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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E/백그라운드 포니

Chapter 20. 종극Denouement(完) [`24.01.20. 오타 및 최후 분량 일부 수정]

by Mergo 2022. 2. 25.

일기.

 

계절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걸까. 여신들께서 계절을 창조하시고 서로 순환케 해서 자연의 한쪽 힘이 소진되지 않게 만들어 두신 것일까. 최초로 창조된 사람들도 농번기와 농한기를 정해서 농사를 짓고 수확했을까. 태곳적 여신들께서 그저 심심풀이로 계절을 만드신 건 아닐까?

 

밖은 눈이 온다. 아주 많이 온다. 이번 달이 몇 월이더라... 11월인가? 12월? 잘 모르겠다. 한동안 밖에 나다니질 않았으니.

 

오두막에 물건은 충분히 쌓아두었다. 앨이 먹을 사료와 식수도 풍족하고, 벽난로에 집어넣을 땔감도 넉넉하다. 당분간은 더 나갈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이유를 콕 집어서 말하긴 어려운데, 밖에 나갈 기분이 아니다. 하긴 평소에도 눈 내리는 건 고사하고 겨울 자체를 별로 좋아해 본 적이 없지. 요맘때쯤 되면 난방절 생각이 나고, 난방절 생각이 나면 엄마, 아빠 생각이 난다.

 

아무래도 누워서 잠이나 좀 자야겠다. 되게 조용하다. 앨도 평소만큼 가르릉거리지 않는다.

 

일어나면 뭘 할지 나도 잘 모르겠다. 뭐 읽을 거리라도 있으면 좋을 것 같다. 평소 시간 때울 때 뭘 했더라? 됐다. 때 되면 알게 되겠지.

















일기.

 

잠을 너무 많이 잔다. 게으른 것도 정도가 있어야 하는데 요즘은 선을 많이 넘었다.

 

그래서 오늘은 모처럼 일이나 좀 해 볼까 싶은 기분이 들었다. 정작 무슨 일을 할지는 좀 더 생각을 해 봐야 했지만. 모닥불에 집어넣을 땔감이나 좀 주우러 다니기로 했다. 도끼를 챙기고 뒷마당으로 갔다. 갔는데, 이상한 게 있었다.

 

오두막 뒤에...... 땅굴이 하나 있었다. 그 말 외에는 적당한 표현이 없다. 뒷마당에 갔더니 웬 판잣집 같은 게 하나 있었다. 문을 열어 보았더니 참 깊이도 파놓은 땅굴 속으로 이어지는 흙계단이 있었다.

 

뿔을 밝히고 계단을 따라 내려가 보았다. 내려가 보니 직사각형 모양 방, 방이라고 해도 아주 작은 공간이 있었는데, 가로 10피트에 세로 20피트 정도나 될까 싶었다. 천장 한가운데에는 불 꺼진 등잔이 하나 달려 있었고, 한쪽 구석에는 금속 보면대 하나와 스툴 하나가 처박혀 있었다.

 

대체 뭐 하는 곳이었을까? 애초에, 이게 어디서 갑자기 툭 나타난 건지도 모르겠다. 이 오두막을 지을 때는 분명 저런 지하실 같은 건 없었던 것 같은데. 레인보우 대쉬를 시켜서 때려부쉈던 낡아빠진 헛간 건물의 부속일까? 뭔가를 넣어두는 장소인 건 틀림없다. 그것 외에는 딱히 어떤 쓸모가 있다고 말하기도 어려우니까. 그렇다 쳐도 왜 굳이 판잣집을 지어 입구를 가렸을까? 물건을 넣고 빼기에는 문도 그렇고 계단도 그렇고, 너무 좁은데.

 

아무튼 이것 하나 때문에 하루 종일 기분을 잡쳤다. 땔감 주우러 다니는 일도 그만두었다. 당장 있는 땔감만 가지고도 하루, 이틀 밤은 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덕분에 전에 쓴 일기를 뒤적거릴 시간이 좀 났다. 옛날에 써둔 일기에 혹시 저 지하실에 관한 얘기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말인즉, 내가 그냥 까먹은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요새 머리가 어지간히 복잡했어야지. 어쩌면 잠만 자서 그런 것일지도.

 

앨이 밥 달라고 보챈다. 이제 그만 써야겠다. 셀레스티아 공주님 맙소사. 눈 너무 뿌리는 거 아닌가요. 풀때기가 좀 고개를 내밀더라도 크게 짜증이 날 것 같지 않다.

















일기.

 

오늘은 땔감을 주우러 나갔다. 기분 전환을 하려면 이런 거라도 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마저도 내 몸 쓰는 게 아니라 염동력을 쓰는 일이긴 하지만, 장작을 패고 있자니 스트레스가 많이 가셨다.

 

어디부터 쓸까. 일기 맨 앞에서부터 읽어 보기로 했다. 거의 몇 달 만에 처음으로 그 짓을 한 것 같은데. 앞에서부터 보니 중간중간마다 몇 장씩 빈 페이지가 나왔다. 말 그대로, 어느 한쪽 페이지에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면 그 다음 페이지에 이어 적는 게 아니라 2, 3페이지는 물론 간혹 4페이지 이상을 비워두고 쓴 경우도 있었다.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내가 그런 짓을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이나 계속했는지 이제 와서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게 너무 짜증난다. 단정하고 보기 편하게 관리하는 거라면 내 특기인데. 그것도 트와일라잇에게서 옮아 온 버릇인 것 같긴 하지만. 학교 다닐 때도 마찬가지다. 필기한 노트 한가운데에 떡하니 공백 하나 있는 것만큼이나 신경 쓰이는 것도 없었는데. 게다가 나는 발굽으로 글씨를 쓸 때면 보통 작은 글씨로 담백하고 정확하게 쓰는 편이다. 한 페이지에 가능한 많은 양을 단정하게 적어 놓으면 얼마나 보기 좋은데.

 

자. 그래서 왜 일기장을 몇 페이지씩이나 비워놓고 쓴 걸까. 이거 엄청 신경 쓰인다. 대학 다닐 때도 딱히 게으른 학생은 아니었던 것이 확실한데. 내가 이러는 걸 보시면 우리 교수님들이 날 종탑 꼭대기에 매달아 버릴 터다.

 

가만, 생각해 보니 교수님은 한두 분이셨던 것 같은데 그건 그것대로 또 말이 안 된다. 대학을 졸업했다면 최소 20개 이상의 전공과목을 들었어야 했다. 교수 3명이서 서로 다른 20개 과목을 강의한다고?

 

덕분에 오늘 밤도 벽난로에 불 꺼질 일은 없겠다.

















일기.

 

자기 스스로도 자기가 미쳐 가는 게 확실하면 이렇게 답답하고 죽을 맛일까. 그럴 때 밖에 나가면 어떻게 될지 적어둔다. 밖에 나가면 좀 괜찮으려나, 하고 나가면 오히려 상태만 더 안 좋아진다.

 

바로 오늘 있던 일이다. 오두막에 혼자 들어앉아 있는 짓도 슬슬 그만둘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꿀꿀한 바깥 날씨를 가만히 살피고 있었다. 후드 재킷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는데, 그닥 상관은 없었다. 래리티가 해 준 스웨터를 입고 동네로 나갔다.

 

나가 봤더니 포니빌 건물이란 건물에 온통 빨간색과 초록색 장식이 매달려 있고, 동네 사람들이 한데 떼로 몰려 있는데,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동네에 무슨 큰 행사가 있는 모양이라고 은근슬쩍 물었더니, 다들 나를 이상한 사람처럼 보면서도 자기네들은 봐야 할 게 있어서 모인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 봐야 할 게 뭐냐고 물어 봤는데, 그 대답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11월도 아니고 12월도 아닌 1월에 접어들어 있었다. 새해가 밝은 지 벌써 엿새가 지난 것이다. 난방절이면 캔틀롯에서 으레 하는 성대한 연극도 성황리에 끝나서, 수십 년 동안 했던 연극 중에서도 제일이라고 하는 듯했다. 그 연극에 트와일라잇과 그 친구들이 하나씩 중요한 역할을 맡아서 참여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퀘스트리아 데일리에도 관련기사가 실릴 만큼 대단했다는 모양이다. 그 기사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면서도 온몸의 피가 싹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난방절을 그냥 날렸다고? 그렇다면 내가 2달을 통째로 날렸다는 얘기잖아. 오두막에 틀어박혀 잠만 자던 나날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내가 잘못돼도 한참을 잘못된 모양이다.

 

결국 오후 내내 기분을 잡쳤다. 눈 쌓인 길가를 비틀거리며 돌아다녔다. 사람들이 커다란 사탕 지팡이 모양으로 만든 장식이나 조화 화환을 들고 창고를 드나드는 모습을 멍하게 볼 뿐이었다. 이렇게 무기력한 기분이나 느끼려고 나온 게 아니었는데. 난방절은 일 년 행사 중에서도 특별한 날이고, 나는 동네 사람들을 아무도 모르니까 저 사람들이 나를 그리 오래 기억해 주지는 않을 터이지만 아주 약간이라도 함께 난방절을 즐겼다면 좋았을 것이다.

 

요사이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으므로, 뭐라도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가 지기 전, 번화가를 쏘다니다가 신기한 장난감을 파는 가게에 들렀다. 앨과 놀아 주려고 쥐 모형에 줄을 달아놓은 장난감을 샀다. 계산대에서 지불을 마치자마자 잡담을 시작했다. 주인장이 스탈리온그라드 특유의 억양을 활용한 말장난을 선보였는데, 웃겨 죽는 줄 알았다. 그 사람 목소리는 어딘가 따뜻하고 행복해 보였다. 그래서 제발 농담을 멈추지 않기를 바라며 계속 빙글빙글 웃어 보였다.

 

주인장 이름은 봉봉이라고 하는데, 두 블록 아래의 과자 가게도 겸업한다고 했다. 실은 이 장난감 가게가 새로 차린 것으로, 본업은 과자 가게라는 것이다. 언젠가 캔틀롯에 자기 명의로 된 장난감 가게와 사탕 가게를 차리는 것이 그녀의 꿈이었다. 그 꿈이 실현되기를 바란다. 그런 생각만 해도 행복해진다. 그러나저러나 밤이 되었기 때문에 가게를 나왔다. 잘 되기를 바란다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머릿속 한쪽 구석에나마 내가 행운을 빌어 주었다는 걸 기억해 주면 좋겠다.

















일기.

 

앨은 내가 사 온 장난감이 아주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앨이 마음에 들어하니 기분이 좋다. 앨이 내 몸에 기대어 잘 때면 따끈따끈하다. 이걸 쓰는 와중에도 앨과 서로 기대어 있다.

 

왜 일기를 끄적이고 있는지 나 스스로도 확실치 않다. 요새 정신머리가 가출해서 아무렇게나 싸돌아다니는 통에 이렇게 된 건 아닐까. 머릿속 생각을 지면에 적어두지 않으면 그 생각을 했었다는 것 자체부터 잊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렇게 생각해 봐도, 매일같이 일기를 쓰고 있는 건 이상하다. 나는 창의적인 사람은 아닌데. 이렇게 두꺼운 일기장을 내 머리에서 뽑아낸 문장만으로 채우려 한다고 생각하니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다.

 

내가 머무르는 곳은 먼지투성이에다 정리도 안 되어 있다. 왜 지난 일 년 하고도 반 년 동안이란 긴 시간 동안 저런 쓰레기를 사들였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예를 들어, 벽에 빼곡히 걸려 있는 저 악기들이 그렇다. 내가 사야 할 이유가 없는 것들이다. 노새가 끄는 고물 수레가 오두막집 바깥에 널브러졌는데, 내가 순간 눈이 돌아가서 그걸 사들였을지도 모르겠다.

 

동네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으니, 저것들을 동네 장터로 가져가서 내다 파는 게 현명할 것 같다. 내다 팔더라도 한 번에 한 점씩만 팔아야겠다. 너무 자주 들락거리면 브로커 눈에 들어서 온갖 트집을 잡아대며 값을 후려치려 할 테니 말이다. 저렴한 생각이라는 것은 자각하고 있다. 그 외에는 돈을 마련할 수단이 없다.

 

가만있자. 그럼 저 옷들이랑 땔감, 오두막집은 어떻게 구한 거지. 포니빌 사람들은 다들 자선사업가라도 된단 말인가?

 

의문을 옮겨 적는 일도 지친다. 조만간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생각 안 하는 게 최선이겠지. 앨이 가르릉거린다. 똑똑한 고양이를 본받아 나도 자러 가야겠다.

















일기.

 

오늘 이상한 일이 있었기로 적어둔다. 시끄러운 소리가 났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포니빌 번화가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빅 맥이 베리 펀치네 집을 줄로 묶어 힘차게 잡아당기니까 집이 통째로 뜯겨 나갔다. 눈이 절로 휘둥그레 뜨였다. 몸에 쇠사슬 몇 개 차고 힘껏 당기니까 집이 뜯겨나간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남이사 믿든지 말든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 사실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정말 이상한 일은 바로 이 다음에 일어났다. 꿈에서 깨듯이 눈치챈 것인데, 동네에 깔려 있던 눈이 하나도 없었다. 벌써 겨울이 끝난 건가? 아니면 나도 모르는 어디에서 열풍이 불어서 다 녹여 버린 건가?

 

사람들에게 정신나간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을 질문을 태연하게 던질 수 있을 정도로 뻔뻔해졌다고 자평하는 마당이라, 빅 맥의 힘자랑을 감상하던 사람 하나를 골라잡아 다가가 오늘이 며칠이냐고 물었다. 글쎄, 마음과 마음의 날이라는 게 아닌가.

 

벌써 2월이라고? 어제만 해도 칙칙하기 짝이 없는 염병할 1월이었는데. 아닌가?

 

머릿속에 앨 생각이 퍼뜩 스치고 지나갔다. 미친 듯이 뛰어 집으로 향했다. 들어와 보니 앨은 놀라울 정도로 멀쩡했을뿐더러 그 밥그릇도 사료로 가득 차서 거의 넘치고 있는 것이 생각도 주관도 없는 자동인형이 알아서 사료를 부어 놓은 것만 같았다.

 

미칠 것만 같아서 일기장을 홱 넘기고 바로 직전에 쓴 일기를 읽어 보았다. 집에 쌓여서 먼지만 날리던 악기를 팔아치우는 일에 관한 기록만 남아 있었다.

 

악기라니? 내가 왜 그런 걸 집에 들인단 말인가? 동전가방을 열어 보니, 주둥이까지 금화가 꽉 들어차 있었다. 분명 어디서 난 돈이기는 할 텐데, 어디서 난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이걸로 끝이 아니다. 오두막집 바닥을 보니 비밀문이 하나 있었다. 문을 열어보니 웬 벨벳 가방이 하나 있었는데, 편자 20개는 족히 담고도 남을 만큼 큰 가방이었다. 내가 이걸 어디다 썼지? 내가 이 가방을 썼던 것 하나는 확실하지만,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게 얼마나 더 있을까. 아무래도 전에 쓴 일기를 좀 뒤져봐야겠다...

















일기.

 

날씨가 슬슬 풀리고 있다. 겨울이 오기는 했던가? 9월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난방절을 놓친 게 아쉽다. 엄마랑 아빠가 생각난다. 못 뵌 지도 꽤 됐다.

 

취미를 하나 가지긴 해야겠다. 하루종일 하는 거라고는 방구석에 처박혀서 벽난로나 들여다보는 것밖에 없으니. 벌써 봄이라서 불을 피울 만한 적당한 핑계도 다 사라지고 있다. 아무래도 좀 더 나가서 돌아다니긴 해야겠는데, 그럴 때면 다시 겨울이라도 된 양 엄청 추워진다. 스웨터가 됐든 뭐가 됐든 하나 걸치고 다녀야겠다. 래리티가 짜 준 빨간 스웨터를 입고 다녀도 좋겠지만, 좀 더 좋을 때 입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화사하고 밝은 색깔 옷이니까, 요즘같이 '화사하지 못한' 나날을 보내는 중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집에 짱박혀 있어 봐야 무슨 소용인가. 일기 쓰는 짓도 시간 낭비다. 어디서 난 건진 몰라도 돈이 한무더기 있긴 한데, 이걸로 평생 먹고 살 수는 없을 터다. 행려병자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어디서 돈이든 음식이든 구할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전에 일기 써 놓은 걸로 내가 옛날에 돈을 어디서 구했나 좀 보려고 했더니, 아무것도 없었다. 사실, 죄다 빈 페이지라 성질도 많이 났다. 깨끗한 종이를 제끼고 중간부터 일기를 쓸 거면 뭐하러 일기를 쓴단 말인가.

 

비가 온다. 창문을 열어 놓았다. 난롯가 말고도 달리 볼 게 있다니 좋은 일이다. 방에 봄비 냄새가 퍼진다. 4월 오후의 맛이 난다. 왠지는 몰라도 소름끼친다. 대체 왜? 4월 좋은데. 지금같은 상황에서 벗어나 포니빌 바깥으로 나갈 수만 있다면 더욱 멋진 4월이 될 것이다. 엄마 아빠는 뭐 하고 계실까.

 

취미를 가지긴 해야 할 것 같긴 한데, 그냥 좀 더 걷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나가서 걷는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진저리가 쳐진다. 아무래도 스웨터를 껴입는 게 나을 것 같다. 래리티가 준 스웨터도 좋지만, 너무 자주 입는 것 같아서 좀 그렇다. 옷 자체가 화사하다 보니, 요즘처럼 화사하지 못한 기분에는 어울리지 않기도 하고.

 

왜 여기 들어앉아 있는 거지? 일기를 써도 뭐 그럴듯한 답이 나오지를 않는다. 돈은 무더기로 쌓아 놨는데, 어디서 났는지를 모른다. 돈이 어디서 났지? 직업을 내가 구했었나?

 

비 온다. 4월인 모양이다. 바로 어제가 2월이었던 것 같은데... 아니, 9월이었던가? 난방절은 어디로 갔지? 트와일라잇이 연극 무대에 섰다고 했었는데, 그게 재작년 난방절이던가? 롤러스케이트를 받았었다. 엄마 아빠는 기뻐하셨다. 나도 좋아했던 것 같다.

 

비 온다.

 

뭐가 잘못된 것 같은데. 뭐가 잘못되긴 했는데...

















일기.

 

오늘 밤에 집에 오다가 길을 잃었다. 아니 진짜, 촌구석 길은 다 비슷비슷하게 생겼고 사방에는 다 비슷하게 생긴 숲이 가득한데 심지어 동네 주변이 죄다 산림이라 어디가 어딘지 헷갈릴 때가 있다. 포니빌 북쪽 어귀에서 한참을 헤맸던 것 같다. 참 추웠다. 빨간 스웨터가 다 해져서 찢어졌다. 하기사 옷의 만듦새를 보아하니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다루는 걸 전제로 짠 것이지 나처럼 막 다루는 사람이 입으라고 만든 건 아닌 것 같다. 끝장난 옷이긴 한데, 그래도 좋은 옷이어서 그런지 아직 귀티가 난다. 이걸 어떻게 써먹을지는 잘 모르겠다. 담요 같은 걸로 재활용할까 생각 중이다. 내가 당장 필요한 건 재킷 같은 겉옷류인데.

 

어쨌든, 그렇게 몇 시간을 헤매고 있는데 웬 여자가 톡 나타난 것이다. 마침 잘 됐다 싶어서 길을 잃었으니 집까지 가는 길을 좀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 말을 들었으니 당신 집이 어떻게 생겼냐고 묻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는데, 정작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멍청한 표정을 짓는 것밖에 없었다. 즉슨 이걸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애매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대화 주제를 바꾸는 데는 성공했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 여자가 일 분 일 초가 멀다하고 주절거리는 말들의 결론은 결국 사과 하나로 귀결되었고, 사과 얘기를 안 한다 싶으면 본인의 부모 이야기나 우리가 따라가는 길 북쪽으로 보이는 널따란 사과 과수원 이야기일 뿐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창가에 앉은 앨이 고개를 갸웃하며 야옹, 하고 우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내 집인 줄도 몰랐을 것이다. 이제 가야겠다고 말을 꺼내니 이제는 그 여자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무시무시한 한기가 느껴져서 냅다 뛰어 집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걸었다.

 

앨은 말 그대로 내 다리를 덮치듯이 달려들었다. 밥그릇이 비어 있었다. 물그릇의 물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사료를 찾아 근처를 더듬거렸는데 찾을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는 공황이었다. 가게 문을 닫기 전에 냅다 시내로 뛰어가 얘 사료를 사들고 오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이번에도 집에 오는 길을 못 찾아서 방황한다면 앨은 계속해서 굶고 있어야 할 것이다.

 

뭐 그래도 사료가 있긴 있었다. 발굽에 밟히는 게 뭔가 하고 보니 사료였다. 내가 나가 있는 동안 앨이 사료 봉투를 뜯은 것이다. 이제 보니 고양이 화장실도 비울 때를 한참 넘겨서, 화장실 바깥 몇 군데에 실례를 한 모습이 보였다.

 

대체 바깥에서 얼마나 헤매고 돌아다녔던 것인지, 나는 정말, 정말 모르겠다. 알고 싶은지도 잘 모르겠다. 앨이나 안고 있고 싶다. 앨이 옆에서 떨어지질 않는다. 얼마나 엉기는지 글쓰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내가 와서 행복한 모양이다.

 

나도 행복해지고 싶다. 정말.


















일기.

 

동네 사람들마다 가례嘉禮*1 얘기로 떠들썩하다. 처음에는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 어떤 재수도 좋은 남자를 데리고 사시려나 보다 싶었다. 그런데 떠도는 말들을 듣자하니, 샤이닝 아머와 미 아모레 드 카덴차 공주님 사이의 혼례가 캔틀롯 왕성에서 열린다는 것이다. 믿을 수가 없다. 트와일라잇네 오빠가 결혼을 하다니!

 

얘길 듣자마자 축하해 주러 갔다. 몇 시간 내내 동네를 뒤지고 다녔다. 트와일라잇이 다른 여자 몇 명과 함께 도서관을 나오는 모습을 포착할 수 있었다. 오빠가 결혼하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고 하며, 앞으로 잘 살면서 백년해로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당혹해하는 표정을 짓는데, 이쪽이 더 충격이었다. 오빠 결혼 소식도 몰랐냐고 농담하듯 물었다. 그랬더니 알고 있었다며, 다른 누구도 아닌 그쪽이 샤이닝 아머의 결혼을 축하하는 게 이해가 안 되서 그랬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깔깔 웃고 문댄서가 이 얘길 들었으면 상처에 소금을 바르는 것마냥 엉엉 울었을 거라고 말했다. 어쨌든 걘 항상 샤이닝 아머에 관심이 지대했으니까.

 

왠지는 몰라도 트와일라잇이 귀를 축 늘어뜨리더니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서, 안아주고 위로해 주려고 했다. 트와일라잇과 함께 있던 여자들이 끼어들었다. 대체로 다 화가 나 있었고, 심지어 날 죽일 듯 노려보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 놀려먹고 싶으면 다른 사람이나 알아보라며, 냉큼 썩 꺼지라는 것이다. 그러더니 트와일라잇을 데리고 어디론가 가며 저런 작자랑은 상대를 말아야 한다고 위로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하면 안 되는 말이라도 했나? 그냥 장난 좀 친 거 아닌가. 문댄서가 평소 하는 짓에 비하면 양반인데. 왜 나를 생판 모르는 사람 취급하는 거지?

 

자리를 떠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본 다른 사람들은 하나같이 즐거워 보였다. 내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인 양, 이쪽으론 눈길 한번 주는 법이 없었다. 이게 다 나쁜 꿈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는 중, 집에 도착해 이 일기를 끄적이고 있다. 전에 쓴 일기는 읽을 수 있겠지만, 잠에 취해서 쓴 글씨는 알아먹기 힘들겠지. 적어도 지금은 '그렇지 않을까?' 정도다. 트와일라잇이 전에 한 번 가르쳐 줬었지.

 

트와일라잇, 내가 뭘 잘못했길래 그래? 여긴 너무 추워. 정말 너무 추워. 너랑은 멀어지기 싫어. 내가 뭘 잘못했어?

 

제발 누구라도, 아무라도 내가 무슨 짓을 했길래 이렇게 됐는지 말해 줘.

















일기.

 

체인질링이 뭐길래 그러지? 오두막 앞마당에서 텃밭을 관리하면서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있는데, 왕실근위대 갑옷을 입은 페가수스 근위 둘이 쳐들어와 몇 가지를 갑자기 물었다. 대부분은 매우 사적인 내용이었다. 나이는 몇 살이고 이름은 무엇인지, 고향은 어디인지 같은 것. 질문에 반 정도밖에 대답하지 못했는데, 뭔가 굉장히 부끄러웠다. 게다가 근위들이 이쪽을 매우 수상쩍어하는 눈치로 쳐다보길래, 절로 몸이 움찔거렸다.

 

아무튼 돌려보내긴 했다. 그런데 한 시간도 되기 전에 또 집에 들이닥치는 게 아닌가. 애초에 처음부터 나한테 뭘 물어 보지도 않았던 것처럼 똑같은 질문을 되풀이하는 거다. 사람 놀리는 건가?

 

최선을 다해 그 양반들 성미를 맞춰 주고 돌려보냈다. 곧장 집으로 들어와 문을 걸어잠그고, 창문 뒤에 숨어서 저것들이 어쩌나 몰래 훔쳐보았다. 세 번째로 오두막 쪽을 향해 올라오더니, 집을 보고는 다가와서 문을 두들겨대는 것이다. 최대한 오랫동안 기척을 숨기고 있었더니, 이퀘스트리아 전역에 파견되어 자기들이랑 똑같은 짓을 하고 다니는 다른 근위대원 얘기를 주워섬기며 알아서 돌아갔다.

 

얼마간 시간이 지난 뒤, 시내에 내려갔다가 사람들이 근위대원 얘기를 하는 걸 들었다. 보아하니 전국에 '체인질링'인가 하는 것들이 이미 침공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이 있는 모양이었다. 가례 이후 다들 신경이 곤두서 있다.

 

잠깐, 가례?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셀레스티아 공주님이 결혼하셨나? 루나 공주님인가?

 

이 얘기만 쓰면 머리가 아프다. 잠깐 쉬어야겠다.

















일기.

 

가끔 신문을 읽는다. 왜 그러는진 나도 모른다. 좋은 소식이 실려도 나에게는 하등 도움이 안 된다. 엄마나 아빠, 적어도 집 근처 이웃들이 끔찍한 해를 입었다면 분명 신문에 실릴 것이다. 그 소식을 보고도 견딜 수 있을까. 요즘은 뭘 견디는 게 무척이나 어렵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북방에 새로이 발견된 지역 이야기를 해보자. 크리스털 왕국이라는 곳이다. 전 국토가 크리스털로 되어 있기라도 하다는 건가? 아니면, 거기 사는 사람들이 크리스털로 되어 있다는 건가. 잘 모르겠지만 알고 싶지도 않다.

 

알고 싶으면 차라리 낫겠다. 새로운 발견의 첨단에 설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전에는 한 번도 나눠보지 못했던 멋진 대화를 해 보고 싶다. 다른 사람들이 기꺼이 기억하거나, 웃거나, 더러는 인용하기까지 하는 좋은 말을 해 보고 싶다.

 

아니지. '인용'이라는 말은 엄밀히 말하면 잘못된 표현이다. 하지만 내 사전은 갈수록 얇아져만 간다. 점점 더 글 쓰기도 힘들어진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문장을 지어내려고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날씨가 더워져서 그런가. 오두막 앞을 지나가던 농사꾼 여자가 벌써 7월이라고 했었다. 7월인데 왜 이렇게 추운지. 밤만 되면 이가 딱딱거린다. 벽난로에 불을 피우긴 하는데, 굴뚝에 연기가 나면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될 것이다. 물론 연기를 보고서도 나오는 말들은 내 걱정을 하는 말들은 아닐 터다. 그냥 다른 누구랑 관련된 대화 자체를 하고 싶지 않다.

 

그냥 시작 자체를 안 하고 싶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일기.

 

이상한 일이다. 신문에 트와일라잇 스파클이란 이름이 실렸다. 캔틀롯 왕실의 신임 총리대신으로 취임했으며, 이에 따라 상응하는 행정력이 부여되었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신문에는 셀레스티아 공주님 이야기가 일언반구도 실리지 않았는데, 그 대신 '루나 공주가 집무실 일부를 내주고 함께 국정을 돌보고 있다'고 쓰여 있었다. 그 '루나 공주'가 내가 아는 그 '루나 공주'인가? 달의 여인, 나이트메어 문 얘기하는 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포니빌에 온 것부터가 트와일라잇을 만나기 위함이었는데.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 올해 하지 태양절 축제에 포니빌에 왕림하시기로 되어 있으니, 그 축제 준비를 해두라고 파견된 친구를 보기 위해서였는데. 여기 있어야 할 친구가 순식간에 캔틀롯 왕실의 총리대신이 되어 왕좌에 앉았다고? 문댄서가 자기 갈기를 다 씹어먹는 게 더 현실적이겠는데.

 

하늘에 맹세코 이건 아주 질 나쁜 장난의 일종이 틀림없다. 그럴 것인데 왜 이리 불안하지?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 좀 해 달라고 말을 걸기가 무섭다. 집 밖에만 나가면 해가 쨍쨍한 한낮에도 미칠 듯한 한기가 덮친다.

 

아무래도 집에 있어야겠다. 살기 좋고 편안한 집이 낫다.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생각이 정리될 때까진 여기 있을 생각이다. 뭔가 착오가 있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게 다 끔찍하고 멍청한 실수여야만 한다.

















일기.

 

일기장에 빈 페이지가 좀 보인다. 왜 그런지 알 것 같다. 일기장을 열었다. 한쪽 페이지를 들여다본다. 뭐라도 적어야 할 건 확실한데, 뭘 적어야 할지 모른다.

 

아침에 일어났다. 산들바람이 기분 좋았다. 좀 돌아다녔다. 사람들이 웃었다. 사람들이 대화하는 걸 들었다. 나도 그 무리에 낀 것 같았다.

 

오후가 되었다. 별이 뜰 때까지 나무 밑에 앉아 있었다. 별자리가 반짝이는 모습은 아마 지구상에서 나 혼자밖에 보고 있지 않은 건 아닐까, 싶은 바보같은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굳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 것이며, 그 중에서 뭐라도 보는 사람은 또 얼마나 있을까.

 

하늘은 넓다. 밤이 올 때까지 계속 보고 있어야겠다. 밤은 앞으로도 계속 올 테니.
















일기.

 

오늘 밤도 추운데, 평소와는 좀 다른 느낌의 추위다. 사람들이 모여 있다. 발굽에 밟힌 눈이 뽀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가게 진열장을 들여다본다. 예쁜 장식등이 가득하다. 눈을 깜박인다. 몇몇 사람들이 장식을 떼어 창고에 집어넣고 있다. 다시 깜박인다. 선물을 열어보고 있다. 뭔가 반짝거리는 게 발굽에 쥐여져 있다. 롤러스케이트다. 무슨 어린애가 12월에 롤러스케이트를 사 달라고 한대?

 

잠시 일기 쓰기를 멈추고 난롯가를 들여다보고 있다. 편안해진다. 방금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아침이 밝았다. 웃음이 멈추지 않는다. 별들이 나와 숨바꼭질을 하는 것 같다. 내일은 꼭 잡아야지.


















일기.

 

누가 꽃, 그러니까 튤립 한 송이를 줬다. 나를 '천사'라고 불렀다. 그 사람을 마주보았다. 눈동자 색이 아빠가 풍경화를 그리러 나가던 발코니, 그 너머로 보이는 캔틀롯 주택가의 지붕과 똑같았다. 그렇게 말했다. 당황한 눈치였어도, 온화해 보이는 얼굴에 그것만 있는 건 아니었다. 거기에 입맞추고 싶었다. 그 사람에게 입맞추고 싶었다. 너무 추워서 그러지 못했다.

 

그 다음 정신을 차려 보니 집이었다. 이불이 눈물에 젖어 있었다. 내 눈물을 마신 것이 그의 노란 솜털이었기를 바랐다. 나는 그 남자를 모른다. 그럼에도 내가 거기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내가 누구인지 그 사람이 말해 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일기.

 

화톳불을 이렇게 많이 피워 놓은 건 처음 본다. 동네 사람들은 하지 태양절 축제라서 그렇다고 말한다. 경이로운 표정을 지었더니 얘기해 준 젊은 부부가 깔깔대고 웃었다. 그게 대체 뭔지 설명해 달라고 했다. 둘 옆에 앉으라고 했다. 부부는 아이 둘을 대동하고 있었다. 꼬마들이 맑고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계속 쳐다보았다.

 

불가는 따스했다. 별빛에 목욕하듯 발굽을 뻗었다. 나는 어린애가 된 듯 웃었다.

 

부부는 소소하지만 행복한 일상과,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식들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오래 전, 그러니까 둘이 결혼하기 1년 전에 있었던 하지 태양절 축제에서 정식으로 연인 관계가 되었다고 했다.

 

그 얘기를 좀 자세히 해달라고 했더니, 수상쩍어하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소름이 돋았다. 불가에 앉았는데 왜 그렇게 추웠을까. 혹시 어디서 찬바람 불지 않느냐고 묻자 만취한 주정뱅이를 상대하듯이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꼬마 둘은 여전히 순수하고 깨끗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빙긋이 웃으며 그 눈에 비친 내 모습을 보려 얼굴을 가까이 했다. 아비는 그런 내 행동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른 화톳불로 꺼지라고 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나는 물러났다. 하늘에서 폭죽이 터지는 소리에 놀랐다. 밤하늘에 번지는 섬광은 밝고 찬란했지만, 내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혼자서 집에 돌아왔다.







일기.

 

이제 보니 달이 옛날 모습이랑 좀 다르다. 얼룩 하나 없이 반들반들, 반짝인다. 근처에 있던 별들도 보이지 않는다.

 

피가 얼어붙는 것 같다. 뭔가 집 밖 숲 속에 도사리고 있다. 쇠사슬이 부딪치는 것 같은 소리가 난다. 숨을 쉬면 멈추고, 숨을 참으면 소리가 난다.

 

뭔가가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안다. 거대한 대양, 그 깊은 곳의 수압처럼, 사방에서 들려오는 천둥과 벼락 소리처럼 명징하게 느껴진다. 일기 쓰기를 마치면 이 모든 게 집 밖에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말 것이라는 게 두렵다. 내가 잠든 사이 밖에 있는 것이 집에 들어와서 나를 목졸라 죽이기라도 한다면 유감스러운 일일까?

















일기.

 

사람들 눈에는 내가 비쳐도 비치지 않는 모양이다. 햇살 비치는 다리에서 잠깐 지나치는 행인에 머무르는 시선이 으레 그러하듯 나와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아주 짧은 순간 포개지는 때가 있다. 나는 그 때 현실로 다시 불려온다. 동네 사람들은 다들 웃고 있다. 행복해 보인다. 소리를 버럭버럭 질러대고 싶지만, 저들을 먼 곳으로 밀어내고 싶지는 않다. 나는 공원에 몇 시간을 혼자 앉아 있었다. 지나는 사람들을 보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이쪽에 발굽을 흔들어 인사하는 이들을 보았다. 나는 닿을 수 없는 곳에서 반짝이는 이들이여.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늘의 별을 보듯 그대들을 보는 일뿐인 모양이다.

















일기.

 

일기장에 빈 자리가 많은 이유를 알겠다. 이 공란들은 내 것이고, 나를 기다리는 것이다. 내가 부러 다른 페이지에 일기를 썼다가 나중에 그 앞이나 뒤에 내용을 적어 넣으면 나는 내 과거와 미래를 바꿀 수 있다. 확실하진 않지만 해 볼 만하다. 적은 페이지로 얼마나 뽑아낼 수 있을까 생각해 봐야겠다. 친구를 얼마나 만들 수 있을까. 즐거운 대화나 어떤 이야기, 어쩌면 장대한 모험담을 적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창의력 대장이 아닌 게 아쉽다. 그러면 일이 좀 더 쉬워질 텐데. 그러면 어둠도 좀 걷히지 않을까?

















일기.

 

내가 못생겼나? 냄새나나? 오후쯤에 잠깐 시내에 다녀왔다. 뭐 먹을 만한 걸 건져야 했다. 가는 길에 유니콘 하나와 마주쳤다. 페가수스 근위대 둘이 경호로 붙어 있었다. 아주 높으신 분이거나, 돈이 정말 많은 사람인 듯했다. 설마 그런 사람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볼 줄은 몰랐다.

 

그 사람이 보인 표정은 다른 무엇도 아닌 웃는 얼굴이었다. 요 근처 사시냐고 그 사람이 물었다. 그런 것 같다고 대답했다. 빙긋이 웃더니 일자리나 기초생활수급이 필요하면 시청 사회복지과에 문의하라고 그 사람이 말했다. 감사하다고 대답했다. 왜 그리 친절하게 구는지는 이해 못 하고 있던 차에, 그 사람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초췌하기 짝이 없는 청록색 유니콘이었다. 나는 놀라 펄쩍 뛰었다.

 

근위대가 움찔하는 순간, 그 사람이 진정시켰다. 그리고는 이쪽으로 와 내 어깨에 발굽을 얹고 잔뜩 곤두선 신경을 달래주었다. 그 사람에게선 라벤더와 책 냄새가 났다. 나는 울고 싶었다. 그 사람도 짐작했을 것이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자기는 모든 신민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며 그 누구라도 행복한 삶을 살 자격이 있다고 했다.

 

나는 그쯤에서 진정했다. 아마 웃어 보이기도 했을지 모른다. 당신은 누구시냐고 물었다. 그 사람은 자기를 '총리대신 트와일라잇 스파클' 이라고 소개하고, 왕실의 중요한 일인지 아니면 다른 일인지를 보러 총총히 걸어갔다.

 

트와일라잇 스파클이라... 예쁜 이름이다.

 

내 이름은 뭘까.

















일기.

 

텃밭을 돌봤다. 땅에 박혀 있던 나무 말뚝 같은 것에 발이 걸렸다. 오두막 바깥의 나무 밑에 숨어 있던 것이다. 처음에는 이게 뭔가 싶었다가, 그 밑에서 썩어가는 꽃의 잔해를 보고 깨달았다.

 

뒷걸음치며 묘비에 적힌 이름을 읽었다. "앨러배스터" 라고 적혀 있었다.

 

앨러배스터가 누구지? 내가 아는 사람인가. 혹시 이전에 나를 도와 준 은인인가? 나를 도운 사람이 있을 수 없고, 나의 벗이 되어 준 이가 있을 수 없으며 또한 지금 나를 도울 수 있는 사람도 있을 리가 없는데?

 

맙소사. 여기서 몇 년이나 살았던 거지?

















일기.

 

완연한 겨울이다. 8월쯤 되었나 싶었는데. 뒤를 바라보며 쌓인 눈 위를 걸었다. 눈을 깜박이고 나자 발자국이 사라져 있었다. 물기가 없어 푸석한 서리 위를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돌아다니는 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옷장에 숄이 하나 있었다. 새빨간 색이고, 다 해져서 올이 드러나 있었다. 누가 꿰맸는지 몰라도 솜씨가 참 형편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몸을 덥히는 기능 면에서는 전혀 하자가 없었다.

 

캔틀롯에서 있을 난방절 연극 이야기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이명이 울었다. 늘어선 나무와 덤불, 상점에서 일제히 김이 훅 뿜어져 나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런 일은 없었고, 다른 일도 없었다.

 

내가 난방절 연극의 배우로 뽑히면 무슨 역할을 맡게 될까 생각했다. 턱수염 스타스월이 배역에 있었던가? 그 사람 자리가 없는 건 말이 안 된다.

 

눈은 보기 싫다. 텅 빈 종잇장처럼 희고 공허하다. 세상에 아직 언설이 충분치 않은 모양이다. 집을 오고가는 길은 너무나 짧다. 이제 그만 싸돌아다니고 돌아가야 할 것 같은데, 달리 어딜 가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일기.

 

오두막 침대에 내 체취가 묻어 있기는 하지만 내 침대는 아니다. 이게 말이 되나? 서랍장 옆에 종야등이 있어야 할 텐데 없다. 그 서랍장도 없다.

 

빗소리가 들린다. 밖을 내다보진 않았다. 결국 창 밖을 흘끔 보았는데, 보여야 할 캔틀롯 주택가의 정경은 보이지 않았다. 일기를 적는 지금에도 내가 여기 왜 앉아 있는지 모르겠다. 혹시 이게 꿈이라면 꿈에서 깰 때까지는 이 짓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이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아니면 얌전히 눈 붙이고 자는 게 좋겠다. 전에는 이 방법이 먹혔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일기.

 

시내에서 장례식이 있었다. 조문객이 무리지어 모여들었다. 나는 멀리 떨어져서 장례식에 무슨 말이 나오는지 들었다. 몇 명이 나와서 입술을 씹어대며 고인을 기리는 추도문을 읽었다. 고인의 딸이 장례의 마지막을 맡았다. 젊은 유니콘 여자가 앞으로 나섰다. 뿔을 밝히더니 플루트를 입에 대고 부드럽지만 쓸쓸한 곡조를 연주했다. 하염없이 눈물을 떨어뜨리던 것을 감안하면 참으로 놀라운 연주라고 할 만했다.

 

나는 곡이 끝날 때까지 가만히 듣고 있었다. 문상객들이 고인 생전에 있었던 일들을 추억하는 말들을 조용히 꺼내놓았다. 나는 계속해서 딸이라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친인척 몇몇을 포옹하고 뺨을 비비면서 그녀는 애써 웃고 있었다.

 

플루트 소리가 귓가에 남아 있다. 이유는 아직 잘 모르겠다. 더 슬퍼할 이유가 남아 있지 않은데도 슬픈 기분이 든다.

















일기.

 

장을 언제 봐 왔더라. 어제였던가? 요사이 장 봐 오는 일이 힘에 부친다. 감기에 걸렸는지 어쨌는지, 뿔의 감각이 많이 무뎌졌다. 내 평생을 달고 살아온 내 신체의 일부인데도 머리를 짓누르는 짐짝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아서 걸을 때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다니게 된다.

 

시험 직전까지 책 붙잡고 공부하면 공부한 게 머리가 아니라 뿔로 다 쏠린다고 엄마가 그랬는데. 지금 생각하면 바보같은 말이다. 내가 뭘 공부하는지도 모르는데 공부할 게 어디 있나. 애초에 여긴 캔틀롯도 아니다.

 

캔틀롯이 아니긴 한데... 왜 머리가 아플까. 기차를 타야 한다. 어딘지 몰라도 아주 중요한 일이 있는데. 친구? 아빠는 왜 말이 없지? 아빠는 복도에 없다. 이 집엔 복도가 없다. 이 집은 대체 뭐지?

 

춥다. 벽난로에 땔감을 더 집어넣어야겠다. 하던 연구도 마무리지어야 한다. 장부터 봐 온 다음에 해도 충분할 것이다. 뿔 쓰기가 힘들다.

















일기.

 

바깥 날씨는 놀랍도록 화창한데 몸의 떨림은 잦아들지를 않는다. 길거리 표지판에 기대어 숨을 골랐다. 눕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다.

 

그 때 그 남자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젊은 남자였는데, 입이 굉장히 잘생겼다. 입을 열어 말하는 모습이 꼭 강아지 같았다. 그 남자는 자기를 파운드 케이크라고 소개했다. 별 병신같은 이름도 다 있다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내 발굽을 잡아 일으켜 세워주기까지 한 친절한 사람에게 그럴 수는 없으니까. 길을 반쯤 건너는데, 폭이 너무 넓은 게 아닌가 싶었다.

 

도와 줘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너무 늦게 인사한 건 아닌가 싶어 등골이 서늘했다. 나를 갓난아이처럼 조심스레 데리고 가는 품이, 내가 잘난 척을 하기도 좀 그랬다. 남자가 웃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하더니,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하면 저기 있는 슈가큐브코너로 오라고 했다. 남자가 총총히 떠나는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가까운 상점 유리창에 내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

 

유리 위로 비친 거울상을 봤는데, 웬 쪼글쪼글하게 늙고 안색은 창백한 녹색 솜털의 여자 때문에 심란해졌다. 그 여자와 내 눈이 동시에 떨렸다. 헌데 그 여자의 갈기 모양이 굉장히 낯익었다. 이마 위로 얼룩덜룩한 검버섯이 나 있는데, 그 질감도 어딘가 익숙했다.

 

내가 이렇게 늙었던가? 베란다에 앉아 아침을 먹었던 게 어렴풋이 기억난다... 아니, 기억을 맛본다는 게 맞다. 엄마는 출근하기 전에 향수를 뿌린다. 아빠가 쓰는 팔레트가 창가에 놓여 봄바람을 맞고 있다. 발굽을 쭉 뻗으면 아빠 붓에도 닿을 수 있을지 모른다. 내 방 욕실에서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싶다. 그래, 맞아. 롤러스케이트. 밝은 보라색이다. 그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다. 네 다리 관절마다 파스텔톤 물감을 왕창 칠하고 사방을 돌아다니며 내 나름대로의 역작을 완성해 간다. 이 모든 과정에서 콧노래도 빠질 수 없다. 잠깐, 콧노래를 흥얼거린다고? 난 그런 적 없다.

 

엄마 아빠가 들이닥친다. 언제나 나를 가장 먼저 혼내는 건 엄마다. 큐티마크 없는 엉덩이에 맴매를 맞고 운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건에서 바르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는 안다. 창의적이지 못한 것이다. 나는 창의적이 되어 본 적도 없고, 앞으로 그럴 수도 없다. 내가 건드렸다 하면 난장판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 내 눈 앞의 저 난장판을 형상화한 저 여자처럼 말이다. 귀 밖으로 뻣뻣한 털이 튀어나오고, 쪼글쪼글한 입술에서는 침이 질질 흐르지 않는가.

 

몸을 돌려 돌아선다. 세상도 나와 함께 돈다. 머리가 갈수록 무거워진다. 어지러워서 우체통에 기대어 잠시 쉬었다. 심장이 마구 뛴다. 내게도 심장이 있고, 미친 듯이 뛰어댄다. 내가 어떻게 저기까지 갔지 싶다. 발굽을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다. 그 누가 이렇게 느린 걸음을 걸을 수 있을까. 이게 살아 있는 걸까. 내 인생은 지금까지 이래 왔던 걸까.

 

그래도 어떻게 집에 왔다.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의자에 앉아서 이걸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다시 그 기나긴 거리를 다시 건너올 수 있을지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그러고 싶지도 않다. 언제 다시 거울상을 보게 되더라도 유리 위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을 터다.

















일기.

 

밥을 먹기는 해야 한다. 먹어야 산다는 것쯤은 안다. 뱃속에 뭐라도 넣으면 속이 아프다. 뭐가 잘못된 것 같다. 동네 병원 가서 진찰을 받았는데, 바로 몇 분 있다가 나를 처음 보는 사람 대하듯이 하는 게 아닌가. 젊은 사람들이 왜 저럴까. 젊고 멍청한 자들이다. 내가 이렇게 살고 싶어서 이렇게 사는 게 아닌데. 내가 이렇게 나약해지고 싶어서 이렇게 된 게 아닌데. 내가 뭐라도 할 수 있었다면 진즉 했을 것이다.

 

너희도 언젠가 나처럼 된다고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이 짜증나는 기분이 된 것이다. 뭔가 나를 내부에서부터 불태우고 물어뜯고 깨부수고 있다. 이런 사람은 아마 세상에 나 하나뿐일 것이다. 저들의 웃음과 미소와 경쾌한 걸음이 보인다.

 

세상에 아픈 사람은 나 하나뿐인 모양이다.

















일기.

 

춥다.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화창한 아침 안개다. 저기에 별들이 떠 있었겠지. 돌아누웠다. 종야등이 없다. 늙은이가 기침하며 쌕쌕댄다. 내가 숨을 참을 때마다 늙은이의 소음공해도 멈춘다. 일어나야겠다. 움직여야 한다. 이불 한 장인데도 무겁기 짝이 없고, 내 뿔은 그것보다도 무겁다. 어떤 놈이 내 뱃속에 불 붙인 석탄을 집어넣은 것 같다. 울지도 웃지도 않는다. 여기 있을 뿐. 항상 여기 있을 뿐이다. 왜 아무도 없지? 왜 나 하나밖에 없지? 언제부터 이랬지? 내가 이렇게 되기를 선택한 게 언제지? 왜 난 집에 못 가지? 집에 가고 싶다. 집에, 집에 가고 싶다...





































입김이다. 입김이 보인다. 방 밖에 드리운 그림자 같다. 엄마? 아빠? 엄마 아빠에요? 어두워요. 추워요. 저 때문에 화나셨어요? 제가 싫어서 떠나 버린 거에요? 공부 더 열심히 할게요. 제가 뭘 공부하는지는 저도 몰라요. 옮겨 적자마자 잊어버리고 말아요. 내가 옮겨 적기는 하는 걸까요? 온통 백지에요. 꽉 채울게요. 언젠가 별이 나타나듯 엄마 아빠도 저 어딘가에 있겠죠. 눈을 깜박이면 빛이 보여요. 엄마 아빠가 내 뒤에 떠 있는 것처럼요. 선물로 뭐 주셨어요? 뭔가 덜컹거려요. 롤러스케이트에요. 눈 위에서 롤러스케이트를 어떻게 타요. 어디 있어요? 화내지 말아요. 마음에 들어요. 정말, 정말 좋아요.





































엄마? 아빠? 제발요. 엄마 아빠가 이걸 읽기라도 하면 나도 혼자가 아니에요. 저 엄마 아빠 딸이잖아요. 저 여기 있어요. 여기가 어딘진 모르지만 저 여기 있어요. 밖은 어둡고, 여긴 추워요. 불을 피우려고 해도 몸이 움직이질 않아요. 움직이려고 하면 뱃속에서 칼이 움직이는 것처럼 아파요. 언제 칼을 먹은 건지 모르겠어요. 아마 그래서 아픈가 봐요. 걱정시켜 드리려고 그러는 게 아니에요. 엄마 아빠가 이걸 볼 수만 있으면, 나를 찾을 수도 있을 거에요. 어딘진 몰라도 병원에 갈 거에요. 동네 사람들이 좋은 사람들이거든요. 기억력도 별로고 별 웃기지도 않는 걸로 내게 관심을 끊어 버리는 일도 있지만 괜찮은 사람들이에요. 가끔 이상한 행동을 하긴 해도 착하고 친절한 사람들이라, 잘 대해 줘요.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여기 생활도 나름대로 괜찮아요. 그래도 더는 못 기다리겠어요. 갈수록 어두워져 가요. 별도 보이지 않아요. 아빠는 별을 잘 알지요. 아빠는 별 그림을 그리잖아요. 가끔은 지붕 위에서도 그리고, 가끔은 언덕에 올라가서도 그리고, 또 언제는......





































아빠를 봤는데. 아빠를 봤는데, 그냥 보내 버렸어. 공주님 맙소사. 내가 왜 그랬을까?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을까? 내가 생각이란 걸 할 수는 있는 걸까? 나처럼 잿빛 갈기였어. 혜성처럼 바람에 날렸어. 이제 알겠어. 이제야 알았어요 아빠. 죄송해요. 아빠를 그냥 보내려던 게 아니었는데. 제발 돌아와 주세요. 전부 다 나를 떠나가요. 남는 거라고는 어둠과 달빛 몇 조각뿐. 나는 깨지도 않은 달걀에서 깨져나온 껍데기 조각 같은 인생밖에 없어요. 그 창백한 광택을 한 번 건드리기라도 하면 저 멀리서 들려오는 쇠사슬 소리처럼 몸이 떨려요. 아파야 하는데 아프지가 않아요. 저 빛처럼, 아빠의 웃는 얼굴에서 느껴지는 온기처럼 사라져 가요. 괜찮아요. 롤러스케이트 좋아요. 튤립만큼, 빨간 스웨터만큼, 짙은 자주색 위로 보라색 줄 하나가 그어진 갈기만큼 좋아요. 아빠를 진정 사랑할 수 있었다면, 시인이 그러하듯이, 또 작가가 그러하듯이 그 사랑을 아빠에게 표현할 수 있었다면, 말로 옮길 수 있는 것보다도 더 깊이 세상을 어루만지는 그들의 솜씨를 내가 쓸 수 있었다면, 말로 색을 칠하고 다시 말을 통해 그 색을 다른 사람에게 들려 줄 수 있는 재주가 있었다면, 흐르는 눈물을 나비로 바꾸는 그들의 말이 있었다면 아빠를 눈앞에서 보내는 일은 없었을 테고, 아빠도 나를 떠나지 않았을 텐데.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돌아와 주세요. 부탁해요. 이렇게 빌게요. 제발요. 돌아와 줘요. 돌아와 주세요. 제게 돌아와 주세요. 다시 아빠 품에 안아 주세요.





































나 하나만 그럴 리는 없다. 그럴 수가 없다.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려온다. 그 말은 나보다 위대하다. 그 말은 우리 중 그 누구보다도 위대하다. 총체이면서 복수인, 내가 마땅히 널리 알려야 할 말이자 내가 이미 알리고 있던 말이다. 어떤 움직임이 느껴진다. 건널 수 없는 어둠에 나를 짓누르고 뭉개는 압력이 느껴진다. 어딘가에서 빛이 보인다. 내 꿈에서 흘러나온 빛이다. 나도 꿈을 꾸었었다. 그 꿈에 이름은 없지만, 어떤 얼굴은 있어서 영혼의 눈에, 사람들의 눈에, 친구들에 눈에 비친다. 나 혼자서만 이런 존재일 리는 없다. 그건 옳지 않다.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고 있다. 왜 그럴까? 왜 나는 혼자일까? 어디로 가는 걸까. 내 말들이 나를 인도하는 곳은 어디인가? 별들이 향한 곳일까? 거기엔 엄마 아빠도 있을까? 거기서 날 기다리고 계실까, 아니면 영영 나를 버리고 떠나 버리셨을까? 숨을 쉬면 숨결이 드나든다. 세상에 시작이 있다면 그 끝도 있는 것이 온당하다. 내가 그리로 가는 것인지, 거기서 달아나는 것인지 모르겠다. 둘 다일지도 모르지. 항상 둘 다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둘 다였을지 모르는 것이 나를 찢어발길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시, 내 안의 무언가를 좋아하게 될 수도 있겠지. 어쩌면 그게 내게 말을 걸어 올 수도 있을 터고, 그러면 우리는 다시 하나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아무것도 없지만, 세상 모든 것이 여기 있군요.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시작할 수도 있다는 뜻이에요. 나는 이해하기 위해 존재하지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나는 내 생각을 앞에 앉혀두고 바라봐요. 내 생각도 나를 바라보지요. 우리는, 나와 생각은 서로 털어놓고 이야기해요. 나는 심연 위에 서 있지만, 거기 빠져 있지는 않음을 깨달아요. 아직 추락하진 않았어요. 아직 최후의 숨결을 토해낼 시간은 아니에요. 최초의 숨결을 들이마시지도 않았거든요. 세상 모든 것은 발생의 순간, 그 끄트머리에 존재해요. 따라서 세상 모든 것은 세상 모든 것이 되어 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지요. 제 머릿속에는 수도 없이 많은 지류가 하나로 합쳐져 흐르는 커다란 강이 하나 흘러요. 저는 거기에 입을 대고 마시면서 토해내고 있는 것이지요. 나는 존재하고, 그것은 확실한 사실이에요.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살아 있었다고, 나중에도 내가 살아 있으리란 보장이 있을까요? 내가 아는 것은 오직 현재뿐이에요. 내가 아는 것은





































드디어 당신을 찾은 것 같아요. 켜켜이 쌓인 그림자와 어둠 속에 숨어 당신의 존재를 숨기고 있었군요. 드디어 내 침대 너머에서, 내 숨결 너머에서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와 주었군요.

 

왜 지금까지도 당신을 품에 안지 않고, 당신의 뺨에 얼굴을 비비지 않고, 이루어졌어야 할 만남을 미뤄 왔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요. 지금까지 당신은 나와 함께 있었군요. 보다 정확히는, 내가 당신을 내 여정에 동행시켰다고 해야겠지요.

 

당신이니까요. 항상 당신이 있었어요. 내 눈물도 웃음도 당신과 함께했어요. 엄마 아빠의 숨결 속에도, 내 꿈 속에도, 내 친구들의 눈 속에 반짝이던 별빛에도 당신이 있었어요. 내가 늘어놓는 말들은 재미도 없고, 솜씨도 없으며 멍청하지만 당신을 위해 준비한 것들이에요. 당신이 내 말들로 시를 써 주세요.

 

이렇게 글을 적고 있는 것도 당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에요.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거기 있음을 알아요. 당신의 존재를 느낄 수 없어서 당신의 존재가 있음을 알아요.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가 우리를 어둠과 먼지 이상의 존재로 만들어 주고 있다고 할까요. 당신이 누군지 나는 모르지만, 오직 당신을 위하여 이 글을 써요.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서로에게 다가가고 친해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에 과연 무엇이 남을까요. 세상에는 말로 옮길 수 없고 오직 느낄 수만 있는 것이 존재함을 계속 알려주는 무언가가 있기 마련이죠. 사람의 삶은 찰나와도 같지만, 확실한 것은 확실히 할 수 있는 선택의 기회가 존재한다는 것이죠.

 

사랑해요. 당신이 누구든, 어디서 왔든, 어디로 가든,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애정하고 축복해요. 내 심장은 죽어가고, 정신은 흩어져 가지만 나는 내게 남은 전부인 이것들로 당신이 최상의 기쁨과 조화를 누리기를 진심으로 바라요. 어둠은 너무나 크고 굶주렸으며 상대할 수 없이 거대하지만, 그 죄악은 우정, 오직 우정을 통해 극복할 수 있어요. 우리는 여럿이면서 하나이기에, 우리는 하나이므로 흩어지지 않고 구분이 없어요. 그러므로 그 무엇도 우리가 고독의 나락 속으로 아름다운 불빛을 쏟아넣을 수 있게 하는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가치를 찢어 없애진 못할 거에요.

 

우리는 살아 있으므로 그 자체로 멋진 존재들이에요. 나는 멋졌던 존재가 아니라 멋진 존재이기에, 멋진 존재가 될 존재가 아니라 이미 멋진 존재이기에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지금 이 순간, 이 눈물과, 내 가슴 속에서 올라온 환희의 함성을 통해 나는 얼어붙은 우주의 고적을 건너 당신의 삶을 응원해요.

 

우리는 하나로 뭉쳐 있지만 또 여럿이기도 해요. 함께한다면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고들 하죠. 멋진 말이에요. 당신 생각은 어때요?


























































 

햇빛이 보인다. 희미하게나마.

 

그렇게라도, 보인다.

 

이 두 눈에 보인다.

 

창문 밖이 보인다. 저 안개 너머가 보인다.

 

여기에 얼마나 있었던가. 여기 있는 것도 이제 지치던 차다. 지치는 것에도 신물이 났다.

 

어디라도 나가고 싶어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잠깐 걷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럼 좀 나가 볼까.

 

사람 구경도 하고.

 

웃는 얼굴도 보고.

 

혼자 돌아다니는 것도 좀 민망한데. 일기장이라도 들고 나갈까.

 

거의 다 빈 것이기는 하지만.
















































 

밝다.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날씨.

 

이게 눈인가? 잘 모르겠군.

 

사탕 입힌 간식 냄새가 풍긴다. 맛있을 것 같다.

 

평소 어떻게 웃었는지 기억났다. 그래도 지금 웃는 게 훨씬 낫다. 지금 웃는 게 최고다.

 

공원 너머에 언덕이 있군. 저기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찬란하히라.

 

언덕 오를 힘이 남아 있을런가.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다리에 감각이 없다.

 

내 뿔. 아직 붙어 있는가. 눈앞이 뿌옇다.

 

그래도 다 올라온 듯하다. 그래. 언덕마루로다......

 

오......

 

세상에...

 

정말 멋진 마을이다. 찬란히 빛나는 마을이다. 사람들도 많다.

 

저 사람들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나는 저 사람들이 보인다. 저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도.

 

이제 막 생긴 것이기는 하여도, 멋진 추억이로다.

 

그러면.

 

잠깐 앉았다 갈까.

 

잠깐 쉬고...

 

조금만 쉬었다, 가자꾸나......



















































































 

아름답다.

 

진실로, 아름답다.

 

그래...

 

생각해 보니 그렇구나......

 

나도 노래를 쓸 줄 알았으면 좋았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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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lated 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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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5례의 하나로, 경사스러운 예식이나 왕실 구성원의 혼인을 지칭하는 말. 이 5례의 예법과 절차를 정리해 1474년 국조오례의가 편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