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챕터명은 영화 퍼펙트 스톰의 패러디로 보임
“오닉스 이클립스가 다가온대.”
한 줄기 밝은 녹색 불꽃이 살풍경한 연구실 천장을 쓸고 지나갔다. 녹색 손톱을 한 두 손이 에메랄드 빛이 들끓는 유리 단지의 룬 각인 마개를 단단히 비틀어 닫았다. 보랏빛 드래곤은 기침을 토해내고 눈을 가늘게 뜨며 자그마한 포니이자 자신의 친구인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 오닉스 이클립스라는 게 뭔지, 말해 줄 수 있겠어?” 스파이크가 석벽에 대고 잘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스쿠틀루가 유리 단지를 쥐고 있는 스파이크의 두 손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W'nyhhm.” 여자는 별 일 아니라는 듯 주문을 중얼거렸다. 룬 봉인이 보라색으로 빛나며 작동하자 단지 안에 들어 있던 녹색 불꽃은 짙고 차가운 구름으로 변해 잦아들었다. “그거 조심해서 잡아야 해, 스파이크.” 그녀는 그에게서 단지를 넘겨받아 옆구리에 차고 있던 안장 가방에 굴려 넣듯 집어넣었다. “네 악력이면 어지간한 원숭이 모가지쯤은 한 번 슬쩍 꺾어서 따 버릴 수도 있을 정도니까 말이지. 알고 있겠지만, 이건 나 혼자 있을 때나 열 생각이야.”
“은근슬쩍 말 돌리는 것 같은데.”
“뭐 문제라도 있나? 모가지 따 버리기에 더없이 적합한 후보 원숭이 한두 마리를 마침 알고 있던 참인데.”
“그―” 스파이크는 다시 기침을 토해내고, 거친 숨을 몇 번 뱉어낸 뒤 다시 거세게 기침하고 난 뒤에야 잠잠해진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콧구멍에서 녹색 연기가 피어올라 하늘거리며 보석을 쌓아 만든 침대를 마주보는, 시계로 가득한 벽면을 향하여 흔들거리듯 사라져갔다. “그 오닉스 이클립슨가 하는 이상한 소리는 대체 무슨 소리야?”
“그게 이상한 소리라고 완전히 단정짓기는 곤란해.” 스쿠틀루가 중얼거렸다. 곱슬곱슬하지만 작은, 분홍 갈기의 숲 아래로 여자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하자면, 더피 후브즈의 딸이 그 염소랑 물고기를 반씩 섞어놓은 그 뭐시깽이한테 씌였는데, 그 다음부터 뭘 계속 중얼거리더라고.”
“그 ‘뭘’ 이 뭔지 말해 봐.”
“약을 바가지로 했는지 멍하고 맛탱이도 완전히 간 소리였는데, 별자리에 대한 얘기였어. 음......” 스쿠틀루는 갑자기 아파 오는 머리를 떨리는 발굽으로 문지르며 혀 짧은 소리로 말을 이었다. “딩키가 뭔가 이 세상 존재가 아닌 것 같은 소리로 ‘무자비한 별들의 죽은 열쇠구멍 너머’에서 ‘오닉스 이클립스’ 라던가 하는 게 찾아와 ‘모든 빛을 앗아갈 것’이라는 말이랑 병신같은 소리를 늘어놨지. 그러더니 ‘혼돈의 화염’이던가 하는 것도 말하더라. 음...... ‘안녕, 재앙 씨.’ 같은 건가. 나 아직 제정신 맞지?”
“염소자리 새끼를 옮기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들을 말해준 걸 내가 정확히 기억한다고 가정하고 말하자면......” 스파이크가 보석 침대로 거꾸러지듯 몸을 던지고 지친 사지를 늘어뜨리고 말했다. “스트레스를 심각하게 많이 받은 것 같아.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는 전자에 무게를 더 두고 싶군.”
“음, 그렇지. 마력 공명이 그쪽에 투영된 나를 잡아 족치는 진귀한 경험을―”
“스쿠틀루, 넌 몇 시간 동안이나 내내 천상생물天上生物의 정수 가까이에서 그 영향을 받았어. 그것 때문에 현재로 더 빨리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거고. 엔트로파 공주의 몸은 불변성 그 자체가 될 수는 없어. 마력에 의한 것이든 물리력에 의한 것이든, 심각한 피해는 견딜 수 없는 거야. 우리 모두 이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
“좋아, 그러니까 결국은 마력 공명을 한 바가지로 뒤집어 썼다는 거야!” 스쿠틀루가 외쳤다. “그게 문제의 핵심인 건 아니야. 딩키가 온갖 헛소리를 무더기로 쏟아내긴 했는데, 한 순간이었지만 나를 향해 직접 말을 건넸다고. 나보고 내 것이 아닌 모습을 쓰고 있다고, 내가 써도 되는 모습이 아니라고 말했어, 스파이크. 그건 내가 엔트로파 공주의 화신을 내 투영의 그릇이자 수단으로 쓰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게 확실하잖아!”
“포니, 드래곤 모두 영리한 종족이지.” 스파이크가 학자적인 웃음을 지으며 뺨에 돋은 녹색 비늘을 보라색 손톱으로 쓸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우리의 지성을, 사상事象을 패턴화해 인식하는 데 쓰는 식으로 지나치게 혹사시키는 실수를 저지르곤 하지. 그러니까 이런 말이야. 후브즈 씨네 아이가 뱉어낸 수없는 헛소리들 가운데에서, 몇 개 단어에 정신이 팔린 것뿐이라는 거지. 한계에 다다른 정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유사성의 구조물을 만들 수 있는 몇 개 단어에 말이야.”
“아, 진짜 미치고 환장하겠네.” 스쿠틀루가 진홍색 눈을 부라리며 고개를 홱 젖혔다. “야 이 빌어먹을 망할... 스파이크! 어떻게 된 게 시간 거슬러 갔다가 돌아올 때마다 옛 친구들에게 이러저러한, 별 거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는 더욱 별 거 아닌 일을 해 줬다고 하면 그렇게 칭찬을 하더니 이제 겨우 재앙이 왜 일어났나 좀 알아볼 만한 단서를 가져다 주니까 못 써먹을 수정 한 무더기를 내버리듯 그렇게 내버리고 그러냐?”
“그 얘기를 하기 전에 내가 수정을 좋아한다는 것 정도는 말해 줘야겠군. 가넷이랑 같이 먹으면 그만한 전채요리가 없거든.”
“길토핀 공주님이 어디서 거나하게 취해 오신 통에, 비늘에 충격 완화 기능 같은 건 안 넣어두셨다는 걸 내가 몸소 증명하게 하지 말아 주겠어.”
스파이크가 빙긋 웃자 입 밖으로 연기가 새어 나왔다. 다시 터져 나온 기침에 목에 걸고 있던 보라색 펜던트가 달랑거리며 마나 불빛을 튕겨냈다. 스파이크가 목을 추스르고 거친 숨소리에 섞어 말했다. “좋아, 그러면 네가 아까부터 줄기차게 주장하는 ‘오닉스 이클립스’라는 게 실재한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그게 과연 무슨 뜻일지 생각해 봤어?”
“음, 정확히 알기에는 모르는 게 너무 많긴 하지. 그리고, 씁, 스파이크, 나도 그렇게 멍청하진 않아. 오히려 딩키는 천상생물의 시각으로 보이는 걸 주워섬긴 것에 가깝다고 봐. 걔가 입 밖으로 꺼내놓은 말의 형태와 그 내용은 자기가 본 걸 말로 옮기기에 가장 적합한 방법이었을 거고. 쑥대밭을 휩쓸고 돌아다니면서 ‘오닉스 이클립스’ 란 말 하나를 찾아 도서관이란 도서관은 전부 뒤집어 놓을 작정이 섰으면 별 쓸 데 없는 걸로 끝낼 생각은 없어. 딩키가 본 것, 아니면 그 몸을 빌려서 말한 목소리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말로 적당히 갈무리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었을 거야. 내가 찾아보려는 건...... 현상 자체의 기술적 성질에 의거해 완전히 관측할 수 있는 어떤 현상인 것이고.”
“어떤 걸 말하는지, 말해 줄 수 있겠어?”
스쿠틀루는 어깨를 크게 으쓱해 보였다. 무언가를 설명하려고 애쓰던 여자는 결국 포기하고 털어놓았다. “큰데, 그냥 큰 게 아니라 거대하고, 거대해서 시커먼 데다가 무섭기까지 한 무언가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거?”
“멋지군.” 스파이크가 눈썹을 치키며, 나이에 걸맞지 않는 풍자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과학적 방법론에 매달려 살아온 내 삼백 년이 아까울 지경이야.”
“아, 그 입 좀 닥쳐.” 스쿠틀루는 입을 다물고 몸을 일으켜 연구실 책상 가장자리에 걸쳐 앉고는 뒷다리를 흔들며 드래곤 친구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캔틀롯 산악지대 속 은둔 학자께, 여쭈어 볼 게 있소이다만.”
“말씀해 보시게.”
“캔틀롯 왕립학회가 마지막으로 천문학회를 열어 최신 이퀘스트리아 천문지도를 만든 게 언제쯤이었는지 혹시 기억하고 있어?”
“슬프지만 그 기억은 나를 떠난 지 오래야. 다만 내 경애하는 벗인 캔틀롯 왕실비서관이 다시 데려다 놓을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아.”
“삼십오 년 전이야.” 스쿠틀루가 대답했다. 여자는 소리 없이 웃으며 장난치듯 고개를 한쪽으로 기대고 말했다. “즉, 최후이자 최신의 천문학 연감은 재앙으로부터 십 년 전에 제작되었다는 것이지. 그 이후로는 모든 왕립학회 출판물을 고려하더라도 의미 있는 천문지도 갱신 사항은 없었어.”
“흠, 왜 트와일라잇이 왕립 영재 유니콘 학교를 조기 졸업하려고 그렇게 열심이었는지 이제 좀 짐작이 가네.” 스파이크가 몇 줄기 희미한 녹색 연기를 뿜으며 깔고 누운 보석 침대에 뺨을 묻었다. “제 3마법학교 졸업장을 따면 가장 먼저 밤하늘 천문지도를 정확하게, 최신 정보로 새로 작성할 거라고 말하곤 했었지. 뭐......” 그는 쓸쓸한 듯 한숨을 쉬고 말했다. “결국 할 수 없었지만.”
“나도 나름대로 오랫동안 이걸 놓고 고민을 해 봤는데 말이지.” 스쿠틀루가 혼잣말하며 한쪽 발굽을 들었다. “제 3시대의 끝과 제 4시대의 시작 사이 기간 동안 이퀘스트리아는 불안감, 심지어 미신까지 떠도는 곳이었어. 쓸만한 걸 찾아 온 세상을 헤집고 다니던 세월 동안 버려진 학술서 같은 걸 많이 주웠는데, 곳곳의 종족들은 물론 포니들로 가득 찬 도시에 이르기까지, 나이트메어 문이 봉인에서 풀려난다면 이퀘스트리아를 어떻게 할지에 대한 공포에 휩싸여 천 년이 되는 해, 방방곡곡의 알리콘 신전으로 모여들어서 기도를 올렸었다나 봐.”
“무서워할 만한 이유가 있기는 했지.” 스파이크가 에메랄드 빛 눈꺼풀을 깜박이며 말했다. “내 사랑하는 스승도 그 사태를 염려하는 이들 중 하나였으니까.”
“그럼 스파이크,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걱정한 것의 본질이 무엇이었는지 뭔지 기억해?” 스쿠틀루가 가장자리에 위태롭게 걸터앉은 채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여자의 얼굴에는 짓궂은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셀레스티아 공주님의 가장 뛰어난 제자분은 두려움의 미망에 휩싸여 포니빌로 왔어. 왜 두려웠을까? 알았기 때문이야, 스파이크. 천 년이 되는 해의 해가 가장 긴 날, 하짓날이 나이트메어 문의 유폐가 끝나는 날임을, 공포의 알리콘이 돌아올 날임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했던 거지.”
“트와일라잇 스파클은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거나, 보지 않는 것들을 보는 능력이 있었으니까.”
“일종의 예언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해. 말의 형태든, 두꺼운 책에 적힌 활자였든, 뭘 타고 갔든 그 오래된 전설이 트와일라잇 스파클의 귀에 들어갔고, 그것 때문에 이퀘스트리아의 역사가 경각에 달한 그 순간에 맞설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된 거라고 봐.” 스쿠틀루는 몇 주 전에 스파이크가 지하 석벽 위로 새긴, 이제는 먼지가 앉은 도표를 흘끗 쳐다보고 말했다. “난 그 예언이 그냥 헛소리 덩어리인 줄로만 알았는데, 덕분에 헛소리가 아닌 게 있다는 것도 알게 됐지.”
“오, 내 덕을 봤다고?”
“네 녹색 불꽃 말이야.” 스쿠틀루가 나직이 대답하고는 스파이크를 바라보며 살짝 웃었다. “시간의 장벽을 넘어 과거로 돌아가게 해 주는 그거. 어지럽고 아찔해서 그것들을 이해하지도 못 할 정도인 순환 속으로 보내 준 그거. 네 덕에 이제 나도 평범한 존재의 한계 너머에 있는 것들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게 되었지. 어쩌면 처음으로 펜으로 종이에 글씨를 쓴 포니들은 그러지 않았던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은 걸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어쩌면 예언이란 것도 이유가 있어서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그리고 만일 예언이 네 개의 별들에 대한 예언을―”
“하늘로 돌아간 네 분의 공주님들......”
“정답. 만일 네 개의 별이 나이트메어 문의 탈출을 도울 것이라는 것을 예언할 수 있었다면, 마찬가지로 별과 재앙 사이의 상관관계를 유추해 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오닉스 이클립스’라는 애매한 이름의 현상이 예언의 중심에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거지?”
“딩키는 지상생물 대부분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관측할 수 있었어. 너와 나, 그리고 우리의 뇌를 전부 반죽해 섞어놓더라도 그 불쌍한 꼬맹이가 봤을 무언가를, 죽음에 이를 정도로 방대한 정보를, 머릿속에 떠돌아다니게 둔다 해도, 그것들을, 우주의 진실들을 설명할 수는 없을 거야. 그 옆에 있던 나도 미칠 뻔했으니.” 숨을 깊이 들이쉰 후에, 스쿠틀루는 팔짱을 낀 앞다리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다음에 어디를 관측해야 하는지 알 수만 있었으면......”
“하늘 말이지?”
스쿠틀루가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끝내주는 사실은 우리가 그 때가 아니라 지금 있다는 것이지.” 스쿠틀루가 가볍게 짧은 분홍 갈기를 쓸며 말했다. “답은 여전히 과거 속에 있어. 별을 봐야 할 기회가 있다면, 그 때뿐이야.”
“나는 네가 ‘그러므로 공주님을 보러 가겠다’고 할 줄 알았어.”
“뭐?”
“스쿠틀루,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참을성 없는 드래곤, 특히 우리의 모험에 관한 것이라면 더욱 그렇게 되는 녀석이야.” 스파이크가 말했다. 짙은 녹색 연기를 뿜어낸 스파이크는 다음 말을 꺼내기 전까지 한두 번 더 기침을 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너는 지금까지 시간을 넘어가며 셀레스티아 공주님을 직접 알현할 기회를 여러 번 잡았지만, 기회가 약속하는 보상을 향해 단 한 번도 집중해서 달려가 본 적이 없어.”
“그, 그랬다고?”
보라색 드래곤이 눈을 가늘게 떴다. “과거에 첫 걸음을 내디딘 순간부터 살기등등한 한 무리 트롤이 습격한 사과 농장을 지키는 데 힘을 썼고, 그 다음에는 죽어가는 천상생물과 맞닥뜨리더니 얼마 안 있어 마력 과부하로 죽어가던 불행한 유니콘 아이의 목숨을 구했지. 내가 꼬마일 때부터 대충 삼백 년 정도가 흘렀지만, 내가 아직 내 어린 날을 정확하게 기억한다면 우리 살던 고향인 포니빌은 태양의 여신인 셀레스티아 공주님께서 드높은 왕궁을 떠나 다만 슈가큐브코너에서 다과회를 즐기고 싶다는, 다분히 사소한 이유로도 걸음하실 수 있을 마을이었어. 이제 네가 그런 마을에 발생한,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고 정상적인 것도 아닌 상황을 너 나름대로 솜씨 좋게 해결했다고 하면, 이퀘스트리아의 총지도자는 물론 그 곁 다른 여신의 지대한 관심을 끌고도 남았을 거야. 이런 절호의 기회가 말 그대로 한쪽 다리만 뻗으면 닿도록 네 가방 위에 떨어진 거나 다름없었는데, 넌 그 때마다 매번, 항상 당사자와 함께 캔틀롯 알현실로 걸어 들어가거나 날아 들어가기를 한사코 거부했지. 이제 말해보겠어? 왜 그랬는지.”
“굳이 직접 말로 꺼내서 씹어 뱉어야 되겠냐, 스파이크?” 스쿠틀루가 두 뒷다리를 흔들며 고개를 숙이고 웅얼거렸다. “더 이상 치어릴리 선생님 수업 때 난동을 피운 미친 년이 아니기 때문이지.”
“절대 아니지. 넌 그 동안 은근히 다가가는 방법만을 익힌 게 아니니까. 감히 말하자면, 단순히 익혔다는 말보다는 통달했다는 말이 더 맞을 정도로.” 스파이크가 피곤한 듯 미소짓자 입술 곡선이 더욱 굽어졌다. “하지만 은근히 다가가는 것과 완전 벽창호처럼 구는 것은 엄연한 차이가 있는 법이야.”
“말은 참 쉽게 한다, 스파이크.” 여자가 얼굴을 구기며 대답했다. “네가 그 때로 돌아가 봐. 가서 애플잭 면전에서, 당신 사과 농장 지하에 도사린 트롤들과 혈전을 벌여야 하니까, 온 이퀘스트리아의 군대가 농장을 짓밟으며 진군해 들어가며 농장을 쑥대밭으로 만들더라도 괘념치 말라고 말해 보라고. 아니면 딸의 목숨이 풍전등화에 몰렸는데 플러터샤이가 제시한 명료한 해결책은 일단 한쪽에 치워버리고, 캔틀롯을 향해 가는 게 더 낫지 않느냐고 더피를 마주보며 얘기해 보라고!”
“나는 네가 내린 결정이 틀린 것이었다고 비난하려는 게 아니야, 스쿠틀루. 전혀 달라. 오히려 흥미를 느꼈지. 그것뿐이야.”
“우리 양쪽 다 이 ‘실험’이란 걸 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 스파이크. 이퀘스트리아는 무너졌지만, 우리 모두 미래에 불을 밝히고 싶어한다는 것도 알고 있지. 하지만 말이야, 막상 어디로 뛰어드는 것 같은 시간 역행의 과정을 지나 과거로 돌아가고 나면, 인과관계고 가변변수고 죄다 내 알 바 아닌 게 되어 버려. 당장 그 상황에 떨어지고 나면, 근방 자경단에 트롤에 관해서 연락을 취해 볼 생각도 하지 않는 멍청이가 된 기분이 들기도 하고, 캔틀롯으로 거의 갈 수 있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그러지 않고 딩키의 뿔 앞으로 엔트로파의 화신을 이끌고 나아가는 위험을 무릅써야 할 때도 있어. 왜 그러나면, 내가 여기 이 굴 안에 너와 같이 있기 때문이야. 네 옆에 다른 포니가 있다면, 비록 제정신을 유지하기는 버거울지라도, 포니들의 종말은 아직 찾아온 것이 아닌 게 되기 때문이지.”
“그래도 네 심지는 여전히 굳건한 것 같지 않아?”
스쿠틀루가 한숨지었다. “시간 여행을 하는 건 쓰레기더미를 뒤지고 다니는 것과 비슷하거든. 뭐라도 찾아내서 건지려거든, 그 순간에 집중해야 해. 어디 다른 데 마음이 팔려 있으면, 그 한 순간 때문에 공포에 질리는 건 기본이고, 잘못되면 일이 완전히 틀어지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거든. 이 슬픈 습성은 큰 그림을 보는 시야를 잃어버리는 부작용을 갖고 있고 말이야.”
“그랬나?” 스파이크가 누운 자리에서 녹색 비늘 돋은 얼굴을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 “어쨌든 스쿠틀루, 우리의 일은 이퀘스트리아 문명이 남긴 유산 전부에 대한 연민이고, 그 결말이기도 해. 애플잭과 플러터샤이, 더피에게 당장 닥친 시련을 너는 외면하지 않았어. 포니 문명의 귀감으로 그보다 더한 예가 있다고 생각해?”
“‘귀감’이라......” 스쿠틀루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퀘스트리아에 당장 필요한 건 구원자인데, 정작 있는 건 망할 돌대가리 하나뿐이라니.”
“네 머리는 돌이라기보다는 좋은 분홍색 붓과 닮았는걸.”
“참 나, 고맙다, 스파이크.”
“뭘 이런 걸로.”
“그건 이제 됐고, 안 그래도 우중충한 대화에 칙칙한 내용을 좀 얹어야겠는데......” 스쿠틀루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신경질적으로 발굽을 얼굴에 비벼댔다. 답답한 듯한 신음을 토해낸 뒤, 여자가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앞으로 이 짓 할 때는 아주 틀린 방법으로 해야 할 것 같다.”
“계속해 봐.”
“자, 봐. 셀레스티아 공주님과 접촉하는 게 재앙의 원인을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규명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는 것쯤은 우리 둘 다 동의한 사항이지. 그러면, 내가 애플잭이나 플러터샤이에게 갔을 때, 어떻게든 직접 공주님을 알현할 기회를 얻었다고 치자. 그 다음엔 어떡할까? 날 누구라고 소개해야 하나?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하나? 딱 보면 답이 나오지. ‘아, 별고 없으십니까, 공주님. 바라건대 왕국 최정예 군단을 파견하시어 트롤 도당과 혈전을 벌이게 해 주십사는 청을 드리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하나이다. 또한 캔틀롯 의사들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의사들을 골라 더피 후브즈의 병마로 고통받는 딸을 구하여 달라는 말씀을 드리니 이 또한 염병할 은덕을 입었습니다. 하오나 앞서 말씀 올린 두 가지 사안을 실행하시기 전에, 제가 미래에서 왔으며 공주님과 공주님의 사랑하는 동생께서 흙에 파묻히시고야 만 후의 황무지에 마법을 돌려놓기 위한 답을 찾으러 왔다는 사실을 말씀드려야 하겠나이다.’”
“아, 이래야 내 사랑하는 이단자 친구답지.”
“말만 하셔.”
“진지하게 말하자면, 어떻게 과거의 너와 미래의 너가 과거라는 현재 속에 공존할 수 있는지 공주님께 말씀드리다 보면 적당한 타협점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내가?” 스쿠틀루가 놀란 눈을 깜박였다. “그래, 내가 늘어놓는 소리를 들어 줄 의향을 보인다고 치자, 그럼 무슨 말을 해야 하는데?”
“재앙이 언제 일어났는지 알고 있잖아. 클라우드데일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해와 달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고 있―”
“그렇다고 내가 공주님의 고독 전부를 대신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스쿠틀루, 넌 분명 도움이 될 거야.”
“그렇긴 하지. 돕기는 도울 테니.” 마지막 포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치더라도 그쪽 방면으로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한 적은 없는데.”
“무슨 뜻이지?”
여자는 신음하며 고개를 푹 떨궈 굴 바닥을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좀 더 알아야 한다는 거야! 이퀘스트리아에 들이닥쳐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무언가에 대한 확실한 단서가 필요해. 은하수 너머에서 다가오는 전조를 자세히 뜯어봐야 한다고. 공주님께 이 문제를 가져가서 원인을 규명할 도움을 받기는 받더라도, 그 전에 나 역시 가능한 많은 정보를 모으고 취합해서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거야.”
스파이크가 깊고 지친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니까, 결국은 네가 아까부터 계속 얘기하는 ‘오닉스 이클립스’란 아리송한 걸로 귀결되는군.”
“내 귀가 아니라 화신의 귀라고 해서 잘못 듣거나 하지는 않아, 스파이크. 너도 나처럼 그 자리에 있었으면 나랑 똑같은 반응이었을 건데. 우선 하늘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부터 알아봐야겠어. 무엇 때문에 염소자리와 큰곰자리가 죽어야 했는지, 그리고 딩키의 입을 빌어 내게 말을 건 존재가 누군지 말이야.”
“다 좋고, 괜찮은데 말이야. 천문지도는 어떻게 그리려고?”
“뭐라고?”
“논리적으로 보면 그게 다음 단계가 맞잖아, 그렇지?” 스파이크가 눈을 가늘게 떠 여자를 쳐다보았다. “네가 가고자 하는 길이 그거라면, 나 역시 반대하지 않아. 하지만 재앙과 별자리의 관계를 조사할 생각이 있다면 말이지, 재앙 10년 전부터 그 누구도 작성하지 않은 천문지도를 바로 네가 그릴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는 말이 되거든.”
“난...... 그게......” 여자는 입술을 깨물며 안절부절못하고 진땀을 흘렸다. “시간을 넘나들 때 펜이랑 종이를 갖고 오가는 건 안 되겠지?”
“안됐지만, 안 돼.” 스파이크가 보라색 비늘 덮인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는 한바탕 연기 섞인 기침을 하고는 덧붙였다. “하지만, 그 시점에 작성한 천문지도를 현재의 우리가 볼 수 있도록 보존하는 것 자체는 가능할 거야. 잘 생각해 봐.”
“어떻게 말이야?”
“너도 머리는 꽤 잘 돌아가잖아. 해결책이 필요할 때가 되면 너 스스로도 떠올릴 수 있을 거야. 적어도 내가 보기엔 이 모든 일의 첫 단추는 25년 전 이퀘스트리아의 천문을 쉽게 관측할 수 있게 해 줄 고정 지점을 찾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군.”
스쿠틀루는 순간 몸서리쳤다. 여자의 몸은 애처롭게도 갈색 솜털을 덮어쓴 뻔뻔한 얼음 덩어리로 바뀌었다. 여자는 입술을 깨물며 자기도 모르게 스파이크의 시선을 피했다. “난...... 글쎄, 일이 내 마음대로 돌아가는 것 같지 않은데......”
“반대로 생각해 봐, 친구.” 스파이크가 이해한다는 듯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입가에는 미세한 웃음이 피어 있었다. “이번에는 널 과연 어디로 데려갈 것인지 짐작하는 걸 꽤 즐기고 있지 않아.”
한 시간 후, 마지막 포니는 한때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기거했던 나무집의 불탄 잔해 위, 다만 판자 세 조각만 남아 흔적만 남은 발코니에 앉아 있었다. 곯아떨어진 스파이크가 코를 골면서 콧구멍으로 녹색 연기를 마구 뿜어내는 바람에 그 페가수스는 기침을 하면서 포니빌 폐허의 찬바람 속으로 몰려나올 수밖에 없었다.
차가운 눈발과 잔해에서 날리는 잿가루에 그녀의 갈색 사지가 절로 떨렸으나, 이제는 그렇지도 않았다. 당장 늘어져 달랑거리는 아기 드래곤 이빨들을 뒤적이는 동안, 스쿠틀루의 네 다리가 평화를 찾기는 그른 것이었다.
고글을 뒤로 젖혀 헤드밴드처럼 쓴 여자는 안절부절못한 채 마른침을 삼켜 가며 작은 이빨들을 뒤적이다가,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 파란 줄에 매달린 상아색 이빨을 다시 끌어안았다. 그녀는 그것이 자기 바로 앞에 펼쳐진 잿빛 세상 앞에 혼자 떨어져 나온 푸른 하늘이라도 되는 듯,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스파이크는 현명한 용이었지만, 스쿠틀루는 자신의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때마다, 적어도 그녀 자신만큼은 스파이크가 수백 살을 넘기더니 이제 서서히 노망이 들어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신뢰와, 더없이 단단한 믿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스파이크에게 그녀 자신이 황무지에서 어떻게 뒤틀려 가며 연명했고, 그 결과 어떤 종자가 되었는지 보여 주기로 작정한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그녀를 한때 능글맞게 웃으며 의기양양하게 온 마을을 스쿠터 한 대로 휘젓고 다니던 말괄량이 꼬마라고 믿고 있었다. 스파이크는 스쿠틀루가 보이는 모습이 실은 가면이며, 죽는 날까지 벗겨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게 달라붙어 멸망하기 전 세상 자체를 간단히, 완벽하게 속여넘겨 스스로를 희생양으로 삼은 어린아이 하나를 그저 그대로 버려두도록 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세상은 이윽고 파멸하여 그녀 스스로, 속으로 바랐던 소원을 그대로 들어주고 있다는 것을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 아이의 기억 속 행복한 기억이란, 지금 마지막 포니에게 있어서는 한 잔 뜨거운 독과 같다는 것을 스파이크는 몰랐다. 그는 그녀가 과거 속에서 답을 찾을 거라는 믿음으로 그녀를 과거로 돌려보내 왔지만, 그녀가 시간 가속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고통과 인내, 광증으로밖에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었음은 알지 못했다. 그녀는 트롤 무리와 싸웠고, 제정신이 아닌 유니콘들을 돌봐야 했으며, 겁에 질린 아이들의 얼굴이 군단을 이루어 자신을 쳐다보는 모습을 마주해야 했다. 머릿속 가장 작은 것들까지 끄집어내져 그녀를 미치게 만들었고, 현실의 몸과 투영된 몸 양쪽의 가장 깊은 곳에까지 눈물을 담아야 했다.
장기적으로는 스파이크의 말이 맞을지 몰랐다. 어쨌든 전체적으로 보면, 스쿠틀루의 시간 여행은 성과를 내고 있었다. 당일치기로 가는 것이기는 했지만, 삼백 살 넘은 시간의 탐구자가 형형색색의 보석 침대 위에 앉아 생각해 낸 유일한 방법인 만큼, 단순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스파이크에게 시간의 고리란 강철 쇠사슬이자 알리콘들만이 다룰 수 있는 고삐와도 같았고, 미친 시간여행자인 스쿠틀루에게는 셀 수 없이 많은 조각으로 부서진 파편의 집합이면서, 장대한 역사 속 위대한 과학자들도 상정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두려움과 슬픔으로 그녀를 내모는 불확실성의 가는 실이었다.
그랬으므로, 이 문제는 스쿠틀루가 스파이크를 너무나 손쉽게 무시할 수 있음을 감안하더라도, 스파이크를 미워하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그의 긍정적 추론과 선한 성품에서 비롯된 조언, 그리고 그의 제안 그 자체를 받아들였을 때, 그녀는 또한 운명적이기까지 한 추락을 받아들인 것이기도 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푸른 줄 목걸이를 꽉 붙들어 잡을 수밖에 없었고, 비전보관고의 검은 문을 열고 기억 속에서 스러지지 않는 화려한 색채의 그림자와, 아이의 길 앞에서 너무나 아름답게 빛나고 있던 그것과, 결국 지금 이 순간 비명을 지르는 서른세 살 먹은 여자를 끝내 십자가에 못박고야 말 그것과 마주 대면해야 했다.
거의 들이대듯이 이빨을 쳐다보고 있던 마지막 포니가 거친 숨을 토해내자 피폐해진 갈색 몸뚱이 속에서 폐가 부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여자의 마음은 클라우드데일의 잔해와 함께 한참을, 통곡으로 둘러싸인 대지 아래 깊은 공허 속으로 추락하고 있었고, 통곡은 눈을 가려 이퀘스트리아의 청명한 하늘 아래 찬란한 나날로 춤추던, 가장 멋지고, 끝내주는 한 누군가를 여자에게서 떼어놓고 있었다.
“으...안 돼!” 스쿠틀루는 트와일라잇의 나무집 위, 이제 삐걱이는 소리박에 남지 않은 목조 발코니 위 앉은 자리에서, 발작하듯 상반신을 튕겨냈다. 여자의 숨은 거칠었고 분홍 갈기는 한때 잠시나마 그녀에게 힘을 주기도 하고, 즐겁게 하기도 했짐나 두렵게 하기도 했던 어떤 구심력에 붙들려 있었다. 여자가 다시 소리를 냈을 때는 클라우드데일의 빗물 폭포에 부딪혀 메아리지는 듯한, 울먹이는 소리가 났다. “아냐...... 아직은 아냐...... 아직은 안 돼......”
과거의 별들은 여자가 생각하는 유일한 것들이었지만, 그것들은 여자를 기다려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스파이크가 했던 말, 진실로 지혜로운 말들이 이제 스쿠틀루의 마비된 정신 곳곳을 찔러대고 있었다. 마지막 생존자가 뛰는 걸음을 멈출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여자는 숨을 뱉어내며 자신은 어린 용의 이빨에게서 달아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스스로 납득했다. 오히려, 그것들을 향하여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달려들고 있었으니까. 과거에는, 지금부터 이십오 년 전 들이닥친 재앙이 베일을 벗고 덮치기 전에는, 기록해야 할 천체의 운항이 있었으며 고정점 각각에게 말해주어야 할 각각의 진실이 있었다. 이것 때문에라도, 스쿠틀루는 선택의 여지 없이 다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스파이크처럼 나이 들어 볼 수 없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믿어 볼 만하지는 않겠느냐고 자신을 설득했다.
버섯 죽을 삼키던 때처럼 두려움을 목구멍 너머로 넘기고 나서, 마지막 포니는 다음 이빨로, 그리고 그 다음 이빨로 넘어갔다. 마지막 이빨을 집었을 때, 여자는 입가를 떨었다. 여자는 문득 떠오른 반짝이던 사과 농장의 그림자 아래서 한 입 베어 물었던, 성과聖果가 가져다 준 벅찬 행복의 기억에 순간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이번의 감미는 좀 더 강했고, 어딘가 몰아붙여진 듯해서, 달랐다.
여자는 어느샌가 자기 앞에서 달랑이고 있는 이빨에 분홍 줄이 매여져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발굽으로 다시 이빨을 쓰다듬던 중 자기 안에 사르사 시럽이 보글거리는 듯한 느낌을 느꼈다. 머릿속 어딘가에 눌러붙은 솜사탕의 구름 같은 찌꺼기에 혀가 붙들렸고, 숨쉴 때마다 계피, 감초, 바닐라, 그 밖의 미뢰를 자극하는 더없는 행복의 향이 들이마시는 숨결마다 섞여들었다.
여자는 말 그대로 구역질이 났다. “참......” 그녀는 알아보기 힘들 만큼 자잘한 구멍이 난 초승달 모양 이빨을 들여다보며, 자조했다. “자기혐오도 정도껏이어야 하는 거 아냐?”
한 줄기 희미한 페퍼민트 향기가 흘러, 그녀를 가둔 눈꺼풀 속 어둠을 몰아내는 장밋빛 온기 속으로 여자를 끌어당겼다. 스쿠틀루가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붉은 갈기가 흔들렸고, 그녀가 몰고 온 하모니 호는 분홍 줄에 매달린 용의 이빨이 여자를 인도한 장소에 떠 있었다. 비행선의 널찍한 앞창 너머로 잿빛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안개 너머로 몇 차례 두리번거린 후에야 마지막 포니는 겨우 지평선을 분간할 수 있었다.
고도계를 슬쩍 들여다보는 일은 도움이 되는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여자는 황폐화된 대지에서 대략 오백 미터쯤 떨어져 있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지만, 용의 이빨이 가리키는 방향을 감안하면 이퀘스트리아 대지 아래 로 그 이상의 살인적인 고도를 뛰어내려야 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스쿠틀루는 비행선의 속도를 줄이며 조종석 의자를 젖혀 사십오 도 각도로 창 밖을 내려다볼 수 있도록 조정했다. 고글을 내려 쓴 뒤, 어스름 안에서도 볼 수 있도록 조정한 여자는 비행선 아래 눈 덮인 땅을 훑어보다가 용의 이빨이 인도하는 방향이 영혼의 영향으로 바뀌었음을 눈치챘다.
여자의 혀가 경련했고 두 뺨은 떨렸다. 목적지에 조금씩 가까워 갈수록, 여자의 몸을 제자리에 붙들어두고 있는 칸막이 벽을 넘어 계피의 단맛과도 같은 행복의 강이 범람해 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를 끌어당기는 조종석의 중력과, 당분의 과다 섭취로 찾아오는 활동항진이 맞붙어 싸우는 한가운데에 휘말리기라도 한 듯 여자의 심장이 제멋대로 뛰었다. 하모니 호가 석고를 바른 것처럼 흰 땅에 위험할 정도로 가까이 붙었을 때, 여자는 심장 마비가 오는 듯한 느낌을 느꼈다. 탄산 거품 이는 소다가 콸콸 흐르듯이, 혈관을 타고 수없는 반딧불이 흐르는 것 같았다. 모든 감각을 단맛이 지배하는 듯한 느낌에, 여자는 자신의 이 위로 자잘한 구멍들이 생기지 않았나 싶어 본능적으로 이빨을 핥았다.
애플잭의 재로 인도하던 때처럼 우직한 느낌도, 플러터샤이에게 데려가던 때처럼 가만히, 부드럽게 끌어당기던 느낌도 아니었다. 그 둘을 찾아갈 때, 스쿠틀루는 적어도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물론 플러터샤이의 잔해는 에버프리 가시숲 속 위험하기 짝이 없는 구덩이 안에 남아 있었기는 했지만, 적어도 에버프리 가시숲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 정도는 분별할 수 있었다. 지금 여기, 바닐라 향기 섞인 숨과 떨어지는 듯한 느낌으로 가득 찬 몸을 끌고 다가가는 와중에도 그녀는 다음 고정 지점의 단서가 어디 흩어져 있을지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이빨은 다만 마지막 포니에게 멸망한 세상의 품 깊은 곳을 가리켜 보일 뿐이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스쿠틀루는 단 한 번도 이 근처에 다가가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성년이 된 이후 포니빌과, 그 근처 지역을 일부러 피해다니며 지냈었다. 지금 여자가 찾아온 곳은, 운명이 그녀와 보라색 드래곤을 다시 하나로 묶은 그 자리에서 겨우 오 킬로미터 떨어져 있었고, 쑥대밭만 남은 자리에는 낯익은 것이라곤 없었다. 어렸을 때, 여자는 클라우드데일의 그림자 아래 커다란 협곡을 향하여 혼자 걸었던 일을 떠올렸다. 남쪽으로는 하늘 위 페가수스의 도시에 닿고, 북쪽으로는 포니빌에 닿는 드넓은 벌판은 지세가 완만했고 초목이 번성해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이 이제 절멸과 함께 찢겨져 나가, 산천초목이 우거진 자리는 날카로운 골짜기와 깊게 패인 구멍으로 바뀌었고, 저 너머 아득한 고블린의 도시 페트라에 닿는 자리에는 드러난 기반암이 창백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재앙이 도래한 바로 그 순간, 그녀와 스파이크의 친구들이 어째서 한 곳에 있지 않고 각자 멀리 떨어져 있는가는 스쿠틀루의 기진한 마음 속에서 몇 번이나 물어진 질문이었지만, 그것을 대답하는 일은 그녀에겐 속수무책이었다. 재앙이 단순히 물리적으로 지형을 찢어놓기만 한 게 아니라, 주민들의 정신을 붕괴시키거나 정서적으로 심각한 악영향을 주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과거로 돌아갔을 때, 고정 지점으로 삼았던 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애플잭은 친구들과 같이 있기에는 일이 너무 바빴을 것이었다. 플러터샤이 역시, 자기 회의에 빠져 밖으로 나다니기는 어려웠을 터였다. 래리티는 철저한 외부자였으므로, 두문불출했을 것이다. 트와일라잇 스파클은 책을 쓰고 있었다. 레인보우 대쉬는...
스쿠틀루가 날선 숨을 들이마시며 쥐고 있던 비행선 레버를 꽉 쥐었다. 여자는 고글 쓴 눈을 감으며 길고 거친 숨을 내뱉었다. 멸망이 찾아올 때 레인보우 대쉬가 어디에서 뭘 하고 있었는가는 그녀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이번 고정 지점을, 초콜릿과 감초의 환영을 이은 보이지 않는 건초 줄기로 스쿠틀루를 부르는 그녀를 찾아가는 일에 대체 어떤 이점이 있는 것인지 스쿠틀루는 판별하기 어려웠다. 하릴없이 입맛만 다시던 몇 분이 지난 후, 그녀의 마음 속 냉소가 아직 살아 있던 감미의 기억을 짓눌렀다. 천문지도라면 다른 누구를 찾아가더라도 쉽게 작성할 만했다.
“골치 아프네. 그냥 건너뛰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마지막 포니가 중얼거렸다.
막 분홍 갈기 위로 늘어진 체인을 당겨 비행선을 띄우고, 자리에서 벗어나려던 참에 마지막 포니의 눈에 근처 지평선 위로 크게 굽어진 모습이 띄었다. 여자는 고글 너머로 흘끗 보고는 의자에서 급히 내려와 앞창문 건너편을 들여다보았다. 비행선 아래 이퀘스트리아 황무지의 겉과 속이 강렬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세상의 바닥은 예전처럼 창백한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이상할 정도로 부자연스러운 윤곽을 하고 있었다. 비행선 아래로 툭 불거져 솟은 널찍한 언덕이 근처의 다른 언덕들과 분명히 다른 종류의 것으로 보였다.
뼈처럼 창백한 언덕을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아본 다음에야, 그녀는 주위의 불탄 대지와 이 암석의 구성 물질이 판이하게 다르다는 걸 눈치챘다. 그것은 보다 죽음에 가까웠고, 차가웠으며 구멍이 많았으나, 다만 그 위로 재 섞인 눈의 회색이 덮여 있을 뿐이었다. 머리로는 잘 알지 못했더라도, 여자의 본능이 그 돌덩이는 본래 이 땅의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바로 떨어져 나온 조각이라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뭐야 이거.” 스쿠틀루가 앓듯이 말했다. 그녀는 비행선 궤도를 우측으로 꺾어 이퀘스트리아의 대지 한가운데를 꿰뚫고 들어간, 거대한 반구형 돌덩이 주위를 반시계 방향으로 천천히 돌게 만들었다. “안 돼, 이럴 순 없어.” 여자의 얼굴은 헛구역질이 나오려는 얼굴과 엄청나게 찌푸려진 얼굴 사이 어딘가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썩을, 장난하자는 것도 아니고!”
월암月巖의 지름은 오백오십 미터였다. 월암의 둥근 가장자리 근처를 낮게 날아 한 바퀴 돌며 스쿠틀루가 직접 잰 결과는 그랬다. 지금껏 마지막 포니가 자기 눈으로 본 달의 파편 중에서도 가장 큰 조각이었다.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이해했을 때, 그녀는 그 주변을 차마 바라볼 수 없었다. 여자를 둘러싸며 솟아오른 산맥들은 사실 이 거대한 돌덩이가 땅에 부딪히며 발생한 크레이터의 가장자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런 게 있다는 소리는 행상 장사치들이나 M.O.D.D.에 처박힌 술꾼들 입에서 단 한 번도 떨어진 적 없었지만,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이 지형이 평범한 언덕 같은 게 아니라는 걸 알아챈 건, 우습게도 그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행운을 잡기란 불가능했다. 단순히 이 돌덩이에서 캐낼 수 있을 재료만 해도 끝이 없었다. 루비, 룬스톤, 화염석, 마력부여 월진의 모습이 여자의 혼을 빼놓았다. 멸망 뒤 세계에서는 그야말로 노다지나 다름없는 것이 여기 있었다. 시간과 예산만 적당하다면, 수백 마리 수전노와는 격을 달리하는 부를 이 돌덩이 하나에서 캐낼 수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포니의 마음을 빼앗은 것은 돈을 버는 것도, 돌덩이를 파 들어가는 것도, 자원을 긁어모으는 것도 아닌, 저 염병할 돌덩이 아래 어디에 잔해가 있는지 어떻게 알아낼 것이며, 안다 한들 어떻게 들어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단순히 살아 있는 포니를 마주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 때문에, 당장 눈앞에 놓인 재물에 관심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여자가 변한 것이었을까?
“곱슬머리가 아니더라도, 저 빌어먹을 게 당장 머리 위로 떨어지는데 살길 바라는 게 미친 짓이지.”
스쿠틀루의 목소리는 계류된 하모니 호 아래 그림자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찍어 누르려는 듯 희미한 독기가 서려 있었다. 여자는 뻐근한 다리로,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거대한 월암을 향하여 걸어갔다. 뾰족하게 끄트머리가 일어난 월암과, 불탄 대지의 부서진 ‘껍질’이 맞닿는 자리로 여자가 시선을 옮겼다. 괴사한 살덩이가 고원을 이루고, 거기서 창백한 암덩이가 들끓어 나온 것만 같았고, 그녀는 엄청난 크기 앞에 하릴없이 서 있는 한 조각 갈색 벼룩처럼 느껴졌다.
“머리도 꼬불꼬불하니, 좀 덜 아팠으려나.” 여자는 속으로 신음했다. 여자는 지친 붉은 눈으로 돌덩이의 고르지 못한 표면을 흘겨보았다. 그녀는 떨리는 발굽을 들어 월암을 가볍게 치고, 그대로 짓눌러 보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기분이 들어 여자는 몸을 낮게 숙이고 두 앞다리로 월암의 가장자리를 들어 보았다. 당연하게도, 월암은 산처럼 버티고 앉아서 꼼짝하지 않았다. “들어서 치우려는 생각은 접어야겠네.” 여자는 발굽을 털며 헛웃음을 띄우고는 한숨지었다. “하아...... 멍청한 돌탱이.”
여자는 엉덩방아를 찧듯 주저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방에 조용히 날리는 눈발 속으로 한숨이 사라져 갔다. 그녀는 이윽고 몸을 앞으로 기울여 앞다리 관절 위에 턱을 포개고는 발굽으로 자신의 분홍 갈기를, 그 아래 들어 있을 뇌가 익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미친 듯 비벼댔다. 머리는 생각에 잠겼고, 특히 한쪽 눈을 더 가늘게 뜨고 노려보는 두 눈은 희끄무레한 월암의 모습으로 가득 찼다.
분홍색 줄에 매단 용의 이빨은 그 와중에 진정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마주하고 있는 거대한 바위 아래 진실로 달콤하고 향긋한 딱딱한 사탕이 있으니, 꺼내서 핥기만 하면 된다고 여자를 당기고 설득하기를 반복했다. 저 흉물스러운 월암 표면을 뚫고 들어가는 데 얼마나 오랜 세월이 걸릴지는 모를 일이었다. 몇 주, 몇 달, 혹은 몇 년에 걸쳐 파고 들어가야 저 거대한 충격을 이겨내고 뼈 조각들이 남아 있을지 아닐지를 알 수 있을 것이었다. 시간여행자들 중에서도 가장 간이 큰 이들조차 쉽게 내어줄 시간은 아니었다.
게다가, 스쿠틀루의 마음 마지막 한 조각까지도 이 일은 시작하지도 말고 빠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황량한 회색의 세월을 견뎌내는 동안에도 은근히 자랑스러워했던, 그녀의 용기만은 그녀의 분홍 갈기에서 겨우 몇 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자리에 거대한 월암의 장벽이 아니라 솜사탕이 가득 차 있기라도 한 양 앞으로 나가야 한다고, 계속 나아가야 한다고, 뛰어들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흐음......” 여자는 끙끙 앓으며 높이 매여 흔들리는 하모니 호의 적동색 그림자가 비친 답답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신은 산란했고 시야는 뒤집혀서, 여자는 황혼 쪽에서 운석처럼 급강하하는 자신과, 우레처럼 몰려든 실구름 위로 걸어가는, 걷는 자리마다 섬광을 일으키고, 도발하듯 웃는 것만으로 번개를 겁주어 숨게 하는, 한 포니를 생각했다.
그 생각을 떠올리자 여자의 갈색 날개가 절로 펼쳐졌다. 스쿠틀루의 붉은 눈에 잠시 빛이 번득였고, 여자는 이윽고 몸을 풀고, 일어서서, 저 위에서 무거운 짐짝을 실은 채 까닥이는 것이자, 자신의 비행선이기도 한 물건을 향하여 날아갔다.
공구 상자를 들고 와 검은색 칸막이 벽을 몇 개 뜯어내면서 하모니 호 최하층 창고칸을 뒤진 지 몇 분이 지난 후, 여자는 찾던 물건을 찾아냈다. 그녀는 먼지 쌓인 금속 조각 더미 속에서 굵직한 황동 실린더를 꺼내 들어올리며 건조한 숨을 내쉬었다. 룬에서 발하는 불빛이 비치는 공기 위로 먼지와 녹 조각이 훅 피었다. 여자는 기침을 하며 갈색 발굽으로 먼지구름을 흩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다시 꺼낸 기계장치를 잠시 들여다보았다.
이 물건은 솔직히 말하자면 일단 낡았고, 전부 황동으로 만들어진, 마지막 포니가 기계공학 기술을 어떻게 익혔는지 온 몸으로 말해 주는 증인이기도 했다. 몇 가닥 전도성 와이어가 가느다란 창자처럼 늘어져 장치 밖으로 흘러나와 있었고, 코일은 이미 상해 과거의 모습만 겨우 유지하고 있었으나 연식을 생각해 보면 아주 멀쩡한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유용할지는, 마지막 포니의 방책이 얼마나 효과적일지와 마찬가지로 아직 알 수 없었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녀는 즐거운 듯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물건을 등에 지고 나선형 계단을 올라 하모니 호 조종석으로 올라갔고, 아름다울 정도로 잘 고쳐둔 스쿠터를 매달아 둔 작업대로 곧장 달려갔다.
놀랄지도 모르겠지만, 난 내가 아주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물론 수도 없이 엿을 먹긴 했지만. 종족의 마지막 생존자라는 사실이 자랑스럽거나, 감사해해야 할 일은 아닐 것이고, 그래서도 안 될 일이긴 하다.
그럴지라도, 내 삶에서 가장 혼란스러울 때를 되돌아보면 내가 아직까지 살아 있는 건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수준의 행운이 여럿 겹쳤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재앙 직후 세계에서, 바로 근처에 클라우드데일제 공구 여럿이 널려 있기도 했고, 어릴 적 그 개고생을 한 덕에 종말 이후 폐허나 뒤지고 다니는 삶에 적응하는 데 크게 어려움을 겪지도 않았고, 페가수스로 태어난 덕에 어스 포니나 유니콘일지라도 눈 깜박할 새 죽여 버릴 수 있을 땅 위 잔학한 족속들에게서 몸을 피해 있을 수 있다. 물론, 레인보우 대쉬가 클라우드데일의 수많은 이들 중 나를 데려다가 이퀘스트리아의 종말에서 몸을 피해 있을 수 있도록 비전 보관고 안에 넣어 둔 것을 빼놓아서는 안 되겠지.
그런 걸 전부 제쳐두고라도, 나는 일단 재능을 갖고 태어났다. 이미 알겠지만, 재능만 가지고 큐티마크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이퀘스트리아는 물론 알리콘 자매의 잿가루와 마법까지 불타 없어진 마당이니, 평생 큐티마크 달고 살기는 글렀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이 역설이 데려오는 쓴 입맛은 무시하는 편이 낫다는 걸 시간은 내게 말해주었다. 내 재능은 내 목숨이 아직 붙어 있다는 데서 분명히 드러나는데, 궁둥짝에 마법 문신 같은 걸 달고 다니는 것보다는 백 배 낫다.
말하자면 나는 기술자다. 아주 끝내주는 기술자. 쇳조각을 모아다 비행선을 만들 수도 있고, 파편 몇 개를 엮어 라이플을 주조할 수도 있으며 월석을 깎아 룬스톤을 조각할 줄도 안다. 몇 달 동안만 준비한다면, 어디든지, 몇 년이든지 나를 태우고 날아가 줄 탈것을 만들 수도 있다. 아드레날린으로 범벅이 된 숨을 토해낼 때도, 내가 살기 위해서라면 뭐든 태우고, 파묻고, 터뜨리고 죽일 수 있다. 녹색 불꽃으로 휩싸인 과거의 밑바닥에서나, 이 세상에서나 내 본능이 시키는 대로 그때그때 대처하면서 목숨을 건진 기적 같은 순간들이 몇 번이나 있었는지 다 세기도 어려울 정도고.
자랑하려고 이걸 적고 있는 것은 아니다. 뭐가 어쨌든, 직접 보여 주는 것만한 게 없으니. 나는 그냥, 순수한 지성이나 기개, 끈기 같은 것과 나의 생존은 거리가 멀다는 걸, 그건 순전히 운의 산물이었다고 고백하고 싶은 것뿐이다. 재앙은 내 삶을 담을 관짝을 마련해 주었지만, 땅 속이 아니라 묘지에 내려주도록 한 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결국은 운이다.
그래도 가끔, 내가 온 힘을 다해 벌이고 있는 일이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가, 운보다도 더 큰 무언가에 의한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가끔이긴 하지만......
녹슨 철제 바리케이드가 둥글게 늘어선 자리가 곰보 흉터처럼 보이는 돌 깔린 고원에서 무지개 한 줄기가 밝게 치솟아 눈발 날리는 하늘 위로 날아갔다. 동력원인 화염석이 슬슬 마력을 잃어 가는지, 무지개 신호는 약간 희미해져 있었다.
마지막 포니에게 무지개 신호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더 이상 중요치 않았다. 여자는 무지개가 바로 옆에서 들여다보이는 감시탑 위 휴식처에 늘어지듯 앉아서, 무지개 빛을 등불 삼아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발굽에 찬 팔찌에서 각종 도구들을 뺐다가 넣기를 반복하며, 스쿠틀루는 무릎 위에 올려둔 황동 실린더 내부에 감아둔 와이어를 잡아당겨 고치고 있었다. 여자가 능숙한 솜씨로 긴 금속 막대를 실린더의 목 부분에 끼워 조이자 각종 스프링과 레버가 주렁주렁 달린 도르래 장치의 골격 위로 녹슨 피뢰침이 솟았다.
여자는 십 년 전쯤 감시탑 주변에 직접 망치질해 가며 세운 철책에, 다시 조립하고 있는 이 이상한 장치의 나머지 부속 부품들을 기대어놓고 있었다. 여자는 등 뒤에서 뻗어오는 광채를 넘어가 박쥐 날개 같은 것이 달린 작은 가죽 연처럼 생긴 물건을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가벼운 재질로 만든 송풍장치를 실린더의 ‘목’ 부분에 가져다 붙였다. 그 다음, 도르래 장치에 감겨 있던 긴 금속 와이어를 천천히, 조심스레 풀어 연의 가운데 부분에 용접했다.
하늘 위, 갈려 날리는 듯한 눈발 사이로 희미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스쿠틀루가 레코드 플레이어를 하모니 호 입구로 가져다가 아슬아슬하게 놓아두고 옥타비아의 음반을 걸어둔 것이었다. 무지개 신호가 지나간 자리로 옥타비아가 켜는 현의 소리가 찌르듯 퍼져나갔다. 기계장치의 부활에 가까워질수록 커지는 황홀감과, 일에 매달릴수록 아파 오는 마음을 조용히 달래 가면서.
내 인생에서 가장 괜찮게 작동했던 물건, 그러니까 그야말로 재앙 그 자체에서 나를 구해 주고, 내가 죽기를 바라는 세상 모든 것들에게서 나를 지켜 줬던 물건은 죄다 말도 안 되는 것들이다. 뭐 기적 같은 걸로 내 평생이 문서로 기록되어 살아 있는 포니들에게 읽힌다고 생각해보면, 절로 몸이 떨린다. 내 목표를 위해서 해 왔던 수많은 정신나간 짓들을 그들이 알게 되면, 온 이퀘스트리아가 나를 천하의 머저리로 생각할 테니. 그게 당연하고.
살다 보면, 가장 병신 같은 짓거리가 가장 효과적일 때도 있지만.
“셋... 둘... 하나... 발사!”
외로운 바람 속에 구령을 흘려보낸 스쿠틀루가 장치의 목 부분에 달린 레버를 잡아당겼다. 하모니 호 기낭 위, 여자가 서 있던 자리에서 금속질의 소릭 울려 나와 사방으로 퍼졌다. 가죽 연이 장치에서 쏘아져 나와 황혼 방향으로 똑바로 날아갔다. 장치가 용수철의 힘으로 쏘아져 나가자 조잡한 송풍기가 작동을 시작했고, 이윽고 황동 와이어가 끽끽 울었다. 연이 날아가며 와이어를 전부 풀자, 연이 크게 멈칫하더니 곧 가죽 날개를 크게 펼쳤다.
금속 와이어 끄트머리에 매달린 연이 하모니 호보다 더 높이 떠서 폭풍에 휩싸여 춤추고 있었다. 연은 선인장처럼 전체에 전도성 금속 침이 꽂혀 있었다. 비행선 기낭 위에 서 있는 스쿠틀루는 이미 네 발굽을 모두 검은 고무로 단단히 싸맨 참이었다. 마찬가지로, 연과 황동 피뢰침의 방향을 어느 정도 조종할 수 있는 손잡이도 같은 처치를 해 두었다.
하늘로 밀어붙인 연이 큰 어려움 없이 날아다니는 모습을 바라보는 스쿠틀루의 고글 쓴 시선은 연에서부터 따라 내려오는 황동 와이어의 궤적을 따라 내려와 장치의 목으로 향해, 그 좁은 곳에 몇 개가 구겨져 들어가 다시 원통형 피뢰침 몸뚱이로 향하는 테슬라 코일로 들어갔고, 입가에는 웃음이 어려 있었다. 빈 원통을 둘러싸고 몇 개의 가느다란 황동 와이어가 엉켜 있었다. 마지막 포니가 룬 조각으로 봉인한 통 세 개에는 각자 내용물이 담겨 있었지만, 마지막 한 개의 통은, 가장 중요한 마지막 재료가 없이 비어 있었다.
“마력부여 천둥진주를 찾는다구유?” 브루스는 당혹스럽다는 듯 헛기침을 하고 방금 빨아들인 담배 연기를 뿜어 내며 진한 녹색 고글을 고쳐 썼다. 그는 자신의 비행선 입구 문틀에 기대어 있다가 몸을 휘청였다. “브루스 꼬랑지가 아무리 북실북실하다 그려두, 포니 아가씨가 생각하는 것마냥 은을 꿍쳐놔서 그런 건 아녀유?”
“설마 한 번 구경해 본 적도 없다는 셈으로 발뺌하려는 건 아니겠지, 브루스.” 스쿠틀루가 브루스를 마주보고 서며 말했다. 비행선 두 대를 연결하는 함교 너머로 황무지의 빛바랜 빛이 펼쳐졌고, 그 위로 바람이 쓸고 지나간 여자의 갈기가 도드라졌다. 여자가 말했다. “산양식 주조를 하려면 꼭 필요한 물건이잖아. 그리고 넌 늘 산양 물건을 주워 오지.”
“그건 산양 물건이 눈에 뜨일 수밖에 없게 생겨먹었기 때문인 거유. 죽어 나자빠진 놈들이 왜 추운 산꼭대기까지 기어올라가 물건을 만들려 들겠슈? 갸들이 어제 오늘 해서 죽은 것도 아니고, 안 그류?” 브루스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한숨을 쉬고는, 담배 연기로 가득한 비행선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잡동사니 위로 잽싸게 올라가며 말했다. “꼭 산 놈들만 흙탕 속에 도토리 숨기듯이 귀중품을 숨기란 법은 없는 거유. 긍께 M.O.D.D. 벽에 산양 애들 해골바가지는 걸렸어두 브루스 머리통은 안 걸린 거 아니겠어유?”
“그러니까 천둥진주가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스쿠틀루가 날다람쥐를 향해 가벼운 걸음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고글 벗은 눈은 둥근 창 너머로 다가오는 검은 구름을 쓸쓸히 바라보고 있었다. “급한 일이 있어서 그래, 브루스.”
“폭풍이 밀어닥치기 전에는 다들 그러더라구유!” 브루스가 금속 상자를 쌓아놓은 곳으로 쪼르르 달려가더니 미친 듯이 그 속을 뒤지며 씩 웃었다. “브루스가 보기에는 포니 아가씨두 어디서 정신병 하나 업어온 게 틀림없어유! 세상에 어떤 정신나간 포니가 붉은 화염도 아니고, 번개를 담아 보관할 생각을 다 한대유?”
“진짜 그렇다면 어쩔 건데?” 스쿠틀루가 대답했다.
브루스가 뒤지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가 손을 들어 입에서 담배를 떼놓자 녹색 렌즈가 불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포니 아가씨는 참 대단하다니께유. 요즘따라 죽지 못해 안달하는 것 같은데, 왜 그런 규? 아니지, 죽지 못해 안달하다니 뭐여...”
“죽고 싶은 생각 추호도 없거든.” 스쿠틀루가 전등 빛을 받아 빛나는 묘목들과 잘 보관된 잎사귀 사이를 아무 일 없다는 듯 돌아다니며 대답했다. “그냥... 요즘 새 고용주를 하나 잡았다고 해두자.”
“그 새 고용주란 양반이 돈이나 잘 주면 좋겠네유. 천둥진주는 한두 푼짜리가 아니니께유! 어디 처박아 놨는지만 알면 말유......” 그는 잠시 가죽 벨트에 매달아 둔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좌로 흘끗 보고, 우로 흘끗 보고는 조종석 위에 올려둔 상자를 슬쩍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담배를 입에 문 채 기합을 넣으며 뒤로 공중제비를 넘어 천장에 붙은 뒤, 꼬리로 한 대 탁 쳤다. 상자가 떨어지며 열렸고, 반투명한 돌 하나가 빛을 뿜으며 반동으로 튀어나와 날아가다가 브루스의 손에 탁 잡혔다. “이야! 함 봐유. 예쁜 만큼 값을 하는 놈이유. 번개가 한 번 내리쳤다 하면 이놈이 그걸 죄다 빨아먹고 폭풍이 열두 번 들이닥칠 때까지 든든하게 전지 역할을 하쥬. 저쪽 오소리 양반들한테 가져가 팔면은 돈이 짭짤하게 벌리기도 하구유.” 그러고는 머리를 한쪽 벽에 기대며 재미있다는 듯 스쿠틀루를 쳐다보았다. “그런디, 아가씨 비행선은 증기식인 걸로 알고 있는디......”
“비행선 때문이 아니야.” 스쿠틀루가 고글을 올리며 붉은 눈동자를 드러냈다. “그걸로 무기를 만들어 볼까 해서.”
브루스가 날카롭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고는 꼬리를 바닥에 한 번 탁 치며 네 발로 걸어와 스쿠틀루의 바로 앞에 다가서더니, 천천히 일어서서 손에 쥔 천둥진주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진짜 솔직허게, 그런 걸 썼다가는 뭐 좀 챙겨올 새도 없이 다 박살나고 말 거유. 쾅! 하는 순간 아가씨가 챙겨야 할 은이고 뭐고 다 없어지는 거유. 그 정도 생각은 있으시쥬?”
“나도 내가 여기 뭐 하러 왔는진 알아. 너 줄 돈도 확실히 챙겨왔고.”
“그라믄 포니 아가씨는 은 육백 개를 주시든가 그냥 가시든가 하시면 돼유. 브루스가 재밌는 놈이긴 혀두, 머리가 빈 놈은 아니니께유.”
스쿠틀루는 벌써 가죽 주머니를 끄집어내고 있던 참이었다. 여자는 자기 스스로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길 일인지 생각하느라 잠깐 멈칫했다. 스파이크와 재회한 후, 그녀는 오직 하나의 목적만을 위해 살아오고 있었다. 지금껏, 지난 몇 주 동안 해 왔던 모든 것들은 오직 시간 역행을 하기 위해서였다. 피트에게 갈색 불꽃을 잡아다 준 것 빼고는, 세월이 가르친 평범한 넝마주이의 삶과는 한참 거리를 두고 살아오고 있었다. 브루스가 곧 들이닥칠 파산의 위기를 경고해 준 것은 분명히 맞는 말이기는 했지만, 마지막 포니는 당장 코 앞에 소중한 것들을 되돌릴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옴으로서 자신의 삶이 얼마나 크게 바뀌었는지 자신에게 납득시킬 수 있는 것 이상으로 그를 설득할 수 있을지 확실치 않았다.
“멍청한 짓거리를 하려고 이 유난을 떨 수 있다니 얼마나 멋져.” 여자가 다 들리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스쿠틀루는 거래의 댓가 치고는 가여울 정도로 가볍게 느껴지는 은 주머니를 브루스에게 넘겨주고 말했다. “내 걱정은 하지 마, 브루스. 적어도 이름 까기 전까진 죽을 생각 없어.”
“포니 아가씬 브루스가 눈이 삔 것 같어유?” 브루스가 씩 웃었다. 그가 천둥진주를 가볍게 던져주자 마지막 포니도 간단히 받았다. 브루스는 이내 여자의 갈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흡사 꽃 피는 거 같지 않어유? 성 피터스부르크의 대정원에 피던 꽃들보다는 못하지만유.”
“흐음...... 아, 그, 그래.” 스쿠틀루가 분홍이 덮어 가는 목을 발굽으로 쓸며 다람쥐를 보고 피식 웃었다. “너 의외로 매력있다. 전혀 몰랐는데.”
“이 쓰잘데기없이 커다란 앞니만 아니었어두, 여자들 깨나 울리고 다녔을 것 같지 않어유? 음...... 적어도 내는 그런 것 같어유!”
스쿠틀루가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었다. “아, 그래, 포기하지 마. 누가 알아, 잘 빠진 다람쥐 애들이 팬클럽 결성해서 네 이름 써붙이고 다닐지.”
“해랑 달이 어디로 사라졌나 했더니 이제 좀 알겄슈. 지금 브루스가 보고 있는 여자가 생전 안 짓던 웃음을 짓고 있는디, 그리로 가 숨었나 봐유.” 그는 말을 마치고 담배를 한 입 빨아들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지저분한 벽에 대충 기대어 서다. “번개를 병에다 담고 나서, 혹 이 망해버린 세상을 다시 웃길 방책이라도 생각나거든, 얘기 좀 해줄 수 있어유?”
“그게 중요한 거다, 브루스.” 스쿠틀루가 다 죽어가는 숨을 내쉬며 귀중한 천둥진주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여자는 돌아서서 비행선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게 있어. 달 배때지에 칼침을 좀 놔줘야겠어.”
“풉! 아가씬 역시 제정신이 아뉴! 이쁘장한 건 그렇다 치더라도, 제정신은 아뉴!”
“그건 확실하지.”
내가 행복해지고 있는 건가? 솔직히 그런 느낌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전보다는 그래도 포니다워졌다고 말할 정도는 될 것이지만. 그렇다 한들 한때 나를 지탱해 주었던 힘 없이 살기란 빠듯한 게 사실이다. 녹색 불꽃을 타고 시간을 넘나들 때, 오래 전부터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의 빛과 그림자를 보았다. 그 때문에 좀 더 섬세해지거나, 눈치가 빨라지거나, 저 연약한 갈색 불꽃을 채웠던 것보다도 신경이 곤두섰거나 했을 것이다. 한두 달 전의 나와 비교해 보면, 지금 나는 여러모로 살아 있는 것에 가까워 있다. 이것 때문에 내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
스파이크는 내가 기쁨을 찾아가고 있는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브루스는 내가 뭔가 일을 꾸미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에버프리 가시숲으로 파고들거나, 월암 산을 뚫고 들어가려는 등, 목을 내놓고 돌아다니는 걸 피트나 길다가 알게 되면 어떻게 될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떨린다.
어쩌면 벌써 맛이 갔는지도 모르지. 미치지 않고서야 누가 희망이란 씨를 얻겠다고 수백의 죽은 이들이 우글거리는 과거로 돌아갈 것이며, 누가 그 씨를 영겁의 폐허 밑 죽은 흙 속에 심겠다고 하겠는가. 그런 짓을 하려거든 우선 스스로 그 일이 얼마나 아둔한 일인지 이해하고, 다시 납득해야 할 일이니 머리가 단단히 돌지 않고서는 어려울 일이다. 미친 포니의 경솔한 절박감이야말로, 그 상황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일한 행복일 것이다.
은 육백 개를 갖다 바쳤으니 본전은 뽑아야 할 거고, 저 아래 있을 것들도 건져야 하니까 아직 포기하지 않은 걸지도 모를 일이다. 내 마음 속 조금 더 큰 나는, 그녀가 몰고 다니는 질리도록 단 것들을 마주할 때 몸이 떨리던 것만큼이나 그녀를 이해하고 싶어하는 게 아닐까. 나는 미친 여자의 마음과 영혼을 작동케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내 혈관 속에 그 언니의 강박관념을 주사한 뒤, 뭘 토해내는지 구경해 보고 싶다.
별 이유도 없이 무모한 짓거리를 하는 여자는 아니라는 건 알고 있겠지. 월암 한가운데로 파고 들어가 그 아래에서 나를 기다리는 그 언니를 찾아오기로 결심했고, 실천할 의지가 있기 때문에 나는 이제 그리로 가려 한다. 가끔은 자기가 미친놈이란 걸 인정하고 마음껏 표출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번개를 활용하겠다, 라. 정말 멋진데.” 스파이크가 비늘 덮인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는 녹색 눈동자 앞에 걸친 크리스털 안경을 고쳐 쓰고, 실험실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려고 곧장 가서 천둥진주를 구해 오다니, 훌륭한걸. 그렇다 한들, 한 가지 가장 중요한 요소가 빠졌다는 걸 부인할 수는 없겠어.” 스파이크는 목에 끼는 연기를 기침으로 닦고 말했다. “번개 말이지.”
스쿠틀루는 커다란 가방에 접은 황동 실린더와 목 부분을 밀어 넣고 굴 천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귀 먹은 거 아냐?”
스파이크는 트와일라잇 스파클의 옛 나무집 위로 우르릉거리며 들려오는 천둥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잘 들려. 일백 하고도 이십사 시간을 주기로 계속 들려오지. 물론 너도 들리겠지만 말이야.”
“그래, 필요한 거 다 모았잖아.”
“다분히 시적이군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왜 네 비행선 선실에 가 있지 않고 나 같은 늙은이랑 같이 있는지 궁금한걸.”
“비행선은 마을 주택가 창고 안에 내려놨어.” 스쿠틀루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도 아는 창고일걸. 캔틀롯 배달 가기 전에 애플잭이 과수원 사과 넣어두던 그 창곤데.”
“하모니 호 정도 크기라면 들어갈 만하겠네. 그렇더라도 이번 폭풍을 감당하기엔 좀 버거울 것 같지 않아?”
“지금까지 잘만 버텼으니, 괜찮지 않겠어?” 스쿠틀루가 씩 웃었다. 굴 위로 폭풍이 몰아치자 굴 천장에 달렸던 종유석 몇 개 끄트머리에서 먼지가 조금 날렸다. “평소 같았으면 뇌운 위로 비행선을 띄워서 거기서 폭풍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지만, 결국 땅 근처에서 폭풍을 맞는 날이 오고야 말았군. 그렇다 해도 비행선이 어떻게 되진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딱히 없을걸. 그 망할 놈을 훨씬 폭풍 한가운데보다도 위험한 데 묶어놓은 게 하루이틀 일도 아니지만, 여전히 멀쩡하니까. 어쨌든......” 여자는 뇌총雷銃 꾸러미를 가죽끈으로 단단히 묶어 끙 소리와 함께 짊어지고 말했다. “어우 무거워...... 그걸 몰고 들어간 데는 보통 들어갈 땐 마음대로였겠지만 나올 때는 아닌 동네였으니까.”
“얼마 전에 봤다고 했지. 충격적으로 거대했다던 월암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말해 주는 건 어떨까 싶은데.” 늙은 용은 망치, 끌, 녹색 불꽃을 담은 단지, 뿔 팔찌, 전등 등의 물건을 주섬주섬 챙겨 중무장한 몸 위에 매달아 놓은 주머니 속으로 각각 집어넣는 스쿠틀루를 차분한 눈길로 바라보며 말했다. “네 나름대로의 행동 방식이 있다는 건 이해하지만, 어떻게 생각해 낸 건지 이 늙은이에게 설명해 주지 않겠어.”
“오래 전에 이 녀석을 만들었지.” 스쿠틀루가 들뜬 듯 등에 지고 있던 커다란 장치를 가리키고 말했다. “또 폐허를 뒤지고 다니다 보니까, 월석이란 게 고압 전기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더라고. 월암 속을 직접 파고 들어가려면 얼마나 오래 걸릴까 생각해 본 적 있어?”
“월석이라, 딱 한 번밖에 먹어보지 않았지. 분필을 씹어 삼키는 것 같더라고. 알겠지만, 용들은 석회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아, 뭐, 그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네가 지금 이빨을 하나 뽑아서 곡괭이를 하나 벼린다고 해도 더럽게 오래 걸릴 거라는 거지.” 스쿠틀루가 쓰게 웃었다. “언제더라, 하모니를 만들기도 전 일인데, 세상 망하고 나서 정기적으로 밀어닥치는 폭풍이 늘 지나가는 자리에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번개가 한 번 딱 꽂히니까 산산조각나더라고. 폭풍이 지나고 나면 눈이 내리잖아, 그 때 그쪽으로 걸어가서 보니까 단순히 폭발만 한 게 아니더라고. 갈라져 부서진 단면마다 형형색색의 귀한 보석들이 가득 박혀 있었던 거야. 그것들을 주워다가 마력을 먹여 교환도 하고 장사도 하다 보니까 비행선 하나 만들 정도로 은이 벌리더라. 얼마 걸리지도 않았어.”
“운이 정말 좋았던 것 같군.”
“정답. 하지만 내가 원하는 자리에 천둥번개가 꽂히게 할 수는 없는 일이지. 그러던 어느 날, 천둥진주라는 물건이 전하 전도를 집중시킬 수 있는 끝내주는 기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 날부터 곧장 장비를 만들기 시작해서 지금 내가 지고 있는 이 염병할 장치가 나오게 된 거야.” 여자는 강조하듯 가죽옷에 덮인 어깨를 흔들고 말했다. “공중에 연을 띄워서 벼락을 유도하고, 나는 선을 따라 흘러 들어오는 전력을 피뢰침 한가운데에 응집시킨 다음 천둥진주로 그걸 집중시켜, 장비 내부의 룬스톤을 작동하는 순서대로 전류가 발사되는 거지. 쾅! 하고 말야. 이과정을 수행하는 게 뇌총이고.”
“그러니까 월암을 파괴하기 위해 저 아름답고 위험한 기계를 만들었다는 거지?”
“내부에서부터 균열을 만들어 폭발시키면, 나는 온종일 일해야 하는 나날을 회피할 수 있으니까.” 스쿠틀루가 웃었다. “완벽하게 말이지!”
“작은 마을 두 개는 들어갈 만한 월암이 폭발하면 무슨 일이 생길지, 생각하기도 무섭군.”
“풉!” 스쿠틀루가 아이처럼 야유했다. “이걸 백 개를 갖다가 쏴제껴도 그 정도 크기 돌덩이를 폭발시키는 건 불가능해. 다만 이 기계로 번개를 가능한 많이 유도할 수만 있다면야 다음 고정 지점을 찾는 데 있어 보다 편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는 있겠지. 그만큼 구멍을 깊이 뚫을 수 있을 테니.”
“뼈를 찾을 수는 있는 거야?”
“이번에 찾아야 할 재가 완전히 풍화되서 먼지로 날릴 것 같은데, 그러면 네 이빨은 어떻게 반응하려나?”
“괜찮은 대답이네. 지금까지 폭풍을 기다린 이유가 뭔지 이제 어느 정도 생각이 되는군.”
“뇌총을 충전하려면 낙뢰가 필요하니까.” 스쿠틀루가 끄덕였다. “그렇다 해도, 겨우 몇 초 내로 전력을 방출해야 해. 이 망할 놈의 세상은 던져 줘도 꼭 그 순간에만 써먹을 수 있는 수단과 방법만 준단 말이지. 앞으로 열두 시간만 지나면, 이번 기회는 영영 가 버릴 거고. 그렇게 되면 월암을 파고 들어가려고 또 몇 날 며칠을 기다려야 할 거야.”
“폭풍의 눈에서 여기까지, 장장 5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보호 장비 하나 없이 어떻게 건너갈 건지 물어봐도 되나?”
“그거 네 덕 볼 건데.” 그녀는 눈을 찡긋하며 스파이크를 가리켰다.
"내 덕이라니?“
“봐봐, 스파이크.” 여자는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천둥 소리 사이로 나직하게 말했다. 폭풍이 지축을 뒤흔들어 벽에 매달린 시계들과 바닥에 쌓아둔 보석들이 흔들렸다. “네가 불러내는 녹색 불꽃은, 나를 과거로 돌려보내기 위한 거잖아.”
“그렇지...?”
“......그러면 그 불꽃의 정확히 어느 부분이 공간의 이동에 관여하는 거지?”
“음... 그거야 별로 긴 얘기도 아니고......” 스파이크가 말을 멈췄다. 당혹스럽게 그녀를 쳐다보는 두 눈이 크게 벌어졌다. “아, 세상에, 설마 그 말은 아니겠지?”
“썩을, 들켰네. 그 말 하려고 했어.” 스쿠틀루가 사악하게 웃었다. “저 비늘 덮인 커다란 몸이, 정말로 옛날 불 한 번만 뿜으면 나라의 절반 어디로든 즉시 배송할 수 있는 꼬마 용이긴 했나 봐.”
“내 기력을 좋게 봐 주니 좋기는 한데, 웃기는 좀 그렇구만. 다음에는 아예 과거로 이동하는 능력을 불완전하게나마 베껴서 그것만 줄창 써먹지 않을까 걱정이야.”
“피, 안 그래!” 여자는 피식 웃더니 뇌총에 장착된 피뢰침 속 소켓에 잘 들어가 반짝이는 천둥진주가 드러나 보일 정도로 가죽 덮개를 들어 열었다. “내가 어떻게 할지는 전적으로 날 저 너머로 보내 줄 수 있는 네 능력과, 이 빌어먹을 놈이 제대로 작동할 가능성에 달렸거든. 음... 무슨 말인지 알겠지.”
“스쿠틀루, 내가 걱정스러운 게 뭐냐면...”
“뭔데 그래.”
“시간 여행과 더불어 우리의 실험을 시작할 때부터, 다른 그 무엇보다도 중요시했던 건 바로 네 행복과 안전이었어. 어두운 과거 속으로 너 혼자 보내는 게 어찌나 부담이 됐는지. 네 끈기와 지혜에 여러 번 놀라기도 했지만 말이야. 이 모든 것이 단 한 번의 도박, 단 한 번의 변덕 때문에 없던 게 된다면―”
“뭐, 네가 그 도박을 하는 건 아니잖아, 안 그래?”
“네 자기 파괴의 장식품이 되는 건 사양하지.”
“스파이크......”
“넌 마지막 포니야.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존재라고. 그런데 시시하게도 뭘 좀 파 보겠다고 덤벼들다 벼락에 맞아 수백만 조각으로 산산이 흩어져 죽어 버린다면 그건 끔찍한 비극이―”
“스파이크, 난 지금까지 악을 쓰고 살아오면서 슬픔으로밖에 숨 쉬어 본 적이 없어.” 스쿠틀루가 냉담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며 차갑게 대꾸했다. “가끔은 성공의 기쁨을 누리게 해 달라고.”
늙은 용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흐린 눈길로 그녀를 한참 바라보았다. “알겠어.” 그는 녹색 연기를 뿜어내며 기침을 토하고는, 겨우 가늘게 웃어 보였다. “과거를 돌아다닐 때 어디까지 발을 담가야 하고 어디부터 발을 담그면 안 되는지 이래라저래라 늘어놓을 생각은 없어.”
“그거 고맙군, 스파이크.” 여자가 웃으며 대답했다.
“솔직히, 레인보우 대쉬의 재 때문에 그 정도 위험을 감수한다는 것만 보면 숭고해 보이기는 해. 그 행동 자체를 고평가하는 건 아니지만.”
“핑키 파인데.”
스파이크가 놀라 되물었다. “다시 말해 주겠어?”
“월암 밑에 핑키 파이의 잔해가 있어.” 스쿠틀루는 짊어진 가방을 고쳐 메며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레인보우 대쉬가 아냐. 자, 그럼 이제 날 보내 줄 거야, 말 거야?”
“나보고... 널... 거기로...” 늙은 용은 꼬마처럼 말을 더듬었다. 그는 자리에 주저앉으며 코 끝에 걸린 안경을 벗고는 고통스럽게 두 눈가를 마구 비비고는 한쪽 손으로 손짓하며 나직이 말했다. “핑키 파이의 재를 구하려면 월암을 뚫고 들어가야 하니 거기 필요한 전력을 충전할 필요가 있고, 마침 멀리 떨어진 곳에 폭풍이 밀려오고 있으니 그 한가운데 폭풍의 눈에 널 보내주면 거기서 번개를 받아올 수 있으니까 널 그리로 보내 달라고?”
“스파이크, 살면서 단숨에 너 스스로에게 명료한 설득을 해 본 적 있어?”
스파이크의 지친 눈이 질렸다는 듯 깜박였다. “하......” 그는 다시 안경을 쓰고 느릿하게 숨을 뱉어냈다. “그래, 마음대로 해. 혹시 모르지, 핑키 파이에게 한 번 데이고 나면 위험한 짓은 하지 않게 될지도.”
“딱 계획대로구만!” 스쿠틀루가 어딘지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내 생각은 이래. 핑키 파이는 늘 포니빌에 있었어. 그리고 재앙이 가장 먼저 들이닥친 곳이 바로 우리 마을이라는 건 불 보듯 뻔하지. 그렇다면 밤하늘을 보기 가장 좋은 곳이 어디겠어?”
“뭐, 스쿠틀루 네가 별 보고 올 거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말이야.” 스파이크는 애써 감추려던 걱정스러운 얼굴을 결국 드러내며 말했다. “문제는, 네가 관측한 것들을 가져오기는 할까에 관한 거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애플잭이나 플러터샤이, 이 둘은 다시 만나서도 네 마음을 달래 준 친구들이지. 하지만...... 흠...... 이걸 뭐라고 말한다......”
“말해 봐. 왜 말을 못 해?”
“스쿠틀루. 너 혹시 핑키 파이를 기억하기는 하니?”
“치, 당연히 기억하지! 핑키 파이, 항상 행복하고, 일상이 파티에, 늘 슈가큐브코너에서 고급 디저트 샘플을 들고 나오고......”
“그렇다면 친구, 그 기억에 딜레마가 있는 것 같지 않아?” 스파이크가 연륜이 묻어나는 미소를 겨우 누르며 말했다. 둘 위로 천둥벼락 치는 소리가 웅웅댔다.
스쿠틀루가 무슨 말이냐는 듯 그를 흘겨보았다. “딜레마라니?”
“핑키 파이에 대한 네 기억은 어렸을 때의 기억이라는 거야.”
“무슨 뜻이야?”
“음......” 스파이크가 녹색 비늘이 돋아난 뺨을 긁적이더니 굴 저편을 흘겨보듯 쳐다보며 말을 꺼냈다. “너도 핑키 파이를 다시 만나게 되면 알게 되겠지만, 나이를 먹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는 법이지. 핑키 파이는...... 글쎄...... 네가 떠올렸던 것 이상의 이면이 있을 거야.”
“스파이크, 내 유년기는 그 누구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힘든 나날이었어.” 스쿠틀루가 건조하게 말했다. “내 기억에 변조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
그는 다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역시, 너랑은 말로 못 겨루겠다니까. 번개 맞아도 난 모른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네.”
스쿠틀루는 재미있다는 듯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스파이크가 일어나 여자에게 다가왔다. “자, 그럼 널 어느 방향으로 보내 주면 되지, 스쿠틀루?”
“며칠 전에 월암을 발견하고 나서 바로 좌표를 측정해 둔 게 있지.” 스쿠틀루가 안장 가방 앞쪽 주머니를 열어 양피지 두루마리를 꺼내 펼쳐 읽었다. “107, 37, 8. 폭풍이 치고 있으니, 아마 대기압이나 이런저런 걸 감안해서 계산해야 할 거―”
“그걸로는 안 돼.”
스쿠틀루가 눈동자를 돌렸다. 그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용을 쳐다보았다. “스파이크......?”
“방향을 알아야 해, 친구. 그...... 가능하면 가리켜서.”
마지막 포니는 눈가를 씰룩거렸다. 여자는 그녀 자신과 용 친구의 위치를 머리 위 나무집의 위치에 대응시키고, 그 위로 상상의 나침반을 돌렸다. 마침내 가늠이 끝났을 때, 그녀는 보석 더미 위로 뻗어 있는 벽을 가리켜 보였다.
“음...... 저쪽으로.” 그녀가 나직이 말했다. “그러니까 북동쪽으로 대략 5킬로미터, 해발고도는 800미터.”
“좋아! 훨씬 낫군.” 스파이크가 빙긋 웃고는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몸 깊은 곳에서 불을 끌어올렸다.
“잠깐 잠깐 잠깐 잠깐 잠깐!” 스쿠틀루는 늙은 용을 똑바로 쳐다보며 두 앞다리를 흔들었다. 얼굴에는 조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그 삼백 년 된 똑똑한 머리가, 간단한 좌표만 알아도 될 걸 못 하고 있다 이거지?”
“시간을 넘어선 순간이동을 완전히 터득했을지도 모르는 용에게 할 말은 아닌데, 스쿠틀루.” 그는 부끄럼을 타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목에 덮인 보라색 비늘 아래 홍조 같은 무언가가 번졌다. “하지만 시간 여행을 위해서는 적어도 몇 년간은 가고자 하는 지역에 살았어야 하고, 과거 시점에서는 살아 있었을 이들의 영혼에 네 영혼을 결속시켜 줄 촉매가 필요하지. 내가 캔틀롯 쪽, 즉 내가 태어난 곳 쪽을 지목하고 있지 않았으면, 솔직히 말해서 그냥 엿 먹이는 것밖엔 안 될걸.”
“어떻게 지금까지 이 얘기는 한 마디도 안 할 수가 있어?!”
“간단한 문제야. 지금까지 네가 물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지.”
“그럼 옛날에 트와일라잇의 편지를 셀레스티아 공주님께 보내드리던 건 다 뭐야......?!”
“그 때는 아무래도 지금보단 젊었고 감각도 더 예리했지. 뭐, 사실 그 과도할 정도의 서류 뭉치를 어디로 ‘던져 주면’ 되는지 모호하게나마 기억하기만 하면 되는 문제긴 했지만. 몇 달 동안 수도 없는 서류가 셀레스티아 공주님 방 벽난로로 들어가 별 쓸모도 없는 잔불로 생을 마감한 걸 알면 너도 놀랄걸. 하하하하......” 갑자기 기침이 치밀어 올라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아, 좋은 시절이었지.” 그는 침을 삼키며 입술을 핥고는, 차분하게 스쿠틀루를 돌아보며 웃어 보였다. “자, 그럼. 준비는 됐니?”
“잠깐만!” 스쿠틀루가 반쯤 소리질렀다. 여자는 떨리는 발굽으로 안장 가방에 달아둔 수통을 떼어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이나 안에 담겨 있던 물을 목 너머로 넘기고, 숨을 토해내며 뚜껑을 탁 쳐서 닫은 뒤 수통을 원래 자리로 돌려두었다. 그녀는 사형수의 목에 매단 밧줄처럼 자신의 목을 싸맨 분홍색 줄에 매인 용의 이빨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됐어. 시작하자.”
“그럼 이제 준비 다 된 거지?”
“안 됐는데.” 그녀는 툴툴대며 대답했다. “생각이 바뀌기 전에 갔으면 하는 것뿐이야.” 목에 감긴 줄에 매달린 용의 이빨이 향긋한 시나몬 토스트 한 조각처럼 희미하게 빛났다. “원래 지고의 용기란 건 마구잡이거든.”
“너 자신의 생각만은 아닌 것 같군.” 스파이크의 호흡을 타고 몸 안의 열기가 빠져나와 좁고 답답한 공기를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스파이크가 목을 뒤로 기울였다. “머지않아 완전히 체화할 것 같기도 하지만.”
“공간이동을 해 줄 거면 빨리 해 줄수록 좋은데.” 스쿠틀루는 처형부대 앞에 선 사형수처럼 똑바르게 서서 대답했다. 그녀는 의미심장하게 고글을 내려 썼다. “내가 폭풍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이유는 딱 하나, 번개를 담아오기 위해서야. 폭풍이 지나갈 때쯤 되면 핑키 파이의 재는 이미 내 수중에 들어와 있을 테니, 그 때 돌아오지.”
“자신 있는 걸 보니 그나마 마음이 좀 놓이네.” 스파이크가 마지막으로 연기를 뿜어내고는 커다란 주둥이를 스쿠틀루 앞에 내밀었다. “적어도 산 밑 암석 속에 보내진 않도록 노력해 보지.”
스쿠틀루의 붉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뭐, 뭐?”
이미 늦어 있었다. 불꽃이 여자 위로 쏟아져 내렸다. 놀란 숨을 들이마시자 열기가 몸 안으로 스몄다. 시간여행자로서 녹색 불꽃을 타고 갈 때마다 보였던 에메랄드 빛 거울을 구부려 만든 둥글고 긴 터널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그것과는 다른 종류의 이상한 느낌이 마지막 포니를 감쌌다. 언젠가 여신들이 세상을 구상할 때 머릿속에 그렸을 그림처럼, 세상이 수채화로 그려놓은 듯 바뀌더니 점차 그 형상이 무너지며 하나로 섞였고, 다시 섞였던 것들이 다시 밖으로 흘러나와 어둠이 내려앉은 잿빛 모자이크화 한 장으로 바뀌었고, 우짖는 바람이 휘몰아치는 듯 깊숙한 곳에서 광발작을 일으킬 듯 밝은 섬광이 군단을 이루어 밀어닥쳤다.
마지막 포니는 눈을 깜박이며 텁텁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뭐, 그렇게 나쁘진 않―으앗!”
등에 지고 있던 황동제 뇌총의 육중한 무게가 여자를 위로 끌어당기자, 그녀는 새된 비명을 질렀다. 말하자면 그녀는 위아래가 뒤집힌 채 디딜 곳 없는 텁텁한 공기 중으로 공간 이동을 한 것이고, 뇌총은 그저 중력에 따라 움직일 뿐이라는 것이며, 고도조차 잴 수 없는 곳 한가운데서 그저 추락에 추락을 반복하는 마지막 포니의 주변에는 폭풍이 몰아치며 말 그대로의 혼돈을 끌고 온 듯 검은 구름이 소용돌이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아, 썅!”
그녀가 내지른 비명은 사방에서 터져나오는 천둥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아래로 보이는 세상은 그저 광기가 휘몰아치는 회오리바람에 지나지 않았고, 그녀는 저 섬뜩한 대기 넘어 설탕 옷을 입은 채 땅 속 어딘가에 묻힌 한 말도 안 되는 알맹이에 낚여 용의 이빨에 기댄 채 여기까지 와 쓸데없이 값비싼 뇌총의 무게에 잡혀 그 심장부를 향하여 다만 무기력하게 발버둥치며 떨어지고 있었다.
비행선을 집 삼아 보내던 나날들 중 이런 상황, 귀가 멀 것만 같은 악몽 같은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준비를 한 적은 없었다. 스쿠틀루는 회전축이 되어 그녀의 몸을 팽이 돌리듯 돌리며 등을 짓누르는 뇌총을 거꾸로 밀어 올리려고 무진 애를 썼다. 한참이나 낑낑댄 끝에, 스쿠틀루는 겨우 날개를 꺼내 펼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그녀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한 줄기 광풍이 그녀의 갈색 날개를 밀어 올려 저마다 전하를 가득 머금은 검고 빽빽한 구름들 사이로 내쏘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날카로운 숨을 토해내며 날개를 굽혀 거대한 구름을 피해 비스듬히 날았다. 사방에서 전류가 섬뜩한 흰빛을 띤 채 가지를 치며 일렁거렸고, 황동색 렌즈에 갇힌 여자의 붉은 눈동자는 그 빛 앞에 무기력했다. 미친 듯 울려대는 세상을 향하여 하강나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나약한 몸이 어디를 향하는지 가쁜 숨을 허덕이며 방향을 찾는 여자의 눈 위 고글 위로 짙은 전류가 엉겼다.
압도적으로 거대한 또 다른 적란운 무리가 여자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곳곳에 불거져 나온 검은 구름 조각은 ‘개들의 개소리’ 호조차 그 크기에 비하면 티끌일 정도로 거대했고, 적란운은 그보다도 더 큰 들끓어 오르는 몸뚱이를 추락하는 여자의 몸 앞으로 들이밀며 끔찍하게 뜨거운 번개를 사방으로 쏘아댔다.
“으앗!”
그대로 용감히 밀고 내려가는 스쿠틀루의 옆구리 바로 옆으로 작열하는 번개가 지나쳐 갔다. 밝고 푸른 불꽃을 튀겨대며 춤추는 구름의 굴뚝 속으로 떨어지는 혜성처럼 떨어지는 동안 여자의 심장은 멈추었다 뛰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악몽 같은 하강나선을 따라 추락하면서 막혀 가는 숨으로 발버둥쳤지만, 다시 조립해 온 기계장치의 순수한 질량이 회전축의 역할을 하고 있었으므로, 나선은 멈추지 않을 듯했다. 그녀는 바로 아래에서 번개가 혀를 날름거리는 적란운의 거대한 목구멍 속으로 떨어지면서도 계속해서 등에 진 장치의 무게를 감당해 보려 애쓰고 있었다.
갈기가 쭈뼛 섰다. 그녀는 주변을 희미하게 밝히는 밝은 기운을 눈치채고 숨을 들이마셨다. 피뢰침 목 부분에 넣어둔 천둥진주가 격렬하게 고동하고 있었다. 비록 추락하고 있기는 했지만, 주변에 들끓으며 휘몰아치는 전류의 무리 한가운데에 놓인 이상 천둥진주가 반응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적란운 위로 불협화음을 이루며 뒤섞이는 천둥번개의 소용돌이가 바로 코앞에 있었다.
“썩을...... 썅, 썅, 썅!”
스쿠틀루는 자포자기해서 도박에 걸기로 하고, 발굽을 움직여 자신의 연약한 몸과 커다란 금속 장치를 엮어 단단히 조여매고 있던 가죽끈 위를 쓸어 더듬거리며 버클을 찾았다. 벼락이 가까워져 있었다. 그녀를 맞이하는 공기 속 입자마저 익어 버린 냄새가 났다. 그녀가 지고 있던 무거운 가방은 덜컥거리며 몸에서 떨어졌다. 여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혼돈 속으로 한 줄기 비명을 지르며 자유낙하를 시작한 가방을 구름 속으로 거세게 걷어찼다. 가방을 밀어낸 반작용이 몸을 밀어내서, 그녀는 가까스로 적란운을 피할 수 있었다. 여자는 날개를 비스듬이 움직여 적란운 바깥쪽으로 돌아 내려갔다.
그녀는 채찍처럼 밀려드는 바람에 맞서 이를 악물었고, 주위에서 터져나오는 천둥 소리에 두 귀의 고막은 사실상 파열 상태였다. 마구 흔들리는 고글 너머로 바라보니 장비를 넣은 가방의 검은 그림자가 그녀의 옆을 지나는 번개의 위로 가끔씩 드리우며 떨어지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 그녀는 장비가 부디 온전히 도착하기를 조용히 기도했다.
번개가 한 번 더 번쩍이자 가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죽끈은 그을어 리본처럼 말려 있었지만, 안장 가방 자체는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고, 그 안에 넣어둔 황동 장치도 마찬가지였다. 스쿠틀루가 승리감에 젖은 함성을 내지르기도 전에, 번개를 받아 그녀 아래에서 무언가 흰 물체가 희끄무레하게 드러났다. 여자는 당혹했다. 월암이 이제 바로 코앞에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몸을 회전시키며 미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가까이 낙뢰에 근접한 다음, 자유낙하하는 가방을 두 앞다리로 움켜잡으며 하늘을 향해 날개를 힘겹게 펼쳤다. 뼈가 피부를 찢었고, 뜨거운 공기 속을 흐르는 전류 속으로 펼쳐진 날개에서 깃털 몇 개가 빠져 흩어졌다. 날개가 견딜 수 있는 한도는 이미 넘어선 지 오래였다. 그녀의 갈색 날개 두 장은 언제든 간단히 찢겨져 나갈 수 있었다.
“으으으으―으아앗!”
스쿠틀루의 비명과 함께, 두 날개에 힘이 빠져 늘어졌다. 그녀는 휘몰아치는 광기를 이끌고 저 아래에서 어른거리는 육중한 월암의 산으로 추락하는 돌덩이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여자는 숨을 한껏 들이마시며 날개를 힘껏 펼쳤다. 격통이 엄습했다. 두 날개가 정확한 각도로 펼쳐졌고, 그녀는 추락 직전에 궤도를 위쪽으로 틀 수 있었다. 두 뒷다리가 공중에서 흔들거렸고, 그녀가 월암 꼭대기로 다가갈 때마다 황동 편자에서 스파크가 튀며 잿가루가 흩날렸다. 여자는 번지점프를 하는 것처럼 그 자리에서 거꾸러졌다.
“이런 맙소사.”
그녀는 상하좌우로 빙빙 도는 몸으로 월암의 꼭대기에서 다시 떨어지며 비명을 질렀다. 마지막으로 힘겹게 날개를 한 번 퍼덕인 덕에, 그나마 그냥 떨어지는 것보다는 덜 죽을 맛인 시속 이십 킬로미터 정도의 속도로 자갈밭 위를 쟁기질하듯 떨어졌다. 온 몸에 멍이 들고 표정은 완전히 구겨졌지만 목숨은 부지한 채, 마지막 포니는 몸으로 땅을 갈며 멈추었다. 그녀는 땅 위에 누운 채 두 다리로 커다란 가방을, 그것이 인형이라도 되는 양 가슴에 꼭 끌어안고 있었다. 사방에서 번개가 내리쳐 재의 세계를 불태우자 바람이 울부짖었다.
“아야야야야...... 그, 그냥 망할 돌덩이 속이 차라리 나았겠다, 스파이크.”
여자와 삼십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자리가 벼락을 맞아 터져나왔다.
그녀는 주저앉은 채 비명을 질렀고,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남은 그을음 자국을 바라보는 두 눈은 떨리고 있었다. 가방에 들어가 있는 천둥진주가 깜박이는 빛을 뿌리며 맥동했다. 다시 한 번 더 세상을 쪼개놓을 듯한 흰 섬광과 함께 다시 번개가 내리쳐 조금 전보다도 더 가까운 자리에 그 송곳니를 박아넣었다. 마지막 포니는 대기 중에 감도는 날카로운 전류의 따끔함에 씁 소리를 내며 주저앉은 채 뒷걸음질쳐 두 번째, 세 번째, 그리고 네 번째로 떨어지는 굶주린 낙뢰의 주둥이를 피해 달아났다. 번개는 갈수록 가까운 곳에 떨어졌고, 떨어질 때마다 공기 속에 끔찍한 혼돈을 남기며 마침내 그녀의 등이 월암의 차가운 몸에 닿을 때까지 몰아붙였다.
마지막 포니는 떨리는 숨을 흘리며 벌떡 일어나 가방을 거의 찢어내듯 열었다. 뇌총이 둔탁한 소리로 울리며 자갈 깔린 땅 위로 툭 떨어졌다. 그녀는 과호흡으로 인한 가쁜 숨 아래로 욕설을 퍼부으며 반쯤 녹슨 채 묶여 있던 장치를 풀어냈다. 그녀는 연약해 보이는 삼각대를 땅 위에 고정해놓은 뒤 발사기를 그 위에 올려두었다. 다시 번개가 내리쳐서, 페가수스는 급히 두 앞다리 발굽 끝에 고무를 씌우고 황동 피뢰침의 조정간을 단단히 잡았다.
룬스톤과 천둥진주의 빛으로 가득 찬 피뢰침을 월암의 거대한 몸뚱이를 겨누어 고정한 마지막 포니는 발사기에 부착된 레버 위로 뒷다리 발굽을 올렸다. “좋아! 어디 한번 해 보자고! 셋, 둘, 하나, 발사!” 그녀는 레버를 밟은 발굽을 힘차게 눌렀다. 이렇다할 소음은 없었다. 장치를 얼레 삼아 말아둔 황동 선과 거기 매달린 연은 발사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스쿠틀루는 속을 태우며 하릴없이 장치를 쳐다보았다. “망할, 발사!” 그녀는 레버를 다시 한 번 밟았다. 연은 여전히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벼락은 끊임없이 내리쳤다. 그녀는 으르렁거리며 발사기의 목 부분을 노려보았다. “대체 썅 뭐가 문제야?”
그 때 연이 갑자기 발사되어 스쿠틀루의 얼굴에 그 가죽질의 몸뚱이를 부딪쳤다. 제멋대로 움직이는 가죽 날개와 금속 침, 내장처럼 꼬이고 꼬인 황동 선이 뒤엉켜 그녀를 짓눌렀고, 그녀는 충격으로 멍해진 머리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여자는 짜증을 내며 선을 풀어 다시 감고, 자꾸만 성질을 긁는 장치를 정리해서 금속 발사기에 돌려놓았다. 천둥과 벼락이 뒤섞여 불협화음을 이루는 사이로 그녀가 투덜댔다.
“이 썅 빌어먹을 놈의―” 벼락이 쳤다. “―당장 이리로 돌아오지 못하겠―” 천둥이 쳤다. “이 쳐죽일 자식은 뭐 제대로 된 게 하나―”
스쿠틀루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가 서 있는 자리에서 겨우 사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번개가 떨어져 말 그대로 그 부분을 날려 버렸기 때문이었다. 주위의 대기가 전부 그 자리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분홍 갈기는 이제 모호크 스타일처럼 하늘을 향해 삐죽삐죽 서 있었고, 자그마한 스파크가 뒷발굽 편자 사이에서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투덜거리며 연 발사 장치를 다시 발사기 안에 집어넣었다. “차라리 사탕으로 치실을 만들어 골탕먹이는 게 낫지, 이게 다 무슨 꼴이야!” 스쿠틀루는 짜증을 내면서 스프링 발사식 발사기를 말 그대로 안듯이 붙잡아 고정한 뒤 다시 발사 레버를 때려 눌렀다. “이거나 처먹어라!”
스프링이 반작용으로 퉁기는 만족스러운 소리와 함께, 연은 적란운으로 뒤덮여 갑갑한 하늘 위로 쏘아져 올라갔다. 가죽 날개가 펼쳐졌고, 연은 벼락에 들볶인 바람에 실려 펄럭이며 날아다녔다.
스쿠틀루는 급히 황동 뇌총 쪽으로 몸을 던졌다. 고무로 감싼 발굽으로 발사관의 안전 장치를 해제하고, 그녀 앞 월암의 흰 몸뚱이를 겨누었다. 그녀는 땀을 비 오듯 흘리며 멀리서 깜박이는 연과 피뢰침 목에 넣어둔 천둥진주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빨리...... 빨리...... 끌어오라고, 이 쓰레기야! 뭐라도 좀 해 보라고!”
그 때 벼락이 천둥 소리를 울리며 하늘을 밝혔다. 푸른 섬광으로 퍼져 나간 벼락은 스쿠틀루의 연에 유도되지 않았고, 그 대신 벼락에 취약한 월암 조각 약간만 스쿠틀루의 갈기 위로 떨어뜨릴 뿐이었다. 마지막 포니는 갑자기 흩뿌려진 뜨거운 월진에 깜짝 놀라 주춤했다.
“좋아, 됐어! 이제 말을 좀 듣네! 이대로만 가자! 망할 폭풍 같으니, 조금만 더 위쪽으로 쏘면 안 되나? 다시 기어 올라가서 직접 망할 번개를 챙겨 와야 하나?!”
호랑이도 부르면 온다는 듯, 한 줄기 번개의 창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이번에는 연에 정확히 들어가 꽂혔다. 밝은 푸른색을 띤 전류가 눈 깜빡할 사이에 하늘에 매달린 황동 철사를 따라 밀려들었다. 뇌총 한가운데 넣어둔 작은 진주가 빛나기 시작하며 듣기 좋은 소리로 웅웅거렸다.
“그렇지! 복 받아라!” 고글 쓴 포니가 사방으로 떨어지는 낙뢰를 배경 삼아 미친 포니처럼 깔깔 웃어댔다. 그녀는 사지에 힘을 주고 불똥을 튀기는 피뢰침을 단단히 잡으며 소리쳤다. “거의 다 됐어! 조금만 더 떨궈 주련? 자, 어서.”
한 줄기 번개가 내리쳤다. 다시 한 개가 더 떨어졌다. 새로 떨어진 두 줄기 번개가 반짝이며 미친 듯 금속 케이블을 따라 쇄도해 들어갔다. 스쿠틀루가 고무 씌운 발굽으로 잡고 있는 실린더가 압축된 번개로 인해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두 귀에, 주변을 가득 채우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대기가 급격히 가열되는 소리였다.
“좋아, 대충 됐네!” 그녀는 낮게 중얼거리고 큰 소리로 주문을 외쳤다. “Y'hnyrr!”
룬스톤 세 개가 즉시 흐릿하게 빛났다. 안에 넣어둔 천둥진주에서 전류가 미친 듯 방출되어 뇌총 방출구 쪽으로 흘러 들어가자 피뢰침에서 큰 폭발음이 들렸다. 전류가 희미하게 빛나며 회오리바람의 형태를 이루어 엉기자 근처 월암이 이상한 각도로 깎여 들어가며 흰 먼지구름을 일으켰다.
“썅! 염병, 염병, 염병!” 스쿠틀루는 온 체중을 실어 미친 듯이 진동하는 뇌총을 애써 눌렀다. 그녀는 천신만고 끝에 저 아래 깊은 곳까지 번개를 쏘아냈고, 월암의 심장부까지 완전히 절개될 때까지 뇌총을 놓지 않았다. “휴! 좋아, 완벽해! 네이징(Neighjing, 말의 울음을 뜻하는 Neigh를 이용)까지 뚫겠는걸!”
월암에 뚫린 구멍은 계속해서 넓어지고, 깊어져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원통 형태를 한 굴이 완성되었고, 푸르스름한 빛이 어른거리던 전류의 어스름도 완전히 흐려져서 월암 깊숙히 뚫린 굴이 얼마나 파고들어갔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천둥진주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 타 버렸다. 스쿠틀루는 막 진동이 멎은 뇌총을 아무렇게나 대충 던져두고 급히 가방에 달려들었다. 가방을 몸에 끈으로 엮은 다음, 그녀는 달릴 때마다 고무 씌운 발굽에서 전해지는 이상한 느낌을 견뎌 가며, 월암에 방금 뚫은 굴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월암을 파낸 자리 위로 드리운 그림자 속으로 그녀가 모습을 감추자마자......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스쿠틀루는 굴 밖으로 몸을 틀어 황갈색 고글 아래 눈을 깜박였다. 조금 전 버렸던 물건이자 그녀 스스로의 능력으로 만들어낸 물건이기도 한 뇌총이 폭발해 수많은 금속 파편을 사방에 흩뿌린 것이다.
“뭐. 터지든지 말든지.” 그녀는 휙 하고 몸을 돌려 황무지에 밀어닥친 폭풍을 등지고 끝도 없이 파인 것만 같은 굴을 따라 천천히 느린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또각거리는 발굽 소리가 멀리서 끝없이 울리는 천둥의 메아리와 섞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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