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에게.
잊히지 않는 존재로 회귀하기 위한 내 머나먼 여정의 목적까지 부정된다면 내가 가는 길은 대체 어떤 길이 될까. 나는 단순히 존재가 부정되지 않는 사람으로 돌아가서 내가 해 왔던 모든 일들과 그 과정에서 배운 것들을 세상에 알리려는 목적만으로 움직이고 있는 걸까? 이 멀고 험난한 길의 끝에서 내가 해냈다는 성취감에 젖고, 이를 기념하려 하지 않는다면 존재를 되찾는 것이 무슨 소용이 될까. 내가 세운 기념비가 곧 나 자신에 불과할지라도 말이야.
나는 그 목적이야말로 일종의 신성불가침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어. 저주가 시작된 이래, 세상에 내가 다녀갔다는 흔적, 그 흔적 하나만 남길 수 있으면 더 바랄 게 없겠다는 생각에 변함도 없고. 지금 일기를 적어 내려가는 것도 마찬가지야. 훗날 나 아닌 다른 누군가가 포니빌에서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떻게 끝났는지 알 수 있게 될지 모른다는 희망 때문이지.
그런데 말야, 이제는 이런 생각이 드네. 저주를 풀 방법을 찾아 방황하고 있는 마당이긴 한데, 막상 풀고 나니 한 술 더 떠서 훨씬 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신세가 되면 어떡하지? 지금까지 그 여자가 짊어지고 있는 잊힌 고통과 비탄의 장막에 나 또한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자유를 찾아 헤매인 끝에 내 나약한 정신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잔학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누군가는 틀림없이 이렇게 생각할 테지. 내가 여기 있는 것도, 여기서 주저앉아 있는 것도,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도... 다 그 남자 때문이야.
여기까지 왔고 앞으로 더 가야 할 먼 길, 과연 갈 만한 가치가 있을까?
창문을 열고 물병을 밖으로 내밀어 머리 위 분홍 구름에서 떨어져 내리는 갈색 빗방울을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씩 떨어지던 빗방울이 멎었다. 뿔을 밝혀 물병을 집 안에 들인 뒤 창문을 닫았다. 물병 주둥이를 입가에 갖다댄 뒤 짧은 호흡으로 몇 번 냄새를 맡고, 몇 방울 정도 입에 넣어 혓바닥으로 몇 번 입안에서 굴려 본 뒤 그대로 삼켰다.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그렇구만. 이건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가 없겠는데."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돌려 침대를 멍하니 쳐다보는 와중에도, 가능한 평정을 유지하려 무진 애를 써야 했다. "초콜릿 비야 이거."
앨은 뒷다리로 일어서서 오렌지색 꼬리를 까딱거리며 반대쪽 창문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밖을 보고 있었다. 요 발바닥만한 털뭉치가 더할나위없는 흥미를 느끼고 있음은 분명했다. 마을 북쪽 어귀로 온갖 기괴한 것들이 날아다닐 때마다 앨의 콧수염이 씰룩거렸다. 날개 달린 돼지, 하늘을 떠다니는 파이, 조정용 보트에 올라타 노를 젓는 미노타우르스 여럿을 비롯해 끔찍할 만큼 말이 안 되는 공상의 산물이라고나 해야 할 것들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멀리서는 뭔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어대는 소리와 누군가 질주하며 지축을 울리는 소리가 마을 중심부에서부터 퍼졌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직접 가서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충만하기는 했으나, 나갔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정말 미쳐 버리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 훨씬 더 컸다.
"이건 뭐... 세상이 단체로 정신줄 놓고 별 웃기지도 않는 장난질 치는 것도 아니고!" 나는 앨 옆 침대로 다가가 앉으며 혼자 큰 소리로 툴툴거렸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보아하니, 뭔지는 몰라도 누가 온 동네에 지독한 마법을 걸어 놓은 모양이긴 한데, 그렇다 치더라도 대체 어떻게 정신이 나가야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싶어할 정도로 훼까닥 돌아 버릴 수 있는지 알 길이 없네!"
이름 없는 자들의 땅에 다녀와 도착한 지하실에서 어느 정도 고양감 비슷한 걸 느꼈던 것이 벌써 한 시간 전의 일이었다. 그 시간 대부분은 내가 제정신으로 도착한 건 맞는지,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지 갖가지 방법으로 실험하는 데 소비되었다. 일 년 동안 온갖 기괴하고 정신 나갈 것 같은 것들을 직접 마주했는데도 그래야 했다. 궁창 사이의 세상, 이름 없는 자들의 땅과 거기 웅크린 공포 그 자체를 목도했고, 죽었으되 죽지 않은 알리콘의 저주받은 유산에 휩쓸려 세상에 버려지고야 만 희생양들을 마주해야 했다. 그렇다 쳐도, 이름 없는 자들의 땅은 최소한의 일관성이라도 있었다. 이 꼴 어디에 그런 게 있단 말인가?
완전무결하고 순수한 혼돈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내가 목격한 아주 사소한 사실, 즉 떠다니는 페이스트리 빵이나 솜사탕 구름, 우스운 모양새로 변해 버린 각종 새 같은 것들은 멍청하고 얼빠진, 덜떨어진 형태로 현실을 변주한 거라고 해야 할 터였으나 오히려 그 멍청한 꼬락서니가 사태의 끔찍함을 가중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영유아 하나가 창조의 열쇠를 나누어 받아 위대한 어머니와 함께 현실의 법칙을 주무르며 놀기라도 하는가 싶을 정도였다. 혹시 오두막 밖으로 나서기라도 한다면, 땅 속으로 끌려 들어가 한 포대 감자나 그 비슷한 걸로 변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쩜, 이렇게 때를 잘 맞추는지, 누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네." 후드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이름 없는 자들의 땅에서도 일이 생기긴 했었거든. 구속되고 재갈 물려진 자들이 한 목소리로 세서, 그 여자의 애인 얘기를 막 부르짖었단 말야. 그 작자가 '깨어난다'고 하주 노래를 하더만. 설마... 지금 이게 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목제 테이블 위에 얌전히 모셔놓은 나이트브링어를 바라보았다. 신물은 전과 같이 스스로의 광명으로 사방을 밝히며 빛나고 있었다. "설마... 설마 이게 다 연관이 있는 일이면 어쩌지? 이쪽 궁창을 지배하는 법칙이 바뀌어서 저쪽에서 그 여자의 남자가 깨어나기라도 한 것이라면?"
옆을 흘끗 보자, 앨이 사라지고 없었다.
순간 간 떨어지는 듯 흠칫 놀라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바닥으로 시선을 돌렸다. 앨이 빈 밥그릇 주위로 빙빙 돌고 있었다. 나와 눈을 마주친 고양이는 네 발로 자리에 앉아 야옹, 하고 울었다.
나는 눈을 굴리며 겨우 희미한 미소를 지은 뒤, 한쪽에 놓아둔 사료 포대를 띄워 올렸다. "우리 꼬맹이는 어쩜 이럴까. 세상이 이대로 쫄딱 망해 버릴 수도 있는 판에*2, 우리 야옹이는 그저 저녁밥이나 먹고 싶어하네." 고양이 밥을 조금 부어 준 뒤, 나는 잠시 어물거렸다. 다시 창 밖을 내다보다가, 나는 퍼뜩 생각난 누군가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렇지! 트와일라잇! 걔가 아니면 이 개판을 수습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 고양이 사료 포대를 잘 내려두고 나자 다시 나이트브링어로 시선이 향했다. 그 무의미한 시간 동안, 머릿속에 어떤 사실이 분명히 떠올랐다. 떨리는 몸을 애써 억누르며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트와일라잇에게 필요할지 모르는 거대한 힘을 갖고 있는 건 나 하나밖에 없겠구나."
침대에서 뛰어내려와 곧장 가방을 챙겨 짊어졌다. 앨이 밥을 먹다 말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곧장 나이트브링어 쪽으로 달려들어 가방에 잘 챙겨 넣고, 음석 한 움큼을 같이 챙겼다. 마법서 한두 권은 덤이었다.
"공주님 맙소사. 앨." 고양이를 향해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누난 이 동네가 좋은가 봐. 초콜릿 비가 내리고, 날개 달린 돼지가 날아다니는 와중에, 공주님들도 모를 무언가가 더 있을지 모른다는 핑계로 집에 처박힌 채 포니빌이 타르타로스 꼴이 나는 걸 구경만 하려고 하지 않는 걸 보니 말이야."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앨의 복슬복슬한 머리에 뺨을 비볐다. "외판원인 척, 어떤 미친 애플파이가 날아와서 문 두드려도 절대 열어 주면 안 된다?"
앨이 야옹 하고 울더니 발굽에 제 뺨을 문질렀다.
"그래... 착하기도 하지." 앨의 귀를 몇 번 긁어 준 뒤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문을 활짝 열었다. "행운을 빌어 주려...ㅁ"
문을 열자마자 길가에서 누군가가 대판 말싸움을 벌이는 소리가 귀에 꽂혔다. 뭐 싸움이라도 났나 싶은 정도였는데, 처음에는 귀를 의심했다. 유독 한 사람 목소리만 다른 목소리에 비해 유독 살벌하고 섬뜩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치어릴리 선생?" 당혹감에 얼굴이 절로 구겨졌다. 나는 급히 문을 팽개치듯 닫고 테라스를 뛰어넘어 마을로 향하는 흙길로 달려갔다. 사람의 발길로 다져진 흙길 한쪽에, 정신이 나가 버린 듯한 치어릴리와 그녀를 끌어내려는 다른 세 명이 용을 쓰며 낑낑대고 있었다. 치어릴리는 길 가장자리에 피어 있던 형형색색의 들꽃을 밟아 으깨 버리려고 발악하는 중이었다.
"치어릴리! 진정 좀 해요!" 크림색 솜털을 한 여자가 소리쳤다.
"빨리 따라오셔야 한다니까!" 하늘에 떠 있던 페가수스 사내가 말했다. "여긴 위험하다고!"
"다들 서둘러요!" 캔디 메인이 외쳤다. 내가 이름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길 아래로 보이는 포니빌 도심부를 걱정스런 눈으로 흘끗 본 여자의 날개가 굽어졌다. "스투Stu, 좀 도와 줘요!"
페가수스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내가 이쪽 다리를 잡을 테니 이쪽을 잡아요!"
"어떻게 해 볼게요!"
페가수스 둘이 달라붙어 치어릴리를 붙잡고 띄워 올리려 했으나, 치어릴리는 위협하는 소리와 함께 그 둘을 무자비하게 떼어내 날려 버렸다. 그리고는 무자비하고 잔혹한 기세로 데이지 덤불을 향해 달려드는 것이었다. "으라아아아!" 치어릴리가 이를 뿌득 갈며 눈을 마구 꿈틀거렸다. 그녀는 이미 짓밟혀 부서진 노란 꽃잎에 대고 한없이 발굽을 내리쳐 몇 번이고 으깨 버렸다. "꽃은 없어져야 해. 꽃 다 없애 버려야 한다고! 전부 다 죽여 버려야 속이 풀리겠어!"
"치어릴리 선생! 정신 차려요! 빨리! 몸 빼고 피해야 한다니까! 뭔진 몰라도 지독한 저주가 온 마을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놔서—!"
"아하, 그렇게 된 거구만!" 치어릴리가 몸을 돌려 크림색 어스 포니를 째려보며 말했다. "당신도 그쪽 편이었던 거네, 아냐?! 어?! 국화 성전단Chrysanthemum Crusader! 라벤더 기만자Lavender Liar! 안개꽃 야만족Baby's breath barbarian!" 그리고는 근처 나무뿌리로 고개를 홱 돌려 섬뜩할 정도의 힘으로 나무를 갉아내 씹으며 소리쳤다. "음음— 스스로 구원하라!"
"히이이익!" 여자가 움찔하며 뒷걸음쳤다.
치어릴리가 여자를 공격하기 직전, 녹색 염동력이 뻗어나와 치어릴리를 속박했다. "뭐야 이거?! 으으—그렇군!" 여자는 씹던 나무껍질을 뱉어내더니 허공에 뜬 채 마구 발광하며 소리쳤다. "이제 엽록소까지 자의식을 가졌다 이거지! 차라리 날 죽여, 이 빌어먹을 꽃가루 기생충 자식들아! 내 반드시 네놈들이 줄기에 맺히기도 전에 짓밟아 죽여 버리겠어! 아아아아아악!"
"대충 된 것 같으니 됐다 치고..." 별반 힘도 들이지 않고 치어릴리를 염동력 안에 가둬 구속한 나는 길가를 따라 내려오며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듣기는 해야겠는데, 뭐부터 여쭤 보는 게 좋을까요?"
다른 셋이 이쪽을 보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유니콘이다!"
"공주님 감사합니다!"
"그렇잖아도 여기서 내내 씨름하고 있던 참이었어요! 글쎄, 눈에 보이는 꽃이란 꽃은 다 밟아 버리려고 드니까!"
"그렇게 됐나 보군요." 나는 말했다. "왜 그렇게 됐는지 설명하실 수 있는 분?"
"그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캔디 메인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당장 여길 빠져나가야 해요."
"그렇고말고!" 하늘에 떠 있던 남자가 파르르 떨리던 녹색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포니빌 끝장났거든!"
파인애플 하나를 통째로 목구멍에 쑤셔넣기라도 한 양 표정이 뒤틀리는 것이 느껴졌다. "끝장나요? 끝장났다는 건 무슨 뜻이죠?"
"뭔진 몰라도 아주 지독한 일이 생겼다는 얘기죠!" 크림색 여자가 숨도 못 쉬고 급히 대답했다. "땅덩어리가 밑에 붙어 있질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져 날아다니는 걸로 모자라 건물이 제멋대로 부풀어 오르고 있어요! 사방에... 온갖 것들이 날아다니고..."
"내 짐수레도 웬 트럼프 카드로 변해 버렸다니까! 내 밥벌이가!" 사내가 소리쳤다.
"스투 리브스Stu Leaves, 당신 멍청한 수레가 어떻게 됐든 그건 전혀 고려 사항이 아닌데." 캔디 메인이 툭 던졌다.
"나한테는 중요하다고!" 사내가 으르렁거리며 받아쳤다. "클로버 J에 무슨 수로 고삐를 채우겠어!"
"동네 전체가 지금 이 비슷한 속도로 계속 변해 가기만 한다면야, 머지않아 가능할지도 모르지." 캔디 메인이 덜덜 떨며 말했다. "이쪽으로 피신하기 전에 글쎄, 시장님 갈기가 갑자기 분홍색으로 홱 변하더니 지나가던 사람 아무한테나 막 덤벼드는 꼴을 봤단 말야!"
"어어..." 이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나는 멍하니 저 셋을 보고만 있었다.
"연꽃인가!" 염동력에 갇혀 있던 치어릴리가 몸을 거꾸로 뒤집으며 빽 소리쳤다. "이건 연꽃 냄새인가?!" 불룩불룩 튀어나올 기세로 꿈틀대는 흰자 위로 핏발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향기는 이단이다! 이단에게 죽음을!"
"그쪽도 마찬가지에요." 캔디 메인이 이쪽으로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새파란 눈동자는 흡사 애원하는 것 같았다. "포니빌 사람은 아니신 것 같지만, 저희 말 들으세요. 지금 포니빌은 난리도 아니에요. 저기 북쪽으로 좀 더 올라가면 스윗 애플 에이커란 과수원이 나와요. 서둘러 그리 대피해서 다른 사람들과 합류하는 게 최선이에요."
"맞는 말이야!" 스투 리브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거기서 조를 짜든지 말든지 해서 트로팅엄이나 캔틀롯으로 가야 해. 가서 도움을 청해야 한다고!"
머리 위로 거나하게 취한 펭귄들로 붐비는 열기구 하나가 뒤집힌 채 무시무시한 기세로 스쳐 지나가더니, 지평선 바로 위에서 폭발했다. 바닐라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컵케이크가 우리 몸 위로 미친 듯이 쏟아졌다.
나는 주춤하다가, 자세를 수습하고 셋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스윗 애플 에이커로 가다간 우리 중 그 누구도 사지 온전히 도착할 수 없을 것 같군요. 일단 제가 사는 곳으로 가는 게 낫겠어요. 멀진 않아요."
"말인즉... 요 근처 사신다는 말씀이신가요?"
"어..."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기 바로 근처에 오두막이 하나 있잖아요. 거기에요."
"오두막이라?" 스투 리브스가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언제부터 거기 오두막이 있었더라?"
이구아나 두 마리가 끽끽 울어대는 타조를 한 마리씩 타고, 폭약을 장치한 볼트와 석궁을 가지고 결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잔해가 쏟아져 내려서 몸을 홱 수그리고 급하게 말했다. "그건 됐고. 일단 따라와요. 알겠죠?!"
셋은 불안한 눈치로 고개를 끄덕였다.
"더러운 제국주의자 장미꽃에게 죽음을!" 치어릴리가 소리쳤다.
나는 한숨지으며 치어릴리 선생을 띄운 채 선두에서 오두막을 향해 걸었다. 일단 도착한 뒤, 나는 신속하게 현관문을 열고 셋을 안으로 들여보낸 뒤 마지막으로 치어릴리를 띄워 데리고 들어왔다. "앨! 손님들 오셨어! 겁낼 건 없고, 바깥이 지금 난리도 아니라 잠시 피신하러 오신 분들이야!"
"어머..." 이름을 모르는 어스 포니가 오두막 벽면을 빼곡하게 채우며 걸려 있는 악기들을 경탄의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여기 굉장한데요."
"편안하고." 앨이 다가와 캔디 메인의 다리에 얼굴을 비볐다.
"좁아 터졌는걸." 스투 리브스가 말했다.
"스투!"
"뭐?!"
"아르르르르르르아!" 치어릴리가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거꾸로 뒤집혀 있으면서도 사지를 버둥거리며 난롯가 위에 얹어놓은 금빛 튤립 꽃병을 잡아채려 악을 쓰며 내는 소리였다. "내 네놈들의 씨를 말려 버리고 말리라!"
"아이고, 공주님 맙소사 진짜..." 눈을 굴리며 꽃병을 띄워 치우고, 꽂아 두었던 튤립을 빼내 혼돈 그 자체와도 같은 바깥 세계 한쪽에 잘 놓아둔 뒤 문을 닫았다. "치웠어요!" 침대 한가운데로 치어릴리를 툭 떨어뜨리고 물었다. "이제 만족했죠?!"
"으으으으음..." 치어릴리가 팔짱을 턱 끼더니, 얼굴을 구기며 집 구석구석을 곁눈질하고 말했다. "아직 카네이션을 안 치웠잖아. 어딜 나를 속이려고."
"치어릴리 선생, 진정 좀 해요..." 캔디 메인이 입을 열었다.
"당신 속이 아주 빤히 들여다보인다고!"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아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람! 뭐 잘못 먹기라도 했어요? 왜 계속 저러지?" 나는 말을 하다 그만두고 치어릴리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잠깐..." 지난번에 슈가큐브코너에서 봤을 때보다 치어릴리의 루비빛 솜털이 확연히 흐려져 있었다. 게다가 분명 분홍색이었던 갈기도 완전히 물이 빠져 있었는데, 흡사 색이 전부 빠져나가기라도 한 듯했다. "이 분... 왜 색이 다 빠졌죠?"
"치어릴리 선생을 아쇼?" 스투 리브스가 놀랐다는 투로 말했다.
"알죠. 모를 리가." 나는 툴툴대는 투로 대답하고 되물었다. "제 질문에 먼저 대답해 주시면 안 될까요?"
그는 대놓고 불안감을 드러내며 치어릴리를 흘끗 보더니 말했다. "캔틀롯에 현장학습 다녀온다고 하더니, 이렇게 되어서는 돌아왔지 뭐요. 데려간 애들은 다 어딜 갔냐고 동네 사람들이 다 물어 보는데도 글쎄 들은 척도 안 하고 꽃집은 물론 공원마다 짓쳐들어가 눈에 띄는 꽃이란 꽃은 죄다 밟아 으깨 버리더라니까!"
"아주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니까요!" 크림색 여자가 큰 소리로 말했다. "셀레스티아 공주님 동상 근처에 심어놓은 독특한 꽃들만은 밟아 부수지 못하게 하려고 캔디 메인이랑 저 둘이서 얼마나 용을 썼는데요! 그걸로도 모자라서 어느 순간 구름이 죄다 분홍색이 되더니 온 동네가 이 모양이 되어 버렸죠!"
"뭔가 연관이 있는 게 존재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소름이 끼치죠." 캔디 메인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고 말했다. "제 생각엔, 그것과 접촉한 게 아닌가 싶어요."
이건 무슨 말인가 싶어 캔디 메인을 보고 물었다. "그것이라뇨?"
그녀는 생각만으로 오한이 드는지 씁 소리와 함께 숨을 들이마시고 말했다. "마을 전체가 저렇게 미쳐 돌아가는 와중에... 웬 괴물 하나가 동네를 온통 휘젓고 다니고 있어요."
"괴물이라고요?" 나는 물었다.
스투 리브스가 끄덕였다. "커다란 짐승이오. 어디는 뱀 새끼고, 어디는 포니인데 그... 세상 모든 동물의 부분을 하나씩 달아놓은 것 같소!"
캔디 메인이 계속 말했다. "누구라도 이 괴물 가까이 다가가면 급격히 솜털의 색을 잃고 소시오패스처럼 굴기 시작하죠. 저만 해도 집주인이 갑자기 미쳐서 전기 면도기로 사람들 갈기를 죄다 박박 밀어 버리려고 들어서 꽁지가 빠져라 도망쳤거든요." 그녀가 몸을 떨더니 말했다. "심지어 아무 전원 장치조차 안 되어 있는데도 작동했다니까요......"
"그거..."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거 말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스투 리브스가 창 밖으로 돼지 몇 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쇼?!"
"진정 좀 하시죠." 앞다리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혹시나 내가 하는 말을 들어 주는 사람이 있기는 하겠지 싶은 일종의 희망을 품은 채였다. "이쪽도 뭔가 말이 될 법한 설명을 찾는 중이니까."
"저희 생각에 그럴듯한 설명 같은 게 있었으면 벌써 해 드렸겠죠." 어스 포니가 나직한 말투로 말했다. 그녀는 파란색과 분홍색이 섞인 갈기를 떨리는 발굽으로 쓸어넘겼다. "받아들일래야 받아들일 수가 없네요. 절친이 둘이나 저렇게 회, 회색으로 변해 버렸으니. 어느 하나 예전처럼 구는 구석이 없었어요. 정말... 너무 끔찍해서..." 여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 훌쩍이며 파르르 떨리는 발굽으로 눈물에 젖은 얼굴을 문질러 닦았다.
"그래도..." 그녀 곁에 다가서서 두 발굽으로 그녀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보고 들은 것 그대로 가지고 여기까지 오신 것만 해도 충분히 용감한 거에요. 치어릴리 선생님 정신 차리게 한다고 붙잡고 계시기까지 하니 그보다 더한 용기가 필요했을 터고." 여자의 벽안을 들여다보며 빙긋 웃었다. "상태가 심각하게 안 좋긴 하지만, 해결할 방법이 분명 있기는 있을 거에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그녀는 입술을 떨며 물었다.
"방법은 분명히 있어요."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이쪽도 포니빌 시내 쪽으로 가고 있었어요. 이 난장판을 되돌릴 능력이 있을 법한 사람은 트와일라잇 스파클, 그 하나밖에 없을 테니까!"
"스파클이랑 아는 사인가?" 스투 리브스가 반색했다.
"옛날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고 해둘까요." 나는 말했다. "우리 우정을 담아낼 만한... 음... 기록이 세상에 없긴 하지만." 몸을 돌려 캔디 메인을 보고 말했다. "여기 납작 엎드려 있기만 하면 위험하진 않을 거에요."
"주인이 와서 보고 내쫓아 버리진 않을까요?"
입을 막 열려던 찰나 잠시 주저하다가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아뇨. 이런 비상시국에 동네 사람들 몇몇이나마 안전하게 숨겨 줄 수 있으니 잘 됐다고 좋아했으면 좋아했지 그러지는 않을 거에요. 여기 계신 동안 고양이나 잘 보살펴 주시면 예의는 다 차린 거 아닐까요."
캔디 메인이 빙긋 웃으며 끄덕였다. "그러네요. 맞아요. 그 정도면 할 수 있죠..."
"좋아요." 나는 대답한 뒤 호흡을 깊이 들이마셔 마음을 가다듬고 말했다. "전 나가 볼게요."
"나가?!" 스투 리브스가 오만상을 썼다. "저 지랄 난리 난 데 또 나가겠다고?!"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알아서 여기 나타나 주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언성을 높여 대답한 나는 입술을 씹었다. 일단 현관을 나서는 순간 저기 네 명은 생판 낯선 오두막에서 새삼스럽게 눈을 뜰 것이고, 자기네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는 전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일단 바깥에 저 난리가 났으니, 그 정도만 해도 오두막에 가만히 숨어 있을 유인으로는 충분했다. 게다가 온 세상 고양이들 중에서도 가장 착한 고양이가 같이 있지 않은가. 나는 문득 말했다. "진지하게 말씀드리는 거니까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들으세요. 이쪽도 나름대로 어마어마한 힘을 다룰 수 있어요. 굳이 제가 아니라도 다른 누군가가 이 힘을 빌어 이 난리를 수습해야 하는데, 저 때문에 그게 안 되면 세상에 죄를 짓는 거잖아요. 제가 진정으로 바라는 게 뭔지, 의심할 여지도 없어요. 저는 포니빌로 가야만 하겠어요."
"호..." 스투 리브스가 경례를 붙이며 말했다. "공주님께서 함께하시길 빌지!"
"조심하실 거죠, 맞죠?" 크림색 여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걱정하실 거 없어요. 제가... 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배경처럼 잘 숨어 다닐 테니." 고개를 돌려 침대를 보고 말했다. "치어릴리 선생님도 부디..." 목제 스툴이 날아와 내 얼굴에 작렬하면서 사방에 나무 조각을 흩뿌렸다. "아아아아악!"
"어우우우우우..." 스투 리브스가 움찔하며 날개를 늘어뜨렸다.
"치어릴리 선생!" 캔디 메인이 놀라 소리쳤다.
"봤잖아! 당신들 다 봤잖아!" 치어릴리의 모습이 어렴풋하게 나를 내려다보며 이를 뿌드득 갈았다. 어스 포니가 잽싸게 달려들어 치어릴리를 끌어내렸다. "저 눈깔 좀 봐. 노란색 튤립이 위장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아으으......" 이마를 부여잡고 씩씩대다 말했다. "이렇게 된 거 그냥 학교 건물까지 불을 싸질러 버릴까......"
"화내지 마세요! 제발!" 치어릴리를 마룻바닥에 넘어뜨려 제압하고 있던 어스 포니가 소리쳤다.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 그래요! 이런 사람 아니에요!"
"그럴듯하군요." 이마에 새로 새겨진 시퍼런 멍을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긴 인격이란 목소리에서부터 묻어나기 마련이니까."
"잘났다, 이 빌어먹을 자스민 일당아!" 치어릴리가 소리쳤다.
"자, 그럼 잠시 작별이군요." 나는 말하며 문간으로 향했다. "안에 꼼짝 말고 얌전히 계세요. 절대 개인 행동 하지 마시고."
셋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두막 현관문을 닫자 그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포니빌로 향하는 길을 따라 달려 절반쯤 왔을 때 벌써 저주가 이끌고 온 한기가 온몸을 덮쳤다. 그런 걸로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길 양쪽에서 온갖 것들이 제멋대로 폭발해댔다. 별 웃기지도 않는 전쟁터 한복판을 달려가고 있기라도 한 양 몸이 움찔거렸다. 온통 난리통이었는데도 고통에 차 내지르는 비명이나 그 비슷한 징후 같은 것은 없었다. 오히려 기괴할 정도로 향긋한 냄새만 감돌 뿐이었다. 출출한 배 대신 뼛속까지 얼어붙는 듯한 한기를 안고 사탕 가게에 들어선 꼬마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나무 몇 그루가 구부러진 곳 바로 너머에 오븐 여러 개가 늘어서서 각종 간식거리와 설탕과자를 구워내고 있었다.
혼돈의 태풍 한가운데로 급히 달려 들어가는 동안 내가 목도한 갖가지 정신나간 것들을 정확히 묘사할 방법은 없다. 발레 드레스를 입은 버팔로와 공중제비를 넘어대는 북극곰, 혼자서 굴러가는 외발자전거, 지네 다리로 쏜살같이 기어다니는 전화번호부 등 갖가지 미친 것들에 나는 더욱 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마을 중심에 가까워질수록 주변을 날아다니던 말도 안 되는 것들이 슬슬... 조금은 말이 되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뭐라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널리고 널린 이상한 것들도 나름대로 어떤 규칙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 안에 잠재된 예술가적 기질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기질이 밖으로 나와 붓질을 한 꼬락서니를 보면 좋은 말로도 곱게는 못 봐 줄 만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눈에 채이는 각종 기기괴괴한 것들의 뭐라 말할 수 없는 성질에도 불구하고, 이 꼴을 만들어낸 자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악의 없는 장난꾸러기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것이 물론 어떤 허위에 가까워 보이기는 했는데, 광대의 익살극을 보는 듯한 이 상황 그 어디에서도 숨겨진 악의를 찾아볼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경계를 늦추거나 속도를 낮추는 일 없이 달려 내려와 마을 어귀에 다다랐다. 가방에 넣은 나이트브링어의 무게가 느껴졌다. 저주의 냉혹한 장막 너머에 가려져 있기는 해도 트와일라잇은 나의 벗이었고, 내가 찾아가야 할 목표이기도 했다. 일단 트와일라잇을 찾아내기만 하면 다 잘 될 거라고, 나는 혼자 다짐했다. 위대한 어머니의 노래가 내 곁에 있으니, 우리가 힘을 합친다면 포니빌에 닥친 이 끔찍한 사태를 되돌릴 수 있을 것이었다. 내 힘만으로 저주를 풀어낼 수 없을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내게 넘겨진 나이트브링어를 보다 큰 대의를 위해 쓰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조금만 걸으면 이퀘스트리아의 필멸자 마법사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마법사를 만날 수 있으니, 나이트브링어의 권능을 효과적으로 끌어내 쓸 수 있으리란 것은 자명했다.
마지막 모퉁이를 돌아 목전에 닥친 모습을 보았을 때, 머릿속으로 되내이던 영웅스러운 생각 전부가 산산이 조각났다. 포니빌이... 내가 아는 그 포니빌이 아니었다.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따지고 보면 포니빌은 여전히 거기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 존재가 사방에 널려 있었다. 시내는 완전히 비틀려서 흡사 거대한 착시현상과도 같이 스스로 뒤엉켜 있었다. 포니빌 정경이었던 것은 토막나서 전후좌우의 공중을 둥둥 떠다녔다. 중력을 거부하고 솟구친 흙덩이 아래쪽에 건물들이 엉겨붙었다. 호텔과 아파트, 각종 상점과 기타 건축물들은 끔찍할 정도로 왜곡된 형상이 되어 있었는데, 몇 개는 사람의 인지를 넘어선 수준이었고 그나마 괜찮은 것들도 피카소츠Picassoats 그림에 나올 법한 꼴이 되어 있었다. 마을을 감싸안고 에메랄드 빛으로 빛나던 너른 들판도 이제 그 귀한 풍경을 상실한 채 다분히 기하학적인 형상으로 격자무늬를 두르고 계속 변형되고 있었다. 홍수처럼 밀려드는 섬광에 싸여 있다가, 이따금씩 부서진 모형 기차 세트 잔해를 뱉어내는 거대한 체커보드를 향해 달려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인근 언덕 너머로 시선을 돌려 보니, 저 멀리 보이는 캔틀롯의 크고 높은 탑이 거꾸로 뒤집혀 떠다니고 있었고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리는 클라우드데일은 거대한 팽이라도 된 듯 제자리에서 팽팽 돌았다.
"공주님 맙소사..." 심장이 쿵쿵 뛰어대며 가슴 안쪽을 두들겼다. 숨이 막혀 왔다. "포니빌만 이렇게 된 게 아니었어." 마른침을 삼켰다. "공주님께서 세상을 저버리시기라도 했나..."
그 때, 내가 밟고 서 있던 흙길이 얼음판처럼 미끄럽게 변했다.
"아아아아악!" 나는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쭉 미끄러져 내려갔다. 무슨 냄새가 콧구멍 주변에 아른거렸다. 골목 전체가 거품 이는 비눗물처럼 변해 있었다. "으아, 으아, 으아아아아!"
제트팩을 맨 악어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날아다녔고, 그 뒤를 죽마 탄 토끼들이 쫓아갔다. 이 난장판을 뒤로하고 계속 미끄러져 가는데, 내 앞에 깔려 있던 땅덩이가 갑자기 꿈틀거리더니 열기구 풍선처럼 솟아났다. 그렇게 찢어진 땅덩어리 깊은 곳에 칠흑 같은 어둠만 깔려 있었는데, 문제는 내가 썰매라도 된 것처럼 정확히 그쪽 방향으로 미끄러지는 중이라는 점이었다.
"셀레스티아 공주님 맙소사!" 이를 악물고 숨을 참은 뒤 전방을 향해 땅을 힘껏 박차고 뛰어올랐다. "으아아아아!" 그리고 곧장 등 뒤쪽에 염동력을 형성해 한 차례 세차게 밀어붙였다. 그 정도만으로도 대포 포탄처럼 날아가는 데 충분한 가속도가 확보되었다. 밑도 끝도 없는 나락을 피해 공중에 뜬 땅덩어리의 흙과 풀잎을 붙잡고 매달렸다. 천만다행히도 두 발굽이 땅에 뻗어 있던 뿌리를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땅덩이가 그대로 상승해 솜사탕 구름보다도 높이 떠갈 때까지도 나는 그 위로 올라서지 못했다.
돌덩이가 삐죽삐죽 튀어나온 땅덩이 위로 몸을 끌어올리려 헐떡이는 숨으로 용을 써댔다. 지난 몇 년 동안 마법 능력은 상당한 진전이 있었지만 신체적으로는 별반 나아진 구석이 없었다. 왕립 영재 유니콘 학교에 다니던 시절, 일상적으로 실내에 틀어박혀 책만 파고들던 말라깽이 어린애에서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는 뜻이다. 까딱 잘못하면 그대로 떨어져 추락사할 게 뻔한 그 몇 분 동안 나는 죽도록 고생해서 겨우 몸을 끌어올렸다. 흙 밖으로 빠져나와 덜렁거리는 뿌리를 지나 땅덩이 위 풀이 우거진 끄트머리를 잡은 순간, 거칠고 쉰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페가수스마냥 날개를 만들어 날아 보는 건 고려 대상에 없었소, 동무?"*3
갈색 흙덩이를 붙잡고 매달린 근육 하나하나가 파르르 떨렸다.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이건 또 무슨?!"
날다람쥐 하나가 빙글빙글 웃으며 녹색 고글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입에 시가 하나를 물고 피우는 중이었다. "하긴 기렇겠구만 기래. 라임 그린 포니 동무래 그런 재주가 있었으면야 이러고 있을 리도 없을 거이오. 악어 제트팩 함 써 보는 기 어떻소?" 다람쥐가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씩 웃었다. "얼마까지 알아보고 왔는지 말만 하시오! 저 하늘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지 않소? 내래 죽음의 심연도 마찬가지로 바닥 없이 패여 있다고 하면 저 바닥에 매달린 포니 동무래 실망하갔디? 하!"
그 때, 웬 익룡 날개가 달린 토스터 하나가 날아오더니 바이스를 닮은 발톱을 세워 쌕 하는 소리와 함께 땅덩이 위에 있던 날다람쥐를 낚아채고는 한쪽으로 삐딱하게 기울어진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갔다.
"니옛нет! 니옛!" 토스터에게 단단히 잡힌 다람쥐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몸부림쳤다. "이 간나 새끼가 거래를 망칠 셈이네? 당장 내려놓으라우!" 포니빌 한가운데서 웬 로켓 추진기를 매단 아르마딜로 하나가 솟아오르더니 콘플레이크와 불꽃놀이 불꽃으로 후두둑 터지며 폭발했다.
나는 움찔하며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고 땅덩이 위로 기어 올라갔다. "뭐, 이건 됐고..."
일단 발을 디딜 만한 곳까지 올라간 것은 좋았는데, 그 위로 있어야 할 하늘이 없었다. 당황해서 사방을 이리저리 둘러보니, 그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세상이 밤의 장막에 감싸인 지 오래였다. 서쪽에서 솟아나 동쪽으로 향하는 달의 운행은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별들이 하나둘씩 솟아나 반짝이려는 순간, 궤도를 따라 움직이던 달이 순식간에 지평선 아래로 거꾸러지고, 불타는 태양이 솟아나 하늘을 비췄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내가 기어 올라온 곳은 포니빌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풍차가 있는 곳이었는데, 지상에서 한 수백 피트는 떨어져서 떠가고 있었는지 저 아래로 주택가 지붕들이 보였다. 정작 내가 당혹한 지점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지만.
"해와 달이..." 태양이 다시 거꾸러져 떨어지고 달이 솟아나 세상을 밤으로 바꿔놓는 모습에 나는 차가운 공포를 느꼈다. "천체의 운행이 통제를 벗어났어."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은 순간, 나는 외마디 헉 소리와 함께 엉덩방아를 찧으며 쓰러졌다. "셀레스티아 공주님... 루나 공주님이..." 마른침을 삼키며 몸을 떨었다. "두 분 공주님 모두... 해와 달의 통제권을 잃으셨다는 건..."
그 때 내 정신을 관통하고 지나간 공포가 어느 정도인지 감히 측량할 방법이 없다. 해와 달의 운행을 마음대로 바꿔놓을 수 있을 정도라면 이 세상을 문자 그대로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 놓는 것도 가능하다는, 아주 단순하지만 머리가 멍해지는 듯한 결론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위대한 어머니의 성가가 두 분 공주님께 부여한 권능조차 무력화할 수 있을 정도로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저주가 이 모든 사달의 원인이라면, 내가 상대해야 할 존재가 대체 어떤 존재일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것이다. 그 여자의 무시무시한 위엄과 베일에 싸인 정체조차 작금의 상황 앞에서는 나중에 생각해 볼 문제로 격하되는 게 당연했다.
나이트브링어의 권능을 빌어 트와일라잇을 지원하더라도 이 상황을 타개할 만한 실마리나마 붙잡을 수 있을지 없을지 내심 심각한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내게 저주를 몰고 온 나이트메어 문과 대적하고, 살아남아 영웅이 되었다는 점을 상기해야 했다. 내 평생 굳세고 믿을 만한 친구가 세상에 있다는 것을 다시 떠올리는 것만큼 기운이 나는 일도 없었다.
용기를 짜내려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풍차 뒤편으로 향했다. 때맞춰 해가 다시 떠올랐다. 낮 시간으로 정의되는 시간 중 해가 떠 있는 시간과 해가 진 시간 사이에서 모종의 규칙성을 발견할 수는 없었지만, 딱히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하늘 높은 곳을 떠가는 땅덩어리에서 저 아래로 내려가야 하는 문제에 직면해 있었으니까.
눈을 가늘게 뜨며 저 아래로 보이는 정적인 풍광에서 내가 주저앉은 자리까지 대충 얼마나 떨어져 있나 어림해 보았다. 주변으로 떠다니는 갖가지 것들 하나하나를 주목하던 중, 아주 뜬금없고 갑작스럽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마력선 깊은 곳에서부터 힘을 끌어내 가방 속 나이트브링어의 현 몇 줄을 튕기자, 나이트브링어의 마력이 내 몸으로 전달된 것이다. 땅덩이 한쪽 구석을 겨누고 마력을 방출하자 에메랄드 빛 섬광이 번쩍였다. 흙덩이 하나가 떨어져 나왔는데, 떨어지자마자 저 아래로 자유낙하하는 것이 아니라 깃털이 떨어지는 것처럼 느릿느릿하게 허공을 떠가다 내려앉는 것이다.
"자, 해 볼까..."
이를 악문 채 바람의 방향을 주시하다가, 땅덩이 밖으로 몸을 던졌다. 밖으로 뛰어나간 몸이 첫 번째 땅 조각 위에 내려앉았고, 동일한 과정을 대여섯 번 정도 반복하였다. 미끄러지듯 내려앉고 다시 뛰어내리기를 계속하자 체크무늬 형상으로 변한 바닥으로 그냥 똑 뛰어내려도 안전할 만한 높이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하!" 마지막이 될 도약과 함께 부드러운 땅 위로 몸을 날렸다. 절로 웃음이 나왔다. "누워서 케이크 먹기네 이거!"
한쪽에서 거대한 커스터드 덩어리 하나가 날아와 내 옆구리에 작렬했다. 몸이 적어도 세 바퀴는 돌아간 듯했다. 나는 모루 같은 쇳덩이라도 된 듯한 기분을 느끼며 옆에 있던 진흙 웅덩이에 머리부터 떨어졌다.
"윽!" 텐트 고정못이라도 된 양 거꾸로 뒤집혀서 뿔부터 땅에 처박히는 것은 끔찍할 정도로 기괴하고 곤란한 경험이었다. 입에 들어간 흙덩이를 뱉어 내며 가쁜 숨을 토해냈다. "이건 또 무슨......?!"
"케이크가 아니지!" 거꾸로 뒤집힌 시야 한쪽에서 웬 여자 하나가 낄낄대고 웃으며 말했다. "파이야, 파이! 하하하!" 외눈 안경을 쓴 게 몇 마리와 콧수염 단 뱀이 여자를 지나쳐 사라졌다. 여자는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느아아아아!" 나는 용을 쓰며 온 몸을 꿈지럭거린 끝에 땅에 박힌 뿔을 뽑아낼 수 있었다. 그대로 진흙탕에 엎어져 구른 몸을 일으키고 곳곳에 묻은 진흙 덩어리와 커스터드 크림을 털어냈다. "아오... 잠깐, 밀키 화이트?!" 얼굴을 팍 구기며 물었다. "이것 봐요, 이게 대체 뭐 하는... 으앗!" 급히 고개를 숙임과 동시에 머리 위로 불 붙은 파이용 냄비가 스쳐 지나갔다.
"나는 이제 밀키 화이트가 아니야!" 여자가 미친 듯 벙글거리며 소리쳤다. 그러더니 웬 종이 봉투를 머리에 뒤집어썼는데, 시야를 확보할 수 있도록 뚫어 놓은 눈구멍에서 눈이 희번득거리며 번들거렸다. 솜털이 눈에 띄게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여자는 다른 간식거리들을 꺼내 던지고 받기를 반복하다가, 근처를 지나가던 사람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던져대기 시작했다. "나는 파이니셔Pienisher*4 밀키다! 정의와 파이의 집행자로다!"
"눈에 띄는 사람이라면 일단 간식거리부터 던져서 맞추는 게 뭐가 정의라고 그래요?!"
"세상에 커스터드 크림과 알루미늄 캔이 나뒹굴게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사명이다!" 밀키 화이트가 외친 소리가 종이봉투에 막혀 조금은 줄어들었다. 여자는 곧장 근처를 지나가던 페가수스에게 음식을 내던졌다. "선량한 시민이여, 자유의 숨결을 느끼시오!"
밀키가 내던진 음식이 선더레인의 안면에 정확히 날아가 작렬했다. 잿빛 갈기와 입가에 진창이 되어 묻은 음식에 좀 충격을 받은 것 같기는 했는데, 곧장 자기 뒤에 묶은 피아노 세 대를 끌고 다시 낑낑대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하아아악!" 부들대는 잿빛 꼬리 아래로 맨 밑에 있던 피아노의 다리가 흙을 파내며 끌려갔다. "이것들을... 빙고 클럽에... 가지고 가야 해......!" 선더레인도 정신줄을 놓은 듯 웃어대며 말했다. "그 다음 내 날개를 에스트로겐에 푹 갖다 담그는 거야!"
"더 천천히 가!" 저 높은 곳에서 블로섬포스가 째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마찬가지로 회색이 된 여자가 맨 꼭대기 피아노에 올라앉아 선더레인의 몸에 연결해 둔 고무 닭 열 마리 정도를 채찍처럼 휘둘러댔다. 선더레인이 걸음을 더욱 늦추었다. "더! 더 느리게! 야 이 새끼야! 어제 도착하고도 남았을 정도로 느리게 가라고!"
"말씀만 하십쇼 여왕님!" 선더레인이 뺨에 홍조를 띄우며 색색거렸다. "더 세게 채찍질해 주십쇼! 나쁜 아이에게 벌을 주세요!"
"그래, 네가 바라는 대로 아주 작살나게 닭 채찍이나 맞아 봐라!" 블로섬포스가 눈을 까뒤집으며 포효했다.
이 와중에도 길 한쪽에서 여자애 하나가 나긋하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이가 없을 정도의 상황이었다. "이봐요, 엄마도 아닌 사람! 나 예뻐요?"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긴 했는데,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캐러셀 부티크가 반쯤 약탈당하기라도 한 듯한 모양새로 열려 있었는데, 건물 곳곳이 움푹 패여 들어가 있었다. 박살난 창문 옆에 쌓아놓은 파스텔톤 드레스 더미 한가운데 선 스쿠틀루가 웃기지도 않을 정도로 헝클어진 드레스 하나하나를 입어 보느라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메이크업 키트가 열린 채 바닥을 뒹굴고 있었고, 캔틀롯 사교무도회장에서 본 것보다도 더 다양한 색상의 립스틱과 마스카라가 꼬마의 얼굴에 떡이 되어 칠해져 있었다.
"텅 빈 궁둥이가 너무 강조되어 보이진 않아요?" 스쿠틀루가 금 간 거울 앞에서 이런저런 자세를 취해 보며 말했다. 이 또한 의상실에서 끌어낸 물건 중 하나였다. 꼬마가 흡사 간질 발작을 일으키듯이 눈꺼풀을 파르르르 떨더니 금이 가 뚝 끊어진 자기의 거울상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아! 이러면 남자가 여장한 것 같이 보이질 않잖아! 아줌마, 보고는 있어?!"
"이 버릇없는 애새끼야, 그럴 새가 있을 것 같니!" 밀키 화이트가 거꾸로 뒤집어진 자전거를 타고 가는 클라우드체이서와 플리터를 쫓으며 말했다. "시대의 영웅 파이니셔는 쓰레기 같은 놈들과 깃털로 가득한 세상을 정화하느라 바쁘단 말이다! 하!" 여자는 자기 꼬리를 투석기처럼 사용해 한 번에 파이 다섯 개를 날려보냈다. "그러니까 타르타로스행 고속도로나 타러 썩 꺼져, 혐오 유발자 새끼야!"
그 때, 딩키가 스쿠틀루의 스쿠터를 타고 쏜살같이 달려가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흥미롭게도, 이 유니콘 꼬맹이는 길바닥에 널린 이 미친 사람들과 달리 색이 쪽 빠져나간 행색은 아니었다.
"딩키!" 나는 꼬마를 향해 발굽을 뻗으며 소리쳤다. "기다려! 네가 쓰면 안 되잖아! 스쿠틀루 스쿠터잖니!"
"하, 누가 쓰기나 한대?" 스쿠틀루가 고상한 동작으로 발굽을 절레절레 젓더니,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갈기빗으로 머리를 빗으며 거울을 보고 입술을 오므렸다. "사내놈들같이 굴던 시절도 끝났어. 어머나아아, 왕자님이시네요. 네, 저도 왕실의 피를 이었답니다. 그러니 씨부랄 키스를 하세요."
나는 신음하며 꼬마 유니콘의 뒤를 쫓아 내달렸다. "딩키! 기다려!" 대충 두 블록쯤 따라가는 길에 건설현장 인부들이 탭댄스를 추고, 거꾸로 뒤집힌 플라밍고가 상점가 차양 아래에 주저앉아 있었다. "여긴 위험하니까 어디든 좋으니 안전한 곳으로 피해야 해!"
"언니 미안해요!" 딩키가 한층 더 가속하며 대답했다. "엄마가 이게 필요하다고 했어요!"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서 절로 눈이 가늘어졌다. "후브스 부인이...?"
바로 그 때, 평소보다도 짙은 잿빛이 된 페가수스 앞에 딩키가 멈춰섰다. "갖고 왔어요 엄마! 갖고 오라는 게 이거 맞죠!"
스쿠터를 이리저리 둘러보던 더피가 유독 안 어울리게 똑바른 눈으로 웃었다. "완벽해!" 그리고는 한쪽 발굽으로 스쿠터 핸들을 붙잡고, 다른 한쪽으로는 야구 방망이를 집어들더니 말했다. "지금까지 이 순간을 얼마나,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선생님! 지금은... 지금은 정상적인 판단을 못 하고 계세요!" 어떻게든 더피를 설득해 보려고 소리쳤다. 여기 희망이라 할 것이 있는지 없는지 나는 알 수 없었고, 이렇게 되어 버린 사람들과 접촉하면 나 또한 이렇게 될지 아닐지도 알 길이 없었다. 길바닥 한가운데서 이정표를 잃은 동네 바보가 된 듯 후드 소맷자락을 쥐어뜯으며, 더듬거리는 소리로 말했다. "선생님이 원래 어떤 사람이었나 잘 생각해 보세요! 따님께 필요한 건 지금 선생님 모습이 아니에요!"
"내 딸한테는 본보기가 필요해! 이 동네도 마찬가지고!" 더피가 스쿠터에 걸터앉더니 날개를 퍼덕이기 시작했다. 그대로 가속해 길목을 따라 쏜살같이 질주하기 시작한 여자가 오른쪽에 든 야구 방망이를 들어올려 집집마다 걸려 있던 우편함 하나하나에 작렬케 했고, 방망이에 부딪친 우편함들은 끔찍한 소리와 함께 조각나 부서졌다. "그렇지! 속이 다 시원하네! 편지 받아라, 이 헛똑똑이들아!" 더피가 반대 방향으로 진로를 돌리고 달리며 눈에 보이는 우편함이란 우편함은 전부 박살냈다. "이제 우표 정도는 니들 혓바닥으로 갖다 붙여라! 하!"
"이예에에이!" 딩키는 아무것도 모르고 좋아하며 제자리에서 방방 뛰며 발을 굴렀다. "못된 우편함들 혼쭐 내 줬다아! 엄마 최고!"
"그렇고말고!" 킬킬대던 더피가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한쪽에 있던 수레에 가 맞부딪쳤는데, 수레가 폭발하며 멍한 기색이 역력한 개구리들이 턱시도를 입고 길거리에 쏟아져 나왔다. "악! 제기랄! 으!"
나는 그저 덜덜 떨면서 천천히, 천천히 뒷걸음질쳐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등 뒤에 있던 누군가의 몸에 부딪쳤다.
"으앗!" 놀라 뒤를 돌아본 순간 나는 안도했다. 그 사람은 처음부터 흑백이 뒤섞인 채 태어난 사람이었다. "아! 제코라군요. 공주님 감사합니다!" 이마를 문질러 닦으며 온 동네에 만연한 광증이 마을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꼴을 가리켜 보였다. "지금 이러는 게 납득될 리 없죠?! 저 좀 도와 주세요!"
얼어붙은 인형처럼 그 어떤 생기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이 느릿느릿, 이쪽을 돌아보았다.
"트와일라잇을 찾아야 해요. 걔라면 이 상황을 정상으로 되돌려 줄 주문을 알고 있을 거에요! 제코라 생각은 어때요? 아직 집에 있을까요? 도서관에 있겠죠?!"
제코라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더니, 차가운 금속질의 소리와 함께 입을 벌렸다.
말을 멈추고 제코라를 쳐다보았다. "어어... 제코라? 괜찮으신 거 맞죠?"
그녀의 인후에서 섬광이 솟구쳤다. 무시무시한 에너지로 주변이 들끓었다. 그 다음 순간, 제코라의 목구멍 너머에서 거대한 푸른 레이저가 쏘아져 나오며 우레와 같은 소음이 울렸다.
급히 고개를 홱 숙였다. 빛기둥이 내 갈기를 가르고 날아갔다. 마을 한복판으로 발사된 레이저가 호텔 건물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건물이 파괴되며 불 붙은 잔해가 사방에 떨어졌다. 나는 멍한 눈길로 자리에 주저앉아 그 꼴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다시 금속질의 소리가 나더니 제코라의 입이 천천히 닫혔다. 콧가에서 김을 훅 내뿜더니, 기분 나쁜 웃음소리와 함께 희번득거리는 눈으로 공중제비를 넘으며 돌고래를 타고 날아다니는 백과사전의 무리에 합류해 달리기 시작했다.
다시 몸을 일으켜 머리에 묻은 거미줄을 떼어냈다. 몸이 움찔했다. "아아아아이구우우우우우. 도서관에나 가 봐야겠다.", 하고 혼잣말을 뱉었다.
나는 더 어물거릴 것도 없이 몸을 틀어 동네를 질주했다. 도서관으로 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일 분 일 초가 멀다 하고 온갖 예상치 못한 것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왔다. 달리는 내내 혼돈에서 몰려나온 벌레 떼 같은 꼬라지를 피하는 것과, 멈춰 서서 상궤를 벗어난 온갖 미친 광경을 구경하고 싶다는 충동을 다스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를 알아보고 반겨 주는 이 없는 이 따뜻한 마을에 사는 일은 내가 버려진 사람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했지만, 나의 무용함에는 다른 의미가 있던 게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전혀 의도치 않게 이 미쳐 돌아가는 꼴을 직접 목도하도록 운명의 사슬이 지금 이 순간을 예비해 둔 것 같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박장대소를 하고 싶은 마음과 조용히 흐느끼고 싶은 마음이 포개졌다. 스쿠틀루의 운명과 밀키 화이트, 제코라, 치어릴리의 운명에 대해서 생각했다.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 있기는 할 것인가. 차라리 죽느니만 못한 운명에 딩키를 내버리고 온 참이 아니었나. 딩키에게까지 저 회색이 마각을 뻗치도록 내버려두지 말고, 당장 안아들어 업고 다녔어야 하지 않았는가. 나는 생각했다.
그렇더라도 나는 계속 전진해야 했다. 트와일라잇을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최우선이라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트와일라잇만 있으면 이 상황을 반전시킬 수도, 아예 작금의 상황을 만들어낸 마력의 근원을 차단해 버릴 수도 있을 희미한 가능성이나마 붙잡을 수 있다. 나는 아직 회색으로 물들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어림짐작이었지만, 이 생각이 이기적인 만큼이나 나 자신을 돌볼 책임은 막중했다.
따라서 내 앞을 가로막는 온갖 기괴한 광경은 회피되어야 하고 우회되어야 하며 슬쩍 피해 가야 할 종류의 것이었다. 뭐라고 정의할 수는 없지만 뭔가 사악한 힘에 침식되어 잿빛으로 변해 버린 낯익은 사람들이 각종 미친 짓을 벌이고 있어서 나는 길을 잃었다. 다행히 그 중 트와일라잇은 없었고, 트와일라잇이 가까이 지내는 친구들도 끼어 있지 않았다. 영문을 모를 상황에 신경이 엄청나게 쓰이기는 했지만, 트와일라잇이 거처하는 나무집이 저 멀리 보이기 시작했을 때는 기분이 굉장히 좋아졌다.
"이제 됐어!" 초등학생처럼 실실 웃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제 저 문만 넘어 들어가면 그 안에 구원이 있을 터였다. "이제 상황 좀 정리할 수 있겠......"
꼬불꼬불한 앞머리가 내 얼굴을 후려쳤다.
"윽!" 맞은 몸이 그대로 날려가 오크나무에 처박혔다. 녹색 바나나 몇 송이가 쓰러진 몸 위로 후두둑 쏟아졌다. 오크나무에서 바나나가 떨어지는 미친 모습보다도 나를 공격한 습격자 쪽에 더 눈이 갔다. 아마 그 때 내 머리도 어디가 잘못되기는 했나 보다.
시장님이 길바닥 한가운데에 서 있었는데, 두 눈은 흑백으로 소용돌이치는 나선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시장님의 갈기였던 것은 이제 머리 꼭대기에서 자라난 촉수의 다발로 변해서, 하나하나마다 사람을 하나씩 휘감고 조이거나 붙잡아 내팽개쳤다. 사람들이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러댔다.
"이제 내가 그대의 죄를 사하노니!" 시장님이 우렁찬 목소리로 포효했다. 갈기 촉수가 가로등을 뜯어내더니 지나가던 알바트로스 무리를 향해 집어던졌다. "그대 마땅히 수도회에 입회해야 하리라!"
시장님의 갈기에 붙잡힌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움을 부르짖었다.
"어어..." 나는 괴물이 되어 버린 시장님의 갈기와 그 너머의 나무 집을 번갈아 보며 이도 저도 못 하고 발만 구르고 있었다. "저들을 구해? 트와일라잇을 만나? 구해야 하나? 가야 하나?" 나는 눈을 꼭 감고 속에 솟구치는 천길 불길을 억눌렀다. 그 찰나의 순간 동안 눈 앞을 스친 것은 앨의 수염 난 얼굴뿐이었다. 내게는 돌아가야 할 집이 있었다. 나는 눈을 뜨고, 나무집을 향해 시선을 겨누었다. "지금은 이게 더 중요해."
그 때, 다람쥐 비슷한 무언가들이 마차를 끌고 내게 달려들었다. 쿵 소리와 함께 다시 길가 한쪽으로 날려가 처박혔다. 공원이었던 곳이 목욕 거품으로 가득 찬 욕조가 되어 있었다.
"아 진짜! 으으으으으으!" 나는 이를 뿌득뿌득 갈아대며 욕조 밖으로 기어나왔다. 몸을 흔들어 가방에 묻은 물기를 털어낸 뒤, 다시 도서관으로 질주했다. "진짜 이번에도 방해하면 아주 그냥......"
눈앞에서 웬 녹색 줄기 몇 개가 솟아나더니 형형색색의 부엌 개수대를 맺어냈다. 나는 무작정 직진하다가 눈앞이 번쩍하는 느낌과 함께 충돌했다. 뒤로 쓰러지는 순간 더피가 몰아가는 스쿠터에 옆구리를 치였다. 시장님의 갈기에서 자라난 촉수 하나가 내 발목을 홱 낚아채더니 몇 번 세차게 흔들어대다가 슈가큐브코너 한쪽으로 내동댕이쳤다.
"윽!" 머리부터 발끝까지 안 아픈 곳이 없어 몸이 움찔거렸다.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세우는 와중 피아노 더미를 끌고 가던 선더레인이 나를 지나쳐 갔다. 고무 닭을 얽어 만든 채찍이 내 등짝을 모질게 후려쳤다. "악!"
"게으름 피우지 마!" 블로섬포스가 높이높이 쌓아올린 피아노 더미 위에서 거의 굴러 떨어질 듯한 자세로 으르렁댔다. "수탉은 절대 잊지 않는다, 용서하지도 않는다!"
"으아아아아, 다 때려쳐!" 한쪽 눈이 경련했다. "내가 무슨 수를 써서든 도서관에 가고 만다 진짜!" 잔뜩 꼭지가 돌아서 몸을 홱 돌려 슈가큐브코너 건물과 대면했다. 왠지 모를 깊고 어두운 변덕 때문에 근처에 있던 쓰레기통을 집어 매장 정면 창문에 냅다 집어던졌다. 박살난 유리 사이로 몸을 날려 식당에 진입했다.
케이크 사장 부부가 매장 안에 각종 엄폐물을 깔아두고 서로를 향해 미친 듯이 페인트탄을 쏘아대고 있어서, 내부는 온통 페인트로 얼룩져 있었고 나는 그 탄을 피해 이리저리 움직여야 했다.
"당신 애플 프리터는 맛이 없어요!" 회색이 된 케이크 부인이 소리치며 방아쇠를 당겨댔다.
그보다도 짙은 잿빛인 케이크 씨가 페인트탄을 홱 피하며 응사했다. "당신 과일 케이크는 얹은 것도 없고 상상력도 없잖소!"
케이크 부인이 의자를 걷어차 넘어뜨리고 냅다 그 뒤로 미끄러져 숨은 뒤 겨냥할 것도 없이 응사했다. "당신 도넛은 어떤데요. 남들 거랑 별로 다를 것도 없고 맛도 없잖아요!"
케이크 씨가 어디 쏠 테면 쏴 보라는 듯 머리를 빼꼼히 내밀고 케이크 부인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당신 컵케익은 감초 맛이잖소!"
케이크 부인이 정말 놀랐다는 듯 숨을 들이마시며 굳어 버렸다. 그러고는 분기탱천한 듯 거의 발작적으로 페인트볼 총을 타일 바닥에 냅다 집어던졌다. 총이 부서지며 불꽃이 확 피어올랐다. "당장 그 말 취소해요!"
"그 전에 우리 결혼부터 취소하시지!"
"그럼 우리 만난 필리델피아 연회나 취소해 놔요!"
"우리 만난 필리델피아 연회에 쓸 빵 굽는다며 친정집에 머물렀던 것부터 취소하시오!"
유치한 말싸움이 벌어지는 동안 나는 잽싸게 움직여 슈가큐브코너의 널찍한 매장을 샅샅이 뒤지며 돌아다녔다. 한참을 낑낑댄 끝에 핑키 파이가 평소 파티용 대포 여분을 쟁여놓던 곳에서 대포 하나를 겨우 끄집어낼 수 있었다. 대포를 들고 돌려 난장판이 된 식당 반대편을 향해 집어던졌다. "잠깐 실례할까요, 지나갑니당......"
둘이 목을 쭉 내밀고 투닥대는 밑을 슬쩍 지나갔다. "그럴 거면 애초에 당신이 빵 굽기로 결심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진로를 달리 정해야죠!" 케이크 부인이 발굽을 쿵 내리치자 바닥에 굴러다니던 페인트볼 총에 다시 불이 붙었다.
"아니지, 제빵에 푹 빠진 끝에 필리델피아 연회를 구경하러 떠났다가 나를 만나 결혼한 한 성체로 자라난 수정란이 문제야. 당장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도록 하시오!"
헥헥대며 식당 밖으로 나온 뒤 파티용 대포의 발사 장치를 힘차게 두들기며 외쳤다. "다들 저리 비켜요!" 나는 전신의 체중을 실어 발포 직전의 대포를 꽉 붙들었다.
파티에 걸맞는 펑펑 터지는 소리와 함께 내부에 장전된 장식용 끈 테이프가 그대로 시장님을 향해 날아가 작렬했고, 시장님은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갈기 촉수가 잠시 힘을 못 쓰게 된 순간 거기 매여 있던 사람들이 풀려나 사방으로 달아났다.
"그렇지, 이거야!" 나는 그대로 도서관을 향해 달려가며 환호했다. "누구라도 날 막았다간 색종이에 머리 맞고 그냥 훅 가는 거라고!"
"개뿔, 그게 뭔 자랑이라고!" 더피 후브스가 콧방귀를 뀌며 스쿠터를 몰고 달려와 내 머리를 향해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며 외쳤다. "반송불가 도장 찍어서 보내 그럼, 임마!"
"아니, 그건 당신이지!" 더피의 얼굴에 그대로 파티 대포를 쏘았다.
"악!" 색종이 뭉치가 그대로 날아가 더피의 얼굴에 작렬했다. 쓰러진 더피가 폭발하는 포도로 가득한 가판대 위로 쓰러졌다.
"다 그쪽을 위해서에요!" 몸을 홱 틀어 도서관을 향해 달려가며 발레복을 입고 쇄도하는 버팔로와, 기린 다리를 달고 돌아다니는 토끼, 꽃바구니를 들고 다니는 미노타우르스를 비롯해 목전에 닥치는 온갖 이상한 것들을 향해 파티 대포를 쏘아댔다. "트와일라잇을 만나야 해! 이 난장판을 멈춰야 한다고! 조화... 조화로웠던 세상을 위해서!"
털이 북슬북슬한 뱀처럼 생긴 몸에 사슴과 같은 가지뿔이 난 무언가가 사팔뜨기눈으로 실실 웃으며 눈 앞에 나타났다. "이거, 이거, 성질이 장난 아니시구만!" 그자가 새빨간 눈을 씰룩거리며 노란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실례가 아니면 제안 하나 할까..."
염소 수염이 난 주둥이를 겨누고 파티 대포를 격발해 길 건너편의 무너져 가는 건물 쪽으로 날려보냈다. "이제 방해하지 마! 이 난장판을 어떻게든 수습할 방법을 찾아야 하니까!" 파스텔톤 색을 입힌 장탄裝彈이 다 떨어졌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파티 대포를 한쪽에 내팽개치고 트와일라잇의 집을 향하여 단숨에 뛰어가 그 문 앞에 섰다. "제발 집에 있어라. 제발 집에 있어라. 제발, 제발, 제발, 제발......" 나는 두 발굽으로 나무집 문짝의 문고리를 쥐어짜듯 잡았다.
그 때, 등 뒤에서 갈색 비늘 덮인 꼬리 하나가 덮쳐들어 나를 세 바퀴는 족히 휘감았다.
"어, 어?" 당혹감에 눈만 한 번 겨우 깜박이고, "으아아아아아!" 소리와 함께 홱 당겨져 도서관 상공 수백 피트 거리로 솟구쳤다. "안 돼!" 나는 비명을 지르며 나무집을 향해 발굽을 뻗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던져진 몸에 보이는 나무집은 갈수록 멀어져만 갔다. "바로 코, 코앞이었는데! 대체... 어떻게...?"
"흠흠... 자, 다시 해 보시지요." 뒤에서 구렁이 담 넘어가듯 유창한 말투로 누군가 말을 걸었다.
속이 싹 얼어붙는 듯했다. 뱀의 꼬리에 휘감긴 듯한 몸을 비비 꼬아 방향을 틀자, 이쪽을 향한 한 쌍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얼굴은 잿빛 마상馬相이고 그 몸은 갈색이었는데, 광대의 옷처럼 파충류와 포유류, 맹금의 사지가 들러붙어 있었다. 등에 난 한 쌍 날개도 페가수스와 사로스인의 날개 하나씩을 갖다 붙인 모양이었으며, 비대칭형으로 돋아난 가지뿔 아래로 살짝 찌푸려진 이마가 펼쳐진 모양새는 도저히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조각 퍼즐이 날개를 펴고 내 앞을 떠다니는 꼴과 마찬가지였다. 이 괴물의 시선은 내 영혼을 곧바로 들여다보는 것 같았는데, 히죽거리며 웃는 입술 아래로 송곳니가 그대로 드러나 햇빛에 번들거렸다.
"안녕하십니까, 마담Madame." 괴물이 말했다. "날씨는 좀 어떠신지요?" 사자의 앞발 같은 손바닥으로 몸짓하며 오른쪽 눈만 접시처럼 크게 뜨더니 말을 이었다. 오른편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부분적으로 혼란스러운 가운데, 피탄 확률은 20% 정도인가요?"
"허?" 당혹감에 입을 떡 벌렸다.
"아시겠지만, 방금 제게 하신 행위는 더없이 무례한 행위였답니다."
"트와일라잇 스파클 보러 가야 한다고!" 소리쳐 대답했다.
"아하, 그러시겠지요! 이 상황에 더없이 어울리는 메리 수Mary Sue*5 니까요!" 그자는 나를 휘감은 채 느긋하게 빙빙 돌며 발톱으로 염소수염 난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요사이 참 대단히도 이름을 날리는 것 같디다. 다만 그, 뭐, 그 양반이 지금까지 사귄 친구 하나하나 전부 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그 양반 내다 버린 건 아직 잘들 모르더군요. 멜로드라마적인 요소가 좀 첨가된 셈입니다. 그나저나." 나를 가리키더니 말했다. "당신 재킷 말인데, 직접 만든 건가요?"
"잠깐, 트와일라잇한테 무슨 일이 있다고?!" 나는 적잖이 놀랐다.
"그게 말이죠, 레몬 농장에서 바느질해 만든 것처럼 생겨서 말입니다." 그자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더니 내 갈기 냄새를 맡았다. 아주 신 냄새라도 나는 양 입가를 찡그리더니 말했다. "으으. 시큼한 게 그쪽도 레몬 농장 출신인가 보네요! 마담 라이미limey, 당신 샤워라는 행위가 존재하는 건 알고 있나요? 아니면, 대충 씻는 척만 하고 다니는 건가요?"
"아오 진짜!" 내 허리를 휘감은 그자의 꼬리를 발굽으로 힘껏 내리치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이거 놔!"
괴물은 밑으로 보이는 포니빌 주택가의 지붕들을 흘끗 내려다보더니 이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고 말했다. "글쎄요, 지금 그런 말씀을 하시면 신상에 이로울 게 별로 없을 겁니다."
"제발 좀! 날 내버려 둬!" 나는 그렇게 소리치고 두 앞다리를 모아 포개고 애원했다. "트와일라잇을 찾아야 해!"
괴물은 느긋하게 아래쪽으로 고도를 낮췄다. "그리 서두를 필요가 있나요? 정말 멋진 날 아닙니까!"
"지금 이 꼴을 보고 멋지다는 말이 나와?!" 조각난 마을이 사방으로 뜯겨나와 떠다니고, 구름 대신 솜사탕이 날아다니는 꼬락서니를 가리키며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트와일라잇 찾아서 개판 난 거 수습해야 해. 이게... 이게 혼란 그 자체지 뭐야!"
"하 하 하 하 하아아아!" 괴물이 그 가는 모가지를 뒤로 꺾고 하늘을 보며 승리감에 찬 소리로 신나게 웃어댔다. 해가 지고 달이 솟아 가지뿔 위로 섬뜩한 광택이 맴돌았다. 그자는 더없이 짓궂은 표정으로 빙글거리며 나를 내려다보고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혼돈이란 거칠고 예측 불가능한 것이기는 하지만, 저는 사실 당신 같은 사람을 만나는 걸 훨씬 더 좋아한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게 말이죠... 음... 뭐라고 할까..." 그자가 시선을 돌리더니 턱을 긁으며 말했다. "흠...... 말로 풀자면 혼자서 주절주절 떠드는 꼴이 될 것 같긴 한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당신이라면 그런 짓에도 익숙할 것 같군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그러시다면 이해를 좀 도와 드려야겠군요?" 괴물이 꼬리를 풀더니 달빛 비치는 골목으로 내 몸을 툭 던지며 말했다. "자, 잠깐 앉으실까요." 그자가 손가락을 퉁겼다.
영문을 알 수 없어 그자를 보기만 하던 중, 몸 아래서 뭔가 커다란 것이 우르르 솟아나는 감각이 사지를 타고 전해졌다. 벤치 하나가 마법처럼 땅에서 솟아나 내 착지 지점 바로 아래에 자리했다. "으악!" 나는 등받이에 부딪치며 거기 기대앉은 자세로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벤치 밖으로 뻗어나간 뒷다리가 흔들렸다.
괴물이 한쪽이 도마뱀의 발이고 다른 한쪽은 버팔로 발굽인 두 다리로 휘적휘적 다가오며 손가락을 휘휘 저었다. 얼굴은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세상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혼돈의 도가니로 바꿔놓는 과업에 한창 매진하던 중에 저와 딱 마주친 사람이 하나 있다 이겁니다. 혼란에 더럽혀지지 않은 한 유니콘이 있어 근처 건물에서 끌어낸 파티용 장난감을 무기삼아 휘두르는데, 혼자서도 제가 벌여놓은 난장판의 곱절만큼이나 난리법석을 피우더라 이거죠! 헌데 그 목적이 아주 오래 전에 잃어버린 '친구'를 찾아 동네를 뒤지고 다니기 위함이었다는 거에요!"
"그게... 어어..."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몸을 꼬았다. "트와일라잇을... 어... 찾으러 가던 거였는데, 그래야... 아니 잠깐, 잠시만 좀 풀어 주겠어?" 몸부림치며 전신을 비틀어댄 끝에, 비교적 정상적인 형태로 자세를 바꿀 수 있었다. "휴. 좀 낫군." 나는 앉은 채 그자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퀘스트리아 어딜 가도 트와일라잇만한 마법사는 없어! 사태를 정상화시키려면 걜 도와야......"
"도와서 세상에 다시 질서와 조화를 가져오겠다는 거겠죠! 당연한 말씀입니다!" 괴물이 몸을 숙이고 낄낄 웃으며 무릎을 탁 쳤다. "그런데 말입죠... 히히히... 말씀하시는 목표가 크고 높기는 합니다마는 정작 그 목표를 추구하는 수단이 더 큰 혼란을 빚어내는 건 모르시나 봅니다! 하 하 하! 당신은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헤, 스스로 증명해 주시고 계신 게지요!"
몸이 살짝 떨렸다. 조금 뒤로 물러나 앉으며 물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셀레스티아 공주를 갖다 앉혀 놔도 이해 못 하기는 마찬가지일 겁니다! 조울증 환자인 그 동생을 데려와도 그렇겠죠! 타르타로스에 가둬 놓은 각종 기괴하고 끔찍한 괴물들도 별반 다르지 않을걸요!" 괴물이 새까맣게 물든 자기 갈기를 뒤로 넘기며 실실 웃었다. "휴! 애들 잡아먹는 트롯토로스Trottoroth 생각이 나는군요. 그 친구가 참 끝내주게 잘 놀았거든요!"
"아니... 대체..." 높은 목소리로 재잘재잘 떠들어대던 괴물을 향해 눈을 부라리고 물었다. "너 뭐 하는 놈이야? 네가 감히..." 달이 떨어지고 해가 다시 솟아나서, 순간 눈 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나는 움찔하면서도 눈에 쌍심지를 켜고 놈을 째려보았다. "네가 뭔데 두 분 공주님을 그리 욕되게 하는 거지?"
괴물이 하품을 쩍 하더니 대답했다. "아하아아아. 그거야 아주 간단한 문제랍니다." 그자가 왼쪽 가지뿔을 당겨 뽑더니 노란 발톱으로 휘휘 돌려 가며 갖고 놀다가 말했다. "권태, 지요."
"권태라니?"
"아. 물론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종류는 아니랍니다. 영겁의 세월 동안 푹 익어 독이 시퍼렇게 올라온 쪽이죠. 지옥의 밑바닥까지 떨어졌다가 도로 기어나온 악마가 품은 복수심이나, 일요일 아침에 발견한 썩어 문드러진 달걀 정도나 되어야 여기 비할 겁니다."
파란 제복을 입은 네 명 사내가 동시에 달려나왔다. 포니빌 경찰이 진압봉을 휘두르며 애써 지은 근엄한 표정으로 뱀처럼 생긴 괴물을 향해 돌진했다. "놈을 찾았다. 너! 이 자식! 드라코네쿠스Draconequus! 네가 지은 죄에 책임을 져야 할 테다, 이 더러운 요술쟁이 자식아!"
"드라코네쿠스...?" 잘 움직여지지 않는 혀로 다시 그 말을 입에 담아 보았다. 흠칫 놀란 몸 밖으로 급한 숨이 튀어나왔다. 혼돈에 물들어 아수라장이 된 동네 한가운데서 하늘 위로 끌려갔다 온 이후 한 번도 똑바로 살핀 적 없던 괴물의 비현실적으로 뒤섞인 몸을 나는 그제야 다시 살폈다. 오래된 스테인드글라스나 태피스트리, 석상으로나 보았던 바로 그 몸뚱이였다. "수천 년 동안 이퀘스트리아에서 드라코네쿠스가 목격된 적은 없다고 하지 않았나..."
"오호!" 수다쟁이 괴물이 눈을 반짝하더니 뽑았던 뿔을 툭 던져 제자리에 끼워 넣고는 자리에서 몸을 휙휙 돌리더니 말했다. "권태 이야기를 좀 해 보실까!" 그자가 몸을 돌려 경찰관들을 마주보더니 좌우 비대칭인 두 손을 뚝뚝 꺾었다. "거 신사 양반들은 지금까지 어디 계시다 지금 나타나셨습니까?! 당신네들이 좋아 죽는 것에 빠져 있기라도 했나요?" 괴물이 허공에서 머그잔을 만들어 내더니 송곳니를 드러내며 커피포트처럼 생긴 물건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검은 액체를 따랐다. "커피라면 많이 있으니 좋을 대로 드시고 사라지시죠! 곁들일 것도 많이 있으니까요!"
"아내를 부표로 만든 그 죄값을 치르게 해 주마!" 늙은 경찰이 딱딱거리며 말했다.
옆에 선 경찰이 멍한 얼굴로 물었다. "부표는 뭡니까?"
"경사는 닥치고 있게!"
"산통 다 깨졌군요." 괴물이 툴툴거리며 드러낸 송곳니를 도로 감추더니 김 오르는 머그잔을 들어 몇 번 홀짝거렸다. 경찰들이 서서히 거리를 좁혀 오자, 괴물은 심드렁한 눈치로 이쪽을 보며 몸짓하고 말했다. "마담 라이미. 사막, 정글, 바다 중에 휴가처로 괜찮은 곳 좀 골라 주시죠. 최대한 빨리."
"뭐, 뭣?!" 이건 또 무슨 소린지 알 수 없어 반문했다.
"어서요!" 괴물이 자기 쪽을 몸짓하며 말했다. "저 노인네 주절거리는 소리 더 듣고 싶지가 않다구요!"
"어어어......" 마른침을 넘기며 인상을 쓰다가, 끽끽대는 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어... 바다가 낫지...?"
"아하! 그렇고말고요!" 드라코네쿠스가 들고 있던 잔을 뒤로 휙 던지자 컵이 그대로 폭발했다. 그러더니 이마를 탁 치며 비뚤어진 웃음을 짓고 말했다. "사막은 너무 오래 봐서 지쳤답니다! 요 염소수염 안에도 모래가 아직 바스락거리니까요. 그럼, 이 상황이 어떻게 끝날지는 그쪽 상상에 맡기도록 하죠."
경찰들이 함성을 지르며 괴물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 작자는 눈만 찡긋해 보이더니 사내들을 향해 새 발톱을 딱 퉁기며 외쳤다. "알로하!"
네 덩이 섬광이 번쩍했다. 빛이 사라진 후 경찰들이 무슨 꼴이 되었는지 보고 나서도 차마 믿지 못해 눈을 비비고 다시 봐야 했다. 제복이 땅바닥에 굴러다니는데, 이 옷가지를 꿰어 입은 게 포니가 아니라 펄떡거리는 시 포니였다. 경찰이었던 자들이 놀란 숨을 내뱉고 꿈틀거리며 입만 뻐끔거렸다.
"흠흠..." 뱀 같은 짐승이 거꾸로 몸을 뒤집고 그들 위로 날아가 근처 강가를 가리켰다. "물이라면 저쪽에 있답니다. 그럼 이제 정신들 차리시고 육상생물로의 진화를 시작하시지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시 포니 넷이 울먹이면서 물개처럼 펄떡펄떡 뛰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넷은 진한 분홍색 액체가 흐르는 강가에 도달했다.
"하하하하......" 드라코네쿠스가 공중제비를 돌며 내가 앉은 벤치 옆에 내려섰다. 그러고는 시 포니들이 몸을 던진 분홍 강물을 아주 자랑스러운 눈치로 바라보며 벤치에 몸을 기댔다. "감기약입니다. 오늘 밤 술집에서 거나하게 취할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암만해도 이게 가장 효과가 비슷할 것 같더군요."
"대체... 아, 아니 어떻게?!" 이쯤되니 두려워지기 시작해서 말을 더듬었다.
"왜 그러시죠?!" 그자는 순진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적어도 감기 걸릴 일은 없게 해 드렸는데!"
"네가 대체 무슨 권리로... 이..." 벤치에서 뛰어내려와 괴물을 노려보며 비눗물로 젖은 길을 네 다리로 단단히 디뎠다. 다행히 당장 미끄러지지는 않아서 말을 마칠 정도는 되었다. "이 사람들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것도 모자라 아예 파탄을 내 놓는데?! 지금 당장 원래대로 돌려놔!"
"왜 그래야 하나요?" 괴물은 뭘 그러냐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고상한 동작으로 한쪽 발로 서서 빙빙 돌며 내 주위를 맴돌았다. "이거야말로 혼돈이지요! 혼돈은 제가 추구하는 바랍니다! 왜 때가 되면 나뭇잎을 떨궈야 하고, 팬더는 왜 살이 뒤룩뒤룩 쪘으며 당신은 레몬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신 냄새를 풍기고 다니는지 묻는 거랑 똑같은 말씀을 하시는 거라고요!"
"혼돈..."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지평선 어귀에서 초콜릿 비가 떨어지며 갈색 장막을 드리우는 모습을 잠시 쳐다보았다. 거꾸로 뒤집힌 비행선에 올라탄 궁수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던 돼지들을 쏘아 떨어뜨렸다. 분홍색 감기약이 흐르는 강을 바라보자 몸이 떨렸다. "저 경찰 양반들을 손가락 한 번 튕기는 걸로 시 포니로 만들고, 순식간에 커피와 벤치를 만들어 내다니." 목전에서 본 걸 그대로 주워섬기는 일이 자주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때는 내 사고에서 현실성과 합리성을 거세해야 할 순간이었다. 당시 그런 생각을 했던 게 부끄럽기는 하지만 아주 부끄럽지는 않다. 그자를 올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평범한 드라코네쿠스는 아닌가 본데."
"하릅강아지밖에 되지 않는 아가씨도 마찬가지지요." 괴물이 회전을 멈추고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그 긴 몸을 여러 차례 접고 길쭉한 상판을 내 코앞에 들이밀며 말했다. "유니콘들은 다들 그렇습니다. 우스울 정도로 뻔히 들여다보이거든요."
"어디가?"
"아주 꽉 막힌 벽창호들인 점이죠." 괴물이 몸을 일으켜 털이 북슬북슬한 가슴팍에서 먼지 몇 개를 털어냈다. "경직되고 비탄력적이며 융통성이라곤 조금도 없이 자기네들의 고상한 목표만 보고 달리거든요. 뭐 '마법'이라거나 '조화', '명경지수', '니바나Neighvana'*6 같은 것들 있잖습니까. 실은 이것들 다 똑같습니다요. 죄다 말뿐인데 그나마도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언어들 중에서도 가장 쓰레기같은 언설만 골라서 갖다 붙인 거랍니다. 이 때문에 간단한 진리에 도달하지 못하는 거라구요."
"그 진리라는 게...?"
"질서를 추구하는 게, 실은 무질서를 추구하는 것과 똑같다는 것이죠." 괴물이 냉소하며 말했다. "다만," 그자가 몸을 굽히더니 목을 비틀어 얼굴을 거꾸로 한 채 나를 보고 씩 웃었다. "방향의 차이일 뿐이라는 겁니다."
인상을 쓰고 답했다. "내 평생 들은 것 중에서도 네놈이 지껄인 얘기가 가장 속이 뻔히 들여다보인다."
"아이고, 그래도 인정하실 건 인정하셔야죠!" 괴물이 몸을 돌려 목과 몸의 방향을 일치시켰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나를 쳐다보았는데, 뿔 하나를 뽑아 제 이마 한가운데에 붙여놓은 상태였다. "그쪽이 그토록 경애하는 알리콘 공주들은 이보다 더하거든요!"
"아, 그러셔?"
"그 양반들은 권능을 갖고 있죠." 괴물이 이마의 뿔을 뽑아내 방망이 크기로 부풀리더니, 입 밖으로 골프공을 하나 뱉어냈다. 도마뱀 발 위로 공을 올리고 스윙 자세를 취한 괴물이 말했다. "자기 혼자만 옳다는 사고방식에 권능을 끼얹으면 혼란이 생겨난답니다. 아, 물론 처음에는 별로 티 나진 않죠. 창문에 눌어붙어 안 떨어지는 끈적한 때 같다고나 할까요." 괴물이 방망이를 휘둘렀으나 공을 치지는 못했다. 욕지거리를 한 괴물이 다시 스윙을 준비했다. "시간이 지나면 말입니다, 이게 조금씩 모이고 모이거든요. 이 때부터 당신들이 아무런 의문 없이 숭배해 온 조화의 두 여신이 슬슬 뒤가 구린 짓들을 하게 되는 거죠." 털 난 잿빛 주둥이가 힘차게 콧김을 뿜어냈다. "아주 머나먼 곳에서부터 자기들을 찾아온 방문자를 돌로 만들거나 하는 것처럼." 그 말과 함께 괴물이 든 방망이가 골프공을 힘차게 후려쳤다. 공이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멀찍이 있던 건물에 부딪치자 옆에 있던 아파트까지 함께 무너져 내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에 있던 건물들까지 도미노가 쓰러지듯 줄줄이 쓰러지며 무시무시한 굉음과 먼지를 사방으로 날려댔다.
소음의 잔향이 서서히 가라앉을 때쯤 되니 이 괴물에게 일종의 경외심까지 들기 시작했다. "돌로... 만들었다?" 마른침을 삼켰다. 몸 깊은 곳에서부터 파르르 떨리기 시작해 전신이 으스스쳤다. "두 분 공주님과... 조화의 원소..."
"확실히 그것들로 일을 마무리짓기는 하더군요. 그렇지 않은가요?" 그자가 가지뿔을 짚고 기대서서 혼곤한 시선으로 말했다. "그 '평화'의 대가를 따지고 보면, 바가지 쓰는 거나 마찬가지랍니다. 제 입장에서는 손 안 대고 코 푼 격이거든요. 제가 잠들었던 그 기나긴 세월 동안 수도 없이 벌어졌던 종족 간 갈등은 좀 재미있으셨을까 모르겠네요? 내전은 어땠나요? 전염병도 창궐했겠죠? 에버프리 숲의 괴물들은 어떠셨을까요? 타르타로스의 봉인이 풀렸던 일은 또 어떤가요? 제브라하라에서 벌어진 전쟁은요? 말씀해 보시죠." 괴물이 방망이를 휙휙 돌리자 방망이가 다시 원래 가지뿔 모양으로 돌아왔다. 뿔을 제자리로 돌려놓은 뒤, 그자가 말했다. "하긴 이 모든 일들에 대한 감사를 지금 받기에는 때가 조금 늦은 감이 있군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나는 입을 떡 벌리고 그 말들을 듣고 있었다. 동공이 한껏 작아지는 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마른침을 삼키고 나는 겨우 말했다. "너, 디스코드군?"
괴물은 종을 시끄럽게 울리며 섬광을 번쩍거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는 몸을 움찔했다. 어느샌가 선글라스를 끼고 반들거리는 빨간 턱시도를 차려입은 드라코네쿠스가 펄쩍 뛰며 다가오더니 전원이 연결되지 않은 마이크에 대고 약장수처럼 소리쳤다. "정답입니다! 우승이네요!" 디스코드가 오른쪽으로 팔을 무시무시하게 길게 잡아늘려 뻗더니 두꺼운 안경을 낀 낯익은 꼬마 하나를 잡아채 왔다. "꼬마 아가씨! 우승자를 호명해 주시죠!"
갈기가 눈에 띌 정도로 잿빛이 된 트위스트가 그림엽서의 한 부분처럼 싱글벙글 웃으며 즐거이 외쳤다. "라이미 아가띠가 당연한 것 새삼스럽게 말하기 부문에서 우슝하셨뜹니다! 우슝 상품으로 이퀘슈튜리아 개똥밭으로 무료 휴가권을 드립니다!"
"우리 아가씨, 도와 줘서 정말 고맙군요." 디스코드가 선글라스를 내리며 빙글거렸다. "항상 기억하도록 해요. 아가씨는 개성도 창의력도 없어서 반겨 줄 사람 하나 없는 사람이란 걸."
"냐는 개성도 없고 창의력도 없어서 아무도 냘 안 조아해여!" 트위스트가 더없이 행복한 미소로 말했다.
"좋아요. 잘 이해했군요!" 디스코드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더니 한땐 새빨간 갈기로 돌아다녔던 꼬마를 근처 언덕 너머로 뻥 차 버리고 말했다. "요즘 아이들은 참 귀엽군요." 그러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블라인드를 말아 걷듯이 제 몸에 걸쳤던 번들거리는 턱시도를 돌돌 말아 없앴다. "아이들 없이는 살 수가 없답니다. 녀석들이 없으면 골대로 슛 한 번 못 날리니까요!" 포니빌 경계 어귀쯤에서 꼬마가 어딘가에 충돌하며 내지른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오자 디스코드가 눈가를 꿈틀댔다.
"아니... 이거... 너..." 충격을 받아서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이구 이런. 호기심 조지사Mythbuckers*7에서 금붕어 기억력이 생각보다 괜찮은 걸 밝혀내지 않았던가요?" 디스코드가 내 주위를 빙빙 도는 형태로 또아리를 틀더니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숨 속에 시간보다도 더 오래된 것들의 퀴퀴한 냄새가 배어 있었다. "내 이름은 '디스코드'랍니다, 아가씨.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은 아니지요. 그대의 이름은 뭔가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름 없는 자들의 땅을 밥 먹듯 드나들며 끌어올린 용기와 강단이 순식간에 녹아 사라져 버린 듯했다. 고대 이퀘스트리아에 그토록 끔찍한 고통과 악덕을 퍼뜨린 장본인과 직접 대면하고 있다는 무시무시한 현실이 조금씩 이해되고 있었다. 평범한 필멸자의 이해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퀘스트리아에 처음으로 발을 딛자마자 눈에 띈 짐승들을 죽여 그 살은 취하고 가죽은 벗겨내 이어 만든 껍데기를 뒤집어쓴 악마요, 악의 화신이 코앞에 있었다. 만고의 기만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상세히 묘사한 기록은 역사에 남아 있지 않았지만, 드라코네쿠스의 형상은 그 기만자에 대한 서술과 완벽히 일치했다. 이퀘스트리아의 주요 미덕과는 정반대의 것들을 하나로 모아 놓은 그 꼬라지는 가히 아이러니의 극치라 할 만했고 그보다 역겨운 꼴은 세상에 또 없을 것이었으며 그 정도로 불쾌한 느낌이 들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이 자가 저질러 온 수없는 폭거에 관한 글이라면 여러 개 주워들은 게 있었으므로, 내가 처한 상황이 얼마나 답이 안 나오는지 그보다 더 명료하게 파악할 수가 없었다. 나는 한없는 공포에 질려 있었다. 봉인에서 풀려나자마자 이 세상을 망각의 낭떠러지 끄트머리로 손쉽게 몰고 간 것도 모자라, 저 피도 눈물도 없는 악랄함으로 두 분 공주님까지 척살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으니까. 내가 달리 할 수 있는 게 있었을까. 내가 뭐라고 할 말이 있기는 했을까?
이성이 마비된 자리로 본능이 치고 올라왔다. 어린애처럼 울며 힘없이 말했다. "라이라. 라이라 하트스트링스." 말을 마친 나는 내 머리 위로 성간 혜성 같은 게 떨어질 게 뻔하다는 생각에 몸을 움찔했다.
디스코드는 웃음을 터뜨리며 면전에 대고 조롱을 퍼부을 뿐이었다. "하하하하! 뭐 그렇게 진지하게 받을 것까지야! 뭐, 여기서 정보 좀 캐내 보라고 캔틀롯에서 파견한 첩자 같은 거라도 되나요?" 괴물이 눈을 찡긋하며 손가락을 퉁겼다.
"제발..." 두 발굽을 들어올리자 디스코드가 마티니 한 잔을 쥐여 주었다. "몰랐어. 진짜..." 나는 말을 멈추고 꾸물거리며 마티니 잔을 던지고 말했다. "네가 누군지 몰랐어."
"제가 누군지 모르셨다고 하지만 제 혼자만 옳은 줄 아는 개새끼처럼 짖어대는 건 멈추지 않는군요! 허심탄회하게 말씀해 주시지요. 제 예술 행위 하나하나에 따박따박 기를 쓰며 대드는 이유가 대체 뭔가요, 하트스트링스 양?" 디스코드가 비뚤게 뜬 눈을 부라리며 손가락을 빙빙 돌렸다. "네, 뭐 그렇죠. 저 경찰 양반들에게 아가미를 달아 물에 처넣은 건 사실입니다. 날지도 못할 날개를 붙이고 다니던 녀석은 계집애한테 딱 맞는 성격으로 바꿔 줬고요. 그 양어머니와의 관계도 완전히 파탄을 내 놓았고 말입니다. 그리고 또 뭐냐, 아가씨가 경애해 마지않는 시장 양반의 갈기를 외설스러운 촉수 모양으로 바꿔 놨던 것 같기도 하고..."
"트위스트를 내년으로 쫓아낸 건 안 세?"
"누구요?"
"셀레스티아 공주님과 루나 공주님께 당했던 걸 되돌려 주려고 이러는 거야?" 떨지 않으려 용을 쓰며 말했다. 나를 둘러싸고 또아리를 튼 디스코드의 기나긴 몸에 비하면 내 몸은 너무나 작았다. "널 돌로 만든 앙갚음을 하겠다고 두 분 공주님의 왕국을 거꾸로 뒤집어 버리고 다니는 건가?"
"아이구 세상에. 절 복수에 눈이 먼 머저리 취급하지 마십시오." 디스코드가 털 난 가슴에 한쪽 손바닥을 얹었다. "애초에, 그 둘이 저를 돌로 만든 것은 제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거든요."
"내버려... 뒀다고?"
"그럼요, 그렇고말고요!" 디스코드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한없는 권태를 극복해 내겠다며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짓도 다 귀찮고 권태로워지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랍니다! 잠이 덜 깨서 주절거리는 소리긴 합니다마는 우리 하프 궁둥이 꼬맹이가 적당히 알아먹을 지능이 있기만 하다면야 제가 다 때려치우고 자러 갈 생각이었다는 걸 눈치챘을 겁니다."
"꼬맹이?!" 얼굴을 찌푸리다가 확 구기며 말했다. "나는 라이라라고!"
"하. 네, 뭐 그러시겠죠. 그럼..." 디스코드가 제 꼬리로 내 뒷다리를 잡아 그대로 허공에 매달았다. 나는 놀란 숨과 함께 사지를 버둥거렸다. "좀 매달려 계십시다."
"야, 야!" 거꾸로 뒤집힌 지평선의 모습에 턱이 절로 벌어져서 씩씩대는 소리로밖에 말하지 못했다.
디스코드가 네 다리로 포니빌 곳곳을 즐거이 헤집고 돌아다녔고, 가는 곳마다 혼란스러운 모습으로 가득했다. "헌데 말이죠. 돌이 된 채로 있는 것도 지루하긴 마찬가지더군요. 그래서 그런지 다시 내 마음대로 사지 쭉쭉 뻗고 돌아다닐 수 있는 게 이보다 더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한도 끝도 없이 내 마음대로 칠하고 다녀도 상관없는 널따란 화폭을 다시 이 손에 넣었단 얘기니까요! 대체 무엇 때문에 봉인이 풀렸는지 아주 확신하지는 못하겠지만, 그게 뭐 대수겠습니까!" 디스코드가 머리를 홱 꺾더니 손을 흔들며 말했다. "제 말이 어떤가요, 후브스 씨?"
"이거나 처먹고 짜져 있지 그래?!" 더피가 스쿠터를 타고 달려들며 야구 방망이로 디스코드의 뺨을 거세게 후려쳤다.
그 충격이 어지간히도 컸는지 디스코드의 대가리가 다섯 바퀴를 휙휙 돌더니 삐걱대는 소리와 함께 멈췄다. 그 상판은 웃고 있었다. "아아, 홈런 잘 때리는 여자는 매력적이죠. 그렇지 않은가요?"
"네놈도 알겠지만..." 머리로 피가 몰려 씩씩대는 소리로 입을 여는 와중에 재킷에 달린 후드가 흘러내려 달달 경련하는 두 귀를 덮었다. "...두 분 공주께서 네놈을 잊으셨을 리가 없어! 이 난장판 만들어 놓은 꼴을 그냥 넘어가실 것 같아! 두 분께는..."
"후. 조화의 원소 어쩌고 하며 일장연설을 늘어놓으실 것 같은데 그만두시죠. 이른바 '빌런의 귀환' 이란 시나리오 아니겠습니까. 이런 상황이 어떻다 저렇다 하는 설명서라면 벌써 읽어 보았다고요, 이 꼬맹아. 그나저나, 다 들으라고 혼자 쫑알거려 봐야 뭔 소용이 있습니까?" 괴물은 근처의 구부러진 가로등에 후드를 걸어 나를 매달았다. "꼭 좀 알아야겠다 싶을 것 같아서 말인데, 그 조화의 원소라는 건 저한테 아무 소용이 없답니다."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대답했다. "뭘 믿고 그리 당당하게 얘기해? 조화의 원소는 혼돈을 잠재우는 힘에서 비롯된 신물인데!"
"그래서 셀레스티아 공주가 저능아란 겁니다. 그 힘을 굳이 여섯 개의 원소로 다시 쪼개서 나눠 놓다니 말입죠!" 디스코드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그러고는 근처 상점가의 장미 덤불에서 꽃 하나를 꺾어내더니 옥좌의 형상으로 바꿔 그 위에 걸터앉았다. "제 생각엔 말입니다, 셀레스티아 그 여자도 제가 막상 없어지고 나니 많이 심심했던 게 분명하거든요! 우정 하면 떠올릴 만한 시시하기 짝이 없는 그 부박한 개념들을 가지고 이퀘스트리아에서도 가장 강력한 권능을 쪼개 놓다니 말이죠. 심심한 게 아니고서는 그 멍청한 짓을 실행할 이유가 없잖아요?" 디스코드가 새의 발톱 같은 사지를 들어올리며 눈썹을 치켰다. 마사지 볼 두 개가 손바닥 위에 나타났다. 디스코드가 하품을 쩍 하며 마사지 볼을 갖고 놀다 말했다. "아하아아암... 쩝... 그래서 말이죠, 그 같잖은 장난질을 좀 손봤어요. 초콜릿 집중호우가 내리듯이 말입니다! 니에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 콜록!"
"뭐..." 나는 매달린 채 디스코드를 빤히 쳐다보았다. 입술이 떨렸다. "트와일라잇이랑 친구들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아이쿠! 잘 들으셔야죠! 과거형을 그렇게 막 남발하시면 쓰나요!" 디스코드가 손아귀에 쥔 마사지 볼을 갖고 놀며 말했다. "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손을 보는 상태거든요! 크흠..." 디스코드가 마사지 볼을 자기 안와 위로 들어올려 그대로 쑤셔넣자 마사지 볼이 보라색 눈동자로 변했다. 디스코드의 갈기에 보라색 선이 그어졌다. 디스코드가 두 손을 제 턱에 갖다대고 트와일라잇의 목소리로 말했다. "얘들아! 대체 왜들 이러는 거야? 이럴 때일수록 힘을 합쳐야지!"
놀란 숨이 폐부에 꽂혔다. "너..." 잿빛으로 물든 채 내 발 밑으로 갖가지 터무니없는 짓거리를 벌이며 돌아다니는 사람들에게 눈이 갔다. "너 이 새끼, 그 여섯 사이를 갈라 놨구나!" 이가 뿌드득 갈렸다. "네놈을 다시 돌로 만들어 봉인할 수 있는 힘을 그냥 놔둘 수가 없었던 거군!"
"지난번 컨벤션 가서 내 주절대기 좋아하는 습성을 한껏 뽐내고 왔다구!"
나는 허공에 매달린 채 디스코드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사지는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너 이 새끼가! 감히 트와일라잇 스파클을 건드려! 네놈이 무슨 짓을 했든, 조화의 원소는 그보다도 훨씬 강해! 두고 보라고!"
"아이고 맙소사.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조화 같은 걸로는 못 멈춥니다요!" 디스코드가 고개를 홱 움직이자 보라색 눈알 두 개가 그대로 튀어나와 내 머리를 강타했다. 디스코드의 갈기가 원래 색으로 돌아오면서 목소리도 처음 목소리로 바뀌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꼬맹이 아가씨 귀에 대고 제가 주절거리던 게 다 이 얘기 하려고 했던 걸요. 요즘 이퀘스트리아라고 해 봐야, 눈 뜬지 하루도 안 됐지만 벌써 구역질이 목구멍까지 차오를 지경입니다. 제가 잠깐 자리를 비운 만 년 동안 동네가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재미없게 되어 버렸다고요! 당신네들 공주라는 자들이 다녀간 자리라며 순례 다니는 꼬락서니를 생각하니 욕지기가 여기까지 올라오는군요."
"이퀘스트리아는 질서의 왕국이야!"
"이퀘스트리아는 감옥일 뿐입니다." 디스코드가 자세를 바로하더니 왕좌를 걷어차 산산이 부수고 맹금의 발톱 같은 사지로 내 턱을 건드리면서 말했다. "이제야 간수를 내쫓은 셈이죠. 그렇지 않은가요?"
도끼눈을 뜨고 째려보며 물었다. "혼돈 그 자체로 바꿔 버린 걸 그렇게도 말하나?"
"그쪽 눈으로 보기엔 혼돈이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자유거든요."
"진심이야 설마?"
"아직도 못 믿겠나요?" 디스코드가 내 몸을 홱 잡아채더니 왼쪽 겨드랑이 밑에 끼우고 말했다. "그럼, 설명해 드리죠."
"지금 어딜... 꺄아아악!"
디스코드가 온 동네를 '스케이트 타듯' 미끄러져 돌아다니는 동안 나는 그자의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도착한 곳은 어렴풋하게나마 기억에 있던 아파트 건물이었는데, 디스코드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건물 옆구리로 그대로 돌진해 벽을 부수고 들어갔다. 거실이었던 곳의 벽은 이제 집안 곳곳으로 부서져 흩어져 있었다. 집에 있던 사람 둘이 소스라치게 놀라 멀찍이 떨어진 벽으로 급히 달아났다.
"택배요!" 디스코드가 나를 들어 휘적휘적 흔들며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도 모르는 행인Background Pony 시키신 분?!"
"드라코네쿠스야! 간 줄 알았는데!" 자욱한 먼지구름이 가라앉는 가운데 윈드휘슬러가 비명을 질렀다. "캐, 캐러멜!"
"내, 내 뒤로 숨어, 빨리!" 캐러멜이 대답했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면서도 자신의 반려 앞을 당당히 막아선 채 나를 붙들고 흔들어대는 전능한 괴물을 똑바로 쳐다보고 외쳤다. "너 이 자식! 당장 꺼지지 못해! 네놈이 부려대는 요술 따위 하나도 필요없다고. 알아들어?!"
"거 잘생긴 양반, 한번 맛이나 본 다음에 안 먹겠다고 하는 게 예의랍니다!" 디스코드가 눈을 찡긋하더니 나를 내려다보고 물었다. "혹시 친구분 되십니까?"
"그... 그......" 몸이 움찔거렸다. 윈드휘슬러와 캐러멜의 집 벽을 때려부수고 들어왔다는 간명한 사실조차 그 둘이 얼마나 사람답게 살고 있는지 내 눈을 가리지 못했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불현듯 머릿속에 떠올랐다. 구석에 몰린 듯한 기분에 나는 울며 말했다. "제발. 부탁해, 디스코드. 조금 전에 막말한 거 전부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그 설명이란 것만은..."
"아이구..." 디스코드가 손바닥에 얼굴을 묻더니 표정을 잔뜩 구기며 말했다. "전부 그쪽 탓이잖습니까, 안 그런가요? 일단 진정하시고, 장인의 솜씨나 느긋하게 감상하시죠. 이 꼬마야." 디스코드가 안락의자 쪽으로 나를 툭 던지더니 손가락을 퉁겼다. 앞다리걸이가 족쇄로 변해 나를 자리에 옭아맸다.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떠는 연인들을 향해 디스코드가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가는 뒷모습을 보며 미친 듯 몸부림쳤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이 어엿브고 가엾은 영혼들을 그 누구도 생각치 못한 방법으로 해방시켜 줄까 하거든요."
"누가... 누가 널더러 부탁이나 했어!" 캐러멜이 앞다리로 마룻바닥을 긁으며 소리쳤다. 그 뒤에 선 윈드휘슬러가 고개를 숙이고 날개를 뻗어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우리 이웃들이나 제자리로 돌려놔!"
"그놈의 이웃, 이웃, 이웃..." 디스코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아주 가엾고 딱한 자들을 보는 듯한 눈길로 그 둘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쯧쯧... 여러분이 어디 사회적으로 용납 가능한 선에서만 움직이는 소인배 나부랭이던가요?"
"뭐, 뭣?!" 캐러멜이 말을 더듬었다. 디스코드와 눈이 마주친 사내가 주춤했다.
"그쪽부터 할까요! 혹시나 돈 잃을까 노심초사하는 건 일상이고, 작물이 말라 죽는 꼴을 보며 발만 동동 구릅지요! 애인한테 해 줄 울랄라에 필요한 돈랄라가 혹시 부족하진 않을까 늘 걱정이니까!" 디스코드가 캐러멜을 집어 가볍게 등 뒤로 넘기고는 윈드휘슬러를 들어올리며 빙글빙글 웃었다. 그녀는 겁에 잔뜩 질린 채 디스코드만 보고 있었다. "그쪽도 마찬가지! 결혼식 비용이 모자랄까 어쩔까 속만 썩이지요. 친구들 앞에서라도 깔끔하고 예쁘게 보이고 싶으니까! 당신네 이웃들이 당신들더러 결혼은 왜 하냐고, 미친 거 아니냐고 할 걸 설득할 생각에 눈앞이 깜깜하잖아요!"
"그, 그만두지 못해!" 캐러멜이 자기 다리로 일어서려고 용을 쓰며 소리쳤다. "으윽... 대체 뭣 때문에 이러는 거야?"
"정말 좋은 질문이에요!" 디스코드가 희희락락하게 대답했다. "대체 뭣 때문에 이런 짓을 하냐고요? 여러분이 영위하고 있던 꽁냥꽁냥하고 로맨틱하며 뒤죽박죽인 관계의 표면에 던진 돌멩이 하나. 그걸 왜 던졌냐고 묻는 거로군요! 나리들께서 각자의 걱정과 두려움을 피하고자 지금의 단단한 유대를 쌓으셨다고, 웬 조그만 새 하나가 와서 칠천 단어 정도 분량으로 막 지저귑디다. 그런데도 여기 두 분은 뭐라도 더 잃어버릴까 전전긍긍하고 계시단 말입죠. 그러니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편집증적인 생각만 더 드는 거랍니다! 상황이 이런데 여기 로맨스 같은 게 어디 있습니까?! 이제 그쯤하면 충분하잖아요?"
디스코드가 캐러멜 옆에 윈드휘슬러를 툭 떨어뜨렸다. 둘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덜덜 떨며 눈을 마주치다 디스코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 하고 싶은 건데?" 윈드휘슬러가 겨우 말했다.
"그러니까 이런 겁니다..." 디스코드가 갑자기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둘을 향해 드리우는 디스코드의 그림자가 더 커지는 모습을 나는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무렇게나 지내면 되는 걸 왜 그리 여러분의 관계를 정당화하고 옳은 것으로 만들려고 피똥 싸느냐 이거죠." 디스코드가 둘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순간 눈이 붉은색과 노란색이 뒤섞인 소용돌이처럼 변해 휙휙 돌아갔다. "가장 두려운 것들이 아직 남아 있는데 사랑에 빠지다니, 정신이 있기는 한가요?"
그 말과 함께 디스코드가 윈드휘슬러와 캐러멜의 이마를 가볍게 한 번씩 툭툭 두드렸다. 둘의 시선이 멍해지더니 디스코드의 눈과 비슷한 소용돌이 무늬를 일으켰다. 둘의 갈기와 솜털에서 색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코앞에서 보는 두려움에 입이 절로 헤벌어졌다. 잿빛으로 물든 둘이 몸을 일으키더니 광인처럼 실실 웃기 시작했다. 둘은 어린애가 된 듯 펄쩍펄쩍 뛰며 눈을 마주쳤다.
"자기!" 캐러멜이 숨을 훅 들이마시더니 말했다. "자기 생각 내 생각?!"
"중력 좆까!" 윈드휘슬러가 광대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빌어먹을 뼈다귀.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
캐러멜이 근처 전등갓을 집어 머리에 투구처럼 쓰더니, 두 앞다리로 비상식적인 힘을 내 윈드휘슬러를 머리 위로 번쩍 들었다. "셋... 둘... 하나..."
"발진!" 윈드휘슬러가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지르더니 입술 떠는 소리를 내뱉었다. "뿌루루루루루루루루루루룹!"
캐러멜이 뒷다리로만 서서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부서진 벽면을 훌쩍 뛰어넘어 허공으로 몸을 던진 사내의 몸이 추락하기 직전, 윈드휘슬러가 날개를 펼쳐 행글라이더처럼 포니빌 상공을 날았다. "위이이이이이이이이!"
그 모습을 그저 경악하며 지켜볼 수밖에 없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디스코드를 쏘아보았다.
"하 하 하 하!" 디스코드가 크게 손뼉을 치면서 다 부서져 가는 거실 한쪽에 아주 당당한 자세로 서더니 말했다. "보셨습니까요?! 제가 뭘 어떻게 하는지 말입니다?!"
"사생활 침해도 모자라 인격까지 바꿔 놔!" 멀리서 창문이 박살나는 소리와, 캐러멜과 윈드휘슬러가 함께 피맺힌 소리로 웃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러고 다니다 죽을 게 뻔한데!"
"목숨이란 그런 게죠. 꽃이 진다고 비가 내리는 건 아니잖습니까... 글쎄... 아니죠..." 디스코드가 입술을 움찔거리며 분홍 구름이 떠다니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만사가 그런 거 아닐까요? 아이고 참, 잊어버렸지 뭡니까. 돌덩이로 굳은 게 하도 오래 전이라서요."
"으음..."
"중요한 건 말입죠." 디스코드가 허리를 숙여 나를 보고 실실대며 말했다. "제가 저들을 구원해 줬다는 겁니다."
"뭐에서 구했다고?!" 나는 소리쳤다.
"허깨비에 불과한 질서의 허울을 떼어내 줬으니 구원입죠!" 디스코드가 아파트 가장자리를 느긋하게 걸으며 허공에 몸짓하자 하늘을 나는 돼지와 헬리콥터처럼 돌아가는 꼬리를 단 여우원숭이가 허공을 날아 지나갔다. "우주란 말이지요, 본질적으로 혼돈에 속한 공간이랍니다. 이상한 건 여기 이퀘스트리아다, 이런 말씀입니다. 저 영광스러운 순수한 불확실성의 거품으로 양념된 멍청한 종교적 의식의 주머니 같은 공간이라고 할까요. 꼬맹이도 알겠지만, 완벽한 구조를 영원히 지속하는 건 불가능하답니다. 글쎄, 앞으로 자기네들 어깨에 그 같잖은 관념을 짊어지고 살 알리콘이 앞으로 얼마가 더 튀어나오든 사실 그건 제 알 바가 아니기도 하고요. 어쨌든 쌓은 벽은 무너지기 마련이라, 저 강대한 궁창도 언젠가는 부스러지고 말 테니까요. 그 날이 오면......"
디스코드가 슥 미끄러지다 도마뱀 발로 멈춰 서더니, 나를 희번득거리는 눈길로 쏘아보며 말했다.
"별 재미 없게 되겠죠."
씩씩대는 숨이나마 깊이 들이마시고 대답했다. "재미가 인생의 전부는 아냐..."
"어이구, 그러십니까요. 보나마나 당신네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겪으면서도 견뎌내는 기나긴 끈기와 자기 희생에 관하여 일장연설을 하실 게 뻔합니다 그려." 디스코드가 옆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더니 초콜릿 비가 떨어지는 마을 여기저기가 폭발하고 골목마다 우편함을 부수고 돌아다니는 배달부들이 산재한 모습을 향하여 환희에 찬 몸짓을 해 보였다. "저기 아가씨 친구들 좀 보십시오! 예, 뭐, 야만적이고 잔혹한 데다 오래 살기는 어려울 것 같은 라이프스타일이기는 합니다마는, 본인들이 즐기고 있잖아요! 저 양반들이 얽매여 있던 것들을 바로 이 제가 싹 없애 줬으니까 말입니다. 이제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굴레에서 풀려나 진정한 자유를 찾은 게죠! 당장 흩어지나 나중에 흩어지나, 결국 흩어지는 건 똑같은데 그걸 굳이 아둥바둥 한 데 모아 놓으려고 애 쓸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태생적으로 갖고 태어난 한계가 있는 건 사실이지. 우리가 사는 건 그 한계를 넘어선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고!" 나는 응수했다. "셀레스티아 공주님이나 루나 공주님처럼 불멸하시는 분들도 마찬가지,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은 혼자가 아니며 함께 가는 거라고! 각자가 두려워하는 것을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말 거란 희망이 세상에서 모두 상실되기 전까지, 그런 충동에 사람이 무릎 꿇을 일은 없을 거다!"
"오호! 인물 났군요, 인물 났어!" 디스코드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팔짱을 끼며 상호 비대칭인 날개를 파닥이며 말했다. "확성기에 달아놓은 태엽인형 같군요!"
"다만, 한 가지 이해가 안 되는 게 있는데......"
"말씀해 보시죠. 가능하시면 세 줄 요약 해 주셔도 좋고." 디스코드가 느긋하게 발톱을 다듬으며 대답했다.
"네놈이 이퀘스트리아에 퍼뜨릴 해악에 관하여 그렇게 확신하고, 자신한다면......" 나는 짐짓 재미있어하는 기색을 내비치며 말했다. "이 땅 구석구석까지 혼돈을 퍼뜨려 침투시킬 생각밖에 없다면, 왜 굳이 다른 누구도 아니고 나 같은 걸 하나 붙잡고 앉아서 네 장대한 계획을 하나하나 떠드는 데 값비싼 시간을 쓰고 있는지 설명이... 안... 되는데...?" 순간 몸에 흐르는 식은땀이 느껴졌다. 기어 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나는 말했다. "떠드는 게 아니라, 문답법이었나." 마른침을 삼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제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나는 의자에 앉은 것이 아니라 천금의 무게로 짓눌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날 붙잡고 있던 건 그것 때문이었군."
"흠......" 디스코드가 몸을 기울이며 악랄하기 짝이 없는 웃음을 지었다. "이제야 지금까지 붙들고 살아온 찌꺼기가 뭔지 자각하셨군요."
나는 공포에 떨며 무기력하게 그자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제자리에서 빙빙 도는 것밖에 안 되는 사유만큼 재미없는 것도 없답니다." 디스코드의 눈이 소용돌이쳤다. 사상 최악의 기만자가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손가락을 들어 내 뿔을 겨냥했다. "뇌를 다 녹여 버리면 어디까지 사유할 수 있을까, 한번 볼까요."
"흑!" 나는 울며 눈을 감았다. 트와일라잇을 생각했고, 엄마와 아빠를 생각했다. 앨을 생각했다. 몇 번 떨리는 숨이 산발적으로 터져나온 뒤에야 내가 사유할 능력을 빼앗기지 않았음을 새삼 깨달았다. 식은땀을 흘리며 한쪽 눈을 천천히 밀어 열고, 남은 한쪽도 마저 떴다.
디스코드가 이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아직 그 손가락을 내 이마에 갖다대고 있었다. 그런데도 어느 하나 바뀐 게 없었다.
"흠... '뇌를 다 녹여 버리면'에서 건드렸는데." 디스코드가 다시 내 뿔을 톡톡 두드렸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녹으라고!" 디스코드가 다시 뿔을 건드렸다.
그래도 바뀐 것 하나 없었다.
"이것 봐라..." 디스코드가 이마를 찌푸렸다. "별 이상한 일도 다 있군요, 안 그런가요?" 디스코드가 입술을 낼름 핥더니 몸을 살짝 띄우고는 넷, 여덟, 열, 수십 쌍 사지를 더 만들어 뻗치고는 그대로 나를 찔러대며 외쳤다. "녹아라! 녹아! 녹아! 녹으라고!"
"아아아악!" 나는 성질을 부리며 몸부림쳤다. "작작... 찔러!" 가방 어딘가에 넣어놓은 신물에 매인 한 쌍 검은 현이 웅웅대는 것이 느껴졌다. 시야 위로 에메랄드 빛 섬광이 번쩍였다. 그 다음 순간, 녹색 방어막이 펼쳐지며 디스코드를 밀쳐냈다. 그자는 당혹스러운 눈치로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졌다.
"어이구, 이건 또 뭐야Ay caramba!"*8 디스코드가 그대로 등을 꺾어 머리를 뒤로 넘겨 꼬리 아래로 대가리를 쏙 내밀더니 이쪽을 흘끔거리며 말했다. "나도 오래 살았나 보구만! 별 꼴을 다 보겠어!"
"이게... 무슨..." 마른침을 삼키며 내 몸 곳곳을 쳐다보다 중얼거렸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이게 무슨 일인지는 쥐뿔도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졌어!" 디스코드가 실실 웃으며 뒷다리를 파닥거려 전속력으로 달리는 바퀴벌레처럼 이쪽을 향해 다가오더니, 의자를 통째로 들어 올렸다. 그 얼굴은 미친놈이 따로 없을 정도로 광기에 가득한 웃음으로 가득했다. "이제 심심하지 않구만!"
왼쪽 귓가를 타고 땀방울 하나가 툭 떨어졌다. "아이고 젠장..."
"좋았어! 어디 얼마나 더 신통방통한 요술을 부리나 보자고!" 디스코드가 내 주위를 빙빙 돌더니 의자를 거세게 걷어찼다. "잘 가시게!"
"으아아아아아아!" 떠밀린 의자가 그대로 벽을 부수고 떨어지며 지면을 향하여 가속했다. 동네 절반을 휘젓고 다니며 본 것들에 비하면 별로 무서운 축에도 들지 않았다. 나는 돼지 한 무리가 편대를 이루어 날아다니고, 비니를 쓴 분홍 포니 하나와 상어 조각 하나, 다른 웃기지도 않는 것들을 지나 쌕 하는 소리와 함께 박격포탄처럼 치어릴리네 학교를 향하여 급강하했다. "셀레스티아공주님맙소사제발살려주세요!"
나는 그대로 빨간 지붕에 충돌해 천장을 뚫고 건물 속으로 떨어졌다. 무시무시한 소리가 덮쳐들어 나는 더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내가 떨어진 곳은 책걸상이 널려 있는 교실이었다. 학교였던 곳이 되어 버린 교실에 나뒹구는 것으로 내 추락은 멈췄다. 나는 기침하며 먼지구름 속에서 씨근덕거렸다. 이 모든 일을 다 겪었으면서도 나는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심지어 어느 곳 하나 다친 곳도 없었다.
"뭣?! 아니... 이게 대체...?"
"안능하떼여!" 옆에서 혀짤배기 소리로 누가 말을 걸었다. 돌아보니 몸 곳곳에 시퍼렇게 멍이 든 트위스트가 코트 걸이에 꼬리가 걸린 채 매달려 있었다. "져는 때단한 떤두에여!"
"아... 그, 그래..." 고개를 돌려 다시 앞다리를 까딱거리고 움직여 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왜 뼈 한 대도 안 나간 거지?" 내 질문은 나를 둘러싼 채 반짝이는 녹색 빛을 보는 순간 바로 해결되었다. 나이트브링어의 현이 가방 속에서 조용히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내겐 일종의 계시와도 같았다. "그래... 전에는 한 번도 나이트브링어를 가지고 마을까지 나온 적이 없었어! 나이트브링어가 나를 보호할 수 있었던 건 오직 이름 없는 자들의 땅에서, 그 여자의 공격을 막아 줄 때밖에 없었던 거군."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계속 생각했다. "가만, 나이트브링어가 그 여자의 공격만 막아 주는 게 아니라면......?"
이제야 앞뒤가 들어맞기 시작했다. 나는 난장판이 된 교실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나이트브링어는 위대한 어머니의 한 편린. 셀레스티아 공주님도, 루나 공주님도, 그 여자도 마찬가지. 이 넷 모두 창조의 숨결을 나눠 가진 존재. 혼돈을 막아내는 것은 순수한 조화고, 순수한 조화라면 일단 한데 모여 어우러진 여섯 원소... 그럼 저 너머의 해로운 것들로부터 이퀘스트리아를 보호하는 두 개의 궁창도 마찬가지잖아!"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내 머리를 스쳐간 계시에 기뻐하며 디스코드가 나를 이토록 멀리 걷어차 준 것을 환희했다.
"나이트브링어가 자아의 변질을 예방할 수 있다면, 트와일라잇과 친구들도 구할 수 있을지 몰라. 그럼 조화를 되돌릴 수 있어!" 나는 웃으며 출구를 향해 달렸다. "여기까지 걷어차 주다니 이것도 다 공주님 은혜가 틀림없어! 지금쯤이면 내 존재는 까맣게 잊었을 테니, 이 미친 짓도 이제는 끝난 거나 마찬가지..."
"아이고, 이게 누구신가!" 디스코드가 갑자기 실실 웃는 상판을 들이밀었다. 이번에는 학사모와 더불어 검은 가운을 입고 있었다. "대단하구만! 이렇게 멀리 날려보냈는데도 사지 멀쩡한 라임은 없을 텐데."
"갸아아아악!" 나는 놀라 뒤로 넘어진 채 네 발로 기어 뒷걸음질쳤다. 구석까지 몰린 나는 몸을 웅크리며 덜덜 떨었다. 눈이 크게 뜨이다 못해 찢어질 지경이었다. "너... 너... 날 아직도 기억한다고?!"
"그거야, 뭐 당연하지! 이 몸이 직접 뇌청소를 해 주는데 그게 안 먹히는 년은 얼마 없었거든!" 디스코드가 칠판 앞에 몸을 쭉 펴고 서더니 학사모 술을 만지작거리다 말했다. "지금까지 이 동네에서 내 혼돈 마법에 저항한 년은 딱 둘, 셀레스티아랑 그 쌍둥이 동생밖에 없었어! 근데 여기 하나 더 추가됐잖아! 그 이상한 녹색 반짝이 마법을 포함해서,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고! 확실히, 네년은 뭔가 달라......"
"녜!" 트위스트가 웃으며 거꾸로 매달린 채 발굽을 부딪쳐 박수를 치며 말했다. "진쨔 특뼐해여!"
디스코드가 도끼눈을 뜨더니 한숨을 내쉬며 제 몸에 난 털을 잡아뽑아 트위스트 위로 수의를 던지듯 뿌렸다. "좋아. 훨씬 낫군.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맞아, 그랬지!" 디스코드가 학사모를 벗어 내 뿔 위에 걸며 말했다. "별 건 아냐, 하트스트링스 양. 네년의 그 잘난 비밀을 꼭 좀 알아야겠거든. 넌 진창 속에 묻힌 다이아나 마찬가지란 말이야. 뭐, 그 진창이 다 부서져 가는 교실인 건 둘째치고 그 다이아가 콜트플레이*9 매니저 따까리들이나 입을 만한 옷이나 꿰어 입고 다니는 취미가 있는 게 문제지만."
"아니... 대체..." 마른침을 삼키고 말했다. "날 아직도 기억한다고? 마을 반대편으로 걷어찼으면서? 불가능해!"
"아냐. 불가능하다니 안 될 말이지, 꼬마 라이미!" 디스코드가 왼쪽 발을 들었다. 어느새 풀물 든 밝은 색 운동화가 그 발에 신겨져 있었다. "만물이 창조되기도 전부터 뭐만 하면 최고였던 게 이 몸이야. 그 크기가 은하 하나에 이르는 우주의 어느 한 공간에 득시글거리는 단 하나의 특이점으로 사는 것도 참 피곤한 일이지. 그런데! 조화라는 것이 기어나와 태곳적부터 내려온 이 균형을 깨 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세상 일이라는 게 굴러가기 시작하더군." 그자가 똑바로 서서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네년이 내보인 그 이상한 마법의 비밀이나 밝히시지......"
나는 입술을 깨물며 등에 진 가방을 곁눈질했다. 최대한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가방을 한 번 들썩이자 디스코드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나이트브링어의 묵직한 무게가 전해져서 안심이 되었다.
"글쎄, 어쩌면..."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네놈이 지껄인 얘기가 맞다 치면, 나는 그냥 예상 외 변수 정도일지도 모르지. 그... 어... 네놈은 예측가능성보다는 예측불가능성을 더 선호하지 않나?"
"여보셔, 마담. 이 아수라장에 내가 참석한 게 아니야. 전부 다 내가 만든 거지. 참된 예술가라면 자기 팔레트에 무슨 색이 올라갔는지 정도는 아주 철저하게 관리하는 법이고, 그건 이 몸도 마찬가지거든. 죄다 회색이라는 걸 빼더라도 말이지." 디스코드가 이쪽으로 다가서서 내 갈기를 손가락으로 쓸며 말했다. "가만 있자. 이거 회색인가? 으, 아니구만. 청록이야......"
디스코드의 손을 쳐내며 거칠게 발했다. "손 떼 임마! 다른 사람들은 건드려도 나 하나는 못 건드린다는 건 알았잖아. 알면 좀 신경 끄고 꺼지면 안 되냐?! 다른 데 가서 놀면 어디 덧나기라도 하냐!"
"하하! 말같잖은 소리!" 디스코드가 고개를 숙여 나와 눈을 마주치며 눈썹을 까딱거리면서 잔뜩 들뜬 어린애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너 임마, 나랑 말이라도 통하는 연놈 하나 없이 얼마나 오래 나 혼자 기다리고 있었는지 알기나 해?!"
"그걸 칭찬이라고 지껄이고 있는 거면, 이쪽은 그 반대로 이해하고 있다고만 해두지."
"그래서 그냥 이걸로 쫑내자고?" 디스코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안 돼. 이제부터 이 몸이 한바탕 멋진 무대를 연출하셔야 하는데, 네년 혼자 제정신이거든. 네가 뭐, 크흠, 이 몸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잠시 뿌리치는 게 가능하다 쳐도, 그게 너희 머저리들이 이퀘스트리아라 부르는 병신같은 왕국의 역사에서 그나마 훌륭한 순간을 즐길 수 없다는 뜻이 되지는 않는다는 거다. 이 몸이 혼돈의 지배자신 디스코드 님으로 계시는 한, 네년은..." 디스코드가 발톱 돋친 손을 권총 모양으로 만들어 나를 겨냥하더니, 방아쇠를 당기며 말했다. "...꼭두각시일 뿐이야. 끈이 꿰여 있는 한 꼭두각시는 그 운명을 벗어날 수 없거든."
섬광이 한 번 번쩍하더니 내 머리 위에 씌워졌던 학사모가 광대 모자로 바뀌고, 후드 재킷은 야리꾸리한 색깔의 광대 복장으로 바뀌어 등에 진 가방 위에 얹혔다. 내가 무슨 꼴로 바뀌었는지 확인하자 절로 말이 튀어나왔다. "이건 또 무슨......?!"
디스코드가 손가락을 퉁기자 사방에서 눈부신 섬광이 번쩍했다. 장소가 어느새 바뀌어, 우리는 포니빌 시청 청사 한가운데에 와 있었다. 그것을 청사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지만. 그곳은 거대한 알현실로 바뀌어 있었는데, 내가 아는 사람 전부가 그 자리에 모여 있었다. 붉은색과 검은색이 배합된 로브를 걸친 디스코드가 장엄한 동작으로 높은 마호가니 옥좌에 앉자 사람들이 하나같이 함성을 지르고, 앞다리를 흔들고, 절을 했다. 내 꼴을 말하자면......
디스코드의 옥좌 앞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주저앉아 있었는데, 모자에 달린 방울이 고개를 돌릴 때마다 딸랑거렸다. 사방에 내걸린 현수막마다 그려진 알아먹을 수 없는 추상화 곳곳에 초콜릿 얼룩이 묻어 있었다.
"아니... 이게...?!" 창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자 거꾸로 뒤집어진 지평선이 보였다. 해가 사라진 자리에 달이 다시 떠올랐는데... 달이 파이 모양 아가리로 변해 주위에 늘어선 별들을 아귀아귀 집어먹기 시작했다. 이쯤되니 구토가 쏠렸다. "내가 살다살다 별 꼴을 다..."
"혼돈의 궁정에 잘들 오셨소!" 디스코드가 우렁찬 소리로 외치며 사람들에게 몸짓하자 사람들이 고개를 깊이 숙이며 절하더니 희열에 가득 차선 소리 높여 디스코드를 찬양했다. 하나같이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제 이퀘스트리아도 혼돈의 영역에 편입되었으니, 여기를 마땅히 그 수도라 할 것이오! 그러니 그대들이 좀 더 환호작약해 주셨으면 좋겠군?"
최면에 걸려 군침을 질질 흘려대는 군중의 멍청한 표정에 절로 얼굴이 구겨졌다. "이만하면 충분하지 뭘 더 환호하라고......"
"어디서 개새끼가 짖는군! 말같잖은 소리. 거기 광대!" 디스코드가 내 엉덩이를 걷어찼다. "한 곡 뽑아 봐라!"
하프 하나가 나타나 내 발굽에 쥐여졌다. 나도 모르게 발굽이 움직여 현을 뜯었다. 그 꼴을 한 번 더 확인하고 난 뒤 얼굴을 찌푸리며 옥좌를 향해 하프를 내동댕이쳤다. "지랄 마! 내가 네놈 여흥에 어울려 줄 것 같아!"
"하! 그럴 줄 알았지!" 디스코드가 조롱하며 말했다. "그럼 저 머저리들 귀 호강이나 시켜! 안 그래도 궁정이란 지루하기 짝이 없는 공간이니까." 디스코드가 손가락을 퉁겼다.
아코디언이 나타나 내 발굽에 엉겨붙더니 제멋대로 연주를 시작했다. 당혹해하며 떼어 버리려고 했지만, 양쪽 끝이 노끈으로 두 발굽에 결박되어 있었다. 내팽개치려 발굽을 휘두를수록 옷에 붙은 방울만 더욱 딸랑거려서, 귀에 심각하게 거슬리는 불협화음이 탄생했다. "으으으으으......"
"원래 그런 연주인 것처럼 해, 꼬마야." 디스코드가 허공을 날아다니던 돼지를 낚아채더니 그 대가리를 옥좌 팔걸이에 처박아 꺾어 빈 경추에서 튀어나온 레모네이드를 만끽했다. 거하게 트림을 토한 디스코드가 알현실에 몰려든 사람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 "긴히 청할 말이 있는 자는 앞으로 다가와 말하시오! 그대들의 주인, 아수라의 왕이 경청하리다!"
사람들이 옥신각신하며 다투기 시작했다. 서로 싸우며 몸싸움을 벌이던 무리에서 두 명의 중년이 톡 튀어나와 맨 앞줄로 나와서 넝마나 다름없는, 그들의 군주 앞에 섰다.
"위대한 디스코드시여!" 케이크 선생이 큰 소리로 외치며 자신의 반려를 향하여 잿빛 발굽을 겨냥했다. "첫 번째 알리콘의 영혼을 흔들어 깨워, 우주를 빚어내고 이 세상으로 와 한 줄기 노래로 이퀘스트리아를 빚어낸 위대한 어머니를 탄생시킨 첫 번째 핵분열을 무위로 돌려 이 더러운 여자의 아비가 태어나지 못하게 하여 이 여자의 어미가 수태하지 못하게 하고, 그리하여 필리델피아에서 열린 제빵 대회에 이 여자가 참석했던 일과 저와의 혼례 전부를 없던 것으로 할 것을 이 멍청한 여자에게 판결하여 주소서!"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케이크 부인이 불 붙은 페인트볼 총으로 케이크 선생의 머리를 후려치며 왕인 양 앉아 있는 드라코네쿠스에게 말했다. "최초의 알리콘이 눈을 뜨게 한 최초의 핵분열을 없던 것으로 하여 제 아비가 태어나지 못하게 하고 제 어미가 저를 갖지 못하게 하라는 하나마나한 헛소리를 늘어놓는 저 남성우월주의에 찌든 머저리에게 부디 입을 닥치라고 말씀하여......"
"그래요, 그래. 알겠소." 디스코드가 누런 앞발을 흔들며 말했다. "여기 모인 이들의 사돈의 팔촌까지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줄줄이 꿰고 있을 것 같구려. 헌데 그대 둘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감탄스러울 정도로 무의미한 말싸움을 상호간 투사체를 쏘아대는 고상한 방식으로 장식하고 있던 것 같던데?" 디스코드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조롱하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 "굳이 그대들의 별 말같잖은 부부싸움을 내 궁정까지 끌고 왔어야 했소?"
"저는 한 번뿐인 인생 조금만 더 재미있게 살고 싶었을 뿐입니다!" 케이크 부인이 외쳤다.
케이크 사장이 아내를 한쪽으로 떠밀며 거칠게 말했다. "이년은 입에 발린 말로 저를 현혹하고, 개새끼들에게나 붙일 법한 이름으로 저를 불렀습니다!"
케이크 부인이 남편을 도로 밀쳐 밀어내고 저 악랄한 혼돈의 주인을 향해 소리쳤다. "그 입에 발린 말과 개새끼들에게나 붙일 이름을 요구한 건 저 새낍니다. 그나마도 저 자가 먼저 저를 꼬드기고 달래 가면서 말입니다!"
"저 머저리들 좀 보라고!" 디스코드가 나를 내려다보며 몸짓했다. "이 몸이 손수 불화를 좀 섞어 주셨는데도 이 불쌍한 바보들은 별 쓰레기만도 못한 관념에 스스로를 구속하는 사슬을 묶고 제 발에는 족쇄를 채우는 병신짓을 멈추질 못해. 보는 사람이 눈물이 다 날 정도로 맹목적인 삶이나마 거기 기댈 구석은 있으리란 거짓말을 내심 아직도 믿고 있는 게지!" 디스코드가 제 가슴팍에 손을 뻗더니 거기서 흠뻑 젖어 약동하는 검은 심장을 쭉 잡아뽑았다. "네년도 슬슬 알아먹었을 것 같은데, 아닌가?" 디스코드가 눈을 찡긋했다.
이를 뿌드득 갈며 앞다리에 엉겨붙은 아코디언을 빼내려 몸부림치고 아둥바둥거렸다. "개소리 마. 내 인생에서 뭐 하나라도 치워 버리고 싶다고 바란 적은 한 번도 없으니......"
"어이구, 꼬맹이가 고생하네." 디스코드가 심장을 위로 툭 던지고 아가리로 잡아채 그대로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음악이 없으면 넌 그냥 성격 더러운 꼬맹이에 불과하다니까." 디스코드가 픽 웃더니 손가락질했다. "그래, 손 좀 빌려 줄까?"
고개를 들어 디스코드를 올려다보며 무슨 헛소리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
"흠..." 디스코드가 염소수염을 긁적였다. "신기한데?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또 성질을 긁어 놓은 것 같군. 뭐 됐어." 디스코드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옥좌에 앉은 그대로 방향만 틀어 케이크 부부를 향하더니 크게 헛기침했다. "케이크 부부는 들으시오! 그대들의 멍청하고 축축하며 같잖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억지로 얽고 있던 족쇄를 풀었소. 이제 그대들의 인생을 좀 더 신나고 재미있는 한바탕 난리통 속에 즐길 수 있을 것이외다! 그대들이 바라던 것이 이것이 맞소?"
"그러하오나, 아직 모자랍니다!" 케이크 부인이 잿빛으로 물 빠진 두 눈을 반짝이며 외쳤다.
"위대하신 분이시여, 부디 살피소서!" 케이크 선생이 무릎을 꿇고 엎드려 빌었다. "머릿속에 기쁨과 즐거움만 가득 차는 것이 느껴지나이다! 부디 저희를 더욱 추하고 혼란스러운 존재로 만들어 주소서!"
득시글거리던 사람들이 입을 모아 부부의 청원에 열렬한 찬사를 보냈다.
"흠......" 디스코드가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팔걸이에 손을 올려놓고 손가락으로 딱딱 두드리며 말했다. "순한 맛 혼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야, 한 가지 방책밖에 없소."
고개를 들어 더듬거리며 말했다. "조화인가?"
"부不라!" 디스코드가 손을 높이 들었다. "매운맛으로 바꾸는 게 답이지!" 그자가 천장을 향하여 손가락을 딱 튕겼다.
어마어마한 섬광이 사람들을 덮쳤다. 빛이 사라진 후 혼돈의 궁정이라던 곳은 이제 정사각형 모양 레슬링 링을 둘러싼 철창으로 변해 있었는데, 곳곳에 로프가 걸려 있었고 그 끝은 패드를 덧댄 턴버클에 매여 있었다. 반쯤 지워진 휘장이 곳곳에 내걸려 있었다. 알현을 청하러 몰려들었던 자들은 이제 피로 물든 경기에 굶주려 포효하는 맹수와 같은 관객이었다. 하나같이 흑백 티셔츠를 입고 시허연 무언가를 높이 들어 흔들고 있었다.
"그럼 어디 한 판 때려 볼까!" 한 벌에 오천 비트를 호가하는 정장을 빼입은 디스코드가 어느샌가 내 옆에 나타난 중계석에 앉아 낮은 소리로 외쳤다. 디스코드가 꼬리로 공을 울렸다.
나는 광대 복장 그대로 주저앉아 경기장을 멍하게 쳐다보았다. 딱 달라붙는 스판덱스 레슬링복 차림으로 바뀐 케이크 부부가 서로를 향하여 격돌하였다.
"으라아아아아아아!" 케이크 부인은 조금 전보다도 훨씬 어두운 잿빛이었다. 부인이 뒷다리 한쪽으로 남편의 목을 짓누르며 한쪽 앞다리를 자기 뒷다리 사이에 끼우고 압박해 렉 바leg bar 기술을 걸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싶을 정도로만 아프게 해 줄게요, 여보!"
"으아아아아아!" 케이크 선생이 이를 부득부득 갈며 말했다. "기어오르는 꼴을 더는 못 봐 주겠군.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이 여편네야! 흐아아아압!" 남자가 아내의 허리 부분을 끌어안더니 그대로 뒤로 메다꽂고는 네 다리 전부를 짓눌렀다.
"아아아아악!" 케이크 부인이 비명을 지르다 신이 나서 환호하는 관중을 향해 독기 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자기, 컵케익 장인이 진짜 꼭지 돌면 어떻게 되나 직접 체험을 해 봐야 정신을 차리겠어요?!" 부인이 서브미션 홀드submission hold를 풀고 빠져나와 남편을 거세게 걷어차 링 반대쪽으로 날려 버리더니, 반격 따위 무시하고 미친 듯 달려들어 사내를 때려눕히고 매트에 메다꽂았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웬 검은 카우보이 모자를 쓴 뚱뚱한 남자가 앉아 마이크에 대고 신나게 떠들어댔다. "이야아, 저거 보소! 나 평생 저런 기술은 듣도 보도 못 혔다 아닙니까! 셀레스티아 공주님께 맹세컨대, 저거 당하고도 몸이 성할 리 읍죠! 오오오오!" 사내가 움찔하더니 말했다. "공주는 얼어죽을! 제코라 씨, 참말로 끝내주는 파일드라이버piledriver 아니었습니꺼?"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옆에 앉아 있던 제코라가 기계장치처럼 고개를 돌리더니 입을 열고 사내의 면상을 향해 사파이어 빛 레이저를 토해냈다.
급히 고개를 홱 숙여 피했다. 타고 남은 재와 천조각이 사방에 휘날려 디스코드와 나 주위로 떨어져 내렸다. "네놈은 이런 걸 여흥이라고 부르냐?!"
"글쎄다, 로레니츠Laurenightis가 감시하고 있지만 않으면 괜찮은 거 같은데." 드라코네쿠스가 하품했다.
"보자, 그건 그렇고. 여흥을 즐겨야 할 대상은 우리가 아니란다." 디스코드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하나같이 잿빛으로 물들어 미쳐 날뛰는 사람들을 향해 손짓해 보였다. "이 몸이 새로 빚어낸 포니빌을 잘 감상해 두라고. 저것들이 일자리나 경력 개발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 같나? 일주일에 한 번씩 공주라는 년한테 편지 써서 바치는 것 때문에 머리를 잡아뜯거나, 같잖은 적성에 맞춰 자기 의지와는 무관하게 발급되는 낙인 때문에 걱정하는 것들 하나 없지? 제 꼴리는 대로 돌아다니는 공주년 때문에 동네 꾸민다고 발 동동 구르는 연놈들도 없고, 체인질링이 쳐들어오진 않을까 조마조마해하는 등신도 없잖아!"
"체인질링이라니? 그것들이 여기서 왜 튀어나오는데?!"
"아차, 그렇지. 내가 너무 일찍 말한 모양이군." 디스코드가 헛기침하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러나저러나, 아직도 대가리가 안 굴러가니, 꼬마야? 행복의 추구와 평화는 상호 독립 관계라는 걸 알 때도 됐지 않았냐고. 네년이 평생을 바쳐 추구하고자 하는 것도, 사실 아주 간단하게 얻어낼 수 있을 수 있다니까. 같잖은 지필묵은 그만 집어던지고, 지금까지 끄적인 같잖은 논리는 전부 먹어치워. 다 그만두고 일어나서 춤이나 추면 된다 이거지!"
얼굴을 구기며 대답했다. "내가 뭐 철학 하나에만 목숨 건 줄 알아!"
"그러시겠지. 마법이나 꼴같잖은 자캐, 음악에도 목숨 걸었을 테니까. 사실 네년이 뭐에 목숨을 걸었든 그걸 멈출 수 있을 거라고는 얘기한 적 없어." 디스코드가 내 발굽을 겨누고 한 줄기 마력을 쏘아보냈다.
앞다리에 웬 기타 하나가 생겨났다. 몸이 스스로 움직여 주위 군중이 포효하는 소리보다는 작은 거친 멜로디를 연주했다. 한숨을 푹 내쉬며 눈을 굴리고 디스코드를 째려보고 말했다. "사람 특기가 뭔지 바로바로 눈치채는 재주가 있는 모양인데, 네놈은 내가 어떤 년인지 다는 몰라. 한 가지 모르는 게 있지."
"아하이구 그래?" 디스코드가 목을 쭉 내밀어 케이크 부부가 벌이는 난장판을 관음하며 말했다. "어디 한번 주절거려 보겠나? 이 몸이 손수 잿빛으로 물들여 주시는데 네년 혼자 도색이 안 되고 있거든. 대체 무슨 찌질한 수작을 부렸는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야."
"알아서 뭐 하게?"
"마담 라이미, 일견 똑똑해 보이는 겉껍데기 뒤로 진실을 숨겨봤자 소용없어. 아주 일반적이지만 가엾기 짝이 없는 마음이 네년 뱃속 깊숙한 곳에 들어차 있거든." 번들거리는 시뻘건 눈동자 하나가 이쪽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외롭잖아?"
입술을 씹었다.
"아, 고독이란 수소와 같아서 한번 반응하기 시작하면 도저히 걷잡을 수 없지! 공통점을 굳이 하나 더 갖다 붙이면, 아주 흔해 빠졌다는 점도 들 수 있겠군. 악취도 심각하고 말이다. 토요일 저녁만 되면 냄새가 아주 심각해지지." 케이크 부인이 남편을 번쩍 들어올려 어깨에 얹더니, 링 가장자리 턴버클에 그대로 내리쳤다. 군중 앞에 놓여 있던 테이블까지 박살나 부서졌다. 디스코드가 움찔하더니 외쳤다. "오오오 호 호오! 죽여주는구만!" 놈이 짝짝이 손으로 박수를 치더니 빙글거리며 말했다. "이상하게 제일 먼저 훅 가는 놈들은 죄다 멕시콜트Mexicolt 출신이란 말이지. 어떻게 생각해?"
"대체 무슨 근거로 날더러 외롭다고 하는 거지?" 나는 생각할 것도 없이 말했다. 내가 짊어진 저주에 대하여 디스코드가 얼마나 알고 있을지 머릿속으로 재며 몸을 꿈틀댔다. 나이트브링어의 존재를 눈치챈 기색도 없었다. 그러므로 혼돈의 군주가 전능할 수는 있어도 전지全知하지는 않다고 말하더라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생각해 봐라..." 최대한 조심스럽게 단어를 고르며 말했다. "그 누구라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고독할 수밖에 없어.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게 괜히 대단한 일인 게 아냐. 사람은 하나로 뭉쳐서 완전한 하나가 될 수 있어. 고삐 풀린 혼돈과 혼란은 사람을 갈라놓고 고립시키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지만 말이다. 설마 산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도 그것들이 정말 진실로 사람들에게 유익할 거라고 믿은 건 아니겠지?"
"산 사람의 세상이라. 굳이 그런 식으로 표현해 가면서 강조하다니 흥미롭구만." 디스코드는 케이크 부부가 관객석 앞 바리케이드 앞에 엉겨서 서로 발길질을 주고받는 꼴을 감상하며 말했다. "사실 포니의 조화를 이루어 살려는 습성부터 저 밖 우주 입장에서는 불량품으로밖에 보이지 않지. 이상한 여자가 나타나서 은하마다 생명의 씨앗을 뿌리겠다고 마음먹기 전까지만 해도 저 우주는 지복의 공허와 적막으로만 가득 차 있었어. 망각 그 자체라고 해도 될 법한 그 공간은 영속적 단순성을 간직한 곳이었지. 헌데 그 미친년이 나타나서 더러운 잡초를 뿌리부터 뽑아내 버리듯이 그 한없이 순결한 단순성을 거세해 버렸어."
"이퀘스트리아가 빚어지고 생명이 탄생하기 이전부터 존재한 정령이라 이건가?" 제멋대로 울려대는 기타를 가슴팍에 껴안고 말했다.
"말 한 번 더럽게 못 알아먹는구나. 저 복된 것들이 이제 영영 사라져 버렸다는 말이다." 디스코드의 목을 향해 금속 고리 하나가 사납게 날아왔다. 긴 모가지가 휘어져 고리를 피했다. 고리는 우리 뒤로 날아갔다. "저 대단하신 암말 신 하나 때문에 혼돈은 자기 몸을 산산이 찢어발기러 다가오는 저 잔학한 엔트로피의 변덕에 영원히 맞서 싸워야만 하게 되었어. 네년들이 재잘재잘 떠들어대는 그 잘난 조화라는 건 사실 히스테리에 절여진 여자에 불과하다 이거지. 보면 알겠다만, 결국 사라지고 말 생명이라면 애초부터 탄생하지 않는 편이 훨씬 나은 일이거든."
"그 전능하신 권능을 갖고 있으면서도 허무에 찌든 말을 할 수 있다니, 이건 상상도 못 했는데?"
"상상도 못 하는 게 당연하지. 내가 본 걸 네년은 본 적 없으니까!" 디스코드가 눈을 꿈틀거리며 송곳니를 드러내고 실실 웃었다. "다만, 가르쳐 줄 수는 있어!"
"가르쳐 준다니...?"
"으음... 그래. 불화를 이용한 간섭 기초 과정Discordant Intervention 101이다. 뭐 그것도 네년이 희망할 경우에나 쓰겠다만." 디스코드가 바싹 다가서서 손바닥으로 제 주둥이를 가리고 내 귓가에 속닥거리며 말했다. "씁... 잘 생각해 봐. 이 몸의 전능한 힘과 네년의 그 이상한 힘만 있으면 궁창을 찢고 나가 다른 세상으로까지 혼돈의 영역을 넓힐 수 있다고."
너무나 당혹스러운 말이어서, 그대로 모든 사고를 포기해 버리고만 싶었다. "다른... 세상으로...?"
"그 잘나신 위대한 어머니란 년이, 딱 한 곳에만 세상을 만들고 거기 주저앉아 할 일 다 끝났다며 쉬었을 거란 생각은 아니겠지?" 디스코드가 낄낄대더니 말했다. "우주 곳곳에 그 여자가 저 달달한 빵조각마냥 수많은 은하를 뿌려두고 가지 않았느냐고! 우리가 할 일은 그냥 폴짝 뛰고 넘어가고, 다시 폴짝 뛰는 것밖에 없어. 그 같잖고 이기적인 불굴의 의지로 그 여자가 빚어놓고 간 다양한 세상을 만나게 될 거야. 다니는 곳마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혼돈의 탱고를 설파하고 다닐 수 있다고! 이야, 그 스톤 콜트 스티브 오츠틴Stone Colt Steve Oatsten*10을 데려와도 이렇게 발상을 뒤집을 순 없을걸!"
"돌았구만..."
"안 미쳤어." 디스코드가 얼굴을 확 구겼다. "난 아주 관대하거든. 네년한테도 이건 일생일대의 제안이 될 거라는 걸 대가리에 좀 박아 둬라. 자 뭐, 어떻게 하겠나?" 놈이 내 쪽으로 발톱을 내밀고 말했다. "네가 손해 볼 거라고는 우정이네 헌신이네 평화네 같은 낡아빠진 개소리에 더 집착할 수 없다는 것밖에 없어. 네년의 부족한 머리로 이해하기엔 너무나 터무니없는 제안인 것 같나? 잘 생각해라, 꼬맹아. 이보다도 안 좋은 조건이야 얼마든지 내걸 수 있으니까. 저렇게 계속 쌈박질해 대는 것보단 낫잖아?" 디스코드가 케이크 부부의 싸움판을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얼굴을 구겼다. "빌어먹을. 누가 저런 개똥같은 걸 예약한 거야?! 잘라 버려!"
거꾸로 뒤집힌 태양이 다시 고개를 내밀어 창 밖에서 햇빛이 스몄다. 몸을 떨며 대답했다. "시간 낭비했군. 트와일라잇이나 찾으러 가겠어." 디스코드가 나를 어떻게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조금도 해 본 적 없었다. 어쨌든 나이트브링어는 내 품에 있었으니까. 그러고 있자니 디스코드가 그토록 경멸해 마지않는 여신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안 그럴 이유도 없었다. 다름아닌 그분의 목소리로 자아낸 성가의 한 파편이 내 품에 있지 않았는가? "그 뭐냐... 어... 케이크 아저씨가 상대 처형할 때 깔던 음악, 저거 아니었나?"
"뭐?!" 디스코드가 일어나 앉더니 부부의 싸움판을 열심히 쳐다보며 말했다. "이상하구만. 메인트리얼*11 이후로는 안 썼는데!"
그 때가 적기였다. 가방에 넣어 둔 나이트브링어의 현을 염동력으로 조심스레 퉁기며 뿔 속으로 고대의 에너지를 빨아들인 뒤, 내 앞다리에 고정된 기타에 흘려넣으며 변형 마법을 사용했다. 기타가 순식간에 철제 접이식 의자로 변했다.
"흐으으으음...... 이 정도면 되겠지." 숨을 멈추고, 디스코드의 대가리를 힘껏 내리친 뒤, 철판 부분으로 놈의 머리를 계속해서 내리찍었다.
"응엑!" 놈이 신음했다. 알루미늄 부분이 움푹 패이며 울려대는 끔찍한 금속질의 소리가 사방에 퍼졌다. 디스코드가 볼링 핀처럼 쓰러져 군중 사이로 섞였다. 사람들은 갑작스레 일어난 끔찍한 살인에 깊은 감명을 받기라도 했는지 함께 미쳐 날뛰었다.
한 줄기 섬광이 빛났다. 광대 옷이 원래 후드로 돌아와 있었다. 씩 웃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경기장 밖으로 뛰었다. 군중 사이를 신속히 비집고 지나간 뒤, 시청 건물의 키 큰 창문을 향하여 쏜살같이 달렸다.
"제발 밤만 되지 마라! 밤이 되면 안 돼!" 판유리를 열고 찬란한 햇살을 받으며 그대로 뛰어내렸다. "좋아! 탈출했어!" 시청 청사가 거꾸로 뒤집힌 채 포니빌 상공을 떠다니고 있었음을 기억해 낸 게 대충 이쯤이었을 터다. 중력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조금 늦게 깨달은 게 문제였지만. 나는 그대로 다 부서지고 찢어져 체크무늬만 남은 지상을 향하여 추락했다. "갸아아아아아아아!"
일 개 편대를 이루어 떠다니는 파이와, 진검으로 울타리를 치는 돌고래 떼, 프로펠러가 왕창 달린 비행선을 끌고 다니는 애꾸눈 다이아몬드 독*12 사이로 추락하는 모루라도 된 양 떨어졌다. 이 미쳐 돌아가는 하늘 어딘가에서, 나이트브링어의 권능이 제발 운동에너지로 변환된 위치에너지에서 나를 지켜 주기를 기도했던 것 같다. 다행이라면 다행스러운 일로, 나는 빗물을 한껏 머금은 솜사탕 구름 여러 겹 뚫고 떨어지게 되었다. 덕분에 추락 속도가 현저히 떨어져서, 트럼프 카드로 쌓은 커다란 집 꼭대기에 가볍게 착지할 수 있었다. 새하얀 카드가 몇 번 출렁이다가 안정을 찾았다. 몸을 일으켜 어질어질한 채 몇 발짝 걸음을 옮겼다. 몸 주변으로 녹색 보호막이 정상적으로 전개되어 있어서 조금 안심이 되었다. 거대한 클로버 잭 카드가 기울어져 이쪽으로 넘어졌다. 숨을 훅 불어 넘기자 진행 방향을 바꾸어 땅에 떨어졌다.
"공주님께서 당신과도 함께하길. 스투 리브스."
더 시간 낭비할 것 없이 발을 재게 놀려 혼돈이 들러붙은 동네를 신속히 건너갔다. 가능하면 하늘 높은 곳을 떠다니는 시청 청사의 그림자를 피하며 달렸다. 내게는 과속의 원소와 교란의 원소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은폐, 엄폐를 할 만한 곳이 있는 한, 드라코네쿠스의 시선을 피해 숨을 곳이 있는 한 놈은 나를 찾을 수 없을 터이다. 내 존재를 계속 기억하더라도, 절대.
누구를 굳이 피해 다녀야 했던 게 대체 얼마만인지 모를 일이다. 겨우 몇 시간 동안 벌어진 일이지만 그게 워낙 기묘하고 이상한 것들이라, 그 상황을 진심으로 기뻐할 새가 없었다. 누구라도, 아무나 나를 단 한 번이나마 기억해 주기를 저 하늘에 몇 번이고 빌었는지 모른다. 아무나 괜찮다고 하기는 했지만, 되도록이면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 여러모로 유익한 자식이 나를 기억하는 첫 번째 존재가 된 건 운명의 변덕이 참으로 악랄하고 음습하다는 증거가 될 일이라 생각한다.
숨을 곳을 찾아 골목과 길거리 곳곳을 쏘다니다 보니, 별로 소용없는 짓 아닌가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고문서와 디스코드 본인이 으스대며 주절댄 말들은 훌륭한 교차검증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놈은 위대한 어머니께서 성가를 빚어내어 만드신 조화의 세계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온 존재였다. 이 땅에 놈이 발을 딛고 있다는 것 자체가 건강한 육체에 탄이나 화살을 맞은 격이었으니, 가시에 찔린 곳이 곪아 터지는 것과도 비교할 수 있을 터이다. 그 자식을 무찌르기 위해 두 분 공주님께서 함께 위대한 어머니의 성가를 쓰셔야 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주님들께서는 놈을 제거하시지 못하셨다. 디스코드는 파괴 가능한 존재가 아니다. 오직 봉인만 가능할 뿐. 따라서 순수한 조화의 권능만 있다면 혼돈의 군주를 닥치게하거나 봉인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지만, 결코 그 존재를 지워 없앨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조화의 원소와 디스코드는 물과 기름 관계와 같다.
혹시나,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디스코드는 내가 짊어진 저주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효과를 무시할 수 있을지 모른다. 궁창의 야상곡에 의해 빚어진 저주가 만인에게서 나와 관련된 기억을 없애고 있는데, 이는 동시에 위대한 어머니께서 남기신 권능의 한 파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가 짊어진 저주가 끔찍하기 짝이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조화의 원소를 빚어낸 권능이기도 하다는 점은 명백하다. 잊힌 교향곡은 한 명의 알리콘 여신을 이름 없는 자들의 땅에 봉인하고자 만들어진 것이니, 그 여자는 앞으로도 궁창 안에서 끓어오른 기포를 전부 끌어안고 혼돈의 나락과 같은 그 땅에서 혼자 버려져 있어야 하리라.
이퀘스트리아의 모든 생명은 세상에 알려진 것이든, 숨겨진 것이든 어쨌든 창조의 질서인 것에 묶인 신세다. 다만 내가 짊어진 저주를 자아낸 것이 창조 이전부터 존재했을 수 있는 거대한 권능에 의한 것이고, 창조와도 별로 관계가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될까?
그럼 뭐, 안 조져지는 거 없이 망하는 셈이다. 나는 매일같이 역사상 최악의 운명을 타고난 자로 스스럼없이 나를 지목할 만한 새롭고 불쾌한 이유를 발굴했다. 달리 생각해 보면, 차악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는 표현이 좀 더 적합할 것 같다. 적어도 앨러배스터 코멧후프를 영원토록 기억할 수는 있지 않은가.
생각에 너무 깊이 잠기면 안 됐다. 그러다가는 내 당장의 급한 목표인 은신처의 탐색을 그만두게 될 수도 있으니까. 길거리를 헤집고 돌아다니며 방향을 바꾸고 트는 동안 결국 방향 감각을 상실하고 말았는데, 바로 몇 걸음만 가면 닿는 거리에 트와일라잇의 도서관이 있었다.
신이 난 어린애처럼 도서관 내부로 급히 달려 들어갔다. 문간 앞에 섰을 때는 공공 예절이고 뭐고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감히 내 앞을 가로막는 못되먹은 방해물을 치워 버리고, 타르타로스에서 뛰쳐나온 악마처럼 도서관 내부로 뛰쳐 들어갔다.
자그마한 꼬마 새끼용이 비명을 지르며 중앙 테이블 가운데에 장식한 목조 말 조각상 뒤로 숨었다. "으아아아아! 제발! 날 좀 내버려 둬! 초콜릿 비 맞고 싶지도 않고 파이 먹기도 싫고 고무 닭 채찍질도 싫고 이 드레스 어떠냐고 물어보는 것도 신물이 나니까!"
"스파이크!" 툴툴대는 소리로 꼬마를 부르며 문을 단단히 닫아걸었다. "괜찮아! 널 괴롭히거나 회색으로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니니까!"
"아니... 아니라고?" 꼬마의 두 눈이 테이블 위로 빼꼼히 올라왔다. 꼬마가 물었다. "고무 닭으로 때리는 건?"
"조용!" 창문 블라인드를 내려 도서관 실내를 들여다볼 수 없게 막은 뒤 스파이크 쪽으로 다가가 급히 물었다. "설명할 건 한도 끝도 없는데 시간이 부족해. 전지전능한 드라코네쿠스인 디스코드가 수천 년에 걸친 봉인을 깨고 풀려나왔으니까. 포니빌부터 시작해 이퀘스트리아 전체를 혼돈으로 뒤덮을 생각이야. 트와일라잇네 친구들한테도 못된 마법을 건 것 같고! 그러니 물을게. 어디 갔어!"
"어딜 가다니, 누가?!"
"트와일라잇!"
"왜?"
"아이고 젠장..."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내 이름은 라이라 하트스트링스. 말해 봐야 기억도 못 하겠지. 지금 이 대화가 있었던 것도 까먹을 테고.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이......" 말을 멈추고 눈알을 굴리다 얼굴에 발굽을 갖다대며 말했다. "하... 됐다. 봐봐. 그냥... 트와일라잇 소꿉친구 하나 왔으니까, 당장 얼굴 좀 봐야겠다. 내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기나 해!"
"그게... 좀 어려울 것 같은데..."
"뭣 때문에?"
스파이크가 자기 발톱을 만지작거리며 애꿎은 마룻바닥을 발 끝으로 툭툭 찼다. "그게... 여기 없거든..."
얼굴이 핼쓱해지는 것 같았다. "뭐?!"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 호출하셔서 다른 애들이랑 같이 캔틀롯 갔거든!" 스파이크가 뒤뚱대는 걸음으로 창가 쪽에 다가서서 커튼을 살짝 들추고 창문 너머 분홍 구름과 하늘을 날아다니는 온갖 미친 것들을 힘없이 쳐다보더니 말했다. "두 분 공주님들께서 이 미친 상황 정리하시는 거 도와 드리러 가는 걸로 알고 있는데."
스파이크의 손목을 쳐 커튼을 원래대로 닫아 놓고 말했다. "캔틀롯 간 지 얼마나 됐어?!"
"그게... 오늘 아침!" 스파이크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꼼지락거리는 빈도가 늘었다. "아무리 늦어도 정오 전에는 출발했어. 지금처럼 해랑 달이 제멋대로 솟았다 지기를 반복하고 있으면 시간 파악하기 되게 힘들거든."
입을 헤벌린 채 허공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말했다. "그럼... 내가 내려오기 전에 출발했다는 얘긴데." 목구멍에 생긴 응어리가 침에 섞여 내려갔다. "이름 없는 자들의 땅에 다녀오기도 전이고."
"이름 없는 자들의 땅이라니?" 꼬마가 이상한 사람 보듯 흘끔거리며 물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후드를 만지작거리며 방 가운데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혼자 말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디스코드가 봉인에서 풀려났어. 그와 동시에 우리나라 방방곡곡까지 혼돈이 집어삼켰지. 그 와중 캔틀롯이 트와일라잇을 소환했다면..." 나는 얼굴을 구기며 자리에 멈춰섰다. "조화의 원소밖에 답이 없지.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 트와일라잇과 그 친구들을 불러들인 건 조화의 원소를 동원해 디스코드를 다시 봉인하기 위함이었어! 그런데... 디스코드 그 자식이 수작을 부려 놨으니, 이제 조화의 원소를 갖고도 이 빌어먹을 놈이 포니빌을 거점 삼아 이퀘스트리아를 혼돈으로 뒤덮는 걸 막을 수가 없게 됐어!" 이쯤에서 심장이 크게 한 번 두근거렸다. 나는 티가 날 정도로 움찔하며 말했다. "이퀘스트리아가 떨어지고 나면 다음은 우주 전체를 집어삼키려 할 텐데......"
"이해가 잘 안 돼서 그런데..." 스파이크가 몸짓했다. "그러니까, 셀레스티아 공주님이랑 루나 공주님께서 아주 오래 전에 봉인했다는 그 디스코드 얘기하는 거야?"
"봉인하는 게 최선이었을 거야."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 정도로 사악한 놈은 타르타로스에 처넣어도 소용없었을 테니까. 다른 다섯이 제정신 차리기 전에는 그 누구도 그 자식을 봉인할 수가 없을 거고."
"잠깐만. 트와일라잇이랑 다른 애들한테 문제 생긴 건 어떻게 알았어?"
고개를 돌려 꼬마 용을 마주보고 말했다. "디스코드 그 자식이 말해 주더군."
스파이크가 놀란 기색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그 드라코네쿠스랑 얘기까지 했다는 거지?!"
"설명하자면 길어. 그 긴 얘기를 주절주절 떠벌일 시간도 없고." 나는 심호흡하고 주위에 꽂힌 장서들을 둘러보다 말했다. "트와일라잇이 포니빌에 없다 이거지. 그럼 걔가 올 때까지는 내가 사태를 수습해야겠구만." 첫 번째 서가로 달려들며 소리쳤다. "스파이크! 위대한 어머니의 권능이나, 조화에 관련된 거면 두루마리, 주문서, 기록물, 일반 서적 다 상관없으니까 싹 다 긁어다 줘!"
"에에엥?!" 스파이크가 놀라 멍한 얼굴로 말했다. "그건 왜?"
"트와일라잇이 지금 없으니, 남은 사람들이라도 포니빌을 정상으로 돌려놓을 방법을 찾아서 시도해 봐야지."
"허?!" 스파이크가 얼굴을 구기더니 양손을 허리에 짚고 말했다. "하트스트링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트와일라잇 정도로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이퀘스트리아를 다 털어 봐도 없다니까! 대체 뭘 믿고 디스코드란 놈의 약점을 찔러 봉인할 수도 있겠다 하는 거야?!"
"해 봐야겠다니까, 임마!" 미친 듯 서가를 뒤적이며 소리쳐 대답했다. "나한텐 그럴 힘이 있으니까!"
"또 하나 묻자!" 스파이크가 다가와 내 꼬리를 당기며 물었다. "그럴 힘이 있다는 건 무슨 근거로 하는 소리야?"
나는 멍하게 스파이크를 쳐다보았다. 맞는 말이었다. 설명을 해 줘야 했다. 더 숨겨서는 안 됐다. "좋아. 이걸 얘기해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되기는 하는데, 지금 당장 네 도움이 필요하기도 하니 너도 알 필요가 있겠다. 뭐, 어차피 말해 줘도 오래는 못 갈 테니까. 때가 되면 잊어버릴 테지."
"잊어?" 스파이크가 몸을 기울였다. "뭘 잊어버려?"
심호흡하고 가방을 열어 나이트브링어를 감싼 벨벳 주머니를 꺼냈다. 모든 악기의 원점이자 신물인 나이트브링어가 은은한 빛을 뿌렸다. 도서관이 성유물에서 흘러나온 금빛 광휘에 흠뻑 젖었다.
"이거야." 나는 말했다. "평범한 유니콘들보다 강력한 힘을 쓸 수 있다고 자부하는 건 이것 때문이야. 트와일라잇만큼 마법을 다룰 수는 없겠지만, 막상 트와일라잇도 이걸 보면 눈이 돌아가고도 남을걸. 트와일라잇이 쓸 수 있는 마법 한두 개 정도만 찾아다 주면 돼. 그럼 뭐, 디스코드가 장난질을 쳐 둔 사람들 몇 명이라도 제정신 차리게 해 줄 수는 있겠지. 적어도 트와일라잇이 올 때까지 시간을 벌 만한 건 뭐라도 할 수 있을 거고. 이만하면 내 말을 믿겠어? 그럼 보조를 기대해도 되는 거겠지? 응?"
스파이크가 입을 딱 벌리더니 천천히, 나이트브링어를 가리키며 물었다. "네가... 네가 나이트브링어를 갖고 있었다고?"
"그래. 경위는 묻지 마. 어쩌다 보니......" 나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온 몸이 그 자리에 굳어졌다. 스파이크를 노려보며 물었다. "가만... 이게 나이트브링어라는 걸 네가 어떻게 아는 거지...?"
"풉, 하하하하하하하하하......" 스파이크가 배를 붙잡고 낄낄댔다. 작은 몸 밖으로 사악하기 짝이 없는 웃음소리가 울렸다.
나는 몸을 떨며, 그저 그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스파이크가 고개를 들자, 두 눈이 빨강과 노랑으로 물들어 있었다. 입술 밖으로 송곳니 하나가 툭 불거져 나왔다. 묵직한 목소리가 뒤따랐다. "네년이... 하 하 하... 그 나이트브링어만 있으면 혼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구나?! 하 하 하!" 그 몸이 몇 배로 커지며 뱀의 꼬리와 한 쌍 가지뿔이 자라났다.
나는 당혹했다. 뭐가 부서지는 듯 시끄러운 소리가 귓가에 앵앵 울렸고 실내로 햇빛이 흘러 들어왔다. '도서관'의 벽면이었어야 할 것들이 커다란 골판지 조각처럼 찢어져 밖을 보고 늘어진 꼴을 보았을 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디스코드와 나는 어느새 도서관에서 세 구역 떨어진 곳으로 순간이동해 있었다. 박살난 도서관 위로 초콜릿 비가 뿌려졌다.
눈을 감고 길고 깊게 심호흡했다. 나는 흐느적거리며 몸을 돌려 아주 즐거운 눈치로 서 있던 드라코네쿠스를 차갑게 흘겨보았다. 눈치챘어야 했다. 후드 죽여준다는 말을 안 하지 않았던가. "그래...... 아주 기막힌 술수를 쓰셨더군."
"하 하 하!" 디스코드가 팔짱을 끼며 이쪽을 보고 빙글거리며 웃었다. "이 몸이 또 구식 술수는 아주 기막히게 좋아하시거든. 아주 껌벅 죽는다니까!" 그러더니 눈을 찡긋하고는 땅에 달라붙은 벌레마냥 몸을 줄여 시선에서 사라졌다.
반대쪽에서 옥수수 하나가 싹을 틔우고 나오더니 꽃을 피웠다. 그 자리에서 옥수수가 아니라 안대를 쓴 디스코드가 튀어나와 내 어깨 위를 돌아다니며 말했다. "이야, 그 귀한 걸 어디서 구하셨나 몰라! 이 몸 생각에는 이 미친 꼬맹이가 위대한 어머니란 작자의 금고를 털었던 게 아닌가 싶군!"
"네놈은 그런 것밖에 생각을..."
"다물어, 이 도둑년아!" 꼬마 디스코드가 삐죽삐죽한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치켜들고 나이트브링어의 검은 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깜짝 놀라기도 전에 디스코드의 손이 나이트브링어에 닿았다.
밝은 녹색 섬광이 번쩍했다. 낙뢰를 맞은 깃발과 같이, 꼬마 디스코드의 몸에 불이 붙었다. 그자는 말 그대로 팝콘이 되어 터지며 바닥에 쏟아졌는데, 이 잔해들이 다시 순식간에 엉겨붙으며 혼돈의 주인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뭐, 딱히 데거나 하진 않았으니 상관없어." 디스코드가 흥미롭다는 듯 턱을 문지르며 나이트브링어를 흘겨보다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엔 장갑 벗고 해 볼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디스코드가 제 오른손을 잡아당겨 뼈에서 살을 분리하더니 다시 나이트브링어로 손을 뻗었다.
"그만—" 몸이 움찔함과 동시에 입이 열렸다.
다시 섬광이 번쩍였다. 이번에는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해서, 아슬아슬하게나마 디스코드가 성유물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할 수 있었다. 놈은 온몸에서 연기를 내뿜으며 호텔 쪽으로 날려갔다. 마력 방출의 흔적으로 남은 크레이터 한가운데 나는 혼자 서 있었다. 나이트브링어의 현이 스스로 울리며 칙칙한 저음을 흩뿌렸다. 지독하게도 불길한 느낌이었다.
"이... 이게..." 품에 안은 나이트브링어를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린 말이다. "저놈을 밀쳐냈어..."
"흠, 그래. 그렇게 볼 수도 있군." 호텔 2층에서 목욕물이 급류처럼 터져나와 강처럼 쏟아져 흘렀다. 디스코드가 욕조를 타고 노를 저어 이쪽으로 쏜살같이 다가왔다. 머리에 쓴 샤워캡 밑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머리를 긁적이던 그자가, 내 품의 나이트브링어를 흘끗 쳐다보며 말했다. "뭐 이보다도 성질 긁는 거야 여러 번 봤었으니 상관없어. 알리콘도 아닌 주제에 내 권능에 저항할 수 있었던 이유도 알았고." 놈이 뺨을 부풀리더니 고무 오리를 던졌다 받으며 말했다. "암만해도 네년이나 나나 아주 특별한 구석이 있는 것 같은데."
"있기는 개뿔!" 그렇게 쏘아붙이며 나이트브링어를 방패처럼 들어올렸다. "꺼져 임마!"
"그렇게는 못 해 주겠는데, 꼬마 조랑말아mon petit cheval!" 디스코드가 훌쩍 뛰어나와 욕조를 가볍게 툭 차자 욕조가 화원으로 날아가 폭발했다. "네년처럼 대단한 흥밋거리를 그냥 내버리라니 그럴 리가! 철에다가 현 몇 개 매어놓은 그 물건이 네 수중에 있는 이상 네년은 내 먹잇감 신세에서 벗어날 수 없어. 혹시라도 그걸 내게 얌전히 넘겨준다면 네년이 아니라 이 몸이 진짜배기 매력남이 되겠지만."
디스코드의 말을 들으니 머릿속이 맑게 개는 느낌이었다. 잿빛으로 변해 미친 짓을 일삼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오직 내가 나이트브링어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트브링어를 뺏기지만 않는다면, 내 마력장으로 나이트브링어를 계속 다룰 수만 있다면 셀레스티아 공주님이나 루나 공주님처럼 디스코드의 사술에 저항할 수 있었다. 반대로, 혼돈의 주인이 위대한 어머니의 성가, 그 파편이라도 손에 넣는다면......
"내가 나이트브링어를 네놈에게 넘긴다는 같잖은 농담을 하고 싶더라도, 조금은 생각을 하고 아가리를—"
"오호, 마담 라이미. 지금까지 그럴 기회는 충분히 있었다네!" 디스코드가 심술맞은 상판으로 조롱하며 말했다. "뭐 마음에 드는 담요라도 되는 양 그걸 껴안고 있던 동안 네년이나 본좌나 그 문제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은 충분했다, 이 말씀이야!"
입술을 씹었다. 앨러배스터를, 내가 '페눔브라의 메아리'를 발견할 때까지 앨러배스터가 기다렸을 나날들을 생각했다.
"그래서, 본좌의 제안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디스코드가 손가락과 발가락, 모가지 관절에 이어 제 혓바닥까지 뚝뚝 꺾으며 물었다. "또 말같잖은 소리로 말을 꼴 텐가? 아니면 잘난 도덕관념을 가지고 말싸움이라도 할까? 아니면 뭐 존재론적 견해 차이로 미친 듯 혓바닥이나 놀려 보겠나?"
"지금처럼 끈질기게 들러붙어 봐야 좋을 것 없을 텐데!"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나는 미끼일 뿐이거든..." 허세를 부리는 것뿐이었지만, 가능한 능글맞은 웃음을 내보였다. "네놈의 시선을 내게 돌려놓은 동안 두 분 공주님과 트와일라잇이 네놈을 쳐죽일 거라고!"
"이 몸이 누구신지 벌써 까먹었나 보구만. 이 몸은 권능을 쓰는 데 조금의 주저함도 없고 조금의 빈틈도 없으시다고." 디스코드가 내 뿔을 잡더니 체스말을 돌리듯 휙 돌려놓으며 말했다. "잘 보시게..."
내가 향한 방향은 트와일라잇 스파클의 도서관이 있는 방향이었는데... 거기 디스코드가 있었다.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그곳에 트와일라잇이 있었고, 회색으로 변해 버린 친구 넷과 더불어 진짜 스파이크가 있었다.
"아이구, 아이구, 아이구..." 트와일라잇과 함께 있는 디스코드가 회색이 된 여자들 앞에서 흐느적거리며 슬퍼하는 말투로 말했다. "아이구, 이를 어쩌나. 조화의 원소를 가져와 버렸구먼. 무서워 죽을 지경이네!"
"디스코드, 네놈의 같잖은 속임수는 다 간파했어!" 트와일라잇이 소리쳤다. 그 무리에서 홀로 자기의 색을 잃지 않은 유일한 포니였다. 트와일라잇이 저렇게 화를 낼 줄도 아는 녀석이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제 골치 좀 썩을걸!"
"안 그래도 그런 참이라네! 보아하니 내가 아주 져 버린 것 같구먼..." 드라코네쿠스가 선글라스를 꺼내 쓰더니 제 가슴팍에 표적지를 만들어 붙이며 멜로드라마 같은 말투로 선언했다. "아무래도 운명을 받아들 때가 된 모양이야! 그래, 내 패배를 인정하겠네. 언제든 치시게!"
"자세 갖춰!" 트와일라잇이 외쳤다. 조화의 원소가 작동하는 모습을 직접 보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쪽도 가슴이 뛰었다. 아무래도 평범한 사람으로는 보기 힘든 일이니까. 뛰던 가슴이 저 밑바닥 나락으로 추락했다. 신성한 권능이 발휘되어야 했을 순간은 말 그대로 용두사미로 끝나고 말았다. 공중에 떠오른 트와일라잇과 친구들이 허무하게 그냥 뚝 떨어지고 난 뒤, 조금 전의 잿빛이 조금도 빠지지 않은 여자들이 발을 쿵쿵 굴러 한껏 짜증을 과시하며 자리를 떠났다. 나는 그 어느 중간 지점에서야 조화의 원소를 작동시키는 데 필요한 요소가 결핍되어 있음을 눈치챘다.
"레인보우 대쉬......?" 나는 말을 더듬었다.
"그림으로 그려 놓은 듯 완벽한 녀석이 저기 있는데도 아무런 소용이 없잖나!" 등 뒤의 디스코드가 말했다. 놈이 다시 내 몸을 돌려 나를 마주보았다. 자기의 분신이 쓰고 있던 것과 똑같은 선글라스와 표적지를 걸치고 있었다. 디스코드가 둘 전부를 벗어 옆을 흐르던 해열제 시럽의 강으로 집어던지고, 겉만 번지르르한 태도로 말했다. "혹여나 저 트와일라잇이란 녀석이 내가 몸소 선사한 비참한 패배에서 몸을 추스르고 일어서서 그 소중하기 짝이 없는 친구년들을 다시 불러모아 내게 대적한다 쳐도, 꼭 한 년만큼은 자리에 없을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그 년을 찾아오면 다른 년이 도망가고, 붙들어 왔더니 딴 년이 또 사라져 있고, 쫓아가서 잡아왔더니 다른 한 년이 어디로 또 새 버리는 일이 반복될 거야. 그러니 네가 사랑해 마지않는 라벤더 유니콘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지. 애초부터 조화의 원소를 여러 개로 쪼개 버리지만 않았어도 이런 자중지란이 일어날 일도, 필요할 때 못 써먹는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야! 꼬맹아, 잘 알았겠지만......"
디스코드가 뱀처럼 내 반대쪽으로 미끄러져 와 빙글거리며 내 턱을 만지작거리다 말했다.
"우리 둘만의 이 사소한 만남만큼은 영원히 이어질 수 있고, 실제로도 그렇게 될 거야. 첫날부터 진도를 미친 듯 빼 버릴 생각이 없더라도, 늦은 밤까지 돌아다닐 만한 데이트 장소쯤이야 셀 수도 없이 많지!" 디스코드가 하늘을 향해 몸짓하자 태양이 그대로 떨어져 저물었다. 놈은 급작스레 떠오른 달빛에 젖어 낄낄댔다. "하 하 하! 온 이퀘스트리아가 말 그대로 네 말 한 마디에 달렸군. 이쯤되면 명백한 진실을 받아들일 준비도 됐겠지." 디스코드가 발톱 돋친 손을 나이트브링어 쪽으로 뻗었다. "그러니 나이트브링어의 무게는 내가 대신 지게 해 주겠나?"
성질을 내며 놈의 손을 쳐냈다. "너 뒈지기 전까진 안 돼!"
"이런, 이런! 꼴통이 따로 없군!" 디스코드가 낭랑하게 속삭였다. "네년 스스로의 실존적 고뇌를 강으로 삼아 그 안에서 헤엄치기를 고집하는 고집불통 붕어대가리라 해야겠는걸."
"뭐?"
"네년 혼자서 주절거리는 걸로도 모자라 이 몸까지 나서서 몸소 말씀을 해 주셔야 알아먹겠냔 말이다, 주둥이만 산 년아." 디스코드가 외눈안경을 만들어 한쪽 눈에 쓰고는 빙글거리며 말했다. "네년의 마력장을 좀 들여다본 참이다, 마담 라이미. 답도 없는 막장 인생을 영위하시느라 정신이 없으신 모양인데."
"지금... 뭐 무슨 소릴 지껄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만." 나는 침을 삼키며 선을 긋는 투로 대답했다.
"어허 참, 쑥스러워할 것 없어 꼬맹아. 정 뭐하면 내가 간단하게 되짚어 줘?" 디스코드가 맹금의 발을 닮은 손에서 발톱 하나를 꺼내 현실의 장막 일부를 찢어 열었다. 그리고는 손을 집어넣어 빛나는 마력선을 한 움큼 꺼내더니 홱 잡아당겼다. 종을 치듯 맑은 소리가 따라나왔다. "그럼 시간여행을 시작해 볼까! 이번 정류소는 슬픔의 도시입니다! 우! 우!"
총총 박힌 별들이 빛나는 하늘이 판처럼 휙휙 돌아가는 모습에 적잖이 놀랐다. 디스코드와 나는 알 수 없는 마법으로 휙휙 도는 문을 지나 잿빛이라는 점만 빼면 아주 낯익은 발코니를 빼다박은 지점에 착지했다. 발굽을 쳐다보니 네 사지가 전부 하얗게 빛나고 있었는데, 심지어 반대편이 비쳐 보이기까지 했다. 내 몸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기도 전에, 아주 익숙한 드라코네쿠스 하나가 나처럼 반투명한 모습으로 잿빛 후드를 걸치고 한 아파트 창문에 엉겨붙은 서리를 문질러 닦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으스스한 캔틀롯 시가지 위에서 눈발이 흩날렸다.
"이런, 이런. 여기는 뭐가 있을까?" 디스코드가 히죽 웃더니 깨끗하게 문질러 닦은 지점만 안이 비치고, 나머지는 뿌옇게 김이 낀 창문을 슥 가리켰다. 집안은 따뜻해 보였다.
안을 들여다보자마자 본능적으로 가쁜 숨이 폐부 밖으로 뛰쳐나왔다. "엄마?! 아, 아빠?!"
내가 와 있는 시점은 대략 20년 전의 난방절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서로를 바싹 끌어안은 채 소파에 앉아 라임색 꼬마가 즐거운 표정으로 선물상자를 찢어 여는 모습을 바라보고 계셨다. 꼬마가 상자에서 무지개색 실로폰을 꺼내 끌어안았다. 아이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조그마한 채를 들어 실로폰을 신나게 두들기기 시작했다.
"라이라 하트스트링스. 적성은 음악. 앨러배스터 가에서도 상류층 엘리트 집안에서 태어났군. 재산도 두둑하게 있었던 모양이고." 디스코드가 이쪽을 흘끗 쳐다보더니 환영 같은 눈발 사이로 피식 웃었다. "제기랄. 재미라고는 개미 눈꼽만큼도 없군. 반항기엔 어땠나 한번 봐야겠는데!" 디스코드가 유리창에 대고 반투명한 손가락을 딱 튕기자 창유리가 빙빙 돌았다. 우리는 어느 새 대학 캠퍼스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댄서와 깔깔 웃으며 잡담을 나누는 내 모습이 보였다. "저기 있구만! 이야, 꼬맹이. 너 저 나이 먹을 때까지 헤어스타일 한 번 안 바꿔 본 거야? 쯧쯧... 사람이 저리 진취적이지 못해서야..."
"디스코드..." 침을 삼키며 놈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지금 뭐 하자는—?"
"그럼 이걸 좀 볼까나..." 디스코드가 창문에 대고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포니빌 중심부, 나이트메어 문이 그 강대한 존재를 이끌고 지상에 강림하는 순간이었다.*13 그 때 나는 나이트메어 문의 그림자 아래서 몸을 웅크리고 떨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거지!" 놈이 짝짝이 손으로 박수를 치더니 손을 맞잡고 비볐다. "여기부터 플랭스피어Flankspear식 비극이 시작됐구만! 라이라가 소중하고 특별한 친구 트와일라잇을 찾아가다 날벼락을 맞은 거였어! 자, 그럼 이런 날벼락을 뭐라고 하나?"
놈이 유리창에 대고 입김을 불더니 그대로 문질러 닦아냈다. 이렇게 사느니 죽겠다며 포니빌 시청 청사 꼭대기에 무력한 몸을 끌고 올라간 내 모습과, 제발 그러지 말라는 캐러멜의 모습이 보였다.*14
"당연히 마른 하늘에 날벼락 아니겠는가!" 디스코드가 계속 말했다. "순식간에 잊히고, 존재감도 없는데다 잘 보이지도 않게 되다니 말이야. 뭐, 저년이 내려왔으니 별 수 없나. 야!" 청사 꼭대기에 선 내 모습을 향해 디스코드가 소리쳤다. "한 바퀴 돌린다!" 디스코드가 회전축을 달리해 창문을 휙 돌렸다. 내가 더피 후브스를 달래며 뭐라 중얼거리는 모습이 창에 비쳤다.*15 "뭐지 이건?" 놈은 유리판을 계속 휙휙 돌려댔다. 수많은 형상들과 주고받았던 대화, 떨어진 눈물이 슥슥 지나가더니, 오두막이 조금씩 모습을 갖춰 가는 모습이 비쳤다.*16 "오호! 이거 재밌는데! 꾸역꾸역 살았구만!" 디스코드가 몸을 돌리더니 쓴웃음과 함께 말했다. "이걸 사는 거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지..."
유리창에 비치는 이미지가 끊임없이 변해 가며, 볼수록 아리고 쓰라린 모습으로 변해 갔다. 나는 입술을 씹으며 두려움 속에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꼴통 영웅 행세를 할 수밖에 없었다니, 이런 식으로 고통받는 녀석들은 구경하는 맛이 있다니까! 포옹은 받을 수 있어도 사랑은 죽어도 못 받는 신세라!*17 죽을 고생 해 가면서 애새끼 살려 놨더니 칭찬은 웬 왈패년이 다 집어먹고!*18 내내 주기만 했구만...... 그걸로 네년이 받은 게 뭐가 있냐?" 디스코드가 한 번 더 창문을 돌렸다. 문댄서와 트와일라잇이 서로에게 소리를 질러대는 모습을 볼 수밖에 없었던 나와*19, 만인에게 잊힌 노병의 묘비와*20, 레인보우 대쉬의 앞다리에 안긴 스쿠틀루가 비쳤다*21. 그리고 파란 갈기를 한 사내가 울먹울먹한 얼굴의 한 여자에게 뺨을 비비는 모습이 보였다*22. 디스코드가 혀를 차면서 그의 웃는 얼굴을 뜯어보았다. "세상에 네년이 어떻게 되든 신경 써 주는 게 하나밖에 없는데, 그나마도 남이 아니라 자기라니. 얼마나 속이 쓰렸을까." 놈이 눈을 한 번 꿈틀하더니 주먹으로 유리판을 후려쳤다.
투명한 창이 산산이 조각나 흩어지며 그의 얼굴도 함께 부서져 사라졌다. 부서진 창 너머로 보이는 것은 혼돈으로 엉망진창이 된 포니빌 정원 위로 햇빛이 비치는 모습이었다. 그 빛에 비추어 보고 나서야 눈에 물기가 얼마나 엉겨 있었는지 깨달았다. 나는 훌쩍이며 헛기침을 해 목을 닦았다. 그 와중에도 품에 끌어안은 나이트브링어만은 그게 베개라도 되는 양 놓지 않았다.
"세상 모든 것을 가졌으면서도 동시에 가장 가난한 자로밖에 살 수 없는 기이한 저주라, 대체 어떻게 견디며 살았는지 궁금하긴 하구만..." 디스코드가 손가락에 돋친 손톱을 이리저리 뜯어보며 내 주위를 어슬렁거리다 말했다. "흠... 그래도 네년이 무슨 자석이라도 되는 양 거의 본능적인 수준에서 나이트브링어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이유는 대충 설명이 되는군. 지금까지 네가 가질 수 있던 유일한 물건이 바로 나이트브링어여서 그런 거 아닌가?" 놈이 잠깐 말을 멈추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니면, 지금까지 누가 네년에게 뭘 내줬던 일이 없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군."
목에 엉긴 응어리를 침을 삼켜 씻어내고 놈을 올려다보며 떨리는 입술로 물었다. "무슨 말이지?"
"잘 생각해 보라고." 디스코드가 쪼그려 앉아 나와 눈높이를 맞추고 느긋하게 숨을 뿜어냈다. 두 눈이 연민과 동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슬퍼 우는 듯한 피아노 연주곡이라도 되는 듯 네 과거가 진실을 속삭이고 있다. 지금껏 감내해야 했던 고통과 고독, 절망을 진실로 함께 나눌 수 있던 자가 있었던가? 이제는 아니야. 혼돈의 존재인 이 내가 나타났으니까." 그리고는 맹금의 발을 닮은 손을 내밀었다. "나는 너에게 자비를 베풀러 왔다."
"네가... 정말?"
"아, 당연하지. 내가 어떻게 알았겠느냐, 라이라!" 디스코드가 나를 가리키고 말했다. "물론 네가 고집불통에 반항기 충만한 녀석인 건 불변의 진실이지. 그건 지금까지 네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었던 게 너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너희 창조주가 남긴 권능의 파편을 지키고 싶어하는 거야 당연한 거지, 누가 그걸 뭐라고 하겠어! 지금까지 네 버팀목이 되어 준 게 그것뿐이었을 테니 어쩔 수 없지! 이 얼마나 훌륭한 일이야. 훌륭하다고 하면 좀 부족하군, 가히 신화적이라고 해도 되겠어! 지금까지 네가 해 온 일, 겪었던 일 전부 다 사서에 남겨 길이 전해 마땅할 일이지. 혹시나... 그냥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줄 수도 있다."
눈가가 절로 꿈틀했고, 눈물이 끝까지 차올랐다. "어떻게...?"
"나를 굳이 빗대자면 세상 모든 곤충의 신이라고 할 수 있지. 넌 개밋둑 맨 밑바닥에 너무 오래 파묻혀 있던 벌레고." 디스코드가 몸을 꼿꼿이 세웠다. "내 권능은 측량할 수 없으니, 땅 깊은 곳에 묻힌 너를 지표로 끌어올려 줄 수도 있어. 다시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게 해 주겠어. 슬픔만이 함께한 기나긴 나날 속에서도 다른 자들을 위해 헌신했음을 그자들이 알게 해 주겠어. 그리되면 저들도 알게 될 거야. 네가 얼마나 특별하고 훌륭한 녀석인지 말이야." 디스코드가 내 앞다리로 두 팔을 뻗었다. 새빨간 눈동자가 반짝였다. "내게 구하라. 나를 믿음을 증거해 보이라. 나이트브링어를 내게 넘기면 내 모든 권능을 다하여 너를 좀먹어 들어가는 네 저주를 없던 것으로 해 주겠다."
침을 삼키며 그자의 웃음과 두 손바닥, 이 모든 것을 은은히 비추는 금빛 광휘를 조용히 뿌리고 있던 나이트브링어를 바라보았다. 나이트브링어가 디스코드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순간, 세상의 근본을 이루는 성가가 온 우주를 아수라장으로 만들 무기로 쓰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트와일라잇과 그 친구들을 내가 소중히 여기는 만큼이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귀하고 소중했다. 그 사람들이 내가 적는 일기처럼 아무렇지 않게 그 본성을 잃고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가는 고통과 혼란에 단발마의 비명을 내지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나이트브링어를 더욱 꽉 끌어안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거절하겠어." 나는 말했다.
"아 나, 이 꼴통 년이!" 디스코드가 성질을 내며 소리쳤다. 짜증이 놈의 온몸을 타고 꿈틀거렸다. "내가 진짜 살다가 네년처럼 가식 쩔고 한 치 앞도 못 보는 돌대가리는 처음 본다!"
"네놈은 그럼." 나이트브링어를 등 뒤로 숨기며 혀를 낼름 내밀었다. "더럽게 못생긴 염소대가리 아니냐?"
"이러긴 싫었지만, 그 썅놈의 나이트브링어는 직접 뺏어야겠군!"
"뺏을 테면 뺏어 보든가!"
"이 시발!Ay gevalt!" 디스코드가 내 뒷다리를 잡아 거꾸로 들더니 포니빌 중심가 길바닥에 대고 미친 듯이 털어댔다. "내놔! 내놔! 내놔! 내놓으라고!"
"으으으으으!" 나이트브링어를 꼭 끌어안고 견뎠다. 에메랄드 빛 보호막이 일어섰다. "꺼져!"
"썅!" 디스코드가 성질을 버럭버럭 내며 나를 그대로 길바닥에 내팽개치고 짝짝이 발을 쾅쾅 굴러댔다. "개같은 이퀘스트리아! 만 년 전에 처음 왔을 때랑 조금도 달라진 게 없구만! 대가리 깨인 연놈 하나 없어!"
"네놈이 보기엔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그냥 웃기지도 않는 놀이판밖에 안 되잖아?!" 나는 대꾸했다.
"그럴 리가, 당연히 그것보다는 훨씬 낫지!"
"어디가?! 얘기나 해 보시지!"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네놈의 얼기설기 끼워 맞춘 누더기 몸뚱이를 봐. 거기 단 한 조각 살점이라도 존재에 대한 존중이 들어 있긴 한가!"
"그러지... 음... 기억이 난다면 말이야."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뭐?"
"몸뚱이가 돌이 되어 버리는 건 아주 신기한 경험이지. 젊은 시절처럼 쌩쌩해지거든. 문제는, 대가리는 그렇지 못해서 머릿속이 똥통이나 다름없게 된다는 거야. 네년이 내가 입으로 싸대는 게 말인지 똥인지 구분한다고 해도 말이지." 디스코드가 악의 넘치는 비웃음을 띄우며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말 나온 김에 충고 하나 할까. 네년이 평생 나이트브링어를 붙들고 살 수는 없을 거야. 몸뚱이가 살아 있으니 언젠가는 그 물건에서 발굽을 뗄 수밖에 없을 테니까."
"이..." 잔뜩 찌푸린 얼굴로 되쏘았다. "이 미친 자식이!"
"네년의 소중한 체면을 먼저 포기하든지, 나이트브링어를 먼저 포기하든지 상관없어. 어느 쪽이든 먼저 놓아 버릴 걸 고르고 그에 맞는 계획을 세워 두는 게 좋을 거다. 다 너 좋으라고 하는 얘기야."
"이퀘스트리아를 지킬 수만 있으면 뭐라도 감수할 거고, 무슨 짓이라도 할—"
디스코드가 제 팔꿈치 아래 부분을 모조리 확성기로 바꿔놓고 마을 전체를 향해 커다란 목소리로 고함쳤다. "여보쇼, 동네 사람들! 방금 들었소?!"
"디스코드—!"
"마담 라이미가 글쎄 온 동네를 똥오줌 천지로 만들겠다네!"
"디스코드, 입 닥쳐!"
"당신네들 비싼 옷가지에 왕창 펴바르고 불을 싸지르겠다는데!"
"닥치라고!"
"하 하 하!" 디스코드가 배를 잡고 웃으며 무릎을 탁 쳤다. "꼬맹아, 재밌는 거 하나 더 알려 주마. 이 싸움은 결국 내가 이길 수밖에 없단다! 그냥 이 정도 빡치는 수준에서 때려치우고 포기하는 게 어때?"
"두 눈깔 똑바로 뜨고 보기나 해. 무슨 수를 써서든 트와일라잇 찾아낼 거니까. 그렇게만 되면 나이트브링어로 다른 사람들도 제정신 차리게 할 수—"
그 때 시야 구석에서 뭔가 괴상망측한 형상이 튀어나왔다. 분홍 드레스를 입고 티아라를 쓴 스쿠틀루가 신명나는 걸음으로 길거리를 누비고 있었다. "히이이이이! 공주님이에요—!" 회색 꼬마가 눈을 감는 순간, 엘크에게나 달려 있을 법한 뿔이 달린 대가리를 쳐든 쥐새끼들이 거대한 원형 치즈를 굴리며 몰려왔다.
깜짝 놀라 "으악!" 하는 소리를 내질렀다. 스쿠틀루를 향해 내달리며 나이트브링어로 묵직한 마력을 방출했다.
디스코드가 그 모습을 보고 있기는 했던 모양이다. 어디선가 그 자식이 "흐음? 이건 또 뭐지?"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으니까.
디스코드고 뭐고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다. 스쿠틀루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혼돈 그 자체를 대변하듯 난장판이 따로 없던 쥐 떼의 행진이 스쿠틀루를 덮치기 직전, 겨우겨우 근처 화단으로 꼬마를 밀쳐 대피시켰다.
"하아..." 쪼그리고 앉아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친 쥐떼가 치즈를 굴리며 저 멀리 사라져 갔다. "큰일날 뻔했어 이것아. 머리가 어떻게 됐는지는 상관 안 하겠는데, 적어도 조심은 좀 하고 다—"
꼬마는 내 뺨을 후려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천하의 미련퉁이 야만인 같으니! 이게 지금 무슨 꼴이야! 드레스가 엉망이 됐잖아!" 스쿠틀루가 굽이 나간 하이힐을 신은 발로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이래서야 왕자님한테 짐의 매력을 과시할 수 없지 않느냐!"
스쿠틀루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한숨을 푹 쉬면서 자리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얼음이 녹듯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디스코드가 슬쩍 다가섰다. 스쿠틀루를 보던 놈의 시선이 나를 향하다가, 다시 스쿠틀루로 향했다.
"흠...... 뭐, 이번 건 별로 재미가 없었던 모양이군."
뚜껑이 열리는 기분으로 놈을 째려보았다. "어쩔 건데 이제?"
"어떻게 해야지." 디스코드가 씩 웃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한 줄기 섬광과 함께 놈의 모습이 사라지고, 스쿠틀루의 모습이 대신 나타났다.
"어어어어... 스쿠틀루?" 웅얼거려 말했다.
스쿠틀루는 구부러진 티아라를 쓴 채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서서히 삐딱한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했다. 비뚤어진 시선이 순식간에 제자리로 돌아왔고, 그 눈동자는 이제 새빨간 색으로 변해 있었다. 꼬마가 씩 웃자 입술 아래로 송곳니 하나가 비어져 나왔다. 그 입에서 나온 소리는 디스코드의 목소리였다. "네년이 뭣 때문에 그렇게 스트레스 받고 사는지 대충 알겠군. 아무래도 동네에서 이런 일 안 터지게 뒤에서 몰래 이 작자들을 돌보고 있었던 모양이야. 우리 동네 메어 두 웰Mare do well이라도 되는 건가 보군. 즉슨 이렇게 말해도 되겠지." 스쿠틀루의 형상이 한쪽으로 고개를 까딱했다. "아무도 모르는 수호 천사, 정도?"
"대체...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주, 아주, 아아아주 간단한 얘기지!" 디스코드가 낄낄대는 투로 말했다. 스쿠틀루의 왼쪽 앞다리가 발톱 돋친 맹금의 발처럼 변하더니 분홍 드레스 안쪽으로 들어가 웬 프라이팬을 하나 꺼내들었다. "이건 네년 대가리의 몫." 스쿠틀루의 회색 머리가 그대로 프라이팬을 향해 내리꽂혔다. 땡 하는 소리가 울렸다. "이건 같잖은 자비심의 몫!"
"야, 이 새끼야!" 흠칫 놀라 고함쳤다.
스쿠틀루가 다시 프라이팬에 머리를 부딪쳤다. 땡. "이건 네 같잖은 자비가 네년 친구놈들에게 미치는 영향이지!"
"그만둬!"
땡. "이건 이웃한테 주는 영향이고." 땡. "이건 소꿉친구!" 땡. "요건 너네 선생 몫!"
이를 부득부득 갈며 염동력으로 프라이팬을 꽉 붙들었다. "스쿠틀루 괴롭히지 마, 이 새끼야!"
잔뜩 부풀어오른 이마가 이쪽을 향했다. 그 아래에서 디스코드의 눈깔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다른 연놈들은 그렇다 치고... 너 자신에겐 뭐가 따르나?"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식은땀만 흘리며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스쿠틀루를 보고만 있었다.
스쿠틀루의 피범벅이 된 입술이 굽어지며 빙글대는 표정을 만들었다. 꼬마가 목을 뒤로 홱 제끼며 소리쳤다. "배달이나 할까!"
섬광이 한 번 번쩍한 뒤, 디스코드와 나는 더피가 운전하는 스쿠터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탈색된 더피는 한창 동네를 쏘다니던 모양이었다. 뒤를 흘끗 돌아보고, 여자가 말했다. "허?! 이보셔들! 여긴 내 담당 구역인데!"
"해고다 이년아!" 디스코드가 더피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사시눈 대신 보다 일반적인 눈이 된 여자는 그대로 근처 수레로 날려가 처박혔다. 본래 과일 카트였던 모양이나, 야구방망이를 비롯한 각종 잡동사니로 엉망인 수레였다. 더피 대신 스쿠터 핸들을 잡은 디스코드가 그대로 방향을 휙 꺾더니 날듯이 달려가 꼬마 유니콘 코앞에 멈추었다.
"엄마 아니잖아!" 딩키가 소리쳤다. 아직 본래 색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아니지, 꼬마야. 암만 봐도 아니겠지." 디스코드가 나를 움켜잡고 스쿠터에서 내렸다. "그렇더라도 그 눈깔 희번득거리는 여자랑 아주 오랫동안 얘기를 나누고 온 건 사실이야. 음악은 네가 갈 길이 아니라고 하더군. 우리도 동의했다."
딩키가 급한 숨을 들이마셨다. 휘둥그레 뜨인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래도... 그래도... 지금까지 플루트를 얼마나 연습했는데! 엄마가 선물로 사 준 거란 말야!"
"너 이 자식..." 몸을 떨며, 더듬거리는 말을 겨우 꺼냈다.
디스코드가 꼬마의 얼굴에 제 상판을 바싹 들이밀며 비웃었다. "네가 뭔데 플루트를 갖고 다니냐. 욕심만 더럽게 많은 쌀벌레 같은 것이!" 놈이 송곳니를 빛내며 조롱했다. "애초에 애비도 없는 게 그런 걸 가질 자격이나 있나?"
딩키가 뒷걸음쳤다. 크게 뜬 눈 밑으로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혔다. "아냐... 아냐... 엄마가 그랬어. 나도 아빠 있댔어. 멀리서 돈 벌고 있다고 했다고..."
"멀리서 돈 벌고 있는 건 사실이지. 번 돈은 한 푼도 안 보내주고 시간이나 죽여서 그렇지." 디스코드가 딩키의 갈기를 한 손으로 쓸다가, 꼬마의 코를 한 번 툭 건드렸다. 아이의 눈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마누라가 애새끼를 싸질렀다는 비극적인 소식을 잊고자, 매일 밤 술로 지새거든." 딩키가 울며 쓰러졌다. 몸에서 색이 빠지는 순간까지 아이는 혼자 조용히 흐느꼈다.
"이 새끼가!" 놈에게 고함쳤다. "당장 돌려놔!"
"돌려놓는 건 네년 소관이지!" 디스코드가 경박하게 외치고 하품했다. "사람들 돌려놓겠다고 엄포를 놓은 게 네년이잖아? 기껏 돌려놓더라도 금세 까처먹어 버리고 감사 인사 한 마디 안 할 저 버러지같은 것들의 고통과 슬픔을 지우겠다고 한 건 네년 아니었어? 아하, 그렇지. 까먹고 있었구먼." 놈이 빙글빙글 웃다가 이쪽을 흘겨보며 말했다. "나이트브링어를 꼭 껴안고 앉아서 이퀘스트리아를 지키시느라 바쁘신 몸이셨지. 그게 네년 특기니까 말야. 아닌가?"
"아냐... 아니라고..."
"보자, 다음은 누굴 건드려 보실까..." 디스코드가 나를 붙잡고 용오름처럼 제자리에서 몸을 홱홱 돌렸다. 혼돈 그 자체가 되어 버린 마을이 소용돌이쳤다. 그 다음 순간, 디스코드와 나는 목조 클럽하우스 한가운데에 와 있었다. 한쪽 구석에 숨어 있던 꼬마 셋이 잔뜩 움츠러들었다.
"그 자슥이다!" 애플블룸이 호박색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동네서 온갖 못된 짓은 다 하고 다니던 그 괴물이다!"
"저리 가라고 해!" 스위티벨이 비명을 지르며 구석에서 이불을 덮어썼다. "다 싫어, 다 저리 가 버려!" 꼬마가 흐느꼈다. "언니 보고 싶어! 래리티 언니 데려와!"
"으으으!" 럼블이 같이 있었다. 녀석은 몸을 달달 떨면서도 용감히 디스코드를 향해 달려들었다. "저리 가 버려! 누가... 누가 너 같은 거 무서워할 줄 알고!"
"그만둬!"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놈의 등짝 뒤에서 소리치는 것과, 공포에 질려 아이들에게 미친 듯 몸짓하는 것밖에 없었다. "도망가! 이 자식은 내가 어떻게 할 테니! 그 자식이 너희 못 건드리게—" 디스코드의 꼬리 끝이 그대로 내 입술을 비집고 들어왔다. "으으으읍!"
놈이 상반신을 아이들에게 들이밀며 광대 같은 표정으로 웃었다. "로미오츠*23Romeoats는 잠시 빠져 주겠나." 그리고는 잽싸게 손을 놀려 두 꼬마를 혼돈 마법의 영향권 내로 끌어들였다. "이 귀여운 녀석들. 뭐가 그렇게 무섭니? 지금이야말로 너희의 적성을 살릴 좋은 기회인데!"
"우리..." 애플블룸이 놈을 흘겨보며 말했다. "...재능을 살려?"
놈이 낄낄대며 손가락을 튕겼다. 두 아이의 엉덩이 쪽에서 밝은 섬광이 반짝했다. 놈은 순순히 둘을 내려주었다. "잘못 날려 버리고 후회하지 않게, 잘 재 보고 일 벌이도록 하렴..."
바닥에 내려온 꼬마 둘이 각자의 엉덩이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밝은 붉은색을 띤 다이너마이트 묶음 그림이 나타나 있었다. 디스코드의 술수에 걸린 것도 모르고 크게 기뻐하는 둘의 몸에서 색이 전부 빠져나가고 있었다.
"우리 적성을 찾았어!"
"마아아안셰이!"
"큐티마크 크루세이더, 전문 폭파반!" 둘이 어디서 났는지 모를 안전모를 뒤집어쓰고, 시커멓고 둥글둥글한 폭탄 여러 개를 꺼내놓더니 되는 대로 사방에 던져대며 놀기 시작했다. 불길이 핥고 지나간 자리에 구멍이 뚫리고, 거기에서 쏟아진 잔해가 클럽하우스 내부로 쏟아져 내렸다. 이 무식한 파괴 행각을 일삼으면서도 둘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한 얼굴로 까르륵 웃어댔다.
"디스코드! 당장 멈춰!" 고함쳐 말했다. 말도 안 되는 꼬락서니를 공포에 차 지켜보면서, 나는 꼬마들이 제발 실수로라도 폭발 범위에 들어가지 않기를 기도했다. "저러다 누구 하나 잡겠어! 하나가 아닐지도 모르고!"
"이것 보셔. 뒈지는 거야말로 가장 찾기 쉬운 적성이라네." 디스코드가 으쓱하며 대답했다.
"스위티벨!" 럼블이 말을 더듬으며 제 여자친구를 휘둥그레 뜬 눈으로 쳐다보았다. 꼬마의 긴 갈기 위로 지붕 파편이 떨어졌다. 럼블이 움찔하고 말했다.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거야?! 이... 이 괴물 녀석이 뭔가 못된 수를 썼구나!"
"우습군. 네까짓 게 뭔데 감히 참견질이지?" 디스코드가 럼블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손바닥을 꼬마의 귓속으로 집어넣었다. "어린 게 벌써 발랑 까져서는 연애질이나 하고 있다니. 나잇살이나 좀 더 처먹고 해라."
럼블의 엉덩이에 큐티마크가 나타났다. 단검에 찔려 피를 흘리는 심장 모양이었다. 꼬마의 얼굴이 평소보다도 더욱 창백한 잿빛으로 물들며, 무시무시할 정도로 구겨진 표정을 만들었다. 럼블이 자리에서 빙 돌더니, 클럽하우스 반대편의 스위티벨을 향해 다가가 그대로 다리를 걸어 버렸다.
"으앗!" 스위티벨이 자리에 거꾸러졌다. 폭탄 두 개가 떨어지며 테이블과 긴 의자를 하나씩 박살냈다. 나무 조각이 스위티벨의 몸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 뒤 럼블이 얼굴을 바싹 들이밀며 아주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밖에 모르는 돼지인 걸로 모자라 머리까지 비었니?" 럼블이 씹어 뱉듯 말했다. "너 같은 걸 좋아하는 사람은 너네 언니 빼고 없어. 그나마도 잘못해서 음식을 너무 많이 했을 때 음식물 쓰레기통 대용으로 쓸 만하니까 도구로서 좋아하는 거지! 흥!" 럼블이 스위티벨을 향해 먼지를 탁 차 날리더니 어기적어기적, 클럽하우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화전이랑 남자애 구분할 정도로 뇌가 자란 다음에나 있을 일이겠지만, 다른 자식 찾아보라고!"
스위티벨이 럼블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다 두 눈에 눈물을 글썽거리더니, 잿빛으로 변한 입 밖으로 한바탕 곡성을 내보냈다. 이 모든 것은 애플블룸이 한 개 다이너마이트를 내던져 만들어낸 거대한 폭발이 클럽하우스를 폭파시키며 전부 없던 것이 되었다.
클럽하우스 전체가 무너져 내렸다. 나는 몇 피트 정도를 떨어지다가 나무 밑 땅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와중에도 나이트브링어를 목숨 걸어 붙들고 있었음은 당연하다. 몸을 일으키고 보니 사방에 타다 만 잔해와 쓰레기가 널려 있었다. 섬뜩한 기분에 숨을 헐떡이며 염동력으로 나무 파편 하나하나를 들어 치웠다.
"스위티벨! 애플블룸!" 잔해 속을 뒤지고 다니며 소리쳤다. "들리면 대답해! 꺼내 줄게!" 드디어 뿔 하나를 찾아 염동력으로 붙들고 끌어올리며 외쳤다. "스위티벨..."
가지뿔이 대신 끌려나왔고, 뒤이어 능글맞게 낄낄대던 디스코드의 상판이 딸려 나왔다. "내가 꺼내 줄 수 있는데. 개판이 되긴 했지만 전부 없던 일로 하고 되돌릴 수 있거든." 그자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렇게 해 주길 바라면, 대가가 따라와야겠지......"
"집어치워!"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고함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호흡 직전이었다. "그 어린 것들이 대체 네놈한테 뭘 잘못했..."
"살아 있잖냐." 디스코드가 느릿하고 단조로운 말투로, 가늘어진 눈으로 나를 흘겨보며 말했다. "조화를 믿고, 셀레스티아를 찬양하지. 내가 혐오하고 경멸해 마지않는 모든 것들을 일삼는 것들이기도 하다. 네년이 하지 말라고, 하지 말라고 소리를 질러대는 걸 이 몸이 할 수밖에 없는 건, 다 네년이 고집을 꺾지 않아서야. 그러니 이제 최소한의 책임 의식이라는 걸 가지고 보다 주인공 자리에 가까운 다른 양반한테 얌전히 그 악기를 넘기도록 해. 이왕이면 내가 좋겠군."
"나는... 절대..."
"어쩔 테냐?"
떨리는 몸을 입술을 씹어 달랬다. 그러면서도 나이트브링어를 몸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흠...... 아무래도 좀 더 강렬한 걸 원하는 것 같군." 디스코드가 눈을 번득였다. 등골이 얼어붙는 듯했다. "오 호 호 호 호..." 놈이 이쪽으로 다가와 내 어깨를 붙들었다. "네년이라도 반할걸."
다시 섬광. 눈에 들어온 곳은 다시 다른 곳이었다. 몸을 움찔하며 눈을 감았다. 그곳에 도착한 순간 작은 방 너머로 놀란 숨소리가 메아리졌기 때문이다.
"공주님 맙소사!" 끔찍할 정도로 낯익은 목소리가 더듬거리며 흘러나왔다. 라벤더와 사향 냄새가 났다. 나는 울고 싶었다. "내 집에서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눈을 열어 떴을 때는 이미 눈물이 몇 방울 굴러 떨어진 뒤였다. 모닝 듀와 암브로시아가 좁은 거실 반대편에 서서 공중을 떠다니는 드라코네쿠스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디스코드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악의를 두르고 그 둘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디, 디스코드..."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였다. 서 있을 힘도 없었고, 나이트브링어를 껴안고 있을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제, 제발..."
"이 니기미시부럴 생기다 만 칠면조는 대체 뭐 하는 쓰레기야?!" 암브로시아가 입을 열자마자 사자의 앞발 모양을 한 손이 암브로시아를 집어 이쪽으로 내팽개쳤다. "윽!"
"그래, 그래. 착하지. 네년은 좀 있다가 손을 좀 봐 줄 생각이야. 네놈은 아니지만." 놈이 모닝 듀의 입가를 붙들고 걸레를 짜듯 쥐어짜 아주 어색한 미소의 형상을 만들었다. "아, 바로 끼워 맞춘 것처럼 딱 떨어지는 이 무기력한 애정의 심볼을 좀 보라고!"
"야, 이 새끼야!" 암브로시아가 고함치며 몸을 일으키려 버둥거렸다. "당장 그 손 떼, 이 개새—!" 디스코드가 꼬리를 뻗어 암브로시아를 짓눌렀다. 여자가 거기서 빠져나오려 몸부림쳤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디스코드가 모닝 듀의 입가를 잡은 그대로 들어올리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잘 모르겠구만! 이것 좀 보라고! 건강도 안 좋지, 그렇다고 힘이 좋은 것도 아니지. 이거 순 비실비실하니 계집애랑 다를 게 없잖아?" 디스코드의 목이 수도꼭지 돌아가듯 돌아가 나를 보고 빙글거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런 녀석은 무덤에 처넣고 묻어 버려야겠지 싶은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디스코드. 그 사람은 건들지 마!" 나는 거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목소리를 낮춰 말할 수도 없었고,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도 없었다. "제발! 제발 부탁해. 그 사람만은 건들지 마!"
"나, 나한테... 뭘 바라고 이런 짓 하는 거야?" 모닝 듀의 말투는 전혀 위협적이지 못했다.
"네놈한테? 아냐. 아주, 완전, 정말, 완벽하게 틀렸어. 대가리에 똥만 들어찬 자식아. 네놈이 아냐!" 디스코드가 사내의 바다처럼 푸른 갈기를 자기 발톱으로 쓸며 까딱했다. "이 몸은 그년에게 볼일이 있어! 내가 괜히 여기까지 몸소 걸음하신 것도 그 때문이지!"
"무, 무슨 소리야?!" 모닝 듀의 떨리는 시선이 나와 디스코드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헤맸다. "이게... 다 무슨 소리냐고!"
"어허,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모양이군! 지금 주인공은 너라고, 이 새끼야!" 디스코드가 으르렁대는 소리와 함께 모닝 듀를 헝겊인형마냥 휙휙 돌리다 방 한복판으로 내팽개쳤다. 테이블이 부서지며 그 위에 있던 실내등이 떨어져 내 발굽 앞에서 조각났다.
"디스코드, 이 새끼가—!" 나는 비명을 질렀다.
"주인공이면 주인공답게 굴어야지, 내 말 틀려?" 디스코드가 사내를 향해 다가갔다. "설명을 해 줄까. 집중해서 연기하라는 뜻이다." 놈이 손가락을 튕겼다.
모닝 듀가 순식간에 잿빛으로 변했다. 그와 동시에 눈을 뒤집으며 자리에 쓰러졌다. 마룻바닥에 엎어진 몸뚱이에 평소 지병이 도지며 의식을 잃은 채 꿈틀꿈틀 발작했다.
"유후! 여러분, 이 난봉꾼 좀 보십쇼!" 디스코드가 언제든 암브로시아를 제 꼬리로 눌러 죽일 수 있을 만한 거리를 유지하며 모닝 듀 근처를 빙빙 돌고 말했다. "에잉 쯧쯧쯧...... 관객 알기를 병신으로 아는 모양이구만. 좀 남자답게 책임감 좀 갖고 다녀라 임마. 정신줄 좀 꽉 붙잡고!" 놈이 다시 한 번 손가락을 튕겼다.
모닝 듀의 솜털이 다시 노란색으로 변해갔다. 자리에서 일어난 사내의 눈은 제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힘 빠진 눈으로 우리를 보며, 그가 말했다. "여긴... 대체...?"
"아이고, 불쌍해서 어째...... 몸 상태가 아주 개판이구만! 이 중요한 순간에 자빠져 잠이나 자다니! 아무래도 두 눈깔 똑바로 뜨고 지켜보고 있기는 힘들겠어." 디스코드가 손가락을 튕겼다.
모닝 듀가 다시 잿빛으로 변하며 식은 몸으로 자리에 쓰러졌다. 두 눈은 그대로 열려 있었다.
"건강 관리가 저따위니 아무래도 데리고 살기 정말 힘들겠구만." 암브로시아가 오만상을 쓰고 자기를 째려보는 시선을 감지한 디스코드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래, 네 애인한테 뭘 약속했냐?"
모닝 듀가 아주, 아주 깊은 호수 밑바닥에서 떠오른 사람처럼 떨면서 급한 숨을 들이마셨다.
디스코드가 얼굴을 들이대며 말했다. "진실을 말해 줄까. 네놈을 사랑한다는 년들은 사실......" 놈이 몸을 홱 돌리더니 힘없이 그 꼴을 보고만 있던 암브로시아와 나를 빤히 쳐다보고 말했다. "......사랑과 싸구려 동정심을 헷갈리는 저능아 년들이라는 거다."
"빨리... 그냥... 네놈이 원하는 게 뭔지나 말해..." 모닝 듀가 말을 더듬었다. 그는 호흡을 유지하느라 쌕쌕대며 급한 숨을 들이마시고 있었다.
"아하. 내가 원하는 게 뭐냐고!" 디스코드가 계속해서 손가락을 튕겨대며 그의 주변을 몇 번 더 돌았다. 모닝 듀의 몸이 혼수상태와 정상 상태를 빠른 속도로 오가면서 몸에 일어나는 발작이 쌓이고 쌓여 전신발작으로 이어졌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는 벌써 다 까발렸는데, 자기 혼자만 옳고 정당한 줄 아는 어떤 미친년이 도통 넘기지를 않네! 내가 가져 마땅한 걸 꼭 끌어안고 반납하지를 않는데, 내가 못 가지면 다른 연놈들도 가지면 안 되겠지? 안 그런가?"
"당장 그만두지 못해!" 암브로시아가 이를 갈며 말했다. "나가 뒈져, 쓰레기 새끼야! 제발 좀 평화롭게 살게 냅두면 어디 덧나냐!"
"평화롭게, 라. 웃기는 소리군." 디스코드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 손가락을 계속해서 튕겨댄 끝에, 모닝 듀는 입에 거품을 물고 눈을 뒤집었다. 마룻바닥이 그 입에서 흘러나온 침에 흠뻑 젖어 갔다. "네년이 말하는 평화는 꿈속에서나 찾으셔야지?" 놈은 계속해서 손가락을 튕겨댔다. "이 몸이 비롯되신 곳은 말이다, 다른 데도 아니고 혼돈 그 자체야. 해도 달도 없어. 이 몸 같은 존재들에게 자빠져 잔다, 는 건 아주 이상하고 기묘한 개념이지." 모닝 듀가 온몸을 꿈틀대며 몸을 늘어뜨렸다 발작성 강직으로 다시 일으키고, 다시 늘어뜨렸다. "너희 연놈들에게는 아주 미안해질 정도로 끔찍하고 잔혹한 개념일 것 같지만, 들어 보라고. 아무것도 없이 텅 빈 지평선에서 아주 희미하고 작은 빛의 얼룩에 지나지 않는 아침이 밝기는 할 것이라는 말만 듣고 끝없는 어둠에 갇혀 있다고 생각해 보겠나? 어떻게 보면 엎어져 자는 게 네놈들이 죽음을 예비하는 연습일지도 모르겠군. 살다 보면 언젠가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할 때가 오겠지." 놈의 송곳니에 계속해서 딱딱대는 손가락이 비쳤다. 눈가에 저물녘 같은 붉고 슬픈 그림자가 슬쩍 비쳤다. "과연 언제 스스로 잠을 청하러 몸을 누일 것이며, 과연 언제 두 번 다시 깨어나지 못할 것인가, 에 대해서 말이다."
모닝 듀가 씨근덕거리는 소리가 메아리졌다. 이제 그는 뱃속의 태아처럼 몸을 웅크린 채 예고 없이 찾아온 끔찍한 고통에 흐느끼고 있었다. 암브로시아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쌍욕을 퍼부었다. 해와 달이 계속해서 뜨고 지며 햇빛과 달빛이 창 밖에서 번갈아 번쩍거렸다.
눈물과 분노로 젖은 눈이 모닝 듀를, 나이트브링어를, 디스코드의 빙글거리는 입술을 훑었다. 디스코드는 분명 위협적이고 잔혹한, 악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최소한의 논리력을 유지하고 있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놈은 애새끼나 다름없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을 보며 즐기고, 우리를 고문하면서 기뻐하는 존재였다. 지금까지 우리는 놈에게 계속 당하고만 있었다. 차가운 한숨이 입 밖으로 빠져나왔다.
디스코드가 경련하는 모닝 듀의 몸뚱이 위로 손가락을 내밀었다. 놈이 사내의 숨통을 끊어놓을 마지막 일격을 가하기 직전,
"게임을 하나 하지!" 나는 소리쳤다.
디스코드가 퉁기려던 손가락을 멈췄다. 드라코네쿠스가 권태에 찌든 표정으로 물었다. "거 다시 말해 보겠나?"
"게임을 하자고. 내기 한 판!" 헐떡이는 숨으로 크게 소리쳤다. 마른침을 삼키며 성물 나이트브링어를 높이 치켜들었다. "이게... 내 판돈이다!"
디스코드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몇 번 깜박이다 물었다. "호오, 진심인가?" 그러고는 깔깔 웃어대더니 똑바로 섰다. 디스코드가 꼬리에 가하던 힘을 풀고 모닝 듀를 내려주자 암브로시아가 급히 달려와 숨을 몰아쉬는 남자를 부둥켜안았다.
침을 삼키고 다시 말했다. "그래, 내기 하나 하자. 내가... 내가 이기면 날 놓아 주고, 사람들 못 살게 구는 것도 당장 그만둬!"
"재밌는 소리를 하는구만. 뭐 뻔한 요구사항이기는 한데, 흥미로운 건 매한가지야." 디스코드가 투명 의자를 만들어내 걸터앉더니 팔짱을 끼며 이쪽을 쏘아보고 말했다. "그 내기에서 내가 이기면 뭘 얻게 될지, 한번 얘기해 보겠나?"
"네가 이기면..."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몸을 덜덜 떨면서도 나는 억지로 말을 쏟아냈다. "내 뇌를 다 녹여 진창으로 만들고... 개똥철학자 하나를 드디어 굴복시켰다고 온 세상에 자랑해도 좋아."
"으흠......" 디스코드의 눈길이 나이트브링어를 향해 겨누어졌다. "또오오오오오?"
심호흡하고 대답했다. "나이트브링어도 네 손에 넘어가는 거지."
"조오오오오오오아. 이제야 말이 좀 통하는군." 디스코드가 발톱을 몇 번 두드리더니 손바닥을 한데 모았다. "그럼, 그쪽이 제안하는 게임은 뭐지?"
"이 게임..." 나는 말을 더듬었다. "이건..." 이번에 나온 말은 더 허약했다.
얘기가 여기까지 진행될 걸 모르고 일단 지르기부터 한 멍청한 행동을 질책하듯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하나하나가 온몸을 찔러댔고, 갈 곳 잃은 시선은 허공을 배회했다. 지금까지 디스코드가 저질러 놓은 끔찍한 행동 하나하나를 떠올렸다. 예술의 경지에까지 다다른 듯한 대혼란과 그 외면을 장식한 부조리와 냉소, 블랙 코미디가 떠올랐다. 디스코드가 품은 악의와 쓸데없이 거창하기만 한 이 난장판의 기저에는 태생적으로 신과 같은 힘을 타고났을 뿐인 훌리건 수준의 정신 연령이 깔려 있었다. 이 교활한 악마가 다시 흥미를 잃지 않게 하려면, 이쪽도 비슷한 수준의 간교함을 보여 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 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이 아주 훌륭하고 뛰어난 명답이라고는 못 하겠지만, 그 때는 그게 최선이었다.
"가장 오래 된 게임이지!" 나는 디스코드를 향해 실실 웃으며 담대하게 소리쳤다. 모닝 듀의 고통을 목도한 이래 계속 뺨이 마를 새도 없이 계속 젖었고, 그 웃음을 무너뜨리지 않는 데도 막대한 기력이 들었다. "그 어떤 게임보다도 전통적이고, 창의적인 놀이다. 깊이있지만 보편적이기도 하고 세상에서 한 번도 사라진 적 없이 다른 놀이와 확실히 구분되는 것이기도 하다! 논리와 창의력, 대담한 비약 모든 것이 요구되는 놀이라 하겠다!"
"뜬구름 잡는 솜씨 하나는 예술이구만." 디스코드가 비틀린 앞발로 몸짓하며 말했다. "자세히 얘기해, 꼬마야. 자세하게!"
나는 단호한 태도로 그자를 쳐다보고 말했다. "이쪽은 이쪽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할 거야. 그쪽은 내가 설명하는 게 어떤 것인지 때려맞춘 다음 그걸 물리치거나 없앨 수 있는 것을 말하면 돼. 아니면 아예 상쇄시켜서 없던 걸로 만드는 걸 얘기해도 되고. 그럼 이쪽도 그쪽이 얘기한 것과 겨루어 이길 수 있는 걸 얘기할 거야. 이런 식으로 상대가 말하는 게 무엇인지 유추하면서 논리정연하게 상대가 말한 것을 부정해 가면 돼. 상대가 말한 것을 물리칠 수 있는 존재를 생각해 내지 못하거나, 그런 존재를 생각해 내더라도 상대를 압도하는 이유를 정확히 설명하지 못하고 헛소리를 하는 사람이 지는 거야. 이긴 쪽이 판돈을 다 가져가는 걸로 하자고. 이 정도 조건이면 어때?"
그는 삐딱한 시선으로 째려보다가 대답했다. "샌드메어The Sandmare*24를 너무 읽은 거 아닌가. 닐 게이메인Neil Gaimane 아저씨 작품이었지?"
"평생 남 꼬투리만 잡으면서 시간이나 죽일 생각이야?!" 그자를 향해 성질을 부리며 말했다. 나는 위협하듯 도끼눈을 떴다. "아니면, 자세한 얘기를 듣고 나니 겁이 덜컥 나서 암만해도 이길 자신이 없어지니 이러는 건가?"
"오 호 호 호... 마담 라이미,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자구!" 디스코드가 몸을 꼿꼿이 펴더니 손가락 마디를 뚝뚝 꺾었다. "물론 이 몸이야 그쪽이 갖고 나온 재미없는 장단에 얼마든지 맞춰 줄 넓은 배포와 아량의 소유자시니, 사소한 말실수 몇 가지쯤이야 그냥 넘어가 줄 수도 있어. 네 발굽에서 나이트브링어를 빼앗는 데 그보다도 손쉽고 빠른 방법이 또 있겠냐구! 헌데 생각해 봐! 뇌까지 질척질척하게 녹아 버리고 나면 네 잘난 자아가 어느 정도까지 파괴되었는지 너 스스로도 알 도리가 없을 텐데, 그래도 해 보겠어? 하 하 하!"
"그래서 뭐?!" 바로 몇 발짝 떨어진 곳의 연인들을 떨며 돌아보았다. 저쪽도 마찬가지로 겁을 잔뜩 집어먹고 달달 떨고 있었지만, 위험에 처해 있지는 않았다. 디스코드를 흘끗 보고 말했다. "할 거야, 말 거야?"
"이 몸이 어떤 분이신가 조금이라도 눈치를 살폈다면 너 같은 꼬맹이도 충분히 눈치 깠을 텐데. 게임이라면 이쪽에선 언제든 쌍수 들고 환영이라구, 우리 꼬마 게임마이스터 양반." 디스코드가 몸짓하며 말했다. "자, 패 까라."
"뭐?"
"얼씨구. 게임을 하자고 한 건 네년이야. 이 쓰잘데기없이 기나긴 항해의 돛을 활짝 펼쳐야 하는 건 당연히 그쪽인 것 같은데! 아냐? 대답해 보시지!" 디스코드가 입가에 대고 손가락을 딱 튕기자 공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꼬맹이, 1라운드다!"
"그래... 어... 그건 좋은데..."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둘을 흘끗 보다 말했다. "그 전에, 장소를 좀 옮기지? 저 양반들 사생활은 그만 침해하자고."
"아, 거 참!" 디스코드가 벽에 손바닥을 대고 방 전체를 나무 팽이 돌리듯 팽팽 돌려댔다. "빨리빨리 좀 하지?" 디스코드가 사납게 툴툴댔다. "저 빌어먹을 나이트브링어를 한시바삐 챙겨가셔야 하는데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핑핑 돌던 방이 서서히 느려지다가 회전을 멈추자, 캐러셀 부티크 한가운데로 바뀌어 있었다. 널찍한 유리창과 돌에 맞아 생긴 커다란 구멍 두 개로 빛이 들어왔다. 디스코드가 더는 못 기다리겠다는 눈치로 이쪽을 음흉하게 보며 말했다. "됐지. 시작해!"
"좋아."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엉덩이를 붙이고 자리에 앉았다. 칙칙한 회색 후드 안에서 심장이 고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가만히 나이트브링어를 움켜쥐며 마음 속 선을 넘고, 입을 열었다. "나는 강인하고 흉포한 맨티코어. 에버프리 숲 깊은 곳 잡목림에 군림하는 먹이사슬의 최상위 포식자. 그 누구에게도 등을 보이지 않았으니, 목숨 붙은 것으로 내 얼굴을 들여다본 자는 내 목구멍 너머를 보게 될 것이니, 그 누구도 나와 대적하고 살아 돌아간 자 없도다."
"하아! 아이구 뮈이이이이이친." 디스코드가 비웃음 가득한 얼굴을 한쪽으로 홱 기울였다. 래리티의 작업 테이블 위에 아슬아슬하게 고개가 멈췄다. "앞으로도 계속 그런 식으로 하면 메인해튼 한 잔*25 다 마시기도 전에 네 작고 소중한 나이트브링어는 영영 내 손에 넘어가 버릴 텐데? 흠흠."
디스코드가 몸을 뒤로 젖히더니, 맹금의 눈과 구부러진 부리를 만들어 보이며 말했다.
"나는 그리폰, 하늘에 군림하는 자다." 디스코드가 한 쌍 날카로운 발톱이 돋친 손을 들어 보이며 사자의 꼬리를 만들어내 내보였다. "야생에서의 생존은 물론이고, 구름 위를 오가며 대머리 포니들 반짝이는 머리 위로 똥을 싸지르는 습성까지 극복한 위대한 진화를 이루었도다." 디스코드가 날개를 만들어 천장 가까운 곳을 떠다녔다. 그 와중에도 그 음흉한 시선을 잠시도 떼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우리 안 깊은 곳에 잠든 육식동물로서의 본성을 아주 억누를 수는 없었으니, 지상에서 흉포한 맹수로 악명을 떨치더라도 우리 앞에서는 손쉬운 사냥감에 불과하다." 디스코드가 커튼을 잡더니 맹금의 날카로운 눈으로 숲 속을 들여다보는 양 몸짓했다. "강인하다는 맨티코어도 지나는 내가 마침 허기지다면, 그 즉시 덮쳐든 이 몸의 발톱에..." 디스코드가 완연한 드라코네쿠스의 형상으로 벼락처럼 내 코앞에 떨어지며 정신 나간 살인마처럼 섬뜩한 웃음을 지었다. "...두 눈이 뽑혀나와 피를 철철 흘린다오! 맨티코어가 아무리 강인해 봐야 빠져나간 피 앞에 무력할 뿐이니, 가만히 기다렸다가 살이 토실토실한 다리만 뜯어 들고 산 속 둥지로 돌아간다네." 디스코드가 물러서더니 아주 즐거운 눈치로 털이 숭숭한 가슴을 앞발로 툭툭 쓸었다. "이건 뭐 거저 주는 거랑 똑같구만. 그쪽 차례야."
몸을 꼿꼿하게 펴고 말했다. "나는 용, 세상에 대륙이 생겨나는 것을 목도한 자들이다. 시간이 가르친 지혜 앞에 그리폰의 행태는 그저 야만성을 벗지 못한 살육귀들에 불과하느니, 무력으로 개입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치악력은 그리폰의 깃털과 가벼운 뼈를 손쉽게 찢어놓을 수 있고 우리의 목구멍은 남은 살점을 한 번에 삼킬 수 있을 정도로 넓다. 혹여나 잘 만들어진 금속 공예품을 갖고 있기라도 하다면 잘 가져와 내 창고에 넣어 두리라."
"흐음... 살벌하구만. 마음에 들어!" 디스코드가 실실 웃으며 거꾸로 공중제비를 넘더니, 캐러셀 부티크의 마네킹 중 하나의 등짝에 올라탔다. 손가락을 딱 퉁기자 금속 갑옷이 생겨나 그자의 온몸을 감쌌다. 손에 쥔 굵고 긴 창을 휘저으며 디스코드가 말했다. "나는 이퀘스트리아 왕실 기사단 앞에 서약한 기사라, 포악한 용들이 지배하는 땅을 우리의 것으로 하겠다는 서원 하에 유구한 세월에 걸쳐 무예를 갈고 닦았도다. 날랜 몸은 도마뱀 놈들의 구역질나는 날숨을 피해 돌격할 만하고, 숱한 전투로 다져진 전투 기술로 저 무시무시한 아가리를 능히 피할 수 있느니. 이퀘스트리아의 장대한 역사에서 얻은 지식은 용의 간교한 속임수를 환히 비추고, 내가 든 칼은 놈의 사악한 지혜가 샘솟는 대가리를 물리적으로 파훼하고도 남으니 감히 내게 지혜로 대적하지 못할지라! 그리하야 놈을 효수하여 높은 창에 꽂아 사악한 용이 죽었음을 만천하에 선포하며 왕성으로 향하나니, 마땅히 내 승리의 함성이 앞을 밝힐지어다. 용의 존재는 자연히 그 용을 죽일 자를 암시한다고!" 디스코드가 투구 바이저를 슥 밀어 올리더니 눈을 찡긋했다. "자, 그쪽 차례야."
나는 절박하게 머리를 굴리며 초조한 마음으로 의상실 바닥을 쳐다보았다. 일 초가 지날 때마다 심장이 더욱 빠르게 고동쳤다.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해답에 고개를 들고 디스코드를 마주했다. "나는 역병일지라, 감히 걷잡을 수도 막을 수도 없는 끔찍한 존재로다! 그대가 창에 꽂아 개선한 용의 머리를 비롯해 많은 곳에 이미 나 있으니. 그대의 갑옷과 전투 기술, 끈질긴 투지도 균이 그대의 몸에 스며 오장육부를 섬유나 다름없게 만든다면 아무 소용 없는 것일지라. 드높은 자부심으로 역병을 막을 수는 없으리. 그대가 자랑하는 문화를 가지고 눈으로 볼 수 없이 작은 균을 막겠는가? 그대가 깨닫고 나면 이미 때는 늦으리. 그대의 왕국에 살아남은 자는 절반이 이미 죽어 없어졌을 것이고, 용을 죽여 얻은 자랑스러운 승리 또한 얼마 가지 못하리라."
"생각을 잘 했어야지, 꼬맹이Au contraire, mon petite equine." 디스코드가 손가락을 퉁기자 흰 실험실 가운과 청진기가 나타났다. "의사 양반, 간호사, 전문 외과의... 아 젠장, 나는 의학이로다. 그대 역병이 쓸고 지나간 자리에서 끝내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은 그대를 상대할 대적자인 의학을 꽃피웠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아무리 머릿속에 뇌 대신 국수 사리가 들었다지만 뭔진 몰라도 아주 작은 게 존재하기는 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자들의 헌신과 연구 끝에 도저히 실현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경우라도 사람은 상대할 방법을 찾아냈도다. 우리 검과 철퇴가 아닌 정제된 치료법과 멸균 작업으로 그대를 상대하느니. 나 의학이 사람의 뒤를 살피고, 저들의 건강과 활기찬 생활을 보증하도다. 그대 역병의 힘이 강대하기는 하나, 의학 또한 그대를 보고 배우며, 더 진화한다." 디스코드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이를 번득였다. "그리하여, 살아남는다."
"나..." 나는 헐떡이며 숨을 내뱉었다. 집중력이 떨어져 가고 있었다. 내가 셀 수조차 없이 오랜 세월을 살아온 전능자를 상대하고 있는데, 그자보다 말할 거리가 많기는커녕 당장 맞받아칠 거리가 계속 생각날 거라는 생각은 어디서 나온 걸까? 좀 더 대담해져야 했다. 기회를 포착하고, 판을 바꿔야 했다. "나는 경제 원리다!"
디스코드가 청진기를 내게 들이대며 눈을 부라렸다. "엉?"
"나는... 돈이다. 자원은 희소하다. 그러므로 만인이... 그 의사들조차 자기들, 자기 가족들 밥은 챙겨 먹여야 한다. 외과의사들은 더 잘 먹어야 하겠지."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꼭 움켜쥔 나이트브링어를 가까이 안았다. "나는 필요의 원리요, 얼마 남지 않은 당근과도 같다. 의학이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희소성이란 제약을 받아 실제로 살필 수 있는 범위는 극도로 좁혀지지. 만인에게 세상 모든 재화를 공급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문명은 없다. 기나긴 세월을 거쳐 사회는 변하고 또 바뀌었고, 사라지기도 하고 나타나기도 했다. 최소한의 지각 정도는 갖춘 문명화된 자들에게 나는 반드시 작동시켜야 할 필수불가결인 허깨비였고, 그것으로 나는 그 기나긴 세월 모든 곳에 있었다. 만인이 알리콘과 같이 강력한 권능과 신성불가침의 신체를 얻게 되는 날이 오지 않는 한, 건강한 삶에 대한 욕망은 언제나 존재할 것이며 그러므로 앞으로도 이를 부정당하지 않으리라. 그러니 각자 적성에 맞는 길을 따라가더라도 특히 전문화된 직업군에서 나, 돈에 더욱 집중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일반의든 전문의든 간호사든 사람 돕는 일을 천직으로 하고 있기는 하나, 이들은 동시에 스스로를 구원해야 한다. 사람들 머릿속에서 내 존재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 한, 대증요법은 앞으로도 만연할 것이고 질병 또한 결코 없어지지 않으리. 아무리 고결한 일이라 해도 돈이 개입하는 한 그 위대함이 계량화되는 것을 피할 길 없으니, 결국 스스로의 고결함을 희석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헌신의 위대함과 그 가치를 폄훼하지는 않겠다만, 세상 모든 것에 가격표가 붙어 있음도 부정하지 말라."
"잘 들었고, 이리 내놔." 디스코드가 발톱 돋친 손을 나이트브링어를 향해 뻗었다.
나이트브링어를 홱 돌려 숨기며 얼굴을 구겼다. "아직 네가 이긴 거 아니거든!"
"아니 야, 경제라니? 진심?!" 거의 농담하는 투였다. "듣다가 지루해서 거의 곯아떨어질 뻔했다. 애매모호한 걸 갖다 넣으면 어떡해!"
"그쪽이 말한 의학이란 것도 불분명하긴 매한가지거든!"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거야, 마담 라이미. 애초에 시작할 때부터 어떻게 하자고 제한 걸어둔 거 아니잖아."
"그러니까, 그만 밍기적거리고 괜찮은 공격이나 하나 날려 보라니까?!" 고개를 쳐들고 씩 웃으며 말했다. "아하. 너 나보다 창의력이 딸리는구나?"
"오호오... 오호 호 호 호 호..." 디스코드가 손가락 마디와 무릎을 꺾더니, 머리도 두 바퀴 꺾어 돌렸다. 나를 보는 얼굴이 내내 씩 웃고 있었다.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해 보자 이거지, 꼬맹아? 그럼 이 몸이 우주적 원리를 마음대로 다듬고 주무르는 게 어떤 건지 친히 보여 주마!" 디스코드가 몸을 한쪽으로 기대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섬광이 번쩍하더니 짙은 푸른색 솜털과 별이 총총히 새겨진 마법사 모자와 로브를 걸친 유니콘 하나가 톡 튀어나왔다. 그녀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나 위대하고 강력한 트릭시는 마땅히 사전 허가 없는 일련의 무례한 행위에 대한 해명을 요구..."
디스코드가 그녀를 뻥 하고 차 구석으로 치웠다.
"읍!" 모자와 망토에서 몸만 쏙 빠져나와 의상실 한쪽 구석에 있던 루비 상자에 가 부딪쳤다.
"거기 친구들 많네! 거기 있어!" 디스코드가 딱딱거리는 투로 내뱉었다. 그리고는 뾰족모자를 머리에 쓰고 망토를 한쪽 팔에 걸치며 등 뒤로 빛나는 연기와 불꽃을 피워냈다. "나는 신비의 극치요, 깊고 고요한 밤의 부동심조차 들뜨게 만드는 불꽃이라." 망토 뒤에서 디스코드의 얼굴이 삐죽이 튀어나와 음침하기 짝이 없는 웃음을 지었다. 의상실을 가득 채운 불꽃놀이로 두 눈이 반짝거렸다. "그 누구라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 없고, 욕망의 극단에서 나를 열망하지 않는 자 또한 없느니!" 디스코드가 두 팔을 들어올렸다. 한쪽 손에 불길이 일었고, 반대쪽 손에는 서리와 냉기로 가득한 구름이 꿈틀거렸다. "세상 모든 원소가 내 앞에서는 꼭두각시에 불과하고, 세상의 이치를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 보이는 질서는 파괴의 대상이요 보이지 않는 질서는 창조의 대상이니라." 디스코드가 유리창 쪽으로 몸짓하자 판유리 위로 노란 별의 형상이 하나씩 그려지기 시작했다. "하늘이 갈라지고 땅이 쪼개지는 것도 내 변덕과 유흥거리에 지나지 않으니." 디스코드가 내 쪽으로 불꽃 몇 개를 날리더니 딱딱 소리와 함께 튕기는 잔불을 향해 날카롭고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엇을 욕망하든 내가 만들어낼 수 있다. 신비 앞에 종이쪼가리나 동전 몇 개가 별 볼 일 있겠느냐. 한정된 자원이란 제약도 내게는 아무 의미 없으니, 경제 원리도 쓰레기에 불과하며 세상 모든 자들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그대로 보여 줄 수 있노라." 디스코드가 장엄한 자세를 잡자 그가 두른 망토가 등 뒤로 웅장하게 펄럭거렸다. 흐려져 가는 불빛을 향하여 빙긋이 웃은 그가 말했다. "나는... 마법일지니."
입에서 응수가 어찌나 빨리 튀어나갔는지, 나 스스로도 당황스러웠다. "나는 과학이다!" 나는 픽 웃었다. "정밀한 관찰과 실험이야말로 사람이 세상의 진리를 파악하는 수단이지. 마법조차 이를 거스르지 못한다!"
"야, 이건 아니지..." 디스코드가 이쪽을 쏘아보았다. 그와 동시에 그가 만들어낸 각종 장난들이 벽돌 조각처럼 바닥에 떨어졌다. "내가 먼저 의학 얘길 했잖아." 디스코드가 발톱으로 나를 가리키고 말했다.
"실무적인 얘기를 하자는 게 아냐!" 나는 픽 웃으며 큰 소리로 답했다. "보다 형이상학적인 얘기, 삼라만상에 적용되는 우주의 질서를 말함이로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마법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가? 원리가 규명되지 않은 것은 마법으로도 만들 수 없다. 사람의 힘으로 도저히 가질 수 없었던 것을 마법으로 성취하는 것이 가능한가? 신비로운 힘이라고 해도 그 에너지를 다루는 일은 반드시 특정 방법론에 의거해야 한다. 세상의 법칙은 그 무엇으로도 왜곡하거나 바꿀 수 없고, 위조도 변조도 불가능하다. 마법이 전능한 권능과 헤아릴 수 없는 힘을 부린다고 하나, 그 또한 과학의 힘으로 설명되는 것이다. 나는 사람이 끝내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우주의 원리만큼은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존재한다. 비록 저들이 보지 못한 진리가 있는지조차 파악할 수 없는 자들이라고 하나, 아직 규명되지 않은 것이 있음을 알고 원리를 알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알며 알아야 할 것들이 더 남아 있는 것 정도는 알 정도의 분별은 있다. 원인 없이는 결과도 없다는 명명백백한 진리에 대한 선언으로, 나 지각 있는 자들의 머릿속에 굳건히 서 있으리."
"흐음..." 디스코드가 몸을 뒤로 기울이며 망토를 끄르고 모자를 벗어던진 뒤, 턱을 긁적였다.
"끝났냐?" 얼굴을 구기고 물었다. "자?! 더 갖다 댈 거 없지?"
디스코드는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나이트브링어를 단단히 움켜쥐며 딱딱하게 물었다. "끝났냐고?!"
디스코드가 눈을 깜박이더니, 씩 웃으며 "그럴 리가..." 한 마디를 던지고 손가락을 딱 하고 퉁겼다.
전신의 감각이 빠져나갔다. 비명을 지르려고 해도, 입 밖으로 나오는 거라곤 입김뿐이었다. 나는 자리에 쓰러졌다. 의상실 마룻바닥이 아니라, 웬 창백한 대리석 같은 돌이 깔려 있었다. 전방위로 무시무시한 추위가 들이닥쳐 온 몸이 경련하며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몸을 떨며 눈을 치켜떴다. 설마 눈알이 눈구멍에 붙은 채 얼어붙은 건 아닐까 두려웠다. 천상의 문장을 드리운 대성당이 보였다. 상황을 파악하고 나는 대경실색했다. 심장조차 얼어붙어 놀란 가슴에 갈 피를 바쁘게 흘려보내지 못했다.
"여기... 포, 포, 포니빌이 아니잖아..." 이를 딱딱 부딪치며 말했다.
"이 몸은 평신도 노릇을 해 본 적이 없거등." 우리는 캔틀롯 중심부에 위치한 천상 사원 앞에 주저앉아 달빛을 맞고 있었다. 디스코드가 내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말했다. 별 사이로 분홍 구름이 떠다니는 밤하늘과 봉헌된 대성당 위로 캔틀롯의 빈 거리에 메아리지는 그자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꼬맹이 넌 어떠냐? 기도문 정도는 읊을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막 드는데."
"너 이 자식... 사, 사, 사기를 쳐..." 나는 씩씩대며 나이트브링어를 꽉 부둥켜안았다. 원래대로라면 벌써 죽었어야 정상이었다. 성물 나이트브링어의 가호 덕분에 목숨이라도 건지고 있는 것이었다. 적어도 내 생각은 그랬다. 사실 내가 얼마나 더 견딜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귀와 발굽, 코의 감각이 빠져나가며 얼굴 근육이 마구 경련했다. "포, 포니빌에서 이, 이, 이 정도 거리까지 머, 멀어지면 저, 저, 저주가 무, 무슨 짓을 할지 알고 있었구나 너..."
"사소한 거 하나하나 가지고 계속 딴죽 걸 거였으면 처음부터 규칙을 상세하게 정해 놔서 이런 일이 없도록 했어야 할 거 아닌가, 게임마이스터!" 디스코드가 얼굴을 찌푸렸다.
"돼, 돼, 됐고, 도, 도, 돌려놔..." 침을 탁 뱉으며 쏘아붙이려고 했는데, 입 밖을 떠난 침이 곧바로 입에 달라붙어 얼어 버렸다. 나는 쌕쌕대며 우는 소리로 애원했다. "제, 제, 제발..."
"쉬이이... 꼬맹아, 잘 듣기나 해." 디스코드가 내 등 뒤로 유유자적하게 걸어가 대사원의 넓고 큰 나무문을 향했다. "내 말 안 듣고 헛짓거리하다가 지고 싶진 않잖냐. 내 말 틀려?"
힘없이 몸을 틀어 디스코드를 올려다보았다. 흘러내린 눈물이 순식간에 얼어붙어 푸른 수정처럼 굴러 떨어졌다.
디스코드가 몸을 돌려 나를 마주하더니, 대성당의 드넓은 정면을 장엄한 몸짓으로 가리켰다. "과학이라?! 하! 과학 따위 엿이나 먹으라지! 이 믿음 없는 자야..." 디스코드가 빙글빙글 웃으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주 냉혈한이구나 너."
나는 쌕쌕대며 몸을 웅크리고 두 앞다리를 한데 모아 비벼댔다. 후드가 굵직한 삼베로 짜낸 수의처럼 느껴졌다.
"아직도 내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겠나? 얼마나 오랜 세월을 살아온 존재인지 정말 모르겠어? 이 몸은 우주보다도 위대하고, 세상에 질서가 생겨나기도 전부터 존재한 분이시다 이거야!" 솜사탕 구름이 떠가는 밤하늘 위로 총총히 뜬 별을 가리키며 디스코드가 말했다. "별자리를 구성하는 하늘 위 천체들이 보이나?! 나는 저것들이 나타나 빛나기 시작하기도 전부터 어둠의 심연에 도사리고 있었는데 말이지. 아하, 혹시 눈치 깠을랑가 모르겠는데, 허허, 저것들 중 한두 개쯤은 내 손길이 닿았을 수도 있다 이 말씀이야. 네가 말하는 그 잘난 과학으로 이 사태를 설명할 수 있나? 내 감히 말하건대, 절대 아냐. 왜 굳이 심장이 뛰어야 하는지 설명할 수 없고 기적이 일어나는 이유를 해명하지 못하며, 산 것들은 모두 죽어야 한다는 진실을 부정하지도 못하는 게 네가 말하는 그 과학이란 놈의 한계야. 위대한 어머니는 과학, 아니지, 누가 처음으로 생각이란 걸 하기도 전부터 존재했던 양반이거든."
디스코드가 혀를 쯧, 차더니 팔을 쭉 뻗어 손가락으로 나를 겨누었다.
"그 모든 의문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묻다니 간덩이가 부었구나! 그래, 우리 꼬맹이 과학자는 세상 만물을 다 아는 것 같나? 조그만 과학철학자야, 대답해 보시지?!" 디스코드가 발을 질질 끌며 다가와 내 앞에 섰다. "그래, 우주의 질서라는 게 있긴 있지... 그게 있다면 그 질서를 만들어낸 자들도 있을 텐데, 감히 내게 과학을 들먹여?" 디스코드가 쪼그리고 앉아 손을 뻗어 내 얼어붙은 얼굴을 들어올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자는 실실 웃고 있었다. "내 대답은 신격, 그 자체다."
디스코드의 말려 올라간 입술을 그렇게 가까이에서 보기란 참으로 고역이어서, 눈이 파르르 떨려 왔다.
"자 그럼, 우리 마담 라이미. 네 대답은 뭐지?"
나는 씩씩대며 겨우 혓바닥을 움직였다. 입 안에 온통 감각이 없었다. 더듬거리며 나는 말했다. "나는 인정이다."
디스코드의 가지뿔 아래로 펼쳐진 이마가 주름졌다.
겨우 힘든 숨을 다시 들이마시고 말을 이었다. "그래. 내 대답은 인정이다. 주, 주,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자들끼리 챙기는 예의를 말하는 게 아니야. 너, 너 같은 신격에게 적용되는 종류를 말하는 것이지. 너희 같은 시, 신격이라면 세, 세상의 규칙을 가지고 노, 놀 수도 있겠지만, 너 자, 자, 자신이 세운 규, 규칙은 그대로 따라야 할 채, 책임을 지니까."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발굽에 얼굴을 묻었다. 한없는 비참함 속에서 나는 말했다. "네가 사, 사악할 수 있는 것은 네가 서, 선량할 수 있기 때문이지. 신격으로서 갖는 권능은 신격으로 창조한 유약함이라는 개념이 존재하기 때문에 성립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신격으로서 가져야 하기에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파괴하고자 하는 파괴신의 개념은 그 끝에 신의 존재를 인정할 자가 남지 않으므로 성립하지 않지. 그러므로 신성이란 개, 개념은 만물이 생겨난 시점에서 모든 곳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어. 모든 곳에 존재하는 시점에서 신격에 귀속된 강대한 권능이 자연 원리로 격하되는 것은 피할 수 없으니까. 필멸자들은 상호 존중이라는 굴레에 영원히 매이는 것으로 존재의 균형을 찾게 되지. 신격으로 존재하기 위한 저울추를 얘기하자면, 권능의 반대쪽에는 반드시 사람들의 인정이 필요해. 신격을 인정하고 숭배하는 것으로 우주의 모든 원리가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이니, 인정이랴말로 마땅히 모든 생명의 워, 원천이라 할 터다."
"흐음...... 맞는 말이야." 디스코드가 몸을 일으키더니 다시 손가락을 퉁겼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지?"
한 마디 비명과 함께 내질러진 숨결이 공기 중에서 얼어붙어 결정화되며 깨진 유리 조각처럼 풀잎 위로 떨어져 뒹굴었다. 구름 덮여 뿌옇고 칙칙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는 허공을 뒹굴었다. 이퀘스트리아 북부에 분포하는 침엽수의 뾰족한 잎사귀가 바로 아래 펼쳐져 있었고, 흐려서 잘 보이지 않는 시야 너머로 몇 개인가 깎아낸 대리석이 서 있었다. 그곳은 묘지였다. 저 멀리로 위니페그의 마천루가 아득하게 보였다. 디스코드가 바로 옆에 있던 묘비에서 갑자기 톡 튀어나와 방방 뛰며 드넓은 묘지 위를 쏘다녔다.
"내가 세상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잘 보도록 해. 이 얼마나 멋지고 쓰라린 풍경인지 말이야. 타고 남은 재와 각종 쓰레기, 폐기물을 파묻으려고 땅을 얼마나 파대야 했는지 똑똑히 보라고!" 디스코드가 직사각형 모양 묘비로 폴짝 올라서더니 발레의 한 동작Pirouette처럼 한쪽 발로 서서 핑핑 돌다가 정확히 나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방향에서 딱 멈추었다. "헌데, 과연 이 몸이 항상 이렇게 단정하고 말쑥한 흔적만 남겼을까? 아니, 아니, 그럴 리 없지!" 디스코드가 훌쩍 뛰어 내려오더니 크고 높은 첨탑에 등을 기대고 섰다. 천 년 전, 나이트메어 문이 반역자 군단을 이끌고 충성파 군단과 정면 충돌하던 때 전투에서 쓰러진 이름 없는 병사들을 기리는 탑이었다. "굳이 처음부터 만들어서 땅에 피와 살점을 흩뿌리는 것보다는, 이미 있는 걸 찢어서 쓰는 게 더 편하지. 이 몸 때문에 아내들은 과부가 되었고, 자식들은 유복자가 되었다. 적당한 멍청이 한두 놈 골라서 이단으로 몰아 손수 목을 매달아 준 적도 있고! 하!"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뱃속의 태아처럼 몸을 웅크려 나이트브링어를 껴안았다. 그러고 있으면 단 몇 초라도 더 살 수 있을 듯싶었다. 이때쯤 되니 다리의 모든 감각이 마비되었고, 피부에도 핏기가 가셔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눈물을 짜내거나 울먹거리려 할 때마다 찌르는 듯한 고통이 허파를 마비시켰다. 저주가 이끌고 온 끔찍한 추위가 내 몸의 통제권을 가져가서, 내가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소리가 계속 줄어들었다. 이제 나이트브링어의 권능으로도 내 목숨을 더 부지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생각해 보자고. 내가 정의를 세우겠다고 이 짓거리를 했을까? 내가 벌인 살육에 과연 숭고하고 위대한 대의가 있었을까? 당시 내가 벌인 무자비한 학살 행위를 두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 근데 사실을 하나하나 따져 보면 말이다..." 디스코드가 묘비 아래로 내려와 뱀처럼 미끄러지는 걸음으로 내게 다가오더니, 내 마비된 귀 한쪽을 붙잡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 짓에는 딱히 이유가 없어. 그게 나한테 자연스러운 행위라서 한 것뿐이지."
나는 떨면서 디스코드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왜... 하 하! 잘 봐, 세상 만물이 다 그렇게 돌아가는 거 아니겠어?!" 디스코드가 몸을 일으켰다. "신격이 인정, 믿음을 통해 정의되고 거기 구속되는 건 맞아. 왜냐, 그게 신격에겐 자연스러운 거거든! 자기한테 안 맞는 걸 굳이 할 필요 있나? 신들도 나름대로 할 게 있지만, 그걸 하려면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 갖다 붙여야 한단 말이지. 그런고로 이 몸은 그냥 그 빈틈을 적당히 이용한 것뿐이라는 거야. 네가 사랑해 마지않는 이퀘스트리아를 내버려 두고 위대한 어머니가 사라진 것도, 자기네들의 같잖고 사소한 내전으로 자기네 어머니의 유산을 갈갈이 찢어놓은 두 공주도 마찬가지지. 너희 벌레 같은 미물들 수준에서도 늘 있는 일이기도 하고! 아, 도저히 눈 뜨고 못 봐 주겠더만!"
디스코드의 몸이 떠오르더니 묘비 위로 올라 쪼그리고 앉았다. 빙글빙글 웃으며 손가락 마디로 턱을 받치고 기분 나쁜 눈초리로 나를 내려다보다가, 그자가 말했다.
"어차피 나이트브링어가 내 손에 들어올 건 뻔한데, 그 뻔한 일을 조금이라도 늦춰 보겠다고 네가 그 조그만 머리를 굴려서 멍청한 방법을 생각해 낼 때도 그렇지. 네가 목숨 부지하겠다고 꿈틀거리면서, 예전 같았으면 부끄럽고 참담해서 못 한다고 뻗댔을 일까지 하게 될 때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아주 방금 전, 하 하, 이 난리법석을 막아야 한다고 트와일라잇 스파클의 집까지 미친년처럼 뛰어갈 때는 특히 더 그랬어. 더 물러날 곳이 없는 자들은 자기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다, 이 말씀이야. 알아듣겠냐, 꼬맹아. 상대를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갖다 들이밀 핑곗거리가 산재하고 창피한 줄은 모르는 세상이 바로 이 물질우주다 이거지. 왜 잔학하고 잔인한 존재가 있을 수 있는 건지 궁금했겠지? 그건 바로 이것 때문이지."
디스코드가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붉은 눈동자가 별빛을 튕겨냈다.
"내 대답은, 이기심이다."
이 때 나는 과호흡하며 라임그린 색 공이라도 된 양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간헐적으로 발작처럼 터지는 숨 사이 어딘가에서 문득 죽음이 고개를 내밀었어도 그닥 놀랄 일은 아니었다. 내 가슴 가장 깊은 곳에서 꽃피는 희망과 체념에 관한 생각이 내포한 온기에 명줄을 의지하는 판국이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한없이 유약하고 부박했지만 동시에 절박한 생각이었고, 그래서 걸어 볼 만 했다.
그래서 나는 거기에 걸어 보기로 했다. "나는 한밤중에 아이를 안아 달래는 어머니의 품이고, 아버지의 나직한 목소리." 입술의 핏기가 다 사라져 검푸른 색으로 변해갔다. 고개를 들어 디스코드를 마주보았다. "네 모든 꿈이 전부 죽어 쓰러진 뒤 문득 찾아온, 받아 볼 수 있을 거란 생각도 없었던 미소. 단 하루밖에 만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하루를 위해 대륙을 횡단하는 자요, 해야 할 일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 옆에 있어 주는 일꾼, 충성스러운 병사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강대한 적병들 앞에 나아가 항복하는 지휘관. 한없는 한기와 어둠 속에서도 심장을 끝내 뛰게 하는 것. 내가 있어야 선량한 행동에 자비가 깃들고, 악랄한 행위에 잔혹성이 생겨나니. 나는 평화가 유지되어야 할 이유이고, 기쁨이 계속될 근거이며 슬픔의 원천이기도 하나 동시에 웃음을 터뜨리는 뇌관이기도 하다. 자기 자신을 배반하는 한이 있더라도 인내하고 희생하며 헌신하게 하는 원동력이니, 이기심으로 내 배를 채울 수는 있더라도 나를 구원하지는 못한다......"
디스코드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얼어붙은 서릿발을 깨뜨리고 한 방울 눈물이 떨어짐과 동시에, 나는 울며 말했다. "나는 사랑이다." 숨이 막혀 기침을 토해내다, 겨우 말을 이었다. "기나긴 시간 동안 네가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을 가, 감정이라 생각하는데......"
내가 상대하고 있는 존재가 다름아닌 괴물이라는 것은 항상 주지하고 있었지만, 디스코드는 아무리 심각한 상황이라도 특유의 발상력으로 전혀 심각하지 않고 유쾌한 상황처럼 느껴지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문제는, 내 입 밖으로 나온 마지막 말을 들은 디스코드의 얼굴에서 그런 종류의 유쾌함이나 발랄함 같은 것이 전부 지워짐과 동시에 내가 마주한 존재의 본질을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디스코드는 측량할 수 없이 냉혹한 적의, 그 자체였음을 나는 죽음의 잔혹한 위협 속에 비로소 깨달았다.
"슬슬 이 장난질도 끝내야겠군." 디스코드가 재미없다는 듯 금속질의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는 양손의 손가락을 동시에 튕겼다.
묘비가 땅 속으로 가라앉았다. 위니페그의 마천루로 솟구친 지평선이 아래로 거꾸러졌다. 모든 별이 사라진 하늘이 새까맣게 변했다. 태양은 사그라들었고, 달은 산산이 부서져 사라졌다. 새하얀 서리가 대지를 뒤덮었고, 그 위로 습기라고는 없는 차가운 바위들이 삐죽삐죽 솟아났는데, 우리 주변에서 희미하게 퍼지는 음침하고 창백한 빛을 받아 반짝이는 녹슨 철판을 보는 듯했다. 저 너머로 보이는 궁창이 회오리바람처럼 소용돌이치며 그 덩치를 키우더니 아무 이유나 목적도 없이 우리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천둥 소리가 들렸다 싶었지만, 감각이 거의 사라진 귀가 내 막힌 숨을 잘못 들은 것이었다.
그 황량한 모습 앞에 선 디스코드의 모습은 문득 냉혈하고 무자비해 보였는데, 눈송이와 진눈깨비 방울이 두 손에 날아와 붙는 모습이 디스코드 스스로 눈과 진눈깨비를 뿌리우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내게 등을 보인 채 생명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막막한 지평선을 향하여 몸짓했다. 시신을 경매에 붙이려는 경매인의 목소리처럼 무감정하고 모든 어조가 거세된 목소리가 폭풍과 같이 메아리졌다.
"나는 바다를 말리고 숲을 없앤다." 황폐화된 대지의 석화된 표면을 디스코드의 발톱과 발굽이 긁었다. "바야흐로 목숨이 사그라들고, 거기 결부된 모든 법칙과 인정도 그 뒤를 따르나니, 내 영역에 들어선 순간 이는 거스를 수 없음이라."
나는 쓰러진 채 몸을 떨며 디스코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성격 자체가 뒤바뀌어 버린 듯한 그 상황에 대한 생각을 놓을 수 없었다. 내 대답에 뭔가 특히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라도 있어서 저런 것이었을까. 내 말이 저 기만자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을 건드려 칼이 겨눈 방향을 비틀어도 단단히 잘못 비틀어 버린 것은 아닐까. 왜 갑자기 판을 서둘러 끝내려고 하는 거지?
디스코드는 우리 눈 앞 죽음의 땅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무감정하게 말했다. "나는 일출 너머의 존재요, 천체의 공전 저편에 있도다. 더 태울 게 없어진 태양의 불꽃이 사그라들 때 나 그 곁에 있을 것이며, 달이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지더라도 나 홀로 당당히 서 있으리. 기록할 수 없는 것을 기록하려는 과학과, 정복할 수 없는 것을 감히 정복하려는 마법의 헛된 시도가 무위로 돌아간 뒤, 그 둘이 정복과 기록을 시도했던 수많은 종류의 에너지조차 엔트로피를 견디지 못하고 증발할 것이다. 감히 내 존재를 무시하고 오만방자하게 구는 짓과, 나를 피해 달아나려는 짓만큼 무용한 일은 없도다......"
디스코드가 빚어낸 광경을 흘끗 쳐다본 순간, 깜짝 놀란 몸이 파르르 떨렸다. 너무나 익숙한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나와 앨러배스터를 제외한 그 어떤 자도 이 장소를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사랑도 결국 말에 불과하지." 디스코드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신성하다는 말만큼이나 부박한 말이 사랑이다. 다른 뜬구름 잡는 말들과 마찬가지로 사랑 또한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고. 죽음, 욕망, 심지어 편의 때문에 사랑 같은 애매모호한 감정들은 순식간에 정리되기 마련이다. 우주에서 그나마 무한히 지속될 만한 게 뭐가 있을 것 같나? 빛도, 중력도, 물질도 아니다. 권태지. 세상 만물이 지루해 죽겠다며 실제로 죽음에 이르더라도 그게 잘못된 것인가? 저 항성이 영원토록 수소를 태우며 빛날 수 있을 것 같나? 암흑물질이 우주를 무한히 넓히고 또 넓힐 수 있을 것 같나? 저항이 없더라도 모든 에너지는 스스로 약해지고 줄어들게 되어 있어. 설마 이게 영겁의 세월은 고사하고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이라도 권태감을 깨 줄 만한 사실이라고 생각하나? 어떤 잔치든 결국은 끝나기 마련이다, 꼬맹아. 아주 크고 장대한 잔치라도 예외는 없지. 감정, 인정, 희망을 아무리 모아 봐야 우주가 생겨나고 시간이 존재하기 전부터 존재했던 결론은 바꿀 수 없다. 모든 우주와 시간이 다다를 종착역은 단 하나뿐이지."
무엇인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까지 머릿속에 들어 있기는 했지만 디스코드가 늘어놓은 장난질에 분개하고, 그 때까지 선보인 악랄함을 두려워하여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 머리에 떠올랐다. 다시 솟은 힘으로 시선을 움직여 디스코드를 겨냥했다.
"너였구나." 나는 말을 더듬었다. "그 여자의 서방이라는 자가..."
"나는 우주의 모든 열에너지와 운동에너지의 마지막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디스코드는 계속 말했다. "내 앞에서는 끝내 빛도 스러져 사라질지니, 모든 물질과 에너지가 죽음에 달하리라. 나는 모든 생명의 끝이요 만물의 종말이나니 그 누구도 더는 사고할 수 없으리. 과학과 신앙의 모든 요소가 무너질 것이고, 그 요소에 들이댈 잣대와 절차도 의미를 잃게 될 것이다. 사랑할 것이 남지 않으므로 사랑으로 패퇴시킬 수 없고, 기대할 것이 남지 않으므로 희망의 힘으로 저항할 수 없으리라. 오직 한 마디 말로만 표현할 수 있으니 평화과 기쁨, 평정으로만 나를 받아들일 수 있으리." 디스코드가 몸을 돌려 나를 쳐다보더니, 묵직한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미래이니라." 디스코드가 차분한 걸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다가왔다. "하트스트링스, 그 어떤 것으로도 미래를 이길 수는 없음은 알겠지. 아무리 용을 쓰고 애를 써도, 아무리 자기를 속여 봐도,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얻는 게 있고 성장하는 게 있다고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해 봤자 결국 성장하는 것도, 얻는 것도 없으니까."
디스코드가 무릎을 꿇고 앉아 조심스러운 손길로 성물에 손을 뻗었다.
"뭐, 그래도 재밌게 놀기는 했지. 안 그런가?" 순간 낄낄 웃을 것 같은 표정을 지은 디스코드가 순식간에 표정을 바꿔 이마를 찌푸리자, 다시 냉혹한 기운만 주변에 감돌았다. "노는 건 언제나 재미있지. 놀이가 끝나면 그것도 끝이다만. 자, 그럼 이리 내놔..."
혼돈의 군주는 굳이 자기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고 강조함으로서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한다는 것을 자인하고 있었다. 궁창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직접 목도했을 그 자의 새빨간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말을 뱉었다.
"내 차례지."
디스코드가 한쪽 눈썹을 치켰다.
"나는 그 무엇도 구성하지 않으니, 이는 내가 재료가 아닌 본질이기 때문이라. 나는 우주를 탄생시킨 가락의 박자요, 그 최후로 인도하는 간주로다."
얼어붙은 사지를 타고 피가 솟구치면서 숨이 가빠 왔다.
"만물에 찾아들 종말을 예고하는 절망의 선고자이며, 동시에 그 선고를 조롱하는 생명의 힘찬 옥타브이니 나는 창조의 이름으로 그 모든 것을 써내려간 가사이니라. 창조와 파괴 너머 그 이상의 존재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 예술이로다."
이게 무슨 헛소린가 싶은 혼란과 본능적으로 찾아든 역겨움이 디스코드의 우거지상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밝은 녹색 빛이 그자의 주변에서 반짝인 덕분에 나는 알 수 있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 뿔을 밝혀 극도로 섬세하게 짜낸 마력의 가닥을 나이트브링어에 흘려보내 내 마비된 사지로는 도저히 할 수 없을 방법으로 그 검은 현을 조금씩 움직였다.
"예술은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 구조의 연장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구성 원리를 하나로 묶는 형이상학의 저편에서 태어난 꿈들을 짜낸 장대한 태피스트리일지니, 사람의 꿈에서 시가 태어나고 시에서 소리가 태어나며 소리는 다시 온기와 감동,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낳노라!"
떨리는 숨이 오르내리다, 디스코드를 꾸짖는 듯 으르렁거리는 소리로 바뀌었다. 나이트브링어의 현 하나하나가 퉁겨지기 시작했다. 현이 한 번 울릴 때마다 대지가 쪼개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꿈이 형태를 바꾸고 성질을 바꾸는 만물유전의 한가운데서 마법보다도 강력하고 인정보다도 구속력이 강하며, 모든 당위론과 신격이 그러하듯이 스스로 그 권능을 얻어 행사하는 존재가 태어나나니, 이는 세상에 본디 없던 것일지라!"
"멈춰..." 디스코드가 씩씩댔다. "게임은 끝났어, 이 미친년아!" 그자가 나이트브링어를 향해 손을 뻗자, 녹색 섬광과 함께 그 손이 튕겨나갔다. 디스코드가 잔뜩 화를 내며 소리쳤다. "거래를 했잖아!"
"그래, 그 거래를 끝내 주마!" 몸을 떨면서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네놈을 끝내 주지! 적어도 이제부터 네놈은 네놈이 알던 네놈이 아니게 될 터! 토막토막을 이어 붙여 만든 누더기 같은 육체 하나만 있는 게 아니겠지, 디스코드! 네놈의 분노와 잔혹성, 장난기 위로 한없이 오랜 세월 동안 계속 피 흘려 온 상처가 보인다. 아주 오래 전에 살점이 뜯겨나가 아물지 못한 상처가! 네 기쁨과 만족, 안락이 있었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내가 뿔을 밝혀 나이트브링어의 현을 퉁기며 곡조를 일으키고 있는 것을 그제야 눈치챈 디스코드의 눈이 툭 불거졌다. 최후의 순간까지 흩어져 은닉되어 있던 연주를 너무 늦게 눈치채 버린 전능자는 그대로 무너지며 아이를 낳는 자의 얼굴처럼, 스스로 태어나며 스스로 죽어가는 자의 얼굴처럼 구겨지고 헝클어진 표정을 지었다. "멈춰!" 디스코드가 가지뿔을 움켜잡고 마구 구부리며 경련하는 뱀처럼 몸을 웅크렸다. "그만둬라! 듣고 싶지 않다!" 디스코드가 소리치며 날려보낸 천둥과 벼락이 궁창의 묘지를 갈랐다. "멈추라고!"
"디스코드, 네놈의 괴로움과 절망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려 줄 미싱 링크, 네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 여기 있다!" 이쯤부터는 소리를 내질러야 했다. 어스름 진혼곡의 마지막 단락에 근접해 갈수록 우리를 에워싼 죽어가는 우주가 찌그러지면서 무시무시한 불협화음을 뿜어냈다. 그것은 시간조차 증발해 사라질 때나 날 법한 끔찍한 소리였다. "이것은 우리 모두를 구성하는 공통분모요, 그 어떤 경우에도 소실되지 않는다. 심장이 뛸 때마다 같이 딸깍거리며 자기를 들어 달라고, 다른 사람에게도 들려 달라고, 그리고 계속 살아가라고 속삭이는 존재다.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보기 전 우리가 직면해야 할 우리 모두의 한계를 말해 줄 뿐이라도 말이다!"
"듣고 싶지 않다!" 디스코드가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반쯤 애원하듯 외쳤다. 형상이 변화하고 있었다. "떠올려서는 안 된다고!"
"디스코드, 내가 뭘로 보이냐?!" 고적의 연안을 향하여 한 줄기 강물을 띄우듯 멜로디를 일으키며 소리쳤다. "세상의 시작이자 끝이요, 듣는 자 없더라도 우리 모두를 존재하게 하는 게 뭐라고 생각해?!"
디스코드가 머리를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
"내가 곧 노래다!" 디스코드를 제압하다시피 한 곡조 속으로 고함쳤다. 이 난리통은 아름다웠고, 그와 동시에 탄생의 순간이기도 했다. "내가 그 여자의 노래라고! 너도 노래해!"
디스코드의 눈과 입이 휘둥그레 열렸다. 내 시선이 다시 태양을 향했다. 들끓는 혼돈과 현실 사이에서 빛나는 사건의 지평선에 노출되는 것을 피하고자 나이트브링어로 몸을 가렸다. 그런데도 그 밝기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디스코드이자 세상을 집어삼킬 분노와 억하심정, 슬픔, 살의의 집합체에서 무시무시한 에너지가 뿜어져 나왔다. 만 년 동안의 고립과 무지가 무너진 끝에, 도저히 이 세상의 것이라 볼 수 없는 정령의 권능이 물질우주 전체를 단 한순간에 쓸어 버릴 기세로 연쇄반응을 일으키며 퍼져나갔다. 성유물의 빛나는 울림통이 발굽에 단단히 잡히는 느낌과 함께,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화약고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말았다는 사실을 나는 새삼 깨달았다.
"공주님 맙소사." 절멸을 암시하는 듯 뜨겁게 작열하는 열기가 피어올랐다. 패러스프라이트가 작살을 내 놓았던 포니빌의 모습이 생각났다. 캔틀롯 왕궁에서 앨러배스터가 야상곡을 연주하여 건물 태반을 날려먹었던 사건이 사로스인의 폭탄 테러로 둔갑했던 사건도 떠올랐다. 이것들이 머릿속에서 저희끼리 재조합되고 뒤섞이면서 수백, 수천억 배로 머릿속에서 마구 부풀었다. 나는 끔찍한 공포에 휩싸였다. "제기랄. 내가 뭔 짓을 한 거야?"
그 여자가 자기 사랑을 추방한 데도 이유가 있었을 텐데.
"안 돼..." 섬광이 내 몸을 덮치고, 온 우주와 그 너머까지 덮치는 것이 느껴졌다. 숨이 막혔다. 나이트브링어의 칠흑 같은 현에 얼굴을 파묻고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안 돼!" 나는 누군가의 이름을 주워섬겼다. 어린애가 된 것처럼 창피한 것도 잊고 흐느끼며 그들의 이름을 소리쳤다. 무시무시한 폭발이 몰고 올 충격파가, 문득 찾아온 침묵 속에 흔적도 없이 녹아 사라졌다. 들리는 거라곤 나 혼자 쌕쌕대며 내뱉고 들이마시는 숨소리뿐이었다.
눈을 뜨자 우주를 집어삼키고도 남았을 폭발이 조그맣고 하얀 구슬 정도 크기로 쪼그라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어둑한 캐러셀 부티크에 조용히 선 디스코드의 노란 손바닥 위에 가만히 떠 있을 뿐이었다. 재단용 핀이 떨어져도 그 소리가 들릴 법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 때 들려온 것은 애절하기까지 할 정도로 진심어린, 디스코드의 속삭임이었다.
"아리아." 디스코드가 연인의 입맞춤을 음미하듯 그 이름을 혀끝으로 하나씩 굴리며 말했다. "내 사랑하는 연가여." 디스코드가 손에 쥔 작은 빛덩이를 차분하게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두 눈은 가늘어져 있었고 입술은 굳게 닫혀 움직이지 않았다. "악마의 땅에 떨어진 천사 같은 아이. 그대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혼돈이요, 혼란이자 고독이었소."
나도 모르게 헤벌어진 입으로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디스코드를 올려다보았다. 포니빌의 온기가 사지를 타고 올라와 몸에 스미는데도, 조심스레 불러 본 이름에 날카로운 한기가 몸을 찌르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아리아라니?"
"이름은 무의미하다." 디스코드가 나긋한 어조로 손가락에 얹은 빛나는 구체를 빙빙 돌리며 말했다. "시간 또한 마찬가지지. 하지만 이 둘이야말로 바로 그 날을 구체화하는 데 필요한 재료이기도 하다. 그래. 내가 아리아를 처음 본 바로 그 날."
디스코드가 몸을 돌려 조심스럽게 창문을 향해 빛의 구체를 내던졌다. 금빛 구체가 터지며 녹슨 표면에 퍼지더니 굳어 판유리에 뒤죽박죽인 문양을 그리며 번져나가 판유리 한가운데에 호리호리한 알리콘 여신의 모습을 만들어 냈다.
"아리아는 완전한 유일성, 그 귀감이라 할 만했다. 나야 특이성이라는 개념은 그때까지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했지. 이해를 형성하거나 쌓아올릴 수도 없이 그저 불가해한 순간이라는 것밖에 모르겠더군. 처음도 끝도 없던 자리에 아리아가 나타나자 그 주위를 둘러싸고 두 궁창이 비로소 일어서서 자리를 잡았어. 그 자리는 오직 나만의 세상이었지만, 이제 아리아의 감옥이기도 한 곳이 됐다. 내가 거기 있을 걸 아리아도 예상했을까? 은밀히 지워진 추방의 굴레를 걸머지고 흘러들어온 땅에 아리아가 아닌 다른 존재가 있었을 것을 예견한 자 있었을까?"
우리 눈 앞에서 판유리 위에 소용돌이가 일었다. 그 여자의 형상을 둘러싸고 혼탁한 에너지와 물질들이 구름처럼 뒤엉켰다. 아리아의 모습을 한 무늬가 이쪽을 올려다보더니 흐느껴 울었다. 빛살이 파르르 떨리더니 구름의 형상이 이리저리 구부러지고 요동치면서 서서히 아리아의 모습을 모방해 가며 형태를 잡아 가기 시작했으나, 결코 완전한 완성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제 아리아는 한결 안정된 모습으로 바뀌었고, 자기를 조악하게 모방한 시뮬라르크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도록 내버려 두었다.
"내게 있어 유일한 지식은 아리아였고, 나는 내가 가진 지식보다 더 많이 알길 원했다. 아리아가 내게 마음을 주었으므로, 나는 아리아의 감정을 함께 느끼길 원했지. 아리아가 두려워할 때 나는 즐거워했다. 아리아가 웃을 때 나는 매혹을 느꼈다. 아리아가 슬퍼할 때 나는 굴욕을 맛보았다. 아리아는 어린애조차 되지 못한 갓난쟁이 여신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아리아를 가르치는 일은 내 일이었어야 마땅했지만, 그럴 생각은 없었다. 우리는 그저 서로를 안고 사소한 잡담이나 주절거리며 궁창 사이의 적막한 세상을 떠돌았다. 아리아는 내 고독을 달래주었고, 나는 아리아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우주가 추워질 때면 따뜻하게 해주었고, 별자리가 행여 희미해질 요량이면 별을 빚어냈다. 우리는 그렇게 둘만의 세상을 건설했다. 우리 둘만의 세상이었으므로, 그곳은 아름다웠다.
판유리 위로 지평선의 모습이 나타나 단색으로 물들었다. 지평선 위로 두 개의 네 발 달린 형상이 나타나 마주보고 달렸다. 하나는 찬란히 빛나는 모습이었고, 다른 하나는 희미하고 어둑어둑했다. 둘이 마주칠 때마다 불꽃이 사방으로 튀며 또 다른 지평선을 그려냈고, 자잘한 형상들이 그 위로 떠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리 위가 작은 별과 위성, 혜성으로 가득 찼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만, 아리아에겐 언어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둘만의 언어를 만들었다. 각자의 마음과 생각 모두 이 말에 실어 주고받았다. 아리아는 자기가 한 곡 노래에서 태어났으므로, 자기는 노래였던 존재라고 말했다. 무슨 이유에선지 아리아는 완전한 존재가 아니었다. 파편 같은 존재였지. 누가 만들어낸 파편이었을까? 이토록 아름답고 고상하되 연약한 존재가 불의의 사고로 만들어진 존재라니? 내 곁의 아이에게는 아리아 공주라는 이름이 있었고, 아리아는 본디 황혼의 여신이 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이제 이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있었다. 그 노래를 만들어낸 자가 스스로 아리아를 그 공간으로 유폐해 버렸으니까. 내가 가진 모든 권능과 지능을 총동원해서 생각해 봤지만, 나는 도저히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굳이 묻지 않았다. 사정이 어떻든 아리아가 내 눈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그녀는 내 영혼의 멜로디, 오직 나만의 노래였으니까. 그 대신 나는 아리아가 타고난 황혼의 권능을 물감 삼아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화폭 하나를 선물했다. 이제 그곳은 나와 아리아 둘이 세상에 없던 새로운 교향곡을 연주하는 연주장이 되었다. 나는 아리아가 행복할 수만 있다면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았다."
우주가 희미해지고, 찬란한 알리콘의 형상이 지평선 너머로 거꾸러졌다. 보라색 그림자가 알리콘의 형상을 뒤덮음과 동시에 몇 개의 작은 포니 형상이 빚어져 은하수를 달렸다. 희미한 그림자는 알리콘의 형상을 위로하려 했으나, 그 둘 사이를 갈라놓은 장벽에 가로막혀 끝내 닿지 못하였다.
"아리아는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없었다. 나는 혼돈에서 스스로 비롯한 존재였고, 그 하나만으로 나는 영원히 아리아와 떨어질 수밖에 없는 별리의 운명을 타고난 셈이다. 어쨌든 아리아 또한 만들어진 존재였으니까. 아리아가 여신이든 아니든 모든 시작은 끝을 암시하기 마련이다. 죽음은 누군가에겐 빠르게 찾아가고 다른 누군가에겐 느리게 다가가지. 죽음의 속도는 삼라만상에 모두 상대적인 것이며, 그 상대성으로 죽음은 세상에 펼친 올가미의 그물을 짠다. 아리아는 내 영역 어딘가에 난 균열을 통해 왔다. 우리가 가지고 휘두른 권능이 얼마나 강대한 것이었든지 결국 그 흔적만은 완전히 지울 수 없는 것이다. 기나긴 세월 동안 존재해 온 성가, 천지창조의 노래는 모든 궁창을 지배했다. 그리고 그 감옥으로 끌려 들어온 것이 아리아 하나밖에 없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지. 아리아처럼 잊히고 부서진 필멸자들이 하나둘씩 찾아왔다. 나는 우리의 영역으로 끌려온 자들을 포옹하며 환영해 주고 싶었다. 우리가 만들어낸 아름다운 세상을 보여 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리아는 그렇지 않았다. 아리아의 내면에서 무엇인가 완전히 바뀌어 버린 것이다. 아리아는... 기억을 되찾고 있었다."
작은 별들이 산산이 부서졌다. 화려하게 피어났던 색상들 위로 무시무시한 검은 얼룩이 번지며 하나같이 검은 잿빛으로 바뀌었다. 아리아가 두 날개를 펼치자 깃털이 후두둑 떨어졌다. 피부 위로 돌출된 내골격이 서로 엮여 사슬이 되었고, 그 땅으로 끌려간 자들을 꼭두각시처럼 휘감았다. 멀찍한 곳에서 폭풍 같은 에너지가 들끓으며 하나로 합쳐져 이름 없는 자들의 땅 내부를 구성했다.
"아리아는 영원토록 원하지 않던 아이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아리아는 버려진 자들의 여왕, 영원토록 비탄과 고통 속에 울부짖는 자들의 감시자가 되기를 선택했다. 아리아에게 끌려온 자들은 저 성가에게 존재를 거부당한 끝에 버려져 망각 속으로 추방된 자들이었다. 아리아보다도 더욱 높은 신격이 그들을 불결한 것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아리아는 버려진 자들을 오래 전 잃어버린 아이들을 맞이하듯 받아들여 기쁨 대신 고통으로 감싸 주었다. 이름 없는 것들을 포괄하는 세상 만물을 포용하기 위한 아리아 나름대로의 결론이었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 줄 수는 없겠느냐고, 내가 어찌 설득할 수 있었겠나? 그 어떤 설명이나 설득, 이유 한 마디도 없이 그저 신성한 질서라는 명분 하에 그 누구에게나 찾아가는 죽음이란 무자비한 맹독을 맛볼 기회조차 없을 터인데. 내가 빚어내고 싶은 형상을 마음대로 빚어낼 수도 있지만 그 여자처럼 그걸 유지한다고 갖은 애를 쓸 필요는 없는 혼돈, 그 혼돈이야말로 차라리 행복이고 축복임을 나는 그 때 깨달았다. 아리아를 원해서 만들었든, 어쩌다 생긴 것이든 아리아 또한 결국 어떤 목적을 부여받았던 것이다. 내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는 소멸이었다. 소멸하여 잠들 수도 없는 비탄에 신음하는 불행한 자들, 방황하는 자들을 거둬들일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리아의 존재 이유였다. 아리아가 보살피는 자들은 아리아의 노래를 부르게 되었고, 그리하여... 무가 되었다."
디스코드가 창가로 다가가 부드러운 손길로 아리아의 형상을 쓸어내렸다. 아리아의 날갯죽지를 따라 디스코드의 손가락이 조심스레 움직였다. 그는 멍한 눈길로 그 형상을 바라보았다. 혼돈의 전도자가 그 형상을 갖추고 난 뒤 일으켰던 그 어떤 난리보다도 그 순간이 더 지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노래는 내가 듣고자 하는 노래가 아니었다. 아리아가 부르기를 원했던 노래도 아니었지. 지금 뭘 하는 건지 모르지만 제발 그만둬 달라고 애걸했다. 저들은 지금 당신이 대하는 것보다 나은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감옥에 불과했던 공간에 우리만의 낙원을 세우지 않았느냐고. 대체 무엇 때문에 저들을 축복하지 못할망정 이런 식으로 대하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아리아를 잘 타일러서 어떻게 해 볼 수 있었던 단계는 지났으니까. 영겁의 세월 전, 아무것도 모르고 내 영역으로 떨어진 어린애가 아니었다. 죄수였던 아리아는 이제 간수가 되었고, 내가 했던 말들은 위대한 질서라는 이름의 심연에 가 부딪치고, 다시 울려 나오는 메아리에 지나지 않았다. 아리아는 영원토록 그 꼴을 보며 살아갈 준비를 마쳤다. 처음 자기를 내버린 그 질서에 다시 사로잡힌 채 말이다."
디스코드가 손가락을 떼자마자 알리콘의 형상에 어려 있던 모든 색조가 빨려나가 사라졌는데, 한 쌍 빛나는 보라색 눈동자는 예외였다. 그녀의 두 눈 앞에 깔린 희미한 어둠이 구속되고 재갈 채워진 자들의 군단 앞에 전율하고 부서져 나갔다. 이쯤되니 판유리가 스스로 휘어지고 일그러지며 창틀을 흔드는 지경이었다.
"아리아의 동기는 명료했으나, 나는 슬픔을 가눌 길이 없었고 더 놀랄 기력도 없었으며 분기가 하늘을 찔렀다. 한때 사랑의 말을 속삭이던 바로 그 여자에게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힐난조의 일장연설과 인륜, 도덕을 주워섬기는 헛소리뿐이었다. 이러한 대화는... 영겁의 세월 동안 이어졌고, 버려진 자들의 여왕이 된 아리아의 인내심은 끝을 몰랐다. 아리아는 나를 사랑했고, 내가 자기를 사랑하고 있음도 잘 알았다. 하지만 이제 본질적으로 아리아의 땅이 된 그 곳에서 내가 자기를 훼방 놓고 다니는 걸 더 봐 주지는 못했지. 아리아의 사랑이 나를 향한 것임은 명백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 감정은 물론 영혼까지도 내가 아닌 다른 존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리아를 사랑해 줄 수 없는 그 어머니란 존재였다. 아리아는 본인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그리고 그 과정에 요구되는 자기의 명예를 보존하기 위해 나를 추방했다. 우리가 함께 세운 낙원은 이제 다시 최초의 감옥이나 다름없는 곳으로 변해 버렸고, 거기서마저 쫓겨난 나에게 돌아갈 고향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땅 자체가 이름 없는 곳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아리아의 영혼과 혈육이 타고난 바로 그 선율에 실려 다시 그 곁으로 돌아갈 수단도, 그 수단에 대한 지식도 내게는 없었다."
디스코드가 손가락을 딱 튕기자 아리아를 에워싼 희미한 어둠이 사라졌다. 유리의 바다 속으로 한없이 침잠하는 한 덩이 돌처럼 아리아의 모습이 유리판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궁창 사이의 공간에 고인 시커먼 어둠이 이제 죽은 것들의 뜯겨나간 사지를 빌어 그 형상을 갖추어 나가더니, 혼돈과 비탄으로 빚어진 좌우 비대칭의 살아 있는 시체의 모습으로 변했다. 유리의 하늘 위로 번지는 소리 없는 비명과 함께, 아리아의 모든 흔적을 박탈당한 존재, 디스코드가 태어났다.
"이퀘스트리아라는 곳에 발을 들인 때도 그때였다. 당장 되는 대로 대충 물리적 형상을 갖춘 뒤였지. 산 것들의 땅에서 아리아의 혈육을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다. 아리아와 마찬가지 방법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셀레스티아와 루나에게 나를 다시 그 곳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사정하고 구걸했다. 그 둘이 내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자기네들의 둘째 동생이요 둘째 언니인 황혼의 공주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내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 것 같나? 그 사실을 알고 나서 나는 꺼뜨릴 수 없는 분노와 혐오의 불길에 휩싸였다. 저들에게 정확한 진실을 전해 줄 수 있을 즈음이면, 그것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격렬한 반응을 내보였다. 혼돈의 군주인 나조차도 당황스럽게 할 정도였지. 성가를 만들어낸 자, 위대한 어머니란 자야말로 온 우주에서 가장 신성하고 아름다운 존재를 만들어 내고 그 존재를 우주적 비밀에 붙여 오직 나에게만 그 존재를 알게 한 저주를 내린 뒤, 내가 몇 번을 설명해도 그 누구도 알지 못하도록 만든 원흉이라는 것을 나는 그 때 깨달았다."
드라코네쿠스의 형상이 일어서더니 녹음이 우거진 이퀘스트리아 위로 시뻘건 불길을 토해냈다. 그 근처에 있던 자들은 형언할 수 없이 끔찍한 유리 괴물의 형상으로 변해 버렸다. 대양이 말랐고 땅이 찢어져 길고 깊은 협곡을 만들었다. 셀레스티아 공주와 루나 공주의 모습이 혼돈의 주인을 둘러싸고 빙빙 돌아 조화의 힘을 담은 무지갯빛 광선을 쏘아냈다.
"나는 그렇게 내 억하심정을 쏟아냈다. 나의 울화과 격노, 고통을 전부 끄집어내 평화로웠던 땅을 짓밟았다. 두 번 다시 사랑하는 사람 곁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자가 자기의 사랑을 영원토록 기억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니, 생이란 그토록 잔혹하고 부조리한 장난질이나 마찬가지였다. 혈육들조차도 모르고 있었으니 아리아를 아는 자가 있을 리 만무했다. 아리아의 유산을 품을 수 있는 그릇은 오직 나 하나뿐이었다. 내게 아리아의 기억은 양날의 검과도 같았다. 깔깔대며 가엾기 짝이 없는 사소한 발작에 불과한 파괴 행위를 일삼을 때조차도 예외는 아니었다. 셀레스티아나 루나가 거기 대고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고, 마찬가지로 나에게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 둘이 할 수 있는 것이 있기는 했을까? 저들의 땅 이퀘스트리아는 허깨비를 쌓아 올린 헛것의 구조물이요, 혼돈의 땅 한가운데를 떠다니는 부박한 비눗방울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아리아의 존재를 은폐한 것은 셀레스티아와 루나의 권능 따위가 아니었다. 나로써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바로 그 노래, 성가가 원인이었다. 나는 이 땅을 미래영겁 계속될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해볼까. 나는 그렇게 만들어 버릴 작정이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지."
드라코네쿠스의 형상이 불타는 갈색 흙바닥으로 거꾸러졌다.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그는 잔뜩 풀이 죽어 몸을 웅크린 채 가슴 속에서 새어나온 희미한 보라색 빛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이퀘스트리아를 내 본질과 같은 곳으로 바꾸어 버린다 해도, 마침내 이 땅의 모든 것을 쓸어 버리고 나 혼자 남는다 해도, 텅 빈 세상에 혼돈의 씨앗을 뿌리고 꽃피운다 해도 나는 죽을 수 없었다. 죽을 수도 없고, 아리아를 잊을 수도 없었다."
셀레스티아 공주와 루나 공주의 모습이 가까워졌다. 드라코네쿠스는 긴 몸을 당당히 일으켜 세우고 그들을 맞았다. 두 공주가 마지막 기력까지 짜낸 무지갯빛 광선을 디스코드에게 날려보내는 순간까지도 그는 등을 기대고 서서 하늘을 바라보며 킬킬대고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는 그렇게 전신이 돌로 굳어 가는 순간까지도 거만한 자세를 결코 숙이지 않았다.
"그랬으므로 나는 그 둘이 이기게 해주었다. 조화의 원소를 들이밀어 나를 가두게 놔두었다. 그것들이 나를 봉인하는 것이 결국 나를 돕는 거라는 걸 알든지 말든지는 상관없었어. 나는 그 둘에게 사소한 승리를 안겨주었다. 세상이 계속되는 한 나는 죽을 수도 없고, 본질이 흩어져 사라질 수도 없다. 혼돈은 스스로 혼돈을 낳기 마련이니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은 잠드는 것 하나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돌이 되어 영겁의 세월 동안 잠들어 있었다. 잠자는 동안 꿈조차 점점 흐려져 갔고, 혼곤한 머릿속에 복된 어둠과 혼란만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저 어둡고 우울한 수면의 나날 속 수많은 호주머니 가운데에서 나는 내 생각 속의 공백, 사라진 기억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리아는 평생 얻을 수 없을 것을 나는 얻었다. 나는 평화를 찾았다."
디스코드가 손가락을 딱 튕기자 유리가 밝은 자연광으로 환하게 빛나더니 창문 저편의 포니빌 정경을 비추었다. 디스코드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눈을 감고, 의상실 구석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내 모든 고통과 비탄, 슬픔의 끝에서 끝내 지복의 망각을 맞이했다 싶었던 순간......"
디스코드가 느리고 냉정한 자세로 몸을 돌려 눈을 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너를 보게 됐지."
입술을 달달 떨면서 디스코드를 맞쏘아보다가, 마른침을 삼키고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리아에 관한 모든 기억을 잊어버린 채 봉인에서 풀려났다고 하지만, 네 분노와 슬픔, 억하심정 어느 하나 사라진 것은 없었어. 각종 익살과 말장난 뒤에 숨겨두고 있긴 하지만, 너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끝없이 창궐하고 있었지. 네가... 잊어버리고 싶어했던 모든 걸 나 하나 때문에 다시 떠올리게 된 건 정말, 정말 미안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네가 세상에 혼란을 퍼뜨리며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걸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고. 끝을 내야 했어, 디스코드. 끝을, 끝을 내야 했다고!"
"다른 무엇보다도 중단될 수 없고 끝낼 수 없는 것에 굳이 '끝을 내야 한다'는 표현을 갖다 쓰다니 참 웃기는 일 아닌가." 디스코드가 울화로 점철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꼬맹이, 너는 이 혼돈의 주인을 충분히 즐겁게 해 주었다. 필멸자 주제에 불멸자의 정신을 갖고 있다니 말이야. 미래영겁 끝나지 않을 고통이라도 견뎌낼 수 있을 만한 배짱도 있는 것 같고. 그러니, 이쪽도 경의를 표해 마땅하겠어." 디스코드가 허리를 깊이 숙여 절을 하며 머리에 난 나뭇가지 모양 뿔에서 손을 꺼내 정중히 인사했다. "감축드리오, 하트스트링스 양. 그대의 승리를 인정하오."
나는 멍하니 디스코드를 바라보았다. 그때까지도 소중히 들고 있던 나이트브링어가 고름 묻은 걸레처럼 떨어졌다. 나도 모르는 새 발굽을 놓아서, 디스코드가 순식간에 나이트브링어를 낚아채 버리진 않을까 싶었으나, 그는 육신에서 모든 생명과 활력을 뽑혀 나간 듯 구부정한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자포자기한 채 더듬거리며 말했다.
"디스코드, 네 허망한 승리만큼이나 아무것도 아닌 승리를 축하할 생각은 없어. 평온, 기쁨, 자유라면 나도 원하는 거라고."
"그러면 디스네이Disneigh*26 월드로 놀러 갔다 오지 그래." 디스코드가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듣기로는 젊은 연주자들이면 볼 것도 없이 바로 채용한다던데."
"아냐, 진지하게 말하는 거라고!" 말은 날카로웠지만, 그 본질은 애원이나 다름없었다. "지금...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서 그래?! 기적이야! 너도 일종의 신격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날 옭아매고 있는 빌어먹을 궁창의 야상곡에 노출된 상황이라고! 셀레스티아 공주님이나 루나 공주님 때랑은 달라. 이 모든 게 없던 일이 되어 버리지 않았단 말이야! 셀레스티아 공주님은 야상곡을 들을 때마다 무지막지한 폭발을 일으켰는데, 너는 아니야!"
"아리아와 두 자매가 단순히 혈육으로만 이어진 관계는 아냐." 디스코드가 힘없이 던진 말이 의상실 벽에 가 부딪치고 뒤섞였다. "셋은 한 곡에서 비롯된 존재이니, 한 가락 멜로디를 공유하는 관계지. 바로 이 멜로디가 이 셋을, 이 셋만을 엮어 준다. 설령 서로 다른 궁창에 존재하더라도 이 연결은 끊기지 않아. 그래서 우리 모지리 우나Woona가 아리아의 영향을 받아 나이트메어 우나로 변해 버린 거고."
"그래!" 간절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맞장구치며 소리쳤다. "그 셋은 연결되어 있었어! 그건 이해해! 너는 어떻지?! 넌 달라! 넌 혼돈의 존재니까! 그것도 나름대로 이점이지! 이름 없는 자들의 땅으로 네 사랑을 찾으러 갈 수는 없을지 몰라도 나는 할 수 있어! 아리아를 거기 옭아매고 있는 곡이라면 거의 다 꿰고 있으니까!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어! 아리아에게 말도 걸 수 있고—"
"그렇게 열렬히 자기소개할 것 없어, 꼬맹아. 네가 심심할 때마다 거기 들락거리는 건 나도 아니까." 디스코드가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전에 네가 그러는 걸 굳이 찾아보진 않았어. 차마 볼 수가 없었거든. 그래도 지금은 이해해. 전부 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나직하게 물었다. "이해한다면, 내가 뭘 하려는지도 알고 있겠지. 내가 뭘 하고 있는지도. 디스코드... 제발, 부탁인데."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와 주면 안 될까?"
"널 도와?" 디스코드가 눈을 흘겼다. "몇 번의 겁파에 이르는 세월 동안 가식과 허세로 점철된 너희 이퀘스트리아의 필멸자들의 역사 속에서 늘 그랬던 것처럼, 네 기억 속에서도 내 사랑 아리아의 기억을 지우도록 도와 달라 이건가?"
머리가 하얗게 비는 충격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모든 게 끝나고 나면 남는 게 뭔지 알고는 말하는 건지 모르겠군?" 디스코드가 밀려오는 눈더미처럼 느릿하게 걸어오며 물었다. "죽음이 남을까. 아니면 파괴가 남나? 아니, 기억만 남는다. 마지막 원자까지 형태를 유지할 수 없는 지경이 되거나, 마지막 한 줄기 빛살까지 힘을 잃고 사라질 때가 아니면 진정한 끝은 오지 않아. 우리의 모든 생각이 사라지기 전까지 우리는 끝내 존재할 수밖에 없지. 너도 그렇고, 아니면 네 그 소위 친구라는 족속들과 사랑하는 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원리다. 나는 어떨 것 같나? 나는 끝도 없이 영겁의 세월 동안 그걸 감당해도 되는 존재인가?"
디스코드가 마지막으로 붉은 눈빛을 번쩍이며 몸짓하고 말했다.
"널 돕는다는 것은, 신성한 혈통을 물려받은 알리콘 자매의 근간을 구성하는 그 노래를 가로채는 걸 도와 준다는 뜻이겠지. 한때 혼돈만 깔려 있던 공간으로 쓰였다가 감옥으로 전환된 뒤 다시 낙원으로 용도를 바꾸었던 바로 그 땅으로 너를 인도해야 할 수도 있겠군. 그럼 뭐가 남지? 벌써 만 년 전에 아리아는 자기 자신을 잃고 공허한 멜로디로 전락하고 말았는데. 나를 다시 한 번 그 땅에서 추방할 권능이 아리아에게 남아 있는지도 의문이군. 꿈을 빌어 바라볼 수밖에 없고, 꿈에서 깨고 나면 눈물에 젖어 차갑게 식은 베개를 안고 눈을 뜨게 하는, 소위 지상낙원이라 할 법한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의 세상으로 네가 영영 떠나 버린 뒤 나는 영원토록 아리아, 아니면 껍데기만 남은 그 무언가와 그 땅에 처박혀 살아가게 되기는 하겠다만, 그렇게 되면 내 존재 의의는 무엇이 되는 거냐, 라이라?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이 되나? 해와 달과 별이 없는 곳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무릎을 꿇고 평생 잊을 수도 없을 내 영원한 사랑을 아리아에게 고백하는 나날을 이어갈 수는 있겠지. 하지만 아리아는 이미 내 사랑을 짓밟고 부수어 먼지로 만들고 끝내 영겁의 고적으로 향했다. 이 우주에 시간이라는 개념이 남아 있는 내내 버려지고 잊힌 자들을 거두어 돌봐야 하는 최초의 숙명 때문에 말이야."
"디스코드, 제발..." 두 눈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목이 같이 메어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다양한 권능을 부릴 수도 있고, 그 권능이 약한 것도 아니고,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잖아. 너처럼 다재다능한 존재가 어떻게 이리 낙담하고 좌절할 수 있는 거야? 날 도와 줘. 할 수 있잖아. 너라면 내 저주를 끝내 줄 수 있어..."
"이 가엾은 녀석아." 디스코드가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앞발로 내 갈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미소를 풀지 않았다. "모든 생명은 저주받은 채로 태어나기 마련이야. 운명이 참 잔혹하고 악랄하게 뒤틀리기는 했지만 세상에서 유일하게 축복받고 태어난 사람은 아리아 하나뿐일 거다. 아리아는 그 끔찍한 숙명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았거든. 하지만 나는 아리아와 같은 승리와 기쁨의 멜로디를 누리지 못했어. 내 사랑 아리아가 이름 없는 자가 되어 버렸으니까. 그러니 하트스트링스, 너는 나처럼 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라. 언젠가 다른 모든 자들과 마찬가지로 아리아가 너를 받아들이고 나면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을 테니." 디스코드가 내 턱을 쓰다듬더니 몸을 일으켰다. "네 자유는, 네가 망각하기 시작할 때 찾아올 거다."
"디스코드..."
"아마 그때쯤이면 나도 그 자유라는 걸 맛볼 수 있겠군..."
"디스코드, 미안해!" 나는 흐느꼈다. 밀려나온 울음에 숨이 가빴다. "네 기억을 끄집어내서 정말 미안해. 그래도 좀 진정해! 세상 모든 사람이 네 절망감과 끝없는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야!"
"오히려 그보다도 복 받은 인생이 있을까 싶은걸."
"애걸복걸하는 한낱 미물 하, 하나가 부탁하는 걸 좀 드, 들어봐 준다고 해서 너한테 손해 되는 건 없잖아?!"
"이유를 말해 주마, 꼬맹아. 넌 진정으로 네게 필요한 게 뭔지 몰라. 아직은 알 때가 아니지. 언젠가 아리아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해 주고 난 뒤에야 오늘 일의 대가가 무엇인지 이해하게 될 거다. 그때가 되어야 알게 되겠지. 네가 비로소 이 모든 걸 이해하고 나면, 내 장담컨대......" 디스코드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차라리 내가 선택한 걸 네가 선택할 수 있었기를 바라게 될 거다."
당황스러웠다. "이건... 무슨... 이해가 안 돼..."
"뭐, 사실 간단해." 디스코드가 발톱을 세워 가슴을 긁적이고 나서 발톱 끝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지금 이 대화가 오가는 동안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곳곳을 뛰어다니면서 그 잘난 친구들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거든. 앞으로 몇 분만 있으면 레인보우 대쉬까지 제정신을 차리게 될 거야. 그러면 그 여섯이서 조화의 원소를 가지고 여기 포니빌로 와 나를 대적할 테지. 그 녀석들 오는 길에 미로 몇 개 정도 더 만들어 줄까, 아니면 다시 한 번 그것들을 회색 존재로 전락시켜 게임을 아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만들어 줄까 싶은 계획이 있기는 했어. 특히 그 분홍색 녀석이 제일 재밌더라고. 좀 과할 정도긴 하지만." 디스코드가 고개를 돌려 힘없이 나를 보고 말했다. "그래도 굳이 그런 귀찮은 짓은 안 할 생각이다. 지금은 아냐. 내가 좀 많이 피곤하거든."
"디스코드..."
"다시 기나긴 잠을 자러 갈 준비는 이미 끝났다. 이 땅을 위해서라도 내가 영영 깨어나지 않는 편이 나으리라는 것은 너도 동의하는 바 아닌가."
"디스코드, 이러지 마!" 나는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나이트브링어를 원하잖아?! 가져가! 빌어먹을 야상곡 어떻게 하든 상관없어! 포기하지만 마!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어!"
"정말 안타깝고 빌어먹게도, 그 정반대야." 눈물로 흐려진 시야 너머로 디스코드가 차분하게 웃는 모습이 보였다. "라이라, 마음에 새겨 둬라. 잊힐 수밖에 없는 존재를 잊지 않는 유일한 존재로 살아가는 것보다 끔찍한 운명은 없다. 차라리 음악을 포기하는 게 나을 거야. 음악은 이미 널 포기했으니." 디스코드가 손을 흔들었다. "작별이다Arrivederci."
디스코드에게 무어라 소리치기는 했는데, 내 목소리지만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섬광과 함께 의상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나는 혹한의 에버프리 숲 한가운데로 내던져졌다. 나는 놀라 몸을 떨었다. 저주가 몰고 온 추위 때문이 아니라, 의상실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순식간에 날려왔다는 끔찍한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시간 맞춰 포니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아 진짜 제발... 너무 늦지 않기를..." 염동력으로 나이트브링어를 들어올려 가방에 집어넣으며 나는 미친 듯 내달렸다. 네 다리를 바람같이 움직여 숲과 그 속 수풀, 잡초들을 등지고 나는 달렸다. 덤불이고 관목숲이고 이끼고 가릴 것 없이 내 앞에 보이는 것이라면 뚫고 달렸다. 머리 위로 떠가는 분홍 구름이 나를 비웃으며 초콜릿 비를 흩뿌렸다. 내가 낼 수 있는 최대 속력과 무거워지는 숨, 줄줄 흐르는 눈물 중 무엇 하나 나를 구원하지 못했다. 나무들을 따라 늘어선 혹한의 선 너머로 숲 가장자리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다. 염동력으로 앞을 막는 나무들을 박살내며 그 사이로 뛸 때, 입 밖으로 나오는 숨마다 심장을 쥐어짜내 뽑아내는 듯한 울음이 솟구쳤다.
겨우 마을 어귀까지 다다랐을 때는 너무 늦어 있었다. 마을 중심부에서부터 밝은 빛이 물밀듯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다. 봉긋한 체크무늬 잔디 언덕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와 울타리를 뛰어넘고,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생겨먹은 두억시니 같은 것들을 피했다. 전신의 근육이 경련했고 힘 또한 그 밑바닥을 내보이려 하고 있었다. 미래를 건 장엄한 전투로 기록될 현장의 근처까지 다다라 그 한가운데로 뛰어들었지만, 상황이 그보다도 빨리 종료될 기미가 보였다.
트와일라잇이 있었다. 그 친구들도 있었다. 각자 목에 건 화려한 장식이 보였고, 그 여섯이서 만들어낸 작열하는 백색광이 솟구치는 것도 보았다. 디스코드는 왕좌에 앉아 특유의 기만술로 저들을 깔보고 얕잡아보는 척 낄낄대고 있었다. 이제 주연들이 한 무대에 모두 모여 얼마 남지 않은 종막을 향해 쇄도했다. 산 자들의 있느니만 못한 귀를 향해 버려진 자의 귀곡성과 같은 비명과 고함을 지르며, 나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길목을 따라 달렸다.
"좋아, 할 테면 빨리 해!" 디스코드가 여섯을 향해 말했다. "어디 한번 그 작고 귀여운 원소를 작동시켜 보라고. 나랑 친구 함 먹어 보자고. 뭐가 됐든 빨리 끝내." 디스코드는 무의미한 수준으로까지 얇아지고 약해진 보호막 뒤 왕좌에 오만하기 짝이 없는 자세로 앉아 거들먹거리는 투로 말했다. 트와일라잇이 겨눈 마법의 사거리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은 채였다. "멋진 혼돈을 즐기고 있어야 하는데 네놈들이 방해하고 있잖아!"
"좋아, 얘들아!" 트와일라잇이 다분히 영웅적인 말투로 외쳤다. 여섯이 진형을 갖추고 서자 트와일라잇의 티아라가 찬란히 빛나기 시작했다. "우정의 힘을 보여 주자!"
여섯이 쏘아낸 무지갯빛 신휘가 혼돈의 군주를 덮치는 순간 나는 더 가지 못하고 자리에 쓰러졌다. 산 자가 가져서는 안 될 기억을 가졌다는 공통점 아래 모인 우리에게, 어느 하나가 내지른 비명은 다시 다른 하나의 비명이었다. 포니빌이 서서히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 갔고, 돌이 되어 다시 평화를 찾은 디스코드는 힘없이 땅바닥에 쿵 하고 쓰러졌다.
나는 흐느끼며 넘어졌다. 사방에서 환호하고 즐거워하는 함성이 터져 나오고 있다는 것조차 겨우 지각할 수 있을 정도로, 머리가 멍해져 감각이 제대로 느껴지지가 않았다. 은신처에서 나온 사람 중 몸이 잿빛으로 변했거나 못 싸워서 안달인 자는 없었다. 연인은 다시 발굽을 잡았고, 가족과 벗들은 눈물에 젖어 포옹했다. 밀키 화이트는 길에 나자빠진 스쿠틀루를 부여안고 한없이 흐느꼈고, 캐러멜과 윈드휘슬러는 멍이 약간 들긴 했지만 크게 다치지는 않은 채 비틀거리며 마을로 돌아왔다. 애플블룸과 스위티벨도 무사히 돌아왔는데, 같이 돌아온 럼블은 자기가 원해서 한 짓이 아닌 일을 사과하고, 또 사과하느라 반나절을 썼다. 우편 배달원은 발을 동동 구르며 내버린 각종 봉투들과 부서진 우편함의 조각을 주우러 이곳저곳을 뛰어다녔고, 기쁨에 찬 플루트 소리가 그 위에 얹혔다. 아무 일도 없던 듯한 모닝 듀의 목소리와, 그 뒤로 따라붙은 암브로시아의 깔깔 웃는 소리가 들렸다. 축제와도 같은 흥분이 온 마을에 가득했고, 사람들은 하나같이 디스코드가 현실을 왜곡한 것과 우리의 여섯 구원자가 그 끔찍한 현실에서 자기들을 구해 준 것, 그 디스코드를 다시 봉인한 것을 가지고 말을 나눴다. 선더레인이 또 뭔가 폼을 잡는 소리와 블로섬포스가 한숨을 폭 내쉬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더 견딜 수가 없어서 터덜터덜 걸음을 옮겨 집으로 향했다. 내 걸음은 산송장처럼 힘이 없었고, 그림자처럼 아무 소리가 없었다.
울음도, 울화도 없었다. 그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머릿속에 오직 한 곡의 멜로디, 디스코드가 들려 준 바로 그 곡조밖에 없었다. 이퀘스트리아를 거의 파멸로 몰고 갈 뻔한 노래였지만, 그와 동시에 이퀘스트리아를 구원하기도 한 곡이기도 했다. 그 곡조차도 나를 구원할 수는 없었다.
"자매 신의 노래..." 나는 혼자 중얼거리며 어떻게든 이걸 분석해 보려고, 감성 아닌 이성에서 뭐라도 뽑아내려고 머리를 쥐어짜냈다. "셀레스티아 공주님이나 루나 공주님께서 진혼곡을 들으신 적은 있을까? 아리아란 이름을 들어 보시기는 했을까?"
캐러셀 부티크의 그림자 속에서 겪었던, 심장이 멎을 것만 같던 순간으로 사고가 되돌아갔다. 디스코드의 두 눈에서 모든 생명과 활력이 빨려 나가 사라지던 그 때로, 송곳니 난 입술 사이로 디스코드의 사랑과 증오에 얽힌 이야기를 듣던 그 때로.
"디스코드를 이퀘스트리아로 추방하는 데도 노래가 필요했어." 나는 말했다. "디스코드가 알리콘 자매의 노래를 훔쳐다 주기만 했다면 아리아에게 바로 갈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침을 삼켰다. 오두막 바로 앞 흙길에서 걸음이 멈추었다. 포니빌에서 솟구치는 승리의 함성은 이제 멀리서 들리는 메아리에 불과했다. "그게 열쇠일지도 몰라. 그것만 있으면 아리아를 직접 대면하고 고적의 이중주를 연주해 줄 것을 청할 수도 있을 수도 있어. 디스코드의 기억을 되돌려 주었듯, 두 분의 기억을 되돌려 드려야 해. 그게 가능할까? 포니빌도, 이 세상도, 그 노래의 아주 작은 한 부분도 다치게 하지 않고 기억을 되돌리는 게 가능할까?" 나는 한숨지으며 발굽으로 얼굴을 덮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디스코드. 대체 너만 아는 그 사실이 뭐길래 이렇게 쉽게 포기한 거야? 그게 뭔데 얘기도 안 해 준 건데?"
나는 그렇게 몸을 떨며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오두막 문은 반쯤 열려 있었는데, 거기 대고 뭐라 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차라리 지금까지 회색으로 변해 있었기를 바라며 멍한 머리로 걸음을 옮겼다. 그 날 있었던 충격을 다 씻어내기 전까지 혼자 있을 시간이 절실히 필요했다. 나는 돌로 변하는 사치조차 누릴 수 없는 몸이니까.
현관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찰나, 등 뒤에서 현을 퉁기는 듯 비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 안녕하소! 거 괜찮나?!"
이건 무슨 소리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흠? 뭐라고 하셨죠?"
탐스러운 금발 갈기를 늘어뜨린 오렌지색 여자가 서 있었다. 갈색 모자를 썼고, 잘 익은 붉은 사과 모양 큐티마크를 하고 있었다. 에메랄드 빛 눈으로 나를 슥슥 훑어보더니 몸을 까딱거리며 여자가 물었다. "머 탈색됐다등가 그런 거 아니제? 혹시 저 혼돈 마법이라카는 게 몸에 남은 것 같나?"
"어... 그, 그게 말이죠?" 뜬금없이 날아온 질문에 몸을 배배 꼬며 말했다. "이상한 건 없어요. 그건 왜 물으시는지?"
"아이고 마! 참 다행이다 야!" 여자가 땀에 젖은 이마를 쓸어 닦으며 피곤한 듯 씩 웃었다. "보아하니 그짝은 머 이상하게 변한 것 같지는 않네. 집에 오믄서 보이는 사람마다 디스코드 고놈이 수작 부린 게 남았나 안 남았나 다 확인하고 다녔거등. 참 살다살다 별 끔찍한 일도 다 겪어 보제이?"
"아. 그, 그러게 말이죠." 나는 말했다. "굳이 여기까지 확인하러 와 주실 것까진 없었는데. 성함이...?"
"애플잭이다." 모자를 한쪽으로 기울인 여자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쪽은 머라고 부르면 되나?"
"라이라. 라이라 하트스트링스라고 해요."
"그릉가. 거 괘안아가 참말로 다행이다. 그라모 이제 나그도 집에 가 봐야 쓰겄구마. 울 가족들도 멀쩡한가 얼렁 확인을 해 봐야 쓰겄거등!" 애플잭이 곧장 뒤돌아 달려갔다. 오후의 바람을 타고 애플잭이 남긴 목소리가 계속 울려댔다. "그래, 언제 함 울 과수원 놀러 오라! 지랄 난리 난 것도 다 정상으로 돌아왔응게, 사과주 시즌까지 좀 남긴 했어두 온 동네에 사이다 직살나게 풀어 볼 생각이거등!"
"어... 그럴게요!" 나는 이 착한 사람의 등에 대고 발굽을 흔들었다. "반가웠어요, 애플잭 씨!"
애플잭이 멀리 사라졌다. 나는 심호흡하며 몸을 돌려 내 외로운 오두막으로 들어섰다.
"뭐, 그래도 기분은 좋네." 현관문을 닫으며 혼자 중얼거리다 가방을 벗었다. 침대 위로 가방을 던져두고 방 한쪽 구석에 놓아둔 옷장 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온 나라를 뒤져 봐도 저만큼 친절한 이웃은 없겠어. 그나저나 사이다라? 평생 그런 건 한 번도 안 먹어 본 것 같은데." 옷장을 열고 후드를 벗으려는데, 밝은 빨간색을 한 무언가가 톡 튀어나왔다. "허... 이상하네..." 그쪽으로 다가가 발굽을 뻗어 만져 보자, 두툼한 양모의 질감이 느껴졌다. "언제부터 내가 빨간 스웨터를 입었더라? 그나저나 솜씨 하나는 끝내주네."
그 때, 뭔가 털이 복슬복슬한 것이 내 뒷다리에 와 닿았다.
나는 놀라 숨을 급히 들이마셨다. 소리 죽인 비명이 밖으로 샜다. 아래를 보자 웬 오렌지색 꼬마 고양이가 야옹, 야옹 울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이고 맙소사!" 놀란 숨을 달래며 몸을 숙였다. "넌 어디로 들어왔니?" 오두막 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요 근처에 길고양이가 많은가?"
순간 몸이 얼어붙었다. 문 옆에 고양이 사료 봉투와 더불어 반쯤 빈 고양이 밥그릇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침대 시트에 오렌지색 털이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가방을 벗어 던져놓은 곳에서 벨벳으로 짠 주머니가 굴러나왔다. 뭔지는 몰라도 뭐라 말할 수 없이 찬란한 빛이 주머니 사이로 새어 나왔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오두막 벽면을 올려다보자, 수십 점의 이상한 악기들이 희미해져 가는 햇빛에 젖어 걸려 있었다. 온갖 기기묘묘한 것들이 다 모여 있어서,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뭔가... 이거 뭔가 이상한데......"
나는 천천히 자리에 주저앉았다. 고양이가 쪼르르 쫓아왔다. 아무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고양이의 귀로 발굽이 움직여서, 이건 무슨 일인가 멍하니 지켜만 보고 있었다. 앞다리를 타고 솜털이 곤두서기 시작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세상이 한없이, 한없이 춥게만 느껴졌다.
이상한 일이다. 내가 대체 지금까지 뭘 쓰고 있었던 거지?
지금까지 과거형으로 달려왔던 BgP의 여정이 현재형으로 바뀔 때가 가까워 오고 있네요. 머지않아 우리는 라이라가 과거를 정리해서 쓴 일기가 아니라, 라이라 눈앞에 놓인 현실을 직접 보게 됩니다.
앨이 등장하는 부분을 옮길 때마다 집에 있는 반려견이 생각납니다. 캠핑장에 누가 버리고 간 걸 아버지가 데려오셨는데, 처음 봤을 땐 '야, 얘 열라 못생겼다' 싶었지요. 미용을 잘못해서 그런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꽤나 영리하고 애교가 많아서 좋아요. 그런 주제에 아침에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제 방 방문 긁어서 깨우고 어디 가서 숨는 짓입니다.
*1 다소니. 사랑의 옛말인 '다솜'은 닷(아래아)옴을 현대국어표기법으로 적은 것으로, 닷옴은 '닷오다'의 이름씨꼴로 '사랑함'의 뜻이다. '닷오다'의 파생어로 '닷오니'('닷'의 모음은 아래아, 자음은 반치음), 즉 '다소니'는 사랑하는 사람을 말하며 '닷온말'은 사랑하는 말을 뜻한다. (원본출처 '사전에 없는 토박이말 2400', 최기호, 1995, 토담) Beloved가 예스러운 표현임을 감안하여 예스러운 고유어를 사용하였다.
*2 원문표기 Ragneighrock. 북구 신화에 전래되는 대파괴 전승인 라그나로크Ragnarok를 비튼 것이나, 한국 신화나 민담에는 대파괴 전승이 없어 적당한 번역어를 찾지 못해 풀어 썼다.
*3 EoP에 등장하는 날다람쥐 행상 브루스. нет, да 등 러시아어를 섞어 쓰며, 상트페테르브리틀St.Petersbrittle 출신인 등 러시아계 캐릭터임을 어필하는 요소가 많다. 여기에서는 북녘의 익숙한 말투를 끌어다 쓰도록 한다.
*4 정의를 집행한다는 명분 하에 물리적 제재를 가하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는 점 등을 통해 마블 코믹스의 히어로 퍼니셔Punisher를 비튼 것으로 보인다.
*5 메리 수는 창작물 속 캐릭터 유형의 한 종류로, 대개 어리거나 젊은 여성이며 비현실적인 수준으로 다재다능하며 못 하는 것이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 일반적으로 팬픽션에서 자주 보이며, 대부분은 작자가 자기 자신을 이상적인 캐릭터로 형상화해 스토리에 끼워 넣은 것이다. (원문출처 영문 위키피디아. 전자의 사전적 정의는 옥스포드 영어사전 3판에서, 후자는 Final Girls, Feminism and Popular Culture에서 발췌된 문장이다)
*6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 해탈Nirvana을 비튼 것. 말장난인 Neighvana를 옮기기 애매해져서 불가피하게 록밴드 너바나를 따와 니바나로 음차했다.
*7 디스커버리채널이 방영한 도시전설 검증 프로그램인 Mythbusters를 비튼 것. 국내 번안명은 호기심 해결사. 적당한 번역어가 떠오르지 않아 뭔가 족치는 이미지가 있는 조지사, 를 만들어 가져다 붙였다.
*8 Ay Caramba. 스페인어에서 기분 좋은 놀람을 표현할 때 쓰는 감탄사.
*9 밴드 콜드플레이를 의미
*10 미국의 프로레슬링 선수 스티브 오스틴Steve Austin. 별칭은 스톤 콜드Stone Cold.
*11 Manetreal. 캐나다 퀘벡 주의 도시 몬트리얼Montreal, 또는 몽레알.
*12 EoP에 등장하는 다이아몬드 독 파벌 '디리지블 독'의 지도자 길리엄.
*13 BgP Ch.04
*14 BgP Ch.02
*15 BgP Ch.01
*16 BgP Ch.03
*17 BgP Ch.01
*18 BgP Ch.06
*19 BgP Ch.07
*20 BgP Ch.12
*21 BgP Ch.06
*22 BgP Ch.08
*23 로미오를 비튼 것.
*24 미국의 그래픽노블 시리즈인 The Sandman을 비튼 것. 원작자는 닐 게이먼.
*25 칵테일 맨해튼을 비튼 것. 위스키와 베르무트, 비터스를 섞어 만드는 칵테일.
*26 디즈니월드를 비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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