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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E/포니 최후의 날

Chapter 33. For the Moon is Hollow and I have Touched the Pie

by Mergo 2019. 8. 26.

요즘 나를 움직이는 이 알 수 없는 열성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 수 있으면 좋으련만. 전에는 날짜를 셀 때 폭풍이 밀어닥치는 주기로 셌었는데, 요즘은 다시 하루 단위로 날짜를 세어 가고 있는 걸 보아하니 요새 내가 바뀌긴 바뀐 모양이다.

 

어떤 일을 열심히 판다는 말이, 무작정 그 일만 파고든다는 말은 아니다. 그런 일은 어디까지나 예외적으로 발생한다. 엉망진창이 된 세상 위를 배회하는 괴물들 사이에 숨어, 얼마 되지 않는 자원에 쩔쩔매던 삶이기는 하였으나, 그러한 삶이나마 나는 살았다. 내가 처한 상황에 비추어 보면, 목숨을 이어 나가는 그 일련의 행위는 다만 명줄을 부지하기 위한 순수하고, 또 어쩔 수 없는 필요에 의해 촉발된 생명 연장에 불과했으나, 그러한 것이라도 나는 꾸준히 살아왔다.

 

그러던 중 스파이크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로 돌아가 보지 않겠느냐고, 대담하고 매혹적인 제안을 건넸고, 그 때 내 삶의 목적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렇다고 해서 잿더미 속에서 맞이하는 오늘의 삶이 완전히 하찮은 것으로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생존을 위해 무엇이 필요할지에 대한 계산은 여전히 내 머릿속에서 돌아가고 있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때마다 빌려 쓰는 엔트로파 공주의 화신이 아주 단단하더라도 그것이 지금 이 순간의 내 몸을 지켜 주는 것은 아니므로 나는 항상 내 진짜 몸을 온전히 보호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미래를 위해 살았던 지난날이 그 열쇠가 되었을까. 이제 나는 전보다도 빠르게 지나가는 오늘날의 시간 위에서 과거를 지향하며 살아간다. 스파이크가 보기에는 내가 대단히 무모한 행동을 하고 다니는 것 같겠지만, 실상은 그 친구가 생각하는 것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해보자. 나의 행위는 내가 했던 행위의 반복일 뿐이다. 다만 그것을 예전보다 더 집중해서, 보다 수월하게, 자신감 있게 반복했을 뿐이다. 스파이크가 행위의 무모성보다는 이걸 읽어냈으면 훨씬 나았을 텐데. 과거로 건너가서 참을성 없이 굴어 봤자 옛날 포니들을 상처 입히는 데 지나지 않는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러나 오늘 저지르는 일들은 지금의 나 하나에게만 해로울 뿐이다.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그쪽이 내가 해 온 일들을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내가 그쪽을, 혹은 그쪽의 기억을 잊었기 때문에 이제 옛날, 그 따뜻한 기억 속을 헤매며 축복과 저주를 동시에 내 몸에 거느리고 있어야 하는 것인가. 그쪽이 독점욕이 과하다는 건 알았지만, 질투도 그 지경일 줄은 미처 몰랐다. 그쪽한테 그 어떤 것도 도와달라고 한 일은 없는 것 같으니, 언젠가 내가 나락으로 추락할 때 신이든 누구든 도와주기는 할 일이다.

 

그러나 이제 내가 그쪽에 무언가를 청하게 된다면 그것은 일종의 시험이 될 것이다. 과거를 들여다보고, 그쪽이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알게 된다면,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나고 난 뒤 그 자리에 홀로 남은 거대한 공허를 마주하게 된다면, 그리고 어쩌면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쪽이 그 무거운 허무를 내려놓는 법을 익히게 된다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겠지.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가벼운 마찰음이 세 번 울리자 스쿠틀루가 안장에 매달아 두었던 전등 속 부싯돌에서 불꽃이 크게 번쩍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등 안에 노르스름한 불빛이 희미하게 번졌다. 마지막 포니는 쓰고 있던 고글을 밀어 올리고, 붉은 눈동자로 조금 전 뇌총으로 꿰뚫어 연 길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길은 창백한 암석 안으로 나 있었고, 그녀의 시선은 그 벽을 가까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스쿠틀루는 한쪽 발굽을 들어 그 위를 천천히 쓸어 보고는 묻어 나온 가루를 눈 가까이 가져가 쳐다보았다.

 

“흠......”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들었던 발굽을 다시 내려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석굴 안쪽을 향하여 걸어가기 시작했다. 벽면 위로 전등 불빛이 흔들리자 석벽에 빛줄기가 튕겨졌다. “월안 걱정은 덜었군.”

 

스쿠틀루는 월암 깊숙한 곳까지 좁고 깊게 파고든 석굴을 따라 걸어갔다. 땅 위에 태산처럼 박힌 월암을 향하여 맹진하는 폭풍과, 미친 바람이 거느린 군세가 바위 몸뚱이에 부딪쳐오는 진동이 둔중한 소리로 울렸다. 석굴 안에 스며든 공기의 질은 거짓말로라도 숨 쉴 만하다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좋지 않았으므로, 무겁고 단단한 월암 깊은 곳을 향하는 걸음걸이는 점점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고, 이는 마지막 포니의 호흡 역시 마찬가지였다. 잠시 호흡용 마스크를 쓸까 생각했던 스쿠틀루는 목 뒤에서 분홍색 줄에 매달아 둔 이빨이 진동하는 느낌에 이내 그만두었다.

 

포니 최후의 생존자가 절실히 바랐던 것은 산소였지, 감미는 아니었다. 그러나 사탕 지팡이의 맛이 남긴 보이지 않는 흔적이, 한때 천체의 일부를 이루었던 돌덩이 속 깊은 곳으로 그녀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굴은 둥글고 길게 뚫려 있었고, 그 길이 깊어질수록 이빨은 더 밑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어서, 스쿠틀루를 부르는 힘은 솜사탕 구름으로 변했다가 다시 중력이 되어 그녀를 끌고 내려가는 듯한 느낌이 들 지경이었다. 뇌총에서 쏘아져 나간 번개가 월암 속 어느 지점까지 파고 들어갔는지 가늠할 수는 없었으나, 생각해 보면 쓸데없는 걱정일 뿐이었다. 어느 정도까지 들어가고 나면, 뇌총이 파놓은 길 대신 바닥을 뚫고 내려가 아래쪽으로 파고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계속 들어가는 것인지 스스로 납득되지는 않았지만, 시나몬 향기와 용의 이빨이 더 들어가라고 하고 있었으므로, 스쿠틀루는 다만 그것들이 말하는 곳까지 걸어갈 따름이었다.

 

어느 순간, 온 몸에 충격이 전해졌다. 스쿠틀루는 비명을 삼켰다. 그녀는 몸을 기울여서 왼쪽 앞다리 방향을 쳐다보았다. 바닥 중에서도 유독 얇았던 부분이 편자와 부딪히며 부서진 모양이었다. 달이란 원래 구멍이 숭숭 나 있는 커다란 돌덩이였고, 이 길은 그 돌덩이 속을 파고 들어가며 뚫은 것이었으므로, 뇌총이 길을 열 때 구멍을 만나지 않고 길을 만들어 낼 수는 없었다. 그것은 자명한 사실이었고, 그녀에게 큰 문제가 될 일이 아니었다. 이 정도로 커다란 월암을 뚫고 들어가는데, 내부 공동空洞이 없는 게 더 이상하다는 것쯤은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멍에 빠진 다리를 빼고, 구멍을 피해 계속 앞으로 가려던 여자의 귓가에, 어딘가에서 공기가 새어 나오는 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

 

그녀는 당혹스러워하며 고개를 숙여 부스러진 구멍 자리를 들여다보았다. 동굴 바닥에 뚫린 환풍구에서 흘러 들어오는 바람처럼, 차가운 공기가 갈색 솜털 위를 쓸고 지나갔고, 지나간 한기가 소름 자국을 남겼다. 그녀는 갑작스레 흘러 들어오는 신선한 공기에 놀라 길게 콧김을 뿜었다. 딱 십 분 전, 바위 덩어리의 육신 속으로 파고들기 직전에 마셨던 공기처럼 편안한 공기가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뜬금없지만 신선한 공기가 어디서, 어떻게 들어온 것인지는 물론 이상한 일이었지만, 숨과 함께 들어와 용의 이빨을 씻어 내리듯 퍼지는 코코아의 감각에 의문이 같이 씻겨 내려갔다.

 

스쿠틀루는 두 앞다리로 천장 쪽 벽을 밀면서 바닥에 뚫린 구멍 쪽 바닥을 뒷다리로 힘있게 받치고 섰다. 그 다음 순간, 황동 편자를 한 발굽이 바닥을 차듯이 짓밟았다. 몇 번 발길질을 하고 나자 조그맣게 뚫려 있던 구멍 주변이 깨뜨려져 무너져서, 한껏 벌린 주둥이의 형상으로 넓어졌다. 삼 미터 정도의 구멍이었다. 지고 있던 등불로 구멍 아래를 비추자, 스쿠틀루가 방금 만든 구멍 말고도 세 개의 다른 구멍이 더 뚫려 있었다. 그 자리에서 모인 굴들은 더 깊은 곳으로 뚫려 있는 한 개의 굴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 굴은 용의 이빨이 가리키는 방향 위에 포개져 있었다.

 

 

스쿠틀루는 심호흡을 하고 구멍 속으로 뛰어내렸다. 월진이 잠깐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그녀는 자신이 뚫어놓은 굴을 버리고, 그 안에 원래 있던 길을 따라가기로 했다. 밝은 노란색 빛을 뿌리던 등잔불을 어둡게 바꾸고, 용의 이빨이 가장 크게 맥동하는 방향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본래 이 자리에 없었어야 할 돌산 속으로 구절양장처럼 뻗어나간 굴 너머를 향하여, 스쿠틀루는 긴장한 근육을 달래며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황무지 곳곳을 들쑤시고 다니던 시절 모든 일들이 그러했듯이, 걸음은 느렸다. 달 속 굴을 따라 걸어가는 여자의 발걸음은 차가운 신중함이 배어 있었고, 시선은 주위 사방을 훑으며 닿지 않는 곳 없이 움직였다. 바깥 대지를 밟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누구 하나 돌봐 주는 이 없이 홀로 생존할 것을 강요한 세상은 스쿠틀루에게 어느 상황, 어느 장소에라도 있을 수 있는 위협을 감시하는 법을 가르쳤다. 그녀는 시간을 넘어 과거에 가 있던 순간에서조차, 과거가 제공하는 기쁨이 자신의 주의를 흐트러뜨리지 않도록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다.

 

한 줄기였던 굴은 둘로 갈라졌고, 다시 한 줄기를 골라 들어가면 셋으로, 다시 다섯으로, 다시 일곱으로 분열했다. 스쿠틀루가 걸어가는 길은 한 개의 길이었으나, 돌아가는 길은 머리가 멍해질 정도로 복잡하게 구성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랬으므로, 스쿠틀루가 안전하게 돌아가는 일까지 생각해두고 있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이럴 일이 있을지도 몰랐으므로, 처음부터 작게 만든 룬스톤을 잔뜩 짊어지고 와서 길 하나를 골라 들어갈 때마다 떨어뜨려 자취를 남기고 있던 참이었다. 돌아갈 때는 주문을 외워 룬스톤이 빛나게 하면 적당한 이정표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바람이 불어오는 굴은 왠지 모르게 불쾌하고 음습한 느낌이 들었다. 몇 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어째서 이런 굴이 달 안에 형성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스쿠틀루는 월석의 특징인 마력 친화를 이용하고, 써먹는 데에는 능수능란했지만, 어째서 그런 것인지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게 없었다. 그렇다 할지라도, 대지 위에 월암이 굴러다니게 된 명쾌하고도 명료한 이유는 말할 수 있었다. 재앙이 자연의 섭리에 가까운 것은 아닐 것이었다. 콘수스 이후 생겨난 다른 별들과 마찬가지로, 달 또한 이퀘스트리아의 성질과는 맞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과거 달은 밤하늘에 뜬 진주라고도 불렸는데, 그 안에 어째서 석굴이 생겨나 있는 것인지는 짐작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머릿속까지 올라오는 구역질을 견디던 그녀는 문득 애플 가 과수원 헛간 지붕에 혼자 앉아서 달을 쳐다보던 그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 때 바라보던 달과, 본래 자리를 벗어나 이제 땅바닥에 처박힌 이 커다란 돌덩이는 서로 같았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마지막 포니는, 이제 이퀘스트리아와 그 주위를 공전하던 위대한 위성 사이의 거리조차 넘어선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감당할 수 없어 기진맥진했다.

 

 

 

석굴 곳곳을 부지런히 누비고 다니던 시선이 무언가 이상한 것을 포착했다. 그녀는 신기한 듯한 눈길로 동굴 벽을 들여다보다가, 그 자리가 평범한 월암과 달리 매끈하게 다듬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크게 놀랐다. 이 거대한 돌덩이 곳곳에 나 있는 굴을 따라가며 쳐다보면, 기하학적 아름다움을 넘어서서 근면성실하게 느껴질 정도로 기이한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여기만은 달랐다. 그녀는 길을 따라 걸으며 벽을 계속해서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내심 플러터샤이가 최후를 맞이한 에버프리 가시숲에 서식하던 못된 무언가가 옮아와서 자신의 뇌를 파먹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다. 뇌를 먹혀 한바탕 미친 짓(A bout of lunacy)을 벌이게 된다면, 달(Luna) 속만큼 적당한 자리는 없을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안도했다. 별 영양가도 없는 생각이었지만, 그것은 자연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 월암의 모습이 야기하는 불편함을 머릿속에서 지우려고 생각해 낸 것 치고는 괜찮은 생각이었다.

 

“뭐야 이건?” 스쿠틀루는 결국 참지 못하고 툭 내뱉었다. 그 목소리는 음침한 메아리가 되어 사방을 둘러싼 돌벽에 뒤채이며 사라져 갔다. “뭐 기념품점이나, 그따위 거라도 차려 놓은 거야, 뭐야?”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희미한 불빛 두 개가 흔들려 여자의 눈동자 위에서 일렁였다. 그녀는 움찔했다. 놀라서 빠르게 뛰기 시작한 심장을 끌어안은 여자는, 내심 그것이 자기가 여기까지 오면서 떨어뜨려 놓은 룬스톤 몇 개가 내는 불빛일지 모른다고, 자기는 그저 결국 한 바퀴 돌아온 것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근본적인 오류가 있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룬스톤 두 개를 저 정도로 가까운 자리에 놓아둔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조금 더 자세히 쳐다보니 두 불빛은 같은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마지막 포니가 평생 동안 룬 조각술을 연구해 오면서 쌓아올린 경험이, 저 두 불빛은 애초에 다른 돌에, 다른 도구로 새겨진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 순간, 용의 이빨이 아닌 순수한 호기심이 여자의 발걸음을 잡아끌었다. 스쿠틀루는 가쁜 숨을 뱉어내며 룬 조각을 향하여 조금씩 가까이 다가갔다. 룬 문양이 새겨진 돌은 이퀘스트리아에서 가장 날카로운 도끼로 쳐낸 것처럼 조금의 군더더기도 없이 단정하게 깎여나가 있었다. 그 위에 새겨진 문양이 놀라울 정도로 밝은 빛을 뿜어내고 있어서, 짊어지고 있던 전등을 잽싸게 꺼 버렸는데도 주변을 보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 정도였다.

 

스쿠틀루는 조금 늦은 감은 있어도,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룬 조각은 월어를 새겨놓은 것이었는데, 마지막 포니가 역사책을 뒤적이며 머릿속에 새겨놓은 본래 형태가 아니라, 위아래가 뒤집힌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여자가 아파 오는 머리로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그녀의 심장은 뛰기조차 잊어버린 듯했다.

 

“에포나 맙소사...... 이게... 가능해......?”

 

그녀는 창백한 벽 위에, 조금 떨어져서 새겨진 룬 조각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았다. 왼쪽에는 H’juulm, 월어로 문을 뜻하는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오른쪽에서 빛을 뿜어내는 문양은 H’Luun이었는데, 마지막 포니가 지금까지 왕실의 무덤을 뒤적이며 보아 온 것들 중에서도 수도 없이 봤던 이름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 문양은 세상 모든 신성성과 위대함이 한데 모인 끝에 결국 영원불멸할 그 이름을, 루나라는 이름을 뜻했다.

 

어지간해선 부서지지 않을 것 같은 벽을 쳐다보던 마지막 포니는 몸을 똑바로 일으켜 세우고, 당당하게 큰 소리로 외쳤다. “H’jem!”

 

그 순간 어둠 속에서 은빛을 머금은 초승달처럼 한 줄기 밝은 섬광이 터져 나오면서 보라색 마력이 분출해 굴 벽을 덮어 버렸다. 오랫동안 갇혀 있던 커다란 먼지구름이 미친 듯 들끓어 오르며 마지막 포니를 덮쳤다. 그녀는 먼지바람에 짧은 분홍 갈기를 날리며 밀고 들어오는 광풍을 견뎌냈다. 바람이 쓸고 지나간 몇 초가 지나고 굴 안이 잠잠해지자, 황야의 청소부의 두 눈에 콘크리트 기둥들이 늘어선 널찍한 공동空洞이 들어왔다.

 

스쿠틀루는 메아리 울리는 굴을 느린 걸음으로, 멍하게 걸어 들어가며 목전의 불가사의한 정경 속으로 갈색 몸을 밀어 넣었다. 흔들리는 시선이 좌우를 훑자 그림자에 삼켜진 기둥 하나하나마다에 새겨진 흐릿한 룬스톤의 전열戰列이 드러났다. 나무로 된 것들과 도자기로 빚어 만든 것들, 비단처럼 짜 만든 것들이 하나같이 멀리서 아물거려서, 그 형상은 시각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여자의 심장이 거세게 고동쳤다. 자신이 맞닥뜨린 눈앞의 모습이, 용의 이빨이 맛보여 주는 감미를 밟아 죽였다.

 

그녀가 딛고 선 흰 돌바닥 위로 한 조각 천이 늘어져 있었다. 먼 옛날 기치에 걸렸을 것 같은 깃발이었다. 스쿠틀루는 무릎을 구부려 쪼그려 앉으며 깃발을 집어 뒤집어 보았다. 보랏빛 천에 은실 가닥이 꿰어져 틀림없는 ‘달 속의 암말’의 형상을 수놓고 있었다. 루나 제국의 국장國章이었다.

 

“세상에...... 맙소사.” 여자는 눈앞의 경이에 압도되어 헤벌린 입으로 앞을 올려다보았다. “......포니모니움......?”

 

※ Ponymonium, 복마전伏魔殿을 뜻하는 Pandemonium의 변형. 굳이 음차하지 않으면 복마전伏馬殿이라고 해도 되지만 Saros에서 포니모니움으로 옮겼으므로 포니모니움으로 음차.

 

죽음 같은 침묵이 찾아왔다. 그림자는 사방에 무성했으나, 진실은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포니는 아직 희미한 빛이나마 머금고 있는 룬스톤을 향하여 외쳤다. “Y'lynwyn!”

 

기둥 하나하나마다 새겨진 룬스톤이 다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달이 머금은 마나를 불씨로 일어난 빛살이 거대한 궁실宮室을 채우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녀는 다만 떨리는 몸으로 서 있었다. 나이트메어 문이 군림한 고독의 궁실에 밝은 빛이 가득 들어차서, 백전百戰을 거친 알리콘과 수십에 달하는 작전참모를 깎아놓은 석조 조각에까지 미쳤다. 연옥과도 같은 달 속 요새 사방에는 태피스트리와 도자기가 장식되어 있었는데, 한때는 위대했으나 이제는 밤의 폭군으로 변모한 루나의 분노를 찬양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곳은 계측할 수 없는 절망과 눈물, 그리고 격노로 지어진 요새였다.

 

마지막 포니는 자신이 지금처럼 위축되었던 때가 언제인지 기억하지 못했다. 자신이 행운아라는 생각 또한 언제 마지막으로 했었는지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녀는 죽음 같은 침묵으로 기다리는 성역 안으로 몸을 떨며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황무지를 나 홀로 방랑하며 돌아다니는 동안 온갖 웅장한 풍경을 구경할 기회가 몇 번 있었다. 스탈리온그라드의 장성長城을 따라 걸어 보기도 했고, 음침한 협곡을 건너가기도 했었으며 셀레스티아 공주님의 방도 다녀왔었다. 위니페그의 은옹성銀甕城도 가 봤고. 동쪽 해안의 상아절벽과 에버프리 숲의 심장부, 그리고 한때 양들의 나라의 수도였던 스카이혼의 거대한 싱크홀도 봤다. 내가 다녀왔던 곳들은, 내가 여기 다녀올 수 있는 마지막 포니였기 때문에 다녀올 수 있었던 곳들이다.

 

내 평생에, 아니, 수천억 년의 시간이 주어진다고 해도 눈앞에 산을 이룬 월암 속을 파고 들어가 봤더니 내 코앞에 포니모니움 유적이 나오더라... 하는 일이 있을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전 벌어진 내전의 끝에 조화의 원소의 힘으로 달로 쫓겨난 나이트메어 문과 그의 충성스러운 부하들이 수백 년에 걸쳐 건설한 저주받은 요새가, 내 눈 앞에 있었다. 수백 년 동안 사학자들은 전설로 전해지는 달 속 도시에 관하여 몇 가지 억측들을 제시했다. 루나 공주님은 다시 정화되어 알리콘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그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루나 공주님의 침묵은 억측에 기름을 부어 더 많은 음모론과 억측을 낳았다.

 

그 생각들이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는 건 알았다. 나는 부랑자가 되어 루나 공주님의 어두운 광명의 홀에 들어섰다. 루나 공주를 잠식했던 어둠이 시간이 흐르며 약해져, 더 이상 공주를 지배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을 때, 나이트메어 문의 왕좌는 군주를 잃었고, 한때 나이트메어 문의 강대했던 군세는 그녀와 함께 달로 추방되어 천 년의 세월에 걸쳐 죽음으로 하나씩 스러져 갔다. 루나 공주님은 방이란 방의 출입구를 모두 그들의 조각으로 굳게 닫아걸었다.

 

죽음과 고독은 태곳적부터 자리해 있었다. 항상 그랬다. 대절멸은 그저 장대하고 화려한 생명의 역사에 찍힌 거대한 마침표 하나였을 뿐이다. 포니 최후의 생존자가 시간여행자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역설인가. 아름다운 것들은 이제 모두 과거 속에만 있을 뿐이므로, 비록 부록일망정 그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일에 내 남은 시간을 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나 역시 아름다운 세상 가까이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나, 앞으로도 내가 여기서 멀리 떨어진 곳에라도 그 사실을 따로 적어두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해와 달을 돌려놓는다니, 이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게다가, 다시 떠오를 달은 두 번째 포니모니움을 품을 일이 없을 것이다. 굳이 그럴 가치도 없을 터이고.

 

 

스쿠틀루는 거대하고 창백한 콘크리트 기둥이 늘어선 한가운데를 갈색 그림자처럼 걸어 들어갔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버려지고, 버려져서 흩어진 휘장들은 그 수를 더했다. 바닥에 커다란 기둥 하나가 쓰러져 있는 것이 눈에 밟혔던 그녀는 그 기둥을 넘어갔다. 그 안에 감돌던 이상한 느낌은 그 다음에야 알 수 있었다.

 

방 자체가 거꾸로 뒤집혀 있었다. 휘장도, 룬 조각도, 통로도, 대리석을 깎아 만든 계단도 전부 머리 위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달이 떨어졌음에도 포니모니움이 기적적으로, 온전히 제 모습을 갖춘 채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포니모니움은 대지에 충돌할 때, 본래 천장이었던 곳부터 부딪친 것이었다. 그제야 마지막 포니의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의문점이 해결되었다. 속으로는 예술품들의 자기 잔해와 부서진 갑주가 좀 더 잘 보존되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지만, 어떤 상황이었는지 아는데도 그러길 바라는 것은 도둑놈 심보였다. 대기권 밖에서 추락해 그대로 대지를 들이받은 충격에도 불구하고 궁실이 구형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일이었다. 스쿠틀루는 건축에 룬을 활용했던 것이 이퀘스트리아의 대지를 말 그대로 뒤집어 버린 거대한 충돌을 일으키고도 궁실과, 돌덩어리로서 달 자체의 원형을 보존해 준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기술자로서 살아온 세월은 나이트메어 문이 남긴 유산에 깃든 그 집요함에 자신도 모르게 감탄하고 있었다. 포니 문명의 종말과, 찬란하지만 복수심에 젖어 있는 과거의 경이를 제 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일은 이제 서로 다르지 않았다. 완전할 정도로 객관적인 시각에서 사상事象을 관찰하는 것은 스쿠틀루가 세상에 내던져진 순간부터 타고난 것이기도 했지만.

 

나이트메어 문이 거처했던 자리를 돌아다니는 동안, 시신은 한 구도 눈에 띄지 않았다. 본심을 말하자면, 그녀 자신부터 유니콘 시체 같은 게 있으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스스로 서약하여 나이트메어 문의 근위대가 된 사로스계 포니의 유골이 있을 가능성 역시 상정하지 않았다. 루나 제국에 동조한 자들의 가속家屬들과 병사들이 그 천 년 동안이나 하나의 파벌로 단합되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오랫동안 주장된 학설이기 때문이었다. 설령 이들이 월석을 식용 가능한 자원으로 변환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하더라도, 천 년 동안 살아남을 수 있는 자는 봉인된 자들 중 단 하나뿐이었다. 나이트메어 문의 내면에 숨어 있던 루나 공주가 오래 전에 죽은 자들을 장사지내 주었으리라고, 스쿠틀루는 짐작했다. 짐작했다기보다는, 그랬길 바랐다. 밤의 여신이 공포의 군주로 군림했던 적이 있기는 했으나, 나이트메어 문에 잠식되기 전이든, 그 다음이든, 그녀의 삶에서 명예를 헌신짝처럼 내버린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기 그렇게 오래 머무를 이유가 없다는 것은 스쿠틀루 스스로도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걸음 하나를 옮겨놓을 때마다 장엄한 광경이 집중된 경외의 물결로 변해서 그녀에게 가 부딪치고 있었다. 궁실 하나, 방 하나를 지나가고 건너가기를 반복하다가, 스쿠틀루는 문득 두 눈을 감고 루나 제국의 신민들로 가득 차 있었을 회랑을 생각했다. 유니콘과 장병들, 사로스 근위대 외에도 많은 이들이 한데 모여서, 평생에 걸쳐 이룩해 온 모든 것들과 자기 자신마저 희생한 알리콘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고, 북적거리며 서로 말했을 것이었다.

 

어쩌면 역사에 정령이라는 것이 있어 그것이 스쿠틀루에게 그 모습을 상상해 보라고 바람을 불어넣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스쿠틀루는 루나 제국의 유산을 미워할 수는 없었다. 사실, 스쿠틀루는 그들이 가엾었고, 그랬으므로 그들을 존경하고 있었다. 루나 제국은 스스로는 파시즘적 체제로 통치되고 있었으나 그것을 ‘공화정’이라고 말했다. 포니 문명을 멸망시켜 버리겠다는 타락한 알리콘의 야망이 실현되기 전에 대절멸이 먼저 찾아와 버리기는 했을지언정, 추종자들은 그 날이 올 때까지 나이트메어 문을 따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짙게 드리운 광기 어린 거짓말의 장막에 눈이 멀어 달 깊은 곳에 포니모니움을 건설했다. 그들은 그곳이 오랫동안 염원해 왔던 새롭고, 가슴 벅찬 민주주의의 심장이 되기를 희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그들 스스로 들어가 눕게 될 무덤을 꾸미는 작업에 불과했고, 조화의 원소로 정화되지 않았더라면 루나 공주 또한 그들 옆에 나란히 누웠을 터였다.

 

마지막 포니는 아무것도 없이 맨발굽으로 커다란 도시를 건설해 낸 추방자들을 연민했다. 마지막에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죽음뿐이었기 때문이었고, 최초이자 최후의 추방자 무리로서 그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루나 공주에게 걸었다면, 마지막 포니에게 몸을 빌려주고 있는 엔트로파는 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이 뒤를 이었다.

 

그녀는 한참이 지나서야 혓바닥 근처를 어른거리는 바닐라의 온기를 지각했다. 한쪽 발굽이 분홍색 끈에 매달아 목에 걸어둔 용의 이빨을 건드리고 지나갔다. 기쁘게도, 이빨은 바로 근처에 있던 회랑을 가리키고 있었다. 스쿠틀루는 왼쪽으로 방향을 꺾어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따라 걸어갔다. 회랑에는 가벼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녀는 잘못해서 계단 밖, 매끈한 천장이었던 곳으로 발을 헛디디지 않게 집중해서 천천히 걸었다. 궁실에서 반짝거리던 룬스톤의 빛이 등 뒤로 천천히 멀어지고 사라져 갔고, 그와 동시에 달이 그 큰 몸뚱이 속에 감춰 두고 있던 새까만 어둠이 그녀를 감쌌다. 바깥에서는 달 표면을 향하여 거대한 폭풍이 쇄도하고 있을 것이었다. 달이 떨어져 창백하고 흰 커다란 산이 되고 나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안에 숨겨져 있던 사적을 아무것도 모르고 지나쳤을지, 그녀는 잠깐 생각했다.

 

층계의 마지막은 너른 회랑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그 너머에 깔린 질척한 어둠이 모든 것을 가리고 있었다. 스쿠틀루는 조금 전에 끈 등잔을 불가피하게 다시 켤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깡충거리며 노르스름한 빛을 뿌리는 등잔을 앞세워 머리 위 움푹 파인 몇 곳 자리를 비추며 나아갔다. 듬성듬성 삐져나온 나무뿌리와 나뭇가지가 위층 광장과 연결된 자리에 아직 엉겨 있었다. 그녀의 발밑에는 본래 천장이었던 자리가 있었는데, 온통 탄화된 나뭇잎이나 잎사귀로 어지럽혀져 있었다. 포니모니움 가장 깊숙한 곳, 루나 공주의 왕좌가 있던 궁실 바로 위에 이퀘스트리아의 식물들이 자라는 정원이 있었다는 사실은 꽤나 마음을 가볍게 해주었다. 천 년에 이르는 세월 동안 정원을 가꾸고 있었다는 것은, 자연의 일부라도 옮겨놓은 정원과, 건축 양식에서 돋보이는 고전미가 루나 공주의 마음에 약간이나마 위안을 가져다주는 것을 나이트메어 문 스스로도 인정하고 귀하게 여겼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셀레스티아 공주가 과연 천 년이 지난 뒤 루나 공주에게 자비를 베풀었을지, 스쿠틀루는 늘 궁금히 여겨 왔었다.

 

마지막 포니가 정원의 잔해를 지나 더 아래쪽으로, 즉 본래의 포니모니움 기준으로는 상층부로 들어갈수록 이빨에서 전해지는 반응이 더욱 커져 갔다. 페퍼민트 단도로 온몸을 난도질당하는 듯한 느낌과 함께 스쿠틀루는 넓은 회랑의 한가운데로 들어섰고, 이내 뜨겁게 끓는 감초의 바다 속에 잠기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걸음을 늦추고는 이내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죽은 과일나무의 빈 몸통 아래 뿌리에 얽혀 달랑거리고 있던 석회 조각을 귀로 짓눌렀다. 이제 갓 구운 빵처럼 느껴지는 용의 이빨은 바나나 빵과 설탕이 혀를 지나 몸으로 들어가며 남겨놓은 뒷맛 같은 감각을 그녀의 목구멍 속으로 던져 넣고 있었다.

 

“바로 근처에 있다는 말인데...” 스쿠틀루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언제부터인가 핑키 파이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포니모니움의 경이로움은 그녀가 여기까지 내려온 이유가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봐야 할 만큼 거대했다.

 

스쿠틀루는 짊어지고 있던 안장식 가죽 가방의 끈을 풀고 콘크리트 바닥 위에 올려놓은 뒤, 큼직한 주머니에서 곡괭이 하나를 꺼냈다. 그 다음 용의 이빨이 가장 크게 맥동하는 지점을 찾아 두 발굽으로 바닥 곳곳을 쓸고 지나다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다 부서진 돌덩어리 하나를 찾아내어 곡괭이를 들고 파내기 시작했다. 중노동에 땀이 맺혔고 숨이 차오르기 시작하자, 순간 얼마나 파고 들어가야 하는지도 모를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하나, 하는 곳까지 생각이 미쳤다. 이미 써 버린 뇌총을 다시 쓸 수만 있으면 달 속 어디에서든 손쉽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굴착이 가능할 터였다. 예상도 못 했던 포니모니움 유적이 생각보다 명확한 근거를 제시해주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얼마나 더 시간을 써야 하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순간, 무엇인가 쪼개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스쿠틀루는 그 소리에 놀라 비명을 질렀고, 그 다음 순간 밑으로 거꾸러져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들고 있던 곡괭이는 의지할 곳을 잃고 밑으로 떨어져 내렸고, 두 앞다리는 곡괭이를 놓은 대신 무너져 내린 바닥 끄트머리를 움켜쥐었다. 마지막 포니는 바닥 꺼진 자리에 생겨난 커다란 구멍 끝에 매달려 있었다. 깊은 바닥에서 부풀어 오르며 상승한 흰 월진구름이 몸 위로 흩날렸다. 그녀는 하반신부터 시작해 자신을 집어삼키려는 듯 시커먼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구덩이의 나락을 흘끗 내려다보았다. 그 밑은 심연과 같아서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날개를 펄럭여 몸을 끌어올렸다. 그러고는 비틀거리며 한쪽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찾아 등잔에 불을 밝히고 구덩이 밑바닥을 비춰 보았다.

 

등잔에서 흘러나온 불빛이 구덩이에 고이자 포니모니움 유적에 뚫린 구멍과, 그 너머로 으스러지지 않고 그저 불타 탄화되기만 한 이퀘스트리아의 대지가 한 개 거대한 얼룩처럼 들여다보였다. 달 곳곳에는 오목하게 파인 크레이터가 수도 없이 있어서, 달이 이퀘스트리아와 충돌할 때 그 크레이터 중 한 곳과 땅이 부딪쳐서 오목한 홈 안으로 들어오는 땅 위에 자생하던 목숨들은 그나마 말 그대로 으깨지는 결말을 피할 수 있었던 것 같았다.

 

“뭐,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스쿠틀루는 땀에 젖은 얼굴로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어쩌면 흩어지지 않고 온전하게 남아 있을 수도 있겠어.”

 

스쿠틀루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직접 새겨 만든 룬 조각 세 개를 꺼내 바닥이 꺼진 자리 주변에 박아 두었다. 저 아래 초토화된 곳에서 올려다볼 때, 출입구를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빛을 뿌리는 룬으로 표시해두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등불과 금속제 공구 몇 개, 그리고 밀폐형 가죽 가방을 챙겨서 그나마 불타는 것으로 끝난 대지를 향하여 갈색 날개를 펴고 하강하기 시작했다.

 

하강 비행은 완만했다. 스쿠틀루는 푹신하게 쌓인 흙더미 위에 네 발굽으로 내려앉았다. 그녀는 발굽에 밟히는 꽃과 풀잎의 잔해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밟고 선 땅은 달의 크레이터 외부와 충돌한 곳과 달리 그 위에 자생하던 초목들이 전부 재가 되어 날리지 않고 기적적으로 보존되어 있었고, 그 탓에 그 바깥 대지와 함께 보면 백 평방미터쯤 되는 커다란 얼룩이 남은 것처럼 보였다. 지형이 어떻게 뭉개지고 파괴되었는지 직접 보니 달 충돌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더욱 명료해 보였다. 게다가, 그 주변에는 유독 잔해가 보이지 않았다. 달리 잔해가 떨어져 쌓일 만한 곳도 없었고, 근처의 기류도 평온해서 광풍이 몰아치는 일도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이 흰 먼지와 재에 덮인 채, 영원히 그 상태로 보존되어 있을 것 같았다. 그 모습은 마치 재앙이 일으킨 불길이 겨우 몇 시간 전에야 겨우 잠들고, 마지막 포니는 방금 도착한 것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돼지우리처럼 주위를 둘러싼 것들 사이로 등불을 밝혀 든 스쿠틀루의 눈 앞에 날려온 죽은 나무 몸통 여러 개가 황동 색을 한 유령처럼 가물거렸다. 그녀는 천천히, 용의 이빨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걸음을 옮겨놓았다. 탄산수에 바닐라 향을 넣은 목욕물에 들어가 앉기라도 한 듯한 느낌이었다.

 

마지막 포니는 기적적으로 온전한 상태로 땅 위에 나뒹굴고 있던 목조 표지판을 보고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본래 색을 칠해 그려놓은 화살표였던 표식들은 이제 재앙이 이끌고 온 불길에 그을려 검게 변해 있었고, 완전히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남쪽으로는 ‘포니빌’이었고 동쪽으로는 ‘트로팅엄’이었으며, 북으로는 ‘클라우드데일’, 그리고 북동으로는 ‘스카이브레이크 포인트’였다.

 

그녀는 자기 옆에 짐마차가 있다는 걸 거기 발이 걸려 넘어질 뻔해서야 알았다. 그녀는 놀란 숨을 헐떡이며 발을 질질 끌고 다가가 짐마차와 더불어 함께 뒤집힌 적재함, 가죽 고삐를 뜯어보았다. 마차는 한쪽에 널브러져 있었고, 죽어서 갈색으로 물든 잎 위에는 뼈가 한 무더기 널려 있었다. 그들은 최후의 순간까지도 끊이지 않았던 고통과 공포 속에서 사지가 뻣뻣하게 굳은 채 죽은 모양이었다. 죽은 이들은 전부 어스 포니였는데, 얄궂게도 그 골격은 어린 아이들의 것들이었다.

 

의심의 여지도, 실수의 여지도 없이 짐수레 주변에 널려 있는 유골들은 전부 어린이의 것들이었다. 스쿠틀루가 보기에도 기껏해야 여섯 해나 일곱 해를 살았을 법한 아이들이었다. 그 유골들은 다른 유골에 비해 좋지 않은 의미로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얼마 되지 않는 유년기 동안 무언가가 그 아이들을 안에서부터 산 채로 먹어치우기라도 한 듯 금이 가 있었다. 그들의 뼈대는 상태가 좋지 않았고, 그로 미루어 보아 그 아이들이 허약했음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재앙이 닥쳤을 때 이 아이들이 짐마차 뒤에 옹기종기 모여 무엇을 했는지 생각하자 마지막 포니는 더 무어라 말할 수 없었다.

 

뒤집힌 짐마차 근처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유골 세 개가 더 있었다. 이번에는 어른의 유해였다. 스쿠틀루는 성큼성큼 걸어가 가까이에서 들여다보았다. 둘은 어스 포니었는데, 나이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다른 하나는 두 어스 포니의 유골과는 많이 달랐다. 갈비뼈가 보다 굵었고, 주둥이가 조금 더 길었으며 발굽 뼈가 더 발달되어 있었다. 스쿠틀루는 이 골격의 주인과 비슷한 체형을 한 이를 본 기억을 얼른 떠올려내지 못했다. 그러던 중, 북서 사막지대의 폐허로 처음 하모니 호를 몰고 갔을 때의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다.

 

“뭐야, 얼룩말?” 스쿠틀루가 당황해서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건 뭔 미친 소리야. 얼룩말이 여기 왜 있...”

 

목에 걸고 있던 용의 이빨이 사르사 음료의 거품을 내뿜는 듯싶었다. 스쿠틀루는 간헐적으로 밀려오는 그 느낌에 머지않아 충치가 턱뼈까지 침범해 턱이 쑥 빠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몸을 움찔하고는 땅에 널려 있던 어스 포니의 유골 중 하나의 빈 안와를 들여다보며 느린 걸음으로 다가갔다. 심장이 세차게 고동했고, 붉은 눈동자 위로는 두개골에 아직 붙어 있던 몇 가닥 남지 않은 채 희미해져 이제는 회색에 가까워진 분홍색 갈기가 떠올랐다.

 

“아......” 스쿠틀루는 풀 죽고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기 있었구나.”

 

마지막 포니는 몸을 똑바로 일으켜 세우고, 그녀 밑에 쓰러져 죽어 있는 옛 벗이 남긴 것들을 전부 빨아들이기라도 할 듯 길고 고단한 숨을 들이마셨다. 전에도 그런 숨을 쉬었던 적이 있었다. 애플잭의 해골을 사용했을 때, 그리고 플러터샤이의 가루가 된 재를 몸에 뒤집어썼을 때 그랬다. 포니모니움 유적이 보여 준 불편한 두려움과 장엄은 그녀가 해야만 했던 일의 슬픔을 희석해 주지 못했다. 죽은 세상에서 죽을 세상으로 도약하는 데 죽은 친구들의 유해를 수영장 물처럼 뒤집어써야 하는 게 아니었다면, 마음이 이것만큼 무겁지는 않았을 터였다.

 

“개구리헤엄이나마 익혀 둔 게 다행이었군.”

 

어릿광대가 웃듯이 웃으며, 스쿠틀루는 무릎을 꿇고 앉아 금속 공구를 꺼내 핑키 파이의 유골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마음 한 구석에 비감이 파도처럼 밀어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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룬 불빛에 비추이는 나이트메어 문의 궁실로 돌아온 스쿠틀루의 짐은 처음 왔을 때에 비해 크게 무거워져 있었다.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불빛 속으로 걸어 들어가던 스쿠틀루는 문득 거대한 포니모니움 유적을 들여다보았다. 짊어지고 있던 가방의 뒷주머니는 단단히 묶어서 넣어둔 유골로 들어차서 툭 튀어나와 있었다. 상아빛 기둥의 숲 너머로 수많은 궁실들이 늘어서서 저마다 장엄한 내부를 감추고 있었다.

 

달의 몸뚱이를 뚫어 만든 석굴로 돌아가려면 아직 먼 길을 더 돌아가야 했다. 바깥에 닥쳐온 폭풍이 멎는 일도 이제 시간 문제였고, 폭풍이 그치고 나면 포니빌로 멀고 고된 길을 따라가야 할 터였다. 스쿠틀루가 조금만 더 현명했더라면, 아니라도 조금만 더 상황을 알고 있었다면, 어딘가 가만히 주저앉아 쉴 만한 조용한 자리를 찾아 잠시 눈을 붙이고, 아직 가지 못한 기나긴 길을 대비해 몸을 쉬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스쿠틀루가 보고 있는 모습은 그보다도 멀고 또 아득한 것이어서...... 그녀는 무기력하고 또 감상적이기까지 한 웃음을 지었다.

 

“신이여, 긍휼히 여기소서.” 스쿠틀루는 다시 웃고는 가까운 벽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도 어쩔 수 없는 넝마주이일 따름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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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간 동안, 스쿠틀루는 거의 서른 곳에 달하는 궁실을 뒤지고 돌아다녔다. 눈에 띄는 방이란 방은 모조리 들어가 살핀 것이다. 그 와중 열 번 정도 유물 더미를 찾아냈는데, 스쿠틀루도 무엇인지 바로 알 만한 것들이었다. 루나 제국군 갑주와 ‘달 속의 암말’ 문양을 아로새긴 깃발, 세월에 따라 흐려지기는 했으나 본디 살상용으로 개발한 룬 문양을 새긴 날 선 무기, 사로스계 포니들이 착용했던 감광성 망토, 그리고 이제는 비극적으로까지 느껴질 정도로 무가치해진 흰 동전, 즉 루나 제국의 화폐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 외에도 종이 같은 질감의 양피지 두루마리 더미도 있었는데, 수백 종류의 군사 작전 계획을 상세히 적어놓은 것들이었다. 그 계획들은 나이트메어 문의 추방과 함께 내전 또한 순식간에 종식되는 바람에 단 한 개도 실행되지 못했다. 식기가 가득한 식당이 있었고, 수면용 모포가 꽉 들어찬 저장고가 있었다. 그 중에도 스쿠틀루를 가장 당혹케 한 것은 루나 제국의 어린이들을 맡아 기르는 보육 시설이었다.

 

그 다음에는 서적류가 많이 나왔다. 스쿠틀루가 건질 만한 유일한 물건들이었다. 그녀는 책 더미를 보자마자 거의 파묻히다시피 하며 그것들을 뒤적거렸는데, 어쩌면 이 오래되고 두꺼운 책들 가운데 이퀘스트리아의 구전 설화 기록에조차 남지 못한 역사가 기록된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역사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사서 노릇을 하던 중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 붙은 곡들이 기록된 악보 뭉치를 찾았을 때는 거의 눈물이 날 뻔했다. 사실, 달에서 태어난 음악가가 작곡한 것들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화려한 탭댄스를 추는 네뷸라, 라, 이거 정말 신나는군!”

 

초상화가 가득 걸린 복도를 따라 걸어가는 스쿠틀루는 거의 군침을 흘리다시피 하고 있었다. 캔버스에 그린 그 그림들은 하나같이 창백한 벽에 거꾸로 붙어 있었다. 고개를 돌려 그림 하나를 쳐다보자 머리 위 불그스름한 갈기가 한쪽으로 흘러내렸다. 그 그림은 거대한 역경을 이겨낸 나이트메어 문이 위대한 승리를 거머쥔 모습을 그려놓은 프로파간다에 가까웠다. 주변에 그려진 유니콘 근위대원들은 하나같이 근면하고 전장에서 잔뼈가 굵어 보이게 그려져 있었는데, 죽음에 이르러서까지 자신들의 구원자를 따르고 있었다.

 

마지막 포니는 자신도 모르게 그들의 시대를 상상해 보다가 이내 거기에 푹 빠져서, 자신이 아직 살펴보지 않은 궁실 한쪽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걸음을 옮겨놓고 있었다. 본래 그 방의 바닥이었어야 할 자리를 올려다보자, 벨벳을 씌운 연단 같은 것이 거꾸로 뒤집힌 신전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그 끄트머리에는 정사각형 모양의 돌 조각이 되어 있었는데, 그 꼭짓점으로 붙어 있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스쿠틀루 자신도 모르는 사이 머리가 굴러가기 시작했고, 이내 셀레스티아 공주의 궁실의 모습과 그녀 눈 앞의 모습이 겹쳐졌다. 그 조각은 셀레스티아 공주의 방에 있던 것과 완벽히 일치했다. 그녀는 불사조의 불길같은 눈빛을 번득이고는 주변을 샅샅이 찾아보기 시작했다. 몇 군데를 시선으로 고슴도치를 만들다시피 한 다음에야 그녀는 찾던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래 전 포니모니움이 거꾸로 뒤집힌 채 땅에 처박혔을 때 같이 떨어져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다가가 그것의 마호가니 몸통을 붙들었다. 알이 배길 정도로 힘을 쓰고도 모자라서 날개까지 펄럭거려 가며 힘을 쓰기는 했지만, 스쿠틀루는 그것을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었다.

 

스쿠틀루는 숨을 헐떡이며 몇 걸음 물러나 루나 공주의 목조 왕좌를 자랑스러운 듯 쳐다보았다. 루나 공주의 별빛 어린 어두운 푸른색 갈기와 잘 어울리는 진한 푸른색으로 마감한 옥좌였다. 나이트메어 문의 강림부터 시작해서 루나 제국의 건국까지 일어난 수십, 수백 건에 달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섬세한 솜씨로 아로새긴 조각이 되어 있었는데,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달 가장 깊은 곳에 세워진 바로 그 제국이 오랜 세월 동안 서서히 그 세가 무너지다가 끝내 망국의 운명을 맞이하는 모습은 새겨져 있지 않았다.

 

용의 이빨이 전해 오는 것보다도 더 달콤한, 어린아이나 할 법한 유치한 행동을 해 보고 싶다는 충동이 스쿠틀루 안에서 끓어올랐다. 그녀는 헛기침을 해 목을 닦으며 얼빠진 듯한 웃음을 짓고는 외로운 걸음을 돌려 느릿느릿 걸어가서... 천천히, 정말 천천히 옥좌에 앉았다. 그 순간, 마지막 포니는 한 시대를 살아온 왕좌이자, 이퀘스트리아 역사의 거꾸로 뒤집힌 무덤 위에 군림해서 무한한 죽음과 침묵 속에서 고개를 조아리는 과거의 유령들 앞에 호령하고 있었다.

 

“왕의 이름으로 첫 번째 칙명을 내리니, 앞으로 전국 각지에서 탤런트 쇼를 벌이는 일을 엄격히 금하노라!”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흠흠. 그래, 등신이 따로 없네.”

 

그녀는 낄낄 웃으며 왕좌를 박차고 내려왔다. 목조 의자가 발길질에 덜그럭거렸고, 그때까지도 있는지 없는지 몰랐던 왕좌 맨 위에 있던 무언가가 떨어져 내려와 천장 바닥에 부딪쳐 구르며 금속질의 비명을 질러댔다. 그녀는 그 자리를 슬쩍 쳐다보다가 이내 크게 놀라며 바닥을 굴러다니던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세상에 이게 뭐야......” 그녀는 입을 헤벌린 채 그것에 가까이 다가갔다. “이건 아니지.” 스쿠틀루는 그러면서도 바보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 물건은 투구였다. 물론 평범한 투구는 아니었다. 나이트메어 문이 썼던 투구 중 한 점이었다. 한때 공포의 군주로 자리매김했던 한 잔혹한 알리콘이 갈기를 모두 자르고 썼던 물건으로, 그 머리에 꼭 맞게 만들면서도 외형을 중시한 것으로서 주변 사물을 맑게 비추이는 금속을 흠 없는 곡선형으로 다듬어 만든 것이었다. 그 위로는 길게 만들되 속은 비게 한 뿔집이 있었는데, 나이트메어 문의 길고 날카로운 뿔에 맞춘 것으로 보였다.

 

마지막 포니는 떨리는 발굽으로 투구를 들어 올렸다. 그녀는 투구를 몇 번이나 이리저리 돌려 보며 자세히 뜯어보았는데, 셀 수 없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은빛으로 반들거리며 한 곳 얼룩진 곳이 없어서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 투구가 주인의 머리를 마지막으로 감싼 것은 아무리 이르게 잡아 봤자 이십오 년 전일 것이었다.

 

스쿠틀루는 날카로운 소리로 휘파람을 불며 큼직한 투구를 더 자세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공주님 의외로 머리가 크셨던 모양인데?” 그리고 잠시 멈추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면서도 한편으로는 명랑하게 투구 곳곳을 살펴보았다.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그 자리에 퍼질러 앉아 투구를 머리 위로 들어 보았다. 그러다가 잡고 있던 발굽을 놓자 공주의 유물이 그녀의 머리를 덮으며 씌워졌다. 머리를 집어넣고도 남음이 있어서, 털실 모자에 달아놓는 방울 장식처럼 앞뒤로 흔들리기까지 했다. 그녀는 웃음이 나오기 전에 스스로 깔깔 웃어댔다. “아고고... 뭐 됐다. 포니모니움의 만백성은 보거라. 너희의 새로운 군왕, 스쿠틀루니 공주를 경외로 맞이할지어다.”

 

그녀는 잠시 자기가 한 말이 조금 전 뒤적거린 책에 쓰여 있던 내용과 앞뒤가 맞는지 생각했다. 이 놀라운 곳으로 돌아올 계획이 있었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공포감을 최대한 조성하기 위한 형태에 하모니 호 뱃머리까지 닿을 듯한 뿔을 단 투구를 써 보는 것 역시 해 봐서 손해 볼 것이 없었다. 트롤이나 하피를 쫓아내는 데 쓸모가 있지 않더라도, 적어도 브루스가 껄껄 웃다가 제 담배 연기에 사레들어 기침을 쏟아내게 하기는 충분할 듯싶기도 했다.

 

그 다음 순간, 스쿠틀루는 눈 앞에 섬광이 쏟아지는 듯한 감각에 급히 투구를 벗기 위해 발을 뻗었다. 보라색으로 칠한 눈꺼풀과, 그 안에서 불타며 휘몰아치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서린 눈동자가, 맹렬하게 그녀를 노려보는 듯한 환상이 시야를 덮친 것이다.

 

“으... 에라!”

 

그녀는 고통에 찬 비명과 함께 투구를 벗어 내동댕이쳤다. 그리고는 힘이 풀려 왕좌의 목제 등받이에 쓰러지듯 몸을 기댔다. 놀란 눈이 핑핑 돌았다. 투구가 날아가 궁실 한가운데에 떨어져 부딪치며 쇠붙이의 소리를 냈고, 굴러가며 금속질의 메아리를 남겼다. 스쿠틀루는 식은땀을 흘리며 거꾸러진 채, 혼 절반이 송곳니에 뜯겨 눈구멍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가기라도 한 듯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들어 투구를 쳐다보았다. 비어 있었을 나이트메어 문의 투구 뿔싸개 너머에서 희미한 불빛이 반짝이는 모습이 순간적으로 스치고 지나갔다. 불빛이 사라지자 궁실을 받치고 서 있던 상아빛 기둥 위에 새겨져 있던 룬 조각들이 순차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찰나의 순간이나마, 포니모니움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 무너지며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어......”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거, 안 좋은데.”

 

그 순간 날카로운 굉음이 들려왔다. 과열된 룬 조각에서 퍼지는 냄새가 방을 밝혔다. 불안해진 스쿠틀루는 주위를 빠르게 훑어보다가, 궁실의 짙은 상아색 벽 위로 문양이 떠오르는 모습을 보고 당황했다. 월진과 재를 비롯해 희고 단단한 파편들이 한바탕 바닥을 쓸면서 휘몰아쳤고, 머지않아 울퉁불퉁한 어떤 형상을 이루며 합쳐져 갔다. 그리고, 아직도 공포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스쿠틀루를 향해 수십, 어쩌면 수백일 수도 있는 살아 있는 조각상들이 무감정하고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포니의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룬스톤이 엉겨 있어 그 빛이 조금씩 새어나오고 있었다. 각각 드러난 부분을 합쳐 보자, <수호자>를 뜻하는 룬 문양이 마지막 포니의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나를 비웃고 있겠지. 나를 비웃고 있으리라는 것쯤은 안다. 이 글을 적어 내려가며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쪽이 대놓고 온 구름을 꿰뚫어놓으면서 부리는 히스테리의 파동 위에서 흔들리는 비행선의 진동이 느껴지니까.

 

그쪽이 이해할 생각이 있는지, 이해를 해 보려고 하기는 할지부터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나라도 황무지에서 평화와 만족을 찾기는 어렵다는 걸 이해해줘야 한다. 어쩌다 그럴 뻔하더라도, 어리석은 방종과 자기 위로에 빠질 만하면 이 개 같은 일들이 일어나니까.

 

어디든지 나가서 뒈져 버리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쪽 심기를 거슬러 봐야 득이 될 일은 없겠지. 뭔가 나도 안전하게 즐기면서 매달릴 수 있는 게 있다 쳐도, 병신 같은 것 이상으로 병신 같은 짓거리를 벌여서 내가 어디 가 죽어 버릴 게 불 보듯 뻔하니 살아서 그걸 해 보는 일도 없겠고.

 

 

 

스쿠틀루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뒷걸음질하며 자신을 향하여 그 수를 불리며 가까워 오는 수호자의 무리와 거리를 벌렸다. 포니모니움에서 최후를 맞이한 이들 모두, 나이트메어 문과 함께 달로 추방되었을 정도로 그녀에게 충성을 다짐한 자들이었다는 사실이 문득 머릿속에 떠올랐다. 최초의 신민들 이후로 대에 대를 이으며 내려와 최후의 신민들로서 죽어간 그들은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영혼을 룬스톤으로 전이했고, 그대로 포니모니움 한가운데 틀어박힌 알리콘을 지키는 최후의 방어선이 된 것이었다. 천 년이 되는 해에 악몽의 마수에서 벗어난 루나 공주는 이퀘스트리아로 돌아왔고, 돌아온 후에도 포니모니움 안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흑마법을 정화하려 하지 않았었다. 두 번 다시 누군가를 달에 유폐할 일은 없을 것이라는 공공의 인식이 자리했기 때문이었다.

 

스쿠틀루는 그런 점에서 보면 여러모로 ‘운’이 좋았음에 틀림없었다.

 

“달 골렘이 있는 게 정상이지. 어련하겠어.” 수호자들이 스쿠틀루를 둘러싸고 살벌한 기세로 삐죽삐죽한 사지를 놀려 천천히, 조금씩 다가왔다. 그녀는 앞뒤를 두리번거리며 짜증을 퍼부었다. “달 골렘 없이 이 정신 나간 동네를 만들 수 없다는 걸 생각했어야 했는데! 안 그러면 앞뒤가 맞지를 않으니까! 아오, 진짜 운수 하나는 더럽게 좋구만.”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는 헛기침을 해 목을 닦고, 용기를 내 큰 소리로 외쳤다. “전쟁은 끝났다! 이제 더 싸울 이유가 없다! 어... 이제 너희의 영원한 안식으로 돌아가거라, 나이트메어 문의 신실하고 훌륭한 신민들이여!”

 

골렘들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밀고 들어왔다. 그것들의 목이 부자연스럽게 홱 움직이자, 별 특징 없는 흰 두개골 속 룬스톤이 외눈 거인의 눈처럼 번쩍였다. 먼지투성이인 다리가 그녀를 향해 뻗쳤다.

 

스쿠틀루는 왕좌 한가운데에서 몸을 만 채 내몰려 있었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태도를 바꿔 벽력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물러나라, 너희 이 어찌 무례하냐! 어...... 나, 나이트메어 문의 질녀이자 포니모니움의 정당한 왕위 계승자인 스쿠틀루에게 이 무슨 짓이냐! 감히 짐에게 이런 무례를 범하느냐! 너희 그 성마른 걸음을 당장 거두어라, 나 스쿠틀루가 명하노라!”

 

그러고는 저주받은 그 투구를 내려다보더니, 다가오는 골렘 군단의 꾸물거리는 걸음 앞으로 걷어차 굴려 보였다.

 

“너희는 짐이 내려놓은 갑주를 보지 못하는가? 새 시대의 소리를 들어 짐이 새로이 일으킨 나라가 보이지 않는가! 너희의 충성심은 이제 더는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까... 본래 있던 돌무더기 안으로 돌아가... 서... 너희의 머리를 기대고 다시 잠들라! 하늘 아래 맞설 자 없는 너희의 새로운 군왕이 명하노라!”

 

골렘들은 투구 앞에서 잠시 멈칫거리더니 몸을 떨면서 걸음을 멈췄다. 찰나의 침묵이 흘렀고, 골렘들은 오히려 기세를 더욱 흉흉히 하여 더욱 거칠어진 걸음걸이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마지막 포니를 향하여 집중된 살기 어린 걸음걸이에 채인 나이트메어 문의 투구가 부서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스쿠틀루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래, 먹힐 턱이 없지.”

 

그녀는 번개 같은 몸놀림으로 목조 옥좌의 등받이를 발판삼아, 온 체중을 실어 걷어차 가까워 오는 골렘 군단을 향해 날렸다.

 

값을 따질래야 따질 수가 없을 그 옥좌는 그대로 날아가, 자기 앞에 파도처럼 밀어닥치는 흰 골렘들을 강타하면서 바닥에 충돌해 산산이 조각났다. 그 통에 흩어진 수호자의 무리 하나가 스쿠틀루를 덮치고 들어왔다.

 

그녀는 급히 공중으로 뛰어올라 마침 달려들던 골렘 둘의 목을 아치 기둥처럼 밟고 섰다. 가방이 불룩해지도록 쓸어 담은 루나 제국의 고서들과 핑키 파이의 뼈가 담긴 가방 무게에 낑낑대면서도 스쿠틀루는 갈색 날개를 펼쳤다. 궁실 가장 먼 구석으로 피할 작정이었다. 그 순간, 얼마 있지도 않은 말총이 골렘의 다리에 붙잡히는 느낌이 전해졌다. 그녀는 달려드는 월석 골렘들의 무리를 마구 차댔다. 흰 돌가루와 상아색 먼지가 가득 피어올라 궁실을 가득 채웠고, 도열해서 몰려드는 골렘들이 저마다 스쿠틀루를 덮치면서 돌더미가 높게 쌓였다.

 

이십오 년 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죽음 같은 침묵이 내려앉아 있던 포니모니움의 회랑은 이제 목숨을 건 사투에서 기인한 온갖 소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스쿠틀루는 더러는 걷어차고, 더러는 때리기도 하면서 몸 위로 기어 올라온 돌덩어리들을 붙잡고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싸우던 중 누군가의 한쪽 앞 다리가 눈에 띄였고, 그녀는 곧장 그것을 크게 물어 거칠게 비틀며 뜯어냈다. 딱 소리와 함께 뜯어진 다리는 곧장 한 줌 먼지로 부스러졌고, 그녀는 아직 남아 있던 돌덩어리를 가지고 목전에서 번들거리며 반짝이는 얼굴 없는 머리통 세 개를 후려쳤다.

 

격렬한 저항 끝에, 스쿠틀루는 자신을 짓누르던 골렘의 무리 한가운데에 작은 틈을 낼 수 있었다. 꼬리털을 붙잡고 매달린 골렘을 한 차례 거세게 걷어차 떼어낸 그녀는 기둥들이 늘어선 방향으로 매섭게 날아갔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내려와 그 속력 그대로 바닥 위를 미끄러져 가다가, 한 차례 가볍게 굴러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 순간, 골렘들이 몰려오며 돌 발굽이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원래는 천장이었던 바닥 한쪽에 루나 제국의 제식 갑주의 한 부분인 흉갑이 굴러다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딱딱 부딪쳐대는 이빨로 겨우 흉갑 조각을 물고, 홱 몸을 틀며 원반을 던지듯, 쇄도하는 골렘의 무리 한가운데로 날려보냈다.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갑옷 조각은 골렘 세 놈의 ‘두개골’에 해당하는 곳을 부수고 지나갔다. 머리가 부서지며 룬스톤이 드러났고, 거기서 나오던 빛이 곧 명멸하다가 희미해지며 사라졌다. 그러자 느릿느릿하게 다가오던 몸뚱이도 곧 한 줌 먼지가 되어 그 자리에 무너지며 스러졌다. 그 초라한 죽음의 자리도 곧 수백에 이르는 골렘의 걸음걸이에 쓸려 사라져갔다.

 

스쿠틀루는 씩씩대는 숨을 내뱉면서도 속수무책으로 수호자 골렘의 무리를 피해 급히 달리기 시작했다. 뒤집힌 도시에 적응한 것인지, 수호자들은 속력뿐만 아니라 기동성까지 두 배는 나아져서 그녀를 추격하고 있었다. 바싹 따라붙어서 돌 주먹으로 때리거나, 그대로 들이받아 버리는 것도 시간 문제였다. 천둥벽력 같은 소음과 자신들의 무리 모두로 온 회랑을 가득 채우며 달려드는 괴물들을 피해 달아나는 일의 헛됨을 속으로 삭이며, 마지막 포니는 도자기 조각과 뒤집힌 갑옷 조각이 뒤섞여 쌓인 무더기를 뛰어넘으며 달아났다.

 

멀리 아득한 곳에서 맨 처음에 들어온 통로, 그러니까 어두운 굴로도 통하는 입구에 새겨진 룬 문자에서 떠오르는 빛이 희미하게나마 눈에 들어왔다. 날개를 펴고 재빨리 날아 들어가려던 순간, 수호자 골렘들이 일어서며 그녀가 아는 한 유일한 통로를 막아섰다.

 

“이런 씨... 아오!” 그녀가 소리를 지름과 동시에 골렘 두 놈이 덤벼들었다. 스쿠틀루는 발길질해서 그것들을 떼어놓은 뒤, 다시 한 번 도약할 준비를 하고 곧장 몸을 날렸다. 흔들리는 시선 위로 궁실 바닥이었어야 할 천장에서 반쯤 흘러내린 벨벳 카펫 자락이 떠올랐다. 그녀는 카펫 자락을 이를 악물어 붙잡고, 스쿠터를 타고 날개를 퍼덕여 속력을 붙이던 어린 시절처럼 있는 힘껏 날갯짓했다. 다행히 효과가 있어서, 그녀는 저 아래로 태산처럼 쌓여 가는 수호자 골렘의 무리를 가볍게 넘어갈 수 있었다. 그 순간, 카펫 자락이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뜯어졌다.

 

스쿠틀루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떨어지다가 겨우 공중제비를 돌며 중심을 잡아 갑옷 더미 위로 덜그럭 소리와 함께 착지했다. 궁실 한쪽에 난 어두운 방으로 통하는 반쯤 무너진 통로가 자신이 내려앉은 자리라는 것을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어......” 그녀는 몸을 돌리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창백한 돌덩이의 무리가 그녀를 둘러싼 채 단단히 조이고 들어오는 모습이 흐릿한 시야로 들어왔다. 그 너머에 유일한 출구가 있었다. “그래, 해보자 이거지?”

 

스쿠틀루는 으르렁거리며 가방을 앞으로 넘겨 메며 라이플을 던지듯 꺼냈다. 그 무기를 꺼낼 때마다 느끼는 만족감을 느끼며, 그녀는 긴 총신 끝 총구를 수호자 골렘의 무리를 향해 겨누었다.

 

 

“장난질은 끝이다. 돌탱이가 걸어봤자 돌탱이지. 어디 한 번 해 보자!” 그녀는 말 끝에 주문을 덧붙였다. “H'rhnum!”

 

 

라이플에 꽂아 둔 룬스톤 탄창에서 보라색 빛이 흘러나오며 뿔 팔찌와 어울렸다. 그녀가 평생에 걸쳐 쌓아올린 루나 제국의 마법이 이제 아이러니하게도 마나 탄환에 실려 그 본산이라 할 만한 루나 제국의 수호자 골렘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탄환이 그 목적지인 수호자 골렘의 머리에 날아들 때마다 몇 놈씩 머리가 터져 룬 불빛을 몇 번 깜박이다가 스러져 갔다. 골렘을 하나씩 처리해 나갈 때마다, 참 더럽게도 새하얀 먼지가 공기로 터져 나와서 공기는 갈수록 탁해져 갔다. 그러나 밀려드는 골렘의 무리는 당연하게도 스쿠틀루가 챙겨 온 탄환의 수를 절대적으로 압도하는 것이어서,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몸을 빼내려면 서둘러야 했다.

 

“길만 열어!”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연기만 피어오르는 빈 탄창을 악물어 빼낸 뒤 새 탄창을 꺼내 결합했다. “지나가게 그냥 냅두라고 좀!” 그 다음, 두 번째 탄창의 탄을 장전했다. 이번에는 전부 희미한 보라색 빛을 뿌리고 있었다. 고폭탄이었다. 장전 손잡이를 쳐 장전하고, 목표를 겨눈 스쿠틀루는 한 마디 주문으로 격발했다.

 

마나 탄환이 창백한 수호자의 무리 속으로 날아 들어갔고, 머지않아 한 불행한 골렘의 몸 속에 가 박혔다. 그리고 이내 폭발했다. 월석 무더기와 산산이 부서진 흰 사지가 거품처럼 이는 먼지구름 사이로 흩어지며 떨어져 내렸다. 그 잔해를 딛고 수호자 군단은 계속 전진했다. 그녀는 옆구리 쪽 어둑어둑한 방 안으로 비틀거리며 숨어 들어가 엄폐물로 삼았다.

 

“M'wynhrm!” 스쿠틀루가 두 번째 고폭탄을 격발했다. 공이치기를 당겨 다음 탄을 장전한 그녀는 다시 주문을 외쳐 격발했다. 석상들이 부서지고 터져 나가며 사방에 잔해가 날렸다. 스쿠틀루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수호자 군단의 정면을 쳐 길을 열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끝없이 덮쳐오는 먼지구름에 개의치 않고 숨을 들이마신 그녀는 숨이 차 헐떡이면서도 더욱 뒤로 물러나 다시 주문을 외쳤다.

 

다시 파열음이 들려왔다. 이번에는 소리 끝에 무언가가 타는 듯한 소리가 덧붙어 있었다. 대기가 뜨겁고 매캐한 연기를 받아들였다. 한 줄기 열풍이, 마치 알 수 없는 이유로 번진 산불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류처럼 스쿠틀루의 뒤를 덮쳤다. 마지막 포니는 당황한 채 어깨 너머로 어딘지 외로워 보이는 시선을 잠깐 던졌다. 엄폐물을 찾아 뛰어 들어온 궁실 깊은 곳에서 희미하게 새어 나오며 깜빡이는 불빛들이 바로 지척에 있었다. 그녀가 몸을 숨길 곳으로 고른 자리가 하필이면 무기고였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고, 등골이 싸해지는 것은 더욱 그러했다. 그 큰 방은 흑색화약폭탄을 산처럼 가득 쌓아놓은, 무기고도 아닌 폭약고였다. 폭탄들은 고대 룬 문양으로 제어되고 있었는데, 그 룬 조각들이 전부 갑자기 빛을 뿌리기 시작했다는 것은, 어떤 머저리가 폭약고가 떠나가라 큰 소리로 격발 주문을 외쳤다는 증거였다.

 

“아...... 엿 됐네.” 마지막 포니는 쏜살같이 방 밖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달려오는 수호자 골렘의 무리를 향하여 뛰어들었다. 당연하게도, 수호자들은 갈급하게 그녀를 덮쳐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순간......

 

포니모니움이 폭발했다. 뜨거운 불길과 열기가 스쿠틀루의 바로 뒤에서부터 맹렬히 터져나왔다. 포니의 형상을 한 골렘 군단이 내민 사지는 아슬아슬하게 그녀를 잡지 못하고 허공을 휘저었고, 앞에서부터 마나 불길에 삼켜졌다. 온 궁실이 뜨겁게 불타며 마구 흔들렸고, 그 사이로 불꽃이 들불처럼 퍼지며 마지막 포니를 뒤쫓듯 퍼져갔다.

 

주위를 훑어볼 지혜가 없었던 생존자의 머릿속에는 당장 꼬리부터 집어삼킬 기세로 혀를 날름거리며 덮쳐오는 불길을 피해 달아날 생각밖에 없었고, 있는 힘 없는 힘을 죄다 끌어쓰는 몸뚱이는 비명으로 그 동력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녀가 지나쳐 간 포니모니움의 벽과 천장은 앞뒤 가릴 것 없이 무너져가며 마구 흔들리는 그녀의 시야 앞에 위협적인 잔해를 던져댔다. 이십오 년 전 언젠가 몸을 떠는 오렌지색 망아지를 데리고 무너져 가는 클라우드데일에서 탈출한 한 무지갯빛 광채를 두른 구원자가 그랬던 것처럼, 떨어져 내리는 잔해 사이로 전속력으로 날아가는 그녀의 악문 이 사이로 낮은 신음이 새어나왔다. 줄지어 서 있던 흰 기둥들이 그녀를 향하여 무너져 내리는 모습이 떨리는 붉은 눈동자 위로 비쳤다. 스쿠틀루는 기둥 아래쪽으로 비행 궤도를 수정했다가 곧장 활 모양을 그리며 비스듬히 솟아 올라오는 곡예비행을 벌이며 멀리서 무너져 가는 출구를 향하여 날아갔다.

 

스쿠틀루가 한 마디 기합을 내지르며 날개를 젖히고 그대로 쏜살같이 무자비하게 폭발해 가는 궁실을 향해 뛰어들었다. 한때는 찬란한 궁실로 기능했던 시기가 있었을 곳이었다. 얼마 안 되는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부서져 가는 문틀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그대로 사방에 구멍이 숭숭 뚫린 월석 안에 뚫린 굴을 따라 미친 듯이 날아갔다. 스쿠틀루는 갈림길에서조차 조금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은, 불길이 굴을 따라 번지면서 그녀의 뒤를 쫓는 형국이 되기는 했으되 그 덕분에 밝은 오렌지색 불빛이 주변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한 가운데서도 그녀는 얼마 전 자신이 들어올 때 별 생각 없이 구멍이 숭숭 뚫린 자리에 끼워 놓은 룬스톤에서 나오는 희미한 빛을 찾아내 벌레가 지나간 자리처럼 꾸물거리며 얽힌 땅굴 중 자신이 들어온 굴을 따라 질주했다. 엉덩이 쪽에서 들끓으며 달려드는 불길이 밝은 황금색 빛을 뿜어내고 있는데다가, 들어온 길을 되짚어 가는 속도 자체도 엄청났기 때문에, 룬스톤 불빛은 잘 보이지 않았다. 무너져 가는 미로 한가운데서 빙빙 돌며 날아가는 그녀 위로 먼지와 잿가루가 날렸다. 사방이 온통 흔들리고 있어서, 어디가 위이고 어디가 아래인지 더는 구분이 불가능했다. 오직 앞과 뒤만 구별할 수 있을 따름이었고, 그랬기에 스쿠틀루의 비행 궤도는 위아래와 좌우로 흔들리기는 했으나 정확히 자신의 정면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룬 불빛이 비치는 땅굴 속 그녀의 등 뒤에서는 폭발로 인한 화염이 그녀를 잘 익혀서 한입에 집어삼켜 버리겠다는 듯 미친 듯한 포효를 내지르며 달려들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녀의 두 눈에 마침내 창백한 황혼의 한 조각이 비쳤다. 육중한 월암이 무너져 내리면서 바로 위쪽에 그녀가 파놓은 굴이 드러난 것이었다. 스쿠틀루는 선두에서 자신을 향해 떨어지는 돌덩이를 옆으로 피해 돌아가며 두 날개를 힘차게 펄럭였다. 자신이 파둔 굴로 들어온 스쿠틀루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발사된 탄환처럼 그 출구를 향하여 날아갔다. 두 눈동자는 출구 너머의 폭풍우 이는 황무지에 고정되어 있었다. 간헐적으로 내리치는 벼락이 그녀의 뭉툭한 보라색 꼬리털을 막 지지기 시작한 불길이 이끄는 불빛에 지고 싶지 않다는 듯 날카롭게 번득였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녀는 드디어 그 너머의 회색 세상으로 돌아왔다. 사방에 치는 우레 소리와도 같은 폭음과 함께, 그녀는 굴 입구에서 뿜어져 나온 불길의 엄청난 풍압에 휩쓸려 돌멩이만 굴러다니는 땅바닥에 거칠게 내동댕이쳐졌다. 월암이 무너지는 소리가 주위를 가득 채웠고, 그 진동은 스쿠틀루의 뼛속까지 전해졌다. 그녀는 얼굴을 구기며 머리에 엉긴 거미줄을 잡아뜯어 치우고 무너져 가는 달의 반구를 바라보았다. 거대한 월암은 그 한가운데에서 일어난 폭발에 다시 터져나오듯 부서졌다. 포니모니움의 잔해는 이제 더 남아 있지 않았다. 희끄무레한 산맥과도 같았던 암석이 박혀 있던 자리에는 이제 이십오 년 전에 그 암석이 대지에 박히면서 남겨놓은 흉터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 자리에는 이제 잔해조차 아닌 먼지구름만이 엉겨 있을 뿐이었다.

 

스쿠틀루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헐떡이는 숨을 달랬다. 초토화되다시피 한 주변으로 번개가 쳤다. 무슨 힘이 또 남아 있었는지, 그녀는 이윽고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 분노를 목청으로 내뿜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악!” 그녀는 펄펄 뛰면서 자기 뒤에 남은 파괴의 잔해를 향해 포효했다. “이 미친 세상에 이게 다 필요한 거라 치자. 그렇다 치더라도...... 왜 이 지랄로 복잡하게 하는데?”

 

소음으로 가득한 세계는 그녀의 분노 앞에 무관심해 보였다. 천둥번개가 그녀의 말을 묻어 버렸고, 놀렸고, 조롱할 뿐이었다.

 

“다 엿이나 처먹으라지! 내가 어디 갈 데가 없어서 이러고 앉아 있는 줄 알아?” 스쿠틀루가 성질을 내며 가방을 벗어 던지고는 주머니 두 개를 찢듯이 열었다. 그녀는 가방에 발굽을 넣고 짜증 섞인 몸짓으로 그 안의 내용물을 찾아 뒤적였다. 이윽고 한 어스 포니의 대퇴골과 스파이크의 녹색 불꽃이 담긴 단지가 그녀의 양 발굽에 각각 쥐였다. “꺼져!” 터지고 잔해만 남은 뇌총의 녹슨 부품을 향해 소리쳤다. “너도 꺼져!” 그러고는 남은 뼈를 자신의 머리에 휘둘러 깨뜨리고, 잿더미처럼 흩날리는 핑키 파이의 유골을 온몸에 뒤집어썼다.

 

대답하듯, 하늘에서 맹렬한 천둥 소리가 들려왔다.

 

“너도 닥쳐! 꺼져! 꺼지라고!” 스쿠틀루는 녹색 불꽃이 담긴 단지를 두 발굽으로 단단히 붙잡으며 지나가는 폭풍을 향해 소리쳤다. “늘 개만도 못한 소리나 하고 앉은 주제에 뭐 할 말이 있다고! 이제 별 보러 꺼질 테니까 지랄 좀 하지 마!” 분통 섞인 숨을 씩씩거리며 토해내던 스쿠틀루는 룬 봉인을 푸는 주문을 외쳤다.

 

엔트로파의 광명이 어린 듯한 녹색 빛과 함께 녹색 불꽃이 단지 밖으로 뿜어져 나와 마지막 포니를 그대로 집어삼켰다. 낯익은 터널 너머에서 무언가가 그녀를 억지로 끌어당기자 사방으로 굴절하며 맥동하는 에메랄드 불빛이 다시 그 터널을 감싸고 돌았다. 스쿠틀루의 지친 몸이 이완된 황동색 몸으로 바뀌고, 붉은 갈기가 검은 갈기 위에 황동색으로 줄을 하나 그은 것 같은 색으로 바뀌자 그때까지만 해도 있었던 우레 같은 소음과 폭발 소리가 원래 없었던 것처럼 모두 사라졌다. 이내 그녀는 태양이 비추는 아침 안개 한가운데에, 비록 그것이 수호자 골렘과 비슷하게 뻣뻣한 모습일지언정,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가 다시 한 번, 황동색 눈을 열어 뜨자 한 쌍 파란 눈동자가 코앞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저기요!” 분홍색 얼굴이 급하다는 듯 말했다.

 

“저, 저요?” 시간여행자는 당혹스러운 얼굴을 지었다.

 

“네 당신요!” 분홍색 솜털을 한 여자가 맹렬한 기세로 끄덕거리고 대답했다. “얼마나 찾아다녔는데요!”

 

“그, 그러셨어요?” 하모니가 주저하며 대답했다. 다시 한 번 눈을 깜박이자 몇 채 노르스름한 지붕을 올린 집들과, 밝은 톤의 솜털을 한 행인들이 보였다. 갓 요리한 음식의 냄새와 막 피기 시작한 정원의 꽃 향기가 맴돌았다. “포니빌......?”

 

“당신같은 분이 필요했거든요!” 그녀는 푸른 눈을 반짝이며 5층짜리 탑의 가파른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 손수레처럼 요란하게 하모니를 흔들어댔다. 그러고는 자기 앞에 있는 페가수스를 근처 나무문 앞에 화분에 묘목 심듯 세워놓더니 말했다. “잘 들어요! 일단 초인종을 쳐요, 그러면 누가 한 분 나오실 텐데, 그 때 ‘올라갈 때는 하얗지만 다시 내려올 때는 노랗고 하얀데 회색도 있는 게 뭐게요?’ 하고 물어보세요!”

 

“어어...... 누가 나오면 그 소릴 하라고요?”

 

“히히히! 빨리요! 누가 보기 전에!” 그녀는 그러고는 잽싸게 숨어 버렸다.

 

하모니는 어안이 벙벙한 채 건물 정문에 붙은 초인종을 울렸다. 갈피를 잡지 못한 심장이 네 번인지 다섯 번을 뛰고 나자, 문을 향해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고 이내 문이 열렸다. 잊을래야 잊을 수 없이 익숙한 얼굴이 문 사이로 드러났다. 시간여행자의 안에 남아 있던 유년기의 그림자는 포니빌 연례 행사 때마다 나와 축하 연설을 하던 그 얼굴을 곧바로 알아보았다.

 

“무슨 일이시죠?” 회색 갈기를 한 여성은 쓰고 있던 안경 너머의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흰색 옷깃에 녹색 크라바트(넥타이처럼 매는 스카프)를 차려입은 얼굴이 한쪽으로 기울어지며 다시 물었다. “공무로 오셨나요?”

 

“그게......” 하모니는 마른침을 삼키며 일단 시킨 대로 말했다. “시장님, 혹시 올라갈 때는 하얀데 내려올 때는 노랗고 회색이 섞였는데 흰색도 있는 게 무엇인지 아시나요?”

 

“그, 글쎄요......” 시장이 얼굴을 찡그렸다.

 

하모니의 시야 한쪽 구석에 웬 끈 하나가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시선을 옮기자 줄 끝에 매달린 양동이가 엎어지면서 무엇인가 흰 물건들이 시장의 머리를 향하여 마구 떨어지며 사방으로 튀었다. 시장은 놀란 숨을 온전히 쉬지도 못했다. 정수리부터 목 아래까지, 온통 흰 껍질과 노란 노른자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핑키 파이가 기세등등하게, 초승달처럼 입꼬리를 올린 미소를 지으며 등장했다. “시장님 머리에 계란을 올리면 그렇게 되지요!” 그녀는 잔뜩 신이 나 있었다. “히히히히히히히히!”

 

시장은 빛 바랜 갈색 솜털이 붉게 달아올라 보일 정도로 화가 나 있었다. 그녀는 장난의 주체를 살기 어린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었는데, 그 공포의 시선도 핑키 파이 혼자 받는 게 아니라, 시간여행자도 같이 분담해 받고 있었다. “이봐요. 파이 양......!”

 

하모니는 오한을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망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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