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자여, 그대가 꼭 알아야겠다면 말해 주겠다. 그것은 선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의문부호에서 출발했다는 게 맞을 것이다. 한때는 유일무이한 진실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갈래로 나뉘어 버렸지. 우주의 진리를 밝혀내겠다는 일련의 탐구가 하나의 진리를 깨뜨려 여러 조각으로 부수고 말았고, 깨진 조각 하나하나가 저마다 다른 소리로 울리는 소리는 일종의 합창으로 뒤섞여 심연 깊숙한 곳에서 하염없이 똑같은 음만 반복하고 있지. 최초의 노래는 울음도, 웃음도 아니었으니, 이는 궁창이 부서져 삼라만상이 영원히, 두 번 다시 생겨날 수 없도록 무너진 후에야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노라." *1
숨을 헐떡이며 좌우로 눈을 굴려 어둠 속을 살폈다. 저 목소리, 분명 들은 적 있는 목소리였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내 귓가에 대고 속삭이던 바로 그 목소리. 다만 내가 그 때, 그 자리에 있고 나서야 그 존재를 깨달은 목소리. 바로 이 순간 어둠 속에 잠긴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 그 어떤 의미도 알 수 없었고 이해할 수도 없었던 그 말들이 그제야 이해되었다.
"언젠가 나뉘고 흩어진 조각들이 더욱 작고 부박한 것이 되고 나면 각각의 조각마다 도출한 답을 서로 나누고 공유할 숨결조차 낼 수 없게 될 터이다. 그 날이 오면 현실우주가 내포한 비극의 대침묵 속에서 여러 조각으로 흩어진 것들이 다시 하나로 모이게 될 것이다."
입 밖으로 놀란 숨이 빠져나갔다. 창조의 순간이 눈 앞에 펼쳐졌다. 칠흑의 장막 너머로 미궁처럼 얽힌 선들이 소용돌이쳤다. 오래되고 장엄한 그 순간을 둘러싸고 나무둥치들이 자라났다. 황혼에 젖은 에메랄드 빛 공터가 보였다. 하늘로 뻗은 나뭇가지에서 잎사귀가 떨어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한가운데에 창백한 빛으로 이루어진 광륜이 있었는데, 그 안에는 웬 아름다운 말의 형상이 부드러운 땅에 기대어 있었다. 그 솜털은 한없이 작은 별자리의 무리로 이루어진 듯 찬란한 광택을 뿌렸고, 쪽빛으로 반짝이는 갈기가 마법의 바람을 타고 찰랑거렸다. 황혼의 한 조각이 그녀의 목 주변을 비추자 거기 엉긴 땀방울 하나가 반짝였다. 그 여자는 고통에 쓰러져 경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또한 우주를 창조하고, 기쁨과 슬픔으로 이를 채운 그 노래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이 가진 권능과, 이루고자 한 서원, 하고자 하는 일 모두 창조를 가리키고 있었지. 하지만 그 어떤 노래로 환희와 기쁨을 말하더라도 그 끝은 반드시 죽음과 만가로 귀결되어야만 했다. 그렇다고 그 누가 감히 어머니를 비난할 수 있겠느냐. 어머니가 곧 음악이셨고, 음악의 의지를 대변하셨으니 말이다. 저 순간까지 어머니께서 지으신 곡은 오직 당신만을 위한 발라드였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도 죽지 않고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자가 나타날 가능성은 없었지."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외마디 비명과 함께 위대한 어머니가 고개를 쳐들었다. 신성하면서도 거대하고, 목적의식으로 충만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회오리바람이 일어 근처의 나무를 뒤흔들고 풀을 일으켜 세웠다. 영원히 노래하실 분의 입에서 솟을 노래를 기다리며 온 우주가 전율했고, 별들이 떨었다. 그러나 몇 분이었어야 할 산통이 몇 시간으로, 며칠로, 몇 년으로, 몇 번의 겁파로 이행되면서 위대한 어머니는 모로 누운 채 고통에 신음하고만 있어야 했다. 그분은 두 뒷다리를 활짝 연 채 산통이 솟구칠 때마다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그 고통을 홀로 감수한 것은 아니었으니, 처음으로 낳은 알리콘이 곁을 지키며 위대한 어머니를 보살폈다. 위대한 어머니의 곳곳을 살피며 정기적으로 뿔을 겨누어 그분의 산통을 완화하기 위한 마법을 걸었다. 어린 셀레스티아 공주의 얼굴은 두려움으로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공주는 어머니의 출산을 돕기에는 한없이 무력했던 것이다.
"바로 저 순간까지 내 어머니께선 오직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당신의 임무를 수행하셨단다, 버려진 자야. 생명을 싹틔우는 것이었지. 하지만 어머니께서 존재하실 수 있었던 것은 그 목적이 더 이상 유일무이한 것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최초의 성가는 스스로를 풀어 자신을 여러 갈래로 나누었다. 어머니께서는 불멸의 존재셨지만 진리에 도달하실 수는 없으셨다. 성가는 어머니보다도 신격이 높았다. 어머니는 신생우주의 어둠 속 가장 깊은 곳까지 빛을 뿌리기 위한 프리즘에 불과하셨던 것이다. 빛과 어둠은 반드시 분리되어 있어야 했다. 낮과 밤 사이에 어스름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위대한 어머니의 몸이 크게 발작했다. 그분의 얼굴은 눈물로 젖어 있었다. 셀레스티아가 그분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산파 역할을 했다. 그런데, 위대한 어머니의 배에서 나온 것은 돌처럼 미동도 없이 조용했다. 음악이 스스로를 쪼개는 과정에서 불협화음이 일어났고, 그와 함께 창백한 빛이 천지창조 위로 물결졌다. 그리고 깊고 깊은 한숨과 함께, 쪼개진 노래가 영겁의 망각 속에서 메아리졌다. 위대한 어머니 곁에 늘어섰던 커다란 나무둥치들이 뻗은 가지에 달린 잎들이 시들어 떨어졌다. 나무들도 쪼그라들며 말라 버렸다. 풀잎들이 갈색으로 변했고, 줄기는 시들었으며 뿌리를 품은 흙마저 딱딱하게 말라붙으며 갈라졌다.
무기력하게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셀레스티아의 눈이 젖어 들어갔다.
위대한 어머니가 당신이 낳은 아이를 들어 갈기로 감싸안았다. 눈물로 젖은 얼굴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위대한 어머니의 솜털 위에서 빛나던 별들이 희미해졌고, 황폐해진 초목 위로 무시무시한 어둠이 쏟아졌다.
"이것이 내가 태어난 과정이다. 나와 함께 태어난 개념이 바로 죽음이다. 시작이 있으면 마땅히 끝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머니께 나름대로의 사명이 있었듯 내 자매에게도 사명이 있다. 상실. 상실이 나의 사명이다. 자의식이 생겨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도 전부터 나는 나를 구성하는 노래를 스스로 알고 깨우치기 시작했다. 나는 세상이 저버리고 잊은 것들을 다스릴 운명이었다. 내가 거느릴 수 있는 유일한 청중은 느낄 줄 모르고, 후회할 줄 몰라서, 기억할 줄 모르는 것 하나뿐이었다."
눈앞이 캄캄해지며 어둠이 번졌다. 달도 없는 밤에 위대한 어머니께서 절벽 위에 올라 원시의 풍경을 내려다보고 계셨다. 몇 걸음 뒤에 선 셀레스티아는 슬퍼하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위대한 어머니의 몸도 들썩이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고통을 짊어진 눈이, 당신 앞에 놓인 어린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꽃을 모아 만든 요람 위에 가만히 누워 움직이지도 않는 아이. 조그마한 머리 위로 자란 갈기는 곱게 땋여 있었고, 연약해 보이는 두 날개는 보라색 꽃잎처럼 접혀 있었다.
위대한 어머니의 몸이 크게 요동쳤다. 그리고는 자리에 쓰러져 둘째딸의 몸에 당신의 얼굴을 가만히 비볐다. 그분은 몸을 떨며 통곡했다. 머리 위로 뜨거운 불빛이 번쩍거렸다. 하늘이 뒤틀리며 그 본연의 원소 단위로 쪼개졌고, 어머니의 분노가 하늘을 찔러 별자리가 수도 없이 터져나갔다.
셀레스티아는 숨도 쉬지 못하고 그 모습을 보았다. 겁을 집어먹은 아이가 엄마 곁으로 달렸다. 셀레스티아가 위대한 어머니 곁에 닿은 순간, 위대한 어머니는 두 날개를 활짝 펼치고 입을 열어 통곡했다. 그 밑으로 펼쳐져 있던 태고의 풍경이 단 한 개의 정제되지 않은 음에 휩쓸려 산산이 조각났다.
"하지만, 어머니께선 기억하실 수 있었다. 슬퍼하실 수도 있다는 것은 비극이었다. 어머니의 감정은 우주를 채색하는 붓질이었다. 어머니께서는 당신이 사랑하는 것들만 빚으셨다. 세상이 생겨난 이후 어머니께서는 본인의 일부에 해당하는 게 아닌 이상 함부로 창조의 권능을 사용하신 적이 없었다. 최초의 성가는 어머니께서 태어나시자마자 그 힘을 내주었지만, 그 상실감을 상쇄할 수단은 되지 못했다."
"답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답을 구하려 하면 흔히 그렇게 되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는 과정에서의 파괴는 진실이 허위의 벽을 깨고 스스로를 드러내며 발생하는 세례와 같다. 다만 내 어머니께서 직면하셔야 했던 파괴는 빈틈없이 전방위로 닥쳐오는 것이었다. 당신이 배 아파 낳은 혈육을 죽음으로 내몰아야 하는 고통을 어찌 감히 짐작하겠느냐. 어머니의 슬픔은 그 어떤 잣대로도 측량할 수 없고, 어머니의 고통과 비탄은 그 어떤 개념으로도 정의될 수 없었다."
"어머니께서는 당신의 딸을 포기해야 하는 슬픔을 견디실 수 없었다. 당신께서 딸을 내버렸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한, 이미 시작된 창조의 과업을 계속하는 것은 물론이고 최초의 노래를 계속 쪼개 만물을 빚어낼 권능조차도 쓰실 수 없을 것은 자명했다. 최초의 노래의 운명이 경각에 달하면 창조된 만물과 실존이 종말에 다다를 것이고, 미래영겁 혼돈만이 존재하게 될 터였다."
세상의 파편들이 헐거워지며 난잡하게 뒤엉키기 시작했다. 소용돌이치는 나락 위로 땅덩이들이 떠다녔다. 창조의 노래가 쪼개지며 함께 불안정해진 에너지가 소용돌이치는 급류와 낙뢰의 섬광으로 솟구쳤다. 그 한가운데서 셀레스티아와 위대한 어머니가 찢겨진 현실의 파편들을 잡아 모으고 있었지만 충분치 않았다.
위대한 어머니가 주저앉았다. 그 얼굴은 일그러진 채 차갑게 굳어 있었고,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그 앞 요람에 누운 어린아이는 태어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죽은 듯 미동도 없었다.
옆으로 날아온 셀레스티아가 위대한 어머니의 얼굴에 뺨을 비볐다. 두 얼굴 사이에서 눈물이 으깨졌다. 딸이 어머니에게 몇 마디 말을 속삭이는 동안에도 세상은 더 빠른 속도로 붕괴해 가고 있었다. 위대한 어머니의 두 눈이 단호한 결단과 찬란한 힘으로 빛났다. 위대한 어머니가 날개를 펼치며 힘을 끌어모았다. 얼굴이 절로 일그러질 정도였다.
셀레스티아도 어머니의 뜻을 눈치채고 날개를 펼쳤다. 두 신성한 존재가 고개를 들고 입을 벌려 위대한 화음을 이루었다. 우주의 붕괴 속도가 차츰 느려지더니, 원래 상태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부서진 별들이 돌아왔고, 흩어진 별자리가 다시 모였다. 새로운 멜로디의 탄생은 최초의 노래 일부가 부서져 흩어졌음을 의미했다. 부서진 노래가 혼돈 위에 세워진 기틀이 되고, 다시 궁창으로 빚어져 그 무엇도 통과시키지 않고 우주 한가운데의 작은 격리 공간을 수호하는 보호막으로 재탄생했다.
"이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진실과 조화를 추구하는 자에게 무의미하고 허무한 결말을 받아들이라고 하면 받아들일 리 없지 않겠느냐. 우주의 창조가 마무리되지 않아 생명의 요람은 만들지조차 못한 상태였으니 말이다. 창조의 숨결이 마침내 꽃을 피우고 안정화되는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서, 어머니께서는 최초의 파괴를 받아들이셔야 했다."
"이는 장례를 치러야 하고, 그 후속조치인 매장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매장된 아이는 단순히 보이지 않는 곳에 매장된 것이 아니었다. 단순히 다른 시공간에 격리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살아 있는 자의 인지와 지식과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되는 매장이어야 했다. 훌륭한 매장은 존재 자체를 잊히게 하지. 망각은 남겨진 자들이 과거의 슬픔에 주저앉아 머뭇거리지 않고 밝은 미래와 기회를 찾아 살아갈 수 있게 하지 않느냐."
"내 어머니가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어머니의 가처분생애는 무한했지만, 그 영겁의 시간 동안 노래를 쪼개고 갈라내 새로운 것을 빚어내는 과업과 첫 번째 망자를 곡하는 일을 동시에 할 수는 없었다. 그런 짓을 하면 권능이 심각하게 불안정해지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나를 사랑하셨지만, 아직 하실 일이 많으셨다. 어머니는 최초의 노래에서 갈라져 나온 고대의 존재셨다. 탄생 과정은 단순할지 모르나 그 신성성은 부정될 수 없지. 내 자매인 셀레스티아의 본질에 대해서도 말해주마. 셀레스티아도 노래의 일부이긴 하나 어머니에 비해 그 크기가 더 작고 복잡하다. 즉, 타고나기를 어머니에 비해 상실과 슬픔을 덜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보다 잘 적응하는 성정이라는 것이다. 어머니는 절대로 셀레스티아의 특질을 가지실 수 없었다. 창조주의 본질은 그러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어머니께서 일구신 조화의 땅에 번성할 필멸자들이 걸머져야 할 짐이요, 삼라만상이 마땅히 스스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공중을 떠다니던 땅덩이 중에서도 큰 것의 한가운데로 궁창의 조각들이 한데 모여 금속으로 짠 관의 형상을 갖추어 갔다. 그것은 구체의 모습이었는데, 다공성 표면 위로 룬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비곡 하나당 구체 하나씩, 총 열 개의 구체가 겹겹이 포개졌다. 중심부에는 두 알리콘의 날개에서 떨어진 깃털로 만든 요람이 놓였다. 위대한 어머니가 둘째딸을 요람에 안치하고 고개를 숙여 마지막으로 뺨을 맞대었다. 흑, 하고 울음을 삼킨 위대한 어머니가 몸을 돌렸다. 딸의 장지를 뒤로하고 총총히 멀어져 가는 어머니의 뒤를 셀레스티아가 따랐다.
"이것이 어머니와 언니가 궁창의 야상곡을 만들어낸 이유다. 야상곡은 내가 누울 관이었고 그 관을 안치할 무덤이었다. 그러므로 이 또한 두 가지 목적을 갖고 있었다. 첫째는 내 안식처를 마련하기 위함이었고, 둘째는 두 궁창 사이의 완충지대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창조의 성가를 유지하고 지탱하는 기둥의 존재 자체가 잊혀져 있다면, 조화의 뿌리요 근간이 되는 존재 또한 찾기 어려울 것이다. 찾기 어렵다는 것은 부수기 어려워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세상은 평화로이 번성하는 곳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무엇이 영겁의 세월 동안 세상의 조화를 유지해 주는지는 알지도 못하겠지만, 사실 이는 알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 황혼의 여신, 아리아 공주는 모든 실존과 모든 노래의 이면에 숨겨진 멜로디였다. 나는 죽어서 태어난 자이지만 내게도 존재의 이유는 있었다. 내 어머니와 언니는 내 존재를 지각할 수 없게 되었으나 내 존재를 어렴풋이 느낄 수는 있었다. 나와 어머니와 언니는 여전히 한 노래에서 갈라져 나온 존재였고, 이는 우리 사이에 영겁의 세월이 흐르더라도 깨뜨릴 수 없는 일종의 유대관계가 형성되어 있음을 뜻한다."
남겨진 자들은 등 돌려 떠났고, 구체는 완전히 봉인되었으며 그 안에 안치된 아이는 어둠에 잠겼다. 각 구체의 금속판 위에 새겨진 룬은 그 구체에 대응하는 야상곡을 옮겨 적은 것이었다. 야상곡의 힘을 받은 구체 10개가 회전을 시작했다. 구체 밖 세상의 빛도 서서히 희미해졌다. 궁창이 완전히 닫히며 그 사이의 완충지대인 영역 또한 함께 봉인되었기 때문이었다. 불협화음으로 깨져 버린 노래의 파편이 격리되고 남은 순결한 우주는 다시 하나로 합쳐지며 질서와 균형을 되찾았다. 잊힌 자는 잊힌 자일 뿐이니까. 잊힌 자에게는 이름이 있을 수 없고, 그러므로 잊힌 자는 이름 없는 자로 남아야 하니까.
두 알리콘이 떠나 버리고 나서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야상곡 사이에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은 아주 짧았지만 최소한의 사고가 가능할 정도는 되었다. 밝은 보라색 눈물을 흘리며 두 눈이 열렸다.
"어머니와 내 언니 셀레스티아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생각하지 못했으므로 모를 수밖에 없었다. 최초의 노래에서 갈라져 나온 파편인 이상 그 또한 불멸할 수밖에 없다. 그 파편이 얼마나 망가지고 무너졌든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사산된 알리콘이라고는 하지만, 그 본질을 거스를 수는 없으므로 완전히 죽은 존재는 아니라는 것을 어머니와 언니는 깨닫지 못했다. 노래를 부술 수는 있다. 더 잘게 부술 수도 있고, 그 소리를 밟아 누를 수도 있으며 아예 새로 쓸 수도 있지만 완전한 침묵에 이르게는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주 또한 완전히 죽어 사라질 수 없다. 그저 한없이 퍼지며 부박해질 뿐이고, 그나마도 다른 곳에 비해 그 속도가 느린 지점 또한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매장하기로 한 것은 현명한 결정이었다. 산 자들이 있어야 할 땅에서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빛과 온기, 미가 충만한 세상에는 내가 발붙일 곳이 없었다. 그곳에서 나는 쪼개진 노래의 불협화음이며, 무력한 망자에 지나지 않는다. 헌데 혼돈으로 가득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매장된 아이의 몸이 살아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나의 세상은 검은 화폭과도 같았고, 그 영역에는 오직 나만이 존재했다."
"너도 보았으므로 알 것이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관으로 삼을 만한 것을 주고자 하셨다. 어떻게 보면 어머니가 사랑하는 아이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자 마지막 요람이라고도 할 수 있을 터이다. 설마 그 요람이 내 감옥이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셨다."
자그마한 아이가 뼈만 앙상한 다리로 기어 구체 밖으로 나왔다. 고독한 시선에 비치는 것은 오직 혼돈의 격랑뿐이었다. 아리아 공주가 궁창 사이의 땅 곳곳에 떠다니는 발판을 따라 걸었다. 낙뢰가 한 번 떨어질 때마다 비쩍 마른 알리콘의 몸은 성장했지만, 그 초췌함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그 정도를 더해갔다. 그렇게 몇 번의 겁파가 지나간 뒤, 아리아 공주의 몸은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옆구리로 갈비뼈가 비어져 나오고, 뼈마디만 불거진 관절에서 뚝뚝 소리가 나는 형태로 완성되었다. 번개가 몇 번 더 치고 난 뒤, 아리아 공주의 깃털 없고 날개뼈가 앙상한 날개가 활짝 펼쳐졌다.
공주의 두 눈이 불타는 보라색으로 번쩍이자 꿈틀대는 하늘 위로 벼락이 내리치기 시작했다. 아리아의 등 뒤에 있던 구체가 하늘로 떠올랐다. 열 개의 구체가 사명에 따라 움직이며 끝없이 회전했다. 알리콘의 너덜너덜한 발굽이 밟고 있던 흙덩이는 그대로 녹으며 그 형질이 바뀌어 차갑고 단단한 강철이 되었다. 아리아의 영토 가장 먼 곳에서부터 솟아오른 먼지가 하나로 이어지며 녹슨 쇠사슬이 되어 이름 없는 자들의 땅, 그 양극을 붙잡아 연결했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땅덩이도 제자리에서 빙빙 도는 강철판으로 변해 대열을 갖추어 꾸물거리며 혼돈의 심연 한가운데에 거대한 공업의 장을 만들었다.
"나는 내 영역 나름대로의 질서를 수립했다. 그 외에 달리 할 일이 있었겠느냐? 나는 가르침을 받지도 못했고 궁금한 것만 많은 유아에 불과했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단 하나, 머릿속에 끝없이 울려퍼지는 멜로디뿐이었다. 나는 그 멜로디를 따라 구조를 설계하고 균형을 유지했다. 내게는 어머니께서 다루셨던 무궁무진한 질료가 없었다. 그 대신, 아주 작은 티끌 정도에 불과한 것이기는 했지만 성가의 한 부분이 있었지. 내 고독은 축복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저주이기도 했다. 나는 잊힌 자였지만 살아 있는 자이기도 했다. 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자는 오직 나 하나뿐이었고,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자문자답한 끝에 나는 무의미 속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수십, 수백, 가끔은 수천에 달하는 자들이 물결에 떠밀려 와 아리아가 서 있던 강철판 위에서 굴러다녔다. 아리아는 그들 하나하나 사이를 돌아다니며 그들의 얼굴에 뺨을 비비기도 하고, 그들이 흘리는 눈물과 일그러진 표정을 무감각하고 흥미로워하는 눈길로 바라보기도 했다. 밀려온 자들은 혼란스러운 머릿속과 아픈 몸으로 고통받고 있었고, 아리아는 그들의 고통을 경감하고자 몸을 낮추어 그들의 이마에 입을 맞춰주었다. 그러한 위로가 별반 도움이 되지 않았음이 확실시되자 아리아가 날개를 펼치고 두 눈을 번쩍여, 쇠사슬로 그들의 몸을 구속하고 입 위로 족쇄를 채웠다. 그리하여 그들은 고요해질 수 있었다. 완벽히 조율된 카덴스로 아리아의 노래를 부르는 저들은, 마침내 평화로워 보였다.
"오랜 세월이 지났다. 궁창의 야상곡에 다다른 자들이 내 땅으로 밀려오기 시작했다. 내 어머니께서 자아내신 교향곡으로 한층 그 힘을 더한 은닉의 권능으로도 보호받을 수 없었던 자들이었다. 저들이 내 땅에 다다른 것은, 저들 내면의 무언가가 죽었기 때문이고, 절망에 꺾인 끝에 남아 있던 것들마저 심연에 빨려들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그대 이전에도 버려진 자들은 있었다. 궁창의 조각들이 맞추어진 뒤로, 죽음도, 추방도, 자살마저도 저들에게는 안식을 가져다 주지 못했다. 그리하여 저들은 내게로, 이름 없는 자들의 땅으로 왔다. 내 어머니의 노래가 산 자들의 땅에서 저들에 대한 모든 기록과 정보를 말소했으므로."
"나는 버림받은 자였지만, 동시에 산 자들의 세상을 빚어낸 여신을 구성하는 성가의 한 파편이기도 했기 때문에 저들이 내게 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내 존재를 계속해서 은닉하는 대가로, 야상곡은 산 자들을 하나둘씩 집어삼키고 있었던 것이다. 실존의 뼈대 속에 끼이고 만 자가 끝내 여기로 끌려오고 마는 것을 나는 감지할 수 있었다. 아주,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내 이름이 위대한 어머니의 귀에 들어갈 수 있다면 이는 중대한 위험 요소였고, 배제되어야 마땅했다. 우연히라도 어머니께서 내 죽음을 다시 떠올리시고 만다면 그 사실과 죄책감 하나만으로도 어머니는 무너지고 말 터이고, 온 우주가 이와 함께 무너질 것이 확실한데 하물며 내가 죽어서 다시 태어났다고 하면 어떻겠느냐."
"나는 이 사실을 아주 잘 이해했고, 내가 할 일은 그런 미래를 막는 것임을 알았다. 끔찍한 일이지. 하지만 어머니에게서 버려져야만 했던 삶이어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어머니께서 당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한 불멸의 의지를 갖고 계셨듯, 내게도 내 나름대로의 의지가 있다. 나는 이름 없는 자들의 땅을 유지하며 최후의 안식처로 여기 끌려온 자들을 단속해야 한다. 창조의 성가에서 막내동생이 태어난 것을 느낀 시점에서도 나는 내 임무를 다하고 있었다. 혼돈이 그 형태를 갖추고 나타나 나를 길러내고, 내가 마침내 그를, 내 다소니를 추방하고야 말았을 때도 동일했다. 더 이상 그가 내 성무를 방해하도록 둘 수 없어서 나는 그를 추방해야만 했다. 막내동생이 야상곡의 마각에서 나를 구원하려다가 실패하고, 도리어 타락해 버렸을 때도 나는 흔들림없이 내 임무를 수행했다."
"어머니께서 빚어내신 우주가 존속하는 한 나 또한 최초의 성가에 매인 몸이다. 내가 성가의 파편이기 때문이라서가 아니다. 성가는 스스로를 쪼개어 낼 권능이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그러나 이 우주는 영원히 존속할 진실에의 수탐을 청중으로 앉혀두고 있기 때문에 쪼개져서는 안 된다. 마땅히 하나의 커다란 교향곡으로서 유지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때, 눈앞이 새까맣게 변했다. 이름 없는 자들의 땅과, 여기 매여 신음하는 자들의 형상이 모두 어둠에 잠겨 보이지 않았다. 나를 둘러싸고 각종 룬이 빙빙 돌아가고 있었는데, 그 형상은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다가 서서히 또렷해져 갔다. 구체 형태로 가공된 다공성 철판 위로 우주의 빛, 그 원천이 다시 떠올라 구체 한가운데의 옥좌로 천상의 신기루를 띄워냈다. 나를 마주보고 선 것은 반짝이는 보라색 눈 한 쌍이었다. 아리아 공주가 내 숨결을 훔쳐내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 얼굴은 엄정했고,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은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다. 여신의 모습은 한없이 수척하고 야위어 있었지만, 그 어디에도 결점이라 할 곳이 없었다. 어느 곳 하나 피폐하고 초라하지 않은 구석이 없었지만 그 자체로 너무나 아름다웠던 것이다. 나는 공주를 위해 곡을 해야 할지, 엎드려 경배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아리아 공주는 한없이 위축되어 몸을 떠는 가엾은 필멸자가 쓸데없는 말을 뱉기 전에 입을 열었다. "내가 존재할 이유와, 부재할 이유 모두가 그대, 버려진 자를 경계할 것을 주문했다면 어떻겠느냐." 아리아 공주의 번득이는 눈이 내 작은 몸뚱이를 겨누고 가늘어졌다. "그대는 야상곡의 진실을 수탐하는 과정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내 영토에 숨어 있던 자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졌으며 이제 내 옥좌가 있는 곳까지 도달하였다. 어느 하나 비상한 관심이 생기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대 자체에게 관심을 둘 만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그대에게 관심을 품고, 이제 이 모든 진실을 일러주게 된 계기는 따로 있다." 공주의 뼈가 앙상한 날개가 가볍게 떨렸다. "그대 스스로의 의지로, 한없는 절망을 넘어 진실을 수탐하기 위해 내가 다스리는 땅에 몇 번이고 발을 디뎠다는 것이 내 관심을 동하게 했다. 내가 감히 추측하건대, 그대는 나보다도 야상곡에 더 스스로를 매어놓고 있는 것 같구나."
몸이 떨려왔다. 발굽에 무언가 차가운 금속질의 감각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후드 재킷은 없었고, 품에는 나이트브링어가 안겨 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아리아 공주를 올려다보았다. 아리아의 음울하고 빛나는 두 눈 앞에 서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울고 싶었지만, 애써 울음을 억눌렀다.
"그러하시면, 제가 위대한 어머니의 창조물을 부수고자 공주님 앞까지 온 것이 아님을 아, 아실 것입니다." 겨우 입을 열어 말하자,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물론 알고 있다. 그대는 부수러 온 것이 아니라 바꾸러 온 것이지." 아리아가 말했다. "변화란 산 자들의 땅에서는 그 무엇보다도 파괴적인 행위다. 창조의 성가의 본성은 불변에 있지만, 그 성가에서 갈라져 나온 전능한 파편의 본질에 의해 집행되는 이상 변화는 파괴일 수밖에 없다. 아마 그 성질은 영원히 바뀌지 않을 것이다."
"저는 무엇도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저 자신 외에는!" 큰 소리로 외치자 사방을 둘러싸고 돌아가는 룬 문자에 부딪친 목소리가 메아리졌다. "위대한 어머니를 자극해서 그분의 악상惡喪을 들춰내고 싶은 게 아니란 말입니다! 공주께서 이곳에 남아 있고 싶어하심에도 산 자들의 세상으로 끌어내려는 것 또한 아닙니다! 대상 영속성이 성립하는 존재로 돌아가고 싶은 것뿐입니다! 공주께서 힘을 끌어다 쓰시는 그 노래가! 저를 더 이상 저주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그 대가는 네가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리아가 차갑게 대꾸했다. 그 얼굴 위로는 파악할 수 있는 그 어떤 감정의 편린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분노도, 슬픔도, 두려움도, 즐거움도 없었다. 아리아 공주는 이름 없는 자들의 땅이 존재하는 것처럼, 그저 그렇게 존재할 뿐이었다. 내가 말을 섞고 있는 대상은 그 무엇도 아니라 살아 있는 심연일 뿐이라는 것을 나는 신속히 파악했다. "그대는 세인들에게 기억될 이름을 바랄 것이다. 글로 적어 남길 수 있는 유산을 남기려거든 그래야겠지. 하지만 그대의 존재와 그대의 욕망이 우연히라도 탄로난다면 내 어머니께서 내 존재를 다시 지각하시게 될 수도 있다. 그리되면 모든 우주가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대는 이미 내 언니와 동생에게 내 존재를 지각시키는 위험 행위를 자행한 바 있다. 창조의 성가는 그 역사를 제거할 수단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지."
"그렇겠지요! 패러스프라이트에 대해서는 알고 있습니다!" 나는 약간 날을 세우며 말했다. "루나 공주에게 공주 전하의 존재를 알리며 새삼 깨달았지요! 루나 공주도, 그 누구도 진실 때문에 고통받지 않았음을! 저는 어떨까요? 저는 조화를 빚어내고, 유지할 수밖에 없는 여신이 아닙니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몸을 곧추세우고 서서 소리쳤다. "저는 필멸자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제 본질은 배우고 성장하는 것에 있지요! 공주께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노래의 파편이 더욱 잘게 쪼개질수록 그 성질은 오히려 더 복잡한 것이 되어 간다고 말입니다! 공주님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제 삶을 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네 삶을 살고자 한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아리아가 말했다.
그 무시무시한 선고를 기다리며 가쁜 숨을 내쉬는 몸이 떨렸다. 나는 아리아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리아가 몸을 돌려 구체의 벽면 쪽으로 발굽을 흔들었다. "내 성가대의 일원이 되어라." 구체가 방향을 맞춰 가며 회전했고, 벽면에 난 수많은 구멍으로 바깥의 모습이 보였다. 사방에 떠다니는 철판에, 수백은 되어 보이는 자들이 묶여 신음하고 있었다. 영겁의 세월 동안 반복되는 야상곡의 흐름에 맞춰 똑같은 소리로 신음하는 것이었다. "우리와 함께해라. 궁창 사이의 존재로서 해야 할 일을 하며 영원한 안식을 누려라."
대놓고 역겨워하는 눈길로 아리아를 보고 말했다. "자유는 없겠군요."
아리아는 냉랭한 눈길로 이쪽을 볼 뿐이었다. "아니, 자유는 불필요하다. 자유는 고통을 의미하지. 자유는 필연적으로 혼돈과 격동을 초래한다. 그러므로 자유란 위험과 파괴를 뜻한다. 내가 다스리는 곳은 자유를 위한 곳이 아니다. 죽음마저도 안식을 선사하지 못한 자들을 구제하는 성소라고 해야 하겠지. 어차피 너희의 현실우주는 한없는 한기 속에 떨어지는 것으로 끝날 운명이다. 여기에서 내 신민들은 우주가 멸망하는 그 날까지 영겁의 세월을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침을 삼키고 말했다. "그래서 디스코드를 추방하셨습니까? 그 작자 같은 자들이면 공주님의 영역을 견디기 어려웠을 테죠. 공주님은 여기 매장된 존재시고 말입니다."
아리아의 표정이 처음으로 약간 변화했다. 뼈가 앙상한 날개가 펴지더니 다시 접혀 옆구리에 붙었다. 아리아가 구체 내부를 천천히 돌며 말했다. "그대의 몸에서 내 다소니의 냄새가 나더구나. 그렇게 물을 줄 알고 있었지." 공주가 말했다. "처음에는 그것을 과거의 그림자요, 부서진 생각의 한 파편 정도로 치부하고 싶었다. 헌데 그대는 내 노래에 삼켜지는 것을 기다리는 대신 오히려 그것을 연주하려 한 첫 번째 존재였기 때문에 머릿속에 무엇인가 떠오르더구나."
"그렇습니다. 디스코드는 이미 만나 보았지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리아가 느릿한 걸음으로 가까워 오는 것을 보고 몸이 떨렸다. "공주님을 몹시 사랑하는 것 같더군요. 자기가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도 깊은 애정이 느껴졌습니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아리아가 무감정하게 말했다. 아리아가 내 앞에 멈춰서자, 그 존재감만으로도 피가 다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리아가 입을 벌려 말하자 입김이 한없이 피어나 떠올랐다. "디스코드의 포부는 지나치게 컸다. 내 어머니의 노래, 그 편린 하나를 보여 주더구나. 디스코드는 그것에서 창조의 권능을 읽어냈다. 혼돈의 존재임에도 흐릿하게나마 존재의 구성을 갖춘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절대 인정하려 들지는 않았지만, 엄청나게 질투했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다스리는 땅에서 디스코드가 그 어떤 희망도 볼 수 없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여기에 있는 한 내 성가대원들은 안식을 찾을 수 있지만 디스코드에게는 전혀 아니었다. 내 성역의 존재 이유 자체가 그의 존재와는 상극이었고, 그러면 디스코드는 내 성무의 장애물이요 일탈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추방하셨습니까?!" 목소리를 높였다. "아리아 공주께서는 스스로를 위대한 어머니와 같이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고, 그 단순성으로 영원히 세상에 봉사하는 존재로 생각하실지 모르나, 제가 보기에는 전혀 다르나이다! 디스코드가 비탄에 잠겨 해 준 말이 있었습니다! 외로움이 묻어나는 걸음걸이와 저 떨리는 날개를 보소서! 부마도위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이미 죽은 몸에 불꽃이 튀고 있지 않습니까! 공주께서는 디스코드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를 악물고 불을 토하듯 말하는 와중에도 몸을 떨고 싶었다. "공주께서는 그자를 사랑하셨지만, 그러한 종류의 변화와 친밀감과 감정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공주께서 그자를 추방하신 것은 노래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자를 산 자들의 땅으로 보내는 행위는 공주님의 존재를 다시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한 것으로밖에 해석될 수 없으니까요! 디스코드의 추방은 사실 공주께서 변화를 두려워하셨기 때문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저는 공주께서 변화를 두려워하시는 만큼 변화를 갈구하고요! 공주님은 그때껏 살아온 시간 자체를 두려워하셨던 겁니다. 위대한 어머니께서 남겨주신 빌어먹을 야상곡을 수호하는 데 바친 일생이 전부 거짓말에 불과할까 봐!"
"거짓말이 맞다." 아리아는 시원하게 인정했다. "꼭 필요한 거짓말이지. 내 다소니는 이를 이해할 수 없었고, 나를 세상의 수면 위로 띄워 올리려는 그의 열망을 잠재우기에 내 노래의 권능은 충분치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내 자매들에게 맡겼다. 내 자매들의 노래는 한데 모일 수 있으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두 분 공주님들도 그럴 권능은 없었습니다." 나는 말했다. "영원히 그자를 붙잡아 둘 수는 없었단 말입니다! 봉인을 깨고 나왔으니까요! 그자를 돌로 만들고 공주님의 비밀을 은닉할 수 있었던 것은, 그자가 스스로 그 운명을 받아들였기 때문..." 말이 더 나오지 않았다. 몸 깊은 곳에서 한숨이 올라오며 눈이 커졌다. "...저 때문이었군요." 나이트브링어를 꼭 안은 채 뒤로 넘어지듯 주저앉았다. "제가... 디스코드를 몰아넣었기 때문이었어요." 말은 더듬거리며 흘러나왔다. 뱃속에 깊고 깊은 나락이 생기는 듯했다. "제가 디스코드의 생각을 바꾸었고, 그 때문에 디스코드는 조화의 원소에 봉인되기를 선택했습니다. 디스코드가 공주님을 기억하도록 만들어 버려서, 그 무기력함에 지쳐 스스로 돌이 되기를 선택하게 만들어 버렸어요."
아리아가 나를 내려다보며 콧김을 뿜었다. "그대가 나보다도 야상곡에 스스로를 매어놓고 있다고 한 이유를 이제 알겠느냐?"
이를 뿌득 갈면서 발굽으로 얼굴을 문질러 닦고 울먹이며 말했다. "당신이... 당신이 저를 이용한 것이군요. 제가 맞습니까?"
"그대를 조종해서 여기까지 오게 만들려면, 나 또한 감정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어야 마땅할 것이다. 버려진 자여." 아리아가 말했다. "그대가 내 성가대에 들어오지 않는 한, 내가 그대에게 지배권을 행사할 수는 없다. 세상의 질서를 수호하고, 내 다소니에게서 그대의 목숨을 구해 준 것은 그대의 열망이다. 내 동생의 존재를 보존하면서 내게 닿기를 원했기에 진혼곡 하나만을 들려 준 것이 아니더냐. 이제 너는 스스로 알라. 그대를 여기까지 데려온 것은 그대 스스로의 자유를 향한 열망이다. 그대가 자유를 찾아 도착한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안식뿐이라는 것을 고지하는 것은 내 의무다. 자기 자신의 의지로 내부 성소까지 오는 길을 개척한 자에 대해서라면, 더더욱 내가 직접 고지하는 것이 도리겠지."
나는 울먹이며 아리아를 올려다보았다. 입을 열어 말하자 입술이 떨렸다. "공주님의 옥좌까지 다다른 자가 저 이전에도 있었나이까?"
"없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쓰라린 전율이 몸을 타고 흘렀다. "그 기나긴 세월이 흘렀는데도... 수백, 수천만 년이 흐르는 와중에도... 야상곡의 비밀을 이만큼 파헤쳐서 공주님의 앞까지 당도한 자가 저 하나뿐이라는 것입니까?"
"내 노래를 들은 자들은 모두 사슬에 묶이고, 망각의 족쇄에 매여 마침내 안식을 찾았다." 구체가 회전하자 룬 문자가 아로새겨진 철판 곳곳에 뚫린 작은 구멍 너머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빛줄기가 새어 들어오며 각종 별자리와 별들과 항성계의 모습을 띄워주었다. "어머니께서는 우주 곳곳에 창조의 노래를 퍼뜨리셨고, 셀 수도 없이 많은 이퀘스트리아 문명이 그 꽃을 피워냈다. 세상에 버려지고, 집으로 돌아갈 길을 잃어버리고, 기쁨도 희망도 우정도 누릴 수 없게 된 자들을 내게 보내주지 않은 문명이 없었다. 절망에 무너진 자들의 마음에 난 상처를 후벼파고 들어간 야상곡의 곡조가 머릿속에 울려퍼지면, 그자들 또한 내 영역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 그리고 산 자들의 세상에서 있었던 기억 하나하나 모두 지워졌지."
"공주께서는... 그들 하나하나를 전부 기억하신다는 것입니까?"
"저들 하나하나를, 모두 기억한다." 공주가 엄숙하게 말했다. 옥좌로 흘러 들어오는 빛이 투사한 형상이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로 변했다. 하나하나, 우울하거나 무표정했다. 아리아가 발굽을 들어 그 형상을 가리켰다. "추방당한 젊은이들, 이별한 연인들, 전쟁의 포화가 몰고 온 포화나 각종 잔혹행위에 무기력하게 당한 희생자들이 있었다. 실존으로 인한 고통이 그 존재를 압도하게 되면 사람은 부서지기 마련이다. 그렇게 영혼에 깊고 깊은 구덩이가 생기게 되고, 그 구덩이는 궁창 사이의 심연보다도 깊고 어두운 나락으로 진화한다. 그렇게 야상곡에 접촉하게 된다. 야상곡이 그들을 부르면, 그들 중 다수는 내 어머니의 노래에 반응해 대답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내 혈족이나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되었고, 나는 그들에게 삶에서 누릴 수 없었던 안식을 선사했다."
"그 사람들이 스스로 행복과 만족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 주실 생각을 한 번이라도 해 보셨습니까?" 얼굴을 찌푸린 건지, 구긴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 땅으로 데려오는 것으로 그 사람들에게서 무언가를 영구히 박탈하는 거라는 생각을 하신 적이 있기는 합니까?"
"버려진 자야, 여기 발을 디뎠다는 것은 더는 빼앗길 것이 없는 존재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아리아가 곁눈질로 이쪽을 보며 발굽을 휙 움직이자, 해와 달이 딸린 작은 행성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 모습은 다시 한 대륙의 모습으로 전환되었고, 아주 낯익은 마을에서, 아주 낯익은 시청 건물로 점점 더 가까워져 갔다.
"네 집이라고 해야 할 이 곳을 보자꾸나. 따뜻하고 번영하는 곳이지만, 여기에서도 내 성가대에 들어온 자들이 있다."
낯선 얼굴 몇 개가 눈 앞에 나타났다.
"성격 나쁜 흰색 페가수스가 있었다. 고상한 취미를 가진 유니콘의 남편이었지. 이 유니콘은 농장주의 딸로 태어났는데, 순간이동 마법을 능수능란하게 다뤘다."
아리아 공주가 다시 발굽을 휘두르자, 띄워 놓은 형상들이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의 형상들로 변했다. 하나같이 슬픈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 모두 행복하고 건실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이름 없는 자들의 땅이 존재함을 지각하고야 말았다. 그래, 내 어머니께서 영겁의 세월에 걸쳐 세상에서 숨기려 하셨던 상실의 공간과 여기에서 흘러나온 정수에 노출된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스스로를 매장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마침내 여기까지 온 저들은 절대 일반적으로 있을 수 없는 현실과 맞서 싸우려는 의지를 포기한 상태였다. 오히려 행복을 찾았지. 그 사람들이 한때 살아서 산 자들의 대지를 거닐었다는 모든 증거물은 저들이 태어난 바로 그 대지에서 완전히 소멸된 지 오래였다."
"하느님 맙소사..." 젖은 눈으로 아리아를 올려다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포니빌에 저 같은 자가 저 혼자인 줄로만 알았는데..." 생각이 깊어질수록 두려움이 고개를 들어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매일 내가 누비던 바로 그 거리에, 나처럼 방황하는 자들이 있어 나와 똑같은 공기를 마시며 똑같이 살아 있었을 거라고, 그리고 설령 마주쳤다 해도 안개 속에서 마주쳐 순식간에 사라지는 배들처럼 서로를 금방 잊어버렸을 거라고 생각하자 구역질이 났다. "아리아 공주님... 대체, 대체 저 말고 얼마나 더 많은 자가 버림받아 여기까지 왔습니까?"
"셀 수 없다."
몸이 떨렸다. 자리에 주저앉아 내가 딛고 섰던 바닥만 무기력하게 내려다보았다. 떨리는 몸을 도저히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알았더라면... 내가 조금이라도 알았더라면... 그 사람들도, 구하려고, 구해 보려고 했을 텐데..." 눈을 감으며 울음을 억눌렀다. "너무 많아요, 앨러배스터. 너무, 너무 많아요..."
"그 자들의 구함은 네가 거론할 문제가 아니다." 아리아가 말했다. "너 스스로의 구원 또함 네가 거론할 문제가 아니다. 버림받은 자들은 끝내 여기로 오게 되기 마련이고, 너희는 그저 다른 이들보다 먼저 여기에 다다른 것뿐이다. 네가 자의식을 유지한 채 이 땅에 발을 디딘 것도 실은 중요한 변수는 되지 못한다. 늦든 빠르든 너도 성가대의 일원이 될 터이니."
몇 방울 눈물을 더 쥐어짜내 흘리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떨리는 다리로 일어서서, 얼굴을 찌푸리며 맞섰다. "죽어도 그렇게는 안 할 겁니다..."
아리아의 답변은 기계적이고 차가웠다. "그 문제에 대해서라면 나는 너만큼이나 무력하다."
"아뇨. 공주님은 오직 한 개의 노래일 뿐입니다." 이를 뿌득 갈며 말하고, 염동력으로 나이트브링어를 들어올리며 외쳤다. "하지만, 저는 아닙니다!"
아리아는 심드렁하게 나이트브링어를 흘끗 보더니, 무감정한 눈으로 나를 보고 말했다. "그대도, 나도,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몇 가지 노래는 찾아낸 게 맞습니다!" 나는 계속 소리쳤다. 이제 아리아의 눈에서 번쩍이는 보라색 빛이 더 무섭지 않았다.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대부분은 제가 직접 지은 것들이지요! 가장 아름답고 호소력 짙은 노래는 다름아닌 각자의 삶의 멜로디로 자아낸 것이었습니다! 몇몇은 이미 느꼈을 테지요! 그 사람들이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저는 위대한 어머니와 다른 것을 노래에 채웠습니다! 희망을 말입니다! 희망을 증류해 세상 사람들에게 기쁨과 삶의 의미를 되찾아 주었습니다! 야상곡이 사람의 마음에 침투해 그 안을 파먹어 공허하게 만들면 저는 희망으로 그 결핍을 메웠다는 말입니다! 변화를 추구한다! 공주님의 말은 젠장맞을 정도로 지극히 옳습니다! 진실을 수탐하는 길은 단순 반복으로는 가지 못하니까요!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이해하시려면 머리 꽤나 싸매셔야 할 겁니다. 배운다는 개념을 먼저 깨달으셔야 할 테니까 말입니다! 위대한 어머니께서 이를 조금도 이해하실 수 없었던 점은 유감입니다. 그토록 헌신적이고 우직하신 창조주께서 이처럼 냉혹한 자리에 당신의 딸을 내버려야 했다니 참으로 유감입니다! 하지만 이 자리는 제가 누울 곳이 아니지 않습니까! 공주께서 여기를 벗어나실 생각이 추호도 없다면 그건 제 알 바 아니지요! 그러니 나가겠다는 사람 발목은 잡지 마십시오!"
"버려진 자여. 그대가 추구하는 길을 걷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조금도 모르고 있구나."
"합주하십시오!" 크게 소리치며 나이트브링어를 더 높이 들었다. 주변의 룬 문자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나이트브링어에 빨려 들어갔다. 찬란한 빛이 따뜻한 만화경처럼 반짝이며 아리아의 옥좌 주변을 감쌌다. 어둠의 심연에서 떠오르는 태양이 생각났다. "이 신물이 무엇인지는 공주님 당신께서도 잘 아실 터이니, 그 권위에 복종하셔야 할 것입니다! 위대한 어머니와 자매의 노래에 응답하십시오!"
아리아는 가만히 나를 보고만 있었다.
속을 끓이면서도 염동력으로 나이트브링어의 검은 현을 퉁겨 고적의 이중주, 그 첫 번째 음을 일으켰다. 나는 다시 말했다. "합주하십시오. 같이 노래해 주십시오. 그러고 나서 무가 되든지 말든지 고르셔도 무방하지 않습니까. 저는 야상곡의 끝에서 저를 기다리는 새벽을 꼭 봐야겠습니다."
아리아는 조각상처럼 서서 나를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몸에 붙은 날갯죽지가 공포의 문양처럼 그 몸을 감싸고 있었다.
이쪽도 떨리는 몸을 최대한 통제하면서 아리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구걸할 입장은 아니니까.
황혼의 여신이 움직였다. 뿔이 밝게 빛나자 옥좌실을 둘러싼 벽면 전체에서 빛이 쏟아졌다. 룬 문자가 새겨진 조각들이 떨어져 나와 아리아 눈앞에서 하나로 응집되었다. 아리아의 염동력 위로 금속 플루트가 나타났다. 공주는 나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나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심장이 펄떡거렸다. 마력선을 타고 전해진 심장 박동이 나이트브링어의 현까지 흘러가, 성물은 스스로 숨쉬는 듯 내 숨과 공명했다. 연주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연주가 같이 솟았다. 이름 없는 자의 이름으로 살아온 아리아 공주가, 자신의 플루트로 자기를 감춰 온 바로 그 노래를 무엇보다도 아름답게 옮겨놓고 있었다. 죽음 너머의 공간으로 사산된 아이를 안치하며 잘 자라고 노래하는 듯한 태고의 자장가처럼 편안하면서, 신성하고도 섬뜩한 곡조가 솟았다.
태초의 한기와 어둠 속에서 이 곡을 끌어내느라 분투하던 앨러배스터와 루나 공주를 생각했다. 옥타비아, 멜로디아, J.R.바드, 바이닐 스크래치를 생각했다. 시간마저 그 존재를 잊어버린 공주와 함께한 협주가 이토록 아름다울지, 그리고 이 연주가 초래할 결과가 무엇일지는 그 넷도 감히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옥좌를 품은 구체 바깥에서 흘러 들어온 빛은 따뜻한 황색과 금빛이 섞여 있었는데, 나이트브링어가 내뿜는 광명과 더불어 아리아의 플루트가 뿌리는 은색 빛이 뒤엉키는 한가운데에 닿은 모습이 더할나위없이 잘 어울렸다.
이름 없는 자들의 영역 너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땅이 생겨난 이래 한시도 멈추지 않았던 쇠사슬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마침내 사그라들고, 이름 없는 자들의 신음이 환희에 찬 기쁨의 소리로 바뀌었다. 이름 없는 자들의 땅은 생겨난 이래 최초의 광명을 누리고 있었고, 나는 그 스포트라이트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잊힌 자들과 잊힌 것들에게, 생이란 무엇인지, 그 광명이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 주고 있었다. 내가 개입해 바꿔 놓은 사람들의 삶을 생각했다. 나는 그들의 삶이 좀 더 조화로워지기를, 삶의 기쁨과 흥겨움을 널리 알릴 수 있기만을 바랐다. 이름 없는 자들의 땅까지 밀려온 버려진 자들 모두에게 닿을 수는 없더라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살 수 있음을 나는 알았다. 내게는 쟁취할 미래가 있고, 존재할 수 있는 두 번째 기회가 있었다. 상실의 한가운데서 아직 남은 것을 찾아내고, 실패의 현장에서 숙고하고, 나 또한 연약한 존재지만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와 있었다.
아리아와 같이 연주하는 일은 분명 아주 두려운 일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측량할 수 없는 권능과 신격으로서의 존재감이 나를 압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중주가 끝을 향해 가면 갈수록 아리아가 내 연주에 맞추기 위해 애를 쓰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그 아리아조차도 내 표정을 바꿔놓을 수 없었다.
그 때 나는 한 가지 진실을 깨달았다. 내 평생을 바쳐 찾아다니던 진실과의 대면이었다.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 의지는 창조의 성가가 존재하기도 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아마 이것이야말로 모든 열망의 원형, 사람이 의식적으로 추구하는 행위의 원천이었을 것이다. 운명의 장난인지, 위대한 어머니는 배울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에서 눈을 돌렸기 때문에 이를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세상에 이를 전파하는 것이야말로 내 목적이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세상이 이를 기억해 주기만 한다면, 나 혼자만이 존재하는 고독의 지옥에서 보낸 몇 달 정도는 충분히 감내할 만한 것이었다.
그 순간에 얼마나 몰입했는지, 곡이 끝나고 나서도 나는 계속해서 연주를 이어나갔다. 눈을 뜨고 눈꺼풀을 몇 번 움직여 눈물을 털어낸 뒤 아리아 쪽을 쳐다보았다.
플루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아리아가 한쪽으로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 뒤로, 보면대 모양의 무언가 위에 빛나는 보라색 오선이 펼쳐져 있었다. 그 위에는 돌돌 말린 두루마리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아주 오래된 악보 같은 것을 묶어둔 것이었다.
"이건..." 알 수 없는 곡이 적힌 악보를 다만 올려다보는 것만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건 대체......?"
"야상곡의 끝이, 마지막 비곡이 그대를 기다린다." 아리아가 말했다. "세상이 버린 자여, 그대는 나이트브링어를 갖고 있다. 그대는 열 번째 비곡을 접할 자격이 있다."
마른침이 넘어갔다. 감각 없는 발굽을 힘차게 움직여 악보대로 향했다. 눈이 쓱쓱 움직이며 악보를 훑자 눈에 비친 음표가 그대로 머릿속에 흘러 들어왔다. 악보 마지막 장, 마지막 음표를 보았을 때는 전율까지 느껴졌다. "새벽의 강림"은 긴 곡이었고, 대곡이었다. 우울감과 환희가 동시에 느껴졌다. 실제로 연주했을 때 그 출렁거림이 어느 정도일지 상상하는 것만으로 내 부박한 정신이 같이 치솟았다 거꾸러졌다.
"가거라. 가서 새벽을 맞이하라." 등 뒤에 선 공주가 거의 속삭이는 듯 나직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만, 새벽은 그대의 마중을 보지 못하리라."
침을 삼켜 목에 응어리진 무언가를 밀어내며 두 발굽을 뻗어 악보대 양쪽 가장자리를 잡았다. 눈물이 앞을 가려서, 악보에 새겨진 음표 하나하나가 전부 흐릿해지고 뭉개져 보였다. "그러면 어떻게 되나이까?" 나는 떨며 물었다. "새벽의 강림을 연주한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습니까?"
"산 자들의 세상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아리아가 말했다. "그리하여 영원히 야상곡의 주박에서 벗어나, 내 권능이 닿지 못하는 곳에서 살게 되리라."
"그런가요..." 나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뒤돌아 아리아를 마주보았다. "그 외에도 제가 산 자들의 세상으로 돌아가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시기는 하시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바라건대, 말씀해, 주십시오......"
아리아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 누구도 나와, 이름 없는 자들의 땅을 통하여 어머니의 영역으로 넘어가 그 지식을 취할 수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위대한 어머니의 전지전능한 권능과 권세는 산 자들의 땅을 구성하는 근간인데도 말이다. 그것은, 그런 자들의 존재를 지우고 잊히게 만든 힘이 내게 속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천지창조 이후 열 곡의 야상곡을 전부 연주해낸 자는 그대가 처음이다. 그러하므로, 지금 그대가 '새벽의 강림'을 연주한다면 어머니께서 세상을 여시며 안배한 그 어떤 존재들과도 다른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말씀은..." 나는 눈을 돌려 어둠을 쫓으며 말을 멈췄다. 순간의 전율과 함께 시선이 아리아의 빛나는 눈과 마주쳤다. "그렇다면 제 기억이 전부—?"
"존재하지 않는 자의 운명을 탈피하려면, 이 심연으로 추락하면서 그대가 겪은 모든 것들을 잃어야 하느니. 어머니께서 창조하신 우주에는 단 두 종류의 필멸자만 허용된다. 지식을 얻은 자 세상에서 잊혀야 하고, 지식이 없는 자는 잊어야 하는 것이 섭리다. 내가 태어남과 동시에 생겨난 이분법 원리의 결과다. 이 세상은 알면서도 잊히지 않는 존재를 용납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대가 얻은 금단의 지식이 세상에서 위대한 어머니를 지워 버릴지도 모르겠군. 그렇게 된다면 모든 실존이 그 뒤를 따르리라."
나는 뒤돌아 다시 악보를 쳐다보며 말했다. "저는... 세상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대가 태어난 세상으로 돌아가기를 선택한다면, 그때부터는 필연이다. 그대가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게 된다." 아리아가 말했다. "어머니께서 남기신 노래를 온전히 네 것으로 만든다면 지금 갖고 있는 선택권은 잃게 되겠지. 다만 그대는 존재하는 자가 될 것이다. 세상이 다시 그대를 기억할 것이다." 아리아가 천천히 다가와 나를 더욱 차분히 응시하며 말했다. "이제 그대도 깨달았을 것이다. 자유에는 대가가 따른다. 마음의 평화에도 대가가 따르지."
고개가 푹 떨어져 알현실의 차갑고 금속 같은 바닥에 시선이 박혔다. "평생 존재하지 않는 자로 살면서 지금까지 얻은 모든 지식을 온존할 것인가......" 마른침을 삼켰다. "아니면, 모든 것을 잊고 세상의 따뜻함과 우정 속에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로군요......"
"그대 회중에 노래가 있고..." 아리아가 나이트브링어를 가리켰다. "...'새벽의 강림' 또한 그대의 것이다. 이제 그대를 막느냐 아니냐는 내 권리의 범주를 벗어난 문제다. 그러니 그대 대신 내가 선택해 줄 권리 또한 없지. 선택하거라. 그대 주변의 모든 것들을 바꿀 것인지, 바꾸지 않을 것인지. 그대는 그럴 힘이 있다. 셀레스티아와 루나 또한 누리지 못했고, 앞으로도 얻지 못할 힘이 그대에게 있다."
아리아 쪽으로 시선이 급히 움직였다. 그것은 일종의 연민이었다.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멍하게 말했다. "제가 저로 존재할 수 있게 할 권능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한기가 몸을 타고 흘렀다. 눈을 꼭 감고 트와일라잇과 문댄서, 모닝 듀, 스닙스, 네뷸러스를 비롯한 수십 명의 사람들을 다시 생각했다. "제가 앞으로 더 나아간다면, 제가 위대한 어머니와 저 자신에 대해 배운 모든 것들을 대가로 풀려나고 나면, 지금의 제 모습으로 성장할 수는 있는 것입니까? 제 어리석었던 과거의 모습을 벗을 수 있습니까? 아니면, 속 좁고 무관심하며 아무것도 모르는 유니콘으로 돌아가는 것입니까."
아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숨지으며 발굽으로 갈기를 쓸어넘겼다. "분명... 분명 다른 방책이 있을 것입니다." 침을 삼켰다. "있어야 합니다!" 아리아를 보고 말했다. "이름 없는 자들의 땅이 존재한다는 건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공주님에 대해서도요! 위대한 어머니에 대해서도!"
"그런 것으로 간단히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적어도 공주님과 이 땅, 공주께서 사랑한 이를 비롯한 기억만 제거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그대의 말은 옳다. 내 권능으로 그대가 가져가기를 원하는 기억만 지우는 것은 분명 가능한 일이다." 그녀가 말했다. 아리아의 발굽이 악보를 가리켰다. "그렇더라도 그대가 '새벽의 강림'을 연주한다면 내 권능으로 그대를 어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대는 그렇게 다시 산 자들의 세상으로 풀려나겠지. 세상은 그 어떤 사람에게도 그대와 같은 힘과 지식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짐은 말했다. 어쩌면 짐조차 그대를 잊어버리게 될 수도 있다." 아리아가 보라색 눈을 가늘게 떴다. "위대한 어머니의 권능은 삼라만상을 아우른다. 이름 없는 자들의 땅을 빚어내신 어머니의 신법神法에 예외는 없느니. 예외가 있었다면 이 땅에 저토록 많은 자들이 묶여 짐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겠느냐?"
"그러면..." 보면대 쪽을 흘끗 보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 이전에도 여기까지 도달한 자들이 더 있었고, 공주께서 그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입술을 씹다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승리의 정점에서 그때까지 거둔 모든 승리와 영광이 전부 잊히게 된다면, 그게 대체 어떻게 된 세상입니까?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찾고자 하는 절박한 탐구의 길에서 그때까지 쌓아올린 모든 것들을 상실하고야 만 이들이 이 세상에 대체 얼마나 더 있었단 말입니까?"
"그것은 내가 알아야 할 영역이 아니다." 아리아가 말했다. "내게 주어진 권능은, 무엇을 잃을 것인지 선택할 수 있게 하는 것뿐이다."
아리아를 쳐다보다 보니, 입가의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상실을 선택하진 않을 겁니다."
아리아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그러하다면 그대가 무엇을 골라야 할지는 이미 알고 있겠구나."
시선이 한동안 악보에 가 머물렀다. 몸이 하도 떨려서 악보 위에 새겨진 음표가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몇 마디 음만 더 연주하면 자유와 온기, 엄마와 아빠, 트와일라잇이 나를 부르는 소리, 문댄서의 포옹, 돌아갈 집과 마땅히 내 것이었던 침대가 존재하는 세계로 회귀할 수 있었다.
"이제 와서 그만두기는 너무 늦었습니다." 나는 말했다. 이름 없는 자들의 땅, 내가 서 있는 그 자리에 드리워 있었거나 아니었던 셀 수 없는 그림자들은 내가 연주한 것과 똑같이 이중주를 연주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을 터인데, 그것들은 내가 하려는 선택을 할 수도 있었을 터이고 안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그 그림자들이 내 입을 빌어 말하기라도 한 듯, 나는 그 말에서 섬뜩한 한기를 느꼈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물러나지는 않겠습니다." 한 줄기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혹시 모르는 일이지요. 지금의 저를 만든 경험이 다시 없으리라는 법이 없고, 그리하여 저를 구성하는 모든 사건들이 다시는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으니, 옛 모습으로 돌아가더라도 건전하고 이타적인 사람으로 성장할 일은 없을 거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아리아는 아무 말도 없었다.
울음이 번져 나왔다. 심호흡하며 나이트브링어를 단단히 잡았다. "생각도 정리도 차고 넘치게 했습니다. 대화도, 불필요한 주절거림도 이쯤이면 족하지요. 이는 저 자신과, 앨러배스터와,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다시 한 번 저들의 사랑을 받을 수도 있겠지요." 아주 잠깐이지만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악보에 적힌 첫 마디를 연주하기 위한 자리로 발굽을 가져갔다. "새벽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알리콘은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는데, 그 침묵은 끔찍할 정도로 나를 두렵게 했다. 나는 끝내 몸을 돌려 아리아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슬쩍 보니, 아리아는 석상처럼 가만히, 조금의 미동도 없이 서서 나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이제까지 아리아를 피해다니고, 대들기까지 한 나를 이제 와서 발굽 놓고 보고만 있다니? 말이 대든 것이지 아리아 본인의 본질을, 본연의 임무를 면전에서 대놓고 모욕하기 직전까지 간 나에게 어째서?
새벽의 강림을 적어둔 악보를 흘끗 보았다. 마지막 한 마디가 눈에 들어왔다. 악보 맨 마지막 부분에 단 한 마디만, 인후에 꽂힌 칼처럼 외로이 쓰여 있었다. 발굽을 쓱 비벼 문지르며 몸을 돌려 아리아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왜 아무 말씀도 없는 것입니까?"
"마지막 비곡은 네 것이다." 아리아가 무감정하게 말했다. "연주하거라."
"필시 무언가를 숨기고 있으신 것이겠지요!" 목소리를 높여 고함치듯 물었다. "무엇을 숨기고 계십니까!"
"내 영역에서는 그 어떤 것이라도 드러나지 않을 권리가 있다." 아리아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너도 여기 더 있고 싶지 않을 텐데. 그러니, 가거라."
"제가 쌓아올린 모든 것들이 전부 없던 것이 되어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아리아의 앞에 서서 얼굴을 들이밀며 소리쳤다. "그 또한 위대한 어머니의 권능이라고, 그 권능에 제 모든 기억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분해되어 사라질 것이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리 되기를 선택했다면야, 그 선택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마땅히 네 몫이—"
"그럼 자유란 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진땀에 젖은 이마가 찌푸려졌다. 내 입으로 나오는 말이 얼마나 심각하고 무서운 것인지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마음의 평화란 또 무엇입니까?! 그 대가가 대체 무엇이길래요?! 디스코드는 아는 것 같더군요! 공주님은 아십니까?"
"버려진 자여—"
"저로 인해 바뀐 사람들의 인생은 어떻게 되냐는 말입니다!" 나는 절규했다. "제가 포니빌에서 해 왔던 것들은 전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아리아는 일관되게 무감정한 시선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것은 차라리 추모 연설을 읽는 것 같았다. "내 어머니의 권능은 단순히 너희의 기억에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께서는 만물의 창조자시고, 모든 실존을 규율하는 최초의 성가를 배분하신 분이시다. 시간도, 공간도 어머니의 의지를 따른다는 말이다." 아리아가 말을 이었다. 보라색 눈이 더욱 밝게 빛났다. "네가 야상곡 연주를 마치고 산 자들의 세상으로 돌아간다고 하자. 그때부터는 네가 처음부터 저주를 짊어진 적 없었던 것으로 현실이 변조된다. 그대는 산 자들의 세상에 나에 대한 기억과 정보를 갖고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야상곡 자체를 몰라야만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 자체가 바뀌어야 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야상곡 자체를 모른다는 것은...?" 나는 거의 숨도 쉬지 못한 채 들이밀었던 얼굴을 다시 떼었다. 저주를 받은 첫 번째 밤, 포니빌에서 지새워야 했던 외로운 밤의 한기가 다시 엄습했다. "나이트메어 문을 만난 적도 없게, 오두막을 지은 적도 없게, 트와일라잇과 마법 공부를 한 적도 없게... 된다는 것이군요."
아리아는 아무 말 없이 나 혼자 기억을 끄집어내 주절대는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떤 결과가 초래되고 말 것인지, 더 많은 것을 이해할수록 숨이 가빠졌다. "머릿속에서 들리는... 비곡을 들을 일도 없을 것이고, 야상곡 연주 실험을 한 적도 없게 될 것이고, 음석을 사게 되는 일도 없게 되겠죠." 침을 삼키며 어둠 속으로 시선을 돌렸다. "래리티와 이야기를 할 일도 없을 것이고, 더피 씨 딸내미에게 플루트를 사 줄 수도 없게 될 것이며, 윈드휘슬러를 잡아야 한다고 캐러멜에게 말한 것도 없던 일이 될 것이고." 두 귀가 축 늘어졌고, 이가 절로 딱딱 부딪쳤다. "숲 한가운데서 죽게 될 스쿠틀루를 구해 줄 수도 없게 되겠군요." 입술을 씹다가 쌕쌕거리며 말했다. "모닝 듀도... 럼블도... 스닙스도, 윈드송도... 시장님도, 스칼렛 브리즈도......"
그 순간, 총격과도 같은 외마디 비명이 입 밖으로 터져나왔다. 나는 두 발굽으로 입을 가린 채 뒤로 나동그라졌다. 두 눈을 접시처럼 휘둥그레 뜬 채였다.
"그러면...!" 숨이 찼고 몸이 떨렸다. 나는 반쯤 울부짖으며 말했다. "디, 디스코드는!" 온몸이 떨려왔다. "세상에 맙소사..."
내 몸을 끌어안다시피 하며 이를 악물었다. 속이 끓는 소리가 밖으로 터졌다. 눈물이 줄줄 흘렀다. 몸을 돌려 아리아 공주를 보려고 하자, 흐르는 눈물 너머로 공주의 형상이 보라색 그림자가 되어 드리워졌다.
"제가... 제가, 처음부터 저주받지 않은 것으로 역사가 바뀐다면, 디, 디스코드 건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아리아가 고개를 숙이고, 아주 느리게 말했다. "추방에서 비롯된 분노가 하늘을 찌르는 가운데, 세상의 그 누구도 자기가 추방되어야만 했던 이유를 알고 있지 않으므로, 내 다소니는 추방에 의한 슬픔보다도 깊은 격노에 젖을 것이다. 산 자들의 땅을 구성하는 노래가 자기를 압도하도록 놔두지도 않을 터. 발을 디디는 곳마다 파괴와 비탄만이 남을 터이니, 내 자매들도 그를 막지 못하리라. 그렇게 산 자들의 땅은 디스코드의 것이 되겠지만, 영원하지는 않을 터이다. 물론 그 세월은 몇 번의 겁파가 반복되어야 할 테지. 시간이 그를 쇠약하게 하겠지만, 그 전에 몇 개의 세계가 디스코드의 손에 떨어질 것이다. 디스코드의 격퇴는 다른 무엇도 아닌 기나긴 세월에 의한 권태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리아의 말을 듣는 동안 나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온 몸이 얼어붙어 굳는 듯한 느낌이었다. 있지도 않은 후드 재킷의 소매로 발굽이 절로 움직였다. 결국 내가 한 짓은 내 솜털과 갈기를 긁는 정도밖에 되지 못했다.
"대체..." 숨이 가빠 왔다. "대체... 산 자들의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 다 아시면서도, 저와 함께한 좋은 사람들의 삶이 전부 끝장나게 될 거라는 걸 아시면서도, 왜 저를 가만히 내버려 두신 겁니까? 공주님의 다소니가 끝없는 파괴와 혼돈의 격풍을 불러올 것을 다 아시면서도 납득하실 수 있는 건 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내가 세상의 존속을 위해서 짊어진 임무는, 여기 있는 것... 여기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리아가 말했다. "내 다소니의 분노가 측량할 수 없이 강할 것이라는 것은 나도 안다. 하지만 내 존재가 위대한 어머니께 알려졌을 때 일어날 말 그대로의 절멸에 비하면 한없이 사소한 것이다." 아리아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자기도 감정의 티끌이나마 남아 있다고 호소하려던 것 같았지만, 너무 늦었다. "궁창 저편에 살아가는 필멸자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마는가는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그들의 몸이 살아 있든지 죽게 되든지, 궁창이 그들을 품는 그릇으로서 기능하기만 한다면 충분하다."
아리아의 옥좌가 놓인 공간이 흔들리며 무너지는 감각에 몸을 떨며 몸을 웅크렸다. "못 합니다... 그렇게는 할 수..."
"버림받은 자여, 그대가 처음 여기 당도했을 때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아리아가 조용히 말했다. "새벽을 저버리고 내 성가대의 일원이 되거라. 그리하여 끝없는 지복과 평화를 누리거라." 아리아가 힘주어 말했다. "내 노래를 부르거라. 그리하여 무가 되거라. 그것이 순리다."
이쯤되니 도저히 더 견딜 수가 없었다. 몸이 하도 떨려서 나이트브링어를 더 잡고 있을 수도 없었다. 어차피 잡고 있지도 못할 것이어서 그냥 놓아버렸다. 숨을 들이마시며 두 앞다리를 내팽개치듯 내던졌다. 나이트브링어가 바닥에 부딪쳤다. 불가침의 악기에서 갖가지 불협화음이 솟았지만, 그것으로 나이트브링어가 망가질 것은 아니었다. 이름 없는 자들의 땅, 가장 높은 하늘을 향하여 고개를 치켜들고 내 허파가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 비명을 내질렀다. 살아 생전에 소리 한 번 질러 본 적 없는 사람처럼 찢어지게 소리를 질렀다. 허공에 대고 사지를 비틀어대다 쓰러져서 강철 바닥을 마구 내리쳤다. 나는 울음과 창자가 찢어지는 과호흡 사이에서 무너졌다. 그냥 무너졌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내가 그러는 와중에도 아리아는 미동조차 없이 서 있었다. 내가 비명을 내지르든지 말든지, 아리아는 날개뼈 하나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부활한 여신이 아닌 심연 속으로 계속 소리를 내지르고 있었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부서진 정신이 미궁처럼 흩어졌고, 거기서 생겨난 미궁의 갈림길마다 짙고, 더욱 짙은 어둠이 드리웠다. 희망 없는 세상의 때는 눈물로도 지울 수 없었다. 몇 분 정도가 지난 뒤에도 나는 태아처럼 웅크린 채 누워 처량하게 흐느끼고 있었다. 다시 눈을 열어 뜨자 다 떨어진 깃털을 모아 만든 고대의 요람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에서, 스스로의 의지와 마음가짐만이 지표가 되는 무의 구덩이 한가운데서 처음 눈을 떴을 때 느낌이 대충 이러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리아는 항상 혼자였지만, 혼자는 아니었다. 누구나 어둠의 요람에서 태어나고, 때가 되면 돌아가기 마련이니까. 우주의 법칙이 우리의 의지를 억압하고 나면 남는 것은 의무뿐... 머릿속에 떠오르는 불리워야 하는 노래만이 남는다.
"어느 쪽이든 그대의 선택이 불러올 결과는 결코 돌이킬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은 여전히 그대의 몫이다." 아리아가 말했다. 공주가 마지막으로 입을 연 지 거의 몇 시간은 지난 것 같았다. 아리아가 옥좌실 주변을 돌았다. 뼈마디가 앙상한 사지가 움직였다. "그대는 세상에게 버림받은 자이므로, 나는 그대에게 안식을 줄 수 있다. 그대가 '새벽의 강림'을 연주한다면 그대는 자유의 몸이 될 것이지만 자유에는 대가가 따를 것이다. 그 대가가 그대에게는 감당할 수 없이 큰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주의 실존이 경각에 달한 지금, 그대의 선택에 따라 풀려난 내 다소니가 세상을 어떻게 하든지, 그대의 선택에 관하여 내가 함부로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
"선택할... 선택할 수 없습니다." 나는 울며 말했다. "생각할 수조차 없습니다..." 고개를 들어 아리아를 올려다보았다. 갈기는 봉두난발이 되었고, 얼굴은 엉망인 채로. "부디... 시, 시간을 주십시오. 저는 필멸자일 뿐이며, 필멸자들은 시간이 필요하기 마련입니다..." 발굽으로 얼굴을 가렸다. "으흑... 공주님... 공주님, 제발..."
"나는 본디 기억을 포식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내가 내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아리아가 조용히 말했다. "마침 시간이 그 적디적은 것 중 하나이기는 하다만, 너에게 큰 소용이 있을 것 같지는 않구나. 노래가 네 정신과 영혼을 벌써 상당히 잠식했다. 이제 산 자들의 세상으로 돌아가 봤자 낯선 곳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대도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내 존재를 떠올리기 위해 어스름 진혼곡을 들어야 했던 게 루나 하나만은 아니었단다."
가빠진 숨이 조금 진정됐다. 나이트브링어를 목발처럼 껴안고 얼굴을 문질러 닦았다. 더듬거리는 소리로 물었다. "제가... 궁창 저편의 세상에서 얼마나 더 살아 있을 수 있습니까?"
"그대가 살아 있을 수 있는 나날의 수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아리아가 말했다. "좀 더 엄밀하게 표현하자면, 그대가 기억할 수 있는 나날의 수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표현하든지, 삶이란 기억의 총체란다. 선택의 시점인 지금 현재 그대에게 남은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그대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 다녀온다면 그나마도 온전치 못하겠지." 아리아가 보면대 쪽으로 몸을 돌렸다. 보라색 빛이 새벽의 강림이 적힌 두루마리를 감쌌다. "버림받은 자여, 그대는 내 어머니의 노래, 그 파편을 이 땅으로 가져왔다. 그대는 나와 고적의 이중주를 연주했다. 마지막 비곡이 그대를, 오직 그대만을 기다리고 있다." 아리아가 무감정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말했다. "다시 돌아오려거든 첫 번째에서부터 일곱 번째까지 연속으로 연주하면 된다. 돌아올 때까지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을 만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전제 하의 이야기지만, 돌아와서 선택하거라. 그대의 선택이 무엇이든 존중하겠다."
고개를 끄덕이며 나이트브링어를 껴안은 채 엎어져 절했다. 울음이 밀려나왔다. "이것이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공주님..."
아리아가 얼굴을 가까이 하고 나를 마주보며 말했다. "도움이 될 것이다." 아리아의 두 눈이 보라색 섬광을 일으켰고...
나는 돌아와 있었다.
오두막 바깥의 풀밭 위로 기다리던 첫눈이 내렸다. 창 밖만 바라보며 몇 시간을, 며칠을, 몇 주를 보냈는지 모르겠다. 포니빌에도 찾아온 겨울이 세상을 잿빛으로 물들이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으니. 그렇게 흘러간 시간들은 실체가 없었고, 실체 없는 시간들은 기억될 필요가 없었다.
하루 일과도 어렴풋하게만 기억난다. 내 일과는 앨의 밥을 주는 일에 집중되어 있었다. 하루 두 번씩 밥을 주고 나면 남는 시간은 집 안의 어둠 속에 혼자 앉아 있는 것이다. 내 밥을 차려 먹었는지 어쨌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집에 처박혀 침대에 드러누워 내가 직접 지은 오두막의 서까래를 바라보며 내가 언제부터 그 짓을 시작했는지 까먹을 때까지 1초씩 셌음을 명확히 기억한다. 앨이 내 옆에 누워 몸을 웅크리는 빈도가 갈수록 높아져서, 시간을 정확히 측정하려면 그 수밖에 없었다. 나는 때때로 앨의 몸을 토닥였다. 솜털과 간질간질한 수염이 발굽에 닿았다. 그럴 때마다 앨이 자기 얼굴을 비벼왔지만, 나는 반응하지 않았다. 벽난로의 불은 피워두지 않았다. 오두막 안에서 그나마 따뜻한 것이라고는 앨의 털이나, 뿌연 창문 밖에서 들어오는 얼마 안 되는 햇빛 정도였다.
그러다가 눈이 오기 시작한 것이다. 녹색으로 덮여 있던 창 밖 정경이 천천히, 깨끗한 석판처럼 희게 물들어 갔다. 눈을 한 번 깜박이자 1년 전이었다. 그 때 나는 어둠 소나타를 연구하는 데 난항을 겪고 있었다. 오두막이 채 완공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나는 천막을 치고 그 안에 기어들어가 뿔을 밝혀 나오는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 무릎 위에 펼쳐놓은 두루마리 위에 도저히 알아먹을 수가 없는 음표를 그려 넣어야 했다. 다시 눈을 깜박이자 캔틀롯이었다. 문댄서를 비롯한 내 또래 여자아이 몇 명과 어울려 기말고사가 끝났음을 축하하며 웃고 떠들었다. 다시 깜박. 엄마와 아빠가 보는 한가운데 난방절 선물을 열어 보고 있다. 난방절 트리에 매단 밝은 조명 아래로 실로폰이 반짝거렸다. 아프거나 슬퍼서가 아니라, 기뻐서 눈물이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때 알았다.
예나 지금이나 겨울은 다 똑같음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계절의 순환은 직무에 심취한 페가수스들이 움직이기 때문이 아니라, 시간이란 본디 칙칙하고 덧없는 것이므로 이를 장식할 어떤 패턴이 필요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런 것이라도 없었다면 전부 다 허깨비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실존 없는 허깨비만 있다면 저주를 받았든 받지 않았든, 우리는 그 어떤 것도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게 있어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찾아 기억을 뒤졌다. 엄마와 아빠, 모닝 듀, 문댄서, 트와일라잇을 생각했다. 내게 있어 이들의 존재의의가 그 결정을 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는지 생각했다. 그 사람들이 누구고, 내게 어떤 존재인지 기억 속에서 서서히 사라지고 희미해진다면 그만한 비극도 또 없을 것이다. 며칠 내내 진혼곡에는 발굽도 대지 않았다. 칠흑같은 바위 사이의 틈새로 불어오는 날카로운 바람처럼 내 귀에 속삭여대는 야상곡이 들릴 때까지, 내 정신이 황량함 그 끝에 있는 새까만 나락으로 침잠하도록 그저 내버려두었다.
기억이 없어 고통받는 것은, 그 기억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표면의식 위로 아리아 공주의 선물이 생각보다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리아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연 상태로 회귀하는 것의 일종으로 보아도 될 법했다. 우주의 마지막 열에너지가 사라지고 나서 그 누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저 방대한 역사 속 모든 성공과 실패의 기록을 자기 머릿속에 담고 있으면서도 미치지 않을 자 그 누구인가. 노래는 지식을 추구하고자 스스로의 몸을 쪼개 여러 갈래로 나뉘었지만, 그랬기 때문에 엔트로피의 굴레에 갇혀 그 지식은 영영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여럿으로 나뉘었다는 것은, 하나였던 것이 스스로 자초한 지적 망각의 파국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였던 것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진실은 아니었을까.
위대한 어머니를 증오할 수는 없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미워할 수 없었다. 아리아처럼, 세상 모든 것은 결국 하나로 합쳐지기 마련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은 모두 산산이 흩어져 사라졌다. 결국 유감스러워해야 할 것도, 축하해야 할 것과 후회해야 할 것 모두가 본디 없는 것이었다. 인생이란 언덕을 타고 내려오는 활강 경기나 다름없었다. 살아 있는 것들과 죽은 것 모두를 감싸안는 흰 눈을 보다 보니, 그 거대한 하강에서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서서히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내려야 할 결정을 오롯이 나 개인의 생각에만 의지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앨의 밥그릇이 넘치기 직전까지 사료를 쏟아주었다. 일종의 예방조치였다. 내가 이제 문 밖을 나서면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기약 없는 길을 향하여 후드 재킷과 리라를 단숨에 움켜쥐고 문 밖을 나서 빛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승차하세요! 캔틀롯행 급행열차가 곧 출발합니다!" 포니빌 기차역 승강장. 역무원이 승강장을 따라 걸으며 소리쳤다.
갖가지 색으로 칠한 열차가 길게 늘어서 있었고, 그 앞에 우뚝 선 기관차는 눈발로 스치고 지나가는 겨울의 입맞춤 속에 반짝거렸다. 뜨겁게 달아오른 굴뚝 위로 증기가 뿜어져 나왔고, 사람들은 저마다 짐을 끌고 열차에 올라탔다. 그 사람들 중에는 열차 한가운데 칸을 향해 급히 달려가는 한 무리 친구들도 있었다.
"으어어 젠장!" 애플잭이 겨우 말했다. "날씨 봐라. 울 할매 검버섯이 얼어서 떨어지게 생깃다!"
"좀 보편적인 표현을 쓰면 어디가 덧나냐, 하여튼!" 레인보우 대쉬가 딱딱거리며 애플잭을 열차에 밀어넣었다. "알았으니까 냉큼 타라구! 너 밖에 세워 놓느라 내 깃털 다 얼고 나면 허리케인 단장님 연주에 맞춰서 곡예비행을 못 하게 되거든!"
"우우우! 아이스 허리케인 아이스크림!*2" 핑키 파이가 레인보우 대쉬의 뒤를 따라 폴짝폴짝 뛰며 승차했다. "기억나써! 캔틀롯 왕성 가다가 중간에 페가수스 거주구역 들르는 거징? 거기 난방절 케이크가 징짜 최고거든!"
"하아. 절대 아니거든." 재킷과 숄로 완전무장한 래리티가 말했다. 옷이 불거져 나올 지경인 옷가방 세 개가 염동력을 타고 그 뒤를 따랐다. "안 그래도 추워 죽겠는데 캔틀롯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굳이 더 추운 날씨를 즐길 필요는 없잖아! 빨리 왕성 가서 우리 역할이나 하자!"
"래리티, 잠깐만." 플러터샤이가 래리티의 뒤를 따르다가 멈추며 말했다.
"자기, 작별인사는 충분히 했잖아!" 래리티가 무자비하게 옷가방을 밀어붙여 열차에 쑤셔넣으며 말했다. "자기가 집 비운 동안 치어릴리가 자기 동물들 돌봐 주기로 했고, 엔젤이랑은 작별 인사를 벌써 다섯 번이나 했어. 충분하지 않니? 그러니까 열차 문 닫고 출발하기 전에 어서 타도록 해!"
"그 얘기가 아냐." 플러터샤이가 떨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트와일라잇은 어딨어?"
"어?"
"옘병할! 쟈 말이 맞다!" 애플잭이 열차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여그 안에도 업다!"
레인보우 대쉬의 머리가 옆 창문에서 나타났다. "얜 또 어디로 사라진 거야?! 더는 못 기다릴 텐데!"
"트와일라잇!" 래리티가 승강장 양쪽을 살피며 트와일라잇을 불렀다. "유후! 자기 어디 있어?"
"됐어, 그만 불러도 돼!" 트와일라잇이 헥헥대며 소리쳤다. "나... 여기... 있으니까..." 트와일라잇은 커다란 가방을 짊어지고 있었는데, 도저히 그 체격으로는 들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짐이 가방에 가득 들어 있었다. "헥... 1분만 줘!"
"야, 출발까지 1분도 안 남았을낀데! 얼릉 움직여라 마!"
"트와일라잇, 솔직하게 말하겠는데." 래리티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나라에선 너도 굉장한 마법사 축에 들 텐데, 염동력으로 가방 하나 못 드는 거야?"
"바로 그게 문제야! 특수한 주문이 걸린 책이 섞여 있어서 그래! 염동력으론 이것들을 못 들어!"트와일라잇이 가방을 밀어붙이며 대답했다. 네 다리는 힘들어 보였다. "난방절 연극에서 영리한 클로버Clover the Clever 역할을 소화하려면 당연히 완벽하게 준비해서 가야 해! 그래서 여기... 눈에 보이는 고대 마법 관련 서적은 다 집어넣어 왔거든!"
"야, 무대에서 고대 마법 하나하나 다 쓰라고 너 부르신 줄 아냐!" 레인보우 대쉬가 루비 같은 눈을 굴리며 말했다. "애초에 셀레스티아 공주님이 처음부터 그럴 작정이셨으면 난 자원했을 거야."
"하긴 대시Dashie는 이게 무슨 재미냐고 해썼엉!" 핑키 파이가 레인보우 대쉬 옆으로 폴짝 뛰어 창문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난 빨리 내 역할 하고 싶어 죽겠는뎅! 연극만 끝나면 모자를 뜯어먹든 삶아먹든 상관 안 하겠다고 했거등! 히히히히!"
"으어..." 레인보우 대쉬가 발굽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어, 근데 래리티?" 플러터샤이가 말했다. "되게 추운데, 이제 들어가도 돼?"
"어? 어, 당연하지." 래리티가 길을 터주자 플러터샤이가 객차에 올라탔다. 래리티가 몸을 돌려 트와일라잇을 보고 소리쳤다. "책 몇 권은 놓아두고 오거나, 역무원 분께 도와 달라고 해, 자기! 빨리 탈 수 있을 것 같기만 하면 뭐든 좋으니까! 좀 있으면 출발할 거야!" 래리티가 객차에 올라탔다.
"책... 다... 가져가야 하는데..." 트와일라잇이 눈을 질끈 감고 가방끈을 악물더니 미친 듯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으으으... 으아아아아악!" 가방끈을 놓친 트와일라잇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눈앞이 번쩍했는지 헤롱헤롱해진 트와일라잇이 일어나 앉았다. "아이고... 난방절이 일 년에 딱 한 번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그 때, 녹색 염동력에 붙잡힌 짐수레 하나가 트와일라잇 쪽으로 달려왔다. 염동력이 거대한 짐가방 쪽으로 옮겨가 엉기더니 그대로 가방을 들어올려 수레 위에 똑바로 실어주었다.
트와일라잇은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아..." 그리고 빙긋 웃었다. "왜 저 생각을 못 했을까?" 트와일라잇이 자기에게 뻗어진 발굽을 잡고 일어나 섰다. "도와 주셔서 감사해요. 성함이라도..." 내 몰골을 보자마자, 트와일라잇의 얼굴에 어려 있던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에 트와일라잇의 모습을 가득 담고, 심호흡하며 말했다. "라이라. 내 이름은 라이라 하트스트링스. 당신은 나를 기억하지 못할 거에요. 지금 이 대화가 있었던, 것조차 기억하지 못하겠죠. 제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말하든, 지금까지 만난 그 어떤 사람도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렸던 것처럼." 침을 삼키고, 반쯤 울먹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트와일라잇이 당혹감에 입을 헤벌렸다. 기관차에서 솟구친 증기가 그녀를 재촉했다. 더듬거리며, 그녀가 말했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는데... 전에 혹시—?"
"캔틀롯 순백Alabaster지구의 어느 날 오후에 처음 만났던 날이나, 캔틀롯 골목을 쏘다니며 뛰어놀던 시절이나, 문댄서와 셋이 모여 밤새 놀며 각각 셀레스티아 공주님, 루나 공주님, 턱수염 스타스월 역을 맡아 역할놀이를 하던 밤들을 기억해 내라는 말이 아니에요." 쓴웃음을 지었다. 저 보라색 눈동자 위로 떠오른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함은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저 보라색으로 셀레스티아 공주님의 마음 속 어딘가에 난 아무도 모르는 구멍이 메워졌을 것이고, 내 인생의 틈새도 채워졌었다. 세상에는 오직 한 명의 황혼의 공주Princess of Twilight만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혼자 생각하며, 트와일라잇을 보고 말했다. "왕실에서 내준 왕성의 어느 한 칸에 앉아 내게 쓰던 편지나 그 날 배운 대단한 마법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리라고도 하지 않겠어요. 나와 둘이 있을 때만 흘리던 눈물이나 웃음을 기억해 내라고도 하지 않을 거고요. 외로워질 때, 막막해질 때 그쪽을 품에 안아 준 누군가를 생각해 내라고도 안 할 거에요."
짐수레를 트와일라잇 쪽으로 밀어주고 몇 걸음 다가가 우리 둘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나직하게 말했다. "내가 알고 싶은 건... 트와일라잇 스파클, 당신은 지금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지에요." 몸이 떨렸다. 코를 들이마시며 눈물을 치웠다. 다시 말했다. "지금 이 세상의 본질과 우주의 원리, 지금까지의 인생을 통틀어 생각했을 때, 당신은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몇 주 내내 거의 먹지도 않고, 그 두 배는 되는 시간 동안 목욕도 하지 않은 행려병자와 같은 행색을 한 낯선 자를 향해 트와일라잇이 시선을 고정했다. 내 눈 밑으로 보이는 가방과, 솜털 위로 드러나 보이는 주름살, 차가운 바람을 헤치고 오느라 흐른 눈물자국을 모두 눈에 담는 듯싶었다. 트와일라잇 스파클은 그 이상의 것들을, 나의 기쁨을, 나나 아리아는 결코 쟁취할 수 없을 것들을 보았다. 그녀의 말은 내 가슴에 불을 지폈다.
"저는... 포니빌을 두 번째 고향이라고 생각해요. 스파이크를 맡아서 지금까지 잘 길러 오는 동안 제가 있을 자리가 어디인지도 알게 되었지요. 정기적으로 셀레스티아 공주님께 서신을 보낼 수도 있으니 행운아이기도 하고요. 셀레스티아 공주님의 내제자이지만, 제가 가고 싶은 곳이라면 어디든지 나다닐 수 있는 자유를 허용받기도 했어요. 공주님이 보살펴 주셨기 때문에 포니빌 시립도서관의 사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포니빌의 수호자가 될 수도 있었어요. 작은곰자리에게선 포니빌을, 나이트메어 문에게선 이퀘스트리아를, 디스코드에게선 전 세계를 지켜낼 수 있었죠. 또..."
증기가 다시 솟았다. 바로 몇 걸음 뒤 객차에서 여자 몇 명이 그녀를 불러대는 소리가 들렸다.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빙긋이 웃더니, 잘 관리된 갈기를 발굽으로 쓸어넘기고 조용히 말했다. "친구들도 사귈 수 있었어요. 혼자서만 보낸 그 길고 외로운 나날들 끝에, 무슨 일이 있든지 항상 제 옆에 있어 주고, 그저 이대로만 있으라고, 지금 이대로의 사람으로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기만 하라는 조건 없는 사랑으로..." 트와일라잇이 훌쩍이더니 눈 앞의 빵빵한 짐가방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저를 보살펴 주는 제 소중한 친구들을." 트와일라잇이 침을 삼키더니 고개를 들어 웃어 보였다. 두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지금까지 온갖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있었고, 바보같은 짓을 해서 돌아가거나 지금 생각해도 스트레스 받는 낭패도 몇 번 있었지만, 그래도... 전 행복해요." 그녀는 훌쩍이면서도 활짝 웃었다. "정말로요.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해요."
숨을 내쉬며 피식 웃었다. 뺨을 타고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면 충분해요." 입술과 목소리가 같이 떨렸다. "그렇기만 하면, 앞으로도 문제 없겠지요."
트와일라잇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 사람 괜찮은가 싶은 걱정과 호기심이 벌어진 입 안에 담겨 있었다.
"곧 출발합니다! 캔틀롯 가시는 분들은 빨리 탑승하세요!" 저편에서 역무원이 소리쳤다. 트와일라잇의 친구들이 더러는 화난 목소리로, 더러는 화들짝 놀라 재촉하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러댔다.
"하트스트링스... 씨였죠? 어..." 트와일라잇이 꾸물대며 짐수레에 몸을 살짝 기대더니 더듬거리며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거든요. 혹시... 캔틀롯 가시나요? 혹시 뭐라도 하시고 싶으신 게...?"
"안됐지만 나는 갈 수 없어요." 나는 말했다. "나는 여기 있어야 하니까."
"그래도. 몇 가지 말씀하신 게... 그쪽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들이..." 트와일라잇이 움찔하며 나를 쳐다보고 말했다. "뭔가 더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부탁 하나만 들어줘요." 나는 말했다. 몸을 앞으로 기울여 트와일라잇의 두 발굽을 붙잡고 말했다. "그 감정에 충실하도록 해요. 그것을 당신 영혼의 질료로, 심장을 덥히는 온기로, 삶을 밝히는 봉화로 쓰도록 해요. 그 감정에만 충실한 인생을 살아줘요. 그러기만 한다면 바랄 건 없어요."
기관차의 증기기관이 작동을 개시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멀어져 갔다. 하긴, 언제는 안 멀어져 갔던가.
트와일라잇이 내가 잡은 발굽을 내려다보다가, 나를 보고 말했다. "가야겠어요. 캔틀롯에서 하는 난방절 행사 연극에서 영리한 클로버 역할을 해야 해서."
"알아요."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한 사람이 되었군요, 트와일라잇." 마지막으로 그녀의 발굽을 쓸어주고, 발굽을 놓았다. "잘 하고 와요."
"그래도 하나는 기억하고 있을게요." 짐수레를 몰고 멀어져 가는 트와일라잇이 말했다. 열차에 올라탄 트와일라잇이 안쪽에 가방을 밀어 넣었다. 그 작업이 얼마나 부산스러운지, 그 가방 안에 내 작은 리라를 집어넣은 것을 눈치챈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미친 듯 뛰어대는 심장 박동을 더 견디기 어려워졌을 때쯤, 트와일라잇이 고개를 번쩍 들더니 환하게 웃었다. "갔다 오면 또 얘기해요! 하트스트링스 씬 여기 계속 계실 거죠?"
발굽을 흔들어 작별했다. 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기차가 떠났다. 잿빛으로 물든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발 사이로 그녀의 행복한 얼굴이 멀어지고, 희미해져 갔다. 문댄서가 떠났을 때도 그랬었고, 내 삶이 내 모든 것을 앗아가면서도 목숨만큼은 붙여놓았을 때도 그랬었다. 과거의 구름처럼 차가운 수증기로 화해 사라졌었다. 나는 추위에 떨며 기차역 승강장에 주저앉았다. 무너진 꿈들의 지평선에서 소모된 삶을 생각했다. 돌이켜보니, 나라는 사람 중에서도 그 위에서의 삶에 필요한 부분만큼의 삶밖에 살지 못했구나 싶었다.
눈을 깜박이고 나서 보니 3마일은 족히 떨어진 곳인 포니빌 교외 어귀를 어정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포니빌 건물 지붕마다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얼마 못 가 잊힐 기억이고 이미지지만, 지금 내 목전에서는 한없이 아름답게 반짝이는, 겨울이 찍은 차가운 사진이었다. 길가에는 아무도 없었고 나 하나뿐이었다. 밖을 돌아다니기는 너무 추운 날씨이기는 했다. 그건 나에게도 마찬가지어서, 내 사지에 보이지 않는 쇠고랑이 채워져 있기라도 한 듯 걸음걸이가 몹시 무거웠다. 뒤를 돌아보진 않았다. 어차피 내 발자국은 모두 지워졌을 것이고, 겨울의 사진은 내가 침범하지 않았을 때에만 그 완벽성을 보장받기 때문이며 내가 감히 그럴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집 굴뚝마다 연기가 올랐다. 불 붙은 땔감과 불똥이 튀며 탁탁거리는 벽난로에서 솟은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살아갈 권리가 있는 자들은 추위와, 궁창 저편에서 혀를 날름거리며 자기들을 집어삼키려는 혹한의 세계에서 몸을 빼내 온기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저들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고, 앞으로 만들어 갈 추억과, 남길 유산이 있었다.
내게는 나뿐이었다.
시청 청사 근처를 터벅거리고 지나갔다. 언젠가 있었던 결혼식과, 광인이 떠들어대는 미친 소리가 메아리졌다. 몇몇이 모여 깔깔 웃던 소리와, 절교한 두 친구가 내지르며 싸우던 화에 치민 말들의 잔향을 가르며 슈가큐브코너를 지나쳤다. 멀어서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캐러셀 부티크가 있었다. 눈꺼풀 위로 수십 벌은 되는 멋진 드레스의 모습이 스쳤고, 귓가에는 혼돈의 사도가 슬픔에 잠겨 중얼거리던 목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잠시 뒤, 나는 얼어붙은 포니빌 중심가에서 걸음을 멈췄다. 화톳불 몇 개가 여기 밝혀져 있었었다. 술에 찌든 자도 있었다. 스쿠틀루는 목숨을 건졌고, 그래나이트 셔플은 체스를 잘 두었으며 오렌지색 고양이는 이 건물들 사이를 지나 자기가 있어야 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여기, 가장 따뜻한 곳인 포니빌 중심가에서 밤의 발퀴리가 내려와 그 밑에서 몸을 떨던 자에게 선물을 건넸다. 선물을 거부해 온 그 먼 여정의 끝에, 나는 그 선물을 받았다.
온기의 한 파편마저도 없는 곳으로 향했다. 건물들과 그 위로 검은 연기를 뿜어내는 굴뚝들을 뒤로하고, 포니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빼기가 있는 공원에 들어섰다. 휘파람 소리와 함께 흘러가던 바람에 섞이던 내 아버지의 숨결과, 바로 거기에서 이 마을을 내려다보며 그림을 그렸을 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했다. 분명 아주 멋진 모습이었으리라. 아버지는 앞으로도 숨이 다할 날까지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화폭 위에 세상의 모습을 남길 테지만, 한때 아버지가 누리던 아름다운 날들은 결코 되찾지 못할 것이고, 화폭 속에 가만히 앉아 있을 구멍은, 내 형상을 빼다박은 그 구멍만은 평생 메우지 못할 것이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지마자, 아버지는 나를 대체할 무언가를 찾을 일이 영영 없으리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아버지는 나보다도 좋은 것을 찾아내실 것이다. 아버지의 삶이 그러하듯이 내 어머니의 삶도 그럴 것이고, 트와일라잇과 문댄서, 모닝 듀와 암브로시아 모두 각자의 삶을 영위할 것이다.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보이든 보이지 않든, 나는 내가 할 일을 다했고 이제부터 그들의 질료를 찾아가는 일은 오롯이 그들 자신의 역할이 되었다.
단 한 사람이 저 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꾸었다. 이제 저 많은 사람들이 더욱 많은 사람들을 바꿔놓으리라.
그럼 내 인생은 대체 뭐였단 말인가. 언덕에 주저앉아 가만히 생각하다가, 답을 찾았다. 그것은 과거에도, 미래에도 있지 않았다. 답은 시간 속에 얼어붙어 서리로 몸을 감싸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가루로 그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항상 얼어 있었다. 나는 내 존재를, 내 존재 이유를 찾아냈다.
그것은 순간, 그 순간이었다. 목전에 흩날리는 눈발과, 잎 없이 앙상한 나뭇가지가 붙잡은 햇빛이었다. 모든 것은 현재에 존재했다. 내 생각, 내 숨결, 울고자 하는 의지와 울지 않고자 하는 의지. 울면서 울지 않으려 했는데, 눈물이 흘렀다. 그것은 잘 기억나지 않는 무언가의 느낌이었다. 먼 옛날, 난방절 아침에 눈을 뜬 어린애가 열어 본 선물상자에 실로폰이 들어 있는 걸 보고 느꼈던 그런 감정이었다. 눈물이 흘렀던 것은, 그 기억은 본래 아주 오래 전 사라진 것의 그림자요 모조품일 뿐이기 때문이었다. 갓 구운 빵도 시간이 지나면 상해서 못 먹게 되듯 세상 모든 것에 대한 기억이 본래 그러해서 얼마 가지 못하고 시들어 사라지는 것인데, 상해서 먹지 못하는 빵이라도 사람들이 가끔 혹해 발굽을 내미는 것처럼, 이미 쓸 수가 없고 죽은 것이지만 그 시절을 다시 추억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결국 움켜쥐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움켜쥐고 있는 것을, 흘러가는 시간 중 유일하게 실존하는 것이자 단 한 번밖에 가질 수 없고, 놓치게 되면 평생 두고두고 후회하게 되는 그 순간을 움켜쥐어야 한다.
슬퍼하지도, 후회하지도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나는 기쁨, 기쁨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감정에 북받쳐 울었다. 평생에 걸쳐 초라하고 가련한 꿈만 꾸고 있었다는 사실을 마침내 깨달은 자가 본인의 정의로 그 꿈을 깨고 나왔을 때 느끼는 기쁨이었다. 나는 옳았다. 나는 너무나 옳았다. 감각 없는 다리를 움직여 후드 재킷을 만지작거리다, 그 어떤 허위도 필요없는 자의 당당함으로 옷을 벗어 내던졌다. 언덕 너머로 날려간 칙칙한 잿빛 후드는 내 시선이 닿지도 않을 곳에 떨어져 눈에 묻히고, 곧 영원히 잊힐 것이다. 아리아는 자신의 무덤에서 잠들었지만, 나는 내 무덤과 어울려 춤을 추리라. 네 다리를 펴고 지금까지 내내 내게 저주나 다름없었던 한기를 만끽했다. 그 환희에는 기억도, 가식도, 어둠 저편에 있어 보이지도 않는 희망에 대한 갈구도 필요하지 않았다. 필요한 것은 오로지 용기.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삶을 살아온 자만큼 용감한 자는 또 없으리라. 그것은 그 순간을 맞닥뜨리기 전까지 자신의 삶에 구차하게 연연하지 않았음을 깨달은 자의 징표일 테니.
내가 어떤 자였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자가 될지는 모르지만 지금 어떤 자인지는 분명히 안다. 지금 내가 아는 것과 느끼는 것, 그리고 이 순간만큼은 위대한 어머니의 야상곡이 얼마나 막대한 권능을 나누어 받았는지 몰라도 절대로 빼앗길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순간은 오롯이 나만의 것이었고, 이는 곧 내 영혼을 구성하는 질료가 되어 영원히 남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뒤로는 오로지 암흑만이 있을 것이나, 끝없는 밤 속으로 걸어 들어갈 용의는 이미 차고 넘친다. 어둠 하나만큼은 내가 절대 상실할 수 없는 지표가 될 테니.
밤의 만장. 그 마지막 마디의 연주가 끝났다. 이름 없는 자들의 땅에 떠다니는 철판들이 주변에 나타났다. 죽었으되 죽지 못한 자들이 마시는 공기를 허파 가득 들이마시고, 회오리바람을 거느리고 낙뢰를 마구 떨어뜨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 한가운데로 아리아의 옥좌를 실은 구체가 나타났다. 구체는 나를 피해 날아가지도 않았고, 내게 번개를 떨어뜨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천천히 하강해 내려오고 있었다. 나를 맞이하러 날아오는 황혼의 공주의 보라색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숨을 내쉬며 품에 나이트브링어를 단단히 안았다. 멍하게 기다리고 있는 와중 왼쪽에서 고통에 찬 신음소리가 들려왔고, 쇠사슬 소리가 뒤를 따랐다. 멍한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다.
입에 족쇄가 채워진 자가 녹슨 구멍에서 기어나오고 있었다. 그 여자는 일종의 동물적 본능으로 내가 있는 쪽을 향해 꾸물거리며 다가왔다. 네 발굽에는 쇠고랑이 채워져 있었고, 강철판이 눈과 입을 감싸듯이 틀어막고 있었다. 여자의 헐떡이는 숨은 철판에 부딪쳐 잘 들리지 않았다. 엉망이 된 깃털 몇 조각이 몸에 남아 있었다. 살아 생전에는, 버려지기 전에는, 끝도 없는 세월이 몇 번이고 반복해서 흐르기 전 어느 알 수 없는 세계에서는, 페가수스였을 터였다.
나는 별 생각 없이 몸을 돌려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그와 동시에 여자가 내 쪽을 향해 몸을 날렸지만, 쇠사슬이 팽팽하게 긴장하며 날카로운 소리를 뿌렸고 그 여자는 내게 닿지 못했다. 쇠사슬을 떨치려는 듯 몸을 거칠게 꿈틀대던 여자가 마침내 바닥에 엎어져 철판을 발굽으로 긁어대며 내 쪽으로 기어오려 용을 썼지만, 내게 닿지 못하는 것은 같았다.
나는 낙엽처럼 조용하게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오직 그 여자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고 천천히 발굽을 뻗었다. 내가 뱉은 숨이 근처 공기에 섞여 사라짐과 동시에 여자가 경련하듯 꿈틀대며 고개를 쳐들고 무시무시한 울음을 토해냈다. 날카로운 울음은 순식간에 멎었고, 여자는 쌕쌕거리며 쓰러졌다. 내 착각이었을 수도 있고, 그냥 감상적인 해석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그 여자는 내 발굽이 자기 몸에 닿는 것을 허락했다. 여자의 솜털을 쓸어 보자 얼음보다도 차가운 한기가 느껴졌다. 수백 년에 걸쳐 눈물이 흐른 끝에 짓무르고 곰팡이가 낀 여자의 얼굴을 가만히 쓸고, 또 쓸었다. 강철판에 막힌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왔는데, 울음소리에 묻혀 그 말은 들리지 않았다.
나는 몸을 더 가까이 하고 얼어붙은 여자의 몸을 일으켜 내 품에 안았다. 오랜 세월 동안 포니빌을 떠돌며 그 누구의 관심도 받을 수 없었던 자가 희망의 인도를 받아 현실의 차가운 입김과 괴로우면서도 행복한 꿈 사이의 찌꺼기를 먹어치우며 달리던 걸음처럼, 그녀의 다리는 떨리고 있었다. 여자는 저항하지 않았고, 나를 끌고 어둠의 심연으로 떨어지려고도 하지 않았다. 여자는 그저 내 품에 안겨 한결 진정된 소리로 숨쉬며 조금 전과는 다른 울음을 토할 뿐이었다. 노래할 수 없으므로 나눌 수 있는 것은 그저 울음에 젖은 숨소리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자의 차가운 등을 쓸어 주며 그저 품에 안고만 있었다. 여기에 너무 정신이 팔려 있었던 것인지, 발판에 내려선 아리아의 발굽 소리가 코앞에서 들리기 전에는 아리아가 오는지도 몰랐다.
"이 아이는 군인이었다." 살지도 죽지도 않은 알리콘이 말했다. "학살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던 현장. 이 아이는 부대의 유일한 생존자였단다. 주변에는 오직 죽은 전우와 죽어 가는 전우밖에 없었지. 그리하여 절망에 마음이 굴복하고 말았다. 그 절망의 극단에서 야상곡이 이 아이를 찾아냈다. 자기가 야상곡을 노래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 때까지 머릿속 야상곡은 반복되었고, 끝내 여기로 오게 되었다." 아리아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랬으므로, 이 아이의 징집부터 시작되어 누적된 서류는 없는 것이 되었고, 부대는 한 명의 생존자도 남기지 못하고 몰살당한 것이 되었다. 이 아이의 부모는 낳지도 않은 자식의 죽음을 곡할 필요가 없게 되었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뺨을 비비고, 우리 발 밑에 있던 철판에 그 여자를 가만히 눕혀주었다. "이 사람도 꿈을 꿉니까?" 나는 물었다.
"일부이긴 하다만, 그러하다." 아리아가 나직하게 말했다. "살아 있는 자인 너를 죽이지 않은 것은 아마 그것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후렴구란 항상 반복되기 마련이고, 반복될 때마다 이 아이가 기억하는 자기의 과거도 그만큼 찢겨 사라진다. 결국 모든 기억이 사라질 것이고, 이 아이를 구성하는 질료도 마찬가지로 사라져 버리겠지."
"이는 사람이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노래 말이냐?"
"기억입니다." 한쪽 발굽으로 나이트브링어를 들고 아리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빈 발굽으로는 포박된 자의 잠자는 몸을 가볍게 쓸어주었다. "공주님께서는 어떻습니까. 어머니를 사랑하기로 결정했으므로 어머니를 사랑하십니까? 아니면, 공주님의 삶을 정의한 노래가 이미 결정해 둔 것이므로 그를 따르시는 것뿐입니까?"
"이러한 것을 '삶'이라고 칭한다면 그건 기만일 터." 아리아가 대답했다. "기만이라는 것은, 삶 자체는 아니지만 그것에 거의 근접한 것이기라도 하다는 뜻이다. 내 어머니가 나를 버려야만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누리고 있는 지금 또한 어머니께서 주신 것이기도 하다."
숨을 들이마시며 고개를 내저었다. "왜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들이 버려져야만 하는 것입니까?"
"생각해보지 않았다." 아리아가 대답했다. 공주가 비쩍 마른 발굽을 뻗어 납작 엎드린 자의 반대쪽 어깨를 가볍게 쓸어주었다. "그렇더라도, 산 자들에게 버려져 내게 온 이 자들을 내가 내버리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
"아리아 공주님." 조용히 말했다. 나는 폭풍우가 이는 쪽을 바라보며, 당장이라도 입 밖으로 떨어지려는 말들을 붙잡아 다듬고 또 다듬었다. 아리아가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공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공주님께서 하고 계시는 일은, 비극이라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침을 삼켰다. "그렇더라도... 그렇더라도, 공주께서 온 마음과 정성을 그 일에 쏟고 계시며, 그 일이야말로 공주께서 계셔야 할 자리임을 아시는 것은......" 떨리는 숨이 밖으로 나왔다. 억지로 고개를 돌려 아리아를 보고 말했다. "...그 일이 옳기 때문에 가능할 것입니다."
아리아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이치에 맞구나, 버려진 자여. 그대의 감상은 어떠하냐?"
"딱히, 부럽진 않군요." 나는 말했다.
아리아는 내 대답을 잠시 곱씹었다. 무슨 대답을 했더라도 나는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리아의 뼈만 앙상한 날개가 펼쳐졌다. "결정은 내렸느냐?" 보라색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새벽의 강림을 연주하고 산 자들의 세상으로 돌아가겠느냐? 아니면 나와 내 성가대의 품에 안겨 영원한 지복을 누리겠느냐?"
아리아를 똑바로 쳐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어느 것도 고르지 않겠습니다."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내비치지 않던 이름 없는 자들의 땅을 지키는 여신이, 당혹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이트브링어의 검은 울림통을 마지막으로 한 번 쓸어 본 뒤, 떨리는 숨을 뱉어내며 아리아 공주에게 바쳤다. "위대한 어머니께서 남기신 노래의 파편을 당신께 바칩니다. 이제 산 자들은 궁창의 야상곡의 비밀을 파헤칠 수도 없을 것이고, 당신의 땅에 다시 발을 들이지도 못할 것입니다."
아리아는 내가 내민 나이트브링어를 흘끗 내려다보기만 할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경이로운 자제력이었다. 아리아가 말했다. "버려진 자여, 너의 처분은 어떻게 하기를 바라느냐?"
"포니빌로 돌아가겠습니다." 나는 딱 잘라 말했다. "거기에서 살아가겠습니다. 지금까지 그러했듯이."
"그 누구도 그대를 기억하지 못할 터인데." 아리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내가 그대를 포니빌로 돌려보낸다고 해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대의 몸은 살아 있을지라도, 저주가 서서히 그대의 마음과 기억, 열정을 좀먹어 들어갈 것이다."
"그렇더라도 살아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나는 말했다. 나이트브링어를 들어올린 발굽을 더욱 높이 뻗어, 가져갈 것을 재촉했다. "공주께서 말씀하신 존재로 굴러 떨어지더라도, 제가 지금까지 얻은 모든 경험과 지식이 거세되어 제가 아닌 존재로 변하는 것보다는 나으리이다. 하물며 아무것도 모르는 꼭두각시로 공주께서 위대한 어머니의 성가를 지키는 데 이용되기만 하는 자는 되고 싶지 않습니다." 고개를 숙여 입이 묶인 자의 솜털을 가볍게 쓸어주고 말했다. "제가 그리해야만 디스코드가 재봉인된 과거가 보존됩니다. 그리해야만 이퀘스트리아가 혼돈의 도래도, 존재의 붕괴도 없이 계속 번성할 수 있습니다. 세상 만물이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남아 있기 위해서는 이리해야만 합니다." 침을 삼키고 말했다. "저도 옳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곳곳에 불어닥치는 폭풍과 천둥번개도 나와 아리아 사이에 드리운 침묵을 깨뜨리지 못했다. 아리아가 몸을 숙여 나이트브링어를 가져갔다. 나이트브링어가 사라진 곳에 내 발굽만 힘없이 뻗어 있었다.
"그래. 알겠다." 아리아가 말했다. "그렇더라도, 그대가 산 자들의 땅에 존재하는 한 내 어머니의 의지에 반하는 위험요소가 될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언제라도 모든 실존이 붕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숨을 들이마시자 씁 소리가 났다. 나는 입을 묶인 페가수스의 창백한 귀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또, 제가 지금까지 축적한 지식과 기억을 일부 가져가시더라도 공주께서는 만족하지 않으실 것도 알고 있습니다. 저는 공주님의 다소니처럼 의욕적인 사람이어서, 살아 있는 것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진실을 찾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지 하고 말 것입니다. 공주님께서 제게 진실한 자유를 주시고자 한다면, 그 전에 제게서 한 가지를 반드시 가져가셔야만 하나이다."
"존재하지 않는 자여, 내가 무엇을 가져가야 하겠느냐?"
나는 침을 삼켰다. 뺨 위로 눈물 한 방울이 굴러 떨어졌다. 나는 아리아를 똑바로 마주보고 말했다. "음악을 향한 제 모든 열정과 사랑을, 가져가 주소서."
아리아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번쩍이는 눈은, 이해했다는 듯 둥글어져 있었다. 그녀가 대답했다. "내 평생 이런 제안은 처음이구나. 앞으로 두 번 다시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어."
나는 울면서 몸을 앞으로 들이밀고 조용히 말했다. "사람은 현재를 살기 마련입니다.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긴 세상이더라도, 적어도 그 세상만큼은 빼앗긴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겠구나." 아리아가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뿔이 환하게 빛나며 내 이마를 겨누었다. 아리아가 덕담 아닌 덕담을 건넸다. 몸이 경련했다. "그대라면 이름 없는 자들의 땅에서조차 영원히 잊히지 않을 아름다움을 내 성가대에 더할 수 있었을 터인데."
"괜찮습니다." 나는 거칠어진 숨으로 말했다. 나는 웃으면서 곡했다. 부서진 미소 위로 내 마지막 노래가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음치가 취향이라서."
아리아 공주의 뿔이 섬광을 터뜨렸다. 눈이 녹고 있었다. 나는 언덕마루에 주저앉은 채였다. 쌩쌩 부는 바람 너머로 그림 같은 포니빌의 정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자, 치어릴리가 근무하는 학교가 보였다. 다 지워져서 알아먹을 수 없는 낙서가 빽빽하게 적힌 칠판 앞에 서자 교실에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내 큐티마크가 있을 자리를 돌아보며 앞뒤 안 맞는 말을 더듬더듬, 중얼거려 보았다. 노란 무언가의 형상이 뭉개지며 퍼져갔다. 내게 금빛 튤립을 건네던 모닝 듀의 고운 솜털처럼 부드러운 모습이었다.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내 목소리는 거친 불협화음이었으며 삑사리가 계속 나왔다. 나는 그게 왜 잘못된 일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스쿠틀루가 뜬금없이 내 두 다리에 안겨 있었다. 나는 조용한 숲을 기어서 건너갔다. 통나무로 지은 오두막이 분해되어 통나무로 돌아갔다. 화톳불 앞에 나란히 앉아 얼굴을 비비는 캐러멜과 윈드휘슬러 근처에 웬 광인이 하나 있어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자 밤의 알리콘이 별빛을 따라 날아갔다. 창밖으로 반짝이는 달 위로 거무스름한 얼룩이 보였고, 나는 작은 몸으로 급히 달려 난방절 트리 쪽으로 달렸다. 엄마 아빠가 보는 가운데 선물을 열어 보자 보라색 연무와 함께 롤러스케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눈물은 더 흐르지 않았다.
"아 진짜!" 밝고 화사한 삽화로 가득한 이야기책을 들고 내 침대에 누워 있던 문댄서가 툴툴댔다. "페가수스들은 죄다 자의식 과잉인가 봐! 왜 다 하나같이 귀청 떨어질 것처럼 쩌렁쩌렁해서는 정신 사나운 곡밖에 안 쓴대?"
침실 바닥에 앉아 있던 트와일라잇이 표정을 구겼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돼! 페가수스 문화는 그렇단 말야!"
"그르냐. 별 멍청한 문화도 다 있네." 문댄서가 짓궂은 표정으로 실실 웃으며 덧붙였다. "걔들 옷 입고 다니는 거 봤냐? 누가 보면 뭐 행사라도 하는 줄 알겠더라? 히히히. 뭐 구름이랑 전쟁이라도 하러 나가는 줄 알겠어!"
"야! 페가수스 군복 양식이 얼마나 멋있는데! 애초에 페가수스 사회가 얼마나 오랫동안 전사를 숭상했는지 알기나 해!" 트와일라잇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라이라 너라면 잘 알고 있겠지! 작년에 페가수스 펜팔 친구 하나 사귀었잖아. 문댄서한테 얘기 좀 해!"
"그러든가아아! 또 트와일라잇 편 들려고!" 문댄서가 이야기책을 한 장 넘기며 침대에 걸터앉은 다리를 흔들었다. "애초에 스타스월부터 셀레스티아 공주님밖에 몰랐으니까, 루나 공주님 편을 들 리가 없지!"
"어..." 침대 위에 매달려 달랑이는 원더볼츠 모양 종야등을 멍하니 바라보며 더듬거려 말했다. "페가수스... 펜팔이 있었지..."
"권운의 비상이라고, 페가수스 고전 교향곡이 있는데 그런 얘긴 안 했어?"
고개를 돌려 트와일라잇을 빤히 쳐다보며 눈을 몇 번 깜박이다가, 얼굴을 구겨 보였다.
"왜 내가 그런 구식 노래 얘기에 관심을 가질 거라 생각했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빙긋 웃고 말했다.
"전국 청년비행대회 때 굉장한 곡예비행이 있었다는데, 그 얘기나 좀 할까?"
"재밌겠다 그거!" 트와일라잇이 말했다.
"오호!" 문댄서가 책을 휙 던져놓고 침대에서 뛰어 내려왔다. "그렇게 나와야지. 이제 좀 들을 만 하겠네!"
"에이, 지금까지 재미 하나도 없었던 것처럼 굴지 말고!" 트와일라잇이 말했다.
"맞는 말이지. 지금이 훨씬 더 재밌을 뿐이야!" 문댄서가 낄낄대더니 벙실거리며 말했다. "그럼 그 곡예비행이 어땠는지 좀 들어 보자!"
"아이 진짜! 수선 좀 떨지 마!"
"자, 자, 둘 다..." 픽 웃으며 둘을 쳐다보고 말했다. "진정 좀 하고, 얘기나 좀 해 볼까?"
미주
*1 챕터 1의 첫 문단에서 라이라가 이야기한 의문에 아리아가 답하는 것.
*2 Frozen Hurricanesic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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