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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E/백그라운드 포니

Chapter 18. 크레센도Crescendo

by Mergo 2022. 2. 14.

* 이 장은 라이라 하트스트링스의 조각난 기억들이 서로 뒤엉키며 현실에 갈마드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그리하여 정말로 미친 사람이 주절거리는 듯한 기분이 들 수 있다. 셀레스티아와 루나의 화법은 정체政體가 왕정인 점, 인격이 아닌 신격인 점을 감안해 왕정시대의 왕족이 쓸 법한 어조로 옮겼다. <남한산성>의 인조와 홍타이지, <흑산>의 문정왕후가 구사하는 화법을 기본 골격으로 삼아 참고하되 불가피하게 현대적인 화법을 덧붙여야 할 때는 <피를 마시는 새>의 치천제를 참고했다. 이 구분을 분명히 하지 못한다.

 

 

"신민들이여." 셀레스티아 공주가 두 날개를 활짝 펼치고 말했다. "포니빌처럼 아름다운 곳에서 그대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기쁘게 생각하노라. 전 국토의 도시들과 비교하여 그 크기가 작고 영세할지 모르나, 너희가 발 붙이고 사는 땅의 크고 작음이 내가 주는 관심의 크고 작음과는 무관함을 분명히 알라. 너희 신민 하나하나가 짐의 귀중한 아이들이니, 오늘 너희의 땅을 찾아온 것은 그것 때문임을 너희는 마땅히 알거라."

 

호텔 로비는 환한 표정과 반짝이는 눈빛으로 무장한 이들로 가득 찬 지 오래였다. 공주를 두 눈으로 목도했다는 감격에 젖은 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서서 일제히 절했다. 그 행렬이 로비 끄트머리까지 늘어져 있었다. 인파 곳곳에 배치된 건장한 페가수스 근위대원들이 인파를 여러 무리로 갈라놓았다. 그들의 제식 갑주는 잘 닦여 반들거렸고, 그들의 자애로운 군주를 대신해 두 눈에 경계와 의심을 가득 담아 군중을 감시했다. 트와일라잇 스파클 또한 거기 있었는데, 다른 이들과 달리 스승 바로 곁에 서서 자부심 가득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셀레스티아 공주가 고개를 깊이 숙여 목전에 모인 신민들에게 답례했다. "평화와 조화를 사랑하고 기꺼워함은 마땅히 우리의 본성일 것이다. 짐은 태곳적부터 그렇게 믿어 왔다. 그러하므로 짐은 여기 그대들 앞에 서서 어떤 이야기든 있는 그대로 들을 것임을 선언하노니, 그대들은 포니빌의 번영을 위한 이야기든, 우리나라의 안녕을 위한 이야기든 그대들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밝히도록 하라. 그대들의 시장이 이미 순서를 정해 두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너희들은 조급해하거나 서둘지 말라. 신민들이여, 내 하루는 온전히 그대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저마다 뭐라고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시장이 발굽을 흔들며 호각을 불었다. 날카로운 소리가 군중의 입을 닫았다. 시장이 빙긋 웃으며 로비 맨 앞줄에 서 있던 사내에게 발굽을 까딱해 보였다. "공주 폐하. 콜드 가든스Cold Gardens이옵니다. 포니빌 동쪽 근교에서 '해돋이 꽃집Rising Sun Floral Shop'을 운영하는 자입니다."

 

호명받은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깊이 절했다. 그는 두 앞발굽을 마주대고 쥐어짜듯 비벼대며 눈 앞에 왕림한 알리콘을 향해 입을 열었다. "공주 폐하. 공주 폐하를 직접 뵙고 말씀드릴 수 있어 지극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나이다. 소인은 983년, 올란도츠에서 열린 하계 태양절 축제 때 처음으로 전하를 뵈었사온대, 전하의 깊은 지혜와 광명에 깊이 감복했습니다."

 

"983년이라..." 셀레스티아가 차분한 미소를 띄우며 부드럽게 말했다. "해바라기가 참으로 보기 좋았었다."

 

콜드 가든스는 놀란 눈치였다. 그는 얼굴에 홍조를 띄우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사옵니다! 말씀하신 대로, 983년은 해바라기가 만발한 해였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소년은 곳곳에 핀 해바라기에 매료되었고, 하지 태양절 축제 이후 해바라기를 볼 때면 공주 폐하의 광명과 힘을 다시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그는 침을 삼키더니 말했다. "그 날 공주 폐하를 뵐 수 있었던 것이, 정원사로서의 적성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되었다고 확신하나이다."

 

"그러하냐. 듣기에 아름답다." 공주가 대답했다. "이제, 짐이 그대를 어떻게 돕기를 바라는지 말해 보거라, 가든스야."

 

"아,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사내가 마른침을 삼키며 호텔 로비 정문 쪽을 가리켰다. "금년 포니빌에 가뭄이 들었나이다. 997년처럼 심각한 기근을 초래할 정도는 아니오나, 강수량 감소로 토종 화초가 시들고 있습니다. 몇몇 종은 완전히 멸종할 지경이어서, 온실을 하나 더 지어야 했나이다. 포니빌 서쪽 산맥에서 용이 난리를 피운 것만으로도 폐하께서 공무가 바쁘신 줄은 미천한 소인도 감히 짐작할 수 있을진대, 하물며 루나 공주와 해후하신 일은 또 어떻겠나이까..."

 

"짐의 공사가 다망하다 하나 그것이 신민들의 근심과 고충을 살피지 못할 정도로 짐의 주의력을 해하는 것은 아니니, 너는 안심하라." 셀레스티아 공주가 빙긋이 웃으며 사내의 말을 막았다. "네가 말한 가뭄 문제라면 짐 또한 주의하고 있다. 두어 달 전 포니빌에서 올라온 상언上言이 있었는데, 내 보아하니 그대가 올린 것이었던 모양이다."

 

사내는 놀란 눈치였다. "그렇사옵니다, 그렇사옵니다, 전하! 소인이... 소인이 올린 글월을 몸, 몸소 읽으셨습니까? 고, 공주 전하?"

 

공주가 빙그레 웃고 답했다. "그러하다. 오래 살다 보니 잠이 없어지더구나."

 

몇몇이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발랄하게 쿡쿡 웃기도 했다. 트와일라잇이 빙긋 웃었다.

 

셀레스티아 공주가 계속 말했다. "네가 올린 글월은 잘 읽어 보았다, 포니빌의 가든스야. 그렇지 않아도 네 글을 읽자마자 클라우드데일 기상관리청에 일러 4월 중순쯤에 포니빌에 비를 더 뿌리는 방안을 검토해 보라고 했단다. 기상관리청 소속 기상학자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논의해 본 바, 단순히 강수량을 늘리는 것으로는 가뭄 문제를 영속적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더구나. 그래서 포니빌 시청 쪽에 관개시설 확충 방안을 마련해 보라고 지시를 해 놓았다. 어스 포니 비율이 높은 지방이니, 너희가 능히 공사를 마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

 

공주는 계속 말했고, 그 목소리는 빽빽하게 모인 군중의 몸뚱이에 짓눌려 잘 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그 군중 사이로 끼어들어 저들의 몸과 갈빗대, 어깨 사이를 헤치고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삐죽이 내밀어 방향을 가늠하는 와중에도 나는 입을 악물어 떨리는 이빨끼리 부딪치지 못하게 하려 용을 썼다.

 

공주의 얼굴이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 순간에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발그레한 눈과 별빛 비치듯 반짝이는 갈기. 그 모습은 그 자체로 광명이라 할 만했고, 아름다움이라는 관념의 물화物化였으며 강림한 여신이었다. 여신. 내가 그 순간 그 무엇보다도 갈구해 마지않았던 것이다.

 

좌우를 흘끗흘끗 쳐다보았다. 페가수스 근위들이 무시무시하게 굵직한 다리로 버티고 서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저 갑주 덮인 목이 능히 천장까지도 닿을 수 있을 듯싶었다. 날개를 한 번 퍼덕이는 것만으로 자리를 박차고 날아올라 로비 어디로든 날아갈 수 있을 것은 자명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불 보듯 뻔히 알면서도 계속 나아갔다. 공주는 하루 종일 여기서 청원을 듣겠다고 했지만, 그것이 더 시간을 지체할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당장이라도 몸 밖으로 표출될 것만 같은 오한을 애써 억누르며 후드 재킷의 소매를 더욱 끌어내려 사지 말단까지 덮고, 바닥에 웅크리다시피 납작 엎드려 군중 사이를 헤치고 지나갔다. 내 가는 사지를 조심스럽게, 조용히 움직이기만 한다면 군중 사이에 숨어 공주가 앉은 자리까지 몰래 접근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질박한 농민들의 몸 밖으로 빠져나온 조용한 숨에서 풍기는 냄새가 콧가를 스쳤고, 저들의 뛰는 심장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들렸다. 태양의 여신이 말하는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올수록 뼈마디가 달달 떨리고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캔틀롯 왕실 산하 왕립 국토지질연구원이 개발한 마법을 덧붙여, 추후 최소 25년간 송수로를 통해 공급되는 수량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셀레스티아가 고개를 앞으로 좀 더 기울였다. "이 정도면 납득할 만한 해법이겠지?"

 

"성은이 망극합니다, 공주 전하!" 콜드 가든스가 연신 절하며 말했다. 사내의 웃는 얼굴 위로 두 눈이 기쁨에 반짝였다. "이 은혜를 어찌 말하리까. 공주 전하의 성은에 부응하겠나이다."

 

"그러하냐. 그렇다면 짐이 다음에 포니빌을 찾을 때는 그대가 해바라기를 더 많이 가꾼 모습을 볼 수도 있겠구나." 셀레스티아가 말했다. 모여든 사람들이 환호하며 시시덕거렸다. 공주가 고개를 돌려 시장을 향해 말했다. "다음은 누구인가?"

 

"흠흠. 중앙시장의 십시Sibsy가 공주 전하께 청할 것이 있다—"

 

가다가 누군가의 발을 밟았다. 큰 고함 소리와 함께 누군가 나를 옆으로 밀쳐냈다. 큰 목소리로 나를 지탄하는 호통 소리가 로비를 메운 것도 순식간이었다.

 

"당신 뭐 하는 짓이야!"

 

"미쳤어?"

 

"순서 지켜!"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도 없었다. 사람들이 벌써 몸을 돌려 이쪽을 보고 있었다. 비쩍 마른 행려병자의 행색을 한 유니콘 쪽으로 온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러니 근위대의 시선이 이쪽으로 옮겨오지 않을 리도 없었다. 온 세상이 그대로 얼어붙는 듯했다. 나는 과호흡하며 몸을 떨었다.

 

"어어..." 시장이 공주 앞으로 걸어나와 이쪽을 살폈다. "거기, 무슨 일이죠?"

 

쯧, 하고 조용히 혀를 차며 내 앞에 있던 사람을 내동댕이치고 앞으로 달렸다. 눈에 비친 세상이 까딱까딱 흔들리다가, 눈에서 흘러나온 눈물에 가로막혀 흐릿한 얼룩처럼 변했다. 셀레스티아의 반짝이는 몸 하나만을 안개 속 등불삼아 달렸다. 이미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의 두려움으로, 나는 공주에게 비명처럼 소리쳤다.

 

"공주님! 공주님, 도와 주소서!" 나는 소리쳤다. "저주를 받았습니다! 저를 풀어 주십시오!"

 

"네 이놈! 어느 안전이라고!" 내 앞으로 모여든 근위대가 날개를 홱 펼치며 소리쳤다. 후끈한 열기가 스쳤다. 그것은 차라리 천장이 무너지며 떨어진 잔해가 내 몸을 꿰뚫는 듯한 감각이었다. 강철 군화를 신은 자들이 달려들어 나를 자리에 넘어뜨리고, 사방에서 짓누른 것이다.

 

나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근위들이 짓누르고 있던 몸에서 다리 하나를 겨우 빼내 앞으로 뻗었다. 나는 셀레스티아 쪽을 쳐다보며 울부짖었다. "공주님, 구해 주소서! 이제 구함을 받지 못하면 영영 구함을 받지 못하리이다!"

 

"아이고, 골치야." 트와일라잇 옆에 서 있던 사람이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꼭 중요한 행사 자리마다 나타나서 훼방을 놓는 바보들이 하나씩은 있다니까."

 

"공주님! 그... 저..." 트와일라잇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사방에서 나를 옭아매는 근위의 사지 너머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저도 이게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저자는 저조차도 한 번 본 적 없는 자인데......"

 

근위대는 내가 아파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그대로 나를 내 유일한 동앗줄에서 떨어뜨려 호텔 로비 한쪽 구석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몸이 움찔했고 숨이 막혔다. "부디, 들어 주소서!" 나는 악을 썼다. "들어 주셔야 하나이다!" 셀레스티아를 보며 말하려 했지만, 충격과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입을 떡 벌리고 나를 쳐다보는 모습에 가리워 여신의 광명된 신체神體는 보이지 않았다. "이제 공주께서 저를 내치시면 두 번 다시 말씀드릴 수 없으리이다!"

 

"멈추지 못할까!" 근위가 소리쳤다.

 

"이쪽이다!" 다른 근위가 나를 들어올리더니 출구 쪽으로 떠밀었다. 문 밖에는 로비를 경비하던 병력보다 훨씬 많은 병력이 쏟아지는 햇빛을 맞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주님께 접근하지 못하게 해!"

 

"놔요! 놓으라고요!" 나는 발작하듯 흐느끼며 소리쳤다. 혼자 되기 싫었다. 다시 잊히고 싶지 않았다. "제 말을 들으셔야 합니다! 공주님만이 이 저주에서 저를 구하실 수 있습니다!"

 

햇빛은 눈이 부실 정도로 밝았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매미가 울어대는 소리가 뒤섞여, 격렬한 포화의 소리로 뒤섞였다.

 

"기다리거라."

 

문 밖의 광채조차 내 뒤를 밝힌 신휘神輝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근위대가 모든 동작을 중지했다. 근위들이 나를 축 늘어진 시계추를 다루듯 돌려, 내 평생 직접 목도한 그 어느 것보다도 신성하고 황홀한 존재 앞에 내보였다. 로비 가장 깊은 곳에 마련된 자리에서 일어난 셀레스티아 공주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군중들이 양 옆으로 갈라져 공주에게 길을 터주었다. 내 눈앞에, 오직 당당히 서 있는 공주 하나밖에 없었다.

 

"끌어내 내치지 말아라. 편히 말하게 두거라..."

 

근위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공주님, 이는—"

 

"짐은 만인을 보살필 책임이 있다." 흠결 하나 없이 말끔한 공주의 눈이 내 몸뚱이를 향했다. 그 눈길은 꾸짖음이나 책망이 아니라, 그저 무한한 자애였다. 나는 소리없이 울었다. "짐의 권능으로 백성의 고통을 덜해 줄 수 있기만 하다면, 어찌 모른 척 할 수 있겠느냐. 그 또한 짐의 책임이니라."

 

근위들은 두말하지 않았다. 근위들은 나를 그대로 내려서 네 발로 땅을 딛고 서 있게 해주었다. 나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네 다리가 후들거렸다. 나는 기듯이 몸을 떨며 공주 앞에 나아갔다. 구원이 바로 목전에 있었으므로, 저주가 몰고 온 한기조차 더없이 기꺼웠다. 나는 고개를 들어 공주를 마주보았다. 광채를 발하는 셀레스티아 공주의 얼굴을 보자 눈물이 한도 끝도 없이 흘러내렸다. "망극하나이다.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불초한 몸에 미친 고난을 어찌 말로 다하겠나이까..."

 

"쉿..." 셀레스티아가 다가와 두 날개를 펼쳐 나를 안았다. 나는 그 품에서 한 명 어린애에 불과했다. 이대로 계속 셀레스티아의 품에 안겨 있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리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저주가 몰고 온 한기는 삼라만상 곳곳에 깃들어 있었고, 이는 셀레스티아의 따뜻한 품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공주가 조용히 말했다. "진정하거라. 다 괜찮다. 숨부터 고르자꾸나. 네 어려움을 고하는 일은 그 뒤에 해도 늦지 않다."

 

나는 훌쩍이며 웃었다. 나는 몸을 일으키고 입을 열어 말할 준비를 했다. 그 때 시야에 무엇인가 스쳐 지나갔다. 고개를 돌려 돌아보았다.

 

트와일라잇은 셀레스티아 공주의 곁에 없었는데, 셀레스티아 공주의 곁에 와 서 있었다. 보라색 연무가 트와일라잇을 감쌌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을수록 그 형상은 점점 더 커져서 거대한 그림자로 변했다. 그림자는 로비에 모인 군중들을 전부 집어삼켰고, 어느덧 셀레스티아까지 넘보고 있었다. 창백한 빛이 번득이는 섬광과 함께 뼈만 남은 날개가 펼쳐졌다. 호텔 벽이 죄다 썰려 무너졌다. 그자가 입을 열자 이름 없는 자들이 부르는 소리가 메아리졌다. 은빛 투구가 트와일라잇이었던 것의 머리에 씌워지는 순간, 내 떨리는 시선 위로 은빛 투구가 가까워 왔다.

 

"악몽의 밤이다! 무서운 밤이다!"

 

나는 놀라 숨을 들이마시며 뒤로 펄쩍 뛰었다. 내 앞에 선 것은 세 명 꼬마였다.

 

하나는 공주, 하나는 무당벌레, 다른 하나는 비행사 복장을 한 꼬마들이 나를 보고 방긋 웃었다. 하나같이 형형색색의 빛깔들로 꾸민 종이 가방을 목에 걸고 있었다.

 

"달달한 거 주면 안 잡아먹지!" 셋이 한 목소리로 말했다.

 

뒷걸음치다 가로등에 몸이 닿았다. 쌀쌀한 10월 밤이어서였는지, 입김이 뿌옇게 엉겨 나왔다. "잠깐... 뭐라고...?" 나는 말을 멈추었다. 내 목소리는 잘 들리지도 않는 소음처럼 들렸다. 발굽을 들어 확인해 보니, 나는 온몸을 하얀 붕대로 칭칭 감은 행색이었다. "악몽...야...라고?"

 

"야들아, 지나가던 양반 놀래키면 안 뒤야!" 스미스 할머니가 달달 떨리는 사지를 끌고 나오더니, 셋에게 얼굴을 비볐다. 셋은 포니빌 한가운데 있는 나무집을 향했다. "단 거는 집집마다 돌아댕김서 달라 캐야지, 이 고얀 것들 같으니라고! 냉큼 가라, 훠이! 너거들 보고 있다가 가뜩이나 안 좋은 심장 더 상할까 걱정이다!"

 

"재밌게 노세용!" 공주로 분장한 꼬마가 낭랑하게 말했다.

 

"으엑." 스미스 할머니가 걸음을 재촉하는 사이, 무당벌레로 분장한 꼬마가 눈을 굴리며 중얼거렸다. "세상 어느 미라가 하프를 들고 다녀요?"

 

나는 멍하니 꼬마들의 뒤만 보고 서 있다가 흠칫 놀라 마력장이 닿는 범위 전역을 마력으로 더듬었다. 엉덩이 쪽에 걸어놓은 벨벳 주머니가 느껴졌다. 나는 겁도 없이 주머니에서 나이트브링어를 끄집어냈다. 신물 위로 쏟아진 가로등 불빛이 만화경처럼 부서지며 튕겨져 나갔다. 나는 나이트브링어의 검은 현을 희롱하며 연주했다. 어스름 진혼곡의 연주는 순식간에 마무리되었다. 밤의 한기가 녹아들어 사라졌고, 그 자리를 뜨거운 목적의식이 채웠다. 악문 이 사이로 뜨거운 날숨을 뱉어내고, 입가에 둘러놓은 붕대를 잡아당겨 숨쉴 만한 자리를 만들었다.

 

나는 가로등에 기대어 주저앉은 채 축 늘어진 시선으로 포니빌 곳곳을 훑어보았다. 오고가는 행인들은 즐거워 보였고, 형형색색의 기묘한 복장을 두르고 있었다. 캐럿 탑은 악마 분장을 했고, 애플잭은 허수아비가 되어 있었다. 더피는... 어... 참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분장을 하고 있었지만 누구인지 알아먹을 수 있을 정도는 되었으니 아무렴 어떠랴.

 

"악몽야 축제." 중얼거리다가 마른침을 삼켰다.

 

헐떡이는 숨이 몇 번 몸을 드나들고 난 뒤, 시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커다란 무대 하나가 설치되어 있었다. 시장이 지휘대에 올라서 있었고, 그 옆에 늘어선 밴드는 기괴한 음악을 연주했다. 시장이 뒤집어쓰고 있던 칼라풀한 광대 가발에 있던 시선이 어느새 드리운 밤의 장막과 그 위로 떠오른 별빛으로 옮아갔다. 해가 진 지는 한 시간도 되지 않은 듯했다. 공식적으로 축제 개시가 선포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편해지지는 않았다.

 

"어디 계시지?" 마지막 빛이 어른거리는 지평선 쪽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어스름이 숲 위로 뿌연 자주색을 뿌리며 다가왔다. 희미한 광륜을 두른 달빛이 루나 공주의 신격을 증거하며 휘영청 떠올랐는데, 정작 루나 공주가 오기는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지금쯤이면 도착했을 터." 입술을 씹었다. "혹시... 혹시 마음을 바꿨나?"

 

고개를 흔들자 몸에 두른 붕대가 좀 느슨하게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염동력으로 붕대를 몸에 다시 감았다.

 

"아니. 통보한 일정을 직전에 가서야 취소하는 게 공주가 할 만한 짓은 아니야." 나는 혼자 말했다. 그러다가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아니, 그럴 수 있으니까 공주 아닐까."

 

다시 고개를 들어 달빛을 마주보았다. 루나 공주를 생각했다. 앨러배스터와, 거의 천 년 전 그가 루나 공주를 도와 연구했던 금단의 지식을 생각했다. 달의 여신이 마침내 정신줄을 놓아 버리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공허의 여신인 아리아 공주가 남긴 영향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일까? 악몽야 축제에 나타나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있을 텐데, 대체 무슨 생각이지? 루나 공주 본인 입장에서는 여기 끼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 텐데. 게다가 다른 곳도 아니고 그 포니빌에서?

 

"아니. 올 거야." 혼자 중얼거렸다. "분명히 올 거야. 나는..." 나이트브링어를 끌어안았다. 몸이 가볍게 떨렸다. 나는 다시 진혼곡을 연주했다. 언제라도 루나 공주가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를 안은 채, 오래 전에 지나간 수많은 밤들처럼 그저 연주할 뿐이었다. 지금이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였고, 루나 공주에게 야상곡을 들려 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성공하기만 한다면 루나 공주와 아리아 공주 사이의 연결을 회복시킬 수 있을 터였다. "나는, 해야 할 연주를 할 뿐. 해야 할 일을 기억하고만 있으면 돼."

 

지나는 행인들은 이쪽을 보고 꽤 놀란 눈치였다. 설마 악몽야 축제 중에 떠돌이 연주자가 나타날 줄은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다. 축제 기분에 젖은 사람들은 기분좋게 웃으며 미라 행색을 한 이방인에게 발굽을 흔들어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행인들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두 눈을 단단히 감았다. 저희끼리 떠들어대는 기분 좋아 보이는 목소리와 젊은것들의 노래가 광장을 채우든지 말든지, 그저 내 귓가에는 연주 소리에 씻겨나가 들리지 않게만 되면 될 일이었다. "정신 차리고 있자. 내가 누군지 계속 기억하자. 나는 라이라. 라이라 하트스트링스." 온 세상이 녹아내려 분간할 수 없게 느껴짐과 동시에, 다 부서진 기억들 한가운데로 이성이 떠올랐다. "나는 저주에 갇힌 자. 아리아 공주가 '고적의 이중주' 연주에 협조하도록 해야 해. 연주에만 집중하자. 지금은 음악이 전부야. 이 멜로디가..."

 

"어쩜, 이렇게 아름다울 데가!"

 

눈이 번쩍 뜨였다.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방향을 쳐다보았다.

 

"맙소사, 자기 추위를 타도 너무 타는 거 아니에요!" 래리티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치아와 갈기가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혹시 어디 안 좋은가요?"

 

몸이 떨렸다. 이빨이 딱딱 부딪쳐서 고개를 숙였다. 옆에 나무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래리티가 넣어준 금화 몇 닢이 그 안에서 반짝였다. 상자를 가로등 뒤로 밀쳐두고 래리티를 마주보았다.

 

"아, 전 괜찮아요." 만장의 한 파편을 퉁기며 더듬는 말투로 말했다. 그게 만장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아니다, 아나? "다른 사람들보다... 체온이 좀 낮은 편이라서." 나는 말했다. 말 하나하나가 축 늘어졌다. 래리티의 뒤를 보니 모닝 듀가 마을 한쪽 외곽을 지나던 민트그린 유니콘에게 금빛 튤립 한 송이를 건네고 있었다. 꽃을 받은 여자가 얼굴을 붉혔다. 당황한 것도 당황한 것이지만, 척 봐도 홀딱 빠진 게 분명했다. "천사같..."

 

"이야, 후드 멋진데!"

 

"응?" 발을 헛디뎠다. 도서관 책 몇 권이 허공을 갈랐다. "으악!"

 

"으어엇! 발 꼬이는 거 조심해야 해!" 스파이크가 휙 달려들어 책 절반 가까이를 무사히 받아낸 뒤 씩 웃으며 말했다. "휴! 트와일라잇이 어질러 놓은 거 겨우 다 치워 놨는데 하마터면 일 날 뻔했어!" 스파이크가 비늘 덮인 팔꿈치로 책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더니 내게 돌려주었다. "자, 여기. 그쪽은 뭐라고 부를..."

 

"하트스트링스." 나는 답했다. 스파이크가 건넨 책을 염동력으로 띄워 올리고, 다른 몇 권도 같이 띄운 뒤 햇살 드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머릿속에 완전 다른 곡이 박혀 있어." 먼지 낀 창문을 통해 모래알처럼 부서져 들어오는 햇빛을 바라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혹시 저 빛 알갱이 중 어느 하나라도 나보다 더 명확한 의지와 목적을 갖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이걸 뭐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어. 그런데 그냥... 그냥 계속 연주를 해야 할 것 같아."

 

"음악가나, 뭐 그쪽 일을 하나 봐?"

 

"당연히 그렇지!" 쏘아붙이듯 대꾸했다. "이런 큐티마크 달고 소설 쓰는 사람 봤어?" 고개를 돌렸다. 눈가가 꿈틀거렸다.

 

캐러멜과 윈드휘슬러가 서로에게 기대고 서 있었다. 시청 청사 내부를 장식한 촛불에서 흘러나온 촉광 아래 둘의 입술이 맞닿았다. 뒤에 선 몇몇이 환호하며 발굽을 쿵쿵 굴러 축하의 뜻을 표했다. 한 쌍 페가수스가 식장 위를 날아다니며 꽃잎을 흩뿌렸다.

 

둘이 서로의 뺨에 얼굴을 비볐다. 캐러멜의 한쪽 눈에서 눈물이 굴러 떨어졌다. 결혼식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캐러멜이 시선을 이쪽으로 돌렸다.

 

나는 소리쳤다. "왜?!"

 

포니빌 모든 건물이 내려다보이는 고층 건물 꼭대기의 바람이 내 갈기를 흩어놓으며 지나쳤다. 다 저물어 가는 저녁이었다. 나는 시청 청사 지붕 위에 서 있었고, 캐러멜은 그 아래에 서 있었다.

 

"뛰어내리지 못할 건 또 뭔데?!" 나는 미쳐 있었다. 나는 망령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웃으면서 곡했다. "떨어지기만 하면 다 끝내고 편해질 수 있는데 내가 왜?!"

 

캐러멜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푸른 눈 한 쌍이 내가 자맥질해 들어갈 호수처럼 보였다. 차분하게 마음을 달래주는 듯한 사내의 목소리가 파문을 이끌고 내게 다가왔다. "당신은 소중하고 각별한 사람이니까. 당신이 떠나 버린 세상은 이전보다도 더 칙칙하고 살기 어려운 곳이 될 테니까."

 

식은땀이 눈물과 뒤섞였다. 숨이 가빴다. 이제 더 놓아 버릴 것이 없었다. 나는 더 비울 것도 없이 공허한 사람이었고, 누군가 내면의 공허를 채워주길 바랐다. 나는 그분께 다가갔다. 살짝 장밋빛이 도는 두 눈 위로, 남은 모든 희망을 긁어모아 그곳까지 걸어온 자의 모습이 비쳤다.

 

"네 그리 바란다면야 그리해도 좋다." 셀레스티아 공주가 말했다. 로비를 가득 메운 군중의 표정은 이제 짜증이 아닌 호기심을 나타내고 있었다. "내게 어떤 방책이 있으리라 생각이 든다면야, 얼마든지 연주하거라."

 

"망극하나이다." 나는 말을 더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떨리는 발굽으로 리라의 현을 퉁겨 보았다. "감히 약속드리건대, 이게 어찌된 일인지 이제 분명해질 것입니다..." 사지가 그 자리에 얼어붙듯이 굳어 버려서 나는 더 움직일 수 없었다. 항아비곡 제3번이 아니었다. 아주 다른 곡을 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내가 아는 비곡은 단 3곡뿐인데. "뭐야 이거?"

 

"뭐긴 뭐양, 악몽야 축제징!" 닭 분장을 한 분홍색 무언가가 자기 얼굴을 내 코앞에 들이밀고 빙글빙글 웃었다. "꼬-꼭!"

 

"으악!" 진혼곡 연주가 끊김과 동시에, 소스라치게 놀란 나는 짚더미로 쓰러지고 말았다. 어느샌가 나는 다른 몇몇 사람들과 함께 짐수레에 올라 별이 반짝이는 보랏빛 밤하늘 아래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히히히힝!" 핑키 파이가 물러섰다. 머리 위에 단 새빨간 벼슬이 앞뒤로 흔들리는 통에 옷에 달린 흰 깃털들이 흐트러졌다. "왜 그랭?! 뭘 그리 깜짝 놀랑?" 핑키가 고개를 돌리더니 짐마차 뒤로 흘러가는 각종 놀이 시설들을 보고 외쳤다. "우우우! 여기양 여기!" 그러고는 한 무리 꼬마들을 헤치고 수레 앞쪽까지 가서 말했다. "빅 맥! 그만 가장! 신명나고 재밌는 놀잇감이 지천이양!"

 

"그으려." 짐수레가 천천히 멈춰서자 핑키 파이를 선두로 꼬마들이 줄줄이 내려섰다. 빛나는 밤의 빛가루가 흩날렸다.

 

"자, 게임의 요지는 호박 발사기를 써서 과녁판을 맞추는 거양!" 핑키 파이가 더없이 즐거운 기색으로 아이들을 향해 주절거렸다. "물론 게임이 항상 원래 규칙대로 되라는 법은 없징! 전에는 과녁이고 사람이고 일단 눈앞에 있으면 일단 쏘고 보자는 식으로 한바탕 난리가 난 적 있었엉! 물론 그 끝이 그닥 좋지는 않았지만 말양! 히히히히!"

 

나는 수레에 탄 그대로 숨을 헐떡이며 서 있었다. 두 앞발굽을 내려다보자, 평범한 리라가 아니라 나이트브링어가 품에 안겨 있었다. 그 누구도 눈앞에 있는 악기가 성물임을 눈치채지 못한 것은, 사람들이 다들 한결같이 정신 사나운 복장을 걸치고 쏘다니고 있기 때문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좋아... 진정하고..." 나는 기어 내려오듯이 수레에서 내려왔다. 빅 맥이 저 사람 괜찮나, 싶은 눈길로 이쪽을 흘끗 쳐다보았다. 걸음을 재촉해 빅 맥의 시야에서 벗어나 호박등이 가득 들어찬 천막 뒤로 몸을 숨겼다. "침착해야 해." 나는 중얼거리며 몸에 두른 새하얀 붕대를 몸에 단단히 감았다. "집중하자. 진혼곡의 효력이 다하고 있으니, 제정신인 상태를 유지하려면 더 많이 연주할 필요가 있겠어. 그나저나 루나 공주님께도 효과가 있어야 할 텐데. 아무래도 그 때 이후 야상곡을 다시 듣는 건 이번이 처음일 테니..." 마른침이 목으로 넘어갔다.

 

그 와중 저편의 널찍한 무대 앞에 모인 사람들은 제코라가 직접 들려 주는 나이트메어 문 이야기를 듣고자 기다리고 있었다. 그쪽을 계속 보고 있자니, 각종 의상에 온갖 솜털 색깔들이 뒤섞이며 천 년 전 캔틀롯의 참상으로 변해갔다. 화마에 휩싸인 캔틀롯 거리와, 아리아 공주의 저주받은 목소리에서 벗어나고자 스스로 목을 매단 자들의 허깨비가 펼쳐졌다.

 

으깨진 한숨을 토하며 두 눈을 질끈 감고 어스름 진혼곡 연주를 시작했다. "오실 거야. 내 연주를 듣게 되실 거야. 셀레스티아 공주님 때처럼은 되지 않을 거야. 절대로." 침을 삼켰다. 한 줄기 오한이 몸을 타고 흘렀다. 나이트브링어의 현을 세게 퉁겼다. 음이 솟구치고 내려앉을 때마다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연주에만 집중하자. 멜로디에 집중해야 해. 그게 나니까. 이 노래가 나니까. 이게..."

 

"다들 조심해!" 머리 위에서 선더레인이 소리쳤다. "숲 가까이 가지 마!"

 

눈이 번쩍 뜨였다. 해가 기울어 가는 어느 오후였다. 나는 리라를 들고 나무 밑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풀이 무성한 땅덩이 위로 어마어마한 진동이 퍼졌다. 사람들이 겁을 잔뜩 집어먹은 채 나를 지나쳐 달아났고, 풀밭 위로 소풍에 싸들고 온 물건들이 굴러다녔다.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이 달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포니빌 공원 너머로 에버프리 숲의 장대한 에메랄드 빛 녹음이 펼쳐져 보였다. 늘어선 수목들 사이로 반짝이는 앞발이 튀어나와 땅을 구르며 전진했다. 내 평생 본 것 중에서도 가장 크다고 장담할 수 있는 크기의 짐승이었다. 날카롭고 반투명한 송곳니를 드러낸 작은곰자리가 그 거대한 몸뚱이를 일으켜 세웠고, 그 앞에는 달아나지 못한 동네 사람 둘이 있었다. 둘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몸을 떨며 작은곰자리의 포효가 끝난 뒤 그들의 머리 위로 내리쳐질 놈의 거대한 앞발과, 사분오열되어 흩어질 운명을 기다릴 뿐이었다.

 

"안 돼!" 내 등 뒤의 나무로 몸을 숨긴 여자가 높고 새된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분명 겨울잠을 자고 있어야 할 시기인데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게 중요하냐!" 남자가 소리쳤다. "저 둘이 죽게 생겼는데!"

 

"선더레인!" 블로섬포스가 시내 방향에서 급히 날아오며 소리쳤다. "트와일라잇네 꼬마 용을 통해서 공주님께 말씀 올렸..." 그녀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숨이 막히는 소리로 말했다. "공주님 맙소사! 벌써 여기까지 기어나왔다고!"

 

"거기, 미쳤어?!" 머리 위에서 선더레인이 앞발굽을 입가에 모으고 큰 소리로 외쳤다. "당장 튀어!"

 

처음에는 선더레인이 작은곰자리 앞 두 명에게 소리치는 줄 알았는데, 이 난장판에 끼어든 제3의 인물이 그 대상이었다. 눈을 흘끗 돌려 그쪽을 보았을 때는 정말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더없이 평온한 걸음으로 현장에 끼어들어 작은곰자리의 그림자 아래까지 거침없이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부드럽고 평온한 노래가 솟았다.

 

둘을 산산조각낼 기세로 흉흉한 분위기를 조성하던 작은곰자리가 모든 동작을 멈췄다. 그러더니 심드렁한 그르릉 소리와 함께, 자기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페가수스에게 주의를 돌렸다.

 

노래를 불러주고 있던 페가수스는 플러터샤이였다. 나긋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였지만, 정작 그녀의 노랫소리가 들릴 정도 거리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그 상황의 긴장감과 두려움 때문에 차마 두 눈 뜨고 못 볼 광경이었을 것이다.

 

작은곰자리 앞에서 벌벌 떨던 둘이 후들거리는 다리로 땅을 딛고 일어서더니, 단순한 자장가 가락에 무력화된 짐승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뒷걸음쳤다. 플러터샤이가 노래하며 작은곰자리의 주의를 돌려놓는 중, 뒷걸음쳐 달아나던 둘 중 하나가 실수로 잔가지를 밟았다. 툭 하고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에 플러터샤이의 집중이 흩어졌고, 그 때문에 약간의 음이탈이 일어났다.

 

작은곰자리가 짜증을 내듯이 대가리를 흔들더니, 포효하며 앞발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가 그대로 플러터샤이의 연약한 신체를 향하여 내리쳤다.

 

그 꼴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숨을 내쉬지도 못하고 긴장할 수밖에 없었지만... 다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작은곰자리가 휘두른 발톱은 플러터샤이의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어느샌가 플러터샤이의 옆에 한 명 유니콘이 끼어들어, 노래가 잠시 끊긴 그 찰나의 순간을 현을 퉁겨 메워 주었기 때문이다.

 

플러터샤이의 곁에 선 유니콘은 나였다. 머리 위로 작은곰자리가 드리운 그림자가 쏟아졌다. 뼛속까지 사무치는 한기에 사지가 파르르 떨리는 와중에도 플러터샤이의 의연한 모습을 최대한 따라하려 무진 애를 써야 했다. 우리는 그렇게 작은곰자리가 진정할 때까지 노래와 연주를 제공했다. 작은곰자리의 거대한 몸뚱이 밖으로 심장 뛰는 진동이 퍼져나오다가, 이윽고 서서히 잦아들더니 흩어졌다. 작은곰자리가 자리에 주저앉더니 발톱을 거두고 차분한 기색이 되었다.

 

뒤쪽을 흘끗 쳐다보고, 뿔을 밝혀 선더레인 쪽에 신호를 보냈다.

 

선더레인이 눈을 번득이더니 나와 플러터샤이 곁에 있던 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뜻인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인 선더레인이 블로섬포스에게 몸짓해 신호하고, 함께 우리 쪽으로 날아와 거기 있던 둘의 발굽을 잡아 들어올려 안전히 대피시켰다.

 

플러터샤이와 나도 가만히 있던 것은 아니어서, 작은곰자리와 서서히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잠이 쏟아지는지 혼곤한 눈꺼풀이 서서히 덮여 갔다. 우리 둘이 공원 반대쪽까지 달아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우리가 달아난 걸 눈치채기도 전, 캔틀롯이 급파한 근위대가 하늘에서부터 내려꽂히듯 도착해서 작은곰자리를 포위했다. 작은곰자리가 으르렁대며 몇 번 발톱을 휘두르기는 했으나, 근위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전부 회피했다. 작은곰자리는 짜증이 났는지 방향을 틀어 에버프리 숲을 향해 돌아갔다. 근위대는 하늘에 떠서 작은곰자리가 완전히 서식지로 돌아간 것이 확인될 때까지 대기했다.

 

언덕마루 위에서 기다리던 인파 속으로 플러터샤이와 함께 합류하자, 군중 사이에서 환성이 일었다. 비슷하게 도착한 선더레인과 블로섬포스가 구출해 온 둘을 땅에 안전하게 내려주었다. 둘은 곧장 플러터샤이에게 달려가 그녀를 얼싸안았다.

 

"덕분에 살았어, 정말 고마워!"

 

"진짜 너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죽었을 거야!"

 

"네가 정말 우리 마을 보배야, 보배!"

 

"어으으음..." 플러터샤이가 홍조를 띄우며 괜히 땅을 툭툭 찼다. "사람이 다치면 안 되니까..."

 

나는 그 때 거기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왜 다들 플러터샤이는 소리 높여 찬양하는 와중에 나는 안중에도 없는지, 순간 혼란이 왔다. 그 때 보인 것이 입김으로 엉겨 흩어지는 내 숨결이었다. 그것이 숨결인지 한숨인지는 알 수 없다. 나는 웃으며 한데 모인 사람들 쪽으로 다가갔다.

 

"이야, 플러터샤이!" 부러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쪽처럼 용감한 사람은 처음 봅니다!"

 

"예?" 플러터샤이는 생면부지의 사람을 보듯 나를 보았다. 붉어져 있던 얼굴이 더 붉어졌다. "아뇨, 그런 얘긴..."

 

"그런 얘긴 처음이라고요?" 활짝 웃으며 말했다. "포니빌에서 그쪽처럼 심약한 사람이 또 없다는 얘기 있었잖아요? 뭐 자기 그림자 보고도 깜짝깜짝 놀란다고들 하던데."

 

몇몇이 피식 웃으며 플러터샤이의 등을 두드렸다. 플러터샤이가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맞아요. 지나칠 정도로 잦긴 한데, 저를 보고도 놀라는 경우가 있기는 있어요. 하지만..." 몸을 움찔하던 여자가 말했다. "...제가 아닌 존재를 마주하고 겁을 먹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솔직히 놀라웠다. 입술 사이로 숨이 스며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뭐, 사실 간단한 일 아니겠어요?" 플러터샤이에게 말했다. "그쪽이 다른 사람 걱정하는 거야, 산도 옮겨 놓을 정도라고 하니..."

 

"산을 옮기는 건 잘 모르겠지만..." 플러터샤이가 말했다. "그래도... 어... 그래서 노래를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사람들이 웃으며 다시 몇 번 플러터샤이를 껴안거나 환호하는 것으로 플러터샤이의 위업을 칭송했다.

 

나는 웃으며 리라를 가슴팍에 껴안았다. "그래요. 노래 잘 하시더군요."

 

"으갸아아악!" 핑키 파이가 비명을 질렀다. "나이트메어 문이양! 튀어어어어!"

 

입가까지 싸매고 있던 붕대에 입 밖으로 토해낸 숨이 부딪쳤다. 몸을 틀어 별빛 쏟아지는 하늘을 올려다보니, 자욱하게 낀 구름 사이로 번개가 내리치며 번쩍이고 있었다. 그 폭풍의 현장을 뚫고, 밤의 갑주를 걸친 두 명 사로스 근위대가 끄는 전차가 솟아올랐다. 소리죽여 내지르는 비명과 경악의 숨소리가 가득 찼다. 전차가 아무런 거리낌없이 우리 앞까지 들이닥치며 솟았던 비명을 깨뜨려 부수었다. 밤의 공주가 검은 그림자처럼 전차에서 내려 포니빌 시내에 발을 디뎠다. 머리에 쓰고 있던 두건을 내리자 시간의 차가운 정과 끌로 깎아내 시퍼런 서슬을 드리우고 있으면서도, 두려울 정도로 아름다운 눈이 드러났다.

 

근처에 있던 자들은 하나같이 자리에 나동그라져 몸조차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공주가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심장이 부서지고 찢어지며 불어닥치는 끔찍한 한기에 온몸이 쑤셔왔다. 공주가 두르고 있던 망토를 벗어던지며 날개를 펼쳤다. 공중에 뜬 망토가 박쥐 무리로 변해 흩어졌다. 루나 공주가 당당하기 이를 데 없는 자세로 외쳤다.

 

"그대 포니빌의 신민들이여! 짐이 그대들의 거처에 당도하여 왕실의 위엄을 능히 미치게 하였으니, 너희들은 마땅히 나와 밤의 공주를 경배하여 맞이할지어다!" 그것이 루나 공주가 쩌렁쩌렁하게 외친 소리였다. 영혼까지 울릴 듯 우렁찬 소리였다. 온 동네 사람들이 떨고 있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 누구도 감히 루나 공주를 마주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루나 공주의 위엄은 빛나고 찬란한 면도 있지만, 동시에 두려운 면모도 있었기 때문이다. "악몽을 몰고 다니던 악몽의 존재가 아니라, 너희들의 사랑과 존중을 받고자 하는 한 사람으로 온 것이니 너희는 두려워 말고 앞으로 나오라!"

 

루나 공주의 일장연설이 끝난 뒤에도 귓가에 그 소리가 계속 울렸는데, 머리가 반으로 쪼개질 지경이었다. 이쪽도 지지 않고 악을 쓰고 대들었어야 했다. 나이트브링어를 머리 높이 들고 루나 공주에게 달려들며 진혼곡을 연주해 오래 전에 잊히고 만 그녀의 혈육, 황혼의 공주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내야 했다. 그러나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사지 말단의 감각마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리 나오라. 너희의 두려움을 축제로 포장한 기만을 그만두고, 광명과 영광을 노래하는 연회를 벌이자!" 아무리 들어도 이 세상의 것은 아닌 것 같은 목소리가 울렸다.

 

루나 공주가 땅을 딛고 선 뒤 처음으로, 나는 눈물에 젖은 눈을 열어 떴다. 루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사라지고 없지만, 분명 내 앞에 서서 고적감의 일부이자 전령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검은 날개를 펼치고 은 투구를 쓴 존재로서 나를 노려보고 있음을. 나는 무의 존재였고, 아리아의 노래로 나를 무의 존재로 만드는 것은 저쪽이 가진 일종의 의무였다. 야상곡에 물든 대가로 이 대지에서 쫓겨나 달에 유폐된 순간부터 발생한 의무였다는 것이다. 평생 거의 이해할 수도 없을 자매가 남긴 한 줄기 숨결을 품에 안아 지키는 대가로, 자기 안에 남아 있던 모든 생명과 온기를 골수 속까지 박탈당해 이퀘스트리아의 재앙이자 새벽을 밟아 죽이는 자로 다시 태어나야 했던 그 존재로.

 

나이트메어 문은 아리아의 그림자였고, 이미 죽은 여신에 붙은 사족 같은 존재였다. 본인은 몰랐겠지만, 자기 자신의 본질을 알고 모르고는 나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나를 무의 존재로 끌어내리는 데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았다.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알 수 없지만 나는 그것을 거부했다. 거부했으므로 나는 사슬에 매이는 최후를 회피할 수 있었고, 영원토록 입을 다물어야 하는 꼴을 면할 수 있었다.

 

"헛소리 마. 내 말 들어!" 끔찍한 소음과 혼란이 뒤섞이는 한복판에 대고 소리쳤다. "저편의 노래만 들은 것은 아닐 터! 그렇다면 당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될 수 없는 무언가로 변해 버렸을 수밖에!" 이를 뿌득 갈고 소리쳤다. "스스로도 너무 나간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로 선을 넘었으니, 이제 그 여자를 기억 저편에서 다시 꺼내오시지! 그래야 그 여자도 마음을 바꿔먹고 나와 협주를 해 줄 테니!"

 

나이트메어 문은 아무 말도 없었다. 나를 내려다보더니, 대뜸 사라져 버렸다. 나이트메어 문이 건너간 저편에서 번쩍거리는 낙뢰가 내리꽂혔고, 이름 없는 자들의 땅에서 솟아난 혹한의 안개가 퍼져 나와 저편을 갈라놓았다. 그것들 모두 내가 있는 곳과 나이트메어 문이 물러난 곳, 그리고 그 순간 어디에도 실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기억의 한 파편일 뿐이었다. 모든 것이 사라진 뒤, 나는 어둠 속에 홀로 서서 아무도 듣는 이 없는 고함만 버럭버럭 질러대고 있었다.

 

"망할!" 속을 끓이며 앞다리를 휙휙 움직여 나이트브링어를 움켜쥐었다. 내 방 옷장에 숨은 문댄서를 끌어안았을 때처럼, 숲 한가운데 떨어진 스쿠틀루를 끌고 바깥 세상의 희미한 온기를 따라 사방에 널린 나뭇가지와 잡목을 피해 달리던 때처럼 나이트브링어를 품에 안았다. "내가 또 잊어버릴 것 같냐! 나이트메어 문!" 그래나이트 셔플의 묘비 위에 적힌 글줄이, 눈물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네뷸러스의 미소에 뒤섞여 지워졌다. 눈을 질끈 감고 사방에 휘몰아치는 소용돌이를 향하여 비명을 질렀다. "두 번 다시 혼자 남겨질 것 같냐고!" 뇌운 너머 어딘가에서 진혼곡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름 없는 자들의 신음과, 덜그럭거리는 쇠사슬 소리에 가려서 잘 들리지는 않았다. "내가 죽어도 그 꼴은 안 당하지! 아무렴! 내가..."

 

"으엑." 레인보우 대쉬가 툴툴대며 말했다. "티파티에 간다니. 나 같으면 차라리 나가 죽고 말겠다."

 

"음, 사실 자기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야." 슈가큐브코너 내부 어떤 테이블. 래리티가 남은 커피를 마저 마시고 말했다. 냅킨으로 입가를 가볍게 두드려 닦은 래리티가 뿔을 밝혀 가방을 어깨에 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이티 토이티가 초대한 건 나밖에 없거든. 보통 그런 자리에 친구를 데려갈 수 있으면 더없이 좋은 일이지만, 아무래도 네가 그... 격식 차리는... 걸 별로 안 좋아하니까 말야. 아무래도 사업상 대화가 오가는 자리니까, 나 혼자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네가 같이 가겠다고 해도 막상 가면 재미없는 자리일 게 분명하지 않니."

 

"핑계 좋다! 그게 뭐 대수라고! 오늘은 나도 할 거 있다 뭐!"

 

"어머, 그래?" 래리티가 빙긋이 웃으며 팁으로 테이블에 2비트를 올려두었다. "또 핑키 파이랑 같이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온갖 장난을 칠 생각인가 봐?"

 

"어, 그게... 아니고." 레인보우 대쉬의 귀가 늘어졌다. 그러더니 한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바닥 타일 위로 발굽을 빙빙 돌리며 우물거렸다. "사장님이랑 사모님이 주말까지 트로팅엄으로 뭘 좀 가져다 주라고 심부름을 시키셨나 보더라고. 혼자 가면 상관없는데, 스윗 애플 에이커 사과 디저트도 홍보하면 좋지 않겠냐면서 애플잭까지 달고 갔더라......"

 

"그럼 플러터샤이나 트와일라잇이랑—"

 

"걔들은 캔틀롯 갔어. 트와일라잇네 오빠가 뭐 표창을 받는다나 어쨌다나......" 레인보우가 테이블 위 티스푼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으으으... 뭔 주말이 이 모양이래냐..."

 

"그래? 어쩜 좋니. 안됐다 얘—"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할 일이 없는 건 아니지!" 레인보우 대쉬가 두 귀를 쫑긋 세우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 새로 배운 곡예비행 기술이 몇 가지가 있거든! 동네 북쪽 어귀에서 연습이나 좀 해 볼 생각이야. 마침 서풍도 딱 좋게 불어오는 참이라, 버커니어 블리츠를 연습하기 정말 좋거든!"

 

"아, 그러니까 원더볼츠 눈에 들려고 연습하고 있다는 그 기술 말이구나?"

 

"그라아아아아아췌!" 레인보우 대쉬가 천장 가까이까지 솟구치더니 빨간 눈을 반짝이며 빙글빙글 웃었다. "혹시 모르지? 핫 토픽인지 뭔지 하는 아저씨랑 수다 떨다가 이 몸이 하늘을 반쪽 내는 걸 감상할 수 있을지도?!"

 

"호이티 토이티 씨라니까." 래리티가 정정했다. "그리고 호이티 토이티 씨가 관광 목적으로 포니빌에 오시는 건 아니거든. 사업상 면담이 필요해서 오시는 거고, 나 또한 사업상의 예의를 다해서 그분을 맞이할 생각이야.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어서 유감이네." 래리티가 느릿하게 발굽을 흔들어 인사하고 자리를 떠났다. "우리가 네 비행을 감상하진 못하더라도 원더볼츠 입단을 위한 좋은 연습이 될 건 확신해! 그럼!"

 

"그러냐. 어, 나중에 봐." 레인보우 대쉬가 말했다. 두 귀를 축 늘어뜨린 레인보우가 도로 내려와 테이블 가장자리에 엎어졌다. 반짝이던 두 눈은 완전히 풀이 죽었고, 자신만만한 말을 외치던 입에서는 한숨이 떨어졌다.

 

바로 그 때, 레인보우의 두 귀가 쫑긋했다. 잠시 뒤 다시 쫑긋했다. 전율이 일 정도로 낯익은 박자에 그녀의 몸이 반응했다. 몸을 일으켜 앉은 레인보우 대쉬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내가 있는 쪽으로 두 눈을 반짝이며 시선을 고정했다.

 

나는 스툴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후드 재킷으로 가린 발굽이 리라의 현을 퉁기고 희롱하며 밝게 색칠한 식당 안에 씩씩한 곡조를 띄워 올렸다.

 

레인보우 대쉬가 입을 떡 벌리더니 고개를 갸웃하고 한쪽 눈썹을 치키며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거, 그거... '허리케인 비행단장의 마지막 비행The Last Flight of Commander Hurricane'아냐?"

 

"그렇죠 뭐..." 나는 빙긋이 웃으며 그쪽에는 눈길도 안 주는 척 하고 말했다. "그냥, 가끔 시간 나면 연습삼아 퉁겨 보는 소곡 같은 거에요."

 

"연습삼아 퉁기는 소곡?" 레인보우 대쉬가 멈칫했다. "원더볼츠가 클라우드데일에서 공연할 때마다 클라우드데일 시립 오케스트라가 개막식에서 연주하는 곡을 소곡처럼 연주한단 말야?" 이어진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이게 얼마나 장대한 곡인데! 연주를 얼마나 잘 하길래 이걸 '연습삼아' 연주한다는 거지?"

 

"준비운동 정도 느낌으로 연주하니까 연습이 맞죠."

 

"그 다음엔 뭔데?"

 

"스트라토폴리스의 흥망성쇠The Rise and Fall of Stratopolis."

 

레인보우 대쉬가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와 내 앞에 떠서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러니까, '권운의 비상 교향곡 Soaring Cirrus Symphony'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꿰고 있다는 말이야?"

 

"음, 뭐 희망사항이지만요." 나는 재미없다는 눈길로 레인보우 대쉬를 보고 말했다. "허리케인 단장님이랑 스트라토폴리스는 페가수스 음악을 이해하기 위한 기본 소양이거든요. 이걸 모르면 페가수스 음악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거 끝내주네!" 레인보우 대쉬가 빙글빙글 웃었다. "스핏파이어는 자기 팀 공연에 스트라토폴리스 전곡을 다 쓰거든! 낡아빠진 오케스트라 연주가 뭐 대수냐 싶다가도, 그 사람들 날아다니는 거 보면 야, 음악 참 끝내준다!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니까!"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음악 자체가 웅장해서 그래요. 페가수스 작곡가들은 진지할 땐 한없이 진지하지만, 과장법을 다루는 데도 일가견이 있거든요. 무시무시하게 시끄러워서 귀가 아프다 싶다가도, 듣다 보면 특유의 당당함과 담대함이 있죠. 페가수스들과 닮아 있지 않은가요."

 

"하하하하... 잘 아네!" 레인보우 대쉬가 씩 웃었다.

 

"그건 좋은데, 권운의 비상을 마무리하는 게 좀 골치가 아프거든요." 나는 말했다. "제가 똑바로 연주하는 게 맞는지 누가 좀 들어 줬으면 좋겠네요. 마지막에 가까워질수록 연주도 더 커지니까, 박자 안 놓치는 데만 정신이 팔려서 높낮이가 맞는지 틀린지 판단하기 어려워서요."

 

"쳇. 척 봐도 더럽게 재미없을 게 뻔하구만." 레인보우가 툴툴댔다.

 

"아, 그런가요. 뭐 달리 하실 일이 있으시다면야 방해하지 않겠어요." 나는 말했다.

 

"어, 어?" 레인보우 대쉬는 당혹스러워하며 귀를 축 늘어뜨렸다. "아, 아냐! 그런 거..." 날개 파닥이기를 멈추며 움찔한 레인보우 대쉬가 내 앞에 내려와 섰다. "그러니까, 이, 이 몸이 기꺼이 도와 주겠다 이거지. 포니빌에서 속도라면 제일가는 기상 관리자와 어울려 다녀도 괜찮을 정도로 쿨하다고 그쪽이 생, 생각한다면야 얼마든지 어울려 주겠다고. 아...하하..."

 

리라 너머로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내가요? 충분히 쿨하다 이건가요?"

 

"어, 어!" 레인보우 대쉬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그쪽도 그 뭐냐... 어... 옆에 누구 있으면 좋을 것 같구만! 맞지..."

 

잠시 연주를 멈추고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괜찮군요. 혼자 있기엔 날씨가 아깝기도 하고."

 

레인보우는 아무 말도 없이 자기 발굽만 내려다보며 정신 사납게 날개를 움찔거릴 뿐이었다.

 

그런 모습이 참 보기 그래서 곧장 말했다. "권운의 비상이 어떻게 끝나는지 아세요?"

 

"왜. 뭐 흥얼거려 보라거나 그런 말 하려고?"

 

"히히히... 그게 시작이라서요."

 

"뭐, 좋아." 레인보우 대쉬가 헛기침을 해 목을 닦으며 내 옆에 앉았다. 즐거워 보였다. "시작한다."

 

가느다란 발굽에 들린 채가 박자에 맞춰 정확히 실로폰 막대를 타격했다. 트와일라잇이 만족스러워하며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지! 천둥 소리랑 똑같네!"

 

"아 진짜!" 밝고 화사한 삽화로 가득한 이야기책을 들고 내 침대에 누워 있던 문댄서가 툴툴댔다. "페가수스들은 죄다 자의식 과잉인가 봐! 왜 다 하나같이 귀청 떨어질 것처럼 쩌렁쩌렁해서는 정신 사나운 곡밖에 안 쓴대?"

 

침실 바닥에 앉아 있던 트와일라잇이 표정을 구겼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돼! 페가수스 문화는 그렇단 말야!"

 

"그르냐. 별 멍청한 문화도 다 있네." 문댄서가 짓궂은 표정으로 실실 웃으며 덧붙였다. "걔들 옷 입고 다니는 거 봤냐? 누가 보면 뭐 행사라도 하는 줄 알겠더라? 히히히. 뭐 구름이랑 전쟁이라도 하러 나가는 줄 알겠어!"

 

"야! 페가수스 군복 양식이 얼마나 멋있는데! 애초에 페가수스 사회가 얼마나 오랫동안 전사를 숭상했는지 알기나 해!" 트와일라잇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라이라 너라면 잘 알고 있겠지! 작년에 페가수스 펜팔 친구 하나 사귀었잖아. 문댄서한테 얘기 좀 해!"

 

"그러든가아아! 또 트와일라잇 편 들려고!" 문댄서가 이야기책을 한 장 넘기며 침대에 걸터앉은 다리를 흔들었다. "애초에 스타스월부터 셀레스티아 공주님밖에 몰랐으니까, 루나 공주님 편을 들 리가 없지!"

 

"지금 공주님 놀이하는 게 아니잖아! 고전 이퀘스트리아 음악사 얘기하는 중인데 왜!"

 

"그런 거 말고 도넛 가게 얘기 같은 거나 하고 놀면 안 되냐? 사탕 가루 왕창 친 도넛 먹고 싶다아!"

 

"하아아아...... 너 가끔 보면 진짜 지진아 같아!"

 

"하하하하!"

 

"뭐야 뭐?"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들었어? 진짜 멍청해 보인다!"

 

"정답! 지진아란 멍청한데 공부도 안 하는 사람이래!"

 

"야! 그거 무슨 뜻이야?!"

 

"네가 지진아라고 하는 게 아니라—"

 

"취소해!"

 

"널보고 지진아라고 하려던 게 아니라니까!"

 

"맞거든!"

 

"아니거든!"

 

"맞거든!"

 

"아니거든!"

 

"맞거든!"

 

슬슬 말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내 역할이니까. 내가 입을 열려고 할 때마다 열차가 덜컹거리며 역을 떠나는 모습만 눈앞에 그려졌다. 필리델피아로 향하는 열차에 몸을 실은 문댄서는 그 자체로 내 인생에서 완전히 격리된 존재가 되었다. 벤치에 주저앉았다. 사방을 채우는 한기에 몸을 웅크렸다. 포니빌 어느 한쪽 구석. 빛조차 잘 들지 않는 그곳은 몹시 추워서, 흘러나온 눈물이 떨어지기도 전에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일기에게."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포니빌 북쪽 어귀의 버려진 헛간 옆에 쳐둔 외로운 천막 하나. 나는 그 안에 들어앉아 앞에 놓인 일기장의 첫 번째이자 텅 빈 페이지를 마주보고 있었다. 염동력으로 펜을 들어 종이에 가져갔다.

 

"음악이 들리면, 그것으로 나는 내가 살아 있음을 안다. 멜로디를 지각하는 것으로 나는 내가 사유할 수 있음을 안다. 심장이 뛰면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지각으로 가슴이 충만해진다. 대체 왜?"

 

인후에 응어리가 엉기는 듯한 느낌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발굽을 뻗어 지퍼를 내리고 텐트 입구 덮개 천을 늘어뜨렸다. 천막 밖으로 마법공학 장치가 폭발하며 분출된 폭압에 트와일라잇 스파클과 후브스 박사, 레인보우 대쉬가 도서관 바닥에 나뒹구는 모습이 보였다.

 

"나 스스로도 구원하지 못하는 주제에, 저들을 구원하러 포니빌에 왔다고?"

 

온실. 모닝 듀가 비틀거리다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두 눈가가 경련했다. 

 

"음악을 나눌 수 있을까." 나는 거의 울다시피 하며 침을 삼켰다. "나 자신을 바칠 수 있을까."

 

네뷸러스가 나를 바라보다가 나를 지나쳐 사라졌다. 가을 바람이 불어 사내의 멋진 잿빛 갈기를 흔들고 지나갔다.

 

사내의 뺨을 타고 내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과 같은 눈물이 굴러 떨어졌다. "집에, 집에 가고 싶어요." 하루가 저물어 사방에서 어둠이 다가오던 어느 저녁쯤. 나와 체스를 두던 그래나이트 셔플은 지쳐 잠들었고, 나는 체스판 위를 내려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 정도, 그 정도도 요구할 수 없다는 걸까요."

 

"이 곡은..." 셀레스티아 공주가 말했다. 뭐라고 명명하기 어려운 감정에 젖어 공주의 불그스름한 눈이 젖어 있었다. "...제목이 무엇이냐?"

 

"그림자 전주곡이옵니다, 공주 전하." 나는 연주하며 말했다. 호텔 로비에서 쏟아지는 빛이 점점 그 힘을 더해갔다.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이 저마다 시선을 교환하며 웅얼거렸다. "이 곡이 어떤 마력을 내포하고 있는지 아셨으리라 사료되옵니다."

 

"그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뀐 것은 알겠다." 셀레스티아 공주가 말했다. 널따란 날개가 떨렸다. "헌데 이 리듬은... 이 멜로디는...?"

 

"알고 계신 것일 것이옵니다." 나는 말했다. "트와일라잇 스파클에게 사사하신 것이지요." 눈물이 말라붙은 얼굴로 빙긋 웃었다. "이는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제게 가르쳐 준 것입니다."

 

몇몇이 트와일라잇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트와일라잇은 당혹해하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아뇨... 그럴 리가... 저, 저는 저 사람 오늘 처음 보는데요! 셀레스티아 공주님, 이건—"

 

"조용..." 셀레스티아의 눈 위로 아득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공주의 입이 벌어졌고, 홍채는 수축했으며 얼굴은 창백해졌다. "여기에서 다음 곡으로 넘어가게 되지. 그렇지 않으냐? 바로... 이어지는 곡이 있을 터..."

 

"그러하옵니다!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나는 큰 소리로 대답하며 다음 곡의 연주를 시작했다. 몸이 떨렸다. "이 또한 공주 전하께옵선 알고 계실 곡이옵니다! 설령 일련의 비곡을 올바른 순서대로 들어 보신 일은 없을 터이지만, 들어 보신 적은 분명 있으리이다!"

 

"일련의... 비곡이라면..." 셀레스티아 공주가 희미하고 아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하옵니다! 두 번째 비곡의 제목은... 제목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연주하기 시작한 곡이 낯선 것이어서 더욱 그랬다. 다른 곡이었다. 다른 곡인 줄은 알고 있었는데, 몰랐다. "진혼곡이 아니었나? 헌데..." 고개를 들었다. 입술이 떨렸다. "헌데, 여긴...?"

 

"거 피해라!"

 

달의 얼룩처럼 작게 보이던 무언가가 나를 향하여 정면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무시무시하게 큰 호박이었다.

 

흠칫 놀라 나이트브링어를 껴안고 옆으로 굴렀다. 날아온 호박은 내 뒤에 도열해 있던 과녁을 맞추지 못하고 바로 앞 지면에 격돌했고, 그대로 폭발하듯 깨지며 사방으로 끈적하게 으깨진 과육과 씨를 흩뿌렸다. 그곳은 포니빌 한가운데였다. 움찔하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니 미칫나?!" 몇 야드 정도 떨어진 곳에 늘어놓은 소형 투석기 뒤에서 얼굴에 주근깨가 빽빽한 허수아비가 하나 튀어나오며 소리쳤다. 루나 공주와 묘하게 여자 같은 턱수염 스타스월이 그 옆에 서 있었다. "마 거 표지판 안 봤제?! 여그는 사선이여 사선!"

 

"미안합니다! 그게... 저..." 침을 삼키며 투석기 쪽으로 달려갔다. "사고 치려고 그런 게 아니었어요."

 

"사고 치까 봐서 이라는 기 아이다! 혹시나 누구 다치까 봐 이라는 기제!" 애플잭이 고개를 돌려 루나 공주를 보고 싱긋 웃었다. 공주는 투석기에 자기 스스로 호박을 올려놓는 중이었다. "인쟈 됐심더!"

 

"쏘세요 공주님!" 스타스월이 트와일라잇 스파클의 목소리로 말했다.

 

투석기가 작동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주황색 운석이라도 된 듯 하늘을 가르고 날아가는 호박의 궤도를 감상했다. 식량의 무기화를 물리적으로 보여 주는 모습이었다. 날아간 호박이 커다란 과녁판에 명중했다.

 

"좋도다!" 루나 공주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을 정도로 즐거워 보였다. "즐거움이 두 배가 되었노라!" 루나 공주 뒤로 모여든 사람들이 환호를 올렸다. 식었던 분위기가 다시 환희와 열광으로 가득 찼다.

 

나도 저들 중 하나였으면 좋았을 터이다. 나는 한쪽 구석에 주저앉아 숨을 고르려 용을 썼다. 대체 얼마 동안이나 정신줄을 놓고 있었단 말인가? 몇 분 정도일까? 아니면 몇 시간? 고개를 들었다. 밤은 끝나지 않았지만 앞으로 얼마가 더 남아 있을까? 사라져 가는 것은 시간뿐만이 아니라, 나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루나 공주의 도움을 구할 기회까지 사라지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아리아에게 향하는 다리를 건널 기회는 영영 사라질 터였다. 혹시나 내가...

 

"신민들은 들으라!" 공주가 의기양양해져서 외쳤다. 추워서 떨리는 몸조차 진정될 정도였다. "너희 모두! 나를 루나라고만 부르거라!"

 

심호흡하며 나이트브링어를 벨벳 가방에 집어넣었다. "앨러배스터, 내가 죽도록 사랑하는 거 알죠." 입가에 감긴 붕대만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리라. "그래도 당신처럼 되지는 않을 거에요."

 

나는 루나 공주를 향하여 걸음을 옮겼다. 겨우 몇 야드 정도 거리였다. 공주가 물을 가득 채운 대야에 사과를 띄워놓은 놀이 기구에 빠진... 꼬마 해적?의 옷을 직접 물어 꺼내 주었다. 뭐야 이거...

 

"갸아아악!" 저쪽에서 분홍색 닭이 꼭꼭거리며 소리쳤다. "나이트메어 문이 핍스퀵 잡아먹는다아아아아! 튀어어어어어!"

 

동네 사람들이 놀라 달아났다. 루나 공주가 건져 준 꼬마도 달아났다. "살려 줘요오오! 내 엉덩이 먹혔어요!"

 

정신없이 달아나던 꼬마가 내 뒤쪽 왼다리에 부딪쳤다. 나는 그대로 균형을 잃고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나이트브링어가 땅에 부딪치는 충격에 검은 현이 떨리며 불협화음이 일어났다.

 

"아악!" 머리도 아프고 귀도 괴로워서 움찔하던 찰나.

 

"하 하 하 하!"

 

고개를 들자 얼굴과 갈기가 서리에 덮였다.

 

드라코네쿠스 하나가 한쪽 발로 위니페그의 묘비 하나하나를 밟고 뛰어다니고 있었다. 놈은 묘비 위에 내려설 때마다 발레를 하듯 한쪽 발끝으로 서서 몸을 휙휙 돌려댔다. 한없이 적막한 잿빛 세상. 놈은 그 공간을 진심으로 즐기고 있었다.

 

"꼬맹이, 이제 알겠지. 더 물러날 곳이 없을 때야말로,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는 걸 말이야." 디스코드가 흥얼거리며 말했다. "명예로운 일이든 부끄러운 일이든 상관없어. 자기가 지은 죄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핑계만 늘어나는 거야. 왜 잔혹한 일이 자꾸 생기는지 알고 싶어했었지? 그건 내가 존재하기 때문이야."

 

얼굴을 구기며 이를 뿌득 갈았다. 몸을 일으켜 놈을 보고 소리쳤다.

 

"야, 이 이기적인 새끼야!" 나는 헐떡이며 다시 소리쳤다. "우주의 모든 권능을 네 손에 쥐고 휘두르는 자식이, 다 때려치고 잠이나 퍼질러 자겠다고?! 차라리 네놈을 증오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넌 침 뱉어 주기도 아까운 새끼인 게 한이다! 세상이 잊어야 하는 건 네놈인데! 존재가 희미해져야 하는 건 네놈인데!" 발로 땅을 쿵 굴렀다. 갈라진 땅이 우주 위를 흐르는 검은 강이 되어 흘렀다. "이름 없는 자들의 땅에서조차 내쫓긴 이유를 알겠다! 살지도 죽지도 못한 자들을 다스리는 여신이라도, 너 새끼처럼 쓸데없는 쓰레기를 자기 땅에 두고 싶진 않았을 테지!"

 

디스코드가 회전을 멈추더니, 재미없다는 투로 말했다. "야, 야. 진정 좀 해. 이제 네가 잔인해지려고 하면 어떡하냐."

 

"잔인해? 내가?!" 그것은 소음이었다. "넌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 못 해!" 나는 큰 소리로 기합을 내지르며 그자의 상판에 각목을 휘둘렀다.

 

얻어터진 스트레이트 에지가 입에서 피를 뿜으며 골목길의 벽돌 벽에 기대며 쓰러졌다. 나는 밤의 백골처럼 흐릿한 빛에 젖어 그 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 잔인해질 수 있지. 그것도 아주 끔찍하게!" 각목으로 스트레이트 에지의 등짝을 두들겨 팼다. 남자는 고통에 찬 신음을 내질렀다. 몽둥이는 내 갈라진 목소리처럼 금이 가더니 반으로 부러졌다. "지금 이 순간까지! 포니빌을 작살내려면 얼마든지 작살낼 수도 있었어! 대신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려고 했지! 근데 그래서 내게 남은 게 뭐지?!" 나는 몽둥이를 높이 들었다. 달빛이 그 위로 반짝였다. "지랄같은 망령 신세 여전하지! 쓰레기같은 곡 계속 연주하는 신세 똑같지! 결국 내 꼴이 어떻게 됐냐고!"

 

"진, 진짜 무서웠어." 꼬마가 울며 말했다. 스쿠틀루가 몸을 틀어 한 쌍 푸른 발굽에 몸을 던졌다. "레인보우 대쉬가 날 찾았어! 언니가 구하러 올 줄 알았다고!"

 

클라우드키커가 피워놓은 모닥불 너머로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그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신성하다고까지 느껴지는 그 모습 앞에, 차가운 야생도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일단 진정부터 해, 꼬마." 레인보우 대쉬가 스쿠틀루의 떨리는 몸을 안아들었다. "일단 숲을 나가야 해. 트와일라잇한테 갈 거야. 그 녀석이 널 감쪽같이 낫게 해 줄 방법을 알고 있으니......"

 

레인보우 대쉬와 클라우드키커가 스쿠틀루를 데리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나는 자리에 웅크리고 누워 몸을 떨었다. 추워서가 아니었다. 울음이 계속 나와서였다.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 뒹굴었고, 타고 남은 잔불이 탁탁 소리를 내며 불똥을 튀겼다. 우주가 그토록 차가운 것은 따뜻한 것들이 많이 없을뿐더러 유약하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세상에는 따뜻한 것들이 아직 있다.

 

"내가 잘못했어요." 나는 울며 말했다. 오두막 벽이 사방을 둘러싸고 서 있었고, 그 안은 밤이 데려온 어둠이 포위하고 있었다. 수십 점 악기가 벽에 걸려 있었지만 그 중 어느 하나라도 쓸모있는 것이 없었다. "누가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누구에게 사과해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후드 재킷의 소매로 눈물을 문질러 닦았다. 창밖으로 외로운 달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조그마한 주황색 고양이가 살금살금 걸어와 내게 몸을 기대더니 야옹, 하고 울었다. 고양이를 쓰다듬을 힘은 있었지만, 웃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내가 정말 미안해요. 다 내 잘못이에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앨이 내 품으로 파고 들어왔다. 고양이를 가슴에 안으며 몸을 떨었다. 나는 울기만 했다.

 

"용서해 주세요. 도와 주세요. 여기서 꺼내 줘요. 배울 만큼 배웠잖아요. 많이 배웠으니까, 사람들에게......"

 

고양이의 따뜻한 털에 얼굴을 비비며 눈을 질끈 감았다.

 

"...주고 싶어요... 줘, 줘야 해요..."

 

"왱? 누구 생일이나 뭐 그런 거양?" 핑키가 말했다.

 

공원 벤치였다. 고개를 들었다.

 

오후 햇살을 받으며 싱글벙글 웃고 있는 핑키 파이가 보였다. 내 뺨에 흐르는 눈물을 본 핑키가 웃음을 거두며 물었다. "우우우우우...... 파티 초대 못 받아서 그랭?"

 

훌쩍이며 시선을 돌렸다. 나는 툴툴대며 말했다. "파티 때문 아니니까 괜찮아. 그러니까 그냥 가도 돼, 핑키."

 

"왱?" 핑키 파이가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며 물었다. 웃음기가 사라졌던 얼굴이 다시 빙글거리고 있었다. "완전 처음 보는 사람이 내 이름 알고 있는 거 신기하지 않앙? 맨날 있는 일 아니라궁! 히히히! 그쪽 이름은 뭐양?"

 

"으으음..." 핑키와 대화할 기분은 아니었다. 뭐라도 할 기분 자체가 아니었다.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 설움이 복받친 과부가 우는 것처럼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서 대답했다. "라이라. 라이라 하트스트링스."

 

"하트스트링스라궁? 흐으으으응...... 치즈스트링스였으면 어땠을까 싶은뎅, 그럼 암만해두—"

 

"핑키, 제발 좀!" 나는 눈물로 젖은 얼굴을 잔뜩 구기며 말을 끊었다. "됐어! 제발 혼자 있게 내버려 둬! 그냥..." 표정이 일그러졌다. 입술을 씹었다. 눈에 비친 공원의 모습에서 색이 빠져나갔다. 세상은 문득 일 분 일 초도 거르지 않고 매일 내 인생에 조금씩 그 그림자를 드리우는 수의처럼 뿌연 모습이었다. "...이미 혼자구나. 이미... 이미 난 혼자고, 나나, 그쪽이나 내가 혼자라는 사실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없어. 다른 누가 와도 마찬가지야." 나는 흐느끼며 발굽에 얼굴을 묻었다. "평생 이런 식으로 여기 처박혀 있다 죽겠지. 누구도 날 도와 줄 수 없어. 이건—"

 

"다른 사람들 코앞에 대고 무슨 난리를 쳐대도, 밝고 명랑한 척을 해도 결국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존재일 뿐이라는 얘기네. 그쪽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들 일상으로 편입시키고 싶지 않은 것처럼 말이야. 그러면 그쪽 집에 혼자 들어가 있어도 가시방석일 수밖에 없을 테지..."

 

훌쩍이며 고개를 들자, 도저히 내 눈을 믿을 수가 없는 모습이 나타났다.

 

교회당의 가고일 조각처럼 앉아서 나를 바라보는 핑키의 두 눈에서 눈물이 강처럼 흘러나와 뺨을 타고 떨어지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핑키의 시선은 차분했다. "그래서, 그쪽을 내버린 것일 테지. 그 흐름에 저항하기란 쉽지 않아서, 몸과 마음의 힘이 조금도 남김없이 뽑히고 말 거야. 그쪽이 웃는 건 웃어야만 하기 때문이겠지. 그쪽에게 힘이 되어 줄 사람은 그쪽 하나밖에 없을 거고, 그 사실은 당신이 제일 잘 알 테니까..."

 

"피, 핑키..." 멍한 눈길로 핑키를 쳐다보며 목에 엉긴 응어리를 삼켜 넘겼다. "너... 너 울고 있는데..."

 

핑키가 떨리는 숨을 들이마시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지도..."

 

"아니... 잠깐..." 핑키를 보며 말했다. "너 안 울잖아!"

 

눈물에 젖은 입술이 천천히 밀려 올라가며 미소를 띄웠다. "울면 기분 안 좋잖아. 웃는 게 훨씬 좋으니까, 웃을 수 있으면 항상 웃고 다니려고 결심했어." 핑키가 부드러운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근데 내가 보니까 그쪽은 늘상 울고 다니는 사람 같았단 말이야. 그래서 그쪽 보자마자, 이런 생각을..." 핑키가 으쓱하더니, 조용히 웃었다. "히히...... 울지만 말고 가끔은 웃는 건 어때?" 훌쩍이는 소리로 핑키가 속삭였다. "그런 놀이를 만들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나는 아무 말 없이 핑키를 쳐다보고만 있다가 피식 웃었다. 그 약간의 웃음은 웃음소리로 번졌고, 뒤이어 배를 잡고 뒹구는 수준까지 확대되었다. 나는 배를 잡고 웃었다. 폭발하듯 튀어나온 웃음에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나도 모르게 벤치를 쳐서 그 반작용으로 의자 아래 풀 덮인 흙바닥에 떨어질 뻔했다. 나는 한도 끝도 모르고 계속 웃었고, 어느샌가 핑키도 합세해서 웃어댔다. 너무 웃어서 떨어진 눈물이 뺨을 적셨다. 얼굴을 문질러 닦고 쓴웃음을 지으며 핑키를 쳐다보았다.

 

"다른 건 몰라도 치즈스트링스라니." 고개를 가로저으며 투덜댔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별명을 고안한 건데?"

 

"히히히히!" 마지막 훌쩍임으로 울음을 털어낸 핑키가 나를 보고 방긋 웃었다. "이름만 들어두 치즈의 그 달달한 맛이 떠오르니까 그렇징! 그릴 샌드위치 할 때 넣어 먹으면 끝내준다궁! 그릴 치즈 샌드위치는 한 입만 해도 안에서부터 행복이 충만해져서 절로 웃음이 나온다니깡! 히히히히...... 그쪽 보고, 그쪽 이름 듣고 나면 절로 웃음이 나는 거랑 매한가지양!"

 

"핑키 넌 뭐가 됐든 상관없이 웃지 않아?"

 

"아니양." 핑키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웃는 건 똑같지만, 서로 다른 웃음이양."

 

심장에서부터 따뜻한 온기가 온몸에 퍼지는 느낌을 만끽하며 핑키를 향해 미소짓고, 핑키를 안으려 몸을 기울였다. 핑키도 마찬가지로 화답했다. 꼬불꼬불한 갈기가 목에 닿아 간질거렸다. 웃음이 나올 것 같아서, 웃었다.

 

"히히히!" 대학 캠퍼스 내부 정원 어느 의자. 웃다가 굴러 떨어질 뻔했다. "트와일라잇 천문연감에 깃털 끼워 넣었을 때 기억하지?"

 

"아, 내가 걔보고 전날에 책으로 비둘기 때려잡은 거 기억 안 나냐고 했을 때 얘기지?!" 문댄서가 큰 소리로 떠들며 빙글거렸다.

 

"맞아맞아! 하하하하!" 웃다가 나도 모르게 테이블을 쳤는데, 그 통에 교과서까지 쏟아 땅에 엎어 버릴 뻔했다. 갈려나갈 게 뻔한 다음 수업을 들으러 오가는 학생들이 이쪽으로 시선을 흘끔 던지고 지나갔다. "그 이후에 거의 일 년 동안 공원 근처에도 안 갔잖아! 사실, 요즘도 새들이 빵가루 쪼아먹는 것만 봐도 흠칫 놀라서 딸꾹질한다니까!"

 

"뭐?! 야! 그럴 리가 없잖아!"

 

"야, 내가 너한테 거짓말을 하겠니?!" 깔깔 웃으며 철제 포크로 학생식당 샐러드 그릇을 뒤적거렸다. "하여간 문댄서 너도 참. 하다하다 그런 거짓말을 하냐."

 

"그럼 고소해 고소! 걔는 세상 만살 너무 심각하게 생각한다니까!" 교보재로 꽉 찬 가방에 몸을 기댄 문댄서가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뺨에 부채질을 해 식히며 말했다. "그 나이에 말이 되냐?"

 

"아무래도 우리랑은 노는 물이 다르니까 그렇겠지?"

 

"당근." 문댄서가 말했다. "애초에 노는 물도 다른데, 걘 그것도 모자라서 노는 물을 계속 바꿔. 물고기도 아니고."

 

"그만큼 귀여운 물고기도 없을걸."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으아아아아아..." 문댄서가 목을 쭉 늘여 스트레칭을 하며 말했다. "솔직히 까고 말해서, 트와일라잇 걘 우리같은 병신들 손절치는 게 인생에 더 도움이 될걸."

 

"넌 또 그게 무슨 헛소리야?"

 

"야, 저렇게 뻔한데 안 보이냐!" 문댄서가 캔틀롯 왕성의 탑과 바로 그 아래에 뻗어 있는 학과 건물을 가리켜 보였다. "셀레스티아 공주님 옥좌 바로 앞에 앉아서 공부하는 애랑 우리랑 같니?"

 

"거기 있는 거 아니거든!"

 

"너 알현실 가 본 적 있었냐?"

 

"걘 공주님 내제자로 들어간 거지, 직속 참모가 아니야." 샐러드를 조금 떠서 풀잎 몇 개를 입에 넣고 씹다가 삼키고 말했다. "또, 그렇게 됐다고 해서 우리랑 완전히 연 끊거나 잊어버리거나 한 것도 아니잖아. 매달 편지도 보내고 있고. 어쨌든 우리가 걔 제일가는 친구들 아냐?"

 

"그건 말이다, 라이라. 우리가 걔 유일한 친구기 때문이야." 문댄서가 무감정하게 대답했다. 얼굴에 권태를 가득 담은 채 가방끈을 만지작거리던 문댄서가 입을 열었다. "좀 밖에도 다니고 그러라고 내가 얼마나 귀찮게 굴었는데, 한 번을 안 나와 보더라. 내 하늘에 대고 맹세하는데, 걘 친구 사귀고 하는 것보다는 집에 짱박혀서 책이나 모으는 게 백 배는 좋은 거야."

 

"그거야 사람마다 다르지. 트와일라잇은 공부 좋아하고, 넌 파티 다니는 거 좋아하고, 난 음악 듣는 거 좋아하고."

 

"그렇지. 재미는 더럽게 없어서 졸리기만 하고 매번 똑같은 음악 말이지."

 

"야!" 입에 샐러드를 가득 넣은 채 소리쳐서, 말소리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문댄서가 사악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농담이야, 농담." 그러더니 한숨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우리 셋이 이렇게나 오래 가다니, 진짜 운이 좋기는 했나 보다 싶다."

 

남은 샐러드를 마저 뜨며 물었다. "그건 또 뭔 말인데."

 

"아. 뭐 그니까, 우리 어렸을 때 하고 놀던 거 기억하냐." 문댄서가 말했다. "걔랑 나랑 공주님 역할 했었잖냐.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맨날 말싸움하는 걸로 끝났잖아."

 

"그게 왜? 어릴 땐 선 넘네 마네 하는 거 모르는 게 정상이야."

 

"그 핑계가 나한테는 쓸모가 있을지 모르지. 트와일라잇한테도 쓸모가 있을까?" 문댄서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현실을 직시하자고. 걔랑 나는 붙어 있으면 언제 파탄날지 모르는 상극관계야. 그나마 가운데서 네가 잡아 주니까 괜찮은 거지. 너 없었으면 내가 걔를 지금처럼 참 대단한 애라고 생각했을까? 신경 거슬리는 옆집 찐따새끼로 봤을걸."

 

"나야 뭐 너희 둘 다 만족하는 방향으로 해결하려고 한 것밖에 없지 뭐."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난 너희 둘 다 좋거든. 사실 되게 간단한 문제 아니야?"

 

"내 말을 잘 이해 못 한 모양인데." 문댄서가 몸을 곧추세웠다. 그 표정이 너무나 진지해서 두려울 정도였다. "네 얘기를 좀 해볼까. 넌 보면 뭔가 성격 좋고, 사람 괜찮고 그러면서도 싸우려고 들지를 않아. 쓸데없이 큰소리도 안 내지. 겉으로 보면 애가 참 맹하다 싶은데,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모두가 행복한 방향으로 일을 해결하려는 성인군자가 하나 있단 말야."

 

"아이 참..."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넌 감상적인 얘기를 하면 안 돼. 진짜 무서워."

 

"야. 진심이거든." 문댄서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넌 내가 필요할 때마다 항상 옆에 있었잖냐. 그 때마다 내가 너한테 고마워하기는 했는지, 솔직히 장담 못 해. 왜냐. 나란 사람은 진심으로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서. 네가 하는 건 나랑은 비교도 안 돼지. 나랑 트와일라잇이 같이 행복하고 또......"

 

"또 뭐...?"

 

문댄서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모르겠다. 내 솔직한 생각으론 음악은 네 적성이 아닌 것 같아. 네가 저 재미없는 커리큘럼인지 뭔지 따라가는 거 보고 있으면 더 그렇고."

 

눈을 굴리며 물었다. "그 판단의 근거를 말해 주면 좋겠는데."

 

문댄서는 당혹하지도 않고 말했다. "글쎄, 그럴까." 문댄서가 내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넌 음악 나부랭이랑은 비교도 안 되는 굉장한 일을 해낼 운명이라는 생각이 막 들거든. 라이라 하트스트링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심호흡했다. 그리하여 나는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몇 마디를 입 밖으로 내보낼 수 있었다. "그래, 위대하신 문댄서 선생이 자기를 깎아내리면서까지 그렇게 말씀하시니, 불초한 소생도 그 대단한 일인지 뭔지를 빨리 해내야겠구만."

 

문댄서가 낄낄 웃었다.

 

피식 웃으며 샐러드 그릇에 포크를 담갔다. 쇠와 그릇이 부딪쳐 울리는 소리는 길고 울림이 깊었다. 문댄서는 낄낄대느라 바빠 쇠가 울든지 말든지 관심이 없었다. 나는 그릇을 내려다보며 소리의 울림을 쫓아 귀를 기울였다. 높낮이를 자유자재로 바꾸는 소리가, 어느덧 내 어린 마음 속에 일련의 멜로디로 꽃피었다.

 

"어스름 진혼곡." 중얼거려 말했다. 나이트브링어의 검은 현이 울다가 멈추었다. 잦아드는 소리의 잔향은 들리지 않았다. 사실,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저마다 의상을 갖춰입고 모인 자들 위로 떠오른 루나 공주가 쩌렁쩌렁하게 소리치고 있었으며, 그 뒤로 드리운 밤하늘은 소용돌이치고 있었는데 여기에 번개까지 쳐대며 정신 나간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희가 공주를 아끼고 사랑하는 대신 두려워하고자 하고," 구름과 회오리바람이 뒤섞인 소용돌이 위로 루나 공주의 포효가 솟았다. "감히 짐을 능멸하는 잔치를 열어 그 명예를 땅에 떨어뜨리니......" 공주가 목소리를 더욱 높여 선언하자, 두 눈에서 안광이 번득였다. "마땅히 너희가 악몽야라 부르는 잔치는 이제, 영영 없으리라!"

 

그 장엄하다시피 한 선포는 밤하늘을 수놓는 번개로 마무리되었다. 루나 공주는 에버프리 숲 방향으로 날아갔다.

 

"안 돼!" 나는 비명을 질렀다. 설마 내 목소리가 그렇게 길게 메아리질 줄은 몰라서 당혹스러웠다. 시선을 돌려 주변을 둘러보니 하나같이 축 처져서는 저마다 갈 곳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불어닥친 바람이 저들의 기력을 전부 소진시키기라도 한 듯했다. 모르긴 몰라도 그 날 밤은 저들에게 분명 중대한 의미였을 것이다.

 

"이제 악몽야는 없겠네." 어린애 티를 벗지 못한 소년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 미치겠다." 옆에 있던 소녀가 받았다.

 

"옘병. 잘 나가나 싶었는데 이게 뭐고." 사탕과자를 왕창 쌓아둔 채 다 무너져 버린 천막 옆에 섰던 애플잭의 평가였다. "공주님? 기분 좋았다. 다른 애덜? 기분 좋았다. 이게 다 뭐란 말이고..."

 

어린 여자애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작살이 난 길거리 장터를 둘러보니, 우는 아이들을 달래느라 진땀을 빼는 부모 몇몇이 보였다. 잔뜩 힘이 빠져서는 걸치고 있던 의상까지 벗어 그대로 길에 내버리고 느린 걸음으로 집에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당장 내가 큰일나게 생겼는데 저들을 왜 연민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트와일라잇과 애플잭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광대 분장을 한 시장이 제코라에게 하는 얘기가 귀에 들어왔다. "세상에 이걸 어떡하면 좋아요! 루나 공주님께서 왕림하시겠다고 사전에 고지라도 하셨으면 작금의 사태는 예방할 수 있었을 텐데!"

 

"우리 측이 공주를 감히 독신하려 한 게 아님은 분명하다네." 제코라가 조용히 말했다. "이쪽은 그저 공주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놀랐을 뿐이니."

 

"당장 찾아뵙고 말씀을 올리고는 싶지만,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 갈 수도 없고!" 시장이 큰 소리로 말했다. "공주 전하께선 벌써 마음 정하신 것 같아서 더 그래요."

 

"그런 시도는 하지 않음만 못할 것이네. 루나 공주는 지금쯤 환궁을 시작했을 터."

 

"그럴 것 같지는 않아요." 시장이 말했다. "몇몇 사람들이 보고 왔는데, 마을 북동쪽 어귀에 공주님께서 대동하신 사로스인 근위들이 야영 준비를 해 놓았다더군요. 아무래도 당장은 떠나실 것 같진 않은데......"

 

놀라서 숨이 막혔다. "공주님께서 천막을 치셨다 이거죠?! 포니빌 코앞에?!"

 

광대와 얼룩말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한창 얘기하던 중에 웬 민트그린 미라 하나가 갑자기 끼어들어서 상당히 놀란 듯싶었다.

 

나도 설마 그 둘에게 그 정도로 가까이 붙은 줄은 몰랐었다. "어어..." 얼굴을 붉히며 뒷걸음쳤다. "마을 북동쪽이요. 고맙습니다. 복 받으실 거에요."

 

제코라가 눈을 꿈벅하더니 시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직까지도 마을 어디서 소리만 났다 하면 깜짝깜짝 놀라니 이거 큰일일세."

 

"저도 마찬가지랍니다. 제코라 씨."

 

나는 번화가 광장 쪽으로 방향을 틀어 미친 듯 달렸다. 둘이 나누는 대화 소리는 사라졌다. 가을 밤바람은 살을 씹는 듯 쓰라렸고, 나는 이를 딱딱 부딪쳐대며 계속 달렸다. 붕대로 싸맨 몸 옆구리에 매달아 둔 벨벳 주머니의 감촉을 느낀 것은 건물 사이의 공원 쪽으로 속도를 낼 때였다. 마지막 골목을 따라 달리다 보니, 보라색 천막 여러 개와 사로스식 전차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기진맥진한 채 달리는 와중에도 웃음이 나왔다. 이제 끝이다! 축제에서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을 뒤로하고 돌아온 곳이 틀림없었다. 악몽야 축제에 대한 사람들의 꿈과 선망이 작살나든 말든 상관없었다. 일단 일만 제대로 풀리고 나면, 비로소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사람으로 다시 나타나 저들의 마음을 위로해 줄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 안에서 나는 진실로 함께 웃고, 온기를 공유하며 우정을 나눌 수 있을 터이다. 분명......

 

"공주님 맙소사! 모닝!" 암브로시아가 소리쳤다.

 

숨이 턱 막혔다. 나는 미끄러지다시피 속도를 줄이며 멈춰섰다. 럼블과 의식을 잃고 쓰러진 사내의 옆이었다. 우리 앞에는 다 작살난 호텔 건물이 한 채 서 있었다.

 

"누나, 도와 줘요!" 럼블이 애걸했다. "이 사람 옮기는 거 도와 주세요!"

 

"제기랄." 울먹거리는 소리였다.

 

나는 정신을 놓아 버린 채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멀찍한 곳에서 인부들이 입을 떡 벌리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내 발굽 밑으로는 건물 내부에 장치한 폭파장치에 연결된 선이 굴러다녔다.

 

"망할..." 속이 끓었다. "진혼곡 연주를 멈추다니!" 햇빛이 쏟아지는 곳이라면 미친 듯 눈을 굴리며 찾아보았으나 천막도, 사로스인도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염병. 여기 있으면 안 되는데..."

 

"으아아악!" 럼블이 비명을 질렀다.

 

고개를 들어 보니 이유가 명확해졌다. 호텔 내부에 장치한 폭약이 기폭되면서 거대한 잔해가 나와 럼블, 모닝 듀를 산 채로 갈아 버릴 기세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나는 기합을 지르며 마력을 모아 녹색 보호막을 쏘아올려 우리에게 쏟아지는 잔해를 막아냈다. 죽어도 하기 싫은 짓이었다.

 

"내 리라..." 눈을 감았다. 폭발의 잔향과 잔해 무너지는 소음의 불협화음 속으로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어디 갔지? 필요한데... 써야 하는데..."

 

"왜 그러지?! 부끄럼이라도 타나?" 오만한 목소리가 물었다.

 

헉 소리와 함께 눈을 뜨자, 휘황찬란하게 꾸며놓은 무대였다. "어, 엇?!"

 

은발 갈기에 푸른 솜털을 한 여자가 나를 내려다보며 씩 웃었다. "하긴, 나 같아도 위대하고 강력한 트릭시의 곁에서 연주를 하라고 하면 부끄럽고 무서워서 덜덜 떨 게 뻔하긴 해!" 주변에 빽빽하게 모여든 관중들이 쿡쿡 웃었다. "자, 그래서 네 연주 실력이 위대하고 강력한 트릭시의 훌륭함을 조금이라도 바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렇다면야 이리 올라와서 솜씨를 뽐내 보도록!"

 

"리라를... 안 갖고 왔는데..." 등판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뒷걸음쳤다. 몸이 떨렸다. 구름 밖으로 몸을 빼내려 용을 쓰는 동안 지나던 행인들과 몇 번이나 부딪쳤다. "제기랄. 내가 멍청했지." 나는 혼자 말했다. "애초에 리라를 안 들고 나왔어! 병신인가 난...?"

 

"봐요! 처음에는 질투라도 하는가 보다 싶었지!" 여자가 잔뜩 뽐내는 투로 대중에게 선포했다. "허나 이 위대하고 강력한 트릭시가 보아하니, 얼굴이 아주 푸르죽죽하게 질린 것이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군!"

 

군중들이 깔깔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를 악물고 주위에 모인 사람들을 헤치고 지나갔다. "집중해야 해, 집중!" 마을 북쪽 어귀를 향하며 소리를 내질렀다. "해야 할 일만 정확히 생각하면 진혼곡이 떠오를 거야! 집에, 집에 가는 생각을 하자..." 눈을 감고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집에 가고 싶다. 집에 가고 싶다. 집에..."

 

"...가야 하는데 갈 수가 없구만. 여그 길은... 또 뭐고? 천막은 또 먼데? 어으..." 쪼그리고 앉은 자리에서 얼마 떨어지지도 않은 곳에서부터 낯익은 목소리가 끝을 질질 끌면서 툴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트로피는 먼 지랄 같은 걸 줘선, 더럽게 무겁구마. 아주... 으으으으... 깃털로 좀 돼 있으모 어디가 덧나나... 헥..."

 

벙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목을 길게 빼 쳐다보았다. 과수원 집 딸내미가 굽어지는 길 근처를 걷고 있었다. 시내에서부터 걸어온 힘든 걸음을 증명하듯 흙길 양쪽으로 사과 몇 알이 떨어져 굴러다니고 있었다. 애플잭은 양쪽 엉덩이에 커다란 과일 바구니를 꽉 채워서 짊어지고 있었는데, 웃기지도 않을 정도로 커다란 금빛 트로피가 한 개 더 얹혀서는 안 그래도 끔찍하게 무거운 짐에 자기 무게까지 의탁하고 있었다. 

 

"아으으으으... 집에, 집에 가야 하는데..." 애플잭은 몹시 지쳐 보였다. 평소에는 잘 관리되어 매끈한 금발 갈기는 갈기를 묶은 빨간 리본 밑으로 마구 뻗쳐 봉두난발이 되어 있었고, 두 눈은 퀭하게 늘어져 있었다. "빅 맥이랑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애플잭의 다리가 후들거리고, 녹색 눈이 거의 감기려는 순간은 애플잭이 자리에 졸도해서 쓰러지거나, 엎어져 잠드는 사건의 분기점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은 둘 중 어느 하나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흐릿한 녹색을 띤 염동력이 애플잭의 몸을 감싸 똑바로 일으켜 세워 놓았기 때문이다.

 

"이거, 일을 너무 열심히 한 거 아니에요?" 싱긋 웃으며 말을 걸었다.

 

"으으으으으으으응... 어음......" 애플잭이 눈을 번쩍 떴다. "머, 머? 머고?"

 

"이 트로핀 뭐에요? 전국 날밤 새기 대회에서 우승이라도 하셨나요?"

 

"응아아아아이다... 머냐면..." 애플잭이 하품을 쩍 하더니, 졸린 듯 비틀거리며 말했다. "머 시민 표창이던가 먼가... 하는가 보던데..." 그녀는 제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에서도 씩 웃었다. "옘병스럽게도 반짝이제. 머 훼까닥 해가 뛰어댕기는 소새끼들이 동네 조사놓기 전에 해결했다꼬 잘했다나 어쨌다나......" 다시 하품을 한 애플잭의 얼굴이 축 늘어졌고, 그 위에 박힌 주근깨마저 윤기를 잃었다. "그란데 그 대신에 사과 딸 시간을... 마이 뺏겼거등..."

 

애플잭의 몸이 투명 침대에 실리기라도 한 듯 그대로 공중에 잠깐 떴다가 다시 내려왔다. 그녀는 자기가 아닌 다른 무언가에 실려 떠가는 기묘한 느낌에 몸을 움찔했다.

 

"흠......?" 분명 애플잭이 눈을 휘둥그레 떴을 테지만, 그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이, 이건 또 뭐고...?"

 

"아, 걱정하실 거 없어요. 애플잭 씨." 몹시 고단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애플잭이야 건장하고 근육질이니, 평범한 사람보다 무게가 더 나가기는 한다. 그래도 염동력을 적절히 활용할 수만 있으면 등에 싣고도 그 무게의 일부만 부담하는 것이 가능하다. 나는 힘찬 걸음으로 애플잭을 업고 스윗 애플 에이커의 빛나는 과수원 속으로 걸어갔다. "이웃 좋은 게 뭐에요."

 

"흥..." 애플잭이 툴툴댔다. "나가 남으 도움이 왜 필요하단 말이고! 내... 혼자서..." 애플잭의 항의는 길게 가지 않았다. 얼마 못 가서 또 크게 하품을 했기 때문이다. "내 혼자서도 사과 따는 것쯤은 할 수 있데이..."

 

"아, 그렇고말고요!" 가볍게 웃으며 큰 소리로 동의의 뜻을 표했다. 염동력으로 들어올린 트로피가 우리 앞에 떠서 축 늘어진 베개처럼 내 새파란 갈기에 기댄 지친 얼굴을 비춰주었다. "일을 하려거든 과수원으로 돌아가야죠. 데려다 드리는 것 뿐이에요."

 

"으어으으으으음... 사과는?"

 

뒤를 흘끗 돌아보자 버려진 헛간 앞 길바닥에 그냥 내려둔 사과 바구니 두 개가 보였다. "그것도 틀림없이 가져다 드리죠."

 

"으음..." 애플잭이 웅얼거렸다. "마 훔치거나 할 생각은 하덜 말그래이..."

 

피식 웃고 답했다. "그럴 생각 없네요. 그쪽 피나 다름없는 걸 훔치다니. 당신 뿌리를 뽑아내 뜯어 버리는 거나 마찬가지죠."

 

"으음... 뿌리..." 애플잭의 주근깨 박힌 얼굴이 취객처럼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트로피의 금빛 표면 위로 비친 풍경이 뜨끈한 여름 바람을 받아 일그러졌다. "잘 지은 집이라모 뿌리가 있어야제. 울 아부지가... 울 아부지가 늘 그래 말씀하셨는데..."

 

빙긋 웃음이 나왔다. "그러게요. 딸 참 잘 키우셨어요..."

 

"암... 자식 농사 하나는 끝내주게 지으셨제..." 애플잭의 목소리는 이내 코 고는 소리에 묻혀 사그라졌다.

 

나는 애플잭을 업고 언덕길을 내려와 스윗 애플 에이커로 향했다. 나는 근간과 구조와 음표의 나열, 그리고 이를 편곡하는 과정을 생각했다. 오래 전부터 머리에 박혀 있던 멜로디를 단순하게 모방하되, 내 등 위에 늘어져 잠든 근면한 농군을 위하여 느릿한 자장가처럼 바꾸어 흥얼거리며 길을 걸었다.

 

"소생은 이 곡을 일몰 볼레로라 부르나이다." 내 목소리는 낮고 아득했다. 태양의 공주에게 또 한 곡의 연주를 바친 호텔 로비. 내부는 기름처럼 고요했다. "처음 들었을 때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백성들로 하여금 스스로 살아 있음을 깨닫게 하려고 지은 곡 같았습니다." 나는 침을 삼키고 엎드렸다. "공주 전하께옵선 어떠시옵니까?"

 

자리에 앉은 셀레스티아 공주의 모습은 태산과도 같았다. 깊은 생각에 잠겨 찌푸려진 이마는, 영영 그렇게 되어 버린 듯싶었다. 내가 올린 물음을 접수했는지도 사실 확실치 않았다.

 

나는 그것이 못내 걱정됐다. 공주의 장밋빛 눈동자에 비친 민트그린 유니콘의 형상은 조금 전보다도 피곤해 보였다. "공주 전하?" 목소리가 리라 현 사이로 울렸다. "혹시... 전에 들으신 바 있는 곡이옵니까?"


"공주님, 전에 제게 들려 주신 적 있는 곡입니다." 트와일라잇이 자리에 굳어 버린 듯한 스승을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내려주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마침내 알리콘이 입을 열었다. "그대의 연주에서는 짐이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어떤 구조가 느껴진다. 연주의 순서와 강약을 들으니, 어떤 원리가 있는 듯한데..." 공주가 침을 삼키고 말했다. "신민이여. 그대가 이 곡을 접한 경위를 말할 수 있겠느냐?"

 

"제 머릿속에서 떠오른 것입니다." 나는 말했다. "제가 저주를 받은 날부터 떠올랐습니다."

 

"어떤 저주지요?" 트와일라잇이 물었다.

 

"제가 짊어진 저주에 관하여 말씀을 올린다 할지라도, 전부 말씀드리기도 전에 제 존재를 잊어버리시게 되는 저주입니다! 공주 전하, 부디 제 청원을 들어 주소서!" 나는 울며 바싹 엎드렸다. "바라옵건대, 부디 세 번째 비곡까지 들어 주십시오. 제3곡까지 듣고 나시면 이것이 어떤 곡인지 아실 수 있을 것이옵니다. 이 곡도 분명 어떤 목적이 있을 것이옵니다. 세상에 목적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옵니다. 목적 없이 존재하는 자는 없사옵니다. 소생이... 소생이 저주에서 풀려나 소생의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공주의 얼굴이 영문 모를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 모습은 차라리 산통으로 찌푸려진 얼굴과도 같았다.

 

트와일라잇이 급히 달려가 공주 곁에 섰다. "공주님! 왜 그러세요?"

 

"이 노래는..." 셀레스티아가 아이처럼 울기 시작했다. 장밋빛 눈동자가 내가 본 적 없는 색으로 빛났다. "그 아이의 노래다..." 공주가 더듬거렸다.

 

"네?" 트와일라잇은 당혹한 눈치였다.

 

트와일라잇과, 탁하고 짙은 보라색 어둠을 생각했다. 우주에 떠도는 자그마한 성단들과 그 한가운데의 고독을 생각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리라의 현이 울면서 어떤 곡조를 띄워 올리기 시작했다. 나도 그 소리를 따라 연주했다. 어스름 진혼곡의 연주가 끝나자 호텔의 모습은 사라지고, 한데 모인 사로스식 천막들이 한눈에 보이는 언덕 위로 돌아와 있었다. 털이 복실하게 난 귀가 유독 눈에 띄는 사로스 페가수스 둘이 전차를 지나쳐 가며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흠칫하며 캔틀롯 왕가의 짐을 담은 상자임을 표시하는 라벨이 붙은 나무상자 뒤로 몸을 숨겼다. 바로 코앞에서 심경근위대가 순찰을 돌고 있었다. 나는 떨며 나이트브링어를 끌어안았다.

 

"공주 전하께서는 어떠하신가?"

 

"보아하니 신민들과 어울려 노시는 법을 알게 되신 것 같네." 둘은 방향을 돌려 흙길 너머, 횃불로 밤을 밝힌 포니빌 시내 쪽을 바라보았다. "공주 전하께서 백성들과 함께하시는 모습을 보는 날이 오다니, 감격스러워."

 

"비명이나 꺅꺅 질러대는 꼬마들과 굳이 어울리실 필요가 있을까?"

 

"자네도 참 공주님이랑 비슷한 과라니까." 다른 근위가 대답했다. 은은한 달빛에 비친 송곳니가 반짝였다. "하긴 자네도 밖에 별로 나다니는 편은 아니지. 일단 밖에 나가 보게. 겁먹는 일조차도 유희거리로 삼는 사람들도 있는 걸 알게 될 거야."

 

"안 그래도 평생을 나만 보면 공포에 떨어대는 자들이랑 살았는데, 또 그러라는 말인가."

 

"그래도 이 시대에 살아서 돌아다니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가. 공주 전하께서도 낮을 사는 자들과 건전한 관계를 구축할 기회를 얻으셨지 않았나. 그건 우리에게도 같은 기회가 있다는 말이네." 사내가 천막 쪽을 가리키고 말했다. "가세. 공주 전하께서 환궁을 명하시기 전에 준비해야지 않겠나."

 

"자네가 숙영지 외부 순찰을 해 주겠나. 나는 숙영지 내부를 순찰하겠네."

 

"그러지." 둘은 날개를 탁 부딪치고, 서로 반대 방향으로 돌아 떠났다.

 

나는 나무상자 뒤에 납작 엎드렸다. 몇 번 심호흡한 뒤에야 포니빌 쪽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대체 얼마나 시간을 낭비한 것일까. 그래도 이젠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었다.

 

"그래. 아직 안 왔다 이거지." 나는 빙긋 웃으며 더듬거리는 소리로 말했다. "상관없어. 오는 건 확실하니까." 침을 삼키며 나이트브링어를 끌어안았다. 심경근위대가 들을 수도 있으므로 연주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내 귀에만 들릴 정도로 진혼곡을 흥얼거리는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연주 사이마다 나는 혼자 말했다. "오실 거야. 오시면 뵐 수 있을 거야." 침을 삼켰다. "문제는, 셀레스티아 공주님 때처럼 안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인데. 포니빌은 안 날리면서 나만 그쪽으로 날리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거..."

 

"그래요, 나도 그게 궁금하다니까!" 캐러셀 부티크 한가운데, 프릴이 가득 달린 붉은 드레스를 입혀 둔 마네킹 주변을 래리티가 눈을 굴리면서 돌아다녔다. "설마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냐고요. 아니, 그러니까 플러터샤이한테는 복이 되고 저한테는 안 그런 건 이상하다는 거죠! 아닌 게 아니라 온 이퀘스트리아에 유명세를 떨치고 있잖아요? 물론 플러터샤이 정도면 그럴 만도 하지만! 설마 그 얌전하고 조용한 성격이—이이이이이익— 포토 피니시의 눈길을 끌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거죠!"

 

"글쎄요, 대체로 사람이 의식적으로 다른 사람이 누릴 유명세를 뺏는 것 같지는 않은데." 부드러우면서도 공감한다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보통 유명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찾아오기 마련이라고 생각해요."

 

"아하. 그럼 저보고는 조금만 더 하면 유명해질 것 같은데, 조금만 더 하면, 조금만 더 하면! 에서 멈춰서서 멀뚱히 보고만 있으란 얘기군요!" 래리티가 성질을 내며 말했다. 평소 부드럽고 고아했던 눈매에 날이 서 있었다. 바늘에 실을 쑤셔넣다시피 꿴 래리티가 거칠기 짝이 없는 동작으로 바느질을 시작하자 바늘이 뚝 부러져 버렸다. "어머, 이런..." 래리티의 새하얀 뺨은 분기로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실례했군요. 마지막 말은 좀 상스러웠죠..."

 

킥킥 웃다가 빙그레 미소짓고 말했다. "괜찮아요 괜찮아. 나도 그 심정 이해하니까."

 

"이쪽 방면으론 문외한이신 것 같은데요. 그쪽은......"

 

"하트스트링스에요."

 

"전투 중 미쳐 버린 병사처럼 아무 말이나 막 쏟아내는 걸 받아 주시는 점은 몹시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그쪽이 정말로 제 심정을 이해하는지는 의심이 들거든요!" 래리티가 한숨을 내쉬며 옆에 있던 쿠션에 주저앉았다. 창백하게 질린 발굽 위로 부러져서 쓸모를 상실한 바늘 조각이 실에 매달려 덜렁거렸다. "부와 명성을 목적으로 부와 명성을 얻고 싶은 게 아니에요. 물론 얻고 싶은 건 사실이죠. 제 이름을 전국에 알리고 싶으니까요. 중요한 건,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부와 명성을 쟁취하는 거에요. 제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나를 보는 래리티의 푸른 눈은 너무나 연약해 보였다. "패션 디자인은 제 밥벌이의 수단으로 그치는 게 아니에요. 저 자체죠. 제가 살아 있을 수 있게 하는 피고요."

 

"그쪽이 그 길을 계속 가는 이유기도 하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몇 걸음 앞으로 다가가 래리티 앞에 앉았다.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이 산산이 찢겨져 사라지더라도, 그 열정이 있으면 계속 살아갈 수 있을 거에요." 침을 삼켰다. "당신의 친구들도, 마찬가지죠."

 

래리티가 울먹이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네요..."

 

"제가 모든 걸 잃는다고 가정해 볼게요." 나는 말했다. "제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들이 전부 사라지더라도 저를 이루는 한 부분만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거에요. 그 내면의 힘이야말로 저 자신을 정의해 주고, 저 자신의 원동력이 되어 어둠 한가운데 떨어져도 등불이 되어 주는 것이고요." 햇빛 드는 창 밖으로 시선을 옮기며 따뜻하게 웃었다.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이에요. 그게 사라진다면 제겐 아무것도 없는 셈이죠. 저라는 사람을 구성하는 본질이고, 오늘 당신을 찾아오게 만든 길잡이기도 하거든요." 래리티를 향해 시선을 돌리고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누구나 가슴 속에 음악을 품고 살아요. 당신 가슴 속 음악은 계속 듣고 싶어지는 음악이죠. 우울한 감정만 좀 덜어내면 더 멋질 것 같은데."

 

래리티가 숨을 들이마시며 가느다란 발굽으로 갈기를 쓸어넘겼다. "있잖아요. 당신이 옳아요! 정말 맞는 말이에요!" 래리티가 힘차게 일어서며 빙긋 웃었다. "플러터샤이가 잘 됐다고 질투나 하고 있으면 안 되는 거에요! 축하를 해 줘야죠! 누가 뭐래도 제 가장 사랑하는 친구니까, 그리고 지금은 플러터샤이가 빛날 때지 제가 빛날 때는 아닐 테니까!" 래리티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드레스를 향해 힘차게 달려갔다. 고상한 붉은색과 파란색으로 치장된 화려한 드레스였다. "오늘 밤 패션쇼에 꼭 가서 도와 줘야겠어요! 이왕 하는 거 가능한 예쁘게 꾸미고 가서!" 래리티가 입술을 씹으며 머뭇거리다가, 얼굴을 붉혔다. "어... 그게... 이왕 하는 거 좀 예쁘게 하고 가는 게 낫지 않아요? 그렇죠?"

 

피식 웃으며 눈을 감고 미소지었다. "낫고말고요. 당연히 그래야 하니까..." 눈을 다시 열어 뜨자 창백한 안개가 깔려 있었다. 숨이 멎는 듯했다.

 

오래되어 부식된 철판을 딛고 나는 서 있었다. 입에 고랑이 채워져 신음밖에 할 수 없는 자들이 나를 반겼다. 이름 없는 자들의 땅 곳곳에 솟아오른 용오름이 번개의 궤적을 두르고 덩굴손처럼 하늘에 뻗쳐댔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높은 곳에서, 감시자처럼 아리아 공주의 옥좌가 떠다녔다. 동일한 점을 중심으로 무한히 많은 원구가 켜켜이 포개지고 겹쳐진 형상을 한 아리아 공주의 옥좌가 어스름의 희미한 빛을 튕겨냈다. 아리아 공주의 끝없는 경계가 계속되는 하늘 위로 천둥이 울어댔다.

 

축축한 후드 재킷이 몸에 달라붙었다. 몸이 떨렸다. 나이트브링어는 내 염동력에 잘 붙잡혀 있었지만, 아무리 신물이라도 그 상황에선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은 명확했다. 나는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추스리며 조용히, 이마를 찌푸렸다. 홀로 독야청청하게 높이 뜬 아리아의 옥좌를 향하여 시선이 솟았다.

 

"이건... 기억의 한 부분입니까?" 나는 건조하고 생기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침을 삼키고, 덧붙여 물었다. "아니면 현실입니까?"

 

무수한 구체가 포개진 아리아의 왕좌는 여느 때처럼 나를 피해 멀어져 갔다. 발판 위에 깔린 안개가 꿈틀대며 살지도 죽지도 못한 자들의 몸 위로 쏟아졌다.

 

나는 울먹이며 저 너머에 서 있는 황혼의 공주를 향해 조용히 속삭이듯 말했다.

 

"우리는 기억의 집합입니까... 아니면 노래입니까. 지금까지 해 온 모든 일들이, 그 누구도 역사에 기록할 수 없어 잊힌 사건들의 장대한 기록에 몇 줄을 더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삶의 아름다움과 놀라움을 찬미하며 끝없이 울려 퍼지는 후렴구인 것입니까." 

 

아리아는 아무 말도 없었다. 우주가 무한히 팽창되어 가고 있었으나, 그렇게 외로워 보이지는 않았다. 우주의 말을 들어야 할 존재는 세상에 나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아리아 공주 전하. 전하는 기록자시지요." 나는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세상에 지킬 가치가 있는 소중한 것들이 있음을 알면서도, 전하의 땅에 그토록 많은 이들을 가두셔야 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앞으로 몇 발짝 내디뎠다. 내가 무슨 수를 써도 아리아 공주의 옥좌가 있는 구체에 닿을 길은 없었다.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었고. 적어도 그렇게는 아니었다.

 

"소인도 지켜질 가치가 있는 자이고 싶습니다." 나는 허공에 대고 말했다. "소인의 인생을 돌려받고 싶나이다. 루나 공주 전하는 그럴 권능이 없으실 터이고, 아리아 공주 전하께서도 그럴 권능이 없으실지 모릅니다." 나는 말했다. 저편에 휘몰아치는 회오리바람과 혼돈의 소용돌이를 따라 시선이 움직였다. 그 기세가 흉흉하기 짝이 없어서, 스치기만 해도 그대로 빨려 들어갈 듯싶었다. "그 누구도 소인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소인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소인뿐이지요. 그것은 제 노래입니다. 제 평생을 들어 온 노래입니다."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공주 전하라고 한들, 제게서 제 노래를 강탈할 권리는 없단 말입니다!"

 

천둥번개가 내리꽂혔다. 나는 그런 줄도 몰랐다. 내 귀에 울리는 커다란 목소리 앞에서는 그 어떤 소음도 속삭임에 불과했다.

 

"대체 전하가 무엇이길래!" 고개를 더욱 치켰다. 나는 울음과 웃음이 뒤섞인 소리로 외쳤다. "저는 또 무엇이길래!"

 

"바로 지난 주까지만 해도 내 소꿉친구였던 사람이죠." 트와일라잇이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고개를 숙이자 트와일라잇이 앉아 있는 테이블의 상판이 보였다. "그래요?" 친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체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트와일라잇이 움찔했다.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책을 괜히 펴 놓고, 그 위에 발굽을 얹어놓은 채였다. 슈가큐브코너를 밝힌 촛불이 어두워 가는 가게를 밝혔다. "아뇨... 무슨 일이 있었는지 괜히 늘어놓아 봐야 기분만 나빠질 거에요." 트와일라잇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트스트링스 씨는 외지에서 오신 손님이시죠. 초야에 묻힌 사서의 이야기를 굳이 청해 들으실 필요는 없으실 거에요."

 

"외지에서 왔어도, 다시 가진 않습니다."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니, 계속하시죠."

 

트와일라잇이 으쓱하더니 말했다. "사실 문댄서와 저는 아주 다른 유형의 사람이죠. 시도 때도 없이 부딪치고 다투기 일쑤였는데, 그래도 또 어떻게 관계를 잘 유지해 왔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누가 다른 하나를 목 졸라 죽였다고 해도 그리 이상하진 않네요. 그런데 이제, 같이 하기로 한 연구과제 문제 때문에..." 트와일라잇이 눈에 띄게 움찔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테이블 상판을 내려다보았다. "그래요... 나이가 들수록 우리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들을 있는 그대로 지키기란 더 어려워져 가죠.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도 점점 퇴색되어 가다가 끝내 흩어져 버리니까요. 살면서 잃어버리는 것들이 다른 것들까지 이끌고 사라지는 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니지요. 인생은 결국 잃어버리는 과정이니..."

 

"얻는 것도 있다면 어떤가요?"

 

고개를 들어 마주보았다.

 

트와일라잇은 웃고 있었다. "처음에는 문댄서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죠. 좀 부끄럽긴 한데, 거의 며칠 밤을 울면서 보냈다니까요." 보라색 줄이 그어진 갈기를 발굽으로 휙 빗어넘긴 트와일라잇이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저를 도와 줄 사람들이 있었지요. 래리티... 핑키... 애플잭, 플러터샤이, 레인보우 대쉬..." 트와일라잇은 울먹이는 듯하더니, 빙긋 미소지었다. "곁에 있어 주고, 위로해 준 친구들이에요. 내가 살면서 수도 없이 많은 걸 잃어버렸지만, 그래도 얻은 게 더 많구나 싶더라고요. 인생이란 참 재미있죠. 나는 그걸 받을 자격이 없어, 내 힘으로는 안 돼, 하고 포기하고 있던 걸 덜컥 안겨주곤 하니..."

 

"당신은 이성주의자 아닌가요." 좀 놀라서 트와일라잇을 쳐다보고 물었다. "무엇이든 시간이 지나면 쇠퇴하고 사라지기 마련인 걸 부정하는 건가요? 그게 만물의 이치인 건 당신도 잘 알고 있지 않아요?"

 

"네. 저는 이성주의자죠." 트와일라잇이 말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사람이고..." 그녀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그러므로 느낄 수도 있죠. 제가 느낀다고 말하는 것들 중에서도 그 사유를 규명할 수 있는 것들은 분명히 있지만, 이유를 밝혀낼 수 있다고 해서 갈수록 무뎌지는 것은 아니에요. 오래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요."

 

트와일라잇이 몸을 떨었다. 그럼에도 나를 보고 웃어 보이는 그 얼굴은 너무나 당당했다.

 

"하트스트링스. 저는 우정을 믿어요." 트와일라잇의 뺨을 타고 한 방울 눈물이 굴러 떨어졌다. 그 와중에도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저는, 우정을 믿어요. 우정이야말로 온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죠. 다른 것들이 부서지고 사라지더라도 우정은 무너지지 않아요. 불화로 가득찬 세상에 조화를 가져오는 힘이기 때문이죠. 우리가 지상에서 향유하는 시간이 다하기 전까지 누리는 세상의 온기를 만드는 힘이기도 하고요.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우정을 키워 나가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죠. 그것도 아주 많은 수단과 방법이 있잖아요? 저는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 대부분을 혼자 공부하고 사색하는 데 투입했어요. 그러려고 애를 썼지요." 트와일라잇이 훌쩍이더니 목이 메여 피식 웃었다. "저는요,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에요. 제 생각에... 아니군요. 세상에는 아직도 탄생의 순간을, 생을 움켜쥐는 순간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제가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은, 그런 사람들을 찾아가 새로운 벗으로 삼고, 너무 늦기 전에 세상에 온기를 퍼뜨리는 일일 테지요."

 

트와일라잇을 마주보는 그 순간, 저주가 몰고 온 소름끼치는 한기조차 아예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말에서 안온한 위로를 느끼고 미소지었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아니, 세상의 모든 재능과 축복이 전부 주어지기만 한다면 그걸 주제로 교향곡을 쓸 수도 있을 텐데요."

 

트와일라잇은 거의 즉시 대답했다. "지금부터 시작해도 되잖아요? 아무도 방해하지 않을 텐데."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다, 라..." 트와일라잇의 말을 그대로 중얼거려 읊었다. 붕대에 막힌 소리는 얼마 가지 못해 스러졌다.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루나 공주가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동쪽 지평선이 희미하게 밝아 오고 있었다. 셀레스티아 공주가 띄워 올린 태양이 지평선 위로 솟기 직전이었던 것이다.

 

"공주 전하..." 사로스인 근위대 둘이 루나 공주 앞에 도열해 무릎을 꿇었다.

 

"됐다, 일어서거라." 루나 공주가 말했다. 그 목소리는 나긋했고, 권위가 없었지만 승리의 희열이 느껴졌다. 루나 공주는 전의 쩌렁쩌렁한 목소리 대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두 근위 앞에 섰다. 그 뒤로 루나 공주의 밤처럼 푸른 커다란 천막이 서 있었다. "이 땅은 무척이나 평온하구나. 그대들의 충심을 내 모르는 바 아니나, 그대들을 대동하고 아침을 맞이하는 것은 과보호일 터. 짐은 그대들의 보호를 바라지 아니하며, 요구하지도 않을 생각이다."

 

근위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가늘게 찢어진 호박색 눈동자가 다시 루나 공주를 향했다. "공주 전하의 말씀은, 동이 트기 전에 캔틀롯 왕궁으로 환궁하실 것을 뜻하심입니까?"

 

"그 또한 아니다." 루나 공주가 천막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밤은 끝났지만... 신민들이 즐기고 노는 놀잇거리가 아직 더 있다고 하더구나."

 

"아직은 환궁하시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이옵니까?"

 

"그러하다. 트와일라잇 스파클과 그 벗들이 정육면체로 자른 먹거리와 설탕과자를 전시해 둔 골목*1으로 안내하고 싶다고 하더구나. 신민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도 왕족의 예법은 아닐 터. 적어도 내일까지는 화급한 일이 닥치지 아니하는 이상 포니빌에 머무를 생각이다."

 

"말씀을 따르겠나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보호복을 단단히 챙겨 입도록 하거라." 루나 공주가 천막에 들어서다 말고 큰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제 동이 트지 않느냐! 너희들이 햇빛을 맞아 몸이 그슬리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 그렇게 말하고, 루나 공주는 천막에 들어갔다.

 

공주가 천막에 들고 얼마 뒤, 근위가 서로 마주보더니 잠깐 빙긋 웃어 보였다. 그리고 공주의 지시대로 차광 보호복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나는 몸을 떨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떨림은 기대의 전율이었다. 루나 공주가 돌아왔다. 겁에 질려 사방으로 뛰어다니는 작자들이 내 앞길을 막을 일도 없다. 그리고 내 앞을 지키는 근위는 단 두 명. 그것도 햇빛을 막아 주는 차폐복으로 갈아입는 와중이 아닌가. 공주를 직접 대면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뜬 것도 사실이고 둘이 잠깐 다른 데 정신이 팔린 것도 사실이지만, 두 근위의 시선을 피해 천막에 숨어들 수 있다고 착각할 정도로 사고가 마비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가서 루나 공주와 얘기를 해야겠다고 하면 둘이 순순히 비켜 줄 리도 없었다. 그러므로 내가 가진 것들을 최대한으로 이용해야 했다. 그렇게만 한다면, 공주가 내게 협조해 줄 수도 있지 않은가.

 

벨벳 주머니를 열고 나무 그루터기 옆 땅바닥에 아무렇게가 내던졌다. 나이트브링어를 내 앞에 띄우고, 심호흡하며 밖으로 나왔다. 나는 염동력으로 나이트브링어를 잘 모셔들고 천막 앞을 경비하던 근위들에게 다가갔다.

 

"멈춰라!" 둘은 방금 전까지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신속하게 움직여 앞을 막아서며 나를 노려보았다. 익갑翼甲에서 튀어나온 칼날이 시퍼런 서슬을 드러냈다. 앨러배스터의 기록에서 읽은 바에 따르면, 굵직하고 단단한 오크나무도 능히 썰어넘긴다는 위험한 무기였다. 통나무에 그러할진대, 나약하기 짝이 없는 유니콘의 몸뚱이에는 또 어떻겠는가. "누구냐?!"

 

"잔치에 다녀오는 길이냐?" 다른 근위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의 눈은 내가 온몸에 두른 붕대를 훑고 있었다. "신민이여, 잔치는 이미 끝났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거라. 공주 전하께서는 해가 질 때까지 그 누구도 들이지 말라 하셨다."

 

"자기가 섬기는 주인이 어떤지 이리도 모른단 말인가." 나는 중얼거리며 나이트브링어를 방패처럼 들어올렸다. "공주께서는 평생 반드시 만나셔야 할 사람이 계시다. 아직 공주 전하 스스로도 잘 모르시는 모양이지만."

 

"무슨 미친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근위가 대답했다.

 

다른 근위가 나이트브링어를 흘끗 보더니 말했다. "무얼 들고 온 것이냐? 당장 멈춰라!"

 

"이 이상 접근하지 마라!"

 

나는 자리에 멈춰 섰다. 그것만으로 끝내지 않았다. 눈을 감고 고대의 성물을 퉁겨 한 가락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런 짓을 하게 되어 유감이다. 나는 공주 전하를 뵈어야만 한다.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겠지만, 그게 당신들 잘못은 아니니 심려치 마라."

 

"당장 악기를 내려놓아라! 대체 뭐 하는—?" 근위가 외치던 말은 당혹으로 마무리되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위대한 어머니 맙소사!" 다른 근위가 소리쳤다. "앞이 안 보여!"

 

나는 숨을 들이키며 눈을 떴다. 어둠 소나타의 연주가 마무리되어, 두 근위의 시야는 당분간 가려질 것이었지만 내 시야는 그렇지 않았다. 둘은 칠흑같은 어둠 한가운데 떨어져 몹시 당황하고 있었다. "미안하다. 오래 가지는 않을 거야." 나는 잰걸음으로 천막을 향했다. "공주 전하를 독대할 동안만큼만 그러고 있으라고."

 

그 때, 엄청난 고음으로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근위 둘이 내가 있는 방향으로 미친 듯 날아왔다.

 

엄청나게 놀라 그대로 몸을 던져 땅바닥에 뒹굴었다. 둘은 내가 구른 방향을 가늠하지 못하고 그대로 쇄도해 루나 공주의 마차 옆구리에 부딪쳤고, 그 충격에 바퀴가 떨어져 나왔다.

 

숨을 고르며 근위들이 부딪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굴에 흐르는 땀이 강을 이뤘다. 급히 몸을 일으켜 루나 공주의 천막을 향해 달리려던 참이었다.

 

다시 째지는 소리가 나더니, 둘이 휙휙 돌면서 이쪽으로 총탄처럼 날아왔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근위의 비행 궤도에서 겨우 벗어난 정도였다. 나무상자가 박살나며 몸 곳곳으로 파편들이 마구 날렸다. 자리에 선 근위들이 사방으로 고개를 돌려댔다.

 

몸을 일으켜 헉헉거리는 와중에도 나는 속으로 나를 질책했다. "아 제기랄! 사로스인이지!" 다 쉰 소리로 으르릉거리며 땅에 침을 탁 뱉었다. "반향정위가 가능한 걸 까먹고 있었다니, 병신 아냐 이거! 몸이 달아서 아주 온갖 병신 짓을 다 하는구만!"

 

"당장 이 더러운 사술을 풀지 못할까!" 근위 하나가 목을 쭉 빼며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끝끝내 우리가 너를 해치게 해야겠느냐!"

 

"당장 그만둬라. 그러면 다 끝난다!" 다른 하나도 거들었다.

 

천막 입구 천이 팔락였다. 시선을 다시 근위에게 돌렸다. 염동력으로 몸에 두른 붕대 절반을 풀었다. 숨을 멈추고 몸의 무게중심을 천천히 앞으로 옮긴 뒤, 온 힘을 다해 발굽으로 땅을 내리찍었다.

 

근위 둘이 동시에 째지는 소리를 내지르며 몸을 틀어 미사일처럼 나를 향해 날아왔다.

 

"이야아아아!" 풀어낸 붕대를 근위 둘의 비행 경로에 던지고 몸을 날렸다.

 

근위의 날개에서 호각 소리처럼 날카로운 소리가 일어나는 순간, 둘의 몸이 그대로 붕대와 격돌했다. 근위 하나가 붕대에 전신을 얽혀, 그대로 땅에 처박혔다.

 

시시한 승리를 기뻐하는 데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전속력으로 천막 입구를 향해 달렸다.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루나 공주의 곱상한 얼굴과 깊은 밤처럼 푸르른 두 눈이 나를 맞을 것이었다.

 

뒤에서 육중한 발굽이 나를 덮쳤다.

 

"아아아악!" 나는 뒤에서 덮친 근위의 기세에 휘말려 그대로 땅에 엎어졌다. "으으—놔!" 나는 비명을 질렀다.

 

"더 움직이지 마라!" 근위가 내 귓가에 대고 쏘아붙였다. 뾰족한 군화 끄트머리를 내 목가에 들이댄 근위가 말을 잇자 목소리가 송곳니 사이로 메아리졌다. "분명 경고하지 않았느냐!" 

 

"형제여, 침입자를 잡았는가?!" 온몸에 붕대가 얽혀 땅에 처박혔던 근위가 붕대를 풀며 큰 소리로 외쳤다.

 

"이쪽일세! 내가 잡았다네!"

 

"으으으으—놔!" 나는 근위의 무게에 짓눌리며 외쳤다. 눈물에 젖은 눈이 사방으로 시선을 던졌다. 바로 코앞에 나이트브링어가 나동그라져 있었다. 나는 헐떡이며 뿔을 밝혀 나이트브링어를 집어들고 현을 퉁기기 시작했다.

 

"경고했을 텐데!" 나를 찍어누른 근위가 윽박질렀다.

 

"악기는 내가 처리하겠네!" 다른 근위가 외치며 비곡의 소리를 따라 날개를 펼치고 급가속했다. "공주님을 위하여!" 근위가 나이트브링어를 낚아채기 직전, 어둠 소나타의 권능이 다할 시간이 되었다.

 

나는 아슬아슬하게 그림자 전주곡 연주를 마쳤다. 동쪽 지평선에서 솟아나는 빛이 평범한 일출의 10배 정도로 증폭되었다. 여기에서 그칠 생각은 없었다. 몸을 꿈틀대며 자세를 바꾸고, 근위 사이로 뿔을 겨냥해 외마디 함성과 함께 내 마지막 남은 힘을 끌어모아 한 덩이 빛을 쏘아냈다.

 

섬광이 터지며 순간적으로 시야가 차단되었다. 나에게는 그 정도였지만, 근위 둘에게는 그보다도 심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 분명했다. 무시무시한 섬광과 함께 두 사로스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나를 붙잡고 있던 근위가 나에게서 떨어져 뒹굴다가 다른 근위와 부딪쳤다. 섬광에 제정신을 놓아 버린 둘은 나를 버려두고 달아났다. 흙길에 군화가 부딪치고 긁히는 소음이 서서히 아득해지다가, 더 들리지 않았다.

 

"아아아악! 또 요술을!"

 

"형제여, 저년의 소리가 들리는가?! 어디로 내뺐는가?!"

 

"뜨거워... 너무 뜨거워... 감각이... 감각이 없..."

 

저 둘을 저런 신세로 만든 것에 대한 유감을 표명할 시간은 없었다. 나는 과호흡하며 몸을 일으켰다. 몸을 감고 있던 붕대의 나머지 절반도 풀어져 땅에 뒹굴었다. 나는 내가 달리는 방향이 공주의 천막이기를 바라며 계속 달렸다. 뒷다리가 다 풀어지지 않은 붕대에 걸렸다. 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넘어졌다. 쓰러지는 몸이 천막을 긁었다. 숨이 막혔다. 나는 섬광의 흔적이 채 가시지 않은 몸으로 천막 이곳저곳을 쓸어대며 입구를 찾아 달려들었다. 나는 울며 애걸했다.

 

"공주 전하!" 숨이 막혔다. 비명이 나왔다. "공주 전하... 대체... 이게 어찌된 일이옵니까?!"

 

"어머니..." 셀레스티아 공주가 중얼거렸다. 공주의 두 눈은 완벽하고 순수한 공포에 질려 수축되었고, 그 아래로 끝없이 눈물을 떨어뜨렸다. "아아, 위대하신 나의 어머니시여. 대체, 대체 저희가 무슨 짓을 했단 말입니까?"

 

"공주님?!" 놀란 트와일라잇의 얼굴은 창백했다. 호텔 로비에 모인 사람들이 불안해하며 몸을 떨었다. 왕실근위대가 공주 앞에 나아갔다. 주인을 걱정하는 표정이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트와일라잇이 이쪽을 보며 물었다. 묻는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대체,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나, 나도 몰라요!" 리라를 가슴팍에 껴안으며 울부짖었다. 파도의 행진, 그 절반 즈음을 연주하던 중에 보인 태양의 여신의 반응은 대단히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어린애처럼 떨며 울먹이는 것에 더해, 파스텔톤으로 반짝이던 갈기도 급속히 그 빛을 잃었기 때문이다. 호텔 자체가 우리 모두를 집어삼키기라도 하는 듯 사방을 둘러싼 벽이 어둠으로 그 모습을 바꾸며 꿈틀거렸다. 무엇인가 무너지는 듯 깊고 묵직한 소음이 들렸다. 아득한 곳에서부터 지표면이 무너져 내리며 이쪽으로 다가오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이게 무슨 음악인지 가르침을 청하려던 것밖에 없어요! 공주님께서 왜... 왜 저러시는진 저도..."

 

건물 전체가 뒤흔들렸다. 천장에서 먼지와 잔해가 떨어지고 쏟아졌다. 시장은 자기 스스로도 다리를 덜덜 떨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침착할 것을 요구했다. 때는 너무 늦었다. 모여든 사람의 절반이 벌써 출구를 향하여 쇄도하고 있었고, 나머지 반은 공주 곁에 모여들이 이게 어찌된 일인지 설명을 구하거나 도움을 청하거나 차마 이름을 붙일 수조차 없는 작금의 재난으로부터 자기들을 구원해 줄 것을 청원했다.

 

"나의 자매여..." 셀레스티아 공주가 중얼거렸다. "내 사랑하는 자매여, 대체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루나 공주님?!" 트와일라잇이 소리쳤다. 마른침을 삼키는 그녀의 두 눈은 눈물과 걱정이 그렁그렁했다. "공주님, 루나 공주님은 괜찮아지신 게 아닌가요! 조화의 원소로 나이트메어 문의 타락을..."

 

"그렇지 않다..." 셀레스티아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시간이라는 개념보다도 더욱 오래된 비극에 공주는 흐느꼈다.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잔학한 구금과 격리의 나날만이 있을 뿐." 셀레스티아가 이를 악물었다. 공주는 말을 더듬었다. "어머니, 어머니께서는 항상 걱정이 너무 많으셨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그 아이를 도와야만 했습니다. 우리의 애정은 그렇게 보잘것없는 것이었나이까?" 셀레스티아가 고개를 푹 수그리자, 갈기가 패전국의 깃발처럼 힘없이 흘러내려 쏟아졌다. 공주가 울부짖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으니, 저는 마땅히 이 땅을 수호해야 합니다. 어머니의 슬픔은 제 슬픔이기도 하나니, 부디 용서를..."

 

"공주 전하!" 근위대가 소리쳤다.

 

"지진입니다.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속히 피하시어 옥체를 보존하셔야 합니다!"

 

"공주님!" 트와일라잇이 비명처럼 외치며 알리콘의 금장 구두에 매달려 헛되이 재촉했다. "서두르셔야 해요! 여기서 나가셔야 합니다! 공주님, 진짜 이러시면 안 돼요! 어서—"

 

"미안하다." 공주가 말했다. 고개를 치켜든 공주의 눈은, 불그스름한 빛이 아니라 보라색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은 다름아닌 나를 향해 똑바로 겨누어져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없던 일이 되어야 한다. 짐은 노래를 수호할 책임이 있다." 셀레스티아 공주가 말을 마치고 그대로 입을 벌리더니, 낮은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대사원의 사제들이 한 자리에서 웅얼거리며 찬송가를 부르는 듯 묵직한 울림이 로비를 가득 채웠다.

 

근위 하나가 주춤했다. 갑주가 저절로 벗겨져 나갔다. 사내는 당혹해하며 무어라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더듬거렸다. 금빛 갑주가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그대로 산산조각나며 형형색색의 꼬마 버러지 무리로 변했다.

 

"이건 대체...?!" 트와일라잇이 놀라 소리쳤다. 그 뒤로 외마디 비명이 들렸다. 트와일라잇이 방향을 틀었다.

 

시장이 로비 중앙에 마련된 연단에서 내려와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고 있었다. 나무를 다듬어 만든 연단이 공중으로 떠올라 무시무시한 수의 패러스프라이트로 변했다.

 

이 사태는 우리 머리 위에 달려 있던 샹들리에에도 그대로 미쳐서, 이것들도 그 상태로 분해되더니 패러스프라이트로 변해 눈에 띄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호텔 로비 전체가 무수한 패러스프라이트로 이루어진 회오리바람에 휩쓸린 형국이 되었고, 폭풍의 눈에는 셀레스티아 공주가 있었다.

 

"안 돼!" 나는 울며 소리쳤다. "이런 일은, 이런 일은 일어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사방으로 버러지가 날아다니고 머리 위에선 잔해가 떨어지는 난리통이었다. "주박에서 풀려나는 걸 바랐을 뿐이데 왜!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대체 왜!"

 

"내 자매의 노래를 불러라!" 셀레스티아가 소리쳤다. 캔틀롯 왕가가 전통적으로 사용하는 발성법도 쩌렁쩌렁하지만, 이건 그 두 배 정도는 되는 듯했다. "내 자매의 노래를 부르고, 그리하여..." 셀레스티아가 멈칫했다. "내, 내 자매의 노래를 부르고, 그, 그리하여..." 셀레스티아가 얼굴을 찌푸렸다. 세상을 빚어낸 성가의 명령에 불복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침내 셀레스티아가 발굽을 크게 떨쳐내며 어마어마한 염동력을 쏘아내 호텔 로비에 남아 있던 사람들을 전부 눈이 멀 정도로 찬란한 오후의 햇살 속으로 날려보냈다. "아니! 너희는 여기에 있어선 아니된다! 무無로 남아 있어야 하는 이는 오직 하나뿐이니!"

 

"으아아아아!" 밀려난 트와일라잇이 밖으로 날려가며 비명을 질렀다. 버티던 근위 몇이 더 버티지 못하고 날아갔다. 나도 균형을 잃고 호텔 로비 밖으로 내던져졌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셀레스티아 공주의 모습은, 뼈만 남은 날개를 활짝 펼친 이름 없는 알리콘의 그림자에 얽혀 찌그러지는 듯 한없이 나약해 보였다. 호텔 건물 전체가 터져나가며 패러스프라이트와 각종 잔해를 포니빌 곳곳에 퍼뜨렸다. 그 사이에는 내 꿈과 희망, 기억도 섞여 있었다.

 

땅바닥에 널브러져 경련하던 내 머릿속에 끝없이 반복되던 노래만 그대로였다. 울음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고, 흐느낌에 졸린 목은 숨쉬기가 버거웠다. 그 멜로디라도 기억하려고 용을 쓴 건 일종의 본능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잠깐의 발작을 마치고 일어났을 때 들려온 것은 노래가 아닌 목소리였다.

 

"아무런 언질도 없이 내 숙소에 들이닥친 이유가 무엇이냐?!"

 

흠칫 놀라 두 눈을 번쩍 떴다. 섬광의 흔적은 사라져 있었다. 마지막 힘으로 일으킨 섬광의 잔향뿐만 아니라, 그림자 전주곡으로 증폭시킨 빛의 흔적도 사라져 있었다. 나는 떨며 고개를 들었다.

 

조각 같은 루나 공주의 찌푸린 얼굴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을 깜박일 때마다 공주의 검은 머리 위로 은 투구가 덮이고 한기가 기세를 더해 갔다. "군것질거리나 사탕을 얻으러 왔느냐? 미안하구나. 악몽야 축제는 이제 끝났다. 아침 동안에는 좀 쉴 생각이었는데......"

 

"전하... 고, 공주 전하." 내가 더듬는 말과 같이, 잘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움직여 공주 앞에 섰다. "송구하옵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공주 전하께 꼭 드려야 할 말씀이 있—"

 

"근위는 어디 갔느냐." 루나 공주의 검고 푸른 눈이 천막 출입구 밖을 내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있었던 소란과 근위들이 내쏜 고음, 그리고 너..." 루나 공주가 눈을 가늘게 떴다. 마력의 바람이 천막 중앙부로 모여들며 휘몰아쳤다. 루나 공주는 흉흉한 기세를 조금도 숨기지 않고 갈기를 크게 부풀리며 나를 내려다보고 외쳤다. "네가 감히 내 근위를 몰아내었느냐?! 저들의 털끝 하나라도 다치게 했다면, 내 너를 가만—"

 

"공주 전하께서는 한 곡 노래를 기다리고 계시지 않습니까!" 나는 루나 공주를 노려보며 거칠게 소리쳤다. 나이트브링어를 들어올려 루나 공주의 앞에 들이밀었다. "공주 전하께서 평생 들어 오셨던 바로 그 노래 말씀입니다. 처음에는 알아듣지 못하셨을 테지만, 실은 처음부터 그 곡을 아주 잘 알고 계셨을 터입니다. 공주님을 구성하는 그 노래의 일부니까요! 이는 셀레스티아 공주님의 한 부분이기도 하며, 위대한 어머니의 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뭐라고 대꾸하려던 루나 공주는 대답 대신 당혹감의 한숨만 토해냈다. 그리고는 내게서, 더 정확히는 내가 가져온 어떤 물건에서 거리를 벌리며 뒷걸음쳤다. "그건..." 루나 공주가 나이트브링어를 쳐다보았다. "전에 본 일이 있다..." 공주의 고아한 풍채 위로 한 줄기 전율이 스치고 지나갔다. 공주가 조금 전과는 달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자, 차가운 숨이 밖으로 뻗어나왔다. "일전에, 짐이 가지고 있었던 것인데......"

 

침을 삼켰다. 앨러배스터가 생각났다. 이제부터는 앨러배스터의 지혜와 경험 밖에 있는 일이었다. "공주 전하, 세상에는 한 가지 멜로디가 있나이다." 나는 말했다.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멜로디옵니다.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우리는 그 소리를 듣고, 각자의 본질을 정의해 갑니다." 포니빌 시내에서 나이트메어 문을 맞닥뜨리고 겁에 질렸던 어떤 유니콘처럼 몸을 떨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하지 태양절 축제 전날의 피해자로서가 아니라, 이 상황을 주도하는 자로서의 떨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명, 단 한 분만은 그 멜로디를 들을 기회조차도 얻지 못했습니다. 공주 전하께옵서는 제가 어느 분을 두고 말씀드리는 것인지 잘 아실 것입니다. 세상 모든 것이 그분의 실재를 부정하고, 공주 전하 스스로 그렇게 믿도록 만들었다 해도 말입니다."

 

"짐은..." 루나 공주의 얼굴이 고통으로 긴장했다. 공주의 갈기가 축 늘어졌고, 관자놀이를 따라 식은땀이 떨어졌다. "짐은... 이를 입에 담아서는... 아니된다..."

 

"무엇을 말입니까?" 공주를 똑바로 쳐다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런 말로 메워야 하는 빈자리가 있다면, 그 빈자리에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도 아셔야 할 텐데요?" 나이트브링어를 들고 루나 공주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분의 존재가 감추어져 있는 이상, 공주께서는 태어나셨어도 완전히 태어나신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노래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공주님의 생에서 무엇을 빼앗겼는지 깨닫고 나시면 혼란스럽고 두려우실 것입니다. 나이트메어 문은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실패작이었을 따름입니다. 항상 공주 전하의 한 부분이었지만 지금까지 빼앗긴 줄도 모르고 살아왔던 빈자리가 있음을, 그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심호흡하고 말했다. "하지만, 방법은 있습니다. 그분을 되돌릴 수 있습니다. 공주님의 노래를 되찾을 수 있습니다."

 

"지, 짐에게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것이냐?!" 루나 공주가 울며 과호흡했다. "짐에게... 짐에게 사특한 말을 속삭이려는 것이냐?"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는 조용히 말했다. "해후의 방법이 있을 따름입니다."

 

루나가 거칠게 말했다. "짐은 네 오활한 말에 귀기울일 시간이 없도다—"

 

"그 분의 이름은 아리아." 나는 말했다.

 

루나 공주가 놀란 숨을 토해냈다. 아마 그 떨리는 몸 안에 남은 숨까지 전부 토해냈을 것이다.

 

"아리아 공주님입니다." 나는 다시 말하며 루나 공주의 앞에서 어스름 진혼곡 연주를 시작했다. 현을 부드럽게 당겼다 놓을 때마다 소리가 솟았다. "아리아 공주님이 없기에 공주 전하께서는 밤마다 눈물을 훔치셔야 했습니다. 천 년 동안의 후회와 속죄, 그 원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리아 공주님이야말로 공주 전하의 삶에서 망실된 부분이 아닌지요? 이는 노래의 미완 여부와 같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공주 전하의 마음과 관련된 것이지요. 아리아 공주님은 공주 전하의 자매이자 황혼의 여신이시며, 해와 달 사이의 간극을 잇는 가교와 같은 분이십니다!"

 

"아리아..." 루나 공주의 커다란 눈에서 눈물방울이 맺혀 굴러 떨어졌다. 마력의 바람이 점점 더 그 기세를 더해가며 천막 곳곳을 찢어대기 시작했다.

 

"공주 전하, 저를 그분께 보내 주셔야 합니다!" 큰 소리로 말했다. "그분께서 공주 전하께 남겨주신 노래가 있을 것이옵니다! 이제 그 노래를 부르셔야 합니다! 소인을 포함한 우리 모두가, 그 노래를 불러야 하나이다!"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나는 나이트브링어에서 뻗어나온 보호막 뒤에 서서 울부짖듯이 말했다. "만인은, 만인은 사명을 가지고 세상에 나옵니다. 흩어져서는 그 사명을 다할 수 없고, 오직 함께 설 때만 이를 다할 수 있으리이다!"

 

"짐의 사랑하는 자매." 루나가 눈물지었다. 두 눈이 밝은 보라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루나 공주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각종 파편들과 눈물이 흩날려 깊고 푸른 밤의 화폭을 완성했다. "짐은... 짐은, 짐은. 짐의 혈육을 보호할... 보호할 책, 책임이..."

 

숨이 막혔다. 패러스프라이트와, 큰 소리로 소리치는 셀레스티아의 목소리, 사로스인이 설치한 폭탄으로 폭파된 캔틀롯 왕성의 한 부분을 생각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외쳤다. "공주 전하. 그분의 노래를 부르시어, 소인을 무의 존재로 만드소서!"

 

루나 공주가 움찔하며 형형한 두 눈으로 나를 마주했다.

 

"무의 존재로 만들어 주십시오!" 나는 소리쳤다. "저는 이미 아무것도 아닌 자입니다!" 천막의 천조각과 온갖 흙먼지가 얼굴로 날렸다. 얼굴을 돌려 돌풍을 피하면서도, 이를 악물며 루나 공주의 귀에 진혼곡이 전부 들어갈 수 있도록 연주를 마쳤다. "그러니 저를 보내 주십시오! 하나의 곡조로는 본래 두 개의 곡조로 구성된 노래를 완성할 수 없습니다!"

 

"짐은... 짐은..." 루나 공주는 움찔하더니 한숨을 쉬며 단호한 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내 자매를 보호할 책임이..."

 

"노래하십시오!" 나는 고함치듯 말했다.

 

루나 공주가 입을 크게 열어 노래했다. 노래의 음파가 아니라 대포의 파열음에 가까운 울림은 차라리 신성한 소음이라고 해야 할 터였다. 보름달을 배경으로 별자리들이 루나 공주를 둘러쌌다. 공주와 나 사이에 회오리바람이 일었다. 땅을 딛은 네 발굽이 뒤로 밀려났다. 궁창이 찢어지는 소리, 차라리 위대한 어머니의 울음이라고 해야 할 법한 소리였다. 그리고 다시 침묵. 나는 모든 소리와 빛과 물리법칙을 초월한 공간으로 추방되었다. 창조의 새벽 이전부터 존재했던 노래의 음 하나하나가 사방에 떠다녔다. 차원 사이의 만화경과 같은 틈새를 따라 흘러가는 내내 나는 나이트브링어를 놓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흔들리는 네 다리 너머로 이름 없는 자들의 영역, 그 낙뢰와 광기의 편린들이 비쳐 보였다. 나는 이름 없는 자들의 땅 곳곳에 널린 쇳덩이 사이를 지나 저 아래에 속박되어 신음하는 자들을 지나쳐 날아갔다. 아리아 공주의 옥좌가 눈앞에 있었다. 겹겹이 겹쳐진 구체들이 정렬되면서 입구를 열어주었다. 나는 루나 공주가 불어 준 숨결을 타고 내 기억 어디에서도 관련된 정보를 얻을 수가 없었던 미지의 영역에 들어섬과 동시에 비명을 내질렀다. 그 와중에도 머릿속에 여러 가지 기억들이 떠올랐다. 모닝 듀의 대양처럼 푸른 눈동자. 엄마, 아빠와 함께 보낸 난방절의 기억. 빙긋이 웃는 트와일라잇과 큰 소리로 깔깔 웃는 문댄서.

 

그리고 오직 어둠뿐이었다. 생각은 생각되어지지 않았다.

 

 

*1 the corner of sugars and cubes, 슈가큐브코너를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