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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DannyJ]불편히 잠드소서Rest in Chaos

by Mergo 2020. 1. 23.

한 익살꾼이 캔틀롯에서 오늘 밤 생을 마감하다

Tonight, a Comedian Died in Canterlot

 

 

 

친애하는 포니 여러분 보시라. 여러분에게 이 글줄이 전달되었다는 건 내가 영영 밥숟가락 놓았다는 뜻이렸다. 한 몸 바쳐 살신성인해 온 내 일대기에 걸맞은 죽음이 되려면 생선뼈나 뭐 그런 것이 목에 걸려 죽었다더라, 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고상하고 품위 있는 성질이 되어야 할 것인데. 뭐 어떻게 죽어 나자빠졌든지 일단 내가 죽었다는 소리가 들리면 몇 가지 뒤처리를 좀 해주었으면 해서 몇 글자 적었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는 계속 읽다 보면 나오니까 재촉하지 말고.

 

그래 뭐 내 마지막 부탁이라고 해 봐야 나에게나 절박한 일이지 너희한테는 별로 그런 것도 아닐 거니까, 생까려는 친구가 한둘은 아닐 것쯤은 예상하고 있지. 그래, 특히 너. 레인보우 대쉬. 일단 나도 혼돈의 정령이다 보니 그 '역할'이라는 것도 나에게는 아주 중요하거든. 그 중요성을 내가 어찌어찌 너희들에게 납득시킨다 쳐도, 너희가 이해하는 것보다 배는 더해. 내가 해달라는 거 안 해도 나랑은 별반 상관없긴 한데, 혹시나 그랬다가는 앞으로 세상의 균형이 너희가 기대하는 쪽과는 정반대로 움직이게 될 거라는 건 감수해야 할 거야. 그 반대로 너희가 뒤처리를 적절하게만 잘 해준다면야 나 다음으로 나타날 혼돈의 정령들도 너희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표할 거고. 걔가 남자든 여자든 너희를 선인장으로 만드는 짓은 하지 않을 거야. 그것도 너희가 그때까지 살아 있을 때 얘기지만 말이지.

 

우선 내 장례부터 시작할까. 매장은 하지 마. 포니라는 자들이 보통 시신을 매장한다는 것쯤은 나도 알지만, 나는 포니가 아니잖아. 우리 동족들도 나름대로 전통이 있고. 옛 드라코네쿠스들은 망자의 몸에서 심장을 적출해서 보존하고(뭔가를 상징하는 의식이기는 한데, 뭘 상징하려는지는 기억 안 나), 남은 시신은 화산 분화구 밑으로 던지는 것으로 장례를 마무리했지. 물론 화장에는 다양한 방법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 몸이 그걸로는 안 타거든. 사실 내가 관습을 잘 따르는 사람은 아니기도 했으니, 이참에 좀 다른 방향으로 변주를 해 줬으면 좋겠어.

 

일단 시신에서 심장을 적출하는 건 그대로 하되, 몸 대신 심장만 화산에 던져 버려. 일단 말해두겠는데 심장이 심장스럽게 생기지도 않았을 거고, 너희가 대충 여기쯤이려니 생각할 만한 자리에 있지도 않을 거야. 사방으로 막 돌아다니거든. 그래도 일단 한번 보면 이게 심장이겠다 하고 감은 잡을 수 있을걸. 뭔가 쳐다보기만 해도 환청이 들리고 기분 나쁜 붉은 빛을 발하는 게 있을 건데, 그게 심장이야. 심장을 적출한 다음 남은 시신은 잘 보존해 줬으면 좋겠어. 이왕이면 내가 너희들을 가리키면서 낄낄대는 자세로 박제해다가 셀레스티아 알현실 왕좌 벽 위에 전시하면 좋겠군.

 

심장 뽑을 때 말인데, 내 몸에 남아 있는 피는 쫙 뽑아다가 어디 한 곳에 모아 놔. 다 모았다 싶으면 누구 한 놈 시켜서 에버프리 숲 주변을 크게 한 바퀴 돌면서 뿌리도록 해. 숲 주변이라고 해도 숲 전체 주변을 말하는 거니까 주의하고. 혹시나 혈흔이 남은 자리를 따라 땅이 갈라져 열리고 거기서 못생긴 놈들이 미친 듯이 기어나오더라도 신경 쓰지 말고 가만히 냅둬. 그것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가만 내버려두기만 하면 기어나온 카오스 데몬들도 누구 하나 해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래도 한 몇 년 동안은 숲 근처에 얼씬하기조차 싫어지겠지만.

 

장례식 말인데, 이왕이면 핑키 파이가 파티로 꾸며 줬으면 좋겠어. 장례식은 눈물이나 질질 짜면서 울어대라고 있는 게 아니야. 누구 하나 내 앞에 재미없는 걸 갖다 들이대면 일단 다투고 봤을 정도로 재미없는 건 사양이야. 그러니 나를 정말로 기리고 싶다면 그런 삽질은 해서는 안 될 것이야. 따라서 내 장례식은 휘황찬란하고 시끌벅적하며 쿵짝쿵짝해야 해. 스탠드업 코미디나 서커스, 누구씨네가 말하는 품위나 심미적인 것들은 싹 결여된 음악 정도면 좋겠군. 장례식 기간 동안에는 내 몸 박제해둔 걸 갖고 나와 장례식장 한가운데에 세워 놓도록 해. 이왕이면 질질 짜는 것들 구경하면서 쪼개는 구도가 나오도록 신경 좀 쓰고.

 

그렇지, 완전히 혼란하고 엉망진창인 음식들을 준비해서 그걸로 뷔페 테이블을 차려놔 줘. 틀림없이 다른 형태, 다른 버전의 내가 나타나서 파티를 뒤엎어 놓으려 할 테니 밥이라도 든든히 먹여서 보내야 하니까. 부고를 보내지는 않겠지만, 나라는 족속은 내가 잘 알지. 뭐 나도 이미 다른 디스코드의 장례식을 열두 번은 조져 놨으니까, 장난질을 치려고 한다 싶으면 조심하라구. 혹시나 다른 디스코드가 일장연설을 하고 싶어하거든 하게 냅둬. 엄청 재밌을걸.

 

비석 말인데, 돌덩어리 말고 나무를 심어 줬으면 좋겠어. 나무란 돌과 달라서 자라면서 계속 변하거든. 장례식 시작할 때쯤에 심되, 고속 성장하도록 해 줬으면 좋겠군. 누구 혹시 혼돈 마법을 쓸 줄 아는 녀석이 있으면 다른 형태로 변이시켜 줄 수 있다면야 굳이 사양하진 않겠어. 이를테면 잎사귀를 분홍색이나 뭐 그런 걸로 바꾼다든가. 정 너희가 바란다면야 나무에 판때기 갖다 거는 것쯤은 해도 상관없어. 이왕 갖다 붙일 거면 그 쓰레기 같은 클리셰 같은 건 집어치우고.

 

유언장에 몇 통 사적인 편지를 같이 넣어둔다. 내 친구들(레인보우 대쉬도 포함)한테 보내는 거니까, 언제 어디서든 마음 갈 때 열어 봐. 트와일라잇 스파클에게 가는 편지에는 장례식에서 읽어 줬으면 하는 연설문도 끼워 놨어. 이왕이면 장례식 때까지는 읽어보지 마. 그렇지, 이왕이면 마법으로 내 박제를 움직여서 내 몸뚱이가 읽게 시켜도 좋을 것 같군. 뭐, 어차피 다른 디스코드가 장례식에 와 있으면 그런 수고는 안 해도 될 거야. 걔들이 그럴 테니까.

 

집정리도 좀 부탁하고 싶은데. 나는 봉인이 풀린 후에 캔틀롯 상공에 조그마한 다른 차원을 만들어서 거기를 집으로 삼았어. 셀레스티아에게 보내는 편지에 어떻게 들어가는지 적어놨으니까 참고하고. 내 집이지만 내 집은 열려서, 비워진 뒤에, 무너져야 해. 아직 그 안에 동물 몇 마리가 살고 있을 거야. 내가 정기적으로 돌아가서 음식을 만들어 주지 않으면 그대로 굶어 죽고 말겠지. 한 몇 달 동안은 버티겠지만, 혹시 잘못될지도 모르고 하니 서둘러 줬으면 좋겠군. 동물들을 어떻게 할지는 플러터샤이에게 맡기겠는데, 드림이터는 건드리지 마. 그 녀석은 루나가 담당하는 바나헤임으로 돌려보내도록 해.

 

동물들을 풀어 줬으면 그 다음으로 책 정리를 좀 부탁하고 싶군. 글쎄 너희가 얼마나 오랫동안 책을 찾아 뒤지고 다닐지는 잘 모르겠는데, 일단 너희가 찾을 책은 두 권이야. 하나는 일기장. 인조가죽으로 장정한 조그마한 갈색 일기장이야. 겉표지엔 아무것도 안 써놨고, 내용물도 투명 잉크로 써놨지. 이건 플러터샤이에게 남긴다. 나머지는 절대 건드리지 마. 두 번째 책은 암록색이고, 큼지막한데다 두툼해. 디스코르디아 성서Biblia Discordia라고 적혀 있을 거야. 표지에는 제목 없고, 책등에만 적혀 있어. 이건 트와일라잇 스파클에게 남긴다. 분명 머리가 번쩍 뜨이는 느낌을 받을 거야. 지난 시대에 나를 숭배하던 사교도들이 정리한 건데, 혼란과 관련된 것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거야. 그거 저주받은 책이니까 읽을 때 조심하고. 혹시나 내가 죽어서도 트와일라잇 스파클을 엿먹이려 드는 게 아니냐고 생각할지 몰라서 미리 경고해 두는 거야.

 

동물들도 풀어 줬고 책 두 권도 찾았으면 그대로 차원을 붕괴시키고 돌아가. 남은 것들은 그대로 그 자리에서 부서지든지 흩어지든지 둘 중 하나 이상 하도록 그냥 냅둬. 혹시 뭐 하나라도 더 건져서 나오고 싶더라도 그러지 마. 세상엔 묻히는 게 더 나은 것들도 있는 법이야.

 

다 됐나? 그러면 스크류볼이라는 여자를 좀 찾아가 봤으면 좋겠어. 큐티마크가 유명하니 아마 알 거야.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일단 근처 정신병동부터 찾아보는 걸 추천하지. 스크류볼을 찾았으면 여기 적어놓은 대로 토씨 하나 틀리지 말고 얘기해. "아버지는 잠드셨지만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찾아냈을 때 스크류볼이 의식이 없더라도 상관없어. 효과는 그대로니까. 그냥 개방된 넓은 공간에서 하는 것만 유념해 둬.

 

다음 혼돈의 정령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스크류볼이 나를 대리해야 하거든. 내 권능 일부를 떼어 그 녀석 안에 넣어놨으니 잘 할 거야. 이퀘스트리아를 정복하지는 못하겠지만, 디스코드도 죽었으니 이제 이퀘스트리아에 '참된 질서'를 가져오겠답시고 스바딜파리* 자식이 그 상판을 들이밀 때 쫓아낼 정도는 돼. 스크류볼은 내 권능을 어떻게 행사해야 하는지 모를 게 뻔하니까 위험할 수도 있으니, 미리 얘기해 주는 게 낫겠다 싶어서 적어둔 거야. 혹시나 스크류볼을 감당할 수 없게 되더라도 그 흉물스러운 조화의 나무를 가지고 과도한 무력진압은 삼가해 주기를 정중히 부탁하지. 스크류볼 걔 좋은 녀석이야. 너희가 나에게 해 주었던 것처럼 그냥 친구가 되어 주기만 하면 돼. 그럼 무서워할 것 하나 없으니까. 혼돈의 본질이 친화적이거나 다정한 것과는 거리가 있긴 하지만, 그렇게 되기를 학습할 수는 있어. 너희가 나를 통해 증명한 것처럼. 

 

자, 그럼 할 말은 다 쓴 것 같군. 중요한 얘기가 수도 없이 있는데, 막상 쓰다 보니 죄다 잊어버린 게 틀림없구만. 그러니 정기적으로 고쳐 쓰러 올게. 뭐 나도 살면서 적을 많이 만들었으니 셀레스티아 녀석조차 최악의 상황은 대비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더라고. 처음엔 비웃었는데, 스스로 목숨을 끊을 가능성은 없다고 하면 그건 또 그것대로 거짓말일 거라.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내 시신을 처음 발견한 양반에게는 미안하게 됐어. 내 사인이 뭔지 생각해보면 그리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닐 게 뻔하니.

 

그래도 말이야, 지금까지 친구가 되어 준 너희들에게는 정말 고맙다 생각하고 있어. 몇 년밖에 안 되었지만 그 우정이라는 게 인생을 아주 재미있게 만들어 줬거든. 다음에 태어날 때에도 너희가 가르쳐 준 것들을 간직하고 태어날 수 있으면 좋겠다 싶네.

 

그럼 몸들 잘 챙기시라고.

 

 

디스코드 씀.

 

 

 

* 스바딜파리

 

북유럽 신화의 명마. 신들과 거인 사이 관계가 악화되었을 때 애시르와 바니르 신족 간 분쟁으로 무너진 아스가르드 성벽을 재건해 주겠다며 헤임달에게 접근한 거인 석공이 끌고 온 말로, 거인 석공이 프레이아, 해, 달을 그 대가로 요구한 이야기에 등장. 신들은 거인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려 하나, 로키가 '신들에게 아주 불리한 조건은 아니다'라며 다른 방안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여 거인을 회의장에서 내보내고 회의를 재개함. 로키는 거인이 최초로 제시한 18개월안을 6개월안으로 줄여 역제안할 것을 주장하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신들은 거인 석공에게 6개월안을 제시.

 

오딘은 여기에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아야 한다고 독소조항을 하나 더 추가하나, 거인 석공은 자신이 몰고 온 종마인 스바딜파리는 쓰게 해 달라고 반발. 로키는 여기서 이 정도 딜조차 받아주지 않으면 벽돌 하나 안 올라간다며 이 제안을 수용할 것을 주장. 신들은 부서진 성벽을 조금이라도 수고 없이 고치고 싶었기 때문에 스바딜파리의 도움을 받는 것은 허용하고, 공사 기간 중 신변 보장도 추가로 수용함. 그러나 거인 본인의 힘이 토르와 비슷한 수준이었고, 스바딜파리의 힘도 그와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성벽 보수 공사는 정말 6개월 내로 완료될 상황에 봉착.

 

공사 기한이 사흘 남은 시점, 성문 하나만 완성해서 달면 보수 공사가 완료될 상황이 되자 신들은 거인이 스바딜파리를 쓰게 해주자고 제안한 로키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겼고, 로키는 고민 끝에 암말로 변신해 공사 기한이 하루 남은 시점에 스바딜파리를 꾀여내 공사를 방해했고, 이 때문에 공사는 성문 하나를 남겨두고 완성되지 못함.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폭력적으로 변한 거인은 신들이 마련한 뒤풀이 잔치에서 깽판을 놓기 시작했고, 결국 토르의 오함마를 머리에 받고 사망. 사라진 로키는 얼마 뒤 다리가 여덟 개 달린 망아지 하나를 데리고 비프로스트를 건너 아스가르드로 돌아오며, 이 망아지가 슬레이프니르가 됨.

 

 

소설 본편도 DannyJ 선생이 구축한 유우니버스였으므로, 여기서의 스바딜파리는 디스코드의 대척점에 있는 존재로 볼 수 있음. 사실 다른 소설 안 읽어 봐서 스바딜파리가 정확히 어떤 존재인지는 알 수 없음. 바나헤임 얘기도 나왔는데, 바니르 신족의 고향인 바나헤임이 언급된 걸 보면 셀레스티아가 담당하는 구역은 아스가르드나 유사한 북유럽 신화의 지명으로 언급될 것으로 생각함. 안 읽어봐서 부질없는 뇌피셜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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