고 싶은 것,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을 수 있던 것도 모두 부모님 덕분이죠." 나는 숨을 빠르고 깊이 들이마시고 말했다. "그렇더라도, 하루에 한 번이라도 부모님 생각을 안 하고 지나가는 날이 있는 건 아니에요. 아침이면 어머니를 다시 만나는 꿈을 꾸고, 언젠가 다시 아버지를 만나게 되면 얼굴 보고 꼭 이렇게 말하겠다고 다짐해요..."
나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사내를 마주보았다. 떨리는 입술을 멈추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아빠, 사랑해. 난 음악보단 아빠가 더 좋더라."
사내는 축축해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갈기에 그어진 한 줄 은색과 젖은 눈이 잘 어울렸다. 그는 눈을 깜박여 물기를 털어내고 빙긋 웃어 보였다.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은 되겠지, 하고 바라는 것밖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고 그는 내 기대에 훌륭히 부응했다. "내게 남겨진 날들이 많지는 않소만..." 사내가 조용히 말을 마쳤다. "...언젠가 그대처럼 훌륭하고 착한 딸을 얻으면 좋겠소."
나는 쓴웃음과 함께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마땅하죠." 그 말은 차라리 속삭임이었다.
사내와 나 사이의 여백은 궁창 사이의 공허처럼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다.
싸늘하고 서슬 퍼런 바람이 갑자기 들이쳤다. 뒤를 이어 늦가을 바람이 따랐다. 네뷸러스가 움찔하더니, 앞다리에 찬 시계를 슬쩍 보았다. 사내는 한숨을 토하듯 말했다. "그래요. 기차가 곧 도착할 것 같군. 이 곳의 경치를 무사히 필리델피아까지 가져가려면 서둘러야겠소."
뺨이 쓰라려 왔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시죠. 행운을 빕니다."
"하하. 평생에 쓸 행운은 이미 다 써 버린 것 같소. 이제는 죽음을 준비할 때지." 사내가 짐을 챙겨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초저녁 땅거미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듯했다. "아, 그나저나." 네뷸러스가 걸음을 멈췄다.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그쪽의 이름을 듣지 못했구려."
대답할 필요는 없었지만, 나는 말했다. "라이라에요. 라이라 하트스트링스."
그는 납득이 가는 이름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쁜 이름이구려."
눈 앞이 흐려져 가는 와중에도 나는 그를 보고 웃어 보였다. "아빠가 잘 골라 주셨어요."
"그러게 말이오." 사내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저녁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나도 자리를 떴다.
그를 떠나보낸 시점으로부터 한 시간이 흘렀을 즈음, 나는 바람 이는 초저녁에 드리우는 그림자 중 하나인 것처럼 천천히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로부터 몇 시간이 더 지나갔다. 그것은 따뜻한 숨결처럼 순식간에 나를 휙휙 타넘고 지나갔다. 나는 밤이 되어서야 깨어났다. 떨리는 몸은 저 하늘의 별조차도 흔들 수 있을 듯 통제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잘만 살아 있더군. 오두막에 언제 도착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아." 피로연이 열리고 있는 연회장 한쪽 구석. 나는 트와일라잇을 마주보고 말했다. "거기 얼마나 있었는지도 모르겠어. 고양이 밥을 한 번 줬나 두 번 줬나, 열 번을 줬나도 잘 몰라.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은 단 하나. 나는 진혼곡을 연주하지 않았어. 그럴 수가 없었어. 그러고 싶지가 않아서. 진혼곡이 내 과거와 현재를 가로막고 있었으니까. 그게 나를 가두고 있었어. 생전 처음으로 다 잊어버리고 눈을 뜰 수 있는 망각이라는 이름의 축복을 갈구하게 되더군.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아무것도 모른 채 살고 싶었어. 안 그럴 이유가 없잖아? 편하더만. 좋고. 차라리... 자유로웠다고 해도 말은 되겠고."
스파이크는 멍한 표정이었다. 꼬마는 조마조마한 눈치로 트와일라잇을 살폈다.
트와일라잇의 두 눈은 젖어 있었다. 솟구친 울음을 인후 너머로 눌러 넘긴 트와일라잇이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왜, 마음을 바꿨나요? 왜 저를 찾아왔죠?" 그녀는 거의 우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왜, 그 모든 걸 겪고 난 뒤에도 진혼곡 연주를 도와 달라고 한 거에요. 왜 모든 걸 다시 떠올리려고 한 거에요?"
나는 숨을 고르며 트와일라잇을 마주보았다. 표정을 살짝 찡그리며 입을 열 힘을 끌어냈다. "모든 기억을 잃고 나니 알겠더군. 사람을 구성하는 질료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건 용기가 아니라 두려움이었어. 아직 마쳐야 할 일이 있고, 벗어야 할 저주가 있어. 지금껏 내가 헤치고 나온 고난과 괴로움을 통해 더 많이 배우고, 지난날의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그 고난과 괴로움은 견딜 가치가 있는 것이고. 트와일라잇 너도 이해할 테지? 나는 삶은 결국 상실과 쇠진의 과정일 뿐이라는 믿음을 거부했어. 어떤 식으로든, 어떤 면에서든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었어. 그리고 이제 내가 넘어야 할 장애물은 단 하나뿐이야."
트와일라잇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눈에서 일종의 단단한 결의를 읽어내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공주님을 뵐 수 있게 조치해 드리죠. 두 분 앞에서 진혼곡을 연주하는 게 해답이 될 거에요!"
"그런 짓을 했다간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일이 닥칠 수도 있—"
"아뇨. 충분히 감수 가능한 위험입니다." 트와일라잇이 단언했다. "당신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리고는 새끼용 조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스파이크!"
"으아앗! 왜?!" 스파이크가 펄쩍 뛰며 대답했다.
"도서관으로 가서 편지 쓸 것들 챙겨다 줘. 당장 공주님들께 알려야겠어!"
나는 한숨지으며 봉두난발이 된 갈기를 발굽으로 쓸어넘겼다. 그 와중에도 떨리는 몸은 진정되지를 않았다. "미안하게 됐지만, 여기까지가 한계거든. 유감이야. 스파이크를 통한다 해도 공주님들을 모셔올 수 있는 방법은 없었어."
"해 봐야 알죠!" 트와일라잇이 대답했다. "그쪽이 디스코드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었다면, 공주님들께도 영향을 줄 수 있는 방법이 분명히 있을 테죠!"
"트와일라잇."
"해 볼 가치가 있어요. 스파이크, 말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꾸물거리고 서 있어?!"
"해 다 졌잖아! 지금 가서 도서관 문 다시 열어야겠어?!"
"내가 한 얘기 안 들었니?!" 트와일라잇이 나를 가리켰다. "저 분이 하신 말씀 못 들었어?"
"아, 뭐 그래. 참 눈물 나는 이야기기는 했는데, 생각을 해 봐!" 스파이크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 누구도 자기를 기억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잊어버린다는 얘기가 말이 되니?! 시장님이랑 딸내미를 풍차에 가둬서 화해시켰다는 건 또 말이 되고?! 보자... 또 뭐가 있나..."
"스파이크, 제발 좀! 그냥 말 좀 들어!"
"아니 야, 그냥 어디서 톡 나타난 사람 말을 믿니!" 스파이크가 다시 어깨를 으쓱했다. "예의가 바르다든가, 멋있는 후드 입었다... 다든...가 그게 중요한 게 아—" 스파이크가 몸을 떨더니 숨을 거칠게 몰아쉬기 시작했다.
트와일라잇이 눈썹을 치켰다. "스파이크...?"
스파이크의 머리가 순식간에 앞으로 젖혀지며 불꽃을 토해냈다. 뜨거운 에메랄드 빛 화염이 뿜어져 나옴과 동시에 다과 테이블의 절반을 집어삼켰다. 작은 두루마리 하나가 바닥에 톡 떨어졌는데, 트와일라잇은 화환에 불이 붙었는지 어쨌는지에 관심이 쏠려 있어서 여기에는 관심을 두지 못했다.
"스파이크!" 트와일라잇이 당혹감에 몸을 움찔하며 새된 비명을 질렀다. 얼마나 놀랐는지 몸이 드레스에서 훅 빠져나갔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내, 내 잘못 아냐!" 스파이크가 펄쩍 뛰다가, 거세지는 불길을 보고 움찔했다. "아니, 이 오밤중에 공주님들께서 편지 보내실 줄 내가 어떻게 아냐고?!"
"이 화상아, 그럼 적어도 다른 데로 고개를 돌리든가 했어야지! 아이고!" 트와일라잇이 눈을 굴리며 뿔을 밝혀 불 붙은 화환을 집었다. "이거 처리하는 거나 도와 줘!"
"어, 어! 어... 당연하긴 한데! 잠깐만..." 스파이크가 두루마리를 집어들었다.
"스파이크! 당장 이리 와!"
"잠깐만, 공주님 편지는 안 읽을—?!"
"지금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굉장히 떨어지는 거 알아 몰라?!" 트와일라잇이 오만상을 썼다. "냉큼 와!"
"어..." 스파이크가 두루마리를 한쪽에 내던지고 뒤뚱거리며 달려가 트와일라잇 옆에 섰다. "알았어, 빨리 치우자고!"
"저기요, 정말, 정말 죄송한데요!" 트와일라잇이 큰 소리로 말했다. "잠깐이면 되니까 기다리세요!" 트와일라잇과 스파이크가 테이블에서 잽싸게 물러났다. "스파이크, 서둘러! 저기 펀치 그릇 가져와!"
"어어, 트와일라잇, 진심? 펀치 그릇을 쓰겠다고?! 아니, 저기 밖에만 나가도 물이 천지에 널렸는데?"
"그 물 찾아 가다가 시청 청사가 너구리 굴이 되게 생겼는데 정신이 있니 없니?!"
"알았어! 펀치 그릇 가져오면 되잖아! 잘 잡아야 하니까 조금만 있어..."
"조심... 조심..."
둘이 불 붙은 테이블을 가지고 씨름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몸을 돌렸다. 둘이 펀치 그릇을 가져와 끼얹자 밝은 색 액체가 불 붙은 테이블에 쏟아졌다. 피어난 연기가 지붕에까지 닿았고, 나는 한기를 느꼈다. 자리에 주저앉아 몸을 웅크리는데, 스파이크가 내던진 두루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두루마리에 붙은 봉인에, 달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움찔하며 트와일라잇과 스파이크가 있는 쪽을 슬쩍 쳐다보다가 두루마리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조심조심 쪼그리고 앉아 뿔을 밝혀 두루마리를 챙겼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두루마리를 펼쳐 그 위에 화려한 필체로 적힌 글을 읽어 내려갔다. 숨이 막히고, 몸이 두 배로 격하게 떨렸다. 한기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미친 듯 뛰어대는 심장을 안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펼쳐진 두루마리와 피로연 현장을 번갈아 보았다. 불은 거의 다 잡혔고, 연기도 흩어져 가고 있었다. 트와일라잇과 스파이크는 이쪽을 등지고 있었다.
둘이 마침내 내가 있는 쪽을 돌아보는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따뜻한 시청 청사를 등지고 나간 지 오래였으니까.
그 두루마리를 챙긴 채로.
몇 시간이 지나 지평선 너머로 새벽이 조금씩 몸을 일으킬 즈음, 나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내 오두막의 살풍경함을 감상했다. 벽에 걸린 수십 점 악기 한가운데에 캔틀롯 왕궁이 보내온 통지가 박혀 있었다. 내게는 세상 그 어떤 악기보다도 위대한 악기가 있다. 혹시 위대한 어머니께서 태곳적부터 전해 내려온 성유물을 통해 내게 상서로운 힘을 내려주시지 않을까, 그 힘으로 내 불면의 열병을 감당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나이트브링어로 어스름 진혼곡을 몇 번이나 퉁겼다.
"그분이 오세요. 앨러배스터." 나는 혼자 말했다. 고양이가 품 안으로 바싹 파고들었다. 딱히 잠을 깬 것은 아니었고, 깰 필요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고양이의 몸은 따뜻했다. 진혼곡을 구성하는 음계의 조화가 어느 순간부터인지는 몰라도 이루 말할 수 없이 부드럽게 마음을 달래주는 듯 느껴졌다. "그분이 포니빌로 오세요. 그분이 오시는 건, 앞으로 이틀......"
봉인을 푼 두루마리가 나이트브링어에서 흘러나온 찬란한 빛에 젖어 반짝였다. 문서에 적힌 일련의 숫자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그 숫자는 아름다울 정도로 명료하게, 악몽야 축제 일자를 표시하고 있었다.
"저도 거기에 있을 거에요." 깨어 있으려 떨며 몸부림치는 몸이 뺨 위로 한 줄기 눈물을 밀어 떨어뜨렸다. "저도, 거기에 있을 거에요. 앨러배스터, 힘을 주세요. 우리 둘 모두 거기에 있을 거에요. 같이 기억하도록 해요. 우리 같이 기억해요." 삼킨 마른침에 울음이 섞여 목 아래로 떨어졌다. "같이 기억해요 우리..."
내게 오직 기억만이 허락된다면, 그 어떤 기억이든 기꺼이 끌어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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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가족 간 갈등이 저렇게 쉽게 봉합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뱃속에서 푹 숙성된 원한은 쉽게 사라지지 않거든요.
*1 미국의 가십 주간지 내셔널 인콰이어러를 비튼 것.
*2. Scar, 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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