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챕터명은 조지프 콘래드의 소설 '어둠의 심연' (Heart of Darkness)의 패러디.
비록 자신 혼자만의 생각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스쿠틀루는 살아 있었다. 여자는 느긋하게 흔들리는 그물침대 위에 등을 대고 누워 진홍 눈동자로 하모니 호 선실의 적갈색 골격을 훑어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 위로 환희도 비애도 없이 평온한 표정이 감돌았다.
옥타비아의 현악기 소리가 진작에 그쳐서, 그 자리는 이제 그물침대에서 몇 걸음 떨어져 있던 레코드 플레이어의 바늘의 회전운동이 종료되면서 하염없이 미끄러지기를 반복하며 내는 딱딱거리는 잡음으로 채워져 있었다. 스쿠틀루는 그걸 고쳐놓으러 일어선다는 것이 한없이 귀찮았고, 거기에 또 무언가 냉정하면서 관조적이고 흐릿한 무엇인가가 여자 내면의 창백한 난각卵殼과 같은 무언가를, 비행선 선실 내부를 밝히는 전등 불처럼 비추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 포니는 묘비처럼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누워 있었지만, 그녀의 생각은 머릿속에서 시속 백만 킬로미터의 속도로 날아다니고 있었다. 여자의 머리가 이렇게 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다만 이번에는 한 방울 눈물도 흐르지 않은 것이 차이였다.
무엇인가 여자의 밖으로 비집고 나가겠다고, 여자의 고독한 삶의 빈 캔버스에 스미겠다고 그녀 안에서 울었다. 그것이 최후의 숨결을 내뱉으며 여자의 낡아빠진 조각 전부를 하나하나 잡아당겨대서, 그녀는 결국 몸을 굴려 그물침대 밖으로 나가 무감각하게 작업대를 향하여…… 죔쇠와 펜, 잉크를 올려둔 곳을 향하여 걸음을 옮겼다.
스쿠틀루가 필요한 도구들을 한데 모으며 먼지 묻은 선반에서 일기장을 잡아당겨 내리고는 가죽 장정이 된 표지와 페이지를 던지듯 넘겨 빈 페이지가 나올 때까지 넘겨댔고, 넘기는 종이들은 상아색에서 먼지가 묻은 듯한 색상으로 바뀌어 갔다. 갈색 여자는 날카로운 숨을 들이마시며 짧은 보라색 갈기를 목 너머로 쳐 넘기고는 뒤편에서 희미한 빛을 뿌리고 있던 비행선 보일러를 흘끗 돌아보았고, 죔쇠를 발굽에 달고는 펜을 끼워 고정시킨 뒤, 글을 적기 시작했다.
여자는 차갑고 단단한 기억들이 머릿속에 구름을 드리우는 것을 느끼며 입 안을 혀로 쓸면서 자신의 마음에 남아 있던 설탕과 페퍼민트, 그리고 그 외의 잡다한 단맛의 기억이 흘러나와 희미하게 고여 있던 감미甘味를 맛보고는 계피로 맛을 낸 빵 덩어리에 버터를 바르듯 신속하게 종이를 채워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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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지 번호 2,357
말들은 넘쳐나지만, 넘쳐나기에 말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황폐한 땅에서 지내 온 온 생애 동안, 입을 여는 것은 울음으로 마무리되었다. 너무 지쳐서 녹초가 되었으므로, 유쾌하다 못해 정신이 나간 듯한 웃음을, 웃고 싶을 뿐이다. 수 년 동안 살아오면서, 나는 불가능한 것들과 말도 안 되는 짓, 그리고 멍청한 짓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광기라면? 그건 완전히 다른 게임의 영역이다. 마지막 포니가 좀 더 제정신을 차린 작자였으면 좋았을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네가 날 잘 아는 만큼이나 나도 널 잘 알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할 거다.
그래, 너에게 글을 남기는 것도 정말 오래된 이야기인데, 하물며 너와 대화한 건 오죽하겠어. 너한테 관심이란 걸 많이 주지 않았으니, 내가 보고 싶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넌 항상 내 주변을 빙빙 돌고 또 맴돌며 거미줄에 붙은 나방에게 달려드는 거미처럼 날 취급해 왔으니까. 네가 내 옆에 붙어 있는 한, 내가 보는 나는 언제나 외로운 존재며, 버림받은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 어떤 의혹과 두려움, 희망과 눈물보다도 너는 내 옆에 오래 붙어 있었다. 스파이크보다도 오랜 동반자인 너와, 네 칠흑 같은 검은 몸뚱이에서 풍기는 냄새, 그리고 내 주변에서 끊임없이 빙빙 돌며 남겨둔 네 흔적은 스파이크의 녹색 불꽃으로도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여기 죽음의 땅에서, 너는 변함없는 동반자이자 친애하는 벗이었고, 또한 내가 중얼거리던 대답 없는 기도를 듣고 피 흘리는 상처를 지켜본 유일한 자인, 두려운 그림자이기도 했다. 한때는 네가 내 고통을 즐거워한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말인즉슨, 너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고통이 무엇인지 너는 알지 못하고, 설령 네가 ‘고통’이라는 기계의 작동을 기꺼워한다 해도 그것의 수많은 파편들을 가지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느 면에서 보면, 너는 어린아이와 마찬가지인데, 어린아이들이란 잔혹하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멍청하기도 하지.
며칠 전에 또 다른 어린애를 하나 만났는데, 며칠 전이라기보다는 ‘몇 년 전’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스파이크에게 있어 삼백 년이 눈 깜박할 새 지나갔듯, 내게 있어서도 이십오 시간과 이십오 년이 마찬가지인 찰나처럼 느껴지니까. 그 녀석은 나를 자기처럼 시간의 무상함에 닿지 않는 무감각한 녀석으로 바꿔놓으려는 생각 같은 건 없었을 거다. 스파이크가 자기 숨결로 나를 시간 깊은 곳으로 보내주기는 하지만, 걔도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한도 끝도 없이 많기 때문이다. 과거의 따뜻한 심연 속으로 굴러 떨어져야만 하는 자는 결국 나일 수밖에 없었다. 가끔씩, 이 모든 게 결국 그 녀석 혼자만의 연구인데도 불구하고 내가 시간을 넘나드는 것에 그 녀석이 질투를 하면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하곤 하지만, 나는 녀석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뿐이라는 걸 다시 깨닫곤 한다. 요즘은 드래곤의 영혼에 관한 진지한 의심이란 짐을—녀석의 나이만큼이나 오래된 의심이다—지고 있는데, 감당할 수 있었으면 한다. 이퀘스트리아의 위대한 현자들만큼이나 현명해질 수는 있지만, 이는 지혜로서 갑옷을 입는 것과 같은 것이므로 고난으로 얼룩진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며칠 전에 만난 어린애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그 아이는 너와 달리 멀리서 외로운 존재들을 차갑게 쳐다보기만 하는 아이가 아니었는데, 오히려 그것들이 흡사 시럽으로 되어 있는 것이기라도 한 듯, 입을 크게 벌리고 그들을 향해 정면으로 나아갔다. 정오에 만족하기 거부하고, 멋진 날의 찬란한 광명을 부술 수도 있는 위험을 끌어안고 더 높이 올라가고 싶어하는 일출과 같은 여자애였지. 다른 이들이 흐느껴 울 만한 상황에서 웃었고, 다른 이들이라면 반쯤 죽어갈 만한 상황에서도 까르르 웃을 줄 아는 여성이었다.
그곳에서 보낸 시간 동안, 처음에는 그녀가 고통을 비웃는 것을 즐기는 오만한 성격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이내 그 웃음이 고통을 통과해 나가는 방법이라는 걸 깨달았다. 황무지에 얼룩진 내 두 눈으로는 수많은 행복으로 가득 차 있던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뒤에서 몰래 다가와서는 심지어 엔트로파 공주의 몸마저 뚫고 펄쩍 뛰어오를 지경으로 놀라게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처음 그 여자와 부딪혔을 때, 그 때는 눈 앞의 여자를 잡아 족치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심지어 지금에 와서도 그러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하긴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여기 있고, 살아 있다. 제정신이나 그거 비슷한 걸 유지하고 있는 동안 절제하면서 살아가고, 즐기고, 글을 적으려고 돌아온 것이니까.
제정신은 ‘희망’이라는 것보다도 훨씬 두렵고 낙담되는 성질의 저주였다. 그 아이, 그녀를 만나 이성理性에 파이 한 판을 대담히 집어 던질 수 있을 때까지 그것을 이해하려고 할 필요는 없다는 걸 배우기 전까지는 내가 제정신이란 것에 얼마나 집착하고 있는지 몰랐었다. 폐허에서 이성은 내게 매달렸다. 그것은 일종의 찬란하게 빛나는 거대한 횃불처럼 번쩍거렸는데, 나의 천성은 그것에 대한 역응답으로 그와 같이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섬광을 하늘을 향하여 쏘아 올렸다. 이성은 끝내 필사적이고 비이성적인 행동들을 낳았고, 그 덕에 여기 죽어가며 썩어가는 세상의 두려움에 맞서면서도 이성과 비이성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니 나 자신이 사실은 광기의 왕국 깊숙한 곳에 파묻혀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와, 그 세상 스스로가 정신병적인 강박을 이기지 못하고 절묘하게 무너지기 전까지 그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광기에 열 배 더 많은 반응을 보이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의 혼란스러움은 어땠겠는가. 혼자인 자는 그 어떤 빛조차 보이지 않아도 순수 그 자체인 어둠 속으로 한 줄기 무지개를 만들어 쏘아 보낼 수 있을 정도로 담대해질 수 있다. 그 녀석이 이곳 황무지에서, 내가 사는 곳에서 어떻게, 얼마나 잘 해낼 것인지 궁금하다. 석화된 것들을 꽃다발로 만들고, 괴물들에게 춤과 노래를 가르칠 수도 있는 녀석이니, 아마 폐허의 여왕으로 군림할 수도 있을 터다.
하지만 나를 가장 놀라게 했던 것이자, 지금 펜을 잡고 종이 앞에 앉게 만든 것이며, 내 외로운 혼의 지주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녀가 광기 그 이상의 것과 춤과 노래 이상의 것들, 그리고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찾아내는 것 이상의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너를 알고 있었다. 그래, 너. 내가 너를 알게 되었을 때보다도, 알아 가고 있었음을 시인하던 때보다도 한참 전부터 널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 지식을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자랑하려 든 적이 없었지. 자기 주변 포니들에게 그걸 갖고 떠들어대려고 하지도 않았다. 설탕을 바른 듯한 자신의 혼 깊숙한 곳에 거미줄로 자기 자신과 너를 옭아매고 있다는 티조차 낸 적도 없었다. 너를 이겨내는 방법을 오랫동안 배워 왔기 때문에, 보여 줄 필요도 없었고 말해 줄 필요도 없었던 거다. 나는 어느 순간에도 익힌 적이 없고, 익히고 싶지도 않은 것이지만.
그랬으므로, 내 기억이 닿는 한에서는 처음으로, 이 일지 페이지는 너에게 바친다. 이걸 써두는 일이 내게 중요하듯, 이걸 읽는 일 또한 네게 중요한 일이라는 걸 알아주기 바란다. 내가 이걸 적어두지 않는다면, 이걸 다른 아무나 뭐에게 말해주지 않는다면, 끝내 미치고 말 테니. 내게는 그녀만큼의 끈기도 없을뿐더러 제정신 또한 없거든. 그녀의 광기를 맛보는 일은, 세상 모든 꽃이 죽어 버렸음에도 번데기에 처박혀 나오지 않는 나비에게 나오라고 설득하는 일과 같았다.
이성은 물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필요하지만, 가끔씩은 그 모두를 똑같이 놓아 버릴 때가 있다. 이번만큼은 선택지를 남겨두지 않을 테니,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기 바란다. 어쨌든, 이쪽은 늘 네 말을 죽 들어 오기도 했고, 그쪽이 남겨둔 유산이 그쪽을 ‘공평’하거나 ‘불공평’하게 만들거나 별로 신경 쓰고 있지도 않으니까. 넌 이제 이 모든 걸 건강한 어린애처럼 전부 집어삼켜 소화하겠지. 찾아올 미래를, 더 이상 너와 어둠을 나누지 않으려 네 근처에도 얼씬하지 않을 언젠가를 예비하려면 좀 더 크고 강해져야 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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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를 붙여 가는 비행선 아래로 펼쳐진 회색 돌들의 대양大洋이 흐려져갔다. 스쿠틀루가 쓰고 있던 호박색 고글이 번득이며 빛을 튕겨내는 위로 거대한 틈새가 비쳤다. 외로운 파일럿의 시선 아래로 돌들이 널린 광활한 벌판이 드러났고, 그 위로 아래를 향하여 내려친 듯 다급한 경사의 협곡이 뻗어가며 고원을 베어내는 모습이 두 안경알에 비쳤다. 여자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조종석 측면에 늘어서 있던 일련의 레버를 잡아당겨 하모니 호의 속도를 줄여 제자리에 다만 떠 있도록 조작했다. 그러고는 나직한 숨을 내쉬면서 갈색 발굽을 얼굴에 가져다 대고 고글을 밀어 올렸다. 아무것도 없이 드러난 스쿠틀루의 진홍 눈동자가 비행선 아래 펼쳐진 균열 섞인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비행선 곤돌라 위로 넓게 벌어진 바람막이 창 너머로, 돌이 많은 땅 위에서도 식별 가능할 정도로 깊게 패인, 수도 없는 뱀들의 무리처럼 꿈틀거리는 땅의 주름들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고 또 미궁처럼 생겨난 패인 자국들 위의 고원은 평평했는데, 고요한 연못의 표면보다도 정돈되어 있어서 차분했다. 땅 위로 이상하다 못해 신성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모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하모니 호에 둥지를 튼 새의 시각처럼 내려다본 협곡이, 흡사 거미줄의 윤곽이나 거대한 새의 두 날개를 선으로 표현한 모습과도 같다고, 마지막 포니는 생각했다.
협곡 안에 건축물 몇 개가 서 있었다. 날카롭게 일어선 석벽石壁의 그림자 아래로 폐허 몇 곳이 무리를 만들어 모여 있었는데, 위로는 하늘에서 어른거리는 황혼을 피해 숨고 벽 뒤로 숨어 고원에 떨어져 날리는 눈과 잿가루를 피하고 있었다. 여기, 이 회색 앉은 기이한 마을은 흡사, 재앙이 닥치며 조용히 살아가던 주민들의 몸뚱이를 태워 먼지로 만들기 전에 스스로의 무덤을 파두기로 작정하기라도 한 듯싶었다.
스쿠틀루는 심호흡하고 등을 의자 깊이 파묻었다. 여자는 좌현과 우현에 난 둥근 창 너머를 내다보며 돌 깔린 지평선 어딘가에 비행선을 계류시켜 둘 만한 곳이 있나 찾아보았다. 죽은 나무들이 모여 있는 곳이 보였고, 멀찍한 곳에는 불길이 한바탕 집어삼켜 이제 얼룩밖에 남지 않은 농가가 있었으며, 한때는 늪과 같았던 오아시스가 이제 그 잔해만 남은 채 석화된 모습도 보였다. 그러한 정경의 황량한 성격이, 페가수스 여자는 이제 아무렇지도 않았다. 포니빌 폐허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 북동쪽으로 엿새 동안 항행해야 했다. 여기는 단지 구경이나 하려고 온 곳이 아니었다. 여자는 전에도 여기에 온 적이 있었는데, 그 때는 솜털 색깔이 좀 달랐었다.
마지막 포니는 마지막으로, 근처 협곡 내부에 지어져 이제 반쯤 무너져 가는 대성당을 내려다보는 형태로 근처 암반에 날카로운 갈고리를 설치했다. 여자는 하모니 호를 느린 속도로 몰아 갈고리를 설치한 지점으로 이동하면서 고글을 다시 밀어 쓰고 조종석에서 뛰어내리고는, 흰 가죽으로 두텁게 감싸둔 원통형의 물체 옆에 놓인, 늘 가지고 가지던 장비들과 함께 놓아둔 목탄 덩이를 올려둔 작업대를 향해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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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부랑자 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겨우 어린애 티를 벗었을 때였는데, 그 때는 그저 생존자를 찾아 돌아다니기 바빴었다. 그 재앙에서도 어찌어찌 살아남은 이들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클라우드데일의 잔해를 뒤지고 다니는 나날이었다. 그 단순한 생각이 흐려지고 난 뒤부터, 그 때부터 오직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쓰레기 더미를 뒤져댔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솜털은 어두운 갈색으로 변색되었고, 몇 푼 은과 몇 조각 음식을 얻으려고 온갖 것들을 찾아 돌아다니며 주워댔다.
최근 한 바퀴 원을 그리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다시 한 번 더 생존자를 찾아 떠나는 여정을 시작했다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에 흩어졌을 죽은 포니들이 남겼을 소중한 보물들을 찾으러 다니고 있다는 것이다. 저기 황무지에서 꾀죄죄한 꼴을 하고 탐욕스런 눈을 번들거리고 앉아 있는, 자기네들이 지각 있는 양반이라 착각하는 돌대가리 자식들에게 팔아먹을 만한 것들이기 때문에 찾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나 자신보다 유가치한 것이고, 나보다도 오래 보존될 것이며, 어쩌면 다시 한 번 햇빛을 쬘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도 있는 것이기에, 설령 내가 거기서 살지 못하게 되더라도, 찾으러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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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개의 황동 편자가 텅 비어 버린 대성당 안마당에 내려앉았다. 스쿠틀루는 메고 있던 장갑 입힌 가방 옆으로 두 날개를 접어두고 느린 걸음으로 반쯤 무너진 신도석 사이로 난, 돌무더기 널린 통로를 따라 걸어갔다. 천장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는 이제 황량하기 그지없는 석제 아치의 흉곽들 바로 위로 무너져 내린, 큰 성당 건물의 꼭대기가 있어 외로이 메아리 치며 퍼져오는 말발굽 소리에 부딪쳤다. 밖으로 드러난 성소聖所의 몸 속으로 몇 조각 눈가루가 흩날려 들어와서, 혼자 제단으로 걸어가 자리에 멈춘 마지막 포니의 몸을 덮었다. 여자의 고글 쓴 눈이 설교단 뒤에 서 있던 커다란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바라보았다. 여러 색으로 짜맞춰져 있었을 스테인드글라스의 절반이 사라져 있어서, 천상의 알리콘과 그 위풍당당한 날갯짓이 이제 파편이 떨어져 나가 건물 저편 모서리에 맞닿아 있을 협곡의 차가운 회색밖에 비춰지지 않는 간극 사이에서 흐릿해져 있었다.
스쿠틀루가 생명의 흔적을 찾아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묘실의 내부와도 같은 대성당 내부를 훑어보자 쓰고 있던 고글이 반짝거렸다. 죽었든지 아니든지, 몸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커다란 건물의 한 가장자리, 한때 황동제 촛대에 꽂힌 몇 개 촛불이 있었던 곳에 밀랍과도 같이 하얀 빛을 띠고 있던 웅덩이 같은 것의 흔적이 여자의 관심을 끌었다. 나아가던 발걸음이 여기 적막한 대성당 어딘가에서 날아온 갈색 로브 조각을 밟자 그녀가 깜짝 놀라 숨을 토해냈다. 천 조각을 밟고 서 있던 여자는 톱니 달린 편자로 가볍게 툭 밀어 한쪽으로 치워냈다. 성직자의 옷이 시선에 들어오자 마른침이 절로 삼켜지며 여자의 갈색 얼굴에 보조개를 파냈는데, 여자는 이내 어깨를 으쓱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스쿠틀루는 몸을 돌려 대성당 동쪽 벽에 난 커다란 틈새를 통해 밖으로 나갔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눈에 흠뻑 젖은 자갈길이 펼쳐진 풍경이 널따랗게 펼쳐졌다. 좁은 길 위로 채우며 깔리도록 배치된 벽돌 하나하나마다 할당 일자와 함께 작업자의 이름이 각각 새겨져 있어서, 각자가 귀한 것들이었다. 마지막 포니의 발굽이 가 부딪히는 벽돌 면 위로 검게 새겨진 이름들은 그저 마지막 목적지를 향하여, 구름처럼 일어서는 발굽 소리의 메아리와 함께 걸어가는 여자의 고독감만 증폭시킬 뿐이었다.
협곡 사이로 난 좁은 길이, 깊이 파인 도랑 같은 땅 양쪽 가장자리까지 들러붙으며 가로막고 있던 건물들에 밀려나 더욱 좁아졌다. 내려앉은 땅 속은 폐허가 구불구불한 협곡의 가용한 자리를 전부 다 채우고 있어서 송곳 하나 꽂을 틈이 없었는데, 이 때문에 이 구절양장九折羊腸의 도시가 어디서 시작되고 끝나는지 짐작하기가 배로 어려웠다.
스쿠틀루는 언제 무너져 내려도 이상하지 않다고 스스로 위협하듯이 서 있는 돌들과 건물들을 바라보고 또 몸을 떨면서 주택가의 구부러진 ‘중심가’ 거리를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거주지화된 땅 속은 어둡긴 했지만 에버프리 가시숲에 비할 바는 아니었는데, 다만 깊숙한 곳까지 파인 땅 속에 지어진 탓에 어둑어둑하게 보이는 도시 풍경은 꿈틀거리는 그림자처럼 보였다. 해구처럼 파인 땅 속의 빙빙 도는 길을 따라 걸어가던 중 바라본 황혼의 세력은 서서히 쇠퇴하고 있었으나 전의 백 배로 밝아져 있어서, 낯선 광휘가 온 황무지를 비추어 반들거렸고, 그 빛을 받은 스쿠틀루도 자신의 몸이 황동색이 아니라 갈색이 아닌가 싶어 고개를 숙여 발굽을 들여다보았다.
기름이 모두 타 불이 밝혀지지 않는 횃불들이 검은 방첨탑의 행렬을 이루며 줄지어 늘어서서, 발이 걸려 넘어지며 그림자 속으로 쓰러지는 마지막 포니를 보며 조소했다. 이곳에 무엇이 어떻게 널려 있는지 날카롭게 감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자는 가스등을 밝힐 수도 있었을 터였다. 대략 오십 미터 정도를 더 전진한 여자는 잠시 멈추어 좌측을 흘끗 쳐다보았다. 눈이 안개에 섞여 내리는 정경 위에서 아른거리는, 거대한 도시 광장이 위치한 곳이자 네 개의 협곡이 한 자리에서 만나는 지점 한 구석에 끝장난 술집 한 칸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것도 없이 황폐해진 가판대들이 탁 트인 광장을 나누고 있었다. 위로 어렴풋이 보이는 건물 위로 반쯤 부서진 시계 문자판이 점으로 찍혔다. 다른 한쪽을 보니 대장간이 있었는데, 현관문이 잔혹할 정도로 산산이 부서진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중앙부를 보자 알리콘 조각상을 가운데 둔, 말라 버린 분수가 있었다. 포니빌 분수대에는 셀레스티아 공주의 조각상이 있었지만, 이 마을의 분수대 조각상은 그와 달리 다른 여신의 형상을 갖추고 있었다. 석상의 뿔이 더 짧긴 했지만, 두 날개는 셀레스티아 석상의 그것보다도 훨씬 크게 펼쳐져 있어서, 스쿠틀루가 대성당 안에서 본 부서진 스테인드글라스의 위엄과 잘 어울렸다.
마지막 포니는 자갈이 깔리고 그 위로 눈이 덮인 광장 위로 메아리를 뿌리며 느긋하게 걸어갔다. 수백 헛것의 발굽 소리가, 길바닥을 덮고 있던 보도블록 위로 새겨진 수많은 죽은 이들의 이름처럼 여자의 혼을 관통해 나가서, 여자는 몸서리쳤다. 알리콘 석상 주변을 대충 훑어보던 중, 여자는 텅 비어 있는 주변과 달리, 한 곳만 유독 이상한 지점을 찾아냈다. 한 무더기의 썩어가는 쓰레기 더미가 광장 한가운데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나무 조각들과 바스러지는 잔해의 파편들이 아무렇게나 모여 잡동사니의 산을 이루고 있었다. 거의 삼십 년에 육박하는 세월의 시련을 이겨내며 변색한 것들에 가까운 것이었으므로, 재앙이 닥치면서 부서져 내린 돌무더기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스쿠틀루는 그게 무엇인지, 그리고 여기 있는 이유까지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눈도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잡동사니 무더기 안에서 굴러다니는 무엇인가가 여자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그녀는 쓰레기 더미 쪽으로 걸어가다가, 위에서부터 씻어 내리듯 쏟아지는 흐릿한 황혼을 받아 반짝이는 무언가의 형상을 보고 깜짝 놀랐다. 여자는 발굽을 뻗어 반짝인 물건이 명확히 드러날 때까지 부서진 가구의 조각들과, 녹아 버린 사진 앨범, 그을린 재봉도구, 그리고 기타 등등의 불탄 쓰레기들을 한쪽으로 쳐냈다. 물건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녹아 버린 은제 수통이었는데, 상아로 마감한 부분들에 그을음이 묻어 갈색으로 변색되어 있었다. 마지막 포니는 서러운 숨을 토해내며 발굽 위에 더럽혀진 물건을 얹고 들어올려서, 비틀리긴 했으나 화려한 필체로 수통 한쪽에 조각된 V자를 들여다보았다. 마지막 포니는 버려진 무덤이 내포하는 모든 성질을 뚫고, 미친 짓을 해냈다. 여자는 웃으면서 재 앉은 광장을 향하여 나직이 속삭이듯이 따뜻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세상이 시작된 것이 당연하다면, 세상의 끝이 오는 것도 당연한 거니까.”
날카로운 추억의 고통이 갑작스레 일어서서, 스쿠틀루는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려 광장 위 외롭고 낡아빠진 술집을 마주보았다. 그러고는 가라앉은 걸음으로 건물을 향하여 직진해 걸어갔다. 문 앞에 다다른 여자는 다 허물어져 가는 입구 속으로 자신의 갈색 몸을 천천히 밀어 넣었다. 마지막 포니가 깨진 술병들과 조각난 의자, 그리고 떨어진 기름 램프들이 뒤섞여 이루어진 바다 속으로 걸어 들어갔고, 그 뒤로 쌍여닫이문의 한쪽이 흔들거리며 삐걱거렸다. 여자가 잠시 부서진 술집 홀 내부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았다. 오랜 세월 동안 돌보지 않아 쪼글쪼글해지고 좀먹은데다 거미줄처럼 찢어진 보라색 장막 아래로 스테이지 하나가 머뭇거리며 남아 있었다. 흐릿하게 밝혀진 바 내부의 넓이를 어느 정도 짐작한 여자는 버려진 술집의 지하저장고로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무대와 지하실 사이를 갈라놓은 목제 마룻바닥 위로 금이 가서, 흩어진 거미줄로 범벅이 된 지하로도 미약하나마 빛이 들어가 비추고 있었다. 마지막 포니는 목조 기둥들이 숲처럼 늘어선 창고 안을 둘러보았다. 어디선가 흘러오는 산패한 냄새에 여자는 본능적으로 코를 킁킁댔다. 여자는 멀리서 누군가 크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사라지는 걸 듣기라도 한 듯 귀를 쫑긋거렸다.
저장고 깊숙한 한쪽 구석에 커다란 목제 트렁크 하나가 놓여 벽돌을 쌓아 세운 벽의 절반을 가리고 앉아 있었다. 마지막 포니가 상자의 정면을 향하여 명확한 걸음으로 걸어가 먼지 쌓인 뚜껑을 열자 경첩이 삐걱거리며 움직였다. 트렁크 안에는 조금 더 작은 나무 상자가 들어 있었는데, 수십 년을 거치며 쌓여 온 녹에 엉망이 된 큰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스쿠틀루가 자갈 깔린 저장고 안의 텁텁한 공기 중으로 작은 상자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여자는 오른발 편자를 근처 벽에 단단히 댄 뒤, 달려 있던 황동 조정간을 반시계 방향으로 돌려 큰 칼 한 자루를 꺼냈다. 그 다음에는 편자에서 튀어나온 칼날을 녹슨 자물쇠에 겨누고 가볍게 한 번 휘둘러 산산이 부수어 버렸다. 대검을 다시 집어넣은 여자는 상자를 열고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여자의 진홍 눈동자 위로 무지갯빛이 비쳤다.
스쿠틀루는 부드러운 숨을 들이마시며 발굽을 상자 속으로 뻗어 스펙트럼의 모든 색으로 물들어 무지갯빛을 띤 장엄한 망토 한 장을 꺼냈다. 이 신비한 옷은 짙은 검은색 두건부터 화려한 뒷자락까지, 진홍색에서 시작해 초록, 파랑의 스펙트럼 사이의 색들과 함께 자신을 꺼내든 갈색 페가수스가 알고 있는 모든 색으로 밝게 빛나며 노래하고 있었다. 망토는 신기할 정도로 화려한 만큼이나 아름다운 물건이었고, 그랬으므로 스쿠틀루의 입술이 굽어지며 웃음지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망토를 잡은 발굽으로 옷을 이리저리 돌려 보던 여자는 그 안 깊숙한 곳에 들어가 숨어 있던 검은 벨벳 마스크를 꺼내 보았는데, 희미한 황혼을 받아 반짝이는 금 간 루비 고글이 달려 있었다. 스쿠틀루는 신기하다는 듯 발을 끌며 옷을 반대 방향으로 돌려 너울거리는 무지갯빛 뒷자락이 보이도록 했다. 여자는 옷을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뒤로 반 걸음쯤 물러나 채찍을 휘두르듯 저장고 안 답답한 공기 중으로 옷을 한 번 탁 털어보았다. 그러자 금속질의 소리가 나며 뒷자락에서 녹슬었으나 여전히 여러 색을 띠고 있던 대검들이 부채꼴을 만들며 튀어나왔다. 마지막 포니가 휘파람을 불었다. 놀랐다기보다는, 알 수 없이 밀려오는 우월감 때문이었다.
그 순간의 쓸쓸함이 곧 대기를 채웠고, 스쿠틀루는 조밀하게 짜인 무지개 망토를 지고 있던 가방 안에 되는 대로 거칠게 집어넣고는 빈 나무상자를 더 큰 나무상자 안에 던져 넣었다. 여자는 저장고 문을 향해 죽 걸어가 판자를 걷어차 치워 깊은 운하와도 같은 도시 속으로 돌아갈 길을 열었다. 광장 한가운데 서 있던 알리콘 석상을 지나쳐 간 여자는 매장된 도시의 심장부로부터 서쪽을 향하여 열려 있던 수많은 길들 중 하나를 골라 따라가기 시작했다. 여자가 선택한 길은 지나쳐 온 다른 길들처럼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길이 아닌 아무것도 없는 길이었으므로, 그 위는 척박하고 무기력했다. 길은 끝내 더 나아갈 앞을 예비하지 않은 채 무시무시할 정도로 두터운 석벽으로 막힌 끝을 드러냈고, 그 너머로는 굵고 녹슨 철근으로 만들어졌으나 이제 버려진 울타리로 둘러싸인 4층짜리 벽돌건물이 일어서 있었다.
스쿠틀루는 무거운 걸음을 질질 끌며 나아가다가, 잠시 멈추어 옆을 흘끗 쳐다보았다. 건물의 거대한 주춧돌 바로 뒤에 조그마한 판잣집이 하나 지어져 있었는데, 거의 다 가리워 잘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포니가 쓰고 있던 황동 고글을 조정해 보다 먼 거리를 조망할 수 있도록 하자 오두막의 무너진 문가 앞에 아무렇게나 흩어진 잔해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무를 깎아 만든 병들과 제브라하라 특유의 방식으로 무두질한 가죽 조각들, 그리고 엎질러진 작은 펠트 상자와 쏟아져 나온 석화된 약초들이 보였다. 마지막 포니는 공허한 입 안에서 혀가 움직이며 노래 같은 무언가를 그리는 감각을 느끼며 잠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스쿠틀루는 정면을 향하여 아무 거리낌없이 나아가 가파른 돌계단을 타고 올라가 커다란 건물의 양여닫이문을 열고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여자가 아트리움의 프런트 데스크를 느긋한 걸음으로 지나쳐가고, 그 너머에서 구불거리며 뻗어 있는 콘크리트 계단을 향하여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아가자 체크무늬 바닥과 철제 편자가 부딪치며 달각거렸다.
여자는 삼 층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건물 정면에 난 격자창들을 통해 들어오며 희미해진 황혼의 어렴풋한 흐름이 묻어 호박색 고글이 반짝거렸다. 여자는 네 발굽을 질질 끌면서 부서진 의자들과 흰 먼지 앉은 테이블로 가득 찬 널찍한 방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몇 장의 긴 유리가 인접한 회랑과 홀을 나누고 있었다. 창문 상당수가 이미 오래 전 깨어져 나약한 파편으로 검정색과 흰색의 체크무늬 타일 위로 흩어져 덮여서, 여자의 황동색 발굽이 움직일 때마다 발굽 아래서 으스러졌다. 이 건물에서도 몸뚱이를 찾아볼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이런 일은 처음이어서, 여자는 기뻤다.
스쿠틀루는 다시 발굽을 질질 끌며 층계로 되돌아가 다시 한 층을 더 올라갔다. 4층까지 별 어려움 없이 걸어 올라온 여자는 먼 끝에서 희미한 빛을 들여보내고 있던 길고 어두운 회랑을 따라 천천히 걸어갔는데, 4층에서 유일하게 바깥 황무지와 그 너머 흐릿한 황혼과 통할 수 있는 통로였다. 이내 엄청난 수의 창문이 난 방에 다다른 여자는 고글 쓴 눈으로 사방을 곁눈질했다. 마지막 포니는 스무 개 정도 되는 빈 침대들이 한때는 완전 멸균된 병실이었던 곳 벽에 기대어 선 모습들을 바라보았다. 한 쌍 목제 책상이 일렬로 늘어서 있던 의약품 보관함 옆에 서 있었다. 체크무늬 바닥은 조그마한 금속 장신구와 작은 말 인형들, 바람 빠진 고무공 등 한때 장난감이었을 만한 잡동사니들로 빼곡히 차 있었다. 찢어진 천 칸막이들이 서로에 기대서 있었고, 철제 호흡보조장치와 심장감시장치를 비롯한 기타 기계장치들이 이제는 저 너머에서 머뭇거리는 황무지와 같이 무용無用하게 되어 한 무더기 녹슨 의료용구로 쌓여 있었다.
스쿠틀루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부랑자는 여기 있어야 할 이들과는 다른 부류의 포니였고, 거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여기 더 있어야 할 타당할 이유 또한 없었다. 반쯤 파묻힌 도시까지 하모니 호를 끌고 온 보람이 있게 할 만한 물건 역시 여기 없었다. 다만 지금 여기, 이곳 병원 최상층이자, 생과 사 모두가 결핍된 황량한 공간에 서 있던 여자가 좀 더 괜찮은 곳을 아는 것도 아니었다. 먼지 앉은 복도에서 아직도 머뭇거리며 떠나지 못하는 외과시술의 메아리가 여자의 기억 속에서 북적거렸다.
시간여행자는 사색하듯이 두 진홍 눈을 감았다. 여자의 몸이 평정을 유지하고 있어서, 셀 수 없이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찰나의 순간 동안 들려오는 듯했다. 목소리들은 음악 마법에 맞추어 춤추는 듯 빙빙 돌며 흔들렸다. 그 다음으로는, 늘 그랬듯이 그 모든 것 너머에 도사리고 있던 어두운 무언가가 방 건너편 한 쌍 창백한 사파이어 빛 눈동자처럼, 크게 웃고 잠깐 쉬다가 이내 다시 웃어대는 무언가처럼 여자의 마음을 찔렀다.
그리고 나서 다른 목소리가, 과거에서도 왔고 미래에서도 온 목소리가 여자의 고막을 터뜨릴 듯 명확한 소리로 쏘아붙이듯 말했다. “네가 싫어. 싫어서 미칠 것 같다고.”
호박색 렌즈 아래서 감겨 있던 스쿠틀루의 눈꺼풀이 급히 열리며 진홍 눈동자를 드러냈다. 심장이 급히 뛰었고, 목에는 식은땀이 흘렀는데 여자는 혼자 있었다. 전부가 조용했고, 그 중 움직이고 있던 것은 허깨비와 같은 말들에 엉겨 있던 고통을 모방하는 찰나의 꿈을 꾸었던, 여자의 입 속 낯선 근육 덩어리 하나뿐이었다.
무엇인가 갑자기 편자 아래서 밀려 접히는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 포니가 당황하며 아래를 쳐다보았다. 고글을 투과하며 굴절되는 시선 위로, 무수히 많은 주름자국이 파인 한 장 종이가 들어왔다. 주름이라기보다는 구겨지고 접힌 자국이라고 하는 편이 더 합당했다. 여자는 놀랐다는 숨을 내쉬며 바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자신의 두 발굽으로 기적처럼 남은 과거의 유산을 부여잡고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그 유산이란 것이 다만 종이비행기 한 장에 불과한 것이었는데도. 종이조각의 모서리는 너덜너덜해져 있었지만, 그 몸통만큼은 여전히 놀라울 정도의 흰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것은 단순한 종이비행기 한 장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스쿠틀루가 천천히 조심스럽게 종이비행기를 열어 펼치자, 왁스 크레파스로 그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그림이 여자의 진홍 눈 위로 들어왔다. 자그마하고 노란빛을 띤 어린 여자아이가 비슷한 색조를 띤, 더 큰 포니 둘과 함께 병원 건물 밖을 껑충거리며 뛰어다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의 방식과 특징이 그림을 타고 춤추며 흘러와 페가수스의 심장을 잔혹하게 찔러댔다.
“선트롯Suntrot.” 여자가 중얼거렸다. 묘비 위로 흘러오는 햇빛 줄기처럼 괴롭고도 아름다운 이름이었고, 거기서 아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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